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TT 고린도후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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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시리즈 서문 ┃ 약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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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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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작된 종말론: 새 영역 사역을 위한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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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예수 그리스도: 새 영역 사역의 창시자 3장 성령: 새 영역 사역의 표징 4장 사탄: 새 영역 사역의 원수 5장 우정: 새 영역 사역의 방식 6장 하늘: 새 영역 사역의 소망

7장 약함을 통한 강함: 새 영역 사역의 비밀 결론 219 ┃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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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편지

고린도후서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메시지는 예수께서 승천하시 고 성령이 임하실 때 시작된 새 영역에서 삶과 사역이 크게 뒤집어 져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강함과 만족이 아닌 인간의 약함과 고 통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이 개요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부분이 있는데, (1) 오늘날 우리는 구약이 예기한 새 영역, 곧 역사의 마지막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 새 창조에 살고 있으며, (2) 이 새 영역에서 기쁨과 성장을 위한 기본 양식은 역설적인데, 그리스도 그분의 양식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통 해 생명이, 약함을 통해 강함이, 고난을 통해 위로가 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은 이 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형성하며 그사이의 장들에서는 고린도후서의 다른 핵심 주제를 살펴볼 텐데, 이 모든 주제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새 창조 시대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핵심과 고린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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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신학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멈추고 이 서신을 더 넓은 관점에 서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고린도후서와 같은 문헌이 없다. 이 책은 이 고린도후서 의 신학을 탐구하고 종합한다. 이것이 적절한 이유는 전체 성경과 그 속에 포함된 66권 각각의 메시지가 그 중심에 있어 신학적인 것, 곧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경 은 또한 풍부한 역사적·문학적 특성이 있지만, 이런 특성은 더 기 본이 되는 신학적 메시지에 이바지한다. 이 점은 바울 서신에서 특 히 두드러진다. 게할더스 보스는 바울의 신학을 개괄하는 논설의 첫 문장에서,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은 진실한 신약의 다른 어떤 문 헌보다도 신학적 특징이 더 많다”라고 말한다.1)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고린도후서의 신학에 대해 숙고할 것 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서론의 첫 문장에서 고린도후서의 신학이 무 엇인지에 대한 개요를 제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초점을 맞추기 전 에, 우리는 더 넓은 각도에서 고린도후서의 독특성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이 서신은 적어도 네 가지 점에서 신약의 다른 문헌과 분명히 다르다. 이 서신은 더 자전적이고 더 원색적이며 더 대인 관 계적이며 더 방어적이다. 이 네 가지 특성은 어느 정도 중첩되지만, 고린도후서 전체에서 각각의 특성이 대단히 독특하다는 사실을 고 려할 때 별개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런 특징들은 고린도후서의

1) Geerhardus Vos, “The Theology of Paul,” in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Collected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ed. R. B. Gaffin Jr. (Phillipsburg, NJ: P&R, 1980),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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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내용보다는 고린도후서의 신학을 형성하는 요소이므로, 이 요 소들을 먼저 파악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할 가치가 있다.

자전적 바울 서신을 읽는 모든 독자는 대화의 한쪽 면만 듣는 독특한 어 려움에 직면한다. 방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전화로 말하는 내용을 듣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 사도가 편지에서 응답하고 있는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서신을 포함하여 성경 66권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주셨으므로, 이 도 전을 너무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전은 하나님의 지혜 에 의한 명령이더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밝히는 자전적인 세부 사항을 통해 이런 어려움이 완화된다. 이 서신 전반에 걸쳐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삶과 고린도 교회 사역의 사건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것을 듣는다. 물론 신약의 어떤 서신도 순수한 조직신학이 아니다. 모든 서신에는 사도와 수신 교회 사이의 개인적 맥락의 흔적이 나타 난다. 하지만 가령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읽은 직후에 고린도후서를 펼치면, 바울이 쓰고 있는 자전적인 투명성에 금세 놀라게 된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 1:8–11 ), 여행 계획( 1:15– 24; 2:12–13 ), 범죄한 죄인과의 대면( 2:5–11 ), 디도와의 우정( 7:6–7, 13– 15 ), 이전에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와 이것이 그들의 관계에 끼친

