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ICNT 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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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요한계시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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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로버트 마운스 (Robert H. Mounce) 로버트 마운스는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Whitworth College)의 명예 총장이며, 저 명한 신약과 헬라어 학자다. 그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 요한계시록 주석』, 『NAC 로마

로버트 마운스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서』(The New American Commentary: Romans), 『EBC 요한복음』(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John), 다. NIV, NIrV, NLT, ESV, HCSB 성경의 번역 위원으로 섬겼다.

옮긴이 장규성

장 | 규성 옮김

『UBC 마태복음』(Understanding the Bible Commentary: Matthew)을 비롯해 여러 논문과 책과 주석을 썼

요한계시록 Revelation

국민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Th. M.), 미국 칼빈 신학교(Th. M.)를 졸업한 후 현재는 일리노이주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박사 과

정에 있다. 이필찬 교수 밑에서 요한계시록을 배운 것을 시작 으로 요한계시록의 선교적 의미를 로마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현재 시카고 교외의 전하는교회에 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ISBN 978-89-6092-544-1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30,000원

로버트 마운스 지음 | 장규성 옮김


요한계시록

목차 ■ 저자 서문(초판) │ 6 ■ 저자 서문(개정판) │ 9 ■ 약어 소개 │ 1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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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 19 Ⅱ. 저자 | 28 Ⅲ. 기록 연대 | 37 Ⅳ. 초대 교회 안에서의 회람과 수신 | 45 Ⅴ. 해석적 접근들 | 49 Ⅵ. 요한계시록의 언어 | 56 Ⅶ. 구조 | 57 Ⅷ. 개요 분석 | 60

본문과 주석 Ⅰ. 프롤로그(1:1~20) | 66 Ⅱ.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1~3:22) | 97 Ⅲ. 하늘 궁정에서의 경배(4:1~5:14) |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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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IV. 일곱 인(6:1~8:1) | 189 V. 일곱 나팔(8:2~11:19) | 228 V I. 교회와 악의 세력의 충돌(12:1~14:5) | 298 막간:

최후 심판에 대한 환상(14:6~20) | 346

V II. 마지막 일곱 재앙(15:1~16:21) | 362 V III. 바벨론의 멸망(17:1~19:5) | 391 IX. 최후 승리(19:6~20:15) | 439 X. 새 하늘과 새 땅(21:1~22:5) | 480 XI. 에필로그(22:6~21) | 507 ■ 참고문헌 │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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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 저자 서문 ( 초판 )┃

NICNT (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 요한계시록 주석은 원 래 이 시리즈의 편집자였던 고 ( 故 ) 스톤하우스 ( Ned B. Stonehouse ) 가 쓰기로 되 어 있었다. 1962년에 있었던 그의 죽음은 신약 학계의 큰 손실이었다. 일 년 뒤, 여전히 준비 중이던 몇몇 책들의 편집을 뒤이어 맡게 된 F. F. 브루 스 ( F. F. Bruce ) 교수가 나에게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쓰도록 권유했다. 안 타깝게도 내가 스톤하우스 박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길은 강의 노트 몇 권밖에 없었는데, 이것들은 이전에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였으며 지금은 웨스턴 켄터키 대학교에서 나의 동료로 일하는 윌리엄 레인 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처음 몇 년간 나는 내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책을 읽는 데 전념 했다. 요한계시록의 세계를 깊이 있게 경험하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 었다. 1차 자료들은 그 자체의 독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전 문가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서로의 작품을 읽는 데 쏟은 저자들의 작품이 더욱 그러했다. 내가 크게 주목한 것은 헬라어 본문 의 자세한 구문론적 개요의 발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요한계시록이 스스 로 자신이 가진 조직적 구조를 나에게 드러내 주기를 기대했다. 요한계시록 은 너무 자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개요로 끼워 맞춰진다. 주석들은 본문에 대한 열린 자세로 시작했다가도 몇 장이 지나지 않아 경직되고 좁아져 드 러난 개요가 허용하는 것만 본문이 말하게 한다. 앞에 나온 장들에서 “어쩌 면”이나 “아마도” 같은 부사로 한정되었을 내용들이 증거에 비해 지나칠 6


정도의 확실성을 갖게 된다.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 나는 R. H. 찰스 ( R. H. Charles ) 가 요한계시록에 대한 고전인 자신의 두 권짜리 ICC (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

주석을 준비하기

위해 25년을 보냈음을 알고 낙담했다. 그러나 이 업무의 방대함을 더 온전 히 깨달아 감에 따라 같은 내용이 나에게 끊임없이 격려가 되었다. 여러 번 에 걸친 이사와, 다섯 아이들의 양육 문제, 그리고 대학에서 맡게 된 행정적 인 보직들 때문에 이 주석의 완성이 늦어졌다. 요한계시록에 관해 글을 쓰는 저자들이 당면하는 비평적 문제는 이 책이 쓰인 문학적 장르에서 불거진다.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결정하기까지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가 어떤 종류의 문학을 다루고 있는지가 본질적인 질문이다. 만족스런 주해 를 위해서는 묵시적 사고 형태와 어휘에 대한 사전 이해와 민감함이 필수 적이다. 생생하고 종종 기괴하기까지 한 요한계시록의 상징주의는 오늘날 의 많은 저자들을 변명의 여지없는 문자주의나 지나치게 상상하는 주관주 의로 빠지게 했다. 나는 중도 노선을 유지하려고 애썼는데, 그 이유는 그것 이 바로 이 고대 본문의 수신자였던 1세기의 아시아 일곱 교회의 귀에 들린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노선이 얼마나 잘 유지되었는가는 독자가 판 단해야 할 것이다. 묵시에 대한 비평적인 글을 통해 내가 받은 도움에 대해서는 주석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각주로 처리했다. 많은 유용한 요한계시록 주석 가운데에 서도, 스위트 ( H. Charles ),

Swete ) ,

호트 ( Hort,

아쉽게도 그는 1~3장 주석만 썼다 ) ,

찰스 ( R.

H.

그리고 벡위드 ( Beckwith ) 의 글이 헬라어 본문을 관찰하는 데 가장 유

용했다. 최근의 저자들 중에서는 오스틴 파러 ( Austin Farrer ), G. B. 케어드 ( G. B. Caird ) 가

내 생각에 가장 많은 도전을 주었다. 상대적으로 짧지만 탁월한 F.

F. 브루스 ( F. Ladd ) 의

F. Bruce ),

레온 모리스 ( Leon

Morris ),

그리고 조지 래드 ( George

주석들은 내가 본문 연구를 통해 도출해 낸 일반적인 해석적 접근

을 잘 반영한다. 때때로 그들의 글 때문에 나는 더 이야기해야 할 것이 없는 지를 생각하기 위해 멈춰 서곤 했다. 내가 요한계시록 연구에 기준이 되는 문헌을 인용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각각의 주석을 각주로 달기보다, 간단히 저자의 이름과 적절한 페이지 숫자 를 적었다. 이런 식으로 적힌 모든 이름들은 약어 소개에서 찾을 수 있고, 전 체 출판물에 대한 정보는 엄선된 참고문헌에 담았다. 내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본문과 각주를 최대한 간결하게 유지하면서도 독자들의 후속 연구에 7


요한계시록

필요한 추가적인 정보들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 주석이 사용하는 성경 본문은 American Standard Version ( 1901 ) 이지 만, 나는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 인용에서는 Revised Standard Version을 사용했다 ( 다르게 표시한 경우를 제외하고 ). 나는 UBS ( United Bible Societies ) 의

헬라어 본문을 따랐다. 비록 내가 영국 및 외국 성서공회 (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 ) trick ) 의

2판 ( 1958 ) 본문에 기록된 G. D. 킬패트릭 ( G.

