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NT 시리즈에 대한 추천의 글
누가복음2
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복음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BECNT 시리즈는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 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통찰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 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고 설교하는 목사, 신학자를 비롯한 모든 그 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집필된 이 주석 시리즈는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각 본문의 역할을 문맥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BECNT 『누가복음1, 2』는 이 주석 시리즈의 방향을 따라 집필되었으며, 복음서 주석 가운데 첫 번째로 간행된 주석으로서, 자료의 원천 및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비평과 질문을 다른 복음서 주석보다 더 깊이 다룬다. 이 책의 저자는 누가복음의 본문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 내용을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비교하며, 관련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 및 현대의 독자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고대 관습 등을 조명하고, 각 관점과 관습의 이유 및 특성을 설명한다. 누 가복음 각 단락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를 제공하는 이 책은, 그 주해를 바탕으로 누가가 각 단 락에 언급된 사건 및 예수의 가르침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이 무엇인지 살핀다.
지은이
2
대럴 벅( Darrell L. Bock )
애버딘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댈러스 신학교의 신약학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누가-행 전 연구로 유명한 저자는 복음주의 신학회(ETS)의 회장 (2000~2001년)을 역임했으며, 크리스채너티 투데 이의 편집위원, 휘튼 대학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누가신 학』 (부흥과개혁사), 『NIV 적용 주석: 누가복음』 (솔로몬)을 비롯해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
옮긴이
대럴 벅 지음 신지철 옮김
신지철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트리어 대학교 고전문헌학부에서 수학했으며 뮌헨 대학교 개신교 신학부 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가페출판사 편집장으로 『오픈 성경』 및 『열린 성경』 (아가페출판사)의 기획, 편집, 집필을 주관했다. 역서로는 『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사랑하는가』, 『하이델베르
ISBN 978 - 89 - 6092 - 453 - 6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크 교리문답 입문』, 『누가복음1』 (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www.rnrbook.com
값 65,000원
대럴 벅
지음 | 신지철 옮김
누가복음 2
목차
시리즈 서문 _ 6 약어 소개 _ 9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17 29
B. 제자도: 이웃을 돌보는 것과 예수에 대한 진정한 헌신 및 기도에 대한 가르침 ( 10:25~11:13 )
107
C. 다양한 논쟁들 및 신뢰에 대한 요구 ( 11:14~54 )
175
D. 제자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 12:1~48 )
263
E. 때의 특성을 알라: 이스라엘은 길에서 벗어났지만, 복의 문은 아직 열려 있음 ( 12:49~14:24 )
349
F. 거부와 직면하여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침 ( 14:25~35 )
481
G. 죄인들을 찾아서 회개에 이르게 함 ( 15:1~32 )
503
H. 관대함에 대해서: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사용 ( 16:1~31 )
545
I. 거짓된 가르침, 용서 및 섬김 ( 17:1~10 )
631
J.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 ( 17:11~18:8 )
655
K.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겸손하게 맡김 ( 18:9~30 )
743
L.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감: 메시아의 권능, 삭개오의 변화, 제자들에게 맡겨진 책임 및 눈물의 예루살렘 입성 ( 18:31~19:44 )
4
795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V. 예루살렘: 죄 없는 예수는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함 ( 19:45~24:53 ) •901 A.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 19:45~21:4 )
907
B. 예루살렘의 멸망과 종말 ( 21:5~38 )
1021
C. 예수의 배반당함 및 최후의 만찬 ( 22:1~38 )
1089
D. 예수의 재판과 죽음 ( 22:39~23:56 )
1165
E. 예수의 부활 및 승천 ( 24:1~53 )
1343
특별 해설 11. 최후의 만찬: 이 만찬의 본질과 시기 ( 눅 22:7~13 )
1446
12. 예수 세미나와 누가복음
1460
참고문헌 _ 1468
5
누가복음 2
| 시리즈 서문 |
BECNT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음을 결합 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 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독자의 관 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 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는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포함하려고 애쓰는 백 과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비록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는 해도 )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들을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 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 력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하여 한 절씩 강해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라 ) 이 노력의 일환이 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6
시리즈 서문
본문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 서 본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최근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경 속에 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 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깎 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 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 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 작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의 마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 지 않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 확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 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론을 취하기 위하여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 고 더 중요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 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 개혁에서 비롯된 다양한 가르침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경에 대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은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출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 해를 낳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 나 편견 없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 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들(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을
성경 해석
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 하기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이차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 류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 양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들을 적절 히 적용하는 데 있어서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게, 7
누가복음 2
분명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론적인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異文 )은 저자의 번역 속에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半 ) 괄호(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추가 주석”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연대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수( 面 數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들이 있다( BAGD, LSJ, TDNT ). 참고문헌은 책 마지 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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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I. 누가복음의 머리말 및 세례 요한과 예수에 대한 소개 ( 1:1~2:52 ) II. 사역 준비: 하나님에 의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음 ( 3:1~4:13 ) III.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 예수가 자신을 계시함 ( 4:14~9:50 )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9:51~19:44 ) V. 예루살렘: 죄 없는 예수는 죽임을 당하지만 부활함 ( 19:45~2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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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9:51~19:44 ) 누가복음 9장 51~56절에 의하면, 예수는 어떤 사마리아 마을을 방문한다. 이 이야기와 더불어, 누가복음에서 가장 긴 대단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대단원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약 37퍼센트를 차지한다( 1,151절들 가운데 424절 ).1) 이 대단원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 가운데 대부분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나타난 다. 또한 이 대단원 안에는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는 많은 단락과 비유 가 들어 있다. 나아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누가는 예루살 렘을 향한 예수의 여행 이야기를 강조한다. 이 대단원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Fitzmyer 1956: 271, Huck and Lietzmann 1936: 112 )
1981: 823 ),
및 ‘중심 부분’( Ellis
‘여행 이야기’( Arndt
1974: 148 )
등으로 불려왔
다. 이 대단원은 9장 51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대단원이 정확하게 어느 2)
곳에서 끝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해서는 많은 논쟁이 빚어져 왔다.3) 여행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
지지자(들)
18:14
루스(Luce 1933: 194), 헨드릭슨(Hendriksen 1978: 531), 클로스터만(Klostermann 1929: 110)
18:30
라그랑주(Lagrange 1921: xxxviii), 파이네(Feine 1922: 421)
18:34
블롬버그(Blomberg 1983: 245), 놀랜드(Nolland 1993a: 531
19:10
마셜(Marshall 1978: 400)
19:27
피츠마이어(Fitzmyer 1985: 1242), 쉬르만(Schürmann 1994: 1), 대부분의 주석자들(참조, Miyoshi 1974: 1, Resseguie 1975: 3n2)
19:40/41
모르간탈러(Morganthaler 1948: 1.170), 로빈슨(W. Robinson 1964: 22~23)
19:44
엘리스(Ellis 1974: 146)
19:48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10)
1) (네슬레-알란트가 편집한 헬라어 성경 제 25판에 기초해서)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2n1)가 문장의 행(行)들을 계산한 방식을 따른다면, 그 수치는 약 44퍼센트에 이른다. 하지만 각각의 절과 행 의 길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당 계산 방식들은 단지 대략의 수치를 제공해 줄 뿐이다. 2) ‘중심 부분’이라는 명칭은 단조로운 묘사일 것이다. 또한 이 명칭과 관련해서 논쟁이 가장 적게 빚어 질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명칭이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가 이 여행을 연대 순서에 따라서 직선적으로 묘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3) 이 대단원이 어디서 끝나는지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다음 연구서들을 참조하라. Egelkraut 1976: 3~11 및 Resseguie 1975: 3(이 연구서는 해석사에 대한 훌륭한 개관을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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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51절~19장 44절에 언급된 장소들 가버나움
10:15
갈릴리
13:1, 2, 17:11
감람원 ( 산 )
19:29, 37
고라신
10:13
나사렛
18:37
니느웨
11:30, 32
두로
10:13, 14
베다니
( 10:38 ), 19:29
벳바게
19:29, ( 19:30 )
벳새다
10:13
사마리아
9:52, 10:33, 17:11, 16
소돔
10:12, 17:29
시돈
10:13, 14
실로암
13:4
여리고
10:30, 18:35, 19:1
예루살렘
9:51, 53, 10:30, 13:4, 22, 33, 34,
시돈
니느웨 두로
고라신 가버나움
17:11, 18:31, 19:11, 28, ( 19:41 )
갈릴리
단지 암시되기만 한 장소들에 대한 본문은 괄호로 표기되었음
나사렛
사마리아
여리고
예루살렘 실로암
벳바게 베다니
감람원 ( 산 )
소돔
벳새다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그러나 여행 이야기의 대단원은 적어도 19장 41절 이전에는 끝나지 않는 다. 왜냐하면 해당 절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다고 언급하기 때 문이다. 18장 34절에서 이 대단원이 끝난다는 견해를 반대하는 요소들은 다 음과 같다. 곧 해당 절 이후에도,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계속 여행한다. 또한 18장 34절 이후에 장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더 자주 나타난다( 놀 랜드 [Nolland 1993a: 529]의 입장을 반대함 ).
많은 학자는 19장 28절이 예루살렘에 도착
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19장 41절을 참조할 때, 19장 28절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지속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 해서, 이 시점에 예수는 아직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장 48절 에서 여행 이야기가 끝난다는 견해에 대한 논박으로서, 누가복음 19장 45~ 48절은 성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곧 해당 절들에서 예수는 분 명히 예루살렘 성읍 안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장 44절에서 여행 이야기가 끝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틀림없 이 이 여행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 9:51, 19:28 ).
53, 13:22, 17:11, 18:31~34,
19장 27절과 19장 44절 사이에 어느 곳에서 이 대단원이 마무리되는지
와 상관없이, 19장 28~44절은 이전 부분을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마지막 사 역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이어 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예수의 생애의 이 결정적인 시점에 대해 준비해 왔다. 누가복음 9~19장에서 빚어지는 모든 긴장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결말이 난 다. 따라서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자기에게 일어날 사건들에 대비시켜 왔다. 누가복음 9장 51절~19장 44절의 자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 고 있다. 1. 이 대단원은 상당히 누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대단원 안에 수 록된 자료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나타난다. 에겔크 라우트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이 대단원에 들어 있는 자료의 삼분의 일보다 많은 분량이 마태복음의 자료와 겹치며, 삼분의 일 이상이 오 직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며, 또한 삼분의 일보다 적은 분량이 마가복 음의 자료와 평행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단원을 더 자세히 살 펴보면, 에겔크라우트가 제시하는 것과 같이 이 대단원의 자료가 상당 히 평등하게 나눠지지 않는다고 밝혀진다.4) 4) 누가복음에만 소개되는 자료와 또한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에서도 나타나는 자료의 분량은 다양하게 측정될 수 있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사항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 단락들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둘째, 어떤 단락들이 서로 평행을 이룬다고 판단하는가?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27)는 누가복음의
19
누가복음 2
2. 이 대단원의 상당 부분은 마가복음과 평행을 이루지 않는다. 마가복음 의 배열 순서는 비로소 누가복음 18장 15절부터 또다시 반영된다. 3. 이 대단원 전체에서 사건 발생 시기와 장소를 밝히는 경우는 불과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Egelkraut 1976: 16~24 ). 4. 이 대단원에서는 이적 사건들이 드물게 소개된다( 13:10~17, 19, 18:35~43; 11:14~23 - 이적 사건 및 그 사건에 대한 요약 설명 ).
14:1~6, 17:11~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짧은 대단원으로서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열세 가지 이적 사건이 소개된다. 또한 이 대단원에서는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언급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도 상대적으로 드물게 제시된다.5) 이와 같이 이 대단원은 누 가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다루는 부분보다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갈릴리 사역에서는 이적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 5. 이 대단원에서는 주로 예수의 말들과 비유들이 소개된다. 이 대단원에 서 열일곱 가지 비유가 언급된다. 이것은 이 대단원이 주로 예수의 가 르침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6) 사실상 누가복음 중심 단원(그의 견해에 의하면, 9:51~19:48)의 백분율을 두 개의 공통된 공관복음서 안에 들어 있는 단락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누가와 마태의
누가복음
누가와 마가의
알란트(Aland 1985) (35%) 후크와 리츠만(Huck and Lietzmann 1936)
평행 본문 (Q 자료) 75개 단락 중 26개 (36%) 60개 단락 중 25개 (42%)
고유 자료 75개 단락 중 27개 (29%) 60개 단락 중 24개 (40%)
평행 본문 75개 단락 중 22개
60개 단락 중 11개 (18%)
레세귀(Resseguie 1975: 4)는 이 대단락을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곧 누가복음에 제시된 60개의 단 락들 가운데 31개(52%)의 단락들이 마태복음/Q 자료와 평행을 이룬다. 또한 29개의 단락들(48%)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레세귀는 눅 9:51~18:14의 자료 가운데 단지 십분의 일만이 마가복음의 자료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반복해서 말했을 가능성이 있는 교훈 자료는 이 수치를 다소 변경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크와 리츠만 및 레세귀가 제시 하는 수치는 각각의 퍼센트를 더 사실에 가깝게 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눅 9:51~18:14에서 마가복 음과 실질적으로 평행을 이루는 본문은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Q 자료에 속한 대 부분의 단락들과 오직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자료는 긴 단락들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오직 누가복 음에서만 나타나는 자료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이 있다. (『누가복음 1』 ‘서론’에서 31~33면을 참조 하라). 굴더(Goulder 1989: 455)는 눅 9:51~13:21에서 매 세 단어 가운데 한 단어는 Q 자료나 또는 누가의 특별한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13:22~18:44(굴더는 이 절에서 여행 이야기가 끝난다고 이해함)에서는 매 여섯 단어 가운데 한 단어가 해당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5) 열두 가지 이이야기들(해당 이야기들의 숫자를 어떻게 세는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음)이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곧 9:52~56, 9:57~62, 10:29~37, 10:38~42, 11:14~23, 11:27~28, 13:31~35, 18:15~17, 18:18~30, 19:1~10, 19:29~40, 19:41~44(14:1에서 18:14까지의 어떤 이야기도 소개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한편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28)는 약간 다른 목록을 제시한다. 6) 블롬버그(Blomberg 1982b)는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소개되는 열다섯 가지 비유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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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14장 후반부부터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이 상호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이 부분의 메시지를 통해 예수는 하나 님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각 사람은 예수의 가르침 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제시하는 길은 유대 지도자 들이 알려 주는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Ellis 1974: 146~147 ). 이와 같은 특징들은 9장 51절에서 19장 44까지의 형성 과정과 역사적인 특 성에 대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에겔크라우트( Egelkraut 1976: 11~59 )는 이 논쟁에서 제시된 다양한 견해들을 소개하며, 해당 질문 전반에 대해서 세부 적으로 검토한다. 1.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곧 누가는 이 대단원을 신학적인 목적에 따라서 배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여행 또는 몇 가지 여행이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서 제시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7) 2. 아른트( Arndt
1956: 272 )는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신학적으로 보수
적인 관점에서, 아른트는 연대기적으로 상당히 촘촘한 순서를 지지한 다. 그는 갈릴리에서 예수가 떠나는 사건들을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 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는 요한복음의 연대기와 결부시킨다. 아른 트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여러 차례 여행한다는 것을 지지한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여행은 누가복음 17장 11절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18장 15절에서 마지막 여행이 시작된다고 이해한다. 해당 절에서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또다시 마가복음의 자료 와 평행을 이룬다( 막 10:13~16 ). 예루살렘의 향한 예수의 마지막 여행이 언제 시작되는가에 대한 논쟁은 누가의 다양한 언급들을 정확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준다( Fitzmyer
1981: 67, 824; 필자는
아래 부분에서 피츠마이어가 누가복음을 다소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함 ).
