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복음이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복음은 부적절하거나 이상한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그레고리 빌의 용어처럼 복음은 역설적인 것이다. 역설을 만나는 것은 복
음의 신적 속성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를 맛보는 것과 같다. 빌은 성경이 스
스로 진리성을 강력히 증언하고 있음을 독자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탁월
한 작업을 했다. 특히 이 책은 개인의 일화, 여러 일화, 목회적 경고, 문화적 관
련성, 실제 적용을 통해 구속적 반전을 풍성하게 보여 준다. 성경을 진지하게
배우는 독자들의 서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신선하고 독특하고 중요한 책
이다.”
제임스 그리어,
서던 침례 교회 총회장, 『크신 하나님』의 저자, 더 서밋 교회 목사(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더럼)
“그레고리 빌은 우리 시대의 상당히 통찰력 있고 매력적인 신약 학자다. 그는
역사적 맥락에서 본문을 해석할 뿐 아니라, 특정 구절과 단락이 성경 전체의
거대한 이야기 흐름에 얼마나 정교하게 들어맞는지도 설명한다. 가독성이 높
은 이 책에서 빌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예상할 수 없
는 방식으로 자주 일하고 예상 밖의 역설적인 수단을 사용하심을 깨달을 수 있
게 돕는다. 우리는 빌의 연구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과 뜻을 주권적으로
이루고 계심과 우리 삶을 하나님께 기꺼이 맡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토머스 슈라이너, 서던 침례 신학교 신약 해석학 교수
“놀라운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어떻게 전복시키고
세상에서 죄를 어떻게 심판하는지, 때로는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한 성
경의 이해를 심오하게 분석한다. 정확한 통찰과 독특한 관점을 제공하는 점에
서 이 책은 대단히 유익한 연구다.”
데이비드 웰스, 고든 콘웰 신학교 조직신학 석좌교수
“이 책은 하나님이 역설의 방식으로 일하고 계심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
게 내 눈을 열어 주었다. 역설은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를 수단으로 그들을 심
판하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며, 우리의 약함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보여 주며, 겸손한 자들을 높여 주시는 방식이다.”
낸시 거스리, 『에덴보다 더 나은: 성경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에 대한 모두를 바꾸는 아홉 가지 방식』의
저자
┃서문┃
가장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부흥
나는 내 오랜 친구 앤드루 화이트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부
탁했다. 앤드루는 의사며 내가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였다. 앤드루는 훌륭한 의사며 통찰력 있는 신학자다. 앤
드루가 여기서 들려주는 실화는 이 책에 나오는 많은 개념을
예시한다. 내 이야기는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내가 ( 종종 ) 이 이야
기를 할 때마다 청취자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 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들려주라고 격려한다. 그레고리 빌과 그의 아내 도린다는
가장 집요하고 설득력 있는 청취자였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용기
를 내어서 1980년에 사깨오로 불리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의 난민
수용소에서 크메르루주 사이에 일어난 영적 부흥에 대한 개인적이
고 역사적인
에서 잔혹한 살인 집단이었다. 이 대학살로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
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비율의 인구가 목숨을 잃었다. (2) 부흥을 이
끈 사람들은 최선의 경우에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들, 곧 살인
자, 퇴물이 된 선교사,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의사였다. 이렇게
심각한 두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부흥이 하나님에 의해
분명히 이루어졌으며 이로써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셨다.
이 실화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분에게 1975년부터 1979년
에 이르는 캄보디아의 역사를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기간은 수
상 경력이 있는 영화 <킬링 필드>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 나는 이 역사의 주요
자료를 ‘캄보디아 트리뷰날 모니터’ 웹사이트에서 참고한다.1) 크메
르( ‘캄보디아의’ ) 루주( ‘붉은’ ) 는 캄푸치아 공산당으로도 알려져 있는
데,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크메르루주의 지
도자 폴포트는 시아누크 왕자를 축출한 내전의 여파로 1975년에 캄
보디아를 장악했다. 폴포트는 캄보디아도 공산 국가 중국과 다르지
않게 계급 없는 농촌 사회로 바꾸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소
속된 농촌 협동조합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세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승인받지 않은 대화에 함께 모이면 국가의 적으 로 고발당하고 처형될 위험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루 12시간
씩 노동했는데, 많은 사람이 부족한 휴식, 굶주림, 의료 서비스 부족
으로 사망했다. 지식인, 도시 주민, 소수집단뿐 아니라 시아누크 왕
1) http://www.cambodiatribunal.org/history/cambodian-history/khmerrouge-history/.
