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 곧 빌레몬서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인류를 위한 새로운 비전인 교회를 구현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보여 주는 중요한 예다. 바울과 그 주변 사람들은 경계를 허물고 행동과 교제를 위한 새 창조 의 왕국이라는 현실을 확립하기 위해 분투했다. 매우 혼란스러운 글인 빌레 몬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투쟁의 산물이다. 이 짧은 편지에 대한 연구는 종 종 편지의 도덕적 함의에 대한 비교 가능한 조사도 하지 않고 노예제의 현 상학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주석들을 양산했다.1 ) 이 편지에는 오네 시모를 해방하라는 바울의 어떤 명백한 호소도 나타나지 않는다.2 ) 다른 각 도에서 편지에 접근하면 혼란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예제와 노예해방에 대한 편지라기보다는 화해의 메시지를 담은 편지로 빌레몬서에 1 ) 최근의 빌레몬서 연구를 간결하게 개관한 다음 문헌을 보라(각각의 개관은 빌레몬서의 도덕적 문 제를 주시하고 있다). John Byron, Recent Research on Paul and Slavery, Recent Research in Biblical Studies 3 (Sheffield: Phoenix, 2008), 116–137; D. Francois Tolmie, “Tendencies in the Research on the Letter to Philemon since 1980,” in Philemon in Perspective:Interpreting a Pauline Letter, ed. D. Francois Tolmie, BZNW 169 (Berlin: de Gruyter, 2010), 1–28; Demetrius K. Williams, “‘No Longer as a Slave’: Reading the Interpretation History of Paul’ s Epistle to Philemon,” in Onesimus Our Brother: Reading Religion, Race, and Culture in Philemon, ed. Matthew V. Johnson, James A. Noel, and Demetrius K. Williams, Paul in Critical Contexts (Minneapolis: Fortress, 2012), 11–45.
2 ) Perry V. Kea, “Paul’s Letter to Philemon: A Short Analysis of Its Values,” PRSt 23 (1996): 223–232 (225–226). Witherington은 62-64에서 암시의 수사학을 통해 빌레몬서를 읽는다. 그 는 바울이 오네시모의 해방을 원했다고 전적으로 믿는다. 그의 주장은 전적으로 빌레몬에서 작동 하는 일종의 아시아적 수사학을 통해 도출된 추론이다.
19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해가 필요한 사람이 노예 주인 ( 빌레몬 ) 과 노예 ( 오네시모 ) 일 때, 그 화해는 도덕적으로 갑자기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일단 빌레몬서의 화해가 노예제라는 현상에 직면하게 되면 이 편지는 칼 날 위에 서 있다.3 ) 빌레몬서를 연구하는 몇몇 중요 학자들의 몇 가지 결론
을 보면 우리의 요점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마리안 메이 톰슨 ( Marianne Meye
Thompson ) 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현대 독자들에게 제기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신학적 문제는, 비록 고대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만, 복음과 노예제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해 보
인다.4 ) 톰슨은 바울이 “완전히 새로운 복음의 토대 위에서 그들의 관계를 재정의하려고 한다”라고 주장한다.5 ) 바울은 형제 관계에 기초한 새로운 관 계를 구상하고 있지만, 노예인 형제는 여전히 노예이고, 형제인 주인은 여 전히 주인이다. 주인과 노예의 화해에 대한 바울의 말을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이 편지의 해석사를 살펴보면 이 편지의 본질 또는 핵심은 우리를 악 몽에 빠지게 만든다.6 ) 그러므로 로이드 루이스 ( Lloyd A. Lewis ) 가 빌레몬서가 다른 모든 바울의 편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편지의 주제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 단계를 밟는다. “아프리 카계 미국인 독자들이 찾는 것은 [노예제와 관련한] 바로 이 시대의 사회적 상황에 직면해 교회 지도자로서 바울이 복음의 능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에 대한 비전이다.” 그런 다음 루이스는 해석의 힘을 촘촘하게 상기시키는 매듭으로 묶어서 “편지 자체는 체계적 답변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7 ) 길리안 필리-하닉은 더 강력한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바울이나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이 노예제 폐지를 실제로 요구했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고통스럽지만 분명한지 ( 나는 이렇게
Felder, 885; 또한 Michael J. Gorman, Apostle of the Crucified Lord: 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Paul and His Letters,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2016), 454.
Thompson, 198.
Thompson, 199.
Jennifer A. Glancy, Slavery as Moral Problem: In the Early Church and Today, Facet Book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11). 전통주의적 관점은 Murray J. Harris, Slave of Christ: A New Testament Metaphor for Total Devotion to Christ,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8 (Leicester: Apollos/InterVarsity, 1999), 47–68에서 볼 수 있다.
Lewis, 437-438. 비슷한 맥락에서 John M. G. Barclay, “Paul, Philemon and the Dilemma of Christian Slave-Ownership,” NTS 37 (1991): 161–186; Todd D. Still, “Philemon among the Letters of Paul: Theological and Canonical Considerations,” ResQ 47 (2005): 138–139의 통 찰력 있는 연구를 보라.
빌레몬서 20
말해야 할
듯하다 ) 아
닌지는
오늘날까지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들은
우리 3 )
4 )
5 )
6 )
7 )
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증거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도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유지하는 데 완벽하게 만족하면서 평등을 강조 하는 신학 ( 들 ) 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8 ) 디다케 4장 9-11절을 보면 우리는 바울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고통스
러울 정도로 분명한 방향성을 경험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충 고가 그리스도인 아버지에서 그리스도인 노예들의 그리스도인 주인으로 바 뀌는 것을 보게 된다.
