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t
nicot
on the old testament
NICOT 주석 시리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약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횡단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최고의 구약 주석으로 자리매김한 NICOT는 신 학자, 목사, 랍비, 신학생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창세기 Ⅰ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o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NICOT 시리즈의 모든 주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복음주의의 입장 을 견지하면서 학문적인 탁월함과 신앙적인 적용을 함께 추구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는 저자, 기록 시기, 기록 목적, 구조, 신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본문에서는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저자의 사역과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제시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 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주석 시리즈가 구약이라는 낯선 세계로
지은이 빅터 해밀턴(Victor P. Hamilton)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지중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37년간 구
빅터 해밀턴 지음
떠나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신실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약학을 가르치면서 오경 연구에 몰두했다. 해밀턴은 고대 근동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 서 개론』, 『출애굽기 주석』 등이 있다.
옮긴이 임요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고, 남아공에 있는 프레토리아 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 학위(Ph.D.) 를 받았다. 『구약 주해와 텍스트 언어학』을 저술했고, 『한 권으로 읽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구 약과 신약의 관계』(이상 부흥과개혁사)를 번역했다.
임 | 요한 옮김
을 토대로 이번 NICOT시리즈의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으며, 그 밖의 저술로는 『오경 개론』, 『역사
창세기Ⅰ Genesis 1~17 빅터 해밀턴 지음 | 임요한 옮김
ISBN 978-89-6092-447-5 978-89-6092-335-5(세트)
www.rnrbook.com
값 28,000원
목차 ■ 저자 서문 │ 8 ■ 약어 소개 │ 10
서론
19
Ⅰ. 명칭 | 21 Ⅱ. 구조 | 23 Ⅲ. 구성 | 34 Ⅳ. 신학 | 63 Ⅴ. 해석의 문제점 | 79 A. 창세기 1장의 “날” • 79 B. 신화로서의 창세기 • 82 C. 족장들과 역사 • 86 D. 족장들의 종교 • 95
Ⅵ. 정경성 | 100 Ⅶ. 히브리 본문 | 102
본문과 주석 Ⅰ. 원시 역사 ( 1:1~11:32 ) | 108 A. 세상 창조 ( 1:1~2:3 ) • 108
1. 태초에 ( 1:1~2 ) • 108 2. 첫째 날 ( 1:3~5 ) • 124 3. 둘째 날 ( 1:6~8 ) • 127 4. 셋째 날 ( 1:9~13 ) • 130 5. 넷째 날 ( 1:14~19 ) • 133 6. 다섯째 날 ( 1:20~23 ) • 135 7. 여섯째 날 ( 1:24~31 ) • 138 8. 일곱째 날 ( 2:1~3 ) • 149
107
B. 에덴 동산과 첫 거주자 ( 2:4~25 ) • 160
1. 정원사 만들기 ( 2:4~7 ) • 160 2. 한 동산, 두 나무 ( 2:8~9 ) • 172 3. 한 동산, 네 강 ( 2:10~14 ) • 178 4. 동산과 명령을 함께 지키기 ( 2:15~17 ) • 183 5. 동물들 가운데서 적절한 돕는 배필? ( 2:18~20 ) • 187 6. 여자 창조 ( 2:21~25 ) • 190 C. 동산에서의 유혹 ( 3:1~24 ) • 200
1. 유혹자의 방법 ( 3:1~7 ) • 200 2. 하나님과 인간이 동산에서 만남 ( 3:8~13 ) • 206 3. 범죄의 결과 ( 3:14~19 ) • 209 4. 새 이름과 새 옷 ( 3:20~21 ) • 221 5. 동산에서 추방당함 ( 3:22~24 ) • 224 D. 형제 분쟁 ( 4:1~26 ) • 237
1. 한 제물은 받고 한 제물은 거절함 ( 4:1~7 ) • 237 2. 재판관과 범죄자 ( 4:8~16 ) • 248 3. 가인의 계보 ( 4:17~24 ) • 257 4. 셋의 출생 ( 4:25~26 ) • 264 E. 아담에서 노아까지: 10세대 ( 5:1~32 ) • 270 F.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부적절한 관계 ( 6:1~4 ) • 287 G. 대홍수 ( 6:5~9:29 ) • 300
1. 홍수의 이유 ( 6:5~10 ) • 300 2. 땅에서의 부패와 포악함 ( 6:11~12 ) • 306
3.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 ( 6:13~22 ) • 308 4. 방주에 들어가라는 명령 ( 7:1~10 ) • 315 5. 홍수의 시작 ( 7:11~16 ) • 322 6. 물이 넘침 ( 7:17~24 ) • 327 7. 물이 물러감 ( 8:1~5 ) • 332 8. 마른 땅이 드러남 ( 8:6~14 ) • 336 9. 노아가 방주를 떠남 ( 8:15~22 ) • 341 10.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 ( 9:1~17 ) • 347 11. 노아의 벌거벗음 ( 9:18~29 ) • 358 H. 민족 목록 ( 10:1~32 ) • 371
1. 야벳 자손 ( 10:1~5 ) • 371 2. 함 자손 ( 10:6~20 ) • 376 3. 셈 자손 ( 10:21~32 ) • 386 I. 시날 사람들과 셈 자손 ( 11:1~32 ) • 393
1. 바벨탑 건설자 ( 11:1~9 ) • 393 2. 셈 자손의 계보 ( 11:10~32 ) • 404
II. 아브라함 이야기 ( 12:1~17:27 ) | 416 A. 아브람의 등장 ( 12:1~20 ) • 416
1. 아브람의 소명 ( 12:1~9 ) • 416 2. 이집트에서의 아브람과 사래 ( 12:10~20 ) • 427
B. 롯과 아브람의 헤어짐 ( 13:1~18 ) • 438 C. 전투자 아브람과 왕들 ( 14:1~24 ) • 448
1. 다섯 왕에게 대항한 네 왕 ( 14:1~12 ) • 448 2. 롯의 구출 ( 14:13~16 ) • 455 3. 아브람이 두 왕을 만남 ( 14:17~24 ) • 460 D. 아브라함 언약 ( 15:1~21 ) • 470
1. 언약의 약속 ( 15:1~6 ) • 470 2. 언약의식 ( 15:7~21 ) • 481 E. 하갈과 이스마엘 ( 16:1~16 ) • 497
1. 가족 내의 갈등 ( 16:1~6 ) • 497 2. 이스마엘의 출생 ( 16:7~16 ) • 504 F. 언약의 재확증 ( 17:1~27 ) • 516
1. 아브람의 이름 변경 ( 17:1~8 ) • 516 2. 언약의 표징 ( 17:9~14 ) • 525 3. 사라와 이삭 ( 17:15~22 ) • 533 4.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할례 ( 17:23~27 ) • 538 ■ 참고문헌 │ 543
창세기 I
┃ 저자 서문 ┃
NICOT 창세기의 집필을 제안하고 원고 준비에 필요한 조언을 해 주신 토론토 대학교의 위클리프 대학 R. K. 해리슨 명예교수에게 감사한다. 처음 에 나는 이 엄청난 과제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걱정했지만, 나의 신학교 스 승이자 현재 애즈버리 대학 총장인 데니스 킨로우 박사에게서 자극과 격려 를 받은 후에 이 도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가 머뭇거렸던 한 가지 이유 는 창세기에 대해 이미 걸작( opus magnum ) 수준에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수 많은 주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앞선 시대로는 궁켈과 스키너의 저서와 더 최근 시대로는 폰 라트와 베스터만의 저서를 염두에 두었다. 한 동료가 창세기 주석가들의 방대한 모음집을 내게 주었을 때 간단히 “그 레 몬에서 얼마나 많은 주스를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창세기 주 석가들의 방대한 모음집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그러나 내가 이 과제를 시작했을 때, 창세기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진술이 아 직 마련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너무 일찍 하게 되 었다. 대학 교수평가발전위원회에서 내게 두 차례 업무 휴가를 준 특권에 대해 감사한다. 그래서 나는 강의와 위원회 업무에서 자유로웠고, 본 주석을 연 구하고 집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한 지속적인 시간을 허락받았다. 나는 어드만 출판사의 편집자인 개리 리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내 원 고를 가장 주의 깊고 끈기 있게 읽었다. 주석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제 안해 준 그에게 감사한다. 8
뉴욕 주 로체스터 시에 사는 셰릴 스미스는 주석의 첫 장을 컴퓨터로 입력 해 주었는데, 셰릴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나의 아내 셜리가 주석의 대부분을 워드프로세서로 작업했다. 게다가 엄마, 아내, 주부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도, 이 중요한 과제를 맡았고 그것을 전문적인 방법으로 수행했다. 또한 본 주석을 출판하는 시기 동안 셜리가 격려와 자극을 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나를 붙드셔서 연구, 성찰, 집필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에 감사한다. 빅터 P. 해밀턴
< 어드만 출판사의 첨언 > 본 주석은 단권으로 계획되고 집필되었으나, 주석의 분량으로 인해 두 권 으로 출판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제1권인 이 주석에서만 창세기 전체 의 서론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2권에는 창세 기 18~50장에 대한 주석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독자의 편리함을 위해 각 권마다 목차, 약어 소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9
서론
I. 명칭
I 명칭
“Genesis”( 창세기 )라는 영어 명칭은 70인역의 ‘게네시스’라는 용어를 빌려 음역한 불가타역 ( Incipit
Liber Bresith id est Genesis ) 에서
온 것이다. 영어로는
“origin”( 기원 ) 이 이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한다. 성경 기록 시대 이후 히브리어 용법에서의 명칭은 ‘베레쉬트’인데, 사실 이것은 단순히 1장 1절의 첫 단어( 태초에 )를 말한다. 이는 오경의 책들이 첫 단어, 첫 두 단어 또는 첫 절 시작 가까이에 있는 표현에 근거해서 명명되었 던 관습을 따른 것이다. 이 관습에 따라 토라의 나머지 책들이 갖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출애굽기는 ‘베엘레 쉐모트’( 이는 ~의 이름들[이니라] ), 레위기는 ‘바 이크라’(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
민수기는 ‘베미드바르’( ~의
기는 ‘엘레 하드바림’( 이는 말씀[이니라] ) 이다.
1)
광야에서 ),
그리고 신명
첫 다섯 권을 넘어서면 히브리
성경에서 이 관습을 잘 따르지 않는다( 따르는 예, “아가,” ‘쉬르 하쉬림’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 ‘에카’ ). 2 )
중세의 일부 히브리어 사본은 “첫 책,” “세상 창조의 책” 그리고 “의인의 책”과 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랍비 이삭 아브라바넬 ( Isaac 1508년 ) 은
Abrabanel, 1427~
자신의 창세기 주석 마지막에 “‘베레쉬트’는 ‘창조의 책’( 세페르
1) 현 대 히브리어 용법은 때로 명칭을 축약하거나(출애굽기를 ‘쉐모트’로, 신명기를 ‘데바림’으로), 명 칭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민수기를 ‘바미드마르’[그 광야에서]로). 2 ) 예레미야애가의 영어 명칭인 “Lamentations”는 ‘키노트’의 번역인 70인역 ‘드레노이’와 불가타역
‘트레니’에서 유래한다. 바벨론 탈무드(Baba Batra 14b, 15a)와 초기 다른 유대 문헌(‘메길라트 키노트’ 표현을 사용하는 예루살렘 탈무드, šabbat 16:15c)은 이 책의 명칭을 ‘키노트’라고 언급 한다.
21
창세기 I
하 - 브리아 )
또는 ‘형성의 책’( 세페르 하 - 예찌라 ) 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한다. 마
찬가지로 나흐마니데스 ( Nahmanides ) 는 서론에서 “‘예찌라’의 책인 ‘베레쉬 트’는 세상이 새롭다고 가르친다”라고 기록한다. 미드라쉬 하비우르는 “왜 ‘베레쉬트’를 ‘야샤르’( 의인 ) 의 책’이라고 부르는가?”라고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를 원하며’( 민 23:10 ) 라고 기록됐듯이, 이 책에는 의로운 자라고 불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역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창세기는 분명히 기원들과 관련된 책이다. 즉 세상 창조의 기원, 인간의 기원, 문명을 지속시키는 제도들의 기원,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로 택하셔서 세상을 복 주는 통로로 삼으신 특별한 한 가족의 기원과 관련된 책이다. 하 나님은 기원에 대한 이 모든 강조점들을 초월해 계신다. 성경을 시작하는 책에는 ‘게네시스 데우’( 신의
기원 ) 도
없고 신에 대한 전기도 없다. 하나님은
‘레쉬트’( 시작 ) 와 ‘아하리트’( 끝 ) 가 없는 분이시다.
