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BTNT 바울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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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BTNT )는

깊이 있게 탐구한다. 시리즈 각 권마다 연구하는 문서에 맞는 접근법을 필요로 하지만, 모든 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1 ) 최근의 학문 및 연구 동향 개관

( 2 ) 관련된 서론적인 쟁점들에 대한 논의

( 3 ) 문서의 내러티브 흐름에 따른 주제 해설

( 4 ) 중요한 개별 주제들에 대한 논의

( 5 ) 특정 문서와 신약 및 성경의 나머지 책들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

성경신학이 비교적 새로운 학문 분야인 데다 의심스러운 가설들과 확실치 않은 방법론이나 결 함 있는 실행으로 인해 자주 방해받아 왔지만, 성경신학 분야는 오늘날 성경 및 신학 연구에서 가 장 유망한 길 가운데 하나다. 본질적으로 성경신학은 성경 본문 연구에 관여하는 한편 주어진 문 서가 기원한 역사적 배경을 면밀하게 고찰한다. 성경신학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원 사역을 중심

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속사 계획의 연속선상에서 성경 각 문서가 기여하는 바를 찾아내며 설명하 려고 애쓴다. 또한 내러티브든지 강화든지 다른 문학 형태든지 주어진 문서에 대한 신학적 탐구 의 기초를 각 본문을 면밀하게 읽는 데 두려고 노력한다. 신약성경신학 시리즈는 신약 문서에 대한 다양하면서도 보완적인 견해들을 깊이 있게 연구함 으로 서로 관련된 성경의 중요한 주제들을 전체적으로, 문맥을 중시하면서, 영적으로 유익이 되

도록 연구하는 일에 중대한 공헌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각 권은 해당 문서에 대한 중요 한 주석이나 논문을 쓴 학자가 집필하며,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 충분한 지면을

또한 이 시리즈는 신약의 개별 문서에 대한 연구 및 신약과 궁극적으로 성경 전체에 대한 연구

에 기여할 뿐 아니라, 성경신학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 방법론 면에도 기여하

려고 노력한다. 각 권의 구상 방식은 주어진 문서의 일부나 전체의 특성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반

영한다. 이른바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 권 사이의 복잡한 상호 관계, 누가-행전의 2부작으로

서의 특성,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요한계시록과의 관계, 바울의 저작인 열세 편지, 베드로서와 야

고보서와 유다서, 히브리서의 신학 등 각 권은 특유의 도전과 기회를 제공한다.

끝으로 아래에 인용된 케어드 ( G. B. Caird )의 말처럼 각 권이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의 다면

적인 특성에 찬사를 보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 책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모든

책이 같은 예수를 증언하는지 그리고 예수를 통해 한 하나님의 다양하고 찬란한 지혜를 증

언하는지 여부다……우리는 우리의 모든 증인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으려 하지 말아야 하

며,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어떤 면에서 결함이 있어 보인다고 트집을 잡으며

불평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수많은 증인 개개인의 입을 통해 자신의

복음을 확증하기로 결정하셨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신약 합창단의 악곡은 제창으로 부르도

록 쓴 것이 아니다.1 )

이런 마음으로 필자들은 하나님의 웅장한 성경 교향곡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겸 허하게 자신들의 저작을 기고한다.

시리즈 편집자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노스캐롤라이나 웨이크 포리스트에서.

1 ) G. B. Caird, New Testament Theology, compl. and ed. L. D. Hurst(Oxford: Clarendon, 1995), p.24

결국 기쁨이 부담보다 더 커졌 다. 이 책을 저술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의 사상 세계

속으로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이는 “내 정신을 갱신했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더 닮도록 나

를 인도한 경험이었음을 믿는다.

2005년( ! ) 에 이 책의 집필 계약을 맺은 이래 나는 가르치고 저술하고 생각할 때마다 많은 부분

바울과 바울의 서신에 집중했다. 나는 바울의 네 서신에 대한 주석서도 집필했고 바울서신에서

몇 개의 본문과 주제를 다룬 논문도 출간했다. 이들 책과 논문은 당연히 이 책에서 다룬 여러 주

제와 많은 부분에서 중첩된다. 때로는 이런 주제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쓰기보다는 이미 정리한

연구를 본서에서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라도 거의 항상 어느 정도 수정이 따랐다. 이런 경

우에는 각주로 표시했다.

내가 본서 집필을 위해 오랜 시간 연구했다는 사실은 몇 세대를 거치면서 학생들이 이 작업을

위해 나를 도왔음을 의미한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와 휘턴 대학의 유능한 박사 과정 학생

들과 작업한 것은 내겐 특권이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학생이 바울에 대해 작성한 논문이 나의 사 고에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아델 케인데이, 스티븐 페글러, 러스 러벳, 제 이 스미스, 웬들 홀리스( 이상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 크리스 블라코스, 크리스 브루노, 데인 오틀런 드, 치-추 리, 엘리세 우바, 로리 노리스, 매튜 하몬, 폴 케이블, 재러드 브라운, 벤 댈리, 매튜 몽키 마이어, 조너선 해리스( 이상 휘턴 대학 ). 나는 ( 때로는 출간된 논문 형식으로 된 ) 이 학생들 대부분의 연구를 각주와 참고문헌에 게재했다. 이 학생들은

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웨스턴 신학교, 리젠트 대학, 소버린 그레이스 목회자 대학, 캐롤

라이나 신학대학원(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스버러 ), 오크힐 대학( 영국 런던 ), PTPC 컨퍼런스, 루마니아 오

라데아 목회자 컨퍼런스, 맥매스터 신학교 기독론 컨퍼런스, 나이로비 복음주의 신학교, 존 번연

컨퍼런스, 덴버 신학교, 리버티 대학교, 패러데이 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 런던 신학교, 슬로베니아

포르도로즈의 크루 컨퍼런스, E. W. 왈 강의, 테일러 신학교( 캐나다 에드먼턴 ), 호주 신학교, 퀸즐랜드

신학교, 장로교 신학교( 호주 시드니 ), 캐스키 신학부, 블랙호크 복음주의 자유 교회( 위스콘신주 매디슨 ),

헌팅턴 대학( 인디애나 ), 퀘벡 침례 신학교,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경 연구소( 칼크 베이 ), 로즈뱅크 연합

교회(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 아이레스 성경연구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성경연구 펠로우

십 컨퍼런스(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 휴스 교도소( 텍사스주 휴스 ), 아시아 성경신학교( 필리핀 마닐라 ), 템플 성 경 교회( 텍사스주 템플 ), 캘리포니아 침례 대학교, 그리어-허드 포럼( 뉴올리언스 침례 신학교 ), 게이트웨이

신학교, 시비마-포르탈레자 신학교( 브라질 포르탈레자 ), 베델 웨스트 신학교, 그리피스-토머스 강연,

댈러스 신학교, 헨리 센터 창조 컨퍼런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 베뢰아 바이블 교회( 하와이주 힐로 ),

복음주의 신학회, 성서학회( SBL ), 성경 연구소.

이 책을 끝내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 준 이 시리즈 편집 총괄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와 존

더반 아카데믹 편집자 카티아 코브렛의 인내에 감사한다. 그들의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무엇보

다도 나는 바울서신의 여러 쟁점을 놓고 나와 자주 논의하고 이 책을 위해 직접적인 도움을 준 아

내 제니에게 감사한다. 아내는 참고문헌과 색인 대부분을 작성하고 더 중요한 것은 책 전체를 편

집했다. 이 책을 아내에게 바친다.

2020년 2월 일리노이주 휘턴

바울 신학 방법론

Chapter 1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사도 바울보다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울

말과 그의 말이 의미하는 개념은 우리의 믿음과 찬송과 설교에 깊이 스며들었다. 시간이 흐르

면서 바울의 영향력은 다양하게 나타났으며, 교회의 어떤 분파는 다른 분파에 비해 바울의 영향

을 더 많이 받은 경우도 있다. 물론 정경의 다른 책을 경시할 정도로 바울의 저술에 지나치게 의

존하는 태도는 우리의 신앙 이해에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유의할 사항이 많이 제기됨에도 우

리는 바울이 남겨 준 교훈의 풍부한 광맥을 계속해서 열심히 파내야 한다. 나는 이 광맥을 파내

는 작업을 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울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누렸다. 그동

안 내가 읽은 바울 관련 논문과 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가능하다면 바울 서적의 출간을 미룰 수

있으면 좋겠다 )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배운 모든 것을 존중하면서도 바울서신을 읽고 다시 읽고 또다

시 읽는 것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았다. 나는 본서에 있는 내용이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것을 제대

로 반영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럼에도 바울 신학을 저술하는 것은 힘겨운 과업이다. 지난 15년을 돌아보면, 나는 무언가 너

무 어리석은 일에 동의한 일로 한 번 이상 후회했다. 그러나 ( 사라지지 않는 ) 의구심을 안고 있지만

인내심을 바탕으로 연구했다. 독자들은 이런 의구심이 얼마나 해소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할 것

이다.

바울 신학을 “행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로 힘들다. 책을 시작하는 본 장에서 바울 신학이 어려

운 이유를 몇 가지 간결하게 다루고 이 책에서 시도하는 나의 접근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성경신학 1 )

이 책이 “신약 성경신학”(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 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리즈에 포함되

므로 성경신학이라는 큰 쟁점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성경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

학이 교회 역사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일부러 신학을 다른 유형이나 방식

과 구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성경” 신학을 성경 본문의 신학적 의미를 도출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자세히 읽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교회사에 나타난 일부 견해와는 달리, 사실 기독 교 신학자가 지금 우리가 “성경” 신학으로 부르는 형태를 오랫동안 탐구해 온 것이라는 점이 중 요하다. 성경신학 분과는 단순히 “신학”으로 이해되었으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학의 성경

연구 여파로 170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대학에서 성경 본문을 연구하는 작업이 점차 교회와 분리되면서 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신학을 “교의신학” 또는 “조직신학”과 분리할 필

요성을 느꼈다. 이 책에서 “성경신학”이라는 새로운 분과의 역사를 탐구하기에는 지면이나 여력 이 부족하다.2 ) 곧바로 현대로 돌아와 보면 지금 우리는 “성경신학”이 합의된 의미를 상실한 시대 에 살고 있다. 클링크와 라킷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성경신학은 성경에 적용된 역사비평 방법

부터 성경의 신학적 해석까지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는 유행어, 가변적 개념이다. 여기서 신학적

해석은 실제로는 등식에서 역사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3 ) 이 인용문이 의미하는 것처럼 성경신학에 대한 현재의 논의에는 중요한 긴장이 존재한다. 이쪽에서 관심을 두

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재구성과 저쪽에서 관심을 두는 성경의 최종적, 정경 형태 사이에 나타 나는 긴장이다. 이 긴장은 두 번째 쟁점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두 번째 쟁점은 우리가 이쪽의 주

해와 저쪽의 조직신학 중 어디에 성경신학을 “위치시켜야” 하는지다.4 )

찰스 스코비는 성경 전체의 신학을 야심차게 시도한 걸작에서 두 번째 쟁점( 과 은연중에 첫 번째 쟁 점도 ) 을 다루면서 “중간적” 성경신학을 주창한다. 스코비는 성경신학을 교량에 비유한다. 이는 현 대 학자들 가운데 지배적인 견해다. 교량의 한쪽 교각은 본문을 자세히 읽는 방법론 위에 세워져

있고 다른 쪽 교각은 조직신학과 본문을 적용하는 작업 위에 세워져 있다. 교량의 은유는 단점도

1 ) 본 섹션의 내용과 일부 표현은 2012년 미국 복음주의신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 근거하고 다음 책에도 포함된다. Douglas J. Moo and Jonathan A. Moo, Creation Care: A Biblical Theology of the Natural World (Grand Rapids: Zondervan, 2018), 34~38. 허락받아 사용함.

2 ) “성경신학”의 개념을 설명한 첫 시도는 J. P. 개블러 연설이다 (1797년). 성경신학의 역사를 유용하게 분석한 글로는 다음을 보라. Charles H. H. Scobie, “History of Biblical Theology,” in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ed. T. Desmond Alexander and Brian S. Rosner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11~20.

3 ) Edward W. Klink and Darian R. Lockett, Understanding Biblical Theology: A Comparison of Theory and Practice (Grand Rapids: Zondervan, 2012, 『성경신학의 5가지 유형』, 부흥과개 혁사 역간, 2015), 13. 자이츠는 “‘성경신학’은 탄력적이고 모호 한 용어다”라며 동의한다. Christopher R. Seitz, The Character of Christian Scripture: The Significance of a Two-Testament Bible, STI (Grand Rapids: Baker, 2011), 95.

4 ) 본 쟁점을 적절하게 반영하는 글로는 다음을 보라. D. A. Carson, “Systematic Theology and Biblical Theology,” in Alexander and Rosner, NewDictionaryofBiblicalTheology, 89~104.

있지만( 아래를 보라 ) 성경신학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작업을 시작할 때 유용하다.

본문에서 적용으로 넘길 수 있는 성경신학의 교량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 재료로 건설되어야 한

다. 사실 네 가지 재료는 “성경적”과 “신학적”이라는 단어에 이미 들어 있다.

첫째, 우리의 성경신학이 참으로 성경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서술적이어야 한다. 성경신학의 서

술적 요소는 널리 인정되고 비교적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성경신학은 본문 주해의 다음

단계, 즉 두 번째 단계의 작업에 해당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고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다. 이 목표를 위해 성경 자체의 범주를 사용하고 구속사적 흐름에 초점을 맞춘다.5 )

둘째, 우리의 성경신학이 진정으로 신학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규범적이어야 한다. 성경신학자들

이 자기들의 연구에서 규범적 측면을 항상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자들이 이 요소를 적극

적으로 반대할 때가 자주 있다. 학자들은 신학이 역사와 주해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이유로 규

범적 측면을 반대하며, “본문이 의미했던 것”과 “본문이 의미하는 것”을 엄격하게 분리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용어는 크리스터 스텐달이 사전에 기고한 논문에 등장한다.6 ) 오늘

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때때로 거부당하기는 해도, “본문이 의미했던 것”과 “본문이 의미

하는 것”을 구분하고 “본문이 의미하는 것”의 토대를 “본문이 의미했던 것”에 두는 것은 매우 타

당하며 우리의 신학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입장이다.7 ) 최소한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성

경신학에서 규범적인 측면은 “신학”이라는 단어에 이미 내포되는 것으로 보이며, 지극히 필수적

인 서술적 주해 작업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8 ) 어떤 “신학”도 “신학”이라는 단어 앞에 무슨 수

식어를 붙이더라도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을 하는 과업을 온전히 회피할 수는 없다. 하나

님의 말씀은 속성상 우리의 연구를, 우리가 이 연구를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단지 서술만 하고 그

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조직신학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만 성

5 ) 성경신학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적인 묘사는 여러 글에 나타난

다. 예, Brian S. Rosner, “Biblical Theology,” in Alexander and Rosner,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10. “성경신학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해 수행하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정의

할 수 있다. 성경신학은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민감성으로 진행하며, 하

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

르침을 성경신학의 용어로 분석하고 종합하고자 하며, 성경을 아우르는

내러티브 관점와 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시야를 견지한다”(강조는 원문).

6 ) Krister Stendahl, “Biblical Theology, Contemporary,” IDB 1:418~432. 비슷한 주장은 다음의 글에도 나타난다. James Barr, The Concept of Biblical Theology: An Old Testament Perspective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9), 특히 196~205; Peter Balla, Challenges to New Testament Theology (Peabody, MA: Hendrickson, 1997), 예, 249.

7 ) 그러므로 나는 고든 피와 더글러스 스튜어트가 잘 알려진 그들의 저술에서 성경해석에 대해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본문이 의미 한 것”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에 동의한다. Gordon Fee

and Douglas Stuart, 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 4th ed. (Grand Rapids: Zondervan, 2014), 34.

8 ) 성경신학에 대한 스티븐 모티어의 정의도 비슷하다. “새로 등 장한 신학 분과를 통해 교회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성경 전 체의 통합된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Stephen Motyer, “Two Testaments, One Biblical Theology,” in Between Two Horizons: Spanning New Testament Studies and Systematic Theology, ed. Joel B. Green and Max Turner [Grand Rapids: Eerdmans, 2000], 158). 이 부분을 강하게 주장한 글로는 Kevin Vanhoozer, “Exegesis and Hermeneutics,” in Alexander and Rosner,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63을 보라. “성 경신학을 역사적 서술에 국한시키는 것은 성경을 교회를 위한 신 학적 규범으로 읽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감과 하나님 의 저술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또한 특별히 다음 예도 보라. Peter Stuhlmacher,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18), 13; Dan O. Via, What Is New TestamentTheology?, GBS (Minneapolis: Fortress, 2002), 43.

경신학자는 성경 본문의 지평에 초점을 맞춘다. 본문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시야가 좁아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쪽 작업과 저쪽 작업을 나누는 선을 선명하게 긋기가 어렵다. 우리 성경신학

자들이 조직신학과 적용의 영역을 향해 우리의 교량을 충분히 멀리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신학

을 하는 우리의 동료들이 건축 구조물을 세우기에 필수적인 성경의 건축 재료를 사용할 수 있으

며, 목회자도 회중에게 전해야 하는 성경 재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성경적”이라는 형용사로 돌아가 보면 우리의 성경신학은 포괄적이어야 한다. 성경신학

의 논의는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성경적”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

되는 신학을 탐구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성경을 입증하는 신학을 전개한다는 말인가? 그

런데 형용사 “성경적”은 더 근본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신학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연구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 신학자는 정경인 구약의 39권과 신약의 27권이 연구하고 종합할 가치가 있 는 특별한 책들의 묶음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복음주의 성경신학자는 중요한 추가 단계를 실행 함으로써 이 전제를 구체화한다. 즉 연구자는 39권 또는 27권 또는 66권이 궁극적으로 한목소리 를 내고 있음을 전제한다. 나는 우리 복음주의자가 성경신학에 있어 특별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 음을 학생들에게 자주 상기시킨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자료를 완전히 입증하는 신학을 전개해 야 한다. 우리는 일부 본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이를 제거하거나 조화를 목적으로 본문

을 억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책에서 우리는 신약에 수록된 바울의 13개 서신에 집중 한다. 나는 13개 서신 모두 바울의 저술이라고 생각하며, 본서의 다른 곳에서 이 사실을 간결하게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바울 신학을 연구할 때 각 서신의 목소리는 해당 서신에 적합한 음량과 음

색으로 들려야 한다.

넷째, 성경신학은 정경적이어야 한다. “신학”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책의 사람들”, 전체가 과제 에 참여할 것을 상기시킨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정경에 있는 다른 책들과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분석해야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과 구약의 관계에 계속 관심을 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충분히 다룰 기회가 부족하지만 궁극적으로 바울 신학은 신

약의 나머지 분량에 있는 가르침과 비교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성경신학은 서술적이고 규범적이며 포괄적이고 정경적이어야 한다. 이 네 가지 는 우리가 건설하는 해석의 교량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특징이다. 서론적 쟁점을 마치기 전에 해 석 문제를 몇 가지 더 다룰 필요가 있으며, 이 문제들은 기본적인 구조보다는 우리가 분석하는 방 법과 관련 있다. 해석상의 추가적인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기존의 은유를 교체할 필요가

9 ) Charles H. H. Scobie, The Ways of Our God: An Approach to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03, 『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7), 46~49, 77.

널리 사용되며,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쌍방의 소통과 풍성함을 뛰어넘는 유비는 생각하지 않는

다. 그러나 양방향 교통의 유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유비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2차선

도로를 생각해 보자. 운전자들은 쌍방의 접촉이 거의 없이 또는 전혀 없이 서로 지나쳐 운행하거

나 안타깝게도 충돌 사고를 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성경신학의 목적에 적합하고

더 나은 이미지는 회전 교차로다. 회전 교차로는 우리가 국도를 운전할 때 볼 수 있고 특히 영국

에 매우 흔한 교통 체계다. 주해에서 조직신학과 적용에 이르는 도로는 곧게 뻗은 고속도로가 아

니다. 몇 갈래의 도로가 성경신학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이 도로들을 회전 교차로를 통과해 주

도로에 병합되는 2차 도로에 비유할 수 있다. 성경연구가 주해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직선적

인 순서로 진행된다는 개념을 포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요점이다. 세 분

과는 서로 혼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 “성경의 신학적 해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또

하나의 흐름이 시선을 끈다. 나는 이 흐름이 특정 방법론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이 흐름은 우리의 방법론에 특정 가치들이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성경의 신학적

해석은 역사신학과 조직신학의 자료를 주해와 성경신학을 위해 활용하는 것의 중요성, 교회를 위

해 신학을 “하는” 것의 중요성, 우리가 시간과 장소와 신학 전통 안에 있음을 알고 겸손한 태도로

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의 바울 신학 연구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의 자료를 기꺼이 활용한다. 물론 나는 나

의 신학적 선호에 따라 본문을 해석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반응은

회전 교차로를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며, 성경 본문에서 나오는 도로가 회전 교차로에 먼저 진입 할 때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요약해 보자. 나의 연구 방법론에 나타나는 특징은 주해에 기초 한 성경신학을 하고 “성경의 신학적 해석” 운동에 나타나는 어떤 가치들을 수용하는 것이다.10 )

2 바울 신학

이 책에서 내가 설명하는 바울 신학의 윤곽은 위에서 설명한 성경신학의 실례에 해당한다. 우 리의 바울 신학 연구에 나타나는 몇 가지 쟁점은 위에서 논의한 내용에 근거한다.

