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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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카사
Vol.14
April
COVER STORY 하늘은 파랗지만 파랗지 않다 비주얼 아티스트 윤다인
ART&CULTURE 100세를 맞아 기념전을 여는 남사 이준 화백
LIFESTYLE 서울 나들이 HOT PLACE 별마당 도서관
단돈 $25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즐기기
도시 정원에서 즐기는 뉴욕의 맛
PEOPLE FOCUS ‘Everyday Korean’ 저자 이승희 박사 GSI 스포츠 에이전시 이한길 대표 남매이야기
Analog Music의 마지막 뮤지션 최준성
치즈와 만나 다시 태어난 한국 음식 치즈 핫도그
빛, 종이의 상처를 치유하는 미니멀회화 작가 김완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CONTENTS
April 2018 Vol.14
12
24
Cover Story
Education
12
32
나만의 캔버스에 상상을 담는 비주얼 아티스트 윤다인
무시당해도 괜찮아
인생은 일루전(Illusion); 하늘은 파랗지만 파랗지 않다 A Real Master of Surreal Illusion and Fantasy
Transforming Her Body Into A Canvas Dain Yoon
22
겨울은 갔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봄을 즐겨보자!
4월의 뉴욕 이벤트
People Focus 24
엄마같은 누나, 오빠같은 동생
‘Everyday Korean’ 공동저자 이승희 박사 GSI 스포츠 에이전시 이한길 대표 남매이야기
Mother-like Sister, A Protective Younger Brother
‘Everyday Korean’ Co-Author Seung-Hee Lee, PhD Han-Gil Lee, owner of GSI sports agency
6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13)
35
4월의 인물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36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직장 생생 체험기(4)
42
2018년 미국내 최고 인기 직업 7가지 Surviving the Automation Trend: Top 7 Jobs for 2018
우리 이웃이야기 46
한인 모두의 행복한 가정을 위한 작은 실천
뉴욕 가정상담소 소장 김봄시내
이달의 시와 사진 50 덤보를 위하여 / 김은자
뉴욕문화예술스토리 www.story-ca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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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86
Art & Culture
Life Style
Clinic
Travel
52
76
92
96
80
믿을 수 있는 GMP 인증
100세를 맞아 상수(上壽)기념전을 여는
남사(藍史) 이준(李俊) 화백
62
전문 음악인의 생활속 음악이야기
단돈 $25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즐기기
64
느리지만 따듯했던 서정시대
Analog Music의 마지막 뮤지션 최준성
70
빛, 종이의 상처를 치유하다
미니멀회화 작가 김완
74
영화 심리 이야기
우편배달부 (Il Postino; The Postman)
리빙 페어를 가다.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그대에게
별마당 도서관
84
뉴욕을 즐기는 숨겨진 공식
도시 정원에서 즐기는 뉴욕의 맛
86
치즈와 만나 다시 태어난 한국 음식
일본 최고 인기 먹거리 ‘치즈 핫도그’를 아시나요?
꼼꼼하게 따져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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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캠페인
아시아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흡연과 당뇨
금연과 당뇨 검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Come Early, Stay Late. Open 7 Days A Week.
첼시 마켓(Chelsea Market)
98
애틀랜타 특별한 볼거리
남부 최고의 보헤미안 거리 ‘리틀 파이브 포인트’
100
‘감천문화마을’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부산
부산의 겨울, 지금 감천의 온도는
88
최고의 자연약재 상황버섯 &
신이 주신 선물 차가버섯 이야기
90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결정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Grand Central Term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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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r Dr. Charles Changsoo Lee
에스카사 (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Editor in Chief Youngjoo Lee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Juyoung Lee, Young Choi English Translation / Hyobin Lee, Katie Lee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 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 가 전해주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문 화예술, 패션, 라이프 스타일, 화제인 물 focus, 교육, 육아, 요리, 여행, 건 강정보 등을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 기를 가득 담았습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 틀, 애틀랜타, 사우스캐롤라이나, 달 라스 지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 구, 부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 격 글로컬 (Global + Local) 잡지입 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입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 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 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 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 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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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드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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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Legal Columnist / Minji Kim Science Columnist / Dr.Byung Hee Hong Music & Arts Columnist /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Managing Director / Sarah Chung Marketing Director / Joonhee Kim Advertising Director / S.H. Chung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Lee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Kibum Kim, George Jung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Jimyung Lee, Hyunmin Kwon, Bohyun Im, Joohee Han, Youngjoo Song,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Minjung Choi, Sungjoo Hong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for each field.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Dallas,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is the hub for cultural and artistical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Creato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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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2017 서울모던아트쇼 대상(아트마이닝상) 2016 대한민국인재상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표창) 2015 토블론 사진공모전 대상
인생은 일루전(Illusion); 하늘은 파랗지만 파랗지 않다
나만의 캔버스에 상상을 담는 비주얼 아티스트 윤다인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영문 Hyobin Lee 정리
12
편집부
201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이 ‘일루전 아트(illusion art)’라는 독특한 장르의 작품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어떤 형상이나 형태를 자신의 몸, 특히 얼굴에 그림으로써 때로는 기괴하고, 때로는 몽환 적인 시각적 자극을 통해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티스트 윤다인. 그 녀는 끝을 알 수 없는 기발함과 완벽한 테크닉으로 세계의 주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이렇게 유명인사가 되어 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잠시 뉴욕을 찾았다기에 열 일을 제쳐두고 그녀를 찾아갔다. 강렬한 무표정과 화사한 웃음을 한 얼굴에 가지고 나타난 윤다인은 진지하 면서도 유쾌하게 본인의 예술관과 인생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3
14
일루전(illusion)을 선사하는 비주얼 아티스트
윤다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 기법을
기반으로 한 ‘일루전 아트’로 분류된
다. ‘일루전’이라는 용어는 착시, 착각, 환상 등을 포함하는데, 예술 분야에서 는 감상자가 작품을 볼 때 형태나 입
체, 또는 원근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왜곡되거나 중복된 이목구비와 겹쳐
지거나 연결된 이미지로 대표되는 윤
다인의 작품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 사된 초현실적 이미지가 감상자의 착 각을 통해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
에서 일루전의 정의에 충실하다. 그 래서 자연스레 그녀도 ‘일루전 아티 스트(illusion artist)’라고 불리게 되었 는데, 정작 본인은 ‘비주얼 아티스트
(visual artist)’라는 좀 더 포괄적인 정 체성을 갖고 싶다고 한다.
벽에 걸린 시계를 자세히 보니 그 안에 여인의 얼굴이 있고, 그 얼굴을 다시 유심히 보니 얼굴 위에 손이 겹쳐져 있고, 그 손 위에는 또 눈이
있다. 어디까지가 시계인지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손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데 이 혼란이 불편하지 않다. 시간, 공간, 사물, 그리고 사람이 교묘
아주 좁게는 저를 메이크업 아티스 트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얼굴 에 화장을 하고 칠을 하니까요. 하지 만 표현 기법에만 초점이 맞춰진 거 죠. 반면에, 일루전 아티스트라는 호 칭은 제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시각 적 효과에만 중점을 둔 느낌이 있어 요. 사실 어떤 의도한 일루전, 즉 ‘시 각적 일루전(optical illusion)’을 일으 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거든요. 착시 는 제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 지를 전달하는 장치일 뿐이에요. 제 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고정관념과 획일화에 대한 저항 이에요. 그 주제를 시각적으로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비주얼 아티스 트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아요.
하게 겹쳐져 보이는 사진 한 장이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녀의 표현법은 새롭고 독특하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이들이 그 표현
려는 것일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얼굴과 손에 그림을 그려
식을 작품 안에 선명하게 녹여 낸다는 데 있다. 고정관념과 틀을 깨고
시계, 9시 20분, 얼굴, 손, 눈,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무슨 얘기를 하 사물과 겹쳐 놓은 것뿐인데 보는 이에게 주는 여운은 절대 단순하지도 쉽게 가시지도 않는다. 이렇게 기발하고 참신한 작품으로 미 지상파 방 송사(ABC와 NBC)의 뉴스를 비롯한 전 세계 언론과 미술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 작가가 윤다인이다.
법에 주목하고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강점은 자신의 주제 의 자유롭게 사람과 삶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 새로운 시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가 ‘비주얼 아티 스트’라고 불리길 원하는 이유도 그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두기 위함인 듯 보인다.
15
왜곡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본질에 다가가다
(overlap) 하거나 연결되게 하는 페인팅이나 퍼포먼스를 통해 실재와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공유되어있는 사실을 왜
나 배경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융화되어 하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윤다인의 화장은 ‘예쁘게 보이기 위한’ 획일화된 화장이 아니라 다양한 곡시켜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킨다. 그를 보고 놀랍다
고 박수를 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보는 사 람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볼 수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이다.
무표정한 얼굴, 무표정한 눈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는 경우가 많은데 요.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슬퍼 보일 수도 있고, 기뻐 보일 수도 있고, 화가 나 보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사람의 특성이기도 하죠. 첫 인상만으로 어떤 사람의 전부를 판단할 수 없는 건, 그 이면에 다른 모습이나 다중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인간의 다면성 과 다중성을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얼 굴에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사람을 마주할 때나 대화할 때 얼굴을 보고 하는 만큼 가장 강력한 매체가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얼굴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캔버스이기 때문에 제 개성 을 표현하기에도 가장 좋죠. 수많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정작 그 얼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보는 사람 마음이다. 윤다인의 기발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신체 부분들, 신체 일부와 사물, 또는 신체와 주변 환경을 겹치게 16
환상의 경계를 허물며 인생의 다중성을 표현한다. 신체가 어떤 사물이
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이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일루전(착각)일 수 있음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주관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기 때문에 인식한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어요. 일루전속에서 사는 거죠. 예를 들어, 우리가 하늘을 파랗다고 인식하지만, 사실은 하늘이 파랗지 않은 것 처럼요. 제 작품 중에 빨간 손톱 여러 개가 얼굴을 감싸고 있는 것처 럼 보이는 작품이 있는데요. 그 작품 제목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에 요. 해 질 녘 저 멀리 노을 진 언덕을 넘어오는 존재가 늑대인지 개인 지 분간이 안 된다는 뜻으로 지은 거죠. 인생이 그렇잖아요.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윤다인의 예술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착시를 이용한 초현실
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과 인생의 본질을 나타낸다는 것이 아이러니 할 뿐만 아니라, 그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극도로 사실적인 묘사 라는 점도 그러하다. 연마된 기술과 즉흥적 창의성(improvisational creativity)이 동시에 요구되는 이 작업은 그녀이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듯하다. 미술 작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을 바탕으로 예원학교 와 서울예고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녀의 ‘진짜’처럼 그려내는 능 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더불어,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 재
학 시절에는 분장으로 배우의 캐릭터를 만들어 주는 작업을 하며 창의
력을 키웠다. 그리고 틈만 나면 사물을 분석하고 뜯어보는 것을 습관화
하다 보니 남들과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녀는 누구보다 독창적인 비주얼 아티스트가 되었다.
힘들고 외로운 예술의 길을 ‘재밌게’ 풀기
윤다인이 말하는 자기 작품의 핵심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표현하여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풀고, 어려운 것을 쉽게 풀고, 진중한 것을 가볍게 풀고…… 그녀는 재치와 기발함을 요
일적으로는 행복한데 내적인 힘듦이 있어요. 많이 외롭기도 하고 요. 하지만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지는 않아요. 타인을 통해서는 완벽한 충족이 불가능하고, 타인을 통한 행복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리 오래 살지는 않았 지만 살다 보니, 삶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아도 하는 만큼 이루어지긴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일, 즐거 운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는 재미 도 느껴지고요.
구하는 이 작업이 늘 재밌고 즐겁다고 한다. 고민이 있다면, 자기만족
32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 팔로워에, 세계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
2016년 4월, 자신의 인스타그램(Instagram: 사진, 동영상 기반의 모바
품 색이 확실해지기 전에 상업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경계하여 활동에
을 위해 취미로 시작한 일이 주업이 되면서 취미가 없어진 것이란다. 일 SNS)에 작품을 소개한 이후로 주 7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장시간 을 한자리에 앉아 작업하게 되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요즘은 일주 일에 하루는 무조건 쉬려고 노력한다.
활동적으로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쉬는 날에는 주로 집에 서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혼자 노는 편입니다. 또, 가만히 앉아 잡생각을 즐기기도 하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자유롭게 따라가다 보면 작품 아이디어를 얻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외로 생산적이에요.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예술의 길이 항상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유명세로 여기저기서 협업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작 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그림 그
리는 것보다 사무적인 일이 더 많아질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에이전트 도 없이 홀로 뉴욕으로 건너와 동분서주하고 있는 그녀에게 힘들지 않 냐고 묻자, “완벽주의라 다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아 직은 제가 직접 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요.” 한다. 윤다인은 내년
쯤 뉴욕으로 와서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다. 그녀에게 뉴욕은 “다양 한 관점이 인정되고 뭘 해도 받아들여지는 도시라 예술을 하는 사람이
살기엔 가장 좋은 곳”이란다. 뉴욕에 와서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들을 해 볼 생각에 벌써 설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기계가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을 하며 세상에 흔적 을 남기고 싶은 것”이 포부라지만, 그녀는 이미 일루전 아트의 대표 브 랜드가 되었다.
17
Dain Yoon A Real Master of Surreal Illusion and Fantasy - Transforming Her Body Into A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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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midst of 2016, a student attending the Korean National University of Arts had the entire world focus their attention towards her with an unique genre of art called “Illusion Art.� Her name is Dain Yoon, an artist who conveys her own message through visual stimulation, often denoted as being bizarre and dreamy, by drawing illusion art on her own body parts - especially her face. She has been receiving recognition and high expectations from the world with her most perfect technique and unprecedented creativity that sees no limits. Having heard that this busy artist is on a temporary visit in NYC,
team dropped everything to
go see her in person. Without fail, Dain Yoon once again impressed us more in person, by showing us both an emotionless face and a face with a bright smile within one face - she continued to share her perspective about art and views on life with sincere genuinity. 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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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eral term 'illusion' encompasses of optical illusion, delusion, and fantasy. In the field of art, it means that an art
work causes the viewer to feel illusion in perceiving shapes, dimensions, or perspectives in a certain way. Dain’s work, which is represented by images distorted and repeated, overlapped
with other images, or blended into the background is called “Illusion Art” because the surreal image created through
extreme elaboration creates illusions for the viewer. Hence, she
was naturally titled an “Illusion Artist”, but she wants a more comprehensive identity and leans towards being called a “Visual Artist”
“People sometimes frame me by generalizing me as a mere makeup artist - to their point, I do create art and put makeup on my face. But it seems to focus too much on the method I use to express my ideas. On the other hand, the title "Illusion Artist" has a strong focus on only the visual effects that my work creates, although causing optical illusions itself is not the purpose of my work. An optical illusion is just a device that conveys the message that my work wants to convey. What I want to show through my work is resistance to stereotypes and uniformity. I think it would be more 20
appropriate to call me a visual artist that expresses the subject in a visually diverse way.” “Often times I draw repetitive patterns of expressionless eyes and expressionless faces. But I believe that it’s matter of perspective from each person - the features on the face can be seen as rather sad, or happy, or even angry depending on different set of eyes looking at it. The reason why we all cannot judge a person based on first impressions is due to the possibilities of the person having multi-dimensional personalities just beyond the first looks. I wondered if there was a way to express this multi-facetedness of a person, using my face as a “canvas”. To me, the most powerful medium is the face, as it is the first focal point during conversations and such. And since I only have one face, it meant that I only had one canvas in the world to best express my individuality.” Dains's main point of her work is "to express familiar ideas in an
unfamiliar way and eventually execute new ones". She says that this job of using her wit and showing her quirkiness are what she enjoys the most.
Dain Yoon, a one-of-a-kind artist who plans her
next visit to New York to be as a graduate student in the prestigious NYU (New York University),
talked about New York City as a “city where even the most various perspectives are freely
recognized and liberally embraced, which makes it a perfect place for artists to live in.” She seems to have a growing excitement on her mind as
she anticipates to stretch her artistic boundaries within this city. Dain adds, “I want to leave a mark in this world by doing and creating things that
only I can do - not a machine, not another person, but only me.” This notion is probably engraved
as part of her aspirations, but needless to say,
she has already achieved beyond her dreams by becoming the flagship brand of Illusion Art.
21
4월 뉴욕 이벤트
April New York Events 겨울은 갔다! 움츠렸던 몸을 펴고 봄을 즐겨보자!
4월의 뉴욕 이벤트 글
편집부
Manhattan Street Art Tour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타가 공인하는 뉴욕, 그리고 그 뉴욕의 중심 맨해튼!
그 뉴욕 맨해튼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다면 2시간가량의 Manhattan Street Art Tour를 추천한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뉴욕 거리 예술가들의
놀이터인 SoHo, NoHo, Nolita and Little Italy를 걷다 보면 내 안에 숨어있 던 자유로운 히피나 보헤미안 영혼이 깨어나는 듯하다. 1960년대부터 현재 까지 거리 낙서문화의 역사와 진화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일시: April 14 (9:45 AM)
장소: L ower East Side - SoHo, NoHo, Nolita and Little Italy 22
The Bloody Mary Festival – New York City
블러디 메리(Bloody Mary)는 보드카와 토마토 주스를 넣어 만든
칵테일이다. 왕권을 잡자마자 가톨릭교를 부활시키고 신교도를 무
자비하게 박해했던 영국 헨리 8세의 첫째 딸이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정적이었던 메리 1세 여왕의 별명을 따서 만든 이 칵테일은
그 이름처럼 진한 붉은색을 띤다. 뉴욕 브룩클린에서 열리는 블러
디 메리 페스티벌에 가면 50달러의 티켓으로 유명 레스토랑과 바 의 다양한 블러디 메리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행사장을 빠져나오
기 전에 피플紙의 People’s Choice Award for Best Bloody Mary 에 투표하고 나오는 것도 잊지 말길. 라이브 뮤직과 칵테일에는 빠 질 수 없는 치즈 스테이션도 마련되어 있다. 일시: April 8 (11:00 AM – 5:30 PM)
장소: G rand Prospect Hall (263 Prospect Avenue, Brooklyn, NY)
NYC Home Décor & Furniture Bazaar
Tribeca Film Festival
핸드메이드, 빈티지 그리고 앤틱으로 집안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해튼과 소호, 차이나타운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역이다. 이곳을 본거지
“아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귀한 것을 구한 거야?”
눈이 번쩍 뜨일 행사가 있다. 뉴욕 데코 & 가구 자선바자회에 가면 베 개부터 거울, 책상, 의자, 액자뿐만 아니라 수천 점의 인테리어 용품들 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푸드 코트의 수많은 먹거리도 즐기면서 당장 구입해서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수많은 장식품과 실
생활 소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뉴욕 데코 & 가구 자선바자회의 입장료 는 무료. 그렇지만 그 수익금은 전액 지역 공립학교 4,000명 이상의 어
린이들을 위한 활동에 기부된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 준비 를 하시길.
일시: April 15 (10:00 AM – 5:30 PM)
장소: Grand Bazaar NYC at 100 W. 77th Street
뉴욕의 트라이베카는 Triangle Below Canal Street의 약자로 로어 맨 로 하는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은 2011년 911 사건 이후에 침체한
뉴욕의 다운타운 지역을 활성화하자는 의미에서 배우 로버트 드니로, 프로듀서 제인 로젠탈, 자선가 크레이그 햇오프가 함께 만든 영화제다. 이곳에 가면 국제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진전과 신기한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매년
기존의 틀을 뛰어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해 큰 영향력을 발휘한 개인 또 는 단체에 상을 주는데, 2013년 영화제에서는 우리나라의 가수 싸이가 이 상을 받았다.
일시: April 18 – April 29
장소: Lower Manhattan 23
People Focus
엄마같은 누나,
‘Everyday Korean’ 공동 저자 이승희 박사 오빠같은 동생,
GSI 스포츠 에이전시 이한길 대표 남매이야기 글 Jennifer Lee 영문감수 Hyobin Lee 정리 24
편집부
봄비가 내리는 3월의 애틀랜타, 커피 향이 가득한 카페에 들어서자 연예인 못지않은 세련 된 옷차림에 큰 키가 인상적인 젊은 남성이 기자를 맞이한다. 그는 예의 바른 자세로 다가 와 GSI 스포츠 기획사 이한길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중에 그가 야구선수 황재균 선수를 미국에 진출시킨 기획사 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창가에 자 리를 잡고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역시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를 뿜으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당차고 똑 부러지는 인상이다. 반갑게 다가와 인사하는 그녀는 애틀 랜타 소재 CDC(미국 질병관리본부: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역학연구 원으로 근무하는 이승희 박사다. 존스 홉킨스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연구원이자 교수 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취미로 요리를 만들어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수만 명의 팔로워를 열광시키는 그녀.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식을 널리 알려보겠다는 당찬 포부로 요리 책 ‘Everyday Korean’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렇듯 간단한 소개만 들어도 뭔가 범상치 않은 이 두 사람은 남매지간이다. 두 남매의 얘기를 듣기 위해 뉴욕에서부터 달려온 기자를 위해 이한길 대표가 팥이 가득 담긴 작고 앙증맞은 붕어빵 열 마리를 쟁반에 담아온다. 붕어빵과 커피를 앞에 두고 변호사의 길에서 스포츠 기획사 대표로, 교수에서 요리사(물론 현재 교수 직함도 가졌지만)로 어떻게 그들의 삶이 바뀌었는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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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볼 얘기가 많아서 무슨 얘기부터 시작할까 고민하려는 찰나, 두 남 매는 기자의 질문과 상관없이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유쾌한 대화를 시 작한다. 자신들의 지난 유학 시절과 부모님(아버지 이종환: 군산대학교
사춘기 때 더 반항했단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엄친딸’ 같은 그녀 의 얘기가 믿어지지 않아 동생을 바라보며 부연 설명을 부탁했다.
영문학과 교수, 어머니 변재경: 충북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과 함께
“저 역시 아버지한테 칭찬 들은 게 없었어요. 늘 칭찬이 고팠죠. 더
정연하게,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질 만큼 공감과 웃음을 주며 이야기를
에 사로잡혀서 빨리 집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엄마와의
현재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때로는 한 편의 소설처럼, 때로는 논리 술술 풀어내었다. 지난 11월 요리책을 발간한 누나 이승희 박사의 얘 기부터 먼저 들어보자.
