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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서문┃
내가 소천하신 프레더릭 브루스를 이어 이 주석 시리즈의 편집장직을 맡 기로 했을 때, 이 시리즈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이 세 권 있었다 ( 마태복 음, 목회서신, 유다서-베드로후서 ). 이 책은 내가 편집장이 되어 처음 맡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우여곡절 끝에 이 세 권 중에 이 책이 처음으로 빛을 보게 되 는 데 15년 정도 걸렸다 ( 다른 두 권도 1-2년 안에 나올 것이 확실시된다 ). ‘고대하던’ 세 권 중 한 권에 ‘편집장 서문’을 쓰는 것은 편집장에게 큰 기쁨이다. 이 책을 교계와 학계에 소개하는 것은 사실 상당한 특권이다. 원래 편집 장이던 네드 스톤하우스 교수가 이 책의 저술 계약을 맺은 지 40년 정도가 지났으나, 몇 가지 이유로 결실을 보지 못했고, 1990년에는 이 주석 저술 가능성을 두고 타우너 박사가 먼저 연락했다. 그러던 중에 필립 타우너가 리젠트 대학에 초빙 교수로 1년 동안 재직하면서, 다정하고 견고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그래서 1995년에 크게 기쁜 마음으로 필립에게 NICNT 주석 저술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필립도 그 제안을 수락하면서 UBS에서 번역 고문으로 전임 사역을 하는 것 외에 두어 가지 다른 일도 겸하고 있음 을 알렸다. 이 주석을 접하는 것이 기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타우너 박 사의 박사학위 논문도 목회서신의 몇 가지 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을 다룬 것이었으며, 1989년에 출간되어 이후 목회서신 참고문헌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그는 ( 자신의 지도 교수인 ) 하워드 마셜 교 수 곁에서 마셜 교수의 ICC 목회서신 주석 저술을 도우면서 본문을 충분히
세심하게 살피는 경험을 무수히 겪게 되었다. 이로써 타우너 박사는 목회서 신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하면서 이에 대해 고유의 접근법 과 이해를 개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주석을 편집하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나도 20년 정도 전에 목회서신 주석을 출간해 본 적이 있지만, 이 책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타우너 박사는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바울의 사역이라는 구도 안에서 목회 서신 이해를 위해 진정으로 새롭고 고무적인 선택 가능성을 제시한다. 타우 너 박사는 학계의 논의에 가담하는 일에도 독단적이지 않고 논쟁적이지도 않으면서 고유의 통찰로 바울 사역에서 목회서신이 가졌을 의미를 살핀다. 교계와 학계에 이 책을 기쁨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을 통해 21세기 교회에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기를 권 한다. 고든 피
┃ 저자 서문┃
새로운 주석서를 출간하는 저자에게 이미 같은 책을 다룬 주석서가 여러 권 나온 상태에서 굳이 주석서 한 권을 추가하는 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하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 입장을 해명하자면 두 가지 역사적 의의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 NICNT 시리즈에서 목회서신을 다룬 책을 출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신약 성경 서신서와 나의 개인사도 어느 정 도 배경이 되었고, 이로 인해 굳이 내가 이 주석을 쓰려고 한 이유를 묻는 질문을 더 살펴야겠다. 이야기는 내가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에서 20년 넘게 일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상당한 시간을 디 모데전후서와 디도서와 관련된 작업에 할애했다. 박사과정 연구를 출발점 으로 학술지 게재 논문 여러 편, 박사학위 논문을 기반으로 한 단행본 한 권, 짧은 분량의 주석서 한 권 등 목회서신에 대한 초기 출간 활동이 있 었다. 그리고 좀 더 긴 분량의 주석서를 구상하고 있었을 때, 하워드 마셜 교수의 요청으로 애버딘으로 돌아가 그의 ICC 목회서신 주석 저술 작업을 돕게 되었다. 당시 고든 피가 나에게 지금의 주석서 저술을 요청했다. 학술 적인 주석서에 대한 강도 높은 협력을 끝내고 2년이 흐른 후에도 나는 이들 목회서신에 대해 정도를 불문하고 내게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는 확신이 들 었다. 그래서 결국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입었던 ICC 프로젝트를 보면 ( 주석을 보라 ), 실망시키지 않고 이 주석서를 독특하게 만들 요소 몇 가지만 극히 간략하 게 언급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 서론을 보라 ). 첫째, 저작성과 관련하여 소위
“위명 이론”( pseudonymity ) 이라고 부르는 견해에 대하여 마셜 교수와 공감했 던 불편함이 이 책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까다롭고 획일적 인 (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 학계의 합의점에 대한 나의 의문에서는 입장을 달리 했다 ( 서론을 보라 ) 둘째, 나는 이 세 편지의 정치, 사회, 종교, 기독교적 배경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취했다. 특별히 관심을 둔 것은 에베소와 그레데의 생활과 인식에 영향을 미쳤을 만한 지배적인 문화 운동과 역사의 영향력이다. 이런 학문 작업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과잉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달리 보았더라면 밝혀내기 어려운 해석에 대해 어느 정도 유용한 단서를 놓치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충분히 이에 대해 알려서 내가 재구성해 본 것을 설명할 것이다. 셋째,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해석에서 구약 성경이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울 연구에서 바울 사도가 교회와 나누기를 원했던 세계 관 체계가 ( 바울에게는 헬라어로 된 ) 유대 성경에 전해진 것과 같은 이스라엘의 이 야기라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이었다. 본문 상호 관계에 대한 연 구를 보면 신약 성경 기자가 유대 성경에 접근한 방식은 다분히 의도적으 로 명시적인 인용보다는 훨씬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청자나 독자를 이야기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도 하나님의 구속 내러티브 안에 있음을 ( 그리 고 이를 통해 평가됨을 )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렇게 하는 이유도 꽤 놀라울 수 있다. 나는 주석 전체적으로 본문 상호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바울서신을 보면 이와 비슷하게 세계관을 형성했던 문화적 배경에 관여 한 경우가 더 나온다. 이런 관여가 단순히 의사 전달이 쉬워지도록 통용 관 념이나 언어를 활용하려는 것 ( 즉, 상황화의 의도 때문 ) 이 아니라 지배 관념을 공 격하고, 반박하며, 전복하려는 의도도 고려했을 가능성으로 인해 필연적으 로 언어와 개념의 유사성도 탐구해야 한다. 이 세 편지의 저자는 “신현”, “경건”, “구주” 같은 언어는 사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단순히 통용된다는 이유로 자선과 후원 같은 지배적인 특징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이런 것들은 제국 제의를 선전하고 촉진하는 데 두드러진 것들이고, 바울이 복음 을 전하기 위해 이런 자료를 활용한 것은 지적인 싸움을 몰아붙여 로마 패 권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나는 다양한 지점에서 이런 대응 을 탐구하면서 해석을 위한 제반 문제도 다루었다. 그래서 나는 ( 무엇보다 ) 이들 몇 가지 방법을 따라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교회, 세상 속에서의 사명에 대해 생생 한 메시지와 신학을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무수히 많은 선배 학자 들의 업적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들을 공평하게 다루고 충분히 적용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학계의 문헌은 선별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각주는 문헌 목록을 담아 두는 용도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들의 글을 직 접 인용했다. 이들의 글을 보면 논점, 배경, 언어, 문화에 대한 어떤 깨우침 을 주는 때가 있기 때문이고 간혹 고려할 가치가 충분할 정도로 흥미로운 대안도 제시하기 때문이다. 최근 영어 주석서 ( 예, 마셜, 존슨, 마운스 ) 는 이 세 편지에 대한 제임스 엘리엇 과 브루스 메츠거의 본문비평적 발견을 공정하고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래 서 나는 헬라어 본문의 모든 이독을 살피면서 이런 수고를 반복하지는 않 기로 했다. 오히려 본문상의 이독이 주해상의 결론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 는 지점으로만 논의를 제한하기로 했다. 이 저술 작업에 여러 방식으로 기여한 사람들이 많다. 벗이며 학자인 두 분에게 먼저 감사한다. 하워드 마셜 박사에게 크게 도움을 받았다. 먼저 그 의 연구 조교로 나중에는 동료이자 공동 연구자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연구 작업을 수행할 기회를 얻었다. 마셜 박사와 공 동 작업을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 나는 또 고든 피 박사에게도 깊은 사의를 표한다. 그의 요청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됐을 뿐 만 아니라, 그의 우정과 교제, 작업이 더딜 때 그가 보여 준 인내와 격려, 초 고를 두고 철저하고 예리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그리스 도인 신사요 형제인 이 두 분은 자기 학생과 동료에게 헌신하는 데 주저함 이 없었다. 내 삶은 이들의 관용으로 훨씬 풍성해졌다. 내가 깊이 채무감을 느끼는 또 한 분은 어드만스의 밀트 에센버그다. 수 고를 아끼지 않으면서 지치지도 않고, 오류를 잡고 표현을 다듬는 일에 확 실한 도움을 주었다. 그의 통찰과 전문성과 격려를 높이 평가한다. 덴버 신학교의 고급 헬라어 과정 학생들에게 감사하는 일을 놓칠 뻔했다. 2004년 가을에 학생들은 마지막 초안을 분담하여 읽고, 논평을 달았으며, 오류를 찾아내고, 으레 그랬듯이 인내와 의심과 쾌활함과 열린 마음이 섞인 감정으로 내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특히 이 뛰어난 과정에 참여했던 브라이 언 베넷에게 감사한다. 베넷은 그토록 자주 공항을 다닐 때마다 내 기사노 릇을 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나폴레옹 다이너마이트’를 소개해 주 었다. 새뮤얼 토머스 ( 이제는 UBS의 동료다 ) 도 색인 작업 하나를 도와 최후의 순
간에 도움이 된 것에 감사한다.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의 메시아 감리교회 가정 예배 모임 구성원들은 이 책의 완성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 줄리와 폴 색스턴, 로빈과 짐 모리컬, 캐 럴 메인더스, 데비와 데이비드 레이놀즈, 셰리와 마크 행크, 레슬리와 존 윈 터. 모두 감사하다. 아내 앤은 관대하게도 시간을 들여 참고문헌과 색인 작업을 도왔다. 두 딸 레베카와 에린은 이 모험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다. 내 삶에 너희 둘을 보내심으로 내게 복을 주신 것같이 주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풍성하 게 복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영광스럽게도 이 책을 박사이자 목사이신 월터 더넷에게 헌 정한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부터 목사님이 학문적인 탁월함과 그리스도인 의 성숙함에 모범을 보였기에, 내 삶에 작용한 역할에 깊이 감사한다. 목사 님은 NIGTC 누가복음 주석을 통해 내게 하워드 마셜을 소개했고, “일차 자 료”의 중요성도 알려 주었다. 목사님은 친절하고 능숙하게 완성된 초고를 살펴 주었다. 목사님의 도움에 감사한다. 필립 타우너
서론과 논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는 대략 18세기부터 ‘목회서신’으로 알려 졌으나,1 ) 이미 2세기부터 더 넓은 범위의 바울 문헌 가운데 포함된 상태 였다.2 ) 신약 성경을 해석해 보면,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 세 편지를 한꺼번에 논의해야 하는 좋은 이유 ( 세 편지는 바울 문헌에서도 독특하다 ) 도 있다. 그래도 이 때문에 해 석가들이 개별 편지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독자성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첫째, 이들 셋만 바울이 교회가 아닌 동역자 개인에게 보낸 편지다. 둘째, 세 편지는 주제 때문에 바울의 다른 편지와 구별된다. 그래도 이 기준 은 적용하는 데 조심해야 한다. 이 기준은 바울의 편지라면 무엇이든 이 특 징을 가질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셋째, 언어 및 개념의 차원에서 바울 의 다른 편지와 비교하여 중요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모두 드러난다. 이들 유사점과 차이점은 바울의 동역자에게 보낸 편지를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 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관찰 사항이지만, 대부분 이로 인해 현대 학계에 미 치는 순수한 효과를 보면 이 세 편지를 다른 바울의 편지와 멀어지게 하고
1 ) D.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0), 584 의 논의를 보라; 관련 자료로 P. Anton, Exegetische Abhandlung der Pastoral-briefe Pauli an Timotheus und Titum (ed. J. A. Maier; 1753-1755); 참고, R. F. Collins, Letters That Paul Did Not Write: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the Pauline Pseudepigrapha (Good News Studies 28; Wilmington, DE: Michael Glazier, 1988), 88.
2 ) 이는 이레네우스(Irenaeus)가 영향을 미친 결과다. 관련 논의는 II 단원의 “A. 수용과 정경화”, 35-39를 보라.