10 ) 이 운동의 개관으로는 다음을 보라. Daniel J. Treier, Introducing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Recovering a Christian Practice (Grand Rapids: Baker, 2008). 일반적으로

이 운동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나온 목소리들과의 대화를 통해 성경의 궁극적인 신학적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1 무엇이 “바울 신학”인가?

성서학회( SBL ) 연례 대회에서 오랫동안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바울 신학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질문은 믿기 힘들 정도로 간단하다. 우리는 어디서 바울 신학을 찾는가?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는

바울서신 안에서 바울 신학을 찾는가? 아니면 바울서신 배후에서 바울 신학을 찾는가? “바울 신

학”은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의 요약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바울 신학은 바울서신 배후

에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바울의 사상을 재구성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나는 후자를 선택하면

서 본 장에서 거듭 이 접근법에 대해 소개할 것이다. 바울이 쓴 서신, 즉 우리를 위해 성경에 보존 된 서신의 외부에서 바울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울 신학은 바울서신 표

면에 드러나는 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학과 주해를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울 신학자는 바울의 사고가 보여 주는 기본적인 틀과 내용을 찾고자 노력할 때

본문 “배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주엣 배슬러는 이런 탐구 과정과 바람직한 신학적 결과를 다음

과 같이 요약한다.

바울 신학의 원자료 (선포 이야기, 성경, 전승 등)는 바울의 경험이라는 렌즈 (바울의 일반적

인 경험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하나님이 택정하신” 자로서 겪은 특별한 경험)를 통과했고

확신들의 일관된 (그리고 독특한 ) 흐름을 생산했다. 그다음 이런 확신들은 프리즘, 즉 바울이

다양한 공동체에서 알게 된 상황에 대한 인식을 통해 굴절됐다. 바울의 확신들은 해당 공동체

를 위한 구체적인 말로 이런 공동체에서 표현되었다.11 )

어떤 의미에서 위의 내용은 ( 본문에 있는 것을 설명하는 ) 주해에서 ( 본문에 있는 것을 종합하는 ) 신학으로 이

동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바울 신학”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본문의 “배후” 또는 본문 “너머”로 이동하는 순간 불가피하게 주관성이 강하 게 작용한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해석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학자들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관점의 예는 페미니즘,12 ) 탈식민주의,13 ) “포스트 홀로코스트 해석 학”이다.14 ) 나는 바울 해석자들이 자신들의 “선이해”를 해석 과정에 불가피하게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선이해가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11 ) Jouette M. Bassler, “Paul’s Theology: Whence and Whither?,” in Pauline Theology, Volume 2: 1 and 2 Corinthians, ed. David M. Hay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3), 11.

12 ) 예, Cynthia Briggs Kittredge, “Feminist Approaches: Rethinking History and Resisting Ideologies,” in Studying Paul’s Letters: Contemporary Perspectives and Methods, ed. Joseph A. Marchal (Minneapolis: Fortress, 2012), 117~133; Sandra

Hack Polaski, A Feminist Introduction to Paul (St. Louis: Chalice, 2005).

13 ) Davina Casperina Lopez, Apostle to the Conquered: ReimaginingPaul’sMission (Minneapolis: Fortress, 2008).

14 ) 예, Angus Paddison, Theological Hermeneutics and 1 Thessalonians, SNTSMS 13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말과 20세기 초에 북미권에서 바울이 노예제를 인정했다고 주장한 편향된 관점에 흑인 바울 해석

가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저술했다.15 ) 흑인 해석가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사회적 위치에 따

라 바울에 대한 기존의 특정 관점을 교정한 것은 타당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다양한 나라

와 지역에서 바울을 가르치면서 다양한 지역, 사회, 문화에 따른 다양한 관점이 본문 이해에 어떻

게 통찰을 줄 수 있는지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제한된 관점으로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

던 통찰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저항”을 사용해 보자. 해석가의 임무

는 본문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나는 본문에 복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 신

학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학에 몰래 들어와 본문을 왜곡하고 신학적 불균형을 초래하는

행위에 저항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의 다양한 귀를 통해 음성을 듣고 현대 교회 다양한 분

파의 목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저항”이 어디에 필요한지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북미권의 학자, 백인 복음주의자로 개혁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나의 정체성에 기

인한 편향성이 당연히 본서에 나타난다. 그러나 나는 고대와 현대 해석가의 목소리에 겸손히 귀

를 기울임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내가 본

문에서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실제로 본문에 있다고 확신하지 못할지라도 소망하고 있다.

2.2 우리는 바울 신학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분명한 사실을 언급하자면, 바울은 지중해 동부에 흩어져 있었던 교회와 개인에 적어도 15년 이 상의 기간에 13통의 서신을 보냈다. 바울이 또한 서신을 통해 가르치게 된 동기는 독자가 처한 상

황이었다. 성경 저자 중에 이만큼 다양한 해석을 거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니컬러스 라이트는 논

평한다. “바울 신학에서 논의되는 주제를 설명하는 일은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어찌

보면 불꽃놀이 상자에 성냥불을 던진 후에 7초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는 것과 같다.”16 )

다양한 재료의 폭발로 생긴 파편을 담아 범주화하는 것은 고전적 과제다. J. C. 베커는 이런 과

제를 설명하기 위해 “긴급성”과 “일관성”을 대중화시켰다.17 ) 짝을 이루는 또 다른 용어는 “다양

성”과 “통일성”이다.18 ) 물론 이런 문제는 바울 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적어도 9명의

15 ) Lisa M. Bowens, African American Readings of Paul: Reception, Resistance, and Transformation (Grand Rapids: Eerdmans, 2020). 더 폭넓은 해석학적 관점으로는 다음을 보라.

Esau McCaulley, Reading While Black: African American Biblical Interpretation as an Exercise in Hop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20).

16 ) N. T. Wright,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Some Contemporary Debates (Minneapolis: Fortress, 2015), 26. 나는 적용을 목적으로 라이트의 논평을 다소 자유롭게 활용하고 있 다. 라이트는 학계의 분위기에

17 ) J. Christiaan Beker, Paul the Apostle: The Triumph of God in Life and Thought (Philadelphia: Fortress, 1980), 23~36. 베

다음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시했다. “Recasting Pauline Theology: The Coherence-Contingency Scheme as Interpretive Model,” in Pauline Theology, Volume 1: Thessalonians, Philippians, Galatians, Philemon, ed. Jouette M. Bassler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1991), 15~24.

18 ) 예, James D. G.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

신약 저자들이 기록한 27권( 신약신학 )이나 정경 66권( “전체 성경” 신학 ) 을 통합하고자 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나는 여기서 “긴급성” 쟁점의 또 다른 측면을 언급할 수 있다. 이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바울

서신이 기록된 연대와 관련 있다. 바울을 연구하는 많은 해석자는 바울이 서신을 쓰는 동안 바울

의 신학이 상당히 발전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다양한 쟁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 모순이 뚜렷

하게 드러날 정도로 발전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을 수용하는 태도로 읽으면 바울의 생각이 당연히 발전했지만 이런 발전이 그가 이전에 생각 한 관점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음을 확신한다.19 ) 바울서신의 신학에 나타나는 차이점은 바울의

인생 여정이 보여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 각 서신을 쓰게 된 교회의 상황과 관련이 훨씬 크다.20 )

미 15년 동안 연구하고 설교했고 다른 신자와 교류했다. 그러나 바울의 긴급한 서신에는 다양한 특성이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 신약신학을 저술할 때 ) 각 저자의 신학을 강조하거나21 ) ( 바울 신학의 경우에는 ) 개별 서신의 신학적 교훈을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22 ) 이런 방식의 성경신학은 해당 책을 저술하게

만든 상황에 더 집중하도록 돕는 이점이 있으며, 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저자가 말하는 것

을 왜곡하는 식으로 저자의 주장을 분석하지 못하게 막는 역할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식의

문제는 “전체를 비교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하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다.23 ) 물론 어떤 학 자는 이런 한계는 이미 성경신학의 속성에 내재하는 것이고 종합 작업은 조직신학자의 몫이라고

ment: An Inquiry into the Character of Earliest Christianity, 3rd ed. (London: SCM, 2006).

19 ) 샌더스는 바울의 사상에 나타난 “유기적 성장”을 언급한다(E. P. Sanders, “Did Paul’s Theology Develop?,” in The Word Leaps the Gap: Essays on Scripture and Theology in Honor of Richard B. Hays, ed. J. Ross Wagner, C. Kavin Rowe, and Katherine Grieb [Grand Rapids: Eerdmans, 2008], 325~350).

20 ) Martin Hengel and Anna Maria Schwemer, Paul between Damascus and Antioch: The Unknown Year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7), 308~309.

21 ) George Barker Stevens, TheTheologyoftheNewTestament (New York: Scribner’s Sons, 1947); Rudolf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s Sons, 1951, 1955); Werner Georg Kümmel,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Nashville: Abingdon, 1973); Hans Conzelmann, An Outline of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

ment (London: SCM, 1969); Leonhard Goppelt,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2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81, 1982); Georg Strecker,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6); Frank J. Matera, New Testament Theology: Exploring Diversity and Unit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7); I. Howard Marshall, New Testament Theology: Many Witnesses, One Gospel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0); Stuhlmacher,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이 접근의 한 가지 변이 형태는 신약신학의 연대기적 발전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다음 예를 보라. Udo Schnelle, The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7).

22 ) 예, Paul Barnett, Paul: Missionary of Jesus (Grand Rapids: Eerdmans, 2008), 7~8.

23 ) G. B. Caird, New Testament Theology, ed. L. D. Hurst (Oxford: Clarendon, 1994), 18.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같이 나는 조직신학자의 작업이 반드시 필요함을 인정하면

서도 종합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성경신학자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최근 성경신학자들은 대부분

종합의 작업에 동의하며, 이런 흐름은 최근의 신약신학과24 ) 바울 신학 연구에도 드러난다.25 )

우리가 바울 사상의 종합을 시도하고, 헤이스가 말한 것처럼 “바울 사상의 문법”을 밝히고자

한다면26 ) 어떤 범주를 사용해야 할까? 얼핏 보기에는 바울 연구의 어려움에 도움이 될 것 같은 한 가지 방법은 바울 신학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바울이 사용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어휘적 접근의 치명적 한계가 금방 드러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울은

핵심적인 신학 용어를 다른 상황과 다른 편지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다카이오쉬

네’( “의” ) 의 용례를 모두 똑같은 의미로 다루면 ( 20.4.1.4.2에서 논의할 것처럼 ) 바울이 법정적 칭의에 대

해 말하는 의미와 신자의 도덕적 삶에 대해 말하는 의미를 혼동할 수 있다. “의”라는 단어를 연구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의”라는 단어를 연구하는 것은 이 단어가 ( 그리고 당연히 다른 단어

도 ) 의미하는 신학적 개념을 연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을 논의하기 위해 우

리는 본문에서 제시하지 않은 범주를 활용해야 하며, 바울 사상에 대한 왜곡은 어느 정도 불가피

하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다.

바울 신학을 종합적으로 다루는 책을 보면 대부분 그 저자가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보는 주

제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그런 주제로는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새로운 순종”, “그리

스도의 전체 사역”, “이스라엘의 운명”이 있다.27 ) 또 하나의 방법은 내러티브 접근 또는 이야기

접근이다. 이 방법은 바울 사상의 구조를 설정할 때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바울 사상의 핵심적

인 하부 구조로 지칭되기도 한다. 최근 학자들은 현대 청중에게 바울 사상을 설명하고 좋게 알리 기 위해 내러티브의 가능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28 ) 이런 관심은 인간 뇌의 작동에 대한 연구 로 더욱 커진다. 이 연구는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는 데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한다. 하지만

24 ) George Eldon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v. ed., ed. Donald A. Hagner (Grand Rapids: Eerdmans, 1993);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1).

25 ) Hans Joachim Schoeps, Paul: The Theology of the Apostle in the Light of Jewish Religious History (Philadelphia: Westminster, 1961); Leander E. Keck, Christ’s First Theologian: The Shape of Paul’s Thought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5, 로마서를 따로 분석한 장을 포함); Frank J. Matera, God’ s Saving Grace: A Pauline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12).

26 ) Richard B. Hays, “Crucified with Christ: A Synthesis of the Theology of 1 and 2 Thessalonians, Philemon, Philippians, and Galatians,” in Bassler, PaulineTheology, 227~229.

27 ) 종합을 위한 또 하나의 가능한 선택지는 바울서신 하나를 두고 견본을 만드는 것이다. 제임스 던은 바울 신학을 다룬 방대한 연

구에서 이 방식을 활용하고 자신의 논의를 위한 기본 틀로 로마 서의 주장을 사용했다(James D. G. Dunn, A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Grand Rapids: Eerdmans, 1998]). 이 접근의 장 점은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할 수도 있는 범주를 억지로 바울 신 학에 집어넣기보다는 바울이 사용하는 범주를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바울 신학의 특정 표현을 다른 표현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 는 것은 단점이다. 브루스 롱네커와 토드 스틸은 바울 신학을 엿 볼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를 선정한다(Bruce Longenecker and Todd Still, Thinking through Paul: A Survey of His Life, Letters,and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2015]).

28 ) 그래서 대니얼 커크는 현대 독자에게 바울 신학을 들려주기 위 해서는 바울 연구에 내러티브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 R. Daniel Kirk, Jesus Have I Loved, but Paul? A Narrative Approach to theProblem ofPaulineChristianity [Grand Rapids: Baker, 2010]).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미를 내러티브 관점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설득력

이 더 높은 논증이다. 실제로 이 논증은 어느 정도 자명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목

적을 성취한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으로 선포한다( 롬 10:4 ). 당연히 바울 신학은 복음

내러티브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바울이 선포하는 그리스도는 이 세상 안으로 “보냄”을 받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지금은 하늘에 올라가셨다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이야기, 특히 핍박하던 유대인 열성분자가 그리스도의 핍박받는 사도로 변화한 이야

기는 바울 신학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내러티브 접근으로 바울 신학을 연구할 것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두 학자는 리처드 헤이스와

니컬러스 라이트다. 헤이스는 1983년에 출간한 갈라디아서 저술에서 갈라디아서 3장을 예수 이

야기에 대한 상호 작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예수 안에서 지

속되고 절정에 이른 이스라엘 이야기가 바울 신학 이해의 핵심적인 틀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중요한 내러티브 개념은 바울 서신의 일부 또는

자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내러티브 틀 안에서 연구한 다른 많은 학

의심의 여지 없이 내러티브가 바울 신학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는 내러티브 접근이 바울 해석

에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네 가지 지적 사항을 언급해야겠다. 첫째,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근본 내

러티브를 본문에 강제하는 위험이다. 우리는 내러티브가 바울의 가르침 배후에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다양한 내러티브를 사용하고 내러티브마다 중요도를 매우 다르게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특정 내러티브를 사용했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본문의 표시가 있는지 증

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바울이 가르침의 구조를 예수 생애 내러티브에 따라 세웠다는 주장

을 입증할 만큼 충분한 표시가 갈라디아서 3장에 나타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러티브 접근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지적 사항은 바울이 사용했을 수 있는 내러티브의 구체적

인 형태를 결정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니컬러스 라이트는 이스라엘 이야기에 대한 자 신의 구체적인 해석에 근거해 바울 신학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이야기의 어떤 요소는 논란 이 된다. 예를 들어, 바울 당시 많은 유대인 또는 대부분의 유대인이 아직도 자기 민족이 유배 상 태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본 쟁점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19.2.2.1을 보라 ). 29 )

우리는 바울이

29 ) 니컬러스 라이트는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설명한다. “심지어 바

울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을 때도 이 이야기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제한된 내러티브 세계를 이스라엘의 전체

적인 이야기-세계 내의, 즉 이야기-세계에 수반하는 상징 세계

내의 적합한 지점에 위치시켜야 다양한 서신의 배후에 있는 이

사용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문

런 내러티브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N. T. Wright, The New Testament and the People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2], 405). 루크 존슨의 경고에 따르면 니컬러스 라이트는 “1 세기 유대교의 복잡한 세계에서 인위적인 단일 세계관을 만들 어 내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Luke Timothy Johnson, “A Historiographical Response to Wright’s Jesus,” in Jesus and the Restoration of Israel: A Critical Assessment of N. T. Wright’s JesusandtheVictoryofGod, ed. Carey C. Newm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9], 210).

학 연구에 사용되는 “직선적 플롯” 구성과 “에피소드 방식 플롯” 구성의 차이를 사용해 이 쟁점

에 적용할 수 있다. 당연히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라는 연속적인 내러티브를 반영하는 직

선적 플롯 구성에 익숙하다. 그러나 바울이 이 내러티브를 사용하는 실제 내용은 주로 에피소드

방식이다. 말하자면, 바울은 자신의 신학 작업을 위한 근거로 이스라엘 이야기에 나타난 다양한

사건을 사용한다.30 ) 이는 바울이 때때로 이스라엘 이야기의 순서를 강조하는 점을 부정하는 것

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3장이 가장 잘 들어맞는 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게 약속한 지 “430년”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갈 3:17 ). 바울은 이런 식으로

독자에게 이스라엘 이야기의 순서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신학화”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순서

에 근거한 명제적 결론의 형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유업”은 약속( 과 약속의 결과인 “믿음” ) 에 근거

하고 율법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예는 고린도전서 10장

1~5절에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바다를 통과하고( “모세에게 세례를 받고……” )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

급하신 영적 음식과 음료를 먹고 마신 이야기, 이후 이스라엘이 불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서술한다. 이번에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경험에 근거한 이 에피소드를 경고

의 “예”( 또는 “모형”, ‘튀포스’ ) 로 독자에게 언급한다( 6절 ). 바울이 사용하는 이스라엘 이야기 자체는 바

울이 수행한 신학 작업의 결과가 아니고 바울 신학을 위한 근거 자료로 기능한다. 이스라엘 이야

기에서 하나님 백성의 영적 경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주는 방어막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역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2절 ). 당연히 이런 “에피소드식” 접근은 바울이

복음 이야기를 사용할 때도 사용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고후 8:9; 빌 2:5~8 ), 죽음( 예, 롬 5:6~8 ), 부 활( 롬 4:25 ), 영광 중의 재림( 살전 4:13~18 ) 같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하는 에피소드는 바울의 신학

작업을 위한 근거를 제공한다.

네 번째 지적 사항은 위의 마지막 요점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자기 신학을 전달하기 위해 ( 보통 )

내러티브를 한 가지 형태나 장르로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신학에서 “내러티브 전환”은 우리를 낯

선 길로 너무 멀리 몰아가고 말았다. 예를 들어, 마이클 고먼은 바울이 “언제나 이야기들을 말하

고”라고 주장하고 티머시 곰비스는 에베소서를 “드라마”라고 주장한다.31 ) 그러나 나의 주장은 이 렇다. 바울서신을 자연스럽게 읽어 보면 바울서신은 단순히 이야기 안에 사건이 순서대로 놓인 것이 아니라

을 어떻게 증명하는지 보여 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Francis Watson, “Is There a Story in These Texts?,” in Narrative Dynamics in Paul: A Critical Assessment, ed. Bruce Longenecker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2], 235).

31 ) Michael Gorman, Apostle of the Crucified Lord: A Theo-

logical Introduction to Paul and His Letters,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17), 75; Timothy Gombis, The Drama of Ephesian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0), 15. “바울의 신학 지식은 거대한 단일 이야기의 구조로 되어 있 다”라는 이언 스콧의 주장은 너무 지나치다(Ian W. Scott, Paul’ s Way of Knowing: Story, Experience, and the Spirit [Grand Rapids: Baker, 2009], 108; 특히 89~156을 보라).

