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NT 시리즈에 대한 추천의 글
요한복음
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BECNT 시리즈는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 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통찰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 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고 설교하는 목사, 신학자를 비롯한 모든 그 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집필된 이 주석 시리즈는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각 본문의 역할을 문맥 속에서 파악하도록 돕는다. 『BECNT 요한복음』은 주해와 신학이라는 두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균형 있게 요한복음을 다룬 다. 요한복음을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책, 면밀한 문학적 구성의 산물, 신학에 상당한 관심 을 지닌 요한의 작품으로 소개하는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이 신약 문서가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입증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세련된 문학으로 전하는지 명쾌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한다.
지은이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Andreas J. Köstenberger )
미국 일리노이의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이스턴 침례 신학교의 성경신학 및 신약학 연구 교수다. 저서로는 BTNT 시리즈의 『요한신학』, NSBT 시리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상 부흥과개혁사),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누가·요한복음』의 “요한복음” (CLC)
등이 있다.
옮긴이
신지철
전광규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트리어 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
학교 고전문헌학부에서 수학했으며 뮌헨 대학
하고 『빛과 소금』 과 『목회와 신학』 의 기자로 활동
교 개신교 신학부 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
했다. 현재 한누리교회 담임목사와 도서출판 하
가페출판사 편집장으로 『오픈 성경』 및 『열린 성
나의 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역서로는 BTNT 시
경』 의 기획, 편집, 집필을 주관했으며, 역서로는
리즈의 『요한신학』, NSBT 시리즈의 『아버지와 아
BECNT 시리즈의 『누가복음1, 2』, 『ESV 스터디
들과 성령』, 『베이커 성경 핸드북』 (이상 부흥과개혁사)
ISBN 978 - 89 - 6092 - 467 - 3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바이블』 (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등이 있다.
www.rnrbook.com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지음 신지철·전광규 옮김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지음 | 신지철·전광규 옮김 값 40,000원
목차
시리즈 서문 _ 6 저자 서문 _ 9 약어 소개 _ 12 지도 _ 19 서론 _ 20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1:1~18)
·41
II. 표적의 책: 메시아에 대한 표적들(1:19~12:50)
·85
A. 세례 요한, 예수의 첫 표적, 대표적인 대화들(1:19~4:54) B. 추가 표적들 및 예수에 대한 불신 고조(5:1~10:42)
89 245
C. 마지막 유월절: 절정의 표적(죽은 나사로를 일으킴) 및 여러 사건 (11:1~12:19) D. 결론(12:20~50)
435 493
III. 영광의 책: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준비 및 예수의 수난(13:1~20:31) ·517 A.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정화와 교훈, 예수의 마지막 기도(13:1~17:26)
519
B. 수난 내러티브(18:1~19:42)
637
C. 예수의 부활과 출현 및 제자들의 사명 위임(20:1~29)
699
D. 결론: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가 증언한 메시아의 표적들(20:30~31)
725
IV. 에필로그: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의 상호보완적인 역할(21:1~25) ·729 A. 예수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다(21:1~14)
735
B. 예수와 베드로(21:15~19)
745
C. 예수와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21:20~25)
753
참고문헌 _ 760
요한복음
| 시리즈 서문 |
BECNT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 음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 은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 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는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포함하려고 애쓰는 백 과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비록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는 해도 ) 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들을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 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 력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하여 한 절씩 강해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름 ) 이 노력의 일환이 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6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시리즈 (1:1~18) 서문
본문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 서 본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최근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경 속에 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 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깎 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 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 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 작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 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확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론을 취하기 위하여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 요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다양한 가르침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경에 대 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은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출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해를 낳기 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편견 없 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다고 말하 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들(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을
성경 해석
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 하기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이차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 류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 양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들을 적절 히 적용하는 데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 론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게, 분명하게 7
요한복음
그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론적인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異文 )은 저자의 번역 속에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半 ) 괄호(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추가 주석”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 - 연대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수( 面 數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들이 있다( BAGD, LSJ, TDNT ). 참고문헌은 책 마지 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8
| 저자 서문 |
이 주석은 요한복음을 10년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얻은 결정판이다. 그동 안 나는 요한의 임무에 대한 논문( Köstenberger 1998b ) 에서 시작해 기본적인 역 사적, 문학적, 신학적 개관( 1999a ), 역사 배경 주석( 2002c ) 및 선정한 주제에 대 한 여러 학술 논문( 특히
1995b; 1998a; 2001b: 49~63; 2002b; 2003; 2004 ) 을
발표해 왔
다. 이 주석은 주해와 신학 양면에서 포괄적이고(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 1) 균형 있 게 요한복음을 다루려는 노력의 결과이며, 다음과 같은 확신에 근거하고 있 다. (1) 요한복음은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다. 요한복음은 역사적 연구를 잘 견디며( Blomberg 2002; Köstenberger 2002c; Riesner 2002 ) 역사와 신학의 단순한 이분 법을 거부한다. (2) 요한복음은 면밀한 문학적 구성의 산물이다. 물론 요한복 음을 이야기로 격하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요한은 선택과 인물의 성격 묘사, 줄거리 전개 같은 장치들을 사용하며( Culpepper 63~68; Tovey 1997: 47~52의 비판을 참조하라. ),
1983; 그러나 Carson 1991: 39~40,
이에 대한 연구는 요한의 신학적 메시
지에 대한 이해를 높일 가능성을 갖고 있다. (3) 요한은 궁극적으로 신학에 관심이 있다.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는 것은, 예수가 요 한을 제자로 불렀을 때 요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믿 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기본적인 확신과 일치하게, 첫째로 이 주석은 제4복음서의 가장 가능성
1) 이 주석의 예상 독자를 고려해, 참고 자료는 대부분 영어로 접할 수 있는 주석과 논문, 정기 간행물로 국한했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다른 언어로 된 자료도 참고문헌으로 실었다.
9
요한복음
높은 배경 및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여러 세부 사항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근거한다. 이 세밀한 역사적 연구를 본격적인 주석에 통합하는 전체 누적 효 과가 요한복음의 역사적 신뢰성에 대한 믿음을 더욱 회복시키게 되기를 바란 다. 이 주석의 두 번째 특징은 요한복음 각각의 내러티브에 대한 문학적 연구 의 통찰을 시종일관 의지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때로 지나치게 역사적인 방향으로 추가 기울거나( 특히 역사비평 방법론의 전성기 동안 ), 때로는 요한복음의 문 학적인 측면에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반면, 이 주석은 양면 접근법을 취함 으로 요한복음의 역사적 신뢰성에 과도하게 비판적인 입장은 물론, 거의 전 적으로 문학적인 면으로 기울어 역사적 차원을 무시하는 환원주의도 피하려 고 애쓰고 있다. 영감된 신약 문서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요한복음은 정확한 역사적 상술뿐 아니라 심미적 즐거움을 주는 문학적 세련미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데, 이는 공동으로 요한복음의 신학적 진술과 영향을 강화한다. 따라서 셋째로 역사적, 문학적 연구는 요한복음의 신학적 이해에 보조적인 것으로 여긴다. 여기( 신학적인
영역 ) 에서
나는 내 멘토인 돈 카슨( Don
Carson ) 의
주석과 네덜란드 학자 헤르만 리더보스( Herman Ridderbos ) 의 주석의 도움을 가 장 많이 받았다. 카슨의 주석은 해석상의 선택지들에 대한 면밀한 고찰 및 신 학적인 이해에 탁월한 반면 리더보스는 신학적인 종합의 대가로서, 나는 ‘큰 그림’에 해당하는 쟁점들에 대한 리더보스의 논법에 특히 통찰력이 있음을 깨달았다. 레온 모리스( Leon Morris ) 의 주석 역시 매우 훌륭한 저작으로 종종 내 연구의 방향을 지시한 원숙한 판단력을 일관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주석의 다른 주요 대화 상대로는 루돌프 슈나켄부르그( Rudolf Schnackenburg ) 와 레이먼 드 브라운 ( Raymond
Brown ) 이
있다 ( 이들과는
이따금 의견 불일치가 있기는 하다 ).
불트
만( Bultmann ) 은 말할 것도 없고, 바레트( Barrett ) 와 비슬리-머리( Beasley - Murray ), 키너( Keener ), 몰로니( Moloney ) 의 주석도 자주 참조하는데, 불트만의 경우 어떤 때는 아주 뛰어나지만 어떤 때는 항로를 다소 이탈한다( 내가 보기에 ). 나는 마르 틴 헹엘( Martin Hengel ) 과 헹엘의 역사적 통찰에서 배웠으며( 비록 어떤 경우에는 감히 의견을 달리하지만 )
마크 스티브( Mark
Stibbe ) 와
앨런 컬페퍼( R.
은 이들의 문학적인 연구에서도 도움을 받았다( 개별적인 만 ).
Alan Culpepper ) 와
같
해석에서는 비판을 제기하지
무엇보다 나는 요한복음의 지면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에게서
배웠기를 바란다. 나는 이 모든 빚을 기꺼이 인정한다. 이 주석의 집필은 주로 2002년 9월에 서 2003년 12월까지 16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사랑하는 아내 마거릿의 훌륭 하고 놀랄 만한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마거릿은 최근에 넷째 아이 티머시 존을 낳았다. 사실 티머시의 중간 이름은 이 책과 관계가 있 는데, 티머시가 태어났을 때 티머시의 아버지는 이 책을 출산하는 중이었다. 10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저자 (1:1~18) 서문
티머시에게도 애정을 담아 이 주석을 헌정한다. 나의 또 다른 아이들, 로런과 탈리아, 데이비드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주었으며, 아빠가 주석 집필을 마치도 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자주 기도했다. 너희의 기도가 응답됐단다! 나는 또한 이 프로젝트의 여러 중요한 때에 연구를 도왔던 마이클 화이트, 앨런 밴 디, 마크 오언스, 데이비드 크로토, 스콧 켈럼, 코린 미하일라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인 사우스이스턴 침례신학교와 전 총장 페이지 패터슨 박사, 러스 부쉬 학장 및 이사회가 이 집필에 기여한 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교수 사역뿐 아니라 집필 사역에도 힘쓸 수 있도록 충분 한 공간과 시간을 허락한 것에 감사를 드린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Soli Deo gloria )!
11
| 지도 |
시돈 다메섹
수리아 헤르몬 산
두로
가이사랴 빌립보
베
니
게
단
돌레마이
벳새다- 율리아스
가버나움
라파나
갈릴리 막달라 디베랴
세포리스
갈릴리 바다
히포스
나사렛 가다라
스키토폴리스
지 중 해
가이사랴
데가볼리
사마리아 세바스테 (사마리아) 에발 산 그리심 산
수가
안디바드리 욥바
페레아 요단강
에브라임 룻다
유 대 여리고 예루살렘
아소도
빌라델비아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
베다니 쿰란
베들레헴 아즈칼론
마카이루스
헤브론 가사
사해
이두매 마사다
나
라피아
바
테
아
브엘세바
19
요한복음
| 서론 |
의의와 해석 요한복음은 로마서와 함께 신약신학의 영원한 ‘쌍둥이 탑’이라고 해도 무 리가 아니다( Köstenberger 2000 ). 달리 비유하자면,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생애 에 대한 보행자의 묘사보다 훨씬 높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른다.1) 사도 요한이 그의 긴 생애와 사역의 절정으로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요한복음의 사 도 저작설에 대해 비평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인 반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2)
요한복음은 다른
정경 복음서 및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깊이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 시의 신비를 통찰한다. 장엄한 프롤로그에서 면밀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1) 교부들은 겔 1:10과 계 4:6~8에 나오는 네 짐승을 출발점으로 삼아 요한복음을 독수리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Augustine, De consensu evangelistarum 6 (Volfing 2001: 45 주67에서 재인용)을 보 라. “요한은 인간의 연약성이라는 구름 위로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마음의 눈으로 불변하는 진리의 빛 을 가장 예리하고도 지속적으로 주시한다.” 어부이자 우레의 아들, 사랑하시는 제자, 장로와 감독, 2 세기의 해석으로는 사도, 독수리와 영웅과 우상(icon)으로 묘사된 성인인 요한에 대해서는 Culpepper 1994를 보라. 2) 오데이(O’Day 2002)의 최근 논문을 보라. 오데이는 제4복음서의 사도 저작성 포기가 요한복음을 새 로이 읽을 “여지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요한복음의 사도 저작성 부인이 낳은 결과를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는다. 어쨌든 현대 학계에서 종종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를 간략하 게 처리하는 방식은 정당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 사도 저작설이 결정적으로 논박된 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Köstenberger 2001b: 17~47). 비록 하나의 학설일 뿐이기는 하지만, 나는 사도 저작설이
여전히 외증과 내증 모두에 근거한 가능성 있고 매우 그럴 듯한 가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참조. 예를 들어 Carson 1991: 68~81; Carson, Moo, and Morris 1992: 138~157; 또한 뒤의 논의를 참조하라).
20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요한복음 저자는 신중하게 선택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훌륭한 저 작을 대하는 모든 독자는 그 어휘들을 주의 깊게 숙고해야만 한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제4복음서는 심오한 메시지에 상응하는 현저한 영향을 미쳤다. 요한의 기독론, 특히 예수의 신성 및 인간적이고 신적인 특성들에 대 한 확언은 초대 교회의 회의와 신조들이 채택한 공식 표현의 형성에 결정적 인 영향을 미쳤다( J. N. Sanders 1943; Pollard 1970; Braun 1959; Grillmeier 1975: 특히 26~32 ). 교부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의 수많은 위대한 지성들은 요한복 음에 대한 주석이나 논문들을 집필해 왔다.3) 계몽운동의 결과, 특히 독일 자 유주의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신뢰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 고 오늘날 요한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 행적에 대한 신 뢰할 만한 증언으로서의 지위를 널리 회복하고 있다.4) 거의 탄생 초기부터 요한복음에 대한 해석은 매우 논란이 있었다. 초대 교 회 시대에는 영지주의자들이 이 복음서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면서 사죄와 구 속이 아니라 지식( 계시 ) 을 통한 구원이라는 자신들의 메시지를 요한복음이 지 지한다고 주장했다( J. N. Sanders 1943: 47~87; Pollard 1970: 25 ). 고의로 왜곡한 것은 아닐지라도 요한복음을 어떻게 오해했는가를 가장 먼저 증언하는 것은 요한 일서일 것이다( 예. 요일 1:1~3; 4:2~3 ). 종교개혁 이후에는 독일의 자유주의 학자 들뿐 아니라 영국의 이신론자들도 처음에는 요한복음을 선호했는데, 이는 요 한복음에 축사에 대한 강조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몽운동의 결과, 영국의 에드워드 에반슨( Edward 더( Karl
Bretschneider ) 와
Evanson ) 에서
다비드 슈트라우스( David
독일의 칼 브레트슈나이
Strauss ) 에
이르기까지 요한의
“영적인 복음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쓴 용어 ) 와 공관복음이 모순된다고 주장 하며 공격을 가했다( Köstenberger
2001b: 17~47 ).
