[미리보기] 개혁파 조직신학 6(성령론과 구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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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1부)

성경의 가르침

복음의 핵심에는 오직 믿음으로( 라틴어로 ‘솔라 피데’ )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약속이 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롬 3:26 ). 칭의는 구원에 대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에

대답해 준다. “죄악 된 인간이 정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 참고, 욥 9:2; 25:4 ) ?

칭의 교리는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셔서 정의를 배제하신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칭의의 복음은

하나님의 정의를 전제한다( 창 18:25 ). 1  )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사법

체계는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출 23:7 ) 라는 하나님

의 선언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레온 모리스는 성경적 관점에서 하나

님은 “율법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의, 칭의 같은 개념

은 심판, 법정에서의 변론, 특히 율법이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게 얽 혀 있다”고 썼다.2  ) 존 오웬은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 위엄, 거룩하심, 절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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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계속 주시할” 때만 칭의에 대해 바르게 생각할 수 1  ) 하나님의 율법적 정의와 형벌적 정의에 대해서는 이 책 2권 466-469, 473-475를 보라. 2  ) Leon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3rd ed. (Grand Rapids, MI: Eerdmans, 1965), 253.

있다고 말했다.3  )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인류의 죄책을 생각하면 칭의의 필요성이 첨

예하게 대두된다( 롬 3:9-18 ) . 존 칼빈은 하나님의 정의가 지닌 위엄과 “하늘의 심판주 앞에서” 인간의 “죄책”을 알지 못하면 칭의에 대해 올

바르게 말할 수 없다고 썼다. 그것들을 알았을 때에야 우리는 시편 기

자가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

서”( 시 130:3 ) 라고 외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4  ) 존 오웬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배교, 그 배교로 말미암아 초래된 우리의 본성의 타락, 율

법의 거룩함과 엄중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제대로 분명하게 아는 것

은 칭의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5  )

칭의의 본질: 용어와 정의

영어의 justify ( 의롭다고 하다 ) 와 righteousness ( 의 ) 는 서로 다른 어근

에서 왔지만, 히브리어( ‘차데크’의 히필형, ‘체데크’ ) 와 헬라어( ‘디카이오오’, ‘디카이

오쉬네’ ) 에서는 이 두 개념이 단일한 어근을 통해 함께 묶여 있다. 히브

리어 구약 성경에서 “의롭게 하다”( ‘차데크’의 히필형 ) 로 번역되는 동사는

재판장이 어떤 사람을 사법 정의의 원칙에 따라 올바르다고 선언하는

행위를 뜻하는 사법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강하게 지닌다. 예컨대 성경

은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

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차데크’의 히필형]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신

25:1 ) 라고 말한다.

3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3.

4  ) Calvin, Institutes, 3.12.1.

5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20.

개혁파 조직신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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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종들을 심 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차데크’의 히필형]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
( 왕상 8:32
.
이 동사는 사법적 행위를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사용된다.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서”
)

게할더스 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단어의 의미가 엄밀하게 사법적이고 그 밖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잠언 17장 15절이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여기서 “의

롭다 하다”는 “선한 특질을 주입함으로써 어떤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그는

악한 자를 선한 자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짓이라

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6  )

이 본문들에서 70인역은 이 히브리어 동사를 “의롭다고 하다”( ‘디카이

오오’ ) 를 뜻하는 헬라어로 번역한다. 이 헬라어는 보통 재판장에게서 호

의적인 판결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7  ) 통속 헬라어로 쓰인

문헌에서 이 헬라어는 분명히 어떤 사람의 도덕적 성품을 변화시키는

것을 결코 가리키지 않는다.8  ) 신약 성경에서도 ‘디카이오오’는 의롭다

고 사법적으로 판결하는 것,9  ) 또는 어떤 사람이 의롭다는 것을 공적으

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10  ) 안토니우스

티시우스는 “의롭다고

“엄밀하게 말해 거의 언제나 재판장에 의한 법정적인 판결

6  ) Vos, Reformed Dogmatics, 4:133.

7  ) 창 44:16; 대하 6:23; 시 81(82):3; 142(143):2; 사 5:23; 43:9, 26; 50:8 70인역의 ‘디카이오오’ 를 보라. 이 헬라어는 법정에서 다른 사람의 법적 권리를 변호하거나(사 1:17; 미 7:9 70인역, 히 브리어 ‘리브’를 번역한 것), 어떤 사람의 의로움을 공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욥 33:32; 렘

3:11; 겔 16:51-52 70인역, 히브리어로 ‘차데크’의 피엘형을 번역한 것)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 된다.

8  ) Mor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253. 70인역에서는 오직 한 번 히브리어 ‘자 카’(“씻다”)를 ‘디카이오오’로 번역하는데(시 72[73]:13), ‘자카’는 법적인 의미에서 “순전한 것 으로 여기다”로 번역될 수 있다(미 6:11).

9  ) 눅 18:14; 롬 2:13; 3:26; 8:33; 고전 4:4.

10  ) 마 11:19; 눅 7:29, 35; 10:29; 16:15; 롬 3:4; 딤전 3:16; 약 2:21, 24-25.

11  ) Polyander, Walaeus, Thysius, and Rivetus, SynopsisPuriorisTheologiae, 33.2 (2:305). 다음을 보라.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366. “법정적”은 “법정과 관련된”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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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의(1부) 27
하다”로 번역되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둘 다
행위를 가 리키는 법정적 용어다”라고 말했다.11  )

하나님이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을 언급하는 신약 성경 본문

은 다른 책에도 종종 나오기는 하지만, 압도적인 다수는 바울 서신에

나온다.12  ) 바울 서신에서 그런 본문은 대부분 로마서( 14번 ) 와 갈라디아

서( 8번 ) 에 나온다.13  ) 신약 성경의 용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본다.

1. 칭의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행하시는 법정적 선언이다. 앞에서

우리는 ‘디카이오오’의 주요한 의미 중 하나가 재판장이 법에 따라 한

사람의 지위에 대해 행한 판결과 관련이 있음을 보았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 롬 2:5-6 ) 을 내다보며

제시한 바로 그 상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지는 칭의에 대한 바

울의 위대한 강해는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

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

니라”( 롬 3:19-20 ) 는 말로 시작된다. 따라서 칭의는 법적으로 의롭다 함

을 받을 수 없는 자를 의롭다고 하는 법적인 판결이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2. 칭의는 죄책의 사함과 정죄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한다. 바울은 사

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

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 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한다. 12  ) 눅 18:14; 행 13:39; 약 2:21, 24, 25; 계 22:11(대다수의 본문은 이렇게 읽지 않지만, 공인 본문

은 이렇게 읽는다). 13  ) 롬 2:13; 3:20, 24, 26, 28, 30; 4:2, 5; 5:1, 9; 6:7; 8:30(2번), 33; 갈 2:16-17(4번); 3:8, 11, 24; 5:4. 또한 고전 6:11; 딛 3:7을 보라.

28 개혁파 조직신학 6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서 주어지는 칭의를 아담 안에서 주어지는 정죄와 대비시킨다( 롬 5:16 ) 그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3-34 ) 고 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1절 )

3. 칭의는 사법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순종한 것

으로 여기는 것 을 포함한다. 이것은 재판장의 행위로서의 “의롭다고

하다”가 지닌 공통적인 의미다. 루이스 벌코프는 구원에서 칭의는 “소

극적 요소”와 “적극적 요소”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14  ) 칭의는 소극적

으로는 죄인에게 죄책을 돌리는 것을 제거해 주고, 적극적으로는 죄인

에게 의로움이라는 지위를 수여한다. 바울은 칭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로마서 4장 3-6절에서 창세기 15장 6절의 표현을 가져와, 칭의는 법적

인 간주 또는 의의 전가라고 설명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 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

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

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여기다, 전가하다”( ‘로기조마이’ ) 로 번역되는 헬라어의 일반적인 의미

는 “숙고하다”이지만,15  ) 바울이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삯을 “보

수”( 롬 4:4 ) 로 지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단어는 좀 더 구체적으로 법

적이거나 재정적인 결산과 관련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자의 죄를 죄로 인정하시는 경우( 8절; 고후 5:19 ) 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의

롭다 하시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의로운 자로 여겨진다. 이 의로움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 자에게 주어지는 지위다( 롬 5:18-19 ). 따라서 최

14  )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14–515.

15  ) 롬 14:14; 고전 13:11; 빌 4:8.

1장 │ 칭의(1부)
29

고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것으로 여긴다고 선포하

시는 것이다.

성경의 용어와 그 신학적 배경에 비추어 우리는 칭의의 의미를 다음

과 같은 정의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이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을 토대로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

의 죄책을 사하시고 ( 이렇게 해서 정죄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 율법에 순종한 것으

로 여기신다는 ( 이렇게 해서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되었다는 ) 것을 법정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이다. 윌리엄 에임스는 “칭의는 하나님이

자를 그가

믿음으로 붙잡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면하셔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

나게 하시고, 생명을 받기에 합당한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고 판결하시

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6  ) 칭의는 법정적이고 사법적인 선언이므로, 하

나의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인 효력을 지닌 하나님의 법적 행위”다.17  )

칭의는 죄인의 법적 지위를 극적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를 고발하는 묵시를 통해 이 역전을 생생하게 예시했다. 거기서 여

호와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저 깨끗하고 아름다운 옷을 그에게 주라고

명하셨다( 슥 3:1-5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갈 3:24, 27 ).

또한 칭의는 인간의 기대와 예상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

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주신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에서 이것을 예시하셨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선한

행실을 자랑한 반면에, 세리는 통회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리스도는

30 개혁파 조직신학 6
재판장이신
믿는
“내가 너희에게 이 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디 16  ) Ames, The Marrow of Theology, 1.27.6 (161). 사면하는 것은 의무 또는 형벌을 면제해 주 는 것이다. 17  ) Grudem, Systematic Theology, 723.