너는 네 아들이나 딸에게서 손을 떼지 말고, 어린 시절부터 그들에
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네가 화가 났을 때, 네 남
종이나 여종 ( 그들은 너와 마찬가지로 같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 에게 명을 내려서는 안 되며, 이는 그들이 너와 그들 모두 위에 계신 하나님 경외 하기를 그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명예와는 상관없이 오직 성령이 예비하신 자들을 부르러 오신다. 그리고 너희 종들은 하나님의 상징에 하듯 존경과 두려움으로 너희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9 ) 그렇다면 노예제 문제 자체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빌레몬서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편지를 네 가지 분야에 대한 지속적 관찰 없이 해석하는 미국 특권 지 역 출신의 사람은 누구나 실패한다.10 ) 이 네 분야는 (1) 로마 제국의 노예 제, (2) 신대륙의 노예제, (3) 전 세계에 걸친, 특히 미국인을 위한 현대의 노예제, (4) 20세기와 21세기 신대륙 노예제가 사회 상황에 미치는 영향이 그것이다. 해석자는 노예제와 관련된 성경 전체 본문의 해석을 주시할 필 요가 있는데, 이 본문들이 성경 해석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8 ) Gillian Feeley-Harnik, “Is Historical Anthropology Possible?,” in Humanizing America’s Iconic Book: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ed. Gene M. Tucker and Douglas A. Knight, Biblical Scholarship
America
9 ) Michael W. Holmes, ed., The Apostolic Fathers: Greek Texts
Scholars Press,
English Translations, 3r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10 ) 특권, 백인, 불가시성에 대해서는 Korie L. Edwards, The Elusive Dream: The Power of Race in Interracial Church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8)를 보라.
11 ) J. Albert Harrill, Slaves in the New Testament: Literary, Social, and Moral Dimensions
서론 21
있고 그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11 ) 우리가 이 편지를 성경으로 읽기 원한다면
Centennial Addresses 1980,
in North
6 (Chico, CA:
1982), 95-126 중 102에서 인용한 것이며, 저자는 여기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 를 인용한다.
and
빌레몬서에 내재한 노예제를 인정해야 한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실용적이고 비인격적 이름을 가진 노예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만들도록 노예 소유주를 설득하기 위해 기록되었다.12 ) 나는 바울이 비겁하게도 그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더 세게 밀어붙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 편지의 해석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 에서든 로마의 노예제의 중요성을 깎아내리거나 바울의 편지에서 작동하는 노예제의 현상학을 보지 못하는 해석자들에게는 공감할 수 없다.13 ) 바울의
비전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과 골로새서 3장 11절의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라는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의 독법에서 골로새서는 빌레몬 서와 동시에 또는 그 후에 기록되었다. 이는 바울 ( 또는 적어도 바울주의자 ) 이 모든 노예의 해방을 기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역시 인정해야 한다. 빌레몬서는 로마서나 심지어 골로새서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넬슨 만 델라의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이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버밍엄 시 감 옥에서 온 편지”와 비교해야 한다.14 ) 빌레몬서의 도덕적 신학적 중요성을 밝히고 들어야 할 목소리를 드러내고자 이 편지를 업데이트한다면, 본 편지 는 “에베소 로벤섬의 바울” 또는 바울의 “에베소시 감옥에서 보낸 편지”로 개칭될 수 있다.15 ) 그러면 우리는 바울이 만델라 및 킹과 비교했을 때 얼마
(Minneapolis: Fortress, 2005), 165–192; Mark A. Noll, The Civil War as a Theological Crisis (Chapel Hill: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6); Robert Atkins, “Contextual Interpretation of the Letter to Philemon in the United States,” in Tolmie, Philemon in Perspective, 205–221.
12 ) 주인은 종종 노예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Varro, Latin Language 8.9: “so everyone calls his slave something different after different things, just as he likes” (translation Thomas Wiedemann, ed., Greek and Roman Slavery, rev. ed., Routledge Sourcebooks for the Ancient World [New York: Routledge, 1989], 34)를 보라.
13 ) E.g., Robert McL. Wilson, Colossians and Philemon, ICC (Edinburgh: Bloomsbury T&T Clark, 2014), 327–330.
14 ) Nelson Mandela, Long Walk to Freedom: The Autobiography of Nelson Mandela (London: Abacus, 1994); Martin Luther King Jr., “Letter from Birmingham City Jail,” in A Testament of Hope: The Essential Writings of Martin Luther King, Jr., ed. J. M. Washington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6), 289–302.
15 ) 억제되어
Bieberstein, “Disrupting the Normal Reality of Slavery: A Feminist Reading of the Letter to Philemon,” JSNT 79 (2000): 105–116; Jeremy Punt, “Paul, Power and Philemon. ‘Knowing Your Place’: A Postcolonial Reading,” in Tolmie, Philemon in Perspective, 223–250; Pieter J. J. Botha, “Hierarchy and Obedience: The Legacy of the Letter to Philemon,” in Philemon in Perspective: Interpreting a Pauline Letter, ed. D. Francois Tolmie, BZNW 169 (Berlin: de Gruyter, 2010), 251–271; Matthew V. Johnson, James A. Noel, and Demetrius K. Williams, eds., Onesimus Our Brother: Reading Religion,
빌레몬서 22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일부 사회 실용주의적 해석 및 탈 식민지적 해석에 대해서는 Sabine
나 용감하고 씩씩한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 을 따라 하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고 믿는다. 바울은 투생 루베르튀 르 ( Toussaint Louverture ) 나 프레더릭 더글러스 ( Frederick Douglass ) 는 아니었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투생이나 더글러스는 없었을지도 모른다.16 ) 빌레몬서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자. 진보주의자들은 때로 그 편지가 노예 제를 찬성하고, 도덕적으로 열등하며, 거부되거나 최소한 갱신이 필요하다 고 비난한다. 아니면 그들은 이 편지가 노예해방이나 심지어 노예제 폐지를 향한 1세기의 확고한 단계라고 생각한다.17 ) 보수주의자들은 로마 제국 내 노예제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이 신대륙의 노예제와는 다르다고 통상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도덕적 문제 자체를 회피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 진보주의자들과 같이 ) 그 본문은 의도적 노예해방을 향한 첫 단계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1800년이라는 시간은 노예제 폐지라는 씨앗이 꽃을 피우기에 장구한 시간이라고 반박한다. 나는 그런 보수적인 에드먼드 버크의 의도적 처방 이론은 바울의 의도에 대해 가능성이 가장 적은 설명 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 및 그것과 유사한 화두를 지 중해 세계에 던졌을 때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돌을 던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나도 이에 동의하고자 한다. 또한 그것이 노예해방선언에 이어 지난 세기 세계적인 시민권 운동이나 다양한 형태의 해방신학을 향한 물결 을 일으켰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물결을 의도했다 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결과를 보고 의도를 측정하는 것이 언제나 정확한 방법은 아니다. 미국 출판 이후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의 사랑을 받은 조지 오웰의 우화 『동물 농장』을 지은 사람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그와 동
Race,andCultureinPhilemon, Paul in Critical Contexts (Minneapolis: Fortress, 2012)를 보라. 사회실천적 해석학에 대한 서론은 Anthony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379–470을 보라. 16 ) 이 두 지도자에 대해서는 아래 “신대륙의 노예제와 현대 노예제의 도가니 속 바울”을 보라. 나 는 이 말을 윌버포스(Wilberforce)를 자신의 예로 사용한 Bird, 30에서 옮긴다. 다원주의 사회
