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보이소서”
1
저자와 요한복음 프롤로그 2
가나 순환 1부
가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2장)
3
가나 순환 2부
예수와 니고데모 및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3-4장) 2부
4 84
절기 순환 1부
다리 저는 사람의 치유(5장)
서론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1
저자와 요한복음 프롤로그 2
가나 순환 1부
가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2장)
3
가나 순환 2부
예수와 니고데모 및 사마리아 여자의 대화(3-4장) 2부
4 84
절기 순환 1부
다리 저는 사람의 치유(5장)
서론
“표적을
하나님께 표적을 구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가 당신에게 표
적을 주셨는가? 어떤 종류의 표적이었는가?
구약 시대에 기드온은 하나님께 표적을 구했다. 나중에 히스기야
도 그렇게 했다. 모세는 출애굽 중에 강력한 “표적과 기사”를 행
했다. 선지자도 때때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상징
적인 몸짓으로 표적을 보였다. 한번은 이사야가 속옷까지 벗고 다
니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했고 그 결과 바벨론으로 끌려가도록
운명이 정해졌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구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예수에게 표적을 구
했을 때, 예수는 사람들이 받을 유일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 마
16:4 ) 뿐이라고 대답했다. 구약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건져
내기 전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다. 예수는 표적을 구 하는 사람들에게 이 표적만이 주게 될 유일한 표적이라고 말하 셨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게 표적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하
실 수 있는 하나님,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는가?
요한복음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표적을 구하는 장면을 기록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가
메시아 권위의 표적으로 상인들의 성전 구역을 정화하시자 성전 당
국자들이 예수에게 도전했다( 요 2:18 ).
예수가 군중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예수의 반대자들이 다시 공격
하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6:30-31 ).
그들은 자기들에게 표적을 주시면 믿겠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주셨을까? 그래서 그들이 믿었을까?
요한은 자기 복음서에서 메시아인 예수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여
러 가지 메시아의 표적을 보여 주셨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
은 믿지 않았다.
신학자는 이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를 지지하는 “신정론”이라 고 부른다.
예수는 일곱 가지 놀라운 표적( 완벽한 숫자 ) 을 행하셨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
사람들이 불신하는 것은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것이 요한의 주장 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자신이 실재한다는 확실한 증거
를 제시하지 못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람들이 표적을 구했으 나 예수가 표적을 주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가 주신 표적이 마음에 들
지 않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예수는 군
중을 먹이고, 병자를 고치고,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눈을 뜨게 했으
며, 추가로 무덤에 나흘 동안 시체로 있던 죽은 사람도 살리셨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가?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든 그 사람이 계속 더 많은 질문만
해 대다가 결국에는 여러분이 제시한 증거가 다른 것들과 아주 조
금이라도 다르고 거기에 약간이라도 설득력이 있음에도 이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고 어떤 말도 없이 나가 버린 적이 있는가?
요한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모든 것과 관련 있다. 사
람들이 예수에게 구했던 표적, 곧 예수가 사람들에게 주신 표적과
그 표적으로 행한( 또는 하지 않은 ) 일에 대한 이야기다.
요한복음에 대한 이 간략한 소개서에서 나는 큰 그림, 곧 큰 줄거
리와 논증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책( 제이슨
앨런 총장의 초청으로 미드웨스턴 침례 신학교에서 진행한 “교회를 위한 워크숍” 강
의 시리즈에서 시작 ) 을 통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단계별로 안내해 드리고자 이 책을 썼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이 책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이 짧은 책이 요한복음의 핵심 메시지에 따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더욱 뚜렷하게 밝힐 것이기에, 여러분은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돕는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것이 나의 소망이며 여러분을 위한 나의 기도다.
이 작은 책을 선택해서 감사한다.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전
념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존중하시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러실 것이다.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1-4장)
저자와 요한복음 프롤로그
요 한복음, 특히 요한복음의 신학을 탐구하는 여정을 함께 해
서 감사하다. 요한복음은 신학적으로 심오하고 예수가 누구
인지에 대해 깊은 이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하지만 요한
의 신학과 복음서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요한은 누구인가? 그리고 예수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이 장에서는 먼저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해 논의한 다음, 요한복음
의 첫 18개 절인 요한복음 프롤로그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 두 장에
서는 예수의 첫 번째 표적인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과 성전 정화,
니고데모 및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이방인 백부장의 아들을 고
친 사건을 포함하는 소위 “가나 순환”( 2-4장 ) 을 자세히 살펴볼 것
이다.
