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전도서가 다루는 인생의 영원한 문제와 딜레마를 현대 및 고전
문학의 풍성한 사례와 함께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그의 신선하고 적절
한 방식은 정교하게 설명해 놓은 성경의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는
전도서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모든 지혜와 지식에 부요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지 보여 준다.”
그레엄 골즈워디, 전 호주 시드니 무어 신학교 구약학, 성경신학 교수
“저자의 새 주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원래는 설교로 작성된 이
주석은 전도서에 대한 열일곱 편의 탁월한 설교 이상이다. 이 각주 달린
설교는 본문에 대한 충실한 연구를 기반으로 탁월한 통찰력과 해학, 놀라
운 메타포, 명확한 사례와 인용, 신약 성경 예수 그리스도로의 유연한 전
환 및 적절한 적용이 가미된 훌륭한 설교다. 이 주석은 전도서에 대한 일
련의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 것이다. 또한 그들에
게 설교의 아이디어, 충실한 주석과 적용, 예화, 그리고 다양한 책, 노래, 영화에서 발췌한 인용문을 제공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주석은 하나님
중심적, 구속사적 접근과 함께 전도서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칼빈 신학교 설교학 명예교수
“이 책의 장점은 첫째, 지혜 문학의 어휘와 대칭 구조를 정확한 주석학
적 식견을 가지고 다룸으로써 어두운 세상 가운데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에 대한 풍성하고 다채로운 통찰력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데 있다. 둘째, 이 책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 성경 각 권의 연결성을 탁월하게 추적하
여 독자로 하여금 공허한 삶의 유일한 해결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초점
을 맞추게 한다. 셋째, 저자의 독특한 스타일과 광범위한 문학적 인용(고대
에서 우디 앨런에 이르기까지)이 결합하여 연구와 독서에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되었다. 이 책이 많은 학생들에게 유익을 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넷째로, 신자가 이 덧없는 해 아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위대
한 주제에 대한 탁월한 적용은 모든 진지한 독자의 마음을 찌르고 고양할
것이다. 확실히 이 책은 영혼의 양약이 될 것이다. 더글러스 오도넬의 전
도서는 세대를 이어 읽을 걸작이 될 것이며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들
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책이 될 것이다.”
R. 켄트 휴즈, 휘튼 칼리지 교회 원로목사
“전도서는 우리 시대의 책이다. 저자는 의미와 타당성의 원천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불안하게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상을
다각도로 반영한다. 저자가 전도서를 다루는 방식은 신선하고 철저하다.
철저한 주해로 설교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며, 명쾌하고 확신 있게 이야
기한다. 이 책은 독자에게 풍성하고 유익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이 현
명한 목회자이자 철저한 주석가는 전도서에 나타난 복음의 핵심으로
“저자는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한, 타고난 설교자이자
목회자다. 저자는 이 놀라운 주석을 통해 ‘목회자 솔로몬’(전도서의 저자)에
게로 우리를 인도하며 솔로몬을 통해 가장 위대한 목회자이신 예수 그리
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전도서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더욱 밝게 빛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배리 웹, 호주 시드니 무어 신학교 구약학 명예교수
“위트 있고, 통찰력 넘치며, 대단히 깊이 연구한 책이다. 오도넬의 새 주
석은 내가 가장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전도서의 진리를 새로
운 관점에서 전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가? 이 책은 여러분의 서재에 반드
시 있어야 할 자료가 될 것이다.”
스콧 위니그, 덴버 신학교 성경적 설교학 교수
17.
참고문헌 | 332
시리즈 서문
어느 세대나 교회 안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실한 강해의
필요성이 늘 존재한다. 동시에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숙고하
고, 기독교 신앙의 교리들을 고백하며, 당대의 문화에 그것을 적
용하는 신학 작업을 끊임없이 행해야 한다. 우리는 강해와 신학
작업이라는 두 가지 과업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의 교리는 성경 본문에서 이끌어 내야 하며, 성경의
성경 강해 주석 시리즈”를 내놓는 것은 기쁜 일이다. 목회자와
교사, 성경공부 인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 시리즈가 하나
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을 연구하는 데 충실하며 영감을 주는 유
용한 자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개혁주의 성경 강해 주석 시리즈”는 네 가지 근본 방침을 갖
고 있다. 첫째로 이 시리즈는 성경적인 주석을 목표로 삼고 있
다. 즉 본문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포괄적인 강해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시
리즈는 단어나 구절을 낱낱이 해설하는 주해 주석이라기보다
성경 전체 단락에 대한 종합적인 강해다. 따라서 각각의 주석
은 성경의 모든 책을 한 단락씩 차례대로 체계 있게 다루어 나
갈 것이다. 둘째로 이 시리즈는 손색이 없는 교리 주석이다. 우
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교리문답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의 체계를 담고 있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각각의
