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에너지가 넘치는 배럿 박사의 강연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그의 강연
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헌신의 불을 붙이는 효과, 신중한 성서 해석학적
주의, 미세 조정된 신학적 마음을 보았다. 독자는 같은 역동성이 처음부터 끝까
지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은 전문 용어와 학자적 허세가 없
는 책으로 그리스도인 독자에게 하나의 선물이다. 마르키온파는 주의하라! 당
신들은 여기서 안전한 구절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
독교 정경 전체 위에 계시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신다.”
- 마크 지그닐리아
비슨 신학교 신학 교수
“이 책은 읽기에도 좋고, 접근 방식에서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그리스도 예수
님을 구약 성경과 전체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로 제시한다. 이 책은 구약 성경
의 모든 약속과 기대, 특히 모든 민족이 그분이 사신 구속을 통해 복을 받을 것
이라는 약속을 이루러 오실 선지자, 제사장,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학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유익한 책을 추 천한다.” - 러셀 풀러 서던 침례 신학교 구약학 교수
“나는 마이클 배럿 박사의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를 정말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
한다. 탁월한 구약학자가 일반인을 위해 쓴 이 책은 고대 성경의 가장 큰 보물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증언을 어떻게 캐낼 수 있는지 보여 준다. 경험 많은 설교자부터 초신자까지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발견하는 데 진 지한 모든 사람은 배럿 박사가 어려운 내용을 뛰어난 가독성으로 이해할 수 있
“배럿 박사는 이 책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축복이 될 책을 만들어 냈다.
그는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구약 성경의 깊숙한 곳을 파헤치고, 우리 구주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물을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독자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평신도든 설교자든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을 구약 성경에 담긴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인도하는 효 과적인
- 로버트 테일러 박사 밥 존스 대학교 예술과학대학 학장
┃목차┃
머리말과 감사의 말 10
서론 14
문제┃해답┃전제┃절차┃성경의 열쇠┃목적과 계획
1부 누구를 찾을 것인가 39
1장 메시아 예수 41
용어의 정의┃용어의 함의┃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의 적용┃결론
2장 그리스도의 위격 85
특별한 분┃그분의 신성┃그분의 인성┃주요 성경 구절 개요┃결론
3장 그리스도의 사역 131
초림 사역┃현재의 사역┃재림 사역┃결론
2부 어디를 볼 것인가 171
4장 언약 안의 그리스도 173
언약의 정의┃언약의 발전┃언약의 세부 사항┃결론
5장 사람 모습의 그리스도 229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한 주의 사항┃그리스도 현현의 인격체┃
그리스도 현현의 목적┃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내는 구절들┃결론
6장 그분의 이름 안의 그리스도 259
이름을 부르는 두 구절┃그리스도의 위격과 완전성에 초점을 맞춘 칭호┃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칭호┃결론 및 제안된 기타 칭호
7장 말씀 예언 중의 그리스도 327
예언의 목적과 성격┃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내용┃결론
8장 그림 예언 중의 그리스도 (설명) 381
예표론에 대한 해석 지침┃예표를 해석하기 위한 신약 성경 모델┃결론
9장 그림 예언 중의 그리스도 (예시) 421 사람┃사물┃사건┃결론
10장 찬송 중의 그리스도 459
메시아적 시편의 식별┃선택된 메시아적 시편의 개요┃결론
결론 500 요약┃마지막 생각
서론
교리와 경험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다. 우리가
믿고 진실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때로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진실이 주관적
경험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위대하
시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고 확언하지만, 우리는 고난의 첫 징후에 곧 절망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믿음을 담대하게
확언한다. 그러나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응답도 감
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궁금히 여기고 의심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
앙을 시험하고 우리가 믿는 것이 정말로 진실인지를 의심하게 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우리는 보통 교리보다 경험을 더 신뢰한다.
이로써 우리 마음에 긴장이 생긴다. 이 긴장은 심지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의 규범인 성경에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14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
것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익숙한 이야기나 좋아하는
구절을 제외하고, 성경의 대부분은 심지어 신자에게도 부적절한 것
처럼 보인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다( 시 19:10 ) 라고 고백했을 때 그의 경험에 대
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이 모든 성경의 참된
의미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참된 기쁨을 주는 열쇠를 발견하기를 기도한다.
문제
이처럼 성경과 단절되는 현상은 구약 성경에서 더 뚜렷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구약 성경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닫힌 책
이다. 이론상으로 ( 또는 교리를 따르면 )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적절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먼저 문제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한 베드로
의 다음과 같은 평가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벧후 3:16 ).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독자는 어려운
말, 모호한 세부 사항, 낯설고 불가사의한 표현, 잊힌 관습,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 가계도 및 현대 생활에 뚜렷하게 적용되지 않 거나 관련성이 없는 상세한 율법을 만난다. 구약 성경의 큰 부분은
뚜렷한 가치나
서론
입은 후에도 자세한 내용을 왜 똑같이 되풀이했는지를 궁금하게 생
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성막도 제사장 제도도 없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왜 이 모든 자세한 사항을 참을성 있게 읽어야 할까?
