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일컬으라’라고 명하시는데(사 58:13), 이
책에서 가이 워터스는 우리가 바로 이 일을 하게 도와준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신학적 체계와 성경적 명령을 조사하는 워터스는 하나님 백성이
종종 오해하는 이날이 우리가 은혜 가운데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인식하
게 이끈다. 워터스의 이해하기 쉬운 글쓰기와 면밀한 주석 덕분에, 이 책은 주
님이 명하신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라
는 새로운 확신(요일 5:3)을 독자에게 준다. 기독교인이 ‘안식일’의 실천에 대
해 자주 이야기하는 현실에서, 워터스는 성경적 안식일이 육체적 휴식을 누리
는 날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는데, 안식일은 바로 하
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이다.”
메건 힐, 『함께 기도하기』, 『교회, 우리가 속한 곳』의 저자, 복음 연합의 편집장
“우리가 오늘날 안식일 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지는 까다로운
질문이 분명하다. 워터스는 미묘한 단순함으로 이런 복잡성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워터스는 창조와 구속에서 안식일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구약과
신약에서 중요 본문들을 다룬다. 워터스는 예수께서 안식일과 연관되는 방식
이나 안식일이 이제 왜 일요일에 기념되는지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를 다룬다.
워터스는 또한 안식일이 계속해서 적절함을 보여 주며 오늘날 안식일 준수를
위한 실천적 제안을 제시한다. 이 작은 책은 유용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
서 전혀 작지 않다. 이 책은 안식일이 왜 좋은 소식이며 예수 자신과 어떻게 관
련되며 우리가 오늘날 안식일을 계속 지키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독자 여러분
에게 보여 줄 것이다.”
브랜던 크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약 교수
“우리가 급변하는 생산성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안식일을 올바르게 존중하고
지키도록 초대하는 이 책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매우 필요하다.
새 동안 우리에게 관점을 제공하고 결실을 촉진하는 필수적인 재정립이다. 워
터스는 안식일의 휴식이 하나님을 본받는 중요한 수단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
기 위한 주간 초대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는 내가 안식일을 열망해 태초
에 주어진 이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콜린 서시, 성경 교사, 연설가, ‘성경에서 만나요’(Meet Me in the Bible) 설립자
┃ 시리즈 서문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성경을 ‘방대하고, 깊고, 거대해’ 통과하기 불가능한 책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본
문을 단편적으로 읽고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영감의 금덩어리를 발
견하지만, 주어진 본문을 전체 줄거리 속에 넣지 못한 채 머물러 버
린다. 그러나 지난 몇 세대 동안 복음주의권의 성경 연구에 일어난
놀라운 발전 중 하나는 성경신학의 회복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성경을 신학적으로 통일된, 역사에 기초한,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책으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악 된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성경신학의 르네상스는 복이지만, 성경신학은
시리즈 서문 7
인 제자라면 이 책들에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본 시리즈의 각 책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하나 취해서 그 주제를
성경 전체에서 추적한다. 이 방식으로 독자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배울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는 책으로 읽는 방법을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본 시리즈를 출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사랑 하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학문 영역에서 일어나는 성경신학
의 부흥이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 제자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
어넣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집자들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
의 은혜로운 구속 행위를 보여 주는 통일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 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증언하신 것처럼 성경 전체를 궁극적
으로 예수님에 대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눅 24:27; 요 5:39 ) 인생
에서 더 흥미진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SSBT 시리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목표는 성
경 전체가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어떻게 무력한 죄인들을 은혜
롭게 구출하시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
이며, 생명을 주는 진리를 이해하는 신자의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데인 오틀런드·마일즈 반 펠트
안식일 성경신학
┃ 서론 ┃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안식일은 현대인의 삶에서 급속한 쇠퇴를
겪었다. 안식일 없는 세상은 생산성과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증대
했다. 안식일 없는 세상은 우리가 자기의 일정과 삶을 자율적으로
통제한다는 망상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안식일
없는 세상은 열광적인 시민을 지치고 공허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
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빼앗기는데, 이것은 바로 휴식이다.
