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저자 서문 5
1장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초기 접근 15
2장 능동적 순종에 대한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의 선례들 31
3장 웨스트민스터 회의 이전의 종교개혁에서 능동적 순종 45
4장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작업과 능동적 순종, 1부 67
5장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작업과 능동적 순종, 2부 93
6장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103
7장 능동적 순종과 언약 신학 137
8장 신앙고백서 해석에서 능동적 순종의 위치 151 참고문헌 162
┃저자 서문┃
“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 크게 감사합니다. 그리스 도의 능동적 순종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이것은 20세 기 최고의 신앙고백주의 장로교 신학자 중 한 명인 그레셤 메이 첸 ( 1881-1937년 ) 이 자신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동료 교수 존 머 리( 1898-1975년 ) 에게 보낸 마지막 전보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남긴 말 이다. 메이첸이 머리와의 최근 대화와 자신이 해당 주제로 라디오 에서 설교한 내용을 되돌아보면서 감격한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에 게 속한 자들을 위해 율법을 이루신 사실이었다. 그리스도는 율법 을 범한 우리 때문에 자신의 수동적 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 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온 율법을 지키셨다.1)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사셨다.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소망이 스스로 행
1) Ned B. Stonehouse, J.Gresham Machen:A Biographical Memoir (1954; repr., Willow Grove, Pa.: Committee for the Historia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004), 450-451. 다음도 보라. J. Gresham Machen, “Active Obedience of Christ,” in God Transcendent and Other Selected Sermons (Grand Rapids: Eerdmans, 1949), 172-180.
저자 서문 5
하거나 행할 수 있었던 것에 있지 않고, 오로지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신해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위해 행하신 것에 있다 는 사실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우 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으나 우리를 대신해 사실 필요는 없었다.2) 그리스도의 죽음이 참으로 죄의 빚을 제거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완전한 의를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 리에게 돌려진( 또는 전가된 )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다. 우리는 자 기의 죗값을 치러야 할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해 율법을 적극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3) 어떤 사람은 죄의 형벌을 (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에서 행해진 대 로 ) 치러야 하고 율법의 요구를 ( 그리스도의 능동적 전가에서 행해진 대로 ) 만족시켜야 하는 요구 사항을 낯선 개념으로 취급하지만, 이것은 우리 경험에서 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방을 청소 하라고 말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를 꾸짖고 청소하도록 계 속 요구한다. 아담은 인류의 언약 대표로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하며 언약을 어겼을 때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 담이요 자신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언약 대표로 오셔서 자기 몸으 로 죗값을 치르셨다. 그리스도는 또한 아담이 따르지 못한 언약을 완전하게 따르셔서, 아담이 행하지 못한 일을 행하기 위해 형벌을
2) 특히 1-3장과 7장을 보라.
3) 1장의 각주 17과 20을 보라.
6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받으시고 아담이 보여야 하는 순종을 실제로 우리를 위해 보여 주 신다.4) 따라서 수동적 순종뿐 아니라 능동적 순종도 필요하다는 관념은 우리의 일상 경험에 반직관적인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교도소 에서 출감한 사람에게 ‘넌 죗값을 치렀어. 이제는 법을 지키는 시민 이 되어야 해’라고 종종 말한다. 우리는 진정한 변화가 불법 활동을 피하고 지역 사회에 긍정적으로 공헌하는 일을 추구하는 생산적 노 동의 새로운 삶에서 나타난다고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 종”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는 능동적 측면과 수동적 측면에 대해 말하는 통일된 방식이다( 히 10:7 ). 그리스도는 두 측면을 모두 행하시는데, 이 두 측면은 우리가 죗값을 치르고 온 율법을 지킨 기록이 있기 위해 우리의 칭의에서 우리에게 전가 된다. 그리스도가 죗값을 치르셨으므로, 여기에 뒤따르는 의를 제공하
4) 어떤 사람들은 히 10:5-7(시 40:6-8 인용)과 같은 구절들을 바탕으로 순종이 제사보다 더 낫다고 주장했다(참고. 삼상 15:22). 하나님이 제사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신다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사 보다 덜 중요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순종이 오직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자격을 그리스도께 부여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그보다 그리 스도의 순종과 제사는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제사는 모두 우리에게 전가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웨스트민스 터 대교리문답 71문항). 다음을 보라. David VanDrunen,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A Defense of Active Obedience of Christ the Light of Recent Criticism,” in By Faith Alone:Answering the Challenges to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ed. Gary L. W. Johnson and Guy P. Waters (Wheaton, Ill.: Crossway, 2007, 『칭의 교리에 대한 도전에 답하다』, 솔라피데출판사 역간, 2012), 127-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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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단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5) 참으로 자기 죗값이 이미 치러졌으므로,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는 사람이 감사하는 삶을 살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실이다.6) 그렇지만 율법의 셋째 용도에 서 율법에 대한 이런 감사의 순종은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순종 과 거리가 멀다. 