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서문_ 6
저자 서문_ 9
약어 소개_ 14
지도_ 26
고린도후서 서론 27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89
A. 서신서 서두 ( 1:1-2 ) 93 B. 서언 ( 1:3-11 ) 103
II. 바울의 사역의 진실성 ( 1:12-7:16 ) 139
A. 왜 바울은 직접 고린도로 오지 않았는가 ( 1:12-2:13 ) 141
B. 진정한 사역에 대한 바울의 성찰 ( 2:14-7:4 ) 215
C. 디도가 마게도냐에 도착했을 때: 고린도인들이 잘 반응했을 때의 행복한 결과 ( 7:5-16 ) 485
III. 드리는 사역 ( 8:1-9:15 ) 513
A. 연보를 마무리하라는 바울의 권고 ( 8:1-15 ) 515
B. 디도의 임무 ( 8:16-9:5 ) 553
C. 주는 것을 위한 자원 및 결과에 대한 성찰 ( 9:6-15 ) 587
IV. 바울이 그의 대적들의 악의적 사역과 대결함( 10:1-13:13 ) 613
A. 대면하든 떠나 있든 바울의 권위는 같다 ( 10:1-11 ) 615
B. 적절한 자랑과 부적절한 자랑 ( 10:12-18 ) 643
C.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중단시키기 위해 어리석은 자처럼 자랑함 ( 11:1-12:13 ) 663
D. 세 번째 방문 준비 ( 12:14-13:10 ) 795
E. 마무리 권고, 인사말, 축도 ( 13:11-13 ) 849 참고문헌_ 858
BECNT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 음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 은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관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 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을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모두 포함하려 애쓰는 백과 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 련되어 있는 문제( 비록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는 해도 )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를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해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력 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해 한 절씩 해 설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름 ) 이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본문
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서 본 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최근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경 속에 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 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깎 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 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가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작 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 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확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론을 취하기 위해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 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비 롯된 다양한 가르침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경에 대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은 성경 해 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출 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해를 낳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편견 없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 를 성경 해석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하 기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이차 철학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류 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양 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를 적절히 적용하는 데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론 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그
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 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 론적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異文 ) 은 저자의 번역 속에 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半 ) 괄호(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게 함 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 한 “추가 주석”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연대 방식을 사용 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수( 面數 )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 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이 있다( BAGD, LSJ, TDNT ). 온전한 참고문헌은 책 마지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사도 바울이 상심한 마음을 추스르며 쓴 편지인 고린 도후서를 해설할 때, 그 책에서 바울의 감정과 이성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마틴( Martin 1986: x ) 이 『말씀 성경 주석』( Word Biblical Commentary ) 서문 에서 고린도후서를 “주석가의 낙원이자 절망”이라고 말한 것이나, 마틴 책의 서평을 쓴 댄커( Danker 1988: 550-551 ) 가 “현대 해석자가 고린도후서의 모든 뉘앙 스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미시 농부가 미국 만화 주인공 둔즈베 리( Doonesbury ) 가 나오는 만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 비슷하다”고 한탄한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분명 고린도후서는 주해의 채석장처럼 보일 수 있다. 거의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바위에 둘러싸인 빛나는 금맥을 발 굴해 내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후서를 집어 드는 사람들은 6장에 나 오는 바울의 고난 목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으로, 심지어 석의적 매 맞음과 해석적 갇힘과 정서적 난동 가운 데” 그렇게 해야 한다. 실로 이 서신서 갈피마다 바울과 동행하려면 “이해를 위한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으로 해야 한다( 참고, 고후 6:4-5 ). 퍼니 시( Furnish 1984: 3 ) 가 말했듯이, “어떤 바울 서신도 독자들에게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서신은 없다.” 하지만 퍼니시는 어떤 바울 서신도 “그 해석에 주의 깊게 전념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많은 보상을 제시하는” 것은 없다 고 고무적으로 덧붙인다. 여기서 우리는 이 어려운 책 연구를 시작할 만한 충 분한 이유를 갖게 된다. 고통에는 보상이 따른다. 하지만 고린도후서 해석에 “전념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한 좋은 도구도 많이 있다. 그래서 바로 지난주에 교회에서 한 여성이 말한 것처럼, “왜 고린도후서 주석을 또 써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그처럼 많은 탁월한 주석들이 이미 나와 있는데 말이다. 좋은 질문 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성경의 여러 책을 주석하는 주석가들 사이에서 다양 한 형태로 표현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정당 화하려 애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수없이 많은 아침마다 헬라어 본문, 펼 쳐 놓은 주석,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응시했던 나에게 그것은 대단히 마음에 와 닿는 질문이었다. 나는 삶의 상당한 부분을 어떤 프로젝트에 가볍게 쏟아 부을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 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2 ). 게다가 특히 고린도후서에 대해 연구하다 보 니, 나는 신약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할 때 통상 취하던 방식에서 좀 벗어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런 놀랍도록 복잡한 서신서를 둘러싼 기본 논의에 속도 를 내는 일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특히 이 서신서의 상황은 느긋함을 허용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여정을 끝내면서 나는 베이커 아카데믹 ( Baker Academic ) 에 깊이 감사한다. 이 프로젝트에 나를 초대해 준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책이 완성되는 동안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준 것에 대해서도 그 렇다. 이 과정을 헤쳐 나온 것에 감사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세 가지만 언급해 보겠다. 첫째, 나 자신이 성장하고 이해하고 세워지기 위해 고린도후서를 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가르치려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다. 분명히 말로 표현 하려면 제대로 내용을 파악해야 한다. 나는 남은 일생 동안 모든 미묘한 차이 들, 댄커가 앞서 언급한 파악하기 어려운 미묘함을 이해하려 애쓰겠지만, 이 주석은 개인적으로 좋은 출발점이 되었으며, 다른 초심자들도 나와 함께 발 견의 여행을 떠나기를 소망한다. 나 역시 앞으로도 이 책을 더 깊이 탐구하기 를 소망한다. 나는 BECNT 시리즈의 방침에 맞게 헬라어 신약 본문을 토대로 작업했으며, 나의 주해와 번역은 고린도후서에 대해 현재 나와 있는 많은 탁 월한 문헌에 기초해서 정보를 얻고 계속 다듬어지긴 했지만, 보통은 이차 문 헌을 참고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의 주해와 번역으로 시작했다. 내가 참고한 것들은 주로 영어권 핵심 주석가와 분석가들의 글 및 제2성전 시기에 나온 적절한 일차 자료들로, 대부분의 교육받은 목사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 접할 수 있고 도움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 자료들이다. 매 본문에 대해 이런 기초 자료들을 다 망라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편집자들이 관대하게 양보하긴 했지만, 나는 깊이와 단어 수 사이에 끊임없는 전투를 했고, 단어 수가 이기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이 정도 길이의 주석을 쓰면서도 여전히 다루어야 할 내 용의 표면만 스치면서 주로 “얕은 곳”처럼 보이는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주석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독 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즉 주석이 이 풍성하고 복잡한 책 인 고린도후서를 평생 연구하기 위한 유용한 시작, 출발점을 제공했으면 한다. 둘째, 지금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풍부한 학적 자원에도 불구하 고, 고린도후서는 오늘날에도 계속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연구에 대한 보답 을 해 준다. 고린도후서보다 먼저 나온 자매 서신인 고린도전서에 필적할 정 도는 아니지만, 지난 40년간 고대 고린도에 보낸 이 “두 번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실제로는 네 번째라고 생각한다 ) 서신에 대해 정밀하고 사려 깊은 주석들, 자극 이 되는 전공 논문들, 통찰력 있는 글들이 점차 더 많이 편찬되어 왔다. 스 롤( Thrall ), 해리스( Harris ), 바넷( Barnett ), 퍼니시( Furnish ) 같은 사람들이 쓴 주석들 은 박학하고 광대한 것으로, 목사들 및 다른 말씀 연구자들을 고린도후서에 대한 참된 말씀의 잔치로 초대한다. 하지만 내가 이 책 곳곳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처럼, 아직도 말할 것은 남아 있다.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특정한 해석 문제들을 새롭게 바라보면, 필요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서 큰 기쁨이다. 우리는 언제나 배우고 있고 발견하고 있 으며, 그 과정은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때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특정 한 가정들에 반대해서 약간 소리를 높이는 불협화음 가운데서 일어난다. 나 는 이 프로젝트에 시간을 들이게 된 것에 감사한다. 적어도 조심스럽게 그리 고 적어도 몇몇 핵심적인 경우에 나도 뭔가 말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대 화에 기여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름대로 해석학적으로 까다롭기도 하고 바울의 메시지에 엄청나게 중요하기도 한 부분인 고린도후서 2장 1416절과 3장 7-18절에 대한 해석에서 나는 왜 그것이 현대에 제대로 논의되 지 못했는가에 대한 배경 정보를 약간 제공하려 한다. 그래서 나는 해석의 항 아리를 살짝 휘젓기를 바란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의 사 상과 그가 의도한 영향에 대해 새롭게 성찰해 보기 위해서다. 셋째,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현대 교회에서 우리에게는 고린도 후서가 지극히 필요하다. 바렛( Barrett 1982: 1 ) 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서가 바울 신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해도, 그럼에도 바울이 그의 신학적 확신 이 교회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는지 가장 완전하고 다각적 으로 보여 주는 묘사는 고린도서에서 얻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 사역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성찰할 때 고린도후서를 듣고, 알고,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사역의 고통스럽고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는 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깨어졌지만 보물 을 품고 있는 그릇으로부터 대단히 아름답고 깜짝 놀랄 만큼 깊이 있는 신학
적 목회적 수사학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해리스( Harris 2008: 434 ) 는 고 린도후서는 보통 목회 서신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탁월한 목회 서신”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나도 동의한다.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말은 고상 하고도 지혜로운 목회 전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방랑하는 회중을 가까이 끌어당기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도와 그의 선교에 가까이 가게 하고, 그래서 참된 복음과 참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의 마음도 끌어당긴다. 21세기에 때때로 이곳저곳에서, 교회는 방랑자, 거짓 선생, 신실한 혹은 신실하지 않은 고난받는 자, 바울의 동역자, 환멸을 느낀 사역자나 회중, 참 복음을 대적하는 자, 세련되고 경쟁력 을 갖추고 있으며 설득력 있는 연설가, 탈수 상태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듯 지위와 인기와 사회적 중요성을 갈망하는 무력한 지도자다. 특히 미국 교회는 사역의 효율성을 지지하는 실용적 중추인 능력, 자세, 지위, 과시라는 틀에 너무 쉽게 빠져들며, 고린도후서는 사역에 대한 그런 접근법 에 반대해서 냉철하고 큰 경고의 음성을 제시한다. 게다가 능력과 과시라는 문화적 풍토로 인해 많은 신실한 목사들은 종종 자신이 인식한 한계로 인해 정서적으로 난타당하고 부담을 느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실제 박해에 직면 하고, 다양한 표현에 에너지를 쏟으며, 정서적 육체적으로 기진맥진한다. 그 래서 내가 바라고 기도하는 바는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사역을 하면서 다양 한 형태의 반대로 깊이 낙담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한 많은 사람에게 마땅히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의 전 편집자 모이세스 실바( Moisés Silva ) 가 처음에 나를 초대해 준 것에, 그리고 밥 야브로( Bob Yarbrough ) 가 끝까지 나를 지도하면서 고무적이고 유능 한 편집자의 역할을 해 준 것에 깊이 감사한다. 베이커 출판사의 짐 킨니( Jim Kinney ) 는 너무나 여러 번 원고가 늦어졌음에도 놀랄 만한 친절함과 인내심을 보여 주었으며, 출판사의 편집 기술자 웰스 터너( Wells Turner ) 는 언제나 빠른 답변을 보내 주고, 아량 있는 지도를 해 주고, 피드백으로 격려해 주었다. 유니언 대학교 행정 담당자 데이비드 도커리( David Dockery ) 총장( 현재 트리니티 국제 대학교 총장 ) , 카를라 샌더슨 ( Carla Sanderson ) 교무 과장, 그레고리 손버 리( Gregory Thornbury ) 총장( 현재 뉴욕 킹스 칼리지 학장 ) 은 언제나 나의 일을 크게 격 려해 주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혹독한 학문적 연구에 대해 분명한 시각 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을 내주었다. 덧붙여 대학교 위원회는 주석 집필의 중대한 두 단계인 맨 처음과 맨 끝 단계 때 연구 휴가를 주었는데, 그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나는 이 두 번의 휴가를 모두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틴데일 하우스에서 보냈다. 세계 최고의 성경
연구 도서관 중 하나에 둘러싸인 채 14번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여름날을 내다보면서, 나는 여기 있는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틴데일 하우스 직원들 과 공동체는 공동체 내에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 및 세상에서 하나님 의 대의를 증진시키기 위해 성경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공동체인 노스브룩 교회 역시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격려해 주었으며, 나의 사역을 교회 사역의 연장으로 여겨 주었다. 마지막으로, 멋진 내 가족에게 특별히 감사해야겠다. 내 아이들인 조슈아와 안나는 내가 이 주석을 썼을 때 부쩍 자랐다. 아이들은 관심을 가져 주었고, 지지해 주었고, 나와 함께 놀아 주었다. 나는 나가서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보 거나 심지어 그저 뜰 주위를 산책할 것을 고대하면서, 부지런히 책 쓰기에 몰 두해야 하는 나날을 견딜 수 있었다. 팻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모든 사역의 동반자, 가장 친한 친구, 한 분 하나님만 빼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아내. 이 프로젝트에서 놀랍도록 실질적인 역 할을 담당해 주어서 고맙소. 이 “장막”이 계속해서 낡아지더라도, 우리가 절 대 포기하지 않기를,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를, 그리고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될 때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고후 4:16-5:5 ).
