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
나는 항상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창조
에서 시작해 새 창조에서 끝나는 성경의 큰 그림을 탐색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성경신학의 관례와 규정에 공감하며, 이 책을 ESBT 시
리즈에 기고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신
학은 성경의 큰 그림을 읽는 연습이다. 성경신학의 정의와 성경신
학을 둘러싼 논쟁은 많지만, 성경신학은 교회의 관점에서 자기 백
성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인격, 섭리, 목적에 대한 큰 그림을 확인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가장 좋을 것이다. 어떤 책도 이 모든
것을 다룰 수 없지만, 나는 창조와 새 창조라는 주제와 관련해 하나
님이 자기 백성과 세계를 상대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 그리고 행하고
자 하시는 것 ) 을 정확하게 제시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중대한 암 수술 이후에 사투를 벌이시는 동
안 이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썼는데, 그 부분에서는 모든 창조의 영
광스러운 새로워짐을 탐구한다. 실제로 나는 가장 최근에 어머니와
나눈 한 대화의 내용 중 일부를 이 책에서 독자 여러분에게 썼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구상하신 창조 프로젝트의 아름다운 이야
저자 서문 9
기다. 성경신학자로서 이 책에서 내가 염두에 두는 목표는 창조와
새 창조라는 주제가 하나님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
경 이야기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드러내신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내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존재하게 하실 때
시작되었고 언젠가 하늘과 땅의 새 창조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하
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설명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을 주었으면 하
는 것이다.
제를
을 고백한다.
영광스러운 사실에 대한 내 확신과 소망
내가 쓴 모든 책은 대단히 많은 사람이 호의적으로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내가 담임 목사로 섬기는 일리노이주 로스코의 호
프 복음주의 자유 교회의 훌륭한 신자들에게 늘 감사한다. 나는 모
든 면에서 기쁨이 되는 멋진 직원뿐 아니라 내가 저술을 통해 목회
자 겸 신학자로 섬기도록 힘을 실어 준 동료 목회자 및 장로들에게
도 신세를 지고 있다. 우리 가족은 나에게 끊임없는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데, 이들의 도움과 허락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은 가능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세 자녀 제이콥, 벤저민, 루스가 책
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사랑해 주어서 고맙다. 아내 로라에게도 고
마움을 전하는데, 아내가 없었다면 이 책의 한 페이지도 쓸 수 없었
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IVP와 함께 출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
기며, 이 책을 기고하도록 초대해 준 점에 대해 시리즈의 편집장인
벤저민 글래드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책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준 IVP 편집부에도 감사한다.
이 책은 패너 티모티에게 바친다. 나는 ( 일차적으로 ) 독일인이며 티
모티는 사모아 사람이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면
에서는 ) 우리가 모두 주 안에서 형제자매다. 티모티, 엘리자베스, 그
리고 그의 모든 가족은 우리 가족이며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로 계
속 그래왔다. 티모티는 신학자로, 목회자로, 아버지로, 기독교인으
로 나를 격려했다. 티모티는 로라와 나에게 선물이며 우리 아이들
에게는 삼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우정 자체가 새
창조의 시작을 보여 주는 징후인데, 그때는 독일인과 사모아인을
비롯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주께
새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양은……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
에 합당하도다”라고 말할 것이다( 계 5:9, 12 ).
저자 서문 11
서론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
나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교의 탤벗 신학부에
서 신약을 가르치고 학계에서 10년을 보내고 나서, 한 지역 교회를
섬기기 위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같은 지역에 있는 북부 일리
노이주로 이사했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 우리 지역 교회의 훌륭한
성도에게 내가 수년 간 학계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이에 탐구할
수 있는 복을 누렸던 하나님의 말씀에서 풍부한 진리 중 일부를 전
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목회를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서 나는 우
리 교회가 “창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교단 신학교
에서 보조금을 받았다. 이 프로젝트가 염두에 두는 목적은 중요하
면서도 등한시될 때가 종종 있는 창조 교리를 성경적으로 충실하고
과학적으로 겸손하며 회중적으로 유익하게 설명하는 일을 지역 교
회에 장려하고 촉진하는 것이었다.
회는 기독교인이 창조와 관련해 다층적이면서도 철저하게 기독교
적 관점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다른 여러 교회와 함께
신학자와 과학자들과 협력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 대다수는 아니어도 ) 많은 교인이 창조라는 주제
에 대해 극단적으로 축소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
아차렸다. 창조나 심지어 창조 교리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마다 우리
교회 신자들은 기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창조라는
용어가 이들의 생각에서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범주가 세상이 생
겨난 때의 시작인 것과 같았다. 유일한 질문은 태초에 어떤 일이 일
어났는지와 관련이 있었는데, 심지어 이때도 주된 초점은 많은 논
쟁이 이루어진 “엿새”에 맞춰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세계 역사의
나머지 부분,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현실, 심지어 세계가 창조된
목적도 이 등식의 일부가 아니었다. 나에게는 이것이 자기 결혼 생
활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결혼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도 생각하지 못하는 남자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에 대한 사
랑과 헌신, 결혼의 목적과 구상, 결혼과 그 결과로 형성된 가족의 현
재 상태도 별개이거나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내가 말하려는 요
점은 창조가 이루어진 처음 엿새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
니라, 창조된 모든 날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 프로젝트 덕분에 우리 교인 중 많은 사람이 창조와
특히 창조 교리를 훨씬 성경적이고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ation-project).