책은 성경에서 발견된 개혁주의 신앙의 교리를 가르치고 장려
하며 변호할 것이다. 셋째로 이 시리즈는 구속사 관점의 주석을
지향한다.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을 믿으며, 또한 그 중심 메시지
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에 대해 그리스도 중심 견해를 취한다. 즉 구약의 인물과 사건, 규례 및 제도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가리키고 있을 뿐 아
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고 있
다고 바르게 이해한다. 넷째로 이 시리즈는
가르친 것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학구적인 주석을 목표
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강해 주석 시리즈는 학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효과적인 강단 사역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래야 하
듯이, 우리는 성경 및 신학 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인 그리스도인
들을 대상으로 한 충실하고 명료하며 도움이 되는 주석을 의도
하고 있다. 이는 학문적 관심사에 그치는 일부 이슈는 부득이하
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뢰할 만한 수준의 학문성을 갖추려고 노력하며, 교회 안의 목
회자와 그 밖의 교사들에게도 이를 장려하며 본을 보이고자 애
쓸 것이다. 해석 및 신학상의 중요한 난제들은 본문과 관련이
있는 역사 및 문화 배경과 더불어 세심하게 다룰 것이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지속적인 탁월함을 갖추려고 애쓰고 있
다. 이 일은 하나님 말씀의 뛰어난 전달자로 입증된 저자들을
선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탁월함의 추구는 또
한 엄격한 편집 과정에도 반영되어 있다. 각 권의 편집은 시리
즈 편집자와 구약이나 신약 편집자가 함께 담당한다. 구약 편
집자인 이언 두기드( Ian Duguid ) 와 신약 편집자인 대니얼 도리아
니( Daniel Doriani ) 는 신학교에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존경받
는 학자이자 숙련된 목회자다. 이 분들이 하는 일은 각 권이 반
드시 최신 학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며 본문 강해에 충실
하고 정확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시리즈 편집자인 우리는 각
권이 글쓰기의 탁월성과 교훈의 건전성, 적용의 유용성을 포함
우리가 목표하고 기도하는 바는 “개혁주의 성경 강해 주석 시
리즈”가 성경의 명료성과 힘에 대한 확신을 새롭게 하고 개혁주
의 신앙의 위대한 교리적 유산을 옹호함으로써 교회를 섬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강해 설교가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
치는 최상의 성경적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 주석을 읽는 목회자
들이 자신의 강해 설교 사역에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또
한 평신도 교사들에게 이 주석이 성경 본문을 이해하고 가르치
기 위해 의지할 만한 가장 유용한 자료가 되기를 소원한다. 동
시에 이 성경 연구의 경건한 특징이 이 주석을 읽는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이 순종하는 제자도를 가르치며
북돋게 되기를 기대한다.
주님이 “개혁주의 성경 강해 주석 시리즈”를 읽는 모든 분에
게 복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끊임없는 신실
함을 베푸심에 감사를 드리고, 성령이 이 주석들을 교회를 교훈
하고 교육하는 데 사용하시기를 기도하면서 이 책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탁한다.
리처드 필립스( Richard D. Phillips ) 필립 그레이엄 라이큰( Philip Graham Ryken )
시리즈 편집자
시리즈 서문 | 11
저자 서문
원래 쓰려던 서문은 이렇게 시작했다. “내 해설은 얕고 그저 그렇다. 그러나 달리 나은 게 없다거나 번지르르한 주장들에 나
처럼 호도된 적 있는 이들은, 이 책에서 스스로 더 나아질 기회
와 더 나은 것을 깨달을 기회를 자신들의 지혜로 찾게 될 것이
다.” 그러고 나서 마틴 루터가 480년 전에 정확히 같은 말을 했
다는 것을 깨달았다.1) 오호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진지하게 적어 보자면, 나보다 앞서 간 많은 탁월한 주석가
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들의 어깨를 딛고 내가 서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각주는, 내가 알아낸 가장 변함없이 영감을 주
는 작품들을 여러분에게 보여 줄 것이다.
많은 것이다. 전도서는 당신을 생각하게 한다. 죽음, 일, 지혜, 때, 기쁨, 하
나님 경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없다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원래 ( 또 일부는 ) 일리노이 주 네이퍼빌에 있는
뉴 커버넌트 교회에서 설교한 것들이다. 새로운 구약 지혜서 시
리즈를 흔쾌히 허락해 준 장로들과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듣기를 늘 열망하는 교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오랜 시간 동역
해 준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앤드루 풀턴 목사의 꾸준한
지지와 끊임없는 격려와 기도의 동역이 없었다면 나는 자유롭
게 연구하고 기도하고 설교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나의 세 딸, 릴리와 에블린과 샬럿에게 이 책을
바친다. 아내 에밀리와 아들 숀과 시므온에게 책을 바친 후 나
는 딸들의 끊임없는 탄원에 굴복하고 말았다. “아빠, 우리에겐
언제 책을 바치실 건가요?” ( 거절하기 차마 어려웠다. ) 그러나 내 꼬마
숙녀들아, 이 책을 너희에게 바친 건 그저 여성들의 압력이나
자식들에 대한 공평한 대우 때문만은 아니다. 내 간절한 소망과
기도는 전도서의 진지하고 활기찬 진리들을 통해, 너희들이 예
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
이란다.
