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카사 뉴욕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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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

에스·카사

Vol.18

The God-given gift of a great voice, Popera Castrato Sehun Jung COVER STORY 내년 카네기홀 콘서트를 준비하는 신이 허락한 목소리,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PEOPLE FOCUS 딸이 떠난 빈 자리를 노래로 채웁니다 소프라노 강미자 다시 부르는 내 노래

August

ART&CULTURE 세계적인 한지 작가 전광영 화백

LIFESTYLE Summer Fancy Food Show 2018

전설의 한인 성악가 베이스 김의진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

바다 속 풍경을 전하는 송연주 작가

공(工)돌이 오성근의 공(球)이야기

에스카사 미디어 후원 영화 “I am Eomma”

성공한 패션 사업 그 이유는?


뉴욕 스토리 에스카사와 만나요! 뉴욕 스토리 에스카사(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한인이 만든 미국 최초 문화예술 매거진 뉴욕 도서관에 비치된 매거진 ID Tandb2017 @s.casa_usa @scasausa www.facebook.com/SCASAUSA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가 전해주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패션, 라이프 스타일, 화제인물 focus, 교육, 육아, 요리, 여행, 건강정보 등을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기를 가득 담았습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틀, 애틀랜타, 사우스캐롤라이나, 달라스 지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구, 부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격 글로컬(Global + Local) 잡지입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입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에스카사 발행인 Jennifer Lee, Dr. Charles Changsoo Lee 외 에스카사 만드는 사람들 일동




CONTENTS

August 2018 Vol.18

12

24

Cover Story

Education

12

32

내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 콘서트 무대를 준비하는 신이 허락한 목소리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내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Prepares to hold his solo concert next year at‌ Carnegie Hall in New York City‌ The God-given gift of a great voice, Popera Castrato Sehun Jung

이달의 시 22

강익중 시와 그림

내가 아는 것 / 강익중

People Focus 24

딸이 떠난 빈 자리를 노래로 채웁니다

서울대 동문회 초청 음악회를 준비하는 소프라노 강미자

6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17)

사고의 추억

이달의 좋은 글 35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한번 뿐인 내 인생, 어떻게 살고 있나요?

문학평론가 이어령 박사

36

Viacom Media Networks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직장 생생 체험기(8)

42

미 경제전문 매거진 Fortune 선정

2018년도 글로벌 100대 기업 순위


뉴욕문화예술스토리 www.story-casa.com

<에스카사 멤버 가입 혜택>

• 에스카사 주최 ‘문화예술 행사’ 초대권 증정 • 에스카사 행사 시, 특별 지정석 배정 • 에스카사 기념품 증정

문의 TEL 201.397.2107

멤버쉽 신청서 (미국)

54

연회비 $100

Art & Culture

Please make the check payable to

46

T&B Publishing LLC and send to 2160 North Central Rd. Suite 203C Fort Lee, NJ 07024

블록체인의 미래

이병욱의 블록체인이 바꾸는 세상

49

뉴욕스토리 에스카사 후원 영화

나는 엄마입니다

별도 V 표시 해 주세요.

뉴욕 첼시 Sundaram Tagore Gallery초대전

이름 (NAME)

54

주소 (ADDRESS /APT)

연회비 $100

50

세계적인 한지 작가 전광영 화백

박정화가 만난 음악인 두번째 이야기

전설을 지닌 성악가 베이스 김의진

62

성공한 패션 사업 그 이유는?

IT와 패션 융합, 미래를 책임지다

64

온 몸으로 느낀 바다의 감각(Sense of Sea)을 그리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바다 속 풍경을 전하는 송연주 작가

우리 이웃 이야기 68

에스카사 새 코너, 새 필진 소개

미국 연방 에너지 규제 위원회 검사관 이상원 박사

CITY/STATE/ZIP

TEL

E-Mail

(PLEASE PRINT)


뉴욕문화예술스토리 www.story-casa.com

<에스카사 멤버 가입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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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TEL 010-7371-0999

멤버쉽 신청서 (한국) 연회비 10만원 연회비 10만원을 아래 계좌로 입금하시고 이름,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전화 문자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카카오뱅크 (예금주 : 이창수) 계좌번호 3333-01-2251051 별도 V 표시 해 주세요.

78

Life Style 72

전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미국 최대 음식 박람회

Summer Fancy Food Show 2018

76 연회비 100,000원

휘둘리는 인간관계 끝내기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기

78 이름 (NAME)

주소 (ADDRESS /APT)

(PLEASE PRINT)

공(工)돌이 오성근의 공(球)이야기

‘공돌이’의 야구장 가는 길 _ Angel Stadium & Dodger Stadium

82

제이미 변호사의 미국살이 경험 나누기

개인 재정(Personal Finances) 관리는 빠를 수록 좋다

84

피부에 뿌려 더 효과적인

‘천연 모기약 만들기’ CITY/STATE/ZIP

TEL

E-Mail

86

한여름에 즐기는 온천과 볼거리

뉴욕주 Saratoga Spring


96

문학관

100

Travel

88

96

김은자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

아를, 어둠속에 풀어낸 태양빛

90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박평일

92

뉴요커도 죽을 때까지 봐도 다 못 본다는 예술품 보물창고

100

세계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꼬블랑길

샌프란시스코 예쁜 볼거리 롬바드 스트리트

행운의 누명

A Dishonor

94

65세 노신부가 들려주는 아프리카 잠비아 이야기(2)

아프리카 잠비아 ‘피데이도눔’ 사제 김한기 신부

9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Publisher Jeniffer Lee(USA) Dr. Charles Changsoo Lee(KOREA)

Editor in Chief Youngjoo Lee ●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for each field.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Won Young Park, Juyoung Lee, Junghwa Park English Translation / Hyobin Lee, Taeriah Kim, JuWon Park, Katie Lee 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Dr. Sooyeon Lee-Garland, Dr. Samuel Lee, Sunggeun Oh, Hyunrye Cho, Hyohyun Hwang, Eunja Kim, Bill Park Legal Columnist / Minji Kim Science Columnist / Dr.Joon Kim, Dr.Byung Hee Hong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Dallas,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is the hub for cultural and artistical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 Creators of

10

Music & Arts Columnist /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Managing Director / Sarah Chung ●

Advertising Director / S.H. Chung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Lee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George Jung, Kibum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Jimyung Lee, Hyunmin Kwon, Bohyun Im, Joohee Han, Jinhyang Park,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ID Tandb2017 @s.casa_usa @scasausa www.facebook.com/SCASAUSA T&B PUBLISHING LLC. 2160 North Central Rd. Suite 203C Fort Lee, NJ 07024 scasa.usa@gmail.com 광고, 정기구독 문의 TEL 201.397.2107 Copyright © 2016 T&B PUBLISHING LLC. All Right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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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1B ‌ 아티스트 | 엔터테이너 비자 EB-1A 세계적 탁월한 능력보유자 영주권 NIW 과학기술자 고학력 영주권 Excellent Result! Proven Expertise! 성악가 기악가 재즈 | 현대음악가 뮤지컬 영화연극인 무용수 화가 조각가 큐레이터 신문방송기자 방송연예인 그래픽 | 패션 | 광고 | 인테리어 디자이너

(917) 972-0722 info@changcholaw.com Kakao : ChangLawFirm 16 West 32nd St., Suite 302, New York, NY 10001 11


COVER STORY

내년 뉴욕 카네기홀 단독 콘서트 무대를 준비하는‌

신이 허락한 목소리 팝페라 카스트라토 정세훈

“내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12


POPERA CASTRATO

SEHUN JUNG

대한민국 최초 팝페라 가수로 최정상에 섰던 팝페라 카스 트라토 정세훈. 그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마치 꿈을 꾼 듯 유명해졌고 연극과 같은 삶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아 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신이 허락한 그의 목소리 덕분이었 다. 팝페라는 '팝(pop)'과 '오페라(opera)'의 합성어로, 오페 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대중화한 오페라를 가리킨다. 정세훈은 기계음이 아닌 인간의 목소 리로 여성의 음성과 남성의 음성 모두를 완벽히 표현한다. 대중은 신비로운 그의 목소리에 넋을 잃었다. 정세훈을 찾 는 이가 점점 늘어나자 그는 자신을 돌아보거나 쉴 틈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걸은 듯 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 ‘뜻대로 하 세요’의 유명한 대사를 통해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다. 어 떤 이는 일생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정 세훈에게도 7막에 걸친 인생길을 가려면 속도 조절이 필 요하다는 신의 암시였을까? 한 번뿐인 인생은 내가 선택 한다지만, 어느 날 스타가 되었듯이 때로는 뜻하지 않게 마 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듯 무심하게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소중함이 더 빛나는 게 인생이다. 신은 멈출 줄 모 르는 정세훈에게 잠시 쉼을 허락했다. 물론 유명세를 치른 고통은 몸무게가 10킬로 이상이 빠져나갈 정도로 힘든 시 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 온 뒤 굳어진 땅처럼 그는 시련 과 고통을 겪은 뒤 더 단단해졌다. 작년에는 외국인으로서 는 처음으로 중국 상해사범대 음악대학 객원교수가 됐다. 내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도 가질 예정이다. 7월 중순, 예술의 전당 무대를 앞두고 뉴욕에서 바쁜 일정을 소 화하고 있는 그를 만나 지난 얘기를 나눠보았다. 글 Jennifer Lee 정리

편집부 13


제1막 오늘의 정세훈이 있기까지

남자가 내는 여성 음색으로 팝페라 열풍을 일으키신 게 쉽지 않은 일이셨을 듯합니다.

“소름이 돋았다.”, “환상적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 정세훈의 공 연 모습을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 2001년 12

“지금도 생소하지만, 제가 대학을 다닐 때도 카운터테너나 카스트

월 정세훈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역으로 데뷔하여 2004년 1집

라토라는 단어조차도 생소했거든요. 그나마 영화 ‘파리넬리’가 나와

정규앨범 Comfort, 2005년 크리스마스 앨범, 2008년 2집 정규앨범

서 ‘남자도 저런 목소리가 나는구나.’ 겨우 이해하는 정도였어요. 대

NeoClassic을 발매한 뒤, 대한민국에 팝페라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학교 때 합창 클래스 시간에 여성 단원들 목소리가 고음에서 못 나

오페라 아리아부터 뮤지컬, 대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아우

오면 제가 그냥 장난삼아서 냈는데 여자보다 더 높이 올라가면 선배

르는 음악적 역량을 지닌 정세훈을 언론에서는 한국의 ‘파리넬리’라

나 동료들이 우스갯말로 재수 없다고 했어요. 이렇듯 국내에서는 제

불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뒷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목소리가 인정을 못 받았지요. 그런데 토론토에 유학을 가서는 이 소리로 어디서든 노래를 불렀어요. 지하철도 예외는 아니었죠. 본래 ‘내가 노래를 잘하는구나!’ 착각하는 공간이 목욕탕이랑 지하철이 거든요. 소리가 울려서 들리고 노래를 못해도 잘하는 것처럼 들리잖 아요. 그래서 몰래 ‘아베마리아’나 ‘울게 하소서’를 부르면 캐나디안 이 막 달려와요. 그리고는 묻죠. ‘여기서 누가 노래한 거냐’고. 그러 면 전 천연덕스럽게 ‘아니 난 모른다’ 시침을 뗐어요. 만일 남자 목 소리였으면 ‘아 이 사람이었겠구나.’ 했겠지만 생긴 건 분명 남잔데, 나오는 건 여자 목소리니까 더는 안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 람이 가면 저 혼자 흥얼거리면서 또 노래하죠. 그럼 또 오고…. 결국 내가 부른 걸 알고 나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I don’t believe it!” 하더라고요. 제 목소리를 들으신 국내분과 외국 분이 받는 느낌 이 달라요. 국내분들은 카운터테너나 저의 목소리에 대해서 ‘신비롭 다’라거나 ‘신기하네’ 정도지만, 유럽이나 미국 같은 국외에서 노래 하면 신비롭기도 하지만, 동양 사람의 소리를 경이롭게 생각하는 이 점이 있더군요.”

정세훈은 노력하는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정확히 어떤 목 소리죠? “카스트라토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천 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신의 축복인 거죠. 저 같은 경 우는 가성이 아니라 진성에 의해 나오는 목소리 에요. 카운터테너(영어: countertenor)는 여자 음역인 콘트랄토나 메조소프라노 음역을 노래 하는 남자 성악가를 말합니다. 저는 여성 알토의 음역에 해당하는 부드러운 테너의 음성을 지닌 카운터테너만이 아닌, 여성의 목소리 도 내기 때문에 ‘팝페라 카스트라토’라는 명칭을 쓰고 있습니다.”

캐나다 유학 시절부터 꽃을 피운 목소리라고 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노래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까지 성악을 공부했어요. 유학을 다녀와서 최고의 성악가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3대째 기독 교 집안이어서 가스펠(gospel)을 공부하기로 맘먹고 캐나다로 갔어 요. 그런데 운명이 참 묘해요. 제가 토론토에 도착하자, 가스펠 학교 가 재정상 문제로 문을 닫은 겁니다. 캐나다에 계속 머물러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캐나 다 가요제’에 나갔어요. ‘꽃밭에서’를 불러서 대상을 받았죠. 그 일이 제 인생의 시발점이 된 겁니다. 같이 입상했던 친구 중 하나가 JK 김 동욱이었어요.” 14


제2막 최정상의 정세훈

집을 프로듀서 해서 소위 대박이 났습니다. 컴포트(Comfort)앨범은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으니까요. 드라마 OST부터 해서 클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 곡에 특별한 애정이 있으신 듯해요.

래식 차트 1위 크로스오버 팝페라 차트 1위. 1위란 1위는 다 쓸어 담 았으니 확실한 대박이죠. 2집 역시 과분하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습

“가요제 대상을 받고 나자 사람들한테 없는 걸 내가 가지고 있구나

니다. 2집 Neo Classic에 수록된 뮤지컬 넘버 "All I ask of you"에서

싶더군요. 그런데 계속 이 길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이 됐

라울과 크리스틴을 동시에 소화해 냈는데 고맙게도 아직도 세계적

어요. 대부분 클래식 하는 사람이 갖는 착각인데 자기 소리가 최고

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생각하죠. 어려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서인지 객관적으로 보질 못해요. 내 소리가 상대방에게도 정말 좋은지 객관 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거든요. 아무튼 지금 생각하면 무슨

대표곡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는 다른 분이 부른 걸 들어 도 정세훈이 연상됩니다.

용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울게 하소서’, ‘아베마리아’를 녹음해 서 서울대 음대 김인혜 교수님한테 보냈어요. ‘내가 이런 소리를 가

“뉴욕 2005년도에 카루소 재단으로부터 ‘세계를 위한 천사의 목소

졌는데 이쪽으로 계속 가야 할지 고민이 많으니 조언을 해주세요.’

리 상’을 받게 해준 곡이 ‘울게하소서’예요. 또 제가 카스트라토의

라는 편지도 넣었죠. 그런데 ‘특이하다.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답이

길을 걷게 해준 곡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있죠. 많은 분이 사랑

왔어요. 그때 마침 가요제 부상으로 받은 게 항공권이었어요. 망설

해 주시는 곡이기도 하고요. 이 곡 외에도 앨범에 들어있던 모든 노

일 이유가 없었죠. 간단히 짐을 챙기고 한국으로 가서 김인혜 교수

래가 다 애정이 가요. 그중에서도 ‘정세훈’ 하면 ‘아베마리아’나 ‘울

님을 만나고 레슨을 받았습니다. 지금이야 친하게 지내지만, 그때만

게 하소서’를 떠올리시는 분이 많으셔서 더 자주 부르게 됩니다. 팝

해도 무척 어려운 분이셨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고맙게도 ‘좋은 소

페라라는 장르가 말 그대로 팝과 오페라이기 때문에 클래식을 좋아

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내에는 카운터테너를 지도하실 선생님

하는 분과 아닌 분까지도 다 만족시켜야만, ‘진정한 팝페라’, ‘크로스

이 없으니 유학이나 바로 활동을 해라’고 하셨어요. 저는 내심 대학

오버’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요에다가 클래식 목소리만 얹는다고 팝

원을 편입해서 선생님께 배우면 어떨까 생각을 했었는데 선생님께

페라가 아닌 거죠. 철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지도할지, support를 해야 할지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트랙에 거는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던 중에 운이 좋게도 ‘오페라의 유령’

순간,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났다는 평가도 받았어요. 모든 게

Raoul 역인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어요.”

다 잘 맞아떨어져서 성공한 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세훈’ 인생의 절정기가 시작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얘 기를 더 해주시죠. “저에겐 운명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절 아껴주시는 모 교수님이 ‘너 는 남자 목소리도 좋으니까 라울 백작 오디션 한번 봐봐’ 하셨어요. 오디션을 봤는데 느낌이 좋더군요. 바로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되었 어요. 2001년 12월의 일입니다. 그 뒤부터 제 생활 패턴이 바뀌더군 요. 바로 서울 음반과 계약을 맺고, 앨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도 제 무모한 용기가 또 고개를 들었어요. 처음 나온 앨범이 맘에 안 들더 군요. 당시 내노라하는 작사, 작곡가가 만들어서 노래는 사실 듣기 좋았어요. 그런데 전 ‘이건 아니다. 이건 정세훈만 할 수 있는 게 아 니라 가요에다 아무 목소리만 얹어도 되는 거라서 팝페라가 아니다. 그러니 나한테 ‘프로듀서 권한을 주던지 날 놓아달라’고 얘기했어 요. 지금 생각하면 건방을 떤 거죠. 지금은 오페라도 공연이나 뮤지 컬 공연도 많지만, 당시는 활발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나라 대형 뮤 지컬의 시발점이 되었던 게 오페라의 유령이에요. 그 공연이 6개월 동안 대박이 나고 흥행을 하고 뮤지컬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라서 부 린 호기라고 할까요?”

대박을 터트린 1집 Comfort, 2집 Neo Classic 앨범 얘기 좀 들 려주시죠. “서울 음반에서 쿨하게 내보내 주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음반입 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래서 제 음악을 좋아했던 분이 1 15


제3막 힘든 시기를 지나면서 …..

않고 제 길을 가도록 도와주셨죠. 또 팬클럽 ’꿈꾸는 섬’ 카페 분들의 응원은 큰 위로가 됐어요. 계약 때문에 일본에서만 공연할 수밖에

오후에 있을 뉴욕 공연 리허설로 바쁜 와중에 잠시 전화로 이뤄진

없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보통 때 73kg이던 몸무게가 63kg

인터뷰는 얼굴을 대하며 진행하는 것보다 더 진솔했다. ‘예술의 전

까지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젤 힘들 때 팬들이 일본까지 와서 맨 앞

당’ 공연에 맞춰 다음 날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몸과 마음이 바쁜 그

에 앉아 응원해주고 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음악을 포기하지 말

였지만, 최선을 다해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휴대전화 너머의

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기 살기로 했죠. 입에 단내가 날

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그러나 무대에 대한 열정만큼, 상

정도로 노력했어요. 다시 바닥부터 간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보니

대에 대한 배려심은 차고 넘쳤다. 부모님에게 배운 타고난 겸손이었

좋은 일이 하나둘씩 생기더라고요.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이

다. ‘언론에 나왔다고 다 진실은 아니다’라는 전제로 그가 겪었던 ‘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사

난 사건’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는 거죠.”

다 잃었다고 생각했던 시 간도 이젠 다 지난 일이 되 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하 셨는지….

제4막 끝나지 않은 그의 인생, 새 막이 열리다 영영 다시는 노래를 못 할 줄 알았다는 정세훈. 그가 다시

“그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일어나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서 세상을 떠나고 싶더군요.

으로 중국 상해 사범대 즉 우

좋지 않은 일로 언론에 오르

리나라의 국립대 음대 초빙

내리는 건, 일반인이 겪는 것

교수 격인 객좌교수가 되었

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공인

다. 외국인이 국립대 초빙교

으로서 받아야 하는 고통과

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시진

시선은 상상 이상으로 더 크

핑 주석의 부인인 가수 펑리

거든요. 그 고통은 이루 말로

위안 여사와 정세훈 둘 뿐이

다 표현할 수가 없었어요. 어

라고 한다.

머니가 아니었으면 벌써 전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 릅니다. 대인 기피증과 우울 증으로 너무너무 힘들었습

외국인 최초 중국 국립대 음대 객좌교수가 되셨습 니다. 과정을 듣고 싶군요.

니다. 가장 최고의 자리에 올 라있었을 때 모든 걸 다 잃었

“중국에는 경극이라는 전통

다는 상실감은…… (그의 말

공연이 있어요. 중국인들이

소리는 자주 끊어지고…. 생

무척 좋아하죠. 경극 배우들

각에 젖는 게 느껴졌다. 공연

이 내는 소리가 고음이거든

한 질문을 했구나 싶었다.)정

요. 새소리처럼 내는 러시아

말…… 모든 걸 다 잃었죠. 어

가수가 중국에서 그 음성으

찌하건 일어서 보려고 저 자

로 이미 성공을 했어요. 그런

신을 다독였어요. 그러나 일어서려고 하면 할수록 세상은 절 고꾸라

데 노래가 아니고 괴성에 가까우니까 노래를 하는 저를 필요로 한

지게 만들더군요. 출연 요청을 받은 프로에서 세 번씩이나 거절당하

겁니다. 중국이 시대적 변화에 맞춰 경극을 현대화하는 중에 적합한

고 …. 음악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

사람을 찾은 거죠. 제가 경극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소문이 나서

간, 이 모든 고통은 제가 지고 갈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

중국 북경과 상해 대학 두 군데서 연락이 왔어요. 시대가 변했어요.

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마음먹으니 그때부터 편해졌어요. 당시 새

예전엔 교수가 되려면 박사를 취득해야 하고 어렵게 되는데 카스트

앨범 ‘네오 클래식’이 발매됐지만, 한국 활동을 다 접고 프랑스·일본

라토의 목소리를 가졌기 때문에 스카우트했다고 학교 측에서 얘기

등에서 공연을 하면서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세계를 다니다 보니 국

하더군요. 고음을 내는 남성이 장르를 어떻게 크로스오버 할 수 있

내 기사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게 되더군요.”

는지, 어떻게 대중화할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면 좋겠다 고 하더라고요. 저는 교수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개인

어머니 그리고 내 노래를 사랑하는 팬클럽 ‘꿈꾸는 섬’

적으로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연락이 왔을 때 대신 조건 을 맞춰달라고 했어요. 학교 측에서 학교에 상주하거나 한 달에 몇

“어머니는 지금의 저를 있게 하신 분입니다.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16

번씩 갈 수는 없다는 제 요구를 다 들어주더군요.”


인간미가 넘치고 사람 좋아하는 정세훈 곁에 는 유독 친구가 많다 “팝페라도 클래식컬한 공연이니 지루해요. 그래서 늘 노력하죠. 부드러움 속에 때로는 날카롭고 카랑 카랑한 고음으로 감동을 선사하고 싶어요. 신이 저에게 특별히 허 락하신 음성으로 위로를 드리고 상처받은 영혼엔 치유의 경험도 드리고 싶거든요. 전 제 공연에 오시는 분들에게 전율이 오는 감동 도 감동이지만, 웃음도 드리고 싶어요. 가끔 감동보다는 웃음으로 관객을 쓰러뜨리기도 하죠. 이런 저를 친구나 지인들은 개그맨이 라고 해요. 이런 철부지 행동 때문인지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좀 많 은 편입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나 꿈은 무엇입니까? “정말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한 일 년 동안만이라도 세계 곳곳에 소외되고 문화적인 생활을 접하기 어렵고 생활이 힘든 사람 들이 있는 곳에 찾아다니면서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제 음악 으로 그분들에게 힐링을 드리고 싶어요. 저 역시 같이 위로를 받는 거죠. 그런데 이건 저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마음이 모여야죠. 예를 들어서 뜻이 맞는 분 중에서 캠

두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곡으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핑카를 후원해주시거나 음향장비를 후원해주시면, 미국이나 유럽,

노래 하나로 국위 선양을 톡톡히 한 셈이다. 우리나라엔 세계 최초

그 어디든 제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곳을 찾아가서 맘껏 노래를 부

로 '팝페라’라는 신조어를 만든 ‘키메라’가 있다. 키메라 덕분에 '팝

르는 겁니다. 에스카사 독자분 중에도 저와 뜻을 같이하는 분이 계

페라' 장르의 종주국이 된 대한민국엔 팝페라를 국내에 크게 유행시

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키고 정착시킨 ‘정세훈’이 있다. 정세훈은 영화 ‘파리넬리’에서 여성 목소리 대신 사용한 기계음이 아닌, 그의 목소리만으로 여성과 남성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정세훈’ 인생 무대가 보여줄 새로 운 5막을 기다리며…..

