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자연법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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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서문 9

│감사의 글 12

1장 자연법

2장 의미와

3장 자연법과

4장 자연법,

5장 그리스도인의

│추천 도서 163

1장 자연법 소개

자연법이란 모든 인간이 육체적 감각, 지성, 양심을 통해 알고 있으

나 죄악스럽게 이 지식에 다양한 정도로 저항하는, 창조 질서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법을 말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자연법은 기독교 신

학과 윤리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자연법이 없다면 기독교는 의미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복음, 도

덕적 삶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이 과장되거나 지나치게 극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 책

은 전체적으로 이런 주장을 설명하고 변호하겠지만 우선 몇 가지 사항을 먼저 고찰하겠다.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위대한 고백 중 하나는 하나님이 온 세

상의 심판자며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의롭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몇 가지 다른 진리가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은 전지하셔서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한 모든 관련 사실을 알고 계셔

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신의 하늘 법정

에 소환하고 모든 반대를 극복할 수 있으셔야 한다. 또한 모든 사람

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책임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잘못이라고 알 길이 없는 행동으로 인간을 심판하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으실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듣고 읽었는데, 하나

님은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수많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어떤 근거로 이들을 심판하실 것

인가? 자연법은 창조 세계에서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

진 하나님의 법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

로 이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자연법은 하나님이 어떻게 온 세상 사

람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하시는지를 설명한다. 자연

법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정당한 근거가 없을 것이다.

또는 기독교의 핵심과 관련된 문제를 생각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통해 성취되고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죄인을 위한 구원을 선포한다. 이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율법과 구별되지만(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를 알려 주고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려 주므로 ), 복음

은 율법 없이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에게

자기의 불순종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구원이나 복음의 메시지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복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기쁜 소식이며 온 세 상 사람에게 관련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 롬

1:16 ).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성경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선교사

자연법 입문

를 파송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길을 잃고 정죄를 받았다고 가정한다. 하나님의 법

은 성경이 전해지기 전에 그들에게도 이미 전해졌어야 한다. 이렇

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법은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관련이 있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더 나아가 자연법의 실체가 없다면 기독교인은 세상의 도덕적 삶

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인은 정의로운 것을 지지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은 또한 정

의란 단순히 정부가 정의롭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정부 관료는 종종 불의를 저지르는 최악의 가해자이므로 정

의를 증진하려면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

량 학살, 전쟁 범죄, 또는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국제 재판에 넘겨진

독재자의 악명 높은 사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뉘른

베르크 재판에서 나치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 국가의 관료가 다른

국가의 관료를 기소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 독재자들이 실

제로 자국의 공식적인 ‘법’을 따랐다면 어떤 법에 따라 이들에게 판

결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모든 민법의 근간이 되어야 하는 법, 즉 그 사회의 ‘법’이 달리 지시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할 의

무가 있는 법의 실체에 달려 있다. 자연법 외에 어떤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 일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 기독교인은 시민 사회의 일원이며 해당 사회의 평화와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렘 29:7 ). 그리

스도는 자신의 백성에게 기독교를 강제로 강요할 수 있는 칼을 주

지 않으셨으므로, 기독교인은 선한 것을 증진하기 위해 불신자와

함께 살며 협력해야 한다. 이웃이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 기독교인

은 이웃이 세상사에서 어떻게 처신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기독

교인은 믿지 않는 이웃이 세례를 받거나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도둑질보다는 일을 하고, 동거보다는

결혼을 하고, 낙태보다는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나쁜 후보보다는 좋

은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떻게 비기독교인과 이런 주제에 대해 의미 있는 도덕

적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 이웃을 설득하

기 위해 성경 구절에만 호소한다면, 이런 도덕적 문제가 그저 기독

교적인 것, 즉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그다지 미

묘하지 않은 암시를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일, 결혼, 육아는 단순히

기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다. 이런 문제들은 모든 인

간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지상 공동체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

는 사안과 관련이 있다. 자연법 없이는 이런 도덕적 문제가 왜 성경

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읽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도 관련이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법의 실체는 기

독교인이 믿지 않는 이웃에게 단순히 성경을 인용하는 것 외의 방

법으로 도덕적 호소를 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 책의 기획

우리는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모든 문제를 더 자세히 살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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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 입문

이다. 그러나 이 첫 논의를 통해 자연법이 기독교 신학과 윤리에 왜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되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손에 든 이 책은 그처럼 흥미롭고 실용적인 주제를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일차적으로 기독교인이 자연법이 무엇이며 왜 중요한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비기독교인에게 자연

