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태를 자세히 주시해 본다면, 그 것을 먼저 늑대의 아가리에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 로 회복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함정에서 구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목장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류의 미로에서 빼내지 않고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일꾼들이 종교를 전복시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진행했으므로, 종교는 그
* * * 칼
뱅
총
서
들의 불경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 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소하고 매장하는 일을 진행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했으므로, 진리는 그들의 거짓에서 보호되지 않는 한 빛 가운
<기독교 강요/초판, 1536>
데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저 탁월한 파수꾼과 목자들은 무엇 때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문에 있습니까? 그들은 칼이 먼 곳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목 에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양 떼가 늑대의 함정에 접근하고 있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잡혀 이빨로 찢기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도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만사가 평안한 것처럼 게으른 안식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들이 공공의 안정에 대한 염려는 제쳐 놓고 도리어 자기 자신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자
7
- <두 서신>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7-6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8,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7
Jean Calvin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Epistolae Duae , 1537)… ……………………………………………… 6 신도의 처신(Fidèle entre les papistes , 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Excuse aux Nicod émites , 1544)… ………… 185 네 편의 설교(Quatre Sermons , 1549/1552)… …………………………… 211 세르베투스 논박(Contra Micaelis Serveti , 1553)… ……………………… 298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 ………………………………………………………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 ……………………………………………………… 144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 ……………………………………………………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6 성물론(1543)… …………………………………………………………………………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 ……………………………………………… 330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 …………………………………………………………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 333 2. 참고문헌… ……………………………………………………………………………… 345
|
5
두 서신
1 )
공개서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만일 주가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왕상 18:21).
장 칼뱅이 경건한 독자에게 문안드립니다.
우리의 이 서신들이 몇몇 경건한 사람 가운데서 열매를 얻었으며, 이 것이 내게 미래에 대한 더 큰 희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서신을 읽은 일부 내 지인들과 2 ) 또 적지 않은 수의 다른 자들은, 내 게 말로는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크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냉정한 조건을 요구한다고 변 명합니다. 만일 내가 여기서 하나님 말씀에서 취한 훈계를, 마치 우화를 1 ) Epistolae duae de rebus hoc saeculo cognitu necesariis . 2 ) 이 가운데는 루이 뒤 티에가 있으며 그는 칼뱅의 소명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편지를 쓴다
(<칼뱅 서간집> 344쪽).
6 | 칼뱅 작품선 7
시인이 또는 강연을 연사가 낭송하듯이 ( 그것은 환호와 갈채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으 로 충분할 것이다 )
받아들이지 않도록 약간의 말로써 모든 신실한 인간들에
게 요청하며 저 하나님의 두려운 이름을 통해 요구한다면, 나는 적지 않 게 보람이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그러나 생명의 교 훈이 자기들에게 가르쳐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교훈은 오로 지 복종을 통해서만 동의함이 합당합니다. 또 그들은 이 교훈 자체는 하 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살전 2:13]. 이 말씀을 조롱거리 로 만들고 처벌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 많은 말로써 이 견해를 추 적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 생각을 예언자 에스겔의 한마디 말로써 요약 합니다. 유대인의 예를 들어 이 불행한 세대의 한 모습을 표현하는 한 구 절은 유명합니다. 그 구절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한 기대에 따라 우리를 당연히 놀라게 합니다. 주께서 예언자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떼를 지어 몰려올 것이고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을 것이나 그것을 따르지는 않 을 것이다. 그들의 귀에는 농담으로 들리며 그들의 마음은 탐욕에 기울어져 있다. 너 는 달콤한 목소리로 부르는 재미있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이다 그래서 그들은 네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그대로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 나 때가 이르면
( 그때는 임박했다 )
그들은 저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음을 3 ) 알게 될 것
이다 ( 겔 33:31, 32 ) . 안녕히. 제네바에서, 1537년 1월 12일.
3 ) [COR]: 칼뱅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긴 모(Meaux)의 개혁 그룹과 그곳을 떠난 파렐과
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두 서신 |
7
제 1 서신 불경건한 자들의 불법적인 의식을 피하는 일과 기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일에 대해 4 ) 장 칼뱅이 특별한 친구인 매우 선한 인물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미신이 지배하는 곳의 비참한 상태] 5 )
친애하는 형제여, 나는 그대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숱 한 우상들과 괴물 같은 우상숭배들이 나날이 그대의 눈에 끊임없이 관 찰되는 저 이집트6 ) 땅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대의 처지를 당연히 동 정합니다.7 ) 경건한 이들의 귀가 이것들의 소문만으로도 너무 두려워 한다면 눈은 현재의 것을 보면서 얼마나 심히 충격을 받겠습니까? 눈 으로 보는 것은 훨씬 생생하고 더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말하듯 이,8 ) 수도사들과 사제들에게서 온갖 더러운 불경건한 모습들을 보며 대 중에게서는 수천 가지의 미신을, 참 종교가 온갖 조롱당함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 주변에는 이런 모든 것으로 가득하고 소란합니다. 그 대가 서술한 대로 그대의 어쩔 수 없는 처지는 실로 비참하므로, 나는 그 런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자들을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무엇보다 특히 모든 가증함의 제일 으뜸인 미사야말로 그대의 눈앞에
4 ) De fugiendis impiorum illicitis sacris, et puritate christianae religionis observanda(CO);
Comment il faut eviter et fuir les ceremonies & superstitions Papales, & de la pure obserua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RO). RO는 “impiorum”을 “papales”로 바꾸어 놓 았고, “superstitions”를 첨가한 대신 “illicitis”의 번역을 누락했다. 5 ) <제1서신>의 소제목들은 모두 RO/1566에 근거했다. 6 ) 파렐과 칼뱅은 로마 가톨릭 진영을 종종 이집트와 바빌론으로 비유한다. 참고. Farel, Summaire
24. 7 ) 니콜라 뒤슈맹에 대해서는 <칼뱅 서간집>을 참고하라. 8 ) 니콜라 뒤슈맹의 분실된 편지.
8 | 칼뱅 작품선 7
그 자태를 드러내며 어떤 다른 종류들의 불의도 능가합니다. 미사에서 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악한 불경이 저질러집니다. 이런 모든 광경이 놀이와 장난에 불과하다면, 아마 그대는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면서 심각하게 행해질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잘 알려진 그대의 경건을 미루어 나는 그것들이 그대를 웃게 하기보다 화나게, 아니 차라리 울게 할 것을 의심하지 않습 니다. 그대는, 현재의 형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 가증스런 신성모독과 바빌론의 진창 9 ) 가운데서, 어떻게 주님에 대한 그대의 신실 함을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는지 조언해 줄 것을 요청했 습니다. 물론 나는 매우 기꺼이 조언하겠으며 이 문제에 대해 그대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것을 맛본 것처럼 보이길 원하면서도, 그들이 고백하는 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므로, 나는 더욱 그러길 원합니다. 그럼에도 이 점에서 거의 모두가 참된 길에서 벗어난 것을 봅니다. 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훈련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면, 그리고 그 의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굴복시키려 한다면 이 일에 대해 조언하는 것 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중 에 많은 사람이 사악하고 주제넘게 주의 계명에 대해 반항하며 계명들 을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하며
( 이것은 경멸에 해당합니다 )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에게 엄격히 금지된 것들을 감히 행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현재의 문제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지금 그대가 처해 있는 어려운 위치에서 사는 자들은, 우상숭배 참여 를 위장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평온을 유지할 수 없고 이웃과 화목하
9 ) 루터가 쓴 바빌론 포로는 본래 미사가 빼앗아 간 성찬의 세 가지 요소(포도주라는 성사, 빵과
포도주의 실체, 성찬에 담긴 약속)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앞의 이집트와 함께 점점 로마 가톨릭 진영 전체를 상징하게 된다.
두 서신 |
9
게 지낼 수 없음을 알 때, 이처럼 그들을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드는 난 관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에게 편리하고 유 익한 것에, 즉 어떻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것인가보다는 어 떻게 하면 인간들의 호의를 얻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 살전 2:4 ) . 그 러면서도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재판정에 직면해 그들의 양심들을 편안 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의 핑계를 만듭니다. 곧 내면적으로는 어떤 불경 함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단순한 사람들의 무지에 양보할 수 있는 수단 으로서, 사소하고 무해한 위선을 이용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고 아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큰 위험이 예상되므로, 이것만이 그런 인간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10 ) 이런 시작과 함께 그들의 파멸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기억으로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피했던 자리 로 되돌아가서 난파하곤 합니다. [기회주의자들의 방종과 하나님의 보복]
먼저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명백하게 위험 한 경우, 그들은 백성을 기쁘게 하려고 약간 어리석은 짓을 해도 백성에 게 심히 불쾌감 주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다만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 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불경건한 의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방법으로는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그들은 선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 람들이 자신에 대해 품는 그릇된 견해는 자신에게 아무 해를 미치지 못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적들 이 건전한 교리에 거슬러 재잘거릴 때, 그들은 표정, 표시, 몸짓, 그리고
10 ) 루셀이 1525년 9월 25일자로 파렐에게 쓴 편지 참고(Herminjard 1.392).
10 | 칼뱅 작품선 7
결국은 말로써 그들에 동의를 표시했습니다. 이 방법이 그들이 예상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알게 될 때, 그들은 열심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어떤 감정의 표지도 보이지 않으려 하면서,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은밀한 확신으로 만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런 방식으로 그들은 올바른 의무의 길에서11 ) 조금씩 벗어난 후 적절한 신중함 ( 그들이
판단하는 대로 ) 을12 )
실천함으로써 결국 맹목적이 되고 자신조
차 망각하게 13 ) 됨으로써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바로 그들은 터무니없는 신중함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 각을 함으로써 헛된 생각에 몰두했습니다. 그들이 행한 희극의14 ) 마지 막 장면은, 어느 누구의 귀와 눈도 그들의 생각의 증인이 되는 것을 허 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 그들이 그것을 이전에 허용했던 것처럼 ) 할 수 있는 한 모 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삼가야 할 행동들에 대 한 증인을 만들며, 그들이 은밀히 인정했던 것에 대한 반대와 증오를 공 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통해 우리는 방자한 감정에 굴복해 주께서 우리에게 부과한 율법에서 벗어나거나 그가 묶은 것을 풀지 않기 위해, 우리의 계획을 포기하고 예언자가 말했듯이 ( 미
6:8 ),
주
앞에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걷는 게 얼마나 필요한가를 훈계받는 것 이 마땅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주께서 지혜로운 자들 의 술책을 꺾으며 신중한 자들의 계획을 뒤집는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해야 합
니다 ( 욥 5:12; 고전 3:19 ) .
