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목차
시리즈 서문 _ 8 저자 서문 _ 11 약어 소개 _ 13 지도 _ 18 서론 _ 19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67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69
B. 예수의 세례 ( 1:9~11 )
89
C. 예수의 시험 ( 1:12~13 )
101
II. 이 예수는 누구인가: 1부 ( 1:14~3:6 )
●
109
A. 예수의 메시지 요약 ( 1:14~15 )
113
B. 예수가 첫 번째 제자들을 부름 ( 1:16~20 )
123
C. 가버나움과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치유 사역 ( 1:21~45 )
131
D. 가버나움과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강력한 행위들 ( 2:1~3:6 )
169
III. 이 예수는 누구인가: 2부 ( 3:7~6:6a )
4
●
●
229
A. 예수의 사역 요약 ( 3:7~12 )
231
B. 예수가 열두 사도를 부름 ( 3:13~19 )
243
C. 예수와 예수의 가족 및 바알세불 ( 3:20~35 )
257
D. 예수가 비유로 가르침 ( 4:1~34 )
277
E. 예수 - 자연과 귀신들과 질병과 죽음의 주 ( 4:35~5:43 )
335
F. 예수가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음 ( 6:1~6a )
387
Ⅰ. 제목(1:1~) A. 제목(1:1~)
IV. 사역과 오해: 3부 ( 6:6b~8:21 )
●
399
A. 예수의 사역과 예수의 제자들의 사역 요약 ( 6:6b~13 )
403
B. 세례 요한의 죽음 ( 6:14~29 )
415
C. 예수가 오천 명을 먹임 ( 6:30~44 )
431
D. 예수가 물 위를 걸음 ( 6:45~52 )
445
E. 게네사렛에서 예수의 치유 요약 ( 6:53~56 )
459
F. 예수와 장로들의 전통 ( 7:1~23 )
467
G. 예수와 수로보니게 여인 ( 7:24~30 )
487
H. 예수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침 ( 7:31~37 )
497
I. 예수가 사천 명을 먹임 ( 8:1~9 )
509
J. 예수에게 표적을 구함 ( 8:10~13 )
521
K. 예수가 두 급식 이적을 상기시킴 ( 8:14~21 )
529
V.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4부 ( 8:22~10:52 )
●
539
A. 예수가 벳새다 맹인을 고침 ( 8:22~26 )
543
B.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첫 번째 수난예고 ( 8:27~33 )
553
C. 예수가 제자도로 초대함 ( 8:34~9:1 )
567
D. 변모한 예수 ( 9:2~8 )
579
E. 인자와 엘리야의 귀환 ( 9:9~13 )
591
5
마가복음
목차
F. 예수가 힘든 귀신 축출을 행함 ( 9:14~29 )
601
G. 예수의 두 번째 수난예고 ( 9:30~32 )
613
H. 제자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들 ( 9:33~50 )
635
J. 예수가 어린아이들을 축복함 ( 10:13~16 )
647
K. 예수와 부자 및 영생 ( 10:17~31 )
655
L. 예수의 세 번째 수난예고 ( 10:32~34 )
671
M. 야고보와 요한의 잘못된 요청 ( 10:35~45 )
679
N. 예수가 두 번째로 맹인을 고침 ( 10:46~52 )
693
VI.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5부 ( 11:1~13:37 )
6
619
I.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 10:1~12 )
●
705
A. 예수의 메시아적 예루살렘 입성 ( 11:1~11 )
709
B. 무화과나무와 성전에 대한 예수의 심판 ( 11:12~25 )
719
C. 예수가 자신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받음 ( 11:27~33 )
739
D. 예수의 포도원 비유 ( 12:1~12 )
749
E.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이 예수를 책잡으려 함 ( 12:13~17 )
763
F.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책잡으려 함 ( 12:18~27 )
775
G.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에 대해 예수에게 질문함 ( 12:28~34 )
787
H.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의 질문 ( 12:35~37 )
799
I.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비난 ( 12:38~40 )
809
J. 과부의 위대한 헌금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 12:41~44 )
815
K. 예수의 종말론 강화 ( 13:1~37 )
821
Ⅰ. 제목(1:1~) A. 제목(1:1~)
VII. 수난 이야기: 6부 ( 14:1~16:8 ) A.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 및 무명의 한 여자가 예수에게 향유를
●
877 881
부음 ( 14:1~11 ) B. 마지막 만찬 및 제자들의 부인에 대한 예수의 예고 ( 14:12~31 )
895
C.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 ( 14:32~42 )
917
D. 예수가 체포당함 ( 14:43~52 )
931
E. 예수가 산헤드린의 심문을 받음 ( 14:53~65 )
943
F. 예수가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함 ( 14:66~72 )
961
G. 예수가 본디오 빌라도의 심문을 받음 ( 15:1~15 )
971
H.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 ( 15:16~41 )
985
I. 예수가 장사됨 ( 15:42~47 )
1007
J.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남 ( 16:1~8 )
1015
참고문헌 _ 1030
7
마가복음
| 시리즈 서문 |
BECNT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음을 결합 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 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독자의 관 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 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들은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는 일어날 수 있는 문제란 문제는 모두 포함하려고 애 쓰는 백과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 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비록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 기는 해도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들을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 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 력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하여 한 절씩 강해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라 ) 이 노력의 일환이 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본 8
시리즈 서문
문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서 본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막론하고 최근의 학문 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 경 속에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 순히 깎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작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의 마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 지 않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 확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 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론을 취하기 위하여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 고 더 중요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 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 개혁에서 비롯된 다양한 가르침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경에 대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은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출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 해를 낳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 나 편견 없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 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들(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을
성경 해석
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 하기를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 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차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류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양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들을 적 절히 적용하는 데 있어서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야 한다. 결론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게, 9
마가복음
분명하게 그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론적인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異文 )은 저자의 번역 속에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半 ) 괄호(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추가 주석’ 부분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연대 방식 을 사용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 수( 面數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 일한 예외로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들이 있다( BAGD, LSJ, TDNT ). 참고문헌은 책 마지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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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 저자 서문 |
독자들을 돕기 위해 이 주석에서 따르고 있는 구성 방식은 논의되고 있는 각 단락을 네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1) 첫째는, 회색 음영으로 처리된 부 분으로서, 인접 문맥과 확대된 문맥 모두에서 그 단락이 나오는 문맥을 논의 하는 것이다. 마가에 의해 주어지는 이 문맥은 현재 본문을 이해하는 방법들 및 그 구절이 전체 복음서 메시지에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제공한다. 마가의 보다 광범위한 단락들 ( 1:1~13, 14:1~16:8 ) 도
1:14~3:6, 3:7~6:6a, 6:6b~8:21, 8:22~10:52, 11:1~13:37,
이들 각 단락의 처음에 논의된다. (2) 둘째, 설명 단락에 있는 단
어들과 문구들을 논의하면서 더 나은 도움을 주기 위해 윤문을 희생하면서까 지 문자적 번역을 제시했다. 고딕체는 원문에 있는 강조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 (3) 설명 단락 내에서의 논의는 논리적 세부 항목들로 더 자세히 나누어진다. 종종 몇몇 구절들이 함께 어떤 세부 항목들로 포함되지만, 때때 로 어떤 세부 항목은 단 하나의 구절만을 포함하기도 한다. 구절을 구성하는 단어들, 문구들, 문장들 및 정보는 이곳 주석 부분에서 논의된다. 가끔 설명 단락에서 마가복음의 어떤 중요한 주제가 상세히 논의되었는데, 주석 후반부 에서 이 주제가 다시 등장할 때 독자들은 그 구절 앞에 “……를 보라”로 처음 의 논의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가령,
“1:45를 보라” ).
(4) 각 단락의 논의에 대한
네 번째 부분은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으면서 또한 회색 음영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마가의 메시지를 요약한다. 이곳에서 나는 해당 단락에서 마가가 주로 강조했던 것들을 서술한다. 이곳에서 다른 어느 곳보 다 나는 “나 마가는……때문에 예수의 이 설명/말씀을 너희들에게 말했다”는 11
마가복음
식의 문장을 완성하려고 노력했다. 이곳에서의 초점은 해당 구절에 나오는 정보( 예수, 세례 요한, 바리새인들, 1세기 유대교, 유대와 갈릴리의 지리 등 ) 가 아니라 마가가 해 당 구절에서 제공했던 정보를 통해 자신의 독자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에 있다. 결국 이 주석의 주된 목적은 나사렛 예수의 생애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 라 마가복음의 의미, 즉 두 번째 복음 전도자가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가르치 려고 했던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 마가는 영감을 받아 단어들과 내용을 선택 함으로 이 의미를 성문화했으며, 그 이후로 마가의 최초 청중과 독자들은 마 가복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말씀을 발견했다. 이 주석은 진공 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가 마 가복음을 이해하는 일에 진전을 이루는 데 공헌해 왔던 많은 학자들에게 커 다란 빚을 지고 있다. 이 주석도 여러 점에서 이러한 이해를 덧붙이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이 주석을 쓰는 일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드리고자 한다. 이들 중에 벧엘신학대학원( Bethel
Seminary )의
교수 비서인 글로리아 메츠( Gloria Metz )가 있는데, 그는 20년 동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으며, 또한 컴퓨터로 하는 작업에 숨어 있는 많은 힘든 일 들로부터 나의 짐을 덜어 주었다. 대학원 학생인 제임스 해밀턴 주니어( James M. Hamilton Jr.) 는
원고의 여러 부분들을 세밀하게 읽고서 참고사항들을 검토해
주는 일에 수고했다. 수년 동안 나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은 마가복음 전체 를 공부해 나가면서 나에게 도전을 주었고 나의 사고를 날카롭게 해 주었다. 지난 35년에 걸쳐 가르치는 특권을 부여했던 벧엘 대학교과 벧엘 신학대학원 및 남침례교 신학대학원에 감사드린다. 나와 함께 BECNT 시리즈의 공동 편 집자를 맡고 있는 로버트 야브루( Robert Yabrough )가 해 준 제안들은 이 주석이 더 나은 저작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수 년 동안 아홉 권 가량의 주석을 출 간하면서 협력해 왔던 베이커 아카데믹( Baker Academic )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아내 조앤( Joan )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아내는 인내심을 가지 고 나를 격려해 주었으며 이 주석이 완성될 수 있도록 몇 년에 걸쳐 여러 계 획들을 기꺼이 연기해 주었다. 이 주석과 다른 많은 작업들을 하면서 내 아내 가 보여 준 파트너십에 대한 감사는 결코 과장될 수 없다. 아내는 항상 내 삶 의 사랑이요 사역의 동반자가 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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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8
서론
| 서론 |
저자 다른 정경 복음서들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의 저자도 자신을 드러내거나1) 자신이 목격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참조, 눅 1:2. 이와 반대로 요 21:24 ). 네 복음서와 연관되어 있는 현재의 제목들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아래를 보라 ). 복음서들이 익명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익명성이 박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옳다 고 입증될 수도 없고 틀렸다고 입증될 수도 없다. 익명성은 저자들이 스스로 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제 2복음서( 편의상
나는 이것을 단순히 ‘마가복음’이라고 부르겠다 )의
경우에, 저자는 자신의
최초 독자들 및 동일한 기독교 공동체의 일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 다( Marcus 2000: 17 ). 신원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는 또한 마가와 다른 복음서 저 자들이 자신들이 기록했던 것을 ‘자신의 복음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 실 때문일 수도 있다. 마가복음은 ‘마가의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1:1 ). 정경 복음서들과 관련된 이후의 제목들도 이를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네 복음서의 제목이 “마태‘의’ 복음,” “마가‘의’ 복음,” “누가‘의’ 복음” 그리고 “요한‘의’ 복음”이 아니라 오히려 “마태‘에 의한’ 복
1) 요 21:20~24에서 제4복음서 저자를 ‘사랑하시는 제자’로 밝히는 것은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가 보여 주듯이(21:24c) 저자가 아닌 저자의 추종자들에 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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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음,” “마가‘에 의한’ 복음,” “누가‘에 의한’ 복음,” 그리고 “요한‘에 의한’ 복음” 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Hengel 2000: 48~53 ). 제2복음서의 마가 저작설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즉 외적 증거( 전승 )와 내적 증거( 우리가 마가 본문 자체에서 저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 다. 마가 저작설을 뒷받침하는 전승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초기적이고 보편적이 며 광범위한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가장 이르면서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유 세비우스에게서 발견되는 파피아스의 증거와 관련 있다( 『 교회사 』 3.39.1~17 ). 4세 기 초에 초기 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유세비우스는 지금은 잃어버린 파피아 스의 『주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 』( Interpretation of the Oracles of the Lord )에서 다음의 내용을 인용한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 eJrmhneuth/ß, 헤르메뉴테스)가 되었으며 자신이 기억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것들을 순 서대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마가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주님을 따라다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대로 마가는 후에 베드로를 따라다녔다. 베드로는 주님의 담화들을 순서에 따라 전해 준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 따라서 마가는 어떤 잘못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몇 가지를 기록했다. 마가는 대단히 주의 깊은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이 들었던 것은 하 나라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또 거짓된 것을 진술하지도 않았다(『교회사』 3.39.15).2)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파피아스는 장로 요한 및 아리스티온에게서 이러한 정보를 입수했다( 『 교회사 』
3.39.4 ).
장로 요한이 AD 100년 직후에 죽었기 때문
에( Hengel 2000: 65~66 ), 파피아스가 인용하는 전승은 1세기의 마지막 10년, 또 는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을 당시로( 65~70년 )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3) 이것은 파피아스가 폴리카르포스 ( 155년경 3.36.1~2. 참조, 3.39.1 )
스( 100년경
사망 ) 와
이그나티우스 ( 107년경
사망. 『 교회사 』
시대 동안에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클레멘
사망. 『 교회사 』 3.39.1 )와도
교분을 가졌다는 유세비우스의 진술을 통해
뒷받침된다. 『교회사』 4에서 파피아스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설명이 트라야누 스( 110년경 ) 치하의 박해에 대한 설명보다 먼저 나온다는 것도 1세기 후반 연대 를 뒷받침한다( Yarbrough 1983: 186~190, Orchard 1984: 393~403, Gundry 1993: 1027 ). 마지
2) 유세비우스와 그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들에 대한 헬라어 및 라틴어 본문들은 Aland 2001의 뒤쪽에서 볼 수 있다. 마가를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자로 보는 이 본문들 및 다른 초기 교회의 언급들에 대한 영 어 번역들은 C. Black 1994: 80~182에서 볼 수 있다. 3) 많은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60년대 후반 혹은 70년 직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R. Brown 1997: 164).
