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분별없이 부당하게 무시받는다. 이 책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풍부함과 중요성을 뚜렷이 조명한다. 이 책은 명료한 구성, 세심한 주
석, 학술 연구와의 소통, 신학적 초점이 특징이다. 하몬은 종종 심오하면서도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게 설명한다. 교회나 강의실 할 것 없이 이 책은 그들
의 주요 주제인 예수를 직접 목격한 제자들이 기록한 이 짧은 편지들의 충격적
이면서도 소망 가득 찬 메시지를 훌륭하게 요약하는 작품이다.
-로버트 야브루 커버넌트 신학교 신약 교수
성경의 광범위한 신학적 맥락 속에서 매튜 하몬은 소홀하게 취급되는 이 편지
들의 주된 신학적 공헌을 유용하게 요약한다. 하몬은 각각의 편지에서 독특한
강조점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두 편지가 신학적으로 상당히 중첩되는 점도
자세히 설명한다.
-더글러스 무
휘턴 대학 성경학 교수
매튜 하몬은 그의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관점에서 세심하게 구성한 베드로
후서와 유다서의 성경 신학적 주해서를 완성했다.
-피터 데이비스
과달루페 성모 수도원 감독, 『야고보서·베드로서·유다서의 신학』의 저자
매튜 하몬의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연구는 풍부한 성경신학적 연관성이 목회적
지혜와 통찰과 균형을 이루며, 독자들이 신약의 끝에 오는 이 두 개의 짧은 편
지가 성경의 위대한 구속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
움을 준다. 하몬의 작품은 기독교인이 이 중요한 편지들과 다시 씨름함으로써
교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치도록 도와줄 것이다.
-대리언 라킷 바이올라 대학교 신학대학 신약 교수
┃ 시리즈 서문 ┃
신약 성경 각 권의 큰 관념을 다룬 책은 매우 드물다. 독자는 성경
사전, 일부 주석, 신약 신학 책에서 간략히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이런 책은 다른 정보로 가득 차 있고 신약 성경 각 책 자
체의 신학을 밝히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신학의 다양
한 주제에 집중하는 전문 작업은 종종 좁은 초점을 갖고 있고, 이를
테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의 가르침의 어떤 국면을 그 책 나머지
부분의 신학과 분리시켜 다룬다.
신약 성경신학 시리즈는 성경 연구자에게 신약 성경 각 책이나
책들의 특수한 가르침을 적당히 책으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
으로 다룬 작품을 제공함으로써 이 간격을 메우려 애쓴다. 이 시리
즈는 성경신학의 관점에 따라 본문에 접근한다. 이 시리즈는 본문
시리즈 서문 7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20권의 이 시리즈는 복음주의 관점에 따라 신학 주제들을 포괄적
이고 학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고찰한다. 이 시리즈는
신학생, 설교자, 관심 있는 평신도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
를 들어 목사는 강해 설교 시리즈를 준비할 때 유익한 주석을 건전
하게 제공하는 책은 찾을 수 있겠으나, 신약 성경 각 책의 종합적
가르침을 충족시켜 줄 만한 책은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시리즈
는 설교와 성경 공부 준비에 유용할 뿐 아니라, 대학과 신학교에서
주석 수업 교재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리즈가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헌신을 끌어내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매튜 하몬의 책 『NTT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신학』은 성경에서 가
장 소홀히 다루어지는 책에 해당하는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고찰
한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분량이 적고 주목받지 않는 정경의
마지막 근처에 자리하지만, 하몬은
충분성에서 구속사와 주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하는
유다서 신학
기독교인에게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많
은 순서표에서 베드로후서와 유다서가 상단을 차지할 가능성은
작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는 신약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짧은
편지다. 네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대조적으로, 많은 신자는 이 두 편
지를 연구하는 일은 고사하고 읽는 일도 드물다. 유다서와 베드로
후서는 또한 많은 현대 독자에게 이상하게 생각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심지어 구약에 나오지 않는 사건과 문헌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 결과,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은 간혹 만나더라도 굳이 알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일부러 내지 않는 먼 친척처럼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다루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인 우리는 베드로후서와 유다서를 방치하 는 위험을 감수한다. 베드로와 유다가 이 편지를 쓴 이후로 거의
2천 년 이상이 흘렀어도 현대 교회는 그때와 똑같은 많은 도전에 직
면하고 있다. 교회 안팎에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권위, 영감,
무오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계속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언젠가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는다는 이유로 비난받
는다. 거짓 교사는 하나님 말씀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하고 자기
의 이기적 이득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며, 다른 사람도 부도
덕한 삶으로 진실한 복음에서 멀어지게 하려 한다. 예수께 충실하
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주변 문화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포기하도록 끊임없이 압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유 3절 ). 조롱
하는 자들은 언젠가 예수께서 참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다시 오셔
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순진한 동
화로 일축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오늘날 교회는 예수의 제자로서
어떻게 충실하게 살 것인지와 관련해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배
울 점이 많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가 오늘날 예수를 충실히 따르도록 우리에
게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출발점은 먼저 베드로와
유다가 기록할 당시에 다루었던 역사적 상황을 (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
선을
1) Matthew S. Harmon, “2 Peter,” in Hebrews–Revelation, ed. Iain
M. Duguid, James M. Hamilton, and Jay Sklar, vol. 12, ESV Expository Commentary (Wheaton, IL: Crossway, 2018), 363–410; Matthew S. Harmon, “Jude,” in Hebrews–Revelation, 503–524.