22
II. 구조
II 구조
성경의 책들 가운데 창세기처럼 개별적인 단위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 는 경계선을 보여 주는 책은 거의 없다. 이런 분명한 구분은 창세기 전체에 서 열 번에 걸쳐 사용되는 ‘엘레 톨레도트’라는 문구로 인해 나타난다. 어떤 곳에서는 이 문구를 “이것은 ~의 이야기( 또는
역사 ) 다”로
번역하는 것이 좋
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들은 ~의 후손( 세대 ) 이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 다. 이 문구가 나타났을 때 이 두 번역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대부분 이 문구 뒤에 나오는 자료의 성질에 달려 있다. 만약 이 문구 뒤에 계보가 나오면 “이들은 ~의 후손 ( 세대 ) 이다”라는 번역이 더 잘 어울리고, 내러티브가 이어지면 “이것은 ~의 이야기( 또는 역사 ) 다”라는 번역 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연속성을 위해서 “세대”라고만 번역한다 ). 1. 2:4a
“이는 하늘과 땅의 세대라”
2. 5:1a
“이는 아담의 세대라”
3. 6:9a
“이는 노아의 세대라”
4. 10:1a
“이는 노아의 아들들의 세대라”
5. 11:10a
“이는 셈의 세대라”
6. 11:27a
“이는 데라의 세대라”
7. 25:12a
“이는 이스마엘의 세대라”
8. 25:19a
“이는 이삭의 세대라”
9. 36:1a, 9a “이는 에서의 세대라”
23
창세기 I
10. 37:2a
“이는 야곱의 세대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문구들 가운데 다섯 문구에서 내러티브가 이어진다. 즉 1번( 창조 ), 3번( 홍수 ), 6번( 아브라함 이야기 ), 8번( 야곱 이야기 ), 10번( 요셉 이야기 ) 등 이 그렇다. 이 다섯 문구에서 소개하는 표현은 “이것은 ~의 이야기다”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성경 번역본은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1장 27a절을 “이는 데라의 후손들이다”( JB ) 또는 “이는 데라 후손의 목록이다”( NEB ) 로 번역한다. 주로 11장 27b~32절에 계보가 나오기 때문이 다. 이외에도 NEB는 25장 19a절을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손 들 목록이다”라고 번역한다. 나머지 다섯 문구는 모두 계보의 제목으로 나온다. 즉 2번 ( ‘아담’의 4번( ‘노아의
아들들’의 후손 ),
5번( ‘셈’의
후손 ),
7번( ‘이스마엘’의
후손 ),
9번( ‘에서’의
후손 ),
후손 ) 이
그렇다. 게다가 창세기의 이 다섯 계보는 두 유형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첫 째 유형은 수직적 계보로, 후손의 한 혈통을 추적한다. 5장 1절 이후 ( 2번 ) “아담부터 노아까지 10세대의 계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11장 10절 이 후( 5번 ) 셈부터 아브라함까지 10세대의 계보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계보는 세 아들을 낳은 사람을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노아: 셈, 함, 야벳 데라: 아브람, 나홀, 하란
창세기에 나오는 계보의 둘째 유형은 수평적 또는 분할된 계보이며, 여기 서 계보는 한 아들 ( 장자 ) 이 아니라 여러 자녀를 통해 추적된다. 이 유형은 10장 1절 ( 4번 ) 에 나오는 셈/함/야벳의 자손들에서 볼 수 있으며, 25장 12절( 7번 )의 이스마엘의 12자손들에서, 마지막으로 36장 1절과 9절 ( 9번 ) 에 있 는 에서의 가계도에서 볼 수 있다.1 ) 이 마지막 세 계보는 창세기의 내러티브
1) 다 음을 보라. B. S. 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p. 145. “내러티브 계보”(즉 창 5장) 그리고 “계보 목록” 또는 “지파 계통”(즉 .. 창 10장)에 대해서는 다음을 또한 보라, S. Tengstrom, Die Toledotformel und die literaische
Struktur der priesterlichen Erweiterungsschicht im Pentateuch (Lund: Gleep, 1981). 창세기에 서 계보를 도입하는 4개의 문구(10:1, 25:12, 36:1, 9)를 제외한 후에 남게 되는 7개의 문구는 P(제 사장 자료)에 속하는 창조의 7일과 병행해서 입증해야 한다는 텡스트룀의 새로운 제안은 억지스럽 다. 텡스트룀이 창세기에 나타난 그 문구들의 열한 가지 용법을 두 범주에 맞춰 놓은 것을 어떻게 창세기 저자가 구분할 수 있겠는가?
24
II. 구조
본문 사이에 살짝 걸쳐 있다. 각각의 경우에 이 계보들은 거의 흐름에서 벗 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 문구가 나타나는 열 번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단연 첫 번째 경우다. 다른 경우들과는 다르게 이 첫 번째 경우에만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 는다. 그 대신 “하늘과 땅의 ‘톨레도트’”가 나온다. 그리고 이 부분은 분명 히 해석에 큰 문제를 유발한다. 구조를 형성하는 ‘톨레도트’ 문구가 처음 사 용된 이 부분은 지금까지 상술되던 내용을 끝맺는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이어지는 내용의 도입 역할을 하는가? 만약 이 문구가 앞의 내용을 끝맺는 것이라면 2장 4a절은 1장 1절~2장 3절과 함께 읽어야 하고, 반대로 이후의 내용을 도입하는 것이라면 2장 4a절은 2장 4b절 이하와 함께 읽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은 모든 ‘톨레도트’ 문구를 이어지는 내용을 도입하는 제목 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앞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으로 이해해야 하 는지에 대한 더 큰 문제로 발전한다. 먼저, 2장 4a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대의 성경 번역본 대부분은 2장 4a절을 1장 1절~2장 3절의 맺는말 ( subscript ) 로 여긴다 ( RSV, Speiser를 보라 ).
JB, NEB, NAB,
이런 구분은 최근에 조판된 두 개의 히브리어 성경(BHK와
BHS)
에도 반영되었다. 그렇게 이해되면, 2장 4a절의 “세대”( 개역개정 “내력” ) 는 1장 1절~2장 3절에 나오는 7일의 숫자 패턴과 연관된다. 2장 4a절이 이어지는 내용의 서론이라는 견해도 유력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견해를 선호한다. 첫째, 2장 4a절을 1장 1절~2장 3절의 끝에 붙인 상태에서 제사장 자료의 창조 이야기( 1:1~2:3 ) 와 야훼 자료의 창조 이야기( 2:4b 이하 ) 를 주장하려 하면 거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초래하게 된 다.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의문시되는 이 문구가 창세기의 모든 부분에서 표제( superscript ) 로서 기능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주석가들은 이후에 제 시됨 ).
그러나 여기서만 이 문구가 맺는말( subscript ) 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폰 라트( Von
Rad ) 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는 억지스럽게도 제사장 자료의
삽입자가 두 가지 이유에서 문단의 끝에 ‘톨레도트’ 문구를 부자연스럽게 삽입했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이유는 순서와 체계를 고집하는 삽입자의 경 향 때문인데, 정돈된 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편집자가 주필(rubric) 을 달아 놓았 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장의 시작이 정경적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 래서 수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 )
2 ) 다음을 보라. G. von Rad, Genesis, OTL, rev. ed., tr. J. H. Marks (Philadelphia: Westmin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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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그러나 창조의 7일을 “세대”로 지칭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톨레도 트’가 나타나는 다른 모든 경우에 ‘톨레도트’는 세대의 의미로 “~의 자손” 을 지칭하거나 “~의 자손”에 대한 내러티브를 도입한다. 만약 우리가 2장 4a절을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2장 4a절에 있는 ‘톨레도 트’에 어색하고 독특한 의미나 뉘앙스를 덧붙여야만 한다. 2장 4a절의 문구를 표제로 읽는 둘째 이유는 고대 번역본( 예, 70인역 ) 에는 2장 4절을 나누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하더라도 2장 3절에서 나뉘고 2장 4a절에서 나뉘지는 않는다. 마소라 본문이 2장 4절의 통일성을 뒷받침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대체로 마소라 본문은 창세 기를 91개의 ‘파라쉬요트’( 부분, 표기되는 ‘페투호트’( 열린 트’( 닫힌 부분 )다.
3)
단락 ) 로
부분 ) 이며
나누는데, 여기서 43회는 ‘페’( p ) 로
48회는 ‘싸메흐’( s ) 로 표기되는 ‘세투모
2장 4절은 이 ‘페투호트’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는 것을 주
목하라. 셋째, 이 문구에는 항상 “자손이 아니라 선조의 소유격”이 이어지기 때문 에 이 구절은 하늘과 땅 자체의 세대가 아니라 하늘과 땅이 낳은 것만을 가 리킬 수 있다.4 )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 문구는 이어지는 내용의 표제로만 읽 을 수 있다. 그러므로 셋이 아담의 후손이며, 아브람이 데라의 후손인 것처 럼, 2장 5절 이후는 남자와 여자를 하늘과 땅의 후손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이 문체 유형에 대해 의도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창세기를 시작하는 장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남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지녔다. 아마도 이 독특한 자질은 아담과 하와에게 ‘톨레도트 엘로힘’으로서의 자격을 주는 것 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은 개인( 특히 왕 ) 을 “하나님의 아들 들”로 부르는 것을 피하지 않지만 이 표현은 창세기 1~2장에는 두드러지 게 나타나지 않는다. 창세기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억제되지 않 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6:1~4 ). 우리는 2장 4절 이하가 1장 1절~2장 3절과 양극을 이루며, 하와가 아담에게 그랬듯이 2장 4절 이하는 1장 1절~2장 3절에게 ‘케네그도’( 보완으로서 ) 라고 제안한다. 서로가 없으면 불완
1972), p. 63. 3 ) ‘ 파라쉬요트’, ‘세다림’, ‘페투호트’, ‘세투모트’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A. Dotan, “Masorah,” EncJud, 16:1406~1407. 4 ) J.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 ICC (Edinburgh: T. & T. Clark, 1910), p. 41에서 인용했다. B. Childs, Introduction, p. 145도 보라. 2:4a에 대한 상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F.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1973), pp. 301~305, 특히 p. 305를 보라.
26
II. 구조
전하며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진실하거나 중요하거나 필수적이지 않다. 1장 1절~2장 3절이 인간의 신적 기원과 자질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2장 4절 이하는 인간의 세속적 기원에 초점을 둔다. 이런 이유에서 1장 1절~ 2장 3절은 권위로( “너는……할
것이라,” 1:29 )
창조된 최초의 남녀를 주목하게 하
는 반면, 2장 4절 이하는 권위 아래( “너는……하지 말지라,” 2:17 ) 창조된 최초의 남 녀를 주목하게 한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는 2장 4a절을 그 이후에 나오는 내용들 에 대한 표제로 이해할 뿐 아니라, 서문 단위 ( 1:1~2:3 ) 에 이어지는 모든 단위, 즉 창세기에 있는 10개의 단위 가운데 첫 번째 단위에 대한 서론으로 이해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문구가 쓰인 나머지 아홉 가지 경우를 고찰하려 한다. 2장 4a절은 예외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톨레도 트’ 문구는 새로운 단위를 도입하는 제목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널리 인정 된다. 많은 저자들도 이 문구들을 콜로폰( 간기 [刊記] ) 으로 여긴다. 콜로폰은 책이나 원고의 마지막에 위치한 판권 페이지로 정의되며, 보통 책과 관련된 정보( 예, 저자의 이름 ) 가 들어 있다. 고대 근동 문헌에 콜로폰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상당수 입증됐다. 초기의 예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로 된 문헌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헝거 ( H. Hunger ) 의
연구에서 도움을 받는데, 헝거는 2천년에 걸쳐 작성된 문헌에서
563개의 본문 콜로폰을 수집했다.5 ) 헝거는 콜로폰을 “글의 내용, 점토판에 대한 진술 그리고 점토판을 만든 것과 관련된 사람을 포함해서 점토판 끝 에 필경사가 본문에 첨가한 메모”라고 정의한다. 서론에서 헝거는 콜로폰 에 있는 정보의 유형을 집계한다. 유형에는 도서목록 정보( 예, 표제, 저작 제목, 점 토판 번호, 줄 번호 ),
개인 자료( 예, 점토판의 필경사, 소유자 또는 감독관 이름 ), 기록 목적, 희
망, 저주, 기도, 날짜 등이 있다. 헝거가 모은 563개의 콜로폰 가운데 1~ 39번은 고대 바벨론 시기에 속하며, 40~72번은 중기 바벨론/앗수르 시기 에 속하고, 73~563번은 후기 바벨론/앗수르 시기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5) H . Hunger, Babylonische und assyrische Kolophone (Kevelaer: Verlag Butzon and Berker/ Neukirchen-Vluyn, 1968). 또한 다음 연구를 보라. E. Leichy, “The Colophon,” in Studies
Presented to A. Leo Oppenheim , ed. R. D. Briggs and J. A. Brinkman (Chicago: Oriental Institute, 1964), pp. 147~154. 아트라하시스의 고대 바벨론 판의 각 세 토판에 나오는 콜로폰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 G. Lambert and A. R. Millard, Atra-hasl-s: The Bablyonian Story of ) the Flood (Oxford: Clarendon, 1969), pp. 31~32. 이 콜로폰은 기록 날짜(월[月]/일[曰]/왕의 이름[Ammi-s. aduqa]), 명칭, 행 번호, 그리고 필경사 이름(Ku-Aya, 수습 필경사가 기록)을 포함 한다.
27
창세기 I
491개의 콜로폰이 BC 1000년 이후의 후기 바벨론/앗수르 시기에 속한다. 헝거의 연구를 통해 두 가지 핵심 사실이 도출된다. 하나는 아카드어 콜로 폰에는 저자의 이름이 없다는 것이며, 둘째로 콜로폰은 항상 본문의 마지막 에 온다는 점이다. 우가릿 본문에서도 입증됐듯이, 가나안에서도 콜로폰 사용이 발견된다. 우가릿 본문( UT ) 62에는 본문의 주요 본론인 “바알에 관련된”이라는 명칭 이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콜로폰으로 마무리한다. “필경사는 Šbn 족속 의 엘리멜렉이다. 해설가는 T . ˚ 족속으로, 대제사장
( 그리고 )
목자의 우두머리
인 Atn-prln이다. T . mrn의 주이며 Yrgb의 주인이며, 우가릿의 왕인 니크마 드( 통치 시기의 것이다 ).”6 ) 길고 중요한 아크하트 서사시는 다음과 같은 콜로폰 으로 마무리한다. “필경사는 T. ˚ 족속 엘리멜렉이다.” 7 ) 우가릿 본문 ( UT ) 51은 다음과 같은 콜로폰으로 마무리한다. “[ ] T. ˚ 족속, 우가릿 왕 니크마 드.”8 ) 이 콜로폰은
( Tha ˚부족에 속하는 )
필경사와 왕( 니크마드 2세 ) 의 이름을 기록
한 토판 모서리에 나온다. 이 토판은 니크마드 왕 통치 시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우가릿에서 나온 많은 토판에 새겨진 글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사라지거나 너무 희미해서 읽기가 어렵다. 따라서 대부분의 제목이나 콜로 폰이 보존되지 않았다. 설형문자 문헌과는 대조적으로 이집트에서 나온 상 형문자 본문은 콜로폰이 사용된 증거가 더 적게 나온다.9 ) 콜로폰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다면 멀리 갈 것도 없이 히브리어 성경으로 돌아가면 된다.10 ) 논의 중인 문구의 예를 잠시 제쳐두고, 다음과 같은 본문 을 예로 들 수 있다. 창세기 10장 22절, 31~32절( 이들은
함/셈/노아의 자손이라 ),
22장 23절(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 25장 4b절(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 야곱의 아들들이요 ), 두 지파라 ).
