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USA FEBRUA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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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에스카사

Vol.12

February

COVER STORY 사람의 마음을 이어 우주를 표현하는 예술가 ‘선한 사람’ 강익중을 논(論)하다 PEOPLE FOCUS 그래핀으로 세상을 바꾸는 서울대 대학원 홍병희 교수

ART&CULTURE

LIFESTYLE

신동호와 떠나는 모나미(Monami)여행

사람을 남기는 장사꾼 김진수 대표

환기 미술관 ‘김환기 색채의 미학’ 특별 전시회 도예작가 윤 솔 백석대 교수

정통 마카롱(Macaron)의 원조, 비주얼의 끝판왕 Ladurée 뉴욕 프레드 프렌치 빌딩 (Fred French Building)






CONTENTS

February 2018 Vol.12

10

22

Cover Story

Education

Art & Culture

10

30

48

선한 사람 강익중을 논(論)하다

너는 왜 안 놀아?

바이올리니스트 / 비올리스트 한예진

사람의 마음을 이어 우주를 표현하는 예술가

2월의 사진과 글 21

‘너를 기다리는 동안’

People Focus 22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상을 바꾸다

그래핀 연구의 선봉장(先鋒將),‌ 서울대 홍병희 교수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11)

33

2월의 인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디트리히 본회퍼(Rev. Dietrich Bonhoeffer)

34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직장 생생 체험기(02)

40

Touch of Humanity

신동호 마케팅팀 팀장과 함께 떠나는‌ 모나미(Monami) 여행

음악에 대한 제 사랑은 절실함입니다

54

올 시즌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10편의 새로운 브로드웨이 작품

58

종로구 부암동 ‘환기 미술관’에 가다

‘김환기 색채의 미학’ 특별 전시회

62

구(球)로 생명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예작가

윤솔 Sol Yoon

우리 이웃이야기 68

기탄야우(Gitanyow)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 나를 봅니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꾼 김진수 대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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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Life Style 72

영화 심리 이야기

레인메이커(The Rainmaker)

78

88

행사

Mei Lai Wah(美麗華) Bakery

102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

90

74

박종진의 작품 속 추억여행 1970년에 두고 온 시간

브리치즈, 닭봉 오븐 구이

92

1월 사랑하는 사람들과

78

뿌리칠 수 없는 화려한 색깔과 유혹의 향연

정통 마카롱(Macaron)의 원조‌ 비주얼의 끝판왕 Ladurée

82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신경 끄기의 기술

94

84

98

프레드 프렌치 빌딩(Fred French Building) 독자칼럼

Super Bowl Sunday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뉴욕 최고의 로맨틱

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 엄마 홍정연(네 번째이야기)

87

바또 뉴욕 디너 크루즈‌ (Bateaux New York Dining Cruise)

후원 행사

2017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

뉴욕의 빌딩 시리즈 1회 맨해튼 마천루 시대를 연 상징적인 건물

미국이 Bowl에 빠진 날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난로위의 도시락‌ Metal Runch Box on a Briquet Stove

아는 만큼 즐기는 최고의 식사!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사진으로 다시 보는

100

9


Publisher Jennifer Y. Lee (USA) Dr. Charles Changsoo Lee (KOREA)

에스카사 (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Managing Director Sarah Chung Magazine Director Yebin Taylor Lee

Editor in Chief Won Young Park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 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 가 전해주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문 화예술, 패션, 라이프 스타일, 화제인 물 focus, 교육, 육아, 요리, 여행, 건 강정보 등을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 기를 가득 담았습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 틀, 애틀랜타, 사우스캐롤라이나, 달 라스 지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 구, 부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 격 글로컬 (Global + Local) 잡지입 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가 되겠습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 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 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 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 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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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만드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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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Juyoung Lee, Young Choi English Translation / Haejin Oh, Soyoung Park 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Legal Columnist / Minji Kim Science Columnist / Dr.Byung Hee Hong Music & Arts Columnist /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Food Columnist / Hwajung Sung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Kibum Kim, Doyoung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Hyunmin Kwon, Bohyun Im, Joohee Han, Youngjoo Song,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Minjung Choi, Sungjoo Hong Marketing Director / Joonhee Kim Advertising Director / S.H. Chung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Eun Lee ‌ ‌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 ‌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for each field. ‌ ‌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 ‌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 ‌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 ‌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Dallas,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 ‌ is the hub for cultural and artistical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 ‌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 ‌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Creato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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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VER STORY

사람의 마음을 이어 우주를 표현하는 예술가

선한 사람 강익중을 논(論)하다

1990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6년, 존미첼 기금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1992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8년, 미국 티파니재단 기금

2012년, 대 ‌ 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

프렛 인스티튜트 동창 어취브먼트상

12

사진 George Jung, Doyoung Kim, Woongchul An


인생은 기차여행입니다. 인연은 같은 기차에 올라타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거죠.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공공미술은 이어진 모두의 마음으로 우주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백남준이 생전에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이자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세계적인 작가. 전 세계 어린이의 꿈과 희망이 그려진 작은 작품을 모아 평화와 행복이라는 큰 메시지를 전하는 공공예술 작가.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공항, 역사,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서 작품으 로 만날 수 있는 작가. 구겐하임 뮤지엄 소장품 ‘1392개의 달항아리’와 광화문 복원공사를 위한 가림막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달항아리를 그린 작가…. 뉴욕에서 35년째 활동하 고 있는 세계적인 예술가 강익중을 수식하는 단어는 이처럼 끝이 없다. 백남준 이후 국제 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몇 마디 대화에서도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과 겸손한 태도로 상대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그 가 오늘날 세계인의 감동을 끌어낸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업실에서 에스카사 편집부와 만난 강익중은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선(善)과 애(愛),

우주(宇宙)를 얘기했다. 그의 맑고 선한 눈빛을 마주하고, 우리는 그와 같은 뉴욕 땅에 사 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인간 강익중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기획 Won Young Park 글 Jennifer Lee 영문 Soyoung Adel Park 정리

편집부

돈을 벌기 위해 뉴욕에 온 가난한 유학생 강익중

강익중의 트레이드 마크인 ‘3x3’ 미니 캔버스 작품은 지하철을 오가며

는 여느 화가들처럼 예술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온 게 아니었다.

이다.

홍익대를 졸업한 강익중은 1984년 예술의 도시 뉴욕에 왔다. 그러나 그

“미국에는 돈을 벌려고 왔습니다. 돈을 벌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 드리는 게 저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요.” 프렛(Pratt Institute) 대학원생으로 등록한 뒤 곧장 생활 전선으로 나

주변의 모습과 일상의 풍경을 기록한 어려운 유학생 시기의 산물인 셈 그는 우연히 한 친구의 소개로 매일 몇 개씩 완성한 작품 1,000점을 모

아 1985년 롱아일랜드 대학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된다. 강익중의 ‘3인치 작품’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다.

선 그는 밤에는 델리가게에서 채소를 다듬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차

다음 해, 맨해튼 소호에 있는 비영리 화랑 Two Raw Gallery에서 뉴욕

다. 뉴욕에 와서 10년 동안 주중과 주말, 밤낮없이 일하면서 학업과 작

에 텐트를 치고 하루 10시간씩 한 달간 매달리며 실연한 것이다. 91년

이나타운 벼룩시장에서 노점상을 하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 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지하철은 제 작업실이었습니다. 집과 직장간 장거리 이동 시간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 고민 하다가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3x3’ 미니 캔 버스 작품’이 나온거죠.”

에서의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한 달간의 리빙 퍼포먼스’로 갤러리 엔 플러싱 메인스트릿 전철역에 2,000여 그림을 모은 <해피 월드>를

설치했다. 돈 버는 일에 대부분 시간을 빼앗겼던 그였지만, 타고난 재 능과 단 1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뉴욕 생활 10년 후 본 격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3


전환점이 된 1994년, 백남준과 강익중의 만남

1994년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공항 벽화는 강익중 작가 인생의 터닝포

인트였다. 2만여 점의 그림이 모인 높이 3m, 길이 22m의 대형 설치작 은 그가 뉴욕의 일상에서 모은 다양한 소재가 바탕이 된 3인치 작품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작품으로 큰돈을 벌지는 못 해도 작업만으로 생활은 할 수 있

겠다.’는 자신이 든 그는 9년째 해

오던 옷가게 점원일을 그만두고 작가로서의 삶에 몰두한다.

같은 해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

에서 백남준과 함께한 ‘멀티플/대 화’ 전을 연다. 백남준의 TV 모니 터와 강익중의 미니 캔버스가 만

난 자리였다. 강익중에게는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일이자 최고의 기

록 도왔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백남준은 그가 목마르게 찾던 멘토였다.

“어느 날 오프닝 행사가 끝나고 선생님은 솔로몬 브라더스의 은행 장이자 재벌 후계자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현재 월가에서 벌 어지고 있는 경제 변화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깊이 있는 의견을 말 씀하신 뒤, ‘천 년 후엔 무슨 일 이 일어나는 줄 생각해 봤느냐’ 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은 아무 리 돈이 많은 상대라도 작아지 게 만드는 질문이었죠. 제가 그 날 충격을 받고 깨달은 건 백남 준 선생은 ‘낮에 별을 보는 무 당’, ‘천년 앞을 내다보는 엄청난 상상력을 가진 부자’라는 사실 이었습니다.”

회였다.

“다른 전시회로 샌프란시스코 에 있을 때였는데 큐레이터 유 지니 사이에게 전화가 왔습니 다.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 서 기획을 한 전시회인데 ‘두사 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 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가졌으니 2인 전시 회를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 꿈을 꾼 줄 알았죠.” 두 작가의 공통된 사고관인 ‘비빔 밥론’처럼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

그는 백남준에게서 ‘진짜 예술가 란 과거와 미래를, 우주와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고 연결하 는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파리에서 만난, 당시 84세의 김환 기 작가의 미망인 김향안 여사도

도화지 위에 ’바른 마음, 많은 노력’이라고 적어서 작업실 문에 붙여 놓았다. 출근을 하면서, 잠깐 달걀을 사러 나가면서 한 번씩 쳐다본다. “형, 바른 마음이 도대체 어떤 마음이야? 많은 노력은 또 뭐고?”

는 사물을 모아 ‘합해진 객체들

가끔씩 작업실에 들리는 후배가 물어본다.

미를 창출하고, 더 나아가 하찮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의 총합을 질적으로 넘어서는' 의 물건을 통해 우주 삼라만상(森羅 萬象)도 설명할 수 있음을 시연

한 전시였다. 당시 이미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그에게 어떤 존재 로 다가왔을까?

요즘 배운 자전거 실력으로 후배와 함께 작업실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형, 넘어지지 않으려면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계속 폐달을 밟아줘야 돼.”

그 시절에 만난 멘토였다.

“여사님의 조언 중, 첫째가 ‘아 침을 잘 먹어라’였어요. 그 얘 긴 건강과 기본을 지키며 순리 에 맞게 한 계단씩 정석으로 가 라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팁을 후하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팁 을 받는 사람 뒤엔 가족과 이웃 있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었지 요. 셋째, ‘기회’와 ‘유혹’을 분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 어요. 대부분 사람은 유혹을 기 회로, 기회를 유혹으로 생각하 지요. 그 분별은 사실 그리 어렵 진 않아요. 지금 하는 일이 역사 와 민족과 세계에 도움이 되는 지… 여사님께서 ‘유혹인지 기 회인 지는 세 가지 공익성을 먼 저 생각하면 쉽게 구분이 된다.’ 고 하신 말씀을 아직도 깊이 간 직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선생님과 코네티컷 휘 “알았어, 고맙다. 바른 자세, 많은 노력.” 트니 미술관에서 2인 전시회를 (2004년 강익중) 준비 중일 때였어요. 당시 백남 준 선생님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계셨는데 미술관 측에 팩스를 보내셨습니다. ‘I am very flexible. It is very important that Ik-Joong 이 두 분과의 대화는 젊은 시절 강익중을 먹이고 키우며 자라게 했다. has the better space. (나는 괜찮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 그는 그분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마음 정말 중요하다)’ 단 두 문장이었죠.” 의 그릇을 키웠다. 인생의 계단을 밟으며 한 단계씩 오를 때에도 온전 세간에선 백남준과의 만남을 두고 ‘강익중을 작가의 위상에 올라서도 14

한 마무리를 하고 난 뒤에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습관도 이때 배웠다.


40代에는 남북을, 50代엔 세상을, 60代에는 우주를

강익중의 나이가 40이 되던 시기이자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부터 강익중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 세계 어린이 들로부터 그림을 수집하여 3인치 캔버스와 함께 강익중 하면 떠오르 는 ‘공공미술’ 활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수재와 천재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천재의 성과물은 본인이 의 식했건 아니건 공익성을 가집니다. 공익성은 역사와 민족,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죠. 김향안 여사의 말씀으로 깨우친, ‘역사와 민족을 위해 과연 내가 한 게 무엇인가.’라는 자문의 결론은 제 ‘위치파악부 터 하자’였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나 모든 행위의 기본은 ‘위치 파악’입니다. 철학이란 게 잠자는 영혼을 깨우듯이 저 역시 예 술가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잠자는 제 영혼을 찌르는 거죠. 예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제 위치를 알려는 행위입 니다.”

불어넣으면 하나의 완전한 소리를 만듭니다. 이렇듯 남과 북이 가진 음과 양의 기운을 모아 통일을 그리거나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고 세 계가 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저의 또 다른 ‘위치찾기’ 이지요. 둘이 만나 완벽함을 이루는 한글이나 모든 걸 담아내는 달 항아리를 작업 소재로 쓰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일을 자신의 위치로 정한 그는 그해 141개국 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항아리는 형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두리

린이들에게 ‘나의 꿈’을 주제로 한 그림을 받아 파주 통일 동산에서 '십 만의 꿈' 전을 개최했다. 9.11 테러 이후인 2001년도에는 유엔 건물 로

비에 135개국 34,000명 어린이의 작품 '놀라운 세계'가 설치되었다. 이 어 3년 뒤에는 일산 호수공원에 130,000여 장의 그림을 붙인 대형 풍

선 '꿈의 달'을 띄웠다. 켄터키주 무하마드 알리 센터에는 7,000여 그림

이 모인 작품이 개관 기념으로 선보인다. 같은 해 프린스턴 공립도서 관 로비에는 '동네 사람들의 작품과 애장품'을 모은 '행복한 세상'이 영

구 전시를 시작했다. 2017년 평창에서는 200여 명 발달장애 어린이들

과 3인치 그림 그리기 행사를 진행했다. 이렇듯 아이들과 평범한 사람

의 작품을 모아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일, 그에게 남다른 의미 를 가질 듯하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40살까지는 날 위해서 정말 열심히 작업하자. 그 후엔 남과 북에 대해서 생각하고 50대가 되면 세계를 논하자. 그 리고 60이 넘으면 우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살았어 요. 저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사람의 작은 마음을 모으는 것, 그 마음을 모아 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분단의 조국과 세계를 생각하 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쉬운 예로,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져 숨을

뭉실함으로 모든 사람의 삶을, 세계를 다 담을 수 있는 포용성의 상징

이다. 그에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정점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

며 과거에서 미래를 꺼내기도 한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머 지않은 미래에 그가 보여줄 우주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몸에 밴 겸손, 삶을 대하는 강익중의 태도

강익중의 작업실은 차이나타운 중심 지역에 있다. 그는 넉넉하지 못했

던 유학생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보냈다. 이 때 가진 소박한 취향을 아 직도 그대로 갖고 있다.

“삶을 대할 때 먼지처럼 더욱더 작아지려고 합니다. 먼지는 장벽이 필요 없지요. 벽이 있다고 해도 그 벽을 넘어 더 멀리, 더 많이 봅니 다. 피카소가 작품에서 자신의 재주가 드러나지 않도록 왼손으로 붓 을 들고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와 닿아있습니다.” 겸손과 소박함이 몸에 밴 그는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한결같은 태도 로 먼지처럼 작아진 모습으로 상대를 대한다. 이런 그를 만나면 누구라 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15


강익중의 작품에서는 인간 강익중이 보인다 “캔버스 앞에 무조건 있다고 창의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제가 늘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씩 규칙적으로 작업하니까 성실하다는 평가도 받지만 오래 앉아 있는 것 이 성실한 건 아니죠. 끊임없이 자기를 부수는 노력,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짜 성실입니다. 작가란 상상력이 커야 하는데 예술가로 자처하며 자기 세계에만 사 로잡혀 있는 작가에겐 큰 상상력이 생기지 않기에 … 전 늘 그점을 경계합니다.” 강익중의 그림은 그의 삶만큼이나 정직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진심이 담겨있다.

그는 예술가로 보이려는 강박감이 없지만, 예술가의 임무에 대해서는 스스로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그러면서 예술가의 범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유연하다.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고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까? 작가는 그런 수많은 일 중 하 나일 뿐 숙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몇 해 전 뉴욕 지역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 어요. 지금이야 자동으로 통행료를 받지만, 당시는 통행료를 직접 내기 때문에 늘 막혔죠. 그런데 톨 부스 중 한 곳이 막히지 않고 술술 빠지더라는 거죠. 알고 보니 그 부스에서 일하는 분이 잔돈을 미리 준비해서 차의 흐름을 막지 않는 슬기로움을 발 휘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자기 일에 열중하여 창의력을 발휘하여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게 작가의 마인드인 셈이죠.” 그래서 강익중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 그의 작품은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에 부응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의미가 명백하다. 그는 자신이 행

복해지길 원하고 타인이 행복해지길 원한다. 작가의 바람이 그림에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자와 기호에 불과하고 어린아이와 노인의 서툰 솜씨에 불과하며 그 자

체로는 어떤 완결된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한곳에 모이니까 거기에 우주가 있다. 작 가의 표현대로 그곳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있다.

강익중의 명랑학파 그리고 공공미술 “공공미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종의 ‘문화혁명’입니다. 모든 혁명에는 대의명분 (Why)과 주도자(Who), 이를 따르는 대중(People)이 필요하죠. 문화혁명을 이뤄낼 공공미술은 기획단계부터 소통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명랑해야 한 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만일 예술에도 학파가 있다면 제가 속한 학파는 명 랑학파일 겁니다.” 그는 2016년 9월에 런던의 대표적인 문화행사 '토털리 템즈(Totally Thames)' 에 초대받아 500명 실향민의 그림으로 완성한 3층 건물 높이의 거대 연등 작 품 '집으로 가는 길(Floating Dreams)' 을 템즈강에 띄우며 주목을 받았다.

“처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거절하시던 분들도 어린 시절을 떠 올리며 고향 그림을 그리시더군요.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우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들의 소원은 꿈에서라도 고향 땅을 밟아보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공미 술은 세계라는 캔버스 위에 ‘희망’이라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 리는 일입니다. 희망은 기다림(When)이죠. 설익은 밥을 먹을 수 없듯이 희망의 씨앗을 심고 기다려야 합 니다. 저는 이역만리 낯선 강물에 띄워진 우 리 어르신들의 간절한 희망이 대서양 태평양을 지나 대동강 두만강까 지 전해졌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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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 담겨있으면 사람들이 움직입니다. 내가 먼저 울고 감동하면 사람들이 따라 울지요.


선한 사람 강익중, 꿈을 꾸는 사람 강익중

그는 천성이 착하다.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이 눈에 보인다. 그에 겐 묘한 언밸런스가 있다. 작은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듣다 보면 스케일

이 크다. 실용적인 사람이다 싶었는데 상상의 끝이 안 보인다. 강박감 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주 집요한 원칙이 있다. 그런 비대칭이 묘한 조

화를 이룬다. 하늘을 보고 걷다 보면 휘청거리고 넘어지기 쉽다. 땅과 앞을 보고 걸어야 안전하게 걷는다. 그런데 일상에 매몰되어 바쁘게 살

다 보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지나가지 않는 날이 쌓이게 된다. 잘 걷지 만, 상상력과 꿈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강익중은 하늘을 보면서도 땅을 딛으며 잘 걷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아쉬운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그는 후대에 어 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강을 건너는 배는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기름이 샐 때만 흔적이 남지요. 인생이라는 배의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이제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입니다. 인 생의 배를 탄 우리는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미래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다행히 예술 가에게는 목적지가 따로 없습니다. 매 순간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고 인연이 닿는 곳이 목적지입니다.” 그는 누구나 아는 바쁜 유명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반갑게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다. 기꺼이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주고, 차이나 타운을 함께 걸으며 동네 구경을 시켜줄 사람이다. 여기에 푸짐한 중국

음식으로 한 끼 식사를 나누며 미소와 함께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 어줄 것 같은 기대를 해도 좋을 사람이다. 진정한 인간애(愛)를 가진 선

한 사람 강익중. 그는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로, 들려주는 얘기마다 메 모장에 적어넣을 만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기분 좋은 부러움까지 안 겨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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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based Korean artist representing the universe, connecting people and always doing good

Open conversations with Ik Joong Kang Over the span of his lifetime, Ik Joong Kang garnered recognitions that have shaped the prestige of his name within the industry. He is a well known artist, who is not only renowned in his domestic country of Korea, but also recognized internationally — his works are exhibited and collected by important international art institutions including Guggenheim museum and also installed in many public spaces such as San Francisco airport, Flushing Main st. metro station, and Princeton public library. Nam June Paik acknowledged Kang as his only disciple. He is also an artist of <Moon Jar>, the oeuvre which have constantly created an important dialogues among art scholars and art enthusiasts.

was invited to the artist’s studio to delve deeper into his own story. Kang,

being an internationally celebrated artist, candidly shared his thoughts about art and life, with his humble attitude and a pair of his sparkling eyes lighting up to our convers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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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University

in Brooklyn. In the

following year, he held his second exhibition <Living

Performance for One Month> in

Two Raw Gallery, a nonprofit gallery in

SoHo, Manhattan.

He installed the tent in the gallery

and spent 10 hours a day there, for a

month. In 1991, he installed <Happy

World> which Multiple Dialogue Infinity with Nam June Paik (Work in Progress), 2009-2010,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Korea, 62,000 Works (Photo by In-Sub Shin)

consists of 2000 pieces of his small

works in Flushing Main Street Station.

A Poor Student Who Came to New York To Earn Money: the birth of 3 x 3 inch art

Big Transition: Nam June Paik and Ik Joong Kang

Korea, came to New York City, which is generally known as the place

3 meters in height and 22 meters in length in San Francisco Airport.

Ik Joong Kang, who graduated from Hong-ik University in Seoul,

for art. Interestingly enough, his major reason for coming to the city was actually not art.

“I came to the states to support my family. Sending money to my parents back in Korea was the main and probably the only priority for me back in those days.”

In 1994, Ik Joong Kang was selected to create the large scale mural of The mural included 20,000 pieces of drawings which illustrated the

diverse lives in New York. Through this artwork, Kang proved that his three-by three-inch series of work reached its peak in quality.

Confident about his career as a professional artist after this project,

he finally quit his series of nine-year part-time jobs and decided to solely concentrate on art.

As soon as he came to the city, he enrolled in Master’s program at

This particular year was also the time when he was selected to

at night, worked at thrift clothing store and flea market during the

June Paik at the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in Connecticut.

Pratt Institute and started working. He made sandwiches at the deli daytime. However, though having hard time juggling two to three

part time jobs day and night, and weekdays and weekends, he still did not want to quit drawing — so he found a creative solution.

“Metro was my studio. The long commute between the deli in Manhattan and thrift store in Queens was the only available time I could use for my artworks. In an attempt find the best solution, I came up with the idea of painting on a hand-size canvas. This is the backstory of how I developed the three-by-three-inch format.” On this small canvas, Kang captured ordinary sceneries and day-today lives of people seen in New York. His diligence, positive mindset,

and talent finally became an advent of his professional career. In 1985, one friend had mentioned Kang and his work during a casual discussion with his professor, where the professor showed deep interest in Kang. Fortunately, the artist already had 1000 pieces

under his collection at the time. After finally getting to meet with the professor, Kang was able to have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Long

participate in the exhibition <Multiple/Dialogue> (1994) with Nam Working in San Francisco on other installations, he got a call from Eugenie Tsai, the curator of the museum. Eugenie suggested Kang

a two-person-exhibition with Nam June Paik since both artists use diverse ingredients in a repetitive format. Kang remembers this as a dreamlike moment. Since this exhibition, Paik showed high interest

to become a true mentor for Kang. Paik faxed a short two-sentence message to the museum: “I am very flexible. It is very important that Ik-Koong has the better space.”

Ik Joong Kang and Nam June Paik, through this exhibition, proved that diverse objects which seem unrelated, when put together,

created a meaning beyond just a sum. They showed that insignificant daily objects explain and represent the universe (sam-ra-man-sang). Kang referred to their philosophy as ‘Bibimbab’. Bibimbab is the Korean traditional dish where the diverse ingredients are prepared

in identical shapes and are mixed to create a harmonious taste. He

believes this balance of repetition and diversity is a power of both of their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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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k also gave him a lot of important life lessons. “After the opening reception, Nam June and I were invited to the dinner organized by the president of Solomon Brothers, who had accumulated a huge amount of wealth. There, Nam June surprised everybody with his profound understanding of Wall Street, a fast changing world of finance. However, after then, he asked us “do you know what will be going on after 1000 years?”. This question is what made everyone, even the rich, feel very small. I literally got shocked at him that day; I thought ‘he is a shaman who sees stars even in daylight’. I also realized that he is the one who has an exceptional imaginative power. I also learned from Paik that the artist is who connects past and future; and who has an ability to see the essence of universe and mind of human at the same time and connects the universe and humans”

stride. He started to collect the children’s drawings around the globe,

also in three by three inches, to incorporate them into a large scale installations.

“I tried hard to find a way to contribute to public interest thanks to Mrs. Hyang-an Kim. Understanding my current position in the world was the start— I think the art is an array of activities to understand where I am now and waking up my soul after understanding.” Realizing that he was currently in the position that he needed to work for nation, he opened the exhibition <100,000 Dreams> in Paju Tong-il Park. He collected children’s drawings about ‘my dream’ from

41 countries. In 2001, he installed <Amazed World>

at the visitors’ lobby of the United Nations in New

Ms. Hyang-an Kim, a wife of

York. Three years later,

the late Hwan-ki Kim, was

he floated the balloon

another mentor he met

i n sta l l at i o n < M o o n o f

during this time. She, 84

Dream> consists of 130,000

years old at that time, left

children drawings in Ilsan

him four advices that are still

Hosu park. At the opening

engraved in him.

