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적 포퓰리즘 사고(및 정치)의 대대적인 일반화(및 주장)가 만연한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 글을 쓰면서, 대니얼 허멀은 더 힘든 길을 택한다.
놀라운 인내심, 큰 그림뿐 아니라 자세한 부분에 대한 세심한 관심, 펜의
섬세한 터치를 가지고, 허멀은 주류를 따르지 않던 세대주의 신학이 주류
복음주의와 미국의 종말론적 문화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을 목격한 수 세기
에 걸친 발전 과정을 통해 독자들을 안내한다. 허멀의 많은 노력의 결과로
깨달음뿐 아니라 놀라움과 재미를 주는 매우 유익하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탄생했다.
대런 도처크
노터데임 대학교, 앤드루 타크 대학 역사학 교수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 책꽂이를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는 여러 권으로 이
루어진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의 신학 책과 몇 권의 『남겨진 사람들』 소설 옆에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 놓여 있다. 십대 때 복음주의 신앙으로 회심
하여 세대주의 성경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사람으로서, 나는 20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 보수적 개신교 신앙에 대한 나의 청년 시
절의 집착을 상기했다. 당신이 휴거, 이스라엘, 적그리스도, 성경의 예언서
에 대한 복음주의적 열광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 몰』이 시작점이 될 것이다.
존 피아
메시아 대학교, 역사학 저명 교수 및
『나를 믿으라: 도널드 트럼프로 가는 복음주의적 길』의 저자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은 혼란스러운 주제에 대한 필수 안내서다. 허멀
은 심혈을 기울인 학문과 접근 가능한 문체를 결합하여, 기독교 신학이 어
떻게 미국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뿐 아니라 미국 문화가 기독교 신학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 준다. 전문가와 학생 모두 이 중요한 책에서
유용한 지식을 얻을 것이다.
새뮤얼 골드먼
조지 워싱턴 대학교, 정치학 부교수
탐정소설처럼 읽히는 역사 연구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댄 허
멀의 책은 내가 세대주의 대중문화에서 이미 알고 있는 세부 사항을 밝히
고 참을성 있는 분석과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공백을 메우는, 책장을
넘기기가 기다려질 만큼 재미있는 책이다. 역사가들은 그의 참을성 있는
분석을 좋아할 것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이 책의 스토리텔링이다. 각 장
이 끝날 때마다 나는 다음 내용을 알아야 했다.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은 훌륭한 학술 연구일 뿐 아니라, 세대주의의 쇠퇴가 남긴 간격에 대한 허
멀의 분석은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 교회의 이념적 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
움이 된다.
리처드 미들턴 노스이스턴 신학교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 해석학 교수
대니얼 허멀은 이 땅에 거대한 발자국을 남기고 (거의) 사라진 한 신학적
짐승의 뼈를 파내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세대주의에 대해 생
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세대주의의 신학적 혁신, 성향, 집착, 호기심의 역사
는 뒷마당에 묻힌 해골일지라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다. 허멀의 신중한
설명과 사려 깊은 해석은 복음주의의 현대적 지형을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
에게 하나의 선물이다.
대니얼 실리먼
『복음주의 소설 읽기: 기독교 소설이 문화와 신앙을 형성한 방법』의 저자
이 훌륭하고 독창적인 책에서 대니얼 허멀은 현대 미국 생활에서 가장 영
향력 있는 종교 단체 중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추적한다. 그의 연구는 인상
적이고, 그의 글은 날카로우며, 그의 논증은 우리가 미국 종교사에 대해 알
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변화시킬 것이다. 인상적인 업적이다!
매슈 에이버리 서튼 『배신: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선교사들』의 저자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은 생생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박학다식한
작품
이다. 허멀은 미국에서 세대주의 사상과 그것이 미친 영향의 신학적, 정치 적, 문화적 진화를 조명하면서 거의 2세기에 걸친 종교사를 통해 독자들을
능숙하게 안내한다. 존 넬슨 다비에서 큐어넌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도자, 텍스트, 경향을 탐색하는 이 책은 미국 생활에서 종말론과 세상의 종말이
임박함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하려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필독
서다.
로런 튜렉 트리니티 대학교 역사학 부교수
대니얼 허멀은 현존하는 세대주의 신학의 가장 훌륭하고 포괄적인 역사서
를 저술했다. 인상적인 역사 연구와 신학적 발전에 대한 매우 미묘한 관심
을 결합한 허멀의 저서는 복음주의 정치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지만 그것만
으로는 거의 이해되지 않는 한 운동에 대한 상세하고 매력적으로 작성된
역사적 개관을 제공한다. 이 책은 미국 복음주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
말론의 오랜 역사적 궤적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기사를 넘어서고자 하는 사
람들을 위한 책이다.
대니얼 윌리엄스
『하나님 자신의 당파: 기독교 우파의 탄생』의 저자
치밀한 연구와 대담한 합성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업적이다. 댄 허멀 덕분
에 우리는 마침내 이런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가 북미 문화와 정치를 통해
어떻게 이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몰리 워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역사학 부교수
┃목차┃
│머리말 12
│서문 15
서론 20
세대주의를 바르게 나누기 24
역사적 경계 27
마지막 때와 그 밖의 모든 것 32
시공간 안의 세대주의 37
1부 새 전천년설 신봉자, 1830~1900년 43
1장 대양을 건너 45
예언 하우스 파티 48
“교파를 복음화하기” 54
다비의 대중화 58
교리 찬송가 64
2장 미국 선교지 69
미국의 존 넬슨 다비 73
해석의 혁신 79
예표와 실상 86
“어려운 곳” 89
3장 경계주 회심 93
제임스 브룩스와 교회 95
조셉 사이스와 미래 104
더 넓은 해석 공동체 112
4장 숫자와 구조 117
신구 전천년설 119
프레드릭 그랜트와 성경의 구조 126
조셉 사이스와 수비학적 전천년설 133
의미 만들기 137
5장 부흥 141
전천년설 지지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 142
지역적 화해와 초교파주의 149
치료적 전천년설: 내 영혼은 평안해 154
6장 전천년설 복합체 159
사경회 161
성경 학교 168
선교 기관 174
블랙스톤의 『예수께서 오신다』:
2부 세대주의자, 1900~1960년
7장 확산 183
바이올라와
181
10장 분파 245
로스, 포스딕, 매카트니: 교파적 근본주의 248
브라이언, 노리스, 스트래튼: 국가주의적 근본주의 254
필립 모로가 ‘세대주의’라는 용어를 만들다 261
11장 학자적 세대주의 265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연합’의 부상과 분열 267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와 학자적 세대주의의 기원 272
노리스, 라이스, 존스: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들 280
루이스 스페리 체이퍼가 ‘세대주의’를 수용하다 286
12장 거대한
균열 291
핑크, 모로, 앨리스: 언약주의자들 292
파인버그, 펜티코스트, 라이리, 월보드: 세대주의의 대응 301
오켄가, 헨리, 래드: 신복음주의적 융합주의 308
학자적 분파의 강화 316
13장 세대주의 정치 321
윌리엄 벨 라일리: 세대주의적 정치 구축 323
“손에 손을 잡은” 신학과 정치 330
행동하는 문자주의 337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반란 342
3부 대중적 세대주의자, 1960~2020년 349
14장 대중적 세대주의 351
할 린지와 『마지막 때의 위대한 행성 지구』 354
선지자와 이익 361
린지와 스미스: 예수 사람들 368
15장 거대한 파열 375
월보드와 라이리가 학자적 변화를 감독하다 377
조지 엘던 래드와 세대주의가 없는 전천년설 385
근본주의 이후의 세대주의 394
16장 “인본주의의 환난” 399
팀 라헤이와 “인본주의의 환난” 403
“통합점”에 있는 쉐퍼, 팰웰, 로버트슨 410
누구의 대재앙일까 418
17장 포화 상태와 그것의 한계 423
텔레비전 전도자와 전기적 세대주의 425
CCM과 대중적 세대주의의 복합체 430
거대 세대주의와 그것의 한계 436
남침례회 교인과 계속되는 지역적 화해 442
18장 붕괴 449
재건주의자들: 재검토된 종말 451
“주재권 구원 논쟁”: 학자적 세대주의의 더 깊은 균열 458
진보적 세대주의: 기준선 붕괴 466
세대주의를 위한 외로운 깨어 있는 상태 473
19장 여파 살펴보기 479
종교 문화: 대중적 세대주의의 매연 481
대중문화: 천년왕국 전 국가를 즐겁게 하기 487
정치 문화: 인터넷의 저변까지 491
토니 캠폴로: 세대주의의 해체 498
맺음말: 마라나타 503
│감사의 말 509
│용어 해설 512
│참고문헌 에세이 517
│서문│
1990년대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책장에는 그들의 존재만으 로도 무언가를 알려 주는 신학 교과서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책들
의 책등에서 월보드, 라이리, 펜티코스트, 체이퍼와 같은 저자의 이
름이 대문자와 굵은 글씨로 빛이 났다.1) 이 책들은 수천 시간의 노력
의 산물이었고,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집합적으로 이 책들을 읽
었다. 이 신학자 저자들은 종말론, 즉 ‘마지막 때’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또한 기독교 사상의 구석구석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이 책들은 세대주의로 알려진 신학 전통의 최고의
학술적 업적이었다.
