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NY MARC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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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에스카사

Photo by Gene Schiavone (Provided by ABT)

Vol.13

March

COVER STORY “꽃은 다 피기 전에도 아름답다” 실력으로 ‘여왕’이 된 발레리나 서희

ART&CULTURE 퀘렌시아(Querencia) & 조각가 장수영

LIFESTYLE 아기와 함께 고급식사를 Nibble + Squeak

영원한 문학청년 재미 문인 이충렬

알아두면 유익한 시니어 할인 Tips!

PEOPLE FOCUS 600만불의 나눔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랑 한인커뮤니티재단 윤경복 사무총장

스튜디오 탐방 아티스트 홍 범

하늘에 있는 호수 모홍크

봄을 재촉하는 3월의 뉴욕 이벤트

식욕 없는 봄철엔 ‘감칠맛’으로~






CONTENTS

March 2018 Vol.13

10

22

Cover Story

Education

Art & Culture

10

30

48

실력으로 ‘여왕’이 된 발레리나 서희

내가 지켜줄 게

33

유년의 추억, 공간의 기억을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홍 범

님의 침묵(沈默)

저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꽃은 다 피기 전에도 아름답다.

An unbloomed flower has a beauty of its ow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12)

Ballerina Hee Seo A Queen Who Rose To The Top With Her Talent 3월의 인물

3월의 사진과 글 20

시냇물 소리가 난다 / 김은자

People Focus 22

600만불의 나눔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랑

한인커뮤니티재단 윤경복 사무총장

Over $6 Millions in Grants to The Community – Building Up A Circle of Giving

Executive Director Kyung B. Yoon at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 (KACF)

6

만해 한용운

34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직장 생생 체험기(3)

40

Preventing Copycat Suicide in the Wake of Jonghyun’s Death

샤이니 종현의 죽음과 모방 자살의 예방

기억은 항상 장소가 필요하다

54

‘세상 속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59

봄을 재촉하는

3월의 뉴욕 이벤트

62

삶과 예술이 공존하는 방, 퀘렌시아(Querencia)

그 곳에 조각가 장수영이 있다

68

44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힌 베스트셀러 전기 작가

자꾸 쓰면 더 예쁜 우리 글

72

말도 뜻도 예쁜 우리말

46

뉴저지에서 두번 째로 큰 대학

몽클레어 주립대 Montclair State University

영원히 늙지 않는 문학청년을 꿈꾸는 재미 문인 이충렬 영화 심리 이야기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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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68

Life Style

Clinic

Travel

74

88

94

Nibble + Squeak 이벤트

다양한 치아미백 클리닉

State park at New Paltz

아기와 함께 고급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76

단맛, 신맛, 쓴맛, 짠맛 그리고 감칠맛!

식욕 없는 봄철엔 ‘감칠맛’으로~

78

신이 숨겨둔 선물

캐나다산 슈퍼푸드 차가(Chaga)버섯

80

55세 이상 뉴욕 거주 노인이 받는 할인 혜택, 뭐가 있을까?

알아두면 유익한 시니어 할인 Tips!

아름다운 미소 하얀 치아

90

독자칼럼

조현례 수필집 ‘가난한 부자’ 중에서

“미국 거지”

92

독자칼럼

전문 음악인의 생활 속 음악 이야기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함께 나눈 콘서트

하늘에 있는 호수 모홍크 산장

96

도톤보리의 간판, 거리를 밝히다

간판따라가는 도톤보리 여행

98

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Hola! 아르헨티나 & 볼리비아

82

제 책에서 작은 위안 한 줄이라도 발견하길 바랍니다

민병임 칼럼집 <족발이든 감자든>

84

30 록 (30 Rock)이란 애칭으로 사랑받는 뉴욕 관광과 미디어의 상징

30 록펠러 플라자

9


Publisher Jennifer Y. Lee (USA) Dr. Charles Changsoo Lee (KOREA)

에스카사 (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Managing Director Sarah Chung Magazine Director Yebin Taylor Lee

Editor in Chief Won Young Park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 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 가 전해주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문 화예술, 패션, 라이프 스타일, 화제인 물 focus, 교육, 육아, 요리, 여행, 건 강정보 등을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 기를 가득 담았습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 틀, 애틀랜타, 사우스캐롤라이나, 달 라스 지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 구, 부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 격 글로컬 (Global + Local) 잡지입 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입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 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 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 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 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10

를 만드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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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Juyoung Lee, Young Choi English Translation / Hyobin Lee, Taylor Lee 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Legal Columnist / Minji Kim Science Columnist / Dr.Byung Hee Hong Music & Arts Columnist /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Food Columnist / Hwajung Sung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Kibum Kim, George Jung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Hyunmin Kwon, Bohyun Im, Joohee Han, Youngjoo Song,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Minjung Choi, Sungjoo Hong Marketing Director / Joonhee Kim Advertising Director / S.H. Chung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Lee ‌ ‌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 ‌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for each field. ‌ ‌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 ‌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 ‌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 ‌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Dallas,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 ‌ is the hub for cultural and artistical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 ‌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 ‌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Creato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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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꽃은 다 피기 전에도 아름답다”

실력으로 ‘여왕’이 된 발레리나 서희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영문 Taylor Lee 정리

12

편집부

Hee Seo in Other Dances. Photo: Erin Baiano. (Provided by ABT)


Hee Seo in Romeo and Juliet. Photo: John Grigaitis. (Provided by ABT)

새초롬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한 발끝으로 도도하게 서 있는 한국인 줄리엣. 세계 3대 발 레단 중 하나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American Ballet Theatre)의 서희다. 2009년, 군무 무용 수(코르 드 발레: Corps de Ballet)로는 이례적으로 대작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을 맡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뒤, 2011년, 또 한 번 솔로이스트(Soloist)로는 드물게 ‘여자 무용수의 로망’이라는 ‘지젤’ 로 발탁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서희는 ABT의 수석 무용수(Principal Dancer) 로 뉴욕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로부터 2018년 현재까지 서희는 “무용수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한 역할도 빼놓지 않고 다 해봤다” 할 만큼 수많은 역할을 소화해내며 세계 정상급 발레리나로서의 위용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인적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그간 받고 얻고 이룬 것 을 세상과 나누고자 ‘서희 재단(Hee Seo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제2, 제3의 서희를 꿈꾸는 수 많은 발레 꿈나무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발로 뛰고 있는 그녀를

편집부가 만나 보았다.

13


2018년 4월, 뉴욕에서는 세계 최대 유소년 발레 콩쿠르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YAGP: Youth America Grand Prix)'가 개최된다. 매년

전 세계에서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어린(9-19

세) 발레인들이 참가하여 경연을 펼치는 꿈의 무대이다. 세계 유수 발레 학교 입학 및 발레단 입단 특전이 주어지는 대회인 까닭에 한국의

발레인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참가를 열 망한다. 호주(3개 지역), 프랑스, 브라질, 일본과 미국 내 18개 지역에서만 개최되었던 이 대회

의 예선이 2016년부터 ‘YAGP Korea’라는 이름 으로 한국에서도 열리게 되었다. 아메리칸발레

시어터(ABT)의 수석 무용수 서희가 본인의 이

름을 걸고 설립한 재단(‘사단법인 서희’)이 이 룬 첫 번째 쾌거였다. 그녀는 당시 “이건 시작 일뿐”이라며 앞으로 그녀가 해나갈 수많은 일

들에 대한 남다른 각오를 보였다. 그 후, 2017 YAGP Korea 개최는 물론, 한국 전역에 걸친 마 스터 클래스 투어를 성공리에 마친 뒤, 현재 올 4월 뉴욕 결선을 앞둔 한국 참가자들의 최종 준

비를 돕고 있다. 서희가 한국 발레 영재들의 해 외 진출을 위해 이토록 애쓰는 이유는 “내가 그 렇게 이 자리에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건 내 몫

어린 시절, 운동 삼아 동네 문화센터에서 발레 수업을 들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초등학교 6학년 때, 지원한 배드민턴부가 꽉 차서 차선 으로 발레부에 들어갔고, 선화예술학교의 발

레 콩쿠르에 참가하여 입상하면서 선화예중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렇게 발레리나가

되는 첫걸음을 떼고 1년 뒤, 워싱턴 DC의 키로

프발레학교(Kirov Academy of Ballet; 전 유니 버설발레아카데미) 교장이 선화에 와서 실시한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3년간의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우연한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성장의 발판으로 만들어 낸 데에는 재능과 더불어 그 녀의 당찬 성격도 한몫을 한 듯 보인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외롭고 힘들지 않았 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저는 그렇 지는 않았어요. 발레를 배우는 게 신나고 재 밌어서 방학 때 집에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 거든요. 그보다는 제가 발레를 늦게 시작한 편이라, 일찍 시작한 다른 애들을 따라가는 게 힘들었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익혀야 할 것을 단시간에 흡수하려고 하다 보니 겉보기 엔 비슷해도 당연히 오래 한 친구들보다 내공 이 떨어졌죠. 발레가 벼락치기로 되는 게 아 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14

Hee Seo in Le Corsaire. Photo: Rosalie O’Connor. (Provided by ABT)


그렇게 발레에 빠져 지낸 3년은 결코 무상하지 않았다. 키로프발레학

‘사람의 삶’을 표현할 줄 아는 발레리나

입상하면서 세계의 발레 학교 어디든지 선택해 가서 공부할 기회를 얻

때 미국 뉴욕을 자신의 활동 무대로 선택한 이유는, “무용수로서의 경

교에서 수학하던 2003년, 스위스 로잔 콩쿠르(Prix de Lausanne)에서 게 된다. 같은 해, 뉴욕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 대상 획득으로 미국에서

의 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발레단(Stuttgart Ballet) 산하 존크랑코발레아카데미(John Cranko Ballet Academy)

로 옮긴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을 발레단 공연에 임시 단원으로 투입하

여 ‘로미오와 줄리엣’, ‘백조의 호수’ 같은 대작들을 단원들과 함께 공연

하도록 해 주었다. 덕분에, 프로 무용수로 발돋움하는 데 필수적인 훈

련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공연 무대에서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년 만에 슈투트가르트와 ABT스튜디오컴퍼 니(ABT Studio Company: ABT의 단원이 되기 전에 훈련을 받는 곳으

로16~20세인 12명–남녀 각 6명–의 무용수로 이루어져 있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게 된다.

독일과 미국 두 발레 강국의 대표적 발레단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을

력도 중요하지만, 사람으로서의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 는 부모님의 조언 덕분이었다. 그때의 결정이 두고두고 흡족한 까닭은,

문화, 예술, 경제,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서 무용수로서뿐만 아 니라 한 사람으로서 정말 많은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 삶에서 발레가 가장 우선이긴 하지만, 발레밖에 모르는 발레리나 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발레는 무용수로서 제 ‘일’인 만큼 ‘근무 시 간’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요. 그렇지만, ‘퇴근’ 후에는 ‘발레리 나 서희’가 아닌 ‘사람 서희’로서의 삶을 즐기려고 노력합니다. 다양 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즐기고요. 무용이 아닌 다른 문 화 예술도 많이 접하려고 해요.

Hee Seo in La Bayadère. Photo: Rosalie O’Connor. (Provided by ABT)

15


그녀에게는 이 두 삶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처럼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나 상반되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발레 연기도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으로서의 제 삶이 중요한 건,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에서 영감 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제 연기를 통해서 사람의 감정을 표현 하고, 그걸 관객들도 느끼게 하려면 제가 그 감정을 아는 게 중요하 기도 하고요. 물론, 모든 경험을 다 할 수는 없으니까 모든 감정을 다 알고 표현할 수도 없겠죠.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죽 은 지젤이 죽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제가 머리로 알기는 어렵죠. 하지만, 제가 살면서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다 는 걸 믿기 때문에 지젤의 감정을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력을 바탕으로 저만의 지젤을 연기할 수 있어요. 발레 연기는 수학 공식 같지 않아서 정답이 없다. 같은 무용수가 같은

배역을 연기한다고 해도 그 연기는 매번 다르다. 관객들이 같은 무용 수의 작품을 여러 번 보는 이유이고, 발레단에서 좀처럼 공연 실황을 녹화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런 예측불가능함이 발레의 매력이라면, 훌

륭한 무용수는 같은 역할이라도 자신만의 색깔로 개성 있게 표현해내 는 무용수일 것이다. ABT의 예술감독 케빈 매켄지(Kevin McKenzie)는 “서희의 가장 큰 자산은 역할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통찰력이

다.”(2011년 4월 23일 자. 중앙일보. “세계 발레 ‘백조’로 떠오르는 25세

의 발레리나 서희”)라고 평하며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였다. 이는 그녀 가 사람으로서의 삶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써 더 나은 연기를 위한 통 찰력과 상상력을 키웠기 때문이 아닐까.

뉴욕의 ABT, ‘최고’가 되기 위한 ‘최적’의 환경

발레리나 서희는 ‘최고’의 자리에 서 있다. 그녀가 2004년 ABT 스튜디 오컴퍼니의 훈련생으로 시작해 2012년 ABT의 수석 무용수가 되기까

지 8년이 걸렸다. 6년간 신중히 기초를 다지고 주역이 된 후, 빠르게 최 고의 자리에 올랐다.

모든 스텝을 다 밟아서 그 당시엔 더디다고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 니 왜 그런 시스템이 있는지 이해가 돼요. 힘들긴 했지만, 제가 무용 수로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그 시간 동안에 발레가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발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으니 까요. 작은 역할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함부로 임하고 나면 죄책감 에 시달리게 된다는 걸 알고부터는 늘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공연하 게 되었어요. 줄리엣이 되고 솔로이스트가 되었을 때나, 지젤이 되고 수석 무용수가

되었을 때, 그녀가 한없이 기뻤던 것은 이례적인 캐스팅 콜이나 승진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며 자신을 지켜봐 왔을 뿐만 아니

라 발레를 정말 잘 아는 동료들과 선생님들의 진심 어린 축하, 즉 그들 의 ‘인정(認定)’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승진은, 외부에서 영입된

무용수가 아니라 ABT에서 성장한 무용수의 승진이었다는 점에서 ABT 단원들에게도 큰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Hee Seo in Other Dances. Photo: Erin Baiano. (Provided by ABT)

16


Hee Seo in Giselle. Photo: Gene Schiavone. (Provided by ABT)

서희의 승진에 대해서는 매번 통보하는 이나 듣는 이나 담담했다. “얹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다 피지 않은 꽃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

있는 듯, 그녀는 어떤 배역이든 “알겠습니다”라는 담백한 대답으로 받

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그 결과, 세계적인 발레단을 대표

혀주는 건 네 역량으로 해내는 것”이라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원칙이 아들였다.

단장님께서 주신다니까 그냥 알겠다고 하고 준비했어요. 이것저것 물어보면 날아갈 것 같기도 했고요. (웃음) 대신 공부를 정말 많이 했죠. 책도 찾아 읽고 영화도 보고요. 다른 무용수들이 연기한 비디 오를 보면서 그들이 그 역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보고, 또 제가 직접 하면 어떨지를 상상하면서 다시 보기도 하고요.

녀는 그 말을 되새기며 주어지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믿어 하는 수석 무용수가 되었다. 그 타이틀은 당연히 무겁고 부담스러웠다. 한번은 그 부담감으로 울면서 선배인 줄리 켄트(Julie Kent)에게 너처 럼 오래 하면 괜찮냐고 물었더니, “오래 해도 똑같은데 어떻게 핸들링

을 하는지는 배우게 된다”고 했다. 그 말대로 이제는 공연 때마다 부담 감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하고 준비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감당하는 법을 배운 그녀의 연기는 무대에서 ‘여왕(姬)’처럼 활 짝 피어 빛난다.

그녀가 처음으로 주역을 맡아 연기한 열여섯 살 줄리엣은 무용 비평가

발레리나 서희는 발레를 시작한 때부터 ABT 수석 무용수가 되기까지

적인 발레리나”라며 극찬했다. (앞에 인용된 2011년 4월 23일 자 중앙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이제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한국의 발레 꿈나

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뉴욕 타임즈는 그녀를 “ABT의 가장 매혹 일보 기사) 마흔 살이 넘은 무용수가 은퇴 공연으로 주로 할 만큼 복잡 하고 심오한 여인의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지젤을 맡았을 때도 그녀는, 스물네 살이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불식시키 고 그녀만의 지젤을 성공적으로 표현해내어 찬사를 받았다.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만 보면, 제가 대작의 주역만 연기한 것 같지만, 사실 안 해 본 역할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크고 작은 작품들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런 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보고 발레단에서 지젤을 맡긴 것 같아요. 스물네 살인 제가 표현하는 지 젤이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제 연기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무대에 섰어요. ABT는 정기적인 승급 심사 없이 단원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평가하면서 각 무용수의 역량에 맞게 역할을 맡긴다. 더불어, 어떤 역

할을 함으로써 소속 무용수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기회를 주 기도 한다. 이런 ABT의 시스템은 서희가 성장하는 데 최적의 환경이

되어 주었다. 그녀는 벅차다 싶은 역할이 주어질 때마다 어린 시절 선

생님에게서 들었던 말 한마디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키 로프발레학교 시절, 발레가 마음처럼 잘되지 않아 슬퍼하던 자신에게

자신의 능력을 믿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후원해 준 모든 손길을 무들에게 돌려주고자 열심히 뛰고 있다. 그녀가 후원금을 모아 설립한

‘서희 재단’은 발레 학도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을 비롯하여 외국 발레 단 오디션 개최, 콩쿠르 입상자의 해외 발레단 입단 지원, 유명 발레 무

용수의 마스터 클래스 개최 등 세계 수준의 무용수를 발굴하고 양성하 기 위해 여러 활동을 계획, 추진하고 있다. YAGP의 보드 멤버인 그녀가 YAGP 예선의 한국 유치를 이루어 낸 것도 그 결실 중 하나이다. 그녀

는, “한국에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서서 콩쿠르를 유치하고 더 많은 학생이 본선에 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 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 그녀가 그 아이들이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고 있다.

서희는 주 6일(공연이 있는 기간), 하루 9시간을 연습하고 공연을 한다.

그리고 “휴식 시간”에 재단 일을 한다. 공연이 없는 여름이 되면 틈틈 이 한국에 가서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한다. 그녀는 어린 발레 학도들에

게 아직 “다 피지 않은” 그들의 발레도 아름다움을 알려주며 자신감을

불어 넣어 준다. 또한,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라”고 충고한다. 정답이 없어서 정형화될 필요가 없는 발레처럼. 그녀는 머지 않은 미래에 성장한 그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설 날을 그린다.

17


“An unbloomed flower has a beauty of its own”

Ballerina Hee Seo

A Queen Who Rose To The Top With Her Talent

18

Hee Seo in The Leaves Are Fading. Photo: Ken Brower and Deborah Ory. (Provided by ABT)


Imagine a Korean Juliet, standing at edge of her toes and gazing out into the space with a simplistic expression. Her name is Hee Seo, the world-renowed principal dancer for one of the world’s three largest ballet companies, American Ballet Theater (ABT). In 2009, she gained recognition by portraying Juliet in Corps de Ballet’s exceptional masterpiece Romeo and Juliet, and in 2011, she once again introduced herself to the world by performing one of the most coveted roles in ballet world, “Giselle”. The following year, Hee Seo officially became ABT's Principal Dancer and reached to the top of ballet scene in New York City. From then until the year of 2018, Hee Seo has played almost every possible ballerina role a number of roles as a "dancer," and established her name as the world-class ballerina. But rather than settling solely for personal success, she decided to share her success with rest of the world by founding the "Hee Seo Foundation".

met Hee Seo

in person, a beautiful artist who works hard to help her younger successors who dream of becoming the second and third Hee Seo.

In April 2018, the world's largest youth ballet competition "Youth America Grand Prix" (YAGP) will be held in New York. It is a dream stage for young children (9-19 years old) from all over the world to

participate in the competition every year. This event, which was held in

18 locations in Australia (3 regions), France, Brazil, Japan and USA, was once held in Korea in 2016 under the name of YAGP Korea. It was the first achievement of Hee Seo’s foundation, yet she was determined to

do a lot of things she would do in the future by saying, "This is just the

beginning," The reason why Hee Seo is trying so hard to held advance the upcoming Korean ballet prodigies overseas is because she says, "I became who I am through this competitions".

At the age of thirteen, she was

awarded a prize at the Ballet

Competition held by Sunhwa

Arts School, and she took her first

step as a ballerina when she earned a scholarship to the Sunhwa arts academy school. After a year, she auditioned for the Kirov Academy

of Ballet in Washington D.C. (formerly known as Universal Ballet

Academy), which led to an opportunity for her to step into United

States to further her studies. In 2003, when she was studying at the Kirov Ballet School, she won the Prix de Lausanne Prize in Switzerland and the New York Youth America Compe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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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then transferred to the world

renowned John Cranko Ballet

Academy in Stuttgart, where she honed

her skills to become a professional

ballerina. During her time in the school, students were assigned to temporary

ballet performances to perform

masterpieces such as Romeo,

Juliet and Swan Lake along with their team members. Thanks to

their help and cooperation, she was able to fully portray her talent on stage, and just within a year she was offered to join

the prestigious Stuttgart Ballet

Company as well as ABT.

When she started to receive calls

from representatives of two of the

ballet powerhouses in Germany and

the United States, she ultimately chose

New York as her primary ground. The

reason was heavily influenced by her parents

reminding her, “Choose a place that opens up various

opportunities and experiences as a person, rather than

focusing on building professional experience.” She made her

decision based on the belief that she will grow not only as a dancer

but also a person, in a city that prides itself in being center of culture, art, economy, and everything. It is clearly evident that to Seo, ballet

is her “first priority". Interestingly enough, she mentions, "I don’t like the idea of ballerinas knowing nothing but ballet." Since Ballet is her

profession in the 'workplace', she puts in her best effort during her 'working hours', but she does not forget to enjoy her life as ‘human Hee Seo’ also. Interacting with various people while paying attention

to other fields of art and culture is how she fills her personal time when she is off stage -- of course, her two distinct lifestyles are not

completely separated nor conflicting like the story of Dr. Jekyll and

Mr. Hyde. She believes that the more experiences she builds as a “human being”, the more wholesome her ballet performances will become. 20

Hee Seo in The Leaves Are Fading. Photo: Ken Brower and Deborah Ory. (Provided by ABT)


Hee Seo in Sylvia. Photo: Marty Sohl. (Provided by ABT)

Ballerina Hee Seo remembers each one of the helping hands that

The weight she carries as the principal dancer among the world-

now, and she is eager to return the favor to the ballet dreamers

once reached to a breaking point and let her tears fall while asking

she received from the moment she started ballet to where she is back in Korea. The 'Hee Seo Foundation', which she founded

as part of a fundraising opportunity, is to discover and educate

world-class dancers by sponsoring scholarships for students, holding auditions, supporting overseas ballet companies to participate in the competition, and hosting classes taught by ballet dancers.

Being one of the board members for YAGP, she is a strong

supporter of finding talented students from Korea -- she says that it’s a pity that so many of the young artists are not able to find

enough support to have their talents discovered and enable them

class ballet scene is obviously heavy and burdensome. Hee Seo

Julie Kent, her senior, if everything will get better as time passes by. Julie instead said that everything actually stays the same -- it’s only

a matter how how she learned to manage the constant pressure.

Nowadays, during her difficult times, she goes back in her memory to catch up with the words she heard from her childhood teacher from Kirov Ballet school -- she reminisces on her teacher’s kind words spoken, “A flower that has not yet been bloomed is just as beautiful."

She recites those words as she stands on the stage with the belief that only her performance will have beauty of its own. As a result, her breath-taking performance blossoms like a queen on stage.

to participate in mainstream competitions.

During the six days out of the week (in the midst of her performance

There is no doubt that ballerina Hee Seo on the top of her field.

performing. After that, she uses her leisurely break by getting involved

She has consistently laid the foundation and consistently climbed

her way to where she is now. Throughout the accomplishments of when she became ‘Juliet’, when she became a soloist, when

she became ‘Gisele’, and when she became the principal dancer -- what delighted her the most was not the extraordinary casting calls nor the promotion itself, but the ‘accreditation’ she received from her colleagues who have been working with her for a long

time and who truly understand the artistry of ballet. She has made any given roles hers, and always lived up to her name by owning up to her responsibilities.

season), she devotes nine hours each day to practicing and in her foundation work. During the summers when there are no

performance scheduled, she goes back to Korea and hosts a class for

younger ballet students who are aspiring to follow into her footsteps.

She hopes to inspire these young artists that their “pre-developed” ballet is just as beautiful, and ensures their confidence level has been elevated. She also reminds them by saying, "Live your own life, by

not comparing yourself with others." -- this mirrors the notion of the

ballet itself, which doesn’t go by the stereotype and the interpretation

itself has no right answer. She dreams of having a performance together when her students are professionally grown up, in the nottoo-distanc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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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사진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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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소리가 난다 詩 - 김은자

김은자

시인, 문학 칼럼니스트.