진위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는 하지만, 베드로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기록했다( 벧후 1:1 ). 베드
로는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서 무엇보다 고린도( 고전 1:12 ) 와 수
리아 안디옥( 갈 2:11 ) 을 포함하는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했다.
60년대 중반 무렵 네로의 손에서 임박한 죽음에 직면한( 벧후 1:12–15 )
베드로는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기다리는 동안 경건의 성장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거명되지 않은 기독교인의 무리( 아마 베드로전서와 같은
수신인일 것이다. 벧후 3:1을 보라 ) 에게 편지를 쓴다. 이들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부도덕하게 살면서( 2:4–22 ),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을 무
시하고 조롱함으로써( 3:1–13 ),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와 주재임
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다.
유다서도 교회사 전반에 걸쳐 그 진위성에 대한 의문에 부딪혔다.
그러나 저자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밝히기는 하지만( 유 1절 ), 저자를 예수의 이복형제 유다로
이해하기 위한 유력한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 유다는 특정 교회나
교회들의 집단을 상대로 편지를 쓰는 듯하지만, 이들이 누군지를
명시하지 않는다. 유다가 자기의 청중이 유대교 묵시 문학과 전통
에 친숙한 것으로 기대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유다의 청중은 유
대인 신자일 가능성이 있다( 물론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회중도 배제해서
는 안 된다 ). 꿈을 근거로 자기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하나님의 권위
와 아마 교회 지도자의 권위마저 배척한 거짓 교사가 이 신자 무
리( 아마 팔레스타인 지역의 어딘가에 있는 이방인 성읍에 살고 있을 것이다 ) 에 침
서론 ┃ 15
투했다( 1:8, 11–13 ). 이 거짓 교사는 하나님의 권위를 배척하므로 음
행에 빠지고 탐욕에 이끌렸다( 1:7–8, 11–13 ). 이런 행동은 교회에 분
열을 일으켰고 교회 안에서 연약한 회원을 잘못된
했다( 1:16, 19, 22–23 ).
방향으로 빠지게
이런 토대를 바탕으로,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바를 알려 주는 근
본적인 신학적 신념뿐 아니라 저자가 분명하게 표현하는 신학적 개
념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두 저자가 기록하기는 했으나, 베드로후
서와 유다서는 두 편지에서 공유한 자료가 광범위하게 중첩되는 사
실에 비추어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공유된 자료가 각
편지의 서로 다른 강조점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베드로전서의 신학은 우리 시리즈에서 별개의 책으
로 다루지만, 유용하다고 판단되면 가끔은 베드로후서를 밝히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베드로전서에서 자료를 가져올 것이다.
