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은 결정에 있어서 자유를 가집니다. 관용은 엄밀한 법정 적인 형태에 따라 판단하지는 않지만, 공정하고 선한 것과 일 치합니다. 관용은 무죄 석방할 수도 있고, 손해 액수를 원하는 가치만큼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관용은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가장 정의로운 것을 결심한 것 처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당신이 처벌받을 만
* * * 칼
뱅
총
서
하다고 판단한 것을 처벌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용서는 받아 야만 될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관용은 확실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히 우위에 있습니다. 관용은 사면받은 자들이 어떤 다른 취급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용서보다 더 완전하고 신뢰할 만합니다. 제 견해로는, 논쟁은 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해서는 일치합니다. 현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자는 많은 처벌을 면제해 줄 것입니다. 그는, 범죄 자체의 불건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전함에도, 성격만은 결코 불건전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구제해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몇 이유로 구부러져서 성장한 나무들을 곧게 만들기 위해 버팀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목을 대 주기도 하는 좋은 농부들과 같을 것입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줄 것입니다. 그는 곧고 키가 큰 나무들을 돌볼 뿐 아니라, 몇
8
- <세네카의 관용론 2권 7장>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83-7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8
Jean Calvin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
|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Senecae De clementia commentariis, 1532)… ……………………………… 6
부록 1. 주요 인물과 사건 연대표…………………………………………………… 333 2. 참고문헌… …………………………………………………………………… 345
|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 편역자 서문 | 8
일러두기 | 77
약어표 | 79
베즈의 칼뱅 전기 | 83
제네바 교회 설립 시안(1537) … ……………………………………………………… 162 제네바 신앙교육서(1537)… …………………………………………………………… 173 [파렐]의 제네바 신앙고백서(1537)… ………………………………………………… 221 154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41)… …………………………………………………… 232 제네바 교리문답서(1545)… …………………………………………………………… 251 제네바 콜레주 규정(1559)……………………………………………………………… 343 1561년 제네바 교회 법규(1561)… …………………………………………………… 359 |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 교회 개혁의 필요성(1543)………………………………………………………………… 6 교회 개혁의 참된 방식(1549) … ……………………………………………………… 144
|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 코프의 강연(1533)… ……………………………………………………………………… 6 올리베탕 성서 서문(1535)……………………………………………………………… 18 로잔 신조와 강론(1536)………………………………………………………………… 44 성만찬 소고(1541)… …………………………………………………………………… 59 취리히 합의와 해설(1549/1555) … …………………………………………………… 94 스캔들 론(1550)… ……………………………………………………………………… 150 유언과 두 고별사(1564)………………………………………………………………… 288 |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1 5권 | 사돌레토에게 주는 답신(1539)…………………………………………………………… 6 성물론(1543)… ………………………………………………………………………… 63 파리 신학대학 신조와 해독제(1544)… ……………………………………………… 126 트렌트 공의회 법령과 해독제(1547)… ……………………………………………… 187 점성술에 대한 경고(1549)… ………………………………………………………… 341 |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2 2권 | 피기우스의 자유의지 논박(1543)………………………………………………………… 6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해(1552) … ……………………………………………… 330 |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 영혼 수면론 논박(1534/1542) … ………………………………………………………… 6 재세례파 논박(1544)… ………………………………………………………………… 101 리베르탱파 논박(1545)… ……………………………………………………………… 221 리베르탱 수사에 대한 반박 서신(1547)… …………………………………………… 348 |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 두 서신(1537)… …………………………………………………………………………… 6 신도의 처신(1543)… …………………………………………………………………… 130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해명(1544) ……………………………………………………… 185 네 편의 설교(1549/1552) … …………………………………………………………… 211 세르베투스 논박(1553)… ………………………………………………………………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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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1 )
헌정 서한 매우 거룩하고 지혜로운 성직자이시며, 누아용의 성 엘루아 수도원장이신 클로드 드 앙제스트에게 2 )
지극히 탁월하신 수도원장님, 오늘날 조금이라도 더 숙련된 재능을 갖 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서둘러 그들의 재능의 기록들을 출판함 으로써 후대에 저명한 이름의 기억을 물려주기 위해, 뛰어난 명성에 대 한 야망에 사로잡혀 경쟁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에게 영광 스러운 칭찬이 될[지 모르나], 후손을 생각한다면 큰 망신이 아닐 수 없
1 ) L. Annei Senecae, libri duo de Clementia commentariis illustrati. 2 ) <칼뱅 서간집> 29-34쪽 참고. 칼뱅과 앙제스트(Hangest) 가문과는 인연이 깊다. Michel
Reulos는 기존의 지식에 수정을 가했다(“Les attaches de Calvin dans la région de Noyon” BSHPF 110/1964, 193-201). 칼뱅이 누아용과 파리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루이 드 앙제 스트의 아들들인 조아생(Joachim)과 이브(Yves)이고, 1526년부터 누아용의 성 엘루아 수도원 장이 된 클로드 드 앙제스트는 장 드 앙제스트와 함께 아드리앙(Adrien) 드 앙제스트의 아들 이다. 한편 누아용 주교이자 아드리앙의 형제인 샤를 드 앙제스트는 칼뱅의 부친인 제라르 코 뱅을 고용했고 1521년에는 칼뱅에게 성직록 혜택을 주었다. 칼뱅은 그의 조카들과 함께 파리 로 갔다.
6 | 칼뱅 작품선 8
습니다. 실로 자신들의 재능을 억제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로부터 뭔가 쓰려는 광적인 방종이 나오는바, 이것은 즉시 후회라는 동료를 동 반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일에서 사악하게 계산하되, 독자들이 호 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합니다. 실로 그 들은 독자들의 너그러움을 아낌없이 활용합니다. 어떤 이들은 젊은 시절 의 초학을 구실로 삼고,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막 시작한 책들을 친구들 이 완력으로 강탈했다고 핑계를 대며, 또 다른 이들은 마치 누군가가 자 신들을 대중 앞에 구경거리로 불쑥 드러내기나 한 듯이, 실수에 대해 용 서를 청하기 위해 뭔지도 모르는 시시껄렁한 소리를 지껄입니다. 그러나 나는 때가 되기 전에 자식을 낳느니, 아예 낳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 각합니다. 다시 말해 미숙아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 너그러운 독자들뿐 아니라 신중한 독자들 이 내 방식과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고 뭔가를 꾸며야 합니다. 이 것은 평범한 민중의 하나로서 보잘것없는 학문을 하는 나에게 유명해질 어떤 소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더욱 그러합 니다. 사실 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 의식이 지금껏 나로 하여금 드러 내는 것을 삼가게 했던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이 주석은, 그것이 어떻다 해도 장차 대중을 수용하리라 는 소망에서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출판에 대 한 생각을 품고 있었으므로 학문에의 열정으로 계속 전진했습니다. 마치 내가 한가롭고 무료하게 유쾌한 일을 즐기듯, 일 또한 그런 식으로 즐기 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직 중간에도 이르지 않은 주석을 정직하고 믿을 만한 몇몇 친구에게 읽어 주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늘 그랬듯 소박하고 솔직하게 평가해 주었을 때, 이 주석이 출판될 경우 고마운 마음 때문에 대놓고 싫어하지는 않을 종류의 [책이 되리라는]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7
있었습니다. 특히 내 친구 코낭 3 ) 의 권위가 의미 있었는바, 내 계획이 서 고 무너지는 것은 그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명 료한 사람입니다. 덧붙여 최고의 저자가 많은 사람에 의해 비천하게 되 고, 거의 아무 지위에 있지 못하는 것을 내가 심히 부당하게 여김을 고 려하십시오. 오랫동안 어떤 탁월한 투사가 일어나 그를 존엄의 자리에 복귀시키길 간절히 바랐을 정도로 말입니다. 만일 내가 이 일을 어느 정 도 성취한다면, 그 많은 노력이 헛되이 낭비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 니다. 분명 문학의 두 번째 영광이요 총아인 에라스무스4 ) 가 이 영역에 서 두 번씩이나 땀을 흘렸지만,5 ) 그의 눈을 피한 어떤 것들이 있는바 ( 반 감 때문에 한 말이 아님 )
우리가 처음으로 그것에 주목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저자에 대해 적게 말하는 동안 내 재능의 결함으로 인 해 그에 대한 최고의 칭찬을 약화시키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또한 그 에 대한 합당한 칭찬으로 일의 대가를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다만 그 자신이 스스로 부족한 칭찬을 초래하는 듯 보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 니다. 만일 세네카의 어떤 작은 생각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차지해, 이미 고정된 편견 ( 즉 세네카의 장점들이 웅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고, 철학에서는 장점들이 단점들 가 운데 감춰져 있기에 수와 무게에 있어[양과 질에 있어서] 빈약하다는 ) 이
되지만 않았던들 나
는 철저히 침묵했을 것입니다. 그들6 ) 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퀸틸리아 누스7 ) 도 인정된 저자들의 목록에서 그를 말소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웅 변 속에서 그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보류하고 있다.” 그들은 또 말
3 ) 프랑수아 드 코낭은 초기 칼뱅과 친분을 나눈 친구들 가운데 하나다. 칼뱅의 또 다른 절친인 니
콜라 뒤슈맹이 부르주의 법학자 알키아티에 맞서 오를레앙의 법학자 피에르 드 레투알을 옹호 하는 글(Antapologia , 1531)을 써서 칼뱅에게 읽어 줄 것을 부탁하자, 칼뱅이 그에 대한 평을 써서 코낭에게 보낸바 있다(<칼뱅 서간집> 19쪽 참고). 4 ) 본서에서 칼뱅은 기욤 뷔데를 문학의 첫 대들보라고 부른다(8.100). 5 ) 에라스무스는 1515년과 1529년에 세네카의 이 작품의 고증본을 출판한바 있다. 6 ) 키케로학파 사람들을 암시한다. 7 ) Marcus Fabius Quintilianus(30-100년경)는 로마 웅변가로 De institutione oratoria 가 대
표작이다.