더불어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전도서의 목적: 서론
1:1~2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1~2)
전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가 휘튼 대학에 다닐 때였다. 철학 개론 첫 시간에 마크 탈
봇 교수는 “여러분 가운데 읽는 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냉담한 선언을 했다. 상위권 성적을 받아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얼굴에는 “교만하다”부터 “강의를 듣지 않겠다”
라는 반응까지 언짢은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학기가 끝날 무
렵 플라톤의 『국가』, 흄의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아우구
스티누스의 『고백록』과 같은 고전에 나오는 단어와 문장 및 문단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서는 읽기 어려운 책이다.1) 이런 사실은 전도서 해석을
도와주는 책( 주석 ) 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인해 더욱 분명
해진다. “이 책은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책 가운데 하나로, 완
벽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 “이천년의 해석
사를 볼 때……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철저히 실패했다.”3) “전
도서는 마치 문어발처럼 모두 정복했다( 곧 모든 내용을 완전히 파악했다 )
싶으면 어디선가 새로운 다리가 나타나곤 한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한
다 ) 4) 따라서 나는 “여러분은 결코 전도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
다”라는 노골적 표현으로 시작하는 대신 우리는 모두 도움이 필
요하며 지혜의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한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도
우심을 구해야 한다 ) 는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나는 오랫동안 기도하며 인내하는 마음으로 전도서를 연구
해 왔으며, 이제 여러분을 우리의 통찰력과 적용 속으로 초청하
면서, 먼저 전도서는 (1) 하나님의 지혜 문학으로 (2) 메시지
에 통일성이 있으며 (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다
시 오실 그리스도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1) “성경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은 한결같이 분명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분명한
아니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CF) 1.7은 전도서를 두고 하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Martin Luther, “Notes on Ecclesiastes,” in Luther’s Works, trans. and ed. Jaroslav Pelikan, 56 vols. (St. Louis: Concordia, 1972), 15:7.
3) R. N. Whybray, Ecclesiastes, Old Testament Guides (Sheffield, UK: JSOT Press, 1989), p. 12.
4) Craig G. Bartholomew and Ryan P. O’Dowd, Old Testament Wisdom
Literature:ATheologicalIntroduc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1), p. 188에 요약된 Craig G. Bartholomew, Ecclesiastes, Baker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Wisdom and Psalm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9), p. 13.
GregoryofNyssa:HomiliesonEcclesiastes, ed.
Hall (Berlin: de Gruyter, 1993), p. 33.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지혜 문학
첫째로, 우리는 전도서를 하나님의 지혜 문학으로 읽어야 한
다. 이 짧은 제목의 첫 번째 단어가 “하나님의”라는 사실에 주
목하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전도서가 독특하고 때로는
종잡을 수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틀림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영감을 받은 정경의 일부임을 확신하는 신자로서 이 책을 대해
야 한다.5) 전도서는 유대 문헌( 가령 집회서나 솔로몬의 지혜 등 ) 을 비롯한
세상의 다른 문학과 유사하지만 이 책 곳곳에 여호와의 숨결이
배어 있다는 점에서 세상의 다른 문학과는 다른 독특성을 지닌
다.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전도서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실존 깊은 곳으로 인도한다.
둘째로, 전도서의 장르는 지혜 문학이다. 이 책은 서신( 가령 갈라
디아서 ) 이나 법전( 레위기 ) 또는 묵시( 요한계시록 ) 가 아니다. 지혜서로
서 전도서는 잠언, 욥기 및 아가서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
고 있다. 전도서에는 시적 요소가 다분하다. 평행( 동의적, 반의적, 종합
적 및 역평행 ) 은 물론 은유, 직유, 과장법, 두운, 유음, 및 기발한 언
어유희로 가득하며 의성어까지 있는 듯하다. 이 책에는 경구를
비롯하여 강조점을 가진 짧은 내러티브와 비유와 유사한 결말
도 나타난다. 또한 전도서에는
등장한다. 전도서는 다른 지혜 문학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궁극적 지혜자인 솔로몬에 의한 혹은 솔로몬에 대한, 아니면 솔
로몬에 의한 그리고 솔로몬에 대한 책이다( 왕상 4:29~34 ). 6)
기독교 정경에서 지혜서는 잠언, 전도서, 아가서 순서로 되어 있다. 잠언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라
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잠 1:1 ).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솔로몬?]의 말씀이라”로 시작하며( 전 1:1 ), 아가서의
첫 부분은 “솔로몬의 아가라”로 되어 있다( 아 1:1 ). 솔로몬은 지혜
문학을 기록하였으며 실제로 “다윗의 아들”이자 “예루살렘 왕”
이었기 때문에( 전 1:1, 1:2 ) 19세기 이전 주석가들은 솔로몬을 전도
서의 저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 대체
로 타당한 ) 여러 가지 이유로7) 솔로몬이 저자라는 주장을 꺼린다.8)
그들은 전도서가 솔로몬에 대한 책( 허구적 자서전 ) 이거나9) 솔로몬
에 대한 전승이라고 주장하지만 솔로몬이 저자는 아닐 것이라
고 생각한다.
사실이 어떻든( 전도서의 저작권만큼 골치 아픈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6) 왕상 3:12, 5:12; 대상 29:25; 대하 1:12.
7)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 아니라는 근거에 대한 유익하고 짧은 요약은 Michael V. Fox, Ecclesiastes, JPS Bible Commentary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04), p. x를 참조하라.
8) 브레버드 차일즈(Brevard Childs)가 30년 전에 한 말이 오늘날의 상황을 잘 요약
해 준다. “극단적 보수주의 학자들 사이에는 솔로몬이 저자가 아니라는 거의 보편
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as Scripture (Philadelphia: Fortress, 1979), p. 582.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보수적 신학 자들은 솔로몬이 저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가령 월터 카이저, 두안 가렛, 대니얼 프레더릭스, 제임스 볼헤이건 등이 있으며 리처드 슐츠도 비슷한 사고를 가진 것으 로 보인다).
