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ICNT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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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편집장 서문 │ 7

■ 저자 서문 │ 9

■ 약어 소개 │ 12

서론 17

1. 마가복음 연구의 새 방향 • 21

2. 마가복음과 관련된 전통 • 25

3. 마가복음 저작의 배경 • 31

4. 마가복음의 연대 • 35

5. 마가복음의 저자 • 39

6. 기록 장소 • 42

7. 문체와 문학 방법론에 대한 몇 가지 고찰 • 43

8. 마가복음 분석 • 47

본문과

1장 │ 55

2장│ 107

주석 53

3장 │ 137

4장 │ 167

5장 │ 197

6장 │ 221

7장 │ 265

8장 │ 295

마가복음의 인자 │ 326

9장 │ 341

10장│ 381

11장│ 421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12장 │ 449

13장 │ 481

14장 │ 521

15장 │ 581

16장 │ 619

■ 랍비 문헌에 나타난 회개에 대한 추가 주석 │ 630

■ 마가복음의 보충적 결말에 대한 추가 주석 │ 639

■ 프리어 로기온의 신학에 대한 추가 주석 │ 644

■ 참고문헌 │ 650

목차

┃ 편집장 서문┃

이것은 NICNT의 복음서 중 세 번째 책이다. 고 ( 故 ) 노발 겔덴후이스 ( Norval Geldenhuys ) 가 쓴 누가복음 주석은 오래전 1950년에 이미 출간되었으며, 사

실 그 책은 전체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이었다. 다음 복음서 주석인 레온 모

리스 ( Leon Morris ) 박사의 포괄적인 요한복음 주석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20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 뒤를 바로 이어 본서의 출간을 앞두고 있고, 현재 헤르만 리델보스 ( Herman Ridderbos ) 교수는 사복음서를 완성시킬 마태

복음 주석을 집필하고 있다.

고인이 된 본 시리즈의 총편집자 네드 스톤하우스 ( N. B. Stonehouse ) 박사는

죽기 직전인 1961년에 레인 박사에게 마가복음 주석을 맡도록 권유했다.

스톤하우스 박사의 판단이 얼마나 타당한 것이었는지는 주석 독자가 스스

판단할 수 있다.

레인 박사는 국제적인 신약학 협회의 회원이자 학술지 New Testament Studies의 기고자로 알려져 있다. 덜 전문적인 수준에서 그는 ( 고든 콘웰 신학교

의 두 동료와 함께 ) The New Testament Speaks( New York: Harper & Row, 1969 ) 의 공동 저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주석의 집필은 그에게 학문적, 주석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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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제공했다. 저자 서문에서 그는 주석 의 범위와 성격에 대해 이 시리즈의 대부분의 저자들보다 더 자세히 설명 하는데, 처음에는 그 범위와 성격을 구상하고 그다음에 그것을 결론으로 끌 고 갔다고 말한다. 그가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과제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요인은 주석가의 주요 임무가 “텍스트를 듣는 것”이라

마가복음

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석가는 이 교훈을 배웠을 때만 텍스

트를 다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해설할 수 있다.

마가는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즉 그는 복음서를 썼다. 로

렌스 하우스만 ( Laurence Housman ) 의 말을 빌리면,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인간들의 삶이었던 삶을

펜으로 기록하는 은혜를 처음 찾은 성자.

레인 박사는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가 네로 통치 기간에 로마

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친 위기 상황이었다는 견해로 기울고 있으며 ( 나는

그가 옳다고

첫 독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에게 닥친 불 같은 시련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주님의 말씀과 일치

했으며, 그들은 시련을 겪으면서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나누었다. 십자가 곁의 백부장은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 했다. 그러나 이 진실을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보여 준 것은 십자가의 죽음

이었다.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과 그 후의 사건들에서 보듯, 우리 주님의 정 체성을 말로 인정하는 것은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선언으로 그 내 용이 주어지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때때로 우리는 왜 이 시점에 1901년의 미국 표준역 ( American Standard Version ) 을 NICNT의 기본 본문으로 계속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우 리가 이 번역을 고집하는 주된 이유는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의 번역 스타 일이 다른 목적에는 부적합하더라도 본문의 세부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 울여야 하는 주석의 기초 역할을 하는 데는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F. F.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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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 ) , 반복해서 그 복음서가 얼마나 적절하게 그 삶의 자리를 반영하는지 보여 주고 최초 독자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예수의 경고는

┃ 저자 서문┃

네드 스톤하우스 박사가 내게 표준적 마가복음 주석 집필을 권유한 것은 1961년 가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아직 박사 과정을 마치지 않았고 그 일을

맡는 것이 매우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내가 용기를 내어 이 과제를 받아들 인 것은 오로지 그때까지 나의 멘토였던 스톤하우스 박사와 긴밀히 협력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톤하우스 박사는 자신이 맡은 마태복

음 주석을 집필하면서 마가복음에 대한 상세한 연구에서 표면화되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주석에 대한 생각을 교환하기 위해 정 기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예정된

모임 전에 주님은 자기 종을 부르기를 기뻐하셨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나와 주석은 점차 그리고 함께 성숙해 갔다.

처음부터 나의 확신은 꼭 필요한 주석은 저널 기사와 단행본에서 발견되

는 풍부한 현대의 학문적 성과와 통찰을 반영하는 것이 되어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심층적으로 탐구된 마가복음 본문의 여러 측면이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최종 출판에서 빠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나는 이 방대한 비평적 견해를 검토하고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자료를 만

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복음서 연구, 로마법, 랍비학, 마가복음 연구에

수고한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음은 모든 쪽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논문을 통

해 나의 스승이 된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주석은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연구와 집필에서 본 주석은 몇 가지 목표의 통제를 받았다. (1)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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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을 해석함에 있어서 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충실성을 추 구했다. 나의 바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사실을 마가가 독특

한 증인으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가의 기록과 다른 공관복음

의 조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는 것이 꼭 필요했다.

본 주석은 마가의 독특한 관점을 집중 조명하고 있으며, 마태나 누가의 증

언에 관심을 쏟은 경우는 드물다. 이 중요한 결정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는 확신을 반영한다. 알려진 유일한 복음서가 이 복음서였

던 형성기가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로나 단락들로나 마가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 예수의 사명과 메시지의

특정 측면을 해석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의 역사적, 신학적 해석을 발전시키는 데도 기여할 수 있었다. (2) 이 복음서를 쓰게 한 삶의 자리를 재구성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간격을 메

우기 위해 나는 마가의 동시대인들이 그 본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보여 주

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받는 인상은 두 가지다. 즉 복음서의 자료는 종종 카 리스마 있는 교사의 지원 활동을 예상케 한다는 것과 로마에 있는 독자들

에 대한 마가의 목회적 관심이 복음서의 특별한 강조와 배열을 설명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3) 마가복음 연구를 현대 복음서 연구가 제공하는 준거

틀 안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특히 이런 연구와 상호 소통하고 주어진

입장에 대해 자료로 뒷받침하기 위해 각주를 사용했다. 나는 마가의 독특한

증언을 전체적으로 제시함에 있어 주석의 각주들이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 고 간주한다.

주석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가 본문 및 그 본문이 수 세기 동안 촉발한 논 의에 귀를 기울이는 것임을, 지혜롭게 될 필요가 있는 어린아이로서, 나는 점차적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오류와 진리를 분별하는

때, 나는 그 자료를 주님 앞에 놓고 그의 인도를 구하는 청교

도 주석가들의 관행을 따랐다. 이로써 주석 집필 과정은 복음서 본문을 통

한 지적 순례이자 영적 순례가 되었다. 이 복음서 기자가 기꺼이 나와 함께

나누었던 모든 것에 민감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책임 있는 듣기라는

규율을 통해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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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때때로 부 담스러웠다. 내가 헌신할 준비가 되기 전에 본문이 비평적이거나 신학적인 결정을 요구할
연구 집필 과정에서 격려해 준 많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마가복음 주석을 NICNT에 기고할 것을 권유하면서 나에 대한 신 뢰를 표현해 준 스톤하우스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작업 과정에서

저자 서문

나는 그가 모범을 보여 준 높은 학문 기준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후 임인 총편집자 F. F. 브루스 박사의 격려에 감사한다. 브루스 박사는 내 작 품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준 인내의 본을 보여 주었다. 동료 글렌 바커 ( Glenn W. Barker ) 와 램지 마이클스 ( J. Ramsey Michaels ) 는 초기 몇 장의 초안을 읽고

내 작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조언과 비판에 의존했다. 이 책을 정중히 헌정하는 버튼 고다드 ( Burton L. Goddard ) 박사는 마가복음에 대한 참고문헌이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지속적

으로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고, 연구에 필요한 책을 도서관에 기꺼이 확보해 주었다. 지난 6년 동안 마가복음 강의를 통해 유능한 학생들과 함께 나의

제안을 시험할 수 있었고 그들의 질문과 응답은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를 더욱 날카롭게 해 주었다. 고든 콘웰 신학교의 대학 평의회와 행정부는 1969-70년에 안식년을 허락하여 원고의 주요 부분 초안을 완성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미국 신학대학원 연합회의 교수 보조금 덕에 스웨덴 룬드

로 여행하여 스칸디나비아의 복음서 연구를 접하고 중단 없이 자유롭게 글 을 쓸 수 있었다. 타자를 쳐 준 루실라 헤인즈 부인, 마가렛 앤더슨 부인, 실

비아 로이드 부인이 원고 준비에 신경을 써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많은 친

구가 작품의 진행 상황에 관심을 표했으며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아내 릴리언과 네 아이 빌, 크리스틴, 마크, 데이비드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 이들은 이 책의 완성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

했으며,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사랑과 지원, 이 해가 없었다면 이 작업은 심각하게 지체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이 작업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주셨음을 인정해야겠다. 이 책에 보여 줄 수

있는 어떤 탁월함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종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 덕 이다. 이 주석이 교회를 굳건히 하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

수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 이 책을 내놓는다.

윌리엄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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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마가복음이 사도적 전승을 기록된 형태로 압축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나 타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공관복음 비평은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마태와 누가가 우리의 마가복음과 거의 동일한 문서를 그들 앞에 갖고 있었다는 상세한 증거를 제시했다. 마가복음 우선설에 대한 설득력 있 는 설명은 내용과 순서와 문구와 관련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둘 다

마가복음과 현저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에 있다.1  )

마가복음이 참으로 첫 번째 복음서라면, 이 복음서는 가장 신중하게 고려

할 가치가 있다. 이 복음서 저자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대중 문학의

한 유형을 로마 세계에 소개했다. 복음서의 형식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선교를 위해 행한 선포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처음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기록된 형태로 기억되고 선포되었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초기의 사도적 설교에서 창조적 추진력을 찾은 마가의 증언 문서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문서가 의도한 것

은 공식적인 역사 논문이나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 선포다. 복음서 기자의

의도는 “기쁜 소식 선포의 시작”이라고 의역되는 복음서 첫 구절에서 파악 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메시아 예수의 죽음이라는 위기를 향해 나

아가는 역사적 이야기다. 예수가 직면했던 위기와 다를 바 없는 위기에 직

면한 사람들을 위해 이 복음서가 쓰였다고 믿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1  ) 마가복음 우선설의 증거에 대한 표준 진술은 B. H. Streeter, The Four Gospels (London, 1953), pp. 151-198에서 제시된다. 참고, D.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The Gospels and Acts (Chicago, 1965), pp. 114-211. 이 입장에 대한 최근의 도전에 대해서는 마태

복음 우선설을 주장하는 William R. Farmer, The Synoptic Problem (New York, 1964)과 누가

복음 우선설을 주장하는 R. L. Lindsey, “A Modified Two-Document Theory of the Synoptic Dependence and Interdependence,” Nov Test 6 (1963), pp. 239-26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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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전체에 걸쳐서 마가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 시아라는 계시의 말씀이다 ( 1:1 ) . 복음서의 첫 구절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 조를 결정한다. 문서 전반부에서 마가의 증언은 베드로가 빌립보 가이사랴

에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 8:29 ) . 이전의 모든

것은 이 고백의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이다. 예수가 예루살렘과 수난을 향 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그 뒤의 모든 내용은 메시아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한다. 복음서 후반부의 절정은 십자가 처형을 맡은 백부

장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건이다 ( 15:39 ) . 이스라엘을 대 표하는 베드로의 고백과 이방 세계를 대표하는 백부장의 고백, 이 두 고백

을 통해 마가는 자신의 문서를 뒷받침하는 신앙을 증언한다.

마가복음은 “확장된 서론이 붙은 수난 내러티브”2  ) 라고 설명되어 왔다.

마가복음 16장 중 거의 절반이 예수 사역의 마지막 기간을 묘사하는 이유

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서이기 때문이다. 마가는 복음서 전반에 걸쳐 수난 이 야기를 특징짓는 긴장과 움직임의 가속화를 준비해 왔다.3  ) 아들의 임무와

운명은 아버지가 예수를 세상에 보낸 목적을 반영하고 있는 일련의 선교 말씀에 날카롭게 제시되어 있다 ( 참고, 2:17; 8:31; 9:31; 10:33-34, 45 ) . 이 진술들은 마가복음의 독자들을 십자가의 죄에 연루시키고 천사의 말로 해석된 대로

의 빈 무덤 증인 앞에 그들을 남겨 두도록 준비시킨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

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

마가가 이 전통을 기록한 것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부르기 위해서다. 이

복음서가 증언 문서라는 점은 바로 이런 특징 때문이다.

마가의 작품은 널리 유포되었고, 마가 자료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복음서 구조도 채택한 다른 두 복음서 기자 마태와 누가의 모 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복음서가 문학적 영향력을 떨쳤고, “복음

2  ) 이 문구는 마틴 켈러(Martin Kähler)의 것이며 그는 이 문구를 모든 복음서에 적용한다. The Socalled Historical Jesus and the Historic Biblical Christ (Chicago, 1964, transl. of 1896 edition), p. 80을 보라. 3  ) 예수와 그의 반대자들이 점점 더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 순서에서 관찰할 수 있다. 2:20; 3:5-6; 8:31; 9:12, 31; 10:33-34, 38, 45; 12:6-8; 14:1-2, 8, 10-11, 17-21, 22-25, 27, 34, 36, 37-38, 41-42, 48-49.

마가복음 20

서” 즉 증언의 책이라는 새로운 대중 문학 형태를 태동시켰다.

서론의 다음 부분들은 복음서를 동시대의 논의라는 더 큰 맥락에 위치시

키려는 시도다. 그것은 성격상 철저하고 완전하기보다는 간결하고 개론적

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본문에 대한

해석과 관련이 있으며 주석에 제시된 설명의 기초가 된다.

1. 마가복음 연구의 새 방향

현대적인 비평학이 등장하기 전에 마가복음은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교부 시대에는 마태복음에 완전히 가려졌기 때문에 5세기 말에 안디옥의 빅토르는 마가복음에 대한 주석이 전혀 없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빅토르는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마태, 누가, 요한의 복음서를 해설하면서

마가에 대해 부수적으로 언급했던 오리게네스, 보스트라의 티투스, 몹수에 스티아의 테오도르, 크리소스토무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등의 초기 주석

문헌을 편찬했다.4  ) 이 복음서에 대한 고대 주석이 드문 것은 마가복음이 마태복음의 요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

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마가복음이 공관복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제

공하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현대적 비평학의 시대가 열린 19세기까지 거의

도전받지 않았다.