20
서론
막으로 만일 파피아스가 “사도 빌립”의 딸들과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 교회사 』 3.39.9. 참조, 행 21:8~9 ), 이것도 역시 1세기 후반 연대를 뒷받 침한다. 그러므로 파피아스의 증거는 초기( 마가복음이
기록된 지 30년 이내 ) 이면서
기껏해야 목격자 전승으로부터 겨우 한 세대 정도 떨어져 있고( 사도들 - 장로 요한 과 아리스티온 - 파피아스 ),
4)
따라서 아마도 2세기 첫 10년에 파피아스에 의해 기록
되었을 것이다.5) 마가 저작설에 대한 다른 전승들은 다음의 내용들을 포함한다. 마가복음의 제목들 ( 70~100년 ). 대부분 헬라어 사본들에서 발견되는 이
복음서의 제목들은 보다 긴 형태( 마가에 의한 복음, eujagge/lion kata\ Mavrkon, 유앙겔리온 카타 마르콘, A D L W Q f 13 ) 와 마르콘,
짧은 형태( 마가에 의한, kata\ Mavrkon, 카타
a B )를 포함한다. 이러한 특이한 두 가지 형태 모두 그 다음에 나오
는 내용이 마가‘의’ 복음이 아니라 마가의 기술에 따른 ( 유일한 하나의 ) 복음 임을 강조하기 위해 저작권의 속격( 마가‘의’, Ma/rkou, 피하고 있다 ( Hengel Mavrkon )이라는
1985: 65~66 ).
마르쿠 )을
의식적으로
이런저런 형태로 ‘카타 마르콘’ ( kata\
제목이 만장일치로 들어가 있는 것은 2세기 중반 기원을
반박하며, 또한 파피아스의 인용( 위를 보라 )이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모두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von Campenhausen 1972: 173n123, Hengel 1985: 69 ),
‘카타 마르콘’( kata\ Mavrkon )과 제2복음서를 연관시키는
것은 이미 1세기 후반에 존재했다. 이러한 표제어의 고대성은 또한 이 복 음서의 저자로 비사도인 마가로 명명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확증되는 4) 유세비우스에게서 발견되는 파피아스의 진술을 보면 파피아스가 목격자의 증언에 직접 접근했을 것 임을 암시한다. “나는 많은 무리들처럼 말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를 말하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며, 생소한 계명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 주님이 친히 주시고 또 진리 자체에서 비롯된 계명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감이 간다. 그 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장로들의 추종자였다고 말하면서 내게 올 경우, 나는 그에게 장로들이 어떤 말을 했는지 묻곤 한다. 가령 안드레와 베드로가 무슨 말을 했으며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나 요한이 나 마태나 기타 주님의 다른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또 주의 제자들인 아리스티온과 장로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이렇게 묻는 까닭은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보다는 아직 생존해 있는 사 람들의 입을 통해 얻는 지식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교회사』 3. 39.3~4). 유세비우스 의 인용문은 “파피아스가 주님의 제자 사도 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지만(C. Black 1994: 87), 유세비우스 자신은 아리스티온과 장로 요한을 사도 적 목격자들 이후에 두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파피아스가 사도들에게 직접 접근했던 것이 아니라 아 리스티온과 장로 요한을 거쳐 사도들의 말씀을 받은 것으로 말한다(『교회사』 3.39.2.6). 아리스티온 과 장로 요한이 마지막 목격자들이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Bauckham 2006: 15~21을 보라. 5) 전승에서 파피아스의 증언을 더 늦추는 유일한 실제적 증거는 유세비우스(324년경)보다 1세기 후에 기록했던(430년경) 시데의 필립(Philip of Side)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Gundry 1993: 1028). 파피아스의 저작들에서 후대 반영지주의적 경향을 읽어내 려는 여러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파피아스에게서는 어떤 분명한 반영지주의적 논쟁도 나오지 않는 다(Yarbrough 1983: 182~183, Hengel 1985: 48).
21
마가복음
데, 이는 외경 복음서들이 보여 주듯이 2세기 중반에 복음서와 같은 저작 들이 사도적 저자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흔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마가복음이 단순히 익명으로 미리 알리지도 않고서 최초 독자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 의 제목이 처음부터 마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Hengel 1985: 74~84, 2000: 50~56. 이에 대한 반대는 Marcus 2000: 17~18 ).
6)
반마르키온 서문 ( 150~180년경 ). “마가와 관련하여 그가 ‘몽당 손가락’으
로 불리어진 것은 그의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 너무나도 짤막한 손 가락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 베드로가 죽은 후 동일한 사람이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Grant 1946: 92 ).
마가의 “몽당 손가락”에 대한 부정적 설명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에 모두 등장한다.7) 2차 전승에서 이러한 언급을 통해 마가를 비하시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마가가 ‘아름다운 손’으로 불리어 진 것은 그 손으로 마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 했기 때문이다”와 같은 문구를 덧붙임으로써 복음서 저자를 격찬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순교자 유스티누스 ( 150년경 ). 유스티누스는 마가복음 3장 17절( 세베대의 아 들들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 )을
인용하면서 이 구절이 베드로의 회고록에
서 발견된다는 것을 언급한다( 『 트리포와의 대화 』 106.3 ). 이레나이우스 ( 170년경 ). “그러나 그들이 떠난( e¡xodon, 엑소돈 ) 후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자( ejrmhneuth/ß, 헤르메뉴테스 ) 인 마가 자신이 베드로가 설교했 던 것들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이단들을 반박함 』 3.1.1. C. Black 1994: 99~100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180년경 ). “베드로가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말
씀을 전파하고 성령의 감화 아래서 복음을 선포했다. 그곳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마가에게 그것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가는 오랫동안 베 드로를 따라다녔으므로 베드로가 말해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서 마가는 복음서를 기록하여, 자신에게 요청했던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 사실을 안 베드로는 강하게 그것을 금지하지도 않았고 장려하지도 않았다”( 유세비우스, 『 교회사 』 6.14.6~7 LCL ).8) 비록 알렉산드리아의
6) 헹엘(Hengel 1985: 81)은 어떤 교회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회 도서관에 두 가지 다른 복음서를 소유 하면서 이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해 제목들이 필요했을 것임을 지적한다. 7) 마가는 또한 히폴리투스, 『모든 이단에 대한 논박』 7.30.1에서도 ‘몽당 손가락’으로 언급된다(C. Black 1994: 116. 이러한 언급은 ANF 5:112[7.18.1]에서 발견된다). 8) 『교회사』 2.15.1~2는 베드로가 “마가의 저작을 승인했다”고 말한다.
22
서론
클레멘스는 베드로가 여전히 살아 있을 때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언급하지만, 대다수 초기 증거들은 베드로가 죽은 후에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오리게네스 ( 200년경 ). “둘째 복음서는 마가가 기록한 것이다. 마가는 베
드로가 설명해준 것을 기록했다. 베드로는 공동 서신에서 마가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면서 이와 같이 말한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 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유세비우스, 『교회사 』 6.25.5 LCL ).
테르툴리아누스 ( 200년경 ). “마가가 편집했던 복음은 베드로의 확인을 받
았을 수도 있는데,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 ( 『 마르키온을
비판함 』 4.5.
Barclay 1976: 121 ).
유세비우스 ( 324년경 ). “마가는 애굽에 처음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자신
이 기록한 복음을 전파했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 고 한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회심한 남자들과 여자들의 수가 매우 많았 고, 그들의 금욕주의는 매우 놀라울 만큼 철학적이었으며, 그래서 필론은 그들의 행동과 모임과 식사와 모든 생활 방식을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전승에 따르면 마가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베드로에게 말하 기 위해 로마에 왔으며, 그때 베드로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 교회사 』 2.16~17.1 LCL ) 히에로니무스 ( 400년경 ). “사도 베드로의 통역자이고 알렉산드리아 초대
주교이며 자신이 직접 구주이신 주님을 보지 못했던 마가는 복음서를 두 번째로 출간하였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의 스승이 일어났던 일들의 순서 보다는 신뢰성에 따라 전파하는 것을 들었던 것들을 서술했다”( 『 마태복음 주석 』 서문 6. Barclay 1976: 121 ).
이상의 내용을 볼 때, 제2복음서의 저작권을 요한 마가에게 돌리는 것이 초 기적이며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음서 자체에서 발견되는 내 적 증거에 대해서 말하자면, 비록 그 저자가 요한 마가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는 없다 해도, 요한 마가가 제2복음서의 저자이며 또한 이 복음서가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기록되었다는 전승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물 론 저자가 헬라어를 알고 있었다는 것( 참조, 행 12:25~13:13, 15:36~39 )이 가능성 있 는 저자들의 영역을 상당히 좁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또한 히브리어/아람 어도 알고 있었다는 것( 막 3:17, 22, 5:41, 7:11, 34, 9:43, 10:46, 14:36, 15:22, 34 )은 요한 마 가라는 전승 및 마가의 집이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과 잘 어울린다( 행 12:12 ). 요한 마가의 청중은 유대교 관습들 및 종교 집단들을 모르고 있었다 해도( 막 23
마가복음
7:1~4, 14:12, 15:42 )
마가는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 전승을 뒷받침하
는데, 이는 마가가 모든 셈어 표현들을 설명하고,9) 다양한 유대교 당파 및 집 단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헤롯당원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대제사장들, 대제사장 등 )을
있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양한 ‘라틴 어법들’( 아래에서
“청중”을 보라 )이
알고
등장한다
는 것도 마가가 제2복음서의 저자였으며 그가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전승을 뒷받침한다( Gundry 1993: 1043~1044 ). 제2복음 서의 저작권에 대한 내적 증거를 요약하면서, 우리는 이 복음서가 요한 마가 에 의해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이 초기 교회의 전승에 잘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10) 비평 학자들은 위의 논증들에 대해 많은 반론들을 제기해 왔다. 어떤 학자 는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자’였으며 또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파피아스 전승의 신뢰성을 문제 삼는다. 사 도가 말한 자선전적 이야기들을 마가가 기록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하 지만 마가복음에 있는 전승들의 균형 잡힌 형식이 어떤 목격자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추정하는 이러한 논증은 어떤 목격자에 의해 반복되는 이야기조 차도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세련되고 부드러워진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 다. 만일 60년대에 베드로가 말한 이야기들이 30년 이상에 걸쳐 베드로에 의해 전해져 왔던 것이라면( 눅 10:22, 33, 39~43 등 ),
1:2; 행 1:21~22, 2:42, 4:2, 13, 19~20, 5:29~32, 6:4, 8:25,
그리고 베드로가 한 달에 한 번씩 이 이야기들을 반복해 왔
다면, 이것은 마가가 그 이야기들을 들었을 즈음인 60년대에는 베드로가 똑 같은 이야기들을 360회나 반복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매 6개월마다 한 번씩만 이야기들을 반복했다면 베드로는 60회 이상 반복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이야기들이 보다 ‘균형이 잡히면서’ 고정된 형식을 지니 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제2복음서의 저자가 사도행전 12장 12절의 요한 마가라면, 이 저자는 30년 전에 이러한 전승들을 들었을 것 이고. 자신의 사역 가운데 이 전승들을 전하는 것을 포함했을 것이다( 참조,
행
9) 이에 대한 반대는 쾨스터(Koester 1990: 289)와 슈넬레(Schnelle 1998: 200)다. 이들은 마가복음 의 저자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헹엘(Hengel 1985: 46)을 참조하라. “나는 두 번째 복음서처럼 그렇게 한정된 지면에서 많은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 단어들과 문구들을 가지고 있는 어떤 다른 헬라어 문헌도 알지 못한다.” 10) 복음서 자체에서 비롯되는 내적 증거와 관련하여 가장 활발하게 베드로와 마가복음을 연관시키는 시 도를 하는 사람은 터너(C. Turner 1925; 1926; 1928)다. 터너는 “이 모든 구절들에서(1:21, 29, 5:1, 38, 6:53, 54, 8:22, 9:14, 30, 33, 10:32, 46, 11:1, 12, 15, 20, 27, 14:18, 22, 26, 32) 마가의 3인칭 복수는 베 드로 담화들의 1인칭 복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C. Turner 1928: 54). 맨슨(Manson 1962: 42)을 참조하라. 맨슨은 터너를 따라서 베드로를 1:16~39, 2:1~13, 3:13~19, 4:35~5:43, 6:7~13, 30~56, 8:14~9:48, 10:32~35, 11:1~33, 13:3~4, 32~37, 14:17~50, 53~54, 66~72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보컴(Bauckham 2006: 155~182)도 참조하라.
24
서론
12:25~13:13, 15:36~39; 골 4:10; 딤후 4:11; 몬 24절; 벧전 5:13 ).
우리는 또한 파피아스가 마
가를 베드로의 ‘헤르메뉴테스’( eJrmhneuth/ß) 즉 ‘통역자’로 언급하고 있을 뿐 베드로의 대필자 또는 ‘비서’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참조, C. Black 1994: 89~91 ).
따라서 만일 제2복음서가 ‘개인적 회고’에서 비롯되었다면
더 자세한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다( Marcus 2000: 23 ).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에 대하여 마가복음에 나오는 자료의 분량( 1:16~18, 29~31, 36, 3:16, 5:37~43, 8:29, 31~33, 9:2~8, 10:28~31, 11:21, 13:3~37, 14:27~31, 32~42, 54, 66~72, 16:7 )은
제2복음서 저자와 베드로의 증언 사이에 있는 유대관
계와 잘 어울린다. 마가 저작권에 대해 제기되는 또 하나의 논증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지리에 실수로 추정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Niederwimmer 1983: 68~70 ).