해로운 영향( 7:8–9 ), 마게도냐에서의 유익한 모금 활동( 8:1–5 ),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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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10-13장 전체에서 자기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내려와 시대를 초월한 추 상 개념의 형태로 우리에게 신성한 진리를 제공하는 일종의 순수한 교리가 아니다. 그보다 성경은 바울 사도처럼 타락한 동료 인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각 성경 저자의 개인적 상황 은 각자의 글에서 분명한 부분을 형성한다. 하나님은 평범한 남녀 의 현세적이고 고통스러운 삶과 마음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 어쩌면 우리는 성경 중 다른 어떤 책보다도 고린도후서에 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색적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할지 알기는 어렵지만, 나는 여러분 이 원색적이라는 단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것으로 생각하는 데, 바울의 감정이 서신의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 있고 바울도 자기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서신에는 당황스러울 정도 로 열정이 넘쳐난다. 바울은 자기 교회를 단순한 회심자나 숫자로 여기지 않았다. 바울 은 자기 교회를 자기의 양, 제자, 영적 책임의 대상, 심지어 자녀로 여긴다. 고린도 교회의 모든 역기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바울의 관심사가 궁극적으로 자기의 명성이나 고린도 신 자가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세 속적 사고방식이 교회를 감염시키고 교인의 영혼 건강을 해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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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에 크게 염려하고 있다. 우리는 젊은 기독교인이 고린도후서를 처음 접한 뒤에 다음처럼 생각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성경을 읽고 있 는 것일까?’ 아마 우리는 성경과 함께 하는 우리의 초기 여행에서 창세기의 원대한 창조 이야기, 출애굽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의 우레와 같은 시내산 사건, 시편의 감동을 주는 시, 잠언의 현세적인 지혜, 복음서에 나오는 주 예수의 황홀한 가르침, 로마서의 날카로 운 복음 논리를 읽었을 텐데, 그런 다음에 성경이 다음처럼 말씀하 는 것을 읽는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23).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 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위로가 가득하도다(고후 7:4).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고후 11:16).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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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고후 11:23).

이것이 정말 성경인가? 그렇다. 고린도후서라는 서신이 변명의 여지 없이 열정적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인 문서에 서 우리가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나님 자신도 열정적 이시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있고 냉담하며 초연한 플라톤적 세 계관의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이라는 체스판의 말들을 냉정하 게 움직이는 계산적인 체스의 명인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이 하나 님은 자기 백성을 자기 신부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배역을 말할 수 없는 음란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생각하실 때 속에서 마음이 요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 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궁극적으로 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성육신에서 절망적이고 타 락한 이 세상의 진흙탕과 혼돈 속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들어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감정을 초월하시며 어떤 외부의 영향에도 고통받거나 흔들리지 않으시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열정적이지 않으시다는 의 미가 아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를 읽다가 고뇌하는 사도의 생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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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더라도 너 무 놀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후서의 신학을 탐구할 때 바울이 간구하고 열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는 편지의 부분을 배제하거나 건너뛰어 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모든 것이 고린도후서의 전반적인 신학적 메시지를 특징짓는다.

대인 관계적 고린도후서는 본질적으로 대인 관계적 곧 관계 중심적이다. 이것 은 바울이 서신 전체에서 자기 동료를 언급하고 고린도 신자에게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는 뜻 이다. 바울은 처음부터 자기 편지를 자신과 “형제 디모데”( 1:1 ) 가 보낸 편지라고 밝히고 있다. 바울이 수신 교회에 인사를 전할 때 한두 명 의 동료를 끌어들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특이한 점은 바울이 편지 전체에 걸쳐 대인관계의 현실로 거듭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마 갈라디아서 정도만이 비슷한 수준의 대인 관계적 성찰을 제시 할 것이다. 두 서신 모두에서 수직적 측면에 대한 성찰( 하나님과 사람 과의 관계 ) 은 수평적 측면에 대한 성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 로 강력하

게 보완된다. 이런 이중적 역학 관계는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몇 구 절에서 대표적으로 잘 포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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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 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 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 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3:11– 12)(수평적 측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13)(수직적 측면).

하지만 바울의 수평적 관심사가 드러나는 것은 단지 처음 몇 구 절과 마지막 몇 구절만이 아니다. 바울은 서신의 처음 두 장 대부분 을 고린도 교회와의 취약한 듯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여행 계획이 변경되어 고린도 신자를 직접 방문하는 대신 편지를 쓰게 된 것을 정당화하려고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고린도후서 7장에 이르면, 우리는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안심시키고 위로를 준 디도의 존재를 말하면서 다시 한번 대인 관계적 성찰이 확장되 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8장과 9장은 돈과 재정적 관대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으나, 두 장 모두가 가령 설교로 유명한 형제를 보내거나( 8:18– 19 ), 디도를 칭찬하는 등 대인 관계적 고려 사항으로 가득하다( 8:16– 24 ). 바울이 친히 말하는 대로,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이런 행동을

