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높이고 예수를 구약 성경에 대한 성취로 보여 주는 누가복음을 당신이
사랑한다면, 당신은 누가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이 책의 연구도 사랑할 것이다.
이 책은 통찰력으로 가득하고 성경의 더 폭넓은 메시지에 대한 누가 자신의 해
석학을 세심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보물이다.
-크레이그 키너 애즈버리 신학교, 성경학 교수
박식한 안내자를 따라 이 새롭고 믿을 만한 안내서의 도움으로 누가복음을 다
시 새롭게 펼쳐 보라. 아담, 출애굽, 광야, 천사와 악한 영, 인자, 이 모든 것이
누가복음 안에 있는 주제다. 글래드는 이런 주제룰 숙고하는데, 이는 또한 우리
의 위대한 구원자에 대한, 그리고 구원자의 위대한 사역에 대한 풍성한 구약
성경의 윤곽을 보도록 돕기 위함이다. -브랜던 크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학 교수
누가복음의 길이와 너비와 깊이는 주눅 들게 할 수 있다. 벤저민 글래드는 세
심한 주해, 신학적 통합, 정경적 감수성을 조화시켜 누가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
제에 대한 ‘이해하기 쉽고 믿을 만한’ 연구 결과를 제공하면서 특히 구약 성경
에 담긴 뿌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책은 개인적인 연구를 증진시키는 데, 설 교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준비하는 데 이상적인 교재고, 심지어 누가복음 수업
보충 교재로도 적절하다. 적극 추천한다. -매튜 하몬
그레이스 대학 및 신학교, 신약학 교수, 『NTT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신학』의 저자
이 책은 누가복음을 공부하는 학생이 꼭 읽어야 한다. 벤저민 글래드는 능숙하
게 독자를 인도해 예수께서 진정한 이스라엘로서, 오랫동안
에 대한 즐거운 참여로 우리를 이끈다.
-브라이언 탭 베들레헴 대학 및 신학교, 학장 및 성경학 교수
누가복음은 우리를 성육신에서 승천으로 이끈다. 또는 벤저민 글래드가 표현 한 것처럼 우리를 구유에서 왕좌로 이끈다. 누가와 함께 이 여행을 하다 보면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미천한 신분의 마리아, 들판의 목자들, 식사 자리에 앉은 세리와 죄인, 나무 위 삭개오, 십자가에 달려 회개하는 죄인
과 함께 우리도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글래드는 주요 주제와 모티브를 포
착해서 독자가 자신의 위치를 잘 알도록 돕는다. 또한 글래드는 믿을 만한 안
내자로서 우리와 나눌 통찰과 우리에게 보여 줄 구약의 연결점이 많은 저자다.
누가복음 신학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드러낸다.
이 책은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고 교훈적이다. 이 책을 단순히 누가복음에 대해
더 이해하려는 목적으로만 읽지 말라. 모든 백성을 위한 위대한 기쁨의 좋은
소식을 찬양하는 일에 천사들과 함께 동참하는 것도 우리의 목표로 삼으라. -미첼 체이스 켄터키주 루이빌에 위치한 코스모스데일 침례교회 설교 목사, 서던 침례신학교, 성경학 부교수 벤저민 글래드가 누가복음 독자를 위해 풍성한 참고 자료를 제공했다. 누가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예수가 친히 이끄심을 따라 글래드는 성경 전체의 패
턴과 약속이 주 예수의 구원하시는 통치에 대한
누가복음에 대한 탁월하고 통찰력 있는 주제별 해석을 담은 이 책은 예수와 구
약 성경과 예수로 말미암은 구약 성경의 성취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글래드
는 하나님의 사역 범위를 창조와 타락에서 예수를 거쳐 여러 세기를 지나 다가
올 시대에 이르는 교회로 확장한다. 누가복음에 대한 더 풍성하고 자료 정리도
더 잘 되었으며 더 간결한 성경신학적 해석이 담긴 책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
직 그런 책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 책을 통해 학생과 목회자와 학자라면 누
구나 똑같이 엄청난 유익을 누릴 것이다.
-로버트 야브루 커버넌트 신학교, 신약학 교수
┃표 목차┃
표 1.1 한나와 마리아 비교 54
표 1.2 부자와 나사로의 대조 72
표 2.1 누가복음 안에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구절들 86
표 2.2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승리의 입성 102
표 3.1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신 사건에 있어 엘리야와 엘리사와 예수를 비교 122
표 4.1 누가복음 24장과 이사야 6장 9-10절 비교 165
표 5.1 예수에 대한 사탄의 명령들과 이 명령들에 함축된 시험들 190
표 6.1 다니엘 7장 14절과 누가복음 4장 6절 비교 222
표 6.2 누가복음 안의 감람산 설교 241
표 7.1 누가복음 안에서 예수와 바리새인들이 가진 식사에 대한 비교 268
┃ 시리즈 서문 ┃
신약 성경 각 권의 큰 관념을 다룬 책은 매우 드물다. 독자는 성경
사전, 일부 주석, 신약 신학 책에서 간략히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이런 책은 다른 정보로 가득 차 있고 신약 성경 각 책 자
체의 신학을 밝히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신학의 다양
한 주제에 집중하는 전문 작업은 종종 좁은 초점을 갖고 있고, 이를
테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의 가르침의 어떤 국면을 그 책 나머지
부분의 신학과 분리시켜 다룬다.
