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편집장 서문 │ 8
■ 저자 서문 │ 9
■ 약어 소개 │ 12
서론 21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 27
야고보: 누가 이 편지를 썼는가? • 37 야고보서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 • 66 야고보서의 구조는 무엇인가? • 76
본문과 주석 87
1. 인사말(1:1) │ 88
2. 그리스도인과 시련(1:2-18) │ 99
2.1. 시험의 목적(1:2-4) • 100
2.2. 시험 중에 필요한 지혜(1:5-8) • 115
2.3. 가난과 부는 시험이다(1:9-11) • 127
2.4. 하나님, 시련과 시험(1:12-18) • 140
3. 일반 권면(1:19-27) │ 175
3.1. 말에 대한 권면(1:19-21) • 176
3.2. 들음과 행함에 대한 권면(1:22-25) • 189
3.3. 순전한 경건에 대한 권면(1:26-27) • 209
4. 그리스도인과 차별(2:1-13) │ 223
4.1. 모순(2:1-4) • 224
4.2. 질문(2:5-7) • 243
4.3. 가르침(2:8-13) • 259
5. 그리스도인과 행함(2:14-26) │ 285
5.1. 질문(2:14-17) • 287
5.2. 도전과 응답(2:18-26) • 297
6. 교사를 위한 일반 권면(3:1-4:12) │ 334
6.1. 교사와 혀(3:1-12) • 334
6.2. 교사와 지혜(3:13-18) • 374
6.3. 교사와 불화(4:1-10) • 399
6.4. 교사와 공동체와 혀(4:11-12) • 448
목차
7. 메시아 공동체와 부자들(4:13-5:11) │ 459
7.1. 주제넘음의 죄(4:13-17) • 459
7.2. 억압의 죄(5:1-6) • 475
7.3. 부자에 대한 메시아 공동체의 대응(5:7-11) • 500
8. 마무리 권면(5:12-20) │ 527
8.1. 맹세(5:12) • 527
8.2. 공동체의 기도와 치유(5:13-18) • 535
8.3. 세 가지 교회 상황과 세 가지 응답(5:13-14) • 537
8.4. 믿음의 기도 필요성(5:15A) • 548
8.5. 죄 사함의 약속(5:15B) • 550
8.6. 고백에 대한 권면(5:16A) • 553
8.7. 의인의 기도 필요성(5:16B-18) • 557
8.8. 공동체의 회복(5:19-20) • 562
■ 참고문헌 │ 574
오 하나님, 우리 주의 형제인 당신의 종 야고보의 모범을 따라 당신의 교 회가 계속 기도에 전념하고 갈등과 적개심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을 화해
시키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옵소서. 당신과 성령과 함께 살아 계
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분이신 하나님, 이 제와 영원토록. 아멘. 공동기도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
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 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명기 10장 17-18절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
리라 누가복음 6장 40절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기꺼이 할례
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지 자문했다. 한
세기 후, 모세의 율법을 지킨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자문하
는 이는 이교도 그리스도인이었다.
피에르 앙투안 베른하임, 『예수의 형제 야고보』
야고보서는 복권되었다.
발터 빈데만, “지혜 대 지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본문에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
는 질문이다.
루크 티모시 존슨, “지혜롭게 지혜 읽기”
┃ 편집장 서문┃ 제임스 애덤슨이 쓴 최초의 야고보서 주석이 ( 1976년에 ) 이 시리즈로 나온 지 이제 35년이 지났다. 이 주석은 출판 이후 훌륭하게 시대를 섬겼으며, 그러는 동안 야고보서에 대한 관심과 학술 문헌이 상당한 규모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바른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루터의 저주스러운 선언 아래 너 무 오랫동안 고투를 해 왔던 개신교계에서는 너무 늦은 셈이었다. 이 주석
은 이처럼 절실히 필요한 교정을 이루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사람
이 집필했다.
금세기 들어, 벧엘 신학교의 도널드 버스퍼트에게 위의 주석을 대체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러나 그는 2004년에 5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로 인해 이 주석 시리즈의 해당 책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몇 년 후에 스캇 맥나이트가 이 작업을 맡겠다고 승낙한 것
은 상당히 기쁜 일이었다. 이 주석을 읽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
나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는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 주석은 폭넓은 독자층이 소화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통찰로 가득
차 있고 또 한편으로는 ( 너무 자주 간과되고 있지만 ) 뛰어난 감각과 번득이는 재치
┃ 저자 서문┃
내가 야고보서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내 수 업을 듣는 학생은 대부분 신학대학원생이었고 우리는 헬라어 본문을 파고
들면서 표준적인 주석서를 읽었다. 이 주석은 그런 배경에서 비롯되었고 그
것을 반영한다. 헬라어 본문을 파헤치는 것과 함께, 나는 이를 악물고 몇 권
의 주석책을 읽었는데, 여기에는 호르트, 메이어, 디벨리우스, 미턴, 데이비
즈, 로스, 마틴, 이 시리즈의 전임자인 애덤슨의 주석 및 야고보서의 신학에
대한 애덤슨의 방대한 저서도 포함된다. 그 당시 내 동료 더글러스 무도 분
량이 적은 야고보서 주석을 집필하고 있었고 우리는 왕래하면서 야고보서
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발견한 사항에 대해 처
음 느낀 흥분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주석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보너스는
더글러스 무가 야고보서의 두 번째 주석을 썼으며 이 주석을 마지막으로
준비하던 중에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을 읽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학생이자
동료였으며 친구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노스파크 대학교의 전 동료
이자 고전학자인 데이비드 니스트롬도 야고보서 주석을 썼다. 나는 그가 설 교자에게 가장 유용한 주석 (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을 쓰고 있을 때 그와 야고보
서에 대해 여러 차례
야고보서
에 앞서 어떤 본문을 떠날 때마다 더 많은 소통을 할 가치가 있는 학자를 무시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제 와서 내가 소홀히 했던 사람, 내게 가르
침을 주었던 사람, 각주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에게 사과 한다. 그러므로 이 주석은 야고보서 본문과 나 자신의 소통 및 상호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회자, 설교자, 교사를 위해 집 필했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교회를
위한 ’ 주석이다. 나는 이 책이 ‘스키엔티아’( scientia ) 만큼이나 ‘사피엔티
아’( sapientia ) 이기를, 즉 학문만큼이나 지혜도 되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야고
보서를 두고 논쟁을 벌일 만한 지론이 없다. 어떤 이는 모든 구절마다 지혜
주제를 찾지만, 다른 사람은 모든 곳에서 빈곤을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어디
에서나 이념적 수사학을 찾는다. 나는 그런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연구를 통
해 배우고 익혀왔지만, 나의 관심은 새로운 빛을 비추는 데 있지 않고 회중
과 학생에게 야고보서와 야고보서의 중요성을 설명하려는 설교자와 교사를
위한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나는 이 주석 전체에 걸쳐 내가 선호하는 두 역본 NRSV와 TNIV를 비교
하며 작업했다. 내가 이 주석 집필에 뛰어든 후에 존더반 출판사는 TNIV 출
판을 중단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내가 이 주석에서 TNIV를 사용한 것은 이
제 유용한 번역 하나에 대한 기념비 역할을 할 것이다.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 시절 대학원 조교였던 존 레이먼드는 나
를 오랜 세월 시험대에 세웠던 야고보서 서지 목록을 훌륭하게 작성해 주 었다. 현재 노스파크 대학교 조교인 크리스 리지웨이는 잘못하면 분명히 이
주석의 완성을 지연시켰을 서지 작업을 맡아 주었다. 그의 도움에 감사를 표한다. 노스파크 대학교 브랜델 도서관의 일레인 핼러머에게는 그의 비범 한 근면함과 기량에 대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사해야 할 것이다. 현
재 교수로 있는 내 예전 제자 중 몇몇이 이 원고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읽어
주었고, 여기서 샘 레이머슨, 더그 허프먼, 매트 윌리엄스, 존 룬드, 스티브
브라이언 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동료인 조엘 윌리츠와 야고보서
에 대해 수시로 토론을 즐겼다.
어드만 가족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이유 중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학생 시
절 내가 그 서점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케이시 램버그스테와 친구가
되었으며, 언젠가 이 시리즈에 주석을
와 컵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마태복음 계획에서 발을 뺀 후 야
고보서에 대해 집필하도록 초대한 것을 두고 고든 피의 후의에 감사한다.
또한 편집 가운데 인내심과 세심한 배려를 보여 준 존 심슨과 색인 작업에
도움을 준 드루 스트레이트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이 책은 손자 악셀 도노번 넬슨 맥나이트에게 바친다. 그는 내 아들 루카
스와 그의 멋진 아내 아니카가 우리 가족에게 준 선물이다.
잠시 묵념 시간을 갖자. 야고보서 독자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지혜로운 야고
보서 학자 도널드 버스퍼트를 이미 그리워하고 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연약함뿐 아니라 이 편지를 둘러싼 우리의 동료애를 의식
적으로 깨닫게 한다. 돈의 뛰어난 기여는 더 큰 기여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καρπὸς δὲ δικαιοσύνης ἐν εἰρήνῃ σπείρεται τοῖς ποιοῦσιν εἰρήνην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장 18절
* 한글 성경 본문은 개역개정을 사용했다. 또한 저자가 부기한
서론
야고보서를 가르칠 때 우리는 교실 앞으로 걸어가 칠판에 큰 글씨로 다음 과 같이 적어야 한다.
야고보서를 읽으라!
그런 다음에 그 밑에 다음과 같이 적어야 한다.
먼저, 야고보에 비추어 야고보서를 읽으라!
오늘날 학자들은 “역사적 야고보”와 유대 기독교에서 야고보의 지위에 몰
입하고, 유대와 로마와 그리스 사이의 유사성에 전념하여, 이전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던 매우 유사한 점이나 단순히 유사한 점을 발견하는 사람
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야고보를 그의 동시대 사람이나 자료와 (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 초기 기독교 문헌과 비교하여 읽는 것이 해석자에게 때로 극적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다른 본문을 통해 야고보서를 읽
는 것은 간혹 독자도 그 본문에 비추어 야고보를 읽게 하고 두 본문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물론 이것은 이른바 순환 논리에 해당
야고보서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야고보가 자신의 문화적 환
경에서 얻은 모든 것에 대해 부여하는 구체적인 메시아의 윤곽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 저술이 주석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아
니, 주석이 역사 저술을 조명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제
땅에 말뚝을 박은 나는 마거릿 미첼의 지혜로운 경고 앞에 서 있다. 미첼은 “그렇다. 야고보서를 그 자체의 용어에 입각해서 읽되, 야고보의 세계에 나
타난 용어 하나가 바울의 것이라면, 바울과 소통 및 상호작용하면서 야고보
서를 읽어 보라”라고 주장한다.1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야고보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혼자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음 내용에서 우리는 야고보
서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본문 전체에 걸쳐 유사점을 인용할 것이다. 그
러나 우리는 야고보를 야고보 자신의 용어로 야고보의 세계에서 읽는 법을 배워야 하고 ( 그 순서대로 ), 이 편지를 공부하는 것이 단순히 “역사적 야고보”
나 “유대 기독교”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배울 필요가 있다. 야고보서는 독특한 문서다. 문학적 수준에서 볼 때, 실제로 고대 편지, 수 필, 설교 가운데 야고보서와 비슷한 것은 없다. 역사적 수준에서 볼 때, 초
기 기독교 문헌 가운데에도 야고보서와 어느 정도 유사한 것은 없고, 다만 그것의 연관성과 기원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다.2 ) 야고보서는 적어 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최초의 기독교 문서며 여러 면에서 신 학적 발전을 예견하거나 그에 선행한다. 우리는 야고보서가 부분적으로는 소아시아나 어쩌면 안디옥에서 바울의
M. M. Mitchell, “The Letter of James as a Document of Paulinism?” in Webb and Kloppenborg, Reading James, 75-98.
야고보서 본문의 편
집 층에 이르는 역사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지만, 일부 사람에게 방법론
적으로 지지할 만한 것이 되었다. 오래된 것이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유용한 스케치로 Cargal, Restoring the Diaspora, 1-8이 있다. 또한 Penner, “The Epistle of James,” 280-287의 간략한
스케치를 보라. 2 ) Konradt, Christliche Existenz, 317-338에서 이 문제의 복잡성을 보라. 야고보서의 학문적 주제에
대한 대가다운 스케치는 Penner, “The Epistle of James”를 보라(진지한 학생들이 시작하기에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다음도 보라. Hahn and Miller, “Der Jakobusbrief”; Myllykoski, “James the Just”; Klein, “Ein vollkommenes Werk,” 15-32; B. D. Chilton, “James, Jesus’ Brother,” in The Face of New Testament Studies (ed. S. McKnight and G. R. Osborne; Grand Rapids: Baker, 2004), 251-262.
