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목차┃
1장 왜 신학이 중요한가
2장 하나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론
3장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4장 성경은 무엇인가
계시: 성경의 교리
5장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론: 인간에 대한 교리
6장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죄론: 죄에 대한 교리
7장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1부)
기독론, 속죄의 교리, 칭의의 교리
8장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2부) 139
성령론: 성령에 대한 교리
9장 우리는 어디에 속했는가 159
교회론: 교회에 대한 교리
10장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 180
종말론: 마지막 일에 대한 교리
결론 새로운 시각 199
│저자 소개 203
│감사의 말 205
│미주 207
한 세대가 잊은 것
이 책은 한 세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잊어버린 지상 명령 일부를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가서 제자 삼
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명령을 전도의 범
주에 넣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 전도지를
들고 또는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 죄의 간격을 손으로 그린 도
표나 그 간격을 메울 십자가로 무장하고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나
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기쁨으로 회심하고 기쁨으로 세례받는 모습
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전도자들이 다음 마을로 이동해 예루살렘
에서 유대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지상 명령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주로 전도에 대한 부름
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상 명령이 요구하는 바의 핵심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
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강조 표시
추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개종자를 만들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제
자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그리고 이 지상 명령에 명시된 바를 따
른다면 그 부르심은 우리가 개종자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칠 것을 요구한다. 당연히 우리에겐 사람들을 개종할 힘이
없다. 하지만 제자 삼는 일은 어떤가? 예수님에 따르면, 우리는 우
리에게 물려주신 좋은 유산을 전수함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 명령은 처음 듣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시 145:4 ) 라는 다윗의 주장과 매우 비슷하
게 들린다. 또한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권고와도 매우 흡사하게
들린다.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차지할 땅에 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
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
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
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
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1-2, 6-9, 강조 표시 추가).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다. 신명기 6장에 나오는 지상 명령에 따르
면,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덜 성숙한 사람을 가르치고 신앙의 핵심
신념을 훈련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제자도는 제자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기술이자 훈련이며, 모든 가치 있는 기술이 그렇듯 노력
과 헌신을 요구한다.
회심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반면에 제자 양육은 평생에 걸친 작업
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고대의 신앙을 전수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을까?
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잘하지 못하고 있다. 2022년에 라이프웨이
리서치( Lifeway Research ) 와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Ligonier Ministries ) 는 협력해 교회의 신학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두 기관은 기
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를 대상으로 누가 기독교인이고 누가 기
독교인이 아닌지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신념인 기본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했다. 비기독교인의 결과는 예상대로 암울했지
만,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결
과다. 조사 결과 중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통해 배우시고 상황에 따라 변하
신다: 복음주의자의 48%가 동의
•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사람은 무죄로 태어난다: 복음주의자
의 65%가 동의
• 하나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으신다: 복음주의자의 56%가 동의
•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 복음주의
자의 43%가 동의( 2020년의 30%에서 증가 ) 1)
잘 생각해 보라. 엄청난 수의 기독교인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
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믿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추세를
보면 이런 지식 격차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고 있다. 한 세대
가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것을 잘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개
종자는 만들었지만, 제자는 만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제자가 학습자라면 제자는 스승이다.
하지만 배운 적이 없는 것을 우리는 가르치지 못한다. 우리에게 전
수되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자
신을 먼저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우리 신앙
의 기본 신념을 가르치려는 열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다
른 각도에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단순히 자기가 전도자나
멘토라든지 또는 신앙 체계 안에 평범하게 참여하는 사람이라고 생
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신학자로 보아야 한다.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J. T.의 이야기
나는 신학대학원에서 처음 들었던 신학 수업을 절대 잊지 못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정말 많이 떨리고 긴장했던 것 같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을 뿐더러( 학사 경고 상태로 대학에 입학했다 ), 전혀
모르는 새로운 학문 분야에 뛰어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교회
에서 자라지 않았으므로 성경, 신학, 교회사 같은 것은 엄청나게 믿
음이 깊은 기독교인들이나 배우는 것처럼 보였다. 오해하지는 말라.