거룩한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함 외에는 아무것도 받으실 수 없는데, 우리 성화의 일부인 거룩함은 부분적이며 여전 히 남아 있는 죄에 오염된 상태여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완전 한 지위를 전혀 부여할 수 없다.7) 우리는 완전한 중보자가 우리의 빚을 갚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같은 중보자가 우리를 위
5) 이것은 최근의 일부 사상가의 견해인 동시에 여기서 제시된 요하네스 피스카 토르의 견해였다. 다음 예를 보라. Steve Lehrer and Jeff Volker, “Examining the Imputation of Active Obedience of Christ: A Study in Calvinistic Sacred Cowism,” accessed at In-Depth Studies Audio, http://idsaudio.org/ids/pdf/classic/imputation.pdf.
6) Sinclair B. Ferguson, The Whole Christ: Legalism, Antinomianism, and GospelAssurance—WhytheMarrowControversyStillMatters (Wheaton, Ill.: Crossway, 2016, 『온전한 그리스도』, 도서출판디모데 역간, 2018).
7) 이것은 존 칼빈(1509-1564년)이 자신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1559; repr.,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3.1-10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점인데, 칼빈은 개혁파가 (로마 가톨릭교가 고발하는 것처 럼) 반율법주의자가 아니라는 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배상(만족)이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한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점, 완전한 의가 오직 우리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만 우리에게 속한다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 중생(거듭 남과 지속적 성화)을 칭의보다 앞서 다룬다. 우리는 가능한 한 거룩해질 수 있 어도 이런 내적 작용은 칭의만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한 지위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데 불충분하다.
8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자신의 능동적 순 종으로 행하신 것이 이것인데, 곧 자신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 종을 우리의 칭의에서 우리에게 전가하셨다. 그래서 메이첸이 확신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완전한 순종의 삶으로 성취하신 의가 그들의 칭의에서 하나님 백성 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죄의 형벌을 받기 위해 겪으신 고난이 칭의에서 전가된다는 생각은 1세대 종교개혁가에게 일반적이었다. 그리스도가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해 온 율법을 지키 셨고, 이것 또한 전가되었다는 신념은 광범위하게 수용되었다. 메이 첸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 적 순종이 없으면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고백할 때, 단지 많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했을 따름이다. 메 이첸은 이런 시인을 통해 깨어진 율법을 성취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이 일을 이루실 수 있고 실제로 이루신 유일한 분임을 나타내려 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이루면서 얻으신 의는 우리에게 전가된 것의 일부였다.
이 책에서 우리가 당면한 구체적 문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 16431649년 ) 에 참석한 성직자들이 우리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이후로는 “능동적 순종” ) 8)이 우리에게 전가되었음을 긍정하느냐는
8)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어구가 길고 이 책 전체에서 반복적으 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나는 종종 단축형 “능동적 순종”을 사용한다. 하 지만 이런 축약형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곧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해 온 율법을 지키고 행하신 사실을 배제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능동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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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전후해 소수의 성직자는 우리의 칭의에서 능동적 순종을 부정했다. 최근 들어 개 혁파 중 일부도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능동적 순종을 분명하게 긍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서 증거의 비중이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능동적 순종을 실제로 긍정 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시도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과정에서, 나는 종교개혁 이전에 능동적 순종의 긍정 에 대한 문제를 간략히 조사하고, 다음으로 종교개혁 시대( 웨스트민스 터 회의의 이전, 사이, 이후 ) 를 살필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때부터 교회가 이 문제를 이해한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 우리는 메이첸, 찰스 하 지( 1797-1878년 ) 등과 같은 미국 장로교 전통의 신학자들이 능동적 순종을 긍정했음을 알고 있다.9)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 ( 16231687년 ) , 헤르만 바빙크 ( 1854-1921 ) 같은 유럽 신학자들도 마찬가 지다.10) 하지만 존 칼빈과 다른 초기 종교개혁가들은 존 오웬( 16161683년 ) 과 이후의 종교개혁가들이 분명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능동 도 항상 염두에 둔다. 따라서 나는 “능동적 순종”이라는 축약형을 사용하더라 도 항상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의미한다.