11 ) Erasmus, Adagia 3501 (ASD 2/8.19). 12 ) 일례로 1524년 8월 27일자로 루셀이 파렐에게 쓴 편지(Herminjard 1.271-272). 13 ) Erasmus, Adagia 1296 (ASD 2/3.312). 14 ) Erasmus, Adagia 135 (ASD 2/1.249).
두 서신 |
11
[잘못의 근원]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것도 명확히 보지 못하고 정당하게 판단 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건전하게 해결하지 못하며 하나님 법을 순수하고 철저하게 준수함에 있어 어떤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볼 때 두렵고 당황 해 주위를 바라보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하지 않고서 인 간들의 호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15 ) 이것이 바로 내가 처 음부터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숙고를 함에 있어 그들은 오직 그들 의 걱정과 맹목적인 불안과 상담하며16 ) 따라서 왜곡되고 불합리하게 행 동합니다. 사실 한 번 하나님의 입으로 결정하고 선포한 것은 의심하고 토론의 주제로 삼는 것은 불경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자신의 두려 움과 소심함을 자신의 상담자로 삼는 자에게서 어떤 선한 결과를 기대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말했듯이 이런 생각에서는 항상 천한 자식밖에 태어날 수 없습니다.17 )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숙고에서 비슷한 결과가 생깁니다. 그들은 하 나님 말씀에서 눈을 돌려, 자기들의 안전이나 처지를 위태롭게 함이 없 이도 행할 수 있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들은 어떤 위험이나 심한 난관이 예상되는 일들을 쉽게 포기합니다. 그 들은 하나님이 제공한 도움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두려운 위협에 대해 귀를 막은 채 자기들의 위치를 포기함으로써 자기들의 처지를 개 선하려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에게 명령된 것에 따라 마땅히 신뢰해야 할 현재의 도움을 불신하고 그들에게 금지되었음에도, 이집트의 도움을 구했을 때, 주님은 그의 예언자를 통해 이처럼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버 림받은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들이 조언을 구하지만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동맹을 맺으나 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것이 아니다.
15 ) 1526년 7월 26일자 투생이 오이콜람파디우스에게 보낸 편지 참고(Herminjard 1.447). 16 ) 1524년 8월 24일자 루셀이 오이콜람파디우스에게 보낸 편지 참고(Herminjard 1.278). 17 ) 참고. Vergilius, Aeneidos 4.13.
12 | 칼뱅 작품선 7
너희가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 바로의 힘에서 도움을 받으려 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신뢰를 두는구나. 바로의 힘이 너희를 혼란하게 만들며 이집트의 그늘을 믿는 것이 오히려 치욕거리가 될 것이다 ( 사
30:1-3 ) .
주님이 그토록 맹렬
히 유대인들을 비난하시는 것을 볼 때, 그들 자신의 생각에 따른 18 ) 새로 운 불법적인 신중함에 의존함으로써 증오와 온갖 위험을 자신에게서 떨 쳐 버리려는 자들이 어찌 더 부드럽고 또는 관대한 무엇을 기대할 수 있 겠습니까?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떤 위험도 제거할 것 같은 핑계가 하나 님 말씀을 향한 단순한 복종보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에 얼마나 더 쉬운 지, 내가 모르지 않습니다.19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제아무리 위협적이라 해도, 내가 인용한 예언자의 말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자들에게 주 님이 경고하신 위협보다 크지 않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강하게 한 자들 에게는 극복하지 못할 큰 난관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디선가 이야기한 키프리아누스의 사례를 통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선고를 받은 뒤 사람들은, 오직 말로, 그가 그것 때문에 죽어야 하는 종교를 부인하는 조 건으로, 그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형 장 소에 와서도 지방 총독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고집불통에 대한 형벌로, 목숨을 희생하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건질 것이 ( 황제의 자비는 총독에게 이것을 허락했기에 )
낫지 않는지 숙고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에 그는 한마디로, 그
토록 거룩한 일에 숙고의 여지란 있을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20 ) 고문 도 구들과 사납고 잔인한 형리가 그의 눈앞에 보이고 칼이 그의 목 위에 놓 이고 피에 굶주린 분노한 백성의 욕설과 모욕과 저주가 그의 귀에 들릴 18 ) L: suo Marte[자력으로]. Erasmus, Adagia 519 (ASD 2/2.43-44). 19 ) <칼뱅 서간집> 85쪽(COR 6/1.138). 20 ) 참고. Augusinus, Sermo 309 (MPL 33.1412).
두 서신 |
13
때, 누군가 어떻게 이 거룩한 인물이 이 모든 공포에 직면해 용기를 잃 지 않고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처럼 가볍게 죽음에 자신을 내맡겼는지에 대해 놀란다면,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거룩한 인 물이 최후까지 위대한 용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로 하 여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명령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그로 하여금 다른 경우 그를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는 모든 공포를 극복할 수 있게 만들었 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이름을 불멸하게 할 말을 토로했으니, 이것 에 대해서는 칭송보다는 모방하는 게 더 합당합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어떤 종류의 행복 또는 편안함이 우리를 하늘 아 버지에 대한 복종에서 손톱만큼이라도21 ) 벗어나게 할 때마다 우리가 우 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일단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뭐 든지 우리에게 매우 거룩한 것이므로 토론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고 려할 여지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다만 생각 한다고 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우리의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다음 으로는 우리는 더욱 헤매게 되고 몰락의 길을 가게 됩니다. 나는 우리 모두의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그대에게 직접 답변하기 전에 이것을 전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이, 어떤 무 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두려움으로 야기된 흐려진 시각 때문에 저해 받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나는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 문제 에 머물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현실이 요청하는 그 이상으로 머물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은 혹독한 질책에 의해 피 흘리기까지 고 난 받도록 강요되지 않으면, 어떤 가르침에도 귀를 막을 사람들이 허다 합니다. 우리 시대의 악, 실로 모든 시대의 공통된 악은 우리 육체의 유혹에 굴
21 ) Erasmus, Adagia 406 (ASD 2/1.48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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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하는 것이니, 이 유혹들은 너무 매혹적이고 교활하며 우리 각자를 속 이기 위해 특별한 미명으로 위장되어 있어서, 참 지혜의 첫걸음은 우리 의 생각에서부터 그 유혹을 포기하고 쫓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그대의 성품을 모르지 않으므로, 내가 만일 그대에게만 말을 했더라면 이런 장 황한 서론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 기회를 통해 그대의 조용 하고 유순한 인품을 경험했으므로 이런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의 특별한 요청을 만족시키려 하지만, 주제가 일반적인 것이고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보편적으로 또 위험스럽게도 오류에 빠져 있으므로 만일 내가 이 글로 써 동시에 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 여러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서신을 읽을 모든 이들이
( 나는 이 일을 허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열렬히 바랍니다 )
그들 자신을 위해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면, 내 일이 헛되지 않으 며 열매가 없지 않다고 믿습니다. 혹시 그들이 들으려 한다면 그들은 의 무가 지시하는 길에 대해 훈계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으 려 하지 않으면, 적어도 그들 스스로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자신의 파멸 을 추구했음을 확증하는 증언을 받는 것이 될 것입니다. [종교의 외적 고백에 대해]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가 모든 제자에게 처음 그의 학교의 훈련을 가 르칠 때 그가 그들에게 역설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우리 눈을22 ) 집중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 를 지는 것부터 시작할 것을 가르치셨을 때 이렇게 첨가하셨습니다. 누구 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신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 눅 9:26 ) .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 그의 가족
으로 등록될 때 이것이 우리 주로부터 명령되었다는 것과, 주의 나라에
22 ) Erasmus, Adagia 1842 (ASD 2/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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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할 자들에게 일생토록 공포된 영원한 칙령이란 그들이 참된 마음의 경건으로 주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자신의 경건을 외적 고백을 통해 선 포해야 한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 자신은 천사들 앞에서 인 정받기 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주를 고백하려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또한 그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한 후에 어떻게 그것이 하늘에서 그들에게 유효하길 바랍니까? 그러므로 교활한 은폐를 통해 여기서 스스로에 만족하거나 그가 외적 증언으로써 완전히 뒤집어 놓음에도, 자기 마음속에 경건을 지니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경 건에 대한 그릇된 견해로써 자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경건 은 참된 고백을 낳습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것을 헛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 롬 10:10 ) .
