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약어표 9
│감사의 말 11
│머리말 13
서론 16
1부 교리의 역사 31
1장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 32
2장 종교개혁 시대 54
3장 정통주의 시대 89
4장 미국 근대 시대 128
5장 오늘날 164
1부 요약 197
2부 석의들 199
1장 구약에서의 전가 200
2장 신약에서의 전가 227
2부 요약 262
3부 교의적 공식화 269
1장 전가 교리 270
3부 요약 317
결론 321
│참고문헌 328
│머리말│
칭의 교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을 근거로 하여 오
직 은혜로만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 놀라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영광스러운 진리를 발견
한 이래로, 이 교리는 줄곧 내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왔다. 나는 진심
으로 이 칭의 교리를 즐거워할 뿐 아니라, 내가 죄의 짐의 버거움을
느낄 때 그 진리에서 위안을 얻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할 때
에도 그 진리를 의지했다. 나는 내 자녀들에게 그들도 그리스도 안
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기적으로 내 가족에게 칭의의 영광을 최선을
다해 알리려고 했다. 목회자로서 나는 이 교리를 회중에게 가르쳤고, 이 때문에 칭의라는 주제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그
두 권의 책은 『칭의: 고전적인 개혁주의 교리의 이해』 ( Justification:
Understanding the Classic Reformed Doctrine ) 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는 무엇인가?』( What Is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 이다. 신학교 교수로
서 나는 이 칭의 교리를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이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학회지에 출판하고, 이 교리의 역사에 대한 책인, 『칼빈 이후:
초기 근대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연합과 칭의』 ( Beyond
Calvin: Union with Christ and Justification in Early Modern Reformed Theology
1517–1700 ) 를 썼다. 이 교리에 대한 내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그것
은 이 교리를 역사적, 석의적, 신학적으로 계속 탐구하는 것이다. 나
는 구속 언약과 같은 광범위한 신학 주제들에 대해 글을 썼지만, 항
상 성경 여러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칭의 교리에 대해 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동시에, 칭의 교리
를 계속 탐구하면서 집필에 대한 다양한 계획을 세웠다. 이 책은 그
계획의 성취된 한 부분을 나타낸다.
나는 칭의 교리를 연구하면서, 칭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핵심 기둥
인 전가 교리에 대한 논문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죄책
의 전가 교리에 대한 논문은 훨씬 더 적었다. 물론 많은 개혁주의 신
학자가 이런 주제를 더 큰 교리 체계의 일부로 다루거나, 칭의 교리
에 대한 많은 논문에서 다루고 있지만, 그런 논문들도 죄의 전가와
의의 전가를 모두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가 교리의 역사를
다루는 논문은 거의 찾기 힘들다. 개혁주의 신학 문헌에서 이런 공백
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구멍을 메우고 싶었다. 나는 전가 교리의 역
사를 다루고 석의를 제시하며 마지막으로 전가 교리를 교리적으로
공식화할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 이런 점에서 내 희망은 이 책이
기독교회 안에서 진행 중인 신학적 토론에 새롭게 공헌할 수 있는, 개혁주의적이고( Reformed ) 석의적이며( Exegetical ) 교리적인( Doctrinal )
연구를( Studies ) 제시하는 REDS 시리즈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달리 명시하지 않는 한, 외국어 본문의 모든 번역은 내 것이다. 별
표( * ) 로 달리 표시하거나 괄호 안에 다른 버전을 제공하지 않는
한( 본 번역서의 경우,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사용할 것이며 외경의 경우 공동번역을
사용할 것이지만, 이 성경 역본들이 저자가 사용하는 버전의 성경의 의미나 의도를 담
아 내지 못하는 경우, 따로 번역했다-옮긴이 ) , 성경 인용에 있어서는 ESV ( English Standard Version, 본 번역서의 경우,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사용하되, 개역
개정이 ESV의 번역을 담아 내지 못할 경우, 따로 번역했다-옮긴이 ) 를 사용할 것
삼중 전가 신학
이다. 별표가 있는 모든 성경 인용문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그
리고 인용된 모든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들은 달리 명시되지 않는
한, 야로슬라프 펠리칸과 발레리 호치키스가 편집한 3권짜리 『기독
교 전통 안에서의 신조와 신앙고백』( Creeds and Confessions of Faith in the Christian Tradition, New Haven:Yale University Press, 2003 ) 에서 인용한다.
일부 사람들은 소위 페더랄 비전( Federal Vision ) 의 대표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의도적으로
이 신학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첫째, 수많은 개혁주의 교단이 이
운동을 다루고 공식 보고서를 발표했다. 둘째, 이미 다른 이들이 그
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다루었다. 가이 워터스( Guy Waters ) 가 쓴 두
권의 책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하나는 『페더랄 비전과 언약신학: 비
교 분석과 칭의』( The Federal Vision and Covenant Theology: A Comparative Analysis and Justification ) 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의 새 관점: 개관과 비
평』( the New Perspectives On Paul: A Review and Response ) 이다. 셋째, 페
더랄 비전의 많은 작업이 인터넷, 특히 추적하기 어려운 블로고스피
어( blogosphere ) 에 등장한다. 이것은 움직이는 대상이므로 특정하기
가 어렵다. 따라서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치기 위해 수고하
기보다, 교리의 역사를 다루면서 페더랄 비전이 전가 교리를 거부하
는 그 근저에 있는 근본적인 오류를 석의적 및 신학적으로 다루어, 그 뿌리를 도끼로 찍어 내려 한다.
머리말 15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1849–1903년 ) 는 자신의 유명한 시 “이길 수
없는”( Invictus ) 의 마지막 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내 운명의 주인
은 나다. 나는 내 영혼의 주관자다.”1) 계몽주의 이후 서구 세계에서
는 개개인이 영웅이며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시대 속에서, 개인들은 공동체에 묶여 있었고, 이런 사회적 유대를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변 세상을 향하던 카메라를 우리 자신에게로 돌리는 세상
에 살고 있다. ‘셀카’는 우리의 문화 어휘집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말해 주는 것은, 개인은 누구에 대한 책임도
삼중 전가 신학
무엇일까?