25장 16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 35장 26b절( 이들은
36장 5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 49장 28a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
창세기 이후의 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출애굽기 6장 15b
절, 24b절, 25b절, 19장 6b절, 38장 21절,11 ) 신명기 29장 1절. 6 ) 다음을 보라. C. H. Gordon, Ugarit and Minoan Crete (New York: Norton, 1966), p. 87. 7 ) 앞의 책, p. 120. 8 ) 앞의 책, p. 74. 9 ) 다음을 보라. J. Černy' , Paper and Books in Ancient Egypt (London: H. K. Lewis, 1952), pp. 24
이하. 10 ) 다음을 보라. H. M. L. Gevaryahu, “Biblical colophons: a source for the ‘biography’ of authors, texts, and books,” in Congress Volume: Edinburgh, 1974, VTsup 28 (Leiden: Brill, 1975), pp. 42~59. 11 ) 다음을 보라. F. I. Andersen, The Sentence in Biblical Hebrew (The Hage/Paris: Mouton,
28
II. 구조
이 구약의 언급들이 지닌 공통점은 “이들”( these )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 용해서 도입하는 명사 문장이라는 것, 요약 진술 역할을 한다는 것, 계보를 마무리짓는다는 것이다( 연설이나
활동을 요약하는 출 38:21과 신 29:1은 예외 ).
요약하는
것보다는 도입하는 콜로폰을 구약에서 찾는다면, 아마도 가장 가까운 예가 신명기 4장 44~49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선포한 율법은 이러하니라 ) 일 것이다. 이 확장된 콜로폰은 신명기 1~4장을 요약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 견해에 따라 신명기 5장 이하를 도입하는 제목일 가능성이 더 크다. 다음과 같은 70인역 에스더서의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우가 릿 문헌에서 예로 들었던 콜로폰( 즉 본문 마지막에 있는 부록 )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Ptolemy ) 와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 의 통치 4년에, 제 사장이자 레위인이라고 주장하는 도시테오스( Dositheus ) 와 그의 아들 프톨레 마이오스가 ‘부림’에 대한 위의 편지를 가져왔다. 그들은 이 편지가 진짜이 며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리시마코 스( Lysimachus ) 가 번역했다고 주장한다.”12 ) 이제 창세기의 “이들은 ~의 ‘톨레도트’다”라는 문구로 돌아가자. 창세기 의 열 가지 경우가 성경의 콜로폰에 대한 자세한 실례라는 것이라고 동의 할 수 있다면, 다음으로 이 문구들이 도입하는 문구( 다수 요약하는 문구( 소수
견해 ) 인지를
견해 ) 인지,
아니면
결정해야 한다. 위의 간략한 논의에서 우리
는 설형문자 세계의 본문에 나오는 콜로폰은 항상 본문의 마지막에 온다는 것을 관찰했다. 똑같은 사실이 오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콜로폰인 “이것은/ 이것들은……이다”에도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에서 2장 4a절을 2장 4b절 이후에 대한 서론 으로 읽어야 한다고 논증했다. 2장 4a절은 1장 1절~2장 3절을 요약하기보 다는 이어지는 내용을 도입한다. 비슷하게 이 문구의 둘째 경우도 이어지는 내용( 5:1b 이하 ) 을 도입하는 제목( 5:1a ) 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통하는 것 같다. 1936년에 와이즈먼( P. J. Wiseman ) 은 처음으로 이런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 는 결연한 시도를 했다.13 ) 그의 아들 와이즈먼( D. J. Wiseman ) 과 해리슨( R. K.
1974), p. 54(§ 3.7.5.2). 12 ) C . A. Moore, Esther,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71), pp. 112~113의 번역. 이에 대 해 이전에 다룬 것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E. Bickerman, “The Colophon of the Greek Book of Esther,” JBL 63 (1944), pp. 339~362, R. Marcus, “Dositheus, Priest and Levite,” JBL 64 (1945), pp. 269~271. 13 ) P . J. Wiseman, New Discoveries in Babylonia about Genesis (London: Marshall, 1936). 이 책은 최근에 다음 제목으로 다시 출간됐다. Ancient Records and the Structure of Genesis
29
창세기 I
Harrison ) 이
와이즈먼의 견해를 따랐다.14 ) 콜로폰을 결론으로 읽는 가장 주
요한 주장은 성경 이외의 문헌에 있는 예를 별도로 하고 다음과 같다. 최소 한 몇 가지 경우에서 ‘톨레도트’ 문구에 나오는 사람에 대한 성경 본문에 있는 대부분의 정보는 사람 이름 “앞에” 나온다. 예를 들어, 아담의 이름은 5장 1절에 나온다. 그러나 아담에 대한 모든 내용은 그의 죽음을 알리는 내 용을 제외하면 모두 5장 1절 앞에 나온다. 37장 2절에 야곱의 이름이 나온 다. 그러나 야곱에 대한 자료는 37장 2절 앞에 나온다. 37장 2절에 이어지 는 내용은 대부분 요셉에 대한 내러티브다. 그러므로 이 문구는 단위의 시 작보다는 결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제안은 요셉 내러티브를 덧붙인 11개의 문학 단위 또는 토판이( tablets ) 창세기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토판 1 1:1~2:4 우주의 역사/기원 토판 2 2:5~5:2 아담/인류의 역사/기원 토판 3 5:3~6:9a 노아의 역사/기원 토판 4 6:9b~10:1 노아의 아들들의 역사/기원 토판 5 10:2~11:10a 셈의 역사/기원 토판 6 11:10b~27a 데라의 역사/기원 토판 7 11:27b~25:12 이스마엘의 역사/기원 토판 8 25:13~19a 이삭의 역사/기원 토판 9 25:19b~36:1 에서( 그리고 야곱 ) 의 역사/기원 토판 10 36:2~9 에서의 역사/기원 토판 11 36:10~37:2a 야곱 가족의 역사/기원
물론 이제 이것은 창세기의 구조에 대한 문제와 관련될 뿐 아니라 창세기 의 저자 및 작성에 대한 문제와도 관련 있다. 이 두 번째 문제는 이 서론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논의할 것이다. 와이즈먼과 해리슨의 제안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문구가 계보를 앞서는 다섯 가지 경우( 5:1,
10:1, 11:10, 25:12, 36:1 )에,
이어지는 내용에 콜로폰을
(Nashville: Nelson, 1985). 저자의 아들이며 유명한 앗수르 학자인 와이즈먼이 추천사를 썼고 R. K. 해리슨이 서문을 썼다. 14 ) R. K. Harri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9), pp. 543~547; “Genesis,” ISBE, 2:436~437.
30
II. 구조
포함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디위트( DeWitt ) 는 와이즈먼과 해리슨의 접근의 기본적인 개요를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이 점을 인정했다.15 ) 디위트는 “이 는 ~의 세대들이다”를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토판 아래에 기록하는 콜로폰 으로 읽자고 제안하면서 콜로폰은 아마도 토판 앞면의 역사와 토판 뒷면에 기록한 계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디위트는 와이즈먼과 해리슨이 제안 하는 11개의 토판이 아니라 10개의 토판으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디위트의 발상으로 말미암아 본문이 토판 순서에서 정경적 순서로 나올 때 몇 가지 중대한 본문 재구성을 하게 된다( 예, 그의 토판 9와 10을 보라 ). 와이즈먼과 해리슨의 재구성에서 나타나는 둘째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제 안한다는 점이다. 이스마엘이 주로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존하는 데 책임을 진다( 11:27b~25:12, 토판 8 ).
토판 7 ).
이삭은 이스마엘의 역사 보존을 책임진다( 25:13~19a,
에서는 야곱의 역사를 보존한다( 25:19b~36:1, 토판 9 ). 그리고 야곱은 에
서의 역사를 보존한다( 36:10~37:2, 토판 11 ).16 ) 적어도 이 설명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 셋째 문제는 이 견해가 히브리어 단어 ‘톨레도트’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동사 ‘얄라드’( 아버지가
되다, 낳다 ) 에서
나온 명사 ‘톨레도트’는 태어난 것, 즉
역사적인 결과를 가리켜야 한다. “이들은 ~의 ‘톨레도트’다”의 소유격에서 우리는 출발점 즉 기원을 가진다. 명사 ‘톨레도트’에서는 결론이나 결과를 가진다.17 ) 우주의 ‘톨레도트’는 다른 창조 부분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아담 과 하와가 있다. 노아의 ‘톨레도트’는 다른 아들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셈이 있다. 셈의 ‘톨레도트’는 다른 자손들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데라가 있다. 데라의 ‘톨레도트’는 다른 두 아들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아브람이 있다. 이 삭의 ‘톨레도트’는 다른 아들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야곱이 있다. 야곱의 ‘톨레도트’는 다른 형제들과 대조되게 그 중심에 요셉이 있다. 각 ‘톨레도 트’는 한 개인에게 초점을 두고 덜 중요한 사람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창 세기는 문학적, 신학적 통일성의 증거를 보인다. 분명히 이 내러티브는 전 기가 아니다. 만일 전기라면, 아브라함과 요셉의 “세대”가 있어야 한다. 오 히려 창세기의 ‘톨레도트’ 구조는 출발점에서 종점으로, 원인에서 결과로, 조상에서 자손으로 옮겨 가는 것을 시사한다. 자손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 15 ) D. S. DeWitt, “The Generations of Genesis,” EvQ 48 (1976), pp. 196~211. 16 ) D. Kidner, Genesis, TOTC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79), p. 24를 보라. 17 ) M. H. Woudstra, “The Toledot of the Book of Genesis and Their 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 CTJ 5 (1970), p. 187을 보라.
31
창세기 I
의 계획과 의지를 이행하고 보존하는 핵심 인물이다. ‘톨레도트’ 문구 외에도 창세기의 구조적 설계를 알리는 다른 지표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 안에는 분명한 지리적 설계가 있다. 창세기 1~11장은 바벨론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12~36장은 팔레스타인을 배경 으로 하며, 37~50장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다.18 ) 다시 말해서 창세기의 특정 부분에서 지중해 세계의 각 지역을 부각시킨다. 19 ) 창세기의 중요한 중심 부분( 12~36장 ) 이 지리적으로 근동 세계의 두 부분으로 묶여 있다. 그리 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근동 세계의 역사와 끊임없이 맞물려 있다. 이런 폭 넓은 지리적 윤곽이 만든 영향은 창세기가 세계 역사에 대한 책이라는 점 이다. 이 점은 우주와 인류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루는 초반 장에서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모든 내러티브에서 사실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한 궁극적 인 이유는 지상( 창 1~11장과 37~50장의 지리적 경계 안에 해당하는 자들과 같은 ) 의 국가들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 주심에 대해 알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조적 설계의 측면에서 창세기를 살펴보면,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 다. 창세기의 1/5( 1~11장 ) 이 20세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 ) 의 역사를 묘사하지만, 창세기의 4/5가 오직 4세대(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 의
역사만을 묘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 창세기는 첫 20세대는 최소한으로만 다루고 4세대만을 최대한으로 다루는가?20 ) 이 질문을 확장해 보자. 창조 이야기는 분명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창세기와 성경 전체의 필수적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겨 우 두 장만 차지하는 반면, 아브라함 이야기는 열세 장과 다른 두 장의 일부 에 할애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셉 내러티브는 창세기의 마지막 1/3을 차지 하면서 왜 “타락”에 대한 이야기는 한 장에만 한정되는가? 11장과 12장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창세기를 두 주요 부분으로 나누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첫 부분은 원시 역사로 의도된 1~11장이고, 둘째 부분
18 ) 똑 같은 종류의 3중으로 된 지리학적 강조는 출애굽기에서 나온다. (1) 이집트에서(1:1~12:36), (2) 시내 산으로(12:37~18:27), (3) 시내 산에서(19:1~40:38). 19 ) 다음을 보라. W. W. Hallo, “Biblical History in Its Near Eastern Setting: The Contextual
Approach,” in Scripture in Context: Essays on the Comparative Method, ed. Carl D. Evans, et al. PTMS 34 (Pittsburgh: Pickwick, 1980), p. 15; “Genesis and Ancient Near Eastern Literature,” in The Torah: A Modern Commentary. Genesis, ed. W. G. Plaut (New York: Union of American Hebrew Congregations, 1974), 1:xxix. 20 ) 똑같은 불균형이 오경에서도 대체로 나타난다. 세상 창조부터 요셉까지를 포괄하는 창세기는 오 경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출애굽기~신명기는 모세의 120년 시기만을 포함하지만, 오경 전체 의 75% 정도를 차지한다. R. P. Knierim, “The Composition of the Pentateuch,” in SBLASP, 1985, p. 395를 보라.
32
II. 구조
은 족장 역사로 의도된 12~50장이다. 1~11장에서 우리는 땅을 가졌었지만 땅을 잃거나 땅에서 추방당한 인물들에 대해 읽는다. 12~50장에서는 땅을 가지지 못했지만 땅을 향해 가는 중에 있는 인물들을 강조한다. 한 집단은 잃고 다른 집단은 기대하고 있다.21 ) 우리는 1~11장에 포함된 내러티브를 통해 하나님과 점차 멀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폰 라트 ). 또는 악이나 죄가 특별히 강해지는 것이 아니면서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다양성과 범위의 예를 발견한다 ( 베스터만 ). 1~11장에 유 감스러운 여러 예들을 제시한 후, 12장 이후를( 족장
역사 )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읽어야 한다. 더 많은 아담과 더 많은 탑 건설자가 있을 것인 가? 아니면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가?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사 람의 모델로서 그 이전의 모든 유감스러운 모델과 대조된다.22 )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름을 위대하게 하려는 의도가 없는 자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위대 함을 부여받은 자다. 인간과의 언약( 창 8~9장 ) 은 이제 가족과의 언약으로 보 강된다. 창세기는 우리를 발생( generation,
1~2장 )에서
퇴보( degeneration,
3~11장 ),
그리고 재생( regeneration, 12~50장 ) 으로 서서히 이행한다.