나는 성경을 공부할 때 저자, 날짜, 출처, 목적지, 상황, 목적 등을
다루는 서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1) 이러한 주제는 우리가
1) 다음을 보라. 내가 요한복음 부분을 집필했다. J. Köstenberger, L. Scott Kel-
요한복음
간단히 확정지으면 그만이고 해당 성경의 본문을 연구할 때에는 거
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당 본문의 기저에 깔린 저
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저자의 신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건전한 해석학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내가 “해석학의 세 초점”으로 부르는 것, 곧 요한복음 해석을 위한
역사, 문학, 신학이라는 세 가지 초점 렌즈를 전제로 한다.2) 관련 역
사-문화적 배경 문제도 염두에 두려고 노력할 것이다. 또한 교차 배
열법이나 수미상관 같은 문학 장치나 줄거리나 인물 묘사 같은 내
러티브의 특징도 고려할 것이다. 신학 측면에서는 직접 인용, 암시,
모형론 등 구약 성경 사용법을 분별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요한복
음이 “영적 복음”이라는 점도 기억할 것이다. 즉, 요한복음은 목적
진술( 20:30-31 ) 에 따라 주로 기독론, 곧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여러분이 요한복음, 그 외에 성경의 다른 책도 연구하고 설 교하고 가르칠 때 탄탄한 기초를 쌓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나는
복음서를 단원별로 세분화하고 전체 복음의 범위 안에서 각 단원의 lum, and Charles L. Quarles, The Cradle,the Cross,and the Crown: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nd ed. (Nashville: B&H Academic, 2016).
2) 나의 공저를 보라. Richard D. Patterson, Invita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ExploringtheHermeneuticalTriadofHistory,Literature,andTheology, 2nd ed. (Grand Rapids: Kregel, 2020, 『성경해석학 개론』, 부흥과개혁 사 역간, 2017).
중심 메시지를 분별하는 데 건전한 주해와 해석학의 모범을 보이려
고 노력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에 담긴 놀라운 영적 진리를
스스로 파악하고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되기를
바란다.
누가 요한복음을 썼는가?
먼저 요한복음을 누가 썼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관심을 돌려 보
겠다. 오늘날 비평 학자 다수가 사도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딴 요한
복음을 썼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요한이라는 다른 사람, 아
마도 흔히 “장로 요한”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요한복음을 썼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요한 사도에 뿌리를 둔 이른바
“요한 공동체”가 요한 사후 어느 시점에 복음서를 썼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나사로 같은 사람이 복음서를 썼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의 저자가 누구인지, 예수와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주어진 글의 신뢰성이 저자의 신뢰성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자 예수의 세 측근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썼다면 요한은 예수에게 매우 중요 한 목격자기 때문에 복음서의 권위가 높아질 것이다.
반면에 요한을 따르는 공동체가 사도가 이미 죽은 후에 요한의 전통을 바탕으로 복음서를 썼다면, 그 연결은 훨씬 간접적일 것이 고, 따라서 복음서의 신뢰성과 권위는 떨어질 것이다. 기껏해야 직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접적인 목격자의 증언이 아니라 간접적인 증언을 반영할 뿐이다.
최악의 경우 루이스 마틴, 레이몬드 브라운 등이 주장한 것처럼 요 한 공동체의 역사를 예수의 생애와 시대에 투영한 것이 될 수도
있다.3) 따라서 요한복음의 권위는 저자의 신원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4)
그렇다면 요한복음의 저자를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내부 증거와 외부 증거가 그것이다. 때
때로 사람들은 외부 증거, 곧 1세기 교회의 기독교인이 요한복음의
저자로 지목한 사람을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부 증거, 곧 본문 자체에서 저자를 식별할 수 있는 단서를
조사하기를 선호한다.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하겠다.
내부 증거
형식적으로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도 익명으로 기
록되었다. 신약 성경의 서신과 달리 “사도 요한이 이 복음을
3) 다음을 보라. J. Louis Martyn, HistoryandTheologyintheFourthGospel, 3rd e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3); Raymond E.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The Life,Loves,and Hates of an Individual Church in New Testament Times (Mahwah, NJ: Paulist, 1979).
