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으로의 논리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사도 바울과 디모데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편지는 “하나 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 1:1 ) 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역에서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디모데”( 고후 1:19 참고 ) 가 덧붙어 있어서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지 만,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바울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바울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14 ) 1장 23절 본문에서 “나, 바울”이라는 문구를 통해 드러난 저자 표시는 1장 23절 화자와 동일 인물이 계속 말하고 있는 1장 24절-2장 5절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4장 3-4절의 기도 요청이 바울과 그의 선교 에 대한 것처럼 들리고 4장 7-15절의 개인 이름들이 바울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편지는 “나 바울은 친필로 이 인사말을 쓴다”( 4:18 ) 라는 말로 명확하게 끝을 맺고 있으며 이런 마무리는 갈라디아서 6장 11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바울이 썼다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26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가장 큰 수준에서 비교해 보면 이 편지는 인사말, 작별 인사, 목회적 측면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 14 ) 디모데가 공동 저자로 나타나는 다른 세 서신은 고린도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다. I
과 비슷해 보인다.15 ) 따라서 골로새서 1장 1절은 다른 편지의 서문들처럼
들리고 ( 고후 1:1; 빌 1:1 ), 1장 23절의 “나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라는
말은 섬김에 대한 고린도후서 10장 1절의 비슷한 생각을 반영하며, 마무리
부분 ( 4:18 ) 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 ( 예, 갈 6:11; 몬 19절; 고전 16:21 ) 에서 볼 수 있는 것
과 매우 유사하다.16 ) 골로새서의 문법과 문체는 어떤 면에서 다른 바울서
신과 비슷하다. 골로새서가 바울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대주교
죽음이 오다』가 『오, 개척자여』의 윌라 캐더 ( Willa Cather ) 의 것처럼 들리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17 ) 대부분 연구에서 골로새서에 대한 이런 전통적 견해는 역시 옥중서신 이라 불리는 다른 세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결합되어 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이 편지들 각각에 대한 탄탄한 해석의 역사가 이 편지들의 위상을 더해 준다. 옥중서신에 대한 이런 해석 때문에 한 편지가 다른 편지에 의존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 장차 중대한 영향력을 행 사하게 될 바우어 ( F. C. Baur ) 의 비평적 저작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이 편지의 저자가 바울임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18 ) 그러나 오늘날 학계는 바울이
15 ) Bormann, 6-7에서 명확히 규명된다. 16 ) 골로새서의 장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지만, 오늘날 이 문제를 논의하는 대 부분의 사람들은 권면의 편지로 본다. Walter T. Wilson, “The ‘Practical’ Achievement of Colossians: A Theological Assessment,” Horizons in Biblical Theology 20 (1998): 55–60; Robert Scott Nash, “Heuristic Haustafeln: Domestic Codes as Entrance to the Social World of Early Christianity; The Case of Colossians,” in Religious Writings and Religious Systems, ed. Jacob Neusner (Atlanta: Scholars Press, 1989), 27–31을 보라. 여기서 윌슨의 진지한 노력 의 이점은 일종의 권면 신학에서도 나타나며, 이 신학은 그가 요약 설명했듯이 문제 지향적이고, 전통 지향적이며 내적 핵심에 대해서는 윤리적이다. 이 신학은 기독교인의 삶의 전체 맥락에 관 심을 갖고 종교적 서사에 의해 활력을 얻는 담론 윤리를 확립하는 것으로 그 의제가 변혁적이며 효과적인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데(60-71), 골로새서는 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 인다. 17 ) 그러므로 우리는 골로새서에 대한 정경적 접근법을 최소한 이해는 해야 한다. 이 주제에 대해 서는 Stanley Porter and K. D. Clarke, “Canonical-Critical Perspective and the Relationship of Colossians and Ephesians,” Bib 78 (1997): 57–86을 보라. 맥도날드는 골로새서와 에베 소서는 유사점이 많기 때문에 적어도 이 두 편지를 함께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MacDonald, 4-6을 보라. 대안적 접근법으로는 Seitz, 21-56이 있다. 그는 정경적 접근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본문은 본문 자체가 무엇을 전하기로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 떤 형태로 말하고자 택했는가에 대해 존중되어야 하며, 역사적 판단들은
The New Testament as Canon:
있다.
예, Justin Martyr, Dialogue with Trypho
Irenaeus, Against Heresies 3.14.1; Tertullian, Prescription against
Clement of Alexandria, Miscellanies 1.1.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27
에게
지
이런 현실에 비례해 [지 혜롭게] 내려져야 한다.”(51). 그는 정경적 접근법에 대한 Brevard S. Childs의 선구적 저작인
An Introduction(Philadelphia: Fortress, 1985)에 기반을 두고
18 )
85.2; 138.2;
Heretics 7;
이 편지를 썼다는 주장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19 ) 바울이 이 편지 를 썼다고 주장하는 자가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대한 최근의 예로 캠벨의 경우를 들 수 있다.20 ) 아마도 가장 의미심장 한 사실은 바울의 삶과 신학이 저자에 대한 한 사람의 결론에 달려 있다는 점일 것이다.21 ) 골로새서 저자에 대한 가장 놀라운 구절 중 하나는 케제만 ( Ernst K ä semann ) 의 RGG3 골로새서 항목에서 볼 수 있다. “내용과 문체를 기준으로 진 정 서신이면 가능한 한 가장 늦은 것이며, 비진정 서신이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른 것이다”( 3:1728, “Wenn echt, um des Inhalts and Stiles willen so spät wie möglich, wenn unecht, so früh wie denkbar” ). 이 구절은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말 에 담긴 함의를 다음과 같이 확장한 제리 섬니 ( Jerry Sumney ) 의 말과 연결해 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이 서신의 저자가 아니라면, 이 서신의 실제 수신자도 골로새 교회들이 아닐 것이다.”22 ) 케제만과 섬니의 진술은 저자 논쟁의 특징적 사고방식, 즉 알려진 것을 알려지기 원하는 것 ( 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 과 비교한다는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골로새서의 저자 ( 알려지지 않아서 알려지기 원하 는 저자 ) 를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의 저자 ( 둘 다 바울로 알려져 있음 ) 와 비교해 골로 새서의 사상과 표현이 알려진 것과 부합하거나 심지어 동일한지 확인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골로새서가 갈라디아서와 너무 많은 긴장을 일으 키거나 아니 어쩌면 약간의 긴장만을 일으키거나 또는 발전을 보여 준다면,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지 않았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 들에게 골로새는 가상의 우편함이요 영리한 아바타에 불과한 것이 된다. 알 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라는 이 논리에 주목하라. 그러나 이 논 리에는 논의 전체를 감염시키는 심각한 역사적 문제가 숨어 있다. 이 논리 는 바울의
19 ) Benjamin L. White, Remembering Paul: Ancient and Modern Contests over the Image of theApost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Douglas A. Campbell, Framing Paul: An
Biography (Grand Rapids: Eerdmans, 2014), 260–309.
Schnelle, Apostle Paul:His LifeandTheology, trans. M. Eugene Boring(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다.
Sumney,
골로새서 28
삶과
신학 및 초기 기독교인의
삶과
신학 기록
모두에
대해 다양
한 결론과 함의를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고름을 제거하 기 위해 절개할 필요가 있는 주석적이고 역사적인 종기다.
2014)에 주목하라. 20 )
Epistolary
21 ) 바울 신학을 구성하는 데 골로새서를 거의 제쳐두는 좋은 예는 Udo
22 )
9.
“바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도 없고 또 내가 믿기에는 잘못 된 가정, 즉 진정한 바울서신 ( 갈라디아서나 로마서 ) 은 그 사람, 사도, 즉 유대인 바 울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 바울이 진정 기록했고 입증 가능한 것 ( 갈라디아서 )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골 로새서와 같은 옥중서신과 비교해 그것이 진정한 서신에 해당하는지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23 ) 바울이 골로새서의
엇일까? 오직 그 사람, 사도, 유대인 바울만이 갈라디아서의 책임 있는 저자라 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 바 울의 순수한 표본, 바울의 진정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골로새 서를 로마서와 비교해 전자가 후자와 긴장 관계에 있는 것을 보고 전자는 바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결정한다. 그러나 이 결 론은 로마서를 순전히 바울이 썼다는 한 가지 핵심 가정에 근거한다. 로마 서 16장 22절이 말하듯이 그렇지 않다. 로마서의 저자 ( 또는 그 편지를 쓴 사람 ) 는 “더디오”였다.
여기 한 사례가 있다. 나의 박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 ( Doktorvater ) 의 사례로, 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의 골로새서 주석으로 즐겁게 공부한 바 있다. 아래에서 보듯이 나는 그와 매우 많은 점에서 견해를 같이하기 때 문에 여기서 한 가지 이견을 기꺼이 제기한다. 그의 요약 진술은 다음과 같 이 이런 비교 논리를 반영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주석가는 편지의 매 지점 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울서신의 것과 일관되고 현저하게 다른 사상 흐름과 수사 기법의 특징들과 마주하게 된다.”24 ) 이제 내 말을 분명히 하자. 나는 로마서와
복잡성이
David G. Meade, Pseudonymity and Canon: An Investigation into the Relationship of Authorship and Authority in Jewish and Earliest Christian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87); Richard Bauckham, “Pseudo-Apostolic Letters,” JBL 107 (1988): 469–494를 포함한 많은 학자가 이 주제를 다루었다. 위명 편지에 대한 Bauckham의 광범위한 분석과 형식적 분류는 골로새서의 사도성을 확증하는 경향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골로새서가 위 조된 것이라는 Schweizer, 21의 관찰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아는 한 이런 종류의 교묘한 위조 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며……따라서 가짜로 포착된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더욱이 고대에는 이와 유사한 위조 사례는 없는 것 같다.” D. A. Carson, “Pseudonymity and Pseudepigraphy,” DNTB, 857-864도 보라. 24 ) Dunn, 35.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29
저자임을 부인하는 대부분의 사 람들에게서 여기서 작동하는 역사적 오류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무
골로새서 사이에 긴장이 없다 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과장되고 너무 우려먹는 측면이 있지만 긴장 23 ) 여기에는 “위서”(pseudepigrapha)가 의미하는 것과 그것을 감지하는 방법의
있다.
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려는 바는 ( 골로새서의 ) 알려
지지 않은 저자가 확실하고 사실적이며 분명하다고 추정되는 것 ( 로마서나 갈라디
아서나 고린도전후서는 순전히 바울이 쓴 것이다 ) 과 비교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의 를 제기하는 것은
바울의 “문체”가
“몇 년 사이에 바뀌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 이는 훌륭하지만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골로새 서나 에베소서나 빌립보서에서 작동하는 손은 같은 손이 아니다. 나는 최근에 바울 전문가가 아닌 존 하워드 요더의 유명한 책 『예수의 정 치학』 각주에서 같은 논리, 즉 알려졌다고 생각되는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넘어가는 논리를 발견했다.26 )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나는 ‘바울’이라고 써야 할 것 같다. 로마서를 쓴 동일 인물이 에베소인들과 골로 새인들에게도 썼는지 아닌지는 현재 목적상 중요하지 않다.” 매우 일반적 인 이런 논리에 주목하라. 그것은 우리는 로마서를 쓴 사람 ( 바울 ) 을 알고 있 고, 그의 사상과 구문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 저자 ( 바울 ) 와 구문을 골로새서에서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있기에, 바울이 골로새서를 썼는지 아닌 지는 비교를 통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는 로마서를 쓴 사 람이 바울 혼자 즉 바울 자신이라는 것과 로마서가 순전히 바울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골로새서가 이 시험을 통과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 해 이 순수한 표본에 비추어 골로새서를 시험해야 한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이 가정은 입증할 수 없고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27 ) 사실 오늘날 바울서신의 저자에 대한 질문은
골로새서 30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다른 편지 들을 순전히 바울의 것으로 가정한다는 사실이다. 던은
) “글을 쓴 손이 다를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결론짓는다.25 ) 참으 로 나는 두 손이 다르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한다. 즉 많은 사람이 로마서 나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전후서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손과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다. 편지를 어떤 식으로 썼는지, 또 스스로 글 쓰는 데 능숙하지 않았고 ( 갈 6:11 참 고 ) 동료들 및 ( 헬라어 ) 글쓰기와 발음에 더 능숙하고 서신에 신학적으로도 기여 했을 전문 비서를 분명 기용한 바울과 같은 사도에게 “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지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고려할 25 ) Dunn, 35–36. 26 )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Vicit Agnus Noster,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1994), 138n3. 27 ) 따라서 저자임을 판단하기 위한 바울서신의 통계적 비교 연구는 즉시 가치가 감소한다. Campbell, FramingPaul, 286-292를 보라.