누가복음
곧 10:25~37, 11:5~8, 12:13~21, 13:6~9, 14:7~14, 14:15~24, 14:28~33, 15:8~10, 15:11~32, 16:1~9, 16:19~31, 17:7~10, 18:1~8, 18:9~14, 19:11~27 등이다. 오직 13:18~21과 15:3~7만이 평 행 본문들을 지니고 있다. 7) 레세귀(Resseguie 1975)는 이 범주에 속하는 열다섯 가지 가능한 해석들 가운데서 다섯 가지를 제 시한다. 에번스(C. F. Evans 1990: 433)는 특별히 이 대단원의 마지막 부분에서 연대기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단지 이 대단원의 시작 부분에서 시간과 장소에 대한 다소 모호한 언급이 제 시되어 있다. 곧 9:52, 56~57, 10:1, 21, 38, 11:14, 27, 13:10, 31, 14:1, 25 등이다. 한편 쉬르만 (Schürmann 1994: 1)은 은유적인 여행 이야기에 대해서 말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순회 선지자 및 교사로서, 예수는 이스라엘을 둘로 나뉘게 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다 는 것이다. 참조, Schneider 1997a: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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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10장 38~42절을 숙고한다면, 예수가 단 한 번 직선으로 이어지는 여 행을 했다는 견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누가복음의 해당 절들에서 언급 되는 사건은 베다니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누가복음 17장 11절에 의 하면, 예수는 또다시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에 있다. 만약 누가가 궁극 적으로 복합적인 여행 일정을 알려 주고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아 른트가 몇 번의 여행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옳다. 따라서 분명히 이 대 단원에서 ‘여행’이라는 용어는 더 광범위한 묘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3. 헨드릭슨( Hendriksen
1978: 542~543 )은
연대기적인 순서대로 정확하게 제
시되지 않는 한 번의 여행에 대해 말한다. 특히 그는 예수가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예루살렘을 여행했다는 것을 반대한다. 따라서 그는 요한 복음과 누가복음의 여행 이야기의 연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헨드 릭슨은 자신의 관점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누가복음 13장 22절과 17장 11절에서 여행에 대한 암시들은 여행의 시작을 가리킴을 논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의 이와 같은 논점은 억지인 것처럼 여 겨진다. 여행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와 관련하여, 이 해석은 옳다. 그러 나 이 해석은 왜 여행의 모티프가 제시되는지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 세 가지 견해 가운데서, 이 대단원이 신학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이해 하는 첫 번째 견해가 가장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본문 자체가 일 직선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여행 이야기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견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단지 미흡할 뿐 이다. 이 여행 이야기에는 시기들과 장소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것은 누가가 이 여행을 예수의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요 약 설명으로 제시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중요한 단서다. 그런데 여행 이야기의 역사적 사실성과 대조시키면서, 많은 학자는 이 대단 원의 신학적인 동기들에 대해 무리한 주장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피츠마이 어( Fitzmyer
1981: 826 )는
이 대단원을 “물려받은 전승에 대한 인위적인 확장”이
라고 부른다. ( 피츠마이어는 막 10:1~52처럼 이 대단원을 이해한다 ). 그러면서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이 대단원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행하거나 말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8) 하지만 여행 이야기에 대한 역사적 8) 슈미트(K. Schmidt)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피츠마이어(Fitzmyer 1981: 825~826)는 여행 이야기 안에서 소재(matter)와 형상(form) 사이의 긴장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곧 “비록 예수는 언제 나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고 있지만, 그는 이 여행에서 실질적으로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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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사실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대단원이 신학적인 관점에서 배열되었다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운명의 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면서, 예수가 행하고 가르친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서,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행을 전반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는 여행 모티프와 또한 그것과 관련된 사건들을 스스로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비록 오직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지만,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행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을 따라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 과 그곳에서 맞이하게 될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여행 이야기가 연대기적으로 엄밀하게 제시되었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누가 자신도 그렇게 제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세한 연구를 통해 블롬버그( Blomberg
1983: 245 )는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19장 44절이 교차대구법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박한다. 하지만 그는 이 대단원의 배후에 교차대구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어떤 비 유 자료가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233~247면 ).9) 또한 그는 누가가 이 대단원을
것이다. 9) 탈버트(Talbert 1982: 111~112)는 9:51~19:44 안에 교차대구법 구조가 제시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눅 15장을 생략하고, 또한 14:1~6의 순서를 누가복음 의 원래의 순서에서 벗어나게 해야만 한다! 굴더(Goulder 1964: 196)는 다음과 같은 교차대구법 구 조를 제시한다. 10:24 영생 11:1 기도 11:14 치유 11:37 바리새인들의 위선 12:1 돈 12:35 회개 13:10 이스라엘의 거부와, 소외된 사람들을 초청함 14:1 이스라엘의 거부와, 소외된 사람들을 초청함 15:1 회개 16:1 돈 16:14 바리새인들의 위선 17:11 치유 17:5 기도 18:18 영생 이 대단원이 교차대구법 구조로 되어 있다고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학자는 바로 패럴(Farrell 1986)이다. 한편 블롬버그는 이 중심 대단원이 일종의 기독교의 신명기라는 이론들에 대해서 논의하 고 나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블롬버그의 논문에 대한 필자의 비판의 주안점은 다음과 같다. 곧 블롬버그의 논문은 이 대단원이 18:34에서 끝나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나중에 누가가 제시해 주는 단서들을 무시하는 것이다(19:28, 41). 만약 특별히 19:11~27을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면, 이것은 이 대단원의 배후에 어떤 비유 자 료가 놓여 있다는 그의 이론을 반대하는 아킬레스건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블롬버그의 논 의에 제시되는 다양한 해석과 누가 자료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에 대해 다룰 것이다. 참조, Nolland 1993a: 5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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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배열하는 관심과 동기들에 대해 변호한다. 이 대단원에 나타나는 특징들은 누가가 예수의 사역의 후반기에 대해 길게 요약해서 설명하는 단원을 마련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누가의 관심은 일직 선으로 진행되는 여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누가는 이 결정 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대해 정확하게 대표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이 기간 에 예수는 자기의 지상 사역을 완성하기 시작하며, 자기의 죽음에 제자들이 대비시키고, 유대 지도자들을 비판하며, 또한 예루살렘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Ellis 1974: 146~147, Marshall 1978: 401 ). 바로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이 점차적으로 실현되어 가는 과정 안에서, 누가는 ‘여행’을 정확하게 묘사하 는 것이다. 이 묘사는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묘 사에는 신학적인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이 대단원 안에서 몇몇의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가 언급되어 있다. 또한 어떤 사건들은 일어난 순서를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요소들이 나타나는 부분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 대단원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다. 요한복음이 제시 하는 연대기적인 자료에 근거할 때, 세 번의 여행이 묘사된다는 아른트의 견 해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자료에서는 구체적인 언급들이 제시 되지 않기 때문에, 누가복음에서도 세 차례의 여행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플러머( Plummer 1896: 260~261 )도 똑같은 어려움을 공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다. 곧 누가는 이 대단원의 이야기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떤 특성’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우리는 그것을 더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카슨( Carson
1984: 197 )이
마태복음 8~9장에 대해 말한
것을 또한 누가복음 9~19장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 장들은 아무렇게나 배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제들이 그 장들을 이끌고 있다. 따 라서 단지 누가가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명백하게 제시할 때만, 우리는 그것 들을 정확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 이외의 경우에, 우리는 누가가 예수의 사역 의 마지막 단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데 만 족해야 할 것이다. 이 대단원은 예루살렘에서 맞이하게 될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직면 해서, 예수가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여 준다. 리펠트( Liefeld 1984: 932 )는
이 대단원에 대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제시해 준다.
“만약 이 대단원에 여행 모티프가 들어 있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여행 모티프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1) 그 것은 줄곧 순회 사역으로 진행된 예수의 사역이 지닌 특성과 일치한다. (2) 그것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모두 여행을 강조하는 것과 일치한다. 24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아마도 누가는 선교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여행을 강조할 것이 다. (3) 그것은 다음 사실과 일치한다. 곧 갈릴리로부터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행을 하면서 예수의 마음은 언제나 예루살렘에 서 맞이하게 될 임박한 사건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예수가 또다시 북쪽으로 여행했을 때에도, 그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이 대단원의 단락들을 나누는 작업은 어렵다. 다양한 견해들과 방법들이 제 시되었다. 그러나 모든 학자가 한결같이 지지하는 견해는 전혀 없다. 한 가지 방법으로서, 13장 22절, 17장 11절 및 18장 31절에서 여행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근거해서 단락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Arndt 1956: 272, Tiede 1988: 194, 252, 295 ).
그렇지만 그와 같이 구분하는 것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
는 것은 쉽지 않다.10) 슈나이더( Schneider 1977a: 226 )는 이 대단원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 곧 제자도와 선교 ( 9:51~13:21 ) ,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서 구원 함( 13:22~17:10 ) 및 제자도와 종말 시대의 소망( 17:11~19:27 )이다. 하지만 이와 같 이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이 대단원의 내용을 세 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블롬버그( Blomberg
1983: 245 )는
이
대단원을 열네 단원으로 구분한다( 9:51에서 단락 구분이 시작됨, 10:1, 10:25, 11:1, 11:14, 12:1, 13:10, 14:25, 15:1, 16:1, 17:1, 17:20, 18:9, 18:31 ).
그는 이 대단원의 마지막 부분을 생략한
다. 그 이유는 그가 비유들의 배후에 어떤 일관된 자료가 있다는 것을 지지하 기 때문이다. 마셜( Marshall
1978: 9~10 )은
이 대단원을 열 단락으로 나눈다( 9:51,
10:25, 11:14, 12:1, 13:22, 15:1, 16:1, 17:1, 17:11, 18:9 ).
하지만 그는 이 대단락이 19장 10절에
서 끝난다고 이해한다. 엘리스 ( Ellis
1974: 149~150 )는
여섯 단락에 대해 말한
다( 9:51, 11:1, 12:35, 13:22, 16:14, 18:15 ). 하지만 18장 15절의 경우처럼, 단락들을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에 대해 엘리스가 제시하는 이유는 설득력이 별로 없다. 마 가복음의 개요로 돌아가는 것은 진정으로 문학적인 전이( a
literary transition )를
가리키는 것인가? 필자는 이 대단원의 내용이 일관성이 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또한 블롬버 그와 마셜이 제시한 것을 따르면서, 필자는 이 대단원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열두 단락으로 구분하는 것을 제안한다.