이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이것이다. 즉 전가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이며 진지하게 연구하고 숙고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
이 전가 교리는 구속받지 않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주장에도 불구하
고, 우리 모두는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두 사람의 행위에 매여 있다
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전가 교리는 이 같은 유대의 많은 핵심적
요소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전가하다”라는 동사는 무엇을 의미하
는가? 이 동사의 기본 정의는 무언가를 다른 것에 할당한다는 것
이다. 회계를 할 때, 누군가는 어떤 계정에 예금이나 부채를 전가하
거나 할당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잘못된 동기를 전가하거나 할당할 수 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전가하다”라는 용어는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떻게 죄책
을 할당하는지 설명하려고 역사적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레위기
17장 4절에서 우리는 성막에 요구된 제물을 가져오지 않는 사람에
게 유혈죄를 전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읽게 된다. 오래된 성경 번역
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의 요구 사항을 충족한 사람에게 의인
의 지위를 할당하거나 인정하신다는 내용을 읽는다. “그러므로 그것
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롬 4:22 KJV ).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에서, 신학자들은 이 본문과 함께 다른 본문
들을 숙고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는 과정에서 삼중 전
가를 사용하신다고 결론 내렸다. 첫째, 하나님은 아담의 첫 번째 죄
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택자들을 구속하심에
있어 선택된 자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신다. 셋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 또는 그의 순종을
서 5장 12-21절인데, 이 가운데 19절이 본문의 핵심을 충분히 포착
하고 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두 번째
본문은 고린도후서 5장 17-21절인데, 21절에 핵심 내용이 포함되
어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
심이라.”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에서, 신학자들은 전가 교리를 다루
며 일반적으로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의 효과를
논의할 때, 이 본문들과 다른 성경 본문들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7년 )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아담과 하와는 “모든 인류의 뿌리이므로 이 죄의 죄책이 전 가되었다. 그리고 죄로 인한 동일한 사망과 부패한 본성이 일반적인
출생을 통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후손에게 전달된다”( VI.iii ).
반대로, 신앙고백은 칭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진 술한다. “하나님이 유효하게 부르시는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그들에게 의를 주입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
하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심으로써 하
는 것이다. 그들 안에서 행한 것이나 그들이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이 그들에게 전가됨으로써, 그들은 믿음으
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안식하게 된다”( XI.i ). 그러나
이런 역사적 진술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교회가 항상 그런 결론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공동체 안에서도 고전적인 전
가 교리의 일부 요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삼중 전가 신학
전가 교리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
간단히 말해, 전가 교리의 수용 역사는 복잡하고 많은 우여곡절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전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든 간에, 그 교리의
기원과 발전, 수용을 다룸에 있어 합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러나 큰 그림에서 볼 때, 루터파와 개혁파를 막론하고 개신교 종교
개혁교회들은 전가 교리를 수용했다.2) 로마 가톨릭교회는 트렌트 공
의회( 1547년 ) 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으로써 전
가 교리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3) 종교개혁 이후에, 개혁주의 전
통의 신학자들은 고전적인 삼중 전가 교리를 옹호해 왔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논쟁에
서 볼 수 있듯이, 삼중 전가에서 일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분
명히 있었다. 게다가 16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아담의 전가된 죄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즉 죄가 수단들을 통해 전가되
었는지, 아니면 매개적 수단들 없이 전가되었는지에 대해 논쟁했다.
요약적으로 말해, 간접적 전가와 직접적 전가 사이에 논쟁을 한 것 이다.
전가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논쟁은 19세기 미국 장로교계 안에서 도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찰스 하지 ( 1797-1878년 ) 와 벤저민 워필
드( 1851-1921년 ) 와 같은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의
2) 예로 다음을 보라. Belgic Confession, §XXII-XXIII; Heidelberg Catechism, qq. 60-64;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I; Larger Catechism, qq. 70-73; Shorter Catechism, q. 33; Augsburg Confession, IV;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IV; Formula of Concord, Epitome, III; Solid Declaration, III.
3) Council of Trent, Session VI, 13 Jan 1547, ‘Decree on Justification.’
4) Charles Hodge, ‘The Christian Spectator on The Doctrine of Imputation,’ The 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 3 (1831): 407-443; 동저자, ‘Inquiries Re-
옹호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위 바울에 대한 새 관점( New
Perspective on Paul ) 의 대표자들은 전가 교리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
를 내며 비판하는 사람들의 부류에 속한다.5) 전가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에 헌신한 신학자들은 개혁주의 교리 체계의 성벽을 지키며 전
가 교리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서부터 전가를 지지해 왔다.6) 그러나
이런 모든 논쟁에는 두 가지 눈에 띄는 경향이 있다.
첫째, 비평가와 옹호자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작은, 바울의 전쟁터, 즉 명백히 바울 신학의 영역에서 싸우고 있다.7) 그런 좁은 석의 영역
으로, 전체 성경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교리를 결정지을 수 있을까?
한편에서
specting the Doctrine of Imputation,’ Biblical Repertory and Princeton Review 2 (1830): 425-472; 동저자, ‘The Doctrine of Imputation,’ in Theological Essays:ReprintedfromthePrincetonReview (New York: Wiley and Putnam, 1846), 195-217; B. B. Warfield, ‘Imputation,’ in Studies in Theology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8), 301-312.
5) 예로 다음을 보라. N. T. Wright, Justification:God’s Plan and Paul’s Visio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9), 135-136, 157-158, 232-233; Michael F. Bird, ‘Incorporated Righteousness: A Response to Recent Evangelical Discussion Concerning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in Justification,’ JETS 476/2 (2004): 253-275.
6) 예로 다음을 보라. Cornelis Venema, ‘Calvin’s Doctrine of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Another Example of “Calvin vs. the Calvinists”?’ MAJT 20 (2009): 15-47; D. A. Carson, ‘The Vindication of Imputation: On Fields of Discourse and Semantic Fields,’ in Justification:What’s At Stake in the Current Debates, ed. Mark Husbands and Daniel J. Treier (Downers Grove: InterVarsity, 2004), 46-78; John Piper, CountedRighteousinChrist:ShouldWeAbandontheImputationofChrist’ s Righteousness? (Wheaton: Crossway, 2002, 『칭의교리를
간, 2007).
7) 참고로, 예를 들면, N. T. Wright, What S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Cornelis P. Venema, The Gospel of Free Acceptance in Christ:An Assessment of the Reformation andNewPerspectiveonPaul (Edinburgh: Banner of Truth, 2006), 148.