자 휘하의 캄보디아 군인, 장교, 공무원도 구금되고 심문받고 투옥
되고 고문받고 처형당했다.
처형을 피한 많은 사람은 시아누크 왕자의 자유 크메르의 회원으
로서 크메르루주에게 대항해 싸웠다. 대부분은 자유 크메르가 크메
르루주에게 압도되었다. 자유 크메르의 많은 회원은 이웃 나라 태
국으로 피신했다. 1979년 베트남인이 캄보디아를 정복하기 위해 싸
웠을 때, 크메르루주는 거의 2백만 명의 자국민을 죽였다. 베트남에
게 공격받은 여파로 크메르루주도 자유 크메르처럼 이웃 나라 태국 으로 도피했다. 분명한 이유로, 크메르루주와 자유 크메르는 서로
다른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태국/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크메
르루주 난민 수용소 중 한 곳이 사깨오였는데, 1980년 봄에 나는 그
곳 말라리아 병동에서 단 2주간 주치의로 일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
금 내 이야기보다 조금 앞선 사실이다.
나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가 정의학과 전공의였다. 내 아내와 나는 1979년 겨울에 교회 예배에
서 캄보디아 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집
으로 오는 길에 나는 아내에게 자유 크메르 난민을 정말 돕고 싶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이 일은 불가능했는데, 나는 2년차 가정의학과
전공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아내와 나는 적어
도 난민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리라고 결심했다.
다음날
서문 9
서 봉사하기 위해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고 이 봉사도 학점으로 인
정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밖에도, 제공되는 모든 봉사는 서
던 침례교회에서 재정을 지원할 것이다. 나는 곧장 아내에게 전화
해 내가 하나님에게서 손으로 쓴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나는
이보다 분명할 수 없는 메시지에 대해 하나님께 아니라고 말할 수
가 거의 없었다. 우리에게는 6개월 된 아들이 있었으나, 아내는 위
험이 잠재된 이 임무를 돕기로 한 내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캄보디아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찰스턴의 전공의와 많은 다른
의학 학과의 교수들이 우리의 임무를 계획하고 강력한 지원 단체를
만들기 위한 정기 모임을 열었다. 1980년 봄까지 우리는 유대 관계
를 맺고 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진행되었다. 나는 열 살부터 심한 우울증 병력이 있
었다( 총 7회의 우울증 증상이 있었는데, 그중 일곱 번째 우울증은 13년간 지속되
었다 ). 내가 경험한 우울증은 공포, 타는 듯한 정신적 고통, 집중력
저하, 접근할 수 없는 기억, 정신적 피로, 아주 사소한 일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 죽음에 대한 갈망의 형태로 나타났다. 말할 것
도 없이 나는 내가 태국에 있는 캄보디아인에게 6주간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 있을 때 하나님이 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 타나게 허용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에 태국 문화와 현지 의료
항우울제가 효과를 나타내려면 4주에서 6주가 걸렸다. 그래서 나는
항우울제를 손에 넣었어도 여전히 심한 우울증 상태에 빠져 있
었다. 2주 뒤에 나는 자유 크메르 난민 수용소에 있는 우리 선교 팀
으로 다시 이동했다. 나는 자유 크메르 난민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난민의 수에 비해 의사가 너무 많아 내가 할 일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 새로운 현실 때문에 내 우울증은 훨씬 심해졌는데, 나는 내 의료
봉사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데도 하나님이 나를 태국으로 보내신 이
유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울증에 빠지는 것 외에 거
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2주가 지난 뒤에, 우리 선교 단체는 태국 북
동부 사깨오에 있는 크메르루주 난민 수용소에서 통지문을 받았다.