독자적인 문헌으로 엄격히 구별되게 할 뿐이었다. 넷째, 결과적으로 이 세 편지, 즉 ‘목회서신’은 최근에 바울 신학 논의에서 그 입지를 확실히 세우려 고 무척 노력했다. 이 주석서는 방법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출발점으로 이들 세 편지를 ‘목회 서신’으로 이해하는 현상 이면에 놓인 관념과 명칭 자체를 폐기하고 무엇 보다도 이들 세 편지를 개별 문학 작품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 물론 세 편지의 문 헌상 지위를 전제로 둔 여러 독법과 해석을 가리켜 쓰는 말은 예외 ). 그러나 이 대안적 독법을 소개하기 전에 준비 과정으로 최근 학계에서 이들 세 편지가 어떤 부침을 겪었는지 더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겠다. 학계에서 세 편지는 한꺼번에 운명 이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비롯한 서론의 여러 내용을 전개하기 앞 서 세 편지를 개별적으로 읽게 될 서론의 논제와 구성을 논해야 하겠다. 주석 저술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성경 기록에 대해 서론을 제시하는 것은 표준 관습이 되었다. 서론에서는 해석을 조명할 기록물의 배경을 형성하는 무수한 ( 역사, 사회, 문학, 신학 등 ) 문제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 게다가 이 서론 으로 인해 성경 기록은 주로 현대 학자들의 합의점에 의해 확립된 해석의 틀 안에 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주제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주제 도 성경 기록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에 배경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디모 데전후서와 디도서의 경우 서론 구성 방식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복 잡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이 세 편지를 진짜로 보는 입장이든 특별히 바울 이후 어느 시점에 기록된 위명 저술로 여기는 입장이든 공통으로 취하는 특별한 접근법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 편지를 단일의 문헌으로 읽는 경향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문헌을 세 권으로 구성된 책으로 보아, 세 부분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두 부분과 구별해서 읽을 수 없다는 말 이고, 한 부분에서 이루어진 관찰이 있으면 이는 나머지 둘의 해석에도 즉 시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이 문헌에 어느 정도 장점이 있더라도 이 세 편지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다 른 바울 기록에는 없는 문학적 개념적 요소가 개별 편지의 해석을 조명할 수 있는 요소를 초월하여 부수적 맥락의 지평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만 어 느 정도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이 문헌 접근법에 내재한 한계는 이로부터 파생될 해석을 위해 어떤 이익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 독법을 채택 하는 것은 이들 세 편지의 본질에 대한 일단의 추정과 그토록 긴밀하게 연 결되어 있어서 여러 주석서에서 서론을 쓰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세 편지를 하나의 문헌으로 읽는 독법은 그 문헌 자체의 서론을 요구 한다. 세 편지를 하나로 묶게 된 것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세 편지만 동역자에게 보내는 편지이고, 분량 때문에도 세 편지는 정 경에서 바울 문헌의 거의 끝에 한꺼번에 나오게 되었다. 이 문헌 독법 이면 에 그리 분명하지 않은 해석 근거 중에는 보수 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추정 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세 편지가 원래는 사도행전이나 다른 바울서신이 형성한 연대기의 틀 안에 위치할 수 있는 다른 바울서신 다음에 나온 것 이라는 것이다. 세 편지가 바울 이후에 나온 것이라는 주류의 관점이 내린 결정도 비슷하게 이 문헌 이론을 강화한다. 이 주석서가 전제로 두는 것은 다른 이들도 공유하는 것으로 디모데전후 서와 디도서가 바울이 동역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쓴 세 편의 개별 편지로 보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세 편을 개별 서신으로 읽지 말아야 할 설득력 있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편이 문헌화되어 오래도록 미친 영향을 상쇄하려면, 세 편지를 어떻게 “소개해야” 개별 편지로 해석하고 주 해할 만한 배경이 성립되겠는가. 세 편지를 한 권의 책으로 다루면서 이들을 개별 서신으로 읽을 이상적인 방식은 무엇보다도 먼저 일반 서론을 제시하는 것 같다. 여기서는 세 서신 에 대한 해석사와 최근 학계의 접근법에 대한 설명과 평가 같은 전반적인 문제를 다룰 것이다. 그러면 역사적 배경과 시기와 신학과 관련된 문제는 개별 편지의 주석을 다루기에 앞서 구체적인 서론의 몫으로 둘 수 있을 것 이다.3 ) 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절차를 따르지 않기로 했다. 첫째는 실천적인 관심사 때문이다. 나는 서론이 보통 앞에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 으며, 특히 새롭게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편지의 신학과 상황에 대한 서론이 길을 잃지 않을까 우려된다. 내가 보기에 더 중요한 둘째 이유는 그러면서 도 개별 편지가 어느 정도 상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 이다 ( 아래를 보라 ). 그래서 구체적인 언어와 개념의 요소가 실제로 극히 제한 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연속성 때문에 개별 편지의 독특성이나 독립성이 침해되는 경우는 전혀 없다 ( 참고, 데살로니가전후서나 고린도전후서 ). 결과적으로 동 역자에게 보낸 이 편지들이 이루는 묶음의 본질을 통일성과 다양성의 차원
3 ) 참고, 훌륭한 모델이 Johnson, 13-99, 135-154, 319-330에 나온다. 반대로 오베를리너 (Oberlinner)가 세 권으로 낸 저술은 편지를 별개의 기록으로 소개하는 구성에서는 완벽했을지 몰 라도(각 권마다 각 편지를 다루게 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인 주제가 되는 서론 문제는 1권 앞부 분에서 다룰 수밖에 없었다.
에서 묘사하기 위해 나는 개별 편지를 다루기에 앞서 단일의 서론 단원으
로 서론적 논의를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기독교 최초기에 나온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신약의 편지를 역사적인 상황 가운데 위치시키려면 시간상으로 현대 번 역본의 기초를 형성하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검토에서 시작하는 것이 최선 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후대의 복사본이나 훨씬 후대에 이루어진 절충적인 재구성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 본이 형성된 자료에 대해 기술하기에 앞서 우리는 초기에 이 세 편지를 수 용하고 이용한 역사를 검토할 것이다. 그래야 이 세 편지에 사도의 기록 이라는 권위를 인정하게 된 통찰을 얻은 교회의 초기 용례와 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4 )
A. 수용과 정경화 고대 교회에서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 어느 정도의 지위를 부여했는지 에 대해 현대 해석가는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이들 세 편지는 분명히 정경 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세 편지는 언제부터 바울의 편지로 권 4 ) 이 문제를 충분히 다룬 경우로 Johnson, 20-26; Marshall, 2-8 같은 것을 고려하면, 이 책에서는 초기 증거를 철저히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위를 입증했을까? 이에 대한 증거가 간혹 의심스러운 것은 초기 그리스도 인 작가의 언어가 세 편지를 알고 있음을 보이는지 아니면 단순히 어법이 비슷했을 뿐인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폴리카르포스 ( Polycarp, 약 110-135 ) 5 ) 와 클레멘스1서6 ) 에서 나온 증거 ( 이들의 어법 과 우연한 인용 ) 를 보면 이들 초기 증인이 세 편지를 알고 이용했음이 설득력 있게 드러난다. 폴리카르포스가 바울 문헌 전체를 알고 이용한 것은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이 문헌 모음집 안에 속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암시한다. 이레네우스 ( 약 120/140-200/203 ) 는 디모데전서를 “그 사도”에게 귀속시킨다.7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Clement of Alexandria, 약 150-211 ) 는 디모데전후서와 디 도서를 인용한다.8 ) 결과적으로 동역자에게 보낸 이 세 편지에 대하여 부여 한 지위는 초기 교부를 넘어 이후 2세기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 말하는 것이 안전해 보인다.9 ) 가장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 편지가 무라 토리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점인데, 이 정경은 2세기 말 무렵에 세 편지의 수용 사실을 거의 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10 ) 마르키온 ( Marcion ) 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자신의 “정경”에서 누락시 킨 것이 세 편지가 2세기에 권한 있는 지위를 가졌는지의 문제를 논하는 일 에 주의할 이유로 자주 거론된다. 테르툴리아누스 ( Tertullian ) 의 어느 진술에 따르면 마르키온은 이 세 권이 자신의 권한 있는 모음집에 드는 것을 거부 했다고 한다.11 ) 이것을 정확한 진술로 추정한다면, 마르키온이 그렇게 한 것이 세 편지에 자신의 계획에 적대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인
5 ) Polycarp, To the Philippians 4.1(딤전 6:7, 10 언급); 참고, 5.2(=딤전 3:8-13), 이에 대해서는 W. R. Schoedel, Polycarp, Martyrdom of Polycarp, Fragments of Papias (The Apostolic Fathers, vol. 5; Camden, NJ: Nelson, 1965), 4-5; D. A. Hagner, DLNTD 86을 보라.
6 ) 클레멘스1서 2.7; 60.4; 61.2를 보라(이 본문은 각각 딛 3:1; 딤전 2:7; 1:17을 떠올리게 하는 언 어를 사용한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와 바나바 서신의 저자도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알았 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The New Testament in the Apostolic Fathers (by the Oxford Society of Historical Theology; Oxford: Clarendon, 1905), 37-40을 보라. 그러나 참고, Johnson, 20 n.16.
7 ) Against Heresies 1.pref. (딤전 1:4 인용); 다음도 보라. 4.16.3(1:9 인용); 5.17.1(2:5 인용); 3.1.1(3:15 인용); 1.23.4와 2.14.7(6:20 인용).
8 ) Stromateis 1.1(딤전 5:21); 1.9(6:3-5 인용); 등; 4.7(딤후 1:7-8 인용); 1.10(2:14 인용) 등; Exhortation 1(딛 2:11-13; 3:3-5 인용).
9 ) F. F. Bruce, TheCanonofScriptur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8), 176을 보라.
10 ) 이 문제에 대해서는 Bruce, Canon, 158-169를 보라; 2세기에 대해서는 E. Ferguson, “Canon Muratori: Date and Provenance,” in Studia Patristica 17 (ed. E. A. Livingstone; New York: Pergamon, 1982), 677-678을 보라.
11 ) Tertullian, Against Marcion 5.21. B. M. Metzger, The Canon of the New Testament: Its Origin, Development and Significance (Oxford: Clarendon, 1987), 159; Marshall, 7-8의 논 의를 보라.
II. 기독교 최초기에 나온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A. 수용과 정경화
지12 ) 아니면 마르키온이 세 편지를 준 ( 準 ) 바울적이라고 여긴 것인지 확정 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부는 세 편지가 누락된 것 을 마르키온이 가졌던 바울 기록 사본에 ( 이미 존재하던 ) 세 편지가 없었거나13 ) 세 편지가 아직 생산되지 않아서 마르키온이 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의 미로 설명한다.14 ) 마르키온의 활동 ( 여기에는 성경을 다소 독단적이고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 은 말하자면 교회에 영감을 주어 정경의 경계를 확정하게 하는 편이었지만,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초기 지위 문제에 대한 관련성은 무 시해도 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논평을 보면, 이미 마르키온이 활동하던 시 기에 세 편지가 존재했고 반이단적인 주제15 ) 로 인해 세 편지 ( 최소한 디모데전후 서 ) 를 거부하려는 광범위한 추세로 마르키온이 세 편지를 누락한 것이 그의 정확한 논리가 모호한 상태임에도 의도적임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편지가 폴리카르포스 활동 시기 ( 110-135; 아마 클레멘스 1서가 나오던 시기 ) 이전부터 이후 교회의 초기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알려지고 바울의 기록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지가 나온다.16 ) 이런 관찰 로 세 편지의 저작성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 편지를 초기 교부 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한 정보는 진정성에 대한 논란을 만들지 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게다가 폴리카르포스의 긍정적인 이용 이나 마르키온의 거부 모두 세 편지의 기원이 현대에 합의에 이른 일반론 이 허용하는 시기 ( 아래를 보라 ) 보다 뚜렷하게 더 이른 시기임을 말해 준다. 세 기 전환기에 쓰인 편지가 10-30년 정도 지난 시점에 바울 사역 중에 나온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후대에 세 편지를 의식적으로 위명 편 지로 받아들였는지도 또 하나의 의문점이다. 어쨌든 ( 클레멘스1서의 경우처럼 더 이
12 ) 예, L. T. Johnson, Letters to Paul’s Delegates (Valley Forge,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6), 24.
13 ) 예, Bruce, Canon, 131, 138.
14 ) 예, H. Y. Gamble, The New Testament Canon: Its Making and Meaning (Philadelphia: Fortress, 1985), 42; L. M. McDonald, The Formation of the Christian Biblical Canon (rev. and expanded ed.; Peabody, MA: Hendrickson, 1995), 157, 141. 폴리카르포스가 마르키온 에 대항하여 세 편지를 썼다는 관점(폴리카르포스가 실제로 디모데전서를 인용한 증거를 고려 하면 이는 극도로 불가능하다)은 Hans von Campenhausen, “Polykarp von Smyrna und die Pastoralbriefe,” in idem, Aus der Frühzeit des Christentums (Tübingen: Mohr [Siebeck], 1964), 197-252; H. Koester, History and Literature of Early Christianity, vol. 2: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1982), 297-308을 보라.
15 ) 참고, Clement, Stromateis 2.11.
16 ) Johnson, 22-26을 보라.
른 시기의 증명도 가능하지만 ) 초기 2세기의 수용과 사용을 보여 준다는 증거에 대 해서 주류의 견해인 위명 관점에서 적절한 해명이 나온 적이 없다. 그 외에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바울의 편지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바 울에게 귀속되는 나머지 편지와도 조화를 이루며 이용되었다. 이런 모습은 당연히 세 편지를 마치 바울 이후에 후대 교회에 바울 신학을 부활시키려 고 쓴 편지인 것처럼 보아 고립시키거나 세 편지를 “목회적” 편지로 보아 그 적용을 지도력이나 교회 질서 문제로 제한하려는 근간의 경향에 대한 교정을 시사한다. 주석 과정에서 논증하겠지만, 세 편지에서 바울은 자신이 여러 교회에 보낸 더 긴 서신 ( 특히 고린도전서 ) 에 나온 것과 비슷한 여러 가지 문제를 말한다. 어쨌든 초기 수 세기 중에 나온 증거에서는 이들 세 편지가 특별히 교회 치리 문제에 유용한 것으로 인정되어 이단에 맞선 논쟁에서 세 편지에 의존하면서도 세 편지가 바울의 나머지 편지에서 이탈하여 전혀 다른 영향권으로 들어갔다는 암시는 없다. 하지만 무라토리 정경은 ( 빌레몬서 와 더불어 ) 동역자에게 보낸 세 편지를 바울이 교회에 보낸 일곱 편지 ( 교회서 신 ) 와 분명히 구별하여 교회 치리 문제와 관련하여 개인에게 보낸 편지 ( 개인
서신 ) 로 분류한다.17 ) 초기 증거와 관련하여 고려할 마지막 문제는 P 46 ( 약 200년 ) 으로 알려진 파 피루스가 만들어 낸 문제다. 이 파피루스에는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후 서, 디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 ( 히브리서 포함 ) 가 나온다. 이 파피루스는 마지막 일곱 장을 찾지 못했고, 이것이 데살로니가로 보냈으나 상실한 편지 ( 그리고 아마도 빌레몬서 ) 를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지만, 누락된 다섯 편지 전부 포함하기에는 충분한 공간이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일부는 P46에 바울의 교회서신만 담겨 있고, 다른 ( 잃어버 린 ) 파피루스는 개인서신에 할애되었다고 본다.18 ) 이에 반대하여 다른 이들 은 실제로는 P46에 바울 문헌 전체가 담겨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 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필사자가 그렇게 의도했다는 것이다. 필사가 진행되
17 ) 참고, Johnson, 25의 논의. 교회사의 이후 시대에 이들 세 편지를 수용하고 활용한 것에서 배울 것이 많다. 19세기까지는 꽤 획일적으로 세 편지를 바울의 편지로 권위가 있다고 인정했다. 존 슨(Johnson, 26-42)은 세 편지에 대한 접근법과 방법론의 개선(그리고 예상되는 특이점도)이 어떻게 발전하면서 정경 지위가 지속적으로 확증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18 ) J. D. Quinn, “P46 — the Pauline Canon?” CBQ 36 (1974): 379-385; Johnson, 17-18을 보라; 참고, 렘 4. 여러 부정적인 관점에 대해서는 J. Duff, “P46 and the Pastorals: A Misleading Consensus?” NTS 44 (1998): 578-590을 보라.