8 | 칼뱅 작품선 8
합니다. “겔리우스8 ) 도 다른 이들의 말로, 하지만 더 많은 자신의 판단으 로, [세네카를] 철저히 쓸모없는 작가라고 선고한다.” 나는 매우 예리하 고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인 퀸틸리아누스를 감히 공개적으로 논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퀸틸리아누스 역시 사람이기에, 그가 세네카를 충분히 성실하게 다루지 않았거나, 그의 무례한 행동을 보복하려 했음을 알기 바랍니다. 세네카가 웅변 연습에 대해 퀸틸리아누 스 1세를 그가 받기에 합당한 존경보다 못하게 취급했고, 퀸틸리아누스 의 이 광채를 흐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겔리우스의 유명한 분노가 세네 카에게 퍼부어진 것은, 만일 이 사람들이 그것을 명백한 사실로 여긴다 면, 그들은 심하게 잘못합니다. 실로 겔리우스가 걷잡을 수 없는 광기로 세네카를 공격했으며, 이 점에서 가혹하기보다 더욱 모욕적이었음을 모 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퀸틸리아누스와 겔리우스가 어떻게 생각했든지, 질투와 편견 ( 일반적으로 진리와 싸우는 두 가지 것 )
없이 판단할 수 있었던 후대 사람들은 그[세네카]를
라틴 문학의 으뜸가는 대가들 가운데 두었습니다. 퀸틸리아누스가 별 노 력 없이 유령과 싸우는 것은 쉬웠습니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물어뜯 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훼방하는 것은 살아서 보는 자에 게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퀸틸리아누스가 세네카에 대한 찬사를 전혀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기억으로 라틴 연사 들을 나열하면서, 모든 사람 가운데서 유일하게 세네카의 문체의 풍부함 을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을 낭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명백합 니다. 나로 말하자면, 내 의견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에 대해 짜증 내 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들을 무슨 거룩한 의무로 묶어 두기 위해 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을 원하는 사람들은 굳건할 것이나, 다른 사
8 ) Aulus Gellius(130년경 활동)는 로마의 석학으로 Fronto의 제자다. <아티카의 밤>의 저자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9
람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보살피거나, 더 전문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재판 관을 선정할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이 사람[세네카]은 지극히 박식하 고 웅변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그런 다작의 천재가 자신의 손 이 미치는 곳에서 가져올 수 없었던 학문의 영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는 그리스인들이 물리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일부에 속하는 자연의 신 비에 대해 완벽하게 알았습니다. 윤리에 몰두할 때는 그 분야에서 최고 로 군림하며 마치 자신의 경기장을 달리는 듯했습니다. 웅변 연마에 대 해서는 수사학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또한 필요한 경우엔 언제나 고대 사를 기억했습니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지나치게 관대함으로써 이따금 실수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역시 깔끔하고 잘 다듬어진 연설은 확실히 자기 시대의 냄새를 풍겼습니다. 말하는 방식은 우아하고 화려했으며, 문체는 자연스럽고 불안 없이 흘러갔습니다. 또한 그는 철 학자에게 어울리는 중용을 늘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따금씩 두각을 나타냈으므로 만일 그가 욕망을 품었더라면, 그가 가진 숭고한 천재적 소질이 더 많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언어가 현란하며 신랄하다고 비난합니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퀸틸리아누스가 세네카에게 넘쳐흐른다고 주장하는 이 과다함 을 달콤한 결점9 ) 이라고 해석합니다. 내가 아쉬워하는 것은 [말의] 짜임 새이지 웅변의 마지막 광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단점의 무게를 장점과 함께 재어 본다면, 단점이 얼마나 적은지요! ‘일찍이 어떤 천재도 [너그러운] 용서 없이 갈채를 받 은 적이 없다’는 말이 떠오릅니다.10 ) 나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머물길 원 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 한 번, 이 말만 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세네카는 로마의 철학과 웅변의 기둥인 키케로를 잇는 바로 다음 사람이었습니다.
9 ) 퀸틸리아누스도 이 말을 썼다. “abundant dulcibus vitiis” (Institutio oratoria 10.1.129). 10 ) Seneca, Epistolae morales 114.12.
10 | 칼뱅 작품선 8
브루투스와 동시대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11 ) 그[세네카]를 읽는 데 상당한 시간을 들인 사람들은 이 사실을 경험으 로 알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유익과 기쁨을 동시에 가집니다. 나는 누 구도, 최소한 그가 학문의 여신 ( Musa ) 과 미의 여신 ( Gratiae ) 을 증오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한, 이 읽는 수고의 비용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합 니다. 매우 저명한 클로드여.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건방 떨며 증명한 세 네카의 재능들에 대해 들을 필요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대가 이 모든 것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설교자도 전혀 필요 없을 정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 안에 그리고 집에서도, 사람들이 말하듯이 활발하고 관대한 신사적 성품 ( 이것으로 그대가 알려진 ) 을 갖고 있습 니다. 또한 날카로우면서 안정된 판단력과 잘 저장해 두고 또 믿을 만한 기억력을 갖고 있으며, 이 모든 것에 이런 연구에 대한 철저한 훈련을 덧 붙일 수 있습니다.12 ) 말하자면, 이런 의논 상대자들에게 의지하면서 그 대는 참된 근원과 거짓된 근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라틴 언어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세네카에게 의존하고 있는지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보호를 부탁하는 우리의 이 주석을, 그대에게 바치고 헌정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우리 수확의 첫 열매로서 외에는 달리 받지 마십시오. 이것은 나의 나 된 모든 것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그대에게 빚진 것이 기 때문일 뿐 아니라, 나아가 내가 소년이었던 당시 그대의 집에서 교육 받고 그대와 함께 같은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내 삶의 첫 교육과 문학에서 11 ) [COR]: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으로 알려진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
85-42)와 상당한 문학적 성취를 한 사람들로, 우리가 그들의 작품들을 대할 수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secundum은 두 번째 항렬의 의미가 아니라 이어지는 다음 세대의 의미를 갖는다. 키케로(BC 106-43), 브루투스(BC 85-42), 세네카(BC 55-AD 65: 세네카 1세와 2세 를 한 사람으로 본 연도)로 이어지는 계보에 브루투스의 작품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12 ) 클로드 드 앙제스트는 그가 오를레앙에 머무는 동안 니콜라 뒤슈맹의 지도 아래 법학을 공부
했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11
매우 고귀한 그대 가정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13 ) 나는 그대에게 내 근면의 [열매]를 받아 달라고 애쓰지는 않을 것입 니다. 나에 대한 그대의 특별한 너그러움을 알므로, 이미 고맙게도 그것 을 오랫동안 받아 왔음을 압니다. 다른 독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을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 시키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가장 훌륭한 비평가들의 가장 나쁜 견해 들을 내게 가져오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다양한 기호와 성 격들이 공존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시도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어쩌면 나쁜 일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게 남겨진 유 일한 길, 곧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 습니다. 이 일을 수행함에서 내 성공 여부는 다른 이들이 판단하도록 합 시다. 나는 내가 교만하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워, 나 자신에 대 해 감히 자랑스러운 약속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우리 구원의 해, 1532년 4월 4일.