32 ) 니컬러스 라이트의 주장을 예로 들 수 있다(“New Exodus,

내가 보기에 내러티브가 바울서신의 근저에 놓인 경우가 많을지라도 내러티브가 바울의 서신을

형성한다는 증거는 강하지 않다.33 ) 하워드 마셜이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기 서신에서 어떤 이야

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논한다.”34 )

다시 말해서 나의 요점은 내러티브가 바울 신학에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 이야기

가 서술하는 사건은 바울과 바울의 독자들이 살던 세상의 속성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역할을 한

다. 아담이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세상은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을 통해 일하셨음에도 세상은 죄와 죽음 아래 머물러 있다. 하나님이 로마의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통해 그리고 승리의 부활을 통해 행하신 것에 근거해 세상에는 새로운 소망이 허락

되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만물을 올바로 만들기 위해 하늘에서 다시 올 때까지 세상

은 여전히 죄와 죽음의 침탈을 당한다. 나의 논지는 이렇다. 이런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해 이런 이

야기에 있는 핵심 사건은 바울 신학을 위한 원자료가 되지만 바울의 신학의 형태는 이런 사건에 대한 주석이다. 바울이 본문 자체에서 주장하는 논점을 왜곡하거나 억제하는 식으로 바울서신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내러티브 구조 또는 하부 구조를 너무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35 ) 마크 사이

프리드는 주장한다. “[내러티브] 읽기 방식을 채택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본문에 나타나는 진

술들을 알려 주는 내포적 내러티브를 근거로 삼는다. 본문이 인유하는 이야기가 본문을 설명하기

보다는 해석자의 상상력이 본문을 좌지우지하는 식으로 본문은 계속해서 위험에 놓인다.”36 ) 그러

므로 나는 내러티브가 바울 신학에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겠지만 바울의 가르침 을 관찰하는 렌즈로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사상을 서신 별로 해설하는 방식과 포괄적으로 종합하는 방식 모두 유용하다. 최근 신약신학 연구와37 ) 바울 신학 연구는38 ) 융합의 접근을 사용하기도 하며, 이는 내

New Inheritance: The Narrative Substructure of Romans 3-8,” in Romans and the People of God: Essays in Honor of Gordon D. Fee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ed. Sven Soderlund and N. T. Wright [Grand Rapids: Eerdmans, 1999], 26~35). 라이트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롬 3~8장의 구 조라고 주장한다. 출애굽/구속(3장), 언약 체결(4장), 세례/홍해 (6장), 시내산(7장), 유업/약속의 땅(8장). 나는 바울이 이 장들 에서 우리의 관심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곧장 이끌 만큼 충분 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33 ) 바울서신에서 내러티브 또는 이야기가 과연 우선성을 가지는 지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로는 특별히 다음을 보라. R. Barry Matlock, “The Arrow and the Web: Critical Reflections on a Narrative Approach to Paul,” in B. Longenecker, Narrative Dynamics in Paul, 44~57; Watson, “Is There a Story in These Texts?,” 231~239. 갈라디아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A. Andrew Das, Paul and the Stories of Israel: Grand Thematic Narratives in Galatians (Minneapolis: Fortress, 2016).

34 ) Marshall, NewTestamentTheology, 423.

35 ) 다음 예도 보라. James D. G. Dunn, New Testament Theology: An Introduction, Library of Biblical Theology (Nashville: Abingdon, 2009), 14~16.

36 ) Mark A. Seifrid, “The Narrative of Scripture and Justification by Faith: A Fresh Response to N. T. Wright,” CTQ 72 (2008): 26~27.

37 ) Ben Witherington III, The Indelible Image: The Theology and Ethical Thought World of the New Testament, 2 vol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9, 2010); Ferdinand Hahn,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3rd ed.; 2 vols. (Tübingen: Mohr Siebeck, 2011); Ulrich Wilckens,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6 vols.; 2nd-4th ed.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14)(그의 첫 네 권[“Band I”] 은 초기 기독교의 사상을 일반적인 연대기 순서로 분석한다. 두 번째 두 권[“Band II”]은 신약의 사상을 종합한다.).

38 ) Udo Schnelle, Apostle Paul: His Life and Theology (Grand

이 책에서 사용하는 접근 방식이다.39 ) 나는 또한 신학의 종합을 시도할 때 “영역”의 용어를 기

본적인 구성 틀로 사용한다( 3부를 구성하는 장들의 제목을 보라 ). 당연히 이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

필요가 있지만 바울 신학의 기본 윤곽이나 틀을 맛보고 나서 그렇게 할 수 있다.

Rapids: Baker, 2005). 39 ) 나는 두 갈래의 접근을 적극 지지한다. 마땅한 분에게 감사를 표 하자면, 본 시리즈의 편집자가 이와 같은 이중 접근을 요청했다.

바울 사상의 모습

Chapter 2

1 방법론적 쟁점

이어지는 내용에서 나는 나무, 즉 칭의, 교회, 복음 같은 쟁점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자 한다. 나는 자주 나무껍질도 유심히 검토하고 살펴볼 것이다. 나무껍질은 구체적인 쟁점에 대

한 바울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구절과 문단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껍질과 나무에 시선을 집중하

면 숲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옛 격언을 떠오르게 한다. 즉 우리는 바울이 교회에 전하고자 하는

“큰 쟁점”을 보지 못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나무가 자라고 있는 숲의 상황에서 나무를

살펴보지 못함으로써 나무의 특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사람을 그가 성장한 문화와 세계관의 배경을 고려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해야 하는 것은 지 극히 당연하다. 바울의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전반적인 배경을 어렵지 않게 밝힐 수 있 다. 바울의 배경은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와 그 세계에 속한 유대교였다. 바울은 유대교 배경에 서 자랐고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바울의 유대교 신앙은 구약에 근거했다. 바울은 어린

나이부터 유대교를 배웠다. 유대교를 히브리어로 배웠을 가능성이 크고 서신의 내용이 보여 주는 것처럼 헬라어로 유대교를 배운 것이 확실하다. 또한

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가르

해석이 사실은 특정 배경 자료를 다른 자료보다 더 우선시하는 평가에 근거한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울의 언어와 서신을 해석할 때 배경 자료 이용을 피해야 바울을 완

전히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널리 인식하고 있

는 것처럼, 우리가 배경 자료를 1세기 그리스-로마와 유대 세계에서 가지고 오든 감지하기 힘들

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현대 교회의 세계에서 가지고 오든 본문 이해를 위해 이런 배경 자료를 활

용할 수밖에 없다. 배경 이해 없이 바울을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대로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생각에 스며든 다양한 영향력이 바울의 언어를 형

성했으며, 이는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본문 외적 요인이 최근 바울 해석에 있어 지나치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

럽다. 현대 학자들은 바울 당시의 세계와 관련된 엄청난 규모의 정보 창고를 이용하고 이런 정보 를 다루고 적용하는 데

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가 다른 정보에 비해 구체적인

있다. 이런 식의 의 존은 특정 해석자가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자료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트로엘스 엥베르그 페데르센 같은 학자는 바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 을 강조한다. 이런 배경 지식은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특정 방향으로 왜곡 할 가능성도 있다. 또 다른 위험은 배경 자료에 대한 특정 관점에 근거해 바울의 가르침을 해석하 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컬러스 라이트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관점에서 바울 신학을 해석함으로 써 바울 신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많은 강점을 보이지만 라이트가 활용

하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구체적인 형태가 바울 해석에 너무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 우 려된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의 본문 자체가 해석의 우선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상 모든 바울 해

석자는 원론적으로는 이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간단히 말 해 본문에는 항상 문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석하는 어떤 본문의 문맥을 평가할 수 있는 “맨살의 본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배경 자료를 평가할 때 본문 자체가 근본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특정 관점으로 본문을 읽

은 결과 얻은 해석을 평가하려면 과연 그 해석이 본문을 자연스럽게 읽게 도와주는지 따져야 한

다. ( 이 경우에 ) “본문”이란 바울의

널리 이해되고 있다. 이와

단어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제 바울의 “나무”를 이해할 때

드러나는 두 가지 큰 쟁점을 “숲”의 측면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나는 바울이 자기 언어를 사

방식에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끼친 요소를 간단히 분석할 것이다. 둘째, 나는 바울의 언어 를 형성한 구체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나의 입장을 말할 것이다.

2 초기의 영향

우리가 “바울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울이 보여 주는 믿음의 일관된 흐름을 묘사하려는 시

도를 말한다. 바울의 믿음은 서신 이면에 있으면서 서신 안에서 발견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가

르침을 가능하게 했다. 사실상 바울의 믿음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반영한다. 그

리스도 사건은 맨 먼저 바울의 회심에 영향을 끼쳤고 바울 신학을 탄생시켰다. 이후 바울은 몇 가

지 중요한 영향력과 계속 소통하면서 신학을 발전시켰다.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구약, 제2 성전

시대 유대 사상,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이다.

2.1 구약 1 )

바울의 신학적 논지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성경과의 대화다. 프랜시스 왓슨은 주장한다.

“성경과의 대화는 바울( 이 가르친 내용 ) 의 근간이다.”2 ) 당연히 바울은 탄생부터 구약의 영향을 받았 다. 바울의 부모는 당연히 바울에게 성경을 가르쳤을 것이다( 부모는 “히브리인”이었음, 빌 3:5 ).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으며( 행 22:3 ) 구약을 깊이 연구했을 것이다. 바울 사상의 중심이 토라에 서 그리스도로 대체될 때 구약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교정되었지만 구약의 권위에 대 한 열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강렬했다. 이는 잘 알려진 본문인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입증된

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

하니.”3 ) 바울은 성경에 정초하지 않는 메시아 “복음”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예, 롬 1:2 ). 물론 “신약의

구약 사용”은 광대한 연구 분야다. “바울의 구약 사용”으로 좁혀도 마찬가지다. 본문 분석 과정에

서 나는 구약을 언급하는 본문을 주해할 것이다. 여기서는 구약 사용의 몇 가지 방향 표시만 간단

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2.1.1 참조의 형태

바울은 “옛 언약”4 ) 이라는 말을 한 번만 사용하지만( 고후 3:14 ) 현재 우리가 정경의 첫 번째 부 분( 구약 ) 을 지칭하려고 이 문구를 사용할 때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바울 당

시는 정경을

1 )

연구

2 ) Francis Watson, Paul and the Hermeneutics of Faith, 2nd ed. (Edinburgh: T&T Clark, 2016), 5. 3 ) 이 번역을 논의하고 뒷받침하는 내용으로는 16.3을 보라. 4 ) 해리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옛 언약”은 기본적으로 “모세”와 동 일하며(고후 3:15), “기록된 형태의 시내산 언약, 오경”을 가리킨 다(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ontheGreek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2005], 302).

를 보라. J. Ross Wagner, “Paul and Scripture,” in The BlackwellCompaniontoPaul, ed. Stephen Westerholm (Chichester: Wiley-Blackwell, 2011), 154~171. 다음도 보라. Steve Moyise, Paul and Scripture: Studying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10).

약”이라는 말은 없었다. 바울은 우리가 “구약”으로 부르는 것을 단순히 “성경들”( ‘그라파이’, 5회: 롬 1:2; 15:4; 16:26; 고전 15:3, 4 ) 또는 “성경”( ‘그라페’, 9회: 롬 4:3; 9:17; 10:11; 11:2; 갈 3:8, 22; 4:30; 딤전 5:18; 딤후 3:16 ) 으 로 부른다.

바울은 이들 성경 구절을 몇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신학에 융합한다.5 )

2.1.1.1 명시적 참조와 인용

바울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구약을 명시적 근거로 삼는다. 첫째, 바울은 백성과 사건과 제도를 언 급한다. 예를 들어 보자.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고후 11:3 ),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 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갈 3:16 ), “우리 조상들[이스라엘 백성]이……바다 가운데로 지

나며”( 고전 10:1 ). 둘째, 바울은 구약을 인용한다. 인용 표시는 도입 공식( 예, “성경에 이르되”, 롬 10:11; “이사

매우 담대하여……라 말하였고”, 롬 10:20 ) 또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예, 롬 10:13; 고전 10:26 ) 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서신에서 구약을

독자들이 인용의 출처를 파악할 수 있게 그들에 게

편중되게 인용한다.

로마서: 51회( 9~11장에서 25회 )

고린도전서: 14회

고린도후서: 11회

갈라디아서: 10회

에베소서: 3~4회

골로새서: 없음

빌립보서: 없음

데살로니가전서: 없음

데살로니가후서: 없음

디모데전서: 1회

디모데후서: 1회

빌레몬서: 없음6 )

이사야서( 21회 ), 시편( 17회 ), 창세기( 13회 ), 신명기( 9회 ) 는 바울이 선호하는 구약 인용 출처다. 바울 의 인용은 눈에 띄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예, 롬 11:26의 사 59:20; 엡 4:8의 시 68:18 ) 주로 70인역의 헬

5 ) E. Earle Ellis, Paul’s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1957), 11~20.

6 ) 위의 숫자는 무엇을 인용으로 계산하는지, 바울이 인용을 결합한

본문을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는 다음을 보

라. Christopher D. Stanley, PaulandtheLanguageofScripture: Citation Techniques in the Pauline Epistles and Contemporary Literature, SNTSMS 6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라어 본문 전승에 가깝다.7 ) 학자들은 바울이 어떤 종류의 구약 본문을 사용했는지 관심을 기울

인다. 디모데후서 4장 13절의 “책”은 구약 본문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구약 본문 편집 자료를 의

미하는가? 바울이 사용한 구약 본문은 서신마다 구약 인용의 빈도가 다른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 까? 바울은 구약 본문을 암기하고 있었을까? 학자들은 이런 질문 외에 관련 질문을 놓고 긴 세월

씨름해 왔으나 합의에 이를 정도의 결정적인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다.8 )

2.1.1.2 인유 ( 와 “메아리” )

바울의 서신 일부에 인용이 없다고 해서 성경의 영향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성경으

로 자신의 신학 작업을 할 때 여러 방법을 사용한다. 바울이 사용한 방법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인유”다. 일반적으로 “인유”란 청자나 독자에게 구약에 있는 특정 본문 또는 일련의 본문을 떠

올리게 할 만한 언어를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인유”의 좋은 예는 골로새서 1장 6, 10절에서 말하는 열매를 맺게 하고 자라게 하는 언어다.

나는 골로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열매를 맺고 자라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 또한 1:22를 보 라). 홍수 심판 후 하나님의 명령은 반복된다(창 8:17; 9:1, 7). 같은 언어가 아브라함과 족

장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수와 씨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장면에도

사용된다(예, 창 17:20; 28:3; 35:11).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이 복을 얻게 되지만(창

48:4; 출 1:7) 이후 심판받고 쫓겨나는 고통을 겪는다. 이 공식은 하나님이 유배 후 자기 백

성을 다시 모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장면에 다시 등장한다(렘 3:16; 23:3). 바울은 성경

신학 모티프를 의도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티프에 따르면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던 명령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성취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안으로의 연합을 통해, 온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서 변화함으로 성취된다.9 )

7 ) 바울이 거의 절대적으로 구약의 헬라어 본문으로 작업을 했다 는 “합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보라. Dietrich-Alex Koch, Die Schrift als Zeuge des Evangeliums: Untersuchungen zur Verwendung und zum Verständnis der Schrift bei Paulus, BHT (Tübingen: Mohr Siebeck, 1986); Christopher D. Stanley, ArguingwithScripture:TheRhetoricofQuotationsintheLetters of Paul (New York: T&T Clark, 2004); J. Ross Wagner, Heralds of the Good News: Isaiah and Paul “in Concert” in the Letter to the Romans, NovTSup 101 (Leiden: Brill, 2002), 5~8.

대조되는 견해로는 다음을 보라. Timothy H. Lim, Holy Scripture in the Qumran Commentaries and Pauline Letters (Oxford: Clarendon, 1997). 림은 바울이 때때로 히브리 본문이나 아람어 본문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8 ) 최근의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Leonard Greenspoon, “By the Letter? Word for Word? Scriptural Citation in Paul,” in Paul and Scripture: Extending the Conversation, ed. Christopher D. Stanley; ECL 9 (Atlanta: SBL, 2012), 9~24.

9 ) The Letters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PNTC (Grand

골로새서에 생육과 번성의 인유와 그 외에 많은 인유가 사용된 것은 골로새서에서 구약이 여전

히 중요한 자료이고 바울의 중요한 대화 상대임을 의미한다. 이는 골로새서에 구약의 인용이 없

어도 그렇다.10 )

바울의 구약 사용에 대한 리처드 헤이스의 혁신적인 연구 이후 많은 학자는 바울서신에 있는

구약의 “메아리”로 불리는 것을 지금도 밝혀내고 있다.11 ) 학자들이 “메아리”를 정의하는 일에 합 의에 이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저자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을 수

도 있는 인유를 가리킨다. 어떤 학자는 “메아리”를 본문과 독자 간에 메아리를 주고받는 것으로

도 이해한다. 나는 “메아리”를 이처럼 전문적인 의미에서 바울의 구약 사용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범주로 확신하지 않는다.12 ) 나는 최근에 바울의 구약 사용과 관련해 인기 있게 사용되는 “본문 상 호 관련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이는 “본문 상호 관련성”이라는 말이 내가 의구심을 가진 매

우 철학적이고 해석학적인 선이해로 구약을 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3 )

바울서신에서 인유를 탐색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이어서 논쟁이 매우 심한 분야다. 구약

본문과 신약 본문이 단어 몇 개를 공유해야 “인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단어는 얼마나 특이 해야 하는가? 청중은 어느 정도까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바울서신의 주요 독자인 이방인 신자

는 구약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까? 리처드 헤이스는 일곱 가지 기준을 제시하여 분석의 객관성

을 담보하려고 했다.14 ) 그러나 헤이스가 제시하는 기준은 대부분 몇 세기에 걸쳐 학자들이 인유 를 밝히려고 사용해 온 것이다. 이런 기준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나는 헤이스의 방

법론이 대단히 진보한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2.1.1.3 개념의 영향

바울이 사용한 신학 어휘는 구약과 유대의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바 울서신에 사용된 핵심 용어의 의미를 파헤칠 때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최고의 출처는 구약, 특히 헬라어 구약 본문이다. 이는 학자들이 전체적으로 동의하는 견해다. 예를 들어, 나는 로마서 3장 25절의 ‘힐라스테리온’이 이스라엘의 성막에 있었던 “속죄소”의 인유라고 주장한다. 속죄소

Rapids: Eerdmans, 2008, 『PNTC 골로새서·빌레몬서』, 부흥과 개혁사 역간, 2017), 88.

10 ) 골로새서에 사용된 이런 인유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음을 보라. Christopher A. Beetham,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 of Paul to the Colossians, BibInt 96 (Leiden: Brill, 2009; repr., Atlanta: SBL, 2010).

11 ) Richard B. Hays,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14~29.

12 ) 다음의 연구에 있는 논의를 보라. Das, Paul and the Stories of Israel, 4~16; Matthew Scott, The Hermeneutics of Christological Psalmody in Paul: An Intertextual Enquiry, SNTSMS

15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11~18. 13 ) 몇 가지 유용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ussell L. Meek, “Intertexuality, Inner-Biblical Exegesis, and Inner-Biblical Allusion: The Ethics of a Methodology,” Bib 95 (2014): 280~291. 본문 상호 관련성(intertextuality) 용어의 함의에 대 한 주의 사항으로 특별히 다음을 보라. Richard J. Schultz, “Intertextuality, Canon and ‘Undecidability’: Understanding Isaiah’s ‘New Heavens and New Earth’(Isaiah 65:17-25),” BBR 20 (2010): 19~38. 14 ) Hays, Echoes, 29~32.

는 대속죄일 의식에 중요한 기능을 한 기구다( 레 16장 ). 이 용어가 성막의 이런 특징과 연결되어 대

속죄일에 중요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바울과 1세기 유대인은 이 용어로 인해 하나님의 속죄 사

역 개념을 생각했을 것이다. 앤서니 티슬턴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

의 의미는 그 단어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구체적인 경험을 가리키려고 사용된 방식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15 ) 하지만 우리는 바울에게 끼친 영향을 어휘에만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때때로 바울은

구약 개념을 설명할 때 헬라어 구약 성경에 없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휘오데시

아’( “입양” ) 는 헬라어 구약 성경에 등장하지 않고 바울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세계를 배경으로 삼

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단어 역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구약 성경의 모

티프를 의미한다. 구약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큰 그림”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바

울이 줄곧 언급하는 하나님은 바울이 성경을 통해 배운 하나님이다. 바울이 신학 작업을 할 때 사

용하는 구원사의

2.1.1.4 구조의 영향

마태는 토라의 다섯 권에 따라 예수의 다섯 강화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이

야기를 배열했을 것이다. 바울도 마태처럼 구약의 영향으로 구조를 배열했을까? 어떤 학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하지만16 ) 나는 이제까지 직접 검토한 이들의 논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구약의 구조와 이야기는 바울의 신학적 확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약속이 율법을 받기 전에 주어졌으므로 약속과 그에 수반하는 믿음은 신약에서도 중심

역할을 한다( 갈 3장 ). 비슷한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향해 은혜로 행하시는 것을 이

곳저곳에서 전제로 하며, 이는 과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먼저 은혜로 대하셨던 것과 같다.