또한 목격자 증언의 중요성 및
증거에 대한 신중한 평가를 강조하는 복음서는 신학적 편의를 위해 역사적 인 사실을 반드시 왜곡하게 되어 있는 양 ‘역사’와 ‘신학’을 대립시켰다.5) 3) 라틴 배경에 대해서는 Volfing 2001: 11~59를 보라. 또한 다음에서 언급하는 저작들도 보라. J. N. Sanders 1943; Pollard 1970; Braun 1959; Grillmeier 1975. 4) 강화 부분들뿐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요한복음 특유의 내러티브도 제4복음서의 온전함을 손상시키 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다음을 참조하라. Köstenberger 2002c; Blomberg 1993; 2001; 2002; 반대 견해는 M. Casey 199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여전히 회의적이다. 카이저(Kysar 2002)의 최근 개관 및 톰슨(Thompson 2002)의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 애트리지(Attridge 2002b)의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참조하라. 5) 제4복음서 안의 역사와 신학 및 제4복음서의 저자 문제에 대한 모리스의 논문들(Morris 1969: 65~292)은 여전히 세심하게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클레멘스의 진술의 흥미로운 적용은 Thielman 1991: 183을 논문 전체의 맥락에서 보라. 클레멘스의 『개요』(Hypotyposeis)에 대한 언급 은 Eusebius, Hist. eccl . 6.14에 나타난다. 또한 Thompson 2002: 2를 참조하라. 톰슨은 “클레멘스
가 어떤 의미로 요한복음을 ‘영적인 복음서’라고 불렀든지 간에 클레멘스가 현대적 의미의 ‘사실들’ 과 ‘해석’을 대비시키려 했다고 보기는 의심스러운 일이다……‘영적인’ 복음서는 사건이나 사실의 내
21
요한복음
20세기에 와서는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 이라는
비범한 인물이 자신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에 요한복음을 편입시켰다( Carson 1991: 31~33 ). 또한 최근에는 요한복음을 사도적 기독교의 주류에서 1세기말 분파주의의 변두리로 옮겨 놓는 노력이 있었다. 즉 사도 요한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나 ‘학파,’ ‘종파’( circle ) 가 요한복음을 편집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은 예수 를 메시아로 믿는 믿음 때문에 모체인 회당이 구성원들을 축출한 것으로 인 해 요한 공동체가 회당과 겪는 갈등에 비추어 이루어졌다( Martyn Brown 1978; 1979; 참조. Cullmann 1976 ).
1977; 1979; R.
그런데 반드시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런 재구성
이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회당 출교에 대한 언급( 특히 9:22 ) 을 시대착오라고 말 하는 비난에 크게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재구성 이론들의 역 사적 가치 자체가 심각한 검증을 거치는 중이며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 다( Hengel 1993; Bauckham [ed.] 1998 ).6) 성서학회의 후원 아래 열린 요한 문서 분과 의 최근 회의에서 로버트 카이저 ( Robert
Kysar 2002b ) 는
마틴 ( Martyn ) /브라
운( Brown ) 식의 ‘요한 공동체’ 가설의 흥망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서 이전에 거기에 찬성했던 일에 대해 개인적인 후회를 표명하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카이저가 제4복음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던 패러다임을 선택하기는 하지만, 카이저의 비판은 최근까지 거의 의문의 여지 가 없었던 패러다임을 철저히 재평가할 길을 열어 놓았다.7)
해석학적 전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명시적이든 암시적이 든, 기초가 되는 해석학적 전제가 없이 집필되는 주석은 하나도 없다. 객관적 이고 중립적인 해석을 정의하기 어려운 것처럼, 전제가 없는 석의는 불가능 하다( Bultmann 1960 ). 개인의 선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몇 가지만 들면, 모 든 해석자는 자신의 교회 전통과 개인적인 경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시각을 적인 의미를 제시하며, 따라서 영적인 복음서의 진리는 영적으로 분별해야 한다”고 바르게 언급한다. 톰슨은 “신학적이거나 해석적인 의제를 제공하기 위한” 요한복음의 어떤 내용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 기하는 “현대의 관점”은 “신학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매우 이상한 가정”에 해당하며 “아마도 사실 상 신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라고 바르게 주장한다. 나아가 톰슨 (Thompson 2002: 3)은 성경학자들이 역사 철학에 더 깊은 소양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카슨 (Carson 1991: 29)도 마찬가지로 클레멘스가 “영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이분했다는 것을 부인 한다. 카슨은 “영적”이라는 말이 “풍유적”이거나 “상징이 많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6) 일찍부터 슐라터(Schlatter 1948: x)는 “요한 학파”라는 용어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völlig phantastisch) 말처럼 보인다고 언급한다. 7) 1990년이 돼서야 스미스(M. Smith 1990: 293 주30)는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마틴의 명제는 전형 (paradigm)이 됐다……그것은 주석이나 교과서 같은 표준이 되는 저작을 통해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며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지식으로 습득하는 내용에 속한다.”
22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반영하는 관점에서 성경 본문에 다가간다 ( 참조.
예를 들어 Klein, Blomberg, and
Hubbard 1993: 81~116 ).
이 주석은, 전제가 없는 석의는 환상이지만 전제가 성경 본문에 대한 접근 을 반드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해석자의 이해는 성경의 메시지에 따라 수정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집필됐다( Osborne
1991 ).
또한 예수 그리스도
를 주님으로 믿는 활동적이고 거듭난 믿음의 관점에서 석의를 행한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한다( Schlatter, Neuer 1996: 211~225에서 ). 만약 겸손함과 석 의적 노력, 다른 이들의 발견에 대한 개방성이 가미된다면, 해석하는 데 성령 의 능력 주심과 함께 이 믿음은 부담이 아니라 큰 힘이 될 수 있다( G. 1994: 45~63 ).
해석 과정의 논리에서 볼 때, 주어진 본문( 이
Maier
경우에는 제4복음서 ) 에
대해 단 하나의 가능한 해석 이상으로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해석이 등장 하리라고 예상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에 대한 포스트모던 접근법 및 독자 반응을 중시하는 접근 법은 반대한다 ).
특히 여기서는, 특정한 문학 장르의 문맥에서 전달되며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저자의 의도를, 주어진 해석의 타당성을 평가할 척도로 삼고 있다.8) 즉 역사·문화적 배경에 비추어 당시 언어 및 문학적 관습에 따라, 원독자들에 게 저자가 전하려고 의도한 메시지에 가장 일치하게 한 해석은 주어진 본문 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라고 할 최대의 권리를 지닌다.9) 적어도 더 어려운 사례들에서는 백 퍼센트 확신을 갖기 어렵겠지만, 우리는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며, 요한복음 문서 자체의 내적 증거와 잘 일치하고, 우리가 초대 교회 및 AD 1세기 후반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바와 부합하는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배경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랄지 모른다. 이 일은 단순히 바람에 그칠 일이 아니라 꼭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요한복 음이 교회가 설교하며 가르치고 삶과 실천에 적용하도록 권위 있는 역할을 해야 할 기독교 정경에 속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설교학’은 반대한다 ). 8) 고전에 해당하는 저서는 Hirsch 1967이다. 밴후저(Vanhoozer 1998)의 최근 저서는 훨씬 더 정교하 다. 저자가 의도한 본문의 의미에 대한 밴후저의 옹호는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밴후저는 성경 해석에 있어 독자의 역할에 민감하며 예민하게 인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참조. Vanhoozer 1995; 또한 Vanhoozer 2002에 실린 통찰력 있는 논문들과 각주를 참조하라). 9) 특히 요 21:20~24에 대한 밴후저(Vanhoozer 1993[=2002: 257~274])의 ‘해석적 강해’는 일반적인 저자 및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한 매우 재치 있는 변호를 제공한다. 밴후저에 따르면 “제4복음서의 성 격은 대체로 저자를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동일시하는 데 좌우된다”(1993: 372). 밴후저가 옹호한 “‘나-목격자 증언’에 대한 안셀무스적인 이중 해석학”은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증언을 자체의 방식 대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그 증언은 믿지 않는 한 이해되지 않는다. 최근 많은 학자가 주장하는 ‘저자의 죽음’ 및 만연한 ‘회의의 해석학’에 맞서 밴후저는 ‘저자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믿음의 해석 학’을 옹호하는데, 이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제4복음서에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를 목격자로 일관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로 요한복음 마지막 구절에서도 여전히 저자의 “나”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21:20~25 주해를 참조하라).
23
요한복음
여기서 연구하는 본문은 복음서이므로 예수의 생애와 대속적인 죽음에( 일부 에서 주장하는 대로 분파적인 ‘요한 공동체’의 역사가 아니라 )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물론 요한복음 저자의 1세기말 관점이 그가 진술하고 선택하는 방식을 특 징지었다고 예상할 수 있음이 틀림없다 ).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면에서 지나친 독
단론에 빠지지 말고 사도 저작설을 포함하여 모든 선택지를 검토해야만 한 다( Köstenberger 2001b: 17~47 ). 최근 들어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요한복음의 문학 적 예술성은 진가를 인정해야 하지만, 역사적인 사항을 희생하면서까지 문학 적인 사항을 편향되게 강조하지는 말아야 한다.10) 제4복음서의 여러 본문에 대한 문학적 탐구의 홍수는 본문의 여러 세부 사 항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낳았다. 그러나 그런 문학적인 조명은 어떤 것이든 요한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역사적으로 춘 )와
정확한 근거가 있고 신학적으로 충분한 지식을 갖
결합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해석’은 원래 속한 큰 문맥 즉 공
동체적인 교회의 삶 및 개인적인 신자들의 삶에 효과적으로 작용하기 위해 반드시 속해 있어야 할 큰 문맥과 동떨어져 개별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뒤에서 나는 제4복음서의 가설적인 역사 배경을 가정할 것이다. 이는 낱낱 의 해석을 위한 전반적인 틀 역할을 할 것이다. 이 주석 전체에는 문학적이며 내러티브적인 해석의 통찰이 구체화되어 있다. 그 방면에서 얻은 통찰에 대 해서는 아무런 편견이 없다. 오히려 전통적인 접근법이 더 최근의 접근법에 서 배울 점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반응을 중시하는 더 급진 적인 입장은 피하고 있다. 이는 적잖이 일정한 해석 공동체의 편협한 시야 외 에도 성경 본문의 권위를 좀먹는 포스트모던적인 결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이런 급진적인 입장이 요한복음 본문이 생성되고 대인적인 소통의 문맥에서 작용했을 방식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주석은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에든 종교개혁 시대에든, 또는 더 최 근의 해석사에 있어서든 제4복음서 해석의 앞선 노력들에 대한 감사를 바탕 으로 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가진 후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을 내세워 주어 진 성경 본문 이해에 대한 현대의 노력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일이다( 참조. Steinmetz 1980 ). 동시에, 성경 사본들의 발견으로 해석상의 결정을 내 릴 근거가 되는 유용한 본문 비평 자료가 추가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11) 홀로 코스트와 성 포괄적인( gender - inclusive ) 성경 번역의 발전 같은 최근의 사건들은 10) 참조. Köstenberger 1999a: 30~31. 지난 20년 간 출판계는 요한복음의 주제나 특정한 본문에 대한 문학적인 탐구의 결과물을 사실상 물밀듯이 쏟아냈다. 그 가운데 몇몇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Culpepper 1983; Duke 1985; Staley 1988; M. Davies 1992; Stibbe 1992; 1994; Lee 1994; Tovey 1997; Beck 1997; Conway 1999; Harstine 2002. 11) 최근의 사본 발견이 가장 가능성이 큰 원래 독법의 판단에 변화를 일으킨 예로 1:18과 1:34 주해를 보라.
24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요한복음의 특정한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선명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쟁점들을 표면화시켰다( 참조. Köstenberger 2003 ). 마지막으로 이 주석은 성경을 높이 보는 시각에서 특히 성경의 무오와 영 감을 전제하고 집필됐다( 내가 믿기에는 합리적이지만 여기서 이 전제를 옹호하기란 불가능한 일 이다 ).
이는 특히 요한복음의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세부 사항에 대한 이해와
관계가 있다( 참조. Köstenberger 2002c; Blomberg 2002 ). 이 주석은 그런 세부 사항이 결국 해결될 수 있으며 요한복음 본문을 사실상 오류나 모순에 빠뜨리지 않 는다는 입장에서 집필됐다. 이에 해당하는 한 가지 사례는 공관복음과 관련 한 요한복음의 십자가형에 대한 연대 결정이다( 참조. Köstenberger 2002a: 147~148 ). 이런 전제는 브레트슈나이더와 함께 대거 쏟아져 나온( 물론 잠재적인 형태는 일찍 이 1790년대에 나타났지만 )
자유로운 비평학자들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12) 의
심할 여지없이 이 주석은 많은 면에서 고백주의와 전통적인 석의에 불과한 저작이라는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격은 적어도 일부분은 부정 확하다. 왜냐하면 오류가 없는 해석의 틀 안에도 석의상 판정을 내려야 할 선 택지들 및 해결해야 할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심 지어 어떤 결과들은 처음부터 그럴 법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제의 급 격한 수정을 요구하는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
여기에 근거하여 이제는, 라이트( N. T. Wright 1992: 61~64 ) 가 주장하는 ‘비판적 실재론’( critical realism ) 의 정신에 따라, 나의 요한복음 해석을 위해 그럴 법한 역 사적, 문학적, 신학적 배경을 간략하게 그려 볼 수 있게 됐다.13) 이는 결과적 으로 이 주석 자체의 전반적인 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배경 요한복음의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에 그럴 듯한 근거를 제공하는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의 조합을 발견 한다( Köstenberger
2000: 280 ).
저자는 (1) 사도이고( 1:14;
참조. 2:11; 19:35 ),
(2)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13:23]; 참조. 19:26~27; 20:2~9; 21, 특히
12) 칼 고틀리브 브레트슈나이더(1776~1848)는 요한복음의 연대를 2세기말로 보고 많은 점에서 요한 복음의 진실성을 부인하는 접근법을 선도했다(참조. Baird 1992: 312~314). 이와 대조적으로 브레 트슈나이더와 동시대 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1768~1834)는 “요한복음이 부인할 수 없 는 신빙성의 증거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지면에서 목격자이자 직접적인 참여자를 보여주므로 요한 복음의 신빙성을 의심하기 위해서는 편파적이 되고 자연적인 경로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Baird 1992: 214에서 재인용). 13) 참조. Wright 1992: 29~144의 권위 있는 “Part II: Tools for the Task.”
25
요한복음
21:24~25 ),14)
(3)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다.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는 제4복음
서 및 신약 다른 곳에서 일관되게 베드로와 관계가 있다 ( 13:23~24; 15)
20:2~9; 21; 참조. 눅 22:8; 행 1:13; 3~4; 8:14~25; 갈 2:9 ).