때,28 ) 우리는 갈라디아서 자체도 저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비교에서 흔히 가
정되는 방식으로 바울에 의해 기록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비교를 위한 순수한 바울 표본이라는 기초가 훼손된다. 즉 바울에게 귀속된 각 편지에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및 한두 명의 비서, 또 정도는 다양하지만 한 사람 혹 그 이상의 다른 사람들
에 의한 약간의 토론과 초안 및 기고문이다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는 순수한 바울의 편지 이며 골로새서는 순도가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가능성이 훨씬 큰 편은 이 두 편지를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다. 즉 갈라디아서는 중간에 끼어들어 바울을 도와준 비서 한 명 이상과 동역자 한 명 이상의 문체와 문법을 반영 하는 반면, 골로새서는 바울을 도와준 다른 동일 집단의 그것을 반영한다. 바울은 정도는 다르지만 각 중간 집단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된 추론적 이론을 버려야 하는데,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고 또한 바울의 스타일과 신학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고 있 기에 골로새서를 바울이 썼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어떤 편지가 위원회에서 작성되었는데 편지의 저자를 다른 위원회에서 작 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훨씬 큰 다른 편지의 저자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 겠는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일반화를 가정하는 것뿐이다. 그러 나 일반화는 저자 비교라 불리는 게임을 파괴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울 전문가들이 서로를 상대로 벌이는 게임이며, 이들은 호머의 글에 나오는 신들처럼 서로를 알고 인정하는 반면 평범한 인간은 암흑 속에 머무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 나는 바울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후발주 자이지만
(Tübingen: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Secretarie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E. Earle Ellis,
Creator, Christus Salvator,” in Interpreting the New Testament
Introduction to the Art and Science of Exegesis, ed. Darrell L. Bock and B. M. Fanning (Wheaton, IL: Crossway, 2006), 415–417을 보라.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31
29 )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 은 이런 편지 제작 방식은 골로새서에 적용될 뿐 아니라 갈라디아서에도
전자 그룹에 나 자신을 둔다. )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런 정 밀한 분석을 용인하려 하지 않고 바울 책의 저자에 대한 지식을 다 갖춘 척 한다. 간단히 말하면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을 만 28 ) 따라서 이 편지들은 바울이 말한 대로 비서가 단순히 받아쓰기한 것이 아니다. 29 ) 논의는 치열하다. 현재로서는 The Secretary in the Letters of Paul, WUNT 2.42
Mohr Siebeck, 1991); E. Randolph Richards, Paul
Composition, and Collection (Downers
“Colossians 1:12–20: Christus
Text:
큼 증거가 그렇게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이다.30 ) 그렇다면 문체에 근거한 논증은 이 지점에서 발을 헛디딘 것이다.31 )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문체와 신학 관련 논점들은, 이것들이 종종 골로새서와 이른바 진정 바울서신들 사이의 긴장 지점으로 여겨지는 한, 이 또한 서신 내에 전통적 자료가 끼어들어 생긴 것일 수 있다는 점 이다. 오래전 조지 캐넌은 골로새서에서 문체와 신학의 긴장은 종종 바울이 기존 전통을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주장했다.32 ) 알려진 것과 알 려지지 않은 것을 비교하는 오래된 게임을 하고 있는 캐넌은 골로새서 1장
12-15절, 1장 15-20절, 2장 9-15절 및 권면 부분들 ( 예, 3:5-12 ) 에서 전통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문체와 신학적 긴장이 새로운 언어 게임에서 표면으 로 부상하는 특이한 어휘, 문체 및 신학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긴 장은 바울의 진정 서신과 의심스러운 서신과의 긴장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전통과의 긴장으로 설명하는 편이 용이하다. 이 부분 모두가 단순히 바울의 것은 아니며 ( 또는 저자가 누구든지 그의 것은 아니며 ),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저자가 사 용한 전통일 가능성이 크다 ( 그것을 탐지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으로 밝혀질지라도 말 이다 ). 덧붙이고 싶은 것은 “전통”이라는 단어를 확장해 바울의 모든 편지에 서 편지의 최종 제작 행위에 다른 사람들이 기여한 부분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나에게는 골로새서의 저자가 바울임을 옹호할 의무가 없음을 분명히 해 야 할 듯싶다. 여기서 의무라는 말은 신학이나 정경이나 신앙고백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 나는 바울의 목회서신 저자에 대해 강의했다. 당시 나는 원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 그 자체가 인정되고 있거나 논의되 는 것보다 훨씬 논쟁적인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고, 기본적으로 그때 위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판단 한다는 논리를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지켜보았다. 나의 논의는 알려지지 않 은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려진 쪽에 있다.
30 ) Wilson, “Achievement,” 50–51.
31 ) 예를 들어 John F. Balchin, “Colossians 1:15–20: An Early Christian Hymn? The Arguments from Style,” VE 15 (1985): 66이 관찰한 바와 같다.
32 ) George E. Cannon, The Use of Traditional Materials in Colossians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 1983). 레지스터 프로필(register profile)을 기반으로 한 스타일에 대한 최근 연구는 Andrew W. Pitts, “Style and Pseudonymity in Pauline Scholarship: A Register Based Configuration,” in Paul and Pseudepigraphy, ed. Stanley Porter and Gregory P. Fewster, Pauline Studies 8 (Leiden: Brill, 2013), 113–152.
골로새서 32
따라서 이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누가 그 편지를 썼는가? 바울이 실제로 이 편지를 썼는가? 일부는 “그렇다”라고 하지만,33 ) 약간 많은 사람은 “아 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부정하는 자들은 종종 고대 위서에 대한 지적 논의를 포함시킨다.34 ) 로이 예이츠는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을 판단하는 논리를 구사하면서 “골로새서는 진정한 바울서신이라
는 네모난 구멍에 억지로 끼워 넣을 수 없는 둥근 못과 같다”라고 말 한다.35 ) 이 편지의 저자는 실제로 디모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36 ) 동 일한 논리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편지가 바울 시대에 기록되었든, 바울 이후에 기록되었든, 아니면 당대의 대안적 제도인 학파에 의해 기록되 었든, 바울 학파에 대한 미묘한 토론과 논쟁에 대해서도 논리에 대한 동일 한 관찰을 말할 수 있다.37 ) 이른바 진정한 바울서신 목록 (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빌립보 서, 빌레몬서 ) 자체가 바울에 의해 형성되고 틀이 잡힌 것이 아님을 인정함으 로써 달성된 방향은 어휘와 문체에 대한 질문들을 필연적으로 재구성하는
33 ) 예, Moule, 13–14; Bruce, 28–33; Harris, 3–4; Barth and Blanke, 114–126; Thurston, 4–6; Bird, 4–9; Moo, 28–41; Pao, 20–23; Gupta, 3–10. Campbell, Framing Paul, 260–309도 보라. 옥중서신의 바울 저작설을 옹호하는 최근 동향은 Ian K. Smith, “The Later Pauline Letters: Ephesians, Philippians, Colossians, and Philemon,” in AllThingstoAllCultures:Paulamong Jews,Greeks,and Romans, ed. Mark Harding and Alanna Nobbs (Grand Rapids: Eerdmans, 2013), 303–308을 보라.
34 ) 이 편지를 바울 주변의 그룹들과 연결하는 뉘앙스는 다양하지만 그 그룹은 그의 생애와 관련 이 있든가 아니면 그의 죽음 직후와 관련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Lohse, 18081; Schweizer (디모데가 이끄는 그룹) 15-24; Gnilka, 19-26; Pokorný , 3-10; Luz, 18490; Lincoln, 577-83; Dunn (디모데가 이끄는 그룹), 35-39; MacDonald, 6-9; Sumney, 1-9; Wilson, 9-19; Bormann, 6-9를 보라. Ulrich Huttner, Early Christianity in the Lycus Valley, trans. David Green, Ancient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85 (Leiden: Brill, 2013), 110–117도 보라. 자세한 논의는 Stanley Porter and Gregory P. Fewster, eds., Paul and Pseudepigraphy, Pauline Studies 8 (Leiden: Brill, 2013)을 보라. 특히 Armin D. Baum, “Authorship and Pseudepigraphy in Early Christian Literature: A Translation of the Most Important Source Texts and an Annotated Bibliography,” in Stanley Porter and Gregory P. Fewster, PaulandPseudepigraphy, 11–63을 보라.
35 ) Roy Yates, “A Reappraisal of Colossians,” ITQ 58 (1992): 96.
36 ) Allan R. Bevere, Sharing in the Inheritance: Identity and the Moral Life in Colossians, JSNTSup 226 (London: Sheffield Academic Press, 2003), 54–59.
37 ) Hans Conzelmann, “Die Schule des Paulus,” in TheologiaCrucis,SignumCrucis:Festschrift fur Erich Dinkler, ed. Carl Andresen and Gunter Klein (Tubingen: Mohr Siebeck, 1979), 85–96; Peter Muller, AnfangederPaulusschule:DargestelltamZweitenThessalonicherbrief und am Kolosserbrief, ATANT 74 (Zurich: Theologischer, 1988); Richard S. Ascough, The Formation of Pauline Churches (New York: Paulist Press, 1998); Angela Standhartinger, “Colossians and the Pauline School,” NTS 50 (2004): 572–593.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33
것이다. 확실히, 골로새서에는 이른바 진정한 바울서신에서 발견되지 않는 용어가 거의 90개에 달한다. 하지만 진정한 바울서신의 하나인 빌립보서에 다른 진정한 바울서신에서 발견되지 않는 용어가 거의 80개가 나타난다는 점을 일단 인식하게 되면, 숫자를 기준으로 하는 주장은 다시 한번 요동 친다. 그러나 우리가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를 더 세게 밀어붙인다면, 우리는 어휘에 근거한 주장과 문체에 근거한 주장 모두 를 포기해야 한다. 이른바 진정 서신을 순전히 바울의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면, 지금까지의 비교 논리는 치명적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심각한 타 격을 받는다.38 ) 그래서 우리는 주장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렇다. 골로새서의 어휘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어휘와 다르다. 그렇다. 문체 또한 서로 다 르다. 특히 골로새서가 풍부한 속격 ( 예, 1:27; 2:2 ) 과 전례적으로 더욱 민감한 표현 ( 1:15-20 ) 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39 ) 어떤 이들은 이 주제를 다음 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바울 자신의 발전으로 이런 변화의 일 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주제에 호소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오로지 사람들이 이른바 진정 서신에 서 순수한 바울을 너무 많이 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편지들이 골로새서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작가나 동역자들과 함께 제작한 것 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문체 문제는 대부분 해소되는데, 그것이 확실하기 때 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과와 사과를 비교하지 않고 먼저 딴 오렌지와 잘 익 은 바나나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골로새서의 저자임을 반대하는 가장 실질적 논거는 아마 이런 사 고 흐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알려진 것과 알려 지지 않은 것의 논리라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 즉 가정된
유사점에
the New Testament, trans. Kendrick
2:127-142. 요약은 Barth and Blanke, 114-115를
York: Charles
골로새서 34
진정한 바울서신 들과 비교해 본 골로새서의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40 ) 골로새서는 바울의 진정 서신의 마지막인가 아니면 제2 바울서신의 시작인가? 이 두 38 ) 또한 골로새서에는 초기 교회의 알려진 모든 문헌과 비교할 때 다른 누구보다도 바울의 것으로 들리는 어휘와 문체가 다수 존재한다는 점도 관찰되어야 한다. 이른바 진정한 바울서신과 골로새 서의
대해서는 Lohse, 84-91의 광범위한 보론을 보라. 로제는 고된 분석 작업 끝에 어 휘와 문체가 결정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39 ) 문체 문제에 대한 좋은 개요는 Barclay, 29-33을 보라. 40 ) 불트만 및 초기 기독교의 발전에 대한 그의 인식과 관련된 개신교-루터교-독일 학파에서 가 장 대담하게 진술된다. Rudolf Bultmann, Theology of
Grobel, 2 vols. (New
Scribner’s, 1951-55),
보라.