있게 되었다. 창조가 일단 기원 논쟁의 사슬에서 풀려나자, 우리 교
인들은 물질적이고 창조된 세계의 선함과 창조자의 위대함을 이해
하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 교인들이 세계를 정하신 영광스러운 하
나님을 위해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매우 좋은” 세계 안에서
이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실과 진지하게 씨름하는 모습을 목격
했다. 창조는 우리 교인들의 생각 속에서 실제의 크기와 범위로, 곧 우주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은 성경 전체가 창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창조가 복음 자체의 핵심에 있음을 훌륭
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기독교인과 교회도 그들만의
“창조 프로젝트”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논증하려는 사실은 성경이 고유의 창조 프로젝트 곧 창조에
서 새 창조로 확대되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로 독자를 안내한다
는 것이다. 창조를 격하하기: 축소와 결함
나는 우리 지역 교회의 기독교인만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창
조라는 용어는 대다수 기독교인의 생각에 우주의 기원이나 적어도
만물의 시작을 주로 다루는 주제와 관련된 해묵은 논쟁을 불러일으
킬 가능성이 있다. 이 책에서 독자에게 설명하려는 사실은 성경이
창조에 대해 말할
앞으로 추진하는 엔진의 역할을 하며 때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뜻
하시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과 같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시 말 해 창조에서 새 창조까지 이 성경적 주제와 신학적 교리는 성경 이
야기 전체의 진행을 감독할 뿐 아니라 성경 이야기의 메시지도 통 합한다.
창조와 새 창조의 성경신학을 제시하기에 앞서, 창조가 어떻게 우
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본질적 교리보다 세계의 기원과 관련된
주석적 논쟁이 되었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창조를 격 하하는 한 측면은 원인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은 왜 더 온전하고
성경적인 창조의 의미를 놓치고 있을까? 또 한 측면은 결과다. 다시
말해, 올바른 성경적 창조 신학이 없을 때 기독교인과 교회에는 어
떤 일이 일어날까?
창조 축소: 기독교인은 왜 더 온전하고 성경적인 창조의 의미를 놓치고
있을까? 기독교인이 더 온전한 성경 이야기에서, 그리고 창조와 새
창조의 메시지에서 벗어나 방향을 틀게 만든 것처럼 보이는 몇 가
지 영향력이 있는데, 이 영향력은 우리가 창조 축소로 부를 수도 있
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축소는 창조라는 성경적 주제의 핵심 측
면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도록 이끈다. 네 가지 이유를 간략하게 요
약할 수 있다.
과학적 이유. 과학이 발전하고 현대를 지배하게 되면서, 교회는
자연계와 관련된 의미의 결정권자로서 권위 있는 지위를 상실
했다.2) 과학자는 목회자와 신학자보다 더 큰 “설명 능력과 ‘자연에
대한 통제’”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3) 이 결과로 교회는 물질세
계에 대한 자기 권리를 대학교의 과학자에게 양보하도록 강요받았
고, 목회자와 신학자에게는 영적 세계만 남겨지게 되었다. 어떤 의
미에서 과학은 “몸” 곧 창조된 생명을 얻었고, 신학은 “영혼” 곧 영
생을 얻었다. 이 구분은 대단히 강력해서 모든 물질적 창조 세계의
신학은 과학의 통제를 받았다. 건튼이 설명하는 대로, “적어도 서구
문화의 주류에서만큼은 현대의 과학자가 실질적으로 창조의 신학
자다.”4) 실제로 과학의 신학적 모델은 실체에 대한 기계론적·이원
론적 개념과 함께 현대 기독교인이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과 떼어 놓고, 그리하여 창조를 창조자와 떼어 놓도록 훈련했다.
과학은 단순히 교회의 초점을 물질적인 것과
단일 주제에 크게 집중하게끔 교회를 단결시키기도 했다. 다윈은 때때로 추정하는 것과 달리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이나 심지어 교회 의 창세기 해석을 흔들지도 않았고 흔들 수도 없었는데, 많은 기독
교인은 다윈이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창조 이야기의
3) Jonathan R. Wilson, God’s Good World: Reclaiming the Doctrine of Creatio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3), viii.
4) Colin E. Gunton, The Triune Creator:A Historical and Systematic Study (Grand Rapids, MI: Eerdmans, 1998), 125.
진화론을 성경과 기독교에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 왔다. 진화론을
비판하고 “젊은 지구” 기독교의 형태를 변호하는 것을 목표로 광범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러 초교파적 단체가 결성되었다. 역설적
인 사실은 1925년 스콥스의 재판이 성경의 창조와 재창조 신학의
전체 범위를 무색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요점은 이렇다.
찬반 여부와 상관없이 진화론이 많은 현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큰
관심을 끄는 나머지, 창조의 주제와 창세기의 해석은 일차적으로
기원의 렌즈를 통해 판단된다. 다윈이 세계의 기원에 대해 말한 이
야기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더 온전한 이야기를 축소시켰다.