더구나 저보다 뭐든 잘하는 누나와 비교를 하시니 전 늘 열등의식 관계는 괜찮은데 아버지의 비현실적인 조언을 받아들이기 힘들었 고요. 아버지는 요즘도 가끔 이해 안 되는 말씀을 하세요. 제가 조금 이라도 일을 쉬는 걸 참지 못하시죠. 제 생각에 할아버지가 일찍 돌
“어려서부터 요리가 재미있었어요. 부모님 대신 우리 남매를 돌봐
아가셔서 부자 관계를 잘 못 하시는구나 싶기도 해요. 그래서 저 자
주시던 할머니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워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한테 주문하죠. ‘무조건 부모님을 이해하고 내가 더 잘하자’ 라고
웬만한 음식은 다 만들었죠. 요리가 적성에 맞다 생각되어 대학도
요. 사실 오늘의 저는 부모님 덕분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거잖아요.
자연스레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를 갔고요. 대학 3학년 때 교수님
두 분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고 두 분의 지원이 없었으면 제가 여기
추천으로 '한국의 맛 연구회'에서 4년 동안 한국 전통 궁중 요리도 전
까지 못 왔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잊지 않아요. 제가
수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 응되면서 일본에서 한 학기
그랬다. 이승희 박사는 요리
를 할 때였는데 아버지께서
에 관해 이미 전문가였다.
“그동안 너와의 대화기술이
그러니 요리책을 냈다고 해
부족했다.” 시며 사과를 하
서 새삼스러울 게 없는 거
시더라고요. 그때 첫 느낌,
다. 그녀는 요리뿐만 아니라
‘아…… 아버지도 완벽한 존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면 공
재가 아니셨구나. 부모님도
부, 운동이면 운동, 심지어
단점이 있으시구나’ 싶었죠.
학생회장까지 한 다재다능
그 뒤부터 부모님을 더 이해
한 우등생이었다. 이렇듯 그
하게 되더라고요.
녀를 겉으로 보기엔 큰 고비 없이 평범하게 자신의 길을
이한길 대표는 누나의 힘든
그녀에게도 내면의 갈등을
서 조기유학을 결심하고 부
대학 입시 준비를 지켜보면
걸어온 듯해 보인다. 그러나
모님을 설득하여 2002년 중
겪었던 힘든 시간이 있었다
3 때, 누나보다 먼저 미국 유
고 한다.
학을 왔다. 부모님이 미시간 주립대 교환교수로 와 2년간
“의외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미국에서 생활한 것이 계기
전 부모님 기대에 늘 못 미
가 돼 비교적 쉽게 올 수 있었
치는 아이였어요. 제가 아무
다. 그는 미시간주립대학을
리 공부를 잘해도 두 분의
졸업(외교학, 경영학 복수 전
눈엔 늘 부족했죠.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데 두 분은 칭 찬보다는 ‘조금 더, 조금 더’를 주문하셨어요. 그러면 저는 또 시키는 대로 다 잘했어요. 대학교수이신 두 분 다 엄하셨는데 지금 와서 생 각하면 저는 부모님과 같이 산 게 아니라 선생님 두 분하고 살았다 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어려서는 누구나 실수하잖아요. 그런데 저 에 대해 기대가 크신 부모님은 용납이 안 되시는 거죠. 그게 지금도 억울해요. 두 분의 기대는 점점 커지고 내 능력은 부족하게 느껴졌 어요. 그러니 스스로 늘 부족하단 생각이 드는 거죠. 제 만족이 없고 공허했죠.” 그녀는 공허함을 떨치기 위해 부모님께 반항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공)하고 탬플 로스쿨을 졸업
했으며 현재 GSI 스포츠 에이전시 대표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 중이다. 어려서 무엇을 해도 누나에게 밀리던 동생은 대학교 때 성적이 누나보다 좋아서 처음으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그녀의 얘기로 돌아가자. 그녀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또 자신이
당연히 가야 할 길로 알았던 교수가 되기 위해 2008년 존스홉킨스대학 공중보건 대학원으로 유학을 왔다. 처음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또 세상에서 정해놓은 성공 기준인,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그 런데 학기 말에 C를 받을 정도로 공부가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혼나도 애교를 떨던 동생과 달리 늘 반항을 하니까 딸이지만 엄청 많이
“오로지 교수 임용을 받기 위해 주위의 조언대로 영양 역학을 공부
같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본성과 안 맞는 이런 자신이 혼란스러워서
을 정도로 심한 우울증이 왔어요.”
맞고 자랐다고. 학생회장이나 공부, 운동은 부모님이 좋아하니까 악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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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내 생애 첫 좌절을 맛보니 의사 상담을 받
그때 그녀는 성공만을 쫓아 살아온 삶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기왕 공부하려면 제가 좋아하고 누 군가를 도울 수 있는 연구를 하자고 맘먹고 영양 인류학을 선택했다.
며 유명해졌다. 현재 그는 12명의 선수를 관리하며 한국과 미국을 오 가며 활동 중이다.
“제가 만일 한국에서 공부했다면 한국 또래 친구들과 나의 현재 모
“스스로 선택한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 그때부터 제 삶이 즐거워
습은 차이가 있었을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을 하기엔 불가능했
졌어요. 그리고 2013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
을 것 같고요. 성적 위주로 대학 전공을 결정해야 하는 문화에서 제
죠. 그해 질병통제센터(CDC) 역학 전문요원(EIS)으로 선발되어 2
가 로스쿨을 가는 건 절대 불가능했을 정도로 제 학교 성적이 뛰어
년 동안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감염 지역을 방문해 역학 조사를 담
나지 않았으니까요.”
당하기도 했어요.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한국을 방문한 기억이 나네요.”
그는 창업 후 클라이언트인 프로야구 황재균 선수가 작년 메이저리그
어려서 누나에게 늘 억눌려 기를 못 피던 동생은 미국에 와서 맘껏 꿈
메이저리그로 콜업된다는 소식도 경기 전날 오후에 팀 단장에게 연락
을 펼쳤다. 자신의 의지대로 로스쿨을 진학했다. (물론 학부를 다닐 때 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하려 했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회 사 입사 후, 퇴근 후에도 자
데뷔 경기에서 홈런을 쳤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흥분이 된다고 한다.
을 받고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보고 싶어서 그날 밤 비행기로 샌프란 시스코로 날아가 직접 경기를 관람 중에 맞이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 다. 한 사람의 꿈을 이루게 돕
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
유시간도 없이 상사가 불러
는 사실에 뿌듯하고 감격스
내면 같이 술을 마시고 자유
러웠던 순간이라서 영원히
시간도 없이 주말까지 일하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는 모습을 보고 미국에 남기 로 마음을 바꿨다.) 로스쿨
에 들어갈 무렵에는 중학생
“황재균 선수와는 나이도
사가 되고 싶었다. 근사한 양
되었어요. 성격은 정반대인
때부터 꿈이었던 멋진 변호
같아서 만나자마자 친구가
복에 넥타이를 매고 법정에
데 우린 코드가 잘 맞아요.
서 싸우는 멋진 변호사! 그
사실 이 일은 스트레스가 많
러나 그런 변호사는 TV 쇼
거든요. 오죽하면 평소 저는
에서나 볼 수 있을 뿐 현실
잘 먹는 편인데 계약 때는
은 달랐다. 법정을 오가며 싸
하루 한 끼 먹을 정도에요.
워야 하는 변호사는 적은 대
계약뿐만 아니라 이미지 관
가에 일만 엄청나고 종일 서
리 등 12명 선수마다 색이
류와 씨름해야 하는 대형 로
각각이라서 힘들지만, 재균
펌 변호사는 지루해 보였
이 같은 친구가 있어서 일을
다. 결국, 그는 대학교수님
즐겁게 하고 있어요.”
과 같이 스포츠 에이전시 회
사(GSI : Global Sporting
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얘
Integration)를 차렸다.
“솔직히 말하면 로스쿨은 1학년 성적이 졸업 후 취직 옵션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해요. 그런데 제 성적이 대형 로펌에 입사할 정도가 되지 않았어요. 변호사 꿈을 접 은 또 하나의 이유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친구
기를 하면 걱정스레 쳐다보 는 누나 이승희 박사. 이 둘은
5분 거리에 산다. 두 남매는
어려서 티격태격 잘 싸웠다. 이제는 네 살 위 누나가 엄마 같다는 느낌 이 든다는 이한길 대표.
들의 만족도가 높아 보이지 않았고 더이상 그 일이 흥미롭지 않아 보
“전 어려서부터 동생의 엄마 역할을 했었어요. 부모님이 두 분 다 일
였어요. 그래서 졸업 무렵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죠. ‘정말 내가 좋
을 하시니 하교 후엔 열쇠를 목에 걸고 동생이 돌아오는 어린이집
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라고 다시 마음을 먹고 어린 시절부
차 마중을 나갔죠. 제가 밥해주고… 미국 정서로는 이미 엄마죠. 동
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기에 프로 스포츠 구단에 취직하는 거로 목
생 덕분에 빨리 어른이 된 거죠.”
표를 변경했습니다.” 그가 대표로 있는 GSI 스포츠 기획사는 한국에 진출하는 외국인 선수
의 적응력을 높이고 이해를 도와준다. 제러미 드루 교수, 켄 제이컵슨 교수와 함께 25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창업한 그의 회사이다. GSI
(Global Sporting Integration)은 야구 황재균 선수를 미국에 진출시키
어렸을 때 동생은 부모님에게 애교도 부리고 착하고 순진해서 사랑을 독
차지한다고 생각해서인지 미워하던 때도 많았고, 질투도 많이 했단다. 하
지만 누나가 미국 대학원에 와서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할 때 동생이 큰
힘이 되어주었다. 물론 그래도 가끔 티격태격하긴 하지만, 이제 동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늘 누나 편이 되어 줄 든든한 오빠 같은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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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팔로워를 거느린 그녀의 인스타그램에서도 엄청
난 인기를 끌고 있다. 120여 가지의 레시피를 담은 요 리책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녀의 동그란 눈이 더 반짝인다.
“제 요리책 ‘에브리데이 코리안’은, 미국에서 식재료 를 구하기 힘든 점들을 고려하고 미국 식문화에 어 울리는 음식을 한국의 맛에 접목한 레시피들을 모아 놓은 책이에요. 미국 상황에 맞게 맟춤 된 요리책인 셈이죠. 제가 미국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다 보니 같 은 재료로 조리를 해도 맛이 다르더라고요. 예를 들 면 김치 같은 경우 똑같은 재료를 써도 배추 맛이 달 라서 김치가 물렀어요. 그래서 누구나 쉽게 요리할 수 있는 한식 요리책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기획 의 도였죠. 전통 한식뿐만 아니라 김치슬로, 불고기 푸 틴, 고추장 마요 연어구이 등 다른 인종들도 쉽게 접 근할 수 있는 퓨전 한식도 다수 수록돼 있습니다.” 5월에는 오스트리아 유명 식당에서 그녀를 초청, 팝
업 한식당을 열 계획이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 도로 바쁜 그녀는 하지만 아직도 새로운 꿈을 꾼다.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에 관심이 많아서 요즘 와인 학교도 다니고 있어요. 훗날 ‘요리전문가 이승희’가 제 꿈입니다. 그래서 요즘 점점 한국 음식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한국의 정서가 스며든 요리를 한 상 가득 차려내고 소개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요리 전문가가 되고 싶어요.” 야구 시즌이 돌아와 역시 24시간을 쪼개어 사는 이한길 대표 역시 늘 새로운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다.
“지금은 야구선수 황재균의 에이전트로 널리 알려져 있고 현재는 “누나가 대학원 공부할 때 자신감 없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요. 어
야구선수들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앞으로 에이전시의 규모
려선 제가 넘지 못할 최고의 누나였거든요. 누나의 약한 모습만 생
를 키워 다른 스포츠 선수들도 관리하는 게 계획입니다. 동아시아와
각하면 지금도 정말 맘이 아파요. 그런데 이젠 누나가 요리를 하면
미국을 오가며 스포츠계 최고의 에이전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알리
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제 맘이 편해요. 누나는 정말 요리를 좋
고 싶어요.”
아해요. 그게 느껴져요. 틈만 나면 저를 집으로 초대해서 맛있는 요 리를 대접해주죠. 누나는 그냥 요리하는 과정을 재미있어하고 진짜 좋아한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그녀는 의사인 네이슨 콴(32)씨와 결혼 5년 차를 맞았다. 동생이나 지
인을 초대해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글을 썼을 뿐인데 지금 그녀의 책 은 아마존 쿡북 코너 1등이다. 책을 내게 된 동기도 재미있다. 2008년
서울시 프리랜서 통역관으로 일하던 때 ‘서른 살의 레시피'의 한국어판 출간 차 방한한 입양아 출신의 유명 푸드 칼럼니스트 김순애(48) 씨와
친분을 쌓았다. 통역 공식행사가 끝나면 요리에 뜻이 맞은 두 사람은 전국 맛집을 함께 찾아다녔다. 그리고 언젠가 같이 한식 책을 내자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미국에 다시 만난 두 사람, 김 씨의 요청으로 출판 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에브리데이 코리안'은 출판과 동시에 아마
존서점 요리책 분야 1등을 하더니 작년 말 쿠킹 채널 푸드네트워크가 선정한 '성탄절 선물로 좋은 요리책'에도 선정되었다. 현재 3만 4천 명 28
좋은 사람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는 전제는 두 남매와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젊은 나이만큼 대화도 거침이 없고 자유로운 두 사람.
툭툭 던지는 얘기지만 솔직한 속내는 듣기에 참 편하다. 최근 이승희 박
사는 학교 커뮤니티 공간에 텃밭을 만들었다. 봄에 심어서 여름까지 하 루 분량만큼만 캐서 식탁에 올린다고 한다. 땀 흘려서 키운 소득으로 음
식을 만들면 최고의 음식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동생에게 매일 새로운 최고 음식을 대접 하는 누나. 누나에게 늘 삶의 자극을 받는 동생. 어렸
을 때는 경쟁상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서로 의존하고 도울 수 있는 누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생. 언제든지 누나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동생. 동생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하 다는 누나…. 서로를 추켜세우는 두 남매의 우애가 참으로 진실하다. 두
시간의 인터뷰를 마치자 때마침 비가 그쳤다. 밝은 햇살이 아직도 창가 에 머물러 있던 빗방울에 투영된다. 앞으로 그들 앞에 펼쳐질 새로운 꿈 처럼 방울방울 매달려 영롱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야구선수 황재균을 미국에 진출시킨GSI 기획사 대표
아마존 1등의 베스트셀러 요리책 저자
Mother-like Sister,
‘Everyday Korean’ Co-Author Seung-Hee Lee, PhD A Protective Younger Brother,
Han-Gil Lee, owner of GSI sports agency One rainy day in March, a tall young man wearing a dandy suit greeted
at a
small cozy coffee shop in Atlanta, GA. His name is Han-Gil Lee, a sports agent at GSI (Global Sporting Integration, LLC) Sports who successfully orchestrated a baseball player Jae-Gyun Hwang’s journey to Major League Baseball (MLB) this past year. Not long after, a woman with an unusual aura walked in. She introduced herself – Seung-Hee Lee, an epidemiologist at 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 in Atlanta. After earning her Ph.D. from Johns Hopkins, Seung-Hee works as a researcher, a professor, but also cooking as a hobby, uploads photographs on her Instagram and fascinates tens of thousands of followers. She also published her cookbook ‘Everyday Korean’ with her desires to introduce Korean food to the masses. Interestingly enough, they are siblings. couldn’t wait to hear more about their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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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oon as they sat down, Han-Gil and Seung-Hee stroke up
me sincerely, “Son, I am sorry that I hurt you because of my lack of
the U.S., their parents (Father, Jong-Hwan Lee – professor of
was a good turning point for me to have a much better understanding
a pleasant conversation about their experiences studying in
English literature at Kunsan National University and Mother, JaeKyung Byeon – professor of physical education at Chungbuk National University), and their current careers.
started
with the sister, Seung-Hee who published her first cookbook in November, 2017.
“I’ve always enjoyed cooking since I was a little girl. I learned to cook from my grandmother, who took care of us while our parents were working. No surprise that I naturally chose to study Food and Nutrition at Ewha Women’s University. With my professor’s recommendation, I also studied Korean traditional royal cuisine for 4 years at the Institute of Traditional Culinary Arts and Flavors of Korea as well.”
communication skills which didn’t properly convey my thoughts.” It of my parents. The truth is, I wouldn’t be here today without my parents and their support and I am always thankful for that.” Watching his sister’s arduous college preparation, Han-Gil decided to study overseas. In 2002, a 9th grader persuaded his parents to send him to the U.S. Because his parents were previously exchange professors at Michigan State University for two years, Han-Gil could settle into the States with relative ease.
He graduated from Michigan State, majoring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Business Management and earned his Juris Doctor degree from Temple University Beasley School of Law.
Let’s go back to Seung-Hee’s story. She flew over the Pacific in 2008 to study public health at Johns Hopkins University to fulfill her parents’ wish – to
Seung-Hee has been
a woman of many talents from a young
age: excelling in school,
sports, and even elected
부모님(아버지 이종환: 군산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어머니 변재경: 충북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과 함께
as student president! It seems that she has lived a comfortable life without
any challenges. Then, she candidly shared some of her internal conflicts while growing up.
“Believe it or not, I was
become a professor. She initially started studying to live up to her parents’ expectations and to live a so-called “successful life”. But, her life at Johns Hopkins was not easy at all. The study materials were so hard and she got a ‘C’ by the end of the semester. Yes, a ‘C’ for the first time in her life.
a child who never met
“People around me
my parents' expectations.
said I should study
No matter how well I did
Epidemiology to become
in school, it was never
a professor but the subject
enough for them. Instead of compliment or encouragement, my
matter was very difficult. When I experienced failure for the first
parents asked a little more every time. So I ended up feeling that my
time, I became severely depressed enough to seek a therapist.”
ability was lacking and couldn’t help but feel so empty at times.” Seung-Hee found her own way to fight back her deep emptiness
inside: Rebelling against her parents. Unlike her brother, who would immediate back down when being scolded, she fought back hard which led to frequent punishments. Seung-Hee’s story
was hard to believe as she appeared to be a ‘perfect daughter’. Then, Han-Gil, her younger brother, started sharing his stories.
That was the moment Seung-Hee looked back on her life after constantly chasing for success and started what she really
wants. Then, she decided to switch concentrations to Nutritional Anthropology.
“Once I started studying something that I really like, my life became much more enjoyable. In 2013, I successfully completed my doctorate from Johns Hopkins and began serving as an ‘Epidemic
“It was no different for me. I was always hungry for my father’s
Intelligence Service (EIS)’ officer at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compliments which I never got. To make matters worse, I was always
and Prevention (CDC) for two years. This allowed me to work
being compared to my sister, who was better at everything than
in infected areas not just in the U.S. but all around the world. I
I was. This was the driving force in me deciding to leave home at
particularly remember being in Sierra Leon during the Ebola Virus in
young age and come study in the U.S. But, one day my father told
2014, and in South Korea fighting MERS in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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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il, the little brother, always pressured by his sister’s success,
she was always the best in my mind. But, she powered through and
be a trial lawyer. He envisioned himself fighting for justice in
Her face gets lit up every time she does cooking.”
lived his dream in America. He went to a law school hoping to court while wearing a fancy suit, just like many TV shows. Soon,
however, Han-Gil realized reality was much different and found
his true interest resided in Sports. He found a sports consulting company with two sports law professors while attending the law school, focusing on assisting professional athletes with
their cultural integration when playing overseas. This concept eventually led to establishing his current sports agency: GSI (Global Sporting Integration, LLC) Sports.
“First-year law school grades dictate your destiny as a lawyer predicting your employment opportunities upon graduation. My grades were simply not enough to join a ‘big law’ firm. Also, the work as a traditional lawyer just seemed…boring. Thus, I really
found what she loves – cooking. I can tell how much she loves it.
‘Everyday Korean’ , Seung-Hee’s cookbook with over 120 recipes topped the Amazon’s new cookbook rankings almost immediately after publishing. Back in 2008 in Seoul, Seung-Hee met Sunée Kim, a Korean adoptee, who was a renowned food columnist known for her book, ‘Trail of Crumbs’ . The two shared the passion for cooking and promised each other to publish a book on Korean food together. Years later, they kept that promise with the birth of ‘Everyday Korean’ . Food Network called it one of the “Best Cookbook as a Christmas Gift.” Her Instagram account (@Koreafusion) with around 34,000 followers has attracted quite a popularity.
wanted to find a field that I was passionate about. Sports has
“‘Everyday Korean’ is a collection of recipes tailoring to folks living
always been a passion of mine since I was a kid, so the choice was
in the U.S. The intention is to create a Korean-style cookbook that
easy for me.”
anyone could easily follow in America. Besides traditional Korean
His agency, GSI Sports, not only focuses on contract negotiations,
but also helps their clients with integrating into different cultures when going overseas. He established the company at a relatively
food, there are also a number of fusion Korean dishes that are easily accessible to other ethnicities such as, kimchi slaw, bulgogi putin, and gochujang-mayo grilled salmon.”
young age of 25. GSI Sports became famous for engineering
This upcoming May, a highly regarded winery ‘Gut Oggau’ in
Baseball (MLB) in 2017. Currently, he manages 12 players and
enough hours in a day, but Seung-Hee continues to dream.
baseball player Jae-Gyun Hwang’s move to Major League frequently travels back and forth between Korea and the U.S.
He says he still gets chills reminiscing watching his client JaeGyun Hwang’s home run in his major league debut last summer. He booked a flight to San Francisco immediately after the team’s general manager contacted him about Hwang’s promotion to
the big leagues and got to experience such thrill from the seats at AT&T Park. He says it is one of the proudest moments of his career, and takes great pride in helping one’s dream come true.
Austria is hosting her for a pop-up dinner event. There are not
"I have a lot of interest in pairing wine with Korean cuisine, so I’ve been doing cooking classes at a wine school these days. My dream is to be called ‘Seung-Hee Lee, A Culinary Expert,’ and hope to communicate Korean cuisine to its fullest.” With a new baseball season just around the corner, Han-Gil also stays busy planning.
