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BECNT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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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리즈 서문 _ 8 저자 서문 _ 11 약어 소개 _ 14 지도 _ 22 서론 _ 23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79 83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II.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 1:12-6:7 )

95

·109

A. 공동체 생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열두 제자를 다시 구성하다 ( 1:12-26 )

113

B. 오순절 ( 2:1-41 )

135

C. 요약: 공동체 생활 ( 2:42-47 )

201

D.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다 ( 3:1-4:31 )

211

E. 공동체 생활과 문제 ( 4:32-5:11 )

275

F. 요약: 표적과 기사 ( 5:12-16 )

295

G. 추가 박해 ( 5:17-42 )

301

H. 공동체 생활: 헬라 과부들을 돕기 위해 일곱 집사를 선정하다 ( 6:1-6 )  I. 예루살렘 공동체 요약 ( 6:7 )

327 339


III. 예루살렘의 박해가 메시지를 유대와 사마리아로 밀어내면서 새로운 증인 한 사람이 출현하다 ( 6:8-9:31 )

·343

A. 스데반의 체포, 설교, 순교 ( 6:8-8:1a )

345

B. 박해자 사울과 말씀의 확산 ( 8:1b-4 )

405

C. 사마리아의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 8:5-40 )

411

D. 사울이 회심하고 이른 시기에 수용되다 ( 9:1-30 )

445

E. 마무리 요약 ( 9:31 )

473

IV. 이방인에게는 복음이 예루살렘에는 더 큰 박해가 ( 9:32-12:25 )  ·477 A.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두 번 행하다 ( 9:32-43 )

479

B. 베드로와 고넬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 ( 10:1-11:18 )

487

C. 안디옥 교회: 바나바, 사울, 아가보 ( 11:19-30 )

527

D. 예루살렘의 박해 ( 12:1-23 )

539

E. 요약 ( 12:24-25 )

557

V. 안디옥에서 시작한 선교와 이방인의 완전한 편입 ( 13:1-15:35 )

·561

A. 첫 번째 선교 여행 ( 13:1-14:28 )

563

B. 예루살렘 협의 ( 15:1-35 )

623


목차

VI. 두 번째 및 세 번째 선교 여행: 그리스 확장과 반대 가운데 터 닦기 ( 15:36-21:16 )  ·661 A. 두 번째 선교 여행 ( 15:36-18:23 )

663

B. 세 번째 선교 여행, 예루살렘에서 끝나다 ( 18:24-21:16 )

747

VII. 체포: 메시지 변호와 로마 전파 ( 21:17-28:31 )

·811

A. 예루살렘 ( 21:17-23:35 )

813

B. 가이사랴 ( 24:1-26:32 )

865

C. 로마로 가는 머나먼 바닷길 ( 27:1-28:16 )

915

D. 로마 방문자들: 복음을 전하다 ( 28:17-31 )

945

참고문헌 _ 960



사도행전

| 시리즈 서문 |

BECNT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 음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 은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 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는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포함하려고 애쓰는 백 과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비록 도 )에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는 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들을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 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 력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하여 한 절씩 강해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름 )

이 노력의 일환

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8


시리즈 서문

본문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 서 본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최근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경 속에 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 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깎 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 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 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 작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확 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하 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 론을 취하기 위하여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개 혁에서 비롯된 다양한 가르침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 경에 대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 은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 이 이런 출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해 를 낳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편견 없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들(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 을 성경 해석 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 하기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이차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 류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 양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들을 적절 히 적용하는 데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 론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게, 분명하게 9


사도행전

그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론적인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異文 ) 은 저자의 번역 속에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半 ) 괄호(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추가 주석”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연대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수( 面 數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들이 있다( BAGD, LSJ, TDNT ). 참고문헌은 책 마지 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10


저자 서문

| 저자 서문 |

이 책은 1980년대 초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한꺼번에 다룬 주석서를 출간 하려고 애썼던 헌신의 완결판에 해당한다. 내가 이런 일에 동의한 게 무모한 행동은 아닌 것인지 의심도 들었다. 일단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모두 이미 훌 륭한 주석서가 많이 나와 있지만 당시 주석을 저술하기로 합의했을 때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다. 또 예수의 생애와 사도행전의 주제는 신약 분야에서도 서로 전혀 다른 영역이다. 각기 고유의 전문성도 있고 문헌상의 개성도 뚜렷 하다. 오래된 광고 문구처럼, “기쁨 두 배 행복 두 배”라며 위안할 수도 있겠 지만, 결국에 읽고 소화해서 평가할 과제만 두 배로 불어난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를 연구하면서 깨닫고 이렇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충분히 보람 있 는 것이다. 최초의 성도들에게서 드러난 여러 사례에서 오늘 우리가 배울 것 이 참으로 많다. 당시 내가 이 작업에 응하게 된 것은 그때까지 두 책 모두 선도적인 주석서 가 없었기 때문이고 또 누가-행전이 두 권으로 되었지만 저자 한 사람이 이 야기 하나를 저술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 주석서를 보 면 두 성경이 단일 저술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누가 가 이룬 혁신에 대해 복음주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신중하게 다루는 작업도 필요하다. 20세기 신약 분야에서는 예수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를 중심으로 회의론이 누적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두 성경에 대한 참신한 시각이 필요 하다는 시대적 요구도 있었다. 이런 사정 가운데 두 분 저자들, 조셉 피츠마이 어( Joseph

Fitzmyer ) 와

루크 티모시 존슨( Luke

Timothy Johnson ) 이

누가-행전에 대 11


사도행전

해 탁월한 비평 주석서를 출간했다. 피츠마이어( Fitzmyer ) 는 자신의 책에 1세기 배경에 대한 훌륭한 이해를 담아냈고, 존슨은 헬라-로마의 배경과 누가-행전 에 영향을 미친 문학 주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본 문의 성격, 현대 교회에 대한 교훈, 구체적인 역사성 문제 같은 중요한 주제는 아직 연구가 미비하다. 그래서 이렇게 주석서를 내 놓으면서도 아직 말하지 못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주석가에게는 자신의 책이 독 자에게 읽히기에 충분하다고 판단을 내려야 하는 때가 온다. 기도하는 것은 특히 누가-행전을 설교하는 분이 이 책에서 넘칠 정도로 많은 역사와 신학과 목회적인 관심사를 얻게 되어 그만큼 기독교 정체성과 기독교 메시지에 기여 했으면 한다. 이 주석서의 집필을 격려한 많은 분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튀빙겐 대학 교( University

of Tübingen )

트 재단( Humboldt

교수 마르틴 헹겔( Martin

Stiftung )

Hengel )

박사가 2004-5년 훔볼

장학금을 지원해 준 덕분에 본 주석 작업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나는 제2의 고향에서 세 번째로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헹겔 교수 집에서 가졌던 초대 교회와 초대 교회 역사에 대한 수많은 대화로 풍부한 통찰과 지혜를 전수받은 것에 특별히 사의를 표한다. 댈러스 신학 교( Dallas

Theological Seminary )

행정실과 신약학과에서 나에게 안식년 휴가를 허

락하고 연구 교수로 봉직할 수 있게 해 준 것도 감사드린다. 이로써 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브리트니 버넷( Brittany Burnette ) 은 연구 조 교이자 대화 상대로 뛰어난 역량을 보였고, 스트래튼 레이드익 ( Stratton Ladewig ) 과

존 에드워즈( John Edwards ) 도 마찬가지였다. 짐 키니( Jim Kinney ) , 웰스

터너( Wells

Turner ) ,

시리즈 편집자 로버트 야브로( Robert

Yarbrough )

같은 베이커

아카데믹( Baker Academic ) 편집자들의 철두철미함에 찬사를 보낸다. 끝으로 올 해로 결혼 30주년을 함께 축하할 나의 아내 샐리( Sally ) 는 우리 결혼 생활 대 부분을 이 프로젝트와 함께 살아야 했다. 막내 아이가 2년 전에 대학에 진학 했지만, 어찌됐든 우리 보금자리가 빌 틈이 없었던 것은 이 작업 때문이었다. 아내는 또 모든 자료를 충실히 살펴 주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유익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내의 성실함에 감사하며 이 책을 아내에게 바친다. 아내는 정말 대단 한 아량으로 가장 큰 희생을 감내했다. 이 책을 홀로코스트( Holocaust ) 가 사실상 종료된 아우슈비츠( Auschwitz ) 수용 자 해방 60주년 기념일에 완성했다. 유대인 가문의 한 사람인 나로서는 특별 한 의미가 생긴 셈이다. 반인륜적인 행동으로 최근에 벌어진 이 사건보다 우 리 안에 있는 죄의 잔인한 실상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 은 우리를 진정한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예수 안에서 사랑으로 역사하신다. 12


저자 서문

사도행전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주석서가 예수를 따랐던 자들이 경험한 대로 예수가 세상에 전하신 위대 한 빛을 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의 목표가 달성된 셈이다. 나는 사도행전 연구생뿐 아니라 학자와 목회자를 위해서도 이 책을 썼지만, 그 이상으로 사 도행전을 깊이 읽는 사람들에게도 사도행전에서 풍부한 설득력을 가지고 제 시되는 복음이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2005년 1월 27일, 튀빙겐에서

13


22

레기온

멜리데

수라구사

시칠리아

보디올

AD 1세기 로마제국

압비오 광장

로마 트레이스 타베르네

스르디스

아 베뢰아

구레네

지중해

라새아

살모네

로도

밀레도

니도

에베소

미둘레네

그레데

가우다

뵈닉스

미항

겐그레아

아덴

네압볼리

트라케

암비볼리 사모드라게 아 아볼로니아 시 드로아 앗소 무

빌립보

고린도

데살로니가

도냐

마게

아가야

무라

버가

알렉산드리아

루기아

이집트

바보

구브로

유대

안디바드리 예루살렘

가이사랴

시돈

살라미

리 다메섹

안디옥

갑바도기아

이고니온 니아 길리기아 루스드라 다소 더베

밤빌리

안디옥

아 기 루 비시디아 브

비두니아

본도

흑해

사도행전


서론

| 서론 |

본 서론에서 모든 주제를 포괄적으로 망라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는 본 주석서가 자세히 다룰 사도행전 관련 논의를 소개한다. 그래서 나중에 자주 나타날 세부 내용 가운데 이런 일반적인 주제를 망각하지 않도 록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다. 동시에 해당 주제를 더 포괄적으로 살피는 방법 도 알려 줄 것이다.

장르 및 개관 책의 제목, 누가복음과의 관계, 장르 “사도들의 행적들”( ΠΡΑΞΕΙΣ ΑΠΟΣΤΟΛΩΝ, 은 사본 î

74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 이라는

( 이 사본에서는 제목이 책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나온다 ) , 1)

오는데, 아마 이오타화 때문일 것이다 ) ,

제목

‫א‬, B, D( 단수 “행적”으로 나

Ψ에 나오는데, 이것들은 4-9세기 사본이다.

사본 1175는 제목이 간단히 “행적들”로만 나온다. 33, 189, 1891, 2344 같은 다른 사본은 복음서 저자 이름 누가가 추가되어 제목이 더 길어졌다( “전도자 누 가의, 거룩한 사도들의 행적들” ).

라틴어 역본도 제목이 비슷하다. 이런 제목은 아마

1) 이오타화(Itacism)는 οι, η, ει, υ를 ι(이오타)로 발음하는 경향이다. 이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람 에 사본을 구술하여 필사하는 과정에서 이독이 생겨났다.

23


사도행전

틀림없이 원래 이 책에 속한 부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제목은 1세기 말 이나 2세기 초에 등장했을 것이다.2) 2-3세기 교부 등 목록을 보면 이런 제목 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해 준다.3) 게다가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 ) 는 이 책을 “누가의 주석”이라고 일컬었으며( On 3.13.3 ) 는

Fasting 10 ) ,

이레나이우스( Irenaeus, Ag.

Her.

“사도들에 대한 누가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이런 변형 제목은 2세기

가 끝날 때까지 사도행전을 누가의 책으로 확인해 주는 방법이 많았음을 보 여 준다. 헬라 문헌에서 “행전” 장르는 보통 알렉산드로스 대제(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17.15; 18.1.6 ) 나

아우구스투스( Res

gestae divi Augusti )

같은 위대한 개인의

행적을 말하지만, 때로는 “초기 왕들의 행전”(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Wikenhauser 1921: 94-104; Talbert 1997: 7; Fitzmyer 1998: 47-48 ) 처럼

3.1.1;

한 집단을 망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행전”은 자주 다루는 영웅을 신적인 인물로 제시되도록 저술하거나, 적어도 신이 보낸 사람으로 나타나게 했다. 이 장르는 보통 영웅 의 행적을 묘사하는데, 기적과 일화를 담고 있다. “사도들의 행전”이라는 제 목은 하나님이 사도행전 속에서 사용하는 인물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여 겨진다는 것을 강조하도록 의도된 것 같다. 하지만 행전은 개인보다는 공동 체의 성장과 메시지를 선별하여 제시하는 데 더 집중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장면에서 장면으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에서 시작했다가 로마로 가는 바울의 여행으로 막을 내린다. 사실 사도행전의 핵심 인물은 하나님이 며,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행위와 계획이다. 이 작품은 헬라 역사서의 기본 원칙을 많이 따른다. 판 위닉( Van 37-60 ) 은

Unnik 1979:

이런 역사서의 주요 특징 둘을 정치적 이해와 표현의 힘이라고 밝

히고, 이런 저술의 원칙 열 가지를 나열하는데 누가는 그 대부분을 따른다.4) 2) 이 견해는 복음서의 제목을 유추한 것에서 나왔다(Hengel 1985: 64-84). 해리슨(Harrison 1975: 11)은 이런 제목이 2세기에 나온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3) Irenaeus, Ag. Her. 3.13.3(“사도들의 행적”);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5.12.82.4(“사도들 의 행적 중에 누가가”); Tertullian, On Baptism 10.4(“사도들의 행적”); Muratorian Canon, lines 34-39(“모든 사도들의 행적이 한 권으로 기록되었다. 누가가 이 책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한다”); Bruce 1988b: 160; Eusebius, Eccl. Hist . 3.4.1(“행적들에 대해”); Pesch 1986a: 22-23.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의 2세기 후반 시기에 대해서는 Ferguson 1982: 677-83 참고. 누가의 사 도행전은 또한 장르에서 2세기의 “행전” 기사, 곧 “영웅” 기사에 부합하지 않는다(Jervell 1998: 58; Roloff 1988: 1). 4) 이 원칙은 (1) 숭고한 주제, (2) 독자에게 주제가 유용함, (3) 정신의 독립과 편파의 부재, (4) 훌륭한 내러티브 구성, (5) 충분한 예비 자료 모음, (6) 이 자료를 다양하게 선택하고 다루는 것, (7) 이야기 의 적절한 배치와 순서, (8) 활기 있는 서술, (9) 지형적 세부 사항의 절제, (10) 웅변가와 수사적 상 황에 맞춘 연설 작성이다. 마게랏(Marguerat 2002: 14)은 누가가 이 열 가지 원칙 중 여덟 가지를 따 른다고 평가한다. 오직 주제 선택과 공평함의 부족이 목록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마게랏이 의식하는 것처럼(2002: 22), 주제 문제가 숭고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시각이 취해지는 것은 바로 누가가 신적 행적들과 그 의미를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점은 유대 역사 기록에 더 긴밀히 관련된다.

24


서론

제목은 책에 나오는 증인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사도 집단이 사도행전의 중 심인물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행위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한 일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예수의 새 백성이자 공동체인 교회를 구성한다. 예수가 이룩한 것과 이 성령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 함을 보여 준다( Schneider

1980: 73; Roloff 1988: 2 ).5)

더욱이 열두 제자 중 일부, 즉

베드로와 요한이 부각되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른 핵심 인물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는다. 이런 인물에는 스데반, 빌립, 바울, 야고보 등이 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오직 한 장면에서만( 14:4, 14 ) 사도로 불리며, 바나바와 함께 등장 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핵심으로 강조하고 싶어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하 나님뿐만 아니라 예수, 즉 성령을 매개하는 분의 주권적 감독 아래 있다( 행 2:32-36. Gaebelein 1912: 8; Ehrhardt 1958: 67, “성령의 복음”; Bruce 1990: 21-22에 논의 ).

요약하면, 사도행전은 누가가 그의 복음서에서 묘사한 예수 이야기의 속편 으로, 이 새로운 공동체의 기원을 설명하는 사회학적, 역사적, 신학적 작품 이다.6) 사도행전은 고대 헬라-로마의 의미에서는 “행전” 장르에 속하지 않 는다. 사도행전은 오히려 “역사서”인데, 이 용어의 고대적 의미에 따르면 그 렇다( Hengel 1979: 13-14, 36; Sterling 1992; Witherington 1998: 2-39 ). 이런 분류는 또 이 자 료가 고대 서사라는 것도 거부한다( 반대

견해로 Bonz 2000 ).

사도행전에는 고대

서사 작품의 시적 성격도 없고, 교회와 로마의 관계보다 이스라엘의 관계에 관심이 더 크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서사시 범주에 나타나는 것처럼 세부 사 항에 창의성도 없고, 역사 정보에도 제대로 부합하는 증거를 보여 준다. 이런 증거에서도 사도행전이 누가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Hemer 1989; 16:11-40 서 론 및 바울의 재판을 논하는 16:16-40 해설 참고 ).

