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칼뱅 작품선6 -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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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있는 인간들이 심지어 얼마간의 지성의 조명을 받고서 도 그토록 끔찍한 어둠에 떨어져 야수처럼 되고 마는 것은 하 나님의 진노의 무시무시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 주의하여 두려움과 염려로 우리 소명을 따르고, 선하고 유익한 교리에서 유익을 얻도록 애쓰자. 특별히 하나님 이 자신의 성경을 통해 기꺼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것 외에 무엇을 알려는 욕망을 갖지 말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우 리의 지각이나 욕심에 종속시키지 말고 그보다 그 말씀이 우리

* * * 칼

에게 말하는 것에 온전히 동의하자.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성 화로 부르신 것을 기뻐하셨을진대, 우리 자신이 오염되지 않게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조심하자. 새로운 것을 탐내지 말며, 호기심으로 빠지게 하는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솔깃한 귀를 갖지 말고 ( 딤후 4:3 ), 오히려 유익하고 교훈적인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것을 추구하자. 매일 어떤 변화를 바랄 만큼 변덕스럽고 유동 적이 되지 말고 오히려 참된 길을 향하고 그곳에 서며, 하나님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의 진리를 갖고 그 진리에 굳게 달라붙자. 나아가 누구도 어떤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이유에서건 이상하고 부당한 오류들을 보고 놀라거나 흔들려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츠러드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복음 안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에서 확고하게 되도록 노력하여 그 복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것 때문에 복음에 대해 동요하거나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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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며 신실한 버팀목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소요와 추문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할 수 있게 하자. - <리베르탱파 논박>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5-2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6

Jean Calvin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Psychopannychia , 1534/1542)… ………………………… 6 재세례파 논박(Contre les erreurs des Anabaptistes , 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Contre la secte des Libertins , 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Epistre contre un cordelier , 1547)…… 348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 ………………………………………………………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 144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 ……………………………………………………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 6 성물론(1543)… …………………………………………………………………………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 330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 ……………………………………………………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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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수면론 논박

1  )

(프시코파니키아)

친구에게 보내는 장 칼뱅의 서문 이미 오래 전부터, 몇몇 선량한 인물들이, 오늘날 막연하고 우둔하게 영혼이 잠든다거나 죽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난하기 위 해 뭔가 써 달라고 내게 이와 같이 권유하고 줄기차게 졸랐지만, 난 여태 껏 그들의 바람과 끊임없는 요구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말다툼 이나 논쟁과는 반대되는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확 실히 나는 변명할 어떤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나는 이런 망상이, 아무 지지자도 얻지 못한 채 사라지거나, 다만 수다쟁이들 사이에서 잠 적하길 바랐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내가 그들의 진영도, 무기 도, 전략도 모르는 그런 적대자들과 전투를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단지 막연한 어떤 중얼거림만 들었으므로, 전장에 아직 나오지도 않은 자들과 싸우려 하는 것은 눈감고 허공을 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1  )   Vivere apud Christum non dormire animis sanctos qui in fide Christi deced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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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는 내가 바랐던 것과 달랐습니다. 이 수다쟁이들은 자기들 의 도당을 증가시키는 데 너무 주의 깊고 부지런해, 이미 수천 명을 나도 모르는 자기들의 오류에 끌어들였습니다. 심지어, 내가 보기에 악이 더 욱 심해졌습니다. 사실 처음엔 몇몇 사람만 죽은 자들의 영혼이 잔다고 막연히 떠들었지만, 그들은 이 수면이란 말로 의미하는 것을 넌지시 알 리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로 [영혼들을] 상처 없이 완전히 죽이는 이 영 혼의 살인마들2  )  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첫째 [인물들]의 오류가 지 지되어서도 안 되고, 또한 이 [둘째 부류의] 사람들의 열광을 진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둘 다 어떤 이성과 판단에도 근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대담한 자들의 어리석은 객설을 공개적으로 논 박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들의 글에서나 알아 낼 수 있는 거짓들을 드 러내면서 ( 흔히 말하듯 ) 대놓고 반박하지 않고서는,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 들에게 확신시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여태껏 보지 못한 무슨 소책자 같은 것을 여기저기 뿌리면서 그들의 몽상과 망상을 퍼뜨린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나는 다만 한 친구한테, 그가 지나가는 말로 들은 것이거나, 이렇게 저렇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을 적어 놓은 짤막 한 글을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이 짤막한 글을 이유로, 내[가 글을 쓰지 않은] 변명 가운데 하나가 절 반은 없어졌으나, 그래도 나머지 절반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책을 인쇄해 사람들을 통해 유포시키는 경우 못지않게, 막연한 소문과 그토록 능란한 수다로 사람들을 [은밀히]3  )   자기들의 오류에 끌어들이 므로, 내가 이처럼 대단히 시급한 일 가운데서 입을 다물고 은폐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배반감을 어떻게 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분명 내 수고가 가장 거칠면서 가장 경험이 적은 자들에게 크게 유익하 고, 이 주제에 그다지 접해 보지 못한 보통 교육받은 자들에게 약간 도움 2  )   CO: yucoktouoi. RO: ces burreaux d’ames. 3  )   CO 추가: clanculum.

영혼 수면론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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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므로, 나는 내 신앙의 도리를 덕 있는 사람들 의 손에 넘기길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적들을 공격할 수 있 을 온갖 무기로 무장되어 있지도 않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 요 새도 갖추지 못하고, 다만 최소한 방어 없는 전적인 비무장은 아닌 상 태지만 [말입니다]. 이런 망상을 뿌리는 자들이 귀찮게 함으로써 된 일 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기꺼이, 수고만큼의 열매를 가져올 수 없 는 이런 식의 전투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때론 슬기롭게 절제 할 필요가 있다는 사도의 권면이 이곳에 도움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습 니다[롬 12:3 참고]. 이 사람들이 우리가 바라는 절제를 결코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해도,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겸손하게 논쟁할 생 각입니다. 극도로 커져 가는 이 악을 졸지에 잘라 내는 다른 방법을 찾 았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암처럼 점점 퍼져 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금 막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몇몇 아랍 사람들이 이 잘못된 교리의 조성자라고 읽고[=알고] 있는데, 그들은 “영혼이 육체와 함께 죽었다가, 둘 다 심판 때 부활한다”고 말했 습니다.4  )   얼마 후, 로마의 주교인 요한 5  )  이 이를 지지했으나, 파리 소르 본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리 는 한참 동안 잠잠했다가, 최근에 몇몇 재세례파 사람들에 의해 다시 불 붙여졌고, 약간의 불티를 튀겼습니다. [그런데] 이 불티가 사방팔방으로 퍼지면서, 결국은 횃불과 열렬한 불길이 되었기에, 나는 하나님이 특별 히 자신의 교회에 예비하신 이 임의의 비 ( 雨 ) 로 곧 끄시길 바랍니다. 나는 어떤 악의도 없이, 또 어떤 사람에게 집착함 없이, 그리고 야유하 거나 헐뜯을 생각 없이 [이 문제를] 토론할 것이므로, 아무도 나 때문에 상처 받았다거나, 심지어 그것이 어떤 종류건, 모욕당했다고 똑바로 불 4  )   MN: Eusebius, Historia Ecclesiastica 1.6.26; Augustinus, De haeresibus 83. 5  )   MN: 요한 22세. de quo Gerson in sermone pasch. priore. CO의 Ioann. II는 XXII의 오기(誤

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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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책망하고 비평하고 비난하고픈 욕망으 로 불타오르는 어떤 이들을 볼 수 있으나, 그들[이야말로 누가] 손끝으 로 건들기만 하면, “교회의 연합에 금이 갔다”느니, “사랑을 깨뜨렸다” 느니 이런 민망스런 불평을 잘도 해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선 그들 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에 기초한 연합 외에 아무 연합도 인정하지 않으 며, 그리스도가 유대가 되는 사랑 외에 어떤 사랑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사랑을 보전하는 중요한 점이자 출발점은 신앙이 우 리 가운데서 거룩하고 온전하게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 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혀를 가져온 것과 같은 식으로 귀를 가져온다면, 이 토론은 사랑에 아무 상처를 주지 않고서 결단될[=이뤄질]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탁월한 인물이신 그대로 말하면, 나의 이 수고를 그대에게 헌정하게 된 데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특별히 쓸데없는 생각들 ( 이 것을 통해 많은 미친 영들이 교회의 안식을 깨뜨리고 있는 ) 로

시끄러운 이 상황에서도, 그

대가 깊은 사려와 비범한 절제로 확고하고 온전히 견디고 있음을 내가 보기 때문입니다. 1534년, 오를레앙에서.