II. 기독교 최초기에 나온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B. 본문과 번역
면서 페이지마다 기록되는 문자의 수를 늘리는 경향은 원래 의도한 수19 ) 보다 더 많은 페이지가 추가되었을 가능성과 더불어, 어쨌든 누락 자체를 가지고 필사자가 세 편지를 알았는지나 필사자가 세 편지를 어떻게 여겼는 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P46에 대해 알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정경성 그리고/또는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 한 결론을 전혀 내릴 수 없다.20 )
B. 본문과 번역
NICNT 주석에서는 독자들을 위한 방향 설정과 도움으로 성경 본문의 번 역을 제시하는 것이 표준 관습이다. 내가 나름대로 번역한 성경 번역본을 제시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어 번역본에 하나를 추가하기보다는 나로서는 TNIV 본문을 그대로 넣기로 했다. 한편으로 TNIV의 구판인 NIV가 널리 읽히고 이 주석 시리즈의 독자층을 구성하는 분들의 다수가 본 격적으로 활용하거나 참고하는 책이다. 반면, TNIV는 NIV의 개정판으로 본 문의 면밀하고 철저한 주해 조사의 상황에서 검증받을 가치가 있다. 여러 영역본과의 비교와 논의를 통해 본 주석서는 헬라어 본문을 연구해야 제시 된 번역본의 수정이 보장되는 것으로 보이는 지점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다 룰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주해가 기반으로 둔 본문은 네스틀레-알란 트 ( NA ) 27판 ( =연합성서공회[UBS] 4판 ) 이다. NA27이 지지하는 본문이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고 생각하 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충분히 많은 학자가 나보다 먼저 본문을 확립 하는 문제를 자세히 검토했기에, 나는 본문비평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논 하지 않기로 했다.21 ) 본문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해석상 특별히 중요하거나 학계에 불일치가 있는 부분을 밝히는 경우로 제한했다.
19 ) Duff, “P46 and the Pastorals.”
20 ) Marshall, 6-7도 보라. 참고, N. A. Dahl, “The Particularity of the Pauline Epistles as a Problem in the Ancient Church,” in Neotestamentica et Patristica (NovTSup 7; Leiden: Brill, 1962), 261-271.
21 ) 특히 J. K. Elliott, The Greek Text of the Epistles to Timothy and Titus (Studies and Documents XXXVI; Salt Lake City: University of Utah Press, 1968); B. M. Metzger,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rev. ed.; New York: UBS, 1975), 639-656; Marshall; Johnson; Johnson, LetterstoPaul’sDelegates; Mounce를 보라.
NA와 UBS의 경우 해당 위원회가 채택한 방법론으로 만들어진 헬라어 본 문에는 고유의 이론적인 “구상”이 담겨 있다. 학자들이 다양하게 평가되는 기준 (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 최초의 증거와 최후의 증거, 짧은 독법, 어려운 독법 등 ) 22 ) 을 가지고 작업하면서 세우는 목표는 최고 ( 最古 ) ·최고 ( 最高 ) 인 증거를 가지고 원래의 원본 형태를 ( 이상적으로 ) 반영하는 신약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를 들
어 NA27이 제시한 본문이 절충적인 본문 원칙의 적용에 근거하여 대다수가 합의에 이른 것일지라도, 그것이 실제로는 교회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적 이 없는 본문 형태를 반영하는 경우는 당연히 문제다.23 ) 이들 세 편지의 경우 가장 빠른 시기가 AD 200년 무렵이고 가장 늦은 시 기가 AD 700년 이후인 두 파피루스에 그것도 디도서의 일부만 담겨 있는 상황이다 ( P 32, 딛 1:11-15; 2:3-8; P 61, 3:1-5, 8-11, 14-15 ). 디모데전후서를 지지할 만한 파피루스와 관련한 사정은 더 불확실하여,24 ) 두 서신의 완전한 본문이 처 음으로 나온 것이 시내산 언셜체 사본 ( 4세기 ) 이고 이후 알렉산드리아 사본 이 나왔다 ( 5세기 ) 25 ) 이들 동역자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지지가 충분하지 않 아 보이는 것은 초기 출처, 활용, 수용, 권위 있는 지위가 반영되지 못한다 는 점과 이런 증거의 불안정한 상태가 더 깊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드러 난다. 존슨이 지적하듯 고린도후서 같은 논란이 없는 바울의 편지는 P46에 나올지라도 그 외에 현존 파피루스에 나오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점을 염
22 ) 헬라어 신약 성경 본문에 대한 방법론과 증거에 대한 소개는 B. M.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2nd e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E. J. Epp, “The Eclectic Method in New Testament Textual Criticism: Solution or Symptom?” in E. J. Epp and G. D. Fee, eds., StudiesintheTheoryandMethodofNewTestamentTextualCriticism (Grand Rapids: Eerdmans, 1993), 141-173; K. Aland and B. Aland,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2d ed.; Grand Rapids: Eerdmans, 1989)를 보라.
23 ) Johnson, 19에서 이 현상에 대한 논의를 보라.
24 ) Elliott, The Greek Text, 13을 보라. 엘리엇은 딤전 1:4-7, 15-16을 담고 있는 파피루스 증 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B. D. Ehrman, The Orthodox Corruption of Scripture: The Effect of Christological Controversies on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에 대한 Johnson, 16 n. 9의 논평을 보고 그가 한 말에 주목하라. 헬라어 쿰란 단편 7Q4에 딤전 3:16-4:3이 담겨 있다고 볼 가능성이 없다는 견해로 J. O’Callaghan, “1 Tim 3,16; 4,1.3 en 7Q4?” Bib 53 (1972): 362-367을 보라. É. Puech, “Des fragments grecs de la Grotte 7 et le Nouveau Testament? 7Q4 et 7Q5, et le papyrus Magdalen grec 17=P64,” RB 102 (1995): 570-584의 평가; Marshall, 10-11의 논의를 보라.
25 ) 그 이후에 대해서는 Codices Ephraemi Rescriptus (fifth century), Codex Bezae Cantabrigiensis (D; fifth century), G (012, ninth century), H (015, sixth century), I (016, fifth century), K (017, ninth century)를 보라.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더 충분한 사본 증거 목록은 Marshall, 10; Elliott, The Greek Text, 13-14; Aland and Aland,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107-128, 246을 보라.
II. 기독교 최초기에 나온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B. 본문과 번역
두에 두어야 한다. “침묵의 논증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 점은 사본 증거의 경우가 가장 확실하다. 신약 성경 파피루스에 디모데전후서가 없다고 해서 세 편지의 시기 설정이나 세 편지의 권위 확인에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26 )
성경 본문에 대한 교부의 인용과 암시가 간혹 정확하지 않고 논란만 더 커지는 입증 자료가 될지라도, 동역자에게 보낸 이 세 편지는 파피루스보다 는 초기 교부 저술에 증거가 더 많다 ( 아래 논의를 보라 ). 이들 권위자에게서 분 명하게 드러나는 수용과 활용 차원을 보면, 세 편지가 바울서신처럼 회람되 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래도 실제로 이들의 완전한 본문 형태 보 존 증거는 중요한 4세기 시내산 사본에 먼저 나온다. 아마 이 편지들이 시 내산 사본 ( 등 ) 에 포함된 것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교회사의 교부 시대에 이들의 유용성과 권위와 사도성을 인정하기로 결정하는 데 기여했을 것 이다.
26 ) Johnson, 18.
I도입 인사 ( 1:1-2 )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 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 어다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command of God our Savior and of Christ Jesus our hope, 2 To Timothy my true son in the faith: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고대의 문학 관습에 따라 바울 저술은 전부 편지로 확인된다. 그러나 고 대에 “편지”라는 범주는 광범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공적 성질과 사적 성질 이 다양한 정도로 있고 광범위한 목적을 가진 기록까지 전부 포함했다. 바 울의 편지는 장르와 기능의 측면에서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바울의 편지 는 오히려 수신자와 수신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 울의 편지는 편지의 기본 사회적 의도를 공유하는데, 이로써 수신자 ( 들 ) 는 ( 거리나 의례상 사회적 지위로 인해 불가능한 대면 소통을 대신하여 ) 대화를 비롯한 여러 소통 행위에 참여한다.1 ) 어느 편지든 유일하게 필수적인 형식적 특징은 인사다. 인사는 전형적으 로 발신자와 수신자를 확인하고 여기에 문안이 추가된다. 한눈에 바울서신
1 ) D. E. Aune, The New Testament in Its Literary Environ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87), 158-182, 특히 158을 보라.
I. 도입 인사 ( 1:1-2 )
은 인사가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실제로 디도서 1장 1-4절 은 바울의 인사 중에서 무척 긴 모습을 보여 준다 ( 참고, 롬 1:1-7 ). 다양성은 편 지가 전개되면서 바울이 움직일 방향성뿐 아니라 채택하려는 어조를 반영 하는 경우가 많다 ( 딛 1:1-4의 논의를 보라 ).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인사는 바울 사 도직의 근원에 크게 집중하고 있으며, 빌립보서의 인사는 이 사도직 주제를 완전히 피함으로써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두 편지 모두 인사말에서 제시 한 실마리를 따라 전개되는 모습을 보인다. 단순히 대화를 시작하는 것 외에도 인사는 소통이 벌어지는 사회적 맥락 도 확립한다. 대면 대화에서 양 당사자가 사회적 지위와 관계의 친밀도로 결정되는 규범에 따라 서로를 부르듯이 이를 대체하는 기록에서도 인사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상대적 지위를 확인하는 가운데 같은 상황을 설정 한다.2 ) 디모데전서 (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도 ) 의 경우 실제 문학적 상황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관계가 허구이든 실제 이든, 이는 실제 바울과 실제 디모데가 이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 해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앞에서 추정한 것과 별도로 인사에는 바울과 디모데 사이의 실제 기록 대 화 사례 외에 암시하는 내용이 없다. 그런데도 이후 편지에 나오는 자료의 혼합 ( 일부는 디모데를 고려한 사적인 자료이고, 일부는 교회를 고려한 공적인 자료 ) 으로 어떤 이 는 “디모데”가 허구적인 패러다임이거나 문학 장치로서 교회와 그 지도자 에게 전하는 가르침을 권위 있게 담아내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보게 되었다. 서론 ( 66-67 ) 에서 주목한 것처럼 다른 특징 중에 사적 교훈과 공적 교훈을 교대로 제시하는 이런 경향은 ‘만다타 프린키피스’( mandata principis, “통 치자의 명령” ) 라고 부르는 헬라 외교 문서와 비슷하다. 본질적으로 통치자나 정부 관리가 보내는 문서였던 이 메모는 자신이 임명한 대표단에게 지침을 내리거나 ( 직무와 의무 사항 ) 통치자든 대표자든 상대 공동체 당국자에게 의사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디모데전서는 이런 장르 특징이 병합된 편지의 모습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편지에서 보인 2인칭 직접 화법과 광범위한 공 적 강론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 S. K. Stowers, “Social Typification and the Classification of Ancient Letters,” in J. Neusner and H. C. Kee, eds., The Social World of Formative Christianity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88), 78-89를 보라.
A. 기록자
인사에서 바울이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자 신을 밝히면서 자기 이름과 직무를 진술하고 자기 직무의 근거에 대해 무 언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자기 이름으로 시작한다. 바울서신의 인사에 완전 한 통일성은 전혀 없지만,3 ) 이들 인사는 모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시작 하여 기록자를 회심한 바리새인이자 이방인의 사도라고 소개한다.4 ) 특히 바울은 자기 혼자 이 편지의 저자라고 확인하고 공동 후원자에 대한 추가 암시는 주지 않는데, 디모데전서 외에 로마서와 에베소서만 이런 경우에 해 당한다.5 ) 해석자가 이를 디모데전서가 바울을 높이고자 했던 위조 문서임 을 보여 주는 징표로 보지 않고,6 ) 이 편지가 무슨 이유로든 오로지 사도 혼 자 기록했을 ( 또는 보냈을 ) 가능성을 무시할 이유는 거의 없다. 바울은 이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묘사한다.7 ) 바울은 그 러면서 일차적으로 이 편지가 그 가르침과 더불어 사도의 권위 아래 있음 을 알린다. “사도”라는 용어가 신약 성경에서 지극히 전문적인 용례로 나온 것을 보면, 이는 부활한 주를 보았고 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임무를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 용어로 교회가 구체적인 직무를 수행하도록 지명한 사 람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 빌 2:25 ), 제일 첫 번째 의미는 바울을 가리키는 말 이었다 ( 참고, 갈 1 ) 8 ) 그래서 바울의 지위는 권위 있는 지도자의 지위였고, 바 울은 하나님에게 임무를 받은 자였다. 바울과 동역자와 교회 사람들은 바울
3 ) 자신을 “사도”로 묘사한 것으로 참고, 롬 1:1; 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 골 1:1; 딤후 1:1; 딛 1:1.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자기 묘사가 없다. 로마서, 빌립보서, 디도서는 바울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노예”라는 용어를 쓴다(딛 1:1의 논의를 보라; 개역개정, “종”). 4 ) 모든 바울서신의 도입부가 말하듯이 사도는 전형적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파울로 스’[Pau/loj]는 아마도 그의 성이거나 로마식 세 번째 이름이었을 것이다; 참고, 행 13:7), 이로 인 해 그의 사역은 이방인 가운데 수행하기에 최적이었다. 사울(Sau/loj, ‘사울로스’)은 사도행전에 만 나온다. M. Hengel, The Pre-Christian Paul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1), 6-15; C. J. Hemer, “The Name of Paul,” TynB 36 (1985): 179-183을 보라. 5 ) 고후 1:1; 빌 1:1; 골 1:1; 몬 1에서는 디모데가, 살전 1:1; 살후 1:1에서는 실라와 디모데가, 고전 1:1에서는 소스데네가, 갈 1:2에서는 익명의 동료들이 공동 발송인의 지위를 가진다. Prior, Paul the Letter-Writer, 37-50; Johnson, Writings, 254; Marshall, 355의 논의를 보라.