D. Kilpa­

간략한 비평 장치 ( apparatus ) 를 주로 인용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브루

스 M. 메츠거 ( Bruce

M. Metzger ) 의

『헬라어 신약 성경 사본 주석』 ( Textual

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1971 ) 은

Co­

매우 유용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을 준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브루스 교 수는 앞 장을 읽고 중요한 제안을 해 주었다. 후에 그는 전체 본문을 신중하 게 편집해 주었다. 나의 아내 진 ( Jean ) 은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읽어 왔고, 계속해서 내가 그때까지 제시했던 것보다 더 확고한 근거를 토대로 하나의 입장을 지지하도록 자극해 주었다. 두 명의 탁월한 비서인 필리스 제스조우 스키 ( Phyllis Rzeszowski ) 와 넬다 스틴 ( Nelda Steen ) 은 원고의 많은 부분을 입력하 고 다시 입력했다. 도로시 ( Dorothy ) 와 빌 맥마혼 ( Bill McMahon ) 박사는 친절하게 도 시간을 내어 교정쇄를 읽고 교정해 주었다. 나는 또한 지난 십여 년간 예언자 요한의 세계에서 살아보는 기회를 가진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한다. 비록 모든 세세한 부분의 특정한 의미가 분 명해지지는 않겠지만 요한계시록의 위대한 핵심적 진리는 기도하는 자세로 마음을 열고 이 책을 마주하는 자들에게 거대한 힘으로 다가간다. 악은 지 나치게 확장되었고, 박해는 올 것이지만, 만물 위에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셔서 의인들을 신원하고 악의 세력을 영원히 물리치 실 것이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약속에 대하여, 교회는 확신과 기 대를 가지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계 22:20 ) 라고 반응한다. 로버트 H. 마운스 보울링 그린, 켄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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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서문 ( 개정판 )┃

고 ( 故 ) F. F. 브루스 교수가 나에게 NICNT 요한계시록 주석을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이 34년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77년에 이 책이 출판되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그 사이에 묵시에 대한 문헌들이 상 당하게 출판되었다. 영어로 된 것만 따져도 주석과 요한계시록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품이 80권이 넘는다 ( 학문적인 저널에 등장한 글들은 말할 것도 없이 ). 이 모든 것은 이제 나의 주석을 최신 경향에 맞춰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해 준다. 독자들은 개정판에서 스타일의 변화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나는 American Standard Version ( 1901 ) 이 아닌 New International Version을 기 본 영어 본문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또한 킬패트릭 ( Kilpatrick ) 의 비평 장치를 NA27 ( Nestle-Aland 27th ed. ) 로 대체했다. 약어 소개 또한 개정된 1994년 JBL 지 침서를 기준으로 통일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이 주석에 가져온 변화 중 부차적인 것에 불과 하다. 나의 기본적 입장이 여전히 전천년주의이지만, 이제는 왜 다른 신념 을 가진 학자들이 자신의 해석적 입장을 지지하는지를 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록 나는 여전히 철저한 요약 이론을 거부하지만, 순 차적인 환상들이 실제로 같은 시기를 포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 은 나선형의 강화로 설명될 수 있다. 이미 초판을 읽은 독자들은 요한계시 록에 대한 이런 보다 성숙한 관점이, 다른 사람들의 통찰에 많이 의존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저자가 말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알려 주려는 시도임을 알 게 될 것이다. 본문과 학자들의 논쟁에 관한 전문적인 논의는 다른 것들과 9


요한계시록

함께 주로 각주로 처리했다. 현재 이 시리즈의 편집자인 고든 피 ( Gordon Fee ) 가 가장 유용한 제안을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다. 그는 나에게 초판은 교수 경력이 5년밖에 되 지 않은 초보 학자가 썼지만, 개정판은 반드시 30여 년간의 요한계시록에 대한 깊은 사색을 추가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분명히 이렇게 하려면 차라리 글을 광범위하게 다시 써야 했다. 이것은 내가 계획한 것과 는 달랐지만, 이제 이 글이 완성되었기에 나는 고든의 통찰에 감사할 수 있 다. 또한 어드만 출판사의 밀톤 에센버그 ( Milton Essenburg ) 가 이 주석을 꼼꼼 히 편집해 준 것에 감사하고 싶다. 더불어, 팀 스트라이어 ( Tim Straayer ) 가 치 밀한 개정에 필요한 전문적인 작업을 위해 수고한 것을 언급하고 싶다. 마지막 감사의 말이다. 75세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특별히 주님께서 나 에게 좋은 건강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나의 아내가 행복한 가정을 만 들어 준 것에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개정 작업을 마치지 못했 을 것이다. 오레곤주 벤드에서 로버트 H. 마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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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elation

서론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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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I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요한계시록은 일반적으로 묵시적이라고 불리는 문학적 범주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다. 문학적 장르를 나타내는 “묵시” ( apocalypse ) 라는 용어는 요한계 시록 1장 1절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서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을 초자 연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을 뜻한다. 최근의 논쟁에서 “묵시”라는 용어는 더 넓게 BC 200년에서 AD 100년 사이에 성경의 세계에서 융성했던 일련의 작품과 그 작품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개념을 가리킨다.1  )   묵시의 정확한 범위를 결정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 종종 다른 문학 양식이나 개념의 형태에 가 까워지므로 ),2  )   대체로

수용되는 것은, “묵시”란 신적인 계시로 보통은 과거에

천상적 매개체를 통해 중요한 인물들에게 전달된 것이며,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고통의 시대를 끝내고 모든 악을 멸망 할 것을 약속하셨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3  )   묵시의 저자들은 대부분 악한 1  )   톰슨은 묵시(“다니엘, 에녹1서, 에즈라4서, 요한계시록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작품과 문학들”)와, 묵시적 종말론(“종교적인 관점으로……세계와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자리에 대한 특정한 믿음을 포함하는 것”), 그리고 묵시주의(apocalypticism. “묵시와 초월적 종말론에 관한 사회적 관점”)를

서로 구분한다(R. Thompson, Revelation, 23). 2  )   마이클스는 “많은 문학 이론들이 좋은, 그리고 위대한 작품들은 결코 하나의 특정한 양식에 속하 지 않는다. 이런 작품들은 매우 독특한 창작물로서, 범주의 구분이 깨어질 때까지 그 범주를 확장 한다”고 말한다(Michaels, Interpreting the Book of Revelation, 31). 3  )   국제 성서학회 양식 프로젝트(SBL Genres Project)는 묵시를 이렇게 정의한다. “서사적 틀을 가진 계시적 문학 양식으로, 그 틀 안에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 수신자에게 전달한 계시가 담겨져 있다. 이 계시는 종말적 구원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지만, 다른 초자연적인 세계를 포함한다는 점에서는 공간적인 초월적 실재를 드러낸다”(J. Collins, Apocalyptic Imagination, 4에서 인용). 리 스트는 묵시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묵시주의는 악한 세력(사탄)에 대한 종말론적 믿음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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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비관적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우주적 힘은 생생하고 종종 기괴하기까지 한 상징으로 묘사된 다. 환상으로 가득하다. 묵시 저자들은 역사를 예언으로 다시 쓰는 일반적 인 글쓰기 방식을 따랐는데, 이로써 미래의 일들에 대한 자신들의 예언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묵시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기에 여기서 충분한 논의 를 하기는 어렵다. 베츠 ( Betz ) 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묵시를 헬라적 현상 으로 보는 반면,4  )   콘첼만은 묵시가 이란 종교에서 발전한 것이며 5  )   유대 사회에서 기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Conzelmann ). 다양한 것이 묵시를 형 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묵시가 본 질적으로 유대적이고 기독교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6  )   로울리 ( Rowley ) 의 “묵시는 예언 ( prophecy ) 의 자녀다”라는 평가는 옳다.7  )   D. S. 러셀은 묵시가 다른 많은 곳에서 자양분을 얻었지만, “주된 뿌리는, 만일 그런 것이 존재 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히브리 예언에까지 깊이 닿아 있다”고 인정한 다.8  )   후에 그는 묵시란 예언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예언의 메시지 를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재적용하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기록하는데, 그의 “새로운 숙어로 쓰인 예언” ( prophecy in a new idiom ) 이라는 구문은 B. W. 앤더 슨 ( B.

W. Anderson ) 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폴 한슨 ( Paul

Hanson ) 은

『묵시의 서

광』 ( The Dawn of Apocalyptic ) 이라는 중요한 책에서 “묵시적 종말론의 출현은 갑 작스러운 것도 이질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예언에

악한 세력은 인류 역사의 한시적이고 소망 없는 악한 시대를 다스리고 있으며, 이 시대에는 의인들 이 악한 세력의 영적인 대리자나 인간 대리자를 통해 핍박을 당한다. 그러나 이 악한 세력은 하나 님의 직접적인 간섭을 통해 곧 멸망하게 될 것이며, 그의 악한 통치 또한 끝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선한 능력 그 자체이시며, 따라서 완전히 새롭고, 완벽하고, 영원한 시대를 즉 각적인 다스림을 통해 창조하실 것이며, 이 다스림은 산 자와, 부활한 죽은 자들로부터 자신을 따 르는 의로운 자들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다”(Rist, 347). Ladd, “Why Not PropheticApocalyptic?” JBL, 76 (1957), 192~200에 나오는 그 글의 서론을 참고하라. 4  )  J TC, 6 (1969), 155. 5  )   An Outline of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23. 6  )   Leon Morris, Apocalyptic, 30~33. 피오렌자는 이전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책[요한계시록]이 약간만 편집된 유대 묵시라는 데 동의했지만”, 현재는 “점점 더 고유한 기독교 작품으로 보는 듯하 다”고 말한다(Fiorenza, Revelation, 25). 7  )   Rowley, Relevance of Apocalyptic, 15. 오니(Aune)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묵시가 이스라엘의 예 언으로부터 태어난 것으로 여긴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묵시는 단지 예언의 유일한 계승자가 아니라, 여러 다른 파생물 중의 하나로 봐야 한다”는 경고를 덧붙인다. 8  )   Russell, D. S.,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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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서 꾸준히 발전된 형태를 따른다”고 주장한다.9  )   조지 래드는 묵시가 역사-신학적인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출현하며 그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본다. ( 1 ) 타협주의로 가득한 세태에 대항하여 율법을 지키고자 애쓰는 “의로운 남은 자”의 출현, ( 2 )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때조차도 고난과 국가적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악의 문제들, ( 3 ) 백성들이 자신들의 역사적 곤경에 대해 하나님의 설명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예 언이 중단된 것 등이다.10  )   묵시의 주된 역할은 의인이 고통을 당하고 하나 님의 나라가 지연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11  )   예언은 주로 예언자가 그 글을 쓴 시기에 문제시 되는 국가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 러나 묵시가 집중한 것은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의를 세우 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미래였다. 전반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관점을 형성하는 특정 기본 요소가 있을 때 묵시의 장르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 묵시는 항상 종말론적이다. 묵 시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다루는데, 이 미래에 하나님이 이 시공간의 세 계에 들어오셔서 전체 구조를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예언 또한 미래 를 내다보는 측면이 있지만 ( 예언자들이