이 통지문에는 담당 의사가 병이 나서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깨오에 말라리아 병동을 위한 의사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 선교 팀에 속한 사람 중 아무도 그 임무를 원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협동 작업을 매우 중시한 단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임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놀랍도록
분명한 느낌을 경험했다. 정신 건강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우리 지
원 단체를 떠나는 일은 가능한 선택지 중에서 최악임이 분명했으
나, 살육을 버젓이 자행하는 크메르루주에 대한 나의 근거 있는 편
견을 극복하도록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리라는 사실도
님은 내가 통역자를 통해 모든 환자와 복음을 나눌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나에게 주셨다. 하지만 나는 우울증 증세가 너무 심해, 모든
환자에게 살면서 지은 죄가 있는지를 묻는 것 말고는 다른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죄가 있다고 대답했다. 크메르
루주의 최근 역사를 고려하면, 대단히 많은 사람이 스스로 죄를 시
인한 것도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돌보는 환자
모두가 보여 준 정직함에 놀랐는데, 다음날에 그들의 죄와 관련해
좋은 소식을 들고 오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다음날 병동을 회진하는 동안, 나는 많은 환자의 얼굴에서 밝은
미소를 보았다. 그들은 나에게서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기다릴 수
가 없어서 병동의 원목을 찾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원목은 은퇴한
캄보디아 감리교 선교사였다. 이 원목은 캄보디아에 있으면서 충실
한 신자로 양육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으나, 캄보디아어를 능숙하
게 구사할 수 있어서 요한복음을 크메르어( 캄보디아어 ) 로 번역했다.
선교사 출신의 원목은 카리스마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예수를 분
명히 사랑했으며 성령이 일하시는 통로였다.
우리 병동에 있는 크메르루주 환자 중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은 한 명뿐이었다. 이 사람은 캄보디아에서 악독한 지도자였다. 글
을 읽을 수 있는 대다수 사람은 지식인으로 여겨져 살해당했으나
이 사람은 웬일인지 죽음을
려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 침대 위에 서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큰 소리로 반복해 읽었다. 이 환자는 자기의 흉부 엑스선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자주 지적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폐렴을 고치고 계
신다고 동료 환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 사람이 성경을 읽는 동안 성령이 병동 전체에서 일하고 계신 사실은 매우 뚜렷했다.
이튿날 회진할 때 나는 웃지 않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매우 짧게 전했다. 나는 단지 이 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위
해 죽으셨고 예수를 믿으면 완전히 용서받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환자 중 절반이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 선교사 출신의
원목은 환자들에게 구원의 의미와 필요성을 더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나는 우울증 증세가 너무 심해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내 환자
중 두 명은 죽기 전에 예수의 복음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들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렸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선교사 출신의 우리 원목에게 훈련
받은 크메르루주
개종하지 않은 크메르루주 지도자의 손에
순교할 수도 있는 큰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 종일 캄보디아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가정 교회의 일원이던 캄보
디아인도 큰 위험에 처해 있었다. 크메르루주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면 캄보디아로 돌아갈 때 “땅에 누워야 할 것”이라
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기의 무덤을 파는 것을 완곡하게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하루가 끝날 때면 이 전도사는 녹초가 되었으나, 잠들
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매일 밤
나는 이 전도사에게 발륨(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 ) 을 주사하곤 했다. 매일
아침 이 전도사는 산뜻하게 일어났으며 자기 사역을 힘차게 계속 했다.
나는 사깨오에 단 2주만 있었을 뿐이지만, 수천 명의 크메르루주
난민이 구원을 경험하게 된 영적 부흥에 동참했다. 사깨오를 떠나
고 나서, 나는 새로 기독교인이 된 난민들이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불교 사원이 있기 전까
지 교회를 지을 수 없다고 기독교 난민들에게 통보했다. 주님의 인
도하심을 구하던 기독교 크메르루주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불교 사
원을 먼저 세운 뒤에 크고 번성하는 기독교 교회를 세웠다.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나는 부흥이 사깨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이유를 말했다. 첫째, 회심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
려진 가장 비도덕적이고 완악한( 나치 친위대만큼 사악한 ) 죄인 중에 속
해 있었다. 둘째, 부흥의 지도자들은 부흥에 참여하기에 가장 적절
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부흥의 네 지도자는 (1)
바쁜 말라리아 병동에서 근무하지만 우울증을 심하게 앓아서 가장
기초적인 복음 메시지를 전할 정도의
구속적 반전 성경신학
전도사, (4) 글을 읽을 수 있으나 가장 치명적인 형태의 말라리아를
앓고 있고 폐렴 합병증 증세도 있는, 보기 드문 크메르루주 환자
였다. 그렇더라도 이 환자는 요한복음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렇게 연약한 네 질그릇은 주님에 의해 놀라운 방식으로 사용되
었다. 태국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회심자를 목격했으나 기쁨이 전
혀 없었는데 우울증에 심하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나를 포함한 연약한 질그릇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영광을 극
대화하시는 방식에 대해 생각할 때면 기쁨으로 크게 충만하다. 예
수는 이 위대한 부흥을 분명하게 인도하셨는데, 성령이 이 부흥을
책임지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재발하는 심한 우울증을 계속 앓고 있어서 나의 약한 정신
이 영원한 새 창조에서 완전하게 새로워질 날을 고대한다. 하지만
심지어 우울증 증세가 가장 심한 중에도 나는 하나님이 1980년에
태국/캄보디아 국경 난민 수용소에서 크메르루주 부흥에 나를 사용
하신 방식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하나님
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되었다. 내가 극심한 우울증을 앓을 때도 하나
님이 나를 사용할 수 있으시다면, 다른 모든 일에서 어떻게 하나님
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 영광을 받
으시는데, 연약한 질그릇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
한 뜻을 이루는 데 장애물이 전혀 아니다.