통해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는 것”( 8:21 ), 곧 수직적인 것과 관계있는 일뿐 아니라 수평적인 것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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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있는 일까지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10-13장이 바울의 삶에서 긍정적인 대인관계의 현실에서 부정적인 현실로 이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은 “지극히 크다 는 사도들”( 11:5 ) 의 영적 기만을 책망하고 자기의 사도적 자격을 변 호하면서 강한 수평적 초점을 유지한다. 우리는 바울의 마음과 유 익이 고린도 신자의 마음과 얼마나 깊이 결부되어 있는지도 계속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2장 2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방문이 임박했음을 회상하며 고린도 신자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 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실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교인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다르다. 이와 비슷하게, 13장 5절에서도 바울은 고린도 신자가 영적 성숙의 시험 을 통과하리라는 소망을 표현하지만, 그 뒤에 13장 6절에서는 고린 도 신자가 실패하면 이것이 바울 자신의 실패이기도 하다고 말 한다. 바울 서신에서 독특한 이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자기의 유 익과 고린도 신자의 유익을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결속한다. 바울이 이 서신을 마무리하는 이런 장들에서 자기 사역을 변호하 는 것은 고린도후서에 독특한 마지막 네 번째 특징으로 우리를 안 내한다.

방어적 바울은 다른 어떤 편지에서도 자기의 사역이 정당함을 입증받기 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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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일부 사람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바울이 옹 졸한 것일까? 바울이 자기 명성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닐까? 바울은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라”라는 잠언 27장 2절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바울은 하나님을 자기 의 변호자로 삼는 자유에 빠져들기보다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일반 적인 타락한 충동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바울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이다. 바울 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우리보다 덜 필요로 하는 것 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고린도후서는 영감으로 된 무오한 책이 므로, 우리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확신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경을 오염된 것으로 폄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1) 건강하지 않은 방어나, (2) 어떤 것이든 간에 자신을 방어하는 일을 겸손하고 조용하게 피하는 방식 외에 세 번째 선택안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선택안은 자신을 건강하게 방어하는 것, 곧 궁극적인 목적이 자기 자신에 대한 염 려가 아니라 자기 외부의 어떤 것, 가령 복음의 진리나 ( 고린도후서의 경우에 ) 약함과 배척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정성의 정당한 표지인

새 시대의 진정한 사도적 사역의 본질에 대한 염려여서, 자신에 대 해 가차 없이 객관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고린도 신자가 ( 루터의 표현을 사용하 면 2) ) ‘십자가의 신학’이 아닌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의 육체적인 ‘영

2) 특히 다음을 보라. Luther’s “Heidelberg Disputation (1518),” in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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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 신학’에 미혹되도록 허용한다면, 바울이 사랑하는 이 신자들은 겉보기에 인상적인 기독교의 유혹적 혼미함에 계속 빠져들 것이다. 바울이 자기 사역을 옹호하는 원동력은 자기의 명성이 아니라 고린 도 신자의 영적 유익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서 우리에 게 중요한 본보기다.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자신을 정당 화하지 않도록 마땅히 자신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지만( 이것은 복음 이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 우리를 향한 공격이 승리해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영적 빈곤을 불러올 때,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일 은 허용될 뿐 아니라 필수적이다.

고린도후서 신학 요약하기 그래서 이런 것들이 고린도후서의 특징적 요소인데, 신학 자체가 아니라 이 서신의 신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을 형성하는 특징 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고린도후서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후서의 신학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 개요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주요 신학적 주제를 살펴보겠다. 위에서 나는 고린도후서의 신학을 설명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실 때 시작된 새 영역에

Luther’s Basic Theological Writings , ed. Timothy F. Lull and William R. Russell, 3rd ed. (Minneapolis: Fortress, 201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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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삶과 사역이 크게 뒤집어져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강함 과 만족이 아닌 인간의 약함과 고통과 맞물려 있다.

두 가지 주요 강조점은 시작된 종말론과 약함을 통한 강함이다. 시작된 종말론은 고린도후서가 펼쳐지는 무대라고 할 수 있으며 약함을 통한 강함은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시작된 종말 론 ) 는 더 넓은 맥락 또는 구성이며, 후자의 경우( 약함을 통한 강함 ) 는