결국, 주님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고백하도록 부르십니다. 고백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은 다른 주를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위선을 관용하 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군가가 물을 것입니다. “불경건하고 미신적인 무리 속에 흩 어져 사는 소수의 믿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입증하기 위해, 때를 얻 든지 못 얻든지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계속 주변 사람들의 불경건함에 맞서 외쳐야 하는가? 그들이 거리로 나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해야 하 는가? 그들이 강단에 올라가 회의를 소집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사도들, 예언자들, 사절들, 또는 무슨 이름으로 불리 든 간에, 주께서 그들의 소리를 공적으로 울려 퍼지게 하길 원하시는 사 람들을 그의 말씀의 사역자로 부르시는 것을 볼 때, 모든 사람이 사방에 서 같은 일을 시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적합하지도 걸맞지 도 않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각자는 스스로 자신의 소명과 자신의 신분 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상 응하는 행위를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직무를 가장 잘 이행하게 될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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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주께서 자신의 말씀 사역자로23 ) 정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말이 빛 가운데 전달되고 지붕 위에서 트럼펫 소리처럼 울려 퍼지게 하려고 공적 성격을 부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도들의 공적 직무를 삼가면 서 사생활의 의무들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해야 합니다. [평신도의 외적 고백]
이 문제는 간단한 말로는 적절히 설명될 수도 없으므로, 그것의 본질 에 대해 좀 더 길게 설명해 봅시다. 그러나 특별히 일부 특정한 개인들 에게 국한된 부분에 대해서는 ( 이것은 공적 고백의 기능을 말하는데 ) 당분간 침묵하 려 합니다. 어쩌면 이 점에 대해 언급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것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만 백성 가운데 공히 각 개인에게 속한 것에 대 해서만 묻고 생각해 볼 것입니다. 첫째, 주께서 참 종교의 훈련이 거부되 고 추방된 장소에서 악한 자들 사이에 흩어져 사는 자신의 백성한테 어 떤 고백을 요구하시는가? 둘째, 외적 삶에 있어서 그들이 자기들과 섞여 사는 우상숭배자들한테서 주님이 그들을 구별하기 원하시는 표지는 무 엇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언제, 누구와 함께 어느 곳에서 향해, 얼 마나 명백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신앙을 입증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게 내 의도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전진시킬 기회나 또는 어느 방식으 로든 선을 행할 소망이 주어질 때 어디까지 진행해야 할지, 언제 멈추어 야 할지 한계를 짓는 게 내 의도는 아닙니다. 이런 토론은 거의 끝없는 토론이 될 뿐 아니라, 고정된 규칙 속에 포함되고 묶일 수 없는 현재의 토론 방법과는 상이합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대해 말하길 요 청하는 모든 자에게 항상 답변할 준비를 갖추길 원하면서 ( 벧전 3:15 ), 베드 로가 요구하는 이 마음의 준비에 한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또
23 ) 칼뱅의 <신앙교육서>와 파렐의 <신앙고백서>에는 말씀 사역자 항목이 있다(본서 1.215,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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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언자들이 하나님 백성을 인도해 그들로 하여금 오라 우리가 주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에게 올라가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며 우 리가 그의 길로 행할 것이라 ( 사 2:3; 미 4:2 ) 고 환호하며 노래하게 할 때, 하나님
의 영광과 그의 나라의 광채를 찬송하는 그 열렬한 열심에 한계를 정하 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 말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갈구하 라고 우리에게 긴급히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 로 하여금 덕을 세우는 일들을 따르라고 ( 롬 14:19 ) 명령한 것의 폭넓은 의 미를 모르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에 대한 진실한 경건을 부여받은 자들은 (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해야 함이 합당한 ) 그의 거룩한 주권을 모든 합당한 수단으로써 드러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법을 기대해서는 안 됩 니다. 그 주권을 드러냄에 있어서, 자신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 는 한, 모든 기회를 추구하고 모든 순간을 계속 포착하는 것 외에, 다른 한계나 목표를 정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이는 다른 이들보다 탁월하고 능력 있고 더 끈질기게 수행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개인적으로는 받은 은혜에 따라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처럼 여기서 이런 폭넓은 주제에 대해 상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인간들 사이에 덕을 세우기 위해 그대가 해야 할 의무가 어느 정 도인가라는 일반적 물음을 다루려는 게 아니라, 다만 그대가 우상숭배자 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대가 취해야 예방책에 대해 일반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대 스스로 그들의 세속적인 신성모독에 오염되 지 않으려면 이 예방책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우상에 대한 외적 존경을 금함]
성경에 이 주제를 담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 이에 사는 자들을 위해 특별히 명령된 것처럼 보이므로, 또한 이런 사람 들의 우상숭배와 오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자들의 미신 사이에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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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있다고 보통 생각하고 있는 까닭에 ( 오늘의 미신은 일종의 위장 수단으로 하 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이방인의 우상숭배는 우둔한 무지 때문에 지고의 신에 대한 경 배를 공개적으로 경멸했습니다 ),
우리는 먼저 성경의 계명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그 계명들을 우리 시대와 연관시켜 비교할 것이며, 상황의 유사성에 힘입어 그것들을 어느 정도나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 는가를 확인하려 합니다. 물론 나는 왜 우리가 신의 영원한 계명들을 일 정한 시대에 한정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무지한 자들에게 이런 절차를 양보합니다. 이것은 아무 양심의 가책이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 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의 법에 따라 우상을 경배하거나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셨을 때 ( 출 20:4 ), 그는 이 이름 아래 불경건한 자들이 우상에게 바치는 모든 외 적 예배를 포함합니다.24 ) 주께서 사용하신 술어들 중 하나는 ‘허리를 구 부리다’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영광을 돌리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따라 서 문제가 되는 형태의 경배는 나무나 돌의 형상을 육체적인 몸짓으로 경배하는 것임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런 금지로써 단순히 백 성이 이방인들처럼 나무나 돌의 형상 앞에서 어리석게도 경탄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형상들에 경배를 표하기 위해 그 앞에 엎 드려 부복하거나 모자를 벗거나 무릎을 꿇는 등, 종교적 존경을 표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표현들을 보임으로써, 이방인들의 세속적 어 리석음을 조금이라도 모방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25 ) 따라서 하나 님이 순수하게 그를 섬기는 자들을 표현하실 때 그들을 구별하는 표시 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칠천 인을 남겨 두었다 ( 왕상 19:18 ) . 그들의 마음이 바알의 헛됨과 거짓으로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라고? 그뿐만 아 니라 그들은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고 바알의 손에 입을 맞추지 않
24 ) 로잔 회담의 일곱 번째 쟁점이다. 25 ) 파렐은 로잔 회담에서 유사한 표현을 했다(G. Farel, Du vray usage de la croix de Jesus-
Christ , Genève, 1865, p.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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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위엄이 하늘과 땅과 땅 밑에 있 는 모든 것한테 인정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실 때, 같은 표지를 사용하십 니다. 그는 이렇게 승인의 방식을 서술하십니다.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내 이름으로 서약할 것이다 ( 사 45:23 ) . 육신의 거동을 통해 형상에 대
한 경배를 표현할 때,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경배를 형상이 받는다는 사 실이 여기에 분명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배를 표현하는 자들의 죄를 확정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어떤 핑계, 어떤 진지성을 가지고 행하 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우상에 조금이라도 존경심을 표한다면, 그가 마음에 무슨 확신을 갖고 있든, 그는 그 우상을 하나님으 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신성의 이름을 우상에게로 돌리는 자는 그 이 름을 하나님에게서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리에게 이런 위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 단 3장 ) . 그들에게는 형상 앞에서 무릎을 잠시 굽힘으로써 왕의 눈을 즐겁게 하기보다는, 맹렬한 화덕의 불길에 무자비 하게 태워지도록 몸을 던지는 것이 더 쉽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강력한 왕의 분노를 돋우어 그들의 생 명에 큰 위험이 닥치게 한 그들의 미치광이 짓을 조롱하든지, 아니면 인 간의 호의를 얻기 위해 어떤 우상숭배 행위라도 행하는 것은 가장 끔찍 한 종류의 죽음보다 더 피해야만 할 일임을 그들의 모범을 통해 배우도 록 합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둘 중에서 오직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곧 하나님 경외를 저버리면서 단지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경합하게 될 때 인간을 경멸해야 하는 경우, 그들은 그들이 왕 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왕이 세운 성상들에게 절하지 않을 것을 왕이 명백히 알길 원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에 부록을 덧붙인 저자가 누구든지 간에 26 ) 그 사람은 매우 유사한 경우에 다니엘이 보여 준 똑같
26 ) 외경 다니엘서를 말한다(14:2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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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지조를 언급합니다. 그는 다니엘이 다른 사람들이 신으로 경배하는 용을 경배하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것보다 사자들의 발톱에 찢기는 것 을 선택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 으므로 나도 이것을 권위로서 인용하길 자제하겠습니다. [신상 숭배 논박]
더구나 아무도 그의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굽히는 것을 단순히 삼가 는 것으로써 그에게 요구된 모든 의무를 행했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려 고, 주님은 자신의 의식들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일과 이방인들의 길을 전적으로 회피하는 일에 대한 여러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은 예 언서에서 한마디로 그가 바빌론에 붙들려 간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것 을 만지지도 말라고 금지하셨을 때 ( 사 52:11 ), 그의 백성이 불경건한 것과 의 모든 접촉에서 얼마나 완전히 벗어나기 원하는지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요약적으로 해석하듯이[고후 6:17, 18],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의 거룩함에 걸맞지 않는 어떤 제의 의식을 통해서도 오염되어서는 안 됨을 의미합니다. 저 주제에 대해 고린도 교회에 명령을 내리면서 바 울은 이 한 문장을 빌려 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모든 생각을 요 약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나를 믿으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종교를 불의한 미신의 어떤 오물로도 더럽히지 않는 자들만이 합당하게 그 종 교를 유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종교를 부정하고 불경건한 의식과 뒤섞 는 자들은 그 종교를 더럽히고 찢어 놓는다는 것은 게을리 간과할 수 없 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마땅한 모든 믿는 자들은, 그런 신성모독에 연루되지 않도록 매우 주의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 삭, 그리고 다른 족장들은 이렇게 가증한 것들과 우상들로 가득 찬 나라 에서 머물 때, 비록 그들이 그 땅의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치료할 수 없 었기에 그들은 참았고 그것에 대해 탄식했을지라도, 어쨌든 그들은 하나 님의 예배를 순수하고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유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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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그들 주변에서 실천되는 미신들에 대해 이의를 공적으로 고지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동의를 위장하는 어떤 표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유대인들의 예]
이런 단순성의 탁월한 귀감이 다니엘에서 나타납니다 ( 단
6:10 ) .