이 책장은 세대주의와 평생의 관계를 시작했다. 2010년대 초에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 의 대학원생이었을 때, 나는 자주 메모리얼
도서관의 방대한 장서, 특히 미국 의회 도서관 주제 BT( 교리 신학 ) 로
표시된 서가를 훑어보았다. 내가 펼쳐 본 거의 모든 책에는 페이지
사이에 삽입 종이가 들어 있었다. 3×5인치 종잇장에 “휴거는
없다!!⋯⋯언약은 두 가지뿐이었고, 그리스도는
약이며, 우리는 이 땅에서 환난을 견뎌야 한다”라고 인쇄되어 있
었다. 익명의 저자는 “스코필드와 다른 세대주의자들의 많은 오류”
를 ‘퇴치해야 할 오류’로, 이 경우에는 책에 삽입 종이를 넣는 게
릴라 전술로 맞서 싸워야 할 오류로 식별했다.
셋째 만남은 2018년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인 마블의 최신
출품작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본 것이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타노스라는 악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계획에는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인류의 절반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마법
의 장갑을 조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타노스가 마침내 영화의
벼랑 끝에서 이것에 성공할 때, 상징적인 슈퍼히어로들은 팬들과 비
평가들이 ‘스냅처’( Snapture ) 라고 부른 것의 희생자가 된다. 스냅처는
휴거에 대한 세대주의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용어다.2) 내가 처음으로
‘스냅처’를 보았을 때, 어린 시절의 친숙한 ‘휴거 불안’의 물결이 나
를 잠시 엄습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창작자는 휴거 교리에
관심이 없었지만, 원래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교리의 정제된 이
미지는 그래도 미국 대중문화의 상업적 정점에 도달했다.
넷째 만남은 2022년 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92세의 성경 예언 예측가 팻 로버트슨이 은퇴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을 하도록 “신의 강요를 받고 있으며”
Glen Weldon, “OK, Let’s Talk about the Ending of ‘Avengers: Infinity War,’” NPR, April 30, 2018, https:// www.npr.org/2018/04/30/607093337/ok-lets-talk-about-the-ending-of-avengers-infinity-war.
3) Patricia McKnight, “Retired Evangelist Pat Robertson Says Putin Is Fulfilling Biblical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로버트슨의 논평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이것이 세대주의자들이 믿는 것입니까?” 나는 너무 복잡한 답변을
했다. 로버트슨의 발언 중 일부는 지정학적 행위자로서의 러시아의
중요성, 이스라엘의 중심적인 위치, 아마겟돈 전쟁의 장소와 같은 전
통적인 세대주의적 종말 시나리오와 비슷했다. 이런 맥락의 이야기
는 적어도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가 있다. 동시에 자존심이 강한 세대주의 학자라면 아무도
로버트슨처럼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 대한 자세한 시나리오를 그렇
게 성급하게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는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내 대답이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로버트슨은 서류상으로는 분류될
수 없지만, 실제로 그는 세대주의적 관점에 대한 저명한 대변인이 었다.
종합해 보면, 이 순간들은 현대 미국에서 세대주의의 삶의 일부를
보여 준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신학적 유산의 일부로 세대주의와 함
께 성장했다. 이 그리스도인 중 다수와 다른 많은 미국인은 아마도
종이쪽지나 온라인 메시지 게시판에 나타나는 세대주의에 대한 격
렬한 논쟁의 증거를 접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인은 휴거의 문
화 적응 때문에 휴거에 대해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은 그 가르침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으로 식별되는 모든 사람이 받
아들이는 신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
Prophecy,” Newsweek, February 28, 2022, https://www.newsweek.com/retiredevangelist-pat-robertson-says-putin-fulfilling-biblical-prophecy-1683497.
서문 17
기와 20세기와 21세기에 세대주의가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에 진입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한 다음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당신이 설령 세대주의적 가르침을 접하며 성장하지 않았어도, ‘스
냅처’와 같은 세대주의의 파편을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적
그리스도가 이끄는 다가오는 단일 세계 정부에 대해 추측하는 영화
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들었다면, 종말론적 세대주의를 조금
더 많이 접한 것이다. 당신이 디스토피아( 반이상향 ) 소설이나 프리미
엄 TV를 본 적이 있다면, 휴거와 비슷한 사건의 생존자들을 중심으
로 한 HBO ( 미국의 케이블 방송 채널 ) 드라마 <레프트오버> ( 2014∼
2017 ) 부터, 자신의 넷플릭스 특별 프로그램 <마크 매런: 빌어먹을 종
말 따위>에서 “사람들이 병 로켓처럼 하늘로 솟구친다”4)와 같이 마
치 휴거가 상식인 것처럼 언급하는 코미디언 마크 매런에 이르기까
지 세대주의 주제의 대중적 흔적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세대주의 신학과 그것의 광범위한 유산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당신이 성경의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서 성경의
‘평이한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세대주의가 깊이 영
향을 미친 논쟁을 접했다. 당신이 성경 예언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
스라엘 국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났다
면, 당신은 세대주의 신학이 영향을 준 지정학적 문제 중 하나를
4) Marc Maron, “End Times Fun (2020)—Full Transcript,” ScrapsfromtheLoft, March 12, 2020, https://scrapsfromtheloft.com/comedy/marc-maron-end-times-funtranscript/.
서론
‘세대주의’라는 용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생소하다. 이
용어는 자신이 1927년에 세대주의로 분류한 휴거와 기타 신학적 개
념의 가르침을 혐오했던 근본주의 그리스도인 필립 모로가 만든 것
이다. 모로가 경멸하는 마음으로 이 용어를 만든 것은 세대주의가
생긴 이래 세대주의가 역동적으로 존재해 왔음을 드러낸다. 세대주
의는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긴장으로 말미암아 지울
수 없는 형태로 형성된 신학이다. 이런 투쟁은 현대 복음주의에서
큰 역할을 해 왔다.
1903년에 44세의 사회비평가이자 변호사인 모로가 뉴욕시의 한
기독교 선교 연합 교회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했을 때, 그는 비교
적 새로운 기독교 종파에 가입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초기 시절
에 그는 하나님 나라(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시작하실 것으로 예고된 사회 질
서 ) 는 전적으로 미래에 놓여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
에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그 공동체의 견해( 후에 세대주의의
일부가 된 것 ) 를 받아들였다. 다음 페이지들에서 ‘새 전천년설’이라고
불리는 이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청했다. 모로는 처음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 견해 및 하나님의 신성한 시
험과 인류의 반복되는 실패로 구분되는 일련의 구별되는 시대 또는
세대를 묘사한 이 견해의 더 깊은 역사 철학에 동의했다. 모로와 동
료 새 전천년설 신봉자들에게 히브리 선지자들과 신약 성경 저자들
이 예언한 하나님 나라의 세대는 전적으로 미래에 놓여 있었다. 하
나님의 목적에 대한 ‘세대주의적 진리’는 세상에 대한 모로의 견해
를 분열시키기는커녕, 그의 신앙을 싹트게 했다. 그가 1910년에 성
경을 설명하면서, “성경은 ‘불완전하더라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구
조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작품을 특징
짓는 설계의 지혜와 실행의 기술이 똑같이 완전함을 보여 준다.”1)
그러나 모로가 본 모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대주의적
진리에 매료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18년에 이르러 모로는 세대
주의의 실패에 집착하게 되어 가고 있었고, 이 과정은 그가 ‘세대주
의적 진리’를 공언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
는 신흥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과 점점 더 동질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일어났다. 새 전천년설의 가르침의 깊은 결함을 확인한 모로는 이 주
제에 대한 수많은 글을 발표하여, 지난 15년간 대중에게 알려진 자
신의 신학과 사회 논평을 실질적으로 뒤집었다. 모로는 1918년에 출
간된 그의 저서 중 하나에서 “이 시대를 위한
1) Philip Mauro, Man’sDay, 2nd ed. (New York: Gospel Publishing House, 1910), 7.