구원론적 이유.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대단히 긍정적인 수정은 교
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한 성경의 핵심 메시지인 복
음의 중심성을 재진술한 것이다. 그러나 불균형은 양방향으로 모두
기울어질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이 성경의 이야기를 비물질적인
구속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현상이 크게 일반화되었는데, 여기서 창
조는 단순히 구속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역할만 할 뿐이다. 이
런 축소된 견해에서는 구속이 심지어 잘못 정의될 때가 있어서, 목
표는 창조의 구속이라기보다 창조에서의 구속이다. 이 두 작은 단어
는 세계( 관 ) 가 다른 두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은
창조를 구속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은 물질세계의
지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구속을 통해 창조에서 새 창조로 진행
하는 이야기의 충만함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구원의 목표는 우
리 몸이나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새로워짐
과 이 세계의 새로워짐이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경이 표현하는 창조와 구속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 노력해 왔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구속할 목적으로만 세
계를 창조하셨을까?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의
도적으로 매우 어설프게 창조하셔서 구속과 관련된 수리가 필요했
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구속은 대안이며 따라서 수리를 위한 뜻
밖의 미봉책이었을까?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면, 하나님은 크게 실 패하셔서 “원래 의도와 형태가 완전히 다른” 계획에 “형편없는 편
법”을 채용해야 하신 것으로 보인다.5) 창조와 구속의 밀접한 상관
관계에 주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대한 기독교인의
이해는 이런 불충분한 두 가지 대안 중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가능
성이 있다. 이 책의 주요 함의는 이런 연관성을 성경적·신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창조와 구속 사이의 전반적인 관계에 대한 기
본적 이해는 창조-구속-새 창조의 전통적인 순차적 도식을 인정
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구성하면, 구속은 단순히
창조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창조의 지원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맥
도너가 지적하는 대로,
5) Karl Barth, ChurchDogmaticsIV/1:TheDoctrineofReconciliation, ed.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New York: T&T Clark, 2004), 64; 참고. Robert W. Jenson, SystematicTheology:Volume2: The Works of G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0.
6) Sean M. McDonough, CreationandNewCreation:UnderstandingGod’s Creation Project (Peabody, MA: Hendrickson, 2016), 49; 참고. Jü rgen Moltmann, “Creation and Redemption,” in Creation,Christ and Culture: Studies in Honour of T.F.Torrance, ed. Richard W. A. McKinney (Edin-
하지만 그렇더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구속을 세 다리 의자의 한
다리가 아니라 중심부로 여긴다면, 구속에 대한 올바르고 성경적인
강조처럼 보이는 것도 복음의 메시지를 순전히 개인주의적·비물질
적 구원으로 축소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세계를 위해 염
두에 두신 더 완전한 목적이나 목표도 부정할 것이다.
해석학적 이유. 성경은 도전적인 부분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통일 된 전체로 종합하는 작업에도 도전적이다. 예를 들어, 구속은 종종
교회의 생각과 가르침에서 창조를 능가하는데, 창조와 구속이 성경
의 전체 이야기를 통해 확대되는 과정에서 이 둘을 서로 통합하는
방법을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과 이 책이 일부를 이루는 시
리즈의 목적은 바로 이런 필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대다수
기독교인은 성경의 신학에서 중심 주제를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고
또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방식을 알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교회가 바로잡아야 하는 실수다. 기독교인은
개인적으로 자기의 지역 교회에서 올바른 성경적·신학적 교리 교
육이 부족하다고 단순하게 주장할 수도 있지만, 교회는 이것이 부
주의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규탄하고 아주 솔직하게 회개하고 대
응해야 한다.
하지만 지성에 대한 이런 부주의가 감정에 대한 교회의 지나친
강조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하는
성주의 진단을 받았다.7) 이것은 중상모략이 아니라 수많은 것의 결
과일 가능성이 있는 현상에 대한 합리적 평가인데, 여기에는 왜곡
된 형태의 경건주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불균형한 거부 또는 단순
히 서구 문화에 본능적인 소비주의적·시장 중심적 기독교에서 형
성된 종류의 제자가 포함된다( 참고. 요 2:16 ) 8) 이런 지적 후퇴는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개별 신자에게는 일차적으로 기독교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계와 떨어진 개인의 내면생활이나 정신생활로
여겨진다. 세계의 교회에는 일차적으로 기독교가 현실 세계와 세속
학문으로부터 면책을 주장할 수 있는 본문의 내적 영역으로 여겨
진다.
예를 들어, 교회는 단순히 역사에 대해 말하는 대신 “구원 역사”
로 불리는 특수한 역사나 신학화된 역사를 주장해 왔는데, 이를 바
탕으로 현실 세계에서부터 자신을 차단할 수 있다. 윌슨이 한탄하
7) 다음을 보라. Mark A. Noll,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 (Grand Rapids, MI: Eerdmans, 1994).
8) 다음을 보라. John Drane, The McDonaldization of the Church:Spirituality,Creativity,and the Future of the Church (London: Darton, Longman, and Todd, 2000); Thomas White and John M. Yeats, eds., Franchising McChurch: Feeding our Obsession with Easy Christianity (Colorado Springs, CO: David C. Cook, 2009).
9) Wilson, God’s Good World, 17-18; 참고. Hilary F. Marlow, Biblical Prophets and Contemporary Environmental Ethics: Re-Reading Amos, Hosea,and First Isaiah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57-74.