18:15~16;
최근 요한 학계에서 제4복음
서의 사도 저작설을 자주 부인하기는 하지만, 이 가설은 지금까지 결정적으 로 논박된 적이 전혀 없으며 따라서 적어도 택할 만한 그럴 법한 설명에 여전 히 해당한다.16) 외적 증거는 이런 확인을 지지하는데( 특히 Irenaeus, Haer. 3.1.2 ),17) 요한이 고령이 되도록 살았으며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들 가운데 마지막 저자 였음을 보여 준다.18)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에베소에서 기록했으며( Irenaeus, 14)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호칭은 요한복음 후반부에만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라(13:23 에 처음 나옴). 이는 13:1 이하의 두드러지는 관점 변화와 일치하는데, 13:1 이하에서는 제자들의 선 교를 예수의 승귀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Köstenberger, 1998b: 153). 그러므로 13~21장에서 요
15)
16)
17)
18)
26
한의 배역이 더 격상된 것은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것이 아니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의 승귀 이후 예수가 사명을 부여한 제자들을 통해 수행할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 을 맡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별칭은 저자 겸양의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참조. Vanhoozer 1993: 374. 밴후저는 Barrett, 1978: 117에 반대하여 어거스틴과 웨스트코트를 인용한다). 저자 겸 양에 대해서는 또한 Köstenberger 2004를 보라. 참조. 웨스트코트를 언급하는 Blomberg 2001: 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저작이 여전히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까지 이 이슈에 대한 학계의 견해를 개관한 논문에서 나는 사도 패러다임이 증거에 근거해서라기보다는 주로 철학적 근거에서 도전을 받았다는 점을 밝혔으며, 따라서 제4복음서의 요한 저작권이 실제의 논쟁을 통해 논박됐다고 하는 것은 의심 할 수밖에 없다(Köstenberger 2001b: 17~47).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뒷받침하는 증거 를 대지 않은 채 선택지가 되는 가설의 우월성을 사실상 자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정한 학문이라 고 하기 어렵다. 참조. Keener 2003: 81~139. 키너는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한 면밀한 탐구(임시적 으로 사도 저작성을 지지하는 결론을 내리는)의 서두부터 제4복음서의 사도 저작성이 종종 반대를 받아온 것은 교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며(81쪽) “다른 학자들이 펴는 반대 주장보다……제4복음서 의 요한 저작성에 대한 전통적인 보수 학자들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82쪽)고 말한다. 한 가지 애매한 증거는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카르포스와 동시대 인물인 2세기 저자 파피아스와 관계가 있다(Eusebius, Hist. eccl . 3.39.4~5가 인용하는 파피아스의 연대에 대해서는 Yarbrough 1983과 Munck 1959를 참조하라). 파피아스는 (적어도 유세비우스가 보기에) 다른 두 요한 즉 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근거해서 어떤 이들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장로 요한이 제4복음서를 썼다고 추정해왔다. 그러나 해당 본문에 나오는 요한에 대한 두 언급을 구 분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그 인용문의 후반부에서 요한을 ‘장로’라고 지칭한 정확한 이유는 요한이 같은 본문 앞에서 언급한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로 요한’ 가설에 대한 적절한 비 판은 Carson, Moo, and Morris 1992: 141~143을 보라. 마찬가지로 키너(Keener 2003: 95~98)도 파피아스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해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는 계시록을 폄훼하려는 것 이 유세비우스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키너(Keener 2003: 102~103)는 또한 요한이 노년에 제4복음 서를 기록했을 가능성에 대해 통찰력 있게 논의한다. 또한 Bauckham 1993: 27 주17에 인용한 저 서 및 힐(Hill 1998)의 중요한 논문을 참조하라. 힐은 파피아스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언급(Hist. eccl . 3.24.5~13, 특히 11; 파피아스를 거명하지 않음)을 들어 파피아스가 사도 요한을 제4복음서의 저자로 주장했다고 제시한다(반대 견해는 Bauckham 1993; Hengel 1989a; 이 주제에 대해 헹엘이 1993년에 쓴 더 자세한 독일어 논문에 대한 내 논평은 Köstenberger 1996을 보라). 제4복음서의 저자와 관련된 외증에 대한 연구는 Bauckham 1993: 24 주1을 보라. 이레나이우스(Irenaeus, Haer . 2.22.5; 3.3.4, Eusebius, Hist. eccl . 3.23.3~4에 인용)는 요한의 죽 음을 트라야누스 황제 통치기(AD 98~117년)로 잡으며 히에로니무스(Jerome, Vir . ill. 9)은 요한 이 예수의 수난 후 68년째 되는 해(즉 AD 98년이나 101년)에 죽었다고 말한다. 요한이 마지막으로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Haer. 3.1.2; 참조. Eusebius, Hist. eccl. 3.1.1 ), 와 마찬가지로 )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독자를( 다른 정경 복음서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Bauckham
[ed.] 1998 ).
요한의 원독자는
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개종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Carson 1991: 91; 참조. Keener 2003: 175~180 ).
20장 30~31절의 목적 진술을 볼 때 요한은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통해 불 신자인 청중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간접적인 전도의 목적으로 복음서를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Bauckham [ed.] 1998: 10 ). 요한복음은 초대 기독교의 이 방인 선교와 초기 영지주의 사상의 출현, 마지막으로 특히 AD 70년의 예루살 렘 멸망이라는 모태에서 태어났는데 ( Motyer Draper 1997: 264, 285 ),
1997; Kerr 2002; P. Walker 1996: 195;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교를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진공 상
태에 빠뜨린 충격적인 사건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의식과 예배를 지속할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다.19) 유대인 전도의 기회를 잡은 요한은 예수 를 성전의 대체자( 2:18~22; 참조. 1:14; 4:21~24 ) 이자 유대 절기가 담고 있는 상징의 성취로 제시한다 ( 특히 264~265 ).
5~12장; 참조. Hoskins 2002; Köstenberger 근간; Draper 1997:
만약 이 재구성이 정확하다면 요한복음은 AD 70년 이후 그러나 AD
100년 이전 어느 때에 기록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20) 만약 예수를 “나의 주 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도마의 고백이 도미티아누스 치하 ( AD 81~96년 ) 의
황제 숭배를 연상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AD 81년 이후 연대가 가
장 가능성이 클 것이다.21)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라는 데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Irenaeus, Haer . 3.1.1; Clement, Eusebius, Hist. eccl . 6.14.7에 인용; Eusebius, Hist. eccl . 3.24.7. 참조. Carson 1991: 83. 19) 특히 Alexander 1992와 Goodman 1992를 보라. 더 자세한 내용 및 추가 참고문헌은 Köstenberger 근간을 보라. 마틴/브라운 유형의 ‘요한 공동체’ 가설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조하 라. Köstenberger 1998b: 200~210; Carson 1991: 35~36, 87~88, 369~72; 뒤의 9:22 주해. 20) 다음과 같은 극소수 학자만이 AD 70년 이전 연대를 주장한다. J. A. T. Robinson 1976: 254~285(그러나 Kerr 2002: 19~25의 논박을 보라; 또한 Carson 1991: 82~86을 참조하라); Morris 1995: 25~30(Cribbs 1970과 Torrey 1936: x~xi을 참조); Wallace 1990(그러나 이 주석 5:2를 보라). 그러나 연달아 제시되는 다음과 같은 내증은 AD 70년 이후를 지지하는 것으로 판단해 야 한다(참조. Croteau 2003). 6:1과 21:1의 디베랴 바다 언급; 20:28에서 도마가 예수에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 숭배에 대한 반대?); 베드로의 순교에 대한 언급(21:19);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의 결여(Schlatter 1948: 44; 그러나 Carson 1991: 84의 경고 참조). 여기에다 제4복음서가 비교적 쉽게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시하는 점이나(예. 1:1, 14; 10:30; 20:28; 참조. Carson 1991: 85, 그러나 84쪽에 나오는 카슨의 경고 유의) Eusebius, Hist. eccl . 6.14.7에 인용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진술 즉 “맨 마지막으로, [공관 복음에서] 외적인 사실들을 밝혔음을 알고 있던 요한은……영적인 복음서를 썼다”는 말과 같은 외 증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AD 70년 이전 연대를 지지하기 위해 인용하는 주요 증거(성전 멸망에 대한 언급 결여 및 5:2에서 양문 곁 연못을 가리키는 데 현재시제 동사를 사용하는 점)가 결정적이 지 않으며 달리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참조. 예. Schlatter 1948: 23~24) 특히 그러하다. 21) 참조. Carson 1991: 85. 카슨은 임시로 AD 80~85년을 제시하는데, 그렇게 보는 부분적인 이유는 “만약 제4복음서가 AD 70년 이후에 기록됐다면, 기록 연대를 AD 70년[성전 파괴] ‘직후’로 보기는 어렵다……아직까지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성전 파괴의 여파가 매우
27
요한복음
문학적 특징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여러 내러티브 가닥을 하나로 엮어, 하나 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20:30~31; 1987: 639~651 ).
참조. Carson
프롤로그는 예수로 성육신한 영원하고 선재하는 말씀이라는 틀
안에 요한복음 전체를 놓는다( 1:1~18 ).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전반부는 예수의 메시아 됨에 대한 증거를 선별한 일곱 표적의 형태로 제시한다( 1:19~12:50; 참조. 20:30~31; Köstenberger 1995b ). 요한복음은 또한 예수의 일곱 가지 “나는……이다”
발언을 포함하며( 참조. 뒤의 ‘신학적 강조점’ ), 모세와 성경, 세례 요한, 아버지, 예수 와 예수의 사역, 성령, 제자들, 저자 자신( 참조. 1:7 주해 ) 등 예수의 주장을 뒷받 침하는 여러( 일곱? ) 증인을 소환한다. 예수의 메시아 됨에 대한 대표적인 질문 들은 저자가 의도한 결론, 즉 “예수는 메시아”라는 결론으로 독자를 이끌어 가는 데 이바지한다( 예. 요 1:41; 4:25; 7:27, 31, 52; 10:24; 11:27; 12:34 ). 요한복음 후반부는 예수의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가 선교를 감당할 준비를 시킴으로 예수가 자기의 선교를 반드시 지속되게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단 락은 예수의 고별 담화( 요 13~17장 ) 로 시작한다. 고별 담화는 새로운 메시아 공 동체의 정화( 발 씻음과 유다의 떠남으로; 요 13장 ) 와 준비( 오시는 보혜사 및 제자들에 대한 보혜 사의 사역에 대해 가르침으로; 요 14~16장 ),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기도( 요
17장 ) 로
이루
어져 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는 동역자가 되 며( 15:15~16 ), 성령이 제자들의 증언을 도와주고( 15:16~27 ), 제자들은 완전한 사 랑과 하나 됨이 특징인 하나님의 생명에 받아들여진다( 17:20~26 ). 요한복음의 수난 내러티브( 18~19장 ) 에는 공관복음에서 보는 수치와 굴욕에 대한 강조가 대부분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한 속죄이자( 참조. 1:29, 36; 6:48~58; 10:15, 17~18 ) 13:1; 16:28 ).
예수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단계로 소개한다( 예.
부활 출현 및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게 사명을 위임받는 일은
끝에서 두 번째 장( 요 20장 ) 의 초점이다. 20장에서 예수는 보냄받은 자의 전형 으로 ( 참조.
9:7 )
이제는 자기의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를 보내는 이가 된
다( 20:20~23 ). 20장 30~31절의 목적 진술은 요한복음의 주요 모티프( 표적, 믿음, 영원한 생명,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정체 ) 를
되풀이한다. 에필로그는 베드로
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관계를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서로 다 르지만 똑같이 적법한 섬기는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한다. 예수의 일곱 표적에 근거한 요한복음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윤곽을 그릴
강력했음에 틀림없다. 제4복음서 같은 문서가 자유로이 성전 파괴를 명백하게 암시하지 않으려 면……시간이 약간 경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28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수 있다.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 II. 표적의 책: 메시아에 대한 표적들( 1:19~12:50 ) A. 세례 요한, 예수의 첫 표적, 대표적인 대화들( 1:19~4:54 ) 1. 세례 요한의 증언 및 예수의 사역 시작( 1:19~51 ) 2. 첫 번째 표적: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 2:1~12 ) 3. 예수의 예루살렘 표적 중 하나: 성전 청결( 2:13~22 ) 4.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서 예수의 사역( 2:23~4:42 ) a.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 2:23~3:21 ) b. 막간: 세례 요한의 증언( 3:22~36 ) c. 사마리아 여인( 4:1~12 ) 5. 가나에서의 두 번째 표적: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침( 4:43~54 ) B. 추가 표적들 및 예수에 대한 불신 고조( 5:1~10:42 ) 1. 예수가 어떤 절기에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다( 5:1~47 ) 2. 갈릴리에서의 유월절: 오천 명을 먹이심 및 생명의 떡 담화( 6:1~71 ) 3. 예수가 초막절에 참석하다( 7:1~8:59 ) a. 예수의 첫 번째 가르침( 7:1~52 ) b. 예수의 두 번째 가르침( 8:12~59 ) 4. 맹인 치유와 선한 목자 담화( 9:1~10:42 ) a. 예수가 맹인을 고치다( 9:1~41 ) b. 선한 목자 예수( 10:1~42 ) C. 마지막 유월절: 절정의 표적( 죽은 나사로를 일으킴 ) 및 여러 사건( 11:1~12:19 ) 1. 나사로를 일으킴( 11:1~57 ) 2.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12:1~11 ) 3.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다( 12:12~19 ) D. 결론( 12:20~50 ) 1. 이방인 시대의 시작: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다( 12:20~36 ) 2. 옛 언약 공동체가 거부한 메시아 표적( 12:37~50 ) III. 영광의 책: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를 위한 준비 및 예수의 수난( 13:1~20:31 ) A.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의 정화와 교훈, 예수의 마지막 기도( 13:1~17:26 ) 1. 공동체의 정화: 발 씻음과 유다의 떠남( 13:1~30 ) a. 발 씻음( 13:1~17 ) 29
요한복음
b. 배반( 13:18~30 ) 2. 예수의 마지막 교훈: 고별 담화( 13:31~16:33 ) a. 예수의 떠남과 성령을 보냄( 13:31~14:31 ) b. 참 포도나무 예수( 15:1~17 ) c. 성령 및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증언( 15:18~16:33 ) 3. 예수의 고별기도( 17:1~26 ) B. 수난 내러티브( 18:1~19:42 ) 1. 배반 및 예수가 체포됨( 18:1~11 ) 2.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심문받고 베드로에게 부인당하다( 18:12~27 ) 3. 빌라도 앞에 선 예수( 18:28~19:16 ) 4. 예수의 십자가형 및 장례( 19:17~42 ) C. 예수의 부활과 출현 및 제자들의 사명 위임( 20:1~29 ) 1. 빈 무덤( 20:1~10 ) 2.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다( 20:11~18 ) 3.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다( 20:19~23 ) 4. 예수가 도마에게 나타나다( 20:24~29 ) D. 결론: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가 증언한 메시아의 표적들( 20:30~31 ) IV. 에필로그: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의 상호보완적인 역할( 21:1~25 ) A. 예수가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다( 21:1~14 ) B. 예수와 베드로( 21:15~19 ) C. 예수와 예수가 사랑하는 제자( 21:20~25 ) 결과적으로, 요한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연대순이라고 볼 수 있다.22)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사역 연대표 시기
장소 / 사건
기원 창세전
1:1~18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AD 29~30년, 사역 초기 29년 여름 / 가을
성경 본문
1:1~18 1:19~2:12
요단 강가의 세례 요한
1:19~34
22) 예수의 사역 연대로는 AD 26~30년이나 29~33년이라는 두 가지 주요 가능성이 있는데, 후자인 29~33년이 선호된다(참조. Hoehner 1977; Hoehner, DJG 118~122).