신약 성경신학 시리즈는 성경 연구자에게 신약 성경 각 책이나
책들의 특수한 가르침을 적당히 책으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
으로 다룬 작품을 제공함으로써 이 간격을 메우려 애쓴다. 이 시리
즈는 성경신학의 관점에 따라 본문에 접근한다. 이 시리즈는
누가복음 신학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20권의 이 시리즈는 복음주의 관점에 따라 신학 주제들을 포괄적
이고 학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고찰한다. 이 시리즈는
신학생, 설교자, 관심 있는 평신도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
를 들어, 목사는 강해 설교 시리즈를 준비할 때 유익한 주석을 건전
하게 제공하는 책은 찾을 수 있겠으나, 신약 성경 각 책의 종합적
가르침을 충족시켜 줄 만한 책은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시리즈
는 설교와 성경 공부 준비에 유용할 뿐 아니라, 대학과 신학교에서
주석 수업 교재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리즈가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헌신을 끌어내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사복음서 가운데 한 권의 복음서에 대한 간략한 신학을 저술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누가복음이 특히 어려운 것은 아마도
누가복음이 사복음서 가운데 가장 길기 때문일 것이다. 벤저민 글
래드는 흥미로운 지점에서 누가복음의 신학에 접근한다. 글래드는
특히 누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구약 성경의 성취에 대해 말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숙고한다.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가르치는 모
든 내용을 다루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독자는
누가복음의 이야기가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
이다. 독자들은 예수에게 초점을 맞춘, 상대적으로
시리즈 서문 11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하기 쉬
우면서 동시에 깊이가 있는 누가복음에 대한 신학을 발견한다. 우
리는 이 책에서 누가복음의 신학의 뿌리들이 드러나고
분석되는 것
을 발견한다. 우리가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릴 수 있다면( 마 13:52 ), 독자들은 많은 보물을, 곧 새것과 옛것을 모두 발견할 것이다.
토머스 슈라이너·브라이언 로스너
┃ 서문 ┃ 윌리엄 포크너는 책을 저술하는 일을 “폭풍 속에서 닭장을 만드 는 일에” 비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신은 날아다니는 널빤지나 지
붕의 판자를 땅에 펼쳐놓고 단단히 못을 박아 고정시킨다.”1) 이 비
유는 내가 지금까지 쓰인 가장 탁월한 문헌들 가운데 한 문헌에 대
한 이 짧은 책을 저술했을 때에 내게도 공감이 되었다. 누가복음은
헬라어로 대략 19,483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신약 성경에서 가
장 긴 책이며, 한 단어도 버릴 것이 없다.
나는 누가복음에 대한 이 책을 저술해 달라고 내게 요청한 톰
슈라이너와 브라이언 로스너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편집자로
서 이들의 조언들은 이 책의 원고를 작성하는 데 있어 힘을 불어넣
어 주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저술들을 대학원 이후로 읽었기에 이
두 사람을 모두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 그래서 내가 이 시리즈에 참
여하게 된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최근에 『복음서 핸드 1) 이 인용구는 자주 반복해서 사용되고 포크너의 것이라고 언급된다. 하지만 나
는 이 인용구의 출처를 확인할 수가 없다.
북』( Handbook on the Gospels, Baker Academic, 2021 ) 이라는 책을 저술했
는데, 이때 이 두 사람은 내가 크로스웨이 출판사의 신약신학 시리
즈에 참여할 수 있을지 문의를 해 왔다. 이 프로젝트는 나로 하여금
누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가 누가복음이 예수를 제시하는 바를 새롭
게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떤 성경책 한 권에 대한 신학을 저술하는 일은 어려운 시도인
데, 특히 복음서에 대한 신학을 저술하는 일이 그렇다. 대체적으로
각각의 복음서는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생애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 마태복음의 예
수는 요한복음의 예수와 동일하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
님이며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시아 왕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신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죄 용서를 받
고 다시 새로운 창조로 들어간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고통 속에 영원히 산다. 하지만 각각의 복음
서는 또한 예수를 독특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네 개의 복음
서를 갖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누가복음에 대한 하나의 신학”이라는 부제를 갖
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누가복음에 대한 그 신학이 되려고 노력하
지 않으며, 누가복음의 모든 측면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책은 누가복음의 주요한 개념 가운데 일부를 간략하게
제시함으로써, 또한 이 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교차되는지 보여 줌
으로써 누가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에 도달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또
한 구약 성경이 각각의 주제를 제시하는 바를 찾아내려고 시도하
누가복음 신학
며, 그다음에 이런 주제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진전되는
지를 연결시키려고 시도한다.