4) 가장 최근의 기고문은 Hugo Méndez, “Did the Johannine Community Exist?,” JSNT 40 (2020): 350–374. 저자는 “요한 공동체 가설”의 타당성에 대해 적절하게 의문을 제기하면서도(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요한복음이 위조된 거대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은 모 두 “아마도 조작된 것”, “연속된 문학적 위조”라는 것이다.
썼다”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는다. 복음서가 서신처럼 개인과 개인
또는 개인과 집단 간의 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리처드 보
컴 등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음서』에서 주장했듯이 복음서
는 폭넓은 독자를 대상으로 예수 이야기를 광범위하게 설명하는 일
반 문헌이다.5)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복음은 저자를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저자에 대한 단
서를 찾기 위해 요한복음을 조사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내부 정보
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인물
에 대한 언급이 몇 차례 나온다. 그는 다락방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
는데,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3:23 )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예수가 체
포되신 후 같은 제자가 대제사장의 뜰 ( 18:15-16 ) , 십자가 처형 현
장( 19:35 ), 빈 무덤( 20:2, 8-9 ) 에 다시 등장한다. 이 구절들에서 이 제
자는 “다른 제자”( 18:15 ), “이것을 본 자”( 19:35 ), “다른 제자, 예수님
이……사랑하시는 자”( 20:2 ), “다른 제자”( 20:8 ) 로 언급된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예수가 제
자들에게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부활한 모습( 21:7 ) 과 예수가 제자 들과 베드로에게 각자의 미래 소명에 대해 대화한 내용( 21:20-23 ) 에
5) Richard Bauckham, ed.,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 Rethinking the GospelAudiences (Grand Rapids: Eerdmans, 1997).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의 두 번째 절에서 핵심을 찾을 수 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
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1:24 ).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랑하
시는 그 제자”와 복음서 저자인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
록한 제자”가 동일 인물임을 ( 3인칭 단수에 이어 1인칭 복수로 ) 알 수
있다. 요한복음은 ( 복음서로는 ) 매우 이례적으로 1인칭 서술로 끝
난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
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
노라”( 21:25, 강조 추가 ). 고대 문헌에서 비슷한 언급을 조사한 결과, 이 것이 요한이 저자적 겸손을 표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
었다.6)
따라서 복음서 자체의 내부 증거는 (1)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곁
에 있던 제자( 따라서 열두 제자 중 한 명 ), (2) 예수의 체포와 재판 현장
에 있던 제자, (3)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 부활 후 예수를
본 제자에 의해 쓰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복음서 저자에 대한 놀라
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좌우 자리는 예수
의 가장 가까운 두 제자를 위해 마련된 높은 영예의 자리였을 것이 며, 이 복음서 저자는 그중 한 자리에 앉았다.
요한복음을 미국 대통령의 전기에 비유한다면, 이 전기는 간접적
6) “I Suppose (oimai): The Conclusion of John’s Gospel in Its Contemporary Literary and Historical Context,” in The New Testament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Essays on Context and Backgrounds in Honour of B. W. Winter on His 65th Birthday, ed. P. J. Williams, A. D. Clarke, P. M. Head, and D. Instone-Brewer (Grand Rapids: Eerdmans, 2004), 72–88.
인 기록이나 소문을 통해서만 그 인물의 생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기자가 쓴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참모, 최측근, 신뢰
할 수 있는 조언자, 곧 대통령 임기의 모든 주요 시점에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 쓴 것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베드로
내부 증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가 더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자료는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등장하는 수많은 구절과 관련
이 있다고 한다.7) 요한복음 후반부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언급될 때마다 거의 매번 베드로도 함께 언급된다. -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에게 배신자의 정
체를 물어볼 때 다락방에 두 사람이 함께 있다( 13:23-24 ).
- 둘 다 대제사장의 뜰에 있으며, 실제로 “예수께서 사랑하시
는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 뜰에 출입할 수 있게 돕는다( 18:15-16 ). - 두 사람이 예수 부활 후 빈 무덤을 방문했는데, 실제로 그
곳까지 함께 달려간다. ( 둘 중 어려 보이는 ) “예수께서 사랑하
시던 그 다른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지만 정중하
7) 다음을 보라. Kevin Quast, Peter and the Beloved Disciple:Figures for a Community in Crisis, LN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9).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게 베드로를 기다렸다가 먼저 무덤을 들여다보게 하고, 자
기도 무덤을 들여다보고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
한다( 20:2-9 ).