이 넓은 맥락에 속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개인적·실존적 경험 이다. 하지만 고린도후서에는 이 두 가지 거시적 주제 외에도 다른 중 요한 구성 요소가 있는데, 이 두 가지 주제가 없으면 고린도후서는 붕괴한다. 이 가운데 일부( 예수, 성령, 고통 ) 는 위에서 제시한 신학적 요약에 명시되어 있는데, 다른 일부( 사탄, 우정, 천국 ) 는 더 암시적이어 도 고린도후서 전체에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 함께 우리 연구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 연구 전반에 걸쳐, 나는 고린도후서 자체에 가차 없이 집중해 고린도후서가 지닌 모든 특징을 돋보이게 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신학에 중요하다고 폭넓게 이해되더라도 고린도후서에 최 소한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가볍게 다루거나 전혀 다루지 않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과 바울이 쓴 열세 편의 서신을 모두 광각 렌즈로 바라볼 때 바울 신학의 핵심은 바로 은혜라는 관념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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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연구들에서뿐 아니라3) 존 바클레이의 획기적인 2015년 논문4) 에서 전면과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의 형용사를 빌리면, 고린도후서에서는 적어도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어울리지 않는 선으로서의 은혜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분명히 “은혜”를 뜻하는 자신의 표준 용어인 ‘카리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 서신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적 은사( 수직적 차원 ) 가 아닌 모종의 은혜로운 인간적 활동( 수평적 차 원 ) 을 의미한다.5) 따라서 바울 신학의 “중심”이 “연약하고 죄 많은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프랭크 틸먼의 제안은 아주 좋 지만,6) 고린도후서와는 별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바울 신학의 중심에 대한 리처드 개핀의 다음 제안이 고린도후서의 특정 메시지 를 더 광범위하게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의 신학에서 중심은 종말론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7) 고린도후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 바울의 다른 주요 개

3) 가령 Jonathan A. Linebaugh, The Word of the Cross: Reading Paul (Grand

Rapids, MI: Eerdmans, 2022)는 전체적인 초점을 더 좁게 로마서와 갈라디아 서에 집중한다. 더글러스 무는 “바울 신학을 종합적으로 논의하는 작업을 은혜” 에 대한 탐구로 시작한다. Douglas J. Moo, A Theology of Paul and His Letters: The Gift of the New Realm in Christ , BTNT (Grand Rapids, MI: Zondervan Academic, 2021), 377–378. 4) John M. G. Barclay, Paul and the Gift (Grand Rapids, MI: Eerdmans, 2015). 5) 예. 고후 1:15; 8:4, 6, 7, 19. 6) Frank Thielma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A Canonical and Synthetic Approach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5), 232. 7) Richard B. Gaffin Jr., By Faith, Not by Sight: Paul and the Order of Salvation , 2nd ed. (Phillipsburg, NJ: P&R, 201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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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 중 두 번째 예는 바울의 악명 높은 “율법” 문제와 새 언약 시대 신자의 삶에서 모세 율법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는 바울의 방식이다. 바울 신학을 전체적으로 다루려면 바울과 율법을 고심해 야 하지만( 이 시리즈의 두 편집자는 최고의 두 가지 논의를 제시했다8) ), 고린도 후서에는 ‘노모스’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뚜렷한 차이에 대해 자세히 성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심지어 여기에서도 구체적으로 “율법”( 곧 모세 율 법 ) 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옛 영역의 지나간 영광과 새 영역의 시작

된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모세 율법이 여전히 유효한지의 질문은 일반적으로 바울 신학의 관점에 서 보면 절실하지만, 고린도후서를 구체적으로 연구할 때는 자연스 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은혜”와 “율법”이라는 바울 서신의 중심 주제는 ‘이 독특한 서신 의 독특한 공헌이 분명하게 빛나게 하려면, 고린도후서가 그 자체 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허용해야 하며, 더 광범위한 바울의 관심 사를 고린도후서에 끌어들여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두 가지 예일 뿐이다. “은혜”나 “율법”과 같은 바울의 중요 관념이 고린도후서에서 바 울 관심사의 핵심과 거리가 멀다면, 이 서신의 핵심이나 중심 또는

8) Thomas

R. Schreiner, The Law and Its Fulfillment: A Pauline Theology

of Law (Grand Rapids, MI: Baker, 1998); Brian Rosner, Paul and the Law: Keeping the Commandments of God , NSBT 31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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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적인 부담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똑같이 타당한 관점이 하 나 이상 있으므로, 이 질문에 대해 인위적이거나 편협하게 독단적 인 답변을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때의 종 말( eschaton ) 이 시작되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 고린도후서에 충만 하다는 점에 곧 주목해야 한다. 이 주장을 밝히는 한 가지 방식은 바울 신학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더글러스 무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무는 이 새 시대의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의 ‘포괄적인’ 복”9) 을 새 언약, 성령, 새 창조, 구원, 생명으로 말한다.10) 놀랍게도 이 연 구의 내용에서 우리가 확인하겠지만, 고린도후서에는 이 다섯 가 지가 모두 눈에 띄게 나타난다. 실제로 고린도후서는 아마 바울 서

신 가운데 이 다섯 가지 새 영역의 복을 가장 일관성 있고 가장 강 력하게 결합한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고린도후서의 지배적인 맥락이 시작된 새 영역이므로, 각 장을 진 행할 때 이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 편지의 주요 신학적 주제를 다음 처럼 밝히겠다.

