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BECNT 유다서·베드로후서

Page 1

시리즈 서문_6 저자 서문_9 약어 소개_13 지도_23 유다서 유다서 서론 26 I. 서신 인사 ( 1-2절 ) 77 II. 서신 본론: 믿음을 위해 싸우라는 권고 ( 3-23절 ) 89 A. 유다가 글을 쓴 목적을 나타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고 ( 3-4절 ) 91 B. 기억하라는 명령: 이단에 대한 예언 및 성취 ( 5-19절 ) 103 C.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권고 ( 20-23절 ) 171 III. 마무리 송영 ( 24-25절 ) 185
베드로후서 베드로후서 서론 196 I. 서신 인사 ( 1:1-2 ) 235 II. 서신 본론: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 ( 1:3-3:18a ) 245 A. 본론 시작부: 하나님이 영광과 덕으로 부르심 ( 1:3-11 ) 247 B. 본론 중간부: 사도적 증거와 거짓 선생들 ( 1:12-2:22 ) 279 C. 본론 종결부: 거룩하라는 명령 ( 3:1-18a ) 401 III. 서신 마무리: 송영 ( 3:18b ) 445 참고문헌_447

BECNT는 학자뿐 아니라 목회자와 성경을 설교하고 해설하는 사람들을 대 상으로 기획된 시리즈다. 또한 이 주석 시리즈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신약

의 여러 책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이런 목표에 비추어 볼 때,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대한 주석을 쓰는 일은 실로 벅찬 과업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는 지금까지 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 했다. 이 서신서들에 대한 모든 학문적 논의에서는 저자, 청중, 환경 등에 대 한 중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쳤다. 유다서에는 신약에서 “가장 소홀

히 여겨진” 책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Rowston 1975 ). 잭 엘리엇은 베드로전 서를 “석의적 의붓자식”( J. H. Elliott 1976 ) 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그래서 베드로

후서는 과연 가족 내에서 어떤 지위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들

었다. 한 동료는 베드로전후서가 절대로 정경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교회 내 상황도 낫다고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종종 유다서의 송영( 2425절 ) 을 들으며, 영감에 대해 논의할 때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호소한다. 하

지만 성경의 이 책들을 토대로 하는 설교는 거의 없으며, 교회의 교육 과정에 이 서신서들에 대한 논의가 포함되는 경우도 드물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유다서와

9 | 저자 서문 |
베드로후서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지만, 이 서신서들을 성경 공부나 성경 읽기 본문으로 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서신서들은 해석하기가 어려우며 독특한 도전을 제시한다. 가령 유다가 에녹 1서를 인용하는 것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심판에 대한 심한 말이 두드러지게 나오는 것 등이다.

( Nienhuis 2007 )

중심적인 위치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메시지를 재평가하려는 이런 움

직임에 속한다. 이 서신서들이 간과되는 것에 비해 이 서신서들이 지닌 가치

는 훨씬 더 크다. 이 서신서들이 받아 왔던 부정적 평가를 넘어, 그 메시지들

에 대한 더 긍정적이고 완전하고 미묘한 의미를 파악하게 되면, 초대 그리스

도인과 우리 자신의 신앙 형태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알기 어려운”( 벧후 3:16 ) 것은 바울의 글만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서신서들이 지

닌 어려움이 있다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주석에서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이 서신서들을 그 문화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읽는 것이다. 상황에 대한 관심은 말로 하는 소통에서나 글로 하는 소 통에서나 부차적인 것이 아니다. 적절한 상황적 정보를 오해하면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한 이해가 왜곡될 수 있다. 이 과업은 사람들이 공통 문화권

에서 같은 시대에 살아갈 때도 충분히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고대 저자의 말

을 듣기 위해 시간과 공간과 문화를 건너가려 할 때 그 과업은 극도로 벅차고 힘겨운 일이 된다. 유다서와 베드로후서를 그 상황 속에서 읽는 일이 특히 문

제가 되는 이유는 저자가 누구인지도 독자가 누구인지도 알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주석에 나오는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 대한 분석은 이 서신서

들에 깊이 얽혀 있는 유대와 헬라의 문화 요소를 고려하고자 한다. 이 서신서

들은 유대적 유산뿐 아니라 동부 지중해 주변 삶의 더 광범위한 철학적 사회

적 실상과의 대화를 나타낸다. 상세하게 분석하겠지만, 독자들의 전체 상황을

염두에 두고 메시지의 전반적 취지를 분명하게 간파할 것이다.

이 주석은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어려운 해석 문제도 다룬다. 저자, 서신 서 간 관계의 본질, 위경 문헌 사용 등의 문제에 모두

유다서·베드로후서 10 하지만 이 책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이 책들에 대한 연구 가 부흥을 이루고 있다. 보컴의 기념비적인 저서( Bauckham 1983 ) 이래 수많은 주석이 발간되었으며1) 현재 더 많은 주석이 제작되고 있다. 국제성경학
( Society
Biblical Literature ) 연례 모임에서는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
of
새로운 심의회가
모임은 베드
의 방법론적 재평가”라는
구성되었다. 2007년
로후서와 유다서에 초점을 맞추었다. 게다가 “예루살렘의 기둥들”이 쓴 이 서
주변부에서 중심 무대로 옮 겨
주석은
책들의 메시지가 교회 생활에서
신들은 정경으로서 갖는 중대성이 재검토되면서
가고 있다
. 이
적절히 관심을 기울 인다. 물론 모든 독자가 나의 결론에 만족하리라는 환상을 갖지는 않는다. 마 지막으로, 이 서신서들의 신학적 관심사는 상황적 역사적 논의와 얽혀 있다. 1)
유감스럽게도 Davids(2006)와 Reese(2007)의 두 주석은 이 책에서 논의하기에 너무 늦게 출간되 었다.

신학과 역사는 함께 논의될 수 있고 논의되어야 하며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유형의 모든 저작이 그렇듯이, 대단히 중대한 방식으로 이 책 출간에 기여한 핵심적인 인물이 있다. 아내 데버라와 딸 크리스티아나는 다시 한번

나와 함께 영국 케임브리지로 갔고, 그곳에서 나는 이 주석 대부분을 쓸 수

있었다. 데버라는 국민보건서비스 소속 조산사로 일하면서 우리가 거기 머무 는 동안 나를 재정적으로 든든히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한결같이 격려자 역 할을 해 주었다. 크리스티아나는 기꺼이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를 떠나 케

임브리지에 있는 남녀공학 사립학교인 더 레이즈 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교

환경에서 매우 의욕적이고 성공적으로 지냈다. 이 책을 쓰는 일은 이 멋진

여성의 도움과 희생 없이는 절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실제적으로 엄청난 지원을 해 주었던 케임브리지 틴데일 하우스의 모 든 직원에게도 감사해야겠다. 전 소장 브루스 윈터, 도서관 사서 엘리자베스

막바뿐 아니라 데이비드 인스톤브루어, 데이비드 베이커, 타니아 라이올라, 피오나 크레이그는 연구를 위한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함께 애썼다.

이 주석의 마지막 작업은 휘턴 대학의 버스웰 기념 도서관에서 완성되었다. 사서인 리사 리치먼드에게 그리고 특히 버스웰에서 오랜 여름날을 보내는 동 안 내게 필요한 것들을 도와준 그레그 모리슨에게 감사드린다. 휘턴 대학은 안식년을 주었으며 동창회 보조금을 통해 이 연구를 위한 재정적 도움을 주

었다. 그런 관대한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내기 위해 직접 나와 함께 일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깊

이 감사를 드린다. 조교 크리스토퍼 헤이스는 문헌을 끝까지 추적하고, 책의

모든 참조문을 점검하고, 초판 편집을 하고, 내용에 대해 나와 대화를 나누면

서 지칠 줄 모르게 수고했다. 그런 노력을 하는 중에 그의 첫 번째 글이 출판 되었다( Hays 2004 ). 앞으로 탁월한 학자에게서 좋은 성과가

저자 서문 11
나오리라는 기대를 갖게 해 주는 글이었다. 이 주석이 처음 진행될 때 피터 스피찰라는 참고문헌 정보를 모으는 일에 확실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이 시리즈 전체 편집자 중 한 명인 밥 야브루와 베이커 아카데믹의 웰스 터너에게도 매우 감사한다. 그 들의 세심한 눈썰미와 분별력 있는 질문, 지혜로운 제안은 이 책의 질을 크게 높여 주었다. 이 주석을 쓰면서 나는 휘턴 대학에서 베드로 서신서와 유다서 강좌를 개 설해서 가르칠 기회를 가졌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나는 그 강좌 를 듣는 학생들이 과제를 써낼 때 가장 잘 쓴 글 중 일부를 주석에 포함시키 겠노라고 격려해 주었다. 과제 글의 수준은 고르지 않았으나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한 학생의 글은 나머지에 비해 군계일학이었다. 레이철 그리고의 글

이었다. 레이철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삶과 친구를 사랑했

고 플루트 연주도 상당히 잘했다. 레이철의 글은 대단히 멋지고 통찰력이 있 었다. 그는 본문을 주의 깊게 읽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창의적으로 글을 썼다. 약속대로 그 학생의 글은 이 책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너무나 슬프게

도, 레이철은 이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레이철은 2005년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가족과 친구와 선생들은 레이철을 몹시 그리워한다. 하지만 레이철의 목소리와 레이철이 보여 준 모범은 계속 살아 있다. 레이철

은 내가 오랫동안 본 많은 학생, 성경의 메시지를 배우려는 열망을 가지고 강

의실로 왔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주의 깊고 때로는 수고스러운 신약

연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범적이고 젊은 해석자였으며,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성경 연구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귀 감이 된다. 레이철은 강의실에서 조용했으나 그의 마음은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과 함께 살아 있었다. 이 주석을 신실하고 모범적인 성경 연구자였던 레 이철에게 바친다.

유다서·베드로후서 12

고대 그리스-로마 및 셈족 서신의 통상적 관례에 따라, 유다서는 저자

“유다”( Ἰούδας, ‘이우다스’ ) 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 서신서 첫 줄에는

또한 독자들이 저자의 신원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 주는 수식어가 포함

되어 있다. 저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δοῦλος, ἀδελφὸς δὲ Ἰακώβου, ‘이에수 크리스투 둘로스, 아델포스 데 이아코부’ ) 라고 부

른다. 저자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을 추가하는 첫 번째 이유는

란( Ilan 2002: 112-125 ) 은 팔레스타인 출신이면서 우리가 아는 이름들의 목록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예후다’( hd"Why> “유다” ) 라는 이름이 179번 나온다. 그 이

름은 헬라어로 ‘이우다스’라고 음역된다.2) “유다”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족장( 마 1:2-3 ) 과 지파( 마 2:6 ) 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대인이다. 고대 문헌과 비문에서 “유다”라는 이름은 이방인의 이름으로 나 오는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이우다스’는 유대 ( Jude ) , 유다스 ( Judas ) ,

1) 이따금 아람어 서신들은 수신자 이름으로 시작했다(Fitzmyer 1974b: 221-222; 또한 Weima 1994: 63-73; Taatz 1991: 105-106을 보라).

2) 헬라어 음역의 다른 철자(몇몇은 어형이 변화되었다)는 Ἰούδης (‘이우데스’), Ἰούδα (‘이우다’), Ἰούδον(‘이우돈’), Ἰούδατος(‘이우다토스’), Ἰωύδου(‘이오위두’), Ἰουδίου(‘이우디우’), Ἰοδίου(‘이 오디우’), Ἰουδαῖος(‘이우다이오스’), Ἰεδδοῦν(‘이에둔’), 그리고 아마도 Ἰαύδα(‘이아위다’) 등이다.