이런 배경에 주의 깊게 집중해 보면 누가가 고대의 틀 안에 머물렀던 역사 가이며 그의 역사 기록이 헬라-로마 모델보다는 유대 모델에 더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도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기원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5) 마게랏(1998)은 이 책의 장르를 특정하지 않고서 사도행전을 공동체의 기원을 추적하고자 하는 집단 창설 내러티브에 비교한다. 즉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에 의한 어떤 공동체를 추적한다. 마 게랏은 후에 쓴 글에서 이 점을 다시 단언하면서, 사도행전을 변증적 역사 기록, 곧 “시초들의 내러티 브”라고 일컫는다(2002: 34). 6) 셔프(Shauf 2005: 60-61)는 학자들이 사도행전의 장르로 제시해 온 역사 장르의 하위 범주 열 가지 를 언급한다. 이들은 일반 역사, 헬라-로마 정치사, 변증 역사, 단체 역사, 성경 역사의 계속, 감동적 역사, 비극적-감상적 역사, 수사적 역사, 계승 내러티브, 역사 논문이다. 문제는 사도행전이 이런 하 위 장르 중 다수에 동시에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세세한 분류는 아마 너무 구체적일 것이다. 사도행전은 다양한 고대 역사 장르의 특성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스털링(Sterling 1992: 17) 은 변증적인 역사 기록을 말하지만, 사도행전을 집단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품으로도 기술한다. 셔 프(2005: 65-66)는 범주가 무엇이든 간에 기능에 관한 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 핵심이라는 데 동의한다(또한 이러한 Marguerat 2002: xi).

25


사도행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꽤 선택적으로 다루며, 누가가 독자들이 인지하기를 원 했던 주제나 이에 상응하는 인물을 강조한다. 사도행전이 빠진 데를 채우지 않는 점으로 후대에 나온 외경 “행전”과 차별성이 드러나고, 사도행전이 누가 의 진본임을 말한다( Hengel

and Schwemer 1997: 106, 385n554 ).

누가는 이야기를 진

행하면서 자신의 저술이 선별적임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누가는 자신이 다 루는 공동체의 기원을 모두 밝히는 것은 아닌데, 안디옥이나 로마 같은 중요 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누가복음 주석( Bock 1994a: 52 ) 에서 말 한 것처럼,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역사하시는 이런 이야기의 선례로 마카베 오 시대를 다룬 작품이 여럿 있다( 마카베오1, 2서 ). 하지만 사도행전은 새로운 하 나님 공동체의 기원을 다룬 것으로는 유일한 기사이며, 누가가 저술한 두 책 가운데 하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누가는 하나님이 새 시대와 새 공동체를 시작하기 위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진술하는 이 기사를 창의 적으로 만들어냈다( Roloff 1988: 1 ).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첫 이야기”라고 말하 면서 누가복음을 떠올린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히 속편의 성격을 보여 주 는 것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작품 간의 연결은 누가복음 마지막과 사 도행전 처음에 나오는 예수의 승천 이야기가 겹치는 것으로 더욱 강화된다.

사도행전의 최근 연구와 역사 철학에 대한 여담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역사 자체를 허구적인 행위의 구성체와 유형으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마게랏( 2002:

5-7 ) 은

“역사 기록을

기술( 記述 ) 이 아니라, ( 재 ) 구성( 再構成 ) 으로 여겨야 한다”라고 말한다.7) 이 말에 서 마게랏이 의미하는 것은 역사는 해석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마게랏( 2002: 8-13 ) 은

리쾨르( Ricoeur ) 의 역사 구별을 이용하는데. 리쾨르는 사실을 살피는

단순 기록 역사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사건을 보는 해설하는 역 사와, 공동체에 정체 의식을 부여하기 위해 신화를 만들고 과거를 해석하는 시적 역사를 구별한다. 마게랏이 보기에 하나님이 이야기에서 정말 능동적이 신 것은 사도행전을 이루는 많은 부분에서 “시적 역사”로 만들고, 다른 두 역 사 범주를 반영하지 않게 만든다. 마게랏은 사도행전이 모든 역사 유형을 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위가 그 대의 안에서 주요 부분을 “시적”으 로 만든다고 말한다. 여기에 중요한 세계관 문제와 정의( 定義 ) 문제가 있다. 예 수가 바울에게 나타난 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즉 비유적이고 시적인 사 건으로 다루어야 할까? 아니면 사실로 기록된 실제 사건으로 다루어야 할까?

7) 슈뢰터(Schröter 2005)가 유사하게 다룬다.

26


서론

만약 이 사건이 기록 그대로의 사건이라면, 왜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른 비슷 한 사건들은 이 시적 범주로 옮겨 넣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이신, 사도행전의 무수한 장면과 관계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적”이라는 기술로 정말 충분한가? 이런 조치는 하나님의 행위를 해설하는 사회적 역사 면에서, 역사적으로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여겨 배제하는 세계관, 곧 비유 적인 광범위한 범주가 될 위험이 있다. 사도행전은 한 장이 읽히거나 한 사건 이 진행되기 전에 세속적인 것이 된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부터 핵심 판정이 내려지고 있다. 사건에 부여할 수 있는 해석의 복수성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이 점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셔프( 2005: 66-84 ) 의 최근 연구는 지나친 방향으로 나아간다. 셔프는 역 사 기록을 “상상에 따른 서술”로 규정함으로써 역사의 사실성 문제로 빠져나 간다. 셔프의 이런 규정은 단순히 역사가는 내러티브를 이미 제한된 출처에 서 모으는데, 이 출처 자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저자 자신이 보고 자 하는 것에 매이기 때문이다( 2005: 66-75 ). 역사에 대한 이런 철학적 읽기는 우리의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일반적이 되고 있다. 이런 읽기는 역사와 역사 기록에 “언어상의” 조작을 가한다( Clark 2005 ). 클라크( Clark ) 의 연구는 역사 기록 논의를 역사적-철학적으로 탁월하게 정 리한 것인데, 클라크는 이런 경향을 지지하며 고대 작품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클라크는 역사 비평가에 대해, “이렇다면 비평가의 일은 ‘겉보기에만 정치적으로 순수한 목적, 주관성의 형식, 행동, 사건’이 어 떻게 영향력과 권위의 결과물인지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이념이 만들어 낸 것 을 그대로 보지 않고 다시 사실에 의거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알튀세 르( Althusser ) 식의 읽기를 통해 비평가는 본문에 나오는 간극과 없는 것을 보고 사실상 ‘판독할 수 없는’ 것을 읽으며, 저자가 대답해 보아도 제기된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유념한다”( Clark 2005: 176 ). 이런 이념적 해 체 비평 유형도 그 자체가 또 해체를 필요로 하는데, 사실은 이런 비평이 저 자가 제기된 문제에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고대 저자는 답을 주는데, 답은 처음의 질문에서 더 포괄적이 면서 적절한 응답으로 솜씨 좋게 넘어간다. 해체주의자의 읽기는 문화에 대 해 피상적이고 잘 모른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회의주의 속에서 보통 보 지 못하는 이런 움직임을 살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핸헨( Haenchen ) 등 학자들 은 이 회의주의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읽는다. 이들은 누가는 본문이 제기하 는 질문이나 비난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누가에 대해 이렇 게 회의적인 읽기가 본문을 보통 심하게 잘못 읽는 것을 자주 볼 것이며, 이 27


사도행전

런 오류는 이 방식의 신뢰도를 끌어내릴 것이다. 더욱이 누가는 세력과 권위 의 위치에서 쓰지 않는데, 1세기가 교회가 아직 고대 세계에서 사회적으로 영 향력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가 하나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힘을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오직 누가가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정말로 행동 하셨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체험에 대한 누가의 관점 과 바울의 자전적 단언들이 일치하는 것이 명확해 보인다. 어떤 실제의 행위 가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켰는데, 이는 또 다른 실제 행위가, 왕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십자가형으로 죽은 갈릴리의 선생을 구원자요 주라고 전파하는 데 정당성을 부여한 것과 꼭 마찬가지다. 이런 철학적이고 회의적인 역사 읽기는 중요한 사실, 곧 어떤 사건은 본질 적으로 중요하거나, 후대의 사건에 의존하거나, 마땅히 연관되기에 복합적인 의미를 요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따라서 이 의미들을 여러 방식 으로 그릴 수 있게 된다. 어떤 사건이 중대하고 변혁적이라는 것을 이 사건이 발생시키는 결과나 생기게 하는 기대나 심지어 처음에 전달하는 인상에 의해 서도 보일 수 있다. 이념과 역사 정보가 합당한 역사적 관점을 반영하는 방식 으로 결합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디데이는 단지 사회적 구성물이었 거나, 또는 최초의 인상, 기대, 결과를 만들어 냈던 본질적으로 의미 있는 제 2차 세계대전 사건이 아니었는가? 디데이가 어느 편에 있는가에 따라 승리로 도 패배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작전이 개시부 터 잠재적으로 중요하게 보이는 주요 사건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사건이 사 건에 내재된 특징을 가질 수 있고 또 실로 가지며 특히 사건이 핵심 사건일 때 더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롬멜( Rommel ) 장군의 최 초 반응을 살피면 된다. 또한 사건의 여러 측면이 이런 사건의 궁극적 의미를 반영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필요 가 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배타적으로 시나 역사 중 어느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이면서 동시에 역사인 것이다. 또한 사건 사이의 연결점이 존 재하거나 합리적으로 수립될 수 있다면, 겨우 사건만 모아 ( 흔히 나중의 ) 사건에 대한 관계와 의의를 말하도록 배열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 아니다. 국제연 합의 창설을 다른 사건 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일어난 사건의 산물로 보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가는 관계를 만들 수 있고 만들어 내며 사건을 연결시키는 데 창의적일( 통찰 있을? )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되지만, 이 사실 때문에 이 런 구성을 역사 왜곡으로 이해할 것은 아니다. 이런 역사가의 통찰은 많은 부 분이 무엇이 역사이며 역사가 어떻게 역사를 산출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우 리는 주어진 사건의 모음에 대해 ( 분명 더 많은 해석이 있으므로 ) 하나의 해석이 있다 28


서론

는 생각과, 특정 해석이 사건 모음에서 기대된 것과 말미암은 것을 지적하는 데 아주 유용하다는 생각을 구별해야 한다. 최근 역사 기록이 지적하기 좋아 하는 것처럼 역사는 가감하지 않은 사실을 파내는 것 이상을 수반할 수도 있 는데, 이런 사실이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해석과 관점은 자주 사건 이 초래한 것을 그대로 잘 보여 주고 이 사건이 나중에 갖는 의의와 역할을 깨닫게 하거나 드러낸다. 또한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한계를 초월하여 그 핵심 인물( 하나님 ) 의 역할을 규정해서도 안 될 것이고, 먼저 누가가 사건과 그 배경을 결합하면서 하나님 이나 예수의 임재와 행동을 말하도록 두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1) 고전 역사가들이 누가를 이용하는 만큼은 역사가로 존중한다는 것 ( Nobbs 2006 ) ,

(2)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살피면 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에서 역사

가로서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바울의 16:11-40 서론의 해당 논의 참고 ).

재판과 관계있는 행

셔윈-화이트( Sherwin-White 1963 ) , 헤머( Hemer 1989 ) , 윈

터와 클라크( Winter and Clarke 1993 ) 의 전집 여섯 권도 누가에 대한 회의론은 바 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배경 지식, 특히 유대교와 헬라-로마 자 료에서 주의 깊은 연구를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으로도 더 많은 신약 학자가 제2성전 유대교와 고전 문헌 연구에 더 힘쓸 필요가 있다. 이런 역사적 접근의 균형 잡힌 관점에 편견을 갖지 않고 사도행 전을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적 행위를 선택지로 삼는 것뿐 아니라, 시, 역 사, 문화 배경의 측면에서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개관 사도행전은 신약에서도 꽤 긴 책으로 절 수가 1,003인데, 누가복음의 1,151절, 마태복음의 1,071절에 비견할 만하다. 사도행전은 네스틀레-알란트( NestleAland )

본문에서 88쪽 분량을 차지하여, 누가복음의 96쪽, 마태복음의 87쪽에

견줄 정도다. 위더링턴( 1998: 6 ) 은 사도행전에는 단어가 18,374개 있는데, 이에 비해 누가복음은 19,404개라고 한다. 신약 성경의 하팍스 레고메논 ( hapax legomenon )

5,436개 중에서 2,038개가 사도행전에만 나온다( Culy

and Parsons

2003: xiii ).

우리는 이미 이 작품이 누가복음의 속편이라고 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의 사역, 죽음, 부활로 말미암은 새 시대를 하나님이 어떻게 수립하는지를 강조한다. 사도행전은 일면 새로운 것 같은 운동이 사실은 유 대교와 연관된 오래된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미 이방인도 포함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29


사도행전

내가 누가복음 주석( Bock 1994a: 1-4 ) 에서 말한 것처럼 네 가지 주제가 두 책 을 지배한다. (1) 구원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되며 이방인도 포 함하는지의 문제가 바로 이 두 번째 책이 주로 의도한 내용이다. 구원은 어떻 게 일어나는가?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그 답은 대 체로 사도행전 2-11장에 나온다. (2) 유대 백성이 이토록 호응이 없음에도 어떻게 이 운동을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사도행전보다는 누가복음이 이 질문에 더 가깝다. 결국 이 주제가 제시되는 중에도 유대인 대 부분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거부하고 그러면서도 상당수의 유대인은 믿음으 로 나아온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요 세부 주제는 유대교의 자연스러운 확장 과 실현으로 시작한 것이 어떻게 독자적인 조직인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의 문제다. (3) 이 모든 것의 실마리는 예수의 역할과 기능이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개관하지만, 사도행전은 부활한 주님이 어떻게 역사하며 새 공동체가 하나님의 계획에 중심이 되는 예수를 어떻게 전파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예수가 그의 사역과 부활에서 실현한 것이 든( 행

2:16-36 )

예수가 다시 올 때 할 일인 것이든( 행

3:19-23 ) ,

예수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주이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도록 정해진 분이다( 행 42 ).

10:40-

(4)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에게 응답하는 여러 신

실한 증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주제가 베드로와 요한, 스데반, 빌립, 바울, 바나바 등 누구를 말하든, 이 책에는 성취의 메시지를 땅의 끝까지 전하라는 소명을 공유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하나님이 허락한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의 모범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중심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중대한 시점에 능력 과 교훈과 보호를 베풀고 상황을 조성한다. 예수의 직접 개입으로 믿음을 얻고, 로마로 가는 여정 가운데 배의 난파에도 보호받은 바울의 이야기만큼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 예수 와 성령의 행위를 포함시키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는 성령을 매개하며, 이로써 성령은 능력을 준다. 성령은 새 공동체를 인도하고 그 구성 원에게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목격자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사건에 대한 강력 한 증인의 권능을 갖게 하기 위해( 행 1:8 ) , “위로부터 ( 오는 ) 능력”( 눅 24:49 ) 으로 보냄을 받았다( Bauckham 대해 논하는 390 ).

2006, 특히 눅 1:1에 나오는 ‘아우토프타이’ [ αὐτόπται, “목격자들” ] 에

이렇게 성령을 보낸 것은 누가복음 종결부와 사도행전 도입부

사이의 또 하나의 연관성이다. 성령은 특히 사도행전에서 능력과 증언의 영 이다. 사도행전은 대부분 구체적인 장소와 핵심 인물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1장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마리아, 땅의 끝까 30


서론

지 나아간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새 공동체가 모이고 성장하던 초기부터 두드러진다( 행 1-5장 ). 이 책의 신학적 내용은 이 부분에서 단락을 지배하는 주 요 설교로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나온 헬 라파 유대인의 배경을 가진 자로서 역시 활동적이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서 증언하다가 생명을 내주고, 빌립은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가는데, 이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퍼지는 서곡이다( 행 7-8장 ). 한편 하나님은 사울이 믿음 으로 부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갈 또 다른 그릇을 준비한다( 행 9장 ).

베드로로 초점이 돌아와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

는 것이 진술된다( 행

10:1-11:18 ).

이러는 동안, 사도행전은 또한 안디옥의 중요

공동체를 더 자세히 소개한다( 행

11:19-30 ).

주의 형제가 아닌 야고보가 살해

되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면서 예루살렘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커 보였다( 행 12장 ).

하나님은 감옥에서도 계속 베드로를 보호한다.

장면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선교 여행을 떠나게 하는 중요 공동체가 있는 안디옥으로 옮겨 간다( 행 13-14장 ). 정확히 어떻게 이방인을 포함시켜야 할지는 모든 주요 인물로 하여금 이 문제를 결정할 공회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만 든다( 행 15장 ). 안디옥에서 시작한 바울의 선교 여행이 계속되고, 그러는 사이 유명한 교회가 설립되거나 견고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고린도 공동체뿐 아니라 아덴에서 벌어진 일도 듣게 된다( 행 16:1-18:23 ). 바울의 세 번째 여행은 에베소에 초점을 맞추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서원하던 중에 체포된다( 행

18:24-21:36 ).

바울의 사역은 언제나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지만 파급력은 정말 컸다. 사도행전 나머지 부분은 로마로 가는 바울 의 여행에 할애된다( 행 22-28장 ). 이 부분의 주요 요소는 바울의 변론 설교이며, 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교회의 위치에 대해 다시 설명한다. 하 나님의 보호라는 주제로 이 책을 마무리하는데, 바울은 로마로 가던 도중 파 선을 겪지만 로마에 무사히 도착하여 재판을 기다리며 자신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 예수를 열정적으로 전한다.