"I am widely known as the agent to baseball player Jae-Gyun
“In fact, this job can come with a lot of stress. When it comes to
Hwang. In the future, however, my goal is to increase the size
contract season, I am stressed enough to be able to eat once a day
of the agency and manage other athletes in different sports. My
only. But, the truth is I love that part of my life, too. I even embrace
dream is to become one of the best sports agents across East Asia
the stress. I feel truly blessed to work in a field that I enjoy.”
and the U.S."
Seung-Hee and Han-Gil grew up fighting over everything.
Seung-Hee and Han-Gil. The frank talks between these two
that he dominated their parents’ love. However, when Seung-
who frequently cooks for her brother. And the brother who
Especially Seung-Hee was always jealous of him because she felt Hee was having a hard time at Johns Hopkins Han-Gil became
the support she needed. They still argue occasionally, but Han has now become a big brother-like figure to Seung-Hee, always supporting her no matter what.
"I still remember when my sister was lacking confidence in her first year at Johns Hopkins. Watching her struggle was not fun because
young siblings made it easy to listen to their stories. The sister
once considered the sister his biggest rival. Now they rely on
each other to get through any challenges ahead. As S•CASA wrapped up the two-hour interview, the rain stopped. The bright sunshine is projected onto the raindrops remaining on
the window, shining, just like the new dreams that lie ahead for both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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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3)
무시당해도 괜찮아 정리
편집부
며칠 전 학원에서 치른 수학시험 점수를 받아 들고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지? 요즘 괴외학원들은 한 두 학년 내용을 미리 가르치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기가 여간해선 어려울 거야. 그런데 매번 시험을 치르 면 학원에서 자체 등수를 발표해서 시험지에 나눠주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 “너는 이번에 몇 등했어?” 라고 물으며 서로 비교한다고 들었 어. 학원 문을 나서면서 돌려받은 시험지를 돌돌 말아 손에 쥐고 오는
모습을 보니 풀이 많이 죽었더구나. 더구나 친구들 사이에서 은근히 시험점수와 등수를 가지고 평가를 받게 되면 “난, 열등한가 보다” “아 이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매 순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
고 서로를 비교하기도 한단다. 때로는 자기보다 못한 지위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또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동경
하거나 시기하기도 하지.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기쁨을 얻 기도 하지만, 가끔은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한단다. 사람은
누구나 끊임없이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원하지. 그 반대의 경험은 아 픔으로 다가온단다. 32
초등학교 고학년이던 어느 날 조회 시간에 선생님은 보이스카우트에
다음 날 아침부터 등교 지도를 하게 되어 있었단다. 그래서 아침 일찍
고, 멋진 제복을 입고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 등교 지도를 할 수
있던 교문 앞에서 모자를 쓰고 아이들 등교 지도를 하고 있었어. “너희,
대해서 설명을 하셨어. 보이스카우트가 되면 방과 후 특별한 모임을 하 있다는 거야. ‘내가 보이스카우트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나를 인정해주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선뜻 선생님에게 보 이스카우트에 들어가겠다고 신청을 했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나, 오늘 보이스카우트가 되었어”라고 말
씀을 드렸어. 그런데 문제는 보이스카우트가 되려면 옷과 모자를 사야 하고 또 일정액의 회원비를 내야 하는 거였어. 가난한 소작농이면서 자
집을 나서서 부푼 기대와 자긍심을 안고 학교에 갔지. 언덕배기 위에 좌측통행 해야지.” “거기 너희 한 줄로 걸어서 와야지”하면서 꼭 뭐라
도 된 것처럼 보이스카우트 완장과 모자를 쓰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단
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보이스카 우트 옷도 안 입었으면서 무슨 보이스카우트야?” “난, 네 말 안 들을래”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과 손에 땀이 부슬부 슬 나기 시작했어. 순간 긴장하고 당황했던 거지.
식이 여섯이나 되는 처지에서 꼭 학업에 필요하지도 않은 비용을 내
간신히 등교 지도가 끝나는 시간까지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어. 하지만,
요.” “선생님에게 이미 한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안 한다고 해요?”라고
실 인식을 하게 되면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어깨와 다리에 힘이 빠지게
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 “엄마, 그래도 꼭 보이스카우트 하고 싶다구 고집을 부렸어.
보다 못한 어머니는 “아랫동네 사는 애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 걔 가 보이스카우트를 했다더라” “그럼 그 집에 가서 혹시 옷과 모자가 있
는지 알아봐라”고 하셨어. 그 형에게 옷과 모자를 얻어서 보이스카우 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한걸음에 동내 형 집에 달려
갔지. “형, 예전에 보이스카우트 한 적이 있다던데, 혹시 그 옷과 모자 아직도 가지고 있어?” “응, 내가 한 적이 있는데, 너 그거 하려고 하냐?”
“보이스카우트 너무 하고 싶은데 엄마가 돈이 없어서 옷하고 모자를 못 사주겠데” “그래, 그럼 내가 가서 장롱에 있나 찾아볼게”
‘형에게 꼭 그 옷과 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기대하며 문지방 밖 에서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단다. 한참 후에 형이 나왔어. “성민아, 어 쩌냐? 옷은 버린 것 같고 모자 하나밖에 없네” 조금 실망은 했지만 그
래도 모자라도 있으니 참 다행이다 싶어서 얼른 모자를 받아서는 집 밖 으로 나섰어. “형, 고마워, 내가 잘 쓸게” “혹시 옷을 찾게 되면 우리 집 에 꼭 연락을 줘야 해?”라고 부탁을 하고는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자랑스 럽게 집에 돌아왔어.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래 나는 보이스카우트가 아니구나”라는 현
된 거야. 뭐랄까?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억지로 서 있는 느낌 이랄까’ 그 후부터는 아이들이 보이스카우트 옷을 입지 않은 나만 쳐다
보면서 수군대는 것 같았어. 모든 아이가 나를 무시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거지. “보이스카우트 옷도 안 입은 주제에 무슨 등교 지도야?”
라고 직접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단다. 교문 앞에 서 있으면서 창 피한 생각이 들어서 얼굴은 화끈거리고 아이들 얼굴도 정면으로 쳐다
볼 수 없었단다. 서 있는 짧은 십 여분의 시간이 마치 몇 시간이 지나간 것처럼 길게 느껴졌어. 가슴 한구석에는 서러운 마음이 차기 시작하고 코끝이 시큰거리더라고.
교실에 들어와서는 온종일 기분이 안 좋았단다. 간신히 학교를 마치고
기운이 빠져 터덜거리며 집에 갔었지. 보이스카우트 모자는 가방 한구 석에 넣어두고는 쳐다도 보지 않았지. “내 모자도 아닌 데 뭐, 그리고
난 보이스카우트가 아니잖아” 이런 마음이 드니까 모자에도 정이 떨어 지는 거야. 아무 죄도 없는 돌멩이만 발로 차면서 돌아왔어. 집에 와 보 니 신발에 까만색 먼지가 가득 앉아서 엄청 더러워졌더라고. 더구나 신 발에 구멍이 생겨서 어머니에게 혼만 났지. “새 신발을 사준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신발에 왜 구멍을 냈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새 신발을 살 생각을 하니 속상하셨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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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교에 가서 담임이셨던 김기호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 보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이 완전히 사
카우트 신청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그만두느냐”고 물어보셨어.
이 정식으로 단장으로 임명한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 모두 내 말을 잘
이스카우트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 선생님은 “보이스
그냥 얼버무렸지. “보이스카우트 비를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선생님 은 그래도 해보지 않겠냐고 설득하셨지만, 이미 내 마음을 돌이킬 수 가 없었어. 또 옷을 안 입고 등교 지도를 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
해지고 가슴이 쿵쿵 뛰는 거야. 아이들이 분명히 무시할 거라고 생각 했던 거야.
다음 날 학교에 가던 중에 멋진 보이스카우트 제복을 입고 늠름하고
자랑스럽게 등교 지도를 하던 보이스카우트 단원들을 볼 수 있었단
라졌어. 그래도 용기를 내서 “키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 “학교 선생님 들어야 해”라고 소리쳤지. 내가 단호하게 말하니까 그 아이도 더 딴지 를 걸지 않더라고. 마을회관까지 무사히 아이들을 인솔한 후 “다음 날, 일요일 아침 8시까지 모두 회관에 모이기 바란다” “회관에 모여서 의
자를 정리하고 걸레질을 한 후,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휴지를 주울 거
야.” “모두 휴지를 주울 때 쓰게 집에 있는 비료부대를 하나씩 가져오 기 바란다.”라고 권위 있게 말하고는 집에 돌려보냈지. 그 후 일 년 동 안 단장직을 잘 수행할 수가 있었단다.
다. 부러운 생각이 들었지. ‘나도, 저렇게 멋진 옷과 모자를 쓰고 보이
생각해보면 무시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것 같아. 큰 집에 제사 지
면했기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지. 매번 보이스카우트 단원을 볼
다른 집들은 할아버지 용돈도 드리고 소고기도 사 오는데 우리 집은 늘
스카우트를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직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선생님은 나를 부르시더니 “성민아, 네가 동네 애향단장을 맡아라” 고 말씀하셨어.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매주 토요일마다 동네
별로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은 후 동네 단장의 인솔하에 마을회관까
지 줄을 맞추어 가는 행사를 벌이곤 했단다. 또 동네단장은 일요일이 되면 아이들을 모아 동네 회관 주변을 정리하고 마을 휴지를 줍는 행 사도 주관하곤 했었어.
갑자기 직책을 맡겨 주시니 기운이 솟았지. “보이스카우트는 못 해 도 내가 마을 단장이 되는구나!” 사실, 내가 살던 동네, 서산군 성연
면 오사리 2구에는 이상하게도 6학년 남자아이가 나 혼자 밖에 없었
어. 단장은 대개 최고학년 남자아이가 맡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선 생님이 나를 지정해서 단장으로 임명하셨던 거야. 그래도 그게 어디 야? 내가 마을 대표인 단장이 되었는데 말이야.
어느 날 토요일 오사리 2구 마을 아이들을 일학년부터 육학년까지
다 모아서 한 줄로 서게 했지. 학교 운동장에 아이들이 쭉 서 있고, 나
는 제일 앞에 서서 하교 조회를 했어. 그리고는 아이들을 두 줄로 맞
춰서 걷게 하면서 마을회관까지 인솔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한마을
에 살던 오학년 남자아이가 “넌, 키도 작은 게 무슨 단장이야?”라고 말하는 거야. 사실, 내가 육학년이기는 했지만, 학교를 너무 일찍 들
어가서 오학년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고, 또 오학년 아이들보다도 키 가 작았었거든.
내러 가면 우리 집 아이들은 다른 친척들에 비교해서 무시를 당했어.
돼지고기 두 세 근이 다였거든. 반에서 키가 두 번째로 작았기 때문에 늘 초등학교 내내 키 작다고 무시를 당했단다. 얼마나 걱정이 되셨는지
어머니는 한 살 어린 내 여동생하고 늘 키를 재보곤 했었지. 여동생이 나보다 키가 조금 컸던 거야. 부모님이 학교 행사에 거의 안 오시거나 선생님들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선생님들에게 잊힌 존
재였을 거야.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길 했나, 또 숙제해 오길 했나. 무시 당할 이유가 백 가지도 넘었지.
그래도 괜찮단다. 마음이 잠시 조금 아플 뿐,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곤 하지. 사람들은 늘 서로 비교 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찾아 비난하려고 한단다. 그렇게 해서 내가 좀
더 우월하게 느낄 수도 있고, 또 경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 이 들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자꾸 남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일이 생
긴단다. 물론, 우리 자신들도 그것에서 예외가 아닐 수도 있어. 그래
서 더욱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단다. 누가 내 말과 행동에 상처 를 받았는지 잘 살피고 주의깊게 처신을 해야 하지. 그러나 다른 사람
이 나를 비난하고 무시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남의 비난과 무
시는 삶 속에서 피할 수가 없단다. 또 경쟁도 늘 있게 마련이란다. 피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냥 인정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
야. ‘그것도 삶의 한 부분이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거야. 그리고 비난과 무시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부분도 또 성장할 기회도 살피는 게 좋겠 지. 지금 내가 무시당했다고 해서 영영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 지금, 이 순간 그렇다 치더라도, 나중에 내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수 있거든.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34
EDUCATION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4월의 인물
이상화 (李相和, 1901~1943)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일제강점기의 민족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1920년대 우리의 근대 시단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그는〈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개벽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록 나라는 빼앗겨 비애에 젖어 있을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 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이상화의 4형제는 모두 한국 근대사에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이다. 첫째 이상정(李相定, 1897~1947)은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면서도 학자요 시ㆍ서ㆍ화에 조예가 깊은 예술인이며 이상화는 둘째, 셋째 이상백(李相佰, 1904~1966)은 역사학자인 동시에 사회학자이며 체육인으로도 저명하였다. 넷째 이상오(李相旿, 1905~1969)는 수렵가이면서 저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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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 직장 생생 체험기(4)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직장 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을 텐데. 어쩌 면 판타지 같기도 한 이런 행복한 커리어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담근 지 가 벌써 18년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미국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변 화를 겪었고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힘들었다. 20년 전 유학생으로 와서 MBA 프로그램 을 마치고 취업비자를 받아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취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좌충우돌하며 버텨낸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 것이다. 지난날의 나의 경험이 지금 막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달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 Seunghee Chung 영문 Hyobin Lee 정리 36
편집부
두괄식과 미괄식
도대체 무슨 소리야?
굴과 상냥한 말투, 그리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메꾸고 있었다. 그래서일
것에 대해 두려움은 없었다. 부지런히 글의 구조를 잡고 서론, 본론 그리고
예로부터 본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이 말 하나를 굳게 붙잡고 워너 브라더스에서 시작한 인턴 생활 내내 나는 나의 어설픈 영어를 웃는 얼 까. 부서 사람들은 나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괴상한 영어를 (적어도 내 앞에
선)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고, 아마도 그것은 늘 웃 는 얼굴을 하는 나를 보며 ‘쟤가 말은 잘 못 해도 하는 걸 보니 본성은 그리 나 쁘거나 머리가 그다지 아둔한 애는 아닐 거야’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그런 와중에 내가 넘어야 할 큰 산이 생겼으니 바로 영.작.문.
행동의 소리가 말의 소리보다 크다…? 영작문은 예외인걸로!
인턴을 시작하고 매일매일 부딪히는 가장 큰 도전은 뭐니 뭐니 해도 영어
로 하는 의사소통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모든 사람의 애증의 대 상인 이 (몹쓸) 영어. 유학 준비한다고 토플을 몇 번씩이나 보고, MBA 프로 그램에 들어가기 위해 GMAT도 보면서 뭐 이런 단어가 다 있을까 싶은 듣
(도) 보(도 못한) 잡(스런) 단어도 많이 외웠었건만 입만 열면 나오는 단어라
그래도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치며 교수님들의 칭찬을 받은 꽤 그럴듯한 석사 논문까지 써본 내가 아니었던가. 다행히 자료 조사를 하고 글을 쓰는
결론까지 한글로 쓴 뒤 그것을 그대로 영어로 옮기는 일에 몰두했다. 완벽 한 영어는 아닐지라도 깊이가 있는 보고서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주어 진 일주일의 시간 동안 짬짬이 디렉터와 한국 시장이 해외 배급 시장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보고서에 포함하면 흥미로울 부분을 이야기하고 점검
했다. 또 자료 수집을 하며 그동안 찾아낸 한국 영화 대작들의 포스터도 뒤
에 첨부해서 붙이고 영화진흥원에서 나온 통계 수치도 넣고 하니 꽤 그럴 듯한 보고서가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완벽하지 못한 영어라도 사장 정도면
반듯한 내용을 알아봐 주리라는 기대심도 있었다. 드디어 보고서를 제출하 는 날이 왔다. 회사 양식을 얻어다가 보고서 표지를 정성스레 만들어 출력
하고, 보고서 내용은 컬러로 출력한 뒤 사장에게 가는 보고서 함에 정성스 레 넣었다.
고는 겨우 유치원생 수준의
하루, 이틀, 사흘… 언제나
하고 머릿속으로 주어 동사
칭찬 메시지가 올까 목이
단어에, 문장 표현력은 고사 순서 맞추기도 어려워 쩔쩔
매었다. 특히 주말 내내 향 수병을 달래느라 한국 드라
마를 눈이 뻘게져라 밤새 본 뒤 출근하는 매주 월요일은
정말이지 영어가 더 안 나와 늘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 래도 미소를 띠며 웃음으로
사장에게서 꽤 잘 썼다는
‘말은 가슴에 남고 글은 머리에 남는다’고 했다.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수단인 말과 글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말과 글은 그 사회와 그곳에 속한 사회 구성원의 문화와 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내 생각이 인풋이라면
어찌어찌 어설픈 영어를 무
마하고 있는 와중에 인턴 생
활에 생각지도 못한 복병 하 나가 나타났으니 그건 바로
영작문이었다. 영어로 하는
그것을 표현하는 말과 글은 아웃풋일 게다. 내가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해 인풋뿐만 아니라 아웃풋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도 안 되는 판에 언감생심 무슨 작문이랴. 그런데 회사
몸으로 직접 부딪혀 배웠다.
식이 없었다. ‘뭐 워낙 바쁜 사람이니까…’하며 스스로
를 위안하고 기다리기를 일
주일. 잠시 자리를 비웠다 책상에 돌아오니 사장 비
서가 다녀갔는지 책상 위에 내가 제출했던 보고서가 놓 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장이
보고서 표지에 빨간펜으로
크게 휘갈겨 쓴 단 한 줄의 문장 – What is this???
당황함과 당혹스러움에 당
장 그 보고서를 움켜쥐고
업무라는 게 보고서 없이는 돌아가질 않으니 이런 난감
빠져라 기다리는데 아무 소
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할 데가 있나 싶었다. 거기다 이메일 없이 그 옛날엔 어찌 일했을까 싶을 정
디렉터의 오피스로 단숨에 뛰어갔다. 마침 사장이랑 통화 중인지 디렉터
요한 세상이 되었으니 그 괴로움이 하늘을 찔렀다. 못하는 영어라도 말로
리 같았다.
도로 이메일이 보편화하여 받는 즉시 바로바로 대답하고 답신을 하는 게 중
하면 어떻게 손짓 발짓으로라도 때울 텐데 영어로 쓰는 보고서나 이메일은
의 목소리가 오피스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왠지 디렉터도 난감한 목소
꼼짝없이 내 밑천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놈의 관사와 정관
“아, 사장님, 그 보고서는 제가 한번 해보라고 시킨 것이었어요. 일도 꽤 성
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디렉터가 부르더니 보고서를 하나 써
부분이 있었으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사! 언제 a(n)를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the가 필요한 건지 아닌지 도 서 사장에게 올려보라고 했다.
“인턴 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지금 한국의 영화 시장 상황을 한번 보고 서로 써서 사장님께 올려 보아요. 아마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예요.” “제… 제가요? 네, 한번 해볼게요. 고맙습니다!”
일단 대답은 자신 있게 했건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번 에 잘하면 확실히 지난번 월례회의에서 사장의 질문에 대답 못 한 것을 만 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환상의 보고서를 써서 나의 진가를 보여 주겠어!’
실히 하는 것 같고 그래서… 한국 시장을 공부도 시킬 겸 또 우리도 모르는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저… 지금 사장님이랑 통화하신 거죠? 저도 자리에 와보니 이런 코멘트 를 피드백으로 받았어요. 무엇이 잘못된 건가요?”
“일단 사장님이 제일 첨에 하신 말씀은 ‘왜 이 보고서를 썼는지 이유를 알
수 없고, 또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였어요… 지금은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보고서를 살펴보도록 하세요. 그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해요.”
37
핵심 포인트는 맨 앞으로!
잘 썼다는 칭찬만을 기다리던 내게 ‘What is this???’ 라는 사장의 코멘트 는 그 빨간색 펜 색깔만큼이나 내게 강렬한 충격이었다.
‘수치가 틀렸나? 아니면, 오타가 있나? 역시나 지긋지긋한 영문법의 문제 인가?’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인지 다
들 퇴근하고 난 텅 빈 사무실을 좀처럼 떠날 수가 없었다. 디렉터는 피곤한 지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난 오늘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잠을
잘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일단 부서에서 회람된 다른 보고서들을 모으고 일 을 깔끔하게 한다 소문난 디렉터의 이메일을 몇 가지 출력해서 내가 쓴 보 고서와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아뿔싸… 이거였구나…’
한 것이었다. 수십 가지의 보고서와 자료를 검토하고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장이나 임원들은 많은 시간을 한 가지 보고서나 자료에 할애할 수 없다. 심지어 누군가를 설득할 경우에도 ‘엘리베이터 스피치’라고 해서 엘 리베이터를 함께 타서 내릴 때까지의 짧은 30초 안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을 조리 있게 할 수 있을 정도의 훈련을 강조하는 것이 미국의 직장 문화이
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고서도 그렇고 스피치도 그렇고 일단 내가 말하고 자 하는 핵심 포인트를 맨 앞에 던져 놓은 뒤, 그것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
야 했던 것이다. 훗날 내가 15명 안팎의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있을 때도 늘 하던 말이 바로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데?’, 혹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 가 무엇이지?’였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젊은 미국 친구들도 이 훈련이 제대
로 되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다. 자기의 주장이나 의견을 조리 있게 설명하 지 못하면 중언부언한다는 인상을 주고, 그것은 바로 말의 신뢰도와 직결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도 눈앞에 선한 사장의 시뻘건 펜으로 휘갈겨 쓴 ‘What is this???’ 는 내가 영문 편지나 보고서를 쓸 때마다 옆길로 새지 않 게 도와주는 소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드디어 감이 왔다. 다른 사람들이 쓴 보고서는 보고서의 주제, 즉 핵심 포
‘말은 가슴에 남고 글은 머리에 남는다’고 했다. 의사소통의 기본적인 수단
게 되었는지 그 배경과 당위성을 설명하느라 앞부분이 상당 부분 할애되
그리고 말과 글은 그 사회와 그곳에 속한 사회 구성원의 문화와 의식을 반
인트가 맨 앞에 나와 있던 반면, 내가 쓴 보고서는 내가 왜 이 보고서를 쓰
어 있었다. 내가 당시 한국에서 배운 글쓰기의 정석은 주로 결론이 맨 마지
막에 나오는 미괄식의 글쓰기였던 반면, 미국에서는 결론이 앞에 나오는 두괄식이 글쓰기의 정석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한국에서 배운 대로 미괄식
의 보고서를 썼으니 당연히 사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38
인 말과 글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내 생각이 인풋이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과 글
은 아웃풋일 게다. 나는 이날 내가 주장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
통하기 위해 인풋뿐만 아니라 아웃풋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직접 부 딪혀 배운 것이었다.
