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신이 내린 특권인가, 아니면 짐승이나 짊어지는 부담인가-
고대 그리스에서의 해결 방법 28
중세 시대에서의 지속 43
르네상스 시대에서의 반전 57
마르크스: 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60
프로이트: 자기부정 형태로서의 일 72
요약과 전환: 소명의 개념에서의 약속 80
2장 기독교의 노동과 직업관 81
-일은 하나님의 섭리: 소명에 대한 기독교 사상-
루터: 우리의 직업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섭리적 임재 82
칼빈주의적 정교화: 직업과 사회적 삶의 유기적 체계 96
칼빈주의적 개선: 타락한 구조들의 개혁을 위한 소명 110
보편적 수렴: 현대 가톨릭의 입장 115
2부 직업에 대한 실천적 적용 129
3장 개인의 직업적 선택 131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에서 자신을 검증하기-
적합한 직업의 선택 132
적합한 직장 찾기 152
구조의 변화: 충돌과 전략 173
헌신의 균형: 직업과 소명 179
개혁주의적 수도원주의: 기도하는 일 190
요약과 전환: 직업 선택에서 직업 설계로 194
4장 기업의 직업적 설계 197
-각종 경영 이론-
프레더릭 테일러: 과학의 강요와 직업의 잔인성 203
엘턴 메이오: 호손의 실험과 직업의 인간적 차원의 발견 219
크리스 아지리스: 조직의 구조와 인간의 자기실현 간의 충돌 225
프레더릭 허츠버그: 인간적 필요, 동기 및 위생 233
더글러스 맥그리거: 이론 X, 이론Y 및 통합에 따른 경영 238
피터 드러커: 사람들에 대한 존중, 목적에 따른 경영 및 책임이 주어진 직업 245
로버트 레버링: 신뢰의 윤리와 좋은 일자리에서의 공정한 환경을 위한 정치학 255
결론: 우리는 반드시 사람과 이익 가운데에서 선택해야만 하는가 264
직업 설계를 위한 가능한 선택지들: 직업 소명에 대한 감각 회복하기 269
│책을 번역하며 279
│참고문헌 285
│서문│
이기도 했다. 미용 보조제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이전 시대에, 이미
자신의 약국을 소유했던 할아버지는 한때 붉은 액체를 만들어 병에
넣고 ‘하디의 머리 가라앉게 하는 약’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그 액체는 의심스럽게도 감기 시럽처럼 보였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 그것이 일종의 속임수였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객들에
게 이 붉은 액체를 계속해서 팔았다. 이후, 남자들의 헤어스타일 유
행이 변해, 상고머리 스타일과 머리 위가 평평한 스타일이 유행할
때에는, 노란 반죽 같은 것을 만들어 파셨는데, 이 반죽의 주요 성분
은 내가 기억하기로 밀랍이었다. 할아버지는 이 반죽을 이름 하여
‘하디의 머리 세워 주는 약’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제품의 효과는
그 이전
것도 기억한다.
1952년에는 아버지가 가족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성인이 되자마
자, 이 약국에 정기적으로 출근하는 붙박이가 되었다. 그래서 난 상
품들을 정리하고, 먼지를 떨고, 바닥에 걸레질을 하는 등, 그렇게 전
문적이지 않은 다양한 잔업들을 매일같이 했다. 그러던 중 방과 후
어느 날 오후, 방에 있는 병들에 있는 라벨들을 보고 있을 때, 난 우
연히 변색이 된 면 뭉치들이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호
기심에 난 아버지를 계산대에 불러, 어떻게 저 면 뭉치들이 천장에
붙어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약간 당황하며 설명하기 시
작했다. 아버지가 어려서 뒷방에 있는 병들의 라벨들을 보고 있을
때, 그는 일종의 화학 용액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 용액을 면 뭉치가
담겨 있는 목이 좁은 병에 넣은 다음 흔들면, 그 용액에 적셔진 면
뭉치가 상당히 부풀어 올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면 뭉치 일부는
부풀다 못해 튀어나가 천장에 붙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 용액을 만드는 방법을 내게 설명해 주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했던 일들 중 일부가
자식인 내가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난, 아버지가 어릴 적 보여 주었던 영리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학생으로 있
으면서 화학자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버지의 계획을 바
꾸어 놓았다. 당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
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어떤 동질감, 또는 우리 가족의 전통적인
가업을 통해 만들어진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나와 같았
을 약 30년 전, 나는 아버지가 일했던 그 같은 방에서 아버지의 일
을 돕다가 비록 좀 더 창의적이긴 했지만, 아버지가 하던 똑같은 일
들을 하던 중에, 갑자기 그 동질감을 깨달았다.