한 형태로 보고 있다.3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이스라엘”, 성전, 안식일 같은 유대교의 많은 중심 사상과 제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4 ) 유대교 내에서 이 편지는 집회서 같은 본문과 잘 어
울리고, 그리스·로마 수사학 및 문학 세계와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대응 관
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과의 연관성 그리고 디다케와 바나바서신, 섹스투스의 어록과 실바누스의 가르침, 특히 클레멘스1서와
헤르마스의 목자와 훨씬 간결한 위 포킬리데스 어록 같은 본문과의 연관성
에서도 때때로 놀라움을 안겨 준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특별한 성격을 형성 하는 것은 야고보서의 실체적 내용인데, 유대·기독교 환경에서 토라 준수
를 새로운 열쇠로 지혜 및 종말론과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5 )
야고보서는 한꺼번에 여러 방면으로 충격을 주고 있어서 역사학자든 신 학자든 목회자나 그리스도인까지 이에 도전을 받을 정도다. 어쨌든 스스로
하나의 공동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표면적으로는 다른 공동체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저자가 쓴 문서인 야고보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많은 학자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의 “삶의 자리”는 여전히 모 호하고 파악하기 어렵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이나 적어도 유대교에 기반 을 둔 환경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이지만, 그 수신인의 위치는 디 아스포라 전역의 어느 곳이든 가능하다.6 ) 오늘날 우리가 교회 세계로
야고보서에 대해 불편해할수록,7 ) 그들
3 ) F. Mussner, “Rückbesinnung der Kirchen auf das Jüdische. Impulse aus dem Jakobusbrief,” Catholica 52 (1998) 67-78; J. Neusner, “Introduction: What Is a Judaism?”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 Jesus, 1-9. “유대교의 한 형태”임을 확인하기 위한 노이스너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이스라엘’로 간주하는 집단에 의해 제시된 종교 체계로, 여기서 이스라엘은
고대 히브리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공동체의 지금 여기서의 구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히브리
어 성경이 그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유대교가 하나의 통일된 믿음과 실천 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는 타성이다. 다음도 보라. C. A. Evans, “Comparing Judaisms,”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 Jesus, 161-183; Penner, The Epistle of James and Eschatology, 75-103; P. H. Davids, “Palestinian Traditions in the Epistle of James,” in Chilton and Evans, JamestheJustandChristianOrigins, 33-57; 같은 책에 실린
3-15.
4 ) 이에 대해 다음을 보라. W. Popkes, “The Mission of James,”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ofJesus, 90.
5 ) Penner, The Epistle of James and Eschatology, 214-256은 이런 연관성의 더 깊은 수준 외 에도 야고보서가 더 큰 스펙트럼에서 어디에 “적합한가”에 대해 보기 드문 통찰력을 보여 준다. Cheung, Genre,Composition, 240-271도 보라.
6 ) 다음을 보라. Bauckham, WisdomofJames, 185-187.
7 ) 이에 대해서는 Mussner, 42-47을 보라. 또한 야고보를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Calvin,
야고보서
은 바울을 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이 주석으로 보여 주
고 싶다. 야고보서는 목회적 차원에서 보면 지혜뿐만 아니라 강력하고 거친
수사학도 제공한다. 야고보서의 지혜 차원은 현대 독자 및 포스트모던 독자
도 끌어들인다. 이 수사학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야고보서를 경계하지
만,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이 저자의 능력에 감동을 얻는다. 재세례파 학자인
큰 소리로 읽어 주고
그 말씀을 엠마 골드만이 쓴 글이라고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싱클레어가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졌고 골드만이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사실
은 목사들이 즉시 골드만의 추방을 요구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왜 일단의 목사들이 야고보서가 비록 혼란스러운 성경이긴 해도
기억할 법한 야고보서 5장 본문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8 ) 이런
목회적 무지에 대해 엘사 타메스가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
음과 같은 말로 선지자 같은 야고보서 연구를 시작한다. “야고보서를 폭력 과 착취로 고통받는 특정 국가의 기독교 공동체에 보낸다면, 정부 보안 기
관에서 그것을 가로챌 가능성이 매우 클 것이다. 그 편지는 전복을 꾀하는
문서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9 ) 그래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비록 자
신 있게 역사적 맥락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 해도, 야고보서의 목소리에는
경제적 불의와 심지어 공공 정책에 대한 몇 가지 강력한 발언이 있어서, 우 리 중에 편안하게 사는 다수를 불편하게 만든다.10 ) 그 목소리는 힘을 가진 많은 사람 사이에서 불편할 정도로 조용하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그 똑같은 목소리는 귀를
276-277(“The Argument”)도 보라.
8 ) R. A. Sider, RichChristiansinanAgeofHunger (5th ed.; Nashville:W, 1997), 133.
9 ) Tamez, Scandalous Message, 1. A. Batten, “Ideological Strategies in the Letter of James,” in Webb and Kloppenborg, ReadingJames, 7에서는 타메스의 책에 대해 보니노가 쓴 책 커버 논평 (어떤 부유한 칠레 교회에서 야고보서를 공개적으로 낭독했을 때 회중의 절반이 교회를 떠났다고 말하는)을 반복한다. 다음도 보라. Maynard-Reid, PovertyandWealthinJames.
10 ) 다음을 보라. D. Warden, “The Rich and Poor in James: Implications for Institutionalized Partiality,”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3 (2000) 247-257; 다음도 보라. C. L.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Grand Rapids: Eerdmans, 1999). 야고보서가
R. Crotty, “Identifying the Poor in the Letter of James,” Colloquium 27 (1995) 11-21.
J. Kameron Carter, Race: A Theological Accou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B. Blount, Then the Whisper Put On
서론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크 트웨인 ( Mark Twain ) 의 유명한 말을 따르자면 이렇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야고보서의 맥락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본문 의 단어다.12 )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이야기 ( Story ) 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어 주고, 각자 뉘앙스와 차이는 있지만, 각 성경 저자
의 생각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거시적 구성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렇게 성경을 묶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합치면 히브리어 성경
Flesh: New Testament Ethics in an African American Context (Nashville: Abingdon, 2001);
L. L. Enis, “Biblical Interpretation among African-American New Testament Scholars,” CBR 4 (2005) 57-82. 특히 야고보서의 경우 다음을 보라. M. P. Aymer, First Pure, Then Peaceable: FrederickDouglassReadsJames (LNTS 379; London: Clark, 2007); Byron.
12 ) 여기서 시작하기에 좋은 곳은 Wall, 234-247의 보론이다.
13 ) 다음을 보라. A.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471-514; Thiselton on Hermeneutics (Grand Rapids: Eerdmans, 2006); The Hermeneutics of Doctrine (Grand Rapids: Eerdmans, 2007), 62-80, 541-581; N. T. Wright, TheNewTestamentandthePeopleofGod (Minneapolis: Fortress, 1992), 47-80, 215-279, 371-443; The Last Word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5); Simply Christian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2006); K. Vanhoozer, The Drama of Doctrin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2005, 『교리의 드라마』,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7);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Grand Rapids: Zondervan, 1998). 시야를 넓혀 보면 다음 책들도 중 요한 추세를 나타낸다. G. Loughlin, Telling God’s 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W. A. Kort, Story, Text, and Scripture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88); T. Work, LivingandActive (Grand Rapids: Eerdmans, 2002).
구약 성경 자체는 본문 간, 본문 내
보여 주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Goldingay, Israel’sGospel; P. Enns, InspirationandIncarnation (Grand Rapids: Baker, 2005). 오늘날 타나크가 어떻게 읽히는지를 보여 주는 유대인 학자 중에는 다음
이 있다. J. L. Kugel, How to Read the Bible (New York: Free, 2007); M. Z. Brettler, How to ReadtheJewish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초대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는지에 대한 문헌은 방대하다. 먼저 그리고 자주 읽어야
는 최초 본문 중 하나는 이레나이우스, 『사도 설교론』이다. 이야기가 일어난 일의 핵심으로 여겨
지는 초기 기독교 성경 읽기에 대한 좋은 스케치는 다음을 보라. R. E. Heine, Reading the Old Testament with the Ancient Church (Grand Rapids: Baker, 2007). 14 ) 나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하나님의 형상”) 대신 ‘에이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마
고 데이’는 너무 자주 거론되었고 지나치게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A Community
‘에이콘’인 그리스도를 통한 구
‘에이
콘’ 연합의 완성 ( 계 21-22장 ) 이
) 라고 보는 것 이다.16 )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로 이해한다. 사실, 성경
각 책은 비록 각 저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더라도 이 하 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인해 그 언약
이 깨졌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1:1 ) 에서 그 깨졌던
언약이 고쳐지거나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야고보서는 성경을 ( 본문 상호 간 읽
기를 통해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장이 새롭게 덧붙어 구성된 이야기로 읽
는다.17 ) 그러나 야고보는 그 이야기를 대체가 아닌 성취로 읽는다. 즉 야고
보의 편지는 열두 지파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뜻인 모세의 토라
를 따라 살 것을 촉구한다.18 ) 그러나 여기서도 야고보가 그 이야기에 특별
한 영향을 미쳤음이 드러난다. 즉 야고보는 예수가 가르친 대로 토라를 읽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사랑 ( 1:12 ) 과 이웃 사랑 ( 1:25; 2:811 ) 의 결합을 통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야고보는 윤리에 대해서 셰마 ( 신 6:4-9 ) 라는 렌즈와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 레 19:18 ) 을 통해 토라를 읽고 해석하고
적용한다.19 ) 야고보가 셰마를 열쇠로 윤리를 해석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과
Called Atonement, 17-22를 보라. 15 ) 이야기로서 야고보서에 대한 표준적이고 보완적인 접근에 대해서는 Wall, 특히 23-34, 275306을 보라. 여기서 야고보서는 교회의 정경적 맥락 안에서 검토되는데, 특히 (바울의 것이 아 닌) 신약의 두 번째 서신에서 야고보가 어떻게 작업하는지가 중점적으로 검토된다. 또한 Painter, “James as the First Catholic Epistle,” 245-247의 관찰 사실도 보라. 신약 성경의 초기 배열 중
다수에서 “공동”서신은 사도행전 뒤 그리고 바울서신 앞에 위치했고, 이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서
신의 첫째 자리에 오게 된다.
16 ) 다음을 보라. C.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L. Pachuau, “Missio Dei,” in DMT 232-234.
17 ) W. Popkes, “James and Scripture: An Exercise in Intertexuality,” NTS 45 (1999) 213-229에
서 최근의 견해를 보라.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의 바탕에 놓여 있는 고전적인 연구는 M.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Oxford: Clarendon, 1988)이다. 야고보서
와 관련하여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에 접근하는 좋은 예는 Bauckham, 29-111이다.
18 ) 다음을 보라. Ludwig, Wort als Gesetz; R. Wall, “Law and Gospel, Church and Canon,” WesleyanTheologicalJournal 22 (1987) 53-55.