비록
그가 바빌론에서 우상숭배의 오물 가운데서 살았을지라도, 마치 그가 그 것들로부터 큰 간격을 두고 분리된 것처럼 그것들과 접촉하는 일을 멀 리 했으므로, 그는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백성이 있는 가운데서는 참된 경건의 여지가 없음을 보았기에, 그들이 보는 데 서 물러나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합당한 순결함으로써 은밀하게 자신의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도시와 백성의 공적 오류에도 불구 하고 참 신앙에서 결코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유대인들에게 주 어진 계명도 같은 취지에서 선포됩니다. 이방인들의 새겨진 형상들에 있는 금 이나 은을 탐내지 말며 그것들을 네 집으로 들이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주의 안전 에 가증스러운 오물처럼 증오해야 한다[신 7:25, 26]. 주님은 그들이 이방인들
의 불결한 미신을 더 열심히 피하게 하려고 한번 우상의 이름이 붙은 것 은 뭐든지 미워하고 증오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옛 계약 아래 아직 모호하고 다만 비유로써만 예시되 던 그의 종교가 이처럼 외적으로 순결한 고백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주 의 뜻이었다면, 마치 그의 진리의 빛으로 감싸듯이 그의 독생자의 출현 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그의 지혜의 신비들을 계시했던 기독교 교회에 서는, 얼마나 더욱 필연적으로 그의 종교가 유지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사실은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쉽게 확인됩니다. 바울이 음란에 대해 사용 하는 논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이 부합하므로, 그것을 우리 주제 에 적응시키는 것이 결코 부조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의 몸이 그리스도 의 지체인 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지체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빼앗아 음란의 지체로 만들겠느냐? 그럴 수 없다 (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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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 .
이와 같은 방식으로 또한 우리도 주장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면서 우리가 우 상숭배로 또는 더러운 미신으로 그 지체를 더럽힐 수 있을까? 이것은 그 리스도의 영광을 비열한 행위에 굴복시키는 것, 즉 우리의 몸을 그리스 도의 몸에서 떼어 내어 우상들과 함께 음행을 한다는 게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그가 내린 교훈은 모든 외적인 변형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이 성령의 성전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싼 값으로 우리를 사셨고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함을 기억하자.” 우리 몸이 신성 모독의 진흙탕에서 뒹군다면 우리 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 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이질적이고 세속적인 제의로 더럽혀진다 면 그 성전의 거룩함이 보존되겠습니까? 바울이 어디서나 그렇게 열렬 히 의무에 대해 권면했다면 그가 그리스도인들로 그들의 악한 예식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의 고백에 합당하지 못한 것을 보 이지 않도록 훈계할 때, 그의 열렬함이 더욱 특별히 나타납니다. 우상숭 배의 위장적인 타협, 또는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의 모방이 가져오는 자 연스러운 결과, 즉 곧 하나님께 대한 불명예와 인간에 대한 실족이라는 두 가지 큰 악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그것을 범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 게 장황하게 경고합니다. [바울의 가르침]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는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 이
우상숭배라는 말을 통해
그가 악인들이 사용하는 온갖 외적 의식을 의미하고 있음이 그다음 문맥에서 명백합니다 )
나는 지혜
로운 자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말한다.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 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닌가? 우리가 떼는 떡은 그 리스도의 몸이 참여함이 아닌가? 그러므로 많은 우리가 한 떡이고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 고전
10:14-17 ) .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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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엇인가? 우상 에게 바쳐진 것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방인의 제물로 바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귀신 과 교제하는 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너희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함께 참여하지 못한다 ( 고전 10:18-21 ) .
우선 그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자가 됨에 있어 주와의 친교가 얼마나 친밀한가를 상기시키며 그가 그들을 그리스도와 더 가깝게 결합될수록 더욱 그들을 우상들과의 모든 교제에서 더 멀리 물러나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외적 성례전이란 주와 함께 결합되 는 어떤 끈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반대로 불결한 의식들에 섞이는 자들은 이로써 우상과의 친교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그들이 우상이란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우상 에게 드려진 고기는 보통 고기와 다를 바 없다는 그들의 항변을 미리 예 견했을 때, 그들의 모든 핑곗거리를 제거합니다. 그는 고기라는 단순한 물질에 대한 한 그들에게 양보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은 우리와 견 해가 다르므로 그들이 주시하는 우리의 행위에서 그들의 판단을 고려해 야 한다고 답변합니다. 그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자들은 연약 한 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이렇게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린다고 추측하 게 함으로써 연약한 자들의 오류를 부추기며, 이로써 인간들 앞에서 하 나님이 불명예를 당하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바울은 조금 뒤에 그리스도 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 사이에는 큰 불일치가 있어서 이 중에서 하나를 맛봄은 다른 것을 포기함을 의미한다고 더 강력하게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의 권면을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도전 하는가?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가 ( 고전 10:22 )? 바울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아주
사소한 잘못으로 여기고 있는 저 가공적인 미신을 공격했을 때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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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범죄적 행위도 더 이상 신랄하게 ( 나는
차라리 거의 비극적이라고27 ) 말하렵니다 ),
공격할 수 없을 정도로, 이 호소는 너무 강력합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귀며, 그리스도 와 벨리알이 어떻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는가? 너희 는 하나님의 성전이니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며 너희 가운데 서 행하여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 고전 6:14-16 ) . 그
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의 모든 접촉을 너무 두려워해 어떤 친 교도 거래도 하지 않길, 즉 한마디로 교제를 하지 않길 원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럴 경우
( 그 자신이 말하듯이 )
분명 우리는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
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고전 5:10 ) .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미신을 모방하도록 유혹할 수 있는 어떤 친교도 허락하지 않습 니다. 그는 다음에 이사야의 증언을 덧붙입니다. 주님이 그러므로 너희는 그 들 중에서 떠나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 사
52:11 ) .
이처럼
그는 우리가 공간적으로 불신자들과 간격을 유지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오염된 제의들에서 멀리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 바울이 그다음에 예언자의 말을 빌렸거나 자신의 말을 사용해 그때 주 님이 우리를 영접할 것이며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을 것이 라 ( 고후 6:18 ) 고 선포합니다. 이 말은 계명에 반해, 우리가 전적으로 불결한
것들을 만지는 일을 전혀 삼가지 않을 경우 마땅히 그에게 버림받고 거 절됨을 암시하는 말로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실족하게 함]
사도는 많은 구절에서, 특히 고린도전서에서 장황하게 우리 이웃을 걸 려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 다룹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에 대
27 ) Erasmus, Adagia 1439 (ASD 2/3.43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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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우리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안다. 비록 하 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해지는 많은 것들이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아버 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 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다 ( 고전 8:4-6 ) . 여기서도 그는 교활하
게도 양심의 무죄를 주장하는 자들의 항변을 먼저 예견하고, 그들의 핑 계로부터 물리치며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에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그들 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실의 증인이 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예를 통해 사람들이 같은 일을 행하도 록 유도한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행 위가 합법적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그들이 불확실할 뿐 아니라, 거리끼는 양심을 가지고 행동해도 그들이 모방하는 개인에게서 권위를 발견하기 때문임을 주지시킵니다. 또한 바울이 다음의 답변을 통해 핑계의 모든 기회를 얼마나 완전하게 차단하는지 봅시다. 우상숭배를 위한 거룩한 잔칫상에 앉는 것은 우상숭 배와 유사한 모습을 가집니다. 그럼에도 어떤 신도들은, 그들이 하나님 의 깨끗하고 거룩한 피조 ( 음식 ) 물들을 먹고 있다는 핑계 아래 앉습니다. 비록 음식물들이 천 번이나 우상에게 바쳐졌다 해도, 우상이란 무지한 자들의 헛된 공상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그 음식물들이 이런 신성 모독적 성별로 더럽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들의 헛된 핑계를 반박하기 위해 형제들을 무시하고 멸시 하면서 자신들만을 스스로 지혜롭게 만드는 이 교활한 신중성을 신랄 하게 비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 운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 하는 것이다 ( 고전
8:2, 3 ) .
그는 형상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합니다. 그러
나 그는 형상 숭배가 어떤 것이며, 그들이 무지한 자들로 하여금 모방 하도록 유도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지식 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우상에게 성별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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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로 알고 먹을 때 그들의 양심이 약하므로 더러워진다. 어떤 사람이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잔칫상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그가 불확실한 것을 보고서 그들의 양 심이 용기를 얻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너의 의식 때문에 그 약한 자가 멸망할 것이니 그리스도는 그를 위해 죽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 게 죄를 짓고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다 ( 고전 12 ) .
8:7-
이것은 바울이 마치 이같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이방인들
이 자신들의 신들에 대해 가진 모든 확신이 ( 실로 그런 것같이 ) 헛되고 하찮 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여김으로써 오직 너희 스스로에 대해 지혜롭다. 너희가 공공연히 행하는 것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으므로 많은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것을 보는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은 너희처럼 우상이란 아무것도 아니라 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 신중함이 아직 없으므로, 너희가 그들의 종교적 제의들에 외견상 동참하는 것을 볼 때 너희가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밖 에는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그리고 그들은 용기를 얻어 그들 자 신의 양심이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핑계로 둘러대는 너희의 신중함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형제들을 미혹하 고 그들에게 오류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 게는 합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사악한 자들이 너희의 잘못으로 불경 건함이 범해지는 것을 보고서 너희를 모방해 저지르는 불경건함은 너 희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특별한 신앙고백에 대해]
그러므로 이제 충분히 명백해진 사실은, 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등 하게 종교를 선포하는 공적 직무를 수행할 의무는 없다 해도 각자가 예 외 없이 수행해야 할 일종의 사적 고백이 있다는 것입니다 ( 물론 그것의 정확 한 한계를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모두가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똑같은
은혜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고, 또 고백의 동기도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 두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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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는 기회에 많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신앙 의 진리에 합당하지 않은, 또는 우리 종교의 완전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 은 어떤 것도 말하거나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글과 초대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보건대, 이런 고백의 모범들 은 순수하고 잘 정비된 초대 교회에서 28 ) 현저히 발견된다고 추측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시대의 신도들이 길 가운데서 그리고 공공 대 로에서 그들의 종교를 선포했음을 읽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이 그것을 말하고 알릴 경우 위험하게 될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기독교를 숨겼음 을 읽을지라도,29 )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들의 종교에 반대되는 어 떤 암시도 행하지 않으려 주의했고 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외의 어 떤 다른 존재로 위장하지 않으려고 매우 주의했음을 읽습니다. 물론 주께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채 속으로 간직하는 자 들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복음서 기자에 의한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습 니다. 많은 통치자들이 그를 믿었으나 바리새인들 때문에 그를 고백하지 못했으 니 이는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 보다 인간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 요
12:42, 43 ) .
