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t
nicot
nico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NICOT 주석 시리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약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횡단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최고의 구약 주석으로 자리매김한 NICOT는 신 학자, 목사, 랍비, 신학생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NICOT 시리즈의 모든 주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복음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학문적인 탁월함과 신앙적인 적용을 함께 추구하고 있습니다. NICOT 주 석은 서론에서 저자, 기록 시기, 기록 목적, 구조, 신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본문에서 는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저자의 사역과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제시합니다. 성경 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하는 독자들은 NICOT가 구약이라는 낯선 세
지은이 존 오스왈트 (John N. Oswalt)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애즈버리 신학교의 구약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
존 오스왈트 지음
계로 떠나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신실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 오스왈트는 『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이사야서 연구 』( The Holy One of Israel: Studies in the Book 며, 신학 학술지 및 종교 간행물에도 많은 논문을 기고했다. 오스왈트는 또한 목사로서 뉴잉글랜드 와 켄터키에 있는 회중들을 섬기고 있으며, 각종 집회 및 지역 교회에서 강사로 사역하고 있다.
옮긴이 이용중
이 | 용중 옮김
of Isaiah ), 『 이사야서: NIV 적용 주석 』( Isaiah: NIV Application Commentary ) 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으
Isaiah
서울대학교 사범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KBS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 가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등을 책으로 만난 이후 좋은 번역의 가치를 절감하고 기독교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부흥과개혁사 전문번역위원으 로 섬기고 있다. 번역서로는 『 신약의 구약 사용 핸드북 』, 『 언 약과 성경 』, 『 성경, 어떻게 개관할 것인가 』, 『 성경, 어떻게 이 해할 것인가 』, 『 ESV 스터디 바이블 』( 이상 부흥과개혁사 ) 등 다 수가 있다.
ISBN 978-89-6092-418-5 978-89-6092-335-5(세트)
www.rnrbook.com
값 40,000원
존 오스왈트 지음 | 이용중 옮김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목차 ■ 시리즈 편집자 서문 │ 6 ■ 저자 서문 │ 8 ■ 약어 소개 │ 9
서론
19
Ⅰ. 작성 │ 21
Ⅱ. 내용과 구조 │ 26 A. 내용 • 26
1. 40~48장 • 28 2. 49~55장 • 29 3. 56~66장 • 30 B. 구조 • 32
Ⅲ. 내용 분석 │ 38
본문과 주석 Ⅳ. 섬김의 소명 ( 40:1~55:13 ) │ 46 A. 섬김의 동기: 은혜 ( 40:1~48:22 ) • 46
1. 종의 하나님 ( 40:1~31 ) • 46 2. 여호와의 종 ( 41:1~44:22 ) • 86 3. 여호와는 자기 종을 구속하신다 ( 44:23~47:15 ) • 225
4.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 48:1~22 ) • 307 B. 섬김의 방법: 속죄 ( 49:1~55:13 ) • 342 1. 구원에 대한 기대 ( 49:1~52:12 ) • 342
2. 구원의 선포 ( 52:13~53:12 ) • 450 3. 구원으로의 초대 ( 54:1~55:13 ) • 495
45
Ⅴ. 섬김의 표지: 신적 성품 ( 56:1~66:24 ) │ 541 A. 인간의 무능력 ( 56:1~59:21 ) • 541 1. 겸손과 성결 ( 56:1~57:21 ) • 541 2. 의와 종교 의식 ( 58:1~59:21 ) • 594
B. 여호와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 ( 60:1~62:12 ) • 642 1. 여호와의 영광 ( 60:1~22 ) • 642 2. 거룩한 백성 ( 61:1~62:12 ) • 677
C. 하나님의 능력 ( 63:1~66:24 ) • 713 1.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함과 여호와의 신실하심 ( 63:1~65:16 ) • 713 2. 최후의 심판 ( 65:17~66:24 ) • 788 ■ 참고문헌 │ 839
시리즈 편집자 서문
이 시리즈의 책들은 성경에 대한 최고급의 학문적 지식을 책으로 출판하 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각 기고자는 성경 본문 그 자체와 이와 관련된 학문적 문헌 모두에 있어서 전문가로서 글을 쓰며 각 주석은 폭넓은 독서와 주의 깊고 성숙한 고찰의 결과를 전달한다. 궁극적으로 이 시리즈의 정신은 치우 치지 않는 균형이며 각 기고자는 종교적, 철학적 관점과 관계없이 어떤 유 용한 출처에서든 해석적 통찰력을 얻고 그것을 성경의 한 책에 대한 자신 의 해석과 통합시킨다. 이 시리즈는 성경 연구에 있어서의 최근의 획기적인 연구 방법들, 예를 들면 정경 비평, 소위 “신문예 비평”, 독자 반응 이론, 성 및 인종적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해석 등을 사용한다. 또한 NICOT 주석 은 나름의 견해를 변호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견해들을 요약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며 조화로운 어조를 유지하는 것도 목표로 삼는다. 이 시리즈의 기고 자 목록에는 다양한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속한 남녀 학자들이 포함된다. 기고자들의 다양성과 그들이 모든 관련된 방법론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 다는 사실이 이 시리즈 전체에 흥미진진하고 풍성한 다양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시리즈를 진정으로 다른 주석들과 구별해 주는 점은 이 주석이 복음주의로 알려진 해석적 전통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는 전통적인 교파적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개신교 내의 비공식적인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마음과 정신은, 성경은 재능 있는 인간 저자들이 쓴 하나님의 영 감으로 된 말씀으로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이자 구원자 이신 분과 서로 사랑하는 인격적 관계를 누릴 것을 요청하신다는 확신이다. 그러한 전통에 충실하게 NICOT 주석은 구약을 단순히 <일리아드>나 <길가 메시 서사시>와 동등한 고대의 문학 작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 주석은 고대의 양피지로 된 시체에 대한 문학적 해부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놀랍도록 인간적인 문헌들과의 철저하고 경건한 분투다. NICOT는 “비평”( 즉, 표준적인 비평적 방법론의 사용 ) 과 성 경 본문에 대한 겸손한 존중, 경외, 심지어 애정 사이에서 섬세하게 균형을 이룬다. NICOT는 복음적인 주석으로서 본문의 문예적 특징, 신학적 주제, 오늘날의 믿음의 삶과 관련된 함의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다. 궁극적으로 NICOT는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기를 소원 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두 가지의 놀라운 선물 ( 성 경 그 자체와 성경의 메시지를 설명해 줄 예리한 지성을 지닌 학자들 ) 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
리며 이 시리즈의 선한 열매를 맛볼 각계각층의 독자들을 환영한다. 로버트 허버드 주니어 7
┃ 저자 서문 ┃
이사야 주석의 두 번째 책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에게 감 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즈버리 신학교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 학교에서 나와 함께 이사야서를 공부해 온 학생들은 귀중한 통찰력을 나에 게 나누어 주었다. 네이선 클라인과 마이클 매덕스는 다양한 문헌 자료들을 찾고 정돈하고 미리 검토해 준 성실한 연구 조교들이었다. 댄 고블은 색인 을 준비해 주었다. 이사회와 행정실, 그리고 애즈버리 신학교의 동료 교수 진은 내가 실제 집필의 대부분을 이룰 수 있었던 두 번의 안식년을 허락해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아내 캐런이 가정을 잘 돌봐 주고 생활 속의 많은 자잘한 일들을 잘 처리해 주어서 내게 이 장시간에 걸친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에게, 그러나 특별히 캐런에 게 나의 가장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존 오스왈트
8
서론
┃ 시리즈 편집자 서문 ┃
오래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 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 ). 그의 말이 맞았다. 사역은 참으로 공동의 노력 ( 많은
숙련된 솜씨와 지성의 집단적 수고 ) 을
요구한다. 어떤 이는
땅을 파서 씨앗을 심고, 다른 이는 묘목이 잘 자라나도록 땅에 물을 준다. 이와 같은 오랜 시간에 걸친 공동의 노력이 이 주석 시리즈에 오늘날의 탁 월한 위상을 가져다주었다. E. J. 영 교수는 40년 전에 이 시리즈를 “심으 며” 최초의 기고자들을 모집하고 스스로도 이 시리즈의 첫 번째로 출간된 책을 집필했다. R. K. 해리슨 교수는 여기에 “물을 주며” 다른 학자들과 계 약을 맺고 모든 학자들의 완성된 저작을 지혜롭게 편집했다. 편집장으로서 이제 내 손이 그들이 심은 것을 가꾸고 있고 바울의 말대로 40년 동안 하나 님이 진실로 은혜롭게 “자라나게” 하셨다. 오늘날 NICOT는 학자, 사제, 목사, 랍비, 기타 진지한 성경 학도들로 이 루어진 넓은 독자층을 거느리고 있다. 수많은 나라의 다양한 종교적 배경 을 망라하는 수천 명의 독자들이 지속적인 설교와 교육과 연구에 이 시리 즈의 책들을 참고한다. 그들은 새 책이 출간될 때마다 열렬히 환영하며, 부 상하고 있는 이 주석 “시리즈”가 마침내 완결된 주석 “세트”로 변모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인류가 역사의 새로운 세기, 흔히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리는 시대를 경험하는 이 시점에 NICOT는 어떤 종류의 주석 시리즈인 가? 이 시리즈와 이와 비슷하게 확고하게 자리 잡은 다른 시리즈의 차이점 은 무엇인가? 6