1967: 178~183, P. Parker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은 7장 31절,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
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다. 만일 우리가 두로에서 시돈, 갈릴리 호수, 데가볼리로 가는 선을 긋는다 면, 이는 정말로 이상한 여행이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여행을 비교해본 다면 ( 거리가
아니라 방향으로 )
포틀랜드에서 시애틀과 대평원을 경유하여 덴버로
여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 Marcus
2000: 472 ) .
이러한 여행은 두로를 떠나 북
쪽 시돈으로 약 35km를 가고 그 다음 시돈에서 데가볼리로 남동쪽으로 갔 다가, 또 다시 갈릴리 호수가 있는 북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마가복음 저자가 팔레스타인 지리를 모르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예루살렘에 집이 있고 또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바울 및 바나바와 함께 여행했던 사도행전 12장 12절의 요한 마가는 마가복음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 여 줄 것이다 ( 행
12:25~13:4 ) .
지리에 있어서 이와 유사한 실수는 마가복음
11장 1절에 나온다. 이곳에서 여리고로부터( 10:46~52 ) 예루살렘과 벳바게 및 베다니로 가는 여행이 그 순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말 이상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여리고에서 출발한다면 진행 순서는 베다 니( 감람산의
동쪽 면 ),
벳바게( 감람산의
정상 ),
그리고 예루살렘( 감람산의
서쪽 )이
된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이 두 경우 모두에 있는 순서는 팔레스타 인 즉 유대의 지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가는 두로( 즉 갈릴리 호수 )와
여리고( 즉 예루살렘 )에서 출발하는 여행의 궁극적 목적을 우선 기술하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지명들( 시돈과 데가볼리, 벳바게11)
및 베다니. 7:31과 11:1을 보라 )을
그
11) 아마도 벳바게가 베다니 앞에 언급된 이유는 벳바게가 예루살렘에 더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11:11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벳바게를 거쳐 베다니로 가는 여행의 순서를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J. Edwards 2002: 334)를 참조하라. 에드워즈는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고대의 길이 벳바게를 지나 베다니로 가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25
마가복음
다음에 기술하고자 한 것을 반영한다.12) 따라서 제2복음서에 나오는 지리적 오류들이라고 하는 것들은 마가가 팔레스타인의 지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비평학자들이 그러한 여행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마가 의 문체를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가복음 저자에 대하여 그 저자가 사도행전 12장 12절의 요한 마가가 아 니라는 또 다른 오류는 저자가 유대 율법들 및 관습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다( P.
Parker 1983: 73~75 ).
13)
7장 3~4절에서 마가는 다음과 같은 삽입적 설명을
한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 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 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것이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은 그러한 씻는 의식들이 모든 유대인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준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7장 3~4절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하지 않다 ( Niederwimmer 183~185 ).
1967:
그러나 ‘모든’이라는 용어는 강조를 위해 과장된 형용사로 종종 사
용된다( Stein 1994a: 134 ). 마가복음의 이방인 독자들에 비해 유대 민족의 가장 독 특한 특징들 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삶을 지배했던 코셔( kosher ) 규정이었으며, 또한 구약 규정들과 바리새적 구전들 사이에 어떤 분명한 구분이 없었다( 아리 스테아스의 편지 305 ).
마가가 7장 3~4절에서 언급한 것은 하나의 광범위한 일반
화로서 정확한 것이며 또한 우리는 씻음에 대한 바리새적 규칙들을 따랐던 유대인 비율의 정확한 통계를 마가복음 저자로부터 기대해서는 안 된다. 7장 3~4절을 보라.14) 제2복음서의 저작권에 대한 논란은 복음서의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 다( Guelich
1989: xxix ).
마가복음의 의미는 복음서를 구성하는 단어들을 통하여
복음서 저자가 무엇을 의미했는지와 관련 있다. 이것은 저자의 이름이 요한 마가였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사실이다. 마가 저작권에 대한 활발한 논쟁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으며, 지식에 대한 단순하고 객관적인 추구와는 관련이 없다. 저작권 쟁점은 좀처럼 논의되지도 않고 때로는 의식적으로 인식조차 12) 마가복음에서 추정되는 또 다른 지리적 오류는 10:1에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도 다시 우선 출발 장 소를 언급하고(‘거기서,’ 즉 가버나움[9:33]), 두 번째로 궁극적 목적지를(유대 지경), 그리고 마지 막으로 그 사이에 있는 경로(요단 강 건너편)를 말한다. 10:1을 보라. 13) 이에 대한 반대는 헹엘(Hengel 1985: 9)이다. 헹엘은 마가가 “제2성전 파괴 이전의 팔레스타인 유 대교에 대한 ‘역사적 윤곽들’을 후대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및 사두개인들 사이를 구별하는 하나의 예증으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14)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마가의 표현(14:12)도 엄밀히 말해서 정확하지 않다. 왜 냐하면 유월절 양을 잡는 것은 니산월 14일에 일어났으며, 무교절의 첫날은 니산월 15일이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유월절 양을 잡는 일이 니산월 15일에 일어난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 다(14:12를 보라).
26
서론
되지 않지만 학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관점을 갖게 만드는 여러 전제들을 종 종 포함한다. 저작권 쟁점과 관련이 있는 것은 주로 어떤 사람을 마가에게 돌 리는 ‘의미’와 관련이 있다( Stein 1994a: 43~46 ). 만일 우리가 마가복음 연구에 자 연주의적 전제들은 가져오면서 마가복음에 기록된 기적들의 많은 부분 혹은 전체의 역사성을 부정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마가복음의 저작권을 사도행전 12장 12절과 베드로전서 5장 13절의 요한 마가에게 돌릴 수 있겠으며, 이러 한 정보의 주요 원천이 사건들의 목격자인 사도 베드로일 수 있겠는가? 우리 는 저자가 요한 마가가 아니라 익명의 공동체가 허구적 기사들을 창작해 내 어 이를 자신의 복음서에 포함시킨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익명의 저자이든지, 아니면 요한 마가가 교회를 속이거나 교화하기 위해 허구적 기사들을 창작해 낸 어떤 뻔뻔한 사기꾼이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 한다. 후자의 ‘타협주의 적’ 견해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짧은 기간 동안 인기를 누렸지만 복음 서 저자들은 자신들이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견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잃어버렸다( 참조, 눅 1:3~4; 요 21:24 ). 다른 한편으로 제2복음서에 있는 기적 기사들의 역사성을 믿는 사람들은 이 복음서가 마가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마가는 목격자인 사도 베드로에 게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을 고려하여 어떻게 해서든 이러한 역사성을 뒷받침 하기 위해 이 복음서가 신적으로 영감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전자의 견해가 마가 저작권을 지지하는 논증들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고 하면서 마 가 저작권을 반대하기 위해 제기되는 여러 반론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이 견 해는 마가 저작권을 지지하는 논증들을 뒷받침하려고 하면서 마가 저작권을 반대하기 위해 제기되는 반론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따라서 비록 제2복음서 의 의미가 누가 이 복음서를 기록했느냐는 쟁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해도, 저작권이라는 쟁점은 복음서를 어떤 사람에게 돌리는 의미와 중요성의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에 있어서 복음주의적 학자들의 전제보다 비평적 학자들의 전제들이 더욱 우세하고 결정적인 역할 을 한다. 비평적 학자들에게 있어서 대개 이러한 입장과 관련이 있는 반초자 연주의적인 전제는 비( 非 ) 요한 마가 저작권 및 마가복음에 있는 기사 배후에 사도 베드로의 목격자적 증언이 있었음을 부정할 것을 요구한다. 복음주의적 학자들에게 있어서 베드로의 목격자적 증언과 관련이 있는 마가 저작권이 훌 륭한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 있는 기적 기사들의 진실성이 마가 저작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마가15) 저작권에 대한 논거가 강력하며 다음의 내용을 포함한다.
15) 신약 성경에 언급되는 유일한 ‘마가’는 행 12:12, 13:5, 13, 15:36~40; 몬 24; 골 4:10; 딤후 4:11과
27
마가복음
1. 마가 저작권을 제2복음서에 귀속시키는 보편적이고 초기적인 전승. 순전 히 허구적인 귀속이라면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어 떤 비사도적 인물을 저자로 거명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 행 13:13, 15:36~41 ). 제2복음서를 어떤 비사도적 인물에게 허구적으로 귀속시키는 것이 우 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반대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외경 복음 서들( 빌립복음,
도마복음, 바돌로매복음, 베드로복음 등 ) 이
저작권을 사도들에게 귀
속시키는 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는 사도 베드로와의 유대관계가 비사도적 저작에 사도성을 승인하는 것으로 의도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전승은 제2복음서와 마가를 관련시켰다. 2. 제2복음서의 저작권을 ‘몽당 손가락’으로 불리는 요한 마가에게 귀속시 키는 『반마르키온 서문』( Anti-Marcion
Prologue )과
히폴리투스( Hippolytus )는
신뢰할 만한 전승이 지니는 모든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전적으로 허구적 인 전승이라면 왜 거룩한 복음서들 중 하나의 저자에게 그렇게 부정적 인 설명을 하겠는가? 3. 제2복음서가 그 기원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이 복음서의 최초 독자들 에게 익명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였다는 설명은 이 복음 서의 청자는 저자가 알고 있었고 저자를 알고 있었을 어떤 교회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제2복음서의 최초 청중들은 이 복음서의 저작권 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4. 내적 증거가 마가 저작권을 입증하지 못한다 해도 이 복음서의 여러 가 지 측면들이 마가 저작권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람어에 대한 지식, 수많은 라틴어 법들의 존재, 유대 관습들에 대한 지식, 후대 복음서 저자들보다 제2성전 파괴 이전 팔레스타인 유 대교에의 ‘역사적 윤곽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지식 [ Hengel 1985: 9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및 사두개인들과 같은 다양한 유대교 집단들의 구별 등 ).
5. 마가 저작권에 대해 제기되는 부정적 논증들( 팔레스타인 지리 및 유대교 관습들 에 대한 지식의 부족 )은
예수가 여행한 곳들의 지리를 묘사하는 마가의 방식
과 이방인 독자들을 위해 유대교 관습들을 서술하는 마가의 전반적인 방식을 오해한 것이다.
벧전 5:13의 요한 마가이기 때문에, 두 번째 복음서의 마가 저작권에 대한 전승은 ‘마가’가 신약 성 경의 요한 마가라는 것을 전제한다(이에 대한 반대는 Marcus 2000: 24). 만일 전승이 어떤 다른 ‘마 가’를 가리키고 있다면, 이 두 사람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했을 것이다.
28
서론
청중 마가복음 내에서 우리는 누구를 위해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는지에 대해 많 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람어 표현들에 대한 마가의 설명들이 암시하는 것처 럼( 3:17~22, 5:41, 7:11, 34, 9:43, 10:46, 14:36, 15:22, 34 ), 우리는 마가복음의 청중이 아람 어를 모르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마 가복음의 청중이 복음서 전승들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예수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다양한 칭호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자 손, 주, 그리고 특히 ‘인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칭호 )이
설명되지 않는다. 독자들이
이 칭호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전제한다. 2. ‘말씀’이라는 표현( 1:45, 2:2, 4:33, 8:32. 참조, 행 2:41, 4:4, 29, 31 등 )은 정의되지 않고 ‘복음’과 동의어로 이해된다. 3. ‘그의 제자’라는 표현은 결코 설명되지 않고 이를 이해하고 있을 것으 로 전제한다. 4. 세례 요한의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는 말의 의미가 어디에서도 설명되 지 않고 이 내용이 가리키는 것( 회심할 때 신자들의 삶에 성령이 임하는 것 )을 독 자들이 이해할 것으로 전제한다. 5. 아마도 복음서 목격자인 구레네 시몬의 두 아들은 분명히 교회의 회 원이었을 것이다( 15:21 ). 6. 독자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장소들을 알고 있기 때 문에 이들을 언급할 때 아무런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주요 등장인 물은 세례 요한을 포함하는데, 그는 단순히 ‘요한’으로 소개되며( 1:4 ) 요한의 독특한 의복이 묘사되나 설명은 되지 않고 독자들이 이해하리 라 예상되는 의미를 설명할 뿐이며( 1:6 및 왕하 1:8과 함께 9:11~13 참조 ), 그리 고 아마도 독자들은 요한이 헤롯왕에게 순교당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막 6:14~29 ). 빌라도는 어떤 설명적 칭호 없이 단순히 ‘빌라도’로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마 27:2의 ‘총독 빌라도’ 및 눅 3:1의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 독으로’와 대조하라 ).
‘나사렛’이라는 예수의 고향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
처럼, 헤롯왕( 막 6:14~29, 8:15 )이 다스렸던 지역도 서술되지 않으며 또한 독자들은 ‘작은 야고보와 요세’( 막 15:40, 16:1 )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16)
16) 마가가 자신의 독자들이 1:9, 24(또한 14:67도 참조하라)와 같은 언급들 때문에 이러한 결론에 이
29
마가복음
7. 마가는 여러 도시들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가버나움:
1:21, 2:1, 9:3, 두로: 3:8, 7:24, 31, 시돈: 3:8, 7:31, 예루살렘: 3:8, 22,
7:1, 10:32~33, 벳새다: 6:45, 8:22, 가이사랴 빌립보: 8:27, 여리고: 10:46, 베다니: 11:1, 11~12, 14:3, 벳바게: 11:1 ).
마찬가지로 여러 장소들도 설명하지 않는다( 요단 강: 1:5, 9,
3:8, 10:1, 유대: 1:5, 3:7, 10:1, 13:14, 갈릴리: 1:9, 14, 28, 39, 3:7, 6:21, 9:30, 14:28, 15:41, 16:7, 갈릴리 호수: 1:16, 7:31 [ 또한 2:13, 3:7, 4:1, 39, 41, 5:1, 13, 21, 6:47~49도 참조하라 ] , 11:1, 11, 15, 27, 15:41, 데가볼리: 5:20, 7:31, 게네사렛: 6:53, 감람산: 11:1, 13:3, 14:26 등 ).