목소리를 완벽하게 낼 수 있다. 현재까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 의 허락을 받은 재능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의 반도 다 보여주 지 못했다. 정세훈은 내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질

안드레아 보첼리 이탈리아의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는 시각장애인

예정이다. 국내보다는 국외 팬들이 더 인정하고 열광하는 카스트라

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

토 팝페라 가수 정세훈! 그가 세계무대 정상을 향해 더 달려야 할 이

다. 사라 브라이트 만과 듀엣으로 부른, 'Time to Say Goodbye'는 모

유이다. 17


Prepares to hold his solo concert next year at‌ Carnegie Hall in New York City

The God-given gift of a great voice, Popera Castrato Sehun Jung

South Korea’s first Popera singer, also known as Popera Castrato Sehun Jung, immediately became popular when he made his debut. It was as if he woke up one day and suddenly became famous overnight, all thanks to his God-given gift of a great voice that no one else could imitate. Popera is a word that combines ‘pop’ and ‘opera,’ which refers to opera meeting pop music or opera and pop crossover. Sehun Jung is truly one of a kind—there is no one like him. Other than machine sounds, Sehun Jung is the only one who uses his voice to perfectly express both male and female voices. The public was fascinated by his mysterious voice. When the number of people who wanted to listen to Sehun Jung steadily rose, he had no time to rest or reflect on himself. Instead, he kept going without looking back. Last year, for the first time as a foreigner, he became the Visiting Professor of Music at Shanghai Normal University. Next year, he is planning to hold his solo concert at Carnegie Hall. In mid-July, a busy day for Sehun Jung before his performance at Seoul Arts Center, S.CASA interviewed him to talk about his past days and share some interesting life stories with our re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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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I: How did Sehun Jung become who he is today? “Fascinating.” “Wonderful.” “The power to move one’s soul.” People who have watched Sehun Jung’s performances react the same way. In December of 2001, Sehun Jung made his debut as ‘Raoul’ from The Phantom of the Opera. In 2004, he released his first official album ‘Comfort,’ and in 2005, ‘The Memory of Christmas.’ In 2008, he released his second album ‘NeoClassic,’ which started the ‘Popera fever’ in South Korea. His musical competence allows him to cover a wide range of genres from Opera to Musical, and even popular music. Sehun Jung is also known as South Korea’s ‘Farinelli.’ What made Sehun Jung who he is today?

Reaching a female high tone as a man "During my college days when I would practice singing with a much higher pitch than an average woman, my colleagues would often laugh at me. But after I moved to Toronto to study abroad, I started to sing freely anywhere I’d go. There is a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the reactions from Koreans and non-Koreans - those from my native country only refer to my voice as being “mysterious” or “interesting”, while those from Europe or America not only complement my voice as being mysterious, but appreciate a certain Asian tone in my singing voice.”

Is Jung Sehun a hard-working castrato or a countertenor? "I do not think that castratos can attain their talents solely through hard work - their talents are almost like God-given blessings in nature. For singers like me, the voice comes out naturally, not by straining falsity. Countertenor is a male vocalist who sings the female transliteration of the contralto or mezzo-soprano transliteration. I am going by the name 'Popera Castrato' because I’m not only a countertenor with the voice of a soft that corresponds to the female alto's range, but also can produce a woman's voice.”

The peak of his career began while studying abroad in Canada "I started singing since elementary school and studied vocal music until college. Growing up in a third generation Christian family, I naturally decided to study gospel and moved to Toronto to continue my studies there. But I was only left with staggering shock when I arrived in Toronto, when I found out that the Gospel School closed for financial reasons. Nonetheless, I was at crossroads in deciding whether I had to stay in Canada or just simply go back to Korea - but coincidentally, Korea Daily was hosting a 'Canadian Song Festival’ during that time, where I won 1st place. That exact moment is the milestone that marks the the starting point in m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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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II: Jung Sehun at the top

At the peak of his life, “The Phantom of the Opera”

It seems as though you have a special place in your heart for both ‘I cry’ and 'Avemaria'.

"It is like a work of fate for me. I had the audition and couldn’t shake off the good feeling afterewards. And shortly after, I was cast as the main character - I specifically remember that day in December

"As soon as I won first place, I realized that I have an extraordinary

2001. Nowadays opera has become more popular and culturally

talent that not many people have. But I was conflicted as to whether

rampant, but it was not quite active during that time. It can be said

I should continue this path or not - then I submitted a recording

that “Phantom of the Opera” has become the advent of the large

of ‘I cry’ and ‘Avemaria’ to professor Kim Inhye of Seoul National

musical movement that started in Korea - when the show was a

University. I wrote a letter saying, 'I have a voice like this but I have

box office hit during the six months of its run, more operas started

a lot of anxieties about going to this field, so please advise me.' Then

to seamlessly start their productions.

she replied back saying that I have an interesting story, and that she wants to meet me. Fortunately, I had a spare plane ticket that

My mother and my fan club 'Dream Island'

I received through an injury compensation, so I had no hesitation to stop me from flying to Korea and meeting Professor Kim. After

"My mother is the only one who has made me into a person I am

receiving lessons, I finally was cast as the main character Raoul of

today. She unconditionally helped me to never give up and pursue

“The Phantom of the Opera”.

this path. Also, my fan club ‘Dream Island’ came all the way to Japan to support me by sitting at front row seats and cheering me on. I wake up each day, telling myself, “today is the turning point of my life.” Everyday I try to live each day to its full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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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IV: Life still goes on, while opening a new chapter He became the first foreigner to become a guest professor at the Shanghai Normal University, a National University of Music in China. It is said that only foreign singer Feng Li Yuan, who is the wife of the president of Xi Jinping, and Sehun Jung have both climbed to the position of being visiting professors at the University.

First foreigner to become a professor of music in a National University in China "There is a traditional performance called Peking opera in China. China has modernized its choreography to match the contemporary times. The fact that I was able to produce a voice that most fits the Peking Opera, was enough for me to get a call from two universities in Beijing and Shanghai and get asked to teach students how to make a high-pitched voice as a man while still popularizing the genre.

Any new projects you would like to be involved in future? "There is actually something

A story yet to be finished, waiting for Act V of his life

I really want to do. I want to spread my music to those around the world whose struggling lives are marginalized and cut off from culture and music - I want to

In Korea, there is Kimera, who first coined the term ‘Popera’. Thanks

give them a ‘healing’ through my music. But knowing that this

to Kimera, Sehun Jung was able to build his popularity in Korea on

is not possible on my own, I think we must all gather together to

the basis of its existence. But he still has yet to showcase even half of

make the world a beautiful place to live. It would be great if there

his talents to the public - popera castrato Jung Sehun, recognized

was someone reading

more globally by fans all around the world, will hold a solo concert

intentions.”

who also shared my beliefs and

at Carnegie Hall in NYC next year! These are just more reasons for him to continuously run towards the world stage. 21


강익중 시와 그림

내가 아는 것 詩 - 강익중

아이들이 행복해야 살기 좋은 나라다 맨몸운동의 꽃은 턱걸이 자전거 탈 때 오른쪽 바짓단을 고무줄로 묶는다 텃밭 상추에 식초 탄 물을 뿌리면 벌레가 사라진다 버스 뒤에 앉아 책을 보면 꼭 멀미 난다 밥 태우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 안 된다 간짜장과 짜장의 가장 큰 차이는 가격이다 결심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얼굴이 작은 사람은 어느 모자나 잘 어울린다 중국식당에선 차를 다 마시고 주전자 뚜껑을 열어놓는다 광어와 가자미는 눈의 위치를 보고 구별한다 나는 새도 내릴 때를 안다 마음은 몸을 몸은 세상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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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for Floating Dreams in the Han River, 2017

강익중

1960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뉴욕 프랫 아트인스티튜트 졸업. 백남준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로 꼽히고 있는 설치미술가. 1997년 베 네치아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특별상을 수상,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청사 메 인홀의 벽화와 뉴욕 지하철역의 환경조형물 등을 제작하였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MOCA)과 휘트니 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뉴욕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한글 작품을 제작해 전 세계 각지에 전시하거나 기증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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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ocus

참척(慘慽)의 슬픔을 음악으로 달래며 “딸이 떠난 빈 자리를 노래로 채웁니다”

서울대 동문회 초청 음악회를 준비하는‌ 소프라노 강미자 엄마와 매일 전화로 긴 시간 수다를 떨며 ‘이젠 나도 아이를 낳고 싶다’고 조잘대던 딸이 다 음 날, ‘숨이 멈췄다’는 전화 통보를 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어 이없는, 허망한 어미의 심정을 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세상 그 어떤 말로도 자식 을 먼저 보낸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소프라노 강미자 씨는 딸을 잃은 참척(慘慽)의 슬픔을 자신의 음악으로 달랬다고 했다. 지금도 그녀는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피 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 딸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슬픔이 깊어질 수록 그녀는 세상에 그녀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고 싶었다. 딸이 살아 숨 쉬던 공간, 한국으로 날아가 예술의 전당 무 대에 섰다. 가슴 한편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딸을 보고픈 그리움은 더 깊어갔다. 유품이라도 있으면 허전함이 덜 하련만 딸은 엄마가 사준 옷 몇 가지와 일기처럼 적은 글 외에 세상에 남긴 물건이 없었다. 결국 그 메모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딸의 이름을 넣은 ‘양주희 에세이’는 첫 장만 넘겨도 “이 새벽 다 읽고 울고 또 울었다.”는 딸의 방송 선 배 박찬숙 씨의 표현대로 강미자 씨의 애통한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운 딸은 이제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기자가 책 얘기를 꺼내자 그녀의 말이 길어진다. 마치 딸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을 일시에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지난 얘기를 끝도 없이 들려주었다. 진행 Won Young Park 글 Jennifer Lee 정리 24

편집부


profile 강미자 Mi-ja Kang, soprano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음대 졸업 1980 Oren Brown(Juilliard 교수) 과 Tony Hartman Management 초청으로 도미 Juilliard음대 및 전문연주과정 졸업(재학시 오페라 ‘라보엠’에서 미미 역 출연) 독창회 뉴욕: Carnegie Recital Hall, Merkin Concert Hal, Lincoln Center Alice Tully Hall 베를린: KonzertHaus 워싱톤D.C.,: Providence, New Orleans, 캐나다: Vancouver, Ottawa LA: Zipper Hall 서울: 예술의전당 Concert Hall, 호암아트홀, LG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울산: KBS홀, 마산 MBC홀 등에서 30여회 오케스트라 협연 펜실바니아 Scranton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 모스코바, 헝가리Budapest, Savaria오케스트라 체코Budweiser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Colin Davis)와 CD 녹음 독일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오케스트라(지휘 Martin Fischer-Dieskau) 와 CD 녹음 오페라 출연 뉴저지 “Opera at Flohram”(오페라단)에서 ‘Turandot’ Liu역 88 올림픽기념오페라 초청공연(국제오페라단) ‘라보엠’에서 미미 역 LA 88올림픽기념음악회초청연주(Music Center) 88 올림픽축제 1월 1일뉴욕 Central Park에서 백남준과 함께 TV 출연 국내 TV, 가곡의 밤, 해외순회공연 최다 출연 수상: American Opera Audition 최종입상(1986), 한국방송대상수상(1992) 성악부분 음반: 강미자 애창곡 독집 제1집~제4집, 강미자 성가곡집, 강미자 명곡 선집 경력: 서울예고 강사, 뉴욕신학대학 종교음악과 강사, 경남대 교수, UCLA 방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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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칸타빌레’ 배토벤 ‘비창’ 소나타 제2악장 강미자 소프라노, 강우성 Piano 예술의 전당 2017. 6. 6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명문여중에 입학하다

도 상동 중학교에 갈 수밖엔 없었어요. 그때 담임 선생님이 너는 정 말 그냥 여기 있긴 아까운 학생이라며 자신의 돈으로 옷이며 차비까

대한민국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로 이름을 떨치던 강미자는 평양에

지 마련해서 이화여중을 보내주더군요. 당시에 혼자서 트럭을 타고

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7살이었던 그녀는 1.4 후퇴 때 부모님을

기차를 갈아타고 혼자서 서울에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따라 피난 열차 지붕 위에 올라탄 채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잠시만 머무르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지만, 강원도 영월

이화여중 입학시험 때 노래를 불렀다. 이화여중은 당시 KBS 어린이

의 상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25세에 결혼할 때까지 강미자의

합창단을 비롯한 어려서부터 음악 실기를 익힌 부잣집 자녀가 많이

삶을 규정하는 단어가 있다면 ‘가난’이다. 피난 전엔 대지주의 딸로

입학하는 학교였다. 그는 노래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대부분 피난민 생활이 그러했듯이 학

화여중 음악 교사는 내로라하는 한국 클래식의 거물들이었다. 특히

창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국

임원식 전 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는 “어린아이가 저렇게 혼이

사회 극빈층 자녀의 성공처럼 그녀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담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놀랍다”며 칭찬했다. 이처럼 어린 강미자

어려움을 극복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대로 강미자도 영민

의 재능을 간파한 교사들과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회자 자녀들을 위

함 하나로 부모의 재정적 지원 한 푼 없이 강원도 산골을 벗어났다.

해 설립된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후 음악인으로서 엘리트 코스인 서울예고와 서울음대 성악과까지 마치게 된다. 그러

“저는 뭐든지 잘하는 똘똘한 아이였어요. 공부도 노래도 잘하고 그림

나 어이없게도 졸업 후 성악가의 길을 접고 바로 결혼해버린다. 이

도 잘 그리고, 학교에서 일등상은 늘 제 몫이었죠. 하지만 초등학교

유는 역시 경제적인 사정이었다.

를 졸업하자 제가 가질 기회는 한정적이었어요. 언니가 진학한 강원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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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벗어나고자 결혼한 강미자

악가로 갑자기 떠올랐다. 영화 같은 벼락 성공담이다. 소프라노 강 미자는 가곡이 사랑받는 대중문화 환경이 만들어 낸 스타이기도 하

“졸업하고 곧바로 음악 교사로 취직을 했어요. 성악가를 꿈꿨지만,

다. 80년대만 해도 TV에서 성악가들이 귀에 익은 서양과 한국의 가

돈을 벌어 집안을 돕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이었으니까요. 대학 4년 동

곡들을 부르는 프로그램이 성인 시청자들의 큰 인기를 받았다. 대중

안에도 남자와 데이트 한번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가난해서요. 연

의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와 미모를 겸비한 강미자에게 방송 관계자

애 같은 낭만을 누리는 건 사치였지요.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했

들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어요. 당시 외제 차를 몰고 다니며 비누 제조업을 하던 성공한 청년 실업가였는데 맘에 들진 않았어요. 그래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나와

유학을 떠난 강미자, 일생 3대 은인을 만나다

가족들이 곤궁에서 벗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농담이 아 니고 심청이의 심정으로 결혼을 한 거죠.”

유명 성악가로 인기를 얻었지만,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서 울 음대 졸업 후, 10년의 공백이 주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많은 음악

결혼 후,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3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가정주부로

인이 거쳤던 선진 음악 학교에서의 유학 경험이 부러웠다. 그래서

만 살았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 없는 결혼일 뿐 아니

40대의 나이에 유학을 결심한다. 처음부터 장기간의 해외 체류를 결

라 남편의 주사가 상상을 초월했다. 다행히 술에 취해도 아내를 때

심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잠시라도 외국의 학교에서 젊은 음악인들

리는 가정 폭력범은 아니었다. 오히려 숫기가 없고 말이 없는 사람

이 어떻게 교육 받는 지 함께 체험하고 싶은 바람 정도였다. 뉴저지

이었다. 그저 매일 술을 마시고 취해서 살았다. 젊은 나이에 돈을 벌

의 음악대학에서 한 달 정도 공부할 생각으로 미국에 왔다. 강미자

었고 사업 때문에 술자리가

의 운은 그곳에서도 찾아

많았던 게 알코올 중독으로

왔다.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남편

만난, 그가 일생의 3대 은

은 술로 인한 간경화로 세

인 중 한 명으로 꼽는 줄리

상을 떠났다.

어드 음대 오렌 브라운 교 수에게 발탁되어 그녀의 수

결혼으로 음악도 포기했건

제자가 된 것이다. 오렌 브

만, 남편과 가정불화를 겪

라운 교수가 펴낸 성악교습

으며 살자니 강미자는 극심

서에는 주디스 블레겐 등과

한 우울증에 빠졌다. 자살

함께 강미자를 이렇게 소개

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

해놓았다. “나는 그를 제자

활은 안정적이고 여유가 있

이며 한 예술가로 10년 이

게 되었지만, “내가 평생 이

상을 알고 있다. 그의 음성

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절

은 열정과 개성을 지니고

망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있을 뿐 아니라, 관중과 교

그러던 어느 날, 집 안 청소

감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

를 하다가 갑자기 라디오에

다. 언어와 음악으로 감정 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 있

서 흘러나오는 카탈라니의 오페라 ‘라 왈리’에 나오는 아리아 ‘나 멀리 떠나가리’를 듣게 되었

어 비유할 수 있는 성악가는 극히 드물다.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흔

다. 강미자는 음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치 않은 성악가이다.”

살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38살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음악인으로의 성공과 비교하면 그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현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작은 독창회도 하게 되었다.

재의 남편인 이채진 클레어몬트 매케나 대학 정치학 교수는 그녀 나 이 63세에 만난 인연이다. 선비 스타일에 젠틀한 교육자인 이채진

스타 성악가로 우뚝 선 강미자

교수는 강미자의 존경을 받을만한 인품과 학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 생을 그와 함께 보내기로 하고 미국으로 오게 된다.

일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노력과 용기를 잃지 않자, 운도 따라줬다. 당시 저명한 지휘자 겸 작곡가였던 장일남 교수가 우연히 강미자 독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로 견디다

창회의 포스터를 보고 공연장을 찾아왔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부 유한 집 딸의 독창회”라고 생각한 장일남 교수는 강미자의 노래를

미국 생활은 평온했다. 늘 연구와 강의 준비를 하는 품위 있는 남편

듣고 반했다. 공연 다음 날 강미자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TV에 출

과 안정된 생활, 사시사철 쾌적한 미국 서부의 기후는 만족할 환경

연하라는 제의였다.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상상 이

을 제공했다. 하지만 친구와 지인이 없고 변화가 없는 생활은 다소

상이었다. MBC가 준비한 3.1절 특집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

지루했다. 게다가 강미자는 운전하지 않아 생활 공간의 제약이 컸

를 불렀다. 그리고 강미자는 각 방송사가 출연 요청을 하는 스타 성

다. 가끔 한국이 그리웠고 평생 친구처럼 지내는 딸과의 통화가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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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동생인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함께 2017. 6. 7 예술의 전당

낙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비극이며 아직도 슬픔에서

“남편이 강의가 있으면 함께 갑니다. 청중 속에 섞여 강의를 들으면

벗어나지 못 하는 일이 발생했다. 가장 소중한 그의 딸이 거짓말처

‘이 사람이 정말로 머릿속에 귀한 지식이 많은 학자’라는 걸 새삼 느

럼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매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통곡을 하다가

끼게 됩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하루 5시간씩 연구에 매

혼절을 했다. 남편도 그런 모습을 보며 함께 힘들어했다. 교회에 다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이지만 존경심이 듭니다. 아내로서 이 사

녀보기도 했다. 기도와 사람들의 위로를 받았지만, 안정을 찾을 수

람이 오랫동안 더 활동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란

없었다. 강미자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결국 음악이었다. 지난해 6월

생각이 들어요.”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7년 만에 독창회를 했고 딸을 잃은 참척(慘 慽)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했다.

딸 10주기를 추모하며 내년 6월 카네기홀 무대를 준비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딸을 잃은 아픔은 너무도 쓰라린 그리움으로

지금과 같은 한류 문화가 없던 시절, 소프라노 강미자는 그 이상의

남아있습니다. 모두 이젠 그만, 딸을 놓아주라고 말하지만, 너무도

역할을 해낸 적이 있다. 88올림픽을 기념한 뉴욕 센트럴파크 백남

보고 싶은 마음에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피

준 비디오 쇼에서 노래했는데 그 모습은 세계 5개국에서 동시에 위

아노 앞에 앉아 노래로 울부짖고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노래는 기

성 중계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 팀 페이

도이며 나의 전부이기에 내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래

지(Tim Page)는 뉴욕 머킨홀의 강미자 독창회를 보고 <뉴욕타임즈>

뿐입니다.”

에 “밝고 매력 있는 목소리와 놀라운 재능, 우아한 무대매너, 뛰어난 발음과 드라마틱한 감성으로 청중들을 감동하게 했다”고 썼다. 강

딸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 남편 이채진 교수

미자의 나이는 올해 74세이다. 딸이 그리울 때마다 노래 부르던 그 녀는 이제 슬픔을 딛고 소프라노 강미자로 다시 돌아오려고 한다.

2010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의 무대는 특별했다. 미국에서

아직도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를 기다리는 팬이 많기 때문이다. 올해

공부와 공연 활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대학교에서 교수

열린 미주 서울대 동문 모임에 참석하자, 뉴욕 동문이 카네기홀 콘

생활을 할 때 맺은 팬들이 몰려왔다. ‘미사모(소프라노 강미자를 사

서트를 제안했다. 오늘의 소프라노 강미자를 있게 해준 카네기홀은

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팬클럽에는 100여 명의 각계각층의 유

그녀에겐 특별한 무대이다. 내년 6월, 다시 그 무대에 서는 날을 위

명인들이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 방송인 김세원, 황인용, 변호사 안

해 그녀는 마치 장거리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매일 연습을 한다고

동일, 화가 이두식 등이 그들이다. 또 70년대 최고의 가수 이장희의

힘주어 말한다. 그 누구보다도 재능있고 똑똑했던 딸을 오래 기억하

친구인, 친동생 기타리스트 강근식도 출연했다. 이제 강미자는 인생

기 위해 양주희의 어머니, 소프라노 강미자 씨는 이제 눈물 대신 자

의 황혼기인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가장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신의 소리를 닦고 있다. 이제 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뒤

외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강미자에게 지금 인생의 의미와 목표는 무

로하고 단거리 선수의 질주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엇일까? 그녀는 우선 평생 학자인 남편의 내조자로서 해야 할 역할

무대 위에서 쏟아낼 것이다. 75세에 다시 무대에 서는 그녀가 들려

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줄 노래는 과연 어떠할지 그날이 무척 기대된다. 29


ESSAY

소프라노 강미자의 딸 양주희 에세이 中에서

휴가

글쓴이 양주희(1968-2009)

소프라노 강미자 씨의 외동딸로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 Susan Wagner High School 졸업, 뉴욕Parsons 대학 재학 중에 귀국, 고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국제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다시 유학을 와서 New York University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뒤, 고대 국제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KBS 외신 뉴스캐스터로 일하다가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30


개 데리고 있는 집은 이 심정 알 것이다. 애 데리고는 힘들어 그렇지

이 더더욱 사라져, 2박 3일도 못 채우고 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덕보

어디든 갈 수 있다. 개 데리고는 어디도 못 간다. 덕보는 여름에 휴가

만 아니라면 속 편하게 차라리 안 가고 싶다.

는 죽어도 꼭 가야 했다. 돈이 없어 ‘여관’보다 ‘여인숙’에 가까운 숙 박시설에 묵으면서도 휴가는 꼭 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넘

여관도 아닌 여인숙 수준의 숙박시설에 묵던 우리의 여름휴가는 해

게 늘 8월이 마지막 주에 휴가를 갔다. 돌돌이를 엄마에게 맡길 수밖

마다 발전했다. 돈을 모으지 못해 그렇지 우리도 벌만큼 벌었다. 최

에 없는데, 엄마는 방학 때마다 바빴고 개강을 앞둔 8월의 마지막 주

근 몇 년간은 제주도에서 반드시 신라호텔에서만 묵었다. 그건 우리

에야 서울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의 첫 제주도 여행에서 품은 포한 때문이었다. 서귀포의 장급 여관+ 콘도에서 밥해 먹던 우리는 버스를 타고 중문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올해도 우리는 휴가를 8월의 마지막 주로 미뤘다. 엄마가 그때야 돌

신라호텔 투숙객들만 다니는 호텔로 곧장 향하는 길을 걸었다. 신

아오시니까. 그리고 돌돌이를 2박 3일만 맡아달라고 했다. 우리는

라호텔 투숙객들은 거기서 민물로 발을 씻고 곧장 호텔로 들어갔다.

휴가를 어디 멀리 오래가지도 못한다. 그토록 돌돌이에게 얼고 떠는

따락보니 별천지였고, 돈이 아까워 로비에서 커피도 한 잔 못 사 마

엄만데, 그런데 돌돌이와 같이 살 수 있는 시한은 2박 3일이 맥시멈

신 우리는 돈벌면 반드시 제주신라호텔에 묵을 것을 다짐했었다.