단순히 설교자였다는 의견과는 반대로 ),

여전히

다른 점이 있다. 로울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말 해서, 예언자들은 현재로 인해 일어나게 될 미래를 예언한 반면, 묵시의 저 자들은 현재로 침입해 들어올 미래를 예언했다.” 12  )   둘째로, 묵시는 이원론의 특징이 있다. 이 이원론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현세적이다. 대립되는 두 초자연적 힘이 존재하는데, 하 나님과 사탄이다. 또 두 개의 구분되는 시대가 존재한다. 이 시대는 찰나이 며 악하고, 다가올 시대는 영원하며 완벽하게 의롭다. 이 시대는 사탄의 통 제 아래 있으며, 다가올 시대는 하나님의 임박한 지휘 아래 있다. 이 두 시 대를 가르치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은 두 세계에 대한 관념으로, 현재 눈에 보이는 우주와, 시간이 있기 전부터 하늘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상적 세계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원론이 페르시아의 세계관에서 영 9  )   Dawn of Apocalypse, 7~8. 10  )   Ladd, BDT, 50~51에 실린 “Apocalyptic, Apocalypse.” 11  )   톰슨은 “묵시가 어느 특정한 상황, 즉 위기의 상황 아래서 생겨난다는 관점이 널리 수용되고 있 다”(R. Thompson, Revelation, 25)고 했지만, 슈미탈스(Schmithals)가 “사회적, 역사적 상황과 묵시의 사이의 태생적 관계성을 모두 단절시킨 것”(27)이라고 한 것도 언급했다. 12  )   Rowley, Relevance,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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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약 선지서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13  )   묵시는 또한 철저하게 결정론적인데, 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확정된 시간 표에 따라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전진하고, 예정된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이런 결정론이, 인간은 자신이 직면한 악과 더불어 싸울 능력이 없다 고 보는 지나친 염세주의를 초래하기도 하지만,14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 점은 심지어 묵시의 저자가 죽기 전에도 하나님이 승리를 가져오실 수 있다 는 확신을 길러 준다. 결정론은 또한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통 찰을 제공한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모든 삶이 하나 님에 의해 결정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허락하신 일은 모두 본질 적으로 선하다는 확신이 자라남에 따라 사그라든다. 묵시적 세계관을 형성 하는 다른 특징들은 종말을 지나치게 중요시한 나머지 역사의 과정을 기꺼 이 저버리는 것,15  )   의인들의 실패를 꾸짖기보다는 그들을 위로하는 데 관심 을 가지는 것, 또 자신들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다는 확신 등을 포함한다. 묵시의 일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이런 모티프들뿐 아니라, 몇 가지 독특 한 문학적 특징 또한 묵시를 구분하는 데 도움을 준다. D. S. 러셀은 묵시를 “특징은 비의적 ( 秘儀的, esoteric ) 이며, 형태는 문학적이고, 언어는 상징적이며, 저자는 익명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정의한다.16  )   벡위드는 “자세하게 묘사 된 환상, 또는 유사한 형태의 계시가 묵시 문학의 형식이 가진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라고 기록한다 ( Beckwith ).17  )   묵시의 내용은 주로 꿈이나 환상을 통 해 저자에게 전달되는데, 이 꿈이나 환상 속에서 저자는 천상의 세계로 옮 겨지고, 거기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원한 비밀의 계시를 목격하는 특권 을 누린다. 종종 천사 해설자가 나타나 저자의 천상 여행을 안내하며 그가 목격한 비범한 것들의 의미를 알려 준다 ( 예를 들어 많은 머리가 있는 괴물들, 우주적 재 앙 등 ).

이런 환상들은 고대의 예언자에게 주어졌고, 여러 세대 동안 비밀스

13  )   래드는 이에 대한 근거로 구속된 땅을 포함하는 미래 왕국에 대한 예언자적 기대감, 옛 질서로부

터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게 하는 신적인 현현으로 인해 성취되는 변화를 언급한다(Ladd, BDT, 52). 14  )   슈미탈스는 “묵시의 저자는 현시대를 급진적인 염세주의로 대면한다. 세계는 쇠락해 가고 있으 며 멈출 수 없다”고 기록한다(Schmithals, Apocalyptic Movement, 21). 15  )   P. D. 한슨은, 묵시에서 역사는 인간이 얼마나 마지막 때에 가까운지를 알려 주는 “우주적 사건들 의 시간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P. D. Hanson, Int, 25[1971], 478~479). 16  )   Russell, D. S., Method, 106. 이 네 가지 특징이 “묵시 작품의 특징”이라는 장에서 길게 논의되었 다(104~39). 17  )   Beckwith,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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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런 전통을 통해 전수되어 오다가, 이제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 시되었다고 주장된다. 묵시의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의 신비를 드러내는 지혜자”였다.18  )   예언자들은 일차적으로 설교자로서 그들의 메시지가 나중에 기록된 반 면, 묵시의 저자들은 문학가로서 자신들의 관점을 확산시키기 위한 방법으 로 그들의 확신을 글로 기록했다. 예언자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 해 예언했다. 그의 메시지는 여는 선언인 “주께서 말씀하신다”로 시작했다. 반면 묵시의 저자는 전형적인 문학 양식을 차용하고, 이에 맞춰 자신의 메 시지를 수정했다. 묵시의 저자가 사용한 대부분의 기본적 자료는 통용되던 전통에서 가져왔다. 상징주의는 묵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완벽한 상상력을 발휘하 기 위해 아주 기괴한 모양의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19  )   통용 되던 주목할 만한 상징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되었다. 어떤 특정한 이 미지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확실히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라도 어렵다. 그중 많은 수가 구약에서 유래한 반면, 몇몇은 고대 신화로까 지 거슬러 올라간다. D. S. 러셀은 창조자와 거대한 바다 괴물 간의 전쟁을 말하는 바벨론 신화는 원시 신화가 성경과 묵시 문학 모두에 영향을 미친 좋은 예라고 주장한다.20  )   묵시 문학에서 상징을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글의 주제 ( 이

시대의 종말과 다가올 새로운 시대의 도래 ) 와

화자의 기질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가올 세계에 초점을 맞춘 저자가 전적으로 상징 에만 의존해야겠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21  )   묵시 문헌은 익명으로 기록되었다. 묵시 저자 는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대신 저자가 과거의 어떤 유명한 인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작품을 과거로 투영시킨다. 그 결과 과거의 역사가 예언으로 다시 서술된다. 비록 상징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 일련의 사건들은 18  )   Russet, Method, 117. 19  )   에녹1서 86:1~4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들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은 황소가 되어 “음부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수소가 올라탔다.” 그러자 “새끼를 배어 코끼리와 낙타와 당나귀를 낳았 다”(이 세 동물들은 찰스[R. H. Charles]의 『구약 외경과 위경』[Apocrypha and Pseudepigrapha of the Old Testament], 2권, 250에 따르면 거인들의 세 계급이다). 20  )   Russell, D. S., Method, 123~125. 21  )   요한계시록이 바로 주목할 만한 예외다. 이와 함께 벡위드는 헤르마스 목자서신을 지목하고