2.1.1.5 이야기의 적용

위에서 나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연속성이 바울 신학의 근거가 되고 바울 신학에 영향을 끼쳤다 는 생각이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언급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런 근거와 영향은 분명한 사실 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모은 백성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한 이야기, 이스라엘의 경 험으로 계속된 이야기의 절정이다. 신약의 사건은 구약의 이야기를 “성취한다”( ‘플레로오’ ). 17 ) 그러

15 ) Anthony C. Thiselton, The Hermeneutics of Doctrine (Grand Rapids: Eerdmans, 2007), 320~321. 16 ) 니컬러스 라이트가 롬 3~8장 배후에 있는 구약 내러티브의 하 부 구조를 설정하는 예를 보라(1장의 각주 32를 보라). 톰 홀랜

드는 이사야서의 “새 출애굽” 예언들이 로마서의 구조를 이룬다 고 주장한다(Tom Holland, Contours of Pauline Theology: A

RadicalNewSurveyoftheInfluencesonPaul’sBiblicalWritings [Fearn, Ross-shire: Mentor, 2004], 31~34).

17 ) 바울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암시할 때 “성취”의 언어를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다. 롬 13:8; 갈 5:14의 “성취하다”(‘플레로오’; 개역개정 “이루다”), 롬 13:10; 갈 4:4; 엡 1:10의 “충만”(‘플레 로마’; 개역개정 “완성”, “차매”, “통일”).

나 우리는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구약 이야기의 상세한 윤곽을 억지로 만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어떤 접근은 바울서신이 충분히 뒷받침하지 않는 특정 이야기를 바울서신에 적용한다. 그

러면서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나타난 특정 에피소드를 복음 사건을

설명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근거는 흔히 “모형론”으로 불리는 형태를 사용하기도 하

는데, 바울은 구약의 백성과 사건을 복음의 백성과 사건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 ‘튀포스’ ) 이다( 롬 5:14 ). 광야에서 유랑한 불순종의 이스라엘 백성은 고린

도 사람들의 잠재적 “모형들”( ‘튀포이’ ) 이고 고린도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지 말아야 함을 보여 주는

예시다( 고전 10:6 ).

2.1.2 바울과 구약: 연속성과 불연속성

때로는 바울이 임의로 구약 본문과 신약 상황을

인이 새 영역의 하나님 백성 안에 포함되는 것을 호세아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바울은 이방

( 롬 9:25~26; 호 1:10; 2:23 ) 호세아는 유대인,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지칭하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5~8절 에서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대조하고 후자가 신명기 30장 11~14절에 예고되었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모세는 신명기 본문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은혜로 주신 것으로 말한다. 바울은 시편

68편 18절에 있는 동사 “받다”를 “주다”로 바꾸어 이 구절을 부활의 그리스도가 교회의 변화를

위해 사람들에게 공급하신 선물에 적용한다( 엡 4:8 ). 이와 같은 본문에 대해 학자들은 바울이 단지

자신의 관점에 근거해 구약을 읽었고 구약의 의미 또는 구약의 본문을 자신의 관심을 위해 변경 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서 학자들은 이런 식의 구약 읽기는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고 바울이 당 시 유대 주석가의 해석을 따랐다고 자주 주장한다.18 )

바울이 당시 유대적 주석 방식을 따랐다는 주장과 관련해 우리는 두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 첫 째, 구약을 해석하는 “유대식 방법”은 상당히 다양했고 간혹 주장되는 것과 달리 임의적인 해

석이 아니었다. 둘째, 바울의 해석 방법 중 일부는 바울 당시 유대식 해석을 따른 것처럼 보이지 만19 ) 접근 방식에 있어 상당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우리는 성경의 상황화 과 정에 나타나는 두 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20 ) 첫 번째 단계는 “적응 기술”이다. 적응 기술은 구약 본문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유의 수단, 본문에 근거한 수단이다. 두 번 째 단계는 “해석학적 원리”다. 해석학적 원리는 상황화 과정 배후에 있고 상황화 과정을 이끄는

18 ) 예, Peter Enns, The Evolution of Adam: What the Bible Does and Doesn’t Say about Human Origins (Grand Rapids: Brazos, 2012), 101~117.

19 ) 예를 들어, 바울은 롬 4:1~8에서 토라의 한 본문(창 15:6)과 성

문서의 한 본문(시 32:1~2)을 연결하기 위해 “여기다”(‘로기조 마이’)를 사용한다.

20 ) 나는 이제는 출간된 형태인 나의 학위 논문에서 이 견해를 발 전시킨다. Douglas J. Moo, The Old Testament in the Gospel Passion Narratives (Eugene, OR: Wipf & Stock, 2007 [1983]), 25~74. 던도 비슷하게 구분한다(Dunn, Theology of Paul, 172~173).

신학적 전제를 가리킨다. 바울은 성경의 적용을 위해 당시 잘 알려진 적응 기술을 사용한다. 그러

나 바울은 당연히 두 번째 쟁점에 대해서는 당시 유대인 대부분과 다른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

어, 사해 두루마리를 기록한 쿰란의 언약주의자는 자신들이 선지자들이 말한 공동체라고 확신했

다. 자연스럽게 선지자들의 예언을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에 적용했다. 반면 바울은 그리

스도가 구약에 나타난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라고 확신했으며, 그래서 구약의 예언이 예수와 예수

를 따르는 자들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바울의 해석학 원리를 수용할 경우 바울의 구약 해석에 분명히 드러나는 임의성은 매우

약해지고 만다( 위에 언급한 구체적인 본문에 대한 주장을 나의 주석에서 보라 ). 나는 바울의 구약 사용을 전체적

으로 살펴보면서 그레고리 빌 같은 학자들이 탁월하게 주장한 견해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 이 견 해에 따르면 바울은 자신이 인용하고 인유하는 구약 본문의 문맥과 의미에 민감성을 보인다.21 ) 바

울서신에 있는 자료를 공정하게 다루기 위해 우리는 이 문제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앞을 향해” 읽어야 하고 “뒤를 향해서도” 읽어야 한다.22 )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

도가 세우는 공동체를 이미 존재하는 구약의 구속 이야기에 포함한다. 존 바클레이가 주장하는 것

처럼, 바울은 헤이스가 강조한 언어의 방향을 뒤집고 “이스라엘의 성경에서 복음의 메아리를 찾는

다.”23 ) 둘째, 바울은 또한 구약의 구속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측면에서 이

이야기를 해석한다. 우리가 바울서신에서 “앞을 향해” 읽는 것을 배제해 버리면 구약과 신약 간의

진정한 연속성을 찾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구성한

다면 그리스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속 이야기의 절정 또는 성취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

는 구약의 구속 이야기를 “뒤를 향해” 읽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만 이야기가 이해될 수 있다. 전체 그림에서 그리스도를 배제하는 것은 이야기의 한

부분만 이해하는 시도가 될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모체였던 유대교는 몇 가지 구약 읽기 방

21 ) 특히 다음을 보라. G. K. Beale, The Right Doctine from the WrongTexts?EssaysontheUseoftheOldTestamentinthe New (Grand Rapids: Baker, 1994). 다음 자료도 보라. Beale, Handbook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xegesis and Interpretation (Grand Rapids: Baker, 2012, 『신약의 구약 사용 핸드북』,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3); 같은 저자, “The Cognitive Peripheral Vision of Biblical Authors,” WTJ 76 (2014): 263~293; Mitchell Kim, “Respect for Context and Authorial Intention: Setting the Epistemological Bar,” in Stanley, Paul and Scripture: Extending the Conversation, 115~129. 반대 견해로는 특히 다음을 보라. Steve Moyise, “Does Paul Respect the Context of His Quotations?,” in Stanley, Paul and Scripture: Extending the Conversation, 106~113. 빌과 빌의 견해에 동의하는 학자는 소책자지만 엄청 난 영향을 끼친 찰스 도드의 책에서 얻은 통찰에 근거한다. C. H.

Dod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e Substruc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London: Nisbet, 1953). 이런 식으로 신 약의 구약 사용을 이해하는 실례를 보여 주는 책으로는 다음을 보라. G. K. Beale and D. A. Carson, eds., Commentaryon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7).

22 ) 특히 다음을 보라. Watson, Paul and the Hermeneutics of Faith, 273~274. 루크 티모시 존슨은 설명한다. “바울의 변증 법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성경의 관점에서 읽히는 것 못지않 게 성경은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혀야 한다”(Luke Timothy Johnson, “The Paul of the Letters: A Catholic Perspective,” in Four Views of the Apostle Paul [ed. Michael F. Bird; Grand Rapids: Zondervan, 2012], 49).

23 )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 (Grand Rapids: Eerdmans, 2015), 418(강조는 원문).

식, 그리고 어느 정도 대립하고 “앞을 향하는” 구약 읽기 방식을 가르쳤다.24 ) 바울의 주장에 따르

면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에서 해석학 열쇠를 얻어야 구약 이야기의 “참된” 읽기가 가능하다. 구약

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뒤를 향해” 빛을 비추는 것은 십자가다.

바울은 전체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근거해, 특히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

르렀다는 관점에 따라 우리가 구약에서 “더 충만한 의미”( 센수스 플레니오르 ) 로 부를 수 있는 것을 자 주 발견한다. “더 충만한 의미”는 주로 “원래 의미”와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며, 바울이 전제로 하

는 해석학 원리에 잘 들어맞을 수 있다.25 ) 이런 복잡함을 고려할 때 바울서신에 나타난 구약 사

용의 “타당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약간 달라야 한다. 우리는 바울의 구약 해석이 모든 곳에서

정확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접근 방식은 케빈 밴후저 가 일반 해석학에 대해 말하면서 “오류 가능성”이라고 부른 개념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26 ) 신약

의 구약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성취 형태를 확신할 만큼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오류 가

능성”이라는 접근에 따르면 우리는 신명기 30장 11~14절이 궁극적으로 복음의 단어에 대해 말

했는지 알 수 없다( 롬 10:6~8 ). 그러나 “오류 가능성”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석학적 허무주의 경향

과 대조적으로, 흔히 신약에서 시작하는 우리의 구약 해석이 점검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근원부터 철저하게, 단계마다 확실하고 합리적으로 이전 단계를 따르면서, 모든 단계가 누구든지

동의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에 근거해 구약을 신약에 정확하게 적용했다고 설명할 수는 없을 것

이다. 그럼에도 신약의 구약 사용에 대한 어떤 설명이라도 합리성과 타당성의 검사를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약의 구약 사용은 설득력이 있는가? 쿰란 문헌 또는 랍비 문헌에 발견되는 구약

해석보다 더 타당한가? 우리는 여전히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는 점을 “증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약에 대한 신약의 해석이 제시하는 성경적 진리의 전반적인 틀

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전제를 충족시키는지 질문하는 것이다.27 )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24 ) 이곳과 책 여러 곳에서 내가 사용하는 명칭인 “그리스도인”의

용례를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바울 연구는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유대교에 계속해서 보이는 열심을 강조하고 유

대교와 기독교의 “분리”는 바울이 죽은 후 오랜 시간을 통해 일

어났다고 언급한다. 이 관점에서는 바울을 “그리스도인”으로 부

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다

른 곳에서 이 쟁점을 논의할 것이다(23.2). 여기서는 나는 유대

교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바울의 관심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받아들인 관점은 당시 유대교의 주장과는

대부분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

어, 바울은 새로운 운동을 핍박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명확한 불연속성의 측면에서 나는 바울뿐만 아니라 바

울 당시 예수를 따른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신약이 인정한 단어

“그리스도인”(행 11:26; 26:28; 벧전 4:16)을 사용하는 것이 적 절하다고 생각한다.

25 ) Douglas J. Moo and Andrew David Naselli, “The Problem of the New Testament’s Use of the Old Testament,” in 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 ed. D. A. Carson (Grand Rapids: Eerdmans, 2016), 702~746을 보라.

26 ) Kevin J. Vanhoozer, “Christ and Concept: Doing Theology and the ‘Ministry’of Philosophy,” in Doing Theology in Today’s World: Essays in Honor of Kenneth S. Kantzer, ed. John D. Woodbridge and Thomas Edward McComiskey (Grand Rapids: Zondervan, 1991), 99~145, 특히 103.

27 ) 나의 논문을 보라. “Paul’s Universalizing Hermeneutic in Romans,” The 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 11 (Fall

통일성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28 )

2.2 제2 성전기 유대교의 가르침

바울은 자라면서 성경을 깊이 이해했다. 바울의 성경 이해에 영향을 끼친 것은 제2 성전 시대

유대교의 성경 이해다. 바울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예루살렘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받을

때 이런 영향을 받았다. 최근 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적절히 강조해 온 것처럼 바울 당시의 유대교

는 성경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이 자신을 바리새인으로 밝히기 때문에

바울이 바리새파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 당시는 바리새

파도 다양했다. 새로운 접근과 운동에 열려 있었던 ( 유대 전통에서 랍비 힐렐과 관련이 있었던 ) “자유로운”

진영과 ( 랍비 샴마이의 가르침을 따른 ) 엄격한 진영이 있었다. 가말리엘이 초기 기독교 운동에 보여 준 태

도( 행 5:34~39 ) 는 그가 “힐렐파”였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열심”을 강조하고

개방된 견해에 동의했음을

근거해 초기 교회를 핍박한 것 은 그가 바리새파의 “샴마이” 진영과 같은 입장임을 의미한다.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따랐던 유대 교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결론을 내릴 만큼 충분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29 )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때문에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안에

서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게 되었다는 점이다. 바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세계관

의 중심을 토라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대체한 것이다. 성경에 대한 바울의 새 관점은 정도의 차이

는 있어도 거의 모든 본문에서 바울의 신학을 전개하고 적용할 때 중요하다. 물론 바울이 성경을

다시 읽게 되었다고 해서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견지했던 관점을 모두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유대 신학의 많은 측면은 성경 자체의 가르침을 단순히 모방한다. 성경을 다시 읽은 바울은

유대교의 표준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확언했다. 표준 가르침은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독특한 역할, 언약에 기반을 둔 구원 계획의 구조, 죄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한 제사의 필요성 같은 것이었다. 물론 불연속성의 특징도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관점에

서 성경을 다시 읽음으로써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의 유대적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의 어떤 본문( 예, 갈 3:14~25; 4:21~31; 롬 4, 9~11; 고후 3:7~18 ) 은 성경의 뜻과 궁극적 의미에 대해 당

시의 유대 관점과 논쟁하는 형태를 취한다.

2007): 62~90.

28 ) 이 내용은 그레고리 빌이 피터 엔스와의 논쟁에서 주장한 것이 다(Beale, “Myth, History, and Inspiration: A Review Article of Inspiration and Incarnation,” JETS 49 [2006]: 287~312).

29 ) 이 쟁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Schnelle, ApostlePaul, 69.

2.3

초기 기독교 전통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에 의존한 점에 대해 두 가지 요점을 말한다. 첫째, 바울은 갈

라디아서에서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

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 1:12 ) 라고 말한다. 이어서 예루살렘 사도들, “기둥들처럼 보

였던 이들”( 갈 2:9 나의 사역 ) 의 독립성을 언급한다. 둘째,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기본적인 윤곽을 바울이 “받은”( 고전 15:3 )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바울 당시 “받다” 언어는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가르침을 받았음을 의미했다( ‘파랄람바노’, 고전 11:23; 갈 1:9; 빌 4:9도 보라 ). 바울이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사실들”을 다른 사람을 통해 배웠으나 그리스도

것으로

해한다면 의존성과 독립성의 긴장을 해결할

“전달한” 전승은 바울이

그리 스도를 경험한 사건을 통해 입증한 것이다.30 ) 바울이 서신의 인사말에 동료 사역자 이름을 포함한 것도 그의 신학이 어느 정도는 공동의 노 력이었음을 내포한다. 나는 바울의 인사말이 서신의 공동 집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 3.2.3 ). 인사말은 바울이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지도자를 신학 작업 과정에 포함했음을 보여 준

다. 또는 적어도 바울이 직접 교회에 전하는 신학을 동료 사역자가 승인했음을 입증할 목적으로

동료의 이름을 인사말에 포함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미 교회에 회람되던 찬송 또는 고백 진술을

인용하는 것도 초기 그리스도인을 신학 작업에 포함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에베소서 5장 14절

에서 바울은 ( 아마도 ) 명시적으로 이런 전통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학자들은 명시적으로 소개되지 않는 많은 인용도 바울서신에서 찾아냈다. 이런 인용 이 있는 본문이 무엇인지, 바울이 인용을 어느 정도 편집했는지, 교회에서 인용이 기원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심각하게 논쟁하는 내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본문은 로마서 1장 3~4절, 빌립보서 2장 6~11절, 골로새서 1장 15~20절, 디모데전서 3장 16절이다.31 ) 다른 본문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단락들의 신학과 관련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을 언급해야 한다. 바울 이 달리 언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울이 이 찬송과 고백 진술을 인용하는 것에 동의하고 있음 을 생각해야

30 ) Ladd, TheologyoftheNewTestament, 425~432. 31 )

Ralph P. Martin, “New Testament Hymns: Background and Development,” ExpTim 94 (1983): 132~136; Stephen E. Fowl, The Story of Christ in the Ethics of Paul: An Analysis of the Hymnic Material in the Pauline Corpus, JSNTSup 36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0); Matthew E. Gordley, New Testament Christological Hymns: Exploring Texts, Contexts, and Significanc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8); Benjamin Edsall and Jennifer R. Strawbridge, “The Songs We Used to Sing? Hymn ‘Traditions’and Reception in the Pauline Letters,” JSNT 37 (2015): 290~311.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본문이다( 우리가 출처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는 인정해야 한다 ).

2.4 예수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신학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래된 해석 전통이 다.32 ) 이 견해에서 바울은 나사렛 교사의 간결한 윤리적 요구를 이론의 체계, 철학의 영향을 받

은 체계로 바꾸었다. 따라서 바울은 “기독교의 두 번째 창립자”며, “첫 번째 창립자”보다 훨씬 많

은 영향을 후대 신학에 끼쳤다.33 ) 많은 사람이 여전히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 신학 사이에 상당한

독립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는 해도 이 견해를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34 )

그러나 언뜻 보기에 우리는 바울이 예수와 독립적인 관계에서 신학을 발전시켰다는 인상을 바

울의 서신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는 인용하는 예

가 거의 없다( 고전 7:10; 9:14; 11:23~26; 14:37; 살전 4:15~16[?]; 딤전 5:18 ).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외하면 예

수의 생애 가운데 일어난 사건도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는 17.2.2.2를 보라 ). 하지

바울의 서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에 생각했을 때보다는 바울과 예수의 연결점이 더 많이

드러난다.

위에 언급한 명시적 본문 외에도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언어상 유

사성을 보여 주는 본문이 매우 많다( 특히 롬 12:14; 14:4; 고전 13:2; 살전 5:2, 4를 보라 ). 35 ) 또한 예수의 가르

침은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바울 신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36 ) 의존성을 입증하는 것은 어

렵다. 어떤 유사성은 초기 기독교 전승에 대한 바울의 의존성을 통해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결론적으로 제임스 던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 전승의 증거가 대단히 강한 때조차도 기

억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입장과 바울의 선포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존재한다.”37 )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바울의 가르침이 발전한 것이라고 해도 예수의 가르침과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다. 바울은 자기 청중이 예수의 이야기와 가르침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가정했을 것이다. 그

32 )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제안에 대한 연구로 는 다음을 보라. Victor Paul Furnish, “The Jesus-Paul Debate: From Baur to Bultmann,” BJRL 47 (1965): 342~381.

33 ) Wilhelm Wrede, Paul (Boston: American Unitarian Association, 1908), 180.

34 ) 예, Jürgen Becker, Paul: Apostle to the Gentile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3), 112~124.

35 ) 다음 분석을 보라. Craig L. Blomberg, “Quotations, Allusions, and Echoes of Jesus in Paul,” in Studies in the Pauline Epistles: Essays in Honor of Douglas J. Moo, ed. Matthew S. Harmon and Jay E. Smith (Grand Rapids: Zondervan, 2014), 129~143.

36 ) 다음 자료를 보라. David Wenham, Paul: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5); 같은 저자, From Good News to Gospels: What Did the First Christians Say about Jesus? (Grand Rapids: Eerdmans, 2018); Detlef Hä usser, Christusbekenntnis und Jesusüberliefung bei Paulus, WUNT 2/210 (Tübingen: Mohr Siebeck, 2006), 351~352, 그 외 여러 곳; Barnett, Paul; Dunn, Theology of Paul, 189~195.

37 ) James D. G. Dunn, Beginning from Jerusalem, Christianity in the Making 2 (Grand Rapids: Eerdmans, 2009), 24~25.

1부 서론적

러나 바울은 1세기 팔레스타인과 다른 환경에 살고 있던 교회의 필요를 위해 기독교 진리를 새로

운 표현으로 전해야 했다.

3 개념적 범주

이 단원에서는 바울의 신학적 “나무들”이 있는 “숲”을 분석할 것이다. 말하자면, 바울 신학의

특정 요소를 해석하기 위한 문맥, 즉 바울의 사고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윤곽을 스케치할 것이다.