재외동포 문학상 시부문 대상 , 윤동주 문학상 (해외동포 부문)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비대칭으로 말하기> 등

삼월에는 흰 빨래를 하고 싶다 등에 업은 아기도 고단한 머릿집도 내려놓고 수북히 쌓아놓은 옷더미 하나 하나 꺼내어 힘껏 , 방망이를 내려치고 싶다 흠씬 얻어맞아 자유로운 봄 눈부신 봄 헹구어내고 싶은 봄 봄 햇살에서는 시냇물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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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ocus

600만불의 나눔 그리고 그 이상의 사랑

한인커뮤니티재단 윤경복 사무총장 글 Sarah Chung 영문감수 Taylor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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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한인 비영리단체로서 15년 누적 모금액이 600만 불이 훌쩍 넘 는 곳. 하지만 그 액수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곳.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도, 그리고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마저도 기꺼이 달려오게 만드는 곳. 그곳이 바로 한인커뮤티니재단(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이다. 그 본부가 있는 맨해 튼 64가 오피스에서

한인커뮤티니재단(KACF: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은 매우 독특한 비영리 단체이다. 언뜻 이름만 듣기에

는 많고 많은 한인 비영리단체 중의 하나인가 싶지만 ‘비영리 단체를 도와주는 비영리 단체’라는 그 아이덴티티 자체도 독특할뿐더러, 이 민 1세대가 아닌, 현재 주류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영어가

더 편한 한인 1.5세와 2세들로 구성된 젊은 단체라는 것도 매우 신선 하다. 한인커뮤티니재단에서 주최하는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보면 3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한다. 첫째는 뉴욕에 이렇게 많은 한인이 한꺼

번에 모이는 행사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 큰 규모에 놀라고, 둘째는 뉴욕에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젊은 한인이 많다는 점에 한 번

더 놀라고, 마지막으로는 그런데도 아직 의식주의 기본적인 문제조 차 해결이 안 되어 고통받는 한인 이민자가 많다는 믿을 수 없는 사

실에 놀란다. 한인 이민자는 아메리칸 드림의 성공 케이스가 아니었 던가. 한인커뮤니티재단은 이런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한인 이민 자의 최소한의 생계유지와 자립을 도와주는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

는 일을 한다. 한인커뮤니티재단의 출발과 그 철학을 윤경복 사무총 장에게 물었다.

가 윤경복 사무총장을 만났다.

니티재단의 출발은 2002년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젊은 한인 30여 명 의 의기투합에서 시작되었다.

“2002년 뉴욕 총영사였던 조원일 대사가 당시 주류 사회에서 활발 히 활동하고 있는 한인 2세들을 저녁 식사에 초청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한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ABC News의 주주 장(Juju Chang), 뉴욕 한인 최초의 리포터 및 앵커로 활동했던 저, 그리고 법조계와 금융계에 종사하는 젊은 한인들이었지요. 아직도 그날 저녁이 얼마 나 특별했는지 기억이 생생해요. 다른 모임처럼 그냥 밥만 먹고 겉 도는 이야기만 하다 헤어지는 자리가 아니었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정말 한인 이민 2세대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리더십과 헌 신의 역할에 대해 진심으로 소통한 자리였어요. 이민 1세대인 우리 부모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좋은 교육을 받고, 언어의 장벽없이 주류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데 ‘과연 한인 사회를 위해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방법도 몰랐고 한 국어가 서툴기도 한 게 이유였지요. 하지만 우리 자신이 한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잃지 않고 있었거든요.”

차세대 한인 공동체 – 새로운 구심점의 탄생

그렇게 마음을 모은 그들은 가장 도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한인 비영

일구고 살면서도 소외되고 어려운 한인을 도우려는 노력은 곳곳에 있

시급한 문제가 바로 안정된 자금의 확보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민

100년이 넘는 이민 역사 속에서 미국이란 땅을 고향 삼아 삶의 터전을 었다. 한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는 한인회가 그렇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찾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수 많은 비영리 단체가 그러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존의 한인회와

비영리 단체는 주로 이민 1세대 중심으로 구성되었기에 영어를 모국

어로 삼아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 문화에 더 익숙하며 주류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자녀 세대가 동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인커뮤

리 단체를 도와 보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고, 이런 단체들이 처한 가장 2세대로서 가지고 있는 장점인 네트워크 인맥을 최대한 살려 한인 사 회를 도울 방법을 모색했고 그것이 ‘비영리 단체를 후원하는 비영리 단

체’인 한인커뮤니티재단의 출발점이 되었다. 출범 첫해에 곧바로 한인 단체들에게 6만 달러의 지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며 돛을

올린 한인커뮤니티재단은 창립 15년만인 2017년에는 600만 달러가 넘는 누적 지원금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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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성공의 완성은 나눔을 통해

또한,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기부한 돈의 사용처에 대한 의구심도

구하고 ‘기부와 자선’은 꽤 많은 한인에겐 아직도 그리 친숙하지만은

려 번 돈을 기부해도 혹시나 그것이 다른 사람의 잇속을 차리는 데 쓰

상대적으로 짧은 이민 역사 속에서 이루어낸 엄청난 경제 성장에도 불 않은 이야기이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고 벅찼던 이민 1세대는 그야

말로 먹고살기에 바빴고, 자녀 교육이 이곳 미국 땅에서 삶의 최대 목

표였다. 내 자식만큼은 이런 고생하지 않고 살아야 하고 내 자식만큼은 돈이 없어 절절매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내 가족 이외의 남을 돕

는다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또한, 근검절약과 부지런함으로 똘똘 뭉쳤지만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사 회에서 왜곡된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맞아요. 우리 부모세대가 미국 땅에서 일구어 놓은 수많은 업적에 도 불구하고 주류 사회가 보는 한인 사회는 아직도 종종 나와 내 가 족만 알고 지역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 줄 모르는 그런 이민 집단으 로 그려지니 말이에요. 많은 이민 1.5세대와 2세대 역시 ‘기부와 베 풂’에 대한 교육을 부모 세대로부터 받지 못했고 뚜렷한 사회적 롤 모델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사실이에요.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 면 기부하고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단체의 표어 처럼 ‘A Dollar A Day’ – 어릴 때부터 내가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롭 지 않아도 조금씩 기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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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한 기부 문화 형성을 가로막는데 그동안 한몫을 했다. 내가 땀 흘 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좋은 마음으로 기부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 을 주춤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금의 투명한 흐름과 그 과정의 투명성은 정말 중요해요. 이것이 바로 지난 15년간 한인커뮤니티재단이 만들어낸 가장 큰 자산 중의 하나에요. 저희 한인커뮤니티재단을 위해 기부금과 후원금을 내신 분뿐만 아니라 저희로부터 후원금을 받기 위해 지원서를 제출하고 기다리는 비영리 단체도 심사과정의 공정성을 신뢰합니다. 누구나 한눈에 볼 수 있는 투명한 심사과정뿐만 아니라 한인커뮤니티재단 은 후원금이 필요한 비영리 단체와 파트너쉽을 만들어 나가지요. 올 해 심사과정에서 탈락한 비영리 단체에는 내년에 더 탄탄한 지원서 를 제출할 수 있도록 저희가 도움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한인 사회를 넘어, 기부 활동의 새 역사를 쓰다

실제로 한인커뮤니티재단은 아시아 이민계 비영리 단체들을 통틀어

뉴욕타임스에는 아시아 이민계의 기부 활동을 조명하는 기사가 실렸

한 지역 사회를 위한 지원금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이제는 한인 사회의

이런 한인커뮤니티재단의 노력이 빛을 발해서일까. 지난 2013년 1월 고,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단체로 한인커뮤니티재단의 이름이 올랐다.

“아시아 이민계, 특히 한인 이민자는 미국 이민사에서 찾아볼 수 없 을 정도로 성공한 사례지요. 오히려 그렇기에 그 이면엔 가난과 질 병, 노인 문제와 오갈 곳이 없어 고통받는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한인 이민자가 있습니다. 혼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의 목소리로 모인 조직을 통해 행해지는 기부 속에 힘이 있어요. 미국 사회의 특성상 재단과 같은 단체를 통한 기부가 우리 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의 하나죠. 천 명이 1달러씩 각각 기부하는 것보다 단체를 통해 1,000불을 모아 기부하는 것이 훨씬 더 큰 힘이 되거든요.”

가장 큰 단체 중의 하나이다. 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기부금을 통

목소리가 주류 사회에 전달이 되기도 하고, 주류 사회도 한인 사회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주 시장과 콜린 파 월 전 국무장관도 한인커뮤니티재단의 연말 기금모금 만찬에 와서 스 피치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난 15년간 한인커뮤니티재단이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온 인맥과 경험을 통해 이제는 단순히 한인 사회만을 돕기 위한 기부 단체나 자선 단체가 아닌 우리가 사는 미국 지역 사회의 소수 민족을 돕는 단체로 거듭나고 있어요. 우리 안에서 우리끼리만 돕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을 당하고 피해를 본 지역 사회가 있다면 인종을 떠나 돕 는 것이 맞습니다.” 나눔의 선순환(善循環) –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 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선물

한인 이민 1.5세와 2세대가 미국 주류 사회 내로 언어와 문화 장벽 없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아 이러니하게도 한인 사회와 문화로부터는 멀어지 거나 단절되는 상황이 생긴다. 그래서 윤경복 사

무총장은 한인커뮤니티재단의 가치가 소중한 다

음 세대를 그들의 뿌리인 한인 사회와 지속해서

연결해주는 플랫폼의 역할을 하는 데 있다고 믿 는다.

“부모 세대의 헌신적인 투자로 성공한 이민 1.5 세와 2세대가 이곳에서 가난과 궁핍의 사각지 대에서 고생하는 사람을 남으로 생각한다면 우 리 한인 사회는 결국 생긴 모습만 비슷하지 쪼 개지고 말 것이에요. 한인 사회의 위상을 높이 고 미국의 정치와 정책 등에 대해 영향력을 발 휘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지금 다음 세대들에게 튼튼한 기반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다리 가 되어야 해요.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를 모아 커다란 통에 담아 가물고 시든 곳에 뿌려주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모든 재료와 실과 바늘을 총동원해서 사회구성원이 최소한의 생 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 록 붙잡아 주는 촘촘한 그물을 짜는 일 – 그것 이 지금 한인커뮤니티재단이 존재하는 이유이 자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누구나 베풀 수 있다. 누구나 베풂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 누군가의 베풂을 통해 받은 감사는 다

시 베풂의 기쁨을 통해 사회로 돌아간다. 우리가

기부하는 것은 이런 나눔과 베풂의 선순환(善循 環)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 한 사람의 기부보다도 열 명, 백 명, 천 명, 만 명의 기부가 더

의미 있고,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고 발전시켜주는 건강하고 힘찬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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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6 Millions in Grants to The Community – Building Up A Circle of Giving

Executive Director Kyung B. Yoon

at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 (KACF) Among the countless non-profit organizations in New York, there is name that stands out by having awarded over $6 million in grants to other nonprofits in New York metro area and beyond for the past 15 years. The former UN Secretary General Ban Ki-Moon, the head of the World Bank Jim Yong Kim, the ex-New York City mayor Michael Bloomberg and the son of Jamaican immigrants, former Secretary of State Colin Powell, are just a few of many those whom this organization has showcased in the past. This organization goes by the name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 (KACF). It was one sunny day, and

met with Ms. Kyung B.

Yoon, KACF’s Executive Director, in their office at 64th street in Manhat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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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American Community Foundation (KACF) is one particularly unique non-profit organization that supports various

other non-profit organizations by funding them. The members

of KACF are mostly the 1.5 and 2nd generations of Korean immigrants who speak English as their native tongue. Somehow, a myth created a stereotypical notion that all Korean immigrants

have become successful in America by being rich and educated enough, thus having become a model case of achieving the

American Dream. But surprisingly, there are also a lot of Korean

“Mr. Won-IL Cho, the Korean Consul General in 2002 invited 2nd generation Korean-Americans who he thought professionally successful in mainstream back then. Juju Chang at ABC News and myself as the first Korean-American television reporter in New York were some of those invited. That is how about 30 of us wound up meeting together that night. We all talked about ‘what we have done for our community and what we could do.’ It was really about social responsibility, commitment, and leadership. Quite many of us didn’t speak Korean very well or wouldn’t feel super comfortable in a typical Korean group, but one thing we all strongly felt was we have had the benefit of good education and all of the tools including language and cultural ease to be successful in mainstream American culture and society due to the sacrifices and investments made by the 1st generation – our parents. It was time to give back.”

immigrants suffering in a dead spot from poverty, illness,

What made that night so special was the people who were there:

2002, the organization has been playing a critical role as a social

to follow through and begin the work of letting their vision come

homelessness, etc. Since the moment of inception of KACF in safety net to support those Korean immigrants, if and when their hardship pushes them off the edge. Ms. Kyung B. Yoon, Executive

Director, shared the details with S•CASA on the story of its birth and their philosophy.

A New Platform Created For The Next Generation

With a history of more than 100 years of immigration, Korean

community has produced non-profit organizations offering

various programs that are prevalent among us. One challenge, however, is that most of them are all driven and created by

the 1st generation of immigrants -- which consequently sets an environment where the 1.5 and 2nd generations or more Englishspeaking young Koreans, may not be comfortable to join. The

birth of KACF goes back to one night in 2002, with about 30 young Korean professionals.

Korean-Americans with deep roots. They took it upon themselves

true – helping non-profit organizations by raising funds leveraging

out a variety of their networks. They learned that providing significant, regular, and reliable sources of funds was where they could add value the most. There are actually many great non-

profit organizations that are doing the direct service, by providing counseling, sheltering people who need homes, or feeding the hungry. However, all of them seem to have one same challenge – the source of funding. And, it gets even more challenging especially for those 1st generation-type organizations due to the

lack of professional and social networks around them. That is exactly where and why KACF has come into play knowing how

to be helpful. In 2017, KACF celebrated their 15th anniversary. Over the course of 15 years of achieving numerous milestones,

the amount of grant that KACF has given to the community has surpassed $6 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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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Make A Life By What We Give

Despite all the accomplishment Korean immigrants have made in various areas in a relatively short period of time, ‘giving’ is still

a foreign concept in everyday life. The life of 1st generation of Korean immigrants was all about not only making a living, but

also building up their overall wealth. Not to mention, they invested every penny and every minute of their time into providing quality

education for their children. This was their definition of American Dream, and the core reason of coming to America in the first place. Thus, helping others usually didn’t make it to the top on

their personal agenda as they had to fend for themselves first.

Unfortunately, however, this was inevidently mis-portrayed and mis-translated by other communities about Koreans.

“I think that is true. Maybe because of language barriers or cultural differences, Koreans got a little bit stereotyped as being selfish and disrespectful people and got the reputation that they never give back at all to the community. What we do here is creating a big movement for our children’s generation – changing the narrative of Korean Americans and showing them the impact of the funding that we are giving. Their future is in this country. We can build something very important for the next generation and not have to be burdened by a negative stereotype. None of us have to wait to be a millionaire. Like KACF’s starter slogan – “A Dollar A Day”, giving is a very simple concept.” In the truest sense, KACF has been working passionately to build up a philanthropic community among Korean-Americans, by

helping people to become more knowledgeable and thoughtful about giving, and also teaching them to become better givers.

However, it is also true that Koreans historically have a deep mistrust of institutions due to having instances where examples of lack of transparency were shown. 30

“Yes, that is why it is absolutely critical to build up the trust for everybody and transparency is the key – full transparency of funds and openness in governance and operating processes. This is one of the cornerstones of what we have sought to build with KACF so people have really come to see us as credible, trustworthy, and absolutely serious about being a good steward of the donations that people give us. Establishing a solid trust-based organization with transparency has enabled us to co-create solutions for our community and partner with not only those organizations in need, but also with our donors.” Making A Mark on Philanthropy in The U.S.

KACF’s vigorous effort has also been noticed by the mainstream view. In January 2013, KACF was recognized as a pioneering

role model by being placed on the front page of the New York Times with the headline: “Asian-Americans Gain Influence in Philanthropy”.

“Asian-Americans, especially Korean-Americans are a “model minority” in the history of immigration in the States. Ironically, however, that has created a blind spot obscured various problems among Korean immigrants such as poverty, homelessness, mental illness and the unmet needs of the elderly. One person can’t solve it all. We can do it together through an organization. That’s why I believe so much in the power of organizing our voice, visibility and philanthropy.”


In The Circle of Giving

Ms. Yoon is a firm believer that KACF is playing an integral role

of bridging our community and prioritizing on not losing the next generation of Korean-Americans. Quite many of the 2nd

generation Korean-Americans may carry the mindset that success somehow is achieved by getting away as far from the Korean community as possible.

Actually, KACF is one of the largest institutional funding

providers today, out of all Asian-American non-profits. KACF’s dignity through collaborative work and its enthusiasm has

influenced more people to re-evaluate their overall mindset. The

organization encourages people to not narrow their perspectives to only thinking about themselves, but rather allows them to

create a worthy macro-level investment that expands beyond

“All of us have had the benefit of all of investment, education and sacrifice from our parents. If we run away from the Korean community, then what is left of our community? In order to remediate this growing gap, we’ve made efforts to create a platform for us to meet and contribute together. That is the value of KACF. I’d like to compare KACF as a bucket that slowly but steadily and surely catches all of the water drops. With this bucket filled with precious water, we can pour the water into the parts of our community that is really dry and really needs it. And, KACF wants to ensure that it goes a full circle. All of us have received help through someone else’s sacrifice and we want to provide a “circle” as a way for us to give back. And we also hope that somebody after us will follow our footsteps and the cycle will go on and on.”

their family’s education and well-being. KACF has now become

How easy would the solution be if Bill Gates showed up one day

American community, and they have successfully positioned

same intrinsic meaning. The value of KACF is built on each of the

the main platform that rightfully prides itself within the Koreanthemselves as a role model of being such an effective funder.

“Let’s walk a little bit taller. This is a very empowered time for Korean-Americans. Our children can’t live without their Samsung phones, their friends at school love K-Pop and K-dramas, and Kimchi is no longer strange to Americans. It is time to change our mindset and become leaders here in America where we live and where our children live. We are really defining the idea of how many people that can lift up our entire community, not just the KoreanAmericans but also including others in the community.”

to simply donate $365,000? But, that solution wouldn’t have the thousand donators who contribute even just a dollar a day -this alone has created a movement that is much more powerful

and sustainable in the long term. As a community, everybody is building something greater together based on many pillars

that holds up our community. There is no isolated giver and

receiver in this picture. All of us have been in certain situations to experience the need to receive and to give. The circle of giving in this community will never end as long as the engine of joy and

gratefulness never stops running as Ms. Yoon at KACF said with a big 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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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2)

내가 지켜줄 게 그림 박종진 정리

박종진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 홍익대학원 졸업 개인전(NewYork K&P Gallery)외 7회 해외전 및 그룹전 100여회 현재) 한국미술협회/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 전문상담요원 32

편집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단

면이 제일 인기가 있었지. 안성탕면이나 너구리 라면은 맛은 있었지만,

만들어져 있었어. 멀리서 달려오던 완행버스가 구덩이를 지나면서 튀

기 힘든 음식이었단다. 논과 밭에서 나는 작물이 아니라 돈을 주고 사

다. 구불구불 이어진 신작로에는 밤새 내린 비에 여기저기 물구덩이가

긴 흙탕물에 몸이 젖어서 개울가에서 더러워진 얼굴과 손을 씻어야 했 지. 길옆 숲속에서는 풀벌레와 매미 소리가 한여름 오후를 시끄럽게 깨 우고 있었고, 멀리 산자락 밑에서는 동네 아낙네들이 형형색색 선캡을

가격이 조금 비싸서 사 먹을 수가 없었어. 그러나 라면은 평상시에 먹 야 하는 공산품이어서 현금이 부족한 시골 농촌에서는 자주 먹을 수 있 는 음식이 아니었던 거야.

쓰고 둘러앉아 밭일을 하고 있었단다.

학교 안 가는 주말에 부모님은 “오늘 온종일 밭에서 풀을 뽑으면 저녁

한참을 걷다 보니 옆 동네 김씨 아저씨가 면사무소에서 받아온 농사용

그러면 “진짜 라면 끓여주는 거에요”라고 확답을 받고는 뙤약볕 아래

비료부대를 손수레에 한가득 싣고 지나가길래 뒤에서 양손을 뻗치고

열심히 밀어드렸지. 수레를 미느라 시선을 길바닥에다 둘 수밖에 없었

는데 갑자기 까만색 지갑이 눈앞에 보이는 거야. 그래서 일단 주워서 손에 들고 있다가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김씨 아저씨와 헤어지 고는 지갑을 열어보

에 라면을 끓여줄 게”라면서 일하기 싫어하는 우리들을 꼬드겼단다. 에서 저녁까지 밭일을 도왔단다. 온종일 일하느라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았지만, 저녁이 되면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줄

도 모르고 일을 하곤 했었지. 드디어 기다리던 저녁이 되어 부모님이 천 원을 주시면 아랫마을 회관 구멍가게까지 한걸음에 달려가곤 했단

다. 가져간 돈으로 삼양라면을 10봉

았지. 지갑 속에는

지 사면 가게 아주

바로 쓸 수 있는 돈

머니가 멀리서 왔다

은 없었고 대신 옛

고 사탕을 몇 개 덤

날 지폐 돈 몇 장이

으로 주셨거든. 한

들어 있었단다. 분

손에는 라면 봉지

명, 동네 사람이 잃

를 들고 설탕이 듬

어버린 게 틀림없는

뿍 뿌려진 왕사탕을

데 신분증이나 주인

입에 물고 집에 돌

을 알리는 다른 물

아오는 일은 큰 행

건이 들어있지 않아

복이었단다. 그런데

서 찾아줄 방법이

갑자기 오천 원이라

없었단다.

는 큰돈이 생겼으니 그 주 내내 라면을

집에 가는 길에 큰

끓여도 먹고 생라면

집에 들러 지갑을

에다가 라면 수프를

주웠다는 이야기를

뿌려서 과자처럼 먹

사촌 형에게 해 주

고 다니곤 했지.

었지. 한참 동안 지

폐를 이리저리 확인 하던 형은 이런 제

어렸을 때 소원은

민아!, 이거 주인을

배달하는 용달 트

시골 가게로 물건을

안을 해 왔단다. “성 찾아줄 수도 없으니까 옛날 돈을 내게 팔아라. 내가 오천 원 줄 게.” 그

럭에서 신작로 한가운데 떨어진 과자나 라면 한 상자를 줍는 것이었어.

있고 라면을 사다가 며칠 동안 배부르게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

라고 생각하며 한 주 내내 즐겁게 지낼 수 있었단다. 덕분에 동생들과

때 오천 원이면 아주 큰 돈이었단다. 맛있는 과자를 실컷 사 먹을 수도

어. 그래서 덥석 오천 원을 받고는 옛날 지폐 돈을 사촌 형에게 넘겨 주 었단다.

돈을 가지고 동네 구멍가게로 가서 오리온 웨하스, 해태 맛동산, 별 뽀 빠이 라면땅, 사브레, 오리온 초코파이, 빠다코코낫 등 온갖 과자와 삼

양라면 20봉지를 사서 집에 갔단다. 동생들에게 큰 인심 쓰는 양 과자 를 나눠주고 온종일 밭일하고 돌아온 부모님을 위해서 커다란 가마솥

에 한 솥 가득 라면을 끓였단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배가 부르도록 라 면을 먹었어.

지금은 건강을 생각해서 라면을 잘 안 먹지만 어린 시절 제일 먹고 싶 은 음식이 바로 라면이었단다. 라면 중에서도 삼양라면하고 소고기 라

그런데 이렇게 큰돈이 생겨서 “나에게도 이런 행운이 다가오는구나” 친구들에게도 후하게 인심도 쓸 수가 있었던 거지.

그러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단다. 며칠 후 일이 터지고 말았어.

사촌 형에게 옛날 돈을 넘겨주고는 빈 지갑을 버리기도 뭐하고 해서 그 냥 들고 다녔단다. 방과 후 주막집 현호네 앞마당에서 신나게 구슬치기

와 딱지치기 놀이를 하고 있었어. 여러 명의 친구와 놀고 있는데 이웃

마을 사는 최현수라는 덩치가 아주 큰 아이가 우리들 옆을 지나갔단다.

갑자기 내가 꺼낸 지갑을 보더니만 “너, 그 지갑 어디서 났어?’ 하고 묻 는 거야. “응, 이거 지난주 길에서 주웠는데”라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 그 지갑 내 거야.” “너 그 안에 있던 오래된 옛날 돈 어디

에다 뒀어?”라고 묻는 거야. 나는 당황하면서 “그거 사촌 형이 달라고 해서 오천 원 주고 팔았는데”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어.

33


그 지갑의 주인이 바로 현수였던 거야. 현수는 옛날 돈을 당장 돌려달

주먹으로 치면서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단다. 나는 그때마다 겁에 질려

가져와” “안 가져오면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한 살 일찍 학교에 들어

게 몇 주 동안 지속해서 괴롭힘을 당했단다. 학교 가기가 너무 무서운

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단다. “너, 당장 오십원짜리 백 원짜리 옛날 돈 갔기 때문에 또래보다 키도 작았고 싸움도 할 줄 몰랐어. 그런데 나보 다 키가 한 뼘이나 더 큰 현수가 위협을 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

었단다. “응, 미안하다. 지갑을 줍긴 했는데 이름도 없고 신분증도 없어 서 누구건 지 몰랐어.” “그 지갑을 본 사촌 형이 옛날 돈에 탐이 났는지 오천 원을 주고 달라고 우기길래 그냥 넘겨준 거야.” “다시 돌려줄 게”

“다음에는 꼭 돈을 찾아다 줄 게”하고 사정사정하며 빌곤 했었지. 그렇

거야. 집에 오다가 현수에게 걸려서 그 옛날 돈을 안 가져왔다고 온갖

협박과 폭력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까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단다. 또 내가 잘못을 했으니까 선생님에게 말할 수도 없고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서 끙끙거리며 맘고생을 하고 있었지.