복음서에 대한 문학비평 및 자료비평에 대한 초기의 강조에서 K. L. 슈미

트, 마르틴 디벨리우스, 루돌프 불트만과 같은 사람들의 영향 아래 양식비

평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5  ) 역설적이게도, 공관복음 연구에서 새로운 질문

과 재검토의 길을 열어 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문학 출판이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 H. 콘첼만 ( 누가복음 ) , W. 막센 ( 마가복 음 ) 이 있었다.6  )

4  ) H. Smith, “The Sources of Victor of Antioch’s Commentary on Mark,” JThS 19 (1918), pp. 350-370. J. A. Cramer, Catenae Graecorum Patrum in Novum Testamentum I (Oxford, 1840), pp. 263-447의 교부 자료 및 R. Devreesse, “Chaînes exégétiques grecques. Les chaînes sur S. Marc,” DB Suppl I (1928), cols. 1175-1181의 논의도 보라.

5  ) J. Rohde,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the Evangelists (Philadelphia, 1968), pp. 1-8, 31-46은 이들의 전제, 강조, 통찰에 대한 편리한 요약을 제공한다.

6  ) 앞의 책, pp. 47-54, 113-140, 154-178.

서론 1. 마가복음 연구의 새 방향 21
복음서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강조점이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이름 중에는 G. 보른캄 ( 마태복음 )

( Willi Marxsen )

( Der Evangelist Markus ─ Studien zur Redaktionsgeschichte des Evangeliums )

이야기, 일부 자료 모음 및 익명으로 된 개

별적 전승 단위만을 갖고 작업해야 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오래된 복음서

형성에 있어서는 그 개인의 추동력이 발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추론 했다. 계획된 편집에 따른 이런 전통을 전달함으로써 마가는 개인적 형성

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을 구조화하고 심지어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막센

은 복음서 연구에서 이렇게 형성된 것, 즉 복음서 전체 내에서 규정된 전통

을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식비평이 개별적인 전통 단편

들을 지향했던 반면, 막센의 접근 방식의 특징은 전통을 편집한 복음서 기

자-편집자 자신이 창조적 사람이라는 확신에 전체 작업의 지향점을 둔다는

점이다 ( pp. 21-22 ) .

막센은 자신의 접근 방식을 “편집비평”이라고 명명했다. 양식비평 분석

이 편집자의 작업 한계를 결정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한, 편집비평은 양식비

평의 자식이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것은 분

명했다. 본문 내에서의 작은 전통 단위에 관심을 갖는 양식비평은 전통이

나타났다고 추정되는 삶의 자리라는 관점에서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전통

Mark the Evangelist. Studies on the Redaction History of the Gospel, transl. by R. A. Harrisville et al. (Nashville, 1969). 막센의

마가복음 22 1956년에
의 『복음서 기자 마가 ─ 복음서의 편집 사 연구』
가 출판되면서 마가복음 연구에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었다.7  ) 막센의 관심은 “복음서”라 지칭된 독특한 문학 형식을 처음으로 고안한 복음서 기자 마가 에 있었다. 그의 기본적인 전제는 마가복음의 잘 짜여진, 특정한 성격 ( 이는 구전 전통에서 유래한 개별 구절들이 갖는 익명성과는 대조적이다 ) 은 “자신의 작품으로 명 확한 목표를 추구하는 한 개인, 한 저자의 인격”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 p. 18 ) . 막센은 마가의 구조화된 기사를 소유하고 있던 마태와 누가와는 달리 이 첫 번째 복음서 기자는 수난
빌리 막센
결정적인 질문 은 주어진 전통 단위가 출현하게 된 삶의 자리에 대한 것이었다. 복음서의 편집자들은 본질적으로 자료의 형성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고 발전된 전통 들을 모으는 “수집가”로 간주되었다. 편집비평의 지지자들은 이런 비평적 재구성에 반대하여 복음서 기자-편집자들을 공관복음의 형성에 중요한 역 할을 한 인물로 간주한다. 복음서의 틀을 구성하고 문체 기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그들은 의식적인 신학적 목적을 가이드로 삼았다. 막센은 신약 7  ) 영어 번역,
논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이 책의 영어판 을 나타낸다.
초기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발전을 추적했다. 여기서

연구가 개별 전통 단위들의 형성을 넘어 정경 복음서 자체의 양식과 형성

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이런 탐구에 따라 그는 특정한

복음서가 출현한 삶의 자리에 대한 결정을 본질적인 질문으로 정의했다.

마가가 행한 작업을 파악하기 위해 막센은 복음서의 틀을 광범위하게 조

사했다. 막센이 말한 틀 ( framework ) 은 “이음매”, 해석적 논평, 요약, 자료 수

정, 자료 선택, 자료 생략, 배열, 각 단락에 대한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 즉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의 모든 “텍스트 변환”( textual transformations ) 을

의미했다 ( p. 22 ) . 막센은 이 틀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복음서 안에서 삶의

자리를 세 가지 다른 수준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수

준은 반복되지 않는 예수 활동이라는 상황에서 발견된다. 두 번째 수준은

전통 단위들이 유포된 교회의 상황이 제공한다. 세 번째 수준은 그 복음

서가 기원한 원시 공동체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편집비평의 특별한 관심

사가 이 세 번째 수준이며, 이는 “문학 작품이나 전통 단편은 그것이 발생

하게 된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일차적 출처이며, 그것이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관련된 역사적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이차적 출처일 뿐이다”( p. 24 ) 8  ) 라는 가정에 입각한다. 그러므로 막센은 복음서가 생겨난 공동체의 상

황을 탐구하는데, 여기에는 그 관점, 시기, 심지어 그 구성도 포함된다. 그 러나 이런 사회학적 관심은 복음서 기자 자신의 특정한 관심사 및 기본 개

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막센은 각 공동체가 고유한 문제로부터 그리

고 고유한 목적을 위해 별개의 “형식”을 발전시켰다고 믿는다 ( p. 25 ) . 세 개

의 공관복음이 광범위하게 유사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

별적인 “형식”은 뚜렷이 구별된다. 이것은 각 복음서의 서두 진술에 이미

암시되어 있다. 마가가 “복음서 형식”을 만들었다면, 마태는 연대기를 작성

하려 했고, 반면에 누가의 목적은 예수의 일생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 pp. 25, 207-213 ) .

막센은 작업 과정에서 분석적 접근과 구성적 접근을 모두 사용했다. 그는

편집비평이 수행하는 작업의 순환적 성격을 지적했다. (1) 복음서의 형식에

서 (2) 우리는 저자와 그의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역으로 (3) 복음서 형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의 방법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마가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첫째, 그는 이 복음서가 구성

8  ) R. Bultmann, “The New Approach to the Synoptic Problem,” JRel 6 (1926), p. 341에서 막 센이 인용한 것이다.

서론 1. 마가복음 연구의 새 방향 23

비평적 방법론을 통해 이끌어 낸 결론을 고려함이 없이,10  ) 그의

접근 방식이 복음서들과 마가복음 연구에 미친 긍정적인 기여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양식비평이 일차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이미 형성된

전통 단위의 편집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편집비평은 전

통을 형성하고 신학적 목적을 갖고 의식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들의 창조적 역할을 강조한다. (2) 양식비평이 구전 형성에 초점을 맞추 었다면, 편집비평은 완성된 즉 기록된 복음서에 초점을 맞춘다. 구전 전통

은 복음서 이전 시대의 역사 속에 존재하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회복할 수 없기에, 기록된 복음서 형태에 집중하는 편집비평이 본문을 좀 더 객관적으

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 준다. (3) 편집비평은 복음서의 통일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들이 자료를 선택하고 정리한 배후에 존재하

는 신학적 의도를 탐지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4) 학문 분과로서 편집비평

은 복음서가 완성된 전체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함 없이 두 개의 유사한 기

사를 조화시키고 작은 독립 단위들을 주석하는 작업에 어떤 위험이 잠재되

어 있는지 해석자들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한다. (5) 각 복음서 기자의 뚜렷

한 신학적 관점에 대한 인식은 복음서 기록의 동기를 부여한 삶의 자리 재

구성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했다.

막센 자신의 편집비평적 마가복음 연구는 그가 양식비평과 공유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가정으로 인한 결함을 보여 준다. 다음과 같은 그의 가정

은 옳지 않다. (1) 공관 전승의 단위들이 기원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익명성 을 띠고 있다는 것 ( p. 19 ) , (2) 복음서는 그들이 보도하는 역사적 세부 사항

에 대한 일차적 자료가 아니하는 것 ( p. 24 ) , (3)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선

포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자리라는 것. 이런 결함은 역사와 계시의 관계

9  ) 이 두 갈래의 접근 방식은 (1) 세례 요한과 광야 전통, (2) 이 복음서의 지리적 진술, (3) 마가의

마가복음 24 된 방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마가 이전으로 되돌아가 전통과 마지 막 편집을 분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마태와 누가를 조사 하고, 마가에게 전형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이 두 책에서 변형된 개념을 강조한다. 마가의 독특한 관점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에 있어서 마가와 구별되는 마태와 누가의 발전은 중요하다.9  ) 막센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는 용어 사용, (4) 13장의 연설 복합체라는 네 가지 연구에 적용되 었다. 최종 요약은 이런 독립적인 연구의 주요 결과를 연관시켰다. 10  ) W. L. Lane, “Redaktionsgeschichte and the De-historicizing of the New Testament Gospel,” Bulletin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11 (1968), pp. 27-33을 보라.

에 대한 견해에 결함이 있다는 방증이다. 하나님은 시공간의 역사가 아니라

교회 선포 안에서만 행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탈역사화 해석학

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에 대한 구약의 증거와 하나님의 성

육신이 인간의 삶과 일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중심 진리 모두를 무색하게

한다. 그 결과는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영지주의화다.

편집비평이 신약 복음서의 탈역사화로 이어져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이 점에서 막센의 결론은 그가 사용한 방법이 아니라 그의 잘못된 전제에

기인한다. 그 전제란 문학 작품은 그것이 출현한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는 일차적 출처지만, 그 문학 작품이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적 세부 사항에 대

해서는 이차적 출처일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질문은 초기 교회 선포의

내용에 내재되어 있으며, 사복음서의 존재는 예수의 지상 생애에 대한 교회 의 관심을 증언한다. 마가가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신학적 목적에 대해 부

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는 확언을 요구한다.

이 사건들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활동에 달려 있다. 역사적 사실이 갖

는 신학적 의미가 부정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 신학적 의미는 그 사실이 역

사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 의존한다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의 아들 메시아 예수의 성취를 증언하는 문서의 기원이 되고 그것을 통제

하며 그것에 본질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복음서 기자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적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센의 비평적 연구는 미래의 모든 마가복음 연구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그 자신의 결론이 추려지고 그의 비평적 방법론이 후

속 연구에 의해 다듬어졌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마가복음 연구에 영구적으

로 기여하고 있다. 편집비평이 마가복음 본문과 복음서 기자의 의도를 이해

하기 위한 유효한 해석학적 접근이라는 가정은 본 주석에서 내내 유지되 었다.

마가복음과 관련된 전통 마가복음의 기원과

서론 2. 마가복음과 관련된 전통 25
관련된 전통에 대해 물어볼 때 중심적인 질문은 복음 서의 증거가 본질적으로 사도적 증거인가 여부다. 일관된 전통은 이 복음서 기자가 사도 베드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 복음서의 내용은 베드 로가 선포한 메시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확증한다. 그 전통이 신빙성이
2.

있다는 증거를 뒷받침하는 복음서 기록을 검토하기 전에, 2세기 전통의 성

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제시할 수 있다.

마가복음에 대한 가장 초기의 진술은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인 파피아

스 ( Papias ) 의 진술이다. 파피아스는 현재 유실된 책인 『주님의 신탁 주

석』 ( Exegesis of the Lord’s Oracles, AD 140년경 ) 을 썼고, 우리는 유세비우스가 인용

한 것을 통해 그 내용을 알게 된다. 유세비우스는 어느 시점에서 분명히 나

이가 많은 동시대인이었던 한 장로의 증언을 인용했다.

그리고 그 장로는 이런 말도 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 되어

주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을 베드로가 기억하는 대로, 정확하게

기록했으나, 순서대로 기록하지는 못했다.” 마가는 주의 말씀을 듣지

도 못했고 주를 따라다니지도 않았으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후에

베드로는 듣는 자들의 필요에 맞게 주의 가르침을 전했으나, 주의 말

씀을 연결된 기사로 작성하는 것처럼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가 기억하는 그대로 어떤 일을 기록하는 데 실수를 하지 않

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가지 일을 미리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자기가 들은 어떤 말도 빠뜨리지 않고, 어떤 말도 거짓으로 하지 않 는다는 것이었다.11  )

복음서의 저자가 사도 베드로의 사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증언은 파피아스의 의견이 아니라 그 이전 권위자의 말로 제시된다. 따라서 파피아

스는 늦어도 2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전통을 보존했을 가능성 이 있다. 이 구절은 전체적으로 마가복음의 성격과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이 선포와 교리 교육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과 베드로가 사도이자 자신이 말한 사건의 목격자였기 때문에 그 권위가

사도적이라는 것을 확증한다. 또한 마가복음의 내용은

11  ) Eusebius, Hist. Eccl. III. xxxix. 15에서 인용된다. 이

H. A. Riggs, “Papias on Mark,” Nov Test 1 (1956), pp. 160-183; J. Kürzinger, “Das Papiaszeugnis und die Erstgestalt des Mätthausevangeliums,” BZ 4 (1960), pp. 19-38; H. E. W. Turner, “Modern Issues in Biblical Studies: The Tradition of Mark’s Dependence upon Peter,” ExT 71 (1960), pp. 260-263; T. Y. Mullins, “Papias on Mark’s Gospel,” Vigiliae Christianae 14 (1960), pp. 216-224; W. C. van Unnik, “Zur Papias-Notiz über Markus (Eusebius, H. E. III. 39,15),” ZNW 54 (1963), pp. 276-277; N. B. Stonehouse, Origins of the Synoptic Gospels (Grand Rapids, 1963), pp. 10-15를 보라.

마가복음 26
실질적으로 베드로
구절은 자주 논의되었으며 그 용어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구성함에 있어 서 베드로가 하지 못한 일을 마가가 했다고 말함으로써 복음서 기자로서

마가의 주도권과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다.12  ) 파피아스는 마가가 “정확하

게” 기록했다는 진술을 전면에 배치하고 복음의 신뢰성에 대해 증언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음으로써 마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많은 고대 라틴어 사본 ( AD 160-180년경 ) 에서 복음서에 덧붙어 있는 “반마

르시온파 프롤로그”( Anti-Marcionite Prologue ) 는 독립적인 증거를 제공하는 것

으로 보인다.13  ) 마가복음 서문은 단편적이지만, 이 증거는 베드로가 죽은

후 마가가 이탈리아에서 복음서를 썼다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마가가 선언했으며, 그는 다른 신체의 길이에 비해 손가락이

다소 짧았기 때문에 “손가락이 뭉툭한 자”(stump-fingered) 라 불렸다.

그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다. 베드로 자신이 죽은 후에 그는 이탈리 아 지방에서 이와 동일한 복음서를 기록했다.

이 전승은 마가복음의 로마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초기의 증언을 제

공하며, 파피아스와 이레나이우스 사이의 기간에서 중요한 증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레나이우스 ( AD 175년경 ) 의 증언은 그가 모든 복음서에 대해 말하는 부분

에 기록되어 있다.14  )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울 때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언급한 후, 이레나이우스는 다음과 같

이 덧붙인다.