10) 피츠마이어(Fitzmyer 1981: 825)는 이와 같이 구분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편 의상 이와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절들에서 구분하는 것은 다른 상황 아래서는 무의미 하며, 또한 다소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플러머(Plummer 1896: 261)도 ‘편의’에 대해 말한다. 여행에 대한 해당 절들의 언급은 사실상 주제들이 바뀐다는 것을 가리켜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 구 분 방법은 타당성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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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9:51~10:24
결정의 축복: 특권, 선교 및 헌신
10:25~11:13
제자도: 이웃과 예수와 하나님을 섬김
11:14~54
논쟁, 책망 및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요구함
12:1~48
제자도: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라
12:49~14:24 시대의 특성을 간파해야 함: 이스라엘이 등을 돌리지만, 축 복의 문은 아직도 열려 있음 14:25~35
거부와 직면해서,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침: 제자도의 기초
15:1~32
죄인들을 찾아서 회개에 이르게 함: 하늘에서의 예들
16:1~31
관대함에 대해서: 돈과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사용
17:1~10
거짓된 가르침, 용서 및 섬김
17:11~18:8 신실하게 행하며 왕을 기다려야 함, 하나님 나라의 도래 및 완성 18:9~30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은 겸손하게 맡김
18:31~19:44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감: 메시아의 권능, 개인의 변화, 책 임에 대한 경고 및 예수가 눈물을 흘리며 예루살렘 성읍으 로 들어감 이 개요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이야기라는 대단원의 강조점들을 드러내 준다. 이 대단원의 처음 부분에서 예수는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하며, 동시에 제자들을 가르친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본받아 서는 ‘안 될 대상’으로 바리새인들을 지적한다. 11장 37~54절에서 예수는 바 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비난한다. 그리고 13장 31절~ 14장 35절에서는 전환점이 제시된다. 해당 절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메시 아를 거부한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자 예수는 이스라엘의 집이 황폐한 상태로 버려지게 되는 것에 대해 슬퍼한다. 이제부터 예수는 거의 대 부분 제자도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시작한다. 맨 먼저 예수는 제자도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을 제시한다( 14:25~35 ). 이 단락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들은 잠시 비판받는 것을 제외하고, 이 대단원의 후반부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다시 등장한다 ). 누가복음 15~18장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거부에 직면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가르친다. 마가복음의 자료를 많이 사용하지는 않지만, 누가가 제자 도, 거부 및 고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마가복음의 경우와 비슷하다. 누가복 음에서 이 대단원은 마가복음이 그와 같은 주제들을 강조하는 것을 보완해 준다. 이 대단원의 마지막 부분의 가까이에 있는 18장 35~43절에서는, 예수 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주제가 다시 나타난다. 해당 단락은 예수의 갈릴리 26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사역을 다루는 본문들과 매우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 인 예수가 예루살렘 성읍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하지만 이 대단원은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막을 내린다.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가면서, 예수 는 그 성읍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해 서,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을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이 모든 사람에게 선포될 것이다. 그러나 예 수를 거부한 이스라엘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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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B. 제자도: 이웃을 돌보는 것과 예수에 대한 진정한 헌신 및 기도에 대한 가르침 ( 10:25~11:13 ) C. 다양한 논쟁들 및 신뢰에 대한 요구 ( 11:14~54 ) D. 제자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 ( 12:1~48 ) E. 때의 특성을 알라: 이스라엘은 길에서 벗어났지만, 복의 문은 아직 열려 있음 ( 12:49~14:24 ) F. 거부와 직면하여 제자도에 대해서 가르침 ( 14:25~35 ) G. 죄인들을 찾아서 회개에 이르게 함 ( 15:1~32 ) H. 관대함에 대해서: 재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사용 ( 16:1~31 ) I. 거짓된 가르침, 용서 및 섬김 ( 17:1~10 ) J.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완성 ( 17:11~18:8 ) K.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겸손하게 맡김 ( 18:9~30 ) L.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감: 메시아의 권능, 삭개오의 변화, 제자들에게 맡겨진 책임 및 눈물의 예루살렘 입성 ( 18:31~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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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이 부분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라는 대단원의 첫 번째 단원이다. 이 부 분은 먼저 제자들의 부족한 점들( 실수들 )에 대해 다룬다. 그 다음 그들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해 다룬다. 누가복음 9장 51~56절은 사마리 아 지역에 있는 한 마을이 예수와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말 한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 곧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에게 그 마을에 즉각적인 심판을 내리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 요청을 거부한다. 예 수가 이 땅에 와 있는 지금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시하는 때이지, 심판의 망 치를 내리치는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9장 57~62절에서는 예수의 제 자가 되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기에 예수를 곧바로 따르는 것보다 자신들에게 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에 대해 다룬다. 그러자 예수는 즉시 그들을 책망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 는 것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부족한 점을 언 급하고 나서, 누가복음 10장 1~24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잘 수행한 것에 대해 소개한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진 정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그의 구원 계획을 올바로 아는 것은 복으로 이끌어 준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그 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면, 그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라는 대단원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곧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은 진정한 복으로 이끈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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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1.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음 ( 9:51~56 )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한다. 그런데 이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드러내는 한 가지 사 건 ( 9:51~56 ) 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여행의 마지막 부 분( 19:41~44 )에서 예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계획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 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이야기의 대단원은 마무리된다. 9장 51~56절에서 제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부에 그릇된 반응을 보인 다. 이 단락의 내용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들어 있다. 여기서 제자들은 자신들 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사마리아 동네에게 곧바로 심판을 내리기 를 원한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을 책망한다. 예수가 그들을 책망한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실상 사마리아 사람들의 그와 같은 결정은 대단히 중 대한 실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활동하는 시기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심 판을 행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할 시간을 주신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 복음이 지속적으 로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게 하신다( 벧후 3:9 ).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간다. 이 시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해야 하는 때다. 심판의 때는 아직 오지 않 았다. 하지만 나중에 언급되는 단락( 눅
10:13~16 )에서
예수가 분명하게 밝히는
것처럼, 각 사람이 지금 예수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가 나중에 어떤 대우를 받을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누가복음 4장 16~30절에서 누가 는 예수가 갈릴리 지역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 했다. 거기서 누가는 예수가 자라난 동네인 나사렛 사람들이 그를 배척한 사 건을 지적했다( 눅 4:16~30 ). 이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에 대해 다 루는 대단원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이야기로 시작 한다( Fitzmyer 1981: 827 ). 이것은 예수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것과 십 자가에서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자료의 원천 및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 이 사건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누가의 고유한 자료에 속한 다(하지만 쉬르만[Schürmann 1994: 31]은 이 사건이 Q 자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자들은 과연 이 사건이 실질적으로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했다.
30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불트만(Bultmann 1963: 25~26)은 누가만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행을 특별히 강조 하기 때문에, 이 자료가 초대 교회의 선교 활동에 기초한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사 건을 예수의 사역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할 명백한 근거는 없다(Schürmann 1994: 32). 대 체로 누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바라본다(눅 10:30~37, 17:11~19; 행 8:4~25). 그런데 누가복음 9:51~56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사실상 누가의 일반적인 관점과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누가는 여기서 어떤 특별 한 자료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에번스(Evans and Sanders 1993: 97)는 이 단 락이 초기의 자료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누가의 고유 자료와 Q 자료 가운데서 한 가지 자료를 선택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누가가 9장 51, 53, 56절을 자기 나 름대로 표현했다고 이해한다. 특히 예수의 제자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에서 묘사하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사건을 실질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한편 놀랜드(Nolland: 533a~34)는 엘리야의 모티프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묘 사하는 것은 누가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5절 에 비추어 볼 때 이 단락이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견해에 대 해 놀랜드는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마태복음 10장 5절은 예수의 사역에서 초 기의 복음 전파 활동에 대해 묘사해 준다. 요한복음 4장이 암시해 주듯이, 마태복음의 해 당 구절은 예수의 제자들이 나중에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 전파 사역을 시도했다는 것 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나아가 이 단락에서 묘사되는 사건은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이 전파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양식 비평학자들은 과연 이 단락이 선언 이야기인지, 또는 예수에 대한 이 야기인지에 대해 논쟁을 한다( Fitzmyer
1981: 827 ).
1)
베르거( Berger
1984: 352 )는
‘예
수에 대한 이야기’ 대신에, 이 단락이 ‘전기와 비슷한 에피소드’라고 말한다( 또한 V. Taylor 1935: 153 ). 누가복음 9장 51~56절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a.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기로 마음을 굳힘( 9:51 ) b. 어떤 사마리아 마을의 주민들이 예수가 보낸 사자들을 거부함( 9:52~55 )
i. 사자들을 거부함( 9:52~53 )
ii. 제자들이 예수에게 즉각적인 심판을 요청함( 9:54 ) iii.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음( 9:55 )
1) 불트만(Bultmann 1963: 25~26, 64, 68)은 선언 이야기를 선호한다. 하지만 또한 그는 이 이야기에는 예수에 대한 어떤 선언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여기서 예수의 반응은 단지 다른 길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점은 이 단락이 선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 준다. 또한 이 점은 왜 예수 세미나가 자신들의 「다섯 복음서들」(Funk and Hoover 1993: 316) 에서 이 본문에 대해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는지 설명해 준다.
31
누가복음 2
c. 예수와 제자들이 다른 마을을 통해 계속 여행함( 9:56 ).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다. 예수는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한다. 또한 예수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서 자기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마리아 지역의 어떤 마을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루살렘 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계선 밖 에서도 거부를 당한다. 이때 제자들 두 명이 예수에게 그 사마리아 마을에 곧 바로 심판을 내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책망한다. 예수의 제 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있다. 한편 예수는 자신의 반응을 통해서, 그의 마음과 사명을 밝혀 준다.
| 51
주해 및 설명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 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 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 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 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 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
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56
|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received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52 And he sent messengers ahead of him. And they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make ready for him, 53 but they did not welcome him, for his face was set toward Jerusalem. 54 When his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it, they said, “Lord, do you want us to bid fire come down from heaven and consume ┌┐ them?” 55 But he turned and rebuked ┌ ┐ 56 them. And they went on to another village. 51
a.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기로 마음을 굳힘 (9:51) [9:51] 여기서 누가는 자신의 일반적인 머리말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절의 표현은 70인역의 표현을 연상시켜 준다. 그러면서 누가는 예수가 예 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소개해 준다. 새로운 단락을 시작할 때, 누가는 자주 헬라어 동사 ‘에게네토’( ejge¿neto,
[어떤 일이] 일어났다 )를
사용한
다( 1:5, 2:1, 3:21, 5:1, 12, 17, 6:1, 12, 7:11, 8:1, 22, 9:18, 28, 37 ). 이 절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을 이루고자 하는 예수의 굳은 결심을 보여 주는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수의 생애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다. 32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예수의 ‘들어 올림을 받음’( ajnalh¿myewß, 아나렘 프세오스 )의
날들, 곧 승천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헬라어 명사가 오직 예수의 죽음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 어는 예수의 부활 및 승천을 가리킬 수도 있다.2) 사도행전 1장 2, 11, 22절에 서는 이 헬라어 단어의 동사형이 사용된다. 해당 구절들에서 이 헬라어 동사 는 분명히 예수가 하늘로 올라간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절에서 이 헬라어 명사는 예수의 부활 및 승천을 모두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3) 따라서 여기서 ‘들어 올림을 받음’은 이전에 언급된 예수의 ‘별세’( 헬. ‘엑소도스’ - [이 세상을] 떠나감; 눅 9:31 )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이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 데 선택된 헬라어 동 사( sumplhrouvsqai, 쉼플레루스다이 )도 우리의 흥미를 끈다. 이 헬라어 동사는 ‘이 루어지다’를 의미한다. 곧 예수의 죽음과 부활 및 승천이라는 사건들은 하나 님의 구원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Liefeld 1984: 933, Delling, TDNT 6:308~9; 렘 25:12 ). 따 라서 이 사건들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한다. 히브리어에서 ‘얼굴을 어떤 방 향으로 향하게 하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결심하 는 것을 가리킨다( 창
31:21; 사 50:7; 렘 21:10, 44:12; 겔 6:2, 13:17, 14:8, 15:7; 단 11:17~18;
Grundmann 1963: 201, Klostermann 1929: 111, Lohse, TDNT 6: 776 n. 45 ).
4)
더욱이 이전에
선지자들이 반대와 박해를 무릅썼던 것처럼, 예수는 반대를 직면하기 위해
2) 댕커(Danker 1988: 207~8), 피츠마이어(Fitzmyer 1981: 828), BAGD(57) 및 BAA(112) 등은 헬라 어 명사 ‘아나렘프세오스’(ajnalh¿myewß)가 신약 성경에서 이 절에서만 한번 사용된 것에 주목하며, 예수의 승천을 가리킨다고 추측한다. 한편 70인역에서 이 헬라어 단어는 엘리야가 하늘로 들림을 받 은 사건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왕하 2:9, 11; 마카베오1서 2:58; 집회서 48:9, 49:14). 더 상세한 논의를 알려면, 눅 9:51에 대한 추가 주석을 참조하라. 3) 신약 성경에서 이 헬라어 동사는 예수의 부활 및 승천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사용된다. 참조, 막 16:19(보다 더 긴 독법에서); 딤전 3:16. 4) 마셜(Marshall 1978: 405)은 여기서 히브리어의 관용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은 누가의 언급 배후에 어떤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겔 6:2, 13:17, 15:7, 20:46[21:2 마소 라] 등에 근거해서, 에번스(C. A. Evans 1987a)는 이 히브리어의 관용적인 표현은 (사자를) 파견하 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관용적인 표현 그 자체에 근거할 때, 에번스의 견해는 가능하다. 하 지만 눅 9:51의 문맥에서 그의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 나중에 또 다른 저서(Evans and Sanders 1993: 93~105)에서, 에번스는 자신의 이전 논문(1987a)을 다시 다루었다. 그 논문에서 에번스는 사 전적인 논의는 별로 하지 않으면서, 이 구절이 겔 21:2~6[21:7~11 마소라]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에번스는 이 구절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곧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은 예수에게 고난을 가져오지만,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겔 20:46[21:2 마소라]의 평행 구절을 강조하면서, 에번스는 겔 25:2, 28:21, 29:2 및 38:2을 덧붙인다). 만약 에번스의 주장이 옳다면, 여기서 예수의 행위는 에스겔 선지자의 행위와 비슷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전개하시는 드라마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 해가 타당할 수도 있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에서 심판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 을 부인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Giblin 1985: 31~32를 참조하라.
33
누가복음 2
예루살렘으로 간다. 여기서 예수의 이와 같은 태도를 이전의 선지자들과 비 교하는 것은 분명히 누가의 가르침뿐 아니라( 눅
11:45~52, 20:9~18; 행 7장 ),
또한
이 관용적인 표현과 관련된 심리 상태와 배경에도 잘 어울린다. 한편 엘리 스( Ellis 1974:152 )는 시편( 시 120~134편의 표제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에서 발견되는 개 념으로서, 이 절이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여행’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하지 만 예수가 선지자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배경이 더 강하게 드러나 있 다. 앞으로 예루살렘은 예수의 지상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일관되게 언 급될 것이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은 단순히 여행과 관련된 내용을 뛰어넘는 언급들과 더불어 소개될 것이다( 눅 9:53, 13:22, 33~35, 17:11, 18:31, 19:11, 28, 41. 또한 예루 살렘으로의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와 같은 언급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라 ).
b. 어떤 사마리아 마을의 주민들이 예수가 보낸 사자들을 거부 함 (9:52~55) i. 사자들을 거부함 (9:52~53) [9:52]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했다는 것( 51절 )은 그가 이
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마리아 지역의 어떤 마을로 들어가고자 했다는 언급보 다 먼저 제시된다. 갈릴리 지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기 때문에, 예수는 적어도 당분간 남쪽 방향으로 이동한다. 자신이 도착하기에 앞서 마 을의 주민들을 준비시키기( eJtoima¿zw,
헤토이마조, 준비하다 )
위해, 예수는 먼저 그
마을로 사자들을 보낸다. 이 헬라어 동사는 대중 설교를 위해 준비하거나 숙 소를 마련하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Creed 829 ).