그것은 어렵게 읽고 아무런 복을 못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열두 지
파 지도자가 제단 봉헌식을 위해 가지고 온 선물의 똑같은 목록을
열두 번이나 반복하는 민수기 7장을 읽어 본 사람으로 모세가 왜 그
들이 모두 같은 선물을 가져왔다고 한 번만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
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은 제단도 없고, 대부분
“성소의 세겔로……칠십 세겔 무게의 은 바리”( 13절과 장 전체를 통해 열
한 번 더 ) 를 어디에서 구할지도 알지 못하는데, 우리는 왜 그 자세한
목록을 다 읽어야만 할까? 이것도 어렵게 읽고 아무런 복을 못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같아 보 인다.
다른 구절은 신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아 보 인다. 레위기가 좋은 예다. 한편으로 히브리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의 단 한 번의 희생 후에는 동물 희생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구약 성경의 의식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엄중
하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레위기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적절한
방법에 대해 계속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신약 성경의 계시에 비추
어 볼 때, 레위기는 순종하기보다 피해야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
리가 레위기의 제물에 대한 엄격한 규정을 따르면, 우리는 종교적
으로는 이상한 사이비 집단으로, 문화적으로는 동물 권리 옹호자들
을 화나게 하는 집단으로 간주될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제물에
16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
추가해서, 레위기는 오래전에 죽은 문화에 속하는 자세한 율법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혼합 소재의 의복을 착용하지 않음( 레 19:19 ) 및
수염 모서리를 손상시키지 않음( 19:27 ) 은 대부분의 남성이 깨끗이
면도를 하고 제조된 직물이 단일 재료로 된 경우가 거의 없는 현대 문화권에서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 같다. 요컨대 레위기도 어렵게
읽고 아무런 복을 못 받는 것이다. 구태여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 예들은 문제를 보여 준다. 이론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구약 성
경에 대한 믿음을 확언하지만, 실제로는 구약 성경에 대해 좌절감
을 느껴 더 친숙하고 더 뚜렷이 신앙적인 책을 찾게 된다. 친숙한
신앙 서적은 좋다. 그러나 신자는 구약 성경의 큰 부분( 성경의 대부
분 ) 을 무시할 때, 구약 시대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그리스도
인에게도 꼭 필요한 소중한 진리의 보배를 발견하는 복을 놓치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은과 숨겨진 보물에 비유되는 것은
상( 賞 ) 이 언제나 지면( 地面 ) 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대
부분의 성경 공부에서 문제는 메시지가 지면에 나타나 있지 않는
한, 일반 독자는 지면에 있는 분명한 교훈을 발견할 때까지 흙먼지
를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발을 끌며 앞으로 걸어가
는 것으로는 대체로 보물을 발견하지 못한다. 때때로 땅을 파기도
해야 한다. 잠언 2장은 우리가 은을 구하듯이 진리를 구하고, 마치 감추어진 보물을 찾듯이 진리를 찾으면, 하나님이 지혜, 지식, 이해
를 주기로 약속하셨으므로, 우리가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 그것 없이는 우리가 생존할 수 없는
그 말씀을 다루고 있는 것을 깨달을 때, 땅을 파는 것조차도 유익하
고 즐거운 일이다. 창세기에서 말라기를 거쳐 요한계시록까지, 하나
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를 계시한다. 우리의 성경을
열어 놓고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 하나님이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분인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를 찾을 때 온 마음을 다해 찾으면 자기를 발견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렘 29:13 ). 그것이 진리다.
해답 신앙은 언제나 교리와 경험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답이다. 디모데
후서 3장 16-17절은 아마도 성경의 교리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진
술일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 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
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 이라.” 성경은 독특하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영감을 받은 또는
문자 그대로 성령님이 ‘내쉰’ 것이다( 딤후 3:16 ). 비록 이 신성하고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인 일의 메커니즘은 설명할 수 없지만, 그 과
정의 결과는 우리가 영감을 받고 권위 있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감의 교리가 가지는 함의는 그것
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고 중요하지만, 우리의 논의를 위해 중
요한 점은 하나님이 내쉰 것을 의도적으로 내쉬셨다는 것이다. 우
리가 가진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말씀
이다. 우리가 가진 역사는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역사다. 우리가 가진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율법이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가 갖기를 원
하시는 바로 그 복음이다. 모든 것은 전지전선( 全知全善 ) 하신 하나님
이 우리가 갖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모든 말씀을 의 도적으로 주셨고, 바울은 우리에게 그분의 목적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우리를 모든 선한 일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
람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목
적이다.