(Beckwith, 127), 리스트는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묵시적 논고인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에 대하여』(On Christ and Antichrist)와 이사야 24~27장을 언급하는데, 그는 이사야 본문을 “익 명의 저자가 이사야 본문에 끼워 넣은 것”으로 간주한다(Rist,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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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보통은 실제 저자 ( 그는 자신이 종말에 가까이 와 있다고 이해했다 ) 가 살아 있던 시기에 는 분명히 이해되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예고 ( prediction ) 라는 관점은 명확성 이 떨어진다. 익명의 사용은 예언이 중단되었고 율법은 너무 고상한 자리로 올라가 버려서 새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지 않게 된 시기 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 사용되던 방법으로 볼 수 있다.22  )   어 떤 이들은 익명의 사용을 위험한 시기에 사용한 조심스러운 수단으로 설명 해 왔다. 다른 이들은 이것을 과거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설 명한다. 로울리는 이 현상이 다니엘서의 출현으로부터 발생했다고 주장한 다. 다니엘 이야기의 첫 부분은 개별적으로 회람되었고 곧 유명해졌다. 이 이야기들은 주로 다니엘에 관한 것이었다. 환상을 포함한 책의 두 번째 부 분은 후대에 다니엘을 가장하여 기록했는데,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다니엘 이야기의 저자로 밝히기 위해서였다.” 따라 서 익명 사용의 목적은 “속임수의 정반대”이며 모방자가 서툴게 사용할 때 에만 인위적인 티가 난다.23  )   D. S. 러셀은 보다 나은 설명을 제시한다. 그는 이 논쟁에 집합적 인 격 ( corporate personality,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한 단체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개념 )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는 익명의 사용을 히브리인의 독특한 시간 개념 ( 과거를 현재 안으로 집약하고, 같은 시대에 속한다는 강한 인상을 만들어서 어떤 측면에서는 예언자가 고대 위인의 영적 복제 품이 되는 ) 과,

히브리인의 사고 체계에서 고유한 이름이 가지는 중요성 ( 고대 인

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인격이 확장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 으로

설명한

다.24  )   비록 이런 관점들이 현대 독자에게는 비교적 낯설지 몰라도, 히브리 인들의 세계관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익명의 사용이 속임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이 묵시주의를 판단하 22  )   참고, R. H. Charles, Religious Development between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 , 38~46; S. B. Frost, Old Testament Apocalyptic, 11~12, 166~167. D. S. 러셀은 율법의 “독재 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고 말한다(Russell, D. S., Method

and Message, 131). 모리스는 찰스가 너무 지나친 주장을 한다고 보고, “종결된 정경이 이러한 상황의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Morris, Apocalyptic, 52). 23  )   Rowley, Relevance, 40~41. 24  )   Russell, D. S., Method and Message, 132~38. 브루스 존스는 러셀과 같은 설명이 어느 정도 올 바르다고 인정하지만 다음의 측면을 또한 언급한다. “노아의 며느리는 후대의 저자가 쉽게 ‘연대 적 동질감’을 느낄 만한 인물이 아니며, 그 며느리의 이름 또한 어떤 작품에도 권위를 부여해 주 지 못한다”(Bruce Jones, “More about the Apocalypse as Apocalyptic,” JBL, 86[1968], 326). 존스는 익명의 사용(이것의 기능은 단지 그 책을 “오래된” 것이라고 말하는 데 있다)은 사건으로 부터의 예언(Vaticinium ex eventu)과 함께 다음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말한다고 본다. “지금이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이다. 고대의 영웅들조차도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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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는 기준으로 인정된다는 점만은 틀림없다. 요한계시록은 보통 앞에서 묵시라고 설명한 문학적 장르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묵시서인 다니엘서와 짝을 이루는 신약의 책 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상징주의의 집중적인 사용, 계시의 주된 수단으로서의 환상, 이 시대의 종말과 다가올 시대의 극적인 도래에 집중하는 것, 역사적 사건들의 과정 뒤에 존재하며 그 과정들을 결 정짓는 영적 질서를 드러내는 것, 공통적인 묵시적 주제들 등, 이 모든 것이 함께 요한계시록에 “묵시”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에 문제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런 유사성들은 왜 요한계시록의 헬라어 본문의 첫 단어 ( ‘아포칼륍시스’, 묵시 또는 계시 ) 가

비슷한 부류에 속하는 모든 다른 문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

로 쉽게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때로 간과되는 것은 요한계시 록과 다른 묵시 문학 간의 차이점들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예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 1:3, “이 25  )   예언의 말씀.” 참고, 22:7, 10, 18, 19 ) 근본적인 차 이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래드는 묵시 문학이 예언적 자기인식 ( prophetic selfconsciousness ) 을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신약 전체가 회복된 예언적 정신의 산

물이라고 본다.26  )   묵시가 항상 익명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 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분명히 “요한”으로 소개한다 ( 1:4, 9; 22:8; 참고, 1:1 ).

그는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을 찾아서 사람들이 듣게 하거나

현재의 중요성을 부각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자 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의 메시지는 권위 가 있고 독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확신한다. 브루스 존스 ( Bruce Jones ) 는 요한이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동시대 사람들과 직접 대화하는 것은 너무 의도적이어서 우연일 수 없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요한이 그의 책과 이전의 묵시 문헌 간의 차이점을 강조하고자 했다는 결론을 내 릴 수밖에 없다.” 27  )   묵시작가들이 주로 현시대에 비관적인 반면 ( 보링[Boring]은 이것을 절대적이지 않은 “염세주의”라고 부른다 28  )   ),

요한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균형을 유지한

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요

25  )   1611 2053 2062 pc gig vgww sy bo 등은 ‘타우테스’(ταύτης, 이것)를 첨가하여 이 묘사를 더욱 명확히 한다. 26  )   Ladd, BDT, 53. 참고, J. Comblin, Le Christ dans l’Apocalypse, 5~6, 85. 27  )   “Apocalypse as Apocalyptic,” 327. 28  )   Boring,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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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6:33 ).

마지막 때에 사탄의 활동이 시작될 것이나, 역사는 여전히 주권적인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다. 어린 양이 이미 구원을 성취했는데, 이 어린 양 은 죽음을 통해 이겼으며 ( 5:9 ), 역사 속에서 그가 행한 위대한 일은 신실한 자들이 사탄을 이기게 해 준다 ( 12:10~11 ). 실질적인 고난이 목전에 다가와 있 지만, 책 전체는 진정한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 요한계시록은 역사를 보는 관점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묵시와 구별된다. G. 폰 라드 ( G. von Rad ) 는 묵시와 예언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고 강조한다.29  )   묵시 저자들에게 있어서 이 시대는 악하고 무의미하다. 이 시대는 가장 중요한 종말 직전의 마지막 시대로 향해 가는 길목에 잠시 끼 워져 있을 뿐이다. 반대로 요한계시록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의 행위를 이 시대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요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간섭 의 서막을 이루는 세계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어 린 양의 두 번에 걸친 강림과 연결된 두 시대를 설명하는데, 이 시기에 의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극심한 박해 에 처하게 될 교회를 위로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예언적인 구 속사적 관점 때문이다.30  )   요한계시록과 묵시의 또 다른 차이점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 다. 성경에 등장하는 도덕적 긴박성 ( 참고, 회개에 대한 촉구인 2:5, 16; 3:3, 19 ), 환상을 설명해 주는 천상의 교사를 주기보다는 환상을 단순히 알려 주고 그 해석 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것 ( 참고, 17:7. 다른 몇몇 구절들은 예외적이다 ), 과거로부터 비밀 리에 전수되어 온 비의적 지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종말론적 진리를 공개적 으로 선포하는 것 ( 참고, 단 12:9; 에스드라2서 12:35~38 ), 그리고 아시아 교회들을 향 한 일곱 개의 목회 서신의 주목할 만한 삽입 등이다. 요한계시록이 묵시 장 르와 공통되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여 러 측면이 이 책을 무조건 묵시 문학과 같은 범주로 분류하지 못하게 막는 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31  )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묵시적이라 29  )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2권, 303이하. 30  )   파이네, 벰, 큄멜(Feine-Behm-Kümel)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구속사의 개념이 묵시가 소유한 역사 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이 개념이 구원의 확신에서 나오는 글의 어조를 형성한다”(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323). 31  )   칼라스는 요한계시록의 고난에 대한 관점에 근거해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책이 아니라고 주장한

다(James Kallas, “The Apocalypse—An Apocalyptic Book?” JBL, 86 [1967], 69~80). 그는 묵 시적 사고에서 고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부터 오지만, 구약의 일반적 관점은 고난이 하 나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의 비묵시적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은……고난에 대한 전적인 재해석이다”(78). 물론 요한계시록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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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요한계시록과 묵시 문학

기보다는 예언적인 여러 특징을 검토한 후에, 데이빗 힐 ( David Hill ) 은 요한계 시록의 저자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인식했으며, 비록 그가 묵시의 전통적인 장치를 많이 사용했다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 양식이 가지는 전 형적인 특징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요한계시록의 의도와 특징 이 예언적이라고 보는 것은 합당하고,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32  )

