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12
저자 서문 16
서론 19
해석과 선포 20
해석을 위한 도움 21
본해석 24
성경신학 26
신약신학 43
1부 사도행전의 신학
1. 오순절과 구속사 54
사도행전의 목적과 구조: 초기 고찰 사항 54
2.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개관 71
종말론과 신약 성경 71
종말론과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 나라 도래 74
하나님 나라 도래의 단계: 하나님의 영역과 통치 77
요약 87
3. 누가-행전에 나타난 성령과 하나님 나라 93
누가복음에 나타난 성령과 하나님 나라: 초기 개관 93
누가복음 24장과 사도행전 1장 100
누가복음 3장 15-18절 113
누가복음 3장 21-22절 133
누가복음 12장 49-51절 142
4. 오순절(1부): 다양한 측면을 가진 오순절의 기본적 의미 146
오순절의 구속사적 의미 147
오순절의 교회론적 의미 193
오순절의 삼위일체적 의미 201
요한의 신학에 대한 간략한 보충 설명 203
오순절의 법정적 의미 213
5. 오순절(2부): 두 가지 관련 문제 224
사도행전 2장과 요한복음 20장 22절 224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빙성 229
6. 예비적 언급 236
근본적 고찰 사항 236
사도행전 관련 내용 239
바울 가르침의 의미 240
어려운 바울 해석사 242
7. 바울과 바울 해석자들 246
종교개혁 이전 247
종교개혁 249
종교개혁 이후 252
역사비평적 해석 258
새 관점 273
역사비평적 해석: 마지막 두 가지 지적 286
개혁파와 복음주의 진영의 최근 해석 288
8. 목사-신학자 바울 295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 295
바울 신학을 해석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 297
결론 299
9. 바울 신학의 입구와 중심에 대한 문제 301
바울 신학의 중심 302
예수, 바울, 하나님 나라 306
결론 314
10. 종말론적 구조 316
바울의 두 시대 구분 사용: 배경 316
몇 개의 핵심 본문 319
바울의 두 시대 구분의 수정: 두 시대의 겹침 367
바울의 두 시대 구분의 수정된 사용: 요약과 결론 381
11. 부활(1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394
초기 지적 사항 394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통일성 398
결론 420
12. 부활(2부): 그리스도와 성령 422
고린도전서 15장 45절 423
고린도후서 3장 17-18절 451
로마서 1장 3-4절 454
결론 479
13.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삶(1부): 직설법과 명령법 485
골로새서 3장 1-4절 487
직설법과 명령법의 관계 493
빌립보서 2장 12-13절 502
로마서 6장 1절-7장 6절: 몇 가지 지적 506
조직신학적 반성과 교회사적 반성 519
14.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삶(2부): 그리스도인의 고난 532
고린도후서 4장 7-12절 534
빌립보서 3장 10-11절 540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 547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부활 552
그리스도인의 고난, 그리스도의 부활, 성령 554
부활, 고난, 오늘날의 교회 555
결론 560
┃서문┃
1965년에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학 교수 네드
스톤하우스는 스코틀랜드 출신 동료 교수 존 머리의 『로마서 주석』
을 소개할 때 “만족감”을 크게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에 대한 내 평가를 진실로 충분히 표현한다면 흔쾌한 기
분으로 최상급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35년에 걸친 저자
와의 친밀한 관계를 특별히 고려하면 이 표현을 얼마간 자제해야 한다. 이런 친밀함 때문에……우리가 다 저자에 대해 사적으로 가
진 따스한 감정만큼 주해가로도 저자에 대해 열렬한 평가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1 )
이후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 어떤 스코틀랜드 사람이 웨스트민스
터 신학교의 신약 성경 담당 교수이자 성경신학 및 조직신학 교수
인 리처드 개핀에게 찬사를 보낼 차례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스톤하
우스 교수가 존 머리의 책에 아낌없이 기쁨을 표현할 때와 비교해
굳이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즐거움을 충분히 표현하고 싶다.
『사도행전과 바울 성경신학 입문』은 참으로 놀라운 책이다. 이 책
은 아주 많은 것을 베푼다. 하지만 저자가 성경을 지적 엄격함과 통
1 )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vol. 1 (Grand Rapids, MI: Eerdmans, 1960), vii.
찰력뿐만 아니라 믿음으로도 다루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지막 장을
넘긴 후에도 개핀 박사가 이제 시작했을 뿐이고 앞으로도 무언가를
더 많이 찾아낼 것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이것은 개핀 교수가 여
러분을 경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직접 하나의 책에 담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채굴해 더 많은 보석을 찾아낸 사람
앞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독자가 이 책의 책장을 넘
기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주해와 신학의 보석을 두 손 가득히 모으
고 있다고 느끼고 연구를 계속할 도전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도행전과 바울 성경신학 입문』의 특징은 바울 사상의 깊은 구
조를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독자가 속도를 늦추어 어쩌
면 다시 읽고 묵상하고 무엇보다 칭송을 바랄 것으로 생각되는 내 용이 많이 담겨 있다. 개핀 박사는 ( 앞서 언급한 은유에 의존하면 ) 여러분에 게 자신의 확대경을 빌려주고 그것을 통해 깊이 들여다보고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다이아몬드의 다면적 아름다움에 감탄 하는 법을 가르치는 유능한 보석상 같다.
은유를 바꿔서 목차를 보면 독자는 개핀이 전문 가이드로 신학의
등산을 위해 지도를 제공한다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이 책 자체는
산의 구조와 아름다운 경치를 지적하고, 가끔 일부 등반객이 미끄
러졌던 위험한 곳을 알려주는 노련한 등산가의 해설 같다. 그리고
등반할 때 우리는 다른 기회에 오르게 될 산의 다른 측면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이 등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 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적용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기억에 남는
광경을 보여 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의심할 것 없이 독서할 때 느끼는 이런 즐거움은 어느 정도 저자 의 인격적 지식에 기인한다. 저자의 억양을 “듣고”, 말투의 익숙한
특성을 인정하며, 마음의 화면에 미친 친숙한 표정과 동작을 볼 수
있는 것도 확실히 책을 읽는 경험에 추가된다. 『사도행전과 바울 성
경신학 입문』의 경우에는 이것이 다 깊은 존경과 찬사로 높아진다.
많은 사람처럼 나도 딕 개핀을 학자, 선생, 친구, 무엇보다 바울 같
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런 경험 요소는 독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다. 개핀 박사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는 이 책의 내용이 웨스트민
스터 신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이 들었던 사도행전과 바울에 대한 강
의에서 나왔다는 증거를 삭제하기를 거절했다. 학생들에게는 이 책
을 읽을 때 부분적으로 그들에게 구두로 전했던 이 풍성한 바울 해
설을 기억하는 데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권이 없는 우리
일반 독자에게는 『사도행전과 바울 성경신학 입문』을 읽을 때 강의
시간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를 듣는 것이 확실히 “그 자리에 있는
것” 다음으로 좋은 일이 될 것이다.
독자는 또 이 책을 읽을 때 이 책이 저자의 살아 있는 믿음을 생
생히 표현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울서신을 채굴하는 일이 딕 개
핀에게는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니었다. 이 강의는 개핀의 활력 근
원이었다. 수업 시간에 그 앞에 앉아 있던 모든 학생이 금방 깨달았
을 것이다.
개핀 박사의 후배로서 나는 처음에 개인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 학교 학생에게 개핀의 강의가 미친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수동태로
만 사용되는 동사를 하나 만들었다( 내가 이 비밀을 그에게 고백했는지는 잘 모 른다 ). ‘개핀화되었다’( gaffinized ) 라는 말은 개핀 박사의 강의가 은혜롭 고 개핀 박사가 복음과 복음의 깊은 구조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에 평생 깊은 인상을 미쳤음을 의미한다. 이런 ‘개핀화’ 과정을 찾아내 기는 어렵지 않다. 포도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게펜 ( !pg ) 이
저자의 이름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들리는 것도 내게는 기분 좋은
우연의 일치로 보였다. 개핀은 진실로 그의 가정, 동료, 학생, 교단, 많은 친구, 그리고 모든 그의 사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기 때문
이다. 개핀은 이 책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학을 겸손하게 실천
하고 바울이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백했던 삶의 열망을 본보 기로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
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
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8-11)
나는 마음의 눈으로 개핀 박사의 학생들이 새로 구입한 『사도행전 과 바울 성경신학 입문』 책을 서재로 가져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협 탁 위에 두되, ( 존경심을 담아 ) 너무 눈에 띠지 않게 살며시 올려놓는 것
을 본다. 그렇게 올려놓는 의도는 자녀나 손자가 그 책을 보고 “리처 드 B. 개핀이 누구에요?”라고 묻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 대답
으로 “NT 223”으로 알려진 강의실에서 들은 이야기를 말해 줄 것이 고 그러면 그들은 거의 반세기 동안 ‘사도행전과 바울’이 사실상 보 편적으로 개핀 박사의 연관 개념이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러 신학교 졸업생의 대변인 역할이 내게 아주 큰 특권이자 기쁨인 것은 『사도행전과 바울 성경신학 입문』이 멘토이 자 친구이자 본보기인 리처드 개핀에게 들었던 강의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 퍼거슨
┃저자 서문┃
이 책은 1977년에서 2010년까지 매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열었던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대한 교실 강의 내용( 바울에 대한 많은
부분이 2015년에 주어졌다 ) 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2005년 강좌의 오디오
파일 녹취록을 제공해 준 크로스웨이에 감사드린다. 이 녹취록으로
강의 노트와 함께 책의 내용을 거의 다 구성했고, 그 한계도 확정하
게 되었다.