삼중 전가 신학
거의 받지 못하는 교리적 결론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런 교리적
설명은 신학적으로 거식증이 될 위험이 있다. 전가 교리 또는 이
울 본문이 아닌, 성경의 전체적인 집합적 증거에 근거해야 한다.
둘째, 칭의 교리를 떠받치는 한 기둥으로서, 교리적으로 잘 입증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가 교리에 대하여 역사적이고 석의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두 가지 전가 문제, 즉 죄책의 전가와 의의
전가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 연구서를 찾지 못했다. 존 머리( 1898-
1975년 ) 는 아담의 죄의 전가에 대해 여러 학회 논문들을 썼고, 이 글
들은 결국 작은 책으로 출판되었다.8) 반대로 브라이언 비커스는 바
울의 전가 신학에 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했는데, 그 책은 의의
전가에 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9) 칭의나 원죄 교리에 대 한 폭넓은 논의 가운데 전가 교리가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죄책의
전가와 의의 전가 모두를 다루는 단행본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삼중 전가에 대한 몇 안 되는 논의 중 하나는 캐스퍼 위스타
8) John Murray, TheImputationofAdam’sSin (Philipsburg: P & R, 1977).
9) Brian Vickers, Jesus’ Blood and Righteousness: Paul’s Theology of Imputation (Wheaton: Crossway, 2006).
10) Caspar Wistar Hodge, Jr., ‘Imputation,’ InternationalStandardBibleEncyclopedia, vol. 3, ed. James Orr (Grand Rapids: Eerdmans, 1974), 1462-66.
된 것이다.
논증
그러므로 본서는 직접적 삼중 전가 교리가( 하나님이 아담의 죄책을 모
든 사람에게, 택자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를 택자에게 직접적으
로 전가하신다는 것 ) 성경적 입장이라는 논지를 변호한다. 내 목표는 전
가 교리를 단순히 하나님이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의롭다고 간주하
는 수단으로서의 추상적인 기계적 장치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요람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언약신학은 전가 교리를 다루는 데 필수적인 배경이다. 언약
신학은 구속사의 피와 땀과 눈물의 옷으로 전가 교리를 입히기 때문
이다.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전가를 죄의 목록과 의의 목록
을 화해시키는 추상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제시하는 것을 막는 역할
을 한다. 오히려 언약은 전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의
모루에서 빚어진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인 은혜와 사랑의 행위로 나타
낸다. 이 책의 주요 초점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고전적인 삼중
적 언약신학( 구속 언약, 행위 언약, 은혜 언약 ) 을 능숙하게 다루고 설명했
듯이, 우리는 전가 교리를 두 아담의
11) 최근의 예들을 보려면 다음을 보라. Michael Horton, God of Promise: Introducing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2006); Zach Keele and Michael G. Brown, Sacred Bond: Covenant Theology Explored (Grandville, MI: Reformed Fellowship, 2012).
12) 존 머리는, (아담의 죄 전가 문제에 있어서)
삼중 전가 신학
어, 최근의 추세인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신학을 다루며 언
약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전가를 논의하면서는 언약신학을 다루
지 않는다.13)
물론, 우리는 전가의 특정 측면에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시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인도를 따라 인류의 두 대표를
나란히 세워, 두 아담의 각각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많은 사
람을 죄인과 의인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
리는 전가를 하나님이 사람들을 죄인이나 의인으로 여기시는 방식
으로 이해하되,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의 역사적 기반 안에서 그렇
게 하시는 것으로 탐구해야 한다. 전가 교리에 대한 내 변호의 또 다
른 중요한 요소는 성령의 역할을 고려하는 것이다. 전가 교리의 역
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신학자들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도구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으로 성령의 사역을 설명
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전가 교리의 다른 영역에서의 성령의 사역
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나는 신학자들이 역사 속에서 인정한
것보다, 전가 교리에서의 성령의 역할이 더 크다고 믿는다.
본서의 개요
본서는 역사, 석의, 교리,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도 언약적(federal, 참고. federal과 covenantal은 같은 의미로서, “언약적”으로 번역 된다-옮긴이) 전가라는
John Murray, ‘The Adamic Administration,’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7), 47-59.
13)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xi).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
전가 교리의 발전 역사는 당연히 초대 교회에서 시작된다. 이 시기
에는 교회가 완성된 성경 정경에 대한 다양한 교리를 이제 막 설명
하고 옹호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전가 교리에 대한 완전
히 발전된 설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은 죄가 존재하며,
인류가 모두 죄에 빠져 있고, 구원을 위해서는 의가 필요하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제들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고 논쟁
하기 시작한 것은 특히 펠라기우스주의가 부상하면서 이에 대한 신
학적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통해
초대 교회에 대해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신학자들도 전가
교리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신
학자들보다 더 높이 우뚝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체계는
중세 시대까지 반향을 일으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설명한
삼중 전가 신학
후, 중세 시대의 세 명의 핵심 인물인 안셀무스, 페트루스 롬바르두
스( 약 1100-1160년 ), 토마스 아퀴나스를 다루겠다. 이들은 이어지는 논 의에서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들이다. 이 장에서는 나는 초대 교
회와 중세 시대에는 전가에 대한 법정적 개념이 교회에 거의 없었음
을 보여 줄 것이다. 신학자들은 법적인 범주 대신 존재론적인 범주
를 사용했다. 그들에게 죄와 의는 물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즉
죄는 출산을 통해, 의는 세례의 물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었다. 이 장 은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요 질문
으로 마무리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도 시대 이후 신학자들은 전가 교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 았다. 신학자들은 인류의 죄 됨을 인정했고, 구원을 위해서는 의가
필요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개념들을 원죄의 전가나 그
리스도의 의의 전가 등, 전가나 전이의 범주에서 논의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원죄에 대한 초대 교회의 이해를 볼 수 있는 요소 중 하
나는, 왜 교회가 유아에게 세례를 주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진술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약 150-215년 ) 는 어린이는
“악행을 금함으로써 육체는 순수하고 영혼은 거룩하다”라고 믿었으
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머니를 통해 만드신” 방식이라
고 말했다.1) 이레네오( 약 130-202년 ) 는 어린이는 죄가 없고 악의식이
없다고 주장했다.2)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약 347-407년 ) 와 고백자 막
1)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IV.25, in ANF II:439.
2) Irenaeus, Against Heresies, IV.xxviii.3, in ANF I:502.