장 칼뱅이 훌륭한 저자들에게서 신실하게 옮겨 적은 세네카의 생애 14 )
검소한 시골 기사의 신분으로 태어난 세네카는 군사적인 공적이나 무 슨 정치적 기술보다는, 정직한 삶과 엄격한 원리를 통해 가문의 명성을 더욱 뛰어나게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인 코르도바가 함락되었을 때, 그는 13 ) 테오도르 드 베즈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뱅의) 부친은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
인물이어서 주변 영주들의 가문에서 필요로 했다. 이런 이유에서 그의 아들은 부친의 희생의 대가로, 더 낫고 자유스럽게 몽모르 가문의 자녀들과 어울리며 성장했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 하기 위해 그들과 동행했다(칼뱅의 <여호수아서 주석> 서문, 제네바, 1564).” 14 ) 이 간략한 세네카의 생애는 거의 철저히 타키투스(Pubilius Cornelius Tacitus, 55-120)의
Annalis [12-16]에서 발췌되고 첨가된 것이다. 불완전한 자료의 탓으로 칼뱅은 라틴 작가인 아버지 세네카(Annaeus Seneca, BC 60-AD 39)와 정치가요 철학자인 동일 이름의 아들 세 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AD 65)를 혼동한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일생이 함께 얽히는 바람에 세네카의 죽은 나이가 115세로 잘못 기재되었다. 이런 실수는 세네카의 인용에 있어서도 주석 내내 지속된다.
12 | 칼뱅 작품선 8
이미 부친을 잃었으며, 두 형제들인 갈리오 ( Gallio ) 와 멜라 ( Mela ) 와 함께 로마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얼마동안 평범한 환경 속에 지내다가, 마 침내 칼리굴라15 ) 통치 시대에 상당한 정도의 문학적인 평판을 얻기 시 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명성은 점점 커져 갔는데, 어떤 이는 이것이 클라 우디우스16 ) 가 그를 섬으로 쫓아 보낸 이유라고 믿는다.17 ) 그는 이 유배를 굽히지 않고 견뎌 냈다. 그는 심지어, 어머니 알비나 헬비아 ( Albina
Helvia ) 가
아들의 불행에 기가 꺾였을 때, 어머니를 위로하
기까지 했다.18 ) 결국 아그리피나19 ) 의 도움으로 복직되고, 원로원직이 허락되며, 집정관에 임명된 세네카는, 아직 클라우디우스가 양자로 삼 지 않은, 도미티우스 네로20 ) 를 여전히 교육 중에 있는 소년으로 두었 고,21 ) 최선의 능력을 다해 그의 학문과 도덕을 가르쳐 길들이되, 클라우 디우스가 죽으면서 네로가 양자의 권리로 황제의 대열에 확정될 때까지 했다.22 ) 그때 세네카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네로의 결심을 조정해, 이 젊은이가 세네카의 권위 없이는 자신의 직위의 힘으 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네로는, ‘집정관 휘하의 제독이자, 군사적 용맹 및 정직한 삶과 도덕으로 주목받는 인물이며, 세네카와 협
15 ) 본명이 Caius Caesar Germanicus(12-41)인 그의 통치 기간은 4년(37-41)이다. 16 ) Tiberius Claudius Nero Drusus(BC 10-AD 54)는 Germanicus와 Britanicus라는 별명도
갖고 있으며 통치 기간은 13년(41-54)이다. 17 ) 칼뱅은 세네카의 유배 이유에 대해 Dio Cassius(59.8.5)가 기록한 Julia Livilla(Germanicus
의 딸이자 M. Vinicius의 부인)와의 간통 내용을 생략한다. 18 ) Seneca, De Consolatione ad Helviam (Albinam ) 1. 19 ) Agrippina(16-59)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알려진 Germanicus(BC 15-AD 19)의 부인(BC
13-AD 33)과 이름이 같은 딸이다. 그는 네로의 아내였다가 후에 클라우디우스의 아내가 된다. 20 ) Lucius Domitius Claudius Nero(37-68)는 14년(54-68)을 통치했다. 21 ) Suetonius, Nero 7.1. 22 )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가 가정교사가 되기 전 네로를 양자로 삼
았다(loc. cit.).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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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해 일하는’ 부루스23 ) 의 도움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실제적으로 이 젊은이의 성격을 보완해 그가 나쁜 상태로 무턱대고 돌진하지 않도록 지켰다. 부루스의 죽음은 네로의 정신 질환이나 또는 그의 한심한 짓으 로부터 세네카의 위치를 크게 약화시켰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악한 기술로 황제의 성격을 부패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한 자들이, 사유 재산의 한계를 넘는 세네카의 부유함과, 자기 고향 사람들의 애정을 자기 쪽으로 돌린 점, 그의 매혹적인 정원, 그리고 화려 한 별장 등을 들어 그를 비난했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그런 소유에 대한 시기를 한탄하면서 휴가를 요구했고, 그가 더 이상 지닐 수 없었던 화려 한 소유들과, 그에게 악평만 가져다주는 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달 라고 부탁했다. 그는 지친 나이와 피로한 건강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는 그의 연구를 위한 휴식을 얻어 내는 데 성공할 수 없었다. 어쨌 든, 그는 그의 이전 생활 패턴을 바꿨다. 그는 그의 작은 방들에서 떼거 리들을 몰아냈고, 그의 수행원들을 쫓아냈다. 그는 시내에 거의 나타나 지 않았고,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게 했다. 네로가 가혹한 형벌로 그 리스도인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격노했을 때, 그는 또 다시 시골 벽지로 의 은퇴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이런 요구는 그 모독적인 악평 을 자신으로부터 돌려놓기 위함이거나, 그가 한 자유민의 자백을 통해, 네로의 지시에 따라 그를 위해 독극물이 준비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요구가 허락되지 않자, 그는 신경통으로 아픈 것처럼, 그의 침대에 누운 상태로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피소24 ) 의 음모 사건이 드러났고, 세네카는 나탈리 스 ( Na-talis ) 의 폭로로 음모자 중 하나로 지명되었다. 범죄가 입증되지 않
23 ) Sextus Afranius Burrus 또는 Burrhus(62년 사망)는 세네카와 함께 네로의 교육을 책임 맡
은 인물이다. 24 ) Caius Calpurnius Piso(65년 사망)를 의미한다. 클라우디우스 통치 시절 집정관이었던 그는
네로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자 정맥을 끊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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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지만 그는 반역죄로 정죄되었다. 먼저 집정관의 보병대 소속인 가비우 스 실바누스 ( Gavius Silvanus ) 호민관이 세네카가 자신의 말을 ( 고소 여부가 달려 있는 )
인정하는지 아닌지 묻기 위해 파송되었다.