1. 시작된 종말론: 새 영역 사역을 위한 체계 2. 예수 그리스도: 새 영역 사역의 창시자 3. 성령: 새 영역 사역의 표징 4. 사탄: 새 영역 사역의 원수

9) Moo, Theology of Paul , 464. 10) Moo, Theology of Paul , 464–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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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정: 새 영역 사역의 방식 6. 천국: 새 영역 사역의 소망 7. 약함을 통한 강함: 새 영역 사역의 비밀

그런 다음 우리는 전체 편지의 뼈대인 시작된 종말론을 좀 더 자 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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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작된 종말론 새 영역 사역을 위한 체계

신약 전체에 나오는 시작된 종말론 신약의 중심 메시지는 구원론적 메시지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 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합당하지 않은 죄인에게 베푸신 구 원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다. 하지만 이 구원은 역사적 진공 상태에 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예수의 강림과 그분이 일으키신 구원은 역 사에서 절정의 시점인데, 예수는 “때가 차매”( 갈 4:4 ) 임하셨다. 그러 나 예수 안에서 이 역사적 정점은 단순히 역사에서 특별히 결정적 인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다.1) 구체적으로 말하면, 1) “이와 같은 ‘때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구속사의 더 큰 체계 속에서 특정 사

항이 성숙하는 것뿐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이때가 성취됨을 의미한다. 세상 의 때는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종결되었다. 이 성취가 여전히 잠정적인 성격을 띠 며 완료형은 아직 미래형이 뒤따르지 않더라도, 여기서는 시간 또는 시간들의 충 만함이 이미 효력을 발휘하여 원칙적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말한다.” H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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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약이 갈망하던 새 창조 시대의 시작이다.2) 2천 년 전에 마 지막 때가 시작되었다. 종말( eschaton. 문자적으로 “마지막 때” ) 이 이르 렀다.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놓치지 말아야 할 점 이다( 이것은 바울이 1:14에서 미래의 “우리 주 예수의 날”을 예기하는 때와 같이 고 린도후서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 그러나 현재의 복음주의적 의식은 우

리가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다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연구에서 나는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의 방향으 로 강하게 밀어붙이겠다. 그래서 나는 신약의 중심 메시지가 구원 적이더라도, 이 구원의 중요 맥락이 종말론적임을 강하고 분명하게 말하겠다. 고린도후서와 신약 전반에 걸쳐 수면의 바로 아래에서 흐르다가 때때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작된 종말론의 체계인 데, 바울의 모든 생각과 글의 흐름도 여기서 흘러나온다. 고린도후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신약 전체의 관점에서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 trans. John Richard de Wi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5), 44–45. 리델보스는 여기서 갈 4:4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바울 신학의 기본 구조를 더 일반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다. 보스도 이와 비슷하게 갈 4:4에서 “때의 충만함”이라는 어 구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사실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한데, 때의 충만함은 이 시대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시기가 시작됨을 의미 한다”라고 논평한다. Geerhardus Vos, “The Eschatological Aspect of the Pauline Conception of the Spirit,” in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Collected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 ed. R. B. Gaffin Jr. (Phillipsburg, NJ: P&R, 1980), 93. 2) 성경 이야기를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어지는 서사로 능란하면서도 간략하게 설 명한 글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Frank Thielman, The New Creation and the Storyline of Scripture , SSBT (Wheaton, IL: Crossway, 2021, 『SSBT 새 창 조 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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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부 현대 신약학자는 시작된 종말론을 자기의 신약 신학에서 전면과 중 심에 내세우기도 했는데, 가령 ( 게할더스 보스에게 영향을 받은 ) 그레고리 빌, ( 조지 래드의 영향을 받은 ) 토머스 슈라이너 등이 있다.3) 하지만 나는 시작된 종말론의 렌즈를 자의식적으로 유지하는 집중된 방식으로 고린도후서를 논의하는 작품을 알지 못한다. 표준적인 조직신학 문헌에서 “종말론”은 순전히 미래와 관련된 문제를 말하며 책의 마지막 장을 구성한다. 이 책에서 내가 사용할 “종말론”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 현재로 다시 시작되고 있 는 미래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시작된 종말론이라고 부르는데, 마지막 일들은 이미 개시되었고 결정적으로 이미 시작되 었다.4)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나리라고 예상된 일이 다시 시작되어 역사의 한가운데에 닥쳤다.5) 그리스도의 초림, 특히 그리스도의 부