가지 입장을 구분하는 일은 미묘하고 거의 직관적인 식별이지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서도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 로의 논리는 증거의 규모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드러낸다. 그러나 전통적 논 쟁의 요점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네 가지 주제 즉 권위,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또는 이런 주제의 발전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명확 하다.41 )
A. 바울의 권위
골로새서에서 바울의 권위는 소위 진정 바울서신에서 바울의 권위를 능가한다. 어디에서 그러한가? 이런 사실은 “믿음”의 언어에 대한 강조 ( 1:23; 2:7 ), 2장 6-7절의 전통 전수, 바울의 사도적 권위의 보편성 ( 1:23-24 ) 에서 찾 아볼 수 있으며, 그 권위는 바울의 명령이나 허락이 있으면 다른 사람, 예컨 대 에바브라 ( 1:7-8; 4:12-13 ) 등에게 이전될 수 있다. 일부 작가는 다른 사람들 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일에 대한 이런 관심은 바울 교회를 온전하게 유지 하기 위해 위서가 취하는 한 가지 생존 책략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42 ) 반 대로, 논쟁의 소지를 줄이는 점들도 관찰할 수 있다. (1) 편지 자체가 교회 를 세운 이가 바울이 아니라 ( 2:1 ) 에바브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43 ) 이 점은 에바브라에 대한 이런 종류의 진술을 인위적이거나 부득이한 것이 아 니라 유기적인 것으로 만든다. (2) 빌립보서도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같은 진술을 한다 ( 빌 2:25-29 ). (3) 사역 초기에 바울 자신이 핵심적 복음 전통을 전수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이른바 진정 서신들; 예, 고전 15:1-8 ). 따라서 전통 을 전수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 전통 보존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후대 전통의 필수 지표가 아니다. 우리가 바울이 소위 진정
주제는
논의된다.
and Blanke, 117-122; Dunn, 36도 보라.
7-8; Sumney, 7-8(그는 바울에 대한 이곳 묘사에서
그의 동역
위해 변증하는 위서 작가(맥도날드의 입장)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논리적으로, 한
논의는 Mark C. Kiley, Colossians as Pseudepigraphy, Biblical Seminar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7)를 보라.
그러나 행 18:23과
바울이
않을 수 없다.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A. 바울의 권위 35
41 ) 각
Moo, 32-36에서
Barth
42 ) MacDonald,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 러나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를 옹호하는 작가(바울이 작가라는 입장) 및 어떤 작가와
자를
자료(골로새서에서 바울이 자기를 변호하고 동역자들을 지지하는 것)가 위서라고 설명하는 것 은 위서임을 증명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더 자세한
4
43 )
19:1을 살펴볼 때
골로새를 둘러보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지
서신들 뒤에만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사도적 권위의 성장에 대한 이런 논쟁 은 다른 각도에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과 그의 동역자 그룹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세운 교회에서 그가 행사하고 있는 강화된 권위를 받 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더 권위 있는 전통을 나타 내는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았겠는가? 사실, 전체적 요지는 도를 넘
은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무 ( Doug Moo ) 는 “따라서 골로새서에는 권위와 관
련해 비평적으로 수용된 일곱 서신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의 발
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조차 없다”라고 결론 내린다.44 ) 나는 바울이 자신
의 고난을 근거로 그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문제에 대한 것을 제외하
면 그의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바울의 다른 곳에서 발견하는 것을 뛰어넘
는 듯한 그 무엇으로서의 바울의 고난 묘사 ( 1:24 ) 에 관한 한 섬니는 이미 빵 을 손에 쥐고 있다.45 )
B. 기독론
골로새서의 기독론은 이전 서신들의 기독론 이해를 능가한다고 주장 된다. 골로새서 1장 15-20절의 유명한 찬가를 잘 읽어 보면, 또한 이 찬가 의 반향 ( 2:2-3, 2:9-10, 또는 2:13-15 ) 에 주목해 보면, 그것이 이른바 진정한 바울 서신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범주와 주제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던이 말했듯이 “그 기독론은……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울서신의 궤적을 따라가는 것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46 )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생명 의 시작이요 모든 피조물의 목표이며 창조주이자 구속주다. 사실, 그리스도 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에 한계가 있다는 점과 이런 주제들이 다른 바울서신 ( 예, 빌 2:5-11 ) 에서도 다소 명백하게 주제로서 암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한편 많은 사람이 골로새서 1장 15절-20절이 찬가 형 식의 초대 교회 전통일
골로새서 36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찬가의 기독론적 주제가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주제는 바울 자신의 사역만큼 이른 시기의 것들이며 바울 자신에 반하는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44 ) Moo, 33. 45 ) Sumney, 7. 46 ) Dunn, 36.
안 될 것이다. 발전과 차이는 분명히 나타나지만,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 는 바울 주변의 동역자들이 ( 물론 편지를 쓰는 현장에서 ) 바울에게 그런 용어를 사
용하라고 압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똑같이 논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는 점과 또한 이런 주제는 아마 바울 자신이 그 자신의 기독론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사실 바울이 이전에 비슷한 생각을 가졌으 나 다른 편지들은 다른 방향을 향했던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는 점
이다. 아래 주석에서 우리는 오늘날 일부 학자들이 골로새서 1장 15-20절
을 찬송이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이 즉석에서 지은 시적 창작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제안에 동의해 고 개를 끄덕이면서, 나 자신은 바울의 동역자들이 그의 작시에 도움을 주었으
리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용어들은 골로새서에 특별한 것이지 만, 여기서 작동하는 신학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기독론 적 주제와 결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휘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창조 와 종말론 주제의 강력한 결합은 바울의 셰마 수정판인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47 ) 더욱이 모든 피조물의 화해라는 로마 서 8장의 주제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C. 교회론
골로새서의 교회론은 범위 면에서 보다 보편적이고 제도적인 반면, “초 기” 바울서신들의 교회론은 특정 지역에 따른 구체적 형태를 띠고 있 었다.48 ) 이처럼 골로새서의 교회론이 일반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문
47 ) Scot McKnight, “Few and Far Between: The Life of a Creed,” in Alan J. Avery-Peck, Craig A. Evans, and Jacob Neusner, Earliest Christianity within the Boundaries of Judaism: Essays in Honor of Bruce Chilton (Leiden: Brill, 2016), 168–186을 보라. 논의는 James D. 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2nd ed. (Philadelphia: Westminster John Knox, 1989), 179–183; Larry W. Hurtado, Lord Jesus Christ: Devotion to Jesus in Earliest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2003), 79–153, esp. 123–126; N. 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vol. 4 of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Minneapolis: Fortress, 2013), 644–709를 보라.
48 ) 이 주제 전반에 대해서는 Margaret Y. MacDonald, The Pauline Churches: A Socio-historical Study of Institutionalization in the Pauline and Deutero-Pauline Writings, SNTSMS 6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을 보라.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C. 교회론 37
헌으로 된 관련 증거도 많다.49 )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창의적 은유처럼 보 였던 보편적 교회가 이제 옥중서신 ( 예, 골로새서, 에베소서 ) 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점은 다른 것이 없는 구별일 수 있으며 오히려 본질적 사고 자체의 다소 유기적이고 불가피한 발전일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가 이 경우에도 너
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마도 바울의 동역자 중 한 명이 몸 이미지를 제안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그것을 발전시켜 나 갔을 것이다. 또 어쩌면 바울이 이전에도 교회를 더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
했지만 그런 생각에 살이 붙을 만큼 그의 사역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바울의 동역자 중 한 사람 ( 디모데? ) 이 “교회”가 보편적 현상이 되어 모든 교회에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매우 분명하게 보이기를 열망했을 수도 있다. 또한 여기에는 목회서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직분들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회중이 은사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 골 3:16 참고 ). 골로새서의 교회론은 에베소서의 그것에 매우 가깝고 목회서신보다 고린도서의 교회론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바울 저작설에 반대하는 이 주장의 일부는 또 다른 고려 사항이다. 즉 골 로새서의 가정 규범은 소위 진정한 바울서신에서 발견되는 것과 다르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골로새서의 가정 규범은 진정한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보다 급진적인 생활 양식에 반해 도리어 전통적인 그리스-로마 생활 방식 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가정 규범은 후기 바울서신 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1세기 후반과 2세기 초반의 기독교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50 ) 즉 만일 우리가 그 규범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학』의 잔재물 중 하나인 전통적인 로마의 도시적 삶의 방식을 보는 규범 읽 기를 수용한다면, 그렇다. 이런 읽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주석에 맡기겠 지만, 지금 독자들이 관찰해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즉 에베소서는 말할 것 도 없고 골로새서는
and Gregory
Fewster, Pauline
Deutero-Pauline
and Pseudepigraphy, ed.
(Leiden: Brill, 2013), 173–195.
골로새서 38
통상적으로 권세에 의해 지배받는 이 세상의 악에 관심 을 두기 때문에 가정 규범들이 그런 세계의 관습을 긍정하고 있다는 개념은 해체되어야 한다. 세상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관습을 단순히 49 ) Paul Trebilco, Self-Designations and Group Identity in the New Testa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164–207; Sigurd Grindheim, “A
Mystery? Ecclesiology in Colossians and Ephesians,” in Paul
Stanley Porter
P.
Studies 8
50 ) MacDonald, 8.
D. 종말론
골로새서의 종말론은 초기의 진정한 바울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종말론에 비해 덜 미래적이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골로새서에서는 실현된 종말론 차원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우리는 다른 바울서신에서보다 미래에
덜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양자택일의 대조가 아 니라 강조의 정도에 속하는 문제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부활은 미래 ( 고전 15장; 고후 5:1-10 ) 에서 세례 ( 골 2:12; 3:1 ) 로 옮겨졌고, 권세들은 이미 패배하고 약 탈당했다 ( 2:15 및 고전 15:24 ). 현재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때로 그 강조가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는데,52 ) 다수 본문에서 미래가 작동 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53 ) 우리는 이미 로마서 6장 4, 13절에서 현 재적 부활에 대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주장에서 “알려진 것에 서 알려지지 않은 것”의 논리를 고려한다면, 나는 골로새서의 종말론이 “순 전한” 바울과의 대조라기보다는 골로새의 상황에서 현저한 목회적 발전을 보여 주는 바울계 그룹의 종말론적 구성일 가능성에 적어도 흥미를 느끼고 있다.
E. 나타나지 않는 다른 주제들
종류의 논리는 또한 칭의와 개인적 응답으로서의 믿음과 같은 소위 순수한 바울의 가르침들이 나타나지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E. 나타나지 않는 다른 주제들 39 긍정할 수 없다.51 ) 그리고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장 규범에서 상급자 또는 상전에게 권고한 것은 로마나 그리스의 관습을 따른 것이 결코 아님을 관찰 했다 ( 특히 귀족을 향한 확고한 헌신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
이런
않는 점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며, 이 서신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그러 나 1:8, 9; 3:16을 보라 ). 로마서에서 죄에 대한 강조점을 읽고 골로새서에 그 언 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일은 존 칼빈의 죄에 대한 논의에서 마릴린 51 ) 이에 대해 나와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으로는 Sumney, 2를 보라. 52 ) Todd D. Still, “Eschatology in Colossians: How Realized Is It?,” NTS 50 (2004): 125–138. 53 ) 예, 1:5, 13, 22–23, 27; 2:5–6, 9, 18–19, 20; 3:1–17, 23–25; 3:25–4:1; 4:5, 12.