21 ) W. Brueggemann, The Land, OBT 1 (Philadelphia: Fortress, 1977), p. 15를 보라. 22 ) G. Coats, “The God of Death: Power and Obedience in the Primeval History,” Int 29 (1975), p. 234를 보라.
33
본문과 주석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1
태초에 1 ) 하나님이 천지 2 )를 창조하
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 행하시니라
1 2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universe.
And the earth-it was a desert and a
wasteland; darkness was 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was hovering over the surface of the waters.
1절 첫 절은 성경 구절에서 가장 잘 알려진 본문 중 하나이며 전통적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니라”로 번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절의 번역과 의미 모두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쟁이 있어 왔다. 이슈는 최소한 두 가지다. 첫째, 이 주석이 접근하는 방식처럼, 1절을 독 립절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를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라는 종속절로 이해하고, 따라서 이어지는 주절에 종속되는 것으로 봐야
1 ) ‘ 로쉬’, ‘리숀’, ‘레쉬트’의 모음을 중심으로 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C. H. Gordon, “Existence of Barth’s Law of Vocalic Sequence,” Or 51 (1982), p. 395. 2 ) 직역하면 “하늘과 땅.” 이는 중언법(“그리고”로 연결된 두 명사가 하나의 개념을 표현하는 방법)
또는 제유법(두 대조적인 부분을 통해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의 예로 보아야 한다.
108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하는가? 둘째, 1절과 2절은 무슨 관계인가? 그리고 이 관계는 실제로 이 장의 나머지 부분과 연대기적으로, 주해적으로, 신학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첫째, 이 구절의 적절한 번역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서 수많은 선택이 가 능하다. (1) 첫 단어 ‘베레쉬트’는 절대형이다( 즉 다른 단어와 독립적으로 기능한다 ). 그리고 1절 전체는 독립절이며 완전한 문장이다. (2) 첫 단어는 상대적인 시간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부정형 명사다. “처음으로( 또는 처음, 맨 먼저 ) 하 나님이 ……를 창조하시니라.” (3) 첫 단어는 연계형이다( 즉, 다른 단어 [보통은 명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기능한다 ).
그리고 이 구절은 2절에 종속되는 시간절이다.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했을 때……땅은 혼돈하고 공허했다.” ( 4) 첫 단 어는 연계형이며 3절에 종속되는 시간절이며, 2절은 삽입구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 곧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을 때, 하나님 이 말씀하시기를…….” 이 가능성들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 히브리어 지식 자체만 가지고서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네 가능성 모두 유능한 현 대 히브리어 학자들이나 고대 히브리어 학자들이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 주 제를 광범위하게 다룬 연구에서는 (1)과 (4)가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다. 1절을 3절에 있는 주절을 준비하는 종속절로 취하는 것을 지지하는 논쟁 의 주요 흐름은 다음과 같다. ( a) ‘베레쉬트’의 모음은 이 단어가 절대형이 아니라 연계형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태초에”가 아니라 “~의 시작에”로 번역해야 한다. “태초에”라면 ‘바레쉬트’를 예상할 수 있다. ( b) “두 번째” 창조 이야기( 2:4b 이하 ) 에서 시간 구문, 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 를 만드실 때”를 이용한다. 이는 1장 1절과 구조적 평행을 이룬다. ( c) ‘레 쉬트’는 구약에 50회 정도 나오는데, 이사야 46장 10절을 제외하면 모두 연 계형으로 나온다.3 ) 창세기 1장 1절이 예외일 가능성이 있는가? (d) 첫 절 을 종속절로 보는 것은 이 “제사장적 기자의” 창조 이야기가 가진 바벨론 배경을 입증한다. 즉 바벨론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첫 아홉 행 은 다음과 같이 창세기의 첫 두 절과 병행을 이룬다.4 )
3 ) 다음을 보라. P. Humbert, “Trois Notes sur Genèse 1,” in Interpretationes ad Vetus Testamentum pertinentes Sigmundo Mowinckel septuagenario missae, ed. N. A. Dahl and A. S. Kapelrud (Oslo; Forlage Land og Kirche, 1955), pp. 85~96. 특히 pp. 85~88; “Encore le premier mot de la Bible,” ZAW 76 (1964), pp. 121~131. 4 ) 다른 것들 중에는 다음을 보라. E. A. Speiser, Genesis, p. 12, H. M. Orlinsky, “The Jew Jewish
Version of the Torah,” JBL 82 (1963), pp. 252~253.
109
창세기 I
조건절
삽입절
귀결절
창세기
1장 1절
1장 2절
1장 3절
에누마 엘리쉬
1~2행
3~8행
9행
특히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실 때”는 에누마 엘리쉬의 첫 두 행, “위, 즉 하늘을 이름 짓지 않았던 때,
( 그리고 )
아
래, 즉 땅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던 때”와 비슷하다. NEB, NAB, NJPS, RSV, AB와 같은 최근 번역본 일부는 이 번역을 각주에 서만 받아들였다. 그러나 NASB, NKJV, JB와 같은 다른 번역본은 전통적인 번역을 유지한다. 이 두 선택( “~하기
시작할 때”와 “태초에” )
사이의 문제는 난해하게 얼버무리느
냐 세부적으로 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더 큰 관심은 “창세기 1장 1절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인 창조의 절대적인 시작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천 지 창조 이전에 어떤 존재가 있었음을 확언하는가?”에 있다. 이 질문을 다 르게 표현하면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한 존재, 즉 하나님만 계셨음을 제안하는가, 아니면 태초에 두 존재, 즉 하나님과 선재하는 혼돈이 있었음 을 제안하는가?”가 된다. 태초에 두 존재가 있었다는 접근은 창조 이전에 혼돈이 존재했음을 말하면서 태초에 한 존재만 있었다는 입장으로부터 스 스로 분리된다. 그러나 혼돈의 창조라는 개념은 용어상 모순일 것이다. 이 결론을 피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 예, 베스터만 ) 은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형태가 모호하다고 믿기 때문에 객관적인 언어학적 근거가 아니라 이 장의 더 넓은 맥락에 근거해 전통적인 번역을 선택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에누마 엘리쉬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이교의 우주발생론 을 의도적으로 반박하고 비신화화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저자가 신화적 세계관의 두드러진 개념, 즉 창조주의 활동 밖에 있는 이전에 존재했던 물질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개념을 바꾸거나 간 섭하지 않은 채로 인정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이런 흔적이 있는 주 제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브레바드 차일즈는 1절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절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 다……문법적으로 선택이 있지만, P의 신학은 후자의 가능성 ( 즉, 1:1은 1:3에 종속 되는 종속절, 즉 시간절이다 )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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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한다……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물질을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초월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P의 노력을 본다.”5 ) 그러나 1장 1절의 번역을 단순히 성경 저자의 창조 신학에 근거해서 주 장하는 것만은 아니다. 성경 저자의 신학이 합당한 기준이 되기는 하지만, 만약 그것만이 유일한 기준이라면 절대적인 창조를 이해하는 논거는 심각 하게 약화될 것이다. “태초에”의 번역을 확증하기 위한 타당한 어휘, 문법, 구문, 비교, 문체에 대한 논의들이 발전해 왔다.6 )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제시할 수 있다. 어휘적으로 험버트( P.
Humbert ) 의
두 연구에서 ‘레쉬트’가 거의 항상 구약에서 연계형으로 사용되며, 한 예외 는 이사야 46장 9~10절( 나는 하나님이라……내가 시초부터 [메레쉬트] 며 ) 이라는
종말 [아하리트] 을 알리
관찰은 옳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 시작과 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 다. 여기서 시작과 끝은 “역사 속에서의 특정한 시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 라, 보통 말하는 역사적 시간”을 의미한다.7 ) 이제 창세기 1장 1절의 가능 성을 제외하더라도 이사야 46장 10절이 ‘레쉬트’를 절대형으로 사용하는 유일한 예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한 예는 ‘레쉬트’가 절대형 구조를 사용 해 시간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 하다.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 전치사+명사 ) 에서 사용한 똑같은 단어가 구약에 네 번 더 나온다( 렘 26:1, 27:1, 28:1, 49:34, “~가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8 ) 각각의 경우에 5) B . S. Childs, Myth and Reality in the Old Testament, SBT 1/27 (London: SCM, 1960), p. 32. 폰 라트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방법을 취한다. “구문론적으로는 두 개의 번역이 가능하겠지만, 신학 적으로는 그렇지 않다……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 안에서 창조적으로 ‘하늘과 땅,’ 즉 절대 적으로 모든 것을 그 다음에 이어지는 존재의 시작을 위해 세우셨다”(Genesis, p. 48). 성경 주석
가들이 성경 저자의 신학을 해석해 낸 것에 기초해서 이 절을 번역하는 것에 대한 이런 시도를 비 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음을 보라. W. R. Lane, “The Initiation of Creation,” VT 13 (1963), pp. 64~65. 6 ) 많은 연구들 가운데 다음을 언급할 수 있다. E. J. Young, “The Relation of the First Verse of Genesis One to Verses Two and Three,” in Studies in Genesis One (Philadelphia: Presbyterian & Reformed, 1976), pp. 1~14, W. Eichrodt, “In the Beginning,” in Israel’ s Prophetic Heritage: Essays in Honor of James Muilenburg , ed. B. W. Anderson and W. Harrelson (New York: Harper & Row, 1962), pp. 1~10, G. F. Hasel, “Recent Translations of Genesis 1:1. A Critical Look,” BT 22 (1971), pp. 154~168, H. Shanks, “How the Bible Begins,” Judaism 21 (1972), pp. 51~58, B. K. Waltke, “The Creation Account in Genesis 1:13. Pt. III: The Initial Chaos Theory and the Precreation Chaos Theory,” BSac 132 (1975), pp. 222~228. 7 ) Eichrodt, “In the Beginning,” in Israel’s Prophetic Heritage, p. 6. 8 ) 비팔(W. Wifall, “God’s Acession Year According to P,” Bib 62 [1981], pp. 527~534)은 창 1:1 의 언어와 문구의 근원을 신명기적 역사가의 유다와 이스라엘 왕의 통치 이야기까지로 거슬러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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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명사에 이어 다른 명사가 나온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만 한정 형태( 구체적으로 완료 형태 ) 의
동사가 명사를 따른다. 이 구문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
분의 셈어에서 알려졌다.9 ) 여기서 창세기 2장 4b절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2장 4b절을 직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는 날에”다. 모 든 사람이 이것은 관계사 문장, 즉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셨던 때”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2장 4b절에서는 1장 1절에서처럼 명사 뒤에 한정 형태의 동사가 따르지 않고 비한정 형태( 구체적으로, 부정사 연계형 ) 로 된 동 사가 따른다. 두 절에서 다른 동사 형태로 다른 어감을 제시하는 것이 그럴 듯하지 않은가? 관사가 없다는 점이 단어가 절대적이라는 것에 반대하는 중대한 쟁점이 되지는 않는다. 우선 첫째로 이미 주장한대로 이사야 46장 10절이 ‘레쉬트’ 가 절대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여 준다면, 또한 이 단어가 절대형과 부 정형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창세기 1장 1절과 정확하게 병행을 이루는 예를 제공한다. 둘째, 모든 고대 번역본은 이 단어를 절대형으로 번 역하고 절 전체를 독립절로 번역한다.10 ) 셋째, 마소라 학자들은 이 단어를 절대형으로 이해한다. 연결 액센트보다는 ‘티프하’라 불리는 분리 액센트로 단어에 강세를 두기 때문이다. 분리 액센트는 보통 절대형인 단어에 사용되 며 연결 액센트는 보통 연계형인 단어에 사용된다.11 ) 구문론적으로 전통적인 번역, 즉 첫 절을 다음 절에 종속시키는 번역을 지 지하는 주장은 1절과 2절, 3절의 관계를 해석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다. 우주 발생에 대한 비교 문헌이 이 문제와 관련있다. 즉 구문상 창세기 1장 1~3절, 2장 4b절 이하와 에누마 엘리쉬의 1~9행 사이에 병행하는 내용이
라간다. 이 이야기는 제사장적 기자가 땅의 왕의 통치를 묘사할 때 모델 역할을 했던 왕의 역대기 들이다. 그러나 창조는 통치를 대체했다. 9 ) GKC, § 130d를 보라. 흥미롭게도 GKC는 창 1:1과 어형론적으로 평행하는 호 1:2a는 인용하지만 이 문단에 있는 창 1:1 자체는 인용하지 않는다. 다음을 보라. C. H. Gordon, UT, pp. 56, 125. 10 ) 예를 들어 70인역 ‘엔 아르케 에포이에센 호 데오스 톤 우라논 카이 텐 겐’과 불가타역 ‘인 프링 키피오 크레아위트 데우스 코일룸 에트 테람’을 비교하라. 11 ) 그러나 예레미야에서는 ‘베레쉬트’의 용법이 분명하게 연계형으로 되어 있지만, 연결 액센트가 아니라 분리 액센트를 사용한 것을 주목하라. 다음을 보라. B. Waltke, BSac 132 (1975), p. 224. 스파이저(A. Sperber, A Historical Grammar of Biblical Hebrew [Leiden: Brill, 1966], pp. 463~464)는 또한 연계형 단어에 분리의 ‘티파’가 나오는 것을 지적하며, “강세와 해석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p. 465). 동시에 스퍼버(Sperber)는 ‘쉐바’가 있는 모음화는 한정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중요한 주장을 한다(p. 627, § 100과 p. 637). 그러 므로 창 38:25에서 다말이 “이것이 속한 그 남자로 말미암아(레이쉬)”(개역개정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라고 말한 것에 모두가 동의한다. p. 637에서 스퍼버는 ‘베레쉬트’를 이 범주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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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에누마 엘리쉬 1~9행과 창세기 1장 1~3절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에누마 엘리쉬 1~9행과 창세기 2장 4b절 이하 사이에 구문론적인 유사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에누마 엘리쉬 1~9행이 창세기 1장 1~3절과 병행하는 부 분이 있다면, 창세기 1장 2절이 에누마 엘리쉬 1~8행과 병행을 이루고, 창세기 1장 3절이 에누마 엘리쉬 9행과 병행을 이룬다는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 1장 1절은 독특하다. 궁켈이 “다른 민족들의 우주 발생론은 성경 의 첫 단어와 닮은 어떤 단어도 포함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은 매우 옳 았다.12 ) 문체적인 근거 면에서는, 전통적인 번역이 이 장 곳곳에 나오는 문장 길이 양식에 일치한다. 규칙은 종속절과 주절을 결합하는 긴 문장이 아니라, 병렬 문체로 짧고 간략한 문장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크스 ( Shanks ) 는 “왜 절망적으로 멋없는 구문으로 묘사된 번역을 채택하는가? 이는 세상에 서 가장 위대한 책의 숭고한 시작을 망치는 구문이다”라고 말한다.13 )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의 첫 절을 “태초에”( im
Anfang ) 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해 부사 형태인 “처음으로, 먼저”( zuerst ) 의 의미를 취하는 해석과 관계 된 단어 문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14 ) 이런 번역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만, 히브리어에서 “처음으로, 먼저”의 어감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문구 는 ‘베레쉬트’가 아니라 ‘바리쇼나’( 창 13:4; 민 10:13~14 등 ) 일 것이다. 2절 그리고 그 땅은 사막과 황무지였다 ( 개역개정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
불행하
게도 우리는 번역과 해석에 대한 모든 문제를 털어내지 못한 채로 1절을 넘 어 2절로 옮겨 간다. 곧 분명해지겠지만, 2절은 1절만큼이나 쟁점으로 가득 하다. 첫 이슈는 두 단어 ‘토후 바보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이런 압 운( rhyme ) 으로 히브리어 단어가 나란히 있는 것은 특이하지만 전혀 없는 것 은 아니다. 압운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이 절이 산문이 아니라 시라는 사실 을 가리킬 수 있다.15 ) 이 문구를 문맥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 하지 않고 뒤섞인 것, 즉 의미 없는 단어들로 구성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12 ) Hasel, BT 22 (1971), p. 163과 Waltke, BSac 132 (1975), p. 225에서 인용되었다. H. Gunkel, Genesis를 보라. 13 ) H. Shanks, “How the Bible Begins,” Judaism 21 (1972), p. 58. 14 ) 다음을 보라. W. R. Lane, VT 12 (1963), p. 68, R. K. Harrison, “Genesis,” ISBE 2:438. 15 ) J. M. Sasson, “Wordplay in the Old Testament,” IDBS , p. 969를 보라. 모두 압운이 있는 “hodeg-podge,” “helter-skelter,” “shilly-shally,” “willy-nilly” 등의 표현을 비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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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것 같지는 않다.16 ) 정확하게 ‘보후’와 같은 어원을 가진 셈어는 아직 발견 되지 않았지만, ‘토후’는 우가릿어 thw ( 사막 ) 와 같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7 ) 이 두 단어는 모두 명사이고, 따라서 우리는 “사막과 황무지”로 번역했 다. “형태가 없고 비어 있는”( 예, AV, RSV ) 으로 번역하게 되면 이 단어들이 형 용사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 게 적절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둘째 단어 ‘보후’는 구약에 세 번 만 나오고 항상 ‘토후’와 함께 나온다( 창 1:2; 사 34:11, “혼란 [토후] 의 줄과 공허 [보후] 의 추”; 렘 4:23, “땅을 본즉 혼돈하고 [토후] 공허하며 [보후]” ). 18 )
다른 한편 ‘토후’는 구약에 20회 등장하고 ‘보후’와는 달리 홀로 나오기 도 한다. 이 가운데 11회는 이사야서에 나온다( 사 24:10, 29:21, 34:11, 40:17, 23, 41:29, 44:9, 45:18, 19, 49:4, 59:4 ).