26 | 유다서 서론 |
유다서 저자
자신을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다( Judah ), 유대아( Judea )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눅 1:39 ), 그 점은

영어 성경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신약에서 ‘이우다스’라는

이름은

때로

45번 나오는데, 때로는 지파 이름인 유다

( Judah: 마 2:6; 히 7:14; 8:8; 계 5:5; 7:5 ) 로 혹은 지역 이름인 유대( Judea: 눅 1:39는 그것을

9:11 ), 초대 교회 예루살렘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 행 15:22, 27, 32 ) 등 이 있다. 이 마지막 두 사람만 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중 어느 한 명이 이 책을 기록했을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자신을 “야고보

의 형제”라고 지칭하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 중 한 명도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눅 6:16; 요 14:22; 행 1:13 ). 하지만 이 사도는 이 책의

저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야고보라는 사람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

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아마도 야고보와 함께 예수의 형제자매 중 한

명으로 나오는 사람과 동일인일 것이다. 유다가 시몬과 함께 예수의 형제 목

록 제일 끝에 나온다는 사실은 그가 가족 중 가장 어리거나 두 번째로 어린 남자였음을 나타낼 것이다( 예수의 자매들 역시 막 6:3에 언급되는데, 몇 명인지 이름이 무엇인

지는 나오지 않는다 ). 복음서와

사도행전 곳곳에서는 예수의 형제자매들이 언급

된다( 막 3:32에서는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로; 요 7:3, 5, 10에서는 그들이 예수의 사역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행 1:14에서는 오순절 전에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는 것으로 ). 이따금 이

식구들은

마리아와

함께 있었다고 나온다( 마 12:46; 행 1:14 ). 이는 그들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었음을 시사한다. “주의 형제들”은 사도들과 함께 초대 교회에 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선교 활동에 참여했던 듯하다( 고전 9:5 ). 유다는

유다서 서론 27
갈릴리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전체를 부정확하게 언급하는 말로 사용한다 ) 로 나온다.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는 요셉의 아들이며 시므온의 아버지인 유다( 눅 3:30 ) 와 더불어, 야곱의 아들이며 베레스와 세라의 아버지로 예수의 계보에 나오는 족장 유다( 마 1:2-3; 눅 3:33-34 ) 가 있다. 신약에서 가장 유명한 ‘이우다스’는 가룟 유다다( 마 10:4; 26:14, 25, 47; 27:3; 막 3:19; 14:10, 43; 눅 6:16; 22:3, 47, 48; 요 6:71; 12:4; 13:2, 26, 29; 18:2-3, 5; 행 1:16, 25 ). 다른 유다로는 갈릴리의 혁명가 유다( 행 5:37; Josephus, J.W 2.17.8 §433; Ant 18.1.1 §§1-10; 18.1.6 §23 ), 사울이 그의 집에서 묵었던 다메섹 유다( 행
선지자였던
더 이상의 수식어 없이 야고보를 언급하므로, 우리는 이 야고보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중 하나였던 “주의 형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갈 2:9; 또한 Bauckham 1995a를 보라 ). 바울에 따르면 이 야고보는 부활의 증인이었으 며( 고전 15:7 )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간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행 12:17 ). 3)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 행 15:13; 또한 갈 2:12를 보라 ) 때나 바울 3)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후 요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으며, 거기서 자신이 석방된 사

서 독자들에게 유다의 지위가 한층 올라갔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유다는 자신 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밝힘으로써,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단언한 것( 갈 1:1 ) 과 비슷한 권위를 주장한다. 유다 가족이 지니고 있던 명예와 권위는 사도 직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유다의 신원에 관해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많은 교부들은

유다를 주의 형제로 이해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또한 그를 사도 유다로 여 겼다. 그가 다대오( 마 10:3; 막 3:18 ) 라고도 불리던 사도였다는 의견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유다가 도마의 다른 이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스( Clement of Alexandria ) 는 『유다서 주석』( Comments on the Epistle of Jude, 1-4 ) 에서 유다가 주의 형제라고 진술할 뿐 아니라, 또한 저자가 자신을 주의 형제라고 밝히는 것을 꺼린다는 점도 말한다. “공동 서신을 쓴 요셉의 아들들

의 형제이며 대단히 종교적인 유다는 주님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주의 형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유다는 뭐라고 말했는가?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라고 말한다. 주님인 그분의 종, 하지만 ‘야 고보의 형제’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의 형제, 요셉 의 ( 아들 ) 이었다.” 히에로니무스( Jerome, Lives of Illustrious Men 4 ) 도 마찬가지로 이 책을 쓴 사람이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말한다.

( Origen, Commentary on Matthew 10.17 )

( Tertullian, The Apparel of Women 1.3; Origen, On Opposing Powers 3.2; Augustine, The City of God 15.23; 18.38 )

유다서 28 이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나( 행 21:18 ) 예루살렘의 지도자 로 나온다.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서 대단히 두드러진 인물이어서 그의 이름 으로 된 서신서를 보면 그는 단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 보”( 약 1:1 ) 라고만 나온다. 야고보가 저명한 인물이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좀 덜 알려진 인물이었던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함으로써 자 신의 신원을 쉽게 확고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중해 사회에서는 가족 중 한 명의 명예는 곧 다른 식구들의 명예이므로( Neyrey 1993: 3-7; Bartchy 1999; Malina 2001: 37-38 ),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로서 야고보에게 부여된 명예로 인해 유다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형제자매에 대한 논의에서 이 같은 그의 신원을 확증 해 준다
다른 한편 유다는 때로 “사도 유다” 로 불린다
서구 교회에서는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이 사람( 눅 6:16 ) 은 유다라는 이름의 주의 형제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ODDC 907 ). 다 른 한편 베다( Bede ) 는 “마태와 마가가 그들의 복음서에서 다대오라고 부르는 사도 유다가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의 서신서에서 정죄하는 동일한 믿음 왜곡 건을 이야기한 후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행 12:17)고 말했다. “형제들”은 아마 더 큰 제자들 무리가 아니라 예수의 형제들을 말할 것이다(행 1:14).
.
.

자들을 상대로 글을 쓴다”고 진술했다( Hurst 1985: 241 ) . 수리아 교회는 이따금

유다에 대한 전승을 도마 복음 저자로 여겨지는 도마에 대한 전승과 섞어 놓

음으로써,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한 비밀한 말씀이다.” 유

세비우스( Eusebius, Eccl. Hist 1.13.10 ) 는 이 전승을 알고 있으며, “이 서신들에 수

리아어로

유다라는 이름은 유세비우스( Eccl. Hist 4.5.3 ) 와 에피파니우스( Epiphanius, Pan 66.20.1-2 ) 가 열거한 예루살렘 감독 목록에도 등장한다.4) 에피파니우스는 유다

를 야고보와 시므온의 뒤를 이은 예루살렘의 세 번째 감독이라고 밝힌다. 사

도 규약( Apostolic Constitutions, 7.46 ) 은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우리 생전에 안수

받은 감독들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곧 예루살렘의 감독이며 우리 주님

의 형제인 야고보, 그가 죽은 후 두 번째 감독으로는 글로바의 아들 시므온, 그 후에 세 번째 감독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다.” 다른 한편 유세비우스는 처

음 두 감독은 야고보와 시므온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세 번째 감독은 유스투 스( Justus ) 라고 말한다.

세 번째 감독의 신원에 대한 이런 견해 중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평가하기

가 어렵다. 야고보, 시므온, 유다의 이름은 예수의 형제자매들로 우리에게 낯

이 익다. 하지만 사도 규약에서 유다를 “야고보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것은

그를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와 연관시키는 듯이 보이며( 눅 6:16; 행 1:13 ), 시므온은 글로바의 아들 이름으로 나온다. 하지만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

와 예수의 형제 유다는 초대 교회에서 흔히 혼동되었으므로, 우리는 여전히

그 이름들이 예수의 친척들을 말한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

의 가족에 대한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 따르면( 뒤를 보라 ), 시므온은 글로바의

아들이며 예수의 사촌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사도 규약의 감독 목록에

각 사람의 신원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무명 저자는 여전히 야고

보, 시므온, 유다가 예수의 친척이라고 밝힐 수 있다. 에피파니우스와 유세비

우스는 둘 다 그 도시의 유대인 감독 열다섯 명 중 마지막 사람인 또 다른

유다가 저자라고 본다. 예루살렘의 열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유대인 감독이

유다서 서론 29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도마라고도 불리던 유다는 70인 중 한 명 인 사도 다대오를 보냈다’는 말이
추가되었다”고 진술한다.
서신서 저자였다는 것은 순전한 추측이다. 성경이나 초대 교회의 어떤 증 거도 그런 연관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고보, 시므온, 유다가 그 도시의 첫 감독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초대 교회가 예수의 가족을 어떤 식으 로 인식했는지 나타내는 또 하나의 표시다. 4) 유다와 관련된 그 목록에 대한 논의로는 Bauckham 1990: 70-79를 보라.

증거를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그 증거에서는 서신서 저자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끌어낼 수 없다. 하지만 신약의 내적 증거로 볼 때 유다를 우리가 복

음서에서 아는 예수와 야고보의 형제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 13:55; 막 6:3 ).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의 형제자매들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요셉과 마리아

에게서 난 자녀들인지 서로 배다른 형제자매들인지에 대해 상당한 논의가 있

었다. 보컴( Bauckham 1990: 19-32 ) 은 교회에서 표출된 세 가지 견해를 요약한다.

각 견해는 “각각에 대한 4세기의 제안자 이름을 따서 헬비디우스( Helvidius ) 의

견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들 ), 에피파니우스의 견해( 요셉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요셉의 아

들들 ), 히에로니무스의 견해( 사촌들 ) 로 알려져 있다.” 히에로니무스의 견해에서

야고보와 유다는 마리아의 아들들인 “작은 야고보와 요세”와 동일인으로 여

겨져야 한다( 막 15:40 ). 그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요 19:25 NRSV ), 예수

의 어머니 마리아의 자매( 혹은 더 가능성 있는 것으로는 시누이 ) 다. 이 견해는 또한 글

로바를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와 동일인으로 본다( 마 10:3; 막 3:18 ). 하지만 야고보와 유다는 핵가족 관계 안에서 언급되므로( 마 13:55— 아버지/아들, 어머니/아들, 형제/자매 ), 가장 이해하기 쉬운 해석은 그들이 이 결혼 관 계에서 낳은 자녀이며 그래서 예수의 형제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 ( Origen,

Commentary on Matthew 10.17 ) 는 에피파니우스의 견해라고 알려지게 된 입장을 언 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에 따른 복음 전승 혹은 ‘야고보의 책’( The Book of James ) 이라는 제목의 전승을 기초로, 예수의 형 제들이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결혼했던 전 아내에게서 낳은 아들들 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동정녀 마리아의 명 예를 보존하고자 한다”( 참고,

여겨야 한다. 이 견해는 명확히 신학 적이다. 고대의 주석들에나 현대의 주석들에나 등장하는 다른 질문은 유다서가

유다서 30
.
히에로니무스의 견 해보다는 더 그럴듯하지만, 헬비디우스의 견해보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충분히 중요하게
진 짜 유다의 저술인가 허위 저자의 이름을 붙인 위경인가 하는 것이다. 다른 사 람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잘 알려져 있었으며, 고대 사회에서는 다양 한 이유로 그렇게 글을 썼다. 재정적 이득을 얻거나, 대적들의 견해의 신빙성 을 떨어뜨리거나,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쓴 글이 더 권위 있어 보이게 하거나, 선생의 이름을 빌려 글을 쓰면서 그 선생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것 등 이다( Baum 2001: 42-48 ). 유다서는 위경 서신으로 분류되어야 할까? 고대 교회에서는 유다서의 진정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이
야고보의 유년 복음 9.8 )
이 견해는
개연성이 덜하다. 우리 는 기껏해야 그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개연성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서신은 서부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수리아 교회들은

이 서신의 정경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와 수리아

교회들의 일반적인 경향과 조화를 이룬다. 알렉산드리아는 처음에는 광범위

하게 다양한 책들을 허용하고 그다음에 목록에서 발췌하는 “최대주의적” 접

근법을 취한 반면, 수리아는 확실한 22권을 받아들이고 다른

( Metzger 1987: 284 )

는 점은 인정했지만, 그 책이 “논란이 된” 책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Eusebius, Eccl. Hist 2.23.25; 3.25.3; 6.13.6; 6.14.1 ). 오리게네스( Origen, Commentray on John 19.6 ) 는 유다서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존재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분명 오리게네

스는 그런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오리게네스는 『로마서 주석』( Commentary on Romans 3.6 ) 에서 유다서 6절을 인용하며 본문을 “성경”으로 분류하기 때문 이다. 오리게네스는 유다가 “몇 줄 안 되는 서신서를 쓴 것은 사실이다. 하지

만 유다서는 하늘 은혜의 강력한 단어들로 가득 차 있다”( Origen, Commentary on Matthew 10.17 ) 고 말한다.

유다서의 진정성에 대해 몇 가지 의심이 제기된 이유는 주로 유다서가 에

녹1서를 사용한 것 ( 유 14-15절 ) 에서 비롯된다. 히에로니무스 ( Jerome, Lives of Illustrious Men 4 ) 는 유다서가 진짜 유다가 쓴 글이라고 받아들이면서, “야고보 의 형제 유다는 일곱 개의 공동 서신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짧은 서신서를 남겼으며,

시간이 흐르고 그 서신서가 사용되면서 권위를 획득했으며 성경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알 렉산드리아의 디두모스( Didymus of Alexandria, 4세기 ) 도 마찬가지로 유다서에서 사

용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유다서를 받아들였다. 유다서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 한 히에로니무스의 말과는 반대로, 그 인용문 역시 에녹1서를 성경으로 간주 해야 한다는 확증으로 해석되었다. 정경에 속한 책인 유다서가 에녹1서를 인 용하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 ) 는 『여자들의 의상에 대하여』( On the Apparel of Women ) 라는 책에 에녹1서에 대한 좀 긴 논의를 끼워 넣으면서, “이러한

Apparel

유다서 서론 31
것들은 서서히 받아들이는 “최소주의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 고대 4세기나 5세기의 수리아역 신약은 페시타( 혹은 페시토 ) 라고 알려진 것으로, 베드로후서, 요한2서와 요한3서, 요한계시록과 함께 유다서를 배제했다( Murdock 1851: 495496 ). 하지만 결국에 가서 그 책은 6세기 초 필록세누스( Philoxenus ) 판에 포함 되었다
유다서가 많은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읽혔다
( AD 507/508 ). 유세비우스는
그 서신서에서
많은 사람들 에게
에녹의 묵시적 책을 인용한 것 때문에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서는
에녹1서를
면서 논증을
다른 한편,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
는 정경에
받아들여서는
고찰에 더해 사도 유다의 글에는 에녹에 대한 증거가 나온다”( The
of Women 1.3 ) 고 말함으로써, 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을 찬성하
마무리한다.
는 후에 유다서
속하지만, 에녹서는 교회에서
안 된다고 인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 유다의 정경적 서신은 자신이 예언한 것을 단언하지

않는가?”( The City of God 18.38 ) 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는 에녹서에 대해 이렇

게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정경의 순결성은 이 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이 사람들의 권위가 거부되기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유다서가 오래되었고

분명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에 대한 히에로니무스의 말은 교회에서 유다서가

권위 있는 위치를 확보하기에 충분하다. 고대에는 유다서를 쓴 유다의 신원

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있지만, 유다가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

한 어떤 분명한 의견도 제기되지 않았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유다서는 초기부터 교회가 알고 있었고 읽었으

며 2세기5) 무라토리 목록 ( Muratorian Canon ) 과 4세기 중반 아타나시우스 ( Athanasius ) 목록에서 받아들여졌다. 무라토리 목록에 나오는 말은 유다서를 이를테면 라오디게아 서신 같은 책들과 대조한다. 라오디게아 서신은 “공교 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쓸개즙과 꿀을 섞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

이다”( 66-67 ). 유다서는 요한의 두 서신과 함께 받아들여졌다. 그 서신서들은 공교회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68-69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유다서 를 매우 존중해서 그 서신에 대한 주석을 쓸 정도였다. 이방인 청중에게 팔레

스타인 유대교의 강한 풍미를 풍기는 이 서신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었다( 뒤에 나오는 유다서가 기록된 장소에 대한 부분을 보라 ).