독자에게 주는 장 칼뱅의 다른 서신 내가 이 논쟁서를 다시 읽어 보니, 약간 귀에 거슬리고, 심지어 신랄하 게 말해진 것들이 있어, 어쩌면 어떤 이들의 귀를 거북하게 할 수 있으 리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떤 선량한 이들이 이 영혼 수면의 어 떤 부분을, 또는 너무 쉽게 그것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또는 즉각 저항할 만큼 성경으로 잘 무장하지 못한 무지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속에 그 대로 방치하고 있음을 내가 알므로, 나는 그들이 허락하는 한, 그들로 범 죄하게 하거나 그들의 노여움을 유발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완강하게, 그리고 나쁜 마음으로 죄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영혼 수면론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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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자들에게 일찍 충언함으로써, 그들을 모욕하기 위해 말해진 것으로 결코 해석하지 않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대담하고 자유롭게 말할 때마다, 그들은 내가 재세례파라고 하는 고집스런 악한 무리에게 말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말했듯이, 처음 이 물의 근원이 여기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아직도 그들에게 합당한 취급 을 받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과 싸우기로 깊이 생각했으므로, 만일 그들 이 이후로 저항한다면, 그들은 내게서 진리의 항구적인 수호자를 발견 할 것입니다. 비록 내가 충분히 숙련되지 못하다 해도, 나는 감히 대담하 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나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 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실제로 내가 모욕적이고 신랄한 말을 언 제나 포기했듯이, 오직 겸손하게 그들에게 분을 발했고, 거의 어디서고 내 기법을 억지로 끌어가기보다는 가르치기에 적합할 정도로 절제했으 나, 그래도 이끌리기 원하지 않는 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리고 진실로 내 의도는 [그들을] 분노로 자극하고 귀찮게 하기보다는 오 히려 정도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권면하고 간청하는 바는, 그들이 솔직하고 순수한 생각과, 진리를 공개적으로 받을 준비가 된 자리와도 같은, 선하고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이 논문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어떤 호의로 새로운 것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음성은 유일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의 교리에 대한 한, 다른 모든 것이 제아무리 확고 하다 해도, 분명 우리의 귀는 이 [말씀]에만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결코 새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그대 로 지금도 있고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부패되고 미온적 인 사용으로 짓눌리거나 매장되었다가, 다시 빛 가운데로 되돌아오는 이때, 그것을 다시 트집 잡는 자들이 막중하게 잘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한편 갈대처럼 온갖 바람에 밀리는 자들, 더 나아가 입김 몇 번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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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흔들리고 굽어지는 자들 역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없 이 온갖 가르침에, 그것이 아무리 참되다 해도, 귀를 빌려 주는 게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인간 의 것처럼 받는다면, 우리는 거짓들도 마찬가지로 쉽게 삼키지 않겠습 니까? 사실 인간이 허망한 것 외에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까? 그 런데 말씀을 받고 그것이 정말인가 알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 의 경우에는 결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 행 17:11 ) 이것은 우리가 닮 는 한, 좋은 모범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알 수 없는 미온함으로, 아니 차라리 경멸로 받아들여, 우리가 세 마디를 배우면 즉시 지혜로운 견해로 가득 차고 고갈되지 않으므로, 마치 왕과 부자가 된 것 같을 정 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든 시대의 무지에 대해 크게 야단 치고 소란 피우나 사실은 누구에게 그토록 오만하게 호통 치는지 모르는 많 은 사람을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어떤 주요 교리 조항들을 마지못해 맛보았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이라 여겨 지고 또 그렇게 불리길 원합니다. 그들은, 뭘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므로, 뭐든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 말씀인 양, 대담하게 응 답합니다. 여기서부터 그토록 많은 분리, 그토록 많은 오류와 타락한 견 해들, 그토록 많은 우리 신앙의 실족과 고집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것을 기회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모독합니다. 마침내 ( 이 것이 악에 절정임 )

그들이 그들 입 밖으로 한번 가볍게 내놓은 것을 고집스럽

게 계속 우기려 할 때, 바로 그때, 그들은 그들의 오류를 변호하기 위해 성경에 의뢰합니다. 오 선하신 하나님, 그들이 이 지경까지 왔을진대, 그들이 뒤죽박죽 만 들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으며, 그들이 부패시키고 타락시켜 휘게 하고 그들의 감각과 지성에 따라 억지로 구부러뜨리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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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까? 확실히 열광이 무기를 다스린다6  )  고 시인이 잘 말했습니다. 자, 성 경이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에 소용이 되고 우리의 감각에 종속되도록, 그것을 한 장씩 넘기는 것이 배우는 태도입니까? 이것보다 더 어리석 은 일이 있습니까? 오 몹시 해로운 페스트여! 오, 참되고 좋은 씨를 방 해하고 질식시키려는 원수의 매우 확실한 가라지여! 처음에 복음이 선 포되고 어둠에서 나와 말씀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 그 많은 분파가 어디 에서 오는지 우리는 아직도 아연실색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 게서 빼앗길 것이고, 그 열매를 맺는 다른 백성에게 주어지리라 ( 마

21:43 ) 고

기록

된 이 선언이 나를 크게 놀라게 합니다. 여기서 내 한탄을 끝내겠습니다. 내가 이 시대의 사악함에 대해 그에 알맞은 이런 연설을 하려 한다면, 두 꺼운 책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형제들이여, 우리로 말 하면, 이 많은 모범을 통해 훈계를 받은 지금, 최소한 늦게라도 분별력을 가집시다. 언제나 주님의 입에 의존하고, 끊임없이 눈을 그의 말씀에 고 정시키며, 우리 지혜의 어떤 것도 그의 지혜와 섞거나 첨가하지 맙시다. 이는 우리의 누룩이 모든 대중을 부패시키지 않으며, 우리 안에 있는 소 금마저 맛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께 복종하는 제자 들로 보이되, 그가 원하시는 대로, 겸손하고 가난하며, 우리의 지혜를 모 두 비우고, 배우려는 열성은 가득하나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 외 엔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니 아무것도 모르길 원하면서, 그러면서도 그 의 가르침 밖에 있는 낯선 모든 것을 치명적인 독처럼 피하는 이런 [모 습으로] 말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끔찍한 소란과 싸움을 일으켰다고, 그리고 내가 피 흘리는 불화로 논쟁을 결심한다고 내 의도를 비난할 자들을 생각나게 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를 이런 식으 로 취급할 자들이 충분히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이렇게 답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고의로 완강하게 공격당하므로, 그것이 아무

6  )   Furor arma ministrat(Vergilius, Aeneidos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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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작은 것이라 해도 아무것도 [진리에서]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빛이 마귀의 어둠과 흑암으로 이렇게 맹 렬히 꺼져 가는 것을 본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또는 무시해도 될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대의명분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오류와 어리석은 견해에 동의 하지 않는 자가, 그들이 잘못 해석하듯이, 피 흘리기까지 고집스럽게 불 화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사실 정신의 두통거리밖에 다른 것 이 아닌 이런 문제들로 논쟁하는 자들의 어리석은 호기심을 책망했습 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쓰레기를 파헤친 이상, 그들의 무모한 짓이 비난 을 받아, 진리를 이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약간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정말 원했고, 내 모든 최선을 다했 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뭔가 더 나은 것을 갖는다면, 그것을 공동의 유익에 두십시오. 바젤에서, 1536년.

이생 이후 영혼의 삶은 어떤 상태인가 [논쟁의 요점]

나는 이 논쟁[서]를 잘 다듬는 데는 크게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나, 반 면 독자들이 내 의도가 무엇인지 간단명료하고 쉽게 이해하게 순서를 잘 정돈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뭘 취급하든 간에, 논의된 사실[=내 용]을 숙지해 그것을 글로 써서 독자에게 쉽게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 이 크게 유익하다. 이는 전자7  )  가 그[=논의] 한계를 넘거나 그 목적에서 멀리 나가 딴소리하지 않게, 또는 후자 8  )  가 확실한 길을 붙들지 않은 채

7  )   이것은 ‘말로 논의하는 것’을 의미하며 첫 번째 문장에서 말한 다듬어지지 않은 “논쟁서”와 일

치한다. 8  )   이것은 ‘글로 쓰는 것’을 의미하며 앞의 “논쟁서”의 순서를 잘 정돈하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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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같은 장소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두 가지] 것은 모든 상이점 가운데서 특별히 잘, 그리고 부지런히 준 수되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가르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일 뿐 아니라, 강압적이지 않고서는 결코 지려 하지 않으며, 즐길 것이 있는 한, 그리고 술책과 모순과 핑계로 농담할 수 있는 한, 졌다고 고백하지 않는 ( 인간 정 신은 습관적으로 이렇다 )

어떤 대적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분쟁의

요점을 잘 명시하며 명백히 설명하고 강조해, 마치 현장에서처럼 가까이 전투로 끌어낼 수 있을 때, 이것은 대적을 진압하고 잡아매어 도망하지 못하게 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우리의 분쟁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 으로, 어떤 이들은 그것을 어떤 [존재하는] 것으로 고백은 하지만, 심판 날까지 잠자다가, 어떤 기억도 지성도 감정도 없이 수면에서 깨어난다 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역시 이것이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을 인정 하나, 단순히 동맥이나 허파의 숨쉬기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지는 생명의 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육체 없이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사람이 완전 히 부활할 때까지, 육신과 함께 죽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 말하면, 우리는 [I] 영혼이 하나의 실체임과, [II] 육신 의 죽음 후에도 지각과 지성을 갖춘 그대로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이 두 가지를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통해 입증하려 한다. 영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나 순수하고 올바른 것이라곤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신중한 모든 것을 거부하자. 이처럼 철학자들을 거부하자. 이들은 거의 모든 점에서 불일치하고, 불화에 절제도 끝도 없 듯이, 이 주제에 대해서도 서로 크게 논쟁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무슨 견 해를 따르든, 서로 일치하는 두 사람을 발견하기가 거의 어려울 정도다. 영혼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선, 플라톤이 짤막하게 매우 잘 다뤘다. 그 밖의 다른 것들에 대해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매우 세밀하게 조사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그리고 모든 무리의 현자들에게서 영혼이 무엇 이며, 어디서 유래하는지 알아내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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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는 이 용감한 자들 보다 훨씬 순수하고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해도 말이다.