신약 성경 커리큘럼에서 이 강의는 순서상 다른 교수가 가르친
복음서 강의와 공동서신 및 요한계시록 강의 사이에 들어왔다. 그
래서 여타 강의에서 충분히 다룬 문제에 대한 결론을 전제로 두거
나 예상해야 했고, 이는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시작하고 계속 진행하면서 내가 직면한 큰 도전은 대략
50분에 걸친 강의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활용하느냐에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하나로 답하기 어렵다. 내가 취한 접근
법 말고 건전하고 유용한 다른 접근법도 가능하고, 특히 비슷한 강
의나 강의들을 진행한 분 중에 어떤 이는 많은 곳에서 내 접근법을
의심하거나 미리 예단하리라는 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왜 어떤 주제는 다루지 않았을까? 나는 왜 한 분야에만 그토록 크게
관심을 가졌을까? 나는 왜 다른 분야에는 관심을 더 갖지 않을까?
이 책은 강의 목적이나 강의 시간의 제약을 그대로 반영하여 사
도행전과 바울의 신학을 충분히 또는 완벽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신 모든 강의가 그렇듯이 이런 신학을 다루는 주요 문제, 곧
“먼저 중요한” 것( 참고. 고전 15:3 ) 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 신학에 대해서는 오순절이 가진 의의, 그
리고 바울 신학에 대해 부활을 포함하는 종말론적 구조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한 것은 확실히 순서도 적절하고 반박하기 어렵다.
13장과 14장에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많은 합당한 주제 가운데
나는 직설법 대 명령법의 관계를 선정했고 나로서는 특별히 이것이
시의적절한지를 두고 고민했다.
나는 강의의 틀과 흐름을 유지하면서 아울러 내용에 대해서도 강
의실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다만 한 가지 중대한 예
외로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원어 성경을 사용했으나 여기서는
최소한 사용을 자제했다.
이런 강의실 수준의 목표를 감안할 때, 학계 동료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이 이 책에 관심을 두기를 바 란다. 내가 주로 염두에 둔 독자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대해 어
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고, 이 가르침에 ‘깊이 파고들기’를 바라는 이다.
간헐적으로 참고 문헌을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책에서 기
대할 만한 수준으로 완전한 각주와 문헌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그 렇다고 해도 다른 많은 학자의 저술, 특히 게르하르두스 보스와 헤
르만 리데르보스의 작품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인정 하고 싶다. 여러 해 동안 주로 하나님 말씀의 놀라운 풍성함에 대한
이 두 학자의 통찰을 전하고 확립하는 일에 몰두했고 그런 기회를
얻게 된 것에 대해 크게 감사한다. 이 책의 가치는 내가 이 일을 얼 마나 성공적으로 해냈는가에 달려 있다.
먼저 자료에 대해 한마디 전해야겠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저자 서문 17
책은 주로 교실 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부 강의 내용은 이미 출판된 다음 자료에도 나온다. “Redemption and Resurrection: An Exercise in Biblical-Systematic Theology,” in A Confessing Theology for Postmodern Times, ed. Michael S. Horton ( Wheaton, IL: Crossway, 2000 ), 229-249; By Faith, Not by Sight: Paul and the Order of Salvation, 2nd edition ( Phillipsburg, NJ: P&R, 2013 ) ; “The Resurrection of Christ and Salvation,” The Gospel Coalition, https:// www.thegospelcoalition.org/; “The Resurrection of the Christ and the Age to Come,” The Gospel Coalition; and “Union with Christ,” The Gospel Coalition. 나는 이 책 내용이 이런 과거 자료
의 내용과 상당히 중복된다는 것을 내내 지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자료가 이 책의 원천이 아님을 독자가 자각하기 바란다. 이 자료
와 이 책 모두 핵심 원천으로 교실 강의에 의존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 받은 것에 감사를 전한다. 크로스웨이 출
판사와 함께 처음에 책을 낼 생각을 한 재러드 올리핀트, 원고를 읽
고 유용한 제안을 해 준 캘리포니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데니
스 존슨, 크로스웨이 출판사에서 계속 격려해 준 저스틴 테일러, 정
교한 편집과 개선을 위해 수없이 유익한 제안을 해 준 케빈 에메르 트 등이다.
마지막으로 30년 이상 강의실에서 질문하고, 시험에 답하고, 빈
번한 비공식적 토론에서 내 생각과 내용의 발표를 날카롭게 만든
유능하고 헌신적인 학생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다.
2021년 11월
리처드 개핀
서론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해석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안은 본질
적으로 보충적이다.
이 문제를 다루면서 이 책에서 어떤 문제를 다른 문제보다 더 길
게 다룰 때는 독자 여러분이 이미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어느 정
도 익숙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전 지식은 당연히 사람 마다 크게 다르다. 그렇지만 대다수, 아니 어쩌면 모든 사람이 아무
리 적더라도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대해 최소한 약간은 지식이 있 을 것이다.
이 전제에 따라 이 책에서 나의 관심사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이해를 깊어지게 하고 건전하게 해석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데 있다.
동시에 이렇게 이해를 깊어지게 하려는 관심사는 언제나 궁극적 관
심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역 할을 해야 한다.
이렇게 깊이를 더하려는 관심에는 때로는 어렵고 당장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는 일도 수반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심사는 긴장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자 할 때 불가피하게 만나는 문제가 무엇이든 이런
문제는 성경의 폭넓고 변함없는 명확성과 성경의 최종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의 필요성을 감소시키지 않으며, 이는 앞으로도 분
명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석과 선포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방금 언급한 궁극적 관심사, 곧 하나님의 말
씀에 대한 순종을 가릴 의도는 조금도 없고, 다만 이 책의 내용이
설교 강단이 아니라 교단에서 나온 것으로, 곧 예배당이 아니라 교
실이나 연구실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함을 분명히 하겠다. 다
시 말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진리를 우리의 삶에 직접 적용하는
일에는 크게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교단과 강단의 분리, 또는 다르게 말해 성
경 해석과 성경 선포 사이에 쐐기를 박는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사실 성경이 해석과 선포, 이 둘의 원천 자료임을 감안하면 둘 사이
에 경계선을 날카롭게 그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경계선은 적합하
고 필수적이다. 여기서 염두에 둔 차이와 이 차이의 타당성 및 의미
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거리와 현대
적 관련성 사이의 구분에 따라 둘 사이의 차이를 간략히 제시하 겠다.
해석에 대해 말하면, 역사적 기원과 뿌리에 따른 본문의 ‘그때 거
기’와 해석자의 ‘지금 여기’ 사이의 거리는 명시적이다. 본문의 현대
적 관련성은 함축적이다. 오늘날 교회에 그리고 교회 너머에 본문을
제시하는 설교와 다른 방식을 보면 상황이 반대다. 즉 현대적 관련
성이 명시적이고 역사적 거리는 대부분 함축적이다.
이 두 가지, 곧 해석과 선포에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직접적 관
련성이 항상 보장되는 것은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그
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써 역사가 끝날 때까지 시간과 장소를 불문 하고 모든 세대의 믿음과 삶에 필수적이고 충분한 최종 권위로 남
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그려진 해석과 선포 사이 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으며, 우리의 해석적 접근 방식 역시 진행하
면서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하고 독자에게 개인적으로 교훈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 이다.
따라서 해석은 선포를 위하고, 건전한 설교는 견실한 강해를 전 제로 하며 거기서 비롯된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최소한 암묵적으
로라도 교회의 삶과 증언에 도움을 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강
해는 잘못이다. 반면에 강해가 없는 설교는 서툰 모조품이다. 해석
자는 본래 설교자를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설교자 자신은 해석
자로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대한 판단자로서 어느 정도
유능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 서신서가 아니라면 ) 취지에 따라 말해
보자면( 살후 3:10을 보라 ), “누구든지 강해하기 싫어하거든 설교하거나 가르치지도 말게 하라.”
