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저자 서문 6
| 프롤로그: 구약과 하나님 나라 9
1 부 창조와 타락 29
1장 창조의목적 30
2장 우주와성전 45
3장 에덴의동산 59
4장 사람의본분 70
5장 뱀의유혹 81
6장 인간의타락 95
7장 심판과회복 108
8장 하나님의아들들 121
2 부
135
9장 아브라함의복 136
10장 이스마엘과이삭 150
11장 야곱의씨름 174
12장 출애굽의첫째의미 187
13장 출애굽의둘째의미 198
14장 우상숭배의본질 211
15장 공동체속의개인 228
16장 음식규례 243
3 부 믿음과 전쟁 261
17장 아말렉과의전쟁 262
18장 언약궤의행군 277
19장 요단강의기적 293
20장 약속의땅과할례 306
21장 기브온족속 319
복음과 율법22장 정복전쟁과땅분배 333
23장 갈렙의믿음 347
24장 세겜의언약갱신 360
4 부 왕국과 통치 373
25장 사사시대의아이러니 374
26장 사울과다윗 387
27장 평화의왕솔로몬 402
28장 히스기야의사적 419
29장 요시야의개혁 432
5 부
예배 445
30장 성전과안식 446
31장 성전의구조와설비 461
32장 호렙산의엘리야 473
33장 스룹바벨의사명 488
34장 에바속의여인 499
6 부 고난과 기도
515
35장 부활에이르는죽음 516
36장 섭리속의질병 530
37장 구약의저주시 544
38장 서원기도 557
39장 처녀가낳을임마누엘 574
40장 시온에세운왕 588
41장 다윗의위에앉을왕 603
42장 엘리엘리라마아자브타니! 615
성전과 7 부 예언과 성취 573하나님 나라는 구약 역사를 추동하는 근본 힘이며 구약 역사가
바라보는 궁극 목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와 사망으로 뒤덮인
어두운 세상에 소망을 주는 강력한 빛입니다. 이 빛으로 인해 썩어
짐과 고통과 허무에 굴복하는 세상과 우리의 삶이 혼란스러운 역사
의 소용돌이에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뚜렷한 방향을 발견합
니다. 필자는 이 믿음으로 구약을 읽고 연구합니다. 창조로부터 시
작되는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를 다스리는 전능한 왕이심을 계시합니다. 온 세계가 지혜와 능력
이 무한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역사
는 그 궁극의 목표에 도달합니다. 육일 동안 진행된 창조가 일곱째
날에 임한 하나님의 안식으로 종결되는 시간 구조가 이것을 나타냅 니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 나라가 구약의 다양한 내용을 통합하는 신 학적 중심이라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구약에 신학적 중심이 있다는
생각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학자 중에는 구
약의 신학적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분도 적지 않습
니다. 예를 들어, 메릴( E. H. Merrill ) 은 “인간 대리자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가져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구약의 모든 내용을
하나로 묶는 중심 주제라고 주장합니다. 구약신학 분야에서 20세기
에 가장 중요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는 아이히로트 ( W. Eichrodt ) 는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신구
약 성경을 하나로 묶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월트키( B. K.
Waltke ) 도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나님 왕권의 침
투라는 개념이 구약의 모든 부분을 가장 잘 수용한다”라고 밝힙
니다. 화란의 구약학자 페일스( H. G. L. Peels ) 역시 “하나님 나라가
여전히 구약의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개념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
고 설명합니다.
필자는 이 관점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가장 잘 부합
한다고 믿습니다.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주요 본문
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를 모은 책입니다. 프롤로그
는 구약 역사가 하나님 나라 실현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는 사실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설명하며 에필로그는 하나님 나라가
기도를 통해 “오늘 여기”( Here and Now ) 현존하는 실체로 경험된다
는 사실을 밝힙니다. 모두 7부로 구성된 책의 본론은 창조와 타락, 복음과 율법, 믿음과 전쟁, 왕국과 통치, 성전과 예배, 고난과 기도, 예언과 성취를 다루며, 각 주제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측면을 소개합니다. 책의 부제 “적용이 있는
구약성경신학”은 이 책이 구약의 여러 신학적 내용을 설명하는 것
저자 서문 7
에서 머물지 않고 오늘날 성도의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조의 목적과 하나님 나라』는 원래 영음사에서 출판했던 글을
개정 증보한 책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헌신으로 이 책
의 출판을 허락해 주신 부흥과개혁사 백금산 목사님과 김은주 대표
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김성수 교수님, 임형
택 목사님, 이복우 교수님, 도지원 목사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
고 싶습니다. 끝으로, 언제나 한결 같은 사랑과 헌신으로 필자를 응
원하고 격려해 주는 사랑하는 아내 은실과 이제 어엿이 자라 하나
님의 말씀을 섬기는 일에 필자와 동역자의 길을 가는 자랑스러운
아들 희범에게 무한히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온 세상
을 다스리며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만왕의 왕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2023년 6월
여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저자 씀
| 프롤로그: 구약과 하나님 나라 |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막 1:15 ) 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독
특한 역사관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예수가 등장하기까지의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긴 과정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란 표
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비슷한 표현인 ‘여호와의 나라’가 나오긴 하
지만, 역대상( 28:5 ) 과 역대하( 13:8 ) 에 한 번씩 사용되는 정도입니다.1)
1) 물론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예를 들어, 역대기에
는 하나님 나라 또는 주권을 뜻하는 단어 마믈라카(hk'l'm.m;)도 두 번 사용된다(대
상 29:11; 대하 13:8). 다니엘서에 여섯 차례(4:3, 34; 6:26; 7:14, 27) 반복되는
‘그의 나라’(아람어로 HteWkl.m; , 말쿠테흐) 또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 단
2:44의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아람어로 Wkl.m;, 말쿠) 또한 마찬가지다. 시편
에도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가리키는 명사가 나온다. 믈루카 (hk'Wlm. ), 말 쿳(tWkl.m;), 멤샬라(hl'v'm.m,), 고이(ywOG) 등이다(시 22:28; 45:6; 145:11, 12, 13; 106:5). 선지서 중 옵 1:21에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는 명사 믈루카(hk'Wlm.)가 한
번 나온다. 그 밖에도 구약에는 ‘왕’을
사실상 구약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나 가르침은 나
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창조부터 시작하는 장대한 역사 기록이 펼
쳐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역사 기록을 지배하는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구약에 대해 역사 기록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 역사 기록 또는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용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합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영어에서 역
사를 뜻하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영어
의 히스토리 ( history ) 는 원래 역사의 아버지라 일컫는 헤로도토스( BC
약 484-425 ) 가 페르시아 전쟁사를 기록한 책 히스토리아이 ( ἱστορίαι ) 에
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원래 ‘탐구’( inquiries ) 를 뜻합니다. 책의 이
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헤로도토스는 BC 5세기에 있었던 그리스
와 페르시아의 전쟁에 대하여 자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탐구한
바를 기록해서 후세대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구약의 기록을 ‘history’로 부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
이 걸어온 삶의 자취를 기록했을까요?