비록 어떤
비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많은 장소들을 알 수 있었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해도, 몇몇 장소들은 1세기 로마 세계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장소들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의 일 부이기 때문에 이를 알고 있었다. 아울러 마가의 독자들은 다양한 구약 인물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유대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언 급되는 이사야 ( 1:2,
7:6~7 ) ,
10:47~48, 11:10, 12:35~37 )
모세 ( 1:44,
엘리야( 6:15,
7:10, 9:4~5, 10:3~4, 12:19, 26 ) ,
8:28, 9:11~13 [ 참조, 1:6 ], 15:35~36 ),
다윗 ( 2:25,
엘리야와 모
세( 9:4~5 ), 그리고 12장 2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및 야곱( 12:26 ) 등에 대한 언급들에서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을 자주 언급한다( 12:10, 24, 14:49. 참조, 1:2, 7:6, 9:12~13, 10:4~5, 11:17, 12:19, 14:21, 27 ).
마가의 독자들은 이스라엘의 통치 중심부가
산헤드린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14:55,
15:21 ).
독자들은 상징주의, 특히
예수가 ‘열두’ 제자를 선택한 것의 의미를 이해할 것으로 기대된다( 3:14~15를 보 라 ).
게다가 독자들은 몇몇 유대교 절기들( 14:1, 12a, 15:42 ),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안식일의 중요성( 1:21,
2:23~28, 3:2, 4, 6:2, 16:1~2 ),
설명 없이 소개되는 다양한 유
대교 집단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2:16, 18, 24] ), 그리고 다양한 유대교 전통들과 이 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그 전통들의 중요성( 7:6~7, 9~13 )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정결에 대한 어떤 구전들은 설명할 필요가 있었 다( 7:3~5 ). 이 모든 것은 마가복음의 최초 독자들이 복음서 전승들과 1세기 유 대교를 모두 잘 알고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방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이들이 원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들’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행 10:2, 22, 13:16, 26 ) 이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마가복음이 의도하는 독자들의 지리적 위치와 관련하여, 전승에 따르면 마 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로마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록했다고 말한다.17) 20세기 르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도 가능하다. 17) 『반마르키온 서문』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및 위의 저작권 논의에 나오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문들과 벧전 5:13에서 마가를 베드로 및 로마와 연관시키는 것 등을 보라. 1958년 마르 사바(Mar
30
서론
후반부까지는 이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그 이후로 몇몇 다른 장소 들이 복음서가 의도하는 독자들로 제시되어 왔다. 그들 중 몇 곳, 예를 들면 갈릴리( Marxsen 1968: 143, 1969: 54~95 )와 데가볼리( 유대 교회가 펠라로 피신한 곳으로 알려 짐 )는
거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상당한 지지를 얻으면서 유일하게 제시
되는 다른 독자들은 시리아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다( Ku..mmel 1991: 236~58, Marcus 2000: 33~37 ).
1975: 98, Theissen
이에 대한 몇 가지 근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
나는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묘사들과 AD 66~70년에 있었던 유대 전쟁 사 건들의 전반적인 과정 사이에 밀접한 일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보다는 시리아 상황에서 더 잘 설명되고 이해될 것이다. 둘째, 만일 13장 14절에 나오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유대 전쟁과 관련 있는 어떤 사건과 로 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도피할 필요가 있는 것으 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로마보다는 시리아 상황에 더 잘 적용되는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 Marcus
2000: 34 ).
그러나 유대 전쟁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박해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어떤 이들은 농 사( 4:2~8, 26절 이하 ), 주택( 2:4, 4:21 ), 고용, 지주, 세금( 12:1~9, 13~17 ) 및 토지에 대한 묘사( Kee 1977: 102 ) 가 이 복음서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기원 및 독자를 정확하 게 반영하면서 이를 확증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러한 내용들 대부분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며, 이러한 내용의 등 장은 마가가 시리아-팔레스타인 독자들을 위해 복음서 내용들을 개작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 예수의 팔레스타인 환경에서 그 기원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다. 초기 교회 전승에서 발견되는 마가복음과 로마와의 연관성은 상당히 중요 하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만일 마가복음 13장 9~13절 및 다른 곳에 있는 경고들이 복음서 독자들에 대한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회 당( 13:9a~b )과 국가( 13:9c ) 모두로부터의 박해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이 국가는 유대 전쟁 동안 팔레스타인 교회에 대한 박해로 추정되기보다는 네로 시대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아래의 13:9~13에 대한 논의를 보라 ). 우리는 60년 대 중반 네로 시대 동안 로마 교회가 경험했던 것 외에는 1세기 기독교 교회 에 대한 로마 박해의 어떤 분명한 전례도 알지 못한다( Hengel 2000: 79 ). 뿐만 아 니라 7장 26절에서 헬라 여인을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묘사한 것은 이 복음 Saba) 수도원 도서관에서 모턴 스미스(Morton Smith)가 발견했던 것으로 많은 논란이 되고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클레멘스 서신에 의하면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로마에서 기록했으나 베드로가 죽은 후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이를 개정하여 보다 영적인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보다 영적인 복음서는 마가의 비밀 복음서로 불려 왔다(C. Black 1994: 139~145). 요한 크리소스 톰(『마태복음 1:7에 대한 설교』)을 참조하라. 크리소스톰은 마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서를 기 록했다고 말한다.
31
마가복음
서가 시리아가 아닌 로마 독자들에게 보내졌을 경우 훨씬 더 의미가 잘 통한 다. ‘보니게’( 즉
‘페니키아 사람’ )라는
말로도 충분했을 것인데,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Hengel 1985: 29 ). 10장 12절에서 예수 가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에 적용한 것은 무엇보다 도 이방 및 로마 독자들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로마가 마가복음의 의도된 독자라는 전통적 견해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논증은 마가복음에 수많은 ‘라틴어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길을 열다( oJdo\n poieivn, 호돈 포이에인; 라. iter facere ) - 2:23 상( kra/battoß, 크라밧토스; 라. grabatus ) - 2:4, 9, 11, 12, 6:55 말( mo/dioß, 모디오스; 라. modius ) - 4:21 군대( legiw/n, 레기온; 라. legio ) - 5:9, 15 시위병( spekoula/twr, 스페쿨라토르; 라. speculator ) - 6:27 데나리온( dhna/rion, 데나리온; 라. denarius ) - 6:37, 12:15, 14:5 손( pugmh/, 퓌그메; 라. pugnus ) - 7:3 주발( xe/sthß, 크세스테스; 라. sextarius ) -7:4 세금( khvnsoß, 켄소스; 라. census ) -12:14 고드란트( kodra/nthß, 코드란테스; 라. quadrans ) -12:42 백부장( kenturi/wn, 켄튀리온; 라. centurio ) -15:39, 44, 45 만족하게 하다( to\ iJkano\n poihvsai, 토 히카논 포이에사이; 라. satis facere ) -15:15 채찍질하다( fragello/w, 프라겔로오; 라. flagello ) -15:15 브라이도리온( praitw/rion, 프라이토리온; 라. praetorium ) -15:16 18) 이러한 라틴어법들의 존재가 마가복음의 로마 기원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 지만( 이와 동일한 라틴어법들 중 몇 가지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발견되지만, ‘시위병,’ ‘손,’ ‘주 발’ 및 ‘백부장’은 마가복음에서만 발견되며, ‘고드란트’는 로마 독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로마 동전이 다 ),
19)
마가복음에서 라틴어법들의 수는 상당하며 이는 로마 독자를 암시한다.
테일러( V.
Taylor 1952: 45 )의
설명이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단어들 거의
전부가 파피루스에 나타난다는 것은 이 단어들이 코이네( Koine )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마가복음에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마가복음 저자가 로마
18) 아울러 6:48에 나오는 ‘사경’(teta/rth fulakh/, 테타르테 퓔라케)을 참조하라. 이는 로마식 시간 계산을 반영한다. 유대식 시간 계산에 따르면 밤을 삼경으로 나누었지만, 로마식 계산에 따르면 사 경이 있다(참조, 13:35). BDAG 1067~1068을 보라. 19) 미국식 달러 금액을 ‘파운드,’ ‘리라,’ ‘엔,’ ‘페소,’ ‘루블,’ ‘프랑’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 인 청중을 암시한다.
32
서론
환경 속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20)
연대 마가복음이 AD 70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광범위한 의견일치가 있음에도 불 구하고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를 더 일찍 잡으려는 여러 시도들이 있어 왔다. 이것은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 Stein
2001: 29~169 )와
사도행전의 마지막을 기록
하면서 마가복음을 사용했다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전제와 관련이 있다. 만일 누가가 바울의 상황에 대하여(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정보를 가지고 사도행전을 마무리했다면, 누가행전은 AD 62년 이후 에 기록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더 일찍 연대를 잡아야 하는 데, 이는 50년대 후반의 연대임을 암시한다( Carson and Moo 2005: 179~182 ). 하지 만 누가는 로마에서 바울과 바울의 운명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기 록했는가?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행적에 대해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것이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사도행전 1~15장에서 는 베드로에 대해 알 수 있지만 16~28장에서는 베드로가 전혀 등장하지 않 는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베드로 및 또는 바울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아니 라는 것을 보여 준다. 누가는 베드로가 사도행전의 주제를 성취하는 데 도 움이 되는 정도에 한해서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언급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 ). 따라서 베드로는 복음이 예루살 렘( 2:1~8:1b )과 유대 및 사마리아( 9:1c~12:19 )에서, 그리고 유대인( 2:1~9:43 )과 이 방인( 10:1~15:11 ) 모두에게 퍼져나갈 때는 중심 무대에 있다. 이후에 누가는 베 드로에 대해 더 이상의 관심을 보여 주지 않는다. 이것은 누가가 베드로의 삶 에 대한 최신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해주었거나 혹은 누가가 베드로에 대한 추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일어나는 사도행 전의 ‘우리’ 단락들을 참조하라. 누가는 베드로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 21:3~18, 27:1] ).
그보다는 복음이 예루살렘-유대-사마리아로 확대되어 사도행
전 1장 8절을 성취하면서 베드로의 역할이 완수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은 바울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아니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이 로마 에서 가이사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 9:1~28:31 ) 으로 사도행전을 끝마친다. 사도행전 1장 8절이 성취된
20) 마가복음에 발견되는 라틴어법들에 대한 추가적 논의는 BDF §§4~6, Dschulnigg 1986: 276~278, Gundry 1993: 1043~1044를 보라.
33
마가복음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28장 31절은 바울의 전기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러운 결말일 수 있지만, 사도행전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스러운 결말이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 전파되었으며( 1:8 ), 전체 로 마제국의 황제가 그 복음을 듣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도행전의 결말이 반드시 최종 기한( terminus ad quem ) 혹은 가능성 있는 가장 늦은 연대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이때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도행전은 AD 62년 이후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마가복음의 초기 연대를 주장하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1972년 호세 오캘러 헌( José
O’Callaghan )이
쿰란( 7Q5와
7Q6 )에서
발견된 헬라어 파피루스 두 조각이
마가복음 6장 52~53절과 4장 28절의 단편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엄청난 주목 을 받게 되었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마가복음의 연대를 로마인들이 쿰란 을 파괴했을 때인 AD 68~69년 이전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문서 학적으로 볼 때 7Q5와 7Q6의 연대는 AD 50년경이다( ±25년 ). 둘 중 더 큰 단 편( 7Q5 )은 5행으로 이루어진 20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오캘러헌이 이 단편을 마가복음 6장 52~53절과 동일시하는 데 필요한 이 글자들에 대한 그의 설명 은 몇 가지 수정을 포함하는데( 10개의 글자만이 실제로 분명하다 ) 이 또한 매우 의심 스럽다( Gundry 1999 ). 뿐만 아니라 그가 행들을 재구성하는 것도 역시 믿기 힘 들다( W.
Lane 1974: 18~21 ).
최초의 주장으로 야기된 흥분이 수그러졌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두 조각이 마가복음의 단편들이 아니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7Q5는 에녹1서의 헬라어 본문의 일부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마가복음의 연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외적 증거는 전승에서 비롯되는데, 이 는 마가복음의 기원을 베드로의 죽음과 관련시킨다. 『반마르키온 서문』과 이 레나이우스( 『 이단들을 반박함 』 3.1.1 )는 이러한 연관성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다( 아 울러 파피아스 [ 유세비우스, 『 교회사 』 3.39.15 ] 와 이를 추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교자 유스티누스, 『 트 리포와의 대화 』 106.3도 참조하라 ).
베드로가 AD 64/65년 네로 통치의 후반기 동안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참조,
클레멘스1서 5.2~4 ),
이것은 마가복음
이 60년대 후반에 기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스( 유세비우스, 『 교회사 』 6.14.6~7 )와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 교회사 』 6.25.5 )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마가복음이 베 드로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마가복음의 연대를 베드로 죽음 이전으로 두는 것이 변증적 목적을 위해서는 더 유리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마가복음의 연대를 베드로의 죽음 이후로 두는 것이 보다 신뢰할 만 한 전승으로 보인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 나오는 마가와 베드로 및 로마 사이의 유대관계(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 리하느니라 ) 도
34
60년대 후반의 연대를 뒷받침한다.