누가복음은 두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일부인데, 누가복음이 사
도행전과 함께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누가복음에서 이루
신 일은 사도행전에서 선포되며, 누가복음 안에 제시된 주제는 사
도행전에서 펼쳐진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전체로서 함
께 읽어야 한다. 단지 누가복음에만 좁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나는
어떤 의미에서 알맹이를 잃고 있다. 나는 누가복음을 분석할 때에 사도행전에서도 눈을 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독자가
신약신학 시리즈 안에 있는 사도행전에 대한 책을 찾아 어떻게
누가가 이야기를 마치는지를 살펴보기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어려운 책을 저술하는 일이었다. 누가
복음은 그 자체로도 어렵지만, 이 프로젝트는 내 삶에 일어났던 일
때문에 특히 어려웠다. 2020년 추수감사절에 우리 집에 불이 났다.
그 피해는 엄청났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감사하게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몇 달 뒤 2021년 봄에 나는 암으로 오랫동안 고생하
시던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늘 주목을 끄는 분이었고, 아버지
를 만난 그 누구도 아버지를 잊지 못했다. 역시 감사한 것은 아버
지가 하늘에서 어린양을 찬양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이런 두 가지 사건 속에서 이 책을 저술하는 일은 때때로 너무 힘든
일이었다. 한 권의 책을 저술하는 일은 엄청나게 많은 감정적이고
창의적인 면을 요구한다. 또한 나는 힘이 바닥난 상태로 글을 쓰기
위해 앉았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누가복음이라는 생명을 주
서론
신약 성경의 모든 책 안에 그 책이 목적으로 하는 내용에 대한 구
체적인 진술문이 담겨 있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이 신약 성경의 책
을 읽을 때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행히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을 시작하면서 누가복음이라는 책의 목적을 진술
하고 있다.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
로라”( 눅 1:3-4 ). 1) 누가가 누가복음 1장 3절과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만 언급하고 있는 “데오빌로”는 신비에 둘러싸인 인물이다. 아닐 수
도 있지만, 데오빌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하는 데 있어
후원자였을 수도 있다. 고대 시대에 책을 저술하는 일은 재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했고, 특히 공관복음 가운데 세 번째 복음서인 누가
복음과 같이 분량이 상당한 책의 경우, 더욱 그랬을 것이기 때문
이다. 또한 “각하”라는 표현은 아마 데오빌로가 높은 직위에 있는
자임을 가리킬 수 있다( 행 23:26; 24:3; 26:25를 보라 ). 2) 데오빌로라는 이
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의미한다. 이는 데오빌로가 하나님
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음을 암시할 것이다. 데오빌로는 이스라엘
사람의 신앙과 성경을 받아들였을 것이며, 이후에 부활하신 그리스
도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누가가 누가복음 서두에서
한 개인만을 언급했다 해도 누가는 분명히 더 폭넓은 청중을 자신
의 책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누가는 스스로 이방인이었을 개연성
이 아주 높으며 복음서 저자로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안에 이방인
이 포함되는 데 중점을 두었으므로, 아마도 누가복음이 대상으로
하는 청중은 대부분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데오빌로가 이미 배운 “사실”( 눅 1:1 ) 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
룬 다른 책의 내용을 가리킬 것이며, 이런 사실이 “이루어진” 것임
을 말하는 진술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성경 말씀이 성취되었음
을 강조한다. 요약하면, 데오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
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이미 배웠을 것이며, 그래서 누가는 구약
성경의 기대를 성취한 이 사실이 참됨을 확실히 뒷받침하려고, 그
2) 다음도 보라. Josephus, Ant. 18.273; 20.12; Philo, Moses 430; 비극작가 에
243.
누가복음 신학
이 서론에서는 이런 누가의 기획 의도를 상기시키기 위한 내용이
제시될 것이다. 여기서 내 목적은 누가복음의 개관을 간략히 다루
고 각각의 주요한 시점에 있어 구약 성경을 더욱 의미심장하게 사
용하는 몇 가지 점을 추적하는 것이다.3) 누가복음 안에는 명시적으
로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구절이 서른 곳이 넘고 구약 성경을 암시
하는 내용이 수백 군데나 있다.4) 이런 탐색은 결과적으로 우리로 하
여금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할 것이며, 공관복
음 가운데 세 번째 복음서인
David W. Pao and Eckhard J. Schnabel, “Luke,” in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d. G. K. Beale and D. A. Carso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7), 251–415; D. L. Bock, Proclamation from Prophecy and Pattern: Lucan Old Testament Christology, JSNTSup 12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7); Craig A. Evans and J. A. Sanders, eds., Luke and Scripture: The Function of Sacred Tradition in Luke-Acts (Minneapolis: Fortress, 1993);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Trajectories from the Old Testament to Luke-Acts, 2nd e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2); C. A. Kimball, Jesus’s Exposition of the Old Testament in Luke’s Gospel, JSNTSup 9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
4) David W. Pao, “Luke, Book of,” in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d. G. K. Beale, D. A. Carson, Benjamin L. Gladd, and Andrew D. Naselli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근간 [부흥과개혁사 근간]).