6 ) 동의, Oberlinner, 1-2.
7 ) “그리스도 예수”의 순서로 쓴 것은 고후 1:1; 빌 1:1; 골 1:1; 몬 1을 보라(참고, 엡 1:1은 본문 증거 가 나뉜다).
8 ) avpo,stoloj(‘아포스톨로스’). 문헌이 방대하다. 이 개념에 대해 활용 가능한 연구로 H. D. Betz, “Apostle,” n.p., ABD on CD-Rom. Version 2.1a. 1995, 1996, 1997; C. K. Barrett, The Signs of an Apostle (Philadelphia: Fortress, 1972); K. Rengstorf, TDNT 1:407-447; J.-A. Bühner, EDNT 1:142-146; P. W. Barnett, DPL 45-51.
I. 도입 인사 ( 1:1-2 ) A. 기록자
이 이 직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리는 사건 ( 행 9:1-19; 갈 1:15-16 ) 과 실제로
이 부르심으로 바울이 구체적으로 이방인을 향하게 된 것 ( 딤전 2:7; 딤후 1:11 ) 에 대해 잘 알았을 것이다. 이러한 이력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보낸 자”로서 교회 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의무와 권한을 얻었다. 디모 데가 자신의 종속적인 지위를 이해하기 위해 아마도 권위에 대한 증거가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아니었을 것이지만, 모든 바울서신이 그렇듯이 이번 에도 바울을 대표하는 자가 에베소에서 들어야 하는 사항 ( 교정을 실시하고, 치리 를 처분하며,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 ) 에는 그 뒤에 사도가 있어서 설득력이 더 컸다. 에베소의 신자들이 디모데가 바울에게 책임을 졌다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 도 교회 안에서 사도의 권위 있는 대표자처럼 디모데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스도 예수”의 연관성이 기준이었다.9 ) 속격 관계는 바울의 임무와 권위의 근원을 가리키며( 갈 1:12 ), 바울이 복음을 선 포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참고, 고전 1:23 ) 10 ) 셋째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만든 부르심의 기초나 근원을 제시한다. 바울은 그러면서 자신의 부르심 이면에 놓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행위를 확인하고, 디모데전서의 신학과 기독론에서 핵심 요소를 소개한다. 바울은 전치사구 “하나님……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참고, 딛 1:1 ) 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하나님의 “명령” 측면에서 규정한다.11 ) 이 생각은 디모데후서 1장 1절의 어구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에서 표현한 생각과 미묘하게
9 ) avpo,stoloj Cristou/ VIhsou/(‘아포스톨로스 크리스투 이에수’). 다음을 보라. 고전 1:1; 고후 1:1; 엡 1:1; 골 1:1; 딤후 1:1. 딛 1:1은 순서를 뒤집어 놓았다(참고, 엡 1:1의 이형). 추가로 딤전 1:2 주 석을 보라. 디모데전서에서 이름 순서 “그리스도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2회)보다 훨씬 자주 나 온다(12회). 하지만 소수에 불과한 두 본문(6:3, 14)은 각기 이 이름이 “우리 주”라는 어구와 병치 되어 나오고, 이는 초기 바울 기록에서 이런 연어 사례 중에 지나치게 지배적으로 많이 나온 경우 를 따른 것이다(40회 이상 나온 것; 바울의 유일하게 진정한 이형은 빌 3:8; 나머지 경우를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순서가 “우리 주”와 함께 나온 경우는 이 이름이 전치사 ‘엔’[evn]의 지배를 받 은 경우뿐이다, 롬 6:23; 8:38; 고전 4:17; 15:31; 엡 3:11; 골 2:6; 이것을 보면 딤전 1:2에 나온 배 치는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주”와 합친 것[Cristou/ VIhsou/ tou/ kuri,ou h`mw/n, ‘크리스투 이에 수 투 퀴리우 헤몬’]으로 빌 3:8의 범주에 들어간다).
10 ) Marshall, 354.
11 ) katV evpitagh,n(‘카트 에피타겐’). ‘에피타게’(evpitagh,, “명령, 지시, 지령”)는 바울식 표현으로 신 약 성경에서 사도와 그 동역자가 내린 명령으로 쓰이고(고전 7:6, 25; 고후 8:8; 딛 2:15), 여기서 도 바울이 전도의 부르심을 받은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롬 16:26). 이 용어는 다른 곳에서 하 나님(솔로몬의 시편 18:12; 지혜서 18:15; 19:6; 제우스에 대해 사용된 경우로 정확한 조합 ‘카트 에피타겐’[katV evpitagh,n]에 대해 Polybius 12.26.2를 보라)과 왕의 칙령(단 3:16; 마카베오3서 7:20)에 사용되었다. 추가로 G. Delling, TDNT 8:36-37; W. Grimm, EDNT 2:41을 보라.
다르다. 본문의 “명령”은 하나님의 의지가 외적으로 적극적으로 작용하거 나 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이 일에 공동 참가 자가 된다. 대안이 되는 어구 (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 에서 바울의 사역을 결 정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뿐이다. 이 사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점을 초래한 결정이 나온 것은 거의 확실하게 사도가 되라는 바울의 부 르심과 해당 에피소드에서 그리스도가 맡았던 계시의 역할에 대해 곧 있을 암시 가운데 있다 ( 1:11-16 )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기독론적 함의가 담긴 의외 의 신학 주제 하나를 소개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주”로 불린 것은 디모 데전서에 나온 세 번의 경우 중 첫 번째다 ( 2:3; 4:10 ) 12 ) “구주”는 이미 헬라어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를 가리키는 칭호로 잘 알려졌다.13 ) 구약 성경에서 출애굽은 구원 사건의 원형이었다. 신약의 용례 중에서 “구주”는 하나님을 자기 아들을 선물로 주어 세상을 구원한 분으로 기술했다. 하지만 그리스도 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한 것은 신약 성경에서 발전이 더뎠고, 후기 바울 문헌 ( 에베소서, 빌립보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 과 베드로후서로 제한되었다. 아마도 제 국 제의에서 신격화된 황제를 가리키는 데 이 용어가 사용된 용례의 내적 모순14 ) 으로 인해 이 용어를 그리스도에 적용하는 것이 지체되었을 것이다. 결국 성경 전통에서 의미를 끌어내서 이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게 되 었을 때, 제국 제의가 교회와 문화에 역사와 상징과 기대로 미치는 영향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대응일 가능성이 크다. 특별히 이런 사정과 더불어 과 거에 헬라의 왕과 영웅과 신에게 이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15 ) 그리스도인 이 이렇게 정치적인 함의가 가득한 말을 사용하는 것을 단순히 편의의 문 제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주장을 펴기 위해 의도적으로
12 ) swth,r (‘소테르’). 다음을 보라. W. Foerster and G. Fohrer, TDNT 7:1003-1021; K. H. Schelkle, EDNT 3:325-327; Quinn, 308-313; Spicq, TLNT 3:354-356; K. Lä ger, Die Christologie der Pastoralbriefe (Hamburger Theologische Studien 12; Münster: Lit, 1996), 119-126; Dibelius and Conzelmann, 100-103; I. H. Marshall, “Salvation, Grace and Works in the Later Writings in the Pauline Corpus,” NTS 42 (1996): 39-58.
13 ) 예, 70인역, 신 32:15; 시 23:5; 24:5; 27:9; 41:6; 사 12:2; 17:10; 43:3; 60:16; 다음을 보라. Towner, Goal, 75-77(각주 포함).
14 ) 이에 대해 D. L. Jones, “Roman Imperial Cult,” n.p., ABD on CD-Rom. Version 2.1a. 1995, 1996, 1997; P. Wendland, “Swth,r: Eine religionsgeschichtliche Untersuchung,” ZNW 5 (1904): 335-347을 보라.
15 ) 명망 있는 사람(Xenophon, Agesilaus 11.13); 제우스(Plutarch, Moralia 830B); 프톨레마이 오스(Plutarch, Moralia 361F); 안티오쿠스(Strabo, Geography 11.10.2)에 대한 존중의 칭호. Dibelius and Conzelmann, 102-103도 보라.
I. 도입 인사 ( 1:1-2 ) A. 기록자
선택한 것이다. 이 세 편지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는 모두 “구주”로 기술된다. 하나 님은 구원 계획의 기획자와 개시자라는 의미에서 “구주”다 ( 딤전 1:1; 2:3; 4:10; 딛 1:3; 2:10, 13; 3:4 ). 그리스도가 “구주”인 것은 이 구원 계획이 역사 가운데 실행 된다는 의미다 ( 딤후 1:10; 딛 3:6; 참고, 1:4 ).
그러나 세 편지를 개별적으로 보면, 개별 기독론 묘사의 영향으로 인해 세 편지에서 이 용어의 용례가 구별되는 것이 드러난다 ( 서론, 98-107을 보라 ) 디도서에서는 기독론이 절정에 이르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동등하게 드 러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 모두 이 칭호를 의도적으로 아주 비슷하게 소유 한다 ( 딛 1:3, 4; 3:4, 6 ). 디모데후서에서 기독론은 소망과 신원을 위한 양식을 제시하는데, 여기서 이 칭호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보존되었다 ( 딤후 1:10 ) 디모데전서에서 “구주” 칭호와 관련하여 의외인 것은 이 칭호가 기독론 범주임을 감춘다는 것이다. 하나님만 “구주”로 묘사된다( 1:1; 2:3; 4:10 ). “구주” 묘사와 관련된 활동이 “구원”( ‘소조’ ) 어휘군 등 그리스도 사건에 담긴 신학 공 식의 용례 안에 그리고 이를 통해 함의된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예, 1:15 ). 그럼에도 기독론을 말하면서도 이 칭호를 쓰지 않는 것은 디모데전서에서 이와 관련된 주장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반영한다. 기독론의 다른 요소 를 강조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래 2:5-6 주석을 보라 ) 이런 식으로 정한 것이다.16 ) 그리스도 예수는 여기서 바울에게 사역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나오면서 “우리의 소망”으로 기술된다.17 ) 이 어구는 예수를 그리스도인이 품은 소망 의 화신과 총체로 전망한 것으로 디도서 2장 13절의 기술과 비슷하다. 바울 이 말하는 소망의 초점은 종말론적 구원이다 ( 살전 5:8 ) 18 ) 세 편지 ( 널리 신약 성 경에서도 같다 ) 에서 이 명사와 관련 동사는 구체적으로 다양한 시점에서 소망 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 딤전 4:10 ), 다른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돕기에 이를 것이고 ( 5:5 ),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재림할 것이며 ( 딛 2:13 ), 영원한 생명이 기다린다는 것 ( 딛 1:2; 3:7 ) 은 과거에 하 나님의 신실함에서 나온 확실성에 근거를 둔 확고한 기대다 ( 참고, 딛 1:2; 롬
16 ) P. H. Towner, “Christology in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in Richard N. Longenecker, ed., Contours of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McMaster New Testament Studies 7; Grand Rapids: Eerdmans, 2005), 219-244를 보라.
17 ) evlpi,j(‘엘피스’; 딛 1:1; 2:13; 3:7); 다음 동사 형태도 보라. 딤전 3:14; 4:10; 5:5; 6:17.
18 ) 롬 5:2; 8:24-25; 고전 15:19; 고후 1:10; 3:10-12; 골 1:5, 27; 특히 다음을 보라. G. Nebe, ‘Hoffnung’beiPaulus (Göttingen: Vandenhoeck und Ruprecht, 1983), 169-170.
5:5 ) 19 ) 인간적이거나 물질적인 소망을 대안으로 삼아도 언제나 좌절을 겪 는다 ( 딤전 6:17; 70인역, 시 43:7; 렘 17:5 ). 여기서 이 모든 관점이 하나로 모여, 그리 스도가 이 소망의 총화와 화신이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 도가 죄와 사망을 극복하고 우리를 위해 영생을 지켰으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 이 약속을 지킬 것이 확실함을 선포했다.20 ) 대명사 “우리의”는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이 소망을 그리스도의 경험을 공유하고 결속시 키는 요인으로 규정한다.
B. 수신자
둘째로, 바울은 디모데21 ) 가 편지의 상대방임을 확인한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와 사역 영역 안에서 무수한 상황을 겪는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주 여 행 동반자, 동역자로 불렀고 바울서신의 공동 발송인으로 부른 경우도 많 았다.22 ) 여기서 디모데가 처한 상황을 보면 디모데가 바울에게서 멀리 떨 어진 어딘가에서 임무를 맡았던 다른 무수한 경우와 일치한다.23 ) 바울은 동반 어구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에서 디모데가 메시지를 받 게 될 기반이 되는 관계의 정도와 근거도 규정한다. 디도에 대한 묘사도 실 질적으로 이에 맞먹는 것이었다 ( 딛 1:4 ). “참 아들”이라는 어구 ( NRSV, “충성스러 운 자식” ) 에 담긴 지배적인 생각24 ) 은 친족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바울이 아 버지의 권한을 가진 인물이라는 함의가 담겼다. 바울은 디모데를 비롯한 동 역자와 회심자를 언급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관계에 의존한다.25 ) 이 표현을 쓰는 것은 확실히 보살핌과 애정이 담긴 긴밀한 관계를 암시하지만, 아마도 이를 능가하는 것은 바울의 두 번째 사적인 편지에서 이 관계를 표현한 어 구 “나의 사랑하는 아들”에 드러나는 것 같다 ( 딤후 1:2 ). 혈통과 장자권에 대
19 ) Spicq, TLNT 1:480-492; R. Bultmann and K. H. Rengstorf, TDNT 2:517-533도 보라.