교회 윤리에서 공공 부문 윤리로의 이동은
Clark,
자세한 해설은 Thompson, 261–266; Kevin Giles, “The Biblical Argument for Slavery: Can the Bible Mislead? A Case Study in Hermeneutics,” EvQ 66 (1994): 3–17; William J. Webb, Slaves, Women and Homosexuals: Exploring the Hermeneutics of Cultural Analysi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1)에서 찾을 수 있다. 당면한 쟁점은 미래에 대한 그런 비전이 성경과 바울에게 얼마나 깊이 의도적으로 작용 했는가 하는 점이다. 바울은 이 편지나 가정 규범을 노예제 폐지의 첫걸음으로 보았던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서론 23
내
David G. Horrell, Solidarity and Difference: A ContemporaryReadingofPaul’sEthics, 2nd ed. (London: Bloomsbury T&T
2015)을 시작으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17 ) 진보 운동이나 구속 운동 해석학의
등하게 토리당을 증오하는 사회주의 성향의 열렬한 노동당 인물이었다. 어 떤 작가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작가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과 빌레몬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주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나는 사 도 바울이 빌레몬을 설득하려고 ( 아마도 성공적으로 ) 시도하는 편지로 빌레몬의 집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고 믿는다. 그 설득은 오네시모를 해방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여행을 위해 약간의 돈과 물품을 훔친 후 도망친 그를 집으로 맞아 주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바울이 빌레몬에게 원한 것은 정 의를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용서와 배상과 화해의 순환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이 여기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이며, 그것은 노예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 및 자 매 ) 가 되는 동등한 사람 사이의 교제를 말한다. 나는 바울이 무슨 일이 일어 날지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용서받은 형제로서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즉시 이 편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오늘날 이 편지가 우리를 위해 수행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속 한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최우선적 화해의 공간이 되어야 하며, 첫 번째는 교회 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사회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화 해한 사람들로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해를 이룬 사람들이 화해 의 주체가 되는 것은 그들이 다른 방법은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과 사회와 문화에서 부적당하다고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 세상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관점에서 환영받는 곳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다. 공간과 시간에서 화해를 구현하는 곳으로서의 교회는 새로운 삶의 방 식, 즉 그리스도를 닮는 삶의 방식을 낳고 있으며, 이 방식은 그리스도인들 이 사회와 세상에 어떻게 들어가는가에 대한
빌레몬서 24
패러다임이 되어야 한다. 즉, 이 편지는 노예제를 찾아내고, 명명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 안 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기본 규칙으로서 사회적 평등을 확립하 는 삶의 방식을 구현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노예제를 전복하는 주 체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노예제의 두 가지 특징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노예제가 바울의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 리고 지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다. 이것들이 명확해지면 우리는 바울 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왕 예수 아래 새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Philemo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본문과 주석
I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 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 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 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 어다
1 Paul, a prisoner of Christ Jesus, and Timothy our brother, To Philemon our dear friend and fellow worker—2 also to Apphia our sister and Archippus our fel low soldier—and to the church that meets in your home: 3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골로새서 주석에서 일부 설명과 각주를 사용할 것이다.
2 ) Weima, “Paul’s Persuasive Prose,” 30–39.
3 ) 롬 1:1-7; 고후 1:1-2; 갈 1:1-5; 엡 1:1-2; 빌 1:1-2; 살전 1:1; 살후 1:1-2. 4 ) 골 1:3-8; 롬 1:8-15; 고전 1:4-9; 빌 1:3-11; 살전 1:2-10; 살후 1:3-12.
78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1 ) 헬라어로 335단어에 불과한 빌레몬서의 길이는 AD 1세기에 로마, 그리 스, 유대 세계에서 사용된 평균적인 편지 길이와 비슷하다. 바울의 다른 정 경 서신들과 달리 빌레몬서가 덜 신학적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편지는 사도가 목회자와 친구가 되었을 때 신학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인지를 아주 잘 보여 준다. 비록 짤막하고 실용적인 편지이긴 하지만, 빌레몬서에도 바 울서신의 표준적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2 ) 즉 인사나 문안,3 ) 감사,4 ) 그리 1 ) 빌레몬서는 특히 1-7절에서 일부 부분 및 용어들이 골로새서와 너무 많이 겹치므로 적절한 경우 나의
I.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
고 편지 본문5 ) 이 그것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신학적 내용을 떠올
리게 한다. 이 용어들은 독자가 볼 필요가 있는 것 이상을 보도록 유혹하는
데, “은혜와 평화”는 결국 “인사”를 뜻하는 사도의 용어다.6 )
빌레몬서 1-3절은 저자들과 수신인들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 한 것일 뿐 아니라, 뒤에 나올 ( 특히 8-22절 ) 수사학과 내용의 어조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바울이 쓴 다른 어떤 편지에서도 바울 개인의 출현 ( ‘파 루시아’ ) 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이 편지의 공개 낭독에서보다 더 크게 느껴지
않는다.7 ) 만일 오네시모나 두기고가 편지를 낭독하는 자이고 그가
8-22절에 이르렀을 때 바울의 이름으로 빌레몬을 바라보았다면, 그의 눈은
사도 자신의 눈이었다. 또한 편지 자체가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위한 사도 바울의 인격적 현존과 사랑을 표현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바울은 빌레몬 에게 명예롭게 행동하라고 호소하면서 오네시모의 옹호자가 됨으로써 자신 의 사랑을 표현한다.8 ) 5 ) 예를 들어,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바울과 대략 동시대 사람으로, 그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바로 뒤에 오는 수많은 편지를 썼다. 편지 쓰기와 바울에 대해서는 John L. White, Light from Ancient Letters, FF (Philadelphia: Fortress, 1986); Stowers, Letter Writing; Hans-Josef Klauck, Ancient Letters and the New Testament: A Guide to Content and Exegesis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06); E. Randolph Richards, The Secretary in the Letters of Paul, WUNT 2.42 (Tubingen: Mohr Siebeck, 1991); E. Randolph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 Secretaries, Composition and Collec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을 보라. 또한 NewDocs 5:48-57; 7:1-57도 보라. 최근에 바울서신 이 유대 서신의 전통을 반영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Lutz Doering, Ancient Jewish Letters and the Beginnings of Christian Epistolography, WUNT 298 (Tubingen: Mohr Siebeck, 2012)을 보라. 인사말에 대해서는 Judith M. Lieu, “‘Grace to You and Peace’: The Apostolic Greeting,” BJRL 68 (1985): 161-178에서 자세한 내용을 보라.