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돌돌이가 예뻐 어쩔 줄 모르고, 돌돌이 역시 엄마만 있으면 백만 대군을 얻은 것 마냥 온갖 버르장머리 없는 어

그 정도 꿈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과연, 특급호텔은 대리석 욕조에

리광을 부렸다. 그런데도 둘은 같이 살지는 못한다. 사실 엄마는, 혼

샤워 부스에 수건도 두텁고 톡톡한 것이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

자서는 돌돌이를 ‘길러’ 본 적이 없다. 예뻐만 했을 뿐, 돌돌이도 그

할 만한 선진국가라는 착각을 심게 했다. 그런데도 덕보와 나는, 돌

걸 안다. 그래서 엄마 집에서 왕자로 사느니, 구박받으면서 우리 집

아오면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는 생각부터 했다. 쓴 돈이 아까워서

에 서서 사는 걸 속 편하게 여긴다. 돌돌이는 엄마 집에만 가면 그렇

라도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게 우리 집으로 달려온다. 흔한 속설로 개와 고양이를 예로 드는데,

그리고 2박 3일 동안 돌돌이 산책시키고 돌돌이 얼고 떠느라 지친

고양이는 ‘터’를 중시 여겨, 주인이 누구인 것은 상관 않고 그’집’에

엄마가 돌돌이를 데려다주면서, 너하고 살 때 까칠하고 털도 엉망이

만 정을 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개는 고양이와 반대라는 것이다.

던 애가 저렇게 윤기가 흐르고 잘 생겼다는 엄마의 자찬을 한참 들 은 뒤 다시 우리 세 식구가 오롯하게 남고 돌돌인 집안 구석구석이

나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에게 제일 중요한

안녕했는지 닫힌 문은 없는지, 방마다 다니며….

건 사랑하는 주인일 테지만, 개이게도 ‘터’라는 것, 자기 집이라는 건 단순히 편안함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

우리 셋 모두 ‘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폭삭 집안에 안기는 일 그

다. 그래서 올여름엔 휴가를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다. 돌돌이를 이

게 매년 여름휴가의 하이라이트였다. 어쩌면 휴가라는 건 내 집 고

제, ‘돌 시각장애 건’이라고 불러야 하나? ‘돌 봉사’라고 불러야 하나.

마운 줄 알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그 느낌이 더 각별할

눈도 안 보이고 계단도 못 오르내리는 놈을 엄마 집에 맡길 생각을

것 같다. (2005.08.15)

하니 휴가 갈 일이 아득하다. 아마 돌돌이 저지레에 엄마의 참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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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7)

사고의 추억 정리

편집부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뉴욕/뉴저지)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32


방과 후 이웃집 근영이 형과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고

에서 제일 큰 편이었단다. 친절한 근영이 형은 걸음이 느린 나를 데

있었다. 아랫마을을 지나던 유일한 신작로는 아스팔트 도로 공사가

리고 학교에 가곤 했었지. 그 날은 학교가 일찍 끝나서 집에 와서 놀

마무리되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어. 울퉁불퉁한 신작로는 온데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단다. 우리 동네로 가기 위해서는 아스팔트

간데 없어지고 멋진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위로 차들이 쌩쌩 달리게

도로를 건너야 했어. 키가 크고 걸음이 빨랐던 근영이 형이 먼저 길

되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서산 읍내에 나가는 게 편리해졌다고 좋아

어 건너갔단다. 나도 형을 따라서 길을 건너려던 순간 무언가가 “쿵”

했지. 교통이 편리해지면 더 살기 좋은 마을이 될 거라고 했어. 실제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단다.

로 오일장에 나갔다고 덜컹거리던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 면 차멀미를 하곤 했어. 그런데 새로 생긴 아스팔트 도로 위로 달리

얼마 후 눈을 떠 보니 어떤 아저씨가 도로 위에 누워있는 나를 걱정

는 버스는 훨씬 빠르고 편안했단다.

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더구나. 아지랭이가 피어있던 우리 동 네 언덕배기에서 밭일하시던 부모님이 아스팔트 도로 쪽으로 황급

편리해진 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 아랫마을 김씨가 경

히 뛰어오시던 모습이 보였단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

운기를 몰고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가다가 차 사고가 크게 났다고 들

었어. 마치 권투 선수의 강펀치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비현실적인

었어. 도로가 좋아지다 보니 차들이 빨리 달려서 천천히 가던 경운

느낌이 들었단다.

기와 충돌사고를 일으키게 된 거야. 가끔 도로를 지나다 보면 차에 치인 야생동물을 볼 수가 있었단다. 느림에 익숙하던 시골 마을 사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차에 치이었던거야. 주막집 정류장에 정차해

람들과 동물들은 아스팔트 도로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단다.

있던 완행버스를 추월해서 달려오던 녹색 포니 택시가 갑자기 길을 건너는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단다. 그래서 택시의 오른쪽 옆면

함께 길을 걷던 근영이 형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키는 훨씬 컸

거울에 내가 부닥쳐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단다. 그때 충격으로

어. 나는 키가 유난히 작은 편에 속했고 형은 키 큰 엄마를 닮아서 반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거야. 33


다행히 사고를 낸 택시 운전사가 사고 현장을 떠나지 않고 나를 돌

반 티켓을 받은 적도 없단다. 사고의 기억 때문에 늘 조심해서 길을

보고 있었단다. 사고를 목격한 근영이 형이 달음박질해서 우리 부모

걷고 운전하는 좋은 습관을 갖게 된 거야.

님에게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한 거였어. 그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밭일하다 말고 맨발로 사고현장에 달려온 거란다.

엊그제 쇼핑몰을 가다가 뒤에 타고 있던 친척들에게 내가 안전띠를 하라고 종용한 적이 있었어. 대개 앞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안전띠

천만다행으로 많이 다치지 않았단다. 택시 운전사는 전날 차를 자기

를 착용하는데 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매지 않는 경우가 많단다.

집 앞에 세워놓았는데 아침에 나와 보니 오른쪽 옆면 거울이 깨져

그런데 뒷좌석에 앉아 있더라도 안전띠를 매지 않고 자동차 사고를

있었다는 거야. 하는수없이 집에 들어가서 강력한 접착테이프를 이

당하게 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확률이 안전띠를 착용할 때보다 여

용해서 임시로 거울을 다시 붙여놓은 거였단다. 그래서 내가 거울에

덟 배가 높아진단다. 실제로 영화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

얼굴을 강타를 당했어도 큰 상처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어. 또 한 발

의 주인공인 프린스턴 대학의 수학자, 존 내시(John Nash) 박사와

짝이라도 빨리 길을 건넜더라면 더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지.

그의 부인도 뉴저지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어. 안전띠를 매고 있던 택시 운전사는 상처를 입지 않았지

택시 운전사 아저씨는 나와 부모님을 태우고 읍내에 있는 서산 의료

만, 뒷좌석에 타고 있던 내시 박사와 그의 부인은 안전띠를 착용하

원 응급실로 데려갔단다. 사고로 겉은 하나도 다친 게 없이 멀쩡했

지 않은 상태였단다. 그 사고 소식을 몆 년 전에 듣고는 뒷좌석에 앉

지만, 입안이 충격으로 찢어졌었어. 응급실에서 입안 상처를 수술용

을 때는 늘 안전띠를 매는 습관을 생활화하고 있단다.

실로 대 여섯 번 꿰맨 후 병원 문을 나섰단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교통사고 를 당하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저씨는 병원 밖에 있는 포장

아예 차를 타지 못하거나 두려

마차로 나와 부모님을 데리고

워서 운전하지 않게 되기도 한

가셨단다. 저녁 시간 포장마차

단다. 또 안전에 대해 지나치

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어. 아

게 강박적인 모습을 보여서 주

저씨는 연신 미안하다며 어묵

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

과 닭발을 시켜 주셨지. 커다

도 있어. 사고의 충격이 너무

란 대접에 담긴 어묵 냄새가

커서 헤어나지 못하고 두렵고

코끝을 강하게 자극했단다. 입

불안한 나머지 비슷한 상황을

안을 몇 발 꿰맨 후였지만 마

만나지 않도록 회피하거나 그

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서 어묵

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나

을 먹어도 별로 아프지가 않았

치게 예방하고 확인하려는 습

어. 점심 이후 아무것도 먹지

관을 키우게 된 거야. 나름대

않은 상태여서 배가 매우 고팠

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지

었나 봐. 택시 운전사 아저씨

만, 살아가는 데 좀 지장이 생

는 어묵 한 그릇을 맛있게 먹

길 수가 있겠지.

는 것을 보시더니 한 그릇을 더 시켜 주셨단다. 그때 먹은 어묵이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하지만 사고의 경험이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

맛있었던 것 같아.

기도 한단다. 초등학교 때 당한 자동차 사고의 기억이 안전하게 길 을 걷고 운전하는 습관을 만들어 준거잖아?. 가능하면 사고를 만나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내게 눈치를 주셨어. “아이를

지 않는 게 좋겠지만, 설령 살아가다가 원치 않는 사고나 힘든 일을

다치게 해서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

경험할 때가 있겠지. 그럴 때마다 그 경험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생

다.” 택시 운전사 아저씨가 사고 합의를 제안하셨어. 그런데 정작 사

각해 보고, 배우고,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면 더 좋지 않을까?

고를 당한 나는 별로 다친 게 없는 듯이 어묵 몇 그릇을 비우고 있으 니 부모님이 난처하셨던 거야. 다쳤기 때문에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다친 사람은 어묵을 폭풍 흡입하고 있으니 보상금을 받을 명목이 사 라진 거지. 그래도 착한 택시 운전사 아저씨는 십여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보상금으로 건네셨단다. 그날 이후 도로를 건널 때는 늘 좌우를 두 세 번씩 살피는 습관이 생 겨났단다. 운전을 할 때도 늘 조심해서 운전하게 되었어. 지금까지 27년 동안 운전을 해 왔지만, 아직 교통사고를 내거나 흔한 교통위 34

그림 박종진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 홍익대학원 졸업 개인전(NewYork K&P Gallery)외 7회 해외전 및 그룹전 100여회 현재) 한국미술협회/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 전문상담요원


이달의 좋은 글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한번 뿐인 내 인생, 어떻게 살고 있나요? - 문학평론가 이어령 박사 남들이 “당신 직업은 열두 개나 됩니다. 교수, 장관, 행정직에 언론

이 되세요.” 자긴 하나밖에 없는데 왜 남과 같이 살아요? 왜 남의 인

인 등에 안 해본 것이 없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

생이나 남의 생각을 좇아가냐고요.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길이라

실상 내 인생은 굉장히 좁게 산 셈이에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글을

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면 대담하게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쓰

쓰고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만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기

러져 죽더라도 내가 요구하는 삶을 위해서 그 길을 가야 하는 거예

때문에 다른 길이 나한테는 없었어요. 참 후회스러운 것이 많은 꿈

요. 자기 삶은 자기 것이기 때문에 남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걸

이 있었으면 지금 내가 또 다른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그런 꿈을 내

늙어서 깨달으면 큰일 나죠.

가 갖지 못하고 글 쓰는 것만 하겠다. 위대한 작가가 되어야겠다. 그 랬기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살아왔던 게 지금 생각

사실 나는 지금 투병 중이에요.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죽

해보면 ‘나처럼 살아온 길이 한 번밖에 없는 내 생명을 정말 값있게

음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젊은이들의 가장 큰 실수는 자기는 안 늙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 그러니 까 내일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순간의 현실을 잡으세요. 마

천재 아닌 사람이 어딨어요. 모든 사람이 천재로 태어났고 그 사람

치 사형수가 하루를 살 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 하루가 얼마

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천재성을 이 세상을 살다

나 농밀하겠어요.

보면 남들이 덮어버려요.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이 덮고 직장에 들 어가면 상사가 덮고…. 자기 천재를 전부 가리는 겁니다.

젊음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은 “살아봤자 오늘도 똑같고 내 일도 똑같을 텐데… 아이고 죽자.” 이럴는지도 몰라요. 지금 젊음을

그래서 내가 늘 하는 얘기가 360명이 뛰는 방향을 쫓아서 경주하면

열심히 살아야 늙을 줄도 알고 열심히 늙음을 삶아야 죽음의 의미도

아무리 잘 뛰어도 1등부터 360등까지 있어요. 그런데 남들 뛴다고

알게 된다는 거죠. 그건 말로만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이 그렇

뛰는 것이 아니라 각자 뛰고 싶은 방향으로 뛰면 360명이 다 1등을

게 살았어요.

할 수 있어요.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VeHhXwv6Ucw Best one이 될 생각을 하지 마세요. “Only one, 하나밖에 없는 사람

셀레브 영상에서 하신 말씀을 글로 옮겼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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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Viacom Media Networks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 직장 생생 체험기(8)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직장 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을 텐데. 어쩌 면 판타지 같기도 한 이런 행복한 커리어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담근 지 가 벌써 18년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미국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변 화를 겪었고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힘들었다. 20년 전 유학생으로 와서 MBA 프로그램 을 마치고 취업비자를 받아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취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좌충우돌하며 버텨낸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 것이다. 지난날의 나의 경험이 지금 막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달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 Seunghee Chung 영문 Taeriah Kim 정리 36

편집부


밥의 미학(美學) – 언제 밥 한번 먹자!

집‘밥’, ‘밥’심, 짬‘밥’, ‘밥’그릇 싸움, ‘밥’값도 못 하는 사람, 철‘밥’통, ‘밥’맛없다, 찬‘밥’ 신세, 한솥‘밥’을

먹은 사이, 한술 ‘밥’에 배부르랴… 우리의 일상 언 어생활 속에도 깊이 파고든 ‘밥.’ ‘밥’이 그저 단순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밥’이 아니기에 우리 한국 사

람에게 이 ‘밥’은 참으로 중요하다. 외롭게 유학생으 로 시작한 미국 생활 속에서 나부터도 누가 “밥 먹

었니?”, “밥 잘 챙겨 먹고”하고 말해주면 참 고마웠 고, 가장 기본적인 인사가 되는 “언제 밥 한번 먹자” 하며 건네는 말 속에서 따듯함이나 위로를 얻기도

했다. 누가 정말로 ‘밥’ 먹으러 오라고 하면 복권 당

미팅의 어젠다는?

서도 같이 밥을 한 번이라도 더 먹은 친구와 좀 더 친한 건 사실이

사실 짬밥이 안돼서 그런 만남을 주선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는

런데, 이 밥정(情) 속에 담긴 그 깊은 뜻을 미국인들에게 이해시키

핑계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 제일 말단인 내가 부서의 최고 위치에

첨된 것보다도 더 기쁘기도 했고 말이다. 친구 중에

지 않나. ‘밥’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문화 – 그야말로 밥정(情)! 그 기는 참 어렵다. 특히나 비즈니스 논리로 무장된 직장에서는 더더 욱 말이다.

그냥 밥 한번 먹자는 건데 뭘 MBA 과정을 마치고 세계 곳곳의 크고 작은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것은 당황한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있는 사장한테 가서 그런 큰 미팅을 제안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 실이었다. 그러나 조직문화상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어젠다였다. 보나 마나 ‘왜’, 그리고 무슨 ‘어젠다’로 만나길 원하느냐고 물을 텐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지를 몰랐기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뿔뿔이 흩어져 직장 생활을 시작한 친구들과는 졸업 후에도 가끔

한국 회사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에서 겪은 이네들의 조직 생활은

공부를 함께 했던 한국에서 온 동기들과는 더욱 그랬다. 함께 공부

어 둘이 하는 작은 미팅일지라도 미팅의 목적이 확실해야 하고 미

씩 소식을 주고받았다. 특히 함께 좌충우돌 안 되는 영어로 어려운 했던 동기 중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공중파 방송국 두 곳에서 유학

을 오셨던, 당시 중간 관리자급 이상 되는 분들이 몇 분 계셨다. 한 국 방송계의 최전방에서 몸으로 부닥치고 실전으로 익히고 경험한 것들을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상황과 비교해서 설명해주시는 그분 들 옆에서 있으면서 귀동냥하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실로 엄청난 공부였다. 그런 분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도서관에서 같이 공

부하고, 안 들리는 영어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함께 괴로워하던 시

절을 보내고 나니 졸업 후에도 끈끈한 정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의 직장으로 복귀하신 한 분으로부터 회사로 전화 한 통이 왔다. 반가운 안부 인사 끝에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 우리 사장님이 미국으로 출장을 가시는데 이참에 너희 배 급 쪽 사장하고 밥 한번 같이하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해서말이야.” “아,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별일은 없어. 그냥 이번 기회에 서로 인사도 하고 얼굴도 익

히고, 또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알아두어 나 쁠 것 없고 또 서로 윈-윈이 되면 좋지.”

“아, 네… 한번 알아는 볼게요. 근데 제가 짬밥이 안돼서 위에다 그 런 말을 올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 한번 애써줘. 수고~”

전화를 끊고 나니 어찌해야 할는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유난히도 넘치다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어젠다 중심이었다. 심지 팅을 위한 미팅은 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삼는 얄미울 정도로 철저

한 미국 직장인들. 어쩌다 어젠다가 확실하게 준비되지 않은 부실

한 미팅을 하고 나면 입이 댓 발은 나와서 시간 낭비했다고 툴툴거 리니, 얼굴 익히며 ‘그냥’ 밥 한번 먹는 미팅을 주선하는 건 나로서

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임원급 이상이 참석하는 미팅의 가장 중요한 일이 어젠다를 세팅하는 것이고, 모아진 어젠다를 다 시 추려 우선순위에 따라 배치하는 것에 꽤나 공을 들이는 임원들

도 많다. 사전에 승인된 어젠다는 다시 부서의 구성원에게 미리 배 포되어 철저하게 각각의 어젠다를 준비하도록 한다. 주어진 미팅

시간 내에 최고의 결과물을 뽑아내자는 것이다. 미팅 후에는 대부 분 가장 말단 직원이 어젠다별로 토의한 내용과 지시사항 및 결정

사항을 정리해서 올린다. 정기적인 미팅일 경우 미팅의 시작은 지 난번 미팅의 어젠다를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말이다. 심지어

식사 미팅일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정말 친한 사람과 오랜만에 하는 점심이 아니고서는 조금이라도 업무적인 일로 만나는 것이라

면 미리 어젠다를 파악하고 나간다. 특히 임원이나 사장이 나가는 미팅은 아무리 가벼운 캐주얼한 미팅이라 할지라도 무슨 말을 어

떻게 할지 사전에 간단하게라도 전략 회의를 하고 나가는 것이 보 통이다. 어젠다가 없다면 서로 뭘 원하고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당 황스럽고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믿는 이런 얄미운 미국 직장

인들의 자로 잰듯한 조직문화 속에서 초면인 두 사장 간에 이루어 질 만남이 어젠다없이 단지 친분을 쌓기 위함이라고 말한들 이쪽 에서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37


음화식덕(飮和食德•마시고 먹는 일이 미덕)과 실용주의(實用主 義) – 그 중간을 원해!

미학(美學)을 넘어선 밥정(情)의 힘!

그렇다. 미국 직장인들은 밥을 먹으면서 쌓인 정이 얼마나 무서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초 과학 시대, 그리고 미국에서

운지, 그 정으로 심지어 만리장성도 쌓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철저한 인과 관계 속에서 ‘Why,’ ’What,’ 그리고 ’How’로 무장 한 이들의 사고체계에서 ‘그냥’은 없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이 때 로 지나치니 ‘미팅을 위한 미팅은 하지 말자’고 외치면서 가끔은 너무 어젠다에만 목을 매 어 본질이 전도되는 느낌 을 받을 때도 있고, ‘진짜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 나서 밥을 먹나’하는 생각

이 들 때도 많았다. 캘린더

에 숨 돌릴 틈도 없이 빼곡 히 차 있는 미팅을 볼 때마 다 직장 생활이란 것이 조 직원을 쥐어짜서 생산성

만 높이려는 목적 이외에 는 달리 낙이 없나 싶기도 했다.

반면, 한국의 문화는 ‘그

냥’ 혹은 ‘좋은 게 좋은 거 지,’ ‘내 맘 알지?’ 하는 ‘더 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임

일 강조할 때가 많지 않나 싶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고 해

서 나 또한 똑같이 고민을 털어놓아야 하는 의무가

그게 보이지 않으면 속상 해하고 서운해한다.

이 초 글로벌 시대에 더 이상 ‘그냥’ 밥 한번 먹자는 CEO도 없을 것 이고, ‘그냥’ 밥 한번 먹는다고 일이 성사될 거라도 기대하는 CEO

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해갈수록 이 밥 정(情)에는 중요한 의미가

더 이상 ‘그냥’ 밥 한번 먹자는 CEO도 없을 것이고, ‘그냥’ 밥 한번 먹는다고 일이 성사될 거라도 기대하는 CEO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해갈수록

이 밥정(情)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기리라고 본다. 마중물(Priming Water)이라는 것이 있다.

펌프질을 할 때 물을 얻기 위해 먼저 붓는 물을 말한다. 밥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마중물로서의 밥 – 구체적인 비즈니스 만남의 방향과 나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한 후에

‘밥’을 먹으며 펼치는 비즈니스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전에 쌓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한 마중물로서의 ‘밥’ 먹기. 예전에 내가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해

대한다. 내가 이렇게 했으 로 똑같이 해주길 바란다.

일본까지 3시간에 돌파할 수 있는 초음속 제트기가 곧 선보인다는

초 글로벌 시대에

없는데 상대방은 그걸 기 니 상대방도 내가 한 그대

우주여행 비즈니스를 누가 선점하느냐를 논하고, A.I.가 어디까지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성숙한 직장인, 비즈니스맨이 되었을 텐데…

여기에 ‘밥’이 들어가면 더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하다. ‘밥’이 들어가면 순

담기리라고 본다. A.I.가 대 체하지 못하는 정(情)의 비

즈니스를 이룰 수 있기 때

문이다. 친한 중국 친구가 있다든지, 혹은 중국에서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해서 밥과 차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중국인에게

는 곧 상대방을 ‘친구’로 받 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 래서 비즈니스 관계로 맺 어진 혹은 맺어지고 싶은

중국인과 밥 한번 먹는 것 은 진정 하늘에 별 따기다. 그들과 밥 먹는 자리 한 번 만들기는 한국인들끼리 혹

은 미국인과 함께 하는 식

사 자리 한 번 만들기보다

훨씬 어렵다. 하지만, 일단 친구로 인정받고 식사에 초대받은 후에는 사업적으

로든, 혹은 개인적인 일로 든 많은 일이 훨씬 수월하 게 진행된다. 같이 ‘밥’을 먹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마중물(Priming Water)

이라는 것이 있다. 펌프질 을 할 때 물을 얻기 위해 먼

식간에 우리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버린다.

저 붓는 물을 말한다. 밥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마중물

‘같이 (한솥) 밥을 먹는 입’이라는 뜻의 식구(食口)라는 말만 보아

는 것을 파악한 후에 ‘밥’을 먹으며 펼치는 비즈니스라면 해볼 만하

도 알 수 있다.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 곳곳에 파고들어

사물이나 현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밥’ – 도대체 우리에 게 밥이라는 존재는 무엇이길래 심지어 비즈니스에서마저도 영 향을 주는 걸까.

38

로서의 밥 – 구체적인 비즈니스 만남의 방향과 나와 상대방이 원하 지 않을까.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전에 쌓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 한 마중물로서의 ‘밥’ 먹기. 예전에 내가 이것을 알았더라면, 그리 고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성숙한 직장인, 비즈니스맨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이 남는다.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My Journey in Corporate America by Seunghee Chung, Former VP at Viacom Media Networks:

Climbing The Corporate Ladder Of Success(8) What you are good 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t is something that you would die for. Possessing an exceptional skill at something does not always translate to having a real passion in itself: a workplace is no exception. In other words, doesn’t everyone share a mutual desire to find a job that they’re good at, which actually happens to perfectly parallel their actual interests? Exactly 18 years into this fantasy-like care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 I’ve realized that no matter how demanding or tiring the work may be, doing something I love somehow creates more energy to be constantly fueled by. However, I must admit that I’ve also had my fair share of hardships throughout my career, but those were eventually lulled by frequent joyful moments that netted out the negatives. But thanks to having a job that I truly enjoyed, I was able to endure this 20-year journey, where I started out as an international MBA student who stepped into a foreign country with limited English-speaking abilities, which wasn’t even my native language. I hope that my humble narrative of the past will encourage and inspire the minds of young working professionals who are currently in the nascent stage of building their careers within the mainstream society today, and I am happy to openly share my episodic memories on a monthly basis for them.

39


thick and thin as fellow students struggling to

conquer the workload in our

shaky English, we

kept in touch after

graduation. One day, one of them

who had returned to his previous

company called me up. I was very h ap py t o h e a r

from him, except for the fact that he made a request I

didn’t know how to fulfill.

The Beauty of Breaking Bread Together

“By the way, our CEO is taking a business trip to the U.S.

“broken bread” - shared a meal? This particular sentiment

“Is something going on?”

Don’t you feel closer to people with whom you have of eating together and sharing a meal is so pervasive in the Korean culture that the word “bap” – literally meaning

rice but more commonly a generic reference to a meal – is used to describe a wide variety of situations. As a lonely international student, I was so thankful whenever someone asked me whether I ate “bap” or reminded me to not to skip “bap”. I found great comfort in the simple greeting, “Let’s have ‘bap’ together one of these days.” Moreover, I felt like

winning the lottery if someone actually invited me over for “bap”.