30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이어서
예수가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다
1:35~51
29년 겨울 / AD 30년 봄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2:1~12
AD 30~31년, 첫 유월절 및 사역 첫해
2:13~4:54
30년 4월 7일
예수의 공생애 중 첫 유월절(예루살 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다
2:13~3:21
30년 봄 / 여름
요단 강가의 세례 요한
3:22~36
30년 12월 / 31년 1~2월?
사마리아에서 행한 예수의 사역
4:1~45
이어서
갈릴리 가나에서의 치유
4:46~54
AD 31~32년, 사역 둘째 해
5:1~47
31년 3월 27일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유월절
마 12:1(병행 구절?)
31년 10월 21~28일?
안식일 논쟁(예루살렘)
5:1~47
AD 32~33년, 요한복음에 기록된 두 번째 유월절 및 사역 셋째 해
6:1~11:54
32년 4월 13일 또는 14일
6:1~21
요한복음에 기록된 두 번째 유월절 (갈릴리)
이어서
예수가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다
6:22~71
32년 9월 10~17일
예수가 초막절에 참석하다(예루살렘)
7:1~52; 8:12~59
32년 10월 / 11월?
맹인 치유, 선한 목자 담화
9:1~10:21
32년 12월 18~25일
예수가 수전절에 참석하다(예루살렘)
10:22~39
33년 1월 / 2월
예수가 요단 강가로 물러나다
10:40~42
33년 3월?
나사로가 일어나다
11:1~53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33년 3월?
예수가 에브라임으로 물러나다
11:54
AD 33년,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유월절, 수난 주간, 부활 출현
11:55~21:25
33년 3월 27일 금요일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하다
11:55~12:1
33년 3월 28일 토요일
나사로 및 누이들과의 만찬
12:2~11
33년 3월 29일 일요일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다
12:12~50
33년 3월 30일~4월 1일 월 요일~수요일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청결, 성전 논 쟁, 감람산 담화
공관복음
33년 4월 2일 목요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유월절 (예루살렘), 배반, 체포
13:1~18:11
33년 4월 3일 금요일
유대 및 로마 재판, 십자가형, 장례
18:12~19:42
33년 4월 5일 일요일
빈 무덤, 첫 번째 부활 출현
20:1~25
33년 4월 12일 일요일
요한복음에 기록된 두 번째 부활 출현
20:26~31
31
요한복음
33년 5월 14일 이전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 번째 부활 출현
21:1~2523)
신학적인 강조점 예수의 메시아 선교
복음서라는 장르대로 요한복음 내러티브는 예수와 예수의 메시아 선교에 초점을 맞춘다. 요한의 기사는 처음부터 구약신학을 기반으로 한다. 요한복음 을 시작하는 문구인 “태초에”는 세상 창조를 기술하는 창세기의 첫 마디를 떠올리게 한다( 1:1; 참조. 1:3 ). 요한에 따르면 말씀이 이 세상에 와서 예수로 성육 신한 것은 창조에 비할 만한 중요한 사건에 해당한다( 1:1, 14 ). 예수는 선교 사 명을 성취하도록 하늘에서 보냄을 받았으며, 사명을 완수하면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말씀으로 소개된다( 참조. 사 55:1 ). 요한이 예수에 대해 ‘로고스’( λόγος, 말 씀 )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또한 저자의 문화에 맞춰 기독교의 메시지를 상
황화하는 역할을 한다.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나타나는 또 다른 구약 개념은 빛과 어둠이다( 1:4~5, 8~9; 참조. 3:19~21; 창 1:3~4 ).
쿰란 문서에서는 이 빛과 어둠의 대조가 종말론적
이원론의 틀에 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창조에서 활동했으며 이제는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를 가져온 말씀으로 소개된다. 그리고 이 계시 는 모세를 통해 전달된 계시와 비교되고 대조된다( 1:17~18; 참조. 출 33~34장 ). 예 수는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 1:16; 개역개정 “은혜 위에 은혜” ) 를 가져다주었다. 모세 를 통해 주신 율법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은 혜( 최종적인
종말론적 은혜 ) 는
오로지 예수를 통해 왔다( 1:17 ). 또한 아무도,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지 못했지만( 1:18; 참조. 출 33:20, 23; 34:6~7 ),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1:1 ) 언제나, 심지어 지상 사역 동안에도 아버지와 가 장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예수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설명했다( 1:18 ). 또한 요한복음의 기독론적 가르침의 여러 구성 요소도 요한복음의 유대적 배경 및 신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약의 선례에 두고 있음을 실증한다. 요한복 음이 예수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 다( 3:17, 34~36; 5:19~26; 6:40; 8:35~36; 14:13; 17:1 ). 이 은유는 유대인의 삶 및 할라카 의 ‘샬리아’( šālîaḥ ) 개념에서 가져온 것으로, 거기에 따르면 보냄받은 이는 보 내는 이 자신과 같으며 보내는 이의 관심사를 충실하게 추구한다( 참조.
13:16,
23) 앞에 언급한 AD 29년과 33년 사이의 네 유월절의 연대 추정에 대해서는 Humphreys and Waddington 1992: 335를 보라.
32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20 ).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 이미지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하신 일
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며 ( 참조. [3:14] ),
올라가고 내려오는 인자 비유( 참조.
광야의 뱀이 상징하는 대상인 예수
3:14과 8:28, 12:34의 “들림” 발언 ) 는
아마
“인자 같은” 이가 등장하는 묵시적 본문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단 7:13 ).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 성전( 2:14~22; 앞의 ‘역사적 배경’ 및 뒤의 논의를 보라 ) 같은 유대교의 제 도들뿐 아니라 초막절( 7~9장 ) 과 유월절( 19장 ) 같은 유대 절기가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행위에 대한 요한의 기술( 특히 1~12장에서; 앞의 ‘문학적 특징’을 보라 ) 에서 중 심을 차지하는 것은 표적 개념이다( Köstenberger
1995b ).
선례가 되는 구약신학
의 궤적은 출애굽 때 모세가 행한 “표적과 기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따라 서 예수의 표적은 새로운 출애굽을 가리켜 보인다( 참조. 눅 9:31 ). 그러나 요한복 음에서는 예수의 행위의 기적적인 성격이 예언적인 상징과 혼합되거나 심지 어 대치된다( 참조. 사 20:3 ). 모세 및 훗날의 선지자들의 경우처럼, 표적은 주로 표적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진정한 대리자임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예 수의 권위를 입증할 놀랄 만한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호된 비난을 받는 다( 4:48 ). 그렇지만 표적은 믿음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10:38 ). 또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에게 복이 선언되기는 하지만( 20:29 ), 예수의 표적은 분명히 독자들에게 믿음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사 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요한의 신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는 유대 절기와 제도에 내재된 상징을 예수가 성취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세상의 빛”이며( 8:12; 9:5 ) “생수”의 근원이라고( 4:10~14;
7:37~38 )
선언함으로 예수는 초막절 의식 가운데 불을 밝
히고 물을 붓는 의식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월절 주간에 죽음으로 예 수는 유대교 유월절의 원형으로 드러난다( 19:14 ).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 는 자신의 몸이 예루살렘 성전의 진정한 체현이자 성전의 기능을 대체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임으로( 2:14~22 ), 예수는 유대교가 하나님의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하는 임시적인 것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특정한 장 소에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 4:23~24 ).24) 마지막으로 당연히 언급해야 할 두드러진 특징은 요한복음이 예수의 일곱 가지 “나는……이다” 발언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1)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6:35, 41 ), (2) 세상의 빛이고( 8:12=9:5 ), (3)
24)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전의 대체자와 성취로서의 예수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보라. Coloe 2001; Johnson 2001; Hoskins 2002; Kerr 2002. 요한복음의 이 모티프와 제4복음서 작성을 연결시키는 논의는 Motyer 1997과 Köstenberger 근간을 참조하라. 예수와 이스라엘의 심판 및 회복 전승에
대해서는 Bryan 2002을 보라.
33
요한복음
양의 문이자 (4) 선한 목자이며( 10:7,
9, 11, 14 ),
(5) 부활이자 생명이며( 11:25 ),
(6) 길과 진리와 생명이고( 14:6 ), (7) 참포도나무다( 15:1, 5 ). 이 “나는……이다” 용어는 출애굽을 시작할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자기 계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I
am who I am; 출 3:14 ) 를
상기시킨다. 또한 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일관된 묘사를 떠올리게 한다( 예. 52:6 ).
사 43:10~13, 25; 45:18; 48:12; 51:12;
“나는……이다” 발언은 곳곳에서 표적과 관련이 있다( 요 6:35; 11:25 ). 그러
므로 요한복음 표적의 배경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자기 호칭 “나는……이다” 는 모세와 출애굽에서 구약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에 이르는 궤도에서 나타난 다( 참조. 요 12:38~41 ). 메시아 공동체의 선교
예수에 대한 묘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메시아 공동체에 대한 요한의 기술 은 구속사의 패턴을 따른다( Pryor
1992a ).
구약 예표론과 일치하게, 신자들은
“양”( 10장 ) 과 포도나무 “가지”( 15장 ) 로 묘사된다. 그러나 요한은 교회가 이스라 엘을 대치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대체자 라고 밝힌다. 예수는 하나님의 “포도나무”로서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포도원”, 즉 이스라엘 ( 사
5장 ) 을
대신한다. 요한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 4:22 ) 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예수를 거부한 불신 세상에 속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예수의 “자기 백성”( 유대인 ) 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 다( 1:11 ). 유대인 대신 이제 예수의 “자기 사람들”이 된 열두 제자가 예수의 사 랑의 수납자들이 된다( 13:1; 참조. 17장 ). 반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의 양 무리 에 속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10:26 ).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에서 이제 는 유대인들이 배제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이 유대인임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예 수에게 나아가야 한다.25) 요한복음이 구약의 선례를 의지하는 또 다른 사례는 예수가 모세의 고별 담 화를 상기시키는 용어를 사용해 제자들과의 헤어짐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랑하 다”, “순종하다[개역개정 ‘지키다’]”, “계명을 지키다”[13~17장]; 참조. 1:17; Köstenberger 1999a: 144 ).
그러나 구속사의 이 시점에서 예수가 자신의 구속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할 핵심 그룹을 대표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자들이다. 이 공동체는 사명 위임 내러티브에서 공식적으로 구성되는데, 모인 제자들에게
25) 키너(Keener 2003: 227~228)는 요한복음이 “유대인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저자가 유대인 들이 선망하는 권위를 “유대인들”이라는 호칭에 부여하는 한편, 유대인들의 주장을 깎아내리고 있 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고 주장한다(계 2:9와 3:9를 인용하여). 키너는 이런 아이러니를 나타내 기 위해 현대 역본들이 “유대인들”을 인용부호 안에 넣을 것을 권고한다.
34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예수가 숨을 내쉬는 것은 ‘새 창조’를 나타내며 첫 인류 아담의 창조를 상기 시킨다( 20:22; 참조. 창 2:7 ). 예수가 자기를 보내신 이인 아버지를 의존하고 순종 하는 관계는 제자들과 그들을 보내는 이인 예수의 관계의 전형이 된 다( Köstenberger 1998b: 190~198 ). 개별 제자를 다룰 때 요한복음은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 즉 베드로 와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이 두 인물은 자주 함께 등장한다( Quast 1989; 앞의 ‘역사적 배경’을 참조하라 ). 즉 다락방에( 13:23~24 ), 대제 사장 집 뜰에( 18:15~16 ), 빈 무덤에( 20:2~9 ) 그리고 예수의 부활 후 디베랴 바다 에( 21장 ) 함께 나타난다.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대표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참조. 6:67~79 ),
계시에 대한 접근성( 13:23 ) 과 믿음( 20:8 ) 의 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사
랑하는 그 제자 다음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 의 사역이 베드로의 사역과 똑같이 정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두 사람의 사역 은 모두 예수의 사역을 상기시키는 말로 묘사된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베드 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죽음에서 유사성을 볼 수 있으며( 21:19; 참조. 12:33 ), 예수가 사랑하는 그 제자의 경우에는 “예수의 품에” 있는 그의 위치( 이는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할”[개역개정 “나타내다” ] 자격을 부여한다 ) 가
다( 13:23;
참조. 1:18 ).
유사성을 이룬
따라서 예수에 대한 증인 역할은 순교와 복음서 집필처럼
서로 형태가 다를 수 있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부르심에 따라 증언을 해야 한다( 15:26~27 ).
정경상의 위치 요한복음은 1세기말 분파주의 공동체의 산물( ‘요한 공동체’ 가설 옹호자들이 주장하듯 이 ) 이라기보다
공관복음과 다른 요한 문서, 구약, 신약 나머지 부분을 포함하
는 정경 계시의 일부분이다. 정경성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은 AD 2세기 말에 기독교의 성경으로 인정 됐다. 또한 2세기 저자인 타티아노스는 복음서 대조서인 ‘디아테사론’( 헬라어로 ‘넷 을 통해’라는 뜻 ) 에서
요한복음을 다른 세 복음서를 위한 연대기의 틀로 사용했
다( Bruce 1983: 8; 1988: 127; Carson 1991: 28 ). 제4복음서를 요한의 것으로 보고 명백하게 제4복음서에서 인용을 한 첫 번째 기독교 필자는 안디옥의 데오필루스( AD 180년 경 ) 로서
세 권짜리 저서인 『아우톨리쿠스에게』에서였다( 2.22; Pollard 1970:
40 ).26)
26) 2세기 교부들이 요한을 제4복음서 저자로 언급한 데 대한 개관은 Nixon 2003을 보라.
35
요한복음
그 후 곧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복 음서들이 외적인 사실을 제시해 왔음을 알고 있던 요한은 제자들의 간청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맨 마지막으로 영적인 복음서를 썼다”( Eusebius, 6.14.7에서 재인용 ).
Hist. eccl.
그리고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네스가 뒤를 이었다. 이단
마르키온과 분파 집단인 ‘알로고이’ 말고는 초대 교회에서 아무도 이 복음 서의 진정성과 권위, 정경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서들보다 요한복 음이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자기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거의 즉시로 사용했기 때문이 었을 것이다.27) 실제로 요한일서는 그런 오용에 대응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현존하는 요한복음 인용문들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영지주의자인 바실리데 스 ( AD 경 )의
130년경 ) 의
인용이며, 알려진 가장 빠른 주석은 발렌티누스 ( AD 28)
제자인 영지주의자 헤라클레온이 쓴 것이다.
180년
그러나 리용의 이레나
이우스는 영지주의를 논박하면서 제4복음서를 능숙하게 사용했으며, 따라서 제4복음서가 영지주의 사상으로 얼룩져 있다는 관념을 떨쳐 버렸다( Pollard 1970: 42~48 ).
공관복음과의 관계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관계는 여기서 깊이 있게 다룰 수 없을 만큼 방대 하고 복잡한 주제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관계는 상호 독립이나 다양한 정도의 문학적 상호 의존 측면에서 설명해 왔다( 참조. D. M. Smith 1992의
개관 ).