법이 존재한다고 설득하거나 특정 도덕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

을 바꾸려 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일부 비기독교인도 이 책을 읽고

자연법에 대한 기독교인의 생각을 알아보려는 데 관심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이 책이 나쁜 도덕관을 가진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논증을 하기 위한 조언을 기독교인에게 해 주는 사용

설명서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그렇게 한다고 주장

하는 책은 아마도 거짓 약속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

이 자연법을 통해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

을 가질 것인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지만 자연법을 토론에 서 사람들을 훌륭하게 보이게 하는 빠르고 손쉬운 도구로 바꾸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대신 우리는 성경 자체가 자연법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성경의 정경 전체는 참되고 권위가 있는데, 이 책은 성

경을 그런 책으로 대한다. 성경은 ‘자연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법의 실체를 반복해 언급하거나 그

존재를 가정한다. 자연법의 존재는 성경이 하나님의 본성, 우주의

질서, 하나님의 형상, 인간 공동체, 그리스도의 복음, 마지막 심판에

대해 말하는 내용의 근간이 된다. 이뿐 아니라, 원래 창조에서 새 창

조에 이르는 성경의 이야기는 자연법 없이는 함께 유지될 수 없다.

이 책은 기독교인이 성경과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서 자연법이 차지

하는 이 중추적인 역할을 이해하도록 돕길 바란다. 이 책이 이 목표

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은 성경과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또

한 나는 여러분이 지상 공동체에서 자기의 위치와 그 안에서 정의

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

게 되길 바란다.

2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대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질

서 있고 의미 있는 우주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자연

법은 이 질서와 의미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3장에서는 자연법에 대

한 지식이 점점 더 우리 공동체와 닮아 가는 이교도 시민 공동체에

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여러 성경 본문을 숙고한다. 하나님

은 이 지식을 사용해 죄의 완전한 영향을 억제하고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신다. 그런 다음 4장에서는 자연법에 대한 지식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그분의 심판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

해 고찰한다. 이런 지식은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관련이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보장하기도 한다. 5장에서는 성경이 그 리스도인의 일차적인 도덕적 표준이기는 하지만 자연법까지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 겠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우리가 자연법이 요구하는 바를 어떻

게 알게 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불신 자와 소통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조사한다.

이번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자연법의 몇 가지 측면을 밝히겠다.

자연법 입문

또한 자연법을 믿는 게 자기의 기독교적 신념을 교묘하게 배반할

수 있다는 지속적인 의구심을 품고 있을지도 모를 독자를 안심시키 려 한다.

자연 계시와 자연법 이론

나는 이 책이 옹호하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연

법’이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 자연법에 반대하는 사람을

수년간 수없이 만나보았다. 물론 사람들이 ‘자연법’을 정의하는 최

고의 방법에 대해 이견을 보이는 것은 정당할 수 있으나, 우리는 우

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명확히 해야 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자

연법과 자연 계시의 관계를 명확히 한 다음 자연법과 자연법 이론을 구분하겠다.

첫째, 그래서 나는 자연법을 자연 계시의 일면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나는 사람들이 자연법보다는 자연 계시를 믿는다고 말하

는 것을 가끔 듣는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하나님이 자

연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의지를 계시하신다고 믿지만 자연법은 이

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자연 속에 나타나는 하

나님의 도덕적 의지에 대한 계시가 바로 자연법이라고 제안하는 것 이다. 우리가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자연 계시의 개념을 받아들

인다면 자연법도 믿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연 계시란 하나님이 창조 질서를 통해 진리를 알려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특별 계시에서는 하나님이 이적, 예

언의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진리를 알려 주셨다. 성경

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으므로 특별 계시

의 한 예다. 그러나 성경 자체도 자연에 하나님의 계시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유명한 예는 시편 19편 1절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

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로마서

1장 18-32절은 또 다른 예다. 이 본문은 자연법이 실제로 자연 계시

의 일면인 이유를 보여 준다.

로마서 1장 18-32절은 자연 계시가 알려 주는 두 가지를 명시하

는데, 즉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이다.

이중 첫 번째는 본문의 시작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하

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1:19 ) 라고 말하는데, 그들

이란 자신이 방금 언급한 불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1:18 ).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으며”( 1:19 ) 하나님의 “보이지 아

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 1:20 ) 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또한 죄 많은 인

간이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알았다”( 1:21 ) 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창조 질서를 관찰하고 숙고하는 것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지식을 정말 알고 있다. 이런 이유

로 바울은 사람들이 “핑계하지 못한다”( 1:20 ) 라고 결론짓는다. 이 마

지막 진술은 자연 계시가 도덕적 책임을 수반한다는 것을 나타 낸다. 즉,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의무가

있으며 그들이 이것을 알고 있다. 자연 계시의 이런 도덕적 차원은

자연법 입문

이어지는 구절에서 더 분명해진다.