My Journey in Corporate America by Seunghee Chung, Former VP at Viacom Media Networks:
Climbing The Corporate Ladder of Success(4) What you are good 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t is something that you would die for. Possessing an exceptional skill at something does not always translate to having a real passion in itself: a workplace is no exception. In other words, doesn’t everyone share a mutual desire to find a job that they’re good at, which actually happens to perfectly parallel their actual interests? Exactly 18 years into this fantasy-like care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 I’ve realized that no matter how demanding or tiring the work may be, doing something I love somehow creates more energy to be constantly fueled by. However, I must admit that I’ve also had my fair share of hardships throughout my career, but those were eventually lulled by frequent joyful moments that netted out the negatives. But thanks to having a job that I truly enjoyed, I was able to endure this 20-year journey, where I started out as an international MBA student who stepped into a foreign country with limited English-speaking abilities, which wasn’t even my native language. I hope that my humble narrative of the past will encourage and inspire the minds of young working professionals who are currently in the nascent stage of building their careers within the mainstream society today, and I am happy to openly share my episodic memories on a monthly basis for them.
39
Conclusion first? Or last?
There is an old Korean saying that ‘one cannot spit on someone
smiling.’ Firmly believing this, I started out my career as an intern at Warner Bros. Throughout my internship, I was trying to cover up my
poor English with a smile on my face, kind words, sincerity, and pure diligence hoping that they would be able to see through me and find
my capability, not focusing on my broken English. Perhaps that is why
colleagues at my department patiently paid attention to whatever I was saying with a kind attitude despite my awkward English. Well… at least in front of me. However, I encountered a big obstacle (totally
unexpected) that was blocking my view, waiting to be overcome. And that obstacle was English composition!
The sound of an action is greater than the sound of a word…? English composition is the exception! The biggest challenge that I faced every day after I started my
internship was communicating in English. Every Korean probably has had a love-hate relationship with English at least one point in their life.
As I was preparing to study abroad, I had to take the TOEFL test many times, not to mention the GMAT and loads of unfamiliar vocabulary
that I had to memorize. However, even with sincere efforts, I could
barely speak at a level of a kindergartener, always thinking about the
What is this???
subject-verb agreement inside my head. Especially on the weekends,
I would watch Korean dramas to reduce homesickness until my eyes became red. Thus, Monday mornings were always the worst when I
had to go back to work because it was harder for me to speak English
after watching so many Korean dramas. Still, I would always keep a smile on my face, trying to cover up my poor English. Then, what
a surprise! My peaceful days of internship were overturned by an
unexpected and unwelcomed everyday “task” of English composition. I could not dare to dream about writing in English when I could not
even speak properly in English. Yet, without a business report, I could not handle the work that was given. Moreover, living in a world where
e-mails are widely used, I came to realize how important (and painful!) it was to keep up with the e-mails, requiring fast replies when needed. Now, speaking in English was at least possible with language gestures
and could be covered up with a smile. Writing reports or e-mails in
perfect English seemed impossible. Especially those painful articles and definite articles! I did not know when and where to use ‘a(n),’
whether ‘the’ was needed or not. Meanwhile, my director called me to write a report to the President of the division. My worst fear came true. “Since you are working hard on your internship, it would be nice to
leave a good impression. I want you to write a report on the situation of the Korean movie market and give it to the President.”
“You mean…you want me to write it? Sure, I will give it a try. Thank you!”
I had some confidence in my answer, but soon I became anxious.
But, I knew that if I did well this time, I might be able to make up for that embarrassment I had last time at the monthly meeting.
‘Okay, let’s do this. Let’s write the best report ever. I will show you guys who I am!’ 40
What is this???
I was afraid, but didn’t I finish my master’s thesis with a compliment from the professors in Korea? I diligently organized the content of the
report into three parts; introduction, the main idea, and conclusion consecutively. I first wrote everything in Korean and tried to translate
word for word. I wanted to give the impression that it was a report with depth if not written in perfect English. Given a week to finish the task, I often talked with my director in my spare time about the
importance of the Korean market taking its place in the international theatrical distribution market and some other interesting facts to
be included in my report. Also, as I was collecting data, I attached the posters of top-grossing Korean films explaining how strong their
local movies are. I felt accomplished when I even attached some important statistical data from the Korean Film Council (KOFIC). The report seemed flawless and well-organized. I had expectations of the President’s ability to realize how substantial the content was, despite
my imperfect English. It was finally the due date. I prepared the report
cover following the division’s policy. The contents of the report were printed in color and carefully put into the “in box” going directly to her. Several days passed rapidly… yet no news. I was waiting anxiously for a compliment message from the President. ‘Well, she sure must
be busy,’ I thought. Another week went by without hearing from the
big boss. Then one day, I found the report sitting on my desk when I had returned to my desk after stepping out for a brief moment. Then what immediately caught my eye was a huge red sentence written in a sloppy handwriting on my precious report – ‘What is this???’
Confused and embarrassed, I grabbed the report and hurriedly ran to my director’s office to ask what was going on. I could hear the voice of
the director inside the office as she was talking to the President just in time. It seemed as if the director was taken aback as well.
“Umm… yes, the report was at least an attempt. I gave that
the introduction. Without knowing that, I completely did the opposite
and… I meant for her to study more about the Korean movie market
have realized what message I was trying to convey.
assignment and told her to give it a try. I saw how diligent she was
and perhaps we also could have an opportunity to learn more about
of what I was supposed to do, and of course the President could not
what we do not know and …”
Executives who review dozens of reports and data every day and
I waited for the call to end and knocked on the door.
or data. One of the important training that the U.S. workplace culture
“Uh… that was the President, right? I saw this report on my desk and this comment was given to me as a feedback. What exactly was the problem?”
“Well, she firstly said she does not know the reason why you wrote
this report, and she does not understand what you are trying to say in the report. I guess
make decisions cannot spend much of their time on a single report emphasizes is the ‘30 second Elevator Speech.’ The elevator speech
is all about delivering a message in a very brief, concise and clear manner. Within those 30 seconds from the moment you get in the elevator with an executive to the moment you get out, you have to be able to deliver your message and convince the other person.
Therefore, whether it would be the report or the speech, you first have to say what you have to say – ‘Get to the point!’. That is, always put
you should go back
front, then explain later.
to your desk and take
a closer look at your
report. Perhaps we could talk more about this in
the main idea in the very
To this day and when I led
They say 'good words rest in the heart and good writing stays in the head'. Through words and writings as the
a group of 15 employees, I would always ask such questions: ‘So what is
your point? What exactly are you trying to say?’ Surprisingly enough, even Get to the point! and are influenced by others as well. Moreover, words many young American I was just waiting for a workers were not fully compliment, but the and writings serve as a mirror reflecting the culture and trained for this. If you comment, “What is consciousness of the society and its members. If my cannot logically explain this??? ”, was such an and articulate your intense shock just as the thoughts are inputs, the words and writings that express argument or opinion in color of her red pen. them will then be my output. a concise way, it gives the impression of mere ‘Were the data wrong? I learned in a hard way that in order to effectively deliver repetition of words which Perhaps there was a my opinion and communicate with others, outputs are would eventually kill your typo? Well, is it the credibility. Being able problem of my poor as equally important as inputs. to successfully deliver English grammar skills your message always led again?’ directly to the credibility of your speech or report. A lot of thoughts came I can still vividly see the message written in red pen, ‘What is this???’ and went, but I could not understand why. The director told me to talk about this issue next time, but it felt like I could not go home and and it alerts and guides me still to this day, helping me not to get rest peacefully if I did not solve the problem today. So I had started sidetracked when I am writing a business letter or a report in English. gathering other people’s reports and e-mails including my director’s, who was well known for flawless work habits, I printed them out and They say 'good words rest in the heart and good writing stays compared with my own report. After a while, I realized and figured out in the head'. Through words and writings as the basic means of what the problem was… communications, we influence others and are influenced by others as well. Moreover, words and writings serve as a mirror reflecting ‘This was it!’ Finally I got it. The reports that other people wrote the culture and consciousness of the society and its members. If my had their main ideas and key points at the very beginning. On the thoughts are inputs, the words and writings that express them will other hand, the introduction part of my report was mostly devoted then be my output. to explaining the reason why I wrote this report. Actually, the introduction was all about the actual background and the reason On that day, I came face to face with the fact that in order to for necessity of the report. The essence of writing, which I learned in effectively deliver my opinion and communicate with others, outputs Korea, was to write one’s main idea in the conclusion of the essay. On are as equally important as inputs. the contrary, in the U.S., it was essential to capture the main idea in person later on.”
basic means of communications, we influence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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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2018년 미국내 최고 인기 직업 7가지 오늘날 인공 지능과 첨단 기술의 등장으로 모든 직업 전 분야에 걸쳐 산업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수십 년 내로 수백만 명의 저숙련 및 중급 노동 직업이 기 계로 대체 될 거라고 얘기한다. 직업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전문직이나 전공을 결정하는 신 규 대학생의 경우 인공 지능과 로봇 공학의 위협이 없는 산업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이 러한 직업 선택 중에서 직장에서 생존하는 데 절대적인 기술이나 로봇이 대신 할 수 없는 대인관계 스킬을 갖춘다면 아직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는 향후 직업시장 변
화를 예측하면서 우수한 임금, 안정성, 일자리 증가, 그리고 직업 만족도의 기준을 충족시키 는 올해 최고의 직업 7 가지를 뽑아봤다. 수요가 많은 일자리는 미래에도 안정적이고 건강 한 소득을 얻을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일자리의 대부분은 IT 계통 업계 일과 관련되 어 있다. 미래세대에게는 미래 시장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직업시 장 추세를 따라 잡기 위해서라도 컴퓨터와 과학계통의 공부는 필수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글 42
편집부
1. 데이터 과학자
5. 전략 및 매니지먼트 컨설팅 팀장
고용자: Google / Facebook / 등 포춘지 선정 500 대 기업
고용자: 맥킨지, 베인, 보스턴 컨설팅 그룹 등 최고 경영 컨설팅 회사
예상 연봉: $110,000 ~ $150,000
예상 봉급 : $135,000
2. 소프트웨어 개발자 / 엔지니어
6. 모바일 앱 개발자
고용자 : Google, Facebook 등 최고 기업, Wall Street
고용자: 스타트업 기업
예상 연봉: $105,000 ~ $130,000
예상 봉급 : $90,000 ~ $120,000
3. 마케팅 매니저
7. 제품 관리자
고용자: 대기업, 광고 에이전시, 컨설팅 회사
고용자 : 스타트업, Google, Amazon, Facebook 등
예상 연봉: $85,000 4. HR 담당자
예상 봉급 : $113,000 ~ $150,000
대기업, 또는 온라인 유통계열
예상 봉급 : $85,000
고용자: Fortune 500 대 기업의 HR 부서, HR 컨설팅 회사 43
Surviving the Automation Trend: Top 7 Jobs for 2018 Nowadays, fast increase of automation across all job industries, which is backed by advent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d advanced technology, is looking to inevitably replace millions of low and middle-skilled jobs over the next few decades. For new college students who are still deciding on their major, or professionals who are looking to go for a career change, it is quite tempting to skew towards choosing an industry where there are no threats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d robotics eventually replacing human workers. Among these job choices, some jobs are still considered to be valuable and quite demanding, as they’d require combination of both technical and soft skills (which cannot be replaced by robots) that are critical to surviving the workplace. After researching and incorporating the future market growth,
narrowed down
to top 7 best career choices for this year, which meet the criteria of good pay, stability, job growth, and good level of job satisfaction. These high demand jobs are likely provide endless opportunities along with a stable, healthy income for the future -- not to mention, most of these jobs are, not surprisingly, are related to IT-industry jobs. Future generations should consider signing up for a class in computer science to keep up with the future market demands and the ever-changing trend. Written by 44
1. Data Scientist
a. J ob Description: This job will be one of the most popular jobs over the next few decades, as the corporate world is heavily
driven by huge sets of data. They need data scientists to help analyze and formulate data in order to identify problems and
create helful strategies. IBM even predicted that demand for data scientists will grow significantly, even up to 28%, by 2020.
b. Estimated Salary: $110,000~$150,000
c. Where Hired: Top companies like Google/Facebook/etc. Most Fortune 500 companies hire data scientists to help solve business problems
d. Degree Required: MS or PhD degree in Computer Science, Math, etc.
2. Software Development Engineer
a. Job Description: Whether if it’s back-end or front-end or Fullstack engineer, these coveted jobs are well-respected within the industry, who are known to spend hours in coding C++ or Java to develop the next big project.
b. Estimated Starting Salary: $105,000~130,000
c. Where hired: Most top companies such as Google/Facebook/ etc. Also, hedge funds in wall street also recruit these computer science majors to train them into top traders in the market.
d. Degree Required: Bachelor’s degree in Computer Science 3. Marketing Manager
a. Job Description: A brilliant marketing manager from a company
knows how to turn an item into the best-selling product with an amazing marketing strategy.
b. Estimated Salary: $85,000
c. W here hired: Marketing and planning team within Fortune 500 companies, advertising agencies, consulting firms, etc.
d. Degree required: Bachelor’s degree in Human Resources, Psychology, Business, Management, etc.
5. Strategy Manager
a. J ob Description: Strategy managers or management
consultants use strategic methods to solve business issues for companies, while coming up with creative and practical ways to generate higher revenue growth.
b. Estimated Salary: $135,000
c. Where hired: top management consulting firms like McKinsey, Bain, and Boston Consulting Group, etc.
d. Degree required: MBA or an advanced degree (MS, PhD) 6. Mobile Developer
a. J ob Description: Mobile developers create apps for
smartphones that consumers use everyday, which are critical to today’s needs.
b. Estimated Salary: $90,000~$120,000
c. Where Hired: Most startup companies
d. Degree Required: Bachelor’s degree in Computer Science 7. Product Manager
a. Job Description: Product Managers help develop and oversee
products for corporations, often find in tech companies. They need critical soft interpersonal skills to manage an entire team and work cross-functionally with other teams.
b. Estimated Salary: $113,000~$150,000
c. Where hired: Google, Amazon, Facebook, Insurance companies, Retailers
d. Degree Required: MBA and/or Bachelor’s in Engineering or Computer Science
d. Degree required: Bachelor’s
degree in Marketing, Business, Management, Advertising, etc.
4. HR Manager
a. J ob Description: For any
successful company to
operate smoothly, a good HR manager can oversee the
process of talent recruitment, onboarding, training, and
people development, and other HR-related policies.
b. Estimated Salary: $85,000
c. W here hired: Working in
HR department of Fortune 500 companies, working for
management consulting firms for HR iss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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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한인 모두의 행복한 가정을 위한 작은 실천
뉴욕 가정상담소 소장 김봄시내 글 Juyoung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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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미주 한인 이민 역사 11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기간에 한인 이민자들은 사회적으로 나 경제적으로나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한편에는 빈곤과 학 대로 고통받으면서도 호소할 곳이 없고 호소할 수도 없어서 그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이 여전 히 존재한다. 가정 내에서 행해지는 폭력이나 사회 취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피해자가 제대 로 된 법적 보호와 구제 조치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불안정한 신분으 로 미국 내에 체류하고 있는 피해자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 뉴욕가정상담소(KAFSC: Korean American Family Service Center)는 이렇게 가정폭력, 사회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한인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사회봉사 단체이다. 1989년에 설 립된 이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안전하고 건강한 한인 사회 만들기를 실천해 왔다. 이에 에 스카사는 더 많은 이들이 뉴욕가정상담소에 대해 알고, 그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하거나 봉사 활 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돕고자 김봄시내 소장을 만나 상담소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중요한 가치 이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으 로 과거 대가족 시대에 치가(治家)의 필요성을 시사하
기 위해 쓰였던 이 말이,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가족이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가화(家和)가 요원해져 가는 현 대 사회에서는 반사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되새기고 강 조하기 위해 쓰이는 듯하다. 인간관계를 수단이나 도구 로 이해하는 풍조가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마저 약화 시켜 가정이 화목하기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가정을
꾸리고 유지하기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가정 내 폭력부 터 성폭력, 인신매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폭력 이 삶을 위협하고 있음에도 이런 문제들은 쉽사리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심화되어 간다. 피해자들은 사회 적 압력이나 자신의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구제조차 요
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뉴 욕가정상담소이다. “가정폭력, 성폭력과 차별 없이 인
간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기치 아래 뉴
욕을 비롯한 미 동부지역 내 소외된 한인들을 돕고 있는 이 단체는 김봄시내 소장을 필두로 뜻을 같이하는 많은 사람이 스태프로,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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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깨고 폭력을 근절하자 (Break the Silence, End the Violence)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피해자 의 침묵이다. 피해자가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하지 않는 것
은 오히려 피해를 키우고 결국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만
든다. 피해자의 침묵은 개인적 희생을 심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가 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왜곡시켜 건강한 사회의 형성을 방해한 다. 가정폭력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갈
등 정도로 치부하는 인식이 그것이다. 뉴욕가정상담소는 이 문제를 해
소하고자 1997년부터 매년 “침묵을 깨고 폭력을 근절하자(Break the Silence, End the Violence)”라는 주제로 침묵 행진을 진행하는데, 이 행사의 의미를 김봄시내 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침묵이 큰 희생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가 정폭력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해요. 그래서 지역 사회에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동시에, 피해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매년 침묵행진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침묵 행진에는 한인뿐 아니라 타민족 사람들, 그 리고 지역정치인들과 사회 인사들도 참여하여 힘을 실어주고 있어 요. 올해로 21회를 맞게 되는데, 이 캠페인을 계속해나가다 보면 언 젠가는 침묵이 사라지고 폭력이 사라지는 때가 올 거라고 믿습니다. 침묵 행진과 더불어 뉴욕가정상담소는 24시간 전화로 가정폭력과 관
련된 문제를 상담해 주는 ‘24시간 핫라인(Hotline)’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응급 상황에 대한 상담을 비롯해 차후 안전을 위한 상담, 보호 시 설(shelter) 안내 등을 제공하는 이 서비스는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일 48
차적으로 도움을 호소할 수 있는 창구이다. 이와 더불어 무료 개인 상 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는데, 가정폭력, 아동 학대, 성폭력, 학교폭력,
인신매매 등의 피해자는 물론,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과 같은 정신 질
환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전문적인 상담을 제공한다. 상담 시 절대 비
밀 보장 원칙을 준수하여 상담자가 심적인 부담 없이 피해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있도록 하며, 상담자에게 정서적 지원만이 아닌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말이 아닌 실천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
뉴욕가정상담소를 찾는 사람은 한 가지 문제가 아닌 다중적인 문제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 에 위로와 조언에 이은 실질적 지원이 절실하다. 이에 가정상담소는 다
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지원을 실천하고 있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과 아동을 위해 ‘무지개의 집(Rainbow House)’이라는
이름의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최대 6개월까지 숙식을 제공한다. 이후 에도, 필요에 따라,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장기주택프로그
램(Transitional Housing Program)’을 통해 아파트를 제공하고 최대
뉴욕가정상담소는 매년 상담소 기금 모금을 위한 연례 만찬을 개최하
정폭력, 성폭력, 학대 피해자에게는 무료 법률 서비스도 제공한다. 파
를 차지한다. 미국 주류 사회로부터의 후원이 거의 없는 까닭에 한인
18개월까지 렌트비 및 생활비를 보조해 준다. 법적 구제가 필요한 가 트너 변호사가 무료로 법적 절차를 대행해 주고 변호를 맡아 줌으로써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당하지 않고, 더 나아가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뉴욕가정상담소의 활동은 폭력 피해자 구제와 지원에
그치지 않고 한인 사회 취약자의 자립을 돕는 일과 취약 계층 아동 및
청소년 교육을 통해 한인 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는 일로 그 외연 을 넓혀가고 있다.
싱글맘을 포함한 취약 계층 여성이나 청소년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취업 상담 및 직업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요. 지역사회 내 기관, 단체와의 파트너쉽을 통해 영어, 컴퓨터, 재봉 등 실용적인 기술을 배 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죠. 아동 교육을 위해서는, ‘호돌이 방과후 학교’를 통해 학업을 지원하고 인성 교육을 하며, 청소년 리더쉽 교 육, 청소년 상담 및 치료, 멘토링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훈육과 체벌 역시 가정폭력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 에 부모와 자녀 간의 관 계 개선을 위한 부모 교 육 프로그램도 시행하고 있어요. 김봄시내 소장은 “저는 궁 극적으로 한인 사회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라고 말 하며 한인 모두가 건강하 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앞으
로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 적으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서는 돈이 필요하다.
뉴욕가정상담소가 ‘물 위’
에 있어야 하는 이유: 기금 모금
‘가정상담소’라고 하면 흔히 ‘언더(underground)’에서 은밀히 가정폭
력 피해자를 돕는 일만 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김 소장은 가정상담소는 ‘물 위’에 나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정상담소가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장소 측면 에서는 비밀리에 운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맞는데요. 활동은 최대한 많이 알려야 해요. 우선, 가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 화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홍보와 의식 교육이 필수예요. 침묵 행진 캠페인도 그 일환으로 보시면 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돈이에요. 도 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해 주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니까요. 정부지원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유관 단체의 지원금은 물론, 기업과 개인으로부터 후원금을 모으는 일이 매우 중 요한데, 그러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무슨 일을 하려 고 하는지를 끊임없이 알려야 해요. 물밑에만 있어서는 지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는데, 이 행사에서 모인 기금은 가정상담소 연간 운영비의 30% 정도
들의 후원이 절실하다. 오는 4월 27일에도 만찬이 예정되어 있으며, 김 소장은 “연간 2500명에 달하는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필요
한 지원을 무료로 제공할 수 있도록 많은 분이 참여하여 도움을 주셨 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런 기금 모금 노력의 결과, 뉴욕가정
상담소는 최근 뉴욕시로부터 5년에 걸쳐 200만 불의 지원을 받게 되었 다. 이 지원금은 더 많은 사람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기 위해 쉘터를 새 로 짓는 데 쓰일 것이라고 한다.