서론
예수의 출생과 세례(1:5-3:38)
누가복음의 프롤로그인 1장 1-4절 이후에 누가복음은 세례 요한
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한 이야기( 1:5-25 ) 로 그 내용이 전환된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야기의 초점이 마리아와 요셉( 마 1:1824 ) 에게 있지만, 누가는 독자들에게 예수의 먼 친척인 세례 요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먼저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에게 있었
던 일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내는 “나이가” 많았으므로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1:18 ).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6개월 되었을
예수는 모든 면에서 더 위 대하시다.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 1:34 ) 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 들”( 1:32 ), “하나님의 아들”( 1:35 ) 이라는 칭호들은 예수의 신성과 선
재성을 분명하게 확증한다. 몇 절 뒤에 엘리사벳은 예수를 “내
주”라고 부른다( 1:43 ). 헬라어로 ‘퀴리오스’인 “주”라는 말은 지금까
지의 누가복음 1장의 이야기에서 열 차례 등장하고, 매번 이스라엘
누가복음 신학
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 예. 1:6, 16, 32 ) . 엘리사벳이 예수는 자신의
“주”라고 고백하는 이 표현을 통해 누가는 사려 깊게 예수를 성육
신하신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한다.5) 누가는 1장 45절
에서 엘리사벳이 “주( ‘퀴리오스’, 참고. 1:38 ) 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 마리아 ) 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선포할
때에 이 점을 분명히 한다.
마리아 송가( Magnificat, 1:46-55 ) 로 알려진 마리아의 기도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약 성경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사무엘상 2장 1-10절에 등장하는 유명한 한나의 감사 기
도로서 한나는 이 기도에서 자신에게 아이를 주신 것에 대해 하나
님께 감사한다. 한나의 기도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
이 교만한 자들을 멸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높이실 것이며( 삼상 2:4-
10a ), 하나님이 “자기 왕( 다윗? ) 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
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이다( 삼상 2:10b ). 마리아는 누가복음
1장 51-52절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할 때에 한나의 이 유명한 기도
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제임스 에드워즈는 눅 1:43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마리아의 태 속에 잉태된 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유일하시고 비교할 수 없으신 하나님에게 적절 한 언어로만 묘사될 수 있다”(The Gospel according to Luke, PNTC [Grand Rapids, MI: Eerdmans, 2015, 『PNTC 누가복음』, 부흥과개혁사 역 간, 2019], 53). 다음의 논의도 보라. C. Kavin Rowe, Early Narrative Christology: The Lord in the Gospel of Luke, BZNW 139 (New York: de Gruyter, 2006), 48–49.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눅 1:51-52).
나아가 마리아는 단지 한나의 기도만을 회상할 뿐 아니라, 첫 번
째 출애굽을 가리키는 구약의 여러 본문을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
어, 하나님이 그의 팔에 힘을 갖고 계시다는 점은 아래의 이사야
51장 9절과 같은 본문들을 기억하게 한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 또한
칠십인역에서 출 6:1; 32:11; 사 40:10; 63:12를 보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깨뜨리시는 것( 눅 1:51 ) 은 또한
출애굽을 생각하게 한다( 칠십인역에서 민 10:34를 보라 ). 마리아는 이 노
래를 부르며 하나님이 왕이신 예수를 통해 영적인 권세든 육적인
권세든 모든 형태의 권세를 무너뜨리실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이
누가복음 신학
두 번째 출애굽( 뒤의 1장의 논의를 보라 ) 에서 자신의 백성을 강한 능력
으로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이 이야기 후에 누가는 세례 요한의 출생( 1:57-66 ) 을 이야기하고
사가랴의 찬가( ‘베네딕투스’, 1:68-79 ) 를 기록한다. 사가랴는 명시적으
로 예수의 다가올 출생을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시킬 하
나님과 연결짓는다( 1:69-70 ). 누가가 여기서 구약 성경의 어떤 본문
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밝히지 않지만, 우리는 사무엘하와 에스
겔서와 같은 책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말씀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을 거의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사가랴는 연이어 아브라함과 맺으
신 언약을 언급한다( 눅 1:73-75. 창 12:1-9; 15:4-20; 17:4-22를 예로 보라 ). 이
찬가에서 아기 예수는 단지 ‘다윗의 자손이 왕위를 견고하게 하며
나라 전체에 평화를 이룰 것이라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알릴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알린다. 이스라
엘이 열방을 빛으로 비출 때가 왔으며, 그래서 열방이 약속의 땅에
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출 19:6 ).
예수는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눅 2:4-7 ). 예수
를 낳은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성전에 데리고 갔으며, 거기
서 시므온은 예수에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32).
시므온은 이사야 49장 6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했고 예수를 오랫동
안 고대했던 구원에 대한 약속과 명시적으로 연결시켰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된 이스라엘로서 하나님께 신실한 자인 한 개인을 하나
님이 일으키실 것을 예언했다. 이 신실한 종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 남은 자
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때에 이 종은 또한 열방을 언약의 공동체
로 이끌 것이다( 사 42:1-9; 49:1-6; 50:4-9; 52:13-53:12 ).
누가는 예수께서 열두 살 때에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만드신 사건을 이야기한 후에( 2:41-52 ), 세례 요한이 “회개
의 세례”( 3:3 ) 를 전파하며 자신의 직무를 시작한 사건을 기록한다.
