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BECNT 골로새서·빌레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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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리즈 서문_ 8 저자 서문_ 11 약어 소개_ 16 지도_ 28

골로새서 골로새서 서론

30

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1:1-2)

57

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1:3-23)

69

A.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백성의 참된 믿음, 사랑, 소망이 있음을 안다(1:3-8)

71

B. 바울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한다(1:9-14)

97

C. 첫 창조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상권은 새 창조의 모형이다 (1:15-23)

129


III. 편지 본문: 그리스도인은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1:24-4:6)

201

A. 바울은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한 싸움을 기뻐한다(1:24-2:5) 203 B. 신자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2:6-15)

247

C. 신자들에게 특별한 종교적 관행을 따르도록 요구해서는 안 된다 (2:16-23)

301

D. 신자들은 땅의 옛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구해야 한다 (3:1-4)

363

E. 신자들은 옛 세상의 죄악된 생활 방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 (3:5-11)

377

F.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 창조의 삶을 살아야 한다(3:12-17)

407

G. 신자들은 가정과 일터에서 새 창조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3:18-4:1)

433

H. 새 창조의 생활 방식은 복음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한 기도로 이어져야 한다(4:2-6)

459

IV. 맺음말: 바울은 골로새인들을 위한 자신의 목회적 관심을 강조한다(4:7-18)

481


빌레몬서 빌레몬서 서론

504

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빌레몬과 골로새 교회에 은혜와 평화를 기원한다(1-3절)

515

II. 서두 감사와 기도: 바울은 빌레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4-7절) III. 편지 본문: 바울의 호소(8-21절) A. 바울은 빌레몬의 마음에 호소한다(8-14절)

525 543 547

B.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의 종을 맞아들이라고 확신에 차서 호소한다 (15-21절)

573

IV. 맺음말: 바울은 빌레몬에게 자신에게 목회적 관심을 보여 줄 것을 요청하고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목회적 관심을 보여 준다(22-25절)

593


보론 보론 1: 이른바 비진정 바울 서신을 식별하기 위해 어휘 및 문체 기준을 사용하는 문제

599

보론 2: 구약 암시를 분별하는 기준과 암시의 사용

604

보론 3: 신비의 일부로서 “이방인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611

보론 4: 골로새서 2장 13절의 “너희 육체의 무할례”에 대한 구약의 배경 보론 5: 주인-노예 관계

참고문헌_ 622

614 618


저자 서문

| 저자 서문 |

내가 이 주석을 쓰기 시작한 때는 2012년 후반기다. 사람들은 주석 집필 작 업에 착수하기 전에 또 다른 주석서를 쓸 필요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 곤 한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의 경우 특히 그렇다. 이 두 서신에 대한 주석과 이차 문헌은 이미 방대하다. 하지만 골로새서의 경우에 나는 다음과 같은 연 구를 수행한 주석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1) 구약 암시가 골로 새서의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정 확한 방식으로 그에 대해 연구하고, (2) 유대인의 주석 전통이 이와 동일한 구약 암시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와 이런 해석이 골로새서에서의 구약 암시 사 용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나는 주석가들이 이 서신의 주요 지점으로 간주하는 곳에서 구약 암시가 나타나고 그것이 골로새서의 주석과 신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런 목표를 성공적 으로 달성했는지 또는 어느 정도 달성했는지, 그리고 골로새서 전반에 걸쳐 구약 암시의 존재에 대해 내가 얼마나 잘 논증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 들이 판단해야 할 것이다. 빌레몬서에는 구약에 대한 명확한 암시가 나타나 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골로새서처럼 이 분야에서 내가 이 서신에 기여 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차 문헌을 읽기 전에 먼저 헬라어 본문과 나 자신의 소통을 토대로 빌레몬서를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골 로새서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따랐다. 주석을 쓴 나의 의도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골로새서와 빌레몬서를 해석하는 데 진지한 관심이 있는 교사나 목사, 학생, 기타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수 있게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한 11


골로새서·빌레몬서

주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주석적 논의는 여러 지점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나는 주석 각 단락의 시작 부분에서 주석적 개념에 대한 진술을 제공 하여 그다음에 나오는 자료를 내가 어떻게 요약하는지 독자가 이해할 수 있 도록 했다. 설교와 성경 연구를 위해 주석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런 진술을 설교 아이디어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주석 단위의 끝 에 나타나는 추가 주석에서도 많은 내용을 다루었다. 이 추가 부분에서는 주 석에서 논쟁이 되는 다양한 논점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나는 헬라 어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대부분의 헬라어 단어와 구절에 영어 번 역을 붙였다. 나는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한 방대한 자료 중에서 가장 관련이 있다고 믿는 출처를 참고했지만,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해 사용 가능한 모든 이차 문헌까지 참고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 주석은 이전 주석가들, 특히 더 글러스 무( Douglas Garland ),

J. Moo ),

제임스 던( J.

에두아르트 로제( Eduard

Lohse ),

D. G. Dunn ),

데이비드 갈런드( David

피터 오브라이언( Peter

T. O’Brien ),

E.

데이

비드 파오( David W. Pao ), 톰 라이트( N. T. Wright ) 에게 빚졌다. 집필을 마칠 수 있게 자원과 시간( 특히 안식년 ) 을 허락해 준 웨스트민스터 신 학교 행정부와 이사들에게 감사드린다. 주석 집필과 관련하여 교정 및 다양 한 조사에 도움을 준 대학원 조교인 맷 더드렉, 브랜든 스젤립, 토드 스케이스 워터, 윌 로스, 캘빈 페론토, 다닐로 산토스, 윌리엄 우드, 로라 레온에게도 감 사드린다. 나의 이전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특히 아내 도린다에게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아내는 내 가 이 책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이 주석을 쓰고 자 하는 열망과 완성할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 책이 하 나님에게만 영광이 되길 기도한다. 본 주석의 일부 양식 측면과 기타 특징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아래에 순서 대로 제시한다. 나는 독자적인 번역을 제공하는 대신, BECNT 시리즈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벗어나 이 주석의 기초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 ) 에 의존했다. 이 번역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록맨 재단 ( Lockman Foundation ) 에

감사드린다. 특히 주석 앞에 붙어 있는 성경 인용 부분에 나오는

꺾쇠괄호는 NASB에서 벗어나 내가 헬라어 본문을 다르게 번역한 곳을 나타 낸다. 주석 부분에서 나는 핵심 용어와 구절에 대한 나 자신의 번역을 더 자 유롭게 통합했고 NASB나 나 자신의 번역 모두에서 특정 단어에 주의를 끌고 자 할 경우에는 밑줄을 사용했다. 12


저자 서문

헬라어 신약을 참고할 때는 NA28의 본문을 따른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의 헬라어 본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독을 논의함에 있어, 나는 본문의 의미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본문 이독에 초점을 맞춘다( 본문 이독은 보통 각주나 추가 주석 에서 다루어진다 ).

다른 고대 저작물의 번역과 관련하여 그 번역이 일반적으로 참고한 표준 판본과 다를 경우, 그것은 내 번역이거나 다른 사람의 번역이다( 후자의 경우 누구 의 번역인지 표시했다 ).

구약과 유대교의 골로새서와의 관계에 대한 나의 논의 중

일부는 골로새서의 구약 사용에 대한 나의 이전 저서( Beale 2007: 841-870 ) 를 통 합하고 수정한 결과다. 헬라어 구약으로는 랄프스( A. Hanhart )

Rahlfs ) 가

편집한 Septuaginta 의 한하르트( R.

개정판( Stuttgart: Deutche Bibelgesellschaft, 2006 ) 을 사용했다. 70인역의 기본

영어 번역은 L. C. L. Brenton, The Septuagint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and Apocrypha with English Translation & Sons, 1896; repr., Grand Rapids: Zondervan, 1972 ) 이다.

존하고 있다. 나는 피터스마( A.

Pietersma ) 와

이 텍스트는 Codex B에만 의

라이트( B.

New English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2007 ) 도

( London: Samuel Bagster

G. Wright ) 가

편집한 A

(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참고했다.

사해 두루마리의 히브리어 텍스트에 대한 나의 기본 자료는 Accordance Bible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M. G. Abegg Jr. 판이다. 때로는 F. Garcí a Martínez와 E. J. C. Tigchelaar가 편집한 The Dead Sea Scrolls: Study

Edition , 2 vols. ( Leiden: Brill, 1997-98 ) 의 히브리어 본문을 참고했다. 사해 두루마 리 영어 번역은 M. O. Wise, M. G. Abegg Jr., E. M. Cook, The Dead Sea

Scrolls: A New Translation , rev. ed. ( New York: Harper Collins, 2005 ) 을 기본으로 했다. 다른 번역을 인용할 때는 그 출처를 밝혔다( 예, García Martínez ).

Dupont-Sommer, Vermès,

영어 번역이 다른 모든 번역과 다른 경우, 그것은 내가 번역한

것이다. 필론 작품의 헬라어 텍스트와 영어 번역은 Loeb Classic Library 판을 따르 지만 때때로 Yonge 1993의 번역을 인용한다. Loeb 판의 영어와 다른 것은 내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참고도 하고 때로 인용도 한 다양한 유대인 작품의 영문판은 다음과 같다.