3) G. K. Beale, New Testament Biblical Theology: The Unfolding of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1, 『신약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3); Thomas R. Schreiner, New Testament Theology: Magnifying God in Christ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08, 『신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5). 4) 이 점에서 지난 세기의 중요 선구자가 자기의 대작에서 “종말론”을 마지막에 두 는 것은 좀 역설적이다. 다음을 보라. Geerhardus Vos, Reformed Dogmatics , ed. and trans. R. B. Gaffin Jr. (Bellingham, WA: Lexham, 2020). 5) 나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역사의 “중간 지점”에 일어났다고 강하게 강조하는 오 스카 쿨만에게 영향을 받았으나, 쿨만은 아마 이 중간 지점에서 초기에 이루어진 모든 것과 관련해 덜 분명할지도 모른다. 다음을 보라. Oscar Cullmann, Christ and Time: The Primitive Christian Conception of Time and History , trans. F. V. Filson (London: SCM, 1962); Oscar Cullmann,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and Row, 1967).

1장 ┃ 시작된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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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은 종말의 시작을 알렸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은 종말의 꽃을 활짝 피울 것이다. 윌리엄 맨슨은 1953년에 이것을 다음처럼 생생하게 표현했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언의 분위기에서 성취의 분위기로 넘어간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예언하신 일들을 이제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로 이끄 신다……종말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징은 예수의 부활과 교 회에 대한 성령의 임하심이다.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하나님 이 자기 아들을 위해 허락하신 표징이 아니라,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 시대로 들어간다……성경에서 이스라엘 이나 종말의 인간에게 일어날 것으로 예언된 일은 예수께, 그 리고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6)

종종 종말이 실제로 이른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죄와 죽 음의 영역인 옛 세대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영역과 함께 계 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 옛 영역은 단번 에 끝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자들이 “세대의 중첩”에 대해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우

6) William Manson, “Eschatology and the New Testament,” in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 Occasional Papers 2 (Edinburgh: Oliver & Boyd, 195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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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리는 구약 시대의 성도( 옛 영역은 있어도 새 영역은 없었음 ) 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새 땅의 시민( 새 영역은 있어도 옛 영역은 없을 것임 ) 도 경험하 지 못할 이상한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이 신자가 “가 운데로 나뉘어” 절반은 옛 영역에 속하고 절반은 새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즉시 명확히 해야 한다. 많은 날 동안 우리는 그렇게 느끼거나 실제로 우리가 새 영역보다 옛 영역에 훨 씬 많이 속해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신약의 분명하고 지속 된 가르침은 우리의 기본 정체성이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시작된 새 창조 세대 시민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영 적 신분증에는 이제 “옛 영역”이라고 적혀 있던 곳에 “새 영역”이라 고 적혀 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 3:20 ). 용어에 대해 언급할 사항이 있다. 이 책에서는 되도록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영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지만, 이 단어가 사용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아니다. 새 창조, 새 시대, 새 질서, 새 언 약, 새 영겁, 새 세계, 새 기원, 새 왕국, 새 세대 등 역사의 이 새로운 시기를 묘사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다.7) 나는 오해에 취약할 여 지가 가장 적다고 판단해 새 영역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또한 공

7) 이 책 전반에 걸쳐 나는 “새 영역”과 같은 뜻으로 이런 여러 어구를 사용할 텐데,

특히 “새 영역”에 대한 유사 칭호로 “새 창조” “새 창조의 영역”을 사용하겠다. 그러나 일관성을 위해 나는 “영역”이라는 용어를 가장 자주 사용하겠다. 다음을 보라. G. K. Beale, “The Eschatological Conception of New Testament Theology,” in “The Reader Must Understand”: Eschatology in Bible and Theology , ed. K. E. Brower and M. W. Elliot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7), 11–52.

1장 ┃ 시작된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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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음서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나오는 ‘나라’의 언어와도 의미 차 원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더글러스 무는 2021년 바울 신학에 대 한 자기의 논의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는데, 나는 거기서 이 표현이 유용하다고 판단해 여기서도 그대로 사용하려 한다.8) 이제 내가 말하는 시작된 종말론 또는 새 영역의 시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좀 더 깊이 살펴보자. 새 영역이 역사의 한가운데서 분출했다고 말할 때,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제의 성경적 표지 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것을 다음처럼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 백 성이 예기하던 주요 사건이나 표지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님 백성이 받은 선지자의 사역에 따르면, 그들은 역사의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했을까? 마가가 아리마대 요셉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할 때( 막 15:43 ), 이 간절한 기대의 내용 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뒤흔드는 일련의 사건은 마지막 때 와 새 창조의 나라, 곧 우리가 “새 영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알리 고 안내하는 전조가 될 것이다.9) 8) Douglas J. Moo, A Theology of Paul and His Letters: The Gift of the