주는 고난에 대한 태도가 칼라스가 주장하듯이 그렇게 일관적이지 않다는 점이 계속 지적되었지 만(참고, Jones, “Apocalypse as Apocalyptic,” 325~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은 요한 계시록이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묵시와 다르다는 보다 일반적인 논증을 지지해 준다. 32  )   “Prophecy and Prophets in the Revelation of St. John,” NT, 18 (1971~72), 406. 뉴먼은 예 언과 묵시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논하는 매우 좋은 작품들의 참고문헌을 소개한다(Newman, NT, 10 [1963], 134, 각주 4번). 케네스 스트랜드(Kenneth Strand)는 미니어(Minear), 모리스 (Morris), 그리고 래드(Ladd)의 주석들을 평가하면서 그들 모두가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특징을 간과한다고 결론짓는다(“The Book of Revelation,” AUS 11 [1973], 181~193). 이후에(1994) 스몰리는 요한이 이중적 정체성(선지자[prophet]와 선견자[seer])을 드러내 주며, “따라서 요 한계시록은 예언적 통찰에 의존한 묵시와, 그리고 묵시적 환상을 통해 강화된 예언으로 볼 수 있 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Smalley, Thunder and Love, 31). 롤로프는 다음과 같이 결 론 내린다. “요한계시록은 다수의 묵시적 모티프와 묵시적 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예언적 작 품이지만, 글의 양식의 주된 특징은 서신을 통한 소통에 있다”(Roloff,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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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II 저자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자신을 단순히 요한이라고 소개한다. 서신의 도입 부인 1장 4절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기록 한다. 저자가 누구인지 오해했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 같다. 저자의 단도직 입적인 접근 방식과 일곱 교회의 정확한 상황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모 습은, 그가 권위자로서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며, 그 공동 체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통치 아래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요한계시록 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네 번 등장한다. 1장 1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종” 이며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는 일에 필수적인 연결 고리로서 섬기는 자로 지칭한다. 22장 8절에서는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로 소개되 며, 이 예언자로서의 역할이 다음과 같이 1장 9절에 나오는 신실한 증인의 역할과 결합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 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 는 섬에 있었더니” ( 1:4도 참고 ). 그러나 책 자체는 요한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제안들을 길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 스 ( Dionysius of Alexandria ) 는 저자가 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했 던 젊은이인 요한 마가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 행 13:5 ), 요한이 그들과 함 께 아시아로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역사적 배경에 근거 해서 이런 생각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33  )   마가복음과 요한계시록은 언어적

33  )   Eusebius, Hist. Eccl.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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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저자

으로도 서로 유사하지 않을 뿐더러, 마가복음의 저자가 강한 예언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환상가 ( visionary ) 의 특징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찰스는 요한계시록이 익명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주 장해 왔다.34  )   유대 묵시작가들이 과거 위인 ( 포로 후기 유대주의의 율법과 정경 형성의 중심이 되는 ) 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에 의존했던 이유는 기독교의 출현과는 잘

맞지 않는다. 더구나 책 자체의 내용도 익명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 찰스는 “어떤 증거의 조각”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가설 을 지지하는 어떤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35  )   찰스의 입 장은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예언자 요한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이며 말년 에 소아시아로 건너간 사람”이라는 것이다.36  )   찰스의 논지는 저자가 분명 히 예언자 ( 결코 사도가 아니다 ) 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헬라어를 서툴게 사용한다 는 ( 그에 따르면 “어떤 인간 저자의 손끝에서 나온 헬라어와도 비슷하지 않다” 37  )   ) 점에 있다. 저 자에 대한 찰스의 견해는 많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의 주장은 요한계시록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즉 저자는 요한이며 그는 예언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일반적인 신약의 예언자들보다 훨씬 대단한 권위를 행사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저 자가 비록 예언자로서 글을 썼다 할지라도, 그가 섬기던 교회에서는 사도의 역할을 했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이와 상이한 견해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요한”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긴 했지만, 이 또한 결국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 도 제시해 주지 못한다.38  )   상당히 많은 현대 작가들은 유세비우스가 제시한 오래된 추측을 선호하 는데, 즉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아마도 장로 요한이었으며, 그는 파피아 스 ( Papias ) 가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과는 다른 인물로 언급한 사람이라는 것 이다.39  )   그러나 파피아스가 다른 두 요한을 서로 구분하려고 의도했는가에

34  )   Charles, 1권, xxxviii~xxxix. 35  )   Charles, 1권, xxxix. 36  )   Charles, 1권, xxxviii. 37  )   Charles, 1권, xliv. 38  )   J. N. 샌더스(J. N. Sanders)는 “실제적 가설”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즉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요

한은 사두개파 귀족으로 요한복음의 편집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St John on Patmos,” NTS, 9 [1962~63], 75~85). A. Y. 콜린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비록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저자를 달 리 알려진 어떤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사회 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유추해 낼 수 있다”(A. Y. Collins, Crisis and Catharsis, 49). 이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페이지 34~49에, 그리고 그 요약은 페이지 49~50에 기록되어 있다. 39  )   Eusebius, Hist. Eccl.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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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40  )   비록 파피아스가 두 명의 요한을 말했다 할지라도, 또 에베소에 요한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었다는 디오니시우스 언급이 41  )   정확하다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의 저자 가 반드시 장로 요한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희미한 파편 조각에 기록된 단 하나의 언급이 저작권을 결정지을 만큼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거스리 ( Guthrie ) 는 만일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권위 있는 지도자가 에베 소에 살았다면 저자가 자신의 신분을 알리는 데 실패했을 것이라는 혼동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장로 이론은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결코 살지 않았으며, 첫 두 세기 동안 모든 교회가 그가 에베소에 살았다고 오해했었다는 전제하에서만 설득력이 있다.” 42  )   J. 포드 ( J. Massyngberde Ford ) 는 요한계시록이 세례 요한의 그룹과 후대의 추 종자들에게서 유래한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43  )   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4장부터 11장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이전에 세례 요한이 받은 계시에서 유래되었으며, 12장부터 22장 ( 마지막 장의 몇몇 구절을 제외한 ) 은 AD 70년 이전에 예수님에 대해서 알긴 하지만 부분적인 지식만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썼고, 1장에서 3장 ( 22:16~17a, 20~21과 함께 ) 은 그보다 후대에 유대 기독교 편집 자에 의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묵시도, 기독교적 첨 가가 가미된 유대 묵시도 아니라고 말한다.44  )   그것은 “‘세례자 학파’가 쓴 편집물이며, 이 학파는 기독교의 원시적 형태를 반영할 뿐 아니라, 세례자 의 예언적이고, 묵시적이며, ‘열정적인’ ( 우레 같은 ) 경향을 물려받았다.” 45  )   포 드 교수는 자신이 “대담한 가설”을 제안했음을 인정하고, 이것이 꼭 수용되 지는 않겠지만, 더 많은 논의를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할 것이라 기대한다고 밝혔다.46  )   포드가 대답하지 않은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은, 어떻게 본질적으 로 유대적인 묵시가 기독교 정경으로 안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떻 게 다수의 기독교 묵시가 정경에서 제외되던 시기에 유대 묵시가 포함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전까지, 많은 사람은 요한계시록이 포드 의 가설이 인정하는 것보다는 더 기독교적이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40  )   Zah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2권 452. 참고. 41  )   Eusebius, Hist. Eccl. 7.25. 42  )   Guthrie, New Testament Introduction: Hebrews to Revelation, 267. 43  )   Ford, 28~41, 50~56. 44  )   Ford, 26. 45  )   Ford, 56. 46  )   Ford,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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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기록 연대

III 기록 연대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는 이르게는 클라우디우스 ( Claudius, AD 41~54년 ) 시 대에서부터 늦게는 트라야누스 ( Trajan, AD 98~117년 ) 시대까지로 본다. 이른 연 대는 74  )   책의 특정한 내용과 암시들이 1세기 초기의 정치적, 문화적, 그리 고 종교적인 상황에 근거할 때 가장 잘 이해된다고 해석한다. 늦은 연대는 본문의 사건으로부터 많은 세기가 지난 후에야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6세 기의 수도사인 도로테우스 ( Dorotheus ) 와 11세기의 비잔틴 주석가인 테오필 락투스 ( Theophylact ) 는 요한의 유배를 트라야누스 시대로 본다.75  )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저술 시기를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기간 ( AD 81~96년 ) 이 나 네로 ( Nero ) 의 재위 말기 혹은 바로 직후 ( AD 54~68년 ) 로 본다. 많은 작가들 이 도미티아누스 시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 견해를 먼저 살펴보겠다. 요한계시록을 도미티아누스 재위 시기로 보는 것은 이레나우스의 언급이 가장 이른 언급이다.76  )   요한계시록을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 한계시록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라 거의 우리 세대인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 74  )   4세기 살라미스(Salamis)주교인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주장되었으나(Haer. 51.12), 거스리 는 “이 주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네로 클라우디우스를 오해한 것이다”라고 말한다(Guthrie,