이런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사로 자라지 않았다. 또한 나
자신의 어떤 사업을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난 청소년 시절에 사람
인생에서의 일의 중심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었다. 비록 나는 당시
에 그 통찰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말하자면 그
통찰이란 이것이다. 즉 일이란 사실 교황 바오로 2세가 말한 것처럼
“인간 존재에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일에 대한 이런 이해와
함께, 청소년 시절의 나는 철학에 대한 분명한 마음의 기호를 가지
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내 성향은 잘못된 관념론에도 불구하고, 내
가 적어도
으로서 대학원의 혹독한 과정을 견디게 만들었다.
철학과 학생
인생에서의 일의 중심성에 대한 내 어릴 적 이해와 이후에 갖게
된 철학적 성찰에 대한 내 열정은, 내가 가르치는 자리에 있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길로 나를 인도했다. 철학과 교수로 칼빈 대학교
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가을 및 봄 학기에 가르치는 정규 과
목 외에, 여름에 가르칠 계절학기 과목을 준비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계획서는 이미 두 달이나 지체된 상태였다. 강의
주제에 대해 생각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나는 전임 교수였
던 말튼 브리즈가 가르쳤던 계절 학기 과목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
로 노동 철학이었다. 비록 내가 그 과목을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주체 자체가 내게는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비슷한
주제를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는 이 과정이 내
철학적 성향과 내 개인사가 통합되는 이상적인 기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앞에 있는 이 책은 내가 여러 차례 가르치고, 이후에는 “직
업과 소명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분야의 학
자들이 팀(학제간 연구) 으로 가르쳤던 그 특별 과목에서 나온 산물 이다. 이 책에서 직업에 대해 내가 취한 접근 방법 또한 학제간 연
구법이다. 이 연구는 신학, 사회학, 심리학, 철학, 역사학 및 경제학
과 같은 다양한 분야가 활용되었다. 내 전문 분야는 이 분야들 가운
데 단지 하나에 국한되므로, 필연적으로 나는 이 연구를 발전시키
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감사를 표해야
할 이들은 바로, 연속되는 두 번의 여름 학기 동안 칼빈에서 만나
직업과 소명에 대해 연구했던 학제간 연구 팀원들인, 셔를 롤즈, 데
일 쿠퍼, 글렌 반 안델, 딕 카피넨, 스티프 심슨이다. 그들의 조언과
격려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로, 나는 칼빈 대학교 철학과
에 있는 내 전・현직 동료들에게 감사를 전하려 한다. 여러 장의 초
기 초안은 그 두려운 화요일 철학과 토론회를 거쳐 다듬어졌다. 이
장들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웠으며 대체로 큰 도움이 되었고, 늘 신
뢰와 우정의 마음으로 전달되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리처드 마
우, 클리프 올레베케, 피트 데 보스, 켄 코닌디크, 존 쿠퍼, 그레그 멜
레마, 델 라츠쉬, 스티브 와이크스트라, 메리 스튜어트 반 리우웬,
서문 11
램버트 지더바트, 마크 탈봇, 데이비드 스나이더, 알빈 보스, 톰 케
네디에게 감사한다. 세 번째로 감사를 전하고 싶은 이들은 바로 학
교 외부에서 내 글을 읽고 논평을 준 데이비드 라이언, 카렌 데 보
스, 진 클라센, 마이크 맥거비, 칼빈 반 레켄이다. 네 번째로는, 3장
에 들어가는 정보의 일부를 위해 인터뷰를 해 주었던 마티 와이어
릭, 존 로엘즈, 롤프 부마, 로버트 벌튼 박사에게 감사를 전한다. 다
섯 번째로는, 내 조교들인 낸시 드 월드, 휴스턴 스미트, 드웨인 멀
더, 리사 드 보어, 글로리아 바나스, 케이스 와이마다. 여섯 번째로
는, 1987년 계절학기 동안 연구를 위해 결강을 허용해 주고, 직업과
소명에 대한 학제간 연구 팀의 세미나의 재정을 지원해 준 칼빈 대
학교에 감사한다. 일곱 번째로는, 내 아이디어들에 대해 다양하고
많은 반응을 준 내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때로는 심지어 그들이 이
해하지 못하는 상황조차도 내게 교훈을 주었다. 여덟 번째로는, 나
의 교회 ‘이스턴 애버뉴 크리스천 개혁교회’의 담임 목사 레오나르
드 반더 지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그는 설교 강단과 개인적인 교제
모두를 통해 나를 영적으로 지도해 주었고, 이는 내게 큰 도움이 되
었다. 나는 그가 내 작업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홉 번째로는, 어드만 출판사의 좋은 분들,
곧 존 팟, 필 어폴, 아이나 본디지아노에게도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는, 무료로 내 원고 전체를 검토해 준 전문 편집자, 내 아내 주디에
게 감사한다.