9) 전도서는 “왕의 자서전”일 수 있다. 즉 “자신을 전도자라 부르는 사람이, 만일 솔로 몬이 이 땅의 삶에서 만족과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아무도 만족할 수 없다는 주장
을 펴기 위해 그의 이름을 빌렸다”라는 것이다. Tremper Longman III, The Book of Ecclesiaste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8), p. 7.
(1:1~2) |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나는 이 “설교자”( the Preacher, ESV
는 히브리어 ‘코헬렛’을 이렇게 번역한다 ) 를 솔로몬으로 부를 것이다. 내가
그를 솔로몬으로 보는 이유는 오늘날 학계의 공감대에 확신이
서지 않을 뿐 아니라10) 고대 교회의 의견에 애틋함을 느끼기 때 문이다. 게다가 ‘코헬렛’보다 ‘솔로몬’이 말하기 편하다.
사실 실제 설교자는 나이므로, 나는 솔로몬이라는 호칭 외에
‘목회자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목회자라는 호칭
을 덧붙인 이유는 이 책 속에 목회적 어조와 모티브와 메시지가
나타날 뿐 아니라 ‘코헬렛’이라는 단어가 “모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할’의 칼형 여성 단수 분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동사는 열왕기상 8장 1절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백성을 성 전 봉헌식에 소집할 때 솔로몬에게 사용된 단어다( 참고. 대하 5:2 )
이곳에 언급된 솔로몬의 말( 즉 전도서 본문 자체 ) 은 모임 또는 교회를
배경으로 한다( ‘에클레시아’는 신약 성경에서 “교회”를 일컫는다 ). 11) 이것이
10) 학계의 공감대에 대한 비판은 Duane A.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New American Commentary 14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3), pp. 254~267; Daniel C. Fredericks, “Ecclesiastes,” in Daniel C. Fredericks and Daniel J. Estes, Ecclesiastes and the Song of Songs, Apollos Old Testament Commentary 16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0), pp. 31~36을 참조하라.
11) 고대 헬라어역(70인역)은 ‘코헬렛’을 ‘에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한다. 우리는 이
것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테스’(Liber Ecclesiastes)
에서 오늘날 영어의 ‘교회’에 해당하는 단어(에클레시아)를 얻는다. 히에로니무스 (Jerome)가 언급했듯이 “헬라어의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는 ‘모임(즉 교회)을 소집하는 자’라는 뜻이다.” Commentary on Ecclesiastes, trans. Richard J. Goodrich and David J. D. Miller, Ancient Christian Writers 66 (New York: Newman, 2012), pp. 33~34.
12) Philip Graham Ryken, Ecclesiastes: Why Everything Matters, ed. R. Kent Hughes, Preaching the Word (Wheaton, IL: Crossway, 2010), p. 16.
원저자가 누구든( 목회자 솔로몬, 왕 전도자, 현자 시몬, 편집자 에브라임, 혹은 우리가
그를 무엇이라 부르든 ), 또는 작성 연대가 언제이든( 주전 10세기이든 3세기이
든 ), 중요한 것은 시대를 초월한 그의 메시지다. 이제 이 메시지
를 살펴볼 차례다.
메시지의 통일성
전도서는 연결성이 부족하여 비정통적인, 영감되지 않은 포로
기 이후 유대 지혜서라고 생각하기 쉬우며 지금까지 많은 이들
이 이 책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그러나 나는 전도서를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부에서 주
장하듯이, 익명의 편집자가 우리가 전도서라고 부르는 원자료를
수중에 넣은 후 여기저기에 교정된 구절을 덧붙이고 말미에 적
절한 신학적 부록을 첨가함으로써 모순과 혼동을 걷어 내려 했
지만 전체적 조화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한( 정경으로서 정통성이나 연결성
이 부족한 ) 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도서를 읽는 최선의 방법은 통
일성 있는 메시지 를 가진 하나님의 지혜 문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다.13) 전도서 전반에 대한 연구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책에는 지
속적인 문학적 의도와 일관성 있는 신학적 논증이 나타난다.
사실 설명은 이렇게 하지만 전도서의 모든 부분을 세밀히 살
펴본다면 이 책이 수수께끼 같은 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13) 우리는 이 책의 기원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전도서 전체를 하나의 문학으로 읽어야 한다는 마이클 폭스(Michael V. Fox)의 주장은 충분한 일리가 있다. “FrameNarrative and Composition in the Book of Qohelet,” HebrewUnionCollege Annual 48 (1977): pp. 83~106. 또한 나는 이 책이 후기 편집 때문이 아니라 “문
학적 기법” 때문에 “매끄러운 연결”을 보인다는 가렛(Duane Garrett)의 주장에 동의한다. Proverbs,Ecclesiastes,SongofSongs, p. 263.
