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ICNT 갈라디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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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 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지만,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타 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갈라디아서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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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데이비드 드실바(David A. deSilva) 프린스턴 대학교(B. A.), 프린스턴 신학교(M. Div.), 에머리 대학교(Ph. D.)를 나와 지금은 애슐랜드 신 학교 신약 및 헬라어 석좌교수다.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문화의 키워드로 신약성경 읽기』, 『신약개론』 등을 저술했고, CEB, ESV 성경의 외경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총신대학교 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기독교 고전과 양서의 번역을 통해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 고 많은 책을 번역했다. 대표적인 역서로는 『신약성경신학』, 『신약개론』, 『신약 성경의 핵심 메시 지』,『BECNT 요한계시록』, 『NSBT 요한계시록 성경신학』(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725-4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42,000원

김 | 귀 탁 옮김

옮긴이 김귀탁

데이비드 드실바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Galatians 데이비드 드실바 지음 | 김귀탁 옮김


목차

■ 편집장 서문 │ 9 ■ 저자 서문 │ 11 ■ 약어 소개 │ 15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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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저자 문제 │ 25 II.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 │ 28 III.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목회적인 도전 │ 34 IV. 거짓 선생이 내세운 “복음” │ 45 A. 할례의 경우 • 46 B.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 되는 율법 • 48 C. 갈라디아 사람들은 누구를 신뢰해야 할까 • 52

V.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은 누구였는가 │ 57 VI. 로마 지리로 본 갈라디아 사람과 바울의 연대표 │ 60 A. 갈라디아서의 내적 자료 • 62 B.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 • 66 C.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북갈라디아 교회에 썼는가 아니면 남갈라디아 교회에 썼는가 • 72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D.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 83

VII.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 │ 95 VIII. 설득력 있는 의사 전달 수단 갈라디아서 │ 128 A. 고대의 편지 갈라디아서 • 128 B.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둔 목표와 갈라디아서의 수사 장르 • 131 C.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에토스·파토스·로고스에 대한 호소 • 135 D. 갈라디아서의 전략적 배치 • 140

IX. 갈라디아서는 효과적이었는가 │ 146

본문과 주석 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 150 II.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지금 일어난 문제점을 지적하다 (1:6-10) │ 163

149


III. 전략적 회고(1:11-2:21) │ 180 A. 바울의 극적 변화와 복음의 원천인 하나님(1:11-17) • 182 B.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수리아 및 길리기아 사역 (1:18-24) • 206 C.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2:1-10) • 218 D. 안디옥 대치 사건(2:11-14) • 245 E. 바울 입장의 일관성(2:15-21) • 267

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 324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 326 B. 아브라함의 선례에서 나온 증명(3:7-9) • 343 C. 성경에서 나온 연역적 증명(3:10-14) • 350 D. 유비에서 나온 증명: 유언법(3:15-18) • 373 E. 그러면 율법은 왜 주어졌는가(3:19-22) • 383 F. 유비에서 나온 증명: 집안에서 성인이 됨, 1부(3:23-29) • 394 G. 유비에서 나온 증명: 집안에서 성인이 됨, 2부(4:1-7) • 416 H. 유비에서 나온 논증에 기반을 둔 책망(4:8-11) • 438

V. 관계에 호소함(4:12-20) │ 453 VI. 성경에서 나오는 결정적 일격(4:21-31) │ 470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II. 바울의 주요 권고(5:1-12) │ 490 A. 바울이 추천하는 행동(5:1-6) • 491 B. 에토스에 대한 호소의 전략적 재개(5:7-12) • 517

VIII.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의(5:13-6:10) │ 530 A. 의를 이루는 데 충분한 성령(5:13-26) • 531 B. 성령으로 행하도록 촉구하는 실천적 권고(6:1-10) • 570

IX. 바울의 작별 인사와 확약(6:11-18) │ 594

■ 참고문헌 │ 616


갈라디아서

추기 목차

바울, 수사학, 고대의 편지 쓰기 • 100 바울과 부활한 예수의 만남과 바울의 패러다임 전환 • 196 주의 형제 야고보 • 209 이방인과 함께 먹음 • 252 바울은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함”과 “의롭다 함을 얻음”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 273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 28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 286 은혜의 배경 이해 • 314 갈라디아서 3-4장에 나타난 대명사, 사람의 무리, 하나님의 계획 • 364 “초등학문”(‘스토이케이아’)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 속한” (‘투 코스무’) 것인가 • 422 갈라디아서와 황제 숭배 • 445 바울의 직설법과 명령법 • 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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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서문

┃ 편집장 서문┃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가자( Gaza ) 로 가 는 길에서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계획하셨다. 그 에디오피아 사 람은 성경 사본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 었다. 빌립이 그의 읽는 것을 듣고 “당신은 읽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 습니까?”라고 물었고, 에디오피아 사람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 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빌립이 내시에게 예 수에 대한 복음을 전했고, 그는 세례를 받아 새롭게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 었다( 행 8:26~40 ). 주석 작업에서,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 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변화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가는 것보다 더 시급한 명령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본 주석 ( NICNT ) 의 목적이다. 본 주석( 사실 본 주석 시리즈 전체 ) 이 제시하는 해석 작업은 이보다 더 나은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이보다 더 나은 꿈을 추구할 수 없다. 이런 주석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점으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관심을 둔다. 이는 연구사와 학 자들의 논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학문적 논쟁이 아닌 본문에 주석을 제공하는 데 고군분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본 작업의 핵심 은 독자들이 각주에서 풍부하게 제공하는 비평적 이슈 및 문헌과 소통하면 서 성경 본문을 이해하도록 안내해 주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비평 방법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거나, 본 시리즈 저자들에게 특별히 어떤 방법 9


갈라디아서

만을 고수하도록 요청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방법도 수 용하면서, 본문의 중요성을 표명하고 우리의 작업을 도와주는 접근 방법을 추구한다. 둘째,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교회를 섬기며 세계선교의 관점에 서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섬기는 가 운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소위 교회를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지지해 주 거나, 교회가 하고 싶은 말을 다만 흉내 내는 그런 특별한 해석을 보장하지 는 않는다. 성경해석의 역사 속에서 보면, 성경은 때때로 교회가 교회의 본 질적 소명으로 돌아오도록 도전하는 데 필요한 예언을 전해 왔다. 또 어느 때는 교회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따르고, 뜻을 이루시고 백성을 보응하 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그 정체성에 머물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비록 기도를 곁들인 연구와 교회의 예배 상황 속에서 성경을 가장 잘 읽 고 이해하겠지만, 우리는 성경 읽기를 교회가 선교로 참여하는 세상으로부 터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C. S. 루이스는 우리가 서 있 는 곳이 어느 정도 우리의 보는 것을 결정하고,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우 리가 하는 해석 작업을 알릴 수밖에 없는 질문들로 우리를 괴롭힌다고 올 바르게 지적했다. 하나님이 한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이 오늘날 교회에 무엇을 말씀하시 는지 계속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의 신학 적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마지막으로, 본 주석 시리즈는 무엇보다도 목사와 교사, 그리고 학생 모 두를 위해 쓰였다. 이는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와 아람어와 라틴어를 포함하 는 좀 더 비평적인 주석들과, 본문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연구하는 설교학적인 주석들 사이에 본 주석이 위치한다는 의미다. 본 주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에 맞게 안내를 받고, 주석 작업을 배우는 사람들은 충분히 본받을 만한 가치 있는 예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조엘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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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 저자 서문┃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는 것은 내게 벅찬 임무였다. 첫째, 현실적인 염 려가 원인이었다. 갈라디아서에 대한 이차 문헌도 대단히 많은데, 바울 전 반을 다룬 이차 문헌은 이보다 훨씬 많고 이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고는 갈라디아서에 대한 논의의 장에 나설 수 없다는 사실로 염려는 배가되었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원인은 한편으로 갈라디아서가 원래 기독교의 사상과 실천에 널리 공헌하는 책이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독자가 갈라디아서 에 투자하는 신학적 노력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로 인해 생기거나 갈라디아 서를 두고 생기는 신학 문제는 근본적이면서도 무척 다양하다. 본서는 갈라디아서를 일관되게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자가 직면한 목회적인 도전 그리고 바울이 절실하게 개입하고자 했던 상황에 대 해 제기된 근본 질문을 전략적으로 정교하게 전달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제 시하려고 애썼다. 바울의 글이 철저히 신학적이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신 학 논증과 근거를 일관되게 해설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본서에서 이런 요소 를 바울의 신학으로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갈라디아서의 신학으로 제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 신학이 바울 신학에 입문하기 위한 필 수적인 단계임을 분명히 밝힌다. 특히 갈라디아의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응에서 다음과 같은 신학적 신념 과 관심사를 찾아냈다. (1) 거짓 선생이나 갈라디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의를 얻도록 하나님이 주신 수단, 곧 모든 당사자가 마지막 날에 무 죄 선고를 받을 필수 조건이라고 동의할 만한 수단에 관심이 크다. (2) 거 11


갈라디아서

짓 선생과 달리 바울은 의를 얻는 수단인 성령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성령은 본질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똑같이 차지하도록 자기 몸을 내놓고 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기업이다. (3) 바울이 무죄 선고 로 이끄는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 여기는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이 전 혀 아니다. 믿음은 예수를 의지하고, 또 예수가 자신을 내놓은 큰 희생을 치 르고 얻은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령이 신자 안에서 그리고 신 자 사이에서 일으키고자 하는 삶, 그래서 신자 안에서 그리고 신자를 통해 그리스도가 사는 것일 수밖에 없는 삶에 진심으로 끈질기게 투자하는 것 이다. 믿음은 믿음 자체를 사랑의 행동에 투자하고, 따라서 인도하고 능력 주는 성령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의로 나아간다. 다시 말해 나는 하나님이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고자 어떻게 사람들의 삶에 은혜로 개입하는지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면, 바울에게는 생소한 관례적 범주, 곧 칭의, 성화, 거듭남 같은 범주로 나누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다. 이 작 업을 하면서 계속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울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다른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점이었고, 그러면서 유일하게 목표로 삼았던 것은 갈라디아서가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선한 소 식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충실하게 주해한 책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래 서 바울 이후 등장한 어떤 신학파의 흔적은 찾으려 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도움과 지원을 계속해서 많이 받았다. 물론 가장 중요한 도움은 앞서 언급한 대로 갈라디아서 연구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들이다. 이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직접 그리고 적극적으로 내가 갈라디아서를 이해 하는 데 기여했다. 현대 저자의 색인을 훑어보면 금방 매우 영향력 있는 학 자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 주석 시리즈의 목표에 맞추어 나는 본문에서 이들 학자와 직접 논란을 벌였다. 하지만 각주도 충분히 활용해서 다른 학 자의 주장에 힘입은 것과 또 내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각주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전반적으로 다루거나 갈라디아서를 다룬 학자의 이름과 작품이 많 이 빠져 있다. 아직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논문이나 책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이렇게 생략된 것을 당연하게 여겨 주시 기 바란다. 나의 학문 연구를 공동으로 지원해 준 것에 대해 애슐랜드 신학교 이사 회, 경영진, 교수진에 감사를 전한다. 연구 휴가를 두 번 받은 것이 본서를 저술하는 데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첫 번째 휴가 때에는 201012


저자 서문

2011년에 교수 연구비를 지원해 준 릴리 재단과 같은 혜택을 베풀며 내게 1년 휴가도 허락해 준 애슐랜드 신학교의 공동 지원을 받았다. 1년 동안

Global Readings: A Sri Lankan Commentary on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 Eugene, OR: Cascade, 2011 )를

썼다. 이 작품을 저술하는 동안 갈라디

아서 서론과 갈라디아서의 의미 문제를 다루는 예비적 판단을 내리고, 특히 다른 사회적 위치에서 갈라디아서에 대해 가하는 도전을 탐구하게 되었다. 또한 중요한 자료를 넣고 자유롭게 종합하도록 친절하게 허락해 준 위프앤 스톡 출판사에도 감사를 전한다. 두 번째 연구 휴가로 본서의 초안을 완성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애슐랜드 신학교의 연구 지원은 공식 연 구 휴가 기간에 한정되지 않았다. 강의를 준비하거나 교수회의 행정 업무에 참석하는 일 사이에도 끊임없이 휴가를 누렸다. 사실 애슐랜드 신학교에 진 정으로 감사하는 것은 강의할 기회만 아니라 신학 교육자의 소명도 온전히 누리고 헌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얻었던 또 하나 의 특혜는 연구 분야를 선택할 자유를 가진 것에 있다. 또한 본서의 모판이 된 학교 수업에서 여러 해 동안 갈라디아서를 함께 공부한 여러 학생에게 도 사의를 표한다. 갈라디아서 주석을 연구하고 저술하는 동안 오르간 연주와 합창대 지휘 로 섬긴 오하이오주 애슐랜드의 크라이스트 연합 감리교회와 플로리다주 포트샬럿의 포트샬럿 연합 감리교회에 감사를 표한다. 이 두 교회 교인과 목회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일을 할 기회와 장소를 제공한 것 말고도 스 스로 도움을 베푸는 신앙 공동체임을 증명했고, 또 학자로서 나의 소명을 위해 자기들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 주었다 ( 쾌적한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것에서 대부분의 주간 임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도록 자유로운 시간을 허락해 준 것까지 ).