시무스( 580-662년 ) 같은 다른 동방 신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
졌다. 다시 말해, 아담의 죄는 죄책뿐 아니라 필멸과 사망과 고통을
가져왔다.3) 예를 들어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비록
유아들이 죄가 없을지라도, 유아에게도 세례를 베풀어 성화, 공의, 양자, 상속의 은사를 받게 하고, 또한 유아들이 그리스도의 형제와
지체가 되게 하고 성령의 거처가 되게 한다.”4) 서방에서 테르툴리아
누스( 약 160-220년 ) 와 같은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어린이는 죄가 없
으므로 세례를 받기 위해 앞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례를 받는 사람은 제자도의 모든 의무와 배교의 모든 위험을 감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이레네오와 클레멘스와 같은 몇몇 신학자에
게 있어, 핵심적인 개념은 죄인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성경
의 훈계다( 마 19:14; 고전 14:20* ). 다른 초대 교회 교부들도 비슷한 견해
3) Chrysostom, ‘Homily X,’ in NPNF1 XI:401-408, 특히 403-404; Fr. Panayiotis Papageorgiou, ‘Chrysostom and Augustine on the Sin of Adam and Its Consequences,’ SVTQ 39/4 (1995): 361-378, 특히, 368-369; Maximus the Confessor, ‘Ad Thalassium: On the Legacy of Adam’s Transgression,’ in On the Cosmic Mystery of Jesus Christ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2003), 131-143; Daniel Haynes, ‘The Transgression of Adam and Christ the New Adam: St. Augustine and St. Maximus the Confessor on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SVTQ 55/3 (2011): 293317, 특히 313-314; 참고. Bradley L. Nassif, ‘Toward a “Catholic” Understanding of St. Augustine’s View of Original Sin,’ USQR 39/4 (1984): 287-299, 특히 294-296.
4) Chrysostom, ‘Third Instruction,’ 3.6, in Baptismal Instructions, vol. 31, Ancient Christian Writers, eds. Johannes Quasten and Walter J. Burghardt (Mahwah: Paulist Press, 1963), 57.
5) Tertullian, On Baptism, 18, in ANF III:678.
6) 다음을 보라. Pier Franco Beatrice, TheTransmissionofSin:AugustineandthePreAugustinian Sources, trans. Adam Kamesa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77-94.
삼중 전가 신학
질적으로 인간 영혼의 기원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와 연관되어 있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출산 행위 속에서 아버지가 영
혼을 생산한다고 믿었다.7) 이런 견해를 영혼유전설 ( traducianism )
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히에로니무스( 약 347-420년 ) 와 같은 다
른 사람들은 사람이 잉태될 때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영혼을 창조하셔
서,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 영혼을 육체에 주입하신다고 믿었다. 이는
영혼창조설 ( creationism ) 이라고 불렸다.8) 그리고 오리게네스( 약 182254년 ) 가 주장한 세 번째 견해는 하나님이 영혼이 모아져 있는 영혼의
창고를 창조하셔서, 인간이 출생할 때 그 창고에서 영혼을 가져와 잉
태된 육체에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이 창조 이전에 존
재했다는 것이다.9) 당시 영혼의 기원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는 영혼유
전설이었지만, 후에 교회는 이 교리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이런 맥락
에서 영혼은 출산을 통해 생성될 때 원죄의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10)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상들이 있는 때에 원죄의 전이에 대한 자신
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 논쟁의 모루에서
7) Tertullian, A Treatise on the Soul, §27, in ANF III:207.
8) Augustine,ATreatiseontheOriginoftheHumanSoul,AddressedtoJerome(Letter 166), VIII.25, in NPNF1 I:523-532.
9) Fifth Ecumenical (Constantinople) Council (553), The Anathemas Against Origen, §§1-15, in NPNF2 XIV:318-320.
10) Beatrice, Transmission of Sin, 76-77. 참고. Peter Lombard, The Sentences, 4 vols., trans. Giulio Silano (Toronto: Pontifical Institutes of Medieval Studies, 2007–10), II.xviii.7;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Allen: Christian Classics, 1948), Ia q. 118 arts. 1-3
11) 아우구스티누스의
Ernesto Bonaiuti, ‘The Genesis of St. Augustine’s Idea of Original Sin,’ HTR 10/2 (1917): 159-175.
났다고 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이었다. 펠라기우스( 390-418년 ) 는 사
람들이 죄의 본성을 물려받아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부정
적인 본을 따랐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사람으
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온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
니라”( 롬 5:27 ). 펠라기우스는 바울의 이 유명한 구절을 설명하면서, 모든 사람이 아담의 나쁜 본을 따르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주장 했다.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는 한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는다.”12)
이런 점에서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거 부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아담 자신이 아닌, 오늘 태어
난 영혼이 다른 사람이 지은 고대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
님이 다른 사람의 죄를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허용되
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3) 펠라기우스의 관점에서, 각 사람은 자
신의 죄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즉 사람은 아담에게서 어떤 죄책이나 전염, 유전적 오염을 건네받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
을 거부하고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
의 죄 됨이라는 개념을 지지했다. “사도가
12) Pelagius, Pelagius’sCommentaryonStPaul’sEpistletotheRomans, trans. Theodore de Bruyn (Oxford: Clarendon Press, 1998), 92.
13) Pelagius, Commentary on Romans, 94.
삼중 전가 신학
갚아야 한다.”14)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9장 21절에 나오는 바울
의 진흙 덩어리 표현을 인용하며 인류가 “죄와 사망의 형벌을 물려
받은” 하나의 덩어리로 형성되었다고 믿었다.15)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인류를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었다. 이 결속 때문에 모든 사람
은 아담의 첫 번째 죄에 결속되어 그에 따른 형벌을 받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중에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어떻게 전이되었는
지 설명하면서 로마서 5장 12절에 호소했지만,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이, 그는 바울의 이 유명한 구절을 잘못 번역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에 대한 불가타 역본을 따랐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
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아담 안
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in quo omnes peccaverunt] 사
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수많은 주석가들이 아우구스티
누스의 잘못된 번역을 비판하고 지적했다.16) 어떤 이들은 아우구스
티누스가 그리스어 원문에 무지했고, 라틴어만 가지고 있어서 결과
적으로 이런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고 추측했다. 다른 이들은 아우구
스티누스가 로마서의 그리스어 본문을 접할 수 있었고, 다른 독해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해석을 고수했다고 지적한다.