이 책은 국회의원에게 엄격한 법률을 제정해 달라는 탄원서가 아
니다. 그보다 이 책은 성경이 안식일과 관련해 모든 사람에게 말하
는 내용에 대한 탐구다. 많은 사람은 안식일을 유대교나 개신교 내
부의 특정 운동( 가령 청교도주의 ) 과 관련지어 생각하지만, 성경은 안
식일이 모든 사람과 관계가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하나님, 세
상, 우리 자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여러 진리를 상기시키기 위해
일주일 중에 하루를 우리에게
진리에 속한다. 일 년 내내 쉼 없이 돌아가는 우리 세계에서는 이런
기본적 진리를 망각하기가 쉽다. 안식일은 모든 사람이 매주 재정
립할 기회를 준다. 자신이 정하신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
과 만나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는 새롭
게 분명해진 이상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 세상,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 그 이상으로, 우리는 영혼과 몸의 휴식과 재충전
을 얻는다. 이런 새로워짐을 통해 우리는 주간의 나머지 시간 동안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기 위한 힘을 얻는데, 이런 새로워짐은 지상
순례의 끝에 있는 우리의 하늘 본향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이 책에서 우리는 안식일 성경신학을 시작한다.1) 안식일은 창세
기와 요한계시록 및 그사이의 많은 지점에 나타난다. 안식일은 성
경의 기본적 요소로 짜여 있다. 그래서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증언
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필 것이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하실 때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을 탐구하겠다. 하나님은 안
식일을 창조의 일부로 만드셔서, 인간은 안식일 없이 결코 존재하
지 않는다. 이 주간 휴식은 인간 존재의 영광스러운 목표를 가리키
는데, 이 목표는 우리가 예배와 경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
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리키던 영원한 안식으로 이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서 언약을 세우신 사실도 확인할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께 계속 순
종했더라면 이 목표를 이루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아담은 죄를 범
하고 타락했다( 우리도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고 타락했다 ). 하나님은 아담이
하지 못한 일을 ( 하나님께 완전하게 순종함으로써 ) 행하고 아담이 행한 것
을 (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담당함으로써 ) 되돌리기 위해
한 구원자, 마지막 아담을 은혜로 세우셨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
은 모든 족속, 방언, 백성, 민족에서 죄인을 부르시고 이렇게 약속된
하늘의 안식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곧바로 시작하셔서 예수 그리스
도의 강림을 위해 세상을 준비시키기 시작하셨다. 2장과 3장에서는
율법과 선지서가 하나님 백성의 믿음이 장차 임하실 그들의 구원자
에게로 향하게 하는 방식으로 안식일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탐구하
겠다. 안식일은 창조 규례로서의 중요성을 계속 유지하지만, 출애굽
의 구속을 기념하는 것으로 추가적 의미를 띠게 된다. 매주 이스라
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속하신 사실을 기억할 것
이며, 출애굽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실 다가오는 구원을 엿
볼 수 있게 해 준다. 특히 선지서는 하나님이 안식일을, 구속받은 자
들이 자신들의 창조주와 구원자 앞에 모일 때 온갖 부류의 사람에
게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되도록 의도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
킨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이적도 안식일과 관련해 많
은 것을 말했다. 4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하는 데 어떻게 공헌했는지를 살펴보
겠다. 예수의 이적은 그리스도가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 오신 회복
과 구속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가
르침은 죄인이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통해 받고 경험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를 강조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 교사들이 안식일에
부과한 짐을 벗겨 냈다.