5)
1930: 141, Arndt 1956: 274, Fitzmyer 1981:
제자들이 특별한 설교를 하지 않은 것을 제외한다면, 어떤 학자들은 여
기서 사자들의 역할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세례 요한의 역할과 매우 비슷하다 고 생각한다.6) 한편 다른 학자들은 이 헬라어 동사가 엘리야의 사역을 암시한다 고 이해한다( 말 3:1, 4:5 [3:23 마소라]; Fitzmyer 1981: 828 ). 이 견해는 옳을 수도 있지만, 5) 헬라어 부정사 ‘헤토이마사이’( JEtoima¿sai, 준비하기)는 헬라어 동사 ‘에이스엘돈’(eijshvlqon, ‘그들 이 ~안으로 들어갔다’)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목적의 의미를 나타낸다. 곧 ‘그들이 준비하려고 (한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를 뜻한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헬라어 접속사 ‘호스’(wJß)가 사
용된 사례에 대해서는 BAGD 898 §IV.3.b 및 BAA 1793 §IV.3.b를 참조하라. 어떤 학자들은 설교와 숙소를 위한 준비를 서로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헬라어 동사 ‘헤토이마조’(eJtoima¿zw)는 ‘어떤 장소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BAGD 316 §1; BAA 640 §1; 마 22:4; 요 14:2~3. 6) 이제까지 누가복음에서 헬라어 동사 ‘헤토이마조’(eJtoima¿zw, 준비하다)는 모두 네 번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세 번(눅 1:17, 76, 3:4)은 세례 요한을 언급한다. 누가가 이 헬라어 동사를 이와 같이 사용하 는 것과 9:53에서 예수와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언급은 이 헬라어 동사가 52절에서 단 순히 숙소를 준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만약 9:1~6에서 언급 된 제자들의 선교 사역이 이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것이라면, 여기서 사자들은 또한 예수의 설교를 위한 준비를 미리 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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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확실히 그렇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마을로 들어간다는 것 그 자 체가 사역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사자 들은 그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세 번( 9:52, 10:33, 17:16 ) 언급한다. 그 가운 데 이 단락만 사마리아 사람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언급한다. 다음 사항과 관 련해서, 누가복음 10장 33절( 선한 사마리아 사람 )과 17장 16절(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열 사람 가운데 예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어떤 사마리아 사람 )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수
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기 때 문이다. ( 또한 행 1:8. 8:1~14, 25, 9:31, 15:3 등에서도 사마리아 사람 [들]이 언급된다 ). 원래 사마 리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이 세운 성읍( 도시 )을 가리키는 이름이었 다. 오므리 왕은 사마리아 성읍을 건설하여,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 다( 왕상 16:21~24 ). 사마리아 지역의 주민들은 북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서 로 섞인 혼혈 민족이었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업신여겼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 아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순수한 신앙에서 벗어난 종교적인 관점들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하
17:30~31; 스 4:2; 요 4:9; 눅 17:18;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4.9 §§114~119; 11.8.6 §342; 12. 5.5 §257 ).
사마리아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과 이스라엘
의 남부( 유다 ) 지역 사이에서 살았다. 그들은 시온 산이 아니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요
4:20~24 ),
또한 구약 성경 가운데서 모세오경만을 정경으
로 인정했다. BC 128년경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요한 히르카누스가 그리심 산에 세워진 성전을 파괴하자, 이스라엘과 사마리아 사이에 긴장이 더욱 고 조되었다. 한편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는 데 걸어서 약 사흘이 걸렸다. 사마 리아 지역을 돌아갈 경우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많은 유대인은 사 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그 지역을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것 을 선호했다.7) 제자들의 이와 같은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예수는 사마리 아 사람들에게도 다가가려고 시도했다. [9:53] 제자들의 사명은 실패로 끝난다.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
를 받아들이지( ejde¿xanto, 에덱산토, [그들이] 받아들였다 )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예루 살렘을 향하여 가기 때문( 여기서 헬라어 접속사 ‘호티’ [o¢ti]는 이유를 나타냄 )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와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단락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준다. 모든 민족이 예수의 사역을 거부한다( 행
4:24~29 ).
한편 많은
7)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1.3 §232, Jeremias 1969: 352~358, TDNT 7:88~94.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집회서 50:25~26; T. Levi 7.2; 창 35:2에 대한 Gen. Rab. 81.3; 희 년서 30.5~6, 23; C. A. Evans 1990: 164 등을 참조하라. 그리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관계 에 대해서는 브린들(Brindle 1984)의 논문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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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학자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그리심 산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유대인들을 거부한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예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공통점이 별로 없다. 두 민족은 오랫동안 서로 분리된 역사를 지녔다(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20.6.1 §§118~123, 『유대 전 쟁사』 2.12.3 §§232~233, Danker 1988: 209, Ernst 1977: 318 ).
이와 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적대감을 해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 ‘받아들이지 않다’라는 표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거부는 단지 유대인들이나 또는 이스라엘 백성 및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곧 예수에 대한 거부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눅
8:26~39에서
이 사건과 비슷한 사례가 소개되었다. 예수가 수많은 귀신들이 들린 어떤 거라사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 아낸 사건과 관련해서,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도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따라서 이 단락의 내
용은 예르벨( Jervell 1972: 113~132 )의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반대한다. 곧 예르벨은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시 찾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로서 긍정적 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한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거 부했다. 또한 나중에 예수는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후에 예수에게로 와서 발 아래 엎드리며 감사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눅 17:18 )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사항들을 고려할 때, 이 단락에서 누가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명백 하게 이스라엘의 일부로 이해했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혼합 민족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자, 사도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견고하게 하려고 그 지역으로 갔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의 전파가 새롭고 중대한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사도( 들 )이 해당 지역을 방문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행 8:14~24, 10:34~43 ). 나중에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새로운’ 국면( 단계 )이 전개되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예수와 연결되어 있는 약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 단락의 단계에서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한다. 하지만 나중에 사도행전에서는 상황이 반 전되어,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것이다.
ii. 제자들이 예수에게 즉각적인 심판을 요청함 (9:54) [9:54]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하자, 제자들은 그것에 반응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에게 그 사마리아 마을을 초토화하는 심판을 내리자고 제안했다. 엘 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게 한 사건( 왕상 18:38 )을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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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이라는 표현은 이미 구약 성경에 선례가 있다.8) 이 두 제자들은 하나님이 그 사마리아 마을을 완전히 없애 버리시기를 바랐다. 이 제자들의 요청은 이들이 예수의 명예에 커다란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의 요청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반영 해 준다.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이들은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람들을 곧바로 대단히 강력하게 심판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어떤 학자들은 ‘우뢰의 아들’( 막 3:17 )이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별 명이 이 요청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한다.9)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은 분명히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에 게 주어진 권한이 매우 광범위하다고 인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소멸하는 불을 내리도록 허락해 줄 것을 예수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절의 내용에는 제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눅 9:49 ) 사역할 때, 그들에게 예수 에게서 유래된 선지자와 같은 권위가 주어졌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Ellis 1974: 152 ).
또한 이 절이 엘리야를 암시해 준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
면 엘리야 모티프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소개하는 첫 번째 사건( 4:25~27; Ellis 1974: 152 )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에게 복종한
다. 예수가 찬성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 헬라어
의문문 ‘델레이
스’ [qe¿leiß, 당신은 원하십니까?]에 주목하라 ).
iii.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음 (9:55) [9:55] 예수의 반응은 간결하게 또한 그림을 보는 것 같이 묘사되었다. 예
수는 몸을 돌려서 뒤를 돌아다본다( 무리의
맨 앞에 있기 때문임 ).
그리고 야고보와
8) 대하 7:1, 3에서 예루살렘 성전 봉헌식을 거행하며, 솔로몬이 제물을 바칠 때, 또한 왕하 1:10, 12, 14 에서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시야가 사마리아(!)로부터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 50명을 세 번이나 보냈 을 때, 엘리야 선지자에 의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두 번이나 오십부장과 그의 부하들을 불살랐던 사건 등이다. 참조, Miyoshi 1974: 13. 그리고 왕하 1:16~17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아하시야 왕이 여 호와를 저버리고 바알세붑에게 자신이 병에서 나을 수 있는지 물어보게 한 행위에 대해 비난한다. 나 아가 불이라는 이미지는 여호와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사건을 연상시켜 준다(창 19:24~28). 9) 플러머(Plummer 1896: 234)는 누가복음에서 이 별명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 셜(Marshall 1978: 406)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이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제안을 받아들이 지 않는다. 그러면서 마셜은 그 별명이 이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또한 예수가 그들에게 명예를 떨어뜨리는 별명을 지어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막 3:17에 대한 헬라어 사본들을 살펴볼 때, 예수가 직접 그 별명을 지어 주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놀랜드(1993a: 536)는 막 10:35~45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권력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 을 섬겨야 한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야고보와 요한의 성격을 넌지시 알려 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와 같은 성격은 점차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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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요한을 꾸짖으며, 예수는 그들의 요청을 물리친다.10) 곧바로 심판하자는 제자 들의 요청은 예수의 그 당시 사역의 특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상 예수의 사역에는 심판에 대한 경고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심판은 나중에 임할 것이다( 10:13~16; 17:20~36 ). 각 사람이 예수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가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심판은 지금 실행되지 않는다. 이전에 복음 전파 사역을 할 때, 자신들의 발에서 먼지를 털어 내는 행동을 통해 제자들은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냈다. 곧 만약 사람들이 예 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에게 종말론적인 결과 를 초래하는 것이다( 9:5 ).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예수에 대해 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을 주신다.11) 누가는 예수 가 꾸짖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다. 단순히 예수가 제자 들을 꾸짖으셨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사역에 대해 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또한 엘리야처럼 경고의 메시지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심 판의 때와 장소와 관련해서, 제자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결정하신 대로 심판 하시게 해야 한다( 19:24~27; Schürmann 1994: 29 ).
c. 예수와 제자들이 다른 마을을 통해 계속 여행함 (9:56). [9:56] 사람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다른 장소로
간다. 누가복음 4장 43절에서 예수는 다른 마을들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마을로 간다. 여기서 언급되는 다른 마을은 아 마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을의 이 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예수와 그의 일행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보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한다.
요약 누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대단원 ( 9:51~ 19:44 )의 첫 단락( 9:51~56 )은 마지막 단락( 19:41~44 )과 마찬가지로 거부라는 주제로
10) 이 절에서 헬라어 부정과거 분사 ‘스트라페이스’(strafei¿ß, [몸을] 돌이키면서)와 헬라어 동사 부 정과거형 ‘에페티메센’(ejpeti ¿mhsen, 그가 꾸짖었다)이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 단어들은 예수가 동시 에 그와 같은 행동을 했거나, 아니면 예수가 자신의 몸을 돌이키고 나서 제자들을 꾸짖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눅 22:47~51에서도 예수는 이 경우와 비슷하게 반응한다. 참조, Nolland 1993a: 537. 11) 행 8장에서 제자들은 박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다. 벧후 3:9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에 이르도록 오래 참으 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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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시작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한다. 그곳에서 예수 는 거부당하고, 그 결과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단지 갈릴리 사람들과 유대 교의 종교 지도자들만 예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 대한 거부는 광 범위하게 일어날 것이다. 다양한 이유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관심사와 관점이 예수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역사와 관련한 인종 및 종교적인 차이점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과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거부와 관련해서,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을 곧바로 초토화시키는 심판을 내리게 하자는 제자들의 요청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과 입장을 평가하고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스 스로 그 때와 장소를 결정하셨다. 그것에 대한 평가와 심판은 오직 하나님에 게 속한 고유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와 그가 보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부정적인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누가는 그와 같은 결 과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한다( 눅 10:13~16, 12:5; 행 10:42, 17:31 ). 또한 그 경고는 타 당한 것이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부 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제자도에 대해 배우면서 계속 여행한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사람 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 메시지를 듣고 결정하는 것은 자신에 게 궁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매우 소중한 메시지다. 그리고 그 메시 지는 각 사람이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결정 및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제 자들이 어떤 사마리아 마을에게 곧바로 심판을 내리자고 요청하자, 예수는 그들을 꾸짖는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제기하는 심판 자체를 부인하지 않 는다. 예수는 심판에 대해서 제자들이 제시하는 때와 또한 복음 전파와 관련 한 그들의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단락에서 언급되 는 사마리아 마을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실질적인 사례를 보여 준다. 의미심장하게도,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 소 개하는 부분( 눅
4:24~30 )과
똑같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다루는 대단원도
예수가 거부당하는 것과 엘리야에 대한 암시로 시작된다. 따라서 예수를 받 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들에게 이 시기는 불행한 때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 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와 같은 소중한 기회를 놓칠 위험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거부는 결 국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부활을 통해 하늘나라로 들어 올림을 받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하므로, 많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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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스라엘도 돌 이키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다( 롬 11장 ). 이와 같이 그 당 시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로 만 들지 않는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은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 서, 모든 나라에게 전파될 것이다.
추가 주석 9:51 예수가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곧 솔 로몬의 시편 4편 18절(죽음에 대한 비유), 에스드라2서(=에스라4서) 6장 26절, 8장 19절, 14장 49절(고대 시리아어로 덧붙여짐), 모세의 유언집 10장 12절(Creed 1930: 141, Plummer 1896: 262) 등이다. 그룬트만(Grundmann 1963: 201)과 엘리스(Ellis 1974: 152)는 예수가 ‘영광을 받는다’(요 13:31)는 요한복음의 신학적인 관점이 이 절의 개념과 평행을 이룬다고 말 한다. 슈바이처(Schweizer 1984: 169)는 예수가 들림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뉘앙 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지한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언어적인 근거로서, 그는 솔로몬의 시 편 4편 18절 및 위-클레멘스(Homilies 3.47) 등을 제시한다. 다른 학자들은 모세의 유언집 10.12, (고대 시리아어로 쓰인) 바룩2서 46.7 및 위-클레멘스 본문 등을 근거로 삼지만, 반면 에 놀랜드(Nolland 1993a: 534)는 오직 솔로몬의 시편 4편 18절만이 죽음을 가리킨다고 주장 한다. 한편 유대교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로 들림을 받았다고 강조한다(Pseudo-Philo, 『Biblical Antiquities』 32.9, 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4.8.48 §326; 9.2.2 §28, 필론, 『모세의 생 애』 2.51 §291, T. Job 39.12, 신 35:7에 대한 『Sipre』 357 [=Neusner 1987: 2.453~462], 또한 신명기에 대한 『미드라쉬 하-가돌』[예레미아스가 TDNT 4:855 n. 99에서 언급함]). 또한 알렉 산드리아의 클레멘스(『Stromata』 6.15.132)도 모세의 승천에 대해 논의한다. 그리고 히에로니 무스는 암 9:6에 대한 설교에서 에녹과 모세와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언급한다(C. A. Evans 1990: 163~164). 9:54 헬라어의 어떤 사본들에서 이 절에 덧붙여진 다른 독법(wJß kai\ jHli ¿aß ejpoi ¿hsen, 호스 카이 엘리아스 에포이에센, 엘리야가 행한 것과 같이)는 이 절을 엘리야와 분명하게 연결 시킨다. 하지만 이 다른 독법은 헬라어 원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A, C, D, W, Q 및 Byz 사본들은 다른 독법을 지지한다. 하지만 î45, î75, a, B 및 다른 주요한 알렉산드리아 사본 들은 이 다른 독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만약 덧붙여진 헬라어 구절이 원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면, 왜 그 구절이 다른 사본들에 생략되어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Plummer 1896: 264). 9:55 이 절에 대한 몇몇의 다른 독법들은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은 내용을 알려 준다. 하지만 그 독법들의 내용은 다양하다. 따라서 그 독법들은 나중에 필사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졌을 가능 성이 높다. 그와 같은 다른 독법들은 D, K, G, family 1, family 13 및 몇몇의 시리아어 사본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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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나타난다. 어떤 다른 독법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곧 “너희는 너희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또 다른 독법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인자는 영혼을 멸망시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구원하려고 왔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약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이 다른 독법은 해당 구절의 영향 을 받았을 것이다. 이 두 가지 다른 독법은 초기의 사본들뿐 아니라, 또한 다양한 대문자 사본 들에 들어 있지 않다. î45, î75,
a, A, B, C, L, W, D, X 및 Y 사본들은 UBS-NA 헬라어 본문을
지지한다(Liefeld 1984: 934, Fitzmyer 1981: 830, Marshall 1978: 407~408, Schürmann 1994: 29 n.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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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자도와 관련된 경고( 9:57~62 ) 예수가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에서 거부당한 이야기에 뒤이어, 이 단락에서 는 예수가 제자도와 관련하여 요구하는 내용이 뒤따른다. 거부에 대한 이야 기 다음에 제자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 Grundmann Egelkraut 1976: 138 ).