The Babylonian Talmud, ed. I. Epstein, 18 vols. ( London: Soncino, 1948 )

Mekilta de-Rabbi Ishmael , trans. and ed. J. Z. Lauterbach, 3 vols. (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3


골로새서·빌레몬서

1976 )

The Midrash on Proverbs , trans. B. L. Visotzky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2 )

The Midrash on Psalms, trans. and ed. W. G. Braude, Yale Judaica Series 13.1-2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6 )

Midrash Rabbah , ed. H. Freedman and M. Simon, 10 vols. ( London: Soncino, 1961 )

Midrash Sifre on Numbers, trans. and ed. P. P. Levertoff, Translations of Early Documents, Series III: Rabbinic Texts ( London: Golub, 1926 )

Midrash Tanhuma , trans. and ed. J. T. Townsend, 2 vols. ( Hoboken, NJ: Ktav, 1989 )

Midrash Tanhuma-Yelammedenu: An English Translation of Genesis and Exodus from the Printed Version of Tanhuma-Yelammedenu with Introduction, Notes, and Indexes, trans. S. A. Berman ( Hoboken, NJ: Ktav, 1996 )

The Minor Tractates of the Talmud , ed. A. Cohen, 2 vols. ( London: Soncino, 1965 )

The Mishnah, trans. and ed. H. Danby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

The Old Testament Pseudepigrapha, ed. J. H. Charlesworth, 2 vols. ( Garden City, NY: Doubleday, 1983 ) ; sometimes reference was made to The Apocrypha and Pseudepigrapha of the Old

Testament , vol. 2, Pseudepigrapha, ed. R. H. Charles ( Oxford: Clarendon, 1977 )

The Pesikta de-Rab Kahana , trans. and ed. W. G. Braude and I. J. Kapstein (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75 )

Pesikta Rabbati, trans. and ed. W. G. Braude, Yale Judaica Series 18.1-2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8 )

Pirke de Rabbi Eliezer , trans. and ed. G. Friedlander ( New York: Hermon, 1916 )

Sifre: A Tannaitic Commentary on the Book of Deuteronomy , trans. and ed. R. Hammer, Yale Judaica Series 24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6 ) 14


저자 서문

Tanna debe Eliyyahu , trans. and ed. W. G. Braude and I. J. Kapstein (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81 )

The Targums of Onkelos and Jonathan Ben Uzziel on the Pentateuch, with the Fragments of the Jerusalem Targum, on Genesis and Exodus, trans. and ed. J. W. Etheridge ( New York: Ktav, 1968 ) ; and the volumes published in The Aramaic Bible: The Targums, ed. M. McNamara (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87 ) 사도 교부 부분에 대한 참고문헌 및 영어 번역은 홈즈( M. W. Holmes ) 가 번역 편집한 The Apostolic Fathers: Greek Texts and English Translations , 3rd ed. (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7 ) 을 이용했다. 그레고리 빌 2017년 여름

15


| 골로새서 서론 |

저자 익명 저자 논쟁 어휘 및 문체상 고려 사항

19세기에 이미 예고되었지만, 20세기 초에 들어와 학자들은 골로새서를 쓴 사람이 바울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1) 한 가지 주장은 골로새서의 어휘가 바울의 것으로 받아들여진 다른 진정한 서신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골로새서는 다른 누군가가 쓴 것으로 간주되어 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만 나타나는 단어의 수가 너무 많고( 34개의 ‘하팍스 레고 메나’[hapax legomena]; Pascuzzi 2013: 229 참고 )

이것은 바울이 저자가 아님을 가리

킨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 서신이 진정한 것이었다면 바울이 평소 사용하던 어휘가 더 많이 사용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한 서신과 다른 서신 사이의 어휘 통계 비교는 저자를 결정하기 위 한 기준으로는 확고하지 않다. 예를 들어, 바울의 것으로 받아들여진 진정한 서신들 중에도 저자가 익명이라고 알려진 서신들만큼이나 한 번만 나타나는

1) 한 추정에 따르면, 현대 학자의 60퍼센트는 골로새서를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바울 저작 설을 지지하지 않는 학자와 그것을 지지하는 다른 학자의 표본을 제공하는 D. Moo 2008: 29를 보라. 궁극적으로는 바울이 골로새서를 썼다고 믿는 최근 독일어권 및 영어권 학자 목록을 제시하는 J. White 2017: 90-91을 보라.


서론

단어들이 많다.2) 또한 바울의 표준 양식을 결정하기에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 바울의 진정한 서신이라고 주장되는 일곱 서신은 진정성을 결정할 만큼 충분히 큰 표본을 제공하 지 않는다 ).

나아가 특정한 교회에 편지를 쓸 때 사용한 단어의 종류는 그 교회

의 독특한 상황과 편지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휘 선택에 있어 개인의 글쓰기 스타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학자의 글쓰기 스타일이 학생 시절부터 은퇴 할 때까지 얼마나 많이 변하는지 생각해 보라. 어떤 사람들은 골로새서의 독 특한 구문 스타일을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증거로 제시했다.3) 그러나 바울 저작설을 반대하는 구문론적 논증에 대한 응답으로 어휘 기준에 대해 앞서 제시한 바로 그 동일한 논증이 똑같이 제시될 수 있다.4) 사실, ‘호 [하] 에스 틴’( ὅ [ἅ] ἐστιν,

“그것은~다”[which is], 2:17, 22 ) 을

제외하면 골로새서의 모든 특이한

문체는 비록 빈도는 낮지만 이른바 진정한 서신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Pascuzzi 2013: 230을 보라 ). 이와 관련하여 이 서신은 바울이 디모데와 공동으로 썼을 수도 있지만( 골 1:1 참고 ),

“나”가 편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나 바울은 이 편지를 내 손

으로 쓴다”는 말로 마무리되는 점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은 낮다. 다만 바울 이 비서( 대필자 ) 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고대 세계에서 저자가 다른 사람에게 받 아쓰게 하는 방식이 다양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키케로( Att. 333, 13.25 ) 는

비서들에게 시킨 두 종류의 받아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티로는 전체 부분을 통으로 기록하지만”, “스핀타루스”는 “한 음절 한 음절” 기록했다.5) 만일 바울이 느슨한 방식으로 이 편지를 받아쓰기 시켰다면, 이 편지는 동의어 및 해석적 의역과 관련하여 비서가 선택한 어휘를 충분히 반 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느슨한 받아쓰기 방법에 대한 주장 중 하나는 던의 주장이다. 던은 기술적으로 바울은 이 편지를 받아쓰기조차 시키지 않았으며 자신의 제자나 동역자( 아마도 디모데 ) 중 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편지를 썼다 고 실제로 믿는다. 다음에 바울이 그것을 읽어 보거나 자신에게 읽어 보라고 한 다음, 골로새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그것을 승인했다 ( 어쩌면 있다? ) 는

수정했을 수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비서는 “바울의 편지 쓰기의 광범위한 패턴에

2) 예를 들어, 골로새서는 진정한 바울 서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일곱 개의 서신에서 발견되지 않는 87개 의 단어를 사용하지만 (바울의 진정한 서신으로 인정되는) 빌립보서는 79개의 특유한 단어를 포함 한다. D. Moo 2008: 30을 보라. 3) 예를 들어, 골로새서에는 나타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울의 편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여러 종류 의 구문(예, 동의어의 조합 구성, 속격들이 함께 연결되는 방법, 느슨하게 연결되는 어렵고 긴 문장이 나 관계절)을 열거하는 Schweizer 1982: 18을 보라. 4) 어휘, 구문, 글쓰기 스타일의 다른 측면에 대한 위의 기준을 통해 저자를 식별하려는 시도의 오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도넬(O’Donnell 1999)을 보라. 5) 키케로의 이 텍스트에 관심을 갖게 해 준 고든 피에게 감사드린다.

31


골로새서

익숙했을” 것이고 바울은 “아마도 옥에 갇힌 상황에서 비서에게 상당한 수준 의 재량을 주고 편지를 쓰라고 맡기는 것에 만족했을 것이며, 그 시점에서 개 인적인 마무리 말만을 짧게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4:18 1995: 38 ).

주석을 보라 ) ”( Dunn

던은 비서의 상이한 신학적 개념이나 상이한 신학적 강조점으로 보

일 수 있는 것이 바울의 생각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데, 그것들은 바 울의 신학에 대한 비서의 해석을 나타내며 바울은 그것들을 자신의 사상의 유기적이고 일관된 발전이라고 권위 있게 묵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이 견해는 추측에 기반한 것으로서 난해하다. 그럼에도 비서 사용과 관 련한 이런 극단적인 견해조차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이 서신이 궁극적으로 바 울의 것이며 따라서 사도적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견해의 범주에 속한다( Dunn 1995: 38 ). 이런 현상은 예를 들어 오늘날 미국에서 대통령 연설을 작성하는 작가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연설 작가가 연설문을 쓰면, 대통령이 그것을 검토하고 아마도 약간의 수정을 한 다음 연설을 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서신을 직접 썼거나 대필자에게 받아쓰도록 승인했거나 디모데와 공동으로 썼을 것이다.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처음 두 가지다. “작 성과 표현이 비록 다른 사람들의 작업이었을지라도 그 내용을 ‘소유한’ 것은 바울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ascuzzi 2013: 227 ). 신학적 고려 사항

주석가들은 일반적으로 골로새서의 저자가 바울이 아님을 분별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이 서신의 신학적 개념 일부가 진정한 것으로 생각되는 바울의 일 곱 서신에 나타나는 바울 신학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임을 인 정한다.6) 그러나 이런 생각은 바울의 사상이 덜 발전된 것에서 시작하여 더 발전된 사상으로 연대기적 궤적을 따라 일직선으로 발전했다는 것과 훨씬 더 발전된 개념들은 바울에게는 너무 앞선 것으로 식별될 수 있다는 가정에 기 초한다. 그러나 더 발전되었다고 알려진 사상이 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상보다 바울에게서 먼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 겠는가? 또한 바울에게는 너무 앞선 것이라고 거론되는 것이 실제로 그런 것 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7) 따라서 저자가 자기모순의 지점8)이나 그 가 넘어설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전에 그가 가질 수 있는 자유의 정도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6) 바울이 원래 기록했다고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일곱 개의 신약 서신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 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다. 7) 바울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가정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Pascuzzi 2013: 237을 보라. 8)

32

L. T. Johnson 1972: 394-395에 의존한 Carson and Moo 2005: 518을 보라.


서론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개념으로는 기독론, 종말론, 교회론, 그리스도인의 삶이 있다.9) 특히 1장 15-17절의 기독론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바울의 편지들보다 일 반적으로 더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적 존재로 서 최초의 창조가 시작되기 전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확실히 고린도전서 8장 4-6절 및 빌립보서 2장 6-11절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사실상 그것만큼 명백하며( 예, Dunn 1995: 36이 이렇게 말함 ), 후자 또한 그리스 도의 선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골로새서 1장 1920절과 2장 9절의 기독론은 바울의 진정한 서신들에 나타나는 다른 어떤 기 독론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 명백하다고 본다( Dunn

1995: 36 참고 ).

그러나 이

구절들이 구약 성전이라는 맥락 안에 위치한다면( 1:19; 2:9에 대한 나의 주석을 보라 ), 그것들은 바울 자신의 성전 신학의 발전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발전은 구약 에 토대를 둔 바울 서신의 다른 곳에도 나타난다( 예, 고전 3:9-17을 보라; 고후 6:15-16 참고 ).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라는 1장 18a절의 교회론 관련 진술은 바울의 진정 한 일곱 서신에 나타나는 어떤 교회론보다 는)

( 역시 익명의 저자가 쓴 것으로 보통 간주되

에베소서 1장 21-23절의 교회론과 더 잘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Dunn

1995: 36 참고 ).