자주 발생하는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신앙이 작용해야 할 장소가
여기에 있다. 신앙은 사실과 반해서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확신시 키려는 긍정적 사고의 주관적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정반대다. 신
앙은 객관적 진실에 근거하고, 신앙 대상의 가치에 비례해서만 가
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언제나 경험을 대체하고 억제해
야 한다. 경험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결코 어떤 것에 대한 최종적
이고 유일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에 확실히 적용된다. 교리는 모든 성경이 영감을 받았고 유익
하다고 말한다. 신앙은 그것이 진실임을 믿는다. 경험이 성경은 목
적이 없고 적절하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지고, 또는 다른 어떤 방
식으로 유익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면, 경험이 잘못된 것이다. 우
리가 즉시 복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서론
있었던 모든 것 중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을까? 신앙으로 우리는 그
분이 그것을 말씀하신 이유를 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
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하심이다.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우리 몫이다. 성경
은 하나님이 진리를 숨기는 대신 드러내시는 수단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 안의 모
든 것을 똑같이 쉽게 이해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을 평범
한 문서 이하로 낮추는 것이고, 우리가 즉시 이해하지 못할 때. 더
많은 좌절에 빠질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에서 성직자의 진술은 이런 것을 상기시키는 훌륭하고 위안이 되는
진술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그 자체가 똑같이 평범하지 않
고, 모두에게 똑같이 분명하지도 않지만, 구원을 위해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하고 준수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여기저기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열려 있어서, 유식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보통의 수단을 바르게만 사용하면 그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7 ).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중 많은 부분을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셔
서 맹목적이고 노골적인 불신자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말씀 중 많은 부분을 너무나 심오하게 만들어 놓으셔서 가
장 독실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지성보다 그분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한다. 성경과 같은 책은 없다. 그것은 평신도가 이해할 만큼 분명하
게 말하면서도 학자를 겸손하게 만들 만큼 충분히 도전적이다. 평
신도나 학자는 이 특별한 계시를 결코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 둘 다
점점 더 많이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 성경이 아름다운 것은 이해할 것이 언제나 더 많이 있다
는 것이다. 언제나 누릴 복이 더 많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유익한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증가시키시고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
게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시 119:18 ) 바란다. 신앙은 우리가 구약
성경을 버리는 것을 막는 해답이다. 우리가 실제로 레위기나 역대 기에서 어떤 유익한 교리나 책망이나 교정을 찾을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신앙은 이런 모호한 책에서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말씀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전제
우리가 신앙을 통해 성경에 접근할 때, 우리는 당연하게 진실이라
고 여기는 한 묶음의 믿음을 가지고 접근한다. 이런 전제는 필수적
이며 불가피하다.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다. 진보적인 학자는 흔히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그
것의 정확성을 판단하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접근한다고 주
장한다. 사실상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신의 계시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접근한다. 그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
님과 진리를 대적하기 쉬운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닫힌 마음이다.
사람은 성경의 심판자가 될 수 없으며, 성경이 사람의 심판자가 된다. 우리는 신자로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열려 있고 수용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신자는 성경을 펼
칠 때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이든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옳은지 그른
지를 결정하게 맡겨 놓을 수 없다. 우리는 신앙으로 성경의 영감을
믿으며, 따라서 성경의 권위, 무오성, 충분성, 그리고 책 처음부터
끝까지의 유효성을 확언한다.
권위란 성경이 진리( 신앙의 문제 ) 의 절대적 기준이며, 생활의 절대
적 규칙( 실천의 문제 ) 이라는 것을 뜻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하
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순종의 유일한 규칙이다”( 질문 3 ).
무오성이란 성경이 오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진리는 절대적이
며, 모든 진리의 근원은 진리며 진리의 계시자인 하나님이시다. 무
오성은 신학의 문제뿐 아니라 역사와 과학의 문제를 포함해서 성경
의 모든 진술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학, 역사, 과학의 모든
문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충분성이란 성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기쁘게 하는 방
법을 배우는 데 필요한 전부라는 것을 뜻한다. 성경은 이 세상을 통
해서 그리고 내세까지 우리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인도하는 데 필요 한 전부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 시 19:7 ) 라고 선
언했다. 여기서 율법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지시의 전체, 특별 계시 전체를 가리킨다. ‘완전하다’라는
말씀이 혼을 변화시킨다고 결론짓는다. 성경을 보완하기 위해 인간
이 규정한 철학, 심리학, 의견, 경험은 필요 없다. 다음과 같은 말은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실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것
으로 확정된다.
유효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말씀을 이룰 내재된 권세가 있
음을 뜻한다. 주님 자신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
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55:11 ) 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은 심판 때에 바위를 부수는 망치며( 렘 23:29 ),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은혜의 수단
이다( 롬 10:17 ).
요점은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마다, 이 책은 평범한 책이 아니라
그 진실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
이라는 확실한 지식에서 비롯된 경외심을 가지고 책을 펼쳐야 한다
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을 규정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이 선포하
시는 것이다. 사람은 성경을 믿거나 부인할 수 있을 뿐이고 성경을
변경할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권위 있고, 무오하
고, 충분하고,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나의 전제가 이 책의 전
체 주제와 생각의 전개를 위한 기초가 될 것이다. 나의 전제는 모든
진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분의 진리는 전 세계적이고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시대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진리의 적용은 변할 수 있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절차 일단 우리가 적절한 전제와 마음가짐을 확립했다면,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절차를 개발해야 한다. 해석은 단순히 우리가 어떤 것
을 읽거나 들을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늘 하는 일이며, 의사소통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
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제대로 이해되는지가 얼마나 중요
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언어의 오해에서 생긴 슬프거
나 재미있는 사례도 얼마나 많은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상대방
이 한 말에 의도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말다툼이 벌어
지곤 한다. 그래서 말하는 이나 글쓴이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아
내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 과정에서 필수적인 열쇠다.