19 ) 야고보서에서 셰마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연구 중 하나인 Edgar, “Love-Command”
를 보라. 나는 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린 후에야 에드거의 연구를 보게 되 었다. 야고보서의 여러 곳에서 TheSentencesofPseudo-Phocylides, 9-21과 비슷하게 레 19장
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는 존슨도 보라. Johnson,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123-135를
서론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유대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
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준다. 제이컵 노이스너는 다른 관점에서 ( 그럼에도 불
구하고 야고보와 셰마에 대한 우리의 요점을 보완하는 관점에서 ), 죄, 회개, 속죄, 심판, 영생
에 대한 전형적인 유대교/랍비 패턴이 야고보서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따라서 그의 신학이 유대교 세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했다.20 )
야고보는 바울, 베드로, 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더 교훈적이고 구원론적
인 열쇠21 ) 가 아니라 도덕, 지혜,22 ) 선지자23 ) 의 열쇠로 하나님의
구속에 대
보라. 내 판단에 존슨은 때때로 증거를 확대 해석하지만, 야고보서가 레 19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는 전체적인 논지는 철저한 검토로 뒷받침된다. 그 논지의 기본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약 2:8은 레 19:18b의 70인역을 인용한다.
(2) 이 인용은 레 19:15에서도 볼 수 있는 “편파성”(약 2:1, 8, 9)이 그 틀을 이룬다.
(3) 약 5:4은 레 19:13을 암시하지만, 존슨은 위 (1)과 (2)의 누적 효과에서 암시를 찾는다.
(4) 약 4:11; 5:12; 5:20은 레 19:12-18을 암시한다.
따라서 존슨은 레 19:12, 13, 15, 16, 17b, 18a, 18b절이 암시 또는 인용되고 있다고 본다.
20 ) J. Neusner, “Sin, Repentance, Atonement and Resurrection: The Perspective of Rabbinic Theology on the Views of James 1–2 and Paul in Romans 3–4,” in Chilton and Evans, Missions, 409-434.
21 ) 그러나 야고보서에는 구원론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Konradt, Christliche Existenz를 보라. 이 런 주제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Penner, “Epistle of James,” 275-280의 스케치 및 J. E. Botha, “Soteriology under Construction: The Case of James,” Acta Patristica et Byzantia 17(2006) 100-118을 보라.
22 )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Hoppe, Der theologische Hintergrund; Frankemö lle, 2.561-571; Burchard, 155-158; 위의 참고문헌에 열거된 하틴(Hartin)의 많은 연구; Verseput, “Wisdom”; B. Chilton, “Wisdom and Grace,” in Chilton and Evans, Missions, 307-322; Johnson, “Reading Wisdom Wisely”; E. Borghi, “La sagesse de la vie selon l’épître de Jacques. Lignes de Lecture”, NTS 52(2006) 123-141(야고보서에 따르면 지혜의 삶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임을 보여 준다)을 보라. P. Perkins, “James 3:16-4:3,” Int 36(1982) 283-287도 보라. 야고보서에 나
타난 증거의 스케치는 명확하고 포괄적인 연구인 R. F. Chaffin, Jr., “The Theme of Wisdom in the Epistle of James,” ATJ 29 (1997) 23-49에서 찾을 수 있다. 때때로 “지혜”라는 용어는 야고보서 연구에서 정형적인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정의하지 않고
사용된다. 야고보서에 지혜 주제가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혜에서 더 중요한 핵심 주제 중
이 세상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지를 아는 필수적인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주를 경외하
는 것”, 지혜를 아들에게 전수하는 것, 창조 및 인과관계로 묶여 있는 삶의 관찰에서 유도된 통찰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열성적인 해석자라면 이 본문에서 너무 많은 지혜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나는 버스퍼트의 다음 말에 동의한다. “요컨대 야고보의 편지는 확
실히 권면이며, 그런 이유로 미시적 수준에서는 지혜 교훈 장르와 다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독자에게 자신을 지혜 성찰의 산물로 드러내지 않는다”(“Wisdom,” 706). 버스퍼트는 “익숙한
지혜 형태라는 주변적 의미 또는 특수한 경우를 위한 지혜 분위기의 암시에 있어서만” 지혜인 편
지에서 지혜는 “주변적 모티프”라고 말한다(706).
23 ) Penner, The Epistle of James and Eschatology. 대리언 로킷(Darian Lockett)은 유대 세계 에서 지혜, 예언, 종말론의 결합이 야고보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The Spectrum of Wisdom”을 보라. 잘 알려진 이 사해 두루마리 본문은 1Q26 및 4Q415-18, 423의
야고보서
한 이 하나의 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종말론은 바벨론
포로와 예루살렘 멸망 같은 역사 차원에서든, 마지막 심판에서든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 4:11-12; 5:7-11 ) 24 ) 그렇다면 야고보
서를 움직이는 것은 교회적, 종말론적 지혜 윤리이며,25 ) 많은 사람이 “정상
적인” 초기 기독교적 방법, 즉 ( 바울 ) 구원론의 방법이라고 이해한 것이 아 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야고보의 초점은 선을 행하고, 올바른 방식으로
말하고, 연민과 자비의 사회경제적 방식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
므로 야고보는 ( 무자비한 ) 부자, 사랑 없는 실직자, 무자비한 권력 남용, 무자 비하게 분열하고 살인하는 교사를 선지자적인 가시 돋친 말의 목표로 삼 는다. 이 편지에는 우리가 초대 교회 및 초기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해 알
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이 없다.26 ) 야고보를 신약의 다른 저자와
비교하는 사람은 결국 바울과 비교하여 야고보서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어떻게든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게 되며, 야고보서는 평가자의 눈높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울리히 루크는 야고보서에 대해 “실 질 능력 없는 언어 능력”( “eine Sprachkompetenz ohne Sachkompetenz” ) 을 소유한다
고 교묘하게 말하고, 우리는 착오로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27 ) 우리의 결론
은 야고보서가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초대 교회
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야고보를 스펙트럼의 한쪽 끝, 즉 가장 오른쪽 끝에
놓고 바울을 반대편 가장 끝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좀 더 신중하게 분
석해 보면 야고보가 초대 교회의 큰 그림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했음을 알
게 된다.28 ) 사실, 초기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의 한 가지 공통점인 유형론에
는 완전한 율법 준수 ( 할례를 받은 자든 받지 않은 자든 ) 를 주장하는 집단부터, 십계
명과 절기 준수를 요구하는 집단까지,
최소 6개 사본에서 발견된다.
24 ) 특히 M. Klein, “Ein volkommenes Werk”를 보라. Wachob, “Apocalyptic Intertexture”도 보라.
25 ) 다음을 보라. Hartin, Jamesandthe“Q”SayingsofJesus, 35-115, 199-217.
26 ) 다음을 보라. Hengel, Between Jesus and Paul; C. Setzer, Jewish Responses to Early Christians (Minneapolis: Fortress, 1994); Stegemann and Stegemann, The Jesus Movement; E. Schnabel, Early Christian Mission (2 vols.; Downers Grove: InterVarsity, 2004); A. Patzia, TheEmergenceoftheChurch (Downers Grove: InterVarsity, 2001).
27 ) 다음을 보라. U. Luck, “Die Theologie des Jakobusbriefes,” ZTK 81 (1984) 11.
28 ) 특히 다음을 보라. G. Boccaccini, Middle Judaism: Jewish Thought 300 B.C.E. to 200 C.E. (Minneapolis: Fortress, 1991), 213-228; Martin, xxxiii-xli; 아래 2:14-26에 대한 주석
Penner, The Epistle of James and Eschatology, 15-32를
서론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이런 유형론에서 보면 야고보는 할례 없는 율법 준수 집단에 속하고, 베드
로는 야고보와 함께 하지만 바울처럼 최소한의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집단
에 기울어져 있었으며, 바울은 헬라파보다는 더 보수적이었던 것이 거의 확
실하다.29 ) 이런 모든 유형론은 기복이 심한 현실에는 결코 맞지 않지만 적
어도 우리에게 초기 메시아 신앙의 다양성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말하자면, 야고보가 다른 ( 이야기 ) 선택 가능성도 있고 그를 통해
동일한 관심을 끌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이다.30 ) 그
런 선택지를 열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단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 원시 랍비주의가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유대교
각 차원의 다양성을 고려하여 갈릴리 지역 유대교나 유대 지역 유대교 같은
구별을 무시하지 않고, 메시아적 유대교나 유대 기독교 초기 형태의 다양성 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31 ) 오늘날 많은 사람이 다른 방향을 모색하면서 로
마나 그리스 맥락에서 야고보서를 읽어야 하며 이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고 주장한다. 야고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데
는 모두가 동의한다. 실제로 야고보는 유대의 다른 목소리 ( 그리고 초기 기독교, 로
마, 그리스 ) 와 대화하는 하나의 목소리로서 열두 지파 이야기와 메시아 예수 이야기를 다룬 축약본을 구성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런 대화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개인적인 것이며, 꼭 지적 견해와 신 학적 입장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출현하여 모습을 갖추어 가 면서 여러 사상이 서로 뒤엉키고 표면화하는 과정에서 신학은 지적, 신학 적, 철학적 입장보다는 사도적, 예언적, 목회적으로
베드로, 바울, 바나바, 스데반의 목소리 같은 다른 목소리와 섞여
29 ) 다음을 보라. R. E. Brown and J. P. Meier, Antioch and Rome: New Testament Cradles of Catholic Christianity (New York: Paulist, 1983). 야고보가 그런 스펙트럼에서 어디에 위치하
는가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Pratscher, Der Herrenbruder Jakobus를 보라. 프라처는 자신의 생
애 동안 야고보의 중재 역할을 강력하게 밀어붙였고, 그래서 이것은 나중에 반바울주의라는 과장
된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는 후대 그리스도인을 위해 한 가지 역할을 했는
데, 다양한 집단이 야고보서에 대해 저마다 고유의 견해를 형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30 ) 특히 Hartin, JamesofJerusalem을 보라.
31 ) 이 주제에 대해 오래되긴 했지만 여전히 매우 유용한 스케치는 Dunn, Unity and Diversity이다.
다음을 보라. 권위 있는 Cambridge History of Judaism, vol. 3: The Early Roman Period (ed. W. Horbury, W. D. Davies, and J. Sturd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이 맥락에서는 다음도 보라. Skarsaune and Hvalvik, Jewish Believers in Jesus; Bindemann, “Weisheit versus Weisheit.”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이 편지
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그 질문은 역사적으로 고려할 가치가
있다.33 )
하지만 우리에게는 야고보에 대한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그는 무시당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주석에서 야고보가 “초대 교회의 우
뚝 솟은 인물”이자 “성장하는 기독교 운동의 선도 ( 어머니 ) 교회 첫 번째 감 독”이었다고 한 번 이상 말할 것이다.34 ) 많은 사람이 야고보를 잊고 있고 이제 그는 잊혀졌다. 사실, 그는 때때로 신약의 “정크 메일”에 속한다는 말까지 듣는다.35 ) 디벨리우스가 옛 독일식 표현으로 야고보서에는 신학이 없다고 간단히 선언한 것은 유명하다. 루터 신학과 바울 신학에 매료되어 있었던 루돌프 불트만은 그의 『신약 성경 신학』에서
시했다.
야고보서를 완전히 무
36 ) 기독교 정통주의나 종교개혁 신학의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존 도
32 ) 이 관찰은 우리를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그리고 통일성)을 탐구하는 진영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 이 논의는 Dunn, UnityandDiversity로 시작할 수 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바울의 관계에 대해서는 특히 Chilton and Evans, Missions를 보라.