나는 분명 성장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곳에 갔지만, 여전히 내가 그
장소에 정말 속했는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나에게 신학은 그저 오
래된 책, 많은 각주, 찾아보아야 하는 단어들처럼 보였다.
첫 수업에 앉자마자 온갖 종류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가? 수업 내용이 나에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이 문을 나설 때 창피한 모습으로 나가진 않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분야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야 할까? 모든 질
문의 중심에 있던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여기가 나에게 맞는 장소
일까?
나는 너무 어색했다. 강의실에는 약 100명의 학생이 흥분된 목소
리로 떠들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모두 자신감이 넘치고, 열 의로 가득하며, 준비되어 있고, 설레는 표정이었다. 나는 강의실 맨
뒤편에 앉아 있었는데 내 부족함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혹시 하
나님은 내가 단순한 신앙만 갖고 신학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길 원하
시는 게 아닐까? 베드로와 요한도 많이 배우지 못한 평범한 제자였
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알았다 ( 행 4:13 ).
나는 내 모습이 그래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배우지 못하고, 평범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습 말이다.
바로 그때 교수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한때 교실을 가득 채웠던 웅성거림이 금세 조용해졌다. 교수님은
뛰어난 학벌에 걸맞은 무게감 있는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가족
사진을 보여 주며 자신을 소개하고 자신의 관심사와 취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곧 강의 계획서를 읽기 시작했고 교수님은 다
양한 글쓰기 과제, 읽을 책, 그룹 프로젝트, 그리고 우리에게 기대하
는 바를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도저히 할 수 없
겠다고 생각했다. 강의 계획서가 충격적인 것도 문제였지만, 주제가
바로 하나님인 그 강의 계획서에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시선
을 받으며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대신 그냥 수업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
강의 계획서 검토를 마친 후 교수님은 파란색 마커를 들고 화이
트보드로 걸어갔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천천히 신학이라는 한 단어 를 썼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학생들에게 그 단어의 정의를 물어보
았다. 몇몇 용감한 학생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한 학생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학생은 “기독교의 역사”라고
답했다. 또 어떤 학생은 “진리에 대한 학문”이라고 답했다.
여러 번의 시도 후, 교수님은 신학 ( theology ) 이란 단어 중간을 가로
지르는 선을 그었다. 이렇게 말이다. 신( theo ) | 학( logy ). 그리고 말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했다.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말입니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정의처럼 보였다. 신학이 그저 하나님에 대한 말이라고요? 그 이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교수님은 그리스어로
하나님은 theos 이고 말은 logos 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theos+logos=theology. 즉,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말이라는 것이
었다.
그리고서 교수님은 우리에게 물었다. “누가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합니까?” 조금 전처럼 몇몇 용감한 학생이 대답하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목사들과 사역 지도자들입니다.” 다른 학생이 말 했다. “교수들과 학자들입니다.” 교수님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
였지만, 이어서 말했다, “또 누가 있을까요?”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목사들, 사역 지도자들, 교수들, 전문 학
자들 외에 누가 신학을 합니까? 교수님이 다음에 하신 말씀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모든 사람입 니다.”
모든 사람이라고요? 어떻게 모든 사람이 신학자가 될 수 있죠?
나는 내가 신학자가 아니란 걸 알아요. 내 아내가 신학자가 아니란 것도 알고, 내 부모님도 신학자가 아니란 걸 알아요. 어떻게 모든 사
람이 신학자일 수 있죠? 내가 이미 신학자라면 왜 신학교에 와야 하
죠? 나는 이미 신학자여서가 아니라 신학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왔는데요.
교수님은 계속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한다고 설명
했다. 물론 목사들, 사역 지도자들, 교수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만, 엄마들, 아빠들, 변호사들, 의료 전문가들, 힌두교도들, 불교도
들, 심지어 불가지론자들과 무신론자들도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므로 모든 사람이 신학
자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신학자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우리
가 ‘좋은 신학자인지 나쁜 신학자인지’라는 것이다.
그 후 교수님은 모든 학생에게 일어서서 자기 말을 따라 하라고
했다. “제 이름은 이고, 저는 신학자입니다.”
처음 따라 했을 때 몇몇 학생이 킥킥거렸다. 우리 대부분은 확실
히 자신감이 부족했다.