이 책이 교회에서 일찍이 사용되었다는 히에로니무스의 증거를 보완해 주

는 것은 다른 교부들이 유다서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빅과 쉐인( Bigg 1901: 306308; Chaine 1939: 261-262 ) 은 교부들의 글에 나온 유다서에 대한 언급이나 흔적의

목록을 모아 놓았다. 거기에는 2세기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Theophilus of Antioch ), 아테나고라스( Athenagoras ), 폴리카르포스( Polycarp ), 클레멘스( Clement ) 뿐 아니라 폴리카르포스의 순교( Martyrdom of Polycarp ), 디다케( Didache ), 헤르마스( Hermas ), 바나바 서신( the Epistle of Barnabas ) 등이 포함된다. 유사점은 강력한 것은 아

니다( 쉐인은 심지어 그런 유사점을 “모호하다”고 부르고 빅은 증거가 “불충분하고 희미하다”고

사용하던 예배 의식 언어에서 파생된 것이었다.6) 기껏해야 우

5) 하지만 4세기 기원을 택하는 일부 사람들 가운데서 그 연대는 논란이 된다. 이 서신서 서론에 나오는 “베드로후서 저자” 부분을 보라.

6) 예를 들어, 폴리카르포스의 Philippians에 나오는 인사말(“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긍휼과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ἔλεο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παρὰ θεοῦ παντοκράτορος

유다서 32
때문이 아니라, 그 글들 이 그들의 것으로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15.23을 보라 ). 유다서의 진정성 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의심을 품건, 그 의심에는 유다서가 묵시적 자료를 사 용한 것 외의 다른 근본 원인이
여기기 까지 한다 ). 그중 많은 것은 교회에서 유다서를 사용한 증거가 되기보다는 교회 가 공통적으로

리는 유다가 교부들의 개념적 언어적 틀에 깔끔하게 들어맞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유다서의 진정성을 확증할 만한 강력한 이유는

전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유다서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증

거는 베드로후서에서 나온다. 베드로후서 2장은 유다서 많은 부분을 재현하

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유다서를 사용했다고 추정할 때만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다( 베드로후서 자료에 대한 서론을 보라 ). 이 증거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둘

것인지는 베드로후서의 저자와 연대에 대한 개인의 견해에 따라 다를 것

이다. 베드로가 정말 그 책을 썼다면, 우리는 유다서가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

고 사용되었다는 견고한 증거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설사 베드로후서가 2세기

초의 문서라고 상정한다 해도, 여전히 유다서가 이른 시기에 기록되고 사용

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를 갖게 될 것이다. 유다서의 연대와 용도에 관한 논증

은 진정성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 내 상당 부분에서

유다서의 기원에 대해 별로 의심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실제로 제

기된 의문은 유다서가 묵시 문학을 언급한 것 때문이라고, 그리고 수리아 교

회가 정경 문제에 신중하게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유다서 저자에 대한 현대의 논쟁은 그 서신서의 헬라어 문체, 그 서신서에

나오는 덜 사도적인 견해의 흔적, 서신서에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 이단들

의 정체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유다서의 헬라어는 저자가 그 언어

에 숙달되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면서, 갈릴리에서 자란 사람이 모국

어가 아닌 언어에 관해 이 정도의 언어적 능력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를 제기한다. 특히 그가 사회적 엘리트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더욱 그렇다. 올

슨( Oleson 1979: 495 ) 은 “유다서의 헬라어 산문체가 지닌 상대적 순수함은 반드

시 헬라인이 썼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않지만, 저자가 주의 깊게 글을 썼다는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σωτῆρος ἡμῶν πληθυνθείη, ‘엘레오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파라 데우 판토크라

토로스 예수 크리스투 투 소테로스 헤몬 플레뒨데이에’)을 유 2절에 나오는 인사말(“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ἔλεο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καὶ ἀγάπη πληθυνθείη, ‘엘레오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카이 아가페 플레뒨데이에’)과 비교해 보라. 혹은 참고, 클레멘스1서 65.2(“그[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그[하나님]에게 영광과 영예와 권력과 위엄과 영원한 통치가 영원부터 영원의 영원

까지 있을지어다”, δι᾽ οὗ αὐτῷ δόξα, τιμή, κράτος καὶ μεγαλωσύνη, θρόνος αἰώνιος ἀπὸ τῶν

αἰώνων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τῶν αἰώνων, ‘디 후 아우토 독사, 티메, 크라토스 카이 메갈로쉬네, 드로노

스 아이오니오스 아포 톤 아이오논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을 유 25절(“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서론 33
유다서
권세가 영원 전부 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μόνῳ θεῷ σωτῆρι ἡμῶν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δόξα μεγαλωσύνη κράτος καὶ ἐξουσία πρὸ παντὸς τοῦ αἰῶνος καὶ νῦν καὶ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αἰῶνας, ‘모노 데오 소테리 헤몬 디아 이에수 크리스투 투 퀴리우 헤몬 독사 메갈로쉬네 크라토스 카 이 엑수시아 프로 판토스 투 아이오노스 카이 뉜 카이 에이스 판타스 투스 아이오나스’)와 비교해 보라.

들”( Origen, Commentary on Matthew 10.17 )

1993; Bauckham 1983:

대한 이런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갈릴리인들의 언어적 기술

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홀슬리( Horsley 1996: 154-175 ) 는 갈릴리

의 헬라화와 헬라어 연구를 하다 보니, 제국의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정치적 문화적 엘리트들에

게 집중되어 있었다……많은 시골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158 ) 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헬라어가 이방 도시 세포리의 공용어일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헬라어가 나

머지 남부 갈릴리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나타내는 표시

는 훨씬 더 적다. 토착어와 결합된 헬라어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

금 입수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이중 언어가 사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171 ). 나사렛은 세포리 근처에 있었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갈릴리인들

이 세포리와 접촉했다는 추정에 기초해서, 그들이 1세기에 헬라어를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Horsley 1995: 247 ). 언어적 능력은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사회적 엘리트에 속한 사

람들은 헬라어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말하면서 더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대한] 지식이 아무리 피상적이고 불완전하다 해도, 사회 각 계층의 많은 사람들은 헬라어

를 이해했으며 그것을 말하고 쓸 수 있었다.” 찰스(J. Charles 1993: 69-71)도 마찬가지로 팔레스타

인에서 헬라어가 사용된 것에 대해 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헬라어 사용에 대

한 견해를 개관하려면, Porter 1994를 보라.

유다서 34 것과 매우 헬라화되어 있다는 것을 둘 다 시사한다”고 말하는 반면, 켈리( Kelly 1969: 233 ) 는 “유다 같은 갈릴리인은 분명 헬라어를 유창하게 말하긴 했겠지만, 그가 그 언어를 그처럼 기술적으로 다룬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찰스
는 유다서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룬 글에서 “유다서는 약간의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헬라어 관용 표현을 통상적으로 사 용한 것을 보여 준다”고 말하며, 다른 주석자들과 함께 유다가 “작문 재능에 서나 어휘에서나 대단히 훌륭한 문학적 헬라어를 사용한다”고 열렬히 말 한다. 이 같은 현대의 평가는 유다서가 “하늘 은혜를 나타내는 강력한 말
로 가득 차 있다는 오리게네스의 해설과 일치한다. 유다의 글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휘로 가득 하다( Neyrey
6 ). 그리고 그의 문체는 상당히 세련되어 있다. 서신서 문체에
( J. Charles 1993: 37 )
홀슬리의 결론이 옳다면,7) 찰스가 칭 송하는 멋진 헬라어 문체는 유다서를 진짜 유다가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면 명확히 문제가 된다. 하지만 유다서의 경우 두 가지 요소가 이런 부정적 평가를 완화시킨다. 첫 째, 우리는 유다가 예수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순회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7) 하지만 세븐스터(Sevenster 1968: 185-186)는 이렇게
“[헬라어에

어느 정도 숙달했다는 것은 역사적 근거로 볼 때 부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신서 작성에서 서기의 역할에 대해서도

된다( 고전 16:21; 갈 6:11; 골 4:18; 살후 3:17; 몬 19절 ).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수많은 고대 파피루스 편지들은

( Weima 1994: 119; Stowers 1986: 60-61; Deissmann 1911: 170-173, 179-180 )

높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돈을 주고 전문적 서기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위해 서신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 관행은 개인 서 신에서는 잘 간파되지 않는다”( White 1986: 216 ). 공적이거나 법적인 서신에서만 서기의 이름을 포함시킬 것이 요구되었다. 서기를 이용하는 관습은 너무 일 반적이어서 그런 문서 업무는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신약 서신서들을 포함에서 고대 서신들에 가득 찬 수많은 표준화된 문구들과 상투적인 표현들

은 그런 산업이 성행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White 1986: 219, 237에 나오는 협정 색 인 ). 문체를 근거로 유다서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유다가 동료 신자나

전문 서기관의 도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지 못하기

맡기도 했을 것이다.

유다서의 진정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는 저자가 사도

무리를 과거에

3:2-3, 이것은 유 17-18절에 의지하고 있다 ). 비엘하우

어와 스트레커( Vielhauer and Strecker 1992: 572 ) 는 “사도 이후 세대에서만 ‘주의

묵시적 전통의 전달자와 보증자가 된다”( 유 17절; 참고, 5, 18절 ) 고 말한다.

유다는 절대

유다서 서론 35 안다. 그것은 그들이 헬라어를 유창하게 사용하고 있었거나 습득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현대 여행자들처럼 외국어 일상용어 사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 그들이 어떻게 이런 기술을 습득했는지는 추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헬라어를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E.
. 때로 신약 서신서 끝부분에 서기의 이름이 나온다( 롬
벧전 5:12 ).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바울이 친필로 마지막 인사말을 함으로 써 그런 서기들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끝에 가서 글을 쓰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저자가 서기의 손에서 펜을 건 네받아 마지막 말을 덧붙인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서신서 본문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표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사람들처럼 편지를
받았을 가 능성이
Richards 1991; 2004를 보라 )
16:22;
유다는 이 시기의 다른
쓸 때 서기의 도움을
때문이다. 서기관 은 구술에 의한 받아쓰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또 어떤 경우에는 더 큰 문학적 책임을
존재했던 집단으로 언급한다는 것이다. 17-18절에서 유다는 그의 독자들에게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에( 개역개정 “미 리” ) 한 말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유다는 자신이 사도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는 것을 암시할 뿐 아니라 또한 사도들에게 죽은 사람들 특유의 예언적 통찰 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참고, 벧후
사 도들’은
하지만
사도들을 이전 세대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18절에서 유다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이라고 상기시키기 때문

I. 서신 인사 ( 1-2절 )

저자는 고대 서신들의 서신 구조에 따라 편지 서두를 구성하지만, 명확한 기독교적 지향을 부여함으로 당시의 문학적 관례를 수정한다.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 1절 ) 로서 자신이 지닌 권위를 나타낸다. 이 편지의 독자/청중의 지위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유다는 또한 그 당시의 일반적인 서신 인사말을 기독교화 한다. 서두의 말은 모든 관련된 사람들의 신원을 단언하며 또한 독자에게 편 지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 았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것은 이단들의 침입 및 설득과는 대조되는 요소다. 유다는 3절에서 자신의 주제를 발표하기

전에, 그의 독자들을 견고한 기반에 세운다.

A. 저자: 유다( 1a절 )

B. 수신자: 부르심을 받은 자( 1b절 )

C.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바라는 기도( 2절 )

1 Jude, a slave of Jesus Christ and brother of James, to the called, ⌜beloved⌝ by God the Father and kept for Christ Jesus. 2 May mercy, peace, and love be yours in increasing measure.

A. 저자: 유다(1a절)

[1a절] 유다가 이 편지를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유다와 처음 이 서신을 읽은 사 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I. 서신 인사 ( 1-2절 )  77
|주해 및 설명|
쓴 목적은 교회에게 이단들의 침입에 대해 경고 하려는 것이었다. 그 이단들은 은혜의 교리를 왜곡해서 그것을 도덕적 방종 에 대한 핑계로 바꿔 버렸다. 유다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 대해 들었는지는 진 술되거나 암시되어
안다. 편지는 부재한 사람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 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 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 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의 임재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세네카가 한 서신에서 쓴 것처럼( Seneca, Ep. mor 40.1 ), “나는 너희에게서 편지를 받으면 즉각 너희 무리 안에 들어가게 된다.” 임재라는 개념은 종종 저자가 친히 서신에 덧붙이는 말로 한층 고양되 었다. 저자는 편지 본론이 기록된 후 서기관의

기분 좋은 것은 친구가 그의 편지에 남긴 인

상에 의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Ep. mor 40.1 ) 라고 말한다.1) 유다의 편지는 그가 교회에 침입한 오류를 바로잡으려 할

때 그의 임재를 대신한다. 편지와 사람은 분리될 수 없었다.