조지 거스리 영국 케임브리지 틴데일 하우스 2013년 8월
고린도전서에 대한 한 연구 논문에서 스티븐 포골로프( Stephen Pogoloff 1992: 273 ) 는 이렇게 쓴다. “우리 역사가들은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하거나 억제 할 단서들을 찾아본다. 이야기를 다듬어서 중요한 확신을 만족시키고 또 본 문을 더 의미 깊게 읽도록 하기 위해서다.” 보통 중대한 주석 서론은 학자들 이 본문을 더 이해하기 쉽게 읽도록 제공하는 여러 사실 혹은 적어도 합리적 인 추측을 제시하면서 저자, 연대, 수신자, 구조 등 주제를 둘러싼 “단서들”을 정리하려고 애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지만 나는 여러분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고린도후서 배후의 이야기를 읽도록 권하 는 것으로 우리의 연구를 시작하고 싶다. 그 이야기는 성경의 책 배후 ( 고린도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 ) 와 그 안에 있는 자료 둘 다에 근거하고 있다. 포골로프의 말 은 이 역사적 허구가 지닌 “역사적” 차원을 묘사한다. 나는 그것을 교육적 목 적으로 사용해서, 우리를 1세기 중반의 고린도로, 즉 생생한 경치와 냄새, 강 력한 문화적 역동성, 격앙된 관계의 긴장이 있는 장소로 데려가려 한다. 서론 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이야기의 어떤 측면이 확고한 역사적 발판에 기초 하고 있는지 가려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나와 함께 바울의 고린도 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포럼(공공집회 장소)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스클레피오스에서 남쪽을 향해 레카이온 도 로의 자갈길을 걸어갈 때, 스데바나는 그 만남으로 인해 아직도 약간 어리둥절한 상태에 있었다. 스데바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을 상대로 토론을 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날
아침 정원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아내 알바는 “도대체 루시우스가 아스클레피오스에서
만나자고 하는 이유가 뭐래요?”라고 물었다. 그들이 사는 크라눔 구역이 위치한 야트막 한 언덕에서는 거대한 조각보 누비이불이 드리워진 것처럼 넓게 펼쳐진 고린도의 전경 이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스데바나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도시는 번창하고 있었고 그의 사업도 도시와 함께 번 창했다.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 관광객, 상인, 이국적인 상품으로 가득한 항구, 위대한 사 람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새로 세워지고 있는 건물, 그들의 멋지고 풍부한 목욕탕과 샘, 부 러운 하수도……. 호라티우스는 “아무나 고린도를 방문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 니다”1)라고 썼다. 하지만 스데바나는 여기 살고 있었다. 아마도 최상류층 사람 중 하나는 아니었지만, 성공한 상인인 스데바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이 부유한 도시에 큰 자부 심을 느꼈다. 물론 아주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지금 교회와 연 관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린도에는 주민들을 위한 기회가 대부분의 다른 곳보다 더 많았다. 그리고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온 이래, 스데바나는 그가 사는 장소와 그의 번창 을 그리고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을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보았다. 물론 스데바나는 루시우스 도미티우스 펠릭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선택한 이유를 알 았다. 그곳은 멋진 장소로, 치유의 신에게 바쳐진 구역이었다. 스데바나는 때때로 거기에 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했다. 도시 중앙에서 북쪽 벽 근처까지 뻗어 나간 신전 마당은 아 름답게 치장되어 있고, 편안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그것 은 은근히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반박을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의 서신이 지난 해 도착했을 때, 루시우스는 그 서신이 읽히는 것을 들었으며 또 후에 그 서신을 직접 읽 었다. 그 서신에서 바울 사도는 교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에 대해 답했다. 거기에는 신전 에서 나온 고기를 먹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루시우스는 바울의 관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물론 음식을 먹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그 도시에서 가장 멋진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그 신전에서 굽는 신전 고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루시우스가 계속 “관심을 갖고 있는” 바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조용한 장소였다. 루시우스는 자신의 후원을 거절하고 “제 손으로 육체노 동을 하는, 품위 없는 장막지기” 바울을 만나고 난 이래 줄곧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도시 한복판에서 약 400보 떨어져 있는 레카이온 도로를 따라 자갈길을 걸어 가면서, 스데바나는 그날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았으며 대화가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 는지 생각했다. 그날 아침 스데바나는 만남을 갖기 전에 장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와서 도시 중앙으로 걸어갔다. 왼편에 있는 막시모스의 주점을 지나 남서쪽 끝에서 포럼으로 들어갔다. 그는 에라스도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시 재무관 에라스도는 아폴로 신전과 아 프로디테 신전 앞에 있는 구역을 재빨리 지나서, 사방에서 물건을 사러 나온 사람, 제사
1) Horace, Ep. 17.36.
장, 관광객, 상인들 무리가 다니고 있는 것을 헤치고, 남쪽 주랑에 있는 사무소로 가고 있 었다. 포럼은 거의 200보 길이에 서쪽 끝으로 안 길이가 약 125보에 달하는 곳으로, 누가 보아도 거대한, 바쁘고 부산한 넓은 공간이었다. 계속 가다가, 스데바나는 포럼의 중앙에 있는 한 상점 작업대에서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보석 상인에게 가서 딸 테오도라에게 줄 선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10월 1일 딸의 열두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포럼 동쪽 끝에 있는 페이레네 샘 근처에서 아가이고와 글로에가 이야기를 나누 는 장면을 보았다. 스데바나는 그들에게 가서 루시우스를 만나는 일에 대해 말하고 기도 를 부탁했다. 세 사람은 각각 바울의 충실한 옹호자로 최근 디도가 방문했을 때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었다. 바울이 보내 온 감동적인 그 서신을 받은 후, 그들은 대부분 의 가정 교회들을 사도 편으로 확고하게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교회 내에 있는 긴장이 해결되었다는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문제는 매우 복잡해서, 그 도시와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가정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해결하기 어려웠다. 교회는 아직 매 우 어려서, 세워진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계층, 교육, 문화적 배경, 성격, 영적 성숙 의 수준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역동적이지만 깨지기 쉬웠다. 그 도시에 있는 가정 교회 대부분은 테네아, 겐그레아, 크롬나의 가정 교회와 함께 사도 바울과 그의 선 교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굳게 다짐했다. 유감스럽게도, 크롬미온에 있는 가정 교회는 바 울을 냉랭하게 대했다(계속해서 성적 부도덕 행위를 하는 몇몇 사람이 그 가정 교회에 속해 있었다). 루시우스의 집사와, 물론 알렉산드로스 학파 출신의 학생들이 그 소그룹을 이끌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 학생들 중에는 루시우스의 장남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울의 감 동적인 서신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으며, 디도는 2주 후에 바울 사도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떠났다. 그래서 이날 오전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 스데바나는 북쪽 시장과 극장을 지나 아스클 레피오스를 향해 계속 걸어갔으며, 상점과 집들이 있는 구역을 거쳐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루시우스는 은밀한 방을 하나 예약해 놓고 음식을 주문해 놓았다. 그는 “지혜 로운 전문 연사”인 다윗과 사무엘을 대동하고 왔다. 루시우스는 지난 봄 웅변대회에서 악명을 얻기까지 한 그들에게 물어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들의 여러 제자 는 2년 전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동쪽에 있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회 지도 자들의 추천서를 갖고 왔다. 아볼로처럼, 다윗과 사무엘은 분명히 고급 수준의 수사학 훈 련을 받았다. 그들은 그 당시 문화의 일반적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훌륭한 연사들이 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달리, 그들의 “연설” 내용은 복음 메시지와 능력이 전 혀 없어서 언제나 “성령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말씀이 때때로 사 용되었지만, 그 가르침에는 실체가 없었다. 즉 분명한 교리도 없고, 삶을 위한 윤리적 기 초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선교와 의로운 삶을 촉진 하거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주로 영광, 성공, 높은 지위 에 이르는 수단으로 승천하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점차 그들의 냉혹한 영향력 아래 들어갔으며, 이제 이런 인상적인 대
중 연사들은 루시우스와 제휴하고 있었다. 그 만남은 잘 되지 않았다. 루시우스와 다른 두 사람이 제시한 바울에 대한 반론은 아 주 합리적으로 들렸다. 스데바나는 전에 그들이 말하는 것을 대부분 들은 적이 있다. 그 들은 교회가 지혜롭지 못하게, 불합리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울의 반대자들 은 사도 바울의 교만, 사회적 관습에 대한 부주의, 그의 가르침, 특히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에 의해 기분이 상하고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바울에 게 교회에 현재의 “위기”를 가져온 약하고 비효과적인 지도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다 윗과 사무엘은 스데바나의 유대적 배경에 호소했다. 그들은 그 유산을 공유하고 있었으 며 또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솔직히, 스데바나는 대립적인 토론에 마음이 불편하고, 위협 을 느꼈으며, 그래서 만남이 끝났을 때 기뻤다. 교회의 대부분은 사도 바울에게 확고하게 헌신하고 있었지만, 바울에 반대하는 이 작은 무리는 걱정스러웠다. 강력하고 은사가 있 는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쪽에 있는 도시 중심 지역으로 되돌아가면서, 스데바나는 그의 창고에 들러 긴 급한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는 어제까지 항구에 보내야 했던 이달리야 램프가 제대로 수 송되었는지 확인해야 했으며, 또 크레스투스가 의사 협회에서 주문한 유리그릇 건을 처 리하기를 원했다. 스데바나는 공중변소에 잠시 들렀으며 목욕탕에 가서 하루의 긴장을 풀고 싶었다. 바울의 반대자들 문제를 해결하는 일도 그렇게 쉽다면 좋을 텐데! 그는 바 울 사도가 고린도에 되돌아오거나, 아니면 적어도 또 다른 서신을 보내 주기를 바랐다. 어떤 것을 “역사적 허구”로 분류할 때 위험한 점은 두 번째 단어와 첫 번째 단어를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허구적 요소들을 역사적인 것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니 약간 정리를 해 보도록 하자. 앞의 이야기에서, 고린도와 고린 도가 속한 지역에 대한 묘사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으며, 로 마 고린도의 문화적 분위기 역시 비문의 증거 및 다른 일차 문헌 자료를 기초 로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연구했다. 바울, 디모데, 디도가 오고 간 것에 대한 언급 및 바울이 고린도인들과 지속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은 것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에 나온 진술에 기초하고 있다. 뒤 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울 사역의 정확한 연대는 크게 논란이 되어 왔다. 바울 의 이동 및 다양한 장소에 머물렀던 기간들의 퍼즐 조각을 맞춰 보려는 시도 는 때로는 매우 어렵긴 하지만 대단히 즐거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리의 이야기에 묘사된 일반적 이동 및 아가이고와 글로에를 포함하여 바울의 조력자로 연관된 사람들 대부분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 서신들뿐 아 니라 사도행전을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 에라스도는 통상 신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또한 고린도 시의 관원이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최근 들어 에라스도가 그저 바울의 고위직 친구였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가 정말 신자였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Friesen 2010 )
우리는 스데바나 집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최초로 바울의 선교 활동에 반응 을 보인 사람들이었으며( 고전 1:16; 16:15 ) 스데바나 자신은 후에 에베소에서 한동
안 사도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안다( 고전 16:17 ). 하지만 우리는 스데바나에게 “집”이 있었으며(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었음을 가리킬 것이다 ) 그가 고린도에서 바 울이 신뢰하던 조력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루시우스는 완전히 허구적 인물이다. 대중 연설가인 다윗과 사무엘도 마찬가 지다. 우리는 고린도에 바울의 대적들이 있었다는 것과 그들의 유형과 관심 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 하지만 바울은 일부러 그 대적들의 이름을 지칭함 으로써 그들을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게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고린도의 물리적 문화적 배경, 바울과 고린도인들의 상호 관계의 일 반적 전개, 고린도에서 바울의 핵심 조력자 중 일부의 신원은 모두 역사적 사 실에 근거한다. 이 이야기의 다른 요소들, 특히 스데바나와 바울의 대적들의 상황은 신약에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고 린도 교회의 역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상상 속에서 고린도의 여 러 길을 걸어 보았으니, 이제 이 풍성하고 어려운 서신의 전형적인 서론적 문 제들을 논의해 보기로 하자. 먼저 이 서신서 저자인 바울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AD 1세기 중반의 바울 헬라어로 ‘파울로스’( Παῦλος ), 곧 “바울”이라는 용어는 보통 고린도후서라고 알려진 서신인 ‘프로스 코린디우스 베타’( ΠΡΟΣ ΚΟΡΙΝΘΙΟΥΣ Βʹ ) 에 나오는 첫 단 어다. 이 복잡한 책의 배경과 내용은 사실상 거의 모든 측면이 논란의 소용돌 이 속에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서신서의 저자는 의심할 것 없이 확실 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이천 년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대단히 여러 가지 호 칭으로 불렀는데,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Crossan and Reed 2005: ix ), “그중 대부분 은 불쾌한” 호칭이었다. 에른스트 레난( Ernst Renan 1869: 126 ) 은 사도 바울을 “못 생기고 키 작은 유대인”이라는 유명한 호칭으로 불렀다. 예수와 대비해서 바 울은 종종 진짜 “새 종교 기독교의 설립자”, 예수 운동의 변절자라고 묘사되 었다( Klausner and Stinespring 1946: 303-304 ). 다른 사람들은 바울을 “급진적 유대 인”( Boyarin 1994: 제목 ), “다섯 번째 복음서 기자”( A. Hunter 1980: 1 ), “열세 번째 증 인”( Burchard 1970: 73 ), 초기 이방 기독교의 눈에 띄는 상징( J. Becker 1989: 1 ), “최 초의 기독교 신학자”( Hengel and Schwemer 1997: 1 ), 게다가 “모든 기독교 신학자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M. Hooker 2003: 150 ), 심지어 신학 자들이 수 세기 동안 그 부근을 거니는 “인간 산”, 누구도 오르지 못한
산( Horrell 2006: 1 ) 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깊은 애정과 심
지어 사랑의 대상으로 환영했다( Bruce 1977: 15 ). 실제로 초대 교회 교부였던 요 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나는 모든 성자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복된 바울 을 제일 사랑한다. 그는 택함 받은 그릇, 하늘의 나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다”( Hom. in 2 Cor. 11:1 1 [15.301] ) 라고 고백했다.2)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이다. 그것 은 위기의 열기와 상처 가운데 기록된 책, 기독교 사역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깊이 탐구하는 책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썼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지 20년이 약간 넘었을 것이다. 모나 후커( Morna Hooker 2003: 149 ) 는 이렇 게 상기시킨다. “바울을 이해하려면 가능한 한 바울을 그 자신의 시대와 상황 의 관점에서 보고, 왜 바울이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그처럼 열정적으로 느꼈 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사도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도 바울의 더 광범위한 상황으로부터 시 작해서 더 구체적으로 그를 규정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특히 이런 특징이 고린도후서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주목하면서 말이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 첫째, 바울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사람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 사 도 바울은 자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 세계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대 단히 많은 가치관, 관점, 공용어를 물려받은 사회, 그리고 일상적 존재의 견지 에서 볼 때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 사회였다. 바울의 헬라 어 소통 능력 및 그리스의 교육적 가치관은 그 사도가 지중해 전역의 교회와 잘, 심지어 설득력 있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사도 바울은 주로 유대 성경의 헬라어 역본을 사용했다. 하지만 교회들을 설 립하고 그 교회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도록 촉진해 준 것은 로마의 도로 및 비교적 안전한 바다 여행( 항해할 수 있는 계절 동안 ) 뿐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의 통 치 아래 확립된 “로마의 평화”인 ‘팍스 로마나’( Pax Romana ) 였다. 사도행전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으며( 22:27-28 ), 그 시민권이 바울을 특정 형태의 처벌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고 그에게 특 별한 권리를 제공해 주었다고 말했다. 바울은 복음의 진전을 위해 종종 그 권 리를 붙잡았다( 16:37-38; 22:26-29; 25:10-12; 26:32 ). 게다가 바울이 가지고 있던 로
2) Mitchell 2000: 1에 인용;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와 바울에 대하여, 특히 1-33을 보라.