오, 저주스러운 영광에
의 갈망이여!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는 영광이 인간으로부터의 모욕으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보다 인간에게 인정받길 더 바라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구하려 는 자들은 그 생명을 영원히 잃을 것이라는 것이 주의 판결에 따라 선 포되었다면 ( 마
10장; 눅 9장; 렘 14장 )
이 선포는 더욱 명성에 적용되어야 하
지 않겠습니까? 명성의 상실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훨씬 견디기가 쉽습 니다. 더구나 주께서 거룩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자들 안에서 스 스로 거룩하게 되길 바랐다고 선포했다면, 그들의 명성을 약간 감소시 킴으로써 주를 거룩하게 만들길 거부할 만큼 주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28 ) 파렐도 같은 표현을 썼다. <칼뱅 서간집> 96쪽(COR 6/1.157). 29 ) 참고. Eusebius, Historia Ecclesiastica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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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무 비중도 두지 않는 자들이, 자신에 대해 감히 무엇을 바라겠습 니까? 이 고백이 현재의 주제에 속하는 한, 이 고백은 입술의 부인을 통해서 만 아니라 불경건한 미신을 외적으로 위장하는 행위와 참 종교에 대한 온갖 모독 행위에 따라 침해되고 뒤집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확실한 구 절들로써 분명히 확증된 것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에 대한 순수한 열심을 가진 모든 자는 모든 불경 건한 언어를 입에 담길 삼갈 뿐 아니라, 그의 몸의 어느 부분도 신성모독 적인 제의로 오염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우상숭배에 대한 고대와 현대의 대조]
그런데 우리가 위에서 말했듯이 매우 많은 사람이 기독교 경건이 어떤 가증한 우상숭배와 함께 섞임으로써 사라지고 무너짐을 인정하면서도, 실로 신성모독적이고 불경스러우나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상의 이름 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전되는 교황파의 제의들을 멀리할 필요 는 없다고 생각하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오류를 논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한 대로 성경에서 우리가 인용한 구절이 쓰인 지나 간 시절과 오늘날과의 비교함으로써, 옛날 사람들은 어떤 가증스러운 우 상숭배 못지않게 교황파의 의식들도 정죄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들 이 주장하는바, 양자를 구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뒤에 고찰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확정된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은 오늘날 교황의 영역 내 어디서나 목격되는 이런 미신들보다 더 가증스럽고 참된 경건에 대해 파괴적이고 치욕적인 그런 신성모독은, 이방인들의 미신들 가운데서도 결코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어느 날 저 협잡꾼 대사제가 그 의 사기로써 부패시킨 교회들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으려면, 그 일을 수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뿌리부터 뽑아 버리고 한번 펜을 놀려 교황의 손에서 나온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 두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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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일 가운데는 그대가 당분간 관용할 수 있었고 또 심지어 범죄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런 특 징과 형태를 지닌 의식들을, 하나님 말씀에 공공연히 위배되며 마치 그 이마에 생생하게 새겨진 것처럼 명백히 불경건한 의식들에서 구별할 수 있는 신중함과 경계심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실례들을 눈앞에 보 여 줌으로써 더 쉽게 설명될 것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고기 먹는 것을 금하는 것과 그런 금지로 신도들의 양심을 속박하는 것은30 ) 분명히 독재적이며 사도가 말한 것같이 악마적 입니다 ( 딤전 4:1-3 ) .31 ) 주님이 매일 고기를 먹든 평생 고기를 삼가든 인간의
자의에 맡겼음을 볼 때, 그 무엇도 특정한 날에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 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항상 자유로운 것이 어떤 때는 합법적이 아닙니까? 그대의 의도가 약한 자들의 무지에 양보하려는 데 있고 그대 의 마음을 전통의 사슬로 사로잡으려는 게 아니라면, 죄를 범함이 없이 도 불의한 명령에 복종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무절제에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에게 결혼을32 ) 금지하는 것도 역시 독재적입니다. 그대가 정욕의 가시에 찔린다면 그대에게는 그 독재 에 굴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고기 먹는 것을 삼가는 것처럼 여자 를 멀리하는 것을 그대의 자유에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동족이 행하는 의식들에33 ) 대해
( 이것이 이 논쟁의 동기인데 )
그대가
그곳에서 사는 동안에 그것의 준수를 위한 규칙을 제안합니다. 그대는 어떤 불경건의 표시가 없는 의식들은 신중하고 유보적으로, 그러나 사 태가 그것을 요구할 때는 자유롭고 확신 있게 준수할 수 있으니 이것은 그대가 그것을 준수하거나 기피함에 있어 어떤 미신도 없음을 분명히
30 ) ICR/1536 (CO 1.201). 참고. Erasmus, De intredictu esu carnium 1522 (ASD 9/1.1-50). 31 ) Summaire 76, 90, 224; ICR/1536 (CO 1.217). 32 ) 로잔 회담 아홉 번째 신조 참고. 33 ) 로잔 회담 일곱 번째 신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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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최소한의 신성모독의 표시가 있거 나 그런 의혹이 있는 의식들은 독사와 마찬가지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런 의식들이 단 한 번의 접촉으로 어떤 뱀보다 더 독을 퍼뜨림을 그대에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의식들에 형상 숭배, 종부성사, 면죄부의 매매, 가증스러운 푸닥거 리를 곁들인 성수 살포,34 )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저주받을 의식들을 집어넣습니다. 우리는 그런 악습들을 마땅히 저주해야 하는데 그들이 그 것들에 대해 무슨 핑계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알기로 사람들이 판단하기에 우리가 하찮고 별것 아닌 것들을 공 격함에서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온건한 자들이 있습니다.35 ) 하지만 그 들은 우리의 지나친 엄격함을
( 그들은 그렇게 부르길 기뻐합니다 )
반박하기 위해
무엇을 주장합니까? 분명히 그들은 숭배하기 위해 성전 안에 세워진 형 상들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것들에게 신적인 경의를 표한다는 사실과, 이렇게 함으로써 형상들에 경배를 금지하는 2계명을 범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만 어리석은 군중 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매우 사려 깊고 고도의 학식과 재능을 부여받 은 사람들도 이 오류에 빠져 있고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그대에게 그 들의 견해에 대해
( 그대가 기억하듯이 사도가 이것을 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
주지시킵
니다. 만일 그대가 종교적으로 그들과 결코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 해 형상 앞에서 모자를 벗거나 무릎을 굽힌다면, 이것은 그대가 우상숭 배자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분명한 증언을 하는 것 외에 무엇입니까? 그 러나 그대는 사람들 앞에서는 형상에 경의를 표하는 체하지만, 그럼에 도 그대의 마음속에서는 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다고 주장 합니다. 마치 그대가 형상과 살아 있는 하나님 사이에서 영광을 마음대 로 분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나 한 것처럼, 또는 마치 그대가 모든 것 34 ) 제네바 개혁자들은 로잔 회담에서 이 모든 주제를 다루었다. 35 ) Meaux의 신학자들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 신학자들(특히 부처와 카피토)도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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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의 눈이 보는 것을 그에게 감 출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성유, 사죄, 성수에 대해]
도유에 대해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대는 사람들의 불 의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그대의 몸에 기름 을 바르는 것을 다만 감수하는 것이므로, 결코 죄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 장합니다. 반대로 나는 견신례 때 그대가 구원의 성유로 견신례를 받 는다는 신성모독의 표를 새기기 위해 그대의 이마를 내놓을 때, 또는 그 들의 사제를 만들 때 행하는 대로 그대가 제물을 바칠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 그대의 손을 내밀어 성유를 바를 때, 또는 그들이 그대의 죄가 기름 으로 용서된다고 말하면서 행하는 종부성사에서 그대 몸의 모든 부분에 저주받을 것을 바르게 할 때, 그대는 크게 죄를 짓는다고 대답합니다. 만 일 내가 그대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썩지 않음을 위해 예정된 우리의 몸 이 이처럼 신성모독으로 더럽혀져서 불멸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기 위 해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에 주 앞에 내놓인다는 것은 극도의 부끄러운 일이라는 고백하게 할 수 없다면, 나는 그대에게 이것이 사소한 잘못이 거나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양보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매매를 위해 사면서가 진열된 곳에서36 ) 돈궤에 동전을 던지거나 면죄와 특사의 비옥하고 풍성한 금고에서 자신을 위해 뭔가 를 사는 사람은, 이런 가증스런 거래에 그의 이름을 등록하는 것이며 마 치 배지를37 ) 단 것같이 자신이 그 일에 동의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나 는 마치 맹수에게 먹을 것을 던져 줌으로써 그들을 누그러뜨리듯이 사 제들에게 돈 몇 푼 던져 줌으로써, 또는 때로는 매우 큰 돈을 증여함으 36 ) 비레는 종교의 상업화에 대해 자주 항의했다(Piaget, Actes 242, 255, 259, 325) 참고.