해석을 위한 도움
다양한 논제를 활용하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독자에게 주요 논제 가운데 몇 가지만 환기하겠다.
우선 보통 ‘특별 서론’으로 지칭되는 일련의 질문이 있다. 이런
질문은 저자 문제, 기원 연대와 장소, 목적지와 원래 수신자, 언어
와 문체 같은 문제를 다룬다. 로마서의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저자는 누구이고 저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로마
서를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썼는가? 원래 수신자는 누구였으
며 어디에 거주하고 그들의 상황은 어땠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다룰 문서인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포함해 신약 성경 모든 문서에
대해 당연히 제기된다. 바울서신에 대해 추가로 고려해야 할 것은
바울서신 상호 간의 상대적인 연대 문제다. 예를 들어 보자. 고린도
전서와 디모데전서 가운데 먼저 기록된 것은 무엇인가? 갈라디아
서와 로마서는 어떤가?
‘특별 서론’에서 다루는 주제는 널리 배경과 관련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 기원을 둔 성경 문
서다.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의 환경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의 환경을 구성하는 것은 ( 문화적, 언어학적, 사
회적, 정치적 요소 중 ) 어떤 요소인가?
이와 관련해 특히 중요한 분야, 곧 최근의 신약 성경 연구, 특히
바울 연구에서 관심이 높아진 분야는 당시의 유대교다. 말하자면
제2 성전 시대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유대교의 생활과 신학이다.
쿰란 공동체는 어떤가? 랍비 유대교는 어떤가? 또는 팔레스타인 유
대교, 본토 유대교, 디아스포라 유대교( 헬레니즘 유대교 ) 사이의 구분은
어떤가? 이런 질문에 주의를 기울이면 사도행전과 바울을 깊이 이 해하려는 우리의 목적에 도움이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분야는 사도행전과 바울 해석사다. 특히 우리
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루기 때문에 성경 해석은 극히 개
인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개인주의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소라도 개인의 진공 상태에 빠져 성경을 나 자신의 것으
로 사용함으로써 ‘나와 내 성경 증후군’으로 불리지 않도록 조심해 야 한다.
아마 이런 접근법을 옹호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렇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 중에도 많은 이가 이론적으로는 아니더라
도 분별없이 실제로 이런 접근법에 빠진다고 생각한다. 거의 틀림
없이 현대 복음주의에서 성경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는
독이 되고 있다. 오늘날 유감스럽게도 계속 분열되고 있으나 그럼
에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남아 있고, 따라서 기본
적으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통일되어 있는 교회가 우리 연 구의 매우 광범위한 배경이라는 점을 계속 유념해야 이런 경향에
대비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테면 에베소서 3장 끝에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고”라고 기도하는 바울의 고결한 기도는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깊이 이해하는 것과 같
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이 기도의 필수 요소는 이렇게 깊이 있게 만드는 이해가
“모든 성도와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3:18-19 ). 가장 바람직한 의미에서 볼 때 “모든 성도와 함께”라는 말은 건
전한 성경 해석이 보편 교회의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는 최초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왔고 그들의 연구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과의 연대성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확실히 우리는
어떤 해석자나 어떤 해석 전통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
상 자신은 생각이 다를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
는 것, 그것도 아주 많이 배운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소극적 관점에
서 다양하게 적용되면서 자주 인용되는 말에 따르면, “과거의 실수
를 무시하는 자는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 진리 역시 교회
사와 해석사를 살펴보면 확실히 증명된다.
본해석
내가 방금 지적한 논제와 추가로 언급할 수 있는 다른 논제가 중
요한 것은 이 논제들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대한 주의 깊고, 방
법론적으로 검증된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 논제들은 등한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깊이 반성하지 않으면 여러분도 사도행
전과 바울서신을 우리가 그 의도된 의미와 기능 또는 그 가르침의
구조로 규정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다루는 것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
음을 인정할 것이다. 또는 말을 약간 누그러뜨리면, 우리는 깊이 반
성하지 않으면 특별 서론 및 배경 연구 같은 이 모든 분야를 통해
기껏해야 본문의 의도된 의미와 기능을 간접적으로나 우발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1 )
짧고 단순한 한 사례가 이 요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계몽시대 이후로 바울에 대한 학문 연구에서 벌어진 한 가지 중대 한 논쟁은 목회서신의 저자 문제였다. 목회서신을 누가 썼는지는
주장과 반론이 폭넓게 전개되며 논란이 지속되었다. 특히 소위 역 사비평 학자 대부분 목회서신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점을 부인
1 ) 우리는 본문의 의도를 존중해야 한다. 독자 반응 기법은 나름대로 확고한 입지를 가졌지만
특히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 여기서 본문의 의도된 의미로 지칭하는 것을 절대로 무시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한다.2 ) 여기서 나의 요점은 무엇인가? 바울에게는 목회서신 저자
문제가 불확실한 문제도 그를 크게 사로잡은 문제도 아니었다는 것
이다.
배경 연구 및 특별 서론과 같은 사안은 서론 문제일 뿐이다. 이런 사안은 본문의 주제와 관련해서 보면 부수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런 사안은 해석에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분명한 의미의 해석에도
가장 고유한 의미의 해석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안
은 확실히 적합하고 유익하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의도된 의미다. 따라 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이 ‘본해석’이 이 책에서 나의 초점이다.
나는 서론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관련된 결론이 전제되어 있 거나 가볍게 언급할 것이다.3 ) 또 이 초점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2 ) 여기서 우리의 목적에 따르면, 본질상 성경에 적용된 역사비평 방법은 단순히 조심스럽고
방법론과 관련 있으며 방법론적으로 자증적인 본문 해석에 전념하는 일의 문제는 아니다.
아무도 이런 식의 본문 해석을 반대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런 식의 본문 해석을 매우 일관 되게 실천하는 자가 분명히 하는 것처럼, 역사비평 방법에서 ‘비평’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이성의 자율에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1) 해석자는 본문에 대해 판단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의무도 있다. 이때 타당하더라도 타당하지 않더라도 본문 내용의 진리 주장에 의심 을 제기하거나 심지어는 거부하거나 할 수 있다(소위 비판). (2) 기록된 본문인 성경 문서는 순전히 인간적 기원과 저자를 두고 있고, 따라서 최소한 사실적이든 도덕적이든 오류의 존 재를 가정하거나 심지어는 예상하면서 일반적 역사 본문과 같이 다루어야 한다.
이런 견해를 옹호하는 것으로 인용할 수 있는 많은 글 가운데 다음 두 편이 특별히 나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Gerhard Ebeling, “The Significance of the Critical Historical Method for Church and Theology in Protestantism,” in Word and Faith (Philadelphia, PA: Fortress, 1963), 17–61; Van A. Harvey, 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 (New York: Macmillan, 1966). 해석자의 필수적 자율성에 대해 특히 1-3장을 보라. 3 ) 서론 문제를 유용하게 다루는 것으로 예컨대 다음을 보라. D. A. Carson and Douglas J. Moo,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5).
간단히 설명하고 오래되었으나 아주 특별히 유익한 것으로 다음을 보라. J. Gresham Machen, The New Testament. An Introduction to Its Literature and Histor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6), 51-188.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결정적 초점을 둔 삼위 하나님 계시의
한 부분이므로 이 문서들의 계시적 성격과 기능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집중하는 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모든 내용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시하면 이 두 문서가
복음이라는 것, 그러므로 이 두 문서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묘사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의 능력”( 롬 1:16 ) 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 명확히 방법론적 요소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해석법
은 구속사적 방법 또는 성경신학적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사용할
때 대체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는 이 두 표현은 오늘날, 특히
“성경신학” 분야에서 매우 널리 다양하게 통용되고 있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여기서 구속사적 방법 또는 성경신학적 방법을 구성하
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설명하는 것이 순서다. 먼저 성경신학
에 대해 어느 정도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그런 다음 더 구체적으로, 하지만 일반적 관점에서 신약 ( 성경 ) 신학에 대해 설명하겠다.
성경신학 4 )
기본 요소
다음 요소는 나중에 제시한 몇 가지 중요한 제한에 종속되어 있
으나 성경신학적 방법 또는 구속사적 방법을 정의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도움을 준다.
4 ) 문헌이 아주 많다. 여기서 취한 견해에 대해서는 특히 다음을 보라.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5), v-vi, 3-18.