마 시민권은 에라스도 같은 고린도의 유력한 인물과 함께 바울에게 어느 정 도 신뢰감을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롬 16:23 ). 고린도 시는 이전 세기에 율리우 스 카이사르가 로마 식민지로 설립했으며, 고린도인들은 여전히 그들이 로마 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 시 민권을 갖고 있음으로써 또한 고린도에서 총독 갈리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행 18:12-17 ). 갈리오는 기독교 운동을 유대교와 더불어 ‘렐리기오 리키타’( religio licita: 로마의 승인을 받은 종교-옮긴 이 ) 로 법적으로 인정했던 듯하다. 그로 인해 교인들은 통상 로마 제국이 요구 하는 종교적 기대를 면제받았을 것이다( Winter 1999 ). 사도행전은 또한 사도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 시민이었다고 말한다( 21:39; 22:3 ). 다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교육 중심지 중 하나였다. 바울이 다소에 서 자란 것, 그의 학교가 시드누스 강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바울은 아마 다 방면에 걸쳐 탄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심지어 수사학 훈련도 받았을 것 이다( Witherington 1995: 44-48을 보라 ). 이런 추정은 고린도후서 10-13장과 같은 본 문의 부분들을 보면 확인되는 듯하다.3) 스트라보는 다소 사람들이 심지어 아 테네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 이상으로 철학과 교육에 전념했을 뿐 아니라,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고, 바울이 그랬듯이( 행 22:3 ) 종종 해외에서 공부를 마 쳤다고 쓴다( Strabo, Geogr 14.5.12-13 ). 게다가 다소는 그곳의 비옥한 평야에서 자란 아마로 짠 아마포와 길리기 움( cilicium ) 이라는 그 지역 직물로 유명했다. 그것은 염소 털로 짠 것으로 춥고 축축한 기온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천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Bruce 1977: 35 ).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고향에서 천막 만드는 기술( 행 18:3 ) 을 배웠을 것 이다. 이 기술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을 여행하면서 스 스로의 재정적 필요를 채울 수 있었다. 천막 만드는 일은 조용하고, 휴대가 가 능하고, 어디서나 필요한 직업이었다( Murphy-O’Connor 1983: 192 ). 바울은 육로나 배로 여행하는 사람들, 상품을 덮을 덮개가 필요한 소상인들, 지중해 주변 여 러 도시의 가게나 공공건물용 차일을 사는 가게 주인이나 도시 지도자들에게 천막을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Pliny the Elder, Nat 19.23-24 ). 천막 만드는 일은 녹초가 되고 진이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살전 2:9; 살후 3:8 ). 하지만 그 일을 하 면서 사도 바울은 또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3) 고후 11:6에 대한 대부분의 영역본에서
연설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부 인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디오테스’(ἰδιώτης, “비전문 가”)라는 단어는 수사학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그 기 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을 말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Winter 2002: 224-225; 예를 들어, Philo, Agr. 143; Isocrates, Antid. 201, 204).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심지어 곳곳에 있던 그의 작업장을 가정 교회로 사용 할 수 있었을 것이다( Murphy-O’Conner 1983: 195-196 ) 4) 동시에, 일부 사람들은 바 울의 육체노동을 교양인이나 지역 사회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경멸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키케로( Cicero, Off. 1.150-151 ) 는 사회에 기여하는 지 적인 일과 비천한 직업을 대비시키면서, 육체노동자들은 그저 노예처럼 산다 고 시사했다. 이런 편견은 고린도후서 11장 7-11절 같은 본문에 반영되어 있 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말로 하는 사역에 대해 보수를 받지 않기로 한 자 신의 결심을 변호한다. 메시아적 유대인 둘째,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며 유대교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이 해했다.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유대교에 등을 돌렸으며, 어두웠던 이전의 삶 과 그리스도인으로 방향 조정을 한 후의 진정한 삶을 대조시켰다고 주장하지 만( 예, J. Becker 1989: 34 ), 최근의 유대 학자들 및 다른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유 대인이라는 것이 그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는 점을 점차 더 인식했다( Frey 2008: 285-288 ). 바울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널리 여행을 다녔던 그리스-로마 세계의 시민이었으며, 분명 초기 예수 운동에서 핵심적인 이방 선교사였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정체성과 선교의 동력을 이룬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유산 및 세상에 대한 이해였다. 한 학자가 말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정신적 지주 에 대해 말할 때,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받은 유산 및 유대교에 대해 배운 바 를 자랑한다( 갈 1:14; 빌 3:5f. ). 심지어 회심을 한 후에도, 바울은 계속 자신을 유 대인이라고 생각한다( 고후 11:21-26; 롬 11:1, 13f ) ” ( Koenig 1979: 38 ). 실로 바울은 예수 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빌 2:9-11 ), 죄 가운데 죽 은 삶으로부터 성령 안에 있는 새 언약의 삶으로( 고후 3:4-6; 롬 8:1-4 ) 회심했다. 하지만 그의 회심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회심한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유형의 유대교로부터 다른 유형의 유대교로 회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Frey 2008: 321 ). 바울의 성경, 해석 방법, 신학, 선교 목표는 모두 바울의 유대교 신 앙이라는 기반에 기원과 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조상들의 유전에 “열심”이 있어, 자신이 자란 배경인 유대교
4) 고린도에는 바울이 일했을 만한 시장 지역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어, 북부 시장은 바울이 그 도시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완성되었다. 중앙 광장 주위에는 마흔 네 개의 가게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함께 살고 일했던 듯하다(행 18:1-3). 보통 고용된 사람은 작업실 에서 잠을 잤고, 주인은 위의 다락에서 가족들과 함께 잠을 잤다. 북부 시장의 가게들에는 가게 입구 위 한가운데에 유리가 없는 창문이 한 개 있었다(너비 약 2.25m). 가게들은 크기가 같았으며, 높이 3.9m, 안 길이 약 3.6m였다. 가게의 너비는 약 2.7-3.9m였을 것이다. 종종 옆 가게와 소통하는 창문 이나 문이 있었다(Murphy-O’Conenr 1983: 194-195).
형태를 진전시켰다고 묘사한다( 갈 1:13-14 ).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 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 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빌 3:56 ) 였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후손”( 11:22 ) 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아스포라에서 자라났으며 성인으로 살아 가는 동안 계속 다소와 연관을 맺을 것이다( 행 9:30; 11:25 ). 하지만 바울은 아마 십대 초반부터 예루살렘에서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훈련을 받았다( 행 22:3 ) 바울은 지중해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웠지만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모교회와 교류했고 그 교회를 위해 모금을 했다( 예, 행 21:15-20; 고전 16:1-2; 고후 8-9장 ). 유대 인에게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1세기 중반에 글라우디오의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난 결과, 거의 확실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들 때문에 고린도의 유대인 숫자가 불어났다는 것이다( J. Wiseman, ANRW 504 ).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왔을 때,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면서 “안식일마다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 행 18:4-5 ) 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선교 방법은 그의 유대적 유산과 뿌 리깊이 연관되어 있고 광범위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주며, 그 연관은 단 지 실용적인 것이기보다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이다. 몇몇 회당원들이 믿었는 데 그중에는 지도자인 그리스보( 행 18:8; 고전 1:14 ) 와 소스데네( 행 18:17; 고전 1:1 ) 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바울과 토론을 한 많은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했다. 바울의 고린도 첫 방문이 끝나갈 무렵, 그 성의 유 대인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공격해서 그를 갈리오 앞에 데려갔는데, 그 전 술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행 18:12-17 ). 더 나중에 바울의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이 끝날 때,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해서 바울 이 여행 계획을 바꾸게 했다( 20:3 ). 하지만 거의 확실한 것은, 심지어 동료 유 대인들조차 바울을 유대교 아닌 다른 종교를 주창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그보다 갈리오의 말이 맞았다. 바울과 고린도 유대 회당과의 갈등은 자중지란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유대 성경 및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에 근거하고 있었다. 바울의 복음은 유 대인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먼저 유대인들 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이스라엘 역사 에 중요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일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지금까 지 이어진 이스라엘 전체 역사의 절정의 성취로 보는 구원-역사적 관 점”( Ciampa and Rosner 2010: 10 ) 을 반영한다고 이해했다. 궁극적으로 그 구원-역 사적 관점은 이스라엘을 넘어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A. 서신서 서두 ( 1:1-2 )
B. 서언 ( 1:3-11 )
A. 서신서 서두 ( 1:1-2 )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2절에 나오는 서두를 1세기 서신 규정에서 보통 사용되는 유형에 따라 쓴다. 하지만 바울의 사역 및 그의 신학적 확신으로 인 해 그 형식적 유형은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O’Brien, DPL 553; Stirewalt 2003: 25 ). 1장 1-2절의 편지 서두는 고린도후서가 공식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 집단에 보낸 공식 편지임을 표시해 준다( Stirewalt 2003: 3, 9, 33-34 ). 당시 공식 편지를 쓰는 사람은 보통 자신의 신 분을 밝힐 것이다. 자신의 계급이나 지위, 수신자, 그리고 아마도 함께 보내 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서두는 또한 ‘카이레인’( χαίρειν, “문안” ) 을 표현했다.1)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역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이며, 디모데와 더불어 이 편지를 함께 보내는 사람이라고 밝히는데, 그는 아가야의 신자들에게 글 을 쓰며, “은혜와 평강”으로 그들에게 말하고,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 수로부터 온다.2) |주해 및 설명|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God’s will, and our brother Timothy, to God’s church in Corinth, along with all God’s holy people throughout Achaia. 2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1] 바울은 통상 편지를 쓸 때 하듯이,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인사말을 시작한다. 그리고 10장 1절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바울은 여기서 단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물론 ‘파울로스’( Παῦλος ) 는 그가 태어 날 때 받은 히브리어 이름 ‘샤울’( lWav', “사울” ) 의 헬라어 번역이다( 행 13:9 ) . 3) 바 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덧
1) 때로 보내는 사람과 수신자의 순서가 역순으로 나왔다. “B에게 A가” 하는 식이다. 2) 공공 우편 제도는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편지를 조력자들에게 들려 보냈다. 그 조력자들은 모 여 있는 수신자 집단에게 그 편지를 읽어 주고 사도 대신 질문에 대답해 주곤 했다(Klauck and Bailey 2006: 60-65; Richards 2004: 11-12장).
3) 해리스(Harris 2005: 128)가 말하듯이, 헬라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보통 그들의 원래 히브리어 혹 은 아람어 이름과 비슷한 소리가 나는 이름을 취했다.
붙인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일곱 서신의 인사말에서 사용하는 명칭이다( 롬 1:1; 고전 1:1; 갈 1:1; 엡 1:1; 골 1:1; 딤전 1:1; 딤후 1:1 ) 4) 바울은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 ) 라는 말을 적어도 세 가지로 사용했던 듯 하다. 헬라어 구약에서 같은 어원의 동사 형태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에 따라, 그 말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사신 혹은 대리인으로 보냄 받는 사람을 언급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고린도후서 8장 23절은 디도와 함께한 형제들 에 대해 말하는데, 바울은 그들을 “여러 교회의 사자들”( ἀπόστολοι ἐκκλησιῶν, ‘아 포스톨로이 에클레시온’ ) 이라고 칭한다.5) 둘째, 그 말은 교회에서 중대한 사역을 수 행한 열두 제자나 바울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 반전문적 의미로 사용 되는 듯하다.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바나바( 고전 9:5-6 ), 안드로니고와 유니 아( 롬 16:7 ), 주의 형제 야고보( 고전 15:7; 갈 1:19 ), 그리고 아마 아볼로( 고전 4:6-9 ) 등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기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처럼, ‘아포 스톨로스’는 열두 제자 및 바울이라는 뚜렷한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그들은 초대 교회에서 독특하고 권위 있는 역할을 위해 주님께 직접 위임을 받은 사 람들이다( Harris 2005: 128; 고전 9:1; 15:3-9; 갈 1:17 ). 6) 이런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의 “사도”로서 고린도후서를 쓰며, 사도로서 바울의 역할은 이 편지에 표현된 그의 수사학적 전략에서 하나의 매우 큰 기초석 역할을 한다. 고린도인들은 바울의 사도적 지도력에 잘 반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7)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크리스투 이에수’ ) 사도라는 것은 관계 혹은 아마 원천의 소유격(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 으로 볼 수 있다. 즉 바울은 메시 아 예수로부터 그분의 공식적 대리인으로 보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 울은 또한 그의 인사말에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디아 델
4) 바울은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살전 1:1; 살 후 1:1; 빌 1:1; 몬 1절).
5) 또한 빌 2:25를 보라. 거기서 에바브로디도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 “사자”)라고 불린다.