교수님은 다시 말했다. “좀 더 자신감 있게 다시 해 봅시다. 저를
따라 하세요. ‘제 이름은 이고, 저는 신학자입니다.’”
두 번째 시도했을 때는 우리는 모두 좀 더 자연스럽게 느꼈다. 나
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 “제 이름은 J. T. 잉글리시이고, 저는 신학자
입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 직
업이 무엇이든, 내가 얼마나 나이가 적거나 많든, 내 가족 상황이나
소득 수준 또는 지리적 위치가 어떻든 간에, 나는 항상 신학자일 것 이다.
젠의 이야기 나는 영문학 학위가 있다. 그게 전부다. 신학대학을 나오지 않았
고, 신학대학원을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언어를 매우 좋아하므로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영문학 학위를 받았다. 학창 시절 내내 철자 대회와 수필 대회에서
우승했고, 프로 스포츠맨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문장을 도표로 그릴
수 있다. 안타깝게도, ESPN에서 그걸 보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문법학자다. 옥스퍼드 콤마에 대해서나, ‘lay’와 ‘lie’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열띤 견해까지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
람이 문법학자라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반드시 좋은 문법학자
는 아니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이 문법 규칙을 따르고 있지만, 우리
중 일부는 잘못된 규칙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lay’와 ‘lie’
동사의 올바른 용법을 모른다면, 당신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엄격히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내 문법적 독단주의( dogmatism ) 속에서도, 이런 규칙들을
지키지 않을 때 큰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신학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신학자이며, 우
리가 더 신학을 잘할수록 이 세상은 본래 의도된 대로 더 잘 기능 한다.
J. T.가 자신이 신학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렇게 활동할 능력을
키우는 동안, 나는 지역 교회에서 잘못된 내용을 가르치지 않으려 애쓰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어디에서 도움을 구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처음에 나는 주일학교에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
회에서 자란 나는 7학년 때 받았던 교육을 그대로 따르려 했다. 우
리는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좋은 교
재였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성경을 다루는 모든 내용이 좋은 내
용이라는 ( 잘못된 ) 전제를 바탕으로 나는 계속 나아갔다.
다음으로 나는 뜻밖에 장년 여성 성경 공부반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29세였고, 반의 모든 사람보다 젊었으며, 이 성경 공부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었다. 훈련도 받지 않았고 다른 학생들보다 인
생 경험도 훨씬 적었다. 그들은 이혼했거나, 배우자를 잃었거나, 불
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불임, 자녀와 배우자 상실, 육
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죄와 싸우고 있었고, 내 삶은 그들의 삶에 비해 지
극히 단순해 보였다. 훈련도 받지 않고 그럴듯한 전투 흉터도 없는
내가 그들에게 가벼워 보이거나 거짓되지 않은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는 1년 성경( One-Year Bible ) 을 힘들게 시작했지만 매주 읽을
때마다 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질문이 생겼다. 남편 제프는
출퇴근길에 R. C. 스프로울의 ‘당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라’( Renewing
Your Mind ) 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다. 스프로울 박사는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언급했고, 제프는 내 서른 번째 생일
선물로 그 책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넷째를 임신하고 네 살 아래의 세 아
이를 돌보면서 나는 낮잠 시간과 저녁 시간에 교리를 탐독했다. 아
이들이 자고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이라면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갑
자기 나는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개념들에 대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범주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분명, 이 범주들은 새로운 게 아니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었다. 단지 내게 새로웠을 뿐이다. 나는 벌코프를 읽었고, R. C. 스
프로울을 읽기 시작했다. 다른 저자들을 찾기 위해 각주를 파헤쳤
고, 전에는 존재하는지 몰랐던 세계가 내게 열렸다.