바울은 우상 숭배( 1:22-23 ) 와 동성애 행위( 1:24-27 ) 로 시작해 다양 한 범죄의 긴 목록( 1:28-31 ) 으로 절정에 이르는 많은 죄를 언급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1:32 ) 라고 결론짓는다. 이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단순히 자연 계시를 통해 아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정말 알고 있다. 이들이 아는 것은 방금 열거한 죄를 짓

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

렇더라도 이들은 그런 일을 계속하고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

을 지지한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따르면 자연 계시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

식과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 사항에 대한 지식이라는 두 가지 진리

를 전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본문만 보더라도 자연 계시가 하

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으로 불리는 것뿐 아니라 자연법도 포함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 계시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 사항을 언급하기 위해 “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

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 로마서 2장은 이것이 사용하기에 적절한

용어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모든 사람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한다( 2:12-16 ). 바울은 심지

어 하나님의 기록된( 성경적 ) 법이 없는 이방인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

1장 ┃ 자연법 소개 23

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다”( 2:14-15 ) 라는 것을 보

여 준다.

왜 우리가 자연 계시와 자연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 있을까? 혼란의 한 원인은 많은 기독교 신학자가 자연

법을 인간의 이성과 관련지어 왔기 때문일 수 있다. 중세 신학자 토

마스 아퀴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

퀴나스는 “자연 이성의 빛으로……우리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

인지를 분별하는데, 이것이 자연법의 기능”이라고 말했다.1) 이 진술

은 자연법이 우리 자신의 이성이 선포하는 것이거나 심지어 이성

자체가 자연법과 일치한다는 인상을 남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점

을 이해하는 훨씬 더 좋은 ( 그리고 아퀴나스 자신의 견해에 더 충실한 ) 방법

은 이성이 우리가 그것을 통해 자연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인간

의 능력 중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적 감각은 자연 계시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이성은 자

연 계시를 숙고하며, 우리의 양심은 자연 계시를 판단한다. 자연법

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성은 우리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연

법을 계시하시고, 우리의 이성은 자연법을 숙고하여 이것에 대한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 이성은 성경의 법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역할

을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기의 법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의 법을 숙고하고 해석한다.

1) Summa Theologize 1a2ae 91.2. 영어 번역은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5 vols., trans. Fathers of the English Dominican Province (Allen, TX: Christian Classics, 1981).

자연법 입문

이 부분에서 두 번째로 명확히 하려는 것은 자연법과 자연법 이론

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앞서 자연법과 이성을 구별한 것과 크게 비 슷하다.

어떤 저자의 자연법 이론이 이해되지 않거나 어떤 연사가 어리석

게 들리는 ‘자연법 논증’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면 자연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

게 하는 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연법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오류다. 어떤 사람이 쇼

팽의 녹턴을 연주하려다가 끔찍한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녹턴이

나쁜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더 정곡을 찌르면, 어떤 설교

자가 주일 강단에서 성경 본문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한다고

해서 해당 본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음악과 성경 본

문을 연주하거나 설교하려는 사람과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자연법

도 자연법에 대한 특정 이론과 구별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연법’을 근거로 당황스러운 주장을 하거나 설득력이

없는 자연법 이론을 개발할 수 있다. 우리는 자연법적 논증과 이론

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이것이 자연법 자체에 문

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할 때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

님의 계시를 잘못 다루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비판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1장 ┃ 자연법 소개 25

자연법, 로마 가톨릭, 종교개혁

자연법 문제가 제기될 때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또 다른 문제를

다루는 게 현명해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법이 로마 가톨릭의 개념

인가, 그렇다면 자연법을 수용하는 개신교인이 자기의 신학적 신념

중 일부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것 이다.

일부 독자가 그렇지 않다고 의심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지만 절

대로 그렇지 않다. 어쨌거나 로마 가톨릭 전통이 자연법을 일관되

게 긍정하고 자연법적 추론을 통해 윤리적 가르침의 상당 부분을

발전시켜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뿐 아니라, 대부분의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와 윤리학자는 자연법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

연법에 관심을 두더라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20세기 로마 가

톨릭의 윤리 저작 몇 편을 무작위로 골라 20세기 개신교의 윤리 저

작 몇 편과 비교하는 사람은 로마 가톨릭이 자연법에서, 개신교가

성경에서 윤리를 얻는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몇 가지 타당한 신학적 우려도 자연법에 대한 개신교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 또는 적어도 개혁파와 루터파

전통의 개신교 ) 에 비해 인간의 죄성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자연법 이론은 인간의 이성이 알아낼 수 있는 것에 대한 순진 하고 낙관적인 견해에 의존하는 듯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죄인이 성경과 종교개혁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타락했다면 이런 낙관

론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신학적 우려는 로마 가톨릭이

자연법 입문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경 ) 교리를 확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

경이 참으로 충분하다면 자연법에 대한 윤리적 호소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호소는 성경에 대한

신뢰 부족을 반영하는 게 아닐까?