로빈슨 ( Marilynne Robinson ) 의 온건한 칼빈주의로 방향을 바꾸는 일과 같다. 칭 의룰 바울 구원론의 중심이 아니라 특정 맥락에 의해 촉발된 주제로 설명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 나처럼 ), 골로새서에 나타나지 않는 주제에 대한 관찰은 여전히 정확하다. 그리고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6-23절에서 유대화 경향에 반대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 마서에서 칭의, 율법, 믿음, 은혜에 대한 그의 “순수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기 때문이다. N. T. 라이트가 그의 책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 Justification ) 에서 특히 인상적으로 지적한 관찰을 사용한다
면,54 ) 우리는 로마서 ( 및 갈라디아서 ) 라는 렌즈를 통해 바울을 자주 읽었다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편지들이 정경 순서에서 앞에 나올 뿐 아니라 연대적으로도 이른 것 이라고 생각하고, 그리하여 그 편지들은 바울의 모든 신학이 들어맞는다고 말하게 되는 중요한 범주가 되었던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55 ) 우리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신학을 처음 접했다면 어땠을까? 라이트는 우리 모두 새 관점의 사상가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논리적 논 증은 여기 도처에서 명백하다. 즉 로마서는 순수한 바울이고 로마서에는 칭 의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골로새서에 칭의에 대한 순수한 바울 주제가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묻는다. 로마서는 그처럼 순전히 바울다운 것인가? 나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는다. 로마서는 바울 신학의 전체가 아니라 진정한 바울계 그룹에서 나온 바울 신학의 한 종류이며, 골로새서는 또 다른 그런 것이다. 다른 서신에서처럼 골로새서에서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성령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56 )
골로새서와 에베소서
모든
골로새서 40
F.
이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간단히 검토해야 할 또 다른 문 54 ) N. T. Wright, Justification:God’sPlanandPaul’sVision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9). 55 ) White, RememberingPaul에서는 이 점을 강조한다. 56 ) 여기서 중요한 저작은 Gordon Fee, God’s Empowering Presence: The Holy Spirit in the Letters of Paul (Peabody, MA: Hendrickson, 1994), 636–657이다.
제가 있는데, 바로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관계다. 많은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한 중요한 연구라고 여기는 것에서, 어니스트 베스트는 H. J. 홀츠만 ( H. J. Holtzmann ) 의 19세기 연구와 관련해, 이 두 편지의 유사성은 어느 방향으로도 설명될 수 있으며, 단 한 가지 길로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57 ) 골로새서가 에베소서를 사용하고 있다고 제안한 이들
이 있는 반면 ( 엡 1:4; 1:6-7; 3:3, 5, 9; 3:7-18; 4:16; 4:22-24; 5:19 ), 홀츠만은 에베소서가 골로새서를 사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곳이 여섯 군데라고 말했다 ( 골 1:1-2, 3, 4, 9; 1:5; 1:25, 29; 2:4, 6-8; 4:5; 4: 6 ) ! 베스트는 다음 네 군데는 어느 쪽으로든 가 능하다고 생각한다.
엡 5:19-20=골 3:16-17
엡 6:5-9=골 3:22-4:1
엡 6:18-20=골 4:2-3
엡 6:21-22=골 4:7-8.
이런 종류의 결론은 몇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 확하다. 즉, 에베소서가 골로새서를 사용했다거나, 골로새서가 에베소서를 사용했다거나, 후대의 위서 저자가 골로새서를 작성하기 위해 에베소서를 사용했다거나, 바울이 아마도 같은 동역자들 ( 골로새서의 경우 디모데 포함 ) 과 대화 하면서 거의 동시에 둘 다 썼고 그렇기에 이런 반복들은 억지로 만든 것이 거나 모방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바르트와 블랑케의 말 을 인용하자면, “거의 같은 시기에, 그러나 다른 상황에 있는 다른 회중에
연설하면서 한 동일 저자가 두 편지를 모두 썼다.”58 )
G. 빌레몬서
서론 I. 저자 문제: 알려진 것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의 논리 G. 빌레몬서 41
게
또한 일반적으로 진정 서신으로 판단되는 빌레몬서 ( 1, 23-24절 ) 와 골로새서 4장 7-17절과의 유사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의도적 속임수나 그와 가까운 것이 있었다고 가정하거나, 아니면 이런 구절은 단지 바울 자 57 ) Ernest Best, “Who Used Whom? The Relationship of Ephesians and Colossians,” NTS 43 (1997): 72–96; Campbell, FramingPaul, 283–286 (의존에 대한 전반적 논평). 58 ) Barth and Blanke, 114, 또한 125-126.
신의 말처럼 들리며 다른 누구도 진정성 있게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그 무엇 과 같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던은 다음과 같이 잘 말했다. “60년이나 61년의 지진으로 골로새가 거의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기억할 때, 그 편 지가 몇 년 후에 골로새에 써서 보낸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확신은 더욱 심 한 타격을 받는다.”59 ) 던 자신은 이 편지가 사실상 “디모데가 이해하거나 해석한 바울의 신학”으로서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60 ) 이는 내가 여 기서 제안하는 결론과 아주 가깝다.61 )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진정한 바울과 골로새서의 “바울”의 차이점으로 종종 제기 되는 것은 바울과 디모데의 해석 차이가 아니라 다른 동역자들이 해석하고 기록한 디모데의 바울과 바울의 차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역방향의 변증법적 결론이다. 즉 바울이 모든 편지 뒤에 있었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에 나는 바울이 어떤 편지 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순수한 바울서신이 없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또는 “진정한” 바울서신도 없으며, 오직 동역자들 그 리고 ( 아마도 ) 전문 서기관들과 나란히 서 있는 바울의 음성이 들려오는 서신 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고린도전 후서만큼 바울적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것이 소위 바울의 의식의 발전을 보여 주는 일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 인지 이제 간단히 짚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62 )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예컨 대 AD 48년에 썼고, 데살로니가전서 ( 및 후서? ) 를 50년대 초반에 썼다면, 그 는 AD 53년에서 57년 사이에 에베소, 마게도냐, 고린도에서부터 연속적으 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쓴 것이 된다.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 로새서, 에베소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후자의 편지 모음은 10년 이상에 걸쳐 바울의 의식이 변화를 겪은 결과로서 상호 연관 된 신학적 표현들의 복합체다.
59 ) Dunn, 37.
60 ) Dunn, 38.
61 ) Schweizer(23-24)도 견해가 같다.
62 ) Rainer Riesner, “Pauline Chronology,” in Stephen Westerholm, The Blackwell Companion to Paul, 23을 보라.
골로새서 42
Colossians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본문과 주석
어떤 이는 교회 역사라 불리는 게임에서 이렇게 늦었는데 왜 주석을 쓰느 냐고 물을지 모른다. 이제는 거의 잊힌 도시인 골로새에 보낸 바울의 편지 는 결국 고대의 것이다. 이것은 고대의 편지일 뿐 아니라, 중요한 모든 점에 대해 끝없는 논쟁이 일었고, 심지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점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쟁이 일었다. 골로새서 자체에 대한 주석이 얼마나 많은지가 그 것을 증명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왜 주석을 읽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겠다. 나는 여러분이 단지 설 교하거나 가르치거나 또는 단순히 어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정보를 얻을 목 적으로 이 책을 읽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공리주의적 목적을 위해서만 주 석을 읽는 것은 ( 강조컨대 ) 비종교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주석책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위해 그것들을 얼핏 읽어 보 지만, 나는 그런 목적만을 위해 이 주석을 쓴 것은 아니다. 이 주석을 쓰는 취지는 실존적 또는 존재론적이다. 내가 골로새서를 읽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며, 모든 독자에게도 이 편 지를 읽는 방향을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으로 바꿔 설정할 것을 ( 그리고 이 주석을 읽을 것을 ) 요청하고 싶다. 내 기도는 여러분과 내가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 하기 위해 읽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쓰고 읽는 목적은 진리에 참여하는 데 있다. 이제 누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놀라운 말을 인용하지 않 을 수 있을까?1 )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판단과 애착에서 어떻게 나타나 든 간에, 다만 스스로 판단할 뿐인 진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진리를 향한 탐구, 즉 사랑을 하거나 사랑을 구하는 것, 진리를 아는 지식, 즉 그것의 현존, 그리고 진리에 대한 믿음, 즉 그것을 향유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최고선이다.
1 ) Francis Bacon, Essays, ed. Michael J. Hawkins, Everyman’s Library (Rutland, VT: Charles E. Tuttle, 1999), 3–4.
골로새서 110
나는 골로새서의 진리가 우리를 진리의 현존으로 이끌고 그 현존 안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쓴다. 베이컨은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이 사 랑으로 움직이고 섭리 안에서 안식하며 진리의 기둥에 의지하게 하는 것이 지상 천국”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리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란 우리의 죄악 된 상태를 통해 빛나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고통,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시간을 잘 견뎌야 하는 고통, 그리고 이 본문이 우리에 게 무엇을 알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도록 해야 하는 고통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정신 및 행동의 지도를 변경하는 고통을 요 구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골로새서 앞에 앉을 때마다 이 본문이 내 생각과 삶을 새롭게 빚을 것을 기대한다. 때로 이 본문은 여러분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곳으로 여러분을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인내심을 갖고 겸손하게 경청 하면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마음을 쓰는 데로 우리의 관심이 돌아설 것 이다. 때로 골로새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의미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 것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는 것이 발하는 찬란한 빛을 향해 우리의 세계를 구부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 울이 이 편지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즉,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메시아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 편지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그 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는 간명한 주장으로 이 편지를 시작한다. 이것 이 골로새서 읽기를 시작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다.
111 본문과 주석
인사말(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 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 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2 To God’s holy people in Colossae, the faithful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편지는 고대 세계의 일반 편지보다 길었다. 또한 바울의 편지에는
2 ) 감사,3 ) 본문 등 예상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우리는 바울의 인사말
나오는 “은혜와 평강”이 결국 사도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방식
상기해야 한다.
격식을 갖추기 위해 압 축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좋다.
112 서론(1:1-2:5) A.
바울의
인사,
에
임을
4 ) 이 편지의 서두는 신뢰할 수 있는 인상을 주기 위한 수사학적 의도로 저 2 ) 롬 1:1-7; 고후 1:1-2; 갈 1:1-5; 엡 1:1-2; 빌 1:1-2; 살전 1:1; 살후 1:1-2; 몬 1-3절. 3 ) 골 1:3-8; 롬 1:8-15; 고전 1:4-9; 빌 1:3-11; 살전 1:2-10; 살후 1:3-12; 몬 4-7절. 4 ) 인사말에 사용되는 무관사 명사가 반드시 비한정 명사는 아니다. 인사말의
I
I.서론(1:1-2:5)
A. 인사말(1:1-2)
자와 청중 모두의 두드러진 특징을 확인해 준다.5 ) 또한 편지는 편지 작성 자의 인격적 현존 ( ‘파루시아’ ) 으로서 역할을 했다.6 ) 골로새서는 바울과 디모 데가 함께 썼는데, 이는 편지들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중요한 주제 를 제기한다.7 )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한 단어 설명이 전부다. 우리는 바울이 아이디어를 개관하고, 동료들과 이야기하고, 편지 초안을 작성하
고,8 ) 자기 대신 편지 한 통이나 두 통을 보다 공식적으로 기록할 비서/서기 를 상당한 비용을 들여 고용하고, 그런 다음 편지를 배달할 편지 운반자를 고용하거나 물색하는 모습을 상상해야 한다. 이런 그림은 바울이 아마 자신
의 편지 중 어떤 것도 자기 손으로 쓰지 않았으리라는 것과 그의 각 편지는 이런 과정에 참여한 그의 비서와 동료들의 문법과 문체와 기여를 반영한다 는 것과 편지들의 초안이 집이나 그늘진 나무 아래에서 동료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는 가운데 작성되었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이 시나리오는 두 가 지 사실을 부정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바울이 자신의 편지들을 비 서에게 받아쓰기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과 아마 한 번에 편지를 쓰지는 않 았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모데는 내용에서 이 편지에 기여했고, 그 렇기에 그의 이름이 “그리고”라는 단어 뒤에 온 것이다.9 ) 1절 1세기의 편지는 저자, 받는 사람, 짧은 인사말로 시작되었다.10 ) 전형
5 ) Olbricht, “The Stoicheia and the Rhetoric of Colossians,” 313. 또한 위더링턴의 주석 전체를 보 라. 이 주석은 현재까지 골로새서를 수사학적으로 다룬 주석으로는 가장 뛰어난 것이다.