6) 바울의 상황은 열두 제자와 비교할 때도 독특했다. 바울은 열두 제자보다 더 뒤에 위임을 받았으 며(고전 15:8) 이방인들에게 사역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함께 받았기 때문이다(갈 1:16; 2:7; 롬 1:1-6; 11:13; 고후 10:13-16; 엡 3:1-2). 다메섹 도상에서 한 경험은 바울에게 깊이 각인되어서(Kim 1985: 2002), 사도적 사역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형성했다. 그 이해는 바울에게 안전함, 방향, 교회를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참조점을 제공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순종하게 하도록 복음 을 위해 독특하게 구별되었다(롬 1:1-6; 11:13).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그들 중 가장 작은 자라고 여기긴 했지만(고전 15:9), 자신이 독특한 방식으로 사도적 위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이 분명 열두 제자와 대등한 권위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7) 고린도후서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거짓 사도들과 대조해서 분명한 진정성이라는 특 징을 지니고 있으며(고후 11:3), 그 진정성은 부분적으로는 바울의 사역에 수반된 기사와 능력에 의 해 표현된다고 본다(고후 12:12). 게다가 바울이 사도적 사역을 맡게 된 것은 인간적 권위의 투표에 의한 것도, 경력을 쌓으려는 계획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에 사로잡히고 부득이하게 그 일을 맡게 되었다”(Garland 2003: 25).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의” 공식 대표자로 임명되고 구별된 것이다.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A. 서신서 서두 ( 1:1-2 )
레마토스 데우’ ) 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것은 그의 사도직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해 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고전 1:1; 엡 1:1; 골 1:1; 딤후 1:1 ). 여기서처럼 ‘디아’( διὰ ) 라는 말 은 소유격과 함께 사용될 때, “어떤 것이 성취되는 환경”( BDAG 224 ) 을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인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된 것이다.8) 이 문구는 ‘크리스투 이에수’라는 말과 나 란히 사용되므로, 바울은 실제로는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가 둘 다 관여되어 있는 합동 위임을 가리킨다.9) 물론 고린도후서 다른 곳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에 의해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3:3, 6, 8; 6:6; 13:13 ), 그리스 도 예수,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역사를 기원하는 아름다운 삼중의 축도로 편 지를 끝낸다( 13:13 ). 그래서 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사도로서 바울의 사역 의 기초와 배경을 형성한다. 게다가 바울은 “형제 디모데”( Τιμόθεος ὁ ἀδελφός, ‘티모데우스 호 아델포스’ ) 와 함께 이 편지를 써서 보낸다.10) 디모데의 이름이 여기서 거론되는 것에 관해 정교 한 추측이 제시되었지만11) 다른 다섯 개의 바울 서신( 데살로니가전후서, 골로새서, 빌 레몬서, 빌립보서 ) 에도 디모데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특별히 고린 도인들 앞에서 디모데의 지위를 강화시키려는 것이기보다는 일반적인 관행 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젊은 디모데가 이 교회에서 사역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전 16:10-11 ). 고린도인들에게 디모데의 이미지가
8) 하지만 그 문구는 또한 사역이 수행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묘사하기 위해(롬 15:32), 혹은 그리스도 의 대의에 전심으로 헌신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묘사하기 위해(고후 8:5) 사용될 수 도 있다.
9) 바울은 2:17에서 위임에서 삼위일체의 첫 번째 위격과 두 번째 위격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을 더 보여 주면서, 바울은 자신이 ‘에크 데우 카테난티 데우 엔 크리스토’(ἐκ θεοῦ κατέναντι θεοῦ ἐν Χριστῷ,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본문에서 바울의 사역의 원천이며 또한 바울이 참으로 응답할 대상이고, “그리스도”는 바울이 그분 과의 심오한 관계 안에 사는 분이다(뒤의 2:14-17을 보라).
10) 1:1에서 ‘아델포스’(ἀδελφὸς) 앞에 나오는 관사와 마찬가지로, 정관사는 때로 소유 대명사 역할을 할 수 있다(D. Wallace 1996: 215-216). 바울은 또한 골 1:1; 살전 3:2; 몬 1절에서도 디모데를 “형 제 디모데”라고 칭한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서, 바울의 사역을 함께하는 동료로 약 100명의 이 름이 거론된다(E. E. Ellis, DPL 183). 하지만 디모데보다 더 바울과 가까운 사람은 없다. 바울은 디 모데를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 또한 빌 2:22; 딤전 1:18; 딤후 1:2)이라고 부른다. 루스드라 토박이인(행 16:1) 디모데는 유니게라는 유대인 어머니(분명 독실한 신자; 딤후 1:5)와 헬라인 아버지(행 16:1)에게서 났으며, 바울의 두 번째 선교 여행 무렵에는 그는 이미 그리 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행 16:2). 게다가 디모데의 사역은 예언자로 선언되고 교회 지도자들이 안수하는 것에 의해 보증을 받았다(딤전 1:18; 4:14; 딤후 1:6). 바울의 선교, 그리고 특 히 고린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서 디모데가 한 역할에 대해서는 Ollrog 1979: 185-187을 보라.
11) 위대한 초기 설교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Hom. 2 Cor.1.2)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은 디모데 를 자신과 연관시킴으로서, 디모데를 더 존중하고 자신이 매우 겸손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바울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Bray 1999: 194). 바울이 공동 저자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Richards 2004: 33-36을 보라.
회복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퍼니시( Furnish 1984: 104-105 ) 는 디모데를 함께 편지를 보내는 사람으로 포함시킨 것은 실제로 그 반대를 보 여 준다고 주장한다. 디모데가 여전히 그 교회에서 설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키너( Keener 2005: 20-21 ) 는 고대의 편지에서 여러 저자를 언급하는 것은 그저 특별한 문안 인사의 수단일 수 있었으며( 또한 Thrall 1994: 82를 보라 ) 이런 맥 락에서 바울이 젊은 후배를 언급한 것은 회중에게 그들을 대상으로 한 디모 데의 사역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12) ‘아드스크립티오’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보낸다. 바울은 그의 글에서 “하나님의 교회”( τῇ ἐκκλησίᾳ τοῦ θεοῦ, ‘테 에클레시아 투 데우’ ) 라는 말을 아홉 번 사용한다( 고전 1:2; 10:32; 11:16, 22; 15:9; 고후 1:1; 갈 1:13; 살전 2:14; 살후 1:4 ). ‘에클레시아’( ἐκκλησίᾳ ) 라는 용어 는 헬라어 구약에서 백 번 가량 사용되며, ‘카할’( lh'q' ) 13)을 번역하는 말인데, 그것은 종종 여호와의 총회를 언급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총회”라는 문구는 느헤미야 13장 1절에만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그 구절에 대한 70인역은 바 울의 구문에서 보통 볼 수 있는 관사( 바울의 글에서 예외는 딤전 3:5, 15에 나온다 ) 를 사 용하지 않고 ‘에클레시아 데우’( ἐκκλησίᾳ θεοῦ ) 라고 번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바울은 교회를 종말론적 이스라엘, 메시아 예수를 통해 옛 약속들이 성취 되는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교회는 여호와의 새 언약 총회이며( P. T. O’Brien, DPL 126; 예를 들어 신 23:1-3; 대상 28:8; 미 2:5 ), 여기서는 고린도 에서 표현되는 하나님의 교회다. 사도 바울은 그의 수신자들에 관해 또한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σὺν τοῖς ἁγίοις πᾶσιν τοῖς οὖσιν ἐν ὅλῃ τῇ Ἀχαΐᾳ, ‘쉰 토이스 하기오이스 파신 토이스 우신 엔 홀레 테 아카이아’ ) 이라고 덧붙인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번역된 말은 종종 “성도”라고 번역되어 왔다. 하지만 그 용어는 “성도”라는 말이 때 로 로마 가톨릭 교회학에서 사용된 것처럼 혹은 대중적 영어 어법에서 다른 식으로 사용되어 온 것처럼 초영적 집단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이 헬라어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사람 들”( Furnish 1984: 100 ) 을 언급한다. 그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해서 사용된 12) 윈디쉬와 스트레커(Windisch and Strecker, 1970: 33)는 유대적 맥락에서
보내는
즉 증거는 적어도 두 명의 증인의 확증 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이 편지의 기원과 메시지의 사실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름을 말하는 일반적 관행은 신 19:15의 율법적
13) 그 단어는 예를 들어 협의, 전쟁, 혹은 종교적 축제를 위해 함께 모인 모임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종종 조직된 사람들 집단에 대해 사용되는데, 거기에는 이스라엘 나라, 예루살렘 공동체, 천사들 집 단, 모인 무리 등이 포함된다. 이 히브리어 동사를 번역하기 위해 사용된 또 다른 일반적 용어는 ‘쉬 나고게’(συναγωγή, “모임/회당”)다.
것으로, ‘카도스’( vwOdq' ) 를 번역한 말인 ‘하기오스’( ἅγιος ) 라는 형용사적 명사의 70인역 용법에서 유래되었는데, 구별되는 것 혹은 거룩한 것과 관련되어 있 었다. 그리스도인 신자들에게 그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 성을 선택하시는 것,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 자신을 위한 독특한 공동체로 구 별하시는 것, 그들을 죄와 분리시키는 것, 그래서 그들의 거룩함과 연관되어 있다( Harris 2005: 134 ). ‘엔 홀레 테 아카이아’( ἐν ὅλῃ τῇ Ἀχαΐᾳ , “온 아가야” ) 라는 문구는 위더링 턴( Witherington 1995: 354 ) 이 생각하기에는 고린도후서가 회람용 서신으로 기록 되었음을 시사하며, 편지 마지막에 개인적 인사가 없다는 것은 이 점을 뒷받 침해 주는 듯하다. 하지만 주의 수도였던 고린도에서 그 도시 자체의 신자들 및 바로 인근 지역 전체 성읍에서 온 신자들이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었을 수 도 있다. 실제로 와이즈만( J. Wiseman, ANRW 446 ) 은 “고린도의 모든 성읍 시민들 은 분명 고대 시대 내내 자신들을 고린도 시민으로 여겼다”14)고 말한다. 바울 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 겐그레아에 있던 것과 같은 다른 회중을 유념하면서, 그에 따라 편지를 썼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파신’( πᾶσιν ) 과 ‘홀 레’( ὅλῃ ) 를 사용한 것은 분명 그가 고린도 밖에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 추종자 들을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뵈뵈와 고린도의 동쪽 항구 겐그 레아에 있던 교회( 롬 16:1 ), 그리고 아덴의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 리를 포함한 몇몇( 행 17:34 ) 만 명확하게 안다. 이 장소들 외에도 고대 고린도 중 심에서 북쪽으로 단 3.2km 정도 떨어져 있던 지협 서쪽 항구 레카이움에 교 회들이 있었을 것이다.15) 하지만 인근에도 시키온, 이스트미아, 크롬뮈온, 스 코이누스, 클레오나이, 테네아를 포함한 다른 성읍들 역시 있었다( Murphy-O’ Connor 1983: 7 ). 바울이 이런 광범위한 수신자를 대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고린도에서 교 회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들이 고린도 시 경계선 너머까지 퍼져 나가 바울의 대적들의 영향력이 더 지역적인 결과를 가져왔음을 시사할 것이다. 실제로 “왜 전 지역을 수신자로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요하네스 크리 소스토무스( Hom. 2 Cor. 1.2 ) 는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 적 문제에 관여되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 같은 치료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Bray 1999: 194 ) 라고 말한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추문 혹은 갈등은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널리 퍼져 나간다. 고린도에서 사도의 사역에 14) 와이즈만(J. Wiseman)은 “테네아(Tenea)만이 어느 때라도 고린도로부터 (영적으로 혹은 정치적 으로) 독립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는 단서를 단다. 15) 스트라보(Strabo, Geogr. 8.6.22)는 거기 많은 사람들이 살지는 않았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 시대 훨씬 전에 대한 것이다.
대한 도전의 “지리적 분포”는 바울의 교회 통합 임무를 훨씬 더 어렵게 만들
었을 것이다. [1:2] 바울은 “은혜와 평강”으로 이 신자들 무리에게 문안한다. 2절 전체는 한 줄 당 네 단어로 균형 잡힌 구조를 형성한다.16)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은혜와 평강이”
ἀπὸ θεοῦ πατρὸς ἡμῶν ‘아포 데우 파트로스 헤몬’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은 고린도인들에게 향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 도로부터 오는 것으로 표현된다.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에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라는 대단히 틀에 박힌 어법을 사용한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몬 3절 ). 이 “바람”은 베드로전후서 인사말 및 요한계시록 1장 4절에서 요한이 교회에게 보내는 인사말에도 나온다. 이는 그 문구가 기독교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헬레니즘 편지들은 보통 ‘카이레인’( χαίρειν, “문안”; 참고, 행 15:23; 23:26; 약 1:1 ) 으로 시작한다.17) 기독교 편지들에서는 표준적 용어 ‘카이레인’이 ‘카리스’( χάρις ) 라 는 말로 바뀌며 흔히 사용되는 유대식 인사인 “평강”( ‘샬롬’ ) 과 결합되는데, 이 는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 및 유대의 사 회문화적 배경과 유산 둘 다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반영한다. 여기 고린 도후서에서 사용된 것처럼, 이 은혜와 평강의 표현은 복음 안에서 약속된 안 녕이라는 하나님의 은사를 반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의해 은혜롭게 전달된 은혜와 평강이다. 이 신령한 복들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만 올 수 있다. 문법적으로 그리고 문맥상,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 스도”가 동격이라는 것과 한 번 사용된 전치사 ‘아포’( ἀπό ) 가 둘 다에게 해당 되어서 분명 성부와 성자가 함께 은혜와 평강의 원천임을 나타내는 듯하다( 문 법에 대해서는 Harris 2005: 135-136을 보라 ).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것 16) 해리스(Harris 2005: 135-137)는 “은혜”라는 명사와 “평강”이라는 명사에 관사가 없는데 그것은 “그 명사들이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추상 명사는 일반적으로 어떤 특질의 독특하고 구체적인 표현들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그 특질을 표현할 때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라 고 말한다.
17) 왜 편지 형식이 이런 식으로 부정사를 사용했을 수도 있는지에 대한 이유로는 Klauck and Bailey 2006: 18-19를 보라.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A. 서신서 서두 ( 1:1-2 )
은 예수가 주기도문( 마 6:9-13 ) 을 만드실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어쨌 든 그분의 자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는 풍성한 초기 기독교 유산과 관련되어 있다( 예, 고전 8:6; 15:24; 갈 1:4; 4:6; 엡 1:3, 17; 4:6; 빌 2:11; 골 3:17; 약 1:27; 요일 2:14 ). 바울은 이 서신에서 네 번 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언급한다( 고후 1:3[2회]; 6:18; 11:31 ).
