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의 신학적 읽기를 위한
방법론 고찰
1. 서론
요한계시록의 풍성한 신학적 자산은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통일성과
정경 전체 문맥에 비추어 읽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본서는 요한계시
록 읽기의 더 나은 방법론을 위해 문학비평과 정경비평 분야에서 사용
하는 접근법들을 통합하고, 이렇게 통합한 접근법을 요한계시록 2122장 해석에 적용하겠다.
브레버드 차일즈( Brevard S. Childs ) 가 제안한 정경적 접근법이 이런 방법론의 출발점이 된다.1) 요한계시록을 포함해 모든 성경책을 기독 교 성경으로 해석하는 정해진 구조 체제는 두 언약 정경이다.
문학비평 분야에서 나온 상호 본문성( intertextuality ) 은 요한계시록 연
1) 브레버드 차일즈의 주저는 다음과 같다. Biblical Theology in Crisis (Philadelphia: Westminster, 1970);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구를 크게 진전시킬 잠재력이 있으나 최근까지 제대로 활용되지 못
했다. 아마 다른 어떤 성경책보다 요한계시록은 상호 본문 참조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성경 전체 이야기와 강력히 결부될 것이다. 요한계시
록은 정경의 많은 부분을, 공식적으로 인용하지 않아도, 인유하거나
반영한다. 이 연관성을 탐구하고, 이런 인유나 반영이 창출하는 신학
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이 정경의 결말로 자리가 배치된 것은 주의
를 더 기울일 가치가 있다. 초기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정경의 특별한
자리( 끝 ) 와 문학적 기능( 결말 ) 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정
경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책이라는 기대를
야 한다.
정경의 결말로 접근해
요약하면 본서의 목적은 요한계시록의 정경 중심 읽기를 위한 방법
론을 제시하고, 그 방법론을 요한계시록 21-22장 해석에 적용하는 것 이다.
2. 성경의 통일성 회복의 필요성
성경의 통일성 문제는 성경신학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
였다. 여기서 성경의 통일성이란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의 정경 이
야기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영감받 은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기독교의 신학과 실천의 핵심 원천으로 사
용되어야 한다. 성경은 어느 부분이든, 전체 이야기가 시작부터 결말 까지 점진적으로 펼쳐진다고 이해하고 전체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2)
2) 딤후 3:16; 눅 24:25-27.
기독교 출범 초기 몇 세기와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회와 학계에서 다
대체로 성경의 통일성을 전제로 삼았다.3) 그러나 18세기와 19세기에
역사비평이 성경 연구를 지배하게 된 이후로는 성경의 통일성에 대해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성경 연구는 구약 연구와 신약 연구로 분
리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 거기서 오경 연구, 역사서 연구, 선지 서 연구, 공관복음 연구, 바울과 요한 문헌 연구 등으로 또 세분되었다.
심지어는 J, E, P, D 또는 Q, L, M과 같은, 어떤 정경 책들의 출처로 추
정된 자료를 다루는 연구도 전문 분야가 될 수 있다. 이런 단편적 연구
를 낳은 온갖 철학적 이유와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본서의 범
주에서 벗어난다. 여기서는 성경 연구가 이런 결과에서 아직 회복하는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4) 제럴드 브레이는 다음과 같
이 말한다. “19세기 초에 신학적 이유로 일어난 분리가 이제는 방대한
관련 자료 때문에 실제로 필수적이다. 우리는 성경 각 책에 자체 전문
연구 부서를 두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으나 그날이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5)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 학자가 성
경의 통일성 관념을 포기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성경 연구 분야가 너무 전문화되었기 때문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통일성을 주장할 이론
3) 예외가 있었다. 마르키온은 이미 2세기에 성경의 통일성을 부인했다. 기독교 정경의 발전은 마르키온의 도전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정경의 형성 및 관련 문제들에 대 해서는 다음을 보라. Bruce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xford: Clarendon, 1997); Lee M. McDonald, The Formation of the Christian Biblical Canon (Peabody, Mass.: Hendrickson, 1995); Hans von Campenhausen, The Formation of the Christian Bible (Philadelphia: Fortress, 1972).
4) 다음을 보라. Hans W. Frei,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 A Study in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y Hermeneutic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4).
5) Gerald Bray, Biblical Interpretation: Past and Present (Leicester: Apollos, 1996), 476.
적 기초가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통일성을 버리고 성경 자료의 역사비평 연구로 들어간 시점
은 1787년 3월 31일에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요한 가블러( Johann Phillip
Gabler ) 가 행한 취임 강연이었다.6) 게르하르트 하젤에 따르면, 이때부터
“성경신학은 교의학에서 완전히 독립해 순전히 하나의 역사학 분야로
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7) 가블러는 저자들이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생각한 것은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탐구를 통해 결정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 성경에서 교의학에 사용할 수 있는 원자료가 무엇인지 결정되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월이 흐르자, 성경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하
는( understanding ) 신학자가 아니라 성경 자료를 “철저히 파헤치는”( overstanding ) 역사가의 역할을 맡았다. 그 결과 교회( ‘에클레시아’ ) 와 학계( ‘아
카데미아’ ) 는 따로 분리된 길을 갔다.8) 교회와 학계는 여전히 성경에 관
심을 두긴 해도 관심을 두는 이유가 각기 달랐다.9) 학자들은 성경을
6) 강연 본문은 다음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Werner Georg Kümmel,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 (Nashville: Abingdon, 1972), 98–100. 가블러는 요한 잘로모 제믈러(Johann Salomo Semler, 1725–1791)와 고틀리프 트라우고트 자카리에(Gotthilf Traugott Zachariä, 1729–1777)의 관념을 기반으로 삼는다. 가블러와 그의 선임자들에 대해서는 다음
을 보라. Henricus Boers, What Is New Testament Theology? The Rise of Criticism and the Problem of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1979), 23–24.
7) Gerhard Hasel, NewTestament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8), 22.
8) 점점 많은 학자가 지금은 성경의 통일성 회복을 요구하지만, 가블러와 브레데의 정 신을 이어받은 다른 학자는 성경신학은 성경의 역사적 연구에 흥미가 있는 학문적 관심을 둔 폭넓은 세속적 독자의 목적을 위해 믿음의 헌신과 교회의 관심을 피해야 한다는 관점을 옹호한다. 다음을 보라. Heikki Räisänen, Beyond New TestamentTheology:AStoryandProgramme (2d ed.; London: SCM, 2000), 8. 9) 로버트 월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비평이 방법론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회가 기독교 성경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갖는 관심을 떨어뜨린다”(‘Reading the New Testament in Canonical Context’, in Hearing the New Testament:Strategies for
성경의
종교 발전을 연구하기 위한 근원 자료로 인식했다.10) 교회는 성경을
주로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을 위한 도구로 간주했다.
종종 그렇듯이 세월이 지나면 학문적 관념들이 교역자의 학문적 교
육을 통해 교회에 침투한다. 그 결과 19세기에 독일 개신교는 역사비
평 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잉글랜드 교회, 로마 가톨릭, 심지어는 정 교회도 정도는 덜하지만 결국 똑같은 위기에 직면했다.11)
성경 연구 분야에서 성경의 통일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세분화함으로써 자료 중심적이지만 신학적 초점이 없는 성
경 연구 자료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길 바라 는 자에게는, 교회와 신학교에서 만족스러운 성경 해석을 하려면 역사 적이고 언어적인 자료
12)
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전통적으로 성경책으로 간주하는, 그러므로 그 들의 믿음과 삶의 규범적 기초로 삼는 문학 작품에 대해 전체론적인, 하지만 학문적인 접근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3. 전체론적 방법론에 대한 고찰
속에서, 차일즈는 정경적
Interpretation [ed. Joel B. Green; Grand Rapids: Eerdmans, 2010], 372).
10) 다음을 보라. Hasel, NewTestamentTheology, 23–24.
11) 다음을 보라. Robert Morgan and John Barton, Biblical Interpretation (Oxford Bible Ser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52.
12) 정경의 통일성을 파괴할 잠재력이 역사비평에만 있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역사 비평이 항상 정경의 통일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점도 사실이 아니다). 일부 급진적 독자 반응 비평도 정경의 통일성보다 독자의 이데올로기에 우선권을 둔다. 다음을 보라. Kevin J. Vanhoozer, ‘The Reader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in Green, ed., HearingtheNewTestament, 265–266.
접근법 곧 정경의 통일성 관념을 강조하는 접근법을 주장했다. 차일즈
의 방법은 성경 연구 분야에서 일어날 중대하고도 지속적인 변화를 알
리는 신호탄이었다.13) 차일즈의 주장은 찰스 스칼리즈 ( Charles J.