6 ) Robert W. Funk, “The Apostolic Parousia: Form and Significance,” in Christia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tudies Presented to John Knox, ed. William R. Farmer, C. F. D. Moule, and Richard R. Niebuh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249–268.
7 ) 고전 1:1-16:20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즉 전문 서기관이나 대필 조수 또는 그런 능력이 있는 동역 자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나타내는 고전 1:1(바울과 소스데네)과 16:21(친필로)을 참고하라.
8 ) 불필요한 추측은 피해야 하지만, 초고를 구성한다는 점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Philadelphia: Fortress,
in Greco-Roman Antiquity, LEC 5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Hans-Josef Klauck, Ancient Letters and the New
Stowers,
113
관계에 더욱 흥 미를 불러일으킨다. 9 ) 바울이 권력 공유(power-with)를 믿었거나 권력을 공유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Kathy Ehrensperger, Paul and theDynamicsofPower:CommunicationandInteractionintheEarlyChrist-Movement, LNTS 325 (London: T&T Clark, 2007)를 보라. 여기 인용문이 있다. “따라서 바울과 공동체 사이의 권 력 장악(power-over)은 그들의 비대칭 관계가 변형되고 결국 바울이 많은 형제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를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62). 나는 바울이 디모데와 이 편지를 공유한 데는 이처럼 권력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10 ) 예를 들어, 대략 바울과 동시대 사람인 로마 웅변가 키케로는 자신의 이름으로 시작해 그가 편 지를 보낸 사람(들)이 바로 이어지는 식으로 매번 편지를 썼다. Cicero, Letters to Friends, LCL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205, 216, 230을 보라. 편지 쓰기와 바울에 대 해서는 John L. White, Light from Ancient Letters, Foundations and Facets
1986); Stanley K.
Letter Writing
적 인사의 좋은 예는 사도행전 15장 23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11 )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바울의 경우 “바울”이라는 이름이 그의 선교사 이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로마 시민은 두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고, 바울의 이름은 “사울”과 “바울”이었음이 분명 하다. 전자는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후자는 히브리어처럼 들리는 로마 식 이름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이방인 선교를 시작할 때까
지 사울이었고 ( 13:9 ), 이때 그의 이름은 바울로 바뀌었다. 바울은 자신을 결
코 사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현재 로마 세계에서 이방인의
선교사이기 때문에 로마식으로 이름을 바꿨을 수도 있고 베드로처럼 사도
로서 새 이름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바울은 자신을 (1) 왕 12 ) 예수의 사 도로 묘사하며, 이 사도적 사명은 (2)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소명을 “사도”와 동일시한다.13 ) 예수 자신이 열두 사도를 중심으로 교회의 핵을 형성했고 ( 막 3:13-19; 마 10:2-4; 눅 6:13-16; 행 1:13 ), “사도”라는 용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대인의 ‘샬리아흐’, 즉 “대사”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었다.14 ) 바울 시대에는 “사도”라는 용어가 열두 사도 이 상에 대해 사용되고 있었다.15 ) 따라서 이는 열두 사도를 나타내는 전문용
Testament: A Guide to Content and Exegesis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06); Richards, The Secretary in the Letters of Paul;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을 보라 NewDocs 5:48–57, 7:1–57도 보라. 최근에 Lutz Doering은 그의 Ancient JewishLettersandtheBeginningsofChristianEpistolography, WUNT 298 (Tubingen: Mohr Siebeck, 2012)에서 바울의 편지들은 많은 부분이 유대 편지 전통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인사 말에 대해서는 Judith M. Lieu, “‘Grace to You and Peace’: The Apostolic Greeting,” BJRL 68 (1985): 161–178을 더 보라.
11 ) 행 23:26도 보라.
12 ) N. T. Wright, Kingdom New Testament (New York: HarperOne, 2011)는 “왕 예수”로 번역 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2 주석을 보라.
13 ) 사도에 대해서는 Paul W. Barnett, “Apostle,” DPL 45-51; NIDNTTE 1:365-376; TLNT 1:181194를 보라. 이 용어는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고, 철저 한 학문적 연구서인 Rudolf Schnackenburg, “Apostles before and during Paul’s Time,” in Apostolic History and the Gospel: Biblical and Historical Essays Presented to F. F. Bruce on His Sixtieth Birthday, ed. W. Ward Gasque and Ralph P. Martin (Grand Rapids: Eerdmans, 1970), 287–303 및 C. K. Barrett, “Shaliach and Apostle,” in Donum Gentilicium: New Testament Studies in Honour of David Daube, ed. Ernst Bammel, C. K. Barrett, and W. D. Davies (Oxford: Clarendon Press, 1978), 88–102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14 ) 표준 증거는 훨씬 늦은 m. Ber. 5:5에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는 “[이것은] 사람의 대리인은 [그 사람] 자신과 같다는 원칙에 기초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사는 공식적으로 그를 보낸 사람을 대 표한다. 이 의미는 이미 예수에게서 발견된다(마 10:24-25; 요 13:16). 15 ) 야고보, 바나바, 안드로니고, 유니아, 바울을 더하면 사도는 적어도 17명이다. 행 14:14; 롬 16:7;
골로새서 114
I.서론(1:1-2:5)
A. 인사말(1:1-2)
어 ( 막 3:13-19에서와 같이 ) 나 총칭일 수 있었고 ( 빌 2:25; 고후 8:23 ), 선교사나 교회 개 척자를 가리킬 수도 있었다 ( 롬 16:7; 고후 11:13; 행 14:14; 계 2:2 ). 여자인 유니아는 로 마서 16장 7절에서 이 후자의 의미에서 사도라 불린다. 바울은 열두 사도라 는 본래 의미 ( 고전 15:5-9 ) 와 예언자로 부르신 부르심 차원이라는 제3의 의미 를 결합하는데, 바울이 예수의 파송을 받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이방인의 선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예수의 목격 자 즉 증인 ( 고전 9:1; 행 1:21-22 ) 이라야 하며, 자신을 대표하고 자신을 대신해 말 하라는 사명을 주님에게서 받은 자라야 하며, 기적을 행한 자라야 했다. 바
울은 사도들을 은사 중 가장 높은 순위에 두었다 ( 고전 12:28; 엡 2:20; 4:11 ).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의 사도직이 골로새서 1장 25-27절에서 전개되는 주제인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도가 된다는 것 은 성령이 주신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 고전 15:5-11 및 딤전 2:7: “참되고 신실한 교사” 참고 ). 확실히 사도의 권위는 칭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근원 (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 과 그가 받은 은사의 능력에서 온다 ( 골 1:11, 29 ). 16 )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 한 믿음과 함께 바로 그 부르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대가 나타나는 데 ( 고전 9:1-18; 고후 2:17-3:1; 11-12장 참고 ), 여기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 칭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바울 자신이 세우지 않은 교회인 골로새 교회 ( 에바브라가 세 웠다 ) 를 두고 그가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동역자들에 의 해 세워진 교회를 포함해 이방인 교회를 감독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의 확신을 드러낸다.17 ) 바울은 왕 예수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18 ) 사도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 도”가 메시아로서 예수의 역할이라기보다는 그런 역사적 역할의 냄새를 거 의 풍기지 않는 두 번째 이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근 연구는 바울이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언제나 ‘예슈아’( 예수 ) 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역사적 주장을 결코 포기하
9:5-6; 15:7; 갈 1:19; 2:7-9를 보라.
16 ) 또 살전 1:5; 롬 1:16; 15:19; 고전 1:18, 24; 2:4-5; 4:20; 고후 4:7; 6:7; 12:9, 12; 13:4; 엡 3:7;
1:7-8; 3:5. 권위의
17 ) Dunn, 45가 그렇다.
44-47을 보라.
18 ) 속격 ‘크리스투 예수’(Χριστοῦ Ἰησοῦ)는 소유의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Witherington
ΧΡΙΣΤΟΣ as ‘Messiah’
Christ αmong the Messiahs;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115
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19 )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 고전
딤후
주장으로서의 사도에 대해서는 Dunn,
나는 이를 “~에 의 해 보내심을 받았다”로 번역함으로써 행위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Harris, 8을 보라. 구 체성이 떨어지는 관계의 속격으로 이해하는 Moo, 75; Pao, 47을 보라. 19 ) Ben
III, “Christ,” DPL 97–98; Novenson,
God, 817–836을 보라. 그의 이전 진술은 “
이야기가 예수 이야기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는 이스라엘 이야기와 들어맞으면서 동시에 로마의 명예에 반하는 두 방향으 로 갈린다. 로마인들은 왕 ( ‘렉스’ ) 을 갖는 것을 경멸했기 때문에, 이상주의적 이지만 항상 중앙집권적 개념이었던 공화정으로서의 로마 시대에서부터 율 리우스 카이사르를 거쳐, “왕국”이나 “왕”이 아니라 원수 ( Principate, 모든 진정한
로마 시민을 이끌고 대표하는 진정한 로마 상원의원/시민 한 사람을 상징함 ) 제도를 세운 옥타비
아누스 ( Caesar Augustus )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지도자를 “렉스”( Rex ) 라고
부르는 법이 없었음을 기억하라. 따라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이스라엘이 낙 후된 나라라는 사실이나 그 용어가 로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 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신경 쓰이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예수가 “왕”이고 그가 “왕국”을 세우려 한다는 주장이 제국 전체에 걸쳐 제기되고 있었고, 이 용어는 깊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20 ) “왕”이라는 단어의 밑바닥에 흐 르는 이런 흐름은 과장하기 쉽지만, 예수 곧 메시아에게 사용된 이 용어가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 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의 주장은 반제국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초제 국적 비판이었다. 왕 예수의 사도가 되어야 하는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받 은 것이며,21 ) 이는 하나님의 섭리로 역사를 이루는 것과 바울에게 하나님 의 목적에 따른 지정된 임무를 맡기는 것, 즉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 로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포함하도록 확장하는 것을 뜻 한다.22 ) 바울이 이방인을 포함한 것은 이스라엘을 대체하기 위함이 아
in Paul: Philemon 6,” in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3), 41–55를 보고, 최근 진술은 그의 Kingdom New Testament를 보라. 고유명사인 이름에는 종종 관사가 붙지 않으며, 이는 관사가 붙지 않은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가 개인 이름이라는 주장의 논거로 가끔 사용된다. BDF §260.1을 보라. 고 유명사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Pokorný, 35를 보라. Barth and Blanke, 137은 “그리스도”는
미묘한 차이는 Dunn, 45-46; Moo, 75; Bird, 33-34를 보라. 나는 McKnight, Jesus and His Death, 6068, 161-171, 207-224에서 “그리스도” 및 그것과 종, 십자가, 속죄의 관계를 고찰한 바 있다. 20 ) C. Kavin Rowe, World Upside Down: Reading Acts in the Graeco-Roman A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91–137에서 한 가지 중요한 논의를 보라. 21 ) 전치사구 ‘디아
골로새서 116
이름이자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확언이 갖는
델레마토스 데우’(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는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 )를 수식 한다. ‘델레마’(θέλημα)에 대해서는 BDAG 447을 보라.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인 것일 수 있으며, 이는 1:9와 4:12에서도 볼 수 있다. 22 ) 바울의 머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야기는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75–196, 538–569; McKnight, The King Jesus Gospel, 148–153에 대강 그려져 있다. Arland J.