그러나 안식일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
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었다. 5장에서는 복음서, 사도행전, 서
신서, 요한계시록이 모두 “주간의 첫날”을 새 언약 공동체가 신적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날로 가리키는 방식을
살펴보겠다. 주간의 일곱째 날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한 것
처럼 주간의 첫날도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데, 새 창조
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간 역사에 나타났다. 그런 만큼 이날은 “주
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계 1:10 ),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날에 새
겨져 있는 것은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수렴하는 분에게 어울리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안식일 성경신학은 기독교인과 교회가 오늘
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방식과 관련해 많은 것을 말해야 한다. 그
래서 6장에서는 이런 현실적인 함축 중 몇 가지를 탐구하겠다. 기독
교인은 자기의 사고방식, 태도, 선택, 다른 기독교인과의 관계에 대
해 말한다.
의 목록과 같은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신자에게는 안식
일이 완전히 낯설다. 안식일에 대한 여러분의 인상이 부정적이거나
없다면, 나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
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과 내 삶에 의
도하신 선하심을 느끼게 되기를 소망한다. 결국 안식일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기 아들을 희생해 죄인을 구속하신 분과의 새로워진
교제에 가까이 나오고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주간 초대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것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주
상기시킨다. 나는 이 책이 여러분과 내게 필요한 휴식을 찾을 수 있
는 유일한 곳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휴식을 찾고 경험하도록
여러분을 권면하기를 바란다.
1장 창조
성경은 안식일을 서두에 소개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야기에서 안식일을 처음 마주한다( 창 1:1–2:3 ). 놀라운 사실
은 어떤 의미에서 첫 번째 안식일을 지키는 주체가 다름 아닌 하나
님이라는 것이다( 2:3 ). 이번 장에서는 신약의 도움을 받아 창세기가
이 안식일과 관련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겠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안식일을 거룩한 휴식의 날로 매주 지키도록 하나님이 의도
하셨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이 세
상을 창조하실 때 세상을 위해 의도하신 바를 들여다보는 창문임을
확인할 것이다. 이 점에서 안식일은 종말론적 성격을 띤다. 다시 말
해, 안식일은 하나님이 태초부터 창조를 위해 염두에 두신 목표를
가리킨다. 인류가 죄로 타락해 이 목표가 좌절된 듯이 보이더라도, 아담 안에서 우리의 타락은 실제로 안식일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에 이르는 길을 준비했다. 그래서 안식일은
창조, 구속,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등과 같은 성
경의 큰 관심사들을 하나로 모은다.
하나님이 일하시다, 하나님이 휴식하시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이전의 엿새와는 구별되는
일곱째 날이 이어진다. 창세기 2장 1–3절은 다음처럼 기록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
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
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
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
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세상 창조 이야 기를 결론짓는다.1) 지금부터는 이 구절이 하나님과 창조에 대해 우
리에게 들려주는 것을 살펴본 뒤에 창세기 1장 1절–2장 3절 전체
에 비추어 이 구절의 메시지를 추가로 숙고하겠다.
1) 그다음 절은 “이들이 세대이니라”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주석자들은 종종 이
절이 창세기 안에서 새로운 부분을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다음을
보라. 창
안식일 성경신학
첫째, 창조 사역이 완성된 것은 분명한데, 1절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1:2, 30 ). 이 창
조 사역은 엿새 동안 이루어져서 일곱 째 날은 다를 것이다.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 노동의 날이 아니라 휴식의 날인데, 2절과 3절은 하
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으며”,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나타나지 않아도 관련 단어는 나온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안
식하셨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샤바트’ ) 는 “안식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 ‘샵바트’ ) 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과 이
후의 계시에서 “안식일”( ‘샵바트’ ) 로 부르게 될 대상 사이에 암묵적으
로 성립되는 연관성이 있다.