고대 수사적 역사로서의 사도행전 저자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사도행전의 문학 장르를 고려하겠다. 이미 제시 한 것처럼, 사도행전은 마카베오서 같은 작품과 유사한 사회과학, 역사학, 신 학 서적이다. 제벨( Jervell 1998: 76-79 ) 은 사도행전을 하나님 백성의 역사라고 부 른다. 곧 보게 될 것처럼 제한적으로라도 다른 고대 작품과의 비교가 있어야 겠다. 우선 사도행전의 성격과 전승 토대는 사도행전이 고대의 소설이나 모 험담이 아님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이 소설에 더 가깝다는 페르보 ( Pervo 31


사도행전

1987 ) 의

주장은 사도행전을 역사로 논하는 스펙트럼의 한 끝에서 이 책을 회

의적으로 다루는 입장을 대변한다. 디벨리우스( Dibelius ) , 콘첼만( Conzelmann ) , 핸헨 같은 이들은 사도행전을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다룬다. 이런 관점의 기원은 19세기 구튀빙겐학파 및 바우어( F.

C. Baur ) 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 이런 관점은 갈등 중인 기독교를 그려 내며, 누가를 베드로와 바울 사이 에 실재했던 차이를 완화하려고 애쓴 사도행전에 내포된 긴장의 중재자로 묘 사한다.8) 이 견해에 따르면 누가는 실재했던 것보다 교회에 대해 더 이상적 인 그림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설사 이런 관점이 암시하는 사도행전의 늦 은 저작 시기가 포기되었다 할지라도, 이 견해가 교회 긴장의 측면에서 주장 하는 관점 중에는 아직도 사도행전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고수하는 것도 있다. 이 접근은 디벨리우스( 1956 ) 를 통해 양식 비평에도 호소하게 되 었다( 양식

비평 문제는 Bauckham 2006: 241-52 참고 ).

이 관점에서 누가복음은 역사

보다는 신학에 가까우며, 역사와 신학은 거의 상충하는 관계였다( Marshall 1980: 34-36 ).

핸헨의 주석( 1987 ) 만큼 이 접근을 전형적으로 예시하는 경우도 없는데,

핸헨은 거의 모든 순간마다 역사 문제를 놓고 누가복음을 알리는 것보다는 교화에 더 관계가 깊다고 여긴다. 하지만 램지( Ramsey ) 로 거슬러 올라가 브루스( Bruce ) , 개스크, 헤머, 헹겔, 마 셜( Marshall ) , 셔윈-화이트, 위더링턴으로 이어지는 다른 학자 집단은 누가가 고대 역사가로서 갖는 의의에 크게 관심을 두었다.9) 특히 사도행전을 세심히 연구한 램지는 사도행전의 많은 세부 사항이 연구 전에 기대한 것보다 더 신 뢰할 만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주장하는 것은 누가가 신학을 기록했고 누가에게 어떤 관점이 있어 기사에도 반영시켰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 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대한 다른 접근이 자주 일으키는 역사와 신학 간의 괴리는 없다. 다방면으로 역사성을 상세히 고려하는 것은 이 책의 자료를 한 단락씩 살펴볼 것을 요구하므로 여기서는 다소 일반적인 언급만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행전에 대한 보수적이고 더 온건한 접근은 보통 누가를

8) 개스크(Gasque 1989: 24-26)와 마게랏(2002: 2-4)이 언급하는 것처럼, 누가가 묘사하는 바울 주제 는 또 누가가 역사를 제시한다는 것을 반대해 제기된 가장 오래된 비판이며, 이는 19세기 초반의 데 베테(W. M. L. De Wette, 1780-1849)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우어(1792-1860)와 그의 의도비 평(Tendenzkritik )이 이 문제를 이어갔는데, 그의 의도비평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누가가 융화시키고

자 하는 경쟁 관계의 기독교를 대표한다. 마게랏은 바우어를 “누가의 역사 기록에 대한 비평의 엄청 난 뇌관”이라고 일컫는다. 오버베크(Overbeck 1919: 78)은 누가의 작품을 “세계사적인 차원의 실 수”라고 말한다. 9) 피츠마이어(1998: 124)는 자신을 사도행전을 회의적으로, 보수적으로 다루는 중간에 둔다. 배 럿(Barrett 1994; 1998)도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우리는 구절마다 진행하면서 더 온건한 이들의 접 근과 더 상세히 상호작용할 것인데,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세부 사항을 다루는 것으로 귀 결되기 때문이다.

32


서론

역사가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임을 말하는 것이다. 일부 학자에게 사도행전의 가장 곤란한 측면은 기적의 범위와 하나님의 개 입이 직접 촉발되는 경우다. 이런 범주를 의문시하는 사람에게,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중심이며 심지어 능동적인 인물로 역할을 하는 방식 때문에 당연히 요주의 대상이다. 누가의 시각과 증언은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역사했다는 것이며, 누가는 하나님이 역사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사도행전에서는 세계관 문제로 드러난다. 기적 같은 일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의심한다면, 순 간 사도행전은 역사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해석은 신속하게 더 “시적 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문서나 역사로 확인이 가능한 사건으로 옮겨간다면 누가는 성공한 것이다. 피츠마이어( 1998: 126-27 ) 는 기사 중에 바울 서신 등 외부 역사 자료를 통한 외적 증거를 가진 아홉 요소를 언급한다. 이들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탈 출한 것, 바울의 로마 여행, 바울이 생계비를 번 것, 헤롯 아그립바의 갑작스 러운 죽음, 아가야 총독 갈리오, 유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헤롯 아그립바 2세의 아내인 베니게, 대제사장 아나니아다. 피츠마 이어는 또한 도시( “식민지”로서의 빌립보 ) 와 관리( 데살로니가의 폴리타르케스 ) 에 대한 적 절한 기술 같은 소소하지만 정확한 세부 사항을 말한다. 우리가 검증할 수 있 는 것은 대부분 사도행전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 자료임을 증명한다. 헤 머( 1989 ) 의 연구는 누가가 사도행전의 수많은 세부 사항에서 얼마나 세심했는 지를 보여 준다. 헹겔( 1979:

60 ) 은

누가가 고대의 역사가 못지않게 신뢰할 만

하다고 단언하는데, 이런 평가가 가짜 칭찬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극단적인 회의주의 배경에서는 대단한 말이다. 헹겔은 대체로 허구적이고 공상 같은 작품들과의 비교는 괜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각 단락을 다루는 것은 또한 사도행전에 신뢰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일부 학자가 누가의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가장 의심하는 곳을 정리할 것인데, 곧 예루살렘 공회와 바울과 관련된 기타 지점, 특히 예루 살렘을 위해 연보를 모으기 위한 노력을 정리할 것이다. 예를 들어 배럿( 1998: xxxvi-xlii ) 은

역사 문제로서 공회 본문에 집중하고서 바우어가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긴장에 대해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건은 거의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루살렘과 그곳 유대인과 바울의 관계는 누가의 역사 대 신학 문제가 가장 자주 제기되는 곳이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기에 본서는 주 석에서 이런 문제에 세심하게 주의할 것이다. 대체로 사도행전은 어떤 종류의 역사인가? 보통 기록자의 의도( Tendenz ) 나 기록자가 변증적 입장을 주장한다는 것 가지고는 일반적인 정확성도 기대할 수 없다. 페너( Penner 2004 ) 는 책 한 권을 온전히 할애해서 고대의 역사 기록은 33


사도행전

대체로 설득, 줄거리, 인물평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역 사를 고쳐 쓰기도 한다고 주장하고서, 헹겔이나 위더링턴 식의 고대 역사 접 근에 이의를 제기한다. 페너의 관점에서 볼 때 고대 역사와 소설은 구별하기 가 어렵다. 페너는 또 고대 역사는 사건의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 에 개인적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신빙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004: 110 ).

하지만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경험에 호소하는 것이 이런 고대 역사 저술

에도 어울리는데 이를 페너가 축소시킨 것이다. 페너는 또 모두가 어떻게 누 가를 본문 표현의 창작자로 인식하는지 강조하면서, 이것이 실제 역사에 도 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한다( 2004: 108, 111 ). 그러나 의도는 사건에 대 한 관점을 반영할 뿐이고, 사건 자체는 해석에 열린 상태다. 좋은 역사는 무엇 이 언제 일어났다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며, 원인과 결과도 다루고 동기와 근 본 이유도 밝혀낸다. 여기서 거짓 반대에 호소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누가의 창작성은 그가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건을 요약한 것에서 드러 난다. 페너는 이 선택지를 배제한 것 같다. 누가의 요약은 실제 사건과의 연관 성을 가질 수 있으며, 실제 사건을 무시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간혹 저자나 그 자료가 묘사한 실제 사건과 배경과의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신빙 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과거와 미래가 어느 정도 중첩될 실질적 인 가능성도 있다. 이는 본문을 사건이 발생한 시기와 누가가 이를 쓰고 있는 시기에 관련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한 장면이 나중에는 배경으로 연관 성을 갖게 된다고 해서 과거와는 관련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함부로 판단 을 내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이 의도한 것은 가르치고 설득하는 것인데, 심지어 효과적인 사례 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원래는 더 광범한 규모로 일어났던 것이라도 사 건의 선택과 요약을 거치기도 한다. 사도행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의 서문이 제시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실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도행전은 확신을 주려 하는데, 이 확신은 어느 정도 누가가 그려 낸 사건의 근본적인 성격에 근거한다. 확신이 누가의 사건에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관점 은 아니겠지만 누가가 분투하는 목적은 된다. 사도행전은 접근법에서 다른 고대 역사서와 비슷하다. 고대인은 루키아노 스의 논고 ( Lucian, 2.56.11 ) 와

How to Write History 49-55, 63 ) 가,

퀸틸리아누스( Quintilian, Institutio

폴리비오스 ( Polybius,

oratoria 2.4.2 ) 의 10)

럼, 역사를 고양을 위한 실천으로 이해했다.

Hist .

언급이 보여 주는 것처

루키아노스는 역사가는 자기가

10) 위더링턴(1998: 10-11, 24-39)은 더 충분히 논하는데, 루키아노스가 출처의 정확성뿐 아니라 세부 묘사와 정확성에 대한 관심도 주장했음을 보여 준다. Mosley 1965-66; Bruce 1990: 27-34; 그 리고 특히 van Unnik 1979: 46-47도 참고.

34


서론

다루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나라( Fornara 1983 ) 의 연구는 로마의 역사와 투키디데스( Thucydides ) 와 폴리비오스의 저술 같은 헬라의 역사 를 구별한다. 페너( 2004:

110 ) 는

이런 고전 저술가들을 자신들의 과업에 너무

보수적인 것으로 보아 이들에게 호소하는 것을 일축한다. 그러나 포나라 같 은 고전 문헌 학자는 사건에서 이런 자료를 제거하려는 역사가의 노력이 자 칫 역사를 전부 버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 헬라 역사가는 사료가 될 수 있는 사건에서 개인적인 논평과 참여를 중요하게 여겼다. 사도 행전의 “우리 섹션”은 여러 민족과 도시에 대한 관심이 그런 것처럼, 이런 헬 라 전통을 반영한다. 이런 고대 저술가들은 사건의 요약으로 그리고 사건의 역사를 함께 묶는 수단으로 연설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연설을 지어내 는 것도 싫어했다. 폴리비오스( Hist .

12.25A-B ) 는

연설을 지어내거나 말한 표현

을 창작적인 해설로 바꾸어 놓는 것을 비난했다. 또한 폴리비오스는 이런 연 설이 말한 표현을 확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건들에 대한 요약으로 간주 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Witherington 1998: 33 ). 브루스( 1990: 28 ) 는 누가와 투 키디데스 저작 간의 유사점, 곧 누가의 서문과 공시적 날짜 사용 같은 것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누가는 이런 역사 방식을 의식하고 저술한 것으로 보 인다. 이런 헬라-로마 전통과 누가의 차이점 하나는 주요 사건이 대부분 헬라 역사처럼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이지 않고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데, 이로써 일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강조점이 어디 있는지를 나타내 준다. 역사하 는 하나님을 발견하려면 특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일어나는 일을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은 또 유대 역사 기록 장르에도 어울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심 은 하나님이 행한 것을 강조하면서, “확대된 산문 내러티브로 민족의 하위 집 단에 대한 이야기”( Sterling

1992: 17 ) 를

말하는 것이다. 마게랏( 2002:

25 ) 은

“유대

의 기독교 역사”는 사건 뒤에 있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야망 도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와 이런 민족 내러티브 사이의 차이점이야 말로 누가의 책이 갖는 중대한 특징이다. 즉 누가는 새로운 신앙이 유대인 하 위 집단 근원에서 확장해서 배경이 다른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감독했는지 설명하고자 애쓴다. 마지막으로, 유대 역사 기록의 핵심 주제는 민족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여러 세대를 위해 행한 방식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점은 이런 역사가 왜 끊임없이 인용과 암시를 통해 성경에 호소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마카베오서의 기사에 모범이었던 구약의 역사 내러티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지난 날 모세, 여호수아, 사사, 이를 계승한 여러 왕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 었다고 말한다( Rosner

1993: 65-82 ).

슈나이더( Schneider

1980: 122-25 ) 는

하나님이 35


사도행전

항상 어떻게 행하였는지에 대한 이런 연관성이 누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 라고 정확히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사는 구원 역사에 속하며, 하나님 이 구원을 위해 어떻게 행했는지를 서술한다. 사도행전 서문을 살필 때 이 주 제로 돌아갈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누가의 고대 청중 대부분은 이 책의 낭독을 듣는 것으로 이 책을 접했을 것이다 ) 은

헬라와 유대 역사의 선

례와 더불어 역사를 다룬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요약하면 사도행전은 헬라어를 사용한, 유대 역사 기록의 한 단편이며, 새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옛 약속에, 주 예수의 현재 행위에, 성령이 함께하 며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근원을 두는지를 다룬다. 사도행전은 또 베드로, 스데 반, 빌립, 바울, 야고보 같은 주요 인간 행위자에 집중한다. 이 책은 이런 인물 과 사건을 더 큰 세계 역사의 맥락 속에 배치한다. 이 책은 지역과 통치자뿐 만 아니라 지방색과 사법 관습의 요소도 정확하다( 후자에 참고 ).

배럿( 1998:

cxiv-cxviii ) 은

대해 Sherwin-White 1963

누가에게 “대체로 호의적인” 역사가라는 판단을

내리는데, 누가의 출처가 확증되지 않는 곳에서도 누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배럿도 누가가 바울과 예루살렘 공회를 다루 면서 본류를 크게 일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 15장과 누가가 바울 을 다루는 것에 대한 이런 견해를 평가할 기회가 차츰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배럿만큼 회의적이지는 않겠지만, 이는 세부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는 논증이다. 따라서 이 주제는 주석으로 미루기로 한다. 사도행전은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대리자로서 이 땅에 온 것의 결과 와 뒷일에 대해 알리고 교훈하고자 한다. 누가는 예수가 끼친 영향을 검토 하고서, 가장 이른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가 했던 일과 관련해 말할 가 치가 있었다고 본 혁신자였다. 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한 것과 교회가 된 공동체를 통해 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게 되길 바랐다. 이런 방식으로, 이 공동체의 사람들은 고무되고 자신들이 받은 유산에 더 깊이 감사하게 되었을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고 계신 것의 한 부분이 되라고 권면을 받았을 수 있다.

언어, 문체, 형식 누가의 언어는 유대 전승과 접촉한 인물이 사용한 코이네 헬라어를 반영 한다( de Zwann 1922; Cadbury 1958: 213-38 ). 피츠마이어( 1998: 114-15 ) 는 70인역의 여 러 단어와 라틴어 용어뿐 아니라 유대의 헬라어 어휘 목록도 언급한다. 아람 어 말투의 증거가 있는지도 추가로 고려한다. 아람어식 표현은 70인역의 영 향과 구별하기 어려운데, 70인역의 문체 자체가 히브리식 표현과 아람어식 36


서론

표현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11) 누가는 어느 신약 저자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어휘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작품에서 제시된 배경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어휘의 거의 90%가 70인역에 도 나오며( Clarke

1922: 69; Polhill 1992: 43 ) ,

85%는 플루타르코스( Plutarch ) 와 일치

한다( Haenchen 1987: 72 ). 어휘 중 상당수가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마카베오2서 같은 다른 기사에도 나온다( Schille 1984: 29 ). 이런 용례는 저자가 “양질의 교육 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Haenchen

1987: 72 ).

그리고 누가의 기사에 “성경다운”

느낌을 주기 바란 것도 드러낸다.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만이 헬라어 사용과 범위에 있어 비교할 만하다. 사도행전이 진행함에 따라 문체도 바뀐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앞쪽 장들에 서, 다양한 배경 가운데 대체로 짧은 장면과 설교를 계속 제시한다( Pesch 1986a: 34-36; Roloff 1988: 11 ).

기사가 바울을 주시하는 장면으로 옮겨 가면서, 바울이 주

요 초점이 되며 상황은 전반적으로 더 자세히 전개된다. 초반 설교의 문체가 배경에 다소 세심함을 보여 주면서 나중보다 셈어 어투의 느낌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12) 바울의 회심과,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전할 때 이 방인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 같은 중요한 장면이 다시 서술된다. 문체의 확장, 곧 내러티브, 기적 기사, 요약, “우리 섹션” 여행기, 특히 개념 신학의 대부분이 표현되는 설교는 누가가 이용한 양식이다( Fitzmyer 108 ).