그러나 이것은 왜 바울 자신이 발전시킨 것일 수 없는가? 특히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 NIV: 고전 10:16; 12:27, 뒤의 본문은 “이제 너희는 그리스 도 몸이다”로 읽는다 ) 이라고

이미 논했으니 말이다.10) 파스쿠찌( Pascuzzi 2013: 238 ) 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를 몸의 “머리”로 언급하지는 않았지 만, 이것은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기 전에 그 개념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특히 고린도전서 11장 3절은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 리이시니”라고 말하고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온 교회의 머리라는 말과 가 깝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바울은 골로새서 이전에는 교회를 초지역적( 즉, 보편적 ) 실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골로새서 의 이런 개념은 이 서신이 바울의 진정한 것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고 주장 한다. 그러나 다시 파스쿠찌는 바울이 이 개념을 진정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 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주장한다.11) 사실, 바울이 이른바 초기의 진정한 서신

예를 들어, 골로새서의 저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 전형적인 신학적 문제로 이런 주제들을 나열하는 Dunn 1995: 36을 보라. 또한 D. Moo 2008: 32-33은 일부 사람이 믿고 있는 견해, 즉 익 명의 저자가 바울 사후에 일어난 교사 세대에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려 했으며 이것은 바울 이후 시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 언급하는데, 무는 이런 견해에 잘 응답한다. 10) D. Moo 2008: 34는 고린도전서의 증거를 지적했다. 11) 그리고 파스쿠찌(Pascuzzi 2013)는 만일 골 1:18a가 학자들이 거의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바울 이전의 찬송이라면,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생각은 원래 바울의 것도 아니고 심지 9)

33


골로새서

들( 갈

1:13; 고전 12:28; 15:9 ) 에서

교회를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했고 골로새서 4장

15-16절이 교회라는 용어를 지역적 의미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Brown 1997: 612 참고 ).12)

골로새서의 바울 저작설에 신학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가장 일반적 이유 중 하나는 골로새서가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 논쟁의 여 지가 없는 편지들에서는 미래적 종말론이 전형적인 것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 문이다. 많은 사람이 골로새서에서 “시작된” 종말론( 1:13; 3:10 ) 이

1:18; 1:26; 2:12-13; 3:1-3;

강조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확실한 미래적 종말론 관점( 1:5;

3:4; 3:6; 3:24; 3:25 ) 도

1:27b;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이에 응답한다. 사실 논쟁

의 여지가 없는 서신들에서 바울은 종말론에 대해 확고한 “이미”와 “아직 아 니” 관점을 고수하고 있다.13) 골로새서에 시작된 종말론이 나타나는 것은 거 짓 교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지위와 믿음의 충분성에 대해 의 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종말의 복에 의미심장하게 참여하고 있음을 확신시키는 것 이다( Pascuzzi 2013: 240-241을 보라 ). 또한 어떤 이들은 골로새서 3장 18절-4장 1절에 있는 가족 규범이 그리스 도인의 삶에 대한 진정한 바울 서신의 묘사와 너무 달라서 그것은 바울의 손 에서 나온 것일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바울 모음집에서 골로새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엡 5:21-6:9의 가족 규범과 독특하게 평행하다 ).

그러나 왜 바울 자

신은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킬 수 없었을까? 앞에서 언급된 기 독론, 교회론, 종말론에 대한 이의 제기에 대해 응답이 없었다 하더라도, 왜 이것 또한 바울 자신의 정당한 개념 발전이 될 수 없을까?14) 사실, 앞에서 언급한 개념들 외에도 진정한 바울 서신에 나타나지 않는 것 으로서 골로새서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은 그것이 교회를 위한 바울의 고난 이든( 1:24 ), 성령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든( 1:8 ), 미래 성취의 그림자로서의 율법 이든( 2:17; Schweizer 1982: 16-18을 보라 ), 모두 비진정성의 증거로 간주된다. 진정한 서신에서도 다른 진정한 서신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것은 정확한 기준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왜 저자는 자신 어 어떤 익명의 저자의 것도 아니며, 그 이유는 비록 바울이(또는 익명의 저자가) 바울 이전의 전통 을 자신의 편지에 통합함으로써 그 견해에 동의했을지라도 그것은 바울 이전의 전통이었기 때문 이라고 덧붙인다. 12) 파스쿠찌(Pascuzzi 2013: 38)는 바울의 “받아들여진” 편지들에서 보편적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구 절에 빌 3:6 및 고전 10:32를 추가하고 고전 1:12 및 고후 1:1도 이런 구절에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13) 시작된 마지막 때의 부활과 미래의 부활에 대해서는 Beale 2011: 여러 곳과 예컨대 롬 6:1-13을 보라. 또한 성령의 현재의 종말론적 사역과 미래의 종말론적 사역에 대해서는 롬 8:1-25을 보라. 14) 바울 저작설에 대한 이런 대부분의 신학적 반대에 대한 좋은 응답은 D. Moo 2008: 32-37을 보라.

34


서론

의 글에서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익명성 문제에 대한 결론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열린 신약 세미나에 참석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 세미나에서 해럴드 회너 ( Harold

Hoehner ) 는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썼는

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바울이 에베소서와 목회 서신의 저자가 아님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전형적인 익명성 기준에 따라 갈라디아 서를 판단할 때 바울이 갈라디아서의 저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스꽝 스러운 결론을 내놓았다. 이 논문( 나중에

Hoehner 2006으로 출판됨 ) 의

요점은 바울

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썼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에베 소서와 목회 서신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함에 있어서는 매우 일관성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갈라디아서는 다른 여섯 개의 진정한 서신들에 비해 개인적 스타일이 아니다( Hoehner

2006: 153-155 ).

진정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여섯 개의 바울 서신과 비교하면 갈라디아서 또한 역사적, 신학적 특징 뿐 아니라 30개의 ‘하팍스 레고메나’와 상당히 많은 흔치 않은 단어들을 가지 고 있다. 굽타( Gupta 2013b: 213 ) 가 말하듯이, “갈라디아서를 진정한 것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여 회너가 제시하는 연구의 전체 범위와 깊이는 인상적이다.” 회 너는 만약 이 학자들이 자신들이 비진정한 것으로 추정하는 편지에 적용했던 것과 동일한 기준을 갈라디아서에 적용했다면, 그들은 갈라디아서도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내 기억으 로는 회너의 논문에 대한 반응은 별로 없었다. 이것은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 고 결정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준의 성격이 주관적인 것임을 보여 준다. 결국, 학자들이 바울의 진정한 것이라고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일곱 개의 서신 각각에서와 같이 골로새서 스스로 이 편지를 “바울”이 기록한다고 말 한다( 골 1:1 ). 골로새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의 손으로” “이 문안 인사 를 쓴다”고 말한다. 이것은 서신이 바울의 진정한 것임을 표현하는 한 방식 이다. 이것은 또한 서신의 대부분이 비서에게 받아쓰기를 시킨 것임을 추정 케 한다( O’Brien 1982: 259 ). 비서의 사용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일반적이었고 비서는 언급되지 않거나 거명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15) 이렇게 서명하는 것 은 ( 살후 2:2에서 경고된 바와 같이 )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글을 쓰는 것을 막아 준다. 이 권위 있는 사도의 서명은 그 자신이 서신에서 말한 모든 것, 특

15) 파오(Pao 2012: 322 및 거기에 인용된 출처)는 또한 바울이 로마서 말미에서(16:22) “더디오”가 자 기 비서임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친필 서명은 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35


골로새서

히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와 반대에 있어서 바울의 권위를 청중에게 상기 시킨다. 자기 손으로 쓴다는 설명과 함께 서명을 한 것도 19절에서와 같이 )

( 고전 16:21; 갈 6:11; 몬

아마도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편지 끝에 서명을

덧붙이는 것은 그리스-로마 편지의 한 특징이었다( Dunn 1996: 289의 참고문헌 및 비 서가 편지를 쓸 때는 이런 서명이 추가되었다고 언급하는 Bruce 1984: 186을 보라 ).

이런 점에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지 않았다면, 그 익명의 저자가 “나 바울 이 친필로 이 문안을 쓴다”고 말한 것은 속임수다. 익명의 저자가 자신의 편 지에 바울의 권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에서 이 서명을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동기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고 믿는 많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저자가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주석가들은 익명의 저자가 속이려 했다는 증거를 극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실, 그들은 속임수가 있었 던 것은 아니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데 실패했다. 익명의 저자는 이 편지 를 “바울”이 쓴다고 말하는데, 이 저자에게 속이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해명하 기는 어렵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미혹”( 골

2:4 ) 이나

“속임수”( 2:8 ) 에 대해 두

번 경고한다. “속임수에 대해 이같이 말하는 익명의 저자가 자신이 직접 작성 한 편지에 바울의 이름을 붙였을까?”( Carson and Moo 2005: 349 ). 익명의 저자와 관련된 제안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골로새서 4장 7-18절에 나오는 개인적 의견과 지시들이다. 바울 자신이 이것을 쓰지 않 았다면, 바울이 죽기 전에 이것을 썼고 여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추측하지 않 는 한, 그것은 허구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이 4장 7절까지는 편지 전체를 쓴 것처럼 보일 것이며, 이는 여전히 편지의 대부분이 허구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상의 작가에게 바울의 권위라는 분위 기를 제공하는 문학적 기법이었다면, 수신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며, 이것으로 그런 의도는 무효가 되는 것일까?16) 또는 수신자들이 그 편지가 진 본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비록 그 속임수의 목적이 훌륭한 목회적, 신학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익명의 저자에게 속일 의 도가 있었다는 생각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D. Moo 2008: 332-334의 비슷한 견해 참고 ). 골로새서 4장 7-18절은 어떤 익명 저자의 바울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것 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MacDonald 2000: 184 ). 그러나 그것이 익명의 편지라면 독 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저자의 권위를 어떤 식으로 강화할 수 있겠는

16) 골로새서로 아킵보에게 전해야 했던 바울의 개인적이고 긴급한 요청(골 4:17)은 그런 세부 사항에 대한 실례다. 이는 Witherington 2007: 201을 따른 것이다.

36


서론

가?17) “확실한 증거는 우리에게 둘 중 하나의 결론을 내릴 것을 요구한다. 즉 일부 신약 문서는 익명이며……저자들은 독자를 속이려고 의도했다고 결론 짓거나, 아니면 실제 저자들은 진실을 말하려고 의도했고 그 익명성은 신약 에서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결론짓거나 해야 한다.”18) 개연성이 큰 것은 후 자다. 어떤 이들은 속임수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위서( 僞書 ) 장르가 있다 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골로새서의 장르에 상응하는 다른 헬라 어 위서나 유대교 위서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위서 편지들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 예레미야의 편지 및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와 같은 )

이런 것들조차도 골로새서의 서신 장르와 실질적으로 다르다( D. Moo 2008: 38 ). 또한 익명성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저자 사후 10년에서 20년으로 시간 의 틀을 추정해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그 기간 안에 작성된 것으로 인정된 고 대 위서 문헌의 예도 없다. 그런 글은 저자로 알려진 사람이 사망한 지 수백 년 후에 작성된 것이 보통이며, 대부분의 경우 익명 작가의 신원은 확인할 수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Pascuzzi

2013: 232 ).