필자가 아는 한 구약에는 저자가 글을 쓴 방식이나 관점이 자세
히 소개되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은 많은 사람의 기록 활동을 알려
줍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기록 활동을 했고( 출
켜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 30:9; 수 1:8; 23:6 ). 이렇게 구약에
는 개별적인 기록 활동과 목적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구약이 그려
내는 이스라엘의 과거 행적이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전체
를 아우르는 관점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
그들이 “연 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일을 하였다는 것과 그런 활동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서 구약
선지자의 활동과 앞에서 언급한 헤로도토스의 활동 사이에 유사점
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사점은 구약 선지자도 헤로도
토스와 마찬가지로 탐구 활동을 했다는 것이며, 차이점은 헤로도토
스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나름대로 고유의 관심을 가지고 탐구한
반면 구약 선지자는 장차 올 구원에 대해 그리스도의 영이 지시하
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선지자
가 남긴 기록을 ‘history’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history’의 성격을 뛰어넘는 측면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구약과 하나님 나라 11
그런데 선지자가 장차 올 구원에 대해 예언한 것을 구약 성경
저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에 대해 기록한 것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지자가 했던 예언
의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자( 使者 ) 로
서 하나님이 세상과 인류를 향해 가지신 계획이 당대 이스라엘 백
성의 삶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피고, 그들의 상황이 미래에
성취될 하나님의 뜻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선포하는 자였습
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약 선지자는 과거의 경험에 근거하여 현재
와 미래를 조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에 근거하여 당
대의 왕과 백성 문제를 지적하고, 시내산 언약에 근거하여 새 언약
의 도래를 알리며( 렘 31:31-34 ), 과거 출애굽 사건에 빗대어 미래의
구원 사건을 예고하고( 사 11:16; 호 2:14-15 ), 역사적 다윗 왕권에 뿌리
를 둔 미래의 왕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사 11:1-5; 렘 23:5; 호 3:5 ).
이런 통찰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 선지자의 예언 활동에 대해 한
말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줍니다. 구약 선지자가 장차 올
구원에 대해 예언한 것은 문자 그대로 미래에 대한 예언만 아니라
과거의 탐구도 포함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구약 선지자가 이스라엘
의 과거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 분류, 분석, 정리한 것 자체
가 미래에 나타날 구원을 연구하고 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내용이 자신을 가리킨다고 말
씀하신 것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합니다
거의 자료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는” 일을 했으며, 그들이 그렇
게 한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 저자의 활동이 구약 선지자의 활동과 겹친다면
그들을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일이라고 하겠습
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서뿐만 아니라
지명, 법률 ) 을 제외하면 선지자의 원류인 모세
가 기록한 것이며, 여호수아~열왕기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선지서’
로 분류되는 만큼 선지자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
서 인류와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보편사( 창 1-11장 ) 와
족장사( 창 12-50 ) 에서 출발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로 종결되는 이
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쇠퇴를 서술하는 긴 역사( 출애굽기~열왕기 ) 를
거쳐, 포로기 후에 새로이 형성된 유대 사회의 형편을 소개하는 내
용( 에스라~느헤미야 ) 에 이르기까지 전체 역사를 선지자적 관점에서
서술한 ‘선지자적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구한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역사관은 무엇일
까요? 다시 말해, 구약의 저자( 선지자 ) 로 하여금 온 세상의 창조로
소급되는 한 민족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통찰, 곧 선
지자적 전망은 무엇입니까? 위에서 인용한 사도 베드로의 진술에
따르면, 구약 선지자는
괄적인 의미에서의 구원, 즉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한다고 보
아야 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저자( 선지자 ) 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
상,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큰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창조까
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서술했다고 볼 수 있 습니다. 신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표현인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
가 가까이 왔으니”( 막 1:15; 참고. 마 3:2 ) 도 예수님이 등장하기까지의
긴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 줍니다.
브라이트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맺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2) 이
와 유사하게 로버트슨은 하나님 나라 개념이 “구별되는 이스라엘
국가와
2) 다음을 보라. J. Bright, The Kingdom of God (Nashville: Abingdon Press, 1981), 28: “For Israel had begun its history as a nation summoned by God’s grace to be his people, to serve him alone and to obey his covenant law. The notion of a people of God,called to live under the rule of God, begins just here, and with it the notion of the Kingdom of God.”
3) A. Robertson, Regnum Dei (Whitefish: Kessinger pub., 2010), 13.