2) Philip Mauro, After This, or the Church, the Kingdom, and the Glory (Chicago: Revell, 1918), 9.
“천국은 전적으로 이 현시대에 속한다”라고 설명했다.3) 비록 기독교
신학의 먼 구석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천국의 의미와 천국의 함의는
모로의 마음속에 크게 떠올랐고 곧 근본주의 운동의 주목을 받게 되
었다.
1차 세계대전의 열기 속에서, 1917년에 신경 쇠약의 고통 속에서, 그리고 1918년에 아내의 죽음 이후, 모로는 천국에 대한 새로운 이
해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세대주의적 진리’를 전면적으로 거부
했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자신의 오래된 견해를 비판하는 책을
8권 이상 출간했다. 그는 자신의 반전 후에 “체계 자체의 불일치와
자기모순, 무엇보다도 세대주의의 주요 입장을 하나님의 말씀의 평
이한 진술과 조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명백해서 나는 세대주의
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4)라고 설명했다. 그는 구체적인 “틀린 가
정”과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썼지만, 그는 또한 광범위한 함의를
지닌 서로 연결된 세대주의적 개념들을 인식했다.5) 그 체계는 부분
들의 합 이상이었다.
모로가 세대주의( 그가 자신의 폐기한 견해들의 묶음에 붙인 이름 ) 를 그가
제시할 수 있는 일관된 지적 프로젝트로 보았다가 그것을 반대한 일
은 아마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1927년이 되어
서야 ‘세대주의’라는
3) Philip Mauro, The Kingdom of Heaven (1918; reprint, n.p.: Philip Mauro Library, 2008), 3.
4) Philip Mauro, The Gospel of the Kingdom (1928; reprint, n.p.: Philip Mauro Library, 2008), 3–4.
5) Philip Mauro, The Seventy Weeks and the Great Tribulation (1921; reprint, n.p.: Philip Mauro Library, 2008; rev. ed. 1944), 18; Philip Mauro, God’s Present Kingdom (1919; reprint, n.p.: Philip Mauro Library, 2008), 118.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하게 헌신한
‘세대주의’
또는 ‘미래주의’( 또는 소위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기’ ) 라는 현대적 체계가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심각한 교
리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음을 슬픔과 함께 알게 되었고, 깊은 수치
심을 가지고 인정해야 했다.”6)
모로는 ‘세대주의’라는 용어가 근본주의 분야를 지배할 사상, 제
도, 개인을 포괄하는 신학적 전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명확하게 만
들기를 바랐다. 사실상 그는 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몇 년 동안 세
대주의자들이 “현대주의의 교묘한 형태”의 행상인임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 표현으로 그는 세대주의가 근본주의의 주요 목표와 상 충되는 위험한 신학적 혁신임을 의미했다.7) 세대주의는 “성경에서
파생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성경에 부과된 인간적으로 고안된 체
계다.”8) 그 가르침은 “기괴할 정도로 터무니없고”, “완전히 그릇되
고”, “해로운” 것이었다.9) 세대주의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들은 “부
정직하고”, “비도덕적이며”, “독창적이다.”10)
어떤 면에서 모로의 세대주의의 분류는 단지 현실을 인정한 것일
뿐이다. 그의 일생 동안 한 새로운 하위문화가 출현했는데. 그 문화
는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근본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세대주의’라는
6) Mauro, HowLongtheEnd? (1927), 1.
7) Mauro, GospeloftheKingdom, 4, 9.
8) Mauro, GospeloftheKingdom, 8.
9) Mauro, Gospel of the Kingdom, 4, 74; Philip Mauro, The Hope of Israel (Chicago: Revell, 1929), 15.
10) Mauro, GospeloftheKingdom, 3.
주의의 일관성은 용어를 만든 사람의 원래의 의도가 아니었으나, 흔
히 세대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세
대주의의 분류는 다음 세기 중에 미국 기독교의 큰 부분을 형성하
고, 모로가 상상할 수 있었던 그 어떤 규모 이상으로 ‘현대 세대주의
체계’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했다.
필립 모로의 독자들에게 그는 좋든 나쁘든 변절자였다. 그는 신학
계 안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1929년에 또 한 번의 신경
쇠약을 앓았으며, 그것으로 세대주의의 최고 비판자로서의 그의 지
위는 끝이 났다. 한 우호적인 전기 작가의 말에 따르면, 모로는 “하 나님 나라의 챔피언으로서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는 사탄이 모로 씨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맹공격을 받았다.”11) 모
로의 항의는 뜨겁고 빠르게 타올랐고, 미국에서 가장 탄력 있고 인
기 있는 종교 전통 중 하나,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싸우는 인간
의 나라들을 쓸어버리겠지만, 단지 아직은 아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기다리라고 가르치는 전통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세대주의를 바르게 나누기
지난 200년 동안 세대주의의 부침( 浮沈 ) 은 미국의 종교, 신학, 문
화, 정치, 사회 변화의 매혹적인 태피스트리를 들여다보는
11) Gordon P. Gardiner, “Champion of the Kingdom: The Story of Philip Mauro” (1961; reprint, n.d.: Philip Mauro Library, 2008), 45.
한다. 세대주의 전통의 우여곡절, 경쟁자 및 미국 문화와 세대주의의
관계의 기복은 이 이야기에서 세대주의의 부침의 궤적을 주도하는
원동력이다.
적절하게 자리 잡은 세대주의의 부침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상
태를 설명하는 데 독특한 방식으로 기여한다. 규정하기 매우 어려운
그룹인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공언하는 신학적 헌신이나
그들이 공유하는 사회학적 프로필뿐 아니라, 그것 못지않게 ‘머리’
종교와 ‘가슴’ 종교 사이, 그리고 포퓰리즘적 열망과 기득권층의 열
망 사이에서 그들이 관리하는 긴장에 따라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 체계와 하위문화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세대주의의 역사
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복음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고쳐 놓는다.
첫째, 세대주의는 미국의 복음주의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신학과
문화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최근 몇 년 동안 복음주의를 정의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답을 내놓았으며, 그 답 중
다수는 이론적으로 17세기 경건주의자에서 21세기 기독교 국가주
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정의를 제안했다. 이런 연
대기적, 문화적 폭은 어떤 경우에도 포착하기 어렵고, 특히 복음주의
자들이 주요 경쟁자로 등장하는 정치적 시대에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를 오늘날 우리가 복음주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특정한 사고방식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식으로
만든 제도에 내재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더 식별 가능한( 여
전히 어렵지만 ) 용어인 ‘세대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접근한다. 사실상
세대주의는 근본주의, 오순절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신칼빈주의 등
서론
을 포함하여, 복음주의의 현대적 정의가 포괄하는 경향이 있는 관련
운동 집단과 겹쳤다. 세대주의의 관점에서 이런 종교적 사상과 운동
을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신학적 사상의 수용과 논쟁, 문화적 생산과
소비의 영향, 복음주의의 발달에 영향을 준 대중화와 제도화를 향한
추진력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둘째, 세대주의에 대한 초점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를 괴롭
힌 현대의 양극화 경향을 조명한다. 나는 이런 경향이 세대주의의
‘부침’ 이야기와 깊이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근본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유일한 신학적 전통은 결코 아니었지만, 세대 주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지는 백인 보수 개신
교도의 적어도 4세대에 성경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틀을 제공했다. 세대주의가 얼마나 정확하고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
해서는 내부자와 외부인의 의견이 달랐지만, 세대주의의 가르침은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기준점을 제공했다.
1990년대에 공식적인 신학 체계로서의 세대주의가 몰락하면서,
백인 보수 개신교 공동체는 신학 정체성의 지속적인 위기를 심화시
켰고, 이제 많은 외부 관찰자는 신학이 복음주의와 큰 관련이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세대주의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상황을 규범적인 것으로 다루기보다는, 신학적으로 빈약하지만 정
치적으로 강건한 대중적인 복음주의 문화의 역사적 발전을 드러
낸다. 보수적인 백인 개신교에는 항상 다른 신학적 경쟁자들이 있었
으나, 지금은 살아 있는 신학적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세대주의의
신학적 전통은, 아주 최근까지 ‘복음주의적 사고’를 형성하는 데 중
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적 접근 방식을 통해 이 상황을 진단하면, 세
대주의의 몰락으로 인해 남겨진 공백의 크기와 미래에 대한 잠재적
인 해결책이 모두 드러난다. 나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그 해결책 하
나를 제시하며 이 책을 끝낸다.