주의처럼, 기독교도 창조자를 창조에서 떼어 놓을 뿐 아니라 영혼
도 몸에서 해방하는 고유한 구원 역사로 말미암아 창조와 새 창 조라는 전통적인 도식의 처음과 마지막을 상실한다. 이런 형태의
성경 이야기와 성경적 삶의 표현은 최선의 경우도 단편적일 뿐 아
니라 최악의 경우는 기독교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종말론적 이유. 창조에서 새 창조로의 진행은 시작과 마지막 모두 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한다. 유감스럽게도 성경 이야기의 마
지막은 여러 세대 동안 기독교인에게 매혹과 과장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세”에 구체적으로 편협하게 치중하는 경향은 심지어 일차
적으로 미국에서 1세기 전에 강하게 뿌리내린 종말 신학의 지원에
힘입어 종말론이 많은 기독교인의 생각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재정의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는 희석되거나 왜곡되
었다.
비하인드』로 불리는 베스트셀러 시리즈를 통해
수많은 경건한 기독교인에게 전해졌다.10) 이뿐 아니라,
( 창 1장 ) 와 완전히 무관한 매혹적이
10) Tim LaHaye and Jerry B. Jenkins, Left Behind: A Novel of the Earth’s Last Days (Carol Stream, IL: Tyndale House, 1995). 이것은 “말세에 대한
종말론적 기독교 공상 스릴러와 서스펜스 시리즈”로 분류된 시리즈의 12권 중 첫 번째 책이다.
고 신비로운 장소다. 오래된 성경 이야기는 성경적 심상을 “해독함”
으로써 세계의 현대적 이야기와 매우 상세하게, 그리고 정말 호소
력 있게 합쳐질 수 있을 것이다.11) 심지어 가장 평범한 성경 독자를
위한 해독 도움말이 주석에 가득한 『스코필드 관주 성경』( 1909년 ) 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말세의 신학이 교회를 휩쓸었다. 이 결과로
마지막을 재구성하는 동시에 시작과도 단절된 성경 이야기가 생겨 났다.
요약하면, 성경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는 시작과 직접 연관되는 마지막이 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
니라! 『레프트 비하인드』 시리즈로 교리를 교육받았든 아니면 서구
기독교의 상상력에서 굳어진 천국과 지옥을 묘사한 중세 회화로 교
리를 교육받았든 상관없이, 최근 세대의 교회는 축소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경적으로 더 정
확한 종말론의 정의는 “인간의 삶이 지향하는 마지막과 관련이
있다.”12) 다시 말해, 시간의 의미( “말세” ) 에서 마지막은 종말론의 작
은 일부일 뿐이다. 더 완전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창조를 위한 하나
님의 목표나 목적, 하나님이 정하신 의도와 세계의 구상을 가리키
는 것이다. N. T. 라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종말론에 대한
11) 여기서 도움이 되는 것은 B. M. Pietsch, Dispensational Modernis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3-4다.
12) Gunton, Triune Creator, 201.
창조의 언약
나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 초기에
지도 교수님을 만났을 때 겪은 부끄러운 경험을 기억한다. 지도 교
수님은 내가 내 연구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들을 처음 정리하신
것을 살펴본 뒤에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씀하셨다. “좋은 학생은 질
문에 답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를 아
는 사람이다.” 교수님의 요점은 나에게 분명했다. 좋은 학생은 자신
이 다루고 있는 문제와 이 문제에 올바르게 관여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관점과 분명한 정의가 중요하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제안한 해답은 전혀 만족스럽지 못
할 것이다. 지도 교수님의 지적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
었다. 나는 답을 찾기 전에 내가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
해야 한다. 나는 성경의 ‘시작에서’보다 올바른 질문을 해야 하는 더 중요한
곳을 마음에 생각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본문만큼 많은 논쟁과 분
열을 일으킨 것도 없다. 창세기의 처음 두 장은 심지어 모든 세대의
가장 뛰어난 학자들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현대의 출판
사들이 이 본문에 대해 포기를 선언한 것은 명백하고 당연했는데, 이 사실은 “세 가지 견해”를 소개하는 수많은 책이 창세기 1-2장의
의미와 적용과 관련된 결론 대신에 대화를 제시하는 형태에서 나타
난다.1) 그렇지만 이 문제는 결국 교회와 일차적으로 목회자와 교사
들에게 넘겨졌는데, 목회자와 교사들은 제3의 매우 길게 느껴지는
것에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신중한 접근법을 채택하고 현실적으로
도박을 한다. 결국 가족 모임에서 어색한 친척처럼, 교회는 이 문제
와 결코 직접 맞서지 않고 결국 회피하는 데 능숙해진다.
공정하게 말하면, 우리가 창세기 1–2장과 관련된 이런 현재의 난
관에 직면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경의 시작 부분은 상당
히 정치적인 본문이 되어서 ‘기원의 정설’에 대한 일종의 고유한 리
트머스 시험이다. 이런 현실은 교회와 지도자에게 매우 뚜렷하게
압력을 가해 대단히 금기시하는 방식으로 창세기 1–2장의 주제를
둘러싼 보호막을 생성한다. 둘째, 창세기 1–2장은 해석하기가
심지어 가장 숙련된 독자도 조심 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창세기 1–2장에 대
1) 예로 다음을 보라. Reading Genesis 1–2: An Evangelical Conversation, ed. J. Daryl Charles (Peabody, MA: Hendrickson, 2013). 이 책은 창세기 1–2장의 해석을 주제로 다섯 가지의 견해가 주고받는 유익한 대화를 소개한다.