이때 누가는 이사야 40장 3-5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인용한다. 이
인용의 요지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신실한 종 예수를 통해 자
신의 백성을 영적 포로에서 구원하실 때가 이제 이르렀다는 것
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자신의 백성이 새 창조의 여정을 하도록
길을 만들어 가기를 시작하셨다. 이 인용의 마지막 구절인 “모든 육
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열방을
단지 족장 아브라함( 3:34 ) 과 다윗왕( 3:31 ) 의 자손으로 제시할 뿐 아
니라, 인류의 조상인 아담 자신( 3:38 ) 의 자손으로 제시한다. 예수와
아담 사이를 명시적으로 연결한 점은 결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
진다.6)
예수와 출생과 세례 이 부분( 1:5-3:38 ) 을 되돌아볼 때, 누가는 예수
를 오랫동안 고대했던 다윗의 자손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으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신실한 종으로, 두 번째 아담으로 바라본다. 예
수께서 성육신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 ) 이면서 동시에 신실한
아담이라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는 하나님이자 사람이며, 이
두 본성은 구약 성경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성취한다.
예수의 광야 시험과 갈릴리 사역(4:1-9:50)
누가복음의 처음 세 장은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예수의 인
격을 소개하고 예수께서
약속들
이 구체화되는지 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장부터 3장
6) John Nolland, Luke 1–9:20, WBC (Grand Rapids, MI: Zondervan, 1989), 173은 이런 연결점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 놀란드는 다음과 같이 주 장한다. “누가는 예수께서 인간의 가정 안에 자신의 자리를 취하시며, 그래서 (아담의 불순종 이후로) 인간의 가정의 결함 있는 아들 됨 안에 자신의 자리를 취한다는 점을 보게 한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인격 안에서, 자신의 독특한
기원 덕분에(눅 1:35), 또한 자신의 능동적 순종 안에서 일하심으로써 아들 됨
에 있어 새로운 시작을 보여 주시고 아들 됨을 완전히 새로운 발판 위에 놓으 신다.”
까지 예수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패배시킬 것으로 기대
되는 오랫동안 고대해 온 메시아이지만( 1:32-33; 2:4, 11; 3:22 ), 누가복
음 4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메시아의 통치가 실행되는지 보기 시작
한다. 오실 메시아에 대한 구약 성경과 유대인들의 기대는 이런 기대가
널리 퍼진 것만큼 그 기대하는 바가 다채롭다. 그러나 이런 기대 가
운데 공통분모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 기대되었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실현하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굴복시킨다는 것이다.7) 메시아는 이 땅에 새로운 시대, 곧 의의 시
대를 여는 데 있어 기폭제일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수
의 첫 번째 사역은 광야에서 사탄과 맞서 싸우시는 것이었다. 그런
데 이것이 우리가 이스라엘의 왕에게서 기대해야 할 것이 맞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께서 성문에서 나오셔서 바로 이스라
엘의 원수들과 싸우실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맞는가? 맞다. 하지
만 구약 성경에 대한 예수의 성취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께
서 성취하시는 방식이다. 예수는 철로 만든 칼을 휘두르지 않으시
고 대신 하나님 말씀을 뽑아 드신다. 예수는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
7) 예로 다음을 보라. 창 3:15; 49:8–10; 민 24:17; 삼하 7장; 시 2편; 78편; 89편; 110편; 132편; 사 9:6–7; 11:1–5; 53장; 단 7:13–14; 9:25–26; 솔로몬의 시
편 17:21–46; 바룩2서 30:1–5a; 40:1–2; 레위의 유언 18:1–9; CD-A XII, 23; CD-B XIX, 10; XX, 1; 4Q161 8–10 III, 18–22. 제2성전기 유대교의 메
시아에 대한 유익하고 균형 잡힌 연구로서 다음을 보라. Kenneth E. Pomykala, “Messianism,” in The Eerdmans Dictionary of Early Judaism, ed. John J. Collins and Daniel C. Harlow (Grand Rapids, MI: Eerdmans, 2010), 938–942.
신학
1장 위대한 반전
한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누가가 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것
은 아니다. 종종 누가는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이”로서 묘사하
고( 1:32, 35, 76; 6:35; 8:28 ), 하늘을 “지극히 높은 곳” 또는 “높은 곳”으
로 언급한다( 1:78; 2:14; 19:38; 24:49 ). 반면에 아래로의 움직임 또한 표
현된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
며”( ’카테일렌’ ) 라고 말한다( 눅 1:52 ). 예수는 가버나움이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카타베세’ ) 라고 강조하고( 10:15 ), 몇 절 이후에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 ‘페손타’ ) 것을 내가 보았노라”라고
말한다( 10:18 ). 누가가 어떤 이유에서 이런 수직적 측면에 관심을 가
지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유명한 마리아 송가( 1:46-55 ) 안에 있는 마리아
의 찬양 내용에 있다. 이 노래 안에 심겨 있는 누가의 수직적 강조
점이 표면으로 드러난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1:52).
이번 장에서는 하나님의 비천한 자를 높이심과 교만한 자를 낮추
심에 대한 누가의 관심사를 정리해 보기 위해 애를 써 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
의 낮아지심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까지 높아지실
수 있는 자격을 준다.