이 사람들이 죽은 후, 베드로의 제자요 통역관인 마가도 베드로가

선포한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전했다.

이와 같이 이레나이우스는 마가복음 출판의 구체적 배경이 베드로의

12  ) 파피아스에서 ‘타 로기아’(τὰ λογία )의 포괄적 특성에 대해서는 R. Gryson, “A propos du témoignage de Papias sur Matthieu. Le sens du mot λογίον chez les Pères du second siècle,” EphThLov 41 (1965), pp. 530-547을 보라.

13  ) D. de Bruyne, “Les plus anciens prologues latines des Évangiles,” Revue Bénédictine 40 (1928), pp. 193-214; R. G. Heard, “The Old Gospel Prologues,” JThS n.s. 6 (1955), pp.

1-16을 보라.

14  ) Adv. Haer. III. i. 2. 이 구절에 대해서는 N. B. Stonehouse, op.cit., pp. 4-7을 보라.

서론 2. 마가복음과 관련된 전통 27

마가복음

도적 설교였다는 전통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이고, “반마르시온파 프롤로

그”와 마찬가지로, 마가는 사도가 죽은 후에야 그 선포를 기록으로 전달하 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고 확언한다.

무라토리 정경 ( Muratorian Canon ) 은 AD 170-190년에 로마 교회에서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된 책 목록을 포함하고 있으나 심하게 손상된 단편만 남 아 있다. 첫 문장은 끊어져 있으나, 분명히 마가를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이어서 복음서의 세 번째로 누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장은 다

음과 같다.

“……그는 어떤 일이 있을 때 현장에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기록 했다.”

합리적인 추측은 앞 구절이 베드로의 설교와 가르침에 대해 언급했다고

보는 것이다.15  )

지금까지 인용한 이 네 진술은 저자 문제와 관련된 복음서의 표제와 함께

2세기에 받아들여진 전통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증인들은

아시아 ( 파피아스 ) , 로마 ( 반마르시온파 프롤로그, 무라토리 정경 ) , 리옹 ( 이레나이우스 ) 의 교 회 중심지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16  ) 테르툴리아누스 ( 북아프리카 ) 와 클레멘

스 ( 알렉산드리아 ) 는 AD 200년경에 이 목소리에 자신들이 동의한다는 말을 덧 붙인다.17  ) 마가복음의 자기 증언은 초기 교회 전통에 놓일 수 있는 정도의

신뢰성이 있는지 결정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한다.

마가복음의 배경을 제공한 것이 베드로의 설교였다는 거듭된 진술은 사 도행전

15  ) A. Ehrhardt, “The Gospels in the Muratorian Fragment,” in The Framework of the New Testament Stories (Cambridge, Mass., 1964), pp. 11-14를 보라.

16  ) N. B. Stonehouse, op.cit., pp. 15-18을 보라.

17  ) Tertullian, Against Marcion IV. 2; Clement of Alexandria, apud Eusebius, Hist. Eccl. II. xv. 2; VI. xiv. 6-7; Adumbr. in I Peter 5:13.

28
10장 36-41절에 요약된 설교에서 복음의 개요가 이미 제시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로 뒷받침된다.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다음 표로 나타낼 수 있다.

마가복음 행 10:36-41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의 시작이라

막 1:2-3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기록된 것 과 같이

막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참고, 막 1:4-8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막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 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참고, 막 1:16-10:52 치유와 축귀를 묘사하는 내러티브 에 지배되어, 예수의 사역에서 일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준다

참고, 막 11-14장 여기서 마가는 예수의 예루살렘 사 역과 활동을 제시한다

참고, 막 15:1-39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초점을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 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 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 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 인이라

전형적인 것이 되었지만, 설교의

구조적 발전과 강조점은 마가복음의 개요에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음이 분 명하다.

마가복음의 내용은 그 개요만큼이나 케리그마적이며, 기록된 기사와 사

도적 설교를 연결하는 전통을 추가로 뒷받침한다. 마가의 내러티브 형식 뒤

에서 때때로 베드로의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 이를 보여 주는 두 가지 예

서론 2. 마가복음과 관련된 전통 29
맞 춘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목격자와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포함되는
참고, 막 16:1-8
함께: “그가 말씀하신 대
그가 살아나셨고

는 복음서에서 일찍 나타나는데, 베드로의 관점에서 말하는 이야기에서 그 렇다.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기사들은 경험적 설교의 1인칭으로 재구성 될 수 있다.

막 1:29-30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

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

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

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

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기사 재구성: “우리가 회당에서 나

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우리

집으로 들어갔다. 나의 장모가 열병

으로 누워 있었고, 우리가 그 여자

에 대하여 예수께 여쭈었다.”

막 1:35-37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

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다른

기사 재구성: “새벽 아직도 밝기 전

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

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우

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

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여겨지는 머리말과 예수의 권위를 생각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결론을 보여 주게끔 사건이 구조화되어 있다 ( 예, 2:1-12; 4:35-41; 7:31-37 ) . 복음서의 자기 증언은 전통의 증언을 입증하는 경향이 있으

며 마가가 일부 복합 단락과 수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익명의 전통의 상 속자라는 일반적인 비평적 전제에 도전한다.18  ) 그러한 전제가 사실이라면, 얼굴 없는 전통에 개성의 도장을 찍는 창조적인 편집자가 참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1세대 교사들에 의해 전통에 이미 각인된 개인 도 장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복음 전승은 익명의 회중이 아니라 예수가 세례

를 받은 때부터 승천할 때까지의 활동을 목격한 증인들에게서 시작되

었다 ( 참고, 행 1:22; 2:32; 고전 15:5 ) . 마가는 완전히 얼굴 없는 전통의 상속자가 아

니라 베드로의 경험이 이미 각인된 전통의 상속자였다.

그러나 파피아스에 의해 전해진 전통은 또한 복음서의 구성에서 마가의

주도권과 베드로로부터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마가복음은 사도의 설교에

의해 촉발되고 선포에 봉사하도록 의도된 증인 문서이지만, 전통의 선택과

30
마가복음
예들에서는 설교로
18  ) 예, W.
op.cit., p. 19.
배열, 구조화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이 복음서 기자에게 있다. 복음서의
과 그 신학적 발전은 마가 자신이 역사가이자 신학자였음을 보여 준다. 2세
Marxsen,

서론

3. 마가복음 저작의 배경

기 초에 이 복음서에 “마가에 따른”( according to Mark ) 이라는 표제를 붙인 교

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에 대한 교회의 공동체적 증언에 각인된 개인의 특성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보여 주었다.

3. 마가복음 저작의 배경

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분명한 전통은 마가가 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

이다.19  ) 마가복음이 AD 60-70년 후반기에 기록되었다면, 이 복음서를 기 록한 계기는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한 위기였다. 그 삶의 자리에 대한 이해 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집회에서 읽은 소책자를 통해 어떻게 정보를 얻

을 수 있었는지 알려 줄 것이다.

이때의 황제는 네로였다. 5년 동안은 통치자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나 ( AD 54-59년 ) 후에 로마 귀족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모하리만큼

전제적 인물임을 보여 주었다. 자녀 없는 부부의 재산에 대한 세금 중과, 거 짓 고발과 그에 따른 재산 몰수, 공개 연회에서의 자살 권유 등 원로원을 비

참하게 예속된 지위로 전락시켰고 부자들에게는 공포 통치의 시대를 열

었다. 그러나 로마 당국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모임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 이지 않았다. 그들의 집회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로마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종교 단체 및 길드와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주민이 그

리스도인을 가증스러운 범죄 혐의로 고발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특히 그

리스도인은 사람을 증오한다는 비난을 받았는데,20  ) 이는 우상숭배와 부도

덕이 만연한 이교도의 축제나 기타 사회 문제에 참여하기를 꺼렸기 때문

이다. 하지만 로마 당국이 이런 혐의를 심각하게 여기거나 기독교 집회에

대해 조사를 행했다는 증거는 없다.

상황은 AD 64년 여름에 로마를 휩쓴 참혹한 화재를 계기로 급변했다. 화

재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 Circus Maximus ) 근처의

19  ) The Anti-Marcionite Prologues to Mark and Luke; Irenaeus, Adv. Haer. III. i. 1; 참고, III. x. 6; Clement of Alexandria, Hypotyposes apud Eusebius, Hist. Eccl. VI. xiv. 6-7. 20  ) 예, Tacitus, Annals XV. 44; 참고, Athenagoras, Legatio pro Christianis iii; “Letter of the Churches of Lyons and Vienne” in Eusebius, Hist. Eccl. V. 1.

31
어수선한 상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으며, 강한 바람을 타고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일

마가복음

주일 이상 거칠 것 없이 타오르던 불은 그 후 어느 정도 진화되었지만, 경비 대장 티겔리누스의 영지에서 두 번째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로마 도심의 14개 구역 가운데 4개 구역만을 비켜 갔다. 3개의 구역은 잿더미로 변했고, 다른 7개 구역에서는 오래된 건물과 기념물들이 전소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최초의 충격 이후, 화재가 황제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

지면서 대중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너무 공공연하

게 도시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몇몇 전직 집정관들은 자신들의 영지에서

밧줄과 횃불로 그의 시종들을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고 비난한다.21  ) 타키투스는 더 조심스럽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한다. “재난이 뒤따랐다. 그것이 우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황제

의 범죄 행위에 의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두 소문 모두 지지자가 있다.”

그는 또 “아무도 감히 불길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렇게 하려는 시

도는 위협적인 무리에 의해 막혔다. 자신들은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고 외치

는 자들이 횃불을 공공연히 던졌다”고 보도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명령을

받았거나 아니면 방해받지 않고 약탈하고 싶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

였다.22  ) 네로는 집 잃은 자들과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구

호를 위해 세금을 거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곡식

값을 낮췄다. 도시 재건 프로그램을 통해 네로는 빈민가를 정리하고, 거리

를 넓히고, 새 공원을 제공했으며, 모든 새 건물은 벽돌이나 돌과 같은 내화

성 재료로 건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조치 중 어느 것도 의심과 분

노를 가라앉히는 데 성공하지 못하자 다른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화재에

대한 책임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사건들이 일어난

지 한 세대 떨어진 시점에 글을 쓰는 타키투스는 격한 감정으로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인적 자원도, 제국의 관대함도, 신들의 유화책도 [황제의] 선동으로 불이 시작되었다는

못했다. 이 소문을 잠 재우기 위해 네로는 희생양을 날조하고 ( fabricated ) , 23  ) 모든 수단을 동

21  ) The Lives of the Caesars Bk.VI,Nero 38.

22  ) Annals XV. 36-38.

23  ) 라틴어 ‘수브디디트’(subdidit)는 사기를 치기 위한 바꿔치기나 거짓 제안에 대해 사용된다. 타

키투스는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를 저질렀다고 믿지 않았다.

32
의심을 가라앉히지
불길한

원해 타락했다는 악명이 높은 그리스도인들(대중은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을 처벌했다……첫째, 네로는 스스로 인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정보에 따라 많은 다른 사람들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는 방화나 선동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반사회적 성향 때문

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대중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들짐승

가죽을 씌우고 개들이 뜯어먹게 하거나, 십자가에 달아 죽이거나, 어

둠이 내린 후에는 햇빛을 대체하려고 횃불로 만들어 불을 붙였다. 네

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제공하고, 원형 극장에서 전시품

을 전시했는데, 거기서 그는 군중 속에 섞여 있기도 하고, 전차병 복

장을 하고 전차에 서 있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죄책과

그에 걸맞은 무자비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들은 동정을 받았다.

그들은 국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만행으로 인해 희생되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24  )

중앙 정부의 이런 변덕스러운 행동은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위태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독교 단체 가입에 따른 대량 체포와

사형 집행은 단기적이고 국지적인 과잉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로

인해 교회는 순교에 맞닥뜨렸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처한 기독교 공동체의

자각은 아시아 교회들에 보내는 불 시험에 대한 베드로전서의 메시지에 반 영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5장 13절에서 “바벨론”은 새 이스라엘이 이제 포

로로 잡혀간 도시인 로마를 가리키는 암호다.

이런 이해에서 마가의 임무는 고난과 순교의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을 투 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굳건하게 되고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되

려면 예수가 직면했던 상황과 로마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상황이 비슷

하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이런 중차대한 요

구에 대한 목회적 응답이다.

로마 신자들이 마가복음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것이 네로의 로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하 묘

지 ( catacomb ) 에 사는 존재로 전락한 그들은 광야 깊은 곳으로 몰려간 주님

에 대해 읽었다 ( 1:12-13 ) . 광야에서 예수가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마가만이 기록하고 있는데 ( 1:13 ) , 그 세부 사항은 투기장에 들어가 야수 앞

서론 3. 마가복음 저작의 배경 33
24  )
44.
Annals XV.

마가복음

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으라는 요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가 득 찬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가복음에서 그들이 네로에게 당하는 어 떤 고난도 예수가 경험한 것과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처럼 예수도 사람들에게 잘못 전달되었고 거짓 낙인이 찍혔다 ( 3:21-22, 30 ) .

그리고 그들이 친밀한 친구 집단 안에서 벌어진 배반의 경험을 알았다면, 열두 제자 중 한 명이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 3:19 ) 였다는 사실을 기억

해 내는 것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임에서 마가복음을 읽었을 때 거기에는 로마 상황에 특히 적합한 구절들이 있었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박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했다. 예수는 한 비유 해석에서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에 대해 언급했다 ( 4:17 ) . 또한 예수는 말씀을 들었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때문에 복음이 삶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다른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 4:19 ) . 어떤 큰 부자가 제

자가 되는 데 따르는 대가를 알고 예수에게서 돌아섰을 때 ( 10:17-22 ) ,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 자신의 제자들이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 14:41-52, 66-72 ) , 마가

는 예수의 이런 경험에서 이 엄숙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위급하

고 중요한 상황에서 불신실함과 부인은 언제나 공동체의 삶을 내부로부터 위협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

를 약속했지만, 마가는 예수가 “박해를 겸하여”( 10:30 ) 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는 점에 주목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자신과 교제했다는 이유로

공회에 넘겨져 매를 맞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예수는 형제가 형

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여 죽게 할 것이며, 자신을 따

르는 자들은 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잔인한 진리를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를 위해 증

언할 것이다 ( 13:1-13 ) . 마가가 함께 제시한 제자도에 대한 중요한 진술에서

예수는 자신이 요구하는 것은 순교하라는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 삶을 근본

적으로 포기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 8:34-38 ) . 예수는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타키투스는 이것이 로마에 있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34
문 자 그대로의 현실이었다고 단언했다. 이것은 또한 로마 행정관 앞에서 재판 을 받고, 끝에 뾰족한 뼈가 달린 채찍에 맞고, 로마 경비병의 잔인한 조롱을 받은 예수 또한 겪었던 문자 그대로의 경험이었다 ( 15:15-20 ) . 사람이 예수를 부인하고 주님과의 교제에 부끄러움을 보이도록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런

복음서 프롤로그(1:1-13)

1장 1-13절을 프롤로그로 잡은 이유는 여기서 이야기의 중심인물을 소 개함으로써 전체 복음서의 열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말씀대로 예

수는 세례 요한의 부름에 부응하여 유대 광야에 나타난다. 거기서 세례 받

고 머문 것이 공생애 첫 번째 활동이며, 후속 사역의 토대가 된다. 마가복음

은 예수의 시련의 기록이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사탄을 만나

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다. 예수가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1  )

프롤로그를 지배하는 것은 광야 모티프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대한 예언서 말씀 ( 1:3 ) 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며, 그의 요단 골

짜기에서의 사역은 나사렛 예수를 끌어당긴다 ( 1:4-8 ) . 요한의 “광야” 배

경 ( 1:4 ) 은 그의 사역 기사를 1장 2-3절에 나온 선지자의 선포와 연결시

킨다. 마가는 요단강에서의 세례를 광야와 관련시킨다. 요단강 하류 골짜기

는 광야 장면의 일부이며 구약과 신약 시대 모두에서 “사막”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2  ) 예수의

1  ) 특히 U. Mauser, Christ in the Wilderness (Naperville, Ill., 1963), pp. 77-102; J. M. Robinson, The Problem of History in Mark2 (London, 1962), pp. 21-32를 보라. 프롤로

그를 1:15로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O. J. F. Seitz, “Preparatio Evangelica in the Markan Prologue,” JBL 82 (1963), pp. 201-206; idem, “Gospel Prologues: A Common Pattern?”