[I] [영혼은 하나의 실체] [용어 설명]

하지만 진행하기에 앞서, 그들이 지금 문제가 되는 이 용어로 논쟁할 기회를 삼지 않게 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때론 영 ( Esprit ) 과 혼 ( Ame ) 을 구 별 없이 호칭하고, 때론 서로 다른 것처럼 감히 구별해 부를 것이다. 이 말들을 다양하게 취하는 것이 성경의 사용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사람이 잘못한다. 그들은 이런 의미의 차이점을 전혀 고려 도 하지 않고서, 그들의 공상 속에 맨 처음 찾아드는 [생각]을 움켜잡 고는 그것을 고집스럽게 지지한다.9  )   때로 그들은 혼이란 말을 생명으 로 읽고, 그것을 언제나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며, 이것을 엄 격하게 주장한다. 만일 누가 다윗이 한 말, 그들의 혼이 생시에 복 받는다 ( 시 49:18 ) 10  )  를

가지고 반대한다면, 그들은 생명이 생시에 복을 받는다고 해

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사무엘서의 한 구절, 곧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으로 ( 삼하

11:11 ) 란

말을 그들에게 내놓으면, 그들은 이 말에는 아무 의

미도 없다고 말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혼이란 이 말이 다음 구절들에 서처럼, 자주 생명 대신 쓰이는 것을 안다. 나의 생명이 내 손에 있으나 ( 시 119:109 ),11  )   13:14 )?,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찢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욥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지 않느냐 ( 마

빼앗기리니 ( 눅

12:20 ) .

6:25 )?,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혼이

이 외에도 이 혼의 살인자들이 항상 입에 담고 있는

9  )   RO에는 eam mordicus tenent가 빠졌다. 10  )   Leur ame sera benite en la vie. 개역개정,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공동번역

성서, “세상에서 잘 산다고 스스로 축복하고.” 11  )   Mon ame est en mes mains. 개역개정,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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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에는 그들이 그처럼 대단히 잘 난 체할 건더기가 없다. 이 혼이란 단어가 여기서는 환유법으로 생명 대 신 쓰였음을 그들이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혼은 생명의 원인이 며 생명은 혼으로 이뤄진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기초로 배 우는 문채 ( 文彩 ) 12  )  다. 이 용감한 자들의 어리석은 교만에 놀라지 않을 사 람이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들을 뭔가 큰 존재로 확신하고, 다른 사람 들이 그것을 대단히 존중해 주길 바라지만, 그들은 문채와 화법을 배워 야 한다. 우리는 또한 거의 유사한 이유로, 혼이 의지와 욕망 대신 쓰임 을 안다. 혼이 의지와 욕망의 소재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요나 단의 혼이 다윗의 혼과 연결되었고 ( 삼상 18:1 ), 세겜의 혼이 야곱의 딸 디 나에게 집착했다 ( 창 34:3 ) 고 기록되었으며, 누가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혼이 되었다고 말했다 ( 행 4:32 ). 게다가,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 시 103:1; 104:1 ),

서 ( 시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 눅 35:3 ) 라고

1:46 ),

내 영혼에게 나는 너의 구원이라 말하소

기록될 때, 이런 히브리어 구절들이 큰 효과를 냄을 보지

못할 자 누구며, 단순히 “주님을 송축하라”,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너의 구원이라고 내게 말하소서”라고 부가물13  )   없이 기록된 경우 보다, 이 말들로 말미암아 그 이상으로 표현된 어떤 것이 있음을 보지 못할 자 누구겠는가? 때로 혼은 단순히 인물, 또는 혼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진다. 일흔여섯 사람이 야곱과 함께 이집트에 내려왔다고 되어 있 고,14  )   범죄하는 그 사람이 죽으리라 ( 겔 18:4 ) 고 되어 있으며, 마술사와 점 쟁이에게 가는 사람은 죽으리라 ( 레 20:6 ) 고 되어 있듯이 말이다. 때로 혼 은 사람들을 소생시키는 숨결로 쓰인다. 이곳에서 육신의 살아 있는 활 동이 계속된다. 나는 다음 성경구절들을 이런 식으로 여긴다. 비록 내 숨 12  )   figure. 문채에는 litote(완서법 또는 곡언법), hyperbole(과장법), métonymie(환유법),

métaphore(은유법), périphrase(우설법) 등이 있다. 13  )   adjection = addition. 14  )   출처마다 인용 성구가 다르다. 창 47:27(RO: 인원수는 나오지 않음); 출 1:5(CSW: 칠십인);

행 7:14(CO: 요셉이……일흔다섯을 청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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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 아직 내 안에 온전히 있지만, 고통이 나를 붙들었다 ( 삼하 있다 ( 행

20:10 ),

아이의 숨결이 그 내장에 돌아오게 하소서 ( 왕상

1:9 ),

숨결이 그에게

17:21 )

등이다. 더욱

이 성경은 다음과 같은 화법을 사용한다. 곧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하는 ‘숨지다’란 말 대신에, ‘혼이 떠나다’라고 한다. 라헬에 대해, 그 혼이 떠나 려 할 때,

( 라헬이 죽어 가고 있으므로 )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다 ( 창 35:18 ) 고 기록

되었듯이 말이다. [영의 의미]

우리는 또한 이 영이란 말이 문자적으로15  )   숨결과 바람을 의미하고,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 사람들은 자주 ‘프노엔’( pnoh,n ) 이라고 불렀음을 안다. 우리가 알기로 이사야서에는 이 말이 헛된 것, 아무것도 아닌 것 으로 쓰였다. 우리가 잉태하고 수고하되, 마치 우리가 헛것을 낳은 것과 같다 ( 사 26:18 ) .16  )   그리고

매우 자주 이 말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영이 육을 거스른다고 말할 때 ( 갈 5:17 ), 그는 혼이 육과 싸운다거나, 이성이 감성과 싸움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지배되는 바로 그 혼이, 아직도 하나님의 영이 없이 자신의 탐욕에 빠지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싸움을 의미한다. 나아가 우리가 알기로, 이 두 가지 혼과 영이란 말이 같이 섞여, 혼은 의지를, 영은 이해력을 의 미한다. 이사야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내 혼이 밤에 주님을 갈망했고, 내 안 에 있는 내 영이 아침까지 주님 곁에 깨어 있을 것입니다 ( 사 26:9 ) . 바울도, 데살로

니가 사람들이 영과 혼과 몸을 갖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 지 흠 없이 보전되길 바랄 때 ( 살전 5:23 ), 똑같이 이해했다. [이 말로] 그는 그들의 모든 생각과 뜻이 올바르길 원하고, 그들의 지체가 불의의 도구 로 죄짓는 데 빠지지 않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 님의 말씀은 살았고 효력으로 가득 차서 모든 양날의 검보다 더 예리하여, 혼과 영과 15  )   RO의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entre les Latins)는 이상하다. 16  )   개역개정,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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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과 골수까지 쪼개며, 마음의 생각들을 분별한다 ( 히

4:12 ) 고

한 말도 같은 의

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마지막 구절에서, 영이란 말 이 이성과 의지가 들어 있는 본질 ( 우리는 지금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을 의미하 고, 혼이란 말이 살아 있는 움직임, 그리고 철학자들이 우등한 것과 열등 한 것 17  )  이라고 부르는 감각을 의미한다고 보길 더 좋아한다. 그러나 둘 다 많은 구절에서 인간에게 있는 생명의 원인인 불멸 본질을 의미하므 로, 그들은 이 말들로 논쟁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어떤 명 칭으로 불리고 전달된다 해도,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제 이 것이 얼마나 참말인지 증명해 보자. [첫 사람의 창조]

우리는 첫 인간 창조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그 창조의 시작 에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 거룩한 역사는 우리에게 사람이 창조되기 전,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생 각이 있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 창 1:26 ) . 이 말씀은 결코 육체로 이해될 수 없다. 비록 이 [사람의] 육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다른 창조된 모든 육체들보다 [뛰어나게] 드러난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형 상이 반사되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18  )   사실, “사람을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자”고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그는 영이신 하나님이 고, 따라서 어떤 육체적인 형태로 상징될 수 없다. 그러나 한 인물의 모 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육체적인 형상은, 우리가 그림이나 판화를 통 해, 그것이 보여 주려 하는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윤곽과 용모를 생생하게 제시해야 하듯이, 마찬가지 로 이 하나님의 형상 역시 그의 모양을 통해 하나님의 인식에 대한 어 떤 이해를 우리 정신에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이, 하나 17  )   CO: id est, ορμας και αισθησεις.