I 작성
이 서론은 이사야 40~66장의 작성, 구조, 내용에 국한되어 있다. 책 전체 에 대한 보다 완전한 서론을 보려면 이사야 1~39장에 대한 주석을 보라. 1 ) 베른하르트 둠 ( Bernhard Duhm ) 의 이사야서 주석이 1895년에 출판된 이래로 학계는 이사야서의 주요 세 단락인 1~39장, 40~55장, 56~66장이 대체로 서로 독립적이라는 견해를 널리 받아들였다. 2 ) 이 결론은 그 세 단락이 각 기 서로 다른 시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 즉, 1~39장은 BC 739~700년, 40~55장은 BC
545~535년, 56~66장은 BC 520~500년과 관련되어 있다는 )
앞선 결론의 자연스러운 귀결
이었다. 이 입장이 옳아 보이고 상당한 내적 증거가 이 입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생각한 학자들은 이 세 단락이 각각의 시기에 기록되어 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는데, 이는 학자들이 미래를 예고하는 예언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20세기의 4분의 3이 지나갈 때까지 우세했다. 주로 문체와 언어를 통해 각 부분의 개별성을 입증하려는 수많은 연구들이 이 입장을 뒷받침했다. 3 ) 이러한 연구들과 더불어 앞의 단락 구분을 전제로 하고 다른 1 ) 나의 다음 책을 보라. Book of Isaiah: Chapters 1-39,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86),
pp. 3~60. .. 2 ) Bernhard Duhm, Das Buch Jesaja, HKAT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892 ). 3 ) 예를 들면 다음 문헌들을 보라. K. Elliger, Die Einheit des Tritojesaja , BWANT 45 (Stuttgart: Kohlhammer, 1928), H. Odeberg, Trito-Isaiah (Isaiah 56-66): A Literary and Linguistic Analysis, UUA° 1 (Uppsala: Lundequist, 1931 ). 그러나 어휘와 문체는 40~55장(그리고 56~66장) 의 배경을 밝히는 데 있어서 포로기의 배경에 대한 언급만큼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클레멘츠(R.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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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Ⅱ
단락을 참고하지 않은 채 각 단락을 해석한 많은 주석들, 즉 40~66장을 다 루는 주석이나 40~55장과 56~66장을 따로 다루는 주석들이 등장했다. 이 러한 합의에서 최초로 이탈한 예를 추적하려면 아마도 197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4 ) 그러나 1979년에 출간된 브레버드 차일 즈 ( Brevard Childs ) 의 『구약 성경 개론』이 이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차일 즈는 이사야서의 최종 형태를 구성한 자들이 구성의 신학적 통일성을 강화 하기 위해 40~55장과 56~66장의 역사적 배경을 의식적으로 숨겼다고 주 장했다. 더 나아가 “제1이사야”는 이후의 단락들의 가르침을 반영하기 위 해 의도적으로 개작되었다고 한다. 5 )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차일즈의 제안 ( 저작의 최종 형태가 신학적으로 권위 있는 형태라 는 확신 ) 의
근거를 회의적으로 보지만, 본문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사야서의
구성적 통일성에 대한 현재의 많은 심화 연구를 위한 문을 열어 주었다. 6 ) 브루그만 ( W. Bruggemann ) 은 이 책 전체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잘 말해 준다. “제2이사야는 신학적으로 제1이사야에서 유기적으로 파생된 것으로 보인 다.” 7 ) 제3이사야에 대해서 렌토르프 ( R.
Rendtorff ) 는
제3이사야가 제1이사야
Clements)의 논평에 유의하라(“Beyond Tradition-History: Deutero-Isaianic Development of First Isaiah’s Themes,” JSOT 31 [1985], p. 96 ). 4 ) 예를 들면 다음 글을 보라. P. R. Ackroyd, “An Interpretation of the Babylonian Exile: A Study of 2 Kings 20, Isaiah 38-39,” SJT 27 (1974), pp. 329~352. 아크로이드는 “제1이사야”가 “제2이 사야”에 대한 충분한 지식 속에서 구성된 것이 분명함을 보여 준다. 5 )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pp. 325~330. 1972년에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에 소재한 유니온 신학교의 스프런트 강연 시리즈에서 전해진 그의 강연 “정경의 맥락에서의 ‘제2이사야’”(‘Ⅱ Isaiah’ in the Context of the Canon)도 함께 보라. 6 ) 회의적인 이들 중에는 다음 학자도 포함된다. John Barton, Reading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84 ). 차일즈의 제안과 그에 대한 비판을 철저히 검토한 다음 책 도 함께 보라. Mark G. Brett, Biblical Criticism in Crisi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 이사야서의 구성적 통일성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들을 보라. P. R. Ackroyd, “Isaiah 36-39: Structure and Function,” in Von Kanaan bis Kerala, AOAT 211, ed. W. C. Delsman, et al.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82), pp. 3~21, W. Brueggemann, “Unity and Dynamic in the Isaiah Tradition,” JSOT 29 (1984), pp. 89~107, R. E. Clements, “The Unity of the Book of Isaiah,” Int 36 (1982), pp. 117~129; JSOT 31 (1985), pp. 95~113, E. Conrad, Reading Isaiah , OBT (Minneapolis: Fortress, 1991), R. Rendtorff,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VT 34 (1984), pp. 295~320; The Old Testament: An Introduction , tr. J. Bowden (Philadelphia: Fortress, 1986), pp. 190~193, 198~200, J. J. M. Roberts, “Isaiah in Old Testament Theology,” Int 36 (1982), pp. 130-143, C. R. Seitz, “Isaiah 1-66: Making Sense of the Whole,” in Reading and Preaching the Book of Isaiah, ed. Seitz (Philadelphia: Fortress, 1988), pp. 105~126; Zion’s Final Destiny: The Development of the Book of Isaiah: A Reassessment of Chapters 36-39 (Minneapolis: Fortress, 1991 ). 7 ) Brueggemann, JSOT 29 (1984 ),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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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성
와 제2이사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어서 “내가 볼 때 이 세 번째 부분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8 )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사야서가 몇개의 독립적인 책들로 구성되었다는 것 에 대한 개념은 쇠퇴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해 보인다. 1장부터 66장까지 현재의 이사야서의 다양한 부분들은 모두 나머지 부분들을 반영한다. 더 나 아가 일반적인 관점에서 뒤의 장들은 앞의 장들에 비추어 기록된 반면 앞 의 장들은 뒤의 장들의 주제와 친밀성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단 지 이목을 끄는 특정한 문구들을 반복하는 것이나 특정한 주제들을 피상적 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사야서의 첫 번 째 부분에서 도입된 핵심적인 주제들의 필연적인 발전이라고 부를 만한 것 이다. 9 ) 확실히 이런 발견들을 단일한 저자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려는 저자들은 소수다. 클레멘츠 ( R.
E. Clements ) 가
말했듯이 “40~55장의 BC 6세기 바벨론
적 배경은 너무 분명해서 내용 이해에 있어서 그러한 배경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것은 곧 구약 선지서의 다른 곳에 명백히 관련된 내용과는 전혀 다른 예언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10 ) 즉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이 장들을 실제로 썼다면 그에게는 다른 구약의 선지자들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자세한 미래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11 ) 더 나아가 이 견해는 이 장들이 단지 미래의 백성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역시 독특하다. 이런 독특성이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 하면 40~55장은 BC 6세기에 기록되었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따라서 현대의 학자들은 증거로 인해 이사야서의 관념적, 신학적 통일성 을 점점 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예언의 본질에 대한 학자들의 개념은 여전히 그들이 이사야서 자체가 분명히 독자들에게 취할 것을 요구하는 행 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 즉 이 글들을 한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주의 주님을 만나게 된 데서 비롯된 결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이 주장이 옳다고 결론짓든 그렇지 않다고 결론짓든 우리는 원래의 이사야보 다 150년 뒤에 출현한 정체 모를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말은 8 ) Rendtorff, VT 34 (1984 ) p. 320. 9 ) 앞의 책, p. 318. 10 ) Clements, JSOT 31 (1985 ) p. 96. 11 ) 다니엘 11장만이 더 자세하며 마찬가지로 많은 주석가들로 하여금 이를 사후에 기록된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예, J. A. Montgomery,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Daniel, ICC [Edinburgh: T. & T. Clark, 1927], pp. 59~60, 76~78 ).