JBL 83 (1964), pp. 262-268; L. E. Keck, “The Introduction to Mark’s Gospel,” NTS 12 (1966), pp. 352-370에서 볼 수 있다.

2  ) 참고, C. C. McCown, “The Scene of John’s Ministry,” JBL 59 (1940), pp. 113-131; 특히 성

경 자료가 쿰란의 관련 텍스트로 보완되는 R. W. Funk, “The Wilderness,” JBL 78 (1959), pp. 205-214.

56
수세 이후 광야는 그가 시험을 받는 무대로 두드러지게
I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등장한다 ( 1:12-13 ) . 따라서 1장 1-13절에서 광야는 관련된 여러 사건에 공통

된 현장으로 나타나서 첫 단락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3  ) 무대는 1장 14절에서 바뀐다. 예수는 광야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고 요한이 옥에

갇힌 이후 자신의 사역을 시작한다.

1장 1-13절의 이런 분석은 신학적, 문학적 고찰로 확인된다. 마가는 복음 서 구성에서 종종 키워드 연상을 사용하여 여러 전통을 함께 묶는다.4  ) 그

결과 마가복음에서 큰 단락들은 기본 단어와 문구들의 반복으로 식별할 수

있다. 1장 1-13절을 통일적인 단락으로 만드는 주요 용어는 “광야”다. 그러

나 이 부분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 1:8, 10, 12 ) . 요한의

메시지 요약에 나타나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에 대한 암시 ( 1:8 ) 는 예

수의 세례 때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예고하고 1장 4-8절을 1장 9-11절에

묶는 반면, 시험에서 성령의 역할 ( 1:12-13 ) 은 이 단위를 이전 단위와 연관시

킨다. 프롤로그를 지나서 성령이 기록에 나타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은

마가가 성령에 대한 삼중 언급을 통해 의식적으로 서론을 통합했음을 시사 한다.5  )

마가의 프롤로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갑작스러움과 침묵이다. 이 것이 놀라운 것은 소개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나는 소 리가 인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공생애 초기 단계에서 가르침의 권위와 권

능의 행동으로 놀라움과 경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복음서 기자는 요 한이 광야에 출현한 것이나 예수가 요한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역사적 설

명을 제공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요한의 예언자적 목소리와 하나님의 아

들은 처음부터 신비의 베일에 싸여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광야 출현이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것은 그 베일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마가는 이를 자신의 기사

서두의 첫 번째 절에서 선언한다. 따라서 마가의 프롤로그는 몇 번의 굵은

획으로 예수를 요한의 설교와 세례 활동, 그리고 광야에서의 시험과 연관시

킨다. 이 프롤로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사역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메

시아가 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가 메시아, 곧 하나님

의 아들이며, 그의 사명은 광야에서

3  ) U. Mauser, op.cit., pp. 77-79.

4  ) 특히 J. Sundwall, Die Zusammensetzung des Markus-Evangeliums (Åbo, 1934)를 보라. 5  ) “성령”은 프롤로그 외에 3:29; 12:36; 13:11에만 나온다. J. M. Robinson, op. cit., pp. 28-29; U. Mauser, op.cit., p. 79를 보라.

57
자신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

) 을 묘사 하는 배경이 된다.6  )

1. 광야의 전령(1:1-8)

1 하나님의 아들7) 예수 그리스도의 복

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8)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

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9) 죄 사함

1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

2 Even as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 Behold, I send my messenger before thy face, Who shall prepare thy way;

3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Make y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4 John came, who baptized in the wil-

6  ) N. B. Stonehouse, The Witness of Matthew and Mark to Christ (Philadelphia, 1944), pp. 6-21; 참고, R. H. Lightfoot, The Gospel Message of St.Mark (Oxford, 1950), pp. 15-20; T. A. Burkill, Mysterious Revelation.An Examination of the Philosophy of St.Mark’s Gospel (Ithaca, N.Y., 1963), pp. 9-23.

7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는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에 포함되어 있지만(ASV, RSV, NEB, Jerus. Bible), 헬라어 본문의 비평판에서는 비평 장치로 축소되어 있다[Westcott And Hort, Nestle, S. C. E. Legg, Novum Testamentum Graece: Evangelium secundum Marcum (Oxford, 1935), K. Aland, Synopsis Quattuor Evangeliorum (Stuttgart, 1964)]. ‘휘우 데우’(υἱοῦ θεοῦ)는 B D W pc (latt)의 지지를 받고, ‘휘우 투 데우’(υἱοῦ τοῦ θεοῦ)는 A λ φ pm (latt) syp sa bo의 지지를 받으며, 이들은 사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a Θ 28 255 1555* sypal geo 1 armpt Irenpt Or에는 이 문구가 누락되어 있다. 스톤하우스(StoneHouse)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언급한다. “만약 이 단어들이 주석이라면, 그것은 마가의 그리스도 묘사의 독특성에 대해 어느 정

도의 진정한 통찰력을 향유한 서기관의 행동을 나타낸다”(op. cit., p. 12). 예수는 마가복음의 여

섯 가지 다른 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1:1의 “하나님의 아들”이 본문의 필수적인 부분이

라고 판단하는 데는 그렇게 추정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즉 8:29에서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 도임을 인정하고, 15:39에서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 더욱이, 시내산

사본의 본문은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가지고 간 파피루스에 기초한 것

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구의 생략에 대한 두 주요 증인(a 및 오리게네스)은 아마도 하나로 줄어

들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구는 사본 전달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누락되었다

고 보는 것이 좋다.

8  )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대로”라는 AV의 읽기는 A W φ pm이 뒷받침하며, 1:3만이 이사야서

에서 인용된 것임을 인식하여 이전 읽기( D pc)를 변경한 것임을 나타낸다.

9  ) RSV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다.”

마가복음 58 임을
사역에 대한 마가의 이야기에서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수와 사탄의 만남은 하나님의 아들과 사탄의 세 력 사이의 충돌 ( 이는 예수의
매우 두드러진 요소임

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10)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

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1. 광야의 전령(1:1-8)

derness and preached the baptism of repentance unto remission of sins.

5 And there went out unto him all the country of Judaea, and all they of Jerusalem; and they were baptized of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6 And John was clothed with camel’s hair, and had a leathern girdle about his loins, and did eat locusts and wild honey.

7 And he preached, saying, There cometh after me he that is mightier than I, the latchet of whose shoe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loose.

8 I baptized you in water; but he shall baptize you in the Holy Spirit.

1절 마가복음의 첫 구절은 1장 1-13절에 이어지는 내용의 성격을 보여 주는 표제 역할을 한다.12  )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과 예 수를 광야로 불러내는 역할을 한 세례 요한이 예비한 것이 불가분의 관 계가 있음을 강조한다. 마가의 의도는 1-4절을 한 문장으로 읽음으로써 파 악된다. 즉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지만 광야의 예언자 요한으

로 시작한다. “시작”이라는 단어는 시작 문구에 놀라운 울림을 제공하는 성

경적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위해 구원을 시작하는 분이 하나님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13  ) 마가는 단지 세례

10  ) RSV “죄 사함을 위한”; NEB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표식의 세례.”

11  ) RSV “그의 샌들 끈.”

12  ) 참고, N. B. Stonehouse, op. cit., pp. 7-10. C. E. 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2 (Cambridge, 1963), pp. 34-35는 1절에 대한 10가지 다른 해석(이는 이 문제의 복잡 성을 보여 준다)을 검토하지만, 그 자신은 여기서 채택된 입장을 지지한다.

13  ) 창 1:1과 요 1:1뿐만 아니라 호 1:2 70인역, ‘아르케 로구 퀴리우 프로스 오세에’(ἀρχὴ λόγου κυρίου πρὸς ’Ωσηε); 잠 1:1; 전 1:1; 아 1:1도 생각해 내는 E. LoHmeyer, Das Evangelium des Markus16 (Göttingen, 1963), p. 10을 참고하라.

59
요한의 예언적 활동을 기리 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을 찬양한다. 1장 2-3절에 인용된 예언자의 증언은 요한의 사역과 예수가 광야로 오는 것 모두에서 성취된다. 따라서 강조점은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나타나는 하
혀 그의 신발끈11) 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 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나님의 행동의 통일성에 있다. 요한의 등장부터 예수의 사역의 시작까지 전

체 사건은 하나의 운동, 곧 복음의 시작이다.

“복음”( “gospel” 또는 “evangel” ) 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만들어

사용한 단어가 아니다. 반대로, 이 개념은 이교도 문화와 유대교 문화 모두

에서 중요했다.14  ) 로마인들 사이에서 이 용어는 “기쁜 소식”( joyful tidings ) 을

의미했으며 황제 숭배와 관련이 있었다. 황제의 생일, 성년 도달, 권력 장악

은 전 세계의 축제 행사로 거행되었다. 이런 축제에 대한 보고를 제국 시대

의 비문과 파피루스는 “희소식”( evangels ) 이라고 불렀다. 소아시아의 프리에

네 ( Priene ) 에서 발견된 기원전 9년경의 달력 비문에는 옥타비아누스 황제 ( 아

우구스투스 ) 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의 탄생일은 그를 위하여

세상에 선포된 기쁜 소식의 시작이었다”( Jnscr. Priene, 105, 40 ) . 15  ) 이 비문은

마가의 첫 구절과 매우 유사하며, 고대 세계에서 복음의 본질적인 내용이

세상에 새로운 상황을 소개하는 역사적 사건임을 명확히 한다. 로마인들은

이런 관점에서 예수 메시아에 대한 마가의 선포를 이해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으로 시작하여 마가는 예수의 오심을 인류에게 근본적으로 새

로운 상황을 가져오는 사건으로 선포한다.16  )

그러나 “복음”의 의미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무엇이 “기쁜 소식”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마가 자신의 이해는 1장 2-3절의 이중 인용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구약의 예언 전통에 크게 의존했다. 이사야서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복음이 오직 예언의 말씀에서 약속된 다가오는 구원에 비추어 적절 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이사야서에서

14  ) “복음” 개념에 대해서는 J. Schniewind, Euangelion. Ursprung und erste Gestalt des Begriffs Evangelium (Gütersloh, 1927-31); G. Friedrich, TWNT II (Eng. Tr. 1964), pp. 707-737; R. Asting, Die Verkündigung des Wortes im Urchristentum (Stuttgart, 1939), pp. 300-457을 보라.

15  ) 이것 및 관련 본문은 G. Friedrich, op. cit., pp. 724-725를 보라. 프리에네 비문에 대한 참고문

헌은 프리드리히의 논의에서 n. 35에 나열되어 있다.

16  ) 참고, E. Stauffer,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1956), pp. 157-159. G. Friedrich, op. cit., p. 725는 황제 숭배에서의 “희소식”(evangel)과 성경의 유사점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적절하게 설명한다. “가이사와 그리스도, 왕좌에 앉은 황제와 십자가 위의 멸시받는 랍

비가 서로 대면한다. 둘 다 사람들에게 희소식이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17  ) 참고, G. Friedrich, op.cit., pp. 707-710, 714-717, 721, 726-727. 구약의 ‘비사르’(rF;Bi)와 ‘브

소라’(hr'fB.) 및 신약의 ‘유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와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의 연관

60
마가복음
“좋은 소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용어는 미래의 구원의 선포 또는 구원의 때에 대한 선 포와 관련이 있다.17  )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권위로 구원을 선포하는 것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1. 광야의 전령(1:1-8)

은 그 자체로 창조적 행위이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것이 말하는 현실

의 개시를 알린다.18  ) 이 사실은 기쁜 소식에 대한 성경적 개념과 제국 숭배 에서 발견되는 개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마인들에게

“희소식”은 이미 일어난 기쁜 사건을 반영하는 회고적인 것이었다. 예언의

말씀에는 미래를 내다보는 종말론적 관점이 독특하게 있었다. 기쁨의 사

자가 구원의 때의 시작을 알릴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가져올 것

이다 ( 참고, 사 52:7-10 ) .

이사야서의 이 용법에 따라 마가의 첫 단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메시

아”에 대한 사도들의 초기 설교와 예수 자신이 선포한 기쁜 소식 ( 1:14-15 ) 모

두에 관심을 집중시킨다.19  ) 마가복음의 첫 구절과

사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소망의 말씀을 가리 킨다.20  )

1장 1절에서 “복음”( gospel ) 은 기독교 설교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이를 수식하는 문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메시아에 대한 좋은 소식”이라고 객

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1  ) 마가복음은 전체적으로 예수의 역사적 출현

에 대한 해석적 설명을 제공하고 있으며,

성은 팔레스타인 시리아어 역본 복음서의 갈릴리 아람어에서 구약의 셈어 용어들이 보존된 것에 서 발견되었다. J. W. Bowman, “The term Gospel and its cognates in Palestinian Syriac,” in New Testame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 W. Manson, ed. A. J. B. Higgins (Manchester, 1959), pp. 54-67을 보라.

18  ) 이것은 요한과 예수의 사역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둘 다 “복음”을 선포한다. 참고, A. Schlatter, Das Evangelium nach Matthäus (Stuttgart, 1929), p. 175: “요한은 예언만 한 것 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언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것이 아

니다. 그와 함께 이 희망의 성취가 시작되었다.”

19  ) G. Friedrich, op. cit., p. 728은 1:15; 8:35; 10:29; 13:10; 14:9에서 예수가 실제로 “복음”이라

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즉 이 용어는 복음서 기자의 것이라는 것

이다. 이 의견에 반대하는 J. W. Bowman, Prophetic Realism and the Gospel (London, 1955), pp. 64-68을 보라. 그는 이런 언급은 복음이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가 선포한 것이었던

초기 시기를 반영한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20  ) 2세기가 되어서야 “복음”이라는

용법에 서 다른 용법으로의 전환은 정경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복음의 권위 있는 선

포라는 2세기의 평가를 반영한다.

21  ) “메시아 예수가 선포한 좋은 소식”이 아니다. 참고, N. B. Stonehouse, op.cit., p. 12.