BC 3세기부터 AD 3세기까지의 대부분의 고대 편지들이 그랬듯이, 이 서신

은 저자와 수신자의 이름과 신원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반적 관행에 의하면, 그다음에는 편지 서두 부분이

에서는 통상 χαίρειν, ‘카이레인’, “문안!” [혹은] “기뻐하라”! ) 과 수신자의 건강 혹은 안녕을

비는 기도나 소망의 말이 나온다 ( White 1986: 200; Doty 1973: 29-31 ) . 2) 저자는 “유다”( Ἰούδας, ‘이우다스’ ) 로, 이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극히 흔한 이름이다( Ilan 2002: 112-125 ). 저자가 자신의

더 충분히 밝히지 않았다면, 그가 신약이

나 그 시기 다른 고대 문헌과 비문들을 통해 알려진 유다 중 어떤 유다인지 알아내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유다는

형제”이며

형제다( 마 13:55; 막 6:3; 그리고 서론에 나오는 “유다서 저자”를 보라 ). 그는 자신이 “주의

한 젊은 군인은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존경하는 아버지, 제게 편지를 써 주세요.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말해 주시고, 두 번째로는 형제자매들의 안부를 말해 주세요. 그리고 셋째로는 아버지의 필적 앞에 내가 경례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Hunt and Edgar 1959: 1.304-305).

2) 예를 들어, 앞의 주에 인용된 편지는 “아피온이 그의 존경하는 아버지 에피마추스에게, 많은 인사와 함께 보냅니다. 다른 모든 것 이전에 저는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아버지가 나의 누이와 누이 의 딸과 내 형제와 함께 언제나 잘 지내고 번성하시기를 기도합니다”(Hunt and Edgar 1959: 1.304305)라고 시작된다.

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이에 대해 최초로 의견을 말한다. “유다는 공동 서신을 썼고, 요셉의 아 들들의 형제였으며 대단히 종교적이었는데, 그와 주님의 가까운 관계를 알면서도 자신이 주님의 형

유다서 78
손에서 펜을 취해 자기 손으로 기록을 추가했다( 고전 16:21; 갈 6:11; 골 4:18; 살후 3:17; 몬 19절 ). 현재 남아 있는 고대 파 피루스 편지들을 보면 이따금 끝에 가서 글씨체가 바뀌는데, 그것은 저자가 필사자의 손에서 펜을 취해 마지막 말을 덧붙인 곳을 나타낸다( Deissmann 1911: 170-173, 179-180;
. 이 관행은 그 편지가 진짜임을 입증할 뿐 아 니라 또한 독자에게 저자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데 기여한다. 세네카는 “우리 가 얼굴을 맞대고 만날 때 가장
Stowers 1986: 60-61 )
나오는데 거기에는 인사말
( 헬라어 서신들
신원을
1:19에서 야고보가 그렇게 알려져 있는 것을 보라 ), 자신 을 ‘이에수 크리스투 둘로스’(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δοῦλος , “예수 그리스도의 종” ) 라고 부른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의 종이라는 사실 외에 자신과 예수의 관계에 대해 아무 런 명백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참고, 약 1:1 ). 3) 이렇게 신원을 밝히는 것은 유다 1) 마찬가지로,
“야고보의
예수의
형 제”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갈

가 믿지 않는 자였다가( 요 7:3, 5; 마 13:57; 아마 막 3:21 ) 기도를 위해 제자들과 모이

고( 행 1:14 ) 기독교 선교에 참여하면서( 고전 9:5 ) 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음

을 암시한다.

유다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라는 말로 수식

된다는 사실은 아마 종의 이름을 짓는 방식이라는 맥락 안에서 보아야 할 것

이다. 종은 모든 로마 시민이 가지고 있던 이름인 트리아 노미나 ( tria nomina ) 로

신원을 확인하지 않고, 그들의 주인 이름과 함께 그들의 별칭인 코그노

멘 ( cognomen ) 과 그들의 기능에 대한 묘사로만 알려졌다( TLNT 1994: 1:380 ). 하지

만 고대 편지들에 대한 화이트의

사용해

서 강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유다는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자주 그랬듯

이( 예, 롬 1:1; 갈 1:1 ) 서두에 나오는 이 말에서 약간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가?

번역자들은 보통 ‘둘로스’( δοῦλος  ) 를 “종”( servant: 덜 빈번하게는 “노예”[bondservant] ) 이라고 번역하지만, 스피크 ( TLNT 1:380 ) 는 이런 번역에 격렬히 반대 한다. “‘둘로스’를 ‘종’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1세기 언어에 서 그 단어가 지닌 정확한 의미를 매우 모호하게 한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

도의 ‘둘로스’에 불과하다. 그것은 고대에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던 제도를 배 경으로 할 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의미에서 노예는 다른 사람 의 재산으로, 상품처럼 사고팔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언한 것처럼, “노예 는 생명 있는 도구다. 도구가 생명 없는 노예인 것과

구별은 “종”과 “자유자”의 지위 사이의 구별이

었다( 고전 12:13; 갈 3:28; 엡 6:8; 골 3:11; 계 6:15; 13:16; 19:18 ). 종의 생명과

신원을 밝히는 것에는 유다의 숭고한 기독론이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유다서 독자들은 고대 사회의 사회적 구조뿐 아니라 성경 내러티브

에도 익숙하므로, 얼핏 자기비하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런 신분 증명을 신적

섬김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헬라 사상과 유대교 사상 둘 다에서

“하나님의 종”은 신적 존재를 섬기는 사람이었다.4) 이스라엘에서 이 사람들

제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유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그분은 주 님이시라고, 하지만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다는 그분의 형제, 요 셉의 (아들)이었다”(Comments on the Epistle of Jude).

4) 행 16:17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NRSV)이라는 여종의 선포에 더하여

Pausanius 10.32.12; Euripides, Ion 132, 309를 보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그 변형과 함께

특히 70인역에 두드러지게 나온다(수 24:30; 삿 2:8; 왕하 18:12; 욘 1:9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 단

I. 서신 인사 ( 1-2절 )  79
연구
는 편지 형태로 기록된 법적 문서와 공식적 서신에서 발신자의 지위는 직함 및 지위 표시를
( White 1986: 200 )
Nic. 1161B; Varro, On Agriculture 1.17.1을 보라 ). 노예는
사회적
마찬가지다”( Aristotle, Eth.
“자유가 없는” 존재이며, 고대 사회에서 근본적인
재산에 대한 모 든 권리는 주인에게 속해 있다. 그 주인은 유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자신의

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지도자적 인물로, 모세( 왕하

18:12;

아( 수 24:29; 삿 2:8 ), 선지자들( 렘 25:4; 암 3:7 또한 Sass 1941을 보라 ) 같은

21:8 ), 여호수

사람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고 지칭한다( 롬 1:1; 갈 1:10; 빌 1:1 ). 야고보( 약 1:1 ) 와 베드로( 벧후 1:1 ) 가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의 종”에게 적절한 행동에 관해 가르친 반

면 ( 딤후 2:24 ) , 디도에게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 딛 1:1 ) 이라고 부른다. 골로새인 에바브라도 역시 이런 지위를 지닌다( 골 4:12 ). 요

한도 마찬가지다( 계 1:1 ). 예수는 지도력에 대해 논하면서 종 청지기의 이미지

를 사용하는데( 눅 12:41-48 ), 그러면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잘 알려진 종의

기능에 대한 이해를 환기시킨다. 예수의 이야기가 반영하듯이, 어떤 종들은

권위를 부여받았으며 자기 주인 아래에서 책임 있는 청지기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마틴( D. Martin 1990: 56 ) 은 “상류층 사람의 대리인인 종은 무시할 수 없 는 존재로 여겨져야 했다. 그는 자유민들을 마음대로 기다리게 할 수 있었다”

고 주장했다. 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청지기 역할을 하는 종의 권세

도 더 커졌다. 유다는 기독교적 사고에 따르면 최고의 지위를 지닌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대행자이므로, 우리는 유다가 자신에게 붙인 칭호를 권위, 신

적 위임, 그리고 심지어 영감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유다의 배후에

있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것은 그저 겸양의 진술이 아니다.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더 규정한다. 이 사람은 아마 예수의

형제였던 야고보와 동일인일 것이다( 마 13:55; 막 6:3 ). 야고보는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행 15:13; 갈 2:9, 12 ) 신약 서신 중 하나의 저 자다( 서론에 나오는 “유다서의 저자”를 보라 ). 야고보는 초대 교회에서 대단히 저명한

지도자였으므로 그의 서신은 더 수식하는 말 없이 이름만 첨부해서 보내 졌다

분명 야고보보다는 덜 저명한 인물이었다.

유다의 지위는 자신이 “야고보의 형제”라는 선언에 의해 더 높아졌다.

6:21 Theod.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 삼상 3:9-10; 23:10-11; 삼하 7:27-28; 왕상 8:28; 18:36; 시

18:12[19:13 영역본]; 108[109]:28; 115:7[116:16]; 118[119]:23, 125, 140; 142[143]:12; 왕상

11:38; 왕하 21:8에 나오는 “나의 종”).

유다서 80
( 약 1:1 ). 그 문서와 이 서신서의 최초 독자들은 그 야고보가 누군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다는
식구 중 한 명이 명예를 얻게 되면 다른 식구들도 명예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서론에 나오는 “유다서 저자”를 보라; Neyrey 1993: 3-7; Bartchy 1999; Malina 2001: 37-38을 보라 ). 아들들은 보통 자기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신원이 밝혀졌으므로( 예, 마 10:2-3; 16:17 ), 유다가 자신과 저명한 인물 야고보와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권 위에 대한 주장을 강조한다. 분명 독자들은 이 야고보가 유다와 마찬가지로 “주의 형제”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관계는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이 왕조와 같은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의 형제”라는 지위는 인정되었다( Bauckham 1990: 125-133 ). 이 서신서 서두에

서 유다는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도 언급 한다. 그것은 그다음에 나오는 지시들을 한층 더 무게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의 무게 있는 말은 별로 명예로운 자리에 있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

니다. 그 말은 이단의 영향을 받게 된 교인들이 쉽기 묵살해 버릴 수 없었다.

B. 수신자: 부르심을 받은 자(1b절)

[1b절] 유다는 이 서신서의 최초 독자들이 어디에 사는 사람들이었는지 밝

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위치와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알

기 위해 입수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모아 보아야 한다. 최초의 독자들은 아마 팔레스타인에 있었을 것이며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이면서 헬레니

즘화된 사람들 혹은 유대 사회의 높은 계층 출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론에

나오는 “유다와 그의 집단”을 보라 ). 하지만 유다는 글을 쓸 때 그들의 신원을 “부르심

을 받은 자”( τοῖς … κλητοῖς, ‘토이스……클레토이스’ ) 라고 표시한다. 헬라 문헌은 신에

게 부르심을 받는다는 개념을 드물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파우사니우

스( Pausanius ) 는 이시스( Isis ) 의 소환을 받은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어느 누구도 이시스 자신이 꿈에서 그들을 초청함으로 영광을 준 사람들 외에는 신전에

들어갈 수 없다”( 10.32.13 ) 고 말한다. 이 문헌은 또한 신의 이름으로 개최된 잔

치에 부름 받는다는 혹은 소환된다는 개념에 대한 언급도 포함한다. 어떤 잔 치 초대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신이 너를 내일 9시부터 토에레이온에서 열리

는 잔치에 부른다”( NewDocs 1.5 ).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개념은 신구약 모두에

나와 있다

대한 언급이 특히 풍성하

게 나와 있으며( 사 42:6; 43:1; 45:3-4; 48:12; 49:1; 51:2; 54:6 ),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개념은 쿰란 문서에서도 나온다( CD 4.4; 1QSa 2.1, 11 ). 신적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근본 교리 중 하나다( Wright 1992: 260 )

I. 서신 인사 ( 1-2절 )  81
( 왕상 1:41, 49; 고전 10:27; 눅 14:7-14 ). 이 잔치 풍습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로의 부르심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눅 14:15-24; 마 22:1-14 ) 하지만 만찬이라는 이미지는 신약 용법 내내 유지되지는 않았다. 그것의 주 된 뿌리는 하나님이 한 백성을 택하시고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분이라는 혹은 그들이 신적 섬김을
이사야서에
은혜로운
하도록 위임하시는 분이라는 구약 개념이다.
나오는 종의 노래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 라이트( 1992: 467 ) 가 해설하듯이, “창조주가 어떻게 그분의 창조 안에 있는 악을 다루시는가? 라는 질문에 대 한 유대인들의 기본적 대답은 물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것이

여자들이 부

르심 받을 때 인간 대행자들이 사용된다( 살후 2:14 ). 개인적 주도권과 선택에 대

한 믿음이 특징인

때 확신을 갖고 호소하는 뿌리다. 이단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그들

의 유입은 교인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19절; 또한 서론에 나오는 “글을 쓴 계기”를 보라 ).

다른 한편,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통합시키고 구성

한다( 벧전 2:9와 J. H. Elliott 1966을 보라 ).