23
이사야 Ⅱ
새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옛 선지자가 한 말을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선지자의 정체 속에 깊이 감추 었다는 점을, 일부 저자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듯이 쉽게 해명할 수 없다. 이런 가설은 독립적인 자료로 인해서가 아니라 이사야서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없음으로 인해 필요해진다. 12 ) 이런 도식의 큰 결함은 어떤 성경 외 의 증거도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사실 외에도 “제2이사야”가 이를 부 정하기 위해 그토록 끈질기게 노력한다는 점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40~55장의 주제는 열방의 우상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월성인 데, 이는 세 가지 방식, 즉 과거를 설명하실 수 있고 ( 41:22 ) 미래를 말씀하실 수 있으며 ( 41:23 ) 근본적으로 새로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 력 ( 43:18~19 ) 으로 입증된다. 13 ) 즉 하나님만이 우주의 한계를 초월하신다. 그 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장들이 BC 540년경에 기록되어야 했다는 확 신은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어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도 미래를 알았을 리 가 없다는 그 이전의 확신에 의존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확신은 양 립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 바벨론에 끌려간 미지의 선지자와 관련되어 있 다. 이 미지의 선지자는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가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말할 수 없지만 자신의 청중들이 여호와는 미래를 말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란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선지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말 들을 한 사람이 실제로 예루살렘의 이사야라고 믿게 하려고 애쓰면서도 그 와 동시에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는 심지어 이전의 이사야의 글 들이 자신의 저작과 좀 더 긴밀하게 일치하도록 만들기 위해 이전의 글 중 일부 ( 예, 바벨론에 대한 언급이 있는 13장 ) 를 바꾸거나 자신의 글 일부 ( 34~35장 ) 를 삽 입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혹자는 아마도 이 가상의 선지자가 스스로 허구를 퍼뜨린 것이 아니라 후대의 편집자들이 허구를 퍼뜨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 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근 연구에서는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가 “제1이사야”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 둘은 그 개념 자체에 있어서 소위 이전의 글들에 의존한다. 그 둘은 처음부터 앞의 내용
12 ) 다음 책들의 입장이 그러하다. R. N. Whybray, The Second Isaiah , Old Testament Guides (Sheffield: JSOT Press, 1983), p. 5, R. F. Melugin, The Formation of Isaiah 40-55, BZAW 141 (Berlin: de Gruyter, 1976), p. 177. 13 ) 이런 내용들의 함의에 대한 부연 설명을 보려면 다음 글을 보라. R. Vasholz, “Isaiah versus ‘The
Gods’: A Case for Unity,” WTJ 42 (1980), pp. 38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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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작성
의 논리적 연장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제2이사야”는 그 자신에게서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탁월한 신학의 증거를 만들어 내야 했 다. 캐럴 ( R. P. Carroll ) 이 주장한 대로 그의 영광스러운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14 ) 그 예언들의 출처가 된 신학 자체도 공허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미리 예언하지도 않으셨고 포로 귀환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자세 히 예언하지도 않으셨다. 따라서 여호와의 우월성에 대한 “제2이사야”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포로기의 위대한 신학자에 대해 듣는다. 15 ) 이와 대조적으로 이사야서가 그 기원에 대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이 사 실이라면 이 두 반론은 어느 것도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이 사야는 실제로 바벨론 유수를 예언했고 그렇게 해서 그가 자신의 생애 중 에 있었던 사건들에 적용한 탁월한 신학이 어떻게 그가 개략적으로는 알 수 있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상황과 관련해서 훨씬 더 탁월 해질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먼 미래를 들여다본 선지자들 ( 예, 요엘이나 스 가랴 ) 의
전형적인 특징과 같이 부득불 고도로 비유적인 언어로 말했다. 따라
서 40~66장, 특히 40~55장의 언어는 1~39장의 언어보다 훨씬 더 서정적 이고 다채롭다. 이 가설에 따르면 속임수나 어떤 개작을 단정하는 일, 즉 사 실상 원래의 저자가 말했던 것을 부정하는 일이 더 이상 불필요하다. 이는 우리에게 계시와 예언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클레멘 츠가 말하는 것처럼, 1~39장의 저자가 40~66장을 기록할 수 없었음을 입 증하는 것이 어휘와 문체가 아니라 40~66장이 저자 자신의 역사적 정황보 다는 또 다른 역사적 정황에 맞게 기록된 것처럼 보이는 점이라는 것이 사 실이라면, 16 )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은 성경의 예언 현상에 대한 학문적 이해이지 이사야서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 견해는 아닐 것이다.
14 ) R. P. Carroll, “Second Isaiah and the Failure of Prophecy,” ST 32 (1978), pp. 119~132. 만 일 예언들이 사실보다 150년 앞서 말해졌고 따라서 의도적으로 비유적이었다면 캐럴의 반론은 그 설득력을 일부 상실한다. BC 6세기의 저자를 예언자가 아닌 시인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대안 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A. G. Auld, “Poetry, Prophecy, Hermeneutic: Recent Studies in Isaiah,” SJT 33 (1980), pp. 567~581. 15 ) R. N. Whybray, Isaiah 40-66, NCBC (Grand Rapids: Eerdmans, 1981), p. 26. 16 ) Clements, JSOT 31 (1985 )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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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내용과 구조
앞에서 지적했듯이 학자들은 40~66장이 어떻게, 언제 존재하게 되었든 지 간에 이 장들은 결코 홀로 존재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 데 점점 더 많이 동의하고 있다. 이 장들의 구조와 내용은 1~39장의 문맥 속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2장 1~5절과 4장 2~6절이 2장 6절~4장 1절과 5장 1~30절 에 대한 그림의 이면을 제시했듯이 40~66장은 1~39장에서 시작된 그림을 완성한다.
A. 내용 이사야 1~39장에 대한 서론에서 나는 이사야서의 핵심적 주제는 섬김, 즉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주 되심이 세상에 알려지는 하나님의 백성의 섬김이라고 주장했다. 1 ) 이 주제는 2장 1~5절에서 처음부터 명백히 드러난 다. 그러나 2장 6절~4장 1절과 5장 1~30절도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준다. 이스라엘의 입술은 이사야의 입술처럼 부정했다.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의도하신 존재가 되지 못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력이다. 그들은 언약의 주님께 자신을 맡기려는 마음보
1 ) 나의 Isaiah: Chapters 1-39, pp. 54~60을 보라.
26
II. 내용과 구조
다 주변의 열방들을 신뢰하려는 마음이 훨씬 더 강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것이 7~39장에서 다루어 지는 주제다.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열방인가, 하나님인가? 7~39장에서는 종의 섬김이 결코 명시적으로 진술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논의의 암묵적인 기초로 존재한다. 2 )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최고의 신뢰성과 다른 모든 토대, 특히 인간의 교만에 바탕을 둔 것들의 무용함을 입증하신다. 이러한 생각은 36~39장에서 절정에 이르며 거기서 앗수르의 정복을 피한 예루살렘은 하 나님은 진실로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점을 명백히 밝혀 준다. 그러나 그 와 동시에 그러한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는 유다의 근본적인 무능은 히스기 야가 바벨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난 다 ( 39:1~8 ). 비록 예루살렘 성은 여기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지만 궁극적으 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촉발시킬 것은 바로 이런 식 의 실패였다. 3 ) 40~66장은 이사야가 내세운 신학과 관련해서 이 새로운 상황의 의미를 탐구한다. 앗수르에게서는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바벨론에게서는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여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실까?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과 같은 이가 없는 거룩하신 분이실까? 하 나님은 여전히 역사를 통제하고 계신 열방의 주인이실까? 너무 죄가 커서 약속의 땅에 더 이상 살 수 없는 이스라엘 같은 민족이 여전히 하나님의 우 주적 계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시온의 선택은 단지 일시적인 것 이고 시온은 세상의 안주인인 위대한 바벨론으로 대체될 운명에 처해질 것 인가? 고대의 토라와 이후의 다윗과 맺은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 들은 폐지될 것인가? 포로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질문들과 그 밖의 그 와 같은 많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1~39장에서 가르치는 것은 정확히 40~66장을 요구한다. 1~39장의 신 학이 보다 덜 야심적이었다면 그것이 새로운 상황으로 확대될 필요는 없었 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학은 너무 많은 것을 주장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 에 그렇게 확대되거나 버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그 신 학은 확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확대는 그가 말한 모든 것의 논리적
2 ) 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보려면 앞의 책을 보라. 3 ) 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보려면 앞의 책, pp. 692~698을 보라.