33 ) 이 주제에 대해 내가 본 최고의 연구서는 다음과 같다. R. Bauckham, Jude and the Relatives of Jesus (Edinburgh: Clark, 1990), 5-133; 다음도 보라. J. W. Wenham, “The Relatives of Jesus,” EvangelicalQuarterly 47 (1975) 6-15.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신약 정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 야고보서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히 Wall, 1-38의 개론 자료를 보라. 정경과 신조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프랜시스 왓슨, 케빈 밴후저, 스티븐 파울, 다니엘 트레이어 등의 작업을 둘러싼 “성경의 신학적
해석”이 최근 부상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접근 방식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스케치는 다음을 보라. D. Treier, Introducing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Grand Rapids: Baker, 2008).
34 ) 다음을 보라. Painter, Just James, 1, 4.
35 ) 존슨이 자기 책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235-259에 실은 탁월한 에세이 “The Importance of James for Theology”를 보라. “정크 메일”에 대한 언급은 Painter, “James as the First Catholic Epistle,” 245에 나왔다.
36 ) Dibelius, 21;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trans. K. Grobel; New York: Scribner, 1951, 1955). 불트만은 야고보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사이성’(betweenness)이라는 상황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여기서는 조금도 보이지 않 는다. 여기 들어와 있는 것은 회당 전통의 도덕주의다”(2.163). 본질적으로 동일한 견해를 P. Stuhlmacher, GerechtigkeitGottesbeiPaulus (2d ed.; FRLANT 87; Gö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66), 191-194에서 볼 수 있다. 슈툴마허는 야고보서가 인간론적으로는 훨씬 순진하고 신학적으로는 유대교로 퇴행했다고 말한다(194 참고).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미닉 크로산 ( John Dominic Crossan ) 은 초기 기독교의 윤곽에 대한 최근 연구에
서 야고보서를 건너뛰었다.37 ) 데이비드 오니 ( David Aune ) 는 초기 기독교 서 신을 검토하면서 야고보서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38 ) 최근에 나온 몇 가
지 신약신학 책은 야고보의 편지를 맨 마지막에 두고 그의 “신학”은 대부분
바울과 관련하여 다룬다.39 )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고보의 목소리가 거의 들
리지 않거나 비신학적이거나 심지어는 반신학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다.40 )
이 사람과 그의 편지는 같은 운명을 겪었다. 그것은 망각이거나 망각에 가까운 것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가 쇠퇴함에 따라, 우리가 현재 야고보서에서 발견하는 것을 포함하
여 그들과 관련된 신학도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41 ) 야고보는 초기 교 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야고보서에 대한 학문에 있어서 르네상스는 아닐지라
도 진지한 부흥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 있어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이 부활한 학문은 기독교 신학 및 복음 전파와 관련된 논의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야고보가 처음에 있었던 곳으로
37 ) The Birth of Christianity: Discovering What Happened in the Years Immediately after the ExecutionofJesus (San Francisco: HarperCollins, 1998).
38 ) TheNewTestamentinItsLiteraryEnvironment (LEC; Philadelphia: Westminster, 1987).
39 ) 다음을 보라. J. Gnilka,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HTKNT Supplement 5; Freiburg: Herder, 1994); Strecker,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반면에
신학 역사에 대한 논의에서 일찍부터 야고보서를 다루었다. Klaus Berger, Theologiegeschichte des Urchristentums.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2d ed.; Tü bingen: Francke, 1995), 179-195, 특히 186-195를 보라. 그러나 베르거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자신의 방향을 드러낸다. “야고보는 초기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발전에 참여하지 않 았다”(187). 따라서 (베르거에 따르면) 야고보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기독론적 구속의 가르 침”(christologische Erlösungslehre)이 아니라 “방법, 길”이다(197).
40 ) G. B. Caird and L. D. Hurst, New Testament Theology (Oxford: Clarendon, 1994)는 도표
에서 야고보에 대해 분량을 거의 할애하지 않았다. 나는 내 친구 링컨 허스트의 때 아닌 죽음을
애도하며, 케어드의 신학을 완성하기 위한 그의 헌신에 다시 한번 존경을 표한다. 다음도 보라. Andrew Chester and R. P. Martin, TheTheologyoftheLettersofJames,Peter,andJude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45.
41 ) 던의 두 책, Unity and Diversity와 The Partings of the Ways로 독자들은 이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다음도 보라. Skarsaune and Hvalvik, Jewish Believers in Jesus; M. Jackson-McCabe, ed., JewishChristianityReconsidered (Minneapolis: Fortress, 2007).
42 ) 이에 대한 스케치는 W. R. Baker, “James, Book of,” DTIB, 347-351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의
주석은 야고보의 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첫 번째 감독은 주의 형제라 불리는 야고보이고, 두 번째는 시므온
이다. 세 번째는 유스도, 네 번째는 삭개오, 다섯 번째는 도비야, 여섯
번째는 베냐민, 일곱 번째는 요한, 여덟 번째는 맛디아, 아홉 번째는
빌립, 열 번째는 세네가, 열한 번째는 유스도, 열두 번째는 레위, 열셋
번째는 에브라, 열네 번째는 요셉, 그리고 마지막 열다섯 번째는
유다다 ( 『교회사』, 4.5.3; 참고, 7.19.1
있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에 대한 갈라디아
서 2장 11-14절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우리의 요점을 잘 보여 준다. “야고
보에게서 온 사람들”의 “야고보”가 반영하는 것이 그 야고보의 진정한 메 시지가 아니라 차용되고 과장된 한 분파의 권위였다 해도, 우리는 사도 야 고보와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고 야고보는 베드로를 바울에
게서 떼어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식이 일부 존재했다
는 사실을 논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한두 세대 안에 정
통 신학의 영향력 범위에서 사라졌고, 종교개혁이 야고보의 신학과 얼마나
강력하게 투쟁했는지는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통주의의 신학적 초점
뒤에 놓여 있는 야고보를 구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명확하게 보고, 마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기라도 하듯, 기독교 이야기의 가장 이른
일화들의 내적 떨림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가장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야 할 것이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토라가 있었다.
그러나 야고보서 이면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작동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편지의 거의 모든 행에 함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땅에 없는 사람들에게
쓰고 있는 야고보 편지의 처음 몇 줄에서 물 밖으로 튀어나온다. 아브라함
과 다윗과 선지자가
곳, 곧 성스러운 땅
이스라엘을 기업으로 갖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오늘날 많
은 사람이 땅에 대한 이 약속을 예수가 새 창조로 대치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땅의 약속에
서론 이야기 속의 야고보서
상” ) 의 소금에 대한 말씀 ( 이방인 선교, 마 5:13-16 ) 에서도 작동하고 있을 것
이다.43 ) 이런 제안에 동의하든 말든, 야고보 같은 유대인이 하나님은 자신
의 땅에 대한 약속에 신실하다고 믿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었다. 그 약
속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었고, 예루살렘이 사라지자 그 땅도 사라졌다.44 )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그 땅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초기 유대 그리스도인은 즉시 “약속이 바뀌었다. 그 땅은 잊어라. 로마 제
국을 뒤엎고 다음으로 세계를 정복하자”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땅을 신성하게 여겼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형성된 메시아 공동체는 자신들을 무언가 예수를 따
르는 많은 교회 중 하나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교회
의 교회, 즉 어머니 교회로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역사의 진원지로 보았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메시아 공동체의 지도자였으며, 심지어 바울도
이 공동체에 보고를 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9절의 “기둥” 중 첫 번째로
언급된 사람이고, 사도행전 15장에서 종국적이며 통찰 있는 말을 하는 사 람이며,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먼저 만난 사람이다 ( 행 21:18 ). 나는 개신교 신자로서 로마 교황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는 않지 만, “첫 번째 교황”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야고보를 택할 것이다.45 ) 그가 교 회, 곧 온 교회의 중심에 있었고, 온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
이다. 예루살렘에서 말한 것은 모든 곳에서 중요했다. AD 70년까지는 그 랬다. 그러나 그것은 땅과 예루살렘과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이야기
보다 앞서는 것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책과 마찬가지로 야고보서도 구체적인 맥락이라는 도가니에서 자기 이야기의 장 ( 章 ) 을 구성한다. 그 맥락은 부분적으로 이
스라엘 이야기의 경쟁 이야기였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세네파, 열심당
원 ( 그 이야기의 네 가지 주요 형태를 지칭하면 이렇다 ) 은 이 이야기에 대해 각각 고유의 형태를 들려주었다. 각각 토마스 홀멘이 “언약의 길 표시자”라고 불렀던 것
도 구상해 냈다. 이것은
K. J. Wenell, JesusandLand:SacredandSocialSpaceinSecondTempleJudaism (LNTS 334; London: Clark, 2007); R. L. Wilken, The Land Called Holy:Palestine in Christian History and Thought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44 ) 다음을 보라. P. W. L. Walker, Jesus and the Holy City: New Testament Perspectives on Jerusalem (Grand Rapids: Eerdmans, 1996).
45 ) P.-A. Bernheim, James,BrotherofJesus, 191-222에서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 구체적인 관행을 가리킨다.46 ) 예를 들어, 바리새인
은 정결과 음식 규례를 중요하게 여겼다.47 ) 야고보가 이들 경쟁적인 집단 과 어떻게 들어맞는지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지만, 크레이그 에번스의 공관
복음 비교는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요약하면, 쿰란 유대교, 랍비 유대교, 야고보 유대교를 나타내느라
원을 세 개 그리면, 그 원이 서로 겹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이 세 원의 중심, 즉 각 유대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중심은 겹치지 않
을 것이다……쿰란 유대교는 제의 개혁을 크게 강조하면서 언약 갱신
에 초점을 맞춘다. 랍비 유대교는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에서 생명
의 열쇠인 토라를 연구하고 그에 순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야고보의
유대교는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한 믿음과 경건에 초점을 맞
춘다.48 )
마지막으로, 야고보의 편지는 나중에 아타나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 퀴나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변적 신학이 아니다. 야고보는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권면의 글,49 ) 사실상 “권면 회 칙”50 ) ( paraenetic encyclical ) 을 쓴 것이며, 그런 문제에는
46 ) T. Holmén, Jesus and Jewish Covenant Thinking (Biblical Interpretation Series 55; Leiden: Brill, 2001), 37-87.
47 ) J. Neusner,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3 vols.; Atlanta: Scholars, 1999)은 이미 오래전에 이를 보여 주었다.
48 ) C. A. Evans, “Comparing Judaisms,”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 Jesus, 161-83, 161-183 중 182쪽에서 인용한다(강조는 덧붙인 것임). 더 완전한 비교는 에번스의 논문을 참고 하라.
49 ) 특히,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의 사회학 이론에 비추어
권면의 사회적 중요성을 유용하게 탐구한 L. Perdue, “Paenesis and Epistle of James”를 보라.
50 ) Bauckham, 13; W. Popkes, “The Mission of James,”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 Jesus, 89. 다음도 보라. M. Tsuji, GlaubezwischenVollkommenheitundVerweltlichung.Eine Untersuchung zur literarischen Gestalt und zur inhaltlichen Kohärenz des Jakobusbriefes
(WUNT 2.93; Tü bingen: Mohr, 1997); K.-W. Niebuhr, “Der Jakobusbrief im Licht frühjüdischer Diasporabriefe,” NTS 44 (1998) 420-443; Verseput, “Genre and Story”(그는
편지 전통을 고대 세계에서 자발적 연합을 겨냥하는
서론 야고보: 누가 이 편지를 썼는가?
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51 ) 이런 맥락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바로
야고보의 복음과 신학이며, 그의 예리한 대답은 여기서 비롯된다.52 ) 그러
나 우리는 야고보의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53 )
야고보: 누가 이 편지를 썼는가?