현수는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고 옛날 돈을 돌려 달라고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풀이 죽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다가 주막

집에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부모님께 설명했지. 부모님은 오천 원을 줄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집의 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공부

테니 큰 집에 가서 옛날 돈을 찾아오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바로 큰 집

에 있는 사촌 형을 만나러 갔어. “형, 큰일 났어” “그 지갑 주인을 우연 히 만났는데 형이 산 그 지폐를 당장 가져오라고 하더라고” 그러나 형 은 욕심이 생겼는지 그 돈을 돌려주기를 거부하는 거야. “이거, 한 번 판 거는 절대로 돌려줄 수 없어”라고 매정하게 거절을 했단다.

그 후로 나는 아주 난감하게 되었단다. 사촌 형은 옛날 돈을 돌려주

지 않지, 현수는 위협을 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애

를 태웠어. 드디어 일주일이 금세 지나가고 지갑을 돌려주기로 한 날

집 아들 현호를 만나게 되었어. 현호는 우리가 주막집이라고 부르던 를 잘해서 반장과 전교 회장을 도맡아왔던 아이였단다. 선생님이나 동네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받던 친구였어. 기가 죽어 있던 내게 현호는 이유를 물었단다. “지갑 주인인 현수가 옛 날 돈을 달라고 하는데 가져간 사촌 형은 줄 생각도 안 해서 계속 현수 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말해주었지. 한

참을 듣고 있더니만 현호는 “걱정하지 말아라” ‘현수가 또 너를 괴롭 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내가 지켜줄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 라고 말하는 거야.

이 되었단다. 학교 수업이 끝나 걸어가고 있었는데 집으로 향하는 길목

그 말을 듣고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힘이 생겨났단다. 누구한테

니, 그게” “뭐, 안 가져온 거야?” “너 안 가져오면 그냥 안 둔다고 했었

호는 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거야. 용기를 얻어 집에 돌아가서 부

에서 현수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어. “너, 옛날 돈 가지고 왔냐?” “아

지?”. “그 말 기억 안 나?”라고 쏘아대고는 나를 거칠게 밀어붙였단다. 나는 사정을 이야기했지. “사촌 형에게 찾아가서 오천 원을 다시 줄 테 니 옛날 돈을 돌려달라고 했는데 절대로 못 주겠다는 거야” “정말 미안

하다.” “조금만 시간을 주면 내가 다시 가서 찾아올 게”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나는 사지가 부들부들 떨렸고 심장은 마치 경운기 엔진 소리 같이 뛰었단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사촌 형에게 찾아갔단다. “형, 그 옛날 돈 꼭 좀 돌 려줘. 지갑 주인인 현수가 그거 안 가져오면 나를 때리고 가만두지 않

겠다고 협박을 했어.” 그러나 사촌 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가 다시 안 돌려준다고 했잖아” “이 돈은 내 소유가 되었으니 다시 돌려줄

이야기할 수도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어려운 상황에 있던 내게 현 모님에게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현수라는 아이가 지속해서 괴

롭히고 있고 사촌 형이 옛날 돈을 반환하기를 거부해서 아주 난감한 상 황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지. 그날 당장 어머니가 큰 집에 찾아가서 사촌 형에게 옛날 돈을 당장 돌려주라고 큰소리를 치셨단다. “아니, 애

가 그 돈 안 돌려준다고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학교도 안 가려 고 하는데 당장 그 돈 돌려주지 못하겠냐?” 아버지도 나서서 큰아버지 에게 이야기하셨지. 안 돌려주겠다는 사촌 형을 큰집 식구들이 간신히

설득해서 결국 그 옛날 돈을 받아올 수 있었단다. 다음 날 현수를 만나

돈을 돌려주었어. 그 후 현수는 다시는 방과 후 길에서 나를 기다리거 나 괴롭히지 않았단다.

수 없어” “가서, 현수라는 아이에게 잘 말해 봐”라고 말하며 돈을 돌려

나중에 현호가 따로 현수를 불러서 “성민이를 괴롭히지 말라”라고 엄

무런 소용이 없었어.

때 현호라는 한 친구가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단다. 가끔 현호가 해 준 말

주길 거부하는 거야. 그 날 이후 여러 번을 찾아가 사정사정했지만 아

현수는 학교가 파한 후 집에 갈 때마다 골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지속해서 돈을 가져오라고 위협을 했단다. 어떤 때는 밀치거나 가슴을

포를 놓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한마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가 있어. “내가 지켜줄 게” 작은 위 로의 말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AWCA 가정상담소 소장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34


EDUCATION

3월의 인물

님의 침묵(沈默) Silence of My Lord (Rev. Dietrich Bonhoeffer)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My Lord has left. O, my dear Lord has gone on his way. Breaking off hill's azure color, my Lord has walked away Upon a tiny trail toward the maple woods, hesitantly dragging himself off. Age-old oath, firm and gleaming like gold'n flowers, turned to a chaff And it was blown away with a whiff of sigh.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The memory of jolting first kiss that changed the direction of my destiny, Now has evaporated, and walked back away. My eyes and ears were numbed by your sweet words and face flowery.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About parting I was neither unwary nor without caution, for love is a human affair. Yet my frightened heart burst into sorrow for so sudden was my Lord’s departure.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Even so, for I know that taking this parting as a 'source of bootless tears' Might by itself spoil the spirit of love, I've let the forces in this unbearable sorrow shift in gears, And poured 'em into the scoop of “Hope”.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As we care about 'parting' when we meet, so when we part do we believe 'reunion' in confidence. Ah, though my Lord has left, I’ve never yet sent him. Melodious love tune, unable to o'ercome its own rhyme, Just circles around over My Lord's Silence.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 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 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불교 최초의 잡지인《유심》 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 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18년《유심》 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 〈님의 침묵〉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35


EDUCATION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 직장 생생 체험기(3)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직장 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을 텐데. 어쩌 면 판타지 같기도 한 이런 행복한 커리어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담근 지 가 벌써 18년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미국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변 화를 겪었고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힘들었다. 20년 전 유학생으로 와서 MBA 프로그램 을 마치고 취업비자를 받아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취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좌충우돌하며 버텨낸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 것이다. 지난날의 나의 경험이 지금 막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달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 Seunghee Chung 영문 Taylor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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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So, what do YOU think?

사장과 가장 멀리 떨어진 제일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 두꺼운 바인

대부분이 유교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들

했다.

자고로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던 우리 문화에서 예의(禮

儀)를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생활에 깊이 박힌 예의범절 문화는

어보면 ‘가장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한 후에야 아랫사람이 식사 하는 식사 예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고개와 허리를 굽혀 인사하

는 인사 예의’, ‘웃어른이 들어오실 때는 일어나 맞고 물건을 드릴 때는 두 손으로 드리는 관계 예의’, ‘나보다 웃어른이 말씀하실 때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또한 어른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며 말대꾸하지 않는 대 화 예의’ 등이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적어도 한국 문화권에서 자랐다면 익숙한 예의범절이다. 우리 선조들은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금

수(禽獸)와 같다’ 했고,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금수(禽獸)가 되지 않 기 위해, 또 ‘버르장머리없는’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훈련받는다.

그런데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우리의 생활예절은 주로 상하관계에 집중 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상하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우리에 대

한 사람들의 평판과 대우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의 예의는 같은 예의범

절을 의미하거나 그 범주에 들어가는 서양의 매너나 에티켓 혹은 커티시 (courtesy)와는 조금 다른 사회적 뉘앙스를 띤다. 서양의 예의는 상하관계 에만 국한되지 않는 보다 포괄적인 관계에 적용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더를 하나씩 들고 들어오는 걸 보니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적어도 노트와 펜은 들고 왔으니 아예 준비 없이 빈손으로 온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

내 의견이 왜 중요한데? 과연 내 생각은 무엇이지?

드디어 사장이 모닝커피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학교 MBA 프로그램을 통

해 멘토(mentor)와 멘티(mentee)로 만났지만, 회사에서는 인턴 시작하고 처음 보는 자리였다. 제일 끝에 있는 나를 알아보는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조금은 기분이 우쭐해졌다.

비서 한 명이 미팅 어젠다를 나누어 주고 나니 본격적인 미팅이 시작되었

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그렇게 열심히 수십 개의 바인더를 만들며 영 화배급에 관한 기본용어를 공부했는데도 영어라서 그런지 도무지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말은 왜 그렇게들 빠른지. 가지고 들어온 노트와

펜을 째려보기만 몇 분. 이미 받아적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알아듣기라도

하자 싶었다. 하지만 초집중을 해서 들어야 겨우 들리는 몇 마디 영어는 수

분이 지나자 극도의 피로감으로 변했고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하나도 들 리지 않은 채로 다 술술 지나갈 뿐이었다. 알아듣지를 못하니 어젠다에 적 힌 내용은 그저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일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사장과 함께 미팅을!

30여 분이 지나자 각 국가별 배급 영화 라인업과 거기에 따른 전략, 경쟁사

주길 한 달여 정도. 디렉터가 아침 일찍 전화하더니 잠깐 방으로 오란다.

간 채 바라보기만 하는데 다행히 당시 10대 주요 배급국에 드는 한국에 관

매일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며 얼굴을 보이고, 부서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 맡아 하며 ‘난 한번 왔다가는 인턴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보여 “오늘은 사장님과 같이하는 월례 미팅이 있어요. 이따가 부를 테니 따라 들 어오세요.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정말요?! 제가 참석해도 되나요? 너무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나 같은 학생 인턴이 사장과 같이 미팅을?! 갑자기 심장 박동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더니 호흡도 가빠졌다. 내 자리로 돌아오

의 개봉 영화 시기 및 현재 상영되고 있는 영화의 실적을 점검하는 순서가

되었다. 다들 5대양 6대주의 전문가처럼 술술 풀어나가는 대화를 넋이 나 한 이야기로 미팅 주제가 넘어갔다.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몇 가지 단

어는 조금 더 주워들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영어에서 오는 대화의 피로감과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에 이

미 정신은 혼미해져 갔고, 시계만 보며 이 괴로운 미팅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사장이 내 이름을 불렀고 모든 시선이 내 게 쏠렸다.

고 나서도 이 기분 좋은 흥분감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다.

‘미팅에는 뭘 가지고 들어가야 하나? 미리 준비할 게 있나? 하긴 난 그냥 인

턴인데 가서 잘 보고 듣고 그러다 나오면 되는 거지 뭐… 말 그대로 경험이 라잖아…’

드디어 디렉터가 미팅이 곧 시작한다고 같이 가자고 손짓을 했다. 한껏 미

소를 지으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가니 반짝반짝 빛나는 나뭇결의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여있는 커다란 회의실에 다다랐다. 가운데에 사장 자리인 듯 보이는 한 곳이 비어있고 나머지 사람들이 양옆으로 쭉 자리를 잡아 앉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정 좌석은 아닌듯해 보여 ‘인턴인 내 위치를 고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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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자극했지만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문화에 너무나 익숙했기에 직장 상사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며 때로는 건전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미국의 직장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쉽지가 않았다. 사장이 말단 사원의 의견까지도 궁금해하고 존중하는 미국 직장 문화에서 ‘나의 의견’은 ‘나의 조직 내 정체성’과 ‘기여도’의 척도가 되었다. 표현하지 않는 의견은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의견이 상사나 동료의 의견과 다를 때 나의 의견을 조리 있고 위트있게 표현할 수 있는 소셜 IQ의 계발 – 이것이 경쟁력이 되고 성공 DNA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한국 사정을 잘 알 텐데 이 문제에 대해 어

의 의견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

수 있을까요?”

음엔 부모님, 학교에서는 교수님… 웃어른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만사

떻게 생각하나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이 영화를 배급할 “… (아… 뭐지…? 정녕 사장이 나에게 묻는 거야? 왜 나에게 묻지? 듣고 있었는지 아니면 졸고 있었는지 테스트하는 건가? 결국은 다 사장 마음대

로 할 거면서 인턴 나부랭이의 의견이 뭐가 대단하다고 묻지? 큰일 났네… 어쩌지… 뭐라고 대답하지…? 게다가 내 어설픈 영어는 사람들의 조롱거 리가 될 것이 분명하고…)”

정말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는 오가는데 입은 좀처럼 떨어지지

맞은 것만 같았다. 집안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의견이 최고였고, 그다 오케이인 삶이었다. 윗사람의 지시에 토를 달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고 칭찬받는 길은 그 지시를 잘 이행하면 되는 것이었고 난 그것을 꽤나 잘하

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갑자기 ‘내 생각’을 물으니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

얘지는 것이었다. 난 그저 누군가가 지시를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기에 미팅 내내 생각이란 건 조금도 하지 않았고, 또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도 전 무인 상태였다.

않고, 몇 초가 흘렀는지도 모르는 사이 기다리다 못해 사장이 다른 직원 두

내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후 18년간

국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는데 한 사람은 현지에서 자란 1.5세 교포 매니저

스로 생각하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자극했지만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형성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우연히도 그 당시 내가 인턴으로 있을 때 한 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한국 기업의 미디어 계열사에서 일하다가 워너 브라 더스로 이직한 후 홍콩에 있는 아시아 헤드쿼터로 발령받기 전에 잠시 트

레이닝을 받으러 온 디렉터였다. 사장이 그 두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 는데, 두 사람 모두 시원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 부서에 한국 사람이 3명이나 있는데 아무도 모른단 말이죠. 이게 무 슨 일인가요?”

사장이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미팅 초반 30분이 영어로 오는 피로감에 집중을 못 했다면 후반 미팅 30분은 얼굴 화끈거리 는 창피함에 집중할 수 없었다.

표현하지 않는 의견은 의견이 아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단 영어 가 안 들렸던 건 그렇다 치고 내 의견은 무엇이었을까? 내 의견이 있긴 했을까?’

미팅이 끝난 후 내 자리로 와서 생각을 해보니 날 가장 견딜 수 없게 했던

건 내 의견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 나만 38

미국에서의 직장생활 내내 이날의 일은 잊을 수 없는 큰 사건이 되었다. 스

된 습성은 금방 깨지지 않았다. 특히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문화에 너무 나 익숙한 나 자신을 깨고 직장 상사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며 때로는 건

전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미국의 직장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말처럼 그 리 쉽지 않았다. 미국 직장 문화에서는 ‘내가 조직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가’하는 기여도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던지, 혹은 아무 생각이 없을 정도로 모르기 때

문에 조직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치부된다. 사장이 말단 사원의 의견까지도

궁금해하고 존중하는 미국 직장 문화에서 ‘나의 의견’은 나의 조직 내 ‘정 체성’과 ‘기여도’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종종 미팅에 들어가면 10% 아

는 것을 가지고 120% 아는 것처럼 청산유수로 떠들어대는 미국 동료가 있

다. 속으로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가지고 떠들다니’하고 끌끌 혀를 차도 그 건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예화처럼 표현하지 않는

의견은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는 점잖음과 웃어른에 대한

공손함이 미덕이지만, 적어도 미국 직장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점잖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내 의견이 상사나 동료의 의견과 다를

때 나의 의견을 조리 있고 위트있게 표현할 수 있는 소셜 IQ의 계발 – 이것

이 경쟁력이 되고 성공 DNA가 되는 것을 눈으로 무수히 보았다. 그래서 일 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아닌 커리어가 되기 위해 내 안의 껍데기를 깨는 쉼 없는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My Journey in Corporate America by Seunghee Chung, Former VP at Viacom Media Networks:

Climbing The Corporate Ladder of Success(3) What you are good 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s something that you would die for. Possessing an exceptional skill at something does not always translate to having a real passion in itself: a workplace is no exception. In another words, doesn’t everyone share a mutual desire to find a job that they’re good at, which actually happens to perfectly parallel their actual interests? Exactly 18 years into this fantasy-like care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 I’ve realized that no matter how demanding or tiring the work may be, doing something I love somehow creates more energy to be constantly fueled by. However, I must admit that I’ve also had my own fair share of hardships throughout my career, but those were eventually lulled by frequent joyful moments that netted out the negatives. But thanks in part to having a job that I truly enjoyed, I was able to endure this 20-year-old journey, where I started out as an international MBA student who stepped into a foreign country with limited English that wasn’t even my native language. I hope that my humble narrative of the past will encourage and inspire the minds of young working professionals who are currently in the nascent stage of building their careers within the mainstream society today, and I am happy to openly share my episodic memories on a monthly basis for them. 39


So, what do YOU think?

I followed her with an innocent smile, then encountered a large

Some typical examples of courtesy are as follows: The eldest must eat

and the rest of the people started to take seats on both sides. It did not

Courtesy and politeness are deeply rooted in the Korean culture, since

Korea was long known as “the country of courteous people in the East.”

first, then the younger could start eating; When the younger person meets the older person, he/she must bow down; When the elder comes inside the room, the younger must stand up to greet the elder; When

the younger person gives something to the older person, he/she must use both hands; Do not look straight into his/her eyes when the elder is

talking; Do not interrupt when the elder person is taking and listen very carefully without talking back. Our ancestors have said, ‘The man who knows no manners is like an animal,’ so all of us have been trained not to become ‘animals,’ nor to be a mannerless ‘brat’ from childhood.

conference room with a twinkling, shiny, wooden, rectangular table. In the center, one seat that seemed to be the President’s was empty

seem as if there were designated seats, so I took a seat at the very end, quite far from where the CEO was sitting because I was ‘just an intern’, I thought.

Why Do You Care About My Thoughts???

Finally, the President came in with a cup of morning coffee. I had met her several times prior through the school MBA program as my mentor,

but it was my first time seeing her since working as an intern at Warner Brothers. The President gave me a smile as if she had recognized me.

One thing I’ve noticed, however, is that our life etiquette is mainly

Despite my excitement at the beginning, I started panicking immediately

People's reputation and treatment of us vary depending on how we

terms related to movie distribution, in spite of all of my efforts of making

focused on the upper and lower or superior and inferior relationships. manage this up-and-down relationship. So our sense of courtesy carries

a different social nuance than the Western manners or etiquette that signify or fall into the category of the same courtesy. Western courtesy is

a concept that applies to a more comprehensive relationship that is not only limited to upper and lower or superior and inferior relationships.

My Goodness! I’m Invited To Join The Meeting With The President! It’s been about a month since I showed up every day, took care of all

after the meeting began. It was difficult to understand even the basic dozens of binders to study them. Whether it was the speed or just the fact that it was spoken in English, I could not understand a word people in the room were talking about. I stared at the notebook and pen that

I had brought with me, hoping to see some kind of magic happen. But

I then lost track of what they were saying and ended up very tired and exhausted after a few minutes of intense conversation, even though I tried to concentrate very hard. To me, everything on the meeting agenda looked like merely meaningless black letters on the white piece of paper.

kinds of chores in the department, and struggled to deliver the message

After about 30 minutes of haziness and confusion, they moved on to the

the director called me early in the morning asking me to come to the

lineup including competitors’ and their strategy, and the performance of

that “I am not just another intern who would come and go!” One day, room for a while.

“Today we have a monthly

next agenda item which was the review of each country’s distribution the films currently being screened. Thankfully, they were talking about

Korea, being one of the top 10 major distribution countries. But, things

didn’t get any better for

meeting with the big boss.

me – only then was I able

Please come in later when

to catch a few more words,

I call you up. It will be a

but that was it. I still could

good experience.”

not understand them.

“Really, really? Do you truly

I was already confused

mean that I can attend?

and tired from all the

Thank you very much!”

conversations that I could hardly comprehend, and I

After returning to my seat,

was rhythmically checking

I couldn’t shake the feeling

the time to see when this

of excitement.

painful meeting would be

over. Then, suddenly the

‘Hmm… What should

President called my name

I bring to the meeting?

and all eyes were on me.

Anything to prepare in

advance? Well, at the end

of the day, I'm just an

intern, aren’t I? I’ll just go and listen, then leave accordingly. After all, it's literally just an experience like she said...’

Finally, the director waved to motion for me to join the meeting. 40

“You’ve just come from Korea and you should

know how things work in Korea better than anybody here in this room. Well, what do you think about this issue? How can we distribute this film more efficiently in Korea?”

“... (Oh, my... Could it really be that she was asking ME for MY input? Am I


in a trouble now? What am

I going to say? Is she testing me to see whether I was

dozing off or listening? Why does she even care about

MY opinion? After all, SHE is the boss, isn't she??? SHE will do what SHE wants to do, and what is the point of asking an intern such as

myself? And besides, these

people will mock me for my poor English...)”

Thousands of thoughts

crossed my mind, but I could hardly get a word out.

Seemingly running out of her patience, the President threw the same question

to two other employees

It was a tremendous shock to realize that I had no opinion of my own. It was not easy for me to adapt to the American workplace culture, where I was constantly stimulating myself to think for myself, since I was so accustomed to the Korean culture of taking orders and following them without having my own thoughts. The workplace culture in the U.S. emphasizes

been living by quite well. Then, suddenly I asked myself what ‘my’ thoughts

were and my mind went

blank. I was just waiting for someone to give me

instructions, so I did not have any thoughts during

the meeting and I had no training to think for myself.

the importance of contribution of individuals needed

It was a tremendous shock

to ‘help the team or the organization’. 'My opinion' is

opinion of my own. Over

a measure of 'my identity within my organization' and 'contribution'. No matter how much I know and how often I come up with good ideas, my opinion will not count if I do not express it.

who were incidentally two

other Koreans at the time.

to realize that I had no the next 18 years working in America, this particular

incident with the President was a turning point not only in my career, but also

in my life and over the next 18 years. It truly remained

an unforgettable event for

me. It was not easy for me

One was a 1.5 generation Korean-American manager who grew up in

to adapt to the American workplace culture, where I was constantly

Korean media industry who was being trained before he got assigned to

Korean culture of taking orders and following them without having my

the local area, and the other was a director with work experience in the

the Asian headquarters in Hong Kong. But, neither of them gave a good answer.

“We have three Koreans in our department and nobody knows. What is going on here?”

The President let out a little sigh and moved along to another agenda. My lack of concentration for the first 30 minutes of the meeting was a

definite result of my poor English, but the later half of the meeting was from sheer embarrassment.

If You Have An Idea, Say It – An Unexpressed Opinion Is Not An Opinion.

‘What was the problem? What on Earth was I thinking? Despite the fact that I could not understand English, what was my opinion? Did I actually have my own opinion?’

Even after the meeting, I couldn’t help but think about all of these questions. What made it most unbearable to deal with was that I had

no opinion or thoughts whatsoever of my own at all. Then, I realized

that I had actually never had my own opinion until then. That realization struck me hard. My grandfather and grandmother made all the decisions at home, and then my parents, professors at school. I lived a life that was all ‘okay’ as long as they were in charge of decision-making.

The way to survive and be praised in a situation where I cannot go against the elder’s decisions was to follow the instructions that I had

stimulating myself to think for myself, since I was so accustomed to the

own thoughts. I had to come out of my shell to adapt to the American workplace culture where one enjoys sharing ideas and having healthy

debates even with one’s boss or superior(s). The workplace culture in the

U.S.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contribution of individuals needed to ‘help the team or the organization’. Therefore, a person who does not

have his/her own opinion – whether it is because one lacks interest in what one does or simply because one does not know anything about

the issue – is looked upon as someone incompetent or unhelpful to

the team. In the U.S. workplace culture where the CEO or president is curious about and respectful of the opinions of the employees at all levels, 'my opinion' is a measure of 'my identity within the organization' and 'contribution'. No matter how much I know and how often I come up with good ideas, my opinion will not count if I do not express it.

I understand that the Korean culture requires and expects politeness and courtesy as ultimate virtues to live well in the society. However, I learned that I should ease the burden of keeping ‘politeness’ of ‘elders/superiors first’ in order to survive at Corporate America. That way I can be free to express myself and my own ideas and thoughts. In addition to that, I also

learned that if I find a way to express my opinion not only in a logical

way, but also in a witty way especially in an intense situation, it will differ

from my colleagues which will naturally lead to gaining a competitive edge and successful DNA. That is the social IQ that I have needed all the

way down till now throughout my career here in America. Rather than simply working to fulfill basic needs, I have worked for the improvement of my career with the unceasing efforts to break free from my inner shell, which I am hoping to go on and hopefully pay off in the end.

41


EDUCATION

Preventing Copycat Suicide in the Wake of

Jonghyun’s Death By Anderson Sungmin Yoon

On December 18, 27-year-old Korean “K-pop” artist Jonghyun,

factors have been shown to lead to copycat suicides — especially

a residence hotel in Seoul. He was pronounced dead at a nearby

huge, devoted following, not just in South Korea, but around the

lead singer of global boy band SHINee, was found unconscious at hospital, where he was immediately taken. The cause was suicide.