“First advice was ’Eat breakfast’. This simple daily task means going step by step while sticking to the basics and staying healthy. Second was ‘Tip generously’, meaning that I should remember the person who gets tipped have family and neighbors to support. Third, she told me to discern opportunity from temptation. Many people consider opportunity as temptation and temptation as opportunity. But here is one more advice to easily distinguish it. Ask yourself if it is beneficial to the history, nation, and the world.”

of Muhammad Ali Center, One Month Living Performance, Two Two Raw Gallery, New York, NY, 1986

drawings were shown. In the

same year, the permanent installation consists of

town residents’ drawings and their objects started

its exhibition at Princeton Public Library lobby. In 2017,

he held the drawing class in Pyeongchang, where the winter olympic will be

held, with 200 children with disabilities.

Ik-Joong Kang, New York, NY, 2014

These important two mentors heavily influenced to Kang in his young age. In an effort to understand his mentors, he developed an insight and the diverse perspectives to see the world. He learned the importance of finishing well at this time. “When going to the next

step”, according to him, “we should perfectly wrap up the current step. If not, we will someday pay the high price.”

For Both Korea in the 40s, World in the 50s, Universe in the 60s

In 1999, when Ik Joong Kang turned into 40s, there was another important transition in his life. His career as a public artist got into 20

the mural of 7000 children

We asked him why he

collects drawings from the children or ordinary people.

“Since a long time ago, I decided to work hard for myself before 40s, then to work for South and North Korea in 40s, then to think about the world in 50s, and universe in my 60s. Delivering the bigger message through collecting and connecting each person’s mind is what I can do for my nation, I believe. The idea of <Hangeul projects> and <Moon Jar> series all came about in order to deliver the desire for the reunification of two Korea. In Hangeul, the vowel and consonant make a complete on sound after they are combined in a syllabic block. Moon Jar, two separate parts — top and bottom — becomes one though fire. This idea of ”two becoming one” will deliver the message for reunification of two Korea and eventually the message of a whole world becoming one.


Multiple Dialogue Infinity with Nam June Paik,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in Korea, 62,000 Works (180 meters), 2009-2010, Photo by In Sub Shin

Study for Bridge of Drream, Imjin River, 2012

Ik Joong Kang’s humble attitude towards everything

Kang’s studio is located in the center of Chinatown - he spent most of

his time in this neighborhood since he came to New York. Even after his great success in career, his inclination to wearing casual jeans and jackets, comfortable sneakers, and getting cheap yet tasty lunch in Chinatown did not change.

“I try to be like dust. Dust probably has no wall that it cannot pass through freely. Going beyond the wall, the dust is able to see more of everything. Picasso sometimes painted in his left hand in an effort not to show off his talents and techniques. And these two stories are all in the same context.” Kang’s attitudes toward everyone is always humble and modest;

He makes everyone comfortable, happy and cheerful by trying to become smaller and smaller like a dust in front of everything before him.

We see Ik Joong Kang within his work “Of course, I wake up early and spend many hours for painting, but just sitting in front of the canvas for all day does not incite creativity. True diligence is all about making continuous efforts to awaken myself and understand the others. The imagination that is necessary for the artist never grows when they confine themselves in their own view. Even though he applies strict rules about his role as an artist, he is flexible about the definition of the artist.

“There are so many interesting things to do in our lives. I think being an artist is merely just one of the many choices people can choose to become; it is not a destiny. A few years ago, I found the interesting article about one tollbooth worker. In order to alleviate the heavy traffic, she always prepares the change in advance. Even though her work may seem insignificant to someone, she has a mindset of an artist because she has that creativity, concentrates on her own work, and she is satisfied that she somehow became helpful to people.” His work is honest as is his life. And it contains his love of people. As a

result, Kang’s work is not difficult. First, his work is visually attractive.

Second, it delivers meaning with clarity. Lastly, he wants him to be happy with his work and also others. His work sometimes is just

about numbers and symbols, and clumsy drawings of children or old people, which can seem meaningless. However, when collected

together, these represent the universe as a whole. As Kang said, there is “Sam-ra-man-sang” in his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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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gs I Know with 2,300 participants, ARKO Museum, Seoul, 2017, Photo by Woongchul An Mountain and Wind, 2,611 Works on Wood, Gwanghwa Mun, Seoul, Korea, 2008-2010, Photo by Woongchul An

The artist of good, and the artist of dream

We could feel that Kang is inherently kind and he has the wisdom gained from practicing the virtue. He is also a person of subtle unbalance. He talks about small daily

moments while he has a huge, far-sighted plan behind it. He is a practical person with

endless imaginative power, where he is

usually flexible but he becomes very strict

at some point. He is a celebrated artist but always willing to tell the world about the

sincere stories of him. Even when he is very

Ik Joong Kang — Happy School of art and public art “Public art is sort of a cultural revolution. Every each revolution needs a proper reason for the revolution (why), a leader (who) and followers (people). Public art, as a cultural revolution, needs a lot of communications from the start. And I think this communication with the public should be clear and bright! So, if there is a school in art, I would choose to belong to Happy School.” Kang was invited to “Totally Thames”, London’s representative

cultural events in 2016. He got a critical acclaim by many media with his “Floating Dreams”, the three-floor-building size lantern floated in Thames.

“I persuaded these old people, who lost (cannot go to) their hometown due to the partition of the country after Korean War, to draw something for me. When they finally start to draw their childhood home, they started to cry. Their desire is to go to their hometown once even just in a dream. Public art should be an art of hope. And hope is to wait. After we plant the seeds of hope through public art, we should wait for them to grow. I believe the hope of reunification already delivered to both Korea from Thames.” 22

busy, he is willing to open the doors of his

studio, treat people to one of his favorite hole-

in-the-wall restaurants in Chinatown, and listen to anyone’s story with a pure smile.

While interviewing him, we’ve felt ambivalent emotions in the air — jealous and pleasant— towards this happy and kind artist, who is

full of love for people and great smiles. This artist, however, does not want to leave a footprint.

“The boat goes across the river does not leave any marks. If I rowed the boat hard, now I’d need to stop rowing to just wait for what happens in the future. Fortunately, the artist does not have a specific destination. Feeling grateful for every moment is the goal of the journey and the place where I eventually end up in, becomes my destination.” “Our life is a train trip. Watching the same scenery in the same train connects us. Through wind and through earth, we are

mingled and connected. Public art is creating the universe with every connected mind.”

“Sincerity moves people. If I am touched, people are too.”


이달의 사진과 글

눈 위에 쓰는 겨울 시 詩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 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黃芝雨, 1952년 1월 25일 ~ ) 시인, 미술평론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 홍익대 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80년 ‘중앙일보’신춘문예 입 선 ‘문학과지성’에 시로 등단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Photography by Do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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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ocus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상을 바꾸다

그래핀 연구의 선봉장(先鋒將), 서울대 홍병희 교수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영문 Taylor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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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세상을 바꾼다’ 하면 제일 먼저 사회운동가나 정치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사회 구조나 제도의 변화는 혁명이 아니고서야 우리의 삶에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반면, 과학기술자들이 연구실과 실험실에 서 추구하고 이루어내는 변화는 빠르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일례로 이메일과 스마트폰이 그러했고, 수 술용 로봇의 보급이 그러했다. 기술의 변화, 즉 ‘테크놀러지(technology)’라는 요소가 우리의 삶과 사회에 가져온 여러 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이 혁명적 변 화를 이루어 내는 데 동참하고 있는 세계적인 과학자, 홍병희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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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흔히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이 허락해야

꿈의 신소재 그래핀(Graphene)

인 과학자 중 이 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있다. 바로 세계 최초로 ‘그

에 보통 사람들이 이제 겨우 익숙해져 갈 무렵 여기저기서 그래핀

하는 거라고들 한다. 과학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노벨상. 한국 래핀(Graphene)’이라는 나노 물질을 대량 생산 하는 기술을 개발한 홍

병희 교수이다. 그의 논문은 전 세계 수많은 과학자에게 영향을 끼쳤 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저명한 과학저널인 Nature 誌에 2009년에 실린 그의 논문은 2017년 12월 현재 6,000회 이상의 인용 횟수를 기

록하고 있다. 아마 한국 내에서는 최소 120년은 깨지지 않을 신기록 이라고 한다. 특히 노벨 위원회(Norwegian Nobel Committee)는 그

사람의 눈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생소한 나노(Nano)라는 용어 (Graphene)이라는 또 다른 생소한 용어가 들리기 시작한다. 현재 서울 대학교 화학과 교수이자 그래핀의 산업화와 상용화를 실현하고자 설

립한 회사, ‘그래핀 스퀘어(Graphene Square)’와 ‘바이오 그래핀(BioGraphene)’의 설립자이기도 한 홍병희 교수를 매료시킨 그래핀이란 대체 무엇일까?

의 그래핀 상용화 연구에 주목했다. 2004년 신물질인 그래핀을 발견한

영어로 흑연을 뜻하는 ‘Graphite’에 화학에서 탄소 이중결합 형식을 띤

Novoselov)교수는 2010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는 그래핀 신소재의 실

막이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등장한 나일

안드레 가임(Andre Geim) 교수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Konstantin 용화학 기술을 개발한 홍 교수의 연구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물질의 발견이 대단한 업적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벨 위원회는

그 물질이 세상에 어떤 이바지를 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나서 야 그 업적을 소급하여 인정하기 때문이다. 홍병희 교수는 그래핀 실용 화학 부분을 선도하는 유일한 과학 자로 노벨위원회 초청을 받아 강연 도 했다. 그의 연구 업적은 한국 과학 자 중 유일하게 스웨덴 노벨 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다. 홍병희 교수는 지

금 그래핀을 활용한 바이오 연구에 매진하며 또 다른 노벨상을 꿈꾸고 있다. 26

분자를 뜻하는 접미사인 ‘ene’을 결합해 명명한 그래핀은 탄소의 얇은 론과 플라스틱이 의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 왔다면, 1940년대에 등장한 ‘신이 내려주신 물질’이라는 실리콘은 컴

퓨터와 반도체 등 전자산업을 이끌어내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에

게 IT의 시대를 선사했다. 실리콘 이후의 시대를 지배할 새로운 소재로

“우리는 홍병희 교수의 상용화 연구 덕분에 노벨상을 일찍 탈 수 있었습니다” – 안드레 가임 맨체스터대 물리학과 교수 (2010년 물리학과 첨단기술)

주목받는 그래핀은 강도는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하고, 다이아몬드보다

열 전도성이 좋아 현재 반도체에서 사용되는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빠 르게 전자를 이동시킬 뿐 아니라 구

리보다도 100배 많은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다. 또, 뛰어난 신축성과 유

연성 및 투명도를 기반으로 말거나


접거나 입을 수 있는 스크린을

“아주 작은 머리카락의 몇만 분의 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 가능하게 하여 구부러지는 디스 계가 나노 세계인데요. 그 나 플레이(display) 시장과 웨어러 한국의 홍 교수와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노 물질 중 하나가 그래핀입니 블 전자 디바이스 시장에 대혁신 –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맨체스터대 물리학과 교수 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포스 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된다. 현 트닥(post-doc: 박사후과정)을 (2011년 전자신문) 재 그래핀은 전자, 정보통신 분 하면서 탄소나노튜브(carbon 야를 넘어 화학, 에너지, 생명공 nanotube) 연구를 시작했는데 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활용 가능성이 검증된 상태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래 요, 이게 그래핀과 상당히 비슷해요. 그래핀이 김밥을 펼쳐놓은 구조 핀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대량생산해서 상용화할 수 있는가’인데 한국 라면, 김밥을 똘똘 말아놓은 게 탄소나노튜브라고 할 수 있죠. 그걸 의 홍병희 교수는 그래핀 분야의 전 세계적인 권위자로서 이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정에서 스카치테이프로 흑연을 떼어내서 그래핀을 만드 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으로는 대량 생산이 어려웠기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때문에 화학적으로 대량 생산할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지요.”

“산업계가 요구하는 것을 잘 몰라

청년 과학자를 매료시킨 나노(Nano)의 세계

홍 교수가 그래핀 연구를 시작한 것은 2004년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질로 유용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자

재직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 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핀 소재를 산업에 적용이 가능한 크

비아대학교 김필립 교수(현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실에서 연구원으로

체만으로도 그 작업이 고도의 장비와 인력, 많은 시간과 비용이 있어

기와 품질로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하 는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인 홍병희 교수와 그의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그

래핀 터치스크린 상용화의 발판을 마 련했다. 한국이 디스플레이 산업과 반 도체 산업을 선도하고 있는 만큼 그 래핀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무궁

하고, 그의 연구 업적은 삼성, LG 같은

기업에는 그야말로 기업의 미래를 좌 우할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핀의 무한한 가능성을 현실로

10여 년의 시간을 학자로서 그래

핀 연구에 매진했던 홍병희 교수는

2012년, 그래핀의 상용화를 위해 ‘그 래핀 스퀘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

립하고 그래핀의 무한한 가능성을 현 실화시키기 위해 과감히 새로운 세계 로 뛰어들었다.

“처음 회사를 만들었을 땐 여러 연구 단체들에 그래핀 샘플과 그래핀 합 성 장비를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 습니다. 하지만 여러 분야에서 그래 핀의 적용 가능성이 입증되면서 그 래핀을 실용화, 상용화하는 데 초점 을 맞추게 되었죠. 지금 진행하고 있 는 것은 차세대 OLED 디스플레이에 그래핀을 적용하는 것인데, 그게 성 사되면 스마트워치(Smartwatch) 같 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차세대 플 렉시블 디스플레이 (Flexible Display) 에도 그래핀이 쓰일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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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핀의 가능성만큼이나 관련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또

도 쉴 틈이 없는 홍병희 교수가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의 원

비용으로 그래핀을 양산할 수 있는 핵심 기술과 특허를 보유한 그래핀

와 세 딸은 항상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온 마음으로 응원하기에 그는 늘

그만큼 그래핀 개발 경쟁도 치열한 것이 사실이다. 획기적으로 저렴한

개발의 선두주자인 홍병희 교수의 업적과 그의 회사는 일찌감치 2014 년에 미 경제 주간지 블룸버그(Bloomberg)를 통해 차세대 모바일 디 바이스 스크린 시장에 기여할 대표적 그래핀 기업으로 주목받았다. 홍

교수는 이에 멈추지 않고, 최근 바이오(bio)와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그

래핀이 유망한 소재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 발맞춰 또 다른 그의 회사 인 ‘바이오 그래핀’을 통해 그래핀 응용 사업의 영역을 확대하였다.

“저희 집안에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분이 계셨어요. 그 일을 계기로 그래핀을 이용해서 특히 파킨슨병이나 치매 치료제 개발을 위한 줄기세포 배양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어요. 그래핀 위에서 줄기세포를 키우면 굉장히 잘 자라거든요. 바이오 분야에서의 그래 핀은 향후 건강보조식품을 비롯하여 퇴행성 뇌 질환 치료제와 같은 신약 개발까지 그 적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래서 그래핀이 줄기세포를 통한 신경 및 생체 조직 재생과 안티 에이징(anti-aging: 항노화)에 활용될 수 있다는 건 정말 고무적입니다. 이 분야에서 선 두주자라는 건 큰 행운이죠. 현재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연구팀과 함 께 그래핀을 사용한 파킨슨병 및 치매 치료제를 개발해서 임상에 들 어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래핀을 다각도로 응용하기 위한 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홍 병희 교수는 여전히 연구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강조하며 많은 사람에 게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

동력은 가족이다.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은 남편이자 아버지임에도 아내 미안하고 고맙다.

“누구보다 아내가 많이 고맙죠. 제가 석사 때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 데요. 교사였던 아내는 제가 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포스 트닥(post-doc: 박사후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로 자 리 잡을 때까지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특히 뉴욕에서 3 년 반 있는 동안, 남편은 연구한다고 잘 들어오지도 않고 혼자 애 키 우고 살림하고……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도 불평 없이 잘 참 아주고 지원해줘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아이들한테도 그렇 죠. 한창 바쁠 때는 애들 얼굴을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못 보는 경우 도 있으니까요. 요즘은 가끔이라도 애들 데리고 놀러 가고, 최대한 가족을 위한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는데 여전히 쉽지는 않습니다. 항상 많이 미안하죠. 그래도 아빠를 자랑스러워하는 딸들이 있어 힘이 납니다.” 한국 과학계뿐만이 아니라 세계 과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그래핀 연구

의 선봉장(先鋒將)인 홍병희 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운이 좋게

도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낮춘다. 그 겸손함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꿈의 신소재 그래핀 의 무한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그 혜택이 사회에 환원되어 모두가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인류를 위한 홍 교수의 소 망의 근원이다.

의사가 될뻔한 과학자, 그의 꿈과 가족

앞으로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홍병희 교수의 대량 상용

는 홍병희 교수의 모습은 그가 과학자가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핀 제품들이 사람들의 삶을 더 편리하고 윤택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그

돈이나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고자 하

“부모님으로부터 의대 가라는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는데, 제가 부 모님 성화에 못 이겨 의사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아마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긴 어려웠을 거예요. 제가 좋아 하는 화학을 한 덕분에 저의 재능을 발견할 기회를 얻었고, 제가 좋 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이 일치하다 보니 좋은 성과도 얻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아빠를 꼭 빼닮아서일까. 그의 딸 셋 중 고등학교 2학년인 첫째 딸은 종군 기자가 꿈이라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걸어온 홍 교

수도 부모가 되고 보니 영락없이 자식이 그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만다. 그래서 종군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 라는 딸을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하지만, 누구를 탓 할까? 돈이나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고집스럽게 가고

자 하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딸의 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임을 홍 교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딸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밖에 사실상 별다른 도리 가 없다고 한다.

그는 늘 아내와 세 딸에게 미안하다. 하는 일이 많아서 항상 시간에 쫓 기다 보니 다정한 남편이나 모범적인 아버지가 되기는 어렵다.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그래핀 연구와 제품 개발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한시 28

화 연구를 통해 그래핀이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생산되고 수많은 그래

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과학자로서 노벨상을 받게 되는 날을 함께 꿈꾸 어 본다.

그래핀(Graphene)이란?

흑연을 뜻하는 ‘Graphite’에 탄소 이중결합 형식을 띤 분자를 뜻하는 접

미사인 ‘ene’을 결합해 명명한 그래핀은 탄소의 얇은 막이라고 볼 수 있 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안드레 가임(Andre Geim) 교수와 연구원이

었던 콘스탄틴 노보셀로프(Konstantin Novoselov) 박사가 2004년에 세

계 최초로 흑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떼는 방법으로 그래핀을 분리 해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탄소 원자가 육각형으로 벌집처럼 무수히 결

합한 평면 구조로 이루어진 나노 물질 그래핀은 두께가 0.2㎚(1㎚는 10

억 분의 1m)에 불과하지만 강도는 강철보다 200배 강하고 전기 전도율 은 실리콘의 100배 이상, 열전도율도 금속인 구리의 100배가 넘는다. 신 축성이 좋아 구부리거나 면적의 20~30%를 늘려도 전기적 성질이 손상

되지 않으며 빛의 98%를 통과시킬 정도로 투명하다. 이러한 그래핀은 반

도체의 정보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여줌으로써 실리콘을 대체할 수 있는 신소재로 주목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신축성과 유연성 및 투명도를 기반으로 말거나 접거나 입을 수 있는 스크린을 가능하게 하여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시장에 대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현재 그래핀은 전자, 정보통신 분야를 넘어 화학, 에너지, 생명공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활용 가능성이 검증된 상태이다.


Change the world within an invisible world

Professor of Graphene Research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Hong Byung Hee 'Changing the world' is perhaps the first notion that comes to mind when referring to social movements and politicians. However, revolutionary changes in social structure and institutions do not come easily, and it takes a considerable amount of time to bring about visible changes in our lives. On the other hand, changes that scientists and engineers pursue in labs and laboratories quickly come into our lives naturally and eventually settle to become our new way of life. E-mail and smartphones have been that way, and the spread of surgical robots is also an exemplifying case. These changes in technology, that is, the changes that technology has brought to our lives and society, are revolutionary.

met with Hong Byung Hee,

a world-renowned scientist who was actively involved in achieving this revolutionary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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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bel Prize is known to be highly coveted and selective, not to

and the wearable electronic device market by providing a screen

of earning. Yet every scientist may dream of winning the Nobel Prize

been used in various fields such as chemistry, energy, biotechnology,

be considered as an ordinary achievement that anyone can dream one day -- in Korea, this one particular scientist has gotten closer to

it than any other person has. It is Professor Hong Byung Hee who developed the technology to mass-produce nanomaterials called 'Graphene'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it is astonishing to consider how many scientists around the world have been affected by his

work. His article, published in 2009 in the world's oldest and most

that can be folded with great bendability. Currently, graphene has and medicine beyond electronic and information communication

fields. Now, the remaining question is, how can you mass-produce graphene at a reasonable price and commercialize it? Professor Hong is currently working as a top leading researcher across the world to proactively continue this research.

prominent scientific journal, Nature , has more than 6,000 citations as

Fascinated By The World Of Nano

breaking accomplishment in Korea for the past 10 years.

served as a researcher at the laboratory of Professor Philip Kim at

of December 2017. This has been noted as an unprecedented recordIn particular, the Norwegian Nobel Committee focused on the commercialization research of graphene. Professor Andre Geim and

Professor Hong began researching graphene back in 2004, when he Columbia University (currently a professor at Harvard University).

Professor Konstantin Novoselov, who discovered graphene were

“Nano world is an invisible world in the size of a few thousandths of

the result of Professor Hong's research on its practical application

researching carbon nanotubes at post-doc at Columbia University,

awarded the Nobel Prize in 2010, which could have potentially been technology in 2004. It is clear that the discovery of new substances is a great achievement, but

the Nobel committee has not acknowledged its achievements ret roa ct i v e l y u n t i l i t h a s

specifically identified what

contribution the substance can bring on to the world. As a leading scientist in the field

of practical application of graphene, Hong was also invited to speak at the Nobel Committee

very small hair, and one of the nanomaterials is graphene. I started which is quite similar to graphene. If graphene is the structure that can be compared as a kimbap, carbon nanotube is what the kimbap is wrapped around. In the process of studying it, I saw the scotch tape stripping the graphite and producing graphene. However, since mass production was difficult in that method of processing, I was worried about how to massproduce chemically.”

-- in addition, his research

It is quite evident that producing

works by a Korean scientist to be

material alone requires that

achievements are the only exhibited at the Nobel Museum.

The Wonder Material – Graphene

As the world is just starting to get used to the term Nano , which

means unrecognizable by the human eye, people suddenly start to

hear another unfamiliar term called Graphene . What is graphene,

which enabled to establish Professor Hong Byung Hee as the world leader in the field of industrialization and commercialization of such material?

Graphene, which is named by using the word ‘Graphite’ and the suffix

something useful as an invisible the task be highly equipped

with manpower, time and money. Professor Hong and his research

team, who are unique in developing methods to produce graphene

materials in size and quality that can be valuable to the industry, have laid the foundation for commercialization of graphene touch screen for the first time in the world. As Korea is leading the display industry and the semiconductor industry, there is abundant opportunities

for utilizing graphene, and his research achievements are the very important driver for corporations such as Samsung and LG.

'ene', can be known as the thin films of carbon. The introduction

Bringing Graphene Into Everyday Life

brought a change to not only our clothing but other aspects of our

more than 10 years as a scholar, has established a company named

of nylon and plastic caused a sensation during the 1930’s which everyday life -- and in 1940s, the world was given silicon, referred to

as “the material given by the Gods”, which shaped the electronic industries such as computers and semiconductors. Graphene, which

Professor Hong, who has been working on graphene research for ‘Graphene Square' in 2012 in order to commercialize graphene and turn the infinite possibilities into a tangible reality.

has been attracting attention as a new material to dominate the

“As the applicability of graphene has been demonstrated in various fields,

better thermal conductivity than diamond. It can transfer electrons

we're doing now is applying graphene to the next-generation OLED

post-silicon era, is more than 200 times stronger than steel and has 100 times faster than silicon currently used in semiconductors. In

addition, it is expected to lead to a revolution in the display market 30

we have focused on practical and commercialization of graphene. What displays, which will allow graphene to be used in wearable devices such as smartwatch and next-generation flexible displays.”


As a leading developer of graphene, Professor Hong has developed

being a loving husband or an ideal father in the face of the global

graphene at a remarkably low cost. His company has garnered

the ultimate force that keeps him going.

core technologies and even carries patents that can mass-produce attention in Bloomberg News in 2014, for being the leading graphene

graphene research and product development wars, but his family is

corporation to contribute to the mobile device screen market.

“I thank my wife more than anyone else. I met her and got married

and biotechnology fields, he plans to expand his business through

until I got my doctorate degree and even a post-doc in the United States.

Professor Hong has not stopped there. In recent years, in the bio another company of his, “Bio Graphene”, to meet the growing demand of the promising material.

when I was doing my Masters -- she was a teacher, who worked hard Especially that time when we lived in New York for three and a half years, it must have been difficult for her to look after our children while I was mostly spending time at the lab. But I was able to get to where I

“There was someone who died of dementia in our family. As a

am thanks to all of her support. Nowadays, I try to make time for the

result, I became more involved in research on stem cell culture for

family and go out with the kids, even though it is still not easy. I always

the development of drugs for Parkinson's disease and dementia, by

feel so sorry to them. Nonetheless, I am happy to have daughters who

using graphene. Growing stem cells on graphene makes them grow

are proud to call me their father.”

up very well. Graphene in the biotechnology field can be applied to the development of new drugs, such as health supplements and drugs for degenerative nerve diseases. It is really encouraging to know that graphene can be used towards stem cell-mediated nerve and vital tissue regeneration, and can even be used for anti-aging -- I am fortunate to be a leader in this exciting field. We are currently working with Johns Hopkins University team to develop a drug for Parkinson's disease and dementia using graphene in order to enter the clinic.” Although he is involved in a business of commercializing various

Hong Byung Hee, the frontrunner of graphene research, expands his horizons beyond the science community in Korea and solidifies his reputation across the international scene as well. Nonetheless,

he humbly lowers himself by claiming that he had only come to this

spot because he had received a lot of help around him. His hope is that the research will bring all these new infinite possibilities of

graphene into a reality, as these contributions will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for humanity.

applications of graphene, Professor Hong still emphasizes his role as

Perhaps it may take about 10 years or even up to 20 years, but

will benefit the world.

become more actively known all over the world, and many of

a researcher and expresses his desire to continue the researches that A Journey In Pursuit Of Passion And Happiness

He chose to follow his path based on his passion, not money nor prestige.

Hong’s mass commercialization studies have made graphene

these graphene products have already made people's lives more

convenient. Furthermore, all that there is left to anticipate is the day when he finally receives his well-deserved Nobel Prize.