더욱이 창세기의 서두는 이 일곱째 날이 이전의 엿새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방식에서 구별되는 점을 보여 준다. 우선 이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복되게 하신” 날이다( 2:3 ). 이보다 앞서 하나님은 새
들과 바다 생물들에게 “복을 주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이들에게 “복을 주셨다”라고 말한다( 1:22, 28 ). 각각의 경우에 이런
복 뒤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명령이 이어
진다( 1:22, 28 ). 따라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실 때, 우리는
이 일곱째 날이 그것에 적합한
셨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이 일곱째 날이 다른 엿새와는 다르
게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이 “거룩한” 일곱째 날을 구별하는 것은
이날이 예배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이 일곱째 날에 염두에 두는 휴식은 거룩한 휴식이다.
이 일곱째 날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날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중단은 이 일곱째 날의 부차적 특징일 뿐이다. 이날의
궁극적 특징은 예배로서, 번성과 충만함과 결부되어 있다.
안식일: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규례
이런 관찰은 ‘여기서 염두에 두는 예배는 무엇이고 누가 예배하는
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창세기의 답변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
님께 드리는 인간의 예배’다. 인간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1:26 ), 하나님 “자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1:27 )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존재로 독
특하다. 그런 만큼 인간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 언급된 모든
창조물 중에 유일하게 하나님과 사귀고 교제할 수 있다.3) 그래서 하
2) Gregory K. Beale, A New Testament Biblical Theology: The Unfolding of the Old Testament in the New (Grand Rapids: Baker, 2011, 『신약성경 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3), 778. 빌이
3) L. Michael Morales, Who Shall Ascend the Mountain of the Lord? A
성경신학
나님이 창세기 2장 1–3절에서 규정하신 예배는 자기 형상을 지닌
피조물이 자신과 교제할 수 있게 하려고 주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에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는 인간이 창조의 정점”이라는 것이다.4)
실제로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을 이중으로 모방하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첫째, 하나님은 인
간을 일하도록 창조하신다( 1:28–30 ). 부분적으로는 사람이 다양한
직업에서 일할 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
에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동물을 “지배하도록” 부르신다( 1:26 ). 자기가 만든 세상을 충만하게
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
복하도록” 부르신다( 1:28 ). 따라서 인간은 결혼하여 자녀를 낳는 일
에 충실할 때 지배권을 행사할 것이다( 2:23–25를 보라 ). 그러나 창세
기 1장 1절–2장 3절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방에서 노동보다
더 고상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잘못일 것이다.
인간은 노동에서 하나님을 모방하듯이 휴식에서도 하나님을 모방
해야 한다. 하나님이 엿새의 시간 동안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휴식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도 엿새의 노
동과 하루의 거룩한 휴식에 참여해야 한다.
Biblical Theology of the Book of Leviticus,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37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15, 『NSBT 레위
기 성경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8), 46.
4) Morales, Who Shall Ascend, 47.
요약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노동에서 휴식하기 위해 매주 안식일
을 취함으로써 자기의 휴식을 모방하고 자신을 예배하기 위해 이
하루를 온종일 바치도록 의도하신다. 창세기 2장 3절에서 “복되게
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바라크’ ) 는 “통상적으로 구약에서 생
물에 한정되며, 일반적으로 복을 받거나 오직 하나님을 위해 거룩
하게 되는 것에 적용되지 않는다.”5)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일
곱 날 중에 이 하루를 인간 존재의 주간 주기에서 정기 휴일로 구별
하고 계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
시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다”로 번역된 단어( ‘카다
쉬’ ) 가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자주 관련된다는 사실은
앞에서 지적했다.6) 이 사실은 인간이 일곱째 날을 이런 예배에 전념
하는 날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
께 드리는 예배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을 약속한다.
출애굽기 20장 8–11절은 우리가 창세기 2장 1–3절을 바탕으로
발견한 사실을 확증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이 엿새 동안 세상
을 창조하셨으나 일곱째 날에 휴식하신 사실과 인간이 엿새 동안
일하지만 일곱째 날에 휴식하는 것 사이에서 명백한 유사성을 끌어 내신다.
5) Beale, New Testament Biblical Theology, 778.
6) 각주 2를 보라.