I.서론(1:1-2:5)
A. 인사말(1:1-2)
니라 ( 그런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 이스라엘을 확장하기 위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 자신이 사용한 이미지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접붙여진 나무줄기라는 것이다 ( 롬 11:11-24 ). 바울은 그가 종종 “신비”라고 부르는 자신 의 임무가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해한다 ( 골 1:24-27 ). 바울은 4장 18절에서 자신이 이 편지를 전부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 디모데가 공동 저자이거나 기여 저자일 가능성이 크다.23 )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가까운 동역자, 동료이며, 비록 항상 뒤에 서 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24 ) 디모데의 아버지는 이방인
이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로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개종해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디모데는 그곳 에서 바울이 돌에 맞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신자였고,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서 그와 “함께”할 사람으로 디모데를 택 했으며 디모데는 안수를 통해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 바울은 디모데 의 “신분”을 알맞게 하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으며, 바울이 아 덴으로 여행할 때 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베레아에 머물다가 아덴에서 바울 과 합류했다. 또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후에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 그 일부 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대한 것이었다. 디모데라는 이
Hultgren, “Paul’s Christology and His Mission to the Gentiles,” in Burke and Rosner, Paul as Missionary, 115–127도 보라. 23 ) Barth and Blanke, 142–144; Thurston, 10–11을 보라. 디모데가 골로새서를 바울과 함께 썼다 는 견해는 Pokorný, 33; Dunn(디모데가 바울보다 이 편지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47; Pao(비서), 48; Moo(공동 사역자이지만 디모데와 골로새의 관계에 대한 증거는 없다 함), 76을 보라. 톰프슨은 또한 “공동 발신자”에 대해 말한다(14). 공동 저자로서 디모데가 기여한 부 분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발췌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울은 1:28-29에서 자신을 언 급할 때 명시적으로 1인칭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도 포함할 수 있음을 나 타낸다. 자세한 내용은 1:3 주석을 보라. 이 주제와 다른 사람들을 저자에 포함하는 문제에 대해 서는 매우 중요한 연구인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을 보라. 기여 저자로 서 디모데에 대해서는 살전 1:1; 살후 1:1; 고후 1:1; 몬 1절을 보라. 엡 1:1에 주목하라. 다만 빌
1:1을 다시 보라. 따라서 디모데는 목회서신 앞의 열 통의 편지 중 여섯 통에
117
관여한 것이 된다. 다른 두 통의 편지는 디모데에게 보내진 것으로 알려진다(디모데전서와 후서). 갈라디아서와 로 마서에는 인사말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1절에는 실라가 나 타나고 고전 1:1에는 소스데네가 나타난다. 나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을 때 편지의 작성 에 관여했다고 추론하고자 한다. 공동 저자로서 디모데는 “기여” 저자이지만 바울의 1인칭 언급 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주 저자는 아니다. 골 1:1-9, 28; 4:3 및 고린도후서의 중심 부분(예, 고후 2:12-13; 7:8-12)이 그렇다. 24 ) 디모데에 대하여는 F. F. Bruce, The Pauline Circle (Milton Keynes: Paternoster, 1985), 29–34; Bruce J. Malina, Timothy: Paul’s Closest Associate, Paul’s Social Network: Brothers and Sisters in Faith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08)를 보라.
름이 그가 쓴 책의 제목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디모데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는 일을 도왔고, 고린도 복음화를 도왔으며, 고린도후서 또 어쩌면 로마서를 쓰는 일도 도왔을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는 루스드라의 대표자로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고,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빌립보서를 쓰는 일을 도왔다. 나중에 바 울이 그를 빌립보로 보냈을 수도 있는데, 그는 에베소에 머물다가 마침내는 겨울에 로마 ( ? ) 에서 바울을 만나라는 권면을 받았다. 또한 디모데는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25 )
바울이 골로새서 1장 1절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부를 때 이런 모든 우정과 사역이 작용하고 있다.26 ) 여기서 “형제”라는 용어는 복음의 동역자뿐 아니라 가족 된 교회 안에서 맺어진 영적 또는 가상의 친족 관계 를 나타내지만,27 )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 고 전 4:17; 빌 2:19-23 ). 여기서 우리는 위계가 아니라 복음을 향한 서로의 부르심 속에서 협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디 모데를 바울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2절 바울과 디모데의 편지는 “골로새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지만, NIV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계속된다. 정관사가 하나뿐이고 ( “거룩한 백성”에만 붙어 있음 ) 이 정관사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서 거룩하고 신실한 형제자매들에게”( CEB ) 로 번역하는 편이 더 정확하며,
25 ) 행 16:1–3; 17:14–16; 18:5; 19:22; 20:4; 살전 1:1; 3:1–6; 살후 1:1; 고전 4:17; 16:10–11; 고후 1:1, 19; 롬 16:21; 골 1:1; 몬 1; 빌 1:1; 2:19, 23; 딤전 1:3, 18; 4:12, 14; 딤후 1:5–6; 3:10–11, 15; 4:13, 21; 히 13:23을 보라.
26 ) 헬라어에는 “우리”라는 복수형은 나타나지 않고, 단지 관사가 있을 뿐이다. 이 관사는 NIV에서 우리 모두의 형제를 나타내는 것으로 번역된다. 나는 이 관사를 “우리의” 대신 “나의”로 이해하 고자 한다. 27 ) Joseph H. Hellerman, The Ancient Church as Family (Minneapolis: Fortress, 2001) 및 Joseph H. Hellerman, When the Church Was a Family: Recapturing Jesus’ Vision for Authentic Christian Community (Nashville: B&H Academic, 2009); Reidar Aasgaard,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Christian Siblingship in Paul, JSNTSup 265 (London: T&T Clark, 2004). 가상의 친족 관계에 대해서는 Dunn, 47-48; Thompson, 14-17; Sumney, 26, 28을 보라. 바울의 동역자에는 우르바노(롬 16:9), 디모데(롬 16:21; 살전 3:2), 아볼로(고전 3:56), 디도(고후 8:23), 에바브로디도(빌 2:25),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빌 4:2-3), 빌레몬(몬 1절),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몬 24절)이 포함된다. E. Earle Ellis는 “Paul and His Coworkers,” in ProphecyandHermeneuticinEarlyChristianity:NewTestamentEssays (Grand Rapids: Eerdmans, 1978), 13–22에서 ‘아델포이’(ἀδελφοί)가 동역자의 사역을 나타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Moo, 76n15는 이 견해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한다.
골로새서 118
I.서론(1:1-2:5)
A. 인사말(1:1-2)
나아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자매들에 게”라고 하는 편이 더 좋다.28 ) 골로새에 있는 가정 교회 ( 들 ) 29 ) 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즉 그들은 성도 ( 거룩한 백성 ) 이며, 신실하다.30 ) “성도” 또는 “거룩한 백성” 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분리 개념과 연결되지만, 모울 ( C. F. D. Moule ) 은 이 용어는 “‘헌신한’, ‘하나님 자신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텐데, 이 는 그 구성원이 ‘헌신한 자들’인 구약의 ‘헌신한 백성’이라는 개념을 나타
내기 때문이다”라고 정확히 짚어 말한다.31 ) 거룩함을 “분리”로 정의하는
것은 이 용어가 말하는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며, 사실 그것은 두 번째이 자 덜 중요한 절반만을 말해 준다. “성도”는 하나님에게 헌신한 사람이며 그 헌신으로 말미암아 통상적 ( 세속적 ) 관습에서 분리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사실, 누군가나 무언가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헌신 행위가 아니다. 무언가 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다. 신자 안에 있는 ( 거룩한 ) 영의 임 재와 연결하는 일이 누군가를 “거룩한” 사람이나 “성도”로 만드는 데 필요 한 모든 것이다.32 ) 그러나 “성도”는 특별한 종류의 그리스도인 ( 완전히 헌신한 28 ) 정관사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견해는 Lohse, 7을 보고, 둘 다에 해당된다는 견 해는 Harris, 9를 보라. 나는 ‘하기오이스’(ἁγίοις)를 단순히 ‘아델포이스’(ἀδελφοῖς)를 꾸미는 형 용사 수식어(“거룩한”)가 아닌 명사(“성도들”: Pokorný, 33; Moo, 78; Pao, 48)로 이해한다. Barth and Blanke(139-40)는 “신실한 형제들”이 “성도들”을 설명한다고 이해한다. 29 ) 이에 대해서는 Edwin A. Judge, The Social Pattern of Christian Groups in the First Century (London: Tyndale, 1960); Bruce, The Pauline Circle, 91–100; E. Earle Ellis, Pauline Theology: Ministry and Society (Grand Rapids: Eerdmans, 1989), 139–45; Robert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rev. ed. (Peabody, MA: Hendrickson, 1994), 26–36; Abraham J. Malherbe, Social Aspects of Early Christianity, 2nd ed. (Eugene, OR: Wipf & Stock, 2003), 60–91;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Roger W. Gehring, House Church and Mission: The Importance of Household Structures in Early Christianity (Peabody, MA: Hendrickson, 2004); Carolyn Osiek and Margaret Y. MacDonald, A Woman’s Place: House Churches in Earliest Christianity (Minneapolis: Fortress, 2006); Peter Oakes, Reading Romans in Pompeii: Paul’s Letter at Ground Level (Minneapolis: Fortress, 2009)을 보라. 거의 유일한 견해였던 가정 교회 가설은 최근 Edward Adams, TheEarliestChristianMeetingPlaces:AlmostExclusivelyHouses?, rev. ed. (London: Bloomsbury T&T Clark, 2016)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30 ) BDAG 10-11, 18-19를 보라. 바울은 ‘하기오스’(ἅγιος)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며, 이에는 롬 1:7; 12:1; 15:16, 25; 16:2, 15; 고전 1:2; 엡 1:1, 4, 15, 18; 2:19, 21; 3:8; 4:12가 포함된다. “형 제[와 자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이에는 롬 1:13; 7:1; 16:17; 엡 6:23; 빌 1:12, 14; 3:1이 포함된다.
31 ) Moule, 45. Wilson, 70-71; Gupta, 37; NIDNTTE 1:124-133도 보라. 골로새서를 강조하지는 않 지만 우리 입장에 동조하는 추가 논의는 Maren Bohlen, Sanctorum Communio: Die Christen als“Heilige”beiPaulus, BZNW 183 (Berlin: De Gruyter, 2011)을 보라.
32 ) 곧 나올 나의 논문인 “Saints Re-Formed: The Extension and Expansion of Hagios in Paul”을
119
사람과 덜 헌신한 사람 )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33 ) 이 용어의 구약과 유대교적 맥락은 물건 ( 곡물 ) 이나 가구 ( 등잔대 ) 나 사람 ( 제사
장, 레위인 ) 이나 이스라엘 민족 ( 출 19:6; 시 16:3; 34:9; 단 7:18 ) 34 ) 이나 쿰란 공동체 자 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헌신하고 바쳐지는 것으로, 그런 바쳐짐 때문
에 통상적 용법 ( 식사, 조명, 일상생활 등 ) 에서 제외된다.35 ) 바울 신학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역사와 말씀
의 효과에 의해 거룩한 자가 된다 ( 롬 15:16; 고전 1:2; 6:11; 엡 5:26; 살전 5:23; 딤후 2:21 ).