신명기 32장 10절에서 이 단어는 “사막”( 미드바르 ) 및
“광야”( 예쉬몬 ) 와 나란히 나온다. ‘토후’는 또한 욥기 6장 18절에서 “사막”( 개 역개정 “삭막한 들” ) 을
지칭하는데, 이 본문에서 ‘토후’는 길을 잃은 여행객들에
게 사실상 죽음의 장소다. 이사야 24장 10절에서 ‘토후’는 버려진 성을 묘 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광활함과 공허함의 똑같은 개념이 욥기 26장 7절에 서 묘사된다. “그는 북쪽을 허공( 토후 ) 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 벨 리-마 ) 에
매다시며.”
‘토후’는 비유적으로 물질이나 실재가 없는 것, 토대가 없는 것, 헛된 일( 사
29:21 ),
나라의 종교적 우상( 사
41:29, “바람 [루아흐] 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 ),
우상
만드는 사람( 사 44:9 ), 고난당하는 종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서 노동에서의 명 백한 무익함( 사 49:4, ‘헤벨’과 병행 ) 을 묘사한다. 우리의 목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45장 18~19절이다. “여호 와께서……땅을…… 혼돈으로( 개역개정 “혼돈하게” ) 창조하지 아니하시고……나 는……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고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잠시 후에 보겠 지만, 이사야 45장 18절을 “여호와가 땅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로 16 ) 예 레미야서에 나오는 ‘토후 바보후’는 의미가 없지 않다. 창조의 역행, 곧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 화하려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릴 때 선지자가 역설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 다. 다음을 보라. M. Fishbane, “Jeremiah IV 23-26 and Job III 3-13: A Recovered Use of the Creation Pattern,” VT 21 (1971), pp. 151~153. 17 ) 츠무라(D. T. Tsumura, “Nabalkutu, tu-a-bi[u'] and to-hu^ wa-bo-hu^,” UF 19 [1987], pp.
309~315)는 ‘토후 바보후’를, “고장난 비생산적인”을 의미하는 우가릿어 ‘투-아-비(우)’로 보고 싶어 한다. 18 ) 다음을 보라. J. S. Kselman, “The Recovery of Poetic Fragments from the Pentateuchal Priestly Source,” JBL 97 (1978), pp. 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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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읽을 것인지, 아니면 “여호와가 땅이 혼돈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다”로 읽 을 것인지에 따라 창세기 1장 2절의 해석에서 하나의 쟁점이 발생한다. 요 약하자면, ‘토후’의 어감은 병행으로 나오는 단어들(사막, 광야, 바람, 아무것도 없음, 공허함)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만족할 만한 것과 미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다. 동 시에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이 두 명사 사용이 한때는 깨끗했지만 이제 는 왜곡된 창조를 지칭하는지, 또는 1장 2절이 태곳적 혼돈에서 창조한 것 을 가리키는지, 3절 이후에서 특수화한 것을 이 표현이 일반화한 것인지는 아래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셨다고 진술하
지만( 3절 ), 하나님이 어둠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어둠은 빛과 달리 하나님이 창조한 것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19 ) 낮이 밤보다 우월한가? 물리적 현상에 영적 의미를 둘 수 있 는가? 구약 안에 있는 다른 창조 전통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 영역 안에 어 둠을 둔다. 이사야 45장 7절과 비교하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20 ) 도 창조 하며.” 1800년대 말 에누마 엘리쉬의 발견과 출판을 시작으로, 이 서사시의 한 신인 티아마트 ( Tiamat ) 와 “깊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테홈’ 사이의 관계가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바벨론의 민간 전승에서 티아마트는 호전 적이고 극악무도한 바다 여신이다. 최고의 신 아누( Anu ) 를 대항해 전투를 이끈 신으로서 악의 화신이다. 그러나 티아마트가 전투를 이길 수 있기 전 에 또 다른 신 마르두크( Marduk ) 가 티아마트를 무찌르고 죽였다. 그리고 나 서 “조개처럼” 길게 시체를 잘랐다.21 ) 마르두크는 티아마트의 몸의 두 부 분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든다.
19 ) Childs, Myth and Reality, p. 34에서처럼. 20 ) 사 45:7에 대한 매켄지(J. L. McKenzie)의 언급을 보라. “이스라엘의 사고에서는 어떤 것도 심지
어 악이나 어둠도 여호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창 1:3~5는 “어둠”을 창 1장의 다른 곳 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창조의 결과로 보지 않고 사역의 결과로 본다(Second Isaiah, AB [Garden City, NY: Doubleday, 1968], p.77). 성경에서 어둠을 위협적인 상황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이 어 둠에 거하시고 어둠이 하나님의 덮개라고 말하는 시 18:12(개역개정 18:11)와 같은 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아마도 어둠은 성경에서 상서로운 어감과 불길한 어감이 모두 있는 것 같다. 어둠이 빛이 뻗어나가는 방향에서 벗어난 것, 즉 빛과 반대되는 존재를 의미할 때는 불길하다. 그 러나 보호하는 어둠도 있는데, 이 어둠은 도둑의 장소를 가리고 사람의 눈이 하나님을 보지 않도 록 하나님에 대한 가리개 역할을 한다. 21 ) A NET,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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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테홈’과 티아마트의 관계에 신빙성을 더하는 것은 히브리어 ‘테홈’이 여 성형이며 구약에 35회 나오는데, 이사야 63장 13절과 시편 106편 9절을 제 외한 모든 경우에 관사가 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테홈’이 고유명 사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테홈’이 티아마트가 히브리화된 형태라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는 (a) ‘테 홈’이 오직 인간이나 동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동사와 연결된다는 점이 다. 이것은 창세기 49장 25절의 “아래로 깊은”과 하박국 3장 10절의 “깊음 이 그것의 소리22 ) 를 냈으며”(개역개정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b) 창세기 1장 2절은 별도로 하고, ‘테홈’을 사용하는 여러 본문에 서 여호와가 초자연적 괴물을 제거하는 것을 다루는 문단이 나온다. 가장 좋은 예는 이사야 51장 9~11절이다. 여기서 여호와가 정복한 목록에는 라 합, 용, 바다, “깊음”의 물이 포함된다. ‘테홈’과 티아마트의 어원이 같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바벨론 배경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첫째로, 많 은 고대인들이 원시적인 물 덩어리가 창조 질서를 파생했다고 믿었다. 이집 트인들은 만물의 근원인 원시적인 물의 신인 누( Nu ) 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 고,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도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믿었다.23 ) 둘째, 창세 기 1장의 “깊음”은 에누마 엘리쉬의 티아마트와는 기능적인 면에서 거리가 멀어서 어떤 관계의 가능성도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다. 창세기 1장의 “깊 음”은 인격화되지 않으며, 사나운 모습의 적대적인 세력으로 볼 수 없다. 히브리어 ‘테홈’과 바벨론의 티아마트 사이에 있는 언어학적 관계에 대해 강력하게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24 ) 히브리어 ‘테홈’은 “깊음, 깊이”를 의미 하는 우가릿어 thm
( 쌍수 thmtm, 복수 thmt )이나
“해양 심연”을 의미하는 훨씬 이
전의 에블라어 ‘티-아-마툼’에 해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25 )
22 ) “ 소리”에 있는 대명사 접미어가 3인칭 남성 단수인 것을 주목하라. 이는 ‘테홈’을 남성으로 이해 했음을 가리킨다. 또한 여기서 동사는 3인칭 남성 단수 완료다. 사실 ‘테홈’은 형태에 있어서도 남성이다. 여성형은 형용사가 따르거나(테홈 라바, 창 7:11) 분사가 따를 때(테홈 로베쩨트, 창 49:26), 그리고 복수일 때(테호모트) 알 수 있다. 23 ) 다음을 보라. W. G. Lambert, “A New Look at the Babylonian Background of Genesis,” JTS
16 (1965), p. 293. 24 ) 다음을 보라. R. L. Harris, “thm,” TWOT, 2:966. 25 ) G. Pettinato, “The Royal Archives of Tell-Mardikh-Ebla,” BA 39 (1976), p. 50을 보라. 다후 드(M. J. Dahood, Psalms, AB, 3 vols. [Garden City, NY: Doubleday, 1965~1973], 2:231)는 우가릿 증거를 잘 아는 학자들이 왜 계속해서 바벨론의 티아마트와 ‘테홈’ 사이에 신화적으로, 언 어학적으로 “명백한 연관 관계”를 주장하는지 의문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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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주요 쟁점은 한 쌍으
로 이루어진 ‘베루아흐 엘로힘’의 번역(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 하나님으로부터의 바 람, 무시무시한 강풍 ) 과
동사 ‘메라헤페트’의 번역이다.