서론
미국 사회에 대한 분석서로서 인기 작품이었던 『마음의 습관들』
에서 로버트 벨라와 그의 동료들은 우리의 “사회 생태학”적인 일상
생활 회복의 핵심에는 반드시 “일의 의미에 대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1) 일의 의미가 변해야 하는 이유는 일이란 것
이 너무 오랫동안 공공의 기여가 아닌 현대의 개인주의 정신에
따라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현대의 개인주의는 일 또는 직업
이라는 개념을 사적인 발전의 수단으로서 이해하도록 이끌었다. 이
런 개인주의 정신은 우리 사회의 사회적 구조를
1) Robert N. Bellah, Richard Madsen, William M. Sullivan, Ann Swidler, and Steven M. Tipton, Habits of the Heart: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New York: Harper & Row, 1986), p. 289.
인주의는 공리주의와 표현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
가운데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은 공적인 일의 세계에서 자신들
의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이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은 종종 재정
적으로 평가되는 개인적인 성공을 추구하며 일한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자신들의 경력을 쌓기 위해 사생활을
기꺼이 희생하기까지 한다. 이와는 반대로, 표현주의 개인주의자들
은 일반적으로 직업 세계에서 벌어지는 가혹한 현실들에서 벗어나, 사적인 삶, 즉 개인적인 관계들이나 여가 생활 및 개인적인 삶의 양
식들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 표현주의 개인주의자들은 더욱 인간적
이고 민감한 존재를 위해 ‘쥐 경주’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러
나 두 종류의 개인주의자들 모두, 결국 자아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하
나는 직업에서의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장을
벗어나 자기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두 가지 접근 방식 중 어느 것
도 직업 안에서 타인을 섬기는 것을 주된 의도로 삼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타인에 대한 섬김이야말로, 벨라 그룹에서 주장하는 바, 직업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의미다. 만약 미국 사회가 사회적 유
대를 다시 되찾고,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가정으로서 미래의 도전
들을 직면하려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일을 이웃에 대한 섬김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코 미국 사회
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오늘날 지배적인 문화 전통인 현대 개인주
의 안에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럼, 사회생활에 대한 성경적 전통의 이해는 일을 이해함에 있어, 상
호 섬김이요, 소명이라는 매우 강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벨라와
그 동료들은 사실 우리 사이에서 다시 회복되어 운용되어야 하는
이런 소명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우리의 문화유산에 내재되어 있 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의 곤경에 처한 분열된 사회가 재조직
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다시 가져와, 직업이 단 지 어떤 개인의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
의 선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새로운 길로 들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2)
이 책은 직업을 소명 또는 부르심으로 이해하는 개념을 다시 회
복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시도다. 최소한 이에 대한 의무를 지닌, 고
백적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라도 말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의 나의
주요 목적은 소명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이 개념의 역사적 배경을
드러내며, 인간 삶에서의 직업의 의미에 대한 가능한 태도들 가운
데에서 소명이라는 개념이 있을 자리를 확인하며, 이 소명의 종교
적 의미를 밝히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이 개념의 실천적 함의
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하는 개념에 대한 내 연구
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이론적
고찰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적용에 대한 것이다. 첫 번
째 부분에서 나는 일에 대한 서양 세계의 태도들에 대한 역사를 다
2) 앞의 책, pp. 287-288.
서론
루었다. 여기에서 내가 사용한 방법론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는 주
제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 존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시작 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
존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책 첫 장에서 나는 이 공식을 일반화하
여 이론적 고찰의 방법론으로 사용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리고 우리 삶에서의 직업의 의미를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
해에 기초하여 이해한다. 전통적으로 서구 사상가들은 존재에 대한
우주적 도식에서 인간이 신과 동물 사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고
상상해 왔다. 우리의 어떤 면은 신과 같다. 동시에 우리의 어떤 면은
동물과 같다. 더욱이 대다수의 서구 사상가들은 인간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면을 강조하고, 양성하고, 강화시켜야 하며, 동시에 인
간의 동물적인 면은 약화시키고, 무시하며, 심지어 정복시켜야 한다
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형식적인 일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인
간의 신적인 면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 매우 다양
한 의견이 있다. 따라서 무엇이 인간의 신적인 면인지, 그에 따라 우
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1장에
서 나는 일에 대한 서구의 태도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이해에서 비
롯된 우리의 자기 이해에 따라 어떻게 직접적이고 결정적으로 형성
되었는지를 보여 주려 한다. 때때로 일은 우리를 동물적 존재의 수
준으로 강등시키는 활동으로, 때로는 우리를 신성한 존재의 지위로
높이는 활동으로 여겨져 왔다. 일에 대한 태도는 그에 따라 부정적
이거나 긍정적이었다.
일에 대한 이런 양극화된 태도들을 배경으로, 나는 개신교 종교개
혁자들을 통해 시작된 소명으로서의 직업에 대한 개념을 2장에서
제시했다. 어떤 의미에서 직업을 부르심으로 정의하는 개혁주의적
개념은 일을 경멸하는 것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 사이에 어떤
중간 지점을 차지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소명이라는 개념에 따르면, 우리의 직업 속에서 우리는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
에 가지고 있다. 개혁주의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하도록 부름 받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창조 활동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러나 정확히 이 이유 때문에, 비록 일이란 것이 인간의 신적인 면
과 관련 있다 해도, 우리는 이 직업으로 말미암아 신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게 하고, 인류의 이익을 위해 땅의 풍족한 자원들을 개발하는 과
업을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게 한다. 일은 우리를 신이 되게 하
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동물 수준으로 강등시키지도 않는다.