자원봉사의 최고 수혜자는 ‘나’ 자신
기금이 뉴욕가정상담소 운영을 위한 필요조건이긴 해도 충분조건은 아니다. 김봄시내 소장은 자원봉사자들이 상담소를 움직이는 원동력 이라고 말한다. 소수의 전문 스태프 멤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이 지지자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한다
고 누구나 수시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루는 사안이 민감하 고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의 전문적 주의를 요구하 다 보니 자원봉사 교육도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이
루어진다. 자원봉사 교육 에서는 가정폭력 및 성폭 력에 대한 기본 상식 및 방지책, 관련 법률, 그리
고 핫라인을 비롯한 가정 상담소 프로그램 내에서
의 업무 수행 방법을 지 원자들에게 상세하게 가
르친다. 이 교육을 수료 한 지원자만이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저도 2000년에 뉴욕가정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에 교육 을 받았는데 그 교육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그 후 실제로 일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고요. 핫라인 상담사로 일하기도 했고 법 원에서 피해자들의 통역을 맡기도 했는데, 이런 자원봉사는 누구보 다 본인한테 가장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돈과 지위를 얻는 일은 아 니지만,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주는 보람과 뿌듯함은 다른 일을 하면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봄시내 소장은 최근 한국의 ‘미투(#MeToo)’ 운동이 매우 반갑다며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여성들 사이에도 이 운동이 확산되었으면 좋겠
다고 했다. 미국 여성들과는 달리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는 한인 여성
이나 아시안 여성에게 미투 운동은 현실적으로 너무 큰 손해를 감수해 야 하는 일이라 아직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렇기에 김 소장은 더 열 심을 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인 여성, 나아가 한인 사회 일원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게 하기 위해 작으나마 자신의 힘을 보태고자 한다는 김 소장과 뉴욕가정상담소의 건투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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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시와 사진
Photography by Doyoung Kim 사진 김도영 서양화가, 사진작가 School of Visual Arts 졸업 한미 예술인협회 회원
아틀란타, 시카고, 뉴욕 한인신문 사진연재
한인 방송국 사진 강의 / 다수 그림전 &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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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보를 위하여 詩 - 김은자
이른 별들이 쓸쓸이 내륙에 걸터앉는 저녁 눈을 감는 노을빛 속으로 하루가 귀가한다 빌딩과 나무를 이어주는 저 하늘 길은 누구의 건너편일까? 교각이 있다는 말은 무지개가 존재하다는 말이다 외투 속에 무거운 목을 파묻은 도심의 사람들에게 다리는 안을 만질수 있는 유일한 밖이므로 나뭇잎처럼 메마른 당신 그 속으로 걸어들어갈수 있다
시 김은자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및 한국문학방 송 신춘문예당선.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윤동주해외동 포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 등을 수상. 시집으로는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비대칭으로 말하기> 등이 있으며 산문집 으로는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온다> 등이 있음. 현 붉은작업 실 문학교실 운영. 51
ART&CULTURE
100세를 맞아 상수(上壽)기념전을 여는
남사(藍史) 이준(李俊) 화백 빛과 함께, 빛을 엮는 색의 장인(匠人) 글 Sarah Chung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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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백(百)’이라는 숫자는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가 됨을 뜻한다. 태어난 아 이가 사람 꼴을 갖추었다 하여 축하하는 백일이 그러하고,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이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을 기다린 뒤 동물에서 완전한 인 간이 되는 것도 그러하다. 아마도 백이라는 숫자 속에는 꿈과 희망이 함께 내포되 어 있기에 완전함을 상징할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간 수명 100세’라는 문구가 그리 낯설지 않 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근대화 이전에는 60세를 넘어 산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 었기 때문에 육십갑자(六十甲子)가 되돌아온다는 뜻의 회갑(回甲)부터를 장수의 상징으로 여기고 축하의 의미로 잔치를 열기도 했지만, 이제는 60, 70대 나이에도 한창 일을 하고 80, 90대의 정정하신 어른들을 주변이나 여러 미디어 매체를 통해 서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100세라는 나이는 그야 말로 병 없이 하늘이 내려줘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가장 위에 존재하는 수명 – 따로 상수(上壽)라 일컫는다. 그렇게 한 세기인 100년을 산다는 것 자체 가 축복일진데, 거기에 더하여 평생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종사해왔던 일을 여전 히 건강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이 어찌 복 있는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제로 그런 경이로운 삶의 주인공인 남사(藍史) 이준(李俊) 화백을 모시고 팀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이준 화백은 1954년 36세의 젊은 나이 에 부교수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부임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30년 동안 후학 을 양성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100년의 시간 동안 찰나(刹那)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그는 오히려 그 시간을 더욱 꽉 채워 살 며 오늘도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는 예술가로서 본(本)을 보인다. 이준 화백이 얼 마나 존경받는 예술가이며, 한국 화단에 남긴 그의 업적과 공헌이 얼마나 묵직한 지는 그의 100세 상수기념전을 통해 여실히 보여진다. 이준 화백의 100세 상수기 념전은 ‘빛의 향연’이란 제목으로 2018년 2월 8일부터 5월 16일까지 경남도립미 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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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深海) 2008
1919년 生 – 3·1 독립운동의 해에 태어나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경남 남해에서 태어
난 이준 화백은 더함이나 뺌 없이 말 그대로 대한민국 현대
미술의 선구자이자 현대 미술사의 산증인이다. 1930년대 말
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쓰며 작 품 생활을 이어온 그는 표현의 자유, 상상의 자유, 재료의 개
방성, 감상의 자유라는 현대화의 4가지 요소를 언제나 ‘새로 움을 통한 창작’으로 구현해 내었다. 54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딱 90년 됐네요. 제 고향이 경상남도 남해입니다. 남해는 지금도 그렇지 만 참으로 아름다운 지역이에요. 지금이야 다리로 연결되어 있 지만, 예전에는 나룻배를 타야 육지와 왕래할 수 있는 오지였 어요.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또 유 배지로도 유명한 곳이었지요. 조선 시대 중종 때 귀양 온 김구 (金絿)가 경치에 반해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썼던 곳이 바로 남해인데, 그만큼 풍경이 예로부터 뛰어났어요. 그렇게 아름다 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것이 그림의 시작이었고,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재주가 있었는지 당시 일본 잡지 표지를 모사 한 것을 보신 아버지가 잘 그렸다 좋아하셨어요. 그리고는 당 신 마고자에 제 그림을 넣고 다니시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자 랑을 많이 하셨습니다. 미술 하는 사람을 환쟁이라 업신여기던 시절이었으나,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해 주셨던 덕분에 계속 미 술을 공부할 수 있었고 그게 평생의 직업이 되어 버렸어요.” 구상화를 주로 그리던 이준 화백은 1970년대 초부터 선과 면의 분할을 이용한 기하학적 추상화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또한,
골판지, 롤러, 종이테이프 등 많은 재료를 제한 없이 캔버스 위에 서 실험하며 순수 창작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석양(夕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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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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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남해(南海) – 빛과 색의 원천
바로크적 구상화에서 시작한 이준 화백은 작품을 통해 끊임없는 호기 심과 실험정신을 통해 창작을 갈망했고, 그렇게 자신을 자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추상화로 화풍이 옮겨 갔다. 그러나 그에게 구상과 비구상, 그리고 추상화로의 변화는 간단할 뿐이다.
“창작이 없는 예술가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남들 이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연구와 실험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화 풍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죠. 사람들은 내 화풍을 기하학적 추 상이니 뭐니 하는데, 그렇게 복잡한 게 아니에요. 그저 나만의 세계 를 추구하다 보니 추상에 도달한 것뿐이니까요. 어릴 적부터 고향 남해의 자연을 보고 자라며 시작한 그림이기 때문에 남해의 아름다 운 풍광과 색채는 제 눈을 통해 화폭에 담겨 있습니다. 구상화를 그 리든, 추상화를 그리든 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화폭에 담고 싶었 던 거예요. 결국, 나는 같은 것을 그렸던 것이고 지금도 같은 것을 그 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준 화백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술에 문외한이더라도 뛰어난
색채감과 ‘빛’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보통 비구상화나 추상화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복잡하며, 차갑고 거칠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준 화백의 추상 작품들은 오히려 따듯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매우 시적(詩的)이다.
이준(李俊) 화백 전시회를 찾은 고(故) 김환기(金煥基) 작가의 친필
“나에게 남해라는 곳은 빛의 고향이고, 색의 원천이며 영원한 노스 탤지어이자 영감의 근원이에요. 빛과 형체, 그리고 색채가 어우러진 자연을 보며 색을 통해 빛을 느끼고 싶었고, 빛을 통해 색을 표현하 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화풍과 상관없이 내 모든 작품 속에 녹아있 는 정신이에요. 둥그런 섬 남해, 그 앞바다엔 곡선이 있고 햇빛에 반 사된 빛을 버금은 자연이 있는 맑은 곳 – 그래서 남해는 영명하고 풍부한 색을 가진, 내게는 빛의 고향이에요.”
만추(晩秋)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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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는 이준(李俊) 화백
고(故) 김환기(金煥基)와의 인연
항상 남해를 그리워하며 남해에서 보던 빛과 색을 화폭에 담고 싶었던
이준 화백. 그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두 작가는 역시 색감의 천재였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고(故) 수화(樹話) 김환기(金煥
“많이 친했었어요 김환기 선생과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예 술과 인생을 바꾼 분이었어요. 아마도 가장 예술가적 기질을 가졌 던,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분이었을 겁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 았지만 김환기 선생과 나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그래서였을까 우리는 서로 각별했고 많은 정신적 교감을 나눴던 사이였지요.”
基) 작가라고 한다. 특히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초
실제로 김환기 작가는 피난 시절 태어난 이준 화백의 차녀 성원(聖媛)
쟁이 발발하고 난 뒤 이준 화백이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기 시작했던
별한 사이였다. 마음속에 품은 뜨거운 창작에 대한 욕구를 녹여내는
창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던 김환기 작가와의 인연은 1950년 6·25 전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 영도 남항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이준 화백의 집에서 김환기 작가와 그 가족이 1년을 같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피난 시절 처음 알게 되었지만 같은 집에서 동고동락하며 한국 현대미술계의 두 거장은 그렇게 매우 가깝고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58
과 차남 철조(喆朝)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을 만큼 그 둘은 정말 각
미학적(美學的) 표현 방법은 극히 달랐지만, 각각의 분야에서 서구의 모더니즘을 자기만의 화풍으로 한국화(韓國化)했던 두 미술계의 거
목들의 우정이 그렇게 서로를 감화시키며 한국의 미술사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자화상(自畵像) 1960
주요 약력 2009~2013 2005~2007 2003~2005 2004 2003~2007 1997 1988 1986 1986 1985 1983 1981 1980 1975~1981 1954~1984 1939~1942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제32대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제31대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서울세계박물관대회 자문위원 서울평화상 심사위원 세종문화상 심사위원장 (미술부문) 제24회 서울올림픽 세계현대미술제 운영위원장 한국미술협회 회장 및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아시아경기대회 전시분과위원회 위원장 및 총감독 서울시 미술대전 추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고문, 국전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장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태평양 미술학교 수학 59
만화(萬花)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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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 하늘이 준 직업을 수행했을 뿐
나의 자화상(自畵像)과 남은 소망
각 분야에서 30년 이상의 독보적인 활동을 펼치고 예술 발전에 현저
의 자화상을 그렸다. 바로 1960년작 <자화상>이다. 이준 화백의 자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의 자격은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무용 등 한 업적이 있는 예술가들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이다. 현재 최
고령 회원이자 예술원의 31대, 32대 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이준
화백의 이력은 굵직굵직한 것만 추려 쓰려 해도 한 장이 넘어간다. 1953년 휴전이 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34세의 나이에 같은 해 제2 회 국전에서 작품 <만추(晩秋)>로 대통령상을 받아 중앙 무대에 이름 을 알린다. 수백 점의 작품을 그린 이준 화백이지만 그래도 <만추>는 여전히 특별하다.
“<만추>는 왕이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기뻐 즐겼다는 창덕궁에 있는 희우루(喜雨樓)를 그린 것이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데 필요하다고 당시 문교부가 작품을 구매하여 경무대로 가지고 간 뒤 실제 작품의 소재는 알 길 이 없고, 지금은 흑백의 도 판으로만 남아 있지요. 재 미있는 것은 이 작품을 그 릴 당시 돈이 없어서 캔버 스를 살 수가 없었어요. 그 래서 종로구 수송동 골목에 가서 6.25 때 부서진 문짝을 샀어요. 문틀 위에 신문지를 겹겹이 바르고, 다시 한지를 겹겹이 바른 뒤 아연화를 발 라 캔버스의 느낌을 최대한 내고 <만추>를 완성했는데 유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우 연히 유난히도 투명한 색이 표현되었죠.”
많은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을 남기듯이 이준 화백도 자신
상은 피에로와 판박이다. 광대 같은 차림, 울긋불긋한 얼굴 화장 그리 고 빨간 코와 지친듯한 눈. 예술원 회장까지 역임한 미술계 최고의 원 로가 자신을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피에로를 볼 때마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현대인을 보는 것 같아요. 피에로는 극단에서 막간을 연결해 주는 익살꾼으 로, 때론 감정이입을 시키는 순정 캐릭터로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 는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애수를 표현하는 ‘인생’의 피에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걸 자화 상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지요.” 어찌 보면 해탈을 한듯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월 동안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이준 화백에게
풍유(風遊) 2006
취를 닮은 소망이 하나 있다.
“훗날 내가 가고 나서도 ‘늘 새로움을 추구했던 작가’라 고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 면 합니다. 그리고 남겨진 나 의 그림들이 그것을 보는 사 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치유 하는 따뜻한 약이 되었으면 해요. 인생의 희로애락(喜怒 哀樂)이 내 그림을 통해 다 독여졌으면 합니다.” 100년을 살아보니 확실한 자
신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실
이렇듯 무(無)에서 유(有)를
현하기 위해 어려움을 견뎌내
만들어 그 속에서 새로움을
는 끈기와 인내가 제일 중요하
발견하는 기쁨을 잠시라도 놓
더라는 이준 화백의 말은 정직
칠 수 없었던 이준 화백은 지 금도 하루에 서너 시간씩 작
그의 담백하고 한결같은 발자
하게 그의 생에 투영되어 있다.
품을 그린다. 그림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도, 입신양명의 욕심
올해 우리 나이로 딱 100세가 되는 이준 화백은 그의 인생이 살아볼 만 했
행하려는 시간이었을 뿐이라는 모든 것을 초월한 노장(老將)의 겸손함
내비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한 그는 그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
도 없는 그. 살아온 100년이 그저 묵묵히 하늘이 준 직업을 열심히 수 에 머리가 숙어진다.
“100년의 삶 중 근 80년 동안 창작 생활을 했는데 어렸을 때부터 화 가가 내 천직, 하늘이 내어 준 직업이라 여겼어요. 세상은 혼탁해졌 으나 영원한 평화를 누리면서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인류의 열망이 아니겠어요? 예술이 그런 아름다움을 영위할 수 있는 한 수 단이죠. 시, 음악, 미술 등이 그렇잖아요. 마치 의사가 몸의 건강을 위해 환부를 치료하듯이 정신의 황폐함을 치료하는 데에는 예술, 특 히 미술이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것이라 여기고 고 생스러운 것이 아닌 즐거운 일이라 여기고 작품활동을 해왔습니다. 내 그림이 남아서 복잡한 시대에 정신이 황폐해진 모든 사람에게 좋 은 양약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다고 함박웃음을 터뜨린다. 74년을 해로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을
이며 예술가로서 최고의 영예와 명예를 안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과욕을 버리고 다른 사람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장수의 비
결로 꼽는 이준 화백의 담담한 인생 고백이 요즈음 만들어진 천재들의 화
려한 자기선전 화집(畫集)이나 창작에 대한 큰 고민 없이 타인에게 보이 는 것만을 위한 미술전 카탈로그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큰 울림을 준다.
현재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는 이준 미술관 건립 사업이 진행 중이다. 그가 늘 그리워하며 구현하고자 했던 남해의 빛과 색이 보이는 곳 – 앞
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뒤로는 비자림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그곳에 이 준 화백의 100년 작품들이 정리되고 모이는 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 다. 이준 화백 생전에 개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지면에 함께 실어본다.
의 바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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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전문 음악인의 생활속 음악이야기
단돈 $25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즐기기 변덕스러운 뉴욕 날씨는 4월이라고 해도 계절을 믿기 어렵게 생뚱맞은 눈 폭풍을 몰고 와 만 개해야 할 꽃들을 얼게 만든다. 하지만 4월은 누가 뭐래도 봄이요. 본격적으로 야외 활동을 시 작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낮에는 가벼운 공원 산책도 좋고 봄바람을 핑계로 친구들과 잦은 만 남이 마냥 즐거운 봄의 계절 4월. 저녁 시간까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풍성한 레퍼토리 를 선보이는 클래식 음악회장으로 발길을 옮겨보는 건 어떨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작품은 한국 출신의 자랑스러운 성악가들이 꽤 많이 주역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평소 비싼 가격 때문 에 관람을 망설인 분을 위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을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는 방법을 소 개한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사는 이점이라면 세계 최정상의 오페라 가수 공연을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관람할 수 있다는 거다. 러시 티켓 등 정보를 잘 활용하시길 바란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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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은 1883년 창단되어 세계 최정상급의 오페라
만 살 수 있는 규정이 있으므로 매주 공연을 감상하려는 분들은 미리
터로 이전하여 연 200회가 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캐스팅과 연출, 작품
많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러쉬 티켓은 주중 공연 4시간 전부터 살
가수가 가장 공연하고 싶은 오페라단으로 성장하였고 1967년 링컨 센 성으로 관객을 실망하게 하지 않는 공연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공연 감상을 계획을 세워야 한다. 러쉬 티켓을 사면 저렴한 가격으로 수 있고 토요일 저녁 공연은 오후 2시부터 살 수 있다.
4월 5일에 선보이는 푸치니 작곡의 투란도트 주역은 1984년 매트에
https://www.metopera.org/Season/Tickets/Subscription/
으로 Liu(여자 노비역)로 캐스팅되어 리릭 소프라노의 진수를 보여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5%의 할인과 자유롭게 날짜를 선택하고
데뷔해서 30년이 넘도록 주역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프라노 홍혜경
예정이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플라시도 도밍고와 지휘봉 아래
로렌스 신부역을 연기하는 베이스 연광철 만날 수 있다. 이번 시즌에 주목할 점은 소프라노 캐슬린 김이 마스네의 오페라 상드리용에서 La Fee(요정) 역을 맡아 메트의 초연 캐스팅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또, 모차르트의 코지판 투테는 1950년대의 코니아일랜드의 카니발을
배경으로 현대적인 요소와 코믹요소를 가미해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색다르게 연출되어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비평을 기다리고 있다.
5편 이상의 오페라를 좋은 자리에서 감상할 계획이라면 Subscription 변경할 수 있어 보고 싶은 공연과 좌석을 미리 정할 수 있어 편리하다. https://www.audiencerewards.com/city/new-york-ny/
이 사이드를 이용해 티켓을 사면 point를 적립할 수 있다. 오페라 티켓
은 $54부터 시작되고 오페라뿐만 아니라 브로드웨이 뮤지컬등 다양한 티켓을 판매한다. 적립금은 상품 구매나, 식사, 티켓구매 등으로 쓸 수 있다
https://www.metopera.org/Season/Tickets/Rush-Page/ 러쉬 티켓 25달러
25달러에 제공되는 러쉬 티켓은 공연 당일 메트 웹사이트에서만 살 수
있다. 선착순으로 좋은 자리를 앉을 수 있으므로 러쉬 티켓을 산 분들 은 공연장으로 서둘러 가실 것을 권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2장의 티켓
글 정선분_바이올리니스트
매네스(Mannes) 음대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NY Classical Youth Orchestra 디렉터 클로스터 Sun Violin Studio 원장 63
ART&CULTURE
느리지만 따듯했던 서정시대
Analog Music의 마지막 뮤지션
최준성 64
Photography by Kibum Kim
지난해 여름 구글 인공지능 ‘마젠타’가 작곡한 음 원이 온라인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AI 알고리 즘이 예술창작까지 넘보는 테크놀로지의 무한질 주에 세상은 흥건히 고무되어 있지만, 휴머니티 (Humanity)가 결여된 인공예술의 등장에 표정이 어두워진 한 사람이 있다. 24채널 멀티트렉 믹서에 직접 연주하고 믹싱하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날음 악을 만들던 서정시대가 짠하게 그리운 사람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에서 연주자로, 편곡자와 세 션맨으로 느리지만 따듯한 시대를 살았던 아날로 그 음악의 마지막 뮤지션 최준성씨가 바로 그다. 글 Young Choi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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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공간은 가히 창작의 발원지라 할만했
다. 출입문을 열자 나무캐비넷 위에 팬케익 터너 (Pancake Turners)라 불리던 RCA victor턴테이
블이 있고, 그 위로 LP음반 한장이 천천히 돌고 있다. 전기는 고사하고 태엽을 감아 돌리는 턴테
이블 위에서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크루닝(crooning)창법이 흘러나온다. LP음반의 독특한 스크래치 소리가 가슴 저변에 가라앉은 오랜 기억들을 가만히 두드린다. 벽면엔 짤막한
낙서 한줄, ‘Life has surface noise’ 영국의 유명
한 라디오 PD 이자 저널리스트인 John Peel의 말이란다.
키보드, 믹서, 스피커, 베이스기타, 색소폰 그리
고 드럼스틱 한세트… 공간을 빼곡 메운 악기와
장비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일론 클래식기타를 가슴에 안고 최준성씨가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음악과의 조우를 묻자 한참을 생각한다.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전축을 사주셨어요. Kenwood라는 외국브랜드의 고급전축이었는 데, 클래식 음반도 몇장 있었고. 차이코프스키, 모짜르트, 그리고 여러 명곡들을 엮어 만든 앨 범 이었는데 그 중 세번째 앨범 속에 있던 베토 벤의 월광소나타를 듣고 엄청 큰 감명을 받았 어요. 그때부터 LP를 사모으며 음악감상에 심 취했어요. 그러다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이 ‘듣 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해보자.’ 이미 곡 은 충분히 들어 잘 알고 있으니까 악보만 읽어 내면 되겠다 싶었죠. 월광소나타 악보를 입수 해서 한참을 들여다 봤어요. 한번도 피아노를 배워본 적이 없는 내가 이거 혼자 할 수 있을까 싶더라구요. 한시간 걸려 한마디를 치고 한달 이 걸려서야 악장 전체 reading을 끝냈어요. 그 런데 신기한 것은 악보읽기가 끝남과 동시에 모든 노트들을 다 암기하게 되더라는 것. 그렇 게 피아노를 익히면서 음악과의 인연을 맺었 죠.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익힌 소나타들, 쇼팽 의 발라드 등은 지금도 다 암기하고 있어요.”