유다는 그의 독자들, 부르심 받은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5) 사랑을

얻은”( ἐν θεῷ πατρὶ ἠγαπημένοις ‘엔 데오 파트리 에가페메노이스’ ) 자들이라고 진술함으로

그들의 지위를 한정한다. 그들의 부르심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없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교회를 선택하신 것을 암시한다. 반면

‘에가페메노이스’( ἠγαπημένοις, “사랑을 얻은” ) 라는 완료

§342; 그리고 Porter 1989: 256-257을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유다서 82 었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위한 이스라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 신학은 여기 유다서처럼 하 나님이 “부르시는 분”으로( 롬 9:11; 갈 5:8; 살전 2:12; 5:24; 벧전 1:15; 2:9; 5:10; 벧후 1:3 ) 하 나님의 백성이 “부르심 받은 자”로( 롬 1:1, 6, 7; 8:28; 고전 1:2, 24; 계 17:14 ) 알려지면서 신약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임무를 행하신다( 마 4:21; 막 2:17 ).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따라, 구 원과 섬김에 이르는 부르심이다( 롬 8:30; 고전 1:9; 갈 1:6, 15; 엡 4:1, 4; 골 3:15; 딤전 6:12; 딤 후 1:9; 히 9:15 ).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하도록 해 준다( 롬 9:6-13; Dunn 1998: 510을 보라 ). 부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만, 복음 선포를 통해 남자들과
가 인간의
받은 자로서
게 할
현대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경의 강조는 우리
소망의 원천으로 돌아가도록 한다. 유다의 독자들이 부르심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유다가 교회를 이단의 오류로부터 떠나
분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머무는 것을 암시한다( BDF
보라 ). 이사야 51장 2절 70인역에서 아브라함이 부르심 받은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복을
하였느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택함을 받은 것도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 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사 44:2 70인역; 또한 신 43:7; 10:15; 시 78:68; 사 41:8 70인역을 보라 ). 5) ‘엔 데오 파트리’(ἐν θεῷ πατρί,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거기서 ‘엔’(ἐν)+여격은 개인적 행위자를 표현한다; BDF §219.1.
너희를 낳은
주어 창성하게

마찬가지로 신약은 하나님이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롬 9:25; 호 2:23[2:25

마소라 본문, 70인역] ) 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 마 12:18, 그리스도의; 롬 11:28; 엡 1:4; 골 3:12; 살

전 1:4 ) 을 둘 다 사랑한다는 개념을 결합시킨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택하신 것

은 그들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다( 딤후 1:9; 참고, 롬 5:7-8 ). 보통 선거에서 하듯

이 자신들의 미덕으로 인해 선택받고 어떤 직무를 맡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다의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과 이방 신들이 변덕스럽고 사람들이 달래 주어야 하는 방식

사이의 대조다. 사람들은 이방 신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지 절대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신들은 어느 순간에는 도움을 주다가 그다음 순간에는 해를 끼치다가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꾸준한 상태로, 사람들을 모

아 그분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부르심의 근본 원인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Ἰησοῦ Χριστῷ τετηρημένοις, ‘이에수 크리스토 테테레메노이스’ ) 자들이다. 이 절은 어떻게 이해하

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된다. 유다는 선택받은 집단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받는”( NIV, NLT ) 다는 말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 키심을 받는”( RSV, NRSV, NJB, NASB ) 다는 말인가? ‘이에수 크리스토’(Ἰησοῦ

Χριστῷ ) 는 수동태( τετηρημένοις, ‘테테레메노이스’, “지키심을 받은” ) 와 함께 행위의 여격

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이 용법은 매우 드물다( BDF §191 ). 신약은 종말론적

날을 위해 지키심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일 수도 있고( 요 17:11-12 6) ; 살전 5:23; 그리고 1:4에 나오는 “간직하다”와 함께 벧전 1:4-5 ) 아니

면 심판을 받을 운명인 사람들일 수도 있다( 벧후 2:9; 3:7; 유 6, 13절; 르우벤의 유언

5.5를 보라 ). 마찬가지로, 유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가 강조하는 것은

의 부르심의 근거( “하나님의 사랑을 얻은” ) 뿐 아니라 그 목적지와 목표( “예수 그리스도

NRSV: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I. 서신 인사 ( 1-2절 )  83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권할
,
사고방식은 종말론적이다. “영생에
때( 21절 )
이르도록 우리
그러므로
그들
.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가
키심을
. 지키심을
것의 목표가 유다의 관심의 초점이긴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수동태는 신적 행위를 암시한다. 여호와께서 그분이 사랑하시고 택하신 그분 의 종을 지지해 주신 것처럼,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 역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지키심을 받는다( 사 41:9-10; 42:1 ). 보컴( Bauckham 1983: 25 ) 의 제안, 6) 데이로스(Deiros 1992: 314)는 이 주의 말씀이 유다의 사상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위하여” ) 인 듯하다. 그 목표는 최종적인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참고, 벧전 1:5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살전 5:23 NRSV: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
다시 오실 때 그분을 위해 지
받을 것이다 혹은 해로움으로부터 보존될 것이다( BDAG 1002 )
받는

곧 종의 노래가 유다의 사고의 원천이라는 제안은 아마 옳을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사 41:9; 42:6; 48:12, 15; 49:1; 54:6; 사랑을 받은: 42:1; 43:4; 참고 44:2 70인역; 지키심을 받은: 42:6; 49:8” ). 신자들의 믿음을

하나님의 주도권 및 그분의 보존하시는 능력을 확신한다. 그 능력은

불구하고, 유다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마칠 것이다( 빌 1:6 ).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일을 하나 님이 끝내신다. 유다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의도에 발맞추라고 명한다( 21절 ).

하지만 그들이 보존되는 것을 단지 교회의 손에 달린 일로만 간주하지 않 는다.

C.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바라는 기도(2절)

[2절] 유다는 신자들을 위한 소원 기도로 서두의 인사말을 맺는다. 그 기도 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그들에게 더욱 많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ἔλεο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καὶ ἀγάπη πληθυνθείη, ‘엘로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카이 아가페 플레뒨데이에’ )

고대 헬라 편지들은 보통 저자와 수신자의 이름을 말한 후에 간단한 인사말을 포 함시켰으며( 행 15:23; 23:26처럼 ), 그다음에 종종 수신자가 건강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나왔다. 예를 들어, AD 1세기 중반에, 카이라스( Chairas ) 는 디오니시오

스( Dionysios ) 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카이라스가 친애하는 디오니시오스에게 심심한 문안과 계속적인 건강을 바랍니다”( 참고, 요삼 2절 ). 다른 한편 아람어 편

지들에는 ‘샬롬’( ~wOlv' ), “평강, 안녕”이라는 표현이 포함된다. 평강을 바라는

것은 때로 상투적이고 그저 헬라식 “문안”( χαίρειν, ‘카이레인’ ) 과 같은 의미일 뿐 이었다. 이 단순한 문안 인사는 상당히 확장되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

주인 바고히의 안녕에 언제나 큰 관심을 보여 주시기를, 그리고 그가 다리우

스 왕과 왕궁의

건강을 비는 글은 기독교적

용도로 변형된다. 부분적으로는 셈어 편지 관행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 것 이다. 헬라어 편지의 문안 인사( χαίρειν, ‘카이레인’ ) 는 수신자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 χάρις, ‘카리스’ ) 를 받기를 바라는 기도로 변형된다. 기독

교적 서신에서 이런 바람은

보통 수신자들이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평강”

(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절; 벧전 1:2; 벧후 1:2;

유다서 84
망치려 하는 오류주의자들의 침입에도
.
왕자들 앞에서 지금보다 천 배는 더 은총을 보여 주시기를, 그리고 그가 장수하게 해 주시고, 언제나 주님을 행복하고 번영하게 해 주시 기를”( Fitzmyer 1974b: 214-215 ) 이라고 시작되는 편지 같은 경우다. 하지만 유다서 에 나오는 소망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 특히 적절한 것은 “너희에게 큰 평강 이 있을지어다”( RSV: 단 4:1; 6:25; 또한 바룩2서 78.3을 보라 ) 로 시작되는 성경 본문과 랍비 문서들이다. 헬라어 편지들의 서두에 나오는 문안 인사와

왜곡된 이해이기 때문일 것이다( 4절 ).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근본적인 복들은 강조한다. 유다가 바라는 것은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수신

자들에게 풍성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을 주시

는 분임을 암시한다( 벧후 1:2; 클레멘스1서 도입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

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폴리카르포스의 순교( 도입부 ) 는 유다서를

참조하고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성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유다서에 표현된

것과 똑같은 복이 독자들에게 많아지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

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가 강조하는 복은 그의 서신서 요소요소에 얽혀 있으며, 그러므로 이

소원 기도는 유다가 다룰 기본 주제들에 대한 소개 역할을 한다. 긍휼은 유다

가 그의 독자들이 풍성히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 현재의 복인 반면, 그들의 간

절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나, 결과 적으로 오는 세대에 영생을 가져오는 것이다( 21절과 해설 ). 게다가 하나님이 교

회에 긍휼을 보이시는 것처럼, 그들 또한 흔들리는 혹은 이단들의 오류에 먹 잇감이 된 사람들에게 긍휼을 지녀야 한다( 22-23절과 해설 ). 신적 자비는 오류와 의 이 투쟁에서 기본 주제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이 신자들은 또한 그들을 사랑하는 분인( 1절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21절과 해설 ). 그것은 서두의 소원 기도에 표현된 또 다른 주제다( 참고, 12절 ). “평강”이라는

어휘 항목은 이 서신서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 반면, “안녕”이라는 개념

은 이 공동체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 공동체의 관계망은 갈가리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단들의 오류는 복음은 왜곡시킴으로( 4절 ) 그리고 교인들을 죄와

심판의 그물에 끌어들임으로 ( 23절 )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평강”은 위태롭게 되었다

I. 서신 인사 ( 1-2절 )  85
1:4; 클레멘스1서 도입부 ) 혹은 “긍휼”과 “평강”( 딤전 1:2; 딤후 1:2; 요이 3절 ) 도 받기를 바라는 기도와 결합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상투적인 인사말과 건강을 바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망의 기도가 된다. 하나님께서 수신자들에 게 복음의 근본적 복을 주시라는 간청이다. 하지만 유다의 인사말은 “은혜”를 언급하지 않고 “긍휼과 사랑과 평강”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기독교적 소원 기도와 다르다. “은혜”를 구하는 소원 기도는 기독교 서신에서 흔한 것이었으므로, 유다가 그것을 빼놓은 것 은 약간 인상적이다. 아마 유다가 은혜를 구하는 소원
배제하는 것은 자신이 서신서에서 다루는 근본 문제가 이단들이 교회에 가져온 바 은혜에 대한
기도를
( 참고, 롬 5:1 ). 게다가 신적 부름을 받은 공동체의 구조는 오류에 빠진 자들이 분열을 야기함으로써 찢어 졌다( 19절 ). 공동체 내의 화합은 깨어졌으며 회복될 필요가 있다( 참고, 엡 4:3 ). 평

( BDAG 288; 행 10:36; 롬 2:10; 5:1; 8:6; 14:17; 엡 6:15 ).

유다서 시작 부분에 나오는 소원 기도는 공식적이거나 상투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독자들을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 향하게 한다. 그 복은 이 배신의 순간

에 그들을 보존하고 구해 줄 것이다. 추가 주석

1b절. 증거는 ‘에가페메노이스’(ἠγαπημένοις, “사랑을 받는”, î72 a A B Ψ 81)라는 독법 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반면, 이문인 ‘헤기아스메노이스’(ἡγιασμένοις, “거룩하게 된”)는 Û 및

K L P에서 볼 수 있다. 이문은 편지 서두에 익숙한 느낌을 부여해 주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서 거룩하게 된”이라는 것이다.

유다서 86 강에 대한 유다의 이해는 개인의 정서적 안정( “내 마음속의 평화” ) 이라는 현대의 이해와는 다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상을 말한다. 그들의 복지 혹은 안녕 은 근원적으로는 관계적이다. 유대 사상에서나 기독교 사상에서나 “평강”은 “메시아적 구원과 거의 동의어다”

베드로후서 저자

베드로후서 저자는 1장 1절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라고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 ). 그는 이 서신서 여러 곳에서 베

드로의 삶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암시하면서 자신의 신원에 대해 더 알린다.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1장 17-18절에서 베드

로는 변화산에서 주 예수와 만난 경험을 상기한다( 마 17:1-5; 막 9:2-7;

3장 1절에서 강조된다. 거기서 저자는 이것이 자신이 이 수신자들에게 쓰는 “둘째 편지”라

고 단언하는데,

가르침이 사도 바울이 이방 인들에게 보낸 가르침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3:15-16 ). 저자는 그의 독 자들이 이 편지를 주요 사도인 베드로의 진짜 저술로 인식하도록 한다.

하지만 고대와 현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196 |
베드로후서 서론 |
그 사건들 중 일부는 서신서 최초 독자들이
알고 있었고
분명히
또한 복음서 이야기를 읽은 사람은 누구든
눅 9:28-35 ). 저자는 또한 주님의 예언으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1:14 ) . 이것은 아마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언을 말할 것 이다( 21:18-19 ). 이 서신서가 베드로의 글이라는 것은 베드로후서
첫째 편지는 아마 베드로전서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을 바울의 사역 동반자로 제시하며, 자신의
이 서신서의 진짜 저자가 누구 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이것이 가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아마 2세기 때 쓰였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위서의 구조의 일부로, 서두의 인사말에 베드로의 이름을 집어넣고 앞에 열거된 개인적인 말들을 추가했다는 것이다.