성경신학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
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
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
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
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이다.7) 하나님의 안식과 주간 안식일 간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창세
기 자체에서 목격하는 바로 그것으로, 창세기에서 이 관계는 인간
을 위한 영속적 규례로서의 안식일 명령을 암묵적인 근거로 삼
는다.
출애굽기에서 확인된 사항 외에도, 신약은 창조 때 세워진 인간을
위한 규례로서의 안식일에 대한 간접 증거를 제공한다. 마가복음
7) 존 머리는 “심지어 출 20:11에서도 언급된 안식일이 명확히 하나님의 활동 영 역에서의 일곱 째 날인지 아니면 인간의 주간 주기에서의 일곱 째 날인지를 확 인하기 어렵다”라고 진술한다. 그렇더라도 머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휴식하
시는 안식일은 인간이 휴식하는 안식일, 곧 매주 반복되는 일곱째 날을 위해 주어진 이유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창조 활동 영역에서
초반부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종교 당국자에게 비판받으시는 일련
의 사건을 읽게 된다( 막 2:1–3:6 ). 이런 사건 중 하나는 “밀밭”에서
일어나는데, 예수와 제자들은 안식일에 이 밀밭을 가로질러 지나
간다( 2:23 ). 바리새인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라는 이유로
예수를 고발한다( 2:24 ).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적절하다고 변호하시고, 그런 뒤에 계속해서 이날의 진정한 본질을
분명히 하신다. 예수는 이렇게 하시면서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
니니라”라고 말씀하신다( 2:27 ). 여기서 예수는 적어도 창세기 2장
1–3절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 관계있는 세 가지 점을 지적하신다.
첫 번째는 안식일이 유대인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며 인류의 어떤
다른 하위집단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 안식일은
인간( “사람” ) 으로서의 인간과 관련이 있다.8) 예수께서 지적하신 두
번째 점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리키는데, 인간을 위해 안식일을 제정
한 주체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므로 안식일이 신적 규례라는 것
이다. 셋째, 하나님은 인간을 돕는 수단으로( “사람을 위하여” ) 안식일
을 제정하셨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을 증진하고
진전시키도록 의도된 것이다. 예수는 이 목적이나 안식일이 이 구 절에서 이 목적을 어떻게 진척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셔도 예수의
8) Roger T. Beckwith and Wilfrid Stott, This Is the Day: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Christian Sunday in Its Jewish and Early Church Setting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8), 11.
성경신학
말씀은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에서 목격한 것을 반영하는
데, 곧 안식일이 하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
로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으로서, 자신과 교제하고
이 신적 교제에서 휴식과 재충전을 얻는 것이다.
결론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는 자기 일에서 휴식하는 시
간으로 일곱째 날을 구별함으로써, 주간 안식일을 인간을 위한 지
속적 규례로 제정하신다. 안식일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무
가 아니다. 안식일 계명은 모든 인간에게 구속력이 있는데, 모든 인
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
역사의 과정이 오래 진행된 어느 시점에 안식일 계명을 받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역사의 초기에, 세상이 창조될 때 인류에게 주
셨다.
그러면 인간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안식일 준수를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실까? 인간은 일주일
중에 엿새 동안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방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주일 중에 엿새 동안 종사하는 일을 24시
간 동안 중단하기를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런 노동의 중단( 그리고 이런 중단에서 비롯되는 재충전 ) 은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9)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안 9) 게할더스 보스는 창 2:1–3에서 염두에 두는 “안식”이 “성취된 일의 완성과 여
식일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신” 날로서 하나님과 하나님께 드리
는 예배를 위해 구별된다. 그래서 안식일이 인간에게 복을 가져오
는 것은 다름 아닌 이날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
나님이 “복되게 하신” 날이다.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이 복은 번성과 충만의 잠재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이날에 자기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과 만나실 때, 이들은 이
모든 선물, 곧 영적인 복, 번성, 충만함을 경험한다.