20 ) 비슷하게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언급한 것으로 다음을 보라. 70인역, 시 64:6; 70:5; 렘 17:7; 솔로몬의 시편 5:11; 15:1.
21 ) 서론 90을 보라.
22 ) 롬 16:21; 고후 1:1; 빌 1:1; 살전 1:1; 살후 1:1; 몬 1; 참고, 고후 1:19.
23 ) 고전 4:17; 16:10; 빌 2:19; 살전 3:2, 6; 참고, 행 17:14, 15; 19:22.
24 ) 다른 곳에서 동역자 등이 바울에 대해 갖는 은유적인 관계로 ‘테크논’(te,knon, “자식”)에 대해 개 인에 대해서는 고전 4:17; 빌 2:22; 몬 10; 자주 나온 경우로 신자 무리를 가리킨 경우로 예, 고전 4:14; 고후 6:13; 12:14; 엡 5:1; 살전 2:11; G. Schneider, EDNT 3:341-342를 보라.
25 ) 참고, 1:18; 딤후 1:1; 2:1; 고전 4:17; 빌 2:22; 몬 10.
I. 도입 인사 ( 1:1-2 )
B. 수신자
한 논의 상황에서 여기 나온 형용사는 용어 “참된”( “진정한” ) 으로 번역되어 그 자식이 적법함을 확립했다.26 ) 이 용어로 암시되는 진정성은 비유적으로 허구적인 관계까지 확대되어 ( 참고, 빌 2:20 ) 디모데의 믿음과 디모데가 에베소 에서 바울을 대표할 권한을 보증한다.27 ) 그러면서 진정한 헌신으로 아버지 를 섬길 의무를 강조한다 ( 빌 2:22 ). 28 ) 이 말을 바울이 디모데의 회심에 영향 을 미쳤음을 거론하는 것으로 보려는 유혹이 생기지만 ( 참고, 몬 10 ), 바울의 설 교를 들은 직접적인 결과로 디모데가 회심했다는 것을 확신할 충분한 증 거가 없다.29 ) 이들의 관계의 근원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공유한다는 사실 이다. 이를 기술한 전치사구 “믿음 안에서”30 ) 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바울 이 줄여서 쓰는 말이다. 여기서 디모데가 바울의 자식이 되는 영역을 기술하 는데, 이것은 두 사람을 가족으로 결합시키는 공동의 유대다( 참고, 딛 1:4, “우리의 같은 믿음 안에서”; 개역개정, “같은 믿음을 따라” ). 문제는 바울의 다른 어구 “그리스도 안 에서”가 기술하는 실체에 대응하여 “믿음 안에서”라는 말로 믿음의 활동( 과 내 용 ) 의 관점에서 이 실체를 보는 것이다.31 ) 이미 표현된 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26 ) gnh,sioj(‘그네시오스’). BDAG, s.v. 1을 보라. 27 ) 이 용어는 고전 문헌과 헬라 문헌에서 다방면으로 널리 사용된다(70인역에서는 성실·진정성 의 의미로는 그리 자주 쓰이지 않았다, 4회). 그 용례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플라 톤(Plato)의 적법한 해석가로 묘사된다든가, 다른 곳에서 계시 전달자를 가리키는 데 쓰인 것(동 의, Dibelius and Conzelmann, 13; Corpus Hermeticum 13.3; 목자의 보조자를 서술한 경우로 Philo, On the Special Laws 4.184도 보라) 때문에 일부는 본문의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도 비슷 한 관계가 떠오른다고 여길 정도다(참고, Marshall, 132). 그러나 허구적 부자지간이 가장 지배적 인 의견이다. Spicq, TLNT 1:136-138, 296-299; F. Büchsel, TDNT 1:727; LSJ, s.v.도 보라.
28 ) 이에 대해 Philo, OntheConfusionofTongues 72를 보라.
29 ) 행 16:1-3이 관련 배경이다(참고, 딤후 1:5와 관련 논의). 참고, Marshall, 356; Oberlinner, 5 n. 10; 그러나 Knight, 63-64; Fee, 36도 보라.
30 ) 나는 여기서 TNIV의 번역 “그 믿음 안에서”(NRSV)와 달리 번역한다. 이 번역은 현재의 맥락에서 무 엇을 믿는지 그 내용의 규모를 지나치게 크게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가 형성되는 근거로 강조한다. 31 ) evn pi,stei(‘엔 피스테이’). “믿음” 언어는 이들 동역자서신에서 그리스도인 실존의 구조와 표현에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다. 이 어휘군에서 파생한 단어는 세 편지에 50회 이상 나온다. (1) 명사 ‘피스티스’(pi,stij)가 가장 지배적으로 나오면서 배치도 다양하다(딤전, 19회; 딤후, 8회; 딛, 6회). ‘피스티스’는 정관사와 나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딤전 1:19; 3:9; 4:1, 6; 5:8, 12; 6:10, 12, 21; 딤후 1:5; 2:18; 3:8; 4:7; 딛 1:13; 2:2). 그중 일부는 “그 믿음”이 믿는 내용을 가리 키면서, 확고한 가르침의 내용을 요약하는데(예, 딤전 4:6; 5:8; 6:21), 이런 용례는 이미 초기 바 울 문헌에도 나온 것이다(갈 1:23). 이 범주 안에 함의된 것은 적극적으로 “믿는 것”의 필요성이나 “믿음”에 대한 전념(딤전 1:19; 3:9)인데, 이런 식으로 “믿음”에 대한 거부는 위선의 기준으로 기 능한다(딤전 4:1; 6:21). 그러나 정관사가 나오는 경우마다 이런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딤후 3:10과 딛 2:2에서 ‘피스티스’가 정관사와 함께 쓰이면서 믿는 행동이나 태도를 가리키기도 하고 무관사로 쓰이는 용례도 간혹 믿음의 대상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이다(딤전 2:7; 참고, 3:13; 딤후 2:13). 문맥과 동사 선택으로 의미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생각과 더불어 이렇게 추가로 범위를 정한 것은 사도의 믿음이 에베소에 보 낸 대표자의 믿음과 동등하다는 것을 확립한다. 직면해야 할 도전의 관점에
다른 구문에서 보통 관사 없이 쓰이는 ‘피스티스’는 적극적이고 건강한 “믿음” 또는 신뢰와 관 련하여 그리스도에 대한(또는 복음에 대한 또는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되는 삶을 묘사 한다(딤전 1:14; 2:15; 5:12; 딤후 1:5; 3:15; 딛 2:10; 3:15). 이 믿음의 근원은 회심이지만(딤전 1:14),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사도의 복음에 대한 견고한 믿음의 문제다. 무수히 많은 경우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가져야 할 여러 다른 미덕 목록 가운데 나온다(딤전 1:5, 14, 19; 2:7, 15; 4:6, 12; 6:11; 딤후1:13; 2:22; 3:10-11; 딛 2:2). 이런 목록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이 가진 다른 특성보다 중요하지(하찮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믿음이 이런 목록에 일관되게 나오 는 것과 믿음 개념이 다른 배열에서 더 발전하고 있음을 볼 때 믿음이 목록에 나오는 다른 사항과 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역할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피스티스’가 ‘아가페’(avga,ph) 와 짝을 이루어 나오는 경우가 많은 것은 전통적인 것으로(목록 중에 9회), 초기 바울 문헌도 그랬 듯이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대한 적절한 요약으로 기능할 수도 있고(갈 5:6; 딤전 1:5, 14; 딤후 1:13; 몬 5) 경건의 미덕을 담은 더 긴 목록에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구 ‘엔 피스테이’(evn pi,stei; 딤전 1:2; 딛 1:4 등)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겨서 그리스 도인의 삶에 초래되는 새로운 현실을 기술한다. 이는 어구 ‘엔 크리스토’(evn Cristw/|, “그리스 도 안에”)와 비슷하게 기독론적 관점에서 새로운 실존을 반영한다(특히 다음을 보라. 롬 16:3, 9-10; 갈 1:22; 몬 16, 23). 어구 ‘엔 피스테이’는 “그리스도 안에서”에서 (결과적으로) 표현된 삶 에 대한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관점과 비교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복 음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2) 동사 ‘피스튜오’(pisteu,w, 6회)는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을 믿는 행동을 묘사하고(딤전 1:16; 3:16; 딤후 1:12), 과거에 변함없이 믿기로 결심한 일의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갖 는 성격을 기술한다(딛 3:8). 수동태 ‘에피스튀덴’(evpistu,qhn)은 두 가지 경우 바울이 복음을 “맡 게 된” 일과 관련하여 사역에 대해 부르심 받은 것을 반영한다(딤전 1:11; 딛 1:3; 참고, 고전 9:17; 갈 2:7; 살전 2:4).
(3) 형용사 ‘피스토스’(pisto,j, 17회)는 신자를 기술하는 경우(9회)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 을 신뢰하거나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그리스도인”; 딤전 4:3, 10, 12; 5:16; 6:2a, 2b; 딛 1:6). 이 용어는 단순히 형식적인 표현이 아니다. 이 말에 능동적이고 건강한 믿음 또는 헌신이라는 의 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특히 다음을 보라. 딤전 4:10; 참고, 6:2; 딛 1:6). 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딤전 3:11)과 그리스도(딤후 2:13)의 “신실함”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경우 역시 이런 태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성향에 뿌리를 둔 것이다. 어구 ‘피스토스 호 로고스’(pisto.j o` lo,goj)에 나온 형용사에 대해 딤전 1:15의 해당 논의를 보라. (4) 이 어휘군의 ‘아-’(a-)접두 형식의 부정은 세 편지에서 발전된 불신과 위선의 대조적 요 약에서도 비슷하게 주제를 이룬다. ‘아피스티아’(avpisti,a)는 회심 이전의 실존을 기술한다(딤 전 1:13). 이런 거듭나지 못하거나 위선적인 삶을 불신하는 행위나 윤리적 행실의 관점에서 보 게 되면, 형용사 ‘아피스토스’(a;pistoj; 딤전 5:8; 딛 1:15)와 동사 ‘아피스테오’(avpiste,w; 딤후 2:13)가 작용하기 시작한다. 바울 초기 저술과 비교할 경우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믿음”이 갖는 역할 이 약화되었다는 혐의(예, H. von Lips, Glaube–Gemeinde–Amt, FRLANT 122 [Göttingen: Vandenhock und Ruprecht, 1979), 72, 281; Easton, 103, 203-204)에는 근거가 없다. 딤후 1:9나 딛 3:4-7 같은 본문은 믿음의 중추적인 의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베푼 은혜로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적절한 응답임을 보여 준다. 목회서신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믿음에 관심 을 크게 가진 것은 의심할 것 없이 믿음에 기초하여 위선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는 것이나 편지 마다 그 저변에 정도를 달리하여 이단과 거짓 가르침과 씨름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 인의 실존에서 믿음의 역할은 바울의 교회서신에서 이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세 편지에 이 르기까지 지속된다. Towner, Goal, 121-129; Marshall, 213-217; Quinn, 271-276도 보라.
I. 도입 인사 ( 1:1-2 ) C. 인사
서 공통의 믿음 가운데 가진 이 관계에 대한 진술은 디모데를 격려할 뿐 아 니라 편지를 받는 공동체에 디모데의 자격을 선포하는 것도 될 것이다.32 )
C. 인사
인사가 디모데후서 1장 2절의 인사와 같다. 여기서 바울은 본질적으로 하 나님과 그리스도 예수가 디모데에게 복을 줄 것이라는 기도나 기원을 전 한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의 인사에 관례적으로 나온다.33 ) 두 용어는 이미 축복과 비서신 맥락과 유대교에 연결되어 있고, 바울의 인사에 등장하 는 이 형태는 바울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교회에 대하여 말로 할 수 있 는 축복이나 축복 기도에 가깝다.34 ) 두 용어가 본문에 나온 형태는 접속사 “그리고” 없이 ( 딤후 1:2; 요이 3 ) “긍휼”을 추가한 것 ( 같은 경우로 딤후 1:2; 참고, 딛 1:4 ) 으로 바울의 교회서신에 나오는 양식과 다르다.35 ) 바울이 말하는 “은혜”에는 신학적 의미가 담기는 경우가 많고, 아마도 편 지 도입부의 관습적인 틀에서도 단순히 서신 예절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만 족시키는 정도를 넘어설 것이다.36 ) 의미의 영역이 넓고 여기에 “은혜로움, 선한 의지, 감사, 사랑의 보살핌”37 ) 도 포함되기에, 70인역에서 이 용어의 용례는 ( 다양한 맥락에서 )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이는 은총이라는 관념을
32 ) Marshall, 357; Fee, 36; Oberlinner, 5도 보라.
33 )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등. 롬 15:13; 16:20도 보라.
34 ) 특별히 J. M. Lieu, “‘Grace to you and peace’: The Apostolic Greeting,” BJRL 68 (1985): 161-178을 보라.