1998: 96-

내러티브는 어떤 다른 양식 유형보다 주요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내러티브 흐름은 또 누가가 세상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지를 말하도록 고안된다. 가장 우호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는 어떤 사건은 따라야 할 신실함의 주요 본보기를 가리킨다. 요약은 다소 길기도 하고( 2:42-47; 31 ).

4:32-35; 5:12-16 ) ,

간단하기도 하다( 1:14;

6:7; 9:31; 12:24; 16:5; 19:20; 28:30-

어떤 요약은 성장을 알려 준다( 2:41; 4:4; 5:14; 6:1; 9:31; 11:21, 24; 12:24; 14:1; 19:20 ).

학자들은 어떤 형식보다 “우리 섹션”을 더 논했다. 이 부분이 보이는 닥치 는 대로 식의 진행은 때로는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가지고 누가가 이런 현장 에 함께 있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런 부분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반박하 는 것 같다( 로스차일드 [ Rothschild, 2004: 264-67 ] 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는 이것들을 사도 행전에 나오는 대체로 수사적인 요소이며 저자가 “청중들이 환상에 빠지도록, 곧 이들을 믿음에 대한 논 증 너머로 옮기려고” 삽입한 것으로 여긴다 ).13)

이런 항목을 삽입하고 있다면, 사도행전

11) 배럿(1998: xlv-xlviii)은 사도행전에서 공통적인 일련의 문장 구조를 나열하고 히브리어 문체에 영 향을 받은 헬라어 표현을 보여 준다. Haenchen 1987: 74-75도 참고. 12) Witherington 1998: 44 참고. 행 10; 17장에 나오는 설교에서 인용이 부족한 것을 말할 수 있는데, 거기서 이방인에게는 성경을 언급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거나 이방인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13) 이는 오직 로스차일드가 진실한 역사 기록적 관심을 반영하는 대신 설득의 수단으로서 여러 수사

37


사도행전

에서 별로 의미가 크지 않은 사건에서 굳이 자신이 목격자로 현장에 있었다 는 사실을 드러낼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장면의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이들이 원부분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피츠마이어( 1998:

100-102 ) 는

문학 창

작인 여행 내러티브에 대한 어떤 문학적 선례도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또한 이런 장치가 바다 항해에 존재한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오히려 피츠마이어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런 언급은 사도행전 저자가 묘사하는 사건 중 일부에서 함께 있었을 때를 알려 주며, 이는 헬라 역사 기록에서 소중한 “목격자 주제”인 것이다. 헹겔( 1979: 66-68 ) 은 이 작품을 “자료로서 의미 있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더 논쟁되는 것은 “우리”가 누가 자 신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격자를 나타내는지다. 저자가 누가가 아니라는 연구로서 설득력이 있는 경우로 포터( Porter 1999: 10-66 ) 를 보라. 포터 는 바울이 사도행전의 어느 곳보다도 “우리 섹션”에서 차분한 어조로 제시되 는 것에 대해 지적한다. 이것이 포터가 이 자료가 누가에게 귀속되지 않 는다고 생각한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차분한 어조는 원래의 장르 자체의 성 격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래 장르는 폭넓은 여러 세부 묘사가 나오는 완전한 기사가 아니라 요약적인 여행 내러티브다. 자료를 누가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돌리려는 노력이 제시하는 견해도 가능할 수 있겠지만, 저자가 자 신을 이 다양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으로 포함시킨다는 본문 자체의 인상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그럼 문제는 누가가 무슨 이유로 이 “우리” 자료를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에서 온, 그가 사용한 다른 모든 자료와 다른 방식으로 다루 려 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누가는 분명 자신의 요약만 자기가 기사에 삽입한 것으로 해 둔 것 같다. 여전히, “우리”라는 말로 누가가 현장에 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 가능하다. 설교의 역할은 사도행전에서 아주 중요하므로 우 리는 자료를 검토할 때 나중에 설교를 따로 논하도록 할 것이다. 누가는 생생하고 다양하게 기록한 숙련된 고대 역사가다. 그의 목표는 하나 장치에 호소하는 사례다(2004: 291). 로스차일드는 되풀이, 예언, 헬라어 조동사 ‘데이’(δεῖ)의 예언 활용, 목격자 확대, 요약하기 패턴의 다섯 장치를 조사한다. 그리고 이런 기법은 헬라 문화 역사 기 록의 전형이며 역사와 신학이 흔히 누가-행전 주장처럼 상충하는 범주로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 으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 근거는 진실한 역사를 대가로 수사를 이용한다는 견해다. “우 리 본문”에 대한 두 번째 사안은 필립스(Phillips 2005)의 연구다. 그는 “우리 본문”을 내러티브 관 점에서 분석하고 두 가지를 주장한다. (1) 서술자는 바울과 함께 속사도 시대에 속한다. (2) 이런 접 근은 서술자에게 사도들이 결부된 과거의 사건들, 특히 재산 공유와 관련 있는 사건들에 역사적 근 거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관찰에는 모두 조건이 요구된다. 실제로, 사항 (1)을 보면, 누가는 바울을 사도 시대에도 중첩되는 것으로 본 것이지만, 나중에 예루살렘에 변화가 일면서 사도들이 중심에서 벗어나면서 바울의 역할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도 시대와의 중첩은 사항 (2)에 서 말하는 과거 사도들의 행적과 대조적으로 바울이 재산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 주는 유일한 사례라는 생각을 약화시킨다. 사도행전은 결코 재산 공유를 부정적 시각에서 그리지 않는다. 사실 사도행전은 이웃의 궁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윤리를 보여 준다.

38


서론

님이 예수로, 또 예수를 따른 사람들을 통해 역사한다는 것을 청중에게 교훈 하고, 알리고, 설득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누가에게 진실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려는 로스차일드의 시도는 특정 고대 형식에 호소 한 것이다. 이런 형식은 광범한 고대 문헌 중에 이런 형식이 존재한다는 유용 한 연구 속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뢰할 수 있든 없든 종류를 불문 하고 고대 역사 기록 본문에 나오는 형식을 모두 제시한다. 따라서 이런 형식 제시로는 우리가 소유한 역사 기록 본문의 정확한 유형을 규명할 수 없다. 포 나라( 1983 ) 와 헤머( 1989 ) 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고대 전기( 傳記 ) 장르의 정교한 사용에 호소하는 사도행전의 대조적인 접근 에 대해서는, 포터( 2005 ) 의 글이 의미가 크다. 그는 고대의 역사 소설을 역사 논문에 비교하면서 “허구에 돌려지는 이들 요소 중 어느 것도 역사 기록 가설 안에 포함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Porter 2005: 8-9 ). 포터가 허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한 수사 항목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사도행전에 대해 고대 전기의 범주에 호소한다. 여기서 분류의 문제는 사도행전의 핵심 인물은 하나님이며 그의 종들 누구도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사도행전이 전기라면 사도 행전은 특정 종류, 말하자면 곧 “신전기”( 神傳記 ) 다. 이렇게 장르 경계가 모호 한 것은 사도행전의 독특함을 나타내며, 고대 역사로 분류해야 할지( 위대한 행위 이야기 ) ,

전기의 특수한 형태로 분류해야 할지( 하나님이 주관하신 구원 사역 이야기 ) 알

기 어렵게 만든다.

저자, 기원, 목적 저작, 내적 증거, 외적 증거, 비판적 논쟁 누구의 저작인가에 대한 논의 중 많은 부분이 누가복음 저작자 문제와 유 사한 것은 두 작품이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Bock 1994a: 4-7; Cadbury 1922는 누가 복음에 묶인 전승을 자세히 살핀다 ).

두 책이 같은 저자의 작품인 것은 분명한데, 두 책

의 서문이 데오빌로에 대한 언급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눅 1:1-4; 행 1:1-5 ). 내적 증거에 대해 핵심 요소는 “우리 섹션”과 이 제재를 두고 소용돌이치 는 논쟁이다( 행

16:10-17; 20:5-15; 21:1-18; 27:1-28:16 ).

이 단락들에 드러나는 그대로

보면, 저자는 사도행전에서 진술되는 일부 사건의 목격자였고 한때 바울의 동료였다( Bruce 1990: 3-5 ). 우리는 이 단원들이 닥치는 대로 사용된 것이나 “우 리 섹션”이라는 문학적 창조에 선례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정성을 반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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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는 것이라고 확인한 바 있다.14) 이 저자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목격자는 아 니다. 그는 제2세대 회심자이며, 한때 바울의 동역자였다. 외적 증거는 가장 밝히 드러난다. 바울을 알았던 후보들은 상당히 많다( 마가, 아리스다고, 더마, 누가, 디모데, 디도, 실라, 에바브라, 바나바 ).

골로새서 4장 14절은 누가를

거론하며 바울이 알고 있음을 확인해 주지만, 이 전승은 우리가 열거한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도 밝힌다. 누가는 빌레몬서 24절과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도 나온다. 여러 가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외부 전승은 누가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결합된다. 이것이 의미심장한 것은 신약에 의하면 특히 누가가 그 시기에 두드러진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Bruce 14 ) 과

1990: 6 ).

이는 핸헨 ( 1987:

대조되는데, 그는 이 전승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며 전승 자체로는 별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핸헨은 누가가 제거 과정에 의해 2세기 정보부터 나 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핸헨의 견해는 많은 후보들이 사도행전 안에 나오 는 일반 증거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 전승의 일치를 무시한 것이다. 누가 저 자일지 추측만 했다면 이런 의견 일치가 가능했겠는가? 느닷없이 누가를 저 자로 지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전승은 AD 200년까지 확고히 제자리 를 지키고 있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Justin

Martyr ) 는

『트리포와의 대화』( Dial . )

103에서, 세 번째 복음서를 인용하면서 누가를 사도들의 동역자라고 말한다. 무라토리 정경 34-39행은 『반-마르키온 서문』( Anti-Marcionite Prologues ) 처럼 누 가를 사도행전을 데오빌로에게 헌정한 저자로 일컫는다. 이레나이우스( Ag. Her. 3.1, 14 ) 는

누가를 바울의 동반자이자 바울의 복음서를 기록한 자로 일컫

는다. 이레나이우스는 또 누가를 바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 한다.15)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5.12 ) 는

사도행전

17장을 암시하면서 누가를 사도행전의 저자로 여긴다. 테르툴리아누스( Against Marcion 4.2 ) 도

오리게네스( Origen ) 처럼 에우세비우스( Eccl. Hist . 6.25 ) 를 따라 누가

와 바울을 연관 짓는다. 이런 언급을 둘러싼 논쟁은 보기에는 바울의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각각 다르게 묘사되는 것과 관계있다. 즉 누가와 바울을 연관시키는 전승에 의혹을 갖는 것이라 한다( Windisch 1922: 316-48은 이런 견해를 가장 완전하면서 가장 이르게 옹호한 사람 중 하나다 ).

마셜( 1980: 42 ) 은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도행전의 역사적

14) 그러나 Barrett 1998: xxvii-xxix 참고. 배럿은 “우리 섹션”을 여행 일정 목록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포터(1999: 10-66)는 이 부분이 저자가 사도행전에서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구별되는 자 료지만 이를 배제할 수도 저자에게 돌리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5) 누가가 계속 바울과 함께 있었다는 이레나이우스의 생각은 분명 과장인데, “우리 섹션”에 누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간단히라도 언급한 것을 보면 그렇다. 오히려 에우세비우스(Eusebius, Eccl. Hist . 3.4)는 누가가 바울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3.24에서도 언급하는데, 거기서 누가가 “나머지 사도들”과도 교류했다고 밝힌다).

40


서론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고 말한다. 필하우어( Vielhauer 1966 ) 는 바울과 사도행전의 바울 묘사 간의 의심스러운 불일치점 네 가지, 곧 자연법, 유대법, 기독론, 종 말론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 견해를 가장 간결하고 설득력 있게 진술 한다. 그는 사도행전 17장에 보이는 것처럼 누가에게는 자연신학의 여지가 있는 반면 로마서 1장에 따르면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누가 에게는 십자가가 없지만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중심이며, 누가는 사실상 바울 이 단언한 마지막-때 종말론을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바울이 직접 쓴 저작에 대해 사도행전에서 얼마나 적게 나타나는지를 말한다. 필하우어에 대해 신뢰가 가는 호응도 존재한다( Ellis

1974: 45-47; Bruce 1976;

Fitzmyer 1998: 145-47는 필하우어의 견해를 “확실히 과장된 것”으로 평한다 ).

사도행전 17장과

로마서 1장의 차이는 공통 근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면서 복음을 공유하는 데 관심을 둔 누군가의 저술( 행 17 ) 이라는 것과 이교 문화가 유일신론자의 눈 에 무엇인지에 대한 더 단조직입적인 비판의 차이다( 롬 1 ). 이 차이는 맥락 설 정 하나뿐이다. 사도행전 17장 바울의 설교는 필하우어가 제시한 것만큼 철 학적인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다. 개르트너( Gärtner 1955 ) 는 이 점을 드러내면서 바울의 설교가 유대의 자연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주석에서 강 조할 것이다. 누가는 바울처럼 십자가의 관점을 갖는다. 이는 밀레도에서 장 로들에게 한 설교( 행 온다. 모울( Moule

20:28 ) 뿐만

1966: 159-86 ) 은

아니라 마지막 만찬 설교( 눅

22:18-20 ) 에도

일부 주장처럼 누가의 기독론이 양자론은 아

니라고 한다.16) 누가 역시 최후의 종말론을 말하는데, 이것이 사도행전 3장 18-22절 베드로의 설명에서든,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정해진 예수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든( 행 10:40-42; 17:30-31 ) , 또는 사도행전 1장 11절 예수의 재 림에 대한 확언이든 그러하다. 율법에 대한 사안은 더 복잡하며 관련 주석 부 분에서 다룰 것이지만, 단서는 바울이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헬라인에게 헬라인이 되는( 고전 9:19-23 ) 식으로 상황에 맞춘다는 인식이다. 이는 강경한 유 대교 신자라면 반대했을 것이지만 바울은 전적으로 일관된 것으로 본 것이 었다. 바울이 유대인의 할례에 대해 민감했을( 고전

9장에 따라 )

것은 사도행전

16장 3절로 증명된다. ( 그리고 고전 7:19에서 바울은 할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 엘리 스( Ellis 1974: 47 ) 가 필하우어의 글에 대해 말한 것처럼, “( 필하우어가 ) 누가가 이해 한 바울을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 이 기자도 비슷하게 자주 필하우어 16) 양자론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 혹은 예수가 지상 사역 중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 의 지위로 지명되었다는 견해다(예, 예수의 세례 때나 부활 후에). 누가가 (마태와 마가와 더불어) 예수를 부활 전에 천상적 정체성을 소유한 것으로 제시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Gathercole 2006 참고. 개더콜이 원래의 역사적 배경 속에 속한 것으로 호소하는 본문 중에 논란이 되는 본문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누가의 부활 후 관점에 비추어 보면 누가가 이를 철저히 이용했을 가능 성이 크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호한 것은 분명해진다.

41


사도행전

의 누가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핸헨( 1987: 112-16 ) 은 이 작품의 알려지지 않은 저자는 바울의 동료가 아니라 후대의 기록자라고 주장한다. 첫째, 핸헨은 바울과 기록자 모두 율법 없이 이 방인에게 선교하는 것을 다루지만 누가는 바울의 해법, 곧 그리스도는 율법 의 종결이신 것을 몰랐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하지만 율법-선교 문제를 사도 행전 13장 38-39, 48-50절, 15장 2절, 21장 20-21, 28절에서 볼 수 있다. 바 울이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방식을 생각해냈다는 핸헨의 견해와 달리 누가는 이 사안이 밖에서 온 것, 즉 하나님이 이방인 선교를 의도하신 것이라 여긴다. 사도행전 13장에는 핸헨이 여기서 제시한 것과 사정이 달랐다는 단 서가 나온다. 둘째, 핸헨은 “누가의” 바울과 바울 서신의 바울 간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 한다. 핸헨은 바울이 스스로 사도로 여기지만 누가는 이를 긍정하지 않 는다고 확언하면서 시작한다. 핸헨은 누가가 바울을 기적 행하는 자이자 대 단한 연설가로 제시한다고도 말하는데, 이 두 가지를 바울이 강조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해한 것이다. 바울은 여러 본문에서 자신이 기 적을 행한 것을 말하고( 롬 15:18-19; 고전 5:4-5; 고후 4:7; 12:9; 12:12; 살전 1:5 ) , 바울의 편 지 자체로 바울의 연설가로서의 면모를 증명한다. 더욱이 사도행전이 바울을 “대단한 연설가”로 그린다는 핸헨의 주장 자체가 과장인 것은 바울이 아덴 사람들의 마음을 대부분 움직이지 못한 것, 베스도에게도 미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긴 것, 유두고를 잠에 빠지게 한 것을 고려한다면 알 수 있다. 바울 이 자신의 은사에 대해 주저한 것은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에 대해 개인이 지 나치게 공을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겸손의 증거일 수도 있다. 셋째, 핸헨은 유대교-기독교 관계에 대한 누가의 묘사가 바울과 모순 된다고 주장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예수가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유대교 의 언약에 따라 죽은 자에게서 일어났다고 설교하는 것 때문에 박해받는다. 바울의 저작과 사도행전이 밝히는 것처럼, 바울은 유대인에게 율법이나 할례 같은 관습에 대한 신념을 버리게 하기 때문에 박해받는다. 이 비판에서 핸헨 은 환원주의의 오류를 범하는데, 즉 바울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이 한 가지 문 제나 관심사에만 국한된 것처럼 본다. 바울은 십자가형을 받고 다시 살아난 메시아가 유대인에게 걸림돌이라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분명한 것으로 보 인다( 고전 1:23 ). 이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본문을 자세히 보는 것도 필요하겠 지만, 누가-바울 연관성을 부정하는 처음 주장은 언뜻 보이는 것만큼 설득력 이 큰 것은 아니다( Porter 1999: 187-206 ). 세 가지 관찰이 이 문제를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 첫 번째는 어떤 사람이 자기 견해를 드러내는 방식과 타인이 이를 관찰하고 그 사람의 논지를 개관 42


서론

하는 방식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듣는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공명되는 것이 말하는 자가 예상한 것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다. 두 번 째는 학생이 강조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언제나 선생이 강조하고 관심을 가 진 것을 그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흔히 누가가 바울이 가르친 십자가 와 믿음으로만 얻는 칭의를 무시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누가는 아마도 구 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만 강조했던 것 같다. 누가는 십자가와 칭의도 인지하고 있지만, 여기에 천착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만찬과 밀레도의 논의가 보여 주는 것처럼( 눅 22:18-22; 행 20:17-35 ) , 누가는 단순히 십자가를 주어 진 것으로 여겨 단순히 받아들인 것일 수 있다. 높아지신 예수와 이방인 선교 는 바울과 누가 모두 공유한 중요한 두 가지 주제지만, 랍비 배경을 가진 신 학자인 바울은 구원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보여 주기 위해 이 주제를 넘어 선다. 바울은 구원의 과정을 정말 자세히 설명한다( 실제로 하다 ).