서론
수많은 학자들은 내적 증거를 가지고 마가복음의 연대를 설정하려고 하였 다. 몇몇 학자들은 예수의 고난에 대한 강조( 8:31~10:45, 14:1 이하 )와 박해를 준비 하도록 교회에 경고하는 것( 8:31~38, 13:3~13 )을 마가가 자신의 독자들이 박해를 받는 동안 그들을 격려하려고 했으며 또한 이것은 60년대 중반 네로가 로마 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을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처음부터 교회가 박해를 경험했으며, 또한 그리스도 인 박해에 대한 바울의 경고 대부분은 AD 64/65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보 여 준다( 살후 1:4~7; 롬 8:35, 12:14; 고전 4:12; 빌 1:29~30 등 ). 따라서 마가복음에 있는 구 절들이 네로 치하에서 박해받은 것을 반영하고 있다는 거울 읽기( mirror reading ) 는 의심스럽다. 박해와 고난을 준비시키는 이러한 경고들 대부분의 기원은 예수 자신의 사역 및 가르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거의 분명하다. 마가복음의 연대를 설정하기 위해 학자들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내적 증 거의 두 번째 주요 영역은 마가복음 13장에 이른바 유대 전쟁에 대한 암시들 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13장 14b절에서 독자들에게 이러한 언급에 주목 할 것을 촉구하는 편집적 부기( 附記 )는 무엇보다 마가복음의 연대를 설정하는 데 적절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 사건은 다가올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이 있 으며 또한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전 에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라는 하나의 경고 역할을 한다( 13:14c ). 그러나 마가복 음의 연대를 설정하기 위한 이 구절의 중요성이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은 틀림 없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라는 권고는 아마도 로마 혹은 시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마가복음의 독자들을 위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가가 아람어 용어들 을 설명하고( 5:41,
7:34, 14:36, 15:34 등 )
유대 전통들( 7:3~5 )이 분명히 암시하는 것
처럼 유대도 분명히 아니다( ! ). 따라서 60년대 후반 유대와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예루살렘 안으로’ 가 아니라! )
도망하라는 역사적 예수의 경고는 유대에 살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상당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지만, 마가복음의 연대를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권고로서 마가의 청중들에게 말해진 것은 아니다. 13장 14절을 보라.21) 몇몇 학자들이 마가복음 13장에서 마가복음의 연대를 설정하기 위한 증거 로 생각하는 또 하나의 암시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언급하는 13장 7절에 나온다. 이것은 네로가 죽은 후인 AD 68~69년에 로마제국이 전쟁과 혼란을 21) 크로슬리(Crossley 2004)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으로 묘사한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어떤 부분들을 준수하고자 하는 의무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을 때인 40년대 중반의 어떤 시기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예수는 역사적 예수의 관습을 반영하며 또한 마가(그리고 40년대 중반 이후에 기록한 것 이 분명한 마태)가 독자들의 상황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예수를 재현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 훨 씬 더 가능성이 있다.
35
마가복음
겪었던 특별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것은 유대 전쟁뿐만 아니라 갈바와 오토 및 비텔리우스 황제들과 관련이 있는 피의 내전들과 독 일, 골, 영국, 아프리카, 다뉴브 강 저지대 및 폰투스 등의 반역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Hengel 1985: 22. 참조, 타키투스, 『 역사 』 1.2.1 ). 그러나 ‘난리와 난리의 소 문’은 심판 예언들에 나오는 흔한 묵시적 개념이며 마지막 때에 대한 묘사들 이며 메시아 시대의 ‘산고들’이다( 사 19:2; 렘 51:46; 겔 5:12; 계 6:8; 에스드라2서 13:31; 에녹 1서 99.4~6; 시빌의 신탁 3.635~36; 바룩2서 27.3~9, 70.3~8; 요세푸스, 『 유대 전쟁사 』 2.10.1 §187 등 ).
실제로 마가복음 13장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묘사는 구약 성경과 중간
기의 묵시문헌에 나오는 다양한 심판 예언들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 따라 서 ‘난리와 난리의 소문’에 대한 언급이 마가복음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 사용 될 수 없는 것처럼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한 후에 쓰여진 마태복음 24장 6절에 있는 정확히 동일한 문구와 누가복음 21장 9절에 있는 병행적 표 현들이 이들 복음서가 기원한 연대를 AD 68~69년으로 설정할 수도 없다. 예 수가 성전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14:55~59를
보라 ),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이미지도 얼마든지 예수 자신이 말했으며 또한 30년 대 중반과 70년대 초반 사이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몇몇 학자들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도 정확하기 때문에 복음서 저작 연대가 AD 70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함으로써 마가복음의 연대를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설정하고자 한 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누가복음의 자료에 대해서는 타당할 수 있지만( 참 조, 눅 19:41~44, 21:20~21, 24 ),
마가복음에 대해서는 정반대가 사실인 것 같다. 만
일 마가복음이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 기록되었고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둘러 싼 사건들을 반영한다면, 성전을 파괴시켰던 파멸적인 화재에 대해서는 왜 아 무런 언급이 없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요세푸스, 『 유대 전쟁사 』 6.2.9~6.9.4 § §164~434 ).
마태와 누가 역시 대화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며, 이는 복음서 저
자들이 그 주제에 대해 예수가 말했던 것에 매우 충실했으며 종종 생각되는 것 이상으로 이 주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창 의적이고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예루 살렘의 운명을 예언적으로 서술하는 일에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묘사하 는 사건들 이전에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Kee 1977: 100~101 ).
복음서 연구에서 마가복음의 등장 교회 역사의 첫 17세기 동안 마가복음은 대개 잊혀진 복음서였다. 마태복 음은 예수의 가르침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면서( 5~7, 10, 13, 18, 23~25장 ) 각 부분 36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II. 이 예수는 누구인가: 1부 ( 1:14~3:6 ) III. 이 예수는 누구인가: 2부 ( 3:7~6:6a ) IV. 사역과 오해: 3부 ( 6:6b~8:21 ) V.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4부 ( 8:22~10:52 ) VI.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5부 ( 11:1~13:37 ) VII. 수난 이야기: 6부 ( 14:1~16:8 )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서언에서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 며( 1:1 ), 또한 1장 1~13절은 예수에 대한 복음의 시작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알린다( Matera 1988, Hooker 1991: 31~52, France 2002: 54~87, J. Edwards 2002: 23~42, Donahue and Harrington 2002: 59~70.
1)
이에 대한 반대는 Keck 1965:
352~370, Guelich 1989: 3~46, Boring 1991: 53~59, Marcus 2000: 137~176 ).
이 단락은 마가
복음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렌즈의 역할을 하면서 독자들에게 1장 14절~16장 8절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 이야기를 준비시킨다. 또한 이 단락은 1장 1절, 2~3절, 7~8절, 9~11절 및 12~13절에 있는 기독론적 내용들에 고도 로 집중함으로써 1장 14절~16장 8절을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 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으로 시작하는데,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면서( 1:2~3 ) 오시는 이를 위해 광야에서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했다( 1:4~8 ).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기 위해 세례를 받 으라고 요청함으로써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자기보다 능 력 많으신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그 다음 마가는 예수의 무대 등 장과 예수가 세례 받는 것에 대해 말한다( 1:9~11 ).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 이 갈라지고 성령이 예수 위에 내려오며,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를 통해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하는 증언을 하신다. 그 다음 마 가는 예수가 사탄의 시험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복음의 ‘시작’을 끝맺는다( 1:12~13 ).2)
1) 킹스버리(Kingsbury 1990: 43)는 1:1~13 전체에서 예수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묘사되고 있음을 주장한다. 1:14 이하가 되어서야 예수가 행위의 개시자가 되기 때문에 1:14~15에서 하나의 새 단락 이 시작한다. 2) 1:1~13(15)에서 마가가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자료들에 대한 논의는 Lambrecht 1992를 보라.
67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B. 예수의 세례 ( 1:9~11 ) C. 예수의 시험 ( 1:12~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1장 1절에 있는 마가의 서두 진술은 책 전체의 제목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는 Boring 1991: 47~53, Marcus 2000: 143, 145, Donahue and Harrington 2002: 59~60 ),
자신이 기
록한 저작의 첫 단락( 1:1~13 )을 독자들에게 직접 소개하는 것이다( V. Taylor 1952: 151~164, W. Lane 1974: 39~62, Kuthirakkattel 1990: 4~11, Hooker 1991: 31~52, J. Edwards 2002: 23~42 ).
1)
그러나 간접적으로 1장 1절은 독자들에게 책 전체( 1:1~16:8 ) 도 소개하
는데, 이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1장 1~13절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임을 말함으로써, 마가 역시 책 전 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을 독 자들에게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마가는 이 복음이 오실 이를 위해 길 을 예비하는 자에 대해 말하는 구약 약속들의 성취임을 지적한다( 1:2~3 ). 곧이 어 마가는 세례 요한에 대한 교회 전승을 다시 인용한다( 1:4~8 ). 세례자에 대 한 어떤 설명적 언급이 나오지 않는 것은 복음서의 의도된 독자들이 요한의 사역과 역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가는 요한이 엘리야의 역할 을 성취하고( 9:11~13 ) 또한 자신의 뒤에 오면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위해 길을 예비하도록 신적인 부르심을 받았음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말한다. 이 단락에서 마가의 편집 작업의 가장 분명한 예는 1장 1절에 나온다. 신 학(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과
어휘( 복음 )는 마가의 것이 분명하며( 1:1을
보라 ),
또한
이 구절이 구전 기간 동안 하나의 독립된 전승으로 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장 1절이 후대 필사자의 첨가라는 견해 를 뒷받침할 만한 그 어떤 본문상의 증거도 없으며( 이에 대한 반대는 Schmithals 1979: 1.73 ),
2)
또한 이 구절의 강한 마가적 특성도 이를 반박한다. 마가복음 1장 2절
에 있는 출애굽기 23장 20절 및 말라기 3장 1절이 마가복음 1장 3절에 있는 이사야 40장 3절과 연관성을 지니는 것은 마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전자의 두 언급이 Q 자료에서 이사야 40장 3절과 별도로 함께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만( 마
11:20/눅 7:27 ),
세 구약 구절 모두 마가복음 이전에
존재했던 성경 ‘증거’ 모음집에서 이미 함께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 다( Fitzmyer
1971: 62~63 ).
이사야 40장 3절의 ‘우리 하나님의 대로’( 마소라
본문 )와
‘우리 하나님의 길’( 70인역 )이 1장 3절에서 “‘그의’ 길”로 대체된 것은 1장 4절
1) 마가복음의 첫 단락이 1:1~15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Pesch 1980a: 71~73, Gnilka 1978: 39~71, Guelich 1989: 3~48, Marcus 2000: 137~176, Witherington 2001: 67~81이다. 2) 크로이(Croy 2001)는 마가복음의 원래 시작(1:2 이전)이 유실되었고 1:1이 후대에 첨가되었음을 주 장하려고 한다.
69
마가복음
과 7절의 ‘전파’처럼 마가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Gnilka 1978: 41 ), 이는 후자가 편 집적 요약들과 삽입들( 1:14,
39, 45, 3:14, 5:20, 6:12, 7:36, 13:10, 14:9 ) 에
종종 발견되는
것으로 마가가 선호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대개 1장 4~8절은 전승 자료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마가의 편집 작업은 아주 적고 신학적이라기보다 성 격상 문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마가가 세례 요한에 대한 여러 고립된 전승 들( 1:4~5,
6, 7~8 ) 을
결합시킨 첫 번째 것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Guelich
16~17, Marcus 1992a: 15~17 ).
1989: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 그런 경향이 있듯이 마가가
마태복음 3장 7~12절/누가복음 3장 7~9절과 15~18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 에 대한 자료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결론짓는 것은 추측에 근거한 것이 다. 마가가 이 자료를 알았는지를 결정하는 단순한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 1
주해 및 설명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2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 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 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세례 요한이 광 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 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 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 더라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 라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 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 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1] ‘시작’( ajrch/,
아르케 )이라는
|
The beginning of the gospel concerning ┌ ┐ Jesus Christ, the Son of God – 2 as it is written [ in the book of ] Isaiah the ┌ ┐ prophet, “Behold, I shall send my messenger before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3 The voice of one calling out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his paths.’” 4 John ┌ ┐ came baptizing in the wilderness and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5 And the whole Judean countryside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re going out to him and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confessing their sins. 6 And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was eating locusts and wild honey. 7And he was preaching, saying, “The one stronger than me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tie the thongs of his ┌ ┐ sandals. 8 I baptized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1
용어는 복음서 등장의 시간적 시작이나 복
음서 내용 서술의 시작 혹은 둘 모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 용어에 대한 시 70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간적 이해는 마가복음에 이 용어가 나오는 여러 경우들( 10:6, 13:8, 19 ) 에서 시간 적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다( 또한 4:15에 있는 이 용어의 시간적 특성을 참조하라 ). 라)
눅 1:2; 요일 1:1; 빌
이 구절이 책 전체의 주제 구절( 제목이 아니
역할을 하지만( 즉 이 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것이다 ), 1장 1절에
서 ‘시작’을 사용한 것은 역사 안에서 이 복음이 시간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 을 시사한다. ‘시작’ 앞에 관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마가가 ‘하나의’ 시작 또 는 복음서의 ‘여러 시작들 중 하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 가복음 문맥에서 복음서 저자는 ‘그’ 시작을 가리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무 관사 도입들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장 1절과 비교하라. 그리고 70인역에서 이사야 1장 1절, 호세아 1장 1절과 2절, 요엘 1장 1절, 아모스 1장 1절, 오바 댜 1절, 나훔 1장 1절, 스바냐 1장 1절, 스가랴 1장 1절, 말라기 1장 1절 등을 보라. 신약 성경에서 ‘복음’( eujagge/lion, 유앙겔리온 )이라는 용어는 대개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복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된 ‘복음서들’에 대해 복음을 전문용어로 사용한 최초의 기록 자료는 2세기 중반 마르키온의 것이 다( Koester 1989, Gundry 1996: 321~325 ). 이 용어와 복음 메시지의 마가 이전 연관성 은 바울에게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명사를 60회 사용하고 동사를 21회 사용한다( 참조, 고전 15:3~8 ). 마가복음에서 이 용어 는 예수의 생애 및 사역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전부는 아니지만 이 용어가 등장하는 대부분은 복음서 저자가 전승 속에 편집적으로 삽입시킨 것처럼 보 인다( 1:1,
14~15, 8:35, 10:29, 13:10, 14:9 ).