35 ) 바울의 인사가 교회를 향할 때 나오는 형태는 전형적으로 ‘카리스 휘민 카이 에이레네’(ca,rij u`mi/ n kai. eivrh,nh, “너희[복수]에게 은혜와 평강)며, 바로 이어 이런 축복의 신적 근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본문에는 ‘카리스 엘레오스 에이레네’(ca,rij e;leoj eivrh,nh, “[너에게, 단수], 은혜와 긍휼 과 평강”)로 나온다. 이런 차이가 저자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시인지가 논란이 되지만(예, Lieu, “Grace,” 170-172), 마찬가지로 문학적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 것일 수 있다(서론 90을 추가로 보라). 36 ) 헬라 편지에서 표준 인사 어법은 ‘카이레인’(cai,rein; 마카베오1서 10:18, 25; 11:30; 12:6, 20; 마카베오3서 3:12;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41; Diogenes Laertius, LivesofEminentPhilosophers
2.141.2 등; Johnson, 158도 보라)이다. 바울이 ‘카리스’(ca,rij; 유대교에서 이것을 “평강”으로 활용한 것으로 인해 나온 형태)를 선택한 것은 인사를 축복 선포로 전환시킨 것으로 보인다. 37 ) 세 편지에서 ‘카리스’의 용례를 보면 다른 바울서신과 비교해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인사와 축 복 기도에서, 딤전 1:2; 6:21; 딤후 1:2; 4:22; 딛 1:4; 3:15; 구원이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진 술에서, 딤전 1:14; 딤후 1:9; 딛 2:11; 3:7; 이것이 “감사”를 뜻하는 구문에서, 딤전 1:12; 딤후 1:3[참고, 바울 문헌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여격과 더불어 사용된 ‘카리스’의 용 례, 롬 6:17; 7:25; 고전15:57 등]).
드러내고 바울은 이를 자신의 구원 신학으로 발전시켰다.38 )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구원의 본질과 관련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를 요구한다. 70인역의 “긍휼”은 지배적인 히브리어 용어 ‘헤세드’를 번역한 말로 자 주 나오는데, 바울이 충분히 이해했듯이 ‘헤세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지지하는 하나님의 자애심을 기술한 말이다.39 ) 바울의 편지에서 “은혜”와 “평강” 사이에 “긍휼”이 삽입된 것은 디모데전후서의 인사로 독 특한 점이지만 ( 딤후 1:2; 요이 3; 유 2 ), 바울이 평강과 긍휼의 관념을 결합시킨 경 우도 분명히 있다 ( 갈 6:16 ). “은혜와 평강”을 바울의 “표준” 인사로 여긴다면, 이 삼중 형식도 독특한 경우다.40 ) 그러나 이런 관찰로 알 수 있는 것은 바 울이 여기서 자신이 디모데에게 사적으로 보낸 편지에 “긍휼”이라는 개념 을 더하기 원했다는 것뿐이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 편지에서 “긍휼”이 도입 강론에서 중요한 주제로 발전했다는 사실 ( 딤전 1:13, 16; 딤후 1:16, 18 ) 은 이 두 가 지 사례에서 인사에 추가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41 ) 바울은 디모 데가 하나님의 부양과 보호에 대해 깊이 느끼기를 원한다. “평강”은 신약 용례에서 헬라어 구약 성경을 배경으로 둔 이 관념의 발전 을 거의 대부분 끌어온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 말은 근원, 곧 하나님 과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든 그것을 벗어나든 누리는 조화나 평온을 말 한다.42 ) “은혜”와 마찬가지로 (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 “평강”의 의의는 디모 데가 에베소에서 처리하는 상황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다. 교회에 하나님 의 평강이 필요한지 아닌지가 모호할 수 있겠는가. 바울서신에서 전형적으로 그렇듯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는 모두 방금
38 ) Spicq, TLNT 3:500-506; H. Conzelmann and W. Zimmerli, TDNT 9:397-399; K. Berger, EDNT 3:457-460.
39 ) ‘엘레오스’(e;leoj, “긍휼”; 다음을 보라. Spicq, TLNT 1:471-479; Towner, “Mercy,” EDBT, 520-523; idem, “Mercy/Compassion,” in T. D. Alexander and B. S. Rosner, eds., New Dictionary of Biblical Theology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2000], 660-663)는 명사형 과 동사형으로 나오는 것으로 세 편지에서 중요한 주제다. 이 단어는 바울 등에게 구원의 기초를 형성하고(딤전 1:13, 16; 딛 3:5),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움과 보호의 다른 측면을 기술한다(딤후 1:16, 18). 참고, 롬 9:23; 11:31; 15:9; 갈 6:16; 엡 2:4. 40 ) “긍휼”을 삽입한 것을 이 표준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는 사변적인 설명에 대해 Knight, 66; Spicq, 318(이를 유대 관습, 디모데의 유대적 배경, 디모데가 직면해야 했던 독특한 압박감에 연결한다); Dibelius and Conzelmann, 14; Kelly, 41(이를 바울의 인사에 흔히 나오는 “너희”[복수형]를 대 체한 것으로 본다)을 보라.
41 ) 참고, Roloff, 55.
42 ) eivrh,nh(‘에이레네’). 다음을 보라. Spicq, TLNT 1:424-438; G. von Rad, TDNT 2:400-417. 참고, 롬 15:33; 16:20; 빌 4:9; 골 3:15; 살전 5:23; 살후 3:16.
I. 도입 인사 ( 1:1-2 ) C. 인사
말한 복의 근원으로 불린다.43 ) 전치사구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는 정확히 디모데후서 1장 2절을 복제한 것으로 표준 바 울 어구와 다른 점은 “그리스도 예수”의 어순과 “주”를 맨 뒤에 배치한 점 이다. 바울의 우선순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주”라는 속성에 연 결하는 것이기에,44 ) 이는 바울의 양식에서 일탈했음을 보이는 것일 수 있다 ( 참고, 6:3, 14는 해당 양식을 유지 ). 이런 일탈에 대해 디모데전후서에서 “그리 스도 예수”라는 순서가 지배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45 ) 그러나 “주”와 조 합을 이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으로 나온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 6:3, 14 ), “그리스도 예수”로 변화를 준 것은 앞 절의 이름 순서에 영향을 받은 것 이거나 두 이름 뒤에 “주”를 위치시킨 결과일 수도 있다 ( 참고, 빌 3:8 )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한 것은 세 편지에서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인 사로 제한된다 ( 딤후 1:2 ). 46 ) 그럼에도 이는 시작부터 디모데가 자신의 그리스 도인 정체성을 밝혀야 하는 친숙한 틀을 확립하고, 이제 바울이 이 정체성 을 구주 ( 1:1; 2:3; 4:10 ) 이자 가장 ( 1:4; 3:15 ) 인 하나님이라는 더 지배적인 주제로 발전시킬 것이다. 이렇게 정형화된 구절 안에서도 그리스도 예수47 ) 에게 주 되심을 귀속시킴은 하나님이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를 신원한 것과 그리스 도가 교회를 능가하는 권위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 바울 문헌과 신약 성경 전체적으로 그렇듯 ). 바울은 대명사 “우리의”를 추가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교회의 경험과 믿음에 고유한 것임을 드러낸다.
43 ) 다음을 보라.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살후 1:1; 몬 3.
44 ) 디모데전서에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순서가 “예수 그리스도”(2회)보다 훨씬 많이 나 온다(12회). 하지만 두 번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6:3, 14) 모두 “우리 주”라는 어구와 연어 형 식으로 나오며, 초기 바울 문헌에서 이런 연어 구조의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을 따른 것 이다(40회 이상 나오며, 대부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순서로 나온다[그러나 다음의 “예 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순서도 보라. 롬 1:4; 5:21; 7:25; 고전 1:9]). 바울이 유일하게 이 양 식의 이형을 보여 주는 곳이 빌 3:8이다(“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 개역개정, “내 주 그리스 도 예수”). 나머지를 보면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 주”와 함께 나오는 경우는 전치사 ‘엔’(evn) 의 지배를 받는 경우뿐이다. 롬 6:23; 8:38; 고전 4:17; 15:31; 엡 3:11; 골 2:6. 이를 고려하 면 딤전 1:2(딤후 1:2)의 배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 순서를 “우리 주”와 결합한 것으로 서(Cristou/ VIhsou/ tou/ kuri,ou h`mw/n, ‘크리스투 이에수 투 퀴리우 헤몬’) 빌 3:8의 변칙적인 범 주에 속한다.
45 ) 딤전(12회 중에 2회는 역전된 순서), 딤후(12회 중 1회는 역전); Johnson, 158을 보라.
46 ) path,r(‘파테르’). G. Quell and G. Schrenk, TDNT 5:945-1014; O. Michel, EDNT 3:53-57.
47 ) 전통적인 어구 “주 가운데 주”(ku,rioj tw/n kurieuo,ntwn, ‘퀴리오스 톤 퀴리유온톤’)로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과 크게 다르게 바울 특유의 양식으로 그리스도에게 ‘퀴리오스’만 쓴다. 1:2, 12, 14; 6:3, 14; 딤후 1:2, 8, 16, 18(2회); 2:7, 19(2회), 22, 24; 3:11; 4:8, 14, 17, 18, 22. 디도서에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칭호 ‘소테르’(swth,r)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더 크게 강조하게 되면 디모데전서에 “주”라는 칭호가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지 본론 ( 1:5-3:11 )
1장 1-4절의 집중된 제시 가운데 출현한 주제를 고려하면 분명해지는 것 은 바울이 이 편지를 신중하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 편지의 구 조를 긴밀하게 살피는 일이 무척 크게 요구된다.1 ) 이 지점에서 감사나 기도 없이 바로 편지의 본론이 시작한다 ( 참고, 디모데전 서; 갈라디아서 ). 디도에게 내리는 지시는 디도가 사역 중인 교회에 널리 공적으 로 적용할 일반 지시와 번갈아 나올 것이다. 2인칭 목적의 동사 둘이 디도 의 그레데 사역 주안점을 제시한다. “마무리되지 않은 것을 정리하라…… 장로들을 세우라”( 1:5 ). 그리고 이 두 기본 지시를 뒤집힌 순서로 매우 상세 히 설명한다. 첫째, 지시는 장로의 임명에 대한 것이다 ( 6-9절 ). 둘째, 위에서 암시된 “마무리되지 않은 업무”와 “무질서”를 말한 것은 닥치는 대로 반대 하는 그리스도인 선생과의 싸움 때문이다 ( 10-16절 ) . 이 뒷 단원에서 1장 10절-3장 11절의 생각, 즉 “책망”( 1:13 ) 을 인도할 몇 가지 2인칭 단수 명령 중 첫 번째가 나온다. 이 명령은 주변 강론의 모양을 형성할 것이 고 ( 13b-16절 ), 1장 9절에 도입된 교육 기능의 예시를 보여 줄 것이다 ( “가르치다/ 훈계하다/책망하다” ). 다음으로 2장 1-10절은 가정 내 처신 맥락에서 “건전한 교 리”( 1:9; 2:1 ) 의 의미를 다룬다. 본론의 마지막 단원에서 교육 용어 “상기시 1 ) 서론에서 구조와 장르에 대한 논의를 보라. 마셜이 다룬 구조(11-40)가 모범적이다. 존슨이 문학 양식과 장르 특징을 논한 것(21-33, 37-41, 105-110, 211-214)은 획기적이다(참고, Bassler, 2224). 마운스가 두 쪽에 걸쳐 개관한 것(cxxxv-cxxxvi)은 양식/구조/배경을 다룬 도입부에서 어느 정도 보충 설명해 놓았다.
키다”는 이미 교회에 친숙했을 전통적인 본질에 대한 자료를 재구성 한다 ( 3:1-2 ). 매우 바울다운 언어를 담은 두 단원은 디도가 가르쳐야 할 윤리 자료의 신학적 기초를 제시한다 ( 2:11-14; 3:4-7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6 책 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
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
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
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 을 탐하지 아니하며 8 오직 나그네를 대
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
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 하니 11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 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 통 무너뜨리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의 어 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 는 게으름뱅이라
5 The reason I left you in Crete was that you might put in order what was left unfinished and appoint elders in every town, as I directed you. 6 An elder must be blameless, faithful to his wife, a man whose children believe and are not open to the charge of being wild and disobedi ent. 7 Since an overseer manages God’s household, he must be blameless — not overbearing, not quick-tempered, not given to drunkenness, not violent, not pur suing dishonest gain. 8 Rather, he must be hospitable, one who loves what is good, who is self-controlled, upright, holy and disciplined. 9 He must hold firmly to the trustworthy message as it has been taught, so that he can encourage others by sound doctrine and refute those who oppose it.
10 For there are many rebellious people, full of meaningless talk and deception, especially those of the circumcision group. 11 They must be silenced, because they are disrupting whole households by teaching things they ought not to teach — and that for the sake of dishonest gain. 12 One of Crete’s own prophets has said it: “Cretans are always liars, evil brutes, lazy gluttons.” 13 He has surely told the truth! Therefore rebuke them sharply, so that they will be sound in the faith 14 and will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
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깨끗한 자들에게
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
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
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
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
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
는 자니라
III. 편지 본론 ( 1:5-3:11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1. 디도에게 내리는 중요 지시: 정돈하고 마무리하라 ( 1:5 )
pay no attention to Jewish myths or to the merely human commands of those who reject the truth. 15 To the pure, all things are pure, but to those who are corrupted and do not believe, nothing is pure. In fact, both their minds and consciences are corrupted. 16 They claim to know God, but by their actions they deny him. They are detestable, disobedient and unfit for doing anything good.
1. 디도에게 내리는 중요 지시: 정돈하고 마무리하라 ( 1:5 )
5절 그레데에서 디도가 처한 상황은 편지 자체로는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도입부의 지시 ( 5절 ) 가 디도가 그레데에서 사역 중임을 암시한다. 그레데는 서론에서 본 대로 에게해 남쪽에 있는 지중해의 섬으로 해상 무 역에 있어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이는 그레데가 당대의 철학과 종교가 대부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 지나가는 지점으로 분명히 흔적 을 남기기도 했다는 의미다.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이 자신의 복음이 발판을 찾기 바랐을 전략적인 지점이었을 것이다. 지시의 언어를 보면 심지어 바울 이 직접 전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의 선교가 이 섬에도 도달했음을 보여 준다. “내가 두고 떠났다”로 번역된 동사는 바울의 육신이 그것에 있었음을 함축할 수 있으며 ( 딤후 4:13, 20 ), 2 ) “파송”이나 “위임”을 뜻할 수도 있고,3 ) 여 기서는 이 의미차가 더 클 수 있다. 디도는 역할에 따라 바울의 대리인으로 불리며, 우리가 아는 것은 디도가 바울의 지시에 따라 지금 그레데에 있다 는 것이다. 지시의 본질에 따라 분명한 것은 그레데 교회가 아직 꽤 초기 단 계이고, 두 가지 의미에서 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목적절 ( “……하기 위해”, ‘히나’ ) 에는 동사 구절이 둘 있고 계속해서 바울이 내 린 결정의 “이유”4 ) 를 설명하면서 디도의 사역도 배치한다. 첫째 구절은
2 ) avpolei,pw(‘아폴레이포’; 부정과거). 다음을 보라. 딤후 4:13, 20. 참고, 히 4:6, 9; 10:26; 유 6; Spicq, TLNT 1:183-184; Mounce, 386.