고든 피가 갈라디아서에 대한 대체 작품을 저술하도록 내게 임무를 맡긴 지 십 년이 넘었다. 로널드 펑같이 매우 존경받는 학자의 책을 “대체하는” 것은 황송한 일이지만 이 분야에서 갈라디아서 해석에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 자체는 큰 특권이다. 고든 피의 신뢰에 감사를 전 한다. 이 주석 시리즈의 목표에 충실한 만큼 이 시리즈의 저술을 맡겨 준 조 엘 그린에게도 감사한다. 조엘에게서 받은 지원과 격려와 비판적 의견은 처 음이 아니었다. 본서를 받아 주고 본서의 저술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 조엘 에게 특별히 감사한다. 또한 원고 편집자인 크레이그 놀에게도 그의 근면함 과 세심함과 협조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아내 도너 진, 우리에게 매우 13


갈라디아서

많은 자랑거리를 주는 아들들, 부모님은 결코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사랑과 격려의 안정된 원천을 계속 제공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IVP 출판사 수석 편집자인 대니얼 리드에게 본서를 헌정한다. 리드는 출판계의 중요한 동역자로 내게 끊임없이 용기를 주었다. 지금은 전 세계 여러 언어로 신학을 가르칠 특권 을 누렸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가 아직 한창 젊었을 때 그가 내 잠재성을 알 아보고 내 연구에 열정적으로 지원을 보냈기 때문이다. 리드의 작업과 리드 의 지도 아래 형성된 자료( 특히 인상적인 것은 8권으로 이루어진 IVP 사전 시리즈 ) 를 살펴 볼 때 편집자가 학문에 끼치는 공헌이 다방면으로 무수한 저술가의 공헌을 능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댄, 당신의 이타적인 섬김과 우정에 감사를 전한다. 2017년 주의 변모 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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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atians

서론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I 저자 문제

바울이 저자로 알려진 여러 서신 ( 특히 신)의

데살로니가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목회서

저작권이 계속 논란을 일으키지만 갈라디아서 저자가 바울이라는 점

에 대해 심하게 이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1 )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역과 바울이 세운 교회의 삶 속에서 벌어진 특수하고 독특한 상황 때문에 기록 되었음을 입증하는 특징을 모두 갖고 있고 철저히 이 상황에 따라 한정된 반응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사도로서 목소리와 권위를 주장하 여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나중에 일어날 문제점을 다루려고 시도하거나 전 반적으로 유용한 신학 원리나 실천 지침을 제공하려는 경향은 보이지 않 는다. 갈라디아서는 아마 고린도후서를 제외하면, 바울서신 가운데 독보적 으로 저자의 인간성과 열정이 그대로 나타나는 서신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런 모습을 경건한 허구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바울이 널리 존경받는 인물 이 되기 오래전에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서는 초기의 어떤 그리스도인이 바울의 이름을 빌려 허구로 글을 쓰는 것이 유용하거나 이롭다고 생각해서 쓴 편지도 아니다. 갈라디아서는 이처럼 폭넓게 바울의 작품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특별히 바울과 바울 사역의 내력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아울러 이만큼 중 요하지는 않지만 갈라디아서는 초기 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1 ) Betz, 1. 바울 저작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몇 가지 시도에 대한 간략한 개관은 Burton, lxix–lxxi에 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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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자료다. 특히 그 이유는 초기 교회 역사가 유대인 신자가 주도하는 예수 운 동에 이방인 신자가 어떻게 편입될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었기 때문 이다. 갈라디아서는 초기 교회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한 인물이 직접 쓴 편지이므로 초기 교회의 복잡한 역사를 재구성할 때 사도행전보다 더 중요한 역사 자료로

( 정당하게 )

인정받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도 본서에서

갈라디아서 본문을 주석할 때 강조할 것처럼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상황 에서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고자 자신의 이야기와 갈라디아 교회의 이 야기를 선별해서 사건을 배치하고 제시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말 하자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모든 자전적인 진술과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초기 사건의 모든 이야기 배후에 놓인 목적은 이후 역사가나 바울 전기 작가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고 당시 갈라디아에서 벌어진 논쟁을 제압하고 갈라디아 교회 교인이 바울에게 다시 돌아와 “복음의 진리”( 갈 2:5, 14 ) 를

따르게 하는 데 있었다.2 )

“갈라디아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은 바울의 편지가 수집되기 시작하고 단 일한 사본이나 두루마리의 다른 편지와 구별할 필요가 생긴 후에 비로소 붙었다. 필사자는 수신자 명칭을 기초로 제목을 짧게 만드는 경향이 있 었다.3 ) 그렇더라도 필사자는 자기들이 실제로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집어넣고자 이 제목에 말을 덧붙이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사본에 “로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4 )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로마에서 썼다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와 ( 북갈라디아든 남갈라디아든 ) 수신자의 거주지를 다룬 현대의 어떤 이 론에 비추어 보아도 개연성이 거의 없다. 바울은 서기( 비서 ) 의 도움을 받아 갈라디아서를 작성했을까? 바울이 독자 에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6:11 ) 라고 명하는 말을 바울이 거기서부터 친필로 편지를 쓰는 변화가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 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갈라디아서 1장 1절-6장 10절은 바울이 동 2 ) 본서 전체적으로 각 주석 단원 처음에 제시한 갈라디아서의 한글 성경 본문은 개역개정 4판이고, 영어 성경 본문은 저자의 사역이다. 그 외에 인용한 모든 성경 본문은 저자의 의도에 맞게 옮기 되 되도록 개역개정 4판(외경은 공동번역 개정판)을 따랐다. 인명과 지명은 개역개정의 기준을 따 랐다. 3 ) 갈라디아서는 a A B* C 사본에서는 ‘프로스 갈라타스’(πρὸς Γαλάτας)라는 간단한 제목을 가졌고, D 사본에서는 ‘프로스 갈라타스 에플레로데’(πρὸς Γαλάτας ἐπληρώθη)라는 제목을 가졌으며, F G 사본에서는 ‘에텔레스데 에피스톨레 프로스 갈라타스’(ἐτελέσθη ἐπιστολὴ πρὸς Γαλάτας)라는 긴 제목을 가졌다. 4 ) 동의, Bc K P 𝔐. L. 다음을 보라. Metzger, Textual Commentary,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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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 저자 문제

역자에게, 아니 사실은 비서 역할을 하는 고용된 서기에게 편지를 쓰도록 구술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게 된다.5 ) 그러나 이 명령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 보는 것처럼 인사말이나 끝맺는 말을 쓰도록 서기가 바울에게 펜 을 넘겨주는 관례를 가리키는 신호로 보기에 너무 모호하고 불명확하다 ( 특 히 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에서 바울의 인증 서명을 명확히 지적하는 것을 보라. 또한 롬 16:22에서 서기 더디오의 개인적인 문안 인사도 보라 ).6 )

바울이 늘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편지를

썼다고 너무 성급하게 추정하는 것은 잘못이고 갈라디아서는 내용 전체를 바울이 직접 쓴 편지로 볼 수 있다.7 )

5 ) 동의, Longenecker, lix–lxi; Betz, Galatians, 1;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81; Das, 67, 630–633. 반면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모스(John Chrysostom, 45–46)는 갈 6:11을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갈라디아서 전체를 직접 썼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다. 6 ) 아이러니하게도 ‘인증’ 서명이 나오는 세 편지(고린도전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가운데 두 편지가 저작권 논란이 있다. deSilva,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539–543, 696–701에 서 이 논란에 대한 평가를 보라. 7 ) 6:11 주석을 보라.

27


II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

갈라디아는 로마의 속주로 바울이 사역할 당시 영역이 매우 방대했다. 갈라디아는 현재 터키 중부 안키라, 페시누스, 타비움 같은 주요 도시가 속 해 있었고 북쪽으로는

( 비두니아 및 본도 속주와 인접한 )

파플라고니아산맥까지 영

역이 미쳤다. 또 남쪽으로는 종종 루가오니아, 비시디아로 지칭되는 지역과 브루기아 일부 지역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 스드라, 더베 같은 중요 도시도 갈라디아에 포함되었다. 로마 속주 갈라디 아 북부 지역은 원래 이곳으로 이주했던 켈트족의 역사적 본거지였다. 하지 만 남부 지역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북부 지역에 병합되어 하나의 행정 단 위가 되었다. 이 두 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보낸 교 회가 위치해 있었는지는 큰 논란거리로 남아 있고 후에 이 문제를 살펴보 겠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수신자의 거주지가 어디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문제의 제기 자체도 갈라디아서를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선교 사역 범주 안에서 읽는 경우로 한정된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사도행전 에서 우리가 읽는 내용과 전혀 다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 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 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 도다.” 28


서론 II.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

바울의 말에 따르면 바울은 병( 육체의 약함 ) 때문에 자신이 가고자 했던 목 적지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 편지를 쓰는 도시( 들 ) 에서 복음을 전한 것 으로 보인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계획에 방해를 받아 여의치 못한 상황 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구함으로써 진 실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가로막힌 상황을 효과적으로 극복한 본보기를 보 여 준다. 바울이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을 보면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조롱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분명히 육체 적 건강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 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제든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그리스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중 연설자에게서 좋은 풍채를 가진 모습을 기대하기 마련이었다. 표현 방식, 신체적 품위, 침착한 자세, 화술 등은 전하는 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요소를 갖추지 못한 자는 사람들의 경청을 끌어내기는커녕 도리어 비웃음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예상과 달리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따스하게 맞이하고 바울 과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 신의 설교와 관련해 그들 속에 임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역사로 말미암 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아울러 그들의 삶 속에 침투한 능력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했는지 환기한다( 갈 3:1-5 ).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한 것과 같이 갈라디아에서도 자신이 전한 복음의 중심 특징을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여긴다( 갈 3:1; 고전 2:2 ).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독자 가운데 특히 이방인 신자에게는 이 말이 어느 정도 해독이 필요했다. 이방 인 신자에게는 “그리스도” 또는 “메시아”인 예수가 생소한 개념이었고 십 자가 죽음은 완전한 파멸의 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는 신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그것도 특별히 인간을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충 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이런 경향을 예증 한다( 아이스킬로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이 이야기가 충분히 발전한 형태를 보라 ). 신의 제 왕인 제우스는 인간에게 화가 나 인간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타이탄 프로메 테우스는 모든 기술의 원천인 불을 신에게서 훔쳐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 을 구하고자 했다. 이에 화가 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사슬로 묶고 날마다 독수리를 보내 그의 뱃속에 있는 간을 쪼아 먹게 했다( 프로메테우 스는 불멸의 존재였고, 따라서 그의 간은 저녁마다 재생했다 ).

바울의 독자 가운데 유대인 신자는 불순종하는 다수에 대한 하나님의 은 29


갈라디아서

혜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고통과 죽음을 감내하는 경건한 유대인을 잘 알고 있었다. 마카베오2서는 안티오코스 4세가 다스리던 당시 예루살렘을 그리스 도시 방식으로 재편하려고 시도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마카베오2서 저자는 이 사건을 언약을 보존할 책임이 있던 엘리트 제사장이 언약을 떠 난 배반 행위로 해석한다. 이 사건은 금방 율법 준수를 억압하고 배교를 강 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기서 마카베오2서 저자는 기꺼이 ( 사실은 로)

의도적으

돼지고기를 한 입이라도 먹는 것 ( 언약의 포기를 인정하는 표시 ) 을 거절함으로써

매우 끔찍한 고통을 겪고 죽임을 당하는 한 늙은 제사장, 일곱 형제, 일곱 형제의 어머니를 소개한다 ( 마카베오2서

6:18-8:5 ).

이들 순교자는 남은 진노를

자기들에게 쏟고 자기들의 순종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은혜를 회복해 달라 고 하나님에게 간구함으로써 민족을 위해 기꺼이 죽을 정도로 율법에 순종 하는 자로 제시된다. 이때 가장 어린 동생이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형들 과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들이 전해 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내 몸과 내 생명 을 기꺼이 바치겠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속히 자비를 보여 주 시고, 당신에게는 시련과 채찍을 내리시어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빌겠소. 우리 민족 전체에게 내리셨던 전능 하신 분의 정당한 노여움을 나와 내 형들을 마지막으로 거두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빌 따름이오”( 마카베오2서

7:37-38 ).