게다가 마가복음은 ‘복음’이 수식어 없이
“독립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복음서다. 1장 1절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주어적 속격(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한 복음 ) 으로 이해 될 수 있지만, 목적어적 속격(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대한 복음 ) 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 장 좋다( Guelich 1989: 9, Boring 1991: 51~52, France 2002: 53 ). 이것은 우리가 Q 자료와 도마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마가복음이 주로 예수가 가르친 것 들의 모음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가복음은 예수의 인격과 행위들 및 행동들에 대한 복음서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추가적 서술도 목적어적 속격임을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이는 마가복음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가 복음에 예수가 가르쳤던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분명하지만 ( 1:15, 4:1~32, 13:2~37 ),
마가복음은 예수가 누구며 무엇을 행했는지에 주로 초점을 맞
춘다. 세례 요한이 체포된 이후에야 예수가 전파하기 시작했다는 것( 1:14~15 ) 은 1장 2~8절을 도입하는 1장 1절의 복음이 이러한 서두 구절들에서 발견되 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대한 복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71
마가복음
‘그리스도’( Cristo/ß, 의미 )가
크리스토스 [ 히브리어
åjyˆv∂m, 마쉬야흐, 메시아 ],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예수’와 함께 사용될 때 하나의 칭호로서의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참
조, 행 3:20, 5:42, 17:3 ),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을 당시 ‘그리스도’는 그 칭호적 성격
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라 해도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시작 했다. 마가복음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는 하나의 칭호로 사용되었지만( 8:29, 9:41, 12:35, 13:21, 14:61, 15:32 ),
이 경우들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이름과 결합되
지 않았다. 따라서 1장 1절에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마태복음 1장 1절과 18절, 요한복음 1장 17절과 17장 3절에서처럼 하나의 칭호로 서술된다기보 다는 주로 동일시되는 하나의 이름으로서 기능한다 ( V. 1980a: 76. 이에 대한 반대는 W. Lane 1974: 44, Gundry 1993: 34 ).
Taylor 1952: 152, Pesch
그러나 1세기 독자들에게
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이름으로서 오늘날보다 더욱더 칭호적 의미로 인식되 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와 하나님의 독특하고도 유례가 없는 관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가 누구인 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마가가 좋아하는 칭호이며( 1:11, 24, 3:11 [ 참조, 1:34 ] , 5:7, 9:7, 12:6, 13:32, 14:61~62, 15:39 ),
또한 마가복음이 기록되었을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
선재와 신성의 개념을 모두 의미했다( 참조, 빌 2:6~8; 골 1:15~20 ). 마가복음에서 1장 1절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논란이 된다. 1장 1절이 책 전체의 제목 역할을 하는가( 참조, 호 1:2 )? 그러나 ‘시작’이라는 용 어 및 1장 2~3절에 있는 예언이 1장 4절~16장 8절 ( 1:2~3을
보라 ) 보다
1장
4~8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을 반대한다. 1장 1절을 1장 2~8절 에 대한 서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럼에도 1장 1절은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한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이 구절을 통해 마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하나님의 복음’( 1:14 )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원한다. [1:2~3] 세례 요한의 도래로 시작하는 ‘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다. 이것은 또한 요한복음에도 해당된다. 요한은 요한복음의 서문 에서 1장 1~5절의 우주적 배경을 서술한 직후 세례 요한의 도래를 위치시킨 다( 요 1:6 이하.). 비록 누가가 3장 1절 이하에 이르기까지 요한의 사역과 예수의 세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복음의 시작이 세례 요한과 함께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누가복음 서문 바로 다 음에 세례 요한의 출생 예언이 나오며( 1:5 이하 ) 또한 초대 교회의 복음 메시지 도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한다’( ajrxa/menoß, 10:36~37, 13:24 )
아륵사메노스 )는
사실에서( 행
1:21,
알 수 있다. 누가가 데오빌로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를 공
유하고 있기 때문에( 참조, 눅 1:1~4 ), 복음의 시작은 세례 요한의 도래로 개시된 72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예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마
11:11~15/눅
7:24~35, 16:16 ).
접속사 ‘……와 같이’( kaqw/ß, 카도스 )는 1장 2~3절을 앞 구절( 1:1 ) 혹은 그 다 음에 나오는 내용( 1:4 이하 )과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일 이 접속 사가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과 어울린다면 우리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 역해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 서 세례를 전파하며……’( 1:4 이하 ).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이사야 인용문이 마 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전에 세례자 전승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참조, 마 11:10/눅 7:27 )
마가 이전 전승에서 1장 3절의 예언이 1장 4절 이하와 어울린다는
것이다. 1장 2절에 있는 예언도 1장 1절보다는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과 더 잘 어울린다. 다른 한편으로 마가복음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 ‘카도스’( kaqw/ß ) 는 새로운 문장이나 사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의 내용을 뒷받 침하는 역할을 한다( ‘카도스’가 15:8, 16:7을 참조하라 ).
‘기록된 것’을 소개하는 9:13과 14:21, 그리고 4:33, 11:6, 14:16,
아울러 1장 2절에 나오는 ‘너의’( 문자적으로 ‘너의 얼굴’ )는 앞에
있는 1장 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가가 이 곳에서 ‘……와 같이’( kaqw/ß,
카도스 )를
사용하는 것은 1장 2~3절이 1장 1절
에 있는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처럼 마가가 다른 곳에서 이 접속사를 사용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Guelich 1992a: 17~18, Watts 2000: 55~56 ).
1982: 6, Marcus
이러한 관련성을 보여 주기 위해 나의 사역에서
는 1장 1절과 2절을 대쉬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1장 1절이 책 전체의 제목으 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France 2002: 50~51 ) 이어서 나오는 구약 인용문( 1:2~3 ) 의 핵심 인물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대는 France 2002: 61 )
예수라는
것( Tolbert 1989: 239~248 )을 보여 준다. 이것은 1장 10절 이후에 세례 요한은 6장 14~29절과 짤막한 회상으로 나오는 1장 14절, 9장 13절, 11장 30절 외에는 마가복음 다른 곳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 Marcus 2000: 137 ).
세례 요한에 대한 전승은 출애굽기 23장 20절( 보라 니 )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
말라기 3장 1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 및 이사야 40장 3절(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의
결합으로 도입된다.
이 인용문들은 이들의 위치가 1장 1절의 서론적 진술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다. 이것은 마가의 편집 작업에서 마가 자신 이 성경의 성취를 언급하는 유일한 경우다. 마가복음 다른 곳에서 성경의 성 취는 마가가 사용하는 전승들에서 나타난다( 7:6, 9:12~13, 10:4~5, 11:17, 14:21, 27 ). 동 사 ‘기록된 것’( ge/graptai, 게그랍타이 )은 강조형 현재완료( intensive perfect )이기 때 문에, 이 예언적 구절 안에 포함되어 있는 신적 메시지의 지속적인 가치를 강 73
마가복음
조한다. 마가는 이러한 합성 인용문의 모든 출처를 언급하기보다 가장 중요 한 자료( 이사야 ) 만을 언급하는 유대교 관습을 따른다( Gundry 1967: 125. 참조, Marcus 2000: 147 ).
이사야 인용문( 1:3 )은 네 복음서 기사 모두에서 요한과 관련이 있으
며( 마 3:3; 눅 3:4; 요 1:23 ), 또한 요한복음 1장 23절이 주장하듯이( 참조, 눅 1:76 ) 이것 이 요한의 사역에 대한 요한 자신의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이 유는 없다. 출애굽기 23장 30절과 말라기 3장 1절은 이미 세례자 전승에서 연 관되어 있었으며( Q 자료 - 마 11:7~19/눅 7:24~35. 참조, 눅 1:17 ), 이곳에서 예수가 직접 요한을 증거한다. 하지만 현재 기사에서 출애굽기 23장 20절과 말라기 3장 1절을 이사야 40장 3절과 연관시키는 것은 마가의 편집 작업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이 단락에 대한 서론을 보라 ). 쿰란 공동체가 이사야 40장 3절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광야에 위 치하고 있었던 것처럼, 요한의 광야 사역도 이사야 40장 3절을 성취하기 위 한 요한의 열망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사 40:3은 쿰란 공동체의 주제 구절 역할을 한다 [ 1QS 8.14. 아울러 9.19~21도 참조하라 ] ).
요한과 쿰란 공동체 모두 자신들의
사역이 이사야 40장 3절의 성취를 수반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많은 추측이 발생했다. 요한이 원래 쿰란 공동체의 회원이었는가? 나이 많은 요한의 부모가 너무 늙어서 요한을 직접 양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한 을 쿰란에 데려다 놓았는가? 나중에 요한이 어떻게 이사야 40장 3절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인해 쿰란 공동체와의 관계를 끊었는가? 소설가들은 이러한 일치점과 요한 및 쿰란 공동체 모두 ‘광야’로 동일시된다 는 사실로부터 장황한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우리는 요한과 쿰란 사이에 있 었던 관계가 있다 해도 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3) 출애굽기 23장 20절의 ‘네 얼굴’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해도 여기서 는 예수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말라기 3장 1절의 ‘내 앞에 있는 길’( 마소라 본 문)
혹은 “내 얼굴 앞에 있는 길”( 70인역 )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반면, 여기서는
예수와 예수의 사역( 네 길 ) 을 가리킨다. 마가에게 있어서 예수의 사역은 역사 에 대한 신적 계획의 성취를 수반한다. 말라기 3장 1절 인용문은 마소라 본문 이나 70인역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는다. 이 인용문이 나오는 다른 곳에서 도( 마 11:10; 눅 7:27. 아울러 눅 1:17도 참조하라 ) 동일하게 해당된다. 이는 이 예언이 구 전 기간 동안 이미 나름대로의 독특한 형태와 모습을 띠게 되었음을 암시한 다. 마가복음 1장 2절은 1장 1절에 비추어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강조점은 ‘네 길을 준비할……내 사자,’ 즉 세례 요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조
3) 간결하면서도 신중한 논의에 대해서는 VanderKam 1994: 168~170을 보라. 보다 자세한 논의에 대해 서는 Badia 1980을 보라.
74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점은 ‘네 앞에’( 문자적으로 ‘네 얼굴 앞에’ )와 ‘네 길,’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에 있고, 또한 요한이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에 있다. ‘네’가 신적 이름을 대 체하는 예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반대는 Snodgrass 1980: 34 ). 이러한 구 약 예언들에서 주의 오심은 마가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마소라 본문의 이사야 40장 3절에서 ‘우 리 하나님의 대로’로 되어 있고 또한 70인역에서 ‘우리 하나님의 길’로 되어 있는 반면, 전승( 혹은
마가복음 )은
이 구절들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
기 때문에 이를 “‘그의’ 길”로 변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두 개의 복수 동사가 암시하듯이 요한은 백성들이 “[너희들은-복수] 주의 길을 준비하라, [너희들은-복수]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했 다. ‘주의 길’은 이사야서에서 ‘여호와의 길,’ 즉 ‘야훼’의 길을 가리키지만, 마 가복음에서는 ‘주’ 예수의 길을 가리킨다( 2:28, 12:35~37을 참조하라 ).
5:19~20, 7:28, 11:3, 13:35. 그리고 특히
마가에 의해 사용된 이사야 인용문은 우선적으로 세례 요
한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묘사한다. 요한은 구약에서 예언된 이 유명한 선지자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것을 준비하는 사자 였다. 따라서 인용문에 있는 강조점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혹은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는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그의’ 대로” 및 “‘그의’ 길”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그 길’을 따르 는 자들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행 9:2, 19:9, 23, 22:4, 24:14, 22. 참조, 13:10, 16:17, 18:25~26 ).
[1:4~6] 동사 ‘에게네토’( ejge/neto )는 마가복음에서 어떤 서술을 도입할 때
종종 사용된다( 참조, 1:9, 2:23, 4:10, 11:19, 15:23. 아울러 1:11, 2:27, 4:4, 22, 39, 6:14, 9:3, 7 [ 2회 ], 26도 참조하라 ).
세례 요한이 소개되는 실제적인 방식은 마가의 독자들이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만일 독자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 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요
1:6 )와
같은 그 무엇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마가에게 있어서 요한의 중요성은 1세기 유대교 역사에서 요한이 행했던 것 이 무엇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예수를 가리키면서 예수가 누구인지 를 밝히고 있다는 데 있다. 요한이 선지자들이 가리켰던 오실 이를 선포했기 때문에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승이 요한을 ‘세례를 베푸는’( bapti/zwn,
밥티존 )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의 사역이 이 세례 의식 및 요한의 청중들이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만일 정관사( oJ,
호)
를 생략한다면( 1:4에 대한 추가 주석을 보라 ), 마가는 이 두 행위를 밀접하게 연결시 키는 것이다. 즉 요한은 세례를 베풀면서 전파하고 있었다( khru/sswn, 케륏손 ). 75
마가복음
사해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요한의 세례에 대한 선례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 다시 등장했다. 정화 및 의식적 씻음은 유대교( 레
13~17장; 민 19장 ) 와
신비종교
및 수많은 다른 종교들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요한의 세례에 대한 가장 가 능성 있는 ‘근원’은 유대교 개종자 세례 아니면 쿰란 공동체의 ‘세례’다. 유대 교 개종자 세례에 대해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경험하는 것으로서 할례와 제의적 희생 및 세례를 수반했다. 안타깝게도 유대교 개종자 세례의 연대를 확실하게 추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 McKnight 39~43 ), 31~32 ).