27
이사야 Ⅱ
확대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경건하고 영감 받은 사람이 그런 새로 운 배경에서 그 신학을 확대했을 수는 없는가? 두 가지 문제나 한 가지 문 제의 두 측면을 제외하면 확실히 그럴 수 있다. 첫째, 소위 후대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저작 사실에 대한 모든 증거를 제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 을 다 했다. 둘째, 현재의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실제로 바벨론 유수와 그 결과를 예견했다고 말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를 담고 있다 ( 예, 3:1~8, 3:24~4:1, 7:3, 11:10~16, 13:1~14:22, 39:6 등 ).
따라서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사야
의 신학을 그들의 다른 상황에 다시 적용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가설에 대 한 현재의 책의 끊임없는 부정은 부인할 수 없다. 40~55장이 다루고 있는 근본적인 핵심은 회복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 은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의문시된다. 첫째는 능력이다. 하나님은 회복시 키실 수 있는가? 둘째는 의도다. 하나님은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가? 두 문제 모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포로 추방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이사야와 포로기 이전의 선지자들이 선포해 왔던 하나님의 성품 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사야서 전체가 포로 추방 이전에 존 재하지 않았다면 포로 공동체가 많은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단순히 포로기 이전의 믿음을 버리고 지배적인 바벨론 문화에 동화되는 모습을 상상하기 는 쉽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이사야의 답변은 히브리 문학에서, 또는 진실로 어떤 문학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의 일부로 표현된다. 번역에서조차 운율, 심 상, 언어의 탁월성이 독자를 비상한 인식과 감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힘 을 지니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는 이사야서 전반부의 위대한 시들 ( 6, 14, 24, 34~35장 등 )
가운데 일부와 비슷하지만 여기, 특별히 40~55장에서는 넓
은 범위에 걸쳐 서로 다른 여러 작품들을 통해 높은 시적 수준이 유지되고 있다. 56~59장에서 다루어지는 보다 현세적인 주제들은 그렇게 고양된 어 조를 요구하지 않지만 60~66장에서 우리는 또 다시 위대한 문학적 거장의 힘이 발휘되는 것을 느낀다.
1. 40~48장 포로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제기할 의문들에 대한 이사야의 대답은 그의 시만큼이나 감동적이다. 강력한 주장을 통해 이사야는 앗수르가 하나 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였듯이 ( 10:5, 15 ) 바벨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선언 28
II. 내용과 구조
한다 ( 47:5~9 ). 벨이나 느보가 아닌 여호와가 역사의 주인이시다 ( 46:1~5 ). 바벨 론의 멸망은 그 이전의 앗수르의 멸망만큼이나 확실하다 ( 48:14~16 ). 하나님 이 이미 바벨론의 정복자를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 42:2~4 ). 진실로 포로들은 하나님이 비할 데가 없는 분임을 보여 줄 것이다. 그분과 같이 과거를 설명 할 수 있고 ( 창조자 ) 미래를 말할 수 있으며 ( 주 ) 전혀 새로운 일을 하실 수 있 는 ( 구속자 ) 신은 없다 ( 43:8~21 ). 더 나아가 하나님은 구원할 능력이 있으실 뿐만 아니라 구원하기를 원하 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포기하시기는커녕 그들의 삶을 자신의 유일한 신성의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로 사용하기로 작정하 신다. 하나님은 거듭해서 포로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이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일, 즉 한 백성을 포로에서 회복시키는 일을 행할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 41:10, 14, 43:1~7, 44:1~5 등 ). 그들은 여호와의 택함받은 종들로서 그 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유일하신 구주이심을 세상에 입증할 것이다 ( 43:10~12, 44:6~8 ).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믿어 야 한다 ( 40:27~28 ).
2. 49~55장 그러나 이 회복의 약속들은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애초에 포로 추방 을 촉발시킨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 죄를 무시하시 고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실 것인가? 요컨대 죄 많은 이스라 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가? 소망이 지속되려면 관 계와 성품 둘 다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 48:18~19 ). 그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는 언뜻 보기에 불가사의다. 그 명백한 수단으로서 42절에서 처음 소개된 바로 그 종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 해 열방을 정복할 강력한 고레스 ( 41:2~3,
45:1~3 ) 와
달리 무력함과 온유함이
4 )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 49:4, 50:4~6, 53:1~3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의 역 할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점은 “백성”과 “눈먼 자들”이 이스 라엘만을 가리킬 수도 있는 42장 6~7절에 이미 암시되어 있지만 5 ) 이스라 4 ) 똑같은 관점을 보려면 다음 책을 보라. T. N. D. Mettinger, A Farewell to the Servant Songs: A Critical Examination of an Exegetical Axiom (Lund: Gleerup, 1983), p. 26. 5 )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 모두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눈먼 자”와 “듣지 못하는 자”의 용례 에 대한 논의를 보려면 다음 글을 보라. Clements, Int 36 (1982), pp. 11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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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과 주석
IV 섬김의 소명 ( 40:1~55:13 )
A. 섬김의 동기: 은혜 ( 40:1~48:22 ) 1. 종의 하나님 ( 40:1~31 ) a. 위로하시는 하나님 ( 40:1~11 )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1 ) 너희는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 3 )
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 의 때 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 4 )
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5 )
“Comfort, comfort my people,” says
your God.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
1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
“Speak to the heart of Jerusalem and
2
call out to her that her hard service is completed, that her iniquity is atoned for,
that she has received from the hand of the Lord double for all her sins.”
1 ) 칼빈은 동사 “이르시되”의 미완료 시제를 상당히 강조하면서 이것을 “이르실 것이라”로 번역해야 한
다고 주장한다. 이후의 주석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금언적 현재인 “이르시되”도 똑같 이 가능하며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때에든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2 ) [저자사역 “말하라 그리고”]. 파이퍼(Pieper)는 명령법 ‘키르우’(wΩ a√rq ˆ )에 붙어 있는 ‘바브’(w)를 “즉” 또는 “다시 말해”라고 번역해야 할 ‘바브 엑스플리카티붐’(waw explicativum [설명의 ‘바 브’])으로 바르게 식별한다. 3 ) 어근 ‘짜바’(abx)는 명백히 고된 일에 동원된 기간을 함축한다. 민 4:23; 욥 7:1, 14:4를 보라. 4 ) 히브리어 ‘니르짜’(h∂ x√rˆn)에는 “받아들일 만한”이라는 기본적인 의미가 있다(레 26:41~43 ). 이스 라엘이 그 죄악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 수 있었는지는 여기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53:11을 보라. 5 ) ‘키플라임’(Mˆyål√ pˆk)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을 예루살렘이 마땅
46
IV. 섬김의 소명 ( 40:1~55:13 ) A. 섬김의 동기: 은혜 ( 40:1~48:22 ) 1. 종의 하나님 ( 40:1~31 )
A voice crying out, “In the desert prepare
3
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
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 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 6 )
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 이 평 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
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 ] 7 )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 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 든 아름다움 8 ) 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9 )
the way of the Lord; in the wilderness make a highway straight for our God. 4
Every valley shall be lifted up, and
every mountain and hill be made low;
rough places shall be made smooth, and high places into a valley. 5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be
revealed; all flesh will see it together, for the mouth of the Lord has spoken.” 6
A voice saying, “Call out!” I said,
“What shall I cry?” “All flesh is grass; all its dependability is like the flower of the field.
The grass dries up; the flower withers
7
when the breath of the Lord blows on it. Surely the people are grass.