문
학적인 의존성을 입증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공관복음 가운데 하나 이상을 알고 있었거나 사용했다는 것을 순전히 문학적인 근거에 따라 27) 앞의 서론을 보라. 붙트만(Bultmann 1971: 25~31 및 여러 곳)의 주장처럼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적 인 ‘대본’(Vorlage)에 기초하고 있다거나, 요한복음이 가현설을 반영하고 있으며 정경에 잘못 포함 됐다고(Käemann 1968: 76~77의 견해[Sloyan 1996: 127, 129~30에서 재인용]) 생각할 아무런 근 거가 없다. 28) 또한 영지주의 문서인 『진리의 복음서』 및 P.Eger. 2(Pollard 1970: 25에 인용됨)를 참조하라. 바실 리데스에 대해서는 Hippolytus, Refutation of All Heresies 7.22, 27을 보라. 헤라클레온의 저서는 오리게네스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광범위하게 언급한다(참조. Bruce 1988: 128). 웨스트코트 (Westcott 1896: i~ii, 184, 292)와 루타르트(Luthardt 1875: 96, 100~101)는 바실리데스 외에도 로마의 클레멘스(2 Clem. 9:5 [AD 150년경]: ‘에게네토 사르크스’[ἐγένετο σάρξ]; 참조. 요 1:14)와
클레멘스의 설교집(19.22; 참조. 요 9:1~3), 다른 교부 문헌에 나타나는 요한복음을 알았을 가능성 에 대해 논한다. 슬로이언(Sloyan 1996: 130)은 Justin Martyr, 1 Apol . 61.4~5에 나오는 요 3:3, 5 의 명백한 언급을 예로 든다(Carson 1991: 25; 그러나 다음을 보라. J. N. Sanders 1943: 27~28; Pollard 1970: 39; Osborn 1973: 137~138; Skarsaune 1987: 105~106; Pryor 1992b). 또한 카슨 (Carson 1991: 26)은 타티아노스와 아데나고라스(아테네의)를 언급한다. 보컴(Bauckham 1993) 은 에베소의 감독인 폴리크라테스(2세기말)를 추가한다. 반면에 샌더스(J. N. Sanders 1943: 86)는 “속사도 교부들이 그것[제4복음서]을 사용한 어떤 흔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폴 라드(Pollard 1970: 24; 참조. Bultmann 1971: 12)도 마찬가지로 “AD 170년 이전의 것으로 현존하 는 ‘정통’ 문서에는 요한복음의 명백한 인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36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서론
확증하기란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제4복음서 저자가 적어도 공관복음의 존재를 듣지 못했다거나 그 일부를 읽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란 어 려워 보인다. 하지만 제4복음서 저자가 다른 복음서들을 알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분명히 제4복음서 저자는 자신의 내러티브를 집필하는 데 다른 복음서 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오천 명을 먹인 일과 기름부음, 수난 내러티브 이외 에, 요한복음은 대부분의 내용을 공관복음과 공유하지 않는다.29) 따라서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탄생 내러티브와 산상설교, 주기도 문이 나오지 않으며, 예수의 변모나 주의 만찬 기사도 없고, 이야기체 비유들 도 없으며, 축귀와 종말론 담화도 없다. 요한은 독자적인 책을 썼음이 틀림없 다. 그러나 이는 요한의 저작이 사도적 기독교의 주류와 상관없는 분파적인 저작이 되게 하지 않는다( Wenham 1997 ). 오히려 요한은 종종 복음서 전승의 요 소들을 조바꿈하여 제시한다( Köstenberger
2002a: 148~149 ).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의 가르침은 요한복음의 영생 주제에 상당하며, 이야기체 비유들은 예수의 표적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긴 강론으로 대치된다. 더욱이 사복음서 는 모두 예수를 구약의 예언 및 예표를 성취하는 인자와 메시아로 제시한다. 따라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차이를 과장해서 말하지 말아야 한다.30) 다른 요한 문서와의 관계
요한일서는 예수가 참으로 육체로 왔다고 밝힘으로 요한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초기 영지주의의 위협을 제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이 매우 분명하 다. 요한복음도 예수를 같은 식으로 묘사하지만, 초기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책에서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훨씬 두드러진 유사점들을 설명했다( Köstenberger Keener 2003: 123~126 ).
1999a: 203~205; 2000: 283~284; 참조.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것으로( 계
29) 그러나 Carson, Moo, and Morris 1992: 161~162가 열거하는 ‘맞물리는 전승’을 주목하라. 또한 요한이, 하나 이상의 기록된 복음서가 아니라면, 공관복음 전승을 알고 있었다는 내증을 열거하는 Köstenberger 1999a: 36~37을 보라(1:40 안드레, “시몬 베드로의 형제”; 3:24 “요한[세례자]이 아
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4:44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함[참조. 막 6:4 및 평행 구절]; 11:1~2 베다니,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참조. 눅 10:38~42]; 6:67, 71 열두 제자, 유다, “열둘 중의 하나”). 30) Köstenberger 1999a: 36~37, 198~200의 짧은 논의를 참조하라. 스툴마허(Stuhlmacher 2002: 185~187)는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은 단지 서로 다른 시각(마르틴 헹엘이 ‘aspective’라고 부르는) 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제4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이상화된 기억을……촉진한다”고 주 장한다. 스툴마허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역사적 근거를 잃지 않으려면 요한의 증언은 공관복음 및 바울서신 전체, 구약과 일치하게 재조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187쪽).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하지 않으며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사이에 모순점이 있다고 에둘러 말하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참조. Stuhlmacher 1997: 287의 더 솔직한 의견[Köstenberger 2002a: 144 주3에서 재인용]). 당연히, 나는 두 가지 비난을 다 부인한다.
37
요한복음
2~3장 )
고난에 직면한 1세기 말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내가
이전에 제시한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공통된 특징을 참조하라.31)
31) 참조. Köstenberger 1999a: 205; 2000: 284; 또한 Keener 2003: 126~139, 특히 129를 보라. 요한 복음과 바울 문서 및 신약 나머지 책들의 관계는 Köstenberger 1999a: 205~207; 2000: 284~285 를 보라.
38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1:1~18) 이 프롤로그는 요한복음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현관과 같다( Carson 1991:111 ).1) 이 프롤로그에서 요한은 자신이 이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에서 전개시킬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소개한다.2) 세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의 족보 나 탄생 이야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은 창조 이전의 시간, 즉 영원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1:1; 참조. 창 1:1 ). 요한은 예수가 세상에 온 것을 천지창조와 연결시킨다. 그 연결을 통해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 1:14 ) 은 구원 역사와 관련된 사건들의 진행 과정에서 정점에 이르는 것이라 고 알려 준다. 모든 사람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에 가장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진행 과정을 보여 준 다. 즉 천지창조 이전의 말씀의 선재( preexistence;
1:1~2 ) 에서
시작해서 창조까
지 ( 1:3 ), 창조 이후의 시간에서 성육신 이전까지 ( 1:4~5 ), 그 다음 세례 요 한( 1:6~8 ) 및 말씀의 성육신과 그 사건으로 주어지는 영적인 유익들( 1:9~18 ) 로 이어진다( van der Watt 1995: 321; Lindars 1972: 77 ).3) 이 프롤로그가 요한복음 저자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이미 존재 하던 어떤 찬송시를 고쳐 쓴 것인지( 세례 요한에 대한 1:6~8, 15를 삽입하여 ) 에 대해 논 란이 있기는 하지만,4) 의심할 여지없이 이 프롤로그는 신약 전체에서 가장 1) 로빈슨(J. A. T. Robinson 1962~1963)은 이 프롤로그에서 “오페라의 서곡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의 주제들이 미리 연주되고 있다”라고 말한다(Viviano 1998: 183에서 재인용). 비슬리-머리 (Beasley-Murray 1992: 1867)는 이 프롤로그를 “세상을 향한 로고스-아들(the Logos-Son)의 사명
을 미리 짐작하게 하는 묘사”라고 부른다.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에 대한 참고문헌은 매우 방대하다. 다음을 참조하라. van der Watt 1995: 311 주1; Kurz 1997: 179 주1. 한편 이 프롤로그에서 예고되 는 주제들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 주석 732쪽에 제시된 도표를 참조하라. 2) 바로 이 점에 근거해서, 이 프롤로그에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미리 알려 주기”(Harnack 1892: 191), “소우주”(Valentine 1996),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윤곽 제시”(Booser 1998: 13) 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다(MacLeod 2003: 48 주1에서 재인용). 3) 요한복음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시간의 윤곽을 제시하는 상세한 도표는 Culpepper 1983: 70을 참 조하라. 또한 Burns 1971 및 Davies 1992: 44~66의 ‘제4복음서의 시간 구조’라는 이름이 붙은 장을 참조하라. 4) 컬페퍼(Culpepper 1980~1981: 1)는 바레트(Barrett 1971: 27)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인용한다. “이 프롤로그는……기초가 튼튼한 신학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 프롤로그 전체를 저술했다”(참조. Barrett 1975a: 20~35). 키너(Keener 2003: 333~334)는 이 프롤로그가 원래 요한 복음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아마도 저자(사도 요한)가 요한복음 초고를 완성하고 나서 프롤로그를 덧붙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키너(Keener 2003: 333~334)의 견해에 따르면, 고대의 저술가들은 흔 히 자신의 저서의 주요한 주제들을 저서 맨 앞부분에서 소개했다(참조. 키너가 2003: 334 주10에서 제시하는 예들). 불트만은 이 프롤로그가 기독교가 형성되기 이전 단계에 영지주의적인 특징을 지닌 어떤 찬송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믿는다. 또한 불트만은 이 찬송시가 세례 요한의 그룹에서 비롯된 것이며, 제4복음서의 저자가 그것을 받아들여서 고쳐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Bultmann 1923: 4; 참 조. Ashton 1986: 161의 요약).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다른 많은 신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밸런타인
41
요한복음
훌륭하고 주도면밀하게 작성된 시다( R. Brown 1966: 22; Beasley - Murray 1999: 3 ).5) 프 롤로그의 시작 부분( 1:1~5 ) 에서, 저자는 ‘계단 형식의 평행 구조’를 사용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 행( 行 ) 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개념을 소개하고, 그 다음 행의 맨 처음 부분에서 그 개념을 다시 언급한다 ( Culpepper 6)
9~10 ).
1980~81:
이 형식은 1장 6~9절에서 잠시 끊어진다. 해당 절들은 다소 평범한
산문으로 쓰였다. 하지만 그 형식은 1장 10~11절과 1장 17절에서 다시 사용 된다( R. Edwards 1988: 8 ).7) 그리고 1장 1~2절에서 묘사되는 문학적인 기교는 가 장 인상적이다. 이 절들은 계단 형식의 평행 구조뿐 아니라 또한 교차대구 구 조를 지니고 있다( Lund
1931: 42[Culpepper 1980~81: 9~10에서 재인용]; 참조. Stanley 1986:
8)
243, 1988: 50~51 ).
A 엔 아르케( ἐν ἀρχῇ, 태초에 ) B 엔( ἦν, 있었다 ) C 호 로고스( ὁ λόγος, 그 말씀 ) D 카이 호 로고스( καὶ ὁ λόγος, 그리고 그 말씀 )
5)
6)
7)
8)
42
(Valentine 1996)은 이 프롤로그가 요한복음의 원래의 구조에서 명백하게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 주장한다. 이 프롤로그는 요한복음의 주요한 신학적인 주제들을 미리 보여 주려는 의도를 지닌 진 정한 서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나중에 생각해 낸 것이거나 복음서의 본론이 완성된 다음에 쓴 후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해리스(E. Harris 1994: 26)도 이 프롤로그는 “맨 처음부터 요한복음 저자 자신이 구성하고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MacLeod 2003: 49~52가 제시하는 개 관을 참조하라. 모리스(Morris 1995: 64)는 이 프롤로그를 “숭고하게 표현된 산문”이라고 부른다. 요한복음 프롤로 그와 관련된 이런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다루는 최근의 논문으로 MacLeod 2003: 48~64를 참조하라. 이 프롤로그의 구조에 대한 논의는 Keener 2003: 334~337을 참조하라(세례 요한에 대한 구절들 [1:6~8]을 생략한 채, 키너[Keener 2003: 337] 자신은 세 연(聯)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설득력이 거의 없다). 1:1~2에 대한 코히(Cohee 1995: 471~472)의 탁월한 분석을 참조하라. 코히는 이 절들이 “계단 형 식의 평행 구조”와 교차대구 구조(각각 1행과 2행 사이 및 2행과 3행 사이)를 지녔으며, 또한 이 구조 에서 헬라어 동사 ‘엔’(ἦν, 있었다)이 각 구절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또한 코히는 이 구 조를 통해 세 번째 행에 있는 헬라어 명사 ‘데오스’(θεός, 하나님)가 강조 위치에 있다고 지적한다. 참 조. Keener 2003: 364~365. 또한 코히(Cohee 1995: 474~475)는 다음과 같이 올바로 언급한다. “6~9절은 ‘어느 정도’ 표현의 반 복 패턴이나 운율 구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아니면 사실상 시 형식으로 된 찬송시 사이에 삽입된 산 문으로 된 주해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절들의 구조는 1~5절만큼……쉽게 분석되지 않는다. 이 점은 12~18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10~11절은 그와 같은 구조를 보여 준다.”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대해서는 몇몇 매우 독창적인 구조가 제안되었다. 때때로 유일한 한계는 해석 자의 상상력인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학자들은 이 프롤로그가 세 개의 연속적인 ‘파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파도는 세 가지 동작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La Potterie 1984; Moloney 1977: 35~39; 1993: 25~27; Viviano 1998). 한편 콜로우(Coloe 1997: 44~46)는 1:1~2를 머리말로, 1:18을 결론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1:3~17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분은 각각 세 연(聯), 곧 첫 번째 부분은 1:3~5, 6~8, 9~13, 두 번째 부분은 1:14, 15, 16~17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 구조는 창 1:1~2:4의 여섯 날의 구조와 평행을 이룬다고 한다. 콜로우의 견해 에 따르면,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은 일곱째 날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E 엔( ἦν, 있었다 ) F 프로스 톤 데온( πρὸς τὸν θεόν, 하나님의 바로 곁에 ) F′ 카이 데오스( καὶ θεός, 그리고 하나님 ) E′ 엔( ἦν, 있었다 ) D′ 호 로고스( ὁ λόγος, 그 말씀 ) C′ 후토스( οὗτος, 이는 ) B′ 엔( ἦν, 있었다 ) A′ 엔 아르케 프로스 톤 데온( ἐν ἀρχῇ πρὸς τὸν θεόν, 태초에 하나님의 바로 곁에 ) 또한 요한복음 서론 부분( 프롤로그 ) 의 커다란 구조도 십중팔구 교차대구법의 유형을 따를 것이다 ( 하지만
학자들의 구체적인 제안은 서로 다르다. 참조. Lund 1931: 44;
Boismard 1957: 79~80; Lamarche 1964; Feuillet 1968: 160; Hooker 1969~70: 357; Borgen 1970, 1972; Culpepper 1980~81; Pryor 1990: 201~202; Booser 1998: 16; Kruse 2003: 59~60 ).