세대주의자들은 흔히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독자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신학적 체계를 사용하여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로를 그토록 괴롭혔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세대
주의적 관점은 성경의 세대주의적 구분에서 파생된 하나의 가르침
이었다. 우리는 세대주의를 ‘바르게 나누는’ 더 시급한 역사적 과제
를 위해 그 특정한 주장의 종교적 타당성은 고려에서 제외하겠다.
처음부터 다음 세 가지 구분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세대
주의의 역사적 경계, 마지막 때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세대주의
신학의 범위, 세대주의적 전통의 사회학적 범위.’
역사적 경계
1830년대에 아일랜드와 영국의 개신교 반대자 그룹은 세대( dispension ) 란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도입했다. 이것은 그리스어 단어
오이코노미아 ( oikonomia ) 를 영어로 번역한 용어로 oikos ( 가정 ) 와 nemein( 관리 ) 의 조합이다. 이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 네 번 나오므
로, 영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종교개혁 초기부터 기간, 특히 성스러운 시간을 기술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해 왔다. 원래의 국교
반대자들은 모든 역사가 필연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련의 시기( 세대 ) 들로 구분되어 있다
고 가르친 점에서 독특했다. 그들은 현재의 세대가 조직화된 기독교
의 실패를 드러내며 거의 끝났으며, 이른바
1부 새 전천년설 신봉자
1830~1900년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 성공회에 대한 비평으로서 새로운 성경 해석법
을 개발한다 ◆ 다비의 운동, 즉 배타적 형제단은 미국인 추종자 소수를 얻
는데, 그들은 다비의 아이디어를 자신들의 경계주들의 정치적, 사회적 상
황에 적응시킨다 ◆ 남북전쟁과 재건 시대 중의 초기 개종자들은 지역적
중립성을 위한 그들의 시도를 뒷받침하는 교회와 예언에 대한 형제단의 생
각에 이끌린다 ◆ 새 전천년설이라는 새로운 미국의 하위문화의 가장 중요
한 홍보자는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이며, 그의 종교 운동은 세계 선교를 위
해 새 전천년설을 영속화하는 기관들의 광대한 복합체를 구축한다
전천년설은 사실일지라도 쓸모없고, 거짓이라도 무해한 비생산적인 추측이 아니다.
전천년설은 성경 해석의 한 학파다. 전천년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요점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허용될 때, 전천
년설은 자체의 재능으로 한 사람의 신학의 전체 체계와 그의 영적 성격의 전체 분위
기에 스며들어, 거의 전천년설 자체의 세계를 건설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신앙을 갖고, 같은 근본적인 소망을 품고 있지만, 자
신의 매체를 통해 사물을 보고 이 교리가 그 안에 생성한 생명으로 모든 것을 본능적
으로 발견한다.
데이비드 브라운,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이전일까?』(1858년)
글래스고 자유교회 목사이자 한때 전천년설 신봉자였던 데이비드 브라운은 존 넬슨 다비가 대
중화하는 데 기여한 새 전천년설에 대한 19세기 최고의 비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인용 문(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이전일까?』에서)에 대해 다비는 “이것은 전적으로
진실이며, 모든 은혜와 인내 속에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보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라고 대답했다.
1장
대양을 건너
1825년에 25세의 나이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한 아일 랜드 거주 잉글랜드인인 존 넬슨 다비는 아일랜드 성공회의 부교역
자가 되었다. 다비의 지역 교회는 더블린 바로 남쪽에 있는 캘러리
지역에 있었다. 그는 일할 교회가 없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말을 타 고 가난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을 방문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교
회는 아일랜드 성공회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1826년에 이르러 그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일부 성공회 신자들은 다비가 한
명의 작은 요원이었던 소위 ‘아일랜드 종교개혁’이 곧 일어날 것으
로 믿었다. 그러나 다비가 후에 기술했듯이, 추진력이 궤도 위에서 멈추어 버
렸다. 실제로 아일랜드 전체의 종교적 운명은 갑자기 암울해졌다. 다
비는 1827년을, 시간과 성령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영국 제도( 諸
島 ) 가 개신교의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을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하다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왕의 지상권을
인정하는 맹세를 하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중단되었다.”1) 다시
말하면, 아일랜드 성공회의 엘리트들이 영혼을 구원하는 하늘의 의
무를 포기하고 대영제국의 이익에 복종하는 세속적인 정치적 개신
교를 받아들였다.2)
다비의 설명의 정확성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1820년대 중반에
아일랜드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기록은 빈약하다. 더블린의 대주교
인 윌리엄 매기는 1827년 중반에 정책 성명서를 작성했는데, 다비
는 미발표 편지에서 화를 내며 이에 답했지만, 다비가 ‘매기가 말
했다고 생각한 것’을 매기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불과 2년
후 영국에서 진행 중인 가톨릭 해방 운동의 일부인 로마 가톨릭 구
제법은 가톨릭 신자들이 완전한 시민이 되기 위해 교황의 권위를 포
기해야 한다는 대부분의 요구를 제거했다. 당시 가톨릭 회심자들이
갑자기 아일랜드 성공회에 넘쳐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로가 ‘세대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 정확히 100년
전에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활기찬 다비는 갑자기 자신과 아일랜드
의 불행을 달래야 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1827년 12월 다비는 자
신의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몇 달 동안 병상에 누워
1) Donald Harman Akenson, Discovering the End of Time: Irish Evangelicals in the Age of Daniel O’Connell (Montreal and Kingston, ON: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16), 249에서 인용.
2) Timothy Stunt, From Awakening to Secession:Radical Evangelicals in Switzerland and Britain,1815–35 (Edinburgh: T&T Clark, 2000), 171에서 인용.
님의 교회로 발전시킨 최초의 진리의 싹”이었다.3) 이 급진적인 주장
은 캘러리의 험준한 언덕에서 멀리까지 퍼져 나간,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발언이었다. 1827년부터 1882년 별세할 때까지, 약 1,900만 단어에 달하는
다비의 방대한 저술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가르침으로 기억될 것이
지만, 그의 일생의 역작은 아일랜드 성공회와 실제로 모든 기성 교
회에 대한 불만에 똑같이 초점을 맞추었다. 다비는 매기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사역이 “이 나라에서 일을 시작하신 성령의
권능이 나타난 것”의 일부이지만, 성령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
으시고, 온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 나라의 권능의 성령”이라고
썼다.4) 유럽 전역의 기성 교회들은 이 군주나 저 교황에게 충성을 바
쳤다. 모두 정치와 부의 음모에 투자했다. 하늘과 땅, 교회와 국가 사
이에 급진적인 이원론을 던진 다비는 자신이 목격한 복음에 대한 무
시에서 자극을 받았다.
다비는 하늘과 평신도가 운영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급
진적인 이해를 발전시켰고, 이 이해는 그의 광범위한 신학 프로젝트
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사고의 함의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이해하
는 방식, 시간의 구조,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예언적 또는 구
속적 목적을 다시 생각하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세대주의는 한 세기
후에 북미에서 성행하게 되지만, 그 족보는 아일랜드와 영국에 기반
을 둔 이 초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3) Akenson, DiscoveringtheEndofTime, 251에서 인용.
4) Akenson, DiscoveringtheEndofTime, 254에서 인용.
예언 하우스 파티
다비의 신학적 창의성의 초기 수십 년에 해당하는 1830년대와
1840년대는 그가 엄청나게 많은 글을 쓰고, 끊임없이 여행하고, 모
든 기회에 강력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시기였다. 그의 가르침은 새롭
고 급진적이며 가공되지 않은 것이었다. 즉 그의 가르침은 실시간으
로 발전했으며 결코 별개의 체계로 정착되지 않았다.
다비의 지속적인 기여는 교회의 새로운 신학, 천년왕국의 새로운
신학, 그가 성경 전체를 읽는 방법을 알려 주는 하늘과 땅 사이의 새
로운 이원론 등 세 가지 신학적 혁신을 한 묶음의 서로 맞물린 가르
침으로 묶는 데 있었다. 이런 영역 밖에서 다비는 특히 아우구스티
누스와 칼빈 등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19세기 개혁주의 전통의
전형적인 신학자처럼 들리고 읽힐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수준과 교
육의 다른 성공회( 후에 반대파 ) 급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다비도
영어 성경과 그 범주에 몰두했다. “나는 성경의 참신한 해석들에 관
심이 없다. 크림은 표면에 있다”5)라고 다비는 썼다. 그러나 그가 참
신한 것이 아니라 회복이라고 주장한 그의 혁신은 여전히 그를 다른
신학적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의 글은 매우 복잡하고, 완전한 일관성
이 없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뀔 수 있었다. 다비는 항변하면서
도 자신의 성경 해석이 왜 이단적이지 않은지, 그리고 실제로 그것
이 왜 정확히 그리스도인에게
5) John Nelson Darby, Pilgrim Portions: Meditations for the Day of Rest (London: Morrish, n.d.), accessed May 10, 2022, https://www.stempublishing.com/authors/ darby/Pilgrim_Portions.html#a3.