Antoine Marcourt, Le livre des marchans (1533); ICR/1536 (CO 1.165); Summaire 176. 37 ) F: marque. L: tessera. Erasmus, Adagia 950 (ASD 2/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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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그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일상적인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벌이에 관계될 때면 먹이를 놓고 입을 벌리고 굶주 린 사자보다도 더 미쳐 날뛰며, 예언자가 증언하듯이 ( 미 3:5 ) 옛날의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사제들처럼 그들은 자기들의 입에 아무것도 주지 않는 자들에 대항해 선전 포고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런 변명을 받아들 이길 거부한다고 말합니다. 그대가 그것의 은총을 원하는 체하는 저 교 서들은 뭔가요? 그들은 그대가 남긴 돈에 대한 대가로 저주로 가득 차 고 저주받아 마땅한 면죄를 얻는다고 큰 소리로 선포하지 않는가요? 이 것을 이해하고 (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그대가 돈을 내는 것을 보 는 사람들은 ( 만일 그대가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면 돈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 그대가 면죄 에 동참하길 원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가진 것이 아닌가요? 그 대가 면죄부 아래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조사한다면, 그대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어느 곳에서도 여기서처럼 철저히 조롱받지는 않음을 발 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악마적인 퇴마술을 통해 성별된 성수를 이마에 뿌리게 하 는 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처벌받지 않고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물 뿌림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악취 나는 물 몇 방울로 그들의 얼굴을 공중이 보는 앞에서 닦 는 것인가요? 아니면 이로써 그들은 저명한 회중 앞에서 이유 없이 장난 을 하는 것인가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 그런 것과는 유사하지도 않습 니다. 그들은 이 상징으로 모인 회중 앞에서 퇴마술의 신성함을 경멸하 지 않음을 증언합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분명히 퇴마술로써 뱉어 낸 모든 신성모독에 인을 치는 셈입니다. 즉 물을 뿌림으로써 마귀를 쫓아 내며, 병을 고치며, 악령을 몰아내며, 모든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이 주입된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그들의 행위를 그릇 표현했고 내가 그들에게 전가하는 불경건함 은 자기들에게는 없다고 그들이 불평하지 않도록 나는 그들 자신의 양 두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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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에 호소하며, 그들이 이런 의식들을 집행할 때 내가 그것 때문에 그들 을 비난하는 바로 그런 일을 백성에게 설득하려는 게 아닌지 묻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소원을 만족시켜 주기 원하므로, 나는 백성을 재판관으 로 데려옵니다. 또 그들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선언하지 않을 자는 그들 중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규칙으로 시험당하는 것이 불공평 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내가 아니라 사도에게 엄격하다고 불평할 것입 니다. [미사에 대해]
만일 우리가 어떤 확인된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 이 점에서 우리가 가르치기 원하는 것이 더 명백하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며 항
의하는 자들도 얼버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미사에 서 한 예를 취합시다. 우상숭배에 대해 성경이 전하는 모든 것, 또는 그 대가 피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하는 모든 이런 의식을, 그대가 중립적인 사물로서 그릇 사용하지 않기 위해, 우상숭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미사에 대해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면, 나는 이 문제를 포기할 것 입니다. 내가 다른 모든 악습 가운데서 미사를 선택한 이유는, 모든 다 른 의식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거룩한 경외심으로써 경배하므로, 비록 그대가 다른 의식을 회피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의 주목을 피 할 수 있을지라도 미사의 경우 많은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지 않고서 는 미사에 불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 람이 다른 의식들의 악을 보고 그것들을 멀리하는 반면, 미사가 가증한 것으로 가득해 있음에도 그것에 감히 불참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두려움에 눈이 멀어 진리를 보지 못하기 때 문이든지, 분별력 부족보다는 용기 부족과 나태함으로 헤매기 때문입 니다. 따라서 나는 이 모든 현재의 논쟁이 이 하나의 주제 아래 포괄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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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주로 현혹당하고 있는 이 악습이 폐지 된다면 그렇게 심하게 현혹시키지 않는 다른 의식들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양보할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대 같 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복종하길 배운 사람들을 의 미하는데, 나는 여기서 앞서 말한 대로 그대와 함께 그들을 가르치길 시 도합니다. 그러므로 미사의 거룩한 위엄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 기 위해, 미사 집전에 참석하며 경배하는 자들 가운데 끼어서 경배하는 자처럼 보일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려해 봅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평범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치고 미사가 무엇인지 모 르는 자가 없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나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올바르 게 간직하기 위해 그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나는 그들 중 많 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봅니다. 이들이 집에서는 미사의 본 질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 그곳에 가면 그들이 미사 의 관람자가 되려 하는 그 비극이 얼마나 끔찍스러운가를 망각하기 때 문입니다. [미사의 희생제사에 대해]
그러나 나는 미사에 대한 길고 자주 반복되는 논쟁을 다시 시작할 필요 없이 미사의 온갖 신성모독에 대해 독자들은 나의 <기독교 강요> 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나는 짧은 작품이 허용하는 한에서 모 든 주제를 설명했으며, 그러므로 특별히 현재의 문제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해설했다고 믿습니다.38 ) 나는 다만 모든 믿는 자들은 제사라는 ( 미 사의 사제들이 미사를 제사로 이해하는데 )
단순한 개념이 철저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38 ) <기독교 강요> 초판(1536)의 4장 성례에서 칼뱅은 미사의 치명적 효력을 논한다. 이것은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1541) 12장 성찬에 내용이 거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들어 있다(735-740쪽). 최종판은 참고. IRC 4.18.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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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폐지할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의 죽음의 기념하기 위해 축성한 그의 거 룩한 만찬을 전복시킴을 의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39 ) 이 두 가지 40 ) 사실 때문에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일 에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임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전적으로 그 영광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제사가 남아 있다면, 그리스도 의 만찬은 단번에 폐지되고 뿌리째 뽑히게 될 것입니다. 성만찬의 유일 한 용도는 일회적 희생에 대한 표시이며 봉인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두 사실이 미사에 언제나 붙어 있어서 미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 로 오직 이 이유 때문에 내가 그대에게 미사의 모든 친교가 얼마나 가 증스러운가를 보여 주려 했다면, 그대는 어찌 나와 함께 한 목소리로 미 사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는 ( 갈 6:14 ) 것이 그대에게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대가 음모자들이 십자가의 영광을 꺼뜨리고 그것의 증언을 중단시키며 전복시키기 위해 모인 것을 볼 때 그대가 그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편 견 없는 눈으로41 ) 이 문제를 바라보길 원한다면, 미사에 참여하는 자들 은 모두가 이런 음모에 동의하기 위해 손을 올린다고42 ) 보아야 하지 않 겠습니까? [미사의 빵에 대한 경배]
그러나 더 명백하게 설명할수록 그만큼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더 심각 하게 흔들어 놓는 셋째 문제가 있습니다. 즉 빵이 하나님이라고 믿게 하 고 그것을 하나님으로서 높이 들어올려 모든 참석한 자로 하여금 경배 하게 하는 가증한 우상숭배입니다. 이것은 너무 흉악하고 모욕적이므로 39 ) <칼뱅 서간집>(COR 6/1.126-127). 40 ) 로잔 회담에서 비레는 제사로서의 미사와 성체 경배라는 두 가지 양상을 논박했다(Piaget,
Actes 124). 41 ) L: recto oculo. Erasmus, Adagia 3568 (ASD 2/8.60). 42 ) L: digitum tollunt. Erasmus, Adagia 2314 (ASD 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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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지 않고서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 든 이들의 눈에 너무 명백해 논증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빵 한 조 각을 하나님으로서 보여 주며 경배하며 그것에 호소합니다. 결국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이교도들조차도 결코 그들의 형상에 대해 그렇 게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서 경배되는 것은 빵이 아니라 그것이 정당하게 축성된 순 간에 그리스도가 빵을 대신한다고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적용된다고 인정한다 해도 음에도 )
(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
이것은 이교 사제들의 만찬이나 고대 로마의 43 ) 연회에 적용될 수
없듯이 미사에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주님이 자신의 몸을 그의 신비로운 만찬에서 주되 경배받기 위 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먹게 하려는 것이라는44 ) 사실과, 그의 임재는 한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어야 하는 자연적 임재가 아니라 어떤 공간적 간 격과 거리도 막지 못하는 영적 임재라는 사실, 또는 ( 이것을
그대가 원한다면 )
그리스도가 거기서 그의 몸의 본성을 현재적이고 제한적인 것으로서 드 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효과와 능력을 드러내려 한다는 사실에45 ) 상호 동의한다면 성만찬 자체에 대한 의심은46 )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보지는 않으므로, 아무도 내가 분명하지 않고 논란되는 문제를 확실하고 고백된 것인 양 간주한다 고 비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것에 대해서는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진정한 자연적인 육신으로 성만찬에 임재하게 하 고, 그가 손으로 만져지며, 이로 부서지며,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하고, 더 구나 그의 신성이 모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의 육체 안에 거했을 때처
43 ) L: Saliorum epulum(군신의 사제들의 향연). Erasmus, Adagia 2137 (ASD 2/5.126). 44 ) ICR/1536 (CO 1.124). 45 ) ICR/1536 (CO 1.123-124). 46 ) L: scrupulus. Erasmus, Adagia 3477 (ASD 2/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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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그의 신성이 그곳에 있게 합시다. 그것을 경배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옳고 정당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의 불합리성을 다른 곳에서 충 분히 입증했습니다. 비록 이 두 가지를 인정해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만 찬을 떠나 한 조각의 빵 47 ) 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사제들의 악취 나 는 기름에는48 ) 능력이 있어 그것을 바른 모든 손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 몸을 만드는 자가 49 ) 되게 하는 능력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 는 사제의 의지가 천상적 명령의 비중을 가지므로 그가 그리스도를 하늘 에서부터 끌어내리기로 결정할 때마다 주님이 그의 신호에 따라 즉각 임 재하게 만든다고 믿지 않으려면, 또는 분명히 발설하기만 해도50 ) 그 효 력을 발휘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는 일종의 마술적 능력이 있다고 51 ) 생각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경건하게 기념하는 신도들에 게 자신의 몸을 빵의 형태로 주어 먹게 한 것은, 결국 주님이 불결한 사 제들이 원할 때마다 언제나 자신을 내주어 희생되고 죽임을 당하기 위 함은 아닙니다. 이런 부조리한 생각에 따라 그들은 빵으로써 그리스도를 만든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합니다.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상상]
그들이 그들의 축성의 능력, 의도에 대해 뭐라고 어리석게 중얼거리든 내버려 둡니다. 우리는 첫째, 그들이 그릇 자랑하는 약속이52 ) 특별히 성 만찬에 속한 것이고, 둘째, 이 약속은 불경건한 자들의 조롱거리로서가 47 ) L: panis frustulum. Erasmus, Adagia 277 (ASD 2/1.382). 48 ) [COR]: 참고. Durandus, Rationale divinorum officiorum I-IV, 103-104. 49 ) L: artifices. [COR]: 로잔 회담에서 파렐과 비레는 특히 Stella clericorum 을 인용했는데,
1500년 전까지 수차례 판본을 출판한 이 책에서 사제들은 creatores creatoris로 묘사되었다. 50 ) L: demurmurata. 미사를 행할 때 사제들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이것은 내 몸이다”를
의미한다. 51 ) 로잔 회담에서 파렐은 수시로 이 점을 공격했다(Piaget, Actes 167, 183, 199, 201). 참고.