이 구조
에서 말씀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 다. 그리고 그것은 세례 요한의 증언에 대한 언급들로 둘러싸여 있다.9) A 천지창조에서 말씀의 사역( 1:1~5 ) B 빛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1:6~8 ) C 말씀의 성육신 및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1:9~14 ) B′ 말씀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세례 요한의 증언( 1:15 ) A′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최종적인 계시( 1:16~18 ) 프롤로그의 구조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1장 1~2절과 1장 18절이 상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오직 이 절들에서 만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 언급된다. 또한 그 말씀은 하나 님 앞으로 돌아간다. 이 언급들은 “질서와 균형과 완성의 의미를 전달한 다”( Culpepper 1980~81: 10 ). (2) 헬라어 명사 ‘데오스’( θεό́ς, 하나님 ) 는 1장 1~2절에 세 번, 1장 18절에 두 번 나타난다. 하지만 프롤로그의 나머지 부분에서 오직 세 번만 나타난다( 또한 세 번 가운데 두 번은 중심 부분, 즉 1:12~13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주목하 라 ).
(3) 그리고 1장 1~2절과 1장 18절은 영원한 시간에 대해 서로 균형을 이
루는 언급을 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참조. ‘아르케’[ἀρχῇ, 태초에]; ‘포포테’[πώ́ποτε, 언 제든지] ).
9) 브와마르(Boismard 1957: 79~80)와 그의 이후로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1:1~11 은 말씀이 내려오는 것을 다루는 반면 1:14~18은 말씀이 올라가는 역학 관계가 특징이라고 말한다.
43
요한복음
1장 3절의 ‘디 아우투 에게네토’( διʼ αὐτοῦ ἐγένετο, 그를 통해 생겨났다; 개역개정 “그로 말 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말씀이 천지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을 확언함 ) 는
1장 17절에서 ‘디아
예수 크리스투 에게네토’(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ἐγένετο,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겨났다; 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계시와 관련한 예수의 역할을 확언함 ) 에
반영된다.
또한 1장 4~5절과 1장 16절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개념적인 측면 에서 서로 평행을 이룬다. 즉 ‘빛과 생명’은 ‘은혜가 충만한 것’과 상응한다. 그리고 1장 6~8절과 1장 15절은 분명히 세례 요한에 대해 언급한다는 공통 점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말씀의 성육신은 1장 9~11절과 1장 14절에서 언급 된다( Culpepper 1980~81: 13~14 ). 1장 12a절이 1장 12c절과 상응하듯이, 교차대구 구조의 한가운데서( 이 구조 는 헬라어 본문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남 ),
1장 11b절과 1장 13절이 상응한다. 이 구
조는 1장 12b절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를 절정으로 만들어 준다.10)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1장 52절에서도 또다시 나타난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는 이방인 신자들도 포함된 다고 언급된다( 참조. 10:16 ). 그리고 그 표현은 8장 41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제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참조.
8:31~47 ).
8장 41절의 전후문맥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8:31~38 ), 또한 그 말 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그 말씀을 실행하는 자들이다( 8:39~47 ).11) 위에서 언 급한 커다란 구조에 기초해서, 프롤로그는 교차대구 구조와 그 안에서 서로 상응하는 연들( strophes ) 로 나눌 수 있다( 아래 제시된 프롤로그에 대한 저자의 번역 참조 ). 즉 1장 1~2절은 1장 18절, 1장 3절은 1장 17절, 1장 4~5절은 1장 16절, 1장 6~8절은 1장 15절, 1장 9~10절은 1장 14절과 상응하며, 1장 11~13절은 이 구조의 한가운데 위치한다.12) 요한복음 프롤로그의 시작 부분( 1:1~5 ) 은 말씀이 천지창조에 동참했다는 것 을 특징적으로 묘사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 말씀은 빛과 생명을 주는 존재로 묘사된다. 요한복음 저자는 비로소 1장 17절에서 예수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밝힌다. 1장 1~5절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기독론과 관련된 요소들을 기대하게
10) Culpepper 1980~81: 15~17. 프라이어(Pryor 1990: 202)의 다음과 같은 관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 다. 즉 1:14를 프롤로그에서 “성육신의 위대한 전환점”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며, “의심할 여지없이 1:12~13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1:9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 이다. 한편 스탤리(Staley 1988: 53~55)는 1:12~13이 그 구조의 중심이라고 제안한다. 11) 참조. Culpepper 1980~1981: 26~31. 요한일서와 관련해서, 컬페퍼는 요 1:12는 요일 3:1~2에 반 영되어 있고, 요일 3:10(참조. 요일 5:2)은 요 8:31~47에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12) 비슷하기는 하지만 서로 동일하지는 않은 분석에 대해서는 Staley 1986: 245~246을 참조하라(하지 만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구조에 대해 스탤리가 제안하는 함의는 다소 주관적이다).
44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하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저자는 1장 9~14절과 1장 16~18절에 이르기까지, 기독론과 관련된 요소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13) 하지만 해당 절들도 말씀이 ‘자기의 집’에 왔을 때, 세상이 말씀을 거부한 것( 1:10 ) 과 하나님 아버 지께로부터 온 유일무이한 아들로서 말씀의 성육신( 1:14, 18 ) 에 대한 무대를 제 공한다. 요한복음 1장 5절은 말씀이 어둠의 세력에게 승리한다고 말하는 것 처럼 들린다. 또한 1장 5절은 이 복음서가 예수의 사역과 수난을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우주적인 싸움으로 묘사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 준다. 프롤로그 전체( 1:1~18 ) 는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에 기초를 제공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장 1~5절은 프롤로그의 나머지 부분에 기초를 제공 한다. 예수에 대해 증언한 세례 요한이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 천지창조 이 전부터 말씀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말씀은 나중에 예수 안에서 성육신한다. 그러고 나서 성육신한 말씀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한 다( 참조. 1:15 ). 요한복음 1장 6~8절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사역이 구원 역사 안에 서 닻을 내리게 한다. 공관복음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저자도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이 “그리스도 사건( Christ - event ) 에 속하는 것”으로 제시한 다( Ridderbos 1997: 41 ). 1장 15절과 더불어, 세례 요한에 대한 이와 같은 언급은 프롤로그 다음에 1장 29절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문 학적인 측면에서 자료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프롤로 그에 들어 있는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들이 이미 존재하던 어떤 찬송시( 요한이 저술하지 않은 ) 에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14)
요한복음 프롤로그에서 점차적으로 그 논리가 고조되어 가는 부분 ( 1:9~ 14 ) 은 참
빛이 세상에 왔으며( 1:9; 다소 밋밋한 진술 ) 말씀이 성육신했다는( 1:14; 정말로
놀라운 주장 )
언급들로 틀이 짜여 있다. 요한복음 1장 10~11절은 세상( 말씀에 의해서
13) 스티브(Stibbe 1993)는 “요한복음에서 묘사되는 예수의 주요한 특징”이 “파악하기 어려움”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면서 스티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요한복음 내러티브 전체를 통해서, 실재 (presence)와 언어(language)의 측면에서, 예수는 사람들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25쪽). 요한복음 내러티브의 몇몇 부분에서 스티브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1:18에 대한 스티브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정확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므로 프롤로그의 끝에서 우리는 예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을 반영한다는 암시를 받는 다”(26쪽). 스티브의 이 주장이 1:18에서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사람들의 이해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사역하던 시기에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아들 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참조. 14:6). 14) 핸헨(Haenchen 1984: 1.117)는 1:6~8이 이미 존재하던 어떤 찬송시에 다소 서투르게 삽입됐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불트만(Bultmann 1971: 49)은 세례 요한에 대한 자료가 그를 숭배하는 것을 논박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라고 믿는다(참조. Schnackenburg 1990: 1.249~250). 한편 리더 보스(Ridderbos 1997: 42)는 프롤로그의 통일성을 열렬하게 변호한다. 몰로니(Moloney 1998: 37)는 현재의 형태대로 제시된 프롤로그에서 1:6~8은 꼭 있어야 하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45
요한복음
지어짐[1:3] ) 과
심지어 자기의 백성( 곧 이스라엘 ) 이 참 빛인 말씀을 거부했다고 말
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 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고 밝힌다. 여기서 1장 12절은 프롤로그 전체에서 주요한 클라이맥스의 역할을 한다( Culpepper 1980~81 ). 또한 1장 13절 은 1장 12절을 보충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1장 11절과 1장 13절은 유대 민족 이 스스로 인종적인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저자는 모든 사람에게 또한 각 사람에게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만 요구된다는 것에 이 복음서의 중심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저자의 그 와 같은 언급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온 세상과 모든 사람 을 대상으로 하는 이 복음서의 이와 같은 범위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경계 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범위는 프롤로그의 천지창조에 대한 언급에서 더욱 발전된다. 교차대구 구조로 배열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요한복음 저자는 세례 요한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1:15; 참조. 1:6~8 ). 세례 요한에 대한 이전의 언급은 단지 요 한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저자는 세례 요한의 증언의 ‘내용’을 자세하게 밝힌다. 그리고 교차대구 구조는 프롤로그 마지막 부분에서 종결된 다( 1:16~18 ). 요한복음 1장 16절은 1장 4~5절과, 1장 17절은 1장 3절과, 1장 18절은 1장 1~2절과 서로 상응한다. 말씀을 통한 천지창조의 선물들이 생명 과 빛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1:4~5 ),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은 충만한 은혜, 즉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다( 1:16; 개역개정 “은혜 위에 은혜” ). 이뿐 아니라, 말 씀을 통해 세상이 만들어졌듯이, 성육신한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는 은혜와 진리가 주어졌다( 1:17; 참조. 1:3 ).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이 이 프롤로그를 시작할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프롤로그를 끝맺는다. 즉 저자 는 말씀( 곧 참조. 1:1 ).
예수 ) 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프롤로그를 마무리한다( 1:18;
따라서 예수의 사역은 천지창조에 동참한 말씀이 종말론적으로 성육
신해서 활동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결정적 으로 계시되었다고 묘사된다. A. 천지창조에서 말씀의 사역( 1:1~5 ) B. 빛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1:6~8 ) C. 말씀의 성육신 및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1:9~14 ) D. 말씀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세례 요한의 증언( 1:15 ) E.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최종적인 계시( 1:16~18 )
46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 1:1
주해 및 설명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
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 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 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 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
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 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
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 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
| 15)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3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 and wit‑hout him nothing was made that has been made. 4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all people; 5 and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but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6 There was a man sent from God, by the name of John. 7 He came to give testimony concerning the light, so that through him all might believe. 8 That man was not the light; rather, he came to testify concerning the light. 9 The true light that enlightens every person was indeed coming into the world.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ough the world was made through him, yet the world did not recognize him. 11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12 Yet to all who did receive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to thos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13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14 And the Word was made flesh and pitched his tent among us, and we have seen his glory, glory as that of the one-ofa-kind Son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15 John testifies concerning him and 1:1
15) 앞에서 논의한 바에 기초해서, 저자는 다음에 제시되는 영어 번역에서, 교차대구 구조를 반영할 수 있도록 절들을 작은 단위들로 나누었다. 즉 1:1~2는 1:18에, 1:3은 1:17에, 1:4~5는 1:16에, 1:6~8은 1:15에, 1:9~10은 1:14에 상응한다. 그리고 1:11~13은 이 교차대구 구조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47
요한복음
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 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 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
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
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cries out, saying, “This is the one of whom I said, ‘The one who comes after me ranks ahead of me, because he was before me.’” 16 From his fullness we have all received grace for grace. 17 For the law was given through Moses—tr ue, ultimate grace came through Jesus Christ. 18 God no one has ever seen: ⌜the oneof-a-kind⌝ Son, God [in his own right], who lives in closest relationship with the Father—that one has given full account of him.
A. 천지창조에서 말씀의 사역 ( 1:1~5 ) [1:1] “태초에”라는 구절은 히브리어 성경의 첫 구절을 연상시킨다( 창
1:1 ).
또한 이 구절은 구약 맨 처음에 언급되는 단어들과 요한복음 사이에 정경적 인( canonical )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여기서 “태초”라는 용어는 창 조 이전의 시간을 가리킨다( R. 16)
1990: 1.232 ).
Brown 1966: 4; Beasley - Murray 1999: 10; Schnackenburg
아마도 요한복음의 처음 독자들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라는 표현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저자는 그 표현 대신에 “태초 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말한다( Beasley - Murray 1999: 10 ). 이 절의 초점은 바로 말씀의 선재성( preexistence ) 을 밝히는 것이다( Ridderbos 1997: 25; Schnackenburg 1990: 1.232 ).
그리고 이 절은 나중에 언급되는 새로운 ‘시작’, 즉 말씀의 성육신( 참조.
1:14 ) 에 대해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Morris 1995: 64; Carson 1991: 114 ).
오직 요한복음 프롤로그에서만 “말씀”이라는 용어가 기독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그분의 의사를 표현하시는 것, 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개념을 전달한다( 참조. 시 19:1~4 ).17) 창세기가 묘사하는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과 효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16) 헬라어 명사 ‘아르케’(ἀρχή)는 ‘태초’라는 의미 이외에 ‘첫 번째 원인’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아르케’라는 용어를 통해서, 여기서 요한은 ‘역사의 시작에’와 ‘모든 것의 근원에’라는 두 가지 의 미를 전달하고자 시도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Morris 1995: 65). 17) 칼빈(Calvin 1959: 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그) 말씀’이라고 부르 는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지혜이며, 하나님 의 뜻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이미지다. 말(언어)을 사 람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부르듯이, 이를 하나님에게 똑같이 적용해서 하나님이 그분의 언어(His Speech)나 말씀(Word)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표현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니다.”
48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됐다( 창 1:3, 9; 참조. 창 1:11, 15, 24, 30 ). 또한 시편 기자들과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인 존재와 매우 가까 운 용어들로 묘사한다( 시
33:6; 107:20; 147:15, 18; 사 55:10~11 ).
하지만 오직 요한만
이 말씀이 어떤 구체적인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참 조. 요일 1:1; 계 19:13 ).