14) Augustine, To Simplician, II.16, in Augustine: Earlier Writings, vol. 6,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Westminster, 1953), 398; 참고. II.17, 19, in Augustine:EarlierWritings, 398, 402.
15) Augustine, ToSimplician, II.II.20, in Augustine:EarlierWritings, 403.
16) Adolf von Harnack, The History of Dogma, vol. 5, trans. James Millar, ed. T. K. Cheyne and A. B. Bruce (London: Williams & Norgate, 1898), 215; John M. Rist, ‘Augustine on Free Will and Predestination,’JTS 20/2 (1969): 430-431.
17) Gerald Bonner, ‘Les Origens Africaines de la doctrine Augustinienne sur la chute et le péché originel,’ in God’s Decree and Destiny: Studies on the Thought of AugustineofHippo (London: Variorum Reprints, 1987), 109.
이 고수했다. 유아는 죄 없이 태어났지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
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 전임자들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유아
가 “오직 원죄에 속박되어 있으며, 오직 이 원죄로 따라 정죄 되는
것이다”라고 믿었다.18) 다시 말해, 유아는 원죄의 죄책을 지니고 있
으므로,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다면, 정죄 받아 지옥에 가게 될 것
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세례는 원죄의 오염과 죄책을 제거
하며, 이 치료법을 받지 않았다면 유아는 개인적인 죄를 짓지 않았
더라도 정죄의 대상이 된다.19)
카르타고 공의회( 418년 ) 와 오렌지 공의회( 529년 ) 등 두 차례의 교
회 공의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을 공식적으로 해
결했다. 카르타고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에 대한 교회의 첫 번째 공식
대응이었다. 이 공의회는 원죄에 대한 8개의 규범을 다루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공의회는 아담이 죽을 수밖
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을 정죄한다. 즉
아담은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죽었을 것이라는 말이다.20) 두 번째
규범은 유아가 원죄를 없애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 인하는 사람을 정죄한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공의회는 아우
구스티누스의 로마서 5장 12절 해석을
18)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XIII.(24), in Four Anti-Pelagian Writings, Fathers of the Church, vol. 86, ed. Thomas P. Halton, et al. trans. John A. Mourant and William J. Collinge (Washington: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92), 246.
19) Augustine, OnForgivenessofSins,andBaptism, I.21, in NPNF1 V:22-23.
20) Council of Carthage (418), canon 1, in Heinrich Denzinger, Compendium of Creeds, Definitions, and Declarations on Matters of Faith and Morals, 43rd ed., ed. Peter Hünermann, et al.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2012), §222 (p. 82).
이로써 그들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그들의 중생으로 깨끗
해지는 것이다.”21) 오렌지 공의회( 529년 ) 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지만, 특정 지점에서
원죄의 전이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 두 번째 규범에서 공의회
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에 대한 이해를 재확정한다. “누구든지 타
락이 아담에게만 해를 끼쳤고 그의 후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
고 주장하거나, 또는 영혼의 죽음인 죄 자체는 아니고, 오직 죄의 형
벌인 육체적 죽음만, 한 사람에 의해 온 인류에게 건네졌다고 말
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불의를 돌리는 것이며, 사도의 말씀과 모순되
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예. 롬 5:12].”22) 카르타고 공의회는 의지의
기능은 아담의 죄에 의해 손상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유롭다고 하
는 펠라기우스의 핵심 교리를 다룬다. 공의회는 펠라기우스 입장에
반박하면서, “첫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출생한 모든 이들 안에서
의지는 손상을 입었다”라고 선언했다.23) 공의회는 본질적으로 아우 구스티누스의 견해를 확정했으며 아담의 첫 번째 죄, 즉 그 도덕적
결과와 법적 결과가 출생을 통해 태어난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전달
되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낳고, 죄 있는 한
사람이 죄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이다. 더욱이 이 죄는 인류에게 영향
을 미쳐 사망에 종속되게 했고 의지를 죄의 지적 영향 아래 두게
21) Council of Carthage (418), canon 2, in Compendium, §223 (pp. 82-83); 참고. Beatrice, Transmission of Sin, 250-251.
22) Second Synod of Orange (529), canon 2, in Compendium, §372 (p. 135).
23) Second Synod of Orange (529), canon 8, in Compendium, §378 (p. 136).
수납되었다. 공의회는 초기 회기 중 하나에서 원죄에 대한 교령을
발표했다.
첫 사람 아담이 낙원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게 행동했을
때, 그가 창조될 때 가지고 있던 거룩함과 의를 즉시 상실했고, 그런 위반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불쾌해하셨으
며, 그 결과 하나님이 이전에 아담에게 경고하셨던 죽음이 초래
되었고, 그 죄 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몸과 영혼이 더 나쁘게 변
화된 아담의 힘 아래 포로가 되었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 파문을 당하게 하라.24)
이어지는 단락에서 트렌트 공의회는 아담의 죄가 아담에게만 영
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정죄하고, 이전 공의회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로마서 5장 12절을 인용한다. 트렌트 공의회는 죄가 유전되기
보다는 모방을 통해 전달된다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한다. 또
한 유아도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원죄의 죄책과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아는 세례
의 물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25) 교리 발전에 있어 이 시점에서
교회는 유아가 원죄에서부터 깨끗해지기 위해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들에게서부터 전해진 신앙 규칙의 일부라고 주장했다.26)
원죄의 전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24) Dogmatic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Decree on Original Sin (17 June 1546),’ sess. 5, §1.
25) Council of Trent, ‘Decree on Original Sin,’ sess. 5, §§3-4.
26) Council of Trent, ‘Decree on Original Sin,’ sess. 5, §4.