일은 구체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인간적인 면과 관련 있다.
이 책 2부에서, 나는 소명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의 두 가지 실천
적 적용을 제시한다. 하나는 직업 선택에 대한
작가가 일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직업
선택과의 관계를 논의하고 있다. 나는 이 현상이 많은 미국 기독교
인이 자기의 신앙과 직장에서의 삶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품들은 신앙과 삶을 통합하고 종교적 일관성을 얻으려 하
는 칭찬할 만한 열망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작품
들에서 제공하는 실천적인 조언은 직업 선택이라는 개인적인 문제
를 넘어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책들은 주어진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선택한 직업을 가장 잘 추구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거의
제기하지 않고 있으며, 일 자체의 사회적 구조가 갖는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일에 대한 복음주의적 성찰이 여전히
현대 개인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 책들이 직업 안에서 이기주의를 조장하거나 묵과하고
않는다는 말이다. 3장 마지막 부분에서와
4장 전체를 통해 나는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라는 관점을 실천적으로
적용하려는 가운데 일이 가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면’을 비판적
으로 평가하려 한다. 나는 구조에 대한 그런 평가가 실제로는 매우
중요하고 본질적이며, 일에 대한 어떤 개인주의적 접근도 불완전
하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은사와 재능의 책임 있는
사용을 통해 다른 이들을 진정으로 섬기게 만들어 주는 사회적 구
안에서 우리의 직업이 수행되어야만, 비로소 우리 직업이 소명
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 이론을 다루는 4장은 경영에 입문하려 하거나 이미 사업장에서
경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기획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를 모르고 읽는 일반 독자들은 미국 경영 이론의 발전에 대한 논의
가 지나치게 기술적이고, 또한 자신들에게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할지 모른다. 그런 독자들은 3장 끝부분에서 책을 내려놓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여전히 ‘완전한 독서 경험’
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소망하는 것은 논의의 흐름
이 독자들을 4장 끝까지 이끌어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은 우
리가 반드시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든 경쟁해야 하는 오늘날의 직업
세계의 구조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
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학자들을 위해 알려 주고 싶은 사항이 있다. 그것은
곧 이 책이 일에 대한 학문적인 논의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비록 내
가 주제를 다룸에 있어 학문적 근거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 이다. 나는 내 일반적인 독자들이 편안히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학문적 논의를 위한 여러 장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학문적 장치들을 학문적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해 각주에 넣었다. 어떤 이들은 이 책에서 유명한 ‘베버 테
제’( Weber Thesis ) 에 대한 언급이나 논의가 눈에 띄게 없음을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 북유럽에서의 자본주의의 발단과 관련된 활발한
경제 활동이 칼빈주의의 선택 교리를 통해 야기된 종교적 불안을
해소하려는 일부 개신교 측의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베버의 주
장은 다른 책들에서 널리 소개되었고, 또한 잘 평가되었다.3) 이 주
제에 대해 이미 많은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으므로, 굳이 내가 여기
에서 그 주제를 다시 다룰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내 생각에 베버
테제는 정당하게 그 신뢰성을 상실한 사변적인
3) 참고. Robert W. Green, ed., Protestantism, Capitalism, and Social Science: The Weber Thesis Controversy. 2nd ed. (Lexington, MA: Heath, 1973); Robert M. Mitchell, Calvin’s and the Puritan’s View of the Protestant Ethic (Washington, DC: University Press of America , 1979).
1장
서구의 노동과 직업관의 역사
일은
신이
내린
특권인가, 아니면 짐승이나 짊어지는 부담인가
나는 대부분의 학생이 앞으로 가질 직업을 위해 자신들을 준비하
려는 마음으로 대학교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려 한다. 이
교육적 모험에 대한 재정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분명 많은 학생이
낯설고 기괴하기까지 한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일들이 내가 대학생일 때 했던 아르바이트와 같은 것이라 해도, 그
들은 인내할 것인데, 왜냐하면 결코 자신이 맡은 그 일이 3개월 이
상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그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피츠버그 외곽에서 있었던 한 주택 개발 현장에서 녹슨 갈
퀴로 흙을 옮겼던 일을 기억한다. 그 일은 내가 대학원 학생 시절에
했던 첫 번째 여름 아르바이트였다.