기독론에 대한 포괄적인 호칭으로서, “그 말씀”이라는 표현
은 예수의 모든 사역을 포함한다. 즉 이 표현은 예수의 모든 사역과 말들을 그의 영원한 존재와 실존18) 및 구원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구 조 안에 위치하게 한다.19) 요한복음 저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헬라 청중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이 해시키려고 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키너( Keener 2003 ) 는 로고스 개념에 대 해 상세하게 논의한다. 즉 영지주의에서의 로고스 개념( 339~341쪽 ), 헬라 철학 에서의 로고스 개념( 341~343쪽 ), 필론 철학에서의 로고스 개념( 343~347쪽 ), 지혜 와 말씀과 토라( 350~360쪽 ),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토라의 관계( 360~363쪽 ) 에 대 해 자세하게 다룬다. 로고스라는 용어와 관련해서는 다음 세 가지 주요한 배경 이 제시된다. (1) 헬라 철학( 스토아 사상 및 필론 ), (2) 지혜의 의인화, (3) 구약.20)
18) 마이클스(Michaels 1989: 21)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복음 다른 곳에서 예수는 ‘말한다’. 그러나 프 롤로그에서 예수는 바로 그 말씀(the Word)‘이다’. 즉 프롤로그에서 예수는 자신이 선포하는 모든 것의 인격적인 구현이다.” 19) 장막에 대한 1:14의 언급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에 대한 1:17의 언급을 참조하라 (참조. 5:46). 베어(Behr 2000: 94[참조. M. Edwards 1995])가 지적하듯이, 순교자 유스티누스 (Justin Martyr)를 포함하여, AD 2세기의 교부들에게 “성육신한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개 별적으로 이루어진 연속적인 계시들 중에서 최종적인 아마도 가장 중요한 계시일 것이다.” 또한 이 레나이우스(Irenaeus)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인 선재하는 그리스도는 하나 님의 말씀인 성경에 새싹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뗄 수 없는 관계다”(inseminatus est ubique in Scripturis ejus Filius Dei; Behr 2000: 98). 20) 보다 상세한 논의는 Miller 1993: 448~449를 참고하라. 밀러는 아홉 가지나 되는 서로 다른 견해들 을 소개한다. (1) 구약의 ‘다바르’, (2) 지혜(R. Harris 1917), (3) 헬라 철학(스토아 사상), (4) 필론 (Evans 1993: 100~145; Tobin 1990), (5) 아람어 단어(mmr’; Hayward 1978), (6) 토라에 대한 랍비들의 고찰, (7) 헤르메스 문헌과 같은 영지주의 자료, 특히 포이만드레스(Poimandres)(Pagels 1990), (8) 헬레니즘·영지주의 사상의 구원자 신화와 솔로몬의 송가(Bultmann 1923; 1973; 1971), (9) 하나님의 침묵의 깨어짐(Jeremias)이다. 에프(Epp 1975)와 같은 몇몇 학자는 앞에서 언 급한 배경들 가운데서 두세 가지를 결합시킨다(예를 들면, 에프는 지혜와 토라를 결합시킨다). 밀러 (Miller 1993:452)는 자신의 이전 저서(1989)에 기초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즉 로고스 는 기독론적인 칭호는 아니지만,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라는 용어는 “일종의 기독론적인 투명성”(B. Reicke의 용어)을 지닌 채 사용됐다는 것이다. 밀러는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요한복음 자체보다 나 중에, 심지어 요한일서보다도 더 나중에 쓰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프롤로그의 로고스 의 기원을 제4복음서 안에서 찾는다. 즉 그는 “요한복음 7:46에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일컬어지던 사람은 마침내 타당하게도 ‘그 말씀’이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견해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판단한다(밀러[Miller 1999]는 헬라어 명사 ‘아르 케’[ἀρχή]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프롤로그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구약의 거대한 하부 구조를 없애 버린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시도다. 밀러의 이와 같은 견해를
49
요한복음
스토아 사상에서 ‘로고스’는 우주를 다스리는 비인격적인 원리인 이 성( Reason ) 이다. 스토아 사상에서는 우주 이성의 불꽃이 사람들( 그들 중에서 적어 도 가장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들 )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상함과 의미를 얻고
자 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이 우주 이성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요한복음 저자가 스토아학파에서 주장하는 ‘로고스’ 개념을 잘 알고 있었겠 지만, 우주 이성이라는 개념이 요한복음 프롤로그에서 주요한 개념적인 틀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쾨스텐베르거[Köstenberger 1999a: 52]가 제시하는 세 가지 이유를 참고하라 ).
로고스의 배경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대상은 지혜 문헌에서 지혜가 의인화 되어 묘사되는 것이다( 참조.
예. Talbert 1992: 68~71 ).
잠언 8장( 특히
22~31절 ) 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지혜를 가지셨으며( 잠 8:22 ),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지혜가 세움을 받았다( 잠
8:23 ) 고
언급한다. 그리고 지혜가 여호와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
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 잠 8:30 ) 했다고 묘사 한다. 외경이나 위경의 지혜 문헌에서 많은 부분들이 지혜에 대한 이와 같은 개념들에 기초해서 묘사된다( 집회서 1:1~10; Wisdom of Solomon ). 잠언 8장에서 묘사 되는 지혜의 특성과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이의 여러 가지 유사점들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인상적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지혜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했다고 언급된다. 나아가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지혜는 피조 세계뿐 아니라 또한 율법 안에서 하나님 의 자기 계시의 수단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이와 같은 유사점들 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몇몇 중요한 관점에서 의인화 된 지혜와 서로 다르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소피아’( σοφί́α, 지혜 ) 라는 용어가 나 타나지 않는다( Schlatter 1948: 43; 쾨스텐베르거[Köstenberger 1999a: 53]가 지적하는 세 가지 차 이점을 참조하라 ).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프롤로그가 언급하는 로고스의 배경으로 제시되는 세 번째 대상은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제안은 가장 추천할 만하 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태초에”라는 구절 을 통해서, 요한복음 저자는 히브리어 구약 창세기의 맨 앞부분에서 언급하 는 처음 두 단어들이 자신의 복음서 맨 앞부분에서도 울려퍼지게 하려고 매 우 신중하게 시도한다. (2) 창세기 1장에서 언급되는 몇몇의 의미심장한 용 어들이 요한복음 1장에서도 나타난다( 예.
“빛,” “어둠,” “생명” 등 ).
(3)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구약이 묘사하는 사건들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따르는 학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50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한 것( 1:14, 다] ) 과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문자적으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쳤
여호와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다( 1:17~18 ).
( 4 ) 요한복음 저자는 자신의 기독론적인 기본 구조를 위해 이사야 55장 9~11절을 자기 방식대로 새롭게 표현했다( Köstenberger 1999a: 54 ).21) 말씀이 태초에 존재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거나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이 두 가 지를 모두 확언한다. 첫째, 요한은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 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전치사 ‘프로스’( πρό́ς ) 는 장소 또는 함께 함을 가리 키지만, 또한 성향과 방향을 가리키기도 한다( Ridderbos 1997: 25 주23 ).22) 따라서 이 헬라어 전치사는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또는 교제하고 있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Pollard 1977: 364~365 ).23)
상호 관계라는 의미와 관련해서, ‘프로스’( πρό́ς ) 는 하나님과
말씀 사이의 관계를 가장 가깝게 연결시켜 줄 뿐 아니라, 또한 이 전치사는 하나님과 말씀을 서로 구별시켜 준다( R. Brown 1966: 5 ). 1장 1절에서 헬라어 동사 미완료 과거 ‘엔’( ἦν ) 은 존재, 관계 및 서술 등의 의미들을 전달한다 ( R.
Brown 1966: 4; 이 헬라어 동사는 1:3, 6, 14에서 나타나는 ‘에게네토’
[ἐγένετο, 왔다 또는 되었다]와 서로 대조된다 ).
다소 지나친 번역이라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이 헬라어 동사는 “그 말씀이 지속적으로 있었다”를 의미할 것이다( Morris 1995: 65; 미완료 과거형 이외에, 헬라어 동사 ‘에이미’[εἰμί]는 직설법 과거 시제를 가리 키는 다른 형태가 없음 ).24)
이 문맥에서 말씀이라는 존재는 “시간과 장소의 한계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왜냐하면 ‘엔 아르케’( ἐν ἀρχῇ, 태초에 ) 에서는 시간도 장 소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Moloney 1998: 35 ). 21) 비비아노(Viviano 1998: 182)는 “이사야서의 이 구절들[사 55:10~11]은 거의 틀림없이 요한복음 1:1~18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라고 언급한다. 22) 몰로니(Moloney 1998: 35)는 헬라어 전치사 ‘프로스’(πρός)가 ‘함께’라는 의미뿐 아니라, 또한 움 직임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몰로니는 이 전치사를 어떤 대상을 ‘향해서 돌이킨’ 이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프로스’(πρός)에 원래부터 움직임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상태
를 나타내는 동사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Wallace 1996: 358~359; 슈나켄부르그 [Schnackenburg 1990: 1.234]도 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린다스(Lindars 1972: 84)는 이 전치사가 여기서 ‘……와 짝을 이루어’를 의미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웨스트코트(Westcott 1908: 1.6)는 “말씀이 인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능동적으로 친밀하게 대화하며 하나님과 완 전하게 교제하는 것을 통해 실현되었다”라고 주장한다. 한편 불트만(Bultmann 1971: 32~33)은 헬 라어 구문 ‘엔 프로스’(ἦν πρός)가 헬라어 전치사 ‘파라’(παρά) + 여격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셈어적 인 표현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23) 브라운(R. Brown 1966: 4~6)은 ‘동반’을 가리키는 ‘함께’와 ‘관계’를 나타내는 ‘……을 향해서’를 결합시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존재 앞에(in God’s presence) 있었다.” 한 편 로버트슨(A. T. Robertson 1934: 623)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라고 해석한다 (MacLeod 2003: 57에서 재인용). 24) 린다스(Lindars 1972: 82)는 ‘엔’(ἦν)을 “지속적인 과거”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헬라어 동사의 미 완료 과거는 “실질적으로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 개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51
요한복음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헬라어 명사 ‘데오스’( θεό́ς, 하나 님; 1:2, 6, 12, 13, 18에서도 사용됨 ) 는
요한복음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단어였을 것이
다. 이 헬라어 명사는 창조주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70인역 창세기 1장 1절에 서도 나타난다. 또한 이 단어는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어떤 신’을 가리킬 때 도 사용된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전들은 수십 명의 신으로 가득했다. 이 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을 믿었다( 신 6:4 ). 자신의 복음 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은 바로 예수와 유일무이한 관계에 있는 “아버지”다( 참조. 1:14, 18 ).25) 한편으로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이사야서의
인격화된 말씀과 지혜 ) 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라는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주 장이다.26) 말씀( 예수라는 이름은 1장 17절에 이르기까지 프롤로그에서 언급되지 않음 ) 을 하나님 과 서로 구별하고 나서, 요한은 이제 그 말씀과 하나님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 는 특성을 밝힌다. 즉 하나님과 그 말씀은 모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M. Harris 1992: 67; Luther 1957: 15 ).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명히 AD 1세기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의 경계선을 연장하는 것이다( 참조. Bauckham 1998a; Hurtado 1998b ).
교부 시대로부터( 예.
아리우스 )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
여호와의 증인 ),
이
절은 예수가 단지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가 아니라, ‘어떤’ 신적인 존재라는 것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왜냐하면 이 절에 사용된 헬라어 명 사 ‘데오스’( θεό́ς, 하나님 ) 앞에 정관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몇 가 지 근거들에 따르면, 이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27) 첫째,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으로서, 요한은 다른 사람을 ‘어떤 신’이라고 언 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만약 요한이 헬라어 명사 ‘데오스’( θεό́ς ) 앞에 정관 사를 붙였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말씀을 똑같이 만들어서, 이전 구절( “이 말씀이 25) 요한복음의 “하나님”과 “아버지”에 대해서는 특히 톰슨(Thompson 2000; 2001)의 유익하고 통찰 력이 풍부한 연구서들을 참조하라. 제4복음서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의 특성에 대해서는 Tolmie 1998를 참조하라. 또한 아버지에 대해 Meyer 1996: 255~273 및 Fisher 2003을 참고하라. 26) 예수의 신성과 유일무이함에 대한 간략한 개요로서, 특히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Köstenberger 1998b: 46~47(참조. 주7~8에 제시된 이 주제에 대한 참고문헌)을 보라. 27) 1:1c의 표현이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여호와의 증인과의 논쟁에 대해서는 Hartley 1999 를 참조하라. 맨 먼저 하틀리는 논쟁의 역사에 대해 개관한다. 즉 콜웰(Colwell 1933: 12~21)에서 시작해서, 하르너(Harner 1973: 75~87)와 딕슨(P. Dixon 1975)의 해당 논문들을 살펴본 다음에, 하틀리(Hartley 1996)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하틀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하나님 아버지가 ‘톤 데온’(그 하나님)이었던 것과 똑같이, 그 말씀은 모든 면에서 ‘데오스’(하나 님)였다(1:1c).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신(a god)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은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어떤 신’이 아니었다”(Hartley 1999: 1, 1996의 논문을 요약함). 참조. MacLeod 2003: 59~60; Keener 2003: 372~374. 키너는 프롤로그에서 나중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은 경우들(1:6, 12, 13, 18)에서 헬라어 명사 ‘데오스’(θεός)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지적
한다. 또한 키너는 20:28에서 정관사와 함께 사용되는 ‘데오스’(θεός)가 바로 예수를 가리킨다고 언 급한다(373쪽).
52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에서
분명하게 언급된 두 인격, 즉 하나님과 말씀 사이의
구별이 거의 없어지는 결과를 빚을 것이다. 셋째, 헬라어 구문에서는 정형동 사( a finite verb ) 에 선행하는 한정적인 주격 서술 명사에 정관사가 붙지 않는 경 우가 흔하다( Colwell 1933: 12~31; McGaughy 1972; Wallace 1996: 256~270 ). 그래서 이 절 에서 ‘데오스’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명사가 어떤 명확하 지 않은 대상을 가리킨다고 추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사실상 만약 요한이 단순히 예수가 어떤 신적인 존재였다고 확언하기를 원 한다면, 그것을 묘사하는 데 전적으로 적합한 헬라어 형용사가 있다. 즉 ‘데이 오스’( θεῖος, 1991: 117 ).
신적인 또는 신성을 지닌 ) 이다( R. Brown 1966: 5; Bultmann 1971: 33~34; Car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정관사가 붙지 않은 ‘데오스’( θεό́ς ) 는 어떤
대상을 한정하는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특성 을 나타낼 것이다. 즉 예수는 “아버지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말씀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적인 존재다”( Wallace 1996: 269 ). 따라서 하나님에 대 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또한 말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Morris 1995: 68; Wallace 1996: 735 ).