내 인생은
서문 15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 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궁핍
과……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라고 말 씀하셨다( 고후 12:9–10 ).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나타나는 역설인데,
앤드루 화이트, 의학박사, 신학석사, 2017
┃ 시리즈 서문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성경을 ‘방대하고, 깊고, 거대해’ 통과하기 불가능한 책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본
문을 단편적으로 읽고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영감의 금덩어리를 발
견하지만, 주어진 본문을 전체 줄거리 속에 넣지 못한 채 머물러 버
린다. 그러나 지난 몇 세대 동안 복음주의권의 성경 연구에 일어난
놀라운 발전 중 하나는 성경신학의 회복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성경을 신학적으로 통일된, 역사에 기초한,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책으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악 된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성경신학의 르네상스는 복이지만, 성경신학은 일반 기
독교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SSBT (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 시리즈의 목표는 학술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성경신학의
시리즈 서문 17
인 제자라면 이 책들에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본 시리즈의 각 책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하나 취해서 그 주제를
성경 전체에서 추적한다. 이 방식으로 독자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배울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는 책으로 읽는 방법을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본 시리즈를 출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사랑 하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학문 영역에서 일어나는
우리 편집자들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
의 은혜로운 구속 행위를 보여 주는 통일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 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증언하신 것처럼 성경 전체를 궁극적
으로 예수님에 대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눅 24:27; 요 5:39 ) 인생
에서 더 흥미진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SSBT 시리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목표는 성
경 전체가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어떻게 무력한 죄인들을 은혜
롭게 구출하시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
이며, 생명을 주는 진리를 이해하는 신자의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데인 오틀런드·마일즈 반 펠트
반전 성경신학
우리 삶은 기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대체로 기복 때문에 놀라더라도 너무 놀라서는 안 되는데, 성경은 이런 기복이 하나님
에 의해 구상된 인생의 기본적 요소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것
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사실이다. 그러나 불
신자에게 인생의 긍정적인 상승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관점과
계획에서 보면 심판으로 하락하는 시작일 때가 있다. 그리고 신자
의 삶에서 하락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복으로 상승하는 것
이다.
이런 기복은 역설적 양식을 수반한다. 역설이란 무엇일까? 역설은
정반대되는 것을 내포하는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다. 말하
거나 행한 것은 실제로 그런 말이나 행동과 정반대되는 것을 나타
낸다. 이 책은 하나님이 인간을 주로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루신다
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루시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두 종류의 성경적 역설 또
는 신학적 역설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죄에 근거해 처벌하
시는 보복적 역설이 있다. 이 보복적 역설은 1, 2장에서 검토할 것
이다. 신자가 저주받는 듯이 보여도 믿음으로 인내할 때 실제로 복
을 받는 중인 구속적 역설도 있다.1) 이 구속적 역설은 3장부터 6장
까지 살펴보겠다. 이 두 종류의 신학적 역설은 모든 사람에게 일반
적으로 적용된다.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이 두 종류의 역설적 삶
의 양식 중 어느 하나의 상황을 만난다. 기독교인은 살면서 나쁜 사
건을 당할 때 낙담하지 않으려면 삶의 역설적 본질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믿음이 성장할 기회를 얻으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역설적 본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이 책은 성경이 사람의 삶 속에서 이 두 종류의 역설을 어떻게 묘
사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역설이 사탄 안에서 ( 보
복적 역설을 통해 ),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 구속적 역설을 통해 ) 어떻게
정점에 도달하는지를 조사한다. 여러분은 이 책을 읽는 동안 역설
의 본질을 더 많이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역설을 논의할 수
있기 전에, 다양한 종류의 문학적 역설에 대해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2)
핵심을 말하면, “역설은 한 가지를 말하고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
이다.”3) 모든 역설은 세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되는데, (1) 둘 또는
1) 워런 오스틴 게이지가 이런 두 종류의 신학적 역설을 개인적 대화에서 처음으로
공식화했는데, 이 덕분에 나는 성경에서 이런 종류의 역설을 더 명확히 할 수 있 었다.