“My parents always told me to go to medical school. I sometimes wonder what may have happened if I gave into my parent’s persuasion in becoming a doctor. Maybe I may not be as happy as I am now. By sticking with chemistry that I loved so much, I got a chance to discover my talent, and it seems that I am getting good results by doing what I like and what I do well.” His first daughter, a sophomore in high school, dreams of becoming a war correspondent one day -- perhaps she could have gotten the

daring attitude from her father. Hong, who has already walked the path that she is now facing in front of her, is no different from any other parent who wants their children to lead a more comfortable and stable life. A part of him wants to persuade his daughter to stray away from taking a risky path of journalism, but who is he to

blame her? The boldness that he has taken as a young man himself

is now purely reflected upon his own child, and he out of everyone knows that this is ultimately the best way to live happily; the only

responsibility left for him as a father is to pray for his daughter’s future.

He is always sorry for his wife and his three daughters. It is hard

What is Graphene?

Graphene, which is named by using the word ‘Graphite’ and the suffix 'ene', can be known as the thin films of carbon. Professor

Andre Geim of the University of Manchester and researcher

Konstantin Novoselov of the University of Manchester released the world’s first graphene by using a scotch tape to separate the

graphene from graphite material. Nanomaterials Graphene has a thickness of 0.2 nm (1 nm is 1 billionth of a meter), but its strength is 200 times stronger than steel, its electric conductivity is more than 100 times that of silicon, and its thermal conductivity is more than

100 times that of metal. It is able to bend and stretch up to 20~30%

of the area, and it is transparent enough to pass 98% of light. Such graphene is not only attracting attention as a new material that can replace silicon by dramatically improving the information processing

speed of semiconductors, but also enables a display screen that can be folded with excellent stretchability, flexibility and transparency.

Currently, graphene has been used in various fields such as chemistry, energy, biotechnology, and medicine beyond electronic and information communication fie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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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1)

너는 왜 안 놀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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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단다. 달라진 건, 졸업

니, 그분은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인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갑작스럽게

어. 여전히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매일 놀러 다니는 데 온 정신이 팔

벅 인사를 하곤 했단다.

한 초등학교에서 바로 건너편 위치한 중학교 건물로 등교하는 것뿐이었

렸었지. 수업이 끝난 후 널찍한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축구를

미치게 되었다는 거야. 그 후로는 길을 걸어가시던 아주머니를 만나면 꾸

하거나, 새로 만난 친구들과 동네 개울가로 고기를 잡으러 다니곤 했어.

기철이 집 마루에 걸터앉아 놀 생각에 신나하고 있었어. 그런데 기철이

중학교 1학년이 된 지 몇 달이 지날 무렵, 같은 반 짝꿍인 기철이네 집에 놀

만 다른 깨끗한 공책에다가 그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깨알같이 요약하

러 갔단다. 기철이는 반에서뿐만 아니라 전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학 생이었어. 그뿐만 아니라, 아이

는 큼지막한 책가방을 열어 교과서, 참고서, 노트 필기한 공책을 꺼내더니 는 거야. 그런 광경을 처음 봤어. 너무 신기한 나머지 “기철아! 너 뭐 하니?”

“너는 왜 안 놀아?”라고 물어봤

지. 기철이는 빙그레 웃더니만

템플이라는 모의고사가 있었

“응, 이거 오늘 배운 내용을 다

는데, 나라 전체에서 한번 시험

시 복습하면서 새 공책에 요약

에 몇만 명씩 응시하는 전국적

정리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

인 시험이었지. 기철이는 그 시

단다. “너도 학교 수업이 시작

험에서도 매번 전국 1등을 차지

되기 전에는 꼭 배울 내용을 읽

하던 수재였단다. 인구가 몇 천

어보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

명밖에 되지 않는 두메 시골 마

아와서는 그날 배운 내용을 다

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

시 복습해 봐”라는 조언도 덧붙

는 일이었지. 백 년에 한 번 날

였어.

까 말까 하는 천재적인 학생이 었어.

기철이의 요약 공책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만, 글씨는 또 얼

기철이 집은 넓은 들판 한가운

마나 잘 쓰는 지! 지금껏 그렇게

데 있었는데 큼지막한 나무 대

글씨를 또박또박 이쁘게 적는

문이 매우 인상적인 기와집이

아이를 만난 건 기철이가 처음

었단다. 넓은 안뜰을 지나면 커 다란 마루가 있었고 그 주변은

이었을 거야. 부모님에게 한 번

많은 방으로 둘러싸여 있었어. 그 큰 집에는 식구들이 많이 살지 않았던 것

도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너무 글씨를 개발새발 흘려 써서 아

도 없고 함께 누가 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단다.

를 너무 잘 쓰는 기철이가 무척 부러웠단다. 한참이 지난 후 방과 후 복습

같아. 집에 놀러 가 보면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 기철이 부모님을 뵌 적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기철이 아버지가 농림수산부라는 중앙 정부

무도 알아볼 수 없다고 종종 꾸중을 들은 적이 많았거든. 그래서인지 글씨 을 다 끝낸 기철이와 신나게 놀고는 집에 놀아왔단다.

부처에 차관으로 일하신 고위공무원이었는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집 마루에 앉아 있으니 갑작스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인지 여러 생각

밍크코트를 입은 채 분홍색 보따리를 손에 쥐고 매일 십 리나 되는 길을 걸

고 “나도 예습 복습을 해서 기철이처럼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

는 이야기가 있었지. 동네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긴

어서 읍내에 다녀오던 동네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어. 이상한 행색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미친 여자라고 놀리곤 했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주머 니가 기철이의 고모라고 믿고 있었지. 지금 생각

해보면 조현병(정신분열증)이라는 정신질환이 있는 분이셨던 것 같아. 그때에는 정신질환에 대 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단지 정신이 나간 미

이 교차했단다. 마음속에는 “나도 기철이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어”, 그리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기철이는 어디 가도 선생님과 동네 어른들에

게 공부 잘하는 천재로 칭찬을 받곤 했거든. 칭찬이라고는 별로 받아본 적 도 없고, 또 매 시험에서 중간 이하의 등수를 벗 어나 본 적이 없었던 내게 기철이는 우상과도 같 은 존재로 여겨졌단다.

친 사람으로 여겨졌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

그 후 기철이를 좀 닮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를 입으시고 길에 걸어가시던 아주머니의 기억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철이의 말투, 글씨,

하신 거지. 지금도 한 여름날 두꺼운 겨울 코트 이 생생하게 남아 있단다. 지금이라면 잘 치료받

고 회복하셨을 수 있는데 아주 안타까운 일이었 단다.

어느 날은 동네 아이들이 길을 걸어가시던 아주 머니를 “미친 여자래요” “미친 여자래요” 하면

었단다. 짝꿍으로 매일 같이 수업을 듣고 시간을 공부하는 습관을 점점 닮아가게 되었어. 한두 달

이 지난 후 학교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이 되었단

다. 예전보다는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제법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와서 수월하게 시험을 볼 수 가 있었어.

서 놀려대길래 내가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친 적이

며칠 후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

린다는 생각에 화가 무척 치밀어 올랐었어. 집에

일어나봐라” 난, 영문도 모른 채 뭐 또 혼날 일이

있었지. 내 짝꿍 친척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놀 돌아와서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

름을 부르더니 일어나라고 하시는 거야. “윤성민, 있나 걱정이 되기도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벌떡 33


일어났지. 선생님은 “이번 시험에서 가장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이 바로 윤

반면, 기철이는 공부를 잘해서 대전에 있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어. 고

이 손뼉을 치자”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

는 한국과학기술대학교 (카이스트 KAIST: Korean Advanced Institute of

성민이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성민이가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다 같 지더라고. 생전 처음 공부로 칭찬을 받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야.

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월반을 해서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만 갈 수 있다 Science and Technology)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단다.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에게 성적이 올라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고향에서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던 우리에게 기철이는 범접할 수 없는 우

지. 부모님은 “그 아이가 천재이고 배울 게 많으니 친하게 지내라”라고 격

대학생이 된 기철이를 만난 적이 있었지. 고딩(고등학생)이던 우리와는 달

사실과 기철이라는 친구 때문에 갑자기 성적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해드렸 려하시는 거야. 하여튼 그 날은 잠 못 이를 정도로 기분이 좋은 하루였단다.

작은 성취에 기분이 좋아지니까 다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공부를

해 보니까 잘하면 칭찬을 받는구나!” “나도 공부를 하니까 실력이 느네” 참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 후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단다. 수학 같이 기초가 튼튼해야 잘 할 수 있는 과목에서는 여전히 높은 점수를 받지

는 못했지만, 역사, 사회, 지리와 같이 열심히 암기해야 하는 과목에서는 반 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곤 했었지.

다음 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기 하루 전날, 기철이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만 “너, 혹시라도 내가 암기 과목에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보여줄래?”

“내가 수학 답안지를 보여줄 게” 기철이가 나에게 부정행위를 하자고 제안

상 같은 존재였단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여름방학 어느 날 이미 카이스트 리 긴 머리 장발을 하고는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거야. 학교에서 담배 피우

면 선생님에게 죽도록 얻어맞던 시절이라 엄두도 못 낼 일을 기철이는 대 학생이 되어 마음껏 할 수가 있었던 것 같았어. 지금도 담배를 한 번도 피 워본 적이 없지만, 그때 기철이가 나와는 다른 어른 같은 존재, 자유를 누

리는 멋진 인격체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단다.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느 냐고 물어봤더니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설명을 하더라고.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졸업하고는 벤처기업을 창립할 생각이라고 하더라고.

그 당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직장으로 인기가 있

었는데 갑자기 이름도 없는 벤처기업을 한다길래 좀 의아하게 생각했었단

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문과 지식을 습득해서 남들보다 또 시대보다 훨씬 앞서가던 진정한 천재가 아니었다 싶다.

을 해 온 거야. 세상에나, 전국 1등 하는 아이와 내가 커닝(부정행위) 파트

그 후 기철이와는 연락이 끊겨서 어디에서 사는지 또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이 풀리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한 문제라도 틀리는 것을 용납

러 번 네이버로 이름과 학력을 쳐서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찾아보곤 했단

너로 인정을 받게 된 거야. 기철이는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아야만 직성 할 수 없었던 거야. 그 중간고사에서 기철이 수학 답안지를 보고는 내 수학 점수가 많이 올라갔지. 기철이는 내게 답안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어. 기 철이는 그 시험에서도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았단다. 지금은 부정행위 를 한 것이 무척 부끄럽단다. 그 덕분에 갑자기 반에서 등수가 엄청 올라갔 지만 말이야. 그 후로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좋은 성적 을 얻게 되었어.

수가 없단다. 그런데도 늘 고마운 생각을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단다. 여

다. 가장 비슷한 사람이 모 대기업 연구소에 일하고 있다는 검색결과를 얻 었어. 나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직접 만나서 “내가 너 때문에 사람 이 되었어” “그때 정말 고마웠어”라고 말해주고 싶단다. 아마, 기철이는 내 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수 있겠지.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몇 마디 도움을 준 것뿐인데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많이 바꿔놓았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거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나는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을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평소 공부에 흥미가 없었는데, 전국 수재인 친구를

만 간다는 공주사대부고에 갈 실력에는 조금 못 미쳤지만, 대전에 있는 학

다. 우리에게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지. 친구의 옷차림, 생각, 말

따라서 멀리 대전이라는 큰 도시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 천재들 교에는 들어갈 실력을 키울 수가 있었단다. 하지만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 게 되면 하숙비와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고향에 달랑 하나 있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단다.

짝꿍으로 만나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 전보다 공부를 훨씬 잘하게 되었단 투, 행동까지 나도 모르는 새 닮아가기 때문이란다.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 이나 멘토들이 많이 있단다.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그런

좋은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지식을 쌓고 학위를 취득하는 것 못지않은 소중한 자산이란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34


EDUCATION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2월의 인물

디트리히 본회퍼 (Rev. Dietrich Bonhoeffer)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

로서, 유대인들을 구하는 싸움에 뛰어든 정보국 스파이로서 그가 걸어

그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 의사인 칼 본회퍼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의무’라 여겼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받는

월 9일)는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나치 운동가였다. 와 파울라본회퍼 사이에서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뛰

어난 학문적 실력과 지위를 가진, 1513년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삶은 목사로서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함이었다. 그는 반나치 활동을 것을 특권이자 영광이라 여긴, 시대의 참 신앙인이었다.

온 중산층으로 전통적인 루터교회인 개신교 가문이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히틀

그는 목사가 된 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첩보국에 관여하다가 발각

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되어 핍박을 받고 처형당했다. 히틀러가 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독일 국

민의 마음을 유혹해 유럽에서 유대인을 모두 없애려는 모략을 꾸밀 때 독일 안에서부터 나치를 무너뜨리려고 움직이는 소수의 독일인이 있

었다. 디트리히 본회퍼(Rev. Bonhoeffer)도 그중 하나다. 그는 히틀러

암살 공모에 가담했다가 1945년에 플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교 수형에 처했다. “악에 맞서지 않는 것은 악에 동의하는 것이며 악을 위 해 일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나서던 그는 결국 자기가 믿는 대로 살 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성경에 기반을 둔 확고한 신학을 가진 신학자로서, 목양의 가치를 소

중히 여긴 목사로서, 남들보다 몇 걸음 앞서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

러가 직접내린 사형명령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회퍼의 기도문

오, 하느님, 이른 새벽 제가 당신을 바라고 웁니다. 저를 도와주시어 기도하게 하시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게 하소서. 혼자서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안에는 어둠이 있지만, 당신과 함께, 거기엔 빛이 있습니다. 저는 혼자지만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 가슴은 연약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저는 쉬지를 못하지만, 당신 안에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제 안에는 고통이 있지만, 당신 안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당신의 길을 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가야 할 길을 당신은 아십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기도 중에서 35


EDUCATION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 직장 생생 체험기(2)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직장 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을 텐데. 어쩌 면 판타지 같기도 한 이런 행복한 커리어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담근 지 가 벌써 18년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미국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변 화를 겪었고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힘들었다. 20년 전 유학생으로 와서 MBA 프로그램 을 마치고 취업비자를 받아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취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좌충우돌하며 버텨낸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 것이다. 지난날의 나의 경험이 지금 막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달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 Seunghee Chung 영문 Taylor Lee 정리

편집부

워너 브라더스의 인기 만화 루니툰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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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학점 이수와 상관없이 매일매일 수업이 없는 시간과 요일엔 무 조건 사무실에 출근해서 내가 인턴인지 정직원인지 헛갈리게 만들기.

둘째는 모든 부서 사람들이 제일 하기 싫은 일을 도맡아서 해주어 내 일의 영역을 확실하게 하기. 그래서 내가 없으면 그 귀찮은 일을 다시 자기들이 해야 할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 칠만큼.

그토록 봐야 믿겠다면 확실하게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다음날이 마침

수업이 없는 날이라 내 조그만 토요타 코롤라 자동차 트렁크에 청소 용 품을 하나 가득 챙겨 넣고 새벽같이 워너 브라더스 본사가 있는 LA 북

쪽의 버뱅크(Burbank)까지 막히기로 악명높은 하이웨이 405를 타고 단숨에 달려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에 천장 가득 쌓인 파일과 책상과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서류 뭉치들 워너 브라더스 루니툰의 벅스 버니, 태즈 그리고 트위티

보는 것이 믿는 것, 그리고 믿는 것이 보는 것!

서양의 격언에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란 말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우리의 속담처럼 무슨 일이든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해보아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뒤집어 생각

하면 눈에 보이지도 또 만져지지도 않는 실체는 믿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행동으로 무

언가를 옮기는 것이 주저될 때도 많고 원하는 결과물이 바로 보이지 않 으면 두려움이 먼저 앞길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보는 것을 믿기 위해서 는 믿는 것을 볼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가 보는 것은 우리의 인식 체계와 무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받는 선택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봐야 믿겠다면 확실히 보여주겠노라!

을 벽 쪽 빈 캐비닛에 내가 아는 수준에 한해 항목별로 정리해서 넣어

두었다. 몸 하나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공간이 조금은 숨통이 트일 만큼 넓어졌다. 그리고 책상과 바닥에 가득한 먼지를 몇 번씩 벗

겨냈다. 당장 일과 관련해서 책상 위에 놓을 문서는 없었지만 대신 연 필꽂이랑 알록달록 볼펜과 형광펜, 노트들을 가져다 놓고, 점심시간엔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랏(Lot)에 가서 워너 브라더스에서 만드는 실

베스터, 테즈, 트위티 같은 작은 카툰 캐릭터 인형들을 사다가 큐브를 꾸몄다. 그래도 좀 정리를 하고 꾸며놓으니 꽤 그럴듯했다.

하기 싫은 일은 다 나에게 주세요

어느 정도 책상과 주변 정리를 하고 난 뒤에 인턴 첫날 만난 부서 소속 다섯 명의 비서들에게 가서 말을 시켰다.

“저…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요? 혹시 정리해서 파일룸으로 보낼 서류 나 팩스 보낼 거 있으면 다 날 주세요. 내가 할게요.”

“정말이에요? 오늘은 학교를 안 가나 봐요? 우리야 고맙지만…”

워너 브라더스에서의 인턴 첫날도 그랬다. 학생 인턴이니까 아무 때나

처음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뭇거리던 비서들이 긴가민가하더니

인 책상. 이곳에서의 나의 위치는 자명했고, 왔다 갈 뜨내기라는 그 믿

혹은 스타급 프로듀서나 감독들이었고, 본인들이 제작하거나 주연한

와도 된다는 말과 한동안 방치되었음이 틀림없는 구석 자리의 먼지 쌓

음을 어찌 깰지 막막했다. 홀로 점심을 먹게 된 당혹스러운 인턴 첫날 을 마치고 혼자 살던 아파트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했다.

‘나한텐 단지 MBA 졸업 학점을 채우기 위한 시간 때우기용 3개월짜리 인턴십이 아닌데… 어떻게 해야 인턴십 후에도 계속 일할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단 1년 만이라도 미국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밤을 홀딱 새 가며 고민한 결과 일단 2가지를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팩스 거리 몇 개를 주었다. 수신자를 보니 유명 배우들과 그 에이전트 영화의 주말 흥행 수입을 보고받는 팩스였다. 쉬운 일이었지만 워낙 많

은 영화를 배급하고 많은 제작자와 배우들을 상대하다 보니 특히 주말 흥행 성적을 집계해서 보내는 월요일 아침엔 이 일이 녹록지만은 않았

다. 팩스를 한 장씩 보낸 뒤에는 모두 보내졌다는 확인까지 해서 차곡 차곡 영화별로 다시 일일이 모아 두어야 했다. 그런데 이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톰 크루즈, 샌드라 불럭, 조엘 실버 같은 유명 배우와 제작자가 정말 팩스를 받아볼 수 있는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라니! 거

기다 팩스를 보내면서 영화별 주연 배우와 제작자의 이름을 외울 수 있 었으니 금상첨화였다.

37


팩스 보내는 일을 시 켜보니 쓸만했든지

아니면 며칠 동안 계 속 얼굴을 보여서 그 런지 비서들이 다른

일거리를 주기 시작

했다. 대형 블록버스

서양의 격언에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란 말이 있다. 하지만 보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믿는 것을 볼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터 영화나 전략적으 로 중요한 영화별로

우리의 인식 체계와 무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받는

필요한 자료를 모아

선택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바인더를 만들고 영 화가 상영되는 내내

매일매일 회사에 얼굴을 비치고,

매주 바인더에 들어

책상에 앉을 때마다 워너 브라더스 캐릭터 인형들을 보면서,

트하는 일이었는데,

그리고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면서

가는 자료를 업데이

자료의 양이 적게는

1인치, 많게는 3인치 바인더에 들어가는 분량으로 상당히 방

대했다. 거기다 이 자 료를 다시 60여 개의

배급 국가별로 나누

고, 사장과 수석 부사

내 자신이 스스로 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 내 믿음대로 조금씩 많은 것들이 눈앞에 보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그들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점점 내가 인턴이 아니라 정직원인 듯 착각을 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워너 브라더스 직원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장, 부사장, 디렉터 등 주요 임원들의 수만

큼 다시 복사해야 해

나의 두 가지 전략이 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마저 세뇌시켰다는 게 참 재미있다.

서 자잘하게 손이 가

수십 년간의 작업과 데이터가 철저히 전

산화가 되어 있는 미 국 직장에서는 특히

자체적으로 제작되 어 쓰고 있는 내부 시 스템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분석 하나 할 수가 없고 이 시스 템을 자유자재로 이 용하지 못하면 무능 력하다 취급받기 일

쑤이다. 붙들고 옆에 앉아 살뜰히 설명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인턴이 단시간 내에

그 시스템을 정복하 기란 거의 불가능한 터에 아예 차근차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매뉴얼까지 주고 마

음껏 시스템을 써보

라니 이런 횡재가 어 딨나 싶었다.

믿는 것이 보는 것 이다

는 건 둘째 손 치더라도 엄청나게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처음에는 얘가 해봤자 얼마나 할까 싶었는지 찔끔찔끔 일거리를 주던

가 쉽게 접할 수 없는 임원들이 보는 자료를 한 장 한 장 복사하면서 공

레한 일을 맡겼다. 조금씩 신뢰를 얻어가나 싶어 기뻤다. 또 깨끗하게

늘 생기는 복사기의 종이 걸림 문제! 잡무 중의 잡무였지만 인턴인 내

부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였다. 물론 그 당시 내 지식으로는 대

부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지만 수십 개의 바인더를 만들고 복사하 고 매주 업데이트하면서 임원들이 어떤 자료를 보는지를 알 수 있었고,

운이 좋게도 생각보다 빨리 기본적인 영화 배급 용어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인턴 생활을 두어 주 해보니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 보였다.

부서 사람들이 매일매일 출근한 지 한 달쯤 지나자 아예 통째로 자질구 정돈되고 재미있게 워너 브라더스 카툰 캐릭터로 꾸며진 책상과 큐브

를 보고 신기했는지 몇몇 부서원들은 일부러 구석진 내 자리까지 와서 말을 시키기도 했다.

“와, 이렇게 꾸며 놓으니 여기가 완전히 달라 보이네요! 원래부터 워너 브라더스 만화 캐릭터들을 좋아했나 봐요?”

그중 하나가 UAT (User Acceptance Testing)라고 해서 내부 시스템을

차츰 왕래가 잦아지니 일거리도 늘기 시작했고, 또 일을 시키려다 보

유저가 직접 테스트해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최종 확인하

들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점점 내가 인턴이 아니라 정직원인 듯 착각을

새로 런칭하거나 중요 업데이트 버전을 배포하기 전에 실제 비즈니스

는 것이다. 개별 항목별로 일일이 시스템 명령어를 줄 때마다 명령값대 로 작동을 하는지를 하나하나 테스트하는 것인데 지루하기가 짝이 없

고 더군다나 주어진 업무 이외에 사이드로 해야 하는 일이니 모두들 귀 찮아했다. 조심스럽게 사람 좋아 보이는 담당자를 찾아갔다. “혹시 그 UAT… 나도 해봐도 되나요?”

“오, 그럼요! 오히려 시스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하면 혹시

나 지나칠 오류도 잡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학교 공부도 있는데 시간이 되겠어요?”

심지어 격려까지 해주면서 테스팅 매뉴얼을 하나 가득 안겨주었다. 38

니 더 자주 사람들이 내 자리로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그

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워너 브라더스 직원들을 세뇌(?)시키기 위

한 나의 두 가지 전략이 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마저 세뇌시켰다는 게 참 재미있다. 매일매일 회사에 얼굴을 비치고, 책상에 앉을 때마다 워 너 브라더스 캐릭터 인형들을 보면서, 그리고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하면

서 내 자신이 스스로 그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을 하게 되니 내 믿음대 로 조금씩 많은 것들이 눈앞에 보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으로 사장이 주관하는 전체 부서 미팅에 초대되었 다. 이 미팅에서 앞으로 미국에서 내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큰 첫 번째 교훈을 얻을 줄은 미처 모른 채 사장이 들어오는 미팅 자리 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만 마냥 좋고 기뻤다.


My Journey in Corporate America by Seunghee Chung, Former VP at Viacom Media Networks:

Climbing The Corporate Ladder of Success(2) What you are good 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s something you’d like to die for. Possessing an exceptional skill at something does not always translate to having a real passion in itself: workplace is no exception. In another words, doesn’t everyone share a mutual desire to find a job that they’re good at, which actually happens to perfectly parallel their actual interests? Exactly 18 years into this fantasy-like care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 I’ve realized that no matter how demanding or tiring the work may be, doing something I love somehow creates more energy to be constantly fueled by. However, I must admit that I’ve also had my own fair share of hardships throughout my career, but those were eventually lulled by frequent joyful moments that netted out the negatives. But thanks in part to having a job that I truly enjoyed, I was able to endure this 20-year-old journey, where I started out as an international MBA student who stepped into a foreign country with limited English that wasn’t even my native language. I hope that my humble narrative of the past days will encourage and inspire the minds of young working professionals who are currently in the nascent stage of building their careers within the mainstream society today, and I am happy to openly share my episodic memories on a monthly basis for them.

Seeing is Believing and Believing is Seeing!

The phrase “Seeing is Believing” has been a popular motivator

throughout the western culture. It essentially means that we can only understand something in its entirety after seeing it through

our own eyes and having the direct, tangible experience. Having an unforeseeable future might explain why some people may

stay reluctant before moving plans into action, and this kind of

uncertainty feeds into a bigger fear that may block the path. But

in order to believe what we see, courage is needed to see what we believe — because what we see may only be a view that is influenced by our very own cognitive system and subconscious state.

I will certainly show you!

The first day of my internship at Warner Bros. proved to be no

exception. As a student intern, I couldn’t help but to be reminded that my job was transient, by getting assigned to a corner filled

with collected dusts; I could not figure a way to break this notion Tweety from Looney Tunes, Warner Bros.' popular animation series

somehow. After my disappointing first day of internship where I had a lonely lunch accompanied by no one, I returned to my apartment to reflect and think thoroughly about my next st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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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three-month internship is not supposed to become another fleeting experience, stemmed by formality, just so I can obtain

my MBA credits for graduation. How can I become a full-time employee and continue to work here? It would be great if I could build more experience in the US even just for a year before returning back to Korea…’

After staying up all night and recalibrating my strategy going

of personalizations, I gave myself a pat on the back after realizing that my arrangement work was quite plausible.