4) W. Eichrodt,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Teil I: Gott und Volk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57), 11-12: “So war also das foedus iniquum des Sinaibundes tatsächlich ein Herrschaftsgebiet mit Oberherrn und Untertanen entstanden: die Idee des Gottesreiches liegt seitdem in der Luft.”
구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 국가란 개념이 세상을 창조하
신 하나님의 계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더 자 세히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이 최고의 왕으로서 통치할 의도로 창조
하신 세상이란 개념이 하나님만 왕으로 섬기는 목적으로 세워진 이
스라엘 국가란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
님 나라 건설이란 창조 목적이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 유지되고 그
최종 실현을 향해 전진해 간다는 것이 구약 성경 저자( 선지자 ) 가 가
졌던 역사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창조 기사( 창 1장; 2장 )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곳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
하는 여러 어휘와 수사( 修辭 ) 가 그것을 암시합니다. 그러기에 창세
기의 창조 기사를 살펴봄으로써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지배하는 하
나님 나라 관점이 어떤 모양새와 윤곽을 갖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1-2장은 구약 성경을 시작하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으므로 이곳에서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선지자적 역사 안
목의 개요를 소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
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
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은 인간이 하나님의
위함입니다. 27절과 28절에서도 같은 내용이 나타납니다.
27절에서는 인간 창조를 두 가지로 부연합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
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28절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
을 주신 것을 두 가지로 부연합니다.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이고, 다른 하나는 다스리는 것입니다. 젠트리가 잘 관찰한 바와 같
이,5) 여기서 창조의 두 가지 사실이 축복의 두 가지 사실과 상응 관
계에 있음이 드러납니다.
A 인간을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하심
B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5) P. J. Gentry & S. J. Wellum, Kingdom through Covenant. A Biblical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Covenants (Illinois: Crossway, 2012), 188-189.
하나님 나라
것( A ) 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갖기 위함인 것( A ´ ) 을 잘 보여 줍 니다. 인간이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은 시편
8편 6절도 노래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그렇다면 인간이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어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
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행사할 왕권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은 인간이 왕권을 행사하되 하
나님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통치권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에 사용된 히브리어 전치사 ( b. ,
브 ) 는 규범의 의미( ~대로 ) 대신 본질의 의미( ~로서 ) 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가능성이 옳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
로서’( as God’s image ) 창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6) 다시 말
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기능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
니다.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볼프는 이 사실을 고대 근동
의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상(像)을 세우는 것은 그 상이 세워진
지역에 왕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단 3:1, 5절
이하). BC 13세기 파라오 라암셋 2세는 바위를 쪼아 만든 자
신의 형상을 베이루트 북쪽 지중해 연안 켈브강
6) D. J. A. Clines, “The Image of God in Man,” Tyndale Bulletin 19 (1968): 80; W. Randall Garr, In His Own Image and Likeness:Humanity,Divinity, and Monotheism (Leiden: Brill, 2003), 169; E. H. Merrill, Everlasting Dominion: A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Nashville: B & H Publishing Group, 2006), 170-171.
관계된다. 다음을 보라. Gentry & Wellum, Kingdom through Covenant, 200-201. 덤브렐 역시 본질과
기능을 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However, it seems to be incorrect to separate essence from function for what results is humanity as a whole and as a relational being.” 다음을 보라. W. J. Dumbrell, The Faith of Israel: A Theological Survey of the Old Testament, 2nd edit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30.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의 주인이라는 증거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또한 자신의 통치를 실행해야
하며, 자신의 직무를 자의적인 독재가 아니라 책임 있는 대리
인으로 성취해야 한다. 인간의 통치와 다스리는 임무는 독단
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사(copies)다.8)
볼프가 잘 설명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로
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면에서 하나
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
어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가 알려 주는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창조의 절
정( climax ) 이라 일컫는 인간 창조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것
이라면 전체 창조 역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
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창조에서 시작된 전체 인류 역사가 하나
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결론을 이끌
어 낼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처음부터 역사를 하나님
8) H. W. Wolff, AnthropologyoftheOld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1974), 160-161.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
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제칠 일에 모든 일을
끝내고 안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므로 2절과 3절에
서 두 번씩이나 되풀이합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쉬셨다
는 뜻일까요? 하나님도 쉬는 것이 필요할까요? 우선 구약에서 ‘안
식하다’라는 말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
펴보아야 합니다. 클라인이 잘 관찰한 바와 같이, 구약은 특별히 하
나님이 성전에 거하시는 것을 안식과 연결합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 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는 것과 안식이
서로 연결됩니다. 시편 132편 14절은 성전이 있는 시온을 하나님의
‘쉴 곳’이라고 밝힙니다. 이사야 66장 1절은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
이 ‘안식할 처소’를 동일시합니다. 성전과 안식의 연결은 역대기
28장 2절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에 다윗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여기서 ‘봉안할 성전’에 상응하는 원문은 베트 메누
하 ( hx'Wnm. tyBe ) 며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안식의 집’입니다. 성전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위한 ‘안식의 집’입니다. 이는 성전과 안식의 관
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제 창세기 1, 2장을 보겠습니다. 이곳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러 요소가 세상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창조되었음
을 알려 줍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 것입니다( 2장 ).
여기서는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하나님의
영’이 세상의 창조에 관여하신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출애굽기 31장 3절과 35장 31절은 ‘하나님의 영’이 성막의 건설에
관여하신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는 세상의 창조와 성막의 건설이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러 학자도 이 관계를 인
정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는 성막이 ‘세상의 모형’으로 의도된
것이라고 말합니다.9) 세일해머도 비슷하게 설명합니다.
9)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창조의 ‘사역’을 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자기들의 ‘사역’(성
막의 건설-필자주)을 해야 했다.10)
심지어 클라인은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을 “다른 성전의
창조를 위한 알파-모델”이라고 설명합니다.11) 이러한 설명은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사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관점
을 반영합니다. 이 관점은 시편 139편 7-8절도 확인해 줍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계시지
to the Pentateuch, 3r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2, 『주제 별
부흥과개혁사 역간, 근간), 234.