낮아짐과 높아짐에 대한 예언들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은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들을 확립한다. 레이
몬드 브라운은 다음의 진술로 이와 같은 관점을 표현한다. “누가복
음의 첫 두 장 안에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예수의 이야기로의
이행이 있다. 여기에 거의 구약 성경의 시대들에 해당하는 사가랴
와 엘리사벳,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의 경건을 마지막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다.”1) 세례 요한
1) Raymond Brown, The Birth of the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Matthew and Luke (Garden City, NY: Image, 1977), 242.
신학
과 예수의 출생은 바로 이스라엘의 더 넓은 이야기에서 흘러나
온다. 누가복음은 유일하게 네 개의 찬송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1장
46-55절의 마리아 송가( ‘마니피캇’ ), 1장 68-79절의 사가랴의 찬가 ( ‘베네딕투스’ ) , 2장 14절의 대영광송(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 ) , 2장 2932절의 시므온의 예언적 찬송( ‘눈크 디미티스’ ) 이다. 괄호 안에 있는
이 찬송들의 영어 이름은 각각 라틴어 번역에서 첫 몇 개의 단어들
을 따라 붙여졌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찬송들과
마찬가지로, 이 네 찬송은 일반적으로 누가복음의 메시지를 요약
한다( 예로 단 2:20–23; 4:1–3, 34–35; 6:25–27을 보라 ). 첫 번째 찬송인 마
리아 송가와 네 번째 찬송인 시므온의 예언적 찬송은 설명이 필요
하다. 마리아 송가
마리아 송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두 가지 서로 관련된 주제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1) 권세 있는 자
를 낮추는 것과 비천한 자를 높이는 것, (2) 메시아에 대한 기대의
성취다. 마리아 송가를 대충 읽어도 독자들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
을 낳고 감사하는 기도를 떠올린다( 삼상 2:1-10 ). 한나와 마리아 사이
의 유사점은 굉장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아마도 예표론적인 경우
를 보증할 것이다( 표 1.1을 보라 ).
표 1.1 한나와 마리아 비교
한나 마리아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의 “여종”과
동일시(삼상 1:11)
불임으로 인한 기적적인 출산(삼상 1:5)
사무엘을 출산한 것에 대해 하나님
을 높임(삼상 2:1-10)
한나가 아들 이름을 사무엘로 지음 (삼상 1:20)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비천한 자
들을 높이시는 것을 인정함(삼상
2:6-8)
자신을 주(여호와 하나님)의 “여종”
과 동일시(눅 1:38-48)
처녀의 출산(눅 1:34-35)
예수를 미래에 출산할 것에 대해 하
나님을 높임(눅 1:46-55)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들 이름을 예 수라고 지으라고 가르침(눅 1:31)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 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을 인정함(눅 1:52)
대럴 벅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마리아 송가와 가장 강력하게
문학적으로 유사한 내용은 사무엘상 2장 1-10절에서 한나가 찬양
하는 내용이다.”2) 만약 누가가 한나의 기도를 모델로 삼아 마리아
송가의 내용을 구성하려 했다면, 아마 우리는 사무엘상 2장에서 한
2) Darrell L. Bock, Luke 1:1–9:50, BECN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1994, 『BECNT 누가복음 1』,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3), 148.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이제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적인 유일하심에 기초해 현재
존재하는 실제 현실들을 뒤바꾸신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용사”
를 낮추셔서 심판하실 권리와 권세를 소유하시며, 또한 비천한 자
를 권세 있는 영광의 자리로 “높이기도” 하신다( 삼상 2:4, 7-8 ). 이와
같은 위대한 반전에 더해, 우리는 한나의 기도 전체에 새겨 있는 왕
적인 함의들을 포착할 수 있다. 사무엘상 2장 8절에 따르면, 하나님
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
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여기서 “자리”는 “왕좌”( 칠십인
역, CSB, NIV ) 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아마도 역사의 마지막 때에( 참고. 시 113:7-8; 단 4:17 )
중요한 통치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암시한다. 한나의 기도의 마지
막 절인 사무엘상 2장 10절은 왕적인 인물을 통해 이스라엘의 대적
에게 쏟아질
사무엘상의 독자들은 승리를 거두는 이 “왕”이 누구인지 처음에
는 알지 못하겠지만, 곧 이 왕이 적어도 최초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다윗왕임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를 비교하고 대조해 볼 때
여러 개의 연결점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두 기도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잠시 마리아 송가 바로 앞에 등장하
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사이의 믿을 수 없는 대화를 생각해 보자.
누가복음 1장 41-43절에 따르면,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
아” 예수를 자신의 “주”( ‘퀴리오스’ ) 라고 인정한다. 누가는 “주”( ‘퀴리오
스’ ) 라는 단어를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누가복음에서 열 번 사용
한다. 매번 이 “주”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
눅 1:6, 9, 11, 16, 32 ). 그래서 엘리사벳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를 자
신의 “주”라고 고백할 때, 누가는 사려 깊고 신중하게 예수를 이
스라엘의 성육신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누가는 “주”라
는 단어를 예수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적용해 사용
했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하나로
연결시키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나아가 마리아가 스스로를 “주의
여종”( 눅 1:38 ) 이라고 선포한 것은 마리아 자신이 바로 아직 자신이
출산하지 않은 아이의 여종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아이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주” ) 이며 이스라엘의
여호와(예수)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 2:2).