2) 나는 문학적 역설에 관한 연구에 대해 내 연구 조교 타일러 밀리컨에게 감사하 는데, 문학적 역설은 이번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3) Jerry Camery-Hoggatt, Irony in Mark’s Gospel:Text and Subtext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60, 키케로를 인용.
그 이상의 의미의 층위나 수준( 하나의 의미 층위나 수준은 관찰자에 대한 것
이고 다른 하나의 의미 층위나 수준은 희생자에 대한 것임 ), (2) 하나의 의미 층
위는 다른 층위의 의미와 상반된 의미가 있고( 각각 보이는 것은 진실과
정반대다 ), (3) 관찰자나 희생자는 이런 긴장을 알지 못하거나 이런
긴장 때문에 놀란다.4) 일반적으로 말하면, 세 종류의 역설이 전통적
으로 문학 연구에서 인정받고 있다. 언어적 역설이 있는데, 이것은
한 가지를 말하고 정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적 진술
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극적 역설 또는 서술된 사건의 역
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서술된 사건이 그것이 나아가고 있는 듯 보
이는 것과는 정반대로 바뀐다. 끝으로 성격적 역설이 있는데, 성격
적 역설은 극적 역설의 일부로 어떤 사람의 진짜 성격이 겉으로 보
이는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5)
유대인이 복음을 배척한 사실에 대한 누가의 이야기에는 역설이
풍부하다. 특히 예수를 배척한 사실에 대한 누가의 서술은 사도행
전의 묘사에 반영되어 있는데,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저
항하려는 모든 노력이 참으로 모든 예언적 세부
4) Camery-Hoggatt, Irony in Mark’s Gospel, 61에 인용된 D. C. Muecke, The Compass of Irony, 1st ed. (London: Methuen Young, 1969), 19–20의 내용.
5) 이 세 가지 역설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InHee C. Berg, Irony in the Matthean Passion Narrative (Minneapolis: Fortress, 2014), 79–80, 88, 95.
서론
할을 한다면,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에 대한 핍박이 구원 복음의 전
파를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한다. 누가는 또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다”라는 원리도 발전
시킨다( 눅 13:30 ). 이런 계획적 역설은 누가복음-사도행전 전반에 걸
쳐 계속된다.6) 그래서 가장 고상한 형태의 성경적 역설 중 일부는
“예상하지 못한 행운과 비운”이 서술되는 곳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강한 자가 낮아지고 겸손한 자가 높아지는” “사건의 충격적 전환”
이다.7) 요한복음 19장에서 로마 군인은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
함으로써 피를 흘리시는 예수를 조롱한다. 로마 군인은 예수가 어
떤 종류의 왕이라고 믿지 않으며, 그들이 사기꾼으로 생각한 예수
를 비꼬는 표현으로 직접 공격할 생각이었다. 독자는 “더 낮은” 수
준의 조롱은 거짓이어도 역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명백해져서 로
마 군인 스스로 조롱의 실질적 희생자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감지하
는데, 로마 군인은 실제로 우주의 진정한 신적 왕이신 분을 십자가
에 못 박고 있기 때문이다.8) 이런 종류의 역설을 보여 주는 또 하나
6) 예로 다음을 보라. Jerry L. Ray, Narrative Irony in Luke–Acts (Lewiston: NY: Edwin Mellen Press, 1996), 109–111. 변증법적 역설(또는 계획적 역 설)에 대한 간략한 정의는 38을, 행 2:23은 109–110을, 행 13:27–52에서 유 대인의 배척이 가져온 부정적 결과와 긍정적 이방인의 결과는 110–111을
보라.
7) Paul Duke, IronyintheFourthGospel (Atlanta: John Knox Press, 1985), 11.
8) 참고. Duke, IronyintheFourthGospel, 132에서 요 19:1–3과 관련해서 비 슷하다.
의 예는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기록된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 이라”라는 바울의 주장이다.9)
지금부터는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자.