말씀과 대조적으로, 지혜는 결코 ‘데오스’( θεό́ς, 하나님 ) 라고 언
급되지 않는다. [1:2] 이 절은 1절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반복해서 단순히 그 내용을 강조하
는 것 이상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보커르트[Borchert 1996: 106]의 견해 ).28) 이제 독자들은 1장 1절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 1장 1절 하반절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요한복음 저자는 1장 1절을 마무리할 뿐 아니라, 또한 독자들에게 1장 3절의 내용을 준비시킨다( Carson 1991: 118 ). 여기서 지시 대명사 ‘후토스’( οὗτος,
문자적으로 ‘이는’; 개역개정 “그가” ) 는
앞 절에서 언급된 말씀을, 또한
앞으로 이어질 내용과 관련해서는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 Moloney 1998: 35 ). [1:3] “요한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그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포했다. 그러고 나서, 요한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라 는 것을 그가 행한 일들로부터 입증한다”( Calvin 1959: 9 ). 모든 것( 만물 ) 이 ‘지혜’ 를 통해 또는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어졌다고 단언하는 것은 유대 교의 믿음과도 전적으로 일치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한은 또한 다음과 같 이 주장한다. 모든 것, 다시 말해서 1장 10절의 ‘코스모스’( κό́σμος, 세상; Bultmann 1971: 36 ) 가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를 통해서,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몸을 입
으신 하나님을 통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헬라어
전치사 ‘디아’[διά]는 이 절과 1:10, 17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천지창조에서 두 번째 대리자의 역할을 했다고 알려 준다 ( 참조. 3:17; 14:6; 요일 4:9;
28) 참조. MacLeod 2003: 62(각주 66에서 맥레오드는 1:2가 1:1을 단순하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다른 이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맥레오드가 단언하는 것처럼, 1:2를 지혜를 가리키는 표현 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53
요한복음
Pollard 1977: 366; Wallace 1996: 434 ).29)
헬라어 구문 ‘호 게고넨’( ὃ γέγονεν, 지음을 받은 것; 개역개정 “지은 것” ) 은 문법적인 측 면에서 앞에 언급된 내용과 연결될 수도 있고, 이어지는 구절과 연결될 수도 있다.30) 하지만 다음 이유들에 근거해서, 이 헬라어 구문이 앞의 내용과 연결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31) 첫째,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는 구절은 이미 말한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강조 함으로 1장 3절에서 표현된 사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대안으로 이해한다면, “지어진 것은 그의 안에서 생명이 있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하지만 전후문맥과 관련해서, 이 번역이 제시하는 논리는 명료하지 않아서,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32) 둘째, 요한은 때때로 헬라어 전치 사 ‘엔’( ἐν, ……안에 ) 다음에 지시 대명사가 나오는 표현으로 어떤 문장이나 절 을 시작한다( 참조. 13:35; 15:8; 16:26 ). 셋째, 다른 곳에서 제시되는 요한 신학은 ‘호 게고넨’을 바로 앞에 나오는 내용과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입장을 지지한 다( 5:26, 39; 6:53; 참조. 요일 5:11 ).33)
29) 하지만 예수는 1:17에서야 비로소 명백하게 언급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만 물)’(τὰ̀ πά́ντα, 타 판타)은 창 1:31을 반향할 가능성이 있다(참조. 창 9:3; Ashton 1986: 184 주37). 비록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상 이와 같은 주장이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언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관점은 신약의 많은 부분에 스며들어 있으며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참조. 고전 8:6; 골 1:16; 히 1:2). 성경 이외의 자료들에 나타나는 평행에 대해서는 Köstenberger 2002c: 6을 보라. 그리고 1:3
의 배경으로서 가능성이 있는 본문들에 대해서는 Keener 2003: 375~381을 참조하라. 30) 하지만 코히(Cohee 1995: 476~477)는 다음과 같이 세 번째 대안을 제시한다. 즉 코히는 3절 하반 절의 ‘우데 헨’(οὐδὲ ἕν, 문자적으로, ‘어떤 것 하나도……이 결코 아니다’)에 대한 설명으로서, ‘호 게고넨’(ὃ γέγονεν)이 이 절에 도입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31) 다음 주석가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은 이 해석을 지지한다. Morris 1995: 66; Carson 1991: 137; Haenchen 1984: 1.113~114; Schnackenburg 1970: 1.239~240; Barrett 1978: 156~157; Schlatter 1948: 5~6. 한편 영역 성경들 중에서 NASB, NIV, NKJV, ISV, NLT, HCSB, ESV, TNIV는 헬라어 구문 ‘호 게고넨’을 앞의 내용과 연결시켜서 번역한다. 32) 이 대안에 대해 메츠거(Metzger 1994: 168)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추측되든지 간에”라고 논평하는 것을 참조하라(UBS 번역위원회의 대다수는 ‘호 게고넨’이 뒤따르는 구절과 연결된다는 입장을 선호한다). 메츠거는 해당 구절이 뒤따르는 구절과 연결된다는 견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 장한다. “헬라어 구문 ‘호 게고넨’을 뒤따르는 구절과 연결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위원들의 용감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그 논리가 어색하고 명료하지 않다”(애쉬턴 [Ashton 1986: 172]의 언급에 따르면, 슈나켄부르그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주요 영역본들 가운데 오직 NRSV만 이 대안을 선택한다. 이 대안을 지지하는 주석가들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R. Brown 1966: 6~7; Bultmann 1971: 39~40, 특히 주4; Beasley-Murray 1999: 1~2, 특히 주a;
Whitacre 1999: 52. 또한 Miller 1989를 참조하라. 밀러는 ‘호 게고넨’을 뒤따르는 구절과 연결시켜 서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밀러는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은 자신의 보다 확 대된 이론과 연결시킨다. 즉 1:1a~b와 1:3~5는 네 개의 연(strophes)으로 이루어진 기독론적인 찬 송시로서 구원사와 관련된 말씀의 활동을 찬양한다는 것이다(밀러는 1:1c와 1:2는 삽입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한편 구두점이 없기 때문에, 브로디(Brodie 1993: 138)는 그 본문이 원래 모호하며 “창 조와 성육신 및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춰 고안된 “신중한 문학적인 전략의 일부”라고 이해한다. 33) 또한 코히(Cohee 1995: 473)는 그리스 고전에서 나타나는 평행 본문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를
54
I.I.프롤로그: 프롤로그:말씀이 말씀이육신이 육신이되다 되다( (1:1~18) 1:1~18 ) I. 프롤로그: 말씀이 육신이 되다 (1:1~18)
이 절의 주안점은 성육신이 아니라, 말씀이 천지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이 다( Ridderbos 1997: 37; Carson 1991: 118 ). 요한복음 저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존재를 말씀에게 빚지고 있다”( Morris 1995: 71 ) 고 강조한다. 이 절의 하반절은 상반절에 서 언급한 내용에 반대되는 것을 부정한다. 이와 같은 표현 방법은 요한복음 에서 흔한 것이다( 예. 1:12~13, 20; 3:16~17, 36; Morris 1995: 71 ). 헬라어 현재완료 ‘게고 넨’( γέγονεν, 다 )가
[이미]지어졌다 ) 은
이 절의 앞부분에서 표현된 ‘에게네토’( ἐγένετο,
지어졌
지속적인 효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피조 세계가 계속해
서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Morris 1995: 71; 참조. Ridderbos 1997: 37 주62 ). [1:4~5] 이 절들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말씀이 천지창조에 동참한 것을 보
다 구체적으로 밝힌다. 저자는 이 세상의 기원에 비추어 보면서, 현재의 세상 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1장 1~4절에서 사용되는 헬 라어 동사의 미완료 과거들은 전반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 Ridderbos 40 ).34)
“생명”과 “빛”은 보편적인 종교 용어들이다( D.
Schnackenburg 1990: 1.242~244 ).
1997: 38,
H. Johnson, DJG 469~471;
하지만 “생명”과 “빛”에 대한 요한복음의 가르침
은 구약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35) 천지창조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첫 번 째 창조 행위는 빛이 있게 한 것이다( 창 1:3~5 ) ( Morris 1995: 74~75 ). 그 후에 하나 님은 광명체들을 하늘의 창공( 궁창 ) 에 두셔서, 빛과 어둠이 나뉘게 하셨다( 창 1:14~15 ).
그리고 빛은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천지창조
와 관련된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생물이 물속과 마른 땅 위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절 정을 이룬다( 창 1:20~31; 2:7; 3:20 ). 이제 요한은 생명이 “그[의] 안에”, 즉 예수 안 에 있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신체적 및 영적인( 영원한 ) 생명의 근원이다. 또한 예수는 초자연적인 빛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오직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지닌 사람들만 “빛 가운데 걸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서, 오직 이 사람들만 하나님이 계시하신 뜻에 일치하는 도덕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36) “[모든] 사람들의 빛”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빛”을 의미 들면, 사도 바울이 행 17:28에서 인용하는 ‘엔 아우토 가르 조멘’(ἐν αὐτῷ γὰρ ζῶμεν, 왜냐하면 그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은 아라토스의 『현상들』(Aratus, Phaenomena 5)과 아마도 클레안 테스의 『제우스 찬가』(Cleanthes, Hymn to Zeus 4)에 나오는 구절이다. 34) 슐라터(Schlatter 1948: 6)는 1:4에서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는 요한의 문체적인 특성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슐라터는 이와 같은 표현이 사고의 흐름을 흩어지게 하지 않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 한다. 한편 키너(Keener 2003: 382)는 1:4~5에서 생명-생명-빛-빛-어둠-어둠이라는 개념들이 이 어지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키너는 수사적인 한 가지 기교로서, 이것을 삼단 논법에서의 연쇄 식 논법이라고 부른다(또한 키너는 이에 대한 논거로 지혜서 6:17~20을 제시한다). 35) 제4복음서에서 상징적인 표현들의 위치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에 대해서는 Culpepper 1983: 180~198의 논문을 참조하라. 또한 C. Koester 2003를 보라. 36) 따라서 여기서 “빛”에 대한 언급은 오직 신자들만 소유하는 빛을 가리킨다. 이 해석은 칼빈(Calvin 1959: 11)의 해석과 차이가 있다. 칼빈은 여기서 빛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반 은총의 “빛”을
55
요한복음
한다( Bultmann 1971: 40 ). 헬라어 문법에서 이 표현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소유 격으로서( Ridderbos 1997: 38 주64 ), 말씀이 나타나는 것은 보편적인 영향을 미친 다는 것을 가리킨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왔을 때 참 빛 이 와서, 그 빛이 지금 이 세상에서 비치고 있는 것”을 미리 내다보게 한 다( Ridderbos
1997: 39 ).
이 복음서에서 “어둠”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세상”을
가리킨다( Schnackenburg 1990: 1.245 ). 이 세상은 영적으로 무지하고 눈이 어두우 며, 타락하고 죄가 가득한( Witherington
1995: 55 )
곳으로서,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맨 처음부터 어둠이 빛을 이기지( κατέ́λαβεν, 카텔라벤 ) 못 했다고 선언한다( “이기다”가 Köstenberger 1999a: 55 ).
“깨닫다”보다 더 나은 번역이다; 개역개정 “깨닫지”; 참조. NIV 각주;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에서 가장 가까운 평행 본문인 12장
35절( 참조. 16:33 ) 이 이 헬라어 동사가 ‘이기다’라는 의미로 사용됐다는 것을 암 시한다( 참조. R. Brown 1966: 8 ).37) 또다시 요한은 그 당시의 종교 및 사상적인 배경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제시한다. 즉 다른 종교 및 세계관의 추종자들 의 다양한 주장에 맞서서, 요한은 이 보편적인 용어들을 사용한다.38) 어떤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동물들은 갖고 있지 않은 윤리적 추론 능력이다. 나아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이 빛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빛을 통해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능가한다. 여기서 요한은 마치 인간에게 주어진 생명은 일반적인 생 명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빛과 연합되어 있는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37) 다음 학자들은 ‘이기다’(overcome)나 또는 이것에 상응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선호한다. Morris 1995: 76; Moloney 1998: 36; Schnackenburg 1990: 1.245~246; Laney 1992: 39; Lindars 1972: 87; Schlatter 1948: 9(헬라어 동사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ά́νω]는 신약에서 결코 ‘이해하다’ 를 뜻하지 않음); Westcott 1908: 1.9~10. 반면에 카슨(Carson 1991: 138)은 요한이 이 헬라어 동 사를 통해 두 가지 의미(‘이기다’와 ‘깨닫다’)를 모두 전달하려고 의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또한 참조. Whitacre 1999: 53). 그러면서 카슨은 BAGD에 제시된 모호한 번역 ‘지배하다’(master)를 좋아한다(참조. BDAG 520). 한편 키너(Keener 2003: 387)는 1:5에서 요한이 헬라어 동사 ‘카텔라 벤’(κατέλαβεν)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 ‘전달’(traductio)의 한 가지 예, 즉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한 단어를 통해 다양한 의미들을 전달하는 표현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키너는 이 헬라어 동사 가 지혜서 7:30에 나타나지만, 해당 구절에서 그 단어는 분명히 ‘이기다’를 의미하며 아무런 언어유 희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고 시인한다. 그런데 버지(Burge 2000: 56)는 이 헬라어 동사를 두 가지 의 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버지는 여기서 ‘이기다’라는 의미가 다소 더 우세하다고 이 해한다. 칼빈(Calvin 1959: 12)은 이 동사를 ‘깨닫다’(comprehend)라는 의미로 번역한다. 한편 영 역본들은 이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다소 비슷한 비율로 나뉘어 있다. 또한 영역본들에서는 대체로 각주에 선택되지 않은 의미가 제시되어 있다. (1) NIV: ‘overcome’; NASB, NKJV: ‘comprehend.’ (2) NLT: ‘extinguish’; NET: ‘mastered’; ISV: ‘put out’; HCSB, ESV, NRSV: ‘overcome.’ 주목할 만한 점으로서, TNIV는 NIV의 ‘understood’를 ‘overcome’으로 바꾸어 번역했다. 38)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여기서 빛과 어둠으로 구분하는 고대 그리스의 이원론 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고 믿는다. 절대 주권을 지니시고 전능하시며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시인한다기 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실을 정반대의 세력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면, 빛 과 어둠 또는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와 같은 사상 을 논박한다. 즉 요한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56
BECNT 시리즈에 대한 추천의 글
요한복음
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BECNT 시리즈는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 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통찰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 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고 설교하는 목사, 신학자를 비롯한 모든 그 리스도인을 대상으로 집필된 이 주석 시리즈는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각 본문의 역할을 문맥 속에서 파악하도록 돕는다. 『BECNT 요한복음』은 주해와 신학이라는 두 측면에서 포괄적이고 균형 있게 요한복음을 다룬 다. 요한복음을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책, 면밀한 문학적 구성의 산물, 신학에 상당한 관심 을 지닌 요한의 작품으로 소개하는 저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이 신약 문서가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입증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서술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세련된 문학으로 전하는지 명쾌하고 통찰력 있게 분석한다.
지은이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Andreas J. Köstenberger )
미국 일리노이의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이스턴 침례 신학교의 성경신학 및 신약학 연구 교수다. 저서로는 BTNT 시리즈의 『요한신학』, NSBT 시리즈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상 부흥과개혁사),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누가·요한복음』의 “요한복음” (CLC)
등이 있다.
옮긴이
신지철
전광규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트리어 대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
학교 고전문헌학부에서 수학했으며 뮌헨 대학
하고 『빛과 소금』 과 『목회와 신학』 의 기자로 활동
교 개신교 신학부 신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아
했다. 현재 한누리교회 담임목사와 도서출판 하
가페출판사 편집장으로 『오픈 성경』 및 『열린 성
나의 대표로 섬기고 있으며, 역서로는 BTNT 시
경』 의 기획, 편집, 집필을 주관했으며, 역서로는
리즈의 『요한신학』, NSBT 시리즈의 『아버지와 아
BECNT 시리즈의 『누가복음1, 2』, 『ESV 스터디
들과 성령』, 『베이커 성경 핸드북』 (이상 부흥과개혁사)
ISBN 978 - 89 - 6092 - 467 - 3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바이블』 (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등이 있다.
www.rnrbook.com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지음 신지철·전광규 옮김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지음 | 신지철·전광규 옮김 값 4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