18  )   MN: Ambrosius, Hexameron 4.8; Augustinus, De trinitate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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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형상이란 짐승에 대해 인간에게 부여된 지배와 관련된다고 말하면 서 ( 이 점에서 인간에겐 만물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흡사한 무엇이 있으므로 ) 수다를 떠는 줄 안다. 크리소스토무스마저도 [제정신이 아닌] 19  )   신인동형동성론자들을 너무 맹렬하게 논박하다 갈팡질팡하면서 이와 같은 오류에 빠졌다. 그 러나 성경은 그것[=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렇게 장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 형상을 사람의 육체에 설정하지 못하도록, 모세는 육 신이 먼저 땅의 진흙으로 만들어져서, 그것이 어떤 하나님의 형상도 보 이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그는, 땅의 먼지로 만들어진 이 육 신에 생기가 추가되어, 그때 곧 사람이 모든 부분에서 완성되었을 때, 처 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비취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라고요? 그대는 이 생기가 하나 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설사 내가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또 이것이 잘못 말해진 것이 아닐 수 있다 해도 말이다.20  )   사실 내가, 하나님 말씀이 이 생기와 짐승의 영혼들 을 다르게 구별한다고 말한다 해서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른 동물들 의 영혼은 그들의 기원을 어디에 두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땅은 그 살아 있는 혼을……생산하라.” 이처럼 땅에서 나온 것은 땅으로 [돌아]가지만, 사람의 혼은 땅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님의 입, 곧 은 밀한 능력으로 된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이 것에 집착하지 않겠다. 다만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육체 밖에 있다는 것 만을 얻기 원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 는 것이 사람에게 큰 칭송거리가 못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실]

19  )   CO: insanos. 20  )   MN: Hilarius, In Psal 63; Augustinus, De spiritu et anima c. 39. Basilius, Hexaemeron ;

Hom. Psalm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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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크게 찬양하고 수없이 반복한다. 정말이지, 무슨 평범한 것을 만들어 야 했다면, [그것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마치 회의에서 의논하는 것처 럼, 하나님을 도입할 무슨 이유가 있었겠는가?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단지 그것들이 있었고, 만들어졌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이 형상에 대해 말할 때는, 마치 그가 특별한 증거를 보이기 원했던 것처럼, 일을 시작하 기에 앞서 자신의 지혜와 자신의 능력을 회의에 불러, 자신 안에서 심사 숙고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목적도 없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서 이런 화법, 곧 말을 더듬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우리 정신의 적은 능력 에 따른 인간들의 흔한 사용법에서 빌려 와, 위대함과 지혜에 있어 모든 피조물의 이해를 뛰어넘는 주님을 보여 주는 화법을 애용했겠는가? 그 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에게서 비취는 하나님의 형상을 높이 찬 양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는 한 번 말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것 을 자주 반복한다. 철학자들과 이 꿈꾸는 자들21  )  이 여기에 무슨 망상을 가져온다 해도,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우리는 영 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 의 형상으로 여길 수 없음을 확신한다. 여기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원 형과 닮았는지 짐작으로 조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쉽게 사도에게 이것 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하신 이의 형상에 따라 지 식으로 새롭게 된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하면서, 이 형상이 무엇인지 또 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 준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하 나님에 따라 의와 거룩함과 진리로 창조된 새사람을 입으라 ( 엡

4:24 ) 고

말한다. 우

리가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인간이 영으로 하 나님의 선과 지혜와 의의 참여자가 된다고 말한다. 집회서 저자와 지혜 서 저자도 이 점을 따랐다. 전자는 인간을 두 부분 곧 땅에서 취해진 육신 과,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영혼으로 나누면서, 모세가 길게 쓴 것을 간략하게 이해했다 ( 집회서 17:1 ) .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목표로 하

21  )   RO: baguenaudiers(부질없는 일로 세월 보내는 자들). CO: somniato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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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지 설명식으로 보여 주려 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의 형상대 로 창조되었으므로, 불멸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 지혜서 2:23 ) . 우리 적대자 들이 이 저자들을 우리에게 내세우지 않는다면, 나는 이들의 권위로 그들 을 결코 누르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도, 정경의 저자로서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원로로서, 곧 많은 사람이 인정한 성자들로서 어떤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쨌든 그들은 그만 놓아두고, 오직 영에 그 소재지를 둘 수밖에 없 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생각하자. [성경의 증거]

이제 성경이 혼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하는 것을 듣자. 베드로가 영혼 구 원에 대해 말하면서, 육체의 정욕이 영혼을 거스른다고 말하고, 우리가 우리 영혼을 깨끗이 한 뒤, 우리 영혼의 주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 르라고 명할 때 ( 벧전 1:9, 22; 2:11, 25 ), 그가 [이 말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 겠는가? 그것은, 못되고 사악한 욕망에 공격당하고 정결하게 되어 그들 의 주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배되는 영혼들 외에 구원받는 영혼은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욥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읽는다. “하 물며 흙집에 살며 땅으로 터를 삼는 자들이랴” ( 욥

4:19 ) .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볼진대, 이것은 땅의 이 육신에 거하는 영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인간을 땅의 그릇으로 부르지 않고, 인간이 땅의 그릇에 거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마치 영혼이라는 인간의 더 나은 부분이 이 지상의 처 소에 담겨 있다고 말하려 한 것처럼 말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장막의 무너짐이 임박한 줄 알므로,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권면함이 옳은 줄 아노라 ( 벧후

1:13 ) .

만일 우리가 아주 멍청하지 않은 한, 확

실히 우리는 이런 화법을 통해 뭔가 장막 안에 있고, 또 뭔가 장막을 벗 어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를 낳게 한 자들 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영의 유일하신 아버지라고 호칭할 때 ( 히 12:9 ), 명백하게 유사한 구분을 한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 영혼 수면론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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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하늘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그 시민들로서 천사 들과 온전한 의인의 영들을 첨가한다 ( 히 12:22 ) . 또한 나는 바울의 다음 말 을 어떻게 달리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이 약속을 가졌으므로,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하자 ( 고후

7:1 ).

여기서는, 그가 다른 곳에서

흔히 하던 대립적인 관계와 같은, 육과 영 사이의 대조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여기서] 더러움을 영에게도 돌리나, 한편 다른 곳에선 이 영 이란 말로 참된 순결을 의미한다. 비방하려는 자들이 즉각 험담의 힘을 빌리려 하는 것을 내가 이미 알지만, 나는 아직 한 구절 더 첨가하련다. 곧 그[=바울]가 이렇게 말할 때다. 사람의 사정을 아는 자가, 그 안에 있는 사 람의 영 외에 누구인가?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정을 하나님의 영 외에 아무 도 알지 못한다 ( 고전 2:11 ) .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었

으나, 생각과 이해의 능력이 거하는 부분을 이 말로 부른 것이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언한다 고 말할 때 ( 롬 8:16 ), 같은 화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사두개인들의 오류]

하지만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한마디 말만 필요했을까? 22  )   사실 우리 는 사두개인들의 오류가 얼마나 여러 번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통해 정죄되었는지 안다. 그들의 오류의 일부는,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말하듯 이, 영이 없다고 하는 데 있다. 그 문장은 이렇다.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 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말하나, 바리새인은 모두 다 고백한다 ( 행

23:8 ) .

나는 그들

이, 이것은 성령이나 천사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술책을 부리지나 않을까 두렵다. [그러나] 이런 반론에 답하기란 쉽다. 그[=예수 그리스도]가 천 사들을 별도로 취급했고, 바리새인들은 성령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아 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더 잘 22  )   CO: Quid, quod uno verbo convincere eos potui? RO: Mais encore pour les

convaincre il ne faloit qu’un seul m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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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것이다. 누가는 아무 관사를 붙이지 않은 채, ‘프뉴마’( pneu/ma ) 라고 말하 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성령에 대해 말하려 했다면, 아마도 그는 관사를 첨가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지 못할진대, 그들이 다 음과 같은 방식 외에 어떤 방식으로 이끌릴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곧 그 들은, 사두개인들이 영을 부인했다 해서 그들의 견해가 정죄되지는 않으 며, 바리새인들이 그 반대의 것을 주장했다 해서 그들의 견해가 인정되 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의 말은 [이미] 이 술책을 예방하고 있다. 누가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바울의 고 백을 쓴 다음, 바리새인들의 이 견해를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바울이 교활하고 약삭빠른 위장술을 ( 이것은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썼다고 말하든지, 그가 영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를 믿는다면,23  )   이것은 사도들 사이에 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나 기타 유사한 신앙 조항과 마찬가지로 확실하 고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말이나 행동에서 진실로 순교를 지향한 인물 이었던 폴리카르포스를 내세우는 데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 도들의 제자로서, 그들에게서 배운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되, 어 떤 누룩도 섞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24  )   이 거룩한 인물은, 화염 가운 데서 많은 탁월한 말들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그날 그가 영으로 하나님 의 존전에 있다고 말했다. 같은 때, 마찬가지로 성실한 인물인 사르디스 의 감독, 멜리토 ( Melito ) 25  )  가 육체와 영혼에 대한 책을 썼는데, 오늘날 우 리가 그것을 가졌더라면, 나는 지금 이 주제에 대해 할 일이 없었을 것 이다. 그런데 [그의] 견해는 그 행복한 시기에 잘 받아들여져, 테르툴리