New Realm in Christ , BTNT (Grand Rapids, MI: Zondervan Academic, 2021). 더글러스 무 자신도 신약에서 시작된 종말론의 중심성과 관련해서 분명 하다. 예를 들어, “모든 신약의 가르침에서 지배적이고 독특한 특징은 초기 신 자가 새 영역의 구성원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기념하는 방식이다”(374). 9) 이후에 이어지는 이 몇 단락의 내용은 다음에서 개작한 것이다. Dane Ortlund, “Bible Q&A: Why Are There Two Testaments in the Bible?,” Crossway, March 4, 2014, https:// www.crossway.org/. 허가를 받아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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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1. 메시아가 임하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원수들이 패배할 것이다. 3. 에덴의 타락이 되돌려질 것이다. 4. 죄가 심판받을 것이다. 5.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 것이다. 6. 하나님 백성이 원수들에 대해 신원을 받을 것이다. 7.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나라가 열릴 것이다. 8.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

핵심 요점은 이것인데,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기대는 이루 어졌다.

1. 메시아가 임하셨다( 롬 1:3–4 ). 2. 하나님의 원수들이 전쟁터가 아닌 십자가에서 결정적으 로 패배했다( 골 2:13–15 ). 3. 둘째 아담은 가령 사탄의 유혹을 받는 것과 같이 첫 아담 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했다( 눅 3:38–4:13 ). 이뿐 아니라, 둘 째 아담의 축귀(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일 ) 는 아담이 실패한 일( 에덴에서 사탄을 내쫓는 일 ) 을 중간에 성취한 것이다. 4. 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심판받았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 었다( 롬 5:9; 살전 5:9 ). 5. 이제 이방인이 전례 없이 이 나라로 몰려들고 있다 ( 롬

1장 ┃ 시작된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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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27 ).

6. 하나님 백성이 칭의로 신원을 받았다( 롬 5:1 ). 말세에 예기 되던 “무죄”의 선포가 역사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에 근거해 현재에 선포되었다. 7. 예수께서 친히 선포하신 대로, 이 나라는 여기에 있다( 막 1:15; 참고. 행 20:25; 28:31; 롬 14:17 ). 우리는 이제 마지막 때의

나라 또는 영역에 있다( 히 1:2 ). 8.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났다( 엡 2:6; 골 3:1; 참고. 롬 6:4 ).

신약 메시지는 구약의 예기 중 일부는 이루어졌고 일부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신약 메시지는 구약의 모든 예기가 이 미 이루어졌으나 ‘이미’와 ‘아직’의 방식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완성은 모든 지점에서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성취 된 종말론이 아니라 시작된 종말론이라고 부른다. 그렇더라도 결정

적인 순간은 이미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앞의 분석은 구약 시대 성도나 선지자들이 인류 역사 마지막에 위의 여덟 가지 약속이 모두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한 것이 잘못이었 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의 성도와 선지자들은 참으로 보 았으나 멀리서 본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산봉우리의 심상을 사 용해, 멀리서 보면 봉우리가 서로 나란히 있는 듯 보여도, 실제로 산 에 도착하면 여러 산봉우리가 서로 크게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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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는 점을 유익하게 전달한다.10)

시작된 종말론을 위한 부활의 중요성 위에서 제시한 마지막 여덟 번째 요점, 곧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는 것은 특히 중요하며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종말의 시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새 영역을 시작한 핵심 사건인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부활 사건을 동정녀 탄생, 죄 없는 삶, ( 부 활로 이어지는 ) 속죄의 죽음, 그리고 육체적 승천, 현재의 중보, ( 부활에 서 흘러나오는 ) 임박한 재림과 같은 ( 일부 신학자가 말하는 대로 ) 전체 “그

리스도 사건”과 분리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신약이 그리스 도의 부활을 종말론적 태양이 세계의 무대 위에 떠오르는 결정적 순간으로 제시하는 듯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가령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울 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또 다른 편지의 끝부분에는 그리스도의 부 활이 지닌 종말론적 중요성에 대한 신약의 가장 분명한 가르침이 나온다. 바울은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 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10) Vos, Reformed Dogmatics , 1095–96.

1장 ┃ 시작된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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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 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니라(고전 15:20– 23).