우리가 의도되지 않은 의미로 읽기 시작하면, 오해가 생기고 심각
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의사소통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다소 심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모든 주의를 기울
여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치에 맞는 일이다.
진리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 무엇이라고 계시하시고 선언하신 것이다. 해석학에 대한 현대적
논의의 한 쟁점은 저자의 의도와
24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
적 진리로 인도한다. 반대로 독자 반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저자
가 뜻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식별할 수 없으므로 독자가 보는 것이
진리라는 태도다. 그것은 절대적 진리의 가능성을 제거하며, 진리는
독자에 따라 주관적으로 변하는 어떤 떠다니는 추상적 관념일 뿐 이다. 권위는 말씀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 나의 전제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이 그분의 말씀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보다 무한히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리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은 자신
이 말한 것을 뜻하시고, 자신이 뜻한 것을 말씀하신다’라는 표현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사실이다. 그분의 말씀의 목적은 사람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 중 하 나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발견하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설정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우리는 해석의 특정한 측면을 고려할 것이지만, 먼저 모든 성경 해석 방법을 조정하는 절차의 몇 가지 기본 원리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모든 성경 공부 모임을 기도로 시작하라. 시편 기자가 하나님이 자
신의 눈을 열어 율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시기를 기도했듯이, 우
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시 119:18 ).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진
리를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
리의 영이 그들을 모든 진리 속으로 인도하실( 요 16:13 ) 것이라고 약
속하셨다. 그 약속의 구체적인 함의는 신약 성경의 영감과 관련 있
지만, 그것은 영감을 받은 말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서론
1장 메시아 예수
베드로에 따르면 구약 시대의 선지자는 자기가 무엇에 대해 기록
하고 있으며 누구를 찾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
도를 찾고 있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
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
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
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것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그분의 고난과 뒤
따르는 영광이 두 번의 개별적인 강림을 구성하리라는 것을 이해하
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구원이심은 알았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열
쇠일 뿐 아니라
잠금을 여는 열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고 있을 때 우리
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이 장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탐구에서 필수적이다.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주님을 지칭하
는 데 사용되는 이름과 칭호를 충분히 고찰하고 그 뜻을 적절하게
밝혀야 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과 하나
님을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라벨
로 간주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이름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름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거나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
하고 식별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이름이 뜻하는 것을 때때로 흥미
로운 글이나 멋진 표어로 명패나 커피 잔에 새기지만, 그것이 사람
에 대해 필수 정보를 전달하는 요소는 아니다. 나의 부모님은 나에
게 마이클( ‘누가 신과 같은가?’라는 뜻 ) 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
것은 그들이 신학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그
이름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요점은 우리가 이름을 사용하지만 반
드시 그 이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
경의 저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름,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
서 아무렇게나 또는 무심코 사용된 적이 없다. 이름은 그렇게 명명
된 분의 성격이나 특징에 대해 무엇인가를 전달한다. “이름을 예
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
이라”( 마 1:21 ). 예수라는
수단이었다. 주님의 이름과 칭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성경 해
석의 중요한 부분이다.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한 가
지 방법은 그분을 계시하는 데 사용된 칭호를 확인하고 그 뜻을 밝
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찾을지를 논의하는 2부
에서 그런 구체적인 칭호 일부를 고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기
본적인 것을 정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한 일반적인 신약 성경의 표현에서 단순
히 예수님의 ‘마지막 이름’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 각 용어가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지만,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의미가
크고, 하나님이 죄 많은 사람을 위해 구주를 예비하신 핵심적인 사 건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
해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구주를 찾는 중요한 첫 걸음 이다. 용어의 정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메시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를 음역한 것이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의미가 같다. 그러므로
유대교 또는 구약 성경의 메시아를 기독교 또는 신약 성경의 그리
스도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두 단어의 유일한 차이점은 하나는 히브리어고 다른 하나는 헬라 어라는 것뿐이다. 성경 맥락에서 둘은 의미가 같으며 똑같이 궁극
적이고 이상적인 인물 나사렛 출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요한은 안
드레가 시몬 베드로에게 증언한 것을 기록하면서 이것을 다음과 같
이 분명하게 밝혔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고 (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 ”( 요 1:41 ).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 단
어를 정의하는 핵심 자료를 제공한다. 안드레는 분명히 메시아라는
칭호의 의미를 이해했고 약속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증
언했다. 그 한 단어에 얼마나 큰 신앙 고백이 담겨 있었는가! 신약
성경이 개념을 정의하지 않고 구주를 언급하기 위해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500번 이상 사용했다는 것은 사도가 그 단어에 대한 구약
성경의 의미를 이해했고 그 독자들도 그 의미를 이해할 것이라고
추정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구약 성경의 의미를 부
여하지 않고는 신약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좋
은 예다.