어느 신약 저자보다 자세

오히려 누가는 평신도 신학자에 불과하고 이런 주제를 자세히 파고드는

데 관심이 없다. 누가에게 구원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동일시되며 예수에 대 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누가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누가의 관심과 강조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세 번째는 중요 사항에 대한 누 가의 관심이 바울의 관심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바울은 대부분 교회 안 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역 교회의 특정 사안에 대해 쓰는 반면, 누가는 보다 일반적인 사안에 대해 쓴다. 이런 요소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알지 못 했다고 평가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Marshall 1980: 43n4 ). 누가가 바울의 서신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누가는 스스 로 사도행전에서 다루지 않은 구체적인 지역 문제를 다룬 서신을 인용하거나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브루스( 1990: 54 ) 는 사도행전 기록 시기가 바울의 서신 기록 시기와 너무 가까운 시기여서 서신 입수 자체가 곤란했다고 본다. 상세 히 고려할 문제는 할례 문제와 바울이 예루살렘과 유대 기독교 공동체와 가 졌던 관계 문제다. 위더링턴( 1998: 88-97 ) 은 바울, 갈라디아서, 할례 논쟁 문제 를 다소 자세히 논하고 이 기사의 존재와 누가 저작성이 조화를 이룬다고 본다. 나도 사도행전 15장을 다루면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이 지도 자 회합이 갈라디아서 2장이 쓰인 후에 있었다고 본다( 행 15:1-35 서론 참고 ). 브루스( 1990: 52-59 ) 는 이 문제들을 중요하게 다루고 차이점 때문에 누가 저 작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특히 바울이 기꺼이 유대인에게 유대인이 되고 헬라인에게 헬라인이 되고자 한 것( 고전 9:19-23 ) 이 바울이 예루 살렘의 서원 요청과 디모데의 할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이해하는 열 쇠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외적 증거는 누가가 사도행전의 저자임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43


서론

사도행전 개요 본서에서 설정한 사도행전 개요는 사도행전 개관과 바울의 선교 여행을 단 락 구분에 핵심 요인으로 사용했다.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1:1-5 ) B. 승천과 ‌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1:6-11 ) II.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1:12-6:7 ) A. ‌ 공동체 생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열두 제자를 다시 구성 하다( 1:12-26 ) B. 오순절( 2:1-41 ) 1. 사건: 성령 강림( 2:1-13 ) 2. 설명: 성령의 임재로 예수가 주-메시아임이 드러나다( 2:14-36 ) 3. 반응: 회개하고 약속한 선물을 받다( 2:37-41 ) C. 요약: 공동체 생활( 2:42-47 ) D. ‌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다( 3:14:31 )

1. 사건: 걷지 못하는 사람의 치유( 3:1-10 ) 2. 설명: 베드로가 토라와 약속으로 예수를 전하다( 3:11-26 ) 3. 체포와 지도부의 심문( 4:1-22 ) 4. 공동체의 반응: 담대함을 구하는 기도( 4:23-31 ) E. 공동체 생활과 문제( 4:32-5:11 ) 1.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바나바 사례( 4:32-37 ) 2. 성령 기만에 대한 심판: 아나니아와 삽비라( 5:1-11 ) F. 요약: 표적과 기사( 5:12-16 ) G. 추가 박해( 5:17-42 ) 1. 체포되었다가, 하나님이 풀어 주고, 다시 체포되다( 5:17-26 ) 2. 심문과 석방( 5:27-42 ) H. ‌ 공동체 생활: 헬라 과부들을 돕기 위해 일곱 집사를 선정하다( 6:1-6 ) I. 예루살렘 공동체 요약( 6:7 ) III. ‌ 예루살렘의 박해가 메시지를 유대와 사마리아로 밀어내면서 새로운 증인 한 사람이 출현하다( 6:8-9:31 ) A. 스데반의 체포, 설교, 순교( 6:8-8:1a ) 75


사도행전

1. 스데반의 체포( 6:8-15 ) 2. 스데반의 설교( 7:1-53 ) 3. 스데반의 순교( 7:54-8:1a ) B. 박해자 사울과 말씀의 확산( 8:1b-4 ) C. 사마리아의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8:5-40 ) 1. 사마리아의 빌립( 8:5-25 ) 2. 빌립과 내시( 8:26-40 ) D. 사울이 회심하고 이른 시기에 수용되다( 9:1-30 ) 1. 사울의 회심( 9:1-19a ) 2. 사울이 다메섹에서 설교하다( 9:19b-25 ) 3. 예루살렘의 사울( 9:26-30 ) E. 마무리 요약( 9:31 ) IV. 이방인에게는 복음이 예루살렘에는 더 큰 박해가( 9:32-12:25 ) A.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두 번 행하다( 9:32-43 ) B. 베드로와 고넬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 10:1-11:18 ) 1. 베드로와 고넬료( 10:1-48 )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이방인에 대해 보고하다( 11:1-18 ) C. 안디옥 교회: 바나바, 사울, 아가보( 11:19-30 ) D. 예루살렘의 박해( 12:1-23 ) E. 요약( 12:24-25 ) V. 안디옥에서 시작한 선교와 이방인의 완전한 편입( 13:1-15:35 ) A. 첫 번째 선교 여행( 13:1-14:28 ) 1. 바나바와 사울의 파송( 13:1-3 ) 2. 바나바와 사울의 구브로 사역( 13:4-12 ) 3. 비시디아 안디옥의 바울과 바나바( 13:13-52 ) 4. 이고니온( 14:1-7 ) 5. 루스드라와 더베( 14:8-20 ) 6. 안디옥 귀환( 14:21-28 ) B. 예루살렘 협의( 15:1-35 ) 1. 문제( 15:1-5 ) 2. 토론과 결의( 15:6-21 ) 3. 답변 전달( 15:22-35 ) VI. ‌ 두 번째 및 세 번째 선교 여행: 그리스 확장과 반대 가운데 터 닦기 ( 15:36-21:16 )

A. 두 번째 선교 여행( 15:36-18:23 ) 76


서론

1.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15:36-41 ) 2. 디모데가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실라에게 합류하다( 16:1-5 ) 3. 마게도냐 사람에 대한 환상( 16:6-10 ) 4. 빌립보에서( 16:11-40 ) 5. 데살로니가에서( 17:1-9 ) 6. 베뢰아에서( 17:10-15 ) 7. 아덴에서( 17:16-34 ) 8. 고린도에서( 18:1-17 ) 9. 안디옥으로 귀환하면서 여러 지역을 거치다( 18:18-23 ) B. 세 번째 선교 여행, 예루살렘에서 끝나다( 18:24-21:16 ) 1. 에베소의 아볼로( 18:24-28 ) 2. 에베소에서( 19:1-41 ) 3. 마게도냐와 그리스를 지나 밀레도로( 20:1-16 ) 4.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다( 20:17-38 ) 5.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 21:1-16 ) VII. 체포: 메시지 변호와 로마 전파( 21:17-28:31 ) A. 예루살렘( 21:17-23:35 ) 1. 바울과 야고보( 21:17-26 ) 2. 성전의 체포와 소동( 21:27-36 ) 3. 바울이 스스로 변호하다( 21:37-22:29 ) 4. 유대 공회 앞에 선 바울( 22:30-23:11 ) 5. 바울을 향한 음모가 드러나다( 23:12-22 ) 6. 바울이 가이사랴 총독 벨릭스에게 이송되다( 23:23-35 ) B. 가이사랴( 24:1-26:32 ) 1. 바울의 첫 변론과 벨릭스의 구금( 24:1-27 ) 2. 바울이 베스도 앞에서 가이사에게 상소하다( 25:1-12 ) 3. 아그립바와 버니게 접견( 25:13-26:32 ) C. 로마로 가는 머나먼 바닷길( 27:1-28:16 ) D. 로마 방문자들: 복음을 전하다( 28:17-31 )

77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II.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 1:12-6:7 ) III. 예루살렘의 박해가 메시지를 유대와 사마리아로 밀어내면서 새로운 증인 한 사람이 출현하다 ( 6:8-9:31 ) IV. 이방인에게는 복음이 예루살렘에는 더 큰 박해가 ( 9:32-12:25 ) V. 안디옥에서 시작한 선교와 이방인의 완전한 편입 ( 13:1-15:35 ) VI. 두 번째 및 세 번째 선교 여행: 그리스 확장과 반대 가운데 터 닦기 ( 15:36-21:16 )

VII. 체포: 메시지 변호와 로마 전파 ( 21:17-28:31 )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1:1-11 ) 사도행전은 이 책을 누가복음과 연관시키고 사도행전의 주요 주제들을 소 개하는 짧은 여는 말로 시작한다. 주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살 아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2) 약속된 성령이 올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시키는 새로운 사명을 감당하게 할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는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뻗어나갈 것이다. 아 버지는 아들을 통해 성령으로 활동하여 예수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신앙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두는데, 이 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래전에 베푼 언약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이 성령에 대한 기대와 예루살렘 새 공동체 안에서 임무가 착수되는 것을 위한 장을 마련 한다. 문체는 헬라-로마 느낌의 역사서 문체다. 플뤼마허( Plümacher 66 ) 는

1979: 457-

사건과 사건 서로의 연관성에 있어서 키케로, 살루스티우스 ( Sallust,

Jugurthine War 5.1; Conspiracy of Cataline 4.4 ) ,

디도루스 시쿨루스(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prologue to book 16 ) 가 쓴 일련의 서신과 용어와 개념에서 일치하는 부분

이 있음을 언급한다. 파머( Palmer 1993 ) 역시 이런 점을 언급한다. 파머는 키케 로의 아티쿠스와( 1.19.10; 1.20.6; 2.1.1-2 ) 가족에게( 5.12.10 ) 보내는 편지들을 한 주제 나 한 인물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의 예로 든다. 파머는 이런 접근과 살루스티 우스, 에스드라1서, 마카베오1, 2서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이 단락( 1:1-11 ) 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부분은 예수가 죽음 및 부활 과 승천 사이 40일 동안 했던 활동에 대한 개관이다. 여기서 예수는 예루살렘 에서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며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한 일은 성령이 오면서 일어날 더 대단한 하나님의 역사와 상당히 다를 것임을 상기시킨다( 1:1-5 ). 둘째 부분은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사명으로의 부름으로 가라앉히는 이야기다. 예수는 사명을 위임한 후에 아버지 옆으로 들어 올려 진다. 여기부터는 성령이 새로운 사명을 감당할 권능을 부여할 것이며, 예수 는 시간 속 특정되지 않은 훗날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이 예수 자신을 통해 시 작한 일을 완성하러 돌아올 것이다( 1:6-11 ). 예수는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올 것이다. 남아 있는 모든 문제와 약속이 그때 모두 실현될 것이다. 이 도입부의 길이가 논쟁거리다. 배럿( 1994:

57 ) 은

도입부를 14절까지 잡으

면서 이 구절에 나오는 모든 것이 누가복음에서 알게 되는 것을 되풀이한 것 이라고 주장한다. 슈나이더( 1980:

188, 195 ) 는

사도행전 1장 1-3절이 도입부며

4-14절은 승천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배럿의 의견이 슈나이더의 관점 79


사도행전

보다 더 맞는 것 같은데, 3-5절을 가르기에는 주제 간 개념적 연관이 너무 긴 밀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1장 12절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는 명령에 대 한 반응을 보여 주는데, 예수가 명령한 “기다림”을 시작하고( 12절에서 ‘토테’ [ τό́τε, “그런 다음에” ] 주목 ) ( 단순히 15절에 나오는 ‘카이’ [ καί ] 를 이용하여 )

바로 유다를 대체하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따라서 나는 가벤타( Gaventa 2003: 62 ) 와 더불어 여기 기다 리는 것을 도입부의 부분으로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모인 교회의 첫 행동으 로 보는 관점을 택했다. 12-14절에 최초의 참여자들이 열거된다. 누가복음처 럼 사도행전 시작부에서 예루살렘은 활동의 중심이다. 하지만 이 책의 끝에 이르는 동안 활동 중심지는 바뀔 것이다. 로마가 중심지가 되는데, 이런 이동 은 복음이 예수가 명하신 대로 세상 속으로 얼마나 뻗어 나가는지를 생생히 보여 준다. 하나님의 활동은 이스라엘 바깥 멀리로 이동해 갈 것인데, 이는 약 속에 따른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도행전의 제목은 “사도들의 행전”이지만, 이는 주요 인물이 신 하나님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다. “성령의 행전”이 또 하나의 안이지만, 이 제목은 성령을 너무 강조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이 모든 사건들을 감독하 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가 또한 자기의 새 존재 너머로 활동하시기에 그렇다. 스토트( Stott 1990: 33-34 ) 은 “예수의 영에 의해 사도들을 통해 계속되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이라는 제목을 내놓았다. 이 제목은 훌륭하지만 또한 이 책에 나오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소극적으로 다루는 감이 있다. 더 적 절한 것은 “이 도를 위한, 주 메시아 예수를 통한, 성령에 의한, 주권자 하나님 의 행전”일 것이다. 사도들은 이 제목에 언급되지 않는데, 사도들 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간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이 도”를 말 하는 것은 이것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 누가의 가장 두드러지는 지칭어기 때 문이다. 이 제목이 하나님이 형성하였고 팽창하고 있는 새 공동체에 대한 신 적 지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제목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가리키신 방 향을 갖추는 것뿐 아니라, 이 공동체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공급과 약속에 뿌 리를 둔다는 것도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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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1:1-5 ) 사도행전은 이 두 번째 책을 누가의 첫 번째 책인 누가복음과 연관 지으면 서 시작한다. 누가복음 24장은 이런 연결에 특히 중요하다. 거기서 예수는 말 씀과 행동 모두를 수반한 사역 후, 살아나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눅 24:5-53 ). 사 도행전 이 부분에서 예수는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 한다. 제자들과 데오빌로 같은 독자들은 예수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들 수 있다. 예수의 신적 사명은 이 땅에 건재하다. 이 정도를 넘어 예수는 제자들을 교훈하여 사명을 위한 준비를 시키는 한편, 또한 이 사명을 위해 부여된 권능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을 실현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따라서 예수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라고 지시하며, 오랫동안 약속된 능력의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올 때까지 사명 수행을 시작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제자들이 해야 할 것은 정말 중요하며 이들에게 정말 많을 것을 요구할 것이기에, 하나 님은 이들의 임무를 위해 능력을 위해 갖추게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들 이 낙담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 메시지를 세상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것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을 줄 것이다. 이렇게 이 개괄은 하 나님이 새 공동체에게 하도록 요구한 것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다시 확인시 키고, 준비시킨다. 교회의 으뜸가는 과업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성령을 통 해 이룬 일을 증언하는 것을 포함해 하나님을 충실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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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및 설명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

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 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 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 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 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

|

In the first account, O Theophilus, I treated all that Jesus began to do and also to teach, 2 until the day God took him up, after he had given a command through the Holy Spirit to the apostles he had elected. 3 To them also he had presented himself living after his suffering by many proofs, appearing to them through forty days and speaking things concerning God’s kingdom. 4 And while [sharing table] with them, he commanded them not to leave Jerusalem, but await the Father’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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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 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promise, which, he said, “You heard from me, 5 for John, on the one hand, baptized with water, but before many days, on the other, you shall be baptized with the Holy Spirit.”

[1:1] 누가는 다시 헌사를 하고 자기의 복음서로 돌아가 언급한다. 다섯 요

소가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연결한다. 첫째, 누가는 첫 번째 책을 “이전 기 사”( 개역개정, “먼저 쓴 글” ) 라고 일컫는다( πρῶτον λό́γον, ‘프로톤 로곤’; “첫째”는 여기서 “이전” 의 의미를 가지므로 “이전 기사”임; Pesch 1986a: 60n4; BDF §62 ).