서 비롯되었으며, 그 불만은 기존의 모든 조직 종교에 대한 비난으
로 폭발했다. 1835년에 이르러 다비는 사도 계승( 교회 권위에 대한 영국
성공회 이해의 핵심 ) 개념과 직업 목사에 대한 전체 개념을 공격할 정도
로 화가 났다. 이런 생각은 1840년에 그의 고전적인
완성되었다. 이 제목은 조직화된 기
독교의 “망가진 상태”에 대한 비평을 구체화한 것으로 유명했다. 형
제단은 성직자 계급에 대한 혐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제” ) 로 유명해졌
지만, 망가진 것에 대한 다비의 초점은 형제단 프로젝트의 또 하나
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경우 형제단의 선교는 조직화
된 기독교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명목상 또는 문화적인 그리스도인
을 목표로 했다. 1835년에 한 우호적인 관찰자가 다비에 대해 언급
한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의 직책이 신자들에게 높고 거룩한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6) 형제단
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많은 국교 반대자 집단과 같이 새로운 개종
자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을 되살리는 데 열정 적이었다.
교회에 대한 다비의 견해는 미래에
기독교라는 가르침에 반발하여, 다비는 재림의 전조로서
교회의 망가짐을 찾는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년설을 장려했다. 이와 관련된 핵심 성경 구절은 다니엘 9장
24~27절의 “칠십 이레”( 전천년설 신봉자들이 490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징
적으로 읽는 수수께끼 같은 예언 ) 와 다니엘 7장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훨씬 더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전천년
설 신봉자들은 1,260일이라는 숫자에 도달했는데, “70주”와 같이
그들은 이것도 일( 日 ) 을 년( 年 ) 으로 번역했다. ‘일-년’ 상징성은 전
천년설 신봉자들이 정확히 융통성이 없는 문자주의로 예언을 읽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지만, 그들은 예언이 관찰 가능한 공
간과 시간에서 물질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830년대에
이르러 1,260년에 주어진 의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527∼565년 ) 의
통치와 프랑스 혁명( 1789∼1799년 ) 사이의 기간이었다. 그 기간의 끝
에 살면서 19세기 초의 대부분의 전천년설 신봉자들은 1840년대부
터 1860년대에 이르는 재림 날짜를 제시했다.
다비가 유명해졌을 때, 전천년설은 성공회 신도들의 생활의 변두
리에 있었고, 다비는 전천년설의 유일한 급진적 신봉자가 아니었다.
전천년설은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잉글랜드인 사회 엘
리트의 소규모 집단이 주최하는 일련의 새로운 모임 또는 “예언 하
우스 파티”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다비는 은행가 헨리 드러먼드가 주
최한 알버리 회의( 1826∼1830년 ) 에 참석했으며, 드러먼드는 후에 어빙
파로 알려진 형제단과 경쟁하는 전천년설 종파를 공동 설립했다. 또
하나의 분리되어 나간 예언 하우스 파티인 파워스코트 대회( 1831∼
1833년에 파워스코트 저택에서, 그 후 1836년까지 더블린에서 모임 ) 는 다비가 전
천년설의 계획을 설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새로운 버전을 소개하는
플랫폼이 되었다. 여기에서 다비는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연기되었다. 그리고 이 괄호는 교회가 하늘로 휴거됨으로써 끝날 것
이다. 이 휴거 사건은 다른 전천년설 신봉자들이 예언된 ‘환난’의 끝
에 두는 것이다. 훨씬 후에 도입된 신학 용어에서 ‘환난 후’와 ‘환난
전’은 오래된 전전년설 신봉자와 새 전천년설 신봉자의 휴거에 대한
견해를 구별하게 된다.
‘오래된’ 전천년설의 인기는 미국에서 동시에 상승했는데, 그곳에
서 침례교 목사인 윌리엄 밀러의 연도별 분석은 예수께서 1843년이
나 1844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많은 예언적 추측으로 이어졌다.
계산할 때 밀러는 불확실한 괄호를 넣지 않았다. 정해진 재림 시간
들이 아무런 사건 없이 지나갔을 때, 그것들은 “대실망”( 大失望 ) 으로
기억되었고 적어도 10년 동안 전천년설의 명성을 실추시켰다.
1840년대 초 이후에도 오래된 전천년설 전통이 남아 있었고, 실제
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신도들( 밀러의 이전 제자 ) 과 같은 집
단은 계속해서 예언에 초점을 맞추었다. 다른 운동들은 기존 교회에
대한 급진적인 비평을 내놓았다. 1831년에 조셉 스미스가 설립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는 조직화된 모든 기독교계를 지극히 해로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천국의 도래를 약속한 뉴욕의 단명 종교
지도자인 로버트 매튜스도
대부분의 성경 예언이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
기 때문이다.
기성 교회에 대한 다비의 불만처럼, 그의 새 전천년설은 그가 성경
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 다비가 1830년대에 도
입한 셋째이자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혁신이 있다. 간단히 말해 다
비는 전통적인 성경 범주 안에서 새로운 구분선을 그렸다. 그는 고
대 이스라엘을 교회에서부터 분리시켰다. 족장들과 선지자들은 초
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교회도 새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는 교
회를 국가들로부터 분리시켰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삶에서 인
가된 역할이 없는 하늘의 시민이었다. 다른 개신교도들처럼 그는
‘참된’ 교회를 가시적 교회에서 분리했다. 기성 교회와 ‘기독교계’는
폐허가 된 반면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은 지속했다. 더 독특
하게도 그는 ‘하나님 나라’를 ‘천국’에서 분리했다. 전자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로 정의되었고, 후자는 장차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도래
할 예언된 지상의 평화의 통치로 정의되었다. 그리고 그는 휴거와
재림을 분리하여, 이 두 북엔드 사이에 마지막 때 사건의 복잡한 시
나리오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런 구별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
의 근본적인 이원론에 따라 지배되었으며, 그것은 가장 진지한 논문
에서 크리스마스 묵상에 이르기까지 다비가 생각하고 쓴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그 묵상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에게 “땅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매일 어둠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빛에 속하고 또
하나의 날을 기다리므로, 전적으로 하늘에 속하기를” 요청하는 글
중에 그 이원론을 포함시켰다.7)
이런 분리는 다비가 성경을 읽는 방식을 알려 주었다. 성경은 두
7) Darby, PilgrimPortions. 676.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구속하신
이야기를 전하는 책이었다. 성경의 큰 부분이 둘 중 하나에 적용되
며, 둘 다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세대 또는 시간 구분이라는 개
념은 기독교 사상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다비의 방식은 이런
세대가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별과 관련이 있으며 항상 실패로 끝
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각각 비극으로 끝난 ( 대부분의 ) 이스라엘 또는
교회와 관련된 연속적인 세대들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각각은 “완전
히 확립되자마자 실패로 판명되었다.”8) 이런 시험-실패 순환과정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다비의 비전의 모든 측면에 퍼져 있
었다. 그는 1836년에 그의 고전적인 저서인 『연속적인 세대들의 배
교』에서 “모든 경우에 인간과 관련하여 총체적이고 즉각적인 실패
가 있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성경에서 묘사된 각 세대는 또한 “하나님의 인내심이 사람이
처음부터 실패한 세대를 용납하고 은혜로 이어 갈 수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9) 세대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한 인식과
함께, 형제단의 대의에 강력한 기독교 비관론을 제공했다.
다비는 이런 점들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830년대에 이르러 영미 개신교의 사색과 저술의 우물은
이미 깊었다. 그러나 다비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난, 전천년설적 종
말론, 하늘과 땅의 이원론을 묶은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8) Darby, PilgrimPortions, 448.
9) John Nelson Darby, The Apostasy of the Successive Dispensations, 1836, https:// www.stempublishing.com/authors/darby/ECCLESIA/01009E.html.