메시아라는 명사는 다양한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액체를 퍼뜨 리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독특한 것은 아니지
만( 주홍색 안료를 ‘칠한’ 집에 대해 묘사하는 렘 22:14를 보라 ), 가장 자주 사용
된 액체는 감람유였고, 물건도 사람도 이 기름을 발랐다. KJV는 흔
히 이 동사를 “anoint”( 기름 붓다 ) 로 번역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물건
의 대부분은 예배 의식에서 어떤 기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출애굽
기 29장 36절은 속죄 제물을 바친 후에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깨끗하게 하고 그것에
리킨다. 기름부음을 받은 물건은 뚜렷한 목적과 용도를 위해 따로
떼어 놓았다. 그것들은 특정한 기능에 봉헌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에게도 같은 의미가 적용된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보통
민간에서든 종교에서든 지도자 역할을 담당했다. 가장 일반적인 것
은 왕( 왕상 1:34 ), 제사장( 출 28:41 ), 선지자( 왕상 19:16 ) 였다. 각 경우에
기름부음은 특정한 기능을 위해 사람이나 물건을 따로 떼어 놓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
고, 그 첫째 왕에게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사 지도자로 삼으 셨다고 말했다( 삼상 10:1 ). 그때 임명된 왕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사실은 의미가 없지 않다( 6, 10절 ). 이와 비슷하게 사무엘이 기름을
가져다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을 때에도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셨다( 삼상 16:13 ). 감람유와 성령님 사이의 명백한 연관
성은 기름부음 의식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그 의식의 중요성을 증가
시킨다. 이 연관성은 우리가 구주 자신의 특별한 기름부음을 고찰
할 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라는 명사는 왕에 대해 가장 자주 사용되지
만( 39번 중 28번 ),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정확하게 메시아라
고 부를 수 있었다. 왕, 제사장, 선지자 모두 메시아였다. 히브리어
에서 명사형 메시아는 본질적으로 동사의 수동적 개념을 전달한다.
메시아는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그 사 람이 어떤 과업을 수행할 자격이 있고 그 과업을 수행하도록 선택 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는 특별한 임무를 위해 성별( 聖別 ) 되거나 따 로 떼어 놓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수동적 기름부음이 가리키
는 적극적인 직분의 실천이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왕은 다스리
게 되어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제사장 임무를 다해야
했다.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는 말씀을 전해야 했다. 단순히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정의되는 메시아는 죄인의 구주로 확인되고 자
격이 있으며 선택받은 유일한 분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잘
적용되는 포괄적인 단어다.
용어의 함의 메시아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 예들을 보면, 구약 성경에서 그 용
어가 참되고 궁극적이며 이상적인 유일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위
해 예약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따라서 메시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작은 메시아 중 누구도 약
속된 구주로 확인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기능은 메시아 그분의
직분과 사역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주었고 지금도 알려 준다. 이
메시아 직분을 가졌던 사람에 대한 몇 가지 주요 사실을 보면, 왜 메
시아라는 용어가 그처럼 적절하게 구주를 지칭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그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 경우에도 그분의 위
격과 사역의 메시아적 측면을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
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메시아 직분은 각각 전혀 다른 의무와
책임을 가졌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 중 일부를 고찰할 때
잠시만 참아 주기 바란다. 감동적이고 만족스러운 부분은 우리가
그것들이 어떻게 주 예수님에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때 나온다.
메시아의 선임
첫째, 메시아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자원자에
게 이 직분을 주지 않으셨고, 이 직위를 찬탈하려는 자는 가혹하게
다루셨다. 이것은 왕에게 해당된다. 모세는 왕을 세울 때가 오면 왕
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신 17:15 ) 사람이어야 한다고 구체
적으로 선언했다. 창세기 49장 10절에서 하나님은 궁극적인 왕이
나올 왕족 지파로 유다 지파를 선택하셨다. 유다 지파에서 처음으
로 왕이 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다윗의 모든 형
제를 두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형들이 차례로
사무엘 앞을 지나갔을 때, 주님은 선지자에게 겉으로 보이는 자격에
도 불구하고 그들을 택하지 않았다고 계시하셨다( 삼상 16:7-10 ). 그러
나 다윗이 나타나자 주님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
으라”( 12절 ) 라고 말씀하셨다. 후에 다윗이 그토록 큰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나단을 통해 그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었음”( 삼하 12:7 ) 을 상기시키셨다. 다윗의 전임자 사울은 겉으로 보
기에는 ‘백성이 택한’ 왕 같아 보였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다윗을 택
하셨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름을 부어 백성을 다스리게 할 사
람이 사울임을 사무엘에게 계시한 분은 주님이셨다( 삼상 9:15-17 ). 의
미심장하게도 하나님이 왕을 선택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국경 너 머까지 확장된다. 미래의 왕국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남긴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동정녀 탄생에서 재림까지 이사야
서에서 찾을 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거의 없다. 이사야는
참된 의미에서 복음서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메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한 유일한 경우는 이교도인 바사 왕 고레스를 언급한
것이었다. 주님은 고레스를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고레스”( 사
45:1 ) 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고레스를 이스라엘 백성을 바
벨론 포로 상태에서 구출하고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
기 위한 도구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더욱 의미가 깊어지는 것은
주님이 그 일이 일어나기 거의 2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이것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이 예언 부분을 통해 주님은 고레스를 일으
킬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41:25; 44:28; 45:13 ). 고레스는 하나님
의 백성을 구원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미리 정해지고, 선택되고, 기름부음 받고, 구별되었다. 그것은 메시아적인 왕에 대
한 좋은 요약이다.