Like most, it was a tragedy that didn’t need to happen. In

Jonghyun’s case, he demonstrated his struggle with depression in

when committed by an idolized figure like Jonghyun, who has a world, including in Korean-American communities, like the one in

which I serve. Mental health experts warn that his suicide could act as a trigger for susceptible people to emulate.

his songs and his numerous media interviews. Yet no one seemed

As a mental health professional with over 16 years of clinical

measures to help stop him from killing himself. The beloved pop

individuals may misread Jonghyun’s story in the media and imitate

to recognize, or act upon, his distress or take immediate preventive star even left a suicide note to his friend shortly before his death.

Ten days before he killed himself, Jonghyun sent a note to his

friend, singer Nine9, revealing his struggle with depression and suicidal ideation. “I’m broken from the inside,” the note read. “The depression that has slowly eaten away at me has finally consumed

practice experience, I am concerned they may be right. Vulnerable

his suicide. That is why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gs we can do in the aftermath of Jonghyun’s death is address the “inevitability”

fallacy that surrounds suicide — and the media and pop artists who spread Jonghyun’s note can play the most vital role.

me, and I couldn’t beat it.”

Copycat suicide, also known as the Werther effect for the tormented

The publication of this note, and the detailed description of the

Werther, refers to the duplication of another suicide depicted on

suicide method he used, provoked heated controversy, as those 42

main character of Goethe’s famous novel Sorrows of Young television or in other media outlets. In particular, studies measuring


the imitative effect of a celebrity suicide story have found that a

raise their voices against the mental health stigma and encourage

suicide than non-celebrity suicides.

and recommendations. It also is important to deliver the message

celebrity suicide story is 14.3 times more likely to result in a copycat Major Korean newspaper the Chosun Ilbo reported that

approximately 2,632 people committed suicide during the two months after five Korean celebrities took their own lives. This was a 30 percent increase over the average. The findings indicate that real

stories about famous entertainer suicides (e.g., Jonghyun) could pose significant risks in relation to copycat suicides. The good news is that the number of copycat suicides could be potentially reduced,

based on the types of suicide stories covered in the media and how suicide is depicted to the public.

To avoid triggering copycat suicides, I urge the media to be

responsible in their continued reporting and inform audiences that suicide is a preventable public health issue — not an inevitable consequence of depression.

his fans to seek help. Susceptible fans may listen to their idols’ pleas that mental health is equated with physical health. They can openly talk to the traditional media and social networking sites about

their own mental health problems and encourage people to seek help. The more we talk, the less we are ashamed of mental health problems.

For those who are gravely affected by Jonghyun’s suicide and still in

severe distress — possibly including Nine9, who must be suffering from incredible grief and guilt, though no one can be blamed for another’s suicide — we recommend referring them to mental

health professionals who can help them feel understood and learn

effective coping strategies to deal with emotional pain, such as sadness, despair, and grief, after the traumatic loss of Jonghyun. It is helpful for mental health professionals to explain the connection between depression, other mental health problems, and suicide.

One of the most concerning

If we identify the suicide

of the suicide note is the

ones and help them get the

parts of the publication reactions being captured that portray Jonghyun’s suicide as inevitable. For

example, Nine9 revealed

that Jonghyun had shared “deep and dark thoughts”

with her in the past, and she tried to intervene, but, “In the end, it only delayed

his passing and did not prevent it.”

This kind of thinking makes

warning signs of our loved right services, we can help

save their lives. This process starts by asking questions

about whether or not they have any suicidal thoughts.

If we do not ask, they will not talk about their suicidal

thoughts, as was the case with Jonghyun.

If someone shows high

risks of suicide, immediately refer them to mental health

it less likely that people will get help — for themselves or someone

professionals. There are empirically based treatments available

inaccurate. Contrary to public myth, a vast majority of people – nine

behavior therapy and cognitive behavioral therapy are effective

else. After all, why delay the inevitable? It’s unhelpful, and it’s

out of 10 – who attempt suicide and survive will not go on to die by suicide at a later date. Therefore, although Jonghyun’s depression

and suffering are validated, his suicide shouldn’t be depicted as an unavoidable coping strategy to end his agony.

The media also should address the warning signs of suicide and

encourage people to seek help whenever they cover a suicide like Jonghyun’s — and for maximum impact, those pleas should be echoed and amplified by fellow pop stars. The stigma associated

with mental health problems and receiving treatment is still strong,

for suicide prevention. Researchers have found that dialectical in preventing suicide. Dialectical behavior therapy, developed by

Marsha M. Linehan, is used to treat people with severe mental health problems and suicidal behaviors. It also helps them learn to

regulate dysfunctional emotions and tolerate distress. Although the causes of suicide are multifaceted, suicide attempters commonly

lack the effective skills necessary to regulate emotions and tolerate

distress. Along with skills training, cognitive behavior therapy can help identify dysfunctional thinking patterns on suicide, restructure dysfunctional distortions, and restore hope and resilience.

especially in Korean and other Asian cultures. Most people who live

The common denominator in all this is that there is hope.

reluctant to seek the help they need. That is why, as one of many

celebrities, and people on the street recognize that, the fewer pop

with mental illness report that they experience stigma and were

effective strategies, I recommend that Jonghyun’s fellow K-pop stars

Depression is not a death sentence, and the sooner the media, stars, loved ones, and friends we will needlessly mourn.

43


Dr. Anderson S. Yoon is the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and valuebased care of The Child Center of NY.

This article was originally posted on The Child Center of NY's website (Edited by Renee Riebling)

Editor’s Note: Sadly, another suicide was in the news this past week.

Popular YouTube vlogger Logan Paul posted a video of a suicide

victim in Japan. We were extremely disappointed and disturbed by

샤이니 종현의 죽음과 모방 자살의 예방 글 윤성민 박사

뉴욕차일드센터 (The Child Center of NY) 통합 및 가치기반 의료 부문 (Integrated and Value-Based Care) 부사장

Paul’s treatment of both suicide in general and this individual suicide

victim in particular: laughing, showing the victim up close, and using a

personal tragedy of someone he did not know — someone’s brother,

2017년 12월 18일, 세계적인 남성 그룹 샤이니의 리더이자 케

lack of judgment and pulled the video, we once again feel compelled

은 채 발견되었다. 그는 인근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결

son, friend — as a publicity tool. Although he later apologized for his

to decry how suicide is portrayed, and how much damage it can do to

vulnerable individuals. Paul’s 15 million subscribers are overwhelmingly

teens and tweens; he has done them a grave disservice. We recently

saw that Paul will be taking time off from vlogging to reflect. We hope

that when he returns, he will choose to turn this around, as promised,

and work to promote suicide prevention.

For anyone who is experiencing suicidal thoughts, please text the Crisis

이 팝 스타인 종현이 서울의 한 레지던스 호텔에서 의식을 잃

국 사망판정을 받고 말았다. 사인은 자살. 종현은 자신의 노래 와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우울증의 고통을 토로했다. 그 러나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아채거나, 진실한 도움을 제공하

거나, 또는 자살을 막으려는 예방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것 같

다. 대중의 사랑을 받던 팝스타는 자살하기 10일 전, 친구인 가

수 나인에게 유서로 우울로 고통받는 자신의 모습과 자살 충 동을 암시하는 내용을 적었다.

Text line at 741741 or call the National Suicide Prevention Lifeline at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The Child Center of NY provides help for people struggling with

유서를 공개한 것과 자살에 사용된 구체적인 방법을 묘사한

we can help.

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종현의 죽음이 자살에 취약한 사람

1-800-273-8255. You’re not alone. Confidential help is available for free.

depression and other mental health challenges. Please call us to see if

Updates:

• On January 21, another beloved K-pop artist, actor Jeon Tae-soo, died by suicide after battling depression. We are deeply saddened by this news and urge other K-pop stars — and members of the

media who cover them — to talk about these deaths responsibly,

resisting the urge to portray suicide as an inevitable consequence of depression. This second sad death underscores the legitimacy of concerns about copycat suicides, and that we all have an obligation to do what we can to stop them by offering real hope.

• We are heartened to see that Logan Paul is so far making good on his promise to spread awareness of suicide prevention — and the true message that there is always hope. On January 24, Paul

posted Suicide: Be Here Tomorrow, which features individuals who

have survived suicide attempts, suicide prevention experts, and a list, compiled by Dr. John Draper, director of the National Suicide Prevention Lifeline, of five steps anyone can take to help prevent

suicide. Equally important was the emphasis on inspiring stories of people who thought of or attempted suicide but instead got help and are now living fulfilling lives. Paul also pledged to donate $1

million to suicide prevention efforts. We hope this momentum continues. 44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것을 두고 모방 자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었 들에게 자살 충동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필자는 정신 건강 전문가로서 지난 16년간의 임상경험을 통해 비추어볼

때, 그들의 경고가 맞을 수 있다는 염려가 든다. 일부 취약계층 은 판단을 잘못해서 섣불리 자살을 모방할 수 있다. 그렇기 때

문에 종현의 죽음 이후 우리가 취해야 할 우선 과제는 자살과 관련하여 “행위의 불가피성”이라는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종현의 유서를 공개한 미디어나 동료 팝스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유명한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을 따서 베르테르 효과라고 알려지기도 한 모방 자살은 텔레비전이나 기타 미디어 매체에 보도된 다른 사람의 자살

을 모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특히, 유명인 자살 사건의 모방

효과를 분석한 연구결과들은 유명인의 자살 사건 보도가 일반 인의 자살 사건 보도보다 14.3배가 넘는 모방 자살을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주요 한국 신문인 조선일보 보도

에 따르면 5명의 유명인 자살 사건이 있고 난 뒤 약 두 달여 사 이에 2,632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이 수치는 평상시의 평균 자살 사건 수에 비해 30퍼센트가량 증가한 것이다. 이는 종현

과 같은 유명 연예인의 실제 자살 사건 소식이 심각한 모방 자

살의 위험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시사한다. 반면, 미디어 에 실린 자살 사건 소식의 유형이나 보도되는 방식에 따라 모 방 자살 숫자를 줄일 수 있다.


모방 자살을 부추기지 않기 위해, 언론은 책임 있는 자세로 보도를 해야

인을 포함해서 종현의 자살로 심각한 충격을 받고 여전히 슬픔 속에

예방 가능한 공공건강 문제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 유서 공개와 관련해

는 종현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충격을 이해해주며, 슬픔, 절망, 비탄과

하고 독자에게 자살은 우울증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결과물이 아니라

서 종현의 자살을 “정말 힘들면 그럴 수도 있겠다” 또는 “자살은 필연일

수도 있다”라는 반응을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는 행태에 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가수 나인은 과거에 종현이 ‘깊고 어두운 내면’을 그 녀에게 털어놓았고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시간만 지연시킬 뿐 그 마지

막을 막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신과 주변인들이 도움 받기를 피하게 만든다. 자살은 필수불가결한 것도 아니며, 얼마든지 예 방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은

빠진 사람들을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한다. 정신건강 전문가 같은 감정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제시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자살 징조를 알아채고 곧바로 도 움을 받을 수 있게 한다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그 시발점은 그

소중한 사람들이 자살할 생각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가 묻지 않는다면 종현의 사건과 같이 당사자는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것이기 때문이다.

10명 중의 9명은 나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다. 한때 자살을 시

만약 어떤 사람이 고 위험도의 자살징조를 보인다면, 즉시 정신건강 전

살아갈 수 있다. 종현의 우울증과 그로 인한 엄청난 고통은 충분히 수인

다. 효과적인 치료방법도 있다. 연구자들은 변증법적 행동치료와 인지

도했더라도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자살을 예방하고 정상적인 삶을

할 수 있지만, 그의 자살을 정신적 고뇌를 끝낼 수 있는 불가피한 대처 방법으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미디어는 자살의 경고 징조를 알려야 하고 종현과 같은 자살 사건을 보도할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도록 권고해야 한다. 특히, 종현의 동 료 팝스타들이 이런 권고를 한다면 그 효과는 극대화될 것이다. 정신

건강 문제나 그 치료와 관련된 낙인 (Stigma)이 특별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안 문화권에서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정신질환을 안고 살아가 는 대부분 사람들은 낙인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도움받기를 꺼린다는 보고가 있다. 그래서 여러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 종현의 동료 케이 팝 스타들이 정신건강과 관련된 오명을 척결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

다. 아이돌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들의 간청과 권고를 잘 받아들일 것 이다. 또한, 정신건강은 신체적인 건강과 다를 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스타들은 전통 미디어 매체나 소셜네트웍 사이트에 공개적으로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정신건강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받도록 권고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살로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가수 나인이

어마어마한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가수 나

문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자살은 예방할 수 있 행동치료가 자살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마샤 리네한 박사가 개발한 변증법적 행동치료는 심각한 정신문제나 자살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이용된다. 변증법적 행동치료는 역기능적인 감정과 고통을 인내하는 방법을 통해 환자들을 도울 수 있

다.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자살시도자는 공통으로 감정을 조절하

고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참아내는 기술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기 술훈련과 더불어 인지행동치료는 자살과 관련한 역기능적 사고방식을

찾아서 그 역기능적인 인지 왜곡을 바꾸고 희망과 탄력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이 모든 것의 공통분모는 희망이 있다는 점이다. 우울증은 사형선고가 아니다. 좀 더 빠르게 미디어나 연예인이나 일반 인들이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팝스타나, 소중한 사람들이나, 친구들의 죽음을 불필요하게 애도할 일이 줄어들 것이다. ■

‌ 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은 위기 텍스트 라인 741741로 메시지를 보내거 자 나 국립 자살예방 핫라인 번호 1-800-273-8255로 전화하십시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비밀이 보장되는 도움이 무료로 제공됩니다. 뉴욕차일드 센터는 여러 정신건강 클리닉을 운영하며 우울증과 정신건강 문제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45


EDUCATION

말도 뜻도 예쁜 우리말 자꾸 쓰면 더 예쁜 우리 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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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달보드레 약간 달큼하다. ‘달달하고 부드럽다’는 뜻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윤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자갈자갈 여럿이 모여서 나직한 목소리로 지껄이는 소리. 또는 그 모양. 자늑자늑 동작이 조용하며 가볍고 진득하게 부드럽고 가벼운 모양. 띠앗머리 형제 자매 사이의 우애와 정이 깊음을 표현하는 말. 슈룹 우산이나 우비(雨備)의 옛말.

사랑옵다 생김새나 행동이 사랑을 느낄 정도로 귀엽다.

포롱거리다 작은 새가 매우 가볍게 나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나비잠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리고 자는 잠.

바림 색깔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나도록 하는 일. 안다미로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

느루 한꺼번에 몰아치지 아니하고 오래도록. 그루잠 깨었다가 다시 든 잠.

비를 긋다 비를 잠시 피하여 그치기를 기다리다.

하릅 나이가 한 살 된 소, 말, 개 따위를 이르는 말.

비설거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 바람꽃 큰 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

온새미로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생김새 그대로, 자연 그대로, 언제나 변함없이. 산돌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너나들이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넴. 또는 그런 사이. 꽃무덤 아까운 나이에 죽은 젊은이의 무덤. 참고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47


EDUCATION

뉴저지에서 두번 째로 큰 대학

교육대학, 예술대학, 미디어 대학으로 유명한 몽클레어 주립대 몽클레어 주립 대학(Montclair State University : MSU)는 1908년에 설립 된 대학으로 뉴저지 주 클리프톤 몬 클레어 하이츠 (Montclair Heights) 지역에 있다. 뉴저지 내에서는 럿커스 주립대학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대 학으로 총 학생수는 2 만 5천여명, 학부생은 17,000여 명이고 대학원생 은 4,000여 명이다. 500에이커에 이르는 광할한 캠퍼스에 5개의 단과 대 학과 인문 사회 과학 대학, 과학 및 수학 대학, 교육 및 인적 서비스 대학, 예술 대학 및 경영 대학원을 통해 250개 이상의 전공 과정이 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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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Montclair State University Montclair State University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의 상위 100개 공립 대학 중

한 곳으로 계속 선정되었다. Montclair State Teachers College (교육학 학사

과정) 프로그램은 미국 내 최초 연구소이기도 하다. 또한, 어린이철학연구의 본산지라고도 할 수 있는 어린이철학연구소 (Institute for the Advancement

of Philosophy for Children, IAPC)가 있으며, 브루스윌리스, 케빈 캐롤란, 다니 아 라미레스, 헐리웃 스타와 로린 스카파리아, 워렌 파렐 등 작가와 뉴욕 브로 드웨이 뮤지컬 스타를 많이 배출한 대학으로 유명하다.

첫 번째 졸업생이었던 윌리엄 오 트랩 (William O. Trapp)은 1929 년 저널리즘 퓰리처 상을 수상하는 등 졸업생의 활약도 뛰어나다.

대학 내에 뉴저지와 뉴욕을 연결하는 Montclair State University Station이 있 어서 지리적으로 뉴욕 진출이 용이하다. 2015 년 새롭게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

어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두 개의 신축 건물이 캠퍼스에 추가되었다. Montclair State는 300 명 이상의 박사과정 프로그램이 있으며, 석사 및 학사 학위 과정이

있다. "뉴저지 최고의 공립 대학교(포브스)”라는 칭호를 얻은 학업 프로그램과 광활한 캠퍼스 커뮤니티를 자랑한다. 학생 대 교수 비율 17 : 1이다. Montclair State University 1 Normal Ave Montclair, New Jersey 07043 973-65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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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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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항상 장소가 필요하다

유년의 추억, 공간의 기억을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홍 범

오래된 외면,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 잃어버린 숲, 마음속 어딘가의 방, 기억들의 광장. 설치/비디오 아트 작가 홍 범이 그동안 열었던 전시회 제목들이다. 이들 제목만으로도 작가의 감정적인 원천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작 품 세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듯하다.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VA)에서 컴퓨터 아트와 사진을 전공 한 후 15년 동안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업을 해 온 홍 범은 집요하게 ‘공간’과 ‘기 억’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는 것은 누구에 게나 어머니의 품 같은 따스함을 주는 것일까. 비디오 자료로 작가의 작품들을 접했을 때 기자는 그 작품들에서 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비디오 아트에서 흔히 보아왔던 차가운 첨단과 난해한 시도 대신 홍 범의 작품은 자연과 인공의 오브제들이 정교하 게 조합되면서도 작가의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난 해 서울 ‘파라다이스 집(ZIP)’과 ‘두산 예술센터’에서 성공적인 전시 를 마쳤고 올해도 뉴욕과 한국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홍 범을 그의 첼시 아파트 라운지에서 만났다. 글 Won Young Park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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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범. 이름이 예술가답다. 초면에 이름에 대해서 먼저 물어봤다. 혹시 예명인가요?

“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이다. 원래 외자 이름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어른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던 분이다. 미술가의 꿈을 가 정 형편 때문에 접어서 그렇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도 두말없이 승낙해주셨다.” 70년생인 그가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에 예체능계를 선택한 많은 또래 와 달리 그는 ‘장남이 미대를 가는 것을’ 선뜻 허락하고 지원해 준 부모 님 덕분에 적어도 진로선택에서의 애로사항은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작업과 전시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아티스트의 길을 택

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도 웹디자인과 CD 롬, 각종 드라마의 타이틀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잘 나 가는 웹디자이너였던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활

동하게 되었을까? 뉴욕의 다른 작가들과 출발 지점이 조금은 달랐던 그의 ‘아티스트 입문기’, 스스로 ‘혼돈의 시대’라고 표현했던 과정을 자 세히 들어보면 그의 작품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들어선 작가의 길

그의 삶은 평탄했다. 명문 미대에서 실용적인 전공을 택했고 마침 부흥

기를 이루기 시작하던 웹디자인과 당시엔 첨단의 미디어였던 CD롬 제 작으로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20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이도 갖고 안정

적인 가정생활도 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부모님이 캐나 다 밴쿠버에 이민 올 때 함께 오게 되었다. 이민이라는 외적인 환경의 변화가 그의 삶에 급격한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한국보다 일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웹디자이너로 일을 했고, 사회 보장이

잘 되어 있는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삶을 꾸려가기에 큰 어려움

은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지루함 섞인 편안함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어지럽게 한 듯하다. 52

“밴쿠버에서 90년대 후반 디자인 관련 일을 하던 시기였는데 어느 순간에 내가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걸 깨달 았다. 예를 들면 1년 동안 꽃과 선인장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지금 보면 현재 하는 작업과 연장 선상에 있던 순수 예술의 형태였지만 그때는 의식을 못 했다. 아마도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마음속 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넘실대던 시기, 그런데 스스로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혼돈의 시절이었다. 그래서 뉴욕에 와서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아내 역시 학업 을 더 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미 32살의 나이에 아이들이 있 는 가장이어서 분명 두려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젊은 나이였다. 탈 출구가 절실히 필요해서 내린 무작정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홍 범은 2001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SVA(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에 진 학했다. 그때도 ‘예술가로서 올 인’하는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경력과

관련이 있는 컴퓨터 아트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졸업 후에 한국에서 교 직을 가질 계획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 것은 사소한 계기일 경우가 많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술가적

인 끼가 남달라서 친하게 지내던 한 동료 학생의 권유로 사진과 전공인 비디오 아트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순수 영상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수업이 의외로 너무 좋았다. 담당 교수님도 학기 내내 나의 재능과 태도를 높이 평 가하고 용기를 주었다. 무엇보다 교수님이 나에게 전시의 기회를 주 었다. 내 생애 첫 작품 발표회였다.”


홍 범은 그때 새와 하늘을 소재로 한 4분 분량의 실험 비디오를 작업했

다. 오브제와 백그라운드만 있는 단순한 설정이었지만 “존재와 공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이후 작가 홍 범의 핵심이 되는 컨 셉이 처음 작품으로 발현된 자리였다. 그저 호기심으로 들었던 비디오

아트 수업을 계기로 한 창작을 통해, 고민과 성취와 비평의 과정을 겪 으며 그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자극과 재미 그리고 성취감을 느꼈 다고 한다.

“교수가 개념적인 과제를 던져주고 나는 그 과제에 대해 깊은 고민 을 했다. 그러다가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을 때 쾌감을 느꼈다. 그리 고 관객들 앞에서 섰을 때는 긴장과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 서 헐벗은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 과정들이 정말 재밌고 자극적이 고 행복했다. 지난 10여 년간 내가 끊임없이 내적으로 고민을 해 왔 음을 비로소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가랑비에 젖듯 조금씩 조금씩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찾아왔던 것 같았다.” 전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들

홍 범은 비디오 아트로 석사(MFA)를 마친 뒤 사진 전공으로 2년간 석

사 과정을 더 공부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교수의 권유에 따른 선

택이었다. 2005년 졸업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브루클린 다리 밑에 모스 부호에 따라 빛을 발하며 움직이는 설치물을 작업하는 등 능숙하게 손에 익은 컴퓨터 기술과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예술적 아이디어들을 결합한 창작물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작가로서 처음으로 가진 의미 있는 전시는 50년대 지식인들이 즐겨 찾 던 찻집을 갤러리로 개조한 인사동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잃어버

린 숲>이었다. 2000년대의 명성 있는 대안공간으로 한국 화단에 입문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인식되던 갤러리였다. 홍 범은 4대의 프 로젝터를 사용해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세곡동의 기억을 떠올린 작품

을 만들었다. 사루비아의 내부는 의도적으로 마감을 마치지 않은 콘크 리트 벽면이었다. 그 거친 벽면은 아련한 옛 추억의 소환을 위해 붓이 번지는 효과를 살린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는 백그라운드의 역할을 충 실히 했다.

“그린벨트에 묶여있던 시절의 세곡동은 시골과 다름없었고 나는 친 구들과 동네 산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칡을 캐 먹는 등 산골 아이처 럼 놀았다.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입체적으로 되살린 전시 였다.” 작가는 사루비아의 <잃어버린 숲>으로 평단과 관객에게 주목을 받는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후 토탈 미술관, 베를린의 안도 파인아트, 스

케이프 갤러리 등에서 활발히 전시 활동을 했고 2011년 뉴욕문화원 뉴 욕-런던 젊은 작가전에 참여했다.

2014년 성북동의 ‘스페이스 캔’ 열린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도 큰 관심을 받은 전시 중 하나다. 작가는 삶의 무늬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전시장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작품과 공간이 서로 스며드는 듯한 전 시를 진행했다. 한 평론가는 전시를 보고 나서 “공간이 작품과 상호작

용한다. 기계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마치 바람결 따라 함께 호흡하는 공간, 관객이 현을 건드리면 곡도 연주되는 살아있는 공명의 공간이 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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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에서 지난해 2월까지 진행되었던 ‘파라다이스 집(ZIP)’

<오래된 외면> 전시 직후인 2017년 4월, 작가는 ‘두산갤러리 서울’에

적 공간과 자연스레 섞이는’ 전시의 연장 선상이었다. ‘파라다이스 집’

리, 빛을 발산하며 주변을 배회하며 관객을 만났다. <기억들의 광장>이

<오래된 외면> 역시 ‘공간의 기억이라는 주제가 전시장이라는 물리 은 건축가 송효상이 오랜 시간을 들여 리모델링한 새로운 대안적 집이 고 동시에 전시공간이다. 1980년 이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점차 자취

를 갖춘 서울의 저층 단독 주택의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그의 작품과 제대로 분위기가 맞았다. 작가는 이 공간 안에 어린 시절 살았 던 집과 그 구조를 3D모델링해서 변형시킨 이미지들을 투사했다. 움직

이는 애니메이션은 리얼하면서도 초현실적인 꿈으로 인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해온 작가에게 오래된 집은 어린 시절의 실제 살았던 집들을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어디에도 없 는 미지의 장소로서 다가옴을 상징한다.