삼중 전가 신학
실재론적 관점으로 명명되었다.27)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이
법정적·사법적 죄책의 부과를 포함하지 않으므로, 대신 원죄의 전
이에 대해서도 실재론적 관점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
누스에게 있어 우리가 아담의 죄책을 물려받는 것은 법적 관계, 즉
대리적( representative, 이는 “대표적”으로도 번역된다-옮긴이 ) 관계나 언약적
관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와 우리의 존재론적 관계에 따라서다.28)
우리는 유전적으로 아담의 죄와 그에 따른 죄책과 형벌을 물려받
는다. 출산 행위는 죄책을 전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재론적 관
점에 있어, 석의의 핵심은 로마서 5장 12절뿐 아니라 히브리서 7장
4-10절이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를 다룬다( 히 7:4 ).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가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
조를 바쳤다고 주장한다.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
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
이라”( 히 7:9-10 ).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과 그의 후손 사이의 연관성
을 설명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다.29)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쓴다. “그러나 유아라도 이 땅에서 하루를 살았다면 죄에서 자유롭
지 못하다고 말하는 성경의 말은 헛된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는 ‘내
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27) 예로, John Murray, TheImputationofAdam’sSin (Phillipsburg: P & R, 1959), 24.
28) Gerald Hiestand, ‘Augustine and the Justification Debates: Appropriating Augustine’s Doctrine of Culpability,’ TJ 28NS (2007): 120.
29) Augustine,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vol. 41, Ancient Christian Writers, trans. John Hammond Taylor (New York: Paulist Press, 1982), VI.9 (p. 187).
30) Augustine, Literal Meaning of Genesis, VI.9 (p. 188); 참고. Beatrice, Transmission of Sin, 100-101.
으로( seminally ) 현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의 유전을 통한 죄의 전이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 인류가 아담
과 공유하는 자연적, 존재론적 연합 때문에 모든 사람은 원죄를 물
려받는다.31)
둘째,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중심이 된 주제는
원죄였지만, 칭의와 관련된 문제들도 제기되었다. 은혜, 선행, 공로, 칭의, 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지만, 법정적 범주보다는
존재론적인 범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죄
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는 칭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약 원죄가 자연적 혈통을 통해 전이된다면, 은혜, 특히 의
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이될 것이다. 원죄의 영향에 대항하도록 하나
님은 세례를 통해 죄인에게 은혜를 주입하신다. 물은 원죄를 소멸시
키고 사람을 영적으로 중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물리적으로
전달한다.32) 유아도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은혜가 주입되어 원죄에
서 깨끗해진다.33)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재론적 관점을 고려할 때, 의
의 전가 개념에 대한 이데아론적 틀은 존재하지 않는다.34) 죄와 의
는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주로 존재론적 범주다. 죄와 의의 법
적 차원은 사람 안에 그것들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에 따른 효과로
서 발생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
고 선언되려면
31) Murray, Imputation, 26-27.
32) Augustine, OnForgivenessofSins,andBaptism, I.20, in NPNF1 V:22.
33) Augustine, OnForgivenessofSins, andBaptism, I.10, in NPNF1 V:18-19.
34) Hiesand, ‘Augustine and Justification Debates,’ 123, 129-130.
것이요, 결과적인 선행은 그 은혜를 받은 자의 것이다. 선행이 은혜
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은 타기 위
해 뜨거운 것이 아니라 타기 때문에 뜨거운 것이다. 바퀴는 잘 굴러
가기 때문에 둥근 것이 아니라, 둥글기 때문에 잘 굴러간다.”35) 사람
은 스스로 선행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그로
인해 자신의 의로운 지위를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는 이후의 근대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처럼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부 시대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아우구
스티누스가 제시한 형식을 따랐다. 따라서 나중에 개신교 종교개혁
시대에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교부 시대에서의 광범위한 논의
속에서 의의 전가 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가 개념은 교
부 시대에 첫발을 떼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의 공식화에 비해 정
확성이 부족하다.36) 오히려 당시의 논쟁과 논의는 죄의 전이에 초점
을 맞추고 있다.
셋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원죄는 영혼의 기능들( 지성과 의지 ) 을 타
락시키고, 필멸성과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아우구스티누스
는 인간이 선택의 자유는 가지고 있지만 영적인 선을 선택할 수 있
는 자유 는 잃어버렸다고 믿었다. 죄는 의지를 구속하고 부패시
킨다.37) 펠라기우스의 입장과는 반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중독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를
35) Augustine, ToSimplician, I.ii.3, in Augustine:EarlierWritings, 388.
36) 다음을 보라. Thomas C. Oden, The Justification Reader (Grand Rapids: Eerdmans, 2002), 60-106. 어떤 면에서,
37)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in NPNF1 V:436-465; 참고. J. N. 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rev. ed. (San Francisco: Harper San Francisco, 1978), 357366.
존경하고 그의 명성을 인정하지만, 후대의 교회 공의회들은 죄로 말
미암아 인간 본성이 파괴된 정도에 대한 그의 견해를 완전히 지지하
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후 교회 공의회들은 인간의 본성이 파괴되었다고 말
하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오렌지 공의회는 아담의
전 인격이 “더 나쁘게 변질되었다”라고 주장했고, 트렌트 공의회도
이 주장을 반향했다.38) 아래에서 다루게 될 중세 후기 발전 과정에 서, 트렌트 공의회는 아담이 거룩함과 의를 상실했지만, 완전히 타락
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확정한다.39) 중세 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재론적 칭의 교리는 지배적으로 수용되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신학자에게 다시 수용되었다. 즉 죄와 의
는 여전히 주로 법적인 용어보다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원죄 교리에 있어, 몇 가지 주요 발전, 특히 안셀무
스, 롬바르두스, 아퀴나스의 공헌을 고려해야 한다. 중세 후기 신학자
가브리엘 비엘( 1420-1495년 ) 은 중세 시대의 이 세 거인이 원죄의 본질
에 대한 중세의 세 가지 주요 관점을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안셀무스
는 원죄를 원의( original justice, 이 단어는 original righteousness와 같은 의미를
지녀 함께
38) 참고. Augustine, City of God, XIII.3, 14, XXII.24; Second Synod of Orange (529), canon 1, in Compendium, §371 (p. 134); Dogmatic Decrees of Trent, ‘Decree on Original Sin,’ §1.
39) Dogmatic Decrees of Trent, ‘Decree on Original Sin,’ §2.