이 책의 각 장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 모두 나오는 핵심 주제
를 식별한다. 논의할 많은 주제가 예상대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
어 있어서, 반복은 여러 지점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할 것이다. 나는
각 주제가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안에서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설명
하려 하겠지만, 성경 신학의 중요 요소는 이 주제를 나머지 성경의
범위 안에 두는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이전의 성경에 따라
크게 형성된 세계관과 개념 체계를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
은 제임스 해밀턴의 책과 비슷한 접근법을 공유하는데, 해밀턴은
성경 신학을 “성경 저자들이 이전 성경, 구속사 및 그들이 서사, 시, 잠언, 편지, 묵시의 형태로 서술하거나 설명하거나 기념하거나 다루
는 사건들을 제시하는 방식에 반영된 해석적 관점”으로 정의한다.2)
해밀턴은 계속해서 이 과제가 크게 중요한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
의 목표는 성경 저자들의 글에 반영된 일련의 가정들에 대한 개요
를 조사하는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이야기, 상징, 교회와 관련해 무
엇을 가정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보았
던 대로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보았던 대로 세
계를 엿보는 것은 현실 세계를 보는 것이다.”3)
그래서 이것이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의 신학을 주제로 다루는 이
작은 책의 목표인데, 성경 저자들이 보았던 대로 세계를 엿봄으로
써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놀라운
2) James M. Hamilton, What Is Biblical Theology? A Guide to the Bible’s Story,Symbolism, and Patterns (Wheaton, IL: Crossway, 2014, 『성경신학 이란 무엇인가』,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5), 16.
3) Hamilton, What Is Biblical Theology?, 19(강조는 필자의 것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임을 우리
에게 보여 준다. 참으로 창세기 1장은 엿새 동안 매일 “하나님이 이
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
실을 강조한다( 창 1:3, 6, 9, 14, 20, 24 ). 요한계시록은 부활한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선언하시는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계 22:20 ). 이 두 성경적 테두리 사이에서( 겉보기에는 거의 모든 장
마다! ) 성경은 어떤 모양이나 형태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이 보편적 주제와 함께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중요한 관련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하기 전의 마지막 단계로, 하나님은 자기 말씀의 진리를 거부한 모
든 자와 함께 인간을 미혹한 마귀를 불 못에 던지신다( 계 20:10, 15; 21:6–8 ). 에덴과 새 에덴 사이의 모든 기간에 하나님의 원수들은 하
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불신하거나 무시하려 시도한다.
이 점을 배경으로,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훼손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1) 베
드로와 유다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방식으로든 훼손하려는
대적들과 맞섰으나, 두려워 물러나기보다 성경을 다양한 각도로 열
렬히 변호했다. 이 이상으로, 베드로와 유다는 그들의 논점을 제기
하고 예증하기 위해 성경을 당당하게 사용했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정
리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세 개의 구별된( 그러나 연관된 )
항목으로 주제에 접근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성경이 생명과 경건
을 위해 어떻게 충분한지를 살펴보겠다. 둘째, 우리는 성경이 어떻
게 인간의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의 작품인지를 검토하겠다. 셋째, 우리는 초기 형태의 성경적 이중 구조를 설명하겠다. 그리고 이번
생명과 경건을 위해 충분한 것으로서의 성경 생명과
위한
말씀의 충분성은 에덴동산에 뿌리를
둔다. 창세기 1장의 양식에 따라, 하나님은 인간을 말씀으로 존재하 게 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
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일환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위
임하실 뿐 아니라,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
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
리라”라고 선포하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을 계속 보전하신다( 창 1:29 ).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경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추가로 드러낸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
니라(창 2:16–17).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심지어 경건함으로써라고 말해도 좋을 것
이다 ), 인간은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생명을 계속 경험할 것이며 불
순종으로 초래되는 사망을 피할 것이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져온다( 창 3:1–24 ).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심판( 창 3:14–24 ) 과 영적
죽음( 롬 5:12–14 ) 으로 이어졌다. 특히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 열매
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쫓겨났고( 창 3:22 ), 하나님은
심지어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
게” 하는 조처까지 내리신다( 창 3:24 ). 그렇지만 심판의 말씀 안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는 약속의 말씀도 포함되어 있
었다. 여자의 후손은 언젠가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다( 창 3:15 ). 하
나님은 아담과
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
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라고 지시하신 사실을 설
명한다( 신 4:10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경건의 핵심으로서, 이 경
외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에 적합한 반응
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40년간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신 주된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
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 8:3 ).
모세는 자기의 삶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음
처럼 엄중히 경고한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
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
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32:46–47).
생명과 경건이라는 한 쌍의 주제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는
점에 다시 한번 주목하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
에게 생명의 근원이며,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경건의 표현이다.