‘퀴리오스’( κύριος ) 는 헬라어 구약에서 여호와에 대해 사용되는 호칭으로, 바울이 예수에 대해 즐겨 사용하는 호칭이며 가장 초기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또한 예수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도 사용된다.18) 바넷( Barnett 1997: 62-63 ) 이 지적하듯이, 이렇게 예수가 “은혜와 평강”의 원천이라고 주장하 는 것은 1세기 유대 상황에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19) 유대 성경의 언약 하 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렇게 철저히 연관시키는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면서 얼마나 극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겪었는지 증 언한다( Barnett 1997: 62 ).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의 글 다른 곳에서처럼,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 로부터 올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고전 16:23; 고후 13:13; 갈 6:18; 빌 4:23; 살전 5:28 ).
묵상 편지 서두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주된 지향성과 충성이 내세를 향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지 맥도날드 ( George MacDonald 1867: 61 ) 는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우리는 신적 우주에 사는 자들이다. 거기서는 어떤 소욕도 헛되지 않다. 충분히 크기만 하다면 말이다.” 바울은 큰 “소욕”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사역에 대한 큰 헌신의 사 람으로서 글을 쓴다. 그래서 바울은 가능한 최고의 위임, 우주의 주님이신 예 수께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위임 아래 산다. 하나님의 뜻은 바 울이 하나님의 교회에 소통할 수 있는 추진력을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 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은혜와 평강”을 전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 요한 신적 선물이다. 그래서 이 편지 서두는 바울의 철저한 하나님 중심성을 18) 복음서는 ‘퀴리오스’(κύριος )의 다양한 용법을 나타낸다. 때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는 말 로(예, 마 1:20; 2:15; 4:7; 눅 1:11-16), 때로는 “님(sir)”혹은 “주인님(master)”라는 일반적인 문화 적 의미로(예, 마 6:24; 8:2, 6; 10:25; 13:27; 막 13:35; 눅 7:6), 때로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분인 예수를 언급하는 말로(마 3:3; 7:22; 12:8; 특히 마 22:43-45//막 12:36-37//눅 20:42-44).
19)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 1998: 93-128, 108-117)와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1999: 45-77)은 둘 다 아주 이른 시기의 기독교에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하게 여겨졌다고 강력하게 주 장했다. 부분적으로는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주”라고 말하는 구약 본문을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말로 전용했다는 것에 기초해서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전달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역사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글을 쓰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렇기 때 문에 바울은 또한 심오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글을 쓴다. 바울이 그 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독특한 관계가 그가 사역 동반자로서 디 모데와 맺은 관계 및 하나님의 교회의 일부로서 아가야 사람들과 맺은 관계 의 기초를 형성한다. 추가 주석
1:1 신약에 사용된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용어의 기원은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광범 위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그 용어는 탐험(Demosthenes, 3 Olynth. 3.5) 혹은 위 임(Josephus, Ant. 17.300)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1세기 헬라어 문헌에서 그 용어 는 드물기는 하다. 70인역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nus)에서 ‘아포스톨로스’라 는 명사는 열왕기상 14장 6절의 아픈 아이 이야기에서 단 한 번만 나온다. 거기서 선지자 아히 야는 여로보암의 아내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후,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나니[ἐγώ εἰμι ἀπόστολος, ‘에고 에이미 아포스톨로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명 사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동사는 거의 700번 나온다(‘아포스텔레인’ 혹은 ‘엑사포스텔레인’ 형 태로). 그것은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히브리어 ‘살라흐’(xl;v', “보내다”)를 번역한 것이 며, 어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보냄을 받은 사람을 언급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이로 인해 후대 랍비 문헌에 나오는 용법이 생겨난 듯하다. 거기서 ‘살리아’라는 명사는 위임받 은 대리인, 보내는 자의 권위를 지닌 사람을 말하게 되었다(예, m. Ber. 5.5). 논란이 있긴 하지 만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고 번역된 ‘살리아’라는 개념은 이미 1세기 헬레니즘 유대인 들 사이에서 사용되었으며, 그래서 신약에서 그 말이 사용되는 배경을 형성했다(Barnett 1997: 45-47; Spicq 1994: 1.186-190).
1:2 증거 A D G K L Ψ 은 ‘이에수 크리스투’(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읽으며, 그것은 예를 들 어 KJV에서 반영되어 있다. 선호되는 것으로, ‘크리스투 이에수’(Χριστοῦ Ἰησοῦ)는 ��46과 B 같은 초기 증거를 따른다.
B. 서언 ( 1:3-11 )
레오 톨스토이( Leo Tolstoy ) 는 “세상의 진보는 고난받은 사람들로 인한 것 이다”( Yancey 1990: 143에서 인용 ) 라고 쓴다. 따라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 로 사역하는 사람들은 종종 사역 도중 고난을 받는다. 그런 고난은 우리의 관 점을 연달아 강타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 들과의 관계를 둘 다 틀어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후서 서언에 서 본을 보인 것처럼, 우리가 받는 고난의 아픔이 관계의 붕괴와 쓰라림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고난은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고난받는 다른 사람 들과의 더 깊은 친교로, 심지어 하나님의 위로 곧 시련의 도가니에서만 온전 히 겪을 수 있는 위로를 찬송하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서언에서 쓰는 것처럼, 그는 하나님이 고난에서 구속시 켜 주시는 것에 대한 풍성한 성찰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고린도후서의 핵심 주제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최근에 겪은 경험에 의해 깊이 상처를 받아, 새로 생긴 감정적 영적 상처가 여전히 욱신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쓰라림과 회한 대신, 신약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받는 본문 중 하나 를 제시하면서, 그의 고난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로 그리고 고린도 교 회와 계속 협력하고자 하는 호소로 바꾼다. 서언은 두 개의 주요 부분으로 깔 끔하게 나눠진다. 첫 번째 부분( 1:3-7 ) 에는 아름답고 격려가 되는 축도가 나 온다. 이 축도에서 바울은 고난 가운데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1:3 ). 그 러고 나서 바울은 고난이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1:4-6 ) 고난에 대 한 경험이 그의 선교와 고린도인들 사이에 구축하는 특별한 친교를 주목 한다( 1:7 )
서언의 두 번째 부분( 1:8-11 ) 에서 바울은 자신이 최근에 죽음에 맞닥뜨렸던 것에 대해 공공연하게 나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했던 환난을 가볍게 여기기를 원하지 않으며( 1:8 ), 하나님이 어떻게 바울과 그의 선교 팀이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1:9 )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바울을 고난에서 구속하셨는지 가리킨다. 바 울은 또한 하나님이 계속해서 건지시고( 1:10 ) 고린도인들이 기도를 통해 돕기 를( 1:11 )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서언이 하나님이 찬송을 받는 것으로 시작되 고 끝나는 것을 주목하라( 1:3, 11 ). 또한 서언의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하나님이 환난에서 구속하시는 것을 널리 알리며( 1:4, 6, 9 ), 둘 다 바울이 고린도인들과 협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끝난다( 1:7, 11 ). 그래서 찬송( 1:3-7 ) 과 호소( 1:8, 11 ) 둘 다를 통해, 사도 바울은 전략적으로 고린도인들에게 그의 마음을 열어
그의 고통을 나누고, 그가 이 편지를 통해 바라는 바 아가야 교회와 관계를
재구축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다.
1. 하나님의 위로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라! ( 1:3-7 )
서언의 이 첫 번째 부분에서, 바울은 몇 가지 일을 이룬다. 첫째, 바울은 큰 핍박 속에서 경험한 위로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고린도인들에게 고난 에 대한 적절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이 무엇인지 본을 보이기 위해 사려 깊은 축도를 사용한다( 1:3 ). 둘째, 바울은 그가 박해받은 경험에는 목적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바울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에 의지하고 그것을 고린도인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해 준다( 1:4-6 ). 셋째, 고난과 위로의 경험은 사도 바울과 고린도인들 둘 다 고난과 위로를 받았다 는 사실에 호소해서( 1:7 ) 바울이 고린도인들과 더 깊은 연관을 맺게 해 준다( 참 고, 1:11 ). 그런 연관은 바울이 그의 편지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Hafemann 2000: 58-59; O’Brien 1977: 263을 따라 ).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고린도인 들에게 그들의 사도인 바울 자신과의 견고한 관계로 다시 돌아오라고 호소하 는 것이다. 서론에서 말했듯이, 사도 바울이 여행 일정을 변경함으로써 바울 과 교회 내 일부 사람들의 관계에 긴장이 생겨난 듯하다. 그래서 심지어 이 서두의 축도에서 바울은 자신의 진실함을 입증하고( P. Hughes 1962: 9 ) 고린도인 들에게 자신과의 건전한 관계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일을 시작한다. 이 부 분의 개요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a. 자비로우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1:3 )
b. 목적이 있는 고난( 1:4-6 )
c. 고난과 격려의 교제( 1:7 ) |주해 및 설명|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 시요 모든
3 Blessed be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compassionate Father and the God who offers every possible encouragement! 4 He encourages us in all our affliction, so that we might be able to encourage those experiencing any affliction with the encouragement by which we ourselves are encouraged by God. 5 Because just as the sufferings of Christ spill over toward us, to the same degree,
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
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
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
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
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
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
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through Christ, our encouragement overflows. 6 Now, if we are afflicted, it is for your encouragement ⌜and salvation, or if we experience the encouragement that follows the affliction— both result in your encouragement, which is at work as you endure the same kinds of sufferings that we suffer. 7 Indeed, our hope for you is resolute⌝, knowing that as you share our experience of sufferings, so also you share our experience of encouragement.
a. 자비로우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하라!(1:3)
[1:3] 바울은 종종 인사말로 그의 서신을 시작하고( 예, 롬 1:1-7; 고전 1:1-3; 빌 1:12; 골 1:1-2 ) 그다음에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대상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 롬 1:8; 고전 1:4-9; 빌 1:3-5; 골 1:3-8 ). 때로 바울은 회중을 위한 기도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예, 롬 1:9-10; 빌 1:9-11; 골 1:9-14 ). 고린도후서 서언( 1:3-11 ) 에서, 바울은 이례적 으로 자신의 경험( 그리고 아마 그의 사역 팀의 경험 ) 에 집중하면서1)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 1:3-5; Harris 2005: 138 ). 사도가 최근에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가 고난 경험에 초 점을 맞추고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축도에는 수사학적 목적도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고 난 경험을 그가 여행 계획을 바꾼 데 대한 한 가지 설명으로 이해하기를 원 한다( 참고, 1:12-20 ). 8-11절에 나오는 글에 따르면, 바울은 최근 심한 박해의 무 시무시한 때를 겪으면서, 정서적으로 깊이 도전을 받고 육체적으로 위협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이 경험을 압도적인 것으로, 그를 절망의 순간으로 이끌 고 어느 정도는 상황에 대처할 수 없게 만든 것으로 묘사한다. 죽음이 임박한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어려운 때에 어려운 회중에게 보내는 이 어려운 편지를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시작 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
1) 고린도후서에서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서론 및 이 부분 끝에 나오는 1:8에 대한 첫 번째 추가 주석을 보라.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찬송을 ‘율 로게토스’( εὐλογητός ) 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것은 “찬양 혹은 칭찬할 만 한”( GELNT 430 ) 것과 관련된 용어다. 존재 동사( εἰμί, ‘에이미’ ) 가 생략되어 있으며, 그 문장은 선포( 즉 직설법,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신다” ) 로 해석하거나 감탄( 즉 기원법,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도다!” 아니면 “하나님 이 찬송을 받으시기를!” ) 으로 해석할 수 있다.2) 그 표현은 열여덟 개의 축도( ‘쉐모네 에스레’; 문자적으로 “열여덟” ) 같은 그 시대의 유대 기도 ‘베라카’( hk'r"B., “축복” ) 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복되도다 여호와여”라고 반복한다( Instone-Brewer 2004: 4142 ). 3)
하지만 유대 성경은 바울의 축복 표현의 실제 배경이다. 이 구문 곧 ‘율로 게토스’( εὐλογητός )+생략된 존재 동사로 된 구문은 70인역에서 상당히 흔하며, “하나님”( 예, 창 14:20; 왕상 5:21[5:7 영역본]; 에스드라1서 4:40; 시 17:47; 65:20[18:46; 66:20 영역 본] ) 혹은 “여호와”( 예, 창 24:31; 출 18:10; 룻 4:14; 삼상 25:39; 삼하 6:21[영역본에는 없음]; 왕상 8:56; 에스드라1서 8:25; 시 27:6; 30:22[28:6; 31:21 영역본] ) 혹은 두 용어가 함께 나오는 것 의 변형( 예, 창 9:26; 24:27; 삼상 25:32; 삼하 18:28; 왕상 1:48; 8:15; 대하 2:11[2:12 영역본]; 6:4; 스 7:27; 시 40:14[41:13 영역본] ) 은 하나님이 축복의 대상이라고 알린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의( κυρίου ) “하나님”( θεός ) 을 언급할 때,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 을 축복하는 방식에서 직접 취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왜 이런 아름답고 감정이 넘쳐나는 축복으로 편지를 시작하는가?
웰본( Welborn 2001: 58 ) 은 바울이 축복을 사용함으로써 마음에서 우러나온 찬송 을 표현할 뿐 아니라, 또한 고린도인들에게 고난에 대한 적절한 기독교적 반 응을 보여 주는 멘토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율로기아’(εὐλογία) 형태를 사용함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원천이 고린도인들의 많은 은사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충만함임을 나타 낼 수 있다. 그 마음은 예상치 않게 건져냄을 받은 것에 대한 찬송으로 흘 러넘친다. 옛 시편 기자처럼, 바울은 하나님이 “복되시다”고 선언한다. 자 신이 환난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위로 때문이다.
웰본( Welborn 2001: 57-59 ) 에 따르면, 바울은 축도를 발판으로 사용해서 “절 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사랑”으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화된 것을
2) 바렛(Barrett 1973: 58)은 우리가 그 찬송을 직설법으로 볼지 기원법으로 볼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고 말한다. 하지만 유대 예배 의식에서는 전자를 선호한다.