9)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New York: Scribner, Armstrong, and Company, 1871), 3:142.
10)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1994), 2:445-455, 646-656;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vol. 3, Sin and Salvation in Chris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네덜란드 판본에서 직접 번역한 『개혁교의학 3』,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1), 377-381.
10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적 순종을 긍정했을까?11) 나는 여기서 이 모든 질문에 답변하려 시 도할 것이다. 물론 능동적 순종의 문제 이면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있는데, 그 것은 우리가 왜 의롭게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제공할 수 있는 논의가 최선의 경우에도 피상적이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냥 당연시할 수 없다. 능동적 순종이 어디에 적합한 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칭의의 본질과 필요성을 더 포괄적 으로 검토해 보자. 칭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개신교 종교개혁 의 신념이다. 실제로 칼빈은 능동적 순종을 “종교를 좌우하는 주된 요체”로 부른다.12) 칭의 교리는 삶에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인은 우리 사회의 극심한 물질주의가 문제임을 올바르게 깨닫는다. 물질주의는 그 자체가 목 적일까, 아니면 ‘물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런 물질을 소유함으로 써 인정받기 위해 궁극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물질주의는 단 순히 물질적 소유가 변모될 수 있는 우상의 일부가 아니라, 인정 이라는 우상에 대한 더 큰 추구의 일부다.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11) 능동적 순종에 대한 오웬의 지지는 사보이 신앙고백서(1658년)에 대한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데, 이 작품은 특히 11장 1항에서 능동적 순종을 명시적으로 긍정하면서 하나님이 “온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그리고 그들 의 온전하고 유일한 의를 위해 자기 죽음에서 보이신 수동적 순종을 전가함 으로써” 택하신 자들을 의롭게 하신다고 지적한다. Jaroslav Pelikan and Valerie Hotchkiss, eds., Creeds and Confessions of Faith in the Christian Tradition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2003), 3:115.
12) Calvin, Institutes, 3.11.1.
저자 서문 11
곳에서 우리는 단순한 물질 이상의 것을 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하기를 원하는데, 우리가 인정을 성취할 수 있다고 종 종 상상하는 방법의 하나는 많은 것들, 곧 인상적인 이력서, 아름다 움, 명성,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인정도 위안, 안전, 통제, 권력, 다른 느껴진 필요 등과 같이, 우 리가 타락 이전에 온전히 누렸으나 우리 죄의 결과로 잃어버린 것 중 하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에덴동산과 함께 상실된 온전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창조 의 일부로 소유하도록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부족한 이 모든 것을 우상으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리스 도와 동행해야 하는데, 단지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키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름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데, 하나 님을 즐거워하는 것의 일부는 우리가 자기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 게 하려 힘쓸 때 얻는 놀라운 만족이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의 존재로 채우려 애 쓰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일생을 보낸다.13) 특히 많은 사람은 인정을 우상으로 만들며,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기꺼이 하려는 인상을 준다. 죄에 물든 마음은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므로, 우리에 게 정말 필요한 것을 뒤틀고 왜곡한다. 우리에게 인정이 필요한 것
13) Augustine, Confessions 1.1.1; Pascal, Pensées, #425.