생명과 경건을 위한 하나님 말씀의 충분성은 지혜 문학에서도 두
드러진 주제다. 아마 이 점을 탁월하게 보여 주는 예는 시편 119편
에 나올 것이다. 시편 기자는 두 번에 걸쳐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
아나게 하소서”라고 명시적으로 기도한다( 시 119:25, 107; 참고. 119:37,
40, 50, 88, 93, 116, 144, 149, 154, 156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
으로써, 온전하고( 시 119:1, 80 ) 부끄럽지 않고( 시 119:6, 31, 116 ) 정직하
고( 시 119:7 ) 깨끗하고( 시 119:9 ) 굳고 성실하고( 시 119:5, 30 ) 지혜로울
수 있다( 시 119:66, 98–100, 125, 144, 169 ).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50절
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과 결부시키는 구절의 수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 참고 119:116, 154 ).
우리가 베드로후서 1장 3–4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주장을 이해해 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그의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
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
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벧후 1:11 ).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은 또한 경건을 위해서도 충분한데, 경건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묘사하는 용어로
서 생각, 느낌, 열망, 행동, 말로 표현된다. 경건은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부르신 것의 핵심을 포착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신 6:5 인
용 ). 사람이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을 통해, 특히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통해 온다. 신
자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약속을 통
해서인데, 이것은 아담의 거역으로 부패하고 왜곡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벧후 1:4 ).
이것을 바탕으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을 실천
적으로 이행하는 일련의 미덕을 추구하도록 신자에게 촉구한다( 벧
후 1:4 ). 이런 미덕의 지속적 성장은 효과적이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이
어지는데( 1:8 ), 이 심상은 심지어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육하
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고 하신 명령을 상기시킨다( 창 1:28 ).
신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효력 있고 열매 맺는 삶을 경험하는데( 벧후 1:8 ), 물론 이 지식은 하
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해진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부지런히 굳게 하며 이 과정에서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확실하게 한다( 1:10–11 ).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신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을 위해 이미 하신 일, 자기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서 현재
에 하고 계신 일, 마지막 때에 그들을 위해 하기로 약속하신 일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된다( 1:12–15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이 미리 한 말”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상기시
킨 직후에( 유 17절 ), 유다는 독자에게 다음처럼 축복을 선언한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
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
어다 아멘(유 24–25절).
하나님이 신자가 거침이 없게 하시고 자신 앞에 흠이 없게 서게
하실 수 있는 한 가지 주된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자는 이 타락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아
갈 때( 벧전 2:11–12 ), 거만한 자들의 조롱에 직면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는 그들의 조롱
섞인 질문과 “만물이 처음 창조된” 이후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는 그들의 주장( 벧후 3:4 ) 에 대응해, 베드로는 독자에게 성경을 바탕
으로 다섯 가지의 핵심 진리를 상기시킨다. 첫째,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물로 땅을 성립하셨는데( 3:5 ), 이것은 창세기 1장 9–10절을
인유한다. 둘째, 세상이 심판의 조치로서 홍수로 범람하게 된 것도
다름 아닌 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며( 창 6–8장에 대한 인유 ), 현
재의 하늘과 땅도 같은 말씀으로 심판을 위해 보호되고 있다( 벧후
3:7 ). 셋째, 주님은 약속을 지키는 데 더디신 것이 아닌데,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기” 때문이다( 3:8, 시 90:4에 대한 인
유 ). 넷째, 베드로는 독자에게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올 것”임을 상기
시키는데( 벧후 3:10 ), 이 표현은 마태복음 24장 43절에 나오는 예수
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끝으로, 베드로는 마지막 날을 예기하며 거
룩한 삶을 살도록 신자를 초대한 뒤에( 3:11–12 ), “우리는 그의 약속
대로 의가 있는 곳인
약속을
과 표현을 빌려 온다( 예. 사 32:16; 43:16–21; 51:3; 60:21; 65:17–25; 66:22 ).