이번엔 다섯 개의 기둥을 설치했다. 이 기둥들은 각각 다른 모양과 소

라고 붙여진 이 움직이는 기둥들은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기억이 혼 재되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거리를 두면서 만드는 관계를 나타낸다. 다섯 개의 움직이는 기둥들은 관객에게 놀라움과 흥미로움, 낯섦, 혹은 불편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그 기둥들의 관계 속으로 끌어

들인다. 결국 기둥의 안과 밖을 오가는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또 하나 의 기둥이 된다”는 설정이었다.

그는 한때 무대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무대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

이 극장에 들어설 때 아직 연기가 시작되기 전 무대의 모습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극이 시작되는 순간 관객은 공연 일부가 된다. <기

억들의 광장>은 움직이는 기둥이 연기자인 한 편의 연극 무대가 아니

었을까? 기자는 아쉽게도 직접 홍 범의 전시를 볼 기회가 없었다. 파라 다이스 집이나 두산 갤러리에 들어선 관객의 감흥을 그저 이런 식으로

짐작해 뿐이다. 한국이 아닌 뉴욕의 좋은 공간에서 그의 전시를 볼 기 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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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족, 그가 살던 집들. 그리고 기억들 작가는 전시할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받는다.

왜 그렇게 한국에서 살던 집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억하고 그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가? 작가가 ‘집’을 소재로 작업하게 된 건 여러 집을 이사 다

니며 살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이 사를 자주 다녔다. 중곡동에서만 10번 넘게 이 사를 했고 잠실로 옮겼고 세곡동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집을 만들고 리모델링하는 일을 하 셨다. 덕분에 온 가족이 함께 이사를 해야 했 다. 짓고 있거나 고치고 있던 집에서 살다가 그 집이 완성되면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는 식 이었다. 어느 날은 지하에서 어느 날은 옥상에 서 심지어는 정신병원 옆에서 살기도 했다.” 친구를 사귈 수 없던 그는 당연히 잦은 이사가

불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는

이사 다니는 게 아니고 여행을 다닌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홍 범의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의 말이 어린 마음에 재

가에게 전시란 ‘낯선 공간이 나의 기억과 교류를 통해 또 다른 나만의

히려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들은 그에게 탐색과 공상의 소

술 장르보다 상업적인 보상의 기회가 더 적은 분야다. 관객들로서도 전

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을 구경하러 다니는 걸 오 재가 되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됐는데 문이 열리면 새로운 공간 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나타난다든지, 다른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듯 한 망상에 빠질 때가 많았다. 2층 다락방엘 가면 갑자기 공간이 확장 되면서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뒤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 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갔다. 또 작품을 만들다 보면 잊혀 있던 다 른 기억들도 복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작가에게 안방은 ‘수

많은 기억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외면> 화면 속, 기둥 사이 를 왔다 갔다 움직이는 다섯 개의 기하학적 오브제들은 작가의 가족을 상징한다. 그의 집 안방은 수많은 손님과의 교류가 일어났던 곳이고 그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품 속 오브제들은 그런 내밀한 이야기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비디오 아트는 회화나 조각 등 다른 미 시를 직접 대할 기회가 적다. 그의 작업처럼 설치와 연계가 된다면 제

작비는 올라가고 상영 공간의 조건은 더 한정된다. 홍 범은 이런 어려

움을 알면서도 ‘빛의 움직임’에 매료돼서 비디오 아트를 선택했다. 그 리고 감각과 재능보다는 우직함이 예술가의 진정한 덕목임을 알게 되 었다.

“내가 공부한 전공에서 보면 컴퓨터와 디자인이란 재능은 광고와 산업 분야에 있는 디자이너들이 더 뛰어나다. 순수 예술을 하는 작 가들의 기술과 재능이 그들을 앞서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예술가는 뚝심과 고집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주로 전시 제의가 오 지만 언젠가 뉴욕에서도 제대로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중년에 접어 든 동양인 아티스트가 뉴욕에서 주류와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 운 일인지 안다. 그저 뚝심 있게 나가려고 한다. 그게 예술가니까”

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기억과 작품의 주제가 집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2011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뉴욕-런던 작가 교류전 에 선보인 <숨바꼭질 2>는 구리파이프에 걸린 동물과 식물 캐릭터의

모티프들이 회전하며 벽에 컬러플한 이미지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 모

티프들은 ‘군대의 악마 같은 고참, 수업시간에 나를 놀렸던 선생, 세발

자전거 타던 모습, 닭장에 들어가던 동생’ 등 그가 수첩에 그렸던 어릴 적 추억과 결합한 캐릭터들이다.

즉, 어린 시절 홍 범은 공상을 좋아했고 많은 공간을 이동하며 살았고

그 공간들을 탐색하길 즐겼다. 자신이 살던 나라를 떠나 먼 이역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고 뒤늦게 작가의 세계에 뛰어든 이후에 그 기억 들은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공간은 작가의 화두가 된 것이다.

그는 비디오 컨텐츠 만큼 설치 부분에 물질적 투자와 시간적 공을 많이 들인다. 공간마다 기억이 투영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

홍범 ■ 1970년 서울 출생 ■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 졸업 ■ 밴쿠버 가족 이민 ■ 2 ‌ 003년~2005년.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VA) 컴퓨터 아트 석사. 사진학과 석사(MFA) 개인전 ■ ‌ 오래된 외면. 파라다이스 ZIP, 서울 (2016-2017) ■ ‌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 스페이스 캔, 서울 (2014) ■ L ‌ uminous Link, 안도 파인아트. 베르린, 독일(2010) ■ ‌ Somewhere in the Mind, The Room, 토탈 미술관, 서울(2009) ■ ‌ 잃어버린 숲. 사루비아 다방, 서울 (2007) 55


ART&CULTURE

저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Photography by Jeremy M. K. Chon 56


2017년-현재 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심사위원 2018년 듀케인대학교 Staff Pianist

2017년 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Strings Competition 우승 2017년 듀케인대학교 매리 페퍼트 음악대학 ‘최고 연주자’ 과정 졸업 2014년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 박사 졸업

2013년 주미한국대사관 ‘한인 명예 장학금(The Korean Honor Scholarship)’ 장학생

‘세상 속에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영어로 ‘down to earth’라는 표현이 있다. 가식이나 허세가 없고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수식어이다. 우리말로는 현실적이라는 말이 때때로 세속적이라는 말과 동일시 되어 부정 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정말 ‘기분 좋게 down to earth한’ 사람이다. 인터뷰 내내 ‘이대로 써도 괜찮을까?’ 싶은 얘기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녀에게서 묘하게도 전에 없는 친 숙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예술가의 삶’보다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했다. ‘피아니스트’라 고 불리는 것이 늘 어색하다는 박현주는, “피아노가 제 삶의 일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어 떤 사람은 무대에서 연주하다 죽고 싶다고도 하는데, 전 그건 아니거든요. 세상에 재미있는 게 얼마 나 많은데요. 어떻게 피아노에만 집중해요. 전 다른 것도 다 할 거예요.” 하며 웃는다.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데 유쾌하고 흥미롭다. 이렇게 혼자 듣기 아까운 그녀의 이야기를 글 Juyoung Lee 정리

에 담아보았다.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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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뉴욕 카네기홀(Carnegie Hall)에서 2017 미국 프로테제

삶을 오롯이 예술 자체를 추구하는 데 쏟아붓는 사람, 더불어 강한 개

Strings Competition) 우승자인 박현주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었다. 모

람이라는 통념이 있다.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통념

국제 피아노 현악 콩쿠르(American Protégé International Piano and

든 음악인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그곳에 서니 많은 기억이 그녀의 머 리를 스쳐 지나간다.

‘한 걸음씩’의 결실일뿐 ‘예술가’는 아직이다 아침 7시,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지체 없이 방

밖으로 나간다. 씻고 초간단 식사를 한 뒤, 터서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

성과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세상’의 틀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 을 규범화하여 그렇지 않은 예술가들의 열정이나 순수성을 폄하하는

우(愚)는 경계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박현주는 단지 한 발 앞에 다른 한

발을 놓았을 뿐이라지만, 그녀의 남다르고 꾸준한 열심은 그 자체로 피

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사랑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녀 는 다만 ‘보통’의 삶 속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듯했다.

락들 끝을 밴디지(bandage)로 꼼꼼히 감아 붙인다. 처음에 한두 손가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

에서 학교 연습실까지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하면, 잠시 숨을 고른 뒤

“피아노를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지만, 다른 길을 선택했어도 전 제가

가르쳐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꼬박 8시간을 앉아 피아노 건반을 두

대한 박현주의 답이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책임감이 좀 강한 편인

락이었던 것이 연주일이 가까워질수록 열 손가락 가까이 늘어난다. 집

바로 연습을 시작한다. 점심시간과 중간중간 수업이 있거나 학생들을 드리다 보면 아침에 붙인 밴디지는 어느새 너덜너덜해져 있고 몇몇 손 가락 끝에서는 또 피가 스며 나온다. 저녁 6시

반, 연습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걸어온다. 짧은

휴식을 취한 후에 과제, 수업 준비, 일상적 잔무

등을 마치고 11시가 되 면 잠자리에 든다. 그리

고 다음 날 아침 7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이 일과를 반복한다. 석, 박사 과정 내내 주중 하

루도 거른 적이 없다. 차

가 있는데도 체력 관리 를 이유로 비가 오나 눈

이 오나 연습실까지 열 심히 걸어가 연습을 한 다. 이렇게 피아니스트 박현주가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마치긴 했죠. 그런데 저는 사실 피아니스트라고 불리 는 게 너무 어색해요.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아노가 아 니면 죽을 것 같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별로 예민하지도 않 고, 피아노에만 집중하지도 못해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일은 다 해야 하니까요. 밥 먹으면 설거지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주 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해야 하고요. 벼락치기를 못 하는 성격이라 늘 꾸준히 준비하는 것뿐이에요. 연주일이 가까워지면 조금 더 집중 력을 보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예민해져서 삶을 송두리째 바치고 그 러지는 않아요. 어떻게 보면 전 그다지 예술적인 사람은 아닌 거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앞에 거 해결하고, 앞에 거 해결하고, 하다 보 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자신은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피아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조차 어

색하다는 그녀의 말이 역으로 ‘예술적인 사람’ 즉, ‘예술가’의 의미를 다

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예술가라 하면, 타고난 재능에 이끌려 자신의 58

선택한 길에 책임을 졌을 거예요.” 피아니스트가 된 계기를 묻는 말에 평범한 사람이라는데, 그녀가 ‘책임지는 수준’은 절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원래는 독일로 유학 을 가려고 했다가 전 액 장학금에 생활비까 지 준다기에 ‘펜스테이 트’(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펜실베이 니아주립대학교)로 갔 어요. 한국 사람이 거 의 없는 데다, 사실 석 사 때는 제가 제일 잘 한다고들 해서 살짝 기 고만장했던 것 같아요. 본교생 중에서는 유일 하게 (본교) 박사 과정 으로 뽑히기도 했고요. 그런데 박사 과정으로 온 학생들은 정말 다 저보다 잘 치는 거예요.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 되고, 그 애들의 음악 성도 못 따라가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기도 죽고 그랬어요. 그래도 제가 한 선택이니 책임지고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박사 과정을 마치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그녀의 목 표는 오직 ‘최대한 제대로 많이 배우는 것’이었다. 학생일 때, 교수님께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때 어려운 곡들을 최대한 많이 쳐 보자고 마음먹 었다. 길고 힘든 곡이라도 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곡이면 선택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그 대가로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쉴 새 없이

연습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마치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이 걸 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녀의 졸업 연주는 그 후로 내내 음대 교수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되는 연주가 되었다. 지난했던 과정의 고단함

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이었고, 책임을 다했다는 인증(人證)이었 다. 그때를 회상하고 나서야 그녀가 말한다. “피아노가 안 좋았으면 그 렇게 못 했을 거예요.”


성실한 학생에서 피아니스트로 거듭나기

박현주가 자신이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게 어색하다고 하는 이유가 이

졸업 연주 후의 보람과 뿌듯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현주는 갑상선 암

려 그녀가 이미 한 단계 성장했고 앞으로 더 성장해 나갈 준비가 되어

판정을 받았다. 박사 과정 당시 심한 피로감에 잠시 갑상선 호르몬 이

상 진단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암은 좀 갑작스러웠다. 다행히 초기여 서 갑상선 제거 수술로 암 치료는 마쳤지만, 그 일로 많은 것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달리기만 해서 걷는 시간이 좀 필요한 건가 싶었어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는 만족스러운 박사 생활을 했다 고 하지만, 가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제가 얻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밖에 얻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게 좌절감이라기보다 는 열심히 살아야 그만큼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압박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마음에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건 강을 잃고 보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그즈음, 음악에 대한 제 생각도 돌이켜 보게 됐어요. 공부하는 동안 제가 크게 배울 수 있겠다 싶은 곡들 위주로 연주하고 보니, 졸업하고 나서 연주회를 하려니까 제 레퍼토리 곡들이 다 너무 어려운 곡들인 거예요. 다시 준비할 엄두도 못 내고,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곡들이 많아서 연주 회 레퍼토리를 짜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청중들 귀를 고려하지 않 고 철저하게 나 자신만을 위한 곡들을 쳤구나’ 깨닫게 되었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에 대한 그녀의 부정은 오히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녀가 대학생이던 2006년, ‘음악춘추’(클래 식 음악 잡지) 우수 신인 데뷔 연주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곡의 기교에 치우친 잠깐의 눈부신 연주보다는 오랫동안 연습하며 쌓 아온 깊이 있는 소리로 한 음마다 감동으로 전해지는 연주를 선사하고 싶다”고 했다. “착실하면서도 정직한 연주자”가 당시 그녀가 정의하는

‘피아니스트’였고, 학창 시절 내내 그 정의에 맞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 “음악적 완성도와 테크닉도 중요하 지만, 음악을 통해 청중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청

중들과 소통하는 무대에서 또 다른 제 모습을 보며 깨지기도 하고 다듬 어지기도 하면서 발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연주할 때 제일 어려운 건, 작곡가의 의도와 ‘나’의 스토리를 조화시 키는 거예요. 먼저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해서 곡의 의도를 청중들에 게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작곡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습에 임하기 전에 작곡가의 생애와 친필 악보를 찾아보면서 그 곡 에 담긴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그 의도를 해 치지 않는 선에서 저만의 색깔을 담아 연주하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해요. 청중들이 작곡가의 의도를 공감하고 그 곡을 사랑할 수 있게 끔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로서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59


공감할 수 있는 삶에서 나오는 공감할 수 있는 음악

정(Artist Diploma)’을 마치면서 피아니스트로서도, 교육자로서도 더

‘공감’은 모든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

고’가 있는 ‘피아노 전공자’ – 그녀의 정의에 따르면 “피아노를 공부해

에 갇혀 자기만이 이해하고 만족하는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예술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예술가는 늘 어떻게 보는 이, 듣는 이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배우의 경우를 보면,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충분히 경험한 배우일수록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폭넓고 깊이 있는 연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피아니스트 박현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넓은 음역 안에서 다양한 선율과 색깔을 한 번에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피아노는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어요. 또 때로는 다른 악기 들과 잘 어우러져 소리를 내고, 때로는 독주 악기를 서포트하여 빛나 게 해 주는 게 우리의 인간관계와도 비슷하고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서 곡에 담긴 인생의 면면과 감정을 청중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 해서는 저 자신이 먼저 작곡가의 인생과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준비 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사람으로서 제 삶을 돌아 보고 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세상 밖의 구경꾼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

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평범한 희로애락을 포기하지 않고 세상 속에 서 누리며 산다. 중학교 시절 만난 남편이 그녀를 찾아 미국까지 유학 와 준 덕에 결혼에 골인했고 예쁜 딸도 낳았다. 덕분에 남편과 딸의 지

지와 응원 속에 듀케인대학교(Duquesne University) ‘최고 연주자 과 60

욱 성장했다. ‘성실한 학생’을 졸업하고 이제는 아내와 엄마로서 ‘생활

서 피아노와 관련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 – 가 되었다며 웃는 그 녀.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본인의 연주회를 준비하며, 피츠버그 국

제 피아노 콩쿠르(Pittsburgh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의 심 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아내, 엄마, 피아니스트 다 하려 면 힘들겠다고 하자, “시간 여유는 없는데 마음의 여유는 예전보다 더

있어요.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내야 하니까 연습 시간이 줄긴 했어도 집중력은 더 생긴 것 같아요.”라며 할 만하다고 한다. 기본으로 가진 성

실함에 풍성한 삶의 경험이 더해진 그녀의 연주는 이전보다 더 많은 이 들을 공감케 하고 감동하게 할 것이다.

박현주는 요즘 5월에 있을 미국의 대표적 실내악 콩쿠르인 피쇼프 콩

쿠르(Fischoff International Competition) 참가를 앞두고 맹연습 중 이다. 생계수단으로 피아노를 한다며 웃던 그녀가 사뭇 진지해진 얼굴 로, “간만에 순수하게 피아노 연주자로 연습 중인데요. 그러니까 숨을 좀 쉬겠더라고요.” 한다. 그녀가 말하는 ‘평범한’ 삶, 즉 무엇 하나 놓지

않고 모두 경험하고 챙기며 음악을 하는 삶이 가뜩이나 책임감 강한 그 녀에게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억척스럽게 잘 해내온 것을

보면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된다.

피아노가 그녀에게 ‘삶의 일부분’일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분명 그 부 분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아니스트다. 그럼에도 그녀가 “나는 예술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은, 아마도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라기 보다 ‘예술을 하는 보통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ART&CULTURE

March New York Events 봄을 재촉하는

3월의 뉴욕 이벤트 글

편집부

New York International Children’s Film Festival 2018

뉴욕을 떠나지 않고도 전 세계 곳곳의 동심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New York International Children’s Film Festival. 매 년 2월 말부터 3월까지 4주간 열리는데 해마다 약 25,00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부모들이 몰린다. 올해는 전 세계 30

여 개국에서 출품된 125편의 애니메이션, 라이브 액션, 다큐 멘터리와 실험영화 중 약 75편이 대중들에게 상영된다. 짧은 단편 영화 스크리닝이 가장 인기 만점. The Big Bad Fox and Other Tales Benjamin Renner & Patrick Imbert (France) 출품작

일시: February 23 – March 18

장소: 영화별로 다르니 티켓 구매시 확인 61


March New York Events

The Orchid Show 2018

동양란은 청초하고 고상한 모습이지만, 양란은 꽃잎부

터가 크고 색깔이 매우 화려하다. 화초 키우기에 재주

가 없는 사람마저도 한번 사서 키워볼까 하는 유혹에 빠지게 하는 화려한 양란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제

16회 오키드 쇼가 올해도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서 펼 쳐진다. 가족과 또는 연인과 함께 가면 더욱 좋겠다. 일시: March 3 – April 22

장소: New York Botanical Garden

COFFEE & TEA FESTIVAL: NYC

만일 당신이 커피 & 티 러버라면 제13 회 COFFEE & TEA FESTIVAL에 가보자. 아마도 가장 맛있고 향기 나고 재미난 페스티벌이 아닐까. 10 Best New York Events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페스티벌

에 가면 다양한 커피와 티를 테이스팅 할 수 있을뿐더러 종일 마시고 즐길 수 있다. 일시: March 10 – 11

장소: Brooklyn Expo Center 62


March New York Events

2018 NYC St. Patrick’s Day Parade

제아무리 유명한 팬톤(Pantone)에서 올해의 색을 뽑아

도 3월의 색은 역시 초록색이다. 특히 3월 17일, 이날만 큼은 직장이나 가게 그리고 뉴욕 거리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초록색을 입고 있다. St. Patrick’s Day는

매년 같은 날로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패트릭 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특히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많은

뉴욕에서는 44가에서 시작해서 50가에 있는 성 패트릭

성당(St. Patrick’s Cathedral)을 지나 79가까지 행진하 는 퍼레이드를 벌인다.

일시: March 17 (From 11AM till 5PM)

장소: 5th Avenue between 44th Street and 79th Street

Macy’s Flower Show 2018

꽃으로 꾸민 판타지의 세계로 입장! 매년 봄을 환영하는 꽃의 축제가 뉴욕 그리고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Macy’s의 marquee 로케이션에서 열린다. 딱 2주간 열 리는 이 행사에 수만 명의 관중이 몰리는데 해마다 테마 가 있는 꽃장식과 정원 등 눈요깃거리가 풍성하다. 일시: March 25 – April 8

장소: Macy’s New York Herald Square 63


ART&CULTURE

삶과 예술이 공존하는 방, 나의 퀘렌시아(Querencia)

조각가 장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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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장수영씨의 작품에는 치명적인 끌림같은 것은 없다. 난 해함도 없다. 암시적이거나 시사적이지도 않다. 그저 살면서 얻는 작은 영감들을 안고 점토를 빚고 조각하고 날마다 그렇게 다듬을 뿐이다. “예술이란 경외의 대상이라기 보다 삶에서 접 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나나, 그나 마음에 평안을 얻으 면 된다.” 간결한 말투 만큼이나 그녀의 예술론 또한 간명하다. 글 Young Choi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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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가 잠시 쉬어가듯 종일 잔비가 내렸다. 이런날은 누굴 만나도 자칫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녀는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닥친

를 다른날로 바꾸자는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빗길을 내쳐달려왔다. 초

들리며 슬픈 기색이 보였지만 숱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지럽던 시선이

궂은 만남이기 십상이다. 장수영씨께 어렵사리 얻은 시간이라 인터뷰 인종을 누르고 문밖에서 인기척을 기다리는 동안 열린 커튼 사이로 살

림집 겸 작업실을 구분없이 쓰고 있는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부엌과 거실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이 있다면, 그 반대편 큰 창을 따라 작가의 작업대와 작품들이 흩어져있는 또 다른 한 세계가 서로간 아무 경계없이 놓여있다. 열정과 영감으로 뒤덮힌 뭔가 비밀스러운 아

뜨리에를 상상하던 내 앞에 ‘삶이 곧 예술이다’라는 단순한 명제 하나 를 툭 던져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현관 문이 열리고 장수영씨가 들어오 라는 손짓을 한다.

인터뷰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그녀는 작업하던 흙덩이를 잠시 매만졌 다. 실내공기가 건조해서 뼈대에 붙여둔 점토가 자꾸 떨어진다며 몇번 이고 손으로 다져 눌렀다. 테이블로 돌아와 차 한모금을 마시고 아들이 야기로 먼저 운을 뗐다.

“아들이 재활을 위해 학교에 간 이 시간이 제게는 유일하게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라 공연히 마음이 분주하네요. 3년 전쯤 아들이 교통 사고를 당했어요. 중상을 입고 오랫동안 병상에 있었는데, 요즘 재 활을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거든요. 아이가 돌아오면 모든 시간을 아이한테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가있는 이 시간에 집중해서 작업을 합니다” 66

아들의 사고를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힘겨웠던 걸까? 간간히 눈동자가 흔 천사를 새긴 동판부조 앞에 마침내 멈춰섰다. 얼굴이 평온해 보인다.

“제가 어릴땐 동네 소문난 그림쟁이였어요. 그림을 잘 그리기도 했 지만 돌이켜보면 그림을 그린다는 게 제게는 특별한 의미였던 것 같 아요. 저희 부모님이 스물을 갓넘긴 어린나이에 저를 낳으셨고 아 래로 동생이 넷이나 되다보니 저를 되려 많이 의지하셨어요. 알잖 아요, 아이를 어른대접하면 아이가 아이다운 행동을 못하게 된다는 거. 전 어려서부터 어른아이였어요. 그러다보니 아이답고 싶었던 내 속의 모든 생각들, 욕구들, 감정들을 그저 그림 안으로 모두 흘려보 냈던 것 같아요. 피아노를 전공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음악을 시키고 싶어하셨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태생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예술을, 그리고 미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녀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오일페인팅이 주는 화학물질의 유 해독소 때문에 더 이상 유화를 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극심했던 물감 알러지로 인해 유화를 포기하고 잠시 동양화를 접 했지만, 동양화는 뭐랄까 제게 만족을 주는 분야는 아니었던 것 같 아요. 하면 할수록 성에 차지않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그래도 돌 이켜보면 동양화를 공부하는 동안 예술을 대하는 마음자세나 진지


함, 정신적인 어떤 기반들을 배웠던 것 같아요. 이후, 고등학교 미술 반에서 조각을 처음 접하고 완전히 매료되었죠. 그 전까지의 모든 미술 작업이 2차원적인 평면 작업이었다면 조각은 입체를 드러내는 3차원이라 표현의 폭이 그만큼 넓거든요. 게다가 흙, 돌, 나무, 쇠 등 다양한 소재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좋았어요. 물론 힘이 들고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그 땐 작업하는 것이 마냥 즐거웠어요.” 조각을 처음 알게 된 후로는 조각에서 손을 떼본 적이 없다는 그녀가 대학을 조소과로 지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학업성적, 실기시험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에 입학했고, 졸업 후 대학원은 장학금을 받고 다녔을 만큼 학업에 대한 더 큰 욕구와 기대가 있었다.