히 받아야 할 고난보다 두 배로 고난을 받았거나 두 세대가 고난을 받았다는 의미로 문자적으 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A. Phillips, “Is. 40:2: Double for All Her Sins,” ZAW 94 [1982], .. pp. 130~132 ). 폰 라트(G. von Rad)는 동의성의 개념을 제안했다(“kiplayim in Jes. 40,2=‘A quivalent’?” ZAW 79 [1967], pp. 80~82 ). 알렉산더(Alexander)와 기타 학자들은 이 말이 가리 키는 것은 이제 곧 받게 될 은혜와 은총의 보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앞의 두 어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는 이 말이 “많고 풍부한”을 의미한다는 칼빈의 주장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베스터만의 글도 함께 보라. 2절에 있는 세 개의 어구는 모두 다음과 같이 완전성을 암시 한다. 노역-끝남, 죄악-사함받음, 죄-벌을 다 받음. 6 ) 이 책에서는 다음 논문의 견해를 따른다. A. Berlin, “Isaiah 40:4, Etymological and Poetic Considerations,” HAR 3 (1979), pp. 1~6. 그는 ‘아코브’(bOq∂o)를 “골짜기”와 짝을 이루는 “움푹 한 곳”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렉산더의 글도 보라. 7 ) [저자사역 “내가”]. 마소라 본문은 70인역과 1QIsa를 따라 “그가”라고 읽는다. 모음이 삽입되기 이 전의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본문에서 이 두 형태(3인칭 남성 단수 완료형과 1인칭 단수 미완료형) 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본문 비평적 관점에서는 어느 쪽의 독법도 정당화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가 말하되”가 원문이라면 필사자가 어떻게 이를 그 다음 동사와 일치시키기 위해 “내가 말하 되”로 바꾸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두 형태는 매우 비슷하므로(‘바오마르’ [rå mOa∂w], ‘베아마르’[rå m∂a√w]) “그가 말하되”가 어떻게 “내가 말하되” 대신 본문에 들어갈 수 있었 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현대 역본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NRSV, NIV, REB는 “내가”를 택한 반면 NEB와 JPSV는 “또 다른 이가 묻되”라고 번역했다. 8 ) [저자사역 “신뢰성”] . 70인역에는 ‘독사’(do/xa, “영광”)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말은 구약의 다른 어 느 곳에서도 ‘헤세드’(d® s® j)의 번역어로는 쓰이지 않는다. 따라서 BHS는 ‘독사’와 보다 일반적으로 뜻이 비슷한 말인 ‘헤데르’(r® d®h)나 ‘헤메드’(d® m®j)로 본문을 수정할 것을 제안하는데 이 두 단어는 외양상 ‘헤세드’와 약간만 다르며 문맥에도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하의 주석을 보라. 9 ) 학자들은 마지막 어구의 원문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뮬렌버그(Muilenburg)는 이 어구의 “존
47
이사야 Ⅱ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
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 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 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 10 ) 께서 장차 강한 자
11 )
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 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 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 로다
The grass dries up; the flower withers,
8
but the word of our God will stand forever.” 9
Get up onto a high mountain, Zion,
herald of good news; lift up your voice with strength, Jerusalem, herald of good
news. Lift [it] up, do not be afraid; say to the cities of Judah, “Look, it is your God.” 10
See, as a strong one the Sovereign
Lord comes, and his arm will rule for
him. See, his wages are with him, and his repayment is before him.
Like a shepherd he will feed his flock;
11
with his arm he will gather the lambs and carry [them] in his bosom. He will lead the nursing ewes.
7~39장의 반복되는 주제는 주변 나라들의 위협에 직면한 가운데서도 하 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 서 다른 나라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으려는 유혹에 빠졌다. 하나님 의 반응은 그 다른 나라들이 그들을 저버릴 것이고 그 결과는 멸망이며, 때 로는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바로 그 나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 이었다 ( 8:5~8, 30:1~5 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하나님은 너무나 미쁘 신 분이어서 당연한 멸망이 임한 뒤에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재가 선지자의 문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노스(North)는 이 어구가 “후대에 붙인 주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거(Elliger)는 마지막 어구가 명백히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1QIsa는 어 지럽게 뒤섞여 있다. 7절을 생략했다가 7절의 둘째 행과 셋째 행을 8절의 첫째 행과 둘째 행 사이 에 삽입하기 위해 8절 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읽힌다. “풀은 마르고 꽃 은 시드니 여호와의 호흡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라. 정녕 이 백성들은 풀이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 은 영원히 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QIsa에 이 어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것이 후대에 덧붙여 진 것이라면 매우 일찍 덧붙여진 것임을 입증한다. 70인역에는 이 구절 전체가 빠져 있다. 대부분 의 주석가들은 ‘호모이오아크톤’(homoioarcton, 유사한 글자로 시작되는 서로 다른 어구 사이를 혼돈해서 한 어구를 지나치는 필사 오류-편집자)으로 인해 생략이 발생했다는 데 동의한다. 10 ) “주”(‘아도나이’[y∂nOd≈a])라는 말이 여호와 앞에 덧붙는 것은 하나님을 복합적인 호칭으로 지칭하 는 이사야 특유의 방식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다(1:24, 3:1, 10:16, 33 등을 보라 ). 11 ) 70인역과 1QIsa는 “힘으로”라고 읽지만 여기서 이 형용사는 28:2에서와 같이 본질의 ‘베트’(b)와 함께 명사 상당 어구(substantive)로 사용된 것 같다(참고, GKC, §119i ). 다음과 같이 어순이 개 념을 강조하는 것을 주목해 보라. “강한 자로 그가 임하실 것이요.”
48
IV. 섬김의 소명 ( 40:1~55:13 ) A. 섬김의 동기: 은혜 ( 40:1~48:22 ) 1. 종의 하나님 ( 40:1~31 )
들을 사로잡은 것에서 그들을 구하실 것이라고 선언했다 ( 9:1~6 [개역개정 9:2~7], 30:9~33 등 ).
40~55장, 특히 40~48장은 이 주제를 이어받아 이 진리가 다가올 포로 추방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미쁘심은 불순 종의 시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순종하고자 한 이들을 구원하신 역 사의 주인이셨고 ( 37:30~38 ), 계속해서 그분은 불순종한 후에 믿음으로 돌이 킬 자들을 구원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 44:24~28 ).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섬김의 길은 전적으로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통한 길이었다. 하나 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의 결과에 대 해 충분히 경고를 받았다. 그들이 고집부리고 싶은 대로 고집을 부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도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40~55장은 자기 백성이 자신을 버릴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그들을 속량하 시되 “돈 없이, 값 없이”( 55:1 ) 속량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 한다. 40~48장은 특히 국외 추방으로 인해 제기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능력 과 뜻에 대한 의문을 다룬다. 이 초점은 40장에서 즉시 명백하게 드러난다. 국외 추방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거나 아니면 그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셨음을 입증하는 일이 아닐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방 나라들로부터 자 기 백성을 지키실 수 없었거나 자기 백성의 치명적인 죄악성으로 인해 패 배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 두 질문에 대한 이사야의 대답은 결 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그가 요담, 아하 스, 히스기야에게 선포한 진리를 무효화하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실 제로 새로운 상황이 오히려 그 진리를 더 분명하게 만들 것이다. 국외 추방 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과 미쁘심을 보여 주실 수 있는 훨씬 더 큰 기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서론적인 장인 40장은 두 가지 점, 즉 하나님은 우주의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 12~26절 ) 신뢰할 수 있는 구원자이심 ( 1~11,
27~31절 ) 을
강조한다. 41~48장의 기본적인 내용은 꽤 쉽게 진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 그때까지 들어 보지 못한 일을 하심으로써, 즉 한 백성, 자기 백성을 포 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우상들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우월성 을 입증하실 것이다 ( 41:1~44:22 ). 하나님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고 메소포타 미아 골짜기에 있는 기존의 어떤 왕국에서도 나오지 않을 통치자인 고레스 를 통해 교만한 바벨론을 멸하심으로써 이 일을 하실 것이다 ( 44:23~47:15 ). 자 49
이사야 Ⅱ
기 자신의 공로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구원받은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주장하시는 것들의 증거가 될 것이다 ( 48:1~22 ). 그러나 이런 폭넓은 진술 외에 학자들은 이 단락의 구조에 대해 동의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과 논문 및 주석들을 살펴보 면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견해의 개수가 저자의 수에 거의 근접하다 는 것이다. 12 ) 아마도 이러한 의견 불일치의 주된 이유는 저자가 주제들을 각 주제끼리의 관계를 달리 하면서 몇 번 반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 이다. 이러한 경향은 학자들로 하여금 교차대구법, 평행 관계 등에 대한 때 로는 정교한 가설들을 만들어 내게 한다. 불행하게도 자료의 복잡성 때문에 어떤 제안된 배열이 다른 것보다 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방금 제시한 전 반적인 개요는 어느 정도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이보다 더 자세한 제안은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하지 않을 수 없다. 40장과 관련해서 주된 의견 불일치는 1~11절이 40~55장에 대한 머리말 로 따로 있고 12~31절은 이어지는 본론의 첫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40장 전체가 서론적 역할을 하는 것인지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40~48장에서 다루는 두 가지 주된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뜻, 구원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고 이 둘은 40장에서 다루는 두 가지 주된 주제이므로 40장 전체가 서론적 단락일 듯하다 ( Delitzsch, Piper, Wright, Knight 등도 보라 ).