61
예수의
선포 요 약문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는 아직 기록된 문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 은 임명받은
갈릴리
그 결과 다른 복음서에 비해 그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은 훨씬 떨어진다. 이와 부합하게 1절의 “예수 메시
용어가 특정한 종류의 문서를 가리키게
되었다. 하나의

아,22  ) 하나님의 아들23  ) ”은 기독교 선포의 내용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머리 글인 1절은 마가의 주요 관심사가 원시 기독교 구원 메시지의 역사적 내용 을 설명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또한 머리글은 그가 말하는 역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예상케 함으로써 그의 작품의 전반적인 구상을 제시한다. 8장

29절에서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한 사건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가가 명확히 밝히는 복음서 후반부로의 전환점

이다. 15장 39절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언하는 사건에서 절정

에 도달한다. 마가복음의 첫 번째 줄은 독자들로 하여금 복음서의 모든 측 면을 분명한 기독론적 관점에서 고려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24  )

1장 1절은 주로 요한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와 관련된다. 이

소망은 분명히 종말론적 성격을 띤다. 이 선구자는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구속의 새 시대를 시작하는 메시아의 도래를 알린다. 이런 이유로 마가복음

의 첫 절에서 주의 날로의 전환은 때때로 생각되는 것처럼 그렇게 갑작스

러운 것이 아니다. 요한의 출현은 구원의 기쁜 소식의 시작과 하나님의 통 치의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2-3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바와 같이”라는 인용 공식은 복음

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맥락이 이사야서 후반부에 나오는 미래의 구원의 약속임을 보여 준다. 이 문구에 이어지는 인용문은 출애굽기 23장 20절과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이 합쳐진 복합 인용문으로, 이 구절은

선구자 엘리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랍비들의 해석 전통에서 이 본문들

은 “언약의 사자”( 출 23:20 ) 가 엘리야 ( 말 3:1; 4:5 ) 라는

사용한 것

은 그가 1:1에서 이 용어의 전통적인 의미를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1:1의 ‘크리스

투’(Χριστοῦ)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휘우 데우’(υἱοῦ θεοῦ)와 대등한 호칭이다.

23  ) 마가복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는 아래 1:11; 3:11; 8:38; 9:7; 12:6; 13:32; 14:36, 61; 15:39 주석을 보라.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이 전적으로 초자연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

려져 있다. 참고, E. Lohmeyer, op. cit., p. 4: “하나님의 아들은 일차적으로 인간이 아니라 신

적 존재다……그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본성에 대해서 그 자신이 신적

이며, 그의 말씀과 사역이 신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도 신적이다.” 참고, J. Bieneck, Sohn Gottes als Christusbezeichnung der Synoptiker (Zurich, 1951); W. Grundmann, “Sohn Gottes,” ZNW 47 (1956), pp. 113-133. 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만이 명확

하게 밝힐 수 있는 신비로운 용어이다. 아들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계시다. 24  ) 참고, R. P. Meye, Jesus and the Twelve. Discipleship and Revelation in Mark’s Gospel (Grand Rapids, 1968), p. 30: “마가 및 그의 작품이 시작된 공동체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예배했다. 이를 매우 명확하게 하는 것은 마가복음의 내러티브, 그것의 기원이 예배하는 교회에

있다는 것, 예배하는 교회가 그것을 계속 사용했다는 점이다.”

62
마가복음
이미 결합되어 22  ) 마가가 8:29; 12:35; 14:61과 15:32에서 “메시아”(개역개정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확신으로
누구이며,
그리고 무엇을 말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며, 마가복음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
무엇을 행하는가,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1. 광야의 전령(1:1-8)

있었다.25  ) 마가의 첫 번째 진술은 율법서에서 나온 것이며 70인역 출애굽

기 23장 20절 본문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이 인용문은 말라기 3장 1절의

히브리어 본문에서 유래한 문구로 풍성해졌고, 다만 이 구절의 메시아적 해

석을 위해 1인칭이 2인칭으로 변경되었다. 이 융합된 본문은 그런 융합이

이미 이루어진 증언 모음에서 선택된 것일 수 있다.26  ) 두 번째 진술은 선지 서에서 취한 말을 소개하는데, “하나님의 길”이 “그의 길”로 바뀐 것 하나

를 제외하면 70인역 이사야 40장 3절과 일치한다. 이 변경으로 인해 이 본 문은 초대 교회에서 “주님”으로 알려진 예수에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1장 2절의 융합된 인용문이 완전한 것인가에 대해 종종 의문이 제기되 었다. 이 인용문은 “예언자 이사야”를 명시적으로 밝히는 인용문 공식을 충 족시키지는 못하지만, 마태와 누가가 다른 문맥에서 소개한 인용문과 형식 적으로는 일치한다. 이런 이유로 이 인용문은 매우 오래된 주석으로 매우

초기 단계에서 본문에 삽입되어 전체 사본 전통에 흔적을 남긴 것으로 간 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7  ) 그러나 이런 추측을 반대할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사본 전승의 일관된 증거는 2절이 생략된 경우를 보여 주지 않을 뿐 아

니라 이런 방식으로 융합된 구약의 세 구절 모두 광야 전승과 관련이 있고

프롤로그 자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출

애굽기 23장 20절은 첫 번째 출애굽 후 광야를 거쳐 가나안을 향할 때 백성

앞에 자신의 사자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이사야 40장 3절의 사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예비된 마지막 구원으로 인도하는 광

야를 통한 두 번째 출애굽을 선포한다. 율법서에서 인용한 본문이나 선지서

에서 인용한 본문이나 모두 광야를 통한 출애굽이라는 주제가 지배적이며

마가의 개념과 목적에 적합하다. 융합된 인용문은 프롤로그에서 복음서 기

자에게 중요한 세 가지 요소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전

근거를 제공했다.

26  ) 기독교 이전 시대의 증언 텍스트가 쿰란의 4번 동굴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4QFlorilegium

및 4QTestimonia에 대해서는 A. Dupont-Sommer, The Essene Writings from Qumran (Cleveland, 1962), pp. 310-317을 보라.

27  ) 예, M. J. Lagrange, L’Évangile selon Saint Marc9 (Paris, 1947), p. 4; J. B. Colon, “Marc (Évangile selon Saint),” DB Suppl V (1957), col. 838; J. A. T. Robinson, “Elijah, John and Jesus. An Essay in Detection” in Twelve New Testament Studies (London, 1962),

63
25  ) 참고, 출애굽기 랍바 23:20. 출 23:20 및 말 3:1의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노니”라는 동일한 문구는 융합의 주석적
p. 34 n. 14. 이런 추측은 마 3:3과 눅 3:4가 세례 요한의 활동의 맥락에서 이사야 본문만을 인용하 는 반면, 마 11:10과 눅 7:27은 다른 맥락에서 인용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사야에 대한 언급 이 증언 모음집에서의 인용문을 소개한다는 주장 역시 의심스럽다.

마가복음

령과 주님과 광야다. 바로 뒤따르는 절들에서 마가는 이런 각 요소의 중요

성을 강조하며,28  ) 요한과 예수가 광야로 오는 것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말 한 약속된 구원의 성취를 본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시작 부분에서 성취

요소를 강조하면서 성취 주제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사도들의 설교에 자신

의 이야기를 일치시킨다.29  ) 2절의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30  )

4-5절 세례 요한은 계시와 구속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돌이켜 보

면, 요한이 광야에 출현한 것은 300년이 넘는 이스라엘의 삶에서 가장 중요

한 사건이었다. 이 기간 내내 선지자의 부재는 선지자의 임무가 종료되었음

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실한 선지자”, 즉 모

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 “마지막 날”의 사건을 예고할 것이라는 소망에

매달렸다 ( 신 18:15-19; 마카베오1서 4:42-46; 14:41, IQS ix. 11 ) . 요한의 등장이라는 사실 자체가 최초의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이었으며, 구원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

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근본적 회개를 선포한 설교자 요한은 메시

아 도래에 따른 위기를 촉발시킨 인물이었다. 예수의 복음을 말하는 것은 요한으로 시작된 좋은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31  )

정확히 말해서 세례 요한은 복음서에 너무 밀접하게 속해 있기 때문에 요 한이라는 인물을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 유대 광야의 키르벳 쿰란에서 에세 네파의 중심지가 발견되면서 요한이 그곳에서 일정 기간을 보냈을 것이라

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32  ) 쿰란 문서는 요한이 언약주의자들과 많은 생각 28  ) E. Lohmeyer, op. cit., p. 10은 4-8절을 성경 인용에 대한 한 줄 한 줄 해설로 본다. 그러나 그

해석을 요한의 활동에 대한 기사로 제한함으로써, 로마이어는 인용문의 중심인 광야에서의 주님

에 대한 성찰을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참고, U. Mauser, op. cit., p. 82: “막 1:3의 광야는

심판과 절망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원대한 소망과 약속을 담고 있는 위대한 종교

전통의 무게 전체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은 그 뒤의 절들에도 이어져서 그 절들을 이스라엘의 사

막에서의 경험의 대응물로 형성한다.” 마우저는 pp. 15-52에서 이 오래된 성경 전통을 탐구한다.

29  ) 예, 행 2:16-21, 25-31, 34-36; 3:18, 21-26; 8:30-35; 10:43 외 여러 곳. 참고, C. H. Dod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e Substruc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London, 1952).

30  ) 막 1:2에서 “선지자 이사야”를 언급한 것은 이어지는 인용문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

한 자신의 자기 이해가 파악될 수 있는 맥락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요한은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그의 기본 입문

서가 이사야의 예언이다. 요한은 이사야의 말 외에 다른 지시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l:10ff.; 2:9ff.; 4:1; 6:10-11 등 여러 곳의 성찰에서 끊임없이 발견된다.

31  ) 복음서에 나오는 요한의 신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W. Wink, John the Baptist in the Gospel Tradition (Cambridge, 1968), 특히 마가복음에 대한 논의는 pp. 1-17을 보라.

32  ) 참고, W. H. Brownlee, “John the Baptist in the New Light of Ancient Scrolls,” in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 K. Stendahl (New York, 1957), pp. 33-53; H. H. Rowley, “The Baptism of John and the Qumran Sect,” in New Testament Essays, ed. A. J.

64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1. 광야의 전령(1:1-8)

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중에는 광야를 중심으로 한 성경

전통에 대한 인식,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고조된 생생한 위기감, 성령에 대 한 강한 기대감 등이 있다. 세례 요한과 쿰란 사람들은 그들이 광야에 거하

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모두 이사야 40장 3절에 호소했다.33  ) 그러나 쿰

란 언약주의자들과 세례 요한을 주의 깊게 비교해 보면 접촉 가능성을 중

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할 정도로 광범위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세례 요한이

쿰란 공동체와 연대한 적이 있다 해도, 그는 그 전통을 깨고 완전히 다른 방

향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은 것이다. 그의 사명을 형성한 것은 광야에서 그 에게 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마가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은 그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속 드라마의 시작으로서 중요하다. 요한에 대한 마가 의 간결한 설명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이 세례자 사역의 두 가지

특징을 예리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1) 요한의 활동은 예언을 이루

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지명한 결과였다. (2) 요한은 오실 메시아의 위엄과 권능을 증언했다.

주의 사자가 광야에서 외칠 것이라는 이사야 40장 3절의 인용은 요한의

광야 출현을 설명한다.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1장 4절은 1장 3절과 마찬가지로 “광야에서”라는 동일한 문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4절은 3절에 연결된다. 광야에 대한 마가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지리적인 데 있지 않다. 요단강 하류 골짜기에 대한 언급은 이 세례자가 사역했던 지역에 대한 구 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그의 자료에서

있었다.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다는 역사적 전승은

이사야서 인용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마가가 서문 전반에 걸쳐 광야 모티프

에 집중하는 이유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4-8절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아주 간결하게 설명한다. 마가는 요한의 사

역에서 세 가지 요소에 주의를 집중하는데, 각 요소는 마가가 자신의 복음

서 서두에 붙인 구약 예언들과 관련이 있다. (1) 요한은 광야의 사람이었다.

B. Higgins (Manchester, 1959), pp. 218-229; J. Pryke, “John the Baptist and the Qumran Community,” Rev Qum 4 (1964), pp. 483-496.

33  ) IQS viii. 12-16에서 사 40:3의 인용에 대해서는 P. Wernberg-Mö ller, The Manual of Discipline (Leiden, 1957), pp. 34, 129; U. Mauser, op. cit., pp. 58-61의 주석을 보라. 쿰란

의 사 40:3 해석은 율법 연구와 그 명령에 대한 순종과 관련이 있다.

65
발견 한 광야에 대한 강조점을 보존했고 그 강조점을 통해 복음에 대한 자신의 신학적 이해를 형성할 수

마가복음

(2) 요한은 광야에서 세례 사역을 행하여 주의 길을 예비했다. (3) 요한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자기 뒤에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다섯 절의 각 세부

사항은 이 세 가지 강조점 중 하나 또는 그 이상과 관련이 있다.

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 중 회개하라는 익숙한 예언적 외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요단강

에서 세례를 받는 완전히 새로운 행동을 요구했다. 요한의 세례는 개종자에 게 세례를 주는 유대교 관습이나 34  ) 쿰란에서 행해진 입문 의식에서

확인하기는 어렵다.36  ) 그러나 성경에서 회개의 개념은 광

야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37  ) 구약 예언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 “돌 이키라”는 부름은 기본적으로 주님과의 원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 백성과 함께하기 시작한 곳, 곧 광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서, 아모스서, 이사야서에서 회개에 대한

예언자들의 관심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광야 시절이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

로 보낸 기간이며, 주님은 미래에 다시 한번 자기 백성을 그 지위로 인도할

것이라는 개념이다. 1세기의 정통 유대교 집단에서 이렇게 이해했다는 흔

적은 없지만,38  ) 쿰란 공동체의 신학은 예언 전통의 이런 가닥이

준다.39  )

34  ) 이 입장에 대한 논의는 J. Jeremias, “Der Ursprung der Johannestaufe,” ZNW 28 (1929), pp. 312-320; T. M. Taylor, “The Beginnings of Jewish Proselyte Baptism,” NTS 2 (1956), pp. 193-198을 보라.

35  ) 참고, J. A. T. Robinson, “The Baptism of John and the Qumran Community,” HTR 50 (1957), pp. 175-191. 반대 관점은 H. H. Rowley, op.cit., pp. 218-229를 보라.

36  ) 몇 가지 관점에 대한 간략한 요약과 E. Lohmeyer의 해석(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베푸는 성례 전 행위였다) 및 C. H. Kraeling(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는 행위로, 죄 사함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재할 수 있었다)의 해석에 대한 더 광범위한 분석은 U. Mauser, op. cit., pp. 84-89를 참고하라. E. Lohmeyer, “Zur evangelischen Überlieferung von Johannes dem Taufer,” JBL 51 (1932), pp. 300-319와 그의 주석, pp. 13-19; C. H. Kraeling, John the Baptist (New Haven, 1951), pp. 69-122를 보라.

37  ) 참고, E. Würthwein, TWNT IV (1942), pp. 976-985; U. Mauser, op.cit., pp. 46-52; 특히 H. W. Wolff, “Das Thema ‘Umkehr’ in der Alttestamentlichen Theologie,” ZThK 48 (1951), pp. 129-148.

38  ) 증거를 분석하는 J. Behm, TWNT IV (1942), pp. 991-994 참고.

39  ) 참고, K. G. Kuhn, Konkordanz zu den Qumrantexten (Göttingen, 1960), pp. 217-218 s.v.