1. 전도서의 목적: 서론 (1:1~2) | 21
어려울 것이다. 전도서의 내용은 혼란스럽다. “빠른 경주자들
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전 9:11 ) 라는 구절이나 “맷돌질 하
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12:3 ) 라는 이미지는 무엇을 말
하는가? 또한 전도서는 외견상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로
가득하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6:12 ) 라는 격언은 후렴구처
럼 따라다니는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라”라는
구절과 어떻게 조화되는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
지 못하고”( 5:10 ) 는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 10:19 ) 라는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전도서는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바닥에 떨
어져 굴러다니는 수많은 퍼즐 조각과 같다. 그러나 아이들을 훈
계하고( 노는 것을 중단시키고 자리에 앉히거나, 인기 영화 <슈퍼 배드>에 나오는 것처럼 수
치 상자에 가두어 두고 ) 집안을 조용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흩
어진 조각을 주워 모아 깨끗한 테이블에 올리고 (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향해 나아갈 때 항상 그러하듯이 ) 천천히, 겸손하게,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
으로 조각들을 끼워 맞추면 명확한 그림이 나타난다.
끼워 맞추기 쉬운 가장자리 퍼즐 조각은 모두 “헛되다”라는
분명하면서도 부정적인 단어로 채워진다. ‘헤벨’( “헛되다” ) 이라
는 히브리어 단어는 창세기에서 첫 번째로 죽음을 맞이한 아
벨( 창 4:8 ) 과 철자가 같으며 의성어에 해당한다. 대니얼 프레더
릭스( Daniel Fredericks ) 의 말처럼 “우리는 첫 번째 음절인 ‘헤’를 두
차례 대기음으로 발음한 후 양순음인 ‘벨’을 발음해야 한다. 따
라서 화자는
보여 준다.”14) 이 단어는 전도서 전체에 38번 등장하며 처음과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참고. 12:8 ). 이 단어는 “일시적,” “덧없
는,” “무의미한,” “어리석은,” “무익한,” “단명한,” “불확실한,”
“부조리한,” “터무니없는,” “공허한”이라는 뜻이 있으며 “바람
을 잡음,” “거품,”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15) “안개” 또는
“호흡”/“숨”16) 과 같은 시각적 의미도 있다.
사람은 헛것( ‘헤벨’, ESV “breath” )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시 144:4 )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 ‘헤벨’, ESV “breath” ) 뿐이니이다 ( 시 39:5 )
( 대부분 문맥에서 나는 “호흡”[breath]이란
의미를 가장 선호한다 ), 이 희미한 개념에 대한 솔로몬의 묘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과연 어떠한 것들이 추운 날 대기로 사라지는 뜨
거운 숨과 같은가?
수고한 모든 것 전 1:14, 2:11, 17, 19
수고의 열매 2:15, 21, 26
15) William Ernest Henley, “Of the Nothingness of Things,” in Poems (London: David Nutt, 1919), pp. 94~97을 참조하라. 히에로니무스는 “희미한 안개” (smoky vapor)라는 의미로 생각한다. CommentaryonEcclesiastes, p. 36.
16) 예를 들면, 프레더릭스는 “전도자가
모든 것은 덧없도 다”라고 번역하며(“Ecclesiastes,” p. 65) 로버트 알터는 “한
한순간일 뿐”이라고 번역한다. Robert Alter, The Wisdom Books: Job, Proverbs, and Ecclesiastes: A Translation with Commentary (New York: W. W. Norton & Co., 2010), p. 346.
‘헤벨’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전도서 1장 2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라. 그리고 여러분의 상
상력을 회한과 저주로 가득한 개념으로 채워 보라. 이 구절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한
다. 히브리어( ‘하벨 하발림’ ) 에는 영어( ‘vanity of vanities’ ) 와 마찬가지로
최상급 소유격( 헛된 것 중의 헛된 것 ) 형태의 기발한 언어유희가 나
타난다. “노래 중의 노래”( 아가서 ) 는 가장 훌륭한 노래이고 “신들
가운데 신”은 가장 위대한 신 또는 유일신 하나님이며 “하늘들
의 하늘”은 최고의 하늘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가
장 헛된 것”에 대한 우울하고 냉엄한 메시지, 즉 모든 것은 전적
으로 무익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영구적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
고 헛되다. 실로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이런 것들은 퍼즐의 검은 조각이다. 이것들은 검은 테두리로
서 죽음과 불의와 기타 암담한 현실이라는 어두운 회색 조각
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어두움과 빛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외견
상 불가해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전
도서의 회색 조각들은 마침내 이 그림의 중심에서 말할 수 없는
영광과 지혜로 빛나고 계신 하나님과 연결된다.
퍼즐 비유를 계속 하면, 이 영광과 지혜의 하나님은 오직 하
나님에 대한 경외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다.19)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것은 성경 지혜 문학의 핵심 개념이며 이 구절의 의미
와 중요성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계속 다뤄 나갈 것이다. 현재로
선 이 핵심 개념을 “두려워 떠는 믿음”( trembling trust ) 으로 요약하
고자 한다. 비극적 현실과 끔찍한 문제로 가득한 타락한 세상에
서 이처럼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은, 그에게서 감사의 순종과 지속적 만족과 놀라운 기쁨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20) 전도서의 퍼즐은 검은 테두리와 외견상 아무
규칙 없이 나열된 것처럼 보이는 회색 조각과 희고 밝은 중심부
로 구성되며, 여기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자들에게 주어지는
다채로운 복이 덧붙여진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지혜
의 근본일 뿐 아니라……목적 있는 삶의 근본이다.”21)
간에게 부과하는 심판의 상황이다. 그것은 타락 이후의 상황을 보여 주며
Five Festal Garments: Christian Reflections on the Song of Songs, Ruth, Lamentations, Ecclesiastes, and Esther,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10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0), p. 104.