처음부터 다비의 견해는 신생 형제단 운동과 초기 예언 하우스 파
티에 참석한 사회적 엘리트를 분열시켰다. 형제단 동료들도 은밀한
휴거의 도입이나 성경의 새로운 구분을 수용할 수 없었다. 1848년
에 완전히 결별하기 전까지 10년 이상 동안 긴장이 고조되었다. 결
별 이유는 표면적으로 교회 권징 방법에 대한 것이었지만 권력 다툼
과 다비의 가르침의 영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개방적’ 형제단은
교회의 폐허 상태와 다른 많은 부차적 문제에 대해 다비에게 빚을
지고 있었지만, 다비의 새 전천년설과 그의 해석학적 체계의 대부분
의 측면을 거부했다. 다비를 따르는 플리머스 형제단의 분파인 배타
적 형제단은 그의 신학적 비전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1850년대에는 종교 사상이 북미에서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새로
운 기회가 생겼다. 부흥 운동이 1857년에 캐나다에서 시작하여 한
세대 동안 볼 수 없었던 강력한 힘을 가지고 돌아왔다. 두 명의 감리
교 전도자인 피비 파머와 월터 파머는 현재 온타리오주와 퀘벡주에
서 매우 성공적인 캠프 집회를 열었으며, 그 집회는 남쪽으로 퍼져
나갔다. 전신( 電信 ) 으로 인한 최초의 금융 위기인 1857년의 공황은
미국에 즉각적인 경제 불황을 가져왔다. 뉴욕시에서는 실업가들이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첫째 모임은 새로 임명된 장로교 평
신도 선교사( 그리고 열렬한 소책자 배포자 ) 인 제러마이어 랜피어가 이끌
었다. 곧 ‘실업가 부흥’이란 이름이 붙여진
“교파를 복음화하기”
이르러 부흥 운동은 동쪽으로 대서양을 건너뛰어 영국 전역으로 빠
르게 퍼졌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부흥의 주요 수혜자였지만, 형제단과 같은
소규모 그룹도 번창했다. “다른 모든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형제단에
서도 복음 사업이 1859년에 크게 부흥했다”라고 다비의 동역자인
앤드루 밀러가 20년 후에 회고했다.10) 형제단의 저술가이자 복음 전
도자로 사역을 통해 미국인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C. H. 매킨
토시는 1858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영적 삶과 능력의 강력한
조류가 우리에게 밀려와, 한동안 많은 인간의 조직을 쓸어버렸고, 하 나님의 일과 그리스도의 봉사에 있어서 인간의 권위에 대한 모든 질
문을 사라지게 했다.” 이런 ‘조직’에는 형제단의 해석으로 제국을 통 해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는 오류 교리인, 교회와 국가에
대한 후천년설 이념의 의제를 위해 부흥 운동을 이용하는 “공식적
및 교파적 통로”가 포함되었다. 매킨토시는 “성령은 이것을 승인하
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일과 그
일꾼은 모든 방향으로 사회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형제단은 해방
되었다.11)
성령은 1850년대에 움직이고 계셨지만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대서양 횡단 부흥에 휩싸인
10) Andrew Miller, The Brethren: ABriefSketchofTheirOrigin,Progress,andTestimony (London: G. Morrish, 1879), 72.
11) Charles H. Mackintosh, “Papers on Evangelization,” in The Assembly of God: MiscellaneousWritingsofC.H.Mackintosh, vol. 3 (New York: Loizeaux Brothers, 1898), 55–56.
룩함을 강조하는 웨슬리 전통을 이어 주었다. 부흥의 정신으로 두
전통 모두 개인의 영혼의 운명에 집중했다. 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
은 1860년에 “성령이 사람의 눈을 열어 그의 마음의 실체를 보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광경인지”라고 증언했다.12) 개인의 성화
과정(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는 과정 ) 은 그
후 50년 동안 개신교도들에게 빈번한 집착이 되었으며, 웨슬리 교회
에서만 아니라 개혁파 단체와 인간의 행동을 형성하는 성령의 권능
에 대해 가르친 케직 ( 또는 고상한 생활 ) 운동에서 성결을 강조하는 원
인이 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했던 형제단으로서는 개
인의 성결은 주로 더 넓은 배교한 교회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중요했다. 1850년대에 형제단은 교회의 더 깊
은 몰락을 무시하면서 부흥 에너지의 대부분이 성화에 대한 웨슬리
의 잘못된 개념에 기초하여 개인주의적 개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곧 우려하게 되었다. 전체 성화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제도적 쇄신과 교회가 신약 성경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
으로 이어지는 아래로부터의 교회 부흥이었다. 1863년에 형제단의
논평자 헨리 솔타우는 자신의 운동은 “하나님의 교회의 전체 역사에
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12) J. Edwin Orr, The Fervent Prayer: TheWorldwideImpactoftheGreatAwakening of 1858 (Chicago: Moody Press, 1974), 56.
13) Charles H. Mackintosh, “Papers on Evangelization,” in The Assembly of God: MiscellaneousWritingsofC.H.Mackintosh, vol. 3 (New York: Loizeaux Brothers, 1898), 55–56.
일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대서양 양쪽의 격동하는 부흥 운동 안에
서, 서로 다른 강조점들이 신학적 차이를 가중시켰다. 형제단은 영어
권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부흥 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일부
가 되었다.
따라서 전형적인 부흥 운동가들은 “잃어버린 영혼들”과 비종교인
들이 그들의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도록 촉구하는 반면에, 배타적 형
제단은 “교파를 복음화”하는 데, 즉 배교한 교회들 자체와 동료 그리
스도인들을 회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부흥은 기독교
계 안의 부흥, 즉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의 기독교계에서 하늘의 교회
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형제단은 그 차이를 전도와 가르침 사이의
차이, 복음을 소개하는 것과 올바른 신앙을 다시 소개하는 것 사이 의 차이로 간주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강의
했다.” 밀러는 1859년 얼스터 부흥에 대해 “형제단이 시행하고 설
명하는,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리스도
인을 가르치는 것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었다”라고 주장했다. “전도자의 은사 및 사역은 교사의 은사 및 사역
과 완전히 구별된다. 그러나 그 구별은 뛰어난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아주 최근까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실행되지 않았다.”14)
부흥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이런 경계선은 개방형 형제단과 배타
적 형제단 사이의 분열과 함께, 다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더 많이
쓰고 움직이도록, 즉 더 많이 여행하고 설교하고 출간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다비가 북미에 발을 들여놓기 훨씬 전에 형제단은 소책자
를 사용하여 “교회 진리”와 교회 쇄신을 수호하는 자신들의 방식을
대중화했다. 그들의 성공은 당시의 종교 문화에 몇 가지 핵심 개념
14)
을 심어 주었다.
이 계획에서 북미는 가르침을 위한 비옥한 땅이었다. 형제단의 확
장은 기성 성직자에 초점을 맞추고, 잘못된 믿음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기독교계 안에서 거짓 종교의 가면을 벗긴다는 원칙에 따라
조직되었다. 이 사명은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다비의
가르침을 적용한 형제단 대중 전도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
들의 메시지와 어조에는 종교적 포퓰리즘이 포함되어 있어, 자신들
의 복잡한 신학을 더 많은 평신도 청중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도록
촉구하고, 기관들과 그 지도자들에게 맡은 일을 잘 수행하도록 격려
했다. 휴거와 같은 참신한 아이디어와 시간에 따른 세대들의 진행을
나타내는 예언 도표와 같은 참신한 이미지는 형제단 가르침을 그들
이 개인적으로 방문했던 곳을 넘어서 훨씬 먼 곳까지 확장시켰다.
다비의 대중화
형제단 가르침을 대중화하는 것은 항상 접근성과 정확성 사이의
절충이었다. 다비 자신은 그런 거래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의 형
제단 동료들은 지속적으로 그런 거래를 했다.
윌리엄 트로터와 토머스 스미스는 다비의 종말론을 처음으로 종
합적으로 정리한 『예언에 대한 여덟 편의 강의』( 1851년 ) 를 써서 북미
에 소개한 형제단의 두 사람이었다.
그림 1. 트로터와 스미스의 『예언에 대한 여덟 편의 강의』(1851년)의 표지와 목차. 일
반 교리에서 특정한 교리로, 전천년설 신학 영역의 공유된 부분에서 논쟁 중인 부분으로
이동하는 이 책의 구조는 즉각적인 거부를 무장 해제하고 다비의 가르침을 훨씬 더 긴 전 천년설 전통으로 통합하고, 특정한 종말론적 가르침의 상대적 참신성을 더 넓은 담론의 틀
안에 숨기는 데 유효하게 작용했다.