화자에 따르면 죽음을 무릅쓴 그

들의 순종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바로 이어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군대 는 “주님이……진노를 푸시고……자비를 베푸셨기”( 8:5 ) 때문에 첫 번째 승 리를 거둔다.8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 로써 인간에게 가져온 구원과 이 구원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초래한 8 )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순교자가 하나님에게 자기를 바치는 사건이 마카베오4서에서 훨씬 강도 높 게 펼쳐진다. 마카베오4서는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유대교 문서로 지중해 연안 북동부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마카베오4서를 보면 엘르아살이 죽음의 문턱에 서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 이 저를 구원하실 줄을 아나이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기꺼이 불에 타 고통을 겪고 죽 겠나이다. 주의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우리가 주의 백성을 위해 충분히 처벌받게 하소서. 주 의 백성을 저의 피로 정결하게 하고, 저의 목숨을 그들의 목숨과 바꾸어 주소서”(6:27–29 CEB). 저자는 이야기 끝부분에서 이렇게 해설한다. “폭군은 처벌받고 조국은 정결하게 되었다. 말하자 면 이들 순교자는 우리 민족의 죄에 속전이 되었다. 그리고 속죄 제물로서 이 경건한 자들의 피와 그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는 이전에 학대받은 이스라엘을 보존했다”(17:21–22 NRSV). 추가로 deSilva, 4 Maccabees: Introduction and Commentary, 137–141을 보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이해에 잠재적 배경으로 이들 순교자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deSilva, Jewish Teachers, 158–174를 보라. 바울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 이해한 배경으로 이들 순교자가 가진 중요 성에 대해서는 Williams, Maccabean Martyr Traditions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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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I.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

변화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줄곧 예수를 죽으심으 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고”( 갈 1:4 ), “나를 사랑하사 나 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며”( 2:20 ), “이 악한 세대에서” 신자를 “건지시 는”( 1:4 ) 분으로 언급한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리스도”라는 압축된 표현은 그가 이전에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말한 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과거에 방문했을 때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에게 이미 배웠기 때문에 이 개념에 익숙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은 그 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수혜자에게 혜택을 주고자 자신을 완전히 쏟아부 은 은인의 관점에 따라 제시했다. “자기 몸을 주는 것”이나 “자기 자신을 쏟아붓는 것” 같은 말은 헬라어와 라틴어 비문에서 베푸는 자를 관대함의 대가( 大家 ) 로 높이고자 새겨 넣은 글귀로 증명된다.9 ) 따라서 수치스러운 십 자가 죽음이 가장 큰 관대함과 자비함을 보여 주는 고상한 행위로 바뀌 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 1:4 ) 예수는 자신이 하나 님에게 행한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무관심한 많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표 행위로 제시하였다. 이 점에서 예수가 완전히 순종해서 이룬 결과인 예수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정죄 선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를 경험하는 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인 하나님에 대한 죄와 모욕을 제거했다. 예수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1:4 ) 죽었다는 바울의 주장 은 그가 갈라디아에서 초기에 전한 설교의 묵시적 관점을 환기한다. 이 묵 시적 관점에 따르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역사는 한시적 현상으로 하나님 의 공의와 의인에 대한 상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다. 바울에게는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이 이 시대의 끝이 시작하고, “다음 시대”, 다시 말해서 하나님 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충분한 상을 누리는 영원한 시대가 임박함을 알려 주는 신호탄이었다. 따라서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심 판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운명에서 사람들을 구원 했고, 따라서 구원받은 자는 다음 시대에 하나님과 함께 사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몸을 내어놓은 메시아의 죽음과 그분의 부활 생명의 혜택에 참여하 는 길은 “믿음”의 길이다. 다른 사람을 대신한 메시아의 죽음이 갖는 효력 과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메시아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예수가 궁극적 후원자인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낼 수 있는 유능한 후

9 ) Danker, Benefactor, 321–323, 363–366, 417–435의 설명을 보라.

31


갈라디아서

원자라는 사실을 믿는다. 믿음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받는 공급( 가장

두드러진 공급은 성령 ) 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바라는 모습을 일으

키는 데 충분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믿음” 안에는 예수에 대한 절대적 인 충성과 순종( “신실함” ) 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알려 주 는 하나님에 대해 충성과 감사로 반응하는 일은 모든 우상과 그 우상이 상 징하는 존재하지 않는 신에 대한 숭배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이 단계 는 이방인이 복음에 반응할 때 나타나야 할 근본적인 요소였다( 살전 1:9-10처 럼 ).

바울은 유대인의 성경책( 예, 시 115:1–8; 사 44:8–21; 렘 10:1–12 ) 과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의 작품( 예, 예레미야의 편지, 솔로몬의 지혜 ) 에서 우상을 반대하는 논증을 충 분히 접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도 전통적인 그리스 로마 종교에 많이 나타나는 편파적인 위장과 부적절한 표상에 따라 불완전하게 숭배받은 하나님의 본질적 단일성을 오랫동안 강조했다. 바울은 이 철학적 관점을 유대인의 유일한 하나님이 이방인의 유일한 하나님도 된다는 자신 의 관점과 연결할 수 있었다. 바울의 범세계적 접근법은 확실히 유일한 하 나님과 그 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의 민족적 특수성을 강 조한 유대인의 전통적 관점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시에 삶의 변혁이 일어난다는 의미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5:19-21 ). 바울은 이 도덕적 교훈, 곧 이기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삶에서 떠나라는 명령을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 자신의 이전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그들을 직접 방문해( 그가 복음 전도를 위해 최초로 그곳을 방문했든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두 번째 방문했든 ) 가 르친 것에 따라 인정해야 했던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하 나님과의 새 출발을 제공하고자 감당한 일의 선포에 동반하는 이 도덕적 명령은 바울서신의 일관된 주제다. 이 도덕적 명령은 로마서에서 특별히 두 드러진다( 특히 롬 6:1–7:6; 8:1–14; 12:1–13:14를 보라 ).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도덕적 메 시지를 본질적으로 제시한다( 이 도덕적 메시지는 최소한 부분적으로 바울이 로마 지역 그리 스도인에게 자신의 지속적 선교 활동에 대한 지원을 얻고자 전한 메시지에도 들어 있었다 ).

이것은

그 이전에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 이 도덕적 메시지가 이미 두드러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명백하게 도덕 32


서론 II. 바울의 갈라디아 사역

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바울은 이 도 덕적 요소를 상기시킨다( 특히 4:2를 보라.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바울은 예수의 사역이 갈라디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충분하고 효과적 이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표지가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있다고 본다. 이들 유대인과 이방인이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해 전한 메시지에 믿음으로 반응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 자신 을 나타냈다( 갈 3:1-5 ). 이렇게 성령을 받는 경험은 바울 선교 활동의 공통 특 징이었다( 고전 2:1–5; 히 2:1–4도 보라 ).10 ) 자기들 속에 신적 능력이 임한 것을 경험 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그리고 자기들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 것과 자기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사실 을 익히 알게 되었다. 바울이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에게 이 경험을 환기 하는 이유는 이 경험이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삼았음을 충분히 증명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 회심한 이방 인은 다시는 부정하지 않았고 다시는 약속의 백성 밖에 있지 않았다. 그것 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결정적으로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0 ) 바울이 쓴 편지가 아니더라도 히브리서도 바울이 세운 교회 진영에서 나온 편지로 보인다. 그것 은 이 익명의 저자가 자신의 여정을 바울 선교 팀에 속한 유명한 인물 디모데의 움직임과 일치시 키기 때문이다(히 13:23. deSilva, Perseverance in Gratitude , 23–27을 보라). 따라서 히 2:1–4는 바울의 설교와 바울 선교의 일부인 교회의 탄생에 수반하여 하나님의 인증을 분명히 경험한 것에 대해 바울 선교 팀의 다른 일원에게서 나온 증언을 제공한다.

33


Galatians

본문과 주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

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 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 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 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 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 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 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

Paul, an apostle not sent out from human beings nor through a human being’s agency, but through Messiah Jesus and Father God, who raised him from among the dead, 2 and all the brothers who are with me, to the congregations of Galatia: 3 May generous kindness and peace be yours from God oura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4 who gave himself forb our sins in order that he might rescue us out of the present evil age according to the will of our God and Father, 5 whose is the glory into the ages of ages. Amen! 1

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a. 초기 증인들 사이에 “우리 ( 의 ) ”라는 대명사가 “아버지”를 수식하는지, 또는 “주 예수 그리 스도”를 수식하는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a과 A 사본은 전자 ( “우리 아버지” ) 를 지지하 고, NASB, NRSV, NIV, ESV, NLT가 이 독법을 따른다. 𝔓46, 51 , B, D, 𝔐 사본은 후 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 를 지지하고, KJV, RSV, NEB, NJB, NET가 이 독법을 따 른다. 바울의 관례적 용법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법을 뒷받침한다 ( 롬 1:7; 고전 1:3; 고후 1:2; 엡 1:2; 빌 1:2; 몬 1:3을 보라. 반면에 엡 1:3; 딤후 1:2; 딛 1:4; Metzger, Textual Commentary , 520은 이와 반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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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b. ‘휘페르’( ὑπέρ, 𝔓51 a C B H 33 ) 와 ‘페리’( περί, “때문에”, 𝔓46 a* A D G K P Ψ 𝔐 ) 모두 외적 지지가 많다. 전자가 바울의 전형적 표현에 더 어울린다 ( 예컨대 갈 3:13; Das, 71을 보라 ).

고대 세계에서 편지는 (1) 발신자와 내포 수신자 또는 수신자들을 확인 하고, (2) 거기에 인사말을 덧붙이는 표준 공식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 었다.1 ) 이 공식의 한 가지 좋은 사례가 사도행전 23장 26절이다. “글라우디 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2 ) 이 공식의 기본 구조는 모든 바울서신 서두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바울은 이 공식을 여러 가 지 면에서 자유롭게 확대하거나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의 신원을 확대해 상세히 소개한다 ( 가장 1-6절이 이런 확대를 보여 준다 ).

두드러진 본문은 롬 1:1-7이다. 거기서

어떤 곳에서는 수신자의 신원을 확대해 약간 상세

히 소개한다( 고전 1:2; 딤전 1:2a; 딛 1:4a처럼 ). 바울은 인사말에서 일관되게 “문안” 이라는 표준 용어를 수신자가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평강”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원을 언급하는 말로 대체한다. 바울은 여기서 언어유희를 조금 사 용해서 예상되는 “문안”( ‘카이레인’ ) 이라는 말을 “은혜”( ‘카리스’ ) 라는 말로 대체 한다. “평강”에 대한 소원을 덧붙이는 것은 전형적인 히브리 방식 인사 말( ‘샬롬’ ) 을 환기한다. 바울의 다른 많은 서신처럼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의 이런 확대는 편지 서두의 전형적인 목표인 신뢰 확립과 편지 요지 전달에 도움을 준다. 하지 만 갈라디아서 1장 6-9절은 이 목표를 더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제시한다.3 )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인간의 위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임에 따라 받은 직분이고, 그래서 자기는 어떤 인간적 권세나 집단의 대사가 아 니라 하나님의 대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바울의 주장은 편지 전체에 걸쳐 흐르는 신뢰할 자 주제뿐만 아니라 1장 11절-2장 10절에 언급된 사실에 대 해서도 더 충분한 증명을 예견하는 역할을 한다( 2:11–14;

4:12–20; 5:7–12; 6:11–17 ).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 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분으로 증언하 1 ) 문자적으로 한 단어다. 헬라어로 작성된 편지에서는 ‘카이레인’(χαίρειν. 예, 마카베오1서 10:18; 12:6; 15:2; 행 23:26; 약 1:1)이고, 히브리어로 작성된 편지에서는 ‘샬롬’(~wOlv', “평안”)이다. 2 ) 현대 서양에서도 비슷한 관습이 여전히 편지 쓰기를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도 우리는 표준 서두 공 식(“사랑하는 X에게”, “관계자 앞”, “지극히 존경하는 선생에게”)과 결말 공식(“사랑해”, “당신의 진실한 벗”, “삼가”)이 사용되는 것을 확인한다. 3 ) 동의, Betz, 37. 더 충분한 언급은 Cook, “Prescript as Programme”을 보라.

151


갈라디아서

는 것은 갈라디아서 나머지 전체에 걸쳐 싹틀 기독론과 구원론 주제의 씨 앗을 간명하게 제시한다. 특히 다음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1. 예수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죽임을 당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우 리가 존귀하게 여기고 적절히 반응해야 하는 은혜 행위였다( 2:19– 21; 3:13–14; 4:4–5; 5:2–4 ).

2. 예수의 죽음이 주는 유익은 우주의 현재 질서와 이 우주의 핍박 세력 및 제한에서 구원을 받는 것으로 구성되었고, 그 결과 우리 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새 질서를 누릴 수 있다( 3:10–14,

23–25; 4:1–11,

21–31; 5:13–26; 6:14–15 ).