3 ) 특히 다음을 보라. van Bruggen, Die geschichtliche Einordnung der Pastoralbriefe, 39-40; Wolter, Paulustradition, 183-184; Marshall, 150; Johnson, Paul’sDelegates, 212.
4 ) tou,tou ca,rin(‘투투 카린’; 문자적으로 “이 때문에”; 이 구절은 엡 3:1, 15를 보라). 이 경우 ‘투토’ (tou/to)는 후속 어구를 가리킨다. BDF §216.
까다롭게 구성되었으나, 근본적으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무리되지 않고 남겨진 것을 네가 정돈할 수 있도록.” 이 동사 “정돈하다”, “바로 잡다”( TNIV, NRSV, NIV ) 는 드물게 나오면서 다른 곳에서는 그레데의 비문에 나 온다 ( BC 2세기 ) 5 ) 관련 동사도 그레데 법률 문서에 나와서 조약이나 법률을 “개선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 참고, 행 24:2; 히 9:10 ), 여기서 본문의 동사 의미에 대한 암시가 나올 수 있다.6 )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 아마 의도적으로 ) 그레데인 이 그레데 교회의 가르침과 행실을 바꾸는 직무로 디도에게 힘을 실어 주 는 일에 꽤 익숙했던 언어를 사용한다.7 ) 바울이 목적어 “마무리되지 않고 남은 것”8 ) 으로 이 계획을 묘사한 방식 에 문제가 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생각을 마무리하면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만들어 낸다. 목적절의 주동사는 수정이나 개선이 필요한 물건을 말 하는 목적어를 요구하고, 여기서 분사로 만들어진 목적어 ( 문자적으로, “[수행되어 야 하는] 남은 일” ) 는 마무리를 표현하는 동사를 요구한다. 누군가가 한 측면만 강조하기로 한다면, 완수되지 않은 일 ( 목적어의 의미 ) 에 초점을 두거나 아니면 이미 진행 중이지만 길을 벗어난 어떤 것을 개선하거나 수정할 필요성 ( 동사 의 의미 ) 에 초점을 두게 된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첫 번째 각본을 떠올리기 쉬울 것이다. (a) 바울의 사역은 이미 수행 중이지만, 바울이나 그 대리인이 직무가 마무리되기 전에 손을 떼거나 반대에 직면하여 이로 인해 절차가 지연된 것이다. 아니면 (b) 디도의 임무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일이 끝난 곳에서 이를 계속 이어 가는 것이다.9 ) 두 번째 필요성은 비슷하게 배 교한 선생 ( 반대파 ) 에 대해 나오는 우려로도 비슷하게 증명된다. 그러나 아마 도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고려한 것 같고, 어울리지 않는 구성은 단순히 한 가지 직무의 두 차원 모두에 관심을 둔 것이다. 디도는 구체적인 계획을 마 무리해야 하고 ( 장로 선출, 가르침 ), 다른 발전을 개선하거나 교정해야 한다 ( 반대파 선생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과 싸우는 일과 교리와 공동체 행실을 고치는 것 ). 디도서의 나
5 ) evpidiorqo,w(‘에피디오르도오’; 여기서는 부정과거 가정법). GDI 5039,9 (BDAG); MM. 6 ) 관련 ‘디오르도오’(diorqo,w, “똑바르게 하다, 수정하다”)는 다음을 보라. Dittenberger, Sylloge Inscriptionum Graecarum 581.85(다음을 보라. LSJ 631; 참고, Quinn, 77-78); 클레멘스1서 21:6. 동족 명사가 나오는 경우로 행 24:2; 히 9:10. 다음을 보라. 딤후 3:16(evpano,rqwsij, ‘에파노 르도시스’, “교정, 회복”).
7 ) 반대, Mounce, 387. 다음을 보라. Marshall, 151.
8 ) ta. lei,ponta(‘타 레이폰타’; 복수형 분사, ‘레이포’[lei,pw, “남겨 두고 떠나다, 부족하다” 등]에서 파생; 3:13). 이 분사는 복합 동사 ‘아펠리폰’(avpe,lipon,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의 동족어인데, 이 복합 동사는 일정 수준으로 문체상의 기교를 암시할 수 있다(참고, Quinn, 83).
9 ) 가능한 재구성은 다음을 보라. Fee, 172; Johnson, Paul’sDelegates, 212.
III. 편지 본론 ( 1:5-3:11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1. 디도에게 내리는 중요 지시: 정돈하고 마무리하라 ( 1:5 )
머지는 이 사역의 범위를 묘사할 것이지만, 디도의 권위 ( 앞서 바울이 위임한 것에 뿌리를 둔, 5c절; 아래를 보라 ) 는 디도에게 힘을 주어 닥치는 상황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를 다룰 수 있게 한다. 목적절의 후반부는 완수할 필요가 있는 주요 직무를 도출하는데, 그것은 마을마다 장로를 선출하는 일이다.10 ) 이 임무는 그레데에서 교회가 초기 단계임을 반영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묘사된 바울의 사역 형태에도 부 합한다 ( 행 14:23 ). 바울은 공적 임무를 나타내는 동사를 사용하지만,11 ) 이 임 무가 수행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주석 에서 논의하는 것 중 대부분은 이 직무에서 디도가 맡은 부분이 어느 정도 이고 교회와 함께 맡은 부분은 어느 정도인지다.12 ) 그레데 교회의 초기 상 태를 최소한으로 놓고 보면, 아마도 후보자에 대해 가장 잘 알았을 공동체 에서 후보자를 선정했을 것이다. 여기에 디도가 대리하는 사도의 권위가 적 용되어 지도자로 승인하고 임명하는 마지막 인증 절차가 있을 것이다 ( 이는 안수로써 공적으로 표시된다; 참고, 딤전 4:14; 5:22; 딤후 1:6 ) 13 ) 그러나 디도가 이 직무를 개시해야 한다는 언급 외에 이것이 실제로 수행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아 는 것은 거의 없다. “장로들”은 바울 사역의 어휘에 속하고 ( 행 14:23; 20:17; 딤전 5:17, 19 ), 초대 교 회가 주로 유대교 회당에서 상속한 ( 행 11:30; 15:2 등 ) 용어다.14 ) 여기서 전문적 으로 쓰이듯, 그 지시 대상은 지도자이지 “늙은이”( 2:2; 딤전 5:1 ) 가 아니다. 이 미 본 것처럼 장로는 감독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데, 이 점은 특히 본문에서 도 분명하여 두 용어가 모두 한 지도자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 ( 5-7절 ). 그러 나 우리는 여기서 묘사한 배치를 당연히 감독과 장로가 서로 다른 실체로 나왔던 디모데전서에서 입증된 것과 결합할 수 없다. 아마도 지도직을 감 독/장로 범주로 다양화하는 것은 더 크고 더 발전된 공동체를 위해 유보된 사치였을 것이다 ( 아래를 더 보라 ) 여기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이라고 확인할 수 있다고 해도, 한 교회 에 얼마나 많은 장로 ( 한 명 또는 복수 ) 가 지도직을 제공할지는 더 막연하다. 다 른 곳에서 이 양식은 지도직의 복수성이 규칙이거나 이상이었음이 드러 10 ) 접속사 ‘카이’(kai,)는 아마 부연적인 것으로 “그리고 특히”를 의미할 것이다
11 ) kaqi,sthmi(‘카디스테미’; 부정과거 가정법). 다음을 보라. 출 2:14; 마카베오1서 10:20; 눅 12:15; 행 6:3; 7:10, 27, 35. 다음도 보라. A. Oepke, TDNT 3:444-446.
12 ) 참고, Lock, 129; Barrett, 128-129.
13 ) 참고, Knight, 288.
14 ) 다음을 보라. 딤전 3:1(논의와 주석).
난다 ( 행 20:17, 28; 16:4; 빌 1:1 ). 그러나 이 직무의 범위 ( “모든 마을에 장로” ) 는 교회 마다 지도자의 분배를 확실히 알려 주는 바가 없다. 그레데는 당시 도시 국가로 분열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15 ) 이는 이 직무의 묘사를 설명할 수 있고,16 ) 지시가 암시하는 것은 교회가 꽤 널리 퍼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역을 불문하고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이는 한 마을의 교회가 몇 가지 더 작은 가정 회중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참고, 고전 1:2 ). 이 경우 아마도 한 가정 교회마다 장로 한 명이 있었을 것 이고 ( 이는 규모로 인한 실천적인 필요성이었을 수 있다 ), “가장” 이미지를 활용하여 7절 의 지도자를 묘사한 것도 마찬가지로 이런 방향성을 지적할 수 있다.17 ) 주 안점은 장로/지도자가 임명되는 것은 그레데섬 전체적으로 여러 마을과 도 시 교회 ( 들 ) 의 행정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지시는 방금 앞의 목적절에 나왔다가 이어 장로를 임명하라는 지시로 옮겨 갔는데, 이제는 바울이 더 이른 시기에 디도에게 내린 구속력 있는 지 시로 돌아가 고려하는 것으로 강화된다 ( “내가 네게 [직접] 지시한 대로” ) 18 ) 이 구절 의 위치가 모호한 것 ( 선행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후행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 19 ) 과 이어 지는 지시의 본질이 상세한 것이 암시하듯, 이 구절에서 “……대로”의 의미 는 간단히 뒤로 돌아가 앞에 나온 명령을 가리켜 이것이 수행되어야 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한다.20 ) 그 효과는 디도와 널리 독자 무 리를 일깨워 선택 과정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특성과 우선 사항의 근거를 이루는 사도적 권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15 ) 다음을 보라. Homer, Iliad 2.649; Odyssey 19.172-179. 그 수는 서로 다르다.
16 ) 참고, 행 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katV evkklhsi,an presbute,rouj, ‘카트 엑클레시안 프레 스뷔테루스’); 본문의 어구 “각 교회에 장로들을”(kata. po,lin presbute,rouj, ‘카타 폴린 프레스 뷔테루스’).
17 ) 다음을 보라. Merkel, 90; Marshall, 153; Johnson, Paul’sDelegates, 224.
18 ) diata,ssw(‘디아탓소’, “지시를 내리다”; 구속력도 있고 권위도 있는 지시에 대해 다음을 보라. 고 전 7:17; 9:14; 11:34; 16:1. 참고, 딤전 2:1, 8[논의와 주석]에서 권위 있는 ‘불로마이’[bou,lomai, “내가 원한다”]). 참고, G. Delling, TDNT 8:34-35; L. Oberlinner, EDNT 1:313-314. 구절 ‘호 스 에고 소이 디에탁사멘’(w`j evgw, soi dietaxa,mhn, “내가 네게 지시한 대로”)에서 1인칭 대명사 의 용법은 강조적이고(“내가 직접”), 부정과거 동사는 과거에 명령했음을 암시한다.
19 ) 참고, GNB는 이 구절을 6절 도입부로 여긴다(“내 지시를 기억하라……”).
20 ) 동의, Marshall, 153.
III. 편지 본론 ( 1:5-3:11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2. 교회 지도자 임명은 교회를 가르치고 반대파를 교정할 수 있게 한다 ( 1:6-9 )
2. 교회 지도자 임명은 교회를 가르치고 반대파를 교정할 수 있게 한다 ( 1:6-9 )
디도가 그레데 사역에 임명된 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바울은 곧바로 지 도자 임명의 직무로 옮겨 간다. 두 가지 지도직 규범을 결합한 것으로 보이 는 것 ( 지도자를 가리키는 두 용어 “장로”[5절]와 “감독”[7절]으로 구분 ) 은 디모데전서 3장 2-6a절의 규범과 같은 근거를 이루면서 많은 언어를 공유하는데,21 ) 이는 지도자 선택에 어느 정도 지침을 제시한다. 디모데전서 3장처럼 장로/감독 의 삶 가운데 증명되어야 할 특성에 강조점이 있다. 각 부분에서 “비난할 것이 없는”이라는 용어의 반복은 이후에 나오는 특성이 “비난할 것이 없 는”이라는 이 광범위한 기준을 정의하는 데 기여한다는 말이다 ( 6, 7절; 참고, 딤 전 3:2, “책망을 넘어서는”; 딤전 3:10, “비난할 것이 없는” ). 그래서 일반적인 의미로 지도직 을 맡는 데 필요한 특성은 “비난할 것이 없음”이다. 구체적인 특성은 한 사 람의 지역, 개인 ( 그리고 개인 상호간 ), 교회 ( 사역 ) 영역을 포함한 구체적인 틀 안 에서 이러한 성품의 기준을 탐구한다. 6절 이 문장의 구조에 대해 먼저 단어 하나를 말해야겠다. 앞에 나온 공 식이나 계획된 공식을 채택할 경우 자주 드러나듯, 구문이 조금 고르지 못 하게 된다.22 ) 보통 도입부의 “누구든……라면” 구절에는 주절이 이어지게 마련이지만 ( 딤전 3:1, 5; 5:4, 8, 16; 6:3 ), 이 경우 주절이 와야 하는 경우에 7절은 또 하나의 관련 교훈 단편으로 돌아가 맥락을 통해 주어 ( 장로들 ) 를 보충하게 둔다. TNIV가 도입부를 해석한 “장로는 비난할 것이 없어야 한다”( 문자적으로, “누구든 비난할 것이 없으면” ) 는 교훈 도입부의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본질을 숨기 는데, 이는 주절이 없어서 생기는 모호함을 해결하려는 시도인 것 같다.23 ) 전체적으로 지도자는 “비난할 것이 없어야”( 1:7 ) 한다.24 ) 이는 “책망을 넘 어서는”이라는 용어와 동의어인데, 그 용어는 디모데전서 3장 2절에서 감 독의 비슷한 일반 특성을 규정했다.25 ) 그래서 매번 큰 뜻을 품은 사람의 명 성이 도마 위에 오르는 가운데, 그에게 불리하게 공민 생활에서나 가정생활 에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고발당할 근거가 전혀 없을 것이 요구된다. 구체적
21 ) 딤전 3:1에서 형식과 내용에 대한 논의를 보라.