이 윤곽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는 바울의 신학적 세계관이 구원사의 모

습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나는 바울이 이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구성하는 개념을 “영 역”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의 다양한 신학적 가르침을 한데 엮는 망이라고 제안한다. 나는 또한 바울 신학의 발전과 표현에 있어 초기의 핵심적인 영향 일부를 간 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3.1 신학적 틀: 구원사

“구원사” 또는 “구속사”( 독일어 Heilsgeschichte, ‘하일스게시히테’ ) 는 서로 다르고 때때로 모순되는 몇 가지 개념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구다.38 )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나는 바울이 역사의 과정에서 예수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 구원을 정의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소 비전문적인 의미 로 “구원사” 또는 “구속사”를 사용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미를 하나님의 구원 계 획의 절정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타락 이후 시작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

의 약속에 선언되며 이스라엘 역사의 흥망성쇠에서 계속된 것이다. 당연히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 에 대한 깊은 지식과 유대 “아카데미”에서 받은 초기의 교육을 통해 이런 용어로 생각하는 훈련 을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당시의 다른 유대인처럼 바울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 원, 즉 하나님이 자기 선민을 신원하고 이런 행위를 통해 자기 이름을 광대하게 하실 날을 소망했 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사는 “두 시대”로 구분된다. 종속과 죄로 점철되는 이스라엘의 옛 시 대는 이스라엘이 높아지고 우상과 죄를

38 ) 예, Robert W. Yarbrough, “Salvation History (Heilsgeschichte) and Paul: Comments on a Disputed but Essential Category,” in Harmon and Smith, Studies in the Pauline Epistles, 181~197.

39 ) 때때로 “두 시대” 도식은 묵시론적 유대교와 구체적으로 관련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니컬러스 라이트가 지적한 것처럼 이 도식

은 바울 당시 유대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N. T. Wright,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157~158). 우리는 구원사 에 대한 유대교의 도식 중 어떤 것은 간단한 “두 시대” 관점 보다 더 복잡했음을 언급해야 한다(Loren T. Stuckenbruck, “Posturing ‘Apocalyptic’ in Pauline Theology: How Much Contrast to Jewish Tradition?,” in The Myth of the Rebellious Angels: Studies in Second Temple Judaism and New Testament Texts, WUNT 2/355 [Tübingen: Mohr Siebeck, 2014],

사에 기초해 생각하는 방식은 바울이 자기 신학을 표현할 때 전제한 틀이었음이 사실상 바울서신

의 모든 내용마다 드러난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계시를 경험하고 나서 두 시대 구원사를 상

당히 새롭게 이해했다. 약속대로 메시아가 왔으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로마의 권세 아래 있고 죄

는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은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했으

나, 친숙한 언어를 사용해 보면, 성취는 미래의 완성을 남겨 두었다. “새 시대”가 도래했으나 “옛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두 “시대”가 현재 중첩된다. 신자는 새 시대 안에 결정적으로 옮겨졌으

나 여전히 옛 시대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의미하는 “이미”

와 하나님이 여전히 행하셔야 한다는 의미의 “아직”의 긴장 사이에 살고 있다.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두 시대의 중첩은 바울의 구원사 도식을 좁은 의미의 “역사”에 제한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는 바울의 세계관을 개념화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추가적인 단계를 아래에서

제안할 것이다.

“구원사”에 대한 위의 간결한 스케치는 최근의 바울 연구와 신약 연구 전반에서 어느 정도 표

준이 되고 있다. 이 견해에 대한 영향력 있는 언급은 조지 래드가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를 묘사하기 위해 “시작된 종말론”을 주장할 때 나왔다.40 ) 이름을 열거하기에 너무나 많은

학자가 이런 기본 개념을 사용했으나41 ) 내게 특별한 영향을 끼친 두 학자는 헤르만 리데르보스와

그레고리 빌이다. 리데르보스는 바울의 신학에서 이 개념을 다루었고 빌은 몇 개의 글에서, 특히

“신약신학의 종말론적 개념”에서 가장 선명하게 언급했다.42 )

마지막 문단이 의미하는 것처럼 바울의 구원사적 세계관은 바울의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 다. 학자들이 바울의 종말론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특징을 상세히 전개했다( 위에 언급한 빌의 논문을 보

라 ). 나는 본서에서 수시로 종말론의 쟁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여기서는 바울의 종말론에 대한 제

임스 던의 주장을 입증하는 증거를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의 복음은 종말론적이었다. 아직

바울이 소망하는 일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이 믿은 일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43 ) “종말론”은 “마지막 일들”( ‘에스카타’ ) 에 대한 가르침( ‘로고스’ ) 이다. “마지막 일들”, 즉 구약에 예 245~256).

40 ) Ladd, TheologyoftheNewTestament, 특히 55~67.

41 ) 예,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The Primitive Christian Conception of Time and History (Philadelphia: Westminster, 1950); 같은 저자, Salvation in History (London: SCM, 1967); Goppelt,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예, 1:280~281; Martin Hengel, “Heilsgeschichte,” in Theologicsche, Historische und Biographische Skizzen: Kleine Schriften VII, ed. Claus-Jürgen Thorton; WUNT 2/253 (Tübingen: Mohr Siebeck, 2010), 1~33. 더 대중적인 수준에서 이런 관점을 일부 유 용하게 소개한 책으로는 다음을 보라. Lewis B. Smedes, Union

with Christ: A Biblical View of the New Life in Jesus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1983).

42 ) 다음 책의 “근본적인 구조” 단원을 보라. 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5), 44~90. 다음도 보라. G. K. Beale, “The Eschatological Conception of New Testament Theology,” in “The Reader MustUnderstand”:EschatologyinBibleandTheology, ed. K. E. Brower and M. W. Elliott (Leicester: Inter-Varsity, 1997), 11~52.

43 ) Dunn, TheologyofPaul, 465(강조는 원문).

고된 사건이 도래했다는 주장은 모든 신약신학의 기본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은 성취의 시대

에 살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런 확신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들과 자기들이 속한 역사에 대해 생

각하는 방식에 중심이 되었다. 바울은 이런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바울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

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11 ). 바울과 그의 편지를 받는 신자들은 “새 창조”( 고후 5:17; 갈 6:15 ) 에 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이 계시되는 시대( 예, 골 1:26~27 ), 율법이 절정에 이른 시

대( 롬 10:4 ), 구약이 성취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아래 17.2.1을 보라 ). “이미”에 대한 이런 강조는 당연 히 “아직”의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하지 말아야 한다.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한 부분 을 강조하면 바울이 자기 서신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학적 문제와 행실의 문제가 생기고 만다.

종말론 외에 “언약”도 구원사에 완전히 연결된 또 다른 개념이다. 언약은 그리스도인이 전통적

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설명하기

표시다. 바울은 언약 언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언약 개념은 일부 핵심 주장의 배경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20.3.1을 보라 ). 바

울은 다른 성경 저자와 마찬가지로 개혁신학의 “언약 신학” 개념에 사용되는 방식으로 “언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혁신학의 언약 신학 개념이란 에덴동산부터 새 하늘과 새 땅까지 확장되는 하

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44 ) 나의 논점은 언약 신학에서 연속성을 타

당하게 강조하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사용된 “언약” 언어가 연속성보다는 불연

속성에 초점을 더 맞춘다는 의미다.45 ) 다시 말해 “언약”은 일반적으로 구원사를 설명하는 성경의

용어가 아니다. 내가 “옛 시대”와 “새 시대”로 이름을 붙인 특유의 문구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하

나님이 펼치시는 계획을 묘사할 때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 자세히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누구든지 이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균형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그 균형을 특정 교리에 적용하고자 할 때 견해 차이가 생긴다. ( 어떤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입장에 문제

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나는 전체적으로 개혁신학 전통에 속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바울 신학이 개혁신학에서 전형적인 것보다는 불연속성에 더 기울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불연속성은 유아세례보다 믿는 자의 세례를 내가 더 선호하는 것에 드러나고( 교회가 신자로만 구성된 다는 것이 나의 견해 ) 모세의 법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에게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는 나의 결론에도 드러난다. 나는 최근에 몇 명의 학자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혼합에 대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 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개혁신학과 어느 정도 일치점이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46 )

44 ) 제프리 니하우스는 성경에 있는 언약은 기존

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협정을 제정한다고 주장한다. Jeffrey J. Niehaus, “An Argument against Theologically Constructed Covenants,” JETS 50 (2007): 259~273.

45 )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학자 중 다음을 보라. Henri A. G. Blocher, “Old Covenant, New Covenant,” in Always Reforming: Explorations in Systematic Theology, ed. A. T. B. McGow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6), 240~270.

46 ) 예, Tom Wells and Fred Zaspel, New Covenant Theology: Description, Definition, Defense (Frederick, MD: New Covenant Media, 2002); Peter J. Gentry, and Stephen J. Wellum, Kingdom through Covenant: A Biblical-Theological UnderstandingoftheCovenants (Wheaton, IL: Crossway, 2012) (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여기서 스케치한 전체적인 구원사의 관점은 바울 학자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바울 신학을 다룬 어떤 관점도 만장일치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며, 구원

사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에 많은 학자가 어느 정도는 구원사에 대해 반감을 표현했다. 이들은 그

리스도의 오심을 갑작스럽게, 예상치 못하게 역사에 개입한 것으로 묘사한 것이 역사가 그리스도

안의 성취를 향해 계속 진행한다는 개념을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커사가 말하는 것처럼, 쟁

점은 “이스라엘의 과거 이야기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연속성을 식별할 선이 있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나타난 묵시론적 속성이 자연스럽게 연속성을 이어 가

는 이야기에 엄청난 파열을 일으켜서 그 연속성을 식별할 수 없게 되었는지다.”47 ) 커사의 말이 의

미하는 것처럼 많은 해석자는 불연속성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묵시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

하며, “묵시론적 바울” 운동으로 불리는 접근을 시도하는 많은 학자가 이 용어를 수용한다.48 ) “묵

시론”의 개념과 관련된 논쟁, 이 용어가 “묵시론적 바울” 운동에서 강조하는 내용에 적절하게 적

용되는지는 여기서 다룰 쟁점이 아니다.49 ) 나는 “구원사”를 선호하는 것을 “묵시론적 바울” 운동

의 학자에 반대하는 시각에서 입증할 것이다.

첫째, 바울 신학에서 “묵시론적 바울” 운동이 강조하는 타당한 통찰력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

하다. D. A. 카슨이 적절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약속-성취” 도식뿐 아니라 “신비-계시”의 도식

도 바울이 구약을 적용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50 ) “약속-성취”의 도식이 구약과 바울의 가르침

번째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을 보라: www.thegospelcoalition. org/reviews/kingdom-covenant-douglas-moo).

47 ) Charles B. Cousar,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Reflections on Romans 5-8,” in Pauline Theology, Volume 3: Romans, ed. David M. Hay and E. Elizabeth Johnson (Minneapolis: Fortress, 1995), 196.

48 ) 이 관점의 핵심 지지자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 만) 다음과 같다. J. Louis Martyn, “Apocalyptic Antinomies i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NTS 31 (1985): 410~424; 같 은 저자, Galati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B 33A (New York: Doubleday, 1997); Beverly Roberts Gaventa, “The Singularity of the Gospel: A Reading of Galatians,” in Bassler, Pauline Theology, 147~159; 같은 저 자, When in Romans: An Invitation to Linger with the Gospel according to Paul (Grand Rapids: Baker, 2016); Douglas A. Campbell, The Quest for Paul’s Gospel: A Suggested Strategy (London: T&T Clark, 2005), 같은 저자, Pauline Dogmatics: The Triumph of God’s Love (Grand Rapids: Eerdmans, 2020). 바울 신학의 묵시론적 이해에 대한 유익한 개관으로는 다음을 보라. J. P. Davies, Paul among the Apocalypses? An Evaluationofthe“ApocalypticPaul”intheContextofJewish and Christian Apocalyptic, LNTS 562 (London: Bloomsbury, 2016), 3~22. 에른스트 케제만은 묵시론은 “기독교 신학의 어 머니”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Ernst Käsemann, New Testa-

mentQuestionsofToday (Philadelphia: Fortress, 1969), 102. 49 ) 매틀락은 “묵시론” 단어가 바울 당시 이 언어가 사용된 실제 방 식에 비추어 매우 의심스러운 근거를 기반으로 바울 연구에 자 주 사용되는 것을 정당하게 반대한다(R. Barry Matlock, Unveiling the Apocalyptic Paul: Paul’s Interpreters and the Rhetoric of Criticism, JSNTSup 127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특히 257~316). N. T. Wright, Paul and His Recent Interpreters, 155~189도 보라. D. 캠벨의 연구에서 특히 “묵시론”은 우리가 고대 유대교에서 보는 의미보다는 바르트 신 학과 더 밀접하게 관련된 어떤 인식론을 가리키는 방식이 된다 는 것을 말해야 한다. 캠벨이 “근본주의”로 부르는 것과 계속 해서 벌어지는 논쟁은 캠벨의 최근 저서 Pauline Dogmatics에 나타난다. 본 쟁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en C. Blackwell, John K. Goodrich, and Jason Maston, “Paul and the Apocalyptic Imagination: An Introduction,” in Paul and the Apocalyptic Imagination, ed. Ben C. Blackwell, John K. Goodrich, and Jason Maston (Minneapolis: Fortress, 2016), 6~11.

50 ) 다음을 보라. D. A. Carson, “Mystery and Fulfillment: Toward a More Comprehensive Paradigm of Paul’s Understanding of the Old and the New,” in The Paradoxes of Paul, vol. 2 of JustificationandVariegatedNomism, ed. D. A. Carson, Peter T. O’Brien, and Mark A. Seifrid; WUNT 2/140 (Tübingen: Mohr Siebeck, 2004), 393~436. 또한 Blocher, “Old Covenant, New Covenant,” 245~254. 그는 바울서신에 있는 연속성과 불연속

에서 연속성을 의미한다면 “신비-계시”는 불연속성에 가깝다. 하나님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행동하셨다. 이와 같은 불예측성은 구약의 성취에 대한 바울의 주장에도 어느 정도 나타난다. 바

울이 부활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나는 사건은 그리스도 중심의 접근을 보여 주는 패러다임이 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활동의 근거로 삼은 구원사의 이야기에 단순히 예수를 연결한 것이 아니

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구원사를 재설정했다. 브루스 롱네커가 말하는 것처럼 “바울 은 계시된 복음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성경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읽었다. 복음이 이스

라엘의 이야기와 성경을 정의하고 결정한 것이고 그 반대는 아니었다.”51 ) 그러나 이는 “묵시론적” 그리스도 사건이 구원사를 지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은 구약에서

시작하고 진전되는 이야기에 그리스도가 일치하는 것을 계속해서 인식한다. 우리는 연속성과 불

연속성을 정당한 비율로 바울 신학의 적절한 위치에서 평가해야 한다. 그리스도 사건은 이 사건 의 모든 영향과 더불어 구원사의 중심이고 해석학적 토대다. 바울 신학은 “묵시론적” ( “계시적” ) 사 건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다. 동시에 바울 신학이 진정한 신-학 ( theo-logy,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 ) 이 되 기 위해서는 바울의 신학이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

님”의 계시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몇몇 학자들

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바울 신학의 특징을 설정할 때 “구원사”와 “묵시론” 중 하나만 선택하

는 결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52 ) 바울 신학은 구원사며, 묵시론적 사건은 구원사의 중심과 해석학 적 폭발이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사”가 넓은 범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구원사”가 바울의

세계관에 나타나는 특징임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관점이 보여 주는 정확한 속성을 명확하게 파

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묵시론적 바울” 운동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불연속성 쪽으로 많이 지우친

것은 맞지만, 그들은 구원사를 파악할 때 그리스도 사건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당하게 강

조한다.

바울의 구원사적 세계관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개인의 역사보다는 집단의 역사에 더 많이 관심을 두는 것이다. 서구의 개인주의 사고방식의 후손인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우

리의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좋은 예가 갈라디아서 3장 23~25절에서 바울이 율법에 대해 가르친 내용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 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 성을 찾아내는 작업과 관련된 복잡한 특징을 강조한다.

51 ) Bruce W. Longenecker, The Triumph of Abraham’s God: The Transformation of Identity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98), 210.

52 ) 예, Barclay, Paul and the Gift, 143~149, 414~418; D. A. Shaw, “Apocalyptic and Covenant: Perspectives on Paul or Antinomies at War?,” JSNT 36 (2013): 155~171; N. T. Wright, “A New Perspective on Käsemann? Apocalyptic, Covenant, and the Righteousenss of God,” in Harmon and Smith, Studies in the Pauline Epistles, 116~123. 또한 본 쟁점에 대한 세

다른 관점을 다루는 세 논문을 보라. JSPL (2012)의 2권: Bruce W. Longenecker, “Salvation History in Galatians and the Making of a Pauline Discourse,” 65~87; Jason Maston, “The Nature of Salvation History in Galatians,” 89~103; Martinus C. de Boer, “Salvation History in Galatians: A Response to Bruce W. Longenecker and Jason Maston,” 105~114.

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개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자주 생각했다. 여기서 개인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

에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었거나, 다른 해석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신칭의를 얻기 위해 율법

의 인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집단 경험

을 언급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이스라엘은 구원사의 새로운 국면이 오기까지, 그리스도를 믿

는 것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 있었다는 말이다. 바울서신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

의 언어는 집단적인 사고방식의 또 다른 예로서 바울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롬 6:6; 엡

4:22, 24; 골 3:9~11 ). 바울서신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대한 교리와 관련해 많은 사람은 바울

이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용어로 한 사람의 두 부분 또는 두 “본성”을 구분한다고 주장하거나

전제한다. 사람들은 이런 해석을 전제로 삼고 회심 때 “옛 본성”이 “새 본성”으로 대체되는지 아

니면 “새 본성”이 “옛 본성”에 더해지는 것인지를 두고 논쟁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한 사

람의 두 부분 또는 두 본성을 의미한다는 전제는 틀렸으며, 바울이 주장하지 않는 개인주의의 전

제를 드러낸다. “예 사람”과 “새 사람”의 용어는 전인을 지칭하고 개인이 속한 집단적 구조와 관

련 있다( 24.1.1.1을 보라 ). 현대의 개인주의 개념을 버리고 바울의 “집합체적”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은 크리

스터 스텐달이 큰 영향을 끼친 1963년 논문, “사도 바울과 서구의 자기 성찰적 양심”에서 강조한

주제다.53 ) 그러나 스텐달의 논문 이후 개인에 초점을 둔 정도 대 집단에 초점을 둔 정도의 비율에

대한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게리 버넷은 바울 당시 사람들은 스텐달이 주장한 것보다

더 개인적인 측면에서 사고했음을 보여 주었다.54 ) 개인에 대한 관심은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 니다. 최근 학자들은 스텐달의 접근으로 돌아가지 않고도 바울의 집단적 사고를 강조하며, 특히

이들 중에는 바울서신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학자들도 있다.55 ) 교회에 관심을 다시 집중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며, 일부 기독교 진영에는 절실히 필

요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도 타당하고 중요한 요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의 사상에서 집단적인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바울이 복수 대명사를 사

용하는 것을 근거로 삼을 때가 자주 있다. 그러나 복수 대명사가 사용되는 것 자체가 집단적인 관 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 신학을 연구하는 최근의 일부 학자들은 이런 실수를 하는 것 같

53 ) Krister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TR 56 (1963): 199~215.

54 ) Gary W. Burnett, Paul and the Salvation of the Individual, BibInt 57 (Leiden: Brill, 2001). 스티븐 체스터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 성찰적 양심에 대한 스텐달의 연구는 현대 학계를 호도 하는 막다른 골목이다”(Stephen J. Chester, Reading Paul with the Reformers [Grand Rapids: Eerdmans, 2017], 346).

55 ) 예, James W. Thompson, The Church according to Paul:

Rediscovering the Community Conformed for Christ (Grand Rapids: Baker, 2014); Timothy G. Gombis, “Participation in the New-Creation People of God in Christ by the Spirit,” in The Apostle Paul and the Christian Life: Ethical and Missional Implications of the New Perspective, ed. Scot McKnight and Joseph B. Modica (Grand Rapids: Baker, 2016), 103~124. 또 한 교회와 관련된 이 주제에 대한 추가 논의를 보라(본서 23과 23.4를 보라).

다. 수전 이스트먼의 로마서 8장에 대한 논문을 예로 들어 보자. 이스트먼은 로마서 8장 9절에 사

용된 복수 대명사에 집중하고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너희 공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

시면.” 마찬가지로 15~16절에 사용된 복수 대명사도 “공동의 기도”를 가리킨다고 한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56 ) 여기서 문제는 헬라어와 영어에서 복수형 단어와 대명사가 전

혀 다른 두 가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방대한 『케임브리지 영어 문법』에서 로드니 허들스턴과

제프리 풀럼은 이런 두 용례를 “다섯 학생이 제안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와 “다섯 학생이 무대

안으로 피아노를 들여 놓았다”의 차이로 예시한다.57 ) 두 번째 문장에서 다섯 학생은 단일체로 함 께 행동한다. 반면 첫 번째 문장에서 다섯 학생은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이와 같은 “배분의” 의미 가 복수 대명사의 용례에서는 매우 일반적이다. 따라서 로마서 8장 9절을 “너희 공동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너희 각 자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의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느 본문이든 우리는 문맥과 평행

본문을 통해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58 )

벤 던슨은 2012년 출간된 학위 논문에서 이 쟁점에 대한 양쪽 견해 사이에 적절한 절충안을 제

시했다. 첫째, 던슨은 버넷이 바울서신에서 지나치게 공동체의 의미를 제거하는 점을 비판했다.