호민관은 세네카가 자발적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묻는 포파 이아 ( Poppaea ) 의 질문에 용감한 태도로 자신의 말들을 인정했고 또 사과 했다고 보고하면서, 자신은 그의 말과 모습에서 아무 슬픈 기색을 발견 하지 못했으므로 어떤 죽음의 징후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답했다. 아무튼 실바누스는 곧장 되돌아가서 사형을 선포해야 했으나, 그의 음성과 눈을 동정으로 가득 채운 채, 마지막 운명을 알리기 위해 그의 백부장 가운데 하나를 보낼 정도였다. 전갈을 받고서, 세네카는 그의 유언이 담겨 있는 서책을 요구했다. 백 부장이 거절하자, 그는 그와 함께 식사하던 두 친구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달리 감사함을 보일 수 없으므로, 자신의 가장 정정당당한 소유물 곧 자신의 삶의 이미지를 그들에게 남기겠노라고 말했다. 다음으 로 그는 아내 폼페이아 파울리나 ( Pompeia Paulina ) 와 포옹하면서, 아내에게 슬픔과 눈물을 억제하도록 간청했다. 그의 아내는 자신 역시 죽음을 자 신의 선택으로 삼았다고 그에게 확신시키면서, 처형자의 칼을 나눠 갖길 요구하면서, 모든 위로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둘은 서로 팔에 안긴 채 단 칼에 베어졌다. 그러나 파울리나의 상처는, 이미 많은 피를 흘린 뒤, 자 신의 종들에 의해 싸매졌다. 이 일이 파울리나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것인지, 네로가 더 부드러운 전망을 제시하자 삶에의 애착에 굴복한 것 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세네카는 그의 질질 끄는 죽음에 넌더리가 났다. 그의 늙은 몸 에서는 피가 천천히 빠져 나갔고, 또한 다리의 동맥과 무릎 뒤의 동맥을 갈라놓았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더 이상 빨리 진전되지 않자, 그는 이런 결말을 위해 일찍이 제 공되었던 독극물을 삼켰으나, 그의 가슴이 이미 독의 활동을 닫아 버렸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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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므로 허사가 되었다. 결국 목욕탕 안으로 올려 보내 증기로 질식되어 죽은 그는, 아무 장례식 없이 화장되었다. 그가 과거에 엄청나게 부자고 힘이 있을 때 자신의 종말을 위해 계획했던 유언에서 그렇게 지정했던 그대로였다. 그는 네로 통치 11년, 곧 그가 이 젊은이의 가정교사로 임명 된 지 17년 뒤에, 115세 또는 대략 그런 나이에 죽었다.25 )
25 ) 위에서 말한 대로 칼뱅은 두 세네카의 일생이 하나로 합쳐진 연대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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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가 네로 황제 폐하께 드리는 관용론 1권
제1장 [세네카 본문] [1] 네로 폐하, 저는 어느 정도 거울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그리하여 모든 쾌락 중 최고의 쾌락에 도달하도록 정해져 있는 존재이신 폐하를 폐하 자신에게 보여 드 리기 위해, 관용에 대한 주제로 글쓰기에 착수했습니다. 사실 덕스러운 행동의 참된 유익이란 행하는 것에 있고, 덕 자체를 떠나서는 어떤 덕에 대한 적합한 보상이 없 긴 합니다. 그럼에도 선한 양심을 되풀이해 점검하고, 그다음 이 엄청난 군중 ( 파벌 적이고, 각기 다른, 통제되지 않고, 멍에를 벗을 수만 있다면 자신 및 다른 집단의 파괴를 위해 날뛸 준 비가 되어 있는 ) 에
눈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심사숙고하는 것도 기쁜 일입
니다. [2]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나는 하늘의 총애를 받았고 신들의 대리자로서 지 상에서 봉사하도록 택함을 입었다. 나는 민족들의 생과 사의 중재자다. 각 사람의 운 명과 상태가 어떻게 될지는 내 손에 달려 있다. 운명의 여신은 내 입술을 통해 각 사 람에게 무슨 선물을 줄 것인지 선포한다. 내 발언으로 백성과 도시들은 즐기기 위한 구실들을 소집한다. 내 호의와 은총 없이는 이 넓은 세상의 어느 구석도 번창할 수 없다. 내 평화가 억제하는 저 수천의 검들이 나의 고개 끄덕임으로 뽑힐 것이다. 어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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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 민족들은 완전히 멸망되고, 어떤 이들은 유형에 보내지며, 어떤 이들은 자유를 선 물로 받으며, 어떤 이들은 자유를 탈취당하고, 어떤 왕들은 노예가 되고, 반대로 노 예의 머리에는 왕의 영예로 관이 씌워지며, 어떤 도시는 붕괴되고 다른 것이 세워질 것인바, 이것이 내 지배권이다. [3] 만사에 이런 큰 권능을 가진 내가, 결코 홧김이나 젊은 충동에 의해서나, 가장 평온한 정신의 소유자들조차 종종 인내를 짜내야 했던 사람들의 무모함과 오만함에 의해, 또는 공포(크고 군주다운 힘을 너무 흔하게 사용하는)를 통해 보이기도 했던 그 허세에 의해, 부당하게 처벌할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내 게 있는 칼은 숨겨져, 아니 칼집에 꽂혀 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하찮은 피까 지도 아끼고 있다. 어떤 사람도, 설사 그가 인간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 지고 있지 않다 해도, 내 손에서 호의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4] 나는 준엄 함을 감추고, 관용을 항상 준비한다. 마치 내가 나태와 어둠에서 환한 빛으로 불러낸 저 법률에 막 답변이나 한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을 이처럼 지킨다. 나는, 어떤 이에게 는 그의 상큼한 젊음 때문에, 또 다른 이에게는 그의 들대로 든 나이 때문에 불쌍한 마음을 가졌다. 어떤 이는 그의 높은 지위 때문에 용서했고, 다른 이는 그의 초라한 신분 때문에 용서했다. 내가 동정의 아무 변명거리를 찾지 못할 때면, 내 자신을 위 해 용서했다. 불멸의 신들이 오늘 내게 셈을 요구한다 해도, 나는 인류의 모든 총계 를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다.” [5] 폐하, 폐하는 대담하게 이런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만사를 안전한 신뢰와 보호에 둘 수 있으며, 폐하를 통해 국가는 폭력이나 사기로부 터 아무 손실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가 스스로 부당함에 대한 무죄를 열렬히 바 라신 것은 가장 드문 찬양거리로서, 지금껏 모든 다른 군주들에게 거부되었던 것입 니다. 폐하의 노력은 낭비되지 않았으며, 폐하의 견줄 수 없는 선함은 배은망덕한 사 람들이나 억지 찬양자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감사가 폐하께 돌려졌고, 어느 누구 의 시기에도 폐하가 로마 백성에게 소중한 것만큼 그렇게 다른 민족에게 소중한 적 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위대하고 지속적인 복이여. [6] 폐하가 스스로 짊어진 것은 강 력한 힘을 필요로 하는 짐입니다. 오늘날 아무도 신격화한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 우스 황제의 초기 시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폐하로 하여금 폐하 자신 외에 는 모방할 만한 어떤 모범을 찾는 이도 없습니다. 폐하의 원수(元首) 정치는 이런 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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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평가됩니다. 만일 폐하의 선함이 타고난 것이 아니고, 다만 잠시 위장된 선 이었다면, 이것은 실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구도 가면을 오랫동안 쓸 수 없고, 거 짓된 것은 빨리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며, 또한 뭐든지 진리를 샘으로 삼 고, 말하자면 단단한 땅에서 솟아나오는 것은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더 크고 좋은 것 으로 자라기 때문입니다. [7] 폐하의 저 고상한 재능이 어떤 진로로 달려갈지 불확 실한 한, 로마 백성이 직면한 운명은 막중합니다. 오늘날 공적 기원 ( 祈願 ) 이 보장되 어 있습니다. 폐하가 갑작스런 자기 망각에 사로잡힐 위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너무 지나친 번영은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하고, 욕망은 도착점에서 멈출 만큼 잘 조 절되는 적이 결코 없으며, 상승은 큰 것에서 더 큰 것으로 나아가며, 사람들은 그들 이 바라지 않았던 것을 한번 얻게 되면 더 크고 광대한 희망을 품습니다. 그러나 오 늘날 폐하의 신하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행복하다고 고백하며, 그들이 이것을 지속하 는 것 외에 그 이상 어떤 것도 그들의 복에 첨가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 니다. [8] 많은 사실이 그들로 다음과 같은 고백(사람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마지못해 하 는)을
하게 합니다. 곧 안전은 깊고 넘치며, 정의는 모든 불의 위에 군림한다는 것입
니다. 자멸의 방종 외에는 완전한 자유의 어떤 요소도 모자라지 않는 한, 국가의 가 장 멋진 환상이 그들의 눈앞에 어슬렁거립니다. [9]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자로 부터나 가장 작은 자로부터나 똑같이, 폐하의 관용하신 성격에 대한 찬탄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른 복들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몫의 비례해, 상대적으로 크거나 작은 것을 경험하거나 기대하지만, 관용의 경우에는 모두가 똑같 은 대우를 받기 바라는 까닭입니다. 관용은 눈에 보이게 서서 사람이 잘못하길 기다 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무죄로 인해 전적으로 만 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칼뱅 주석]