카이오오’]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다( 눅 18:9-14 ).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칭의의 토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칭의에 대해 논의하면

서, “하나님의 의”와 믿는 자에게 “전가되는” 의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

이 어떻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지”( 롬 4:5 ) 를 이해하려

면 바울이 이 두 표현을 이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

칭의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하나님의 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

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

니라”( 롬 1:17 ) 고 쓴다. 그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

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

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

니라”( 3:21-22 ) 는 말씀을 덧붙인다. 그런 후에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

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

은 자 되었느니라”( 24절 ) 고 설명한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의”는 복음

메시지를 줄인 말일 수 있다( 10:3 ).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하나님

의 속성인 의로우심,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 또는 하나님이 인

정하시는 의를 가리킬 수 있다. 하지만 존 머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

마서 1장 16절의 “하나님의 능력”과 마찬가지로 17절의 “하나님의 의”

는 “하나님의 특질에 따라 정해진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로우심”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의로우심’이고……인간의 불의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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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칭의(1부)

인간의 의와도 대비된다.”18  ) 제임스 뷰캐넌( 1804-1870년 ) 은 “그것은 인

간의 모든 의가 차단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하나님의 의다”라

고 썼다.19  )

바울의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사용한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에 뿌

리를 둔다.20  ) 예컨대 여호와 하나님은 “내 공의[의]가 가깝고 내 구원

이 나갔은즉……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의]는 폐하여지

지 아니하리라”( 시 51:5-6 ) 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구원이

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동의어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특

정한 문맥 속에서 의의 사전적 의미를 의의 적용인 구원이나 언약에 대

한 신실함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21  )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 의

로우심, 정의를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로 작정하셨다( 5:16 ). 하나

님은 자신의 율법과 그 의로운 요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

신의 율법을 존중하신다( 42:21 ).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죄인

의 구원을 통해 자신의 의를 어떻게 나타내시고 영화롭게 하시는지

를 줄여서 설명한 것이다.22  )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삶과 하

나님 백성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정의의 요구를 충

족시키셨다( 53:6, 11 ).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과의 연합을 통해 의롭다 하

심을 얻는다( 45:24-25 ). 하나님은 의의 아름다운 옷을 그들에게 입혀 주

신다( 61:10 ). 그 결과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너를 치려고 제조된 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18  ) Murray, TheEpistletotheRomans, 1:31.

19  ) James Buchana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1867; repr., Grand Rapids, MI: Baker, 1955), 316.

20  ) 칭의와 관련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이 책 2권 475-481을 보라.

21  ) 다음을 보라. Charles Lee Irons, The Righteousness of God:A Lexical Examination of the Covenant-Faithfulness Interpretation,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2/386 (Tübingen: Mohr Siebeck, 2015).

22  )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370.

개혁파 조직신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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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들이 내 게서 얻은 공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54:17 ) 고 약속하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신 것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

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롬 3:24 ) 가 되는 것과 조금도 모순

되지 않는다. 에임스가 지적했듯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의

롭다 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분명하

게 보여 준다. 첫째, “하나님은 엄격한 율법과 응보 정의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죄에 대해 기소할 권리가 있으셨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둘째, 하나님은 “피해자이신데도 이 화해의 수단”을 기꺼이 계획하시

고 실행하셨다. 셋째, 하나님은 “그 화해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

자도 아끼지 않으셨다.” 넷째,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에

게 있는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아들에

접붙여서……우리로 하여금 아들 안에 있는 화해에 참여하는 자가 되

게 하시기” 때문이다.23  )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이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믿는 자의 것인 이 하나님의 의는 무엇

인가?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 즉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형벌을 담당하신 것과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행하신 것으로 말미암은 의다.24  )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

을 대신해 고난 받으셨다고 가르친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6, 8절 ). 또한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으셨다는

것(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9절 ), 하나님이 그리스

도( 10절 ) 와 그의 의로우심( 11절 ) 을 기뻐하셨다는 것도 강조한다. 특히 이

사야 53장은 “나의 의로운 종이……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11절 ) 라

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개인의 의로우심을 자기 백성의 칭의와 연결

시키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의롭게 하며”와 그 동족 명사 “의로운”을 바로 옆

23  ) Ames, A Sketch of the Christian’s Catechism, 118. 24  ) 그리스도의 구원의 순종이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

책 4권 24장을 보라.

│ 칭의(1부) 33

1장

에 붙여 나란히 배치하기 때문이다( ‘야츠디크 차디크’ ). 따라서 이 본문이

염두에 둔 것은 죄와 의의 맞교환이다. 백성의 죄는 그에게 두어져 그

는 그들을 위해 고난을 받고, 그의 의는 그들의 것으로 여겨져 그들은

그의 의에 참여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만 그리스도의 의

는 우리의 의가 된다. 해딩턴의 존 브라운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일 때만” 하나님은 법적으로 우리를 “온전히 의로운 것으로” 여기실

수 있다고 설명했다.25  )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갈 2:17

ESV ) 26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된다”( 롬 3:24 )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

이라”( 고후 5:21 ) 고 말함으로써, 백성의 죄와 하나님의 의의 맞교환에 대

해 말한다. 빌헬무스 아 브라켈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믿는 자를 위해 죄가 되신 것처럼,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

게 된다. 여기에서는 서로의 것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전된다.”27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죄

악 되게 하거나 죄를 짓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그들에

게 돌리지 않기 위해 죄를 알지 못하는 그를 죄인으로 여기셨다는 것

이다( 19절 ).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칭의는 “상호

적인 전가를 통해 믿는 자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25  ) Brown, Questions and Answers on the Shorter Catechism, 158.

26  ) KJV는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된다”로 읽는다. 헬라어 전치사(‘엔’)은 ‘안에서’, ‘함께’, ‘~에

의해’를 의미할 수 있지만, 바울은 보통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말할 때 이 표현을 사용 한다(‘엔 크리스토’).

27  ) Brakel,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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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죄인을 더 나은 사람으로 변 화시키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들에게 전가하셔서 그들을

자에게 옮기는 일종의 변환”이라고 설명했다.28  )

따라서 인류가 한 사람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롬 5:15-19 ). 바울은 “한 사

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19절 ) 고 한 대목에서

“되다”( ‘카티스테미’ ) 로 번역된 동사는 보통 어떤 신분이나 지위로 세워

지는 것을 의미한다.29  ) 이 문맥에서 바울은 아담의 죄가 아담 안에 있

는 자들에게 정죄와 사망을 가져다준 반면에,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

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칭의와 생명을 가져다주었다는 말을 반복적으

로 한다. 따라서 “의롭게 되다”( 개역개정에는 “의인이 되리라” ) 는 믿는 자의 성

품이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

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그들의 의다.

믿는 자는 이 탄탄한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 3:9 ). 프란키스쿠스 투레

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

의 판결에서 “고려할 가치 있는 이유”이므로, “하나님은 다른 이유 때

문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붙잡아 우리에게 전가된 그

리스도의 지극히 온전하신 의 때문에 죄사함과 생명의 권리를 수여하

신다.” 이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논쟁을 통해 알아야 하는 문제가 아

니라, 오직 “우리의 양심이……그 광채 때문에 별들이 어두워지고 그

힘 앞에서 산들이 녹는……저 최고의 재판장이신……하나님 앞에 놓

여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올바르게 알 수 있는 문제다. 하나님

│ 칭의(1부) 35

1장
앞에서는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에 대 처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단초는 우리의 죄 에 대한 정죄에서 우리를 건져 낼 수 없다. 오직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 28  ) Perkins, A Golden Chain, chap. 37, in Works, 6:182. 29  ) 마 24:45, 47; 25:21, 23; 눅 12:14, 42, 44; 행 6:3; 7:10, 27, 35; 17:15; 롬 5:19; 딛 1:5; 히 2:7; 5:1; 7:28; 8:3; 약 3:6; 4:4; 벧후 1:8.

스도의 의와 순종만”이 진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해 천국으로 데려다

준다.30  )

칭의의 실행: 영원에서 영광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 논의하면서 우리는 이 연합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 잉태된 때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끄시는 때까지 이 연합의 실행을 추적했다.31  ) 칭의도 그리

스도의 연합에서 오는 은택이므로, 영원과 역사 속의 서로 다른 여러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1.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칭의를 작정하셨다. 하

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

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신 것

이다( 딤후 1:9 ). 하나님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

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엡 1:4 ). 그

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 계 13:8 KJV ) 이시고,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벧전 1:20 ) 구속주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

떤 것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자신의 택하신 자들의 칭의를 그리스도 안

에서 작정하셨다.

하지만 택하신 자들은 이 작정을 통해 즉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그가 택하신 자이든 아니든 현

재적으로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 요 3:18 ).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

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36 개혁파 조직신학 6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 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때까지, 그들은 “다른 이들과 같이 본 질상 진노의 자녀”( 엡 2:3 ) 이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아주 “멀리 있는” 자다( 1230  ) Turretin, Institutes, 16.2.6–8 (2:639–640). 31  ) 이 책 5권 10장을 보라.

13절 ). 해딩턴의 존 브라운은 “택하신 자는 칭의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

는가”라고 묻고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섭리는 그들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위한 길을 은

밀하게 준비하지만, 그럼에도 율법과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들은 진노와 정죄의 상태에 있다.”32  )

2.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 죽음, 부활을 통해 칭의를 성취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

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 ) 고 말하고, 그들

의 칭의에 대해( 5:18 )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

리라”( 19절 ) 는 말을 덧붙인다. 바울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영으로 의

롭다 하심을 받으셨다”( 딤전 3:16 ) 고 쓰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 롬 1:4; 8:11 ).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고소가 잘못되었

음을 확증해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보증을 무덤에서 다시 살리

심으로써,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도 대표의 원리에 따라

다시 살리시고 의롭다 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택하신 자들이 그

리스도의 위대한 구속 사역을 통해 대표의 원리에 따라, 또는 실질적으

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마지

막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요 19:30 ) 고 말씀하실 수 있었기 때문

이다.

3.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칭의를 약속하신다. 복음이 약속하

는 것은 “죄사함”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 행

13:38-39 ).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32  ) Brown, Questions and Answers on the Shorter Catechism, 156.