이러한 인상은 열방에 함께 논쟁할 것을 촉구하는 41장의 강력한 서
두로 인해 강화되며 이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을 암시하는 서두다. 40장이 서론적 역할을 한다고 말했으면 즉시 그 말의 의미를 한정해야 한다. 40장이 41~55장이나 41~66장은 말할 것도 없고 41~48장조차도 그 주요한 주제들을 전부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40장에서 다 루지 않는 세 가지 주된 주제는 증인, 여호와의 종, 열방의 구원이다. 13 ) 따 라서 40장은 이어지는 내용을 요약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어지는 내용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 준다. 그렇게 해서 40장은 뒤따르는 말씀 선포 12 ) 다음 글들을 보라. J. Goldingay, “The Arrangement of Isaiah 41-45,” VT 29 (1979), pp. 289~299, M. Haran, “The Literary Structure and Chronological Framework of the Prophecies in Is. xl-xlviii,” in Congress Volume: Bonn, 1962, VTSup 9 (Leiden: Brill, 1963),
pp. 127~155, R. P. Merendino, Der Erste und der Letzte: Eine Untersuchung von Jes. 4048, VTSup 9 (Leiden: Brill, 1981), C. Stuhlmueller, “Deutero-Isaiah: Major Transitions in the Prophet’s Theology and in Contemporary Scholarship,” CBQ 42 (1980), pp. 1~29. 13 ) 스툴뮐러(Stuhlmuller, CBQ 42 [1980], p. 5)는 이른바 종의 노래는 40장이 기록된 뒤에 덧붙여 진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40장의 역할을 내가 기술한 대로 이해하면 이런 결론은 불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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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섬김의 소명 ( 40:1~55:13 ) A. 섬김의 동기: 은혜 ( 40:1~48:22 ) 1. 종의 하나님 ( 40:1~31 )
의 어조 (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와 기초 ( “모든 육체는 풀이요”,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 를 확 립한다. 40장은 또한 이사야서 전반부와의 가교 역할도 한다. “위로”라는 주제는 12장에서 이미 도입된 반면 “대로”( highway ) 는 11장, 19장, 33장, 35장에서 등장했었다. 선지자의 사명이 이제 이전에는 그에게 허락되지 않 았던 소망의 말씀으로 확장될 때는 6장에 함축된 의미도 찾아볼 수 있다 ( 아 래를 보라 ).
40장 전체에서 핵심적인 초점은 하나님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 이는 국외 추방이 1~39장에서 선포된 신학에 대해 제기하게 될 하나님 의 성품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응답이다. 1~11절은 새로운 예언 단락에 감동적인 서두를 제공한다. 14 ) 고르게 균 형 잡힌 네 연에서 선지자는 책의 나머지 내용의 기초를 놓는다. 선지자는 이 시점부터의 주제는 더 이상 심판이 아닌 회복이며 ( 1~2절 ) 이 회복은 하나 님의 인격적 개입을 통해 일어날 것이고 ( 3~5절 ) 어떤 인간 세력이나 조건도 하나님의 약속을 이길 수 없으며 ( 6~8절 ) 신적인 긍휼과 짝을 이룬 신적인 힘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있다는 사실 ( 9~11절 ) 을 확증한다. 단락 전체에 걸쳐 연설이 두드러진 요소다. 말하기와 관련된 열한 개의 단어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 번 언급된다. 하나님의 음성과 더불 어 다른 음성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천사의 음성일 것이다 ( 아래의 2절에 대한 해설을 보라 ).
선지자의 음성과 예루살렘의 음성도 있다. 이 좋은 소식은 말해
지고 선언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15 )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계속 침묵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에 함축된 구원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면 안 된 다. 하나님은 세상에 개입하시고, 영감을 받은 사자들에게 주시는,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주시는 영감된 말씀으로 자신의 행동들을 해석해 주심 으로써, 사라져 가고 죽어 가는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을 베풀어 주신다. 인 간들은 풀처럼 사라져 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 14 ) 이 부분은 수많은 학술적 연구를 촉발시켰다. 그 중에 비교적 중요한 연구들로는 다음과 같 은 것들이 있다. F. Ettore, “Isa. 40:1-11, una lettura structurale,” RivB 28 (1980), pp. 285~304, Y. Gitay, Prophecy and Persuasion: A Study of Isaiah 40-48, Forum theologiae linguisticae 14 (Bonn: Linguistica Biblica, 1981), O. Loretz, “Die Gattung der Prolog zum Buche Deuterojesajas,” ZAW 96 (1984), pp. 210~220, L. Stachowiak, “Die Sendung des ..
Deuterojesaja im Lichte von Jes. 40:1-11 und der spateren Text Traditionen,” in Dein .. Wort beachten: alttestamentliche Aufsatze (Leipzig: St. Benno, 1981), pp. 102~115, H. .. J. Stoebe, “U berlegungen zu Jesaja 40:1-11; zugleich der Versuch eines Beitrag zur Gottesknechtfrage,” TZ 40 (1984), pp. 104~113, N. Tidwell, “The Cultic Background of Is. 40:1-11,” JTSA 3 (1973), pp. 41~54. 15 ) 뮬렌버그는 동사 ‘카라’(a∂r∂q, “부르다, 선포하다”)가 40~66장에서 30회 이상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빈도는 이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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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섬김의 표지: 신적 성품 ( 56:1~66:24 )
A. 인간의 무능력 ( 56:1~59:21 ) 1. 겸손과 성결 ( 56:1~57:21 ) a. 타고난 권리가 아닌 순종 ( 56:1~8 )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1 ) 말씀하시기 2 )
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 를 행하 라 이는 나의 구원 3 ) 이 가까이 왔고 나 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2
안식일 4 ) 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
1
Thus says the Lord, “Keep justice
and do righteousness, for my salvation is
about to come, and my righteousness to be revealed.”
Happy is the man who does this, and
2
1 ) 1QIsa는 “이와 같이” 앞에 ‘키’(yk)를 덧붙인다(그러나 1QIsb는 그렇지 않으며 이 단락 전체에 걸쳐
1QIsa와 달리 마소라 본문을 뒷받침한다). 4절을 참고하라. 역본들은 마소라 본문을 뒷받침한다. 2 ) 영(Young)이 지적하듯이 ‘미슈파트’(f∂ p√vˆm, “정의”)와 ‘쩨다카’(h∂ q∂d√x, “의”)는 이사야서에서 자 주 연관된다(1:27, 5:7, 16, 28:17, 32:16, 58:2, 59:14). ‘미슈파트’는 창조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행동이며 ‘쩨다카’는 어떤 관계에서도, 특히 언약으로 정의되는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옳은 것이다. “제2이사야”는 ‘쩨다카’를 인간의 행동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은 다른 누군가가 쓴 것이라는 와이브레이의 주장은 옳지 않다(참고, 51:7). 3 ) ‘예슈아티’(yt ˆ ∂ oΩw v√ y, “나의 구원”)는 12:2와 49:6에서도 나타난다. 포로 귀환을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과 문단에 등장하는 이 진술은 40~55장의 “구원”이 포로 귀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 4 ) ‘샤바트’(t∂ Ωbå v, “안식일”)는 여성 명사지만 이 구절의 마소라 본문에서 이 단어의 수식어구는 남 성형인데 이는 아마도 저자가 이 말을 “안식의 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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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Ⅱ
며 5 ) 그의 손 6 ) 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 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7 ) 이와 같이 8 ) 9 )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 10 )
[ ]
who is careful not to profane the Sabbath, who is careful not to let his hand do any evil. 3
은 복이 있느니라 3
the son of man who lays hold of it: the one
11 )
여호와께
12 )
연합한
이방인
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 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13 )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 라 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14 ) 나의 언약을 굳게 잡
So do not let the son of a foreigner
say, the one who has joined himself to the Lord, saying, “The Lord will surely cut me off from among his people.” And do not let the eunuch say, “Behold, I am a dry tree.”