1963: 203,
하나님 나라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권력을 소유한다는 것
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고난과 거부에 동참하는 것이 다( Danker 1988: 210 ).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다음 사실 을 이해해야 한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 단락에서 이른바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사람들은 모두 예수에게서 분명히 이와 같은 메시지를 받는다. 예수가 거부당한 것과 마찬 가지로,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를 따 라가는 것에 가장 우선권을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수와 연합한 제자들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뒤를 자주 돌아보게 되면, 그것으로 말 미암아 위험에 처하게 되고 중대한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 다. 이 단락의 이야기에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개인들이 주목해야 할 대상 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각각 어떻게 반응했는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 문이다. 오히려 이 단락의 이야기는 오직 예수의 대답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예수의 대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료의 원천 및 사건들의 역사적인 사실성 누가복음 9장 57~60절의 평행 본문은 마태복음 8장 18~22절이다(Aland 1985: §176). 마태복음의 해당 본문에서는 단지 누가복음에서 언급되는 처음 두 사람에 대한 내용만 약간 다르게 제시되어 있다. 비록 마 8~9장이 연대기적인 순서대로 엄밀하게 배열된 것 은 아니지만, 흥미롭게도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의 사역 부분 에 위치해 있다. 누가복음에서 소개되는 처음 두 사람에 대한 묘사와 마태복음의 평행 본 문의 내용은 서로 상당 부분 일치한다. 따라서 이 두 본문은 분명히 반복적으로 일어난 어떤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단락에서 언급되는 사건은 연대기적으 로 어떤 배경에 위치해 있는가? 아른트(Arndt 1956: 276)는 다음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아른트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이 서로 다른 사건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견해 와 또한 이 사건들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견해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1) 마태복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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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제시된 이 사건의 배경이 연대기적으로 맞을 것이다. (2) 누가복음의 위치가 옳을 것이 다. (3) 마태와 누가 모두 이 사건에 대한 연대기적인 배경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 지 않았다. 만약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옳다면, 두 복음서들 가운데 하나는 이 사건을 주제에 따라서 배열한 것이다. 이 견해는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두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이 사건의 배경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와 두 번째 견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는 매우 어렵다. 전반적으로 갈릴리 지역을 배경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가 모두 이 사건을 주제에 따라서 배열했을 가능성(세 번째 견해)이 매우 높다(Arndt 1956: 276, Ellis 1974: 152[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듯함]).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마태와 누가는 모두 배경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은 채 이 단락의 사건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와 제자 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화는 주제적인 특성을 지닌 단락들에 나타난다. 누가복음 9장 52절은 예수를 위해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것을 언급한다. 이 사건 은 열두 제자들이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파송받은 사건(9:1~6) 이후의 시기에 일어났을 것이다. 아마도 이 최초의 복음 전파 사역 이후의 어떤 시기에 9장 57~62절에서 소개되 는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 어떤 사마리아 마을이 예수를 거부하는 사건 다음에, 누가는 ‘복음 전파 사역’이라는 주제를 소개하는 부분에 의도적으로 이 단락을 삽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누가는 이 사건을 이 부분에 위치하게 했는가? 왜냐하면 제자들이 복음 전 파 사역의 특성, 특히 새로운 영역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예 수에게 전적으로 헌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와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사람들에게서 거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자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이 단락이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다루는 대단원에 위치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지금 사람들의 거부를 직면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10:1~24절에서 누가는 더 많은 제자들이 복음 전파 사 역을 위해 보냄받는 사건을 소개해 준다. 9장 51~56절은 지역적인 배경이 바뀐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 서 예수를 대신해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누가복음 9장 57~60절과 마태복음 8장 18~22절의 배후에 어떤 공 통된 자료가 있다고 이해한다. 특히 누가와 마태의 해당 부분의 헬라어 표현이 서로 일치 하는 범위를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고 한다(Schürmann 1994: 47). 쉬르만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공통 자료가 바로 Q 자료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마태복음 우선설 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이 공통 자료는 마태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는 제 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제자도의 본질을 철저하게 요구한다. 이 점은 여기에 수록된 예수의 말이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지지해 준다. 예수 세미나는 9:57~60에 들어 있는 예 수의 말이 진정성이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예수 세미나는 예수의 말을 분홍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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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한다(Funk and Hoover 1993: 316~317). 이 세미나는 예수의 말에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의 철학적인 배경이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헹엘(Hengel 1981: 5~6)은 이 견 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누가복음 9장 59~60절은 예수의 말들 중에서 그 진정성을 가장 적게 의심받는 것 가운데 하나다(Hengel 1981: 6 n. 12). 반면에 9장 58절은 때때로 예 수의 말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 절에서 ‘인자’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Nolland 1993a: 540, Casey 1985). 크로선 (Crossan 1991: 255~256)은 위경 도마복음 86에서 누가복음 9장 57~58절의 평행 본문을 발견한다. 크 로선의 견해에 의하면, 도마는 ‘인자’라는 용어를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지만, 반면 에 누가는 이 용어를 예수에 대한 칭호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크로선은 58절의 예수의 말 이 누가복음과 위경 도마복음에서 이중적으로 입증된다고 이해하면서, 그 말이 진정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누가가 ‘인자’라는 용어를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했다고 이 해한다. 여기서 크로선은 위경 도마복음 안에 들어 있는 초기의 전승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서 예수의 말은 동물들보다도 더 자주 이곳저곳으 로 이동하는 어떤 사람에 대한 말보다는,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예수의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참조, 9:58에 대한 주해). 이 단락에 수록된 예수의 말에 의하면, 예 수는 어떤 랍비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가르치는 선생이나, 선지자보다 훨씬 위대한 인 물이다(Schürmann 1994: 48).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적인 헌신을 필요로 하는 예수의 요 구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부정 적인 반응에 직면하게 될 것을 기대하며, 그것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9장 61~62절은 어떤 자료에서 유래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이 제시되었다(Marshall 1978: 408~409). (1) 어떤 이들은 누가가 스스로 9장 61~62절의 내용을 지어낸 것이라고 이해한다.1) 하지만 이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의 말은 첫 번 째와 두 번째의 말과 문체적으로 비슷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Schneider
1) 디벨리우스(Dibelius 1934L 160~161, 특히 160 n. 1)는 이 말(9:61~62)이 지닌 일반적인 특성은 이 말이 복음서 저자에게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밝혀 준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디벨리우스는 어떻게 ‘일반적인 원리들’이 복음서 저자에게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9:61~62의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디벨리우스는 이 절들에 창 19:26의 이미지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제자도에 대한 적절한 결론을 제시하려는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 복음 서 저자가 9:61~62을 이 부분에 삽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세미나도 이 절들이 누가에게로 거슬 러 올라간다고 이해한다. 그러면서 예수 세미나는 이 말이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지 나치게 많이 부여한다고 주장한다(Funk and Hoover 1993: 316에서 이 절들은 검은색으로 분류됨). 하지만 예수 세미나가 예수의 말일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9:57~60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제자들의 행동과 정체성은 이미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한편 9:61~62이 초대 교회로부터 유래되었다 는 견해에 대한 논박과 관련해서, 다음 주석을 참조하라. Marshall 1978: 409. 특히 디벨리우스를 의 존하고 있는 슐츠(Schulz 1972: 435 n. 239)의 견해에 대한 마셜의 비평을 참조하라. 또한 글롬비차 (Glombitza 1971)도 9:61~62을 누가가 지어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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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1977a: 231, Crossan 1991: 256). 9:57~62에서 예수의 세 가지 말은 함께 속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예수의 이 말이 열왕기상 19장 19~20절의 평행 본문에 근거해서 표현되었다고 제안한다(피츠마이어[Fitzmyer 1981: 837]는 이 말이 누가에게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다). (2) 다른 학자들은 누가가 자신이 입수한 특별한 자료에서 세 번째 사람에 대한 내 용을 얻었다고 주장한다(Grundmann 1963: 204, Ernst 1977: 320 [Q 자료 또는 누가의 고유 자료], Wiefel 1988: 192, Schneider 1977a: 231 [슈나이더는 첫 번 째와 두 번째 견해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지 않음], Fitzmyer 1981: 833 [누가가 스스로 지어냈다는 견해보다 이 견해를 조금 더 선호함], Manson 1949: 72). (3) 또 다른 이들은 9장 57~62절에 해당하는 내용이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고 있는 Q 자료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태가 9장 61~62절에 해당 하는 내용을 생략한 것이다(Hengel 1981: 4 n. 5. 또한 예수의 세 가지 말이 표 현상 서로 평행을 이룬다는 점에 근거해서, 헹엘은 9장 61~62절에서 예수의 말 의 진정성을 옹호한다). 나아가 헹엘은 마태가 세 번째 대화 부분을 생략했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의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되어 있어서, 그것이 마태복음 8장 18~23절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 마지막 견해는 다음과 같다. 곧 누가복음 9장 61~62절은 Q 자료와 비슷하지만 마태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자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만약 마태가 그 자료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왜 마태가 세 번째 대화 내용을 생략했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다(Hahn 1969: 119 n. 99).
비록 누가가 추가 자료를 사용한 것처럼 여겨지지만(두 번째와 네 번째 견해), 네 가지 견해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쉽지 않다. 또한 만약 마태가 누가복음 9장 61~62절 에 해당하는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왜 마태가 그 부분을 생략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9장 62절에 소개된 예수의 말은 상당히 과격한 어조로 표현되어 있다. 이 점은 예수 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을 지지하며, 또한 그 말은 누가복음에 수록된 예수의 다른 말들과도 조화를 이룬다(곧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10:4],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 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14:26]등이다. Nolland 1993: 540). 따라서 누가복음 9장 61~62절은 누가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내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재미를 추구하는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 다. 제자도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가 제자의 삶속에서 가장 우선권을 차지하는 45
누가복음 2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제자는 자신이 예수와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예수의 제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세상 사람들이 처리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처리해야 한다. 이 단락에 서 예수의 말( 매우
강하고 특이한 것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과장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든지 )은
무엇보다도 제자도의 긴급성과 전적인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단락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어떤 양식으로 표현되었는가? 이 단락의 이 야기는 세 가지 선언, 또는 격언( apophthegms )이다( Bultmann 1935: 72 ).
1963: 28~29, V. Taylor
베르거( Berger 1984: 81, 182~187 )는 이 단락의 이야기가 경고인 동시에 선
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의 말이 이 단락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나 타난다.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a.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함( 9:57~58 ) b.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가 가장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함 ( 9:59~60 ) c. 복음 사역에 언제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경고함( 9:61~62 ) 이 단락의 핵심 내용은 제자도와 복음 사역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 이다. 여기서 모든 제자들이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 다. 제자도는 반드시 예수가 사람들에게서 거부당한다는 배경에서 이해해야 만 한다. 어떤 제자가 복음 전파 사역을 할 때, 그는 제자도가 무엇을 요구하 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와 하나님 나라에 가장 우 선권을 두어야 한다. 또한 자신들이 예수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때, 제자들 은 세상적인 일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 로서의 사명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가정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심을 다소 적게 기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 가정의 사소한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헌신하다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복 음 사역에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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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및 설명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 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 57
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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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s they were going along the road, a man said to him,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58 And Jesus said to him, “The foxes have holes, and the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where to lay his head.” 59 And he 57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 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 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 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 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 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said to another, “Follow me.” But he said, “Lord, permit me to go first and bury my father.” 60 But he said to him, “Leave the dead to bury their own dead; but as for you, go and proclaim the kingdom of God.” 61 Another said, “I will follow you, Lord; but first let me say farewell to those in my house.” 62 But Jesus said to him, ┌ “No one who puts his hand to the plow ┐ and looks back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a.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을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함 (9:57~58) [9:57] 첫 번째 사건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온다. 그는 예수가 어
느 곳으로 가든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런 언 급이 없다. 어떻게 그가 이와 같은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 도 제시되지 않는다. 예수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가겠다는 이 사람의 선 언( 57절 )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예수에게 그와 같이 헌신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답변( 58절 )도 그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다. 이 절의 평행절인 마태복음 8장 19절에서 언급되는 어떤 서기관은 자신이 예수의 문하생이 되어, 그를 따르겠다고 제안한다. 왜 냐하면 그 서기관은 예수를 ‘선생님이여’( dida¿skale, 디다스칼레 )라고 부르기 때 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 서기관이 자기의 문하생이 되는 것 이상을 바라 고 있다. 유대교에서 어떤 랍비의 문하생들( 제자들 )은 율법( 토라 )를 배우기 위해 서 랍비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하지만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더 어렵고 위험한 학습 과정을 제공한다( Plummer
1896: 265, Ellis 1974: 153; 눅 6:40 ).