우리를 안식일의 핵심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점이다. 하나님은
복과 행복을 얻게 하려고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가 일하기 위해 창
조된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신약의 도움을 받아 창
세기 2장을 더 깊이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여명에 이 목
표를 밝히시는 방식에 대한 명료성과 통찰을 추가로 얻게 된다. 그
리고 이런 추가적 발견은 우리가 안식일의 시작을 훨씬 잘 이해하
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기에 수반하는 기쁨과 만족을 상징한다. 이런 것의 원형은 하나님께 있었다.
인간은 이것을 모방해야 했다”라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Carlisle, PA: Banner of Truth, 1975, 『성경신학』, CH북스 역간, 2017), 140.
안식일: 종말론적이고 언약적이다
조직신학자는 ‘종말론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죽
음, 심판, 천국, 지옥이라는 ‘최후의 네 가지 일’을 가리킨다. 성경신
학자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종종 다르지만 상호 보완적인 정의를
염두에 둔다. ‘종말론’은 인간 역사가 의미와 방향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의
미와 방향이 있다. 역사는 어딘가로, 곧 하나님이 역사를 위해 정하
신 목표로 향하고 있다. 이 목표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작정하시
고 역사의 시작에 드러내신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
이 자신들을 만드신 하나님과 나누는 복된 교제다( 창 1:1–2:3 ).
창세기 2장 4–25절은 우리가 이 목표를 더 잘 이해하게 도와
준다. 창세기 1장이 엿새 동안 이루어진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넓은
각도로 보여 주는 초상이라면, 창세기 2장은 여섯째 날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근접 촬영하는 줌 렌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이 아담을 창조하신 뒤에( 2:7 )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음”을 알게 된다( 2:8 ). 하나님이 아담을
동산에 두신 목적은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2:15 ). 하나님은 아담이 한 나무를 제외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
를 먹도록
“선택적 관계”에 있는 두 당사자 간의 합의다.10) 하나님과 인간 간
의 성경적 언약에서 이 합의는 하나님이 친히 시작하신다. 특히 하
나님은 상응하는 의무와 함께 약속을 주권적으로 시행하신다. 이런
언약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11)
“언약”이라는 단어가 창세기 2–3장에 나오지 않더라도 에덴동
산에는 언약의 본질이 나타난다.12) 창세기 2장의 마지막에 도달할
즈음이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담이 현존하는 선택적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친히 만드신 창조물 아담과 관계가 있을 뿐 아
니라( 1:26–27 ), 또한 그의 후손에게 깊이 영향을 끼칠 프로젝트를 시
작하기 위해 아담을 대표자로 선택하신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과하신 합의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 중 하나인데, 이 문
제의 비극적 결과는 완전한 죽음 곧 육체적인 동시에 영원한 죽음
이다. 더욱이 이 합의는 주권적으로 시행된다. 하나님은 이 조건을
10) “현존하는 선택적 관계”라는 어구는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Paul R. Williamson, Sealed with An Oath: Covenant in God’s Unfolding Purpose,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23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7), 43.
11) 나는 이번 단락의 이 정의를 다음의 내 책에서 가져온다. TheLord’sSupper as the Sign and Meal of the New Covenant,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Wheaton, IL: Crossway, 2019, 『SSBT 성찬 신학』, 부흥과개혁 사 역간, 2019), 21–26. “생명과 죽음”이라는 어구는 다음 책에서 가져온 것
이다. O. Palmer Robertson, The Christ of the Covenants (Phillipsburg, NJ: P&R, 1980,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P&R 역간, 2015), 4, 10.