3. 예수의 죽음이 가져온 구원은 다 하나님의 선하고 오래된 목적의 결과였다( 3:7–9, 15–22; 4:4–5 ). 4.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아버지로 알고 있는 분이다( 3:26–29; 4:6–7 ). 1절 연설가가 연설을 시작할 때 이루고자 하는 한 가지 목표는 자신이 원

하는 구체적인 판단을 행하도록 이끌고 싶은 청중의 행복에 대해 구체적인 쟁점과 책임을 전하고자 종종 자신의 권위를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신뢰성 을 확립하는 것에 있었다. 바울은 자신을 편지의 발신자로 명확히 밝힘으로 써 자신의 권위 문제를 정면으로 솔직하게 다룬다. 바울은 복음의 사도로 수고하도록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 권한을 주었음을 강조하고, 자신이 어 떤 인간적 권위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사람들에게서 보냄을 받 은 것도 아니요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은.”4 ) 그의 서신들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이 사도의 이름은 “바울”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이 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명을 감당할 때까지 사울로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한다(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 일은 사도행전 13장 9절에 나타난다 ). 이 사도의 이름이 이렇게 바뀐 것이 종교적 충성의 변화( 즉 영광 속에 들어가신 그리스 도와의 만남 ) 와

관련된 것은 분명히 아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자 이방인

4 ) NASV와 NRSV의 번역에 따라 이 책에서 갈 1:1을 번역할 때 앞에 나오는 부사적 전치사구(“사람 들에게서”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와 관련하여 동사 ‘아포스텔레인’(ἀποστέλλειν, “보내다”) 과 관련 명사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 “보냄을 받은 자” “특사”)라는 말의 동사 국면을 파악하 도록 “보냄을 받지 않았다”라는 말을 사용했다.

152


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땅으로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사울로스’라는 헬라어가 갖고 있는 부정적 의미( “뽐내며 걸음”, “어기적거리며 걸음”, 아니 사실은 “여자같이 나약함”, “허세 부림” ) 로 말미암 아 “사울”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을 멀리했을 수 있다.5 ) 사도행전이 로마 시 민 바울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다면( 행

16:37–38; 22:25–29 )

바울은 세 가지 라틴어 이름을 가졌던 것 같다. 첫째 이름 ( ‘프라이노멘’ ), 이 름( 가족 이름, ‘노멘’ ), 셋째 이름( ‘코그노멘’, 대체로 그를 부를 때 쓰는 이름 ). 헬라어로 ‘파 울로스’로 음역되는 ‘파울루스’가 그의 셋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넷째 이름이었을 것이고, 이것이 이스라엘 유대 공동체 및 민족의 일원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특정 진영 내에서 이름으로 불린 일종의 제2의 셋째 이름이었다. 베냐민 지파의 후손이었음을 감안하면 ( 빌 3:5 ) 그의 부모가 베냐민 지파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이의 이름( 삼상 9:1-2 ) 을 그 에게 지어 준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사도”라는 명칭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임무를 감 당하도록 파견된 사절 또는 대리인을 가리킨다.6 ) “사도”라는 명칭은 보내 는 자를 즉각 의식하도록 주의를 환기한다. 바울은 자기를 보낸 분이 영광 속에 들어간 그리스도와 이전에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7 ) 말고 다른 분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인간적 파견자를 위해 일하는 자 임을 강력히 부인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바울은 같은 사실을 긍정적 진술로 제시하기 전에 자기 사도직의 원천에 대해 빚어질 수 있는 오해( 또는 허위진술 ) 를

이처럼 이중으로 수정한다.

“사람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것도 아니요”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

5 ) LSJ 1586; LSJA, 630. 6 ) BDAG 122 (s.v. ἀπόστολος). 이 말은 고대에 해상 운송과 관련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간헐 적으로 특정 목적을 위해 파견되는 사람을 가리키고, ‘대사, 사신’과 같은 우리말 속에 표현된 지위 나 기능을 문맥이 결정한다(Hdt. 1, 21; 5, 38).”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이 말의 일차 의미가 된다. 신약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이 사도의 명칭을 갖고 있다. 베드로(벧전 1:1; 벧후 1:1), 열두 제자 (마 10:2; 눅 6:13; 계 21:14), 맛디아(행 1:26), 바나바(행 14:14),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롬 16:7), 에바브로디도(빌 2:25). 어떤 이는 “교회의 사자들” 같은 제한된 의미에서 “사도”로 불리고(고후 8:23처럼),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사신 또는 대사(고후 5:20)와 차별화된다. 어떤 이는 스스로 “사도”로 부르지만 다른 기독교 지도자에게 이 명칭을 거부당한다(고후 11:5, 13; 계 2:2). 7 ) 초기 기독교 담화에는 드물지만 예수 자신이 히 3:1에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로 지칭된다. 예수는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의 한 형태로 흔하게 하나님에게 “보내심을 받은” 이로 사용되 고(마 10:40; 15:24; 21:37; 막 9:37; 12:6; 눅 4:43; 9:48; 10:16; 20:13; 행 3:26; 갈 4:4), 특히 요 한 문헌에서 자주 사용된다(요 3:17, 34;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8, 18, 21, 23, 25; 20:21; 요일 4:9–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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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도 아니요”라는 두 어구는 불필요한 중복이 전혀 아니다. 두 어구는 서로를 보강하는 역할을 한다. 첫 번째 어구에 대해 말하면 바울은 사도로서 자기 사명의 기원이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8 ) 두 번째 어구에 대해 말하면 바울은 사람이 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자기를 보내는 도구였다는 사 실을 부인한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유대인 기독교 선생을 근방의 자교회를 점검하도록 사명을 주어 파견할 수 있었다( 갈 2:12 ). 다른 이들은 특 정 교회를 위해 사자나 사도로 사명을 받을 수 있었다( 고후 8:23을 보라 ). 야고 보와 다른 동료 사도는 유다와 실라 같은 사람들을 선발해 자기들의 대표 로 사도의 명령을 전하고 설명하도록 다른 교회에 보낼 수 있었다( 행 15:2227 ).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 하나님과 하나님의 메시아를 대표하

는 자신의 사명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하나 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직접 나왔다고 주장한다 ( 갈 1:1 ).9 ) “오직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사람들에게서”라는 말과 명백히 대립 관계에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의심 없이 예수와 아버지를 자신의 사도직의 원천과 자신의 사명의 동인으로 확언한다.10 )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고,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에게 책임이 없다면 갈라디아에 들어와 그들의 메시지와 사명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 짓 선생에게도 확실히 책임이 없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1장 11절-2장 10절 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명을 상세히 언급하고 자신과 예루살렘 사도의 관계 를 주의 깊게 묘사하는 것을 감안하면 바울은 이미 편지의 첫 줄부터 거짓 선생이 자기에 대해 일으킨 악평을 깨는 데 힘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11 ) 8 ) ‘아포’(ἀπό)의 이러한 용법에 대해서는 BDF §210을 보라. 이 두 어구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Lagrange, 2–3을 보라. 9 ) 바울의 이런 절대적 주장과 우리가 행 13:1–3에서 확인하는 것과 같은 장면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 이 있다. 사도행전 본문을 보면 여전히 성령의 인도와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의 사람들이 최소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파송하는 데 있어 진실로 성령의 도구 역할을 한다. 10 ) Burton, 5–6을 보라. 11 ) 일부 학자는 첫 구절은 바울의 사도직이 공격받는 현실을 아직 명확히 암시하지 않고 단순히 부 정문이 긍정적 주장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한다(매우 강력한 경우로 Vos, “Paul’s Argumentation,” 3; Betz, 39; Matera, 41도 보라).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대립의 수사 적 비유 용법을 단순히 장식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반대, Vos, “Argumentation,” 3). 바울은 1:11-12에서 이 주장을 자신이 사도로서 지는 사명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교 에서 선포하는 메시지, 곧 최소한 2:10까지 이어지는 폭넓은 서술을 위한 전제 진술로 사용되는 주장과 관련해 다시 제시한다. Tolmie, Persuading, 32–33과 같이 “(특히 편지의 인사말 부분에 서) 이런 말을 예상치 못하게 불쑥 사용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자신의 사도직 문제를 편지 첫 부 분에 거론할 정도로” 매우 중요했고, 따라서 “이것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잘못된 정보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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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쓸 수 있다는 사실로 분명한 것처럼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여기서는 아직 개인 이름으로 생각 되지 않았다. 고대의 이름은 이런 식으로 순서를 바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 았다.12 )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의 직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바 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과 회심한 이방인에게 그들의 새로운 믿음과 의 무에 대해 예비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 단 어가 예수에게 적용되었을 때 주어지는 새로운 의미를 설명할 기회를 충분 히 가졌을 것이다.13 ) 물론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은 초기 기독교 운동의 핵심 신념이긴 하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가 자기 경쟁자의 설득력 있는 말을 귀담아들을 때 예수의 부활이 가진 함축적 의미를 잊어버릴 위험에 빠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아예 예수를 그리 스도로 지칭할 수도 있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하나님이 예수의 의로움을 입증하고 예수가 마지막 날에 있을 전체 부활의 전조로서 마지막 때에 대 해 가르치고 마지막 때를 시작한 것을 승인하였음을 입증하는 표지가 아 니다. 예수의 부활은 시대의 경계가 심지어 지금도 하나가 지나가고 다른 하나가 새로 생김으로써 서로 부딪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지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을 “이 세상의 초등학문”( ‘스토이케이아 424-429쪽에 나오는 추기를 보라 )

투 코스무’, 4:3 주석과

아래 가둔 현시대의 여러 세력에게 조종( 弔鐘 ) 을

울리는 소리다. 바울은 4장 1-11절에서 이에 대해 말하고 이 조종 가운데 율법을 둘 것이다. 2절 바울은 종종 동역자를 자신이 쓰는 편지의 공동 발신자로 언급

한다( 고린도전서:

소스데네;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모데; 데살로니가전후서: 실

루아노와 디모데; 로마서, 에베소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없음 ).

여기서는 독특하게 공동 발

신자로 한 명의 동료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감을 갖고 자기 옆에 서 서 갈라디아의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문안하는 “함께 있는 모든 형제 ( 자매 ) ” 를 언급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는 바울이 현재 동행하는 동료가 없는 상태

반대자의 전략이 되었다면 일리가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고 결론짓는 것이 더 낫다. Barclay, “Mirror-Reading,” 88도 보라. 12 ) Das, 90–91. 다스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로파토르나 에피파네스, 심지어는 아구스도와 동일 선상에 있는 경칭으로 듣는다고 주장한다(93-94). 당시는 경칭이 확실히 이름과 나란히 또는 이 름 대신 사용될 수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대 문헌에서 이름과 경칭 순서가 흔하게 바뀌는 사 례(예, “에피파네스 안티오코스”, “니카토르 셀레우코스”, “마카베우스 유다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것은 다스의 주장과 반대다. 13 ) Dunn, Theology of Paul, 198–199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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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에 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가 안 디옥에서 바나바와 사이가 나빠졌을 때와 예루살렘 회의에서 함께 증언하 기 전에 화해했을 때 사이의 좁은 시간대에 기록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바울의 메시지가 바울 자신의 특수한 고안이 아니라 기 독교 공동체가 공유하는 증언이라는 사실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환기하는 효과적인 수사 방법이기도 하다.14 ) 갈라디아서 첫 부분에서 바울이 가족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 하다.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지배할 주제를 미리 들려준다. 하나님은 이처럼 방대하게 커진 대가족의 “아버지”가 된다( 1:1, 3 ).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아 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형제( 자매 ) ”다( 1:2 ). 따라서 기독교 운동은 세 계적인 “믿음의 가정”을 구성한다( 6:10 ). 다른 초기 기독교 지도자처럼 바울 도 가족 언어를 사용해서 복음화된 세계 전역에 사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곧 바울은 신자에게 한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 아들과 딸 ) 와 신자 서로 간에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 형제와 자매 ) 를 받아들 이도록 촉구한다. 혈연관계로 보면 출생으로 서로에 대해 “외부인”이었던 자가 서로를 가장 가까운 “내부인”으로 받아들이며, 서로 돌아보고 서로 의 지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그들은 형제 관계에 동반되는 선물, 곧 협력, 물 질 등 여러 혜택의 공유, 진실한 말과 신실함, 조화와 연합의 앙양, 서로의 유익을 도모함을 주고받으며, 이런 관점에 따라 서로에게 다가가도록 요구 받는다. 그들은 한 가족으로 함께 모인 사람들로 혈통적 가족 안에서 벌어 지는 부적절한 모든 일, 곧 경쟁,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자기 이득을 챙 김, 속임, 진실과 진실한 의도를 외면함 등을 피하도록 요구받는다. 신약 성 경에 나타난 기독교 관계와 공동체의 각별한 윤리적 관점은 하나님으로 인 해 서로 무관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그래서 지금은 진리 안에 서 피로 관련된 사람이 많이 모여 새로운 가족을 형성했다는 이해까지 직접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15 )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갈라디아 지역의 여러 회중 ( ‘에클레시아이’ ) 에게 보 낸다.16 ) “회중들”이라는 번역이 “교회들”로 번역하는 것보다 더 좋다. “교