둘째, 던슨은 집단적 의미를 강조한 에른스트 케제만과 달리 루돌프 불트만이 주장한 개인적 관 심을 지지한다. 던슨이 비판하는 케제만 등의 학자는 “개인적”이라는 용어에 대한 현대적 개념을

설정하며, 그다음 바울서신에서 “개인적”의 개념을 찾지 못하고 바울이 개인에 관심을 두지 않 는다고 평가해 버린다. 던슨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바울서신에는 개인과 공동체가 철저하

게 불가분으로 통합된다. 개인과 공동체는 서로를 의미한다.”59 ) 최근 학계는 바울의 교회를 그리스

도의 복음에 근거한 새로운 집단 정체성을 통해 회심자를 새로운 세계관과 정신으로 재사회화하

는 장소로 이해하며, 이는 옳은 접근이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거룩한 개인으로 변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불리고 거룩한 백성에 참여한다. 던슨이 옳게 주장한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인 개인을 분리된 의미에서 생각한 적이 없으며, “공동체 안에 있는 개인”으로

생각했다.60 ) 보컴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고대 사람들이 자아를 현대 개인주의가 예상하는 독

립적이고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적 측면에서, 근본적으로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와 관련된

56 ) Susan Grove Eastman, “Oneself in Another: Participation and the Spirit in Romans 8,” in “In Christ” in Paul: Explorations in Paul’s Theology of Union and Participation, ed. Michael J. Thate, Kevin J. Vanhoozer, and Constantine R. Campbell, WUNT 2/384 (Tübingen: Mohr Siebeck, 2014), 112, 114.

57 ) Rodney Huddleston and Geoffrey K. Pullum, The Cambridge Grammar of the English Languag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362.

58 ) 이런 일반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Gerald W. Peterman, “Plural You: On the Use and Abuse of the Second Per-

son,” BBR 20 (2010): 201~214.

59 ) Ben C. Dunson, IndividualandCommunityinPaul’sLetterto the Romans, WUNT 2/332 (Tübingen: Mohr Siebeck, 2012); p. 17의 인용.

60 ) 다음의 예도 보라. Michael S. Horton, Rediscovering the Holy Spirit: God’s Perfecting Presence in Creation, Redemption, and Everyday Life (Grand Rapids: Zondervan, 2017), 178; Thiselton, Hermeneutics of Doctrine, 185~192; Troels Engberg-Pedersen, Paul and the Stoic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0), 293~294.

것으로 인식했다는 주장은 자아가 밀접하게 관련될지라도 서로 구분할 수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61 )

3.2 구성 개념: 영역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원사에 대한 바울의 관점에서 옛 시대와 새 시대는 중첩되며, 이는 필

연적으로 두 시대의 관점이 순전히 역사적 측면에서만 설명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62 ) “시대의 변

화”가 역사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일어났으나 개인에게는 믿는 순간에 실제가 된다. 그리스도 안

에서 일어난 “시대의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경험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살고 있으나 죽음과 부활 사건의 혜택을 믿음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옛 시

대에 살고 있다. 즉 죄의 종이고 육체 안에 있고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로

마서 4장의 관점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먼 과거에 살았음에도 적어도 어떤 의

미에서는 새 시대에 속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혼란한 요인이 생기며, 바울이

구원사를 적용한 내용을 모두 통합할 수 있는 종합적인 체계를 세우는 작업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 체계를 위해 불필요하게 과한 주장을 하지 않고도 “영역”이라는 범주가 문제를 개념

화하기에 유익한 방법이 될 수 있다.63 ) 우리는 왜 “영역”이라는 범주를 사용하는가? 이상한 선택

으로 보일 수 있다. NIV가 단수 “영역”( realm ) 을 바울서신에 단 4회만 사용하기 때문이고, 4회 중

어느 것도 같은 헬라어 단어를 직접 번역한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며( 롬 7:5; 8:8, 9[2회] ), ESV나 NRSV

의 바울서신에서는 이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영역”을 선택한 이유는 이 용

어가 위에서 설명한 구원사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 도식에서 나

는 “옛 영역”과 “새 영역”을 대조함으로 “역사적” 요소를 유지한다. “영역”이라는 말은 두 “영역”

이 동시에 실재함을 다루기에 수월하다. 또한 “영역”이라는 개념은 바울 신학에 나타나는 중요 한 특징, 즉 사람을 제어하려고 싸우고 대립하는 “권세들”과 관련된 쟁점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충돌하는 권세들을 묘사하는 도식은 “묵시론적 바울” 운동으로 강조된다( 위 67~68쪽을 보 라 ). 나는 이

바울의 렌즈를 통해서만 본다는

61 ) Richard Bauckham, Gospel of Glory: Major Themes in Johannine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15), 3. 62 ) 특히 다음 저술을 보라. K. Stalder, Das Werk des Geistes in der Heiligung bei Paulus (Zü rich: EVZ, 1962), 240~248; Victor Paul Furnish, Theology and Ethics in Paul (Nashville: Abingdon, 1968), 134~135; John M. G. Barclay, Obeying the Truth: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T Clark, 1988), 99, 104~105; Beker, Paul the Apostle, 135~181. 모이 세스 실바가 주장하는 것처럼 “바울은 전적으로 연대적 차이가 아니라 두 시대 사이에 나타나는 특성의 차이, 즉 육체의 시대 (=자기 확신과 죄)와 성령의 시대(=약속과 구원)의 차이에 관 심을 둔다”(Moisés Silva, Philippians, BECNT [Grand Rapids: Baker, 2005, 『BECNT 빌립보서』,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0], 160~161n10).

63 ) 캠벨은 또한 “영역”의 범주를 바울의 종말론을 설명하기 위 한 그의 기본 틀로 설정한다(Constantine R. Campbell, Paul and the Hope of Glory: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Study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20, 65~102).

점에서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운동을 주창하는 학자들은 바울 신학에서 반복해

서 강조하는 쟁점에 대해 관심을 끌었다. 예를 들어 로마서 5장의 끝에 있는 요약 진술을 생각해

보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21절, 강조는 나의 것 ).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

람들은 “죄[의 권세] 아래” 있다( 예, 롬 3:9 ). 이들이 그리스도에게 올 때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게 된다( 롬 6:14, 15 ).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지칭하기 위해, 특히 그리스도를 “주”로 표현하는 본문 곳곳에서 종살이와 주

되심의 언어를 자주 사용한다. 덧붙여서 “영역”의 언어는 정경의 핵심적인 표현과 연결되는 이점 도 있다. “영역”은 “나라”와 비슷하다. 여러 구약학자는 “나라”를 구약신학을 통합하는 주제로 이

해하고 복음서 학자는 흔히 “나라”를 예수 가르침의 핵심 주제로 이해한다.

따라서 공간적 이미지 언어인 “영역”은 바울의 구원사적 도식을 개념화하고 실행하는 유용한

방법으로 기능한다. 성경신학의 개척자인 게르하르두스 보스는 기본적으로 공간적 개념화를 지 지한다.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세계의 거주자와 참여자라고 (고후 5:17에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변화를 경험한

첫 번째 자리는 개인의 내부가 아니다. 물론 개인의 내부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을

둘러싼 세계 전체가 새로운 양상과 모습을 얻었다.64 )

보스의 인용에 있는 “첫 번째 자리”는 공간적 개념의 사용이 개인 내면에 변화와 능력이 주어

진 사역과 같은 개념적 도식을 억누르거나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린다. 바울

의 모든 사상을 영역의 개념에 강제로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여러 부분에서 바울 신학을 왜곡하 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충분히 민감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할 때면 이에 대해 “대 응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런 주의점을 고려하는 동시에 나는 여전히 “옛 영역”과 “새 영역” 간의

통일된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3 “중심”: 그리스도와 연합

64 ) Geerhardus Johanne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30; repr., Phillipsburg, NJ: P&R, 1994), 47. 이디스 험프리 역시 바울 신학을 개념화 하는 데 공간적 범주를 사용할 필요성을 주장한다(Edith Hum-

phrey, “Apocalyptic as Theoria in the Letters of St. Paul: A New Perspective on Apocalyptic as Mother of Theology,” in Blackwell, Goodrich, and Maston, Paul and the Apocalyptic Imagination, 87~110).

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적 범주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이제 나는 바울 신학자들이 자주 논쟁

하는 문제, 즉 바울 신학의 “중심”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65 ) 중심 문제가 유명한 한 가지 이유는

이 질문과 관련해 바울 연구자들이 입증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는 사변적인 대답을 제안하는 것

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심 문제는 바울의 가르침을 조명할 수도 있고 이탈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학문적 중요성 이상의 의미가 있다.

시작하는 단계에서 잠시 멈추어 우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말하는 “중심”

의 의미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중심”은 세 가지 별도 개념을 의미할 수 있는 단

어다. 첫째, 우리는 바울 신학의 “중심”을 바울이 가장 자주 언급하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수평으로 정렬된 막대그래프를 상상해 보자. 각 막대는 바울의 신학 개념 하나를 의미한다. 이 관

점에서는 오른쪽으로 가장 길게 뻗어 있는 막대그래프가 바울 사상의 “중심”일 것이다. 내가 실

제로 이런 그래프를 표시하는 작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만들어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적힌 막대가 오른쪽으로 가장 길게 뻗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는 사실 쉬운 대답이다( 우리는

주일 학교의 어린이가 “예수”라고 말하기만 하면 늘 정답을 맞추고 칭찬받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 그리스도, 더 구체

적으로는 (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것을 강조하는 ) “그리스도 사건”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울 이 흔히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66 )

위의 설명이 옳다고 해도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는 것은 아니며, “중심”의 단어마저 확실하게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통상 “가장 일반적인” 또는 심지어 “가장 중요한”의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로 “중심”을 사용한다. “논란의 중심”이라고 말할 때처럼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련의

개념과 행위의 중심인 무엇을 지칭하기 위해 “중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

심”에는 융합하는 역할이 있다. 융합하는 역할은 바울 신학의 논의에서 “중심”이 통상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참여”와 “이신칭의” 중 어느 것이 바울 신학의 “중심”인지에 대해 오랫

동안 벌어진 논쟁이 좋은 예다. 고전적 개혁주의 신학자는 ( 개혁주의 접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

다는 훨씬 드물게 선정하지만 ) 자주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이신칭의를 선정한다. 그런데 1900년대 초

반에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리스도 신비 사상”, 즉 그리스도 안의 참여가 바울 사상의 중심이

라고 주장했다.67 ) 현재의 많은 학자도 비슷하게 주장한다. 이들은 우리가 “참여”에서 바울의 다

65 ) 어떤 학자들은 구원사가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러나 나는 캠벨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바울 사상의 틀이 사상

의 “중심”일 수는 없다(D. Campbell, Quest for Paul’s Gospel, 27).

66 ) 슈넬레를 보라. 그는 바울의 사상과 생애의 시작점과 중심은 “흔들릴 수 없는 신학적 확신,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에게서 오는 구원의 종말론적 현존”이라고 주장한다(Schnelle, ApostlePaul, 389). Peter Stuhlmacher, Grundlegung: Von Jesus zu Paulus, vol. 2 of 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5), 283도

보라. 베커는 “그리스도 사건의 묵시론적 해석이 바울 복음의 일관된 중심을 구성한다”라고 비슷하게 주장한다(Beker, Paul theApostle, 135).

67 )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참여의 개념을 “중심 분 화구”, 칭의의 개념을 “주변 분화구”로 묘사했다(Albert Schweitzer, PaulandHisInterpreters:ACriticalHistory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1912], 225~226; 같은 저자,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London: Adam & Charles Black, 1931]).

른 가르침에 이르는 연결선을 명료하게 그을 수 있으나 “이신칭의”를 중심에 놓으면 연결선을 그

리는 작업이 훨씬 어려워진다고 주장한다. 본서에서 “중심”은 바퀴 살이 뻗어 나오는 바퀴 중심

축( 허브 ) 의 이미지 언어로 사용된다. 또는 내가 주장하는 영역을 강조하면 “중심”은 특정 지역이 나 나라의 허브 도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식으로 “중심”의 역할을 설정하면 다음과 같은

주제도 “중심”의 후보로 제시할 수 있다. 후보 중에는 인간론,68 ) 바울의 이방 선교,69 ) 십자가 말 씀,70 ) ‘셰마’ 고백,71 )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기,72 ) 복음,73 ) 구원,74 ) 화목,75 )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76 ) 새 창조 등이 있다.77 )

위의 후보 중에서 “복음”과 “화목”은 바울 사상의 “중심”을 대표하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본서에서 사용하는 “중심”의 의미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나의 관점에서 “복음”은 바울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서신인 로마서에서 중심 주제지만( 9장의 “논증 분석”을 보라 ) 허브의 의미에서는

“중심”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화목”도 똑같다. 그럼에도 “화목”은 바울의 가장 중요하고 전

체를 아우르는 구원론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칭의”는 “중심”의 좋은 후보로 언급하지 않겠지만,

바울의 복음을 중요하고 필수적으로 조명하는 개념인 것은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핵심 사항이 명료해지는 것 같다. 바울 복음의 “중심”을 밝히는 작업이 쉽

지 않고 “중심”의 의미에 대한 혼동으로 여러 “정답”이 나올 수 있다. 바울 신학에서 무엇이 특별

히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분석이 의미론적 논쟁 때문에 흐려지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심”의 의미에 변화를 주어 “중심”이란 바울 사상의 많은 부분을 한데 엮을 정도

로 반복되는 모티프를 의미할 수도 있음을 제안한다. 콘스턴틴 캠벨은 “망”의 유비를 제안한다.

영역의 이미지 언어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나라 또는 영토에 속한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을 생각할 수 있다. 캠벨 등 여러 학자의 견해처럼 나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 또는 그리스도와 연 합이 바울 신학을 한데 묶는 망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78 ) 그리스도와 연합은 바울서신

68 ) 이 주장은 특히 루돌프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접근과 관련이 있 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불트만은 바울을 두 부 분, “믿음의 계시를 받기 이전의 사람”과 “믿음 아래에 있는 사 람”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69 ) Krister Stendahl, Final Account: Paul’s Letter to the Romans (Minneapolis: Fortress, 1995), 11~12.

70 ) Pascale Rondez, “Ein Zentrum Paulinischer Theologie? Eine Pneumatologische Erschliessung des Zusammenhangs von Soteriologie und Christologie anhand von Gal 5,25,” in Kreuztheologie im Neuen Testament, ed. Andreas Dettwiler and Jean Zumstein (Tübingen: Mohr Siebeck, 2002), 59~79; Jean Zumstein, “Das Wort von Kreuz als Mitte der Paulinischen Theologie,” in Dettwiler and Zumstein, KreuztheologieimNeuenTestament, 27~41.

71 ) Mark D. Nanos, “Paul and the Jewish Tradition: The Ideology of the Shema,” in Celebrating Paul: Festschrift in Honor of

JeromeMurphy-O’Connor,O.P.,andJosephA.Fitzmyer,S.J., ed. P. Spitaler, CBQMS 48 (Washington, DC: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2011), 65.

72 ) Terrance Callan, Dying and Rising with Christ: The Theology ofPaultheApostle (New York: Paulist, 2006), 8~9, 92~93.

73 ) Hahn, TheologiedesNeuenTestaments, 1:181~191.

74 ) C. A. Anderson Scott, Christianity according to St. Pau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27).

75 ) 본서 20.4.2의 논의를 보라.

76 ) Thomas R. Schreiner, Paul, Apostle of God’s Glory in Christ: A Pauline Theology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 15~35.

77 ) Beale, “Eschatological Conception.”

78 ) Constantine R.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Study (Grand Rapids: Zondervan, 2012), 437~441; Andrédu Toit, “‘In Christ,’ ‘in the Spirit’and

에 많은 방식으로 표현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그와 그리스

도인을 연결하기 위해 “함께”( 통상 헬라어 ‘쉰’ ) 를 사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

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부활

할 것이고 ),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을 고대한다( 예, 롬

6:1~10; 8:17; 갈 2:19~20; 골 2:12, 20; 3:1, 3 ).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할 때 가장 흔히 사용

하는 방식은 그가 수없이 사용하는 그리스도 “~ 안에”( ‘엔’ ) 의 언어( 바울서신에서 130회 정도 사용 ) 에 나

타난다. 아래의 몇 가지 예처럼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신학의 모든 측면을 의미하

기 위해 이 문구를 사용한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고전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고전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전 3:1: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후 1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롬 16:7: “그들은……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 안에”의 문구는 상당히 많은 개념과 관련된다. “그리스도 안에”의 개념에 들어 있는 구체적

인 함의를 다루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 안에”를 사용하는 바울은 의미 의 차이 없이 그리스도와 신자의 순서를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예수 그

Related Prepositional Phrases: Their Relevance for a Discussion on Pauline Mysticism,” in Focusing on Paul: Persuasion and Theological Design in Romans and Galatians, ed. Cilliers Breytenbach and David S. du Toit (New York: de Gruyter, 2007), 139; Emmanuel L. Rehfeld, Relationale Ontologie bei Paulus: Die ontische Wirksamkeit des Christusbezogenheit im Denkend des Heidenapostels, WUNT 2/326 (Tübingen: Mohr Siebeck, 2012), 52, 289. 바울 신학에 있는 참여의 요 소를 강조하는 다른 학자는 다음과 같다. E. 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

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 특히 502~508; Michael J. Gorman, Inhabiting the Cruciform God: Kenosis, Justification, and Theosis in Paul’s Narrative Soteri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09), 22~55; Terence L. Donaldson, “The Juridical, the Participatory and the ‘New Perspective’ on Paul,” in Reading Paul in Context: Explorations in Identity Formation Essays in Honour of William S. Campbell, ed. Kathy Ehrensperger and J. Brian Tucker (London: T&T Clark, 2010), 233~240.

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고후 13:5 ). 비슷한 예로는 “그리

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롬 8:10 ) 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의 언어와 이 언어가 뜻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더 넓은 개념에는 역사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이 있다.79 ) 이 표현에 대해 현대적 연구의 문을 연 학자는 아돌프 다이스만

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의 문구에 있는 헬라어 ‘엔’을 장소적 용법으로 이해했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수단”이나 “공간”의 의미로 해석했다.80 ) 이와 같은 신비적 접근은 종교

사 학파에서 인기가 있었으나 요즘은 전반적으로 낮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가 기

본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위치시킨다”라는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진다. 위에 언급한 용례

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이런 의미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의 모든 문구 를 한 가지 의미 안에 집어넣는 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81 ) 예를 들어, 이 가운데 어떤 문구는

도구적인 의미를 지니고 그리스도를

어떤 해석자는 장소와 도구의 의미가 함께

성취하는 수단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82 )

자주 있다고 주장한다. J. C. 베커는 “참여

적-도구적” 의미로 부른다. 즉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행하는지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는 “그리 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로 표현된다.83 ) 나는 장소적 용례가 우세하다고

다.84 ) 바울은 신자의 존재와 경험이 모두 그리스도와

79 ) 연구사 분석으로는 Robert Letham, UnionwithChristinScripture, History, and Theology (Phillipsburg, NJ: P&R, 2011)을 보라. 역사와 신학을 모두 고려한 경우로 특히 Grant Macaskill, Union with Christ in the New Testa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를 보라. “그리스도와 연합”은 특히 존

칼빈 신학에서 중요하다(예, J. T. Billings, Calvin, Participation, and the Gift: The Activity of Believers in Union with Christ, Changing Paradigms in Historical and Systematic The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그리스도 안에 참

여”를 바울 신학의 토대가 되는 주제로 선정하는 일부 해석가 는 이 주제가 정교회의 ‘데오시스’(신성화) 신학에 널리 알려

진 개념과의 관련 가능성을 주장한다(특히 Gorman, Inhabiting the Cruciform God; 같은 저자, “Romans: The First Christian Treatise on Theosis,” Journal of Theological Interpretation 5 [2011]: 13~34를 보라). 그러나 정교회 신학에 구체적으로 표

현된 ‘데오시스’ 개념은 이 전통에 있는 다른 교리와 밀접한 관

련이 있어서 바울의 가르침을 이 용어로 설정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예, N. Russell, The Doctrine of Deification in the Greek Patristic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79~85; Macaskill, Union with Christ, 44~76; Gösta Hallonsten, “Theosis in Recent Research: A Renewal of Interest and a Need for Clarity,” in Partakers in the Divine Nature: The History and Development of Deification in the Christian Traditions, ed. M. J. Christensen and J. A. Wittung [Cranbury, NJ: Fa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2007], 281~293).