12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은 분명하지만, 주로 하나님에게서 그런 인정을 받아야 한다. 어떤 인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거 룩한 하나님께 결코 인정받지 못하는 죄인이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 는 목마른 영혼에게는 복음( 우리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인정받는다는 것 ) 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자신이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자신이 행한 일에도 불 구하고, 예수께서 어떤 분이며 예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인정받 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는 아담이 자신의 시험 기간 중에 받았던 것보다 더 크게 인정받는 데,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근거로 완전하게 승 인받으며, 지금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처럼 앞으로도 인정받을 것이 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더 행복하겠지만 더 확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그냥 당연시해 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때, 그리스 도와의 연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을 성령의 사역으로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14) 그리스도는 자기의 삶과 죽음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을 행하 셨는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소유가 되
14) 중요한 참고문헌은 다음에 나와 있다. http://philgons.com/resources/ bible/bibliographies/union-with-christ/. 목록에 포함된 작품 중에 그리 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해 더 도움이 되는 것은 토드 빌링스, 존 페스코, 리처드 개핀, 로버트 레담, 존 머리의 작품이다. 비키와 존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청교도의 견해를 다루므로, 웨스트민스터 회의 기간과 관련해 도움이 된다.
저자 서문 13
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믿음 자체는 성령의 선물로서 그리스도가 복음으로 제안될 때, 우리가 예수를 “붙잡거나” “믿게” 해 준다. 우 리가 믿음을 행사할 때, 성령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로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돌리신다( 또는 전가하신다 ). 이 인정은 우리 칭의의 결과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커다란 선물이다. 실제로 칭의는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어떻 게 죄인을 인정하실 수 있는지와 관계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다. 항상 순전한 하나님은 죄의 결과로 마땅히 심판과 정죄를 받아야 하는 죄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언하 시며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인정하실 수 있다. 칭의는 경이로운 진 실인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인이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즉시 하나님께 현재와 영원토록 완전하게 인정받 는다. 이 인정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다. 여기서 우리의 초점은 특히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우리의 칭 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라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 냐는 것이다.
14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최근에 우리의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긍정 하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 사이에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1) 토론의
1) 나는 능동적 순종을 진심으로 긍정하며, 그중에서도 다음 인물들이 제시하는 논증을 환영한다. R. Scott Clark, “Do This and Live: Christ’s Active Obedience as the Ground of Justification,” in Covenant, Justification, and Pastoral Ministry: Essays by the Faculty of 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 ed. R. Scott Clark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7), 229-265; VanDrunen, “To Obey Is Better than Sacrifice,” 127-146. 그중 에서도 능동적 순종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Norman Shepherd, “Justification by Works in Reformed Theology,” in Backbone of the Bible: Covenant in Contemporary Perspective, ed. P. Andrew Sandlin (Nacogdoches, Tex.: Covenant Media Press, 2004), 103-120; Norman Shepherd, “The Imputation of Active Obedience,” in A Faith That Is Never Alone: A Response to Westminster Seminary California, ed. P. Andrew Sandlin (LaGrange, Calif.: Kerygma Press, 2007), 249-278;
상당 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성직자 회의의 역할과 여기서 작성한 문 서와 관계있다.2) 여러 가지 자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능동적 순 종을 긍정하지 않았음을 역사적으로 주장하는데, 더 많은 최근 자 료는 이 주장을 반복한다.3) 하지만 다른 자료는 웨스트민스터 회 의가 최종적으로 채택한 문서에서 능동적 순종을 결코 명시적으로 단언하지 않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 고려하면 웨스트민스터 문
서가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4) 이 논의에
Daniel Kirk, “The Sufficiency of the Cross (I): The Crucifixion as Jesus’ Act of Obedience,”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 24, no. 1 (Spring 2006): 36-64; Daniel Kirk, “The Sufficiency of the Cross (II): The Law, the Cross, and Justification,”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 24, no. 2 (Autumn 2006): 133-154. 셰퍼드와 커크는 모두 예수 께서 죄가 없으셨으나 속죄하기 위한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뿐 (죽음과 아울러 삶에서도 우리의 대속자로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두 사람은 관련 성경 구절과 역사적 문헌에 대해 극단적이고 단편적인 읽기를 보 여 준다.
2) 웨스트민스터 성직자 회의는 특히 교회 정치, 예배와 예전, 권징에 대해 다루 는 일련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 책에서 특히 관심이 있고 종종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물론 이것은 회의의 모든 문서를 가리킬 때도 있다)로 통칭되는 문 서는 1646-1647년에 작성된 세 개의 교리적 저술로서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다.
3) 능동적 순종에 대한 본격적인 성경적·신학적 변호를 제공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업이다. 내 소박한 목적은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그리스도 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참으로 긍정했음을 논증하고 관련된 역사적·신학적 문제들을 살피려는 것이다.