10) J. H. Sailhamer, The Pentateuch as Narrative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1995, 『‘서술’로서의
크리스챤서적 역간, 2005), 173.
11) M. G. Kline, Kingdom Prologue:Genesis Found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Overland Park: Two Age Press, 2000, 『하나님 나라의 서막.
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의 임재’( the Lord’s Presence ) 입니다( 참고.
출 33:14; 신 4:37; 사 63:9 ). 시인이 보기에 주의 임재가 없는 곳은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스올’에도 없습니다. 온 세상이 주가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이는 온 세상이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임재가 있
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출 25:8 ) . 이사야 66장 1절 말
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 도 같은 사실을 가르칩니다.
윌리엄슨이 적절하게 말한 것처럼, “온 창조는 하나님의 성전 단
지( 團地 ) 입니다”( the whole creation is the divine temple complex ) 12) 그러
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기의 말씀과 조화를 이룹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창세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전에서 안식하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
까요? 그것은 물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쉰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
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는 것은 그곳에서 세상을 통치하기 위
함입니다. 사실 지상에 세우는 성전은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왕궁( 궁전 )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왕궁( 궁전 ) 을 뜻
하는 히브리어 단어 헤칼 ( lk'yhe ) 이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참고. 렘 7:4 ). 또한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 야샵 ( bv;y"; 왕상 8:13; 시 9:11; 사 6:1 ) 은 주로 왕이 왕
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왕상 1:35; 2:12; 3:6;
12) P. R. Williamson, Sealed with an Oath: Covenant in God's Unfolding Purpose (NSBT; Downers Grove: IVP, 2007), 49.
8:20; 22:10 등 ). 여기서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는 것은 왕이 궁전에 거
하며 백성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
면, 성전은 온 세상의 왕이신 여호와의 궁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성전에서 안식하시는 것은 그분이 왕궁
옥좌에서 통치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 우주적인 궁전의 옥좌에 오르신 일로 이해해야 합
니다. 클라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자신의 궁전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그의
안식은 그렇게 만들어진 궁전에 입궁하는 것, 즉 창조주가 왕
으로 통치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안식의 시작은 엘로힘 하
나님이 새롭게 왕으로 즉위하셨음을
13) M. D. Kline, 앞의 책, 63.
14) S. J. Hafemann, “Covenant Relationship”, in Central Themes in Biblical Theology:Mapping Unity in Diversity, edited by S. J. Hafemann and P. R. House (Nottingham: Apollos, 2007), 40.
헤이프먼을 인용하며 슈라이너도 같은 설명을 제시합니다.15)
창조의 제칠 일(창 2:1-3)은 특별하다. 하나님이 창조 사
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날에 하나님은 창조하는 대신 안
식하신다. 하나님의 안식은 성경의 스토리 라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제다. 하나님의 안식은 “그가 이제 자기 백성
의 유익을 위해 창조 세계를 다스린다”라는 것을 가리킨다.
법궤에 대한 말씀도 이런 이해를 뒷받침합니다. 흔히 법궤는 하나
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물건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법궤는
하나님의 통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궤는 종종
하나님의 보좌 또는 보좌에 딸린 발판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사무엘서 기자는 법궤를 가리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
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 삼하 6:2 ) 이라고 함으로써 법궤
가 하나님의 보좌임을 밝힙니다. 또한 시편 99편 1절도 “여호와께
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
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라고 함으로써 법궤 ( “그룹 사이에 좌정하
심” ) 가 하나님의 보좌임을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 예레미야 3장 1617절은 법궤가 하나님의 보좌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법궤( 여호와의 언약궤 ) 는 여호와의 보좌로 설명됩니다.16)
15) T. R. Schreiner, The King in His Beauty:A Biblical Theology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3), 7.
16) 참고. S. G. Dempster, Dominion and Dynasty: A theology of the He-
프롤로그: 구약과 하나님 나라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
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때에 예루살
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에서 법궤와 안식은 상호 긴밀한 연관이 있 습니다. 예를 들어 역대기는 언약궤를 보관할 성전을 “안식의 집” 이라고 부릅니다. 이에 다윗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
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안식의 집)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
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대상 28:2)
민수기와 시편도 언약궤를 안식과 연결합니다.
brew Bible (Downers Grove: IVP, 2003, 『NSBT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
는 구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2), 166.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안식의 장소)
을 찾았고(민 10:33)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안식
의 장소)으로 들어가소서(시 132:8)
요컨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여호와가 왕궁의 옥좌에 오르는 것과 같은 의미입
니다. 하늘의 왕이 자기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임한다는 개념이 언
약궤를 성전에 메어 들이는 의식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이처
럼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법궤가 안식과 연결됩니다. 이는 하
나님의 통치와 안식의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주고도 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의 제칠 일에 안식하신 것을 통치의 관점에
서 이해하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창조의 제칠 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제 막 창조된 세계( 성전 ) 에
왕으로 좌정해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창조 전
체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
나님이 온 세상을 짓고, 그것을 (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 다스릴 인간
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우주적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
을 비롯한 피조 세계에 안식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
이라고 여겨집니다. 고대 근동 신화에 등장하는 변덕스럽고 독재적
인 신과 달리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과 피조물을 수고롭거나 고통스
럽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과 피조물에게
안식을 가져옵니다. 다음 시편 구절이 그것을 밝히 드러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16:11)
안식으로 완성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 창조의 목적이며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구약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그 궁극적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려 줍니다.