Scalise ), 로버트 월( Robert W. Wall ), 마크 브레트( Mark G. Brett ) 그리고 차
일즈의 방법론을 비판하거나 수정하거나 기반으로 삼은 다른 학자들
을 통해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성경 연구 분야에서 성경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법을 추구한 또 하나
의 발전은 문학비평이다. 문학비평은 문학으로서 성경에 관심을 두고 성
경의 언어, 심상, 형식, 내용과 같은 심미적 국면에 주의를 집중한다. 문
학비평은 장르, 문맥, 상호 본문 문제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쓰기와
읽기 행위를 분석하면서 폭넓은 문학 분야에서 얻은 경험을 성경 연구
에 적용한다. 문학비평가는 반드시 신학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연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비평가의 이론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무척 다양한 문학 연구 방법론 가운데 서사 비평, 독자 반응 비평, 상
호 본문성이 성경 연구에 파장을 일으켰다. 서사 비평은 정경의 통일
성을 진지하게 취할 잠재력이 있다. 말하자면 서사 접근법은 포괄적
성경 이야기를 연구하는 데 어휘와 개념 구조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서사 비평은 포괄적 성경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어휘와
개념 구조를 성경 연구에 제공한다. 서사 비평은 최종 형태의 본문에
담긴 성경 이야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역사비평이 장악한 주도권을
약하게 만든다. 독자 반응 비평도 정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 목표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독자 반응 비평은
독자가 같은 본문을 얼마나 다르게 ‘듣는지’, 그리고 독자가 본문들 사
이에 자연스럽게 있는 ‘간격’을 어떻게 채우는지 설명한다. 또 독자 반
13) Bray, BiblicalInterpretation, 490.
청자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판단하는 한 요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상호 본문성은
본문이 다른 본문들과 이루는 관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본문을 상호
본문 참조에 비추어 읽고 듣게 되면, 본문이 다른 집단의 본문과 하나
로 묶인다. 정경비평, 그리고 문학비평의 이런 분야가 내 통합적 방법
론의 중요한 소재다.
a. 정경적 접근법
(1) 브레버드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법
브레버드 차일즈는 비평적 성경 연구에 정경적 접근법을 도입했다.
차일즈는 『위기에 처한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 in Crisis ) 에서 성경신 학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79년에 내놓은 작품 『구약 성경
서론』(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 은 이 변화를 제시했다.
말하자면 지금은 ‘정경비평’14)으로 불리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했다.
1960년대에 양식비평과 전승비평 분야에서 교육받은 차일즈는 양 식비평이나 전승비평 방법이 신학적으로 성경에 합당하지 않음을 깨 달았다. 신학교에서 공부한 목사들은 성경을 비평하고 수정하는 관점 14) “정경비평”(canonical criticism)이라는 말은 제임스 A. 샌더스가 자신의 작품 Torah and Canon (Philadelphia: Fortress, 1972)에서 처음 사용했다. 차일즈 는 정경비평이라는 말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고 거부했다. 다음을 보라. Brevard Childs, ‘The Canonical Shape of the Prophetic Literature’, Int 32 (1978): 46–55; James A. Sanders, ‘Scripture as Canon for Post-Modern Times’, BTB 25 (1995): 60. 차일즈는 자신의 방법을 ‘정경적 접근법’(canonical approach)으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학계는 ‘정경비평’이라는 말을 받아들였 고, 나는 이 두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겠다.
을 지지하는 신학 교육이, 정경 형태를 갖춘 성경이 대체로 믿음과 삶
의 규범으로 읽히는 교회 배경에서 보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성경
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신학적 교육이 성경의 신학적 읽기의 모델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
이다. 성경신학 분야는 믿음의 헌신을 필수적으로 동반하지 않는 순전
히 역사적·분석적 학문이 되고 말았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차일즈는 성
경 연구에 대한 역사 중심 접근법과 교회의 규범적 성경의 필요성 사
이에 점점 긴장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차일즈는 역사비평 방법
에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차일즈는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성경신학은 이를테면 역사비평 서론에 한 층
을 더하는 것으로는 행해질 수 없다고 확신했다.”15) 차일즈의 의견에
따르면, 필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가벼운 수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
운 접근법이었다. 차일즈는 학계의 성경 연구와 교회의 성경 사용 사
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길 원했다. 차일즈는 정경에 초점을 맞추면 이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보았다.
제임스 메이스는 이 새로운 접근법의 본질을 “‘원본’ 관념에서 ‘최
종’ 관념으로 가치가 이동하는 것”이라는 말로 정확히 표현한다.16) 학
자들은 계몽시대 이후로 편집을 밝히고 원문을 복원함으로써 끈질기
게 원본을 찾아내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차일즈가 보기에 교회와 신
학에 권위가 있는 것은 그 과정의 최종 산물이다. 본문의 바탕에 놓인
역사적 과정의 실재성을 부인하지 않아도, 차일즈가 보기에 전체성과
연속성이 있는 정경이 오직 교회가 승인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계
시 역사의 충분한 결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규범적 역사가
15) Brevard S. Childs, ‘A Response’, HBT 2 (1980): 206.
16) James L. Mays, ‘What Is Written: A Response to Brevard Childs’ IntroductiontotheOldTestamentasScripture’,HBT2 (1980): 159.
끝에 도달한 성경 본문의 최종 형태에 있다.”17) 정경 전체는 정경 부분
들의 합보다 크고, 정경 전체에 한 책을 추가하게 되면 정경에 대한 해
석 방식도 달라지는 법이다.
차일즈는 “정경”이라는 말을 “고대 이스라엘 안에서, 특히 포로 이
후 시대에 존속한 종교 공동체 안에서 경전으로서 규범적 기능을 행하
도록 본문들을 수집하고 선별하고 배치하는 일을 포함한 역사적 과
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한다.18) 최종 산물( 성경 ) 과 최종 산물까지
이르는 역사적 및 신학적 과정을 다 포함하는 정경에 대한 이런 정의
는 차일즈 자신의 연구가 종종 가리키는 것보다 폭이 더 넓어 보인다.
실제로 차일즈는 정경을 본문들을 “수집하고 선별하고 배치하는” 과
정의 결과로 강조한다.19)
(2) 차일즈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
역사비평학자에서 정경비평학자 동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경학
자가 차일즈의 방법론을 비판했다. 주된 비판은 두 방향에서 나온다.
첫째는 정경 과정의 최종 산물을 신학의 기초로 삼는 것을 의심하는 자에게서 나오고, 둘째는 차일즈의 방법을 성경 본문의 역사적 지시대
상, 따라서 성경 사건들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위협으로 보는 자에게 서 나온다.20)
17) Childs, ‘Canonical Shape’, 48.
18) Brevard S. Childs, ‘The Exegetical Significance of Canon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in CongressVolume:Göttingen,1977 (ed. J. A. Emerton et al.; VTSup 29; Leiden: Brill, 1978), 67.
19) 제임스 바는 특히 이런 모호함 때문에 차일즈를 비판했다(Holy Scripture:Canon,Authority,Critic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76–77).
20) 차일즈가 학자들과 벌인 논쟁을 상세히 개관한 것은 다음을 보라. Samuel Cheon, ‘B. S. Childs’ Debate with Scholars about His Canonical Approach’, AJT 11 (1997): 343–357.
첫 번째 비판은 데이비드 포크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크는
본문의 초기 단계에 대해서는 학문적 일치가 없으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 곧 정경으로 작업해야 한다는 차일즈의 결론에 불만을 토로한다.
차일즈의 방법에 따르면 역사는 신학과 의미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포크의 주장은 차일즈는 왜 “신학을 위한 토대가 신학 과정의 최종 산
물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21)
두 번째 비판은 존 오스왈트의 작품에서 들려온다. 오스왈트는 차일
즈의 접근법은 성경의 영감에 대한 이해를 재고하도록 강요할 것이라
고 우려한다. 오스왈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일즈의 견해에 따르면 영감이 저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백 년, 아니 사실은 수천 년 동안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신앙
공동체에 임한다. 이때 그 전통들이 최종적으로 공동체가 무엇인지
아주 잘 표현할 때까지 그 전통들에 대해 말하고 다시 말하는 것이 그 전통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본문의
정경 형태가 온전한 영감이 임하는 유일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22)
오스왈트는 복음주의자가 과연 영감이 저자에게 임한다는 전제를
기꺼이 포기하고 대신 공동체가 정경으로 받아들인 본문 속에 임한다
는 견해를 취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 오스왈트는 차일즈가 역사를
낮게 평가한다고 비판한다. 오스왈트는 ‘차일즈는 이야기 배후에 역사
21) David P. Polk, ‘Brevard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HBT 2 (1980): 170.