도된 청중은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라 고통당하는 성도였다. 저자들
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 강의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거
의 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이익을 위해 행해졌으며, 이제 책으로 출간되었다.”16) 후천년설적 낙관주의는 선지자의 직분
을 무기력하게 “평화가 없을 때에 평안한 것을 예언하며 평화를 외
치게” 타락시켰다고 그들은 진단했다. 트로터와 스미스는 그 대신에
16) William Trotter and T. Smith,
심판이
날”이
자신들의
않으면서
있으며, 그때에만 “보편적인 평화와 복의
주장이 “인간의 추리와 추측”이 아니라 성경에서
직접 나온 것으로 제시했다.18) 실제로 그들은 은사주의 지도자들의
통찰에 빚을 지고 있는 어빙파 및 모르몬교와 밀러파를 포함한 다른
종파 운동이 예언 연구의 일반적인 불명예를 가져왔다고 비난하며, 잘못된 해석의 수많은 예들이 그들의 조사를 더 적절하게 만들었다
고 주장했다. 그들은 “예언이 무시되어야 함을 증명하는 대신에” 과
거의 오용이 “예언이 연구되어야 하며, 조용히 기도와 함께, 전적으
로 하나님의 영에 의지해야 하지만 여전히 연구되어야 한다”19)라고 썼다. 그러나 트로터와 스미스가 제시한 것에서 얻은 것은 잃은 것과 상 쇄되었다. 여덟 편의 강의는 다비의 미래에 대한 견해를 분리주의적
이고 성직자의 개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분리하여 예언 연구에 좁
게 초점을 맞추었다. 독자는 강의에 동의하고 성경의 전천년설 해석
을 채택하지만 교회에 굳건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다비의 이원론
은 강의의 말 이면에서 작용해서 형제단 가입자는 감지할 수 있었지
만, 외부인은 종말론과 교회론 사이의
17) Trotter and Smith, EightLecturesonProphecy, 6.
18) Trotter and Smith, EightLecturesonProphecy, 6.
19) Trotter and Smith, EightLecturesonProphecy, 18.
행한 유명한 형제단의 순회 전도자 찰스 스탠리였다. 믿기 어렵겠지
만, 스탠리는 다비의 종말론의 가장 인기 있는 시각적 표현인 예언
도표의 창시자다. 그는 자신의 성공적인 설교에 대한 짧은 기록인
“철도 소책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 설교 중 다수는 철도
객차나 거실에서 행한 것이었다. 『여덟 편의 강의』와 같은 많은 소책
자는 대상 독자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지정했다. 스탠리도 역시 그
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게 될 날을 갈망했다. “잉글
랜드 침공은 주님이 정말로 오고 계신다는 사실에 잠들어 있던 교회
가 깨어나는 것보다 더 큰 놀라움이나 경각심을 줄 수 없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재림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기대가 공허함
을 “기름 없는 등불”에 비유했다. 화려하지만 현실은 암울하기만
했다. “이게 내 독자의 상황인가? 그러면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 아
니,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시는 분
은 예수이시기 때문이다.”20)
그러나 스탠리는 자신의 소책자 외에도 다비의 가르침의 한 측면
인 세대의 진행에 대한 지속적인 시각적 표현을 제공했다. 웨일스
북부의 해안 마을인 란두드노에서 설교하는 동안 스탠리는 후기 세
대주의 문화의 아이콘이 될 것의 개요를 제시했다. “나는 주님의 오
심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라고 그는 후에 회상했다. “그리고 현재의
복음 기간과 천년왕국, 즉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깨닫고, 나는 분필을 집어 정원 문에 두 개의 원
을 그렸다.” 그는 두 개의 원을 현재와 미래의 시대로 설명했고, 그
것은 청중의 추가 질문을 촉발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 ‘그리스도
20) Charles Stanley, “Awake! Awake! Behold the Bridegroom Cometh,” in The C. S. Tracts, vol. 2 (London: G. Morrish, n.d.), 2.
의 승천’, ‘주 예수께서 자기 성도들을 데리러 오심’ 등과 같은 역사
적 이야기를 나타내기 위해 선들을 그었으며, 마침내 그 선은 “영원
한 상태를 나타내는 끝없는 원의 시작”에 도달했다. 그는 이 첫째 도
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모두는 정원 문에 그려진 조잡
한 표시였지만, 그것들은 청중이 세대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놀라운 도움을 주었다.” “B 대령”이라는 이름의 동료가 그것을 판지
에 복사했고, 그것은 여러 출판물에 수록되었다.21)
“예시적 도표”는 세대를 가장 단순하고 따라서 가장 전파되기 쉬
운 형태로 포착했다. 형제단은 전에도 그들의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1840년대에 에드워드 데니 경과 존 주얼 펜스톤은 외부
인이 보기에는 복잡하고 주눅이 들게 하는 여러 페이지로 구성된 정
교한 도표와 안내서를 제작했다.22) 다니엘서의 70이레를 묘사하는
다른 두 장의 데니의 도표에 수반된 200페이지의 책은 이 도표의 의
미를 파악하기 위해 제작자가 얼마나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
는지에 대한 증거였다.23) 이런 작업에는 중요한 성경 구절을 고쳐
쓴 것이나 전체 구절을 포함시켜 텍스트와 그림 사이의 관계를 강력
하게 보여 주는 경향이 있었다. 흔히 컬러로 큰 종이에 그려진 이런
21) Charles Stanley, Incidents of Gospel Work:Shewing the Way the Lord Hath Led Me (London: G. Morrish, 1889), 62–64.
22) Edward Denny, Companion to a Chart,a Prophetical Stream of Time (London: J. Nisbet, 1849). 도표
23) Edward Denny, Forgiveness Seventy and Sevenfold, Companion to Two PropheticalCharts (London: J. Nisbet, 1849).
24) Denny, CompaniontoaChart, 권두.
성을 보이기 위해 예시 도표와 함께 배열한 책』이라는 제목의 소책
자 형태로 나타났다. 16페이지의 짧은 소책자에는 재림에 대한 성경
구절들이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로 순서를 따라 나란히 나열되
어 있으며, 각 페이지의 중앙 아래에는 스탠리의 해석이 나와
구하라”라고 지시했다. 마지
막 페이지에 예시된 도표는 “사건들의 순서를 기억에 고정하는 경향 이 있을 것이다.”25)
트로터와 스미스의 『여덟 편의 강의』와 마찬가지로 스탠리의 도표
는 엄청난 대중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회론, 종말론 및 성
경 해석학을 한데 묶으려는 다비의 의도를 왜곡하기도 했다. 세대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다비의 이해를 구조화했지만, 도표는 보는
사람의 관심을 분명히 미래로 향하게 만들었다. 9개의 라벨이 붙은
지점 중 처음 3개만 과거와 현재를 지정했고, 나머지 여섯 개는 영원
한 상태에서 절정에 달할 일련의 사건들을 표시했다. 원래 도표는
“현재 기간 중에는 잘라낸 유대인의 역사”를 나타내는 점선을 포함
시켜 구속사의 중심 줄거리와 일치시켰지만, 이후 버전에서는 훨씬
더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이런 표시를 삭제했다. 어쨌든 하늘과 땅
사이의 수직적 이원성은 시간의 수평적 진행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
에서
25) Charles Stanley, Coming Events, as Revealed in Scripture, Arranged with a View to Shew Their Order and Connection,with Illustrative Diagram, 5th ed. (London: G. Morrish, n.d.), 2.
건너
렸다.
대서양 횡단 부흥의 진통 속에서 이런 절충안은 야외 설교도 조금
해 보았지만 소규모 모임을 선호했던 다비에게도 이해가 되었다. 트
로터, 스미스, 스탠리를 포함한 형제단의 교사들과 윌리엄 켈리와 C.
H. 매킨토시를 포함하여 북미에서 이름을 남길 다른 사람들은 영국
에서 상당한 숫자적 성공을 거둔 인기 있는 교수법을 연마했다. 북
미로 전파되는 과정은 이런 아이디어가 널리 퍼지고 다비의 글의 원
래의 출처에서 훨씬 더 분리되게 만든다.
교리
찬송가 형제단의 가르침은 신학 저술을 통해서만 인기를 얻은 것이 아
니다. 형제단의 분리와 반대에서 영감을 받은 찬송가와 시도 외부인
들을 이 집단의 독특한 가르침으로 끌어들였다. 아일랜드 거주 잉글
랜드인인 형제단 작곡가 에드워드 데니 경의 음악이 초기 사례였다.
데니는 수백 개의 찬송가를 만들었는데, 어떤 것은 형제단의 예배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은 더 넓은 개신교 청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주요한 “천년왕국 찬송가”는 흔히 성공회에 대한 더 광범위한 형제
단의 비평 안에서 휴거를 숙고했다.
당신은 해야 할 경계를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실패했다.
보라, 그가 오셔서 거의
당신의 나른한 영혼이 잠든 것을 발견하신다!