ICR/1536 (CO 1.123). 52 ) L: promissio. 개혁신학에서도 약속은 성찬론의 핵심 부분을 차지한다. 참고. ICR/1536 (CO
1.102, 120, 138). 심지어 카롤리도 그렇게 말했다(Piaget, Actes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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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경건한 자의 신앙을 위해 주어졌음을 압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성만찬 밖에서는 있을 자리가 없다면 미사에서 ( 미사보다 성만찬에 더 반대되는 것 이 없습니다 )
어떤 자리를 가지겠습니까? 그리고 그 약속이 오직 경건한 자
들에게만 주어져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바친 일 회적 희생제물을 통해 그들 자신이 영원히 거룩하게 된다고 믿는 자들 의 신앙을 양육하고 견고하게 만든다면, 약속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악하게도 그것을 방패로 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어 떻게 이 약속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방정맞은 사제가 제단 주 위를 돌 때마다 계속 보여 주는 이 신은,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길 원하 는 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방앗간에서 가져온 것임이 분명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을 빵의 상징 하에 믿는 자들에게, 주님의 약속은 야수들에게 속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자들에게 속하지 않고 소 위 박카스 축제와 투르크인들의 축제뿐 아니라, 미사와도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뭐라고요! 이 익살극 배우 같은 몸짓 53 ) 때문에 ( 그것은 너무 꼴사납고 상스러워서 건전하고 이성적인 인간들은 그런 짓을 도저히 할 수 없는 데 )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별로 모욕당하지 않는 것 같다고요? 그런
부조리한 일은 바보들에게는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이 빵에 전가되어 그의 거룩함이 크게 모욕당하는 일을, 우리는 오직 극도 의 분노로써만 참을 수 있습니다. 특히 거룩하게 제정된 영적 만찬의 의 식이 매장당하고 파괴되고 완전히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을 결코 관 용해서는 안 됩니다.54 ) [제단]
이제 그대가 미사의 참여를 위장하기 위해 어떤 양심으로 미사의 집 53 ) ICR/1536 (CO 1.140, 143, 177, 189, 192). 54 ) ICR/1536 (CO 1.13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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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참석할 수 있는지 나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선 들어가자마자 정 면에 제단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식탁과 거의 차이가 없으나 그 이름에 의해 그것이 제사를 위해 사용됨을 선포합니다. 이것 자체가 확실히 이 미 신성모독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그대는 그곳에 사 제가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네 손가락에 기름을 바름으로써 하나님 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세움 받았다고 자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종들에게 그의 몸과 피를 내주어 빵과 포도주의 상징 아래 먹게 하 면서 말씀한 저 약속을, 교회의 신도들과 성만찬 자체로부터 빼앗아 그 약속을 자신과 동료 살해자들에게로 돌립니다. 또 그는 천상적 성만찬에 미사의 이름을 줌으로써 그것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따라서 성만찬은 완 전히 뒤집히고 왜곡되었습니다. 백성은 그곳에 참석해 거기서 말해지고 행해지는 모든 게 거룩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대는 그들 가운데 섞여 같 은 확신을 얻은 것처럼 위장합니다. 이 사기꾼이 제단으로 올라갔을 때 그는 때로는 동적인 때로는 정적인 행위로, 그리고는 마술적인 속삭임으 로 그의 연극을 시작하는데,55 )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늘 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 길 원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그가 제물로 끌어내려진 그리스도를 바치 고, 마치 그가 죽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대치된 것처럼 하나님과 인류와 의 화해를 구합니다. 그대는 이런 행위들이 온 회중에게 위에서 언급된 것들과 같은 경배 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봅니다. 그대는 그 광경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표 현했어야 할 때, 그들을 모방하기 위해 그들의 얼굴 표정을 흉내 냅니다. 경건을 가장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자는, 이런 행위들이 이루어질 때마다 (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무엇을 고백한다 해도 ),56 )
사람들 앞에서 그 신성모독의 참
여자임을 고백하는 것임을 내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끝으로 그 모양 55 ) L: fabulae suae actus. Erasmus, Adagia 135 (ASD 2/1.249-250). 56 ) Erasmus, Adagia 1030 (ASD 2/3.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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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고 색깔이 하얗고, 그러나 모든 우상 가운데 가장 불건전하고 흉측 스러운 우상을 보십시오! 이것이 관객들의 마음에 미신적 신앙을 자아 내기 위해 올려집니다. 모두가 멍청해져서 그것 앞에 부복할 때 그대 역 시 우상을 향해 경배의 표현으로써 부복하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성 경에서 우상숭배에 반대해 서술된 내용 중 어느 것이라도 여기서 발견 되고 입증된 우상숭배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의 뻔뻔스러움 을 얼마나 저주받을 것입니까? 뭐라고요? 이 우상이 율법의 2계명이 우리에게 숭배하길 금지한 것 과 다르다고요? 다르지 않다면 왜 빵의 숭배는 바빌론의 형상 숭배보다 는 작은 죄라고 간주해야 합니까?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명의 이스 라엘 사람은 가장 잔인한 형태의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도 형상에 경배 를 드리는 것에 더욱 몸서리쳤습니다. 주께서 이방인들의 저속한 미신 의 불결함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면, 누가 여기에 분명히 존재하는 오물과 허다한 신성모독의 혼돈 가운데서 계속 뒹구 는 것을 허용했습니까? 만일 사도가 우상숭배에 반해 발설한 모든 비난 들의 요지가 이 한 구절에 내포된다고 볼 때 ( 우리는 그리스도의 식탁과 귀신의 식 탁에 동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고전 10:21 ),57 )
누가 이 말이 미사와 적용될 수 있
음을 부인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식탁이 전복됨으로써 미사의 제단 이 세워지고, 그리스도의 잔치를 위해 준비된 음식을 약탈하고 찢고 더 럽힘으로써 미사의 잔치가 준비됩니다. 미사에서 그리스도가 짓밟히고, 그의 죽음이 우롱당하고, 가증스러운 우상이 하나님 대신 놓일 때, 우 리가 그것을 귀신의 식탁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할 것입니까? 또는 차라 리 미사의 지나친 불경건함을 올바로 표현하기 위해 혐오감을 더 잘 나 타낼 어떤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매우 놀 라는 것은 전혀 눈멀지 않은 사람들이 미사의 제단을 세우고 준비함에 57 ) [COR]: 로잔 회담에서 크리스토프 파브리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일치할 수 없음을 말하면
서 같은 표현을 했다(Piaget, Actes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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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마귀의 모든 속임수와 계략과 힘이 협력하는 것을 분명히 보면서 도 미사에 귀신의 식탁이란 이름을 붙이길 잠시라도 주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제들의 비난]
그러나 다른 자들은 나에게 다시 새로운 핑계로 반박합니다. 과거에 일상적인 오류의 미로에 58 ) 빠졌을 때, 교황청 사제직의 기름을 바른 자 들 중 일부는 여전히 옛날의 돼지우리 속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장 직에 대해 매우 잘 교육받았음에도, 여전히 제사를 드리며 또한 처벌받 지 않고서 이것을 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뻔 뻔스런 요구입니까! 나는 이미 강력한 근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미사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음에도, 그들은 미사를 주관할 수 있도 록 허용되어야 하다니! 그들이 벗어나려고 어떤 핑계를 짜내는지 잠시 들어 보고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바친다는 신성모독적 생각이나 빵을 그리스도로 바꾼다는 헛된 생각이나 미사를 불경건하게 만드는 미 신적인 견해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통해 무 지한 인간들의 불의한 욕구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외적 의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로 하여금 미사 대신 주의 거 룩한 만찬을 거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미사를 단순히 의식의 외적 형 식과 그것의 사소한 불합리한 거동으로 평가하고 사악한 견해와 신성모 독적 어리석음으로 ( 우리 모두는 미사의 불경건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인정하는데 ) 평가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바치는 일 과 모든 헛된 미신을 제거한다면, 우리가 주의 만찬을 시대의 불의한 풍
58 ) Erasmus, Adagia 1951 (ASD 2/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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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지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면, 마치 그것이 큰 범죄인 양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의식들에 대해 비난 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부적절하다.” 그러나 내가 그들 중 어떤 이에게, “주의 만찬은 그 자체의 의식들로 이루어지며 이 의식들은 하늘의 주가 제정하셨으되 성만찬의 적절하고 진정한 상징이 되게 제정하셨고 성만찬에 있어 본질적이므로, 그것들이 제거될 경우 성만찬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으므로 그 의식들은 무시되 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고 합시다. 성만찬의 모든 상징이 제거되고 왜 곡되어 신적 신비보다는 연극에 더 가까운 의식에 누구의 허락으로 그 대는 성만찬의 이름을 감히 부여하려는지 대답할 수 있을까요? 나는 성 만찬에 참여한 모든 믿는 자들이 공통으로 그것의 영적인 잔치에 초대 받지 않는다면,59 ) 빵과 포도주의 거룩한 상징들이 교회 앞에 제시되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의 봉인으로서 약속들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주님이 그의 죽음으로써 값을 치른 생명의 은혜가 선포되 지 않는다면, 주의 만찬이 있음을 부인합니다. 그대는 미사에서 이 모든 것의 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내게 보일 수 있습니까? 도리어 미사에 있는 모든 것이 상반되고 어긋납니까? 그러므로 그대는 인간의 우둔한 경솔 함이 만들어 낸 어리석은 것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배하겠습니까, 아 니면 성만찬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회전 유희에 성만찬 의 이름을 넘겨주겠습니까? 결국 그대는 마귀 같은 미사의 형상으로 주 의 식탁을 재현하려 합니까? 그대는 야비하게 주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행위에서 ( 고전 11:26 ) 그대가 주의 만찬을 준수한다고 설득하려 합니까? 주 님은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을 드러내도록 분명히 권면하 십니다. 그대가 아주 낮게 중얼거리는 것을 누가 듣겠습니까? 그대가 그 대의 몸의 행위를 통해 제사를 수행함을 분명히 표명할 때 이것이 주님