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 수업은 그 주에 우리가 읽던 성경 구절
들을 다양한 교리와 연결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내가 더
제대로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교사로서의 자신감이 커졌다. 이전
에는 성경 교사의 역할을 ‘새로운 배움의 내용을 허공에서 만들어
내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래되고 검증을 거친 가르침을
새로운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 세기에
걸쳐 다른 이들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에 대한 신뢰할 만 한 틀을 만들어 왔고, 그 틀을 나도 사용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내
가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을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벌코프? 그렇다. 스프로울? 당연히 그렇다. 각주에서 발견 한 모든 학자들? 신학의 거인들이다. 반면 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
는 지역 교회의 한구석에서, 아무도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
들을 가르치는, 공식적인 훈련도 받지 않았고 앞으로도 받을 계획 이 없는 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공식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다. 하
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신학자다. 그리고 당신도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
님에 대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말들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하고, 다
른 이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며, 그 말들이 묘사하는 분께 영광을 돌
리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신학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
은 의도를 가지고,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
님을 바르게 나타내는 말을 생각하고 말하도록 창조하셨다. 신학적
사고와 담론을 위해 만드셨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렇다. 나는 여
전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성된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당신도 같은 일을 하도록 초대한다. 당신은 식탁에서
든, 주일학교 교실에서든, 카페나 직장에서 또는 소셜 미디어 플랫
폼에서 하나님에 대한 말을 나눌 때도 이 일을 유창하게 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 하실 것
이다.
당신의 이야기
예수님은 지상 대명령을 통해 제자들에게 제자 삼으라고 명령하
신다. 제자란 누구일까? 기독교 신학자가 되기 위해 배우는 신학
자다. 하나님에 대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말을
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다.
어쩌면 당신은 의심을 많이 품고 이 책을 집어 들었을 수 있다. 순
수한 호기심에서 집어 들었을 수도 있다. 또는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느껴 절박한 마음으로 집어 들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당신을 돕고 싶다.
이 책은 두 가지 주요 목표가 있다. 첫째는 당신이 자신과 다른 모
든 사람을 신학자로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선포하는 당신의 역할을 인식하길 바란다. 하나
님이 누구신지에 따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기독교적 과업에 초대받
은 사람으로 당신이 자신을 이해하길 바란다. 이것을 이해할 때 당
신은 제자 삼으라는 지상 대명령의 부르심에 당신의 자리매김을 할
준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 번째 목표는 신학 공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지식과 사랑이 자라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풍요로우
심, 영광은 고갈되지 않는 우물이다. 신학은 우리를 그런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기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모든 삶이 궁극적으로 신학
에 대한 것이라고 당신을 확신시키고 싶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무
엇을 하시는지와 관련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게 전하
고 싶은 우리의 열망과 노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가 아는 이 하나님이 너무 놀랍기에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가르 친다.
이제 눈치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두 명이다. 함께 신학 하는 법
을 배운 두 친구가 공동 저술했다. 우리는 각자 배우고, 서로에게서
배웠으며, 때와 주제에 따라 서로 동의하거나 의견을 달리했다. 신
학이 작동해야 하는 방식이 바로 그렇다. 우리 둘 다 자신의 목소리
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며, 그럴 때는 분명히 밝히겠다. 그 외에는 이
책을 한목소리로 함께 썼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상황과 전 세계
의 기독교인들이 신학자로서의 정체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사명을 함께 갖고 있기 때
문이다. 우리는 지역 교회와 초교파 단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 세대의 믿는 자들이 당황하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 좋은 유산을
전달할 수 있도록 양성 사역을 구축하고 확산시켰다.2)
이 책은 그런 작업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기본적인 신학을 가르
치지만,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평생의 묵상, 축하, 예배, 그리고 섬김으로의 초대다. 마지막 페이지
를 읽은 후에도 신학이라는 즐거운 과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당신에게 평생의 작업이 되어야 하며, 그 가
운데 당신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대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기여자
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이제 펜을 들고 빈칸을 채워 보라.
“내 이름은 이고 나는 신학자다.”
이제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라. 기분이 어떤가? 이 문장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해당하는 진술이었다. 이 말이 그리
스도의 제자가 되는 방식에서 당신에게 참된 진술이 되게 하자. 나
사렛 예수를 따라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는 신학자의 모습
이 되게 하자.
책 한 권이 당신을 신학자로 만들 수는 없다. 당신은 이미 신학자
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신학자가 되라.
다음 세대의 제자가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내일의
교회는 오늘 선하고 충성되며 겸손한 신학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
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 대화에 참여한 것을 환영한다.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을 환영 한다.