6 ) 몬 3절과 같은 인사말에서 정관사가 없는 것이 반드시 비한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인사의 형 식 때문에 압축된 것이다.
7 ) Robert W. Funk, “The Apostolic Parousia: Form and Significance,” in Christia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tudies Presented to John Knox, ed. William R. Farmer, C. F. D. Moule, and Richard R. Niebuh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7), 249–268. 이 편지에 서 바울의 존재감은 편지에서 그리고 오네시모 자신을 비롯한 그가 보낸 사절들에서 모두 경험 된다. 참고, Margaret MacDonald, “New Testament Envoys in the Context of Greco-Roman Diplomatic and Epistolary Conventions: The Example of Timothy and Titus,” JBL 111 (1992): 641–662.
8 ) Christopher Kumitz, Der Brief als Medium der ἀγάπη: Eine Untersuchung zur Rhetorischen und Epistolographischen Gestalt des Philemonbriefes, Europäische Hochschulschriften 787 (Frankfurt am Main: Lang, 2004).
79
지는
A. 저자들(1a절)
1a절 편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 바울, 그리고 우리 형제 디모데” 로 시작한다. 이 전형적인 서두는 저자가 두 명임을 나타낸다.9 ) 골로새
서 ( 1:1; 4:18 ) 와 마찬가지로 빌레몬서 ( 1, 19절 ) 의 경우에도 실제로 다른 사람이 파피루스에 이 편지를 썼다.10 ) 우리가 상상해야 하는 모습은 이렇다. 바울 이 일하면서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사람 이 편지 초안을 작성하며, 더 공식적인 기록을 위해 바울이 상당한 비용을 들여 비서나 서기관을 고용하고 자신을 위해 한 통이나 두 통을 보관하고, 편지를 전달할 운반자를 고용하거나 물색하는데, 이 경우에는 아마 두기고 와 오네시모일 것이다 ( 골 4:7-9 ). 바울은 아마 자신의 어떤 편지도 손으로 직 접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각 편지에는 그의 비서와 동료들의 문법과 문체와 그 과정상의 기여가 반영되어 있다. 바울의 편지들은 바울이 동료들 과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 초안이 작성되었다. 바울은 단순히 비서 에게 편지를 받아쓰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한 번에 편지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는 골로새서와 대조적으로, 여기서 바울은 자신 을 “갇힌 자”( prisoner ) 라고 부른다.11 ) 이미 확립된 패턴이 있다면 ( 이것은 부분적 으로 바울 편지들의 연대 추정에 달려 있다 ), “갇힌 자”라는 단어의 사용은 이례적일 것 이다 ( 그러나 롬 1:1; 빌 1:1; 딛 1:1 참고 ) 12 ) 바울은 “위력을 과시하는” 사도적 권위 ( 예, 갈라디아서 ) 에 자신을 고정하지 않는다.13 ) 오히려 바울은 자신의 투옥 상태에 9 ) 행 15:23; 23:26 참고. 10 ) 고전 1:1(바울과 소스데네) 및 16:21(그 자신의 손으로)을 비교하라. 고전 1:1-16:20은 다른 누 군가, 아마도 전문 서기관이나 대필자
L&N 1:485, 486, 55152를 보라.