1991: 78~89, Hooker 1991:
또한 개종자 세례는 스스로 실시한 것 같다 ( Hartman
1997: 5~8, 12n8,
뿐만 아니라 유대교 개종자 세례는 이방인들만을 포함한 반면, 요한의
세례는 주로 유대인을 포함했다. 쿰란의 ‘세례’도 회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 지만( 1QS 3.4~5, 9, 5.13~14 ), 쿰란의 의식은 요한의( 그리고 기독교의 ) 세례처럼 단회 적인 입문 의식이라기보다는 반복적인 정화를 포함했다. 따라서 요한이 베푼 세례의 기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요한이 베푼 세례의 독특성은 그 세례가 입문 의식이라는 것에 있지 않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일종의 입문 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요한이 베푼 세례의 독특성은 그 세례의 형식, 즉 침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그 독특성은 세례가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참조, 1:5 ). 마가 의 이해에서 요한이 베푼 세례의 독특성은 회개를 동반하여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의 독특성은 그 목적에서 나타난다. 즉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요한의 사역의 목적은 단순히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죄사함을 받게 하여 이스라엘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의 사역의 목적은 오실 이와 하나 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종말론적 공동체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 예를 들면 요한 이 그 길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대해서는 눅 7:29~30과 요 1:29~51을 보라.)
‘광야에’( ejn thø v ejrh/mwø, 엔 테 에레모 )라는 마가의 표현은 세례 요한에 대한 전승 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요 1:23; 눅 1:80, 7:24~28 ). 요한이 유대의 광야 혹 은 사막에서 전파하고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요한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 4절에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은 요한 을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광야’의 종말론적 역할”과 관련시키기 위한 목적 이나 혹은 ‘출애굽 유형론의 종말론적 소망’이나 광야가 ‘하나님이 다시 한 번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동하실 장소’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 다( Guelich
1989: 18. 참조, Mauser 1963: 46~52, J. Edwards 2002: 29 ).
마가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1장 4절의 ‘광야’는 소망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구약의 주제들( France 2002: 57 ) 이
아니라, 1장 3절에서 방금 언급된 이사야 40장 3절의 그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Marxsen 1969: 37 ). 따라서 이 표현은 어떤 특별 76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한 지리적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히 는 일종의 수단 역할을 한다. 광야는 세례 요한이 1장 2~3절에서 언급된 구 약의 ‘광야’ 전파자이며, 이사야가 말했던 오실 이를 위해 길을 준비할 그 선 지자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요한이 1장 7~8절에서 예수에 대해 말하는 것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표현이 하나의 지리적인 명칭 으로 간주되어 역할을 하는 마태복음 3장 1절 ( 유대
광야 )
및 누가복음 3장
2~3절( 빈들에서…… [ 그리고 ] 요단 강 부근 각처 )과는 달리, 마가는 이 표현을 한정하지 않는다. 이 표현이 마태와 누가에서처럼 이사야의 예언 앞이 아니라 이사야 의 예언 다음에 나온다는 것은 마가가 자신의 독자들이 1장 4절의 광야와 1장 3절에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에 있는 광야를 연관시키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광야가 어디에 위치하던 간에 요한은 이사야가 광야에서 나타 날 것으로 말했던 그 선지자다. 요한의 ‘전파’ 내용은 1장 4절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로 묘 사되지만, 1장 7~8절에서 그 내용은 실제로 기독론적이다. 우리는 이들을 서 로 관련성이 없거나 모순되는 메시지로 볼 것이 아니라, 요한을 곧 오실 ‘능 력 많으신 이’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켜( 1:7~8 )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이해해야 한다( 1:4 ). 요한이 촉구하는 회개와 그 결 과들은 하나님이 항상 이것을 요구해 오신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독론적 및 종말론적 사건에 기인한다. ‘그가 오셔서’( 1:7 ) 자 신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기 때문에( 1:15 ), 사람들은 회개할 필요가 있다. ‘회개의 세례’( ba/ptisma metanoi/aß,
밥티스마 메타노이아스 )라는
표현에서 속
격 ‘의’는 서술의 속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따라서 ‘회개 세례’로 번역할 수 있다( Donahue and Harrington 2002: 62 ). 이것은 목적어적 속격( 회개를 위한 세례 )이나
원천의 속격( 회개에서 비롯되는 세례 )이 아니다.
‘회개’에 대한 헬라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마음의 변화를 수반하며 또한 회심이라는 인간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인간적 차원은 회개와 믿음을 수반하고( 1:15 ), 신적 차원은 성령을 통한 갱신을 수반한다. 마가는 요한의 회 개 메시지가 의로운 삶을 살며, 자신의 이웃에 대해 정의를 행하며, 또한 하나 님 앞에서 진정한 경건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는 요세푸스의 생각에 동의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요세푸스,
『 유대 고대사 』 18.5.2 §117 ).
세례와 회개의 긴밀한 연관
성( 1QS 3.4~5, 9, 5.13~14에 나오는 이들의 연관성을 참조하라 )은 이 세례가 일종의 고립된 의식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요한 및 후대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회개와 세례는 필수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진정한 회개는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지만, 회개 없는 세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회개 없는 세례는 물속에 헛되이 잠기는 것이 77
마가복음
다( 참조, 1QS 3.14~15 ). 다른 한편으로 세례 없는 회개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요 한이 그렇게 될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와 세례는 나누어 질 수 없었다.4) 요한의 세례가 저절로( ex opere operato ) 죄사함을 가져온다는 의 미에서 성례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회개 및 함축적으로 믿음과 관련 하여 요한의 세례를 경험하는 일은 죄사함으로 끝난다.5) 비록 요한의 세례 양 식이 어떠했는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세례( 1:9~10 )를 묘사하는 데 사 용된 용어들 ( 즉 논 ]”) 과
“요단 강‘에서’ [ eij ß , 에이스 ]”와 “물에서 ‘올라오다’ [ aj n abai/ n wn , 아나바이
‘세례를 주다’( bapti/zw, 밥티조 )의 근본적 의미가 적시다 혹은 담그다 라
는 것은 침례임을 강하게 암시한다.6) 마가는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 고 묘사한다( 1:5 ). ‘나아가’( ejxeporeu/eto, 엑세포류에토 )라는 동사 다음에 복합주어 가 나오지만 이 동사는 단수다. 왜냐하면 헬라어에서는 동사 다음에 복합주 어가 나오는 경우에 대개 두 주어 중 첫 번째 주어의 수만 취하는데, ‘지방’은 단수이기 때문이다( 1:36~37을 보라 ). 헬라어 본문에서 복합주어는 교차대구법으 로 나타난다. A 온( pavsa, 파사 ) B 유대 지방과 B´ 예루살렘 사람이 A´다( pa/nteß, 판테스 ) 이 구절은 하나의 과장된 예이지만 요한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끼친 큰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요세푸스가 독립적으로 증언하는 요한의 위 대성( 『 유대 고대사 』 18.5.2 §§116~119 )은 기독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비록 요한이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크다 해도( 참조, 마 11:7~15 ) 예수는 훨씬 더 큰 분 이기 때문이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요한을 보기 위해 나왔다 해
4) 마커스(Marcus 2000: 156)는 요한의 세례와 관련이 있는 죄사함이 미래적 종말에서의 죄사함을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눅 11:4)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며, 초대 교회는 세례가 회개 및 믿음과 관련 있으며 또한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일로 끝난다고 가르쳤다(행 2:38. 참조, 11:16~18). 시 51:1~14에 나오는 기도들과 요일 1:9에 나오는 약속들은 즉각적인 용서와 정결을 가 져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5) 회개와 죄사함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눅 24:47; 행 2:38, 5:31을 보라. 아울러 행 10:43, 11:18도 참조 하라. 세례와 죄사함에 대한 추가적 언급에 대해서는 마 26:28; 행 2:38, 13:38, 26:14; 골 1:14; Stein 2006을 참조하라. 6) 기독교 세례에 있어서 롬 6:3~5의 세례와 관련된 장사되고 살리심을 받는다는 상징도 침례를 암시 한다.
78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도, 훨씬 더 큰 무리들이 예수를 보기 위해 유대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 리와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에서도 왔다( 3:7~8 ). ( 5:3~5에서 마가가 동일한 목적을 위해 귀신의 능력을 어떻게 과장하고 있는지를 참조하라. 만일 이 귀신이 크고 능력 이 있었다면, 귀신에 대해 권위를 행하는 예수는 얼마나 더 크고 능력이 있겠는가! )
‘그에게’는 요한의 세례가 유대교 개종자 세례처럼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 니라 요한이 세례자였음을 보여 준다( 1:4 ). 수동태인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이름이 ‘세례자’인 것처럼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세례가 회개의 내적 행위를 가시적으로 표시하는 기능을 하지만, ‘죄를 자복하는 것’( 1:5 )은 말로써 표시하는 기능을 한다( 참조, 행 19:18; 요일 1:9; 마 10:32/눅 12:8; 롬 10:9~10 ). 요한 이 사역한 위치는 ‘요단 강’이었다. 이곳은 ‘광야’의 일부였으며( 막 1:4. 참조, 요세 푸스, 『 유대 전쟁사 』 3.10.7 §§515 )
또한 세례를 베풀기 위해 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요
단 강 저지대 부근 지역이 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였을 가능성이 있다. 전통 적 장소인 와디 엘-킬트( Wadi el - Kilt )는 여리고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러 나 요한의 세례 행위를 어떤 한 장소에 한정시키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복음 서 저자들이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요단 강 부근 각 처’( 눅 3:23 ).
3:3 ),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요
1:28 ),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요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요한의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갔다는 언
급은 요한이 사역한 주요 지역이 아마도 사해 근처 요단 강 계곡의 남쪽 부분 이었음을 암시할 것이다( France 2002: 65. 이에 대한 반대는 Riesner 1987: 29~63. 리스너는 이곳의 위치를 갈릴리 바다 동쪽인 바타네아 [ 요 1:28의 베다니 ] 의 북쪽으로 본다 ).
하지만 마가는
요한이 사역한 정확한 지리적 위치( 들 )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마가에 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요한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전파했는지에 대한 것이지 어디서 사역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9:2에서 변모의 장소에 대해 마가가 제 시하는 부정확한 위치를 참조하라.)
1장 6절에서 마가는 세례 요한의 의복을 상징으로 묘사한다. 즉 ‘요한은 낙 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다.’ 요한의 옷차림에 대한 이러한 묘 사( 참조, 마 3:4 )는 마가 이전 전승의 일부였다( 참조, 마 11:8/눅 7:25 ). 요한의 의복에 대한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는 것은 마가 및 마태가 자신들의 독자들이 그 의 미를 이해했을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낙타털’에 대한 언급은 마가의 독 자들로 하여금 요한을 선지자와 동일시하도록 했을 것이지만( 슥 13:4 ),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마가 복음 1장 6b절에 있는 요한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열왕기하 1장 8절에 나오 는 엘리야에 대한 묘사와 거의 동일하다. 독자들은 엘리야의 미래적 도래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에 비추어 보면서( 말 4:5 ) 요한의 도래와 엘리야의 귀환에 대한 예언 사이의 어떤 관련성을 보았을 것이다( 참조, 눅 1:17; 요 1:21, 25 ). 나중에 79
마가복음
마가는 이러한 관련성을 훨씬 더 명백하게 언급한다( 9:11~13 ). 이 시점에서 성격상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이러한 서술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이 발생한다. 하나는 요한이 실제로 그런 옷을 입었는지 아니면 이것이 요한의 생애를 말라기 예언의 성취로 재해석하는 교회의 후대 창작이었는지 등을 포함한다. 하지만 1세기 유대교에서 엘리야가 메시아에 대한 선구자 역 할을 했다는 것을 믿었다는 증거는 없다. 유대교에서 이러한 신념에 대한 최 초의 분명한 언급은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트리포와의 대화』 8.4와 49.1에 나타나는 듯하다. 요한이 입은 옷에 대한 이러한 전승이 현재 구절뿐만 아니 라 Q 자료에서도 등장하기 때문에( 마 11:8/눅 7:25. 참조, 막 6:15와 요 1:21. 여기서 요한은 엘리야와 관련이 있다 ),
요한의 의복에 대한 이러한 묘사의 정확성을 의심할 이유
는 없다. 또 다른 질문은 요한이 말라기 4장 5절을 성취하도록 부르심을 받았 다는 것을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요한이 의식적으로 이런 식의 옷을 입었는 지에 대한 것이다. 요한이 이런 식으로 옷을 입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 을 것이며 또한 요한의 청중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했으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낙타털 옷과 가죽 띠는 통상적인 광야 복장이나 일반적인 유 목민 의복이 아니었다. 마가복음 및 전승은 요한이 사역하면서 통상적인 광 야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선지자들이 늘 입었던 일상적인 복장도 아니었는데( 슥 13:4에도 불구하고 ), 이는 표준적인 선지자 복장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의복이 나타내 는 것은 분명하다. 즉 요한은 선지자 엘리야처럼 옷을 입었다( 참조, 왕하 1:8 ). 따 라서 요한이 의도적으로 이런 독특한 방식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상당히 확 실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요한이 의식적으로 말라기 4장 5절을 성취하기 위 ..
해 그렇게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Ohler 1999: 470~473 ). 만일 쿰란 공동체가 자신 들이 이사야 40장 3절의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면, 왜 요한은 자신이 말라기 4장 5절의 예언과 동일한 예언을 성취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제기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은 요한이 이러한 역할을 성취할 것으로 예수가 생각했는지에 대 한 것이다. 마가복음 9장 11~13절에 나오는 증거 ( 마 11:7~15에 있는 병행구절을 참조하라 )는
17:10~13과 눅 7:24~30/마
예수가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
의 제자들 중 몇몇 사람이 원래 요한의 제자였으며( 요 1:35~51 ) 이들이 기독교 전승을 전달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 눅 1:2 ) 도 그 역사성을 뒷 받침한다. 마가가 1장 6절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분명하다. 9장 11~13절에 비추어 볼 때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이 말라기 4장 5절을 성취했으며 또한 요한은 예수 가 오실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음을 가르쳤다는 교훈으로 이해될 80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수 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자신들의 독자들이 요한의 사역을 이런 식으 로 이해하기를 원했다. 비록 요한이 개인적으로 한때는 예수가 정말로 오실 그이인지 의심할 때도 있었지만( 마 11:2~6/눅 7:18~23 ), 복음서 저자들은 이를 일 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요한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요한의 개인적인 견해에 대해 우리가 어 떤 결론에 도달하든지 간에, 마태와 누가는 요한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지칭 하는 현재의 본문과 이 구절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만일 마 태와 누가가 마태복음 11장 2~6절/누가복음 7장 18~23절이 현재의 본문과 충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복음서에서 이 구절을 생략했 을 것이다. 요한은 또한 ‘메뚜기’( ajkri/daß, 아크리다스 )와 ‘석청’( me/li a¡grion, 멜리 아그리온 )을 먹은 것으로 묘사된다. 메뚜기( 음식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곤충, 레 11:20~23; CD 12.14~15 ) 와 야생벌에서 나온 꿀은 광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음식이었다( 참조, 레 11:21~23; 마카베오2서 5:27 ).