‘베루아흐’에 대한 번역 가운데 가장 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은 “무시무 시한 강풍”이라는 번역이다. 이 번역은 ‘루아흐’를 “바람”( 많은 성경 본문에서 이 단어에 대한 적절한 번역 ) 으로
보고, ‘엘로힘’을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히
브리어에서 최상급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따라서 “강력 한, 무시무시한, 맹렬한, 격노하는 바람”이 된다. 이 강렬함과 폭풍 같은 대 기의 그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분사 ‘메라헤페트’를 “쓸어버리 는” 또는 “휘젓는”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26 ) 여러 요소들이 이 번역을 지지하지 않는다. 첫째, 이 구절이 구약 다른 곳 에서 18회 나오는데 어느 것도 “강력한 바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 이후에 처음 이 문구가 나오는 곳은 출애굽기 31장 3절인데, 거기 서는 브살렐이 성막을 짓도록 준비하기 위해 ‘루아흐 엘로힘’으로 가득하게 된다. 브살렐에게 내린 것은 분명히 “강력한 바람”이 아니다. 이 핵심 문구 는 상호본문적인 암시를 통해 세상 건설과 성막 건설, 세상 창조와 성소 창 조를 통합한다.27 ) 그러므로 이 문구를 창세기 1장에서는 부정적으로, 출애 굽기 31장에서는 긍정적으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둘째, 히브리 성경에 ‘엘로힘’을 최상급, 즉 명사가 아닌 한정 형용사로 사 용하는 예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28 ) 그러나 심지어 이런 예들도 모호하다. 26 ) 이 접근을 취하는 현대 주석가는 폰 라트(G. von Rad, Genesis, p. 49)다. 폰 라트는 “무시무시 한 폭풍”을 제안한다. 또한 B. Vawter, On Genesis: A New Reading, pp. 40~41을 참고하라. 바우터(Vawter)는 자신의 번역 “강력한 바람”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도 정확 할 것으로 여겨지는 그 표현에 대한 평가에서, 우리는 세상이 아직 어두운 원시의 물에 잠겨 있 었고 맹렬한 바람이 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고 말함으로 처음의 무질서에 대한 그 림에 방점을 찍었다.” 마찬가지로 복음주의 학자 해리슨(Harrison)은 “무시무시한 폭풍”을 선택 한다(“Genesis,” ISBE, 2:438). 이런 접근은 2a~b절만 원시 혼돈에 대해 묘사하는 것이고 2c절
은 그렇지 않다는 입장을 취하는 대신, 실질적으로 2절의 세 부분 모두가 같은 방법에서 원시의 혼돈을 묘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P. J. Smith, “A Semotactical Approach to the Meaning of the Term ru^ah. ’ělo-hl^m in Genesis 1:2,” JNWSL 81 (1980), pp. 99~104. 27 ) 다음을 보라. M. Fishbane, Text and Texture: Close Readings of Selected Biblical Texts (New York: Schocken, 1979), p. 12. 28 ) 다음을 보라. D. W. Thomas, “A Consideration of Some Unusual Ways of Expressing the Superlative in Hebrew,” VT 3 (1953), pp. 209~224. 토머스(Thomas)는 자신의 결론을 책의 218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나는 구약에서 별칭을 강화하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명백한 예를 집어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으로 ‘엘로힘’을 최상급으로 제안했던 학자는 스미스(Smith)다. 다음을 보라. J. M. P. Smith,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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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창세기 23장 6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도자”로 불리는가, 아니면 “강력한 지도자”로 불리는가? 30장 8절에서 라헬은 “하나님의 경쟁”을 했 는가, 아니면 “강력한 경쟁”을 했는가? 니느웨는 “하나님의 큰 성읍”인가, 아니면 “매우 큰 성읍”인가( 욘 3:3 ) ? 그러나 이 세 언급에서 이런 번역이 분 명하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이유에서 창세기 1장 2절에서 ‘엘로힘’을 똑같 이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째, 원 독자나 번역가가 2절의 ‘엘로힘’과 1장에 나오는 ‘엘로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둘째, ‘엘로힘’을 최 상급으로 보는 것은 2절의 ‘엘로힘’을 1절에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3절에서 말씀하시는 ‘엘로힘’에 반하게 만드는 것이다.29 ) 이 번역에 대한 셋째 반대로서, 우리는 저자가 만약 “강력한 바람”을 의 도했다면 ‘루아흐 게돌라’( 왕상
19:11; 욥 1:19; 욘 1:4. “큰 바람” )
또는 ‘루아흐 세아
라’( 시 107:25, 148:8. “광풍” ) 처럼 분명한 표현을 사용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번역은 하나님의 “영/성령”( sprit/Spirit ) 이나 하나님의 “바람”일 것이다. 현대에 올린스키 ( Orlinsky ) 는 “바람”에 대한 주장을 가장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30 ) 올린스키에게 “영/성령” 번역은 히브리 본문을 신빙성 없게 “기독교화”한 것이다. 이는 AD 1세기 전반 알렉산드리아의 유 명한 유대 철학자 필론이 ‘루아흐’를 철학적으로 해석했던 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전통이다. 올린스키의 판단에 따르면, ‘루아흐’는 구약에 400회 정도 나오는데, 창세기에서 41장 8절 ( 아침에 음”] 이 번민하여 ) 까지는
그의 [바로의] 영 [개역개정 “마
“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창세기에서 ‘루
아흐’의 이전 사용은 분명하게 “바람”이나 “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3장 8절은 “그들이 그날의 서늘한 때에( ‘레루아흐 하욤’, 개역개정 “그날 바람이 불 때” ) 동산 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가 된다. 즉 그날의 바람이 부는 시간 또는 산들바람이 부는 시간이 된다. 비슷하게 8장 1절에서는 “하나님 이 바람( 루아흐 ) 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라고 한다. 그리고 6장 17절, 7장 15절, 22절에 있는 ‘루아흐’는 “숨”으로 번역하여 “생명의 숨”( 개역개정 “생명의 기운” ) 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을 일부 지지하는 것이 히브리 성경을 아람어로
Syntax and Meaning of Genesis 1:1-3,” AJSL 44 (1928), pp. 111~112; “The Use of Divine Name as Superlatives,” AJSL 45 (1929), pp. 212~213. 29 ) 다음을 보라. B. Childs, Myth and Reality, p. 36. 30 ) H. M. Orlinsky, “The Plain Meaning of Ru^ah. in Gen. 1.2,” JQR 48 (1957/1958), pp. 174~182; “The New Jewish Version of the Torah,” JBL 82 (1963), pp. 25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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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번역한 유대 탈굼에서 발견된다. 탈굼 옹켈로스는 ‘베루하 민-코담-예야 메나쉐바 알 - 아페 마야’(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 바람이 물의 표면 위에 불고 있다 ) 라고
읽는다. 다른 유명한 탈굼인 탈굼 요나단과 예루살렘 탈굼은 “불고 있다”를 유지하지만 흥미롭게도 주어를 “하나님 앞에서 오는 자비의 ‘루아흐’”로 본다. 70인역과 불가타역은 어느 쪽 번역을 분명하게 지지하지는 않는다. 창세 기 1장 2절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은 ‘카이 프뉴마 데우 에페페레토 에파노 투 휘다토스’이고 불가타역은 정확하게 70인역을 따른다( 스피리투스 데이 페레바 투르…… ).
올린스키는 70인역을 “하나님의 바람이 물 위에 스쳐 지나가고 있
다”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헬라어 ‘에페페레토’와 라틴어 ‘페레바투르’가 수동이라는 것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은 “끌려왔다” 또는 “데 려와졌다”가 될 것이다.31 ) 동사의 수동형은 ‘프뉴마/스피리투스’를 “바람” 으로 만들 필요성을 줄여준다. 아마도 올린스키의 논쟁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창세기 1장과 에누마 엘리쉬 사이에 또 다른 연결고리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 신화에서 아누( Anu ) 는 적대자 티아마트를 제거 하고 티아마트의 유물을 먼 곳으로 가져가기 위해 무기의 일부로 네 방향 의 바람을 만들었다. 창세기 1장의 ‘루아흐’와 마르두크의 무기, 즉 ‘아부 두’( abudu ) 와 ‘임훌루’( imhullu ) 로 불리는 폭풍 또는 바람 사이에서 어떤 유효 한 관계를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32 ) 올린스키의 주장을 더 뒷받침하는 것은 “하나님의 ‘루아흐’” 문구의 실마 리가 전체 절, 즉 “하나님의 ‘루아흐’는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 있다는 루이스터의 주장이다.33 ) 거대한 물을 가두고 지배할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 히 그분의 힘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시 89:9 )가
그렇다. 게다가 하나님의 바람이나 숨( 영과 대조되는 ) 은 하나님의 존재
를 가장 유력하게 나타낸다. 이 두 사실은 창세기 1장 2절에서 넘실거리는 물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이나 바람이라고 제 시한다.
31 ) 다음을 보라. E. J. Young, Studies in Genesis One, p. 41. 32 ) 앞의 책, p. 40. 또한 W. F. Albright, “Contributions to Biblical Archaeology and Philology,” JBL 43 (1924), p. 368. 33 ) R. Luyster, “Wind and Water: Cosmogonic Symbolism in the Old Testament,” ZAW 93 (1981), pp.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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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스키와 루이스터의 논쟁은 일관적이지 않은 것 같다. 첫째, ‘루아흐’ 에서 기본적인 개념은 “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문맥을 통해 “숨”이 “바람”을 가리키는지 “영”을 가리키는지 결정될 것이다. 루이스터가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은 바람을 하나님의 존재를 가장 유력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인용한 이 구절들에서 바람이 파괴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15장 10절이 그 예다.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 니”( 참고, 사 11:15, 40:7; 호 13:15 ). “숨”과 “영” 중에 합당하게 선택해야 하는 본문들 ( 참고, 34:14; 시 104:30; 겔 37:14 ) 에서는
창 6:3; 욥 27:3, 33:4,
활력을 불어넣으시며, 생명과 활기를 주시며, 창
조하시며 말살하지 않으시는 분을 강조한다.34 ) 창세기 1장 2절이 ‘루아흐’ 가 파괴적인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바람”을 선택해 야 하고, ‘루아흐’가 유익을 끼치는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면, “영/성령”을 선택해야 한다. “영/성령”이 바람직한 선택인 것이 분명해 보 인다. 심지어 루이스터도 분사 ‘메라헤페트’를 지도자, 안내자, 보호자로서 “운행하다”를 의미한다고 본다. 물론 현대 영어의 알파벳과 달리 히브리어 알파벳은 두 경우를 “영/성령”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브리어에서 는 “영”( spirit ) 인지 “성령”( Spirit ) 인지 구분할 방법이 없다. “성령”으로 번역하 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반드시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삼위일체적 개념을 과 도하게 부여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제 분사 ‘메라헤페트’에 주목해 보자. ‘메라헤페트’는 “움직이는”( RSV ), “움직였다”( AV ), “운행하는”( NIV ), “운행했다”( JB ), “휩쓰는”( Speiser ), “휩쓸었 다”( NEB ), “품은”( Gunkel ), “달려드는”( Peters ),35 ) “소용돌이치는”( Fishbane ) 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분명하게 “휩쓸었다,” “달려드는,” “소용돌이치는”과 같은 번역은 ‘루아흐’의 번역으로 “바람”을 선택한 것과 어울린다. ‘라하프’ 동사는 구약에서 드물게 사용된다. 칼형 동사의 어간이 예레미 야 23장 9절에 사용된다. “내 마음이 상하며 ( 샤바르 ) 내 모든 뼈가 떨리며 ( 라 하프 ).”
신명기 32장 11절에서도( 창 1:2에서처럼 피엘형으로 ) 사용된다. “마치 독수
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 우르 )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 며( 라하프 ).”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이 절이 어떻게 새가 자기 새끼를 날 수 있도록 가르치는지, 특히 어떻게 어미가 새끼를 날 수 있도록 자극하는지와 34 ) 이 중요한 관찰은 맥클랠런(W. H. McClellan, “The Meaning of ruah. Elohim in Genesis 1,2,” Bib 15 [1934], p. 523)이 제시했다. 35 ) J. P. Peters, “The Wind of God,” JBL 30 (1911), pp. 44~54; idem, JBL 33 (1914), pp. 8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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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관련된다고 가정했다. 어미 독수리는 어린 독수리를 높은 곳에서 위협하며, 단호하게 날개를 펄럭거리면서 어린 독수리를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신명기 32장 1절의 ‘우르’가 “휘젓다”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우가릿어 g'yr 에서처럼 “살펴보다, 보호하다”를 의미할 가능성 이 있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36 ) 우가릿어와의 이러한 평행은 최소한 신명기 구절의 ‘라하프’가 우가릿어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을 가리 킨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루아흐’는 물 위에서 “휩쓸고” 있는가 아니면 물 위를 “살펴보고” 있는가? 살펴보고 있는 것이라면 “영”이 더 정확할 것 이다. 그렇다. 혼돈되고 불길한 예감의 어둠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모두 를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우가릿 문헌에서 이 동사는 항상 독수리와 연결된다. 우가릿 어 rh. p 에 대해 고든은 “날아오르다”라는 의미를 제안한다.37 ) 그것은 지금 까지 아크하트 서사시에서만 발견된다. “그( 아크하트 ) 위로 독수리들이 날아 오를 것이고, 거기에 [날아가는] 새들이 맴돌 것이다”( 3 Aqhat, 표면, 20줄 ), “그 위로 독수리[들]이 날아오르고, 거기에 날아가는 새[들]이 맴돈다. 독수리 들 [사이에서] ‘아나트’( Anat ) 가 날아오른다”( 3 Aqhat, 표면, 31~32줄 ). “독수리들 )
이 아버지의 집 위에 날아오른다, 거기에 새들이 맴돈다”( 1 Aqhat, 32줄 ). 이와 같이 우가릿 구절과 신명기 구절에서 ‘라하프’는 바람이 아니라 새의 행동 을 묘사하는 것 같다.38 ) 마지막으로 전체 절의 구문을 논의해야 한다. 이 절에 세 종속절이 있으 며, 세 개의 주어와 세 개의 술어가 나온다. 완료 동사( 2a절 ), 명사절( 2b절 ), 분사( 2c절 ) 가 있다. 그러나 2절의 내용은 하나님이 원래의 완벽한 우주를 창 조한 이후에 있게 된 어떤 것을 묘사하는가? 아니면 2절은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을 때 땅의 모양을 확장하고 분명히 하는가? 2절은 3절에서 도입 되는 하나님의 실제 창조 이전 상황을 묘사하는가? 이 제안들 가운데 첫 제안은 간격 이론으로 잘 알려졌다. 본질적으로 이 재 구성은 1절이 흠이 없는 원래 창조를 묘사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나서 격 변의 사건이 일어났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 이는 하나님의 완벽한 땅을 요동치게
36 ) 다 음을 보라. H. N. Richardson, “A Ugaritic Letter of a King to His Mother,” JBL 66 (1947), p. 322; M. J. Dahood, Psalms, 1:56. 37 ) U T, p. 484, no. 2327. 38 ) 다음을 보라. T. Friedman, “Weru^ah. ’e lo-hl^m merah. e pet ‛- al-pene^ hamma-yim). (Gen 1:2)”, )
Beth Mikra 25 (1980), pp. 309~312(히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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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심판을 내리게 한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게 되고 공허하게 됐다( “혼돈하 고 공허했다”가 아니라 ).