1장 │ 칭의(1부) 37
믿는 자의 칭의를 선언하신다. 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실제적인 칭의를 수여하 신다. 칭의는 영원 속에서 작정되었고,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모든 시대에 복음을 통해 선포되지만, 칭의가 적용되고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언한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 마다, 하나님은

것은 오직 한 사람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후렴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다.33  ) 바울은 구

원의 질서에서 칭의를 예정과 부르심 뒤에 둔다( 롬 8:30 ). 바울이 “우리

도……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갈 2:16 ) 고

한 말 속에는 실제로 언제 칭의가 일어나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영어로 “that”을 번역된 접속사( ‘히나’ ) 는 목적이나 결과를 나타

낸다. 존 머리는 이 본문에 대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칭의를 위한

것이므로, 칭의에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썼다.34  )

5. 하나님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양심으로 하여금 칭의를 알게

해 주신다 . 청교도는 “양심의 법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나님

이 사람의 영혼 속에 양심을 두어, 각 사람과 각자의 행위에 대한 하나

님의 판단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다( 롬 2:15; 9:1 ). 35  ) 믿는 자로 하여금 의

롭다 하심을 얻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지

위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적용됐을 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

게” 할 수 있다( 히 9:14 ). 즉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고 하나님이 받으

시는 자가 되었음을 내적으로 알게 되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게 된다는 것( 10:19, 22 ) 이다. 이렇게 칭의를 알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의 한 측면인데, 바울

은 법적인 용어를 사용해 이 사역을 설명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

과 더불어 우리가

고, 히 11:7.

28; 4:5, 9, 11, 13; 5:1; 9:30; 10:6; 갈 3:8, 11, 16, 24; 빌 3:9; 참

34  ) Murray, RedemptionAccomplishedandApplied, 129.

35  ) Sibbes, A Commentary upon the First Chapter of the Second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 in Works, 3:211. 오웬과 알렉산더 콤리의 신학에서

지는 칭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eeke, The Quest for Full Assurance, 182–185, 240.

36  ) Owen, Communion with God, in Works, 2:241.

38 개혁파 조직신학 6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 존 오 웬은 이것은 법정이 아니라 “양심” 속에서 이루어지는 “증거 조사라 는 사법 절차”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말한 후36  ) 이런 말을 덧붙였다.
행 13:39; 롬 1:17; 3:22-25,
33  )
양심의 법정에서 이루어

“성령을 통해 영혼에 전달되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는 복음의 약속은

믿는 자의 양심 속에서 그의 칭의를 완성하고, 그에게 하나님과의 평

화가 이루어졌다는 확신을 준다.”37  ) 이렇게 해서 객관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지닌 의에 대해 주관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주제 아래에서 더 자세하

게 탐구될 것이다.38  )

이 다섯 가지의 차이를 알면, 우리는 흔히 “영원한 칭의”로 알려진

오류, 즉 하나님은 칭의를 작정하셨을 때 택하신 자들을 이미 의롭다고

하셨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것은 개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

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

백( 11.4 ) 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모든 택하신 자를 의

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고,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해 죽

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럼에도 그들

은 성령께서 합당한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하실 때 의

롭다 함을 받는다.”39  )

우리는 모든 택하신 자가 이미 칭의를 얻었고, 믿음은 단지 그들이

이미 칭의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거짓 교리를

배척해야 한다. 첫째, 토머스 굿윈이 말했듯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는 “오직 내 자신의 양심의 법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교리가 사실이어서, “사람은 믿은 후만이 아니라 믿기 전에도 이

미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라면, “그가 믿음으로써 그의 지위와 신분

이 새롭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이미 달라져 있는 자신

의 지위와 신분을 알게

37  ) Owen, AnExpositionoftheEpistletotheHebrews, 3:300.

38  )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12-13장을 보라.

39  ) Reformed Confessions, 4:248. Schaver, The Polity of the Churches, 2:35에 있는 위트 레흐트 공의회(1905년) 결론도 참고하라.

40  ) Goodwin, TheObjectandActsofJustifyingFaith, in Works, 8:214.

1장 │ 칭의(1부)
39
되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성경은 사람이 믿음 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자 새롭게 일어나 는 일이라고
교리는 칭의와 성화를 단절시키게
말한다.”40  ) 둘째, 그런

될 것이다. 만일 택하신 자가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런즉 우리가 무

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

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런 교리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인데도 죄에 대해 죽지 않은 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셋

째, 하나님의 작정과 그 작정의 실행을 뒤섞어 버리면,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주권적으로 사용하시

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다. 넷째, 영원 속에서 이미 실제적인 칭

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하면, 복음 전도의 절실함이 훼손된다. 우리는 택

하심과 관련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속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

를 바라보아야 하지만, 정죄 아래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 메시지, 즉 하

나님은 오직 자기 아들을 믿는 자만을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전해야 한다. 존 머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복음의 희년 나팔이다”라

고 말했다.41  )

6. 하나님은 심판 날에 믿는 자를 공적으로 의롭다 하실 것이다. 그리

스도는 자기 백성이 “심판 날”에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

신다( 마 12:36-37 ). 바울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

실” 것이므로, 영광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끝까지 선한 일

을 한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악을

행한 자에게 진노와 곤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그 종말론적인 문맥

속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한다

40 개혁파
6
조직신학
( 롬 2:6-10, 13 ).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우심이 공적으로 드러 나는 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직 믿음만 의거해 이루어질 수 없다( 5절 ). 심판 날에는 우리의 행위,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만들어 내신 행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빌 1:9-11; 살후 1:9-12 ). 그 행위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여 줄 것 이다( 마 25:34-40 ). 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 41  ) Murray, Collected Writings, 2:217.

져 줄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

나님의 진노에서 건져 줄 수 있으시다( 롬 5:9; 살전 1:10 ). 하나님 백성은 그

리스도의 구속의 죽음을 근거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될 것

이다( 히 9:15 )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은혜 덕분에 심판 날에 믿는 자의 경험은

불신자의 경험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다. 요한네스 볼레비우스는 하

나님이 악인에 대해서는 “각자의 행위를 따라 각자의 행위에 의거해”

심판하실 것인 반면에, 의인에 대해서는 “믿음의 행위를 따라” 심판하

시면서도 “행위에 의거해” 심판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이 보여 주는 것처럼 심판 날에는 두 종류의 책, 즉 행위의 책과 생명책이 펼쳐질 것이므로, 여기서 “우리는 의인의 구

원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에 의거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42  )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행실에 대해 우리에게 주

실 상조차도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지니신 긍휼하심에서 비롯

된다( 눅 12:32-33 ). 벨기에 신앙고백( 24조 ) 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지만, 그 선한 일로 공로를 얻기 위해 행하지는 않는다……우

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일에 상을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은사에 관을 씌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

는다.”43  )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4주, 63문 ) 도 마찬가지다. “이

상은 공로에 속하지 않고 은혜에 속한다.”44  )

바울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행위를 따라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고후 5:10 ),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촉구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촉구한다( 18-21절 ). 오직 하나님과 화해한 사

람만이 성령의 성화의 은혜를 힘입어 행한 자신의 선한 일을 통해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42  ) Wollebius, Compendium, 1.35.11 (184).

43  ) The Three Forms of Unity, 42.

44  ) The Three Forms of Unity, 63.

칭의(1부) 41

1장 │

칭의의 수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

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한다. 이 본문은 바울이 이신칭의

교리를

는 데 사용한 열쇠였다( 롬 4:3; 갈 3:6 ) . 일반적으로 고대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과 자신의 후손

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쌓은 인물로 보았다.45  ) 반면에 바울은 아

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롬 4:9-12 ) 하나님이 “일한 것이 없는” 그에

게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6절 ), 어떤 식으로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

롭다 하시는지”( 5절 ) 를 보여 주신 본보기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 하셨는데, 이

것은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11절 ). 아브라

함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율법은 오직 율법을 범하는 자에게 하나님

의 진노를 가져다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13-15절 ). 아브라함이 하나

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그에게 자손을 주어( 이 자손은 그리스도였다[갈 3:14, 16] )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

신 것을 믿었던 것처럼( 17-22절 ), 오늘날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다( 롬 4:23-25 ).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이 옛적부터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정하신 유일한 길이다.

하박국 2장 4절은 교만한 자를 꾸짖는

45  ) ApocryphaandPseudepigraphaoftheOldTestamentinEnglish, ed. R. H. Charles, 2 vols. (Oxford: Clarendon, 1913), 1:622; 2:48에

다음도 보라.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1 (Nashville: Thomas Nelson, 1990), 110–111; William Hendriksen, Exposition of Paul’s Epistle to the Romans, vol. 1, Chapters 1–8,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 Baker, 1980), 145.

42 개혁파 조직신학 6
반면에, “의인은 그의 믿음으 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약속한다. 이 하박국 본문에서 70인역이 헬라 어로 번역할 때 사용한 ‘에크 피스테오스’( “믿음으로써” ) 라는 어구는 바울
기도(8절)와
23:10을
나오는 므낫세의
희년서
보라.

이 칭의에서 믿음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표현이 되었다.46  ) 바

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 고 말한다. 또

한 그는 ‘디아 피스테오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니”( 3:22 ) 라고 쓴다. 종종 바울은 이 두 전치사를 서로 교환

해 사용한다( 25-26, 30절 ). 그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사람이 의롭

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엑스’]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

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디아 피스테오스’] 줄 알므로 우리도 그

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엑스’]가 아니

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에크 피스테오스’]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

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엑스’]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고 말한다. 이렇게 두 전치사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전치사 ‘에크’가 칭

의의 원천이나 근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디아’처

럼 하나님이 칭의를 수여하시고 사람이 칭의를 받기 위한 수단을 가

리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울은 전치사 없이 믿음의 여격( ‘피스테

이’ ) 을 사용함으로써, 마찬가지로 믿음이 칭의의 수단임을 보여 준다.48  )

성경이 “그리스도의 믿음”( 빌 3:9, 개역개정에는 “그리스도를 믿음” ) 이라고 말

할 때, 이 어구는 그리스도가 지니신 믿음( 주격적 속격 ) 이 아니라, 그리스

도를 믿는 믿음( 목적격적 속격 ) 을 가리킨다. 바울은 갈리디아서 2장 16절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피스티스’]”( 개역개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

음” ) 이라는 어구를 “우리도 그리스도

30; 4:16; 5:1; 9:30, 32; 10:6; 14:23; 갈 2:16;

11, 12, 22, 24; 5:5. 바 울은 롬 1:17; 갈 3:11에서 합 2:4를 인용한다.