둘째, 데오빌로라는 호칭

은 누가복음 1장 3절에서 우리에게 소개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일치된 호 칭은 누가가 사도행전을 자신의 복음서에서 연장된 하나의 줄거리로 저술한 것을 보여 준다. 이 사도행전 도입부에 대한 모든 것은 이 연관성을 확신하게 한다. 머리말은 고대의 다른 서문 양식과 비슷하다( Philo, Good

Person 1 §§1-7 ).1)

셋째, 이런 누가복음과의 연관성은 사도행전 1장 4-5절에서도 추가적으로 확 인되는데, 이 절들은 누가복음이 시작하면서 나온 인물인 세례 요한과 연관 된다. 도입부의 네 번째 관련은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 간 일치된 승 천 기사다. 다섯째 연결점은 사도행전 1장 2절에 언급되는데, 누가복음 24장 47, 49절의 성령을 기다리고 증인이 되라는 지시를 직접 암시하는 것이다. 위 더링턴 ( 1998:

107-8 ) 은

누가복음 24장이 단축되고 ( 압축되고 ) 사도행전 1장이

40일 동안 일어난 일을 되풀이한다고 타당해 보이게 제시한다( 또한 1944, n23 ).

Bock 1996:

장문 문체의 문장인 누가복음 1장 1-4절과는 다르게, 이 구절은 단

순히 절들의 모음이다( BDF §464 ). 벅은 누가복음을 1장 3절을 다루면서( 1994a: 63-64 ) 데오빌로의 정체는 알려 지지 않지만 그는 높은 사회적 신분의 사람인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교회에 가해지는 압력으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는 이방 기독교인일지도 모른다고 제 안한다( 또한 Polhill 1992: 79 참고 ). 이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 또는 하나님에게 사 랑받는 자”를 뜻한다. 데오빌로는 후원자이거나 단순히 가장 중요한 독자일 수도 있다. 배럿( 1994: 65 ) 은 이 이름이 흔했으며 호칭에 “각하”가 붙는 누가복 음 1장 3절은 “상상의” 인물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지 적한다. 다시 말해 데오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상징적으로 지 칭하는 것이 아니다( 동의하는 Bruce 1990: 98 ).

1) 알렉산더(Alexander 1996: 73-103)는 누가의 작품이 어떻게 헬라어 관점에서 체계적 글쓰기의 중 간 수준에 해당하는지 논한다. 하지만 누구든 이런 체계적 작품과 연관 짓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 을 것이긴 한데, 사도행전은 학문이 아닌 역사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Witherington 1998: 105n2; Eckey 2000: 4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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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누가의 첫 번째 책은 예수가 행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모든 것을 다룬다. 누 가의 첫 책에 대한 이런 설명은 누가복음과의 관련을 암시한다. 누가는 예수 가 행하고 가르친 모든 것을 망라한다고 수사적으로 과장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다고 보는 Witherington 1998: 9-10, 106 ). 행위와 말씀의 결합은 ( 누가복음 4:16-30의 설교 패턴과 4:31-44의 행동이 보여 주는 것처럼 )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제다.2) 소

사 ‘테’( τε ) 는 설교와 행동을 밀접히 연결하여, 거의 이들이 한 묶음인 것을 암 시한다( “a

holy knot”, Calvin ).

라고 옮기는 )

이 소사는 종종 번역되지 않지만

( 나는 “그리고 또한”이

밀접한 연관을 나타내 준다. 예수가 그런 활동을 “시작하

셨다”( ἤρξατο, ‘에륵사토’ ) 는 생각은 당연히 누가가 자신의 두 번째 책에서 교회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동안 예수가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것을 암 시할 것이다. 사도행전 9장은 예수의 직접 관련을 기술하지만, 이 주장은 예 수의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개입보다 더 광범위하다( Bruce 1990: 98 ). 이 연관은 중요하다. 초대 교회가 말하고 행한 것은 부활한 예수가 관여한 활동에 뿌리 를 두고, 이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참으로 요점은 누구도 예수와 예수가 행하 는 역사 없이는 교회의 존재와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2] 누가복음의 기사는 승천까지 진행되는데, 승천은 신약에서 누가 혼자

만이 자세히 기술하는 사건이다. 승천은 예수의 오명을 벗기고 그를 하나님 우편이라는 권위의 자리에 앉히는 중요한 신적 행위다( 시 110:1; 행 2:32-35 ). 예수 가 “들려 올라가신” 대목은 누가복음 24장이 끝나는 곳이다( 눅 24:51 참고 ). 사용 된 표현은 하나님이 의인들을 직접 하늘로 들어 올리신 구절과 비슷하다.3) 사 도행전 1장은 이렇게 떠난 것을 돌이켜 볼 것이고, 2장은 이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 암시되는 명령은( ἐντειλάμενος,

‘엔테일라메노스’ )

이들 선택된 사도들이

앞장서야 할 전도를 명한 것을 가리킨다. 이 전도는 하나님의 역사의 다음 국 면을 대표하며, 누가복음 24장 47절이 선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해 성 경대로 성취되면서 행해진다. 누가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이다( Jervell 1998: 110 ).

따라서 회개와 죄 용서를 설파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갖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신적 계획의 일부로서 수행된다. 바나바와 바울이 사 도로 불린 사도행전 14장 4, 14절 외에는,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 ) 라는 단어 는 열두 ( 또는 유다를 뺀 열한 ) 제자를 가리킨다( Bruce 1990: 99 ). 보통의 의미에서 사 2) 비켄하우저(Wikenhauser 1961: 24)는 기적들과 수난을 주요 활동으로 말하며, 페쉬(Pesch 1986a: 61)는 하나님 나라를(행 1:3) 가르침의 핵심 주제로 언급한다. 제벨(1998: 109)은 하나님 말씀의 능 력을 증명해 보이는 것을 예수의 행위 목적으로 이야기한다. 3) 승천에 대해 사도행전의 동사 ‘아날람바노’(ἀναλαμβά​́νω, “들어 올려지는”)의 사용에 대해서는, 행 1:11, 22; 또한 왕하 2:9-11 70인역; 마카베오1서 2:58; 집회서 48:9(엘리야에 대해); 49:14(에녹에 대해); Conzelmann 1987: 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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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도는 단지 “권한을 위임받아 보내진 대리인”인데, 이런 뜻이 열두 제자가 예 수에 대해 갖는 의미다( Le Cornu and Shulam 2003: 8 ). 유대교에서 이런 대리인은 자신을 보낸 사람을 대신해 말한다. “한 사람의 대리인은 그 사람과 같다”( m. Ber . 5.5 ).

BDAG( 122 ) 는 이 용어가 단순히 “대표자, 사절, 사자”를 뜻할 수 있지

만 사도행전에서 특히 이처럼 특별한 집단을 지칭한다고( 1:2; 2:42-43; 4:33, 35, 37; 5:2, 12, 18, 40; 6:6; 8:1, 14, 18; 9:27; 11:1; 14:4; 여기부터는 장로들과 연관하여, 15:2, 4, 6, 22-23; 16:4 )

말한다. 사도들은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은 성령(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 ) 에게 권 능을 받은 증인으로서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모든 민족에게 죄 용서를 위한 회개를 전할 것이다( 눅 24:47-49 ).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 간의 연 관은 자주 나온다( 1:5, 8; 2:4; 4:8; 5:32; 8:17-18, 29; 13:4; 15:28; Jervell 1998: 110 ). 이 지점에서 성령을 속격으로 언급하는 전치사 ‘디아’( διά ) 를 어떻게 이해해 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한 견해는 예수가 성령을 통해 또는 성령으 로 이 명령을 준다는 것이다( 눅 24:49; 행 1:8 ). 다시 말해 예수의 추종자들은 성 령을 통해 사명을 부여받고 이를 위해 성령에게 권능을 받을 것이다( 행

1:5 ).

따라서 “그가 성령을 통해 명령을 주셨다”라는 번역이 된다. 두 번째 견해는 성령의 활동을 여기 열두 제자의 선택과 문법적으로 연관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성령을 통해 선택한 사도들”이 된다 ).4)

여기서 실마리는 누가복음 6장 13절인데,

이 구절에서 열두 제자의 선택과 더불어 성령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는 반면,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줄곧 설교 및 전도 활동과 연관된다( 행 4:8 ).

배럿( 1994:

킬갈렌( Kilgallen

68-69 ) 은

1:8, 16; 2:4, 17-18;

이 관계절은 이런 의미와 더 어울린다고 주장한다.5)

2000: 414-17 ) 은

세 번째 견해를 선택하는데, 속격과 결합된 ‘디

아’( διά ) 를 성령 “때문에”의 뜻으로 취한다. 이 발상은 사도들이 성령이 온다 는 약속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성령이 온다는 약속 은 납득을 요구하는데, 이 전치사의 이런 용례가 드물다는 것에 대해서다. 그 리고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는 것은 모두에게 오는 것이지 사도들에게만 오 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의미는 그럴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너무 독창적이 라는 것에 대해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해 왜 단지 열한 제자만 선택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성령이 어떻게 전도와 연관되는지의 주제는 첫 번째 독법

4) 라킨(1995: 38-39)은 성령을 통하는 명령은 의미에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핸 헨(1987: 139와 n3)은 누가가 수신자에 대해 강조된 표현을 앞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의미는 “그는 자신이 성령을 통해 뽑은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가 된다. 또한 Pesch 1986a: 61n11; Schneider 1980: 192-93 참고. 이들은 눅 6:12-16을 근거로 인용한다. 모 울(1959: 169)은 위치가 바뀐 절에 대해 말하며, 이 구절을 “널리 알려진 문젯거리”라고 부른다. 그는 독법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몰턴과 터너(Moulton and Turner 1963: 350)는 이 절의 자연스럽지 않은 순서를 지적한다. 이는 전도와의 연관을 암시한다. 5) 존슨(1992: 24)은 성령이 예수의 모든 활동에서 일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두 가지와 연관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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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을 지지한다( NET, HCSB, RSV ). 성령에 대한 언급은 사도행전에서 이 주요 등장인물이 교회의 사명에 대해 하는 역할을 강화한다. 예수와 성령은 협력하여 하나님을 대신해 작용한다. 이런 연관이 아마도 요한복음 20장 22절을 생각나게 하는가( Bruce

1988a: 31 ) ?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거의 항상 선포의 조력자이고 능력을 주는 이다( 특히 행 2:17-18 ).

이는 존슨이 주장한 것과 같은 열두 제자의 사명과 선택에 연관시키

는 것을 반대하는 논점이다. 예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명 사이에는 연속성 이 있다. 사도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계획에 다시 들어가라고 외치려 하기 때문이다( A. Robinson and Wall 2006: 30 ). [1:3] 예수의 고난( παθεῖν, ‘파데인’; 행 17:3; 26:23 ) 후에, 부활에서 승천 때까지 예

수의 활동은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ζῶντα,

‘존타’ )

것을 여러 증거로

보여 주는 것을 포함한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40일 동안 계속된다. ‘헤메 론 텟세라콘타’( ἡμερῶν τεσσεράκοντα ) 는 시간의 속격이다( BDF

§186.2 ).

“증거”에

대한 단어인 ‘테크메리온’( τεκµήριον ) 은 “무엇인가 설득력 있고 의심할 여지없 는 방식으로 알려지게 하는 것, 곧 증거”를 뜻한다( BDAG 994; Josephus, Ant . 17.5.6 §128; 마카베오3서 3:24 ).

위더링턴( 1998: 108 ) 은 이 단어가 헬라의 역사 문헌에 보존

되어 있다고 말한다( 퀸틸리아누스 [ Institutio oratoria

5.9.3 ] 는 이 단어가 증거가 결론을 암시한다

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또한 Thesaurus Linguae Graecae [ 고대 헬라 저작들의 데이터베이스 ] 를 탐색한 Mealand 1989 ).

배럿( 1994: 69 ) 은 ‘파레스테센’( παρέστησεν, “보여 주었다” ) 이 “증

거”의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 1:3처럼, “증거”에 대한 두 단어가 모두 나오는 Lysias, Against Eratosthenes 12.51 참고 ).

예수가 나타난 것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다. 이런 출현은 예수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 했다. 또 데오빌로가 필요로 하는 확증과 격려의 일환이다( 눅 1:4 ). 예수의 부활 을 본 것은 예수의 증인이기 위한 자격이었다( 눅 24:44-48 ). 예수는 이렇게 나타 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계속 교훈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예수는 증인들에 게 자신이 지금 가져오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는 사도들이 사명을 감당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Bock 2002a: 565-93 참고. 행 3:14-26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 예수의 메시와 왕국 계획을 논한다 )

40일에 대해 구약의 상징적/비유적 의미는 전혀 없다( Balz, TDNT

8:139 ).

광야

에서나 왕의 통치 기간으로서의 40년이 아마 가장 가까운 유형일 것이다.6) 6) 40일 기간의 기원을 논하면서 어떤 학자들은 이 기간을 상징적으로 만들어진 수 또는 “신성한” 수로 보려고 한다(Haenchen 1987: 141n1; Bauernfeind 1980: 20; Pesch 1986a: 62; A. Robinson and Wall 2006: 31-32 참고). 제벨(1998: 111)은 40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취의 수로 말한다(출 16:35; 시 95:10; 암 5:25; 삼하 2:10; 5:4; 왕상 2:11; 11:42; 왕하 12:1; 대하 9:30). 이 수는 포괄적인 관점에 서는 이런 식으로 기능하지만, 40년이 이런 의미를 암시하게 하는 것이 가장 흔하다. 가장 나은 설명 은 어떤 상징도 정말 명백한 것이 아니므로(“전형적인 표현은 아니므로”) 이 수가 그리스도가 나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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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이 수가 보통의 사용에서 이렇게 벗어난 것은 이 수치가 정말 구체적인 기간 일 것 같게 하며, 따라서 이 수치는 설사 문자적 의미 이상을 전달할 수도 있 더라도 뜻에 있어서 문자적이다. 이 견해는 예수가 끊임없이 40일 동안 증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이 보여 주는 출현처럼 예수가 이 기간 안에서 간격을 두고 나타 났다는 것을 말한다. 1장 5절의 ‘우 메타 폴라스 타우타스 헤메라스’( οὐ μετὰ̀ πολλὰ̀ς ταύ́τας ἡμέ́ρας ) 라는

식이다( Moulton

표현은 “짧은 기간 후에”나 “머지않아”를 말하는 방

and Turner 1963: 193 참고 ).

이는 40일과 성령이 오는 것이 날들이

촘촘히 연결된 시간열에 잘 들어맞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자기 추종자들을 가르쳤는데, 하나님 나라는 또 한 예수의 이전 사역의 중심 주제였다( Bock 2002a: 565-93 ).7) “하나님 나라”(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 ‘테스 바실레이아스 투 데우’ ) 는

메시아로 예정된 예수의 활동과 더

불어 도래하는 하나님의 약속된 통치를 가리킨다. 사도행전에서 이 표현은 누가복음만큼 지배적이지는 않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에서 32회 나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6회 나온다( 1:3; 8:12; 14:22; 19:8; 28:23, 31 ). 누가에게 이 개념은 이 미 예수의 사역 동안 도래의 표징을 보인( 눅 11:20; 17:21 ) 복음의 중요 요소를 요 약한다( 눅 9:2, 6 ). 예수의 부활은 이 나라가 전파되게 한다( 행 28:23, 31 ). 문학적 관점에서는 여기서 의도되는 것 같은 주제나 내용은 사도행전 2-4장에 나오 는 초기 설교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이 언급은 주제 도입 역할을 한다( 브루스 [ 1988a:

32-33 ] 는 앞으로 행 10:42; 17:31뿐 아니라 뒤로 돌아가 눅

24:44-47을 본다 ).

키스트메이커( 1990:

48 ) 는

예수의 출현을 10회로 정리한다. 곧 무덤에서 여

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엠마오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에게, 열 제자들에게, 열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일곱 제자들에게, 갈 릴리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500명에게,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다. [1:4] 예수는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고 식탁 교제를 하면서( 행 1:4에 대한 추가적 인 해설 참고 ) ,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τοῦ πατρό́ς, ‘텐 에팡겔리안 투 파트로스’ ) 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곳에서 전

도를 시작하라고 명한다. 이 약속은 이들이 예수에게서 들었던 것이다. 아버

기간이었다는 것이다(Conzelmann 1987: 5). 그리고 40일은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의 간격이므로 시 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진다(Williams 1990: 20; 테르툴리아누스[Apology 21.29]는 이런 사항들을 언 급하고 행 1장의 기사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7) 펠리칸(2005: 38-41)은 교회의 최초 수 세기의 많은 선생들이 이 40일의 기간을 사도들을 가르친 중 요한 기간으로 보았으며, 부활 후 “40일 복음”을 이후 교회 전승의 추정되는 전거로 여겼다. 특히, 펠 리칸은 3세기 카르타고 키프리아누스의 저술(Three Books of Testimonies against the Jews )에 나오는 그의 가르침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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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지의 약속 주제는 성령을 암시하며( 눅 24:49,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 , 누가가 자 신의 두 책에서 일찍이( 눅 3:13-17 ) 기술해 오고 특히 사도행전 2장, 10장, 11장 에서 전개한 주제다. 이들 장에서 성령은 오순절에 믿음의 공동체에, 고넬료 에게, 또 이방인에게 임한다( 각각

행 2:16-39; 10:34-45; 11:15-17 ).

사도행전 1장 5절

은 누가복음 3장 15-17절과 세례 요한의 말과 유사한 가르침을 언급할 것 이다. 예수는 이 가르침을 분명 강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도행전 1장 4-5절 은 예수가 사도들에게 이를 가르친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에 대한 구약의 출처는 요엘 2장 28-32절, 이사야 44장 3절, 특히 32장 15절( “위에서부 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 이다.