1, 9, 13절; 엡 3:1; 4:1; 딤후 1:8). 이 용
은유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을 가리킨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Stuhlmacher, 29; Moule, 140; Wilson, 332에 반대한다. 자세한 내용은 Harris, Slave of Christ를 보라. 바울 의 종 은유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Byron, Paul and Slavery, 77-91을 참고하라. 감옥에 있 는 바울에 대해서는 나의 주석인 McKnight, Colossians, 101-105, 골 1:7-8; 4:12 주석을 보라. 빌 1:7, 13, 14, 17; 4:22; 고후 6:5; 11:23과도 비교하라. 감옥에 대한 요약 진술에서 나는 Brian Rapske, The Book of Acts and Paul in Roman Custody, vol. 3 of The Book of Acts in Its First Century Setting (Grand Rapids: Eerdmans, 1994), 9–70, 177–182, 195–422에 의존하 고 있다. Brian Rapske, “Prison, Prisoner”, DNTB, 827-830도 보라. 12 ) 로마서와 디도서 모두 “종”의 지위에 사도 신분을 덧붙인다. 13 ) “위력을 과시하는”(saber-rattling)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Callahan, 23-24를 보라. Weima,
빌레몬서 80
혹은 아마도 그런 기술을 가진 동료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 이다. 11 ) ‘데스미오스’(δέσμιος)에 대해서는 BDAG 219를 보라. 유사한 용어들은
이 용어는 후기 바울서신에서만 발견된다(몬
어가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
저자들(1a절)
동정을 구함과 동시에 메시지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수사적 전략에 의존 한다. 그 결과는 빌레몬이 바울과 비슷하게 순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14 ) 참고로,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감옥은 일반적으로 최종 형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재판 이전에 임시로 수용되는 곳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빌레몬과 다른 사람들은 감옥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바울의 말이 호소력이 있는 것 은 바울이 감금된 상태에 있고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그들 사이에 우정
이라는 유대감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15 ) 혹자는 비슷하게 옥에 갇혀
예수에게 호소하는 세례 요한을 생각하고 ( 마 11:2-3 ), 마찬가지로 혹자는 옥 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는 예수를 생각한다 ( 25:31-46 ) “갇힌 자”라는 용어로 바울이 오네시모의 유사한 한계 상황과 의도적으로 동 일시되는데, 오네시모는 족쇄에 묶이는 굴욕을 충분히 경험했을 것이다. 즉 옥에 “묶여 있는” 자는 빌레몬보다 노예 오네시모에 훨씬 가까운 상황에 있다.16 )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자신에 대해 “노인”( 9절 ), “갇힌 자”( 1, 9, 10절 ), 오네시모의 영적 부모 ( 10절 ), 오네시모의 형제 ( 16절 ), 형제, 동료 복음 사역자, 동반자, 그리고 빌레몬의 미래 손님 ( 1, 6, 17, 22절 ) 이라고 다른 용어들로 표현 한다. 갇힌 자로서 바울은 음식과 물이 필요함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도 움에 의존하고 있다. 최상의 상황에서는 감옥의 관리들에게서 기껏해야 최 소한의 물과 음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쇠사슬에 묶이거나 지하에 갇혀 있 었다면 ( 둘 다 로마 감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 바울은 고통에 시달리고 자연광 을 받지 못한 채 거의 틀림없이 끔찍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다.17 ) 어떤 이들은 여기서 “그리스 도”라는 용어가 메시아로서 예수의 역할과 관련된다기보다는 두 번째 호칭 으로서 메시아로서의 역사적 역할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바울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역사적 주장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결론
고 있다는 보다 강력한 형태의 주장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Chris Frilingos, “‘For My Child,
Onesimus’: Paul and Domestic Power in Philemon,” JBL 119 (2000): 91-104를 보라. 그러므 로 Ernest Best, “Paul’s Apostolic Authority-?”, JSNT 27(1986): 3-25에서 주장되듯이 권위 주 장을 “사도”라는 용어로 제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14 ) 바울의 수사에 대하여는 Witherington, 53-54; Pao, 363을 보라.
15 ) Harris, 244; Fitzmyer, 84; Moo, 380.
16 ) Barth and Blanke, 132; Thompson, 206; Lewis, 439.
17 ) 이 속격이 표현하는 관계는 모호하다. 즉 소유, 인과관계, 목적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관계를 표 현할 수 있다(Harris, 244; Moo, 380 참고).
I.
A.
81
“Paul’s Persuasive Prose,” 33의 비평에 주목하라. 바울이 이 편지에서 자신을 가장으로 주장하
이 내려졌다.18 )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은 동시에 두 방향으로 진 행된다. 즉 메시아로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바꿔 놓고, 동시에 메 시아로서 예수는 로마의 명예를 거스른다. 로마인들은 왕 ( rex ) 을 갖는 것을 경멸했다. 공화정 시대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거쳐 옥타비아누스 ( 카이사 르 아우구스투스 ) —그는 “왕국”이 아니라 원수정 ( Principate, 모든 진정한
로마인들
사악한 의도를 연상시키는 일이
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왕”이며 그가 “왕국”을 가져오고 있다
고 선포했는데, 이런 용어들은 깊은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19 ) 가장 좋은
것은 바울이 “반제국적”이었다고 단언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의 주
장은 반제국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초제국적 비판이었다.20 ) 디모데는 이 편지의 내용에 기여했고,21 ) 그래서 이 편지 서두에 그 이름
18 ) Ben Witherington III, “Christ,” DPL, 97–98; Matthew V. Novenson, Christ among the Messiahs: Christ Language in Paul and Messiah Language in Ancient Juda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2:817–836; Joshua W. Jipp, Christ Is King: Paul’s Royal Ideology (Minneapolis: Fortress, 2015).을 보라. Wright, “ΧΡΙΣΤΟΣ as ‘Messiah’ in Paul: Philemon 6,” in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3), 41–55에서 그의 이전 진술 을 보라. 고유명사에 종종 정관사가 없다는 사실은 정관사가 없는 ‘크리스토스’가 개인 이름이라 는 주장으로 때로 사용된다. BDF §260.1을 보라. 나는 Scot McKnight, Jesus and His Death: Historiography, the Historical Jesus, and Atonement Theory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05), 60–68, 161–171, 207–224.에서 “그리스도” 및 그것과 속죄의 관계를 살펴본 바 있다.
19 ) 중요한 논의로 C. Kavin Rowe, World Upside Down: Reading Acts in the Graeco-Roman Ag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91–137..