“대학 4학년 때 만든 작품이 San Francisco Art Institute가 주관했던 Competition 에서 일등을 해 현재 그 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것이 조각공부에 더 매진하도록 만든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유학을 준비했어요. 결혼하지 않은 여자 혼자 외국 에 갈 수 없다며 맞서시던 부모님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서 남편감 을 찾던 중에 마침 유학준비를 하던 같은 학교 상대를 졸업한 남편 을 만나 결혼을 했고, 미국으로 건너오게 되었어요.”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예술가에게 많은 것을 내려놓도록 요구했

고 작품활동을 하기에는 얘기치 않은 변수들이 많았다. 딸, 아들 두 아

이가 생겼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 까지는 가정주부로 살기에 도 벅찬 일과들이 이어졌다.

“결혼 초부터 둘째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가정주부로 살았어요. 유학하겠다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엄마로써 자식은 또 열과 성을 다해 키워야 하잖아요.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마 자 곧바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Brooklyn Art Institute에 진학해 서 서양화, 미술사 등을 공부했는데 미국의 저명한 추상화가이자 조 각가인 Jerry Samuels교수께 사사를 받았어요, 이 후 FIT의 Richard McKelway 교수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구요. 아이 키우는 동안 손 놓고 있었던 만큼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학위를 얻겠다는 욕심보다 는 뛰어난 교수님들께 제대로 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어요.” 늦은 나이에 다시 작업을 시작했지만 1995년 초반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크고작은 전시회를 연중 이어갔다. 서양화가 김아토씨와 유리작

가 유충목씨가 함께 했던 Elemental 3인전을 해마다 한차례씩 열어왔 고, 지금은 고인이되신 서양화가 김옥지선배와 함께 2인전을, 또 서울

대 동문으로 구성된 그룹전시회는 2년에 한번씩 참여하고 있다. 그리

고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며 함께 작품활동을 해 온 많은 외국 아티스트 들과 함께 크고작은 로컬전시회로 작업의 맥을 놓지않고 있다. 또한 올

연말에 있을 한국영사관 주관 이태리 밀라노 전시회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고, 내년에는 플로렌스까지 추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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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에 조각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조각을 멈춰본 기억이 없어 요. 제가 이름을 널리 알리거나, 작품을 팔거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좀 없는 편이라 활동에 비해 기록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는데요, 저 는 그저 작품만 하고 싶을뿐이에요.” 예술가로써 이런 왕성한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판 매되거나 세상에 알려지는 일에는 좀 둔감한 편이다. 스스로 충족되지

않는 작품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 늘 그녀를 작업대로 이끌었을 뿐이지 세상적인 평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탓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사람들인데, 대중성과 예술성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 가는지가 궁금해졌다.

“물론 저도 작품을 판매해 봤고, 돈을 번다는 것보다 누군가 내 작품 을 좋아해주면 기쁘죠. 아마 예술활동을 하는 모든 아티스트들의 딜 레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흔히 다 아는 이야기 하나 해볼까요? 37 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1000점이 넘는 그림을 남긴 반고흐는 그 의 생전에 단 한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어요. 그렇게 가난에 허덕이 면서도 말이죠. 만일 그가 그림을 팔아 생존을 해결하길 원했다면 상업적인 그림을 그렸어야 옳았겠죠. 그러나 아무리 가난과 배고픔 에 휘둘렸어도 그는 그의 예술적 가치나 의지를 꺾지 않았어요. 누 가봐도 불행한 삶이지만 저는 오히려 그게 순전한 예술가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상업적 미술에 자신을 팔지 않는 예술가, 현실 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작품의 예술적 가치와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 는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면 예술가로써 그것보다 더 큰 명예는 없 겠죠. 그렇다고해서 대중성에 촛점을 두고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이 해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래야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화 가 나요. 대중에게 소통을 강요할 수 없듯이 예술가에게 소통거리를 제공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어떤 감성적 직관은 다수 의 통합적 공감하고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에 단 한사람의 대중이 건네는 아주 작은 소통이라 할지라도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68

플라톤의 미학이나, 예술철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정신이라면 대중적 지지 이전에 예술행위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유의미하다는 그녀의 말 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이들은 대중성과 작품성이 동일하게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이들은 사람들이 봐주지 않는 작품은 생명이 없다고도 한다. 또는 내가 추구하는 작품성을 쫓다보면 대중성이 자 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보다 앞서는

것은 작품을 하는 예술행위이고 장수영씨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행복할 뿐이다.

장수영씨의 작품에는 인체조각상들이 많다. 현대미술에서는 전통적 인 신체의 미적 비율을 깨고 다양한 변형, 파격적 변신 등을 꾀하는 감각적 작품들도 많지만 현대 작가로 불리는 장수영씨의 작품들은 오히려 고전적이다. 모더니즘의 파격 혹은 변형과는 거리가 먼 오히

려 인체의 사실적 재현에 가깝다. 더러는 고대 근동의 여신상을 연상 케 하기도 한다.

“미술사에 있어 사람의 신체는 미술가들에게 오랜 탐구의 대상이자 작품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어 왔는데요, 얼굴표정, 몸의 형태, 손모 양, 제스쳐 등 여러 가지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이거든요. 그러다보 니 인체조각을 많이 하게되죠. 그러나 저는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추 상작가이고 추상작품들도 하고있어요. 제 작업에 영감을 주는 것은 그냥 평범한 일상사입니다. 이렇게 쉽게 설명하지 않으면 자칫 관념 적이고 사변적으로 흐르기 쉬운데요, 말하자면 인간 존재와 삶이라 는 거죠. 피조물로 존재하는 인간의 연약함,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 의 한계상황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우리들 모습, 또 그런 삶 가운데 서 더러 맛보는 행복한 순간, 또는무념한 일상 등 살아가면서 맞딱 드리는 모든 순간과 시간들이 제 작품 속에 다 들어있어요. 불같은 영감이나 뜨거운 예술적 동기 뭐 이런 것은 없지만 그저 일상 속에 서 문득 느껴지는 작은 영감으로 편안하게 작업합니다. 작품을 하는 나도 보는 사람도 모두 평안해지기를 바라면서요.”


막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 그 곳을 스 페인어로 퀘렌시아(Querencia)라고 한 대요. 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제 가 작업하는 공간과 시간은 제게 그런 곳 과 같아요. 내가 위로를 얻고 나의 내면 에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거든요. Jerry Samuels 교수님을 통해 예술 행위가 주 는 치유의 능력에 대해 깊이있게 배우기 도 했지만, 작업이라는 실제적 행위를 통 해 제가 번번히 치유되고 있음을 느끼거 든요. 요즘은 예술치료사, 예술보건소, 뭐 이런 용어들을 쉬이 들을 수 있는데, 예술이 한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 된 개인을 통해 가족이 치유가 되고 더 나아가 사회까지 치유해내는 힘이 있다 고 저는 믿어요. 제 작품을 감상하는 모 든 분들에게도 작은 위로, 혹은 치유, 평 안이 전해지면 좋겠어요.” 그녀의 남편이 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

단다. “여보, 그건 상식이야.” 그런말을 듣 는 그녀는 혼란스럽다. 예술가에게는 일반 적인 상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래서 더러는 현실과 괴리가 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괴리감이 작품으로 이

어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예술가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정해주는 존재라는 것을 회계사 남편이 깨닫기는 좀 어려워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작은 망설 임도 주저함도 없이 짧게 말한다. 내면에 평안이 깃드는 시간, 그 곳이 바로 그녀의 퀘렌시아라고.

“책에서 읽은 얘긴데요, 스페인의 투우장에 가면 투우사와 싸우다 지친 소가 잠시 쉬는 공간이 있다고 해요.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 는 곳인데, 그 곳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힘을 추스려 다시 투우 장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치열한 경계 가운데서 마지

“수많은 훌륭한 조각가들이 있지만, 저 는 특별히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데요, 그 사람은 조각을 하기위해 대리석 덩어 리를 마주하면 그 돌 안에 갇힌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고 해요. 그는 돌을 깨고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자유 롭게 놓아준다고 하거든요. 저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그게 조각이고 예술인 것 같아요. 제 작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 중의 일부에요. 돌과 흙 속에 갇힌 아름다움을 하나의 형태로 끌 어내고 싶은 태생적 욕구가 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작업을 쉬지 않죠.” 최근 Mikhail Jekin Gallery 에서 로컬 전시회를 마친 그녀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중에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단다. 하고싶은 일만 하고 살

았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것, 세상이 내게 요구하는 것으로 자꾸 마음 이 흘러간다고. 이기가 이타로 옮겨가는 변곡점일까?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는 이타란 과연 어떤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된다. 긴 대화를 마 치고 작품이 놓인 창쪽으로 눈을 돌렸다. 창밖엔 여전히 비. 창 가에 가 지런히 놓인 조각들이 하나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69


ART&CULTURE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힌 베스트셀러 전기 작가

영원히 늙지 않는 문학청년을 꿈꾸는 재미 문인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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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seller 미국에서 전기(Biography) 는 중요한 문학 장르의 하나다. 전기의 종류와 발행되는 부수 도 많고 무엇보다 전기를 즐겨 읽는 고정 독자층이 두텁다. 최근까지도 뉴욕타임즈 주간 베스트셀러 논픽션 부분 1, 2위를 <다 빈치> 와 <오바마> 가 차지했고 <그랜트>까지 3편 의 전기가 10위안에 올랐다. 특히 <다 빈치>의 저자 월터 이작슨(Walter Issacson)은 저명 한 전기 작가로 이전에도 <벤자민 프랭클린>,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 등 발표하는 책마다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섯 번째 전기 작품 <권정생>을 출간하는 작가 이충 렬을 한국의 월터 이작슨이라고 한다면 과한 평가일까? 하지만 전기 문학이라는 토양 자 체가 척박한 한국 출판계에서 <간송 전형필>, <아 김수환 추기경> 등 내놓는 작품마다 베 스트셀러를 기록한 이충렬 작가의 위상은 양국 출판계를 상대적으로 비교할 때 결코 과 찬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40년간 서부에 사는 재미 문인이 한국 전기 문 학의 지형을 바꿔 놓은 성과는 글쓰기의 열망을 가진 미주 한인들에게 특히 고무적이다. 글

편집부 71


늙지 않는 ‘문청’ 이충렬 “청년 문학 지망생을 줄여서 ‘문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번 문청

은 영원한 문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 람은 평생 그 열정을 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단국대 국문과를 다니던 20세의 이충렬은 아마도 계속 한국에 있었으 면 자신의 말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문학의 길만 걸었을 전형적인 문

학청년이었다. 그러나 1976년 가족이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오면서 그

의 생은 크게 달라졌다. 처음엔 비록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곳에서 살아도 열정만 있으면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정을 갖고 있어도 생활 때문에 글쓰기를 멀리하면 ‘문학적 언 어’를 상실하게 된다. 열정만 갖고 작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래서 작

가는 “저 역시 이민 와서 생활이 먼저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글쓰기를 그만둔 실패한 문청이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에 온 지 20년이 지난 1994년, 계간

지 <실천문학>에 그의 단편소설이 발표

전형필>은 동아일보의 ‘올해 10대 책’, 삼성경제소의 ‘CEO가 올해 여 름휴가에 읽어야 할 도서 14권’ 등에 선정되었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 에도 실렸을 뿐 아니라, MBC와 드라마 원작 계약도 체결했다. 이 책의 성공으로 인한 인세와 차기 출판에 관한 계약금으로 작가는 최소한의 생활을 꾸리며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김영사에서 국내에 전기 작가가 드물다며 계속 전기를 써보라고 권유했고, 저도 매력적인 인물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면서 배 우는 게 많아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출판사의 격려 못지않게 독자들의 반응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인물을 알게 해 줘서 고맙다는 평을 들을 때마다 무척 기쁘더군요.” 전업 작가로서 탄력을 받은 이충렬은 2012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그리고 다음해는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를 잇달아 펴내며 전기 전문 작가로서 의 입지를 굳혔다.

되었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에 불씨를

<아, 김수환 추기경> 으로 한국 전기

부터 애리조나 최남단에 있는 멕시코와

28쇄를 거듭하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살린 늦은 등단이었다. 그는 1990년대 의 접경도시인 노갈레스라는 곳에서 잡 화 가게를 했다. 작은 도시였지만, 불경

기를 별로 타지 않는 국경도시여서 비 교적 꾸준했다고 했다. 실천문학 등단

이후에 그는 ‘샘이 깊은 물’, ‘한겨레’, ‘국 민일보’, ‘경향신문’ 등에 단편소설, 르

포, 칼럼을 써왔지만 아이들을 대학 졸 업시킨 후에야 장사를 포기했다. 그렇

게 부모로서의 소임을 마친 뒤 피닉스 로 거주지를 옮겨 전기를 쓰는 전업 작

가가 된 것이다. 여유가 생겨서 한 선택

은 아니었다. 작가는 “애들 학비 대느라

모아 놓은 돈도 없었지만 늦게나마 좋 은 작품 몇 개 남기고 싶다는 간절한 소 망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전업 작가의 길을 열어준 <간송 전형필>

외로움은 글쓰기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작가는 피닉스로 온 후 친구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 더욱

글쓰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문학은 자신과의 싸움이 고, 그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피닉스 같은 사막 도 시에서 조용히 사는 것이 집필에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무명의 재미 작가 그것도 늘그막에 작가의 길에 들어선 제가 한국의 문 단과 출판계에 인정받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 2010년 발간한 <간송 전형필(김영사)>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 서 그에게 전업 작가의 길을 열어주었다. 일제강점기 시대 엄청난 유산 을 물려받았으나 모든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우리나

라의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의 삶을 다룬 평전이다. 이 책은 작 가가 2006년 ‘간송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출품된 22점의 국보와 보

물을 본 후 10년에 걸쳐 자료 조사와 집필에 매달린 역작이었다. <간송 72

문학의 위상을 바꾸다

잡은 <간송 전형필>의 성공과 정열적

인 집필 활동으로 이충렬은 한국 출판 계에서 가장 대접을 받는 작가 중 한 명

이 되었다. 2015년 <아, 김수환 추기경>

이 출판되었을 때 김영사는 주요 일간 지에 전면 광고를 했다. 독자층의 감소 와 불황으로 어려운 출판 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지원이었다. 게다가 한국 도

서의 메카 광화문 교보문고 벽 전면에

이 책의 배너광고가 한 달이나 펼쳐져 있었다.

“일간지 전면 광고는 많은 저자들의 로망입니다. 전체 출판을 모두 합해서 1년에 불과 10번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정말 유명한 작가의 화제 신작 정도가 전면광고를 하는 셈인데 제 책이 그 영광을 누린것이죠.” 작가의 높아진 인지도와 전폭적인 마케팅 지원으로 <아, 김수환 추기 경> 1, 2권 모두 발매와 동시에 쇄를 거듭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충렬의 전기 작품이 한국 문학계에 미친 효과는 단순히 판매 부수에

만 그치지 않았다. <간송 전형필>이 나온 후 연 2회씩 열리는 간송 전

시회 때마다 3시간 이상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결국, 관람객 수용 능력의 한계로 3년 전부터는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 에 설립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상설 전시를 시작했다. 또한

<아,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전기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찬

사를 받으며, 한국의 10대 일간지 모두에 비중 있게 소개되는 이른바 ‘출판계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을 때 그것은 작가 개인의 영광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한국 출판의 변두리로 취급되던 전기 문학이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것이 더 큰 수확이다. 그리고 수용자층의 확대는 공급을

린이를 위해 남긴 인물이다. 작가에게 권정생의 전기를 쓰게 된 동기도

“10년 정도 꾸준하게 쓰니까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대부분의 언론사 에서 비중 있게 소개해줬고, 전기 작가를 발굴하는 출판사가 많아져 야 한다는 출판평론가들도 생겼습니다.”

“이 분의 삶이 참으로 입지전적입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 교밖에 다니지 못했고, 거지 생활을 한 적도 있습니다. 20살 때 가게 에서 점원 생활을 하다가 전신 결핵에 걸렸고, 29살 때는 콩팥을 하 나 제거하는 수술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까지 했습니다. 그때 의사 가 잘하면 2년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수술 후,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모두 결혼해 혼자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15년 동안 시골의 조그만 교회에 종지기를 하며 교회 문간방에서 살 았습니다. 그 방에서 동화를 써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하고 기독 교 아동 문학상, 한국아동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강아지똥, 몽실 언니 등 크게 성공한 책도 쓰셨죠. 권정생 선생은 2007년 세상을 떠 날 때까지 가난하게 살면서 그동안 모아둔 10억이 넘는 인세와 앞으 로 발생하는 인세를 북한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어린이들 을 위해 사용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런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기에 그분의 정신과 문학이 계승 발전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2년 전부터 준비했습니다”

요구하는 목소리로 나타났다.

전기문학이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위인전 수준이 아닌 폭넓은 독자층

에 교양과 재미를 선사하는 매력적인 문학 장르가 될 수 있음을 이충렬 이란 재미 작가가 보여주었고, 이에 맞춰 전문적인 전기 출판사의 등장 까지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내게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이름 있는 출판사를 고를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 게 된 작가지만 새로 출간한 권정생 전기는 일부러 광고할 여력이 없는 일인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 “출판사의 마케팅 지원 없이 책 내용의 힘 만으로 얼마나 나가는지 알고 싶다”는 설명이다. 그의 말처럼 이번 권

정생 전기의 판매 부수는 작가 스스로 기여했던 한국 전기 문학 독자층 이 어느 정도의 실체를 가졌는지 확인 할 수 있는 지표가 될 것이다.

물었다.

왜 전기를 쓰는가? 의미 있는 삶을 찾아내고 전하는 역활

간단한 소개만 들어도 가슴이 찡하고 뭉클해지는 아름다운 사람의 이

가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전기 작가의 임무는 무엇인가?

볍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문학 작가보다도 더 많은

왜 전기를 쓰는지 궁금했다. 소설과 수필을 쓰던 문인이 왜 전기 전문 작

“전기는 사회와 역사에 의미 있는 성취를 남긴 인물의 삶을 복원하 는 작업입니다. 한 인물을 통해 지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이 시대 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시야와 사고의 폭을 깊고 넓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전기는 대필 작가들이 쓴 경 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자연히 평가절하되었고 제대로 된 전기를 쓰는 작가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진정한 전기문학의 전통이 사라져 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기에 각 시 대,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을 정리하는 전기는 꼭 필요 합니다. 그동안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수화 김환기 등 문화 발전 에 공헌한 3인과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노력하고 약자에 대한 관심 을 불러일으킨 김수환 추기경의 전기를 쓴 이유입니다.” 곧 출간될 예정인 전기의 주인공 동화작가 권정생 역시 평생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어

야기다. 이런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작가의 마음이 결코 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함도 알 수 있다. 전기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는 문학적 역량뿐 아니라 역사적 통찰력 그리고 자료조사 능력을 갖

춰야 하며 역사와 주인공의 관계를 씨줄 날줄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 다. 그래야만 ‘주인공이 역사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여서 독자

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전기작가의 기본 덕목’을 갖추는 셈이다. 결국, 전기 작가는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사명이 있어야 하고

바로 그 이유로 전기 전문 작가가 많지 않다. 다른 분야보다 더 고되고

힘든 문인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 고된 길을 즐겁게 개척했고 그 길을 더 넓히고 있는 60대 문인 이충렬의 각오가 남다르다.

“대학을 다니다가 이민 와서 노동과 장사를 하던 문학청년이 이제 는 한국 전기 문학이 가야 할 길을 닦는데 작은 보탬이 되고 있다는 평가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앞 으로 다섯 권쯤 더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제 겨우 반을 왔을 뿐입니다.” 73


ART&CULTURE

영화 심리 이야기

투모로우 (The Day after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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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는?

구 북반구를 강타한 탓입니다. 또한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녹

남극의 라슨 빙상 (Larsen Ice Shelf)에서 탐사를 진행하던 중 빙

한 공업지역이 대기오염으로 인해 온난화가 유발되었다. 지구온

기후학자인 잭 홀박사는 동료인 프랭크 그리고 제이슨과 함께 하가 부서져 나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 후 뉴델리에서 열린 유

엔 국제회의에서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서 북극의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재앙이 찾 아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미 부통령인 레이몬드 베커

는 잭의 우려를 무시해버립니다. 얼마후 잭의 경고처럼 지구 북

반구에 강력한 폭풍이 형성되어 캐나다, 스코틀랜드 및 시베리

아 지역에는 초강력 폭풍이 몰아닥치지요. 거대한 허리케인 이 후 지구는 화씨 영하 150도로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신빙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한편, 잭 홀박사의 아들 샘은 친구들과 함께 뉴

욕 맨해튼에서 열리는 퀴즈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갑자기 뉴 욕에 엄청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푹풍에 의한 해면

상승으로 맨해튼 전체가 물에 잠기기 시작합니다. 가까스로 뉴 욕 공립 도서관에 피신한 샘은 잭과 엄마인 루시에게 연락을 취 하지요. 잭은 아들에게 도서관 안에 머물러 있으면 곧 구하러 가 겠다고 약속합니다. 도서관 밖을 나가면 금세 동사를 해 버리는

강력한 추위에 맞서 샘과 함께 피신한 생존자들은 도서관 책을 태우면서 겨우겨우 추위를 견뎌냅니다. 잭의 조언에 따라, 미국

대통령인 블레이크는 이미 늦어버린 북부지역 주민들은 포기하

을 수록 지구 해면은 점점 상승하게 되고 중국과 한반도를 비롯 난화는 인류의 근시안적인 탐욕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업가와 국가는 경제발전을 앞세워 온난화의 경고

를 무시한 채 경제성장 위주의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이에 편승

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지구온난화 연구가 과장되었다고 주

장하며 당장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석유와 석탄 채굴 에 열을 올리고 있지요. 양희은 씨의 ‘작은 연못’은 깊은 산 오솔 길 옆에 있는 연못에 이전에는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는 데 서로 싸워 한 마리가 죽고 결국 물이 썩어들어가 지금은 아무 것도 살지 않는 더러운 곳이 되었다는 노래입니다. 인간의 탐욕

과 이기심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재앙만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남극의 황제펭귄 무리는 새끼를 낳

고 서로의 몸을 밀착시켜 허들링을 하며 서로의 체온을 통해 극

심한 추위를 이겨나갑니다. 배려와 협동을 통해 상생을 만들어 가며 새끼를 지켜냅니다. 재난 영화인 투모로우가 보여주는 지 구 재앙이 얼마든지 인류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영화는 탐욕스

러운 인류의 미래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희망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 남부지역 주민들에게 멕시코로 피난할 것을 명령합니다. 잭

아버지의 역진

구하러 뉴욕까지 북진하게 되지요. 결국, 온갖 위험과 도전을 겪

로 피난하고 있을 때 거꾸로 필라델피아와 뉴저지를 거쳐 뉴욕

은 동료들과 함께 살인적인 추위를 뚫고 맨해튼에 갇힌 아들을

으면서 잭은 아들과 생존자들을 구하게 됩니다. 대통령은 잭의

경고를 무시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텔레비전을 통해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생존자들을 구하러 헬리콥터를 보내겠다고 약 속하지요. 구조단은 잭과 샘과 함께 있던 생존자들을 구하고 돌

아오는데 상공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모습은 꽁꽁 얼어있지만 처 절할 정도로 아름답고 청명합니다.

탐욕과 이기심의 인간 심리가 초래한 재앙

얼마 전 트럼프 미 대통령은 파리기후 협약을 공식 탈퇴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전임 오바마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16년 9월 협

약을 비준한 지 9개월 만에 공식 백지화시킨 것이지요. 그는 “파

리 협정이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역설하고 “나는 파리

가 아니라 피츠버그 시민의 대표가 되기 위해 선출된 대통령”이

라며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한 발언을 했습니다. 미국이 비준을 통해 약속한 이산화탄소 배출감소 계획이 피츠버그와 같은 공업

지역에 거주하는 트럼프 지지층들과 미국 경제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요. 세계 제2위 이산화

영화에서 아버지 잭 홀 박사는 모든 사람이 생존을 위해 남쪽으

으로 북진합니다. 뉴욕 도서관에서 생존자들과 함께 책을 태워 서 극심한 추위를 가까스로 버텨내고 있는 아들, 샘을 구하러 죽

음을 무릅쓴 도보 행진을 떠나게 된 것이지요. 잭의 행동은 인간

의 탐욕과 이기심과는 매우 상반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자동반사적으로 피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자연의 진리를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화재 현장에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 드는 아버지, 악어에 물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악어에게 달려

들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어머니, 장애아들을 구하기 위해 찻길에 뛰어든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식을 위

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 충동의

작용입니다. 자식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은 자율신경계의 작용이면서 동시에 고차원적인 인 간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과 비교해 인간이 더 위대한 게 아닐까요?