21세기에 접어든 직후, 개신교 신자 사이에서 자연법에 대한 관심

이 르네상스처럼 번졌다.2) 그러나 이 르네상스를 촉진한 일부 개신

교 신자도 자연법이 로마 가톨릭의 사상이라는 생각을 의도하지 않

게 강화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주로 로마 가톨릭 저자들에 대한 논

의를 통해 자연법을 제시했는데, 사실상 개신교 신자가 개신교 신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을 따라가고 긍정해야 한다고 제안함으로

써 그렇게 했다.3)

하지만 개신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연법을 긍

정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 신자는 개신교 신자이므로 자연법을 긍정

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먼저 성경이 자연법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으

므로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간략하게 설명했는데,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하지만 여기서 기본적인 요점은 이

2) 더 이전에 나온 더 큰 논문으로는 다음을 보라. NLTK; Stephen J. Grabill, Rediscovering the Natural Law in Reformed Theological Ethics (Grand Rapids: Eerdmans, 2006); J. Daryl Charles, Retrieving the Natural Law:A Return to Moral First Things (Grand Rapids: Eerdmans, 2008); Robert C. Baker and Roland Cap Ehlke, eds., Natural Law:A Lutheran Reappraisal (St. Louis: Concordia, 2011).

3) 내 판단으로는 Charles, Retrieving the Natural Law도 마찬가지다.

것인데, 개신교 신자는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삶에 대한 최고의 권

위라고 믿으며 성경은 자연법의 실재와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

므로, 개신교 신자가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려면 자연법을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신교 신자가 개신교 신자로서 자연법을 긍정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개신교 신자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해 왔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주요 개혁가들은 자연법에 반복적으로 호소했다. 예를

들어, 마르틴 루터는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일”( 롬 2:14-15 ) 에 대한

바울의 진술을 자연법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했다.4) 루터는 또한 자

연법이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다고 믿었다.5) 다른 곳에서 루터는 자

연법을 인간의 법체계보다 더 높은 법으로 묘사했다.6) 그런 다음 루

터는 그리스도인은 모세 율법이 “신약과 자연법 모두와 일치할 때”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7) 자연법에 대한 존 칼빈의 많은 주석에도

비슷한 정서가 드러난다. 칼빈은 로마서 2장 14-15절을 주석할 때,

4) 다음 예를 보라. 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in Luther’s Works, vol. 25, ed. Hilton C. Oswald (St. Louis: Concordia, 1972), 186–187;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 in Luther’s Works, vol. 40, ed. Conrad Bergendoff (Philadelphia: Fortress, 1958), 97.

5) 다음 예를 보라. Luther,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98; “How Christians Should Regard Moses,” in Luther’s Works, vol. 35, ed. E. Theodore Bachmann (Philadelphia: Fortress, 1960), 172–173.

6) 다음 예를 보라. Martin Luther, “Temporal Authority: To What Extent It Should Be Obeyed,” in Luther’s Works, vol. 45, ed. Walther I. Brandt (Philadelphia: Muhlenberg, 1962), 127–128.

7) 다음 예를 보라. Luther, “How Christians Should Regard Moses,” 165.

자연법 입문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과 의지에 “각인”되고 “새겨져” 있으며 사람

이 양심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8) 칼빈은 이 각인된 법

을 “도덕법”과 십계명의 교훈과 동일시했다.9) 칼빈은 또한 자연법

이 모든 인간 민법의 표준이 되어야 하지만, 때와 장소에 맞게 유연 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10) 인간의 법체계는 모세 율법의

사법 규정이 아닌 자연법을 따라야 한다.11)

후대의 개신교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옹호했지만, 좀 더 깊이

있고 엄밀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7세기

의 저명한 개혁파 스콜라 신학자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는 자연

법을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에 각인시키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법은 “옳고 그름의 차이”를 표현하며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의 실천

적 원리”를 담고 있다. 투레티누스는 자연법의 증거가 “죄 때문에

부패하고 가려졌다”라고 인정했지만, 그렇더라도 “이 법의 많은 잔

존물과 증거가 여전히 우리 본성 속에 남아 있어서……그 힘을 어

느 정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다”라고 말했다.12) 투레티누스에

8)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trans. and ed. John Owen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9; Grand Rapids: Baker, 2003), 97–99.