9) Karl A. Plank, Paul and the Irony of Affliction (Atlanta: Scholars Press, 1987), 21n13.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죄에 근거해
심판하신다
[나치 전범] 요제프 멩겔레는 처벌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
했다……나이 든 도망자는……“유대인에게 발각될지도 모
른다는 걱정에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멩겔레는 편
두통을 앓았고 모제르 권총을 침대 곁에 두고 잠들었다……멩
겔레의 범죄 수준에 아주 적합한 처벌은 결코 없었으나, 멩겔
레가 자기의 희생자들을 두려워하는 형벌을 선고받았고 멩겔
레가 이 형벌을 스스로 직접 시행해야 했던 것은 아주 적합하
지 않을까?
오토 프레드릭, 1985년 6월 24일자 「타임」
대학원생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한 취미 중 하나는 중요한 과제
나 기말시험을 끝낸 뒤에 인근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대형 초콜릿
민트 아이스크림을 보상으로 즐기는 것이었다. 이것은 먹는 즐거움
중에서 최고였다. 실제로 나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보상할 수 있
는 많은 구실을 찾았다. 몇 년이 지나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를 찾아
갔을 때, 의사는 이런 아이스크림 파티를 수년 간 계속하면 내 건강
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스스로 크게 즐
기던 것이 결국에는 문자 그대로 ‘두통’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깨달
았다. 그러나 아마 나의 가장 큰 실수는 의사의 진단을 아내에게 말
한 것일지 모른다. 나는 아내가 이 냉정한 진실을 그 후로 줄곧 나
에게 상기시켜 주리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나는 그때부터 대형
초콜릿 민트 아이스크림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대부분은 이
런 종류의 잡다한 역설과 친숙하다. 입은 즐거워도 몸에는 ‘해로운’
음식이 너무 많다.
더 심각한 사실은 형벌적 역설이 요리의 경계를 넘어간다는 것
이다. 사람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순전히 즐거움이나 사리사욕 때문에 하는 일이 많다.
내가 전에 가르친 학생 중에 기독교 윤리 과목의 기말시험을 치
면서 속임수로 좋은 성적을 받으려 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시험 도
중에 이 학생은 문제 중 하나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강의실 앞쪽
에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이 학생이 손가락으로 시험지의 문제를
가리킬 때, 나는 이 학생이 자기 손에 써 놓은
관련된 마키아벨리적 역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닉슨은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대통령 중 한 명이 되려고 부당한 시도를 했다. 닉
슨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를 녹음함으로써 자
기의 성공을 보증하기를 소망했다. 정말로 닉슨은 가장 악명 높은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런 녹음테이프 자체가 정적을 꺾으려는 닉슨
의 부정직한 시도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 예증은 역설적인 도덕 원리를 반영하는데, 사람이 성공하려고
비윤리적인 음모를 꾸밀 때 종종 그 음모가 성취될 수 있기도 전에 잠재적 희생자에게 발각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출세하려고 악한 수
단을 동원하는 방법 자체가 종종 스스로 실패하는 수단이 된다.
이 원리는 삶의 모든 수준에서 작용한다. 몇 년 전 「타임」지의 한
기사는 마약과 관련해 다음처럼 논평했다. “코카인에 중독된 사람
은 통제 불능이다……그래서 코카인의 효과가 의지와 감정적 초점
을 모방해 사용자가 실제로 자신에게 없는 미덕으로 복을 받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비열하고 대칭적인 역설이다.”1) 나는 사회생활
을 하면서 내성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어 과음하는 한 여성을 알
고 있다. 이 여성이 간질환 때문에 평생 금주해야 하기 전까지는 이
방법이 한동안 효과가 있는 듯했다. 이 여성은 말년에 알코올의 치
명적 영향 때문에 사교 모임에서 아무 개성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
어야만 했다. 사람이 해방을 찾으려고 잘못 시도하는 바로 그 일이
자신을 더 가혹하게 속박하는 걸림돌이 될 때가 종종 있다.
심판의 이런 역설적 원리는 잠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 16:25 ). 우리가 비
윤리적 방식으로 무언가에 성공하기 시작할 때, 상황은 종종 우리
가 실패할 수밖에 없게끔 기이한 방식으로 전환된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역설은 일반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암시하는 무언가를 행하거나 말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다루실 때가 많다. 심판과 구
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동도 마찬가지여서, 역설은 성경 전체를
하나로 엮는 실처럼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하나님은 역사의 사건
들을 처음에 움직이는 듯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거듭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역설적인 형벌 사역을 어떻
게 수행하시는지를 살펴보겠다.