19) 전 3:14, 5:7, 7:18, 8:12~13, 12:13.
20) 전 2:24, 3:12~13, 22, 5:18, 8:15, 9:7~9, 11:9~12:7.
21) Michael A. Eaton, Ecclesiaste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16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나는 앞서 언급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헛되다”( 38회 ), “지 혜/지혜로운”( 53회 ) , “하나님”( 40회 ), “수고”( 33회 ) , “주다/주었다”
( 16회 ), “죽음”( 21회 언급 또는 암시 ), “해”( 가령 “해 아래” 33회 ), “기뻐하다”
( 17회[“즐거워하다, 누리다, 기쁨” 등의 파생어 포함] ) 와 같은 핵심 단어 및 하나
님과 인간, 무익함과 덧없음, 때와 기회, 소득과 분배, 일과 수
고, 부요와 가난, 권력과 지배, 지혜와 어리석음, 공의와 심판,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22) 과 같은 핵심 주제를 도입하였으며 여
러분에게 전도서가 어떤 책인지 보여 주려 했다. 그러나 통일된
메시지를 간략히 진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전도서 분야의 세 저자는 ( 내 판단에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되는 ) 다음
과 같은 요약을 제시한다. 마이클 이튼은 전도서가 “대안( alternative ) 의 참혹함을 보여줌으로써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
음의 삶을 옹호한다”라고 주장한다.23) 제프리 마이어스는 전도
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선물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
는 것”이라고 말한다.24)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헛되고 공허 한 삶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의미 있는 삶으로 바꾸기 위
해 하나님을 경외하라”라는 탁월한 권면을 제시한다.25) 통일된 메시지에 도달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목회자 솔로몬이 던진 핵심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1983), p. 48.
22) Thomas Krüger, Qoheleth, ed. Klaus Baltzer, trans. O. C. Dean Jr.,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2004), pp. 1~5.
23) Eaton, Ecclesiastes, p. 44.
24) Jeffrey Meyers, A Table in the Mist: Meditations on Ecclesiastes, Through New Eyes Bible Commentary (Monroe, LA: Athanasius Press, 2006), p. 17.
25)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Foundations for Expository Sermons (Grand Rapids: Eerdmans, 2010), p. 22.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이 질문에 대한 암시적 대
답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수고
와 지혜와 재물과 즐거움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이 세상 및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헤아려 볼 때 인간의 수고와 지혜와 재
물과 즐거움은 결코 영원한 가치나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처럼 냉엄하고 실제적인 현실에 이어 두 번째 질문이 이어 진다. “이런 덧없음에 비추어 볼 때, 곧 우리의 수고와 지혜와
즐거움과 소유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무익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이 덧없는 해 아래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곧 우리는
인간의 “헛된 자존감”과 “모든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지혜
를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26) 전도서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가능하
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
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13 ). 순종하
는 믿음이야말로 전도서의 목적( 혹은 목표 ) 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다시 오실 그리스도
이런 본분이 전도서의 목적( 목표이자 결론 ) 은 될 수 있지만 하나
님의 구원 이야기의 목적( 결론
덧붙이기 위해 붓을 들 것이다. 전도서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나 약속이 명확히 나타나지
않으며 신약 성경도 이 책에서 인용하거나 이 책을 암시하는 일
이 거의 없지만, 그리스도인 설교자로서 내 궁극적 관심은 육신
을 입으신 말씀의 언행에 비추어 이 “설교자”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관심 혹은 사명은 내 지역 교회나 내가 임직 받은
교단에서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부여하신 것이
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을 염두에
두고,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
록된 모든 것”( 눅 24:44 ) 에 비추어 읽으라고 가르치셨다. 전도서를
포함하고 있는 “시편”( 또는 “성문서” ) 역시 그를 증거하며( 요 5:39 ) 우
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딤후 3:15 ) 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헛된 세상에 오지 않았던 것처럼 전도서를 가르친
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데렉 키드너는, 전도서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은 이 책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저자 자신의 입장과 결론” 및 “빛줄기들”( 즉 기쁨
으로 초대하는 후렴구 ) 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27) 이처럼 유익한 전
략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서 사망
의 저주를 이기고 부활하사 소망을 주셨으며 장차 심판하러 다
시 오실 참된 지혜의 화신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 책을 읽는다면
전도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요약하면, 전도서는
앞서 살펴봤듯이 (1) 하나님의 지혜 문학으로서, (2) 메시지에
통일성이 있으며, (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사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비추어 읽을 때 ( 완전하지는 않아도 ) 가장 잘 이해할
27) Derek Kidner, The Wisdom of Proverbs, Job and Ecclesiastes: An Introduction to Wisdom Literatur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5), p. 93.
수 있다. 나는 앞서, 테두리가 검고 음영은 회색이고 가운데는 밝은 전
도서의 전체 그림을 묘사한 바 있다. 이 책을 읽는 데 크게 도움
이 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마지 기저가 디자인
한 필 라이큰의 전도서 주석 표지에서 발견한 것으로, 주석서의
제목은 ‘왜 모든 것이 중요한가’다. 표지는 검정색, 금색, 적색
세 가지 색깔로 이뤄져 있다. 하단 1/3을 차지하고 있는 검정 바
탕에는 “의미 없는,” “따분한,” “왜곡된,” “힘든,” “공허한,” “슬
픈,” “미친,” “어리석은”과 같은 단어가 들어 있다. 이 단어들은
금색으로 되어 있다. 검정 바탕 위 상단에 있는 적색 바탕에는
“즐거움,” “만족,” “풍부,” “기쁨”과 같은 단어가 들어 있다. 이
단어들도 금색으로 쓰여 있다. 검정색 부분과 적색 부분은 중앙
에서 다소 벗어나 기울어져 있는 금색 십자가에 의해 나뉘는데, 이 십자가는 나머지 부분보다 약간 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저는 이와 같은 디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 없는, 따분한……어리석은 등과 같은 단어는 표지의
배경이 되며 현실적 삶을 묘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무익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의 삶에는 의미가 있으며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다.