따라서 예
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토라를 배우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곧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바꾸 는 것이다. 제자도에는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아마도 죽음을 당하는 것도 포 함되어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고자 한다 면, 예수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반드시 자신이 거 부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9:51~56; Talbert 1982: 117~119 ). 예 수는 단순한 유대교의 랍비가 아니다. 예수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점들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 이 예수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위험과 거부를 직면할 준비가 되 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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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이 말을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그 당시 예 수와 그의 제자들은 여행을 하면서, 순회 사역을 하고 있었다( 9:56~58 ). 마태 복음 8장 18~19절에서도 일반적인 머리말이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더 자세 하게 언급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갈릴리 호수의 건너편으로 건너간 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특별히 어떤 서기관이 예수에게 나아와서, 어디든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말했다고 알 려 준다. 두 복음서에서 예수를 따라가겠다는 말은 사실상 거의 똑같이 묘사 된다. 한 가지 차이점으로서, 마태복음에서 그 서기관은 예수를 ‘선생님’이라 고 부른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그 사람의 가치 있는 목표에 무엇이 뒤따르게 될지 경고한다. 누가는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 사람이 어떤 서기 관이었다고 밝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58절의 예수의 말은 그를 따르고자 하 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놀랜드( Nolland 1993a: 541 )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곧 놀랜드는 그 당시 예수에게 말한 사람이 어 떤 서기관이라는 것과 그가 예수를 ‘디다스칼레’( dida¿skale, 선생님이여 )라고 부 르는 것은 마태가 덧붙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마태가 ‘어떤 서기관’ 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도 그 서기관을 ‘어떤 사람’이 라고 일반화해서 표현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누가는 첫 번째 사건에서 예수에게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또한 그 사람이 예수에게 사 용한 호칭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 음 9장 57절에서는 어떤 랍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그 랍비에게 말 을 거는 듯한 느낌이 표현되지 않았다. [9:58] 제자들이 예수를 본보기로 삼을 때, 예수는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묘사한다. 예수가 경험하는 생활 여건은 짐승들의 경우보다 더 열 악한 것이다. 여우들과 새들은 고정적으로 머물 장소가 있지만, 반면에 인자 는 자기 자신의 집이 없다. 불트만( Bultmann
1963: 28 n. 3 )은
여기서 ‘인자’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개념을 지닌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개념에 어긋난다. 곧 하나 님은 다른 피조물들보다 사람들을 더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점이다.2)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집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인자’는 특별히 예 수를 가리킨다( Liefeld 1984: 935, Marshall 1978: 410 ). 예수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자기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Hengel, TDNT 9:55 ).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따르면
2) 콜페(Colpe, TDNT 8:432~433)는 여기서 인자는 ‘예수와 같은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한편 눅 12:22~34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새들을 돌보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들 을 돌보시며, 사람들은 새들보다 훨씬 귀한 존재라고 말한다(12:24). 따라서 58절에서 예수의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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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예수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 거부당할 것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데에 는 단호한 결심과 의지가 필요하다( Talbert 1982: 118 ). 댕커( Danker 1988: 210 )는 이 절에 소개된 예수의 말과 평행을 이루는 격언들 또는 개념들을 제시한다. 플루타르크( Plutarch, 9.5 [828]』 )는
『Lives of Tiberius and Gaius Gracchus
군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야생 짐승들
은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그 짐승들에게도 각자의 집 이나 굴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하는 군인 들에게는 자신들의 몫으로 오직 빛과 공기가 주어졌을 뿐이다”( 티베리우스 그라쿠 스가 이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집회서 36:26~27에서는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
아다니는 사람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웃는 어조로 말한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강도질하는 사람을 아무도 믿지 않듯이, 길들일 곳 없이 쏘다니며, 밤이 되면 아무 데서나 자는 사람을 누가 믿으랴?” 이 평행문들은 맨슨( Manson 1949: 72 )의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해 준다. 곧 맨슨이 예수의 말에서 격언적인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하 지만 58절에서의 ‘인자’라는 표현이 격언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맨슨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따라서 58절에서 격언 의 특성을 지닌 예수의 말은 먼저 예수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의 발자취 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며 일정한 집도 없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또한 하나 님과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자신의 집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그 러므로 이 절에서 예수의 말에는 숭고한 비애감이 스며들어 있다. 예수의 제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로 선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8장 20절의 헬라어 본문에서도 누가 복음 9장 58절의 예수의 말이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 똑같이 수록되어 있다.3)
b.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가 가장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 함 (9:59~60) [9:59] 본문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에게 예수는 자기를 따르라고
3) 위경 도마복음 86에서도 눅 9:58의 평행 본문이 나타난다. 하지만 도마복음의 해당 절에는 영지주의 적인 어조로 강조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절은 머리를 두고 안식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또한 Fitzmyer 1981: 835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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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4) 예수에게 부름을 받았을 때,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랐던 레위( 눅 5:28 )와는 달리, 이 사람은 지금 곧바로 예수를 따라가지 않고자 하는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곧 그는 먼저 자기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 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요청은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버 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자식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토비트 4:3~4, 12:12 ).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며 가르치 기 위해서 때때로 예수는 급격한 변화로 이끄는 말을 한다. 그래서 60절에 제 시된 예수의 답변은 독자들을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절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자 한다. 이 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 엘 문화에서 장례를 정중하게 치르는 것은 주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5) 의식적인 정결은 장례 의식을 거행하는 것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겨졌다. 이 점은 이스라엘 문화에서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우 선적으로 행해야 하는 일임을 보여 준다( Ellis 118 ).
6)
1974: 153, Ernst 1977: 321, Talbert 1982:
한편 이 절에서 어떤 사람의 요청은 열왕기상 19장 19~21절을 따라 표
현되어 있다. 열왕기상의 해당 구절들에서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자기의 부모 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그를 따르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다( Schweizer 1984: 171. 참조, 눅 9:61~62 ).
외경 집회서 38장 16절에서는 59절에 등장하는 예수
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되어 있다. “너는 들어라, 사람이 죽으면 눈물을 흘리고 곡을 하여 깊은 슬픔을 나타내어라. 그 리고 의식을 갖추어 염을 하고 의례를 다 지켜 장사지내라”( 공동번역 ). 하지만
4) 이 사람이 빌립이나 도마일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플러머(Plummer 1896: 266)는 그와 같은 견해는 상상에 근거한 것으로서 입증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옳다. 이와 같은 시도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Stromata』 3.4.522)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 유대교의 ‘사랑의 행위’와 또한 장례에 대해 언급하는 고대의 중요한 문헌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 라. Egelkraut 1976: 139 nn 3, 5; SB 1:487~488, 4:578~592; Hengel 1981: 8~10 및 n 21. 또한 행 5:5~6, 10 및 요 11:1, 14, 17 등에는 어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신속하게 장사를 치르는 것이 언급된 다. 그리고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대해서는 눅 7:12에 대한 주해를 참조하라. 한편 구약 성경에서는 장례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시기가 언급된다. 예를 들면 남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 로로 사로잡혀 가기 직전의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시기다(렘 16:5~7; Ernst 1977: 321). 6) 레 21:1~3에 의하면, 만약 가까운 가족이 죽으면, 제사장들은 그 주검에 가까이하는 것이 허용되었 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어떤 주검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었다(레 21:11). 자비 또는 사랑에 근거한 행 위로서,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것은 일반적인 중요한 종교적인 활동보다 우선권을 지닌 것으로 여 겨졌다. 다음을 참조하라. 미 6:8; 토비트 1:17~18, 2:3~9, 4:3~4, 6:15, 12:12~14, 14:11~13; m. Ber. 3.1, b. Ber. 18a(이 가운데 어떤 문헌은 애도 기간에는 심지어 토라를 연구하는 것도 금지한다). 나실 인 서원을 한 사람은 장례 의식에 참여해서는 안 되었다(민 6:6~8). 미쉬나(m. Ber. 3.1)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가까운 가족이 죽은 사람은 쉐마와 ‘쉐모네 에스레’(유대교의 열여덟 가지 축복 기도)을 암송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그는 토라에 언급된 모든 계명들로부터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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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60절에서 예수는 이와 같은 요청을 거부한다. 자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서, 자녀가 실행 해야 할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예수가 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 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보다 더욱 중대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 로 예수의 말은 사실상 예수가 자신을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존재로 이해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예수가 그 사람에게 요구하는 우선권은 십계 명 가운데 다섯째 계명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메시아의 권위 를 지닌 존재가 이미 와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Witherington 140 ).
1990: 139~
예수는 새로운 모세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일은 가장 우선권을 지녀
야 한다. 과연 60절의 예수의 요구는 가혹한 것인가? 59절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버 지는 이미 죽어서, 곧바로 장례 의식을 치러야만 했는가? 아른트( Arndt 1956: 277 ) 는 그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게 해 줄 것을 예수에게 요 청했다고 이해한다. 만약 그 사람이 이와 같이 요청했다면, 제자로서 예수를 따르는 것은 기약 없이 늦추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책망은 상당히 납득 할 만하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헬라어 동사 ‘아콜루데이’( ajkolou¿qei, 따르라 )가
현재 명령형이라는 데 주목한다. 곧 ‘나를 따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학자들은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를 지내야 할 상황에 있는 사람은 자 기의 마을을 곧바로 떠나서 예수와 함께 여행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한다. 율 법 규정에 의하면, 주검을 가까이 한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 민 19:11 ). 따라 서 그는 장례 의식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눅 7:12 ).
만약 이 견해가 옳다면, 아버지가 죽은 사람의 아들은 자신이 가정의 기
본적인 의무 사항을 수행하기까지, 예수에게 헌신하는 것을 미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일을 섬기는 것보다 가정의 일 에 더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은 예수가 제자로 부르는 것이 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고 밝혀 준다. 그런데 리펠트( Liefeld 1984: 935 )는 누가복음 14장 25~27절은 과장법적인 표 현을 통해 누가복음 9장 59~60절의 내용과 비슷한 점을 강조한다고 주장한 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으로서,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서 예수의 요청은 곧바로 예수를 따를 것을 의도하는 9장 61~62절과 평행을 이룬다. 또한 플러 머( Plummer 1896: 266 )도 아른트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플러 머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아마도 중병에 걸려 그 당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늦추고자 하는 것은 ‘나를 따르라’는 현재 명령형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것 이다. 만약 예수가 나중에 장사를 지내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면, 장례에 대한 51
누가복음 2
그의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가 이해하는 것보다 예 수가 그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훨씬 긴급성을 띠고 있다. 헹엘( Hengel 1981: 6 ) 은 이 점을 올바로 지적한다. 누가복음 9장 59절과는 달리, 마태복음 8장 21절에서는 예수가 먼저 제자 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에게 말했다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헬라어 본문에서 두 구절들은 매우 비슷하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 소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어순이 다르다. 둘째, 마태복음에서는 헬라어 동사 부정형( ajpelqeivn,
아펠데인, 가다 )이
사용되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헬라어 부정
과거 분사( ajpelqo¿nti, 아펠돈티 )가 사용되었다. 셋째, 마태복음에서는 헬라어 접 속사 ‘카이’( kai¿, 그리고 )가 덧붙여져 있다. [9:60] 예수의 답변에는 깊은 의미를 지닌 언어유희가 내포되어 있다. 예
수는 논리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대신에, 오히려 수사학적인 효과를 노리는 대답을 제시한다. 예수의 답변은 매우 강력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통 해, 예수는 제자도가 요구하는 헌신의 범위를 강조하며 밝히려고 의도한 다( Tannehill 1975: 162~164 ). 예수는 먼저 가족으로서 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를 이 행하고 나서 나중에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어떤 사람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리고 예수는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라 고 말한다. 구약 성경에는 장례 의식을 소홀히 해도 되는 것에 대한 선례가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그 선례는 단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임하게 된다는 것 을 계시하는 선지자들의 ‘반사회적인’ 행위에 국한되어 있었다( 겔 16:1~9; Hengel 1981: 11~12 ).
24:15~24; 렘
따라서 여기서 예수의 요구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
요구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제 새로운 중요한 시기가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어떤 이들은 얼핏 판단하기에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예수의 이와 같은 요구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부모를 버리고 떠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해석은 예수의 답변이 의도하는 수사학적인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 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절의 해석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클렘 [Klemm 1969~70]의 논문을 참조하 라 ).
피츠마이어( Fitzmyer 1981: 836 )는 다음 네가지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1)
첫 번째 견해는 이 요구가 예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부인한다. (2) 두 번째 견해는 예수의 답변이 수사학적으로 과장해서 표현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3) 세 번째 견해는 잘못 번역된 아람어의 표현에 근거해서, 첫 번 째로 언급되는 ‘죽은 자들’( nekrou¿ß, 네크루스 )은 관을 들고 가는 사람들을 가리 킨다고 주장한다.7) (4) 네 번째 견해는 여기서 언급되는 ‘죽은 자들’은 모두
7) 피츠마이어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해 주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페를레스(F. Perles
52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은 결코 장례 의식을 거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절을 문자적으 로 아니면 수사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죽은 사 람은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수의 대답에 수사학적인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 준다. 이 점은 예수의 대답을 문자 그대로 엄밀하게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예수의 말은 다음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의미할 것 이다. 첫 번째로 나타나는 ‘네크루스’( nekrou¿ß, 죽은 사람들 )는 어떤 특별한 의미 를 지니고 있다( Plummer 411, Ellis 1974: 153~154 ).
1896: 267, Creed 1930: 142~143, Fitzmyer 1981: 836, Marshall 1978:
아니면 예수의 말은 단지 수사학적인 측면에서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어라” 또는 “보다 덜 중요한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 이지 말라.” ( 놀랜드 [Nolland 1993a: 543]는 여기서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한다 ).
아마도 첫 번째 ‘네크루스’( nekrou¿ß )는 하나님 나라의 일에 헌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곧 하나님 에게서 분리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에 참여 하지 않는다( 엡 2:1~3. 유대교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SB 1:489, 2:165를 참조하라. 헹엘 [Hengel 1981: 7~8]은 다양한 평행문들을 언급한다. 슈나이더 [Schneider 1977a: 232]는 헹엘의 관 점을 지지하지 않는다 ).
여기서 예수가 강조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곧 하나님 나
라에 우선권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이 다. 예수의 요구는 매우 가혹한 것처럼 여겨지고, 또한 그 당시 유대 사회의 배경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60절의 예수의 말은 그가 직접 말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Fitzmyer 1981: 835 ). 사실상 여기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예수를 따르는 것을 조금 늦추는 것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또한 타당한 변명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그의 변 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태너힐( Tannehill 1975: 163 )은 예수의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의 말은 예수가 요구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밝혀 준다. 또한 예수의 말은 제자도가 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이 실질 적으로 해야 할 일과 바라는 것이 서로 부딪히게 되는 다른 많은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조명해 준다.” 어떤 것도 제자도가 추구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것도 예수를 따르는 것을 늦추게 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는 그와 같은 우선적인 선택을 요구한다( Egelkraut 1976: 140 ). 이제까지 일들을 처리해 오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우선권이
1919~2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블랙(Black 1967: 207~208)의 연구서를 참조하라. SB 1: 489 는 이 견해를 거부한다.