“Let’s have ‘bap’ together” may sound the same as “Let’s

Can you arrange a time for your head of distribution to have a meal with him?”

“No, nothing in particular. I think it is a great opportunity

for them to get to know each other. Maybe some good ideas

for synergy will come up. It couldn’t hurt to just eat and talk

for the sake of building relationships, and even better if it gets to be a win-win in the near future.”

“Uh, I’ll look into it, but I’m not sure if I can make it happen. I’m still the lowest one on the totem pole, you know.”

“Give it your best shot for me, okay? Thanks so much!” I had no idea how I was going to pull this one off.

What is the purpose? What’s the agenda?

hang out sometime” in America. However, eating ‘bap’

It was a pretty challenging thing to propose a business

Breaking bread together has a much deeper relational

Considering the work culture, however, it wasn’t exactly

together means more than just eating something together.

significance for Koreans, compared to the logic-driven American office culture.

Can’t we “just eat and talk”? A few of my MBA program cohorts had been mid-level

meeting to the most senior executive of my department.

impossible, even for the most junior-level employee such as

myself. The real problem was not the “what,” but the “why”.

Without a doubt, the first thing I would be asked is “What is the agenda? What is the purpose of the meeting?” And my answer wouldn’t have been satisfactory. Never ever.

executives at the major Korean broadcasting companies. I

Everything is agenda-driven in the American corporate

the American entertainment industry as seen through the

involved. Meeting for meeting’s sake is to be avoided at

learned a lot simply by listening to their observations about lens of their real-life experiences. Having gone through 40

culture, regardless of how many (or few) people are all costs. Before a meeting, teams go through multiple


iterations of prioritizing agenda items to maximize meeting

intensifies once people break bread together – their fortunes

prepared. After a meeting, minutes are distributed to

becoming “sik-ku (식구)” – a word for family that literally

results and circulate the final list so participants can come summarize discussion topics, decision points and next steps.

Recurring meetings starts with a review of minutes from

the last meeting. For the most part, working lunches are

are seen to be tied together from then on, in essence means “eating from the same pot.” To me, the business world seems to be no exception to this pervasive attitude.

not exempt from agenda-setting. Teams often hold a prep

The Science of Breaking Bread Together

more casual occasions. In such an environment, in which a

In this global and futuristic age of space travel and A.I., no

an inevitable cause for confusion and a colossal waste of

longer. Nevertheless, I now believe that the faster the pace

meeting in advance of meeting with top executives, even on

meeting without defined goals and objectives is considered time, I couldn’t imagine suggesting a meeting to my

of the top Korean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Feasting or pragmatism? We need the middle ground! Is meeting for meeting’s sake so bad that we can’t “just eat and talk”? On the contrary, breaking bread

together has the potential to build a momentum of

good-will powerful enough to break down the Great

Wall, if we allow it. But in the American professional

culture confined by the

space travel and

A.I., no CEO would either suggest or

agree to “just eat and talk” any longer. Nevertheless, I now believe that

the faster the pace of change, the greater

the importance of breaking bread together. One must first “prime” a pump by putting water in before the machine can actually start to pump. Likewise, breaking bread

together can open up a more productive and powerful flow to a business meeting.

An earlier understanding of this crucial nuance would have given me

logic of “Why,” “What” and

“How” even in interpersonal

relationships, there is no room for “just because.”

From what I have observed,

of change, the greater the

In this global and futuristic age of

head executive “just to eat and talk,” even with the CEO

CEO would either suggest or agree to “just eat and talk” any

an edge in the business world.

Well, better late than never: Let me ask you –

the obsession with agendasetting can ultimately

would you grab a meal

with me one of these days?

negate the efficiency and

importance of breaking bread together. The interpersonal

relationships thus forged

is something A.I. cannot replace. In Chinese culture,

inviting someone to share

a meal and tea signifies friendship. Therefore, the

opportunity to break bread

with a Chinese business contact is much more difficult

to obtain than with Koreans or Americans. However, once

a Chinese acknowledges friendship through breaking bread together, both personal

and business interactions would proceed noticeably more smoothly.

One must first “prime” a

pump by putting water in before the machine can

actually start to pump.

Likewise, breaking bread together can open up a more

productive and powerful

flow to a business meeting.

productivity this approach seeks to achieve.

An earlier understanding of this crucial nuance would have

At the other extreme, the Korean culture over-emphasizes

than never: Let me ask you – would you grab a meal with

conformity and reciprocity of unspoken obligations “just

because” there was a shared moment at some point. In

given me an edge in the business world. Well, better late me one of these days?

this environment, people routinely expect others to mirror

English translation Taeriah Kim

personal troubles – and get disappointed and hurt when

Columbia College of Columbia University

their own behavior – whether it’s doing a favor or confiding the others don’t reciprocate in the same way. This effect

B.A., Neuroscience and Behavior

41


EDUCATION

미 경제전문 매거진 Fortune 선정

2018년도 글로벌 100대 기업 순위 글, 정리

편집부

미국 경제 전문 매거진 포천(Fortune)이 선정한 2018년 글로벌

How can one define working at a “big company”? In Korea,

이어 2018년도에도 6년 연속 1위를 기록했다. 한국 기업 중에서 대

of prestige and drives the employees of those companies

500대 기업 발표되었다. 세계 최대 유통기업 월마트가 지난해에 (大)기업이란 명칭은 어떤 기준으로 얻게 되는지 정확히 모르겠 으나, 포천 매거진에 이름을 올린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홀딩 스, LG 등은 대기업이란 상징성이 있다. ‘대 기업’에 다닌다는 건

대 기업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과 명예, 소속감과 일정한 부분에서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미국에서도 큰 회사에서 근무한다는 건 개 인으로서 엄청난 자부심과 자랑거리가 된다. 한국의 기준과는 달

리 미국에서는 ‘대기업’이란 명칭을 얻게 되기까지 매우 엄격한 기 준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매년 포천 매거진(Fortune Magazine)

가 선정하는 글로벌 기업 순위는 미국 내 상장기업뿐만 아니라 비 상장 기업도 포함된다. 전년도 매출액과 총 재정 수익을 기준으로

가장 높은 순위부터 뽑는데 1955년도 Fortune 매거진의 Edgar P. Smith 편집자가 처음 작성한 Fortune 500 리스트는 재무 건전

성 및 순위 내 순위 수준을 기준으로 기업의 규모와 성장을 가늠하

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상위 500개 목록 외에도 Fortune 100 또

는 Fortune 1,000과 같은 순위도 발표한다. 본 매거진 에스카사(S. CASA)는 현재 미국 경제를 이끌고 있으며 영향력과 규모도 큰 미

국 주요 100대 기업을 정리해보았다. 뉴욕, 캘리포니아, 시애틀 및 워싱턴 DC와 같은 주요 도시와 주요 주에 본사를 둔 기업 등이다.

the idea of working at a “big company” insinuates a sense to hold a certain level of accomplishment to be labeled as part of a member of that conglomerate. In America, a

similar notion is being mirrored, except the recognition to be categorized as being a “big company” comes with

a requirement to be carefully selected and go through a

more official, formal process. Every year, Fortune magazine

compiles and lists the ranking of publicly held as well as privately held companies within United States, solely

based on their total fiscal revenues per year. First created by an editor named Edgar P. Smith at Fortune magazine,

the Fortune 500 list is the unprecedented calibrating tool to measure the scale and growth of companies based on their financial health and level of ranking within the list.

Aside from the top 500 list, the magazine also publishes the shorter version of the rankings, such as Fortune 100 or

even a longer list, Fortune 1000. S. CASA has compiled the first 100 companies, acknowledging some common themes and patterns across this wide range of different companies. When going through the list, it is evident to discern that

majority of these companies identify their industry to be

either Technology, Energy, or Financial Services. It is also worth noting that the headquarters of top companies reside in major cities and big states, such as NYC, California,

Seattle, and Washington D.C. Let’s explore some of the biggest, more influential corporations that play a key instrumental role in shaping the economy of United States. 42


Ranking Number

Company Name

Revenue ($M)

1

Walmart

$500,343

Walmart

2

Exxon Mobil

$244,363

3

Berkshire Hathaway

$242,137

Headquarters : Bentonville, AR

4

Apple

$229,234

5

UnitedHealth Group

$201,159

6

McKesson

$198,533

7

CVS Health

$184,765

8

Amazon.com

$177,866

9

AT&T

$160,546

10

General Motors

$157,311

Berkshire Hathaway

11

Ford Motor

$156,776

12

AmerisourceBergen

$153,144

Headquarters : Omaha, NE

13

Chevron

$134,533

14

Cardinal Health

$129,976

15

Costco

$129,025

16

Verizon

$126,034

17

Kroger

$122,662

18

General Electric

$122,274

Apple

19

Walgreens Boots Alliance

$118,214

20

JPMorgan Chase

$113,899

Headquarters : Cupertino, CA

21

Fannie Mae

$112,394

22

Alphabet

$110,855

23

Home Depot

$100,904

24

Bank of America Corp.

$100,264

25

Express Scripts Holding

$100,065

26

Wells Fargo

$97,741

27

Boeing

$93,392

28

Phillips 66

$91,568

29

Anthem

$90,039

30

Microsoft

$89,950

31

Valero Energy

$88,407

32

Citigroup

$87,966

33

Comcast

$84,526

Amazon

34

IBM

$79,139

35

Dell Technologies

$78,660

Headquarters : Seattle, WA

CEO : Doug McMillon Industry : Retail

CEO : Warren Buffet

Industry : Financial Services

CEO : Tim Cook

Industry : Technology

McKesson

CEO : John Hammergren

Headquarters : San Francisco, CA Industry : Healthcare

CEO : Jeff Bezos

Industry : Technology / E-Commerce 43


Ranking Number

44

Company Name

Revenue ($M)

36

State Farm Insurance Cos.

$78,331

Costco

37

Johnson & Johnson

$76,450

38

Freddie Mac

$74,676

Headquarters : Issaquah, WA

39

Target

$71,879

40

Lowe's

$68,619

41

Marathon Petroleum

$67,610

42

Procter & Gamble

$66,217

43

MetLife

$66,153

44

UPS

$65,872

JPMorgan Chase

45

PepsiCo

$63,525

46

Intel

$62,761

Headquarters : New York City, NY

47

DowDuPont

$62,683

48

Archer Daniels Midland

$60,828

49

Aetna

$60,535

50

FedEx

$60,319

51

United Technologies

$59,837

52

Prudential Financial

$59,689

Alphabet (Google)

53

Albertsons Cos.

$59,678

54

Sysco

$55,371

Headquarters : Mountain View, CA

55

Disney

$55,137

56

Humana

$53,767

57

Pfizer

$52,546

58

HP

$52,056

59

Lockheed Martin

$51,048

60

AIG

$49,520

Microsoft

61

Centene

$48,572

62

Cisco Systems

$48,005

Headquarters : Redmond, WA

63

HCA Healthcare

$47,653

64

Energy Transfer Equity

$47,487

65

Caterpillar

$45,462

66

Nationwide

$43,940

67

Morgan Stanley

$43,642

68

Liberty Mutual Insurance Group

$42,687

69

New York Life Insurance

$42,296

70

Goldman Sachs Group

$42,254

CEO : Craig Jelinek Industry : Retail

CEO : Jamie Dimon

Industry : Financial Services

CEO : Larry Page

Industry : Technology

CEO : Satya Nadella

Industry : Technology

Prudential Financial

CEO : John Strangfeld

Headquarters : Newark, NJ

Industry : Financial Services


Ranking Number

Company Name

Revenue ($M)

71

American Airlines Group

$42,207

Disney

72

Best Buy

$42,151

CEO : Bob Iger

73

Cigna

$41,616

Headquarters : Burbank, CA

Industry : Consumer Services

74

Charter Communications

$41,581

75

Delta Air Lines

$41,244

76

Facebook

$40,653

77

Honeywell International

$40,534

78

Merck

$40,122

79

Allstate

$38,524

80

Tyson Foods

$38,260

81

United Continental Holdings

$37,736

82

Oracle

$37,728

83

Tech Data

$36,775

84

TIAA

$36,025

85

TJX

$35,865

86

American Express

$35,583

87

Coca-Cola

$35,410

88

Publix Super Markets

$34,837

89

Nike

$34,350

90

Andeavor

$34,204

91

World Fuel Services

$33,670

92

Exelon

$33,531

93

Massachusetts Mutual Life Insurance

$33,495

94

Rite Aid

$32,845

95

ConocoPhillips

$32,584

96

CHS

$31,935

97

3M

$31,657

98

Time Warner

$31,271

99

General Dynamics

$30,973

USAA

$30,016

100

Goldman Sachs

CEO : Lloyd Blankfein

Headquarters : New York City, NY Industry : Financial Services

Facebook

CEO : Mark Zuckerberg

Headquarters : Menlo Park, CA Industry : Technology

Coca-Cola

CEO : James Quincey

Headquarters : Atlanta, GA

Industry : Consumer Services

45


ART&CULTURE

블록체인의 미래

이병욱의‌ 블록체인이 바꾸는 세상 글 이병욱 정리

편집부

많은 사람이 블록체인을 미래를 이끌어 갈 기술로 찬양하고 있지만, 정작 일반 사람이 지금까지 목격한 블록체인의 기능이라고는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암호화폐가 거의 전부인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많은 업체가 기술기업을 표방하면서 블록체인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공공연히 사기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ICO니 Reverse ICO니 거일 매일 새로운 신조어를 양산해가면, 수많은 사기가 기술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지만,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도 구분하는 전문가도 드물다. 과연 블록체인이 란 것이 정말 미래의 기술이자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기술은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우리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블록체인은 분명 재미있는 기술인 것은 분명하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은 신뢰받는 제삼자의 개입 없이도, 스스로 데이터를 검증하는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해 주었다. 제삼자의 개입 없이도 거래가 가능한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만 있다면 이는 분명 큰 변혁인 동시에 유통 비용 구조에 크나큰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은 확실하다. 거 기에 더해 한번 기록된 내용은 현실적으로 절대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점 은 그 나름대로 가치를 가지며 상당한 주목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직 그 누구도 안정적이고, 지속해서 운용될 수 있는 블록체인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칼럼에서는 블록체인에 대한 과 도한 장밋빛 칭송만 넘치는 이 시점에서 블록체인의 현주소와 함께 미래 에 대한 비교적 명확한 진단을 내려보기로 하자. 블록체인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문제가 해결 되어야 한다. 그 중 몇 가지 과제는 시급한 동시에 블록체인의 존립 자체 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범용적 블록체인의 구 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이 밖에도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지만, 우선은 3가지 큰 문제에 대해서만 우선 정리해 보자. 그 밖의 문제 대부분 은 기술적 지식을 필요로 하거나, 여기 제시한 것에 비교해서는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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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의 용량

이든 내일 당장 멈추더라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언제 멈출지 모 르는 미완의 도구일 뿐이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채굴의 동인을 찾

블록체인의 기본 개념은 모든 데이터를 모든 참여자가 복제해서 자

지 못한다면, 시스템의 영속성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 점이 필자

신의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이다. 이는 데이터의 집중을 막아 위변

가 책에서, 2020년 7월 6일, 비트코인 보상금의 또 다른 반감기가 도

조 가능성을 없애는 동시에 해커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블록체인

달하는 전후에 비트코인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멈춰 버릴 수 있다고

만이 가질 수 있는 근본적 핵심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시

경고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간이 흐르고 블록체인의 처리 용량이 커질수록 보관해야 하는 데이 터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데 있다. 비트코인의 예를 들면, 현

기능적 한계

재까지 약 53만 개 정도의 블록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모두 저장하려 면 최소한 200G 바이트 정도의 하드디스크를 확보해야 하고, 최초로

블록체인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

접속해 이를 모두 다운로드 받으려면 통상 열흘 정도 소요된다. 비

람이 궁금해하고 있다. 비트코인 블록체인이 구현해 놓은 세상은 A

트코인을 결제 시스템처럼 진화시

가 B에게 비트코인의 소유권을 이

킨다고 가정해 보자. 현재 비트코

전하는 것에 관해 기술하는 것에

인은 초당 3건의 거래를 처리하고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A가 B에서

있으며 이론적으로는 초당 7건 정

비트코인을 지급하되, 어떤 특정한

도 처리가 가능하다. 한편 비자카

조건을 만족할 경우만 지급하도록

드의 경우 초당 평균 2,000여 건을

하려면, 소스 코드 자체를 뜯어고

처리하고 있으며 최대 4,000여 건

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이러

을 처리할 수 있으며 이론적 최대

한 문제를 해결하며, 범용적 스마

치는 무려 초당 56,000여 건에 이

트 계약 기능을 지원한 이더리움의

른다. 만약 비트코인이 비자카드

등장으로 소위 General Purpose 블

의 초당 4,000여 건 처리를 따라잡

록체인이라는 또 다른 혁신을 통해

으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비

범용 블록체인의 시대가 구현되었

트코인이 현재의 시스템으로 초

지만, 이 또한 관점에 따라서는 지

당 4,000건의 계약을 처리하려면

엽적인 문제 하나만 해결한 것으로

하루 69GB, 연간 25테라바이트의

볼 수도 있다.

데이터를 저장해야 한다. 만들어 진 데이터는 네트워크를 따라 모 든 노드가 저장해야 한다. 이는 현 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 데이터 의 분산 저장 기술인 샤딩 등을 이 용한 새로운 방법이 논의되고 있지 만, 실효성은 여전히 의문이다. 현 상태대로라면 하루 치 합의를 위해 서 열흘 가까이 데이터를 전송받아 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암호화폐는 국가나 자본가의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화폐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블록체인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이다.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모델

암호화폐가 법정통화로 매매되는 한,

을 입증한 블록체인은 아쉽게도 아

과학 기술만으로 경제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습

절대로 독립적인 화폐가 될 수 없다.

잘 설계된 경제 시스템이 과학 기술을 활용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지속 가능성

직 단 하나도 없다. 블록체인의 잠 재력과 가능성을 위해서는 더 많 게도 블록체인 연구를 저해하는 가 장 큰 문제는 엉뚱한 곳에 있다. 현 재 블록체인의 여론과 정책을 이끌 고 있는 곳은 기술 진영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 이득만 노리는 완전

비 기술 집단이나, 블록체인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현재의 경제적 거품 블록체인의 기본 개념은 자발적 참여를 통한 자원의 제공이다. 그러

만을 누리려는 일부 교수들이 중심이 된 기술집단을 표방한 비 기술

나 사실 자발적 참여라는 말은 다소 진실이 왜곡되어 전달되는 측

집단이 블록체인 자체를 오도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면이 있다. 자발적이라는 의미는 봉사의 의미가 아니라 강제가 아니 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재 블록체인에 참여하는 가장 큰 이유

여기에 더해 존재 이유가 없는 중개소들은 블록체인의 뒤에 숨어, 암

는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이다. 달리 말하면 경제적 이득이 없

호화폐라는 거품을 통해 가장 많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으며, 세

다면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뜻도 된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비트코인

계적으로 하루에 20개 이상의 중개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만들어

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는 방법은 투기적 시장을 통한 매매가 전부이

지고 있다. 중개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암호화폐의 투기를 근절하지

다. 블록체인 자체로 수익을 내는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않는 한 진정한 블록체인의 등장은 쉽지 않다. 기술보다 투기가 수백

지속 가능한 모델을 구현하지 못하면 블록체인은 필연적으로 사라

배 더 보상받는 현실에서 미래를 위한 기술에만 전념하기를 기대하

지게 되어 있다. 그런 관점에서 현재로서는 비트코인이든 이더리움

는 탁상공론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명제인 셈이다. 47


Bitcoin and blockchain: Cryptocurrency, technology swallowed by avarice.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탐욕이 삼켜버린 기술 전 세계가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에 대한 맹신과 환상에 빠져 있는 듯한 이때,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술과 거품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블록체인을 설명해 주는 책이 등 장해서 화제다. 바로 KAIST 전산학과를 나오고 오랫동안 금 융계에 종사해 온 이병욱 CRAS 금융경제 연구소 대표가 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탐욕이 삼켜버린 기술”이라는 책이다.

시중에는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 관련 책들이 넘쳐 나고 있지만, 기

는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에 대한 경제적 의미를 설명한다. 책 한

술과 경제 부분을 객관적이고 종합적 시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책

권으로 블록체인에 대한 기술 이해는 물론, 현재 암호화폐의 거품에

은 찾기 힘들며, 오히려 판매되는 책들의 상당수는 비전문가들이 블

대한 경제적 측면을 이해할 수 있게 배려한 셈이다.

록체인에 대한 기술이나 경제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신봉하거나, 유명한 저널리스트 등이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내용을

“암호화폐와 비트코인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일까?”, “범용적인 블록

소화하지 못한 채 아무런 여과 없이 장밋빛으로 포장하여 전달하는

체인이란 어떤 것인가?”, “진정한 블록체인이란 어떤 것을 이야기하

식으로 객관성을 상실한 채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 현재 대중

는 것인가?” 등 대부분의 사람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명쾌한 설명

적으로 블록체인에 대한 정확한 인

을 담고 있다. 책의 성격과 내용은

식이 결여되고 편협 된 지식만 전파

기술서적이 분명하지만, 그 설명과

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저자 는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궁금하지 만, 제대로 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책이나 문헌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는 이야기다. 전산을 전공한 금융 전문가인 이병 욱 대표는 블록체인의 세부 작동원 리까지 기술적인 부분을 빠짐없이 설명하면서도 전문 용어를 최대한 자제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 상생활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현업에서 진정한 블록체인의 구현을 위해서는 9장에서 제시하는 6가지 원칙에 따라

장단점 분석을 통해 설계를 도모해야 한다. 이더리움이든 무엇이든

전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손쉽게 풀어 쓰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 이다. 저자 이병욱은 한국과학기술원

암호화폐가 운영하는 메인 넷에

(KAIST) 전산학과 계산이론 연구실

현재의 작업은

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서 세계

의존하는 블록체인을 개발하고 있다면, 그저 완전한 시간의 낭비일 가능성이 높다.”