왜 신학이 중요한가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말이다. 당신은 신학자다. 좋은 신학자가 되라.
몇 가지 기본적 정의와 해야 할 과제를 제시했지만, 아직 신학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냥 성경에만
충실하면 안 되는 걸까? 성경과 신학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일까?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더하고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있다면 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두
핵심 인물의 예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은 아담과 예수님이다. 창
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
시고 바다와 하늘, 땅을 채우시는 장면을 본다. 창조가 하나님이 자
기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한 방법임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하나
님이 만드신 것들, 예를 들면 산, 일몰, 벌새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 롬 1장 ).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주목할 만한 일을 하신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세
상에 질서를 세우는 일을 이어받아 계속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
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바로 2장에서 우리는 아담이 정확히 그렇게 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을 아담에게 데려와 이름 짓게 하신다. 말 하자면 분류하게 하신 것이다.
아담은 “새로운 종 하마가 생기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
창조 작업은 끝났다. 오히려 아담은 “여기 하마가 있고, 여기에는 물소가 있다”라고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에 추가하지 않 는다. 아담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에 체계적인 언어를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질서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 그리 고 하나님이 주신 다스리라는 명령을 이행한다.
당신도 비슷한 일을 한다. 아마 당신은 회의와 다른 약속들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달력을 사용할 것이다. 옷장의 양말과 티셔츠 또는
식료품 수납장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정리함을 구매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당신을 매우 즐겁게 해 주는 라벨기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일을 정리하기 위해 어떤 분류 시스템을 생각해 냈을 수
도 있다. 이런 모든 정리 방식은 정리하는 것에 무언가를 더하지 않
는다. 단지 그 항목들을 접근 가능하고 유용하게 해 줄 뿐이다. 작은
방식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대로 질서를 세워 가는 것
이다.
분류법, 정리함, 파일 정리 시스템, 달력과 마찬가지로 신학은 하
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개념들을 정리하는 수단이다. 신 학은 그 개념들에 무언가를 더하지 않는다. 단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 줄 뿐이다. 신학은
개념을 범주로 분류하고, 유용한 라벨을 제공하며, 높은 수준의 관
점에서 관계와 사건을 정리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우리가 아는 한 유명한 사건에서 우리는
신학 정리 작업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루살렘에서 막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애
쓰는 두 제자가 나온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인사하시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물으신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 일어난 혼란스러
운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누가는 예수님이 이렇게 응답하셨다고 기 록한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
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
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대한 것을 자
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혼란스러워하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신학적 교훈을 주신다. 두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약 11km를 걸으시며 제자들에게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쳐 주신다. 제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높은 수준의 관점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던 계시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셨다. 아담이 자연 계
시에 질서를 부여한 것처럼, 예수님은 구약 기자들의 특별 계시에
질서를 부여하신다.
신학을 할 때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하신 것에 더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질서 있게 하는 일이다. 신학은 하나님이 특
별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정리하고,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다. 왜 신학은 중요한가
신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지적 수준뿐 아니라 감정
적·실천적 수준에서도 우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신학에 대한 가
장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신학이 교실에서 배우거나 책을 통해 배 우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신학을 배우는 게
아니라 “신학을 행한다.” 내 안의 문법학자적 기질은 이 표현을 좋
아하지 않지만, 이 표현이 흔히 사용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는 신
학이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더 나은 범주를 발전시킨 결과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행동하게 된다.
신학은 오직 또는 주로 교실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신학은 일상
생활에서, 매일 매순간 이루어진다. 우리는 설교하고, 기도하고, 노
래할 때 신학을 행하지만, 일터에 갈 때, 휴가 갈 때, 노부모를 돌볼
때, 죄와 싸울 때, 자녀를 키울 때,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애도할
때, 돈을 쓸 때, 그리고 나이 들어갈 때도 신학을 행한다. 당신은 신
학자이며, 항상 신학을 행하고 있다.