Introduction, 277). 75  )   『선지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개요』(Synopsis de vita et morte prophetarum)는 도로테우스 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참고, 마 20:22에 대한 테오필락트의 주석(흥미롭게도 그가 신약의 모든 주석을 썼음에도 요한계시록만 제외시켰다!). 스위트(H. Swete)는(c) 트라야누스 언급이 아마도 이레나이우스(Adv. Haer. 2.22.5.)의 제안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76  )   2세기에 사데의 멜리토가 요한계시록이 이 기간에 쓰였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Eusebius, Hist. Eccl. 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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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기로 보이기 때문이다.” 77  )   호트 ( Hort ) 는 캠브리지에서 웨스트컷 ( Westcott ), 라 이트풋 ( Lightfoot ) 과 함께 요한계시록을 네로 재위나 바로 그 직후에 탄생했 다고 보았지만, 그는 “만일 외적 증거만 가지고 결정할 수 있다면 도미티아 누스 시대로 다시 생각할 분명한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78  )   이레나 이우스의 글은 후에 유세비우스가 인용한다.79  )   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80  )   오리게네스는 81  )   비록 도미티아누스라는 이름을 실제로 사 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황제가 도미티아누스였음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기의 빅토리누스,82  )   유세비우스,83  )   그리고 히에 로니무스의 84  )   언급은 분명하게 요한계시록을 도미티아누스의 시기에 위치 시킨다. 요한계시록 자체를 들여다 보면, 글의 배경이 전제적인 세속 권력의 요구 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충성 사이의 갈등 중 하나라는 점이 분명해진다.85  )   로마 제국은 세계적 숭배를 강요하는 짐승으로 의인화되는데 ( 13:4, 15~17; 14:9; 16:2; 19:20 ),

이 짐승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표”를 받도록 강요하며 거부

하는 자는 죽게 했다 ( 13:15~17; 14:9; 16:2; 19:20; 20:4 ). 이런 언급은 특히 소아시아 의 황제 제의 ( imperial cult ) 의 발전에 근거해서만 납득할 만한 설명이 가능하 다. 황제 숭배 개념은 고대 이방 세계에서 다신론, 조상 숭배, 그리고 전설 적 영웅들에 대한 지속적인 신격화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발전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속주 ( 屬州 ) 들 사이에서 이런 제국의 신격화가 좀 더 일찍 시작 77  )   Irenaeus, Adv. Haer. 5.30.3; cf 2.22.5; 3.4.4. 78  )   xx. 이레나이우스 글의 ‘헤오라데’(ἑωράθη)의 주어가 ‘헤 아포칼립시스’(ἡ ἀποκάλυψις, 계시)가 아니라 ‘호 텐 아포칼립신 헤오라코스’(ὁ τὴν ἀποκάλυψιν ἑωρακώς, 그 계시를 보는 자), 즉 ‘호 요 안네스’(ὁ Ἰωάννης, 요한)라는 논증은 호트(Hort)가 사용한 것은 아니다(Swete, cv~cvi 참고). 79  )   Eusebius, Hist. Eccl. 3.18.3. 80  )   Clement, Quis Div. Salv. 42. 81  )   Origen, In Matt. 16.6. 82  )   Victorinus, In Apoc. 10.11; 17.10. 83  )   Eusebius, Hist. Eccl. 3.18.1; 3.20.9; 3.23.1; 3.20.9; 3.23.1. 84  )   Jerome, De Vir. Illus. 9. 85  )   A. Y. 콜린스는 요한계시록의 저술에 있어 중요한 사건은 사중적 위기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고 주장한다. 즉 지역 유대 공동체와의 우려스러운 분리, 교회가 그리스 로마의 시민 생활을 거 부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것, 로마에 대한 적대감과 로마의 대리자들로부터 오는 위 협에 대한 인식, 그리고 부와 특권의 정도의 차이에서 발생한 지역 엘리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적대감 등이다(A. Y. Collins, “The Revelation of John: An Apocalyptic Response to a Social Crisis,” CurTM 8 [1981], 4~12). 뉴먼은 요한계시록이 정치-종교적인 성격의 박해 가운데에서 탄생했다는 생각에 반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반영지주의적 논쟁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한다(Newman, “The Fallacy of the Domitian Hypothesis,” NTS, 10 [1963~64], 133~139). 그의 후기 저작인 Rediscovering the Book of Revelation (1968)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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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기록 연대

되었는데, 이것을 토대로 황제들은 스스로 신적인 위치를 주장하며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 Julius 86  )

로서 경배를 받았다.

Caesar ) 는

자신의 생전에 신으

아우구스투스 ( Augustus ) 는 로마의 도시 내에서는 매

우 조심했지만, 속주에서는 자신을 위한 신전을 승인했다. 죽은 뒤에 그는 아시아와 서쪽 속주들에서 널리 숭배 받았다. 칼리굴라 ( Caligula ) 는 자발적인 숭배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피지배자들이 모든 곳에서 자신의 동상에 경 의를 표하도록 했다. 네로의 시기에 이르러 황제 숭배는 하나의 종교적인 제도로 견고히 자리매김했다. 비록 네로 치하의 기독교 박해의 원인이 황제 가 신성을 주장한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어떤 그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도미티아누스 재위 기 간에 와서야 황제를 신으로서 존경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고 처벌당할 행위가 되었다. W. G. 큄멜 ( W. G. Kümmel ) 은 도미티아누스 때 에 “처음으로 종교적 문제로 인해 국가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이 일어났 다”고 말한다.87  )   비록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황제 숭배를 세계적으 로 강요하는 모습이 도미티아누스 재위 기간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미래 를 내다본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예상을 가능케 해 주는 모든 요소들이 1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존재했다.88  )   그리스도와 카이사르에 대한 각각 의 충성 사이에서 발생할 임박한 충돌은 요한계시록을 도미티아누스보다 이른 시기에 위치시키면 안 된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큄멜은 이렇게 기 록한다. “요한계시록이 그리고 있는 시대적 그림이 도미티아누스 박해의 시기처럼 잘 들어맞는 시대는 이전 역사에는 없었다.” 89  )   책 자체에는 박해의 광풍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들이 있다. 저자가 밧모섬에 유배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 1:9 ) 때문이다. 비록 이 유배가 지역 정부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결정 뒤에 로마에 서 유래한 보편적 정책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버가모 교회에 대한 편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에 대해 알게 되

86  )   에베소에 그의 이름으로 세워진 한 신전이 있는데, “로마의 여신과 신성한 율리우스를 위하여”라

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87  )   Feine-Behm-Kümmel, Introduction, 327. AD 96년에 황제의 가족들이 제국 종교에 대항한 ‘아 데오테스’(ἀθεότης, 신의 존재를 부정함)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88  )   모팻은 아시아의 일반적 박해라는 견해를 지지할 증거가 충분함을 인정하지만, 작은 빗방울이 다가올 폭풍을 경고하고 있다고 제안한다(Moffatt, Introduction to the Literature of the New

Testament, 504). 89  )   Kümmel, Introduction,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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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는데, 그는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죽임 당한 것으로 보인다 ( 2:13 ). 서머나의 믿는 자들은 임박한 고난과 투옥에 대한 경고를 받는 데, 이를 통해 그들 중 몇몇은 자신들의 삶을 희생해야 했다 ( 2:10 ). 빌라델비 아 성도들은 그들의 신실함으로 인해 “장차 온 세상에 임하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 3:10 ). 다섯째 인이 떼어졌을 때, “하나님 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 ( 6:9 ) 이 등장 한다. 이 묘사가 넓게 모든 시대의 순교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도 있지만,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명령은 더 많은 박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 준다.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큰 음녀 ( 로마 ) 를 언급하는 여러 본문 안에 박해가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 17:6; 18:24; 19:2; 참고, 16:6; 20:4 ).

당면한 질문은 1세기의 어떤 시기가 이 박해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배경 을 제공해 주는가와 관련이 있다. 초대 교회는 거의 처음부터 이교적 환경 과 충돌했지만 ( 그들은 이방인들의 삶의 방식을 비난했고[벧전 4:3], 황제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인 식했으며, 통치자들의 오해를 사는 모임들을 자주 가졌다 ),

로마 정부의 박해가 처음 발생한 90  )

것은 AD 64년 네로의 통치 아래에서였다.