첫째, 구술이든 기록이든 하나님에게서 온 말씀의 전달이라는 의
미에서 계시는 역사적 과정으로 임했다.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말
뿐만 아니라 “과정”이라는 말에도 강조점이 있다. 전체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고( 딤후 3:16 ), 따라서 자체로 충분한 계시인 성경은 이
역사적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서 역사적 과정, 곧 특별 계시 역사의
필수 부분이다.5 )
요한복음 20장 30절과 21장 25절이 증명하는 것처럼, 특별 계시
역사의 범위, 곧 역사 속에서 실제로 계시된 모든 것은 성경의 내용
을 크게 넘어선다.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성경에서 확인하는 패
턴은 계시사 전체가 따르는 패턴을 반영한다”6 )라고 믿을 것을 기
대한다. 성경의 내용은 실제 계시사의 내용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특별 계시의 전체 우주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계시의 인도자로 나타
난다. 특별 계시의 전체 우주 속에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계시의 은하 계는 없다.
역사적 과정의 이 요소를 강조하는 데 대조가 도움이 된다. 성경
문서는 하나님 저자에 기원을 두고 있더라도 앞에서 지적한 실제로
널리 퍼져 있는 복음주의 경향과 달리 이를테면 하늘에서 곧바
로( senkrecht von oben ) 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이와 관련해 성경은 다른 주요 종교 경전, 예컨대 코란이나 모르몬경 등과 다름을 주목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코란은 아마 비
교적 짧은 계시 기간, 사실은 그의 생전에 일련의 밤의 환상으로 모 하메드에게 구술된 것이다. 모르몬경은 뉴욕주에서 발굴된 금패에
5 ) 물론 특별 계시는 항상 하나님을 계시하는 창조(일반 계시 또는 자연 계시)의 배경 안에서 일어난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관계 문제가 중요하지만 이 책의 연구 범위를 벗어난다.
6 )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4: Studies in Theology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2), 18.
기록된 내용에 기반을 두고, 그 기록이 단시일에 번역, 출판되었다.
역사적 전개로 임하는 계시의 적극적 의미와 계시사의 한 부분인
성경의 기원은 곧 살펴볼 것이다.
성경신학을 정의하는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와 면밀하게
관련 있다. 그것은 말로 이해되는 계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시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하나님, 인간, 세상에 대한 초
시간적 진리로 이루어지는 정보를 제공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
니다.7 ) 공정하고 중요하게 일반적으로 말하면 구두 계시는 항상 역
사 속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일어나고 또 그 활동에 초 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은 창조자와 구속자로서의 하나
님의 행동을 향해 나아간다.
더 나아가 이와 관련해 계시는 증명하거나 해석할 때 또는 묘사 하거나 설명할 때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묘사하는 것은 이미 해석하는 것이다. 묘사와 해석, 이 둘은 해석학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엄밀
하지 않고 상대적인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변함없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 요점은 바로
하나님의 선포는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 있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
님의 사역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말씀의
초점이 사역에 있다는 점에서 구두 계시는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
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구두 계시는 파생적이고, 하나님이 역
사 속에서 행한 일의 한 기능이다. 구속은 계시의 ‘존재 이유’다.
“계시는 구속과 크게 얽혀 있어 구속에 대한 성찰이 허용되지 않으
7 ) 이 진술에서 “초시간적”이라는 말은 오해할 여지가 있다. 여기서 거부되는 관념은 계시된 진 리의 타당성은 무시간적 진리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하고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둔감하다는 관념이다.
면 계시는 근거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8 )
이처럼 계시된 말씀의 초점이 구속 행위에 있는 것, 곧 말씀 계시
의 초점이 행위 계시에 있는 것은9 ) 앞에서 지적한 첫 번째 요점, 곧
계시는 역사적 과정으로 임한다는 것에 더 깊은 이유를 제공한다.
구두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행하며 자기 피
조물의 구속과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 안에서 필
수적으로 수반하는 것이다. 구두 계시는 구속, 곧 구속사 전개의 특
징인 역사적 점진성에서 파생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점진적인 성 격을 가졌다.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가 구속사에 대해 말할 때 타락 이후로 에
덴동산에서 시작하는 역사와 타락의 결과로 전체 피조물에 영향을
미치는 인간의 죄에 대한 저주( 롬 8:20-22 ) 는 이스라엘사의 전개 과
정에 깊이 결합하고, “때가 차매”( 갈 4:4 ),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
리 가운데 거하실”( 요 1:14 ) 때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완성에 이른다.
그러므로 구두 계시가 임한 것은 유기적인 역사적 전체, 곧 유기
적으로 철저하게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으로 임한 것이다. 소극적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고립된 또는 상관없는 개인들에게 따로따로
주어진 신탁의 편집물이 아니다. 성경은 대체로 서로 무관한 계시
삽화를 모아 놓은 선집도 아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계시라는 말을 들을 때 구두 계시
역사는 항상 구속사의 주된 흐름 안에 있는 필수적 물결로, 이 큰 흐름의 추세를 따르는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8 ) Vos, Biblical Theology, 15. 9 ) 구속 행위와 말씀 계시 사이의 이런 구분 역시 엄밀한 구분이 아니다. 구두 계시 활동도 구 속 활동이고, 비구두 구속 활동도 계시 활동이다. 말씀과 행위, 계시와 구속의 이런 통합 또 는 융합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리스 도의 행동과 가르침 안에서 완벽하게 실현된다(요 1:1; 히 1:2).
이런 의미에서 계시는 구속을 해석하고 성경신학의 초점은 구속
사적 계시라는 의미의 계시에 있다.
성경적 기초 10 )
지금까지 나의 설명은 대체로 단정적인 선포였다. 이런 설명의
성경적 기초는 어떤가? 나의 설명의 성경적 기초는 다양한 방법으
로 세울 수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첫 부분에서 확인되는 가장 명확
하고 가장 명백한 보증에 초점을 맞추겠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은 시기와 다양한 방식으로 조상
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나의 사역)
이 진술은 저자가 히브리서 전체에서 계속 말하는 것을 총괄하여
하나로 망라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진술은 하나
님의 말씀하심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 전체에 대해 포괄적 관점을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이 진술에는 서로 관련된 네 가지 요소가 들
어 있다.
첫째, 계시는 명확히 역사적 과정으로 간주된다.
둘째, 이 역사 과정은 다양성이 특징이다. 다양성이 계시의 전개
를 형성한다. 이 다양성은 “많은 시기”와 “다양한 방식으로”라는
두 어구로 강조된다. 이 두 어구는 각각 부사인 두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고, 헬라어 본문을 보면 이 진술의 첫 부분에 함께 배치
되어 강조된다. 의미상 비슷한 이 두 어구는 차이도 있다. 첫 번째
10 ) 다음도 보라. Richard B. Gaffin Jr. By Faith,Not by Sight:Paul and the Order of Salvation, 2nd ed. (Phillipsburg, NJ: P&R, 2013), 7–8.
단어( πολυμερῶς, 폴뤼메로스 ) 는 복수의 부분이나 시기를 가리키지만 두
번째 단어( πολυτρόπως, 폴뤼트로포스 ) 는 서로 다른 방식이나 양식을 가리
킨다.
간략히 말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두 단어로 암시되는
다양성에 각종 문학 장르가 포함되고, 따라서 성경을 해석할 때 문
학 장르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문학적
접근법 및 장르에 대한 관심은 구속의 바탕인 실제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도록 도울 때만 타당성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셋째, 결정적인 것은 아들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1) 계시사의 종점 또는 최종 목표로 간주되고, (2) 관련된 모든 다
양성을 통합하는 초점으로 간주된다( 참고. 예. 고후 1:20 ). 저자가 지금 만 아니라 나중에도 계속 말하는 내용에 아들에게 이어지는 계시의
궤적이 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성의 성취를 생략한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히브리서 외에 특히 눅 24:44-47을 보라; 참고. 고후 1:20 ).
이것은 단순히 상대적인 의미나 제한된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 의
미에서 사실이다. 그 까닭은 아들이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말한
것만 말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 계시된 말씀의 종말론적 종점이
자 성취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곧 성육신하신 그분의 인격과 사
역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행위 계시든 말씀 계시든 다 폐지하거
나 능가할 수 없는 최종성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계시사를 끝내 기 때문에 계시를 완성한다.11 ) 수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묻는 찬 송가 가사와 같다. “그가 네게 말씀하신 외에 더 말씀하실 것이 무 11 ) 히브리서 저자에게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구원은 “들은 자들이” 확증한 것을 포함 한다(히 2:3). 이 확증은 그리스도에게 직접 권한을 받은 사도들의 귀(그리고 눈)가 증언하 는 것(예. 행 1:8; 참고. 1:2, 20-21)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따라서 사도들의 말은 그리 스도의 말씀이며(예. 고전 14:37; 살전 2:13),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과 관련된 다른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다(참고. 엡 2:20).