있다. 탈중앙화 합의, 작업증명, 해

에서 학 ·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LG 전자 연구원 시절 미국 워싱턴 주 최초의 핸드헬드-PC(HandheldPC) 개발에 참여해 최초의 한글 Windows CE 1.0과 2.0을 공동 개발 하고, 최초의 파생상품 기반의 변액,

시퍼즐, 하드포크 등 블록체인의 모든 핵심 개념은 물론 실제 블록

저축 보험상품과 매일매일 분산투자 하는 일, 분산 투자 상품을 세계

내부의 데이터 구조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쉽게 설명해야 한

최초로 개발하는 등 전산을 전공한 금융 전문가로서 ‘최초’라는 수식

다는 핵심철학은 마지막까지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분석에

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인물이다. 최근에는 CARS 금융경제 연구소

기반해서, 책의 후반부에서는 암호화폐를 둘러싼 현재의 경제적 현

를 이끌며, 머신 러닝 기반의 인공지능 금융 분석과 블록체인에 연구

상을 풀이해서 설명하며, 암호화폐의 가치와 효용은 물론 그 미래에

를 하고 있으며,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는 강단은 물론 국방부나 대기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2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1

업체 등 다양한 강연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부에서는 블록체인의 기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2부에서 48


뉴욕스토리 에스카사 후원 영화

나는 엄마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엄마입니다”가 후원자를 모십니다. ‘I am Eomma’ 다큐멘터리는 미국 중부에 거주하며 장애를 가진 백인 두 자녀를 입양하고 키 우는, 재미교포 한국인 중년 부부가 사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부부의 생활은 수많은 입양 가 정이 어떤 삶을 사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그 부부는 ‘왜 입양을 하였나?’라는 질문도 던집니다. 영화 시청자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아직도 제 작 중이며 영화 완성을 위해서는 총 5만 불의 재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도움을 청합니다. 후원하시는 모든 분에게는 영화 엔딩 Credit에 이름을 올려드립니다. 또 이 다큐멘터리가 완성 되면 완성본의 링크를 여러분의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기도와 후원 부탁 합니다. 고맙습니다. – ‘나는 엄마입니다’ 감독 안경환 드림

미디어후원 뉴욕스토리

후원 방법 (페이팔) : ahnkh167@gmail.com 후원자 필수 사항 : ‌ 성함, 이메일, 후원금액 (보내실 곳: chaverimmedia@gmail.com) 49


ART&CULTURE

CHUN KWANG YOUNG SOLO SHOW

Chun Kwang Young, Aggregation 18 - JA006 (Star 1), 2018,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63 inches/160 cm ©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세계적인 한지 작가 전광영 화백 뉴욕 첼시 Sundaram Tagore Gallery초대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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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자료제공 Sundaram Tagore Gallery


Chun Kwang Young, Aggregation 17 - MA028 (Dream 7) (detail), 2017,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59.4 x 59.4 inches/151 x 151 cm ©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지난 5월 3일부터 7월 7일까지 뉴욕 첼시에 있는 Sundaram Tagore Gallery에서 세계적인 '한지 작가' 전광영의 초대전이 있었다. 2014년에 이어 뉴욕에서 4년 만에 다시 가진 이 전시회는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만 엄선해서 전시하는 세계 적인 갤러리로부터 초청을 받았다는 작가 개인의 기쁨을 넘어 한국 작가의 위 상을 살려준 점에 큰 의미를 갖는다. 전광영 작가는 홍익 대학교에서 미술 학사 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미술 대학에서 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 다. 2001년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었고, 2009년에는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 제41 회 한국 문화 예술 대상 대통령 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 품은 록펠러 재단 (Rockefeller Foundation)과 유엔 (United Nations), 뉴욕을 포 함하여 워싱턴 D.C.의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필라델피아 the Philadelphia Society Building 서울 시립 미술관과 호주 국립 미술관, 영국 런던 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국립 미술관 등에 등 소장되어 있다. 지면으로나마 전광영 작가의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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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 KWANG YOUNG AGGREGATION MAY 3 – JULY 7, 2018

Chun Kwang Young, Aggregation 17 - NV093, 2017,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73.2 x 60.2 inches/186 x 153 cm ©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Written and Photographed by: Sundaram Tagore Gallery Chun Kwang Young began his career as a painter, but shifted his focus to paper sculpture in the mid-1990s. Incorporating elements of both painting and sculpture, Chun’s Aggregations are assemblages: freestanding and wall-hung amalgamations of small, triangular forms wrapped in antique mulberry paper, often tinted with teas or pigment. Born in Hongchun, South Korea, in 1944, Chun grew up during the end of Japanese colonization and the brutality of the Korean War. In the early 1970s, he moved to the United States to pursue a Master’s Degree at Philadelphia College of Art, where he was deeply drawn to Abstract Expressionism. “It seemed to be the best way to freely express my surprise and sadness at witnessing the huge gap Sundaram Tagore Gallery (May 3rd to July 7th) was pleased to

between idea and reality,” he says.

present a solo exhibition in New York, where Chelsea was received an invitation from Chun Kwang-Young, a world-renowned

Over time, Chun became disillusioned with the materialistic drive

Korean artist. The show—the artist’s first in New York in four

that seemed to fuel the American dream and feelings of loneliness

years—features a comprehensive survey of work from his noted

intensified his longing for home. During this period, Chun’s

Aggregation series, which explores themes of harmony and conflict.

paintings, which explored the effects of light and color, reflected his

A great significance is shown here in saving the status of Korean

interest in Abstract Expressionism, however, he ultimately found the

writers beyond the joy of the individual artists who have been invited

expression inauthentic. Chun decided to return to Korea and focus

by a world gallery to exhibit carefully selected works from all over

on developing his own methodology, one that was wholly unique

the world.

and reflective of his history and cultur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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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elopment of Chun’s signature technique was sparked by childhood memories of seeing medicinal herbs wrapped in mulberry paper, tied into small packages and hung from the ceiling of the local doctor’s office. He became intrigued with the idea of merging the techniques, materials and sentiment of his Korean heritage with the conceptual freedom he experienced during his Western education.

Chun Kwang Young, Aggregation 00 - NV306, 2000,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64.6 x 52 inches/164 x 132 cm ©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Chun’s decision to use mulberry paper—known as hanji in Korea—

Rendered in a restrained palette of natural hues, the overall effect is

is significant. It embodies the essence of Korean history and imparts

organic, geological—almost cosmic in appearance.

a spiritual power, even in its most mundane applications. Derived from native trees and prized for its strength and ability to resist

Over the years, Chun’s Aggregations have become more colorful

water, hanji has been used in Korea for centuries for everything from

and evolved in complexity and scale, but the use of mulberry paper

writing and drawing to packaging and weatherproofing.

remains at the core of his practice. Although imbued with the spirit of Korean tradition and history, Chun’s work, with its intricate,

With history in mind, Chun sources paper from antique books.

abstract compositions, is grounded in a purely contemporary

“The hanji that I am currently using are from books between fifty

context.

and a hundred years old,” he says. “Each has its history and each generation of our ancestors’ joys and sorrows can be seen in the

A printed catalogue with an essay by Dr. Marius Kwint, reader in

thousands of aggregated fingerprints that make my work even more

Visual Culture, School of Art and Design, University of Portsmouth,

mystical and precious. It’s almost as if these fingerprints are trying to

U.K., accompanies the exhibition.

have conversation with me, to explain their reasons for being there.” To create his compositions, Chun starts with the triangular forms, which are individually cut from polystyrene, wrapped in hanji and tied with string made from the same material. He then adheres each wrapped piece to a flat support or sculptural substructure. Once adhered, some of the forms are painted by hand. The process, multifaceted and repetitive in nature, necessitates an almost meditative approach. Chun’s arrangements vary from seemingly uniform surfaces to works that burst from their frames, constituting low reliefs. His palette ranges from subtle, sepia-toned hues, which naturally result from the teas he uses to tint the paper, to pigments in vibrant blue, red, orange and yellow. Some of the works employ subtle shifts in tone and color to create the illusion of craters, dips and depressions.

Chun Kwang Young

received a Bachelor of Fine Arts Degree from Hongik University, Seoul, and a Master of Fine Arts from the Philadelphia College of Art, Pennsylvania. His work is in numerous public collections, including The Rockefeller Foundation and the United Nations, New York; the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 C.; the Philadelphia Society Building, Pennsylvania;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and the Seoul Museum of Art; the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anberra; the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and the National Museum of Fine Arts, Malta. He was named Artist of the Year by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Seoul, in 2001 and in 2009 he was awarded the Presidential Prize in the 41st Korean Culture and Art Prize by the Ministry of Culture, Sports and Tourism. 53


ART&CULTURE

박정화가 만난 음악인 두번째 이야기

전설을 지닌 성악가 베이스 김의진 글, 영문 Julie Junghwa Park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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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맨하탄 음대 석사과정 및 전문연주자과정 졸업 럿커스 뉴저지주립대 박사과정 중 귀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 콩쿨 뉴욕지구 우승 베리알렉산더 국제콩쿨 1위 Tanglwood Music Center, Aspen Opera, Virginia Opera, Martina Arroyo Foundation, Music Academy of the West, Connecticut Opera 주역 현 창신대학교 음악학과 교수 / 학생부처장 창원시립예술단 운영위원

화려한 음악가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삶 속에 숨겨진 속 이야기를 나눠보는 그 두 번째 글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시작해 본다. 주변 한인 음악가들의 삶 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후 미국이나 유럽 등지 에서 유학을 하게 되고 그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다 보니 결국 해외에서 정착하 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런 분들의 경우 미국 정부나 유럽 정부에서 그들 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여 영주권 또는 체류가 가능한 비자를 발급해 주기에 그들의 음악 실력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음악인, 아니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은 해외에서의 활동과 발급된 비자를 돌연히 모두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 람이 있다면 “왜?”라는 큰 의문이 생길 것이다. 세계의 성악가들이 선망하는 꿈 의 대회, 메트로폴리탄 성악 콩쿠르, 그중에서도 가장 경쟁이 치열하다는 뉴욕 지부 우승자인 성악가 김의진 씨가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었던 역행자(어떤 일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였다. 미국 대학 강의가 없는 여름방학 기간을 맞아 한국에서의 연주회와 공개 강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하게 된 나는 이 오랜 의문점을 풀기 위해 그를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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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소문 속 전설의 한인 성악가와의 첫 만남 오래전 미국 럿거스 주립대학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학교를 찾

경상남도 마산(馬山, 현 통합창원시), 서울, 그리고 뉴욕 맨하 탄의 유명 성악가가 되기까지

은 첫날 나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미국 내의 유명 음악 페스티벌

사실 성악가 김의진 씨는 음악가로서의 경력이 너무 화려해 처음 그

탄 콩쿠르 우승 후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전설의 성악가가 같은 학교

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진한 경상도 사투리 억양으로 ‘허허’ 웃으

에 모두 발탁되어 수많은 오페라 공연을 했고 뉴욕 지부 메트로폴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눈으로 직접 만나 뵙 고 그 성악가의 노래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혹 이 모든 소문은 그저

부풀려진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그와의 첫 만남 을 고대하던 어느 날, 그가 학교 오페라 리허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사를 채 나누기도 전에 베이스 김의진 씨가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 하던 그 순간 나는 다른 어떠한 말없이 그저 ‘아!’라는 감탄사 한마디 만 내뱉게 되었다.

안정된 발성과 깊이 있는 목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가사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감정적 깊이는 자연스레 나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였다. 또 한 오페라에서 노래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연기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뛰어난 호소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결같이 세련되고 능숙한 모습으로 리허설을 이끌

어 나가는 김의진 씨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의 소문이 그저 떠도는 이

야기가 아님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설레는 마음 으로 첫인사를 나누던 그 감격스러운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

는 투박하면서도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 “안녕하 ‘심’니까”였다. 아니 나는 분명 방금 무대에서 훤칠하고 세련된 도시남을 보았는데 지금

내 눈앞에는 옆 동네 아저씨와 같은 경상도 사나이가 있다니라는 생 각에 잠깐 멈칫하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와의 만남은 뭔가 선뜻 다가가기 어렵다고 할까, 쉽게 이야기를 나누 며 솔직 담백하게 대화해 나가는 그의 모습에 이 사람이 방금 전 무

대에서 노래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의 고향을 물어보니 서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할 거라며 경상남도 마산(馬山), 현 통합 창원시 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위 시골 소년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같은 경상도 내의 익숙한 도시 이름이긴 했으나 실제 로 그 당시에는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도대체 그는 어떻게 성악을 시작하게 되고 미국까지 오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물어보니 그는 동네에서는 꽤나 알려

진 다재다능한 아이였다. 공부, 운동, 노래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뛰어나다 보니 그의 부모님께서는 특별히 무엇을 목표로 세워 공부

하기보다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길 원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던 무렵 다니던 교회 성가대에 서 독창을 하게 되었고 피아노를 전공하셨던 어머니께서는 그의 목

소리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셨

다. 물론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변성기 가 지나고 난 후 그의 목소리는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나도 뛰어난 Timbre(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의진 씨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남자가 음악을, 그 것도 성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었어요. 소위 ‘딴따라’(비속

어로써 연예에 종사하는 배우, 가 수, 무용가 등을 통틀어 낮잡아 이 르는 말)라며 좋은 직업이라고 여 기지 않았었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늘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학교 공부에만 충실해도 괜찮았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좋아

하는 노래를 그냥 평생 부르고 싶

었어요. 부모님께서도 고민이 많으 셨지만 이런 저의 생각을 존중해

주셨고 재능을 믿어주신 덕분에 음 악을 시작할 수 있었죠.”

고등학교 시절 남들보다 어쩌면 조 금 늦은 첫 성악 레슨을 시작하게 되고 서울 연세 대학을 거쳐 미국

맨해튼 음대까지 오게 된 그는 본

격적으로 음악 콩쿠르, 오페라 페 스티벌 등을 거쳐 국제적인 성악가 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56


화려한 미국에서의 삶, 그리고 갑작스러운 귀국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창원으로 다시 돌아가다.

그의 30대는 화려했다.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서 뽑힌 소수 만이 참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한국 생활이 어떠냐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학

아스펜 오페라 페스티벌(Aspen Opera), 버지니아 오페라 (Virginia

고 대답했다. “왜 한국으로 돌아온 거예요?"라고 바로 뒤이어 질문하

여할 수 있는 탱글우드 음악 페스티벌(Tanglwood Music Center),

Opera), 코네티컷 오페라(Connecticut Opera), Music Academy of

the West, Martina Arroyo Foundation 등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악 페스티벌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고 뉴욕 카네기홀 및 링컨

센터 초청으로 오페라 갈라 콘서트, 그리고 모차르트 레퀴엠 독창자

로 협연을 하는 등 매일매일이 노래와 함께 사는 삶이었다. 활동 영역 이 넓어지다 보니 마냥 학생비자로만 미국 내에 체류할 수 없어 아티 스트 비자로의 전환을 알아보던 중 그의 변호사는 영주권 취득을 권 유하였다.

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주활동을 하느라 몸은 바쁘지만 마음을 즐겁다

려다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즐겁다’라는 말이

왠지 나의 궁금증에 대한 모든 답변이 된 것만 같았다. 뉴욕이라는 거 대한 예술의 도시에서 활동하던 그가 한국의 창원이라는 도시에 돌 아온 것은 어쩌면 마음이 즐겁기 위함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질문을 바꿔 던져보았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으세요?” 그는 묘한 미소를 띠

그의 이력서를 살펴보

며 이곳 학생들이 참

니 사실 성악가로서의

순수하고 착하다고 대

경력이 워낙 뛰어나

답했다. 미국에서도

EB1 (Extraordinary

개인 레슨을 통해 학

Ability; 뛰어난 능력

생들을 많이 가르쳐

의 소유자에게 주는

왔기에 늘 다양한 아

미국 영주권 비자)을

이들을 겪어봤지만 이

신청하기에 아무 문제

렇게 고향에 돌아와

가 없었기 때문이었

고향 학생들을 가르치

다. 아니나 다를까 비

는 것은 또 다른 기분

자 신청 3개월 만에 영

이라고 이야기했다.

주권이 발급되고 이

사건은 또 한 번 그를

김의진 씨에게 고향,

인사로 만들어주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

음악가 사이의 유명

그리고 고향 학생들은

이후 꾸준한 미국 내

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연주 활동을 이어 나

이번에는 창원이 좋으

가던 그는 학부시절부

냐고 물었다. 어릴 때

터 관심 있어 하던 오

뛰어놀던 그 골목, 늘

페라 연출과 전반적인

다니던 동네 교회, 같

성악 이론에 관한 심

이 자라난 어린 시절

도 있는 공부를 위해 박사과정을 시작하기

로 마음먹게 되었다. 굳이 공부를 더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연주자로 서 자리를 잡았지만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오페라 연출이나 음악 이론들에 관한 공부를 도전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를 비롯한 주변 음악가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그의 화

려한 미국 내 활동 이야기이다. 그리고 돌연히 그는 박사 과정이 끝나 갈 무렵 한국으로 귀국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활동하던 음악가 모두가 그의 안부를 궁금해할 무렵 그가 미국 영주권을 반납하고 창원시의 한 학교에 교수로 취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왜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간 것인지 직접 물어보지 않고 는 알 수 없는 이유였다.

친구들, 그리고 나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동네 어른들 이런 것 들 이십 년이 넘게 타지에서 떠돌던 자신의 마 음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대답했다.

“다들 영주권 받아 놓고 왜 한국으로 돌아가냐고 많이 물었죠. 뭐 하 러 그렇게 열심히 미국에서 활동했냐고. 그런데 그건 다른 이야기에 요. 꼭 미국에서 잘 풀렸다고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요? 나는 그냥 노래가 좋아서 열심히 했고 감사하게도 기회가 주어져

서 미국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그리고 우연히 고향에서 또 다른 기회가 생겨서 내가 사랑하는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이에요. 나

는 최선을 다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살아 갈 뿐이에요”

57


“성악가 이면 노래를 잘해야 하고 피아니스트이면 피아노를 잘 쳐야

하는데 잘 아시겠지만 이렇게 중요한 실기 능력은 개인 레슨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거든요. 음악학과 교수님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학교 본부와 상의 후 내린 결정이었죠. 전국 일반 대학교에서 이렇게 일주 일 두 번 레슨 하는 정책은 우리 학교가 유일하다고 알고 있어요. 사

실 개인 레슨은 1:1 교육이라 학교 경영 입장에선 강의료 지출이 상 당한 수업이고 요즘 일주일 한번 레슨도 시간을 줄이려고 하는 학교

들이 주위에 많이 있어요. 그와 반대되는 이런 힘든 결정을 해준 대학 본부가 대단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주 2회 레슨을 막상 시

작해 보니까 교수 입장에선 강의 시수가 많아져서 너무 힘들어요. 그 그동안 내가 들어왔던 그의 귀국을 둘러싼 무성한 추측들과 소문들

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듯한 대답이었다. 거주하는 곳이 미국이던 한

런데 학생들이 변해가는 과정과 만족도를 보면 예술가이지만 교육자 로서 정말 보람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국이던 그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마음이 즐거운 곳에서 열심히 살

학생의 레슨 시간과 학교의 정책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처음과

왔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가 거의 없던 그 시절 어렵게 시작해 미국에서 활동하기까지의 어려

아왔을 뿐인데 다들 마치 정해진 성공의 장소가 있는 것 마냥 생각해

의문점이 해결되고 나니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그 학교가 좀 더 궁 금해졌다. ‘순수하고 착하다’라는 그 학생들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주위에 성악, 아니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이

움을 몸소 겪었기에 고향에서의 음악 교육에 더욱 열의를 띄게 되었 다고 말했다.

물어보았다. 노래를 완벽히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노력해서

성실과 봉사

게 시작한 아이들이 많고 서울에 있는 학생들보다는 연주 경험들이

한참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음악가라는 것은 그저 한때 날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고 애가 쓰인다고 했다.

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머물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물밑에

어떻게든 배우려는 그 모습이 참 기특하다고 했다. 대부분 노래를 늦 부족하기에 마치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기에 김의진 씨가 재직하고 있는 창신대학교는 1990년도에 전문대학으로 시작하여 2012년에 4년제 대학으로 승격인가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설 대학이지만 그는 처음 임용되던 날 학교 설립 과

정과 그 이념을 보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했다. 남들보

다 조금 늦었던 첫 성악 레슨, 그리고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아왔던 자 신의 성악 인생처럼 창신대학교는 4년제 대학으로 바뀐 지는 얼마 되

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성실하고 남에게는 봉사하자’라는 이념 아래

꾸준히 노력해 나가는 그 모습에 많이 귀감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창 신 대학교의 음악학과는 독특하게도 개인 실기 레슨을 일주일에 두

번씩 한다고 이야기했다. (통상적으로 한국 음악대학 내의 1대 1개인 레슨은 일주일에 한 번으로 정해져 있다.) 58

아와 지저귀는 새처럼 잠시 아름다운 선율을 노래하고 지나가 버리

서 발장구를 치는 백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남 들이 평가하고 결론내어주는 삶이 아니라 성실하게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노력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눠주며 봉사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오늘 또 한 아름다운 음악가를 통해 삶과 음악을 배워 나간다. 글 소프라노 박정화 교수

• 현 펜실베니아 주립대학 락 헤이븐 대학 음대 성악과 교수 • 맨하탄 음대 석사 및 전문 연주자 과정, 럿커스 음대 박사 졸업 • 로린마젤 버지니아 캐슬턴 오페라 페스티벌 영아티스트 역임 • 미국 뉴욕 카네기홀, 야마하홀, 스타인웨이 홀, 디멘나 센터 독창회 • 독일 카셀 국립 오페라 극장, 뉴욕 리릭 오페라단 공연 • 배리 알렉산더 국제콩쿨 1위, AFAF 국제 콩쿨 1위


Member of Changwoon Arts Council New York district winner of the Metropolitan Opera National Council Auditions First Prize Winner of The Barry Alexander International Vocal Competition Operatic roles with Tanglewood Music Center, Music Academy of the West, Aspen Opera Theater Center, Virginia Opera, Martina Arroyo Foundation, Natchez Festival Opera Yonsei University, BM Manhattan School of Music, MM and Professional Study

Majority of Korean musicians that I know in New York City were born in Korea and came abroad to get world-class education. For some of them, the plan is to get a degree or a diploma before going back to Korea. But for many of them the goal and the dream is to obtain either a work visa (H-1 or O-1) or a green card so that they can stay in the states and build their career. For the second story of my interview, I would like to share a fascinating case of a highly successful musician who has decided to wrap up his promising career in the states, surrender his green card and return back home to Korea for a university teaching position. Mr. Eui Jin Kim, a bass singer, is the New York district winner of the much coveted and the notoriously selective Metropolitan Opera National Council Audition. He has been chosen numerous times to participate in prestigious music festivals including Tanglewood and Aspen. His musical career was blossoming as he became one of the most sought after bass singers in the field. However, after obtaining the U. S. green card, Mr. Kim decided to go back to Korea to teach at a university. This summer, I had the pleasure of meeting him in Korea to hear all the stories behind his life-changing decisions.

A Musician through a musician’s eyes: the second story

Professor of Music in Voice at Changsin University, 2014-Current

59


The First Encounter with a Legend

As a child, Mr. Eui Jin Kim was multifaceted. He certainly

When I began my doctorate study at Rutgers University, I

and writing. It was not until his mother, a pianist, heard

heard of a fellow Korean doctorate student who had obtained the green card after winning the Metropolitan Opera National Council Audition in New

enjoyed singing, but he loved sports as much as reading her son as a teenager singing a solo at church choir that she noticed an unusual talent with a unique timbre of

his voice. Mr. Kim

reminisces as the

York district and getting

following:

invited to practically all

of the top music festivals

“During the time of

in the US. He was a

my teenage years in

singer and was known

Korea, the general

as something of a legend

perception on a male

among the students in

musician, particularly

the music school.

a male singer, was not

the most admirable

The first time I met

and respected one.

h i m a n d h e a rd h i s

Becoming a musician

singing was during a

as a Korean man was

rehearsal for school’s

not something to be

opera production.

revered and be pursued.

The expressive timbre

I simply enjoyed singing

and emotional depth

at my church choir

of his voice was truly

more than anything

memorable and his

and I hoped to continue

stage acting delivered

doing what I loved to

a palpable drama with

do. My parents did have

conviction. I understood

some second thoughts

instantly why people

about supporting my

addressed him as

passion of making

something of a legend.

singing into an actual

Fro m C h a n g wo n (formerly Masan) to Seoul, then to New York City

career. But ultimately,

they believed in my

talent and respected my

choice. So I was able

to begin pursuing my

Before my first

dream at that point.�

Mr. Kim, I was a bit

Mr. Kim in fact had a

spectacular career as

but he continued onto

conversation with overwhelmed by his

late start as a singer,

a bass singer. With his first words of greeting

s t udy i n g a t Yo n s e i

University in Korea and

in Korean, I heard a thick country dialect of Gyungsang-do

then came to Manhattan where he began conquering his

small country town in Changwon, formerly Masan in Korea.

renowned opera festivals. His international career was

(Southeastern province of Korea). Apparently, he was from a

It was pleasantly surprising to see the juxtaposition of a refined and charismatic performer on stage to a humble and unpretentious man off the stage. 60

goals of winning competitions and participating in worldtaking off.


Success and Promising Career in the US, and an Abrupt Return Home

those years of hard work?’ So I tell them, just because things

Mr. Eui Jin Kim’s musical career in his thirties was quite

because singing is simply what I loved to do. Consequently,

spectacular, to say the least. He was invited to perform at Tanglewood, Aspen Opera, Virginia Opera, Connecticut

Opera, Music Academy of the West, and Martina Arroyo

Foundation among many. He played the major roles in countless opera productions and performed Gala concerts

went well for me in the state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I must stay and live there. I practiced singing deligently

some opportunities came and I had some success in the states. But then coincidentally I had a new kind of opportunity to come back home to Korea so I seized it. I am just following my heart and doing what I loved to do”.

at Carnegie Hall and Lincoln Center. As his career was

It was clear that to Mr. Eui Jin Kim, the location does not

to individuals with extraordinary talent in the fields of art,

has been simply following his heart and making the best out

building up, Mr. Kim sought to obtain the O-1 visa (granted music, sports, and more). His lawyer, upon reviewing his

resume, strongly suggested applying for the green card.

After all, Mr. Kim’s vitae was more than qualified to be

offer happiness. To him, a place does not entail success. He of every situation and capitalizing every opportunity along the way.

considered for the EB-1 (green card for an individual with

Mr. Kim went on about his teaching experience in Korea.

3 months (green card applications could take up to several

with their vocal training and lacks performance experience

extraordinary talent). The application was approved within years to be processed) and this made him famous among Korean musicians in NY area. Afterwards, Mr. Kim decided

to pursue a doctorate program at Rutgers University so that he could study opera staging and vocal theory. Although his

career as a singer was already established, he always desired to enrich his knowledge in other aspects.

This is about the extent to which many musicians including myself know of Mr. Eui Jin Kim’s career. Towards the end of his doctorate degree, Mr. Kim suddenly left to go to Korea

and never returned back to the states. Later on, I found out that he had surrendered his green card and decided to go back to his hometown in Korea to teach at a University.

The fact that many of the students had a late beginning

reminded him of himself during his childhood. Because he

as a youth did not have much access nor exposure to great musicians and education in his hometown, he feels even strongly to find it his own mission to provide good education for the young students.

Changsin Univerisity where Mr. Kim is now working, was only founded in 1990 and then became a four-year college

in 2012. Although it is a brand new institution, being hired at this place made him look back on his own life. The

University’s mission on constant growth under the vision of “Self-improvement and Volunteerism” resonated deeply with him.