플루타르코스가 권좌에 있는 자들에게 충고하기란 어렵다고 쓴 데는 일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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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26 ) 고삐 풀린 방종을 왕의 진짜 위엄과 동일시하는 자들은 이성에 따르는 삶을 결코 ‘왕’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 인의 권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굴욕적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들 자신 의 법과 그들 자신의 관습, 아니 그보다는 그들 자신의 변덕에 따라 살아 간다. 그러나 더 온건한 이들의 경우라도 그들은 방해꾼을 조용히 참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오만함은, 지속적이고 천부적인 악처럼, 왕들과 군 주들에게 심겨져 있을 정도다. 그들은 국가를 잘, 그리고 효과적으로 다 스림에 있어 전폭적인 신임을 얻기 원한다. 그들은 외부 고문관들이 칭 송을 나눠 가질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이런 점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격언 이 나온다. “좋은 충고는 왕의 친구에게는 희생이 크다.”27 ) 그러므로 세 네카는 덕에 대해 기술하면서, 네로 자신의 관용을 반영해 인식하는 식 으로 관용에 대해 쓰겠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권고사를 칭찬을 가장해 듣기 좋은 말로 들려준다. 그러므로 그는 네로를 훈계로 교훈하 며 가르칠 생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덕의 모습으로 보이는 거울을 그에 게 보여 주어 자신을 스스로 깨닫고 자기 자신의 은사들을 응시하게 할 의도라고 말한다. 사실 거울이 사람에게 그의 얼굴을 보여 주듯이 힘센 사람은 힘에 대한 서술 가운데서, 신중한 사람은 신중에 대한 기술에서, 의로운 사람은 정의에 대한 기술에서 자신의 무엇을 깨닫는다. 이런 완 곡한 방법으로 세네카는 교묘하게 네로의 환심을 산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선한 양심을 가진 그는 그것에 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쾌락 중 최대의 쾌락을 얻는 데 목적을 두는 사람이 되라고 선포할 때 생기는 것이다. [1] 사실 덕스러운 행동의 참된 유익이란……] 철학자들은 길고 애타게 궁
극적 행복, 곧 만물이 귀결하는 종국에 대해 토론을 벌여 왔다. 16개의
26 ) [Battles/Hugo]: Plutarchos, Ad Principem Ineruditum , in Moralia 1.779E. 27 ) 이 격언의 출처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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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들이 다른 견해로 서로 다툰다.28 ) 에피쿠로스29 ) 는 언제나 그 자신 의 즐거움 가운데서 태평한 채로 있는 한편, 크로에수스30 ) 는 그 자신의 부를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은 종국적으로 각기 자신의 정열을 섬긴다. 진리에 더 일치하는 두 개의 종파가 있다. 전자는 제노, 클레안테스, 포 세이도니오스, 헤카타이오스, 바빌론의 디오게네스31 ) 그리고 스토아학 파 ( 비록
아우구스티누스32 ) 는 이 가르침의 창시자를 안티스테네스33 ) 로 여기지만 ) 로서,
이들
은 덕이란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 삶의 모든 행동과 행위와 도모 ( 圖謀 ) 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표라고 여긴다. 본 구절은 이런 의미에서 취해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더 멀리 나아간다. 그들은 목표점을 덕 이 아니라 덕의 사용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34 ) 을 보라. 의 미는 이렇다. 비록 스토아학파의 원칙에 따르면, 덕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고 덕 자체가 중요하며, 덕에 대한 평가가 어떤 다른 것에 달 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있어야 하지만, 선한 양심을 되풀이해 점 검하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다. 키케로는 이런 생각을 그의 <스키피오 의 꿈>35 ) 에서 다음과 같이 우아하게 표현했다. 너는 너의 업적에 대한 인간 적 보상을 믿지 못할 것이다. 덕 자체가 그것 자신의 매력을 통해 너를 참된 영광으 로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밀로를 위한 변명>36 ) 에서 그는 확실히 참된 다
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용감하고 현명한 사람은 선한 행실의 보상이 아닌 선 28 ) 어쩌면 칼뱅은 Budaeus[Budé]에게서 “철학적 분파” 등에 대한 언급을 들었을 것이고 키케
로에게서 이런 논의를 발견했을 것이다. 도덕 철학의 기본 문제에 대한 칼뱅의 태도는 회심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기독교 강요>(1541) 17장과 <공관복음 62번째 설교>(CO 24.773) 참고. 29 ) Epikouros(BC 341-270). 그의 작품으로 단 세 편의 편지가 남아 있다. 30 ) Croesus는 BC 546년에 죽은 리디아의 부유한 왕이다. 31 ) Zeno(BC 335-264). Kleanthes(BC 331-232). Poseidonios(BC 135-AD 51), 역사가요 지
리학자인 Hekataios(BC 540-480), 견유학자로 알려진 Diogenes(BC 413-327). 32 ) CN: De civitate Dei 8.3. 33 ) Antisthenes(BC 444-365)는 견유학파의 창설자로 알려진다. 34 ) CN: Ethicorum 1.1, 1095a5. 35 ) CN: Somnium Scipionis . 키케로의 De Republica (6.23.25)에 들어 있는 글이다. 36 ) CN: Pro Milone 96.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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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자체를 추구하는 데 익숙해 있다.
[덕에 대한 적합한 보상이 없긴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가 덕 너머로 다른
목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덕은
페리안드로스37 ) 의 경우 영예의 끝을, 또 아
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경우 덕의 실천을 향한다고 생각하듯이 ),
덕 자체가 최고의 목적이며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 셈이다. 클라우디아누스도 거의 같은 말로 같은 생각을 표명했다.38 )
덕은 그 자체가 자신의 보상이며, 운명으로부터 안전하다. 그것만이 널리 빛을 비추며 그것은 어떤 영예의 흔적에 의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세네카도 <행복론>39 ) 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거래의 보상은 그 자체 안에 있다.
선한 양심을 되풀이해 점검하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다] 플리니우스40 ) 는 사
투르니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덕의 보상을 사람의 평판보다는 사람의 양심에 두는 것이 얼마나 더 고상한지 안다. 마크로비우스41 ) 는
<스키피오의 꿈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명한 사람은 덕의 보상 을 그의 양심에 두고 덜 온전한 사람은 그의 평판에 둔다.
파벌적이고, 각기 다른……이 엄청난 군중] 파벌적인, 각기 다른, 통제되지 않는
등 이런 말들은 군중에 대한 불변하는 수식어이며 이유 없이 적용된 것 37 ) Periandros(BC 627-585)는 고린도의 왕으로서 그리스 7대 현자 중 하나다. 38 ) Claudianus, Panegyr 17.1-3. 39 ) CN: De beneficiis 4.1.3. 40 ) CN: Ep . (ad Saturninum) 1.8. 플리니우스 1세인 Caius Olinius Caecilius Secundus
(61-114)로 그의 서간집이 남아 있다. 41 ) CN: Macrobius, Somnium Scipionis 2.10. Ambrosius Macrobius Theodosius는 5세기
초에 활동한 라틴 문법학자로서 키케로의 <스피키오의 꿈>과 베르길리우스의 <사투르누스 축 제>(Saturnia )를 주석했다.
22 | 칼뱅 작품선 8
이 아니다! 파벌적]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도스>42 ) 에서 이렇게 말한다.
큰 회중에서 소동이 일어날 때면 천민은 성이 나서 사납게 날뛰며 횃불들과 돌들이 날고, 무기를 빌려 주는 미친 짓이…….
비록 군중이란 언제 어디서나 신 유행에 민감하지만, 그래도 여러 방 대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로마의 평민들은 다른 모든 민족보다 훨씬 변 덕스럽다. 역사를 살펴보자. 로마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무서운 반란이 군중의 파벌들 때문에 야기되었으며, 그들이 얼마나 자주 전 국가를 재 해 직전까지 끌고 갔던가! 이로 인해 “군중과 난폭자”43 ) 라는 금언이 나 왔다. 각기 다른] 이 말은 견해의 다양함을 의미한다. “머리가 있는 만큼 마음
도 있다.”44 ) 사람들이 눈앞에 무슨 확실한 계획이 없고 미리 생각한 바도 없이 경솔하게 그들의 어지러운 마음에 떠오르는 뭔가를 붙드는 곳에선 특별히 더욱 그렇다. 키케로는 <플란키우스를 위한 변명>45 ) 에서, 사실 대 중 가운데는 어떤 심사숙고도, 이성도, 분별도……없다고 말한다. 플라톤46 ) 과 호
라티우스47 ) 에게 군중은 많은 머리가 달린 짐승이다. 이것은 말의 파생을
42 ) CN: Vergilius, Aeneidos 1.148-150. 이 책은 트로이의 왕자인 아이네아스(Aeneas)의 방랑
을 노래한 서사시다. 43 ) Aulus Gellius(130년경 로마에서 활동한 문법학자)의 <아티카의 밤>(Noctes Atticae
13.11.3.)에서 라틴 석학 Marcus Terentius Varro(BC 116-AD 27)가 한 말이다. 44 ) 이 격언의 출처는 불분명하나, 테렌티우스(Publius Terentius Afer: BC 190-159)의 <포르미
오>(Phormio )와 에라스무스의 <격언집>(Adagia ), 그리고 키케로의 <웅변술>(De Oratore ) 에 유사 표현이 있다. 45 ) CN: Cicero, Pro Plancio 4.9. 46 ) Plato, Republica 9.588f. 47 ) Horatius, Epistolae 4.9. 라틴 시인인 Quintus Horatius Flaccus(BC 65-8)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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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도 보인다. 비록 오비디우스48 ) 가 “따로따로의”, “분리된”의 의미 로 “각기 다른 영광”이란 말을 사용해 새로 유행시켰지만 말이다.
그러나 내 영광은 어떤 병사와도 다른 별도의 것이다.
통제되지 않고] 노니우스 마르켈루스49 ) 는 impotens를 “매우 힘센”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이상의 힘을 갖는다. 그것은 키케로50 ) 가 아 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탐내지 않는, 그리고 어떤 통제되지 않는 정열에 의해 움직이지도 않는 자들이라고 말할 때, 그에게 이 말
은 “매우 힘센”의 뜻뿐 아니라, “어떤 자부심 넘치는 배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한다.51 ) 우리가 때로는 ‘욕망’이라 하고, 때로는 ‘갈망’이라고 하는 지나친 열망에 의해, 그들은 일종의 통제되지 않은 영혼 상태를 불러일으키며, 절제와 자제를 위반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것을 “아크라테이
아”[자제력을 잃은]라고 부른다.52 )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53 )
가장 열광적인 소망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 통제되지 않고 운명의 호의에 취한 여인.