23  )   MN: Eusebius, Hist . Eccl . 4.15. 24  )   MN: Ibid . 4.14. 25  )   190년경에 죽은 사르디스(Sardis)의 감독. 멜리토는 많은 작품을 썼으나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세기 중반에 발견된 Bodmer 파피루스 가운데 그의 텍스트가 있었고 내용이 유월 절(제목이 Peri. Pa,sca)임이 밝혀졌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양성 이론을 전개하면서 육체 와 영혼의 문제를 다룬다. 칼뱅은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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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스가 영에 대한 일반적이고 우선적인 개념들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태어나면서 이해하는 )

사이에 두었을 정도였다. 비록 우리가 지금, 그들이 주장했던 것

을 (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 완전히 물리쳤음에 틀림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인간의 영혼이나 영이 육체와 구별된 실체라고 공격하고 있지만, 그럼에 도 우리가 이제 첨가하는 것은 이 점을 더욱 확실하게 할 것이다.

[II] [영혼은 육신의 죽음 후에도 지각과 지성을 간직한다] [영혼 불멸]

[이제] 둘째, 나는 내가 제안한 것을 향한다. 곧바로 이 영혼이 육체 의 죽음 후에도 지각과 지성을 간직한 채,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런데 내가 여기서 영혼 불멸과 다른 어떤 것을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사 람이 있다면, 그는 매우 잘못이다. 사실 영혼이 산다고 고백하면서도, 자 주 영혼에게서 모든 지각을 제거하는 자들은 영혼이 전혀 아닌 어떤 영 혼을 만들어 내거나 영혼을 그 자체에서 분리시킨다. 영혼의 본성은 ( 이 것 없이 영혼은 존재할 수 없다 )

움직이고, 느끼고, 활기차고, 이해하게 되어 있으

며, 또 ( 테르툴리아누스가 말한 것처럼 ) 지각이야말로 영혼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에서 이 영혼 불멸을 배우자. 예수 그리스도가, 몸 은 죽여도 영혼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 을 죽이면서 영혼도 지옥 불에 보낼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그에게 속한 자들을 권면하실 때 ( 마 10:28 ), 그는 죽음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음을 의미하려 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그토록 쉽게 죽이는 자 들, 아니면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자들의 욕망에 그 영혼을 버리 시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인자하게 대하신다. 독재자들은 고문하고 베며, 불사르고 매달지만, 그것은 오직 육체뿐이다. 영혼을 지옥 불에 보 낼 능력을 가지신 이는 하나님밖엔 없다. 그러므로 죽음 후에도 영혼이 남아 있든지 독재자들이 영혼에 대해 아무 힘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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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든지 [둘 중 하나다]. 그들은 이 점에 대해 대답하길, ( 내가 듣기로 ) 사람 들이 육체를 죽일 때 영혼이 당분간 진실로 죽임 당하나, 결코 소멸되지 않는바, 이는 부활할 때가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길 원한다면, 육체도 부활할 것이므로 없어지지 않는다 는 데 동의해야 한다. 둘 다 심판 날까지 보존되는 까닭에, 이것도 저것 도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가 죽임 을 당한다고 선언하시며, 영혼은 보전되어 남아 있다고 증언하신다. 그 는 이런 화법을 사용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리라 ( 요

2:19 ).

이것은 그가 그의 몸의 전에 대해 말씀하

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영혼을 그들의 세력에서 제외시키고, 죽음이 임 박하시자, 누가가 기록하고 다윗이 예언한 대로 ( 눅 23:46; 시 31:6 ), 그 영혼 을 그의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다. 스데반도 [예수]의 모범을 따라 이 렇게 말한다. 주 예수여 내 영을 받으소서 ( 행 7:59 ) . 여기서 그들은, 예수 그리 스도가 그의 영혼을 그의 아버지께, 그리고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 영혼이] 부활 때까지 간수되기 위함이라고 재잘대지 않겠는가? 하지만 [성경] 말씀들은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특히 스데 반의 말이 그렇다. 요한도 머리를 숙이고 영이 돌아갔다 ( 요 19:30 ) 고 덧붙인다. 이 말씀들이, 호흡이나 허파의 활동과 관련될 수는 없다. 베드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옥에 있는 자들에게 곧 영들에게, 다 시 말해 그가 구원의 죄사함을 전파한 신자들의 영들에게뿐 아니라, 그가 혼동을 선포한 불신자들의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하면서 ( 벧전 3:19 ),

영혼들이 죽음 후에도 존재와 삶을 갖는다고 명백히 증언한다. 사

실 많은 지성들을 괴롭혔던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내겐 모든 선한 이들을 이렇게 설득할 확신이 있다. 베드로가,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하 26  )  에 대해 말하고 모든 신도가 이분의 모

26  )   abjection = humiliation(Hug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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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에 부합되어야 함을 보인 뒤,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즉시 부활에 대해 언급해, 그들의 고통이 무슨 목적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시키기 때 문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 지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굴복시 키신 뒤, 승리자로 나타나셨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 이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진정 죽임을 당했으나, 영으로는 살아 났다[벧전 3:18 참고]. 같은 의미로, 바울은 그[=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비천하게 고통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다고 말한다. 그 런데 신자들이 이 능력 자체가 그들에게 속했음을 이해하도록, 그는 예 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곧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나아가 그의 종들에게뿐 아니라, 은총을 믿지 않는 자들과 경멸하는 자 들에게까지 그 능력을 보여 주셨다고 덧붙인다. 더욱이 우리는 [베드로 의 말 속에] 불완전한 이야기가 있으며, 두 지체 가운데 하나가 없음을 안다. 성경에는 이런 식의 예들이 많다. 특히 여기서처럼, 많은 취지들이 한 결론에 집결되는 경우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얻게 될 구속을 기다 렸던 거룩한 조상들이 옥에 있었다 해서, 누구도 놀라서는 안 된다. 사실 그들은, 구름과 그늘 밑에서처럼 멀리서 빛을 바라보았으므로, 저문 날의 나머지[황혼]를 보고, 여명에 앞서 날이 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듯이 ),

( 마치 매우

그리고 그

들이 그 속에서 안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복이 그들에게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베드로]는 그들의 기다림을 옥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진 구속의 능력 이 죽은 자들의 영들에게 나타나고 드러났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이 열 매를 알고 맛본 신자들과 관련된 다른 집단이 결여되어 있다. 그[=베드 로]는 큰 혼동 가운데서 같은 메시지를 받은 불신자들의 집단을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구원이 단 하나밖에 없음을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신 들은 권리가 상실되었음을 보면서, 절망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어떤 이들이, 내가 내 생각으로 이런 해석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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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냈고, 따라서 자기들은 그런 법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중 얼거리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내 법에 굴복시키지 않을 것 이고, 다만 이 질문만 하련다. 감옥에 갇힌 영들은 영들이 아니던가? 같 은 사도가 한 말은 더 명백하다 ( 벧전

4:6 ) .

이를 위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 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그리스도]가 육체는 죽음에 넘겨지고, 영은 생명

으로 유지함을 안다. 죽음과 삶 사이에 관계27  )  가 있으므로, 하나 곧 육체 는 죽고, 다른 하나 곧 영은 산다. 우리는 이것을 솔로몬에게서도 배운다. 그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쓰면 서, 영혼을 육체에서 멀리 분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티끌이 그가 나온 땅으로 돌아가며, 영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까지 ( 전

12:7 ) .