대부분의 초점이 왕의 직분에 놓여 있지만, 성경은 제사장과 선
지자도 각자의 직분에 선택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히브리서 5장은
구약 성경의 제사장직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요건과 의무 목록
에는 제사장직이 임명된 자에게만 부여된다는 진술이 있다. “이 존
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
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직으로 선택하신 것과 그 직분을 위해 ‘자원
하는 것’의 심각한 결과가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기름부음을 받
고……제사장들”( 민 3:3 ) 인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을 발표하신 다음,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맏이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2절 ) 라고 설
명하셨다. 민수기 16장은 다단과 아비람과 함께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아론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고라의 반역을 기록
한다. 반역자 스스로 이 직분을 구함으로 주님을 노엽혔기 때문에 하나님은 즉각적이고 독특한 심판으로 땅을 열어 그들을 삼키게 하
셨다( 30절 ). 그런 다음 민수기 17장에서 주님은 아론을 제사장으로
선택하셨다는 공개적 증거로 아론의 지팡이에서 기적적으로 꽃이
피게 하셨다. 교훈은 분명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제사장만이
주님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선지자로 선택하신 사례가 많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세우신다 또는 임명하신다’를 의미하는데, 그는
사례집에 나올 만한 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지자 직
분에 부르신 것에 대한 자세한 간증을 기록한다( 렘 1:4-10 ). 5절에서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특히 교훈적이다. “내가 너를 모
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
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경의 선택을 나타내는 어휘에 속한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택하
신 것은 그가 잉태되기 전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아실 것이 생기기도 전에 예레미야를 아셨다. 둘째, 주님은 “내가
너를 성별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떤 것 또는 누군가가 기
름부음을 받은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기름부음을 기술하는 많은 구
절에서 나타나는 똑같은 단어다( 출 29:36을 보라 ). 예레미야가 태어나
기 전에 하나님은 선지자가 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를 구별하
셨다. 예레미야의 봉사는 자신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도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셋째, 주님은 “내가 너를 선
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에서, KJV가 사용하는 ordain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주다’를 의미하는 동사지만, 특
정한 과제에 임명하거나 지정하는 특별한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 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예레미야를 선
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선지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하
늘에서 결정하시고 뜻하신 일이 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의 영원한 목적과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 사이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다.
메시아의 권위 둘째, 메시아는 인정을 받은 개인이었다. 다시 말해서 선지자, 제
사장, 왕은 자신이 기름부음 받은 직분을 행사할 권한을 가지고 있 었다. 제사장의 직무와 왕의 직무의 성격 때문에 이런 직분의 인가
와 권한은 명백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제사장과 생명
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로 세우
셨다( 말 2:5-7 ). 하나님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
이 거룩한 예배 의식인 희생제사를 집행할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
람들임을 확인시켰다. 예배에 대한 그들의 헌신은 그들에게 이런 독점적인 의무를 수행할 권리와 권한을 주었다. 그들은 또한 일반
행정관에게는 너무 복잡한 분쟁을 재판하고 해결하는 권한도 가지
고 있었다( 신 17:8-11 ). 이런 면에서 그들은 매우 큰 권한을 가지고 있
어서, 그들의 결정을 무시하는 자는 사형을 받았다( 신 17:12 ). 그러면
누가 “여호와께 성결”( 출 28:36 ) 이라고 선언하는 흉패, 에봇, 관이 달
린 최고 지도자 아론의 옷을 보고, 주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도록
기름부음을 받은 이 사람에게 절대적인 두려움과 경이를 느끼지 않
을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아론 자신은 여호와의 거룩한 자라고 불
렸다( 시 106:16 ). 대제사장의 모습 자체가 권위와 영광을 발산했다.
왕이 백성을 다스리도록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신 17:15; 삼상 10:1; 삼하 12:7; 23:3 ) 은 필연적으로 왕을 구별되고 권위 있는 위치에 올려 놓았다. 사무엘은 백성이 왕을 세우지 못하게 설득하려고 했을 때, 왕이 왕권으로 인해 권리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열거 했다. 백성은 왕이 자기들을 재판하고 자기들의 전쟁에서 싸워 주
기를 원했다( 삼상 8:20 ). 왕은 분명히 그러한 일을 하겠지만, 사무엘
은 왕이 받는 그런 혜택과 함께 왕이 그들의 재산에서 자녀에 이르
기까지 백성이 소유한 모든 것을 요구하고 빼앗을 권한을 가질 것
이라고 경고했다( 11-17절 ). 왕의 보좌에는 영예와 위엄과 영광이 따
른다( 시 21:5 ). 그의 왕국이 더 크고 더 넓을수록 그의 주권적 권세와
권위는 절대에 더 가까워진다. 왕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람은 왕에
게 충성과 명예와 복종을 빚지고 있다. 전도서 8장 4절은 “왕의 말
은 권능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아무도 왕의 뜻을 문제 삼을 수
없다. 지혜로운 왕이자 영감을 받은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도 “왕
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네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
니라”라고 권고한다( 2절 ). 그것은 진정한 권위다.