엇인가?”12 )
넷째, 계시사는 인간 활동을 포함한다. 이 인간 활동은 필수 요소
로 무시되지 말아야 하고 적절한 고려가 요구된다. 이 인간 활동은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한 대로 중요한 다양성의 존재를 대부분 설명
하고 역사 전체의 구성에 기여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인간 활동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놓쳐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 1장 1-2절의 핵심 단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라는 것이다. 말씀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두 동사( 1:1의 분
사와 1:2의 주동사 ) 의 유일한 주어는 하나님이다. 다른 모든 것은 구문으
로도 의미로도 종속 어구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을 통한”13 )
이라는 인간 활동은 도구적 의미다.
히브리서 저자가 시편 95편 7절[70인역 94:7]에 나온 똑같은 인
용문을 소개하는 방식을 보면 이 도구 관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
는지가 증명된다. 곧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히 4:7 ) 것은
“성령이 이르신”( 3:7 ) 것이다. 다윗 같은 사람이 말한 것( 구술이든 기록
이든 ) 은 어쨌든 하나님이 말한 것에 대해 독립된 것도 긴장 관계를
가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을 사용해 그들의 말을 자
기 말씀이 되게 한다. 그들의 말은 완전히 진실하고 최종적으로 권
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14 )
12 ) “How Firm a Foundation” in Trinity Hymnal (Philadelphia, PA: Great Commission, 1990), 94, stanza 1.
13 ) 선지자에 대한 이런 언급은 전체 계시사에서 줄곧 사용된 인간 도구에 대한 제유법이다. 2:2(천사들)와 3:5(모세)의 평행 진술을 참고하라.
14 ) 우선 이 양식은 이후에 성경 교리가 형성될 때 하나님과 인간 저자를 각각 제1 저 자(auctor primarius, 아욱토르 프리마리우스)와 제2 저자들(auctores secundarii, 아욱토 레스 세쿤다리이)로 구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몇 가지 기본 제한
구속사적 방법 또는 성경신학적 방법에 대해 지금까지 성경에 바
탕을 두고 이루어진 설명은 다음 세 가지 필수적이고 중요한 제한
및 해명에 종속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지적했듯이 계시사의 초점은 창조자이자 구속자로서 하나님
의 활동, 하나님이 행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있다. 그
러나 그 특별한 초점과 함께 계시는 또 계시하는 하나님이 자기 계
시를 능가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그 활동보다 먼저 존재하고 오로
지 그 활동으로만 정의되는 분이 아님을 인정할 것을 우리에게 지
시한다.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하나님은 창조자나 구속자를 무한히 능가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피조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존하
지 않고 어떤 식으로도 피조물에게 제한받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
한 우리의 지식은 창조와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지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존성, 곧 스스
로 존재하고( a se, 아 세 ) 피조물과 독립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피
조물 안에 내재하며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동시에 피조물을
초월한다.
이 진리가 무시되지 않고 적절히 존중되는 곳에서만 구속사에 대 한 관심이 건전할 수 있다. 우선 이사야 57장 15절은 궁극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실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천명한다. “지극 히 존귀하며/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이가/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통회 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둘째, 구두 계시는 구속 계시일 뿐만 아니라 전( 前 ) 구속 계시이기
도 하다. 성경 자체는 모든 성경책이 타락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
에서 구속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주요 구속 주제를 적절히
이해하려면 성경이 원 창조와 원 창조의 선함( 창 1:31 ) 외에 이후에
일어난 타락의 역사성과 죄와 죄의 결과에서 구속받을 후속적 필요
성도 설명해야 한다.
성경 기사는 타락 전 상태를 증언하고, 그러므로 구속 전에 주어
진 구두 계시도 증언한다. 타락 전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와 교제
한 일에 전형적으로 공정하게 읽혀지는 구체적 사례는 창세기 1장
28-30절, 2장 16-17절 ( 함축적으로는 2:19 ), 3장 1-3절이다.15 ) 관련된
구두 계시와 함께 이 교제의 유대는 타락 전후에 하나님이 인간과
가진 관계를 중심으로 구축되는 초기의 언약 체결( 행위 언약, 은혜 언약 )
사례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 전후의 구두 계시를 망라하는
‘언약사적’ 계시는 ‘구속사적’ 계시보다 더 포괄적인 지칭이다.
셋째, 단번에 이룬 구원의 성취, 곧 구속사 또는 구원사( historia salutis, ‘히스토리아 살루티스’ ) 와 구원의 지속적 적용, 곧 구원의 서정 ( ordo
salutis, ‘오르도 살루티스’ ) 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타락과 함께 에 덴동산에서 시작해서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루어지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는 타락 이후로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
고 펼쳐지는 구속의 지속적 적용과 구별된다. 구속사와 구속의 적용은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후자 ( 적용된 구
속 ) 는 전자( 성취된 구속 ) 에 의존하지만 후자가 없으면 전자의 의도된 효력이 없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차이가 흐려지거나 희미해져서
는 안 된다. 내가 구속사 또는 구속사적인 것 전체에 대해 말할 때
염두에 둔 것은 구속의 적용( 오르도 살루티스 ) 이 아니라 구속의 성취( 히
15 ) 다음을 보라. Vos, Biblical Theology, 22–23(“Pre-Redemptive and Redemptive Special Revelation”).
스토리아 살루티스 ) 다.
성경신학과 해석학
앞의 설명을 통해 성경신학적 방법의 핵심 의미가 해석학에 있다
는 사실을 아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의 의미
와 성경신학과 주해 간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설명해야 한다.
성경의 통일성. 성경에 대해 적절한 관점을 가지려면 성경의 통
일성을 인정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따라서 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자각이 성경의 건전한 해석에 필수적이다.
분명히 성경의 통일성은 성격상 교리적이거나 교훈적이다. 성경
전체에 걸쳐 이런 성격이 존재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한 하
나님이 성경의 제1 저자이고, 따라서 모든 말씀에 대해 책임을 지 기 때문이다. 성경의 통일성이 근본적인 해석 원리다. 우리는 심지
어 성경의 통일성은 사전 해석 원리 또는 메타 해석 원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성경의 통일성을 전제로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지 않
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많이 배웠다고 말 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성경,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는
성경의 핵심 메시지를 궁극적으로 오해하고 왜곡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핵심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주목받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통일성을 주장하면, 성경의 유비( analogia Scripturae, 아날로기아
스크립투라이 ) 에 대해 말하게 된다. 여기서 ‘유비’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작용한다. 성경의
어느 부분도 나머지 성경의 문맥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원리는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전형적으로 표현된다. “오류 없는
성경 해석 원칙은 성경 자체다. 그러므로 어느 성경 본문의 참되고
충분한 뜻( 다양하지 않고 하나인 ) 에 대한 질문이 있을 때, 이 질문은 더
분명히 말하는 다른 본문에 따라 찾아지고 알려져야 한다.”16 )
이 원리는 종교개혁 원세대가 파악하고 설명했다. 종교개혁의 성
경 원리( sola Scriptura, 솔라 스크립투라 ) 는 스크립투라 인테르프레스 스크립
투라이 ( Scriptura interpres Scripturae ), 곧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라는
루터의 말17 )로 표현된 해석학 명제를 포함한다. 우리는 항상 종교
개혁은 무엇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개혁임을 파
악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정확히 커다랗고 새로운 해석학 운
동의 하나로 간주된다.
아울러 이 원리에 함축된 것처럼 성경은 스스로 해석하거나 스스
로 해설한다. 이것은 성경이 진공 상태로, 고립적으로, 그리고 앞에
서 언급한 것과 같은 서론이나 배경 문제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아도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본문( 어떻
게 고려하든 길이가 어떠하든 ) 도 성경 전체의 통일된 가르침 맥락 안에 자
리 잡고 있고,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은 그 본문이 성경의 종합적
통일성 안에서 언급되고 다른 본문에 비추어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본문은 성경 전체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 성경 전체가
그 본문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면 문맥의 원을 점차 넓히는 중심
으로 드러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성경신학 방법론에서 해석학의 중요성을 살펴볼 때는 성
경의 통일성이 근본적으로 구속사적 또는 언약사적 통일성이라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16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 대한 이런 언급과 이후
언급에 대해서는 예컨대 다음을 보라. The Confession of Faith and Catechisms (Willow Grove, PA: The Committee on Christian Education of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2005); https://opc.org/confessions.html.
17 ) Martin Luther, The Bondage of the Will, in Career of the Reformer III, vol. 33 of Luther’s Works, ed. Jaroslav Jan Pelikan, Hilton C. Oswald, and Helmut T. Lehmann (Philadelphia, PA: Fortress, 1972), 25–26.
성경의 통일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의 통일성을 확언할 때, 특히 성경의 교리적 또는
교훈적 통일성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요점에 비추어 보면, 성경의
통일성은 상호 일관되고 모순되지 않은 일단의 단언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내용
을 고려할 때는 분명히 충분하지 않다.