‘디아 피스테오스’라는 어구를 칭의 또는 구원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사용한 예로는 롬

3:22, 25; 갈 2:16; 엡 2:8; 빌 3:9; 딤후 3:15; 히 6:12; 참고, 고후 5:7; 히 11:33; 벧전 1:5를

보라.

48  ) 롬 3:28; 5:2; 11:20; 빌 3:9. 히브리서 11장 전체에서는 “믿음으로”를 나타내기 위해 ‘피스티스’

의 여격만을 단독으로 사용한다. 갈 2:20; 살후 2:13에 나오는 ‘엔 피스테이’ 구문을 참고하라.

43

1장 │ 칭의(1부)
) 라는 어구도 사용한다.47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예수를 믿나니[‘피스튜오’]”라는 구절과 병행으로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 로 말미암아”( 개역개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 모든 “믿는” 자 46  ) 롬 1:17; 3:26,
3:7, 8, 9,
47  )

울은 그리스도가 지니신 믿음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어구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리키

는 어구를 서로 엮어 사용하므로, 그가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따라서 믿음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기 위한 수단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믿음 때문에, 또는 믿음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벌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 때문에( ‘디아 텐 피스틴’ ) 의롭다 함을 얻는다

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믿음을 우리의 칭의의 근거로 결코 제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49  ) 믿음은 하나님의 정의의 조건을 충족시켜 우리

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믿음은 우리의 선

한 행실 대신에 우리의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믿음은 언제

나 자기 자신 밖에 있는 제3자의 의, 즉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토머스 왓슨은 “존귀함은 은혜인 믿음에 있지 않고,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는다는 점에서만 상대적인 존귀함을 지닌다”

고 말했다.50  )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은 약하고 불완전한 것들

로 가득할 수 있지만, 믿음이 붙잡는 그리스도의 의는 완전하다. 하이

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3주, 61문 ) 은 이렇게 말한다. “왜 당신은 오직 믿음

으로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하는가? 내 믿음이 가치가 있

어서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20–521. 다음을

Bavinck, Reformed Dogmatics, 4:211.

50  ) Watson, A Body of Divinity, 227.

51  ) The Three Forms of Unity, 87.

44 개혁파 조직신학 6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롬
.
에게
3:22; 참고, 갈 3:22 )
의이고, 오직 믿음 으로 말미암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내가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받아 내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51  ) 제임스 피셔와 어스킨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칭의의 수단 49  )
보라.

인 것은 “우리의 칭의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의의 선물을 값없이 돈 없이 받는 것이어

서, 칭의가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 롬 4:16 ).” 그들은 믿

음은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얻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

아 적용하는 손일 뿐이다”라고 설명했다.52  ) 따라서 믿음은 “우리의 빈

곤과 벌거벗음에 대한 엄숙한 선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그러므

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진실로 우리의 의와 힘은 여호와 안에 있다’( 사

45:24 ) 고 말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53  )

개혁파 신학자들은 믿음은 언약의 조건 이자 그리스도에게 참여하

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해 왔다.54  ) 일부는 거기서 더 나아가 믿음은 칭

의의 조건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스티븐 차녹은 “믿음은 칭의를 위

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이다”라고 말했다.55  ) 일부는 칭의와 관련

해 조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단호하게 배척해 왔다. 로버트 트

레일( 1642-1716년 ) 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믿음은 단지 사람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위한

52  ) Fisher et al., TheAssembly’sShorterCatechismExplained, 33.56–57 (182).

53  ) Fisher et al., TheAssembly’sShorterCatechismExplained, 33.66 (183).

54  ) 테오도르 베자는 자신의 신앙고백문(4.5-6)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으로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영접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요 17:20-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믿는다는 조건으로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온전하며 영속적인 순종의 조건으로” 아담과 “생명의 언

약”을 맺으셨고(20문),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관계할 조건으로 믿음을 요구하시며” 그리스도 및 택하신 자들과 은혜 언약을 맺으셨다(32문)고 말한다. Reformed Confessions, 2:253–254; 4:303, 305.

55  ) Charnock,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God, in Works, 2:214.

56  ) Robert Traill, A Vindication of the Protestant Doctrine Concerning Justification . . . from the Unjust Charge of Antinomianism, in The Works of Robert Traill, 4 vols. (1810; rep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5), 1:277.

│ 칭의(1부) 45

1장
수단일 뿐이다……칭의와 관련해 이 믿음은 조건도 아니고 자격 요건도 아니며 우리의 복음의 의도 아니고, 그런 자격이나 의 같은 모 든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행위다.”56  ) 존 오 웬은 이렇게 썼다.

어떤 이는 믿음이 우리의 칭의의 조건이고, 믿음을 그 밖의 다

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도 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 의도한

것이 내용에서 나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이 사용한 단어나 용어

나 표현에 대해서는 다툴 마음이 없다. 그런데 믿음을 우리의 칭

의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의도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

하는 의도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

게 요구하시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것이다.57  )

존 오웬은 계속해서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붙잡거나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제한된 의미에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조건이라는 표현은 모호해 혼란과 다툼을 초래

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또한 조건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믿음을 모종

의 의나 우리가 은혜를 얻기 위해 지불하거나 행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왜곡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을 수 있다.58  )

조건이라는 단어를 올바르게 정의한 후 믿음을 칭의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비판할 생각이 없지만, 벨기에 신앙고백( 22조 ) 이

말하듯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수

단”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지혜로워 보인다.59  ) 칼빈은 믿음을 그리스

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빈 그릇 또는 열린 입에 비유했다.60  ) 볼레비우스

단지

썼다.61  )

57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13.

58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13–116. 오웬은 은혜 언약

자체는 새 언약의 약속을 토대로 한 무조건적인 것이라고 믿었다(렘 31:31-34; 참고, 히 8장).

59  ) The Three Forms of Unity, 39.

60  ) Calvin, Institutes, 3.11.7.

61  ) Wollebius, Compendium, 1.30.10 (166).

46 개혁파 조직신학 6
는 “믿음은 행위이거나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붙잡기 위한 수단이므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해 준다”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선행의 지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2 ) 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 요 1:12; 롬 3:28; 5:1 ). 하지만 믿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 안에 단독으로 있

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혜들과 함께 있고, 죽은 믿

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약 2:17, 22, 26; 갈 5:6 ).”62  ) “오직

믿음”과 “단독으로 있지 않은 믿음” 간의 긴장관계는 칭의, 믿음, 선행

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데 더 큰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첫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로 말미암

는 칭의의 반대다.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 고

쓴다. 바울이 율법과 관련해 방금 지적한 죄들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악한 말, 폭력,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 같은

도덕적인 죄다( 9-18절 ).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는 예

식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덕법의 행위를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둘

중 어느 것도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해 줄 수 없다. 바울

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

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8절 ) 고 말한다. 바울은 흔히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고 말한다.63  )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

침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야고보서 2장 21-24절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

일 수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47

1장
│ 칭의(1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 62  ) Reformed Confessions, 4:248. 63  ) 로마서 3-4장과 갈라디아서 2-3장 외에도 롬 9:11; 11:6; 엡 2:8-9; 딤후 1:9; 딛 3:5를 보라.

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

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

으로만은 아니니라.

하지만 이것은 단지 겉보기에만 모순처럼 보일 뿐이다. 야고보는 “의

롭다 하심을 받다”( ‘디카이오오’ ) 로 번역된 단어를 바울과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고 말할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재판관이 법정에서 어떤

사람에게 의롭다고 선고한다는 법정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에 야고보

서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칭의에 대한 용

어를 논의할 때 설명한 바 있는 다른 의미, 즉 어떤 사람이 의롭다는 것

을 공적으로 선언하거나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다.64  ) 마찬가지

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게 되었지만( 창 15:6 ),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희생제

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22:9-12 ) 살아 있는 믿음

을 통해 자기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공적으로 나타내 보

였다고 말한다. 야고보의 관심은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것이고 살아 있

는 것임을 어떻게 보이느냐에 있고( 약 2:14, 17, 26 ), 바울의 관심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에게

64  ) 마 11:19; 눅 7:29, 35; 10:29; 16:15; 롬 3:4; 딤전 3:16; 약 2:21, 24-25. 65  )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21; Grudem, Systematic Theology, 731; Joel R. Beeke and Steven J. Lawson, Root and Fruit: Harmonizing Paul and James on Justification (Conway, AR: Free Grace Press, 2020).

48 개혁파 조직신학 6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느냐에 있다.65  ) 둘째,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성화의 은혜와 분리될 수 없는 동 반자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의 법적 지위와 신분을 선언하는 행위인 칭의보다 선행하고( 롬 8:30 ), 칭의 직후에는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 화가 뒤따른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자신의 복

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풍성하게 하려면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그 반문에 대해 믿는

자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해 주

는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죽으심과 부활

에 참여하게 되므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게 되며, 죄

는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 롬 6:1-14 ).

그리스도는 그와 연합된 자들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이다( 고

전 1:30 ). 지혜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고, 구원함

은 장차 모든 악에서 건짐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둘 중간에 믿는 자가 현세에서 누리게 되는 두 가지 큰 은택, 의로움( 칭

의 ) 과 성화가 놓여 있다. 이 두 가지가 이 본문에 함께 나오는 것을 근

거로 칼빈은 이렇게 추론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과 동시에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

면 이 은혜의 열매들은 분리할 수 없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 둘을 분

리하려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를 갈기갈기 찢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66  )

바울과 야고보는 둘 다 구원의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낳는다고 가

르친다( 갈 5:6; 약 2:17 ).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언제나 의

롭다 하심을 얻게 하고 살아 있게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단독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언제나 단독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다고 해서, 단독으로 존재하고 단독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믿음은 성육신해 사람이 된다. 즉 믿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67  )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은혜지만 서로 분리

할 수 없다. 웸프레이의 존 브라운( 약 1609-1679년 ) 은 이 두 은혜를 다음

과 같이 비교했다.68  )

66  ) Calvin, Commentaries, 고전 1:30; 참고, Institutes, 3.11.6.