표지에 넣은 색깔은 모두 의미가 있다. 검정색은 아무런 소
망 없이 혼란 가운데 힘겹게 살아온 삶을 상징한다. 디자인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금색 십자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
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상징한다. 디자인 상단부의 적색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
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영원한
세계관을 나타낸다.28)
예수 그리스도는 목회자 솔로몬이 씨름하며 괴로워했던, 일시
적이고 무의미하고 무익하고 이해할 수 없고 불확실하고 부조
리하며 순식간에 대기 속으로 사라지는 연기처럼 덧없는 삶, 그
헛됨( vanity ) 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해 아래에
서 나시고 해 아래에서 수고하시고 해 아래에서 고난당하시고
해 아래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의 죽
음을 통해 죽음의 저주를 받아들이심으로 “저주에서 우리를 속
량”( 갈 3:13 ) 하셨다. 그는 부활을 통해 우리 수고의 의미를 되찾아
주셨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는 모든 부당함을 거두시고 모든 부
조리를 밝히시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모든 것을 아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로 인도하실
것이다.
사랑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
우디 앨런의 코미디 영화 <사랑과 죽음>에서 보리스( 우디 앨런
분 ) 와 소냐( 다이앤 키튼 분 ) 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보리스: 소냐,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소냐: 보리스 데미트로비치씨, 농담하세요?
보리스: 만일 우리가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주변을 어 슬렁거리는 불합리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28) “About the Book Jacket,” in Ryken, Ecclesiastes, p. 319를 참조하라.
소냐: 정말로 하나님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없
겠지요. 계속해서 살 이유가 있을까요? 자살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리스: 오, 예민해지진 말자고. 내가 틀릴 수도 있지. 내가
자살하고 나서 사람들이 뭔가 발견했다는 기사를
읽긴 싫으니까.29)
우리는 전도서라는 작은 책에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 해 아래
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확고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찾는, ( 참으로 대단한 ) 발견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
님이 우리의 일과 학업, 소유와 즐거움에 의미를 부여하심을 발
견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불의, 압제, 불합리와 악에도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원정은 시작된다!
나는 왜 일찍 일어나는가
설교에 필요한 예문을 수집 중이다. 마흔 개 정도 되는 시는 나
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가운데 두 개만
다는 사실에 대한 탄식으로 시작한다.
작가 이름이 가장 먼저 떠나고
제목, 플롯, 감동적 결말, 소설 전체가 순순히 따라 떠나
순식간에 읽어 본 적, 들어 본 적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2)
두 번째 사례는 시인 메리 올리버다. 그는 <과수원>( The Orchard ) 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는 꿈꾼다
성취를.
나는 굶주려 있다
야망에.
나는 바꾸었다
달콤한 잠을
밤낮 없는 수고로.
아! 나는 보았다
꽃이 피고 지면
풋풋한 열매가 달리고
단내 나는 과실로 바뀌어 가는 것을.
아! 나는 보았다
2) Billy Collins, Sailing around the Room:New and Selected Poems (New York: Random House, 2001), p. 29.
찬바람이 불어오면
결국, 그처럼 무성하고 화려하던, 잎은, 어둡고 깊은
시간의 심연으로,
거대하고 캄캄한
야망의 늪 속으로, 사라지고
사과는
떨어지기만
기다려 왔음을.3)
전도서는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메리 올리버가 “어둡고 깊은
시간의 심연……거대하고 캄캄한 야망의 늪”이라고 부른 것을
들여다본다. 이 책은 “사과가 익는 것은 떨어지기 위한 것”임을
관찰한다. 즉 이 책은 땅에서 하는 수고-아무리 훌륭한 결실을
맺었다 할지라도-는 무익함을 보여 준다. 잘 익은 사과가 땅에
떨어져 썩는 것처럼 우리의 수고도 결국 헛되다는 것이다. 이것
이 바로 내가 목회자 솔로몬이라고 부른 “다윗의 아들 예루살
렘 왕 전도자”( 전 1:1 ) 가 오래 전에 보았던, 그리고 우리가 전도서
1장 3~11절을 통해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이다.
우리의 수고: 가장 헛된 것
전도서 1장 3절부터 살펴보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느닷없는( 아마도 큰 소리로! ) 외침이 있은
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핵심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해 아래에
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3, 참고. 3:9,
5:16, 6:8, 11 ).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세 가지 관찰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담’이다. ‘헛되
다’( ‘헤벨’ )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의 ‘아벨’( ‘헤벨’ ) 과 같은 단어이듯
이 이 ‘아담’은 우리에게 창세기를 상기시키며 목회자 솔로몬이
아담의 타락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보
여 준다.