와 죄의 적극적 현존이라고 믿었다.40)
안셀무스
안셀무스에게 원죄는 감염이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원의( original righteousness ) 를 상실하는 것이었다. 안셀무스는 원죄를 죄와 죄책의
적극적 현존이라기보다는, 본성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41)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것이며 하나님의 명예를 모독
한 것이었다.42) 안셀무스에 따르면, 아담의 죄의 본성을 더욱 악화시
킨 것은 아담이 창조되고 아담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의 ( iustitia ) 라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이었다.43) 아담
은 죄를 지을 때, 자신과 그의 자손을 위한 이 원의라는 은사를 잃 었다. 안셀무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담과 하와가 원의를 유지했다면,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마찬
가지로 본래적으로 의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죄
를 지었다. 그래서 원래 그들은 문제없이 의를 유지할 수 있는 힘
과 고결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전인이 약화되고
타락했다. 범죄한 후 그들의 육체는 짐승의 육체처럼
40) Heiko A. Oberman, The Harvest of Medieval Theology (1963; Grand Rapids: Eerdmans, 1983), 121-123.
41) Wiley, OriginalSin, 80.
42) Anselm, Why God Became Man, I.11, in Anselm of Canterbury:The Major Works, ed. Brian Davies: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282-283.
Henri Rondet, OriginalSin:ThePatristicandTheologicalBackground (Shannon, Ireland: Ecclesia Press, 1969), 148.
43) Anselm, WhyGodBecameMan, II.i (Works, 315).
들이 잃어버린 은사를 박탈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전체가 아담과 하와 안에 들어 있었고 아담과 하와 밖에는 본성
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의 본성 전체가 약화되
고 부패되었다.44)
안셀무스는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재론적 요소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안셀무스는 인간의 타락이 죄의 적극적 현존이 아니라 원
의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더욱이 안셀무스의 죄의 전이에
대한 이론은 아담 안에 인류가 종자적으로( seminal ) 현존한다는 아우 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대한 생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플라톤주의
적 이데아론에 근거한 것이다. 즉 아담은 전형적인 인간 본성을 소
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원형적 인간 본성이
타락하고, 아담의 모든 후손도 아담과 함께 타락했다는 사상에 근거
한 것이다.45) 실제로 안셀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로 부패한 것
으로 본 인간의 씨앗을, 침이나 피보다 더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죄는 육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안에 있
는 것이다.46)
안셀무스는 죄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 정
의했는데, 이런 이해는 칭의에서 의의 기능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자
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다. 안셀무스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44) Anselm, OntheVirginConceptionandOriginalSin, §II (Works, 360).
45) Anselm, On the Virgin Conception and Original Sin, §I (Works, 359); Rondet, OriginalSin, 149.
46) Anselm, OntheVirginConceptionandOriginalSin, §VII (Works, 366-367).
망이
인류에게 들어온 것처럼, 하나님은 한 인간의 순종을 통해 구
원과 회복을 가져오신다고 주장한다.47) 그리스도는 죄 용서를 가져
오는 만족을 이루시지만, 이것이 자동으로 의가 필요한 상황을 해결
해 주지는 못한다. 공의( 또는 의 ) 는 도덕적 형평성과 법에 대한 순종
을 중심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상태를 중심으로 이해
된다. “정의는 지식이나 행동의 정당성이 아니라 의지의 정당성
이다.”48) 이와 상응하게, 안셀무스는 진리는 형이상학적 정당성이며, 이를 “마음만으로 지각할 수 있는 정당성”이라고 정의한다.49) 아담
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세우신 규범인
진리 및 도덕적 정당성에 따라 사는 데 실패했고, 그 결과 원의라는
하나님의 은사를 잃었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를 만족해 주심으로, 사람들은 의와 칭의를 찾을 수 있다.50)
롬바르두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의 역
사를 잘 알고 있었으며, 펠라기우스 견해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적극적으로 인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롬바르두스는
원죄가 단순히 모방의
47) Anselm, WhyGodBecameMan, I.iii (Works, 268).
48) Anselm, On Truth, §XII (Works, 167).
49) Anselm, On Truth, §XII (Works, 166); 참고. Alister E.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3rd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76-77.
50) McGrath, Iustitia Dei, 78-81.
51) Peter Lombard, The Sentences, 4 vols., trans. Giulio Silano (Toronto: PIMS, 200710), II.xxx.4.
말해,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52)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약 329-390년 ) 는 원죄를
“잘못”( fault ) 으로 정의한다. 롬바르두스에 따르면, 이는 “모든 사람
은 정욕을 통해 계약을 맺는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일치
하는 것이다. 따라서 롬바르두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원
죄는 ‘잘못’이며, 부모로부터 정욕을 통해 태어난 모든 사람이 이 원
죄와 계약된다.”53) 또한 롬바르두스는 정욕은 “죄를 짓게 하는 동
기”라고 설명한다.54) 롬바르두스는 정욕이 원죄의 진정한 본질이라
고 믿는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원죄, 즉 정욕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 왔다. 이 진술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곧 원죄는, 즉
정욕이라는 악덕은 정욕을 통해 아담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들어오고, 모든 사람을 그 원죄의 오염을 공유하는 자가 되게
한다.”55) 롬바르두스는 아담이 불순종했을 때, 아담의 자범죄에서부
터 원죄가 발생했으며, 아담은 이를 모든 자손에게 물려주었다고 믿
었다. 롬바르두스에 따르면, 아담은 자신의 후손에게 원죄를 물려준
것은, 모든 인류가 질료적으로나 인과적으로가 아니라, 형상적으로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낳는다는 전이의
법칙은
52) Lombard, Sentences, II.xxx.6.
53) Lombard, Sentences, II.xxx.7.
54) Lombard, Sentences, II.xxx.8.
55) Lombard, Sentences, II.xxx.10.
56) Lombard, Sentences, II.xxx.14.
57) Lombard, Sentences, II.xxxi.3.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가 죄의 전이 교리에 기여한 것은 아우구스티누
스와 안셀무스의 견해를 종합한 것으로 특징된다.58) 안셀무스의 노
선을 따라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영혼의
부조화를 붙들고 죽음을 막는 원의( iustitia ) 를 은사로 주셨다고 주장
한다.59) 아퀴나스에게 있어, 원죄는 정의( 또는 의 ) 의 박탈이다. 이는
안셀무스의 견해이고 아퀴나스도 그의 전임자를 인용한다.60) 아퀴
나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지가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게 만드는
원의의 박탈은 원죄의 형상적 요소다.”61) 원의는 영혼의 힘을 온전
하게 유지하게 하고, (1) 이성이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고, (2) 도덕
의지가 이성에 종속되며, (3) 육체가 이성과 의지의 기능들로 구성
된 영혼에 복종하도록 보장하는 접착제였다.62) 아퀴나스는 이렇게
썼다. “이제 원죄라고 불리는 이 부패의 성향의 원인은 오직 하나, 즉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을 제거하는 원의의 박 탈이다.”63) 인간 영혼의 기능들( 지성과 의지 ) 안에서의 무질서와 혼란
은 원죄의 감염과 원의의 상실 때문이다.64)
안셀무스와 달리, 아퀴나스는
58) Wiley, OriginalSin, 83.