나는 이런

논증이 그들을 그렇게 감동시키지 않을 줄 잘 안다. 그들은 생명이 그 근 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이렇게 해서 생명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 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그들이 본문을 왜곡한다 고 소리 지르므로,28  )   읽거나 들을 가치도 없는 이 궤변을 이미 논박할 필요가 없다. 결국 그들에 따르면, 이 말은 영혼들이 꿈을 통해 그들의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된다.29  )   에스라서에는 이것과 상응하 는 문장이 있다. 그들이 이 저자를 그들의 방패로 삼는 경우 외에는, 결 코 나는 그를 내세우지 않겠다. 에스라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렇다. 땅은 그곳에서 자는 것들과, 침묵 속에 거하는 것들을 돌려보낼 것이며, 시체 구덩이 들은 그곳에 놓인 영혼들을 되돌려 보낼 것이다 ( 에스라4서 7:32 ).30  )   그들은 시체 구

27  )   CO: kai, avnti,qesin[per antithesin]. 28  )   RO: Mais les paroles mesmes crient qu’on leur fait violence. CO: Sed verba ipsa

clamant, sibi vim inferri. 29  )   RO는 1542년판을 따르고 있다. Iam hoc significet illis restet…(Il reste que ceci selon

eux signifie…). 30  )   라틴 성경은 에스라의 이름으로 4권의 책을 담고 있다. 에스라1서와 2서는 각각 구약의 에스

라와 느헤미야이고, 에스라3서는 그리스 판 에스라(Esdra grec)를, 에스라4서는 에스라 묵시 서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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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이 ( 납골당 ) 란 말을 ‘하나님 섭리’로 이해하고, 영혼이란 말을 ‘생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생명책이 하나님 앞에서 생각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그들에게 더 낫게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침묵하기에는 부끄럽기 때문인 것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음이 명백하다. 누구든 성경을 이런 식으로 모호하게 만든다면, 그는 쉽게 모든 것을 왜 곡할 것이다. 비록 내가 그들에게 내세울 다른 많은 것이 있지만,31  )   여 기서 내 것은 아무것도 내놓지 않겠다. 저자 자신이 이런 비방을 스스로 변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조금 앞서서 이렇게 말했다. 의인들의 영 혼들이 그들의 무덤에서, ‘오 주님, 어느 때까지 우리가 이렇게 바라고, 우리 보상의 대가가 언제 옵니까’라고 묻지 않던가 ( 에스라4서

4:35 )?

이렇게 질문하고 소망하

는 영혼들은 누구란 말인가? [이제] 그들이 피하려 한다면, 다른 보고를 캐내야 할 것이다. [나사로 이야기]

이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로 가 보자. 이들 중 나사로는 이 죽을 인 생의 고통과 고역을 치른 뒤, 결국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졌고, 부자는 고문받는 고통에 떨어진다. [여기서] 후자는 고통당하고, 전자는 위로를 받는다. 전자의 기쁨과 후자의 심한 고통 사이에는 큰 심연이 있다. 이 것이 꿈이나 우화인가? 그러나 그들은 무슨 핑곗거리를 갖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나의 비유로 삼으면서, 이것은 진리가 아브라함과 식충이 부자, 그리고 나사로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꾸며 낸 이야기에 불 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경의 비유 가운데 이름이 호칭되는 단 하나의 다른 예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의 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사로란 이름을 가진 한 불쌍한 사람

31  )   CO는 괄호로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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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거짓이든지, 이것이 참된 이야기든 지 해야 한다. 옛 선생들도 이것에 매우 조심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여기 에 이름이 붙어 있으므로, 이것은 비유라기보다는 하나의 설화라고 말 한다. 그레고리우스도 같은 견해다.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네오, 오리게 네스, 키프리아누스, 히에로니무스 등은 이야기로 여긴다. 이들 중 테르 툴리아누스는 부자는 헤롯을, 나사로는 세례 요한을 의미한다고 생각 한다. 이레네오의 경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이 부자와 나사로로 우리 에게 이야기하신 것은 결코 하나의 비유가 아니다. 키릴루스는, 그리스도의 신

성을 논박하기 위해 이 구절을 방패로 삼은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답하 면서, 이것을 비유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이야기로 해석한다.32  )   그들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들의 오류를 주장하고, 이 견해 에 동의한다고 하면서 교묘히 해석하는 것은 더욱 조롱받아 합당하다. 내 생각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곳에서33  )   “[이 비유에서]34  )   나사로 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자는 바리새인들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으로 여

긴다. 그러나 [사실] 그는, 만일 나사로란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부자가 바리새인들에게로 돌려질 경우, 이 설화는 비유가 될 수밖에 없 음을 말하고 있다. 어떤 생각을 품고는 이내 그것에 열광하는 자들은 습 관적으로 이렇게 한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확고한 것이 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볼 때, 그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글자 한자라 도 닥치는 대로 움켜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중얼거리지 못하 도록,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다른 곳에서 이것을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나가서, 대낮에 거짓으로 속여 보게 하라.35  )   그들은 32  )   MN: Tertullianus. Adversus Marcion ; Irenaeus, Contra haeres 4.4.; Origenes, Hom . in

Ezech 5; Cyprianus, Epist 3; Cyprianus, Epist 3; Hieronimus. In Esa 49 et 65; Hilarius, In Psalm 3; Cyrillus, In Joann 1:22. 33  )   MN: De Genesi ad litteram 8. 34  )   CO: in parabola. 35  )   CO: vendant suos fumos. RO: vendent leurs coquilles(essayer de duper par des mensonges) (Hug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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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같은 그물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그 들에게 이것이 비유라고 양보한다면 ( 그들이 결코 얻어 낼 수 없지만 ), 그들은 이 것이 어떤 진리 없이 있을 수 없는 하나의 비유라는 것 외에 무엇을 입 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위대한 신학자들이 이것을 모른다면, 그들은 문법학자들의 초보에서 그것을 배울지라. 그러면 그들은 비유란 진리에 서 취해진 유사성임을 발견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 어 그들에게 그들의 몫을 나눠 주었다는 말을 들을 때, 반드시 한 사람과 아들들, 그리고 유산과 몫의 분배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비유는 언제나 이 점을 갖는다. 곧 우선 우리가 있는 사실 36  )  을 제시된 대로 이해한 뒤, 다음으로 이런 개념에서 비유의 끝으로, 다시 말해, 비유가 적응되는 사 실 자체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크리소스토무스를 자기 들의 후견인37  )  으로 따라야 한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이것을 비유로 생각 하고 여기서 자주 진리를 끄집어내고 있음은 사실이다.38  )   그는 이것을 통해 죽은 자들의 영혼들이 어디엔가 있다고 입증하면서, 지옥 불이 얼 마나 끔찍하고 쾌락 가운데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지적한다. 여기 서 내가 많은 말을 허비하지 않도록, 그들로 상식에 ( 그들에게 좀 상식이 있다면 ) 묻게 하라, 그러면 비유의 능력과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알 것이다. [육체에서 분리된 신도들의 영혼의 안식 또는 아브라함의 품]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원하므로, 여기서 하 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서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들의 안식에 대해 다룰 것이다. 확실히 성경은 아브라함의 품이란 말로 이 안식 외에 다 른 것을 우리에게 의미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이 잘난 신학자들39  )  이 36  )   le fait nud를 le fait nu로 읽는다. 37  )   CO: Achillem. 그리스어로 Achilleus.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주인공. RO는 patron으로 번

역한다. 38  )   MN: Hom. in Matth 25 et 57. 39  )   RO: ces beaux theologastres. CO: i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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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라고 부르는 것을 “안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잠이란 말 이 그들의 거짓으로 매우 부패되고 거의 오염된 경우가 아니고는, 그 말 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나아가 안식이란 말로 우리는 마비나 혼수상 태 또는 유사한 술 취한 것 같은 어떤 것40  )   ( 그들이 이것을 영혼에게 적용하는 것처 럼 ) 으로

이해하지 않고, 다만 의식의 평온함과 안전 ( 이것은

어 있긴 하지만, 죽음 이후가 아니고는 결코 온전하고 완전하지 못하다 ) 으로

항상 신앙과 결합되

이해한다. 교회

는 이 땅에 나그네로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의인들과 신자 들의 복을 듣는다. 곧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 으리라 ( 사 32:18 ) . 또한 교회는 감사하면서 주님께 찬양하고 축송한다. 오 주 님, 우리에게 평화를 베푸소서. 이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 모든 일을 행하심이 니이다 ( 사 26:12 ) . 복음을 받은 신자들은, 그들이 전에 재판관으로 생각했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자한 아버지가 되심을 볼 때, 또한 그들이 진노의 자녀들 대신 은총의 자녀가 된 것을 볼 때,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의 정이 그들에게 베풀어져, 선함과 온후함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에게서 기다리 지 않게 될 때, 이런 평화를 갖는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인생이 전쟁이므 로 ( 욥 7:1 ), 죄의 찌르는 것과 육체의 남은 날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세상 에서 고통을,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위로를 가져야 한다. 이런 식으로 그 들의 영은 평온하지도 않고 동요가 없지도 않다. 하지만 그들이 육체와 탐욕 ( 이것들은 내부의 원수처럼 그들의 평화와 안식을 흩뜨려 놓는다 ) 을 벗어 버릴 때, 그 때 그들은 궁극적으로 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끝나도 이해하는 자가 없다. 이렇게 의인은 재앙 뒤로 물러간다.41  )   평화로 오게 하라. 자신의 길에서 행한 자는 그의 침상에서 쉴지어다 ( 사

57:1 ) .