그리고 많은 현대 학자들은

구약 책들에서도 익명성을 인정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유대인 전통에 부합하는 익명 작 품을 의식적으로 생산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Pascuzzi

2013: 232-233 ).

그러

나 골로새서가 속이려는 시도가 없는 그런 용인된 위서 장르의 일부였다 하 더라도, 그것이 속이려는 시도가 아니라는 것을 편지 수신자들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을까? 그런 증거는 없다. 사실, 그 주제에 대해 어떤 증거들이 있느냐 하면 그 반대다. AD 200년에 안디옥의 주교인 세라피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그리스 도의 사도로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짓으로 달고 있는 글은……우리 에게 그런 것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거부한다.”19) 따라서 속이려 는 시도가 없는 그런 위서 장르가 교회 안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만일 골로새서가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우리 는 그 저자에게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20)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골로새서의 진정성에 대한 교부들의 만장일치 증언이다. 그들은 몇몇 교회 관련 문헌들이 익명으로 되었다는 것 과 그렇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초대

17) 18) 19) 20)

Witherington 2007: 201-202. 뒤의 4:7-18 개관도 보라. Carson and Moo 2005: 350과 346-350은 속임수와 관련된 익명성에 대해 논한다. 이 인용문이 나타나는 Eusebius, Eccl. Hist. 6.12.1-6을 인용하는 D. Moo 2008: 38을 보라. 위서와 관련된 찬반양론의 이차 자료에 대해서는 D. Moo 2008: 37-40을 보라.

37


골로새서

교회는 확립된 기준( 문체, 내용, 성격 ) 에 따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문헌, 논 란이 되는 문헌, 거짓 문헌으로 구분했다.21) 이는 특히 성경 본문의 해석에 있 어서 수용사( reception history ) 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시기에 해당된다( 여기 서 Gupta 2013b: 211-212를 따른다 ).

저자 문제의 결론 앞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어휘, 문학적 양식, 신학적 발전, 다른 가 명 장르나 문헌과의 비교는 바울이 골로새서의 궁극적인 저자임을 배제하기 에 충분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다. 진정한 바울의 일곱 서신과의 중 요한 차이점은 바울 자신의 저술 양식과 신학의 발전이나 다양한 종류의 비 서의 사용 또는 상황의 변화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교부들도 골로새 서가 진정한 바울 서신임을 증언한다. 우리의 결론은 파스쿠찌( Pascuzzi 245 ) 의

2013:

결론과 일치한다.

진정성 여부 논쟁의 밑바탕에 깔린 두 가지 주요 가정, 즉 바울의 편지들 은 특수한 경우를 위하여 쓴 것이라는 점과 그것들이 협업에 의한 산물 이라는 점은 오늘날 바울 학계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합의된 전제다. 이것 들은 골로새서의 진정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것들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점이 있으며, 양식과 발전에 있어서 의 명백한 변화나 신학적 강조점의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편지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 이 편지에 나타난 신학적 발전과 강조점은 골로새 공동체의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양식의 변화는 구성의 협업적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 골로새서를 진정한 서신의 범위 내에 또 는 그 범위와 충분히 가까운 곳에 둔 노이만의 연구의 문체통계학적 결과, 서신을 쓰게 된 상황이 바울의 생애 동안 일어났음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 그리고 바울이 그 저자라는 서신 내의 삼중 주장을 추가해서 살펴보면, 골 로새서가 진정한 서신일 가능성을 강화하는 증거는 겹겹이 쌓여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초대 교회에 익명 관행이 있었다는 가정과 바울 학파( 여 기서 익명 저자들이 태동했다 ) 가

존재했다는 가정은 설득력이 없다( Pascuzzi 2013: 245 ).

21) Eusebius, Eccl. Hist. 3.25.1-7을 인용하는 Pascuzzi 2013: 232.

38


서론

집필 장소 및 연대 골로새서, 에베소서, 빌레몬서의 밀접한 유사점은 바울이 옥에 갇힌 상황에 서 이 편지를 썼음을 보여 준다( 골 4:3,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내가 그것을 위하여 갇힌바 되 었도다”; 4:18 NIV, “나의 사슬을 기억하라; 엡 4:1, 6:20, “나는 사슬에 매인 사신이다”; 몬 1, 9, 13절 NIV, “나는 복음 때문에 사슬에 매여 있다” ).22)

세 편지 모두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동일한

투옥일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디에 투옥되어 있었는가? 다른 투옥 시기 도 있었지만( 고후

6:5; 11:23 참고 ),

상이한 주석가들이 제안한 투옥 장소 중 가능

성이 가장 높은 곳은 에베소( 고후

1:8; 고전 15:32[?]에서 암시됨 ),

가이사랴( 행

24:27 ),

또는 로마( 행 28:16-31 ) 이다. 톰 라이트( N. Wright 1986 ) 의 제안은 그가 제시한 다른 이유 중에서도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트는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기 위해 로마보다는 에베소로 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오네 시모를 골로새로 다시 보내고 그 종을 자기에게 돌려보내서 자기를 돕게 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더 용이했을 것이라고 한다( 몬 13-14절 참고 ). 오네시모가 로마에서 골로새로 여행을 갔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특히 노예 신분에서 탈출하기 위해 처음에 골로새에서 로마로 이미 왔었던 오네시모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라 이트는 바울이 로마를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의 기항지로 보았기 때문에( 롬 15:22-29 ),

바울이 바라는 바 로마 감옥에서의 임박한 석방 후에 그렇게 빨리

빌레몬을 방문하기를 원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결론지었다( N.

Wright 1986: 35를

보라 ).

이것이 옳다면 골로새인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2년 이상에 걸쳐서 사역하고 있던 기간인 50년대 초반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행 고 ).

19:8-10 참

라이트의 추측은 그럴듯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썼는지 로마

에서 썼는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골로새는 어디에 있었고, 골로새인들은 누구였는가 골로새는 로마의 소아시아 속주인 프리기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23) 그곳 은 히에라폴리스에서 남남동쪽으로 24km, 라오디게아에서 남동쪽으로 18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93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골로새는 로마 제국 시대에 중요한 경제 도시였다. 그 무렵 라오디게아는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 22) 이 부분은 N. Wright 1986: 34-39의 요약이지만, 라이트가 말한 것 중 많은 부분이 일반적으로 인 정되고 있다. 23) 이 부분은 C. E. Arnold, ABD 1:1089-1090을 기반으로 한다.

39


골로새서

한 도시가 되어 있었다. 리쿠스 계곡의 도시들 ( 그중에

골로새도 포함됨 ) 에는

7,500명쯤 되는 상당한 수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런 추산은 BC 62년에 루키우스 페두카이우스가 라오디게아에서 성전세로 징수한 금액에 근거 한다( Cicero, Flac.

28.68을 보라 ).

또한 요세푸스( Ant.

12.145-153 ) 에

따르면 BC 213년

에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는 골로새 주변에 2,000명의 유대인 가족 을 정착시켰다( D. Moo 2008: 27에 인용됨 ). 물론 골로새 주민의 대다수는 이방인이 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대 주화의 증거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제우스, 프리기아의 멘, 히게이아, 아테나, 불레, 데메테르, 셀레네와 같은 신들과 이집 트 신 이시스와 세라피스가 숭배되었음을 보여 준다. 골로새 지역에 큰 지진 이 있은 후 사람들은 가까운 마을인 호네( 호나즈 ) 로 이주했고, 이후 골로새는 결국 버려졌다.

골로새서에서 구약의 중요성 최근까지도 골로새서에서의 구약 연구를 명시적 목적으로 한 책이나 단행 본으로 된 논문은 물론 심지어 소논문조차 없었다.24) 이 주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거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골로새서에는 구약에서 공식 인용한 부분 이 없기 때문이다. 골로새서에는 구약을 암시하는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주석가들은 그런 암시조차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고펠 트( Goppelt

1982: 198 ) 25)가

신약에 대해 일반적으로 말한 것은 골로새서에도 적

용된다. 신약의 [구약] 성경 사용에 대한 이전 연구들에서는 실제 인용이 과도하 게 강조되었다……신약의 성경 사용은 구약 구절의 직접 인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한 암시는 저자들의 설명에서 계속 발견된다……이런 사실은 간과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신약의 많은 부분은 구약 에 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이런 암시는 신약의 성경 사용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성경에 대한 신약 관점의 핵심을 형성한다.

24) 비덤(Beetham)은 이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고(2005; 출판 2008년), 피(Fee 2006)는 이 주제 에 대한 소논문을 완성했으며, 나는 Beale and Carson 2007: 841-870에서 골로새에 대한 장을 썼다. 피와 비덤의 연구의 최종 형태는 내가 2007년 작업에서 충분히 참고하기에는 너무 늦게 출판 되었지만, 출판 전에 그들의 연구를 접한 결과는 그들의 접근 방식이 나와 비슷했으며 그들이 구약 을 암시한다고 확인한 많은 것이 내가 식별한 것과 겹친다는 것(특히 비덤의 작품)을 보여 주었다. 이 주석에서 나는 일부 경우에는 이전 소논문에서 논의했던 것을 축약해서 넣었고, 또 어떤 경우에 는 내가 이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암시를 찾아내어 확장 설명했다. 25) 나는 Beetham 2008: vii의 이 인용문에 매료되었다.

40


서론

다양한 주석책들이 이런 암시 중 일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저자가 암시 하는 특정한 구약 본문이 무엇인지에 대해 때때로 의견을 같이한다.26) 그러 나 주석가들이 암시를 찾아내는 경우에도 그 타당성을 입증하거나 바울이 그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주석 의 한계 내에서 가능한 한 암시를 식별하는 절차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다 양한 구약 암시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과 그 중요성을 논하는 것이 그것 이다. 빌( Beale 2007 ) 과 비덤( Beetham 2008 ) 을 제외하면 과거의 골로새서 연구에 서는 이런 작업 중 어느 것도 일관되게 수행되지 않았다. 주석가들은 “암시”와 “반향”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제시하고, 이 둘을 구별 하기 위한 다양한 기준을 제시하는데, 때로는 반향을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 인 것으로 정의하는가 하면 때로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구약과의 관련성을 “암시”라 부르건 “반향”이라 부르건, 주석에서의 목 적은 바울이 어느 정도건 관련지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논증하 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어떻게 분류하고자 하는가에 관계없이( 즉, 반향으로 분류하 건 암시로 분류하건 ),

목표는 사례별로 구약과 관련지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뒷

받침하는 가장 명확한 누적적 증거를 짚어 내는 것이다( 암시를 식별하기 위한 기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보론 2를 보라 ).