따라서 하나님은 둘째 창조를 시작하셨다. 그래서 3절은
창조가 아니라 재창조를 묘사한다.39 ) 첫째 창조와 둘째 창조 사이의 간격 이 얼마나 긴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다. 첫째는 2절을 1절에 이어지 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2절의 “있고” 동사를 상태보다 는 능동으로 이해하고 동사를 과거완료( 땅이……였었다 ) 로 읽어야 한다. 둘째 는 “혼돈과 공허”라는 문구를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 이다. 이 문구가 유익하게 창조된 것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이사야 45장 18절 “혼돈 ( 토후 ) 으로( 개역개정 “혼돈하 게” )
창조하지 아니하시고”에 특별히 호소하는데, 이는 “그가 땅이 혼돈하게
되도록 창조하지 않았다”라는 번역과 대조된다. 때로 완료 시제에서의 “~이 되다”( to be ) 동사는 분명한 능동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분명히 3장 22절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 나 같이 되었으니( 하야 )”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1장 2절에서는 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첫째 저자가 2절을 1절에 이어지는 것으로 읽도 록 의도했다면, ‘바브’ 연속형+주어+동사( 완료 동사 ) 구문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바브’ 전환형을 동사 ( 미완료
동사 ) 에
덧붙였을 것이고, 현재
있는 형태인 ‘베하아레쯔 하예타’보다는 ‘바테히 하아레쯔’를 기대할 수 있 을 것이다. 둘째, 다른 종속절에서 ‘하야’ 동사의 완료 시제는 보통 상태의 의미를 지 닌다 ( 3:1 [뱀이
더 간교했다], 29:17 [라헬은 아리따웠다], 34:5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있었다], 출
1:5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욘 3:3 [니느웨는 큰 성읍이더라] ).
그렇다면 증명의 부담은 여
기서 우리가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 상황절에서의 ‘하야’의 예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있게 된다. 우리는 ‘토후 바보후’를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졌던 초기 스올이나 무저갱 으로 해석하지 않는 이유를 이미 제시했다. 대신에 우리가 여기서의 언급을 구체적인 창조 이전의 상황, 즉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서 관리하시는 상황 으로 본다.40 ) 39 ) 소위 간격 이론은 주로 매우 유명한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특히, The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New York: Oxford University, 1907], p. 1n5, p. 752n2). 다음을 또 한 보라. A. C. Custance, Without Form and Void (Brockville, Ontario: Custance, 1970). 40 ) 다음을 보라. G. M. Landes, “Creation Traditions in Proverbs 8:22~31 and Genesis 1,” i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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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1. 태초에 ( 1:1~2 )
구문론적으로 2절을 이해할 때 두 가지 가능성이 남는다. 첫째, 3절에서 묘사한 것과 동반하는 상태를 묘사할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 나님이 이르시되…….” 이것은 올린스키, 스파이저 등의 접근이다. 이 견해 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반대하는 견해는 동사 없는 절( verbless clause ) 로 동시 에 일어나는 상황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41 ) 우리는 ‘베하아레 쯔 토후 바보후’를 기대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문론적 근거에 기초해 서 2절을 3절과 구별된 것으로, 그리고 3절 이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둘째 가능성을 선택한다. 요약하자면, 여기서 취한 입장은 1절이 표제와 요약의 기능을 모두 가진, 시작하는 진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절은 “이는 ~의 계보다”라는 문장과 기능상 똑같다. 이 문장은 창세기의 나머지 주요 각 구분에서 도입 하는 문장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2절은 3절 이하에서 상술되는 구체적인 창조 이전의 상황을 묘 사하는 것이 된다.42 ) 창조의 날들은 일반화된 것이 구체화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은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과 병 행한다. 따라서 빛을 창조한 첫째 날은 구체적인 빛의 종류를 창조하는 넷 째 날과 짝을 이룬다.43 ) 우리는 이것과 똑같은 개념의 형식이 2절( 일반화 ) 과 3~31절( 구체화 ) 에서 발생한다고 제안한다.
Light unto My Path: Old Testament Studies in Honor of Jacob M. Myers, ed. H. N. Bream, et al. (Philadelphia: Temple University, 1974), p. 286. 41 ) 다음을 보라. F. I. Andersen, The Sentence in Biblical Hebrew (The Hague/Pairs: Mouton, 1974), p. 85. “창세기 1장 2a절은 1장 3절에 기록된 첫 지시와 동반되는 상황으로서……땅이었 다는 의미보다는 첫 지시 이전 상황으로서……땅이 되었다(또는 되어 왔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진술은 우리가 앞서 말했던 상황절에서의 ‘하야’의 번역에 대한 내용과 모순되지 않 는다. 앤더슨은 단지 2절에서의 활동이 3절에서의 활동 이전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앤 더슨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는 2절에서의 활동 역시 1절과 연속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 니다. 또 다른 앤더슨(B. W. Anderson)은 문체적인 근거에 기초해서 3절이, 1절로 조건절을 시 작하는 시간절의 귀결절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A Stylistic Study of Priestly Creation Story,” in Canon and Authority: Essays in Old Testament Religion and Theology, ed. G. W. Coats and B. O. Long [Philadelphia: Fortress, 1977], p. 153). 이것은 2절을 3절과 결합되는 삽입절로 해 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더 나은 증거가 될 것이다. 42 ) 이 입장을 채택하는 자들 가운데 다음을 보라. B. Waltke, “The Creation Account in Genesis 1:1-3,” BSac 132 (1975), pp. 225~228. 43 ) “형태에서 온전함으로”(from form to fullness) 또는 “준비와 성취”(preparation and accomplishment)는 키드너(D. Kidner)가 선택한 단어다(Genesis , TOTC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1967], p.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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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I
2. 첫째 날 ( 1:3~5 )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
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44 )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45 )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
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6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47 )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 And God saw how beautiful the light was. God separat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 God named the light “day”; the darkness he named “night.” And there was evening and morning-a first day. 3
3절 하나님이 활동하신 여섯 날 가운데 이 첫날에는 빛의 창조가 있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인데, 빛의 존재가 그밖에 다른 것을 창조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이 빛 가운데서 발생한다. 44 ) [ 저자사역 “그리고 하나님이 그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셨다”]. 여기서 나는 ‘키’를 단순한 종 속 접속사가 아니라 강조로 본다. 참고, W. F. Albright, “The Refrain ‘and God was KI TOB’ in Genesis,” in Me'langes bibliques re'dige's en l’honneur de Andre' Robert (Paris: Bloud & Gay, 1957), pp. 22~26. 쿠겔( J. L. Kugel, “The Adverbial Use of kl^ t. o^b,” JBL 99 [1980], pp. 433~435)은 “그리고 하나님이 빛에 매우 만족했다”라고 부사로 취해 모호한 “좋았더라”를 회피 한다. 쿠겔은 ‘키’를 강조로 이해해야 할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쿠겔은 “좋다”가 가리키는 점이 즉각적으로 마무리된 행동이라는 것을 볼 수 없다. 다음을 더 보라. J. G. Janzen, “Kugel’s Adverbial kl^ t. o^b: An Assement,” JBL 102 (1983), pp. 99~106. 45 ) [저자사역 “빛과 어둠 사이를”]. 히브리어는 “x와 y 사이”를 의미하는 구절에 전차사 ‘벤’을 반
복한다. 여기서 본문을 직역하면 “빛 사이 그리고 어둠 사이”가 된다. 이 구문이 여기서처럼 동사 ‘바달’의 히필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는 구약에서 10회 등장한다. 영어에서는 전치사를 다시 사 용하면 쓸데없는 반복일 뿐이다. 46 ) 이 번역은 이 절의 교차대구적 배열, 즉 동사-간접목적어/간접목적어-동사를 보존한다. ‘바이크 라……카라’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산문에 표준적이지만, 여기서는 시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 음을 보라. J. Kselman, “Recovery of Poetic Framents,” JBL 97 (1978), p. 164, A. R. Ceresko, “The Chiastic Word Pattern in Hebrew,” CBQ 38 (1976), p. 309. 47 ) 또는 “1일.” 히브리어는 서수 ‘리숀’이 아닌 기수 ‘에하드’를 사용한다. 그러나 ‘에하드’는 “하 나”가 아니라 “첫 번째”를 의미할 수 있다. 예, 창 8:5-“그 달 초하룻날에”(베에하드 라호데쉬), 2: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쉠 하에하드 피숀). 서수 대신에 기수를 사용한 예에 대해서 는, GKC, § 134p을 참고하라. 고든은 만약 ‘에하드’가 하나님의 이름이라면 아마도 그 주의 첫 날을 하나님을 따라 이름을 붙였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많은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주의 날” 이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창 1:5의 문구는 “유일자(the One)의 날”이 될 것이다(C. H. Gordon, “His Name is ‘One’,” JNES 29 [1970], pp. 198~199; “The Seventh Day,” UF 11 [1979], pp. 299~300). 왕과 여왕이 뱀 신인 Ušh r 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신들이 제물을 같 ) 이 먹는 의식을 기록한 우가릿 본문이 출판됐다(no. 611). 이 본문은 달력 문구(14행)를 포함한 다(ym ah. d [1일]. 피셔(L. Fisher, “An Ugaritic Ritual and Genesis 1:1-5,” Ugaritica [Paris: Geuthner, 1969], 6:197~205)는 이 문구를 창세기 1장이 예배 배경을 반영하는 증거라고 보았 다. 그러나 단순히 이 구절이 우가릿 본문에 나오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대한 똑같은 기원을 가정 하기에는 희박한 증거다. 참고, S. Loewenstamm, “Ugarit and the Bible II,” Bib 59 (1978), pp. 112~113.
124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2. 첫째 날 ( 1:3~5 )
이 세 절은 하나님과 내래이터의 말을 모두 포함한다. 실제로 이 첫째 날 에 하나님은 ‘예히 오르’( 빛이 있으라 ) 라는 단 두 단어로만 말씀하신다. 그 외 의 모든 것 ( 신 급)은
소개, 창조 대상 묘사, 평가 진술, 이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정보, 연대기 언
내래이터의 말이다. 그러나 짧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 내래이터는 부록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독주자이시고 내래이터 는 협연자다. 또한 3절은 독자에게 창세기 1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하나님이 이르시 되”( 3, 6, 9, 14, 20, 24, 26절 ) 라는 문구를 소개한다. 불가타역은 3절을 ‘피아트 룩 스( fiat lux ), 즉 “빛이 있으라”로 번역했고, 거기서 “명령에 의한 창조”( creation by fiat ) 라는
말이 나왔다. 명령하는 말씀에 의한 창조를 강조한 것이다.
성경이든 성경이 아니든 모든 창조 이야기는 네 방식 가운데 하나로 창조 를 묘사한다. (1) 신이나 신들의 행동을 통해, (2) 적대적인 힘과의 갈등을 통해, (3) 출생과 자기 재생산을 통해, (4) 말을 통해. 분명하게 (2)와 (3) 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1장과 2장은 (1)과 (4) 의 사용을 나타낸다. 1장 1절~2장 3절의 창조 방식과 2장 4절~31절의 창조 방식이 기본적으 로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해석은 살펴볼 가치가 있다. 말씀에 의한 창조와 행동에 의한 창조가 대조된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갈비뼈를 만드시고/심으시고/취하셨다.
( 그런데 이 차이점은 자료 비평가들이 이 두 장 사이를 분리하
려고 사용하는 기준에 속한다. 이들은 1:1~2:4a를 “P 문서”로 여기고, 따라서 후대의 것으로 간주한다. 2:4이하는 “J 문서”로 보고, 따라서 초기 [아마도 BC 9/8세기] 의 것으로 본다. )
두 장을 자세히 조사하면 본문 자체에서 이런 구분을 유지하지 않는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창세기 1장에서 ‘피아트’( 있으라 ) 라는 말씀으로 창조된 유일한 항목은 빛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장에 있는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피아트’와 그에 이어지는 하나님이 착수하신 어떤 활동들이 합쳐져서 창조되거나 발 생했다. 따라서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있었다”라든지 “빛들/동물 들/인간이 있으라 하니 빛들/동물들/인간이 있었다”라는 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둘째 날의 “있으라”는 표현 뒤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가 나 온다. 4절 4절은 논리적으로 3절을 따른다. x와 y는 이미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만 x는 y와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누사”는 여기서 분리하는 것이 아니 라 각 부분에 각각의 영역과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125
창세기 I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일은 종종 나누시는 것이다. 이 동사는 1장에서 다섯 번 사용된다( 4, 6, 7, 14, 18절 ). 한 번은 빛과 어둠, 두 번은 궁창, 두 번은 광명체에 사용된다. 카펠루드( Kapelrud ) 는 이 동사가 의도적인 이유에서 창 세기 1장에서는 자주 나오고 창세기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제안했 다. 카펠루드는 이 이야기가 신앙이 위태로울 위험에 처하여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을 위해 작성됐다는 개념으로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에서 “나누다” 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게 이교도에 더럽혀질 모든 가 능성에서 자신들을 분리시키라는 미묘한 권고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48 ) 이 제안은 주해적이라기보다는 공상적이고 상상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창세기를 시작하는 장은 건전한 구분과 악의적인 구분 사이에 대조를 제시한다. 창조에서의 분리는 질서를 향해 간다. 즉 어둠과 빛, 아랫물과 윗 물, 낮과 밤, 여자와 남자를 나눈다. 죄와 범죄에서의 분리는 무질서를 향해 간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에게서, 남자는 여자에게서, 남자는 땅에서, 남 자는 동산에서 분리된다. 이 분리와 창세기 1장의 다른 두 분리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여기서 하나 님이 분리에 앞서 축복의 진술 (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 을
선언하신다는
점이다. 6~8절과 14~19절에서는 이 평가 문장이 분리에 나타난다. 그러므 로 아름다운 ( 또는 “좋은”, 히. ‘토브’ ) 것은 빛 그 자체이지, 빛과 어둠 단위로의 시 간 창조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우리가 첫째 날에 일어난 일을 이어지 는 날들과 비교하면서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의 첫 창 조는 시간이고( 3~5절 ), 둘째 창조는 공간이다( 6~10절 ).49 ) 이 창조 이야기를 시간의 맥락에서 시작하고 다시 시간의 범주, 즉 안식의 날로 돌아가서 마 무리하는 것 ( 2:1~3 ) 이 의미가 없을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 주기적인 시간 개념을 가진 문명은 분명한 이유 때문에 시간의 범주를 신성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명은 배타적으로 공간의 신성화에 집착할 것이다. 창세기에 서는 공간을 신성화하는 개념보다 시간을 신성화하는 개념( 창 2:3의 ‘카다쉬’ 어 근을 비교하라 ) 이
더욱 두드러진다. 사실 출애굽기 3장 5절( ‘카다쉬’[신성하게 하다] 어
근이 다음으로 나오는 곳 ) 에
와서야 공간을 신성화하는 개념이 나타난다. “네가
48 ) A . Kapelrud, “The Mythological Features in Genesis 1 and the Author’s Intention,” VT 24 (1974), p. 185. 49 ) 다음을 보라. C. Westermann, Creation, tr. John J. Scullion (Philadelphia: Fortress, 1974), p.