Photography by Kibum Kim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혀 쇼팽을 연주하고 기타(Guitar)를 잠난감 삼
함께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하고 본격적인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 고, 저는 당시 대학생밴드로 조명을 받던 ‘다섯손가락’이라는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다 주법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우연한 일처럼 이야기하고,
한세월을 풍미한 노래들이 있다. 386세대들에게 비오는 수요일을 그
고 그는 편곡가들이 원래 다 그렇다며 손사래를 친다.
다. 당시 대학생이라는 풋풋함을 컨셉으로 결성된 다섯손가락의 타이
나는 그것이 흔히 말하는 예술가의 태생적 재능이 아니겠느냐 반문했
“형, 누나가 쓰던 피아노와 기타가 결국엔 다 내 차지가 됐는데 뭐랄 까, 장난감 같았어요 악기들이.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에 심 취해 지내다가 서강대에 진학을 하고 학내 그룹사운드 킨젝스에서 건반(keyboardist)을 맡게 되었어요. 거기서 한해 선배였던 드러머 (Drummer)’ 전태관형을 만나 이듬해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면서 대 중음악에 첫 발을 들여놓았죠. 나중에 태관이형은 친구 김종진씨와 66
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들었던 곡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그 중 하나 틀 곡이었고, 최준성씨는 그룹에서 베이시스트(Bassist)로 활동했다.
“당시 서울음반에서 대학생그룹이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상품화해 밴드를 결성하고 앨범을 발표했는데, 앨범 발표 후 제대로 된 활동 도 없이 팀이 해체가 되버렸어요. 그런데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 라는 노래가 기대치않게 대박이 나자 기획사에선 멤버를 충원해서 다시 팀을 꾸리게 되는데, 기획사 메니저와 보컬이었던 두헌이, 형
순이가 저를 찾아와 팀에 합류해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때 베이스 (Bass)기타로 조인하게 됐죠. 예상밖으로 앨범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바람에 쇄도하는 방송스케쥴, 공연스케쥴에 떠밀려 학교 출석 이 어려웠을 정도였어요. 한학기를 수업과 활동을 병행하다 어쩔 수 없이 휴학계를 내고 몇개월 정신없이 일하며 세간에 이름을 알 리기 시작했는데, 그즈음 입영통지서가 날아와서 저는 군입대를 해 야했었죠.” 한창 주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팀을 떠나게 된 것이 내심 억울했겠
다는 질문에 그는 자신을 Optimist라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군입대 라는 위기를 모든 관악기들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로 전환시키고 27개 월 동안 연주의 폭을 넓혔다.
“군악대에서는 드럼(Drum)을 쳤어요. 원래 군악대는 브라스(Brass) 밴드가 기본이거든. 그래서 관악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죠. 아마 군 대에서 거의 모든 관악기를 다 공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에 요.군대를 제대하자 태관이형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조용필과 위대 한 탄생에 세컨키보드(Second Keyboard)로 조인하지 않겠냐는 제 안이었죠. 아시다시피 조용필씨는 그 당시 한국 최고의 가수였고,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된다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는 무한히 영광스 러운 일이었기에 망설임없이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그 팀에 합류했 더니 대한민국 최고의 팝 피아니스트 이호준선배, 전설적인 드러머
김희연형님, 또 베이스의 신이라고 불리는 송홍섭형, 현재 서울예대 교수로 계시는 재즈피아니스트 정원영형까지 정말 전설적인 분들 이 계시더군요. 그 대가들과 함께 저도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 버가 되어 일본의 동경, 오사카, 나고야, 교토 4개도시 투어공연을 떠났어요. 돌이켜보면 저를 크게 성장시켜준 시간이었고 최고의 연 주여행이었어요.” 일본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뮤지션으로써 평생 잊을 수 없
는 역사적인 공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88년 서울 프레올림픽 쇼에서의 연주. 그때의 감격을 그는 그의 음악 인생의 하이포인트였다 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일본공연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한국은 88서울올림픽 때문에 나라 가 온통 축제분위기였어요.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그해 5월 잠실 주경기장에서 서울 프레올림픽쇼(Seoul Pre-Olympic Show) 를 하게되었는데, 한국가수로는 유일하게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팀 이 참여했거든요. 글로리아 에스테판, 홀리오 이글리시아스, 영화배 우 부룩쉴즈, 밥호프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내한해서 함께 공연하는 무대였어요. 사실 저는 연주를 할 때 별로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 그 날은 무척 떨리더라구요. 아마도 잠실 주경기장에 운집한 13만 관중 의 함성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마치 제트기가 바로 옆에서 날아오 르는 듯 스테이디움을 완전히 압도하는 그런 소리였어요. 그 함성을 가르며 공연 첫 순서로 조용필씨가 ‘서울, 서울, 서울’이라는 곡을 불 렀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날의 전율이 다시 느껴지는데요, 그때가 제 음악인생의 하이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67
공연, 방송 그리고 녹음 스케
졸업생 상위 5%가 받는다
작업실에서 쪽잠을 자야 할
Cum Laude)로 버클리를 3
쥴이 이어지면서 여러날씩
는 숨마쿰라우데(Summa
만큼 바쁜 날들을 보내야했
년만에 졸업하고 한국으로
던 그는 직업적인 음악인이
돌아가는 대신 미국의 L레코
아니라 아티스트로써의 음
딩회사의 뮤직디렉터로 자
악에 대한 갈증이 이따금씩 그를 괴롭혔다고 말한다.
“뭔지 모르지만 늘 갈등이 있었어요. 이듬해 위대한 탄생 팀을 나와 새로운 음 악을 해보고 싶어서 젊은 뮤지션들과 함께 평균율, 이색지대 등 그룹활동과 함 께 젊음의 행진, 여의도 공 개홀 같은 당시 가장 줏가 를 올리던 방송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정말 바쁘게 살 았어요. 또 그 즈음 신서사 이즈(Synthesizer)와 컴퓨터 와의 접목이 처음 시도되던 때라 스튜디오에서 편곡과 세션으로 한달씩 집에도 못 들어갈 정도 로 바쁜 스케쥴이 이어졌죠. 하루는 KBS행사장에서 방송 녹화를 하 고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음악이 좋아서 뮤지션이 됐 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방송국으로 출근하고 공연장을 거쳐 녹음 실로 퇴근하는 샐러리맨 같다는 생각. 좀 우울해지더라구요. 내가 하고싶은 음악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혼란스러워서 그냥 다 손놓고 미국으로 왔어요. 제가 좀 즉흥적인 면이 없지않은데, 주변에서는 이 많은 일들을 다 놔두고 어딜가느냐 만류하는 분들도 많았지만 보 스톤으로 날아와서야 겨우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 버클리(Berklee School of Music)유학 시절 이명세 감독의 영화음 악 제작을 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간 그는 삼성 DMR 뮤직스튜디 오에서 3개월을 꼬박 영화음악 작업에 매달렸다.
“제가 버클리에 입학했을 당시 한국 유학생은 겨우 열명남짓했어 요. 한국 재즈계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김광민씨, 한상원씨 그리고 정 원형씨가 함께 재학 중이었고 한국에는 재즈음악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거든요. 버클리에 입학한 후 그간 산만하게 알고있던 음 악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재즈라는 새로운 분야에 대한 경이로움에 완전히 빠져있었어요. 그야말로 세계적인 대가들 틈에 서 음악을 배운다는 것, 학교가 주는 예술적 무드가 너무 좋았어요. 3학년이 시작될 무렵 영화감독 이명세씨로부터 영화음악 제의를 받 고 잠시 한국에 들어갔죠. 이명세감독님이 뭐랄까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마인드를 갖고 계신 분이잖아요. 영화 ‘남자는 괴로워’를 제 작하시면서 모든 음악을 재즈로만 만들어줄 것을 부탁하시더라구 요. 당시 한국에는 재즈라는 쟝르가 무척 생경했을텐데 말이죠. 재 즈의 거의 모든 쟝르를 영화에 다 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 히 작업했죠. 비록 흥행은 저조했지만 저로써는 무척 만족스러웠던 작업이었어요.” 68
리를 잡는다.
“영화음악때문에 한국에 체류할 때 당시 서울예전 (현, 서울예술대학)으로부 터 티칭제안을 받았어요. 당시 한국엔 재즈를 가르 칠만한 사람이 거의 없던 터라 그랬나봐요. 그대로 한국에 놀러앉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학교를 마치 고 싶어 고사했어요. 그런 데 마침 졸업과 동시에 한 인이 운영하던 비교적 규 모가 컸던 L레코딩회사에 취업을 하게되었죠. 당시 한국에 있는 가수들이 실력이 출중한 외국연주자들과 함께 앨범 을 만들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례가 잦았는데 제가 그 앨 범들을 맡아 편곡을 하고 여기 뮤지션들과 함께 녹음을 진행하는 일을 맡았거든요.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일이 점점 바빠져가던 즈 음 갑자기 한국에서 IMF가 터졌죠. 계약이 하나씩 취소가 되면서 스튜디오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어요. 한국으로 돌아가 학교에 들어가야 할지 진로를 놓고 고민을 했는데 주변을 돌아보니 제가 혼자가 아니더라구요. 마침 제 아이들이 취학할 나이가 되었고 그 아이들에게 미국교육의 혜택을 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가 한국에서는 아무리 프로패셔널한 뮤지션이었다 해도 미국에 서는 마이너리티잖아요. 그 당시로는 음악활동만으로 생활하기 가 녹록치 않았어요. 그래서 갈등 끝에 컴퓨터 프로그램과 어카운 팅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느덧 경력 17년 차 회계사 로 살고있어요.” 클래식과 대중음악 그리고 재즈를 공부했지만 그에게는 음악적 호불 호가 없다.
“음악이야기라면 삼일 밤낮을 해도 모자라죠. 사실 그동안 여러 가 지 음악을 골고루 접해본 셈인데요, 클래식은 언제들어도 품격이 있어 좋고, 스탠다드 재즈와 불루스는 형식이 분명하고 귀에 친숙 해서 고전음악처럼 편안하죠. 물론 쉔베르그의 무조주의나 12음 계와 같은 현대음악이나 마일스 데이비스의 프리재즈는 난해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팝을 비롯해 알앤비,보사 노바, 가스펠, 재즈 등 사실 모든 쟝르의 모든 음악들이 다 좋습니 다. 비록 힙합이나 랩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독특함이 있어서 재 밌고요. 특정 쟝르가 좋다기 보다 제게는 그저 좋은 음악과 더 좋은 음악이 있을 뿐이죠.”
연주자로, 편곡자로, 또 세션맨으로 그가 종횡무진하던 화려한 무대는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지만 그는 한시도 음악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맑다. 아날로그로 출발해 디지털 세대까지 잇닿아 있는 아티스트로써 요즘 젊은 뮤지션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묻자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 어봤다’ 억지쓰고 싶지 않다며 조심스러워한다.
“사실 디지털시대가 시작되면서 뮤직 스튜디오를 떠난 엔지니어들 이 많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의연한 결단이 아닐 수 없죠. 디지 털은 정보를 보관하기에 최적화된 장점이 있지만 예술성이 사라졌 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으니까. 휴머니티가 사라진 음악은 과연 누굴 위한 예술일까요? 그리고 요즘은 실력있는 젊은 뮤지션들이 너무 많아요. YouTube같은 정보를 통해 프로들의 연주를 보며 기교 나 스킬을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으니 다들 엄청난 실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연주를 해보면 서로 잘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스킬은 뛰어난데, 깊이가 없다’ 이렇게 단순하게 평할 문제는 아니고, 뭐랄까 음악을 숙성시키는 과정이 생략되지 않았나 싶거든요. 이 나이가 되고보니 젊어서는 몰랐던 ‘음악의 넓이와 깊이’가 보인다고 할까요? 마치 시 간이라는 긴 터널 끝에서 만나는 빛 같은거죠. 이런말 하면 시대에 뒤쳐지는 꼰대 소리나 듣겠죠? ”
“이미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아날로그의 반격은 시작되었다고 생각 해요. 실리콘벨리에서는 낮에는 코딩을 하지만 밤에는 함께 모여 수 제맥주를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 할 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더욱 강해질테니까. 나이탓이기도 하 겠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덧칠이 없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음악을 하고 싶어요.어쿠스틱하고 맑은 음악. 너무 깔끔하고 완벽해 서 끌림없는 음악이 아니라 굳이 멋부려서 이야기 하자면 불완전함 의 아름다움이 담긴 뭐 그런 음악, 누가 들어도 저거 최준성음악이 지 할만한 음악 해보고싶어요.” 인생에 더러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자신이 뮤지션으로 살았다 는 사실만큼은 결코 후회스럽지 않다는 최준성씨. 지나온 시대의 가
치있는 것들을 꼭 부여잡고 싶다는 그는 요즘도 일년에 몇차례 버
클리(Berklee) 후배들과 가스펠 투어를 하고 틈틈히 로컬콘서트에 도 참여하며 음악적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아날로그의 따스함과 휴 머니티의 회복’은 테크놀로지의 변방에서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들에게 던지는 그의 소박한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가 끝나자 안고 있던 클래식 기타를 고쳐잡고 그가 천천히 플러킹 (Plucking)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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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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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l a wound
빛, 종이의 상처를 치유하다
미니멀회화 작가 김완 칼로 자른 종이들의 단면에서 애절한 애절함을 느끼고, 그 단면이 상처라고 말 하는 김완 작가는 그 상처를 더 드러내고 만지며 치유하여 아름답게 승화시킨 다. 그는 평면성을 띄는 나약한 선을 강하고 입체적인 선으로 변화시켜 미니멀 회화의 평면성을 극복했다. 그리고 그 강한 단면에 빛과 공간을 그려 넣어 미 니멀회화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선보인다.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베이징 상상국제미술관의 기획전, 신세계갤러리 본 점의 기획전에 참여했고 미국 뉴욕 첼시 에이블파인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 을 열어 호평을 받는 등 요즘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김완 작가. 그만의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종이의 상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글 손시현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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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예술로 풀어내는 작가 김 완
사진 속에서 만나던 작가의 작품은 실제로 보면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될 만큼 입체적이다. 작업과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즉 종이를 자른
후 붙여 종이의 단면이 쌓인 부분에 채색한다. 종이 한 장의 단면은 연 약하다. 그러나 수많은 단면이 모이면 더 단단해진다. 이렇게 단단해진
종이의 단면 위에 그림을 그려서 입체감을 더해준다. 작가는 칼로 자 른 이 종이의 단면이 ‘종이가 드러낸 상처’라고 생각을 한다. 누구나 내
면의 상처가 있다. 상처를 아픔으로 간직하면 상처로 끝나지만, 작가의
상처는 작품으로 승화되어 보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상처에 대한 위 로를 주기도 한다.
자연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며 빛을 그리는 작가 김 완
“제 작품은 언듯 평면 추상 같아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런
방식으로 하늘도 그리고 바다도 그리죠. 제 작품 중에는 감옥 속에서 바라보는 하늘, 창밖 등 ‘희망’과 ‘빛’에 대한 시리즈가 있어요. 그리고
거의 제 작품의 모든 제목에는 ‘만지다’가 들어있습니다. 만진다는 것 은 ‘살아있다’ 혹은 ‘살고 있다’라는 뜻이죠. 그리고 빛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워한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상처뿐만 아니라 빛 등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72
베토벤의 삶과 음악에 대한 명언
루트비히 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 고귀함이야말로 왕을 만드는 것이다. 난 심지어 가난할 때도 왕으로 살았다. Even in poverty I lived like a king for I tell you that nobility is the thing that makes a king 사람은 모두 실수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실수를 한다. We all make mistakes, but everyone makes different mistakes.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 Only the pure in heart can make a good soup. 운명은 사람에게 인내할 용기를 주었다. Fate gave to man the courage of endurance. 비밀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숨겨야 한다.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Hide your secret even from the closest friend; learn to be silent. 악보를 틀리게 연주하는 것은 넘어갈 수 있다. 열정 없이 연주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To play a wrong note is insignificant; to play without passion is inexcusable! 음악은 모든 지혜와 철학보다 더 높은 계시다. 음악은 영혼이 살고, 생각하고, 창조하는 전기적 토양이니까. Music is a higher revelation than all wisdom and philosophy. Music is the electrical soil in which the spirit lives, thinks and invents. 음악은 영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중재자다. Music is the mediator between the spiritual and the sensual life. 음악은 인류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상위의 지식세계로 들어가는 무형의 문이다. Music is the one incorporeal entrance into the higher world of knowledge which comprehends mankind but which mankind cannot comprehend. 내 가슴과 영혼에 있는 것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음악의 이유다. What I have in my heart and soul -must find a way out. That's the reason for music. 73
ART&CULTURE
영화 심리 이야기
우편배달부 (Il Postino; The Pos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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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졌어요. 너무 아파요. 하지만 낫고 싶지 않아요.”
영화의 줄거리는?
다. 어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던 마리오는 영적인 부모와 같은
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마리오 역을 맡은 배우 마시모 트
을 얻습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원작으로 로이시는 영화를 찍기 전 이미 심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시한
존재 네루다를 통해서 영감을 얻고, 시인이 되고, 사랑하는 가족
부 인생을 살면서 영혼의 힘을 다해 영화를 완성한 마시모는 영
메타포 (은유 metaphor)의 삶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운 영화, 우편배달부는 일상의 삶을
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감상해보게.” 시를 가르쳐달라고
화 촬영이 종료된 12시 간 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잔잔한 영감을 제공합니다.
‘일 포스티노(Il Postino)’는 이탈리아어로서 그 뜻은 영어로 ‘The Postman’, 우리말로는 ‘우편배달부’에 해당합니다. 칠레의 위대
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탈리아의 어촌 마 을로 망명을 옵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백수 마리오는 우연히 우
편배달부 구인광고를 보게 되지요. 우체국에서는 네루다의 팬들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묻습니다. 어떻게 시인이 되었냐고. “해변
했더니 해변을 걸으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멋진 주변 환
경 속에 살았지만,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는 마리오, 그래도 일단 해변을 걸어봅니다. 그리고 시인의 시를 되됩니다. 대 시인에게
메타포를 확인하려 하지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것 같은 마리 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의 뜻을 시인에게 묻지만 여간 해선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이 보내오는 우편물을 배달할 직원을 모집하고 있었습니다. 우
하루는 해변에서 수영하려는 시인이 순간 떠오른 심상을 시로써
여성이라는 사실에 자신도 시를 쓰면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게
하는 것 같아요. 바다 위의 배가 단어들로 이리저리 튕기는 느낌
편배달부가 된 마리오는 시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전부 될까 봐 시인을 귀찮게 합니다. 마리오는 마을 주점에서 일하던
베아트리체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수한 시골 청년과 위대한 시인과의 만남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마리오에게 들여줍니다. 시인에게 마리오는 “단어가 왔다 갔다 이에요.” 라고 자신의 생각을 즉흥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시인은
마리오에게 “방금 자네가 한 말이 뭔지 아나? 그게 은유야.” 메 타포를 깨달은 마리오, 그렇게 마리오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시인과 가난한 우편 배달부와의 만남
우리 삶은 수많은 메타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리오는 그걸 알
게 위대한 시인 네루다는 우상입니다. 시를 잘 쓰는 것도, 수많
니었다면 불가능했던 대 시인 네루다를 만난 것은 마리오게 기
직업도 미래의 꿈도 없이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아가던 마리오에 은 여자들에게서 편지를 받는 것도, 촌뜨기 마리오에게는 시인
의 모든 것이 경외로운 일이었지요. 사실, 마리오는 시인이 되려
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바로 마을 주점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베아트리체 밖에 없었습니다. 시를 배워서
짝사랑하던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아채고 살아가도록 깨닫게 해 준 사람을 만났습니다. 망명이 아
적 같은 일이었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인생은 네루다 같은 존
재를 우연히 만나고, 영감을 받고, 사랑을 찾고, 성장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일련의 메타포가 아닐까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두 사람의 만남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쳐 주는 스승을 넘어 인간의 우정, 사랑, 삶의 의미를 가르쳐줍니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게 묘한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시를 가르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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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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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페어를 가다. 글 · 사진 최승환 정리
편집부
국내 최대 전시 컨벤션 센터인 코엑스 전시회가 바뀌고 있다. 최근엔
특별히 이번 전시회는 유럽 등지에서 감각과 경험을 쌓은 젊은 디자이
분야의 개인 대상 전시가 특히 많아졌다. 올해 24회째를 맞이하는 서
정교한 우수제품이 많이 선보였다. 또한, 한국 특유의 강점인 소량 다
기업 상대 전시를 벗어나 미시 주부층의 관심을 끄는 리빙, 카페, 데코 울 리빙 디자인 페어는 30여만 명의 관객이 다녀감으로 국내 최대의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24회를 맞이한 서울리빙디자인페어는 “따로 또 같이, 생활을 잇 다! 커넥티드 홈 Connected Home”을 주제로 3월 7일부터 5일간 개
최되었다. 전시회는 최신 인테리어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리
빙 트렌드 섹션과 ▲리빙 아트 섹션 ▲디자이너스 초이스 섹션 등 크 게 3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빙페어에 관객이 몰리는 이유는 각자의 개성으로 꾸미고 싶은 아이 디어를 페어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장식과 소 품, 가구 등 다양한 제품들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 문이다. 76
너의 3D프린터나 레이저 커터기 등의 자동화기기를 활용한 섬세하고
품종 생산이나 스피디한 신제품 개발이 많아서 리빙 페어의 인기는 더 해가고 있다.