1장
창조의 목적
이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이 질
문이 어리석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세계가 빅뱅이란 우연한 현상
을 통해 생겨났고 우연이 지배하는 진화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상
태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 사고에는 ‘목적이 있는 세
계’란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히 존재하고
우연히 사라질 뿐입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적이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존재의 목적이 따로 있겠습
니까? 존재의 목적이 없으니 목적이 요구하는 책임이나 의무도 있
을 수 없고, 목적이 가져다주는 기대나 소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남 아 있는 것은 오직 생존의 법칙이며, 생존의 법칙을 잘 응용하여 생
명을 향유하고 연장하는 것뿐입니다.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요? 세계는 과연 아무런 존재 목적도 없는
우연의 산물일까요? 인간 삶은 그저 우연히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신기루에 불과할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세상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지
으신 것이 세상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이 목적에 따른 것이 며, 이 목적이 우리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하나
님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은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설명인
창세기 2장 1-3절에서 가장 밝게 계시됩니다. 앞 장에서 창조의 일
곱째 날이 갖는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이미 살펴본 바 있습
니다. 하나님이 이날에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주의 왕으로서
창조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앞으로 전개될
세상 역사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 역사는 하
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 ) 의 도래를 그 궁극적 지
향점으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창세기 2장 1-3절을 더욱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들
여다보고자 합니다.
창조의 일곱째 날에 대한 설명은 창세기 2장 1절의 “천지와 만물
이 다 이루니라”라는 말씀과 함께 시작합니다. 2절에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말씀은 모두 창조의 완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1절의 ‘이루
니라’와 2절의 ‘마치시니’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 칼라 ( hl'K' ) 의 수동
태와 능동태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단어가 형태를 바
꾸어 가며 반복됩니다. 이 반복을 통해 1절에서 선언된 완성이 2절
에서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1절은 창조의 일곱째 날이 완성
의 날임을 알리는 제목의 구실을 하며, 2-3절은 그 완성이 구체적
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설명합니다.
이런 구조는 창세기 1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은 뒤따르
는 말씀이 창조에 대한 것임을 밝히는 제목 구실을 합니다. 그리고
2절부터 31절은 창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자세하
게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도 제목과 설명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 1-3절은 하나의 단락이 아닙니다. 그
둘은 각각의 제목과 설명을 가진 두 개의 구분되는 단락입니다. 앞
의 것은 창조에 대한 것이고 뒤의 것은 창조의 완성에 대한 것입
니다.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2:1
“하늘과 땅과 만물들이
완성되었다” 첫째 날 ~
여섯째 날
주석가들은 2장 2절에서
일곱째 날
으로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가 가리키는
마침
의 시점이 언제인지 모호합니다. 개역개정판은 조금 다른 번역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여기서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시점은 분명히 일곱째 날입
니다. 원문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개역개정판과 마찬가지로
원문에서도 창조가 완성된 시점이 일곱째 날로 제시됩니다. 이것은 창조의 일이 일곱째 날에도 계속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습니다. 70인역 번역자들은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2절의 ‘일곱째
날’을 ‘여섯째 날’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현대의 주석가들은 ‘마치시
니’를 과거로 이해하지 않고 과거완료로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마치다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치다ʼ는 히브리어 동사 칼라를 번역한 말입
니다. 여기서 대두되는 문제는 칼라가 나타내는 완성을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해결책은 역시 본문이 제공합니다. 원문
에 따르면, 2절은 두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문장의
동사는 ‘완성하다ʼ를 뜻하는 ‘칼라’이며, 둘째 문장의 동사는 ‘안식
하다ʼ를 뜻하는 샤바트 ( tb;v' ) 입니다. 칼라와 샤바트가 마주 보며 대구
를 이룹니다. 또 두 문장에는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앞 문장에는
‘일곱째 날에 그 하신 일’이 나오고, 뒤 문장에는 ‘일곱째 날에 그 하
신 모든 일’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두 문장은 사실상 같은 말의 반
복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그 하신 일을 완성하셨고
일곱째 날에 그 하신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 이런 분석은 ‘완성하다ʼ가 무슨 뜻인지를 밝혀 줍니다. 앞 문장의
‘완성하다ʼ와 뒤 문장의 ‘안식하다ʼ는 사실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두 낱말은 서로의 의미를 밝혀 줍니다. 완성은 안식을 의미하며 안
식은 완성을 의미합니다. 안식이 없으면 완성이 아니며 완성은 안
식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
곱째 날에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2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일곱째 날
에도 어떤 창조의 일을 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으며 이를 통해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의미
입니다. 고대 랍비들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다음 인용은 창세기
2장 2절에 대한 랍비의 이해를 잘 보여 줍니다.
엿새 동안 창조가 이루어진 뒤에 우주에 무엇이 없었는가?
메누하가 없었다. 안식일이 되자 메누하가 왔다. 그리하여 우
주가 완전해졌다.1) 여기서 메누하는 안식을 뜻합니다. 메누하 곧 안식이 오자 우주가
완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안식과 더불어 창조
1) Abraham Joshua Heschel, The Sabbath: Its Meaning for the Modern Man (Boulder: Shambhala, 2003, 『안식』, 복있는사람 역간, 2007), 73.
가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창조의 목적이 밝혀집니다. 창조가 하나
님의 안식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의 궁극적
인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없으면 창조는 미완으로
남게 됩니다. 창조가 완성의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안식 때문입니다. 빛의 창조에서 인간의 창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의 모든 창조 행위는 사실상 일곱째 날에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보고 그것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안식은 창조 세계와 무관한 하나님 자신만의
안식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안식하셨기에 안식의 주체는 하나
님입니다. 안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를 완성으로 이끈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안식하심
으로써 창조가 완성에 도달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안식은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 세
계에 완성을 가져오는 안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안식이 창
조 세계를 지배함으로써 창조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 세계, 특히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히브리서 3-4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인간이 들어가서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히브리
서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이미 그( 하나님 ) 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
말씀에서 창조의 일곱째 날에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이 인간을 위한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창
조 세계가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안식하는 것, 그것이 창조의 완성
입니다.