66
유래 한 것으로 추측된다.35  ) 이런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는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세례는 이 선지자의 독특한 활동으로 나타나며, 이는 너 무 놀라운 예언적 표징이어서 요한은 단순히 “세례자”로
수식어구가
받게
정확한
알려지게 되었다.
없기 때문에 “죄 사함을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문구의
뉘앙스를
종파적 유 대교에 살아 있었음을 보여
광야와 회개의 상관관계는 요한이 이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1. 광야의 전령(1:1-8)

룬 혁신이 아니었고 그의 동시대인들도 이해하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 회

개하라는 요한의 외침과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에서 자기에게 나오라는 외

침은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그것은 광야에서 아들 신분을 새롭게 받

으라는 외침이다. 이 외침의 특별한 긴박감은 하나님의 마지막 행동의 위

기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에 있다.

동일한 상관관계가 세례와 광야 사이에도 나타나는 것이 틀림없다. 요단강

에서 세례를 받으라는 부름은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광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오래전에 홍해를 건너는 순례를 통해 애굽과 분 리되었듯이, 이 민족은 그러한 분리를 다시 경험하라는 권고를 받는다. 백성

들은 하나님과의 새 언약을 준비하기 위해 두 번째 출애굽에로 부름을 받 는다.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과 그의 세례는 모두 하나님의 최종 구원이 광 야에서 그 베일을 벗을 것을 기대하는 예언 전통의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의 선포에서 회개를 필요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결정적인 방식으로

역사에 들어오시려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회개의 기회40  ) 와 긴급성은 성령 으로 세례를 베풀 이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람들이 요한의 부름

에 귀를 기울이고 광야에서 그에게 나아갈 때 통회와 고백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지위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다시 확립되어야 하는 심판의 장소인 광

야로 돌아간다. 광야로 기꺼이 돌아가겠다는 의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불 순종과 반역의 역사임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열망을 의미한다. 요

한의 죄 사함 선포는 하나님이 심판뿐 아니라 은혜를 베푼다는 확신을

준다.41  ) 예루살렘과 유대 사람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광야로

나가는 것은 심판과 은혜의 맥락 안에 놓여 있다.

6절 요한의 의복과 음식에 대한 언급은 그가 광야의 사람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요한의 의복과 음식은 모두 광야 유목민에게 익숙한 것으로

bWv. U. Mauser, op.cit., pp. 58-61은 본문을 수집하고 논의한다.

40  ) H. W. Wolff, op. cit., pp. 138-143은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에서 “돌아오다”라는 단어는 예

언적 훈계에서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오직 백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이유로 한 책망 선포

나, 하나님이 다시 돌아올 기회를 제공할 미래의 시간에 대한 약속에만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이

스라엘은 돌아올 기회를 잃었지만(예, 호 5:4), 그 가능성은 하나님의 미래의 행동으로 회복될 것 이다(예, 호 3:4 이하). 이 선지자들에 따르면 그 민족은 어느 때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회개가 가능한 심판과 은혜의 상황을 제공할 수 있다. 41  ) 참고, U. Mauser, op. cit., p. 89: “이처럼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유대와 예루살렘 백성이 그

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인정한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새로운 은혜의 역사를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이 반응에 대해서는 아래 1:9 주석을 보라.

67

마가복음

사막 생활의 특징이다.42  ) 세례자의 허리에 두른 가죽 띠에 대한 언급은 또

다른 광야의 사람인 예언자 엘리야의 특징을 상기시킨다 ( 왕하 1:8 ) . 그러나

9장 9-13절까지는 요한을 엘리야와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7-8절 요한의 메시지는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장차 오실 분의

선포라는 하나의 주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축소되었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존엄한 이 새로운 세례자를 언급하면서 전통적인 메시아 용어를 피했다.

이 선언은 하나님 자신이나 그가 임명한 대리인의 종말론적 오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대에 따라 구성되었다. “오실 이”라는 문구는 체로 치듯 심판

하기 위해 갑자기 임하는 주님에 대한 경고가 나오는 말라기 3장 1-2절, 4장 5-6절, 또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찬송을 돌리는 시편

118편 26절을 반영한다.43  ) 오실 이의 정확한 정체는 분명히 요한에게도 숨 겨져 있었다. “누군가의 뒤에 오다”는 1세기의 서기관들과 랍비들 사이에

서 제자도를 나타내는 전문 용어이며, 이런 용법은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신

에게 오라고 또는 따르라고 부르는 것에 반영되어 있다 ( 참고, 1:17 ) . 그러므로

요한은 “오실 이는 나를 따르는 자다”라고 말했을 수 있다.44  ) 그러나 요한

은 자신이 히브리 노예조차 하지 않는 가장 하찮은 일인 주인의 신발을 벗

기는 일조차 행할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45  ) 오실 이의 신비와 위엄을 이 보다 더 강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 수여에 대한 언급은 요한의 선포의 광야 맥락에 적절하다.46  ) 이사

42  ) 참고, C. H. Kraeling, op. cit., pp. 10-11, 14-15. 사막 유목민은 메뚜기를 비롯한 작은 곤충을

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메뚜기는 레위기에서 정결한 음식 목록에 올라 있다(11:21). 흥미로

운 유사점이 AD 1세기의 이사야의 순교 2:8-12에 제시되어 있다. 이사야는 백성의 불법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물러나지만, 베들레헴 사람들도 악하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

께 더 남쪽의 유대 광야로 물러나 “한적한 곳에 있는 산에” 자리를 잡는다(2:8). 이사야와 그 일

행은 모두 선지자이기 때문에 “털옷을 입고 있다”(2:9). 그들의 음식은 야생풀이었다(2:11). 그들

은 광야에서 2년을 보내며 백성의 죄를 한탄했다(2:12). 선지자의 의복과 같은 털옷에 대해서는

슥 13:4을 보라.

43  ) 참고, J. Schneider, TWNT II (Eng. Tr. 1964), pp. 668-671; S-BK IV. 2 (1928), pp. 872ff.

44  ) 참고, K. Grobel, “He that cometh after me,” JBL 60 (1941), pp. 397-401; O. Cullmann,

ὁ ὀπίσω μου ἔρχόμενος,” Coniectanea Neotestamentica (Zurich, 1947), pp. 26-32. H. Seesemann, TWNT IV (Eng. Tr. 1967), p. 290은 이에 반대하고, ‘오피소’(ὀπίσω)에서 단순히

시간의 표시를 본다.

45  ) 예, Mekilta to Ex. 21:2 (ed. Lauterbach, Vol. Ill, pp. 5-6): “히브리 종은 주인의 발을 씻어 주

어도 안 되고, 신을 신겨 주어서도 안 되며, 주인 앞에서 그의 물건을 운반해서도 안 된다……그

러나 아들이나 제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TB Ketuboth 96a: “종이 주인을 위해 하는 모든 봉

사는 신발을 벗기는 일을 제외하고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해야 한다.”

46  ) 사 32:15; 44:3; 63:10-14.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E. Schweizer, TWNT VI (1959), pp. 363, 368, 382-383을 보라. 성령 세례의 기능에 대해서는 J. E. Yates, “The Form of Mark i. 8b. ‘I

68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2. 광야의 주님(1:9-11)

야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걸어 여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의 인도 아래 행

진하는 것으로 묘사하며 ( 사 63:11 ) , 광야에서 백성에게 안식을 준 것도 하나

님의 영이었다 ( 63:14 ) . 첫 번째 출애굽이 하나님의 영의 인도 아래 광야로

나가는 것이었듯이, 이사야 선지자는 두 번째 출애굽을 성령의 새로운 부으

심이 있을 때라고 선언한다 ( 32:15, 44:3 ) .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예언 적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면서 사람들을 광야로 부른다. 요한의 메시지를

으로 있을 일을 가리키는 두 개의 진술로 줄임으로써 마가가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기대의 분위기다.47  ) 이 두 진술은 요한이 메시아의 선구자이 며 ( 1:7 ) 그의 세례는 장차 올 메시아의 세례를 위한 준비라고 확언한다 ( 1:8 )

요한의 사역에 대한 설명으로 복음서를 시작함으로써 복음서 기자는 요 한이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직면하게 했던 결정의 위기를 동시대 사람들을 위해 재현한다. 요한이 역사적으로 누구였는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역사의 매개체를 통해, 선포된 심판과 요한이 촉구한 회 개를 만나는 것이다. 교회는 구속사에서 요한의 역할을 하나님 나라의 개척 자로서 인정했기 때문에 복음 전통에서 그에게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교

회는 요한의 기억이 해석되지 않은 과거로 흘러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요한의 증언을 계속되는 기독교 선언의 일부로 만들었다. 요한은 예수에 대 한 좋은 소식을 최초로 선포한 사람이었다.

2. 광야의 주님(1:9-11)

9 And it came to pass in those days, that Jesus came from Nazareth of Galilee, and was baptized of John in the Jordan.

baptized you with water;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NTS 4 (1958), pp. 334-338을 보라. 47  ) 참고, W. Wink, op. cit., p. 6: “요한은 성취의 시간에 완전히 속하지는 않는다. 마가가 기록한 그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예언적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성취의 관점에서는 구약 시대와 구별되

고(1:2ff.), 기대의 관점에서는 예수 시대와 구별된다(1:7-8). 승리의 전령은 승리자가 아니다.”

48  )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40번에서 50번 사이(숫자는 본문 이독에 따라 다름) 나오는 마가 용어의

첫 번째 사례다. 이 단어는 “즉시”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만, 그 의미는 문맥에서만 결정될 수 있으며, (여기서와 같이) 즉시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1:14에서와 같이) 논리적 순서를 나타내 는 “적절한 시기에”를 뜻하기도 하는 등 의미가 다양하다. 마가의 용법

pp.

69
분석은 D. Daube,
Sudden
46-60을 보라. 9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 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48)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The
in the Scripture (Leiden, 1964),

10 And straightway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rent asunder, and the Spirit as a dove descending upon him:

11 and a voice came out of the heavens, Thou art my beloved Son, in thee I am well pleased.

9절 예언의 말씀은 광야의 전령뿐 아니라 주께도 선포되었다. 1장 4-8절 에서 그는 오실 더 큰 분으로 간접적으로만 소개되었다. 직접 소개되는 것 은 1장 9-11절에서다.49  ) 즉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다. 요단강50  ) 에 대한 1장 9절의 명시적 언급은 이 순간을 요한의 이전 활

동 ( 1:5 ) 과 연결시킨다. 세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하게 예수는 갑자기 등장 한다. 마가가 제공한 그의 정체성에 대한 유일한 열쇠는 “오실 이”에 대한 요한의 말이다.

마가는 8절과 9절을 능숙하게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예수가 행할 세례와

그 자신이 순종하는 세례 사이의 엄청난 대조를 그린다. 8절의 중심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을 적극적으로 창조하는 생명의 수여자다. 9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여 수동적으로 회개의 징표를 받는 겸손한 회개자의 역할에

서도 그것은 동일한 내용이다.51  ) 요한의 세례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는 이

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한다. 동시에 예수의 세례는 그의 사명

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는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는 회개가 온전한 참 이

스라엘 사람으로 요한에게 온다. 그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지만

광야에서 그 아들 됨을 재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광야로 오게 된 것이다. 요

한의 광야 출현과 회개하라는

예수는 예

49  ) 나사렛에 대해서는 특히 C. Kopp, “Beiträge zur Geschichte Nazareths,” JPOS 18 (1938), pp. 187-228; 19 (1939), pp. 82-119, 253-285; 20 (1940), pp. 29-42; 21 (1948), pp. 148164; B. Bagatti, “Nazareth,” DB Suppl VI (1960), cols. 318-333과 아래 6:1-6a 주석을 보라.

50  ) 초기 랍비 전통은 요단강이 정화를 위해 적절한 곳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준다(M. Parah VIII. 10). 요세푸스만이 요한의 세례를 정결 예식(참고, 요 3:25)과 명시적으로 연관시키지

만(Josephus, Ant. XVIII. v. 2), 요단강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요단강과 이스라엘의 유산과의 연

관성에 관하여는 O. J. F. Seitz, “What Do These Stones Mean?” JBL 79 (1960), pp. 247-254

마가복음 70
외침과 세례는 하나님이 새 이스라엘이 출현 할 수 있게 결정적인 심판을 집행할 때가 왔다는 것을 상징한다.
드 러내는 구절은 없다”라고 언급하는 U. Mauser, op.cit., p. 91도 그렇다.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참고. 51  ) “제2복음서에는 첫 번째 장의 8절과 9절을 함께 읽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소위 메시아 비밀을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2. 광야의 주님(1:9-11)

언 전통에 뿌리를 둔 이 확신을 인정한다. 그는 이 심판의 선두에 기꺼이 서

려는 사람으로 요한에게 온다. 그 짐을 지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이것은 1장 5절과 1장 9절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로마이어 ( E. Lohmeyer ) 의 관찰로 더욱 분명해졌다. 두 문장은 이 두 절이 상응하도록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52  ) 두 가지 측면에서 큰 대조를 보인다.

(1) 1장 5절의 유대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중부 지방과 거룩한 성을 가리

키는 반면, 1장 9절의 갈릴리 나사렛은 율법에 대한 무관심과 관련하여 전

망이 없는 지역이다.53  ) (2) 1장 5절에서는 모든 백성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

으러 나오는 반면, 1장 9절에서는 한 사람이 대표로 소개되며, 그는 광야로

오라는 요한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인 마가가 언급한 유일한 갈릴리 사람

이다. 이런 일치와 대조를 통해 마가는 요한에게 나온 유대와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이 여전히 반항적이고 하나님의 목적에 무감각하다는 것을 증명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상과 달리 오직 갈릴리에서 온 그 한 분만이 광야

로 나오라는 예언적 부름에 참으로 응답하는 유일한 아들임을 증명한다. 그

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구속을 필요로 하는 반항적인 세대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 처음부터 마가는 예수가 자신의 의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 관심이 있다. 소개된 때로부터 예수는

백성의 유산과 곤경에 동참했고, 첫 번째 출애굽의 모세처럼 ( 출 32:23 ) , 자신

을 그들의 죄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가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9절이 강조하는 놀라운 점이다. 다

른 무리와 함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스라엘의 신분이 갱신되어

야 하는 곳인 광야로 나오라는 요한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였다.54  ) 52  ) 인용된 주석, p. 20. 어순대로 번역함으로써 그 평행을 드러낼 수 있다.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 아가……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 더라”

1:9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 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러나 9절에는 5절의 마지막 구절인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에 해당하는 구절이 나타나지 않

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53  ) 참고, L. E. Elliott-Binns, Galilean Christianity (London, 1956), pp. 13, 25. 요한 벤 자카

이(AD 90년 사망)는 갈릴리에 랍비 학교를 세우기 위해 18년 동안 분투했다. 그의 실패는 “갈릴

리야, 갈릴리야, 너는 토라를 미워한다. 너의 끝은 로마인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이 될 것이다”라

는 한탄에 반영되어 있다(TJ Shabbath 16 end, 15d). 이 랍비 구절에 대해서는 A. Schlatter, Johanan ben Zakkai der Zeitgenosse der Apostel (Stuttgart, 1899), pp. 14-15를 보라.

54  ) U. Mauser, op.cit., pp. 90-95.