20 ) Karl Galinsky, “The Cult of the Roman Emperor: Uniter or Divider?” in Rome and Religion: ACross-DisciplinaryDialogueontheImperialCult, ed. Jeffrey Brodd and Jonathan L. Reed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11), 1–21, and Karl Galinsky, “In the Shadow (or Not) of the Imperial Cult: A Cooperative Agenda,” in Rome and Religion: A CrossDisciplinary Dialogue on the Imperial Cult, in Jeffrey Brodd and Jonathan L. Reed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11), 215–225. 같은 표현이 빌레몬서의 해방 및 바울을 두고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사람(anti-slavery)이라기보다는
참여했다는 주장은 Dunn, 311; Fitzmyer, 8586; Thompson, 207을 보라. 전략적 이유로 그가 추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Lohse, 189; Bruce, 205; Wright, 172; Harris, 244-245; Barth and Blanke, 249-250(그러나 이들은 “형제적 합의”에 대해 말한다[250]), Stuhlmacher, 30; Ryan, 210; Moo, 380-381. 디모데를 편지 저자 에서 제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편지 나머지 부분에 나타나는 일인칭에 호소한다(예, Lohse, 189). 문법적으로 보면 디모데를 공저자에서 제외하기란 어느 정도 불가능하므로,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나” 뒤에는 디모데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주제와 저자로 포함되는 다른 사
빌레몬서 82
로마 시민을 이끌 고 대표하는 한 명의 진정한 로마 원로원/시민을 상징함 ) 을 확립했다—시대까지,
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렉스’라고 부르지 않았다.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 르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겠다는
노예제를 초월한 사람(supra-slavery)이었다. 21 ) 디모데가 빌레몬서에 기여하거나 공동으로 쓰거나
I.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 A. 저자들(1a절)
이 포함되었다.22 )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가까운 동역 자요 동료이며, 비록 항상 뒤에 있지만,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다.23 ) 디모 데에 대한 증거에 최대주의자 관점을 취하면 다음과 같다. 디모데의 아버지 는 이방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로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것이며, 그곳에서 바울이 돌로 맞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신자 였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에서 그와 함께할 사람으로 디모데를 선택했고 디모데는 안수례를 통해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 바울은 디모데의 지 위를 조율하기 위해 그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바울이 아테네로 여행할 때
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베뢰아에 머물다가 아테네에서 바울과 합류했다. 또 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후에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했다. 디모데는 바울이 데살로 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를 쓰는 일을 도왔고, 고린도 복음화를 도왔고, 고린도후서 ( 어쩌면 로마서도 ) 를 쓰는 일을 도왔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교회의 대표자로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 후 바울이 골로새서, 빌레 몬서, 빌립보서를 쓰는 일을 도왔다. 훗날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로 보냈 을 것이다.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다가 결국 겨울에 로마 ( ? ) 에서 바울을 만나자는 권면을 받았다. 또한 디모데는 복음 때문에 투옥되었다가 결국 석 방되었다.24 ) 루이스와 톨킨이 서로에게 그랬듯이, 베트게가 본회퍼에게 그 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연구인 Richards, Paul and First-Century Letter Writing을 보라. 기여자로서 디모데에 대해서는 살전 1:1; 살후 1:1; 고후 1:1; 골 1:1을 보고, 엡 1:1에 주목하라. 그러나 다시 빌 1:1을 보라. 그렇다면 디모데는 목회서신 이전의 편지 열 통 가운데 여섯 통을 손 에 쥔 것이다. 다른 두 통의 편지는 디모데에게 보내진 편지라고 한다(디모데전서와 후서). 갈라 디아서와 로마서에는 인사말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는 각각 실라가 나타나며, 고전 1:1에는 소스데네가 나타난다. 나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을 때 편지 작성에 관여했다고 추론하고자 한다. 공동 저자인 디모데는 바울의 1인칭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기여하는” 사람이지만 주 저자는 아니다. 골 1:1-9, 28; 4:3 및 고린도후서의 중앙 부 분(예, 고후 2:12-13; 7:8-12)도 그렇다. 22 ) 혹자는 때로 바울이 권력을 함께 가져야 한다고 믿었거나 권력을 공유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재구 성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는 Kathy Ehrensperger, Paul and the Dynamics of Power: Communication and Interaction in the Early ChristMovement, LNTS 325 (London: T&T Clark, 2007)를 보라. 중요한 관찰은 이렇다: “따라서 바 울과 공동체들 간의 권력 장악 활동은 그들의 비대칭적 관계가 변화되어 바울이 결국 많은 형제 자매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를 쓸모없게 만드는
Pauline
(Milton Keynes: Paternoster, 1985), 29–34; Bruce J. Malina, Timothy: Paul’s Closest Associate, Paul’s Social Network: Brothers and Sisters in Faith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2008).
24 ) 행 14:19-20; 16:1-3; 17:14-16; 18:5; 19:22; 20:4; 살전 1:1; 3:1-6; 살후 1:1; 고전 4:17;
83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62). 23 ) 디모데에 대하여는 F. F. Bruce, The
Circle
랬듯이, 디모데가 바울에게는 그런 인물이었다. 디모데는 “우리 형제”25 ) 라 불리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맺어진 영적이고 실제적인 친족 관계와 복음의 동역자를 가리키는 용어다.26 ) 더욱이 이 용 어는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특별한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 고전 4:17; 빌 2:19-23 ). 우리는 이 호칭에서 관계의 위계질서가 아니라 서로 복음으로 부름받은 그 부르심 속의 조화를 본다. 이 용어는 편지 전체에 걸쳐 울려 퍼진다 ( 2, 7, 9, 10, 12, 16, 17, 20절 참고 ). 27 )
B. 수신인들(1b-2절)
1b-2절 저자가 복수이듯이 수신인들도 다음과 같이 복수다. “우리의 사 랑하는 친구요 동역자인 빌레몬에게, 또한 우리 자매 압비아와 우리의 동료 병사 아킵보에게, 그리고 네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게.” 헬라어로 수신인들 은 다음과 같이 정연하게 등위 구조를 이루고 있다. 즉 (1) 빌레몬에게, (2) 압비아에게, (3) 아킵보에게, (4) 교회에. 빌레몬은 이 편지에서의 중요성 때문에 먼저 언급된다. “네[남성] 집에서 모이는 교회”는 아마도 빌레몬의 교회일 것이다. 따라서 앞의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NIV는 압비아와 아킵보 를 괄호로 묶어 가정교회를 빌레몬과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신약에서 달리 알려지지 않은 빌레몬28 ) 은 “사랑하는 친구”이자 “동역
16:10-11; 고후 1:1, 19; 11:9; 롬 16:21; 골 1:1; 몬 1절; 빌 1:1; 2:19, 23; 딤전 1:3, 18; 4:12, 14; 딤후 1:5-6; 3:11, 15; 4:13, 21; 히 13:23. 25 )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 복수형이 나타나지 않는다. 헬라어 본문에는 단순 한 정관사(“형제”[“the brother”])가 들어 있다. NIV에서 이 정관사는 우리 모두의 형제를 나 타내는 것으로 번역된다. 나는 그것을 “우리”(our)보다 “내”(my)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델 포이’(ἀδελφοί)가 동역자의 사역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은 E. Earle Ellis, “Paul and His CoWorkers,” in ProphecyandHermeneuticinEarlyChristianity:NewTestamentEssays (Grand Rapids: Eerdmans, 1978), 3–22 (특히 13-22)에서 논의되었다.