그는 평화

의 집안식구였던 사람들을 평화로 부르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

40  )   CO: aliquid simile ebrietatis. RO: quelque autre chose semblable. RO는 “술 취한”이

없다. 41  )   CO: colliguntur(=rassembler). RO: ont prins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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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함께 평화를, 그리고 세상에 대해 전쟁을 하므로, 그는 그들을 평화 의 최고 경지로 이끌어 간다. 그런데 에스겔 ( 겔 1:28 ) 과 요한 ( 계 4:3 ) 은 하나 님의 영광의 보좌를 묘사하려 하면서, 우리가 아는 대로 주님이 인간들 과 맺으신 언약의 표징인 무지개로 ( 창

9:13 )

그 보좌를 에워싼다. 요한은

다른 곳에서보다 명백하게 이것을 가르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 안 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 치고 쉬리라 ( 계 14:13 ) .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품이다. 그는 그토록 신속한

용기로 자신의 자손에게 약속된 복을 믿었고, 하나님 말씀이 힘이요 진 리인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이미 성취하신 것처럼, 그는 손으로 만지고 영과 육의 모든 지각으 로 느낀 것과 같은 확실한 믿음으로 이 복 받은 자손을 기다렸다. 이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 증언하시길, 그가 자신의 날을 보고 즐거워했다고 하셨다 ( 요 8:56 ) . 이것이 아브라함의 평화요 또는 안식이며 잠이다. 단 이 [마지막] 적절한 말이 이 잠자는 자들의 더럽혀진 입으로 오염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과연] 의식은, 하늘 보화를 펼쳐 보여 주고 주님의 잔의 큰 즐거움에 취하게 하는 이 평화보다 더 큰 무 슨 즐거움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 외에] 어디서 안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 수면 선생들이여, 그대들은 “취한다”는 이 말을 들으면서, 얼 떨떨한 것, 머리가 띵한 것, 육신의 잠 등을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 이런 불편함 42  )  은 술 취함의 결과다. 그대들은 교양 없고 어리석은 까닭에 그 렇게 이해하지만,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이런 화법을 통해 잠이란, 주님이 그의 평화의 집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주시는 의식 의 평온을 일컬으며, 이런 용법을 통해 술 취함이란, 주님이 그의 풍요 의 집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배불리시는 풍부함을 일컫는다는 사실을 안다. 아브라함이 원수들의 공격,43  )   일, 위험 가운데 있으면서도, 게다가 42  )   fascheries = incommodité, fatigue (Huguet). CO: incommoda. 43  )   course = incursion, attaque (Hugu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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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안에 내부의 원수, 곧 모든 것 중 가장 위해한 것인 자신의 육체를 지니면서도 이런 평화를 소유했다면, 그가 원수들의 공격에서 벗어났을 때, 그의 평화가 어떤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이제 하나님의 택한 자들, 곧 이생에서 그들의 하나님께로 간 자들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 식한다고 기록된 이유로 놀랄 자가 누구인가? 다시 말해 그들이 신자들 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함께, 평화의 소재지에 영접되어 그곳에서 아무 불편함 없이 기쁘게 하나님으로 즐거워한다 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디선가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없 지 않다. 우리는 복 받은 자들의 종말을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것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다. 평화의 하나님이신 자기 자신보다 더 좋고 더 큰 것 을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이가, 평화보다 더 좋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줄 수 없기 때문 이다.44  )   그러므로 이후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이것을 자

기들의 잠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 성경의 진리가 그들의 헛됨을 책망하 며 그 진리를 확신시키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렇다. ‘이 안식이란 천상 의 예루살렘, 다시 말해, 평화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약속에 따라 ( 마

5:9 )

화평하게 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주사 보게 하시는, 평화의

환상이다.’ 그런데 성령은 성경에서 이 평화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이것 보다 더 자주 발견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친밀하게, ‘잠자다’ 와 ‘안식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주의 신도들이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 서 기뻐할 것이다 ( 시 149:5 ) 라고 다윗은 말한다. 다른 곳에서는 주의 죽은 자들 이 살아나고, 주의 시체들이 부활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 하라. 이는 주의 이슬은 풀밭의 이슬이며, 힘 있는 자들의 땅을 파멸로 끌어당길 것 이기 때문이다.45  )   내 백성아, 네 장막으로 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 사

26:19 ) 라고

했다. 게다가 히브리어는 이 말을 사용해 매

우 안전함과 확실함을 의미한다.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라 ( 시 44  )   MN: De civitate Dei 19. 45  )   개역개정,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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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고

말한다. 또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해 들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과 전쟁을 꺾어 저희로 놀람 없이 잠들게 하리라 ( 호

2:18 ) .

모세는 내[=여호와]가 너

희 국경에 평화를 주리니, 놀라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라 ( 레

26:6 ) 고

한다. 욥기

에는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웅덩이를 파고 안전히 자며 쉬리니, 너를 두렵게 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많은 사람이 네 얼굴을 요청할 것이라 ( 욥 11:18, 19 ) 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산 자의 영혼들은 잠을 자고 평화를 누리며, 하나님 말씀에서 안식하며 자신들의 하나님의 뜻 이상으로 나가길 결코 갈망하 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갈 준비를 하면서, 그의 손과 인도하심 아래 행동한다. 그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렇다. 설사 그의 진리가 더딜지라도, 그것을 기다리라 ( 합 을 것이다 ( 사

30:15 ) .

2:3 ) .

또한 너희의 힘은 소망과 침묵에 있

그런데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고, 결코 갖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므로, 그들의 평화가 불완전함이 명백하다. 다른 한 편,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것을 확실하게 기다리고, 자신들이 갈망 하는 것을 믿음으로 갈망하므로, 그들의 갈망이 평온한 것 또한 매우 명 백하다. 죽음은 이 평화를 더 낫게 증가시키며 전진시키는바, 그것은 신 도들을 이 땅의 전쟁에서, 마치 깨어진 것처럼, 그들을 건져 내어 평화의 장소로 이끈다. 그들은 눈과 마음을 온통 하나님께 고정시키면서, 그들 이 바라보거나 바랄 수 있는 더 복되고 더 나은 어떤 것도 갖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길 원하는 것, 곧 그들이 항상 갈망하는 하나님의 절 대적이고 완전한 영광의 뭔가가 그들에게 여전히 결핍되어 있다. 비록 그들의 바람에 어떤 초조감도 없지만, 그들의 안식은 아직도 완전히 이 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있길 원하는 곳에 있는 자에 대해, 그가 안식 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나, 그의 바람의 정도가 그가 지향하는 곳에 이 를 때까지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선택된 자들의 눈이, 그 들의 목표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영광을 겨냥한다면, 그들의 바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며, 대 심판 날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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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때 기록된 말씀은 참이 될 것이다. 내가 깰 때 주의 얼굴을 봄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 시 17:15 ) .

[부활의 소망]

그런데 우리가 버림받은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비록 그들에 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너무 염려해서는 안 되지만, 나는 그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 외에, 어디서 소망을 갖는지 양심적으 로 대답하길 원한다.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며, 부활한 자들 중 첫 열매이기 때문이다 ( 골 1:18; 계 1:5 ) . 그가 죽고 다시 사신 것과 마 찬가지로, 우리도 죽었다가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운명으로 정해진 죽음을, 죽음을 통해 이겨야 하셨다면, 그는 우리가 죽는 것과 똑같이 죽으시고,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과 똑같이 죽 음의 고통을 당하신 게 분명하다. 성경의 진리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 서 먼저 난 자요, 부활한 자들 중 첫 열매라고 부르면서, 우리에게 이 사 실을 명백하게 한다. 성경이 우리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신도들이 죽 음 한복판에서 그를 그들의 안내자로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그의 죽음을 통해 거룩해진 자신들의 죽음을 바라볼 때, 죽음의 어떤 저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울이 의미하는 바로서, 그 는 그[=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 빌 3:11 ) 고 말한다. 사실 그[=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로 시작

해 죽음을 통해 이루기까지 이 일치된 길을 가셨다. 수면 선생들이여, 이 제 좀 그대들 자신에게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으셨나를 생각해 보라. 그가 그대들의 구원을 위해 깨어 계시던 그때, 그대들 생각 엔, 그가 잠을 잤다고 [여기는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버지께서 자 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그 안에 생명을 주어 갖게 하셨다 ( 요

5:26 ) 고

말하지 않는가? 자신에게 생명의 힘이 있는 이가 어떻게 그것을 잃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이것이 신성에 속한다고 대답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영혼 수면론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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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없던 자에게 부여되었다는 말은, 신성에게가 아니라 인성에게 부 여되어 그 안에 생명을 갖게 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 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사람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처럼 본질에 속하며 사람처럼 은총에 속하는바,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처럼 그의 충만한 데 서 모든 것을 받아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죄가 하나님 과 그들 사이에 먹구름을 드리움을 잘 알면서,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을 들을 때 ( 시 36:9 ), 그들이 얼마나 큰 소망을 품겠는가? 그러나 참되 고 큰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의 동료들 위로 환희의 기름 을 부으셨다는 사실 ( 시 45:8; 히 1:9 ) 과,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 을 위해 그의 아버지에게서 은사들을 받으사 46  )   우리로 우리 본질 안에 서 생명을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치료 후, 그리고 나인의 청년이 다시 살아난 후,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 음을 이런 맥락에서 읽는다. 그[=하나님]가 사람들에게 이런 능력을 주 셨고, 이 큰 선지자를 그의 백성에게 주시면서, 그들을 찾아오셨기 때문 이다. 키릴루스는 이 점을 잘 이해했고,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우리와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를 살리시나?]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갖는다고 말 씀할 때, 우리는 그가 자신에게 생명의 원인이라 말하지 않고, 다만 하 늘 아버지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게 온전히 충만한 생명 을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 가지 친밀한 비유로 이것 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한 샘이 있어 거기서 모든 사람이 물을 긷 고, 모든 시냇물이 흘러나올 경우, 그 샘은 그 안에 물을 갖고 있다고 말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은 결코 샘에서 오지 않고 근원에서 오는바, 바