- 두 제자는 갈릴리 바다에서 부활한 예수를 보게 된다. “예
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주님이시라”라고 외친 후
에야 베드로가 신이 나서 호수에 뛰어들어 예수를 향해 헤
엄친다( 21:7 ).
-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는 복음서 맨 마지막에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와 대화
한다( 21:20-23 ).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를 이렇게 일관되게 유 사하게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묘사에
가장 잘 적합한 인물은 누구인가? 다른 복음서, 사도행전, 심지어
바울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인물은 사도 요한이다.
요한과 베드로는 요한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야이로의 딸이 살아 나는 것을 목격하고( 막 5:37; 눅 8:51 ), 예수와 함께 변화산에 오르며( 마 17:1; 막 9:2; 눅 9:28 ) , 겟세마네 동산으로 함께 끌려가는 ( 마 26:37; 막 14:33 ) 3명의 핵심층을 구성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함께 성전에 가고, 사도행전 4장에서는 둘 다 산헤드린에서 증언하며, 사도행전 8장 14-25절에서는 함께 사마리아로 여행하여 사마리아인 회심자
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바울은 야고보( 예수의 이복형제 ), 베드로( ‘게바’라고 불림 ), 요한을 교회의 “기둥”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 심지어
바울의 첫 번째 서신에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네 번째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와 일관되게 연결될 때 그 제자가 다름 아닌 사도 요한이라는 것
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가
그런데 사도 요한은 왜 복음서에서 자신을 식별하기 위해 “예수
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특이한 표현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복음서에는 요한이라는 다른 인
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례 요한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을 단순히 “예수께서 사랑하
시는 그 제자”라고 부름으로써 요한이라는 이름을 세례 요한에게
쓴다. 따라서 저자는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을 처음 소개할 때 “하나
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1:6 ) 라고 쓴다. 또 다른 일반적인 이름인 “마리아”에 대해서도 같은 현상을 관찰
할 수 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인명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수행 한 리처드 보컴은 당시 전체 여아의 30% 정도가 마리아 또는 살로
메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마리아가 가장 흔한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추측한다.8)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단순히 “예수의 어머니”라고만 언급한다( 예. 2:1-11 ). 이
런 식으로 요한복음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써
서 막달라 마리아를 간단히 마리아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이
었다( 예. 20:11, 16; 참고. 20:18: “막달라 마리아” )
또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문구는 요한 자신이 예
수에게서 깊은 사랑을 받았다는 중요한 진리를 표현한다. 이는 세
족식( 13:1-20 )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대표 본문인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도 볼 수 있듯이 요한의 신학과 사랑의 윤리와도 일치한다. 요한이 믿었던 가장 중요한 진리는 자신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9)
8)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Eyewitnesses: The Gospels as Eyewitness Testimony,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17), 39–92, 다 음을 참고, Tal Ilan, Lexicon of Jewish Names in Late Antiquity: Part I: Palestine 330 BCE–200 CE, Texts and Studies in Ancient Judaism 91 (Tübingen: Mohr-Siebeck, 2002).
9) 다음을 보라. “The Johannine Love Ethic,” in Andreas J. Köstenberger, A Theology of John’s Gospel and Letters:The Word,the Christ,the Son of God, BTNT (Grand Rapids: Zondervan, 2009, 『BTNT 요한신학』, 부흥과 개혁사 역간, 2015), ch. 13.
신약 성경에 포함될 마지막 네 번째 복음서를 기록할 사람을 찾
고 있다면 사도 요한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사
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겸손한 제목과 복음서 마지
막 절의 ( 개역개정에는 없는 ) “아마도”라는 결론 문구에서 드러나는 것
처럼 요한이 독특하게 저자로서 보이는 겸손함에도 이것이 바로 요
한이 이 복음서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요한이 예수와 친밀했다는 놀라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언어적 유
사성을 살펴보자. 구조적으로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 1-12장 ) 과 “영
광의 책” 또는 “승귀의 책”( 13-20장 ) 으로 불리는 대체로 대등한 두
부분으로 대칭을 이루며 나뉘고, 이 두 부분은 프롤로그( 1:1-18 ) 와
에필로그( 21장 ) 가 틀을 이룬다. 요한은 프롤로그에서 예수에 대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에이스 톤
콜폰’]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8, 강조 추가 ) 라고 말
한다. 복음서의 후반부를 시작하는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최후의 만
찬 장면이 펼쳐진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은 후 가장 가까운 제
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신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3:23, 강조
추가 ) 라고 말한다. “예수의 품에”로 번역한 헬라어 표현 ( ‘엔 토 콜
포’ ) 은 프롤로그( 1:18 ) 에서 예수가 “아버지 품 속에 있다”라고 묘사
한 것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언어 표현이다. 우연인가? 그럴
리가 없다. 특히 복음서 말미에 요한은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더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가슴”; ‘에피 토 스테도스’]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20 ).