3) “열여덟 개의 축도”(The Eighteen Benedictions)는 또한 ‘쉐모네 에스레’(열여덟), ‘테필라’(기도), 기도를 말할 때 서 있기 때문에 ‘아미다’(서 있는)로도 알려져 있다(Instone-Brewer 2003: 25-29).
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편지를 전개한다. 그래서 바울은 본을 보임으로 고린 도인들에게 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반응을 생각해 보라고 명 한다. 그러면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도전한다. 축도의 대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아버지”(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 이다. 바울
은 “하나님이시요 아버지”를 축복할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언급하는 2절 인사말 끝부분에서 부드럽게 넘어간다. 하지만 더 광범위한 유대교의 축 도와 달리, 바울은 주 예수도 언급한다. 그 관용 표현의 그런 기독론적 표현은 신약의 다른 곳, 즉 에베소서 1장 3절과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도 나오는데, 거기 보면 여기 나온 바울의 말이 반영되어 있다.4) 고린도후서 11장 31절에 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호 데오스 카이 파테르 투 퀴리우 이에수’ ) 이 “영원히 찬송할 이”( ὁ ὢν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호 온 율로 게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 라고 말한다. 이것은 1장 3절에 나오는 축도의 말을 반영한다. 고린도후서는 대단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5) 때로 바울은 자신 이 예수의 고난에 결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1:5; 4:10-11, 14; 8:9; 10:1; 12:10 ). 하지 만 바울은 또한 높임 받으신 주님이신 예수를 중시한다( 1:14; 2:14; 4:5, 14; 5:8, 1011; 10:5, 8 ). 이렇게 이중적 시선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자에게 강력한 격려가 되며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는 고난을 겪고 있 을 때, 주 예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예수께 많이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 예 수 역시 고난을 받으셨지만 지금은 우주의 주님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우리 를 상하게 하는 모든 원수들은 먼저 그 예수의 발 아래 놓일 것이다. 고난 속 에서 우리가 예수와 공유한 경험과 높임 받은 주님이신 예수의 지위는 둘 다 우리에게 격려를 해 줄 것이다! 바울은 예수가 “우리의”( ἡμῶν, ‘헤몬’; 관계의 소유격 ) 주라고 명확히 말한다. 아마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서 자신과 고린도인들의 결속을 강조하고 있을 것 이다.6) 하지만 축도의 첫 번째 부분에서 초점은 자기 백성에게 격려 혹은 위 4) 신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은 막 14:61에서 ‘투 율로게투’(τοῦ εὐλογητοῦ, “찬송받을 이”)라고 나 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또한 눅 1:68에서도 스가랴가 “주 이스라엘 의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누가 복음에 나오는 용법은 70인역의 어법을 따른다(예를 들어, 왕상 1:48; 대하 2:11[2:12 영역본]; 6:4; 시 71:18[72:18 영역본]). 그 용어는 70인역에서 70번 이상 나온다.
5) 고후 1:1-3, 5, 14, 19, 21; 2:10, 12, 14-15, 17; 3:3-4, 14, 16-18; 4:4-6, 10-11, 14; 5:6, 8, 10-11, 14, 16-20; 6:15, 17-18; 8:5, 9, 19, 21, 23; 9:13; 10:1, 5, 7-8, 14, 17-18; 11:2-4, 10, 13, 17, 23, 31; 12:1-2, 8-10, 19; 13:3, 5, 10, 13을 보라.
6)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엡 1:3에 나오는 축도는 고후 1:3에 나오는 이 형태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에베 소서에서 바울은 또한 연합을 매우 강조한다(예, 4:1-16).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로를 제공하시는 분인 아버지께 맞춰져 있다.7) ‘호 파테르 톤 오이크티르몬’( ὁ πατὴρ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자비의 아버지” ) 은 하나님이 “긍휼이 많은 아버지”라는 것을 전달한다. 2절에 대한 주석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은 성경 전승에서 풍성하게 표현된다. 하나님은 “한 아버지”( 말 2:10; 마 23:9; 고전 8:6; 엡 4:6 ) 그리고 심지어 더 친밀한 말인 “아빠( Abba ) ”8) ( 막 14:36; 참고, 롬 8:15; 갈 4:6 ) 라 고 불린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자기 자녀라고 주장하는 것을 기뻐하시 며( 요일 3:1 ) 선하신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딸에게 필요한 것( 마 6:25-34 ) 및 선한 선물( 눅 11:11-13 ) 을 제공하시고,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잠 3:12; 히 12:5-11; DBI 274-275 ). 게다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므로 자기 백성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한 관심 을 표하신다. 헬라어 구약에서 약 삼십 번 그리고 신약에서 다섯 번( 롬 12:1; 고후 1:3; 빌 2:1; 골 3:12; 히 10:28 ) 사용된 ‘오이크티르모스’( οἰκτιρμός ) 라는 용어는 여기서 처럼 거의 언제나 복수형으로 나오며9)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에 대한 관심을 의미하면서, 영어 역본에서는 “동정”( pity ), “자비”( mercy ), “긍휼”( compassion ) 등 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바울은 분명 하나님이 고난받는 그분의 백성을 격 려하신다고 말하는 풍성한 유대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전승에서는 시 련을 환경과 하나님 백성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볼 기회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 성으로 시련의 물과 불을 헤치고 나아가 번영의 장소로 가도록 하시면서 상 황을 구속하실 때( 시 66:12 ), 그들의 분투함을 통해 정결하게 될 것이다( 사 48:1011 ).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어려움 속에 분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격려는 다 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아브라함, 욥, 요셉 등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 은 굳센 믿음과 헌신으로 강력한 격려를 받았다. 특히 적절한 것으로, 시편 103편 13절은 아버지 되심과 긍휼이라는 이 두 개념을 결합해서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 7)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하는
형)를 형성한다.
καὶ(‘호 데오스’, “하나님이시요”) B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파테르 투 퀴리우 헤몬 이에수 크리스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오”)
B′ ὁ πατὴρ τῶν οἰκτιρμῶν καὶ(‘호 파테르 톤 오이크티르몬 카이’, “자비의 아버지시요”) A′ θεὸς πάσης παρακλήσεως(‘데오스 파세스 파라클레세오스’, “모든 위로의 하나님”)
8) 이것은 친밀도를 나타내는 가족간 단어였다. 예레미아스(Jeremias)의 영역본에 나오는 ‘아 빠’(daddy)라는 말은 너무 극단적으로 단순하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예수께서 사용하신 이 호칭이 색다른 특성과 친밀성을 지니고 있었음은 분명한 듯하다(L. W. Hurtado, DJG 275; Jeremias 1971; 56-68, 178-203).
9) 예외는 슥 1:16; 7:9; 12:10; 참고, 마카베오4서 6:24; 집회서 5:6; 바룩서 2:27; 그리고 신약에서는 골 3:12다.
나니”라고 되어 있다.10) 삶에서 모진 환경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려움에 버려두신 것처럼 느끼면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시는지 의심하고 싶 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여기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의 이 측면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긍휼, 곧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갖는 자연스러운 관심에 의해 응답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격려를 해 주신다. 격려라는 주제는 이 다섯 구절짜리 축도를 지배한다. 명사 ‘파라클레시스’( παράκλησις, “격려, 위로” ) 는 여섯 번 사용되었으며, 같은 어원에서 나온 동사도 네 번 사용되었다. 바울이 글 내내 그 명사와 동 사를 둘 다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사도 바울에게 중요한 주 제다. 고린도후서가 바울의 격려의 편지라고 할 수 있다면, 1장 3-7절은 그 주제를 사도 바울이 가장 잘 표현한 부분이다( Hafemann 2000: 59 ) 11) ‘파라클레 시스’( παράκλησις ) 라는 동사는 “위로”( comfort ) 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며, 예를 들어 대부분의 영어 역본에서는 그렇게 번역된다. HCSB, NET, ASV, KJV, NASB, NIV, NLT 등이 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 용어는 “믿음 혹은 행동 과정 에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행동”, 그래서 “격려”( BDAG 766 ) 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위로”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의미인 듯이 보인다. 다른 곳인 7장 4, 7, 13절에서 그 단어는 또다시 “위로” 혹은 “격려”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8장 4, 17절에서는 후자만 적절할 것이다. 바울이 누군가에게 행동을 하도록 재촉하기 때문이다( 즉 “격려” 혹은 “권 고” ). 12) 또한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동사 형태는 종종 어떤 사람이 행동을 취하 도록 격려한다는 함축을 지니고 있으며( 2:8; 5:20; 6:1; 8:6; 9:5; 10:1; 12:8, 18; 13:11 ). 이 본문들에서는 영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위로”( comfort ) 라는 번역은 맞 지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 갈런드( Garland 1999: 60 ) 가 바울이 1장 3-7절에서 말 하는 “위로”의 의미에 관해 적절하게 말하는 것과 같다. 10) 70인역(시 102:13[103:13 영역본]은 긍휼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그 명사보다는 같은 어원에서 나 온 동사 형태인 οἰκτίρω(‘오이크티로’)를 사용한다. 11) 고린도후서 다른 곳에서 그 개념은 도처에서 고르게 나오며, 7-8장; 2:7-8; 5:20; 6:1; 7:4-13; 8:4, 6, 17; 9:5; 10:1; 12:8, 18; 13:11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바울의 다른 글에서 그 명사는 아홉 번 더 나 오며(롬 12:8; 15:4-5; 고전 14:3; 빌 2:1; 살전 2:3; 살후 2:16; 딤전 4:13; 몬 7절), 그 동사는 서른여 섯 번 더 나온다(롬 12:1, 8; 15:30; 16:17; 고전 1:10; 4:13, 16; 14:31; 16:12, 15; 엡 4:1; 6:22; 빌 4:2[2회]; 골 2:2; 4:8; 살전 2:12; 3:2, 7; 4:1, 10, 18; 5:11, 14; 살후 2:17; 3:12; 딤전 1:3; 2:1; 5:1; 6:2; 딤후 4:2; 딛 1:9; 2:6, 15; 몬 9-10절).
12) 저자는 글을 쓸 때 그 용어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 말의 요점은 바울이 그 용 어를 이 편지 다른 곳에서 “격려”의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위로는 나른한 만족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것은 그저 고통을 둔화시키기만 하는 어떤 은혜의 안정제가 아니라 마음 과 뜻과 영혼을 강화시키는 경화제다. 위로는 격려, 도움, 권고와 관련되 어 있다. 하나님의 위로는 연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고 축 늘어진 영혼을 떠받쳐서 굽히지 않는 결의와 끝없는 확신으로 삶의 어려움을 직면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그 단어를 “격려”의 의미로 번역하는 편을 택한다. 그것은 “영혼을 들어 올리는 것”( 영어의 “위로”라는 말이 그렇듯이 ) 이라는 의 미를 전달하지만 또한 앞을 내다보며 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해 힘을 내어 소 망을 갖는 것 역시 암시한다. 하나님이 “모든”( πάσης, ‘파세스’ ) 격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격려가 내내 주 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시간적 언급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어, “항상 격려하시는 하 나님” ), 바로 뒤 문맥에서 나오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자기 자녀에 대한 하나 님의 격려가 지닌 포괄적 성질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즉 “가능한 모든 격려”( Harris 2005: 142-143 ) 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 나오 는 ‘엔 파세 테 들립세이’( ἐν πάσῃ τῇ θλίψει, “모든 환난 중에서” ) 의 용법과 대응된다. 그것은 격려가 필요한 대단히 다양한 어려움이 있다는 언급이다.13) 게다가 바 울에게 그런 격려는 정서적 영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을 넘어서, 때로는 실제 로 해를 당하는 것에서 구해 주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1장 10절에서 그것 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Barrett 1973: 60은 그렇게 말한다 ). 물론 또한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역경 목록이 아주 잘 입증하는 것처럼, 바울은 무자비한 역경과 위험 에 직면해서 맞설 용기를 준 격려도 경험했다( 예를 들어, 4:8-11; 6:4b-10; 11:23b-33; 12:10 ) 우리는 날마다 하는 사역에서 때로 결정적으로 낙심하게 될 때, 고린도후서 1장 3절의 축도 안에서 살고 있는가, 밖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b. 목적이 있는 고난(1:4-6)
[1:4] 바울은 자비로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계속 이어 간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번역한 실명사적 분사 ‘호 파라칼론’( ὁ παρακαλῶν, “위로 하시는 이” ) 은 앞 절에서 “아버지”와 “하나님”이라고 나온 분을 추가로 묘사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14)( ἐπὶ πάσῃ τῇ θλίψει ἡμῶν, ‘에피 파세 테 들 립세이 헤몬’ ) 이렇게 강력한 격려를 제공하시며, 바울은 분명 자신이 방금 헤쳐 나온 이 격심한 박해 속에서 받은 하나님의 격려를 염두에 두고 있다( 1:8-11 ). 키르케고르( Kierkegaard 1956: 278-279 ) 는 이렇게 진술한다. “어떤 사람이 ‘저 사 람 쫓아 버려! 그는 살 가치가 없어’라는 대답을 하도록 기독교를 전파할 때, 이것이 신약의 기독교라는 것을 알라……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전파하면 돌 아오는 벌은 사형이다.” 그래서 여기 축도에서, 고난에 대한 바울의 말은 1장 8-11절에 그의 괴로움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이 나올 것을 예상한다. 우리가 여기서 “환난”15) ( θλῖψις, ‘들립시스’ ) 이라고 번역한 용어는 성경 이외 헬라어에서는 드물게 나오며 “압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성경 문헌 에서 그 단어는 강렬한 고통을 가져오는 괴로운 환경이나 사건들 ( 그래서 행 11:19에서처럼 그리고 아마 바로 뒤 문맥인 고후 1:8에서처럼 “압력” 혹은 “환난”이라는 말이 나온다 ) 혹 은 가혹한 외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내적 고뇌의 감정 혹은 깊은 비탄 자체 를 언급할 수 있다. 신약에서 이 비탄은 종종 박해 아래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16)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 용어를 아홉 번 사용하며17) 그의 글 다른 곳에서 열다섯 번 더 사용한다. 삶의 가혹한 어려움을 언급하는 곳에서( 예를 들 어, 롬 2:9; 8:35; 고전 7:28; 빌 1:17 ) 그리고 종종 박해의 상황을 명확히 언급하는 곳에 서( 예를 들어, 엡 3:13; 골 1:24; 살전 1:6; 3:3 ) 사용하는 것이다.18) 바울의 찬송의 요점은
14) 전치사 ‘에피’(ἐπί)+여격은 있을 수 있는 광범위한 의미들을 전달하며,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은 공 간적 의미로 그것을 번역한다(“우리의 모든 ~안에서”; ESV, HCSB, NASB, NLT2, NIV, NET는 그렇 게 되어 있다). 하지만 그 구문은 또한 “~에 관해” 등과 같은 “관점”이라는 뉘앙스 혹은 “우리가 받 는 고난의 모든 경우에”=“우리가 고난을 경험하는 모든 때”라는 시간적 의미도 지닐 수 있다(BDAG 363-367).