22) John N. Oswalt, ‘Canonical Criticism: A Review from a Conservative Viewpoint’, JETS 30 (1987): 318.
적 사건이 있는지가 본문의 권위에 대한 사람의 견해에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주장한다. 오스왈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성
을 무시하고 결론( 성경 ) 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경비평학자들의 논리적
결함이다. 오스왈트는 차일즈의 방법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다음과 같
이 요약한다.
정경비평은 우리에게 성경책을 문학적 온전함에 따라 해석할 것
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발전이다. 게다가 성경책
들과 그 책들의 묶음이 배열되는 방식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도전을
준다는 점에서도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계시의 역사
적 타당성과 관련된 곤란한 문제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 한다는 점에서는 위험하다.23)
브루스 버치는, 더글러스 나이트( Douglas A. Knight ) 의 견해를 따라, 역사에 중점을 둔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즉 역사 시대 이전 본문에서
인식할 수 있는 단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류되어야 하는지 묻 는다. 버치의 견해에 따르면, 차일즈는 역사적 배경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전통들을 낳은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만 가치를 부여 한다. 버치는 다양한 단계에 대한 역사적 조사가 정경의 최종 형성을 이해하는 데 유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버치는 이렇게 묻는다. “정 경은 다만 여행 목적지에 대한 기록인가, 아니면 여행에 대한 기록이 기도 한가?”24)
23) 같은 책, 325.
24) Bruce C. Birch, ‘Tradition, Canon and Biblical Theology’, HBT 2 (1980): 122.
(3) 샌더스의 “정경 과정”과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법”
제임스 샌더스는 정경비평과 관련해 아마 두 번째로 유명한 학자일 것이다. 정경비평과 관련된 샌더스의 두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정경과
공동체: 정경비평에 대한 안내』( Canon and Community: A Guide to Canonical
Criticism ) 와 『거룩한 이야기에서 거룩한 본문까지』( From Sacred Story to Sacred Text ). 25) 샌더스는 차일즈가 신학은 학문적 객관성의 틀 안에서
가 아니라 믿음의 틀 안에서만 성공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과, 성경신학을 행할 때 성경의 통일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을 학계에 환기함으로써 성경 연구의 진정한 필요를 일깨웠다는 점을
인정한다. 두 성경 다 “독자적으로, 그리고 함께 묶여 하나님의 한 목
적을 증언한다.”26) 샌더스는 또 차일즈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
자들의 손에서 성경을 어떻게 해방하고 교회 공동체가 성경에 다가가
도록 얼마나 크게 도왔는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전통 밖에서
의미를 찾는 자를 비판한다. 샌더스는 오늘날보다 1980년에 더 익숙
했던 신학 용어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다 똑같은 일을 했다. 다만 자유주의
자는 보수주의자보다 초기 ‘저자’에게는 본문을 덜 귀속시킨다. 자 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다 개인들 및 원래 화자들에게 거의 오로
지 권위를 부여했다. 보수주의자는 어떤 책이나 본문의 모든 말을 개인이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자유주의자는 거기서 부착물을 벗 겨 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다 어떤 식으로든 공
25) James A. Sanders, Canon and Community:A Guide to Canonical Criticism (Philadelphia: Fortress, 1984); From Sacred Story to Sacred Text (Philadelphia: Fortress, 1987).
26) James A. Sanders, ‘Canonical Context and Canonical Criticism’, HBT 2 (1980): 174.
성경의 마지막
동체를 간과했다.27)
차일즈와 샌더스는 공통점이 많기는 해도, 정경비평에 대한 그들의
접근법은 차이가 상당히 크다.28) 샌더스는 전승사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문서들이 신앙 공동체를 통해 현재 형태가 될 때까지 거친 과정
을 강조한다. 이 ‘정경 과정’은 교회와 신학의 지속적 과제다. 샌더스
는 성령은 성경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정경 과정 모든 길에서 곧 청자가 원래 화자에게 들은 말을 이해한 것을 거쳐 제자들
이 믿은 것으로 말해진 것까지, 구두든 기록이든 말해진 것에 대해 이 후 편집자가 다시 기록한 것까지, 그리고 현재의 신앙 공동체가 본문 에 대해 듣고 이해하는 것까지” 역사하셨다고 믿는다.29) 샌더스에 따
르면, 정경 과정은 결코 끝에 이를 수 없다. 정경은 여전히 열려 있고 ( 재 ) 창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더스는 정경의 종결과 같은 전통적 이
론을 논박하고, 쿰란 두루마리와 나그함마디 문서는 신자 공동체 안에
서 신축성과 다원성을 가진 열린 정경을 증명한다고 주장한다.30) 샌더
스는 4세기에 이루어진 정경의 종결이 계속 진행 중인 정경 과정에 큰 차이를 만들지 못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샌더스는 종결이 있었고 최
종 형태가 해석학에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차일즈와 근본적으로 다
27) 같은 책, 183.
28) 샌더스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Canonical Context’이라는 논문에 나타난 차일 즈의 주장을 폭넓게 비판한다. 샌더스는 또 자신의 책, From Sacred Story to Sacred Text에서 한 장을 할애해 자신과 차일즈의 차이점을 다룬다.
29) Sanders, CanonandCommunity, xvii.
30) 같은 책, 12. 마르틴 헹겔은 적어도 구약 정경은 기독교 교회에 여전히 끝이 열려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헹겔은 신약 성경이 구약 정경의 결론, 목표, 성취이므로 교회가 엄밀히 닫힌 구약 정경을 필요로 하겠느냐고 묻는다(Septuagint as Christian Scripture: Its Prehistory and the Problem of Its Canon [Old Testament Studies; Edinburgh: T. & T. Clark, 2002], 125–126).
르다. 샌더스는 이렇게 말한다. “정경 과정은 구두 전승의 첫 번째 반
복/암송까지 올라가 시작되고, 오늘날도 종결을 넘어 계속된다. 정경
으로서의 성경의 기능은 정경 과정을 식별하고 지금까지 신앙 공동체
에서 계속되는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다.”31) 샌더스의 방법은 상대
주의를 허용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바로 차일즈가 성경의 최
종 형태에 최종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차일
즈에 따르면 정경 과정은 이미 끝났다. 성경에 더하거나 뺄 수 있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초기 교회가 사도 전승과 이후 교회 전승을 날카롭
게 구분했다는 사실은 차일즈의 주장을 뒷받침한다.32)
샌더스는 차일즈가 최종 형태의 본문을 고정된 성경책으로 택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에서 차일즈의 방법의 가장 큰 난점을 본다. 차일즈
는 마소라 본문을 최종 형태의 본문으로 보았다.33) 샌더스가 이런 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마소라 본문이 “기독교 이후” 작품이고 “랍비 성
향이 강하며”, 그러므로 비교적 늦게까지 기독교 공동체와 관계가 없
었기 때문이다. 마소라 본문에 초점을 맞추면 초기 교회가 칠십인역을
그들의 성경으로 사용한 사실이 무시된다. 샌더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경은 참된 본질상 단순히 고정적이지 않고 신축성이 있다. 우리는
모든 본문과 모든 정경과 모든 공동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34)
샌더스와 차일즈의 또 한 가지 차이점은 샌더스가 고등비평을 높이
평가하고, 고등비평을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생각하며, “다만 고등비평이 악용되거나 목적 자체로 취해지면 또는 권위 문제
31) Sanders, ‘Scripture’, 62.
32) Sanders, ‘Canonical Context’, 202.
33) 같은 책, 188. 샌더스는 이 점에 대해 많은 동지가 있다. 예컨대 다음을 보라. McDonald, Formation, 299–309.
34) Sanders, ‘Canonical Context’, 187.
성경의 마지막
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는 점에 있다.35) 샌
더스는 정경비평을 다른 비평 형식들의 논리적 후편으로 본다. 샌더스
는 ‘성경 연구는 자기 교정 능력이 있고, 어떤 잘못된 길도 조만간에
고쳐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다. 차일즈는 더 안전한 영역을 찾고, 그 영역을 고정된 본문 형태에서 찾아낸다.
차일즈는 기록된 정경 본문에서 의미를 찾고, 샌더스는 본문 뒤에
있고 본문과 함께 있는 공동체에서 의미를 찾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 할 듯하다. 차일즈는 누구의 정경과 어떤 본문 문제로 씨름하는 한편,
샌더스는 어떤 공동체와 누구의 해석 문제로 씨름한다. 두 학자가 다
역사 대대로 성경 본문을 보존하고 해석 공동체를 이끄신 성령의 역사
에 의존한다.