따라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인 자
신을 예수와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예수가 아
버지 하나님과 밀접하고 친밀하게 관련되었던 방식이 요한 자신이
예수와 밀접하고 친밀하게 관련되었던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암
시한다. 요한이 예수와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를 설명하고 예수에
대해 온전히 설명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와의 이런 친
밀함은 예수를 해석하고 예수에 대해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이상
적인 입장에 놓이게 했다. 놀라운 주장이다.
여기에 이전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요한이 복음서 후반부에 사도
베드로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추가하라. 공관복음서에서
는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탁월한 대변자이자 예수에게 천국 열쇠를
받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영적 통찰
력과 예수와의 친밀함에서 탁월함을 보여 준다.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 ) 에게 예수에게 배신자의 정체를 물어보라고 요청
한다( 13:23-24 ). 나중에 다시 베드로는 “다른 제자”에게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는데, 그 제자는 대제사
장의 가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했다( 18:15-16 ). 10) 그리 10) 학자 마이클 버드의 항의(“국가 안보 문제에 대해 판단할 때에는 무해해 보이
고 부활의 날,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빈 무덤
으로 달려갈 때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간다 ( 그리고 정중하게
기다리면서 먼저 무덤을 들여다보게 한다, 20:8-9 ).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
한 예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
자”며, 베드로는 예수를 향해 헤엄치기 위해 호수에 뛰어든다( 20:7 )
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묘사가 똑같은 것은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에
서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예수가 베드로를 세 번 재신임
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 후 예수가 베드로에게 순교자의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예수는 베드로에게
여러 번 말하며 자기 일에 신경 쓰라고 한다.11)
다섯 장면 모두 요한과 베드로가 함께 등장하지만, 요한만이 예수
에 대해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나 접근성을 가졌으며, 다른 사람들
는 사람일지라도 조심해야 한다”)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버드의 생각대로 무해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 Michael F. Bird, “Authorship of the Fourth Gospel Revisited,” Patheos, March 2, 2020, https://www. patheos.com/blogs/euangelion/2020/03/authorship-of-the-fourthgospel-revisited는 요한복음의 저자에 대한 최근 논의를 거론한다. 버드는 공 동 저자인 N. T. 라이트와 함께 “복음서의 “요한”은……아마도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아니라 예수의 유대인 제자인 장로 요한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음을 보라. N. T. Wright and Michael F. Bird, The New Testament in Its World: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Literature,and Theology of the First Christians (Grand Rapids: Zondervan, 2019), 특히 648–652.
11) 예수와 관련하여 요한을 일치하게 묘사한 것과 비슷하게 저자는 베드로도 예수 와 일치하게 묘사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하고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다(21:19; 참고. 12:33).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이러한 통찰과 접근성을 얻도록 돕는 관문이 된다. 이것은 이 복
음서 저자가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관련하여 예수를 묘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와 관련하여 요한을 묘사하는 것 사이
의 유사성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결론은 예수가 지상에서 사역
하는 동안 요한보다 예수와 더 가까웠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복음서에서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이보다
더 통찰력 있고 영적으로 예리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복음서는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요한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복음
을 구성했다”라고 쓴 것도 바로 이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을 누가 썼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요한은 예수를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고, 예수를 무엇보다 사랑했으며, 지상에서 사역 하는 동안 예수를 개인적으로 아는 특권을 누리지 못한 다른 사람
에게 그 사랑과 영적 통찰을 나누고 싶어 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요한은 80대였으며, 동료 사도를 비롯한 기독교인이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다가 순교자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여러 번 보
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콜로세움으로 몰아넣어 서
커스처럼 사자에게 먹이로 주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요한은 초기 기독교 선교의 성공, 곧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기독교가 예루살렘
과 유대에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지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심
지어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 또는 두 가지 모두를 핍박하는 영지주
의 이단의 초기 형태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예
수가 육신이 된 영원하고 선재하신 말씀이라고 그토록 단호하게 주
장했을 것이다.