이것이 요한이 먹었던 전부는 아니었으나 전승 및
마가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요한의 식사 습관은 전승 여러 곳에서 언 급된다. 나실인과 같이( 민 6:2~21; 삿 13:2~7 ) 요한은 거룩한 직무를 위해 하나님 에 의해 구별된 자였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다( 눅 1:15, 7:33 ). 또한 요한 의 금욕적인 식사 습관은 잘 알려져 있다( 눅 7:33/마 11:18 ). 마가가 요한의 식사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요한이 이사야 40장 3절의 성취를 전파했던 “광야”에 서 사역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7) [1:7~8] 요한의 전파는 이미 1장 4절에 언급되었지만, 이제 죄사함을 받
게 하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이유가 서술된다. 마가가 누가복음 3장 7~9절/마태복음 3장 7~10절에 나오는 요한의 윤리적 가르침을 알고 있 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가는 자신의 독자들이 요한이 전파하는 것의 핵심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임을 알기 원했 다. 이 시점에서 요한의 윤리적 가르침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은 마가 메시지 의 기독론적 초점과 목적을 손상시켰을 것이다. 요한이 전파하는 중심적 내 용은 ‘그분이 오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래적 현재( e¡rcetai, 에르케타이 ) 의 강조적 상태를 주목해야 한다. 이 동사를 문장 맨 앞에 두고 있어서 요한 의 메시지의 긴급성을 강조한다. “그분이 오고 계신다……그러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오실 이에 대한 첫 번째 묘사는 그가 세례 요한보다 ‘능력이 많다’는 것이
7) 켈호퍼(Kelhoffer 2005: 121~123, 132~133)를 참조하라. 켈호퍼는 “1:6이 막 1:2~3에 있는 ‘이사야 서’의 인용을 확증하는 것”으로 본다.
81
마가복음
다. ‘능력 많으신 이’( oJ ijscuro/teroß, 호 이스퀴로테로스 )라는 용어가 메시아에 대한 전문 용어로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 1장 1~8절의 문맥에서 이 용어는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능력 많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 도이며( 1:1 ), 주이며( 1:3 ), 요한은 그를 위해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1:3. 참조, 3:27 ). 하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요한이 기대했던 능력 많은 이가 어떤 분인지에 대 해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몇 가지 제안이 있었다. 즉 (1) 하나님,8) (2) 어 떤/그 종말론적 선지자( 신 18:15 ), (3) 메시아, (4) 인자, (5) 어떤 알려지지 않 은 선지자. 첫 번째 제안은 하나님을 요한보다 ‘능력 많은’ 이로 묘사하는 것 은 무의미하다는 문제에 직면하며, 또한 ‘하나님의’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이 러한 관계를 묘사하는 데 매우 이상한 은유가 될 것이다( Donahue and Harrington 2002: 63 ).
게다가 나중에 요한이 예수에 대해 질문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
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참조,
마 11:3/눅 7:19 )는
요한이 이러한
역할을 성취하는 것으로 어떤 신적인 인물보다는 어떤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인자’ 칭호는 1세기 유대교에서 대중적인 ‘메시아’ 칭호 가 아니었던 것이 거의 분명하기 때문에( Stein 1994b: 136~146 ), 요한이 이런 수수 께끼 같은 인물을 언급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요한 이 신명기 18장 15절의 애매한 종말론적 선지자 혹은 훨씬 더 모호한 어떤 선 지자를 언급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가능성이 없는 듯하다. 만일 요한이 어떤 능력 많은 이가 오신다는 것을 언급했다면, 요한의 청중들은 이를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마가와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요 한이 예수 ( 그 )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 이다. 오실 이가 ‘능력이 많다’는 성격에 대해, 마가는 이것이 오실 이가 더 큰 정치적 및 경제적 혹은 군사적 권위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귀신 축출( 3:22~27, 6:45~52. 참조, 요 10:41 )에서
9:14~29 )과
병 고침( 6:53~56 ) 및 이적들( 4:35~5:43,
나타났듯이 예수가 더 큰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예수가 담당할 더 큰 역할을 강조 한다( 막 10:45, 14:22~24 ). 많은 학자들은 1장 7절에 있는 ‘내 뒤에’( ojpi/sw mou, 오 피소 무 )를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한 전문 용어로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참
조, 1:17, 20, 8:33, 34, 13:16 ),
요한이 말하는 능력이 많은 이는 예수의 어떤 제자였
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가에게 있어서 시간적인 것임이 분명한( 내 뒤의 시 간에 )
현재의 의미와 요한 자신이 아마도 이 문구로 의미하고자 했던 것을 혼
8) 예, 톨버트(Tolbert 1989: 239~248). 하지만 톨버트는 주 곧 하나님의 길을 전파하도록 보내심을 받 은 사자가 예수이지 세례 요한이 아니라는 무리한 주장을 한다. 전승의 현재 상태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가(그리고 다른 복음서 저자들)의 이해는 분명하다. 즉 능력 많 으신 이는 예수다.
82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동하는 것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예수는 시간상 요한 다음에 오는 것이 분명 하다 ( 1:14, 70~71 ).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France 2002:
뿐만 아니라 나사렛 예수가 언젠가 요한의 제자였다는 그 어떤 구체적
인 역사적 증거도 없으며( 이에 대한 반대는 Meier 1994: 1.116~130 ), 또한 “마가복음 줄 거리는 예수가 요한의 제자 집단 안에 머물렀을 지도 모르는 어떤 때를 배제 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구성되었다”( Meier 1994: 1.118 )는 증거도 없다. 요한의 전파에 나오는 오실 이의 두 번째 묘사는 요한이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품위를 극히 손상시키는 일로 간주되었다( b. Ketub. 96a, “종은 자신의 주인에게 제공해야 할 모든 방식의 섬김을 제공해야 하고, 학생은 선생의 신발을 벗기는 [ 문자적으로 ‘푸는’ ] 일은 제외하고 자신의 선생에게 제공해야 한다.” 아울러 b. Qidd. 22b; Sifre on Num. 21.41도 참조하라 ).
비록 요한이 길을 준비하도록 하나
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 자신을 생각했다 하더라도, 요한은 히브 리 종도 때때로 면제되었던( Mek. on Exod. 21:2 ) 이와 같은 천한 행위를 행하기에 합당치 않았다. 마가복음 1장 8절에서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묘 사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오실 이에 대한 세 번째 묘사는 그가 베푸실 더 큰 세례 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비교의 강조적 성격은 헬라어 대명사인 ‘에고’( ejgw/, 나 는 )와
‘아우토스’( aujto/ß, 그는 )의 불필요한 사용에서 볼 수 있다. 요한과 예수( 요
3:22, 4:1~2 )
및 초대 교회는 모두 물세례를 행했기 때문에, 마가가 자신의 독자
들로 하여금 ‘세례를 주다’라는 동사를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도 록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즉 먼저는 문자적으로( 요한의 세례에 대해 ),
다음으로는 은유적으로( 예수의 세례에 대해 ) 그렇다. 마가가 자신의 독
자들이 요한의 말을 자신들의 기독교 세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의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 사이의 차이는 세례 의 방식( 침례 )이나 세례의 수단( 물 )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례와 관련된 유 익과 관련이 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는 모두 회개와 관련 있는 침례 로 행해졌다( 1:4, 15 ).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는 모두 세례를 죄사함과 관련 시킨다( 행 2:38, 10:43, 47 ). 그러나 요한은 능력 많은 이가 자신과 함께 새 시대의 도래 및 하나님 나라의 보증으로 성령을 가져올 그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고후 1:22, 5:5; 엡 1:14 ).
1장 7~8절의 교차 대칭 형태를 주목해야 한다.
A 그는, 능력 많으신 이 ( 1:7 ) B 나는 ( 1:7 ) B、 나는 ( 1:8 ) A、 그는 ( 1:8 ) 83
마가복음
마가는 세례 요한을 옛 시대와 언약의 일부로 묘사한다. 모세처럼 요한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백성을 준비시켰지만 요한 자신은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신 34장 ). 요한 뒤에 오실 능력 많으신 이가 하나님의 나라 ( 막 1:14~15 )와
성령의 선물( 눅
24:49; 행 1:4~5, 8, 2:1 이하; 요 7:39, 14:16~17, 25~26, 16:13~14 )
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그’ 표지였기 때문에 마가의 독 자들은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약속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행 15:7~11; 갈 3:2~5 ).
11:15~18,
“성령의 세례”라는 표현은 신약 성경에 7번 등장한다( 마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고전 12:13 ).
3:11;
거의 마지막 경우에서 요한의 세례가 성
취했던 것과 예수의 세례( 즉 기독교 세례 )가 성취하려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대 조가 있다. 각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경험을 보편적으로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대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나 요한은 나의 모든 제자들을 위해 [회개 의 세례]를 베푼다. 그러나 능력 많으신 그는 그의 제자들 모두[일부가 아니 다]를 위해 [성령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히 언급한 다. 능력 많으신 이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새 시대의 표지로서 선지 자들이 약속했던( 사 32:15, 44:3; 겔 36:26~27, 39:29; 욜 2:28~32. 참조, 행 2:17~21 ) 성령의 독특한 복을 베푸실 것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는 예수를 따르는 소수가 경 험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두 번째 단계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마가가 1장 8절의 성취로서 성령의 강림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이 일이 자 신의 복음서에 기록된 사건들 이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가가 오순절 날 을 둘러싼 사건들을 알고 있었는지는 여러 요소들에 달려 있다. (1)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성, (2) 이 복음서의 저자가 사도행전 12장 12절의 요한 마가였는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3) 이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 및 후 에 베드로의 선교와 관련이 있었는가. 만일 이들 중 어느 하나가 가능성이 있 다면, 마가와 마가의 독자들은 이 구절에 기록된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 지를 알았을 것이다.
요약 마가복음 서두에 나오는 여덟 구절은 마가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저작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범위를 제공한다. 이 단락에 있는 모 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을 서술하기 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은 세례 요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마가복음 이 단락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또한 세례 요한의 사역이 예수를 어떻게 조명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것은 하나님( 1:11, 84
9:7 ),
귀신
I. 서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 1:1~13 ) A.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 ( 1:1~8 )
들( 1:24, 3:11, 5:7 ), 제자들( 8:27 ), 예수 자신( 12:6, 13:32, 14:62 ) 그리고 로마의 한 백 부장( 15:39 ) 등에 의한 고백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의 치유들과 귀신 축출 들, 예수의 이적들과 기사들 등을 증거하는 무리들의 반응을 통하여 분명 히 나타날 것이다. 이 단락은 또한 예수가 무엇을 행했으며 또한 예수에게 일어난 모든 것 이 ‘기록된 것과 같이’( 1:2 )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의 오는 것에서 성경의 성취에 대한 강조는 새 언약( 14:24 )이 옛 언약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옛 언약의 정점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예언의 즉각적인 성취 는 세례 요한의 도래와 예수에 대한 요한의 선언이 1장 2~3절에 있는 성 경을 어떻게 성취하는지와 관련되어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 외에 예수가 행한 것과 예수에게 일어난 일은 신적인 계획에 따라 발생한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의 죽음 및 부활의 필연성을 포함한다( 8:31,
9:31,
10:31, 45, 14:21, 49. 참조, 행 2:23 ).
추가 주석 1:1 ‘하나님의 아들’은 a* Q 오리게네스 및 여러 열등한 증거들에는 나오지 않는다. a1 B D W f 1 f 13 및 초기 교부들과 같은 증거들의 강력한 뒷받침은 이 문구의 진정성을 입증한다. 예수 를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은 마가의 강력한 신학적 강조이면서(1:11. 참조, 1:34와 함께 3:11, 5:7, 9:7, 14:61, 15:39. 아울러 12:6과 13:32도 참조하라) 그 진정성을 입증한다. 이 문구 가 마가의 강력한 편집적 강조였음을 어떤 필사자가 알고 1장 1절 끝에 ‘하나님의 아들’을 덧 붙였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이에 대한 반대는 Head 1991: 621~629, Marcus 2000: 146~147). 1:2 현재시제 ‘아포스텔로’(ajposte/llw, 내가 보내노니)는 미래적 현재의 기능을 한다. 1:4 몇몇 중요한 사본들은 이 분사 앞에 관사를 가지고 있다(a과 B가 가장 중요한 증거들 이다). 만일 관사가 있다면, 분사 “세례를 베푸는”(bapti/zwn, 밥티존)은 하나의 칭호 역할을 한다(세례 요한). 공관복음이 ‘세례자’(Baptisth/ß, 밥티스테스)라는 이름을 이런 목적을 위 해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6:25, 8:28; 마 3:1, 11:11, 12, 14:2, 8, 16:14, 17:13; 눅 7:20, 33, 9:19) 이것이 다소 특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마가는 분사를 6장 14절과 24절에서 이런 방 식으로 사용한다. (이 구절들의 본문 전승에 분사가 아닌 명사가 나오는 이문들이 있다). 관사 를 원문의 일부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두 가지 내적 논증이 있다. 첫째, 어떤 필사자가 관사를 첨가했을 가능성은 있어도 생략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문장 안에 “그리 고”(kai/, 카이)가 있는 것은 강한 본문적 지지를 받는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과 ‘전파하는’이 라는 분사들이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Metzger 1971: 73). 첫 번째 분사를 주격 분사로 만들거나 그렇게 부르고 두 번째 분사를 ‘그리고’로 연결된 동사적 분사로 만드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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