53
누가복음 2
요구된다. 댕커( Danker 1988: 210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바로 예수를 따르라 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은 먼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회적인 책무와 사업상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이유를 제시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와 같은 변명을 받아들 이지 않는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가정의 일들에 전적으로 얽매이는 것을 지지하지 않 는다. 그 대신 제자들이 가장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 것으로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제시한다. 제자들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 는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한다.8)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 라’는 구절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들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 8장 22절에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서기관은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 고, 곧바로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마무리된다. 헬라어 본문에서 ‘죽은 자 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구절은 서로 똑같이 표현되어 있 다. 여기서 누가는 어떤 추가 자료를 사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디앙겔 로’( diagge¿llw, 전파하라 )라는 헬라어 동사는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 기 때문이다( 그
동사 대신에, 누가는 ‘유앙겔리조’ [eujaggeli¿zw, 기쁜 소식을 전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선호한다. 참조, 눅 4:43, 8:1, 16:16; 행 8:12. 그밖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이 동사는 스물한 번이나 추가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누가는 ‘케뤼쏘’ [khru¿ssw, 전파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자주 사용 한다. 참조, 눅 9:2; 행 28:31. 그밖에 이 헬라어 동사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열다섯 번이나 더 나타난 다. 쉬르만 [Schürmann 1994: 42 n. 69] 를 참조하라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개념은 예수의 사명( 눅 4:43 )과 평행을 이루며, 또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제시하 는 위대한 명령( 24:44~47 )을 기대하게 한다.
c. 복음 사역에 언제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경고함 (9:61~62) [9:61] 누가복음의 이 단락( 9:57~62 )은 세 번째 사람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
리된다. 세 번째 사람도 자신이 먼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 람도 자신이 예수를 따라나서기에 앞서, 예수에게 한 가지 사항을 허락해 달 라고 요청한다. 곧 그는 자기의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ajpota¿ssw, 아포타쏘, 작별 인사를 하다; BAGD 100 §1, BAA 202 §1; 눅 14:33; 행 18:18, 21 )
해 달라고 간청한다. 오직
8) 이 절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디앙겔레’(dia¿ggelle)는 현재 명령형이다. 곧 이 단어는 (하나님 나라 의 복음을) ‘멀리 광범위하게 전파하라’는 것을 뜻한다. 참조, BAGD 182, BAA 364. 신약 성경의 다 른 곳에서 이 동사는 오직 행 21:26 및 롬 9:17에서 나타난다. 슈니빈트(Schniewind, TDNT 1:68)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절대 주권을 행사 하시는 것에 대해 말한다.
54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누가복음에만 세 번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된다. 여기서도 이 사람의 요청은 타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 요청은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나서, 엘리사가 그에게 반응한 것과 평행을 이룬다( 왕상 19:19~21 ). 열왕기상의 해당 구절들은 두 번째 사람이 예수에게 요청하는 것과 개념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비슷하다( Marshall
1978: 412 ).
구약 시대의 ‘제자’인 엘리사
는 자신이 엘리야 선지자를 따르기에 앞서 부모에게 입맞춤을 하게 해 달라 고 요청한다. 그러자 엘리야는 그 요청을 하락한다. 누가복음의 다른 본문들 에서도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배경을 제공해 준다( 눅
1:15~17, 4:25~27, 7:27,
9:30~32, 54; Leaney 1958: 173~174. 유대교의 전승에서 엘리야에 대해서는 비너 [Wiener 1978]를 참조 하라. 누가복음에서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는 브라운 [R. Brown 1971]과 브로디 [Brodie 1987]을 참조하 라 ).
여기서 특별한 성격을 지닌 예수의 대답은 구약 성경의 이 본문과 의도적
으로 비교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대답은 예수가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시기 는 더 커다란 긴박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그 시기는 매우 중대하며 특별한 때이기 때문이다( Danker 1988: 211. 참조, 9:60에 대한 주해에서 언급된 구약의 평행 구절들 ).
이 단락에서 첫 번째로 등
장했던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자신이 먼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한 다. 그러자 예수는 그 사람이 예수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 을 요구하는지 밝혀 주며, 그 사람에게 대답한다. 사람은 한꺼번에 두 가지를 추구할 수 없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곧 예수를 자기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제자도가 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못 이해하기가 쉽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에게 온전히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혀 준다( Rengstorf, TDNT 4: 450 ).
여기서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이야기의 초점에 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헨드릭슨 [Hendriksen 1978: 559~563]은 그렇게 한다. 또한 그는 본 문을 지나치게 심리적인 측면에서 다룬다 ).
예수의 요구는 새롭고 근본적인 것이다. 이
단락에서 등장하는 세 사람은 예수가 자신들의 요청에 그렇게 직선적으로 반 응하며, 또한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단 락의 핵심적인 강조점은 예수의 제자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요 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와 관계를 맺는 데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 경고하며, 또한 수사학적인 표현을 통 해 예수가 새로운 시대를 오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려는 것이다. 한 편 에번스( Evans and Sanders 1993: 80 )는 이 경고가 나중에 예수가 사람들을 거부 하는 것에 대해서 준비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16:15, 18:9~14 [바리새인들 에 대해서], 18:18~30 [어떤 부자에 대해서] ).
55
누가복음 2
[9:62] 예수의 대답은 사실상 경고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 사람의 요청에
서 어떤 위험 요인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예수를 따라 나설 것이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전의 생활 방식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이 어떤 제자가 지난날을 되돌아본다면, 그것은 영적 인 건강 및 성장에 도움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의 대 답은 거부라기보다는 오히려 경고다( Arndt 1956: 278 ). 이집트를 빠져나온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다( 출 16:3 ). 롯의 아 내는 소돔을 떠나면서 그 성읍을 되돌아보았다( 창 19:26 ). 따라서 일단 우리가 예수를 따라 나선다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굳게 간직하 고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나서 나중 에 그 믿음을 영원히 저버린다면, 그의 신앙고백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라 나선 다음, 그 사람의 상태는 신앙을 고백하기 이전과 똑같이 위험한 것이다( 고전 언급되는 경고들 ).
15:2; 골 1:21~23; 마 7:21~23, 22:11~13; 눅 13:25~27; 참고. 히브리서에서
아마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바라면서, 그 사람의 마음
은 이전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그 사람이 자신을 이전 것과 분명하게 단절하려고 하지 않는 자세에 대해 경 고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따르기 이전의 생활 방식을 뒤돌 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섬김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 않은 온전한 충 성을 요구한다( Ellis
1974: 154 ).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순간의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라, 오히려 한평생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K.
Schmidt,
TDNT 1: 588 ).
이 절의 비유적인 표현은 격언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아야만 고랑을 곧게 낼 수 있다. 특별히 팔레스타 인 지역에서는 이와 같이 쟁기질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농부가 돌이 많은 밭에서 쟁기질을 하다가 뒤를 돌아다본다면, 그는 금방 고랑을 고불고불하게 내고 말 것이다. 농부는 한 손으로는 쟁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소들을 몰면 서 쟁기질을 하고자 하는 방향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Jeremias 1963a: 195 ). 쟁 기질과 관련된 고대 문헌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타난다. 어떤 일 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것에 대해 묘사하면서, 헤시오도스( Hesiod, Days』 442~443 )는
『Works and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밭에 고랑을 똑바로 내려고 하는 사람
은 자기의 친구들을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그는 자기의 마음을 일에 집중시켜야 한다”( Marshall
1978: 412, Danker 1988: 211, SB 2:165, m. Abot 3.8, 외경 집회서
38:25; 빌 3:13~14; 히 12:1~3 ). ( 클로스터만 [Klostermann 1929: 133]은 플리니우스의 저서 [『박물지』 18.179] 에서 자주 인용된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
예수를 따라가면서 여
행 도중에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56
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헬라어 형용사 ‘유데토스’( Eu¡qetoß )는 ‘적합한’ 또는 ‘쓸모 있는’을 뜻한 다( BAGD 320, BAA 648; 눅 14:35 [쓸데없는 소금에 대해서]; 히 6:7 ). 곧 마음이 둘로 나뉜 제 자는 쓸모가 없다. 이 헬라어 형용사가 사용된 것을 고려할 때, 예수를 따른다 는 것은 단지 ‘구원받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의 이 슈는 어떻게 어떤 사람이 예수를 계속 따라가면서, 효과적으로 그를 섬기는 가에 대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은 계속 그와 동행하며, 하나 님 나라의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슈바이처( Schweizer
1984: 172 )는
예수가 나중에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제자,
곧 베드로를 회복시켜 준 것에 대해 말한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요구는 지속적인 것이며 절대 적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기꺼 이 용서해 주시며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 만약 어떤 제자가 실수를 범하면, 그는 돌이키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해야 한다( 눅
22:32 ).
반면에
어떤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면, 곧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에게 계속 헌신하는 것을 포기하고 전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 절에서 예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지적할 것이다. 예수의 관점에 의하면,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진지한 일이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언제나 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따라서 그 헌신은 다른 모든 일 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캐리스( Karris
1977: 130 )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를 따라가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서 두 번째 일을 하는 것과 결코 같지 않다. …… 반면에 그것은 모든 것을 의 미한다. 그것은 진지하고 온전한 헌신을 요구한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가 되 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들의 순서를 다시 정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 기초해서, 가족과 가정의 우선순위를 재정립해 준다( 9:23~26,
14:26~27; Tannehill 1986: 231 ).
예수는 이 단락에서 등장하
는 세 사람에게 이와 같은 요구를 제시한다. 예수를 통해 온 새로운 시대와 예수가 대표하는 새로운 시대는 그와 같은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요약 예수는 진정한 현실주의자다. 누가복음 9장 57~62절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진정한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 그 러자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한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그들에게 분명하게 밝혀 준다. 예수가 먼저 어떤 사람을 부르거나, 또는 어 떤 사람이 스스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하든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자신이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예수라는 존재를 따라간다는 57
누가복음 2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심지어 가정의 중대 한 일도 하나님에게 헌신하는 것보다 부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는 예수와 연합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난날 및 이전의 관계 및 관습과 결별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가장 우선권 을 두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예수는 바로 이와 같은 헌신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자세로 헌신할 때, 그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그 나라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쉬운 길을 걸어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 만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예수의 제자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곧은길을 걸 어가야 한다. 제자는 오직 하나님 나라의 일에만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고 헌 신해야 한다. 그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예수의 제자에게는 위대한 사 명이 주어져 있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에게는 구약 시대의 위대한 제자들보 다도, 예를 들면 엘리사 선지자보다도 더 높은 표준의 헌신이 요구된다. 예수 가 제자로 부르는 것은 전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누가는 독자들이 이와 같은 헌신에 대해 깨닫기를 바란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는 그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때문이다.
추가주석 9:62 어떤 사본들(î45, D, 몇몇의 Itala)에서는 이 절의 헬라어 단어들이 다른 순서로 필사 되어 있다. 그 사본들에서 농부는 먼저 뒤를 돌아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쟁기질을 한다. 하지 만 이 독법은 의미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지 못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초기의 알 렉산드리아 사본들 및 비잔틴 사본들은 UBS-NA에 인쇄된 헬라어 본문을 지지한다(î45, B, a, C, Byz, 몇몇의 Itala, Syriac; Metzger 1975: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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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3. 일흔두 명의 제자들의 복음 사역( 10:1~24 ) 이 단원은 길고 중요하다. 이 단원은 예수가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두 번 째로 제자들을 보낸 것을 묘사한다. 단지 열두 명( 눅
9:1~6 )만을
보내는 대신
에, 여기서 예수는 더 많은 제자들( 일흔두 명 )을 보낸다. 이 단락은 몇몇의 작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1) 선교 사역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0:1~12 ), (2) 메시지에 반응하지 않는 도시들에게 저주를 선언함( 10:13~16 ), (3) 제자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의 선교 사역에 대해서 보고함( 10:17~20 ), (4)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또한 제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함( 10:21~24 ). 이 단원 의 길이는 이 단원의 중요성을 밝혀 준다. 예수는 사마리아 마을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자 했다. 어떤 사 마리아 마을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9:53 ).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거부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예수는 자기를 따 르는 사람은 이전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로부터 결별해 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제 예수는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보 낸다. 제자들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보냄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의 이름이 지닌 권위를 체험하며, 제자들은 복음 전파 사역의 목표를 달성할 기회를 맞이한다. 그들은 사역을 마치고 기뻐하며 예수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예수에게서 계시의 말씀을 듣는다( Tannehill 1986: 232 ). 이 대리인들은 하나님의 평안( 평화 )의 메시지를 갖고 간다( 눅 10:6, 1:79; 엡 2:11~22 ). 하나님 나라의 권위와 더불어, 그들은 보냄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면,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눅
10:9, 16 ).
그들의 사역은 세례 요
한( 3:4 ), 열두 제자들의 사역( 9:52 ) 및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사역과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Tannehill
1986: 233~236 ).
1)
이 제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역사하신 것에 대해 기뻐하며, 예수에게 돌아온다. 하지만 예수는 제자 들에게 다음 사실을 일깨워 준다. 곧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커다란 축복은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된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복을 베푸신 것에 대 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를 표현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1) 사도행전의 평행 본문들 가운데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발에서 먼지를 떨어뜨린 것(행 13:51)과 이적 적인 치유 사건들(행 3:6, 4:10)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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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구 약 시대의 선지자들과 왕들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고 듣기 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이전의 짧은 두 단락( 9:51~ 56과 9:57~62 )의
침울하고 심각한 이야기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단락에서는 긍
정적인 분위기가 빚어진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하나님 나라는 예 수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은 예수 안에서 임재하며 역사하고 있다.