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 이 조건을 거부하는데, 아담과 그의 일반 후
손에게 죽음은 이 조건을 거부한 결과다.13) 이 언약의 의무는 매우 명확해, 죽음의 고통을 근거로 아담은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 2:17 ). 그러면 약속
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아담에게 주셨을까? 이
약속은 명령과 거기에 동반하는 저주에 함축되어 있다. 아담이 하
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마땅히 죽음을 선고하
셨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했더라면 순종에 대한 상으로
생명을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해 명백하게 죽음으로
위협하시는 순간에도 순종에 대한 생명을 아담에게 암시적으로 약
속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추가 질문을 제기한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 약속을
주셨을 때 이미 살아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의롭고 거룩하게 만
드셨고( 전 7:29 ),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
고 있었다. 하나님은 생명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
군가에게 어떻게 생명을 유의미하게 주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
한 답변은 아담이 타락한 슬픈 사실에서 나온다. 아담은 죄를 범할
때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생명을 상실했다. 한때는 의로웠던 아담이
이제는 죄의 허물이 있으며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때는
하나님의 친구였던 아담이 이제는 자신을 가리고 하나님을 피해 숨
13) 이 단락에 사용한 자료는 내 책 The Lord’s Supper, 32에서 가져온 내용을
약간 개작한 것이다.
는다( 창 3:7–8 ). 이 모든 것은 아담이 낙원에서 누리던 생명이 상실
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상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실했다 ). 그래서 이 최초의 언약( 종종 행위 언약으로 부
름 ) 에서 아담에게 약속된 것이 안전한 생명 또는 확증된 생명이
었다고 할 수 있다.14) 또한 신약의 증언에서 곧 확인하게 될 내용을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마찬가지로
덴동산에서
누리고 있던 것보다 더 고양되고 더 큰 수준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을 누렸을 것이다.15)
이제는 우리가 창세기 1장과 2장 모두에서 확인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창세기 1장 1절–2장 3절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께 드리는 예배와 창조주와의 교제에서
자기 존재의 목표를 실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던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사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방식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또한
인간이 자기의 삶에 순서를 부여해야 하는 방식도 규정하는데, 이
방식은 엿새 동안의 노동과 하루 동안의 거룩한 휴식이다. 이날은
안식일의 일을 시작하기 위해 엿새의 노동을 내려놓는 것을 수반하
14)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칭한다. ‘행위’라는 단어는
이 언약에서 아담에게 제안된 복이 아담의 순종에 달려 있었던 사실을 강조 한다. 다시 말해, 아담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이 언약 의 생명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15) 이 마지막 두 문장의 자료는 내 책 The Lord’s Supper, 32에서 가져온 것 이다.
안식일 성경신학
는데, 안식일의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하나님과의 교제다.
그 뒤에 창세기 2장 4–25절은 하나님이 인간 존재의 이 목적을
진척하려는 구상으로 아담과 세우신 언약을 드러낸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특징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낙원에 두
시고 낙원의 풍부함을 누리도록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동산
에 있는 한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일을 삼가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과
의 교제 속에서 확증되고 강화된 생명을 아담에게 제안하신다. 물
론 이 생명은 다름 아닌 창세기 2장 1–3절의 일곱째 날 휴식에서
그려진다. 게할더스 보스가 지적하는 대로, 소위 “행위 언약”은 단지 안식일 원리의 체현일 뿐이었다.
이 원리의 시험이 성공적이었다면, 신성한 안식일은 그것이
예표한 실체로 넘어갔을 것이며, 이후에 이어진 인류 역사의
전 과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이 말세에 기대
할 수 있는 것이 대신에 세계 과정의 처음을 형성했을 것
이다.16)
다시 말해, 하나님이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세우신 언약은 인류
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안식일 생명이라는 종말론적 목표로 진전
시키기 위해 구상되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가상으로만 이런 노선으로 생각할 수 있을 뿐
16) Vos, Biblical Theology, 140.