깨어나라. 보라. 공중에서 경고하는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한밤중의 외침이
그의 모든 교회에게 지금 자신을 맞이하라, 그들의 죽어 가는 등불을 준비하라고 알린다.26)
다른 찬송가들은 다비의 이원론을 각 개별 반대자의 경험에 포함
시켰으며, 데니는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찬송가 중 하나인 “고독한 세
상을 가는 순례자”에서 그런 반대자를 묘사했다.
우리는 천막에서 쓰레기 가운데 거하네
배회하기 위해 옆으로 돌아서지도 않고
예수께서 집이 없던 땅에서
어리석음의 길에서 우리의 안식을 구하지도 않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죽으신 그분과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은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으로 하늘에서 거하네
이 찬송가는 원래 1839년에 발표되었다. 이 찬송가는 후에 수많
은 영국 교회 찬송가집에 포함되었으나, 나중에 한 찬송가 사전에서
기술했듯이, “이 찬송가는 주로 미국에서 사용되었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26) Sir Edward Denny, HymnsandPoems (London: James Nisbet, 1848), 41.
27) John Julian, ed., A Dictionary of Hymnology:Setting Forth the Origin and History ofChristianHymnsofAllAgesandNations, 2nd ed. (London: J. Murray, 1907), 3.
가르치는 “천년왕국 찬송가”와 기타 다양한 곡을 제작
했다. 20세기 초의 한 찬송가 학자에 따르면, 데니의 찬송가와 같은
형제단 찬송가는 “성도를 되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
국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형제단 찬송가는 “이 세상
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의 황량함, 신앙의 온전한 확약, 그리스도 안
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온전함”29)을 가르쳤다. 트로터나 스탠리 못지
않게 정확한 방식으로, 데니는 다비의 가르침의 핵심 진리와 함의를
평신도 청중에게 전달하는 데 자신의 창작물을 집중했다.
순례와 광야, 외로움과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십자가의 은혜라는
데니의 주제에서 다른 형제단 찬송 작가와 시인들이 데니에 합류
했다. 세상에서부터의 소외와 하늘과 땅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를 주
제로 한 것에서, 데니의 작품은 비슷한 주제를 가진 다비의 찬송가, “광야를 위한 노래”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
는 다비의 1881년 판 배타적 형제단 찬송가집 제목과 같이, 주로
“작은 무리”를 위해 제작된 다른 형제단 찬송가와
28) “A Pilgrim through This Lonely World,” Hymnary.org, accessed May 11, 2022, https://hymnary.org/text/a_pilgrim_through_this_lonely_world/compare를 보라.
29) Julian, A Dictionary of Hymnology, 899에서 인용.
30) John Nelson Darby, ed., A Few Hymns and Some Spiritual Songs. Selected...for the Little Flock, Revised (London: G. Morrish, 1881).
여행을 시작했다면, 북미의 오대호 유역은 형제단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목적에 맞게 재사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미국에서 형제단
의 유산을 재창조하는 주변 지역이었다.
사람이 대서양에 익숙해질 수 있다면, 나는 대서양에 익숙해지고 있다.
존 넬슨 다비, 뉴욕시에서, 1865년
불쌍한 기독교계! 그 진영에서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주권적인 자비다!
존 넬슨 다비, 보스턴에서, 1875년
사람이 교회를 회복할 수 있을까? 가엾은 무기력한 벌레여, 네 자신을 회복하라!
존 주얼 펜스톤, 형제단 시인, 1876년
학자이자 시인이며, 다비의 절친한 친구이자 배타적 형제단의 일원이었던 존 주얼 펜스톤은
북미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은 1세대 형제단 저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와 다비는 기성 교회들
과 구별되는 것을 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미국인 추종자들에게 그런 감정을 전달하지 못했다.
2장 미국 선교지
유럽인들은 미국을 여행하며 미국 사회의 특수성을 진단하는 전 통이 있다. 1831~1832년에 9개월 동안 북미를 방문하여 즉시 고전
이 된 『미국의 민주주의』를 출간한 프랑스 외교관 알렉시스 드 토크
빌보다 더 유명한 관찰자는 없다. 토크빌의 지속적인 관찰 중에는 미국인의 종교성이 있었다. 토크빌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
저 눈에 띈 것은 미국인들의 종교적 측면이었다”라고 썼다.1) 그의
가장 유명한 평가 중 하나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전 세계에
서 기독교가 미국보다 인간의 영혼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없다.”2)
토크빌 이후 한 세대가 지나서, 또 한 사람의 유럽인이
1) Alexis de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trans. Harvey C. Mansfield and Delba Winthrop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282.
2) Tocqueville, Democracy in America, 278.
렸다. 이듬해 미국 남부로의 첫 탐험에서 다비는 계속되는 남북전쟁
으로 황폐해진 음울한 영적 풍경을 발견했다. 그는 1863년에 한 동
료에게 이렇게 썼다. “교회는 어느 곳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세속적
입니다. 즉 세상이 지나치게 악하다고 고백하는 교회가 더 세속적입
니다.”3) 미국인들을 규정한 것은 토크빌이 지적한 그들의 “종교적
측면”이 아니라, 신앙으로 가장한 불안한 행동에 대한 선호였다. 미
국 그리스도인에 대한 다비의 인상은 미미했다. 그는 보스턴에서 자
신의 가르침에 대해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은 반대하려 합
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움직임을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썼다.4) 그는 신생 도시인 시카고에 대해 “어떤 진정한 영적 마음가
짐과 ( 단순한 외적 활동이 아닌 ) 헌신은 그 어느 곳보다 시카고에서 더
멸시될 것”이라고 추측했다.5) 비록 다비의 사역은 미국에 집중될 것
이었지만, 그의 진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사실상 다비는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를 방문한 것이 아
니라, 깊은 인상과 일반화의 단초를 형성한 특정한 지역과 지역사회
를 방문했다. 다비의 인상은 미국에서 청중을 확보하기 위한 형제단
의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미국은 대체로 새로운 형
제단을 배출하는 데 실패했지만, 형제단의 가르침은 대중 종교 문화
에서 견인력을
3) Darby to Mr. Pollack, May 1863, in Letters of J. N. Darby: Supplement from the French, vol. 1 (Chessington, UK: Bible and Gospel Trust, 2014), 211.
4) Darby to Mr. Brockhaus, June 1877, in LettersofJ.N.Darby:Supplementfromthe French, vol. 2 (Chessington, UK: Bible and Gospel Trust, 2014), 262.
5) Darby to Mr. Brockhaus, June 1877, in LettersofJ.N.Darby, 2:262.
역 가까이에서 이루어졌다. 미국 중서부와 뉴잉글랜드는 1825년에
개통된 이리 운하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으며, 1850년대에는 철도
기반 시설의 급속한 증가로 두 지역이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다비는 미주리주의 남쪽에 발을 딛지 않았으며, 미국 땅에서의 3년
의 대부분을 미국 4개 도시 지역, 즉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뉴욕, 보
스턴에서 보냈다. 다비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
의 사상을 처음으로 옹호한 미국 사람들 중 다수는 중서부와 동부
해안의 도시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다비의 여정은 점점 배타적 형제단으로 알려진 형제단 분파에 대
한 그의 지도력과 분리될 수 없었다. 다비가 제안한 신학 원칙에 전
적으로 투자한 공동체인 배타적 형제단은 부흥, 야외 전도 또는 대
중 설교에 회의적인 경향이 있었고, 그 대신에 부지런한 제자 훈련
을 통해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했다. 다비 자신은 미국 부흥 운
동을 항상 너무 많은 세속성과 너무 적은 엄격함이 뒤섞인 “피상적
인 일”로 여겼다.6) 미국 도시를 방문했을 때, 다비는 성경 공부를 주
최하여, 자신의 방법을 보여 주고 개별 성직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통해 사역하고, 전도지를 배포하고 한 번에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가정들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다비는 강대상에서 설교하곤 했
는데, 그곳에서 그의 성경 지식은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
만, 그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소규모 모임이었다.
북미에서의 형제단의 사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진정한 제자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들의 생각, 특히 다비의 많은 가
르침은 오대호 유역의 일부 지역에서 발판을 마련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조건과 방식으로 형제단 사상을 채택한 반면에, 다비의 원
2. “다비의 북미 여행, 1862~1877년.” 다비는 북미를 7번 방문했고, 7년 이상의 시간을 북미 대륙에서 보냈다. 그의 서신 에 따르면, 그의 여행 날짜는 다 음과 같다.
1862년 9월~1863년 8월(11개월), 1864년 12월~1865년 6월(7개월), 1866년 7월~1868년 4월(21개월), 1870년 7월~1870년 9월(2개월), 1872년 6월~1873년 5월(11개월), 1874년 9월~1875년 8월(11개월), 1876년 6월~1877년 5월(11개월).
마커스 미어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