둘째로, “수고”라는 단어의 반복(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 은 아
담의 저주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창 3:17b~19 )
(1:3~11) |
셋째로, “해 아래에서”라는 구절( 이 본문에 2회, 전도서 전체에 28회 나타
나며 “하늘 아래”와 “땅에서”라는 표현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 은 “하늘에”
계신 하
나님과 “땅에” 사는 사람 사이에 지리적( 전 5:2; 참고. 마 6:9 ), 신학적
경계선을 긋는다. 이 구절은 세속적 삶( 하나님과 무관한 삶 ) 이 아닌, 세속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죄인
으로서 함께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을 지칭한다. 하나님은 아담
에게 내리신 형벌을 성실히 집행하고 계시다. 하늘에 계신 하
나님께는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것, 곧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한
땅, 땀으로 얼룩진 힘든 수고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죽어 가는 몸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해 아래” 있고 하나
님은 그 위에 계신다.
따라서 목회자 솔로몬이 던진 질문(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
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3] ) 은 이미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2절 ) 라는 최상급 표현을 통해 대답된, 저주 로 가득한 질문이다. 또한 이 질문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4~11절을 통해 비관적인 내용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4)
새 것은 없다
목회자 솔로몬은 전도서 1장 4~11절에서 마치 까다로운 건축
감독관처럼 우리의 수고가 왜 잘못되었는지 보여 준다. 그는 나
중에 내가 “사소한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적한다. 즉 일
을 하려는 의지는 종종 시기심과 같은 불순한 동기에서 비롯되
며( 4:4 ), 우리의 수고는( 설사 유익이 있다고 해도 ) 종종 불면의 밤으로 이
어지며
없으면서 어리석게 재물만 낭비해 버릴 자에게 넘겨주게 된다
는 것이다( 2:18~19 ). 그러나 그는 4~11절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통찰력을 제시한다.
첫째로, 우리의 수고는 이 땅에서 결코 새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전 1:9~10 )
우리는 이처럼 강력한 비관적 관점에 망설일 수도 있다. 사
실 우리는 모든 것이 얼마나 “새롭고 발전되었는지” 자랑할 수
도 있다. 오늘날은 정보 시대이며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한 기술
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우리의 관점을 사람의 수고에 대한
솔로몬의 두 가지 중요한 통찰력에 비추어 형성한다면 과연 이
런 망설임이나 자랑이 가능할지 의문스럽다. 성경의 지혜 문학은 대부분 일반적 현실을 다룬다. 그러나 욥
기나 시편 73편은 다르다. 이런 본문은 예외적 규칙에 대해 언
급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악인은 형벌을 받고 의인은 번성한
다. 또한 일반적으로 게으름은 가난으로
수로를 파던 사람과 오늘날 상하이에서 하수구를 파거나 위생
과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손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 설사 새로 설립된 회사에서 새롭게 개발한 신제품
을 파는 일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다지 새
로운 것이 아니다. 사주는 여전히 사주이고 생산자는 여전히 생
산자이며 세일즈맨은 여전히 세일즈맨이다. 오늘날 최신 기기
를 파는 컴퓨터 세일즈맨은 550년 전 극동에서 새로 들어온 비
단을 팔았던 스페인 상인과 판매 방식이 똑같다. 최신식이라는
것은 자신이 사는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인류
역사 전체에 비추어 보면 새롭다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전도서 1장 4~8절에서 솔로몬은 이 땅의 순환성에 비해, 또
한 그것의 영속성과 달리, 우리의 활동은 독창성이 없고 반복적
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본문에서 솔로몬은 우리의 수고가 해나 바람이나 강물과 마
찬가지로 피곤하다는, 즉 말할 수 없이 따분할 뿐만 아니라 눈
에는 족함이 없고 귀에는 차지 않는다는( 전 1:8 ) 사실을 보여 준
다. 이런 부지런함 때문에 모든 활동이 날마다 새로운 것을 하
느라 바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단조로움으로 가
득한 활동일 뿐이다.
먼저 해를 살펴보자. 해는 뜨고 지는 똑같은 일을 날마다 반복
하고 있다. 해는 결코 새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해는 여전히 지
구 주변을 맴돌고 있는 크고 오래된 가스 덩어리다. 생각만 해
도 피곤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한 활동”5) 의 두 번째 사
례는 바람이다. 바람은 어느 날 남쪽으로 불다가 다음날에는 북
쪽을 향한다. 굉장한 소란을 피우는 것 같지만 결과는 초라하
다. 그 많은 열대 바람은 어떤가? 이 바람은 어딘가 도착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끝없이 돌아다닐 뿐이다.6) 끝으로 강물은 어
떤가? 미시시피 강은 멕시코만을 통해 대서양으로 흘러들어 가
지만 대서양이 넘치거나 수심이
5) Walter C. Kaiser, Ecclesiastes: Total Life, Everyman’s Bible Commentary (Chicago: Moody, 1979), p. 51.
Alter)의
The Wisdom Books: Job, Proverbs, and Ecclesiastes: A TranslationwithCommentary (New York: W. W. Norton & Co., 2010), p. 346.
|
“탁월한 연구, 탁월한 논리, 실제적이고 목회적이며, 빈틈없이 견고하고 치밀하다.”
- 제임스 패커
“설교자에겐 성경적이고 학문적이며, 오늘날 목회자가 당면한 과제를 알고 있는 최고의 주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