14 ) Bruce, 74; Fung, 38; Tolmie, Persuading, 34. 15 ) 추가로 다음 자료를 보라. deSilva, Honor, 157–240; Oakes, Reading Romans, 107–110, 119– 123. 16 ) 지리적으로 그리고 바울이 사역할 때 이 “갈라디아 여러 교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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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회들”은 예배를 위해 지정된 건물을 내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에클 레시아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건물이나 장소를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모임 을 가리키고,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정체성과 관습에 더 일치된다. 우리가 사도행전( 2:46; 5:42; 18:7; 20:20 ) 에서 바울이 개인 집에서 가진 이런 집단적 모 임을 언급할 때( 롬 16:4–5, 23; 고전 16:19; 골 4:15; 몬 1:2 ) 확인하는 패턴에서, 그리고 초기 기독교 운동이 크게 의존했던 접대의 미덕을 자주 칭송하고 언급하는 것( 행 16:15; 히 13:2; 벧전 4:9; 요삼 1:5–10 ) 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이 편지의 수신자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를 위해 부유한 지체의 큰 가정집에서 주기적으로 함 께 모였을 가능성이 크다.17 ) 3절 발신자는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자신의 신뢰성을 확립하는( 그리고 필요할 때 자신에 대한 악평을 제거하는 )

것과 함께, 세 가지 다른 목표를 전개하는 경향이

있었다. (1) 본문에서 다룰 주요 주제를 미리 선포함, (2) 독자의 주의를 끌 어내 문제의 질문이 중요하다는 점을 증명함, (3) 독자를 다른 방향으로 끌 고 가려고 획책하는 선생에 대해 악평을 불러일으킴 ( 아리스토텔레스, 3.14.6–7; 아낙시메네스, 『알렉산드로스를 위한 수사학』, 1436a33–37을 보라 ).

『수사학』,

갈라디아서 1장

3-4절은 이 가운데 첫 번째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 거기서 바울은 독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호의”, 곧 “은혜”( ‘카리스’ ) 와 평강( ‘에이레네’ ) 받기를 원 함으로써 그분의 성품과 업적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사회적 후원 제도나 구제 제도가 그렇듯이 “은혜” 관계 안에서 적절하다고 추정되는 역할 및 반응과 함께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 사실은

중요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2:21과 5:2–4를 보라 )

특별히 중요

하다( 316-325쪽에서 “추기: 은혜의 배경 이해”를 보라 ). 이런 관계 안에서 “은혜”라는 말 은 다음 세 가지 기본 의미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가리킬 수 있다. (1) 남을 돕는 기질. 따라서 “호의”나 “관대한 친절”을 가리킴. (2) 이런 관대함과 기 꺼이 돕는 마음의 표현으로 주어진 “선물” 또는 도움. (3) 이런 관대한 기 질과 선물에 대한 적절한 반응. 따라서 “보은” 또는 “감사”를 가리킴.18 ) 문 맥이 대체로 어떤 의미로 보아야 하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여기서는 “은 혜”라는 말이 주도적 은인으로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메시아의 호의를 베푸 는 성향과 관대하심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울이 자기 회중이 계속 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마지막 구절인 6:18에서도 똑같다 ).

17 ) 다음도 보라.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Oakes, Reading Romans, 69–126. 18 ) BDAG 1079; deSilva, Honor, 10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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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헬레니즘 시대 유대인 속에서 특히 히브리어 단어 ‘샬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에이레네’는 개인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다툼과 위험에서 벗어 난 건강하고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고, 이런 의미에서 “평강”( “평화” ) 을 가 리킨다.19 ) 그러나 평강은 로마 세계에서 논란이 많은 관념이었다. 라틴어 ‘팍스’( “평화” ) 는 로마 제국의 통치 이념에 중요한 말이다. 특히 아구스도와 그의 계승자들이 자기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이념으로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안키라( 현대의 앙카라 ) 에 눈에 띄게 뚜렷 이 새겨진 ‘레스 게스타에 디비 아우구스티’( “신성한 아구스도의 업적” ) 를 보면, 아 구스도는 무법적인 속주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든 도로와 바다를 강도 와 해적에게서 해방시키는 것이든 자신이 베푸는 은혜 가운데 “평화”를 두 드러지게 부각한다( 특히

12–13, 25–26 단락을 보라 ).

아구스도가 베푸는 평화의 선

물은 로마 마르스 광장에 세운 “아구스도의 평화 제단”에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이 제단에 해마다 제물을 바쳤다. 아시아에 있는 비문은 아구스 도를 “전쟁을 멈추게 했고 모든 것을 질서……있게 할” 자로 칭송했다.20 ) 아구스도 시대에 궁정 시인으로 활동한 베르길리우스( Virgil ) 는 로마를 “평화 를 인간을 위한 생명의 길로 만든” 곳으로 예찬한다( 『아에네이드』, 6.851–53 ). 로 마 공화정 시대에 주조된 많은 동전에는 평화의 화신( 디베료, 글라우디오, 갈바, 오 토, 베스파시우누스, 디도의 동전 뒷면에 전설의 ‘팍스’ 또는 ‘팍스 아우구스티’라는 말과 함께 ),

아구스

도 평화의 제단( 네로 ), 또는 ‘세쿠리타스’의 화신( 네로, 오토 ) 이 새겨져 있다. 바울은 여기서 평강이 다른 원천, 즉 결국 새로운 리더십으로 새로운 질 서를 이끌( 살전 1:9-10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확실히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조 명하지 않은, 그러므로 존재하지만 사라지고 말 세상 권세에게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메시아로 우주적 통치권자가 전환되는 것을 대비하지 못하는 자가 받아들인 “평화와 안전”( 이 두 단어는 제국이 베푸는 혜택을 가리키는 로마의 통상적 표 어다 )

이념을 조롱한다.

4절 바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메시아가 베푸는 호의가 특별히 나타난

것, 곧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가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로 이미 누리는 혜 택을 환기한다. 바울은 먼저 예수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21 ) 편지 전체에 걸쳐 다시 등장할 바울과 독 19 ) BDAG 287–288. 20 ) Priene Inscription, lines 36–37; Danker, Benefactor, 217. 21 ) 여기서 전치사 ‘휘페르’(ὑπέρ)는 행동의 수행으로 얻는 이익의 실체를 표시하는 의미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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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자를 향한 예수의 희생적인 관대하심 주제를 선포한다( 특히 2:19-21; 3:10–14; 4:4– 5를 보라 ).

바울과 청자는 “그들을 위해”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유익을 제공

하거나 베풀어 준 덕망 있는 영웅 주제에 익숙했을 것이다. 이 주제는 흔히 그들의 백성에게 안전 등의 혜택이 임하도록 목숨을 내던진 군사 지도자나 일반 병사를 칭송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다른 사람이나 도시나 사람 전체의 더 큰 선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사람을 크게 기렸다.22 ) 유대 전통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대가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고통으로 죽음을 받아들인 순교자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바 친 영웅으로 기념했다. 하나님이 순교자의 순종을 전체 백성을 대신해 언약 에 순종하는 대표 제물로 받아 주고 그들에게 다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 이다.23 ) 이 두 전통, 특히 유대의 순교 전통은 불의한 자를 어떤 큰 악에서 구원함으로써 불의한 자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의인 주제를 강조한다. 예수는 죽기까지 바울과 독자에게 자신의 관대함을 최대한으로 보여 주 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복을 베풀려는 계획에 맞게 그들에게

(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

유익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은혜”, 곧 “관대한

친절”을 베푸는 것이고, 바울은 율법과 같은 다른 오래된 후원자에게 돌아 감으로써 이 은혜를 “제쳐두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갈 2:19-21 ).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 어떻게 율법의 저주를 아브라함이 약속받은 복으로 바꿀 수 있었 는지 설명할 때 이 주제로 되돌아간다( 3:10-14 ). 바울은 회심한 갈라디아 사 람들이 이 은혜의 가치를 무시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할 수 없다 고 의심하는 일을 할례와 율법 준수가 해낼 것이라고 신뢰하는 현실을 생 각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푼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내어 준 행동의 원인이나 이유를 표시하는 의미로(BDAG 1031)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책이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죽은 것이지 그들의 죄에 유익을 주고자 죽은 것이 아니다. 무생물과 함께 사용된 이 전치사는 종종 “어떤 대상과 관련해 어떤 것을 이루는 것” 에 따라 번역되고, 따라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로 번역된다(1031). 여기서 대명사 ‘헤 몬’(ἡμῶν)은 주격 속격으로 이해된다. 22 ) 두드러진 사례로 에우리피데스의 『페니키아 여인들』에 나오는 메노이케우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헤라클레스의 자녀』에 나오는 마카리아를 비롯해 그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알케스티 스』에 나오는 주인공이 있다. 이 주제와 패러다임의 포괄적인 그리스 로마 배경에 대해서는 van Henten, Maccabean Martyrs, 145–150, 210–222도 보라. 23 ) 마카베오2서 7:1–8:5; 마카베오4서 6:28–30; 17:21–22를 보라. 이런 순교 신학과 하나님에게 순종해 자기를 바치는 대표 제물의 궁극적 뿌리는 아마 사 52:13–53:12일 것이다. 다음 자료 도 보라. van Henten, Maccabean Martyrs, 85–294; deSilva, 4 Maccabees: Introduction and Commentary , 146–149, 249–253; deSilva, Jewish Teachers of Jesus , 158–174; Williams, Maccabean Martyr Traditions; Williams, Christ Died for Our Sins.

159


갈라디아서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5:2-4 ). 예수가 가져온 구원은 그리스 비극의 영웅이나 마카베오 시대 순교자가 얻은 것 같은 단순한 시간적 구원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가져온 구원은 묵시적 구원이다. 예수는 “현재의 악한 세대24 ) 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 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 바울이 묵시적 관점에 따라 하나님을 일하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두 시대, 곧 이 시대와 다가올

( 다음 )

시대로 나뉜다. 비록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좋게”

창조했을지라도( 창 1:4, 10, 12 등 ) 현재 이 우주는 천사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 미암아 부패했다.25 ) 인류는 개별 인간에서 무수한 인간의 참여로 유지되는 정치, 경제, 종교 체계에 이르기까지 지금 죄, 사망, 육신, 마귀, 귀신의 세력 에게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 세력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개인으로나 공동 체로도 인간 실존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비전을 거부하게 만든다. 현 세대는 구속받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패했다. 이 세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이 세대의 부패에 속해 있는 자와 함께 “지나가는” 것이다( 고 전 1:18; 고후 2:15; 4:3; 계 21:1, 4 ).

바울이 자신이 살던 시대를 “현재의 악한 세대”로

부르는 것은 아구스도와 함께 돌아온 황금 시대를 예찬하는 공적 수사학과 정면으로 반대되고 ( 베르길리우스, 기)는

『아에네이드』, 6.792–793 ), 26 )

또 “인간에게 가장 즐거운 시대”였다.