(4) 차일즈와 샌더스를 넘어
마크 브렛은 현대 해석학의 설명에 비추어 정경적 접근법을 수정하
려 시도한다. 브렛은 새로 발전한 문학 이론과 사회 과학을 사용하고,
그 가운데 한스 프라이( Hans Frei ), 조지 린드백( George Lindbeck ), 로널 드 티먼( Ronald Thiemann ) 이 전개한 “본문내”( intratextual ) 신학이 있다.36)
브렛은 성경학자는 정경비평을 역사비평을 대체하는 용도가 아니라
성경에 대한 많은 접근법 가운데 하나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브렛은 포스트모던 신학을 위한 추가 접근법을 제공하려 애
쓰고 정경적 접근법의 잠재성도 인정하는 다원주의자다. 브렛은 차일
즈가 전개한 정경적 접근법과 샌더스가 전개한 정경비평을 날카롭게
35) 같은 책, 192.
36) 다음을 보라. Mark G. Brett, Biblical Criticism in Crisis? The Impact of the Canonical Approach on Old Testament Studi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156.
구분한다. 브렛은 샌더스의 이론을 선호한다. 즉 샌더스의 이론이 더
발전적이고 지적으로 자극을 주며 다원적이라고 생각한다. 브렛은 차
일즈의 접근법에서 지나친 단순화 경향을 보고, 차일즈가 본문의 최종
형태를 강조하는 태도는 너무 독단적이라고 주장한다. 브렛은 차일즈
를 본문의 최종 형태를 밝히는 것을 돕는 곳에서만 역사비평 방법을
주석에 사용하는 “해석학적 일원론자”로 단정한다.37)
로버트 월과 유진 렘시오는 자신들의 저서 『정경으로서의 신약 성 경』에서 정경비평을 발전시키는 데 힘쓴다.38) 월과 렘시오도 대체로
샌더스의 이론을 지지한다. 독자를 위한 서론에서 월은 정경과 공동체
의 지속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교회가 현세대의 신자가 다음 세대의
신자를 위해 기독교 신앙과 삶을 규정하고 가르치는 신앙 규칙으로서
의 성경의 역할에 비추어 정경 형태의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읽어
야 하는지”를 붙들고 씨름한다.39) 월과 렘시오는 교회론 관심사를 염
두에 두고, 교회가 신앙 규칙으로 이 본문들을 읽는 법을 안내하기 위
해 정경 과정 동안에 성경 문서들에 추가된 정경의 순서, 명칭, 서언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월은 또 성경 자체에서 확인되는 해석 전략을 연 구하는 일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저자들이 성경 본문을 작
성할 때 도움을 준 해석학이 이런 같은 본문을 해석하는 현대 해석자 를 이끄는 역할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이다.”40)
37) 같은 책, 42.
38) Robert W. Wall and Eugene E. Lemcio, eds., The New Testament as Canon:A Reader in Canonical Criticism (JSNTSup 76; Sheffield: JSOT, 1992).
39) Robert W. Wall, ‘Introduction’, in Wall and Lemcio, eds., The New Testament as Canon, 16.
40) 같은 책, 17. 성경 저자들 자신의 문서 속에 나타난 해석 방법을 찾아내 이 방법을 우리 자신의 해석 지침으로 사용하는 것을 다룬 것은 다음을 보라. I. Howard Marshall, Beyond the Bible: Moving from Scripture to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4). 특히 그의 논문 ‘The Search for Biblical
성경의 마지막
나아가 월은 “정경적 문맥과 정경적 대화” 부분에서 정경비평에 대
한 자신의 접근법을 설명한다.41) 월은 역사비평을 반대하고, 교회 자
산으로서의 성경의 역할을 확언한다. 월은 학자들이 종교적 목적이 아
니라 학문적 목적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42) 월은 나아가 본문
의 의도된 의미는 저자의 자산이 아니라 교회의 자산이라고 말한다.43)
월은 해석은 공동체의 임무로, 해석의 목표는 기존 공동체에 대한 하
나님의 의도를 찾는 일에 있다고 본다. 월은 성경의 권위는 교회 안에 서의 성경의 기능 및 용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실현될 때 비로소 그 말씀이 성경이 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월은 성경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지 저자들이 살던 고대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역
사적 과제와 거리를 둔다. 나는 월의 성경에 대한 목회적 접근법을 높
이 평가하고, 그가 제시한 수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월
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너무 멀리 간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정경비
평에 대한 내 설명의 해석적 전제는 현재의 독자는 저자가 원래 의도
했거나 저자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구문에서 똑같은 의미를 끌어내
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는 새로운 독자층을 위해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44) 의도된 의미는 그 의미를 식별할 수 있는 곳에서 찾
아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내가 보기에 원 독자에게 초점을 맞춘 역사적 연구는 정경 읽기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필요한
Principles’, 55–79가 이와 관련되어 있다.
41) Robert W. Wall, ‘Canonical Context and Canonical Conversations’, in Between Two Horizons: Spanning New Testament Studies and Systematic Theology (ed. J. B. Green and M. Turner; Grand Rapids: Eerdmans, 2000), 165–182.
42) 같은 책, 168.
43) 같은 책.
44) 같은 책, 174.
것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알려질 수 있는 어떤 실재와 원래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원래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제한적이고 가변적인 재구성은 성경 읽기의 기준
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책의 역사적 상황을 탐구하면 그 책이
원래 배경 속에서 가졌을 영향력을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읽기 경험을 위해 이런 의도된 영향력에 대한 약
간의 암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월은 샌더스가 주지 못한 기준을 제시했다. 말하자면 월은
우리의 주석을 안내하는 것에 목표가 있는 기준을 보여 주었다. 월은
그 기준을 교회의 ‘레굴라 피데이’( regula fidei, “신앙의 규칙” ) 에서 찾아
낸다.45) “신앙의 규칙과 일치하지 않으면 어떤 성경 해석도 교회의 신
학적 형성에 공헌할 수 없다.”46)
월은 또 상호 본문성 관념도 중요하게 여긴다. 월은 상호 본문성을
성경 저자들이 “그들의 성경책이 의미한 것과 그 책이 지금 의미하는
것 간에 쐐기를 박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일종의 증거라고 본다.47) 성
경 저자들은 자기들이 정경으로 간주한 본문( 히브리 성경 ) 을 사용한 것
처럼 정경이 된 새로운 본문( 신약 성경 ) 도 기록했다. 월은 이 기록 작업
을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에 대한 역동적 참여로 본다.
월에게는 비평 방법으로 상호 본문성이 문학적 방법이자 신학적 방 법이다. “문학적 유사함 때문에 처음에 함께 연관된 어떤 본문들은 신 학적으로도 유사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성경 저자에게 중요하게 여겨 진다.”48) 상호 본문성은 출처 및 영향 문제도 아니고, 단순한 문학적
45) Ivor J. Davidson, TheBirthoftheChurch:FromJesustoConstantine,A.D. 30–312 (Grand Rapids: Baker, 2004), 168–170.
46) Wall, ‘Canonical Context’, 173.
47) 같은 책, 169.
48) Wall, ‘Introduction’, 18(강조 표시 원문).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상호 본문성은 정경의 신학을 따르도록 이끄는
안내도다. 상호 본문성은 문서의 문학적 통일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이 아니라, 신학적 해석을 위해 문서들 사이의 연관성과 그 연관성에
담긴 함축성을 탐구한다. 상호 본문성은 위장된 자료비평이 아니다.
찰스 스칼리즈도, 차일즈의 방법론을 기반으로 삼아, 성경 해석에 대 한 전통적 역사비평 접근법과 복음주의 성경 교리를 다 진지하게 취하
는 탈비평적 정경 해석학을 전개하려 힘쓴다. 스칼리즈는 이 방법을 “탈비평적 복음주의 신학”( postcritical evangelical theology ) 으로 부른다.49)
스칼리즈는 전통적인 전( 前 ) 비평적 성경 해석과 역사비평 해석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 애쓴다. 스칼리즈는 차일즈의 방법론을 비판하
고 수정하며, 폴 리쾨르( Paul Ricoeur ) 의 문학비평과 이론에서 나온 요
소를 포함하는 통합적 접근법을 제안한다.50) 스칼리즈는 복음주의 신
학이 개인적 경험이나 독단적 영감 이론에 권위를 두는 방식에서 벗어
나게 하려 노력한다. 스칼리즈는 성경 권위의 다른 위치를 제안하고
이렇게 말한다. “인간적으로 보면……성경의 권위는 성경이 기독교 공
동체 안에서 성경책으로 기능했고, 또 계속 성경책으로 기능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 중심 관점에서 문제를 묘사하면……성경책의 권위는 하
나님이 성경책에 주신 목적에 있다.”51) 스칼리즈에 따르면 성경책의 권위는 ( 최종 ) 형태가 아니라 용도에 있다.