그럼에도 독자들은 동일한 증거에 기초하여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어떤 본문을 두고 일부는 “유망한” 것으로 분류하고 다른 사람은 동일한 본문을 단지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가능성이 아주 적어서 분석 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사실, 우리는 “병적으로 유사점/평행을 찾 아내려는 자”( parallelomaniac ) 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의 증거에 의 해 타당성이 입증되고 개연성이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구약 암시들을 연구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전히 ​​바울이 특정한 내용을 암시하려고 했는지 궁금해 할 수 있으며, 바울이 정말로 내가 주장하고 있는 어떤 구약 본문의 모든 의미를 전달하려고 의도했다면 왜 그 본문과 좀 더 명 시적으로 연결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나는 바울이 구약 성경을 깊이 있게 오랫동안 읽어 온 사람이기 때문에 단지 자신의 마음으로만 구약과의 연결을 생각했을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한다. 이것은 논의 중인 구약 본문과 의미론적 연결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26) 나는 여러 주석가들이 기록한 다양한 암시와 반향을 목록으로 만든 비덤에게 빚지고 있다. 물론, 나 는 이후에 이런 참고문헌을 확인하고 다른 것을 추가하기 위해 주석 문헌을 직접 찾아보았다. 골로 새서에 나타나는 암시에 대한 방대한 논의와 분석은 Beetham 2008을 보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는 주석가들과 비덤에 의해 이전에 관찰되지 않은 몇 가지 새로운 암시를 찾나냈지만, 내가 논의

하는 암시의 대부분은 다른 어떤 주석가가 이미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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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1:3-23 ) III. 편지 본문: 그리스도인은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 1:24-4:6 ) IV. 맺음말: 바울은 골로새인들을 위한 자신의 목회적 관심을 강조한다 ( 4:7-18 )


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1:1-2 ) 대부분의 현대 편지가 시작하는 말( “친애하는……에게” ), 종종 등장하는 서두 기 원(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란다” ),

편지의 주요 부분을 포함하는 본문, 마지막 작별

인사( “진심으로”, “행복을 빌며” + 보낸 사람 이름 ) 로 이루어져 있듯이, 헬레니즘 시대의 편지 또한 비슷한 기본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바울은 특히 기독교 신학을 편지에 담음으로써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런 변형된 헬레니 즘식 편지 관습을 새로운 용도에 맞게 조정한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에서 편 지를 시작하는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확장되는데, 이는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덧붙 은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헬레니즘식의 편지를 각색한 것으로, 그 안에 서 편지는 작가의 존재를 대신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경우에서 보게 되 겠지만, 그 편지는 바울의 존재뿐 아니라 수신인에 대한 그의 사도적 권위도 나타낸다. 이 사도적 권위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편 지를 포함한 각 편지에서 바울이 대표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위가 그것 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고대 편지의 두 번째 부분은 일반적인 인사말로, 바울 은 이것을 신학적 의미가 가득 담긴 “은혜와 평화”라는 문구로 대체했으며, 일반적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문구가 그 뒤를 따랐는데 이것은 바울의 편지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함께한다는 것 을 시사한다. 골로새서는 이 패턴을 따르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는 빠지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 바울은 서신의 요소들을 단지 형식적인 문체로 구성하지 않고, 우리가 이미 보기 시작한 것처럼 자신의 편지에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자신이 말하는 모든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읽게 될 사람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인사말을 포함하여 그의 편지에는 많은 감정이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은 골로새인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도 확실히 사실이다. 1-2절의 요점은 편지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2절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편 지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내리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거짓 가르 침을 대적하고 믿음 안에서 인내하며 성장하는 데에 그것이 필요하며, 이 서 신의 나머지 부분은 그 점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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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 주해 및 설명 |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

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 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 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through] the will of God, and Timothy our brother, 2 to the saints at Colossae and [the faithful brothers] in Christ: Grace to you and peace from God our Father ⌜ ⌝. 1

[1:1] 바울의 인사는 먼저 “사도”( 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 ) 로서

자신의 직분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표현하는 것 같다( 즉 소유의 속격으로 쓰인 것 같지만, 갈 1:1에 명시적으로 표현 된 바와 같이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개념[주어의 속격]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에 나온 속격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는 월리스[Wallace 1996: 82]와 해리스[Harris 2010: 7]를 보라 ).1)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통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2) 바울이 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 그에게 사명을 주었을 때였다( 행 9:3-19; 22:6-16; 26:12-20; 고전 9:1; 15:7-9 ). 따라서 바울의 사도직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부르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독자적 결 정을 통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뜻의 역사를 통해 사도 가 되었다( Melick 1991: 188 ). 이 절에서 바울 자신을 “사도”로 처음 언급한 것은 이 편지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사 도로서 바울은 메시아의 권위를 대표한다. 따라서 바울이 자기 자신을 “사 도”라고 부른 것은 그의 독특한 직분을 가리키며, 단순한 인간 메신저들( 빌 2:25 및 고후 8:23의 NASB 난외 읽기 참고 )

또는 승인된 선교사들( 예, 고전 9:5-6; 15:7; 참고,

갈 2:9; 이에 대해서는 D. Moo 2008: 74를 보라 ) 을

가리키는 “사도”의 다른 용법과 질적

3)

으로 다르다. 바울은 “그리스도[메시아] 예수”라는 표현을 (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순만큼이나 )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것은 신학적 의미가 거의 없는 단순한 이

름이 되었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지금 그리스도와 동일시 되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기대를 최소한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D.

1) 이것은 바울의 사도직이 정의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결부되었다고 설명하는 관계의 속격일 뿐일 수도 있다(D. Moo 2008: 75는 갈 1:1에 비추어 주어의 속격일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한다). 2) 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딤전 1:1; 딤후 1:1을 보라. 참고, 고전 12:28; 딤전 2:7; 딤 후 1:11. 3) 바울 서신과 신약 전반에서 사도직의 개념에 대한 참고문헌으로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훌륭한 브루스(Bruce 1984: 38)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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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Moo 2008: 75; Bird 2009: 34 ).4)

“메시아 예수”에서처럼 “그리스도”가 앞에 놓임으

로써 이런 점이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사말은 바울뿐만 아니라 디모데도 전한다( 고후 1절 ).

1:1; 빌 1:1; 살전 1:1; 살후 1:1; 몬

여기와 다른 머리말에서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적어도 그가 바울의 사역

에서 “동역자” 중 한 사람임을 나타내지만( 롬 16:21; 살전 3:2; 참고, 고전 16:10 ), 그가 바울의 비서임을 암시할 수도 있다( 이것이 복수 저자임을 의미할 가능성은 적다 ). 바울을 비롯한 다른 신약 저자들은 다른 서신들에서 비서를 사용했다( 바울은 더디오에게 로마서를 받아 적게 했고[롬 16:22], 베드로는 실루아노를 비서로 사용했다[벧전 5:12] ).

“동역자”가 되는 것 외에도 바울의 여행에 동행했으며( 행 3:6 ),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파했고( 고후

1:19 ),

디모데는

16:1-20:4; 빌 2:19; 살전

다른 사람들에게 바울의 가르침

을 대표했다( 고전 4:17 ). 그러므로 바울이 1절 말미에서 디모데를 “형제”라고 부 른 것은 당연하고,5) 따라서 디모데가 바울의 비서 중 한 사람이 되는 것도 당 연하다. 비서의 사용은 바울이 일부 서신의 끝에서 자신의 독특한 서명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도 암시된다( “나 바울은 이 인사를 친필로 쓴다. 이것이 내 모든 편지의 표 지다. 나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쓴다”[살후 3:17 NIV]; 마찬가지로 고전 16:21; 갈 6:11 ).

이것은 골로

새 4장 18절에서도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라고 강조되어 있다. 이 것은 또한 비서를 통해 편지를 썼더라도 바울이 편지의 진정한 저자임을 나 타낸다. 더욱이 바울의 비서들이 독자적으로 편지를 쓴 것이 아님은 고대 세계에서 받아쓰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면 분명하다. 키케로는 받아쓰기에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비서가 듣고 “전체 부분”을 적는 느슨한 받아 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비서가 “음절별로” 적는 엄격한 방법이다( Cicero, Att. 333, 13.25 ).6)

느슨한 받아쓰기라 하더라도 바울의 비서들이 쓰기에서 자율적인 역

할을 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바울은 편지에 최종적으로 적힌 내용 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나타냈는지 확실히 하기 위해서 편 지를 보내기 전에 직접 읽어 보거나 자신에게 다시 읽어 보라고 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4)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마지막 때의 왕과 관련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의 사용에 대해 서는 시 2:2(2:7 참고) 및 단 9:25-26을 보라(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자이며 영원히 통치할 그의 후 손들과 관련되는 시 89:19-29[88:20-30 70인역] 및 132:10-12[131:10-12 70인역] 참고). 유대교에 서 “기름부음 받은 자”의 동일한 사용에 대해서는 에녹1서 48.10; 52.4; 솔로몬의 시편 17.36; 18.6, 8을 보라. 쿰란에서는 예를 들어 CD-A 12.23; 14.19; CD-B 19.10; 1Q28a(=1QSa) 2.12, 20에서 “메 시아”가 동일하게 종말론적으로 사용된다. Pokorný 1991: 35도 보라. 5) 그러나 우리는 골 1:2에서 “형제”라는 단어에는 동료 신자가 가족의 일부라는 개념이 포함된다는 것 을 알게 될 것이다. 6) 몇 년 전에 키케로의 이 텍스트를 처음으로 내게 알려 준 고든 피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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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또한 “사도”라고 불리지 않는 디모데에 대한 언급 이전에 바울 자신을 사 도라고 먼저 언급한 것은 그 편지가 궁극적으로 바울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나타낸다는 것을 암시한다( 같은 견해, Lincoln 2000: 587 ). 더욱이 바울의 권위가 이 편지 배후에 있음은 바울을 가리키는 1인칭 대명사( 나는/나의 ) 가 나타나는 구 절들에도 반영되어 있으며( 예,

골 1:23-25, 29; 2:1, 4-5; 4:3-4, 7-8, 10, 13, 16, 18 ),

이런

1인칭 대명사는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바울의 것으로 인정하는 서신들에도 다수의 비슷한 사례가 나타난다( 예, Blanke 1994: 143 ).