No Job is Below Me

Not long after settling down in my desk and working area,

I approached the five Executive Assistants (EAs) that I’ve acquainted myself with on my first day.

forward within this company, I decided to execute two things into

"Is there… anything I can help you with? If there are any

my class schedule, I planned to go to the office everyday — the

them to me. I will do it.”

action. First of all, regardless of the number of credits to get and goal was to blur the lines so they can’t remember whether I am an intern or a full-time

documents to be sent to the file room or be faxed, you can give

"Really? You didn’t go to school today? I mean, we certainly appreciate it…"

employee. The second

strategy was to roll up

The EA’s, who were

any kind of work that

offer, shared some of

my sleeves to take on

startled by my bold

they dreaded on, and to

their faxing duties with

become so irreplaceable

me. As I got a chance

that they cannot fill my

to take over their task,

void when I am gone.

I’ve noticed that these

By making my presence

recipients ranged from

bigger here, maybe

A-list actors, their agents,

they could not bear the

or a star producer/

thought of going back

director, and these

to the days when they

were the fax documents

had to do the work

reporting the weekly

themselves.

box office earnings of

movies. It seemed like

If seeing was actually

a rather straightforward

believing, then it meant

responsibility — but

that I would certainly

given the volume of

have to show them.

the work, especially on

Fortunately, I did

Monday mornings after a

not have classes the

following day, so I packed

up cleaning supplies and stuffed them into the

box office weekend, the Warner Bros. Looney Tunes' famous characters Sylvester, Tweety, Bugs Bunny and Taz

trunk of my tiny Toyota

work actually demanded

an acute sense of attention to ensure that

all fax documents have

Corolla; I headed straight towards the Warner Bros. headquarters

been sent, confirmed, and organized by movie titles. To me,

soon as I arrived, I got to work. I gathered all papers that were

was interacting, even indirectly via fax, with some of the biggest

in Burbank by taking notorious Highway 405 for heavy traffic. As

stacked to the ceiling or even scattered across the floor, and

organized them to the best of my ability into an empty cabinet against the wall. Suddenly, a once-narrow space that was hardly

able to pass a person by, became quite spacious enough. Then

afterwards, I removed the dust from the desks and replaced them with pencils, colorful pens, highlighters, and notepads. And

this job could not have been better. I could not believe that I names in Hollywood like Tom Cruise, Sandra Bullock and Joel Silver — not to mention, this was also a good opportunity for me to familiarize myself with the names of the leading actors and

the names of the producers for the movies under the distribution arm of Warner Bros.

during lunchtime, I went out to the company store to buy small

Perhaps they may have been impressed by the fact that my help

Bros. to decorate the cube. After taking a look around my touch

a several days in a row — other EA’s started to share more of their

cartoon character toys like Sylvester, Taz and Tweety from Wa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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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 rather useful, or they have gotten used to seeing my face for


responsibilities with me. One of the duties involved collecting of

to slowly learn the system without anyone’s help, in a short

large blockbuster movies, and updating them into the binder

dependent on usage of Big Data and operating internal systems,

all the materials considered to be strategically important for the every week during the film's screening. The amount of material is probably less than 1 inch, sometimes the papers accumulated up

to be more than 3 inches. In addition, it was very time-consuming to divide the data by ~60 distributing countries, and to distribute

the copies among the key executives, such as the divisional president, senior vice presidents, vice presidents, and director.

And to add on top of the pressure, the copy machines never fails to cause a paper jam and slow down the process! Of course, it

was hardly understandable by my knowledge at that time, but I was able to gain access to materials that the executives were

looking at, and above all, I’ve learned the technical terminologies and jargon within the movie distribution industry. I’ve made dozens of binders, both

period of time. Within the American workforce that is heavily it is impossible to conduct any kind of proper deep-dive analysis

by not being able to navigate the systems freely; thus, this could lead to being framed as incompetent. Using only this manual

book, I loved having the control of my learning pace and having the freedom to play around the system to get familiarized quickly.

After All, Believing is Seeing!

After a month has passed by, the team members who used to

periodically entrust me with only one or two responsibilities, eventually completed the full transition of their so-called “grunt-

work” onto me. Nonetheless, the thought of me earning their

entire trust gave me a sense of accomplishment. Also, there were even instances

copied and updated on

where some members

a weekly basis, which

gave me the basic

There is an old saying that “Seeing is Believing.”

foundation and allowed

me to interact with my

It essentially means that we can only understand

team quite sooner than I

something in its entirety after seeing it through our

Spending a couple of

In order to believe what we see, however, courage is

thought.

weeks as an interns

helped me see which tasks were considered

own eyes with the direct, tangible experience. needed to see what we believe — because what we see may only be a view that is influenced by our very own

to be boring and

cognitive system and subconscious state.

unattractive among

By repeating every day’s routines and thinking of

Among these unwanted

myself as one of the team members, I started to see that

the team members. tasks was UAT (User Acceptance Testing),

things were aligning with the way that I’ve envisioned.

which was a protocol prior to the launching of

of the team came to my

desk to comment on my decorations, which

must have sparked their interest.

"Wow, the place looks

totally different after

decorating! Have you always liked cartoon

characters from Warner Brothers?"

I started to work more

and more, and as I tried to expand my

responsibilities, more people came by my desk. It was amazing to

an internal system to verify that the system is working properly

see that they’ve started to mistake me for a full-time employee

for each item, a test is done to confirm whether it works as

have actually worked in brainwashing them. And, surprisingly,

among business users. Every time there is a system command

command value. But this process had a reputation for being quite

manual and time-consuming, which added on top of their daily

work. So I carefully looked for the person in charge who looked approachable, to learn more about its complexities. "That UAT… Could I take a stab at it?"

instead of an intern, and those two operational tactics of mine MYSELF as well. I showed up to the office everyday, stared at my Warner Bros. toys sitting on my desk while finding any kind of

opportunity to help out with small tasks, and thought of myself as

one of the team members. By repeating these routines, I started to see that things were aligning with the way that I’ve envisioned.

"Oh, sure! Since you don’t know the system, you will have a more

One day, for the first time, I was invited to the entire department

still need to study for school, would you have enough time?”

a seat at the table was enough to excite me at the moment; little

fresh perspective and might even be able to catch errors. But you As he handed over the testing manuals along with words of

encouragement, I was determined to take on this opportunity

meeting led by the divisional president. The fact that I got to have

did I know, this meeting became a pivotal point where I learned

the first most important lesson that shaped my career in America.

41


EDUCATION

Touch of Humanity

신동호 마케팅팀 팀장과 함께 떠나는 모나미(Monami) 여행

복고 바람이 불고 있다. 레트로룩이 유행한다고 하더니만 거리에는 다시 나팔바지가 하나둘씩 보 이고, 추억의 LP 레코드판도 심심치 않게 여기저기서 빼꼼히 그 얼굴을 내민다. 옛날 다방처럼 신 청곡을 틀어주는 DJ가 있는 포장마차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재래시장 골목에서 심심할 정도로 특별한 소스나 양념도 없이 바로 막 튀겨서 종이 상자에 담아 주던 옛날식 그대로 파는 통 닭집도 생겼다고 한다.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만이 줄 수 있는 여유에 기대어 잠시 쉬어 가고픈 마음 때문인지 아날로그 감성을 입고 새롭게 다시 우리 곁으로 추억 열차 를 타고 돌아온 것들이 있다. 지금 세상을 호령하는 것은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디지털임에도 ‘찰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진을 보기 위해 족히 몇 분은 기다려야 하고 그마저도 한 번 찍으 면 수정할 수 없는 즉석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귀환이 그렇고, 스마트폰의 강력한 메모 기능에도 밀 리지 않고 여전히 무언가를 기록하고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두툼한 다 이어리의 건재함이 그렇다. 아날로그 감성을 말할 때 종이로 된 다이어리와 함께 빠질 수 없는 펜 또한 그러하다. 이젠 손가락이 그 자리를 대신 했지만, 종이와 함께 펜은 인류의 기록 문화까지 논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해왔다. 그 아날로그 펜의 대표 주자가 모나 미(Monami) 153 볼펜이다. 지금 신동호 모나미 마케팅팀 팀장과 함께 모나미 153 볼펜을 추억하 며 모나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짝 엿보고 오는 재미있는 시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글 Sarah Chung 영문 Haejin Oh 정리 42

편집부


저택에 사치를 부리면 귀신이 엿보고, 먹고 마시는 데 사치를 부리면 신체에 해를 끼치며, 그릇이나 의복에 사치를 부리면 고아한 품위를 망가뜨린다. 오로지 문방 도구에 사치를 부리는 것만이 호사를 부리면 부릴수록 고아하다. 귀신도 너그러이 눈감아줄 일이요, 신체도 편안하고 깨끗하다. 조선 후기 문인 유만주(兪晩柱)의 일기 <흠영(欽英)> 중에서

대한민국의 필기 문화를 바꾼 혁신적 패러다임

물자가 부족하던 1960-70년대를 살았던 세대들은 귀한 연필이 닳 고 닳아 몽당연필이 되면 그 끝을 정성스레 칼로 깎아 낸 뒤 모나미

153 볼펜의 몸통에 넣어 사용하기도 했다. 관공서나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빨강, 파랑, 검정 모나미 153 볼펜을 테이프로 붙여 삼 색 볼펜처럼 쓰기도 했으며, 골목길을 점령하고 놀던 개구쟁이 아이

들은 153 볼펜을 변형해서 비비탄을 넣고 장난감 총처럼 가지고 놀

기도 했다.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간 코흘리개 어린이들은 모나미 왕 자 크레파스로 처음 그림을 그렸고, 1980년대 민주화 항쟁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대학생 언니 오빠들에게 모나미 병 매직과 유성 매 직은 대자보를 쓰는데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우리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모나미의 제품은 우리의 유년기와 성장기를 함께 했다.

“볼펜은 1942년 세계적으로 처음 상용화가 되었다고 해요. 하지 만 우리나라는 모나미가 1963년 최초의 유성 볼펜인 모나미 153 볼펜을 출시할 때까지 여전히 펜촉에 잉크를 찍어 쓰고 있었지 요. 모나미 153 볼펜의 등장은 당시로써는 엄청난 기술 혁신을 의 미했어요. 마치 10년 전 아이폰의 등장에 버금갈 정도로요. 메모 하거나 글을 쓰기 위해서는 가방과 옷에 잉크가 흘러 묻는 것도 불사하고 잉크와 펜을 따로 가지고 다녀야 했던 문제와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져 기록물들이 소실되는 문제를 간단히 해결 해 주었으니까요.” 43


모나미 컨셉스토어 - 에버랜드점

특히나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던 우리 선조들이 종이, 붓, 먹, 벼루를 글 방의 친구라고 칭하거나 (문방사우 文房四友), 각각에 벼슬 이름을 붙

여주기도 하기도 하고 (문방사후文房四候), 혹은 보물이라 칭하기도

(문방사보 文房四寶) 했던 것에서도 보듯이 족제비 털로 만든 황모붓 에서부터 만년필로, 그리고 펜으로 이어지기까지 필기구는 소수 지식

인의 전유물이었고 한 시대의 엘리트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사서 쓸 수 있는 값싼 모나미 153 볼펜의 등장은 펜을

산하는 데 성공했고, 153 볼펜은 출시 직후부터 하늘을 찌를듯한 인 기였죠. 1966년에는 하루에 1,000개씩 팔리는 제품이 되었다고 하 니까요. 1967년에는 아예 회사 이름도 브랜드 이름을 넣어 모나미 화학공업주식회사로 바꾸게 되죠. 지난 50년간 153 볼펜의 누적 판 매량만 37억 자루에 달하는데 이것은 지구를 12바퀴 이상 돌 수 있 는 양이지요.”

통한 민주화였다.

모나미 153 볼펜은 펜의 재료와 형태, 표면의 질감과 색상까지 정말 평

비범을 뛰어 넘는 평범 – 슈퍼 노멀(Super Normal)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 기능에 가장 충실하면서 군더더기가 없

프랑스어로 ‘내 친구’라는 뜻의 모나미(Mon Ami)는 1963년 당시 판매

가 15원으로 출시한 3번째 제품이라는 뜻이 담긴 153 볼펜을 시장에 내놓았다. 어떤 계기로 모나미는 우리나라 최초의 볼펜을 만들게 되었 는지 신동호 팀장에게 물었다.

“1962년 5월 국제산업박람회를 방문한 당시 광신화학공업사 대표 였던 송삼석 모나미 창업주께서 잉크가 들어 있는 조그만 막대기로 글씨를 쓸 수 있는 신기한 필기구를 처음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그 후 일본에서 잉크 제조 기술을 전수받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963년 5월 마침내 국내 최초의 볼펜인 모나미 153 볼펜을 생 44

범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평범하고 사용하기 쉽다는 것은 절대로 거저 어야 하고, 뛰어난 기술과 품질을 갖췄지만 굳이 내세우고 자랑하지 않

는 솔직함이 있어야 한다. 대다수 우리는 평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니 솔직히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해야 더 정확 할 듯하다. 남보다 더 뛰어나고 남보다 특출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강 박관념 속에서 우리는 종종 평범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

람은 물론이거니와 물건 또한 독특하고 통통 튀어야 눈길을 끌고 특별

하다 인정받는 시대에 평범함은 지루하고 고루하다 취급받는다. 하지

만, 슈퍼 노멀(Super Normal)은 평범함 속에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담고서 마음을 움직인다. 평범함 속의 특별함, 그리고 특별함 속의 평 범함. 모나미 153 볼펜이 슈퍼 노멀인 이유이다.


모나미 컨셉스토어 - 동대문 DDP점

모나미 본사 스토리 연구소 - 고객이 직접 제작하는 DIY 잉크 프로그램

모나미 본사 스토리 연구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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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것이 강한 것이다

볼펜을 쓰면 악필이 된다는 신문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면서 필

기구의 민주화를 이룬 모나미 153 볼펜은 1963년 등장 이후 산업화와

현대화의 물결과 함께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1990년대 경제적인 풍요

와 맞물려 예쁘고 화려한 문구인 팬시 제품 시대와 함께 전성기를 맞이 했던 문구 시장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컴퓨터의 대중화와 스마트폰

의 생활화로 손글씨를 사용하는 일이 급속도로 줄면서 달라진 필기 환 경에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나 모든 문구 제조사들이 고전을 면치못

할 때 2014년 모나미는 대담하게 문구 시장에 파장을 일으킬 작은 돌

하나를 던진다. 153 볼펜 50주년을 기념하여 한정판으로 ‘모나미 153 리미티드 에디션’을 출시하며 프리미엄 문구 시장에 도전장을 내민 것 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손목시계가 필요 없어졌지만, 고급 손목시계 는 여전히 그 수요가 상당하잖아요. 단 순히 시계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 급 손목시계는 ‘나’를 나타내는 패션 아이템이 된 거죠. 마찬가지예요. 손글 씨가 줄어들수록 필기구가 사용자의 스타일과 아이덴티티를 반영하는 고 급 패션 소품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주 목했어요. 구매 욕구가 생길 수 있는 소장가치가 있는 필기구를 만들어본 거죠. 50년 전에는 15원이었고 지금은 한 자루에 300원인 153 볼펜의 원본 모습을 금속의 몸체로 복각해서 고급 화한 리미티드 에디션은 한정 수량 1 만 개가 1시간 만에 팔렸고 뉴스 보도 를 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고급 문구 시장의 진입 가능성과 함께 모나미가 동시에 집중한 것은 다각

도의 시장 분석과 소비자의 니즈를 파 악하는 일이었다. 모나미의 상품 매력은

‘필요할 때 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 대비

품질이 높은 것’이고, 모나미의 제품 경 쟁력은 200가지가 넘는 자체 개발 잉크 를 바탕으로 내구성과 필기감, 디자인의

어떨까요? 일반인도 전문가처럼 네일아트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젤 네일펜, 의사들이 수술 부위를 표시하기 위해 환자의 피부에 직접 사용하는 의료용 펜, 글씨를 쓰거나 선을 긋는 것만으로 전기가 통 하는 회로를 그릴 수 있는 과학용 전도성 펜, 자동차 제조공정 중 흠 집을 남기지 않고 공정이 마쳐지면 표식이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산 업용 마카, 수산 시장 상인들이 물기 있는 표면에도 쉽게 쓸 수 있는 마카, 주부들이 반찬 통이나 비닐봉지에 날짜와 내용물을 적어두고 설거지를 하면 세제에 저절로 지워지는 키친 마카, 욕실과 주방의 더러워진 타일 틈새를 메꿔주는 마카. 모나미의 제품 스펙트럼은 생 각 이상으로 넓어요.” ‘펜이 필요한 모든 곳과 모든 사람을 위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심플하 지만 뚜렷한 비전을 가진 모나미는 50년이 넘도록 일관된 모습으로 어 떤 제품에서도 찾을 수 없는 뚜렷한 정체성을 얻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고시생들이 밤새워

불 밝혀 공부할 때 외롭지 않게 친구가 되어 주었던 153 볼펜.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우리의 부모님은 이 모나 미 153 볼펜으로 우리의 출생신고를 했

을 것이고 대다수 사람이 이 볼펜으로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을 작성하고 혼인신고를 했을 것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필기구인 펜.

첨단 기술의 급격한 발달과 디지털 문명

의 뿌리칠 수 없는 편리함의 유혹 속에 서 오히려 펜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

간을 기록하는 고귀한 도구가 되었고, 그 어떠한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화

려한 비주얼 임팩트보다 감동을 준다. 그래서 펜이 지닌 상징적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모

나미의 2대 수장 송하경 대표의 믿음은 모나미의 슬로건인 ‘터치 오브 휴머니티

(Touch of Humanity)’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완벽한 합을 이루는 ‘자체 기술력’에 있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계적인 스마트폰을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

었다. 우수한 반도체 회사가 반드시 세

처럼 뛰어난 잉크 제조능력이 있다고 해

도 잉크가 펜의 요건 중 하나로 우수하 게 발현되려면 다른 요건들이 받쳐 주어

야 한다. 이 두 가지 시장 경쟁력을 발판

으로 모나미는 지금 산업용, 생활용, 의 료용 등 필기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던 새로운 영역에서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필기구라고 해서 꼭 종이 위에만 써 야 할까요? 생각을 좀 다르게 해보면 46

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거스를 수 없는 시

들이 있는 반면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고히 본연의 가치가 유지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나미 153 볼펜은 우리에게 단순한 필기구, 그 이 상으로 다가온다.

멤버십에 가입하는 모든 분께 모나미 153 볼펜을 드립니다.


Touch of Humanity

A Trip Down the Memory Lane with

Monami

It seems that people are finding comfort in those old-timey, analog gadgets that allow them to slow down and enjoy a mental rest in midst of this fast-paced, modernized era. The shift from the analog phase to the technology-driven digital current times have brought upon us a world represented by endless strings of 0’s and 1’s -- but honestly, what harm can be done in taking a little trip down the memory lane? Take the instant film camera for example: the process is not instantly executed by any means, as it requires waiting a good few minutes for the photo to print as well as applying the mandatory airbrush, but people apparently consider the entire routine as part of the charm itself. Diaries and journals have also been making a comeback nowadays, despite the ubiquitous scheduling and note-taking apps on everybody’s cell phones. And when it comes to taking notes, the most essential tool is the pen. Recently, human fingertips have somewhat come to replace physical writing instruments, but there is no denying that the pen and paper have long played a pivotal role in documenting the human civilization. Speaking of analog sentiment, the Monami 153 ballpoint pen is one instrument sure to evoke that nostalgic mood to many who grew up in Korea. Below, we cordially invite you to join Mr. Shin Dongho of Monami’s Marketing team in a brief time travel that takes a look at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the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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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tionizing The Korean Stationery Industry

In the 1960-70’s, when everyday commodities were still scarce in

Korea, people often shaved off the end of pencil stubs a bit and put them in an empty body part of a Monami 153 ballpoint pen to elongate them for a better grip. In another widespread practice,

they combined red, blue and black Monami ballpoint pens into one bundle with a tape and pretended it was a ready-made

multi-color pen. Stories like this abound. Monami 153 ballpoint pens were often transformed into toy guns by kids, while Monami

Prince crayons were the choice of most toddlers as they started drawing. In the 1980s’ nationwide democracy movements,

college students grabbed Monami’s bottled ink markers and

permanent markers to write posters calling for justice. As such, Monami’s products have always been there with the Korean people, and anyone can give an account related to one of the products, often with a fond memory.

the third product the company sold at the price. How did the first Korean ballpoint pen come into being?

“It was during the International Trade Expo held in May 1962 that Song Samseok, the founder of our company, then representing Kwangshin Chemical Industry, Co., Ltd., got shocked to discover a new writing instrument containing the ink inside of the body of the pen. He learned the ink making technology from Japan, went through countless trials and errors, and finally succeeded in making the first pen of such kind in Korea in May of 1963. From the moment it debuted, the 153 pen enjoyed huge popularity. By 1966, it was selling one thousand units per day. In 1967, even the company name, Kwangshin, was changed to Monami. The 153 model has sold over 3.7 billion units up to date.” The Monami 153 ballpoint pen carries a rather normalized exterior — from its material and shape to the texture of the

“Ballpoint pens were largely commercialized in as early as 1942, but body to the colors, everything about the pen looks simple and Koreans were still using fountain ordinary. But achieving this pens dipped in ink bottles simplicity, while still being able until 1963, the year Monami to guarantee ease of use, was launched the country’s first oila feat not that simple at all. It based ballpoint pen, dubbed the was important that the pen 153. The Monami 153 marked performed flawlessly and be a significant technological of exceptional quality while advance back then, comparable still coming across as modest to the arrival of iPhones a and humble in design. In an decade ago. Our ballpoint age where everything from solved two then-unsolvableproducts to people themselves problems at once: first, carrying are easily judged mostly by 모나미 데코마카로 직접 그린 모나미 아트카 (이달우 일러스트레이터) around the ink bottle meant their appearances, sticking to risking getting ink stains on your simple design and functionality clothing and bag while traveling. could have beared the risk of Secondly, traditional ink didn’t last that long, it grew faint over time being branded as “old and boring.” Nevertheless, Monami held and eventually the documents were as good as nothing. The 153 onto the value of “normality” and their conviction has proven solved these issues effectively at once.” fruitful so far. The steadfastness of the minimal design has been For our ancestors and the many previous generations led by scholars who have long cherished the art of writing, their

possession of writing tools, such as brushes made with weasel hair and fountain pens, was a barometer of their elite social

status. It was mostly those in the upper class who owned these proper instruments. The emergence of the affordable and

engraved in so many hearts and minds of its users, and ironically, the “simple” pen seems to hold an unparalleled “unique and special” place in the country’s stationery industry.

Strongest May Not Always Survive, But Those Who Survive Are Certainly The Strongest

accessible Monami 153 pens have thus revolutionized the way

The Korean stationery market saw its peak during the 1990s

of the power of the pen.

began to turn. Unprecedented use of personal computers and

writing tools were distributed, and resulted in a “democratization” Beyond Normal – Super Normal

The name of the company, Monami, means “My Friend” in

French. The 153 earned its name from the selling price at the time of launch (15 Korean Won) and the fact that the model was 48

economic boom. With the turn of the century, however, the tide

smartphones has remarkably reduced the need for handwriting, if not entirely eliminated it yet. While most manufacturers of office

supplies suffered, Monami made a bold move in 2014. It launched

the Monami 153 Limited Edition ballpoint pen to celebrate the

50th anniversary of its debut, tapping into a premium market.


“Today, people wear fine watches as a fashion item to express their identity rather than out of the actual need to tell 모나미 컨셉스토어 - 홍대점 the time. Likewise, we noticed that the stationery goods were increasingly being viewed as a sophisticated fashion item that reflected the user’s taste and style. So we set out to make the kind of tool that could satisfy the desire for collectibles. Using the same mold as the original 153 pen, we upgraded the body with metal to give a more refined feel. A total of 10,000 units of this limited model sold out in an hour.” As Monami made its foray into a premium market segment, it realized the importance of market and consumer analyses.

Based on continued research, the company has been eagerly

applying its expertise in diverse areas, such as industrial and medical, as well as everyday products that make our life easier.

“Do you have to use a pen only on a piece of paper? How about using them on non-paper materials? For example, our nail pens let you enjoy your own work of art on your nails. We also make medical markers that doctors use to draw lines on patients’ skin. Some industrial markers disappear without a trace when the process is over, such as in automobile manufacturing, and others can write on wet surfaces. You’d be surprised to learn the full range of products we carry today.” To make products for every place and every person in need of a pen. Such is the simple yet clear vision of Monami that

the company has adhere to throughout its entire 50-year long history. In the course, it earned a reputation for its unique identity, and rightly so. A Touch of Humanity

Despite all the convenience brought to this age by cutting-edge technologies, pens still remain as the primary recording tool that humans turn to for documenting the most important moments amidst a series of fleeting moments in life.

Under the leadership of CEO Song Hakyung, the secondgeneration leader of Monami, the company made it clear that

they will go beyond just making products and will delve more

into researching the essence of human behavior related to writing and documenting. With this vision, the company embraced a

more inclusive slogan, “Touch of Humanity.” Song believes that the symbolic value endowed upon a simple pen will never go

away - after all, a pen is what you must use to “sign off” life’s

most important events, such as marriage, birth, and first home ownership. Pens are used by every one of us to communicate, and more often than not, we do rely on them to express our

sincere feelings. It is certainly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Monami 153 has been bridging hearts for more than half a century now.

Pens are the most common desktop staple that anyone has easy access to, and using it in often cases, using one helps you

to sincerely extend your heartfelt gratitude to the other party

receiving the note. The feeling of mutual in a sense, pens more

than often function as the medium that facilitates a genuine communication between people, and that is probably how so

many people have come to find the nostalgic sentiment reflect

on the good old Monami 153 ballpoint pen. It is a true icon of humanity, indeed.

Newly subscribed members of Monami 153 ballpoint pen as a gift.

will receive a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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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음악에 대한 제 사랑은 절실함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비올리스트

한예진 글 Juyoung Lee 사진 Kibum Kim 정리

편집부

2008년 미국 맨해튼 음대 ‘Lillian Fuchs’ 기념 실내악 콩쿠르 우승 2007년 ‌ 이탈리아 ‘Citta di Brescia’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특별상(Best Performance of Contemporary piece) 2007년 ‘Five Towns Music and Art Foundation Young Musician 콩쿠르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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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올리스트, 남들은 하나도 힘들다는 현악기를 둘이나 연주하는 음 악가 한예진. 서양적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으로 대변되는 클래식 음악가 이미지보다는 동 양적 단아함과 수수함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그녀이기에 그 어떤 난해한 곡도 그녀가 연 주하면 친숙하게 느껴질 것만 같다. 뉴욕 내 다수의 콩쿠르에서는 물론, 이탈리아의 유수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실력파 음악가이면서도 연주를 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냥 음악 이 좋고, 그래서 늘 음악을 더 잘하고 싶고, 제 음악을 들으러 오는 고마운 청중들에게 최 고의 연주로 보답하고 싶어서”라고 한다. 이렇게 겸손하고 착한 음악가 한예진의 음악 여 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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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선물하며 소통하는 기쁨

저는 음악이 정말 좋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기 회를 청중분들이 주시는 거잖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거기 에 보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해 드리는 것 뿐인 것 같아요. 선물이 값진 이유는 받는 사람은 물론

주는 사람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

다. 그녀가 각처에서 들어오는 연주 요

청을 까다롭게 취사선택하기보다, 일 정이 허락하는 한, 흔쾌히 수락하고 늘 기쁜 마음으로 연주에 임하는 것은 그

렇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연주하는 까

닭일 것이다. 더불어,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 익숙한 그녀 는 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 연주를

할 때 훨씬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자신 의 마음을 표현하며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 같다.