외부 증거
내부 증거를 추가로 나열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제시한 내용을
통해 내부 증거가 사도 요한을 분명히 복음서 저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를 바란다. 이제 외부 증거로 넘어가 보겠다.
내부 증거에서 시작해서 어느 정도 조사했는데, 그 이유는 내부
증거가 복음서 자체의 정경, 영감, 본문 무오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외부 증거보다 어떤 면에서 더 중요하고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부 증거도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며, 이 경
우에는 내부 증거와 외부 증거가 수렴한다.
아마도 내가 언급해야 할 첫 번째 외부 증거는 “요한복음”이라는
제목일 것이다. 사도가 아닌 다른 요한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복음
서에서 언급된 다른 요한은 열두 제자에 속한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의 위상에 근접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두 번째 외부 증거는 거의 모든 초대 교회 교부들이 사도 요한을
복음서 저자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리옹의 이레
네오( 130-200년 ) 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 주님의 제자 요한
은 아시아 에베소에 거주하던 중에 복음서를 출간했다”( 『이단 논박』,
3.1.2 ) 라고 썼다. 따라서 이레네오는 요한복음의 저자를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 주의 만찬에 참석한 것으로 언급된 “그가 사랑하시
는 자”와 직접 연결했다.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150-
215년 ) 는 “마지막으로 요한은……영적인 복음을 저술했다”( 유세비우
스, 『교회사』, 6.14.7에서 재인용 ) 라고 썼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사도 요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과 직접 관련이 있던 초대 교회 교부( 예. 이레네오는 요한의 제자였던 폴
리카르포스의 제자였음 ) 가 복음서의 저자를 요한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12)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소수 학자들이 요한복음의 사도
저술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90년에서
1810년 사이에 쓰인 작품에 나타난 그들의 의심은 역사적 증거로
뒷받침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의심은 대부분 그 근거인 철학, 신 학, 이데올로기의 전제가 빈약한 경우가 많았다.13)
사도 저작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도 저작을 반대하는 모든 주장 을 능숙하게 반박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썼다고 믿는 학자는 소수다. 이는 역사적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
니다. 이는 기성 교회에 대한 반발심과 성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
이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비평 학계가 복음서와 신약 서신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에 점점 편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
이다.14)
12) 참고. 이레네오, 『이단 논박』, 3.3.
13) 내 논문을 보라. “Frühe Zweifel an der johanneischen Verfasserschaft des vierten Evangeliums in der modernen Interpretationsgeschichte,” European Journal of Theology 5 (1996): 37–46; “Early Doubts of the Apostolic Authorship of the Fourth Gospel in the History of Modern Biblical Criticism,” in Studies in John and Gender:A Decade of Scholarship, Studies in Biblical Literature (New York: Peter Lang, 2001).
14) The Cradle,the Cross,and the Crown의 1장뿐만 아니라 A Theology of John’s Gospel and Letters의 서론에서도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최근 학계
나는 마르틴 헹겔, 리처드 보컴, 벤 위더링턴, 로버트 키사르 등
요한복음의 사도 저술 여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최근의 다수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독일의 대표적인 신약학자이자 역사학
자인 마르틴 헹겔은 요한복음의 “이중 얼굴”, 곧 요한복음의 “도펠
안틀리츠”( Doppelantlitz ) 를 말했다. 즉, 그는 내부 증거가 사도 저술
을 가리키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저자의 바람은 독자들이 사도 요
한이 복음서를 썼다고 믿는 것일지라도 실제로는 저자가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헹겔은 복음서의 실제 저자는 장
로 요한이라고 주장한다. 이 장로가 교부 파피아스의 저술에서 간
단히 언급한 것 외에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는 인물이라고 하지만,
파피아스의 저술도 현존하지 않아 이 내용에 대해 확인할 길이 없
고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간접적인 기록으로만 우리에게 전해진
내용일 뿐이다.15)
마찬가지로 리처드 보컴도 중요 저서 『예수와 목격자들』에서 일
반적으로 성경 복음서의 목격자적 성격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마
태와 요한의 저자 여부는 명백히 부정한다. 보컴은 헹겔과 마찬가
지로 예루살렘 귀족 가운데 속한 인물로서 아마도 최후의 만찬 주
최자였을 요한( 장로 요한? ) 이라는 사람이 이 복음서를 썼을 것이라고
믿는다.16) 애즈버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웨슬리파 학자 벤 위더링
15) 나의 서평을 보라. Martin Hengel, DiejohanneischeFrage, JETS 39 (1996): 154–155.