빌 2:19-28; 살전 2:18, 3:5, 5:27; 참고, Barth and

바울의 제자가 먼저 바울의 이름으로 독자적으로 편지를 작성

하고 후에 바울의 최종 승인을 받았다는 견해( Schweizer 1982: 15-24; Dunn 1996: 44, 47은 이렇게 주장한다 ) 는

동일한 증거로 반박된다.7)

따라서 이런 단서를 염두에 두면 디모데가 비서로서 이 편지를 쓰는 데 어 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에 대한 언 급은 바울이 디모데를 신실한 “동역자”로 칭찬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디모데가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도록 공식적으로 위임받았음을 나타 낼 수도 있다( Doty 1973: 30 ). 위의 모든 생각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모두 바 울이 염두에 둔 것일 수 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전서 2장 6-7절에서 “사 도들”로 언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살전 1:1 참고 ). 그러나 이것 은 바울이 대표하는 권위에 디모데가 참여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임시 명칭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디모데가 바울의 비서로 섬기고 바울의 권위 있는 말을 기록하는 것이 특별한 경우에만 있었던 일인 것과 마찬가 지다( 추가 주석도 보라 ). [1:2] 바울은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성도들”( 여 격 복수, ἁγίοις, ‘하기오이스’ ) 을 ( 형태에 따라 )

형용사로 이해해야 하는지 또는 형용사

형태가 명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인지( 종종 이런 경우에도 해당됨 ) 에 대한 의문이 있 었다. 어떤 이들은 ‘하기오이스’ 앞에 나오는 복수 정관사 “the”( ‘토이스’ ) 가 “신 실한” 앞에는 나타나지 않아서 이 정관사는 양쪽에 걸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 기오이스’는 형용사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기오스’의 복수형은 “신실한”이란 단어와 함께 묶어서 보아야 하고 후자는 분명히 형용사이기 때문에 ‘하기오이스’는 “거룩한”이라는 뜻이 되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번역은 “거룩하고 신실한 형제들에게”가 될 것이며, 이는 충분히 통하는 번역이다.8) 그러나 ‘하기오스’의 복수형은 바울 서신의 서두에서 항상 명사로 쓰이기 때문에( 롬

1:7; 고전 1:2; 고후 1:1; 엡 1:1; 빌 1:1 ),

7) Barth and Blanke 1994: 144에 동의한다. 8) 섬니(Sumney 2008: 27), 슬래터(Slater 2006), 캠벨(Campbell 2013: 2)이 주장한 바와 같다. 캠벨

은 바울의 독자들이 헬라어의 자연스러운 어순을 따라 이렇게 읽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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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이 단어는 여기서도 그렇게 쓰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즉 “성도들[또는 거룩 한 자들]과 신실한 형제들에게”( O’Brien

1982: 3을 따름 ).

형용사 “성도들” 또는 “거룩한 자들”( ‘하기오스’의

바울의 서두 인사 외에,

복수형 ) 은

신약 전체에서도 그

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관련하여 명사( “성도들” ) 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나타 난다. 형용사 “거룩한 자들”이 명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추가로 보여 주는 것 은 “골로새에 있는”이라는 문구가 구문상 복수형 “성도들”( ‘하기오이스’ ) 에 더 가깝고 또한 그것과 잘 연결되며, “신실한 형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더 가깝고 또한 그것과 잘 어울리며, 두 문구는 접속사 “그리고”( καί, ‘카이’ ) 로 구

분되어 있다는 관찰이다. 이 구문 패턴은 특히 에베소서 1장 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서신 중에서 골로새서 1장 2절과 가장 비슷한 것이며, 우리가 여기서 취한 입장을 뒷받침한다( 아래 설명을 계속 보라 ). 따라서 ‘하기오스’ 가 형용사 기능을 한다고 반드시 보지 않더라도 복수 정관사는 여전히 두 가 지 역할을 행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두 가지 역할의 의미는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이 통일된 전체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MHT 3:181 참고 ). 구약에서 이 단어가 이스라엘의 “성도들”( 시

16:3[15:3 70인역]; 34:9[33:10] ),

특히

하나님 나라의 마지막 때의 여명기에 살게 될 자들( 단 7:18, 21-22, 25, 27; 7:27 70인 역은 “거룩한 백성”으로 읽음 ) 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과 여기서의 사용에는 연속

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이 편지에서 바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나라다( 1:13; 4:11 ). 바울은 다니엘 7장이라는 배경을 거의 틀림없이 염 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도들”( ‘하기오스’의

복수형 )

이 “왕국/

나라”( βασιλεία, ‘바실레이아’ ) 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언급된 곳은 구약 전체에서 다 니엘서가 유일하고 ( 앞에 13절( “빛

제시한 본문들 참고 ) ,

신약에서는 골로새서 1장 12-

가운데서 성도들이……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옮겨졌다” ) 이

이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2절( “성도들이

유일하기 때문

세상을 심판하리라” ) 에서

이미

다니엘 7장 22절( KJV,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심판이 주어졌다” ) 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9) 비록 다니엘 7장 배경이 골로새서 1장 2절에서는 고린도전서 본문 9) 초기 유대교는 이스라엘이 열방을 심판한다는 단 7:22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고전 6:2에서 바울의 마 음속에는 지혜서 3:7-8; 에녹1서 1.9; 1QpHab 5.4(에녹1서 95.3 참고), 그리고 다니엘 7장에서 비롯 된 이런 주석적 전통이 있었을 것이며(Fee 1987: 233 참고), 여기 골로새서 1장에도 그런 것들이 반 향되어 있을 것이다. 바울의 “성도” 이해에 대한 더 넓은 배경은 “거룩한 백성”(‘라오스 하기오스’; 신 7:6; 14:2; 28:9; 사 63:18) 및 “거룩한 나라”(‘에드노스 하기온’, 출 19:6)가 되라는 이스라엘의 부 르심에 있다.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에서 실패했지만, 마지막 때에 마침내 이 부르심을 깨닫게 될 것 이다(사 62:12; 단 8:24; 12:7). 초기 유대교에서 이스라엘을 “성도”로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던(Dunn 1996: 48)을 보라.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구별된” 그들의 하나님처럼 되어야 했기 때문에 “거룩하고 구별된” 존재라야 했다(예, 레 11:44; 19:2; 이 마지막 요지에 대해서는 특히 Lohse 1971: 7을 따른다). 구약 이스라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골로새인들이 그 일부로 속한 마지막 시대의 이 스라엘도 거룩하신 그들의 하나님을 반영하기 위해 똑같이 거룩해야 했고, 따라서 그들이 “택함 받은

것”과 그들이 거룩해야 한다는 요구는 분리될 수 없었다(신 7:6; 14:2; 골 3:12을 보라; Sum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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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에서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말이다. 청중은 단순히 “성도들”이 아니라 “신실한 형제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바울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형 제자매 ) 을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여 가족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1:2 끝부분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에 주목하라 ). 앞에서 디모데를 “형제”로 언급한 것은 이 가족 개념을 강화한다. 그리스도인은 가족이며, 그 들의 영적 유대는 육체적 가족의 유대를 초월한다 ( 마

10:37-38; 눅 14:25-33;

Thompson 2005: 14-17도 보라 ).

골로새인들이 “신실한”( πιστός, ‘피스토스’ ) 자들로 여겨지는 이유 중 적어도 일

부는 바울이 1장 4절에서 즉시 설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 의 믿음에 대해 들었다” )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에서 “신실

한”( ‘피스토스’ ) 이라는 단어는 신뢰하는 태도나 신실한 행위를 가리킬 수 있으며 때로는 두 개념이 모두 포함될 수 있다( 참고,

BDAG 820-821, s.v. πιστός ).

여기서

“신실한”이라는 개념은 예수에 대한 내적인 신뢰의 태도 및 이 신뢰에서 비 롯된 외적인 신실한 행동 둘 다를 통해 예수에 대한 신실함을 유지하는 것 이다( ‘피스토스’의 사용에 이 두 개념이 모두 포함되는 것에 대해서는 골 2:7[여기서는 명사 형태가 나타 나지만]; 4:7, 9를 보라; 참고, Davids 2008a: 243 ).

따라서 그 생각은 단지 그들이 그리스

도를 믿는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신실하다”는 것이 아니다. 또 한 여기에는 그들이 “골로새에” 있는 “거룩한 자들”인 것처럼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는 생각도 포함되어 있다. 신실하고 믿음직 한 성품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에바브라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개역개정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

“신실한”( ‘피스토스’ ) 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1장

7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따라서 그들의 영적 위치는 “그리스도 안”이다( MHT 3:263도 참고 ).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절은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너무 많이 나타나서 각각의 경우 그 직접적인 문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10) 이 구절은 골로새서에서는 단 두 번만 더 나오는데( 1:4, 28; 참고, 2:5 ), 거기서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 중에 살펴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처음 사용된 이 구절은 적어도 청중이 본질 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비슷한 진술이 고전 1:2; 엡 1:1; 빌 1:1; 살전 1:1; 살후 1:1에 나온다 ). Christ ) 라는

“골로새에”( in

Colossae ) 와

“그리스도 안에”( in

표현이 중간 구절인 “성도들과 신실한 형제들”의 양쪽에서 정교하

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가 의미하 는 바를 문맥 안에서 더 정확하게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골로새에”라는 2008: 27을 따라 골 1:22을 참고하라). 10) “그리스도 안에”라는 바울의 정형 문구에 대한 20세기 해석의 간략한 개요는 바르트(Barth 1974:

69-71)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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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문구가 성도들을 지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식별하고 위치시킨다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참 백성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와 동일 시되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위치되어야 할 “신실한 자들”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N. Wright 1986: 47 ). “골로새에”와 “그리스도 안에”의 평행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그리스도인 의 영적 위치가 물리적 위치에서의 그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함을 의미한다( 참고,

Wall 1993: 37-38 ).