보컴( Bauckham 1988c: 3719 ) 이 진술하는

것처럼, “베드로후서의 저작권 문제는

( Bigg 1901; E. Green 1959; J. A. T. Robinson 1976; M. Green 1987; Guthrie 1990; G. Green 1993; Moo 1996; J. Charles 1997; Waltner and J. Charles 1999; Kruger 1999; Schreiner 2003 )

못한 이유를 굳어 버린 회의주의 탓으

로만 돌릴 수는 없다. 본서는 초대 교회에서 이 서신서가 고른 반응을 받지 못했다는 것과 그 기원 문제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사였음을 반영한다.

현대의 독자들은 한편으로는 이 책이 위서임을 주장하는 논증이 설득력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서신서가 베드로의 글이라고 확증해 주는 충분 한 근거가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초대 교회와 베드로후서

셸클( Schelkle 1980: 182 ) 은 베드로후서가 어떤 2세기 문서에도 언급되지 않

는다고 말한다( Kümmel 1975: 433도 그렇게 말한다 ). 퍼킨스( Perkins 1995: 160 ) 는 이런 평 가에 동조한다.

3세기에

가서야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베드로의 저작권을 거부하는 가

비판적인 학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나온 증거를 상세히 분석하지 않는 경

향이 있다. 셸클( Schelkle 1980: 182-183 ) 과 보컴( Bauckham 1983: 162-163 ) 의 짧은 논 의는 주목할 만한 예외다. 다른 한편 체이스( Chase 1900: 792-802 ), 빅( Bigg 1901: 199-215 ) , 그린 ( E. Green 1959: 5-10; 1987: 13-17 ) , 파이시렐리 ( Picirelli 1988 ) , 거스 리( Guthrie 1990: 805-811 ), 크루거( Kruger 1999: 649-656 ), 슈라이너( Schreiner 2003: 262264 ) 는

가 적어도 제한되게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Mayor 1907: cxv-cxxiii, cxxx-cxxxiv 에 나오는 암시의 목록을 보라 ). 심지어 베드로가 저자임을 거부하는 보컴마저도, 교 부들에게서 나온 최초의 증거를 검토한 후에 이렇게

베드로후서 서론 197
술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 보컴이 1988년에 한 평가는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이 서신서가 진짜 베드로의 저술이라는 논증은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설득력을 얻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하지만 금세기가 시작될 때부터야 비로소 이 저
위서적 특성이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베드로가 저자라는 전통 적 견해를 변호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초대 기독교 저자들에서 베드로후서의 분명한 증거는 서기
시작되는
증거를 제시했으며,
“베드로후서 가 2세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 나은 증거가 있다”( Bauckham 1983: 162 ). 하지만 이 서신서가 베드로의 저작임을 찬성하는 증거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다른 글들보다 분명 약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조로 밝혀진 글들보다는 강력하다( J. A. T. Robinson 1976: 188 ). 이 서신서는 교회의 초창기에 권위 있는 진짜 베드로의 글로 알려져 있었고 인 정되었는가? 베드로후서가 유다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고 결론 내리려면, 유다서 자체
2세기부터
초기
2세기부터 베드로후서
진술한다.
때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가 이 책을 사용한 가장 이른 시기의 증거가 될 것이다. 빅( Bigg 1901: 216-224 ) 은

바로 이 점을 주장한다. 하지만 베드로후서가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현대

학계에서는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 뒤에 나오는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관계”를 보라 ). 이런 조류는 이런저런

것이다( Moo 1996: 17-18을 보라 ). 유세비우스( Eusebius, 약 260-339년 )

대한 유세비우스의 평가는 매우 색달랐다. 그는 이렇

말한다. “우리는 소위 두 번째 서신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신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던 듯하며 다른 성경들과 함께 연구되었다”( Eccl. Hist. 3.3.1 ). 하지만 유세비우스는 베드로의 이 름으로 된 책들, 이를테면 베드로 행전, 베드로 복음, 베드로의 설교, 베드로

의 묵시 등에 대해 논평하면서, 그것들을 거부한다. “고금의 어떤 정통 저자

도 그것들의 증언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Eccl. Hist 3.3.2 ). 그러고 나서

유세비우스는 베드로후서를 이렇게 거부된 책들 및 진짜 베드로의 글로 받아

들여진 베드로전서 사이에 두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앞의 책들은 베드

로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책들로, 나는 그중 단 하나만을 진짜 베드로의 것이 며 옛 장로들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인정한다”( Eccl. Hist 3.3.4 ). 유세비우스는 베

드로후서를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2서, 요한3서와 함께 “논란이 되는 책”으

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문서 측에 속한다. 이 모든 문서들은 최종적으로 정경에 받아들여졌기 때문

이다. 유세비우스는 베드로후서가 초기에 의심을 받았다고 경고하지만, 동시

에 그 책이 2세기 때 존재했고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클레멘스1서 ( 약 96년 ) 와 클레멘스2서 ( 약 140-160년 ) 가 베드로후서를 사용한

것은 약간 논란이 되어 왔다. 파이시렐리( Picirelli 1988: 58-65 ) 는 그 증거를 긍정

적으로 평가하고, 해그너( Hagner 1973: 246-248 ) 는 클레멘스1서가 베드로후서를

사용한 것에 대해 회의를 표하고, 돈프리드( Donfried 1974: 90-91, 151 ) 는 클레멘스 2서가 베드로후서를 참조했다고 단언하는

베드로후서 198
속에서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베드로후서의 진정성에 관해 새로운 관점이 작동 하기
는 베드로의 문헌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관점을 몇 가지 기록할 뿐 아니라 당시 이 책들에 대한 평가를 제시한다. 유 세비우스는 베드로 서신들 중 베드로전서만 진짜 베드로의 저술로 받아들이 며, 저자가 확실한 책 목록을 만들고 거기서 “옛 장로들은 그들의 글에서 베 드로전서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사용했다”고 말한다. 베드로후서가 초기에
학문적 논쟁
리고
시작할
받아들여진 데
있는” 것으로 분류한다( Eccl. Hist 3.25.3 ). 유세비우스가 만든 논란이 되는 책 목록에서 베드로후서는 유리한
것 등이다. 파이시렐리가 인용한 암시들은 대부분 초대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말로 볼 수 있다. 하지 만 클레멘스가 롯의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 클레멘스1서 11장 ) 은 불의한 자들에게

는 벌을 내리고 롯은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베

드로후서 2장 7-10절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보컴( Bauckham 1984: 284 ) 역시 클

레멘스1서 23.3과 클레멘스2서 11.2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 4절 사이의 대응

을 상세히 검토한다. 그것은 파루시아에 관한 이단들의 의심을 표현하는 내

용이다. 보컴은 “개념과 용어”의 유사성은 이 세 저술이 모두 공동 자료를 사

용해서

알고

있었다고 가정할 때 가장 잘 설명된다( Gerdmar 2001: 199-203을 보라 ). 인용문에 나

오는 “두 마음을 가진”이라는 언급은 베드로후서에서 직접 나오지는

만( 참고, 약 1:8; 4:8 ), 한때 주를 알았으나 등을 돌린 사람들의 비참함을 적절히 묘사한다. 옛 본문들에서 나온 인용은 정확하게 제시되지는 않는다. 그저 사 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기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계적 반 복”보다는 풀어서 쓰는 편이 더 선호되었다( Ferguson 2002: 299 ). 클레멘스1서와

클레멘스2서는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이 본문들에 반영된 베드로후서로부터 알고 있었다고 추정하는 듯하다. 클레멘스1서는 기록된 자료를 “성경”이라고

밝히며, 클레멘스2서는 그것을 “예언적 말”이라고 부른다. 달리 알려지지 않

았던 어떤 자료가 이 시기 동안 그처럼 명예로운 위치를 부여받을 것 같지는

않다( 참고, 벧후 3:16 )

베드로후서와 이그나티우스, 폴리카르포스, 헤르마스의 글들 사이의 대응 에 대한 파이시렐리의 목록( Picirelli 1988: 65-74 ) 은 그것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 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말을 반영하는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 정도만 말해 줄 뿐이다. 하지만 파이시렐리가 열거하는 바나바의 나머지 인용문은 별로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이 없지만, 바나바의 서신( 70년에서 150년 사이 어느 땐가 기록 된 ) 에는 베드로후서와 놀랄 만큼 비슷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바나바 서신 15.4는 창조와 시대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진술한다. “그분과의 하루는 천

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이 ‘보라, 여호와의 날이 천 년과 같을 것이다’라 고 말씀하실 때 그분 자신이 나의 증인이시다.” 가장 출처가 될 만한 것 혹은

1) 베드로후서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

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클레멘스1서 23.3. “이 성경을 우리에게서 멀리 하라. 거기서 그는 ‘두 마음을 가진 자들, 그들의 영

혼에 의심이 있고 “우리는 심지어 조상 때도 이 말을 들었다. 그리고 보라 우리는 나이가 들었는데 이

중 어떤 일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불쌍한 자들이로다’라고 말한다.”

클레멘스2서 11.2. “예언적 말은 또한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우리는 오래전

에 조상의 때에 들었으나 우리는 하루하루 기다렸으며 그중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들

은 가련하도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서론 199
기록되었다는 증거라고 본다. 베드로후서 3장 4절과 클레멘스1서 23.2 그리고 클레멘스2서 11.2는 실로 강력한 대응을 이루지만1) 알려지지 않 은 묵시적 자료가 있었다고 전제하기보다, 이 서신서들이 베드로후서를
않지

3장 8절이다. 이레나이우스도 마찬가지로 그 구절

을 인용한다( Haer 5.23.2, “‘주의

온다( 약 132-135년; J. A. Robinson and James 1892; Buchholz 1988; Schneemelcher 1991-92: 2.620-638을 보라 )

있다. 이 저술의 알려지지 않은 저자는 철저한 묵시주의자로, 그는 베드로후

서가 자신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헬라어( ‘아크밈’이라고 하는 ) 본문은 이 렇게 선언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거짓 선지자일 것이며 멸망의 길과 다 양한 교리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멸망의 아들이 될 것이다”( 1-2; Schneemelcher 1991-92; 2.633 ) . 본문의 첫 몇 줄은 베드로후서 2장 1절을 반영

한다(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

4도

산으로

베드로후서 1장 18절처럼, 베드로의 묵시

올라가는 것에 대해 말하며, 두 문서

모두

진리의 도를 떠나고 그

도가 비방을 받는 것을 언급한다( 벧후 2:2, 15, 21; 베드로의 묵시 22-23; 또한 Mayor 1980: cxxx-cxxxiv를 보라 ). 보컴이 말하듯이,

베드로의 묵시가 베드로후서를 사용한 것

“베드로후서가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배제하기에 충분

하다”( Bauckham 1983: 162 ).

베드로후서에 대한 또 다른 초기 증거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데오

도루스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s to Theodorus ) 다. 이 책은 1.7( “그들은 자유롭다고 자

랑하면서, 비굴한 욕망의 종이 된다”, καὶ καυχώμενοι ἐλευθέρους εἶναι· δοῦλοι γεγόνασιν

ἀνδραποδώδων ἐπιθυμιῶν, ‘카이 카우코메노이 엘류데루스 에이나이: 둘로이 게고나신 안드라포도돈 에

피뒤미온’; M. Smith 1973: 446, 448 ) 에서 베드로후서 2장 19절(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 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편지가 진짜라면, 그것은 2세기

말에 클레멘스가 베드로후서를 사용한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할 것 이다. 유세비우스 ( Eccl. Hist 6.14.1 )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약 150215년 ) 에 대한 주해를 포함한다. 유세비우스의 말에 의하면 클레멘스는 “모든 정경에

베드로후서 200 그의
베드로후서
“증거”는
하루는 천 년과 같기’ 때문이다”; 약 130-200년 )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언급하면서
점을
베드로후서를 가장 놀랍게 입증한 것은 위경인 베드로의 묵시에서 나
. 이 저자들 은
그 자료를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는
나타낸다.
. 이 책은 나그함마디( Nag Hammadi ) 에서 발견된 동일한 이름의 후대 영지주의 저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헬라어로 된 베드로의 초기 기독 교 묵시 단편 두 개가 더 완전한 에디오피아어 역본과 함께 지금까지 남아
대해 간결한 설명을 썼는데, 유다서와 나머지 공동 서신들처럼 논란 이 되는 글들조차 지나치지 않았다”고 썼다. 베드로후서에 대한 클레멘스의 주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바나바 서신과 베드로의 묵시에 대한 그의 글들도 마찬가지다. 베드로후서는 역시 2세기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은 무라토리아

단편에 열거되어 있지 않다.2) 하지만 남아 있는 단편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현존하는 본문에 기초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2세기 동안 있었던 베드로후서에 대한 좀 약한 입증은 3세기까지 이어 진다. 오리게네스( 약 185-254년 ) 는 실제로

Eccl. Hist. 6.25.8; Origen, Commentary on John 5.3 )

이런 의심에 대해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리게네스 자신의 평가는 상당히 긍 정적이다.

on Joshua )

크게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는 그 서신서를 ‘스크립투라’( scriptura ) 라고 불렀다( Homilies on Numbers 6.676 ) . 베드로후서는 î 72뿐 아니라 애굽에서 나온 3세기 초의 콥트어 역 본( Sahidic version ) 에서도 나온다. 메소디우스( Methodius, 약 311년 사망 ) 는 『부활에

관하여』( De resurrectione ) 에서 베드로후서 3장 8절을 명백히 인용하며 그것이

베드로의 말이라고 말한다. 가이사랴의 피르밀리안( Firmilian of Caesarea ) 은 키프 리안에게 보낸 편지( Ep 75.6 ) 에서 이단들에 대한 베드로후서의 공격을 언급

한다. 오리게네스가 말하는 이 편지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은 3세기에 이 책에 대한 증거가 좀 약한 것에 반영되어 있다. 이 서신서의 진정성에 대한 토론은 4세기 때는 강화되었다. 이 책은 많은

정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라오디게아( AD 360년 ), 아타나시우스( 약 296-373년 ), 예 루살렘의 키릴로스 ( Cyril of Jerusalem, 약 315-387년 ) , 몸젠 ( Mommsen ) 또는 첼트 넘( Cheltenham, AD 359년 ), 사도( 약 350-380년 ),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 of Nazianzus, 약 390년 ), 아프리카( 약 393-419년 ), 히에로니무스( 약 345-420년 ), 카르타

고( AD 397년 ) 의 정경 등이다. 4세기 가장 끝 무렵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베 드로후서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 동안 유세비우스는

베드로후서를 “논란이 되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Eccl. Hist

3.25.3 ) 것으로, 널리 회람되던 책 중 하나로 분류했다. 히에로니무스의 논평은

이 시기에 나온 가장 교훈적인 것 중 일부다. 히에로니무스는 “사도 야고보, 베드로, 요한, 유다는 일곱 개의 서신서를 출간했다”( Ep 53.9 ) 고 진술한다. 하

지만 히에로니무스는 『헤비디아에게 쓴 편지』( Letter to Hebidia, Ep.120.11 ) 에서 베 드로후서에 관해 미심쩍은 것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먼저 바울에

는 Verheyder 2003을 보라. 늦은 연대는 Sundberg 1973과 Hahneman 1992, McDonald1995: 209-220이 뒷받침한다.