26 ) Joseph H. Hellerman, The Ancient Church as Family (Minneapolis: Fortress, 2001); Aasgaard,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일반적으로 이는 “가상적”(fictive) 혈연관 계로 전해지는데, 이 용어가 가장함을 의미하지 않는 한 괜찮다. 이 새로운 친족 관계는 실 제다(Fitzmyer, 85).
27 ) Lewis, “Philemon-Paul-Onesimus Triangle,” 239–246.
흔한 이름이다. BDAG 1057; Lightfoot, 303-307을 보라. 최근 이론으로는 빌레몬의 집이 실제로 로마에 있었다고 한다. Vicky Balabanski, “Where Is Philemon? The Case for a Logical Fallacy in the Correlation of the Data in Philemon and Colossians 1.1–2; 4.7–18,” JSNT 38 (2015): 131–150을 보라.
빌레몬서 84
28 )
I.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
B. 수신인들(1b-2절)
자”다.29 ) 빌레몬은 바울의 회심자였다 ( 19절 ). 이 새로운 관계로 빌레몬의 가
정이 재구성되고 바울은 가장 ( paterfamilias ) 이 된다.30 ) “친애하는 ( 또는 “사랑받 는” ) 친구”라는 사실은 명예심-수치심뿐 아니라 사랑과 우정으로 보답하 는 ( 즉, 오네시모를 바울에게로 되돌려보내는 ) 은혜 문화의 필요성을 낳는다.31 ) 그러므 로 9절은 “나는 사랑을 바탕으로 너에게 호소함을 선호한다”( 개역개정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 라고 말한다. 바울이 빌레몬을 “동역자”라고 불렀으므로 이제 빌레몬은 동역자의 긴 목록에 들어간다. 이 목록에는
,
‘토 아가페토 카이 쉬네르고
συνεργῷ ἡμῶν). 단일한 관사로 두 용어가 결 합하고 마지막 소유대명사는 두 실체 모두에 적용된다(Harris, 245). “사랑하는 친구”(‘토 아가 페토’)에 대해서는 “사랑”에 대한 5절 주석을 보라. 교회와 개인에 모두 사용되는 “사랑하는” 의 다른 용례는, 살전 2:8; 고전 4:17; 10:14; 15:58; 엡 5:1; 6:21; 빌 2:12; 4:1; 딤전 6:2; 딤후 1:2; 특히 또한 골 1:7; 4:7, 9, 14 및 몬 16절을 참고하라. “동역자”와 동료 사역자들에 대해서 는 James D. G. Dunn, BeginningfromJerusalem, vol. 2 of ChristianityintheMaking (Grand Rapids: Eerdmans, 2009), 566–572; Ellis, Prophecy and Hermeneutic, 3–22; Bruce, The Pauline Circle, 81–90; Ehrensperger, PaulandtheDynamicsofPower, 35–62를 보라. 해설 로는 Barth and Blanke, 251-253을 보라. 문법적으로 바울과 디모데를 가리키는 “우리”라는 용 어에서 공유된 가정들과 공동체적 연상들 및 이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상 황은 Mary Ann Getty, “The Theology of Philemon,” in SBL Seminar Papers 1987 (Atlanta: Scholars Press, 1987), 503-508에 개관되어 있다. 30 ) 이제 Frilingos, “For My Child, Onesimus”를 보라. Petersen, Rediscovering Paul, 92-93도 보라. 1세기 로마 제국의 가정에 대해서는 Jane F. Gardner and Thomas Wiedemann, eds., The Roman Household: A Sourcebook (New York: Routledge, 1991); David L. Balch, “Household Codes,” in Greco-Roman Literature and the New Testament: Selected Forms and Genres, ed. David E. Aune (Atlanta: Scholars Press, 1988), 25–50을 보라. 초기 기독교 가정이 새롭 게 이웃으로 확장되는 내용은 Richard Last, “The Neighborhood (vicus) of the Corinthian ekklēsia: Beyond Family-Based Descriptions of the First Urban Christ-Believers,” JSNT 38 (2016): 399–425를 보라. Last의 저서는 Peter Oakes, Reading Romans in Pompeii: Paul’s Letter at Ground Level (Minneapolis: Fortress, 2009)과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하며 이해할 필 요가 있다.
31 )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 (Grand Rapids: Eerdmans, 2015); Bruce W. Longenecker, Remember the Poor: Paul, Poverty, and the Greco-Roman World (Grand Rapids: Eerdmans, 2010); Stephan Joubert, Paul as Benefactor: Reciprocity, Strategy and Theological Reflection in Paul’s Collection, WUNT 2.124 (Tubingen: Mohr Siebeck, 2000); David J. Downs, The Offering of the Gentiles: Paul’s Collection for Jerusalem in Its Chronological, Cultural, and Cultic Contexts, WUNT 2.248 (Tubingen: Mohr Siebeck, 2008) 에서 주의 깊게 검토되었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연구서는 Stephen C. Mott, “The Power of Giving and Receiving: Reciprocity in Hellenistic Benevolence,”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Studies in Honor of Merrill C. Tenney, Presented by His Former Students, ed. Gerald F. Hawthorne (Grand Rapids: Eerdmans, 1975), 60–72다.
85
우르바노와 디모 데 ( 롬 16:9, 21 ), 아볼로 ( 고전 3:9 ), 디도 ( 고후 8:23 ), 에바브로디도 ( 빌 2:25 )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트 ( 빌 4:2-3 ), 디모데 ( 살전 3:2 ),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 빌 24 ) 가 있다. 바울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바울과 함께 다양한 사역 29 )
헤몬’(τῷ ἀγαπητῷ καὶ
을 하고 있는데, 이는 복음화, 가르침, 교회 개척, 행정, 목회, 제자화뿐만 아 니라 손으로 일하고 환대를 베푸는 일을 의미한다.32 ) 그렇다면 빌레몬을 “동역자”라 부르는 것은 빌레몬을 바울의 사역에 연루시키는 것이며 바울 이 여기서 조성하고 있는 수사적 원 안으로 그를 더 깊이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즉 바울은 “네가 동역자라면 내가 오네시모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빌레몬이 노예 주인이라는 데
있다. 그는 오네시모를 소유하고 있으며 오네시모는 그의 권한 아래 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중재자로서 빌레몬을 대하는 것은 그가 노예 주인 이기 때문이다.33 ) 빌레몬서에 관한 사회적 현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노예 제의 적절한 정의를 반복해 본다.