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는

80 ) 다음 문단의 내용과 어법은 나의 주석을 개정한 것이다. Douglas J. Moo, TheEpistletotheRomans, 2nd ed.,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18), 420~421.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위의 내용은 이 책을 따른다.

81 ) 예를 들어 바울이 사용하는 문구 일부가 도구적이라는 주장으로 는 다음을 보라. A. J. M. Wedderburn, “Some Observations on Paul’s Use of the Phrases ‘in Christ’ and ‘with Christ,’” JSNT 25 (1985): 83~90.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413 은 해당 문구에 세부적인 차이가 많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연 합, 참여, 동일시, 융합이 핵심 개념이라고 결론짓는다.

82 ) 예, F. Neugebauer, In Christus (ΕΝ ΧΡΙΣΤΩΙ). Eine Untersuchung zum paulinischen Glaubenverständnis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1). 연구사로는 (지금 은 오래된 책이기는 하지만) 다음을 보라. Michel Bouttier, En Christ: Étude d’exégèse et de ThéologiePauliniennes, Etudes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54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2), 5~22.

83 ) PaultheApostle, 272.

84 ) ‘엔’(ἐν)이 일반적으로 공간이나 위치의 개념을 의미한다고 주 장하는 학자들은 이 문구가 근본적으로 장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이런 강조점과 관련해 나는 스티브 런 지(Steve Runge)와 루러기에게서 도움을 얻었다. 런지는 내게

발표문을 공유해 주었다. 런지의 연구는 Dirk Geeraerts, ed., Cognitive Linguistics: Basic Readings (New York: Mouton de

안의 실제에 융합된다.”85 )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과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으로 우리에게 선사한 혜택은

바울의 넓은 구원사적 세계관에 근거할 것이다. 아담이 옛 영역을 “주도했고” 그가 초래한 죄와

죽음의 실제 안에 우리를 융합시킨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영역을 주도하신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를 통해 우리는 아담의 통치를 벗어났고 옛 영역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이미 들어

간 영광에 참여할 운명을 얻었다.86 )

Gruyter, 2006)에 수록된 언어학적 접근을 종합했다. S. Luraghi, On the Meaning of Prepositions and Cases: The Expression of Semantic Roles in Ancient Greek, Studies in Language Companion Series (Amsterdam: John Benjamin, 2003).

85 ) Strecker, Theology, 118.

86 ) 특히 다음을 보라. Ridderbos, Paul, 57~62; Beker, Paul the Apostle, 272~273; Schreiner, Paul, 156~159.

Part 2

선교사와 신학자 바울 1 )

Chapter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2 ) (고후 12:2)

기독교 신앙을 위한 바울의 가장 큰 기여는 바울의 신학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바울은 “신

학”, 즉 자기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단행본도 연작도 기록하지 않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나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생각해 보라 ). 바울은 선교사와 목사로서 13권의 서신서를 남겼다. 내가 1장에

서 언급한 대로 바울의 편지에 근거해 그의 “신학”을 종합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신

학자는 바울의 신학을 반영하는 다양한 조각을 종합하는 과제를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종합하는

작업만큼이나 바울의 서신을 개별 맥락에서 분석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부분에

서는 바울이 참여한 선교 활동의 맥락에서 각 서신을 분석하고 해당 서신의 가르침을 짧게 요약 하고자 한다. 이 작업을 위해 이 장에서는 바울의 생애와 서신을 개괄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 생애

먼저 바울의 생애를 개관해 보자. 바울의 서신만으로는 그의 생애를 개관하기가 어렵다. 이는

1 ) 이 제목을 로버트 레이몬드가 사용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같은 제목으로 바울과 관련하여 저술했다. Robert L. Reymond, Paul, Missionary Theologian: A Survey of His Missionary Labours and Theology (Fearn, Ross-shire: Christian Focus, 2000). 슈라이너도 바울 신학의 한 장을 사도의 선교에 할애했다. Schreiner, “Proclaiming a Magnificent God: The Pauline Mission”(Paul, 37~72). 2 ) 내가 이 인용문을 선택한 것은 같은 제목으로 바울 신학 저서를 출간한 제임스 스튜어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James Stuart Stewart, A Man in Christ: The Vital Elements of St. Paul’s Religion (New York: Harper & Row, 1935).

바울이 정확한 연대 파악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에만 의존한 생애의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나오게 된다.3 ) 하지만 바울의 생

애와 관련해 사도행전에서 시간을 언급하는 내용을 추가한다면 훨씬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4 ) 나는 바울의 생애를 설명하기에 사도행전을 신뢰할 만한 길잡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어지는 개관의 연구에서 사도행전을 기본 틀로 사용한다. 물론 누가는 연대를 정확히 설명하지도

않았으며, “여러 날이 지나매” 같은 장면 전환의 문구를 자주 사용했다( 예, 행 9:23 ). 그럼에도 누가

의 설명을 서신에 적합하게 적용하면 상당히 정확한 내용을 조합할 수 있다. 또한 누가와 바울은

세계사에서 잘 알려진 인물과 시기를 추정하기에 충분한 사건을 언급한다. 우리는 이런 기록을 바

탕으로 적어도 바울 생애의 핵심 사건이 일어난 대략적인 시간대를 파악할 수 있다. 아래에 제시 한 개관은 사도행전에 근거한 자료로 통합을 시도하고 제안한 학자들의 개관과 매우 비슷하다.5 )

연대표에 별표( * ) 가 붙은 두 사건은 별도로 설명할 것이다. 또한 이 연대표에 들어 있는 바울서

신에 대한 나의 견해에 대해서는 2부의 나머지 부분에 수록한 서신별 연구에서 설명하고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나는 기록 연대를 확신하기가 가장

두 서신(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 ) 모두 두 번 표기했다. 모두 ( 상대적 가능성에 대한 나의 추정을 간단히

출생-길리기아의 다소 5~12년? 22:3

*예루살렘에서 “자람” 22:3

예루살렘에서 교육 20~30년? 참고, 22:3

힐렐과 샴마이 논쟁

3 ) 예, Charles Buck and Greer Taylor, Saint Paul: A Study of the Development of His Thought (New York: Charles Scribner’ s Sons, 1969); Robert Jewett, A Chronology of Paul’s Life (Philadelphia: Fortress, 1979); Gerd Lüdemann, Paul, Apostle to the Gentiles: Studies in Chronology (Philadelphia: Fortress, 1984); Jerome Murphy-O’Connor, Paul: A Critical Lif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1~31; Gregory Tatum, New Chapters in the Life of Paul: The Relative Chronology of His Career, CBQMS 41 (Washington, DC: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2006); Douglas A. Campbell, Framing Paul: AnEpistolary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2014).

4 )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

지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파악하려면 다음 단행본의 소논문을 보

라. David P. Moessner et al., eds., Paul and the Heritage of Israel:Paul’sClaimuponIsrael’sLegacyinLukeandActsinthe

Light of the Pauline Letters, LNTS 452 (London: T&T Clark, 2012). 포터는 바울에 대한 누가의 설명이 근본적으로 정확하다 고 주장한다. Stanley E. Porter, Paul in Acts, Library of Pauline Studies (Grand Rapids: Baker, 2000).

5 ) 예, F. F. Bruce, Paul: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Grand Rapids: Eerdmans, 1977), 475; Rainer Riesner, “Pauline Chronology,” in Westerholm, Blackwell Companion to Paul, 23(학 자들의 견해를 담은 24쪽의 표를 보라); Stanley E. Porter, The Apostle Paul: His Life, Thought, and 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2016), 50~60; Ben Witherington III, The Paul Quest: The Renewed Search for the Jew of Tarsu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8), 327~331. 구체적인 연도는 종종 1~2년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이는 신약 자체 본문의 의미 와 신약 외부 사건 연대가 불확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박해자 30~34년 8:1; 9:1~2 갈 1:13~14; 빌 3:6

*회심 34년 9:1~19 갈 1:15~16

다메섹 설교 33~35년 갈 1:17

“아라비아” 설교(?) 33~35년 갈 1:17

다메섹 탈출 36년 고후 11:32~35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36년 9:26~29 갈 1:18~19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체류 36-45년 참고, 9:30 갈 1:21

안디옥 사역 45~46년 11:25~26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기근 구제”) 46년 11:27~30 갈 2:1~10

1차 선교 여행 46~47년 13:1~14:26

안디옥 체류 47~48년 14:27~28 갈 2:11~14

갈라디아서(?)

예루살렘 총회 48년 15:1~29

안디옥 체류 48~49년 15:35

2차 선교 여행 49~52년 15:36~18:22

갈라디아, 마게도니아, 아덴 49년 초

고린도 49년 가을~51년 여름

데살로니가전후서

3차 선교 여행 52~57년 18:23~21:16

에베소 52~55년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북부 그리스 55~56년

고린도후서

고린도 56~57년 겨울

로마서

유대로 복귀 57년 봄

유대에서 투옥 57~59년 21:27~26:32

“난파선” 표류 59년 가을~60년 봄 27:1~28:14

시기 사도행전 서신

로마에서의 첫 번째 감금 60~62년 28:15~31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사역 62~64년? 목회 서신

디모데전서

디도서

로마에서의 두 번째 감금 64년?

디모데후서

죽음 64/65년(67년?)

1.1 “예루살렘에서 자랐다”

참고, 딤후 1:8

유대인이 자기들 생각에 거룩한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하자 로 마 군인이 바울을 구출했다( 행 21:27~36 ). 로마의 천부장은 바울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었 다( 22:1~21 ). 바울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교육을 간단히 개관하는 것으로 변호를 시작한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 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 자라”( 22:3 ). 본문 은 바울의 초기 생애를 세 단계로 소개한다. 첫째, 바울은 다소에서 출생했다. 다소는 로마의 길

리기아 속주에서 중요한 대도시였고 소아시아의 남동쪽에 위치했다. 세 번째 단계 역시 매우 명 료하다. 바울은 가말리엘을 통해 유대교 신앙을 배웠으며, 가말리엘은 바울 당시 최고의 랍비였 다( 행 5:34를 보라 ). 바울이 두 번째 단계에서 주장하는 내용( “이 성에서 자라” ) 은 명료하지 않다. “이 성” 은 다소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예루살렘을 의도할 가능성이 더 크다. “자랐다”( 동사 ‘아나트레포’ ) 가

의미하는 말인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십 대에 받는 훈육을 의미하는 동사라는 견해는

6 ) 예, Eckhard J. Schnabel, Acts,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6), 900. 7 ) 특히 다음 저술을 보라. Willem C. van Unnik, Tarsus or Jerusalem: The City of Paul’s Youth, 2nd ed. (Eugene, OR: Wipf &

모순되지 않는다.

분명히 사소한 것 같은 바울의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

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해가 헬라의 환경과 유대 교육이 바울의 생애와 사상에 끼친 영향력에 대

한 격렬한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어린 시절과 관련한 쟁점은 바울 연

구 초기 단계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어떤 학자는 바울이 헬라 배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독특

한 모습의 유대교를 형성했고 바울의 신학이 그리스-로마 세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

다.8 ) 다른 학자는 바울이 “정통” 유대교에서 훈육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쟁이 지금은 진

정 국면에 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격전이 진정 국면에 접어든 한 가지 이유는 “헬

레니즘”과 “유대교”를 완전히 구분하려는 시도가 지나치게 단순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팔

레스타인 유대교조차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9 ) 둘째, 바울의 핵심적인 신학 개념 중

많은 부분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기인한다는 과거의 일부 연구는 이제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변증의 목적을 위해 다소 출신이고 디아스포라의 유업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것 외

에는 바울은 일관되게 자신의 유대교 배경을 강조한다. 바울은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라고 주장한다( 빌 3:5 ). 유대교의 어떤 분파가 바울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쟁의 대

상이지만 바울의 사고가 기본적으로 유대교다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대교의 요소가 바울의

사고에서 기본적으로 중심을 차지할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로마 환경이 바울에게 끼친 영향도 간

과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두 세계의 사람이었다. 더 나은 견해는 다양한 배경, 즉 유

대교와 헬라의 영향에 열려 있는 세계에 살았던 사람으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모든 내용

을 고려해 보면, 바울이 어디서 “자랐는지”가 궁극적으로 중요한 쟁점은 아니다.

1.2 “회심”

바울 생애를 개관할 때 제기되는 두 번째 논쟁의 문제는 바울의 “회심”이다. 누가는 바울의 회

심 사건을 사도행전 9장 1~19절에서 서술한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사도행전 22장 6~16절, 26장 12~18절,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서 설명한다. 최근 일부 학자는 “회심”이 적합한 언 어인지 의구심을 나타내고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것은 “부르심”이고 회심이 아니라고

Stock, 2009); Craig S. Keener, Acts: An Exegetical Commentary, Volume 3: Acts 13:1-23:35 (Grand Rapids: Baker, 2014), 3207~3208; Rainer Riesner, Paul’s Early Period: Chronology, Mission Strateg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98), 268.

8 ) 예, C. G. Montefiore, Judaism and St. Paul: Two Essays (New York: E. P. Dutton, 1915), 93; Schoeps, Paul, 214 등; Samuel Sandmel, The Genius of Paul: A Study in History (Philadelphia:

Fortress, 1958), 30~33(쇱스와 샌드멜은 헬라의 영향이 특히 율 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의 반 응을 보라. William D. Davies, Paul and Rabbinic Judaism: Some Rabbinic Elements in Pauline Theology, 4th ed. (Philadelphia: Fortress, 1980), 1~16.

9 ) 고전적 연구는 다음을 보라. Martin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Studies in Their Encounter in Palestine during the Early Hellenistic Period, 2 vols. (Tübingen: Mohr Siebeck, 1974).

주장한다. 회심 사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바울을 부르셨음을 강조한다( 행

9:15; 22:15; 26:16~18; 갈 1:16 ).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 선지자로 부르심을 묘사한다. “회심”은

바울이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

어난 사건에 대한 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이유는 이렇다. 바울이 다메섹

사건 이후에도 자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예, 롬 9:3; 참고, 행 23:6 ). 또 다른 이유는

이렇다. 다메섹 사건이 일어난 때처럼 이른 시기에 바울이 회심할 수 있었던 기독교 같은 종교가

아직 없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간의 “분리”는 몇십 년 후에 일어났다.

바울이 회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주로 바울과 유대교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큰 흐름에 해당한

다. 최근의 몇몇 책 제목은 학계의 방향을 반영한다. 『바울: 새 언약의 유대인』,10 ) 『바울: 특이한

유대인』,11 ) 『바울과 유대인』,12 )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13 ) 뒤의 두 제목은 이런 주장에

서도 더 극단적 예이며, “유대교 내의 바울”이라는 견해로 나타난다. 나는 이 견해를 분석하고 이

견해가 제기하는 쟁점을 나중에 상세히 다룰 것이다( 19.2.2.2.3.2 ). 여기서는 바울의 종교 경험에 나

타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에서 신중하게 방향을 잡는 것이 중요함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 다. 예수의 추종자 바울은 구약과 유대교의 한 분 하나님을 여전히 확신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성 경의 권위를 존중하고, ( 롬 11:25~28의 구체적인 관점을 수용하여 ) 이스라엘의 구원을 고대한다. 반면 바울 은 당시 유대인이 이해하고 실천한 유대교의 중심을 차지하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바울이 거부한 주장은 토라 언약에 근거한 선택, 토라 준수에 따라 규정되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구

원을 우선시하는 종말론적 해방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바울이 소명을 확실히 경험했으나 이 사건에는 “회

심”의 요소 역시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 1장 13~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아들의 계시

를 통해 새로운 신앙과 이전의 “유대교”를 대조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3, 14절 ). 물론 바울이 사

용하는 단어 “유대교”의 의미가 확실히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던은 이 문맥에 사용된 “열심”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이 단어는 민족주의적인, 즉 이방인에게 적대적인 형태의 유 대교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다메섹 도상의 바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대교 라고 부를 수 있는 범위에서 견해를 바꾼 것이 된다.14 ) 물론 특정 용어를 붙이는 것은 환원주의적

10 ) Brant Pitre, Michael P. Barber, and John A. Kincaid, Paul, a New Covenant Jew: Rethinking Pauline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2019).

11 ) Michael F. Bird, An Anomalous Jew: Paul among Jews, Greeks, and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2016). 또한 다음 자료에서 “선지자적 유대인”을 보라. Luke Timothy Johnson, Constructing Paul, vol. 1 of The Canonical Paul (Grand Rapids: Eerdmans, 2020), 143.

12 ) Gabriele Boccaccini and Carlos A. Segovia, eds., Paul the Jew: Rereading the Apostle as a Figure of Second Temple Judaism (Minneapolis: Fortress, 2016).

13 ) Pamela Eisenbaum, Paul Was Not a Christian: The Original Message of a Misunderstood Apostle (New York: HarperOne, 2009).

14 ) James D. G. Dun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BNTC (Peabody, MA: Hendrickson, 1993), 56~65. “유대교” 단어의 범위 를 심하게 제한하는 다른 견해로는 다음을 보라. Steve Mason, “Jews, Judaeans, Judaizing, Judaism: Problems of Categorization in Ancient History,” JSJ 38 (2007): 457~512. 그러나 비 판적인 평가로는 다음을 보라. Matthew V. Novenson, “Paul’s

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중요한 세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째, 누가

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유대인은 일관되게 바울의 관점을 자신들이 이해하는 “유대교”의 경계 밖

에 있는 견해로 대했다( 예, 행 13:45, 49~51; 14:2, 19; 17:5~9, 13; 18:6, 12~14; 20:3; 살전 2:14~16 ). 둘째, 빌립보

서 3장 2~11절 같은 본문에 있는 회심을 말하는 바울의 언어는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근본적 변화는 바울 당시의 유대교 이해에서 전혀 다른 우선권과 가치로 옮겨 갔음을 말한다. 셋

째,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23.2 ) 바울은 자신이 중요하게 관여하는 운동을 무언가 새 이

름( 예, “유대인, 헬라인, 하나님의 교회”; 고전 10:32 ) 을 붙여야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처럼 바울의 경험에

단순히 “부르심”의 용어를 붙이는 것은 다메섹 회심 사건으로 촉발된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바

울의 주장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이다.15 ) 바울서신은 바울이 다메섹의 경험을 계기로 자신이 배

우고 실천한 “유대교”를 떠났음을 분명하게 알린다. 따라서 “회심”은 철저한 변화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용어다. 오직 근본적인 중요성의 차이만이 초기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던 바울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핍박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으로 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셨을 때 바울은 회심하고 부르심을 받았다. “회심과 소명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다.”16 ) 존 바클레이는 주장한다. “신자로서 바울은 더 이상 ‘유대교 안에’ 머물지 않는 ( 바울식 표현대

로 ) ‘유대인’이다. 바울의 출신 민족은 제거되지 않고 그리스도 사건에 기반한 정체성과 충성 안에

융합된다.”17 )

바울의 다메섹 도상 경험은 바울의 신학에 강력한 추진력이다. 바울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을 겪었으며, 토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식과 신앙의 중심으로 택했다. 우리는 바울서신에 다

양한 방식으로 나타난 바울의 근본적인 신념 중 많은 부분을 바울 생애 중 다메섹 사건으로 거슬

러 올라가 파악할 수 있다.18 ) 이런 점에서 다메섹은 “바울의 의미 형성을 위한 근본적인 출발점”

Former Occupation in Ioudaismos,” in Galatians and Christian Theology: Justification, the Gospel, and Ethics in Paul’s Letter, ed. Mark W. Elliott et al. (Grand Rapids: Baker, 2014), 24~39.

15 ) 예, Terence L. Donaldson, Paul and the Gentiles: RemappingtheApostle’sConvictionalWorld (Minneapolis: Fortress, 1997), 249~260; Seyoon Kim, Paul and the New Perspective: Second Thoughts on the Origin of Paul’s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2002), 1~19.

16 )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82), 93; 특히 다음을 보라. Peter T. O’Brien, “Was Paul Converted?,” in Carson, O’Brien, and Seifrid, The Paradoxes of Paul, 361~391; Bruce Corley, “Interpreting Paul’s Conversion: Then and Now,” in The Road from Damascus: The Impact of Paul’s Conversion on His Life, Thought and Ministry, ed.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Eerdmans, 1997), 1~17; Larry W. Hurtado, “Convert, Apostate or Apostle to

the Nations: The ‘Conversion’ of Paul in Recent Scholarship,” SR 22 (1993): 273~284; Stephen J. Chester, Conversion at Corinth: Perspectives on Conversion in Paul’s Theology and the Corinthian Church, SNTW (London: T&T Clark, 2003), 3~42, 153~172.

17 ) Paul and the Gift, 359~360; 같은 저자, “Paul, Judaism, and the Jewish People,” in Westerholm, Blackwell Companion to Paul, 188~201. 바울의 “유대인다움”과 관련된 견해를 다루는 최근의 간단한 연구로는 다음을 보라. Pitre, Barber, and Kincaid, Paul, a New Covenant Jew, 13~63.