9) 다음 예를 보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3.1; 1.3.3; 2.2.14; 2.2.22; 2.8.1; 4.20.16.

10) 다음 예를 보라. Calvin, Institutes, 4.20.16.

11) 다음 예를 보라. Calvin, 4.20.14–16.

12)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2, Eleventh through Seventeenth Topics, trans. George Musgrave Giger, ed. James T. Dennison Jr. (Phillipsburg, NJ: P&R, 1992), 3.

게는 자연법이 “정의와 불의의 규칙”이어서 인간 입법자가 재량에

따라 이것을 구체적인 법률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13) 이런 입법자는

“모세 사법법이 자연법에 동의하고 자연법에 기초한 경우에만” 모

세 사법법을 부과할 수 있다.14)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은 자연법이 특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이것

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자연법은

기독교 사상에서 일반적인 주제였다. 초대 교회의 중요 사상가들은

자연법의 개념을 장려했다.15) 심지어 여러 가지 중요한 면에서 신학

이 달랐던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컴도 자연법

이 존재한다는 점, 인간이 자연법에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점, 자연

법이 인간 민법의 적절한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 동의했다.16) 신학

자들이 오랫동안 자연법을 긍정했으므로 초기 개신교 신자는 자연

법을 기독교 신학과 윤리의 표준으로 여겼다. 물론 종교 개혁가들

은 중세 신학의 많은 측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심각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믿었으나, 모든 교리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13) Turretin, 2:2, 167.

14) Turretin, 2:167.

15) 다음 예를 보라. Lactantius, The Divine Institutes, VI.8, in The Fathers of the Church, vol. 49, trans. Sister Mary Francis McDonald, OP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1964), 411–413; The Etymologies of Isidore of Seville, ed. Stephen A. Barney et 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117 (V.ii–iv).

16) 이런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논의와 이런 점에 대한 그들의 작품 인용에 대 해서는 NLTK, 43-55를 보라.

자연법 입문

는 않았다. 종교 개혁가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 한 인격 속

그리스도의 두 본성 같은 핵심적 사안에 대해서는 중세 신학자들이

초대 교회와 성경 자체와 연속성을 지닌 정통 견해를 고수하고 있

음을 인정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이런 교리들을 바꾸는 데 전혀 관

심이 없었다. 자연법도 이 범주에 속한다. 초기 개신교 신학자들은

자연법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했지만, 대부분은 교회가 이미

오랫동안 확증해 온 것을 단순히 재확인했을 뿐이다.

이것은 오늘날 개신교 신자에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종 교 개혁가들은 스스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니라, 그리스

도가 지옥의 공격에서부터 보호하고 세우기로 약속하신 하나의 교

회를 개혁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마 16:18-19 ). 종교 개혁가들은 자기

의 신학이 어떻게 성경과 일치할 뿐 아니라, 교회사를 통틀어 위대 한 신학자들과 교회의 신앙고백과도 일치하는지에 주의하기를 좋

아했다. 개신교 신자인 우리는 교부 신학과 중세 신학을 우리 역사

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현대 개신교 신자는 자연법을 신학과 윤

리의 일부로 인정할 때 자기의 개신교 전통뿐 아니라 그 이전의 전

통, 즉 성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독자는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문제에 대해 여전히

궁금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자연법에 호소하는 것이 인간의 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을 반영하고 성경의 충족성을 거부하

는 태도는 아닌가? 다음은 이런 정당한 우려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인데, 이 문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더 자

세히 다루겠다.

첫째, 죄의 깊이와 미혹은 자연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능

력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자연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과

의로우심을 계속 선포한다. 인간의 반역은 자연법이 존재한다는 사

실과 자연법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 의무를 우리 마음에 각

인시킨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자연법에 대한 죄인의 반응은

복잡하다. 로마서 1장 18-32절은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창조 질

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알고 있으며 ( 1:19-20 ), 긴 목록에

나열된 죄를 지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함을 알고 있다 고 가르

친다( 1:28-32 ). 다른 한편으로, 죄인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자연적 지

식에 저항하며( 1:18, 21 ), 죽음에 합당한 죄를 계속 자행한다( 1:32 ). 로

마서 1장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세상 경험과 일치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고귀하고 생산적인 일도 많이 하지만 끔찍하고 파괴적인 일

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아는 하나

님의 형상 소유자임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죄가 그들의 삶 속에서

작용한 타락을 보여 준다.