여기서 ‘안식하다’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생깁니다. 창세기 2장
2절의 ‘안식하다’는 히브리어 샤바트 ( tb;v' ) 를 옮긴 말입니다. 샤바트
에서 안식일을 뜻하는 명사 샵바트 ( tB'v;; 영어 단어 사바스[Sabbath] ) 가
나왔습니다. 샤바트의 일차적 의미는 하던 일을 ‘그치다’ 또는 ‘중단
하다’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일곱째 날의 중요성은 그날이
‘일하지 않는 날’이라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노동의 휴식은
창조의 일곱째 날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샤바트’와 함께 살펴보아야 할 말이 누아흐 ( x:Wn ) 입니다. 누아흐는
십계명의 제4계명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쉬신 것을 표
현합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
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
호와가
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이 말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안식을 표현합니다( 수 23:1 ). 사무엘서 역시 이 말을 사
용하여 다윗 시대에 이룩된 안식을 소개합니다( 삼하 7:1 ). 솔로몬 시
대는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로 기억됩니다. 그 시대
백성은 은 정도는 귀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
고 정치적인 안정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런 복된 시대를 표현하
는 말 역시 누아흐에서 나온 말입니다( 왕상 5:4 ).
이런 예시로 누아흐가 나타내는 안식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안식의 상
태는 애굽의 압제가 없는 자유의 상태입니다. 안식의 상태는 광야
생활의 위험이 사라지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주석가 월턴이 설명한 대로 그것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아 안정되고 ( stability ) , 위험 요소들이 없어 안전하
며( security ),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평정의 상태( equilibrium ) 입니다.2) 한마디로 ‘누아흐’가 표현하는 안식의 상태는 “전체
삶을 포괄하는 온전한 행복의 상태”입니다.3) 창조의 일곱째 날을
특징짓는 하나님의 안식 역시 그런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써 지극히 복된 상태가 그날을
2) J. H. Walton, Genesis, NIVAC (Michigan: Zondervan, 2001), 146.
3) F. Stolz, “xwn ,” in E. Jenni./C. Westermann (Hrsg.), Theologisches Handwörterbuch zum Alten Testament Bd. 2 (Gü tersloh: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20046), 46.
나님의 안식 안에서 “전체 삶을 포괄하는 온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립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된 세계에 안정과 안전과
평정을 가져오는 근원적 힘이요 능력이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태
양과 달과 별 등 천체의 한결같은 운행과 산과 들과 강과 바다 등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말미암는 창조 세계의
복된 모습일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학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통치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통치하여 세상
이 평화롭게 안식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라
는 말속에 담긴 뜻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식하
셨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표현합니다. 구약학자 클라인
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의 휴식에 들어가신 것은 창조주가 왕위에
오르신 것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세계와 모든 나라와 백
성의 주로 합당한 자리에 앉으셨다는 의미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추리면,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 세계에 안식
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세계의
안식 사이의 관계는 시편 93편이 노래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시의 1,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
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
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이처럼 이 시는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이 여호와의 다스림( 왕적인 통
치 ) 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통치가 없다면 세상이 안정
적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70인역은 시편 93편을 안
식일 전야에 부르는 노래라고 밝힙니다. 이 역시 창조의 일곱째 날
에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이 사실은 세계가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일곱째 날에도 일하 셨습니다. 하나님이 멈추신 것은 창조의 일입니다. 육 일간 창조의
일이 끝나자 일곱째 날에는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일입니다. 세계가 여호수아 시대의 가
나안 땅처럼, 다윗-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처럼 복된 상태로
유지되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일곱째 날을 지배합니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 날이 아닙니다. 예수도 이와 비슷 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유대인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
는 이유로 예수님을 박해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 ) 라고 응수하셨습니다. 히브
리서 기자는 세계가 성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서 나오는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된다고 가르칩니다
는 날짜 공식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이 날짜 공식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기능을 가집니다. 그것은 하루가 끝나고 다른 새
날이 온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런 날짜 공식이 창조의 일곱째 날
에 대한 기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큽 니다. 그것은 일곱째 날이 끝나지 않고 무한정 지속하는 날이란 사
실을 나타냅니다. 영원히 지속하도록 의도된 날, 그날이 바로 창조
의 일곱째 날이라는 것입니다.4)
사실상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일곱째 날에는 이미 창조의 일이 모 두 끝난 상태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안식하는 일뿐입니다. 다시 말
해, 창조 세계가 안식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영원토록
안식을 누리는 것만 남은 일이라는 것이지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장엄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안식하는 것 외에 더
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4)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따른다. K. A. Mathews, Genesis 1-11:26, NAC 1A (Nashville: B&H, 1996, 『NAC 창세기1』,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8), 181; W. J. Dumbrell, Covenant and Grace: An Old Testament Covenant Theology (London: Paternoster, 2013), 34; D. Kidner, Genesi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OTC (London: The Tyndale Press, 1967), 53; G. von Rad, Das este Buch Mose, ATD 2-4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55), 49; C. F. Keil, Biblischer Commentar
über das Alte Testament, Teil 1: Biblischer Commentar über die Bücher Mose’s, Bd. 1: Genesis und Exodus (Leipzig: Dörffling und Franke, 1878), 28.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전체 삶을 포괄하는
온전한 행복의 상태”가 안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
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끝나지 않는 일곱째 날에 속해 있
으면서도 안식 밖에 있는 우리 모습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이 불행
한 형편의 원인을 인간의 타락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
하였기에 인간은 안식의 영역에서 수고와 고통과 눈물과 죽음이 지 배하는 영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안식은 사라지거
나 파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무 엇으로도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
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안식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3-4장이
이 문제에 답합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안식이 자주 언급됩니다.