경가가 되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을 하기 전, 나는 사람의 주거
지에 어울리는 식물에 대한 알맞은 디자인과 적절한 관리가 조경
이라고 생각해 왔다. 내 경우를 보면, 당시의 내가 맡던 “조경”은 내
가 생각해 오던 것과는 확실히 덜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마도 그
일은 내가 생각하던 조경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시카고 남서부 교외 어딘가에 있는 슈퍼마켓의 정육을
맡는 부서에서 어떤 불쾌한 독특한 경험을 했다. 당시 내가 했던 일
은 톱에 남아 있는 소의 살덩어리를 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 일
은 내가 대학생 2학년 차에 했던 것이다. 인사담당자의 직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나는 “환경공학자”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 정제되어
기록된 내 직위는 내가 했던 일의 전반적인 본질을 담아 내지 못
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농산물 부두에서 짚으로 가득 찬 트레일러
에서 수박을 나르던 기억도 있다. 당시는 내가 막 고등학교를 졸업
했을 때였다. 아마도 나는 “미리 포장된 부패하기 쉬운 상품을 재배
포하는 작업자”였을 것이다. 나는 그 직업의 공식적인 이름을 알지
못했다. 포장되지 않은 상품에 대해 만지기를 거부하던 정규 노동
조합 부두 노동자들은 우리를 “허드렛일꾼들”이라고 불렀다. 분명
그 표현은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직업의 특성을 감안하면, 적절한 표현임은 부정할
알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은 쾌적하지 않고 재미있지 않으며, 그다지
높은 임금을 주지도 않는다. 오늘날은 특히 상대적으로 높은 실업
률, 사회적 지위의 하강 이동, 고용 시장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 경
제적 불확실성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가 하거나 하게 될 일의 종류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좋은 일자리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많은 시
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하여, 좋은 직업을 갖는 데 필요한 ‘시장성 있
는 기술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준비시키려 한다. 일에 대한 우리의 관심 수준을 고려할 때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
실이 있다. 즉 우리는 일 자체, 즉 직업의 성격과 역사, 현재 형태 및
우리 삶에서 그 직업이 갖는 적절한 위치에 대해 성찰하기 위해 잠
시라도 멈춰서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중 전업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성인이 된 이후의 삶에서 어림잡아 인생의 절반을 직장에
서 보낼 것이다. 우리는 잠자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낼 것이다. 집에서 일하지 않는 한, 집
보다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며, 교회에서 일하지 않는
한, 교회에서보다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고, 예술계에
서 일하지 않는 한, 예술 활동을 위해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직장에
서 보낼 것이다. 이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어떤 목적을 위해 소비되
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한 가지 분명한 대답이 있다면 이것이다. 즉 우리는 생
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무엇이 있는 것일까? 노동 그
자체가 인간에게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노동을 우리의 복으로 여
겨야 하는가? 과연 직업은 우리 삶을 의미, 목적, 방향으로 채우고 있는가? 과연 직업은 성취, 만족,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가? 과연
일은 우리가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된다 해도, 기쁘게 하고 싶은 무엇
인가? 아니라면, 일은 인간의 삶에 대한 저주를 상징하는 것인가?
저주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필요악은 아닐까? 일은 우리를 둔하고, 좁고, 모험적이지 않은 존재로 몰아가는가? 직업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자기부정의 삶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인가? 노동은 우리를
비인간적인 시장 세력의 자비에 맡겨 우리의 자유와 자율성을 강탈 하는가? 과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일하지 않아도 된다 면, 일을 하겠는가?
더욱이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완전 고용을 목표
로 노력하고, 모든 직업을 가능한 한 풍부하고 보람 있게 만드는 데
전념해야 하는가? 아니면 노동이 언제나 사람에게 ‘무익’하거나, 늘 그렇게 무익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첨단 기술을 통해 인간
노동의 필요를 최소화하고 여가 기반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일에 대한 우리
태도가 가지는 어떤 양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일과
놀이를 대조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일은 재미가 없다.
이런 생각은 삶의 기본 공리 중 하나가 되었다. 만약 스터즈 터클의
책, 『직업』( Working ) 에서 실시한 인터뷰가 대표적인 표본으로 생각
될 수 있다면, 대다수의 미국인은 자신들의 직업을 싫어하거나 최
소한 매우 지루한 것으로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평일의 지
루함과 진부함이 주말의 약간의 설렘으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대부
분의 직장인은 자신들의 일이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것이다. 이것
은 ‘블루칼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은 많은 사무직 종사자와 전문가들의 불행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 일은 어떤 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보상을 제
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할 뿐이다. 문제는 바로
돈이다. 그들이 만약 일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한 돈이 있다면, 그
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여가 활동을 위해 직장을 떠날 것이다.
반대로, 실제로는 아무도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
고 그것은 단지 돈 때문만은 아니다. 직장을 잃었을 때 우리는 파괴
적인 심리적 충격을 얻는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금전적 보상보다 일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직
업에는 우리의 자존감과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포함되어 있다. 직
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직장에서 바로 우리
의 재능이 확인되고 우리의 기술이 사용된다. 일터에서 우리는 조
직 안에서 우리에게 맞는 위치와, 일상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 사실, 상당수의 사람이 자신의 일을 지루하
고 따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직업으로 인해
긍정적인 도전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일하면서, 동료들은 물론
상사들에게서 든든한 지원을 받는다. 종종 이 사람들은 돈이 아닌,
다른 자신들의 일의 보상, 즉 자극과 인정에 매우 매료되어 일을 거
의 멈출 수 없기도 한다. 그들은 하고 싶은 다른 일을 생각할 수
없다. 그들에게 은퇴는 죽음이다. 주말을 통해 강제로 휴식하지 않
았다면, 그들 대부분은 정규직이 된 후 5년 만에 녹초가 될 것이다.