“신학은 학자들을 위한 것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학을 행하는 것은 영향력 있는 노력
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신학을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을 회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한 가지 흔한 장애물은 신학이 지나
치게 학문적이라는 인식이다. 솔직히 말해 신학이 때로는 그럴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접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이 우리
중 일부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수준에서 신학을 한다고 해서 우리
가 모두 신학을 완전히 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중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상
생활을 잘 수행하기 위해 기초적 이해를 넘어선 수학을 배우고 도
움을 얻을 수 있다. 신학적 개념은 어린이, 부모, 젊은 전문가, 박사
학위나 고등학교 졸업증을 받은 사람 등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하며 또 그래야 한다.
“신학은 비실용적이다”
신학을 하는 것이 비실용적이라는 인식은 두 번째 장애물이다. 모
든 사람은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우리는 누구나 가장 중요한
것에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하지 않
으며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대
의, 정치적 신념, 심지어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대해 얼마나 열정적
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두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길 원하고, 우리 삶이 의미 있기를 원한다. 만약
신학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말이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존재,
즉 궁극적인 실재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사실 그보다
더 실용적인 것이 있을까? 만약 신학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이해하
고 우리 삶을 그 이해에 맞추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그보다 더 중요 한 것이 있을까? 잘 살아가는 삶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으며, 신
학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신학은 무정하다”
세 번째 장애물은 신학이 감정이 아닌 사고를 강조한다는 인식 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학은 머리에
서 시작해 가슴으로 이동한다. 신학을 하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위 한 생각의 갱신 작업이다( 롬 12:2 ). 기독교는 단지 생각의 종교가 아 니다. 차갑고, 죽어 있고, 먼지 쌓인 지적 운동이 아니다. 또한 단지
가슴의 종교도 아니다. 모든 감정과 열정만 있고, 이성적 믿음은 없
는 그런 게 아니다.
신학은 지성적 삶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이 알지 못하
는 것을 가슴은 사랑할 수 없다”1)는 사실을 인정한다. 신학이 단지
지적 운동에 그친다면 이는 실패다. 살아 있는 지성이 살아 있는 가
슴을 자극할 때 신학은 제대로 기능한다. 신학은 신앙생활에서 이
성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성에 어휘와 비전을 제공한다. 하나님
에 대한 깊은 생각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송영( 예배 ) 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학은 전혀 신학이 아니라 헛
된 지식의 추구일 뿐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배우는 사람의 동기
와 배운 것을 적용하는 성령의 역사다.
그렇다면 신학은 학문적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
든 제자가 신학에 접근할 수 있게 의도하셨다. 신학은 비실용적인
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이 세상
에서 가장 실용적인 일이다. 신학에는 감정이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참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이어 진다.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말이다.
누가 신학을 하는가? 모든 사람이 한다.
신학은 무엇을 하는가? 성경의 진리를 체계화한다.
왜 신학이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신학은 잘 살아가는 삶의 일부다. 신학은 우리가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삶의 모든 부분을 잘 살도록 도와준다.
신학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까? 신학은 성경적으로, 기도하는 마음
으로, 예배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해
야 한다.
첫째,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의 목적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반영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반영하
지 않는 신학은 더는 기독교 신학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성
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누구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중심으로 말과 생각, 예배를 구체 화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성경을 졸업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성경을 넘어서 가지 않는다. 결코 성경에 지루해하지 않는다.
성경은 신학의 생명력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 기 위해 성경으로 계속 돌아간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이 우리의 일차적 권위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에
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신학은 성경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신학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난다. 신학의 임무는 성령의 능
력으로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우리의 마음 과 생각을 일깨워 달라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구할 때 가장 잘 이
루어진다. 기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올바로 보기
시작한다.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집중할 기회를 얻게 되
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신학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의 어두워진 마음과
생각을 밝혀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한다. 기도 없는 신학은 아마 교만한 지성주의일 것이다. 하나님
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신학적 성장의 문제에 있어 우리가
구하지 않아서 갖지 못했다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학은 또한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보다 신학을 더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다. 신학은 단순히 지
루한 정보가 아니라 그 본질상 관계적이다. 현재의 기독교 하위문
화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지식이 그저 우리를 교만하게 한다고 여
긴다. 신앙의 지적 표현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따르는 위험한 일
이 될 것이라 여긴다. 간단히 말해, 지나치게 많은 사고( thinking ) 가
예배를 죽일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신학과 예배는 대립적이지
않다. 신학과 예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학은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학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예배하기 위함이고, 하나님을 예배함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더 큰 지식을 갖기 위함이다. 교리와 송영은 서로에게 연료를
공급한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
배로 이어져야 한다.