반전의 세계
예전에 하만이라는 바사 제국의 총리대신과 모르드개라는 더 낮
은 지위의 유대인이 있었다. 모르드개는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
려 왕의 목숨을 구했으나, 왕은 이 음모를 알린 사람이 모르드개라
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만은 바사 제국의 총리대신인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고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르드개를 미
워했다( 에 3:1–5 ). 그 결과, 하만은 아하수에로왕을 설득해 제국 안
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함으로써 자기의
유치한 분노를 터뜨렸으며( 에 3:6–15 ),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
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에 5:14 ).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르드개가 처형되기 전날 밤에 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신하에게 최근 왕국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글을
읽게 했다. 이 글에서 왕은 자신을 살해하려던 음모를 밝힌 사람이
모르드개라는 기록을 듣게 되었다. 모르드개가 이런 공을 세웠는데
도 존귀함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알자마자, 왕은 사태를 바로잡고 싶
어 했다. 마침 그 시간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한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왕궁에 들어왔다. 하만이 모르드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왕은 하만에게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라고 하문했다( 에 6:6 ). 하만은 왕
이 가리키는 대상이 자신이라고 생각해 다음처럼 대답했다.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
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
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
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
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에 6:7–9).
하만은 왕이 자신에게
드개를 태운 말을 끌고 성 중 거리로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의 전환이 틀림없었으나 훨씬 큰 역설적 전환의
시작일 뿐이었다.
왕이 하만의 음모를 승인한 뒤에( 에 3:8–11 ) 모르드개의 수양딸이
던 왕후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을 몰살시키고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
이려는 하만의 음모를 왕에게 일렀다. 분노한 왕은 하만이 모르드
개를 매달아 죽이려고
변하여 기쁨이 되었다”( 에 9:22 ). 히브리어
에서 “하만”이라는 이름이 “유명한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
실은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하만은 유대인에게 승리해 유명
해지려 했으나, 자기 원수에게 패배해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에 9:17–
22, 27 ). 실제로 이 승리는 유대인이 그 후로 수 세기 동안 부림절로
기념하게 되었다.
모르드개의 부상과 하만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일반적인 원
리를 예증하는 것은 분명해서, 하나님은 이 원리에 따라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지만” “교
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는
데”( 욥 5:11–12 ),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며……그를 잡
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욥 18:7–10 ).
눈에는 눈 에스더서에 수록된 이 이야기는 구약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것
과 같은 개념을 예증하는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그의 죄에
근거해 처벌하신다. 역설적 정의의 원리는 레위기 24장 19–20절에
명료하게 요약된다.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
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참고. 출 21:23–25).
여기에 나타나는 개념은 사람이 받는 형벌의 형태가 그의 범죄나
죄의 형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2) 그래서 가령 다른 사람을 죽이
는 행동 자체는 살인자를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지의 양식을 보여
주는 것이어서, 살인자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
게는 죽이는 것이 옳은 행동 방식처럼 보일 수 있어도 이런 행동의
끝은 사망의 길이다. 이뿐 아니라, 살인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근
거해 처벌받을 것이다.
2) 출 21:23–25는 보복법(lex talionis)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처벌은 행해
진 범죄와 비슷하다. 엄격히 말하면, 이 원칙은 일차적으로 살인의 경우에 문자적
으로 적용된다. 그 밖의 경우는 출애굽기 21장이 처벌의 정도가 범죄의 정도와
같아야 함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적인 이해를 구약
전반에 걸쳐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것이다.
이것이 신적 형벌의 이례적 형태가 아니라는
증된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시 5:10).
사실은 시편에서 입
그가[악한 자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시 7:15–16).
다윗은 악한 민족들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방 나라들
은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
고 말한다( 시 9:15–16 ). 아마 다윗은 사울이 검으로 자신을 뒤쫓아 다
니던 때를 회고하면서, “악인이 칼을 빼고……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리로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시 37:14–15; 참고. 삼상 31:4 ). 사울에게 내려진 역설적
정의의 판결은 여기에 비추어 예상할 수 있었는데, 사울이 자기의
검 위로 엎어져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삼상 31:4 ). 마찬가지로, 다
윗의 아들 솔로몬도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라
고 진술한다
반전 성경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