이 조직적인 보복은 로마 도

시에만 국한되었기에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세계적 박해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문제의 박해는 도미티아누스의 시대가 되어서야 다시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의 많은 종교적인 명령 뒤에는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 는 자들을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디오 카시우스 ( Dio

Cassius ) 의

기록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사촌인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 Flavius mens ) 를

91  )

처형했고, 조카 도미틸라 ( Domitilla ) 를 “무신론”의

Cle­

죄목으로 폰

차 ( Pontia ) 제도 ( 諸島 ) 에 유배시켰다. 도미티아누스의 동시대인인 로마의 클 레멘스 ( Clement of Rome ) 는 “우리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계속되는 참사와 적개 심”에 대해 말한다.92  )   이것은 우리가 도미티아누스에 대해 아는 것과 일치 하는데,93  )   이것을 기록한 후대의 작가들은 또한 그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

90  )   Tacitus, Ann. 15.44. 91  )   ‘아데오테스’(ἀθεότης, “신의 존재를 부정함.” Dio Cassius, Hist. Rom. 67.14). 도미틸라의 묘비 에 따르면 도미틸라는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92  )   Clement of Rome 1.1. 93  )   리스트는 도미티아누스를 “과대망상증에 버금갈 정도로 교만한” 황제로 묘사한다(Rist, 355). 기

준이 되는 출처들은 그를 악하고,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제정신이 아니며, 지나친 성적 행위에 탐닉한 사람으로 묘사한다(Thompson, Revelation , 96~99). 디오 카시우스는 도미티아누스가 “여인들과 소년들 모두에게 방탕하고 음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Romaika, 67.6.3).

40


Ⅷ. 개요 분석

Revelation

본문과 주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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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I 프롤로그(1:1~20)

A. 표제(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

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 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 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 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 까움이라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which God gave him to show his servants what must soon take place. He made it known by sending his angel to his servant John, 2  who testifies to everything he saw — that is, the word of God and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3 Blessed is the one who reads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blessed are those who hear it and take to heart what is written in it, because the time is near. 1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과 기원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와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주어졌고, 이어서 요한은 이것 을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1~3절은 전체 책의 서론 또는 프롤로그다. 이 구 절들은 계시가 어떻게, 또 무엇을 위해 전달되었는지를 이야기해 주며, 또 한 읽는 자들과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선언한다. 가장 초기의 요한계시록의 사본들은 “요한의 계시”라는 단순한 제목이 달려 있 다. 그러나 후대의 사본들은 이 제목을 다양한 방식으로 수정하고 확장했 다. 공인 본문 ( Textus Receptus ) 은 “신학자 요한의 계시”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 66


Ⅰ. 프롤로그(1:1~20) A. 표제(1:1~3)

다.1  )   프롤로그를 후대의 편집자의 작품으로 봐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2  )   이것은 저자 스스로 기록했고 아마도 책을 다 완성한 이후에 기록했을 것 이다. 1절 이 책은 스스로를 “그리스도 예수의 계시”로 규정한다. 이 책은 묵시 3  )

또는 계시다. 하나님이 친히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진정한 힘에 대해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도 이 힘의 정체가 어떻게 드러나게 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계시” ( 본문에서 사용 된 ) 라는

용어는 문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이 책의 본질과 목적을 가리키는 것

이다. 현대 학자들은 “묵시” ( apocalyptic ) 라는 용어를 BC 200년부터 AD 100년, 또는 그 직후까지 유대주의에서 널리 꽃핀 특정한 문학 양식을 묘사 하는 데 사용해 왔다. 이 문학 양식은 가명을 사용하고, 거짓 예고 ( pseudopredictive, 저자가 자신을 과거의 어떤 시점에 위치시키고, 과거의 역사를 상징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예 언을 가장 한 채 다시 쓰는 것 ) 를

담고 있으며, 염세주의적이다.4  )   이 문학 양식은

역사의 종말적인 대재앙의 기간을 다루는데, 이 기간에 악의 세력과의 사투 이후에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출현하시는 것으로 그린다. 요한계시록이 에 녹1서와 에스드라2서 같은 유대 묵시 문헌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예언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묵시는 아니라는 점이 3절을 통해 확실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 예언의 말씀 을” 읽는 자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 계 22:7, 10, 18, 19 참고 ).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달된 책이지, 그리스도 자신의 계 시는 아니다. 1절은 하나님이 이 계시를 그리스도에게 주신 목적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의 종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라고 기록한다. 비록 1  )   ‘투 데올로구’(Τοῦ θεολόγου, 신학의. 다수 본문[MajT]에도 이것이 추가되어 있다. 아토스산 [Mount Athos]에서 발견된 요한계시록 사본의 27개의 단어로 된 제목에 대해서는 Metzger,

Textual Commentary, 662를 보라). BAGD는 ‘데올로고스’(θεολόγος, 신약 전체에서 이곳에만 등 장)를 하나님의 일, 또는 신적인 일에 대해 말하는 자, 즉 하나님의 사자로 정의한다(356). 2  )   포드는 이 첫 번째 프롤로그(계 1:1~3)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쓴 반면(Ford, 375), 두 번째 프롤 로그(계1:4~8)는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하던 한 유대 그리스도인이 쓴 것이라고 추측했다 (380). 3  )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에 대한 간결한 논의는 W. Milligan, St. Paul’s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 149~151을 보라. 이 책은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오심)와 ‘에피파네이아’ (ἐπιφάνεια, 현현)와의 연관성을 통해, 재림은 “신적인 계획의 ‘계시’이며, 이 계획은 모든 시대를 통해 진행되어 오다가 결국 ‘최후에 있을 신적인 사건’을 통해 종말적 완성에 이르게 되며, 모든 피 조 세계는 이 사건을 향해 천천히 움직여 간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Milligan, 151). 4  )   Ladd, 20.

67


요한계시록

호트는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의 동사와 명사가 모두 “숨겨진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5  )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은 동시에, 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일어나게 될 일들을 계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6  )   그러나 그리 스도가 계시자라는 것은, 그가 요한의 환상의 경험의 동반자라는 의미가 아 니라 ( 천사가

이 역할을 담당했다 ),

그리스도만이 운명의 두루마리를 열고 ( 계

5:5,7 ),

또 그 책의 내용을 드러내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의미다 ( 계 6:1, 3, 5, 7, 9, 12; 8:1 ).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식 호칭은 요한계시록 1장 1~5절에 세 번 등장 하지만 책의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이 호칭은 프롤로그의 품위 있 는 문체에 잘 어울린다. 책 전체에서는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이 사용된 다 ( 11회 ).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에게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만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고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신다 ( 단 2:28, 29, 45를 보라. 그리고 암 3:7을 참고하라 ).

요한계시록에서 이 드러내는 일은 예수 그리스

도에 의해 이뤄진다 ( 요한복음에서는

종종 예수님의 역할을 하나님의 일들을 취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으로 묘사한다. 요 1:18; 5:19–23; 12:49; 17:8을 보라. 참고, 마 11:27 ).

하나님이 계시

를 주시는 분명한 목적은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서”이다. 역사는 관련 없는 사건들의 임의적인 연속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 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순서다. 역사는 하나님의 속성과, 창조 와 구속에 드러난 그의 경륜에 대한 계시의 속성으로 인해 논리적으로 그 리고 윤리적으로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필요성이다. 요한은 계시를 구성하는 사건들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 한다.7  )   거의 2,000년의 교회 역사가 흘러왔는데도 아직도 끝이 오지 않았 다는 점이 어떤 이들에게는 문제가 된다. 한 가지 해결책은 “속히”를 “갑작 스럽게” 또는 “약속된 시간이 도래하면 지체함 없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은 문제의 사건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 는 것이다. 요한이 베드로후서 3장 8절 ( “주께는 다” ) 의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

공식을 사용한 것이라는 제안도 있는데, 이것은 예언자를 사기꾼으

로 만들어 버린다. 다른 이들은 다가올 위기가 역사의 종말적 완성이 아니

5  )   Hort, 4. 6  )   Hort, 6. 7  )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 속히), 또한 계 22:6 참고. 계 22:7, 12, 20의 ‘타쿠’(ταχύ, 속히). 또한 계 1:3 과 22:10의 ‘호 가르 카이로스 엥귀스’(ὁ γὰρ καιρὸς ἐγγύς, “때가 가까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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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롤로그(1:1~20) A. 표제(1:1~3)

라 교회의 핍박을 가리킨다고 믿는다.8  )   실제로 핍박은 머지않아 일어났다. 그러나 또 다른 접근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현재 세계 질서의 종 말은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시작되었고, 그가 온 세계에 알려지는 것 을 통해 완성될 것이었으며, 요한은 바로 이 사건이 임박했음을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9  )   물론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 현존하는 실재라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 또한 종말적 완성이 계속해서 지연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속히 일어날 일들”이라는 표현을 단순하게 받아들여 예언적 조망에서는 종말이 항상 눈앞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 이다.10  )   연대기적 순서로서의 시간은 예언에서는 부차적인 관심사에 불과 하다. 이런 관점이 모든 신약 성경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나 님이 택하신 자들을 지체 없이 신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셨고 ( 눅 18:8 ), 바울 은 로마의 교회에 하나님이 “속히” 사단을 그들의 발 아래에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썼다 ( 롬 16:20 ).11  )   이 계시를 받게 될 종들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예언자들이다 ( 암 3:7의 “주 여호 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의 의미에 서. 참고, 계 10:7; 11:18 ).12  )