한 올바른 성경적·신학적 분석이다.
창조의 방법뿐 아니라 창조의 주체, 대상, 이유
그러면 창세기 1–2장과 관련해서 해야 할 올바른 질문은 무엇
일까? 너무 오랫동안 창조라는 단어는 기원에 대한 논쟁을 일반 기
독교인의 생각에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창세기의 처
음 장들에 대한 접근법을 지배했으므로, 질문은 창조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법에만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2) 우
리는 창세기의 처음 장들을 주의해 살펴볼 때, 창조의 의미와 목적
이 이야기의 의도에서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해석적
질문은 성경 자체의 의도, 곧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열망에서 비롯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의사소통적 열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1–2장이 한 가지 질문이 아닌 네 가지 질문에
답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데, 곧 창세기 1–2장은 방법의
질문(곧 기원)만 아니라 또한 주체의 질문, 대상의 질문, 이유의 질문에
도 답하려 한다. 방법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과학이 우리
가 성경을 읽는 데 끼친 영향을 반영한다. 과학은 물리적인 질문( 원
인과 결과 ) 을 던지는데, 이런 물리적인 질문도 좋고 참되지만 교회는
2) 유익하고 관련된 분석은 다음을 보라. J. V. Fesko, Last Things First:Unlocking Genesis 1-3with the Christ of Eschatology (Fearn, Ross-Shire, UK: Mentor/Christian Focus, 2007, 『태초의 첫째 아담에서 종말의 둘째 아담 그리 스도까지』,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2), 23-29.
형이상학적인 질문 ( 본질과 목적 ) 을 덧붙인다. 교회는 물리적인 질
문( 방법 ) 을 형이상학적인 질문( 주체, 대상, 이유 ) 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현대에 방법의 질문에 대한 다양한 답변에 맞서 성
경을 설명하거나 변호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교회는 인격성( 주체 ),
계획( 대상 ), 목적( 이유 ) 과 관련이 있는 다른 세 가지 질문을 설명하고
변호해야 하는 사역의 책임에 주의하는 일에 소홀했다. 요약하면, 교회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논의를 단순히 기원의 문제에서 확장
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상과 목적의 문제도 포함시켜야 한다.
이것의 중요성은 창세기 1–2장을 단순히 떼어 내어 해석하지 않고
성경적 정경에서 성경의 서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훨씬 폭
넓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고대에서는 책의 시작 부분이 중요
했는데, 대부분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간에 이야기의 목적과
내용에 대한 중요 정보를 소개하는 서문이나 서언이 있었다.3) 특히
서문은 고대 문헌에서 독특하게 극적인 힘이 있었다. 서문은 이야
기의 세 가지 중요 측면을 독자에게 소개함으로써 이야기를 올바르
게 읽는 데 이바지했는데, 곧 (1) 이야기 속에 나오고 중요한 것으
로 이해되는 주요 등장인물, (2) 특히 행동
Morna D. Hooker, “Beginnings and Endings,” in The Written Gospel, ed. Markus Bockmuehl and Donald A. Hagn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84-187.
는 데 중심이 되는 해석적 지침과 방향을 제시한다. 이중에 어느 것
도 창세기 1–2장을 공식적인 서문으로 전문적으로 정의할 것을 요
구하지 않는데, 단지 창세기의 처음 장들은 창세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와 성경 이야기에 대해서도 해석적으로 중요한 의도적인 문학
적 목적이 있음을 주장할 뿐이다.4)
서문에서 독자에게 소개하는 세 가지가 창세기의 시작에 대해 교
회가 질문하는 데 실패한 세 가지의 추가적( 형이상학적 ) 질문인 등장
인물( 주체 ), 구상( 대상 ), 목적을 추구하는 관점( 이유 ) 을 연관시키고 합
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창세기의 시
작( 그리고 성경 ) 에 나타나는 의사소통적 의도는 독자가 성경 이야기
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올바르게 살도록 이끄는 것
이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방법에 대해서는 우리 사이에 의견
이 서로 다를 수 있는 성경적 재량권이 어느 정도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며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구상되었는지, 하나님
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통해 세상 속에서 무
엇을 하기를 의도하셨는지, 또는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내 인생과
목적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지으신 이유를 오해하지 않는 것
이 좋다. 요약하면, 우리가 이야기의 시작을 잘못 해석하면 이야기
의 나머지 부분도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있다. 이 이야기는 창조자
4) 참고. Gordon J. Wenham, Rethinking Genesis 1-11:Gateway to the Bible (Eugene, OR: Cascade Books, 2015), 4-6. 웬함은 창세기 1장의 문학적
양식과 특히 숫자 7의 다양한 양식이 세심하게 구성된 작품을 어떻게 반영하는
지를 보여 준다.
와 그분의 창조에 대한 것이어서 그 위험은 이보다 더 높을 수
없다. 내 지도 교수님이 여러 해 전에 나에게 가르치신 대로,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와 올바른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한다.