67  )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갈 3:12, in LW, 26:272.

68  ) John Brown of Wamphray, The Life of Justification Opened (N.p.: 1695), 268. 다음을

49

1장 │ 칭의(1부)
루터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의 관 계를 그리스도의 두 본성, 즉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것에 비유했다.

칭의 성화

하나님 및 그의 율법과 관련한 변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시는 사법적

행위

여러 단계가 없고 단번에 완결됨

최초의 순간에 완성됨

모든 믿는 자에게서 동일함

상실될 수 없음

즉각적

죄책과 가벌성을 제거함

사람이 받아들여지고 의가 전가됨

영생의 권한이 주어짐

오직 믿음으로

본성의 변화

지속적인 세워 나감

많은 단계를 거쳐 성장하는 과정

죽을 때까지 완성되지 않음

모든 믿는 자에게서 동일하지 않음

이전 단계로 퇴보할 수 있음

점진적

죄의 존재와 권세를 죽임

은혜가 주입되고 성령이 주어짐

유업에 참여하는 데 적합하게 함

모든 은혜의 사용을 요구함

도표 1.1 칭의와 성화의 대비

칭의와 성화는 둘 다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다. 각각의 것은 죄인

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 엔젤 제임

스( 1785-1859년 ) 는 이렇게 썼다.

어떤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동시에 발

진티푸스라는 위험한 병을 앓고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왕이 그

를 사면해 준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충

분하지 않다. 그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으면 그는 곧 병으로 죽

게 될

보라. Joel R. Beeke, “John Calvin and John Brown of Wamphray on Justification,” in Reformed Orthodoxy in Scotland: Essays on Scottish Theology, 1560–1775, ed. Aaron Clay Denlinger (London: Bloomsbury T&T Clark, 2015), 191–211. J. I. Packer, Faithfulness and Holiness:The Witness of J.C.Ryle (Wheaton, IL: Crossway, 2002), 134에

50 개혁파 조직신학 6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가 그의 병을 치료해 준다 해 도, 왕이 그를 사면해 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병은 낫겠지만, 곧 사형이 집행되어 죽게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
인용된 존 라일의 비교도 이와 비슷하다.

이다. 그러나 사면도 받고 병도 치료된다면, 그는 완벽하게 구원

받게 될 것이다.69  )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지닌 경험적이고 실천

적인 은택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법적 지위

와 관련된 보이지 않는 행위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엄청난 함의

를 지닌다. 믿음은 의를 위해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복도 붙잡는다.

1. 양심의 화평.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

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 고 말한다. 복음은 화평을 전하는 것이고( 행 10:36 ) , 그리스도는 우

리의 화평이시다( 엡 2:14 ). 이것은 하나님과의 객관적 화평이지만, 주관

적 평안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1:2; 6:23 ). 믿음이 커질수록, 하나님의 임

재에 대한 담대함과 확신도 커진다( 3:12 ). 하나님이 하늘의 법정에서 의

롭다는 판결을 하시면, 사람의 양심이라는 땅의 법정은 그 판결을 듣

고 기뻐하며 소중히 여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한 깊은 지식은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탄탄한 발판을 마련해

준다( 6:15 ) . 브루스 데머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참되게 믿는 자의 죄를 사면하시고 깨끗하게 하셨으며, 죄와 죄책의 무

거운 짐에서부터 해방시키셨다. 지나치게 이것저것 따지는 그리스도인

이라 해도 이 영광스러운 실재를 송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70  )

2. 화해하신 하나님과의 기쁜 친교. 칭의는 법적 지위에 대한

John Angell James, PastoralAddresses,ChieflyontheSubjectofChristianDuty (New York: Robert Carter and Brothers, 1852), 319. 70  )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380.

1장 │ 칭의(1부) 51
교리이 지만, 무미건조하고 지적인 진리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달콤 한 관계를 위한 입구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분리하고( 사 59:2 ) 하
69  )

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다( 롬 1:18 ). 칭의는 죄책과 진노를 둘 모두 제

거하므로, 믿는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8:33-39 ). 바울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

롭다 하심을 받은” 자인 우리도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5:9, 11 ) 고

쓴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엡 2:18 ) . 요한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 고 말하며 크게 기뻐 한다.

3.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자유 . 교회

는 하나님의 빛 안에서 행하는 거룩한 교제를 누린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일 1:6-7 ). 이것은

죄 고백, 회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에 의한 죄사함의 체험, 하 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믿는 자의 새로운 각오를 수반한다( 1:8-2:3 ).

그리스도인은 진노하신 심판주가 아니라 우리와 화해하신 “우리 아버 지”에게 기도하는 것임을 알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

도를 따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수 있다( 마 6:9, 12 )

따라서 믿는 자는 죄를 고백할 때 또 다시 반복적으로 칭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이미 그들을 의롭다 하셔서 이제 그들의 죄 고백과 회

개를 받으시고 그들과의 은혜의 관계를 새롭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71  ) 해딩턴의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했다. 신자는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새로운 법적인

52 개혁파 조직신학 6
죄사함이 아니라 아 버지의 용서만을 필요로 한다.” 법적인 죄사함은 그들을 “영원한 진노” 에서 놓이게 해 주는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행위인 반면에, “아버지의 용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행위”, 즉 “징계를 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72  ) 71  ) 반복적인 매일의 칭의라는 정반대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rakel, The Christian’s Reasonable Service, 2:381–391 72  ) Brown, Questions and Answers on the Shorter Catechism, 157.

4.

1:17 ). 죄의 정죄가 존재의 모든 차원에 죽음을 가져다주었던 것처럼, 바

( 롬

5:17-18 ). 웸프레이의 브라운은 “믿는 자가 참여하는 이 생명은 믿음으

로 시작되고 지속되며 실행되므로, 믿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생명

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서다”라고 주해했다.73  )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율법의 저

주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 즉 생명의 성령을 받는다( 8:1-3; 갈 3:10-14 ). 하나님은 그들을 대적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을 위하시

므로, 모든 것이 합력해 그들에게 선을 이룬다( 롬 8:28, 31 )

5. 양심이 인간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를 얻음 . 믿는 자에 대한 하나

님의 판결은 권위 있는 최종적인 것이므로,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롬 8:1 ). 바울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3절 ) 라고 쓴다. 믿는 자가 자신의 삶

에 슬픔과 수치를 초래하지 않게 하려고, 지혜는 여전히 믿는 자에게

자신의 책망하고 바로잡는 말을 경청할 것을 요구한다( 잠 13:18; 15:5 ). 교

회는 믿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실을 해명하게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서 교회의 지체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 마 18:15-18 ). 하지만 믿는 자는 죄를 지었을 때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구원의 확신을 위한 근거. 만일 부분적으로라도 칭의가 행위로 말

미암는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1장 │ 칭의(1부) 53
영생과 복의 선물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롬
울은 “생명의 칭의”에 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의의 선물”을 받는 자 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 간 제사장에게서 죄사함을 받거나 자신의 죄를 보속하려 할 필요가 없 고, 그들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를 하시는 의로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요일 2:1-2 ) 6.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히 잘 행했는지를 현세에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 는 근심 어린 양심이 끝없이 찾아다녀야 할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73  ) Brown, TheLifeofJustificationOpened, 9.

을 얻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

는 지위에 “서 있다”( 롬 5:1-2 ). 선한 행실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은

구원받았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이지만( 3-5절 ) , 우리가 그것들을

의지하려는 순간, 그것들은 우리를 실망시키게 될 것이다. 행위 없이

전가된 의로 말미암는 칭의는 두려워 떠는 성도를 위한 탄탄한 토대다.

어거스터스 톱레이디는 이렇게 썼다.

이 두려움과 불신앙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흠 없으신

아들을 슬픔에 두지 않으셨던가?

주님이시여, 주께서 저 죄의 빚을 이미 짊어지셨는데,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께서

저 죄의 빚 때문에 나를 정죄하시겠는가?

주께서는 주의 백성이 빚진 모든 것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다 지불하셔서

온전한 속죄를 이루셨네.

주님께 피해 주님의 의 안에 머물고

주님의 피로 뿌림을 받으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일어날 수 없다네.74  )

7. 영광의 소망.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

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롬 5:1-

2 ).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Hymns and Sacred Poems,on a Variety of Divine Subjects,Comprising the Poetical RemainsoftheRev.AugustusM.Toplady (London: Daniel Sedgwick, 1860), 155.

54 개혁파 조직신학 6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이제 더 이 상 심판 날을 생각하고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주홍 빛 같은 악은 씻김을 받았고( 사 1:18 ), 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갚아야 할 빚이 없으므로, 하나님께 그들의 처벌을 부르짖는 큰 빚도 없다. 그 74  )

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율법의 요구와 형벌을 대속하셨다. 장차 그리스

도가 심판하실 것을 생각하면 믿는 자는 거룩한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그것은 기쁨이 섞인 두려움이다. 그들의 심판주는 그들을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신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묵상과 토론을 위한 질문

1. 칭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정의와 우리의 죄를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 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2.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칭의의 선물의 소극적 측면과 적극적 측면은 무엇인가?

4.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5.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의 상호 전가를 어떻게 가르치

는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택하신 자의 칭의와 어떻 게 다른가?

7.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8. 야고보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4)고 말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9. 칭의와 성화는 어떻게 다른가?

10. 위에서 열거한 칭의의 은택 중 어느 것이 지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가? 이유는 무엇인가?

더 깊은 성찰을 위한 질문

11.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는 자의 현재적 칭의는 어떻게 행위에 따른 심판에 의

55

1장 │ 칭의(1부)

한 장래의 칭의를 위한 토대가 되는가?

12. 믿음을 칭의의 “수단” 또는 “조건”이라고 할 때, 각각이 지니는 함의는 무엇인가?

어느 쪽이 최선의 용어이고, 이유는 무엇인가?