이 전거들은 이 믿음은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오래된 신적 약속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신앙이 긴 세월 속에서 건재하길 원한 선조들에게도 중요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Witherington

1998: 109 ).

26; 15:26-27; 16:7-15; 엡 1:13 )

성령과 약속 간의 연관은 신약에서 자주( 요

14:16-17,

나온다( Bruce 1990: 101 ). 참으로 성령은 로마서 5-8장이

가르치는 것처럼 복음에 의해 받게 되는 중요한 선물이다( 롬 5:5; 8:2-17 ). 이 명령의 시점은 명시되지 않는다. 이 명령은 40일 동안 언제라도 올 수 있었는데, 특히 누가복음의 결말이 축약된 것이라면 그렇다 ( 같은 Harrison 1975: 37과 Larkin 1995: 39; Bock 1996: 1929의 논의 ).

의견으로

사도행전 1장 8절과 함께 본

이 명령의 요점은 이 사명은 약속된 것 곧 성령이 오신 후에 예루살렘에서부 터 개시될 것이라는 점이다( 행 3:25-26 ). 요한복음 14-16장에서 예수는 성령에 대해 두드러지게 말한다. 권능 부여와 함께( Rackham 1901: 5 ) , 하나님 나라와 예 수를 전하는 사명이 착수될 수 있다. 영향력 있는 사역은 하나님의 감독과 권 능 부여를 필요로 한다. 전도 명령은 교회에 방향을 제시하며 성령은 권능을 준다. 이 절의 끝은 예수가 사도들이 전에 자기에게 들은 것을 상기시키는 것 처럼 직접 지칭하는 것으로 바뀐다. [1:5] 예수는 이들이 왜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구원사적인 면에

서 상기시키고 설명한다( ‘호티’ [ ὅτι ] 는 Schneider 1980: 200 ).

설명을 나타낸다. 곧 “왜냐하면” [ 개역개정에는 없음 ] ;

이는 대조법이 사용된 ‘멘……데’( μὲν…δέ,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

이 있었고……‘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오는 것이 있다” ) 를

포함한다.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

적이고 예비적인 씻음이었다. 이 세례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는 것에 준비가 된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성령의 선물은 메시아가 이미 왔고 새 시대 가 시작되었다는 표징이었다( 눅 3:1-17, 특히 3-6, 16절; 막 1:8; 마 3:11; 행 1:8; 2:4, 16-39 ). ‘엔 프뉴마티’( ἐν πνεύματι, “성령으로” ) 는 현재 절에서 도구적이다( Barrett 1994: 74 ).8) 8) 눅 3장, 요한의 세례, 성령이 오는 것에 대해서는 Bock 1994a: 287-89, 324 참고. 슈나이더(1980: 200)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에 대한 헬라어 표현이 문법 면에서 눅 3장보다 막 1:8에 더 가 깝다고 지적한다. 바우어른파인트(Bauernfeind 1980: 21)는 표현 측면에서 마가의 방식과 연관된다

89


사도행전

누가복음만이 요한이 자신이 메시아인지 질문을 받는 대목에서 말하는 이 약 속을 포함한다. 이렇게 누가복음에 나온 요한의 대답은 사람이 메시아가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려 준다. 알게 되는 때는 성령의 세례가 오는 때 이다. 제벨( 1998:

113 ) 은

이 세례를 “종말론적인 구원 및 심판 세례”라고 옳게

일컫는다. 이 세례는 심판에서 구하고 보호하는데,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 것 뿐 아니라 깨끗해진 결과로 하나님이 내주하는 것도 나타낸다.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넘어가는 다리가 예수가 성령을 오게 할 때 가로놓인다. 예수의 사 역 자체가 연결 고리다. 예수는 여기서 이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또한 이들에게 성령에 대해 이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눅 12:12는 눅 24:49처럼 이 개념을 갖는다 ). 이 강조점은 사도행 전 2장에서 베드로가 하는 설교의 요점일 것이지만, 베드로는 살아난 메시아 예수가 아버지에게 성령을 받아 이 성령을 수여하였다는 명백한 관계를 덧붙 일 것이다( 행 2:32-33 ). 사도행전 1장에서 아버지가 이 일을 하는데, 이는 아버 지를 예수의 활동의 단초로서 강조하는 경향에서 나타난다. 아버지가 약속한 새 시대의 세례는( 4절 참고 )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성 령은 이들에게 사명을 위한 권능을 부여할 수 있도록, 이들을 정화하고 이들 에게 내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겔 36:25-26; 1QS 4.21은 물로 씻는 것을 정화하는 것으로 그 린다; Conzelmann 1987: 6 ).

사도행전 2장 38절은 세례와 회개를 연관시킴으로써

이런 정화 이미지를 암시한다. 마셜( 1980:

58 ) 은

정화만이 아니라 권능도 요점이라고 말한다( 행

1:8도 이러함 ).

이는 성령이 신자와 함께 머무는 것으로 그려질 때 성령이 내주하거나 성령 을 입는다고 흔히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다( 입는다는 은유에 대해 중요한 구절인 눅 24:49 참고 ).

누가는 요한-예수 대조를 사도행전 11장 16절과 13장 24절에서 반

복한다. 사도행전은 여기서 또한 누가의 유아 내러티브( 눅 1-2장 ) 의 요한-예수 대조를 반영한다. 누가는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반복하는데, 메시아가 현존하며 새 시대의 복이 도래하는 표징으로 성령이 온다는 가르침은 누가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신약 관점에서 성령이 오는 것은 새로운 것이고 이전까지는 누릴 수 없던 것인데,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열두 제자나 이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또한 Rackham 1901: 5 참고 ).

요 7:39;

스토트( 1990: 40 ) 은 이 사명을 위한 필수적인 네 가지를 언

급한다. 곧 증인으로의 위임, 전도를 지휘하고 승천한 주, 이 임무에 대한 사 도들의 중심적인 역할, 이들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이 오는 것이다( 또한 R. Longenecker 1981: 353-55 ).

는 점에서 전승의 활용에 대한 증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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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제자들은 이 사건을 종말이 완전히 오는 것에 대한 징조로 인식하며, 이는 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에 대한 이들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수 가 이 사건이 펼쳐지면서 종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이들의 책무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비추실 곳은 여기다. 사도행전 3장의 설교는 사도들이 여기서 배운 것을 어떻게 종합하는지 보여 준다. 예수는 “이 많지 않은 날 후 에”라고 말하여 기다리는 것이 길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9) 참으로, 사도행 전의 연대기에 따르면 기다린 것은 약 10일인데, 오순절이 유월절에서 50일 후며, 예수는 40일 동안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도행전 1장 1-5절은 예수의 부활과 예수가 사도들이 사명을 위해 권능 받는 것을 마련하는 것을 다시 살핀다. 사도들은 예수의 선택, 계 시, 위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 약속에서 은혜를 입는다( Stott 1990: 35-37 ). 이들은 새 시대의 하나님의 영의 권능 부여 없이는 나아갈 수 없다. 아버지에 게서 오는 이런 공급은 오래전 약속된 것이다. 이 믿음은 오래된 근원을 가 진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나라 이야기 를 끝내지 않았고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예수 는 일으킴을 받아 살아 있고, 사도들이 자기에게 받을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 요한 은혜를 내릴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는 이들에게 이들의 사명을 말할 준비가 되면서 승천이 보여 줄 사항이다. 이것 들이 다른 한 사항 곧 예수가 할 남은 일과 함께 도입부의 다음 부분의 목표 들이다. 예수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시작한 것을 완성하러 하늘에서 돌아오는 날 이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도입부는 이 책의 핵심 주제를 강조할 뿐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런 선 언은 이 부분의 중요한 적용이다. 곧 예수가 부활하고 성령이 오는 것은 우리 에게 하나님이 역사하며 구원 계획에 차질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킨다. 성 령이 오고 내주하는 것은 이런 결론을 보증한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사명을 위임받는 것은 교회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주요 목적이다. 사도 시대 이래 다 른 신자도 예수의 선택, 자기 계시, 위임, 성령 베풂의 수혜자다. 그러나 우리 경험의 근원은 예수가 부활하여 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 며, 제자들은 이 예수를 직접 대면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9) 배럿(1994: 75)은 ‘우’(οὐ, “아닌”)가 ‘폴라스’(πολλά​́ς, “많은”)와 더불어 “약간”의 개념으로 바뀌며, 바로 이어지는 지시대명사는 사실상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치사 ‘메타’(μετά,́ “~후에”)와 관계 있는 문법과 어순에 대해서는 BDF §433.3 참고.

91


사도행전

추가 주석 1:1. ‘멘’( μέ́ ν ) 다음에 대응하는 ‘데’( δέ ) 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드물지 않다(3:13, 21; 21:39; 27:21; 28:22; Barrett 1994: 65). 이 ‘멘’을 번역하지 않은 채로 두는데, ‘멘’은 보통 “한편”을 뜻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용이하게 번역되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문두 의 소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1:2. 여기에 서방 전승과 B 사본 사이에 본문 비평적 차이가 있다. 이 절의 끝에 사본 D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언급하고 승천을 나타내는 동사를 이동시켰다. 배 럿(1994: 67-68)은 우리의 번역이 반영하는 B의 짧은 독법을 지지한다. 1:4. 동사 ‘쉬날리조’(συναλίζω )의 뜻은 의견이 분분하다.(LSJ 1694; BDAG 964; Eckey 2000: 45n125).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와 소금을 먹다”로 번역되며 따라서 식탁 교제를 나 타내는 것으로 보인다(Barrett 1994: 71). 어떤 학자들은 이런 의미가 문맥에 잘 맞지 않고 다 른 데서도 입증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와 머물다”의 의미를 택하고(RSV가 이러함) 이 단어를 이런 다른 의미를 갖는 ‘쉬나울리조메노스’(συναυλιζόµενος )의 변형으로 본다. 누가 의 어휘 목록은 식탁 동석의 선택을 지지하는 것으로서 사도행전 10장 41절에 호소 한다(BDAG 964 §1 참고). 따라서 나는 이 단어를 이에 맞춰 옮겼다(HCSB와 NET의 해설들 참고). 이 언급은 누가복음 24장 41-43절이나 요한복음 21장 9-14절을 돌아보는 것일 수 있 는데, 복음서들이 이 전승이 암시할 수 있는 이런 여러 장면을 진술하기 때문이다. 이 언급은 이러한 이전의 식사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이 기간의 끝 무렵의 최후 지시다(이러 한 Haenchen 1987: 141). 슈나이더(1980: 199)는 이 절이 마지막 출현으로서 사도행전 1장 2절과 관련 있으며 기사에서 여담 역할을 하는 3절과도 연관된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는 또 한 이 장면을 누가복음 24장 41-43절과 연관 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하는데, 이유로 서 여기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점에서 논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핸헨이 맞다면 이 언급은 사도행전 1장 6절을 예비하는 것이지만, 4절을 시작하는 ‘카이’(καί )는 3절 을 돌아보는 것이지 새로운 사건을 나타내는 것 같지 않다. 음식을 드는 것은 예수 부활의 육체 적이고 물질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예수의 출현들은 단순히 상상이나 환영이 아니었다(Bruce 1988a: 34). 이런 지시가 40일 기간의 끝 무렵에 있던 것으로 보는 것은 이 지시를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전의 출현들로 여겨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비켄하우 저(1961: 26)는 이 식사의 때와 장소는 확증하기 어렵다고 맞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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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A. 승천까지 기록한 첫 번째 책에 대한 회고 ( 1:1-5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1:6-11 ) 이 장면은 유대인과 제자들이 고대한 종말에 대한 우선 사항과 일정을 다 시 구성한다. 이 장면은 또한 선교를 언명하는데, 선교는 사도행전에 윤곽을 제공하며 교회의 근본적 소명을 나타낸다. 예수는 사명을 설명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지도를 필요로 하는 제자들에게 예정 사항을 분명하게 밝힌다. 7절에서 예수는 6절에서 받은 이스라엘을 위한 왕국의 회복이 목전 에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 가 이 사건을 언제로 정했는지는 이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의 대답은 이 회복이 일어날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다만 그 시기가 밝 혀지지 않을 것이며 제자들은 그 동안 수행할 다른 소명이 있다는 것을 확언 한다. 메시아가 오는 것이 미래의 회복과 이렇게 분리되는 것은 교회가 그리 스도의 재림이라고 일컫게 되는 사건에 대한 여지를 만든다. 유대교가 동시 에 올 것이라고 믿어 온 것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둘 사이에는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은 8절에서 규정된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결과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마침내 세상 끝 까지 증인이 될 수 있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이 계획을 언제 성취할지 걱정하 는 대신에, 오는 구원의 소식을 들고 세상으로 가야 한다. 이 장면은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 획을 함께 진행하기 위해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옆으로 들어 올려지며, 두 천 사가 나타나 예수가 떠났으며 이렇게 다시 올 것이라고 설명한다( 9-11절 ). 이 보증하는 말은 꾸짖는 어조가 섞여 있는데, 이들이 예수가 하늘에서 하나님 의 존전에 머물기 위해 떠난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예수가 떠난 것처럼 다시 올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과 연관된 다시 올 것에 대한 소망은 바울이 위로의 말을 하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다시 확신시키는 것이다( 살전

4:13-18 ).

여기 누가의 목적도 비슷하다. 예수는 볼 수

있게 같이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 진척되고 새 공동체 는 예수가 다시 올 때까지 수행할 임무가 있다. 이 단락의 요점은 사실상 명 령이다. 곧 다시 오는 것을 기다리며 그저 위를 쳐다보며 가만히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95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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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및 설명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 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 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 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 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 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 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 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So, on the one hand, when they had come together, they asked him, “Lord, will you at this time restore the kingdom to Israel?” 7 But he, on the other hand, said to them, “It is not for you to know the times or seasons that the Father has set through his own authority, 8 but you sha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comes upon you, and you shall be my witnesses in Jerusalem, in all of Judea and Samaria and as far as the end of the earth.” 9 And after he said these things, as they were looking, he was lifted up and a cloud received him from their sight. 10 And while they were gazing into heaven as he departed, behold, two men stood by them in white robes, 11 and they said to them, “Men of Galilee, why do you stand looking into heaven? This Jesus, the one taken from you into heaven, this one will come in a manner similar to the way you saw him depart into heaven.” 6

[ 1 : 6 ] 사도행전은 여기처럼 단순히 내러티브를 재개하기 위해 ‘멘……

데’( μὲν…δέ ) 구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BDF §251 ). 이 구문은 번역이 보여 주 는 것처럼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의 대답 사이의 대조를 나타낸다. 예수가 성령이 올 것이라고 알리는 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회복의 때가 왔다고 생각하게 한다( Jervell 1998: 114 ). 그러나 성령이 오는 것은 그 나라 에 대한 약속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3장은 그 순서를 분명 히 할 것이다. 아무것도 예수의 이전 담론의 주요 대상인 사도들이 2절과 다르게 바뀐 것 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장 8절의 약속과 성령이 공급한다는 특징은 이들이 전체 공동체를 대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 도행전 1장 12절은 우리에게 이들이 함께 모여 이런 예고를 듣는 것이 예루 살렘 바로 밖에 위치한 감람산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해 준다. 누가복음 96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24장 50절에서 승천의 장소로 언급되는 베다니는 감람산 동편에 있다( Bock 1996: 1944 참고 ).

이렇게 사도들은 이스라엘 회복의 때가 왔는지 알기 위해 질문을 한다. 직 접적인 질문은 ‘에이’( εἰ ) 와 함께 제시되지만( 로버트슨 [ Robertson 1934: 916 ] 은 ‘에이’가 셈어와 70인역 문체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또한 Moulton and Turner 1963: 333 ) ,

번역되지 않

는다. 어휘 ‘크로노’( χρόνῳ, “시간” ) 는 시간의 특정한 간격을 나타낸다( Barrett 1994: 76 ).

구약의 소망이 대체로 그러는 것처럼, 많은 유대 문헌이 마지막 때에 이

스라엘이 엄청난 복의 장소로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렘 16:15; 23:8;

새 언약이

언급되는 31:27-34; 겔 34-37; 사 2:2-4; 49:6; 암 9:11-15; 집회서 48:10; 솔로몬의 시편 17-18; 에녹1서 24-25; 토비트서 13-14; Eighteen Benedictions 14 ).1)

이 질문은 메시아 대망을 품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은 이 희망을 생생하게 표 현한다( 1:69-74; 2:25, 38 ). 유대교에서 논쟁되는 것은 이스라엘 중심성이 이방인 들에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여부다. 마지막 때는 열방의 구원과 심판 중 어느 것과 함께 올 것인가? 제자들은 여기서 선교의 면까지는 생각하지 않 는다. 이들의 질문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민족적 관심을 반영한다. [1:7] 7-8절에 나오는 예수의 대답은 그 나라가 한 날에 이스라엘로 회복

될 것이라는 질문 전제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Barrett 1994: 77 ) 이 질문의 초점을 바꾼다. 이 책이 진행되면서 이스라엘의 정의가 바뀌는지는 논쟁거리다( 배럿은 그렇다고 한다 ).

이런 해석은 스토트( 1990: 41 ) 와 대조되는데, 스토트는 이 질문에

오류가 가득하다고 여긴다. 스토트의 견해로는 제자들은 회복에 대해 묻지 말았어야 하는데, 회복은 정치적 나라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이 스라엘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어야 하는데, 이는 민족적 나라를 고려하게 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에”에 대해서도 물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나라의 즉각적인 수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 모든 일이 언제 일어 날지 과도하게 관심을 가진 것을 제외하면 예수의 대답에 이들이 질문한 것 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은 없다( Le

Cornu and Shulam 2003: 15 ).