이 편지의 첫 단어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야고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
스도의 종”( 1:1 ). 이 야고보는 누구인가? 그는 독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며,54 ) 그리고 아마도 “종”이라는 용어조차 특
별히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라고 상정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55 )
신약에서 “야고보”56 ) 라 불리는 사람은 40회 이상 언급된다. 그렇다면 서
51 ) 렘 29장[70인역 36장]; 예레미야의 편지[=6:1-73]; 바룩2서 78-87장; 바룩4서 6:19-25; 마카베
오2서 1:1-9 및 1:10-2:18을 보라. 후대의 증거는 b Sanhedrin 11b를 보라.
52 ) 여기서 다음을 보라. Wall, 27-34; Strecker,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654-682; Tamez, ScandalousMessage.
53 ) 이 책은 주석이며 역사적 문제를 전체적으로 다룬 책이 아니다. 배경, 역사적 연관성, 저자, 야고
보의 생애, 연대, 다른 초기 기독교 문헌과의 연관성같이 서론적 문제라 불릴 수 있는 것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담으려면 두꺼운 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관심 있는 독자에게는 각주가 그
런 논의의 지침을 제시할 것이다.
54 ) 여기서 야고보의 수사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가 자기 독자가 자기가 말한 대로 행하기 를 기대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수사학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Wachob, Voice of Jesus, 1-58을 보라. 여기서 그는 ‘파레네시스’(“권면”)가 하나의 장르가 아 니라 수사학의 긍정적 양식임을 보여 준다. 55 ) 그 자체로 학문적 수준을 높이 살 수 있는 몇몇 서론에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Martin, xxxi-cix; Pratscher, Der Herrenbruder Jakobus; Johnson, 1-164; Johnson,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1-122; Painter, Just James; Bernheim, James, Brother of Jesus; Frankemölle, 1.39120; Popkes, 1-69; Popkes, “The Mission of James,”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Jesus, 88-99; Penner, TheEpistleofJamesandEschatology; R. Wall, in DLNTD, 545-561; Bauckham. 특히 다음도 보라. J. Painter, “Who Was James?” 10-65, in Chilton and Neusner, The Brother of Jesus. Hartin, “The Religious Context of the Letter of James”는 자신이 야고
대해 쓴 많은
헬라어 형태
인 ‘이아코보스’를 거쳐 초기 라틴어 ‘야코부스’(Jacobus)가 되었고, 후기 라틴어에서 ‘야코무
스’(Jacomus)로, 그다음에는 고대 프랑스어 ‘젬므’(Gemmes)/‘자메’(James), 스페인어 ‘하이
메’(Jaime), 카탈로니아어 ‘자우메’(Jaume), 이탈리아어 ‘자코모’(Giacomo)가 되었다. 따라서
이 편지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는 ‘제임스’(James)의 형용사형으로 ‘제이커바이트’(Jacobite)가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제임스’(James) 대신 ‘제이컵’(Jacob)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제
안한다. 이 이름의 역사에 대해서는 Johnson, 93을 보라.
인사말(1:1)
1절의 언어는 야고보서가 편지임을 나타내지만,1 ) 나머지 본문에는 야고 보서를 편지로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 세
계의 편지는 내용 ( 로마서, 고린도후서, 디모데전후서 ) 과 문체 (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히브리 서 ) 측면에서 다양하므로, 대부분 권면과 강론과 심지어 지혜로 이루어진 야
고보서의 내용에서 그 형태 ( 편지 ) 를 추론해서는 안 된다. 특히 메시아 신앙
같은 새로운 운동의 가마솥에서 어떤 정해진 구성 방식은 없었다. 하나의
글이 “편지” 또는 “서신”으로 분류되기 위해 따라야 하는 형식은 없었다.
전형적인 인사말과 서론적 감사가 있는 바울이나 베드로의 서간 형식과 달
리, 야고보서에는 인사말만 있으며 여기서부터 편지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
1 ) 제명(題銘) 증거는 정상적인 이독들을 보여 준다. NA27에는 ‘이아코부 에피스톨레’(ΙΑΚΩΒΟΥ ΕΠΙΣΤΟΛΗ)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많은 사본이 단어를 추가하거나 어순을 변경하여 제명을 변 경했다. 일부 사본은 “야고보” 다음에 ‘아포스톨루’(ἀποστόλου)를 덧붙이고, 일부는 ‘에피스톨레’ (επιστολη)뒤에 ‘카돌리케’(καθολικε)를 덧붙인다(P33, 1739). 어떤 사본은 야고보가 히브리인이
나 유대인이나 유대인 신자에게 편지를 썼다고 말하거나(94, 945),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편지를
썼다고 말하거나(330), 야고보를 “거룩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예, 2423) 상황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약 1:1을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생각하여 그 가치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견
해를 입증할 본문 증거는 없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나중에 누군가가 이 책이 편지라고 불
릴 수 있는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그래서 1:1을 덧붙였다면), 이전의 누군가(야고
보 자신과 같은 사람)도 그것을 편지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S.
R. Llewelyn, “The Prescript of James,” NovT 39 (1997) 385-393을 보라. 레웰린의 전략은 1:1
이 원본임을 옹호하는 입장을 다투는 것이지만, 더 확실한 주장은 이 편지가 1:1 없이 유포되었다
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서의 본문 증거로 나는 『대비평본』(Editio Critica Maior)을 사용했다.
서신을 바울서신과 베드로서신의 형태와 비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도서신과 그 실질적인 형태는 아마도 그 자체로 발
전의 초기 단계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 )
1 James, a servant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 TothetwelvetribesintheDispersion: Greetings.
1:1 표준적인 헬레니즘 서신에는 글쓴이와 수신자 ( A가 B에게 ) 뿐만 아니라 인사말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남아 있는 증거에 따르면 유대인의 편지는
“평화”( ‘샬롬’, ‘에이레네’ ) 와 다른 복 ( ‘베라코트’ ) 을 기원하는 것으로 인사말을 수정
했음을 암시한다.4 ) AD 58년 8월 29일자로 기록된 전형적인 그리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카이라스는 사랑하는 디오니시오스에게 인사하며 건강을
한다.5 )
기원
2 ) 이는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읽는가 하는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첫 번째
편지라면, 감사 부분의 “부재”는 형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수 있으므로 형식 부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3 ) 일부 사본은 ‘파트로스’(πατρός)를 추가하여 초기 기독교의 삼위일체 경향을 나타낸다(429, 614, 630, pc).
4 ) 단 4:1; 6:25; 바룩2서 78:2; b Sanhedrin 11b를 보라.
5 ) 이는 John White, Light, 145에서 인용한 것이다. S. K. Stowers, Letter Writing도 보라. 스타워스
는 편지를 (1) 우정, (2) 가족, (3) 칭찬/비난, (4) 권면/조언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네 번째 유형은 다시 권면(권고와 만류), 조언, 충고(생활 방식 권면), 훈계, 질책, 비난, 위로, 중재, 고발, 변증, 설 명으로 나뉜다. Adamson, 19-21; Johnson, 16-26도 보라. 범주를 구체화하지 않거나 편지가 다
른 장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한, 야고보서는 권고/조언의 편지, 특히 권면(paraenetic)
이나 충고(protreptic)의 편지일 것이다. 로프스는 야고보서의 문학적 편지 및 신랄한 비난의 성격
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유명하다(Ropes, 6-18). Davids, 22-28은 일련의 설교가 나중에 한 통의
편지로 편집된 것으로 본다. Grünzweig, 22도 보라(“ein schöner Strauss von guten, hilfreichen Worten”: “선하고 도움이 되는 명언들의 예쁜 꽃다발”). 야고보서는 엄격한 장르 분류에 저항
한다.
고대 세계에서 서간 이론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간략한 선집을 함께 제시한 A. J. Malherbe, Ancient Epistolary Theorists (SBLSBS 19; Atlanta: Scholars, 1988)도 보라. 말레르브
의 본문은 1세기 편지에 속한 것으로 가정된(그리고 지금은 때때로 구체화된) 범주(이것들은 야고
보서 외의 신약 성경 편지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에 대해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하게 만든다. 편지의
수사학 뒤에는 논리와 설득의 기술이 있으며, 편지는 논리와 설득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달리 말하자면, 편지에 대한 이론적 고찰 및 편지와 수사학적 문체 사이의
유사성은 때때로 편지 쓰기 또는 수사학적 모델의 이상에 대한 순응보다는 논리와 설득의
야고보서
유대인의 한 편지는 다음과 같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포로로 잡혀간 형제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바룩2서 78:2, OTP ).
야고보의 인사말은 헬레니즘 형식이다.6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의 편지는 현재 우리가 세네카의 『도덕 서간집』 ( 75.1-2 ) 에서 볼 수 있는 편지 쓰기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그는 “너는 내가 네게 보내는 편지가 다소 부주의하게 쓰였다고 불평해 왔다”라고 쓴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 즉 야고보서는 야고보 개인의 존재 자 체다 ) 명확히 하는 성찰을 그가 감행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다. 세네카는 자
신의 편지들이 왜 그런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가식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누가 말에 주의하겠는가? 나
는 내 편지가 너와 내가 서로의 모임에 앉아 있거나 함께 산책할 때 ( 즉
자발적이고 편안하게 있을 때 ) , 그때의 나의 대화와 같은 것 이 되었으면 좋
겠다. 내 편지에는 왜곡되거나 인위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내 감정을 말로 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7 )
한 한 예를 보여 준다. 즉 위 데메크리우스에 의해 나열된 편지 종류는 21가지이며, 그중 많은 것이
야고보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그것들은 비록 야고보서가 나열된 모델
중 어느 것에도 부합하지 않더라도 야고보서의 수사적 의도를 잘 보여 준다. 41가지 유형을 제시한
위 리바니우스도 보라(66-81). 야고보가 의식적으로 수사학적 모델을 염두에 두고 앉아 있다가 그
런 형식의 제약에서 자신의 논증을 수행했는지가 궁금하다는 관찰로 이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가 그런 논증과 예언적 수사학의 열기 속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6 ) 다음을 보라. J. M. Lieu, “‘Grace to You and Peace’: The Apostolic Greeting,”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68 (1985) 161-178. 리외는 초기 기독교 서신과
표준 그리스 서신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야고보서와 행 15:23-29는 이 차이에 대한 예외지만).
7 ) Malherbe, Ancient Epistolary Theorists, 29에서 인용(강조는 나의 추가). 이것을 보면 The American Scholar에 실려 오랫동안 전해지는 바람에 지금은 친근한 개인 수필로 알려진 어떤 글
이 떠오르게 된다.
인사말(1:1)
야고보가 구성한 것은 이런 편지다. 마치 수신자의 면전에서 말하듯이, 때 로는 직설적이고 예언적으로, 때로는 교훈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편지는
후세를 위해서, 또는 지적 명성을 위해서 고안된 추상적인 “서신”이 아
니다. 이것은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쓴 목회 편지로 때때로 격앙된 수
사도 사용된다.
편지는 야고보가 보낸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야고보”는 누구인가? 우
리가 서론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야고보”( James, 히브리어 ‘야아코브’ 또는 영
어 ‘제이컵’[Jacob]; 참고, 창 25장; 27:36 ) 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후보자가 적
어도 세 명이다.8 ) 세베대의 아들이자 원래의 열두 사도에 속한 야고보 ( 막
3:17; 행 12:2 ) 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AD 44년경 ) 알패오의
아들이며 달리 알려지지 않은 야고보 ( 막 3:18 ) 도 최초의 사도였다. 서론에서
결론 내렸듯이, 예수의 형제 ( 막 6:3 ) 이자 예루살렘에 기반을 둔 메시아 유대
교9 ) 지도자인 야고보는 “야고보”가 가명이든 아니든 여기서 의도한 인물
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야고보가 예수의 가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와 그의 사회·종교적 배경
과 이 편지의 메시지에 있어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10 ) 특히, 앞으로
분명히 밝혀지겠지만, 마리아 찬가는 예수의 가르침 및 야고보의 편지와 여
러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 마리아, 예수, 야고보는 ‘아나빔’( “경건하고 가난한
자” ) 의 세계로부터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주석에서 때때로 이 사회
경제적 공동체와 신앙 전통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11 )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확고한 지도자였다는 사실
갈 2:9에서 그를 “기둥”이라고 부른다 ) 은 이
8 ) 저자에 대한 더 직접적인 논의와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야고보서의 저자로 온건하게 옹호하는 입 장에 대해서는 위 37-66쪽을 보라.