노예제란 정치·경제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집단이 비자발적 노동력
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34 )
노예 소유주로서 빌레몬은 널리 퍼져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며, 문화를 형성하는 노예제에 연루되어 있다. 그는 이런 체계를 유지하는 데 사용되는 권력, 권위, 힘에 연루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노예인 오네시모에 대해 정치 적, 경제적 권력을 갖고 있다. 노예 소유주는 자신의 노예들을 위협하고 통 제하기 위해 두려움이라는 수단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빌레몬이 어느 수준 에서 두려움을 유발하는 행동을 했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힘을 알고 있 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성적으로 이용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우리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수 없지만, 그가 노예시
between Thomas Jefferson
of North Carolina Press,
The
빌레몬서 86
어떻게 오네시모를 얻었는지는 알
장에서
샀거나 빌레몬의 여자 노예가 오네시모를 낳았다고 추 측하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 예를 들어, 우리는 압비아가 여자 노예는 아니었는지, 설령 여자 32 ) 몬 22절; Callahan, 25를 보라. 33 ) 여기서 화해시키는 자로서 바울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고 또 많은 것이 이야기되어 왔다. 최근 한 설교에서 제이 그리너(Jay Greener) 목사는 바울의 화해 사역을 존 아담스와 토머스 제 퍼슨을 화해시키려 했던 벤자민 러쉬(Benjamin Rush)와 아름답게 연결했다. Lester J. Cappon, ed., The Adams-Jefferson Letters: The Complete Correspondence
and Abigail and John Adams (Chapel Hill, NC:
University
1988), 284–286을 보라. 34 ) Bradley, Slaves and Masters, 18.
I. 서론: 저자들, 수신인들, 인사(1-3절)
B. 수신인들(1b-2절)
노예였다 하더라도 빌레몬과 혼인하여 오네시모를 낳은 것인지 혼인 없이 낳아준 것인지 알지 못한다. ) 우리는 빌레몬의 힘이 오네시모가 팔리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충분히 강 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오네시모가 도망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가 두려움에서 도망쳤다고 추론할 수도 있고, 어쩌면 바울의 말 ( 골 3:11이나 갈 3:28 같은 본문; 참고, 고전 12:13 ) 의 결과로 해방을 믿었기 때문에 탈출했을 것 이라고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빌레몬이 오네시모가 도망쳤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여러 곳에 걸어 두고 그를 찾은 사람들에게 보상을 약속
하면서 관리들에게 연락하도록 요청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오네시
모는 자신이 낙인이 찍혀 평생 흉터를 지니고 살거나, 도망쳤기 때문에 목 줄을 걸고 살 수도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35 ) 주인과 노예에 대한 합리적 설 명에서 도출된 이런 일반화나 추론은 단지 그런 것일 뿐이지만, 바울의 이 편지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 잔혹 함, 야만성, 심지어 정도가 덜한 형태의 폭력이 포함되는 것을 피하려면 명 백한 것을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빌레몬이 특이한 주인이었다거나 오네시 모가 선하게 살았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노예제와 오네시모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변화시 켰다는 것은 이 편지에서 가정하거나 추론할 수 없다. 빌레몬이 선하고 친 절한 사람이었다는 건 편지에서 분명하다. 한 가지 가능한 추론은 빌레몬이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오네시모가 다른 곳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했고 오네시모를 형제 로 여기라는 바울의 새로운 지시를 경청할 만큼 충분히 바울을 존경했으리라 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복음 변화의 빛을 보기 시작하지만, 그것이 가정이나 사회에서의 해방으로 이어졌는지는 추측의
준다. Wiedemann, GreekandRomanSlavery, 194 no. 221을 보라. 36 ) U. Wickert, “Der Philemonbrief—rivatbrief oder apostolisches Schreiben?,” ZNW 52 (1961): 230–238. 또한 Fitzmyer, 89–90; Lewis, 440; Pao, 365; Bieberstein, “Disrupting the Normal Reality of Slavery,” 111–112; Weima, “Paul’s Persuasive Prose,” 37–38. 따라서 나는 “2차 참여자들이 본문에 언급은 되어 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는 데이비드 앨런의 주장 에 동의할 수 없다. Allen, “Discourse Structure,” 77-96(여기서는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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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일 뿐 이다. 빌레몬에게 보낸 이 개인적 편지는 단순한 사적 편지가 아니라 공적이면 서 개인적인 편지다. 즉 이 편지는 빌레몬뿐 아니라 압비아, 아킵보, 빌레몬 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함께 보낸 편지다.36 ) 편지를 공개적으로 읽음으 35 ) 예, Petronius, Satyricon 103. 그런 라틴어 비문 중 하나는 머리글자가 있는 노예 목줄을 보여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타 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nicnt 지은이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세계적인 강연가, 저자, 교수로 역사적 예수, 초대 교회, 신약 성경 연구에 탁월한 권위를 인정받 고 있다. 그랜드래피즈 침례교 대학(B. A.),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M. A.), 노팅엄 대학교(Ph. D.)에서 공부하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신약학 교수, 노스파크 대학교 종교학 석좌교수를 거 쳐 지금은 노던 신학교 신약학 석좌교수로 있다. 유명 블로그 Jesus Creed를 운영하고 있으며, 『NICNT 골로새서』(부흥과개혁사), 『거꾸로 읽는 로마서』, 『목회자 바울』 등을 저술했다. 옮긴이 신윤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 및 성서 학(Th. M., Th. D.)을 전공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등 여러 신학교와 비블리카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쳤다. 역서로 BECNT 『골로새서·빌레 몬서』, NICNT 『골로새서』, 『히브리서』, NICOT 『에스겔I』, NAC 『신명기』, 『여호수아』(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 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지만, 주석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값 12,000원www.rnrbook.com ISBN 978-89-6092-762-9 978-89-6092-457-4(세트)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맥나이트 빌레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