For thus says the Lord, “To the eunuchs
4
who keep my Sabbaths, and choose that
in which I delight, and lay hold of my covenant,
(“날”은 남성형이다). 1QIsa에는 여성형 수식어구로 되어 있다. 마소라 본문이 더 어려운 독법으로 선호된다. 5 ) [저자사역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직역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으로부터 지키 는”이 된다. 그 다음 소절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는 것으로부터 지키는”이 된다. 6절에서도 마찬 가지다. 6 ) 1QIsa에는 마소라 본문의 단수형 대신 복수형인 “손들”로 표현되어 있다. 7 ) 마갈리오트(R. Margalioth, The Indivisible Isaiah [New York: Yeshiva University Press, 1964], p. 202)는 이 어구가 33:15와 긴밀히 대구를 이루며 33:15에서는 여기서와 같은 문법 구조(분사, 신 체 일부에 3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 ‘민’[Nˆm]과 부정사 연계형이 결합된 형태, 목적 어[여기서와 같이 ‘라’, “악”의 3격])가 세 번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부정사 연계형과 결합된 ‘라’(oå r)는 이 두 본문에서만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8 ) [저자사역 “이것을”]. 델리취는 ‘조트’(taO z, “이것”), 특히 ‘바흐’( Ωh∂ b, “그것 안에”)가 뒤따르는 ‘조트’는 이어지는 내용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며 시 7:4(개역개정 7:3)를 인용한다. 다른 주석가들 (예, Whybray)은 ‘조트’가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을 모두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9 ) 마갈리오트는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문예적 특징에 주목한다(Indivisible Isaiah , pp. 170~171, 184). 이 구절에는 ‘에노쉬’(v øwn∫a, “사람”, 8:1, 13:7, 12, 24:6, 33:8, 51:7, 12)가 등장하 는 여덟 번의 용례 중에 마지막 용례가 나오며 이 단어는 다른 선지서에서는 단 한 번만 등장한다 (렘 20:10). 더 나아가 ‘에노쉬’와 ‘(벤-)아담’(M∂ d∂a[-N® b])의 쌍은 구약 전체에서 사 13:12, 51:12 와 이곳에만 등장한다. 10 ) [저자사역 “그래서”]. 1QIsa, 70인역, 시리아어역에는 접속사가 없다. 탈굼, 불가타역, 1QIsb는 마 소라 본문을 뒷받침하며 마소라 본문은 2절과 3절 사이의 연관 관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더 어려운 본문이다. 11 ) 마소라 본문은 여기서는 ‘엘’(l® a), 6절의 같은 어구에서는 ‘알’(lå o)을 사용하는 변화를 보여 준 다. 1QIsa에는 두 군데 모두 ‘엘’(la)로 되어 있는 반면 1QIsb에는 두 군데 모두 ‘알’(lo)로 되어 있다. 마소라 본문이 두 이문 모두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12 ) 현재 형태로는 니팔 완료형이다. 그러나 관사가 관계 대명사를 대신해서 기능하고 있으므로, 이 형태는 분사처럼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GKC, §138k, BHS, 나머지 역본들). 13 ) 어근 ‘바달’(ldb )은 레 20:24; 민 16:9; 스 6:21에서 집단들 사이의 분리를 표현하는 데 사용 된다. 14 ) 1QIsa에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마소라 본문의 완료형보다 쉬운 독법이다. 그러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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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섬김의 표지: 신적 성품 ( 56:1~66:24 ) A. 인간의 무능력 ( 56:1~59:21 ) 1. 겸손과 성결 ( 56:1~57:21 )
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
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 15 ) 과 이름을 그 들에게 주며 16 ) 영원한 이름을 [ ] 17 ) 주 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18 )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19 )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
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 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 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20 ) 이 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
I will give to them in my house and in my walls a hand and a name better than sons and daughters; an eternal name I will give to them, which will not be cut off. 6 And the sons of a foreigner who have joined themselves to the Lord to minister to him, and to love the name of the Lord, to become servants of him, all who are careful not to profane the Sabbath, and who lay hold of my covenant, 7 I will bring them to my holy mountain, and make them rejoice in my house of prayer; their whole burnt offerings and their sacrifices will be acceptable on my altar, for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5
소라 본문이 착시로 인한 오류일 수도 있다(사해 두루마리 사본이 보여 주듯이 ‘바브’[w]와 ‘요 드’[y]는 종종 정방형 서체에서 서로 거의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15 ) [저자사역 “손”]. 모든 역본은 ‘야드’(d∂ y , “손”)를 “장소”에 해당하는 단어로 번역한다. 이하의 주 석을 보라. 16 ) ‘바브’(w )와 결합된 완료형은 조건이 함축된 조건절 뒤에서 귀결절을 이끈다. 참고, GKC, § 112mn. 17 ) [저자사역 “그들에게”]. 마소라 본문은 ‘로’( øwl, “그에게”)다. 역본들은 한결같이 “그들에게”로 번 역하며 1QIsa에는 ‘라헤마’(hmhl, “그들에게”)로 되어 있다. 바르텔르미(Barthe' lemy)는 마소라 본문을 더 어려운 독법으로 선호하며(Critique, p. 410) 이는 앞의 이중소절에 있는 “이름”을 가리 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독법은 너무 어려워서 특히 원문이 그 자음 형태에 있어서 ‘라헴’(Mhl)과 혼동하기 쉬운 ‘라모’(wml)였다면 오류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참고, BHS). 18 ) [저자사역 “그를 섬기기 위해 그들 스스로 여호와께 연합하며”]. 1QIsa는 마소라 본문의 ‘레 샤르토’( øwt√r∂ v√ l, “그를 섬기기 위해”)를 생략했다. 다른 모든 증거들은 마소라 본문을 뒷받침 한다. 여기서 동사 ‘샤라트’(trv )는 제의적 예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이하의 내용 을 보라) 1QIsa는 이방인들에 대해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기를 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참고, Rosenbloom, Dead Sea Isaiah Scroll, pp. 62~63). 19 ) 1QIsa에는 마소라 본문의 ‘아하브’(bha, “사랑”) 대신 ‘바라크’(Krb, “축복하다”)로 되어 있다. 쿠처(Kutscher)가 지적하듯이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은 유대인의 예배에서 중요했다 (Language, pp. 225~226). 두루마리 사본도 이 어구 전체의 위치를 이어지는 어구 뒤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변화와 앞에서의 변화의 결과로 이 구절을 “그의 종이 되기 위해 그리고 여호와 의 이름을 송축하기 위해 스스로 여호와께 연합하는 이방인의 아들들, 안식일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붙드는 자는 모두”라고 읽는다. 20 ) 마소라 본문은 ‘지브헤헴 레라쫀 알’(lå o N øwx∂r√l M® hyh ´ √ bˆ z)이며 직역하면 “~위에 기쁨을 위해 그 들의 제사를”이 된다. 1QIsa에서는 ‘지브헤헴’ 뒤에 ‘야알루’(wloy, “그들이 올라갈 것이다”)를 덧붙이는데 토리(Torrey)는 이것이 사해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기 전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주 장했다. 70인역과 탈굼은 “그들은 ~일 것이다”를 전제로 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영어로 그렇게 했듯이) 단지 본문의 의미를 도착어에서 받아들일 만한 문체로 번역하는 데 필요한 전제일 것이 다. 마소라 본문은 받아들여질 만한 히브리어 문체이므로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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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Ⅱ
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 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
of prayer for all nations.” 8 An oracle of the Sovereign Lord, the
one who gathers the outcasts of Israel, “Still more I will gather on him to his gathered ones.”