Returning back to his hometown of Changwon, Korea

Mr. Eui Jin Kim is a living example that life is shaped and

Upon our reunion in Korea, I opened up our conversation

measured and defined by anyone but oneself. Mr. Kim

with a question, “How’s life in Korea?” Mr. Kim responded

that although juggling teaching students and performing is physically draining he is in such a wonderful spirit now then ever. His answer stopped me from asking my next question which was, “Why, did you move back to Korea?” His being in a great spirit had resolved my curiosity somehow. When

influenced by others but its intrinsic worth can never be exemplifies that true happiness and success in life is not

achieved by the number of trophies and awards, but by improving oneself as a musician as well as a person and

constantly sharing and helping those around that are less privileged.

asked about teaching, Mr. Kim smiled brightly and stated that the young minds are so pure and eager and working with them is utterly rewarding. Moreover, coming back to

his childhood hometown offers a special kind of warmth and piece of mind.

“Everyone has been asking me, ‘why are you going back to

Korea when you have earned the green card? Why after all

English translation Dr. Julie Junghwa Park

• ‌ Assistant Professor of Music at Lock Haven State University of Pennsylvania, 2016- Current

• Doctor of Musical Arts in Voice at Rutgers University

• Manhattan School of Music, Professional Study and MM 61


ART&CULTURE

Photography by Doyoung Kim

성공한 패션 사업 그 이유는?

IT와 패션 융합, 미래를 책임지다

패션만큼 역사가 오랜 비즈니스가 있을까요? 그런 만큼 이 산업에는 우리가 무심 코 흘려버리는 온갖 사연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만들면 팔리던 시대의 잔재에 허 덕이는 기업들은 서서히 시장에서 물러나고, 혁신적인 뭔가로 무장한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패션 분야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방법으로 패션 비즈니스를 이끌어 가는 회사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프라인 비즈니스를 온라인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패션 비즈니스의 근본에 대한 회의로부터 사업을 시작합니다. 다음 몇 가지 사례를 한번 보시죠. 글 Hyohyun Hwang 정리

62

편집부


www.everlane.com

REVOLVE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매출 1조 원을 넘긴 여성 패션

EVERLANE이라는 회사를 한번 볼까요? 백화점에서 옷을 살때 옷

몰입니다. 창업자는 패션 스쿨을 졸업하고 패션 인더스트리, 특히

값이 왜이리 비싼지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택 가격에서

여성복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한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오

몇십프로 할인해 준다고 하지만 MSRP(Manufacturer's Suggested

늘 제가 쓰는 글의 취지를 오해한 것입니다. 패션 일자무식 남자

Retail Price)로 불리는그 택 프라이스 자체가 의문투성이입니다. 에

두명이 창업한 회사입니다. 오로지 데이타만을 기반으로 패션몰

버레인은 아예 원가를 모두 공개합니다. 원단값 얼마, 가공임 얼마,

을 운영합니다. 잘 팔리는 칼라, 치마의 길이에 따른 판매 수량 변

물류비 얼마, 자기들 마진 얼마 이런 식입니다. 게다가 원단값의 변

화, 단추 장식의 유무 등과 같은 데이타를 판매와 동시에 제조업체

동에 따라 가격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합니다. 2010년 25살에

에 제공합니다. 이 쇼핑몰에 등록된 업체는 이 정보를 실시간으로

불과하던 마이클 프레이스라는 청년이 창업한 회사입니다. 이런 회

받아서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 다시 등록합니다. 자연히 매

사들이 늘어나면 패션인더스트리는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

출이 늘어나는 것이죠. 패션과 데이터가 어떻게 결합하는 지를 보

금합니다.

여준 예라 하겠습니다. 산업의 대세는 이제 직거래입니다. 중간 유통은 계속 제거되어 나갈 ZOZO TOWN 은 일본의 패션 쇼핑몰입니다. 이 회사는 등록하는

것입니다. 유통이 산업을 장악했던 것은 물론 정보를 독점한 덕분이

고객들에게 ZOZO SUIT를 공짜로 제공합니다. 어떤 옷일 것 같습

었고, 지금 유통이 위기인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정보가 공개되고 있

니까? 옷을 사 보신 분들은 경험해봤겠지만 내 몸에 딱 맞는 기성복

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보 과잉은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습니다.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 괴로운 일중 하나입니

이 스트레스로부터 고객을 지원해주는 분야가 새로운 산업이 되고

다. 이 회사는 사이즈가 S, M, L만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에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고 보니 패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IT 이

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ZOZO SUIT입니다. 이 옷을 입

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IT와 패션의 융합이 미래의 대세

으면 고객의 체형 데이터가 바로 조조타운으로 전송되고, 이 데이터

라고 해도 될까요?

를 기초로 고객에게 딱 맞는 옷을 골라서 집으로 5벌을 보내줍니다.

글 황효현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구매하고 나머지는 반품하면 됩니다. 지금 이 ZOZO TOWN에 고객으로 등록하여 이 SUIT를 받으려면 최소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군요.

연세대학교 경영학 전공Gyeonggi Textile Center New York 사무소 소장 Gyeonggi Textile Center New York President Yonsei University에서 경영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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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온 몸으로 느낀 바다의 감각(Sense of Sea)을 그리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바다 속 풍경을 전하는‌ 송연주 작가 송연주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바닷속 세계를 동경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몇

살부터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성인이 되어 미술학도가 되었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얻었다. 오랫동안 동경했던 바닷속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하나의 꿈을 이룬 것이다. 스쿠버 다이빙은 지난 10여 년 동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었다. 바다는 한 번도 같은 장면을 반복해 연출하지 않 았으며 늘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주는 장소였다. 들어갈 때마다 힐링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바다는 작가 송연주에게 작품 구상에 끊임없는 영감을 선사했다. 머 릿속에서 나온 관념이나 아이디어가 아닌 컬러플한 물고기와 산호초, 바닷속 수 많은 생명체에서 오감을 느꼈다. 그녀는 깊은 물속에서 ‘온몸으로 느낀 자극과 감 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로 대작으로 바다를 표현한다. 6월 말 첼 시의 K & P 갤러리에서 열린 송연주의 첫 뉴욕 개인전 <Memory of the Sense of Sea>은 작가가 체험한 바다의 느낌을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자리였다. 글 Won Young Park 정리 64

편집부


크고 작은 수상과 전시회 활동이 활발하다고 들 었습니다. “일본 공모전에서 14번의 입상과 수상을 했어요. 그 덕분에 2014년 미츠이 스이토모 그룹에서 6개 월간 전시도 했습니다. 타이완 Tainan University of Technology에서 작품발표와 심포지엄의 패널로 참 가했고요. 2016년 사토미술재단 미술관 장학생으로

미지의 장소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중세의 신화나 민화 속에

선발되어 2018년 3월까지 토쿄 신주쿠에 있는 사또

서 깊은 숲속이 야수와 괴물과 마녀들의 서식처로 자주 묘사된 것도

미술관장학생 초대전도 했습니다. 작년엔 토쿄 주일한국대사관 한

그 당시 과학과 문명의 수준에서 유럽의 울창한 숲은 인간의 손길과

국문화원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 대표 작가로 모래작가

지각이 닿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바다도 마찬가지였

김창영 선생님과 함께 2인전도 했지요. 올3월에는 토쿄 긴자 시로타

다. 자연 앞에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존재를 실감시키는 가장

화랑에서 개인전과 타마미술대학미술관에서 2층 전관에 전시를 했

압도적인 대상이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바다였다. 그 바다에

습니다. 뉴욕 전시회가 끝나면 9월에 한국 삼청동 갤러리 도스에서

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생명체가 탄생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여 글과 구전과 그림으로 오랫동안 전해졌다.

이처럼 많은 전시와 활동을 통해서 느낀 점은? 동시에 바다는 순수한 동경과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실 뒷면에 전시된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속 풍경이 아마

“지금까지는 바닷속에서 느낀 리얼리티의 표현이 중심이 되었어

도 그런 순수한 호기심의 대표적인 표현들일 것이다. 그런 그림들

요. 하지만 여러 각국의 사람들과 작품에 대한 커뮤니케이션을 통

속에서 깊은 바다의 산호초 사이를 아이들은 웃으며 헤엄치고 있고

해서 표현자인 작가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그 주위를 거북이와 고래와 물고기들이 웃으며 함께하고 있다. 천진

느끼는 리얼리티도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죠. 이런 점을 반영해

한 풍경이다. 송영주 작가의 그림을 둘러보며 기자가 느낀 것은 바

서 작가와 관람객이 함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작품 표

로 그런 종류의 천진함이었다. 깊고 투명하고 푸른 파다가 아닌 화

현과 전시형 태도 평면회화와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와 형태에

려하고 다채롭고 생명감이 충만한 바다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었다.

도전해보고 싶네요.” 65


드로잉 작품집을 갖고 계시는데 작품 시작 `전 드로잉과 작업 과정을 소개해 주시죠. “작품 제작의 프로세스에는 바닷속 공간에 서 보낸 기억을 기초로 해서 그 스토리를 드 로잉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 어, 전갱이 떼, 말미잘과 니모의 관계, 고래 상어와 빨판상어와의 관계 등을 떠올리죠. 드로잉은 나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창고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작업은 직접 체 험했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리얼리티가 있어요. 드로잉은 리얼리티를 표현하기 위 한 수단이지요. 여러 장을 그린 드로잉 안에 서 하나를 선택해서 캔버스 위에 색으로 표 현하고 그 위에 은박을 부침으로써 바닷속 으로 들어오는 빛과 공간의 표정을 시작으 로 그 안에서 느낀 유영 감각, 무중력 등의 감각을 표현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로잉을 은박 위에 올리는데 작품의 테마에 따라서 은박을 그대로의 색을 유지하기도 하며, 그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작품을 그대로 두 고 시간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작품을 보면 대부분 바다가 소재입니다. 한 그림만 고집스럽게 그리는 이유는? "에메랄드 빛 바닷속을 조금 지나면 끝없이 펼쳐진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다양한 움직 임이 있지요.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수 많은 생명체가 무한한 감동을 줍니다. 스쿠 버 다이빙을 하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체험 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네요. 그 감각 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자체가 저에게는 창 조의 행위이며 예술입니다. 대학 시절 시작한 스쿠버를 지속하면 서 바다는 제 일상과 작품, 생활 그 모두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고리

바다를 밖에서 보고 관찰하는 것과 스쿠버 다이버로서 느끼 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였습니다. 바다는 제 삶의 일부분이자 작품과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제 그림이 표현하는 것이 바로 제가 온몸으로 느꼈던 바다에 대한 자극과 감각의 기억이고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합니

스쿠버 다이버가 되어 바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이전 에는 주로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다. 바다에 들어가면 조금씩 수심의 깊이가 달라지면서 빛이 바뀌 고 바다의 색도 변하죠. 그 층에 다른 생명체의 종류에 따라 온갖 종 류의 컬러풀한 광경을 연출해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그때도 구상은 아니었고 주로 추상 회화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파란색이 모아진 것 같은 경이로운 푸름을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찬

그 시절에도 바다는 저에게 주요한 영감의 대상이었던 건 분명해요.

물과 더운물이 교차하면서 그 온도가 몸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감각

예를 들면 어떤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도 그 음악이 바다의 다이내믹

은 무어라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겠네요. 제가 그리는「바다」는 잠

함을 연상시키곤 했죠. 어린 시절 수족관에 갔던 기억이 문득 떠올

수를 통해서 처음으로 체험한 공간입니다.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 같

라 그걸 표현해 보기도 하고요.”

은 따스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해주죠. 마치 양수에 둘러싸인 느낌이 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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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주 작가는 일본 유학 시절에 도 그의 관심은 바다였다. 박사 과정 논문에서 그는 “나에게 있 어 진정한 공간은 호흡이 가능해 야만 살아 있는 안락한 지상이 아 니라 위험한 바다 속이다”라고 단언한다. 그를 지도했던 모토에 쿠니오 교수는 송연주가 표현하 고 있는 바다에 대해 “무엇보다 그 화면의 현실감과 진실성에 대 해 주목하게 된다”며 “송연주에 게 화면은 그대로 바다속이라는 현실 혹은 이미 그 일부이다”라 고 평했다.

전시되고 있는 모든 그림의 화폭 이 은박인 것이 흥미롭습니다.

뉴욕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과 반응이 궁금합니다. “은박 소재는 일본인에게 굉장히 친숙한 소재에요. 그런데 그들이

"바닷속 경험의 핵심은 무궁 무궁한 변화와 다채로움입니다. 그걸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장식적이며 빈 공간이 없이 금은 박은 메꿔서

한마디로 말하면 ‘신비로움’입니다. 그 신비를 그걸 어떻게 하면 캔

부치는 기법이에요. 전 그들과 다르게 표현하죠. 그런데 한국에서

버스라는 평면적인 배경에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

는 ‘일본에서 유학해서 그림이 일본풍’이라는 평을 들었어요. 그러

어요. 많은 시행착오 후 찾아낸 것이 은박 소재였죠. 일본에서는 은

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작품 스타일이라며 신선하다고 합니다.

박 소재가 작품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교수들이 평하길 제가

뉴욕 전시회장에서의 반응은 작품의 소재에 대한 얘기보다는 일단

사용한 은박은 그들과 조금 다르다고 하더군요. 은박은 빛의 반응에

“beautiful’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색상이 다양하게 변화하고 화학 반 응에 의해서 변색이 됩니다. 은박이 백색에서 검게 산화되어 변색되

다른 지역 전시에서의 관람객 반응과 다른 점이 있나면?

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각, 내가 바다에 깊이 잠수해 나갈 때 주의 정 경이 끊임없이 변해갈 때 느끼는 불안과 환희가 섞이는 느낌이 매우

“미국 갤러리나 아트 페어 작품은 유니크하고 시각적인 효과가 큰

흡사합니다.”

소재를 쓰는 작품이 많더군요. 한국과 일본에서 화려하다고 느꼈던 제 작품 소재인 은박이 오히려 미국에서는 평범한 소재구나. 싶었

은박 소재는 바다의 다채로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미디 엄으로 선택한 것이겠죠?

죠. 다만 은박 소재 작품은 빛의 각도나 반사,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 라 달라져서 이런 다양한 모습을 흥미로워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작품 스토리에 대한 관심을 주셨어요. 각자 자신의 경험한 수영

“은박은 단순한 시각효과뿐 만 아니라 내 시각의 카메라 필터를 통

이나 스노클링, 다이빙이나 수족관, 다큐멘터리에서 본 바닷속 등을

해서 표현한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바닷속 세계를 간접 체험하도록

연관 지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

돕는 거죠. 텔레비전의 영상이나 수족관에서 볼 수 없는 바닷속 세

해주셨고요.”

계의 신비를 관람객에게 온몸으로 느끼도록 해 주고 싶은 겁니다. 그림을 통해서 비현실 세계의 즐거움을 느끼는 거죠.”

송연주는 2014년 LA Lela International Exhibition 이후 11회의 개 인전과 60 회 이상의 그룹전 및 아트페어에 참석했다. 14회의 각종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가장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 는 공간입니다. 화폭에도 마치 생명처럼 변화와 퇴색의 과정 을 겪는 의미가 있겠군요.

공모전 수상 경험도 갖고 있다. 앞으로의 전시를 통해서 일본에서 의 5년간의 유학 생활 안에서 발견한 바닷속 표현에 대한 은박의 표 현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및 유럽과 미국에서도 나의 창작활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활기찬 도전을 시도하는 송연

“생명체의 기본이 움직임이듯이 바다 안에는 정말 다양한 움직임이 있어요. 작품에서 바닷속의 그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은박 조각을 붙이면서 리듬감을 표현하는 거죠. 깊은 바닷속에서 호흡을 하는 생활을 지속해 왔기에 바다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제 몸에 들어 와 있습니다. 바다를 모티브로 한 작품은 무수히 많지만, 제 작품이 조금 다르다면 그런 이유일 겁니다.”

주 작가의 앞날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송연주

경남 마산 출생(1982년생) 경남대학교 미술교육학과 졸업(서양화전공) 일본타마 미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 석사 일본타마 미술대학 대학원 미술연구과 박사학위 취득 및 졸업 67


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에스카사 새 코너, 새 필진 소개

미국 연방 에너지 규제 위원회 검사관‌ 이상원 박사 수필가, 언론인, 사회계몽가, 사상가, 재미 농공학자, 수공학자, 수문학 자, 환경공학자, 80518 카페주인장….. 이상원 박사가 현재 하는 일을 소 개하려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다. 이뿐만이 아니다. 버지니아 공대 (Virginia Tech) 농공학과, 노스이스턴대학교 토목학과, 브라운대학(Brown University)과 대학원 지질학과, 로드아일랜드주립대 환경공학박사 취득까 지 배운 전공과 대학도 그에 못지않다. 매사에 열정 또한 넘쳐서 ‘위안부’ 관 련 영문판 책자(Flutter, Flutter, Butterfly)을 기획하여 출간하고 미국 내 모 든 도서관 비치를 위해 어떨 땐 본업보다 더 열심히 뛰고 있다. 그는 샌프란 시스코 팔로알토에 살고 있으며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검사관으로 일하는 공무원이기도 하다. 이렇듯 현재 하는 일이 말해주듯이 이상원 박사 는 다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다. 9월호부터 이상원 박사의 ‘우리 이웃 이민 이야기’ 코너의 새로운 필진이 된, 이상원 박사를 만나 보았다. 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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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다니신 학교와 전공 소개만 해도 지면이 꽉 찰 듯 합니다.

군생활 중에 아내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복숭아로 유명한 소사북 국민학교(현재

군대는 현역으로 50사단 전투 공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의 부천북 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리고 부천중학교를 다니다

유공자로 만들어준, 광주 민주화 운동 중에 일어난 고문과 수감생활

가 서울로 전학하여 서울 선린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때부터 학

로 군 생활 중 오랜 기간을 대구통합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

교 숫자가 남들과 달라진 듯하네요. 고교도 서울 장훈고등학교를 입

다. 투병생활은 제 인생을 바꿔놓았지요. 잔인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학했지만, 중간에 전학해서 서울 영동고등학교를 졸업했거든요. 대

지냈다고나 할까요. 그곳에서 국군간호사관학교 4학년생도였던 지

학도 역시 그래요. 원예농장을 하시는 아버님의 영향으로 전북대학

금의 제 아내를 만났습니다. 이 얘기를 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듯하

교 농대 농학계열에 진학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어요. 당

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제대 후에는 한국잡지 연구소의 연구원

시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부당한 정권에 항거했지요. 그 일로 수감생

으로 근무하며 전공과는 다른 저널리즘을 연구했습니다.

활을 거친 뒤, 2학년 때 농공학과 농구 토목 전공을 택하여 토목환경 공학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유학을 와서는 버지니아텍 농공학과 대 학원에서 Nonpoint Source Pollution Control Modeling을 1년 반 공

유학 생활 얘기가 남들보다 더 많으실 듯합니다.

부하였고 이어 Northeastern 공대 대학원 토목환경공학과에서 토

군사독재 정권으로 인해 오랜 투병 생활을 거친 뒤, 대한민국을 떠

질공학과 수리수문학 등 환경공학의 틀이 형성되던 초기에 산성비

나고 싶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전공도 공부할 겸 미

대기오염 수질오염 등을 폭넓게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깊이있는

국으로 유학을 온 겁니다. 유학 후, 총기 사고의 불미스러운 기억

지하수의 거동을 연구하고 싶어서 Brown 대학 대학원 지질학과의

이 가시지 않고 있는 버지니아텍 농공학과 대학원에서 Nonpoint

Geophysics에서 공부하였고 마침내 University of Rhode Island 공대

Source Pollution Control Modeling을 1년 반 공부한 뒤에 좀 더 폭

대학원 토목환경공학과에서 Simulation/Modeling을 전공으로 박사

넓은 공부를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Northeastern 공대 대학원 토목

학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환경공학과에서 토질공학과 수리수문학 등 환경공학의 틀이 형성 69


영향, 그리고 지하수 오염 추적에 관한 Numerical Model을 개발하여 방사능오염 지역의 Simulation을 돌려 Historical 한 관 측 기록들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 공적으로 Model을 개발하여 Simulation Data 들과 관측 기록의 비교를 통하여 개 발된 Model의 우수성을 입증했지요. 현재 미국 환경청의 대표 Code로 주유소와 세 탁소 사업장의 토질 및 지하수 오염의 정 도를 측정하는데 대표적으로 쓰이고 있습 니다. 또한 보완된 여러 개의 Model 들과 특수 목적을 위해 개발된 Model들이 미 국방성 산하 미 해군과 육군 공병단의 표 준 Model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댐 안전 성들에 관련된 Model들이 미국 에너지 성 2016년 희말라야산맥 루프군드 주나가일 정상에 오른 이상원 박사

과 미연방 에너지 규제 위원회에서 표준으 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련 매뉴얼과 보 고서는 정부 문서로 발간되었고 주요 관련 학회와 저널에 발표되었지요.

되던 초기에 산성비 대기오염 수질오염 등을 공부했습니다. 대학 재 학 중 불포화대 지하수 오염에 관련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요. 그리고 학생 신분으로 쟁쟁한 석학들과 겨루어 미국 환경청의

현재 미국 연방에너지 규제위원회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곳 에서 하시는 일을 소개해주시죠.

불포화대 오염 추적 모델 프로젝트 등을 수주하기도 했습니다. 개인

미국 연방정부 업무와 관련하여 실제로 실무에 사용되는 Model들

적으로 공부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이어

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제 연구는 저널과 학회에 발표하는 논문을

깊이 있는 지하수의 거동을 연구하고자 Brown 대학, 대학원 지질학

주목적으로 하는 학교나 연구소의 R&D 인력과는 조금 차이가 있

과에서 Geophysics(지구물리학)를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University

지요. 즉 법을 집행하는 실무자들이 오염을 유발한 사업장의 사업자

of Rhode Island 공대 대학원 토목환경공학과에서 Simulation/

들에게 규제를 가하고 벌금을 부과하고 면허를 박탈하는 툴로 사용

Modeling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게 되었지요. 박사 과정 중에

하는 Model을 개발하는 거지요. 학교나 연구소와는 다소 입장이 다

수많은 미 국방성 산하 해군 육군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던 기억이

를 수는 있겠지만 연구 과정이나 방향은 비슷할 겁니다. 실무 공직

나네요.

자로서 시간과 공간이 그들보다는 열악한 연구환경에 놓여 있지만, 앞으로 몇 년간 Dam Safety와 Risk Assessment 그리고 대테러 예방

졸업 후 쌓으신 경력 역시 대단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등에 관한 Simulation / Modeling 개발이 주된 본인의 연구방향과

미국 플로리다 남서부에 위치한 Lee County Regional Water Supply

한국 환경부서에서 주유소와 세탁소 등 토질과 지하수 오염 사업장

Authority에 수석 Hydrogeologist로 근무했습니다. 이어 미국 연방

에 적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계획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 불포화 토질대의 오염 추적 모델을

공무원의 신분으로 미 육군 공병단의 수리수문조사관도 역임했지 요. 현재 미국 연방 에너지 규제 위원회에서 수력발전댐의 안전 및 대테러 예방과 점검, 수리. 수문 연구, 토질 안정성 연구, 구조안전성

필진으로 들려주실 얘기가 궁금합니다.

연구, 환경영향성 평가 등을 수행하며 주요 수력발전댐의 정기적 안

우리 주변에, 지금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위에

전점검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제 전문분야를 꼭 짚어 얘기하라고 한

서 흔하게 만날 수도 있는 분이지만, 한 분씩 만나보면 각자 노력과

다면 환경공학 전반과 토목공학에서 댐 안전공학 및 대테러 예방공

성실로 살아온 결과를 보여주신 분들이지요. 그 분야에서 크고 작은

학이라 칭할 수 있겠네요.