“신실한 자들”로서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는 연합되고 세상과는 구별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거룩한 자들”이다 ). 이것은 거짓 가르침에 직면한 독자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진실성과 믿음의 대 상( 즉, 그리스도 ) 에 대해 확신을 주기 위한 편지의 주요 목적 중 하나와 들어맞 는다( 서론의 “집필 계기: 거짓 가르침” 및 1:4-7과 2:4-15에 대한 나의 주해를 보라 ). 골로새인들 은 그들이 영적으로 위치했던 “어둠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그들의 새로 운 장소인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1:13 ). 따라서 그들은 “이미 죽었고”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3:3 ).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영적인 각성은 그리스도가 그들 을 대표한다는 것과 그의 구속 사역이 이방인이 지배적인 골로새 교회가 이 스라엘의 마지막 때의 “성도들”의 일부가 되기 위한 길을 열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2절의 이 첫 번째 구절의 ‘카이’는 아마도 해설의 ‘카이’일 것이다 ). “골로새에 있는 성 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 Pao 2012: 48 ). 골로새인들이 지금 “그리스도 안에”, 즉 그리스도가 지배하는 영역에 들어 온 결과로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바울의 대답은 2절 끝에 나온다.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주석가들은 헬레니즘 편지의 전형적인 서 두 “인사”( χαίρειν,

‘카이레인’ ) 가

신학적 언어유희를 통해 비슷한 발음인 “은

혜”( χάρις, ‘카리스’ ) 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예, O’Brien 1982: 4 ). 바

울은 통상적인 인사말에 은혜의 신학을 주입하고 있다. 헬레니즘 편지에서 인사말 후에는 일반적으로 받는 사람의 건강에 대한 소원( 또는 보낸 사람의 건강에 대한 설명 ) 이

나온다. 바울은 이 부분을 독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Sumney 2008: 29 참고 ).11) 바울은 모든 서신의 서두에서 청중에게 이처럼 “은혜”와 “평화”를 선언 한다. 바울이 이런 이중 인사로 의미하는 바를 규정하는 것은 각 편지에서 뒤 따르는 문맥이다. “은혜와 평화”는 소원을 말하는 것인가, 사실 진술인가, 아 니면 기도인가? 골로새서의 문맥은 독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다양

11) 헬레니즘 편지에서 “인사말” 뒤에 건강에 대한 언급이 뒤따르는 전형적인 패턴에 대해서는 Hunt and Edgar 1932: 269-39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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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한 방법으로 유익을 얻는다는 바울의 믿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또한 하나님 이 앞으로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기도하기 때문에, 이런 구별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현재와 관련하여, 예를 들면 골 1:6, 12-14을 보라; 참고, 2:12-13; 미래 에 대해서는 골 1:9-11을 보라; 참고, 1:28; 3:4 ).

그러므로 2절은 그들의 현재의 복 받은

상태와 소망하는 미래의 상태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 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임을 보고 “은혜가 너희 에게 있을지어다”( 4:18 ) 라는 말로 서신을 적절하게 마무리한다. 골로새서가 “은혜가 너희에게”로 시작하고( 1:2 ) 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로 마치 는 것을 보면 이 서신의 주요 주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참되고 궁극적인 “평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 골 1:19-22 ) 을 위해 오직 “우리 아버지로부터” 온다. 편지 서두에서 마지막 방점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받는 청중에게 떨어지며, 이는 편지 나머지 부분에서 개념적으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바울은 모든 서신의 서두에서 이 두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것은 단지 툭 던진 정중한 말이 아니라 1-2절의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바울의 다른 편지 서두 끝부분에 나 오는 “은혜와 평화”라는 인사 또한 형식적인 용어가 아닌 것 같다. 은혜와 평 화를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관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골로새서 2장 6-7절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그 길이라고 말한다( 1:4;

2:12도 참고하라 ).

화”는 신자들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게 하고( 즉, 고) 39 ).

이 “은혜와 평

“성도”, “거룩한 사람들”이 되게 하

“골로새” 교인들처럼 “신실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참고,

Wall 1993:

여기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만 언급하고 바울의 다른 서신 대부분에서

함께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1-2절에서 형제애 에 대해 두 번 언급한 것이 이 관계의 아버지-자녀 측면을 환기시켰고 바울 로 하여금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게 했기 때문이다( 뒤의 1:2 주석 참고 ).12) 이런 사 실은 알레티( Aletti 1993: 45 ) 가 지적한 바와 같이 바울 편지의 인사말 중 여기서 만 편지의 수신자를 “형제들”( ἀδελφοῖς,

‘아델포이스’ ) 이라

지칭하는 데서 두드러

진다. 한편 다른 편지의 인사말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을 단수 “형제”( 고 전 1:1; 고후 1:1; 몬 1절; 참고, 골 1:1 ) 라

부르며 한 번만( 갈 1:2 ) 복수형으로 부른다.

12) 바울이 왜 “하나님 우리 아버지”만을 언급하고 그리스도를 직접 포함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럴듯 한 설명을 한 유일한 주석가인 것으로 보이는 알레티(Aletti 1993: 45-48)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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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 1:1-2 )

추가 주석 1:1.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로 매우 많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디모데는 골로새 서에서 바울의 비서였을 가능성이 있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6-7절은 디모데를 “사도들”에 포 함하고 있기 때문에, 디모데는 바울에게 “사도”로 여겨질 수 있었을까(참고, 살전 1:1)? 바울이 이 본문에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실라와 디모데를 “사도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문제가 있는데, 후자의 두 사람은 공식적인 “사도”의 일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해결책이 다음과 같이 제안된다. (1) 데살로니가전서 2장 6-7a절의 “우리”는 서간문의 “우리”(epistolary “we”)이 며 바울만을 지칭한다. (2) 이는 열두 사도 외의 이차적 사도 그룹이다. (3) 바울은 “우리”에 실라만을 포함시켰는데, 실라는 열두 사도와 같은 예언자였을 수 있기 때문이다(실라는 행 15:32에서 “선지자”로 언급됨). (4) 바울은 이 사역 초기에 “사도직”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거나 어쩌면 사도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유연하게 사 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이 제안들에 대해서는 위의 해결책 3을 선호하는 Marshall 1983: 6970을 보라; 행 14:14, “사도 바나바와 바울” 참고). 공동 대표에 대한 이해를 통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것이다. 이에 의하면 대표자의 권위가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확장될 수 있다. 즉 실라와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권위 아래서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시적으로 사도 집단의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살전 2:7에 대해서 역시 위와 동일한 대안을 검토하는 Beale 2003: 70-71을 따름). 이 개념은 골로새서에도 적용되며, “우리” 구절(예, 1:3, “우리가 하나님 께 감사하노니”)에 나타나는 “우리”는 단지 저자의 복수형(authorial plural)일 뿐만 아니라 디모데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다(골 1:4, 9, 28; 골 4:3도 보라). 우리는 형용사 형태 ‘하기오이스’가 형용사(“거룩한 자들”[holy ones])가 아니라 명사(“성 도들”[saints])로 기능하며 그 뒤에 “그리고 신실한 형제들”이라는 문구가 오는 것으로 이해 했다. 이것이 옳다면, 선행하는 정관사의 경우에 지배하는 복수 명사들(governing plural nouns)은 두 명사가 중첩되거나 통일된 방식으로 식별되는 것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모든 면 에서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그랜빌 샤프 규칙(Granville Sharp rule)의 한 예 시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는 가장 비슷한 본문인 에베소서 1장 1절(“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에게”)을 그랜빌 샤프 규 칙의 예시이며 동일한 그룹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월리스(Wallace 1996: 278-283)를 보라. 1:2. 몇몇 좋은 사본(예, a, A, C, F, G, 075)을 포함한 많은 사본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다음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καὶ κυρ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카이 퀴리우 이에수 크리스 투’)를 2절 끝에 덧붙인다. 목회 서신을 제외하고 바울의 다른 모든 서신은 “아버지” 다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때문에 이것이 원문일 수 있다. 반면에 이 문구가 누락된 것에 대해 똑같이 좋은 사본 증거도 있다. 필사자가 원래의 짧은 텍스트에 이 구절을 추가한 이유를 설명 하는 것보다 필사자가 그 구절을 의도적으로나 실수로 빠뜨린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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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렵다. 전자의 경우라면, 필사자는 거의 모든 다른 서신의 서두에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 실에 비추어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추가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두의 “은혜”와 “평화”는 더 넓게 보면, 비록 “은혜”(χάρις, ‘카리스’)가 아니라 “자 비”(ἔλεος, ‘엘레오스’)와 “평화”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구약과 초기 유대교가 그 배경일 수 있다. 예, 사 54:10; 시 85:11(84:11 70인역); 토비트 7:12. 또한 셰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 렘 16:5; 1QH 5.11(=olim 13.5); 희년서 22.9; 바룩2서 78.2와도 비교하라(Beale 1999a: 204-223을 보라). 그러나 바울과 다른 신약 저자들은 “자비”를 일반적으로 “은혜”와 동의어로 본다(예, 딤전 1:2; 딤후 1:2; 요이 3절; 참고, 유 2절).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6절에서 “자비”와 “평화”로 마무리한 것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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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편지 서두: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인들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바 란다 ( 1:1-2 )

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1:3-23 ) III. 편지 본문: 그리스도인은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 1:24-4:6 ) IV. 맺음말: 바울은 골로새인들을 위한 자신의 목회적 관심을 강조한다 ( 4:7-18 )


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1:3-23 )

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1:3-23 ) 다음은 이 단원의 주요 개념에 대한 상세한 진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독 자들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이 거룩하고 주권적인 마지막 아담인 자신의 아들을 통해 그들을 화해시킨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기도한다.

골로새서 1장 1-2절의 서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네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헬레니즘 편지 관습( 여는 말, 인사, 본론, 작별 인사 ) 을 변형하여 채택하고 특히 기독 교 신학을 거기에 주입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일부 헬레니즘 편지에는 패 턴에 있어서 서론적인 감사 요소가 나타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Pao 2012: 43 ). 바울은 이 특이한 감사 요소를 종종 채택하지만, 때로는 서 두 축복과 기도를 덧붙인다( 엡

1:3-23에는 세 가지 모두 나타난다 ).

우리의 편지에서

바울은 먼저 감사의 말을 하고( 1:3-8 ), 그다음에 기도로 넘어가는데( 1:9-14 ), 이 기도는 특히 “기도”에 대한 1장 3절의 언급을 잇고 있으며( Schweizer

1982: 32 )

1장 3절에서와 같이 또다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12a절 ) 로 끝맺는다. 12a-13a절은 감사를 받고 있는 “아버지”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하고, 13b-23절은 아버지의 아들이 누구이며 그의 구속 사역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12a ) 로 귀결된다. 따라 서 두 번째 감사의 말은 12절에서 23절까지 이른다. 12b절에서 23절까지 전 체는 12a절의 감사의 근거가 되고, 3b-23절 전부는 궁극적으로 3a절의 “감 사”가 단원 전체의 요점임을 뒷받침한다. 헬레니즘 편지의 감사 부분이 이교 신에 대한 것인 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 서 두 감사에서 발견된 주제는 바울의 다른 서두 감사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편지 전체에 걸쳐 전개된다.1) 이런 주제 중 일부가 나중에 어떻게 전 개되는지는 1장 3-8절에 대한 나의 주석에서 탐구될 것이다.