71

10-11절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요단강에 왔지만, 하나

님에 대한 참된 순종을 완벽하게 구현한 예수의 경우에만, 그는 물에서

“올라왔고”( coming up ) 응답이 위에서 “내려왔다”( coming down ) 55  ) 이 사건의

우주적 중요성은 하늘이 갈라지는 환상, 성령의 강림,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마가의 독특한 언어는 이사야 64장 1절을 반

영하는데, 여기서 선지자는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여 주 앞

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이라고 기도한다.56  ) 백성이 성별되기 전에는

)

많은 사람을 위해 죄를 대리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세례를 받기 위해 물로 들어갔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것처럼 믿음에 자신을 헌신했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강림했고, 완벽한 회개를 한 참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 아들의 신 분이 다시 세워졌다는 놀라운 증거가 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성령이 비둘 기 같이 내려오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 모두 이 사야가 예언한 광야에서의 새로운 출애굽과 관련이 있다 ( 32:15; 44:3; 63:1014 ) . 57  ) 이 예언은 예수 위에 성령이 강림하는 것에서 예기적 방식으로 성취 된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은 광야

에서였으며, 특히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아들 신 분을 새롭게 할 때를 예고했다.58  ) 이 고대의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

은 광야로의 순례가 유일한 참된 출애굽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요한

에게 나갔지만 오직 예수만이 광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살겠다는 결의를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비둘기의 유비는 구약 또는 성경 이후의 유대교에서 나타나는 틀 55  ) 참고, E. Lohmeyer, op.cit., p. 22. 56  ) ‘스키조메누스 투스 우라누스’(σχιζομένους τοὺς οὐρανοὺς )라는 마가의 문구는 70인역 사

63:19(M.T. 64:1); 겔 1:1을 반영한다. 그러나 레위의 유언 2:6; 5:1 및 특히 18:6과 바룩2서

22:1에서도 하늘이 갈라지는 것이 음성을 듣는 것과 연관된 것을 보라. 레위의 유언 18:6-7 및

유다의 유언 24:2-3에서 그것은 성령의 수여와 연관되어 있다. 마가의 문구를 사 64:3-4와 연관

시키는 C. Maurer, TWNT VII(1964), p. 962 참고: “예수는 영원 전부터 예상되지 않았고 어떤

눈도 보지 못하고 어떤 귀도 듣지 못한 하나님의 행동을 가져온 분이다.”

57  ) 참고, I. Buse, “The Markan Account of the Baptism of Jesus and Isaiah LXIII,” JThS n.s. 7 (1956), pp. 74-75.

58  ) 출 4:22-23; 렘 2:2; 호 11:1-3.

72
마가복음
하나님이 강림할 수 없다는
19:10-11
패턴은 첫 번째 출애굽에서 이미 확립되었다 ( 출
. 이런 이유로 예수는
성령과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2. 광야의 주님(1:9-11)

을 기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59  ) 다음 두 해석이 다른 것보다 인상적이다.

(1) 이 언급은 은연중 창세기 1장 2절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벤 조마 ( Ben Zoma, AD 90년경 ) 는 창조 시 성령이 물 위에서 새가 알을 품듯 한 것이 비둘기

의 행동을 나타낸 것이라고 제안했다. 성령의 강림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

며, 하늘이 갈라지는 사건에 담긴 우주적 함의와 부합한다. 이후의 전승은

창세기 1장 2절의 영을 메시아의 영으로 확인했는데, 그 영은 이스라엘 민

족이 회개를 통해 준비될 때까지 보류될 것이다.60  ) 그러나 랍비들이 비둘

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2) 랍비들은 비둘기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가 더 잦다.61  ) 마가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연관성이었을 수 있다. 세례를 받는 순간에 예수는 유일한 참 이

스라엘 사람이며, 하나님의 선택은 그에게 집중된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는 것은 예수가 성령을 통해 창조된 새 이스라엘의 유일한 대표자임

을 가리킨다.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에서62  ) 하나님은 예수가 그의 선택하는 사랑의 대 상이며,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승인을 나타

내는 이 표현은 예수가 자신에게 구별되어 맡겨진 메시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선언에 시편 2편 7절과 이사야

42장 1절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인용이

아니며 이 선언에서 다른 메아리를 듣는 것이 합당하다.63  )

59  ) 여러 가지 관점이 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Oxford, 1963), pp. 248-250; T. A. Burkill, op. cit., pp. 17-19에서 검토되지만, 유대교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강 력하게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둘기가 메시아 왕에 깃든 신적 능력을 상징한다고 믿지만, 이를 주로 뒷받침하는 것은 페르시아와 이집트 텍스트에서 온 것들이다. H. Greeven, TWNT VI (1959), pp. 64-68은 “비둘기”라는 용어를 범위를 넓혀 근동의 전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다.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유대교에서는 비둘기와 하늘의 음성을 연관 짓는 것이다(TB Berachoth

3a). 초기 교부들의 해석 및 현대적 해석에 대한 검토는 W. Telfer, “The Form of a Dove,” JThS 29 (1928), pp. 238-242를 보라.

60  ) 그 본문들은 TB Hagigah 15a; Gen. Rabba 2; Yalqut to Gen. 1:2다. “예수 세례의 우주적 의

미”에 대해 “불모의 시대는 지나갔고 새로운 피조물이 밝았다”라고 말하는 J. Jeremias, Jesus als Weltvollender (Gütersloh, 1930), p. 17 참고.

61  ) 참고, S-BK I (1922), pp. 123-124; T. A. Burkill, op. cit., pp. 18-19; A. Feuillet, “Le Symbolisme de la Colombe dans les récits évangéliques du baptême,” RSR 46 (1958), 524-544; J. de Cock, “Het symbolisme van de duif bij het doopsel van Christus,” Bijdragen 21 (1960), 363-376에서 논의된 본문들.

62  ) 하늘에서 오는 음성(‘바트 콜’, lAq tB; )의 개념에 대하여는 S-BK I(1922), pp. 125-132; II (1924), p. 128; J. Kosnetter, Die Taufe Jesu (Freiburg, 1936), pp. 140-190; H. Traub, TWNT V (1954), pp. 530-532를 보라.

63  ) 예, G. Vermes, Scripture and Tradition in Judaism (Leiden, 1961), p. 233은 이 선언이

73

마가복음

이 선언은 예수에 대한 독특한 평가를 제공한다.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

사야 42장 1절에 나오는 주의 종이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가 풍성해지지만, 주된 강조점은 그 아들의 신분에 있다. 이 문맥에서 “아들”은 메시아를 가

리키는 칭호가 아니라 메시아 직분을 초월하는 최고 수준의 의미로 이해되

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독특한 관계를 상징하며, 역사상

의 공식적 기능에 대한 그 어떤 생각과도 별도로 존재한다.64  ) 즉 예수는 하

나님의 유일한65  ) 아들이다. 이 선언의 첫 구절 (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 사용 ) 은 영

원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두 번째 구절 ( 직설법 부정과거 동사 사용 ) 은

역사에서 특정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과거의 선택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여

기 담긴 생각은 “너는 나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시작하려는

과업을 위해 너를 택했다”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66  ) 이 두 구절 사

이의 관계는 9장 7절의 선언에서 정확히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거기서 첫

구절의 선언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두 번째 구절인 “너희는 그

의 말을 들으라”의 근거를 제공한다. 예수는 세례나 변형의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성령을 수여할

자격이 있는 분이다. 하늘의 갈라짐과 성령 강림과 하나님의 선언은 예수의

본질적인 지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소명에 대한 예수의 복종의

우주적 의미를 나타내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기뻐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이 구절은 마가복음 서문에서 계시의 정점을 표시

하고 이어지는 모든 내용에 없어서는 안 될 배경을 제공한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사건은 자기 은폐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 그는 요

한에게 온 다른 사람처럼 세례를 받았다. 마가복음에는 예수 외에 다른 사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했다는 암시가 없다. 오직 부활과 그 사건이 가 능하게 한 계시의 관점에서만 복음서의 독자들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사 42:1과 창 22:2(“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려가라”)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 pp.

193-227에서 그는 이삭이 유대교에서 사랑하는 아들과 기꺼이 희생하는 전형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생각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에 함축된 모든 것을

예수가 성취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P. G. Bretscher, “Exodus 4:22-23 and the Voice from Heaven,” JBL 87 (1968), pp. 301-311은 출 4:22-23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한

것을 지적한다.

64  ) 참고, N. B. Stonehouse, op.cit., pp. 16-21; J. Bieneck, op.cit., 여러 곳.

65  ) 마가의 용어 ‘아가페토스’(ἀγαπητός)는 “단 하나의” 또는 “유일한”을 의미할 수 있으며(예, 창 22:2, 12, 16 70인역), 이런 생각이 마가의 마음에 존재할 수 있다. C. H. Turner,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JThS 27 (1926), pp. 113-129, 362를 보라.

66  ) 참고, N. B. Stonehouse, op. cit., pp. 18-20; T. A. Burkill, op. cit., pp. 19-20; M. D. Hooker, Jesus and the Servant (London, 1959), pp. 68-73.

74
람이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3. 광야에서의 유혹(1:12-13)

있다. 슐라터 ( A. Schlatter ) 는 그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한다. “그

는 죄인들과 어울리며 죄인의 대열에 서는데, 이는 스스로 구원을 얻기 위 함이 아니고,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여 도피한 자기 죄 때문도 아니고, 오직

교회와 하나이며 하나님의 자비의 전달자이기 때문이다.”67  )

3.

광야에서의 유혹(1:12-13)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 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 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2 And straightway the Spirit driveth him forth into the wilderness.

13 And he was in the wilderness forty days tempted of Satan; and he was with the wild beasts; and the angels ministered unto him.

12-13절 세례 기사는 예수의 광야 시련 기사로 이어진다. 두 사건 사이의

밀접한 연결은 “그리고 곧”이라는 문구에 나타난다.68  ) 예수가 광야로 몰려

나간 것은 세례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강림한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그를 광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한다.

마가의 유혹 이야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간결함이다. 마태나 누가와 비교해 볼 때 마가는 전승의 일부만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69  ) 이런 인상은

다른 복음서 기자의 눈을 통해 마가복음을 읽는

예수가 주의를 기울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세부

67  ) Der Evangelist Matthäus (Stuttgart, 1933), p. 89. A. Feuillet, “Le Baptême de Jésus d’ après l’Évangile selon Saint Marc,” CBQ 21 (1959), pp. 468-490도 보라.

68  ) D. Daube, op.cit., p. 47은 “그리고 즉시”라는 마가의 구절에는 “때가 되어서” 또는 “적절한 시

기에”라는 의미의 흔적이 있다고 제안한다. 즉 이것은 순전히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의 초기 전통이라고 가정하게 되었다. 참고, J. Schniewind, Das Evangelium nach Markus7/8 (Göttingen, 1958), p. 48; J. Dupont, “L’arrière-fond biblique du récit des tentations de Jésus,” NTS 3 (1956-57), pp. 294-295. H. Seesemann, TWNT VI (1959), pp. 34-35는

A. Feuillet, “L’épisode de la tentation d’après l’Évangile selon Saint Marc(1.12-13),’’ Est Bib 19 (1960), pp. 4973은 마가의 기사는 마태와 누가에 보존된 완전한 기사를 의도적으로 요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70  ) M. Dibelius, Die Formgeschichte des Evangeliums3 (Tubingen, 1959), p. 129.

75
오류를 야기한다. 이 기사 는 마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70  ) 이 짧은 절들은 요한의 광야 로의 부름에
더 신학적인
69  ) 설명이 간결하고 그 요소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해석자들은 1:12-13이 확장된
예 수의 유혹 기사를 전적으로 마태와 누가의 내러티브에 의거하여 다룬다.
것이다.

마가복음

적인 몇 가지 사항은 이 설명보다 덜 중요하다. 복음서 기자는 광야에서 선 포되고 세례를 받은 주님이 그곳에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을 포착 한다. 이것은 예수의 사명에 담긴 낮아짐 측면이 그가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계속 순종

해야 한다. 성령은 세례를 받은 후에 예수가 광야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13절의 기능은 이런 복종의 결과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즉 예수는

사탄과 유혹에 맞서고, 들짐승에게 노출되며, 천사들의 수종을 받는다는 것

이다. 12-13절은 프롤로그의 주요 주제를 설명하고 그 절정을 구성한다.

마우저 ( U. Mauser ) 가 정확히 보았듯이, “각 세부 사항은 구약의 광야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마가에게 사막이 갖는 중요성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한다.”71  )

예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정해진 시간인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

른다.72  ) 40일에 대한 언급은 모세가 시내산에 머물렀던 것과 엘리야가 광

야를 지나 호렙산으로 방황하던 때를 상기시킨다.73  ) 그들의 경우 40일이라 는 시간은 그들의 사명의 가장 내밀한 특성을 하나의 결정적인 기간으로

집중시킨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 기간 이전과 이후 모두 광야의 사람들 이다. 동일한 관점이 마가복음의 예수에 대해서도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다. 40일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기간을 묘사하는 것

이 아니라 그의 전체 사역을 관통하는 음을 낸다.74  )

유혹은 광야에 머물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 이 모티프는 구약

과 신약 모두에서 광야 전통과 자주 연관된다.75  ) 예수가 하나님의 일을 좌

절시키려는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 문제의 근본적인 성격을 강 조하는 역할을 한다. 회개하고 광야에 머물겠다는 예수의 결심은 필연적으

로 하나님의 대적과의 충돌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마가복음 1장

9-12절의 우주적 언어가 중요하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부름 및 예수의 응

답과 관련하여 인간의 결정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

71  ) Op,cit., p. 98. 이어지는 해석은 Mauser, pp. 98-101의 해설에 따른 것이다.

72  ) 어림수이자 상징적 수인 “40”에 대해서는 J. Bergmann, “Die runden und hyperbolischen Zahlen in der Agada,” MGWJ 82 (1938), pp. 370-375를 보라.

73  ) 출 24:18; 왕상 19:8, 15. G. Kittel, TWNT II (Eng. Tr. 1964), p. 658은 여기서 구약 전통 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경향이 있지만 W. Schmauch, Orte der Offenbarimg und der Offenbarungsort im Neuen Testament (Göttingen, 1956), p. 38을 보라.

74  ) 참고, U. Mauser, op.cit., p. 99.

75  ) 관련 구절들과 분석에 대해서는 H. Seesemann, op.cit., pp. 27, 32-33을 참고하라.

76

I. 복음서 프롤로그(1:1-13)

3. 광야에서의 유혹(1:12-13)

의 투쟁의 한 측면임을 나타낸다.76  )

마가가 사탄에 대한 예수의 승리나 유혹의 결말을 보고하지 않은 것은 의

미심장하다.77  ) 예수가 그 40일 동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도 않았고 유혹

받기를 그치지도 않았다는 것이 복음서 기자 마가의 독특한 이해다. 예수는

사탄과 유혹에 맞서기 위해 광야로 내몰린다. 이 대결은 그 자체로 중요한

데, 이는 예수의 사역 전반에 걸쳐 이 대결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마가가 유

혹의 내용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된다. 즉 그의

복음서 전체가 예수가 어떻게 유혹을 받는지를 설명해 준다.78  ) 마가만이 기록한 세부 사항은 예수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1장 12-13절은 일반적으로 사탄에 대한

들짐승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사탄과 유혹에 대한 새 아담

의 승리를 상징하며 그리하여 사람이 동물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낙원

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79  ) 그러나 프롤로그의 지배적인 모티프가 광 야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마가가 들짐승을 독특하게 언급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구약에서 복은 사람이 거주하고 경작하는 땅과 관련이 있고, 광야는 저주의 장소다.80  ) 광야에는 씨도 없고 열매도 없고, 물도 없고 자라

는 것도 없다. 사람은 거기에서 살 수 없다. 무섭고 반갑지 않은 동물만이

거기에 살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광야가 낙원으로 바뀔 때 거기에는 굶주

린 짐승이 없을 것이다 ( 사 35:9; 겔 34:23-28 ) . 마가복음 1장 13절에서 들짐승

을 언급한 것은 광야의 특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는 들짐승을 만

났을 때 광야에 가득 차 있는 공포와 외로움과 위험에 직면한다. 이 맥락에

76  ) 참고, J. M. Robinson, op.cit., pp. 26-28.