9 ) 여기 나온 용어가 어렵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유대교”를 선호하고, 다른 일부는 “유대교적
택한다(이 주석 전체에서 나는 이 용어를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치열하다. Bruce, New Testament History; Hengel, “Hellenization”; Lieu, Image and Reality; Christian Identity; Dunn, The Partings of the Ways; Jews and Christians; Pritz, Nazarene Jewish Christianity; Chilton and Neusner, Judaism in the New Testament; Becker, Christian Beginnings; Crossan, Birth of Christianity; Stegemann and Stegemann, Jesus Movement; Skarsaune, In the Shadow; Harland, Associations; Boyarin, Border Lines; Skarsaune and Hvalvik, Jewish Believers in Jesus.
10 ) 즉시 다음을 보라. Bauckham, JudeandtheRelativesofJesus.
11 ) 당장은 다음을 보라. Dibelius, 39-45; E. Bammel, “πτωχός,” TDNT 6.888-915; L. Coenen, H.-H. Esser, and C. Brown, “Poor,” NIDNTT 2.820-829; Brown, Birth, 350-365.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데 열려 있으며 분열된 당사 자들을 화해시키기 원하는 인물이다. 이 대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연설을 한 사람이 야고보였으며 ( 행 15:13-21 ), 문학 전통에서 마지막 연설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위해 유보되었다.
야고보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며, 이로써 자신의 개인적 소 명을 일깨우고 자기 자신을 깊고 강력한 유대 전통에 묶어 둔다. 신약의 다
른 곳에서 편지 필자들은 자신을 “종”, “사도”, “죄수”( “갇힌 자” ), 다른 사람 들과 더불어 “종들”이라고 부른다.14 ) 오직 야고보와 유다만이 다른 호칭 없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원래의 12사도에 속하지
않았다는 자의식을 나타내는 것 같다. 또한 “종”이라는 호칭이 가리키는 것
은 야고보와 유다 ( 이 두 사람은 전통적으로 예수의 “형제”로 알려져 있다 ) 가 가족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은 “단순히 사
도가 아니라 종”이라는 문구나 “단순히 믿는 자”라는 문구처럼 극도의 겸 손함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해해도 안 된다. 그 대신 이 단어는 야고보의 두
가지 특징을 가리키는데, 첫째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
로 여긴다는 것이며 ( 이는 몇 단어 거리에 나오는 “주”라는 단어로 확인된다 ), 15 ) 둘째는
나온다는 것이다.
12 ) 서론을 보라. Johnson, 126-140도 보라.
16 )
“종”이라고 불리는 다른
13 ) 예, Bauckham, “James and the Jerusalem Church”; Painter, Just James.
14 ) 로마서와 디도서의 “종”. 로마서, 고린도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전서, 베드로전서의 “사 도”. 빌레몬서의 “죄수”. 빌립보서의 “종들”. 요한2서와 3서의 “장로.” 유다서는 “종”과 “야고보 의 형제”로 시작한다. 특히 다음을 보라. Edgar, Has God Not Chosen the Poor?, 44-73; 다음 도 보라. EDNT 1.349-353; Mounce, Dictionary, 632-633; Spicq, 1.380-386.
15 ) 헬라어 본문에서 “하나님과 주”는 “종” 앞에 나타난다. θεοῦ καὶ κυρίου … δοῦλος, ‘데우 카이
퀴리우……둘로스.’
16 ) Martin, 4도 그렇게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몇몇 사본에서 발견되는 약 2:23의 이독은 “종”과 ‘필
로스’(φίλος)를 연결하여 아브라함을 “종”이라는 용어로 구별한다. 이 편지를 가명 편지라고 생
각하는 Dibelius, 65-66은 “종”이라는 단어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를 칭송하는 표현으로 사용
된 것으로 본다.
사람들로는 모세, 다윗, 아모스, 예레미야, 다니엘이 있다.17 )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것은 모세, 다윗 등 이 스라엘 역사상 위대한 선지자의 업적을 계승해서 전수하는 유대 메시아 공
동체의 특권과 명예를 주장하는 것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굴복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18 ) “야고보”와 “종” 사이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
는 문구를 배치함으로써 야고보는 의도적으로 “종”의 위치를 메시아적/기
독교적 맥락에 설정한다. 야고보는 ( 한 분 ) 하나님의 종이며 또한 주 예수 그
리스도의 종이기도 하다.19 )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여
긴다.20 ) 여기에는 나중에 삼위일체라 불리게 될 사상을 비추는 야고보 초 기의 희미한 빛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로 정의된다. 아니 더 좋 은 것은 “주”가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주”가 아버지/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항상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메시아 공동체의 신학에서 작동하는 심오한 변화의 문턱에 놓이게 한다. 래리 허타도 ( Larry Hurtado ) 의 대표작은 “주”가 기독교 예배와 신학적 성찰의 초기 층에 속해 있으며 그 층에서 나 온다는 것을 완전한 문헌 작업을 통해 입증했다.21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에게 주권을
돌리는
것이 야고보가 편지를 쓰고 있는 메시아 공동체22 ) 의
17 ) 왕상 8:53; 말 4:4; 단 9:11; 클레멘스1서 4:12; 43:1; 51:3; 바나바서신 14.4의 모세. 삼하 3:18의
다윗. 암 3:7의 아모스. 렘 7:25; 디다케 9:2의 예레미야. 단 9:10의 다니엘. 모든 사도 교부에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인과 기독교 지도자에 대해 사용된다(예, 헤르마스의 목자, 『계명』, 44.2). 그
리스·로마 세계에서 “종”의 사용에 대해서는 Dibelius, 65를 보라.
18 ) Ropes, 117-118은 이 용어가 벧전 2:16같이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인용한 증거는 오히려 예외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19 ) 다음을 보라. Laws, 45-46.
20 ) 정관사가 붙지 않은 ‘데우……퀴리우 이에수 크리스투’(θεοῦ …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는 야
고보서가 아닌 초기 그리스도인의 편지(예, 롬 1:7; 고후 1:2; 갈 1:1, 3; 벧전 1:2; 요이 3절; 유
1절)에서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언급하는 표준 형식이 아니라면, 기독론적 목적을 위해
더 많이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문구를 “하나님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번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과 연결된 2:1로 뒷
받침될 수 있다(2:1 주석 참고). 또한 ‘퀴리오스’(κύριος)는 1:7; 3:9; 4:10; 5:10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된다. 나아가 딛 2:13과 벧후 1:1에도 호소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어(Mayor)는 이
단어의 사격(斜格, oblique cases)은 때때로 관사가 생략되어 그 하나님과 그 주 예수 그리스도
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제안한다(ccx-ccxxii).
21 ) Lord Jesus Christ. 그의 다음 책도 보라. One God, One Lord; At the Origins of Christian Worship
22 ) 지금까지 예루살렘의 메시아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한 이 표현은 하나의 공동체가 아
니라 디아스포라 상황에 처한 여러 유대인 공동체, 그 가운데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을 가
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공동체를 마치 그것이 지리적으
및
메시아 관점에서 ‘타나크’를 읽는 공동체의 해석에 의해 재구성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24 ) 초기 기독교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은 다양
한 이유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1) 예수 자신
의 성경 사용, (2)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주를 따르고 경배하고 이해
해야 할 필요성, (3) 이스라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
사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이해에 대한 불가피한 논의, (4) 그들 자신의 경
험과 박해에 대한 설명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메시아 공동체가 어떤 형태
를 취하는가는 그 공동체의 성경 해석학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어 야고보
의 경우 ( 2:1-12 참고 ), 내가 다른 곳에서 예수신경25 ) 이라고 부른 것의 후반부
인 레위기 19장 18절의 렌즈를 통해 토라 전체를 읽어야 하며, 구약의 인물
은 메시아 공동체에 전형적이고 모범적인 본보기가 된다 ( 2:21-23, 25; 5:10, 11, 17
참고 ). 야고보의 해석학은 예수의 해석학이다.26 )
해석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주 예수
로 한정된 하나의 메시아 공동체인 것처럼 언급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로 인한 논리적 귀결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상황은 여러 공동체(그리고 이들은 거의 확실히 복구 불가능하다)가
처한 독특한 상황이거나, 다양한 메시아 공동체에 일반적인 상황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에 대하여는 Bauckham, WisdomofJames, 25-28을 보라. 23 ) 고등 기독론의 성장에 있어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흥미로운 단일 본문은 종종 논의의 주변부에
만 있는 본문인 고전 8:4-6이며, 여기서 셰마는 “하나님”이 “아버지”를 가리키고
사고까
허용했다. 다음도 보라. Boyarin, Border Lines, 89-147; P. Rainbow,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1 Corinthians 8:4-6” (D.Phil. thesis, Oxford 1987); C. J. Davis, The Name andWayoftheLord (JSNTSup 129;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96). 24 ) 이와 관련된 문헌으로 방대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다. Dodd, According to the Scriptures; Goppelt, Typos; Lindars, New Testament Apologetic; Longenecker, Biblical Exegesis in the Apostolic Period; Carson and Williamson, It Is Written; Juel, Messianic Exegesis; Ellis, The Old Testament in Early Christianity. 더 상세한 논의는 특히 Fishbane, Biblical Interpretation을 보라. 야고보 자신의 구약 사용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을
보라. R. A. Bauckham, “James, 1 and 2 Peter, Jude,” in Carson and Williamson, It Is Written, 306-309; D. A. Carson, in CNTOT, 997-1013.
25 ) 다음을 보라. The Jesus Creed 예수신경(전통적인 셰마)의 전반부는 약 1:12(τοῖς ἀγαπῶσιν
αὐτόν, ‘토이스 아가포신 아우톤’)와 2:19(σὺ πιστεύεις ὅτι εἷς ἐστιν ὁ θεός, ‘쉬 피스튜에이스
호티 헤이스 에스틴 호 데오스’)에서 찾을 수 있다.
26 ) 다음을 보라. Bauckham, “James, 1 and 2 Peter, Jude,” 309.
릴지 모른다. 즉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에, 예수를 섬
기지 않는 다른 유대인과 자신을 구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예수를 메시아로 섬기지도 않는 모든 이방인과도 자
신을 구별한다. 야고보서의 “가난한 자”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야고보의 이 고백은 그를 “부자”가 지배하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위치시킨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야고보의 메시아 공동체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연대의 고백이 될 수 있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27 ) 편지를 쓴다. 이 수신인은 주
석가 사이에 큰 충격을 주고 거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게 했다. 의미심
장하며 함축적인 이 표현은 무엇을 말하는가?
민족 단체인가 ( 유대인이나 메시아 공동체의 유대인 )
아니면 은유의 대상인가 ( 유대인이나 메시아 공동체의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누
구나 ) ?
또 “흩어져 있는”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땅에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가리키는가 ( 물리적 흩어짐 ) ?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견디라고 부름 받은 이 땅에서의 비유적 체류
생활을 가리키는가 ( 영적 흩어짐 ) ?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유를 감지하기 위한 원칙이다. 어떤 용어가 비유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28 ) 즉 은유나 직유가 나타남
을 가리키는 표시인 “~처럼” 또는 “~같이” 같은 문구가 존재해야 하며, 1장 11절에서 부자가 “시들어 간다”라는 표현처럼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것 이 불가능해야 하고, 야고보가 예루살렘 메시아 공동체를 “흩어져 있다”라
27 ) ταῖς δώδεκα φυλαῖς ταῖς
학자들은 이 표현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주석(예, Hartin, 50-51, 53-55) 그 외에도, Bauckham, Wisdom of James, 14-16; Cargal, Restoringthe Diaspora, 45-51(그는 자신의 수사학, 구조 이론에 기초하여 1:1을 5:19-20에 연결하고 1:1의
“디아스포라”가 5:19-20에서 진리에서 벗어나 헤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McKnight, “A Parting within the Way,” 111-113; Edgar, Has God Not Chosen the Poor? 96-101(그는 이
구절을 비유로 보며, 이 편지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전체로 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야고보서에서 문맥 정보의 독특한 요소를 지적한다)을 보라. 28 ) 비유를 감지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는 Caird, LanguageandImagery, 183-197을 보라.