서문(창세기 1–2장): 창조자와 그분의 창조에 대한 소개
창세기 1–2장은 만물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력을 독
자에게 확실히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기원을 회고적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창세기 1–2장은 또한 만물
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고유한 창조적 의도를 독자에게 보여 주는
데도 관심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전망적으로 보는 것이다. 성경의 서문은 창조자와 그분의 창
조, 따라서 세계를 위한 목적과 계획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성경의
서문은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절정의 성취를 목표로 하
는 성경 이야기를 위한 방향을 설정한다. 이런 전망적인 보기의 작
업은 주체와 대상과 이유, 다시 말해 등장인물과 구상과 목적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창조 이야기의
본질 자체에 걸맞게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부분은 점증
적으로 작동해 독자가 세계와 그 이야기로 향하도록 이끈다. 성경
의 서문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 모든 피조물의 다른
모든 진리( 그리고 목적과 기능 ) 는 이 진술의 지배를 받는다. 요한 사도
는 자기의 복음서 첫 부분에서 다음처럼 말하면서 이 진리를 ( 긍정적
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 더 완전하게 밝혔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
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 그리고 바울 사도는 창조의 방향과 목적을 신조의 형태로 밝
힌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
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 요한과 바
울이 설명하는 것은 섭리와 목적에 대한 모든 질문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첫 말씀이 주체의 질문에 답변
하고 있으므로, 방법의 질문을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에 두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주체가 먼저 언급되지만 대상이 곧바로 이어진다. “천지”라는 어
구는 창조의 총체성을 의미하므로, 볼 수 있는 대상뿐 아니라 보이
지 않는 것도 모두 포함한다. “하늘”은 지구 위의 하늘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영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엡 6:12 ) 보이지 않
는 하늘, 곧 천사의 영역과 영적인 세계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5)
요약하면,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5)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Genesis Found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Eugene, OR: Wipf and Stock, 2006).
막을 기술하는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로 설정할 뿐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과 뚜렷이 다른 존재로 설정한다. “창조
하다”라는 동사의 힘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하신 세계의 주권적인
주인임을 확인하도록 이끈다.6)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엘
로힘’ ) 으로 번역된 용어는 언약 이름인 “주”( ‘여호와’ ) 와 달리 창조자
의 초월성을 드러낸다.7) 이 구별은 중대하다. 성경 서문의 시작은
하나님이 태초에 자신에 대해 말씀하기를 원하신 사실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알려지거나 이해될 수 없는 우주적 창조자며,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구별되며,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지니신다.
(2) 창조는 목적이 있으며 발전을 위해 구상된다(창 1:2). 서문은 창
조자에게서 그분의 창조로 진행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땅”으로 이
동한다. 땅은 쉽게 해석되지 않는 두 용어인 “혼돈과 공허”로 묘사 된다. 적어도 이 용어들은 “흑암”과 “깊음”의 언어와 함께 땅이 창
세기 1장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첫 명령 이전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형성과 채움” 이전에
6) Gerhard von Rad, Genesis:A Commentary, rev. ed., OTL, trans. John H. Mark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2), 49.
7) C. John Collins, Reading Genesis Well: Navigating History, Poetry, Science, and Truth in Genesis 1-11 (Grand Rapids, MI: Zondervan, 2018), 169-171.
고의 혼돈에 대한 이교의 신화처럼 전투의 징후는 전혀 없고 다만
창조의 건축자가 짓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수면에 대한 묘사만 있
을 뿐이다.
이 묘사가 의미심장한 이유와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자로 선포한
뒤에 밝히시는 두 번째 사실은 창조자가 세계를 목적 있게, 그리고
점진적으로 짓고 계시는 설계자라는 것이다. 세계는 창조 프로젝트
인데, 이 구절은 구조물이 지어질 토대에 대한 통찰을 우리에게
준다. 이 심상은 그 자체로 이중의 진술인데, 하나님이 아직 자기 일
을 시작하지 않으셨고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성경의 서문은
창조가 “미완성 상태”에 있음을 알리려는 것인데,8) 땅이 “생산하지
못하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을 것
이다.9) 성경의 시작 부분이 묘사하는 창조의 초기 상태는 창조가 발
전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도록 독자를 이끄는데, 창조자가 자기 일
을 마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창 2:1을 보라 ). 창조의 초기 상태는 또한
창조가 목적에 따라 진행하도록 준비되고 있음을 독자가 이해하기
를 원하는데, 창조주께는 의도 곧 목적( ‘텔로스’ ) 이나 목표가 있기 때
문이다. 그래서
8) Vern S. Poythress, Interpreting Eden:A Guide to Faithfully Reading and UnderstandingGenesis1-3(Wheaton, IL: Crossway, 2019), 294.
9) C. John Collins, Genesis 1-4: A Linguistic,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Phillipsburg, NJ: P&R, 2006), 54.
의 불확실성이 그야말로 요점이다. 창조( 대상 ) 는 창조자( 주체 ) 에 의
해 형성된다. 그래서 목적은 여전히 밝혀져야 할 것( 이유 ) 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설계자와 토대가 있는 곳에는 구상도
것이 공정하다.