탄소 배출국인 미국의 탈퇴 선언으로 지구 온난화를 감소하려던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겨울,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지구 북반구 지역은 최강한파와 독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파리협정의 미래도 매우 불투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2017년 감으로 시달렸습니다. 북극의 차가운 대기를 막아주던 제트기류

고리가 지구 온난화로 인해 느슨하게 되면서 차가운 기류가 지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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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아기와 함께 고급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Nibble + Squeak 이벤트 아무리 얌전한 내 아이라고 해도 식당에서 편하게 식사를 하기엔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고 부담이 된다는 엄마들. 행여 우리 아이가 다른 손님의 식사를 방해하거나 식당 주인에게 맘충(엄마와 곤 충의 합성어)으로 찍히지나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모의 걱정을 일시에 해결해주는 회 사가 있다. 2016년 1월 뉴욕에서 시작된 Nibble + Squeak는 미국 내 대도시 유명 식당과 제휴하여 아이 있는 부모들만 가는 날을 잡고 일자, 시간, 메뉴, 가격을 Nibble + Squeak 홈페이지에 공지한 다. 이벤트 참여를 원하는 부모는 날짜를 예약하고 티켓을 산 뒤 편안하게 식당을 방문하면 된다. 글 76

편집부


“아이를 키우며 괴로웠던 일 중 하나

는 내가 좋아하는 식당에 맘대로 갈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가 울거 나 큰 소리로 떠들며 뛰어다닐까 봐 마

음을 졸여야 했죠. 그래서 ‘웰컴 키즈 존’ 식당을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Nibble + Squeak의 창업자인 Melissa Elders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회사 창업 이유이다. 전직 편집인

Melissa Elders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 가 자녀와 함께 식당에 가서 간단한 식 사를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닐 거란

생각을 했다. Nibble+ Squeak의 이벤 트는 참여 가족에게 즐겁고 기억에 남

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지

만, 이젠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한자리 에 모여 고충과 정보를 나누고 편한 시 간을 가질 수 있으며 사회 공간을 넓히 는 공익 이벤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Nibble + Squeak는 현재 뉴욕, 로스 앤젤레스, 필라델피아, 애틀랜타, 시애

틀, 오스틴, 시카고, 덴버, 휴스턴, 마이

애미, 샌프란시스코와 런던 레스토랑 40여 곳과 제휴를 맺고 있다. 이 회사 는 부모들이 가고 싶어도 아이 때문에 갈 수 없었던 유명 레스토랑과 제휴를 맺고 이벤트를 만들어준다. 유아와 어

린 자녀를 위한 메뉴에 아이들은 만족 해하고 부모들 역시, 유명 식당에 오고 싶어도 자주 오지 못하는 부모를 위해 유명 식당의 대표메뉴만 조금씩 제공

하는 메뉴에 만족도가 높다. 어린 자녀 를 위한 메뉴에 모두가 만족한다.

뉴욕 타임스 저널리스트로 이벤트에 참가한 마르고는 “서로 아이를 키

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아이가 울거나 소리 를 질러도 모두가 너그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이해했다.”라며 이벤 트 참가 소감을 적었다. 티켓 가격은 Nibble + Squeak 회사가 가져가 는 10% 정도의 수수료가 포함된, 평균 $80~$110으로 다소 비싸지만, 이벤트는 대기자가 몰리고 매번 매진일 정도로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3월 10일에 진행되는 뉴욕 이벤트는 $22 어린이 런치 메뉴부터

$298 디너 메뉴까지 모든 이벤트가 매진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제휴 식당 역시 참여 만족도가 높다. 레스토랑 입장에서는 이벤트를 마친 뒤

평가 사이트에 고객 평점을 후하게 주는 손님들로 인해 레스토랑에 대 한 평판을 높일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나누고 같은 생각 에 공감하며 스트레스 없는 식사를 함께 나누는 이벤트!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꼭 필요한 이벤트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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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단맛, 신맛, 쓴맛, 짠맛 그리고 감칠맛!

식욕 없는 봄철엔 ‘감칠맛’으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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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입맛엔 단맛, 신맛, 쓴맛, 짠맛만 있는 게 아 니다. 맛 중의 으뜸이랄 수 있는 감칠맛을 빼 놓을 수 없다. 음식물이 입에 확 당김을 표 현하는 이 맛은 1908년 동경제국대학 이케 다 기쿠나에 교수가 최초로 식별한 맛으로, 그는 이 맛을 umai(うまい: 감치다, 맛있다) 와 mi(味: 맛)를 조합해서 감칠맛(Umami) 으로 명명했다. 사실 ‘감칠맛’은 우리나라 옛 선조들이 음식이 특별히 맛이 있을 때 사용 됐던 언어로써 '입에 착 달라붙는 맛 있다'라 는 의미로 쓰여왔다. 단맛도, 매운맛도, 신맛 도, 쓴맛도 아니지만, 왠지 맛있는 맛, 이 맛 을 표현하는데 쓰던 언어가 ‘감칠맛’이었다.

모유를 통해 처음 느끼는 감칠맛!

이노신산(IMP)이 MSG와 5:5로 만나면 감칠맛이 원래보다 7배까지 증폭

는 오묘한 맛! 이 맛은 놀랍게도 모유를 통해 처음으로 느낀다고 한다.

이노신산, 구아닐산 성분이 우러난 맛'이라고 한다. 음식 잘한다는 식당

감칠맛은 맛있다는 표현만으로 부족하다. 뭔가 친근하고 입에 달라붙 태어나 처음 먹는 모유와 거의 비슷한 맛이 감칠맛이란 얘기다. 감칠맛 (우마미) 성분인 글루탐산은 모유 전체의 유리 아미노산 중 절반 이상

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모유에는 핵산계의 우마미 성분인 이노신산도

0.3mg/100mL 함유하고 있다. 모유를 먹는 아기는 태어나 처음으로 감칠맛(우마미)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감칠맛의 극대화 음식 궁합!

감칠맛을 내는 식재료는 어패류, 어류, 절인 고기, 채소(예: 버섯, 방울

토마토, 콩, 배추, 시금치, 샐러리 등) 또는 녹차 및 발효 숙성 제품(예: 치즈, 새우젓, 간장 등)이 있다. 나라마다 감칠맛을 위해 사용하는 재료

가 다른데 일본 맛국물의 경우는 고기 대신 어류나 채소를 주로 사용 해서 순수한 감칠맛이 난다. 맛국물의 경우 다시마와 가쯔오부시, 작은 마른 멸치를 사용한다. 반면에 서양이나 중국은 고기뼈와 채소의 아미 노산을 광범위하게 혼합해서 만들므로 다양한 맛이 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 감칠맛은 음식 궁합만 잘 맞춰주면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즉 감칠맛을 내는 재료는 한 가지를 쓸 때보다 다른 재료와 궁

합을 맞춰 같이 사용하면 양보다 감칠맛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바로 아 미노산계인 MSG와 핵산계인 IMP나 GMP가 만나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된다고 한다. 감칠맛을 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연 재료 속 글루탐산, 마다 특유의 국물맛을 낼 때 감칠맛의 주성분인 글루탐산에다가 구아닐 산 성분이 포함된 버섯을 빼놓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감칠맛 최강주자 콩!

모든 감칠맛의 비밀은 잘 우려낸 국물에 있다. 가마솥에서 우려낸 사골

국물엔 감칠맛이 더 살아나듯이 오래 가열할수록 감칠맛 성분은 많이 추출된다. 단백질이 분해되면 감칠맛 주성분인 글루탐산이 증가하지 만, 여기엔 한계가 있다. 감칠맛을 발견한 이케다 교수는 40kg의 다시

마에서 겨우 30g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음식을 오래 끓인다고 글루탐산이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효과적으로 단백질을 분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미생물에 있는 효소를 이용한 발효이

다. 치즈, 된장, 간장, 젓갈 등이 대표적인데 이 중에서 콩에는 단백질이 36.2%가 들어 있고 이중 글루탐산은 25%가 들어있다. 즉 콩 100g에는 9g의 글루탐산이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콩의 글루탐산은 거의

전부가 단백질로 결합한 상태라 콘 하나만으로는 감칠맛을 느끼기 어 렵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미생물로 분해하여 장류로 만들어 숙성

이나 발효과정을 거쳐야 단백질이 분해되어 감칠맛 성분은 증가한다. 입맛 없는 봄철이라지만 감칠맛 나는 구수한 냉이 된장찌개, 향긋한 봄 나물이 오른 식탁이면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오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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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숨겨둔 선물

캐나다산 슈퍼푸드 차가(Chaga)버섯 자작나무는 키가 크고 매끈하며 껍질이 희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날, 자작나무를 잘 관찰해보면 검은색의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표면에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차가 버섯이다. 이 독특한 모양의 버섯은 16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애용한 약 용 작물이다. 차가버섯만 먹었는데 암이 녹아서 없어졌다는 유튜브 영상이 수십 만의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차가 버섯 효능은 이제 모르는 이가 없다. 러시아에서 진행 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차가 버섯은 각종 궤양, 위장 장애 등을 비롯하여 난소 종양이 나 자궁 종양 등의 부인과 질환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차가 버섯이 주로 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위궤양이나 위암, 종양 등의 중병이 없다고 한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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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차가버섯 생산지 캐나다나 알래스카, 북유럽 숲에는 유난히 자작나무가 많다. 시커먼 혹 모양의 차가 버섯은 일종의 기생 포자 생물로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 작나무에 기생한다. 즉 자작나무가 살아있는 동안 차가 버섯 역시 생장 을 계속하며, 10년에서 20년까지 자라기도 한다. 차가 버섯 효능이 널 리 알려지자 수요가 부족할 정도인데 과거에는 러시아 산을 주로 사용 하였으나 유통과정의 문제로 인해 최근에는 캐나다산과 알래스카 산 이 주목을 받고 있다. 차가버섯 효능 차가버섯은 활성산소 제거와 면역력 강화가 가장 중요한 효능으로 꼽 힌다. 차가버섯의 핵심 유효성분의 집합체를 ‘크로모겐 콤플렉스’라 고 부르는데, 이것은 우리 몸에 이로운 항산화효소 (SOD), 플라보노이 드, 폴리페놀 그리고 각종 미네랄이 식품 안에 얼마나 들어있는지를 러 시아 학자들이 수치화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크로모겐 콤플렉스가 10% 이상인 것만을 차가버섯으로 인정한다고 한다. 특히 항암 능력을 높이는 항산화 효소 SOD(Superoxide dismutase)는 몸속에서 지속해 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일정량이 정해져 있는 만큼, 차가버섯과 같은 먹거리를 통해 꾸준히 섭취해 주어야 한다. 차가버섯 섭취요령 차가버섯을 덩어리 상태에서 차로 우려낼 때는 절대로 물을 끓이면 안 된 다. 이는 차가버섯에 들어있는 유효성분들이 열에 의해 쉽게 파괴가 되기 때문이다. 베타카로틴 성분 중에서도 버섯류에 들어있는 성분은 고열에 의 해 쉽게 깨지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끓는 물을 사용하면 효과를 보기 가 어렵다고 한다. 분말을 사용할 때는 약 60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에서 서 서히 우려 마셔야 한다. 이때에도 물은 반드시 끓였다가 식혀야 사용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끓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물에 들어있는 용존산소 등을 제거하고 각종 세균도 없애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차가버섯의 기타 효능 항암, 제암효과(특히 소화기계통 암에 유효) 활성 산소 제거 작용

당뇨병, 고혈압,알레르기 질환

아토피성 피부염 및 만성 신장질환의 예방과 개선

차가버섯 덩어리 복용 방법 1. ‌ 단단한 껍질 부분을 제거한다.

겉껍질은 약효를 떨어뜨리고 알레르기 반응이 있을 수 있다.

2. 깨끗이 씻는다.

3. ‌ 물을 끓인 뒤 식혀서 50-60℃가 되면 버섯 덩어리를 물에 담궈둔다.

4. 덩어리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4~5시간 기다린다. 5. 버섯을 건진 뒤 잘게 부셔서 믹서기에 간다. 6. 가루를 낸 버섯을 따뜻한 물에 섞는다.

7. 상온에 48시간 두었다 약 보자기로 짠다. 8. 찌꺼기는 버린다.

9. 냉장고에 보관하고 최대한 3~4일 안에 모두 먹는다. 10. 적은 양으로 자주 우려내서 마시는 게 좋다.

캐나다 원주민이 정성껏 채취한 차가버섯

CHAGA

Mushroom

미국내 구입문의 김진수 TEL : 201-232-5599 E-mail : jinsoo.kim@gitxmushroom.com

서울 연락처 ITK 신문식 TEL : +82 10-3748-1353 www.thechaga.com 81


LIFESTYLE

55세 이상 뉴욕 거주 노인이 받는 할인 혜택, 뭐가 있을까?

알아두면 유익한 시니어 할인 Tips! 글 82

편집부


55세 이상이 되면 쏠쏠한 혜택과 할인이 많아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 미 국. 나라에서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주기 때문에 마음먹기 따라서는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문화 혜택을 받으며 인생의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세계 최대 도시 뉴욕은 특별한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시니어 를 위한 할인 혜택과 장소도 다양하다.

교통비 반값 할인 혜택

미국은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할인 혜택 역시 다양하다. 식료품을 구입할 때나 식

당, 또는 여행 시에 받는 혜택 등 공공 기관은 물론이고 생활 모든 분야에 망라된 시니어 할인 혜택을 잘 찾아서 사용하면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노인 메트로카드

반액 할인은 메트로폴리탄교통공사(MTA)가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뉴욕시 대중교통 요금을 절반으로 할인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신청은 운전면허증이나 여

권 등 사진이 들어 있는 신분증만 있으면 OK! 한인들은 뉴욕한인봉사센터(KCS:

718.359.5400) 플러싱경로회관(718-886-8203) 에 문의하면 된다. 이곳에 정기적 으로 MTA가 방문을 하여 발급을 해주는데 한 번 발급받은 반액 카드는 2년간 사 용할 수 있으며 나중에 갱신도 가능하다. 재산세 감면 혜택

노인 주택 소유주 재산세 감면 프로그램(SCHE)은 65세 이상 주택 및 콘도미니엄, 코압, 아파트 소유주에게 재산세를 소득에 따라 최대 50%까지 감면해주는 프로그 램이다. 단, SCHE혜택을 받으려면 본인과 배우자의 연소득이 3만7399달러를 넘어

서는 안 된다. 매년 3월 15일까지 신청해야 하며, 회계연도 시작일인 같은해 7월 1 일부터 혜택이 주어진다. 뉴욕시의 시니어를 위한 재산세 감면 신청 마감은 매년 3

월15일로 나이 증명서류(운전면허증이나 여권)와 전년도(2016년 또는 2017년) 세 금보고서 등의 서류를 지정 오피스에 보내야 한다. 공공기관 시설 할인 혜택

동물원이나 박물관 등 주 정부나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 시설에는 30~35% 할인 혜택을 준다. 또 식료품을 구입할 때나 식당, 여행 시에 일정 금액 할인 혜택

이 있다. Amtrak은 62세 이상 시니어에겐 15% 까지 할인을 해준다. 보험회사인 Allstate Insurance는 운전 기록에 따라 최고 30% 할인을 해주고 AMC Theaters 역시 지역에 따라 55세 이상이면 30% 할인이다. AT&T 전화기 회사는 65세 이상에

겐 $29.99/month 상품을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은행 어카운트를 오픈할 때 많은 은행은 무료 체크를 제공한다. 또, Car Wash를 해도 할인을 해준다. 뉴욕 시립대인

존 제이 대학에 가면 노인들이 강의를 듣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있다. 대학에서

시니어에겐 무료나 다름없는 교육을 제공하는데 학비가 일반 학생에 비해 1/10수 준이다.

기타 생활에 필요한 용품 할인 혜택

체인 옷가게인 Banana Republic이나 Bealls에서는 50세 이상에겐 10%~20%까

지 할인을 해준다. 미국 노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아침식당 IHOP는 55세 이상에

겐 10% off, 서부의 인기 햄버거 가게인 Jack in the Box 는 55세 이상에겐 20% 할인율로 시니어를 맞이한다. Kentucky Fried Chicken은 55세 이상에게 무료

small drink를 제공한다. 이외에도 Applebee’s Restaurant은 55세 이상에겐 15% 를 할인 해준다. 하지만 같은 이름의 식당이라도 식당마다 디스카운트 조건이 다르 므로 음식을 오더하기전에 할인 혜택을 먼저 물어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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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제 책에서 작은 위안 한 줄이라도 발견하길 바랍니다." 민병임 칼럼집 <족발이든 감자든> 민병임 뉴욕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지난 20여 년간 발표한 칼럼을 모은 <족발이든 감자든>을 출간했다. 1980년 한국에서 잡지사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민 논설위원이 89년부터 현 재까지 30년간 뉴욕의 로컬 언론인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크고 작은 한인사회와 미국의 현 안을 보고 느낀 점, 이민자로서 체험한 생생한 기록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은 테러와 총기 참사, 난민 문제 등 시사성 칼럼 모음 ‘난민과 시민권’으로 시작된다. 꿋 꿋하게 이민 생활을 개척하는 한인들을 담아낸 ‘우리의 보금자리 플러싱’, 고향에 대한 향수 를 담담하게 그린 ‘뷰티풀 라이프’,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회와 음악회 등 뉴욕 문화현장을 누빈 생생한 경험과 감동을 그린 ‘황금 변기’ 등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욕 언론인으로서 시사와 문화에 관한 전문가적인 시각도 돋보이지만, 여성 독자들에게 더 깊게 다가오는 글 들은 두 딸을 키우는 워킹맘으로서의 진솔한 체험담인 ‘뒤로 걷는 엄마는’ 편일 수도 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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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한국의 잡지사 ‘여원’에서 8년간 기자로 일했던 민 위원은 1989년 남편

민 위원을 포함해 6명이 지난 1월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신춘서화

정착하지 못해서 이민 초창기 생활이 어려웠다. 그는 뉴욕에 온 후 두

게 시작한 아마추어 화가들의 실력으로는 놀라운 수준이다.

가족과 함께 뉴욕에 이민 왔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이민 생활에 달 만에 뉴욕한국일보사 건물 주소가 적힌 쪽지 한 장을 쥔 채, 이제 2

달력 초대전’을 열기도 했다. 전업 작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은퇴 후 늦

살이 된 딸아이 손을 잡고 플러싱 7번 전철역에서 전철을 탔다. 퀸즈보

<족발이든 감자든> 이란 소박한 제목과 소박한 표지처럼 이 책은 뉴욕

빌딩 하나가 서 있을 뿐 허허벌판이던 롱아일랜드시티에서 그는 전철

인 독자들에게 이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유명 작가의 칼럼

로 플라자 역에서 내렸을 때 이미 딸은 잠든 채였다. 당시는 시티뱅크 역 바로 앞에 있던 신문사를 찾지 못하고 아이를 업은 채 30분을 길을 헤매었다. 그렇게 찾아간 신문사에 무작정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그때 부터 30년을 같은 언론사에서 글을 쓰고 있다.

어린 두 아이의 엄마로 생활을 위해 뛰어든 언론사지만 그는 자신의 형 편을 핑계로 삼지 않고 기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민 3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에서 임종을 앞둔 친정아버지를 눕혀 놓 고 신년특집 취재를 나갔다. 몸이 너무 안 좋아 휴가와 병가를 쓰며 통

원치료를 하던 시절에도 집에 오면 링거를 맞아가며 다음날 넘길 원고 를 정리했다. 민 위원은 “사

로컬 언론인의 글을 모은 작은 책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한 집이나 소설보다 더 깊은 감명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저자 스스로가 자신의 글을 매주 읽었던 한인 독자들처럼 어렵고 외로운 이민자의 생 활을 해 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한인 기자라는 직종은 한국 과는 사뭇 다르다. 마치 독자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양, 지식과 영향

력에서 자신들은 일반 대중과 다르다는 식으로 독자들을 훈계하려 드 는 한국 대 언론사 논설위원들의 칼럼과 눈높이가 다르다. 광화문이 내

려다보이는 고층 언론사 빌딩의 높은 논설위원실이 아닌 허허벌판 공 장 지대인 롱아일랜드시티의 창고건물 사무실에서 쓰인, ‘낮은 위치’의 언론인이 쓴 글이기 때문에 그들의 칼럼들과는 겸손함과 삶을 바라보 는 태도가 다르다. 그래서

저자가 독자에게 바라는 것

는 일이 힘들고 서러워서

도 오직 “이민자 생활을 하

지쳐있으면 세 살 된 둘째

는 한인 독자들이 내 책에

딸이 다가와서 ‘5분만 안고

서 한 줄 위안이라도 발견

있어도 된다’며 선심을 썼

하길 바랄 뿐” 이다.

고, 딸의 따스하고 작은 몸

을 꼭 껴안고 있으면 마음 이 스르르 풀렸다”고 어려

운 시절을 회상한다. 이제 두 딸은 다 키워 내보냈지 만, 그의 바쁜 일과는 여전 히 계속되고 있다. 새벽 6시 알람 소리에 일어나 하루

10시간 노동을 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상을 차리고 출근

준비를 한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편집국에 와

서 불을 켜면 밤새 잠자고 있던 온갖 사물들이 화닥닥 깨어나는 순간” 이 노 기자에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민 위원의 칼럼은 지난 20여 년간 ‘여기자 벤치’, ‘27스트릿’, ‘민병임 칼 럼’, ‘살며 느끼며’로 소제목이 바뀌면서 계속되었다. 시사적인 내용, 자 녀교육, 삶에 대한 수상, 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매주 한 번씩 독자와 만

나면서 1천 편이 넘게 쌓였다. 그 칼럼들을 보면서 그는 ‘참 많은 말들

을 쏟아냈구나 싶어서’ 민망하기도 하지만 ‘뉴욕에서 보낸 30대, 40대,

50대의 생각의 흔적들을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책 한 권으로 묶었 다. 그리고 유난히 친분이 깊었던 버지니아의 사촌 오빠가 지난해 세상 을 뜬 일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의사였던 오빠는 시를 좋아해 작은 시집도 썼어요. 갑자기 죽고 나니

결국 남은 건 시집 한 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책 한 권 은 남기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과 그림에 재주가 있는 건 민 위원 가족들의 내력이기도 하다. 한국 에 사는 5명의 형제, 자매들은 모두 은퇴한 뒤 시와 그림을 시작했다.

새벽 4시면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나 일터로 뛰어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친 정이나 시댁 부모에게 갓 난아기를 떼어놓고 악착 스레 일해 모은 종잣돈으 로 네일 가게를 열고 세탁 소를 열고 델리를 열었다. 남의 것 탐내지 않고 그렇 게 정직하게 번 돈으로 아 메리칸 드림을 일구어 나갔다……. 이제 경제가 어려워서 아메리칸 드림이 퇴색하고 다들 80세까지 일한다고 한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 리도 없다고 한다. 직장 잃고 모기지 체납으로 집을 차압당하고 사 기까지 당해 홈리스가 된 한인의 사연이 들린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이란 그림이 있다. 하루의 힘든 노동을 끝내고 어두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가족들. 남루한 살림살이지만 석유 등불 아래 감자를 나눠주고 먹는 거칠고 투박한 손들. 이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한 손인가. 족발이든 감자든,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것은 숭고하다. 초가집이건 마구간이건 추 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하룻밤 잠자리는 눈물겹다. <족발이든 감자든> 중에서 민병임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잡지자 '여원' 기자 로 근무했다. 1989년에 도미, 뉴욕한국일보 입사 후 특집부장, 문화경제부장, 편집

위원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매주 칼럼을 싣고 있다. 미동부한인문인협회 신인 작품상 소설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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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빌딩 시리즈 2회

30 록 (30 Rock)이란 애칭으로 사랑받는 뉴욕 관광과 미디어의 상징 30 록펠러 플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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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록펠러 플라자는 미드타운 중심 5애비뉴와 6애비뉴 사 이에 구성된 19개의 대규모 록펠러 콤플렉스에서 가장 높 고 유명한 건물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크라이슬러 빌딩 과 함께 대표적인 아르데코 양식 건축물로 꼽히는 이 빌딩 은 아름다운 내·외관과 건물 꼭대기의 전망대로 늘 관광객 들이 붐비는 곳이며 특히 연말엔 대형 크리스마스 장식과 야외 스케이트장 개설로 ‘뉴욕의 겨울 성지’처럼 인식되고 있다. 건물의 외적인 매력과 특징 외에도 30 록펠러 플라 자는 탄생부터 미국 미디어의 중심이었고 현재도 NBC 방 송국을 배경으로 한 인기 시트콤 제목인 ‘30 록’이란 애칭 으로 불리며 뉴욕 미디어를 상징하는 빌딩의 위상을 잃지 않고 있다. 높이에서는 뉴욕에서 14번째지만 대중적인 인 지도와 인기 면에서는 단연 1위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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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역사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가장 인정받던 조각가 리 오스카 로리(Lee Oscar

부유한 인물’이었던 존 D. 록펠러의 아들 록펠러 주니어가 완성했다.

화려함과 모던함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리 오스카 로리는 정문 외에

록펠러 센터는 스탠다드 오일의 창설자로 20세기 초반 ‘세계에서 가장 48가와 51가 사이 22 에이커의 땅에 19개의 상업용 건물이 사방에 세 워져 각 건물의 저층은 하나의 건물로 연결되어 있다. 30 록펠러 플라

자는 이중 가장 높은 850 스퀘어피트(257미터) 70층이며 꼭대기에 ‘탑

Lawrie) 가 이 건물 정문에 작업한 ‘위즈덤(Wisdom)’ 역시 아르데코의 도 동서남북 4개 입구에 소리와 빛으로 명명된 작품을 남겼고 패트릭 성 당 맞은편 아틀라스 동상 역시 유명한 그의 아르데코 작업이다.