노동 제도는 분명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을 통합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일은 우리 삶을 인도하고, 우리의 시간을 조직하며,
우리를 사람들과 연결해 준다. 실업자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사회
적 나병에 걸린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중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노동 자체가 좋은 것
인지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우리 중 일부는 오직 살기 위해 일하
지만, 또 다른 우리 중 일부는 오직 일하기 위해 산다. 그러나 대부
분의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일을 대하는
태도도 나뉜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전국적인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가 돈을 벌기 위해 현재 갖고 있는 직업이 필요하지만 일 자체가 즐
거운 것은 아니라고 정의하면서도, 4분의 3 이상이 편안하게 생활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신들의 남은 삶
동안 계속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1)
고대 그리스에서의 해결 방법
우리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가진 역설에 대해 여러 관점을
얻을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인간 삶에서 일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서구의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유용하다. 왜
1) Robert L. Kahn, “On the Meaning of Work,” Journal of Occupational Medicine 16 (November 1974): 716.
냐하면 사람들이 일에 대해 항상 그런 이중적 태도를 유지해 온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를 살펴보자. 일에 대한 우리의 태
도와 비교할 때 그들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았다. 아드리아노 틸게르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인들에게 일은
어떤 저주일 뿐, 다른 것이 아니었다.”2) 그리스인들의 세계에서 일
은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피해야 할 완전한 악이었다. 일은
그런 악의 요소들을 상쇄할 수 있는 어떤 보상 기능이나 보상 요소
가 없었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
는 사회적 미덕이었다.3) 사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한 기본 자격 중 하나였으며,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필요조건이었다.4)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행운의 조각이었다.
왜 이처럼 일에 대해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까? 물론 일을
하는 것에도 단점들이 있다. 그러나 왜 그리스인들은 우리와 같이
일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서 일에 대해 건전하고 균형 잡힌 이중
적 관점을 유지할 수 없었을까? 이런 질문에
2) Adriano Tilgher, Work: What It Has Meant to Men Through the Ages (New York: Arno Press, 1977), p. 3.
3) Aristotle, Politics, I.viii.9.
4) Aristotle,Nicomachean Ethics, X.7.
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가진 육체 때문에 우리에게 강요된 끝
없는 활동의 순환과 일을 연관시켰다. 왜냐하면 동물과 인간의 몸
은 스스로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우리 몸
을 먹이고, 입히고, 외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다면, 우리 몸
은 죽을 것이다. 이처럼 사냥, 농사, 요리, 방적, 베 짜기, 봉제, 건설, 배관, 도로공사 등의 일들은 모두 우리 존재가 필연적인 생물학적
질서에 묶여 있음을 보여 주는 다양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즉 우리
는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하는 것에 우리의 일평생을 쓰는 것은 땀 흘려 일하고, 결국 짐승처럼 죽어,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이나 차이를 남기지 못한
채 잊히는 것이다. 일을 통해 우리는 얼마간의 우리 삶을 조절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가? 우리는 짐승
들과 우리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동물들 역
시 매일 반복되는 육체의 필요를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 이처
럼 노동이 지배하는 삶은 짐승의 무익함과 허무함을 선고받은 삶과
같다. 우리 몸이 닳고 죽어 분해되어 먼지 외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될 때까지, 우리는 그저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다.
노동의 필연성에 지배되었던 우리 존재는 결국 후대에서는 잊혀 아
무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이 시적 표현으로 묘사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 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전 1:3, 9, 11, 13, 14; 3:19, 20).
특별히 그리스적인 것은 일의 무익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일에
대한 반응이다. 전도서 기자는 영원히 자기 일을 지속하시는 하나
님을 경외하면서, 사람이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자신의 수고에서
만
족을 얻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전 3:13, 22 ). 반면, 그
리스인들은 일할 필요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들의 불멸에 참여하
는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비결은 생존에
필요한 일에 종사할 필요 없이, 오히려 가치 있는 활동들, 즉 정치
영역에서의 위대한 업적이나 군사적 충돌이 있는 곳에서의 용맹한
행동들과 같은 ‘실천적인’ 활동들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위치
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 활동들의 본질적인 가치 외에도, 대중이 보는 앞에서 수행된
그런 위업들은 미래 세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므로 어느 정도 불
멸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틀림없이 죽지만, 운이 좋은 소수의
이름과 명성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솔론, 페리클레스, 알렉산더 대
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크 안토니, 콘스탄티누스 대제, 샤를마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윈스턴 처칠, 프
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등, 이 빛나는 영속적인 인물들은 올림포
스 신들처럼, 역사의 그늘진 덤불 속을 헤매는 이름 없이 흐릿해진
대중 위에 우뚝 솟아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쓴다.