월과 마찬가지로 스칼리즈도 성경의 상호 본문성을 크게 중시할 것 을 요구한다. 스칼리즈는 상호 본문성이 “단순히 성경책의 통일성을 해석의 자명한 공리로 가정한 전통적인 ( 전비평적 ) 성경 해석과의 연관
49) Charles J. Scalise, Hermeneutics as Theological Prolegomena:A CanonicalApproach (StABH 8;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1994), 76.
50) 스칼리즈가 차일즈를 비판한 것은 같은 책, 43-74를 보라.
51) 같은 책, 90-91.
성을 보여 주고”, 현대의 문학비평 해석학, 특히 폴 리쾨르의 변증법적
읽기 이론을 성경 연구에 통합하므로 상호 본문성을 중요하게 본다.52)
스칼리즈는 상호 본문성이 성경 해석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접근법들
에서 핵심 역할을 맡을 것으로 믿는다.
돈 모건은 신앙 공동체가 대체로 전체론적 관점에 따라 성경에 접근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모건은 교회들이 성경을 작은 발췌 본문 중
심으로 읽거나 공부하고, 심지어 때로는 증거 본문으로 제시하는 것으
로 그친다고 지적한다. 정경을 전체론적 관점에 따라 읽는 일이 정경
을 소유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 흔하게 벌어지지 않는다. 일부 성
경 읽기 주기표를 보면, ( 동방 정교회의 예배에서 사실상 읽히지 않는 요한계시록
과 같이 ) 읽기에 아예 포함되지 않은 성경책도 있다.53) 그러나 모건이
지적하는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어쨌든 작은 부분을 공개적으로 읽
는다고 해서 성경 이야기 전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성
경 이야기 전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전체
론적 관점에 따른 읽기가 ‘부분’이나 ‘단편’에 대한 읽기의 통제 수단
이나 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말하자면 정경이 작은 부분을 이해하
기 위한 필수 배경을 제공하고, 확실히 특정 책들 안에서 다양한 메시
지를 서로 관련시키거나 책들을 서로 관련시킬 필요성을 낳는다.”54)
(5) 진행 방향을 위한 제안 정경적 접근법은 분명히 성경 연구의 초점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보여 주고, 이 변화는 계속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정경적 접
52) 같은 책, 92.
53) Donn F. Morgan, ‘Canon and Criticism: Method or Madness?’, AThR 68 (1986): 93. 동방 정교회에서는 거의 시행되지 않은 만성절 전례의 한 부분으로만 요한계시록이 읽힌다.
54) 같은 책, 93.
근법에 대해서는 답변해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여기서 핵심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은 기독교 신학을 위해 어떤 본문 을 정경으로 택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과거에 세
가지 답변이 있었다. 첫째, 원문이 신학의 권위적 근거라는 주장이 있
었다. 이것이 역사비평의 배후에 놓인 가정이었다. 성경의 원문을 찾
는 연구는 종교개혁 기간에 이미 시작되었고 역사비평 시대에 정점에
달했다.55) 그 결과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쩌면 중세 신학자나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작업한 어떤 본문보다 더 완전하고 정확한 재구성된 성경
본문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한 재구성이라도, 여전히 계속 변하는
학문적 견해나 이론에 입각한 재구성일 따름이다. 다만 원문이 참된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 본문에 대한 우리 확신은 계속 도
전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모든 단계의 본문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되었다. 샌더스는 모든
세대가 정경을 재창출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연루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여기서 문제는 경계 문제다. 모
든 세대의 독자가 다양한 문제를 들고 성경에 다가가지만, 우리는 청 자와 경배자로서 다가가고, 우리 당대의 관심사가 정경 이야기를 압도 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56) 정경 과정에 대한 샌더스의 주장을 인정 한다면 우리는 경계를 정해야 한다.
셋째, 본문의 최종 형태만이 권위가 있다고 주장되었다.57) 이것이 차
55) 네슬과 알란트 같은 학자들의 공헌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tephen Neill and Tom Wright, The Interpretation of the New Testament 1861–1986 (2d e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35–64.
56) 현재 우리는 정경에 대한 우리의 읽기를 바꾸려 시도하는 다음과 같은 성경 역본 들의 범람을 목격하고 있다. The Green Bible: Understand the Bible’s PowerfulMessagefortheEarth (New York: Harper Collins, 2008).
57) 다음을 보라. McDonald, Formation, 302.
일즈의 주장이다. 이 이론 역시 문제가 있다. 어떤 본문이 정확히 이런
“최종 형태”인지 정해야 한다. 차일즈는 마소라 본문을 구약의 그 본
문으로 옹호했다. 샌더스는 칠십인역이 예수와 초기 교회의 성경이었
고, 그러므로 칠십인역이 마소라 본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자체는 어느 정도 두 학자가 다 우리가 한 본문에 동조해야 한다
는 가정에 따라 작업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우리는 결론적으로 정경비평을 위해서는 해석자가 이 선택이
해석에서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한, 어느 한 본문을 택
할 수 있다는 모건의 주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방법
론 문제는 어떤 최종 본문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본문이 선택되는 것이다. “관건은 정경적 성경 본문은 종교 공
동체 안에서 기능하므로 그 본문에 대한 전체론적 해석을 제시하는 것
에 있다.”58) 브루스 메츠거도 초기 교회가 정경은 종결되었다고 인식
하긴 했어도, 이것이 “정경 책들의 본문의 신축성 없는 고정화”를 낳
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59) 본문은 이문들이 많고, 그중에서 선택
하는 것이 우리의 지속적인 역사적·신학적 임무이며, 심지어는 고정
된 정경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느 정도 변화 과정에 있다.
확실히 현대적이고 ‘더 나은’ 성경 번역을 내놓는 것도 지속적 관심사 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 해석에서 독자의 역할을 인정한 것은 샌더스가 성경 연구에 끼
58) Morgan, ‘Canon and Criticism’, 87. 분명히 교회는 여러 역본의 최종 형태 본 문(마소라 본문, 칠십인역, 페시타, 불가타, 개신교 정경)을 사용하고, 대부분이 교 회 당국의 중대한 지원을 받았다. 나는 다른 정경 순서, 본문의 이문, 심지어는 정 경의 한 부분으로 추가된 책들의 결과로 어느 정도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인 정한다. 하지만 이런 본문들의 차이들과 거기서 나온 신학들은 신앙 전통을 넘어서 면 대화 나누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큰 것은 아니다.
59) Metzger, Canon, 269.
성경의
친 중대한 공헌이다. 대대로 방대한 지역에서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석
한 다양한 독자와 공동체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세대
마다 정경을 재창조한다는 샌더스의 관념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샌
더스가 실제로 허용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샌더스는 제시하지 않
지만, 경계가 없으면 이 관념은 두 성경 정경의 역사적 정의에 따라 형
성된 교회 공동체를 해체할 수 있을 것이다. 정경이 사실상 종결된 후
에는 정경 과정이 아니라 해석 과정에 대해 말해야 더 적절할 것 같다.
우리는 차일즈와 샌더스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웠다.
첫째, 정경적 접근법은 학자가 완전하고 최종적인 본문을 선택하고 그
본문의 구성과 통일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둘째, 학자 는 이 본문이 상당히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본문을 읽고 소유했으며, 그
본문을 형성하거나 그 본문에 따라 형성된 교회 공동체의 자산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셋째, 마지막으로 학자는 이 본문이 교회 공동체
에 대해 지닌 권위와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또 성경은 교회의
자산이며 성경 해석은 주로 교회 배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을 강조한 월과 렘시오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월과 렘시오의 작품
은, 모건의 작품과 함께, 정경비평을 상호 본문성과 같은 문학비평의
새로운 접근법과 결합하는 데 도움을 주고, 따라서 추구할 어떤 새로 운 측면도 보여 준다.