56 개혁파 조직신학 6

역사신학과 변증신학(고대부터 종교개혁까지)

칭의 교리는 논란이 많은 주제다. 마귀와 인간의 자기 의가 칭의론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루터파 종교개혁의 “또 다른 마르틴”이라 불린 마

르틴 켐니츠는 거짓된 가르침 속에 파묻혀 있는 칭의 교리를 다시 회복

하여 빛을 보게 하는 일은 “헤라클레스의 고역들보다 훨씬 더 힘든 일”

이었고, “성령이 말씀의 빛을 밝혀 길을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켐니츠가 말했듯 종교개혁의 상속자

인 “우리는 칭의 교리의 참된 의미와 사도적 순수성을 보존해 우리의

후손에게 넘겨주고, 누군가가 교묘한 술수나 속임수로 칭의 교리를 우

리에게서 탈취해 가거나 변질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노력

1  ) Justification: The Chief Article of Christian Faith as Expounded in Loci Theologici, trans. J. A. O. Preus, ed. Delpha H. Preus (St. Louis, MO: Concordia, 1985), 12에 수록된 Martin Chemnitz, Loci Theologici의 칭의 주제에 대한 서론.

57

2장
│ 칭의(2부)
2장 칭의(2부)
을 기울여야 한다.”1  ) 이 장에서는 16세기 종교개혁 기간에 칭의를 둘러싸고 소용돌이처 럼 휘몰아쳤던 신학적 논쟁에 대해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논쟁을 이 해하려면 먼저 종교개혁 훨씬 이전에서 시작해, 이 주제에 대한 고대와 중세 교회의 이해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초기 교부의

칭의론

초기 교회의 신학자들은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삼위일체론과 관

련된 문제에 몰두했으므로 칭의에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의 가장 초기부터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고 송축했다. 로마의 클레멘

스( 99년 사망 ) 는 AD 1세기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안

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받아,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의

지혜나 명철이나 경건함이나 우리가 마음의 거룩함 속에서 이루어 낸

행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실 때 사용하셨던 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

는다. 이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으시기를. 아멘.”2  ) AD 2세기에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과 그리스도가 이루

신 의 사이의 “달콤한 맞교환”을 크게 기뻐했다.3  )

키로스의 테오도레토스( 약 393-466년 ) 는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5 ) 는 바울의 말을 주해하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

은 우리 삶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구주의 사랑 때문이다”라

고 말했다.4  ) 마리우스 빅토리누스( 약 355년에 활동함 ) 는 “우리는 이것들

을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으로 말미

암아 받은 것이므로, 하나님은 이것들을 우리가 받을 만해서 주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5  ) 그는 이렇게 썼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당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 아니고, 당신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6  )

2  ) Clement, FirstEpistle, chap. 32, in ANF, 1:13.

3  ) Anonymous, Epistle to Diognetus, chap. 9, in ANF, 1:28. 이 본문은 이 책 4권 671에 인용 되었다.

4  ) Theodoret, Epistle to the Ephesians, 2.4–5, in ACCS/NT, 8:132. 이 단락과 다음 단락에

나오는 전거는 Thomas C. Oden, The Justification Reader (Grand Rapids, MI: Eerdmans, 2002), 44–46, 59에서 가져왔다.

5  ) Marius Victorinus, Epistle to the Ephesians, 1.2.7, in ACCS/NT, 8:132.

6  ) Marius Victorinus, Epistle to the Ephesians, 1.2.9, in ACCS/NT, 8:134.

58 개혁파 조직신학 6

요안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

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은 행위가 아니라, 행위로 의

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선하심이 분명 히 드러나게 하려고 아무도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게 하셨다고

말한다.”7  ) 크리소스토무스는 아브라함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

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롬 4:1-2 ) 에 대해 이렇게 주해했다. “내세울 만

한 행위가 없는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이

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선한 행실로 단장된 사람에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놀라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고, 믿음의 힘을 강력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8  ) 그는 로

마서 8장 33-34절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 즉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한다. 심판주가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하시고 선언하셨다면……누가 우리를 고발하겠

는가……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을 씌워 주시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

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런 후에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면, 누가 우

리를 정죄하겠는가?”9  ) 크리소스토무스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

울이 한 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는 “저주받은 죄인이 되어 정죄받으

셨고”,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이 경우에는 한 점의 흠조차 발견되어서는 안 되었다 )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 경우에 모든 죄가 제거된다 ) ” 하나님

의 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왕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범죄자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신 것에 비유했다. 왕은

“정죄받은 자를 구원하고 그의 악한 평판을 깨끗하게 해 주어”, 그에게

“큰 위험”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을 수여하려고……죽음과

7  ) Chrysostom, Homilies on Ephesians, 4.2.9, in ACCS/NT, 8:134.

8  ) Chrysostom, Homilies on Romans, Homily 8, in NPNF1, 11:385.

9  ) Chrysostom, Homilies on Romans, Homily 15, in NPNF1, 11:455.

10  ) Chrysostom, Homilies on 2 Corinthians, 11.5–6, in NPNF1, 12:334–335.

59

2장
│ 칭의(2부)
죄책 을 그에게서 자신의 아들에게로 옮겼다.”10  ) 하지만 초기 교부들은 특히 공로( 라틴어로 ‘메리툼’ ) 라는 용어를 사용함

으로써, 칭의와 관련해 장차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게 될 씨를 뿌리기도

했다.11  ) 테르툴리아누스는 “심판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셨음을 우리는 단언한다”고 말했다.12  ) 그는 “악만이 아니라 선행

도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데, 심판주는 악이든 선이든 모든 행위에

대해 상 주는 자이시기 때문이다”라고 썼다.13  ) 테르툴리아누스는 세례

이전의 회개는 하나님이 죄사함을 위해 요구하시는 대가이자 보상이

고, 세례 이후의 회개는 추가적인 죄에 대한 보속이라고 말했다.14  ) 키

프리아누스( 258년 사망 ) 는 그리스도의 피는 세례 이전의 죄를 씻어 주지

만, 세례 이후의 죄로 말미암은 죄책은 선행으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썼다. “의의 행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보속이 된다.”15  )

공로 신학은 펠라기우스에게서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하나님은 각

자의 의의 공로에 따라 성도를 사랑하신다고 가르쳤다.16  ) 그의 제자 켈

레스티우스( 400-430년에 활동함 ) 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과에 비례

해 임하는데, 이것은 만일 하나님이 죄악 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불의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7  ) 펠라기우스는 세례는 죄

인을 의롭게 하므로, 그들이 세례를 받은 때로부터 진정으로 순종하려

한다면 그들의 과거의 죄는 사함을 받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인은 세례를 받은 이후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해 선행을 함

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공로를 쌓아야 한다. 펠라기우

스에 따르면,

11  ) Alister E. McGrath, Iustitia Dei: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2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1:23.

12  ) Tertullian, Ad Nationes, 1:19, in ANF, 3:127; 참고, Against Marcion, 5.12, in ANF, 3:456.

13  ) Tertullian, On Repentance, chap. 2, in ANF, 3:658. 다음을 보라. Johann Heinz, Justification and Merit: Luther vs. Catholicism (Berrien Springs, MI: Andrews University Press, 1981), 114–115.

14  ) Tertullian, On Repentance, chaps. 6–7, in ANF, 3:661, 663.

15  ) Cyprian, On Works and Alms, chaps. 1–5, in ANF, 5:476–477.

16  ) Pelagius, “The Christian Life,” 18.

17  ) Pelagius, “The Christian Life,” 65에서 인용함.

18  ) Evans, Pelagius, 109, 113–114, 119; Pelagius, Commentary on Romans, 롬 3:28, in ACCS/NT, 6:105.

60 개혁파 조직신학 6
행위 없는 칭의라고 할 때의 행위는 유대 율법의 예식에 속한 행위를 가리키고, 순종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18  )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선도에 서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반대하고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옹호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리를 의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고, 우리

자신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다 ), 자신을 죄로 삼으셨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삼으신 죄는 하나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이고, 하나님

자신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19  )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그

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마귀에게

서 놓이게 하시려고 “자신은 빚을 지지 않으셨는데도” 스스로 고난을

받아 “우리의 빚을 채무자들에게 대신 갚으셨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

였다.20  )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자신의 피를 “쏟

으신” 것은 사탄이 우리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은 죄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21  )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의롭게 되

는 것”, 즉 이전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죄사함과 변화 둘 모두를 포함한

넓은 의미로 이해했다.22  )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행위는 칭

의에 선행하지 않는다……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칭의가 주어지는 것

이 아니라, 먼저 칭의가 수여된 자가 율법을 행한다. 왜냐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어구는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으

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이제는 경건한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19  ) Augustine, Enchiridion, chap. 41 (52).

20  ) Augustine, On the Trinity, 15.14.18, in NPNF1, 3:177.

21  ) Augustine, On the Trinity, 15.15.19; 15.16.21, in NPNF1, 3:177, 179.

22  ) 다음을 보라. David F. Wright, “Justification in Augustine,” in Justification in Perspective: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Challenges, ed. Bruce L. McCormack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6), 55–72.

23  ) Augustine,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chap. 45, in NPNF1 , 5:102. 다음을 보라. Michael Horton, Justification, 2 vols., New Studies in Dogmatics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88–89.

2장 │ 칭의(2부) 61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3  ) “칭의”를 해석하 는 문제는 부분적으로는 언어학적인 문제다. 성경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다”로 번역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법적이고 사법적인 지위를 가

리키는 것과는 달리,24  ) 라틴어 동사 ‘유스티피코’는 “의롭게 행하다, 의

를 행하다” 또는 “의롭게 만들다, 사하다, 정당함을 입증하다”를 의미

할 수 있다.25  )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는 원죄를 극복하기

위한 내적 은혜의 주입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여 준다.26  ) 아우구스

티누스에게 칭의는 하나님이 공로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사하

시고, 새로운 사랑의 성품을 주어 선한 행실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27  )

또한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의 미덕에 대해 공로라는 표현

을 사용했지만, 이 공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했다. “하나님

이 우리의 공로에 관을 씌우시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은사에 관을

씌우시는 것이다.”28  )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

5:6 ) 을 지닌 자들의 경우조차 그들의 “의는 참된 선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참되지만, 그럼에도 현세에서는 미덕을 완전하게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죄사함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우리 죄를 사하

여 주시옵고”( 마 6:12 ) 라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이 싸움을 아무리 잘해

나가고, 아무리 철저하게 이 원수를 굴복시킨다 해도, 어떤 악한 것이 슬며시 들어와 행위로 표출되거나 입술을 통해 빠져나가거나 생각 속 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29  )

우리는 초기 교부들이 선한 행실을 심판 날에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될 진정한 경건과 연결시킴으로써 중요한 기여를 했음을 인정하지만, 그

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관련해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공로를 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공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만들어지는 것

25  ) Charlton T. Lewis and Charles Short, eds., A New Latin Dictionary (New York: Harper & Brothers; Oxford: Clarendon, 1879), s.v. justifico (1020).