이런 사실 때문에 자연법을 균형 있게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하

나님의 불가사의한 섭리가 이 죄 많은 세상을 다스리고 자연법의

증거를 사용해 우리 사회에 선한 많은 것을 증진하는 방식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도덕적 문제에서

자연법적 논증으로 사람들을 현혹함으로써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바에 대해 순진하게 낙관해서는 안 된다. 이어지는 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성경 연구에서 이 두 가지 점을 강조하겠다.

둘째, 자연법의 중요성을 긍정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솔라 스크립

32

자연법 입문

투라’( 오직 성경 ) 라는 관념과 상충하지 않는다. 솔라 스크립투라는 성

경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며, 지식의 다른

원천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솔라 스크립투라

는 성경이 특별 계시의 충분한 원천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기독

교인에게는 하나님이 선지자나 사도나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 영감

으로 주시는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지 않다.17) 성경은 기독교인의 최

고 표준이자 유일하게 무오류한 권위다. 하지만 솔라 스크립투라는

자연 계시가 불필요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장하는 태도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경 자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우

리가 모든 종류의 것을 알고 있다고 추정한다.18) 성경은 해, 달, 별, 새, 물고기, 말, 애굽, 바벨론, 요단강 등을 언급한다. 자연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성경은

우리에게 의미가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경은 독

자가 자연 세계에서 도덕적 삶에 대해 배우도록 지시한다. 예를 들

어, 잠언은 창조 질서를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8:2231 ), 우리에게 개미에게로 가서 지혜로워지라고 지시한다( 6:6-11 ).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은 우리가 모두 자연 세계에 더 욱더 주의를 기울이고 자연법을 배우고 따르려는 열망을 갖게 해야

1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충족성을 설명할 때 “성령의 새로운 계시 에 의해서든 인간의 전통에 의해서든”(1.6) 성경에 어떤 것도 추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18) 참고. Matthew Barrett, God’s Word Alone: The Authority of Scripture (Grand Rapids: Zondervan, 2016, 『오직 하나님의 말씀』, 부흥과개혁사 역 간, 2018), 337–339.

2장

의미와 목적이 있는 세상

앞장에서 설명한 대로, 자연법이란 하나님의 도덕적 의지가 자연

창조 질서를 통해 인간에게 계시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연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

를 말해 준다. 세상은 의미와 목적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이 의미와

목적을 파악할 수 있는 종류의 피조물이어야 한다. 무작위적이고

혼란스러운 세상이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무

언가를 전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질문이다. 자연법에 대한 글을 쓴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자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논란의 여지가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에 의미와

목적을 심어 주셨으며 인간을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만 드셨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 우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

의미와 목적이 있으며, 그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따라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책임이다. 그들은 이른바 전 현대적인 문화 속에

서 살았다.

세상에 대한 문화적 가정은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와 종종 관련지

어 생각되는 현대성의 부상과 함께 변화했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은 세상에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 의미가 있더라도, 이런 사상가들은 인간이

그 의미를 지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사상가들에게

는 인간이 세상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투영하거나

강요하는 존재였다. 현대 초기에도 많은 저자가 계속 자연법에 대해

말했으나,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만 남긴 형태였다. 그들은 우

리가 모두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세상에 같은 종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성에 기반한 보편적인 인간 윤

리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1)

그러나 지난 세기 동안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상하면서 가

정은 다시 바뀌었다. 포스트모던 문화는 세상이 본질적으로 의미

있다는 확신이 부족할 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이성의 실체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각 개인이나 공동

체가 세상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한다. 누군가의 의미가 선한지 악

1) 예를 들어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정서를 많이 표현했다. 다음을 보라. Kant, Groundwork for the Metaphysics of Morals, ed. Allen W. Woo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2).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자연법에 대해서

는 특히 다음을 보라. Knud Haakonssen, Natural Law and Moral Philosophy: From Grotius to the Scottish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자연법 입문

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

는다. 우리가 오늘날 관용에 관한 주장을 많이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관용이 일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 세상에 의미나 목적이 없고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합리성이 없다면, 개인과 공동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관용하고 심지어 축하해야 하는 게 논리에 맞다. 이런

상황은 정체성 정치의 부상도 설명한다. 사람들이 그들만의 의미를

만들게 내버려 두면 비슷한 방식으로 의미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게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그리하여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함

께 모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집단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그럴수록 사회적 응집력은 점점 더 약해 진다.