‘내 안식’, ‘그의 안식’, ‘저 안식’은 모두 하나님의 안식을 가리킵
니다. 히브리서 4장 4-5절은 이 안식을 창조의 제칠 일과 연결합
니다.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은 끝없이 현존하기 때문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에게 초청 메시지를 이렇게 보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
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
이라(히 4:11)
이 말씀처럼 순종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이 안
식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에덴 밖으로 추방된 아담의 운명이 이에 대한 산 교훈입 니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과
연 우리가 이 일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
어다(히 4:14)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
창세기 2장 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고 거룩
하게 하셨습니다. 무생물인 ‘날’에게 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독특
하지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에게 복을 베푸셨습
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땅을 정복하
고 동물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창 1:28 ). 생육과 번성은 우선
수효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풍요, 평화, 안녕 같은 생
명의 복을 모두 포괄합니다. 신명기에는 복의 내용으로 사회적인
성공, 경제적인 풍요, 안정적인 자연환경, 적에게서 보호 등이 언급 됩니다( 신 28:1-14 ).
이것이 일곱째 날에 대한 하나님의 복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창세기 2장 1-3절을 창세기 1장의 배경에서 읽을 때, 인간에게 주
어진 모든 복이 복의 날인 일곱째 날에 실현되고 구체화하는 것으
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창조의 일곱째 날은 무한
대로 열려 있는 날로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시행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날을 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왕적 통치 안에서 풍요와 평화와 안
녕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또한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때 생의 모든 복이 저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바울은 세상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롬 8:21 ) 을 바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구
약에서 ‘거룩하게 하다’란 표현은 이곳에 처음 나타납니다. 원래 거
룩함은 하나님에게 고유한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이날이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바쳐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거
룩하신 속성이 그날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상반되는 어떤 것도 이날에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날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
님이 거룩하신 것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창조된 세계가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는 뜻의 선포라고 보아야 합니다. 요컨대, 쉼 또는 안식으로 표현되
는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을 비롯한 피조 세계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것이 현재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정리하자면, 창세기 2장 1-3절은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계시
합니다. 안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인간과 만물이 안
식을 누리는 것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2장 우주와 성전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으로써 창조가 완성되었
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 세계를 지배하는 상태가 곧 창
조의 완성이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 세계를 지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창조 세계 역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복을 얻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안식은 창
조 세계에 안식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육 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적 통치자로 나타나십니다. 일곱째 날은 날짜 공식에
의해 닫히지 않고 열려 있는 날입니다. 이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니다( 히 1:3 ).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 또는 주권적인 통치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만물을 붙드시는 하나
님의 주권적인 통치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동물 세계를 다스리는 등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
의 통치가 주는 선물입니다. 피조 세계가 거룩하게 유지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고 이날을 거룩하
게 하신 것은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복을 누리며 거룩
하게
창조된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집니다. 우주는 무엇
을 위해 창조되었을까요? 우주는 만물의 통치자인 하나님이 임재하
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물리적 공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는 하나님 왕이 거하는 왕궁이자 성전입니다.1) 우주가 성전으
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이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것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
먼저, 성막( 성전 ) 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왕으로 임하며 자
1) 참고. Williamson, Sealed with an Oath, 49: “Strictly speaking, the whole creation is the divine temple complex, the garden was part of the inner sanctum.”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
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
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솔로몬 성전에서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 10-11절은 성전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묘사합 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
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
더라 위의 말씀은 성막( 성전 )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임을 분명
히 해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기는 우주 공간도 마찬
가지입니다. 성경은 우주 공간을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시는 장소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5, 11)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시 72:18-19)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5)
이런 말씀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임을 잘 나타
냅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우주는 분명히 타락 이후의 세계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여전히
그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의
창조 세계는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
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창조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바라는 시인의
기도는 타락 이후 변화된 세상 형편을 전제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보든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법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법궤( 언약궤 ) 는 하나님의 왕좌에 딸린 ‘발판’ 또는 ‘발등상’
으로 불립니다.
이에 다윗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
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
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
하였으나(대상 28:2)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
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나아가 하나님은 법궤 ( 언약궤 ) 위에 만들어진 두 그룹 사이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삼상 4:4; 삼하 6:2; 시 80:1; 99:1 ). 하나님
은 법궤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명령을 내리
시는 분으로도 소개됩니다.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
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
왕좌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룹들 사이”로 표현된 법
궤 위의 공간은 하나님의 왕좌며 법궤는 왕이신 하나님의 발판이라
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사야 66장 1절이 중요해집니다. 이곳에서 하
나님의 왕좌와 하나님의 발판은 창조 세계와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
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 구절은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며 땅은 그분의 ‘발판’이라고 밝
힙니다. 하늘이 법궤 위에 만들어진 ‘그룹들 사이’의 공간과 같으며
땅은 법궤와 같은 장소라는 말씀이지요. 이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과 땅을 성전의 법궤와 비교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
확합니다. 하늘과 땅이 지성소의 법궤에 비교되는 공간이며, 온 우
주가 하나님이 임하시는 성소( 성전 ) 와 같은 장소라는 것이 이사야의
관점입니다.