59 ) 특히 사적인 미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ICR/1536 [CO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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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인가요? 만일 주님이 죽음 후에 제사의 여지를 남 긴다면 그의 죽음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
왜 내가 쉽게 할 수 있는데도 그들의 모든 간계를 단숨에 차단하지 않 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익살극의 관람객으로 받아들인 백성이 그들의 제사 집행을 위해 그곳에 모였음을 압니다. 여기서 백성이 기대하는 제 사를 그들에게 실제로 보여 주든 않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확 실히 사람들이 제사라고 간주하길 바라는 행위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백성이 우상에 대한 악명 높은 숭배를 위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마치 그들이 동시에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손을 뻗 치는 것처럼 우상을 높이 들어 경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상숭 배하는 백성이 그 앞에 부복하여 간음하도록 우상을 들어올립니다. 나는 여기서 내가 말한다면 그들이 반박할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는 점, 즉 그 들의 손으로 그런 흉악한 행동의 몸짓을 행할 수 있고 그들의 힘과 신경 이 이런 시도를 하는 중간에 무기력해지지 않고, 또 그들의 수족이 공포 로 떨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그마한 경건의 단편도 있을 수 없다고 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만 을 말하겠습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열렬하고 변함없이 선포하는 것과 신성모독을 수행함에서 지도자, 우두머리, 창시자로서 행동하는 것 사이 에 차이만큼이나, 그들이 스스로 주의 식탁에 가까이 간다고 주장하는 그 길은 오히려 그들을 그 식탁에서 동떨어지게 만듭니다. 동시에 나는 다른 사람들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누군가 그들에게 미사 참석한 것에 대해 비난할 때, 그들은 사제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든 상 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미사를 주의 만찬에 참석할 수 있게 만들며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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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념하게 만드는 상징으로만 간주한다고 답변하곤 합니다.60 ) 나 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비참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 변명 도 하지 말도록 호소합니다. 만일 그들이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여러 모로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 또 미사는 그의 죽음 을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각하게 만 드는 것이며 ( 그 죽음의 모든 효력을 망각시키고61 ) 매장하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최악의 모독 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거부하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서 그들은 거의 만찬의 대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올바로 숙고한다면, 그들이 변명하지 말길 희망 합니다. 사실 미사와 관련해 그들이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그리스도의 유일회 적 희생으로 얻어진 성화와 정의와 구속을 기억나게 하는 무엇, 그리스 도가 동료도 후계자도 없는 유일한 제사장임을 가르치고 보여 주는 희 생, 또한 그의 죽음으로 우리 구원에 대한 모든 것이 완수되었음을 증언 하는 희생을 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미사에는 그 희생과 유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이 무슨 권리로 희생의 기념으로62 ) 간주될 수 있 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이 성만찬에서와 거의 똑같게 미사에서도 같은 은혜를 얻는다고 말할 때, 그들은 믿는 자들은 성만찬에서 이렇게 행하 도록 규정된 말씀으로 부름을 받고 있음에도, 그들은 미사에서 주 그리 스도에게 영광을 돌리는 고백 외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음을 스스로 증 언합니다. [유대교, 이방종교, 교황종교에서 우상숭배의 차이]
그들이 보통 현재의 우상숭배와 고대의 우상숭배 사이에 경계선을 그
60 ) 소위 성사주의자들로 불리는 츠빙글리파를 겨냥한다. 참고. ICR/1536 (CO 1.126). 61 ) 로잔 회담에서 파렐 역시 같은 공격을 했다(Piaget, Actes 199). 62 ) L: mnemosynon. ICR/1536 (CO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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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특별히 구별하려 하는 것에 대해 물론 나는 모든 선한 자들이 이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으리라 생각해도, 우리 는 이 문제를 고려하려 했습니다. 또한 어떤 개인들의 고집을 굴복시키 는 게 적당하다고 보이므로 이것이 무엇인지 고려해 봅시다. 그들은 주 께서 옛날에 그의 종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방인들의 미신에 참여하지 말도록 무서운 경고를 발하셨던 이유는, 우상에게 돌려지는 명예는 분 명히 그릇된 신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므로 신성의 명예를 참 하나님에게 서 빼앗아 그릇된 신들에게 이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러나 실로 세상은 오늘날도 가증스러운 미신들로 여전히 열중하고 있고 우둔하고 거의 어리석은 의식들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 는 있습니다. 곧 이런 의식들은 어쨌든, 그래도 하나님의 예배의 일부분 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그러므로 누가 전도된 미신 없이 그 의식들을 지킨다면, 그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에서 아무것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사이 구별하기 위해 “아무래도 좋은 것”이라는 명칭을 부친 저 중립적인 의식들에 대해 그들이 여기서 말하 는 것이라면, 나는 그 의식들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지 않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립적인 의식이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불경건 함과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표시되는 저 의식들을 포함하고 있을 때, 우 리는 성경에서 끄집어낸 몇 가지 예를 통해 그들이 얼마나 서투르게 주 장하는가를 드러낼 것입니다. 놋 뱀은 한때 세워졌던 특별한 목적을 위해 ( 민 21:8, 9 ) 사용하길 중단한 뒤에도 후손들에게 남겨져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영원한 기념물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선조들을 모방한다는 핑계 아래 후손이 놋 뱀에 신적인 경배를 바치기 시작했을 때, 선한 종교라는 원래적 이유를 여전히 내세웠다는 것과, 그것이 주권자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의 영광을 위해 경배되어야 한다는 게 도처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였음 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주께서 이런 맹목에 떨어지는 것을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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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은 자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어떤 미신과도 무관하지만, 다만 백 성의 일반적인 어리석음과 열광에 적응하기 위해 이 우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역사가 이야기했다면 ( 왕하 18:4 ), 누가 이런 악한 기만을 즉시 혐 오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이런 기만은 모든 경건한 자의 분노를 사는 게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쓸데없이 우쭐대지 않으려면 우리가 한 조각의 빵 앞에 무릎을 꿇는 불의는 뱀 앞에 경배하는 것 못지않게 극악 한 일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가 만든 송아지를 보여 주고 오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를 이집트 땅 밖으로 올라오게 한 너의 신이라고 비꼬아 말했을 때 ( 출 32:4 ), 이것은 그의 진정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며 근래에 얻은 자유를 준 자임을 부인하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가 자 기들 곁에 임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송아지 안에서 하나님을 보려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아론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축제를 선포 했을 때 그들은 그것에 대해 반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 에게 드리기 원했던 영광을 일종의 가시적 표상으로서의 송아지에게 돌 렸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어떤 미신도 없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럼 에도 분명히 그들은 이처럼 황금 송아지 앞에서 경배하기 위해 무릎 꿇 는 것이 이집트의 황소 앞에 행한 것보다는 더 나은 또는 더 용납할 만 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
여로보암도 그가 어떤 생각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는지 물어본다면, 새 로운 신들을 취할 의도가 없었고 하나님에게서 공공연히 이탈하려는 생 각도 없었습니다 ( 왕상
12:25-33 ) .
그는 참 종교를 경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더럽히려 하는 거룩한 의식들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이 런 미친 짓으로 몰아넣은 것은 다만 불신앙이었을 뿐입니다. 성경이 이 두 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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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상태를 자세히 주시해 본다면, 그 것을 먼저 늑대의 아가리에서 빼앗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 로 회복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함정에서 구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목장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류의 미로에서 빼내지 않고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일꾼들이 종교를 전복시키고 멸망시키는 일을 진행했으므로, 종교는 그
* * * 칼
뱅
총
서
들의 불경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 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소하고 매장하는 일을 진행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했으므로, 진리는 그들의 거짓에서 보호되지 않는 한 빛 가운
<기독교 강요/초판, 1536>
데 드러날 수 없습니다. 저 탁월한 파수꾼과 목자들은 무엇 때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문에 있습니까? 그들은 칼이 먼 곳이 아니라 매우 가까운 목 에 있음을 봅니다. 그들은 양 떼가 늑대의 함정에 접근하고 있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잡혀 이빨로 찢기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도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만사가 평안한 것처럼 게으른 안식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들이 공공의 안정에 대한 염려는 제쳐 놓고 도리어 자기 자신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에 대해 염려하고 있음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자
7
- <두 서신>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77-6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8,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7
Jean Calvin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