선지자의 권위는 왕의 권위만큼 실질적이었지만, 언제나 그것만
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선지자의 권위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대
변자가 되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었다. ‘선지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선지자의 말에 내재된 권위를 암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말하다’를 뜻할 가능성이 큰 동사에서 만들어졌다.
선지자라는 단어 자체는 동사의 수동적 개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메시아라는 단어와 똑같은 패턴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
나님에 의해 말해지고(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 그다음에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직
분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역
의 놀라운 전망에 압도되어 무엇을 전해야 할지 모른다고 고백 했다. 주님은 기본적으로
걱 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렘 1:6-9 ).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선지자의 직
분을 맡기실 때 자기 말씀을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겔 2:7 ). 에스겔의 메시지는 단순히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2:4 ) 가 될 것이 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가장
분명한 진술 중 하나는 학개 1장 12-13절일 것이다. 12절은 실제로
주 하나님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과 선지자 학개의 말을 순종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13절은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는 것으로 확인한다. 기적과 이루어진 예언이 선지자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가시적인 수단이었지만( 신 13:1-3; 18:2122 ), 그의 궁극적인 신임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서 그가 보 이는 신실함이었다.
자칭 선지자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노골적 으로 물리치셨다. 그런 선지자는 권위가 없었다. 예레미야와 겨루는
거짓 선지자에 대해 주님은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
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
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렘 14:14 ). 그
러나 백성이 선지자의 말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택함을 받은 선
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선지자가 그곳
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을 것이었다( 겔 2:5 ). 백성의 죄와 반역과 불
신은 흔히 선지자의 명예를 앗아 갔지만, 백성은 선지자의 권위를
무효화할 수는 없었다. 선지자의 권위는 말씀에 있었다.
메시아의 권세
셋째, 메시아는 권세를 부여받은 개인이었다. 주님은 제사장이든
선지자든 왕이든 어떤 봉사 영역을 위해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
실 때, 그 사람을 그의 능력이나 독창성에 맡겨 놓지 않으셨다. 주님
은 항상 그 봉사를 위해 권세를 공급하셨는데, 권세의 궁극적 근원
은 성령님이셨다. 봉사를 위한 이런 권세 부여는 기름부음 의식에
서 가장 생생한 요소였다. 임명된 메시아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바르는 동안, 그에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그가 거룩하게 되고 구별
됨으로써 준비하고 있는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셨다. 이스라
엘의 처음 두 왕에게 행하신 성령님의 활동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에게 성령님
이 임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삼상 10:6 ). 사울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사
울을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 그에게 다스리고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9절 ). 분명히 이런 권세를 부여받기 전에 사
울이 가진 것으로 사울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유일한 것은 그
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키가 크다는 것이었다. 사울의 지도력은
무엘이 사울을 대신하도록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이 날 이후
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삼상 16:13 ).
마찬가지로 선지자는 예언을 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받았다. 에스
겔은 선지자 직분으로 부름을 받기 직전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
광에 대한 신비하고 장엄한 환상을 목격하고 엎드려서 경배하고 자
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그때 주님이 그에게 서라고 명하시고, 성 령님이 그에게 임하셔서 서게 하셨다( 겔 1:28-2:2 ). 이것이 성령님의
권세를 부여받는 것의 아름다움이다.
만든 거짓 선지자의 사역과 대조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 3:8 ). 하나님
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든 없든, 그 영적인 권세는 그에게
그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게 했다. 주님은 구속자( Redeemer ) 가
시온에 오실 것이라는 심오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관련하여 이사
야에게 다음과 같이 확언하셨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떠나지 아니하
리라”( 사 59:21 ). 성령님이 권세를 부여하신 것은 전파된 말씀의 궁극
적인 성공을 보장했다.
제사장도 성령님의 권세로 사역했다. 역대하 24장 20절은 “하나
님의 영이 제사장……스가랴를 감동시키셔서” 그를 백성을 향한 담
대한 증인이 되게 만드셨다고 말한다. 그 담대하고 강력한 증인은
백성을 매우 화나게 했고, 백성은 음모를 꾸며 왕의 명령의 권위로
성전 뜰에서 그 증인을 죽였다. 제사장의 사역에서 성령님의 역할
은 다른 직분에 대한 것처럼 구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지는 않았
지만 기름부음의 중요성에 대한 일관된 해석은 제사장이 실제로 봉
사를 위해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결론을 정당화한다. 또한 왕과 선
지자의 기름부음보다 실제 제사장의 기름부음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기름부음이 상징하는 것이 실제로 실현되었다는
해 영적으로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구약 성경이 충분히 분명하
게 밝힌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메시아를 찾는 데 이 모든 것을 적용할 때 배워야 할 핵심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의 적용
이 모든 것이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우리의 노력
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그분이 모든 메시아 중의 메시아이심을 알
고 메시아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면, 언제 어디
서든지 우리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읽을 때 그분은 우리의 눈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것이다.