신학은 또한 겸손의 작업이 되어야 한다. 신학자들은 절대 자랑하
당신은 신학자입니다
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제자는 배우는 사람이다. 당신이 무엇을 배
웠든, 그 과정에서 겸손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배울 가치가 있는 모
든 것은 숙달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학을 하는 것
은 단순히 기술을 배우는 일 그 이상이다. 우리는 겸손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으
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
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 주
시는 것은 은혜의 행위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겸손 안에서 성장하는 일이다. 신학에
는 교만할 여지가 없다. 교만한 신학자라는 표현은 모순된 표현
이다. 모든 신학의 특징은 성령이 주도하시는 겸손함이 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의 신학이 당신을 교만으로 이끈다면 당신의 신학
을 버리고 더 나은 신학을 얻으라. 만약 당신의 신학이 여러분을 더 깊은 겸손으로 이끈다면 계속 전진하라.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든
신학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신학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
동체란 우리의 현대 공동체와 역사적 교회를 모두 의미한다. 하나
님은 이유가 있어 당신에게 환경, 공동체, 관계를 주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관계 속에서 신학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계신다. 배우자, 형
제자매, 부모와 자녀, 이웃, 친구들이 함께 신학의 과제에 참여하도 록 부르셨다.
지역 교회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가까운 환경에 있는 다른 사
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고, 그들도 우리에게 배울 수
있다. 고독한 신학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신학을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하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를 증언하게
된다. 우리 중 누구도 개인으로서 신학적 과제를 수행하기에 충분
하지는 않지만, 함께 모여 신학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수
있다.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과 민족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배운다. 우리는 서로 배움으로써 서로 돕는다.
세계 교회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매우 다른 문화적 환경에 있
는 동시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다른 삶의 경험
은 우리가 성경을 보는 다른 관점과 렌즈를 제공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아름다운 복음의 다이아몬드를 보고 있지만, 세계 각지의 다
른 배경을 가진 형제자매들은 다이아몬드의 다른 면을 더 선명하게
본다. 전 세계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부터 겸손히 배우는 것
이 우리에게 유익하다.
역사적 교회의 맥락에서 볼 때 매우 다른 역사적·문화적 환경에
살았던 선배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성령은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를 가르치고, 양육하며, 진리로 인도해 오 셨다. 신학은 고대의 친구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학에
참여할 때, 우리는 초대 교회, 중세 교회, 종교개혁 시대부터 오늘날
에 이르는 형제자매들에게서 배울 수 있게 된다. 이전 세기에 살았
던 형제자매들을 우리의 대화에 초대할 때, 우리는 이전 세기에 그
들이 발견했던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 삶으로 초대할 수 있다. 우리
의 신학 안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수 세기 동안의 지혜와 어리석음
이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고대의 친구들과 함께 신학을 할 때, 우리
는 그들의 지혜와 실수에서 배울 수 있다. 역사적 사고방식으로 신 학을 한다고 해서 전통을 성경의 권위와 같은 수준으로 높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교회 역사의 렌즈를 통해 우리는 성경을 잘 이해하
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만약 기독교 서점의 신학 코너를 둘러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전
도서 12장 12절의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다”라는 말씀이
진실임을 알 것이다. 그 책 중에는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책이 많다. 그것은 이 책이 신학 공부 여정의
첫 단계인 입문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자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신학적 고려 사항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겠다. 대신 이 책에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주요 주제들을 다루겠다. 이런 주제들을 우리는 본
질 ( essentials ) 또는 1차 교리 ( first-tier doctrines ) 라고 부른다. 이는 기독
교를 정의하는 신념들로, 기독교를 다른 믿음 체계와 구별하고 정
통과 이단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는 핵심 신념들이다. 만약 당신이 교회의 역사적 신조에 익숙하다면, 이 책이 그와 같은 패턴을 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