있다고 말하는
(3) 창조자는 자기 창조에 대해 언약의 주장을 하신다(창 1:2). 창조자
의 구상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훨씬 명백해진다. 쉽게 간과되고 해
석적으로 어색한 이 어구는 다음처럼 밝힌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은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중요한 진실( 창조자 ) 을 밝히므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이 세심한
설명은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일을 밝힌다고 해석하는 것이 최선인
데, 곧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를 위해 계획하신 더 많은 것을 드러
낸다. 그리고 이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자신
의 창조에 대해 하시는 상징적 동작의 형태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창조를 고유한 형태로 명령하시기 전에( 창 1:3 ) 일종의
의식을 거행하시는데, 성경과 세계 역사 전반에 걸쳐 확장될 공표
를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시작하시려는 일과 이 일을 행하
실 성실성과 관련해
전달된다.11)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창조 사역의 과
정과 결과물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을 통해서도 드러
난다. 창세기 1장 2절은 상징적 의미를 거의 설명하지 않을 수도 있
으나, 신명기 32장 10-11절은 선회하시는 성령을 어두운 물 위에
나는 날개로 해석한다. 신명기 32장 10-11절과 창세기 1장 2절에만
나오는 두 희귀어의 용례는 평행하고 상호 설명적인 상황을 가리
킨다. 신명기에 나오는 노래는 하나님이 척박한 광야에서 “자신을
위해 새롭고 거룩한 성소로 조성하신 자기 백성 위로 독수리처럼
선회하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음을 상기시킨다.12) 그리고 이 “선회하는” 현존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현존”
이나 “영광-구름”으로 정의되는데, 이 현존은 또한 특별히 성령과
동일시된다( 느 9:19-20; 사 63:11-14 ). 실제로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
백성을 덮는 영광-구름의 심상은 또한 언약의 표징으로 묘사되기
도 한다( 참고. 학 2:5 ).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해석적 렌즈를 창세기 1장 2절의 심상에
적용할 때, “우리는 태초에 성령이 창조 언약에 대한 신성한 증인으
로서, 창조가 자기의 언약 주권의 보호 아래 존재한다는 표징으로
모든 언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독력적인 종주-봉신 조약이다.
11)
12)
서, 창조 위에 아치형으로 덮으셨음을 알 수 있다.”13) 하나님의 덮
으시는 현존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성한 서명인데, 이 서명이 하나
님의 창조 사역이 시작될 때 의식의 형태로 나타나는 사실은 창조
자와 창조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낸다.14) 언약의 이 상징성은
하나님의 현존이 이 경우에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무지개를 땅과 맺으신
마주한 영광( 창 28:10-16 ) 과 이스라엘 자손을
시내산에서 떨게 할 두려운 영광( 출 9:16-19 ) 이 있다.
이 창조 언약과 아담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는 여기서 우리에게
상관이 없다. 이것은 이 언약 의식이 아담과 관계되지 않는다거나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 이전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는 의미가 아니라( 호 6:7을 보라 ), 이 언약 의식이 아담에 의해 완전하
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는 심지어 언약의
언어를 싫어해서
13) Meredith G. Kline, Images of the Spirit (Eugene, OR: Wipf and Stock, 1980, 『언약과 성령』,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4), 19.
Thomas R. Schreiner, Covenant and God’s Purpose for the World (Wheaton, IL: Crossway, 2017), 20-23.
15) Paul R. Williamson, Sealed with an Oath:Covenant in God’s Unfolding Purpos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52-59.
것은 분명하다……참으로 성경의 맥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을 때도 언약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을 인정할 것
이다.16) 이뿐 아니라, 영광-구름이라는 이 언약 상징을 하나님이 이
후에 세우신 언약의 계시에 비추어 해석하지 않는 것은 정경의 측 면에서 부주의한 것으로 보인다. 창조와 자기 피조물에 대한 하나
님의 관계는 세계 역사에 대한 성경 이야기를 틀로 삼아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성경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서로 관련된 언약
들” 안에서, 그리고 이런 언약들로 정의되기 때문이다.17) 따라서 우
리는 창조의 출발 위에 선회하는 영광-구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이 언약의 표징을 무엇
으로 이해해야 할까? 이 상징은 창조와 관련해 세 가지 언약적 주장
을 한다. 첫 번째 주장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현존이다. 성경 전체
에서 영광-구름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증거가 되며, 더 구체적으
로는 자기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광야
에서 방랑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한 하나님의 영광-구름은 하
나님의 현존을 계속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이 현존으
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클라인은 이것을 다음처럼 훌륭하게
설명한다. “창조의
16) Williamson, Sealed with an Oath, 33.
17) Scott J. Hafemann, “The Covenant Relationship,” in Central Themes in Biblical Theology: Mapping Unity in Diversity, ed. Scott J. Hafemann and Paul R. House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7), 20-64(특
히 21).
을 드러낸다.”18) 이뿐 아니라, 상징이 가득한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언약의 성격을 띠므로, 독자는 성경 자체의 방향, 곧 “하나님과 창
조와의 관계가 언약을 통해 드러나는 발전”을 소개받으며19) 이 발
전은 “선회하시는 성령”이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요 1:18 ) 예수께 임
하실 때( 마 3:13-17; 막 1:9-11; 눅 3:21-22; 요 1:32 ) 새 언약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주장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영광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것
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기 창조와 관계하실 뿐 아니라 자기 창조
를 다스리기도 하신다. 이 사실은 장차 이루어질 행동을 위한 무대
를 마련하는데, 이런 행동은 그다음 절( 창 1:3 ) 에서 하나님이 명령으
로 창조를 생겨나게 하실 때 시작된다. 창조의 출발에서 하나님의
영이 흑암과 공허 위에 선회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보이는 것과 보
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주장한다. 이것은 또한 소유권과
절대 주권을 주장한다. 시편 기자가 선포하는 대로,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
이다( 시 24:1 ). 창조 행동은 알파와 오메가여서 시작뿐 아니라 마지막
도 다스림을 증언한다( 계 22:13 ).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창조를 다스
리신다는 사실은
18) Kline, ImagesoftheSpirit, 17.