메시아 지위의 구체적 증거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라는 용어를 메시아에게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구약 성경 전체적으로 구주에게 메시아의 개념과 함
의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메시아라는 용
어를 직접 사용하는 중요한 구절이 조금 있다. 예를 들어 일부 해
설자가 반박하기는 하지만, 한나의 감사 기도에서 궁극적인 메시아
의 오심을 기대하는 고백을 볼 수 있다는 좋은 성경 해석학적, 신학 적, 논리적 근거가 있다. 한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마음의 기쁨
을 표현하는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
분의 무오한 공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분의 주권, 인간의 일에 대한
그분의 주권적 성향, 그분의 창조력, 백성에 대한 그 분의 섭리적 돌
보심, 악인에 대한 그분의 종말론적 심판에 대해 주님을 찬양한다.
그것은 구약 시대의 한 성도에게 나온 많은 훌륭하고 심오한 신학
이다. 한나가 메시아 왕과 연관시킨 것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미래
의 심판이다. 종말론적 언급과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한나가 메시아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적
절한 해석적 이치에 맞는다.
시편 2편은 메시아라는 단어를 메시아에게 분명히 적용한 또 하
나의 예다. 이 시편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2절
은 통치자들이 주님과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분의 메시
아를 대적하는 음모를 꾸미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신약 성경은 이 시
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의심도
해소한다. 사도행전 4장 25-26절은 시편 2편의 서두를 인용하고, 27절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를 대적하는 구체적인 공모자로
헤롯과 빌라도를 지목한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 바울은 시편
2편 6절을 인용하고 그것을 주 예수님의 부활에 직접 적용한다. 주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 용어가 적어도 한 번 더 명시적으로 사용되
었다. 70주간에 대한 다니엘의 신비한 환상에서 메시아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단 9:25-26 ). 이 예언이 메시아에 대해 말하는 것과 이
루어진 세부 사항 중 일부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다니엘의 메시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시편 2편과 다니엘 9장은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을 가득 담고
있으며, 이들은 2부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지금
나의 요점은 구약 성경이 구주를 언급하기 위해 완전한 의미로 메시
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임을 알고 메시아가 하신 일을
안다. 남아 있는 일은 주 예수님이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선지자·제
사장·왕으로서 어떻게 이런 핵심적인 메시아의 사역을 이루셨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이런 활동이 이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읽을 때, 우리는 복되신 구주에 대해 읽고 있음을 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때 알게 될
것이다. 메시아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다.
메시아인 주님의 지위와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그분이 중보자라
는 것이 가지는 완전한 함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바울은 “하
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
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 라고 직접적으로 선언
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진리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
보자라는 것은 신약 성경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
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셨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
할 것이다. 구약 성경은 중보자의 필요성을 가르치고 필요한 중보
사역을 하기 위해 그분이 반드시 오실 것을 예언했다. 구약 성경은
중보자가 해야 할 일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낮아진 지위와 높아진 지위 둘 다
에서 행하신다”( 질문 23 ) 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가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돌아오게 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중
보자라는 직분은 본질적으로 동의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은 그 죄로 인해 필연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
어지고 스스로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사람에게 꼭 필요 한 존재다. 인간은 타락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과 완전한 교감과 교
제를 누렸다. 그러나 타락과 함께 그들 안에서와 그들과 주님의 관
계에서 비참하고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악이 사람을 하나님과
갈라놓았고, 죄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 사 59:2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타락했을 때, 사람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갱신해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 골 3:10 ). 그들에게
는 하나님을 계시할 선지자가 필요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인간
은 자기들이 창조되었을 때 가졌던 의와 참된 거룩함을 잃어버
렸다( 엡 4:24 ). 자기들에게는 자기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킬 제사장이 필요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 인간은 자기들의 혼을 속박할 권세
를 가진 혼의 원수에게 먹이가 되었다( 히 2:14-15 ). 인간에게는 자기
들의 혼의 모든 원수를 정복하기 위해 통치할 왕이 필요했다. 하나
님은 자신의 놀라운 은혜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곧 그분과 우리
의 메시아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일을 하셨다.
메시아의 지위의 공통된 특징
모든 메시아에게 적용되는 세 가지 공통된 특징을 기억하기를 바 란다. 메시아는 선택되었고, 인정받았고,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들
특징은 각각 주 예수님에게 아름답게 그리고 이상적으로 적용되며, 따라서 그분이 구약 성경의 약속된 메시아라는 반박할 수 없는 증
거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 중에 이 모든 특징은 직접적으
로 구주를 가리킨다. 우리가 이런 특징이 주 예수님에게 해당된다
는 것을 알게 되면, 메시아에 초점을 맞추는 구약 성경의 구절에 표
시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그리
스도를 발견하는 길을 가는 중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임. 첫째, 하나님의 아들은 구주로서 그분의 사역
을 위해 선택되셨다. 성부가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되는
것은 최소한 그리스도가 그분의 사명을 위해 선택되었음을 암시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8 )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장 엄숙하고 성스러운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
스도를
구약이 보여 주는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