선한 인상과 연주하는 모습이 유독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비

올리스트인 한예진은 요즘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들어오는 연주 요청 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현재 롱아일랜드 컨서버토

최근에 열흘 동안 페루의 여러 도시 를 돌며 투어 콘서트를 하고 왔어요. 그때 가장 좋았던 건, 함께 연주하러 다닌 열 명의 음악가분들은 물론, 현 지 관객분들과 음악을 통해 정말 하 나가 되는 느낌을 받은 거였어요. 제 대로 음향 시설이 갖추어진 콘서트홀 이 아닌 시청 광장이나, 학교 강당, 현 지 교회 등에서 콘서트를 했는데도 정말 많은 분들이 와 주셨고요. 누구 나 알만한 유명 클래식 음악이랑 현 지인들에게 친숙한 찬송가를 중심으 로 연주를 한 덕분인지 오신 분들이 다들 정말 좋아하셨죠. 연주하는 저나 들으시는 관객분들 모두 온전 히 함께 즐기면서 소통했던 시간이었어요.

리(Long Island Conservatory: 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음악 학교)에

가난한 토착민들의 비율이 높은 페루에서는 클래식 음악 연주를 듣거

어티(American Bach Society: 미국과 캐나다 내 바흐 음악의 연구, 연

할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너무나 기쁘고 보람 있었

서 강사로 재직하며 어린 음악 영재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바흐 소사이

주, 및 감상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로 1972년에 설립되었다)와 같은 음악 단체나 공공 문화 센터에서 주최하는 음악회에서 연주를 한다. 최

근에는 유명 클래식 음악가들과 함께 페루의 다섯 개 도시를 돌며 다

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드물다. 그런 사람들에게 훌륭한 연주를 접 다. 그래서 앞으로도 클래식 음악을 더 알리고 음악을 통해 소통할 기 회가 주어진다면 무료 연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갈라 콘서트(gala concert: 여러 연주자가 나와

많지 않은 강사 월급으로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라 뮤직 페스티벌(Lyra Music Festival)에서의 독주도 성공적으로 마쳤

는 부모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겠거니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서 각각 짧은 곡을 독주하는 음악회를 의미) 여행을 다녀왔으며, 라이 다. 자신이 참여했던 음악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 가 떠날 줄을 모르는 그녀에게 연주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52

않을 텐데도 그녀가 수시로 무료 재능 기부를 실천하는 것을 보고 혹자 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놀랍게도 상당 부분 ‘상대적 결핍’으로 인한 절실함에서 비롯되었다.


실력으로 증명한 음악에 대한 사랑

칠세라 바이올린 레슨과 연습에 매진하는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독서

클래식 음악 전공자라 하면 으레 부유한 집안의 자녀겠지 하는 인식이

과외 하나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준비해서 당당하게 예원에 합격했다.

있다. 악기값과 레슨비를 비롯해 교육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예진도 7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한 후로 한국의 음악 전

공자들에게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라 여겨지는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 울대 음대를 거쳐 뉴욕 맨해튼 음대(Manhattan School of Music) 석사

와 스토니브룩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 지 결코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하고

싶으면 해야지’하고 언제든 선뜻 학비를 손에 쥐여 줄 수 있을 만큼 경 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금속공학 박사였던 아버지가 빠듯한 연구원

봉급으로 식구들과 노부모를 동시에 부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바이올린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실에 다니면서 방학 때도 수시로 밤 12시까지 공부했다. 그렇게 고가

그 뒤에도 학교 시험을 볼 때마다 합격하면 계속하고 불합격하면 그 만두는 게 부모님의 조건이었어요. 그게 조건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했고, 더 열심히 하게 된 것 같아요.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거기 서 레슨과 음악 수업들을 받을 수 있게 되니까 저에게는 학교가 절 실했죠. 또, 그런 만큼 좋은 학교에서 좋은 선생님께 최고의 교육을 받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요. 잘 배우고 싶고, 그렇게 해서 실력을 계 속 기르고 싶은 마음, 배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배우고 싶은 마음이 었어요.

제가 창원에 살 때 어떤 선생님이 동네에 출장 레슨을 오시는데 4명 그룹이 되어야 레슨을 하겠다고 하신 거예요. 그런데 한 명이 모자라서 못 하게 될 것 같으니까 아 랫집 아주머니께서 악기까지 빌려주시면 서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렇게 그룹 레 슨을 시작하게 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3 명은 그만두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다 행히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보신 선생님 께서 개인 레슨을 해 주셨고, 1년 정도 됐 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초에 처 음으로 진해 벚꽃 축제 음악 콩쿠르에 나 가서 최우수상을 탔어요. 하루에 적어도 3시간은 연습해야 한다는 선 생님 말씀에 8살 아이는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노력이 입상

으로 이어지자 가르친 선생님도 배운 아이 도 욕심이 생겼다.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아이의 부모도 한번 시켜 보자 마음을 먹었다. 시작은 우연이었는지 몰

바이올린 하나로는 부족했을까? 한예진은 대학교 때 비올라도 배우기

열심 덕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예리한 선생님이 지나치지 않고 발

갈고 닦았다. 그 결과, 두 악기 모두 훌륭하게 연주하고 가르칠 수 있는

라도 그녀가 음악을 계속하게 된 건 일찍부터 남달랐던 그녀의 열정과

견해 준 재능은 그녀의 성실함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창원 내 소규모

콩쿠르 대상부터 부산 콩쿠르, 그 외 여러 콩쿠르에서 연달아 입상하 면서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도, 실력도 더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마냥 행복해할 수만은 없었다.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많이 부담스러워 하셨어 요. 집안 형편을 아니까 서운했다기보다는 많이 죄송했는데 그래도 포기는 안 되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올라가서 예원이 라는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공부와 바이올린을 모두 잘해 야 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엄마, 아빠는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과외는 못 해준다. 그래도 네가 시험 봐서 되면 바이올 린을 전공하고 안 되면 그만두자.” 이 말이 가혹하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 그녀는 오히려 무조건 그만두라

고 하지 않고 기회를 주신 부모님이 감사했다고 한다. 주어진 기회를 놓

시작해서 박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바이올린과 비올라 실력을 동시에 흔치 않은 음악가가 되었다. 이제 어렸을 때부터 가져왔던 꿈을 이루었 다는 느낌이 드는지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완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는 지금도 사실 감사하고 행복해요. 처음 바이올린을 시작한 이유가 거창하게 대단한 음악가가 되고 싶어서였다기 보다는 그냥 음악이 좋고 연주 가 좋았기 때문이고,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공부하고 연습하고 연주 해 온 거니까요. 계속해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기는 것만으 로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작은 연주든 큰 연주든, 청중이 많 든 적든 최선을 다하게 되고요.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재 미있어요. 5살짜리 아이든 학부를 이미 졸업한 학생이든, 그 친구들 이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돕는 일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감이 생기 면서 음악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고, 더 열심히 음악의 길을 추 구하게 되는 학생들을 보면 정말 뿌듯해요. 53


한예진은 어렵게 음악을 해왔기 때문에 본인처럼 어렵게 음악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더 마음 이 가고 도와주고 싶어진단다. 그래서 그런 친구들한테는 레슨비도 많이 안 받게 된다고……

그러다 인터뷰 내내 어린 시절 힘들게 음악을 공부했다고 얘기한 것이 혹여라도 부모를 원망 한 것으로 오해될까 염려되었는지 부모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표현했다.

사실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단지 예원이나 예고에 다니는 굉장히 부유한 친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좀 있었다는 거였죠. 좀 덜 좋은 악기, 좀 덜 비싼 레슨, 이 런 정도요. 생각해 보면 부모님 힘드실 거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제 꿈을 고집한 게 죄송하 죠. 그리고 어떻게든 끝까지 후원해 주신 게 감사하고요. 부모님이 저에게 제시하셨던 조건 을 저는 “정말 하고 싶으면 실력을 갖춰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 덕분에 저에게 음악 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달았고, 또 절실한 만큼 열심히 하게 되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좌절 하지 않고 제가 원하는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렇게 힘을 길렀기 때문이겠지 요. 앞으로 더 잘 해드리고 싶고, 더 잘 돼서 보여드리고 싶고, 그런 마음이에요. 실제로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그녀는 항상 조금이라도 부모의 부 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아이들 레슨을 했고 대학교, 대학원 내내 수십 명 의 아이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학자금과 생활비를 충당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때로는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음악의 길을 가는 게 아니었나 하는 후회나 의심이 들지 는 않았다고 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이나 음악가가 있는지를 묻자 잠시 난감한 표정 을 짓는가 싶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각각의 음악이 모두 나름의 개성이 있고 아름답거든요. 예를 들어, 베토벤 심포니는 귀가 먼 그가 쓴 음악인데도 정말 아름답잖아요. 삶 의 고통 속에서도 음악을 쓰면서 얼마나 환희를 느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오선지에 표현해낸 것 자체가 기적이라 는 생각이 들어요. 제 역할은 각 음악의 개성을 제대로 끄집어내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제 마음을 담아서 재창조하는 작업이기도 하고요. 그 자체로 영광이고 축복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거리를 걸으며 그녀의 일상에 관한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뉴욕 맨해튼에서의 삶이 금전 적으로 빠듯해서 다소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맨해튼의 활기 와 생동감이 좋다고 했다.

박사 6년 하는 동안 시골(스토니브룩)에 오래 살아서 그 런지 다양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재미있어요. 자신을 창조 적으로 개성 있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요. 일주일에 3일 롱아일랜드로 강의를 나가는데, 쉬는 날에는 연습 외에, 아침에 요가를 하고 장보고 요리하는 것을 좋 아해요. 또 시간 나면 친구들이랑 돌아다니기도 하고, 갤러리 구경 도 하고요. 참, 요가는 강사 자격증도 따서 가끔 사람들을 가르치기 도 해요. 허리 통증이 심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허리도 좋아지고 저한테 맞는 운동인 것 같아요. …… 한예진은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도 항상 웃고 있다. 지금이 만족스럽고 행복

하다는 그녀의 말이 그대로 느껴진다. 자신이 음악을 그처럼 사랑하게 된 것

은, 엄마가 갓난아기였던 언니에게 들려주려고 항상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았

는데 마침 엄마 배 속에 있던 자신이 듣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며 유쾌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살면서 꼭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거나 특별한 누군가 가 되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분명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 토록 절실했던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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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way

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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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10편의 새로운 브로드웨이 작품 "뮤지컬 한 편 보려고 하는데 뭐가 재밌을까?" 뉴욕에 살면 한 번쯤은 받게 되는 질문이다. 그럴 때 대부분 대중에게 친숙한 히트 뮤지컬을 권하게 된다. 질문을 받는 이들 역시 뮤지컬을 자주 보거나 새로운 작품을 매번 챙겨 볼 수 있는 여 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처럼 뮤지컬 한 편을 보게 될 때도 다수의 관객은 이미 재미있다고 검증된 유명 가족 뮤지컬을 선택하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 래서 <라이온킹>, <캣츠> 등이 장기 흥행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입소문을 타지 않은 새로운 뮤지컬을 남보다 먼저 관람해보는 모험을 한 번쯤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 2017~2018시즌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새로운 뮤지컬 10편을 골라봤다. 글

편집부 57


회전목마 Carousel

애틋한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 <회전목마>는 1945년

초연된 대표적인 브로드웨이 고전이며 56년 영화로 제 작되기도 했다. 회전목마에서 일하는 주인공 빌리가 아 름다운 처녀 줄리와 결혼한다. 줄리가 임신하게 되자

돈을 구하기 위해서 강도질을 하려다 오히려 칼에 찔려

죽게 된 빌리. 하늘나라에서 별을 다는 일을 하던 빌리 는 별지기에게 줄리의 소식을 듣고 15년 만에 이승으로

내려간다. 빌리에게 주어진 건 단 하루 동안의 시간이 다. 오페라계의 슈퍼 스타 르네 플레밍을 비롯해 토니 수상자인 조슈아 헨리, 제시 뮐러 등이 배역을 맡는다. Imperial Theater: 249 W 45 St

http://carouselbroadway.com

프로즌 Frozen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올 시즌 최대의 기대작이다. '렛 잇 고'라는 선풍 적인 히트곡을 탄생시켰고, 13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흥행 기록을 세

운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브로드웨이 최고 흥행작 <라이언 킹>을 제 작한 디즈니가 만드는 작품이다. 지난해 콜로라도 덴버에서 진행된 트

라이 아웃에서 공연 내내 관객들의 싱어송이 이어지며 이미 흥행 잠재 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2월부터 시작되는 프리뷰 티켓은 동이 난 상 태다.

James Theater: 246 West 44 St frozenthemusical.com

스폰지 밥 pongeBob SquarePants

아마도 올해 어린 자녀와 뮤지컬을 보려는 부모들이 프로즌 다음으로

염두에 둘 가족용 뮤지컬이 될 것이다. 케이블 채널 Nickelodeon에서 장기간 방송되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수많은 어린이에게 사랑받 고 있는 캐릭터 스펀지밥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친숙한 주인

민 걸 Mean Girl

션들이 참여한 음악들이 이번 시즌 꼭 봐야 할 뮤지컬 중 하나로 꼽히

영화로까지 추앙받는 원작 '민 걸'이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되며 지

공 캐릭터 못지않게 사랄 발레리즈, 신디 로퍼, 존 레젠드 등 스타 뮤지 게 한다.

Palace Theatre: 47th & Broadway spongebobbroadway.com

밴드의 방문 The Band’s Visit

이미 영화를 통해 흥행을 거두었고 오프 브로드웨이 상영에서 관객 은 물론 비평가들을 놀라게 한 밴드의 방문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

단순히 틴 에이저 코메디 영화를 넘어 이제는 일부 영화팬들에게 컬트 난해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풋풋한 디즈니 요정 시절의 린지 로한은 물론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나 사이프러스 등 나중에 빅 스타가 되었던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했었다. 영화에서 선생님으로 나왔던 코메디언

티나 페이가 대본을 쓰고 남편인 제프 리치몬드가 음악 제작을 담당했 다. 영화의 감흥을 잊지 못하는 이제는 중년이 된 여성팬들이 극장으로 몰릴 것인지 관심이다.

August Wilson Tearter: 245 W 52nd St,

다. 지난 연말 개막 후 흥행세를 몰아가고 있어서 올해 가장 인기 있는

meangirlsonbroadway.com

진 마을로 근무지가 옮겨진 이집트 경찰 밴드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

파리 여인 The Parisian Woman

진다. 워싱턴 포스트는 'Beautiful music, Beautiful story, Beautiful

닌 연극을 한 편 꼽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워싱턴 D.C 를 무대

뮤지컬 메뉴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국경에서 벗어나 멀리 떨어 재를 통해 음악과 우정이 편견의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 acting'으로 평하며 브로드웨이 최고 뮤지컬로 선정하기도 했다. Ethel Barrymore Theatre: 243 W 47th Street thebandsvisitmusical.com 58

이번 시즌 가장 주목받는 브로드웨이 무대극이기 때문에 뮤지컬이 아 로 한 정치 스릴러라는 매력적인 장르 외에도 우마 써먼이라는 헐리우 드 스타의 연극 무대 등장이 팬들의 기대를 자극한다. 거기에 <하우스

오브 카드>를 연출한 뷰 윌리엄스 (Beau Willimon) 가 극본을 썼고 <


몇 개로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쥬크박스(Juke Box)는 미국 인들이 대중적으로 음악을 즐기는 방법이다. 오리지널 음악이 아닌 기

존 팝 히트곡들을 위주로 한 뮤지컬을 주크박스 뮤지컬이라고 하며 몇

년 전 흥행했던 '록 오브 에이지(Rock of Age)'가 대표적. 그리고 <마가 리타 빌> 탈출 역시 전형적인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마가리타 빌이라 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열대 록커인 지미 버핏 (Jimmy Buffett)의

음악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카리브해 섬인 마가리타빌에서 독신 파티 를 위해 모인 친구들이 주축이 된 흥겨운 작품이다. Marquis Theatre: 210 West 46th Street escapetomargaritavillemusical.com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뮤지컬과 영화로 대중들에게 익숙한 클래식 <마이 페어 레이디>가 3 월 다시 무대로 돌아온다. 1956년 3월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6

년 6개월에 걸쳐 롱런 공연한 히트 뮤지컬이다. 원작은 조지 버나드 쇼

의 희곡 <피그말리온 (Pygmalion)> 브로드웨이의 초연에서는 줄리 앤 드루스가 여주인공을 맡았고 영화에서는 오드리 햅번이 기용되었다.

관계자들에겐 '역사적인 귀환'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기대를 모으고 있 다. 현재 주연과 극장이 준비 중이다.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마이 페어 레이디> 못지않게 오드리 햅번이 주연을 맡아 세계적인

흥행을 한 또 다른 영화 <로마의 휴일>도 뮤지컬로 선보인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 오드리 햅번, 그레고리 펙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1953년에 흑백 영화로 제작되어 아카데미상을 받은 고전이다. 로마를 방문한 왕녀가 어느 날 밤 남몰래 숙소인 대사관을 빠져나가지만 진정 제 주사 효과 때문에 깜박 잠들고 만다. 그곳을 지나가게 된 미국의 기 자가 그녀를 하숙으로 옮겨 편히 자게 하는데, 이튿날 그녀가 왕녀임을

알게 되자 즐겁게 로마를 관광하면서도 친구인 사진사를 시켜 그녀 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로 토니상을 받은 팸 매키넌이 감

독을 맡았다. 어두운 유머의 경계를 정치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파 리 여인>은 이미 연말부터 예매가 어려운 인기

래 사진을 찍게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은밀한 애정을 품기 시작한 그 는 기자회견 때 특종으로 다룰 것을 단념하고 사진을 그녀에게 건네주 며 작별을 고한다. 프리뷰 예정.

를 얻고 있다.

Hudson Theatre : 141 West 44th Street TheHudsonBroadway.com

이 섬에 가면 Once on This Island

팬들의 사랑을 받던 뮤지컬 <이 섬에 가면>이 2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미스 사이공>

의 전설적인 스타 리 살롱 가(Lea Salonga)가 주

연을 받아 기대를 더하고 있다. 한 농부의 딸이 자신의 사랑을 찾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고 신들과 여신, 선과 악, 사랑과 증오에 관한 이 야기다. 밝고 활기찬 열대의 분위기가 충만한 작 품으로 여러 매체에서 호평받고 있는 작품이다. onceonthisisland.com

Circle in the Square Theatre 235 W 50th St, 마가리타빌 탈출 Escape to Margaritaville

마치 한국의 노래방처럼 싸구려 바에서도 동전 59


EDUCATION

종로구 부암동 ‘환기 미술관’에 가다 ‘김환기 색채의 미학’ 특별 전시회 종로구 부암동에 가면 <환기 미술관>이 있다. 청와대와 인접해 개발제한구역으 로 지정돼 있어 높은 건물도 거의 없는 탓에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입구에 심어진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와 조형미를 갖춘 미술관 건물만 봐도 탄성을 자아낸다. 수화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1992년 김환기의 그림과 유품을 정리해서 설립 한 환기 미술관은 사설 개인 기념미술관으로는 국내 최초이다. 4월까지 ‘김환기 색채의 미학’ 전이 열리고 있는 이곳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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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직접 찾아가 보았다.

편집부 사진및 자료 제공 환기미술관


김환기 색채의 미학

김환기의 화풍은 크게 파리시대(1956~1959) 와 뉴욕시대(1963-1974)로 나뉜다. 담백한 청

색 주조 화면, 평면적인 면의 구성과 장식성

그리고 촉각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질감이 파리 시기 작품의 특징이라면 뉴욕에 서 세상을 뜨기까지 작업한, 한국적인 정서를

서구의 모더니즘에 접속시킨 독특하고 독보적 인 작품이 주를 이루는 뉴욕 시대로 나뉜다. 높은 천장이 특색있는 본관과 별관, 수향산방

김환기의 전면점화(全面點畵)

어 1992년도에 완성된 환기미술관은 크게 세 동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

계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기획된 전시라고 한다. 뉴욕 시기의 김환기

김환기의 아내인 수필가 김향안이 그의 작품과 유품을 모아 사재를 털 다. 본관은 3개 층으로 3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2층은 100호 이상인 대

작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2층은 천장이 유난히 높다. 대형 캔버스에

서 작업한 김환기의 작품은 천장이 높지 않으면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 기 때문에 건물을 지을 때 특별히 이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별관은 카 페테리아와 아트샵을 겸하고 있으며 기획전 전용 공간이 있다. 별관을

끼고 돌면 수화 김환기의 첫 자와 김향안의 향을 따서 지은 성북동 화 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수향산방’이 있다. 이 공간은 김환기 생전 에 구상한 아틀리에 형태를 반영했다.

이번〈김환기, 색채의 미학〉전은 ‘색’으로 발현되는 김환기의 예술세 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하나의 점으로 응축하여 다양한 색

의 전면점화(全面點畵)에 몰입하며 물감의 농담을 살린 독창적인 화 면을 완성해낸다. 자신이 사용하는 채색재료를 ‘빛깔’로 표현하며 화가 의 감각으로 ‘색의 미묘감’을 선사하였고, ‘색질감’에 대해 끊임없는 질

문과 답을 구하는 다양한 조형적 실험에 몰두하였다. 이번 전시는 김환 기의 색에 대한 미학적, 철학적 질문과 성찰을 시작으로 실험과 시도로

써 찾아가는 그의 색채를 향한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도전을 되짚어 나 가며 색에 대한 다각적인 해석과 감상을 끌어냄이 주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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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면 붓을 드는 그러한 공부 가지고는 우리가 꿈꾸는 예술가가 될 수가 없다. 하루라도 팔레트에 빛깔을 짓이겨보지 않고는 한 달이고 목욕을 못해 생리가 개운해질 수 없는 것처럼 돼버려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생활이 돼버려야 한다. 부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중략… 색질감, 그리고 색이 발산하는 공간의 지배-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Air and Sound(I) 2-X-73 #321, 1973, 코튼에 유채, 264x208cm

27-VIII-70 #186, 1970, 코튼에 유채, 292x216cm

14-XII-71 #217, 1971, 코튼에 유채, 291x210cm

김환기의 색채 ‘푸른 빛’

면의 절제된 조형 감각에서 품어내는 투명하고 은은한 ‘색의 깊이’는

관되게 펼쳐 나갔던 예술표현의 결정체로 다양한 푸른색의 미묘한 변

점의 수많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고, 물감의 농담에 의한 강약의 조

김환기의 색채라 불리는 푸른빛은 자신의 조형세계를 구축하면서 일

화를 통해 개성적인 표현과(左. 右) 김환기가 제작한 색상대조표 (中)

물감 유품 명상적인 분위기를 완성하였다. 순수추상의 깊고 신비로 운 분위기를 더해주는 캔버스 화 면 속의 푸른빛은 김환기가 우리 나라 고유의 산천을 떠올리며 자 연과 내밀한 교감을 이뤄나간 정 서의 표현이자 전통의 미감과 동 양의 철학을 내포한 민족의 노래

라 할 수 있다. 색과 질감의 다양 한 섹션은 김환기의 실험과 도전

정신이 돋보이는 작품과 바탕재 에 스며드는 유채의 표현기법을

시공간을 초월한 명상의 울림을 준다. 김환기의 전면점화는 간결한 색

절·색이 캔버스 화면에 흡수되고 번져 나타나는 차이에 의해 순수 추상

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생동감 있고 맑은 색점의 표현 을 위해 바탕 면으로 코튼을 사용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어 가는 충분한 시간이다. (…)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 에세이’ 중에서

완성하기 위해 김환기 스스로 농

담을 맞추어 제조한 물감, 그리고

하였고, 코튼 위에 아교를 덧칠한 후 테레핀유(Turpentine Oil)를

묽게 푼 유화로 작업하였다. 우주 적 공간을 담아내기 위한 작가의

선택인 점, 선, 면의 조형기호 그

리고 청, 적, 녹, 황, 흑 등의 다채 로운 색감의 확장은 우리에게 무 한한 상상력으로 시작도 끝도 없 는 우주,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생활화되어야

직접 종이와 천위에 발색을 확인한 물감 블랜딩샘플 등을 함께 보여준

한다는 김환기는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인내심으로 견디며 수도자의

의 속성을 계속해서 연구하였고, 이를 과감하게 사용하여 고유한 빛깔

다. 이러한 시도는 자신만의 개성이 녹아든 ‘색질감’으로 발전시켰다.

다. 김환기는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재료와 안료 을 완성해나갔다.

색으로 빚어낸 공간의 울림

김환기 추상회화의 정점인 1970년대 대형점화가 이루어내는 점과 선, 62

마음으로 자신의 작품 안에서 다양한 조형적 훈련과 실험에 매진하였 그는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다”라고 말하며 미묘한 색감이 더해진 화

면의 조형성을 추구하였으며 작품이 발하는 ‘색질감’을 위해 다양한 회 화 재료를 연구하고 자신만의 표현기법을 정련하였다.


김환기, 색채의 미학

- 기간 : 2017년 11월 24일 – 2018년 4월 1일 - 전시장소 : 환기미술관 본관 전층

- 관람시간 : 오전 10:00 - 오후 6:00 (월요일 휴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1913-1974)

전남 신안 출신. 서울대 미대, 前 홍익 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역임. 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이 다.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의 선

두주자로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

창적 예술 세계를 정립하여 한민족의

정서를 화폭에 담아 세계에 알렸다. 그는 1930년대 후반경 부터 가장 전위적인 활동의 하나였던 추상미술을 시도, 한

국의 모더니즘을 리드하였고 현대적이고 절제된 조형언어 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그의 예술세계는 50년대에 이르러

산, 강, 달 등 자연을 주 소재로 더욱 밀도 높고 풍요로운 표

현으로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조형화하였으며, 1956년부 터 59년까지 약 4년간의 파리시대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서 수상한 해인 1963년부터 작고한 74년에 이르는 뉴욕시 대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

다. 파리시대와 서울시대를 포함한 50년대까지 그의 예술 은 절제된 조형성과 순화된 색감으로 한국의 고유한 서정 의 세계를 구현하였으며 1960-70년대 뉴욕시대에 이르러

점, 선 , 면 등 순수한 조형적 요소와 보편적이고 함축적인 구성으로 내밀한 서정의 세계를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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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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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41st Annual Philadelphia Museum of Art Contemporary CRAFT SHOW 이모저모 지난해 11월 9일~12일, 41년 역사를 가진 필라델피아 뮤지엄 오브 아트

(PMA)가 주최한 현대 공예품 쇼(Contemporary CRAFT SHOW)는 미국 내 최고의 공예박람회(CRAFT FAIR)이다. 사흘간에 걸쳐 미 전역 195명의 작 가, 25명의 한국 작가 초대되어 전시회를 했다. 위주로 행사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담아봤다.