모건은 1986년에 이미 정경비평에 대한 다원적 접근법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명확한 방법론을 추구했다. 그 결과 모건은 정경비평 연구
자를 위해 몇 가지 지침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리는 최종 형태의 성경 본문을 갖고 연구를 시작한다. 우리는
다른 비평 방법들과 그 수단들의 도움을 받아 특정 정경 책들의 내
적 구조를 평가한다. 더 나아가 정경을 연구하는 자는 작은 단원들
의 연구 결과를 활용해 성경책들의 연속성과 그 책들의 병렬 배치
의 함축성, 그리고 정경의 다양한 부분들(예. 토라와 선지서) 간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더 창의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60)
마찬가지로 나도 내 접근법에 따라 요한계시록 본문의 “최종” 형태
를 택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요한계시록 전체의 내적 구조를 평가하
겠다. 이어서 요한계시록의 작은 단원, 즉 요한계시록 21-22장을 연
구하겠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이 두 장의 정경에서의 위치의 중요성과
정경 다른 부분들과의 상호 본문 관계도 탐구하겠다.
개신교 소속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개신교 정경의 내용과 책 순서
를 나의 “최종” 본문 형태로 선택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뿌리를
둔 개신교 정경은 367년에 아타나시우스의 『축일 편지』( Festal Letter )
이후로 존재했고, ( 최소한 신약 성경 부분은 ) 대다수 기독교 교회가 권위를
인정했다.
개신교가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칠십인역의 요한계시록 이 부
분은, 내 전통 때문에, 내게는 성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히브리 성경과 겹치고 신약 성경 저자들이 사용하는 칠십인역 이 부분
은 확실히 인정되고 내 해석에도 통합된다. 그러나 나는 다양한 전통
적 기독교 공동체에서 약간 다른 정경을 받아들이게 된 일련의 역사적
이거나 지리적인 이유 및 다른 이유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 방법은 그
내용과 구성의 진정성에 대한 합리적 주장이 있는 곳은 어디서나 다른
정경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정경적 접근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정경의 이야기 구조의 통일성을
양보하지 않는 한, 역사비평 방법들을 굳이 포기할 필요는 없겠다. 소
60) Morgan, ‘Canon and Criticism’, 90.
아시아 공동체의 원래 상황, 역사적 배경, 자료의 연구는 요한계시록
의 해석을 풍성하게 만들 것이다.
b. 성경 연구에 사용된 문학비평
정경 연구의 최근의 이런 발전으로 말미암아 정경적 접근법은 정경
본문의 독자/수신자의 역할뿐 아니라, 본문 자체의 형식적 특징에 주
의를 더 집중하는 문학비평의 발전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서사 비평, 독자 반응 비평, 특히 상호 본문성과 같이 문학비평
아래 발전된 방법들은 요한계시록을 정경적 담화에 더 철저히 통합하
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1) 성경 연구에 사용된 독자 중심 접근법
마크 앨런 파웰은 이렇게 지적했다. “성경 연구 분야는 현재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뉜 것 같다. 즉 역사비평을 사용하는 저자 중심 학자들과
문학비평을 사용하는 독자 중심 학자들이다.”61) 이 두 접근법의 주된 차이는 이 접근법들이 독자에게 허용하는 해석적 자유의 크기가 다른
것에 있다. 역사비평 접근법은 본문에 대해 저자가 의도한 의미로 이 해되는 하나의 참된 의미를 추구한다. 독자 중심 접근법은 본문은 많
은 해석에 열려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두 세기 동안에는 역사비평 접 근법이 지배적이었으나 이후로 문학비평 접근법이 서서히 인기를 얻 었다.
성경 연구에 서사 비평이 사용된 것은 저자 중심의 역사적 접근법에 서 벗어나는 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여 준다. 서사 비평은
61) Mark Allan Powell, Chasing the Eastern Star:Adventures in Biblical Reader-Response Criticism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1), 1.
1970년대에 시작되어 서사학, 러시아의 형식주의, 프랑스의 구조주
의, 미국의 신비평과 같은 분야로 성장했다. 서사 비평은 본질상 학자
들이 문학으로 성경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성경 연구에 적용된 절충적
방법론이다. 서사 비평이 성경 연구에 끼친 주된 공헌은 본문의 표면
적 이야기를 적합한 연구 대상으로 확립한 것이다. 서사 비평은 본문
의 세계를 구성하는 플롯, 구조, 주제, 동기, 인물, 배경 및 다른 특징들
에 초점을 맞춘다.
서사 비평은 본문 중심 접근법으로 출발했으나 오늘날 서사 비평이
적용되는 길은 많다. 어떤 학자는 본문 중심 관점을 유지하면서 본문
을 의미 측면에서는 오히려 독립된 요소로 본다.62) 그들은 독자의 반
응, 저자의 의도 또는 역사적 및 문화적 배경에는 거의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단어, 구문, 구조와 같은 본문의 특징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데 집
중한다. 반면에 다른 학자는 독자의 역할에 더 큰 관심이 있다.63) 미래
에 어떤 접근법이 선호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64)
서사 비평 연구에서 주도적이면서 아주 미묘한 철학자 가운데 하나
가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폴 리쾨르다. “서사 신학에 대해: 그 필요성,
62) James L. Resseguie, Narrative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An Introduct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은 본문 중심 접근법을 취 한다. 다음도 마찬가지다. David Rhoads, ‘Narrative Criticism: Practices and Prospects’, in Characterization in the Gospels: Reconceiving Narrative Criticism (ed. David Rhoads and Kari Syreeni; JSNTSup 18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9), 264–285 (272).
63) 서사 비평의 독자 중심 초점의 한 사례로는 파웰의 후기 작품이 대표적일 것이다. 파웰은 독자 반응 비평과 서사 비평이 점점 하나로 융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 음을 보라. Powell, Eastern Star, 67. 그러나 파웰의 초기 작품 What Is Narrative Criticism? (GBS; Minneapolis: Fortress, 1990)은 본문 중심이다.
64) 예컨대 페트리 메른라티(Petri Merenlahti)는 성경 해석 전체 구조의 통합된 해석 학적 반성과 재고를 강조한다(‘The Future of Narrative Criticism: A Paradigm Shift’, in Poetics for the Gospels? Rethinking Narrative Criticism [SNTW; London: T. & T. Clark, 2002], 115–130).
그 자원, 그 난점”이라는 논문에서, 리쾨르는 성경신학에서 서사 접근
법을 사용하기 위한 기본적 필요성과 방법을 제시했다. 리쾨르는 서사
신학의 필요성을 보고, 서사 신학을 순전히 사변 신학( 이스라엘, 예수, 초
기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하는 전통을 무시하는 ), 도덕 중심 신학( 윤리적 일신
론의 초시간적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한된 ), 실존 신학( 믿음을 지향하고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 의 대안으로 제시했다.65) 서사 신학은 전통과 이야기
가 충분히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 전통과 이야기를 성경 본문의 재구성으로 시작
하는 자료비평 분석이나 다른 형태의 비평에 종속시키지 않음으로써 ). 서사 신학은
또 성경 이야기의 복합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단순히 초시간적 도덕을
뽑아내지 않는다.66) 폴 리쾨르의 해석학은, 관련 책과 장르가 다양함에도, 성경의 근본적 통일성을 확언한다. 리쾨르는 정경을 해석의 주요 문맥으로 가정한다.
“성경적 시간”이라는 논문에서 리쾨르는 ( 이야기를 해석하기 위해 본문을 각
기 다른 시간에 속한 다른 층들로 분해함으로써 먼저 원래의 ‘시츠 임 레벤’[Sitz im Leben, “삶의 자리/삶의 정황”]을 재구성해야 하는 ) 역사비평 방법론과 ( 본문을 원
래의 상황과 별개로 본문의 실존 속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 그의 ‘시츠 임 보르
트’( Sitz im Wort, “말씀의 자리/말씀의 정황” ) 관념을 대조한다. ‘시츠 임 보르
트’에 초점을 맞추면, 다른 시간들 및 사건들이 읽는 행위에서 당대의
65) Paul Ricoeur, ‘Toward a Narrative Theology: Its Necessity, Its Resources, Its Difficulties’, in Figuring the Sacred: Religion, Narrative, and Imagination (ed. M. I. Wallace; Minneapolis: Fortress, 1995), 236.
66) 그러나 서사 신학자들에게 어려운 일로 판명된 유일한 영역은 믿음과 역사의 관계
문제다. 리쾨르는 성경 이야기들에서 이야기와 실제 역사의 관계는 판단하기 어 렵다고 지적했다. (한스 프라이와 그의 예일대 학파와 같은) 일부 서사 신학자와 달리, 리쾨르는 역사 문제를 무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리쾨르는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문제는 제기한다. 같은 책, 244를 보라. 한스 프라이 와 그의 서사 신학 접근법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illiam C. Placher, ‘Hans Frei and the Meaning of Biblical Narrative’, ChrCent 106 (1989): 556–559.