누가는 정확하게 예수를 명백한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 고백의
자리에 두었다. 나아가 이런 관점에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또한
“용사의 활”을 꺾으시고 “가난한 자를” 높이시며 “귀족들” 가운데
에 자신의 백성을 두시는( 삼상 2:4, 7-8 )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두 번째 위격이며 선재하는 예수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예수와 여호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은
삼위일체 가운데 서로 다른 두 위격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보다 예수를 한나의 기도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비는
마리아 송가에서 전면에 등장한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곧 사무엘의 출산과 처녀의 출산을 기적적으로
주관하시는 그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예수와 동일하신 하나님일
수 있는가? 우리의 머리를 감싸쥘 만큼 이 두 가지 진리 모두를 납
득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성육신이라는 사건 속에 선재
하신 분이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추가하셨다. 이 점은 엘리사벳이
예수를 “주”와 동일시할 때에 “성령”으로 “충만”해 있음을 누가가
어떤 이유에서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런 믿을
수 없는 통찰력은 오직 위에서 올 수 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에 따르면, 마리아는 운명에 대한 위대한
반전을 이야기하는 한나의 기도를 재확인한다.3)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는 권세 있는 자들이 꺾임을 당하고 가난한 자들이 높임을
받는 것을 꼬집어 말한다. 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전체에 흐르
는 강조점이다. 누가는 또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이와 같이 행
하실 것인지를 설명한다. 바로 하나님이 이집트에 노예 되었던 속
박에서 구원하셨던 것처럼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실 것이다. “능하신 이”( 1:49 ), “큰 일”( 1:49 ), “그 이름이 거룩하시
며”( 1:49 ), “힘”( 1:51 ), “팔”( 1:51 ), “흩으셨고”( 1:51 ), “그 위”( 1:52 ), “그 종
3) 한 가지 해석상의 어려운 점은 눅 1:51-53 안에 있는 여섯 개의 단순과거형 동
사들과 씨름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예를 들어, 단순과거형 동사
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또는 단순과거형 동사들은 미래에 일
어날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대럴 벅은 다음과 같이 옳게 주장한다. 단순
과거형 동사들은 “예언적 단순과거형” 동사들이며, 이 동사들은 예수의 최종
적 승리와 연결된 궁극적인 종말론적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Bock, Luke 1:1-9:50, 155). 하지만 나는 이런 예언적 단순과거형 동사들이 그리스도의 사
역 전체를 통해,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만이 아니라, 특별히 광야 의 시험에서 최초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아래의 논의를 보라).
이스라엘”( 1:54 ) 과 같은 마리아 송가에 있는 단어들과 표현들의 조
합은 첫 번째 출애굽을 생각나게 한다.4) 하지만 첫 번째 출애굽과
달리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권력에서가 아니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임을 마리아에게 약속하신다.5) 오
직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이 아닌 두 번째 오심에
서만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한나의 기도의 더 넓은 배경과 사무엘상하의 전체
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사무엘 선지자는 다윗 왕조가 세워
지는 데 있어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예. 삼상 16:1-13 ). 한편 다윗
은 여러 차원에 있어 분명히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내적인 갈등과
개인적인 죄들이 다윗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다. 다윗왕은 이스라
엘을 위해 하나님의 대적들을 패배시키고 사악함을 극복하는 해결
사가 아니었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 한 명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삼하 7장 ). 신실하고 새로운 아담이라는 인물이 미래의 실재
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 한나의 기도는
4) 다음의 논의를 보라. David W. Pao and Eckhard J. Schnabel, “Luke,” in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Use of the Old Testament, ed. G. K. Beale and D. A. Carson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7), 261–262. 프랑수아
çois Bovon, Luke 1: A Commentary on the Gospel of Luke 1:1–9:50, Hermeneia, trans. Christine M. Thomas [Minneapolis: Fortress, 2002], 57).
Brown, The Birth of the Messiah, 363).
서 그 궁극적인 성취를 바로 다윗의 자손인 예수 안에서 발견
한다( 눅 1:32-33을 보라 ). 요약하면, 하나님은 예수라는 왕을 통해 실
체가 있고 영적인 모든 형태의 통치를 멸하시고 두 번째 출애굽에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므온의 예언적 찬송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처음 난 남자로서 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성전에 데려갔다( 2:22. 뒤의 3장의 논의를 보라 ). 성전에서 이들은 우연히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 사
람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2:25 ). 시므온이 아기 예
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한 후에 마리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예언
한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
며”( 2:34 ). 이 축복은 누가복음 1장 52절 말씀에 여호와 하나님이 예
수의 탄생에서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
셨”다는 마리아의 기대와 놀랄 만큼 유사하다. 시므온의 수수께끼
와 같은 말은 예수께서 운명들을 위대하게 뒤바꾸실 것이라는 마리
아의 예언을 강화한다. 여기에 시므온의 말들의 탁월함이 있다. 바
로 모든 형태의 권세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는 소외된 자들과
누가복음 신학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 땅과 하늘의 권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가난한 자들과 열방이
밀려 들어온다는 것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
인 것이 결합되어 있다. 이 점은 누가가 어떤 이유에서 사탄의 권세
와 사탄이 부리는 귀신들을
을 자주 언급하는지 설명한다( 예. 눅 4:1–13, 33–36, 41; 8:2, 27–33; 9:1;
하나의 항목 전체를 광야 시험에 대해 할애할 것
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단지 몇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만 언급하
겠다. 광야 시험은 이 땅에서의 예수의 사역에 대한 제법 큰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처음으로 사탄을 패배시키시고 사탄
의 나라를 전복시키기 시작하신다. 또한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마지막 때의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신다. 내가 목적한
바를 위해 나는 한 가지 측면에만 집중하겠다.