더욱이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변혁적이며 바울의 명령법들의 기초가
된다 ( 골 3:12 ). 바울은 메시아 공동체가 거룩함을 너무나 확신하기에 누군가
의 배우자나 부모가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고린도전서
7장 14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 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 하니라.” 이런 관점은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배운 바와 완전히 연속적이다. 유대인 자녀가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거룩하게 되었듯이,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 자녀가 믿는 부모에 의해 ( 그리고 아마도 그들이 받은 세례에 의해 ) 거룩해 진다고 말할 수 있다.36 ) 그러나 여기서 “성도”라는 단어에는 더 깊은 해석학적 이야기가 작용하 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 민족 ( 이스라엘 ) 을 택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성도”와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인” 또는 “유다인”이라는 단어는 동의 어가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성도들”( 고전 16:1 ) 이라고 부른다. 이 편지의 “성도”라는 단어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보라. 33 ) Wright, 47. “성도”가 도덕적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지위라는 주장은 충분히 일반 적이지만(Barth and Blanke, 140), 이런 이해는 사도의 기본적인 도덕적 명령법에 어긋난다. “성
된다는 것은 또한 삶에서 “성스럽게” 또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며, 죄를 자각해 고백하 고 회개하고 헌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지위나 도덕의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4)을 보라. 34 ) 거룩함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만물에 앞서 하나님의 완전한 홀로 되 심과 하나님이 영원히 거룩하심을 숙고한다면, 거룩함은 분리라는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레
11:44-45; 19:2; 20:7, 26을 보라. 일반적으로 거룩함은 분리의 관점에서 본다.
이 단어는 쿰란 공동체 도처에서 사용된다. 공동체 규칙(1QS) VIII, 5-6에서 공동체는 스스로를
위한 지성소”로 본다.
고전 7:14 주석들을 보라. 그러므로 여기서 “성도들”은 반드시 개인적 회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계로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는 교회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2:12 주석을 보라.
골로새서 120
도”가
완전한 대안을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좋은 연구서로 David A. deSilva, Transformation:TheHeartofPaul’sGospel
35 )
“아론을
36 )
가족
아래
I.서론(1:1-2:5)
A. 인사말(1:1-2)
있다. 즉 이방인들은 매우 이례적으로 어떻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 이스라 엘 ) 의 일부가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지금 하나님에게 온전히 바쳐 졌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이전에는 거룩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이제는 하 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도”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말했을 때 의
미한 바를 뜻한다.37 ) 골로새 신자는 성도일 뿐 아니라 “신실한 형제자매”이기도 하다.38 ) “신 실한”이라는 단어는 별개의 신뢰 행위 ( 믿는 자, 믿는 ) 39 ) 및 시간에 따른 신 뢰 ( 신실한, 신뢰하는 ) 를 모두 포함한다.40 ) 사실, “신실함”은 골로새서 안에서 각 각의 용례에 대한 의미이며 초기 바울서신에서는 그렇게 많이 발견되지 않 는다. 문맥상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 즉 남자와 여자, 어린 이와 종 모두에게41 ) 편지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는 총칭 명사인 “형 제들”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했다. 이 용어는 가상의 친족 관계, 즉 그들의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종류의 가족을 나타 낸다. 이것은 모든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된 교회에 대해 바울이 좋아하는 용어 중 하나다 ( 3:11 ) 42 ) 골로새에 있는 교회를 정의하는 다른 두 표현이 있다. 즉 그들은 “골로새 안에” 있고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전자는 지리적 ( 그리고 다소 미천 한 ) 위치이고, 후자는 영적, 사회정치적 ( 고귀한 ) 위치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 에”라는 구절은 성도의 신분과 신실한 신분 모두와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미.43 ) 이 표현에 바울 신학이 전부 포함되어 있으 37 ) 아래 1:12 주석도 보라. 38 )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자매”에 나타나는)가 그들의 “신실한/신실 함”(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대상인지, 아니면 영역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석적 논의가 있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Harris, 9도 그렇게 생각한다.
39 ) 믿는: 안디옥 성경; 신실한: Bruce, 39; Wright, 47.
40 ) 1:7; 4:7, 9에서도 그렇다.
41 ) Decker-Lucke, 715의 지적이 도움이 되었다.
42 ) Paul S. Minear, Images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65–172; Banks, Paul’sIdeaofCommunity, 47–57; Hellerman, The Ancient Church as Family; Hellerman, When the Church Was a Family. 더 광범위한 논의는 Scot McKnight, “Ecclesiology,” in The Routledge Companion to Modern Christian Thought, ed. Chad Meister and James K. Beilby (London: Routledge, 2013), 445–456을 보라. 맥도날드는 1:2 주석을 포함해 주석 전반에 걸쳐 교회적 감성을 표면으로 드러낸다.
43 ) “그리스도 안에서” 주제에 관해, 특히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390–401; Mark Seifrid, “In Christ,” DPL 433–436; Campbell, Paul and Union with Christ; Douglas A. Campbell, The Quest for Paul’s Gospel (London: T&T Clark, 2005); Douglas A. Campbell,
121
며,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바로 그 원 안에 칭의 교리까지도 위치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바울에게 돌려진 모든 편지에 이 표현은 83번 나오지만, “주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 스도를 통하여”와 같은 유사한 표현까지 고려하면 이 숫자는 상당히 늘어 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이 표현은 목적격 차원과 주격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목적격 차원을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
고 ( 롬 3:24 ), 영생 ( 6:23 ), 자유 ( 8:2 ), 새로운 피조물의 삶 ( 8:39 ), 은혜 ( 고전 1:4 ), 부 활 생명 ( 15:22 ), 휘장 제거 ( 고후 3:14 ), 화해 ( 5:19 ), 이방인을 교회에 포함하도록 이스라엘을 확장함 ( 갈 3:14; 5:6 ), 새롭게 된 생각 ( 빌 2:5 ), 풍성한 재물 ( 4:19 ) 을 갖 는다. 주격 차원을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 로 여기고 ( 롬 6:11 ), 정죄함이 없으며 ( 8:1 ), 우리는 한 몸 백성이며 ( 12:5; 갈 3:28 ),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수고하며 ( 롬 16:3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 룩해지고 ( 고전 1:2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에 들어가고 ( 고후 5:17 ), 우 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 ( 갈 2:4 ). 즉,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 안 에” 있다 ( 1:22 ). 44 ) 이 표현은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서” 창조되었다는 진술로 확장된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 전체, 즉 그 삶의 근원, 그 삶의 정체성, 그 삶의 책임에 대한 바울의 인 식은 이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45 ) 그러므로 이 표현은 그리스도인이 처하 게 된 시작된 종말론적 실재이며, 한 사람이 발견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현 실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는 신자 안에 거하고 ( 갈 2:19-20 ), 신자는 “그리스 도 안에” 거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바울의 인사말은 헬라식과 유대교식 인사를 결합한 인사라는 해석이 중론 이다. 번역이론가들은 텍스트는 주어진 맥락에서 필요 이상의 의미를 갖지
The Deliverance of God: An Apocalyptic Rereading of Justification in Paul (Grand Rapids: Eerdmans,
주한다(예, Pokorn
,
골로새서 122
2013)을 보라.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그리스도인”과 거의 동의어로 간
ý
34). Barth and Blanke, 140은 고전 1:2 및 8:5에 근거해 “그리스도 안에 서”를 “그리고 메시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으로 번역한다(145-146 참고). 라이트는 30년 동안 이스라엘과 메시아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하며 따라서 메시아는 통합적이며, 그에게 는 교회론과 기독교 윤리에 대한 보다 견고한 기반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Wright, Pauline Perspectives를 보라. 44 ) Dunn은 “주 안에서”와 같은 다른 표현들이 어떻게 유사한 주제를 포함하는지를 강조한다(4950). 45 ) Dunn, TheTheologyofPaultheApostle, 399.
I.서론(1:1-2:5)
A. 인사말(1:1-2)
않는다고 말했다.46 ) 이런 제약은 “은혜와 평화”가 “안녕하세요”에 불과함
을 암시할 수 있다. 그러나 편지 끝에서 바울은 좀 더 평범한 인사말 단어인
‘아스파조마이’를 사용할 것이다 ( 4:10, 12, 14, 15 ). 이 일상용어는 인사말의 “은
혜” 및 “평화”라는 용어와 대조되며 이 편지를 여는 일반적 인사말이 일종 의 기독교 인사 또는 축복으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내는 용어일 수 있다. 그
러나 이 용어가 보통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은 바울
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부터”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이 인사말을 의미
심장하게 바꿔 놓았다는 데 있다.47 )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자신과 디모
데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중재자가 되게 하고, 이 용어들은 더 이상 단
순히 서로에게 건네는 인간의 인사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사말이 된다. 사 실, 이는 “아버지의” 인사말이다.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용어이 자 특별히 민감한 하나님에 대한 신약의 용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 지이며 ( 예, 호 11:1 ), 하나님은 다윗의 아버지이며 ( 삼하 7:14; 시 2:7 ), 예수는 제자들 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친다 ( 마 6:9 ). 사도들은 신자들이 아들과 연합을 통해 아들들로 입양됨을 깨닫도록 교회를 이끈다 ( 갈 4:7; 롬 8:15-17 ) 48 ) 간단히 말해, “은혜”는 가치나 지위에서 합당하지 않은 인간 ( 이방 인, 노예, 골 3:11 참고 ) 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속 사역을 의미하 는데,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성도로 변화되어 감사하고 기여하는 그리 스도의 몸의 일원이 된다.49 ) 반면에 “평화”는 전반적 안녕을 의미하며, 이 에는 물질적 번영 및 이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 된 하나님의
46 ) Eugene A. Nida, “Implications of Contemporary Linguistics for Biblical Scholarship,” JBL 91 (1972): 73–89; Eugene A. Nida and Charles R. Taber,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Leiden: Brill, 2003). 나이다(Nida)는 “어떤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전체 맥락에 가 장 적게 기여하는 것, 달리 말하면 해당 문맥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86).
인사말에 나타난 용어들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학적 인식은 Pokorný, 33-35를 보라. Dunn, 51은 바울의 편지가 다른 유대인 편지보다 두드러지는 이유는 “은혜”(대 “자비”) 때문이라고 말 한다. 골로새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용어로는 Hay, “All the Fullness of God,” 163-179를 보라. 48 ) Thompson, 17. “아버지”는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두고 흔히 사용된다. 신 32:6; 사 63:16; 렘 3:4, 19; 31:9; 호 11:1; 말 1:6을 보라. 그러나 이런 용법이 예수와 초대 교회의 독특성을 부정하 는 것은 아니다. Scot McKnight, A New Vision for Israel: The Teachings of Jesus in National Context (Grand Rapids: Eerdmans, 1999), 49–65를 보라.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Marianne Meye Thompson의 중요한 저작인 The Promise of the Father: Jesus and God in the New Testament (Louisville: Westminster, 2000); Abera M. Mengestu, God as Father in Paul: Kinship Language and Identity Formation in Early Christianity (Eugene, OR: Pickwick, 2013)를 자세히 살펴보라.
49 ) 롬 3:23-24; 엡 2:8-9를 보라. 은혜의 모든 가능성은 Barclay, Paul and the Gift를 보라.
123
47 )
백성의 내적, 관계적 온전함이 포함된다 ( 골 3:15; 참고, 약 3:18 ). 50 ) 일부 사본에는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가 포함되어 있는 데, 그렇게 되면 이 인사말은 대부분의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인사말과 유사 하게 될 것이다 ( 앞의 주 참고 ). 이 사실만으로도 바울이 이 문구를 포함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이중 지시어는 1장 3절의 상응하는 서문을 향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바울의 기도는 은혜와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는 아버지 ( 또는 아버지와 아들 ) 에 의해 주어진다.51 )
B. 감사(1:3-8)
이 편지의 구성을 광범위하게 살펴보면, 또한 다소 놀랍지만 바울이 옆으 로 샌 부분 ( 1:15-20의 찬송처럼 ) 도 따로 떼어 놓지 않으면, 엄밀한 의미의 편지 서문은 1장 3절을 포함하고 그 후 2장 5절까지도 포함한다고 봐야 할 것 이다.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위해 세 단계를 밟 는다고 보는 점에서 라이트와 견해를 함께한다. 즉 그들을 위한 바울의 감 사 ( 1:3-8 ),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 1:9-23 ), 그들을 위한 바울의 사역 ( 1:242:5 ) 이 그것이다.52 ) 바울의 편지는 종종 감사로 시작하며, 이런 감사의 말은 긴 문장, 복잡한 연관 관계 및 논리적 전환으로 종종 주목받기 충분하다.53 ) 빌레몬서의 감
50 ) 평화는 Willard M. Swartley, Covenant of Peace: The Missing Peace in New Testament TheologyandEthics (Grand Rapids: Eerdmans, 2006)를 보라.