16) 보컴은 사도 요한이 저자였다면 21:2처럼 “세베대의 아들들”을 에둘러 언급하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턴은 나사로가 복음서를 썼다고 믿으며,17) 앞서 언급했듯이 익명의
요한 공동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로버트
키사르같이 요한 공동체 가설을 지지하던 일부 학자는 생각을 바꾸
어 포스트모던 방식의 복음서 읽기를 옹호한다.
헹겔이나 보컴 같은 유능한 역사가조차 사도의 저술에 대해 거의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의 저술 여
부를 증명하며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내부 및 외부 증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처음부터 사도 저술을 배제하는 몇 가지 근본적인
전제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사도 저술은 가능한 선
택에서 사전에 배제된다. 비평 학자들은 당연히 사도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복음서를 썼다고 결론을 내린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지적 풍토에서 사도가 요한복음 저자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주류 학계에서 존경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
실상 불가능하다.18)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주류 학계
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고대 저자들은 자신을 자주 3인칭으로 언급
했기 때문에 보컴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이 극복할 수 없는 반대라고 생각하 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수가 마지막 기도에서 자신을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 리스도”(17:3)라고 3인칭으로 언급한 것에 주목하라. 다음을 보라. Bauckham, JesusandtheEyewitnesses, 412–471.
17) Ben Witherington, “Was Lazarus the Beloved Disciple?” Ben Witherington (blog), January 9, 2007, http://benwitherington.blogspot. com/2007/01/was-lazarus-beloveddisciple.html.
18) 덧붙여서, 이와 관련된 몇 가지 흥미로운 단락은 레온 모리스의 훌륭한 저서인 Studies in the Fourth Gospel (Grand Rapids: Eerdmans, 1969)에서도 비 슷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논문을 보라. “Leon Morris’s Scholarship on John’s Gospel: An Assessment and Critical Reflection on His Scholarship,” in The Gospel of John in Modern In-
에서 거부당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말씀
을 정확하게 다루는 사람임을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이 결국 중요
하다( 고전 4:3-4; 딤후 2:15 ).
저자에 대한 결론
사도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붙인 복음을 썼다는 사실을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충분히 입증했기를 바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
유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1. “요한 신학”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 히 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예수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던 사도 요한의 신학을 말한다.
2. 사도 요한이 저자라는 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특히 목격 자의 증언을 매우 중시하는 복음서에서 요한의 증언이 가 진 권위와 정확성과 신뢰성에 대해 강력하고 긍정적인 확
신을 갖게 해 줄 것이다.
3. 우리에게는 요한복음이 전하는 신학에 일관성이 있으며, 이 신학이 그 주요 주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친밀하
고 사적인 친분과 제자 훈련 가운데 예수를 가까이에서 따 랐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확고한
terpretation, Milestones in New Testament Scholarship, ed. Stanley E. Porter and Ron C. Fay (Grand Rapids: Kregel, 2018), 197–209.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근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문제로 여기고 저술 주제에 대한 개인적인 몰
입은 당연히 편견과 부정확성을 초래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주제에 대해 강한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는 것
도 가능한 일이고, 그 열정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보도를 위해 최선
을 다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수처럼 자신에 대해 놀라운 주장을 펼
친 사람에 대해 냉정하고 냉담하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라고 주장했는지, 그리고 그가 오신 일의 의미가
얼마나 획기적인지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요한복음 프롤로그
다음 두 장에서는 요한복음 2-4장으로 구성된 요한복음의 가나
순환에 대해 살펴보겠다. 하지만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요한
복음에서 요한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요한복음이 어떻게
독특하고 특별한지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한복음 프롤로그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19)
요한복음 프롤로그는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
19) P. J. Williams, “Not the Prologue of John,” JSNT 33 (2011): 375–386은 요한복음의 초기 사본이 요 1:1-18이 아니라 요 1:1-5를 요한복음 서론으로 다 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결과 요 1:1-18을 “요한복음 프롤로그”라고 부 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논쟁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다. 프롤로그는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에서 예수에 대한 요한복
음의 전체 내용을 볼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 요한복음 프롤로그
에 대한 연구 틀을 제공하기 위해, 요한이 교차 배열법 구조인
ABCB’A’를 사용하여 프롤로그를 구성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능한 개요를 제시하겠다.20)
도표 1: 요한복음 프롤로그(1:1-18)의 주요 장면
A: 창조에서 말씀의 활동( 1:1-5 )
B: 빛에 대한 요한의 증언( 1:6-8 )
C: 말씀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1:9-14 )
B’: 말씀의 탁월함에 대한 요한의 증언( 1:15 )
A’: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마지막 계시( 1:16-18 )
이것은 프롤로그를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 개요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한 절씩 일목요연하게 진행할 수도 있고, 1-5절 먼저 다루
었다가 마무리 부분인 16-18절로 이동한 다음, 세례 요한을 말하는
6-8절과 15절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프롤로그의 중심인 9-14절에 서 말씀의 성육신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 권을 다루면서 마무리할 수 있다.