자료의 원천 및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 이 단락의 자료에 대한 논의는 매우 복합적이다. 그래서 그 논의는 우리의 정신을 혼란 스럽게 할 정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9장 37~38절 및 10장 7~16절은 누 가복음 10장 1~12절에서 발견되는 것과 평행을 이루는 많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Aland 1985: §177). 많은 학자는 누가가 Q 자료에서 이 단락으로 많은 자료를 끌어왔으며, 또한 누가와 마태는 Q 자료를 공유했다고 주장한다(Marshall 1978: 413 [막 6:7~13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더불어], Fitzmyer 1985: 842, Schneider 1977a: 235, Ernst 1977: 329, Egelkraut 1976: 142, 특히 각주 4). 학자들은 Q 자료에서 가져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자료를 비교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Q 자료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누가복음의 이 단락에 묘사된 것이 원래의 예수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Nolland 1993a: 547, Meier 1994: 485 n. 155, Schulz 1972: 404). 마태복음 우선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단순 히 누가가 마태복음의 평행 본문들을 이 단락의 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 태복음에는 예수가 오직 열두 제자들을 보낸 사건만 수록되어 있다. 곧 마태복음에는 예 수가 더 많은 사람(칠십이 명)을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보냈다는 언급은 없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과연 예수가 두 번째로 더 많은 제자를 보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열두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사건을 다루는 마가복음 6장 7~ 13절을 평행 본문으로 언급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1)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예수는 제자들을 두 번 보냈다. (2) 오직 한 번(마 10장+막 6:7~13)이다. 하 지만 누가의 묘사는 마태 및 마가의 묘사와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3) 전혀 보내지 않았 다.2)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데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누가복음 22장 35절에 2)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142, 특히 각주 3)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슈바이처 (Schweizer 1984: 174)는 누가가 Q 자료와 마가복음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다양한 사건들에 분 산시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감람산에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눅 17:22~37 및 21:6~36에서 소개된다. 또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눅 11:37~54 및 20:45~47 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눅 22:35을 언급하면서, 피츠마이어(Fitzmyer 1985: 843)는 누가가 제자들 의 복음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곳에 분산시켰다고 주장한다. 마가복음과 Q 자료가 서로 겹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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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들어 있는 예수의 말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기 바로 전 날 밤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바로 누가복음 10장 4절을 암시해 준다. 이 점은 더 많은 제자뿐 아니라 또한 열두 제자들도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적어도 예수는 복음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한 번 보냈다. 하지만 누가복음 22장 35절은 누가가 두 번 보낸 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는 누가가 더 많은 제자를 보낸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냈다고 이해한다(자료들 에 근거해서 Creed 1930: 143~144, Luce 1933: 198).3) 플러머(Plummer 1896: 269)와 아른트(Arndt 1956: 279)는 예수가 두 번째로 제자들 을 보냈다는 것을 지지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 사건이 요한복음 7장의 사건들이 일어난 뒤에 곧바로 일어났다고 주장한다.4) 뿐만 아니라, 플러머는 이 사건이 누가의 보편주의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이 오직 이스라엘 지역으로만 가야 한 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플러머의 이와 같은 주장이 옳은 것인지 판 단하기가 쉽지 않다(참조, 눅 10:1에 대한 추가 주석). 사실상 플러머(같은 책 270면)는 이 단락의 이야기를 누가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아니면 한 가지 사건에 근거해서 누가 가 두 가지 사건으로 만든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은 누가가 두 가지 파송 사건을 명 백하게 구별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맨슨(Manson 1949: 74)은 두 파 송 사건에 대해 의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누가가 Q 자료와 누가가 입수한 특별한 자료(22:35)에서 그 자료를 사용했다고 제안한다. 마셜(Marshall 1978: 413)은 두 파송 사건을 선호한다. 또한 그는 누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만드는 것을 회피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가 이 단락의 선교 여행에서 제자들에게 요 구하는 것은 이전의 선교 여행의 자료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에 대한 예수의 요구 사항은 누가복음 9장 1~6절과 10장 1~12절에서 요약적으로 제시되었 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요구 사항들은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하거나 중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 사역에 대한 요구 사항들의 차이점에 근거해서 복음 사 역의 전승을 의심하고자 하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 세미나 [Funk and Hoover 1993: 318]는 그와 같은 시도를 한다). 이 차이점 가운데 어떤 것도 복음 사역을 위한 두 파송 사건의 요구 사항들에서 서로 모순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제자들을 보내는 사건에는 본질적인
본문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와 관련해서는 라우펜(Laufen 1980)의 연구서를 참조하라. 3) 불트만(Bultmann 1963: 145)은 이 자료 가운데 상당 부분을 초대 교회가 만들었으며, 또한 그것을 초대 교회를 위한 규범으로 이해한다. 비어(Beare 1970)는 예수가 제자들을 보냈다는 것과 이 단락 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예수 세미나(Funk and Hoover 1993: 317~323, 특히 320)도 똑같은 입장을 지니고 있다. 4) 모로스코(Morosco 1979)는 복음 전파를 위해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것을 예수의 가르침의 전승으 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는 이 전승이 예수의 공식적인 파송과 관련되었는지, 또는 이 자료가 그와 같 은 배경에 속한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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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이 들어 있지 않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무리를 보내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본적 으로 똑같은 내용을 지시했다. 이것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인 물(예수)이 비슷한 일(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두 무리를 조직해서 내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파송 사건에는 당연히 비슷한 요소들이 발견된다. 자신이 스스로 가기에 앞 서, 때때로 예수는 먼저 제자들을 보냈다. 누가복음 9장 51~56절이 이 점을 넌지시 알려 준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0장 1~24절은 예수가 복음 전파를 위해 여러 번 제자들을 보 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한 가지 사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누가가 이 복음 전 파 사역에 대해 어떤 별개의 자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누가는 예수가 더 많 은 제자들(칠십이 명)을 보내면서 지시한 사항은 더 작은 무리(열두 명)를 보낼 때 지시 한 내용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누가복음 10장 1~24절 의 이야기를 묘사하기 위해서 예수가 이전에 제자들을 보낼 때 지시한 내용을 참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의 지시 사항은 이 단락의 선교 사역을 위한 지시 사항으로도 활용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Plummer 1896: 270, Liefeld 1984: 937). 이와 같은 설명은 누가 가 10장 1~24절의 이야기를 스스로 지어냈다는 주장이나, 또는 한 가지 사건을 두 가지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제안보다 더 받아들일 만하다. 예수 세미나(Funk and Hoover 1993: 317~320)는 누가복음 10장 1~12절에 들어 있 는 예수의 말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0장 7a 및 8절은 예수가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분홍색으로 분류됨). 10장 4~6, 7c절은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한 다(회색으로 분류됨). 또한 10장 2~3, 7b, 9~12절은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검 은색으로 분류됨). 그리고 예수 세미나는 10장 2~3절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 왜 냐하면 이 절들이 예수를 위한 복음 사역을 가정하고, 또한 심판을 예수에게 돌리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사항들은 모두 10장 2~3절이 예수의 말이라는 것을 지지한 다. 곧 세례 요한의 선례, 예수에 대한 반대가 고조되어 감, 또한 제자들이 복음 전파 사역 을 위해 여러 번 보냄을 받았다는 것 등이다(Nolland 1993a: 548). 유대교의 배경(평안을 비는 인사말)과 위경 도마복음(14.4)의 평행 본문이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예수 세미나 는 10장 4~6절이 예수의 말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예수 세미나의 성향을 드 러내 준다. 곧 이 세미나는 주로 다양한 평행 구절들이 나타나는 본문을 신뢰하며, 반면 에 평행 구절이 없는 본문 전승에는 의심을 품는다. 예수 세미나는 누가복음 10장 7bc절 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절들은 ‘후기의 복음 전파 사역’을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복음 전파 사역을 하지 않았다는 자신들의 신념에 기초하여, 예수 세미나는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일꾼들이 자신에게 합당한 삯을 받는다는 문제는 신약 성경의 편지들에서도 나타난다(고전 9:14; 딤전 5:18). 그 문제는 예수의 말 이 신약 성경의 편지들에서 다시 언급되는 몇몇의 적은 예들 가운데 하나다. 이 점은 그 말이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지해 준다. 또한 예수 세미나는 10장 9~12절을 예수 가 말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절들은 심판에 대해 언급하며, 또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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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유대인들의 거부와 새로운 길 ( 9:51~19:44 ) A. 복을 위한 결심: 제자들의 특권과 사명 및 헌신 ( 9:51~10:24 )
나라에 대해 명백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 세미나가 10장 2~3절을 예수의 말로 인정하지 않는 데 제시하는 판단 기준과 비슷하다. 하지만 예수의 설교 내용 가운데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다(예, 막 1:15; 눅 11:20). 만약 예수가 어떤 메시지를 전파하라고 자기의 제자들을 보냈 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것에 반응하지 않을 경우에 뒤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선포 했을 것이다. (놀랜드[Nolland 1993a: 554]는 10:9~12이 예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는 누가가 10:10~11을 재구성했다고 주장한다). 누가복음 10장 13~15절의 평행 본문은 마태복음 11장 20~24절이다. 사실상 두 본문 은 거의 똑같이 표현되어 있다(Aland 1985: §178).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모두 이 작 은 단락에 대한 일반적인 머리말이 들어 있다. 하지만 마태는 이 단락을 세례 요한에 대 한 질문과 연결시킨다. 반면에 누가는 세례 요한에 대한 그 사건들을 7장 18~35절에서 다룬다.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의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서로 비슷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마태는 그와 같이 연결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1장은 주제에 따라 배열되었다. 따라서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언급을 정확하게 어느 곳에 위치하게 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과제다(참조, 눅 7:18~35의 머리말). 누가는 10장 13~15절을 제자들이 두 번째로 파송을 받은 사건과 직접 연결시킨다. 아마도 이 절들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사람들에게 열렬하게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경고 할 것이다. 또한 누가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와 그 권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도시들 을 예수가 지적하는 것을 알려 준다. 예수는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도시들에게 저주를 선 언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의 언급은 이전에 예수가 제자들을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로 보낸 사건(9:51~56)과 전혀 관련이 없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 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준 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이 이르는 곳마다, 심지어 제자들을 통해 그것이 전파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거부할 것이다 (반면에 피츠마이어 [Fitzmyer 1985: 850~852]의 견해를 참조하라. 그는 누가가 마태복음에 제시된 배경을 다른 곳으로 옮겼 다고 주장한다). 10장 13~15절은 예수가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적들을 행한 장소로 서, 고라신은 공관 복음서의 전승 가운데서 다른 부분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 서 초대 교회가 이 작은 단락의 내용을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다(놀랜드[Nolland 1993a: 548]와 무스너[Mussner 1968: 18~22]는 이 점을 올바로 지 적한다. 무스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예수의 부활 사건 이전에 형성된 하나의 로기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가 성장하고 활동했던 갈릴리 지역의 이 세 도시들에 대한 그의 애도의 말일 것이다). 반면에 예수 세미나(Funk and Hoover 1993: 320)의 견 해는 그릇된 것이다. 예수가 누가복음 10장 13~15절에 수록된 말을 어떤 독립적인 상황에서 말했을 가능 성도 있다. 특히 10장 16절은 일종의 격언과 거의 비슷한 표현이며, 또한 그 말이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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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서 다른 곳에서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가능성이 있다.5) 여기서 예 수의 저주는 9장 5절에서 사람들이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을 때 반응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 예수가 그와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곧 누가는 그 자료를 주제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따라서 누가는 예수가 복음 사역을 위해 제자들을 갈릴리 지역으로 두 번째로 보낸 사건을 첫 번째로 보낸 사건 이후에 또한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사역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적인 배경에 대해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인 10장 1절은 두 번째로 보냄을 받은 사건이 제자도 에 대한 논의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 준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도에 대한 논의가 8장 18~22절에 수록되어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태복음 11장 20~24절을 이해하는 또 다른 가능한 방법으 로서, 더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예수의 사역에서 그 복음 전파 사역의 구체적인 위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그 평행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그 복음 전파 사역은 대체로 누 가복음의 이곳에 제시된 사건과 평행을 이룬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저주를 받은 도시들 이 모두 갈릴리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이 결론을 암시해 줄 것이다. 이 견해는 피 츠마이어(Fitzmyer 1985: 850~852)의 입장에 가깝다. 하지만 이 견해는 누가가 스스로 지어낸 요소들이 들어 있다는 그의 관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 누가가 이와 같이 했 다면, 주제에 따라서 배열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곧 누가는 이전에 제자들이 사 마리아 지역에서 거부를 당한 침울한 이야기와 제자들이 복음 전파 사역에서 성공을 거 둔 이야기를 대조하려고 의도했을 것이다. 만약 그 연관성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누가 는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할 때 직면하는 것을 고려하는 시점에서 비로소 제자들 의 복음 전파 사역에 대해 언급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에 언급되는 사건은 이른바 ‘예루살렘을 향한’ 시기의 초기에 속한다. 또한 이 사건은 열두 제자들이 보냄을 받은 사건 이후에 소개된다. 이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 열두 제자들이 맨 처음으로 보냄을 받은 사건은 10장 7~16절(= 눅 9:1~6)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래서 눅 10장 13~15절은 마태복음 11장 20~24절에 상응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누 가가 추가 자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인정한다.6) 누가복음 10장 17~20절에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 대해 보고한다. 다른 공관복음서에는 예수가 일흔두 명을 파송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들어 있다(Aland 1985: §180).7)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이
5) 눅 10:16의 내용은 마 10:40과 요 13:20과 개념적인 측면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서로 다르게 표현되 어 있다. Aland 1985: §179. 6) 에겔크라우트(Egelkraut 1976: 143)는 누가가 추가 자료를 사용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해한다. 특히 평행 본문이 없는 눅 10:17~20과 10:21~24와 관련해서, 그와 같은 가능성을 인정한다. 7) 피츠마이어(Fitzmyer 1985: 859)는 누가가 그 자료를 지어낸 것이라고 이해한다. 또한 그 자료는 눅 10:18의 다른 독법에 반영된 진정성이 있는 예수의 말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자료를 이와 같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눅 10:17~20의 자료와 관련해서, 마셜(Marshall 1978: 427~428)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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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복음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BECNT 시리즈는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 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통찰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 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고 설교하는 목사, 신학자를 비롯한 모든 그 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집필된 이 주석 시리즈는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각 본문의 역할을 문맥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BECNT 『누가복음1, 2』는 이 주석 시리즈의 방향을 따라 집필되었으며, 복음서 주석 가운데 첫 번째로 간행된 주석으로서, 자료의 원천 및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비평과 질문을 다른 복음서 주석보다 더 깊이 다룬다. 이 책의 저자는 누가복음의 본문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 내용을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비교하며, 관련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 및 현대의 독자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고대 관습 등을 조명하고, 각 관점과 관습의 이유 및 특성을 설명한다. 누 가복음 각 단락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를 제공하는 이 책은, 그 주해를 바탕으로 누가가 각 단 락에 언급된 사건 및 예수의 가르침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이 무엇인지 살핀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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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럴 벅( Darrell L. Bock )
애버딘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댈러스 신학교의 신약학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누가-행 전 연구로 유명한 저자는 복음주의 신학회(ETS)의 회장 (2000~2001년)을 역임했으며, 크리스채너티 투데 이의 편집위원, 휘튼 대학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누가신 학』 (부흥과개혁사), 『NIV 적용 주석: 누가복음』 (솔로몬)을 비롯해 30권 이상의 책을 저술했다.
옮긴이
대럴 벅 지음 신지철 옮김
신지철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트리어 대학교 고전문헌학부에서 수학했으며 뮌헨 대학교 개신교 신학부 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가페출판사 편집장으로 『오픈 성경』 및 『열린 성경』 (아가페출판사)의 기획, 편집, 집필을 주관했다. 역서로는 『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사랑하는가』, 『하이델베르
ISBN 978 - 89 - 6092 - 453 - 6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크 교리문답 입문』, 『누가복음1』 (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www.rnrbook.com
값 65,000원
대럴 벅
지음 | 신지철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