성경의 구속사적 통일성을 말할 때, 성경의 배후에 있는 통일성
을 고려해야 한다. 성경의 내용적 측면에서 성경 진술의 통일성을
예측하는 것은 성경이 기록하는 구속의 역사적 과정이 유기적으로
전개되는 통일성 또는 일관성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이다. 통일성이 구속사의 실제 전개를 표시하는 것처럼, 원래의 계
시 과정이 통일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해 하나님
이 저술한 기록도 그 과정의 일부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의 통일성은 창조주이자 구속주로서 역사에서 하나님 활동의 유기체, 즉 유기적 양식의 통일성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따라서 성경 통일성의 필연적 결과는 특별히 실제 주해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그 이유는 장르나 길이( 한 문장에서 긴 담화 단원에 이르기까
지 ) 가 어떠하든 특정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계시사 속에서의 위치, 언약사 속에서의 위치를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이기 때문 이다. 본문의 주제, 곧 본문이 말하는 것에 따르면 전체를 규율하는
맥락은 구속사적 맥락과 계시사적 맥락이다.
용어 여기서 용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 순서다. ‘성경신학’ 이라는 말은 사용할 때 해명해야 할 어떤 책임이 따른다. 우선 이 말은 다른 신학 분야는 ‘성경적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인상
을 남길 수 있다. 또한 이 말은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특정 신학
분야를 염두에 둔 것으로, 말하자면 다른 신학 연구 분야와 구별되
는 자체의 영역이나 범주를 갖고 있고 다른 신학 분야, 특히 이를테
면 조직신학과 독립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오해를 거부해야 하는 것은 내가 방금 지적한 것처럼 성경
신학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학 연구의 모든 국면을 포함하
는 방법론적 고찰이고, 전체적으로 그 수고가 건전한 주해에 대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성경신학은 성경을 올바르게 주해하
는 것, 성경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게르하르두스 보스와 그를 따르는 다른 학자들은 ‘성경신학’이
이미 확립된 용어이기에 이 말을 계속 사용하기는 해도 원래의 계
시사 과정을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찰하는 데 특
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살펴서 더 나은 지칭으로 ‘특별 계시
사’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용어 문제에 대해 더 말하면, 실사인 ‘성
경신학’보다 형용사 ‘성경신학적’ 또는 ‘구속사적’ 또는 ‘언약사적’
이라는 말이 더 낫다. 이 용어들이 더 나은 것은 주로 방법론적 또
는 기능적 국면이 관련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교의학) 18 )
앞에서 설명한 것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에 대해 종종 거
론되는 질문을 전면에 부각한다. 여기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18 ) 인용할 수 있는 상당히 많은 문헌 가운데 유용한 개관을 담은 다음 자료를 참고하라. Lee Irons, “Biblical and Systematic Theology: A Digest of Reformed Opinion on Their Proper Relationship,” The Upper Register(website), http://www.upper-register. com/papers/bt_st.html.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의 절대 필수적인 시
녀고, 그래야 조직신학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적합한 주제 아래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19 )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에 절대 필수적인
이유는 성경신학이 구속사적 맥락에 따라 본문에 각별한 관심을 갖
는 것이 건전한 조직신학의 원동력인 주해에 절대 필수적이기 때문
이다.
성경신학이 조직신학의 시녀인 이유는 또 있다. 성경신학이 성경
의 다양한 2차적인 인간 저자 각자가 특수하고 독특하게 계시에 공
헌하는 것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성경신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성경신학이 성경의 1차
성경 전체를 통일되고 일관되게 가르치기 위한 궁극적 목적에 기여
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조직신학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로마서나 바울의 신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궁극
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여기저기서 하나님이 말씀 하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성경신학
성경신학적 방법 또는 구속사적 방향에 대해 의도적으로 명확한
적용이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에 특히 개혁파 전통에서 그리고 널리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일어났음을 주목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 성경신학은 누구보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설한 성경신학 학과장에 처음으로 부임한 ( 1892-1932 ) 게르하르두스 보스 ( 186219 ) 나는 수년간 다른 곳에서 이 관계를 설명했다(일부 다른 언급에 대해서는 뒤에서 각주 22에 인용된 자료를 보라). 다른 간략한 진술에 대해서는 예컨대 다음을 보라. Richard B. Gaffin Jr. “Redemption and Resurrection: An Exercise in Biblical-Systematic Theology,” in A Confessing Theology for Postmodern Times (Wheaton, IL: Crossway, 2000), 229-230.
1949 ) 의 독창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스는 분명
히 개혁파 성경신학의 아버지로 간주할 수 있다.20 )
그러나 동시에 보스의 연구가 가진 의의와 그가 전개한 명확한
성경신학을 강조할 때 과거와의 중대한 연속성을 간과하지 않는 것
이 중요하다. 19세기 말에 보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갑자기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교회가 해석의 어둠에 빠져 비틀거리고 있었던 것
은 아니다.
교회는 길고 유익한 토론이 될 수 있던 일에 간단히 들어가고자
소위 성경신학 안에서 진실로 관건이 되는 것에 대해 항상 민감 했다. 왜 그런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는 구원의 역사적 성
격에 항상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체인 구원에 대한 관심사는 다른 무엇보다 성경신학의 핵심 요소다.
교회는 출범 초기, 특히 2세기와 그 이후로 맹위를 떨친 영지주의
와의 다툼에서21 ) 구원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하나님이 누구인지
또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
니라 궁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
도 안에서 행한 일에 의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함축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출범 초기부터 교회가 파악한 것은
20 ) “성경신학”이라는 용어는 (보스가 등장하기) 약 한 세기 전인 18세기 중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주로 역사비평적 성경 해석 학파의 배경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 성경 신학은
특히 독일 대학의 주요 신학부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점점 더
자리를 잡았지만, 자의식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성경의 영감과 정경성을 부정하 고 성경의 가르침의 전체적 진리와 통일성을 부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가 보스와 동시대의 선구자들과 관련된 작업을 간과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도, 보스가 성경적으로 건전한 전제와 원칙에 기초한 성경 신학을 선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1 ) 사실 이 다툼의 흔적은 신약 성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요한서신(참고. 요일 4:2) 에서 언급되고 바울을 통해 골로새 교회에서도 다루어진 고대 영지주의의 오류에서 이 다 툼이 확인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곧 참된 코그니티오 데이 ( cognitio Dei ) 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또는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복음 지식,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역
사 속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지식이 핵심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덴에서의 바울의 행적에 대한 기사( 행 17:16-32 ) 에서 이미
확인되듯이, 교회는 기독교가 단순히 또 하나의 경쟁적인 철학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모욕은 기독교가 또 하나
의 대안( 아무리 “새롭고” “이상한” 것이라고 해도, 17:19-20 ) 을 제공하는 것에 있
지 않다. 오히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에 두고 바
울과 다른 사람들이 선포한 복음 메시지는 단순히 고전적인 그리
스-로마의 이교 문화에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이 문화의 우상숭배적
인 세계관을 뿌리째 파괴했다는 것을 금방 증명했다.
후대 성경신학과의 연속성 논제는 특히 종교개혁과 함께 시작된
주해가 종종 함축적으로 성경신학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더 깊이 주장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이 연속성과 함께 보스의 획기적인 연구와 보스가 교회의 삶 속에 들여온 것도 똑같이 인정받아야 한다. 보스는 역사 적 기독교의 정통성 안에서 확실히 개혁파 전통 안에서 역사 과정
의 전개로서 계시에 대해 예리하고 의도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그
사실의 근본적 의미를 파악하고 원하는 것만큼 명백히는 아니지만 그 방법론적 및 해석론적 결과를 끌어낸 최초의 인물, 아니 사실은 최초의 가장 유능한 인물이다. 현재 상황은 보스의 연구와 그의 연 구가 함축하는 의미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많은 유익을 얻어낼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한다.22 )
22 ) 추가로 다음을 보라. Richard B. Gaffin Jr. “Vos, Geerhardus,” in Dictionary of Major BiblicalInterpreters, ed. Donald K. McKim (Downers Grove, IL: IVP, 2007), 1016-19;
결론적 언급
앞에서 성경신학에 대해 설명한 것은 이미 말한 내용을 일부 보
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두 가지 결론적 언급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첫째, 내가 보기에 지금 성경신학적 방법은 없어도 좋은 주해의
사치품도 아니고 특정 입문자 집단을 위해 마련한 수준 높은 통찰
을 제공함으로써 본문을 은밀하게 다루는 비법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간혹 접하는 이런 관점은 성경신학을 너무 과소
평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 후자에 속한 신학적 엘리트주의도 무익하다 ). 성경
신학의 관심사가 성경의 주제 자체에서 나오고, 성경신학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적절하고 필수적인 방법론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 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라고 권고한다. 정
통성( orthodoxy ) 과 정통( orthodox ) 이라는 말은 이 구절에서 “옳게 분별 하며”에 사용된 복합 단어( ὀρθοτομεῖν, 오르도토메인 ) 의 접두사에서 유래
한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의 해석이 정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른바 성경신학에서 위기에 처
한 것은 성경에 대한 이런 건전하고 ‘정통적인’ 분별에 절대 필수적
인 것이다.