야고보서
고 언급하고 있음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처럼 은유와 비슷함
이 일치할 가능성이 낮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1장 13-15절에서
시험받는 것에 대해 묘사할 때같이 그것이 비유적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표현이 명확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이 중 어느 것이 “열두 지파”나 “흩어져 있는”에 적용되는가? 첫째, 이 표현은 유대인이 자신을 흩어져 있는 민족이라고 부를 때 전형적으로 사용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민족 지향적, 지리 지향적 언어이며 이것이 고도로
발달된 은유임을 나타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29 ) 유대인은 관례적으로 자
신들을 열두 지파 백성으로 보았으며,30 ) 흩어짐이라는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이스라엘 땅이 아닌 다른 땅을 가리킨다. 이 단어의 동사 형태는 예루살렘
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다른 지역으로 흩어진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
있다 ( 행 8:1 ). 31 ) 둘째, 이 시점부터 이 표현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서 다른
증거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셋째, “열두 지파”는 거의 정의 ( 定義 ) 자체로 은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열 지파가 앗수르 포로 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8세기 추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유대
인이 1세기 디아스포라에 있었고, 그들의 귀환에 대한 소망은 유대인 종말
론의 일상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므로 그 귀환은 기대되는 것이지만 민족적
의미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 전
체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으며, 아마도 이 표현에는 재통일에 대한 종말 론적 소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32 ) 예수는 이렇게 “열둘”을 세웠고 ( 막
3:13-19; 마 19:28 ), 예수를 위해 그리고 예수와 예수의 사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
보라. 요 7:35; 벧전 1:1(신 28:25와 같이 나타남); 시 147:2; 사 49:6; 유딧 5:19; 마카베오2서
1:27도 보라. 예, Verseput, “Genre and Story,” 99-101.
30 ) 다음을 보라. McKnight, “Jesus and the Twelve,” 211-220.
31 ) 행 8:1: πάντες δὲ διεσπάρησαν κατὰ τὰς χώρας τῆς Ἰουδαίας καὶ Σαμαρείας πλὴν τῶν
ἀποστόλων, ‘판테스 데 디에스파레산 카타 타스 코라스 테스 이우다이아스 카이 사마레이아스
플렌 톤 아포스톨론’,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
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32 ) 다음을 보라. 사 11:11-16; 렘 3:18; 31:8; 대하 29:24; 30:1; 34:9; 솔로몬의 시편 17:28; 에
스드라1서 7:8; 에스드라2서 13:34-47; 시빌의 신탁 2.170; 아브라함의 유언 13.6; 1QS 8:1; 1Q28a 11-12; 4Q159 frgs. 2-4:3-4; 1QM 2:1-3; 4Q164 2:1-3. 다음을 보라. Brant Pitre, Jesus, the Tribulation, and the End of Exile (Grand Rapids: Baker, 2005); Penner, The EpistleofJamesandEschatology, 181-183.
시아적 공동체에서 비롯된 야고보서에 대한 우리의 주석에 비추어 볼 때, 야고보는 사도가 이끄는 메시아 공동체에 속한 유대 민족이라는 의미에서
“열두 지파”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3 ) 야고보서를 이
해하기 위해 이것을 결정짓는 단 하나의 본문이 사도행전 15장 13-21절에
서 발견되는데, 여기서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12절에 나오는 다음과 같 은 말로 사도 회의에서 연설한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 행 15:16-18a )
분명히 야고보는 예수의 사역을 이스라엘 회복 사역으로 보았고, 그 회복
사역의 구체적인 형태가 예루살렘의 메시아 공동체다.
넷째, 이전 요점에서 기독교가 강조된 것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 하다. 그것은 이 메시아 공동체와 나머지 유대 공동체 사이의 경계가 모호
하다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13절은 여전히 “회당”에서 모이는 공동체
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 2:2 ),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교회”라는 단어가 한 번만 사용된다 ( 5:14 ). 이것은 “열두 지파”가 메시아적이면서 또한
유대인 공동체와는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여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초기 그리스도인, 특히 초기 메시아 공동체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순례자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히브리
서 외에는34 ) 거의 없다.35 )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결과적으로 야고보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유대인
공동체 ( 들 ) 에게 편지를 썼을 가능성이 더 크며, 그들은 그렇지 않고 흩어져
33 ) 다음을 보라. Ropes, 118-120, 123-127; Dibelius, 66-67; Davids, 63-64; Laws, 48-49; 특히 Martin, 8-9; Popkes, 71-73; Frankemölle, 1.125-128.
34 ) 히 11:13; 13:14. 35 )
H. Elliott, Homeless for Homeless의
미리 맛보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결론짓는다.36 ) 야고보는 그런 공동체를 이
용어의 민족적 및 언약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일부로 본다. 따라서 패트릭 하틴은 “야고보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이스라
엘 집안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자들은 왜 흩어져서
사는가? 여기서 야고보가 언급하는 것을 거룩한 도성에서 박해를
39 )
이 모든 것 후에 야고보는 “너희에게 문안한다”라고 말한다. 이 문구에서
헬라어 “은혜”를 뜻하는 단어와 동족어 동사를 사용한 것은 초기 기독교 신 학, 특히 바울의 신학을 반영한다기보다는 관습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행전 15장 23절에서 찾을 수 있는 것과 똑같은 인사말이며, 저 자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 적어도 ) 야고보에게 귀속 된다는 것은 같다.40 )
36 ) Martin, 9-11은 “흩어짐”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 박해 중의 보존이 강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Frankemölle, 1.127.
37 ) P. J. Hartin, “The Religious Context,” in Matt A. Jackson-McCabe, Jewish Christianity Reconsidered (Minneapolis: Fortress, 2007), 210.
38 ) Hengel, Acts and the History of Earliest Christianity, 74-75는 행 8:1이 예루살렘을 탈출 한 헬레파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Craig Hill, Hellenists and Hebrews: Reappraising Division within the Earliest Church (Minneapolis: Fortress, 1992), 32-39는 헹 겔의 논문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39 ) 아프리카인의 “흩어짐”에 뿌리를 둔 신학에 대해서는 바이런의 주석 463을 보라. 40 ) 명령법 ‘카이레인’(χαίρειν)의 생략과 구문에 대해서는 BDF §§389, 480.5; MHT, 3.78을 보라. 나
는 생략을 가지고 실제로는 부정사를 보어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과 시련(1:2-18)
야고보는 빠르게 편지 본론을 시작한다.1 ) 시련은 야고보의 중심 주제에
속한다 ( 2:1-7; 4:13-17; 5:1-6 참고 ). 1장 2-18절, 심지어 1장 2-27절을 이해하기
위한 관건은 여러 단락 사이의 관계다. 이 부분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느슨
하게 연결된 일련의 권면인가, 아니면 동일한 상황 ( 가난 ) 을 다루고 다양한
권면 ( 인내, 지혜 등 ) 을 제시하는 대체로 일관된 단위인가? 본 주석은 1장
2-27절이 특정 청중 ( 즉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억압받는 가난한 메시아 공동체 ) 을
대상으로 하는 단일한 단위라고 제안할 것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야고보서는 시련의 목적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품성 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1:2-4 ),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게도 시련의
목적을 분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야고보는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에 시련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한다 ( 1:38 ). 이제 야고보는 자신이 염두에 둔 것을 밝히면서 유대인 메시아 공동
체가 직면한 구체적이고 특별한 형태의 시련으로 눈을 돌린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부를 누리는 상황에서 빈곤에 직면하는 것이다 ( 1:9-11 ). 여기서 야 고보는 가난한 사람의 편에 서고 그들은 자신들이 ( 역설적으로 ) 고귀해졌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야고보의 “어법 구조”2 ) 에서 가난하다
1 ) 바울서신과 베드로전서는 사도들이 편지를 보내는 교회에 대한 감사나 찬양을 위해 여기서 하나님
께로 향하는 것이 특징이다(예, 롬 1:8-15; 살전 1:2-10; 딤후 1:3-7; 벧전 1:3-9). 야고보서는 그
렇지 않으며, 이는 디모데전서, 디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와 같다.
2 )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P. Berger and T. Luckmann,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 1:12-18 ). 야고보는 하나님은 선하며
시련은 공동체가 시험을 받을 기회라고 가르친다. 죄는 인간 상황에서 어쩔
공동체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2.1. 시험의 목적(1:2-4)
2 내 형제들아4) 너희가 여러 가지 시
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5)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6)이7) 인내를 만 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 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
2 My brothers and sisters, whenever you face trials of any kind, consider it nothing but joy, 3 because you know that the testing of your faith produces endurance; 4 and let endurance have its full
TreatiseintheSociologyofKnowledge (New York: Anchor, 1967).
3 ) 바울은 갈 4:21-31에서 박해에서 적출(摘出)로 옮겨 가는 논증을 사용한다.
4 ) 전반적 내용은 Johnson,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221-234를 보라. 존슨에 따르면 리 더십에 대한 야고보서의 묘사는 전형적인 남성의 자질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섬김에 대한 것이다. 야고보는 1:18에서 하나님(아버지)이 “낳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야고보서에
“세대를 표현하는 친족 언어”(아버지/아들 등)가 없는 것에 주목하라. 이것들은 양성 및 평등과 관
련하여 때때로 “구속적 경향/해석학”이라고 불리는 것의 흔적이다. 이것은 NRSV와 TNIV의 포괄
적 번역을 정당화할 것이다. 더 광범위한 논의는 Ng, “Father-God Language”를 보라.
5 ) 33, 607, 621, 1735를 포함한 9-11세기 사본의 상당수에는 ‘헤게사스데’(ἡγήσασθε) 대신 ‘헤게이
스데’(ἡγεῖσθε)가 나타난다.
6 ) ‘도키미온’(δοκίμιον)은 실사 형용사(BDAG: “어떤 것의 진위를 결정하는 과정이나 수단” 또는
“시험의 결과로서의 진위”)이며, 일부 사본에서 ‘도키몬’(δόκιμον)(BDAG: “시험에 근거하여 진
정하고……높이 평가할 만하고……가치 있다는 것과 관련된”)으로 나타난다; 다음을 보라. 110, 1241 pc; Didpt. 의미는 뚜렷이 구별된다. 즉 초점이 전자에서는 과정(진위를 시험함)에 있고 후자 에서는 결과(진위)에 있다. 사본 증거는 압도적으로 전자를 뒷받침한다. 신약에서 전자는 벧전 1:7
에, 후자는 약 1:12에 나온다. 또한 롬 14:18; 16:10; 고전 11:19; 고후 10:18; 13:7; 딤후 2:15에도
나온다. 중요한 논의가 A. Deissmann, Bible Studies, 259-262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70인역 시 11[12]:7[6]; 잠언 27:21도 명확하게 설명된다.
7 ) 어순은 다양하다. ‘휘몬 테스 피스테오스’(ὑμῶν τῆς πίστεως )가 ‘테스 피스테오스 휘몬’(τῆς πίστεως ὑμῶν)으로 바뀌고(629), 속격이 생략되거나(429, 614 등), 속격만 나타나며(B2), 어떤 전
통에서는 세 단어가 모두 생략된다(syh Augpt Arn). 사본 대부분이 ‘휘몬 테스 피스테오스’를 선 호한다(01, 02 with MajT and MaxConf, PsMaxConf, PsOec).