성경은 심지어 거만한 자들의 조롱에 직면해서도 신자에게 힘을 주
기에 충분하다.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베드로와 유다의 신념을 보여 주는 마지막
예는 성경의 사례를 독자가 직면한 거짓 교사를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체계로 확대해 사용하는 것이다. 참으로 유다서와 베드
로후서가 가장 의미심장한 중첩을 보여
, 홍수( 벧후 2:5 ), 소돔과 고모라( 벧후 2:6; 유 7절 ), 롯( 벧후 2:7–8 ), 출애굽( 유 5절 ), 고라의 반란( 유 11절 ), 발람( 벧후 2:15–16; 유 11절 ) 의
제시한다. 베드로후서 2장 9절이 요약하는 대로, 유다서와
런 성경의 사례를 사용한다. 성경의 사례는 거짓 교사가 정확히 구
속사 전반에 나타나는 양식의 최신 형태임을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의 독자들이 이해하게 도와준다. 하나님이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
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
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신뢰함으로써, 신자에게는 조롱하는 자와 거
짓 교사에게 맞서서 굳게 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벧후 3:1–
13 ). 이렇게 할 때 신자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
여
위해 충분하다.
능력 있는 인간적·신적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인간의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의 작품이다. 베드로후서와
유다서가 성경을 신적 말씀으로 강조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두
편지가 이 두 가지 진실을 모두 표현하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성경을 인간과 하나님의 작품으로 제시할 때, 베드로후서와 유다서
는 단지 이전 성경이 스스로 주장한 바를 확대한 것일 뿐이다.
좋은 시작점은 베드로후서 1장 19–21절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기 편지가 오랫동안 복음의 진리를 상기시키는 역할
을 하도록 의도한다( 1:12–15 ). 베드로는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두 가 지 증거를 보이는데, 둘 또는 그 이상의 증인에게서 증언을 요구하
는 재판 절차에 대한 구약의 선례에 의지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 신 19:15 ). 첫 번째 증거는 사도들의 목격자 증언으로서( 벧후 1:16–18 ),
변형
사건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활용한다( 참고. 마 17:1–8; 막 9:2–8; 눅
9:28–36 ). 두 번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벧후 1:19–21 ). 베드로가
기록한 내용은 크게 중요해서 전문을 인용한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
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
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이 구절은 성경의 인간적 측면과 신적 측면 모두와 관련해 많은
점을 말한다. 세 가지의 구체적 통찰에 초점을 맞추겠다.
첫째, 성경은 예언적 말씀이다. 가장 기본적 의미에서
전형적인 선지자로 묘사
한다.3) 모세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것을 이유로 이스라엘 자
3) 창세기 1–2장은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창 2:16–17), 아마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사실을 알고 있는 하와 에게 이 말씀을 전할 것(창 3:2–3)이라는 점에서 선지자로 묘사된다. 추가로
다음을 보라. Benjamin L. Gladd, From Adam and Israel to the Church: A Biblical Theology of the People of God (Downers Grove, IL: IVP
손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는 하나님 명령에 항의할 때( 출 4:10 ), 여
호와는 자신이 모세의 입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네 입과 함께 있어
서 할 말을 가르치실” 분임을 모세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응답하
신다( 출 4:12 ).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자신들에게 직
접 십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크게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당
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출
20:19 ). 모세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
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라고 선언한다( 신 18:15, 18 ).
하나님이 자기 말씀을 선지자의 입에 두어 선지자가 이 말씀을 자
기 백성에게 할 수 있게 하시는 이 기본 양식은 하나님이 선지자에
게 사명을 위임하시는 이야기에 자주 나타난다( 예. 렘 1:4–12; 겔 3:1–11 ).
베드로는 예언적 말씀에 대해 언급할 때, 아마 변형 사건에 대한
자신의 설명에 인유되고 반영되는 일련의 구약 구절을 구체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구약 전체를 염두에 둘 것이다( 벧후 1:16–18 ). 4) 하나님
Academic, 2019, 『ESBT 하나님 백성 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1), 18–19.
4) 필로도 구약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예. Leg. 3.43; Plant. 1.117; Sobr. 1.68). 암시된 구약의 인유와 반향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은
다음을 보라. Matthew S. Harmon, “2 Peter,” in Hebrews–Revelation, ed. Iain M. Duguid, James M. Hamilton, and Jay Sklar, vol. 12, ESV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여호와의 존귀하심이 하늘
보다 높다는 시편 8편 2절의 단언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다. 예수를
“사랑하는 아들”로 부르는
것은 창세기 22장 2, 12, 16절( 여기서는 이
삭을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아들로 부른다 ), 사무엘하 7장 14절( 여기서는 하나님
이 다윗의 약속된 자손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시편 2장 7절( 여
기서는 여호와가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자기 아들로 부르신다 ), 이사야
42장 1절( 여기서는 여호와가 자기에게 택함을 받은 종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로 부
르신다 ) 과 같은 일련의 본문에 의지한다.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거
룩한 산”에 있었다고 말할 때 시편 2장 6절을 반영할 가능성도 있는
데, 해당 시편에서 여호와는 자신이 기름 부은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고 선언하신다. 이 각각의 본문은 하나님이 인간 저
자들을 통해 이야기하신 예언적 말씀인데, 인간 저자들은 때로 하
나님이 자신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완벽히 파악
하지 못했다( 벧전 1:10–12 ).