26  ) Augustine, On the Merits and Forgiveness of Sins, and on the Baptism of Infants, 1.9.10, in NPNF1, 5:18–19. 다음을 보라. McGrath, Iustitia Dei, 1:14–15, 30–31.

27  ) Augustine, ExpositionsontheBookofPsalms, 111.3 (5:258–259).

28  ) Augustine, Epistle 194. McGrath, Iustitia Dei, 1:28에서 재인용. 다음을 보라. Augustine, Enchiridion, chaps. 30–32, 94, 109–110, in NPNF1, 3:247–248, 267, 272.

29  ) Augustine, The City of God, 19.27, in NPNF1, 2:419.

62 개혁파
6
조직신학
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해도 말이다. 라틴어에서 공로를 뜻하는 ‘메리 툼’은 어떤 것의 가치를 가리킬 수 있지만, 흔히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24  )
나타내는 성경
칭의를
용어에 대해서는 1장을 보라.

는 의미를 내포한다.30  ) 설령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다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

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다( 눅 17:7-10 ). 우리는 타락한 상

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율법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

신다면, 누가 설 수 있겠는가( 시 130:3 ) ? 바울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

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4-5 ) 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와 관련해 공로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배척한다. 우리의 칭의는 영생과 마찬가지로 하

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공과에 근거해 얻을 수

있는 삯은 오직 죽음이기 때문이다( 6:23 ).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공로이고, 우리의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의 의 없이는 어떤 상도

받을 수 없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의 칭의론

서양의 중세 교회는 칭의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죄사함에 따른 내적

변화를 통해 은혜로 말미암는 삶과 공로를 얻게 해 주는 삶을 살 수 있

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노선을 계속 따랐다.31  ) 피에르 아벨라르( 10791142년 ) 는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지고, 믿음은 하나님이 그

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계시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키시는 수단이라고 말했다.32  ) 페트루

스 롬바르두스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마음에서 사랑[그리스도

인으로서의 사랑]을 점화시킴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고”, 우리는 “마

30  ) Lewis and Short, eds., A New Latin Dictionary, s.v. mereo (1136). 31  ) 페트루스 롬바르두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가브리엘 비엘 의 칭의론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orton, Justification, 1:93–162.

32  ) Peter Abelard,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롬 3:21–26, in A Scholastic Miscellany: Anselm to Ockham, ed. Eugene R. Fairweather,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10 (Philadelphia: Westminster, 1956), 278–279.

│ 칭의(2부) 63

2장

하나님의 은혜가 하

나님을 향한 모든 움직임의 원인임을 강조했다.35  ) 하지만 오컴의 윌리

엄( 1347년 사망 ) 과 가브리엘 비엘( 1495년 사망 ) 은 거기서 한참을 더 나아가, 인간의 타락의 심연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반( 半 ) 펠라기우스주의적인

공로의 사다리를 만들어 냈다. 그는 그 사다리의 각각의 계단에서 사람

들에게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함으로써 공로를 쌓으면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약속

한다.36  )

공로가 중세 신학의 일부였긴 하지만, 중세 신학자의 경건은 그리스

도인에게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의지할 것을 장려했다. 캔

터베리의 안셀무스( 약 1033-1109년 ) 는 “나의 공과를 따라서가 아니라 내

게 처음에 주어졌던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자신의 구원을 온전하게

해 주시라고 하나님께

죽으심에 두고, 다

33  ) Lombard, The Sentences, 3.19.1.1–3 (3:78–79).

34  ) Aquinas, Summa Theologica, Part 2.1, Q. 111, Art. 1, Reply Obj. 1; Art. 2, Answer; Q. 113, Art. 8.

35  )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의롭게 되는 동안, 우리의 자유

의지의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Summa Theologica, Part 2.1, Q. 111, Art. 2, Reply Obj. 2.

36  ) Heiko Oberman, The Dawn of the Reformation: Essays in Late Medieval and Early Reformation Thought (Edinburgh: T&T Clark, 1986), 213;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Gabriel Biel and Late Medieval Nominalism (Durham, NC: Labyrinth, 1963), 132; Steven E.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0), 234. 이 책 5권

37  ) The Prayers and Meditations of St.Anselm, trans. Benedicta Ward (Harmondsworth, England: Penguin, 1973), 94.

64 개혁파 조직신학 6 귀의 속박에서
놓인다”고 썼다.33  )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거룩 하게 하시는 은혜는 새로운 성향을 영혼에 주입하는 것과 죄사함을 통 해 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의롭게 한다고 말 했다.34  ) 아퀴나스는 값없이 주권적으로 주어지는
당신의
기도했다.37  ) 그는 죽어 가는 죄인에게 이렇게 조 언했다.
모든 신뢰를 오직 이 [그리스도의]
과정 전체가
의롭게 하시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움 직임은 은혜의 원인이 아니라 은혜의 결과다. 따라서
은혜에 속한다.” Aquinas,
13장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회심준비론에 대한 논의를 보라.

른 것에 두지 말라……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심판하려고 하

시면,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이여, 저는 저와 당신의 심판 사이

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식으

로는 당신과 다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저와 당신의 심판 사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라. 하나

님이 당신에게 ‘너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합당하다’라

고 말씀하시면,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이여, 저는 저와 당신의

심판 사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의를 가져야 하지만 갖고 있지 않아,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의 의를 제 자신의 의로 제출합니다.’38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어떤 큰 죄 를 저질렀을 것이고, 내 양심은 괴롭습니다. 하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

습니다. 나는 내 주님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나

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긍휼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공로 전체입

니다……내가 어떻게 감히 내 자신의 의를 찬양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 주님. 나는 주님의 의를 말하고, 오직 주님의 의만을 말할

것입니다( 시 71:16 ). 그것이 내 의이기도 한 것은 주님 자신이 내 의가 되

셨기 때문입니다.”39  ) 베르나르는 하나님이 그들 자신의 의가 없는 자

에게 “다른 이의 의”를 주셨다고

38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6–17에서 재인용. 다음을 보라. Anselm, Admonitio Morienti, in J. P. Migne, ed., Patrologia Latina (Paris, 1865), 158:687. Oden, The Justification Reader, 58에서 재인용.

39  ) Bernard of Clairvaux,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61.3, 5, in The Life and Works of Saint Bernard, Abbot of Clairvaux, ed. John Mabillon, trans. Samuel J. Eales, 4 vols. (London: John Hodges, 1896), 4:367–368. 여기서 인용한

Calvin, Institutes, 3.12.3에서 가져왔다.

40  ) Anthony N. S. Lane, Bernard of Clairvaux: Theologian of the Cross, Cistercian Studies Series 248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13), 91 (아벨라르를 비판한 베 르나르의 서신, 6.15), 218-219.

2장 │ 칭의(2부)
65
말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 암은 칭의라고 말했다.40  )
베르나르의 글은

존 오웬은 우리의 공로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의를 위해 오직 그리스

도를 의지한 많은 신학자( 대항 종교개혁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를 포함해 ) 를 인용

했고,41  )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인지를 진정으로 판

단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들이 쓴 글이 아니라 그들이 한 기도라는

것을 배웠다”고 논평했다.42  )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칭의 교리는

고대와 중세 교회에 씨앗 형태로 존재했지만, 또 다른 가르침들 때문에

모호해졌으므로, 그런 다른 가르침을 제거해야 거기서 오직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보고 옹호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가르침을 재해석하려는 오늘날의 신학자들 의 시도에도 불구하고,43  ) 지금도 여전히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를 선봉에 서서 주창한 위대한 인물이다.44  )

그는 그리스도 밖에서의 모

41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6–18, 32–33, 36–40.

42  )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in Works, 5:18.

43  ) 1970년대 말부터 투오모 만네르마(1937-2015년)가 이끈 한 무리의 핀란드 루터파 신학자는

마르틴 루터는 칭의를 법정적 선언이라고

주장했다. Veli-Matti Kärkkäinen, “Deification View,” in Justification: Five Views, ed. James K. Beilby, Paul Rhodes Eddy, and Steven E. Enderlei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1), 219–228. 다음을 보라. Tuomo Mannermaa, Christ Present in Faith: Luther’s View of Justification (Minneapolis: Fortress, 2005); Kurt E. Marquart, “Luther and Theosis,”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64, no. 3 (July 2000): 182–205. 이 해석은 다른 루터

파 신학자들에게 비판받아 왔다.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루터의 칭의론의 중심 개념이라는 증

거가 없고, 이 해석은 루터가 한 다른 많은 말과 부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이 해석은 루터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사학적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창조주에 대한 루터의 존

재론과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Robert Kolb, “Contemporary Lutheran Understandings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Justification:What’s at Stake in the Current Debates, ed. Mark Husbands and Daniel J. Treier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153–156; Robert Kolb and Charles P. Arand, The Genius of Luther’s Theology:A Wittenberg Way of Thinking fortheContemporaryChurch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8), 48n65.

44  ) 루터의 칭의론과 그 발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 Scott Clark, “Iustitia Imputata Christi: Alien or Proper to Luther’s Doctrine of Justification?,”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70 (2006): 269–310.