15) ‘들립시스’(θλῖψις)는 “비탄, 억압, 고통, 환난을 가하는 괴로움” 혹은 “비탄, 고통, 괴로움의 내적 경 험”(BDAG 457)을 말한다. 영역본의 “괴로움”(예를 들어, NLT2, NIV, NET는 그렇게 되어 있다) 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너무나 광범위한 의미론적 범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 말은 종종 “환난” 혹은 “억압”이라는 말로 딱 잘라 말할 수 없으며, 바울은 분명 박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고 통”(affliction)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현대 영어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 게 가해지는 “괴로움”의 의미를 지니며,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16) ‘들립시스’(θλῖψις)는 70인역에서 백 번 이상 사용되며 신약에서 총 45번 사용된다.
17) 고후 1:4(2회), 8; 2:4; 4:17; 6:4; 7:4; 8:2, 13.
18) 롬 2:9; 5:3(2회); 8:35; 12:12; 고전 7:28; 엡 3:13; 빌 1:17; 4:14; 골 1:24; 살전 1:6; 3:3, 7; 살후 1:4, 6.
하나님이 언제나 환난 속에서 우리를 만나셔서, 환난과 강력한 격려가 균형 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울과 그의 사역 팀에게 주시는 격려는 바울로 끝나지 않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더 큰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 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εἰς τὸ δύνασθαι ἡμᾶς παρακαλεῖν τοὺς ἐν πάσῃ θλίψει διὰ τῆς παρακλήσεως ἧς παρακαλούμεθα αὐτοὶ ὑπὸ τοῦ θεοῦ, ‘에이스 토 뒤나스다이 헤마스 파라칼레인 투스 엔 파세 들립세이 디아 테스 파라클레세오스 헤스 파라칼 루메다 아우토이 휘포 투 데우’ ) 하시는 것이다. 이 구절의 이 부분이 지닌 함축은 상 당히 단도직입적이다. 힘든 사역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받는 위로는 바울 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수 있게 하는 목적( “~하게” ) 19)에 기여했다. 이 격려에 는 동전의 양면이 있다. 다른 사람의 고난에 동일화되는 면과 격려해 줄 기회 를 갖는 면이다. 한편으로, 기독교 사역을 하면서 고난을 받았던 사람들은 상처받은 사람들 에게 공감하고 섬길 자원을 가지고 있다. 찰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 1960: 221222 ) 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통렬하게 그것을 나눈다. 어느 안식일 아침, 나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 나이까”라는 본문을 갖고 설교했으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설교는 내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동료 수감자들에게 설교하려 할 때 나 자신의 사슬이 철커덕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왜 내가 자신을 정죄하게 된 그런 무시무시한 어둠 속으로 끌려갔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그다음 월요일 저녁, 한 사람이 나를 만나러 왔다. 그의 얼굴에는 온갖 절망의 표시가 나타나 있었다. 그 사람의 머리칼은 곤두서 있는 것 같았고,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안구에서 튀어나올 듯했다. 그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내게 말했다. “나는 살면서 전에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아는 듯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내 마음은 끔찍했죠. 하지만 일요일 아침에 목사님은 생생하게 있는 그대로 말해 주셨고 마치 내 영혼 속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설교하셨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그 사람을 자살에서 구해 주었으며, 그를 복음의 빛과 자유로 인도했다. 하지만 내 자신이 그가 누워 있는 지하 감옥에 갇힌 적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형제들이여,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은 때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완벽한 사람들
19) 1:4에서 ‘에이스’(εἰς)+부정사(δύνασθαι, ‘뒤나스다이’)+여격으로 된 부정사의 주어(ἡμᾶς, ‘헤마 스’)—그런 문구는 목적을 표현하는 표준적 방식이다. “우리가 ~할 수 있도록”이라는 것이다.
은 그런 경험에 대해 여러분을 비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람
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뭘 아는가? 여러분과 나는 우리가 맡은 사람
들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바울의 사고를 계속 따라가면서, 바울이 찬송하는 이 능력 주심에 대해 두 가지 사항을 더 주목하라. 첫째, 그것은 신자들이 만날 만한 모든( πάσῃ, ‘파세’ ) 고난을 다 포괄한다. 그래서 격려의 범위는 포괄적이다. 둘째, 바울이 강조하 는 것은 고난보다 격려이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똑같은 격려를 받았기 때문 에 격려를 해 줄 수 있다. 여기서 전치사 ‘디아’( διά ) 더하기 소유격은 어떤 것 이 일어나는 수단 혹은 환경을 전달한다. 다시 말해, 바울이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그런 위로를 경험하지20) 않았다면 그는 고린도인들이 고난을 경험할 때 그들을 격려할 수 없었을 것이다. [1:5] 5절 시작 부분에 나오는 ‘호티’( ὅτι , “왜냐하면” ) 는 설명이 시작된다는 표 시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는 4절 첫 부분, 곧 하나님이 바울과 그의 동료들 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격려하신다는 생각에 대한 설명이다. ‘카도 스……후토스’( καθὼς … οὕτως, “~한 것처럼 또한” ) 는 바울의 고난과 그가 하나님으 로부터 받은 격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고난을 경험 한 정도는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격려와 조화를 이루며, 바울이 고난받은 정 도는 실로 크다. 실제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 τὰ παθήματα, ‘타 파데마타’ ) 이 “우 리에게 넘친다”고 말한다. 고대 저자들은 때로 어떤 것의 풍성함, 많은 것이 남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페리슈오’( περισσεύω ) 라는 용어의 한 형태를 사용 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거대한 무리를 먹이신 후에 남은 떡 조각, 마 14:20; 15:37; 눅 9:17; 요 6:1213 ). 바울은 자신의 사역 경험에는 고난이 차고 넘친다고 말하며,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세밀하게 증언한다( 고후 4:8-11; 6:4-10; 11:23-29; 12:10 ). 여러 번에 걸쳐 바울은 매 맞고, 돌로 침을 받고, 배가 파선되고, 압력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비방을 받고, 거의 죽을 뻔했다. 바다에서의 위험, 폭동과 강에서의 위험, 도시와 시골 둘 다에서, 이방인과 그의 동족 양쪽에게 서, 그리고 비바람에 노출되는 것에서 그렇게 고난을 받은 것이다. 명백히 바울은 고난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슨 의미인가? 수많은 주장들이 있다( 추가 주석을 보라 ). 하지만 아마 도 이 소유격 형태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21) 이 관점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 경험에서 시작되 었을 것이다. 거기서 예수는 바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4 ) 라고 물으셨다. 이 경험으로부터 바울은 그리스도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에 대한 박해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 스도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동일화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따르기 때문 이다. 그래서 바울이 매를 맞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계속된 공격이자 사도 바울이 뛰어나게 의로운 고난받는 분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화되는 것이다.22)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께 적대적인 세상 안에 있다는 것은 삶과 사역 에서 넘치는 어려움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 고난은 바울이 예수와 더불어 진정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강조하며,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 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의 사역의 진정성을 강조한다. 거짓 선지자들이 “안전 하게 집에 머물러 있는”( P. Hughes 1962: 9 ) 동안 바울은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 았다. 하지만 바울이 적대적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고난을 받을 때 겪 은 위로는 그가 경험한 고난만큼이나 풍성했다. 사실상 격려는 고난의 결과 였으며 모든 면에서 고난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의 경험 안 에서만 고난에 대한 대답을 발견한다. 큰 고난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큰 격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이제 그분을 위한 우리의 고난에서 우리와 동일화되실 뿐 아니라 또한 고난에 걸맞는 격려를 해 주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1:6] 6절을 보면, 바울은 4-5절에서 나온 추론을 한다. 바울의 사역을 둘 러싼 고난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은 고린도인들 모두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 룬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21) 1:5에 대한 이 해석은 소유격 ‘투 크리스투’(τοῦ Χριστοῦ)를 연관의 소유격, 즉 “그리스도와 연관해 서” 경험하는 고난으로 본다. 22) 따라서 바울 자신은 “내가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빌 3:10)기를 바라 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그리고 “내 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0)고 자랑할 수 있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남 은 것”을 채운다고 말할 때 그는 속죄의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속죄는 확고 하게 이루어진 바 있다. 그보다 고난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세상에서 계속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리스도가 직면했던 거부와 그에 수반되는 고난도 따라서 받는다. 그리스도는 그런 사람들과 동일화되신다. 브루스(Bruce 1971: 178)는 그것 을 잘 표현한다. “십자가에서 몸소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현 시대가 계속되는 한 이 땅에서 그 분의 백성들 안에서 계속해서 고난을 받으신다.” 따라서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 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박해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위해 고 난을 받는 것에서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으며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고난받으신다. 우리는 십자가에 반대하는 세상과 한편이 되어 예수를 반대하여 외치는 대신(마 27:38-44), 우리 주님과 동일화되면서 고난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편이 된다. 히 13:13이 말하듯이,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 이니……”라고 진술한다. 해리스( Harris 2005: 147 ) 가 진술하듯이, ‘에이테……에 이테’( εἴτε εἴτε ) 의 결합은 상호 배타적인 대안이 제시되는 상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바울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어려움의 경험과 그에 이어지는 격려다. 4절에서 우리는 ‘들립시 스’( θλῖψις ) 가 두 번 나오는 것을 “환난”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는 같은 어원 에서 나온 동사인 ‘들리보’( θλίβω ) 가 나오는데, 이 말은 “함께 누르다” 혹은 “압착하다”라는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또한 “괴롭히다”, “억압하다”, 혹은 “고난을 가하다”라는 의미도 지닐 수 있다. 바 울은 자신이 경험한 박해를 암시하고 있다( BDAG 457 ). 바울과 그의 사역 팀이 고난을 경험한다면, 그 고난은 고린도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23)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울이 받은 박해가 “위로와 구원” 을 이루었는가? 고난은 어떤 공동체를 낙심시키는 경험이 될 수 있다. 고린도 공동체는 바울이 받은 박해( 1:8-11 ) 및 그가 뒤이어 받은 격려를 목격할 때, 그 것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의 일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 자신의 박해 경 험을 납득시키기 위한 계획이다. 바울은 고난 속에서 격려를 받은 경험을 통 해 고린도 교회에 격려를 전달하도록 구비되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의 “구 원”( σωτηρία, ‘소테리아’ ) 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용어는 육체적으로 벗어난다 는 의미의 “건짐” 혹은 “보존”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의 글에서 대부분 그 말은 그리스도가 복음 안에서 가져오시는 건져냄을 말한다( 롬 1:16; 10:1, 10; 11:11; 13:11; 엡 1:13; 빌 2:12; 살전 5:8-9; 살후 2:13; 딤후 2:10; 3:15 ). 이 용어는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두 본문에만 나오는데( 6:2; 7:10 ), 두 본문 모두에서도 복음이 가져오는 건 져냄의 차원을 언급하는 듯이 보인다.24) 고린도인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 때 문에 구원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사역은 고난을 포함했다. 그래서 바울이 고 난을 견딘 것은 부분적으로는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 신 구원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바울이 이 편지 뒷부분에서 지적하는 것처 럼, 사망은 그의 안에서 역사한다. 생명이 고린도인들 안에서 역사하도록 하 기 위해서다( 4:12 ).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 사역에는 환난과 격려가 둘 다 포함된다. 하지만 둘 다 사역 대상자들에게는 격려가 될 수 있다. 이것은 6절 구조에 나오는 대조 23) ‘휘페르’(ὑπὲρ)+소유격은 여기서 고린도인들을 위한 고난의 경험을 표시한다(BDAG 1030). 24) 바울은 박해라는 맥락에서 그들의 “구원”을 언급하면서, 빌 1:19, 28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언어유 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빌립보서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구속과 구원(1:19)을 말하며 그다음에 빌립보인들의 구원과는 반대로 빌립보인들의 대적들의 멸망(1:28)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여기서 고린도인들의 구원, 그들이 복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건져냄을 받은 것은 역설적으로 바울의 박해 경험과 연관해서 온다.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와 대응을 살펴볼 때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도표 5를 보라 ) 25)
도표 5. 자신이 받은 고난에 대한 바울의 묘사에 나오는 대조와 대응
그런데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우리는 환난을 당한다]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 ℗
우리가 고난에 따르는 위로를 받는 것도
[우리는 위로를 받고 있다]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대조점은 도표 왼쪽 괄호( C ) 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환난과 위로라는 사역 경험 사이의 대조다. 더구나 박해 경험의 이 두 차원은 모두 위로라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도표에서 P 왼쪽의 괄호로 표시된 대응 행에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바울이 사역에서 경험하는 고난은 고린도인들 자신이 직면하는 고난 과 대응을 이룬다. 그것은 이 부분 시작부에 나오는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 도”라는 말과 끝부분에 나오는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이라는 말 사이의 대응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가혹한 환경을 경험한 결과로 고린도인들이 받는 “위로” 는 바울과 그의 선교 팀이 경험한 것과 같은 고난을 견디는 동안 고린도인들 이 받는 위로와 대응을 이룬다. 현재 분사( 형태는 소유격 여성 단수다 ) ‘테스 에네르 구메네스’( τῆς ἐνεργουμένης “역사하는” ) 는 한정적인 것으로, ‘테스……파타클레세 오스’( τῆς παρακλήσεως ) 의 범위를 정한다. 그것은 관계절처럼 번역되었다. “역 사하는 것인 위로”라는 것이다. 전치사 ‘엔’( ἐν ) 은 “견딤”( ὑπομονῇ, ‘휘포모네’ ) 이라 고 번역된 단어와 함께 고린도인들에게 위로가 주어지는 상황 혹은 조건을 반영한다. 그들이 바울과 그의 조력자들이 겪은 것과 “같은 종류의 고난을 견 디는” 것“처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한 사 도 바울의 사역으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하지만 고린도인들은 또한 바울과 25) 영어판 도형에서 구조적 역학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이 부분 시작부에서 이 구절에 대한 매끄러 운 필자의 영역본을 좀 벗어났다.