라미나 테이블
Cat Tower
벨레(welle)의 스피커 테이블 ‘멜로우’
추억의 태극당
사랑이 담긴 마음에서 시작된 꼬꼬노리
구리 쿡웨어 KUPER
친환경 액상 실리콘 주방용품 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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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루미늄을 소재로 만든 몬스트럭쳐
모던하고 세련된 감성의 방짜유기 놋담 NOTDAM(놋그릇 담다)
콩왁스로 만든 친환경 크레용 GOOBER
한국 도자기 리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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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천연 미네랄 염색을 한 살아있는 이끼식물 풀씨공방 스칸디아모스액자
저렴한 가격대가 장점인 엘포레 반려동물 디자인 스튜디오 하울팟
일본의 전통디자인 SORI YAN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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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그대에게 – 낭만과 지성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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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 HOT PLACE
별마당 도서관 책이 많은 곳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공연장보다 훨씬 높고 탁 트인 공간에 수 만권의 책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삼성역을 나와 코엑스 전시장을 가는 중간 위치에 있는 별마당도서관 은 지하 1층과 지상을 탁트인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 점 같은데 판매는 안 하고, 도서관이라 하기엔 처음 보는 기능성 공간. 책과 함께 쇼핑을 즐길 수 있 는 문화 감성 공간으로 꾸몄다. 글 · 사진 최승환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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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별)을 무료(마당)로 펼친다 하여 ‘별마당 도서관'
총 5만여권의 장서가 신비롭고 은은한 조명으로 둘 러싸인 곳. 그런데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
저 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낭만적인
장소. 삼성동 스타필드 코엑스몰에 위치한 별마당 도서관은 그런 감성 문화 예술 공간이다.
시 낭송회, 명사 초청 강연회, 북콘서트, 클래식 연주 회 등 다채로운 문화 행사도 펼쳐지고 있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10시이며 연 중 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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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묵은 때 벗기기
봄맞이 집 안 청소 Tips!
냄새나는 신발장 청소
신발장은 습기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난다. 습기와 냄새를 동시에 잡으려 면 커피 내린 뒤 남은 가루를 신발장 안에 넣어두면 간단히 해결된다. 매트리스 살균
보드카는 냄새의 원인인 박테리아 살균 효과가 크다. 분무기를 사용해 매트리스 위에 얇게 보드카를 뿌린 뒤 증발할 때까지 말리면 된다. 카펫 관리 요령
평소 천연 세제로 자주 닦아주면 굳이 세탁업체에 맡기지 않아도 된다.
방법은 베이킹소다를 넓게 펴서 뿌린 뒤, 가볍게 문질러 주고 반나절 정
도 내버려 둔 후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면 끝! 미세 먼지와 냄새를 제거 할 수 있고 위생에도 좋다. 변기 찌든 때
변기 안쪽 때가 찌든 곳에 마시고 남은 콜라를 붓고 3시간 뒤에 물을 내 려주면 묵은 때가 씻겨 내려간다. 그래도 안 빠지면 세정제 한 알을 밤 새 변기 속에 넣어 두고 아침에 일어나 물을 내려 주면 쉽게 해결된다. 스탠드 갓등에 앉은 묵은 먼지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도 먼지가 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먼지와 묵은
때를 쉽게 벗기는 방법은 먼저 갓등 위에 휴지를 덮고 세제를 분무기에 넣어서 뿌린다. 휴지에 먼지가 흡수되면 휴지까지 그대로 닦아내면 먼 지가 날리지 않는다. 물때 낀 수도꼭지
욕실이나 세면대, 부엌 싱크대에 때가 찌든 수도꼭지는 레몬껍질을 잘
라 닦아주면 반짝반짝 빛이 살아난다. 그래도 안 닦아지면 치약을 같이 발라서 닦으면 쉽게 제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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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뉴욕을 즐기는 숨겨진 공식
도시 정원에서 즐기는 뉴욕의 맛 뉴욕의 맛을 즐기는 숨겨진 공식이 있다면 과연 믿을까?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맨해튼 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디너도 물론 좋지만, 밤의 뉴욕 그 반대편에는 더 찬란한 뉴욕의 낮이 기다리고 있다. 뉴욕의 도시 정원에서 즐기는 브런치가 바로 그것이다. 여 행에서만 즐길 수 있는 소탈한 한 끼는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의 발걸음까지 가볍 게 한다. 도시의 산미를 중화시키는 공원의 푸르름 속에서 진짜 뉴욕의 맛을 즐겨보자. 글 · 정리 84
편집부
Shake Shack(MADISON SQUARE PARK)
The Halal Guys(Central Park)
크쉐이크, ‘쉑(shack)’은 판잣집을 뜻한다. 2004년에 문을 연 쉐이크쉑
어도 맛있게 느껴질 테지만, 꼭 추천하는 음식이 있다. 바로 특유의 향
미 동부를 대표하는 햄버거 전문점 ‘쉐이크쉑’에서 ‘쉐이크(shake)’는 밀 1호점은 실제로 조그마한 간이 건물로 지어져 있다. 그것도 공원 한중간
에 말이다.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 길게 늘어선 인파 행렬이 쉐이크쉑 버 거의 인기를 실감케 하지만, 다행히도 이곳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이므로
로테이션이 빠르다. 쉐이크쉑 버거는 그 이름처럼 쉐이크와 함께 먹을 때 더 맛있다. 쉐이크와 햄버거를 트레이에 담아 공원 안 마음에 드는 벤 치에 앉아보자. 달콤한 쉐이크와 두툼한 패티의 맛은 도심 속 공원이라 는 장소를 만나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또한, 공원 곳곳에서 소규모 음악 공연을 하는 버스커들이 있어 눈과 귀까지 즐거운 야외 식사가 된다. 식
사를 마친 후에는 공원 옆에 있는 다리미를 닮은 ‘플렛아이언 빌딩’을 둘 러보는 것도 잊지 말자. 만약 매디슨 스퀘어 파크에서 쉐이크쉑 버거를 맛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뉴욕 곳곳에는 이미 많 은 체인점이 있어 어렵지 않게 쉐이크쉑을 또 만날 수 있다. Shake Shack, Madison Ave & E 23rd St, New York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공원 뉴욕 센트럴 파크. 이곳에서는 무엇을 먹 신료가 감칠맛을 더하는 할랄푸드다. 뉴욕의 현대 미술관(MoMA)이 있 는 W 53rd Street. 그곳에 가면 한눈에 노란색의 할랄 가이즈 푸드 트 럭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푸드 트럭이 아닌, 여러 개의 푸드 트럭이 할
랄 가이즈의 마크를 달고 서 있어 어느 곳이 ‘원조’ 인지 헷갈릴 수 있
지만 모두 같은 체인점이니 안심하고 주문하자. 커다란 은박 접시 위에 밥과 채소 그리고 불맛을 입은 닭고기와 양고기가 소스와 함께 제공된
다. 포장한 할랄 푸드를 들고 10분 정도를 걸으면 4개의 애비뉴와 50 개의 스트리트를 차지하는 방대한 크기의 공원, 뉴욕의 심장 센트럴 파
크가 나타난다. 공원 중심부의 쉽 메도(The Sheep Meadow)에 도착 하면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할랄푸드를 신나게 오픈해보자. 빌딩 숲속, 드넓은 잔디광장에 앉아서 먹는 길거리 음식이야말로 진짜 뉴욕의 맛 이 아닐까. The Halal Guys, West 53rd Street, New York
Magnolia Bakery(Washington Square Park)
The Lobster Place(High Line Park)
체인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뉴욕의 대표 베이커리다. 1호점은 그리
는 이유 중 하나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가격은 한 마리당 약 $31. 한
매그놀리아 베이커리는 쉐이크쉑 버거와 마찬가지로 이미 한국에도
니치 빌리지 서쪽에 위치한다. 인기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 등장해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구에 들어
서면 캐리와 미란다가 이곳의 컵케이크를 먹는 사진을 볼 수 있다. 시
그니처 메뉴 ‘바나나 푸딩’과 예쁜 컵케이크를 사 들고 보도로 10분 거
리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로 향하자. 이 공원은 브루클린 브릿지 파크나 센트럴 파크처럼 크지는 않지만, 뉴욕 내 1,700개 공원 중 가장 잘 알려진 시민 공원이다. 특히,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공원 입구에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 100주년을 기
념하는 워싱턴 스퀘어 아치가 있다. 이 아름다운 아치와 공원 내부의 대형 분수대는 그리니치 빌리지 특유의 보헤미안 스러운 분위기를 한
껏 고조시킨다. 분수대 옆에 앉아, 달콤한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면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까지 맛볼 수 있다. Magnolia Bakery, 401 Bleecker St, New York
싱싱한 바닷가재를 맛볼 수 있는 랍스터 플레이스는 첼시 마켓을 찾 화 약 33,000원에 랍스터 한 마리를 즐길 수 있다. 사이드 메뉴로는 감 자튀김과 볶음밥 등 다양한 메뉴가 준비되어있다. 든든하게 요기를 하 고 첼시 마켓 안의 여러 잡화 상점을 둘러보다가, 커피 전문점 ‘나인 스 트리트 에스프레소’의 라떼 한잔과 함께 하이 라인 웨이를 걸어보자.
하이 라인 파크는 원래 맨해튼의 웨스트사이드 노선으로 운행되었던
2.33km의 고가 화물 노선 철길로, 열차의 운행이 중단되고 난 후 철로 위에 꽃과 나무를 심고 벤치를 설치해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봄이면 꽃
이 만개하고, 가을이면 갈대가 운치 있게 우거져 공중정원이라고도 불
리는 하이 라인 파크는 자발적으로 여행자들을 걷게 한다. 허드슨강을 내려다보며 산책길을 걷다가 보면 맨 끝자락에 있는 휘트니 미술관에
다다른다. 그 길 위에서 저 멀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브루클린 브리지까지 뉴욕 시내를 한눈에 담으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맛보자. The Lobster Place, 75 9th Ave, New York, NY 10011,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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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치즈와 만나 다시 태어난 한국 음식
일본 최고 인기 먹거리 ‘치즈 핫도그’를 아시나요? 음식을 먹으며 하는 방송(일명 먹방)이 유행하는 건 일본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최근 일본에서는 한식 먹방은 물론이고 SNS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며 인증사진 을 올리는 게 유행이다. 그만큼 한식 선호도가 높아졌다는 얘기이다. 일본 어디를 가도 웬만한 야키니쿠(불고기 고깃집)은 물론이고 슈퍼나 편의점에서도 김치를 팔고 있다. 순두부찌개는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음식이 되었다. 여기저기 한국 음 식만 파는 가게가 생겨나고 김치찌개는 매운맛에도 불구하고 인기몰이 중이다. 정리 86
편집부
사진 출처: https://ameblo.jp/mamagohann/entry-12294636622.html
일본 사람의 입맛이 바뀌고 있다. 그 이유는?
냄새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던 김치. 그러나 이젠 김치찌개가 밥상 가운 데 자리를 차지할 만큼 일본인이 한식을 대하는 태도부터 변했다. 한국 음식 중, 일본인이 먹기에 부담이 없어서 인기였던 닭갈비와 삼겹살 부
침개는 이제 고전 음식이 되었을 정도. 일본 친구들에게 한국 음식은 어떤 맛인지 물어보자, 놀랍게도 ‘맵고 치즈(?)가 많은 음식’이라고 답 하였다. 그 이유를 분석해보니 겨울연가의 주인공인 욘사마(배용준)의 인기 이후 한류열풍과 함께 한식도 일본에 들어왔을 무렵부터 변화가
온 듯하다. 일본인은 원래 매운 음식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한식은 무
트위터에 치즈 핫도그(アリランホットドッグ)를 치면 쉽게 볼 수 있는 인증샷
조건 맵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느 가게에서 매운 음식에 치즈를
한입 베어 물면 치즈가 쭉~ '치즈 핫도그'
하면 ‘치즈’라는 공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 젊은이들
깃한 식감을 자랑하며 길게 늘어나는 치즈로 인해 일본 젊은이들 사이
곁들여 파니, 일본인들에게 딱 맞는 맛이 완성되었다. 그 뒤부터 한식 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한식은 단연코 “치즈 닭갈비!” 일본 최고 인기 한식 간식거리 ‘치즈 닭갈비’
인터넷은 물론 NHK, TBS 등 주요방송사에서 치즈 닭갈비의 유행과
가게의 손님 행렬을 보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현지인 친구가 새로 생
치즈 닭갈비에 이은, 한국 젊은이의 복고풍 간식 '치즈 핫도그' 역시 쫄 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물고 치즈를 길게
늘어트리면서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는 것이 요새 젊은이들의 유
행이라고 한다. 그들의 먹거리 문화를 지켜보면서 핫도그의 열기만큼 이나 한국 음식에 대한 인기가 뜨거워져 있음을 체감으로 느낄 수 있다.
길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한마디가 "한번 치즈 닭갈비 먹으러 가자"는 말
글 이지명 (Jimyoung Lee)
나름 분석해보면, 닭갈비는 양도 많고 저렴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즐길
먹거리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 전통 식당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공부하는 틈틈
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일본 젊은이에게 치즈 닭갈비가 인기인 이유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코 거주, 호세이대학(法政大学) 경제학부 재학 중 히 일본 식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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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최고의 자연약재 상황버섯 &
신이 주신 선물 차가버섯 이야기 상황버섯과 차가버섯은 암세포를 제거해주며 말기 암 환자의 종양 억제 효과로 암의 추가적 성장을 막아주는 매우 훌륭한 자 연식품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서도 상황버섯을 최고 의 자연 약재로 기술하고 있다. 상황버섯은 수십 년 자란 고사목 에서 주로 기생 한다. 현재 한국 내에서 발견되는 자연산 상황버 섯의 양은 1년에 10kg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니 자연산 상황버 섯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상황버섯은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한약상들 사이에서 전설의 약제로 전 해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구하기 어려운 상황버섯이나 추운 겨 우내 자작나무에서 영양분을 얻어 자라난 차가버섯은 가히 신 이 내린 선물이라 칭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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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상황버섯은? 봄에 채취한 자연산 상황버섯은 노란 황금색을 띠고 있다. 처음엔 진흙 덩어리 형태로 자라다가 겨울이 되 면 성장을 멈추고 노란 부분이 진흙 색으로 변한다. 다 시 봄이 되면 노랗게 변하는 다년생 버섯이다. 나무에 서 한번 채취하면 5년 뒤 다시 같은 자리에서 채취할 수 있다. 맛과 향이 없으나 맛이 순해서 먹기에 거부감 이 없다. 미국 식품의약처(F.D.A)가 선정한 세계 10대 항암 식품 중의 하나인 자연산 상황버섯은 인삼의 주 요성분인 사포닌과 같은 성분인 베타글루칸을 다량 함 유하고 있어서 인체의 면역 조절체로서의 효능이 뛰어 나다. 차가버섯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비의 약재 차가버섯은 암 환 자에게 가장 효과적이다. 차가버섯은 면역력 강화와 암의 성장 속도를 억제하는데 특히 항암치료의 부작 용을 경감시키고, 면역력이 저하되는 것을 방지한다고 한다. 또한, 당뇨, 고혈압 환자의 혈당과 혈압을 떨어뜨 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위염, 위궤양, 간염, 신장 염, 방광 등 비뇨기계 염증 등의 체내 주요 장기 염증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혈액순환을 개선하여 심혈관계 질환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아토피, 비염, 천 식 등 알레르기성 질환에도 효능이 입증된 바 있다.
캐나다 원주민이 정성껏 채취한 차가버섯
CHAGA
Mushroom
미국내 구입문의 김진수 TEL : 201-232-5599 E-mail : jinsoo.kim@gitxmushroom.com
서울 연락처 ITK 신문식 TEL : +82 10-3748-1353 www.thechaga.com 89
LIFESTYLE
뉴욕의 빌딩 시리즈 3회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결정체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Grand Central Terminal) 뉴욕 맨해튼의 심장부 42가와 파크 애비뉴가 교차하는 곳에 있 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Grand Central Terminal)은 전 세계 를 통틀어 가장 큰 역으로, 통계에 의하면 매년 1억 명의 사람 들이 이곳을 이용한다고 한다. 자동차의 이용으로 아무리 철도 이용객의 수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관 광객뿐만 아니라 수많은 뉴요커의 출근길과 퇴근길로 언제나 붐빈다. 그래서 언제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는 뉴요커의 활 기찬 에너지로 가득하다. 글 90
편집부
많고 많은 뉴욕의 유명한 건물 중에서도 그
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혹은 짧게 줄여서 그
랜드 센트럴이라 불리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 널은 44개 플랫폼과 67개 노선을 거느린 뉴
욕 교통의 상징이다. 기차뿐만이 아니라 이
곳에서 지하철과 자동차, 택시 등 모든 뉴욕 의 교통수단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역사
1800년대 초부터 무역과 은행업의 중심지 였던 뉴욕은 언제나 모여드는 사람들로 붐
볐다. 1947년에는 6,500만 명이 이용해 당시 미국 인구의 40%가 이 역을 통해 미국의 다
른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하니 말이다. 수많 은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르는 기차는 이런 경
제적 성장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운송수단인 기차를 통한 뉴욕의 번 영은 경제적 풍요와 함께 대기 오염도 함께 가져왔고, 1854년에 뉴욕시는 42가 아래로
는 검은 그을음을 내뿜는 증기 기차를 금지 하기에 이른다.
현재의 위치에 처음 세워진 역사(驛舍)는
1871년 철도 거물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Cornelius Vanderbilt)가 지었다. 약 30년 후
증가하는 교통량과 증기, 연기 등의 문제 때 문에 새로운 기차역의 필요성이 대두하였고, 이에 1913년 리드(Reed) & 스팀(Stem), 워렌
(Warren) & 웨트모어(Wetmore) 건설회사가 참여해 현재와 같은 형태의 기차역을 완공하
였다. 새로운 역사를 지으며 고려했던 주요 사항 중 한 가지는 철도를 전화(電化)하는 일
이었고,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 역사로 들어
오는 철도 대부분을 땅속에 파묻을 수 있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설계와 건축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첨단 건축 공학의 절정이 었다.
미학적 건축물과 문화적 중요성
뉴욕시는 처음부터 경제와 문화의 수도인 뉴욕의 명성에 맞는 건축물 을 원했다.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은 현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100년도 훨씬 전에 지어졌다는 것이 믿기
관광문화의 명소
자르 양식(Beaux-arts) 건물로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뒤덮인 철골로 지
(Chrysler Building), 뉴욕 공공 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
지 않는 훌륭한 건축미학적 설계는 보는 이의 감탄을 절로 자아낸다. 보 어졌으며, 건물 중앙 홀 천장에는 2,500개의 별이 빛나는 12궁의 밤하
늘이 수놓아져 있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계단 양식을 모방한 대리석 계단과 양쪽에 세 개씩 뚫린 23m 높이의 큰 아치형 창문도 관광 명소
이다. 안내소의 시계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 로 유명하다. 또 다른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의 유명한 볼거리 중 하나는 미네르바, 헤라클레스, 머큐리 조각상에 둘러싸인 티파니 유리로 만든
시계로, 쥘-알렉시스 쿠탕이 디자인했다. 완공되었을 당시 높이가 14m 에 달하는 이 시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 군상이 되었다.
메트라이프 생명보험사 건물(Met Life Building), 크라이슬러 빌딩
과 인접해 있는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는 일일 약 660대가량의 기차
가 운행되고 하루 약 50만 명 이상이 방문하며, 약 12만 5,000명의 통 근자가 이용한다. 2층 높이의 역에 기차들은 지하로 진입하게 되어 있 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상 층의 상당한 공간이 개발 가능했고,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지상과 지하에는 레스토랑과 쇼핑센터들이 즐비하다.
특히 그랜드 센트럴 오이스터 바(Grand Central Oyster Bar)는 꼭 들 려보길 추천한다. 1913년부터 뉴욕에서 가장 신선한 굴을 먹을 수 있 다고 자랑하는 이곳은 뉴욕시의 또 다른 랜드마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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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믿을 수 있는 GMP 인증 꼼꼼하게 따져 보세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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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도움말 칭 한의원 우극청 원장
지난해 봄 홈쇼핑에서 판매한 건강기능식품 백수오 파문으로 많은 소
비자가 곤란을 겪은 적이 있다. 문제가 된 하수오(何首烏)는 동의보감
에 머리가 검어지게 하고 늙지 않게 하며 뼈와 힘줄을 튼튼하게 한다
람이 어느 순간 한약재에 대해, 그리고 한약의 약리효과에 대해 부정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 소개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수오는 백수오가 아닌 적하수오를
특히, 같은 명칭을 가진 약재라 할지라도 대한약전에 의해 식품용 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건 같은 것으로 보게 되는 탓에 곧바로 한약에 대한 폄하로 이어질 수
뜻한다. 우리나라에는 적하수오가 거의 안 나서 대체품으로 백수오를 이 사건뿐만 아니라 신문 또는 방송 등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불 량 한약재로 제조된 건강기능식품 관련한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약재와 의약품용 한약재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 한약은 무조
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의 입에서 ‘한약은 믿을 것이 못 된 다’라거나 ‘한약은 먹어도 효과가 없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있다. 실제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집계한 ‘떴다방 허위 과대광고 단속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질의 식품용 한약재를 사용한 건강기능 식품
르는 110개소가 적발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는 한약이 아니므로 이들 식품용 한약재를 섭취한 후 효능 효과를 운
실적’에 따르면 최근 3년간 모두 162개소를 점검한 결과 67.9%에 이 ‘건강식품 위해정보 신고현황’에 따르면 신고 건수가 최근 3년간 9.6
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니 국민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 회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 제품은 농어촌 지역은 물론 도시 곳곳
들이나 대형마트, 쇼핑몰 등에서 손쉽게 사 섭취하는 식품용 한약재 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다. 의료용 한약재는 일반 유통이 불가한 한약재이니 식품용 한약재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에 홍보관 등을 차려 놓고 정보 접근성이 낮은 노인들이나 부녀자들
한의사에서 처방받아 GMP 인증 한약재로 만든 약 복용해야
고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야말로 전국 곳곳에서 많은 국민들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약재의 품질과 제조를 관리하
을 상대로 마치 질병 치료에 효능 효과가 있는 한약처럼 속여 판매되 이 가짜 한약을 먹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런 피해를 막을 수 있을까?