진화 철학도 의미 있는 세계에 대한 현대의 자신감 상실에 이바

지한다. 나는 자연에 진화가 있다( 분명히 있다 ) 는 일반적인 생각을 말

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항상 목적 없는 진화적 흐름의 상태에

있었다는 더 큰 철학적 생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세한 다윈주의

적 체계에 따르면, 세상은 무언가를 향해 진화하거나 초자연적인 존

재 또는 영향력의 인도를 받는 게 아니다.2) 진화는 무작위적이며 어 떤 목표도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법에 대한 호소가 종종 당혹감이나 적대감

에 부딪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2) 다음 예를 보라. Ernst Mayr, What Evolution Is (New York: Basic, 2001), 75–76.

삶에서 의미를 찾고 있으며, 삶에서 의미가 없을 때 절망을 느낀다.

이 사실은 세상이 의미가 없다면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의미 없

는 우주에서 의미 없는 존재가 왜 삶의 의미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의미에 대한 이런 갈망은 자연법칙이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작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것은 또한 의미 있는 세상을 여전히 믿

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소통의 가능성도

열어 준다.

책의 초반부에 이런 사안을 고려하는 게 적절하다. 따라서 이번

장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숙고하는 작업으로 시작한다. 특히 창

세기 1장과 잠언 8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참으로 의미와 목

적이 있게 만드셨으며, 자기 형상 소유자들이 이 세상을 이해하기

에 적합하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겠다. 그런 다음 성경이 타

락한 세상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숙고하고, 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목적이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관찰하겠다. 이번 장

은 세상이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자연법에 대한 추가 증거를 제

시하면서도 쉽게 간과되는 성경 본문을 탐구함으로써 마무리한다.

원래 창조 질서

창세기 1장은 시작하기에 명확한 본문이다. 특히 다음 세 가지 사

항은 주목해야 할 중요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이 만물

을 적절한 자리에 두신 방법, 하나님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는 사

물을 창조하신 방법,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을 선하게 만드신 방법

자연법 입문

이다. 먼저 인간이 아닌 창조와 관련해 이 세 가지 사항을 고찰해

보자.

창세기 1장에서는 모든 단계에서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두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질서 있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먼저 하나님이 빛을 만드셔서 어둠과 분리하셨고( 1:4 ),

나중에 이 분리 작업을 위해 하늘의 빛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1:14-15, 17 ). 빛과 어둠은 하나님의 질서에서 각자의 자리를 차

지했다. 위의 물과 아래의 물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이 “궁창”을

창조하여 그 둘을 서로 분리하셨기 때문이다( 1:6-7 ). 하나님은 또한

마른 땅과 구분하기 위해 아래의 물도 한곳으로 모으셨다( 1:9 ). 궁창

과 바다와 땅은 모두 각자의 적절한 자리가 있었으며, 각각은 특정

종류의 생물에게 적절한 거처를 제공했다. 하나님은 물을 위해

바다 생물을, 하늘 궁창을 위해 새를( 1:20-21 ), 땅을 위해 가축과 짐

승을 만드셨다( 1:24-25 ). 무작위적이거나 임의적인 것은 없었다. 하

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시는 곳에 두셨다. 본문은 하나님이

다양한 생물을 “각기 종류대로”( 1:11, 21, 24-25 ) 창조하셨다고 말함으

로써 이 점을 강조한다. 생물의 종류와 상호 관계는 하나님의 기본 계획에 따라 존재한다.

하나님은 이 완벽한 질서 안에서 자기 피조물에게 해야 할 일을 주셨다. 따라서 피조물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먼저 궁창

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물과 물로 나뉘라”( 1:6 ). 하나님이 “풀을 내도록”( 1:11-12 ) 만드신 마른 땅과 마찬가지로, “낮과 밤을 나

뉘게 하여”( 1:14-18 ) 시간의 흐름에 대한 표지가 되고 땅을 비추고 낮

과 밤을 주관하는 궁창의 광명체들도 마찬가지다. 바다와 땅도 물

고기가 번성하고( 1:20-21 ) 땅의 생물을 낳는( 1:24 ) 임무를 받았다. 하

나님은 이런 피조물들이 이성이 없어서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순종

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이들에게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지 않 으셨다. 이런 피조물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러나 이

런 다양한 진술은 세상이 철저하게 목적이 있음을 나타낸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훌륭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이유로 존재 한다.

하나님이 고유한 일을 부여하여 만물을 적재적소에 두셨다면 자

연 질서가 지극히 훌륭해야 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 사실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남기지 않는다.