43.
126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3. 둘째 날 ( 1:6~8 )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아마도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저자가 셋째 “날”이 되기까지 태양 없이 빛의 존재(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날” ) 를 확증하는 것이 특이하다는 생각에 부딪 힐 것이다. 빛 창조는 태양빛 창조를 예견한다. 결국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 은 하늘의 광명체에게 부여할 것이다( 18절 ). 이런 주장이 과학적 무지를 나 타낸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셋째 “날”까지는 태양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빛을 비추도록 하셨다는 것이다.50 ) 5절 창세기 1장이 계속해서 저녁을 아침 앞에 둔다는 사실이 구약이 날을
일몰에서 일몰로 간주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날이 해 가 뜨는 아침에 시작한다고 간주하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이 이튿날을 언급할 때 아침이라는 시간을 언급한다는 사실 이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창 19:33~34; 삿 6:38, 21:4 ). 비슷하게 “낮과 밤”이라는 구절은 “밤과 낮”보다 훨씬 자주 나온다.51 ) 이와 같이 창세기에서 이 반복 어구는 하루를 계산한 것이 아니라 “아침까지 빈 시간, 즉 날의 끝과 다음 일( work ) 의 시작”을 가리킨다.52 )
3. 둘째 날 ( 1:6~8 )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
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7
53 )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 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 vault in the middle of the waters, and let it be a separator between waters and waters.” 7 So, God made the vault and he separated between the waters beneath the vault and the waters above the vault. And 6
50 ) 성 경은 빛으로 가득하지만 태양이 없는 밝은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참 고, 계 22:5). 자신을 “빛”이라고 부르는 자(요일 1:5)가 많은 자원을 마음대로 다루지 않겠는가? 이 자원으로써 빛이 창조 세계에 보내진다. 창세기 1장이 태양이 없이 낮과 빛이 있을 수 있다 고 말하듯이, 마태복음 2장은 부친이 없이 아들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러므로 여 호와는 창조의 질서에 의해 자신의 손에 빛을 쥐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 빛을 여호와는 태 양과 달 없이 우리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라고 언급한다(Commentaries on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tr. John Kings, 2 vols. [Grand Rapids: Eerdmans, repr. 1948], 1:76). 51 ) 레 23:32와 같은 절은 속죄일 준수를 다루면서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 녁까지” 거룩한 날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이 절은 일몰에서 일몰에 이르는 하루의 계산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거룩한 절기를 전날 밤에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52 ) R. de Vaux, Ancient Israel , 2 vols., tr. J. McHugh (New York: McGraw-Hill, repr. 1965), 1:181. 다음을 또한 보라.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2 vols., tr. I. Abrahams (Jerusalem: Magnes, 1961~1964), 1:28~30. 53 ) [저자사역 “물과 물 사이의 분리자가 되게 하라”]. 이 번역은 여기서 사용된 ‘바달’의 히필 분사 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져오려는 시도다.
127
창세기 I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
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it was so. 8 God called the vault “sky.” And there was evening and morning?a second day.
6절 “궁창”( vault ) 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 ‘라키아’다. AV에서는
“창공”( firmament, 불가타역 firmamentum에서 유래 ) 으로 번역한다. 이 명사의 기본 의 미는 동사 ‘라카’가 결정한다. 여기서의 기본 개념은 “펼치다”이고, 특히 창 조에서 땅을 펼치거나 ( 참고, 37:18 ) 을
시 136:6; 사 42:5, 44:24 )
하늘을 펼치는 것 ( 참고,
욥
가리킨다. 이사야 40장 19절에서는 “( 금으로 ) 씌우다, 판금하다”를 의
미한다. ‘라키아’는 펼치거나( 예, 천막 ) 망치로 두드려서( 예, 금속. 참고, 신 28:23 [기 근 때의 하늘을 놋에 비유]. 참고, 출 39:2 [분명하게 “망치로 치다”를 의미] )
만드는 대상을 의미
한다. 궁창은 물과 물로 나누는 기능을 한다. 7절에서 “물” 앞에 있는 전치사는 ‘벤……벤’이지만 6절의 “물” 앞에 전치사는 ‘벤……레( 또는 ‘라’ ) ’인 것을 볼 것이다. 첫 번째 조합은 구약에서 126회 나오지만, 두 번째 조합은 30회만 나온다. 창세기 1장 6절은 창세기에서 ‘벤……레’가 나오는 유일한 곳이다. 이 조합은 레위기 20장 25절에 가서야 다시 나타난다. ‘벤……레’ 조합은 x와 y를 구분하는 데 일관되게 사용되고,54 ) 남자와 여 자, 아버지와 딸, 정결함과 부정함 같이 불특정한 부류를 가리킬 때 사용한 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블레셋( 즉
특정한 사람들 )
사이에 전쟁이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벤……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선과 악( 불특정한 것)
사이의 차이점을 아는 것”과 같은 표현에서는 보통 ‘벤……레’ 조합이
사용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6~7절에서 아마도 6절은 일반적인 물을 가 리키는 것 같다. 그러나 일단 구분이 정해진 다음에는 ( 7절 ), 두 개의 특정한 물, 즉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온다.55 ) 7절 구문론적으로 “나누었다”( 개역개정 다 ) 이거나
궁창 ( 그것이
나누었다 ) 일
“나뉘게” ) 의
주어는 하나님 ( 그가
나누었
수 있다. 교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4절의 병행을 근거로 하나님이 주어라는 견해를 선호한다. 4절에서 하나님은
54 ) 이 곳과 신 17:8(피와 피, 법적 권리와 법적 권리, 공격과 공격 사이); 겔 18:8(남자와 남자 사이), 34:17, 22(양과 양 사이), 41:18(그룹과 그룹 사이) 에서처럼 특히 x와 y가 동일한 단어일 때. 창 32:16은 예외다. 55 ) 다음을 보라. J. Barr, “Some Notes on ben ‘between’ in Classical Hebrew,” JSS 23 (1978),
pp. 1~22, 특히 p. 11.
128
I. 원시 역사 ( 1:1~11:32 ) A. 세상 창조 ( 1:1~2:3 ) 3. 둘째 날 ( 1:6~8 )
분명히 똑같은 동사의 주어다. 또한 새로운 주어가 나오든지 또는 둘째 동 사 형태가 바뀌든지 분명하게 주어가 바뀐다는 표시가 없으면, 첫 절에 나 오는 동사의 명백한 주어가 다음 분사절에서 동사의 주어 역할을 한다. 나 중 내러티브에서 구분의 일이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된 항목 자체에 부여되 었다는 사실은 주어인 궁창에 동사를 덧붙였다는 것을 지지한다( 14, 18절 ). 많은 주석가들은 70인역을 따라 마소라 본문의 ‘바예히 - 켄’( 그대로 라)을
되니
이 절의 마지막에서 6절 끝으로 옮겼다. 창세기 1장에서 일관되게 이
표현은 하나님이 시작하는 선언 진술을 따른다( 9,
11, 15, 24절 ).
여기서 “그대
로 되니라”에 말의 보고( Wortbericht ) 가 아닌, 행동의 보고( Tatbericht ) 가 뒤에 이 어진다. 여섯째 날에 이 문구가 비슷한 위치에 있다( 아래 30절을 보라 ). 8절 성경 이야기와 이교의 이야기 사이에 정신구조가 크게 다른 것을 보
기 위해, 이 절에 묘사된 “하늘”의 창조와 에누마 엘리쉬의 병행을 살펴볼 수도 있다. 에누마 엘리쉬의 적절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때 주( 마르두크 ) 는 그녀( 티아마트 ) 의 죽은 시체를 보기 위해 멈췄고, 그는 괴물을 나누고 숙련된 작업들을 했다. 그는 그녀를 조개처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는 그녀의 반을 세우고 천장을 만들어 하늘이 되게 했고, 빗장을 내리고 보초들을 세웠다. 그는 그들에게 그녀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56 )
이 신화에서 하늘은 이전에 존재했던 물질에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특 히 악한 여신의 시체 절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서 마르두크는 티아마 트가 자신의 위협적인 물을 땅에 쏟지 못하도록 막고 보초를 세워야만 했 다. 적대자로서의 하늘이 속박당하며 작용한다. 가나안 신화에서는 이 하늘에 있는 바다와 바알이 크게 주목을 받는다. 이들의 주요 기능은 비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중심 역할은 하늘의 창이 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에서는 이런 수문이 드물게만 언급된다. 창세기 7장 11절은 위의 물들을 배출하는 수단을 분명하게 언급하는 구절이다. 우 리가 번개, 구름, 천둥이 동반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구약은 압도적 으로 비가 내리는 과정을 묘사한다( 창 9:14; 삿 5:4; 왕상 18:45; 사 5:6. 그리고 욥 26:8과
56 ) A NET, p. 67에 있는 스파이저(E. A. Speiser)의 번역.
129
창세기 I
시 77:18 [개역개정 77:17] 과 같은 시 구절에서도 ). 57 )
둘째 날과 관련해서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문구가 없다. 70인역은 아마도 인위적으로, 그리고 일관성을 위해 이 문구를 첨가한 것 같다. 70인역이 히브리 본문의 초기 형태를 나타낼 가능성은 거의 없 다. 8절에 이 문구가 생략된 것은 저자가 궁창의 창조를 단지 10절에 나 오는 마른 땅( 개역개정
“뭍” ) 의
예비단계로서만 보았고, 따라서 이 문구가 가
장 어울리는 시점까지 남겨두었음을 가리킬 수도 있다. “위의 물”은 이제 창조 이야기에서 서서히 밀려나고 있고, 저자의 관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 고 있다.
4. 셋째 날 ( 1:9~13 )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58 )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
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 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
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59 )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waters beneath the sky be gathered into one collection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 God named the dry land “earth”; the collection of waters he named “seas.” God saw how beautiful it was. 11 And God said, “Let the earth be green with verdure: seed-bearing plants, and every kind of fruit trees-whose seed is enclosed in it-producing fruit on earth.” And it was so. 9
57 ) 다음을 보라. D. Neiman, “The Supercaelian Sea,” JNES 29 (1969), pp. 243~249. 58 ) [저자사역 “한 집합체로”]. 마소라 본문은 ‘마콤 에하드’를 “한 장소”라고 읽는다. 여러 요소(다 음 구절에 있는 단어 ‘미크베’[집합체, 모임], 70인역이 9절의 ‘마콤’을 ‘쉬나고게’[모임]로 번 역, 4QGen에서 11절의 ‘미크베’ 읽기 등)에 근거해 여기 본문을 ‘마콤’에서 ‘미크베’로 수정할 것이 제안되었다(예, BHK, BHS를 보라). 그러나 ‘마콤(Mwqm)에서 마지막 자음 ‘멤’(M)이 전접어
(前接語)이며 세골 모음과 ‘에하드’의 후음 사이에서 경과음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면, 11절 의 자음 본문은 그대로일 수 있다. 다음을 보라. D. N. Freedman, “Notes on Genesis,” ZAW 64 (1952), pp. 190~191, M. J. Dahood, “Northwest Semitic Notes on Genesis,” Bib 55 (1974), p. 77, F. C. Fensham, “Ugaritic and the Translation of the Old Testament,” BT 18 (1967), p. 72. 59 ) [저자사역 “모든 종류의”]. 전통적으로 “각기 종류대로”로 번역했다. 여기서는 마소라 본문이 ‘레미노’로 읽지만 다음 절(2회)과 25절에서는 ‘레미네후’로 읽는다. 구약에서 ‘레미노’는 4회 사 용되고(이곳과 레 11:15, 22 [여기서는 두 형태를 모두 사용한다]; 신 14:14), ‘레미네후’는 12회 사용된다. 프리드먼(D. N. Freedman, ZAW 64 [1952], p. 190)에 따르면, ‘레미노’는 변칙적인 것이며, ‘레미나후’에서 나온 ‘레미나브’ 형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아’발음은 고대의 옛 목적격 어미를 나타낸다.
130
nicot
nicot
on the old testament
NICOT 주석 시리즈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구약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횡단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도와 왔습니다. 최고의 구약 주석으로 자리매김한 NICOT는 신 학자, 목사, 랍비, 신학생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자층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창세기 Ⅰ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o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NICOT 시리즈의 모든 주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복음주의의 입장 을 견지하면서 학문적인 탁월함과 신앙적인 적용을 함께 추구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는 저자, 기록 시기, 기록 목적, 구조, 신학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본문에서는 히브리어 원문에 대한 저자의 사역과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을 제시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 님의 음성을 새롭게 듣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주석 시리즈가 구약이라는 낯선 세계로
지은이 빅터 해밀턴(Victor P. Hamilton) 브랜다이스 대학교에서 지중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애즈베리 신학교에서 37년간 구
빅터 해밀턴 지음
떠나는 여정에 도움을 주는 신실하고 신뢰할 만한 안내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약학을 가르치면서 오경 연구에 몰두했다. 해밀턴은 고대 근동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풍부한 지식 서 개론』, 『출애굽기 주석』 등이 있다.
옮긴이 임요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했고, 남아공에 있는 프레토리아 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 학위(Ph.D.) 를 받았다. 『구약 주해와 텍스트 언어학』을 저술했고, 『한 권으로 읽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 『구 약과 신약의 관계』(이상 부흥과개혁사)를 번역했다.
임 | 요한 옮김
을 토대로 이번 NICOT시리즈의 창세기 주석을 저술했으며, 그 밖의 저술로는 『오경 개론』, 『역사
창세기Ⅰ Genesis 1~17 빅터 해밀턴 지음 | 임요한 옮김
ISBN 978-89-6092-447-5 978-89-6092-335-5(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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