자신의 파괴를 위해 날뛸 준비가 되어 있는] 이것은 키케로가 그의 <국가
론>54 ) 에서 너무 피에 목마르고 온갖 종류의 잔인함에 기뻐 날뛰어서 무자비한 48 ) Ovidius, Amores 2.12.11. Pubilius Ovidius Naso의 작품 가운데 하나다. 49 ) Nonius Marcellus, De Comp. Doctr . 2, p. 129. F. L. Battles & A. M. Hugo는 이 저서를
저자 목록에서 빠뜨렸다. 50 ) Tusculanae Disputationes 5.7.17. 51 ) CN: Tusculanae Disputationes 4.15.34. 52 ) G. Buaeus, Commetarii Linguae Graecae , Paris, 1530, 1331.5-22. 53 ) CN: Carmina 1.37.10-12. 54 ) CN: Republica 2.41.68.
24 | 칼뱅 작품선 8
살인자라고도 말해지기 힘든 자라고 말하듯이 ‘기뻐 날뛰다’의 의미이거나
‘넋 잃고 날뛰다’의 의미다. <국가론>에서 키케로: 그러므로 모든 사람 안 에는 기쁨으로 날뛰고 시련에 의해 부서진 어떤 정신 빠진 요소가 분명히 있다.55 )
노니우스 마르켈루스56 ) 는 두 가지 정의를 다 말하나, 후자가 더 적합 하다. 자유에 아무 제한도 두지 않는 무지한 평민들은 즉각적으로 방종 에 빠지며 자기 멸망으로 빠진다. 마치 로마의 민중이 종종 내분으로 그들의 제국을 멸망하게 할 뻔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파괴도 마찬가지다. 정신없는 군중이 한번 무기를 들고 일어나면 제어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리비우스57 ) : 이것이 군중의 특성이다. 그들은 겸손히 섬기거 나 다른 사람들 위에 교만히 군림한다. 그들은 중용을 견지하는 이 자유를 적절히 쫓아내거나 즐기거나 하는 방법을 모른다. 쿠르티우스58 ) : 어떤 깊은 바다도, 어 떤 광대하고 폭풍 일렁이는 대양도, 군중의 감정과 같은 그런 큰 물결을 일으키지 못 한다. 특별히 군중이 새롭지만 짧게 끝나게 되어 있는 자유에 기뻐 날뛰는 경우에 말 이다. 리비우스59 ) : 퀸티우스 ( Quintius ) 는 아카이아 사람들 ( Achaeans ) 60 ) 에게 그들의 자유를 적당히 사용하라고 권면했다. 자유가 신중하게 통제될 때, 그것은 그들 모두 에게와 각 도시에게 복이었으나, 그것이 남용될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와 그것 을 고집스럽고 고삐 풀린 채 소유하는 자들에게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모든 인간들 가운데 나는] 의인법으로, 이것을 통해 황제가 자기 자
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명상에 잠기는 것으로 꾸몄다. 여기에 세네카가 그에게 약속하는 양심의 보상이 있다. 단 그가 자신을 향해 내 려가서 마음의 평정에 주의한다면 말이다. 꾸며진 인물을 통한 이 말은 저자 자신에게서 착상된 말보다 호소력이 강하다. 퀸틸리아누스도 이렇 55 ) CN: Republica 3.35.49. 56 ) De Comp. Doctr . 4 pp. 300-301. 57 ) CN: IV = Ad Urbe Condita 24.25.8. Andronicus Titus Livius(BC 270년경 출생)는 라틴 비
극의 창설자로 알려진다. 58 ) CN: lib. X = History of Alexander 10.7.11. Quintus Curtius Rufus는 1세기 역사학자다. 59 ) CN: Ad Urbe Condita 34.49.7-8. 60 ) 그리스 사람들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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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가르친다.61 ) 이런 식의 말들이 독자를 일깨우고, 감정을 자극하며, 강 연을 다양하게 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의인 법”이 아니라 ‘에도포이인’으로 부르는바, 그 이유는 전자가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내는 반면, 후자는 이 말들을 한정된 인물들에 맞추기 때
문이다. 로마누스 아킬라를 보라.62 ) 게다가 이 진술은, 인간사의 감독을 신들에게로 돌리고, 섭리를 주장하며, 단순한 우연에도 아무 여지를 남 기지 않는 스토아학파 사람들의 견해에서 유래한다. 에피쿠로스주의자 들은, 신들의 존재를 믿진 않지만, 그것에 가장 가까운 일을 한다. 그들 은 신들이, 뭔가가 그들의 쾌락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한, 쾌락을 사랑 하고 게으르며 죽을 인생을 돌보지 않는 것으로 상상한다. 그들은 스토 아학파의 섭리를, 예언하는 늙은 여인이라고 조롱한다. 그들은 모든 것 이 단순한 우연에 따라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신들의 대 리자로 천명하는 자는 신들이 인간의 필요를 돌본다고 확실히 고백한다. 이런 이유에서 호메로스63 ) 도 신이 왕들을 양육했다64 ) 고, 즉 주피터가 키 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리아스>65 ) 에서, 그는 아가멤논 ( Agamemnon ) 이 주피터가 만든 왕이었다고 쓴다. 플리니우스는 그의 <칭송서>66 ) 에서 적 지 않은 우아함으로 이것을 표현한다. 세상의 아버지가 땅을 힐끗 바라보고 인간의 행동을 신의 관심사에 포함시킬 때, 그때 그가 머리를 끄덕임으로 모든 것을 통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이제 그대에 의해 이런 보살핌에서 해방되어 하늘 의 것만 전념하는바, 이는 그가 그대를 임명해 전 인류를 위한 그의 대리자로서의 기 능을 맡겼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실로 플루타르코스가 <군주론>67 ) 에서 말
하듯이 말했다. 군주들은 인간의 복지와 돌봄을 위한 신의 사역자들이다. 신이 그 61 ) CN: Quintilianus, De institutione oratoria 9.2.29. 62 ) Romanus Aquila, De nominibus figurarum et exemplis lib. 1. 63 ) Homeros(BC 9세기경 출생), Odysseia 7.49. 64 ) 원문은 basilῆaj diotrefeῖj다. 65 ) CN: Homeros, Ilias 9.229. 66 ) CN: Plinius, Panegyricus 80.4. 67 ) CN: Ad Principem Ineruditum , in Moralia 780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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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 나누어 주는 대로, 그들은 몫을 분배하고, 몫을 간직한다. 누마 폼필리우
스의 진술 68 ) 도 이것과 일치한다. 통치는 신들의 사역이다. 같은 플루타르코 스의 책 69 ) 에서, 우리는 아르타바누스70 ) 의 유사한 표현을 발견한다. 모 든 것을 지탱하는 신의 형상인 왕들. 플라톤이 그의 <고르기아스>71 ) 에서 신을
인류 각자에게 그 위치와 군사적 계급을 할당하는 인류에 대한 일종의 지휘관으로 삼는바, 이는 매우 정당하다. 페르시우스72 ) 는 플라톤에게서 다음 생각을 빌려 왔다.
신은 그대에게 어떤 인물이 되라고 명령했나, 그는 인류 가운데서 그대에게 어떤 계급을 주었나.
우리의 종교도 역시 이와 같은 고백을 한다. 권세는 하나님에게서만 오며, 존재하는 권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73 )
나는 생과 사의 중재자] 위와 같은 생각이다. 쿠르티우스의 말 74 ) : 그대가 모든 시민의 생과 사의 주인인 왕의 보좌에 앉을 때, 그대가 통치권을 받는 이 조건 을 잊지 말라……. 그리고 세네카의 말 75 ) :
그대에게 바다와 땅의 통치자가 생과 사의 지배권을 주었도다.