스토트의

다른 주요 주장은 신약에 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즉 (1) 신약이 쓰일 때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 있으며 (2) 예수의 통치는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 예기되는데 단지 그 땅에 초점을 맞출 이유가 있겠는가? 사실 이스라엘의 정의나 이스라엘에 대한 기대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 1)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µι, “회복하다”)에 대해서는 이 단어가 종말에 대한 전문 어휘인 말 3:23(70인역, 영문본은 4:6); 단 4:36(70인역) 참고. 행 3:21은 이 관념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 49:6은 어휘는 없고 개념만 있다.

97


사도행전

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지금 민족적이나 율법적 강조 속에서가 아니라, 종말 의 인물 곧 예수 안에서 중심이 되고 있다.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예수는 강 복의 중보자로 전해진다. 우리는 사도행전 내내 이스라엘의 역할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이 소망이 유대인의 기대, 곧 신적으로 약속된 회복 소망의 자 연스러운 확장으로 설교되는 사실을 볼 것이다. 이런 것이 어떻게 자세히 진 행되는지는 사도행전 이야기를 구성하는 부분인데, 특히 이방인이 포함되는 방식을 이해하게 하는 사도행전 10-15장이 그렇다. 로마서 9-11장은 새 시 대에 나타나는 이런 새로운 강조점이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없애거나 하나 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이 민족을 대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데, 곧 바울은 이 장들에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약의 약속에 따라 민족 이스라엘에 관심을 갖는다( 폴힐 [ 1992: 84n27 ] 은 이 선택지들을 보여 준다. 1:7에 대한 추가 주석 및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그 견해 참고 ).

일반적인 유대인의 대망

면에서 바뀐 것은 은혜의 범위에 대한 강조다. 사도행전은 이스라엘 단독에 대한 관심이 복음의 요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일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모두에게 전파될 것이며 모두를 위한 것인데, 예수는 모든 이의 주님이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 역할 등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회복과 그때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대답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부인도 아니다( 반대 의견의 Haenchen 1987: 143 ). 그리고 종말이 언제 오는지도 전혀 언질을 주지 않는다. 예수는 단지 종말이 오기까 지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다. 아버지가 자신의 권한으로 정한 때 나 시기( χρόνους ἢ καιρούς, ‘크로누스 에 카이루스’ ) 를 이들은 알 수 없다. 6절의 구체 적인 때에 대한 질문은 7절에서 모든 때와 시기와 관련해 대답한다( Jervell 1998: 115 ).

‘우크 휘몬 에스톤 그노나이’( οὐχ ὑμῶν ἐστιν γνῶναι ) 라는 표현은 이 사안이

이들이 관심 가질 바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BDF

§162.7 ).

배럿( 1994:

78 ) 은

“아무도 언제……다윗 가문의 나라가 이들의 자리에 다시 세워지고 악한 나 라들이 완전히 파괴될지 모른다”라는 Mekilta Exodus 16.32( 59b ) 의 구절을 인 용한다. 이는 알려지지 않은 회복과 희망의 때에 대한 중요한 유대교 관점을 훌륭히 요약한다. 예수는 여기서 이 유대 문헌 이상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때 를 모를 뿐 아니라, 이때는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문제여서도 안 된다. 하나님 이 언제 종말을 가져오기로 결정하든 사람은 예수가 다시 오는 것에 준비되 어 있어야 한다. “때”와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동의어일 것이며 전통적인 어구 를( 단 2:21; 지혜서 8:8; 살전 5:1. 70인역 본문은 이 순서가 반대이긴 하다 ) 반영하는 것으로 보 인다 ( Schneider

1980: 220 ) .

하지만 누가복음 21장 24절에 나오는 이방인의

“때”( καιροί, ‘카이로이’ ) 용례와 6절에 나오는 마지막 “때”( χρόνος, ‘크로노스’ ) 에 대한 98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구체적인 질문을 고려할 때, 첫 번째 어휘( χρόνους, ‘크로누스’ ) 가 특정한 기간을 나타내고 두 번째 어휘( καιρούς, ‘카이루스’ ) 가 더 넓은 시간 틀을 나타낼 수 있다. 요점은 분명한데, 즉 약속이 성취되는 때는 어떻게 생각해 보든지 하나님이 정하며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막 13:32와 평행 구절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 아버지는 자 신의 주권적 권한에 따라 그때를 “정해”( ἔθετο, ‘에데토’ ) 놓았다. 중간태의 이 동 사는 무언가를 “확정하다”나 “확립하다”를 뜻한다( BDAG 1004 §4b. 고전 12:18은 비슷 한 참뜻을 갖는다 ).

[1:8] 제자들의 소명, 관심, 임무는 종말의 시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베풀 권능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땅의 끝까지 예수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2) 성령은 권능( δύναµιν,

‘뒤나민’ ) 과

관계있는데, 이 단어는 여기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행한 일에 대한 메시지 의 증거가 되면서 담대히 전하기 위해 권능을 받는 것을 나타낸다. 바울은 로 마서 1장 16-17절에서 복음에 대해 비슷하게 말한다. 곧 바울에게 있어, 복음 에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하는 방식으 로 살아가는 능력을 준다. 단어 “권능”은 사도행전에서 열 번 등장하는데, 때 로는 권능으로 인한 기적이나 결과를 나타내고( 2:22; 3:12; 4:7; 8:13; 10:38; 19:11 ) 다 른 경우에는 권능의 부여를 의미한다( 4:33; 6:8 ). 부여된 권능은 말과 행동에서 드러난다( Jervell 1998: 115: “기사와 말에 있는 기적적인 능력” ). 이렇게 이들은 예수의 “증인”( μάρτυρες, ‘마르튀레스’ ) 이 될 것이다. 이런 이해의 근원은 구약의 증인 개념에 있다( 민 35:30; 신 17:6-7; 사 43:10-12; 44:8-9 ). 교회 내의 실재적이거나 잠재적인 행동을 논하는 본문처럼( 고후 13:1; 딤전 5:19 ) , 예수는 법 적인 의미의 증인도 말한 것이다( 마 18:16 ). 이런 의미에서 증인은 입증 가능한 증언을 통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증하는 것을 돕는 사람이다. 증인은 이런 사람으로서 단지 주관적이고 사적인 인상을 받은 사람에 머물지 않는다. 이 렇게 증인이 객관성과 사실에 근거하여 갖는 특성은 사도행전 1장 21-22절 에서 유다를 대신하는 자에게 예수의 사역과 부활을 직접 경험한 것이 요구 되는 이유다. 이 본문은 누가복음에 나온 이 단어의 용례 이면에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경험하고 부활 후 나타난 예수를 본 사람( 1:22 ) 을 가리키는 핵심 용어다. 이 경험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 해 행한 일을 직접 보고 증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눅 24:48 ). 제자들이 직접 실제로 예수와 그의 부활을 경험한 것은 이들에게 증인의

2) 세상의 “배꼽”이나 중심이 되는 예루살렘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는 겔 5:5(나라들에게 둘러싸인 가운 데에 있는 예루살렘); 38:12; 에녹1서 26.1(세계 지리의 중심에 있는 예루살렘); 특히 희년서 8-9 참고(J. M. Scott 1995: 99-103; Le Cornu and Shulam 2003: 19). 개념적으로 사 2:2-4; 미 4:5; 신 32:8 참고.

99


사도행전

자격을 주지만, 성령은 이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담대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은 베드로에게 임하는 첫 권능 부여 를 보여 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사람이었다가 변화를 겪 는다. 신약에서 “증인”이 35회 사용된 것 중에서 13회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사도행전 외에 신약의 용례는 단순히 무엇을 보거나 경험한 사람이라는 넓은 의미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용례 대부분 이 용어의 일반적 용례보다 의미의 폭이 좁고 이렇게 특별한 핵심을 가진다( BAGD 494 §2c; BDAG 620; 행 1:22; 2:32; 3:15; 5:32; 10:39, 41; 13:31; 22:15; 22:20에는 이런 좁은 의미가 있다 ).

음 24장 47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Strathmann, TDNT

이런 용례의 근원은 누가복

4:492-93 ). 이 증언은 예루살렘

에서 시작될 것이지만, 유대와 사마리아로, 세상 끝으로 널리 퍼질 것이다. 사 도행전 1-7장에서는 예루살렘이, 8-10장에서는 유대와 사마리아가 중요한 곳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1-12장에서 짧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복음 이 널리 퍼질 것인데, 먼저 안디옥에서 시작되는 선교에 초점이 맞춰지고 마 침내 바울을 통해 로마에 이를 것이다. 1장 8절은 이런 의미에서 누가가 즐겨 쓰는 지리적 확장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면서 사도행전을 시작한다. 이들은 이 계획의 끝을 걱정하는 대신 메시지를 땅의 끝까지 가지고 갈 준 비가 되어야 한다. “땅의 끝”( ἐσχάτου τῆς γῆς, ‘에스카투 테스 게스’ ) 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3) 이 어구의 기원은 구약에 있다( 사

48:20; 49:6; 렘 10:13 ).

이 어구가 스페인을 가리키는가( 1 Clem. 5.7처럼 ) ? 그러니까 땅 전체를 포함한 것 인가( 같은 견해로 Witherington 1998: 110-11 ) ? 4) 아니면 ( 솔로몬의 시편 8.15에 근거를 둔, 폼페이 우스의 )

로마를 가리키는가( Conzelmann 1987: 7 참고 ) ? 아니면 인종적인 함의가 담

겨서 이방인을 고려하는 것인가? 바울이 로마에서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들 과 관계한 것은 마지막 견해와 반대되는 증거다. 무어( Moore 1997: 389-99 ) 는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서 팔레스타인과 에디오피아 또한 가능한 곳으로 제시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다 ).

파오( Pao

2000: 93 )

또한 지리적이든 민족적이든 가능한 모든 목록을 보여 준다. “땅의 끝”은 에 디오피아,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유대인, 로마, 스페인, 전 세계, 이방인, 이 땅 의 가장 먼 끝 중 어디인가?5) 3) 헬라어 어구는 단수, 곧 “땅의 끝”이다. 더 관용적인 영어 복수와는 다르지만, 이 주석에서는 문자적 번역을 채택했다. 4) 마셜(1980: 61)과 제벨(1998: 116)에 따르면, 로마는 “유대인 전도”의 “첫 국면”이거나(Marshall) 목 표를(Jervell) 끝내는 곳이지만, 전체 선교의 목표는 더 넓고 로마에서 시작해 뻗어 나간다. 5) 슈나벨(2004: 372-76)은 각 입장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경우를 연구하고서 이 땅의 가장 먼 지역 을 택한다. (서쪽으로는) 골-브리타니아-스페인, (북쪽으로) 극지방-스키타이, (남쪽으로는) 에디오 피아, (동쪽으로) 인디아와 중국 너머를 포함한다. 슈나벨은 이런 의미를 지지하는 스트라 본(Strabo), 필로스트라토스(Philostatus), 필론(Philo)을 언급하지만, 이들은 모두 헬라 학자거나 헬 라어를 쓰는 유대인 저자들이다.

100


I. 서론: 예수가 아버지에게 승천하면서 사명을 주다 ( 1:1-11 ) B. 승천과 마지막 유언: 지금의 제자들에 대한 약속과 다시 오겠다는 약속 ( 1:6-11 )

사도행전은 로마에 관심을 보인다( 19:21; 23:11; 28장 ). 사도행전 안의 문학적 견 지에서, 사도행전 27장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긴 바다 여행 뒤에 로마를 언 급하는 것은 메시지가 이제 이방 세계의 거점에 도달했으며 그곳에서 모든 곳으로 전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Barrett

1994: 80 ).

이렇게 “땅의

끝”을 로마로 특정하든 더 넓게 세상 끝을 말하든 해석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이사야 49장 6절이 배경일 수 있는데 정말 그렇다면( 행 13:47 참고 ) , 요점 은 메시지가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메시지가 로마에 이른 것은 이 일의 중요한 부분이다 ).

무어( 1997 ) 는 누가가 이사야서를 광범위하게 이용하기에, 이사야서를 암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언급한다. 무어는 누가-행전에서 이사야를 암시하는 본 문 18개를 거론한다. 파오( 2000:

84-86, 92-95 ) 는

이 견해를 지지하고 이사야

49장 6절에 대한 암시를 확실한 것으로 여기며, 사도행전 13장 47절과 이사 야서에서 이방인에 강조를 두고 있는데 거기서 에디오피아, 이스라엘, 디아스 포라 유대인에 대한 언급은 배제된다고 말한다. 파오는 또 이 표현이 헬라-로 마의 표현에서 흔한 어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 표현은 70인역에 다섯 번, 누가복음에 두 번 나오고 이사야나 사도행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헬 라 문헌에서는 나오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 하지만 헬라어 자료에 나오는 이 표현의 용례 에 성경을 제한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

무어( 1997:

48:20; 62:10-11; 렘 16:19; 38:8 [ 영문본은 31:8 ] ) 을

393 ) 는

70인역 본문( 사

45:22; 49:6;

들면서 이사야 49장 6절을 핵심으로

본다. 이 70인역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모든 땅으로의 확장이다( van 1966 ).

솔로몬의 시편 1.4에서는 ‘파산 텐 겐’( πᾶσαν τὴ̀ν γῆν,

“모든 땅” ) 과

Unnik

평행을

이루는데, 이는 두 표현이 같거나 거의 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파오는 헬라 자료에서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페인을 배제한다. 슈나벨( 2004: 375 ) 은

사도행전에서는 스페인에게 역할이 없다고 덧붙이며 그래서 제국의

경계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기로 한다. 이렇게 이 표현은 본래 이방을 가리키 도록 의도되었으며, 동시에 그 중심으로 로마를 암시하거나 세계를 나타내는 것 같다. 무어( 1997: 397-98 ) 의 표현이 훌륭한데, 결국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후 퇴한다는 암시 없이 로마가 “땅의 끝을 나타내고 복음이 이방인 세계로 확장 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이 어구에서는 의도적으로 세계에 있는 이방인 을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땅의 끝”이라는 어구는 범위에 있어서 지리적이고 민족적이며 모든 민 족과 지역을 포괄한다. 슈나벨( 2002: 369=2004: 375 ) 이 말했듯이, “제자들의 사명 은 세계 선교다.” 하나님 나라 메시지는 점점 이동하고 모두를 아우를 것 이다. 교회의 소명은 방향에 있어 선교적이고 초점에 있어 종말적이어야 한다. 세계는 마지막 목표며, 지금 선교에 힘쓰게 하고 선교의 초점을 제공하 101


사도행전

는 구원 완수를 가리킨다( Stott 1990: 44 ). 이것이 논란을 다 없애지는 않는데, 문자적 수준에서 이방인이 포함되는지 는 사도행전의 현 시점에서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독자는 예수 나 누가가 의도한 것과 이 표현이 처음에 어떻게 이해되었을 것인지가 반드 시 동일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열려 있어야 하고, 또 이 사실에 민감 해야 한다. 제자들은 처음에 아마 모든 곳에 있는 유대인을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에게 이 표현은 아마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내다보게 했 을 것이다. 이런 이중적 의미가 문학에서는 가능하며, 또한 전개되고 있는 역 사에 대한 이해에서 가능하다. 사실 럼)

( 윌리엄스 [ Williams 1990: 24 ] 가 정확히 언급한 것처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예수가 이 메시지에 대해 단지 세계 곳곳

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가는 것을 의도한 것이라고 깨닫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이중 의미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사도행전 10-11장에서 어떻게 교회를 이방인 선교로 이끌어 가야 하는지다. 하나님의 의도는 세계였지만, 제자들은 아마 처음에 의도한 것이 이스라엘의 성경이 제시한 대로 열방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생 각했을 것이다. 윌슨( S. Wilson 1973: 91-92 ) 은 이 구절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처럼 여러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다는 발상을 거부한다. 윌슨의 해석은 예수나 누 가가 사도들의 과업을 소개하는 위임을 통해 의도한 것과, 제자들이 처음에 이것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는지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 위임은 실로 전 세계라는 취지를 가졌지만, 처음에 제자들에게는 유대인의 범위로 제한된 것으로 들렸다( 바르게

본 Rengstorf 1962: 186-87 ).

하나님은 사도행전 8-11장이 보

여 주는 것처럼 이에 대한 깨달음을 분명히 할 것이며, 틀림없이 후대의 시점 에 이사야 49장 6절의 의미는 더욱 명확하게 될 것이다. 라킨( 1995: 41 ) 은 이 절 을 “명령-약속”이라고 본다( 역시 같은 Haenchen 1987: 144 ). 이렇게 사도행전의 관 심에는 교회가 이방인을 어떻게 포함하게 되었는지 보여 주는 것도 있다. 예 수가 위임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규모를 말한 것인지 헤아리는 데에는 시 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임은 주가 다시 올 때까지 해야 할 교 회의 핵심 임무를 기술한다.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우선되는 것, 곧 공동체가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땅의 끝까지 예수를 증언하는 것 이다. 교회는 상당 부분에 있어 예수에 대한 사도의 증언을 모든 곳까지 미치 도록 존재한다. 사실 교회는 사명을 갖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수행해 야 하며 교회 자체가 사명이다( A. Robinson and Wall 2006: 43-45 ). 이런 시작 부분의 구절은 적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주요 주제를 제시 한다( Fernando 1998: 64-70 ). 이 구절은 사역을 위해 성령으로 준비되는 것이 중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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