46  )   CO는 이곳에 시 68:19를 참고로 달아 놓았다. 한편 RO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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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 근원이 흐르는 시냇물과 물 긷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것을 꾸준히 공급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생명, 곧 생명의 충만을 갖고 있어 그것으로 살고 또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살리시지만, 그럼에 도 그는 그 생명을 자신으로부터 갖지 않는다. 이는 그가 그의 아버지로 인해 산다고 증언하신 것과도 같다 ( 요 6:57 ) . 비록 그가 하나님처럼 그 안 에 생명을 갖긴 하지만, 그가 인성을 입었을 때,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 은사를 받아, 부분적이나마 자신 안에 생명을 갖는 데 이른 것이다. 이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에 따라서도 죽음으로 소멸 되실 수 없었음을 매우 확실하게 한다. 비록 진실로, 자연의 이치에 따 라 그가 우리 모두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에 넘겨지신바 되었지만, 그럼 에도 그는 언제나 아버지의 이 은사를 간직하셨다. 그것은 진짜 죽음이 었고, 육체와 영혼의 진짜 분리였다. 그러나 영혼은 그 생명을 결코 잃 지 않았는바, 그 생명은 아버지께 맡겨져서 구원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이 베드로가 한 설교의 의미다. 그는 설교를 통해 ( 행 2:24, 27 ), 예수가 사 망의 고통에 매어 있기가 불가능하신데 이는 성경에 기록된바 주는 내 영 혼을 무덤에 버리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자로 부패를 보지 않게 하소서 ( 시 16:10 ) 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확언한다. 이 예언 속에서, 비록 영혼이 생명으로 여 겨진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두 가지 것을 구하시고 그의 아버지로부 터 그것을 기다리신다. 곧 그의 생명을 파멸에 버리지 마시거나 그가 부 패에 이르지 않게 하시거나이다. 이것은 이루어졌다. 그의 영혼은 하나 님의 능력에 붙들려, 파멸에 빠지지 않게 되셨고, 그의 육체는 무덤에서 보존되었다가 부활하셨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사망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을 때, 이 ‘크라테이스타이’( kratei/stai ) 47  )  란 한마디로 이 모 든 것을 이해했다. 곧 그가 사망의 지배에 굴복하거나 사망의 권세에 지 거나 사망에 붙들릴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설교에

47  )   RO는 estre detenu(매이다)와 중복되는 이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영혼 수면론 논박 |

37


서 영혼에 대한 논쟁을 버리고, 육체의 썩지 않음만을 계속 말하고 있는 바, 이는 그가 유대인들 자신의 증언을 통해, 이 예언이, 그들 가운데 무 덤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육신이 부패에 빠진 ( 그들이 아는 대로 ) 다윗에게 해 당되지 않음을 확신시키므로,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그리스도]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 서 3일 동안 있었다는 점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의 비유로 삼으 시면서, 자신의 영혼 불멸에 대한 다른 논증을 우리에게 주셨다. 마찬가 지로 그는 땅 속에서 3일 밤을 계셔야 했다 ( 욘 2:2; 마 12:40; 마 16:4 ) . 그런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어 응답받았다. 이 뱃속이 사망 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영혼을 좇아 주님께 부르짖었고, 이 사망 가 운데서 구원된 것이다. 주 예수의 상징으로, 죽음에서 구원되어 그의 부 친에게 되돌려진 이삭 역시, 사도가 히브리인들에게 증언하듯이, 부활 의 형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 창 22:10; 히 11:19 ) . 그[=이삭]는 준비된 제물이나 희생처럼 제단 위에 놓여 묶인 다음, 주 님의 명령으로 풀렸고, 뿔이 숲에 걸린 양이 이삭 대신 놓였다. 이삭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 곧 영혼을 죽지 않게 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이삭] 대신 놓인 이성 없는 동물인 양은 곧 육체다. 이삭이 묶여 있다는 것은 영혼 을 상징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죽어 가는 한 사람의 모습 을 보여 주었고, 또 사람들의 흔하고 통속적인 죽음 가운데서 ( 여기서는 사 람들의 견해에 따라 만물이 소멸되는 듯이 여겨진다 )

여전히 [같은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묶는 끈 밖에 놓였고, 우리 영혼 역시 소멸되기 전에 풀린다. 수면 선생 여러분, 이제 그대들 중 어떤 이들도 부끄럽지도 않게, 우리 주 예수의 죽음이 꿈이었다고 말한다거나, 이단 적인 아폴리나리우스 편으로 아주 빠져 버려서는 안 된다. 선하신 주 예 수는 그대들의 구원을 위해 전념할 때, 실로 깨어 계셨다. 오히려 그대 들이야말로 잠을 자고 있으며, 경거망동의 어둠에 짓눌려 파수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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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경고]를 들을 수 없다. [죽음과 부활에서의 주님의 능력]

나아가, 우리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망의 그늘 가운데서 결코 소멸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로할 뿐 아니라, 이런 확신과 함 께 [다시 사심으로] 사망의 주[지배자]가 되시고 우리를 죽음 위로 들어 올리신 그의 부활이 있다. 내가 우리라고 말함은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 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고 말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 골 3:3 ) . 다른 곳에서 [그는 이 렇게 말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 신 것이라 ( 갈 2:20 ) . 그들[=영혼 수면론자들]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잠을 자

며, 또 잠자는 영혼들 가운데서 빈둥거린다고 열린 입으로 외치는 것 외 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사셨던 자라면, 그는 또한 그들 가운데서 죽으시는 자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길 바라는 자는 마땅히 하나님의 아들을 아버지의 영광의 우편에서 끌어내어 둘째 죽음에 던져야 할 것이다. 만일 그가 죽을 수 있으시다면, 확실한 죽음이 우리를 뒤따른다. 하지만 만일 그의 생명이 끝이 없다면, 그에게 달라붙 어 있는 우리 영혼 역시 어떤 죽음에 의해서도 끝날 수 없다. 아직도 우 리가 [이 문제로] 씨름할 필요가 있던가? 그가 내가 살아 있으므로 너희도 살 것이다 ( 요

14:19 ) 라고

말씀할 때, 이 말씀이 모호한가? 만일 우리가 그가

살기 때문에 산다면, 우리는, 우리가 죽으면 그도 더 이상 살지 못하리라 고 말해야 한다. 그가, 믿음으로 그와 함께 결합될 자는 그 안에 거할 것 이며, 그도 그 사람 안에 거하리라 ( 요 6:56 ) 고 말씀할 때, 이 약속이 모호 한가? 그러므로 우리가 지체들에게서 생명을 빼앗고 제거하길 원한다 면,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그의 지체들을 제거하자. 그의 무기로 무장된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곧 우리 모두가 실로 아담 안에서 죽지만, 그리스도 안에 영혼 수면론 논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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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있는 인간들이 심지어 얼마간의 지성의 조명을 받고서 도 그토록 끔찍한 어둠에 떨어져 야수처럼 되고 마는 것은 하 나님의 진노의 무시무시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행을 피하기 위해 주의하여 두려움과 염려로 우리 소명을 따르고, 선하고 유익한 교리에서 유익을 얻도록 애쓰자. 특별히 하나님 이 자신의 성경을 통해 기꺼이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것 외에 무엇을 알려는 욕망을 갖지 말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우 리의 지각이나 욕심에 종속시키지 말고 그보다 그 말씀이 우리

* * * 칼

에게 말하는 것에 온전히 동의하자. 하나님이 한번 우리를 성 화로 부르신 것을 기뻐하셨을진대, 우리 자신이 오염되지 않게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조심하자. 새로운 것을 탐내지 말며, 호기심으로 빠지게 하는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솔깃한 귀를 갖지 말고 ( 딤후 4:3 ), 오히려 유익하고 교훈적인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것을 추구하자. 매일 어떤 변화를 바랄 만큼 변덕스럽고 유동 적이 되지 말고 오히려 참된 길을 향하고 그곳에 서며, 하나님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의 진리를 갖고 그 진리에 굳게 달라붙자. 나아가 누구도 어떤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이유에서건 이상하고 부당한 오류들을 보고 놀라거나 흔들려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츠러드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복음 안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에서 확고하게 되도록 노력하여 그 복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것 때문에 복음에 대해 동요하거나 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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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며 신실한 버팀목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소요와 추문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탱할 수 있게 하자. - <리베르탱파 논박>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5-2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6

Jean Calvin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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