68 ) Plutarchos, Themistocles 6.2.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BC 525-460)는 아테네의
정치가요,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는 로마의 제2대 왕이다. 69 ) Ibid. 27.3. 70 ) Artabanus는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또는 아르사키데스 왕조의 이름으로 1세(BC 191년 사
망), 2세(BC 123년 사망), 3세(12-44년 통치)를 거쳐 5세(224년 사망)까지 이어졌다. 71 ) CN: Gorgias . 고르기아스(BC 487-380)는 그리스 소피스트로 알려져 있다. 72 ) Aulus Persius Flaccus(34-62), Satires 3.71-72. 73 ) 롬 13:1. 74 ) CN: History of Alexander 4.1.22. 75 ) CN: 세네카의 비극 작품인 Thyestes , 607-608. 투에스테스(Thuestes)는 그리스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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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티우스가 “통치권”이라고 부르고, 세네카가 “지배권”이라고 부르 는 것을, 여기서는 “중재”, 즉 호소권 없는 충만하고 자유로운 권세라고 부른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76 ) 도 이것을 그렇게 정의한다. 내 손에 달려 있다] 코엘리우스도 키케로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77 ) 그 대가 그에게 얼마나 은혜를 베풀기 원하는지는 그대 손에 달려 있소. 이 문구의
의미를 키케로는 <의무론>78 ) 에서 마치 설명하듯이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장, 말하자면, 손으로 받는 것은……훨씬 만족스럽다. 그 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을, 마치 손에 거머쥔 것 처럼 우아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또한 “손안에”, “손에”, “손앞에”, “손 밑에”, “손 안쪽에”라고도 말한다. 마지막 두 경우가 드물므로 예를 들 겠다. 세네카는 루킬리우스 ( Lucilius ) 에게 이렇게 쓴다.79 ) 계획은 바로 그날 수립되어야 한다……이것도 너무 늦다. 계획은 그들이 말하듯이 ‘당장’ 나와야 한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80 ) 에서 말한다. 각 지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더 신속하게 그리고 ‘바로 쓸 수 있게’ 보고되고 알려질 수 있도록, 그는 우선 젊은이들을 군사 도로를 따라서 짧은 간격으로 주둔시켰고, 후에는 역마차를 배치시 켰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도스>81 ) 에서 말한다.
그 밖의 모든 것이, 넓게 폐허가 된 채, 그대의 눈앞에, 그리고 그대 손안에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네로는 쉽게 자신이 원하는 자를 부하게 하고 또한 자신이 원하는 자를 가난하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손”을 ‘지배’ 또는
76 ) Pompeius Festus, <말의 의미론>(De Verborum Significatione ), 14.6f, 10f. 77 ) CN: Coelius in Cicero, Ep. Fam . 8.6.1. 78 ) CN: De Officiis 2.17.60. 79 ) CN: Ep. Mor . 71.1. 80 ) CN: Augustus 49.3. 칼뱅은 수에토니우스를 Tranquillus로 사용한다. 81 ) CN: Aeneidos 11.3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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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수에토니우스가 <네로>82 ) 에서 이렇게 말 한 것과 같다. 그는 필요한 모든 일을 준비를 통해 했지만, 접근하는 시도의 결말 은 운명의 지배 아래 있었다……. 어쨌든 의미는 같을 것이다.
각 사람의 운명] 여기서 군주란 운명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
해진다. 운명이야말로 그의 손과 사역으로 모든 것을 뒤죽박죽하게 만 든다. 세네카는 신이란 말 대신에 운명이라는, 적절하기보다는 평범한 용어를 사용한다. 모든 것을 필연에 굴복시키는 자들에게 우연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포하다”라는 말을 적절히 사 용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지배권을 가진 자가 결정하고 법을 세운다는 뜻이다. 내 발언으로 백성과 도시들은 즐기기 위한 구실들을 소집한다] 이 말은 로마
인들과 동맹한 각 국의 대사들, 밀사들, 협상가들과 관련된다. 저 유명한 로마 제국이야말로 실로 일대 약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정 복된 민족들은 이 로마 제국에 조공을 바쳤던 한편 협정 맺길 더 좋아한 민족들은 노예 상태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는 저 야심적인 동맹을 위해 비싸게 지불했다. 저 수천의 검들이] 다른 의미로 이야기한 플라우투스83 ) 의 말은 실로 로
마 황제에게 적용될 수 있었다. 곧 그는 자신의 머리를 끄덕임으로 동과 서를 떨게 했던 일종의 지상의 주피터였다. 이는 오비디우스의 말과도 같다.
이 우두머리 밑에서 태양의 각 지역은 로마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82 ) CN: Nero 23.3. 83 ) Titus Maccius Plautus(BC 254-184, 라틴 희극 시인), Persa 1.3.19f.99f.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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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의 크기와 땅의 크기는 같다.84 )
부속국들의 기질이 언급되어야 한다. 우선 황제는 스스로 모든 개인 소유, 도시, 백성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 뒤, 이제 그것을 종류대로 나열 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발언으로 백성과 도시들이 즐길 구실을 모은다. 나의 고개 끄덕임으로 뽑힐 것이다] 세네카는 강조하기 위해 “고개 끄덕
임”이란 말을 사용했다. “명령”이라고 말함으로써 충분했을 것이지만, 이 말이 더욱 풍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군주가 만사를 멋대 로 끌고 가서 자기 충동으로 그것들을 뒤흔드는 것처럼 말이다. 베르길 리우스의 말 85 ) : 그는 끄덕여 동의했고, 그 끄덕임으로 모든 올림포스 산을 떨게 했다.
쿠르티우스86 ) : 마케도니아인들의 밀집 군대는 지도자의 신호뿐 아니라, 그의 끄덕임에도 방심하지 않는다. 키케로87 ) <퀸투스에게 쓴 편지>: ……수많은 도 시가 단 한 사람의 끄덕임을 주시한다.
어떤 민족들은……유형 보내지며] 전쟁에서 정복당한 민족들이 지방의
이 점을 통해 새로운 의기 ( 意氣 ) 를 일으킬 수 있을 때, 그들을 다른 곳으 로 이송시키는 것이 옛 관습이었다. <막시미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에 대한 찬사>88 ) : 그대는, 산들의 자연적 보호와 접근할 수 없는 고도에 의지했던 지 극히 맹렬한 마우레타니아 89 ) 백성을 정복했고, 항복을 받아 냈으며, 다른 지역으로 보냈다. 리비우스90 ) : 벨리트라이 ( Velitrae ) 91 )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이 너
84 ) CN: Ovidius, Fasti 2.136; Ibid . 2.684. 85 ) Aeneidos 9. 106. 86 ) CN: History of Alexander 3.3.27. 87 ) CN: Ep. Quint. Frat . 1.1.22. 88 ) CN: Panegyric to Maximian and Constantine 8.2. 89 ) Mauretania는 북아프리카 지방이다. 90 ) CN: Ad Urbe Condita 8.14.5-6; 8.20.9; 1.28.7; 1.29.1(순서대로 연속 인용되는 네 인용문
출처다). 91 ) Velitrae는 라티움의 볼스키 사람의 도시로 지금의 Velletr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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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자주 반역했으므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엄격함의 척도인 로마 시민들이 타 격을 받았다. 결국 그들의 성벽이 무너지고, 그들의 원로원이 해체되었으며, 그들은 티베리스강 저편에 거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래서 티베리스강 근처에서 체포되는 자 는 나귀 천 마리 이상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같은 작가: 프리베르눔 ( Privernum ) 92 ) 의 원로원에 대해서는, 로마인들로부터 반란이 있고 난 뒤, 그곳의 원로원 의원으로 계속 행세한 자는 누구나 벨리트라이 사람들과 같은 제한 하에 티베리스강 저편에서 거주해야 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옮기다”라는 말을 쓴다. 알바 ( Alba ) 의 모 든 거주민을 로마로 옮기는 것이 내 의도이며, 그것은 로마 백성에게와 내 자신에게, 그리고 오 알바인들이여, 그대들에게도 다행이며, 경사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같은 곳, 조금 뒤: 이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그 무리를 로마로 이송하기 위해 기병대가 급파되었다. 이 말은 드물지만 ‘유배하다’의 의미로도 또한
쓰인다. 나는 수에토니우스의 <아우구스투스>93 ) 에서 단 하나를 읽은 기 억이 있다. 고집스러울 뿐 아니라, 그 어리석음이 날로 커져 가는 아그리파 94 ) 를 그는 섬으로 유배시켰다.
어떤 왕들은 노예가 되고] “노예”라는 말은 의미를 강하게 한다. 이 말은
그가 마치 ‘정상에서 가장 낮은 상태로 떨어짐’을 말한 것 이상으로 표 현하기 때문이다. 왕과 노예라는 이 두 가지는 전혀 상반되는바, 전자는 모든 것을 명하나 후자는 가장 초라한 종의 신분에 놓여 있다. 머리에는 왕의 영예로 관이 씌워지며] 이 표현은 왕관을 말하기 위한 완곡
법으로, 세네카는 이것을 <미친 헤라클라스>95 ) 에서도 사용한바 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장식한 왕의 면류관이 그에게서, 곧 그의 머리와 모든 것으로부터 빼앗기는 것을 보았다.
92 ) Privernum 역시 라티움의 볼스키 사람의 도시로 지금의 Piperno다. 93 ) CN: Augustus 65.4. 94 ) Marcus Vipsanius Agrippa(BC 63-12)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다. 95 ) CN: Hercules Furens 257-25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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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에스테스> 96 ) 에서도,
…… 면류관은 두 번 세 번 왕의 머리에서 떨어져…….