둘째, 성경신학적 방법에 대해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는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둔 것을 방법이 아니라 접근법 또는 방향으로 느슨
하게 묘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을 충분히 명확히 할 수 없다. 확
실히 우리는 어떤 엄격한 방법론, 어떤 고정된 또는 판에 박힌 일단
의 절차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경 해석에서 우
Danny E. Olinger, Geerhardus Vos: Reformed Biblical Theologian, Confessional Presbyterian (Philadelphia, PA: Reformed Forum), 2018.
리가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했
듯이 우리가 염두에 둔 것은 다양한 방법론적 단계를 인정하고 수
용하며, 다양한 주해 절차와 기법을 통합할 성경 접근법이다.
이와 관련해 때때로 나타나는 오해를 고려하면, 우리가 문법적역사적 주해와 구속사적 해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되
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양자택일은 잘못된 분리를 드러낸다. 구속사
적 방향은 건전하고 면밀한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요구한다, 아니
더 낫게 말하면 통합한다.
관련 있으나 약간 다른 방향에서 보면, 구속사적 접근법은 성경
을 다룰 때 다양한 관점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쉽게 인정한다. 바울
은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에
대해 말하고, 3장 10절에서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대해 말 한다. 성경에 대한 어떤 접근법이나 어떤 다룸도 성경이 열어 놓은 충분한 관점을 갖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이런 각종
지혜에 철저히 다가갈 수 없다. 그러나 말이 나온 김에 말하면, 나
는 성경 전체의 중심으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구속사적 ‘관점’이 단순히 다른 많은 관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 하고 싶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구속사적 관점은 다른 모든 관점을 포괄하고 포용하는 거대 관점이다.
신약신학 23 )
지금까지의 설명은 성경신학 일반과 관련 있다. 이제 초점을 좁
23 ) 이 부분은 Vos, Biblical Theology, 299-304(“신약 계시의 구조”)를 기반으로 삼고 그 내 용을 보충한다.
혀보자. 신약 성경에 대한 성경신학적 접근법에 특별히 포함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특별 계시의 역사적 점진성에 비추어 신약
성경을 정확히 어떻게 다루겠는가? 구속사나 언약사의 관점에
따라 신약 성경을 해석할 때 수반하는 것은 무엇인가?
계시 과정의 종착점
첫째, 이러한 질문에서 촉발된 몇 가지 관찰 중에서 신약 성경의
관심사는 계시 과정보다는 그 과정의 종착점에 있다. 이에 비해 계
시의 지속적인 발전은 신약보다는 구약의 구조적 특징에 훨씬 더
가깝고, 구약의 문서가 모세부터 포로기 이후 선지자들에 이르기까
지 약 천 년에 걸쳐 등장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 차이를 알 수 다.
반면 신약 성경은 대략 한 세대에 걸쳐 기록되었다. 절차와 종착점
사이에는 명확한 정경적 구분이 존재한다.
이어서 두 번째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대한 연구가 무엇을 보
여 줄지에 대한 주요 요점을 간략히 예상하면, 신약 성경 계시의 내
용을 고찰할 때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 곧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고, 훨씬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사역의 종말론적 성격을 고찰할 때는
신약 성경 전체를 고찰할 것이므로 신약 성경 계시의 종말론적 성
격에 대해 말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계시사의 종말
론적 종착점과 관련된 책으로 말할 이유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
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1장 2절을 간단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곧 하
나님의 새 언약 말씀은 아들 안에서 “이 마지막 날에” 주어진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종말론적 말씀이다.
역사적 진행 그러나 이 요점을 주목하되, 신약 성경 안에 과정과 전개가 나타
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역사적 진행은 신약 성경에
서 결정적 요소다. 전체적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예수의 지상
사역을 거쳐 사도의 교회에 이르는 진행이 있다.
사실 이런 역사적 진행은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복음에 기본적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겪은 역사적 진행이 복음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는 결정적으로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낮아
짐의 상태에서 높아짐의 상태로 나아간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하
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죄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정당 한 진노와 저주를 그들 대신 감당하는 것에서 그 진노가 진정되고 제거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취소할 수 없이 회복하는 것으로 나아
간다. 그 결과 역사 가운데 진노에서 은혜로 바뀌는 전환이 영속적으 로 일어나고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가져온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높아짐의 역사적 사건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24 )
그러므로 신약 성경 계시에는 기본적으로 요한-예수-교회로 이
어지는 세 단계에 걸친 역사적 진행이 있다. 이 세 단계를 각각 살
펴보면 확실히 진행이 있음을 인정하고 진행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대략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개가 신약 성경 기록에서
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신약 성경이 기록
되던 기간의 교회를 살펴보면, 교회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엄밀 하고 충분하며 상세한 구성을 확립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관련
문제를 재검토하는 신약 성경 연구를 지탱하는 사건의 상태를 엄밀 히 정립하기 힘들다. 이런 문제가 중요한 것은 파악에 도움을 주기
24 ) 이 요점은 주로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의 영향에서 비롯된 견해를 특별히 반대하기 위해 확언하거나 주장할 필요가 있다. 칼 바르트 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 아지심은 복음의 의미 속에서 참된 역사적 이전과 이후로 간주되지 않고 반대로 상존적이 고 변증법적으로 관련된 위와 아래로 바뀐다.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약 성경 계시의 성격 때문에 충분하
고 명료한 답변을 얻어낼 문제가 아니다.
신약 성경 저자의 지배적 관심사는 다르다. 신약 성경 저자가 관
심을 두는 초점, 곧 그들에게 ‘첫 번째로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
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 고전 15:3-4 ). 신약 성경 저자는 이 사건 복합체
를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과 확대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직접적인
역사적 결과와 지금 그렇게 판명된 것처럼 장기적인 역사적 결과와
함께 제시할 의도를 가졌다. 신약 성경 저자는 이렇게 할 때 아직
미래의 그리스도 재림이 있을 때까지 충분한 계시를 제공한다.
아울러 신약 성경 저자의 집합적 관심사는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
을 맞추는 것과 함께, 신약 성경 전체를 구약 성경 전체와 연관시키
는 것에도 있다. 신약 성경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 특
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약사의 성취로
기록하고 강조한다. 이렇게 할 때 그 일이 신약 성경 저자들은 이
스라엘 성경( 구약 성경 ) 의 참된 의미를 증명하는 것, 즉 이스라엘의
성경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이 본
래 지닌 유일한 의미를 밝히는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음을 놓쳐
서는 안 된다.
역사적 전개와 관련해 염두에 둘 또 다른 요소는 신약 성경 전
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를 비롯해 부활 이전 시기를 주로 다루는 모든 신약 성경은
부활 이후 관점에 따라 기록되었다. 심지어 복음서도 이 높아지심
의 관점에 따라 명확한 설명이나 해설을 담고 있다. 이것은 특히 요
한복음에서 증명된다. 요한의 부활 이후 관점은 공관복음과 비교할
때 더 명백히 드러난다( 예. 요 2:21–22; 7:39 ).
우리가 신약 ( 성경 ) 신학과 관련해 이 요점을 고찰할 때 다음과 같
은 일반적 관점에 따라 초점을 맞출 수 있다. 구속사의 완성에 대한
기록으로 신약 성경은 다양한 부분에서 부활 이후 관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제공한다. 또는 좀 더 형식적으로 표
현하면, 신약 성경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하고 공시적인 증 언으로 이루어져 있다.25 ) 신약 성경 해석의 과제는 도전적인 것만
큼 열매가 있으므로 이 신약 성경의 증언을 주의 깊게 충분하고 다
양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증언인 신약 성경
신약 성경의 이런 기본적 특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명확한 설명
이 요구된다. 첫 번째 설명은 신약 성경을 가리키는 핵심 범주인 증
언과 관련 있고, 두 번째 설명은 그 증언의 다양하거나 다채로운 특
징과 관련 있다.
사도의 증언
성경을 ‘증언’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해 당연히 신중한 이가 있다.
성경에 증언을 적용하는 다양한 방식 때문에 이것은 이해할 수 있
는 망설임이다. 여기서 칼 바르트를 다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경 교리가 20세기에서 현재까지, 특히 신학 학문 연구에 광범하 고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모든 견해를 사실상 배제하는 역사비평 전통에서 지배
적인 이 견해에 따르면, ‘증언’은 계시와 성경 사이에 불연속성을 들여서 둘 사이에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한다. 이 말을 사용하면 ‘단
25 ) 여기서 ‘공시적’인 것은 신약 성경의 모든 책이 본질상 같은 시간의 구속사적 관점에 따라 작성됐다는 의미다.