59) Thomas Aquinas, SummaTheologica, 5 vols. (Allen: Christian Classics, 1948), Ia q. 95 art. 1; Wiley, OriginalSin, 85.
60)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83 art. 3; 참고. Anselm, OntheVirginConceptionandOriginalSin, §III (Works, 361-362).
61)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82 art. 3.
62) Thomas Aquinas, Commentary on the Letter of St. Paul to the Romans, vol. 37, Latin/English Edition of the Works of St. Thomas Aquinas (Lander, Wyoming: Aquinas Institute for the Study of Sacred Doctrine, 2012), lect. 3, §416, pp. 141; Wiley, OriginalSin, 85.
63)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82 art. 2
64)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82 art. 2
면, “원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퍼진다. 하나는 육체에서 영혼으로 퍼
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본질에서 능력들로 퍼지는 것이다.
전자는 생성의 순서를 따르고, 후자는 완전성의 순서를 따른다.”65)
아퀴나스가 육체에서 영혼으로 죄가 전이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
은, 안셀무스와 달리,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롬바르두스의 초기
공식을 따라, 아담이 출산 행위를 통해 자손에게 원죄를 전이시킨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로마서 5장 12절을 인용하고 이 본문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석
의를 명시적으로 따른다.66) 그러나 아퀴나스는 또한 안셀무스의
플라톤적 인간 본성 개념의 요소도 통합한다. 모든 각자의 인격이
“인간 본성의 구성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같은 종을 공
유한다면, 많은 사람은 곧 한 사람이다”라는 의미다. 따라서 아퀴나
스는 죄의 전이에 대해 두 가지 방식을 주장한다. 평행 선로를 달리
는 두 대의 기차처럼, 아퀴나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이
생식( generation ) 을 통해 얻어지는 것처럼, 첫 번째 부모의 죄로 인해
얻은 결함도 생식을 통해 전달된다.”67) 원의의 부재로서의 원죄는 아퀴나스의 칭의 교리에 영향을 미
친다. 만약 원의가 타락으로 인해 상실된 주입된 성질이라면, 칭의는
이 원의의 회복에 대한 것이다. 칭의는 세례를 통해 거룩하게 하는
은혜가 주입되는
65)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82 art. 2
66) Aquinas, Summa Theologica, Ia IIae q. 82 art. 4, Ia IIae q. 81 art. 1; 동저자, Romans, lect. 3, §§406-420, pp. 137-142.
67) Aquinas, Romans, lect. 3, §410, p. 139.
68) Aquinas, Summa Theologica, Ia IIae q. 113 art. 2; 동저자, Romans, lect. 1, §§331-
삼중 전가 신학
은혜의 주입으로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
게 된다. 또는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지위를 확보하
기 위해, 믿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 갈 5:6 ). 69) 아퀴나스에게 있어, 원죄와 칭의, 그리고 의는 법적·법정적 범주보다는 주로 존재론적
범주에 놓여 있다. 안셀무스와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의 경
우, 우리는 죄책의 전가와 의의 전가라는 용어로 그들의 견해를 설
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적절한 용어가 전해지고 있다. 법적 인대
가 아닌 존재론적 인대가 인류를 묶는다. 사실 아퀴나스는 칭의를
신격화, 즉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70) 이런 점에서
아퀴나스의 이해에 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칭의는 밀접한 관련
이 있다. 결론
초대 교회와 중세 시대에는 법적·법정적 범주가 존재론적 범주에
밀려 뒤로 갔다. 예외적인 일들은 항상 일반적인 법칙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대 교회나 중세 시대에는 전가에 대한 논
의가 거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입장을 실재론적 전
가라고 바라본다. 그러나 말하자면, 초대 교회의 입장은 전가보다는
340, pp. 113-115; McGrath, Iustitia Dei, 64.
69) Thomas Aquinas, Commentary on St. Paul’s Letters to the Galatians and Ephesians, vol. 39, Latin/English Edition of the Works of St. Thomas Aquinas (Lander, Wyoming: Aquinas Institute for the Study of Sacred Doctrine, 2012), lect. 2, §286, p. 128.
70) Aquinas, SummaTheologica, Ia IIae q. 112 art. 1.
편적으로 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 논쟁 때
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신학자들은 원죄에 대해 재검토하고
세분화하여 본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출산을 통한 죄의 물리적 전이를 주장했으며, 이 신념은 이후 수 세
기 동안 지속되어 카르타고, 오렌지 공의회에서 확정되고,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도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안셀무스와 같은 중세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수정하여 원죄는 죄의 현존이
아니라 의의 박탈이라고 주장했다. 더욱이, 안셀무스는 물리적 전이
가 아닌, 전형적 인간 본성을 지닌 아담에 의한 지정된 전이라는 개
념을 제시했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의 요소를
원죄와 의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모두 통합시켰다.
이런 발전 방향은 고려할 만한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아담과 그의 후손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가? 만약 연관성이
있다면, 그 연관성은 어떤 유형인가? 도덕적 유형인가? 법 적 유형인가? 물리적 유형인가? 모범적 유형인가?
2. 죄는 단지 존재론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 세대에서 다음 세
대로 물리적으로 전달되는 것인가?
3. 만약 각 세대가 전이된 죄를 물려받는다면, 각 세대는 또한
주입을 통해 의를 물리적으로 받는 것인가?
4. 원죄는 단순히 의의 부재인가, 아니면 죄의 적극적인 현존 인가?
5. 플라톤 사상이 성경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하는가? 다시 말해, 아담은 전형적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어, 타락했을 때 다른
모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2부와 3부에서 이런 질문들을 다루겠다. 그럼에도 한 가지
더 시급한 질문이 있다. 그것은 곧 종교개혁 시대에 교부들의 견해
가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한편으로 의의 전가 교
리는 칭의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새로운 이해의 일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원죄의 전이에 대한 실재론적 관점과 안셀무스주
의적 관점이 여전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