것이 된다. 리쾨르는 역사비평의 통시적 접근법과 반대되므로 자신의
접근법을 공시적 읽기로 부르고, 더 나아가 상호 본문 읽기로 부른다.
통시적 읽기는 공시적 읽기가 없다면 완전하지 못하다.67) 리쾨르는 역
사비평 연구는 문학적 전통을 일으킨 개연적인 역사적 계기를 보여 줄
수 있지만, 문학적 본문 연구만이 우리에게 이 문학적 전통이 성경 안
에 있는 의미를 준다고 주장한다.
리쾨르의 ‘시츠 임 보르트’ 관념은 본문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본문
은 독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는 관념을 보존한다. 이처
럼 ‘시츠 임 보르트’를 강조하는 것은 정경 자료의 순서에도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본문의 의미가 본문이 문학적 배경 안에
서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본문의 특징들에서 많은 지침을 얻으나 그의 해석학은 독
자 중심 경향을 띤다. 리쾨르는 주도적인 포스트모던 철학자로서 독자
가 중립적 관찰자가 아니라 의제, 비평, 의심을 품고 본문에 나아간다
는 점을 인정한다. 리쾨르는 그가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전
개했고, 이것은 독자가 비판적 독자 곧 평가적 독자로, 중립적 독자인
척 가장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울러 본문에 따라 바뀌고 형
성되는 개방성도 있어야 한다.68) 그러므로 리쾨르는 급진적 형태의 독
자 반응 비평은 거부한다. 리쾨르는 또 성경 읽기를 모든 단편적 자아
가 포괄적 이야기( 또는 주축 이야기 )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성경
직물의 넓은 천 속에 짜 넣는” 상상 과정으로 본다.69) 이 상상 작업이
67) Paul Ricoeur, ‘Biblical Time’, in Wallace, ed., FiguringtheSacred, 171.
68)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폴 리쾨르는 자신의 철학과 신학적 해석의 뼈대가 된 해 석학적 아크(hermeneutical arc)에 대한 자기의 관념을 전개했다. 다음을 보라.
Dan R. Stiver, Theology After Ricoeur: New Directions in Hermeneutical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1), 56–57.
69) Mark I. Wallace, ‘Introduction’, in Wallace, ed., FiguringtheSacred, 32.
독자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에서 읽기는 항상 적용
으로 이어져야 한다.
교회가 받아들이거나 따라 살아야 하는 기독교 성경책으로서 정경
을 연구하는 데 있어 리쾨르의 해석학이 유익하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
은 어렵지 않다. 또 리쾨르의 공시적 읽기가 오로지 역사비평 분석과
저자의 의도에만 관심이 있는 자가 택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점을 파악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2) 상호 본문성과 성경 연구에서 상호 본문성이 맡은 역할
우리는 문학비평으로 말미암아 상호 본문성 관념도 주목하게 되
었다. 상호 본문성 이론과 기능에 대해서는, 이 용어가 무척 다양한 방
식과 맥락에서 사용되므로,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상호 본문성은 1967년에 ‘상호 본문성’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
용한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연구를 통해 주로 문학 연구에서 초점이 되
었다.70) 크리스테바는 상호 본문성 개념을 문학 이론에 도입한 공을
미하일 바흐친( Mikhail Bakhtin ) 에게 돌렸으나 상호 본문 현상을 체계적
으로 기술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상호 본문성”은 모든 본문은 다른 본문들로 구성되고, 다른 본문들
역시 또 다른 본문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본문이 단어들의 총합보다 더 크다는 기본 개념을 가리킨다. 이것은 마치 네트워크와 같다. 롤랑
바르트는 상호 본문성을 “직물 조직” 또는 “천 짜기” 은유를 사용해
70) 이 주제를 다룬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고전 작품은 Semeotike: Recherchespourunesemanalyse (Paris: Seuil, 1969)이다. 다음도 보라. Patricia K. Tull, ‘Rhetorical Criticism and Intertextuality’, in To Each Its Own Meaning: An Introduction to Biblical Criticisms and Their Applications (ed. S. L. McKenzie et al.; Louisville: John Knox, 1993), 166.
기술했다.71) 모든 본문은 무수한 다른 본문들의 실로 짜인다.72)
상호 본문성은 본문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고 전제한다. 어떤 학자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항상 본문들 사이에 파워 플레이가 있다고 주
장한다. 피터 미스칼은, 해럴드 블룸( Harold Bloom ) 의 이론을 따라, 궁극
적으로 모든 본문이 이전 본문을 대체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
면 미스칼은 이사야서와 창세기의 관계를 조사해 둘 사이의 어떤 연관
성이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다. 미스칼은 이사야서 본문 ( 예. 사 65:125 ) 을 창세기 1장 1절-2장 4a절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담긴 것으로 이
해한다.73) 크리스테바는 본문들이 만나는 곳에서 중립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말한다.74) 이것은 모든 본문이 ( 영화, 사회 관습, 문화적 대상과 함
께 ) 표면의 충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아이슐레와 필립스가 지적
하는 것처럼, “본문들의 교차점은 본문들과 저자의 의도가 충돌하고
기호 체계와 이데올로기가 다투는 전쟁터다.”75)
최초 문학비평가들은 상호 본문 관계를 주로 새 본문이 옛 본문을 대
체하려 할 때 일어나는 충돌로 정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본문들 사이의
핵심 관계를 충돌로 보는 관념은 과장일 수 있다. 페트리샤 툴( Patricia K. Tull ) 은 본문들 사이에 충돌 관념을 넘어서는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증
71) Roland Barthes, ‘The Death of the Author’, in Image Music Text (trans. S. Heath; New York: Hill & Wang, 1977), 145. 다음도 보라. George Aichele and Gary A. Phillips, ‘Introduction: Exegesis, Eisegesis, Intergesis’, Semeia 69/70 (1995): 8.
72) 크리스테바는 상호 본문성을 다른 무엇보다 사회학, 정치학, 기호학, 예술, 문학을 하나로 묶는 복합 개념으로 본다. 어느 정도 단순화하지 않으면 크리스테바의 개념 을 사용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다.
73) Peter D. Miscall, ‘Isaiah: New Heavens, New Earth, New Book’, in Reading between Texts: Intertextuality and the Hebrew Bible (ed. D. N. Fewell; Louisville: John Knox, 1992), 47.
74) Kristeva, Semeotike, 113.
75) Aichele and Phillips, ‘Introduction’, 10.
명한다. 툴은 마이클 박산달( Michael Baxandall ) 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오래된 예술 작품과 관련해, 그[마이클 박산달]는 이렇게 말한다.
새 작품은 “의지하고, 의존하고, 이용하고, 적용하고, 의탁하고, 적
응하고, 오해하고, 언급하고, 취하고, 떠맡고, 관계를 맺고, 반응하
고, 인용하고, 차별화하고, 동화되고, 순응하고, 제휴하고, 모방하고,
말을 걸고, 바꿔 말하고, 흡수하고, 변화하고, 소생시키고, 지속하
고, 개조하고, 흉내 내고, 겨루고, 변장하고, 패러디하고, 추출하고,
뒤틀고, 돌보고, 저항하고, 단순화하고, 재구성하고, 다듬고, 전개하
고, 직시하고, 지배하고, 뒤엎고, 영속화하고, 축소하고, 촉진하고,
대응하고, 변혁하고, 맞싸울……” 수 있다. 누구든 다른 것에 대하
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76)
우리는 여기서 새 본문이 반드시 옛 본문을 대체하거나 반대하려 하
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은 옛 본문을 모방하거나 소생
하려 할 수도 있다.
현대 저술가들은 대체로 관념의 독창성을 소중히 여기고, 권위( 이전
본문들 ) 를 대체하기 위해 애쓸 수 있다. 옛날 저자들은 위대한 고전을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을 칭송할 일로 여겼다.77) 성경 저자들은 이 스
펙트럼의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새로운 것이나 모방하는
76) Tull, ‘Rhetorical Criticism’, 159. 참고. Michael Baxandall, Patterns of Intention:On the Historical Explanation of Pictur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5), 58–59.