대, 하나님의 새 창조, 만물의 갱신( 또는

따라서 “현 세대”( 즉

1세

그러나 현 세대는 다가올 세

대체 ) 에

자리를 내주고, 그때 인류,

공동체, 자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망이 결국 현실이 될 것 이다. 그때 의가 편만하고 의에 대해 상이 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현세대의 고난은 하나님의 자아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의 의로운 인도와 그 결과 임하는 온전함과 선함에 대한 경험 에 삼켜질 것이다.27 ) 24 ) 또는 “현재의 악한 세대.” ‘투 에네스토토스 포네루’(τοῦ ἐνεστῶτος πονηροῦ)는 아마 한정적 위치에서 형용사 분사(‘에네스토토스’)의 수식을 받는 형용사(‘포네루’)의 실사적 용법으로 이 해되고, 전체가 ‘투 아이오노스’(τοῦ αἰῶνος)를 수식하는 묘사 또는 정의의 속격으로 기능할 것 이다. 25 ) 유대 묵시 문헌은 이 세대의 악이나 타락상을 설명하기 위해 타락 이야기(창 3장)는 별로 주목하 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인간 여성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자기 자리를 떠나 그들과 성관계를 가짐 으로써 인간 속에서 살며 인간에게 금지된 온갖 기술과 예술을 가르치고 땅을 크게 파괴한 거인 의 조상이 된 천사 이야기를 더 크게 다루었다. 이 천사 이야기는 창 6:1–4에 뿌리를 두었으나 바 울이 태어나기 여러 세기 전에 크게 성행했다. 이 천사 이야기를 매우 중요하고 강력하게 제시하 는 기사가 에녹1서 6–36장에 나온다. 26 ) SIG2 364, lines 9–10. 27 ) 추가로 deBoer, 31–35; Das, 86–89도 보라. 마틴(90, 263–275)은 단순히 “하나님이 베푼 근본

160


I. 바울의 서두 인사말(1:1-5)

예수의 부활은 이 새로운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 이유는 다가올 세대의 핵심 특징은 죽은 의인이 현 세대의 상과 복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28 ) 하나님은 자기에게 충성하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역시 다가올 세대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유일한 의인 예수의 부활은 이어질 전체의 부활, 곧 하나님의 큰 추수 의 첫 열매가 되었다( 고전 15:20-22 ). 바울의 편지는 한 세대는 사라지고 다른 한 세대는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 두 세대의 경계선이나 겹 치는 가장자리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반영 한다( 가장 극적으로 반영된 본문인 롬 13:11-14를 보라 ). 한 세대의 끝과 다른 세대의 시작이 겹치는 삶이라는 관념은 율법의 계속 된 준수를 반대하고 그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영속적 차이를 반 대하는 바울 논증의 근본 관념이고, 이에 바울은 거짓 선생과의 논쟁에서 이 관념을 전면에 내세운다( 3:26–28; 5:6; 6:15 ).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는 역사에 대해, 그리고 확실히 전체 피조물을 다루는 역사에 대해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고, 그 결과 인간을 지배해 온 세력이 종말을 고 하며( 3:23–25; 4:1–5, 8–11 ), 이때 예수는 사람들을 이들 세력에게서 해방하고 자 유와 의의 새 시대로 인도하였다.29 ) 바울은 이 행위와 이 행위의 함축적 의미가 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30 ) 공관복음 전승에서 하나님의 뜻과 예 수가 자원해 받아들인 죽음 사이의 연관성이 부각된다 ( 마

26:42//눅 22:42 ).

기서도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은 목적 ( 인간의 구원 ) 과 수단( 예수가 자기 몸 을 주심 ) 을

함께 포함할 것이다.31 )

5절 바울은 이 첫 단락을 송영으로 끝낸다. 이것은 이 편지가 회중에게

낭송하게 되어 있던 예배 배경으로 보아 적절하다. “그의 것은 세세토록 영 광이라 아멘.” 여기서 관계 대명사 “그의 것”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 름인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1장 4절 전체 문장의

적 치료”인 죄 사함보다는 이 악한 세대와 죄의 권능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적절히 강조한다. 28 ) Bryant, Risen Crucified Christ, 144–146을 보라. 29 ) “그 아버지가 정한 때”(4:2)와 “때가 차매”(4:4)라는 말 역시 이 세대와 이 세대 여러 세력의 “때가 끝났다”라는 바울의 신념을 지시한다. “이 악한 세대”에서 해방되는 것이 갖는 함의는 우 리가 본 주석서 전체에 걸쳐 거듭 돌아갈 갈라디아서의 핵심 주제를 구성한다. 30 ) ‘카타’(κατά)를 기준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투 데우 카이 파트로스’(τοῦ θεοῦ καὶ πατρός)를 복합적인 주격 속격으로 이해한다. 31 ) Burton, 15; Das, 85.

161


갈라디아서

주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는 즉각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 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송영을 사용한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송영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조금도 의심을 남기지 않는다 ( 빌 11:36 ).

4:20; 롬

로마서 결말 부분에 나오는 송영도 예수와 하나님이 관계 대명사가

지시하는 가능한 선행사로, 두 분에게 거의 똑같이 영광을 귀속할 수 있기 는 하다. 그렇지만 “지혜로우신 하나님”( 롬 16:27 ) 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면 모 호함이 거의 확실히 해소된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 1장 5절의 송영과 비슷 하다.32 ) 여기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선행사로 보는 것이 바울의 다 른 송영과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실제로 이 질문에 압박을 받 았다면 의식적으로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 어구( “영광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 는 진술( “그는 영광이다” ) 이나 기원( “그에게 영광이 있기를” )

어느 쪽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 원문에는 )

동사( “있을지어다” ) 자체가 생

략되어 있고 청자가 어느 쪽이든 법의 형태를 합리적으로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한 말은 영예, 덕, 가치, 확대하면 이런 영예를 가진 존재와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 ( 거의 33 )

지 널리 인정하는 의미다.

가시적인 어떤 “영광” ) 까

여기서 마지막 전치사구는 보통 “영원히”나

이와 비슷한 대등 어구로 번역된다( NRSV, NIV, NLT, CEB ). 하지만 이 헬라어 관 용어는 이 “영원히”를 “세대”의 연속( “세세토록” ) 으로 생각한다.34 ) “아멘”은 히브리어에서 빌려 온 말로, 대체로 제2성전 시대 말에 기도 마지막 부분에 붙인 전례 용어다.35 ) 이 말은 70인역에서

( 음역하지 않고 )

“그렇게 될 수 있기

를”로 번역한다. 하지만 이 말은 또 엄숙한 긍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 예, “진실로, 참으로” ).

32 ) 고후 1:20; 4:15; 빌 1:11; 2:11; 딤전 1:17도 보라. 다만 딤후 4:18에서는 “주”이고, 바울 문헌에 서 “주”는 대체로 예수를 가리키며, 따라서 예수가 “그에게 영광이/그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 을지어다”의 지시 대상이다. 33 ) LSJ 444; BDAG 257–258과 deSilva, Despising Shame, 231–232를 보라. 34 ) 이 표현의 이전 용례는 특히 시 19:9; 84:4; 145:1; 단 7:18의 70인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35 ) Burton, 16.

162


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 (3:1-4:11)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율법 규정에 맞추는 것으로 인해 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암묵적 주장을 보강하는 논증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2장 21절의 자신의 반대 사실 진술에서 끌어낼 명확한 결론을 선포한다( 이 논쟁의 어떤 당사자도 21c절같이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으셨다”라고 기꺼이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

바울의

흔들림 없는 논증의 근거는 갈라디아 사람들의 직접 체험인데, 이들은 성령 을 받고 자기들의 삶에서 자기들 가운데 계속 성령이 활동하는 것을 경험 했다( 3:1–6;

4:4–11 ).

바울은 이 경험으로 회심한 갈라디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미 “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으며( 5:5-6 ), 이미 스스로 하나님 가족의 아들과 딸로 하나님 약속의 상속자라는 것을 깨닫기에 충분 해졌다고 천명한다. 이와 반대로 율법 준수를 통해 이 혜택을 보강하려는 시도는 무엇도 이 혜택을 훼손할 것이다( 4:8–11; 5:2–4도 보라 ). 바울이 3장 7-14절에서( 3:14b가 절정이다 ) 전개할 이 논증 배후에 놓인 전제 는 성령을 받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에게 준 약속의 성 취를 암시하고, 바울은 그 하나뿐인 자손을 예수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3:1516 ).

이 전제는 성령을 받은 경험과 신자와 신앙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성령

의 후속 활동이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에서 파악한 것보다 또는 “성령론” 을 “구원론”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 추가 요소로 보는 어떤 조직신학에서 파 악한 것보다 바울에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바울 324


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이 3장 15-25절에서 전개할 이 전제 배후에 놓인 또 하나의 전제는 율법의 수여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씨가 받은 약속이 인간을 하나님의 의에 일치된 존재로 회복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 요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입장은 바울이 먼저 하나님이 율법을 준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 구하는데( 3:19-22 ), 이것이 거짓 선생이 함부로 주장을 폈던 이유가 아니었다 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율법과 율법의 시간적 한계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타당하다( 3:10-14, 23-25; 4:1-7 ). 이 부분 전체에서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 는지, 따라서 어떻게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지 확립하는 일의 중요성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 어다( 3:7 ).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 이라( 3:13-14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 을 자니라( 3:29 ).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 ( 또는 딸 ) 이면

딸 ) 이니

아들 ( 또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4:7 ).

바울은 자신의 논증에서 대체로 부차적인 의미를 가진 이 요점, 곧 거짓 선생이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약속의 상속 자가 되는 수단으로 할례와 율법 준수를 중시했다고 보는 것에 큰 주의를 기울인다. 거짓 선생이 이런 주장을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 의 성령 경험에 의존하고, 어쩌면 하나님의 경륜에서 율법의 한시적 역할을 주장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이 긴 논증 부분은 다음과 같이 개관할 수 있다. 3:1-6: 성령을 받은 경험에서 나온 증명 3:7-9: 아브라함의 선례에서 나온 믿음의 충분성에 대한 증명 3:10-14: 율법 준수가 아니라 믿음이 의와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성 경에서 뽑아낸 연역적 증거 325


갈라디아서

3:15-18: 유언 법과의 유비에서 나온 증명 3:19-22: 율법의 제한된 역할에 대한 설명 3:23-29: 성년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한 유비에서 나온 증거와 이 요 점을 끌어내는 추론 4:1-7: 성년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한 유비를 재개하고 성령을 받은 것 으로 돌아감 4:8-11: 성년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한 유비에서 끌어낸 책망 형태의 추가 결론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 (3:1-6)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 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 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 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 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 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 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 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 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 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 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 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O unthinking Galatians! Who has put a spell on you,a before whose eyes Jesus Christ was vividly portrayedb as crucified?! 2 This one thing only do I want to learn from you: Was it on the basis of works of Torah that you received the Spirit, or on the basis of the message that aroused trust? 3 Are you all so thoughtless [that], after beginning with the Spirit, you are now going to finish by means of flesh?! 4 Have you experienced such great things for nothing—if indeed it was for nothing?! 5 The one, then, who keeps on supplying the Spirit to you and working miraculous signs among you, does he do this on the basis of works of Torah or on the basis of the message that aroused trust, 6 just as Abraham trusted God, and it was accounted to him as righteousness? 1

a. 많은 후기 사본 ( C D2 K L P Ψ 33c 𝔐, 따라서 KJV에 나타난다 ) 이 “너희가 진리를 순종

하지 못하게”( τῇ ἀληθείᾳ μὴ πείθεσθαι, ‘테 알레데이아 메 페이데스다이’ ) 라는 말을 덧 붙이고, 이것은 갈 5:7에 나오는 같은 어구의 이차 차용 및 삽입이다.

326


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b. 많은 서방 사본과 다수 사본이 ‘엔 휘민’( ἐν ὑμῖν; D E F G K L 𝔐, 따라서 KJV에 이 말이

나타남 ) 을 덧붙인다. “너희 가운데 밝히 보이거늘.” 이것은 분명히 이차적으로 명확화와 개 선을 시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단락으로 수신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영과 수신자 가운데 행하 는 하나님의 역사, 성경에 나온 논증, 자신의 성경 지식이 제공하는 구원 역 사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자신의 입장 ( 2:14-21 ) 이 진실함을 증명하기 시작 한다. 이 모든 논증은 바울의 다음 핵심 진술에 직접 기여한다. 갈라디아 사 람들은 거짓 선생이 제안한 “궤도 수정”을 받아들이지 말고 바울이 권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5:1 ). 바울은 4장 11절까지 이어지는 논증에 계속 주의를 집중하고, 3장 1-5절과 4장 8-11절로 이 부분의 시작과 끝을 표시 하는 일종의 수미상관을 구성한다. 3장 1-5절과 4장 8-11절은 일련의 신 랄한 수사 질문이 담겨 있고, 심문 기법을 사용하여 청자를 특정 결론으로 이끄는 점에서 똑같다. 두 본문에는 또 책망 편지에 익숙하게 등장하는 청 자에 대한 직접 화법도 나온다 ( “어리석도다 1)

여……두려워하노라”, 4:11 ).

갈라디아 사람들아”, 3:1; “내가 너희를 위하

장터에서 활동하는 도덕 철학자는 철학자들이 삶에

대해 “더 큰 시야”를 가지라고 권고한 것에 따르지 못하는 행인의 지성에 자주 의심을 품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의 이성이 건전한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이것이 갑작스럽고 주의를 끌기도 하지만 수사 관행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바울은 4장 11절을 넘어가도 계속 자신의 권고를 보강하는 논증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논증은 행동과 충성에 대한 권고( 그리고 경고 ) 와 충분히 융합된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은 새로운 논증의 시작을 분명히 드러낸다. 바울은 긴 서술을 마친 다음 엄숙한 직접 화법으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청중에 게 직접 질문하여 청중이 자기들의 주변 상황에 새롭게 초점을 맞추게 유 도한다. 주제( 즉, 칭의를 추구하는 데 있어, 예수를 믿음으로 열린 길과 율법 규정을 지키는 길 사이 의 대립 관계 ) 가

연속되기도 하지만, 바울은 성령과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주

제도 소개한다. 갈라디아서 3장 1-14절은 일관된 논증을 세 단계로 명확히 구성한다. 우선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영접하고 경험한 일에 관 심을 촉구한다. 이 믿음의 길이 진정으로 이들이 시작한 여정의 종착점에 도달하기에 충분한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복음 메시지에 의지하는 응

1 ) Longenecker, 97.