둘째, 성경의 진실성과 신뢰성은 계속적으로 확인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형의 산에서 겪은 경험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이
진실함을 보여 주신 한 사례일 뿐이다. 그 뒤에 베드로는 하나님 말
씀의 신뢰성을 보이려고 구약 표현을 추가로 사용한다( 벧후 1:19 ). 하
나님의 말씀을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나 등과 결부시키는 여러 시편에서 표현을 선택한다( 시 19:8; 119:105, 130 ). 구약에서 하루의 새벽은 하나님이 위로를 베푸시는
Expository Commentary (Wheaton, IL: Crossway, 2018), 380–382.
것에 대한 일반적 은유( 시 27:6; 46:5; 130:6 ) 나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
동의 시작을 알리는 더 구체적인 심상( 사 9:2; 말 4:2 ) 일 수 있다. “샛
별”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을 물리칠 왕적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가리킨다( 민 24:14–19 ). 구약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런 약
속, 양식, 심상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성취되었으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흔들림 없이 확신할 수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하나님이 성취하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은 성경의 원천이지만 인간은 성경의 도관이다. 베드
로는 성경을 산출하는 일에서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나란
히 둔다. 하나님의 역할은 두 가지 범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
나님은 성경의 원천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
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라고 기록할 때 의미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벧후 1:20 ). 5) 성경은 인간 저자의 창작성이나 탁월함에서 비롯
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성경의 기원이다. 그래서 하나님
이 침묵하시면 어떤 성경도 없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성령을 통
해 인간에게 능력을 주셔서 말하게 하시는 분이다. 배의 돛을 채우
고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바람처럼, 하나님의 성령도 하
나님이 말하고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인간 저자가 말할 수 있게
5) 기초가 되는 헬라어 표현은 난해하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표현이 예언을
해석자의 변덕에 따라 해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 문
헌에서 구약 예언의 신적 기원을 변호하기 위해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
실 뿐 아니라 주변 문맥도 여기서 제시된 견해를 지지한다. 다음을 추가로
보라. Harmon, “2 Peter,” 383.
하신다.6)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성경을 산출하는 과정에서 인간
의 역할은 베드로가 실제로 말하고 있는 내용에서 합리적으로 추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 저자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유
도를 따르는 일에 순응해야 했다. 성경의 출발점은 기록하려는 인
간 저자의 결정( 곧 “사람의 의지” ) 이라기보다 이 인간 저자를 통해 자
기를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전 조치다.7)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성경의 인간 저자는 이사야 66장 2절에 묘사된 형 태의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
며 내[여호와]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여호와]가 돌보
리라.” 성령이 돛을 채우는 바람이었을 수 있으나, 바람을 돛에 채
우려면 돛이 알맞은 위치에 있어야 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조롱하는 자들을 다룰
때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되돌아간다.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벧후 3:1–3 ).
6) 베드로는 요세푸스(Ant. 4.119)와 필로(Spec. 1.65)가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말하도록 감동을 주기 위해 선지자들 안에 역사하시는 것을 묘사하는 방
식과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
7) 성경은 하나님이 권위 있는 성경을 산출하려고 인간 저자 안에 역사하신 여러
가지 방법을 지적한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이 말한 바를 정확히 기록하도록 인
간 저자에게 들을 수 있게 말씀하고 지시하셨다(예. 렘 30:2; 계 19:9). 그러나
대개는 하나님이 자기가 어떤 일을 하시고 있는지를 그것의 의미와 중요성과
함께 기록하도록 인간 저자를 유도하신다. 그렇지만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인간 저자가 기록하도록 유도하는 일을 주도하시는 행동을 통해 성
경의 원천이 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