글, 사진

가 한국 작가 작품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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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球)로 생명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예작가

윤 솔 Sol Yoon

오랫동안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그릇이나 화병 같은 것을 도자기로 칭하였으나 현대는 예술 성을 가미한 조형 창작물도 도자기 범주에 넣는다. 도자 예술은 이제 물레로 빚어낸 화병이나 식기 같은 생활 자기 수준에서 서양의 세라믹 아트처럼 장식용 예술작품 등 조형 도예로 변화했다. 66


‘한국 미술이 아시아 미술의 중심’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시 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크게 얻는 각 분야 예술가가 넘친다. 도예 부분 에서도 기술과 미적 감각이 뛰어난 도예가들이 세계무대를 발판으로 활동 중 이다. 그중 한 사람, 서구적인 감각과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동양의 멋을 표현하 여 한국 도예 대표작가의 반열에 서 있는 윤 솔 백석대 교수. ‘2017 Philadelphia Craft Show’ 전시를 위해 미국에 온 그를 직접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눠보았다. 글 Jennifer Lee 정리

편집부 67


흙, 불, 유약이라는 도자기 기본 구성요소를 유지하지만, 도예를 현대 적으로 재해석, 오브제 형식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표현양식을 창출해

내는 윤 솔은 도자기의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한 일반적인 형태와는

다른 ‘안팎’ 모두 조형적, 회화적 요소가 강한 작품을 보여준다. 그는 이

미 10년 전에도 미국에서 작품을 선보였었다. “10년 전 베벌리힐스에 오픈한 도자 갤러리(Doja Arts & Crafts Gallery) 전시에 참여했던 게 미국에서의 첫 전시였습니다. 그 후 SOFA시카고와 샌디에고에서도 전시 참여를 했습니다. 작품 9점을 가지고 직접 미국에 온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9개 작품은 이번 크래 프트 쇼를 위해서 특별 제작했지요. 제 작업의 7개 카테고리 중 2개 의 카테고리에 속한 작품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타원형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그 도자기에 선을 그어 여러 개의 작품으

로 재 탄생시키는 그의 작품은 구(球)가 기본이다. 달걀 모양의 타원형 에서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아늑하고 편안한 여러 개의 작품을 재창출하 는 것이다. 푸근하고 편안한 작 가의 외모가 그의 작품과 많이

닮아있다. “어느 작가든 성품과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만드는 듯해 요. 그런데 제 경우는 반대의 것을 동경하는 거로부터 작 업이 나오는 것 같아요. 제 작 품의 시작은 제가 겪은 경험 과 어린 시절 여러 가지 기억, 추억 등이 모티브가 되었습니 다. 전 풍선의 동그란 형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어 렸을 때 풍선이 너무 좋았는 데, 바로 옆에서 풍선이 터지 면서 너무나 놀라서 그 뒤로 풍선은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 죠, 동그란 풍선의 형태, 어찌 보면 동그라미라는 것이 저의 트라우마 극복의 대상일 수 도 있어요. 또 하나는 알에 대 한 표현인데 생명을 감싸는 어머니의 자궁도 원이죠. 원초적인 생명 이 뭔가 감싸고 있는 원의 형태로 있잖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단순 한 형태로 있는데 거기서 태어나는 생명은 점점 성장하면서 여러 가 지 형태의 모습으로 발전하죠. 모든 발전의 원초적인 형태는 그 안 에 있었던 것이고 더 나아가면 우주에서 수억 개 수천억 개의 행성 들이죠. 미시적으로 가자면 제 몸, 제 핏속에 흐르는 적혈구 백혈구 셀들…. 이 모든 것을 얘기할 때 남는 것은 동그라미였죠. 원에 대한 것. 입체적인 것, 은유적 생명의 형태가 컨셉이면서 제가 어렸을 적 기억이 남아있는 극복의 대상인 제 안에 남아 있는 풍선에 대한 극 복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는 두려움의 대상인 풍선의 형태인 동그라미를 오히려 극복의 대상

으로 삼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생명을 품은 알을 작품 소재로 삼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작품’으로 표현하는 세라믹 아티스트 윤 솔. 그는 자신의 작업에 얼마만큼 만족하고 있을까? 68

“제가 소재로 삼은 알은 일단 매력적입니다. 제 작품을 보고 놀라워 하고 좋아하시는 분들, 편안한 느낌이 든다는 평을 들으면 기쁩니 다. 제 작품은 멀리서 보면 그냥 알의 형태인데, 가까이 와서 보면 와 우! 하는 거죠. 그래서 직접 만져본 결과, 어떤 구체적인 것을 형상 화하진 않았지만, 사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자기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만져보고 느끼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까 지 세세하게 살펴보시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로서 보람을 느끼고 행 복합니다.” 윤 솔은 이렇듯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물의 탄생과 진화의 출발점이 구(球)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원을 변형한 작품으로 생명을 표현했다. 자연 안에서 발견되는 껍질의 유기적인 형태에서 그릇의 요소를 재발 견하는 작품인 셈이다. 윤 솔의 작품 카테고리는 조형작업에서부터 테

이블웨어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

미국 전시회를 위해서 오브제와 조형 쪽 성향이 강한 것만 가져왔다고

한다. “조형작업에서는 네 가지 정 도로 각각의 컨셉을 나눠서 작업이 이루어져요. 테이블 웨어 작업 같은 경우는 “Leaf Container”라는 프로젝트명 으로서 물 위에 떠있는 나뭇 잎의 형상을 모티브로 사용 가능한 식기류를 제작합니 다. 요즘엔 식기 작업이 한창 진행 중에 있어요. 현재 하고 있는 이 작업은 “정소영의 식 기장”을 통해 한남동에 위치 한 레스토랑 “MOSU”에서 사용할 메인 식기 제작입니 다. “MOSU” 는 샌프란시스 코에서 미슐랭 원스타를 받 은 안성재 쉐프가 한국에 오 픈 한 레스토랑입니다. 오브 제 쪽 성향이 강한 “From the Archetype series” 는 모서리 가 뾰족하고 기다란 형태를 띠는데 사실 오브제와 테이블웨어의 중간 성향을 지닌 작업이죠. 이번 전시에는 이런 작품들을 가져온 겁니다.”

도자기란 흙을 빚어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워낸 그릇이나 장식물을 말 한다. 크게 1200℃이하의 온도에서 구운 도기와 1,200∼1,300℃에서

그 이상의 온도로 구운 자기로 나눌 수 있다. 여느 도자기와는 다른 그

의 작품은 유난히 얇고 가볍다. 그의 작품은 어떤 작업을 거친 것인지

궁금했다. “작업을 간단히 설명해 드리면, 먼저 슬립캐스팅이라는 기법으로 석고로 만든 원형 틀에다가 슬립 상태의 흙물을 집어넣어 틀을 이용 해 같은 형태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 후 틀에서 나온 원형을 크게 변형을 시키지 않고 구(球)형태를 해체합니다. 잘 라내는 조각 자체가 다 작품이 되는 것이죠. 형상을 마음속으로 그 리면서 부위 별로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서 작품이 나온다고 보시


경우엔 책도 만들고 포스터도 만들어서 관리가 안 될 정도로 쌓이게 된 거죠. 아내와 저는 그걸 스크랩해줍니다. 훗날 자신이 만들어놓 은 결과를 보고 분명 발전해 나가리라 믿으면서요.” 일명 구(球) 작가로 불리는 윤 솔은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달걀 모양의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돌아보니 같은 작업만 거의 15년 이상 해왔더군요. 그래서 어떤 이 들은 구(球)하면 바로 제가 떠오른다는 분도 계시죠. 구(球)는 저에 게 극복의 대상, 동경의 대상이 되어 제 안에서 섞이고 작품으로 탄 생하였기에 구(球)에 대한 제 사랑은 여전할 것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제 남은 일생 동안 찾아내도 끝이 없을 겁니다.”

면 됩니다. 원형에서 재창조가 되는 거죠. 작업의 프로세스도 제가 그리는 컨셉하고 일맥상통합니다. 알이 깨지고 다시 탄생하듯이 말 이죠.”

가장 한국적인 예술이 가장 세계적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전통미를 현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중노동에 가까운 게 도예 작업이다. 여기에 시간

통적인 제작을 이어감과 동시에 동시대인의 사고와 새로운 한국적인

과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대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외에

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윤솔은 결혼하여 돌봐야 하는 가정도 있다. “기본적으로 남들보다 잠을 덜 잡니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을 쪼개

서 써야 하는데 남들처럼 다 자고선 할 수가 없으니 결국 잠을 줄여 서 해결하죠. 가정생활 역시 가족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해서 늘 미안하지만, 아내 역시 같은 대학 금속공예를 전공해서 저를 많 이 이해해줍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림 그리는 걸 무 척 좋아해요. (미술을 전공한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림을 하도 많이 그려서 처음엔 스케치북을 주었는데 나중 엔 A4지 한 묶음을 주고 알아서 그리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대적으로 해석해낸 대표적인 작가, 그는 지금 우리나라의 도예 전통을

잇는 현대 도예가의 대표적인 위치에 있다. 구(球) 작가 윤 솔. 그가 전 작품으로 한국 도예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을 넘어 세계무대 정상에 당 당히 도전장을 내밀 날을 기대해본다.

YOON, SOL Seoul, South Korea 서울대학교, 서울대 대학원 디자인학부 도예전공‌ 석사, 공예전공 박사 수료 현 백석대학교 디자인영상학부 공예디자인 조교수 69


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Alaska

Kitwanga Gitanyow

기탄야우(Gitanyow)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 나를 봅니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꾼 김진수 대표 알래스카의 최남단, 다시 캐나다 서부지역 밴쿠버에서 1,000㎞ 정도 북쪽에 있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내 키트왕가(Kitwanga)라 불리는 강을 따라 인디언 보호구역 이 있다. 이러한 인디언 보호구역은 이제는 그 존재감마저 희미해진 미 대륙 토착 원주민들이 미국 본토에서 멀찍이 떨어져 살며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는 곳이 다. 미 대륙을 독차지하기 위한 백인들에 의해 강제 이주된 인디언 원주민들은 보 호구역이라 불리는 곳에서만 살 수 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정부에 서 받는 보조금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들을 도우며 그들의 자립을 위해 기업을 세우고 그들과 함께 비즈니스를 하는 사업가가 있다. 긱섬(GITXM) 대표 김진수. 가족이 사는 뉴저지에 잠시 와 있는 그를

취재팀이 만나 보았다.

기획 Jennifer Lee 취재 Won Young Park 글 Sarah Chung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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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Vancouver


인디언 보호구역을 통과하는 키트왕가 강을 따라가다 보면 기탄야

우(Gitanyow)라는 부족 마을이 나온다. 인디언 말로 ‘많은 수의 사람

들(People of Many Numbers)’이라는 뜻의 기탄야우 마을에는 긱산 (Gitxan)어를 쓰는 부족인들이 여전히 전통적인 모계 사회를 이루고서

기탄야우 고유의 법과 전통을 따르며 살고 있다. 김진수 대표는 이곳 기탄야우에 긱섬(GITXM)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인디언들과 함께 생 활하며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긱섬은 Gitx Mushroom Inc.의 약자로 2011년 김진수 대표가 자본금

20만 달러로 캐나다 서북부 지역에 세운 회사이다. 이 회사의 주 비즈 니스는 캐나다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자연산 송이와 고사리를 수집, 판 매하는 것이다. 외형만으로 보면 회사의 규모도 작고 사업의 내용도 세

인의 관심을 끌만큼 특별하지 않지만, 긱섬이 설립된 계기와 운영 방식 을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롭다.

Discover British Columbia's Stewart-Cassiar (www.stewartcassiarhighway.com) 71


Business as Mission

이곳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인디 언들과 함께 생활하며 사업을 하 리라고는 김진수 대표 본인도 미 처 몰랐다. 우연히 이 지역에 선

교하러 갔다가 희망을 잃어버리 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는 원주민 들의 초점 잃은 눈을 마주하게 되

었다. 말이 좋아 보호구역이지 실 상은 유배지나 다름없는 이곳에 서 기탄야우 원주민들은 다른 보

호구역의 인디언들과 다를 바 없 이 삶을 포기한 채 무기력함에 빠 져 알코올과 마약 속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고 그런 인디언 원 주민들의 실상에 충격을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 사람들을 도울 일을 찾겠다고 나선 건 아니었습니다. 마을 추장이 제가 비즈니스맨인 걸 알고 먼저 사업 제의를 했는데 마침 기존 사업을 매각한 뒤라 자 금과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을 때였지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하지만 조건 없는 투자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최소한 그물이라도 주어서 일을 하 게끔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캐나다 서북부는 일조량과 강우량이 고사리와 버섯이 자라기에는 천

혜의 환경이다. 여름철에는 고사리가 천지에 널렸고 가을엔 송이버섯, 겨울엔 차가버섯이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곳 무공해 청정

지역에 가득하여, 할 일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좋은 일거리를 제공해 준

다. 김진수 대표는 인디언 원주민들과 함께 세운 회사를 통해 원주민들 이 채취하는 고사리와 버섯을 구매하고 그걸 말리고 포장해서 판매하

는 사업을 하고 있다. 원주민들과 함께 회사를 시작할 때 이익의 절반 을 지역사회에 공헌하도록 창업 목적에 명시했다. 그래서 항상 이익의 50%는 원주민 사회로 환원하고 20%는 원주민 교육에 투자한다. 수익 창출이 아닌 인디언 원주민들의 자립갱생을 위하여

천혜의 자연조건에 상품의 질이 뛰어나고 풍부한 노동력에다가 사업

의 목적까지 좋다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리리라고 김진수 대표는 생각했 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사업은 초창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목적이

어쨌건 간에 비즈니스는 무조건 이익을 내야 하는데 손해가 나니까 정 신이 번쩍 들었다.

“속이 그렇게 쓰릴 수가 없었어요. 숲속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고사 리와 버섯을 채취하기만 하면 되고, 이익금은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 가니 인디언 원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함께 적극적으로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의 선의를 봐줄 거라고 믿기도 했고요. 착각 이었죠. 몇 세대에 걸쳐 뿌리 깊이 박혀버린 그들의 무기력하고 의 존적인 태도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72

무조건 전념해서 매달려야겠다 싶었다.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소프트웨어 회사를 운영했던 김진수 대표는 농산물에 대해서 전혀 몰 랐다. 수입과 수출도 몰랐다. 노동력, 상품, 판로 등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 알았다면 아예 시작을 안 했을 터인데, 또 그랬기 때 문에 시작할 수 있었고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올인 할 수 있었다. 고 사리를 많이 먹는 미국 교민사회뿐만 아니라 직접 한국을 찾아가 영업 도 하고 판로도 뚫었다. 워커홀릭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하기를 몇

해, 이제는 회사도 차츰 안정되고 이익이 발생할 만큼 매출도 오르고 있다.

“그냥 돈을 주면 그들을 더욱 의존하게 할 뿐이에요. 멀리 보면 진정 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지요. 힘들고 돌아가더라도 인디언들이 자 립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자립의 기반을 만들어 주고, 그렇 게 옆에서 도울 겁니다. 비즈니스를 잘하는 것 못지않게 이 회사가 내 회사라는 주인 의식을 인디언 원주민들이 갖도록 격려하고 가르 치는 일이 저에겐 제일 중요하답니다.” 기탄야우에서 나를 보다

왜 김진수 대표는 아무 연고도 없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살면서 인디언 들의 자립갱생에 그토록 매달리고 있는 걸까. 김진수 대표는 1998년

스미스소니언협회 기술혁신상을 수상할 만큼 잘나가던 컴퓨터 엔지니 어이자 소프트웨어 제작 회사의 창업주이며 경영자였다. 그런 그가 고

사리와 버섯 채집용 가방을 둘러메고 인디언들과 함께 산을 타고 다니 며, 포장된 건조 고사리와 송이버섯이 가득 든 보따리를 들고 바이어들 을 만나러 다닌다.


“저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농부셨습니다. 당시 대부분 가정이 그렇듯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가족 중에 큰 형님은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둘째 형님은 군대 생 활 중에 자살을 했습니다. 손위의 누님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셨고요. 그런데 선교를 가서 만난 인디언 원주민의 모습 속에 내 가족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의 얼굴 속에서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았습니다. 마치 데자뷔처럼요. 그때 알았습니다. 나 의 어려웠던 가족사가 내가 이들에게 오기 위해 미리 준비되었던 길 이란 걸요.” 실제로 보호구역에 사는 인디언 원주민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3가지 문제가 바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인한 높은 자살률 그리고 낮

은 교육수준이다. 그 밑에 깔린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낮은 자존감임 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

려움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확실하고 확정 지어진 미래 때문이다. 외

지다 못해 지도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곳에 갇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운명지어진 이들에게 삶의 희망은 단지 사치로

만 느껴질 뿐이다. 이곳에서 김진수 대표는 내 손으로 만든 물건을 팔

아 이윤을 남기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래도 살아볼 만 하다’라는 희 망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사람을 남기는 장사꾼

지금은 자신이 진두지휘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원주민들이 이 회사의

완전한 주인이 되게 한 후 떠날 준비를 한다는 김진수 대표. 그는 20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수출까지 할 수 있

도록 회사를 발전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이지만, 비 즈니스를 잘하는 것 못지

않게 인디언 원주민들이 주인 의식을 갖도록 격려 하고 가르치는 일이 그에 게는 더 중요한 이유이다.

“제가 자주 하는 말 중 에 ‘신뢰의 손익분기점’ 이란 말이 있습니다. 손 익분기점이란 장사를 할 때 수익과 비용이 똑 같 아지는 지점인데 여기서부터 이익과 손실의 갈림길이 되죠. 신뢰도 그렇습니다. 함께 일을 한다고 해서 당장 신뢰가 형성되는 것은 아 니죠. 인간적인 관계, 사회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쌓인 신뢰가 어느 순간이 되면 문제가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 지점에 다다르는데 제가 느끼기에 지금 전 인디언 원주민들과 이 신뢰의 손익분기점을 잘 넘 긴듯합니다.” ‘이문을 남기는 것은 작은 장사요, 사람을 남기는 것은 큰 장사’라 했다. 비즈니스를 위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동기를 부

여하고, 노동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이익 창출의 기쁨을 통해 미국 역 사 속에서 뭉개진 자존심을 찾아주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희망을 보 여주고 싶다는 김진수 대표는 사람을 남기는 장사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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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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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레인메이커 (The Rainmaker) 영화의 줄거리는?

디와 의뢰인은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되지요. 결론이 약

먼 분)는 가까스로 브루저 스톤 변호사 사무실에서 매달 일정액

의 성공 무용담이 아닙니다. 루디는 의뢰인들과 만나고 사건을

법대를 갓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 루디(Rudy Baylor: 맷 데이 이상 수입을 올리는 조건으로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던 어

느 날, 루디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의뢰인을 위해 막강한 힘을

가진 보험 회사 그레잇 베니핏을 상대로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 건을 맡게 되지요. 그레잇 베니핏은 노련한 거물 변호사 레오 드

루먼드(Leo F. Drummond: 존 보이트 분)를 내세워 교묘하게 법

망을 피해 대부분의 보험금 지급을 거절해 온 매우 파렴치한 회

간 허무한 듯 느껴집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는 풋내기 변호사

변론하면서 따뜻한 인간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가 상대하고 있

는 막강한 회사의 비윤리성과 법조계에 만연된 구조적 병폐의 민낯을 보면서 지치고 힘든 소시민들의 일상이 겹쳐 지나갑니 다. 성경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진짜 현실에서도 다윗은 골리 앗을 이길 수 있을까요?

사입니다. 브루저 스톤에서 독립한 신출내기 변호사 루디와 파

가정폭력 희생자 켈리와의 만남과 사랑

견뎌내며 힘든 법정 싸움을 벌이지요. 그 과정에서 사건 수임을

나누다가 불행한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고 도움을 주다가 사랑에

트너인 덱(Deck Shiffler: 대니 드비토 분)은 온갖 협박과 회유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입원한 켈리(Kelly

Riker: 클레어 데인즈 분)를 만나 점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 지만, 예상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우여곡절끝에 사건

에서 승소한 루디, 그러나 그의 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미시시피주 멤피스 법대를 갓 졸업한 루디는 가난한 아버지 밑

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루디의 엄 마는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가로채 다시 재혼하면서 루디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고아같이 자란 루디는 학교에 다닐 때 파산선고를 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가 영화 제목처

럼 레인메이커(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 즉 영업실적 우수 변호

사)가 될 수 있을까요? 멤피스에서 유명한 법률회사인 브루저 스

톤에서 변호사 일자리를 구한 루디, 그러나 법률사무소는 병원 과 경찰서로 영업을 하러 다니며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비 윤리적인 경영을 일삼는 곳입니다. 결국, 루디는 사법기관의 조

사를 받게 된 브루저 스톤을 나와 동료인 덱과 함께 작은 법률 회

사를 차립니다. 덱은 풍부한 법률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

만 어떤 이유인지 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무자격 변호사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맡은 사건은 단, 세 개, 부자 할머니의 유언장을 써주는 사건과 가정폭력 사건, 그리고 백혈병 보험 지급 거부 사 건이 전부입니다. 그들이 맞선 회사 그레잇 베니핏은 막강한 힘

을 가지고 있는 보험회사이고, 상대편 변호팀은 지역 멤피스에 서 가장 강력한 법률회사입니다. 전혀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은 법

정싸움에서 루디는 의뢰인의 처지를 공감하면서 마치 자기 사건

루디는 남편의 폭력으로 병원에 입원한 켈리를 만나 이야기를 빠집니다. 그러나 켈리는 폭력 남편을 쉽사리 떠날 수가 없습니

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켈리는 자기 자

신을 존중하지 않게 되고, 남편의 폭력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왔죠. 불행한 일이지만 종종 가정 폭력피해자들은 남편의 폭력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심한 학대를 당하면서도 가 해자를 떠나지 않습니다.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루디는 변호

사의 입장을 떠나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고, 그녀가

폭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종용합니다. 이혼소송 을 위해 켈리의 집을 찾았다가 맞닥뜨린 남편과 격렬한 싸움 끝 에 살인하게 된 루디, 켈리는 루디 대신 자신의 소행이라며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스스로 체포됩니다. 처음에는 동정으 로 시작된 감정에서 비롯되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보

듬고 상대를 위해 희생을 감내할 정도로 깊은 사랑의 관계로 발 전합니다. 영화 말미에서 루디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켈리와 함

께 떠납니다. 레인메이커는 법정 스릴러 소설의 대가, 존 그리샴 (John Grisham)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변호사로 활동한 적이 있던 원작자 존 그리샴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자신을 가깝게 투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루디 는 건설노동자와 목화 노동자 아버지 밑에서 힘겨운 어린 시절 을 지냈던 자신과 많이 닮았습니다. 루디가 법조계를 떠나 사랑

하는 여인과 떠나갔듯이 존 그리샴도 형사법 변호사와 주 의원 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전혀 다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지요. 존

그리샴은 레인메이커를 통해 사회와 법조계의 구조적 모순을 예 리하게 끄집어내고,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층의 횡포를 법조인의 눈으로 그려냈습니다.

을 변론하듯이 진심을 다합니다. 결국,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지만, 그들 앞에는 또 다른 골리앗이 나타납니다. 그레잇 베니핏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리한 루디와 의뢰인은 수천만 불의 배상 판결을 받아 냅니다. 하 은 배상금 지급을 피하고자 교묘하게 파산을 신청하게 되고, 루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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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Ladurée 뿌리칠 수 없는 화려한 색깔과 유혹의 향연

정통 마카롱(Macaron)의 원조 비주얼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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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젤라또와 티라미수, 홍차와 함께 마시는 영국의 쇼트브레드 쿠키, 벨기에 의 와플, 대만의 펑리수. 만일 세계의 디저트 지도를 만든다면 꼭 들어가야 할 지구촌 의 대표적인 디저트 음식이다. 여기에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에클레어, 밀푀유와 함 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디저트인 마카롱(Macaron). 마카롱은 주로 차나 커피와 함께 디저트로 먹거나 샴페인과 함께 결혼식, 약혼식, 생일 등 각종 축하연에서 손으로 집 어 한입에 먹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쿠키이다. 이 마카롱의 원조인 프랑스의 유명한 고 급 제과점 라뒤레(Ladurée)를 프랑스에 가지 않고서도 뉴욕 맨해튼에서 만날 수 있다. 글

편집부 81


원래는 이탈리아에서 유래되었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 귀족 및 왕족들 간 의 정략적 결혼과 통혼을 통해 프랑스 로 전파된 마카롱은 왕의 간식으로 제 공되었을 만큼 프랑스 왕들도 즐겨 먹

던 음식이었다. 마카롱이 처음 나왔을 때는 지금의 샌드위치 모양처럼 두 겹

대신 한 겹이었고 색깔도 다양하지 않 았다고 한다. 그 후 20세기 초반 프랑

스 귀족의 요리사였던 루이 에르네 라

뒤레(Louis Ernest Ladurée)의 손자 가 처음으로 마카롱 두 개를 덧붙여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익 숙한 두 겹 마카롱의 시작이었다. 프

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는 1862년 문을 연 라뒤레 제과점이 아직도 그

화려한 민트빛을 반짝이며 파리지앵 과 관광객 모두를 유혹하고 있다. 이

Ladurée 소호점

곳에 가면 여전히 155년 전통의 마카 롱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샹젤리제점을 포함해서 파리에 있는 네 개의 라뒤르 제과점에 서 하루에 팔리는 마카롱의 개수만 무려 15,000개라고 한다.

화려한 색깔에 눈이 먼저 취하고, 한입 가득 베어 물면 마치 잠시 프랑

스의 귀족이 된 듯한 마술 같은 느낌에 취하게 만드는 이 라뒤레 제과 점의 마카롱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뉴욕에도 있다. 그것도 매디슨 애비

뉴와 소호, 두 군데에서나 말이다. 매디슨 애비뉴점과 소호점 모두 라

뒤레의 시그니처 컬러인 민트색으로 단장을 하고 혼을 빼놓을듯한 형

형색색의 마카롱으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마저도 유혹한다.