본문은 인간이 아닌 피조물의 창조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친히

만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1:4, 10, 12, 18, 21, 25 ) 라고 여

섯 번이나 말씀하셨다고 우리에게 전한다.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분인데, 하나님의 작품은 이 선하심을 반영하고 구현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마찬가지며 더 고양된 방

식으로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지 동물과 함께 공유하는 적절

한 장소( 즉, 땅 ) 에 두셨다( 1:28 ).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그들의 종

류대로 만드신 게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

로”( 1:26 ) 만드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사람을 창조

하시고”( 1:27 ).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특별하게 반영하기 위해 이

세상에 속해 있다( 참고. 시 8:5 ). 하나님은 또한 인간에게 해야 할 일

도 주셨다. 하나님은 한 목적을 위해 인간을 형상 소유자로 창조하

자연법 입문

셨는데, 이 목적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창 1:26, 28 ). 이것은 도덕적 사

명이었다. 인간만이 특별하게 지적·영적 은사를 받았으므로, 이 명

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끝으로,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지극히 훌륭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다음, 그리하여 모든 창

조를 마치시고 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

았다”( 1:31 ).

잠언은 목적이 있는 창조 질서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다. 즉, 하

나님은 지혜를 통해 만물을 만드셨다. 잠언은 먼저 3장 19-20절에

서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

고히 세우셨고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

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한다. 조금 후에 8장 22-

31절에는 창세기 1장만큼이나 강력하고 아름다운 창조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은 지혜를 여인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지혜를 창조하시고 자기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지혜를 소유하

셨다( 8:22-26 ). 본문은 하나님이 하늘, 구름 하늘, 바다, 땅을 만드신

것을 묘사한다 ( 8:27-29 ) . 그 모든 과정에서 지혜는 “거기 있었

고”( 8:27 ) “그[하나님]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었다”( 8:30 ). 지혜는

하나님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8:30 ), 다음으로 지혜는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간을 기뻐하였다( 8:31 ). 하나님의 지혜

로 가득 찬 세상은 결코 혼란스럽고 무작위적일 수 없다. 그 대신

창조 질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을 반영하는 의미와 목적이 넘쳐

난다. 이런 세상은 참으로 좋은 세상임이 틀림없다.

창세기로 돌아가면, 성경의 처음 장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 자연

세계의 일부로 친밀하게 만드신 사실을 알려 준다. 많은 면에서 우

리는 동물과 비슷하다. 창세기는 인간이 아닌 동물을 “생물”( 1:20, 21,

24 ) 이라고 부르며 또한 첫 사람을 “생령”( 2:7 ) 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땅의 재료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땅”에서 육지 동물을 만드신 것

처럼( 1:24 ), 첫 사람도 “땅의 흙으로”( 2:7 ) 지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부르셔서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 1:28 ) 식물을 먹

고( 1:29 ) 동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1:26 ).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하나

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적합하고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이곳에

머물 수 있게 만드셨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철저하게 자연 세계의 일부지만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도 하다. 많은 기독교 신학자는 정확히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

상으로 만드는지에 대해 숙고해 왔다.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영혼이

나 이성이나 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이런 것들이 없다

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 소유자가 될 수 있을지를 상상하

기는 어렵지만,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우리를 일하도록 부르셨다는

또 다른 사실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려

는 목적으로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드셨다( 1:26 ).

하나님의 형상 소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위대한 임무로 부름을 받 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 소유자가 된다는 것은 도덕적 사명

을 받는다는 것이다.3)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질서를 부여하 3) 창 1:26을 목적절이 포함된 것으로 읽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예를 보라.

자연법 입문

는 데 최고의 권위로 일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

인 권위 아래서 세상을 다스리고 추가로 정복하게 만드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인간 본성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

을 미친다. 인간 본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만, 한 가지

핵심적 측면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

나님의 형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도덕적 소명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하도록 부름을 받은 일은 분리할 수 없다. 인간 본

성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우리의 첫 선조에게도 이상하게 느껴지

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이 자연 세계 안에서, 이 자연

세계와 함께, 그리고 이 자연 세계 위에서 행동하도록 부르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에 수반되는 일을 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이 세상

의 친밀한 일부로 만드셨다.

이런 고려 사항은 자연법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 즉 자연법이 이

른바 존재-당위 의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반론에 대한 답변을

Paul Joü on, S.J.,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trans. and rev. T. Muraoka (Rome: Editrice Pontifecio Instituto Biblico, 1991), 2:381. 형상 자체의 일부로서의 도덕적 사명에 대해서는 다음 예를 보라. D. J. A. Clines, “Humanity as the Image of God,” in On the Way to the Postmodern: Old Testament Essays, 1967–1998, vol. 2, ed. D. J. A. Clines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1998), 490–492; J. Richard Middleton, The Liberating Image: The Imago Dei in Genesis 1 (Grand Rapids: Brazos, 2005),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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