1) 예를 들어 O’Brien 1977: 261-263을 보라. 바울의 감사와 관련된 헬레니즘 감사나 유대교 감사의 배 경에 대해서는 Lohse 1971: 12-13; Barth and Blanke 1994: 147-148에 인용된 문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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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1:3-23 ) A.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백성의 참된 믿음, 사랑, 소망이 있음을 안다 ( 1:3-8 )

A.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백성의 참된 믿음, 사랑, 소망이 있음을 안다( 1:3-8 ) 다음은 이 단원의 주요 개념에 대한 상세한 진술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 막 때의 백성의 진정한 믿음, 사랑, 소망이 독자들에게 있음을 알고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서론에서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영감을 받은 이유 가 믿는 자들을 그릇 인도하려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그가 들었기 때문( 2:4, 8 ) 이라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 신자들의 믿음, 사랑,

소망( 1:3-5a ) 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믿음, 사 랑, 소망은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들 안에서 점점 열 매를 맺어 왔고( 5b-6절 ), 그들은 그것을 에바브라에게서 배웠다( 7-8절 ). 이 단 락의 주요 요점은 “감사하는 것”이다. 단락의 나머지 부분 모두는 이 요점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의 일부를 이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5b-8절의 나머지 부분은 “복음”에 담긴 “소망”( 5a절 ) 에 대해 설명하는데, 골로새인들은 신실한 에바브라에게서 이 “복음”을 들은 바 있다. 이 “소망” 자체가 청중의 “사랑”( 4b절 ) 에 영감을 주는 원인이며, “믿음”( 4b절 ) 과 함께 3-8절의 요점인 감사를 지탱하는 기초다. 바울이 이런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진리의 말씀 곧 복음”에 근거한 믿음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 를 그들로 하여금 성찰하게 함으로써 골로새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다. 바울은 그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특히 거짓 가르침과 대비하면서 서신 전체에 걸쳐 곳곳에서 강조할 것이다( 예,

1:20-22;

2:12-15 ).

몇몇 주석가들은 3-8절이 교차대구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A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며( 3절 ), B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너희가 모든 성도 를 위해 갖고 있는 사랑을 들었고( 4절 ) ;

C 그것은 너희가 전에 진리의 말씀 곧 복음으로 들은 바요( 5절 ),

D 그것은 너희에게 임한 바 있다( 6절 ),

D' 온 천하에서와 같이 너희 안에서도 그것이 끊임없이 열매

를 맺고 자라고 있으며

C'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듣고 깨달은 날부터; 에바브라 71


골로새서

에게서 그것을 배운 바와 같이( 7절 ), B' 그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의 너희의 사랑을 알려 주었노라

( 8절 ).

A' 이러므로 우리도 들은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구하기를 그치 지 아니하고……( 9절 ).1) 교차대구 구조는 “열매를 맺는 것과 자라는 것”이 ​​중심 구조 요소임을 보 여 준다. 많은 사람들은 교차대구 구조의 중심 요소가 문학 구조의 요점이라 고 생각하지만, 맥락과 사고의 논리적 전개에 따라서는 가장 바깥쪽의 평행 본문도 요점으로서 그럴듯하게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음 문단을 시작하는 9절 이 교차대구 구조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한 교차대구 구조의 문학적 예는 아니다. 우리는 사고의 논리적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3a절의 감 사가 핵심 요점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복음이 보편 적으로 열매를 맺고 자라가는 것( 6a절 ) 이 구조적 중심임을 드러내는 교차대구 구조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중심에 위치한 이유 중 일부는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한 암시로 6a절을 강조하기 때문일 수 있으 며( 6절

주석 참고 ),

그 중요성은 10절에서 동일한 암시가 반복됨으로써 강조

된다. 이것은 또한 6a절이 “소망”과 “복음”( 5절 ) 에 대한 이후 설명에서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한다. 바울 서신 전반에 걸쳐 서두 감사에는 여기서와 같이 매우 강력한 바울 신 학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주해 및 설명 |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

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

We give thanks to God, the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praying always [concerning] you, 4 [because] we heard [about] your faith in Christ Jesus and the love ⌜which you have⌝ for all the saints, 5 [which is inspired by] the hope [that is] 3

1) 교차대구 구조에 대해 여기서 나는 던(Dunn 1996: 54)과 라마르슈(Lamarche 1975: 453-454)를 따 랐다. D. Moo 2008: 87은 후자는 따른다. 디벨리우스(Dibelius 1953: 5)가 제안한 비슷한 구조를 보라. 갈런드(Garland 1998: 44-45)도 마찬가지로 “꾸준히 열매를 맺으며 자라나는”(6절)을 중심으 로 하는 4-8절의 설득력 있는 교차대구 구조를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로제(Lohse 1971: 14)는 6a절 을 3-8절 구조의 중심으로 본다. 그러나 제안된 교차대구 구조 중 어떤 것도 1:3-8의 명확한 문학적 단위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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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감사의 말: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삶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1:3-23 ) A. 바울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백성의 참된 믿음, 사랑, 소망이 있음을 안다 ( 1:3-8 )

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 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 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 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 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 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 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 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laid up for you in [the heavens, …] which you previously heard [by]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6 which has come to you, just as … also it is … bearing fruit ⌜and increasing⌝ [in all the world, just] as … in you … [from] the day you heard … and understood the grace of God in truth; 7 just as you learned … from Epaphras, our beloved fellow … servant, who is a faithful servant of Christ on ⌜our⌝ behalf, 8 and he also [made clear to] us … your love in the Spirit.

[ 1 : 3 ] 감사는 끊임없는 기도의 자세에서 나온다. 3절의 요점은 “감사

하다”( εὐχαριστέω, ‘유카리스테오’ ) 인데, 이는 독자들의 삶에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

의 효과를 기도하며 생각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절에서 바울과 디모 데가 모두 언급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이 서신의 주요 저자라는 사실에도 불 구하고 감사를 드리는 “우리”가 바울과 디모데 둘 다인 것은 당연하다( 1절에서 논의된 바와 같음; D. Moo 2008: 82; Harris 2010: 13 참고 ).

그러나 바울이 저자이고 디모데

는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바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 따라서 Sumney 2008: 32를 보라 ).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나”라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으로도 뒷받침 된다( 1:23-25,

29; 2:1, 4-5; 4:3-4, 8, 13, 18[“나의”]; 참고, Lohse 1971: 14 ).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라는 문구로 감사를 드리는 것은 전형적이 지 않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바울은 아버지와 예수를 연결할 때 통상적으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구 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골로새서의 표현이 때때로 다른 곳에서도 바 울 서신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차이를 크게 신경 쓰 지 않아도 된다( 고후 1:3; 갈 1:1[“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 또한 벧전 1:3은 고 후 1:3과 거의 동일하다 ).

다른 표현이 나타난 것은 단지 문체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

2)

이다.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때때로 왕이나 주인에게 적용되는 것처 럼 단순히 경의를 표하는 칭호가 아니라 헬라어 구약에서 “주”( κύριος, 스’ ) 에

‘퀴리오

대한 언급이며, 이는 70인역에서 여호와에 대한 전형적인 헬라어 번역

2) 그러나 무(D. Moo 2008: 83)는 그리스도의 최고 위치를 ​​강조하는 편지에서 그 표현은, “아버 지”(Father)에 대한 2절의 독특한 언급과 “아버지”(the Father)에 대한 12-13절의 독특한 언급과 함 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께 단단히 기반을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73


골로새서

이었고( 참고, Fee 2007: 20-27, 179, 577-578, 631-638 ) 또한 이교도들이 자기들의 신에 대해 사용한 단어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단 어다.3)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여기서 바울의 서두 감 사는 선행하는 기도의 자세와 행동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항상 너희를 위해 기도할 때[즉, 그때마다]……감사를 드린다.” 바울 서신 다른 곳에서 서두의 감사 직후에 오는 기도에는 일반적으로 독자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 운 역사에 대한 약간의 회상이 포함되고, 그 뒤에 그들의 믿음의 양상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성장하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심의 표현이 뒤따른다( 롬 1:8-11; 엡 1:15-17; 빌 1:3-6; 골 1:3-11; 몬 4-6절; 참고, 고후 1:11 ).

이 다른 서두 감사 표현들은 바울

이 먼저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에 대해 기 도하면서 묵상하고 그런 다음 이것으로 인해 바울이 그 은혜에 대해 하나님 에게 감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런 패턴을 드러낸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3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지 바울이 감사할 때 기도하고 있다거나 감 사가 기도의 일부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다른 서신 서두에서처럼( 빌 살전 1:2; 몬 4절 ),

1:3-4;

신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지를 기도로 회상하

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1:6, “너희는 진 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에 주목하라 ).

바울의 감사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이것이 “항상”( πάντοτε, ‘판토테’ ) 의 의미일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은 이 단어가 “감사를 드

리다”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문자 그대로 하루 중 매 순간 감사를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 시간에 정규적으로 감사를 드린다는 의미다( O’Brien 1982: 10 ). 그러나 “항상”이라는 단어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다”라는 구절 바로 앞에 나오고, 9절의 “우리는 기도하며( προσευχόμενοι, ‘프로슈코메노이’ )

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라는 구절은 “기도하다”에 대한 여기

3절의 문구를 직접 전개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Schweizer

1982: 32 ),

“항상” 4)

이라는 단어는 “기도하다”를 수식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높아 보인다. 그러 3)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주”(‘퀴리오스’)의 배경과 사용, 그리고 신약에서 신 을 지칭하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된 것에 대해서는 W. Foerster and G. Quell, TDNT 3:1039-1095 및 H. Bietenhard, NIDNTT 2:510-520을 보라. 4) 일부 번역은 “항상”(‘판토테’)이 “감사를 드리다”(‘유카리스테오’)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RSV, NRSV, NIV, TNIV, HCSB, ESV, NET). 그러나 이 단어는 “기도하다”(‘프로슈코메노이’)를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한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ASV, KJV, NASB, Douay, NLT, NJB). 에아디(Eadie 1856: 6)는 첫 번째 견해를 선호하고 이런 견해 중 하나를 지지하는 이전 주석자들을 나열한다. 로버트슨(Robertson 1934: 473)은 어느 쪽으로든 쉽게 갈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항상”은 편지 서두에서나(고전 1:4; 살전 1:2; 살후 1:3; 몬 4절[?]) 그 외

의 곳에서나(엡 5:20; 살후 2:13) “감사를 드리다”를 수식한다. 또한 부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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