베드로후서 서론 201
이렇게 진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의 교회의 터를 이룬 베드로는……한 개의 인정된 서신서를 남겼으며, 어쩌 면 두 번째 서신도 남겼다. 그 두 번째 서신은 의심을 받기 때문이다”( Eusebius,
. 오리게네스는
오리게네스는 자신이 쓴 『여호수아서 설교』
에서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베드로조차 그의 두 서신서에서
( Homilies
면서 히에로니무스는 “그래서 그는 디도를 통역자로 두었다. 복된
2)
2세기의 것인지 4세기의 것인지에 관한 논쟁과
연대에
대해 말하
베드로에
무라토리안 단편이
이른
대한 변호 요약으로

I. 서신 인사 ( 1:1-2 )

그렇게

있었다( White 1986: 194-195, 199-200 )

다른 신약 서신서에서 그렇듯 상당히 정교하

고 대단히 신학적이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가족 편지에는 “주” 혹은 “나의”

같은 경칭 혹은 사랑스러운 묘사에 더하여, 저자와 수신자 사이의 가족 관계

를 나타내는 표시가 포함될 수 있었다. 율리우스 빅토르( Julius Victor ) 는 “서신

서 시작부와 결론부는 우정의 정도 ( 당신이

하며, 관례에

작성되어야 한다”( Malherbe 1988: 65; White 1986: 200 )

수 있었다( White 1986: 200, 59, 61 ).

레스크립티오’의 고도로 적절한 언어는 형식적이고 공식적인 경향이 있는 반

면, 친숙함을 잃지 않는다. 헬레니즘 편지들에 나오는 서두의 문안 인사는 상 당히 짧고 그에 이어서 종종 수신자의 건강을 기원하는 말이 나왔다. 베드로

후서에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문안 인사는 소원 기도 형태로 나오는데, 그것

은 건강에 대한 기원을 대신한다. 편지 서두는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어조

로 되어 있었겠지만, 내용은 복음에 비추어 상당히

A. 저자: 시몬 베드로( 1:1a )

B. 수신자: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 1:1b )

C. 은혜와 평강을 비는 기도( 1:2 )

I. 서신 인사 ( 1:1-2 )  235
베드로후서 서신 시작부 혹은 ‘프레스크립티오’( praescriptio: 서언 ) 는 그 시대 헬레니즘 편지에서 통상 볼 수 있는 문체를 따라 기록되어 있다. 저자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오고 그다음에 수신자 이름과 문안 인사, 보통 ‘카이레 인’( χαιρεῖν ) 이 나온다. 아람어로 된 편지들은 때로 수신자 이름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는다( Fitzmyer
211 ). 헬레니즘의 간청하는 편지나 다른 법적 서신 에서도
. 하지만 베드로후서는 고대로부터
1974b:
할 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파피루스 편지 순서를 따른다.
드로후서의 ‘프레스크립티오’는
따라야
생각했다. 법적 혹은 공식적 통신문의 경우 수식하는 묘사가 상당히 광범위 할 수 있었으며, 공식 통신문의 경우 따뜻한 말과 친밀한 용어가 섞여 있을
다른 신약 서신서에 나오는 ‘프
수신자와 나누는 ) 혹은 그의 계층을
따라
베드로후서와
수정되어 있다. 이 부분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

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

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

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

욱 많을지어다

A. 저자: 시몬 베드로(1:1a)

1 ⌜Simeon⌝ Peter, a slave and apostle of Jesus Christ, to the ones who have received a faith of equal honor to ours in the righteousness of our God and Savior, Jesus Christ. 2 May grace and peace abound to you in the knowledge of God and Jesus our Lord.

[1:1a] 베드로후서는 당시의 다른 헬레니즘 편지들처럼, 저자의 이름을 밝

히는 말로 시작한다. 이 경우 저자는 자신을 ‘쉬메온 페트로스’( Συμεὼν Πέτρος )

혹은 시므온( 개역개정 “시몬” ) 베드로라고 밝힌다. 예로부터 주석가들은 이 책이 진짜로 사도 베드로가 쓴 것인가 아니면 위작인가에 대해 논란을 벌여

왔다( 서론에 나오는 “베드로후서 저자”를 보라 ). 여기서 저자는 자신을 시므온 베드로라

고 소개하지만, 본 주석 내내 저자는

( ‘시몬’ ) 의 더 자주

나오는 음역인 “시몬”( Σίμων ‘시몬’ ) 이라고 되어 있다( 추가 주석을 보라 ). 그 이름에

대한 다른 음역도 여러 문헌과 비문에 나온다( Σύμων, ‘쉬몬’; Σιμωνίδης, ‘시모니데스’; Σιμωνάθης, ‘시모나데스’ 등이다 ).

음역은 헬라어 이름이었지만, 그것은 요셉 아들의 이름인 성경의 ‘쉬메온’( Συμεὼν ) 과 같은 것으로 채택되었다( 창 29:33 )

온’이 여전히 전통적인 철자법이었으며, ‘시몬’은 좀 더 헬라화된 형태 였다( Ilan 2002: 226, 218-235 ). 베드로가 ‘쉬메온’이라고 불리는 유일한 다른 곳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사도행전 15장 14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언어 전환을 했을 수도 있지만( 참고, 갈 2:7-8[베드로]과

갈 2:9, 11, 14[게바] ), 이 이름을 사용한 것은 저자의 뿌리를 팔레스타인 배경에 두 는 것이다. 우리는 ‘쉬메온’이라는 독법에 기초해서

베드로후서 236 |주해 및 설명|
“베드로”로 언급될 것이다. 상당수의 헬라어 사본에는 ‘시므온’이라는 말 대신 셈어 이름 !wO[m.vi
!wO[m.vi은 그 당시 아주 대중적인 팔레스타인 남성 이름이었다.
. 이 두 이 름은 요세푸스의 글과 다른 곳에서 거의 교환 가능하게 사용되었으나, ‘쉬메
‘시몬’이라는
이 편지의 진정성을 찬성 하거나 반대하는 논증을 펼 수는 없다. 사도의 이름에 대해 덜 일반적인 이 음역을 사용한 것을 진정성의 표시로 보거나 위서 저자의 기술 중 일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베드로의 서신이라면, 시므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가 이중 언어를 사용했다는 흔적일 것이다.

( 요 1:42; Fitzmyer 1981: 112-124; Cullmann 1953: 17-21 )

매우 드물다. 주님 자신이 이 아람어

참고, 마 4:18; 10:2; 16:17-18; 행 10:5 )

( Ilan 2002: 436 )

( 막 3:16; 눅

기록된 이 글에는 고색창연함과 권위가 둘 다 감돈다.

베드로는 자신을 ‘둘로스 카이 아포스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δοῦλος καὶ ἀπόστολ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 ) 라고

밝힌다. “주의

종”( δοῦλος, ‘둘 로스’; 수 24:30 70인역[24:29 영역본]; 삿 2:8; 왕상 1:33; 왕하 10:23; 18:12; 시 36편 표제; 134:1; 135:1[70인역: 35:1; 133:1; 134:1] )

, 혹은 덜 흔한 것으로는 “하나님의

종”( 느 10:30 70인역 [10:29 영역본]; 사 42:19 70인역 ) 은

모세, 여호수아,

들에게 주어진 호칭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교회를 감독하도록 하나님

께 위임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린다. 이렇게 이해하면 이 호칭은 단지 베드로의 겸손과 섬김만

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할 것이다. 베드로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은 그런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로마 세계 전역에서

‘둘로스’( δοῦλος ) 는 종으로, 사회에서

근본이 되는 사회적 구분은 종과 자유

인 사이의 구분이었다( 고전 12:13; 엡 6:8; 골 3:11 ). 그리고 노예제도가 도처에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 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을 이해하는 두 개의 틀은 서로 합쳐진다. 하지만

“종”( slave )

I. 서신 인사 ( 1:1-2 )  237 ‘페트로스’( Πέτρος, “베드로” ) 라는 이름은 아람어 게바( ap'yKe, ‘케파’ )
이다.
. 그러나
있다.
경우가 간혹
를 번역한 것
둘 다 “바위” 혹은 “돌”을 의미한다
아람어로는 또한 암반의 “험준한 바위”를 의미할 수도
이 명사는 이름으로 사용되는
있기는 하지만
, 베드로는 이 이름의 헬라어 형태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이따금 계속 게바라 불리기도 했다( 고전 1:12; 3:22; 9:5; 15:5; 갈 1:18; 2:9, 11, 14 ) 1) 단순한 “베드로”라는 이름에 비해, 그의 원래 이름과 사도적 이름 의 결합인 “시몬 베드로”는 약간 드물게 나온다( 마 16:16; 눅 5:8 ). 요한복음에 약 간 더 자주 나올 뿐이다( 요 6:68; 13:6, 9, 24, 36; 18:10, 15, 25; 20:2, 6; 21:2, 3, 7 등 ). “시몬 베드로”라는 결합된 이름은 교회의 터가 된 어부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마 16:16-18 ). 그 이름에는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름으로
이름을 시므온에게 주셨으며
6:14;
다윗 등과 같이 이스라엘에서 지 도자의 책임을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그 책임을 수행한 사람
( δοῦλοι , 롬 1:1; 빌 1:1; 골 4:12; 딛 1:1; 약 1:1; 유
‘둘로이’
1절처럼 ) 라고
도구”로
시대에
‘퀴리오스’( κύριος, “주인” ) 가 소유한 “인간
간주되는 존재였다. 그
있었 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헬라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그 호칭을 자신들이 가장 접하기 쉬운 배경 안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서 1절에 나오는 해설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은 주인의 대행자가 될
과 “종”( servant ) 은 둘 다 영어권 독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번역이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 slave ) 이라는 말은 남북전쟁 전의 남부가 지니고 1) 베드로와 게바가
어만(Ehrman 1990)의 주장은 좀 지지하기가 어렵다.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있던 인종 차별을 연상시킨다. 더 광범위한 영어권 사회에서 “종”( servant ) 이라

는 말은 자발적 섬김을 암시한다. 두 영어 어휘 모두 고대 사회 노예제도의

개념에는 담겨 있지 않던 함축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는 또한 자신을 ‘아포스

톨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ἀπόστολ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 라고 밝

힌다. 자기를 보낸 사람의 권위를 지닌 사신이라는 말이다( 유 17절과 해설을 보라 ).

베드로가 “종”이라는 말을 신적 주인이신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의미로 사용 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사도”라는 말은 베드로의 겸손( “종” ) 과 권위( “사도” )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강 조한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베드로가 신적 위임을 받았다는 것과 그의 권 위로, 그것은 베드로가 교회에서 이단적 요소들을 뿌리 뽑으려 할 때 중요한 점이다. 이 서신서의 권위는 베드로의 신비한 임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내신 자로서 베드로의 역할에 달려 있다. 그의 이름조차 그 사 실을 강조한다.

B. 수신자: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1:1b)

[1:1b] 베드로전서 1장 1절과 바울 서신들은 일반적으로 독자들의 위치를 나타내는 반면, 베드로는 이 서신서의 최초 독자/청중을 그저 믿음의 사람 이라고만 밝힌다. 독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헬레니즘 서신의 관

례가 아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수신자들이 그의 첫 번째 서신을 받은 사람들

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나타낸다( 벧후 3:1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소

아시아 주에 있던 신자들일 것이다( 벧전 1:1; J. H. Elliott 2000: 84-93 ). 하지만 여기서

베드로는 이 편지를 ‘토이스 이소티몬 헤민 라쿠신 피스틴’( τοῖς ἰσότιμον ἡμῖν

λαχοῦσιν πίστιν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3절 ) 는 유다의 명령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이 받은 “믿음”은 복음

자체이며, 단순한 동의와 신뢰의 반응도 그저 사도적 교리의 요약도 아

니다( 유 3절과 해설을 보라 ). 그것은 “이미 있는 진리”( 벧후 1:12 ) 와 정확히 똑같은 말

은 아니며 더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238
,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 ) 에게 보낸다. 표현은 상당 히 다르지만, 그의 생각은
수신자들이 그들에게 할당된 몫으 로 “받은” 믿음이다. 베드로가 사용하는 동사( λαχοῦσιν, ‘라쿠신’; λαγχάνω, ‘란카노’에서 나온 말 ) 는 보통 제 비뽑는 것( 요 19:24 ), 제비뽑기에 의해 선택되는 것( 눅 1:9 ), 혹은 여기서처럼 어 떤 것에 대해 할당된 몫이나 부분을 받는 것( 행 1:17 ) 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사 도행전 1장 17절처럼 그 동사는 ‘클레로스’( κλῆρος, 당첨된 것 혹은 할당된 부분 ) 와 함 께 나온다. 하지만 이 보어는 종종 감춰져 있다. 이 후자의 의미에서, 그 동사

는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업이라든가 계약상의

의무로 인해 받는 것 등이다. 예를 들어, 한 비문은 이렇게

죽으면 내가 유업으로

배당받은

되어 있다. “내가

집을 남긴다”( P.Dura 16 b7, TLNT 2:356에 나옴 ). 그

렇다면 이것은 하나님 ( 암시되어 있지만 진술되어 있지는 않다 ) 이 나누어 주신 믿음

이다.2) 이 생각은 믿음이 신성한 전통으로 전해 내려온 것이라는 유다의 개념

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 3절 ).