성공을 이룬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공이란 게 꼭 부는 아닙니다. 저는 이 코너를 통해 우리 이웃이 열심히 살아온 모습을 알려드리고

박사님의 연구분야는 일반인에겐 조금 어렵습니다. 그간 이루어 놓은 연구실적과 앞으로의 연구 방향 및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싶습니다. 제 표현의 한계로 더 멋있게 글로 담아 내지 못할지라도

맞습니다. 일반인이 이해하기엔 어렵습니다. 제 Ph.D. dissertation

야기가 “아기아 시급 12불에서 연봉 60만 불 용자 전문가로 변신한

은 불포화 토질대의 오염 추적과 그 오염물질이 지하수에 미치는

김민규 씨” 이야기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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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그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용기와 도전, 위로와 사랑, 그리고 희망과 행복을 얻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이


www.luxnlux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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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전 세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미국 최대 음식 박람회 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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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지난 6월 30~ 7월 1일까지 Jacob K. Javits 컨벤션 센터에서 ‘The Summer Fancy Food Show’가 열렸다. 1954년부터 시작된 Summer Fancy Food Show는 미국에서 가장 큰 식품 박람회 행사로 5만 스 퀘어피트의 넓은 행사장에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참여한다. 2018 년도 Summer Fancy Food Show에서는 2만500여개 업체가 참가하 여 180,000가지의 Specialty Food를 선보였다. 4만 여 명의 방문객은 Specialty Food를 맛보며 미래 음식문화를 짐작해볼 수 있다. 행사 중에 는 Sofi Awards 이벤트도 실시하는데 14명의 심사위원이 엄선한, 36개 식품 분야에서 156명의 ‘Fancy Food Show 2018’ 우승자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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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Fancy Food Show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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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ummer Fancy Food Show' was held at the Jacob K. Javits Convention Center from June 30 to July 1. This exciting show, which began in 1954, is the largest food trade show in the United States and takes place in more than 30 countries around the world at a wide venue of 50,000 sf. At the 2018 Summer Fancy Food Show, more than 20,500 exhibitors participated in introducing over 180,000 specialty foods. More than 40,000 visitors can freely taste these specialty foods and look forward to encountering these novelty treats again in the future. During the event, Sofi Awards events were also held, with 14 judges commemorating the birth of 156 Fancy Food Show 2018 winners in 36 food categ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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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휘둘리는 인간관계 끝내기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기

하루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나요? 친구에게 이런 부탁을 받 고 “에이~ 우리 사이가 이 저도 밖에 안 돼? 한 번만 도와줘라.” 회사의 상사 가 승진 기회를 주겠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 키워주려는 거 알지? 그러 니까 조금만 더 애써줘. “남자 친구에게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고 “우린 영 원할 거야 그치? 혹시라도 헤어지면 나 죽어버릴지도 몰라.” 부모님이 반대 하는 일을 하려다 이런 말을 듣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대학까지 보내 줬더니 너는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구나. ”일상적으로 주고받았던 너무나 익 숙한 이런 대화들…. 이 대화가 모두 정서적 협박이라는 것 알고 계셨나요? 글 책그림 정리

편집부

정서적 협박(emotional blackmail) 심리학자 수잔 포워드가 제시한 개념으로 부탁이나 위협, 압박이나 침묵 등의 직간접적 '협박'의 수단을 써 상대방이 좌절감이나 죄책감,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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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d by George Jung


“내 인생의 목적은 타인의 바람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타인의 부탁과 요구로 힘들게 짊어진 그 짐을 내려놓자. 이제 족쇄를 풀고 나를 돌아보자. 나는 나를 소중히 여겼는지 내 감정을 잘 챙겼는지 살펴보자.”

정서적 협박이란 상대방에게 죄책감, 좌절감,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느끼게 하여 결국 요구하 는 것을 들어주도록 만드는 행동입니다. 정서적 협박이란 여섯 단계가 있는데요. 부탁을 들어달라 던 친구와의 대화를 예로 들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지?”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정서적 협박자가 요구합니다. 또 “이번 엔 좀 바쁜데…” 부탁을 받은 우리는 이렇게 소극적인 저항을 합니다. “왜 그래 들어주기 싫은 거 야?” 친구는 이전과 달리 시원한 답을 주지 않자 친구는 자신도 모르게 압박을 시작합니다. “에이 우리 사이가 이 정도밖에 안 돼?” 늘 하던 이런 말과 함께 말이죠. 이 말은 의도치 않았지만, 위험이 됩니다. “내가 진짜 바쁜데 너니까 특별히 들어준다 알지?” 협박이 성공했습니다. 부탁을 들어주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과 함께 정서적 협박이 완성됩니다. “저기… 이번에도 내 부탁을 들 어줄 거지?” 바로 반복입니다. 쳇바퀴 돌 듯 지금까지의 과정이 반복되며 협박은 더욱 강화됩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정서적 협박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대만 작가 지우무쯔는 심리상담가로 만났던 수 많은 사람이 크고 작은 정서적 협박으로 힘들어하 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상담을 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기 위해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먼저 정서적 협박자의 마음을 살펴봐야 한 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기본 전략은 “내 요구에 따라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입니다. 정서적 협박기의 기준으로 보면 회사에서는 위에서 시키는 일을 묵묵히 참고 잘해야 좋은 사람이고 연인 사이에서는 늘 옆을 지키고 서로를 갈망해야 좋은 사람입니다. 부모의 요구를 따라야만 효자가 되 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 프레임을 씌우면서 죄책감을 이용하려는 전략입니다.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으면 이기적인 사람, 배은망덕한 자식이 되는 것이죠. 그래도 우리가 거절하면 그들은 화를 내면 서 두 번째 전략을 사용합니다.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고 좌절된 건 너 때문이야.”, “내가 지금 죽고 싶은 느낌 이 드는 건 너의 선택 때문이야.”라는 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우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많 은 분이 여기서 죄책감을 느끼며 협박에 넘어갑니다. 이때 저자가 말합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으신가요? 상대의 감정에만 맞춰준다면 당신의 감정은 누가 보 살펴주는가요? 상대의 감정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따르고 있고 다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내 가치관을, 내 감정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내 감정을 내가 중시하 지 않는다면 타인도 나를 똑같이 대할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세요. 상대방의 요구를 꼭 들어 준다고 해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요. 일시적인 만족 일시적인 관계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 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상대방과의 사랑은 멀어져 갑니다.” 아직도 정서적 협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보여 줘야 할 것은 끌려다니는 삶이 아닌 나 스스로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계속될 관계라면 나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같이 기뻐해 줄 것입니다. 글 출처: 책그림 영상의 일부에서 가져온 글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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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공(工)돌이 오성근의 공(球)이야기

‘공돌이’의 야구장 가는 길 _ ‌ Angel Stadium & Dodger Stadium 글 Sunggeun Oh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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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아내의 미국 순회 작품 전시회 일정을 따 라 나선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3주나 훌쩍 지나버렸다. 지난 6월 23일, 나의 버 킷리스트 1호인「MLB 30개 전 구장 관 전」의 3년 차 계획을 달성하겠다는 ‘설레 는 꿈을 안고’ L.A에 도착했다. 미국 도착 후 댈러스, 휴스턴, 탬파, 마이애미, 워싱 턴, 신시내티를 거치면서, 숨이 찰 정도로 그리고 서상희 씨의 표현대로라면 몸살이 날 정도로 소화해낸 일정들이 마구 뒤얽힌 채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어웨이 게임의 경우, 야구 선수들이라면 한 도시에서 세 게임씩 소화한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나의 일정으로는 한 게임 소 화한 다음 바로 다음 도시로 이동할 수밖 에 없었다.

6월 23일, 천사표 야구장 Angel Stadium 도착 당일 오후, 교통체증으로 유명한 도로, I-5 프리웨이를 거의 1시간 반이나 달려서 이번 3년 차 계획의 첫 구장이자 ‘나의 통산 8번째 MLB 구장’인 Angel Stadium에 도착 했다. 이 야구장의 랜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 는, 라이트 외야석 바깥쪽의 ‘A’자 위로 천 사 마크가 빙빙 돌고 있는 대형 타워는 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야구장에 들어설 때까 지 길잡이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었다. 아내를 포함한 일행 4명은 TV에서만 보던, 약간은 괴기스러운 ‘바위’처럼 보이는 돌화 산 옆 좌중간 외야석에 자리를 잡았다. 선수 들이 연습하며 오가는 그라운드를 보기만 하면 마음이 급해지는 나는, 일행에서 벗어 나 1루 관중석에서 외야석까지 한 바퀴 둘 러보면서 사진을 찍다가 에인절스의 선발 바리아 투수의 1st Pitch를 놓치고 말았다.

‘공돌이’의 야구장 가는 길 _ Angel Stadium & Dodger Stadium

투수의 자신감과 그날의 컨디션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

뉴욕 JFK 공항을 떠난 지 거의 6시간, 500명 이상이나 되는 승객을

시즌 초반,「이도류, 쇼헤이 오타니」의 활약으로 기세를 올렸던 에인

태운 KE082는 캐나다 북동부를 지나 고도 34,000피트의 북극해 상

절스의 현재 모습은 최근 수년간 보여준 그 특유의 팀 컬러대로 ‘혹시’

공을 조용히 날고 있다. 깊이 잠든 다른 승객들 눈치를 봐가며 창문

에서 ‘역시나’로 바뀌고 있는 추세이다. 무시무시한 아메리칸리그 동

덮개를 살며시 열어보니 창밖으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만 보일 뿐

부지구에서 양키즈와 레드삭스를 견제할 수 있는 팀으로 기대를 모았

시공간의 흐름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인천까지 아직도 8시간이나

던 블루제이스 또한 에이스 스트로먼의 부상으로 주춤거리고 있다. 오

더 날아가야 한다. 지금 시간은 8시 10분, 동부 지역 야구장에서는 3

늘의 매치는「역시나 팀」간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공교롭게도

회 초쯤 진행되고 있을 것이고 중부 지역은 막 1st Pitch가 이루어지

오늘 블루제이스에서는 스트로먼이 선발로 등판하여 재기 여부를 테

고 있을 타임이다.

스트하는 기분이다.

인데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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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로먼의 구위는 전성기에는 못 미쳤지만 5회까지 산발 5안타 무

맨해튼 비치, 리돈도 비치를 거쳐 롱비치로 이어지는「L.A 비치 대

실점으로 처리하면서 부상 회복의 청신호를 보인 반면, 볼은 빠르지

장정」이라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비치에서 부리나케 돌아와 선

만 아직은 덜 다듬어진 바리아 투수는 포볼을 남발하면서 매회 주자

셋 Blvd에서 비탈길을 터벅터벅 걸어올라 도착한 Dodger Stadium

를 내보내곤 했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 트라웃

은, 한 마디로 ‘산 비탈을 깎아 세운 콜로세움’ 같다고나 할까..

이 첫 두 타석에서 모두 삼진을 당하는 등 양 팀 모두 졸공으로 일관 하다가 3회 초 2번 에르난데스가 때린 솔로포로 블루제이스가 1-0

모두 4개 층으로 되어 있는 관중석은 맨 꼭대기 층(Top Deck)만 제

으로 리드를 지키고 있는 6회 초 상황에서 우리는 야구장을 뜨기로

외하고는 각 지상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산비탈의 경사지를 잘 활용

했다. Angel Stadium이 너무 추워(?) 더 이상 즐겁게 관전하기에는

한 야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문학 경기장이 조금 벤치

무리라고 판단되어 인근 라후나 비치(Laguna Beach)에 가보기로 했

마킹을 한 듯. 단, 각 층간의 이동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한정되

다. 7회 이후 오승환 선수의 등판이 유력하다는 걸 알면서도, 오승환

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야구장 유목민’에게는 매우 불편한 구조라

보다 ‘라. 후. 나.’라고나 할까..

고 할 수 있다.

6월 25일, 산 비탈 속의 콜로세움 Dodger Stadium

오늘의 매치는, 내셔널리그 플레이오프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

다저스 게임이 없는 일요일에는 야구 명문 페퍼다인 대학교 탐방에

다이아몬드백스의 예상외 선전으로 인해 오늘 맞붙는 이 두 팀은 각

이어 말리부 비치와 베니스 비치를 돌아보았고 월요일인 25일에는

각 2위를 달리고 있지만, 언제라도 1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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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커브스@다저스. 중부지구와 서부지구에서는 각각 브루워즈와


댈러스로 떠나야 하는 새벽 비행에 대비하여, 밤 9시 반 유니언 스 테이션에서 아내를 만나 공항 호텔로 이동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쉽 게도 7회 말에 야구장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L.A 두 게임은 공통 적으로 중간 스코어가 홈런 한 방에 의한 1-0일 정도로 빈공이었고, 그 이후의 동점이나 추가점도 모두 홈런에 의한 것이었다. 역시 메이저리그는 어느 시점에서 홈런이 나오느냐 하는 것이 승부 의 관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볼에 배트를 맞추는 데에 을 갖추고 있다. 동부지구에서도 브레이브스와 필리스가 예상외 선

만 급급한 동양권 타자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던 이

전을 펼치고 있어, 앞으로 내셔널리그의 플레이오프 대진표가 과연

유이기도 하다. 물론, 홈런에 의해서만 득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 짜이게 될지 많은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요즘

반드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우리 야구 선수들도 어릴 때부

추세로 볼 때, 슈어저가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셔널즈는 조금 어렵지

터 공이 깨져버릴 정도의 강한 스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다. 아메리칸리그의 경우는 한 자리에

이 바로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토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기

대한 이동 여부만 빼놓고 대진표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게 정

도 하다.

설이겠지만.. 다저스 선발 마에다에 비해 커브스의 언더우드 투수는 거의 신인급 에 가까운 무명 선수. 그런데도 2회 말 7번 에르난데스가 때린 솔로 포를 제외하고 다저스는 7회까지 안타 고작 4개라는 빈공에 시달리 고 있다. 오늘 게임에서는 7회까지 3피안타 9탈삼진에다가 단 하나 의 포볼만 내준 마에다 투수의 호투가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역 시 일본야구에서 투수 랭킹 1위를 달렸던 그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 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다소 가볍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동양권 선수로서 그 정도면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오성근(Sunggeun Oh)

서울대학교, KAIST 기계공학과 야구팀 대표선수. 야구명문 동산 중.고등학교에서 야구를 접하면서 자라났으나 체격조건 미비로 선수를 포기하고 틈틈이 블로그에 야구 전문 칼럼을 쓰고 있다. 최근 3년 전까지 동호인야구팀에서 15년 이상 활동. 대기업 10.5 년, KIST 3년 근무. 현재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21년째 재직 중. 첫 직장 대우중공업에서 ‘국내최고의 엔지니어’를 꿈꾸었으나 ‘오재박’이라는 별명을 얻는 데에 만족함. 진정한 엔지니어로 사 회에 기여하고 싶었지만, 정작 ‘진정성’을 필요로 하는 사회는 만 나지 못해 평생을 평범한 ‘공돌이’에 머문 듯한 느낌이다. 블로그 blog.naver.com/sgoh1 81


LIFESTYLE

제이미 변호사의 미국살이 경험 나누기

개인 재정(Personal Finances)‌ 관리는 빠를 수록 좋다

남편의 뇌출혈, 반신마비, 우울증, 실직, 파산, 숏세일…. 남편이 쓰러지자 불 행은 연속으로 이어졌다. 결국 집을 날리고도 남은 모기지에, 신용카드 빚, 로 스쿨 학비 론도 모자라 보증을 섰던 남편 빚까지 떠맡게 되자 난 순식간에 산 더미 같은 수 억 원대의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명색이 법을 공부한 내가 어 쩌면 그렇게도 개인 재정에 대해선 무지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 다.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엄청난 빚을 갚아가며 혼자 일하면서 아이를 양육해 야 하니 삶이 잔인하리만큼 힘겨웠다. 그때부터 공립 도서관에서 무료로 개 인 재정 책자를 닥치는 대로 빌려다 보았다. 퇴근 후에는 개인 재정 무료 세 미나와 행사장, 교육장을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방송에 나오는 개인 재정 프 로그램도 몇 년 이상 꾸준히 시청했고, 나중에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정부 지원금 신청해서 공인 개인 재정관리사(Certified Financial Planner) 자격증 취득과정도 기웃거려 보았다. 배운 대로 하나둘씩 실행에 옮 기자 자신감이 붙었고 한때 죽는 순간까지도 빚에 쫓기지나 않을까 하던 염 려는 이제 옛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가끔 주위 지인들 로부터 개인재정에 관한 조언을 부탁받는다. 내가 어렵게 배우고 터득한 지 식과 정보를 간단하게 나누려고 한다. 글 Jamie Kim 정리 82

편집부


개인 재정 목표와 단계

는 현금 유통이 가능한 은행구좌에 넣어두어야 한다. 투자나 적금 구좌가 아니라 이자율이 낮더라도 쉽게 벌금 없이 사용할 수 있는

1. Money Script (돈에 대한 개념)

돈이 있어야 불안감도 없어지고 돈이 착착 붙는다.

돈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첫 과제이

7. Retirement Fund (은퇴자금)

다. 돈은 중립적인 것이라 벌고 쓰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혹시 나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

적어도 총수입의 15퍼센트는 은퇴자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미국의

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자. 저축을 생활화하고 최대한 아껴야 부를

경우 은퇴자금 마련은 보통 세 가지로 나뉘는데 정부에 낸 세금으

축적할 수 있다.

로 나오는 social security benefit, 고용주를 통해 준비하는 401K와 pension,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IRA가 있다. 만일 직장에서 은퇴자금

2. Budget & Goals (예산과 목표)

적립금을 matching 해준다면 적극 활용하라.

수입과 지출 재산을 파악하라. 아무리 벌이가 커도 씀씀이가 더 크

8. Home (주택)

면 적자인생이다. 예산을 짜고 예산 내에서 지출한다. Pay yourself first! 저축하고 부가 쌓이는 걸 낙으로 생각하라. 5년 내에 이룰 단/

집은 투자라거나 집값은 오르기 마련이니 주택융자금 받을 수 있는

중기 재정 목표와 5년 이후에 이룰 중/장기 재정 목표를 세운다. 이

만큼 최대한 받아서 최대한 큰 집을 장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다가는

때 목표 달성 시기, 액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쪽박 찬다. 2008년 미국 sub-prime mortgage crisis의 교훈을 잊지 말자. 모기지는 15년 이하로 하고 예산 한도 내에 가능한 집을 무리

3. Insurance (보험)

없이 장만하라. Reverse mortgage 피하라.

아무리 수입과 지출 조정해놓고 재산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도 응급

9. College Fund (학자금)

한 상황에 적절한 보험이 없다면 길거리 나앉는 거 한순간이다. 건 강, 생명, 장애, 장기 간병, 주택, 자동차 보험은 기본. 단, 불필요한

자녀의 학자금은 자신의 은퇴자금 준비보다 우선순위로 두지 마라.

보험에 돈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보험의 필요성과 보험 수령액과

학자금이 모자란다고 해서 보증 서주 지도 마라. 2년제로 시작해서

기간이 적절한지 해마다 점검하고 조정해야 한다.

4년제로 편입하는 것도 학자 융자금을 줄이는 방법이다. 장학금과 파트타임 일을 하고도 모자란다면 학자금 융자를 하도록 권유하는

4. Estate Planning (상속계획)

게 길게 봐서 서로에게 부담이 없다.

상속 계획은 유언장과 신탁증서 준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의료 대리

10. Investment (투자)

인, 재정 대리인, 또 미성년자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법정보호인 지 정도 필요하다. 상속 계획은 돈 있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든지, 아직

위의 단계들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간다면 투자도 생각해보자.

한창인데 더 있다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상속은 크던 적던 누

단, 위험성이 큰 주식투자는 피하고 분산투자를 하는 게 좋다. 투자

구에게나 필요하다.

에 문외한이라면 (혹은 전문가라도) 워런 버핏도 강추한 뮤추얼 펀 드를 이용하면 불안감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시장을 이기려 하

5. Debt (빚) 부의 축적이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지 않으려면 빚 청산이 우선 되어야 한다. 빚을 갚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작은 빚부터 시작 해 큰 빚을 갚는다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이자율이 높은 빚부터

지 말고 시장을 타라.

위 내용은 개인 재정 전문가로 드리는 조언이 아닌, 제이미 변호사님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하고 난 뒤, 올려 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편집자 주)

갚아나가는 게 가장 좋다. 6. Emergency Fund (비상예비자금) 실직을 당했거나 비상시에 보험처리가 안되고 실비가 나가야 할 때 쓸 수 있는 자금은 꼭 마련해둔다. 6개월 내지 8개월 정도의 생활비

글 Jamie Kim

IRS Office of Chief Counsel, Assistant to the Branch Chief, Tax Attorney (미 국세청 세법 변호사) 이화여대, Temple University Beasley School of Law, Georgetown Law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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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피부에 뿌려 더 효과적인

‘천연 모기약 만들기’ 글, 정리

편집부

건강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샴푸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노푸

족'(NoPoo)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최근 건강에 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면 서 노푸족과 같이 화학 성분을 멀리하는 '노케미족'(No+Chemicals)들이 늘어나

고 있다. 이에 따라 각종 SNS에는 천연제품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TIP 을 예전보다 더 쉽게 볼 수 있다. 이 중 하나인 ‘피부에 뿌리는 천연 모기약' 만드는

법을 소개한다. 다소 번거로울 수 있지만,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고 직접 만들 어 더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천연 모기약으로 이 여름을 더 건강하게 나보자. 천연 모기약 준비물 100mL 용량의 스프레이 공병

워터 베이스 : 알로에 워터 70g, 무수에탄올(Anhydrous Ethanol) 90mL 아로마 오일 : 시트로넬라 10방울, 티트리 5방울, 제라늄 5방울 천연 모기약 만드는 방법 피부에 뿌리는 모기약이므로, 피부 보습과 진정효과에 좋은 성분을 주로 한다. 만 드는 사람마다 레시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필요한 원료는 크게 두 가 지다. 기본이 되는 워터 베이스를 준비해주고, 여기에 아로마 오일을 첨가해주면 손쉽게 완성된다. 다음 순서에 따라 천연 모기약을 만들어보자.

1) ‌ 먼저 재료를 준비한 후 모든 용기는 휘발성 에탄올을 뿌려 깨끗이 소독한다.

2) ‌ 피부 보습과 진정효과에 좋은 알로에 워터나 케모마일로먼워터 또는 피톤치드 가 풍부한 편백나무 워터 70g 정도를 빈 용기에 담는다.

3) 100mL 용기의 나머지 99%는 무수 에탄올로 채운다. 4) 아로마 오일을 첨가해 효과를 극대화한다. 천연 모기약의 주요 성분과 그 역할은?

천연 모기약의 주요 첨가되는 아로마 오일의 구성을 살펴보자. 먼저 모기 퇴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트로넬라 오일은 열, 기생충, 소화 등에도 도움이 되지만 벌레 퇴치제로도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여름에는 시트로넬라향을 모기향으로 주 로 사용하는데 천연 캔들이나 비누를 만들 때 이용해도 좋다. 티트리 오일은 칸디

다, 포도상구균을 포함한 박테리아를 박멸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항균, 진정작 용이 있어 여드름 치료에도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제라늄 오일은 살 균과 항염작용에 주로 사용된다.

아로마 오일은 만드는 사람마다 레시피가 달라질 수 있으며, 시트로넬라 오일 만 큼이나 호흡을 완화하고 염증 작용에 도움이 되는 유칼립투스 오일이나 스트레스

해소와 통증 완화, 모기퇴치 효과가 있는 페퍼민트 오일 또한 천연 모기약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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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내 구입문의 김진수 TEL : 201-232-5599 E-mail : jinsoo.kim@gitxmushroo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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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한여름에 즐기는 온천과 볼거리

뉴욕주 Saratoga Spring

Saratoga Spring은 우리가 알던 기존의 온천과는 다르게 건강, 레저, 운 동 문화 역사까지 한 번에 즐기수 있는 곳이다. 뉴저지, 보스턴에서 3시 간 떨어진 뉴욕주 업스 테이프에 위치한 사라토가 스프링은 미 북동부의 유일한 온천이다. 사라토가는 독립전쟁 당시 기세가 당당했던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 전세를 역전 시킨 주요 전 투지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를 자 랑하는 경마장과 폴로 경기, 골프 코스, 뉴욕 시티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및 재즈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여름 최고의 휴양지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휴가를 알차고 보람 있게 보낼 장소로 손색이 없다. 내년 여름휴가를 계획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곳이다. 글 정선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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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온천 Saratoga Spa State Park 안에 있는 스파나 리조트호텔에서 고혈압 과 심장병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 탄산 스파를 즐길 수 있다. 한국 온천과는 다르게 일인 일 실의 온천장에서 20분 정도 입욕을 하므로 사전 예약은 필수이다. 미네랄 약수터 방문도 건강을 위해선 빼놓을 수 없다. 경마 7월 20일부터 9월 3일까지 거의 매일 진행되는 경마는 온천만큼 인 기가 좋다. 가족이 함께 경마를 즐길 수 있다. 1964년부터 시작한 가

장 오래된 Travers Stakes 경마 경기는 가장 인기 있는 경마로 8월 25

일에 (8월의 마지막 토요일) 열린다. 오전 7시부터 입장이 가능하고 입장료는 $10이다.

공원과 다운 타운 쇼핑 가볍게 산책만 해도 아이들과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미국 독립전쟁 의 격전지 방문과 회전목마, 박물관 방문, 야외 공연, 캠핑 등 다양한 야외 활동이 가능하다.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과 고급 부티크, 레스토 랑, 갤러리가 즐비한 다운타운은 여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사라토가 퍼포밍 아트 센터(SPAC) 넓은 잔디밭과 인사이드에서 멋진 오케스트라 공연을 감상할 수 있

다. SPAC의 8월 메인 공연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공연이 예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여름밤 사라토가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즐

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프로그램은 1일 8시 차이콥스키 의 서곡 ‘1812’를 시작으로 2일 2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3일

8시 홀스트의 플레닛, 4일 8시 해리 포터의 ‘마법사의 돌’(영화와 함 께), 8일 8시 말러 교향곡 4번, 9일 2시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 10일 8 시 번스타인의 ‘Westside Story’, 11일 8시 ‘Star Wars: A New Hope’

(영화와 함께), 15일 8시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16일 2시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17일 8시 조슈아 벨 브루흐 바 이올린 콘체르토, 18일 8시 조슈아 벨 연주 ‘The Red Violin’(영화와 함께)이다. 영화 필름에 맞추어 연주되는 4일, 11일, 17일 공연은 누 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이라서 적극 추천하고 싶다.