같은 편에서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고난을 경험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위로를 받는다. 고린도인들이 이러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은 박해의 모진 시련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린도인들이 견딘 “고 난”에 관해서는, 바울은 부분적으로 고린도에서 바울의 대적들에게 반대해서 바울 편에 선 사람들이 받는 압력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 문에는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c. 고난과 격려의 교제(1:7)
[1:7] 고린도인들이 고난 속에서 견디는 것은 실제로 바울이 확신 혹은 기 대를 가지고 앞을 내다볼 때 그에게 소망을 준다. 그리고 바울의 소망은 “견 고”하다. ‘베바이아’( βεβαία ) 라는 용어는 소망을 묘사하는 술부 형용사로, 고대 사회에서 다양한 함축을 지니고 있었으며 예를 들면 신뢰할 만한 혹은 실망 시키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서 6장 19절 에서 무너지지 않고 안정감을 제공하는 닻에 대해 사용된다. 또한 이 용어는 “오랜 시간 동안 버티는 것” 혹은 “효력이 있는 어떤 것” 혹은 “타당한”이라 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바울은 아마 자신이 갖고 있는 소망이 확고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 그래서 HCSB와 NIV의 “확고한”[firm], NET의 “불변의” [steadfast], 아니면 NASB95의 “확고한 근거를 가진”[firmly grounded]이라는 번역이 나온다 ) 실망으 로 이어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널리 퍼져 있는 일 반적인 희망적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P. Hughes 1962: 15-16 ). 계속되는 반대, 곧 교회 내에서 목소리를 내는 소수 집단이 바울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시도 에 직면해서도 바울은 고린도인들로부터 궁극적 반응이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현한다. 아마 특히 디도가 최근에 고린도를 방문한 것에 비추어 그랬을 것 이다( 7:6-7, 13-16 ). 간단히 말해, 바울은 고린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이며, 바울의 사역과 고난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위로 에 참여하는 자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 소망의 기초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바울의 소망은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이 이 교회에서 이미 행하신 일에 있다. 바울이 1장 2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신 이 는 하나님이시니.”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 으로……쓴……편지”( 3:3 ) 라고 믿는다. 1장 7절에서 분사 ‘에이도테 스’( εἰδότες ) 는 원인적 분사로, “우리가 앎으로”라는 의미다. 고린도인들은 바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울 및 그의 선교와 한편에 서서 고난에서나 격려에서나 함께 교제하면서26)
고난을 견딜 때, 자신들이 진정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임을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과 고난을 견딜 때 오는 격려는 참된 기독교를 확인해 주는 표시다. 우리는 바울의 고난을 세상이 주님의 몸을 때 릴 때 그리스도가 받는 고난의 연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본 바 있다. 고린도인들이 바울이 직면했던 똑같은 고난을 경험할 때, 그들 역시 그리스 도의 넘치는 고난에 참여하며 이것은 그들의 기독교적 경험을 입증해 준다.
묵상 바울이 고난에 대한 적절한 반응의 본을 보일 때, 고린도후서 1장 3-7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아름답고 강력하게 울려 퍼지며, 이렇게 축도를 통해 하 나님의 성품을 경축하는 것이 대대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그처럼 많은 의미를 지녀 왔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 때문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를 찬송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독교 사역에 종사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필사적으로 필 요하다. 일단 그런 자비와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찬송”하는 특징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선물은 찬송을 끌어내야 한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고난의 “구속주”로 찬송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울과 그의 사 역 팀이 자신이 경험한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 이다. 고린도인들은 이처럼 바울이 받는 것과 동일한 위로로 위로를 받으며 참된 믿음의 공동체의 표시를 나타내라는 권고를 받는다. 고난과 위로라는 유형은 그들이 진정한 형태의 기독교적 ‘코이노니아’, 혹은 협력 관계에 있다 는 것을 표시해 준다. 추가 주석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강력한 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구는 무엇을 언급할까? 첫째, 이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소유격은 작용 혹은 원 천의 소유격(“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고난”)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인의 고난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전후 문맥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듯하며 절대 분명하지 않다. 둘째, 신약 시대의 묵시적 유대교에는 “메시아적 고통”(messianic woes)이 있다. 메시아 시대로 이어질 해산의 고통이다(사 26:17; 66:8; 렘 22:23; 호 13:13).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이런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만일 그 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 개념을 더 광범위한 유대적 개념으로부터 철저히 바꾸어 놓았다. 십자가상에서 메시아의 고통의 절정을 이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경험한다. 그들은 예수를 위한 자신의 고난에 의해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의 고통에 참여한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들의 고난 속에서 그리고 예수와의 연합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 한다(Beker 1980: 146; Dubis 2002: 172-185; Grabbe 2000: 119). 스롤(Thrall 1994: 108)은 그 개념을 4장 11절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하지만 소유격 형태 자 체가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리 스도와 동일화되어 고난을 받는 것을 “메시아적 고통” 패러다임과만 결합시킬 필요는 없다. 그 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길에 점차 더 반대하는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서면서, 궁극적인 “의로운 고난받는 자”였던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그들 또한 의로운 고난받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을 세 번째 입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통해,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 그 리스도와 심오하게 연합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해하면서, 신자들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속이자 그 고난을 보충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해석은 종종 신비적 관계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었다. 하지만 몸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이런 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섯째 견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개념이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타티오’(imitatio)라는 주제는 고린도후서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으며, 스롤이 말하듯이, 이 것은 바로 앞뒤에 자발성을 끼워 넣는 것으로, 문맥상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이 중 몇 가지 입장은 상당히 중복된다. 하지만 바울의 글의 더 광범위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세 번째와 네 번째 입장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동일화로 인한 고난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고난에 임재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말하는 듯하다. 1:6-7. NA28로 대표되는 독법은 강력한 증거가 있으며([��46: h.t. παθημ. vs 6/7] a A C P Ψ 0121 0243 104 365 [629 1175] 1739 1881 pc r vg [syp] co; Ambst) 6절과 7절 사이 에 중요한 연관을 만들어 준다. 메츠거(Metzger 1994: 505-506)가 말했듯이, 다른 이문들은 어미 반복(homoeoteleuton) 및 우연히 빠진 것을 후에 고치려다 생겨난 듯하다.
2. 바울이 최근에 건져냄을 받음 ( 1:8-11 )
현대 사회의 많은 사역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우리의 힘을 대중에게 제시 하는 것이다. 교회는 강력한 소통자이면서 예외적 행정가이자 동기 부여에 능한 지도자인 목사를 원한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에서는, 우리의 시련, 한계, 실패, 약점이 종종 가교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실로 취약성은 관계 형성 혹은 회복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 중 하나다. 나의 고통, 나 자신의 한계, 혹은 나의 필요와 소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통해 우리는 “내 말 들어봐. 나를 받아줘. 나를 도와줘. 나와 동행하고 내가 공동체 안에서 너와 동행하도록 해줘”라는 제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 린도후서 1장 8-11절에서 고린도인들에게 그런 초청을 한다. 지금까지 고린도후서에서 편지 서두( 1:1-2 ) 와 서언 전반부( 1:3-7 ) 를 살펴보 았다. 사도 바울은 서언 후반부로 이동할 때, 웅대한 찬양 진술에서 나온 많은 주제를 이어간다. 여기서 바울은 계속해서 “환난”에 대해 말한다( 1:4, 8 ). 사실 상 바울은 고린도후서가 진정한 기독교 사역에 포함되는 고난을 종종 강조하 는 책이 되도록 한다( 예, 4:7-18; 6:4-5, 8-10; 7:5; 11:23-33; 12:7-10 ). 게다가 바울은 1장 3-5절에서 위로자로 나왔던 “하나님”을 이제 1장 9-10절에서는 건지시 는 자라고 말하며 찬송한다. 그리고 바울은 미래에 대한 그의 소망을 표현 한다( 1:7, 10; Barnett 1997: 81 ). 서언의 두 부분은 모두 바울이 고린도인들 자신을 명확히 언급하면서, 첫째로 그들이 바울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리고 둘째로 그들이 기도를 통해 바울의 사역에 참여할 때 그들을 위한 그의 소망을 표현 하는 것으로 끝난다. 1장 3-7절이 일반적인 찬양의 노래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바울은 이제 자 신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체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문법적으로, 그 본문은 두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부분( 1:8 ) 은 “우리가……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Οὐ γὰρ θέλομεν ὑμᾶς
a. 엄청난 환난( 1:8 )
b. 환난의 목적( 1:9 )
c. 하나님의 건지심( 1:10 )
d. 기도로 동역함( 1:11 )
이 네 구절은 또한 수많은 해석 문제를 제시한다. 특히 바울이 아시아에서 겪은 ‘들립시스’의 정확한 성질에 대해서 그렇다. 하나님이 그분의 선교사들 을 건져 주신 이 가혹한 시련, 이 “큰 사망”( τηλικούτου θανάτου, ‘텔리쿠투 다나투’ ) 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박해였는가, 질병이었는가, 다른 어떤 것이었는가? 바 울은 그 시련의 성질이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그 시련에 대 해 생생하게 묘사한다. 훨씬 더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이 심한 환난이라는 돌 밭에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린 큰 영적 유익을 붙잡고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 경험은 자신을 신뢰하는 것에 대한 공격이자 하나님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분 으로 신뢰하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싸울 준비를 갖춘 사도 바 울이 전략적으로 자신의 환난 이야기를 사용해서 고린도인들이 기도를 통해 바울 자신 및 그의 선교와 더 밀접한 동맹을 맺도록 초청한다고 주장한다.1) 여기서 표현된 취약함은 또한 더 큰 수사학적 전략의 일부다. 바울이 고린도 인들에게 최근에 그의 여정이 바뀐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 주해 및 설명 |
8 Now brothers and sisters, ⌜we do not want⌝ you to take lightly ⌜ ⌝ the tremendous affliction that happened to us in Asia, that we were oppressed to an extraordinary degree, beyond our ability to deal with the situation, so that we experienced deep despair, to the point that
1) 실제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Hom. 2 Cor. 2.2)는 고린도인들이 바울의 위로를 그들의 위로와 동일시한다면, 이런 생각은 그들에게 격려가 되겠지만 또한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고린도인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Bray 1999: 196-197) 해 줄 것이라고 쓴다. 이것은 퀸틸리 안(Quintilian, Inst. 4.1.23)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우리가 과거에 겪은 것 혹은 겪을 만한 것에 관해 자비를 호소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말이다(참고, Welborn 2001: 39; Witherington 1995: 356-357). 게다가 웰본(Welborn 2001: 39-47)은 1:3-7에 나오는 바울의 고난 과 1:8-11에서 그가 받은 박해의 경험, 2:5-11에서 그의 대적들의 학대, 2:4, 12-13; 7:5에서 그의 친 구들과 분리된 것에 대한 염려에서 볼 수 있는 동정(ἔλεος, ‘엘레오스’)에 대한
I. 서신서 서두와 서언 ( 1:1-11 ) B. 서언 ( 1:3-11 )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
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
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
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
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
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we thought we were going to die. 9 Yet we ourselves had this verdict of death in ourselves in order that we might not trust in ourselves but rather in God, who raises the dead. 10 He rescued us out of ⌜such horrible brushes with death⌝, and ⌜he will rescue us⌝—that is, we have placed our hope in him ⌜that he also⌝ will deliver us in the future as the need arises— 11 with you also joining in helping us through prayer, in order that many people might give thanks to God on ⌜our⌝ behalf for the gift given to us through the cooperation of many.
a. 엄청난 환난(1:8)
[1:8] 접속사 ‘가르’( γάρ ) 는 8절 시작 부분에 후치사로 나오는데, 1장 8-11절을 서언의 첫 부분( 1:3-7 ) 과 다소 느슨하게, 하지만 분명한 목적을 갖고 결합시킨다.2) 주절의 중심부인 “우리가……너희가 가볍게 여기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혹은 “우리가……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Οὐ θέλομεν ὑμᾶς ἀγνοεῖν ‘우……델로멘 휘마스 아그노에인’ ) 는 고대의 서신에서 널리 사용되 던 관례로, 청중이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말 이다. 그리고 바울은 서신서 여러 곳에서 이 관용 표현을 변형해서 사용 한다( 롬 1:13; 11:25; 고전 10:1; 12:1; 살전 4:13; Furnish 1984: 112 ). 3) 모든 경우에 바울은 애정 이 담긴 용어인 ‘아델포이’( ἀδελφοί ) 를 첨부한다. 바울의 용법에서는 그 말이 이 관용 표현의 일부인 듯하다. 바울은 여기서 수신자를 표시하면서, 고린도 인들을 말로 자신에게로 이끈다.4) 우리는 ‘아델포이’라는 단어를 “형제자 매”라고 번역한다. 그 말은 고대 사회에서 종교적 공동체 안의 남자들과 여자 들과 관련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5) 2) 스롤(Thrall 1994: 114)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나는 우리의 고난에 대해 말한다. 우리 는 방금 거의 치명적인 환난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3) 1인칭 복수 형태는 여기서와 살전 4:13에서 나온다. 하지만 고전 11:3; 갈 1:11; 빌 1:12를 참고하라. 거기서는 단수 동사 형태와 바울이 자기 독자들이 무엇을 “알기를” 바라는지 더 적극적으로 진술 한다.
4) 1:7에서 바울은 고난과 격려에서 고린도인들을 자신과 동일시했으며, 1:11에서는 그들이 기도로 그 의 편에 설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서언 내내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포용하며 그에 대한 답례로 그들도 그를 포용하라고 권한다. 5) 그래서 예수는 그분께 헌신한 모든 사람을 “형제” 혹은 “자매”라고 말씀하시며(마 12:50; 막 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