327


갈라디아서

답이 그 근거라고 한다( 3:1-5 ). 갈라디아서 3장 6절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을 믿음으로 반응하여 의를 얻게 된 역사적 본보기로 소개한다. 때로는 이 를 3장 1-6절의 일부로 보기도 하고,2 ) 또 때로는 새로운 단락의 시작 절로 보기도 한다.3 ) 그러나 거의 확실히 3장 1-6절에 속한다고 보는 전자의 입 장이 선호되는데, 그 이유는 “……함과 같으니라”로 번역한 등위 접속사가 3장 5절에서 제기된 질문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더 자연스럽게 만들기 때문 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청자에게 특별히 응답하게 이끄는 선례로 소개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열린 길을 따라감으로 써 이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고, 지금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며, 앞으로 하 나님이 우리에게 정한 목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어서 갈라디아서 3장 7-9절은 “믿음”을 아브라함의 자손, 곧 아브라함 에게 약속된 복을 받을 자를 규정하는 가족 유사성의 특징이라고 단정한다. 갈라디아서 3장 10-14절은 대조법에 따라 “율법 행위” 주제로 돌아와 율 법 중심의 삶을 복에 대한 기대를 확실히 채워 주는 삶이 아니라 “저주 아 래” 사는 삶으로 확정한다. 복에 대한 기대를 확실히 채워 주는 삶은 믿음 으로 나아갈 때 임한다. 바울은 3장 13-14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 도, 성령, 복, 저주, 율법, 믿음 주제를 하나로 묶어 이 논증을 마무리한다. 곧 그리스도는 교환을 통해 율법 저주의 경고나 경험 아래에 수고한 자를 속량하고, 그리하여 믿음을 기초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 심지어는 성 령까지 모든 민족에게 임하도록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 1절 바울은 인상적인 직접 화법으로 논증의 흐름에 변화가 있음을 암시

한다. “생각이 없도다( 개역개정, “어리석도다” )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 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 더냐?” 여기서 수신자를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부른 것은 안디옥 사 건( 2:11-14 ) 과 이 사건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반응( 2:15-21 ) 을 갈라디아에 전파 된 다른 복음의 도전과 연결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한 직접적인 상황에 다시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다.4 )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생각 이 없도다”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거짓 선생의 메시지와 권고에 마음이 열

2 ) UBS4 ; NEB; ESV; NIV; Bruce, 152; Matera, 113; Silva, Interpreting, 219–220(설득력이 크지는 않다). 3 ) NA27, 28 ; NRSV; NLT; Burton, 153; Longenecker, 112; Tolmie, Persuading, 100–101. 4 ) Tolmie, Persuading, 103. 청중의 위치와 구성을 식별하는 데 “갈라디아 사람들”이라는 말이 적합 한지는 본서 서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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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려 있다는 사실에 도전을 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를 “어리석다”로 번역하려는 유혹을 받지만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 신자의 지성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 상황에서 스스 로에게 적용하기를 거절하거나 실패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5 ) 그렇다 면 갈라디아 사람들은 거짓 선생의 권고를 진지하게 고려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종종 누군가에게 “악한 눈”6 ) 을 주어 주문을 거는 것을 특별히 자 주 가리키는 동사를 사용해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질문함으로써 자신 의 의문에 포문을 연다. 악한 눈은 상대방의 행운에 대해 시기심이 촉발하 여 생기는 악한 의도를 가리키는 말인데 자주 잠재적이고 널리 만연한 힘 으로 간주되었다. 터키 안타키아( 안디옥 )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2세기 모자 이크 벽화는 로마 시대 아나톨리아에서 악한 눈을 물리치는 데 관심이 있 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 모자이크 벽화는 끝이 눈동자에 닿아 있는 삼 지창과 칼, 눈동자를 쪼아 먹는 새, 아울러 마치 이 눈동자를 칠 것 같은 동 작을 취하던 지네, 전갈,

( 몸에 매듭을 가진 )

뱀, 개, 표범을 포함해 다양한 부적

으로 둘러싸인 눈동자가 특징이다. 이 모자이크 벽화는 눈동자에서 멀어지 고 꼬챙이를 붙잡고 있는 악귀 같은 형상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 형상의 발 기한 남근은

( 극단적으로 )

눈의 힘을 피하기 위해 뒤돌아보고, 악한 눈의 접근

을 막는 다른 부적과 함께 정렬되었다. 이 모자이크 벽화에는 방문자가 복 을 가져오든 저주를 가져오든 그 집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에게나 “그리고 너도 함께”를 선언하는 “너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둘이 적혀 있다.7 ) 악한 눈을 막는 대중적인 한 가지 대책은 분명히 사람의 가슴에 침을 세 번 뱉는 것이었다.8 ) 이것은 반대자가 사용하는 전략과 그들의 근본 동기를 잘 보여 주는 수사 적 특징이다. 거짓 선생이 회심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마법을 사용했을 같 지는 않다. 그러나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한 거짓 선생의 영향을 가능한 한

5 ) Burton, 143; Matera, 111; LN 32.50. 6 ) BDAG 171. 7 ) 이 형상은 Cimok, Journeys of Paul, 104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 테오크리토스(Theocritus)의 『목가』, 6.39를 보면 갈라테아를 질투하게 만든 폴리페모스가 악한 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 반응한다. “저주를 받지 않도록 세 번에 걸쳐 내 가슴에 침을 뱉 었다.” Clayton Zimmerman, The Pastoral Narcissus: A Study of the First Idyll of Theocritus (London: Rowman & Littlefield, 1994), 45–46의 설명을 보라. 대 플리니우스, 『박물지』, 28.7 §§36, 39; BDAG 309도 보라.

329


갈라디아서

부정적이고 불길한 빛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전략이다. 갈라디아 사람 은 단순히 바울이 자기들에게 가르친 것이 아닌 다른 것에 “설득당하는” 것 이 아니라 거짓 선생이 자기 편으로 꾀려고 사용한 어두운 힘에 지배당 했다.9 ) 갈라디아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 가능한 한 빨리 거짓 선생의 마법 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또 속아 넘어간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서 거짓 선생에게로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그리하여 갈라디아 사람들의 태 도가 지금 모호한 것도 결국 거짓 선생의 악의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 한다( 따라서 바울이 이를 그렇게 퉁명스럽게 지적한 것을 두고 바울에게 향하는 모든 분개를 누그러뜨 린다 ).10 )

바울은 거짓 선생의 영향이 특히 복음 메시지의 핵심적인 중요 요

소, 곧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갈라디아 사람들의 관점을 흐리 게 한다고 주장한다.11 ) 악한 눈은 특별히 시기심과 결부되어 있다. 바울은 이 시기심이 거짓 선 생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복 음을 반대한 다른 집단이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의 “자유”를 부정적인 시 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다시 속박으로 이끄는 조치를 취했으나 그들의 시 도가 좌절되었다고 이미 주장했다( 2:4-5 ). 바울은 특별히 자신의 전도로 회 심한 자를 미혹한다는 이유로 거짓 선생을 계속 비난할 것이다. 거짓 선생 은 자기들의 유익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지위를 빼앗으려고 획책하고, 자기들 거짓 선생의 지위를 높이 고자( 4:17 )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을 부추기고 있다( 6:12-13 ).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거짓 선생의 메시지 진리를 평가할 때 더 비판 적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래서 더 깊이 생각하면 이 외부인의 말에 쉽게 넘 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분명히 표현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도시를 처음 방문했을 때 자기들에게 분명히 전한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메시지와 하나님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은 자신들 의 경험( 즉

3:2-5에서 곧 전면에 부각할 성령에 대한 경험 ) 을

더 깊이 반성했다면 거짓

선생의 잘못된 추론을 충분히 간파했을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동 사는 “현저하게 드러나다” 또는 “미리 선포하다”를 의미할 수 있는데, 대체

9 ) Longenecker, 100; Witherington, 201–204. 이 말의 비유적 의미가 담긴 고전 문헌 사례에 대해 서는 Betz, 131을 보라. 10 ) Tolmie, Persuading, 104. 11 ) 바울이 여기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고유의 눈으로 본 것을 악한 눈에 연결하여 언어유 희를 벌인 것일 수도 있다(Fee,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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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로 두 번째 의미가 흔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첫 번째 의미가 문맥 에 더 적합하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선포로 회심한 자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했을 때, 그리고 초기에 같은 복음에 대해 가르쳤을 때 그들의 눈앞에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를 올바로 제시했기 때문이다.12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울이 더 긴 복음 선언문을 압 축해 속기로 표현한 것으로, 복음 메시지의 가장 특징적인 심상과 국면을 가리킨다( 또한

고전 1:23; 2:2도 보라 ).

또한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일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이 무시할 위험이 있는( 2:21 )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의 큰 가치 를 매우 생생하게 포착한 심상이기도 하다.13 ) 3장 1절에서 바울이 십자가 에 못 박힌 메시아 선포를 강조한 것은 2장 21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한 것과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가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믿은 바울의 확신에서 유기적으로 파생된다. 우리는 바울이 근본적으로 제 기하는 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 예수의 값비싼 십자가 죽음의 구속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그 런데 지금 어떻게 너희가 율법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맞추 겠다는 관념을 갖기 시작할 정도로 생각이 없단 말이냐?” 2절 바울은 지금 고민 중인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으로 진술

한 내용( 2:14-21 ) 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각인시킨( 3:1 ) 다음, 한 가지 질 문에 대해 갈라디아 사람들의 답변을 촉구한다. “내가 너희에게서 오직 이 한 가지만 알려 하노니”( 3:2a ). “오직 이 한 가지만”이라는 말이 문장 첫 부

분에 나온 것( 이어지는

부정사 “알려 하노니”의 직접 목적어 ) 은

강조 용법으로, 질문에

힘을 더하고 아직 언급되지 않은 “이것에 대해 독자의 기대를 창출하는 역 할을 한다. 바울은 실제로 이 질문 다음에 네 개의 질문( 3a절을 3b절과 분리된 질 문으로 다룬다면 어쩌면 다섯 개의 질문 ) 을

가차 없이 연속으로 제시하지만, 네 질문은

12 ) 동의, Fung, 129; Longenecker, 100–101; Matera, 112. 버턴(144)은 비슷한 의미로 “게시하다” 를 제시한다. 청중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은 설 득력 있는 말에서 흔히 드러나는 목표였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를 가리키는 말로 사물이 눈앞 에 제시된다”(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3.11.2). 퀸틸리아누스(『연설가의 교육』, 6.2.29–32) 도 비슷하게 말로 정신적 심상을 창출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때 “없는 물건이 우리가 실제로 눈 없이 보는 것처럼, 그리고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처럼 지성에 제시되고”, 결과적으 로 화자는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둘 다 Murphy-O’ Connor, “The Unwritten Law,” 229에서 재인용). 브라이언트(Bryant, Risen Crucified Christ, 171)는 바울은 보통 자신의 수사 능력을 가볍게 여기지만 여기서는 그 능력을 자랑하는 것 같다 고 바르게 지적한다. 데이비스(Davis, “Meaning of προεγράφη”)는 더 나아가 바울이 자기 몸의 상처(6:17)를 노골적으로 이 선포를 돕는 가시적 도구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13 ) Shauf, “Galatians 2.20,” 96.

331


갈라디아서

모두 기본적으로 하나의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2b ). 오직 “믿음으로”일 수밖에 없는 이 질문의 답변은 이 단락의 추론 과정을 주도하고, 갈라디아 사람들 이 자기들의 현재 상황에 대해 부득불 결론을 내리도록 이끈다. 수사 이론가는 아무리 설득력이 없더라도 강한 논증을 연설의 증명 부분 앞에 두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렇게 하면 연설자는 초반에 청자가 자기들 의 판단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고, 아울러 이후의 모든 증명에 대해 설득 력을 부여하게 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전략을 보여 준다. “오직 이 한 가지”에 대해 갈라디아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바울은 그 것이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율법 준수가 실제로 무죄 선고로 향한 이들의 진술에서 다음 단계를 가리키는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14 ) 특히 이 본문( 더

상세히 나오는 5:13-6:10처럼 ) 은

바울의 선교, 그리고 하나님이

회심한 자 가운데에서 어떻게 역사하였는지에 대한 바울의 이해에 성령을 받는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약속한 결말로 그들을 이끌었다. 바울은 성령 자체를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지금 성취되고 있는 약속의 본질적 요소로 본다( 3:14 ). 예를 들어 보자. 에스 겔서를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속에 새 영을 보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겔 11:19–20; 36:26–27 ). 에스겔은 온전하고 내 적으로 인도받는 율법 준수가 일어나게 되는 이 약속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구체적으로 유대의 율법 체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규범에 순종하는 능력을 주는 분으로 이해한다 ( 갈 5:13-25를 보라 ).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받았는지는 문젯거리가 아니다.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알고 있고, 또 그들도 스스로 성령을 받은 것을 아 는 것으로 바울도 알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에 복음을 접 한 사건을 복음 선포를 들은 일과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 어난 확신을 경험한 일의 결합으로 묘사한 것은 바울 선교 전체를 망라하 는 공통 특징이다. 바울은 회심한 고린도 그리스도인에게 비슷한 경험을 환 14 ) 같은 견해로 Burton, 147; Betz, 130; Dunn, 151; Matera, 112; Tolmie, Persuading, 101, 104. 3:1–5를 여담 또는 막간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예컨대 Drane, Paul, Libertine or Legalist? , 24를 보라)은 이 본문의 중요성을 놓칠 뿐만 아니라 바울 신학에서 성령을 영접하는 사건이 차지하는 결정적 의의도 놓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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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기시키고( 고전 2:1-5 ), 바울 일행에 속한 히브리서 저자도 독자에게 독자가 하 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일과 선포된 말씀을 확증하는 성령의 나누어 줌을 상기시킨다( 히 2:3-4 ). 이런 경험의 본질은 초자연적인 어떤 일이 회심한 자 가운데 일어났다는 사실에 결코 의심을 남겨 놓지 않았다 ( 또한 특히 14:24–25를 보라 ).