그런 사람들은
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구별은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통해
바로 드러난다. 즉 끊임없이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고……
‘없어질 것들보다 불멸의 명성’을 선호하는 최고만이 진정한
인간이다. 그 밖의 다른 이들은 자연이 주는 쾌락에 만족하며
동물처럼 살다가 죽는다.5)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의 필요성
을 고려할 때, 과연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자연적 필요에 따라 요구되는 활동에 가용 시
간이 모두 소모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 대부분은 전임 직
업( a full-time job ) 으로 생계를 꾸린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고대
그리스 사회의 대답은 하나의 단어로 요약된다. 곧 노예 제도다. 만
일 어떤 사람이 자기 노예를 소유할 만큼 충분히 부유했다면, 그는
노예들을 통해 육체에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자유롭게 어떤 위대하고 고귀한 일을 성취하여 명예로운 삶을 추구
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인권 개념을 지지하는 현대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노
동 문제에 대한 이 고대의 해결책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고대의 해결책이 자연
5) Hannah Arendt, The Human Condi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8), p. 19.
그 자체의 질서에 근본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노예로 태어났다. 그들은 누구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이성적인 사고와 숙고의 능력이 미숙한 사람들, 말하자면, 바보들이다. 특히 크고 약간 구부러진 몸을 가진 이들 말이다. 이 사 람들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노예”라고 불렀다.6) 그들은 가정의
사적 영역 안에서 생산적 노동( the productive work, 저자는 육체적인 필요
를 채우기 위해 무엇을 생산하는 일을, 관조와 대비되는 것으로 명명한다-옮긴이 ) 에
종사함으로써, 자체적으로 부유한 유한계급( 有閑階級, 이는 영어 the leisure class의 번역어로, 말 그대로 노는 계급, 여가를 즐기는 계급이라는 말이다-옮
긴이 ) 구성원들이 공적 공간 안에서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무익함에 대한 그리스의 해결책은 결코
온전한 민주적 해결책이 아니었다. 부자와 권력자만이 노동의 필요
성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나머지는 강제로 노동을 선고받았다. 한
6) Aristotle, Politics, I.v.8.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노예 제도를 변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노예 제도는 고대 세계
에서 거의 의문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노예 제도가 정당
하지 않다면, 왜 노예 제도가 정당화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관심을 가졌다. 아
테네에는 노예 제도가 관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
지만, 어떤 사람들은 강제로 노예가 되는 특별한 불행을 겪었다. (전쟁 포로들은
종종 집으로 끌려와 노예로 팔렸다.) 이런 “권력이 권리를 만든다”는 입장에 반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제도가 정당화되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은 선천
적으로 노예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는 말이다. 이로부터 실제로 노예가 된 모든 사람이 노예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
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노예 개념이 가진 모순들에 대해
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R. G. Mulgan, Aristotle’s Political 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pp. 40-44.
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한다. “강제로 노동의 필요성에 종속되었던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 노예로 떨어지는 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의 불행이
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을 길들이듯이 사람을 짐승으로 변형시
키는 것을 동반했기 때문이다.”7) 소수의 불멸성은 다수의 희생을
통해 획득될 수 있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 영역에서의 실
천적( practical ) 활동의 삶이 경제에서의 생산적( productive ) 노동의 삶 보다 확실히 우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높은 삶의 방식,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잠재력이 실현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곧 정신적인 관조적 또는 관
상적( contemplative ) 삶이다. 실천적 삶이 아닌 관조적 삶을 통해 우리
는 신적인 삶의 참모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인간의 가장 높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 대해 우리가 의문이 드는 것은, 과연 그들은
무엇을 그런 관조적 삶 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으로 발견했을
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직업 없는 삶에 어떤 좋은 것이 있는 것인
가? 아마도 어떤 이는 푸른 에게해에서 수상 스키를 타거나 미코노
스의 밝고 상쾌한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면서 여가를 보낼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여가의 적절한 사용이 무엇인지
가 문제다. 수상 스키와 일광욕은 오늘날 쾌락을 좇는 사람들에게
7) Arendt, Human Condition, p. 84.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쾌락
추구를 인간다운 삶으로 여기지 않았다.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동물 행동의 원리일 뿐, 인간 행동의 원리는 아니다. 왜
냐하면 인간 영혼의 가장 뛰어나고 결정적인 특징은 단지 즐거운
감각을 위한 능력이 아니라 지식을 위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인간
은 결국 “이성적인 동물”, 즉 사고와 언어 능력을 가진 생명체다.