4) 제프리 주(Jeffrey Jue)는 “Active Obedience of Christ and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A Historical Investigation,” in Justified in Christ: God’s Plan for Us in Justification, ed. K. Scott Oliphint (Fearn, Scotland: Mentor, 2007, 『그리스도의 칭의론』, CLC 역간, 2017), 99-130에 서 이 입장을 잘 논증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능동적 순종을 긍정 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은 또한 정통 장로교회의 Report of the Committee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추가할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5) 하지만 검토할 경우에 그림을 채우고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해당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룰 때 능동적 순종을 긍정했음을 우리가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약간의 빈틈이 남아 있다는 것이 내 주 장이다. 웨스트민스터 문서의 최종 언어는 ( 1658년 사보이 선언과 같은 ) 일부 다른 공식화처럼 능동적 순종을 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 으나, 능동적 순종 교리를 긍정하는( 특히 이 책의 7장에서 볼 것처럼, 참으 로 수반하고 요구하는 ) 두 언약 체계를 반영한다. 이뿐 아니라, 나는 웨 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의 원래 의도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채택한 교회들이 수년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식처럼 능동적 순종을 선호하는 것( 다시 말해, 아니무스 임포넨티스가 이런 긍정을 선호하는 것 ) 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교회의 통치 기구가 to Study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Willow Grove, Pa.: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007), 144145에서도 제기된다. 더 최근에 이 입장은 John Fesko,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Wheaton, Ill.: Crossway, 2014,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 터 신앙고백서』,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8), 206-228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제 시하고 변호한다.
5)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 중 많은 부분은 내가 쓴 다음 논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The Affirmation of the Imputation of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at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The Confessional Presbyterian 4 (2008): 194-209, 311; “The Imputation of 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 at the Westminster Assembly,” in Drawn into Controversies: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ed. Michael A. G. Haykin and Mark Jone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1), 31-51.
1장 ┃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초기 접근 17
아니라 의회에 자문을 제공하는 기구로서의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구성은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 점을 고려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능동적 순종을 긍정했 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해 다양한 논쟁과 관련이 있다.6)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지 않았다는
주장들 더 구체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더 일반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능동적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다거나, 적 어도 능동적 순종에 반대한 사람들을 수용했다는 의심은 제법 유 서가 깊다. 미첼과 스트러더스는 그들이 편집한 웨스트민스터 회의
6) 웨스트민스터 희의가 영국 의회에 교리적·교회적 자문을 해 주기 위해 세워진 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되는 두 작품은 다음과 같다. Robert S. Paul, The Assembly of the Lord: Politics and Religion in the Westminster Assembly and the “Grand Debate” (Edinburgh: T&T Clark, 1985); S. W. Carruthers, The Everyday Work of the Westminster Assembly, ed. J. Ligon Duncan III (repr., Greenville, S.C.: Reformed Academic Press, 1994). 회의 참석자를 주제로 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illiam Barker, Puritan Profiles: 54 Puritan Personalities Drawn Together by the Westminster Assembly (Fearn, Scotland: Mentor, 1996). 성직자들의 교회적 환경과 신학적 입장과 관련해서 는 다음을 보라. Robert Letham, Westminster Assembly: Reading Its Theology in Historical Context (Phillipsburg, N.J.: P&R Publishing, 2009,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P&R 역간, 2014). 칭의 그리고 능동적 순종의 승 인과 관련해, 레담은 이 토론이 결정적이지 않아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 해하는 경향이 있다(다음을 보라. 250-264).
18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
록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미첼과 스트러더스는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서 11장에서 능동적 순종을 명시적으로 긍정하는 언어를 생 략한 이유가 아마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능동적 순종에 반대한 저 명한 성직자 토머스 가타커와 다른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고 추측한다. 미첼과 스트러더스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대다수 성직자가 능동적 순종을 분명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한( 그리고 그와 같은 입장을 처음에 표현한 ) 신학자 “[아마의 대주교인 제임스] 어셔 와 [대니얼] 피틀리의 견해를 선호했지만”, 이와 동일한 성직자들이 나중에 능동적 순종에 대한 분명한 긍정을 기꺼이 포기하고 “이 문 제에 대한 추가 논쟁을 피하려 했던 것”으로 인지했다.7) 분명한 함 축은 성직자들이 능동적 순종을 신앙고백의 문제로 만들기를 꺼렸 으며, 결국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수용했다는 것 이다.8)
7) Alex F. Mitchell and John Struthers, Minutes of the Sessions of the Assembly of Divines (Edinburgh: William Blackwood and Sons, 1874), lxv-lxvii. 추가 논쟁을 피하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이유는 미첼과 스트러 더스가 회의 초기(1643년 9월)에는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나중 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을 채택할 때(1645-1646년)는 능동적 순종 에 대해 더 이상 중요한 논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인식했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아래서 검토하겠다.