칭한의원 우극청 원장은 “현재 우리나라에는 홍삼 제품을 비롯해 식 품용 한약재를 사용한 건강기능식품이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부작 용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건강•기능식의 복용 시에도 한의사 와 상담이 필요하며 특히 건강증진과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한약을 복용할 경우에는 반드시 한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홈쇼핑ㆍ마트에서 판매하는 한약은 의약품용 아닌 식품용 한약재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가짜 한약은 곳곳에 널려 있다. 대형마트 나 홈쇼핑, 인터넷쇼핑 등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그리고 약재시장 등
에서 가두판매되고 있는 식품용 한약재들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들 식품용 한약재를 사서 섭취한 사람들 역시 자신들은 한약을 복용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건강기능식품이나 식품용 한약재를 섭취한 사람들은 저
마다 건강증진 또는 질병의 치료 효과를 기대하는 것도 당연한 심리 다. 하지만 식품용 한약재인 만큼 플라시보 효과라면 모를까 효능 효
과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가 있다. 아니 효능 효과는 고사하고 부작용에 의해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일지
도 모른다. 실제로 한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의 자세한 내막을 알고 보면 이들이 복용했다는 한약은 한의원 등 한방 의료기관에서 한의사의 처방을 통해 복용한 의약품용 한약재가 아닌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대다수 국민들 또는 대형
품질이 좋은 한약재를 사용하면 우수한 제품의 한방제제 의약품이 는 체계적인 제도의 규정이 미비했다. 소비자는 내가 먹는 한약이 중
금속이나 농약ㆍ벤조피렌 등의 유해물질 검사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약재는 약사법상 의약품으로 취급돼 관리되고 있지만, 한 약재의 품질 관리 및 제조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규범이 부족했기 때
문이다. 식약처는 2012년 6월 ‘한약재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을 도
입해 이를 지키도록 하고 2015년부터 지키지 않은 제조업소는 한약 재를 팔 수 없도록 규정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한약재 GMP(Good Manufacturing Practice,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다.
일반적인 의약품에서 GMP란 품질이 보증된 의약품을 제조하고 관리 하기 위해 요구되는 요건으로서, 제조소의 시설ㆍ설비를 비롯해 사용
되는 원자재의 구매부터 생산ㆍ시험검사 및 출하에 이르기까지 전반 에 걸친 체계적인 관리와 충분한 인적 조직 확립을 마련하는 것이다. 한약재 GMP도 의약품 GMP와 거의 같다. 다만 한약재 특성에 맞게 약 재의 기원 확인과 표본 생약 확보, 훈증제 사용 방침 등의 내용이 적용
돼 있다. 또한, 각각의 완제품에 대해 유해물질 및 품질시험을 수행하 도록 해 안전하고 유효성 있는 한약재를 공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칭 한의원 우극청 원장은 “아직도 일부에서는 한약재에 대한 불신이 있지만 한의원이나 한방의료기관에 공급되는 의약품용 한약재는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보된 우수한 약재들로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복용해도 된다”며 “특히, 저희 칭 한의원 같은 경우에는 GMP 인증 을 받은 한약재만 사용해 우리 가족들의 마음 놓고 드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건강증진 또는 질병 치료를 위 해서라면, 그리고 효능 효과를 기대한다면 엄격한 품질관리를 거친 의약품용 한약재가 공급되는 한방의료기관에서 한의사의 처방에 따라 한약을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마트, 홈쇼핑, 약재시장 등에서 식품용 한약재를 사서 섭취한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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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금연 캠페인
“아시아인의 건강을 위협하는 흡연과 당뇨”
금연과 당뇨 검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주요 의학회, 미 의무감(The U.S. Surgeon General)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흡연자 인 아시아계 미국인은 비흡연자보다 당뇨병 위험이 30~40% 증가한다고 보고하 였다. 샌디에이고의 공중 보건학 박사인 Caroline Chen은 “흡연은 폐, 목 및 다른 유형의 암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만, 2014년 의무감의 흡연과 건강 결과 보고서 (Health Consequences of Smoking Report of the Surgeon General)에 따르면 현재 흡연으로 당뇨병이 유발된다고 추론할 수 있는 타당한 증거도 있다”고 말하였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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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참고자료 한인금연센터(ASQ)
미 질병통제예방센터에 따르면, 당뇨병이 있는 흡연자는 아래와 같은 심각한 합병증에 대한 위험이 더 높다. ● ●
● ●
한인금연센터(ASQ)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Moores 암센터
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미주에 거주하는 한인 흡연자들의 금연을 돕 는 단체이다. 이 단체는 미국에 거주하는 광둥어, 만다린어, 한국어, 베
심장 및 신장 질환
다리와 발의 원활하지 않은 혈액 순환으로 감염, 궤양 및 절단 가능성 유발. (발가락이나 발과 같은 신체 부위를 수술로 제거함)
트남어를 사용하는 아시아계 커뮤니티에게 과학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금연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망막증 (실명을 유발할 수 있는 안구 질환)
이곳에서 카운셀러로 일하는 강윤경 씨는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및 조절 능력 저하)
무료 일대일 전화 상담을 해주며 자격이 되는 흡연자에게는 2주 분량
말초신경병증 (팔과 다리의 신경 손상으로 인한 무감각, 통증, 무기력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당뇨병과 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것을 목표 로 하는 아시아태평양의사협회(National Council of Asian Pacific
Islander Physicians)의 대표, Ho Luong Tran 박사는 “흡연은 생명에
의 기금으로 제공된 금연 프로그램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흡연자에게
의 무료 니코틴 패치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흡연자의 친구와 가족 또 한 한인금연센터로 전화하여 흡연자의 금연을 돕는 방법에 대한 정보 와 조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을 두 배로 높일 수 있는 경우가 있으며, 신부전
1992년 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아시안 금연센터(ASQ)내 한인금연센터
다. 한인금연센터(ASQ)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Cherrie Ng 역시 “흡연
상)이 넘는 한인 흡연자에게 카운슬링을 제공하며 성공적인 금연사례
증과 같은 당뇨 합병증으로 생명에 위협이 되기도 한다.”라고 주장한 은 혈당을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신체가 인슐린에 대한 내성을 갖 게 할 수 있으므로 당뇨 환자에게 흡연은 매우 해롭다.”라고 말하였다.
는 2012년 전미주로 확장된 이래 약 5천명(아시안 전체로는 3만명 이 를 양산해왔다. 이 단체는 특히 당뇨병이 있는 흡연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자세한 안내를 원하는 분은 ASQ 한인금연센터, 1-800-556-5564 로 전화하면 된다.
(에스카사)가 후원합니다!
당신의�건강은�곧�가족의�행복입니다. 이제�담배�중독에서�완전히�벗어나십시오. 지금 ASQ 한인금연센터로�전화하셔서�무료�니코틴�패치를�문의하세요. 이미 10,000명이�넘는�흡연자의�집으로�패치를�직접�배송해�드렸습니다. 또한, 일대일�전화�상담과�금연�자료�등�금연�성공률을�두�배�이상�높여주는 무료�금연�서비스를�받을�수�있습니다. 오늘�전화하셔서�가족의�웃음을�지킬�수�있도록�금연을�시작하세요! 한인금연센터는 Asian Smokers’ Quitline (ASQ)에�의해�운영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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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Photo courtesy of Jamestown (www.jamestownlp.com)
Come Early, Stay Late. Open 7 Days A Week.
첼시 마켓(Chelsea Market) 글
편집부
맨해튼 75 9th Avenue. 이곳이 유명한 첼시 마켓(Chelsea Market)이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멋
스러운 조그마한 동네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 건물. 그 건물에서 풍기는 느낌 그대로 100년이 넘은 공장을 개조 해서 만들었는데 원래는 오레오 쿠키로 유명한 나비스코(Nabisco) 공장 건물이 있던 곳이다. 공장이 문을 닫은 뒤 외관은 그대로 둔 채 28개의 공장 벽을 허물어 하나의 건물로 만들어 1997년 오픈하였다. 13,000 SF의 공간 에 즐비한 식료품점과 음식점, 작은 소품들을 파는 가게로 가득한 첼시 마켓에 가면 ‘활기차다’라는 단어의 뜻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마켓 입구에 큼지막하게 일주일 내내 오픈한다는 사인이 인상적이다. 첼시 마켓 바로 앞 에는 구글의 동부 헤드쿼터가 있는데, 2018년 3월 22일 구글이 이 첼시 마켓을 24억 달러 (2조6천억 원)에 샀다 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치 영화 세트장에 와있는 듯한, 그러나 빈티지 느낌과 세련된 감각이 잘 조화된 이곳은 1 층에는 각종 음식 재료를 파는 상점과 베이커리, 꽃가게 등이 자리 잡고 있고, 2층에는 유명한 TV 채널인 Food Network와 일반 사무실들이 있다. 수많은 가게 중에 먹거리 위주로 꼭 들려볼 만한 곳을 몇 군데 추려 보았다. 96
랍스터 플레이스 The Lobster Place
수 있다. 에코백, 티셔츠 등 팩 위치 베이커리 마니아들을 위한 아이템
식가라면 꼭 가봐야 할 곳. 싱싱한 랍스터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을
다는 낱개로 구매하는 게 훨씬 저렴하다. 포장을 뜯는 순간… 브라우
아마도 첼시 마켓에서 가장 유명한 집일 것이다. 랍스터를 좋아하는 미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찜기에 쪄서 먹을 수도 있다. 랍스터 이
외의 다양한 해산물도 즐길 수도 있고 포장도 해준다. 착한 가격 덕분
에 커다란 랍스터를 부담 없이 주문해서 가족끼리 하루 배불리 포식할 수 있는 곳이다.
나인스 스트릿 에스프레소 Ninth Street Espresso
2001년 문을 연 조그마한 커피집이지만 작다고 얕보면 큰일. 라떼 가 엄청나게 유명한 집이다. 메뉴는 Brewed Coffee, Iced Coffee,
Espresso, Espresso with Milk 이렇게 딱 4가지뿐이다. 특히 신맛의 커 피를 좋아한다면 꼭 맛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원두도 구입이 가능한데 원두를 사면 커피를 서비스로 맛볼 수 있는 것은 보~너스! 로니브룩 Ronnybrook Dairy
아마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일 것이다. 우유 가게인데 사람들이 바글바
글하다. 고소한 우유와 요거트도 팔고 있지만, 이 가게가 유명한 진짜 이유는 바로 밀크 쉐이크!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 쉐이크를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다는 그야말로 핫한 잇(it) 아이 템이니 방문한다면 꼭 맛보길 추천한다. 팻 위치 베이커리 Fat Witch Bakery
뉴욕뿐만 아니라 교토, 아부다비 등에도 체인이 있는 브라우니의 대명 사격인 가게인 펫 위치 베이커리. 혹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브라우
니라고도 한다. 브라우니 가루도 따로 팔고, 캔디 등의 간식도 구입할
들도 준비되어 있다. 이곳의 브라우니는 다양하게 포장된 세트 제품보 니는 없다!
첼시 와인 볼트 Chelsea Wine Vault
커다란 네온 불빛이 인상적인 와인가게. 창고 스타일의 선선한 기운이
도는 매장에는 수많은 와인이 기호별로 잘 정돈되어 있으니 충분히 시
간을 갖고 직접 골라도 좋고 추천을 받을 수도 있다. 구입하고 바로 따
서 맛볼 수도 있다. 관광객을 위해 일정 수량 이상의 와인을 구입하면 묵고 있는 호텔까지도 배달을 해준다. 먹바 mok·bar
첼시 마켓에 있는 한국식 라멘점. 한글로 메뉴가 줄줄이 걸려 있어서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청국장, 곰탕, 짬뽕, 김치찌개 등의 장식용 메
뉴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지만, 이 집은 주종이 라멘이다. 생면을 이용 해서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등이 들어간 클래식 라멘, 김치 라멘, 비빔 라멘을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도너터리 Doughnuttery
그냥 도넛이 아니다. 도넛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을 극대화한 뒤 부담 없 는 한 입 크기의 작은 사이즈로 눈 앞에서 바로 튀겨주는 도넛계의 신 세대이다. 주문과 동시에 튀겨주는 먹기 좋은 크기의 도넛은 포장을 받
아 들자마자 입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기본적인 슈가글레이즈, 달콤한 시나몬 슈가 도너츠도 좋지만 가장 인기 아이템은 카카오보이로 달달 함과 적당한 소금의 조화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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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애틀랜타 특별한 볼거리
남부 최고의 보헤미안 거리 ‘리틀 파이브 포인트’ 애틀랜타를 하루 정도 여행하는 관광객이라면 대부분 코카콜라 박물관, CNN 본사, 스 톤 마운틴 등을 둘러본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진짜 살아 움직이는 애틀랜 타만의 문화가 숨 쉬는 거리”를 둘러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중 시내 중심지에서 멀 지 않는 ‘피드몬트 공원(Piedmont Park)’이나 ‘리틀 파이브 포인트 (Little Five Points)’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다. 뉴욕으로 치면 센트럴 파크 같은 피드몬트 공원은 애틀랜 타 시민들을 위한 휴식처 같은 곳이다. 보헤미안 느낌이 강한 리틀 파이브 포인츠(Little Five Points)에는 중고 가게 사이에 현지 주민이 운영하는 독특한 식당이 즐비하다. 글, 사진 이영주 98
애틀랜타 리포터
1960년대 애틀랜타 최고의 상업지역 Little Five Points
1890년 리틀 파이브 포인트 (Little Five Points) 남쪽에 애틀랜타의 첫 번째 전차 역이 들어섰다. 역세권이 형성되자 이곳은 애틀랜타 주요 쇼 핑센터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까지 최고의 상업지역으로 번창했 던 이곳은 지역의 중심부를 통과하는 고속도로가 생기자 상황이 변했
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도시 개발로 인해 오히려 도심 보다 상대적으로 땅값이 싸지자 이곳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와 빅토 리 안 스타일의 집을 복원함에 따라 도시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특별한 문화 Little Five Points
거리 어디서든 보헤미안 스타일의 예술가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
은 곳. 수많은 예술품과 공예품 판매점, 커피점 (Java Lords, Aurora Coffee, Starbucks), 의류 매장과 신발 가게 등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멋과 맛을 자랑하는 수많은 레스토랑과 바(Bar)는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낭만을 제공한다. 자유분방함이 살아 숨 쉬는 곳이지만 특이 하게도 독립 서점 두 곳도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Festival 때는 지역의 50~100개 밴드가 모여 도시에 생기를 더해준다. 살아 숨쉬는 벽화 Little Five Points
리틀 파이브 포인트 (Little Five Points)는 애틀랜타 최고의 거리 예술
감상 지역이다. 새 도로와 새 건물이 유난히 많은 애틀랜타에서 리틀 파이브 포인트의 좁은 거리는 무척 인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좁은 거리엔 보석 같은 예술품이 곳곳에 숨어 있다. 거리를 걸으며 세
계적으로 유명한 거리 예술가 Jerk face의 작품을 맘껏 즐길 수 있고 Chris Veal과 R. Land와 같은 현지 예술가의 작품도 실컷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대로변보다는 건물의 뒤쪽이나 골목길, 뒤 주차 장에 자리 잡고 있으니 보물찾기하듯이 거리를 헤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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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감천문화마을’에서 바라보는 새로운 부산
부산의 겨울, 지금 감천의 온도는 ‘부산의 마추픽추’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 실제로 마주한 감천문화 마을은 마추픽추보 다는 ‘이탈리아의 친퀘테레’를 더 닮아있었다. 남쪽으로는 감천항이, 북쪽으로는 구덕산 이 솟아있는 지형적 특성과 파스텔 색채를 입은 주택이 옹기종기 모인 이국적 경관 때문 이었을까? 사실 이곳은 한국의 무엇무엇이라는 수식어를 더하기보다 ‘부산의 감천문화 마을’ 그 자체로 이미 독보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이곳을 다녀간 방 문객만 200만 명을 넘어섰을 정도니 말이다. 심지어 그 방문객의 절반가량은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다. 한때, 까치고개라 불릴 만큼 험난한 코스의 도로를 통해야만 갈 수 있었 던,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었던 이곳은 어떻게 부산을 대표 하는 관광명소가 되었을까. 글 손시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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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신앙촌에서 문화마을이 되기까지
가득 채운 ‘골목을 누비는 물고기’는 발길을 한차례 멈추게 한다. 그 옆
을은 1950년대 태극도 신자 800세대와 한국전쟁으로 몰려든 피난민
‘하늘 마루’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마을 관련 자료의 전시 안내관이
산기슭을 따라 밀집한 작은 집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감천문화마
들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한때는 ‘신앙촌 태극도 마을’로 불렸으며,
줄곧 낙후된 동네로 인식되었다. 그러던 2009년, 지역 재생을 위한 공
공 미술 사업이 시작되었다. 마을 미술 프로젝트 ‘꿈꾸는 부산의 마추
좁은 계단 길을 올라가면, 감천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 자 확 트인 옥상 공간에서 용두산을 포함한 부산항과 감천항을 함께 조 망할 수 있는 전망대의 기능을 한다.
픽추’를 시작으로, 2010년 ‘미로미로 골목길’, 2012년 ‘마추픽추 골목
특히 이곳에서는 아름다운 마을 경관이 인쇄된 엽서를 보낼 수 있다.
랫마을 내려가기’로 점차 마을을 둘러싼 모든 길목이 관광지로 거듭나
다. 이 조형물 앞에서는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인파가 특히나
길’ 그리고 2016년 문화예술 인프라가 부족했던 아랫마을에 ‘감천 아 기 시작했다. 지역의 예술가와 주민들이 합심해 담장이나 건물 벽에 벽
화를 그려 넣기 시작했고, 방치되었던 빈집은 작은 박물관, 갤러리, 포
그리고 마을의 3분의 1 정도를 돌면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를 볼 수 있 몰리는 인기 포토존으로, 감천 2동을 전체 조망할 수 있다.
토존 등으로 탈바꿈했다. 마을 공터와 옥상을 생태 정원으로 바꾸는 등
구석구석 더 재미있는 발걸음 ‘스탬프 지도'
술가와 함께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일자리를 창출하니, 관광객은 물론
사진만을 위한 여행은 언제나 숨이 가쁘다. 적어도 이곳 감천문화마을
전반적인 주민 생활환경 개선 사업 또한 추진되었다. 이처럼 주민이 예 떠났던 주민들까지 돌아오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층형의 오래
된 주택들과 천마산 기슭의 좁은 골목길이 조화를 이루며 전국적인 명 성을 얻게 된 것이다.
감천문화마을의 포인트 스폿
감천문화마을의 골목과 벽, 그리고 주택에 그려진 그림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소곤대는 듯 제각각의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보이는 것만 보아도 충분히 멋진 경관의 마을이지만, 숨은 재미와 꼭 놓치지 말아야 할 대표 스폿 몇 곳을 짚어보자. 작은 박물관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박물관과는 사뭇 대조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곳 이다.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이곳은 빈집을 개조하여 만든 곳으로, 주민들이 하나둘 모은 마을의 옛 사진, 기증받은 생활용품, 판잣집의
재현, 주민들과 예술가 그리고 구청의 협업으로 진행된 마을의 발전과 정을 볼 수 있다. 감내 어울터
마을 전체가 하나의 포토존이 되는 감천문화마을이라 할지라도, 인증 을 찾았다면, 겉핥기식 인증 투어가 아니라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부 산을 한껏 느껴보자.
모든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단언컨대 안내센터의 위치 파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쩌면 이 말이 스마트한 시
대에 매우 고리타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안내센터에서는 핸드폰 화면에서는 미쳐 접할 수 없었던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무 거운 가방을 보관할 수도,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내가 찾은 감천문화마을의 안내센터에서는 ‘스탬프 투어 지도’가 판매 중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따라 스탬프를 찍다 보면 자연스레 마을
의 모든 곳을 다 둘러보게 된다. 이 지도는 여러 의미로 꽤 요긴하게 쓰 였다. 생각보다 넓었던 감천문화마을에서 길을 잃은 외국인이 말을 걸
어왔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냐고. 내 손에 쥐어있던 2,000원짜리 지
도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함께 크게 한바퀴 마을을 돌고 나니, 나의 스탬프 지도는 완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지도에는 추억이라는 도장이 하나 더 찍혀있다.
옛 목욕탕의 흔적이 남도록 최소한의 마무리로 재생시킨 공간으로, 1
사람 사는 마을 감천, 감성온도 36.5℃
터로 사용되고 있으며, 옥상 전망대에서는 계단식 주거와 ‘별보러가는
부산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동경과 환상은 푸른 빛의 해변에서부터 시
층은 공방, 2층은 카페 및 갤러리, 3은 문화강좌시설, 4층은 방문객 쉼 길’을 조망할 수 있다. 아트숍 & 미니숍
금빛 모래사장과 갈매기, 부서지는 파도와 짠 바다 내음과 같은 내가 작되었다. 하지만 이곳, 감천문화마을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은 해운 대 혹은 광안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부산이었다.
예술가들과 섬유 공방, 도자 공방, 목 공방 등에서 교육을 받은 주민들
낮에 찾은 감천문화마을은 따뜻함과 포근함이라는 키워드가 어울리는
별한 기념품을 구매하고 싶다면 꼭 한번 들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더 멋진 곳’이라는 말을 전했고, 이곳의 밤 풍경은 또 어떠할지 궁금해
이 직접 만든 아기자기한 감천문화마을만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특 감내 카페 & 감내 맛집
감내 카페와 감내 맛집은 감천문화마을 주민협의회에서 운영하는 곳
장소였다. 그런데, 여행 중 만난 현지인은 내게 ‘감천문화마을은 밤에 졌다. 그리고 낮과 밤의 온도 차이는 얼마일지도 꽤 궁금해졌다. 실제 온도가 아닌 감성의 온도가 말이다.
으로, 수익금은 전액 주민복지사업에 사용된다. 감내 카페에서는 차 한
밤이든 낮이든 언제 찾든 꼭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곳은 ‘문
물 1층에서는 부산의 대표 먹거리 어묵을 맛볼 수 있다.
활하는 공간이므로 피해를 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잔의 여유를, 감내 맛집에서는 허기를 달랠 수 있다. 특히 감내 맛집 건 전망대 & 포토존
먼저 마을에 들어서서 조금 걷다 보면, 감천문화마을의 상징이 되어버
린 물고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큼지막한 벽면을
화마을’이기에 앞서, ‘사람 사는 마을’이라는 것이다. 실제 주민들이 생
그래야만 앞으로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지금의 감천의 감성 온도를 오래도록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나 또한 다시 이곳을 찾을 때, 사람 냄새 나는 36.5℃를 다시금 느껴보고 싶은 욕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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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억과 아름다운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되돌아보면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시련과 역경, 실패와 성공의 긴 여정 속에서 이별, 행복, 감동의 순간을 담아낸, 지나온 인생을 담은 회고록은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랜 경험의 집필자, 자서전 전문 작가와 실력 있는 최고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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