비록 이 용어가 요한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는 모든

믿는 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 계 7:3; 19:5; 22:3 ). 계시는 천사를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고 소개된다. 만일 동사 의 주어인 “그” ( 개역개정은 “하나님”으로 번역-옮긴이 ) 가 그리스도라면, 천사가 그리 스도와 요한 사이에 매개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 천사가 바로 22장에서 요한이 자신을 향해 무릎 꿇어 경배하려고 엎드린 것을 꾸짖은 그 천사다 ( 계 22:16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 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

이렇게 보면, 예언의 전달에 네 단계

가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로, 그리스도로부터 천사로, 천사로부 터 요한으로, 그리고 요한으로부터 그의 종들로 전달된다.13  )   “보이시려고” 8  )   케어드가 이렇게 본다. Caird, 12. 9  )   Sweet, 58. 10  )   성경 예언에서 일시적인 심판들은 자주 최후의 종말론적인 사건들을 배경으로 표현된다. 11  )   두 구절 모두 계 1:1과 같이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 속히)를 사용한다. 12  )   탈버트가 “종들”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다양한 회중을 이끄는 예언적 지도자”라고 말한다 (Talbert, 17). 13  )   이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몬터규(Montague)는 이렇게 쓴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 예수와 천

사(들)와 선견자(예언자)로 이어지는 이런 연결 고리는, 후기 유대주의 안에서 점차 강해지던 경 향을 보이던 매개자를 통해 하나님의 전승을 보존하는 모습을 반영한다”(Montagu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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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를 앞 문장의 “주사”와 병행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을 두 절 모두의 주어로 보는 것 ( 개역개정에서처럼-옮긴이 ) 도 개연성이 약하긴 하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렇게 보면, “천사”라는 용어는 사자 ( messenger ) 라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를 갖게 되고 ( 1:20; 2:1, 8 등과 같이 ), 곧 그리스도 자신을 지칭하게 된다. 그 리고 그리스도는 계시의 매개자로서 사자라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천사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4  )   계시는 “알려진” ( signified,

AV ) 것으로

묘사된다. 헬라어 동사 ‘세마이노’는

비유적인 표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이 단어는 다른 기호 ( sign ) 같은 것으로 알려지는 것을 뜻한다.15  )   따라서 이 단어는 책의 상 징적 성격에 매우 잘 어울린다. 이것을 통해 독자들이 역사의 미래에 대한 문자적인 설명이 아니라,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일에 대한 상징적인 묘사를 기대해야 함을 보여 준다. 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하나 님이 자신의 메시지를 문자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징적인 방식의 환상을 통 해 알려 주셨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환상들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이지 만, 환상 그 자체는 단지 하나님이 실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신 매개체 에 불과하다.16  )   2절 더 나아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는”자로 묘사된다.17  )   본문이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증언된 계시다.18  )   또는 저자가 일반 적 용어 ( 이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 ) 를 다른 분명한 어구 (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 를 추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만드는 관습적인 표현을 따랐을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동사의 마지막 절 ( NIV에서는

“그가 본 모든 것”이 앞에 위치한다 ) 은

격이며 둘 모두의 범위를 한정한다. 첫째 절에 쓰인 헬라어 동사가 부정 과 거형 ( ‘에마튀레센’, 증거했다 ) 이라 할지라도, 영어의 현재형 ( “증거하다” ) 으로 번역하 14  )   요한계시록 안에서 수많은 다양한 천사가 언급되는 것을 기억하라. 즉 힘센 천사(5:2),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는 천사(7:2), 바다와 땅을 밟고 있는 천사(10:1-2), 낫을 휘두르는 천사(14:19) 등이다. 15  )   필론(Philo)은 ‘세마이노’(σημαίνω)를 “구약 성경의 보다 깊은 의미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TDNT abr., 1023). 16  )   메츠거는 이렇게 기록한다. “요한계시록에서의 묘사는, 실제적인 사건 묘사가 아니라, 실제 사건 에 대한 상징적 묘사다”(Metzger, 66). 17  )   2036 pc 는 ‘투 데우’(τοῦ θεοῦ, 하나님의)를 생략하여 요한이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를 증언하는 자로 표현한다. 다수 본문(MajT)은 ‘에이덴’(εἶδεν) 뒤에 1:19의 이문(異文)을 추가 한다. 18  )   두 소유격은 1:9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주격의 의미를 가진다. 6:9에서 “증언”은 순교자들이 지 니고 있다(12:1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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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롤로그(1:1~20) A. 표제(1:1~3)

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프롤로그는 아마도 요한이 책에 기록된 환상의 경험을 다 기록한 이후에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이 그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했고 그것으로 인해 밧모섬으로 유배당했을 수도 있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고 추측할 필요는 없다. 3절 교회를 향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

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요한의 시대에 대다수 의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했기에 들으면서 배웠다. 교회에서 이 말씀이 읽 힐 때 그것을 듣는 자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는 22장 18~19의 마지막 교훈 에 분명히 명시된다. 1장 3절의 복은 계시록에 나오는 칠복 ( 七福 ) 중의 첫 번째다 ( 나머지는

14:13; 16:15; 19:9; 20:6; 22:7, 14에 나온다 ).

이것은 사실상 누가복음

11장 28절의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재사용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 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 라.” 성경을 공적으로 읽는 것은 유대인의 관습에서 유래했다 ( 느 8:2; 눅 4:16; 행 13:15; 참고, 골 4:16; 살전 5:27 ).19  )   처음에

낭독하는 일은 회중 가운데서 어느 정도

글을 유창하게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낭독하 는 직무는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이 되었다.20  )   회중들에게 그 예언에 기록된 것을 “지키라”고 요청한 것은, 이 책이 단 순히 예고가 아니라 윤리적 교훈으로 여겨졌음을 알려 준다. 요한은 자신의 글을 구약의 선지서와 동등한 예언서로서, 모든 듣는 자들에게 순종을 요구 할 만한 권위가 있는 글로 인식했다.21  )   이런 복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분명 한 사실이기는 하지만, “때가 가까움이라”는 구절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특 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헬라어 ‘카이로스’ ( 때 ) 는 보통 종말론적 인 의미로 위기의 시대나 결정적인 순간을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다. 이 구 절은 그날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메시아적 기대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많 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와서 그들이 약속의 메시아라고 주장할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 5절 ).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대해 말 씀하시면서, 언제 그 때 ( ‘카이로스’ ) 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하셨

19  )   롤로프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미 1세기 말엽 즈음부터, 예배에서 구약 본문과 함께 기독교 작품 들을 크게 읽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oloff, 21). 20  )   Tertullian, Praescr. Haer. 41. 21  )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요한은, 자신의 주장처럼 예언자에 합당한 인물로 스스로를 묘사한다(D. E.

Aune, “The Social Matrix of the Apocalypse of John,” 26 [1981], 16~32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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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다.22  )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본 모든 것이 성취되는 그 결정적 순간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런 이유로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매우 긴 박한 일이다.

B. 인사말과 송영(1:4~8)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 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 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 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 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 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 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 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22  )   참고, 마 8:29; 고전 4:5의 ‘카이로스’(καιρό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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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To the seven churches in the province of Asia: Grace and peace to you from him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and from the seven spirits before his throne, 5 and from Jesus Christ, who is the faithful witness, the firstborn from the dead, and the ruler of the kings of the earth. To him who loves us and has freed us from our sins by his blood, 6 and has made us to be a kingdom and priests to serve his God and Father — to him be glory and power for ever and ever! Amen. 4

Look, he is coming with the clouds, and every eye will see him, even those who pierced him; and all the peoples of the earth will mourn because of him. So shall it be! Amen. 8 “I am the Alpha and the Omega,” says the Lord God, “who is, and who was, and who is to come, the Almighty.” 7


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요한계시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로버트 마운스 (Robert H. Mounce) 로버트 마운스는 워싱턴주 스포케인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Whitworth College)의 명예 총장이며, 저 명한 신약과 헬라어 학자다. 그는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 요한계시록 주석』, 『NAC 로마

로버트 마운스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서』(The New American Commentary: Romans), 『EBC 요한복음』(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John), 다. NIV, NIrV, NLT, ESV, HCSB 성경의 번역 위원으로 섬겼다.

옮긴이 장규성

장 | 규성 옮김

『UBC 마태복음』(Understanding the Bible Commentary: Matthew)을 비롯해 여러 논문과 책과 주석을 썼

요한계시록 Revelation

국민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Th. M.), 미국 칼빈 신학교(Th. M.)를 졸업한 후 현재는 일리노이주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약학 박사 과

정에 있다. 이필찬 교수 밑에서 요한계시록을 배운 것을 시작 으로 요한계시록의 선교적 의미를 로마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현재 시카고 교외의 전하는교회에 서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ISBN 978-89-6092-544-1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30,000원

로버트 마운스 지음 | 장규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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