이다. 아담은 죄에 빠졌고 우리의 지정된 대표여서 ( 롬 5:12–21을
보라 ), 우리도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고 이 최초의 죄에서 아담과 함
께 타락했다. 이 시점 이후로는 생명이 아닌 죽음이 아담의 일반 자
손인 모든 사람의 타고난 권리가 될 것이다. 아담( 그리고 아담 안에서 우
리 ) 은 하나님이 창조에서 주신 안식일 생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것은 인간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다. 하나님
은 죄인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종말론적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
기 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죄인의 구속을 통해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
획의 실행이다. 이 계획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42–49절에서
들려주는 것으로서 인간을 위한 목적을 포함하는데, 우리는 창조에
서 하나님이 이 목적을 선포하시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바울
은 이 본문에서 창조와 구속이 서로 불편하게 나란히 자리하는 것
이 아니라 어떻게 통합된 전체 중 일부인지를 보여 준다. 특히 바울
은 창조에서 선포된 인류를 위한 안식일 목적이 마지막 아담인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어떻게 성취에 이르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고전 15:42–49)
고린도전서 15장 1–5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죽은 자 가운데서
몸의 부활의 필요성과 본질을 이해하기를 원하는데, 논증 과정에서
양자의 차이점을 예증하기 위해 현재 우리가 가진 몸을 우리의 부
안식일 성경신학
활 육체와 비교한다( 고전 15:42–44a ). 17) 이 일련의 비교에서 바울의
결론적 의견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라
는 것이다( 15:44 ). 이 차이( 육에 속한/신령한 ) 는 15장 44–49절에서 이
어지는 일련의 논증을 유발한다. 바울은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고 추론한다( 15:44 ). 바울은 그다음 절을 이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
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느니라”( 15:45 ). 여기서 바울
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는데, 이 본문은 아담의 창조에 대한 이
야기다. 이 인용 및 해당 본문에 대한 바울의 해석과 주석은 바울이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요약하면, 바울은 아담( “첫 사람” ) 과 그리스도( “둘째 사람” ) 를 두
대표자로 우리 앞에 둔다( 15:47 ). 아담과 그리스도의 두 몸은 이들이
관장하는 두 시대와 “이들과 관련된 서로 다른 두 가지 존재 양식”
에 상응한다.18) 바울은 여기서 죄, 부패, 죽음을 특징으로 하는 아담
의 질서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종말론적 질서와
주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바울은 타락 이전의
17) 이어지는 자료 중 일부는 다음에서 가져온 것이다. “1-2 Corinthians,” in Michael J. Kruger, ed., A Biblical-Theological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The Gospel Realized (Wheaton, IL: Crossway, 2016, 『성경 신학적 신약개론』,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7), 212–214.
18) 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trans. John R. DeWitt (Grand Rapids, MI: Eerdmans, 1975, 『바울 신학』, 솔로몬출판사 역간, 2017), 542.
비교하고 대조하고 있다.19) 우리가 이것을 아는 이유는 바울이 여기
서 언급하는 것이 다름 아닌 창조된 아담( 창 2:7 ) 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말하면, 아담과 그리스도는 각자가 뚜렷이 다른 존재
질서를 관장하는 대표자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아담은 “생
령”( ‘프쉬켄 조산’ ) 으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살려 주
는 영”( ‘프뉴마 조오포이운’ ) 이 되셨다. 이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생령”과 “영”으로 번역된 단어는 15장 44절과 15장
46절에서 “육에 속한”과 “신령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서로 관련이 있다. 하지만 아담이 창조에서 살아 있게( ‘조산’ ) 되지만 그리스도는
부활에서 살려 주게( ‘조오포이운’ ) 되었다는 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
는 서로 다르다.20) 아담은 “살아 있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빠져 그의 일반 후손을 자신과 함께 죽음에 빠뜨렸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서 죽음을 이기셨다( 15:54–
57을 보라 ).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성령에 붙잡히시고 성
령을 지니신 그리스도는 이제 “살려 주는” 마지막 아담이다. 요약하
면, 아담은
19) Ridderbos, Paul, 542n152.
20) Richard B. Gaffin Jr., Resurrection and Redemption: A Study in Paul’s Soteriology, 2nd ed. (Phillipsburg, NJ: P&R, 1987), 87–88.
성경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