순전히 인간적이라는 것과 기록된 본문으로서 그 기원과 성격이 단
순히 인간적이므로 성경은 오류가 있다는 결론을 추가로 전한다.
내가 여기서 신약 성경에 ‘증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런 견
해와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어야 하고, 무엇이 다른지 명확히 할 필
요가 있다. 그러나 당연한 망설임이 이 용어의 유익하고 적절한 사
용, 사실은 성경적 사용을 배제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증언’에 해당하는 신약 성경의 핵심 단어
군 ( μαρτυρία , 마르튀리아 ; μάρτυρος , 마르튀로스 ; μαρτυρέω , 마르튀레오 ) 의 용법을
주의 깊게 연구할 때 확립할 수 있는 몇 가지 핵심 결론을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26 )
신약 성경에서 확인되는 증언은 오늘날 보통 사용하는 의미와 달
리 한 개인의 ‘개인적 증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오히려 신약 성경
에서 접하는 마르튀리아는 초주관적인 증언, 곧 절대로 믿고 신뢰할
수 있고 믿어져야 하며 진실을 세우고 동의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
는 증언이다. 이를테면 법정에서 내세우는 것과 같은 증언이다.
이 증언은 구약 성경에 적용되었다. 예컨대 요한복음 5장 39절의
주변 맥락이 분명히 하는 것처럼( 5:45-47 ), 거기서 ‘성경’은 모세의
증언이다. 예수는 반대자에게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그들을 고발하는 것처럼 이런 증언을 담은
성경은 예수를 거부하는 자를 정죄할 만한 근거로 작용한다.
대충 살펴보아도 신약 성경은 사도의 증언이다. 따라서 신약 성 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사도의 증언은 높아지신 그리스
도가 정하고 권위를 준 증언으로, 그리스도는 사도의 증언을 자신
의 참된 증언으로 간주한다( 행 1:21–22; 엡 2:20 ). 사도의 증언은 진실함
26 ) 다음을 보라. Herman N. Ridderbos, Redemptive History and the New Testament Scriptures, 2nd rev. ed. (Phillipsburg, NJ: P&R, 1988), 58-68.
과 권위가 예수의 말씀과 동등하다( 예. 고후 13:3; 요일 1:2. 1:2에 비추어 보면
4:14도 해당 ) 27 )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증인인 사도의 증언은 “진리의 영”인 성령
의 증언이고, 성령의 증언은 특히 사도의 증언과 관련 있다( 요 15:2627 ). 28 )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증언은 사도, 그리스도, 성령이 똑같은
증인으로 서로 관련된 증언을 담당한다. 그리스도-성령-사도의 이
삼각 구도 안에서 증언이 계속 오간다. 어느 한 증언은 다른 증언을
함축한다.
이것이 글의 묶음( 정경 ) 으로서 신약 성경의 특징인 증언이고, 신
약 성경은 높아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증언, 곧 기원, 진리,
권위에 있어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인 증언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이 때문에 신약 성경의 증언을 다양성에 따라 공평히 다루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다양한 인간적 도구
신약 성경 증언의 다양성을 살펴보면 불가피하게 인간 저자 요 소, 곧 기원과 관련된 다양한 인간 저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27 ) 신약 성경이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의미는 다양하다. 여 기서 나의 설명은 그리스도의 사도인 자, 곧 그리스도가 선택해 권세를 주심으로써 그리
스도의 권위를 가진 자와 관련 있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유다 대신 뽑힌 맛디아를 포함 한 원래의 열두 제자(행 1:20-26), 바울(고전 15:8-9; 참고. 롬 1:5; 고전 1:1; 9:2; 갈 1:1, 11-16),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 이들은 엡 2:20에서 염두에 둔 자로, 고전 12:28과 엡 4:11에서 먼저 언급된 사도들이다. 이 사도직(“사도의 직무”, 행 1:25)에 대한 설명은 다음 을 보라. Ridderbos, Redemptive History, 12-15. 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도가 받는 완전한 권위는 없이 일시적 기초에 따라 특정 교회의 ‘사자’로 활동한 ‘사도’(고후 8:23; 빌 2:25)와 구별된다. 28 ) 이 본문에서 언급된 “너희”는 불명확한 지칭이나 일반적 지칭이 아니고 사도를 가리키는 지칭이라고 생각한다(“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너희”는 다만 파생적 으로 그리고 사도들(요컨대 교회)을 통해서만 온 교회를 가리켰다.
그러나 이런 접근에서 얻는 큰 유익은 이런 접근이 종종 그런 폐단
을 낳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말미암아 성경의 인간적 요소가 두드
러지거나 “우리에게 더 가까이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안에도 약간의 진리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접근의 핵심 가치
는 성경의 인간적 요소가 두드러져서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 되는
것에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요점은 이런 인간의 도구
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이 너무 거친
표현처럼 보일 수 있고, 성경의 인간적 특성에 대해 필수적으로 요 구되는 관심을 약화하는 불행한 방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궁극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저작 자체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기에 그렇게 심
한 말은 아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하는 말이 특별히 여기서
말하는 요점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거기서 바울은 데살로
니가 교회가 자신의 설교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한다. 의심할 것 없이 그것은 바울의 설교였다. 그것은 그의 인
격이 남긴 흔적을 지녔다. 바울의 인격적 특성은 당연히 바울의 말
에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바울의 설교가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바
울의 묘사는 획기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29 ) 그러하도다.”
결론적으로 사도로서 바울이 맡은 바울의 설교는 이런 양극성, 곧 “사람의 말로……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라는 말로 적절히 평가된다.30 )
29 ) ἀληθῶς(알레도스, “참으로”).
30 ) 이 구절을 바울 설교의 언어적, 구문적-의미적 형식이 아니라 내용(그 메시지)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종합하면 증언의 다양성에 비추어 신약 성경에 접근할
때 당연히 다양한 인간 저자에게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러나 이런 접근이 궁극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렇게 할 때 하나
님 계시의 풍성함이 더 명확히 드러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
님의 다양한 지혜( 엡 3:8, 10 ) 가 더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의도된 엄밀한 의미가 더 잘 받아들여지고 좌
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하여 효과적으로 통찰할 것이다( 히 4:12 ).
적응 과제
마지막으로 이런 신약 성경 해석 방식, 곧 증언의 다양성에 비추
어 신약 성경에 접근하는 일은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오늘날 성경을 연구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신약 성경의 다양성에 주의를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에게 아니 실은 역사비평 해석에 가담한
모든 사람에게, 이 다양성은 대체로 교리적 혼란과 본질적인 신학
적 대립을 낳는다. 분명히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다양성은 불일치와 같다. 사실 학문적 성경 연구의 현재 환경 속에서 신약 성경의 불일
치가 많은 사람에게 사실상 해석학적 공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 불일치는 거의 전제이며 더 이상 증명이 필요하 지 않다.
이런 현재 상황은 거부되어야 하는 과잉 반응의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다양성을 불일치로 여기는 만연된 상황 때문에 너무 성급하 게 조화를 도모하거나 통일성을 역설하는 경향에 잘못 빠져서는 안 된다. 여기서 문제는 적당히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거나 어떻게든 것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그의 진술에 완전히 생소한 괴리를 도입한다.
통일성을 보여 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에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신약 성경
의 통일성을 양보해 버리는 상대적인 역사주의의 망령에 대한 두려
움 때문에 신약 성경 내용의 다양성과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기를
주저하는 경향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다양성
을 약화하여 신약 성경의 통일성을 가장 잘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작전이 잘못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본문을 부당하게 다루
고 신약 성경 자체에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아울러 결국 그것은 성
경 학문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만다.
여기서 인정하고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요점은 결론적으로 신약
성경의 통일성은 우리가 어떤 구성적 방법으로 확립하거나 증명해
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의 과제는 이미 있는
것, 곧 다양성으로 존재하는 통일성, 통일성을 구현하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적응의 과제다. 신약 성경은 다양성 안의 통일성, 각기
다른 부분의 유기적 전체성, 다양한 요소의 일관성이다. 통일성과
다양성은 서로 대립하거나 대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여기서 염두에 둔 통일성이 성경과 함께 이루
어지는 어떤 반복적인 동적 행동, 곧 본문과 관련 있으나 본문을 본
문으로 단정할 수 없는 비언어적 계시 활동에서는 확인되지 않
는다. 오히려 그것은 엄밀히 신약 성경 증언의 다양성으로 존재하
는 교리적, 교훈적 통일성이다.
신약 성경의 해석자, 목사, 교사 등에게 도전적이지만 바람직한
과제는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약 성경
의 통일성이 복합적 깊이와 참으로 조화로운 힘을 갖고 더 잘 보이
고 더 잘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