왕관이 왕들의 휘장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것은 많은 색깔 의 테로 감겼으며, 그 이름은 그리스어 ‘디아데오’ 곧 ‘둘레를 감다’에서 기원한다. 키케로는 이 말이 왕위와 다름을 그의 <필리푸스>97 ) 에서 보 이는바, 그는 집정관 안토니우스가 이미 왕위에 오른 카이사르에게 왕 관과 통치권을 바쳤다고 말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98 ) 도 폼페이우스 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파보니우스 ( Favonius ) 는 흰 테로 자신의 다리를 묶은 다 음, ‘왕관이 몸 어느 부분에 입혀져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것
을 키다리스라고 부른다. 쿠르티우스99 ) 는 말한다. 페르시아인들은 왕의 머 리 장식물을 키다리스라고 불렀는바, 이것은 흰색이 곁들여진 청색 머리띠로 장식되 었다. 이제 왕의 이 억제되지 않은 지배권에 대해,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
은, 통치가 카이사르의 군주 정치로 넘어가기 전에, 왕국들이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수여되었음을 안다. 키케로100 ) 는 파피루스 파이투스 ( Papirus Paetus ) 에게
이렇게 쓴다. 내가 그대로 알게 하는 것은, 내가 전에 세상의 가장 먼
곳에 있는 왕들로부터, 내 결의로 그들에게 왕의 칭호를 준 것에 감사하다는 편지들 을 받았다는 것인데, 사실 나는 그들이 그런 칭호를 받은 것이나, 그들이 언제 태어 났는지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나 백성은 “왕의 법”에 따라 모든 통치를 황
제의 가문에 이양했다. 이것이 내 지배권이다] 여기서 법학자들은 “지배권”이란 말이 모든 종류 96 ) CN: Thyestes 701-702. 97 ) CN: Philippics 2.34.85; 참고. 3.5.12. 98 ) CN: Valerius Maximus, Facta et Dicta Memorabilia 6.2.7(p. 475). 99 ) CN: History of Alexander 3.3.19. 100 ) CN: Ep. Fam . 9.15.4.
32 | 칼뱅 작품선 8
의 재판권을 포함하는 일반적 의미로 쓰였다고 이해한다. [3] 만사에 이런 큰 권능을] 흔히 말하듯이, “시도되지 않은 덕은 칭찬의
가치가 적다.”101 ) 적당한 행운을 올바르게 조절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만사를 제멋대로 하는 그런 큰 허용을 잘못 사용하 지 않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따라 권능을 확 대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탁월한 황제로 입증하는 자는 성숙기의 인간 ( 그에게
나이는 선생처럼 온다 ) 이
아니라, 불안정한 나이로 평가된다. 그는
모욕에 괴로워하기 때문인데, 흔히 대부분의 평화로운 사람들은 모욕에 어리둥절해한다. 이런 이유에서 세네카는 어떤 법에도 억제되지 않는 왕 들의 큰 권능을 언급한다. 이는 헤로디아누스102 ) 가 말하는 것과 같다. 사 람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가장 큰 허용이 주어질 때 자제하기란, 다시 말해 욕망 에 고삐를 당기기란 어렵다.
홧김이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 셈이다. 어떤 억제된 주장도 하지
않는, 특히 처벌함에 있어 결코 절제를 지키지 못하는, 저 미개한 마음의 성향이 ( 이것을 에니우스103 ) 는 “정신 질환의 시작”으로, 호라티우스104 ) 는 “잠시 미침 [ 狂 ]”으로, 카 토105 ) 는 “일시적 미침”으로 불렀다 )
아직껏 나로 하여금 누구를 파괴하는 데로 끌
어가지 못했다.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하는 말은 이렇다. 왕의 분 노는 힘들다 ( Cale,ph
me.n o,rgh, basilῆoj ) .106 )
이 말을 세네카는 그의 <메데아>107 )
에서 라틴어로 썼다. Grauis ira regum est semper ( 왕의 진노는 언제나 무겁다 ) . 그 러므로 이런 흔한 악덕에서 자유로운 한 군주가 스스로에 대한 감탄을 시
101 ) 출처가 불분명한 격언이다. 102 ) Angelus Politianus(ed/tr), Herodianus 1517, 1.4.6. 103 ) Quintus Ennius(BC 239-169)는 라틴 시인이다. 이 말은 키케로가 <투스쿨룸 논
쟁>(Tusculanae Disputationes 4.23.52)에서 인용하고 있다. 104 ) Epistulae 1.2.62. 105 ) Marcus Porcius Cato는 같은 이름의 조부(BC 234-149)와 증손(BC 93-46) 관계인 두 사
람이 있다. 둘 다 로마의 정치가로서 누가 인용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106 ) 출처가 불분명한 격언이다. 107 ) CN: Medea 495.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
33
관용은 결정에 있어서 자유를 가집니다. 관용은 엄밀한 법정 적인 형태에 따라 판단하지는 않지만, 공정하고 선한 것과 일 치합니다. 관용은 무죄 석방할 수도 있고, 손해 액수를 원하는 가치만큼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관용은 정의롭지 않은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가장 정의로운 것을 결심한 것 처럼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당신이 처벌받을 만
* * * 칼
뱅
총
서
하다고 판단한 것을 처벌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용서는 받아 야만 될 처벌을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관용은 확실
칼뱅 총서 I. 칼뱅 기독교 강요
히 우위에 있습니다. 관용은 사면받은 자들이 어떤 다른 취급
<기독교 강요/초판, 1536>
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2판: 프랑스어 초판, 1541>
<기독교 강요/최종판, 1559>
칼뱅 총서 II
작품선 33권
작품선 33권
칼뱅 작품선
Jean Calvin
칼뱅 총서 II
용서보다 더 완전하고 신뢰할 만합니다. 제 견해로는, 논쟁은 말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해서는 일치합니다. 현
칼뱅 총서 II. 칼뱅 작품선
자는 많은 처벌을 면제해 줄 것입니다. 그는, 범죄 자체의 불건
<칼뱅 작품선 1. 교회 법규·신앙고백서·교리문답서 7권>
전함에도, 성격만은 결코 불건전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구제해
<칼뱅 작품선 2. 교회 개혁서 2권>
<칼뱅 작품선 3. 강연·서문·유언·고별사 등 7권>
<칼뱅 작품선 4. 로마 가톨릭 논박서 1 5권>
몇 이유로 구부러져서 성장한 나무들을 곧게 만들기 위해 버팀
<칼뱅 작품선 5. 로마 가톨릭 논박서 2 2권>
목을 대 주기도 하는 좋은 농부들과 같을 것입니다.
<칼뱅 작품선 6. 재세례파와 심령파 논박서 4권>
<칼뱅 작품선 7. 니고데모파와 세르베투스 논박서 5권>
<칼뱅 작품선 8.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줄 것입니다. 그는 곧고 키가 큰 나무들을 돌볼 뿐 아니라, 몇
8
- <세네카의 관용론 2권 7장> 중에서
칼뱅 총서 III. 칼뱅 서간집
장 칼뱅 지음
<칼뱅 서간집>(1530~1538)
박건택 옮김 칼뱅 총서 IV. 칼뱅의 제네바 당회 회의록, 목사회 회의록
<칼뱅 제네바 당회 회의록 1>(1542~1544)
칼뱅 총서 V. 칼뱅 설교집
<칼뱅 시편·예레미야 설교집>
ISBN 978-89-6092-683-7 ISBN 978-89-6092-538-0 (세트) www.rnrbook.com
값 22,000원
지은이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은 마르틴 루터와 함께 16세기 개신교 종교개 혁을 이끈 탁월한 신학자이자 목회자다. 칼뱅은 30년 도 안 되는 목회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 겼는데, 그의 대표 작품인 『기독교 강요』를 비롯하여 성경 주석, 설교집, 신학 논문, 논쟁서, 신앙고백서, 교리교육서 등을 포함한다. 27세 때 초판을 발간한 이 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개정 증보한 『기독교 강요』 는 교회사에서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칼뱅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이래로 기독교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칼뱅의 사상은 전 유럽에 전파된 후 신세계로 뻗어 나갔으며, 훗날 전 세계에 알려졌다. 칼뱅의 통찰과 영향력은 현재까지
칼뱅 작품선 8
Jean Calvin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Recueil des opuscules de Jean Calvin 장 칼뱅 지음 | 박건택 옮김
지속되어, 성경에 기초를 둔 신학 사상의 모형을 제시 해 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교회 안에서 성도들 의 신앙 양육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옮긴이
박건택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전 공하고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 IPT(Institut Protestant Théologie)에서 신학 석사(M. en théologie), 파리 10대학에서 박사 과정 수료(DEA), 파리 4대학에서 역사학 박사(D. en histoire)를 취득했다. 오랫동안 총신대학교 신학대학 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고 퇴임하였다. 저서로는 『칼 뱅의 자유사상』, 『자끄 엘륄의 생애와 사상』 등이 있 고, 칼뱅 작품 선집을 비롯하여 주로 칼뱅 원전을 번 역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