이제 소개해 드리고자 하는 것은 구약에서 성전이 묘사되는 방식
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안식의 장
소로 언급됩니다. 성전은 분명히 하나님의 왕궁입니다. 하나님이 자
기 백성 가운데 왕으로 임하며 그들을 통치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건물이 성전이라는 것이지요. 법궤가 이것을 분명히 해 줍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룹들 사이’로 표현된 법궤 위의 공간은
하나님의 왕좌며 법궤는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이처럼 법궤는 만왕
의 왕이신 하나님이 앉으시는 통치의 보좌에 해당합니다. 성전의
지성소는 바로 이 법궤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왕
인 하나님이 거하며 자기 백성을 통치하시는 신적인 왕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에서 성전은 법궤를 위한 안식의
장소로도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먼저 주목해야 할 본문은 역대상 28장 2절입니다. 한글 성경( 개역
개정판 ) 은 이 구절을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이라고 잘
못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위한 안
식의 집 ( hx'Wnm. tyBe, 베트 메누하 )”이라고 번역해야 옳습니다. 성전은 법
궤를 위한 ‘안식의 집’이란 것이 이 구절의 설명입니다. 시편 132편
8절도 중요합니다. 이 구절은 성전을 가리키는 말로 메누하란 표현
을 사용합니다. 한글 성경( 개역개정판 ) 은 이 단어를 ‘평안한 곳’이라
고 번역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안식의 장소’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32편 8절은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일
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안식의 장소 로 들어가소서.” 시편
132편 14절에 나오는 표현인 ‘영원히 쉴 곳’ 역시 성전을 가리키며
‘영원한 안식의 장소’라고 번역해야 좋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이사야 66장 1절 말씀 역시 같은 내용을 담고 있
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
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을 ‘안식의 사람’( hx'Wnm. vyai , 이쉬 메누하, 대상
22:9; 개역개정, “온순한 사람” ) 이라고 부릅니다. 이 역시 성전이 ‘안식의
집’이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전이 안식의 집이란 사실은 창조 세계가 성전이라는 사실과 어
떤 관련이 있을까요? 앞에서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
신 것은 창조 세계에 안식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나 시편과 이사야는 하나님이 왕으
로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며 그들을 통치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성전을 ‘안식의 집’으로 묘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역대기와 시편은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법궤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우주적인 성전을 건설하고 안식
에 들어가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창세기의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창조 세계 하나님의 안식 법궤의 안식 성전
위의 도표는 창조 세계가 성전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분
명하게 보여 줍니다. 창조 세계는
이는 성전을 안식의 집으로 소개하는 구약의 관점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법궤가 성전에서 안식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안식하신 일의 모형적인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를 완성하고 안식하신 하나님은 성전에서 안식하
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로써 우주와 성소( 성전 ) 사이의 밀접한 관련
성을 확인해 주는 세 번째 요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살펴보아야 할 내용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기사입
니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에 대한 기록이
창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우주적 성전인 하늘과 땅
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출애굽기는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성막과 안식일을 하나로 묶습
니다. 출애굽기의 관점에서 엿새 동안의 창조는 성막 건설에 상응
하고 일곱째 날의 안식은 한 주의 안식일에 대응합니다. 출애굽기
가 안식일 제도의 유래를 창조 기사에서 찾는 것 역시 이런 이유 때 문입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
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출 31:1617 ). 따라서 출애굽기가 보여 주는 성막과 안식일의 연결은 우주 성
전과 하나님의 안식을 연결하는 창조 기사의 재현입니다. 결론적으
로, 성막은 우주적 성전( 창조 세계 ) 의 축소판이자 모형입니다.
출애굽기에는 창조 세계와 성막의 모형론적 상관관계를 확인해
주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창세기 1-2장에서 육
일간의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보여 주는 시간 구조( 6+1 ) 입
니다. 이 시간 구조는 성막 건설 기사가 도입되는 출애굽기 24장
12-18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그곳에는 모세가 하나님에게 성막
건설에 대한 말씀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오른 일이 소개됩니다. 지
금 시내산 정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덮여 있습
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구름으로 들어가기
까지 육 일을 기다립니다. 모세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곳의 시간 구조( 6+1 ) 는 창조 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렵지 않습니다. 출애굽기가 염두에 둔 것은
창조 기사에 나오는 육 일간의 창조와 일곱째 날의 안식입니다. 모
세가 시내산 정상에서 성막 건설에 대한 지시를 받기까지 육 일간
기다려야 했던 것은 우주적인 성전이 창조되기까지 육 일의 시간이
걸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출애굽기의 성막 건설 기사가 유사
한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학자 바인펠트 ( M. Weinfeld ) 의 관찰에 따르면, 창세기 1장 1절-2장 3절과 출애굽기
39장 1절-40장 33절이 모두 하나님이 명하신 일의 만족스러운 완
성, 검사와 승인, 복되게 함과 거룩하게 함을 포함합니다. 무엇보다
도 두 본문에 동일( 유사 ) 한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유사성은 원문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나지만 한글 성경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기에 소개해 봅니다. 비교할 본문은 창세기 1장
31절과 출애굽기 39장 43절, 창세기 2장 1절과 출애굽기 39장
32절, 창세기 2장 2절과 출애굽기 40장 33절, 창세기 2장 3절과 출
애굽기 39장 43절, 창세기 2장 3절과 출애굽기 40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치되(출 39:32a)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창
2:2a)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출 40:33b)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창 2:3a)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3b)
하나님이……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a)
그것과 그 모든 기구를 거룩하게 하라(출 40:9b) 이 비교 외에도 창조와 성막 건설의 관련성을 지시하는 요소들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성막 건설의 종결부에 연이어 반복되는 “여호
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 hv,mo ta, hw"hy> hw"ci rv,a]K;, 카아
셰르 치와 아도나이 에트 모셰 ) 라는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40장 17-33절에
서 이 표현은 일곱 차례 반복됩니다. 이는 창조 기사에서 여섯 차례
반복되는 표현 “그대로 되니라”( !ke-yhiy>w:, 와예히-켄 ) 와 구조적으로 연
관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그대로 되니라”라는 하
나님의 명령에 따라 창조가 일어났음을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합
니다. 창세기 1장 3절의 표현 “빛이 있었고”( rwOa-yhiy>w:, 와예히-오르 ) 역
시 같은 기능을 합니다. 이처럼 창세기 1장에도 출애굽기 40장과 같
이 일곱 차례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 창조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