18 ) 이 통찰은 김세윤이 (너무?) 강하게 강조한 것이다. 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WUNT 2/4 (Tü bingen: Mohr Siebeck, 1981). 그 외 여러 학자 중에 다음을 보라. Josef Blank, Paulus und Jesus: Eine Theologische Grundlegung, SANT 18 (Munich: Kö sel, 1968), 184~238; Stuhlmacher, Grundlegung, 242~249; Christian Dietzfelbinger, Der Sohn: Skizzen zur Christologie und Anthropologie des Paulus, BTS 118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11), 57~97.

이다.19 ) 바울 신학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당사자인 바울 자신을 바울 신학의 그림에서 제외하지 말

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그의 생애 가운데서 계속 경험했으

며, 필연적으로 바울의 신학은 이런 경험에 근거한다.

2 바울의 서신

우리가 바울 신학에 사용하는 자료는 ( 사도행전을 2차 자료로 생각한다면 ) 대부분 바울이 교회와 개인

에게 보낸 서신이다. 바울의 서신과 관련된 몇 가지 쟁점을 여기서 짧게 다룰 필요가 있다.

2.1 서신의 수

우리가 연구하는 바울 신학의 모습은 어떤 서신을 바울의 관점을 보여 주는 증거로 “계산하는”

여부에 따라 영향을 크게 받는다. 증거로 삼는 서신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사도의 가르침을 파악 할 때 상대적으로 영향이 작기도 하고( 예, 칭의 ) 영향이 매우 중대할 수도 있다( 예, 교회 지도력 ). 나는

여기서 바울서신의 진정성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분석하고자 한다. 오늘날 학자들은 몇몇 서신은

바울의 사후 바울 추종자들이 마치 바울이 쓴 것처럼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학자들

은 대부분 목회 서신이 이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다수가 에베소서를, 극소수는 골

로새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이 범주에 넣는다. “학계의 합의”에 따르면 우리는 바울이 일곱 통의

서신을 기록했음을 확신할 수 있고 일곱 통의 서신에 근거해 바울 신학 또는 바울서신의 신학적

주제를 연구해야 한다. 이런 결정이 연구의 결론에 미치는 효과는 매우 다양하다. 어떤 학자는 일

부 서신의 바울 저작설을 의심하면서도 이 서신들이 바울의 사상에 대한 참된 통찰력을 제공한다 고 이해한다. 정반대 편에 있는 학자들은 진정한 바울서신과 나머지 서신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후자의 접근을 보여 주는 예는 마커스 보그와 존 크로선의 저술에 나타난다. 이들은 후기-바울서

신을 “반( 反 ) 바울” 서신으로 이해하며, “바울 길들이기, 바울의 열정 순화하기”를 주장한다.20 ) 여기서는 “위경” 신약 서신에 대한 논쟁은 평가하지 않겠다. 내 입장은 다음과 같다. 신약의 많

은 서신을 두고 해당 서신이 밝히는 저자가 아닌 사람이 기록했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흔히 생각

19 ) Schnelle, ApostlePaul, 101.

20 ) Marcus J. Borg, and John Dominic Crossan, The First Paul:

Reclaiming the Radical Visionary behind the Church’s Conservative Icon (New York: HarperCollins, 2009), 15.

진술은 진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술의 내용이 그 진술이 언급한 이름의 인물에게서 온

건지 파악할 수 없다면 진술은 가짜로 이해되었다.”21 ) 닐 엘리엇은 바울서신의 많은 부분을 진정

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움과 비슷하게 결론 내린다. “경건을 위한 동기로 저술되었다고 해도

위서는 위조다.”22 ) 우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관점을 공유했음을 인정한다면, 그들이 위서로

알고 있는 서신을 정경 서신으로 인정했을 리는 없다. 물론 바울이 쓴 서신이 아닌데도 진짜 바울

의 서신인 것처럼 속였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서신을 수집하고 진정성

을 입증하는 절차에 대해 정보가 많지는 않지만, 초기 그리스도인이 서신의 위조 가능성을 인지했

을 때는 신앙 교육을 위해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알려진 서신이라도 거부했음을 알고 있다.

어떤 바울서신을 위서로 간주하기 위해 몇 가지 증거가 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학적 일관성이다. 간단히 말해서, 많은 학자는 논쟁이 되는 서신 일부에서 바울이 가르친

신학이 진짜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신학과 일치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이와 같은 증거를 평가하

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문제다. 쟁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쟁점은 바울의 신학

이 발전했는지가 아니다. 물론 바울의 신학은 발전했다. 하지만 쟁점은 신학의 발전이 해결될 수

없을 정도의 모순을 만들어 냈는지다. 나의 견해는 그런 모순이 바울서신에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세 가지를 인정한다면 “진짜” 바울서신과 논쟁이 되는 서신 사이의 긴장은

상당히 해소될 수 있다. (1) 바울이 성숙할 때 당연히 그의 생각도 성숙했다. (2) 교회가 성숙하면

서 새로운 쟁점을 전할 필요성이 생겼다. (3) 서신에 거론된 것과 같이 개별 상황이 매우 달랐다.

나는 이 책에서 신약 정경의 13 서신 전체를 근거로 바울의 신학적 가르침을 분석할 것이다.

2.2 장르와 수사법

“서신”은 고대 세계에서 인정된 소통 형태였으며, 바울의 서신은 고대의 다른 서신과 일반적인

특징을 공유한다. 바울서신 일부의 길이는 서신 장르의 특징과 약간 다르다. 키케로의 많은 서신

중에서 가장 긴 서신은 2,530 단어, 세네카의 서신 중 가장 긴 서신은 4,134 단어이지만 바울의

로마서는 7,101 단어로 훨씬 길다.23 ) 그래서 어떤 학자는 바울의 서신이 서신 장르의 경계를 허물

22 ) Neil Elliott, Liberating Paul: The Justice of God and the PoliticsoftheApostle (Minneapolis: Fortress, 1994), 29.

23 ) Larry W. Hurtado, 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6), 120.

21 ) Armin D. Baum, Pseudepigraphie und literarische Falschung Im Frühen Christentum, WUNT 2/138 (Tübingen: Mohr Siebeck, 2001), 92; 같은 저자, “Content and Form: Authorship Attribution and Pseudonymity in Ancient Speeches, Letters, Lectures, and Translations: A Rejoinder to Bart Ehrman,” JBL 136 (2017): 381~403. 위서 가설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는 다음 연구를 보라. Terry Lee Wilder, Pseudonymity, the New Testament and Deception: An Inquiry into Intention and Reception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004); Lee Martin MacDonald and Stanley E. Porter, Early Christianity and Its Sacred Literature (Peabody, MA: Hendrickson, 2000), 388~393; D. A. Carson and Douglas J. Moo,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nd ed. (Grand Rapids: Zondervan, 2005), 337~350. 다음도 보라. Johnson, Constructing Paul, 33~41, 74~92.

어 “사도 서신/목회 서신”, “부재중인 사도”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24 ) 이런 제

목이 내포하는 것처럼 바울서신은 바울이 물리적으로는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도 바 울의 “현존”을 목회 현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 5:3에서 바울이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라고 말한 내용의 예를 보라 ). 그러나 바울의 서신을 새로운 장르로 분류하는 것

보다는 표준 서신 형식의 확장 또는 적용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어느 경우든 바울의

서신을 당대의 다른 서신의 맥락에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학자들은 서신의 “형식”과

관련해서 여러 정교한 모델을 제시했으나 고대 서신 전체를 살펴보면 단순하고 명료한 형식이 나

타나며, 시작하는 말, 감사, 본론, 맺음말로 구성된다.25 ) 이 범주들은 매우 일반적인 서신의 속성

이어서 이런 식의 구분에서 어떤 의미를 도출하는 해석적 결론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울 당시의 그리스 세계는 수사법에 “빠져” 지냈다. 설득력 있게 논증하는 방법과 문체를 발

전시키고 연구하고 적용했다. 학자들이 바울서신을 분석하기 위해 당시 널리 사용된 수사법의 문

체와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주요 고대 수사법 형식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1) “법정적”( forensic ) 수사법은 과거 행위를 변호하거나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2) “권고적”( deliberative ) 수사법의 의도는 어떤 행동 지침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도록 설득

하는 것이다. (3) “평가적”( epideictic ) 수사법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칭송할지 아니면 비난할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학자들은 바울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수사법을 자기 서신 또는 서신의 특 정 본문에 사용했는지 논쟁했다. 학자들이 내리는 다양한 결론에 따르면 바울의 논증( 들 ) 은 세 가

지 범주 중 하나에 깔끔하게 들어맞을 수 없다. 머리 해리스는 이를 고린도후서와 관련해서 언급 한다.

(1)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2) 변증의 목적으로 (3) 논리적으로 진술하고 (4) 청중을 설득하고 청중의 사고와 행동 방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목표로 삼는……고린도후 서 분량 정도의 모든 문서는 법정적, 권고적, 평가적 수사법의 기본적인 요소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순서가 인지 가능하거나 도식적인 것은 아니다.26 )

바울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당대의 수사 형식, 장치, 언어를 많 이 활용한다. 그러나 바울이 수사학 훈련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바울서 신을 특정 수사

24 ) Gorman, ApostleoftheCrucifiedLord, 92~98.

25 ) Jeffrey A. D. Weima, Paul the Ancient Letter Writer: An Introduction to Epistolary Analysis (Grand Rapids: Baker, 2016), 10~26. 다음 논집도 보라. Stanley E. Porter and Sean A. Adams, eds., Paul and the Ancient Letter Form, Pauline Studies 6 (Leiden: Brill, 2010).

26 ) Harris, SecondEpistletotheCorinthians, 109.

27 ) 특히 다음 자료를 보라. Stanley E. Porter, “Paul of Tarsus and His Letters,” in Handbook of Classical Rhetoric in the Hellenistic Period (330 B.C.-A.D. 400), ed. Stanley E. Porter

2.3 공동 저자?

다른 학자들처럼 나도 “바울의 서신들”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흔히 “바울”의 이

름을 붙이는 서신의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다른 기독교 지도자도 언급한다.

바울과 소스데네( 고전 1:1 )

바울과 디모데( 고후 1:1; 빌 1:1; 골 1:1; 몬 1절 )

바울, 실라, 디모데( 살전 1:1; 살후 1:1 )

어떤 해석가는 시작하는 말의 의도가 실제 공동 저자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8 )

그러나 서신에 1인칭 단수형을 사용하고 ( 추정되는 공동 저자가 아니라 ) 바울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암

시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서문에 포함된 개인을 “공동 발신자”로 이해해야 함을 강하게 제시한

다.29 ) 바울의 대필자가 표현에 있어서 어떤 소임을 수행했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그래도

서신의 내용에 대한 책임은 바울에게 있었다.30 ) 바울은 자신이 서신에서 말하는 내용이 기독교의

핵심 지도자의 지지와 권위를 근거로 삼고 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여러 서신의 서문에

동역자의 이름을 넣었다. 당연히 이 지도자들은 바울이 서신을 보내는 교회나 개인의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서신에 자주 들어간다.31 )

(Leiden: Brill, 2001), 533~585; Weima, Paul the Ancient Letter Writer, 8~9; Paul M. Robertson, Paul’s Letters and Contemporary Greco-Roman Literature: Theorizing a New Taxonomy, NovTSup 167 (Leiden: Brill, 2016), 40~56; Ryan S. Schellenberg, “Rhetorical Terminology in Paul: A Critical Reappraisal,” ZNW 104 (2013): 177~191. 바울서신에 사용된 수사법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보여 주는 유익한 논집으로 다음 을 보라. Stanley E. Porter and Bryan R. Dyer, eds., Paul and AncientRhetoric:TheoryandPracticeintheHellenisticContex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28 ) 특히 다음을 보라. E. R.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Secretaries, Composition and Collec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2~36.

29 ) Weima, Paul the Ancient Letter Writer, 27~32. 물론 바울은 그

의 서신에서 1인칭 복수형 동사를 자주 사용한다. 이 경우 복수 형은 실제 복수에 해당하며, 바울과 함께 바울과 비슷한 사람들 (때로는 동료 유대인, 더 많은 경우는 동료 그리스도인), 가끔 은 바울 자신과 바울의 공동 발신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일부 복 수형은 바울만 지칭한다(예, Karl Dick, Der Schriftstellerische Plural bei Paulus [Halle: Ehrhardt Karras, 1899]).

30 ) 대필자 외에도 서신에 대필자가 포함되는 특징에 대해서는 E. R.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81~93을 보 라. 바트 어먼(Bart Ehrman)에게 반박하는 아르민 바움은 서신 의 (반드시 어법이 아니더라도) 내용에 명시된 저자를 파악할 수 있는 한 서신은 진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음을 성공적으 로 주장한다(Baum, “Content and Form,” 381~403).

31 ) Samuel Byrskog, “Co-Senders, Co-Authors and Paul’s Use of the First Person Plural,” ZNW 87 (1996): 230~250.

Chapter 4

갈라디아서

나는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가장 먼저 쓴 서신으로 이해한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가장 독특한

개념 일부를 소개한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에서 차지하

는 우리의 위치를 해석하기 위한 큰 틀로 구원사를 소개한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율법이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 하나님의 백성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소개한다.1 ) 바울이 이 모든 신학을 제시하는 데는 목적이 있으며, 이는 바울의 서신에 언제나 나

타나는 특징이다. 신학의 목적은 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충분한 사실을 부정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고 의의 길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바울이 수행한 선교의 궤적 가운데 갈라디아서의 목적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면 이

런 신학적 쟁점과 다른 신학적 쟁점에 대한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갈라디아서의 기록 시기를 확실히 파악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이는 서신의 목적지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언제 기록했는지는 바울이 누구에게 기록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 참고, 3:1의 “어리석

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 그러나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북중부 지역 또는 이 지역의 이름에 유래한

1 ) (개념과 때로는 어법에 있어서) 본 장의 많은 내용은 Douglas J. Moo, Galatians, BECNT (Grand Rapids: Baker, 2013, 『BECNT 갈라디아서』,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8)에 의존하고 출판사의 허 락을 받고 사용한다.

로마 제국의 속주를 지칭할 수도 있다. 바울이 전자를 지칭한다면 서신의 가장 이른 시기는 AD

51년 또는 52년일 가능성이 있다. 이 시기에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이었다. “갈라디아”가 이름

이 지칭하는 지역을 가리킨다면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나서 3차 선교 여행 중에 서신 을 기록했을 것이며, 서신의 연대는 AD 54~57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2 ) 반면 바울이 비시디

아 안디옥,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를 포함한 갈라디아의 속주에 서신을 보냈다면 빠를 경우 AD

48년 또는 49년의 시기, 즉 1차 선교 여행 직후에 서신을 기록했을 것이다.3 ) 그러나 내가 사용한

표현인 “빠를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남”갈라디아라는 목적지로 인해 저작 시기를 이른 시기로

국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AD 48년 무렵 이후 언제든지 서신을 쓸 수 있었다. 두 견해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갈라디아의 속주를 목적지로 삼으면 저술 시기로 매우 이른 시기도 가능하지

만 갈라디아 지역을 목적지로 삼으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주장하고 평가하는 데

학문적 열의를 쏟았다.4 ) 내가 보기에 바 울이 1장 11절~2장 10절에서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를 언급한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결

정적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두 차례 예루살렘 방문을 언급한다. 그는 회심 직후 고향 다소로 돌

2 )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서신을 쓰기 전에 갈라디아에서 사역했음

을 명확히 한다. 바울의 이동에 대한 누가의 명확한 증언에 따르

면 사도 바울은 아무리 빨라도 2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가지 않았다. 행 16:6을 보라. 이에 덧붙여

서 갈 4:13이 바울이 서신을 쓰기 전에 갈라디아를 두 차례 방문

했음을 내포한다면(이 구절의 ‘프로테론’은 “두 방문 중 첫 번째”

를 의미) 바울이 3차 선교 여행까지는 서신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는 시점에 “갈라디아”를 방 문했기 때문이다(행 18:3).

3 ) 갈 4:13에 암시된 두 차례의 방문 가능성은 교회 개척을 위한 첫

번째 방문과 바울이 선교 여행의 경로를 거슬러 돌아오는 길에

이루어진 방문을 포함할 수 있다(행 14:21~25). 그러나 갈 4:13

이 바울의 앞선 두 차례 방문을 전제로 하는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프로테론’은 단순히 “이전의”를 의미할 수도 있음). Moo, Galatians, 283~284를 보라. 4 )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i. 바울은 속주 갈라디아의 남부에 있는 여러 교회에 서신을 썼다.

a. 예루살렘 총회 직전(AD 48년; 예, Bruce, Galatians, 3~18, 43~56;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WBC [Dallas: Word, 1990], lxi~lxxxviii; Richard Bauckham, “Barnabas in Galatians,” JSNT 2 [1979]: 61~70; Colin J. Hemer, The Book of Acts in the Setting of Hellenistic History, ed. Conrad H. Gempf, WUNT 2/49 [Tübingen: Mohr Siebeck, 1989], 260~271; David A. deSilva, The Letter to the Galat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18, 『NICNT 갈라디아서』,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2], 39~62);

b. 2차 선교 여행 초기(AD 50~51년; 예, James D. G.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Ca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12~17; Craig S. Keener, Galatians: A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2019], 8~22);

c. 3차 선교 여행 도중(AD 54~57년; 예, Ernest de Witt Burt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ICC [Edinburgh: T&T Clark, 1921], xlvii~xlix (hesitantly); Gordon D. Fee, Galatians, Pentecostal Commentary [Blandford Forum, UK: Deo, 2007], 4; Frank J. Matera, Galatians, SP 9 [Collegeville, MN: Liturgical, 1992], 19~26).

ii. 바울은 (“북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에 서신을 썼다.

a. 2차 선교 여행 도중(AD 50~51년; Martyn, Galatians, 19~20; Martinus C. de Boer, Galatians: A Commentary, NTL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1], 5~11);

b. 3차 선교 여행 초초(AD 54~55; 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New York: Doubleday, 1997], 474~477; Werner G. Kümme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nd ed. [London: SCM, 1975], 296~304; Murphy-O’Connor, Paul, 159~162, 180~182);

c. 3차 선교 여행 말기(AD 57년; 이는 “고전적” 형태의 “북부 갈라디아” 관점이다. 예, J. B. Lightfoot, SaintPaul’sEpistle to the Galatians: A Revised Text with Introduction, Notes, and Dissertations, 7th ed. [London: Macmillan, 1881], 48~49; Joachim Rohde, Der Brief des Paulus an die Galater, THKNT 9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89], 10; Franz Mussner, Der Galaterbrief, 5th ed., HThKNT 9 [Freiburg: Herder, 1988], 9~10).

아가기 전에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1:18 ). 몇 년 후에 두 번째로 방문했다( 2:1 ). 사도행전에서

는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서 세 번의 사건을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은 회심 직후 짧게, 처음으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행 9:26~30 ). “기근 구제”를 위해서도 방문했다( 11:27~30 ). 예루살렘 총회

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방문했다( 15:1~21 ). 바울이 언급하는 첫 번째 방문은 사도행전 9장 26~30절

의 내용과 분명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 1~10절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 바울이 “기둥” 사도들을 만난 사건에 대한 설명과 예루살렘 총회가 서술된 누가의 내러티브

는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이 때문에 많은 학자가 두 본문을 같은 사건에 대한 묘사로 결론을 내

리는 것은 당연하다.5 ) 그러나 두 이야기에는 몇 가지 뚜렷한 차이점도 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2장 1~10절과 사도행전 15장을 같은 사건으로 이해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울이 “기

근 구제”를 위한 방문을 갈라디아서 2장에서 빠뜨린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이 자신의

회심과 갈라디아서를 쓴 시기 사이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벌어진 모든 일을 거론하지 않기 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논쟁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나는 바울이 예루살렘 방

문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누가의 역사적 정확성을 전제하면, 갈라디아서 2장

1~10절과 사도행전 11장 27~30절이 일치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 참 석하기 전에 갈라디아의 로마 속주 남쪽 지역에 속한 첫 번째 선교 도시에 서신을 보냈음을 의미

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일어나는 쟁점을 위해서는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가 바울에게 대단히 중요 한 문제였을 것인데도 바울이 총회의 결과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결론을 지지한다.6 ) 그러므로 나는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의 마지막 시기와 예루살렘 총회 사이에 갈라디아서를 기

록했다고 결론 내린다( 행 14:26~28 ).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첫 번째 서신이 된다. 물론 나는 갈라디아서를 보낸 목적지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

신학의 발전과 관련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갈라디아서의 목적지를 설정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의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서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쟁점은 명확하다. 핵심 쟁 점은 복음이었다. 갈라디아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1:6~10 ). 그들은 회심한 이

5 ) 특히 실바의 명확하고 간결한 요약을 보라. Moisés Silva, Interpreting Galatians: Explorations in Exegetical Method,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1), 129~139.

6 ) 특히 이런 논증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글로는 다음을 보라. R. Longenecker, Galatians, lxxxviii~l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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