오브 더 록(Top of the Rock)’이라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한편 이 빌딩 로비도 뮤지엄을 연상시키는 대형 미술품의 전시장이다.

콜롬비아 대학이 소유했던 이 땅에 원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한 멕시코 작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 있었지만, 지나치게 선동적인

이 세워질 자리였지만 대공황과 비용 문제로 중단이 되었다. 땅을 임대 했던 록펠러 주니어는 이곳을 개발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결국 대규모

빌딩군 건설에 착수했다. 1930년 공사를 시작해 10년 만에 14개의 초

기 빌딩들이 완공되었다. (후에 6애비뉴를 중심으로 5개의 추가 빌딩

원래는 남미를 대표하는 예술가이며 프리다 칼로의 파트너로도 유명

사회주의 작품이라는 비난에 직면해 곧 철거되었고 대신 죠셉 서르트

의 벽화 ‘미국의 발전(American Progress)’ 이 현재까지 로비의 벽면을 웅장하게 장식하고 있다.

이 들어섰다.)

테넌트와 소유주

건물 공사를 지휘한 수석 건축가 레이몬드 후드는 당시 라디오 산업의

이다. 완공 직후에 35개의 스튜디오를 빌딩 내에 설치했고 1,400명의

선두 주자였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그리고 RCA가 설 립한 방송국 NBC와 협력해 서 미국 최초의 매스미디어

콤플렉스를 구성하는 계획 을 세웠다. RCA는 425만 달

러를 투자해 센터 내에 4개 의 극장을 짓고 모두 100만

스퀘어피트의 사무실 공간 을 임대하는 조건으로 회사

의 이름을 사용할 것을 요 구해서 30 록펠러 플라자

초기부터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입주자, 앵커 테넌트는 NBC 방송국

방청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스튜디오도 마련했다. 400명의 직원을 가진 록펠러 재단은 56층

전체를 사용해 이 층은 ‘룸 5600’이라고 불리기도 했 다. 재단은 2004년까지 54

층에서 56층까지를 사용했 다. 20세기 초 대표적인 미

국 기업 웨스팅하우스도 14

층에서 17층까지를 사용한 주요 테넌트였다.

는 약 50년 동안인 1988년

70층 꼭대기의 전망대

미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

Rock)’과 전망대와 동일한

까지 RCA 빌딩으로 불렸다. 공황으로 뉴욕도 극심한 침

체에 놓여있던 30년대 록펠 러 플라자 (그리고 조금 이

른 시기에 완공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단순한 고층건물을 넘어 미국의 꿈과 뉴욕의 대도약 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예술적인 측면

‘탑 오브 더 록(Top of the

풍경을 제공하는 65층의 고 급 레스토랑 ‘레인보우 룸’

도 빼놓을 수 없는 이 빌딩 의 명소다. 레인보우 룸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식당’ 의 명성으로 뉴욕 엘리트 계층의

사적인 모임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2009년 금융위기로 인한 경영난으 로 문을 닫았지만 2014년 다시 문을 열었다.

30 록을 포함해 20~30년대 지어진 뉴욕 건축물의 상당수는 당시를 풍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트린 사건이 1989년 벌어졌다. 미쓰비시가 록펠

시기와 장소 즉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미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미국의 미디어와 부동산을 사들이던 거품경제 시절, ‘재팬 머니’에 의

미했던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산물들이다. 아르데코는 서로 다른

결합한 양식으로 절제된 화려함과 모덤함으로 정의된다. 1차대전 직후 부터 파리에서 시작되어 약 20년간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아르테코 는 회화와 패션, 공예, 가구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눈에 띄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그 특유의 양식 미를 보여주는 대상은 역

러 센터를 2,200억엔으로 매입한 것이다. 80년대부터 일본 기업들이 한 해외 자산 매입의 상징적인 예였으며 이로 인한 반감으로 미국에서 일본 때리기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부동산 불황으로 막대한 적 자를 입고 미쓰비시는 대부분 빌딩을 다시 내놓았다.

시 건축물이다. 절충주의의 장식적 양식, 3차원 형태를 감싸는 매끄러

1995년 GE(제너럴 일랙트릭) 으로 소유주가 바뀐 이후 2015년까지

비싼 재료의 사용을 그 특성으로 볼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뉴욕에 처음

(comcast)가 NBC 유니버설을 인수한 이후 ‘컴캐스트 빌딩’이 되었다.

운 표면의 사용, 이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 반복되는 기하학적 주제, 값

와서 100년 전에 지어진 대표적인 빌딩들을 보고 그 형상과 디테일이 무척 인상 깊었다면 바로 아르데코 양식에 대한 감흥이었을 가망성이 큰 것이다. 88

이 빌딩은 ‘GE 빌딩’이 되었고 현재는 2015년 미디어 공룡인 컴캐스트 하지만 공식적인 이름이나 소유주와 상관없이 뉴요커와 세계인들에겐

‘NBC 방송국이 있는 건물’, ‘토요일밤의 라이브(SNL)와 투데이쇼가 진 행되는 곳’ 이 30 록펠러 플라자의 가장 익숙한 이미지다.


* 록펠러 패밀리

을 취하고 있는 ‘마천루에서의 점심’ 이다. 한가롭게 점심을 즐기는 이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록펠러 가족의 전체 재산은 미국에서 23

사실을 떠올리면 아찔한 광경이다. 매일같이 고층 빌딩이 들어서던

석유왕 존 D. 록펠러의 후손은 현재 270여 명이다. 포브스지에 따르면 번째로 많다. 그의 손자 세대까지는 체이스은행 총수, 포드 경영진, 주 지사 등을 역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후 세대들은 학자 와 건축가, 소설가, 마케터 등 ‘록펠러’라는 이름에 비해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막대한 패밀리 펀드의 운용을 논

의하기 위해 1년에 두 번씩 록펠러가 만든 현대미술관(MoMA) 컨퍼런

스룸에 후손들이 모인다. 특이한 사항은 록펠러 후손 중 일부가 엑손 모빌이 지구온난화 사실을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소송 중이라는 것이

들이 표정은 편안하지만, 철근 밑에 실제로 어떤 안전장치도 없다는

20~30년대 뉴욕의 건설 현장엔 오늘날과 같은 안전장치와 복장이 없 었다. 헬멧도 쓰지 않은 인부들은 올려만 보기에도 어지러운 수십층 높

이의 건설 현장에서 철근과 콘크리트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작업을

했다. 행인들에게 건설 노동자들의 모습은 큰 구경거리였고 기자들은 이들의 모습을 분주히 담았다. 록펠러 센터를 짓던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이 사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뉴욕의 풍경 사진으로 꼽힌다.

다. 엑손 모빌은 록펠러가 세운 스탠다드 오일의 후신이다.

* 시트콤 30록

* 마천루에서의 점심(Lunch Atop A Skyscraper)

서 방영한 시트콤으로 매 시즌 큰 인기를 얻었다. 연출 겸 여주인공 티

록펠러 센터의 역사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뉴욕시 건물의 옥상들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공

중에 매달린 철근 위에 10여 명의 사내들이 빼곡하게 붙어 앉아 휴식

<30 ROCK>은 티나 페이가 제작하여 2006년부터 2013년까지 NBC에 나 페이가 SNL에서 수석 작가로 일하면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각색했 다. NBC 방송국에서 코미디쇼를 만드는 배우, 작가, 방송국 간부 간에 생기는 다양한 사건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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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아름다운 미소 하얀 치아 나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치아미백 클리닉

시원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하얀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가지런하고 하 얀 치아로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면 대인관계에 많은 도움을 주므로 누구나 새하얀 치아를 갖고 싶어 한다. 본인에게는 자신감을, 보는 이에겐 기분 좋은 새하얀 미소를 만들어 주는 하얀 치아. 그러나 아이들의 유치가 하얀색인 것과는 달리, 성인 치아의 자연 색은 하얀색이 아니라 약간 누런 빛이 돈다. 이는 치아의 안쪽 면에 있는 상아 질의 색 자체가 약간 노란 빛을 띠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얀 치아를 가졌다고 해도 개인의 식습관에 따라 커피, 차, 담배, 와인 등 치아 변색을 초래하는 음식을 많 이 섭취할 경우, 변색 현상은 더 심해지거나 가속화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게 치아 미백시술이다. 치아미백클리닉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변색한 치아를 삭제하거나 손 상하지 않고 치아의 색을 희고 밝게 만드는 치과 치료 시술이다. 스케일링으로 해결 되지 않는 변색 부위에 안전성이 입증된 여러 치아 미백제와 특수광선 등을 이용하 여 여러 치아의 색을 원래의 색으로 회복시키거나 더 밝게 하는 방법인데 이러한 전 문 치과 시술 이외에도 다양한 치아 미백 방법을 알아보고 장단점에 대해 살펴보자. 정리 90

편집부


미백 치약

적절한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또한, 치아 클리닝 후 미백 치료

아 안까지 깊숙이 박혀있는 내부 얼룩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백

치과 심미 치료는 대략 1시간 정도면 가능하므로 ‘오늘’ 바로 결과를

미백 치약 속의 작은 입자들이 표면의 얼룩을 제거해 준다. 하지만 치 의 한계가 있다. 미백 치약은 미백 치료를 받은 후 미백의 효과를 유지 해 주는 역할 정도로 생각하면 좋다. 미백 린스

미백 린스에는 과산화 수소 성분이 들어있는데 한번 가글을 할 때 30 초에서 1분 정도 치아 표면에 미백 작용을 한다. 하지만 하루 당 작용

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실제로 미백 효과는 미미하다는 게 대부분의 연 구결과다.

미백젤 & 스트립

대부분의 경우, 과산화 수소 성분이 젤이나 스트립 타입 미백제에 들어 있다. 하루 3분에서 2시간 정도 치아 표면에 적용하여 약 2주 동안 지 속 사용할 경우 4개월 정도의 미백 효과를 유지 할수 있다. 장점은 가

를 받으면 표면에 쌓여 있는 치태가 제거되어 고른 미백이 가능하다.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미백 방법 중, 자신의 구강 상태에 따라 어떤 치아 미백이 적합한지 검진을 통해 먼저 확인해야 함을 기억하자. 가능한 치 아 미백 후의 부작용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좋다. 치과 치아 미백 시술 후 오래 유지하는 방법

정기적으로 치과 검진을 받고 스케일링해준다.

미백 치료 후 일주일까지는 커피, 콜라 등 착색이 쉬운 음식물을 피하 고 흡연자는 흡연을 금해야 한다.

미백 후 가벼운 touch-up 미백을 한 번 더 해주면 훨씬 더 하얀 치아를 유지하게 된다.

까운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있고 치료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 단점 으로는 각자 치아에 맞추 어 제작된 트레이가 아니기 때문에 미백제가 트레이 바깥으로 흘러 잇몸에 통증을 주거나 미백제가 닿지 않는 치아 표면은 얼룩져 보일 수 있다. 치과 미백 치료

치아 미백은 대체로 안전하다. 하지만 치아가 약한 환자의 경우, 구강

상태를 치과 의사와 상담을 한 후 어떤 강도의 미백 치료가 본인에게

글 Francis Oh, DDS, PhM, MS, MA

Comfort Dental Clinic (편안한 치과), 보철과 전문의 Columbia University, 보철과 교수

Comfort Dental Clinic (편안한 치과)

(201)585-8050 / njcomfortdentalclini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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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Photography by Doyoung Kim

조현례 수필집 ‘가난한 부자’ 중에서

미국 거지 정리 92

편집부


어떨 때 옷장에 들어가 보면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옷이 너무 많은 것 처럼 보인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되겠다.

절대로 옷은 사지 말아야지.” 그런데 어는 날엔 그런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건망증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마땅한 옷이 없을 줄이야!”

옷가게 가서 훑어보듯 빽빽하게 걸려 있는 옷들을 뒤적거려 본다. 한 심하기 짝이 없다. 빨리 나가야 할 경우 결국은 가장 손쉽게 늘 즐겨 입는 옷을 들쳐 입고 나가게 된다.

“엄마! 일 년 내내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엄마가 싫어하는 옷이니까 버 려요.”

옷걸이가 휘어질 듯한 걸 보며 큰딸이 벌써 몇 번째 뱉어 놓은 말이다.

그런데 왜 못 버리는 걸까? 아까워서? 미련이 있어서? 아니면 시큐리

티 블랭케트처럼 끈끈한 정이 있어서란 말인가. 나이가 들면 무엇이 든 버리지 못하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습성이 있어서일까?

한두 해 전쯤 되었을까? 뉴저지에 있는 양품점엘 갔을 때다. 꽤 유행 감각이 있어 보이는, 나보다는 5, 6년가량 젊은 여자가 주인이었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젊은 후배와 함께였다. 내가 명품 옷을 입지도 들

지도 않았는데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성질이 퍽 급해서였을 까? 나한테 어울릴만한 옷을 보여주며 권유도 해보지 않고 다짜고짜 로 “사모님 연세에 있는 분들도 돈이 있으셔도 1,000불 이상짜리 옷

은 덜컹 못 사시지요.” 하는 거였다. 장사를 할 건지 지레 안 살 거라고 점을 친 건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우리는 젊었을 때 전쟁을 치 른 세대가 아닙니까?” 하는 거였다.

하기야 내가 1,000불 이상짜리 비싼 옷을 입고 또 비싼 핸드백을 들고 다니면 동네 개도 웃을 것만 같다. 그런 눈에 뜨이는 고급 옷을 입으면 친구들을 만나도 나 자신이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친

구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눌 수 없지 않을까. 도대체 그런 값비싼 옷 을 사준다 해도 입고 갈 데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람들은 고작 결혼식이나 교회에 갈 때 가장 화려한 옷을 입는 것 같 다. 어떤 이는 장례식에 갈 때도 그 빛깔이 검은색이라는 이유 하나를 내세우며 감히 비싼 옷을 과시한다.

돈이 억수로 많은데 어쩌겠는가. 가령 남이 절대로 쫓아올 수는 없는

값비싼 옷을 입고 교회에 나타난다고 상상해보자. 교회는 성스러운

곳인 동시에 자유로운 곳이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이 온갖 부러움과 선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 시선이야 말로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런지.

한국에서는 지금 내가 떠나온 3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부유하 조현례

강원도 출생. 경기여중,고 졸업. 이화여대, 동 대학원 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여성생활, 소년한국일보 기자. 이화여대, 단국대 성균관대 강사 역임

수필집 ‘보이지 않는 유산’ ‘너와 내가 만나는 곳’ 저자

게 사는 것 같다. 슈퍼마켓에 반찬거리를 사러 가면서도 천여 불이 넘

는 옷차림이란다. 며칠 있으면 서울에 간다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

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한 뿐이다. 나는 또 진바지에 편한 잠 바를 입고 갈 판인데 ‘미국 거지’라고 흉을 봐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수

준에 맞는 편한 옷차림과 오래 신어서 길들 편한 신발에 족하고 좋은 데야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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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전문 음악인의 생활 속 음악 이야기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함께 나눈 콘서트 “예진아, 혹시 12월에 볼티모어에서 같이 연주할 수 있을까? 내가 뮤직 디렉터로 일하는 교회에서 너와 함께 연주하고 싶어.”

어느 날 갑자기 볼티모어에 사는 혜성이게서 연락이 왔다. 혜성이와 난 예원 예고와 서울대 동창인 단짝 친구이다. 피아노를 무척 사랑하

는 내 친구 혜성이의 제안에 난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떨어지는 나 뭇잎만 보아도 웃음을 참을 수 없던 우리의 꿈많던 학창 시절을 뒤로

하고 혜성이와 난 12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건너 고달픈 유학 생활을 마치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런 우리의 음악 안에서의 재회 – 함께 할 이 연주를 앞두고 나도 혜성이도 둘 다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콘서트 시간은 어떻게 돼?”

“인터미션 없이 한 시간 정도 하려고. 일단 오르간 소리가 웅장하니까

비탈리 샤콘느로 끝나면 어떨까? 예진아, 프로그램의 앞부분은 네가 짜주겠니? 사람들이 좋아할 곡으로.”

친구의 제안이 참 고맙고 기뻤다. 연주자가 연주곡을 고를 때의 두근거

림은 아마도 문학가가 큰 서점에 들어가 빼곡히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12월 9일로 잡힌 볼티모어에서 있을 콘서트를 앞두고도 11월 초에 이 미 예정되어 있던 오케스트라 오디션과 두 번의 독주회, 한 번의 오케 스트라 협연 그리고 강의 –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이 바빴다. 그

래도 짬을 내어 아이스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혜성이와의 콘서트를 위 한 연습 시간은 이상하리만큼 내게 평안함을 주었다. 다행히 혜성이가

연주 2주 전에 뉴욕으로 올 수가 있었다. 우린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새벽 1시까지 맨해튼 음대 연습실을 빌려 함께 곡을 연습하고 연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오길 잘했다. 함께 연주해보니 어떤 곡들인지 더 잘 알겠어. 연습 많이 해놓을게!”

“그래 혜성아, 나도 네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 같이 하니까 큰 도움이 된 다. 나도 더 연습할게!”

그렇게 어느덧 시간은 흘러 2주 뒤, 콘서트 하루 전날 아침 기차를 타고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처음으로 단짝 친구의 집을 방문하고, 친구의 남 편도 만나고, 친구와 2박 3일을 함께 하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래도 내 머릿속은 브람스와 비에냐프스키의 연주곡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을 마주할 때의 두근거림과 같을 것이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브람스

마침내 12월 9일 – 연주 날 아침이 밝았다. 첫눈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

스케르초, 그리고 바이올린의 현란한 테크닉을 화려하게 보여줄 수 있

를 들으러 올까 걱정도 되었지만 한 명이라도 찾아준 사람에게 최고의

소나타 1번과 분위기를 활기차게 해줄 수 있는 당차고 짧은 브람스의 는 10분 길이의 비에냐프스키의 폴로네이즈 2번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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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하염없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이런 눈길에 과연 몇 명이나 연주 연주를 최선을 다해서 전해주는 것만 생각하자 다짐했다.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인 설경이 커다란 유리 창문으로 내다보이

클래식 음악을 찾는 대중들이 줄어들면서, 그래서 연주자로서의 커리

눈길을 뚫고 온 예순 명이 조금 넘는 관객들과 함께 콘서트가 시작되었

그래도 나 같은 연주자를 앞으로 계속 정진시키는 원동력은 연주가의

는 아름다운 St. Martin’s-in-the-Field Episcopal Church에서 그렇게 다. 오직 청중이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음악 속 이야기가 그렇게 시

작된 것이다. 나의 귀는 피아노의 화성에 반응하고, 나의 팔과 손가락

들은 악보에 그려 있는 음표 하나하나와 일체가 되기 위해 움직인다. 노래나 오페라처럼 가사나 내용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음악 그 자체로 사람들의 마음에 아름다움을 넘어선 감동을 선사하는 건 부단한 노력 없이는 어렵다. 테크닉적으로 완벽한 연주가 아닐지라도 진실한 마음

이 음악에 담기기를, 나의 음악을 듣는 이 순간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쉼을 얻고, 추억을 오가고, 소망하게 되고, 또 치유를 받을 수 있기를 기 도하는 마음으로 연주했다.

어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 오늘의 현실이다. 재능과 노력을 높이 사주고 응원해주며, 음악의 사회문화적 가치를 알 아주는 볼티모어에서 만난 이런 분들이다. 이분들 덕분에 참으로 마음

이 따뜻해졌다. 아마도 이것이 몸이 고단하고 힘들고, 때로는 지쳐서, 편하고 여유로운 삶이 부럽다가도 내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는 이유일

게다. 하늘이 내게 준 선물 같은 재능을 갈고닦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때의 그 기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니 귓가에 그 날 볼티모어에서 연주하던 곡들이 혜성이의 피 아노 소리와 함께 맴돈다. 다시 한번 그분들을 뵈러 가야겠다.

그런 내 마음이 전달되었을까. 한 곡, 한 곡 모든 연주가 끝났고 청중들 은 기립 박수로 한참 동안 화답해 주었다. 정성스러운 음식과 음료수로 꾸며진 리셉션장에서 나를 보고는 다가와 고맙다고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분들과 마주할 땐 나도 모르게 함께 눈시울 이 붉어지며 목이 메어왔다.

“뉴욕 같은 대도시가 아니어서 이곳에 사는 분들은 클래식 음악에 많 이 목말라 있단다.”

혜성이가 살짝 옆에서 귀띔을 해준다.

글 한예진 ■ ‌ 2008년 미국 맨해튼 음대 ‘Lillian Fuchs’ 기념 실내악 콩쿠르 우승 ■ ‌ 2007년 이탈리아 ‘Citta di Brescia’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특별상 (Best Performance of Contemporary piece) ■ ‌ 2007년 ‘Five Towns Music and Art Foundation Young Musician’ 콩쿠르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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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하늘에 있는 호수

모홍크 산장

뉴욕 시내에서 87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1시간 반 정도 달려가면 동부의 스위스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뉴 팔츠( New Paltz )라는 도시를 만난다. 모홍크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이곳은 인디언 말로 Lake in the sky 라고 불리는 ‘모홍크’ 산 장이 있다. 목조건물로 지어진 모홍크 산장의 위용은 바라만 봐도 잠시 숨을 멈추 게 할 정도로 압권이다. 1,200피트의 호수와 사완건크산(Shawangunk Mountain) 의 우거진 나무숲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산장은 1986년 스마일리(Smiley)형제가 짓기 시작했다. 그 뒤 연방 정부로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서 주변을 둘러싼 2만4,000에이커가 국립 유적지(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되었다. 글 김향신 객원기자 정리

96

편집부


State park at New Paltz 연인들이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로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모홍크 산장은 총 7,500에이커에 305개의 객실이 갖춰져 있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리조트로 정평이 나 있는 이곳은 객실 예약자 외에는 차량 출입이 금지되어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급하고 셔틀 밴을 타거나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모홍크 마운틴 하우스는 호수 주변 산책길 외엔 개발을 하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닌 85마일 하

이킹 코스와 산책길이 특히 유명하다. 이외에도 테니스, 수영, 골프, 보트, 암벽등반, 마차 타기 외에 즐길거

리가 넘친다. 빌 클린턴 내외 등 미국 유명 인사들도 이곳에서 묵고 갔으며 역대 5명의 대통령이 휴가를 보 냈다는 기록만으로도 모홍크가 상류층 리조트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

이 리조트의 또 다른 매력은 테라스다. 여러곳에 이곳 주변전경을 즐길 수 있도록 곳곳에 테라스가 마련돼

있다. 캣츠 킬 산지(Catskill Mountains)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식당은 모홍크의 아름다운 전망을 더 가까이 즐길 수 있다. 주말에는 전망을 바라보며 고급 브런치를 먹거나 혹은 런치를 즐길 수 있다. 저녁은

맨 위층에 자리 잡은 본관 식당(Main Dining Room)에서 뷔페 혹은 정식 만찬을 먹을 수 있는데 특별히 해 물 요리가 뛰어난 레스토랑으로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탑 10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근처 또 다른 큰 볼거리는 모홍크 산장과 인접한 미네와스카 주립공원(Minnewaska State Park)이다. 이곳 에는 미네와스카 호수와 아워스팅(Awosting)호수가 있는데 어퍼 아워스틴 캐리지웨이를 따라가면 레인보 우 폭포가 나온다. 폭포 주변엔 해발 2,000피트. 소나무, 전나무 등이 그림 같은 호수와 어우러져 하늘을 향 해 뻗어있다. 또 호수 주위로 예쁜 산책로가 있다.

가장 짧은 산책로는 미네와스카 호수 주위를 돌아보는 비콘힐(오렌지) 코스로 1시간가량 걸린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이곳에서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까지 볼 수 있다. 산악자전거와 말을 위한 해밀턴 포인트 캐 리지 웨이는 미네와스카 호수에서 해밀턴 포인트 절벽을 끼고 도는 코스로 경관이 매우 수려하며 5시간 동

안 정도 소요되는데 중간에 돌아 나올 수 있다. 네이처 센터(Nature Center)에서는 이곳에 서식하는 부엉 이, 매, 뱀, 코요테 등 박제한 야생 동물을 살펴볼 수 있다. 모홍크 산장은 가족 친구들과 함께 하루 만에 다

녀오거나 근처 야영장이나 숙박시설을 예약해서 며칠 동안 묵으며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는 추억 쌓기에 최고의 여행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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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글 장수희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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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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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Hola! 아르헨티나 & 볼리비아 Photographed by George Jung

Patagonia 빙하 호수

Patagonia만년 설을 뿜는 산 피 츠로이(Fitzroy)

Patagonia만년설을 뿜는 산 피츠로이(Fitz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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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gentina


Bolivia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

ni)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Salar de U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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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정기구독 문의 TEL 201.397.2107 www.story-casa.com ID Tandb2017 @s.casa_usa @scasausa www.facebook.com/SCASAUSA

필진 & 번역가 & 객원 기자를 모십니다. 문의 TEL 201.560.7275 담당자 이메일 jenniferlee@scasa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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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억과 아름다운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되돌아보면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시련과 역경, 실패와 성공의 긴 여정 속에서 이별, 행복, 감동의 순간을 담아낸, 지나온 인생을 담은 회고록은 내가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오랜 경험의 집필자, 자서전 전문 작가와 실력 있는 최고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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