고전 12:1–14:40;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

것을 명백히 경험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선교 속에서 그리고 선교 내내 어떤 일을 행했는지에 대한 바울의 생각에서 근본적인 전제가 된다.15 ) 그 것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가진 지위에 대한 경험적 증 거가 되고, 따라서 거짓 선생의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된다.16 ) 바울은 자신의 전도로 회심한 자에게 그들이 겪은 경험의 이러한 국면을 환기하고, 어떤 기초 또는 원천에 따라 그들이 성령을 받았는지 묻는다. 이 때 그들에게 선택할 두 가지 가능한 답변이 제시된다. “율법의 행위”( ‘엑스 에 르곤 노무’ ) 나

“믿음을 일으킨 메시지”( ‘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 개역개정, “듣고 믿음” )

가운데 어느 것을 기초로 받았는가? 첫 번째 어구는 이미 2장 15-16절에 나타났다( 세 번이나 ). 그리고 지금은 그 의미가 익숙하다. 두 번째 어구는 새 롭고 매우 불명확한 표현으로 다양하게 타당한 해석이 가능하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여기서는 바울의 엄밀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거기서 이들이

( 이 말의 뉘앙스를 내부자의 입장에서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사상과 표현을 더 폭넓게 인지할 수 있는 혜택을 받았지만 )

현대 해석자가 직면

하는 것과 똑같은 모호함에 직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일으킨 메시지” 표현과 유관한 ‘피스티스 크리스투’라는 말이 그 런 것처럼( 지금은 “믿음을 일으킨 메시지”가 “율법의 행위”라는 말과 이처럼 새롭게 대조 관계를 형 성하면서 ‘피스티스 크리스투’를 대체하므로 ),

앞의 명사 ‘아코에’의 의미와 ‘크리스

투’라는 속격으로 전달되는 ‘아코에’와 ‘피스티스’ 사이의 관계에도 모호함 이 그대로 남아 있다.17 ) 명사 ‘아코에’는 (1) 듣는 능력 또는 듣는 행위를

15 ) “갈라디아 사람들의 기독교적 삶의 핵심과 출발에는 성령에 대한 실존적 경험이 놓여 있다”(Rabens, “Indicative and Imperative,” 300). 16 ) Lemmer, “Mnemonic Reference”와 Fee, Empowering Presence, 378, 381–389를 보라. 17 ) ‘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ἐξ ἀκοῆς πίστεως)와 ‘엑스 에르곤 노무’(ἐξ ἔργων νόμου)가 평행 을 이루는 표현이기는 해도, 이 기초에 따라 두 전치사구를 구성하는 문법적 및 구문적 요소도 이 평행 관계에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Hays, Faith of Jesus Christ1 , 147은 올바르게 말한다). 매틀록(“Detheologizing,” 16)이 행 9:31과 관련해 증명한 것처럼 속 격 관계의 근본적으로 다른 두 의미가 같은 문장에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견해들을 충 분히 설명한 것은 Hays, Faith of Jesus Christ1 , 143–149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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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의미하거나18 ) (2) 들은 것, 따라서 “보고”나 “메시지”를 의미할 수도 있 었다.19 ) 두 번째 명사( ‘피스티스’ ) 는 아마 특별히 돌이켜 보면 ( “신실함”이나 “신앙”, “신뢰”나 “믿음”을 가리키는 말로 들렸

즉 1장 23절처럼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 )

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 사건이 비슷한 상황 의 선례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비록

2:16-21도 청자를 이런 이해로 이끌기는 해도 ).

듣는

것과 믿는 것은 우리가 아브라함 속에서( 3:6 ),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자 ( 3:7-9;

3:1-2의 바울의 설교에 대한 반응으로 )

브라함과 아브라함의 자손 )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두 경우( 아

모두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 한다.20 ) ‘피스티스’의 속격은 “믿음”이 어떤 면에서 “들음”의 특징임을 가리키고, 따라서 “신실한 들음” 또는 “신뢰가 특징인 들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렇 게 “들음”( 그리고

들은 것을 신뢰함 ) 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와 대조되는 행동인

“율법의 행위”에 함축된 수행과 더 나은 평행 관계를 이루고 그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는 앞으로 다루겠지만, 하나님이 약속을 선포하자 아브라함이 약속을 듣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사례( 3:6 ) 에 상당히 가깝게 부합한다.21 ) 바 울이 제시한 특수 메시지 (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 를

환기하는 앞

절( 3:1 ) 도 자연스럽게 들음과 믿음의 반응에 초점을 내준다. ‘피스티스’의 속격은 또한 명사 ‘아코에’를 그 방향이나 목적을 지정하는 관점에 따라 파악할 수도 있고,22 ) 그렇게 되면 “믿음을 일으키는 메시지( 또 는 어쩌면 듣는 행위 ) ”를

가리키게 된다. 바울이 이후에 로마서 10장 16-17절에

서 복음 선포와 믿음 또는 신뢰의 일어남에 대해 말하는 진술이 이 해석을 옹호한다. 거기서 바울은 이사야 53장 1절을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울과 같 은 사도의 메시지를 통해 전파되면 신뢰나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는 결과를

18 ) 예컨대 다음 본문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사 6:9의 70인역; 마 13:14; 막 7:35; 눅 7:1; 행 17:20; 고전 12:17; 딤후 4:3–4; 히 5:11; 2 벧후 2:8. 19 ) 예컨대 다음 본문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 사 52:7; 53:1; 렘 6:4; 49:14의 70인역; 마 4:24; 14:1; 24:6; 요 12:38; 행 28:26; 롬 10:16–17; 살전 2:13; 히 4:2(요 12:38, 행 28:26, 롬 10:16은 모두 사 53:1의 70인역을 인용한다). 20 ) Williams, “Hearing of Faith,” 87. 21 ) Fung, 132; Bruce, 149; Schreiner, 182–183; Williams, “The Hearing of Faith,” 86–87. 롱게네 커(103)도 “듣고 (너희가 들은 것을) 믿음으로냐”와 같은 말을 주석할 때에도 같은 취지를 밝히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2 ) BDF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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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박(3:1-4:11) A. 경험에서 나온 증명: 갈라디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음(3:1-6)

낳을 것이라는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는다.23 ) 후기 문서로 초기 문서를 해 석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라디아서 3장 2절과 로마서 10장 16-17절을 같은 저자가 기록해서 문서가 분명히 서로 긴밀한 관계를 보여 주고 비슷한 주제의 배치를 보여 준다는 사실로 이런 제한을 완화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런 이해는 또 바울이 자신이 선포했고 갈라디아 사람들이 믿었던 복음 메시지 (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3:1 ) ”

를 문맥에서 명백히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아 효력이 있다.24 ) 어느 쪽 견해든 3장 2절의 반정립을 앞서 나온 2장 16절의 반정립, 곧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사이의 대립과 조화시킨다. 두 견 해 모두 계속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다른 인간적 반응, 곧 사람의 관습과 인격을 율법의 규정에 일치시키는 반응과 달리 바울의 초기 전파를 들은 결과로 전면에 부각하기 때문이다.25 )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독자가 낭독된 편지를 들었을 때 이 어구를 어떻 게 해석했는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존재했는지 엄밀 히 결정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사실은 참으로 명백하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성령을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에게 부어 주 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고 어떤 율법 준수 생활 방식을 채택 하는 것을 고려하기 오래전에 바울이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위해 예수의 죽음이 가진 중요성에 대해 전한 메시지에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코에’를 자기들이 들은 행위로 이해 했든 또는 자기들이 들은 메시지로 이해했든 그들이 들을 때 말한 자는 바 울이었고, 그들의 믿음을 일으킨 것은 바울의 메시지였으며, 그 결과 그들 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 이것 역시 이제 바울을 신뢰하는 것과 거짓 선 생을 신뢰하는 것 사이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과 관련해 갈라디아 사람들에 게 분명히 함축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아마 정말 중요 23 ) Martyn, 288–289. 24 ) Sprinkle, “Eschatological Event,” 177. 살전 2:13도 보라. “들은바(ἀκοή, ‘아코에’) 하나님의 말씀.” 25 ) Williams, “Hearing of Faith,” 86. 우리가 속격 ‘피스테오스’(πίστεως)를 머리 명사의 “내용”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다른 견해도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온다. (3) 개연성은 없지만 “믿음에 대한 들음.” (4)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에 대한 들음”(‘피스티스’ [πίστις]를 다른 주요 의미로 취함). (5) “믿음”에 대한 (바울의 설교) “보고.” 여기서 마지막 견 해는 사실상 Betz, 133; Matera, 112가 취한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반응 해 믿음을 보여 준 아브라함의 본보기는 ‘피스티스’가 여기서 “믿음”으로 이해될 개연성을 부각 한다.

335


갈라디아서

하게도 “율법의 규정대로 행하는 것”은 자기들이 성령을 받고 성령을 계속 경험하는 수단이 아니었음을 명명백백히 이해했을 것이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이 예수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을 위해 가져온 것을 믿은 결과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을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 은 사실을 알 것이다. (1) 그들은 “모든 민족”( 이방인 ) 에 대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받았다( 3:14 ). (2)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수용을 누리고 이미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약속의 상속자였다( 4:6-7 ).26 ) (3) 그들 은 하나님에게서 스스로 육체의 권능을 넘어 하나님이 말하는 의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고, 따라서 끝까지 하나님의 인정을 누리며( 5:13–25; 6:7–10 ), 이 모든 것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에 베풀어 주는 은혜를 의지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갈라디아 사 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의 행위를 행하는 일로 돌아가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추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예 수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에 대해 거룩하게 되었고, 따라서 성령이 자기들에 게 머물고 자기들 속에 거하기에 충분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유대인이 이 방 민족과 민족적 차이를 유지하는 측면에서 거룩하다 규정됨으로써 주님 앞에 거룩해지려고 지켜온 전통 의식( 儀式 ) 까지 수행할 필요는 없었다. 확실 히 이 복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갈라 디아 사람들이 그때까지 유일하게 믿었던 예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 는 것에 불과했다( 참고, 2:21; 5:2-4 ). 3절 바울은 두 번째 관련 질문을 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문을 부각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 느냐?”( 3:3 ). 바울은 이 구절 후반부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쌍의 진정한 교차 대구 구조를 창출하여 마치 “육체”가 “영”을 발전시킨다거나 “영”에 공헌 할 수 있는 것처럼 “영”을 무언가 “육체”와 관련된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부조리함을 강조한다. A 시작하였다가 B 성령으로 B’ 이제는 육체로

26 ) 행 10:1–11:15에 상세하게 언급된 고넬료 일화와 그 해석을 통해서도 비슷한 요점이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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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 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지만,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타 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갈라디아서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데이비드 드실바(David A. deSilva) 프린스턴 대학교(B. A.), 프린스턴 신학교(M. Div.), 에머리 대학교(Ph. D.)를 나와 지금은 애슐랜드 신 학교 신약 및 헬라어 석좌교수다. 『에베소에서 보낸 일주일』, 『문화의 키워드로 신약성경 읽기』, 『신약개론』 등을 저술했고, CEB, ESV 성경의 외경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다.

총신대학교 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기독교 고전과 양서의 번역을 통해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 고 많은 책을 번역했다. 대표적인 역서로는 『신약성경신학』, 『신약개론』, 『신약 성경의 핵심 메시 지』,『BECNT 요한계시록』, 『NSBT 요한계시록 성경신학』(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725-4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42,000원

김 | 귀 탁 옮김

옮긴이 김귀탁

데이비드 드실바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갈라디아서 Galatians 데이비드 드실바 지음 | 김귀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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