경마장에도 멋진 모자로 치장하거나 남다른 패션 센스를 보여주는 부유한 미국인의 은퇴 마을인 Saratoga Spring은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휴식과 운동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올여름 최고의 피서지가 아 닐까 싶다. 자세한 여행 정보와 이벤트는 웹사이트 www.saratoga. com에서 찾을 수 있다.

글 정선분

바이올리니스트 매네스(Mannes) 음대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NY Classical Youth Orchestra 디렉터 클로스터 Sun Violin Studio 원장 87


문학관

아를, 어둠속에 풀어낸 태양빛

아를(프랑스어: Arles)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역에 있는 부슈뒤론 주에 속한 도시로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15개월 동안 머물며 전 생애 작품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3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88


아비뇽 GTV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갈리아

빛나는 카페들과 함께 파리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한 묘사로 시

신의 채취가 남아있는 아를의 거리를 걷습니다. 지금 나는 카발

여동생에게 쓴 편지 부분 -

의 작은 로마. 노란색 봉고를 타고 작은 시골 역을 빠져나와 당 르리 문을 지나 에스파스 고흐를 향하는 중, 머지않아 노란 집이

작되는데, 이 장면은 내가 방금 그린 것과 같은 거야.” - 고흐가

나오고, 밤의 카페가 나오고, 골목의 별들이 꿈틀거리겠지요.

고독이 문제였군요. 고독의 근원은 밤을 어둠으로 생각하고 싶

아레나 원형 경기장 앞에는 하얀 전기 꼬마 기차들이 여행객들

으면 견딜수 없었던 것이군요. 참, 당신이 그린 해바라기와 붓

을 싣고 지나갑니다. 이층 아치에 올랐습니다. 황토색 낡은 집들

이 촘촘하면서도 삐뚤빼뚤합니다.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 그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군요. 무질서 속의 질서 혹은 질서 속의 무질서로 인해 예술은 존재하는 것,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을 때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속이 뻥! 뚫립니다. 어우러졌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닮은 것이 없는 집들이 정겹습니다. 태양을 따라 아를에 왔다는 당신. 그때도 골목들은 좁고 어두웠을 테지요. 오 래된 골목들에 귀를 대어보니 숨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의문 입니다. 당신이 다녀간 골목에 꽃 한 송이도 없다는 것이… 레퓌

지 않았던 연유였을 것입니다. 당신은 고독에 별을 그려 넣지 않

꽃은 꽃이라기보다 짐승이었습니다. 왜곡된 선들이 꿈틀거리고 이글거렸지요. 나는 그것들의 눈에서 동물이 느껴져 화들짝 놀

라곤 합니다. 가끔은 해바라기 꽃 위에 내가 서 있지요. 묻고 싶 습니다. 보이는 것만 그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야 한다 는 고갱에게 왜 압생트 술잔을 내던졌던 것입니까? 인정받고 싶

었던 게지요. 아, 사람은 인정받지 못할 때 발작을 하는가 봅니 다. 예리한 면도날로 스스로 한쪽 귀를 자른 행위는 고독의 증거 아니, 발악이었던 것입니다.

블리크 광장의 골목은 더욱 그렇습니다. 음산한 미로가 되었지

다시 , 노란 집 앞입니다. 싱싱한 버터를 바른 것 같다고 했던 노

한 햇살이 골목과 골목사이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왜 당신이

까? 당신에게 노란 빛은 고독과 어둠을 부수는 삽 이었습니다.

요. 아를에는 알수 없는 골목들이 즐비합니다. 남프랑스의 강렬

환한 대낮보다 밤에 심취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태양 빛 을 따라 아를에 왔으면서도 어둠을 꿈꾸었던 사람, 붓이며 횃불 이었던 태양은 어둠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밤이면 가슴에 품 은 빛을 꺼내어 칠흑의 팔레트에 풀어내곤 했던 당신이여.

론강 주위를 걷다가 작은 골목을 도는 순간 탄성을 지릅니다. 노

란 벽에 ‘카페 반 고흐’ 라고 적힌 익숙한 카페가 보입니다. ‘밤의 테라스 카페’ …. 그 무렵 밤하늘은 수정 빛이었는데, 수정빛 바

다에 별이 둥글둥글 달팽이 모양처럼 떠 있었는데, 별들이 꽃처

럼 지상에 가지를 흩뿌리고 또렷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란 집. 절망과 꿈이 공존했을 것 같은 노란 방. 기억하고 있습니 노란 문을 밀고 들어가면 계단을 지나 노란 방이 나올 테지요. 현실이든 꿈속이든 상관없습니다. 존재는 이미 허구를 벗은 것

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카페 앞을 서성입니다. 론강이 내려다 보이는 밤하늘에 별들이 떠다니고 바람이 벌판을 지나갑니다.

로열 불루 하늘에 소용돌이치는 별 틈새로 당신이 둥근 원을 그

리며 내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미친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정신병자였을 테지요. 당신은 불통속의 비명이었을 뿐. 검은 팔

레트에 태양 빛을 풀어낸 당신. 따스한 빛을 찾아 젊음을 불태웠 던 그대여.

그 무렵의 골목들은 별들이 많아 수려한 밤이었는데, 오늘은 카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군요. 상점의 불이 모두 꺼집

빛보다 밤의 색채가 풍부했던 당신. 어둠 속에서 태양을 풀어내

럼 열리는 당신.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미스트랄 바람처럼 골목

페 라 뉘의 가스등이 희미합니다. 당신의 빈자리가 큽니다. 낮의 곤 했던 그대여. 아를의 여인은 보이지 않고 낮은 불빛 아래 두

런두런 속삭이는 사람들을 옆에서 오래된 당신의 편지를 읽어 봅니다.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바로 이곳에서 밤을 그리

는 것은 나를 매우 놀라게 하지. 창백하리만치 옅은 하얀 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 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검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

용했어. 그리고 그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 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

거웠어. 기 드 모파상의 소설 ‘벨 아미(Bel Ami)’는 대로의 밝게

니다. 도시가 고요해지면서 카페의 불이 환해집니다. 가스등처 어딘가에서 툭, 튀어 나올 것만 같습니다. 이렇듯 서성이다 보 면 프로방스의 하늘이 쪽빛으로 펼쳐지는 아침이 올 테지요. 아 침이 오면 따스한 햇살 한 줌 등에 업고 빨간 지붕들과 이프섬이 있는 마르세이유, 기차를 탈까 합니다. 글 김은자

숙명여대 졸, 월간 시문학 등단. 시집 <외발노루의춤>, <붉은 작업실>, <비대칭으로 말하기>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 들어온다> < 이상한 유추> <혼자 닦는 별> 재외동포 문학상 시부문 대상 , 윤동주 문학상 (해외동포 부문), 제1회 해외풀꽃 시인상,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 당선. 환태평양영화제 최우수시나리오상. 재외동포문학상 심사위원. <붉은작업실 문학교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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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칼럼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 글 박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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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는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는다’는 이어령

중국 당대 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시인 백거이에 얽힌

는지 모르겠다.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어령

때 일이었다. 하루는 백거이는 나무 위에서 참선을 즐기고 있

교수의 이 평범한 말이 왜 며칠째 나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

교수는 학창시절 존경했던 지성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수필

집 ‘축소지향의 일본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서’를 읽으며 느 꼈던 격한 감동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런 일화가 전해온다. 백거이가 황지우 현리로 재직하고 있을

는 그 시대의 유명한 도림 선사를 찾아가 나무 밑에서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고 도를 구했다. 이에 선사는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하고 대답했다.

젊은 시절 그토록 독창적이고 예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

백거이가 “그거야 삼척동자들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고

평범한 말로 나를 또 한차례 감동시키는 것일까? 인생은 오래

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 진리다.”라고 비웃었다.

며 분석하고, 해석했던 그가 나이 들어 암으로 투병하며 이런

살고 볼 일이다. 아마도 그가 50여 년 전에 이런 평범한 말을 했

더라면 ‘삼척동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도사인 척한 다’며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성숙해져 간

다는 의미다. 성숙해진다는 것 은 평범한 눈으로 남을, 세상을 보다 폭넓고 깊게 이해해 간다

는 의미다. 또 최고의 비법은 최 고의 평범함이라는 사실을 자

각해 가는 과정이다. 그렇잖아 도 며칠 전에 나 또래 나이 한

지인과 점심을 함께하며 “이 세

일축했다. 그러자 도사는 “삼척동자도 알지만 여든이 된 노인 그렇다. 진리는 간단하다. 그래서 이해하고 실천하기가 어려 운 것이다. 늙음은 만인에게 공평하다. 죽음도 공평하다. 그러

나 늙음과 죽음을 순간순간 가 슴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진리가 무엇입니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이 결코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라”

“그거야 삼척동자들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삼척동자도 알지만 여든이 된 노인도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 진리다.”

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세요?” 하고 내가 물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돌출 질문에 그 친구는 “글쎄 요”하며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바 라보고만 있었다.

아니다. 가슴의 느낌으로 살라 갈 일이다.

흔히 바보를 일컬어 “비천도 구

분하지 못하는 놈”이라고 비아 냥한다. 땅과 하늘도 구분할 줄 모른다는 의미다. 그러나 땅과

하늘만 가슴으로 구분하고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도 인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나도 곧 죽는다…...

“우리 나이에 자기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하 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이 세상에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들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비꼬는 투로 응 수했다. “그렇지요. 머리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지요. 그러

나 죽음을 가슴으로 이해하며 순간순간을 절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자기는 예외라고 믿으려고 하지요.” 내 말의 참뜻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평일

부동산 감정사

경복고, 서울대 농업경제학과 졸업 Clifton, Virgini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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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행운의 누명

A Dishonor 글 조현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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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신문사에 다닐 때 결혼을 했다. 집안에서 길일을 택해서 음력으로

다. 그때 나는 “우리 아들은 휴대폰이 효자 노릇을 하는 것 같다.”

신문사에서는 1년 중 단 하루 쉬는 날이었다. 신랑은 KBS의 PD였

지만, 전화 한번 안 한다.”며 흥분하며 말했다. 하긴 많은 엄마가 한

날을 잡았는데 영력으로 4월 7일이었다. 4월 7일은 ‘신문의 날’로 으므로 이래저래 매스컴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바쁜 와중에도 많

이들 참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거의 26세에 가까웠던 신부는 순진

했던 건지 멍청했던 건지 덜컹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 나는 겁이 더럭 났다. 양가의 부모님들이 계시지 않아 둘이 열심히 벌어 전세

방이라도 얻어야 할 형편인데 아기가 불쑥 나오면 여러 가지로 곤

라고 말했더니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 아들도 휴대폰이 있 국말을 못 하는 아들과 영어로 안부만 묻고 끊는다고 들었다. 아들 은 다행히 고교 때 이민을 와서 나랑 친구처럼 한국말로 대화를 한

다. 꼭 효심이 아니라 우리 일상생활을 낱낱이 미주알고주알 다 알 려고 한다. 자기 일과도 물론 다 얘기한다.

란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내가 결혼하자마자 우리 국장님은 “요

아들이 이화부속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나는 딸 둘을 떼어 놓고 몰

나면 나를 격려해 주시곤 했는데 말이다.

뮤직’이나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명화를 보러 다녔었다. 아들은

즘 여성들은 결혼해도 자기 직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틈만 나는 마치 철부지 십 대 여성이 사고로 임신을 한 것처럼 죄의식을

느꼈다. 고민 끝에 생전 처음 산부인과를 찾았다. 친구 어머님이 원 장선생님이었으나 따님 친구라는 말은 안 하고 상담하는 환자로

찾아갔다. 한참이나 끙끙대며 뭐라 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 무 기억도 안 난다. 원장 선생님은 눈치를 채셨는지 “첫아기는 유

산시키면 안 됩니다.”하시는 거였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들어서

래 아들만 데리고 영화 구경을 많이 하였다. 이를테면 ‘사운드 오브

학교 선생님이 어쩌다 영화에 관한 얘기를 하면 이미 다 본 영화라 서 신이 났고 기뻤다고 말했다. 이렇듯 우리는 마치 둘만 아는 비

밀이 있는 친구처럼 가까웠다. 맹세코 지금 나는 아들이 태어날 때 가졌던 죄의식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난 세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그 생각은 거의 망각한 채 살았기 때문이다.

얼떨결에 “유학가야 하기 때문에요 선생님….” 나도 모르게 거짓

아무튼 첫 아이가 예정일에 딱 맞춰서 이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난

받았지만, 당장 공부하러 갈 생각이 없어서 결혼했었다. “유학가더

첫 아이가 태어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통 태아는 엄마 뱃속에

말이 나왔다. 사실 그때 나는 미국의 모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라도 아기는 낳아놓고 가라”는 게 원장선생님의 결론이었다.

그때 어머니 같은 그분을 찾아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잃어버릴 뻔하지 않았는가. 요즘엔 아들은 소용없 고 딸만 좋다는 세상이다. 미국이 하도 넓어서 같은 하늘 아래 살 고 있지만, 아들 얼굴은 1년에 서너 번밖에 못 본다. 그래도 나는

딸도 좋지만, 아들은 더 좋은 것 같다. 치과의사인 아들은 일터에

서 집에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주로 전화를 한다. 한 주일에 평균 서 너 번은 꼭 한다. 언젠가 어느 모임에서 효도 얘기로 화제가 모였

누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7일에 결혼했는데 12월 12일에 40주를 머문다. 그런데 그 계산보다는 사람들은 8개월이란 숫자만 생각하고는 내가 속도위반을 했다고 누명을 씌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누명이야말로 참으로 행운의 누명이라고 생각되어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조현례 강원도 출생. 경기여중,고 졸업. 이화여대, 동 대학원 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여성생활, 소년한국일보 기자. 이화여대, 단국대 성균관대 강사 역임 수필집 ‘보이지 않는 유산’ ‘너와 내가 만나는 곳’ 저자 93


문학관

65세 노신부가 들려주는 아프리카 잠비아 이야기(3) “신앙의 선물”

아프리카 잠비아 ‘피데이도눔’‌ 사제 김한기 신부

한국의 천주교 원주교구 소속으로 5년 임기를 정하여 아프리카 잠비아의 은돌라 교구에 파견된 피델이 도눔 선교사인 김한기 신부님의 연재입니다. 피델이 도눔 (Fidei Donum)은 말 그대로 “신앙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선물이란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것으로 “너희가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라는 성경 말씀처럼 실천하는 뜻 을 지닙니다.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루 어질 수 없는 것으로 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전하고 계시는 김한기 신부님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글, 사진 김한기 정리 94

편집부


잠비아에 오기 전에 따로 비자를 받지 않았다. 공항에서 임시 비자를

습, 문화가 참 힘들었다. 영어와 현지어를 섞어 쓰는 현지인의 말은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 달이 채 안 된 상태에서 수도 루사카로

서 독립, 영어가 공용어이긴 하나 대부분 사람들은 현지어를 주로 사

받은 것이 전부이다. 9월 15일에 도착했는데 10월 3일까지만 체류할 내려갔다. 그날이 10월 3일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선교에 필요한 고용

비자(Employment Visa)를 얻기 위해 새벽 6시 반에 은 돌파를 출발, 루사카의 잠비아 이민국에 가서 2년 비자를 받고 저녁 10시 반에 돌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잠비아는 지난 1964년에 영국 식민지 상태에 용한다. 영어도 아프리카 특유의 악센트가 있어서 표준어가 아니니 더 어렵다.

아왔다.

그래도 내 삶이 이곳 사람들에게 선물이 되려면 우선 내 생활이 안정

교구의 운전사인 야콥 부스 씨의 운전으로 340km나 되는 먼 거리를

문에 힘이 들었다. 모든 걸 내가 부담해야 하는 게 마치 큰 손해를 보

다녀오느라 힘은 들었지만 보람된 하루였다. 결국 신앙의 선물을 나 누어 주기 위해 고용 비자를 받은 거다. 누군가에게 고용되면 임금을 받아야 하는데 임금은커녕 오히려 제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할 판

되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이유 때 는 느낌이었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다. 사실 그날도 자동차 기름값은 교구에서 대주었지만, 그날 모든

지난 해 10월 초, 한국 은인들의 도움으로 이곳 프란시스데일 피정센

기사 봉사료 등 이것저것 모으니 적지 않은 경비가 든 셈이다.

세)에게 선물을 주었다. 받는 이나 주는 이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었

경비는 다 내가 부담해야만 했다. 톨게이트비와 식사비 그리고 운전

터의 동료 사제와 부제, 그리고 부제품을 앞둔 신학생(이들 모두 30 다. 또 휴대폰도 오래되고 낡아서

사제(신부) 양성

기능도 없다. 그

의 요람인 루사카

래서 새 폰으로

의 도미니코 신

교체해 주었다.

학대 학과 대통령

지난해 8월에 서

관저 등 시내 일

품을 받은 파이어

원을 돌아보고 마

스신부의 경우 교

침 동행한 카통

구에서 받는 미사

고 부제의 아버님

예물이나 생활비

(2011,11,3 선종)

가 전혀 없다는

묘소가 루사카 시

딱한 사정을 듣고

내에 있어서 들려

많지는 않지만 조

서 기도했다. 또

금 보태주었다.

함께 간 신학생 레오나르드의 노

트북 컴퓨터를 구

내가 맡고 있는

스피커 등 쇼핑도

은 신자들이 돈이

성 마티아스 성당

입해 주고 본당의 간단히 했다. 루

없다. 그래서 적

사카는 이곳 은 돌아보다 훨씬 큰 도시로 이 나라의 수도이자 최고의

지만 신부인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젠 정식으로 비자를 받아서 잠비아 선교사가 된 것을 걸 실감한다. 마

성당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낡고 오래된 성당을 개보수한 것이다. 앞

도시인데 인구는 174만 명으로 생동감 있고 활기가 넘쳐 보인다. 이 음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짐을 새삼 느낀다.

다행스러운 건, 교구의 배려로 인근의 미리 키시 농장 미션의 차량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이곳 운전면허가 없다 보니 12월 초까지 운전면

허를 따야 해서 과정이나 경비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곳 동료 신부의 도움을 받아 운전학원에도 다녀야 하고 교구를 비롯한 시내를 다니

다 보니 기름값과 차량 운행비가 여간 많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 에다가 보험료, 차량 수리비, 타이어 교체 등 큰 부담이 되었다.

당시엔 지금보다 비포장이 많았고 남에게 부탁해서 차를 얻어 타고

다니다 보니 피로감과 짜증이 났다. 여기에 찌는 듯한 더위까지 더하

니 죽을 맛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물론이고 달라진 환경과 관

마련해 준다. 지난 5월 18일부터 한국 신자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으로도 이 지역이 지난 1931년 4월 8일에 이태리 프란치스코회 선교 사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은돌라교구의 기초를 세운 곳이기에 개발

이 계속 되리라.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물론 학생들 장학금을 마련해 주고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이일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이고 신앙의 선물인 것이다.

잠비아 선교지에 후원을 하실 분은 신부님 이메일로 알려주시거나 에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한기 신부 이메일: hankikim2817@hanmail.net 문의 Tel 201-560-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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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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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도 죽을 때까지 봐도 다 못 본다는 예술품 보물창고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 미국 뉴욕에는 크고 아름다운 미술관이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뉴 욕 센트럴 파크 동쪽에 붙어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은 최고 중 최고의 미술관으로 손꼽는다. 방 대한 소장품의 숫자와 엄청난 가치를 지진 예술작품은 대대로 살아온 뉴요커라도 죽을 때까지 봐도 다 못 보고 죽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글

편집부 사진 George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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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의 소장품은 전 세계에서 수집된 역사적으로나 문화 적으로 큰 의미가 담긴 예술품만 무려 150만 점에 이르는, 엄청난 양을 자랑한다. 2017년 2월 미술관 측은 그중에서 추린 375,000여 점의 예술작품을 디지털 사진 자료로 기록해, 온라인에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공개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쪽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고해 상도 디지털 사진으로 된 예술 자료를 무료로 내려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욕타임스> 등의 보도에 의하면, 토마스 피 캠벨 메트로폴리탄 관 장은 “예술품 6만 5000여 점을 추가로 디지털화했지만, 아직 공개하 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세계 최고의 예술작품을 사진으로 보 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뉴욕 여행을 와서 이곳 하나만 보고 가 도 반 이상은 봤다고 얘기할 수 있는, 뉴욕의 대표성을 가진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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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지난 50년간 정해진 입장료 없이 관람객이 원하는 만큼 기부금 형식으로 대중에게 개방해왔다. 그러나 2018년 3월 1일부터 뉴욕 주민이 아니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다니엘 와이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회장이 공식 블로그를 통해 밝 힌 내용에 의하면, 관람객 수는 증가했지만, 입장료를 낸 관람객은 엄청나게 줄어들어서 미술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전 세계 대형 박물관 중 유 일하게 기부에 의존하고 운영 자금을 정부로부터 지원받지 않는다. 민간인 주도로 설립된 미술관 성인 입장료는 25달러, 65세 이상 노인은 17달러, 학생은 12달러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866년 미국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러나 기존 기부금 형식도 탄력성을 두어 운영하고 있다. 즉, 뉴욕

파리에 모인 미국인들 모임에서 제안되어 설립되었다. 1870년에 소

주민과 뉴저지, 코네티컷에 사는 학생들은 현재의 ‘기부제’에 따라

규모로 개관하였으나 1880년 지금의 자리(1000 Fifth Avenue. New

입장이 가능하다. 단, 거주 사실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York, New York 10028 )로 이전하였다. 그동안 기금을 통한 구매과 기증 등으로 소장 미술품은 숫자가 급증하였으며 현재 회화와 조각,

이외의 관람객은 입장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그 대신 정가에 구매한

사진, 공예품 등 300여만 점이 소장되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티켓은 3일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현대 전시 위주인 멧 브로이

의 특색은 방대한 소장품의 숫자가 말해주듯이 소장된 유물은 전 시

어와 중세 전시 위주 별관인 클로이스터에서 사용할 수 있다. 단, 입

대와 지역을 망라한다. 중요한 건 정부 기관이 아닌 순수한 민간인

장권은 3일 동안 유효하더라도 오디오 가이드는 입장할 때 7달러의

주도로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대여비를 내야 한다. 99


Travel Lombard Street by Eric Dowdle (Dowdle Folk Art)

박진향(Sunny Park)

일본계 IT 계열의 직장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산호세로 이주해와 15년째 살고 있다. 집값이 비싼 실리콘밸리 지역이지만, 전 세계 관광객이 다 모 이는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사는 이점을 살려 지역 소식이나 여행 정보를 전하는 에스카사 객원 칼럼니스트. 지역 기자 겸 에스카사 애독자이다.

롬바드 스트리트 세계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꼬블랑길

샌프란시스코 예쁜 볼거리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는 세계에서 가장 꼬불꼬불한 언덕

길(The Crookedest Street in the world)로 알려져 있다. 시원한 풍 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러시안 힐’ 아래로 내려가는 길 이름 이 바로 유명한 롬바드 스트리트 (Lombard Street)이다. 이 길은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빼놓지 않고 찾아가는 주요 명소 중의 하나이다. 일방통행로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 도의 좁은 길옆으로는 걸어서 내려가는 관광객을 위한 계단으로 된 길이 따로 있는데 거리 입구에는 자동차보다 여행객이 더 많아 서 그들을 구경하는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글, 사진 박진향 정리 100

편집부


수국꽃길을 따라 걷는 관광객 롬바드 길은 수국꽃으로 유명하다. 수국이 한창인 봄과 여름 오전에

가면 예쁜 사진을 남길 수 있다. 차로 내려가기엔 너무 짧아서 아쉬움 을 남기는 이 길은 거리 입구에 자동차보다 차가 내려오는 모습을 구 경하는 관광객이 더 많다. 꽃이 만발한 봄에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꽃이 피어 있어, 수국이 만개한 꽃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며 사진 찍는 여행객을 더 즐겁게 해준다.

자동차 사고를 막기 위한 꼬부랑 길 언덕이 유난히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러시안 힐은 27도의 가파 른 급경사이다. 1922년, 자동차 사고를 막기 위해 지그재그로 내려오

도록 지금의 꼬부랑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1806년부터 19세기 동안 러시아의 군함과 무역선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주 왔었는데 러시아 힐

무덤은 그 당시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드 러쉬 시절, 이곳에 정 착하려는 이들이 언덕 꼭대기에 러시안의 무덤이 많은 것을 보고 이

름 지은 러시아 힐에는 러시아인도, 무덤도 없이 오로지 이름만 남아 있다. 이곳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건축가 월리스 포크가 1953

년에 지은 앳킨스 하우스와 그가 살았던 발레호 거리(Vallejo St.)의 목조가옥 등을 볼 수 있다.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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