66 개혁파 조직신학 6
가르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신적인 존 재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든 공로를 배척했고, 영혼 속으로의 사랑의 주입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배척했다.45  )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자

기는 우리에게 자비로운 아버지이기를 원한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하

나님은 우리의 공로 없이( 결국 우리에게는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으므로 )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죄사함, 의, 영생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신다.”46  ) 그는

“우리는 율법의 행위나 사랑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선언된다”는 말을 덧붙였다.47  ) 계속해서 루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붙잡고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의이고, 이 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수여하신다. 여기에는 율법의 행

위도 없고, 사랑도 없으며, 오직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의가

있을 뿐이다.”48  )

루터는 믿는 자에게는 “이질적인 의”, 즉 “다른 이의 의”가 주어진다

고 말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 행위, 말씀, 고난, 죽으심은 나의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내가 살고

행하고 말하고 고난당하고 죽은 것처럼 나의 것이다.” 루터는 신랑과

신부가 연합해 하나가 됨으로써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에 비추어, “그

렇게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영이다”라고 함으로써 이것을 설명했다. 또

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고,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된다. 아니,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것이 된다.”49  )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가르치고, 율법과 복음을 구

별하기 시작한 직후,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45  )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갈 2:16, in LW, 26:124–129.

46  )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갈 2:16, in LW, 26:127.

47  )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갈 2:16, in LW, 26:137.

48  ) Luther, Lectures on Galatians, 갈 2:16, in LW, 26:130.

49  ) Luther, Two Kinds of Righteousness, in LW, 31:297–298.

2장 │ 칭의(2부) 67

삶에서 율법 의 사용을 폐기한 거짓된 가르침에 직면했다. 루터는 오직 “칭의의 토 대”로서의 선행만을 배척했을 뿐이고, “믿음의 삶에서 선행의 중요성”

을 강조했다.50  ) 하지만 루터 및 필립 멜란히톤과는 달리 요한 아그리

콜라( 1494-1566년 ) 는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들어설 자리가

없고 오직 시민 정부와 관련된다고 주장했다. 아그리콜라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께로 달려가 그리스도 위에 자신

의 죄를 떨쳐 버린다. 그들이 어떤 선행을 한다면, 그 선행은 그들의 것

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 심

지어 아그리콜라는 믿는 자에게 “당신이 죄를 지어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니 행복해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51  ) 루터는 이 관점을 율법폐기

론( antinomianism ) 이라 부르고 단호하게 배척했다.52  ) 멜란히톤은 1527년

에 이렇게 탄식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믿음과 죄사함을 가르치지만, 회개[‘포에니텐티아’]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 없는 믿음은 어리석은 꿈일 뿐이다.”53  )

루터와 마찬가지로 존 칼빈도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오직 믿 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가르쳤다. 그는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

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자가 됨으로써 그 의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54  )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

아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이유는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

어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

이다.55  ) 칼빈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로운 것으로 여기시는 것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을

50  ) David Steinmetz, Mark Jones, Antinomianism: Reformed Theology’s Unwelcome Guest? (Phillipsburg, NJ: P&R, 2013), 5에서 재인용.

51  ) Timothy J. Wengert, Law and Gospel: Philip Melanchthon’s Debate with John Agricola of Eisleben over Poenitentia, Texts and Studies in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Thought (Grand Rapids, MI: Baker, 1997), 85, 87에서 재인용.

52  ) 이 논쟁에 대해서는 Luther, Against the Antinomians, in LW, 47:101–106의 해제를 보라.

53  ) Wengert, LawandGospel, 23에서 재인용.

54  ) Calvin, Institutes, 3.11.23.

55  ) Calvin, Institutes, 3.17.11.

68 개혁파 조직신학 6
공유하기 때문” 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가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고 가르쳤다.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여기

심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두고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마치 우리 자신의 순종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

면 무엇이겠는가?”56  )

칼빈은 이렇게 썼다. “이 사람아,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행

위가 없다. 그래서 행위로부터의 모든 도움을 벗어 던질 때, 오직 믿음

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죄

인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로 받아들여져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

고,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사함을 얻고 그리스도의 의를 마

치 자신의 것인 양 입고서 하늘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선다.”57  )

칼빈은 교부들이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단언

했음에도, 선행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 기여할 더 나은 다른 단어가 있

었는데도, 공로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

했다.58  )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떤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 롬바르두스는

그것을 모호하게 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 속에 약간 오염

된 것이 있으면, 롬바르두스는 그것을 변질시킨다. 학파들은 지

속적으로 악화되다가 결국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뛰어들어

파국을 맞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

해, 또는 어쨌든 그가 이것을 말하는 방식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의를 위한 모든 공로를 인간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박탈해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긴 했지만, 여

전히 성령이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 거듭나게 하는 성화 아래 그

은혜를 두기 때문이다.59  )

칼빈은 율법폐기론에 반대하여,

56  ) Calvin, Institutes, 3.11.23.

57  ) Calvin, Institutes, 3.17.8.

58  ) Calvin, Institutes, 3.15.2. 칼빈은

59  ) Calvin, Institutes, 3.11.15.

2장
│ 칭의(2부) 69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자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베르나르를 인용했다.

에게 “이중 은혜”를 주신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전가로 말미암아 의

로운 것으로 여겨지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거룩

해진다.60  ) 칼빈은 “그리스도가 여러 부분으로 찢어질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함께 결합되어 있는 이 둘, 즉 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61  )

종교개혁의 여러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이 교리를 분명하게 단언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

백( 4조 ) 은 “우리는 우리의 공로나 행위나 속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과 의를 얻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인한 은

혜로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고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62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3주, 60문 ) 은 이렇게 말한다.

문: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운가?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

롭다. 따라서 내 양심은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심각하게 범

했고, 그중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모든 악으로 기울어

져 있다고 나를 고발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은 마치 내가 어떤 죄도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고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는 듯이, 그리고 그리

스도가 나를 위해 이루신 저 모든 순종을 마치 내가 온전히 이루

었다는 듯이, 나의 어떤 공로 없이 오직 은혜로

60  ) Calvin, Institutes, 3.11.1.

61  ) Calvin, Institutes, 3.11.6.

62  ) The Book of Concord, 38, 40.

63  ) The Three Forms of Unity, 87.

70 개혁파 조직신학 6
그리스도의 온전 한 속죄와 의와 거룩하심을 내게 수여하시고 전가하신다.63  )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3문 ) 은 “칭의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칭 의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 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 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서( 갈 2:16; 빌 3:9 )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

않는다는 점에

서” 사역이 아니라 행위라고 정의한다고 제임스 피셔와 어스킨 형제

는 썼다.65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 )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한다.

하나님이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은 또한 의롭다고 하

신다. 이 칭의는 의를 그들에게 주입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

의 죄들을 사하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받으심으로

써 이루어지고,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에 의

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루어지며, 믿음 자체나 믿는 행위나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

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

를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이루어진다(롬 4:5-8; 고후 5:19, 21; 롬

3:22, 24-25, 27-28; 딛 3:5, 7; 엡 1:7; 렘 23:6; 고전 1:30-31; 롬

5:17-19).66  )

64  ) Reformed Confessions, 4:357.

65  ) Fisher et al., TheAssembly’sShorterCatechismExplained, 33.10 (177).

66  ) Reformed Confessions, 4:247.

67  ) Calvin, Institutes, 3.11.1.

2장 │ 칭의(2부) 71 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롬 5:17-19 )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롬 3:24-25;
),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를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이신다( 고후 5:19, 21 ) ”고 대답한다.64  )
4:6-8
이 교리문답에서는 “칭의는 재판관의 선고처럼 단 번에 완료되고, 시간의 사역처럼 점진적으로 전개되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 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그에게 전가하여 그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에게 값없이 수여하신다는 것 이다. 칼빈은 이 교리를 “신앙의 주축”이라 부르고, 이 교리가 없는 것 은 “당신의 구원을 견고히 세우거나” “하나님을 향한 경건을 세울 토 대”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67  )
요컨대 종교개혁의 칭의관은 하나님이 오직

트리엔트 공의회와 오늘날 로마 가톨릭 신학의 칭의론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반응은 처음에는 혼합

적인 것이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 1541년 ) 에서 일부 로마 가톨릭 신학

자들은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가 지닌 가치 또

는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단언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정도의 열린 태도를 보여 주

었다.68  ) 교황 특사 자격으로 이 회의에 참석한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

경( 1483-1542년 ) 은 그리스도인은 “우리 안에 내재된 의”를 지니고 있다

고 말했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의

지해야 하고 “오직 그 완전한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

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69  )

교황 바오로 3세( 1468-1549년 ) 는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대응하려고

16세기 중반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여섯

번째 회기( 1547년 ) 에서 특히 칭의론에 주목했다.70  ) 로마 가톨릭 역사가

후베르트 예딘( 1900-1980년 ) 은 “칭의에 대한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령은

은혜와 칭의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권위 있는 대답이다”라고

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과 싸우려 한다는 것을 분

68  ) The Regensburg Agreement (5.4), in Anthony N. S. Lane, Justification by Faith in Catholic-Protestant Dialogue: An Evangelical Assessment (London: T&T Clark, 2002), 235. 이

다음도 보라. Anthony N. S. Lane, “A Tale of Two Imperial Cities: Justification at Regensburg (1541) and Trent (1546–1547),” in JustificationinPerspective, ed. McCormack, 119–145.

69  ) Gasparo Contarini, De Justificatione, in Gasparis Contareni Cardinalis Opera (Paris: Apud Sebastinanum Nivellium, 1571), 592;

Turretin, Institutes, 16.2.18 (2:643–644).

70  ) Council of Trent, Decree on Justification, in The Creeds of Christendom, ed. Schaff, 2:89–118.

71  ) Hubert Jedin, A History of the Council of Trent, trans. Dom Ernest Graf, 2 vols. (Edinburgh: Thomas Nelson, 1957), 2:307.

72 개혁파 조직신학 6
썼다.71  ) 종교개혁자들의 칭의 론에 대한 로마 가톨릭 안에 어떤 모호성과 개방성이 있었다 해도, 트
교회의 권위와 성찬의 본질에 대한 이견들 때문에 실패했다. 칼빈은 이 회의가 칭의에 대해 채택한 것을 좀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한 반면에, 루터는 거부했다(46-60).
회의는
영역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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