마치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이 마카롱으로 꾸 며져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현실감 제로의 어느 초현실

파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화려한 매장 안에는 이미 정신줄

을 놓고 수십 가지의 마카롱 앞에서 결정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 들로 가득하다. 마카롱뿐만 아니라 라뒤레의 장식품, 볼펜 같은

액세서리도 아기자기함과 귀여움을 드러내며 방문한 손님들을

유혹한다. 라뒤레의 컬러인 민트와 핑크, 화이트 등의 예쁜 포

장 상자와 장식 리본들 앞에서 대부분의 고객이 무장해제되 어 지갑을 열고 마는 것은 이곳에서는 너무나 당연하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라뒤레 마카롱의 명성이 어느 정도

였는지 2011년 뉴욕 매디슨 애비뉴점 개점일이 바로 허

리케인 아이린이 지나가고 난 다음 날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많은 사람이 마카롱을 사기 위해 가게 앞에 줄을 서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마카롱 판매를 위주로 하

는 라뒤레 매디슨점과 달리 최초의 티 룸 레스토랑(Tea

Room Restaurant)이라는 컨셉을 내건 소호점에서는 마카

롱과 함께 차를 마실 수도 있고 뒤편에는 널찍한 레스토

랑도 있어서 날씨 좋은 날 다정한 사람과 브런치를 하며

우아한 기분을 내기도 딱 좋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유럽의 어느 고풍스러운 저택의 정원 같은 라뒤레 소호 점 뒤뜰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마카롱 색깔처럼 예쁘

고 화려한 접시에 나오는 음식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디선

가 프랑스 귀족 부인이 나와서 ‘봉쥬르’ 하고 우아한 목례

를 하고는 비단 치마를 사각거리며 지나갈 것만 같다. 82


Ladurée 샹젤리제점 (프랑스 파리)

작고 동그란 모양의 머랭(meringue; 달걀흰자와 설탕을 혼합해서 채 로 쳐서 만든 과자의 일종)으로 만든 크러스트 사이에 잼, 가나슈, 버터

크림 등의 필링을 채워 샌드위치처럼 만든 마카롱은 매끈하고 바삭한

크러스트, 부드럽고 촉촉한 속, 달콤한 필링의 삼합이 만들어내는 독특

한 식감, 맛, 향, 그리고 형형색색의 고운 빛깔 때문에 많은 이들의 사랑 을 받는 디저트이다. 처음 라뒤레를 방문한다면 진열대를 가득 메운 거

의 스무 가지 종류의 마카롱을 앞에 두고 행복한 고민에 빠질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 라뒤레에서는 주문을 한 후 수십 개의 포장 상자를 계

산대에 한꺼번에 늘어놓고 한 명씩 계산을 하므로 이 과정 중에 상자가 서로 섞일 위험이 있으니 구매한 이후에는 영수증과 내용물을 대조해

서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는지 꼭 확인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워낙 관광객이 많아 가게 내부에서 카메라를 사용한 사진 촬영은 금하 고 있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다.

입안 가득 라뒤레의 마카롱 하나를 집어넣고 혀를 굴려보니 하루종일

쌓인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진한 달콤함에 눈 녹듯 녹는다. 어느덧 눈앞 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가득한 노천카페가 펼쳐지고, 마카롱의 달 콤함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샹송 소리에 온몸을 내맡기고 싶은 낭 만 가득한 하루를 선사한다. Ladurée Soho

398 West Broadway

New York, New York 10012 Ladurée Madison

864 Madison Avenue

New York, New York 10021 83


LIFESTYLE

아는 만큼 즐기는 최고의 식사!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멋진 정찬’을 뜻하는 ‘파인 다이닝’. 그러나 불어로 된 용어 때문에 자칫 당황할 수 있다. 파인 다이닝(Fine Dining) 식문화를 좀 더 여유롭게 즐기기 위한 요리의 기본적인 용어를 소개한다. 글, 사진

편집부

아뮤즈 부쉬 Amuse-Bouche

크렘브륄레 Cream Brulee

은 음식이다. 하지만 아뮤즈 부쉬에는 셰프의 요리 철학이 담겨 있으

로 그을려 딱딱하게 굳은 상태이다. 숟가락으로 가볍게 깨면서 먹는,

착석과 동시에 제공되는 아뮤즈 부쉬는 한 두 입으로 맛볼 수 있는 작 며, 이어 나올 전체 요리에 대한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음식으로 입에 미소 짓게 하는(amuse) 것이자, 입맛을 돋우는 에피타

루아얄로 조리된 음식을 식혀서 위에 흑설탕을 뿌린다. 윗부분만 토치 음식 위만 살짝 그을리는 조리법이다.

이저 요리로 볼 수 있다.

퀴숑 Cussion

카르파치오 Carpaccio

보다 프랑스는 좀 더 세분되어 있다. 겉만 익어 피가 흥건한 정도인 블

아주 얇게 슬라이스 한 생소고기에 레몬, 올리브유, 파르미지아노 레지

아노, 루꼴라를 얹은 요리다. 식당에 따라 얇게 슬라이스한 생고기 또 는 해산물이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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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숑은 고기 굽기 정도를 일컬은 말이다. 미국식의 레어, 미디움, 웰던

뢰Bleu, 겉은 익고 속은 부드러운 상태인 세냥saignant, 송아지, 양, 오 리 등을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로제rose, 먹어야 할 때라는 뜻의 아 푸앙a ponit, 웰던의 의미인 비앙 퀴bien cuit로 나뉜다.


콩소메 Consomme

꿀리 Coulis

정도지만, 실제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간 고기, 채소, 토마토,

기나 야채 요리, 수프나 소스의 베이스로 사용되며 과일 꿀리는 보통

맑은 수프로 향미가 풍부한 스톡을 활용해 만든다. 육수(Broth) 한 컵

달걀흰자를 스톡에 넣어 모든 재료가 표면에 뜰 때까지 끓여낸다. 그리

고 조금 더 오래 끓여 낸 후, 모두 걸러낸다. 다시 표면에 뜬 기름을 1차

꿀리는 과일이나 채소를 퓌레한 끈적한 소스이다. 야채 꿀리는 보통 고 디저트에 사용된다. 라즈베리 꿀리가 가장 유명하다.

로 걷어낸 후 냉장시키고 2차로 다시 기름을 걷어낸다. 1파운드의 고

퀸넬 Quenelle

메는 파인다이닝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꼬치)요리이다. 프랑스 리옹Lyon 의 전통 음식인 퀸넬은 생선 또

기를 사용해서 긴 조리시간으로 거쳐 8온스의 양으로 제공되는 콩소 루아얄 Royale

계란찜과 흡사하다. 크림, 달걀 등을 섞어 저온의 오븐에 익혀 계란찜 비슷하게 먹는 조리법을 뜻한다.

최근에 그 의미가 달라진 퀸넬. 정확한 의미로 퀸넬은 생선 또는 고기 는 고기를 이용해 럭비공 모양으로 만들어 끓이고 그다음 크림소스에 넣어 조리한다. 퀸넬은 최고급 프랑스 레스토랑 메뉴이다. 하지만 아이

스크림, 소르베, 으깬 감자 등을 담을 때 본래 퀸넬 모양으로 만들면서 이 용어가 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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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미국이 Bowl에 빠진 날

Super Bowl Sunday 2월이면 도지기 시작하는 열병! 1월 중순부터 이미 밤마다 스멀스멀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고 머릿속으론 끝없이 승률표가 돌아간다. 비트코인의 등락으로 천 국과 지옥을 오가는 건 댈 바도 아니다. 회사에서도 동료들과의 대화는 온통 이 것뿐이다. 재미 삼아 한다지만 동료들과 대진표를 만들어 작은 액수의 돈을 걸 고 우승팀을 맞추는 일은 데드라인을 맞춰서 끝내야 하는 회사의 그 어떤 업무 보다 지금 중요하다. 이날이 오면 피자집과 버팔로윙을 파는 가게에는 아침부 터 긴장감이 돌고 딜리버리 맨의 얼굴엔 비장함마저 흐른다. 또 요리 채널은 요 리 채널대로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날 맥주와 함께 지인들과 둘러 먹으면 좋을 요리들을 소개하느라 바쁘다. 전자제품 가게에는 이 대목을 놓치지 않기 위한 엄청난 프로모션으로 법석인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매년 2월의 첫 번째 일요일엔 미 전역이 들썩인다. 바로 슈퍼볼이 있기 때문이 다. 경기가 펼쳐지는 4시간여 동안 거리에서는 자동차를 볼 수 없고, 스포츠 바 가 아니고서는 식당에 사람이 없다.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았어도 이 정도까지 슈퍼볼에 광분하는 미국인을 보는 것은 매년 낯설다. 대체 어떤 스포츠이길래 전 미국인들을 이토록 흥분시키는 걸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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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학 풋볼 정규시즌이 끝나고 상위팀들끼 리 겨뤄서 지역별 최강자를 가리는 포스 트 시즌 경기를 ‘Bowl’ 경기라고 하는데

풋볼 경기장의 모습이 마치 속이 움푹 들

어간 그릇, ‘Bowl’처럼 생겼기 때문이라 고 한다. 유명한 Bowl 게임으로는 로즈 볼(1902년 패서디나에서 시작), 오렌지

미국의 4대 스포츠라고 하면 야구와 농구, 아이스하키, 그리고 풋볼이

볼(1933년 마이애미에서 시작), 코튼볼(1938년 달라스에서 시작), 슈

그도 결성되어 있어 종목별 결승일이 되면 동네가 들썩인다. 대부분의

모를 자랑하는 로즈볼은 매년 1월 1일 캘리포니아주 장미 특산지 패서

라고 부르는 미식축구를 꼽는다. MLB, NBA, NHL, NFL과 같은 프로 리 ‘보통’ 미국 사람 모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야구면 야구, 농구면 농

구 등 이 4대 스포츠의 지역별 팀 이름과 유명 선수 이름을 줄줄이 꿰

거볼(1935년 투레인에서 시작) 등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오랜 역사와 규 디나에서 열리며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한다.

고 있어서 이쪽 방면으로 관심이 없거나 문외한이면 학교에서건 직장

2018년 1월1일 104회 로즈볼은 오클라호마대의 Oklahoma Sooners

자, 오직 미국에서만 대규모 프로 리그가 진행되는 스포츠로 진취적이

리언즈에서 같은 날 1월 1일 열렸던 슈거볼에서 맞붙은 클램슨대의

에서건 왕따 아닌 왕따가 되기 일쑤다. 특히 풋볼은 미국이 종주국이 고 개척정신으로 표현되는 가장 ‘미국스러운’ 스포츠라고 말해도 과언 이 아니다.

풋볼은 미국 대륙에 처음 온 유럽 사람들이 가져온 타원형의 럭비공을 바탕으로 시작된 독특한 운동으로 쉽게 말하면 어릴 적 하던 땅따먹기

의 업그레이드 프로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원형 공을 상대방 진

와 조지아대의 Georgia Bulldogs이 대결해서 여기서의 승자가 뉴올

Clemson Tigers와 앨라배마대의 Alabama Crimson Tide의 승자와 애틀랜타에서 전미 대학미식축구 챔피언을 가렸다. 이미 얼마나 해당

지역들이 난리통이었는지 이미 뉴스로 접한 것처럼 이런 대학 풋볼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미국 프로 풋볼리그 NFL이 있을 수 있었고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 쪽으로 차거나 던지면서 계속해서 전진함으로써 자신의 영역을 넓

혀가는데, 궁극적으로 상대방 진영의 End Line에 먼저 도달하는 팀이 승리한다. 풋볼은 공격과 수비가 확실하게 구분 지어 있고 각 포지션의 역할과 책임이 분명한 만큼 매우 전략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이다. 또 몸

으로 부딪히고 돌진하며 전진하기 때문에 매우 거친 남성 스포츠로 각 인되어 있다.

풋볼은 프로 풋볼 리그인 NFL뿐만 아니라 대학 팀끼리의 경기도 인기

가 높은데 대학 풋볼 리그는 사실상 오늘날 미국 프로 풋볼 리그가 있

게 한 기반이다. 사상 첫 대학 풋볼 경기인 1869년 11월에 있었던 프

린스턴(Princeton) 대학과 럭거스(Rutgers) 대학간의 시합 이후 150 년 가까이 풋볼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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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우수 풋볼 선수들은 이제 더 큰 물, 즉 프로들의 세계

세계와 비교했을 때 나 하나의 역할로 인해 팀 전체의 명운이 갈릴 수

Football League)은 산하에 각각 16개의 팀으로 구성된 NFC(National

땀을 쥐게 된다. 참가하는 수십 개의 팀 누구나 우승을 꿈꿀 수 있지만,

인 NFL로 진출한다. 북아메리카프로미식축구리그 NFL(National Football Conference), AFC(American Football Conference)를 두고

있으며 양대 컨퍼런스 우승팀이 겨루는 챔피언 결정전이 그 유명한 슈 퍼볼(Super Bowl)이다. NFL 초기의 명감독인 빈스 롬바르디의 이름을 따 서 롬바르디컵 대회 라고도 한다. 경기

는 매년 2월 첫번째 일요일에 열리는 데 이를 ‘Super Sunday’ 혹은 ‘Super Bowl Sunday’라고 부르며 관련된 모

든 것이 화제가 된다. 경기를 생중계 하는 방송국 중계료의 어마어마한 가

도 있는 단체 스포츠는 그래서 그 승부를 관람하는 사람들마저도 손에 어느 누가 그 주인공이 될지는 리그 시작 단계에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고, 직접 구장에서 몸으로 뛰는 선수들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그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아 슈퍼볼 우승 트로 피까지 거머쥐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치 자신이 그 일을 이뤄내는 것처럼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 Super Bowl

Sunday의 광분에 가까운 열기는 겪 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격도 그렇고, 4시간여의 경기 중간 중

미국에 사는 우리도 일 년에 한 번쯤

국인을 TV 앞으로 다 끌어 모은다는

뻑 젖어보자. 매콤한 버팔로윙, 치즈

간에 나오는 TV 광고는 거의 모든 미

엄청난 시청률 때문에 광고주들이 사 활을 건다. 또 경기 시작 전에 미국의

국가인 Star Spangled Banner를 부 르는 가수와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의 Half Time Show에서 공연하는 가수

들은 그 무대에 서는 것 자체를 일생

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한다. 말 그대로

슈퍼볼은 미국 최대의 스포츠 잔치이 다. 제 52회 슈퍼볼은 2018년 2월 4일

은 적어도 가장 미국스러운 문화에 흠 가 듬뿍 들어간 나쵸칩과 과카몰리, 맥 앤치즈, 두툼한 햄버거와 핫도그 그

리고 빠질 수 없는 시원한 맥주! 올해 Super Bowl Sunday에는 풋볼의 경

기 룰이 좀 낯설어도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모여 슈퍼볼 경기를 같이 즐겨보

자. 30초짜리 하나당 $5 millions (500

만불)을 호가한다는 경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재미있는 광고만 몇 개 보아도,

에 미네소타 주 U.S. 뱅크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그리고 Half Time 공연에 나온 가수의 이름과 슈퍼볼 우승팀의 이름만

개인 스포츠와는 달리 단체 스포츠는 선수도 그리고 보는 사람도 감정

슈퍼볼 수다에서 머쓱하게 빠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입의 정도가 훨씬 크다.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치열한 승부의 88

기억해도 적어도 다음날, 보통은 일주일 한 달을 가는 직장 동료들과의


뉴욕 최고의 로맨틱

바또 뉴욕 디너 크루즈 뉴욕의 아름다운 경관을 선상에서 즐길 수 있다는 디너 크루즈. 그중 맨해튼에서 가장 렉셔리한 뉴욕 바또 크루즈 (Bateaux Cruise)는 뉴욕 최고 절정의 야경은 물론 우아한 4코스 디너 요리가 포함되어 있어서 특별한 날을 더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이들을 만 족시키고 있다. 맨해튼의 화려한 스카인라인을 따라 뉴욕 웨스트 허드슨 강가 야경을 바라보며 3시간 동안 코스 디너를 즐길 수 있기 때문. 환상적인 브루클린 브리지, UN 본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등 뉴욕의 랜드마크를 손에 잡힐 듯 바 라볼 수 있는 디너 크루즈는 다소 비싼 편이지만, 비싼 만큼 최고의 추억을 선사한다. 글

편집부

디너 크루즈는 크고 둥근 유리창을 통해 어느 좌석에 앉더라도 뉴욕 야경을 원 없이 맛볼 수 있다

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뉴욕 바토 디너 크루즈는 밤 7시부터 3시간 동안 맨해튼 섬 주변을 순항하 는데, 배 안에서는 재즈 연수, 클래식 연주 등 각종 이벤트가 벌어지고, 배 밖에서는 자유의 여신상

을 비롯한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즐길 수 있는 데크가 있어서 자유의 여신상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디너 코스는 랍스터 비스킷, 에피타이저, 세프 특별요리, 로스트 포크, 샐몬 요리 등 앙트레,

그리고 뉴욕 치즈 케이크나 바토에서 직접 만든 다크 초롤렛 트러플 같은 디저트, 커피 또는 티가

제공된다.(에피타이저나 앙트레, 디저트 각 1개씩 3개 코스를 고를 수 있다.) 와인 1병은 $30~$50 선으로 비교적 저렴한 편. 승선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자는 재킷과 셔츠를 입어야 하고 여자는 슈트 등 정장을 입어야 하며 운동화, 진, 반바지 차림은 입장이 안 된다. 탑승 시간: 오후 7시~ 10시(3시간) 가격: $190~$200

출발장소: Pier 61 – 23st Street, NY, NY 10036

Bateaux New York Dining Cruise

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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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

Mei Lai Wah(美麗華) Bakery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사람 없는 곳이 없다고 하고 뉴욕과 LA에는 제법 큰 코리아타 운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대도시마다 전 세계적으로 자리 한 차이나타운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판이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은 세계의 차이나타 운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발전한 곳으로 약 80만여 명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특히 동 쪽으로는 로어 이스트 사이드(Lower East Side), 북쪽으로는 리틀 이탤리(Little Italy), 남 쪽으로는 시빅 센터(Civic Center), 서쪽으로는 트라이베카(Tribeca)와 맞닿아 있는 맨해 튼 차이나타운은 뉴욕에 있는 9개의 차이나타운 중에서도 미국 속의 중국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곳이다.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중심을 관통하는 커넬 스트릿(Canal Street)을 따라 없는게 없는 이곳에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호사스러운 맛을 즐길 수 있는 맛 집들도 많은데, 그중 2008년과 2016년에 두 번이나 가게 문을 닫아 차이나타운을 사랑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철렁하게 했던 유명한 베이커리인 Mei Lai Wah를 소개한다. 글 90

편집부


커넬 스트릿 양옆 도로에 현대식으로 들어선 빌딩 뒤편으로 주윤발이

두 번이나 가게를 닫았다 새로 열었고 그래서 상호도 Mei Lai Wah와

착각할법한 풍경이 펼쳐지는 맨해튼 차이나타운에는 정말 없는 게 없

안팎으로 저렴한 다양한 bun을 맛볼 수 있다. 늘 발 디딜 틈 없이 북적

주연했던 8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에 나오는 세트장인가 싶을 정도로 다. 즐비한 보석상부터 채소, 해산물, 닭발까지 안 파는 것 없이 다 파는

시장도 즐비하다. 가격마저 너무 착해서 심지어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달러 스토어를 이곳에서는 찾기가 수월치 않다. 대신 25센트 스토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Mei Li Wah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지만 지금도 건재한 이곳에 가면 $1 이고 10개 이상을 사야만 하얀 상자에 담아주고 10개 미만은 무성의

한 듯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이곳의 조금은 불친절한 서비스에도 사람 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유명한 포크번과 함께 또 하나 꼭 맛보 아야 하는 것이 바로 속에 아무것 도 들지 않은 빵인 플레인 번(Plain

때문이다. 그리고 구석구석 숨은그

Bun)이다.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림찾기 같은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다이어트 중인 아가씨라도 어쩔 수

숨은 명소 찾기의 백미는 역시 맛집

없이 앉아서 두세 개는 게눈 감추

찾기! 영화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듯 먹어버리게 되는 플레인 번은

정신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베

거의 마약과 같은 중독성을 띤다.

이야드 스트릿(Bayard Street)을 만

한국의 광장시장에 가면 마약 김밥

난다면 꼭 Mei Lai Wah 베이커리에

이 있다고 하는데, 맨해튼 차이나

들려보길 바란다.

타운에는 이 마약 빵이 있다.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가였던 고 백

남준과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의

옷을 잘 차려입고 고급 레스토랑

표적인 메뉴는 중국식 찐만두 스

스트푸드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을 가기에는 좀 피곤하고 대충 패

입맛마저도 사로잡았다는 이곳. 대

성에 차지 않는다면 뉴욕 메트로

타일의 포크번(Pork Bun; 챠슈바

Subway를 타고 차이나타운으로

오)이다. 마치 꽃빵 속에 다진 고기

가서 Mei Lai Wah에서 포크번으로

가 들은 것 같은 이 빵의 인기가 얼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는 플레

마나 대단한지 2008년과 2016년

에 뉴욕 위생국의 기준에 통과를 하

인 번과 옛날식 종이컵에 담아주는

지 못해 가게를 폐쇄한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노여

조금은 쓴 커피 한 잔을 내일 아침거리로 사보면 어떨까.

는 것과 현대식 식기 세척기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오늘의 위생 기준

Mei Lai Wah

는 것인가 하는 슬픔으로 가득 찬 추도문이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New York, New York 10013

워했다. 아직도 30년이 넘은 오래된 솥을 가게의 주방에서 쓰고 있다 으로 판단할 일이냐는 항의성 기고와 이제 더 이상 이 빵을 먹을 수 없 Voice)와 각종 블로그를 도배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64 Bayard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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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박종진의 작품 속 추억여행

1970년에 두고 온 시간

난로위의 도시락 Metal Runch Box on a Briquet Stov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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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도시락’에는 뭔가 설렘이 담겨있다. ‘소풍’이 연상되고, 허기를 채워 줄 맛난 반찬에 대해 기대감, 어머니와 자녀 간에 소통하는 매개의 역할까

지…. 얼마 전에 진행했던 한 야외스케치 행사에서 줄만 당기면 불 없

바람에 김이 날아가 버렸다. 웃으시며 괜찮다고는 하셨지만 김을 좋아 했던 나로서는 너무 아까웠다.

이도 데워지는 도시락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낀 적이 있다. 금세 뜨끈해

선생님의 점심상에는 항상 고소한 들기름을 듬뿍 발라 갓 구워 따뜻하

난로 위의 도시락을 떠올렸다. 학교급식을 당연하게 느끼는 세대를 향

점심 밥상에 김은 꼭 달라고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

져 먹기 좋을 만큼 온도로 김이 나는 도시락에서 국민(초등)학교시절 한 부연설명 과정은 요즘의 부모가 염원하는 ‘자녀들과의 정서적 소통’ 에 대한 물꼬가 되기도 한다.

겨울방학이 임박한 12월 초의 4교시쯤, 교실 중앙에 있던 난로 위에는

기까지 한 김이 놓여 있었다. 그 김을 볼 때마다 이담에 선생님이 되면 런지 내가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이유도 그 날아간 김 때문이 아

닌가 싶다. 사실 지금도 김은 들기름을 발라 굵은 천일염을 빻아서 뿌 려 직접 구워 달라는 까다로운 주문을 하곤 한다.

차가워진 밥을 데우기 위한 갖가지 모양의 도시락이 차곡차곡 쌓여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도 요즘과는 느낌이 달랐다. 교회를 가지 않는 아

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을 운동회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만들고, 색종이로 고리를 만들어 친구들과 이어 길어진 줄을 교실의 곳

었다. 도시락의 재질이 대부분 알루미늄, 당시에는 양은으로 불리던 재

계주경기의 트랙 모양을 한 타원형 혹은 직사각형, 높이가 두 배나 되 는 대식가를 위한 도시락이 일반적이었고, 뚜껑에는 꽃 그림이나 만화 캐릭터가 그려있었다. 사용하다 보면 젓가락 뚜껑이 찌그러져 맞지 않 게 되어 대부분 무용지물로 전락하

이들도 종교와 상관없이 설날만큼이나 설레던 날로 기억된다. 카드를 곳에 얼기설기 걸어두었다. 중간중간에는 입체로 된 등 모양을 하나씩

만들어 붙이는 합동작품을 하는 과정 동안 모두 행복해 보였다. 제법 근사해서 봄방학까지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의 개념화된 표현으로 설

명하자면 이른바 ‘미술치료’라는 정 서로 우리에게 안정감을 안겨준 소

는 경우가 많았지만, 도시락 뚜껑에

박한 교실 소품이 아니었나 추정해

대각선 방향의 홈을 내어 젓가락을

본다.

넣을 수 있는 기능성 디자인도 있었 다. 도시락들은 금색이었는데 닳아

서 은색으로 변하곤 했다. 아마도 숟

국민학교 시절에 대한 작품들을 제

설거지로 닳아진 이유로 보인다.

는 단연 ‘난로 위의 도시락’을 떠올렸

작하게 되면서 겨울에 대한 소재로

가락으로 긁어댄 탓이거나 어머니의

다. 당시의 학교에서 난로는 가장 즐 거웠던 ‘겨울 놀이’로 기억된다. 흰

김치를 반찬으로 싸 온 날에는 흐른

배경에 주제가 되는 도시락은 될 수

국물에 책이 불어서 귀퉁이가 두꺼

있는 대로 가감 없는 객관적 묘사를

워지곤 했는데, 무거운 다듬잇돌을

하고자 했고, 가끔 아이들이 구워 먹

올려놓고 하루를 기다려봤지만 좀처

던 고구마를 한 개 올려 이야기를 더

럼 원래의 두께로 돌아오지는 않았

했다. 화두가 되는 소재로 운을 띄우

다. 아이 중 한 명이 일어나서 책을

고, 나머지 부분은 관람객 각자의 기

낭독하거나, 네다섯 명이 앞에 나가

억으로 채워가게 된다. 전시장에서

서 칠판의 산수 문제를 푸는 동안 선 생님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도시락

이 골고루 데워지도록 위치를 바꾸는 작업을 하셨다. 4교시 내내 각자 의 도시락행적을 곁눈질하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산수 문제를 칠판에 적어두고 날짜와 번호가 같은 친구를 기 점으로써, 뒤로 몇 명 혹은 날짜에 10단위로 문제를 풀도록 했다. 세심

한 성격의 45번이었던 나는 5일, 15일, 25일에는 온종일 알 수 없는 긴 장감을 내려놓지 못했었다. 때론, 나름 미식가 녀석들이 김치와 들기름 을 밥 밑에 깔아놓은 탓에 점심시간을 재촉했지만, 선생님도 우리도 이 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주번은 할 일도 참 다양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30분 정도 일찍 학교에

그림의 소재와 표현법에 대한 질문

에 ‘짧은 그림 짓기’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회화작가라면 누구나 한 명쯤 닮고 싶은 작가가 있다. 난 16세기 브라

반트(Duchy of Brabant)의 화가 ‘브뤼겔(Pieter Bruegel)’의 작품을 좋 아한다. 그의 그림 속에는 당시 유럽인의 일상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왠지 시 공간을 거슬러 나의 어릴 적을 떠올 리게 되며 유럽인 브뤼겔과 아시아인인 나와 기묘하게도 무언의 의사

소통을 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서 설명할 수 없는 위안과 푸근한 고 향 같은 느낌을 받는다.