77  ) 마 4:11; 눅 4:13과 대조된다. 일반적인 의견은 사탄에 대한 예수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단순히 암시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 E. Lohmeyer, op. cit., p. 28; J. Schniewind, op.cit., p. 49; T. A. Burkill, op.cit., p. 21.

78  ) U. Mauser, op. cit., p. 100은 “드라마의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의 부름에 대 한 예수의 응답과 그 결과로 광야로 돌아가는 예수의 결정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탄의 권세의 대결이 일어난다는

79  ) 또한 J. Jeremias, TWNT I (Eng. Tr. 1964), p. 141; L. Goppelt, Typos. Die Typologische Deutung des Alten Testaments im Neuen (Gütersloh, 1939), p. 118; J. Schniewind, op. cit., p. 48; E. Fascher, “Jesus und die Tiere,” TLZ 90 (1965), pp. 561-570.

80  ) J. Pedersen, Israel,Its Life and Culture I-II (London-Copenhagen, 1926), pp. 453-470을

보라. U. Mauser, op. cit., p. 37, n. 2는 동물들이

77
예수의 승리에 대한 보도 로 이해되기 때문에 들짐승에 대한 언급은 낙원 모티프의 한 요소로 해석 되었다. 예수가
진술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광야를 차지한다고 말하는
구절의 목록을 제 시한다.

마가복음

서 들짐승은 낙원이 아니라 사탄의 영역과 관련된다.81  )

마가는 또한 천사들의 수종에 대해 언급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

하고 돕는 천사 모티프는 첫 번째 출애굽의 많은 이야기에서 두드러

진다.82  ) 그러나 마가의 기사와 가장 가까운 유사점을 보여 주는 것은 메마

한 천사가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는 열왕기상 19장 5-7절 이다. 마가가 복수의 천사들에 대해 언급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예수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마가복음에는 천사들의 수종이 그

쳤다거나 유혹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가 없다. 마우저가 말했듯이

“마가는 유혹, 들짐승과 함께 있는 것, 천사의 수종을 하나님과 사탄의 모

든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과정에서의 연속적인 사건들로 생각한다.”83  ) 이것이 적절한 설명이다. 예수의 사역에 대한 마가의 설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악마의 세력과의 대결과 지속되는 유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순종은 죽음과 소외를 가져온 이스라엘의 반역이 있었던 정확한 장 소인 광야에서 확인되고 유지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이룩될 수 있도록 한다.

81  ) U. Mauser, op.cit., pp. 100-101.

82  ) 예, 출 14:19; 23:20(막 1:2에 인용됨), 23; 32:34; 33:2.

83  ) Op. cit., p. 101. 끊임없는 유혹으로서 예수의 사역에 대한 유용한 요약문은 pp. 128-132에서

찾을 수 있다.

78
광야에서

갈릴리 사역의 초기 단계(1:14-3:6)

마가복음의 첫 번째 주요 부분은 1장 14절에서 3장 6절까지이며, 갈릴리

사역의 초기 단계를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복음서 기자는 첫 번째 제자들

의 부르심 ( 1:16-20; 2:14 ) , 가버나움과 그 주변에서 예수의 사역 ( 1:21-34 ) , 예수

의 죽음을 요구하는 결정 ( 3:6 ) 으로 절정에 이르는 일련의 논쟁 ( 2:1-3:6 ) 을 기

록한다. 새로운 섹션은 3장 7절에서 시작하여 6장 13절까지 이어진다. 복음 서의 이 첫 두 부분의 첫 단락들 사이에는 의식적으로 구성한 유사점이 있 는 것 같다. 첫 단락들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요약문으로 시작하여 ( 1:14-15; 3:7-12 ) 예수의 첫 번째 행동으로 제자들을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즉 1장

16-20절은 두 쌍의 형제를 부르는 것을 보도하고, 3장 13-19절은 열두 제

자의 선택에 대해 보도한다. 이 두 사건의 현장은

79
물러나는 곳인 바다 ( 1:16 ) 와 산 ( 3:13 ) 이다. 마가의 더 큰 맥락에서 이 요소들은 복음서 서문 에서 전개된 광야 모티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84  ) 84  ) 참고, U. Mauser, op.cit., pp. 108-119, 124-128. II

1. 갈릴리 입성(1:14-15)

14 요한이 잡힌 후85) 예수께서 갈릴리

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86)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87) 회개하고 복

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4 Now after John was delivered up, Jesus came into Galilee, preaching the gospel of God,

15 and saying, The time is fulfilled, and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repent ye, and believe in the gospel.

14-15절 요한이 잡힐 때까지 예수가 자신의 독특한 사역을 시작하지 않

은 것은 의미심장하다.88  ) 마가의 문구는 세례 요한이 현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예수의 선포 사역이 하나님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을 암시한다.89  )

요한이 잡힌 것은 예수가 행동할 때가 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는 갈릴 리에 들어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의미하는 바는 1장 15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선포의 요약으로 규정되며, 각각의 요소는 역사상 이 특정한 순간에 자기 아들을

85  ) RSV, NEB, “체포되다.” 헬라어 용법에서 ‘파라도데나이’(παραδοθῆναι)는 예컨대 “감옥에 넘

겨지다”와 같이 수식하는 구절을 사용하여 특정한 의미를 명확히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

서 이 단어가 “요한이 체포된 후”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식하는 구절이 없는 것은 요한

의 경험과 예수의 수난 사이의 유사점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일 수 있다. 즉 그 또한 “넘겨

졌다.” 참고, 9:31; 14:10; 15:1, 15. 파피루스와 비문에서 이 용어가 수식어 없이 사용될 때 감옥

이나 재판에 “넘기다”를 의미하는 경우의 예들에 대해서는 M-M, p. 483, παραδίδωμι 항목 3을

보라.

86  ) AV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A D W pm latt syp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롬 1:1; 15:16; 고후 11:7; 살전 2:2, 8-9에서도 발견되는 “하나님의 복음”만큼 잘 증명되지는 않는다.

87  )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위에 있다”라는 NEB 번역은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London, 1935), pp. 43ff.; idem, “The Kingdom of God Has Come,” ExT 48 (1936-37), pp. 138-172에서 정의된 바와 같은 실현된 종말론의 관점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 된 언어학적, 신학적 논거에 대한 검토는 R. F. Berkey, “ΕΓΓΙΖΕΙΝ, ΦΘΑΝΕΙΝ, and Realized Eschatology, JBL 82 (1963), pp. 177-187을 보라.

88  ) W. Marxsen, Der Evangelist Markus (Göttingen, 1956), pp. 22-24에 따르면, 마가의 기사

는 사건이 연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자아내는데 마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성했다는 것이다. 역

사적으로 요한이 체포된 것은 나중 일이다. 그러나 6:14은 예수와 요한의 활동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분리되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 준다. 예수를 죽었다 살아난 요한이라고 판단한 사람

들은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한 예수의 공개 활동은 요한이 체포되어 무대에서 사라

진 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동시대성이라는 인상이 아니라 연속성이라는 인상을 받

는다.” W. Wink, op.cit., pp. 8-10을 보라. 89  ) ‘파라도데나이’(παραδοθῆναι)라는 일반적인 용어, 특히 그 수동태에서 “요한과 관련된 인간들

의 계획과 행위 배후에 놓인 하나님의 목적과 행위를 깨달아야 한다”는 암시가 나타난다고 생각

하는 C. E. B. Cranfield, op.cit., p. 62를 참고하라.

마가복음 80

II. 갈릴리 사역의 초기 단계(1:14-3:6)

1. 갈릴리 입성(1:14-15)

보낸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을 명확히 한다. 때가 찼음을 강조하는 것은

계시와 구속의 역사에서 예수의 선포의 확고한 근거가 된다. 그것은 과거에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속함으로 미래의 활동에 대한 보증을 제공한 행동

하는 하나님에게 주의를 집중시킨다. 예수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고 선언

한다. 하나님은 새롭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여 궁극적인 구

원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한다.90  ) 하나님은 주권적인 결정으로 이 시

점을, 과거의 약속과 성취의 모든 순간이 경외심을 갖게 하는 하나의 순간

에서 각자의 의미를 찾는 결정적인 시점으로 만든다. 요한의 설교와 비교할 때, 예수의 독특한 말은 성취를 강조한다.91  ) 그 정확한 뉘앙스는 다음 문구 로 명확해진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단언했을 때의 의미는 어디에도 명시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강조는 그의 선포를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연결시키고 새로운 계시와 이전 계시 사이

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그 강조점은 하나님의 주도권과 행동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속사의 독특한 요소이다. 그것은

인간의 구속을 확보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강조점은 소외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역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근본적

으로 영향을 미치는 어떤 일을 하고 있고 또 어떤 일을 할 하나님에게

있다.92  )

90  ) ‘카이로스’(καιρὸς)의 결정성(decisiveness) 요소에 대해서는 G. Delling, TWNT III (1938), pp. 459-461; 그리고 방향성에서 명확하게 종말론적인 전체 문구에 대해서는, 같은 저자 TWNT VI (1959), p. 293을 참고하라.

91  ) 참고, H. Ridderbos, The Coming of the Kingdom (Philadelphia, 1962), p. 48: “‘때가 찼다’ 는 말은 위대한 미래의 문턱에 이르렀고, 그 문이 열렸으며, 하나님의 완성의 역사를 실현하기 위

한 전제 조건이 갖추어졌고, 그러므로 이제 결말 드라마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예수의 최초 선포는 아직 성취의 시작을 언급하지 않은 요한

의 선포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 시점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92  ) 주석이 갖는 한계로 인해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해설할 수는 없지만, 참고할 만한 가

치 있는 논문과 책이 많다.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은 K. L. Schmidt, TWNT I (Eng. Tr. 1964), pp. 565-593(언어학 및 신학적 배경); H. Ridderbos, op. cit.; 광범위한 참고문헌이 있는 G. E. Ladd, Jesus and the Kingdom (New York, 1964), pp. 337-351이다. 예수가 사용한 아람어

용어의 일차적 의미는 “나라”가 아니라 “주권”이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고 말할

때마다 탈굼은 하나님의 주권 행사에 대해 말하고 히브리어 동사를 아람어

81
명사로 번역한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세세토록 다스리실 것이다.” 탈굼 옹켈로스 “여호와의 주권이 영원무궁토록 있도다.” 사 40:10 “보라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임하실 것이요 그의 팔이 그를 위해 다스리

나라의 실현을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다 면 그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사역이 회개에 대 한 긴급한 요구에 초점이 놓였던 것은 하나님이 “오실 이”를 백성들 가운데 로 데려오기 위해 결정적으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예수는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는데, 그의 선포가 베일에 가려져 있는 동 안에도 마가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예수 자신의 출현

임을 분명히 이해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미래에 남아 있지만 그것이

확실히 정확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오심으로 그것을 이루기 시 작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언약 백성 가운데 이미 임재하고 있

고, 그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왕적 행위가 시작되었다. 그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으며, 공간적으로는 베일에 싸인 방식으로 그 나라를 구현한 예수의 인격으로 왔고,93  ) 시간적으로도 왔는데 그것은 종말 이전에

일어나는 유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인격 안에서 사람들은 가까이

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직면하게 된다. 복음 선포에 대한 신실한 응답은 필수적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권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

해 인간에게 전해진 말씀을 새롭게 되풀이한 것이다.94  ) 그러나 회개하라는 촉구의 긴박함은 날카로워졌다. 이제 복음의 본질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분 명해졌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3장 28절에서 마가가 보존한 무화과나무의

짧은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언을 반영하며, 왜

실 것이다.”

탈굼 “너희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날 것이다.”

특히 이 두 번째 예는 탈굼의 해석을 보여 준다. 즉 주님이 용사로 오시고 그의 팔이 그를 위해

다스린다는 것은 구원 행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의 계시를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개

념의 역동적 특성을 잘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오셔서 인간의 구속에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분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집이나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은 S. Aalen, “‘Reign’ and ‘House’ in the Kingdom of God in the Gospels,” NTS 8 (1962), pp. 215-240에서 옹호되었고 G. E. Ladd, “The Kingdom of God-Reign or Realm,” JBL 81 (1962), pp. 230-238에서 도전을 받았다. 93  ) C. E. B. Cranfield, op. cit., p. 66은 Tertullian, Adversus Marcionem IV. 33에 기록된 마르 시온의 다음 진술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엥기

켄’(ἤγγικεν)의 어휘적 배경과 의미에 대한 논쟁은 R. F. Berkey, op. cit., pp. 177-187에 요약

되어 있다. 제안된 번역인 “왔다”(has come)에 대한 언어학적 반대는 중대하며, 이 구절을 위에

서 정의된 대로 이해하여 “가까이 왔다”(has come near)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

94  ) 앞의 1:4 주석 및 H. W. Wolff, op. cit., pp. 129-148; E. Wurthwein, op. cit., pp. 976-985의

논의를 보라. 랍비 주석 전통에서 회개에 대한 논의는 아래 “랍비 문헌의 회개에 대한 추가 설명”

을 보라.

마가복음 82
하나님

II. 갈릴리 사역의 초기 단계(1:14-3:6)

2.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부르심(1:16-20)

그 사실이 인간에게 근본적인 요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한다. “그 가지가 연

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안다.” 즉 다음에 오는

것은 여름이라는 것이다. 사탄, 죄, 질병, 죽음에 맞서고 자연을 제압하는

예수의 행동은 그 끝이 인간의 미래에서 하나님의 다음 행동으로 서 있다

는 신호다.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준비는 되어 있지만 지체할 시간은 없다. 회개를 통해서만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기쁨으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 예수는 이에 따라 사람들에게 급진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예수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직면한다. 믿음과 불신앙이 결실을 맺는 결정적인 기간은 예수 그 자신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그 내용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심을 전달하기 위해 서다. 예수는 인간의 마지막 시간에 인간에게 주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으

로 서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순종하거나 이 세상과 그 부와 명

예를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결정의 양자택일적 성격은 매우 중요하

며 어떤 연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모든 것이다. 예수의 급진성, 하나님의 나라 선포는 사복음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나에게 가까

이 있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있고, 나에게서 멀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다”95  ) 라는 말씀에 잘 포착되어 있다. 예수는 비록 사람들

사이에서 베일에 싸여 있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거나 하나

님의 나라를 배척하는 결정적인 기간이 되는 것은 예수 자신이다. 그가 하 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2.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부르심(1:16-20)

16 And passing along by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Andrew the brother of Simon casting a net in the sea; for they were fishers.

17 And Jesus said unto them, Come ye after me, and I will make you to become fishers of men.

95  ) The Coptic Gospel of Thomas, Logion 82; Origen, Homily in Jer. XX. 3; Didymus the Blind, in Ps. lxxxviii. 8. 이 말씀에 대해서는 W. L. Lane, “Agrapha,” EC I (1964),pp. 110-

83
111을 보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 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 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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