19) James W. Skillen, God’s Sabbath with Creation:Vocations Fulfilled,the GloryUnveiled (Eugene, OR: Wipf and Stock, 2019), 96-97.
창조는 주어진 헌장에 따라 살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20)
세 번째 주장은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양식이다. 선회하시는 성령
이라는 언약 표징은 하나님이 자기 창조를 위한 청사진이 있으며
하나님이 하늘의 양식을 본떠서 세계를 형성하는 일을 시작하고 계
심을 드러낸다. 클라인이 주장하는 대로, “영광-성령은 완성된 창
조-구조를 미리 보여 주는데, 이 신현적인 성령-형성은……창조 사
역을 위한 신성한 양식이었다. 우주와 인간은 모두 똑같이 이 원형
적인 성전 양식을 본떠서 형성될 운명이었다.”21) 이런 이유로 예수
는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6:10 ). 성경 서문의 나머지 부분이 밝
힐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창조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셨으며, 자기
구상의 성취에 부합하게 일하고 창조를 육성하는 방법을 인간에게
보이셨다.22) 그렇지만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에게 설명하
시는 대로, 영광-구름의 점진적 계시로써 자기 창조를 인도하시는
20) Roland S. Ward, GodandAdam:ReformedTheologyandtheCovenant of Creation, rev. ed. (Lansvale, NSW, Australia: Tulip Publishing, 2019), 16.
21) Kline, KingdomPrologue, 31.
22) James B. Jordan, ThroughNewEyes:DevelopingaBiblicalViewofthe World (Eugene, OR: Wipf and Stock, 1999), 45.
날 창조 성막
1일 휘장같이 친 하늘(시 104:2) 막(출 26:7)
2일 궁창(창 1:2) 성전 휘장(출 26:33)
3일 궁창 아래의 물 물두멍 또는 놋 바다(출 30:18)
4일 빛들(창 1:14) 등잔대(출 25:31)
5일 새들(창 1:20) 날개 있는 그룹들(출 25:20)
6일 인간(창 1:27) 대제사장 아론(출 28:1)
7일 중단(창 2:1)
복(창 2:3)
완결(창 2:2)
중단(출 39:32)
모세의 축복(출 39:43)
완결(출 39:43)
도표 1.1. 창조와 성막 사이의 관계
성전이 되도록 구상된다(창 1:3‑25). 하나님의
영광-구름이 하늘의 영역을 미리 보여 준다면, 1장 3-25절에 나오
있다. 이 발언에서 하나님은 재료( 출 25:1-9 ),
사이에는 어법상의 유사점도 있다.”25) 하
나님은 창조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에게 일
곱 번째 발언을 마치실 때도 안식을 명령하셨는데 이 명령을 창조
이야기와 직접 연관시키신다( 출 31:17 ). 더욱이
23) 이 내용은 다음에서 개작한 것이다. Fesko, LastThingsFirst, 70. 크리스천 포 커스의 허락을 받아 사용함.
24) Fesko, LastThingsFirst, 68.
25) Gordon J. Wenham, “Sanctuary Symbolism in the Garden of Eden Story,” in I Studied Inscriptions from Before the Flood: Ancient New Eastern,Literary,andLinguisticApproachestoGenesis1-11 , ed. Richard S. Hess and David Toshio Tsumura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94), 399-404(특히 403).
26) 앞에서 제안한 대로, 모세가
창세기 1장이 땅을 성전으로 형성하는 것에 대해 암시적으로 말
한다면,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훨씬 명시적이다. 예를 들어, 에스겔
은 에덴을 성전으로 부르면서 에덴을 “성소”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동산……하나님의 성산”으로 언급하는데( 겔 28:13-14, 16, 18 ), 이 모든
용어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성전을 언급하는 것이다. 에스겔은 또
한 제사장처럼 단장한 옷을 입고 에덴에 있는 아담 같은 사람에 대
해서도 말하는데( 겔 28:13. 출 28:17-20을 인유 ), 이 사람의 죄 때문에 성
소가 더러워지고 이 사람이 내쫓기게 된다( 겔 28:17-18 ) 27) 실제로 성
전은 에덴동산의 요건에 따라 설계된다.
요약하면, 동산은 하나님의 성소요( 겔 28:18 ) 우주적 성전이요 세
계의 축소판이었다.28)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
계의 양식인 동시에 약속이었는데,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 프로젝트
에서 여전히 육성 과정에 있었다. 성경의 서문은
있다. 참고. Moshe Weinfeld, “Sabbath, Temple and the Enthronement of the Lord,” in MélangesBibliquesetOrientauxenl’honneur de M. Henri Cazelles, ed. A. Caquot and M. Delcor (NeukirchenVluyn: NeukirchenerVerlag, 1981), 501-512(특히 506).
27) G. K. Beale and Mitchell Kim, God Dwells Among Us:Expanding Eden to the Ends of the Earth, ESB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21, 이 책의 2014년
간, 2016), 6.
28) 참고. G. K. Beale, The Temple and the Church’s Mission: A Biblical Theology of the Dwelling Place of God, NSBT 17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3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