20) 매우 명민한 요한 문헌 학자 앨런 컬페퍼의 연구와 그의 논문에 도움을 받았다. R. Alan Culpepper, “The Pivot of John’s Prologue,” NTS 27 (1980): 1–31.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육신한 말씀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1-2 ) 라는 잘 알려진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 절은 창세기
첫 절을 암시하는 본문으로 매우 중요한 선언이다. 많은 사람이 요
한복음에 상당한 정도로 고기독론이 담겨 있다고 믿는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가 태어나 베들레헴의 구유에 눕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
나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존재하게 했던 것은 성육신 전의 말씀인
예수를 통해서였다( 1:3-4 ).
또한 요한은 성육신한 예수를 “말씀”이라고 부르며 창조 주체로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와 동등한 “하나님”( ‘데오스’ ) 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요
한복음 프롤로그 첫 절은 기독교 시대 초기에 삼위일체, 그리스도
의 신성, 기독론에 대한 교회의 교리 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한
이 다른 복음서( 공관복음서 ) 에서 동정녀 탄생, 선재, 신적 존재인 예
수라고 표현한 것을 상당히 심화시켰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면에서
요한에게 헤아릴 수 없이 크게 신학적으로나 기독론적으로 빚을 진
셈이다.
이 선재했던 말씀,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를 이룬 말씀은 요한
의 주장에 따르면 후에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었으며 예수는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다”( 직역하면 “그의 장막을 쳤다”; ‘스케노오’ ), 1:14; 영
어 단어 “skin”이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요한과 그의 동료 사도들
은 예수의 영광( ‘데오마이’, 단순히 본다는 의미의 헬라어보다 더 구체적인 단어
로, 영어 ‘theater’의 어원이다 ) 을 인식했다.
요한은 사도들이 예수에게서 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
버지의 독생자, 곧 유일무이한 아들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1:14 ). 여
기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말세의 ) 현현으로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전의
성막과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던 성전에
서 하나님이 현현하신 것과 연속성을 띠고 있다.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
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들
이 여호와의 전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위에 있는
것을 보고 돌을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대
하 7:1-3; 다음도 보라. 왕상 8:11; 대하 5:14)
요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충만하게 임했으며, 이 충만함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은혜 대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요 1:16, ESV, 개역개정 같은 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은혜 위에 은혜”로 번
역하지만, 나는 전치사가 ‘에피’가 아니라 ‘안티’, 곧 “대신”이므로 “은혜 대신 은혜”라
는 번역을 선호한다 ).
요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한은 계속해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7 ) 라고 말한다. 다
시 말해, 율법도 좋지만 예수가 훨씬 좋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
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보고 살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하셨다( 출 33:18-23 ). 이와 대조적으로 요한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
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1:18 ) 라고 말한다.
요한의 보내는 기독론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영원히 선재하신 분으로 하나님 아버지
를 “나타내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완전한 설명”을
주러 오셨다 ( ‘엑세게오마이’; 의역하면 예수가 아버지를 “강해”하셨다고 할 수
있다 ). 이런 식으로 요한은 복음의 나머지 부분을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신지에 대해 예수가 온전히 설명하는 것으로 읽어야 하며, 예수
의 행적( 특히 표적 ) 과 말씀( 강론 ) 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요한은 예수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을 때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2:11 ) 라고 말한다. 나중에
다락방에서 예수의 제자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청
하자, 예수는 마치 빌립이 그 질문으로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것
처럼 대답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