따라서 외부의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활동은
바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서 볼 때,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풀 뜯어 먹는 동물들”을 위해
설계된 삶을 사는 것이다.8) 플라톤은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소
처럼 항상 머리를 땅에 구부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좀 적
나라하게 말해, “그들은 잔칫상에서 먹이를 먹고 살을 찌우고 음행
을 저지른다.” 9) 그러나 인간다운 삶이란 철학적 지식을 고상하고
기강 있게 추구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는 그런
그런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는 신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기 있는 모험가(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묵인하고, 복수하는 등 ) 로 생각하지 않고, 열정에 따라 자극받는
그런 행동들을 지속해서 하는 존재들로 생각했다. 오히려 아리스토
텔레스는 신들을 먼 하늘에 움직이지 않는 순수한, 자충족적인, 정
8)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I.5.
9) Plato, Republic, 586a.
신적 실체들로 생각했다. 자기 안에 완전하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신들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필요가 없다. 실천적 삶은 그들
과 거리가 멀다.10) 오히려 신들은 관조적 사고에 특화되어 있다. 이
런 의미에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관조할 수 있게 해 주는 이성이
야말로 인간 안에 있는 가장 고상하고 신성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최고의 요소를 드러내기
위한 삶을 온 힘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11) 그가 자신의 정
치학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본질적으로 ( 영혼의 ) 더 높은 부분의 활
동을 선호해야”12) 한다. 우리가 관조적인 사고를 하는 정도와 시간
만큼, 우리는 신과 같이 되어 신의 평온하고 자충족적인 지복지선
의 상태에 참여하게 된다.
관조적인 삶에 비교하면, 정치 참여의 실천적 삶은 살짝 아래에
위치한다. 이 삶은 생산적인 삶보다 우월하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는 그 자체로 깊은 결함이 있다. 명성, 명예, 영광과 같은 선은 군중
의 변덕스럽고 가변적인 의견에 너무 의존적이다. 아마도 이 사실
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의 격동의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10)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X.8.
11) 같은 책, X.7.
12) Aristotle, Politics, VII.xiv.13.
13) 다음을 보라. Friedrich Solrnsen, “Greek Ideas About Leisure,” in The Wingspread Lectures in the Humanities (Racine, WI: The Johnson Foundation, 1966), p. 28.
제할 수 없다. 또한 우리가 죽은 후에는 우리의 명성과 명예를 방어
하는 데 있어 무능력하다. 게다가 명예를 자랑스럽게 추구하는 데
보내는 삶은 철학자의 겸손한 삶보다 더 많은 부, 더 많은 친구,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아름다움을 외적 수단으로 요구한다. 곰곰이 생
각해 보면 실천적 삶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에 지나치게
의존되어 있다.14) 내일 우리는 주식 시장에서 큰 재산을 잃을 수도
있고 자동차 사고로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철학적 삶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철학적 삶은 목표 달성을 위한 외부 환경에 덜
의존적이고, 그래서 덜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다.”15)
그런 인간의 활동은 행복의 성격을 가
그러나 이생에서 우리와 신들 사이에는 항상 상당한 차이가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 때문에 힘겨움을 느끼지만, 신들
은 그렇지 않다. 희소한 비물질적인 실체들로서의 신들은 전적으로
자충족적이다. 우리와 달리, 신들은 충분히 먹을 식량과 겨울옷을
확보하는 것이나 치솟는 공과금 때문에 절대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더욱이, 신들은 생각할 것을 찾기 위해 결코 자신의 외부로 나갈 필
요가 없다. 왜냐하면 신들의 마음에는 가능한 모든 생각 대상들을
스스로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 마음은
14)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X.8.
15) 같은 책.
신들보다 훨씬 열등하다. 필멸의 존재인 우리는 대체로 무지한 상
태에서 삶을 시작하며, 우리가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첫 번째 원리에 대한 지식은 오직 몸의 감각 경험에 대해 길고 힘든
일련의 정신적 작업이 수행된 후에만 온다. 이런 일을 위해, 신체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몸이 지식을 생산
하는 데 필요한 원료를 정신에 공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은 또 한 마음의 방해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몸은 전혀 자급자족하지
않으며, 관조로 말미암는 행복을 성취하려는 우리 시도를 정기적으
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하기 위해 앉은 지 얼마 되지 않
아, 허기지거나 춥거나 졸려 한다. 우리의 관상에 대한 계획은 신체
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때문에 중단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런 필
요를 정기적으로 몸에 공급하기 위해 상당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를
일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자충족적이지 않으므로, 필연적으로 인간 사회 안에서 일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필
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연에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
른 사람들과도 협력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대하다
가 완전히 짜증 날 수도 있다. 따라서 철학적 삶이 참으로 가능해지
려면, 육체의 필요를 돌보는 노예들의 노동뿐 아니라 국가의 필요
를 돌보는 정치인들의 활동도 필요하다. 철학자는 강제 노동과 사
회적 안정이라는 보호벽으로 둘러싸여 자연적・정치적 필요들의 침
입으로부터 보호받을 때만,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영원한
중요한 문제들에 돌릴 수 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생활의 이상적인 기관으로서 염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