21 )
라 하셨느니라
어떤 면에서는 55장이 끝난 뒤에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는지 상상하 기 어렵다. 이사야는 ( 또는
다수 저자 이론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인다면 최종 저자나 편집자는 )
왜 무언가를 덧붙였는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에 의한 본토 귀환과 죄 용 서에 대한 약속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56~66장이 새로운 역사적 상 황, 즉 귀환 이후에 존재한 상황을 다루기 위해 기록되었고 그래서 이전에 기록된 내용에 덧붙여졌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사적 배 경은 저자 ( 들 ) 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이 중요했다면 우리 앞에는 현재의 희미한 암시보다 훨씬 더 많은 내 용이 있었을 것이다. 22 ) 저자가 무언가를 더 말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어 떤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 장들이 덧붙여진 이유는 저자 ( 들 ) 가 공교롭게도 가설적인 “이사야 학 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도 불충분하다. 왜 “에스겔 학 파”는 두 번째 성전이 에스겔의 종말론적 소망에 그토록 한참 못 미쳤는데 도 에스겔 48장 뒤에 무언가를 덧붙이지 않았는가? 에스겔의 기본적인 신 학을 완성하기 위해 덧붙여야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이 존재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또는 어떤 “학파”가 존재했느 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이 문제와 무관하다. 이 문제는 신학적인 것 이다. 이사야 1~55장의 신학과 관련해서 무언가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 누 군가는 이 선지자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무언가 더 말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23 ) 내 입장은 이 누군가가 바로 선지자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 21 ) [저자사역 “내가 더욱더 그의 위에 그의 모인 자들에게 모을 것이다”]. 어색하게 들리는 “그의 위에 그의 모인 자들에게”라는 어구는 엄밀히 말하면 “치환”이며 이는 일종의 동격이다. 참고, GKC, §131k, l. 22 ) 역사적 배경이 저자에게 있어서 거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 장들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이 BC
586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직후의 기간에서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게 많이 제시되 어 왔다는 점만 봐도 충분히 증명된다. 만약 배경들이 반드시 재구성되어야 하는데 그 배경에 대 한 의견 일치가 없다면, 그 자료들은 불충분한 것이 틀림없다. 23 ) 이전에 말했듯이 이는 중요한 요점이다. 이 저작이 서로 다른 여러 배경 속에서 살았던 다수 저자 의 저작이라면 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배경을 지우고 이 저작이 한 사람의 단일한 저작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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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섬김의 표지: 신적 성품 ( 56:1~66:24 ) A. 인간의 무능력 ( 56:1~59:21 ) 1. 겸손과 성결 ( 56:1~57:21 )
나 독자가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요점은 그대로다. 이 장들 을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역사적 배경도 아니고 원래의 저작에 대해 숙 고하는 한 집단이 존재할 가능성도 아니다. 이 장들의 일차적인 문맥은 역 사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이다. 이 자료들이 현재의 위치에 있는 이 유는 이 자료들이 이미 진술된 내용에 무언가를 덧붙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자료들은 이 저작에 어떤 중요한 신학적 기여를 하고 있다. 24 ) 그런 신학적 기여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56~66장의 핵심적인 개념들을 탐구해야 한다 ( 이 단락 끝에 있는 자료들의 구조에 대한 보충 설명을 보 라 ).
핵심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할 필요성과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력 내지 실패다. 이것이 56~59장과 63~66장 의 핵심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가운데 포함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타고난 권리에 의한 은혜의 문제인가? 아니면 행위의 문제인가? 이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할 애된 문단 전체 ( 40~55장 ) 의 결론이 등장한 직후에 맨 첫머리 ( 56:1~8 ) 에 배치 됨으로써 강조된다. 그러나 그것은 56~66장의 세 번째 주요 주제인 구원하 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 주제는 56~59장을 끝맺고 63~66장을 열며 60~62장의 초점이 되는 주제다. 이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고려하면 비로소 이 장들이 기여한 점을 제안할 수 있다. 나는 앞에서 이사야서 전체가 6장의 소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메시지를 들을 때는 바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대해 무언가를 보고 하나 님께 불로 정결케 함을 받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다. 마찬가지로 “입술이 부정한 백성”이 하나님께 대한 비전 ( 7~39장 ) 을 얻고 하나님의 은혜 로운 용서와 구원 ( 40~55장 ) 을 받고 하나님이 사시는 것처럼 살 수 있게 될 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된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까? 차라리 저자가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쉬운 가정이다. 즉 한 저자가 신학적인 비전을 받는데, 이 비전은 너무 커서 저자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다른 시간과 공간, 즉 저자가 희미하게만 볼 수 있는 세부적인 내용을 가졌고 이야기되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배경을 제공해 주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도록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4 ) 어떤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 이는 언급들이 있다(이것이 틀림없이 학자들이 그토록 많은 다양한 배경을 제안한 이유다). 우상 숭배에 대한 언급들(57:3~13, 65:2~7)과 사회적인 의에 대한 요구(58:1~59:15a)는 포로기 이전 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파괴된 성전에 대한 언급(64:8~12)은 포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 인다. 종말론적 약속들(60~62장, 65:17~25)과 안식일 준수에 대한 요구(56:3~8, 58:13~14)는 포로기 이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많은 주석가들이 이사야서에 대해 가정해야 한 다고 느끼는 단일한 포로기 이후의 배경과 어긋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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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Ⅱ
때 ( 56~66장 ) 열방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56~66장은 여호와의 종들의 표지, 즉 그들의 죄의 결과에서 그들을 구원한 바로 그 은혜를 통해 그들 안에 모방된 신적 성품에 대한 내용이다. 이 장들 의 내용은 유일하게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한 율법의 내면화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56~66장은 7~39장과 40~55장에서 서로 상충되는 관점처럼 보 이는 것을 종합한 것이다. 7~39장은 백성들에게 언약에 순종하여 의로운 삶을 살 것을 촉구하며 25 )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파멸에 대한 위협이 수반된다. 40~55장은 선택된 백성이 누릴 수 있고 그것을 받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은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개념 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큰 문 단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종들이 된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될 때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롭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삶으로 나타내기로 결심할 때다. 56~59장은 하나님의 종들의 삶 속에 의가 나타나야 할 필요성 및 그와 동시에 그 의를 나타낼 수 없는 그들의 무능력에 크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주제는 두 번, 즉 처음에는 57장 끝에서 ( 14~21절 ), 다음에는 59장 끝에 서 ( 15b~21절 ) 중단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중간에 삽입된 주제는 분투하는 백 성들을 도우러 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다음으로 56장 1~8절은 방인과 내시에 의한 )
( 이
안식일 준수로 대표되는 언약 준수를 강조하고 58장
1~14절은 압제로부터의 금식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두 부분으로 된 이 하위 문단의 구조 ( 56:1~57~21과 58:1~59:21 ) 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이 두 단락은 각각 실현된 의에 대한 구체적인 예 ( 56:1~8,
58:1~14 ),
일반적 상황에 대한 고찰 ( 56:9~57:13,
59:1~15a ),
구원하시려
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선포 ( 57:14~21, 59:15b~21 )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26 ) 56~57장은 이 문단에서 논하도록 계획된 문제를 도입한다. 즉,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 40~55장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 순
25 ) 비록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1~39장에 모세 언약이 담겨 있다는 가정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W. Eichrodt, “Prophet and Covenant: Observations on the Exegesis of Isaiah” (tr. J. I. Durham and J. R. Porter), in Proclamation and Presence, Fest. G. H. Davies, ed. Durham
and Porter (London: SCM, 1970), pp. 167~188. 26 ) 이하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58:1~6과 59:15b~21은 이 문단 전체에서 더 큰 기능을 한다는 점 에 주목하라. 그러나 앞의 논의가 보여 주듯이 이 하위 문단에서 그 기능은 특정한 예배로 압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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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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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NICOT 주석 시리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약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횡단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최고의 구약 주석으로 자리매김한 NICOT는 신 학자, 목사, 랍비, 신학생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NICOT 시리즈의 모든 주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복음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학문적인 탁월함과 신앙적인 적용을 함께 추구하고 있습니다. NICOT 주 석은 서론에서 저자, 기록 시기, 기록 목적, 구조, 신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본문에서 는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저자의 사역과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제시합니다. 성경 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하는 독자들은 NICOT가 구약이라는 낯선 세
지은이 존 오스왈트 (John N. Oswalt)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애즈버리 신학교의 구약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
존 오스왈트 지음
계로 떠나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신실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 오스왈트는 『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이사야서 연구 』( The Holy One of Israel: Studies in the Book 며, 신학 학술지 및 종교 간행물에도 많은 논문을 기고했다. 오스왈트는 또한 목사로서 뉴잉글랜드 와 켄터키에 있는 회중들을 섬기고 있으며, 각종 집회 및 지역 교회에서 강사로 사역하고 있다.
옮긴이 이용중
이 | 용중 옮김
of Isaiah ), 『 이사야서: NIV 적용 주석 』( Isaiah: NIV Application Commentary ) 등 다수의 작품을 저술했으
Isaiah
서울대학교 사범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KBS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 가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전 등을 책으로 만난 이후 좋은 번역의 가치를 절감하고 기독교 전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어 부흥과개혁사 전문번역위원으 로 섬기고 있다. 번역서로는 『 신약의 구약 사용 핸드북 』, 『 언 약과 성경 』, 『 성경, 어떻게 개관할 것인가 』, 『 성경, 어떻게 이 해할 것인가 』, 『 ESV 스터디 바이블 』( 이상 부흥과개혁사 ) 등 다 수가 있다.
ISBN 978-89-6092-418-5 978-89-6092-335-5(세트)
www.rnrbook.com
값 40,000원
존 오스왈트 지음 | 이용중 옮김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