8) 제임스 어셔가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토론에서 능동적 순종의 승인을 옹호하지 않았던 이유는 헌신적인 감독제주의자로서 회의의 모임에 반대했기 때문인 데(Barker, Puritan Profiles, 44-47), 대니얼 피틀리도 감독제주의자로서 1643년 능동적 순종에 대한 토론의 좋은 소식통이었으나 칭의에 대한 토론 직 후에 체포되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인 1645년에 사망 했다(Barker, Puritan Profiles, 47-50). 감독제주의자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고려할 때, 어셔와 피틀리가 대단히 큰 교리적 영향을 끼친 사실은 주목할 만
1장 ┃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초기 접근 19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미첼은 유사한 노선을 따라 더 충분히 논증한다.9)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는 데 찬성하는 대 니얼 피틀리의 연설에 주로 의존해, 미첼은 ( 1643년 39개조 신조의 11조 개정에 대한 성직자 토론의 일환으로 )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신자에 게 전가되었는지의 문제에 대한 표결에서 회의에 참석한 “대다 수”가 능동적 순종을 긍정하는 데 찬성했다고 올바르게 언급했다. 그러면 1645-1646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을 토론하고 채택할 때는 성직자들이 왜 온전한 순종이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채택하지 않았을까?10) 미첼은 다음처럼 추측한다. 아마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신앙고백서에서 칭의의 주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가타커와 그의 지지자들이 가장 완강히 반 대했던 ‘온전한’이라는 단어를 생략해 [39개조 신조의] 11조 의 개정된 형태에서 “그의 온전한 순종과 만족이 하나님에 의 해 우리에게 전가되는”의 형태로 존재한 해당 조항이 신앙고 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전가하는”으로 바뀌 었을 텐데, 우리에게는 능동적 순종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 하다. 성직자들은 교회 관련 문제에 크게 반대하더라도 교리적으로는 일치할 수 있었다.
9) Alex F. Mitchell, The Westminster Assembly: Its History and Standards (London, 1883; repr., Edmonton, Alberta: Still Water Revival Books, 1992), 149-156.
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의 토론/채택 날짜가 이 책 전체에 걸쳐 일관 되게 1645-1646년으로 표시되는 이유는 11장에 대한 토론이 1645년에 진행 되었으나 회의가 1646년 7월까지 11장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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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으며, 가타커와 그의 지지자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 은 더더욱 아니지만, 이들은 전자보다 덜 엄격한 것으로 받아 들이는 데 만족했다.11) 미첼은 웨스트민스터 회의 측에서 이루어진 양보로 결국 “가타커 와 그의 지지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추가 논쟁을 중단하는 데” 합 의하게 되었다고 결론짓는다.12)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활동과 관련해 초기 주석가들뿐 아니라, 더 최근의 역사학자들도 성직자들이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는 견해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성직 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유익한 작품에서, 윌리엄 바커는 능동적 순 종에 대한 이 토론을 성직자들이 그들 사이에서 차이가 있었으나, 단일 입장을 위해 이 차이를 해결하지 않고 이 차이가 그대로 남아 있게 허용한 영역 중 하나로 특징짓는다.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 천년 왕국 문제, 작정의 순서 문제처럼 )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능동적 순 종을 규정하지 않고 다른 모든 견해를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 로 바커의 견해다. 바커는 윌리엄 트위스, 토머스 가타커, 리처드 바 인( 바커가 모두 능동적 순종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인물 ) 이 피틀리( 능동적 순종을 옹호한 인물 ) 와 대조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에서 ‘그 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하는’이라는 어구에서 ‘온전
11) Mitchell, Westminster Assembly, 155-156.
12) Mitchell, Westminster Assembly, 156.
1장 ┃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초기 접근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