바울은 “첫 열매”( ‘아파르케’ ) 라는 구약의 농업적 심상을 사용하면 서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을 필수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다. 바울 은 고린도전서 15장 전반에 걸쳐 두 가지 방식으로 주장하는데, 그 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신자의 부활도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우 리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조차 부활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주장 한다( 고전 15:12–20 ). 둘째, 바울은 세대의 마지막에 모든 성도에게 일어나리라고 예상된 최종 부활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에서 이미 시 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첫 열매”의 심상을 사용하는 방식의 놀라

운 중요성은 첫 열매가 단일한 전체 추수의 초기 수확이라는 것 이다. 첫 수확은 때가 되면 완전한 추수를 보장하고 예기한다.11)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 새 영역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에덴은 역사의 마지막이 아닌 역사의 한가운데서 조 용히 분출했다. 예수는 나사로( 요 11:1–44 ) 나 어린 소녀( 막 5:35– 11)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의 다른 곳에서 ‘아파르케’라는 단어를 몇 번 더 사용하

는데, 이런 본문에서는 고전 15:20, 23과 같이 긴장된 종말론적 의미가 없어도 아파르케가 언제나 단일 추수와 유기적으로 연관된 초기 수확이라는 관념을 강 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롬 11:16; 16:5; 고전 16:15; 신약의 다른 곳에서 유일하 게 나오는 용례인 계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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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43 ) 처럼 필멸의 존재로 살아났다가 다시 죽는 방식으로 부활하지

않으셨다.12) 예수의 부활은 불멸의 존재 곧 내세의 생명으로의 부활 이었는데, 이것은 가령 나사로와 마찬가지로 앞선 필멸의 존재와 순수한 연속성이 아닌 불연속성도 포함한 것이 분명하다. 이 점은 다른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는 데 어려움을 겪은 사실( 눅 24:16 ), 잠긴 문과 관련해 물리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듯이 보인 사실( 요 20:19 ) 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부활한 예수께서 아침 식사를 하 셨으며( 요 21:9–13 ), 도마가 자기 몸의 상처를 만지게 하셨으므로( 요 20:27 ), 살아난 생명도 이 필멸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인 것임

이 분명하다. 그리고 신약의 가르침은 신자의 부활이 단지 미래의 문제가 아 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첫 부활이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는 것은 사

실이지만, 단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이 새 영역의 과정 동안, 죄인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행사할 때마다 즉시, 그리고 돌이킬 수 없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의 한 측 면은 바로 이런 신자가 부활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육체적 부활이 아니라 영적 부활을, 그리고 우리가 덧붙여야 하는 대로 문 자 그대로의 부활을 경험한다. 확실히 우리는 “부활이 이미 지나 갔다”( 딤후 2:18 ) 라고 잘못 가르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신자의 마지 막 육체적 부활을 언급하면서 범했던 과도하게 실현된 오류를 피하

12) Vos, Reformed Dogmatics ,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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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린도후서에서 우리는 바울이 아직 이르지 않은 최종 완성된 부활에 대해 말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 이다( 고후 4:14 ). 그렇더라도 우리는 최종 부활의 핵심 현실이 심지어 지금도 이미 일어났다는 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부활”이 그저 구원의 경이로움을 특별히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 인 것처럼 순전히 은유적인 부활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신자 는 실제로 살아났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미 끝났다. 가장 결정적 인 일은 이루어졌는데, 신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 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는데”( 골 3:1 ), 그 리스도는 살아나셨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해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다”( 엡 2:6 ). 우리는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최종적인 완성 곧 육체적 요소를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원칙적으로 또한 처음부터 보장된 방식으로 문자 그대로 영적으로 부활했다.

바울 신학의 모든 측면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번 장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내용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것은 종말론이 신약 신학의 최 종적이고 독립적인 요소라기보다 신약 신학의 모든 측면이 본질적으 로 종말론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보스의 표현을 빌리면, “바울 사

도의 종말론을 밝힌다는 것은 바울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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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신학


것을 의미한다.”13) 칭의는 종말론적 실체인데,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나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그리 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화는 종말론적 실체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신분적으로 단번에 깨끗해졌으나 그리스 도가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최종적인 실제의 도덕적 정결을 기다 리고 있기 때문이다.14) 기독교인의 삶과 죄 죽이기는 종말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밝아 오는 새 창조에 참여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본 정체성이므로 우리는 이제 가 장 심원한 자기 모습에 부합하게 살 수 있는 능력과 동기를 부여받 는다’와 같이 말이다. 그레고리 빌은 다음처럼 설명한다.

사도들은 자신이 이미 말세에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서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구원을 이미 말세의 실체로 이해해 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들의 구원의 모든 측면은 본질 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했다. 다른 식으로 말하

면,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에는 말세의 색조가 있다.15)

13) Geerhardus Vos, The Pauline Eschatology (Princeton: Princeton Uni-

versity Press, 1930; repr., Phillipsburg, NJ: P&R, 1994), 11. 14) 나는 점진적 성화가 아닌 신분적 성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15) Beale, “Eschatological Conception,” 18(강조는 원문의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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