22 ) 다음을 보라. Quinn, 84-85.
23 ) “……그로 지명되게 하라” 같은 표현을 말한다(Marshall, 154를 보라).
24 ) ‘아넹클레토스’(avne,gklhtoj)는 딤전 3:10(논의와 주석)을 보라.
25 ) 딤전 3:1-7에서 더 상세한 논의를 보라.
인 특성이 입증할 것처럼, 이 평가는 기독교 공동체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바깥의 의견도 받아들인다. 첫째, 바울은 가정생활 영역을 탐구하면서, 행실의 두 가지 측면에 주목 한다. 디모데전서 3장 2절처럼 첫 번째 우려되는 점은 지도자의 혼인을 전 제로 한다. “아내에게 충실한”( 문자적으로, “한 아내의 남편” ) 은 혼인에 대한 정절 을 묘사하고 구체적으로 일부다처혼이나 재혼 문제를 조사하지는 않 는다 ( 딤전 3:2 주석을 보라 ) 둘째, 후보자가 아버지로서 가지는 명성은 간접적으로 그 자녀의 행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나오는 것으로26 ) 에베소에서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처럼 검토한다 ( 참고, 딤전 3:4 ). 그 자녀는 “믿는”27 ) 자녀이거나 “신실 한/신뢰할 수 있는”28 ) 자녀다. 이것이 디모데전서 3장 4절에 나온 것보다 더 터무니없는 조건처럼 보일 수 있고 자녀의 믿음을 언급하는 대신 아마 도 추정할 뿐이라고 해도, 전자의 의미가 이들 동역자서신에서 “믿음” 어휘 군이 가진 의미 영역에 더 부합한다 ( 딤전 1:2 주석을 보라 ). 아마도 그레데 교회가 기복도 심하고 개척 중인 상황에 처했기에 지도자의 가정이 분열된 가족이 아니라는 보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장인 아버지의 명성을 고려하는 차원 에서 자녀의 종교적 확신은 주인/아버지의 확신에 따를 것이 기대될 것 이다. 이런 조건을 어떻게 측정할지 궁금할 수 있다. 바울은 이 경우 다시 그레 데 사회의 자생적인 고정 관념에 의존할 수 있다. “방종하고 불순종한다는 비난이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29 ) “고발”이라는 법률 용어는 여기서 공식
26 ) 이 조건은 보통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말한다. 남자인 장로는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을 것이다. 27 ) te,kna e;cwn pista,(‘테크나 에콘 피스타’). ‘테크논’(te,knon, “자식”)은 딤전 1:2(주석)를 보라. 자녀에 대한 ‘에코’(e;cw, “잡다, 갖다, 취하다”)는 딤전 3:4(주석)를 보라. 이 질문은 형용사 ‘피 스토스’(pisto,j)의 두 가지 의미(“믿는” 또는 “신실한/신뢰할 수 있는”; 딤전 1:2, 주석을 보라) 를 중심으로 다룬다. 다음을 보라. Marshall, 157-158; Mounce, 388-389; Johnson, Paul’s Delegates, 220-223; BDAG, s.v. 2. 28 ) Knight, 289-290. 신앙을 벗어난 의미에서 아버지에게 충실함(=순종; 참고, 딤전 3:4)은 이어 지는 나쁜 행실 항목에 더 잘 부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음도 보라. Schwarz, Bürgerliches Christentum im Neuen Testament?, 67. 하지만 바울의 마음속에서 이런 부정적인 특성이 뚜렷 하지 않은 행실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시작된 삶의 특징이다(2:12).
29 ) 부정 어구 ‘메 엔 카테고리아’(mh. evn kathgori,a|; 부정의 분사는 형용사에 내재한 행동을 반영 하고 이는 분사로 기능한다; Moule, Idiom Book, 155-156을 보라)는 타당하게도 대부분의 해 석가가 “믿음”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Mounce, 389는 이 구절을 7절에서 이어지는 금지와 연결하여 장로의 행실에 대한 추가 묘사로 여긴다. 7절에서 새로운 소개가 들어 와 이 연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
III. 편지 본론 ( 1:5-3:11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2. 교회 지도자 임명은 교회를 가르치고 반대파를 교정할 수 있게 한다 ( 1:6-9 )
적인 사법적 상황을 전제로 둔 것이 아니다.30 )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측 면에서도 나올 수 있는 고발을 말한다. 두 속격 용어 중 첫째는 “고발”의 내 용을 묘사하는 것으로 “방종한”이 성적 난잡함에서 술 취함에 이르는 일정 범위의 무절제한 행동을 포괄하는데, 여기에는 그러면서 돈과 음식을 사용 함에 과도함도 포함된다.31 ) 에베소서 5장 18절과 베드로전서 4장 4절처럼 이 단어의 가장 넓은 의미는 대부분의 근거를 포괄하도록 의도되었다.32 ) 바울은 억제되지 않은 행실에 ”불순종“ ( 더 나은 것은 “반란”, “불복종” ) 을 더 한다.33 ) 특히 이는 정확히 공동체에 물의를 일으키는 반항적인 선생의 특 성이고 ( 1:10; 참고, 딤전 1:9 ), 이 선생들의 행실에 대해 바울은 조만간 그레데의 고정 관념을 끌어들여 희화화할 것이다 ( 12-13a절 ). 가정 상황을 고려하면 이 함의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의 수준에 이르렀던 불순종을 말한다. 바울이 이 행실을 반대파를 규정하는 위법성으로 이어지는 연속체 에 둔 것으로 보인다 ( 딤전 3:2; 신 21:20 ) 현대 서구적 관점에서 다소 과한 조건으로 보일 수 있으나, 1세기 지중해 의 존경과 수치를 중시하는 문화라는 보편적 의미에서 가장의 명성과 존경 은 이런 가족 유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더 기본적인 차원에서 가장 중요 한 관심사가 그레데 문화의 저속한 요소가 발산하는 유혹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던 교회가 보기에 그 지도직은 이런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어야 했다. 집단적으로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서 복음의 가치 체계를 수용했던 가 정은 사회에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레데의 가치를 떠나기를 주저했 던 반항적인 그리스도인 선생의 영향에 맞서려고 했다. 7절 7절은 이미 소개한 “책망할 것이 없음”이라는 조건의 근거를 소개하 는 것으로 보인다. ‘가르’( “왜냐하면” ) 는 어떤 의미에서 추가 설명을 제시하지 만, 구문과 반복 및 교대는 논리를 조금 거칠어지게 만들었다. 바울은 6절
30 ) ‘카테고리아’(kathgori,a)는 딤전 5:19(논의와 주석)를 보라. F. Büchsel, TDNT 3:637 n. 2에서 이 용어가 교회 치리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라는 의견을 보라. 이로써 “그 자녀가 현재 교회의 견 책을 받지 않는자”라는 의미가 생길 것이다. 이는 맥락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보 인다.
31 ) avswti,a(‘아소티아’). 순서대로 마카베오2서 6:4; 엡 5:18; 벧전 4:4; 눅 15:13; 잠 28:7(마소라 본 문). Spicq, TLNT 1:220-222; W. Foerster, TDNT 1:506-507; BDAG, s.v.
32 ) Marshall, 158이 지적한 것처럼 예수의 비유에서 탕자의 방종한 행실(눅 15)은 정신을 차린 가운 데 있는 모습에 대한 적절한 묘사로 기능한다.
33 ) ‘아뉘포타크토스’(avnupo,taktoj)는 딤전 1:9(논의와 주석)를 보라. TNIV 해석 “불순종하는”은 의 심할 것 없이 가정 맥락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부모에 대한 불순종을 고려한 것이기에 이 용어는 권위에 대한 더 노골적인 무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의 조건을 지지하고 다듬으면서 지도직 ( ‘에피스코포스’ ) 을 위한 조건을 완성하 고 이를 설명할 몇 가지 부수 특성과 더불어 “책망할 것이 없음”이라는 조 건을 반복한 평행 진술을 제시한다 ( 7b-9절 ). 이렇게 디모데전서 3장의 양식 에서 이탈한 것은 무수한 문제를 일으켰고,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두 가지 관찰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첫째, 디모데전후서에서 본 것처럼,34 ) 미덕과 악덕 목록은 바울 세계에 서 윤리 강론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여기서 사용한 종류의 목록의 경우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항목 자체에는 해당 문화에서 존경 가능성과 명예를 측정하는 표준적인 미덕이 담겨 있다. 그중 일부는 의미가 중첩되지만, 이 것만이 추가로 미덕의 완성이라는 인상까지 창출하고, ( 확신을 기할 수 없을지라 도 ) 이들 사이의 첨예한 대립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 구성 방식에서 이 런 미덕은 확인해야 할 그토록 많은 개별 특성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 미덕은 함께 모여 대부분 외적이고 가시적인 평가가 가능한 삶의 이상적인 양식을 형성했다. 그리고 덕망 있는 이상적인 삶의 칭송에서 철학자는 이런 미덕 목록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공적 존경 가능성의 가치를 이상화했고, 사 회 지도자는 이 이상을 수단으로 평가받아야 했다. 현 본문에서 요지는 이 렇다. 이 장치는 지도자에게 그 명성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개별 항목은 함께 작용하여 어느 정도 방향성을 갖 지만, 이것들을 “지도직”에 이르기 위해 고유의 신비한 비밀을 포기할 것 이라는 소망으로 맹목적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과 초대 교회는 존경 가능성의 개념과 장치를 활용하면서도 반드시 신학적으로 고려했다. 바울이 보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묘사할 수 있는 언어는 당대의 언어였다. 이들 동역자서신의 윤리 언어는 헬라 윤리 언어와 극단적으로 가까운 체제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언어를 사용하면서 디아스포라로 있으면서 최소한 2세기 전부터 이미 헬라 윤리의 언어를 채택하여 토라를 따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인 간의 삶에 대한 함의를 실현한 유대의 신학적 고려 전통 가운데 서 있었다. 헬라 윤리 용어가 사용된 것은 서로 다르지만 여전히 의미의 다리가 생길 수 있는 헬라 문화와 충분히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 실존을 묘사하는 데 쓰 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직무를 신학의 다음 국면에 두었다. 이제 헬라의 중요 미덕으 34 ) 다음 논의를 보라. 딤전 6:4-5, 11; 딤후 2:24-25; 3:2-4, 10-11.
III. 편지 본론 ( 1:5-3:11 )
A. 디도에 대한 지시 ( 1:5-16 )
2. 교회 지도자 임명은 교회를 가르치고 반대파를 교정할 수 있게 한다 ( 1:6-9 )
로 묘사할 수 있는 삶은 공적으로 존경 가능한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이 베푼 은혜로 인한 결과로 설명된다 ( 2:12 ). 삶에 대한 이런 신학적 기 초를 놓고 보면, 윤리의 언어는 겉으로는 헬라의 관념과 비슷할지라도 그리 고 심지어 그 가시적 표현이 똑같이 드러날지라도 “존경 가능성” 또는 개인 행실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 이 디모데와 디도가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을 돕기 위해 이들에게 미덕 목 록을 제시할 때, 바울의 의도는 선택한 자들이 논란이 없는 명성을 가진 사 람들이기를 바란 것이었다. 다른 구체적인 조건 ( 연령, 가르칠 능력 등 ) 은 물론 그 조건의 적용에 있어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둘째, 디도서 1장 6-9절을 디모데전서 3장 2-7절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 지는 것은 공통점과 차이점 모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곧 보겠지만 차이점은 그레데의 상황을 볼 창을 열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한 차이와 두 가지 공적 용어인 장로와 감독의 뚜렷한 정체성과 각 직무에 추가된 “책 망할 것이 없는”이라는 단서는 바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반복에 대한 흔한 설명은 유사 전통의 채용을 암시한다 ( 한 교회가 “장로”라 는 용어를 쓰면 다른 교회가 “감독”이라는 용어를 쓰는 식으로 ). 이것들이 여기에 배치된 것 은 추가로 두 용어가 바울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말이었다거나 ( 또는 일부 교회 상황에서 그랬을 수 있다 ) 교회의 두 직무가 하나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디도서 1장 6-8절과 디모데전서 3장 2-7절이 분명히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직무 규범에 의존한 것인지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 의존하 여 바울이 이를 재구성한 것인지는 알기가 더 어렵다. 현 본문의 조합에서 보면 우리는 별도의 규범이 따로 존재했고, 각 규범이 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 중 하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 류의 문헌사나 전승사는 어느 정도만 도움이 된다. 아마도 더 유익한 것은 사도행전 20장 17-28절을 기초로 관찰하는 것 같을 것이다. 분명히 바울 사역의 범위 안에서 두 용어는 이미 서로 지도직의 단일 범주를 묘사하는 데 교대로 쓰였다.35 )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스’ ) 의 기능은 “감독”( ‘에피스코페’ ) 의 측면에서 묘사되었다. 이런 고려를 생각하면서 본문의 주제 흐름을 보면 “그 장로”( 6절 ) 에게 요 구되는 “책망할 것이 없음”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장로가 교회를 감독할 소명에 긴밀히 연결된다 ( 7절, 추론적 불변화사 ‘가르’에 주의하라 ). 앞에서 지적한 대로 35 ) 딤전 3:1-7의 도입부 논의를 보라. 참고, Marshall,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