51 ) Dunn, 52는 “아버지” 앞에 “우리”가 오는 것을 근거로 여기서 바울이 이방인을 이스라엘에 통합 시켰다고 주장한다.
52 ) Wright, 52. 골로새서의 구조에 대한 접근 방식은 위더링턴(Ben Witherington)이 자신의 골 로새서 주석에서 수행한 고대 수사학을 포함해 매우 많다. 골로새서에 대한 그런 시도 중 하나 는 1:3-12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Jan G. van der Watt, “Colossians 1:3–2 Considered as an Exordium,” JournalofTheologyforSouthernAfrica 57 (1986): 32–42다. 53 ) Lohse, 13. 골 1:3-8은 수직적(paratactic) 사고 진행보다는 일련의 짧고 수평적인 전환과 설 명(hypotactic)으로 구성된다. 감사가 표현되면서(1:3) 감사의 이유인 믿음과 사랑(1:4)이 그 근 거로까지 확장되거나 소망과의 연결로 확장되는데(1:5), 이 소망은 복음에서 비롯되며(1:5), 그 자체에 전환, 확장 및 설명이 담긴 1:6-8로 확장된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에바브라에 대한 약
간의 진술이다. Lohse, 13-14; Barth and Blanke, 147-150; Pao, 45를 보라. 교차대구 구조로 볼 수 있는 배열에 대해서는 Dunn, 54를 보라. 바울서신의 평행 본문들은 살전 1:2-10; 살후 1:312; 고전 1:4-9; 롬 1:8-15; 몬 4-7절; 빌 1:3-11을 보라. 바울서신의 감사들에 대해서는 William G. Doty, Letters in Primitive Christianity, Guides to Biblical Scholarship: New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1973), 31–33을 보라. Lohse, 12–14도 보라. 또 T. Y. Mullins, “The Thanksgivings in Philemon and Colossians,” NTS 30 (1984): 288–293을 보라.
골로새서 124
I.서론(1:1-2:5)
B. 감사(1:3-8)
사는 골로새서의 이 기도와 매우 유사하므로 여기서 인용할 가치가 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주 예수
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
록 역사하느니라.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 4-7절 )
주변 세계와 성경에는 길고 풍부한 감사의 역사가 있으며, 바울의 이런 감사 말은 이에 근거하고 있다.54 ) 감사 말이 있는 비교할 만한 중요한 서신 이 마카베오2서 1장 10-17절에 나타나는데, 여기서 10-12절과 17절을 인 용한다. 예루살렘 사람과 유다 사람과 원로원과 나 유다는,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집안 사람이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선생 인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그리고 애굽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건강을 비노라. 중대한 위험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왕을 대적할 때 우 리 편을 드신 것에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노라……불경하게 행하는 자 들을 심판하신 우리 하나님을 모든 면에서 찬미하노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유대교적 맥락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에 초점을 맞추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항상 ( 말하자면 ) ‘횃대’이며, 그리스 도인의 기도는 이것에서 출발하고 이것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55 ) 이런 감사는 습관적으로 드리는 식전 감사 기도가 아니라, 기도로 표현된 전체 편지의 신학 또는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 찬양이다.56 ) 골로새서에 나타나는 특별한
예,
7:12-13, 15; 22:29;
12:8, 46;
42:4; 50:14, 23; 69:30; 95:2; 100:4; 107:22; 116:17; 147:7;
51:3;
30:19;
2:9. War Scroll (1QM) XV, 5도 보라. 55 ) Moule, 48. 56 ) Wright, 53. 더 자세한 연구는 Fred O. Francis, “The Form and Function of the Opening and Closing Paragraphs of James and 1 John,” ZNW 61 (1970): 110–126; David W. Pao, “Gospel within the Constraints of an Epistolary Form: Pauline Introductory Thanksgivings and Paul’ s Theology of Thanksgiving,” in Paul and the Ancient Letter Form, ed. Stanley Porter and
125
감사는 또한 54 )
레
대상 25:3; 대하 5:13; 33:16; 느
시
사
렘
욘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
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
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
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
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
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 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 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 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 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 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3 We always thank 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en we pray for you, 4 because we have heard of your faith in Christ Jesus and of the love you have for all God’s people—5 the faith and love that spring from the hope stored up for you in heaven and about which you have already heard in the true message of the gospel 6 that has come to you. In the same way, the gospel is bearing fruit and growing throughout the whole world—just as it has been doing among you since the day you heard it and truly understood God’s grace. 7 You learned it from Epaphras, our dear fellow servant, who is a faithful minister of Christ on our behalf, 8 and who also told us of your love in the Spirit.
3절 바울이 “우리”라고 말할 때 그는 디모데를 포함해서 말한다.58 ) 바울
Sean A. Adams, Pauline Studies 6 (Leiden: Brill, 2010)을 보라. 바울 편지의 다양한 형식적 부분들을 비교하기 위한 도구들에 대해서는 Fred O. Francis와 J. Paul Sampley, eds., Pauline Parallels, 2nd ed., Foundations and Facets (Philadelphia: Fortress, 1984); James P. Ware, ed., Synopsis of the Pauline Letters in Greek and English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0)를 보라.
57 ) Olbricht, “Rhetoric of Colossians,” 313–315.
58 ) 서간문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BDF §280; Lohse, 14; Harris, 15; Sumney, 32를 보라. 순수 복 수형에 대해서는 Bruce, 40–41; Witherington, 120; and Pao, 50을 보라. Barth and Blanke, 166-168은 바울이 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는 “나”를 사용한다는 점(예, 1:28-29)과 2:4에서 이른바 서간문의 복수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용하게 지적한다. Lightfoot(231, 골 4:3 주석)은 “성 바울이 ‘서간문의’ 복수형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한다. 복 음 전파 맥락에서 “우리”가 자주 사용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같은 결론을 시사한다(예, 1:3; 4:3). Moo, 82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1:1의 저자에서 디모데를
“항상”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울이 동사를 수식하는 시간 지시어 ‘판토테’(πάντοτε)
골로새서 126 골로새인들과 호의적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며 이는 그들이 편지에서 뒤 따르는 내용을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57 )
제외하고 1:3의 “우리”에는 그를 포 함한다. 현재 시제 ‘유카리스투멘’(εὐχαριστοῦμεν)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관찰한다는 의 미를 자아내거나, 더 정확하게는, 감사하는 바울 자신을 묘사한다. 그것은 “우리는 계속해서 감 사하고 있다”라거나 “우리는 감사를 드리는 중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I.서론(1:1-2:5) B. 감사(1:3-8)
이 다른 편지들에서 단수를 더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로 이런 견해가 확증
된다.59 ) 여기서 감사는 자축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는 일로 말미암아 하 나님을 찬양하는 한 형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여기서 초기 기독교 예배 의 전례60 ) 가 표현된 것으로 본다. 바울의 감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아버지 하나님61 ) ”을 향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수정은 바울의 그 리스도 중심적 사고를 예시한다. 즉 애굽의 종살이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한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하나님은 메시아와 메시아의 백성 ( 교회 ) 의 아버 지다. 바울은 이스라엘 성경의 하나님을 이 새로운 메시아 신앙으로 끌어들 이고 그리스도와 그 영의 실재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틀을 잡 는다.62 ) 바울이 예수에 대해 “주”라는 호칭을 택한 것은 일신교적이며, 반 로마적이라기보다 유대교적이다. 이와 같이 “주”( ‘퀴리오스’ ) 는 이스라엘의 유 일한 하나님 여호와 ( YHWH ) 의 표준 헬라어 번역이다.63 ) 따라서 예수를
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살전 1:2; 빌 1:3; 엡 1:16; Harris, 15 참고). 헬라어 시제를 이해하기 위 한 상 이론(aspectual theory)으로는 다음 두 권의 개론서를 보라(하나는 초급이고 다른 하나는 고급이다). Constantine Campbell, Basics of Verbal Aspect in Biblical Greek (Grand Rapids: Zondervan, 2008); Stanley Porter, Idioms of the Greek New Testament, Biblical Languages: Greek 2 (Sheffield: JSOT Press, 1992). 본질적으로 상 이론은 행위와 시간적 현실의 관계가 아 니라 저자(또는 저자의 관점)에서 묘사된 행위를 검토한다. 현재 상(또는 미완료 상)은 내부에서 부터 행동을 묘사하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래 감사를 드리는지가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을 감사하고 있다고 묘사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주석의 설명에서 캠벨과 논쟁할 생각이 없다. 그 는 특정 맥락에서 어휘소와 결합된 시제를 기반으로 상 이론을 전통적 어휘상(Aktionsart)과 결 합하려고 한다(xxi-xxvii). 나는 시제 자체보다는 시간의 지시적 지표에 주목한다. 골로새서에서 사용된 상 이론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T. R. Hatina, “The Perfect Tense-Form in Colossians: Verbal Aspect, Temporality, and the Challenge of Translation,” in Translating the Bible: Problems and Prospects, ed. Stanley Porter and R. S. Hes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9), 224–252를 보라.
59 ) 롬 1:8; 고전 1:4; 빌 1:3; 몬 4절.
60 ) 고후 1:3; 11:31; 롬 15:6; 몬 3절; 엡 1:3, 17; 벧전 1:3. Pokorný, 37n7; Barth and Blanke, 152도 보라.
61 ) 1:2 주석을 보라. 예상되는 정관사가 없는 점에 대해서는
James Hope Moulton and Nigel Turner, Grammar of New Testament Greek (Edinburgh: T&T Clark, 1963), 3:206; Harris, 15를 보라.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의 순서(“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는 바 울 문학에서 충분히 유동적이기에 여기서 그 순서를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Moo, 82도 보라. 고후 1:3; 11:31; 롬 15:6; 엡 1:3, 17에서 매우 밀접한 평행 본문을 찾아볼 수 있다.
62 )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619–773;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 27–50; Dun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27–50. 예배에 대해서는 Hurtado, Lord Jesus Christ, 134–153; Larry W. Hurtado, How on Earth Did Jesus Become a God? Historical Questions about Earliest Devotion to Jesus (Grand Rapids: Eerdmans, 2005); James D. G. Dunn,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The New Testament Evidenc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10)를 보라.
63 ) C. J. Davis, The Name and Way of the Lord, JSNTSup 129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27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타 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nicnt 지은이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세계적인 강연가, 저자, 교수로 역사적 예수, 초대 교회, 신약 성경 연구에 탁월한 권위를 인정받 고 있다. 그랜드래피즈 침례교 대학(B. A.),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M. A.), 노팅엄 대학교(Ph. D.)에서 공부하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신약학 교수, 노스파크 대학교 종교학 석좌교수를 거 쳐 지금은 노던 신학교 신약학 석좌교수로 있다. 유명 블로그 Jesus Creed를 운영하고 있으며, 『NICNT 빌레몬서』(부흥과개혁사), 『거꾸로 읽는 로마서』, 『목회자 바울』 등을 저술했다. 옮긴이 신윤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 및 성서 학(Th. M., Th. D.)을 전공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등 여러 신학교와 비블리카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쳤다. 역서로 BECNT 『골로새서·빌레 몬서』, NICNT 『빌레몬서』, 『히브리서』, NICOT 『에스겔I』, NAC 『신명기』, 『여호수아』(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 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지만, 주석의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값 38,000원www.rnrbook.com ISBN 978-89-6092-761-2 978-89-6092-457-4(세트)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골로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