베드로는 이 믿음을 ‘이소티몬’( ἰσότιμον ) 으로 분류하는데, 이 용어는 다른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에게 동일한 영예를 지닌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자기 형제 안티고누스에

게 “자신의 것과 대등한 영예”( J.W 1.3.1 §71 ) 를 부여했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

은 위엄과 영예의 대등함이다( TLNT 2:231 ). 유다는 교회가 위해서 싸워야 하는

믿음이 성도들에게 전해 내려왔다고 말하며, 그래서 독자들을 더 큰 교회의

유업과 연관시킨다( 유 3절 ).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 교회들에게 할당하신 믿음

은 베드로 및 더 큰 기독교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것( ἡμῖν, ‘헤민’ ) 과 동일하게

영예로운 것( 개역개정 “보배로움” ) 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영광

을 목격한 자들의 믿음과 똑같이 영예로운 것이다( 1:16-18; 3:2 ). 베드로는 교회

가 자신들이

강조하는 점은 교회에 파괴적

인 이단들을 들여오고 있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룬다( 2:1 ). 게다가 그들이 받은

믿음은 신화적 우화가 아니다( 1:16 ). 처음부터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받

은 것의 지위와 영예 및 그 믿음의 보편적인 혹은 “공교회적인” 성질에 대해 경고하며, 이 단언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 그리고

1:16-17; 3:21-26 ) 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지닌

도덕적 특질( 벧후 2:5, 21; 3:13 ) 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나누어 주는 행동은 신적 의 혹은 정의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한 집

단( 사도들 ) 을 다른 집단( 편지 수신자들 ) 보다 선호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이 믿음

을 나눠 주시는 일에서 완전히 의로우셨다 혹은 공평하셨다.3) 하지만 여기서

2) 이 용법은 오빌랴의 신탁 3.580과 비슷하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율법의 의에 참여하는 것 [λαχόντες, ‘라콘테스’].”

3) Nueva Biblia Española는 “gracias a la equidad de nuestro Dios[우리 하나님의 공평하심으로 인

I. 서신 인사 ( 1:1-2 )  239
더 큰 기독교 공동체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를 간절히 바란다( Neyrey 1993: 147 ). 이런 단언에서 베드로가
더 큰 교회와 공유하고 있는 것을 버리지 말라는 암시적 명령이다. 베드로는 교회가 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엔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헤몬 카이 소테로스 이에수 크리스투’( ἐν δικαιοσύνῃ τοῦ θεοῦ ἡμῶν καὶ σωτῆρο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 받았다고 덧붙인다. 베드로후 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의 롭다 하시는 그 “의”( 롬

정의는

하나님 아버지의 정의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의다. 헬라어에서 하나의 정관사( τοῦ , ‘투’ ) 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둘

다 지배하는데, 이 두 단어는 ‘카이’( καί , “과” ) 로 연결되어 있다. 똑같은 문법 구 문이 이 서신의 다른 곳에서도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 곧 구주”라고 불

리는 곳( 1:11; 2:20; 3:2, 18 ) 이다. 이와 같은 경우, “동격을 이루는 두 문구가

‘카

이’( καί ) 로 연결되면서 관사는 ( 자연스럽게 ) 빠진다”( BDF §276.3, 하지만 BDF는 이상하게

도 이 경우는 원칙에 대한 예외라고 본다 ). 여기서 저자는 디도서 2장 13절( “우리의 크신 하

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NRSV] ) 과 똑같은 구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이라는 호칭과

“하나님”

호칭을 둘 다 붙인다( Neyrey 1993: 148과는 반대로. 그는

1:11; 2:20; 3:2, 18에 대한 해설에서 저자가 같은 문법 구조를 사용하는 방식을 다루지 않는다 ). 이 구

니다( Bauckham 1983: 168-169 )

해설을 보라; 벧후 1:11; 2:20; 3:2, 15, 18 ).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붙여진 “주”라는 호칭

과 마찬가지다( 1:2, 8, 11, 14, 16; 2:20; 3:2, 18; 그리고 해설 ). 그들에게 복음 믿음을 주는 것에서 주도권은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계신다. 그분은 다름 아닌 참된 하나 님이며 구세주이다.

C. 은혜와 평강을 비는 기도(1:2)

[1:2] 서신서의 ‘프레스크립티오’는

베드로후서 240
“구주”라는
가장 명확히 선 언하는 것 중 하나다( 요 1:1, 18; 20:28; 롬
살후
. 예수께 신적 호칭을 붙이는 것이 이 서신서가 늦은 연대에 기록되었다는 증거는 전혀 아
.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그것
유대교 안에서나 더 넓은 로마 세계에서나 신적 호칭이었다( 유 25절과
절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초대 교회의 확신을
9:5;
1:2; 히 1:8-9; 요일 5:20 )
“구주”라고 불린다.
자체가
소망 기도 형태의 인사로 결론을 맺 는다. χάρις ὑμῖν καὶ εἰρήνη πληθυνθείη ἐν ἐπιγνώσει τοῦ θεοῦ καὶ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 플레뒨데이에 엔 에피그노세이 투 데우 카이 이에 수 투 퀴리우 헤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이 소망 기도는 헬레니즘 편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강에 대한 소망을 대신 한다( White 1986: 200-202 ). 이 기도에서 베드로는 유다가 하는 것처럼( 2절 ) 자기 독자들에게 “긍휼과 평강”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더 전통적 인 기독교의 “은혜와 평강”을 포함시킨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3절; 계 1:4 ). 문안 인사의 첫 단어들은 베드로전서 1장 2절과 똑같다. “은혜”( χάρις, ‘카리스’ ) 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 원 역사를 요약하며( 롬 3:24; 5:15; 엡 2:8; 살후 2:16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 해]”라는 번역에서 이런 개념을 포착한다.

4절과 해설을 보라 ).

정비례해서 주어졌다( Garnsey 1970: 209 ).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위와 상관없이 값없이 풍성하게 주어지며 심지어 죄를 지은 사람들( 롬 5:2021 ) 과 하나님의 원수들( 롬 5:10 ) 에게까지 주어진다.

이 소망 기도는 또한 “평강”이 그의 독자들에게 많아졌으면 하는 베드로의

바람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유다서 2절에 대해 말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메시 아적 구원의 내용을 요약한다. 베드로 및 다른 신약 저자들의 관심사는 “평

강” 혹은 정서적 평안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구성 요소인 하나님

과의 “화평”이다( 롬 5:1 ). 이 가장 단순한 기독교적 문안 인사에서 우리는 복음

의 핵심을 보게 된다. 베드로의 기도는 이 신적 복들이 그들에게 많아졌으면

혹은 확대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BDAG 826; 유 2절; 벧전 1:2; 그리고 단 4:37c 70인역; 4:1과

6:26 Theod.에 나오는 동사 ). 이 서신서는 신자들의 도덕적 진보에 특별한 관심을 보

이며( 벧후 1:5-9; 3:18 ), 이러한 믿음의 성장과 안정이 이단들의 영향과 대비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진보는 신적 주도권의 열매다. 도덕적 진

보라는 이 서신서 주제는 여기 서두의 소망 기도에서 소개된다.

소망 기도의 첫 부분은 베드로전서 1장 2b절을 따르지만, 여기에는 추가

문구가 덧붙여져 있다. ‘엔 에피그노세이 투 데우 카이 이에수 투 퀴리우 헤

몬’( ἐν ἐπιγνώσει τοῦ θεοῦ καὶ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 이라는 말이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앎”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두 개의 단어가 사용된다. 첫 번째는 ‘에피그노시스’

( ἐπίγνωσις; 여기와 1:3, 8; 2:20 ) 및 그 말의 동사 형태인 ‘에피기노스코’( ἐπιγινώσκω  ) 이고, 다른 것은 복합어가 아닌 ‘그노시

스’( γνῶσις; 1:5, 6; 3:18에 ) 와 그에 대응되는 동사 ‘기노스코’( γινώσκω ) 다. “앎”과

“알다”의 다양한 형태가 도처에 나오는 것과 “거짓 앎”에 대한 비판이 나

온다는 것이 곧 이 서신서가 2세기 영지주의와 싸우고

때문이다( Schelkle 1980: 230-234; Kelly 1969: 299; M. Green 1987: 42와는 반대로 ). 베 드로의 대적들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아마 다양한 철학적 관점을 기독교의 가르침과 혼합시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서론에 나오는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대적들”을 보라 ). 파이시렐리( Picirelli 1975: 89-90 ) 는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에피그노시스’

보다 광범위하며 가장 온전한

I. 서신 인사 ( 1:1-2 )  241
행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능력을 포괄한다( 행 15:40; 고후 8:1, 7; 갈 2:9; 벧전 5:12; 유
를 “과
그것은 재판이라는 맥락에서 피고인에게 보일 은총이며, 이 은총은 그 사람의 ‘포텐시아’
키케로는 ‘카리스’에 해당하는 라틴어 ‘그라티아’( gratia )
도한 은총”이라고 규정했다.
( potensia ) 혹은 사회적 경제적 힘에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계시와 참된 앎에 대한 관심은 가장 초기부터 기독교 신학의 구성 요소 중 일 부였기
의미의 지식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그는 ‘에피그노시스’는 신약에서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단언한다. “(1)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이 실제로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안다……; (2) 어떤 것

을 깨닫게 되다 혹은 인식하게 되다( 내적으로 ) ……; (3) 어떤 ( 외적 ) 사실을 알게

되다 혹은 발견하다……; (4)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깨달음 혹은 이해로, 단순한 ‘그노시스’와 매우 비슷한 의미……; (5)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을 인 정하다……; (6) 회심과 같은 의미” 등이다. 베드로후서에서 ‘에피그노시스’

는 회심이라는 이 후자의 의미와 관계가 있다 ( Picirelli 1975: 93 ) . 하지만 네이

리( Neyrey 1993:

롬 1:20-21 ). 네이리는 파이시렐리의 분류에서 상당히 도약하며 ‘에피그노시스’가

후견인을 공경하여 인정한다는 의미라는 어떤 예도 제시하지 못한다 ( Starr 2000: 35-39에 나오는 이 입장에 대한 비판을 보라 ).

용어들을 구분하려 할 때, 용어들은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

그 어휘소가 더 광범위한 개념들을 부여하는 방식이 과소평가됨으로 인해 종종 어려움이 생겨난다. 그 어휘들은 그것이 사용되는 특정한 문맥에 비추

어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Sperber and Wilson 1995 ). ‘에피그노시스’와 ‘그노시스’

의 경우, 인격적 앎이라는 맥락에서는

369, 203 )

고 있으며,

소유격

‘투 데우

카이 이에수 투 퀴리우

헤몬’( τοῦ θεοῦ καὶ Ἰησοῦ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의” )

고, 70인역: 잠 2:5; 호 4:1; 6:6; 신약: 엡 1:17; 4:13; 골 1:10; 벧후 1:3, 8; 2:20 )

369 ).

베드로후서 242
는 그 단어를 가신-후견인 관계라는 틀 안에서 해석하며, 파이시렐리가 말하는 다섯 번째 의미에 기초해서, 그 단어가 이 신자들의 후 견인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념을 제시한다( 참고,
149 )
둘 중 어느 것이든 사용될 수 있으며, 결정적인 것은 문맥이다
. 여기서는 이런 인격적 앎을 염두에
은 그렇게
( BDAG
알려지는 분이 누구인지 밝힌다( 참
여기 베드로후서 1장 2절에 나오는 앎의 목적어가 인격적 존재라는 것에 비추어, 그 단어가 “법적 술어”라는 바우어
이렇게 하 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기독교의 큰 특권으로, 이 신자들은 구원의 은 혜와 평강이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은 하나님의 인격과 절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인격적 앎의 대상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다. 1절은 예수 그리스도 께 “하나님”과 “구주”라는 호칭을 붙이는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이 예수와 구 분되며, 우리는 베드로의 사고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 야 한다( 벧전 1:2 ). 이 구절들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신학의 가공되지 않은 구 성 요소를 발견한다. 이 구절에서 성령은 나오지 않지만( 참고, 벧전 1:2 ). 예수는 “주”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유다서 4절에 대한 해설에서 나온 것처럼, 헬레니 즘 문헌과 헬레니즘-유대교 문헌 둘 다에서 신적 호칭이다.
.
( Bauer ) 의 주장은 빗나간 듯하다( BDAG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