도착해서 조개탄을 받아다가 난로에 불을 지피는 일을 했다. 그러나 난

글·그림 박종진

3도가 되지 않으면 난로를 피우지 못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있었고,

개인전(NewYork K&P Gallery)외 7회

로를 피우는 날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실내온도가 영하 우린 그 소문의 기준에 충족할 만큼 더 추워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주번의 할 일 중의 하나가 선생님 점심을 민가에서 날라야 했는데, 한

번은 내가 주번인 날, 선생님의 점심을 들고 교문을 들어설 때쯤 겨울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 홍익대학원 졸업 해외전 및 그룹전 100여회

현재) 한국미술협회/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 전문상담요원 93


LIFESTYLE

2017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

미국 네티즌 추천 2017 최고의 책 뉴욕타임스,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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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신경 끄기의 기술 학창 시절 마약 문제로 퇴학을 당한 문제아, 대학 졸업 후에도 백수로

으로 거듭나는 법’,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선택하라! 그리고 견디라’, ‘죽

년이 있었다. 그는 뚜렷한 삶의 목표나 확고한 가치관도 없이 그저 되

만 읽어도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답이 손에 잡힌다.

지내며 친구네 집 소파를 전전하면서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했던 한 청 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180도 다른 인생을 살

음이 남긴 질문,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등 그가 주장한 얘기 중 부제

고 있다.

2017년 최고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현재 그의 미디어 파워는 메이저 언론과 맞먹는 힘을 가지며, 그에게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깨달음을 준다. 출간 직후

인생의 답을 찾으려 하는 대중의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천 통씩 쇄도한 다. 그는 지금도 50개국 이상의 나라를 바쁘게 누비며 전 세계 사람들 에게 자신만의 중요한 가치를 찾는 방법을 전하고 있다.

“무한 긍정만을 강요하던 기존의 자기계발서는 잊어라!”

F*ck(한국어 번역본: ‘신경 끄기의 기술’)은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그의 블로그를 통해 이미 알려진 독자의 힘으로 단숨에 아마존, 뉴욕타 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1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2017 아마존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뽑혔다. 각 분야 유명 인사들 의 서평과 함께 CNN, 타임지, 포브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수많은 언론 의 극찬을 받은 2017년 최고의 책이다.

몇 년 전 어느 기업의 구호처럼 그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위해 가장

저자 : 마크 맨슨(Mark Manson)

는 잡다한 것을 배제하고 더 나은 삶으로 가기 위한 5가지 가치관을 제

2007년 보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9년 자신의 데이

중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지워버리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삶에서 걸리

시한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질 것, 내가 옳다는 확신 을 버리고 틀릴 가능성을 받아들일 것,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거

절하는 기술을 익힐 것,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숙고할 것. 그 는 대중에게 무조건 믿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인생이 특별해지거나 행

복해지는 것은 아니며, 앞뒤 따지지 않는 긍정은 오히려 독이라며 때론

내려놓고, 포기하고, 더 적게 신경 써야만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 을 발견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얘기한다.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 ‘어떻게’는 필요 없어’, ‘매일 덜 틀린 사람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출신으로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 이사하여

트 자문 사업을 위한 마케팅 채널로 첫 블로그를 시작했다. 디지털 유 목민으로 풀 타임 블로그(MarkManson.net)로 전환한 그는 200만 명

이 넘는 구독자를 지닌,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워블로거 중 한 명이다. 각종 매체에 지속해서 칼럼을 기고했으며, 날카로운 통찰력 과 직설적인 문체로 CNN, 뉴욕타임스, 타임, 포브스, 월스트리트저널

등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Infinity Squared Media LLC를 설립하여 운영 중이다. ‘Attract Women

through Honesty’와 , ‘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ck’ 두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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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뉴욕의 빌딩 시리즈 1회

맨해튼 마천루 시대를 연 상징적인 건물 프레드 프렌치 빌딩 (Fred French Building)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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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포효하는 20년대(Roaring 20’s)

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20년대는 미국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하

보여주는 도시는 없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의 ‘길드 시

터 29년까지 10년간 국민소득은 2배로 올랐고 처음으로 도시 거주자

를 탄생시켰다면 20년대는 그랜드 센트럴 역을 중심으로 한 미드타운

게 변동했던 시기다. 외형적인 경제적 성장이 특히 눈부셨다. 20년부

들의 수가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늘어난 소득은 소비의 급증을 불러왔

다. 자동차와 생활용품, 의류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소비자들의 시선 을 잡기 위한 광고와 광고를 싣는 신문도 급성장했다. 월가는 활황을 넘어 투기의 수준으로까지 연중 상승세를 지속했다. 루이 암스트롱과

듀크 앨링턴이 활동하던 이 시기에 재즈는 연령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얻었다. 영화관에 관객이 몰리면서 6천석 규모의 초대형 극장

이 타임스퀘어에 들어섰다. 그리고 라디오의 등장은 NBC와 CBS 방송 을 탄생시키며 진정한 대중문화 시대의 탄생을 알렸다. 미국이 매스 미 디어를 기반으로 한 대중문화와 대량 소비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

는 시기가 ‘포효하는 20년대(Roaring 20’s)’로 불린다. 그리고 소비와 대중문화의 중심지 뉴욕만큼 정신없이 질주하던 이 시기의 정수를 잘

대’가 5 애비뉴를 중심으로 고급 저택들이 들어서던 ‘백만장자의 거리’ 42가를 중심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빌딩들이 경쟁적으로 올라간

마천루(Skyscraper) 시대를 열었다. 부동산 개발업자, 미디어 황제, 대

기업 오너 들은 더 높고 더 아름다운 빌딩을 건설하면서 그것을 자신들 의 성공과 자존심의 상징으로 여겼다. 전 세계인들에게 맨해튼 하면 떠

오르는 미드타운 마천루의 숲이 탄생했고 당시에 세워진 많은 빌딩이 랜드마크나 히스토릭 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면서 여전히 뉴욕의 스

카이라운의 중요한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20년대 미드타운 고층 빌딩 건설 붐을 가장 앞장서서 이끌었던 인물이 부동산 업계의 타이쿤으로

불리던 프레드 프렌치였고, 그의 이름을 딴 5 애비뉴 45 스트릿의 38 층 프레드 프렌치 빌딩은 마천루(skyscraper)라는 단어를 탄생시키며 20년대 뉴욕을 상징하는 선두 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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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프렌치

자본과 기술을 축적했다. 1920년 그는 뉴욕 부동산의 거물이 되는 일

주정뱅이였던 부친은 세상을 떠났고 어린 프렌치는 신문 배달, 유리창

41스트릿에 16층 오피스 빌딩을 세운 것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프레드 프렌치는 1883년 브롱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 되기전 닦기, 잔디 깎기 등의 일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전업으로 나설 각오였지만 어머니의 강한 만류로 학교에 남았다. 영특

한 학생이었던 프렌치는 퓰리처 장학금으로 명문 호 레이스 만에 진학

생일대의 과감한 투자를 시도한다. 25만 달러를 빌려 매디슨 애비뉴

가장 큰 공업, 미디어, 문화 중심지였던 20년대 뉴욕에는 사무실 공간 을 찾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다.

했고 프린스턴 대학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귀족과 명문 가족들의 자녀

투자에 큰 성공을 거둔 프렌치는 이후 미드타운의 땅을 광범히 하게 매

퇴한다. 프렌치는 이후 텍사스와 뉴멕시코 등에서 닥치는 대로 노동을

중 일부였다. 그는 1925년 그 땅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담은 빌딩을 짓

로 가득한 프린스턴의 속물적 학생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1년 만에 중 하고 심지어 서아프리카까지 가서 돈을 벌었다. 뉴욕에 돌아온 그는 콜 롬비아 대학 엔지니어링 과정으로 다시 공부하며 일을 했다. 창문도 없 는 하루 1불 숙박비의 호텔에서 기거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한 그였지만 톨스토이와 체홉 등 문호들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 다. "사람은 어려울 때라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그의

입했다. 후에 프레드 프렌치 빌딩이 들어서는 5 애비뉴45 스트릿도 그 기 시작했다. 프렌치 빌딩이 완성된 1927년 맨해튼에는 모두 30개의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건설 광풍의 연도였다.

그중에서 프렌치 빌딩은 가장 높은 빌딩의 명성을 2년간 가질 수 있었 다. 1929년 인근에 크라이슬러 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인생관이었다.

한편 주거용 건물로 대표적인 프렌치의 프로젝트는 미드타운 동쪽 끝

프렌치는 27세가 되던 1910년 자신의 이름을 단 회사를 설립하고 어

으로 불리는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릿지 사이 로어맨해튼의 '니

머니의 집을 담보로 빌린 적은 돈으로 부동산 임대 사업을 시작했고 낡 은 건물을 매입해 개조해서 매매하는 개발 사업도 병행했다. 그 후 브 롱스 지역에 수십 동의 아파트를 건설해 본격적인 부동산 개발자로서 98

에 세워진 대규모 주택단지 '튜더 시티(Tudor City)' 와 2 브릿지 지역 커버커 빌리지(Knickerbockers Village)' 다. 편의, 오락, 체육 시설을

모두 갖춘 대형 아파트 단지 들었고 뉴욕에서 처음 시도된 형태의 주거 공간이었다.


맨해튼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38층 높이의 이 건물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점 외에 도 탁월하게 아름다운 아르데코(Art Deco) 양식으로 5번가의 국제적

명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부동산 개발업자이며 엔지니어로서 프레드

프렌치는 구조와 실용성만 추구하지 않았다. 빌딩의 가치를 높이려면

디자인과 장식에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믿었고 이 건물이 그의 개발 철 학을 대표하는 양식인 셈이다. 프랑스풍의 장식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물의 외관은 특히나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칼데아의 예술에 영향을 받아서 '맨해튼의 메소포타미아'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45년 랜드 마크 보존위원회(Landmark Preservation Commission)

는 프렌치 빌딩을 랜드마크로 지정하면서 “전통과 선구자적인 모더니

즘 사이의 양식적 타협을 이룬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로 남아있다"

얇은 금 베니어로 덮인 청동 즉 금박의 엘리베이터는 이 건물의 중요한 예술작품이다.

고 평가했다.

이 빌딩은 뉴욕을 찾는 이들에게 플랫 아이언, 엠파이어 스테이트, 크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직사각형 타워의 4면 장식은 유리 도자기가 재

위로 뾰족하게 드러나는 첨탐도 없고, 건물 전체가 태양광을 반사하는

료였고 붉은 테라코타가 사용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시대를 연상하

는 말의 문양이 외관을 장식한다. 건물의 모든 청동 작품 특히 엘리베

이터 문은 러시아계 예술가인 빈센트 글린스키 (Vincent Glinsky)가 작 업했다. 1986 년 뉴욕시 랜드 마크 보존위원회 보고서에서 명시했듯이

라이슬러 빌딩 등에 비교하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뉴욕의 스카이라인

번쩍거림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입구도 크지 않아 복잡한 5 애비뉴를 걷다 보면 건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디테일을 즐길 수 있는, 100년 전 재즈 시대의 뉴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빌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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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독자칼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 글 박평일

지난주 화요일 오후에 매년 연말마다 갖는 동네 모임에 참석했다. 우리

크리프톤 다운타운의 경우 대부분 건물이 미국 남북전쟁을 전후로 해

태어난 백인들 가정이 30가구 이다. 18년 전 내가 이사 올 때만 해도 동

건물은 물론 증 · 개축마저도 극히 제한 되어있다. 버지니아 지역의 최

동네는 모두 33가구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동네다. 그중에 미국에서

양인 가족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 후 10여 년 전에 인도계 변호사 가정 이 이사 왔고, 5년 전쯤에 중국계 대학교수 부부가 이사 왔다. 동네 거

주 기간이나 미국 땅에서 산 경험, 나이로 보아서는 나는 고참 수준에

속한다. 하지만 백인 이웃들 눈에 비친 나는 항상 외국에서 굴러들어온 이민자다. 우연히 마주길 때면 습관적으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고 국적을 묻곤 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째 모임에 불참해 오다가 동네 모임 서기직을 맡 은 친구 Jon의 수차례 요청으로

서 지어진 건물들이어서 역사적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새로운

초 실내 화장실 건물과 최초의 노예들 전용 교회도 우리 동네에 있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연을 정말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 동네를 주거지로 선뜩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이사를 오면 질병 나거나 늙어서 거동이 아주 불편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주저앉아 사는 경우가 많다.

회의 시작 시각인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하니 이미 13명 정도가 자리를 잡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의 참석을 예상치 못한 듯, 약간 놀란 눈

으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눈

올해 모임에는 참석을 결정했다.

에 익은 몇 사람도 눈에 띄었지만,

Jon은 미 중북부 미네소타주 태

분위기가 약간 어색하게 돌아가고

생으로 연방정부에서 평생 근무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가 5년 전에 은퇴했다. 나이도

나보다 5살 위이고, 우리 동네에

특별 연사로 Ms. Margaret Fisher

는 젊은 시절부터 노후를 자연을

Plants with us’ 였다. 그녀는

산 기간도 5년 정도 고참이다. 그

가 초청되었다. 주제는 ‘Invasive

즐기며 살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Occoquan River 주위의 생태

15년 동안 집을 물색하다가 우리

계를 보호, 보존하기 위한 자원

농네에서 자기 맘에 드는 집을 발

봉사할동을 하는 ‘자연 애호가’

견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 탓으

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로 우리 동네에 대해 사랑과 자부

“Occoquan River 생태계가 심각

심이 대단하다.

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지

역에서 수십만 년 동안 살아온 식

우리 동네의 특이한 점은 젊은 층

물들이 외국에서 침략해 온 식물

들보다 노년층들의 숫자가 압도적

들에 의해서 정복되어 점점 자취

으로 많은 점이다. 그 이유는 대충

를 감추고 있습니다. 현재 이 지역

이러하다. 동네가 위치한 Clifton City 지역에 Occoquan River가

식물 중에서 원래부터 이곳에 살 아온 토종들은 25% 정도밖에 되

흐르고 있다. 수만 에이커에 달하는 울창한 숲에 생수를 공급해 주는

지 않습니다. 75 % 정도 식물들은 유럽이나 아시아, 러시아, 아프리카,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한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대지면적이

는 한 늙은이가 “식물뿐만이 아니라 인구분포도 그와 마찬가지로 변

생명의 젖줄이다. 그 강의 수질을 보호할 목적으로 우리 동네 주변을 최소 5에이커로 제한 되어 있고, 상수도와 하수도 연결도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대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까다로

운 건축허가 조건 때문에 건축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또, 숲으 로 뒤덮여 있어서 길이 좁고 직장인들에게는 출퇴근하기가 여간 불편 하다.

남미 등 외국에서 온 침략한 식물들입니다.” 그러자 80세가 넘어 보이 해가고 있습니다.” 하며 맞장구를 쳤다. (사돈네 남 말을 하고 있군. 미

국 원주민들이 살던 땅을 송두리째 빼앗아 먹은 놈들이 얼굴 낯짝도 없 이…!)

나를 의식하고 한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 르고, 가슴 속에서는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불 편한 심기를 숨기고 조용히 넘어가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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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이 지역 토종 식물들은 이 지역 토양과 기후와

자연질서일 뿐, 동식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고, 금하고, 제거

요가 없고 병해충에 강해 살충제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자태

다.”라는 옛 우리 속담이 있다. 굴러온 돌들은 벽을 좋아하는 탐욕적인

궁합이 맞아서 잘 자라나고 성장하기 때문에 따로 물이나 비료를 줄 필 가 다른 식물들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아울러 천연물과 토양을

보호, 유지해 주며 곤충들이나, 벌, 나비, 벌래, 새들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 역할을 해줍니다. 외국에서 침략한 식물들 때문에 토

종 식물뿐 아니라 그 식물을 의존하고 살아가는 토종 새들, 곤충들, 개

구리, 벌레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

계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침략한 식물들을 뿌리째 뽑아 제거하고 그 자 리를 토종 식물들로 대체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하필이면 내가 좋아하는 Japanese barberry 가지들을 들고나 와 그 침략자 식물의 예로 들었다. 다소 이해가 가는 주장이었다. 그러

나 생태계 파괴에 대한 그녀의 견해는 나의 평소 견해와는 사뭇 달랐 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나의 견

할 권리가 인간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인간 세계에서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계에서만큼은 결코 통용될 수 없는 윤리다. 새로운 지역으로 삶의

터를 옮기는 동식물들은 생존적 분능 때문에 토종 동식물들보다 수 십 배, 수백 배 더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

는 탐욕에서 비롯된 침략행위가 아니라 니체가 주장했던 생명의 본질

인 생존을 위한 ‘권력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끊임없는 변

화와 성장, 진화를 즐기고, 싱싱한 새것을 좋아하는 신의 독특한 기호 탓인지도 모른다. 밤과 낮을 두어서 낯이 늙어 저물어 가면 싱싱한 밤

으로 대체시키고, 밤이 늙어 깊어가면 새로운 낮으로 대체시키며, 또, 사계절을 두고 봄에 탄생한 생명이 늙어가면 겨울에 거두어들여 다가 오는 봄의 싱싱함을 즐기시는……

해를 밝혔다.

깊게 생각해 보면 인류의 지난

“토종 식물들을 보호하는 운동

세기 세계 최고의 지성인 영국

역사도 그 예외는 아니다. 20

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중국의 5

에 일부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천 년 역사를 연구하던 중에 ‘굴

상태계 파괴문제는 지구 전체의

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다

생태계 변화와 파괴에 대한 깊

는 놀라운 역사의 법칙을 발견

은 이해를 하고 인류가 공동으

해 냈다. 중국의 중심 문화가 시

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어 갈 때마다 변방 오랑캐 문

나는 지난 수년 동안 Occoquan

화가 구세주로 나타나 중심문화

River 강변 숲길을 산책하면서

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심문

매년 눈에 띄게 숲의 생태계가

화로 자리매김 했었다. 테네시

변하고 달라지는 모습들을 직

주 군인 출신 미국 7대 대통령

접 눈으로 목격래해 오고 있습

Andrew Jackson은 1930년 5월

니다. 미 대륙의 기후변화, 온

28일 The Indian Removal Act

난화 현상 때문에 이 지역 토종

에 서명을 했다. 테네시주를 비

식물들은 점점 죽어가고 North

롯한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미

Carolina, South Carolina, 심

국 원주민 인드안들을 미시시피

지어는 Georgia 주 식물들까지

강 서부로 추방시기키기 위한 법

북상해 오고 있습니다. 나는 지

난달에 테네시주에 위치한 The

안이었다. 15,000여 명은 인디

Smokey Mountain을 일주일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도 이 지역과

언들 중에 4,000 천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굶주림과 추위, 질병, 갈증으

운틴에는 대충 100여 종류의 토종 나무들, 150여 종류의 꽃들, 240여

시만 해도 백인들의 눈에는 인디언들이 Relocation이라는 단어 대신

유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스모키 마 종류의 새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온난화 현상으로 남부

주들 식물들이 북상해서 토종들의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고 합니

다. 자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북극의 폴라 곰들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와 마찬가지겠지요.”

그러자 그녀는 “남부 주들 식물들은 이 지역 식물들과 유사한 종류의

로 죽어간 그 유명한 Trail of Tear의 처참한 고난의 행렬이었다. 그 당 Remova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동식물들같이 하찮은 존재들 로 보였을 것이다. Invasive plants 들을 Removal 하고 미국 토종식물

들을 심으라는 강의를 듣고, 왜 갑자기 The Indian Removal Act가 내

머릿속을 스쳐 가고 가슴 속에 이유 없는 서글픔이 파도치고 있는지 모 르겠다.

미국 식물들입니다.” 하며 서둘러 대답을 마쳤다. 맞는 주장이다. 그들 도 미국 식물들임을 부인할 미국인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외국에서 침략해온 식물들이 아니다. ‘Maid in America’, 미국산 식물들이다.

자연계는 인간사회들처럼 국경 개념이 없다. ‘이민’이라는 개념도 없

다. 다만 창조주 신이 부여한 자유 지와 생존 의지를 따라 자기들이 살 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이동할 뿐이다. 이는 준엄한 창조 섭리이고

박평일

부동산 감정사

경복고, 서울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Clifton, Virgini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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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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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인의 아내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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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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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엄마 홍정연 (네 번째이야기) 글 홍정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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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파키스탄 사람과 한국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첫째로 정이 많다는 건

최근에 유명 아이돌 멤버가 자살한 소식을 듣고 참 안타까운 적이 있었

놓고 우리 할머니 때 시대처럼 손님 접시에 무조건 얹어준다. 세 번 거

177위이다. 순위에서 보듯이 이 나라는 자살이 종교적으로 금기되어

데 특히 손님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한다. 한국처럼 상을 휘어지게 차려 절하면 그때야 주인이 포기하는데 주로 비싼 염소고기가 권해질 때가 많다.

돌이켜보면 파키스탄에서 전통 혼례를 치루고 한 달간 머물면서 이틀 에 한 번꼴로 친척 집을 방문해서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었는지 5kg나

찌고 온 생각이 난다. 주로 염소나 닭고기 커리가 메인이고 넓적한 모

양의 빵인 “로티”와 화덕에서 구워낸 “난”이 곁들어 오는데 우리나라

상추쌈 먹듯이 빵에 고기와 야채를 넣고 파란고추를 갈아 넣어 만든 요 구르트 소스를 얻어먹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불고기처럼 손님 접대

에 빠질 수 없는 요리가 “브리아니”인데 바스마티 쌀과 고기를 커리 양 념해서 볶아낸 볶음밥이다. 특히 부유한 집에 초대되면 마당에 숯불고

기를 뜨근뜨근하게 서빙해 주는데 긴 꼬치에 각종 고기와 야채를 꽂아

서 매콤한 양념을 바르면서 구워내는 건 우리나라의 숯불갈비와 흡사 하다. 맛 또한 가장 근사해서 나의 첫 번째 선택 메뉴 “인”이다.

이웃간의 정을 나누는것도 한국과 참 비슷한데 음식을 나눠주는건 물 론이고 대소사를 거의 같이 해낸다. 특히 집안에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3일장을 치루고 40일이 되는 날 다시 모여 쿠란을 읽고 기도하면서 가 족들을 위로한다. 이때 3일간은 집에서 가스불을 켜고 음식하는 게 금

기시 되서 요리을 전혀 하지 않고 친척과 이웃이 음식을 담당해 제공해

다. 2015년 WHO 발표에 따르면 한국 자살률은 10위이고 파키스탄은

있다. 실제로 무슬림 나라의 자살률은 극히 낮다. 어떤 인생이라도 생 명은 신의 선물인 것이다. 어찌 보면 불교와도 상통되는데 심지어 동물 이나 식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신(알라)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가축을 도살할 때도 물과 음식을 충분히

주고 다른 가축의 가족이 없는 곳으로 홀로 데려가 가장 날카로운 칼로 고통을 덜하게 하여 “신의 이름으로”를 외치며 동물의 동맥을 따서 피 를 흘려 자연스럽게 도살한다. 목을 절단하거나 전기충격으로 죽인 경

우는 고통이 극심해서 인지 살이 경직돼서 몇 시간이 지나야 먹을 수 있는데 이슬람 방식으로 도살된 “할랄” 고기는 바로 먹을 수 있다. 처 음엔 피를 흘리며 죽는 가축을 보면서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러

한 방법이 가장 고통을 적게 하는 것이고 피에는 각종 박테리아가 서식 해서 사실 피를 뺀 고기가 사람 몸에는 더 이롭다고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이외에도 어른을 공경하는 말, 어른이 먼저 식사하는 것, 어른에게 먼

저 인사하는 예절 등등 많은 관습이 한국과 비슷해서 별로 이질감을 느 끼지 못한다. 다만 시간 개념이 좀 희박해서 오후에 집에 들르겠다고 하면 저녁 시간에 나타나서 종종 당혹스럽게 했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익숙해진 나는 진정 “파키스탄 댁”이 되어버렸다.

준다. 그리고 이슬람에선 화장이 금기사항이라서 모든 시신을 땅에 묻

는다. 특이한 건 이러한 무덤에는 봉분이 없이 평평하게 평지와 같은 높이로 만드는데 비석도 거의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시간이 지나

면 누가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요즘에는 이름만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부부가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자식도 같은 곳에 합장하기

아가칸 파키스탄 대학원 간호학 석사

간단히 표시하는 경우가 있다. 가족 무덤인 경우에도 합장을 많이 해서 도 있다.

가톨릭의대 간호학과 학사

뉴욕 리만 칼리지 Family Nurse Practitioner certificate 103


사진으로 다시 보는

후원 행사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그리움으로의 여행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출연: Acoustic Generation(김병관, 박동규, 김동휘) 특별출연: 최영수(하모니커) 장소: 하영석 스튜디오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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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배부처

배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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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isades Park: Koko Loko Coffee, 솔사우나, 김밥클럽, Peppre Media Leonia: Coffee Park Closter: TOUS LES JOURS, Sun violin, 예당

Norwood: Camerata New Jersey, 정미용실 Paramus: Kook Hwa Bakery Cafe, 서울 BBQ Englewood Cliffs: NV Factory Teaneck: AWCA Ridgefield: H-Mart, 아리랑김치 River Vale: 혜윰 공방 Edison: H-Mart

뉴욕 배부처

Manhattan: 고려서적, 뉴욕한국문화원, 소림꽃집 Flushing NORTHERN: ‌ 금강산, 대동연회장, 뉴욕의 아침, M 스튜디오,‌ 굽지(Gupji), 뉴욕가정상담소 Bayside: SEJONG MUSIC STUDIO Long Island: H-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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