8 ) ‘카이 홀로클레로이’(καὶ ὁλόκληροι)는 여러 사본(400, 1270, 일부 콥트어 사본)에서 불필요한 중
복으로 여겨져 완전히 생략되었지만, P74V, 629C, 631f, 1595Z, Cyr, Did, MaxConf, PsMaxConf, PsOec, 대부분의 라틴 사본, 일부 콥트어, 시리아, 에티오피아 사본에서는 발견된다.
세계 대부분의 편지 저자와 마찬가지로 청중과
의 연결 및 정보 공유를 가정했기 때문에, 정보를 알고 있는 독자는 그런 가 정을 인식하고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야고보는 이제 “나의 형제자매들”
본문에서 이 구절은 “그것을 오직 기쁨으 로 여기라”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독특하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야고 보가 그들에게 내리는 명령과 관련하여 청중을 공동체적 친교 의식으로 품 어 준다. “형제자매들”은 메시아주의자인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든 그렇지 않든, 집합적 민족 ( 유대인 공동체 ) 을 포괄적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레
위기 25장 46절과 신명기 15장 3절은 유대인이 자기 동포를 “형제”로 여기
는 전형적인 예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청중이 메시아주의자든 아니든 “형제들”이라는 똑같은 표현을 계속 사용했다 ( 행 2:29; 롬 9:3 ). 어떤 이들은 여 기의 “형제들”은 1장 1절에서 “열두 지파”로 지칭된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
19회 사용된다. 여기처럼 인칭 대명사가 덧 붙으면 이 용어는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예수 공동체를 나타낸다. BDAG, 18-19를 보라.
10 ) 이 또한 초기 기독교의 특징이다. Mayor, 33; Ropes, 131-132; Mussner, 63; Burchard, 54를 참
고하라.
11 ) 또한 1:19; 2:1, 5, 14; 3:1, 10, 12; 4:11; 5:7, 9-12, 19. 따라서 이 용어가 수사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Ropes, 132), 단순히 수사적 어휘거나 설교용 어휘일 가능성
은 거의 없다(Vouga, 38 참고).
12 ) ‘헤게사스데’(ἡγήσασθε; BDAG, 434)는 부정과거 명령형이다. 나는 이 주석 전반에 걸쳐 헬라 어 구문의 상(相) 이론을 상정할 것이다. 우리의 접근 방식은 스탠 포터의 작업에 가장 가깝다(아
래 참고). 이 구절의 부정과거는 “명령하는 것”을 시점(時點)이나
야고보서
서13 ) 일반 번역본과 다르다. 시련을 기쁨의 기회로 “여기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수반하고, 이는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가 시련을 보지 말고 시련을 통해 가능한 결과를 보라는 권면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
에서 자신이 겪은 시련을 변론, 전도, 석방의
“여기기”
원했듯이 ( 3:15 ) 야고보는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에게 시련을 통한 그들의 정
화와 성화의 영향을 바라보며 그 시련을 기쁨의 기회로 “여기라”라고 촉구 한다.
시련과 고난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전설적이었다. 이런 태도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전후에 페르페투아, 펠리키타스,14 ) 마크리나15 ) 의 박해 와 순교 이야기를 낳았지만, 그 토대는 욥을 생각하든 선지자들의 고난을 생각하든 이스라엘 역사 안에 놓여 있었다.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와 초기
온전한 기쁨으로 여긴다는 “사실의 존부” 때문이고 그렇게 여긴 “방식”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
면 초점은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는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 부정과거의 어휘
적 의미에 놓여 있다. 상 이론과 명령법에 대해서는 Porter, Verbal Aspect, 335-363; Fanning, Verbal Aspect를 보고, 상 이론에 대한 읽기 쉬운 개론서로 A. D. Naselli, “A Brief Introduction to Verbal Aspect in New Testament Greek,” DBSJ 12(2007) 17-28을 보라. 다음도 보라. S. E. Porter, “Greek Grammar and Syntax,” in The Face of New Testament Studies (ed. S. McKnight and G. R. Osborne; Grand Rapids: Baker, 2004), 76-103.
상 이론에 대한 새롭고 과감한 개론은 매우 유용하고 짧은 교과서 C. R. Campbell, Basics of Verbal Aspect in Biblical Greek (Grand Rapids: Zondervan, 2008)에서 볼 수 있다. 이 책
은 “상”을 “관점”으로 이해하고 상을 “외부 [관점]”(완료상-부정과거 및 미래)이 아니면 “내부 [관점]”(미완료상-현재[근접한], 미완료[현재로부터 먼], 완료[매우 근접한], 과거완료)이라고
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상 이론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논의다(26-33). 캠벨은 “상
태를 나타내는” 상(대략 완료 시제)을 “미완료 상”에 밀어 넣고 완료를 “근접성의 강화”로 보아
서 “초현재” 시제로 기능하게 한다(51).
신약 연구에서 상 이론이 갖는 함의는 엄청나다. 예를 들어, 상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저자
의 주관적인 묘사나 관점의 견지에서 생각하게 하고, 부정과거가 개별 구체적인 시련의 예시
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Ropes, 131의 관찰과 같은 것에 대립한다.
13 ) 행 26:2; 고후 9:5; 빌 2:3, 6, 25; 3:7-8; 살전 5:13; 살후 3:15; 딤전 1:12; 6:1; 히 10:29; 11:11, 26; 벧후 1:13; 2:13; 3:15도 보라.
14 )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의 순교』, ANF 3.697-706.
15 )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성마크리나의 생애』.
2. 그리스도인과 시련(1:2-18) 2.1. 시험의 목적(1:2-4)
순교자의 생애는 그리스도인의 상상을 소망으로 가득 채웠다.16 ) 어떤 이는
그런 시련은 종말이 되어야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하거나 ( 마 5:10-12; 벧전 4:1214 ), 운명이라고 설명하거나 ( 살전 3:3 ), 그리스도를 본받는 기회라고 설명했지
만 ( 행 5:41 ), 야고보는 시련이 도덕 형성과 성품에서 무엇을 이루는가에서 밝
은 희망을 찾는다. 야고보는 표제어를 사용하여 글을 연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헬라어
로 동족어인 “문안”/“기쁨”이라는 두 단어로 1장 1절의 인사말과 1장 2절
의 편지 본문을 결합한다.17 ) 그는 가난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공동 체에서의 이런 “기쁨”의 “근거”에 대해 말하는데, 이것은 낙관주의나 “긍정
적 사고”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18 ) 야고보는 내적 확신을 염두에 두고 있 으며,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 역사와 영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 권적 통제에 대한 확신, 기쁨으로 샘솟는 자신의 내적 변화에 대한 확
신 ( 4:5 ) 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신실하게 따를 수 있게 해 준다. 역본들은 “모 든 기쁨”19 ) 으로 직역되는 헬라어 문구의 의미를 번역어에서도
4:6; 5:10-11 ).
중요한 질문은 야고보가 유대인 메시아 공동체에 기쁨으로 시련을 맞
으라고 촉구하는 이유 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순례자의 삶이자 종말론적 보상에서의 기 쁨의 터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동기는 초기 기독교의 전체 구조에 연
16 ) Frend, Martyrdom. 17 ) χαίρειν(‘카이레인’)— χαράν(‘카란’). 다른 예로, 1:4와 1:5; 1:12와 13; 1:15-18; 1:26과 27; 2:12와 13; 3:11과 13; 3:17과 18; 5:9와 12; 5:13-16; 5:19와 20을 참고하라. ‘카라’(χαρά)
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DAG, 1077; EDNT 3.454-455; W. G. Morrice, Jo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4).
18 ) 여기서는 다음을 보라. Mayor, 33; Ropes, 131; Johnson, 176-77; Popkes, 80-81; Blomberg and Kamell, 48-49.
19 ) 헬라어로 ‘파산 카란’(πᾶσαν χαρὰν)이다. 정관사가 붙지 않은 명사와 함께 사용되는 형용사 ‘파 스’(πᾶς)는 “무엇이든(또는 각각)이라는 의미에서 모든”을 나타낸다. BDF §275.3을 보라. 이와 같이 이 단어는 ‘카란’을 강조하고 번역에서도 바로 이 “강조”를 표현해야 한다. 그것은 “충만한”
또는 “순수한” 또는 “온전한” 또는 “완전한”을 의미한다. Ropes, 129-31; Dibelius, 72 n. 11; Davids, 67을 참고하라. 메이어는 이 ‘파스’를 ‘메갈렌’(μεγάλην) 또는 ‘폴렌’(πολλήν)과 동등 한 것으로 보고 풍부함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32). 다음도 보라. 빌 2:29; 벧전 2:18; 딤전 2:2, 11; 딛 2:10, 15; 3:2; 행 17:11; 23:1. 시련 가운데의 기쁨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마카베오2서 6:12-17; 마카베오4서 7:22; 11:12; 마 5:11-12; 행 5:41; 벧전 1:6-7. 20 )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엘사 타메스가 거의 유일하다. Tamez, 27-41을 보라.
결되어 있으며 종말론은 초기 기독교의 기본 요소 중 하나다. 그러므로 사
도 바울은 로마서 5장 2-5절에서 고난이 소망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6-7절에서 고난이 예수가 나타날 그날에 대한 믿
음을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야고보 자신도 1장 12절에서 시련을 마주
하기 위한 종말론적 토대와 손을 잡고 있으며, 2장 5절에서는 시련을 견디
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는다고 말한다.21 ) 최후의 구속과 시련에서
벗어남이라는 이런 종말론적 초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이것이 야
고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많은
것 같다. 즉 고난은 인내 ( 1:2-4 ), 의 ( 1:20 ),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삶 ( 1:26-27; 2:1-13, 14-17 ), 화평 ( 3:18 ) 을
그는
종말 ( 2:12-13; 4:12; 5:1-6, 7-9 ) 과
종말 ( 1:15; 3:13-18; 4:7-11, 13-17; 5:7-9, 10-11, 20 ) 에
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22 )
반면, 메시아 공동체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두 번째 견해를 경솔 하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 5장 41절은 사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 아 채찍질을 당한 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
심을 기뻐하며” 산헤드린 ( 개역개정 “공회” ) 을 떠났다고 전한다. 고린도후서 8장 1-9절은 고난을 관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연결한다. 언어는 야고
보서 1장 2-4, 9-11절과 비슷하다.23 ) 야고보서 1장 2절을 이런 초기 기독
교 전통과 연결하는 것은 로마서 5장 2-5절과 베드로전서 1장 6-7절을 연
21 ) 특히 시험과 종말론에 초점을 맞춘 Penner, TheEpistleofJamesandEschatology를 보라(특히 183-210). 그는 슥 13:9; 단 11:35; 12:10; 말 3:1-5; 1QS 4:5; 8:3; 1QM 16:17-17:9; 계 2:2627; 3:10을 포함한 다수의 본문을 지적한다.
22 )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것은 야고보서에서 미래의 종말론적 보상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
니다. 1:12 및 그 주석을 보라. 하늘에 있는 저 세상에 집착하는 것에 맞서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중요성을 논하는 최근 연구로 N. T. Wright, SurprisedbyHope (New York: HarperOne, 2008)
를 보라.
23 ) 다음과 같이 언어 및 주제에 있어서 연결되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1) 고후 8:1, 2의 ‘카
린’(χάριν); (2) 8:2, 8의 ‘도키메’(δοκιμῇ); (3) 8:2의 고난/시련 주제; (4) 8:2, 9의 ‘프토케이
아’(πτωχεία; 약 1:9-11 주석 참고); (5) 8:9 및 약 1:9-11의 ‘플루시오스’(πλούσιος); (6) 고후
8:8-10의 부와 가난의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