77) 엘렌 반 볼데(Ellen Van Wolde)는 다른 역사적 시기가 어떻게 본문들을 평가하 는 다른 기준을 갖는지 설명한다(‘Trendy Intertextuality?’, in Intertextuality in Biblical Writings: Essays in Honour of Bas van Iersel [ed. S. Draisma; Kampen: Uitgeversmaatschappij J. H. Kok, 1989], 43–45).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 저자들의 목표는 예수 이야기를 이
스라엘 이야기에 맞추어 설명함으로써, 이스라엘 이야기가 이루어졌
음을 증명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관계나 의존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모
든 본문의 공통점은 이 본문들이 다른 본문들과 분리할 수 없고, “어떤
본문도 외딴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자들이 최근에 우리 관심을 환기하는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은 독
자의 역할이다. 상호 본문성 개념은 본문이 자체로 의미를 단순히 담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초점 본문의 상호 본문 기능에 따라 상
호 본문 읽기를 통해 본문에 주어지는” 것을 암시한다.78) 독자는 본문
에 대해, 그리고 본문 배후에 놓인 본문들에 대해 좋은 청자여야 한다.
독자는 또 해석자로, 독자 자신이 “본문들”로 가득 차 있다. “독자는
이를테면 해석의 다발로, 자체로 해석의 다발인 본문에 참여한다.”79)
크리스테바와 바르트가 전개한 것처럼, 상호 본문성의 원래 개념은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저자의 의도와 철저히 무관하다는 사실을 전
달한다. 본문은 자체의 생명이 있고, 기록 행위를 넘어가면 저자는 의
미와 무관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가 다음과 지적한 것과 같다.
고전적 비평은 독자에게 아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전적 비평
에서는 저자가 문헌에서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사회가 피
하거나 무시하거나 질식시키거나 파괴하는 바로 그 일을 찬성하며
오만하게도 말을 반대로 써서 좋은 사회를 비난함으로써 더는 바보 가 되지 않는 출발점에 서 있다. 우리는 글쓰기에 그런 미래를 부여 하려면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78) Willem S. Vorster, ‘Intertextuality and Redaktionsgeschichte’, in Draisma, ed., IntertextualityinBiblicalWritings, 26.
79) James A. Sanders, ‘Intertextuality and Dialogue’, BTB 29 (1999): 38.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을 희생으로 삼아야 한다.80)
대다수 성경학자는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더 주기 위해, 이처럼 급진적으로 저자를 “죽이는”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호 본문성
이 성경 연구에 적용될 때도 대체로 저자의 의도는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이것은 상호 본문성의 원래 개념을 중대하게 수정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수정이 자신이 주장한 개념의 존재 기반을 위협했으므로 크 게 실망한 크리스테바는 후기 작품에서 실제로 상호 본문성이라는 용
어 대신 전위 ( transposition ) 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81)
상호 본문성은 편집사 ( Redaktions-geschichte ) 를 통해 성경 연구 안에
들어왔다. 빌렘 포르스터( Willem S. Vorster ) 는 자신의 논문 “상호 본문성 과 편집사”에서 이 두 방법을 비교한다. “[편집사의] 관심은 편집자의
의도와 편집자가 전승을 편집한 방식에 있지만, 상호 본문성 지지자는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다른 본문들을 지시하는 네트워크로서의 본문
에 초점을 맞춘다.”82) 초점에 차이가 있다. 편집사는 본문의 구성에 관
심을 두지만, 상호 본문성은 본문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이가 새로 유행한 “상호 본문성”이라는 명칭 아래 출처 및 영
향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성경학자들을 비난했다. 토머스 해티나는 상
호 본문성 개념은 본래 본문이 해석에 필요로 하는 것을 자체 안에 갖
고 있다는 이념을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역사를 중시하는 성경학자들
은 점점 새로운 방법( 해티나에 따르면 실제로는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단지 “출처 영향 연구”에 대한 새로운 명칭에 불과한 ) 을 위한 그들의 탐구에 상호 본문성
80) Barthes, ‘The Death of the Author’, 148.
81) Julia Kristeva,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4), 59–60. 다음도 보라. William Irwin, ‘Against Intertextuality’, PhilosophyandLiterature 28 (2004): 229–230.
82) Vorster, ‘Intertextuality’, 22.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문학 연구에서 성경 연구로 분야의
상호 이동을 통해 “상호 본문성”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바뀌었다. 해티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비평가는 포스트 구조주의 이데올로기를
취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독특성을 상실하거나 후기 구조주의
를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상호 본문성’의 특수한 의미를 폐하거나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 두 진영은 다리를 놓을 수 없는 틈으로
갈라져 있는 것 같다.”83)
성경학자들이 때때로 상호 본문성을 편집사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는지와 상관없이, 나는 성경 연구에 종사한 자는 “상호 본문성”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을 때, 포스트 구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
해야 하고, 그래서 어쩌면 “저자의 죽음”에도 동조해야 한다는 해티나
의 관념에 동조할 수 없다. 다른 분야에서 나온 방법론을 빌려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전환은 모든
유익한 종합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우리가 크리스테바 및 바르
트의 견해와 결별했다고 이해하고, 상호 본문성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
하겠다. 그러나 상호 본문성은 목표가 항상 이야기의 통일성을 유지하
는 것에 있고, 본문 안에서 본문들을 식별하는 독자의 능력에 크게 의
존한다는 사실로 보아 자료비평과 구별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리처드 헤이스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성경의 반영들』이라는 저서
에서 상호 본문성을 성경 연구에 적용하기 위한 몇 가지 용어와 기준
을 명확히 밝혔다.84) 점점 더 많은 성경학자가 널리 사용하므로 나도
헤이스의 용어를 대체로 받아들일 것이다.
83) 다음을 보라. Thomas R. Hatina, ‘Intertextuality and Historical Criticism in New Testament Studies: Is There a Relationship?’, BI 7 (1999): 36, 42.
84)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헤이스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상호 본문성을 다루면서, 인용 ( quotation ),
인유 ( allusion ), 반영 ( echo )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용은 명확한 인용
공식이 있는 상호 본문 참조를 가리킨다. 인유와 반영은 명확한 인용
공식이 없는 본문에서 상호 본문 참조에 대한 각기 다른 수준의 확실
성을 표시하는 용어다. 인유는 더 분명한 상호 본문 참조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반영은 덜 분명한 참조를 가리키는 용어다.85) 종종 인유나
반영은 어디서 일어나는지 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헤이스는 이렇게 말한다.
상호 본문 반영의 볼륨은 자료와 반영하는 표면 사이 의미상 거
리에 따라 다르다. 인용, 인유, 반영은 상호 본문 참조의 스펙트럼에
서 더 명확한 것에서 덜 명확한 것으로 이동하는 지점들로 볼 수
있다. 우리가 명확한 인용에서 멀어질수록 자료는 그만큼 더 먼 거
리로 물러나고, 상호 본문 관계는 명확성이 떨어지며, 독자의 듣는
능력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더 커진다. 반영의 소멸점에 가까울수
록 불가피하게 우리가 진실로 반영에 대해 듣고 있는지, 또는 단지
우리 자신의 상상적 속삭임에서 나온 추측인지 판단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86)
헤이스는 상호 본문 반영이 일어날 수 있는 최소한 다섯 가지 가능 성을 제시했다. 헤이스는 바울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 다섯 가지 가능
성을 열거한다. 여기서는 대다수 성경책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 다섯 가지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알맞게 고쳤다.
85) 같은 책, 29. 86) 같은 책, 23.
1. 해석 사건이 성경 저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2. 해석 사건이 원 독자 안에서 일어난다.
3. 상호 본문 융합이 본문 자체에서 일어난다.
4. 해석 사건이 나의 읽기 행위에서 일어난다.
5. 해석 사건이 해석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다.87)
헤이스는 자신의 방법은 이 다섯 가지 선택을 대표하는 해석학파 가
운데 어느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긴장” 속에서 이
다섯 가지 선택 전체를 함께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88)
이 다섯 가지 가능한 선택은 근거가 많이 있다. 잠재적으로 저자 중
심 읽기와 독자 중심 읽기를 다 만족시킬 수 있다. 자료비평가는 처음
세 가지 선택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문학비평가는 주로 뒤의 세 가지
선택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실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우리는 원 독자
가 상호 본문성 사례를 찾아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2번 ) ?
우리가 원 독자가 본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결정하는 것은 사변에 속한
일로 보인다. 다만 해석사나 전승사가 원 독자가 반영 사례를 찾아낸
기록을 보존한 곳에서만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이다. 헤이스의 세 번째
요점과 관련해 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독자가 없다면 본문 자체에서
상호 본문 융합이 일어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의 본문 읽기
에 대해 말하면, 다음 세 가지 사실로 요약되는 것 같다. 본문의 특징
으로 판단하건대, 저자는 자료를 반영할 의도가 있었는가, 해석 공동
체가 반영을 알아챘는가, 독자로서 나는 반영을 확인하는가?
헤이스는 또 상호 본문 반영의 주장들을 검사하기 위한 일곱 가지
87) 같은 책, 26.
88) 같은 책,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