두 번째 시험에 대해 누가복음은 아주 생생하게 사탄이 예수를
이끌고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4:5 ). 하지만 마태복음만이 어디로
사탄이 예수를 이끌고 올라갔는지 알려 준다. 바로 사탄은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를 이끌고 올라갔다( 마 4:8 ). 다음으로 세 번째 시
험이자 광야 시험의 절정에 이르러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이끌고 가 예수로 하여금 그 꼭대기에서 스스로 “여기서 뛰어내
리라”고 부추긴다( 눅 4:9 ). 사탄은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하면서
천사들이 지킬 것이라고 약속한다( 4:10-11 ). 이 인용의 후반부는 다
음과 같다. “또한 그들이( 천사들이 ) 손으로 너를 받들어”( 4:11 ). 우리는
누가가 “올린다”, “내린다”라는 공간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주석가들은 자주 이 표현 이면에 있는 상징
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누가는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이 1장
52절과 2장 34절의 시각으로 광야 시험을 바라보기를 원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탄은 높이고 낮추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권세를
따라하려는 것처럼 예수에게 똑같은 일을 하려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에서 사탄은 예수를 데리고 올라간 다음에 다시 들어올려질 것
이라고 예수에게 보증하면서 뛰어내리라고 명령한다. 사탄은 예수
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으심으로써, 높여진 또는
들어올려진 사탄 자신의 통치 상태에 가담하시기를 원한 것이다. 결
국 세 번째 시험은 십자가의 낮아지심을 건너뛰어 버린다.6)
6) 조엘 그린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때에 이런
예수는 이와 같은 일을 할 리가 없으시다. 예수는 사탄에게 순종
하는 대신 자신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신다. 그 결과는 다음
과 같이 두 가지다. (1) 광야 시험에서 예수의 신실함은 최초로 사
탄을 그 하늘의 지위에서 내리친다( 아래의 논의를 보라 ). (2) 그래서 예
수는 높임을 받을 수 있으셨고 우주적 통치권을 취할 수 있으셨다.
예수와 사탄은 이와 같이 그 위치를 뒤바꾼다. 아담의 타락의 결과
로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및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우주를 통치하
는 권한을 부여하신다( 예로 욥 1:6-12; 2:7을 보라 ). 사도 요한은 결국 사
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말한다( 요 12:31. 참고. 계 12:7-12 ). 그리스 도가 광야에서 승리한 것은 최초로, 그러나
완성하실 것이다( 계 20:10 ).
광야 시험에 곧바로 이어져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시고 자신
의 고향 나사렛에 도착하신다. 여기서 예수는 이사야 61장 1-2절의
성취를 선포하신 후에 잘 알려진 것처럼 고향 사람들에게 거절당하
신다( 눅 4:16-30 ).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다( 4:29 ). 누가복음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
나님의 구원이 고난과 죽음 앞에서(그리고 고난과 죽음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통과해 온다는 점을……이해하지 못한다”(Joel B. Green, The Gospel of Luke, NIC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97, 『NICNT 누가복음』,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0], 198 [강조는 원저자의 것임]).
들은 즉시 세 번째 시험과 연결점이 있음을 볼 것이다. 예수를 밀쳐
떨어뜨리려 한 데서 나사렛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예수를 왕좌에서
몰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곧장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실 때에 나사렛 사람들은 이 일을 성공시키지 못한다( 4:30 ). 예수는 귀신들을 내쫓기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실제로 우주의 통
치자임을 나타내신다 ( 4:31-37; 8:26-39를 보라 ) . 다음으로 누가복음
9장에서 우리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알아챈다. 예수는 자신
의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어 사탄의 통치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에
동참하게 하신다. 제자들은 곡식을 추수하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유익을 얻은 것이다. 누가복음 9장 1절에 따르면, 예수는 “모든 귀
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신다. 여기 이 말
씀은 다니엘 7장 14절과 27절( 뒤의 6장의 논의를 보라 ) 의 예언에 기초
를 두고 있으며, 놀랍게도 광야
주고( 단 7:13-14 ), 이 어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나라를 통치하는 권세
를 준다( 단 7:27 ). 우주를 다스릴 통치권을 물려받은 인자로서 승리
자 예수는 자신과 함께 다스리고 귀신들에 대한 권세를 누릴 열두
제자를 세우신다. 이후에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추가로 일흔두 제자를 세우시는
데( 눅 10:1-11 ), 아마도 이는 새로운 인류를 대표할 것이다( 창 10-11장을
보라 ). 일흔두 제자가 자신들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다음과 같이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