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USA 2017 OCTOBER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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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에스카사

October

COVER STORY 새롭게 변신한 뉴욕 53rd. 공립도서관

EDUCATION 세상의 모든 오로라 공주의 부모들을 위해서

PEOPLE FOCUS Alexander Wang 윤정환 부사장

ART&CULTURE 뉴욕 24시를 찍는 사진작가 김도영

LIFESTYLE ‘뉴욕의 길’그리니치 빌리지의 미네타 레인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행복해질까? 혼자 걷고 느끼는 뉴욕의 가을






CONTENTS

October 2017 Vol. 8

8

Cover Story

Education

8

22

새롭게 변신한 뉴욕 53rd. 공립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곳이 아니에요

한인 사서(Librarian) 이초롱 씨가 들려주는‌ 도서관 & 우리 부부이야기

이달의 글과 시 13

이달의 시

미완성 가을 / 선우미애

14

사진과 함께 읽는 이달의 좋은 글

가난한 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사람들이다

People Focus 16

삶도 패션도 ‘나’답게!

Alexander Wang 윤정환 부사장

6

16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7)

워키토키와 역사책

26

세상의 모든 오로라 공주의 부모들을 위해서

The Only Way To Do It Is To Do It!

32

시각 디자인의 명문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

School of Visual Art

36

인물탐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세계적인 한국의 음악가 윤이상

문재인 대통령 독일 방문을 계기로 새롭게 조명

38

붓끝으로 그리는 본질의 예술

캘리그라피 작가 데이비드 장

40

디지털 유목민 시리즈 (2)

암호화폐 비트코인 이야기

우리 이웃이야기 44

뉴욕의 24시를 누비는 택시 드라이버

뉴욕의 24시를 찍는 사진작가 김도영

Art & Culture 50

인생, 잔잔한 소망들로 채워가는 나만의 그림

전) 뉴욕현대미술관 행정담당관 조봉옥

56

사진으로 다시 만나다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58

엉뚱하고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진지한 다재다능 영화인

‘꿈의 제인’ 상영을 위해 뉴욕 방문한 배우 겸 감독 구교환

62

작가와의 만남 시리즈 (1)

스튜디오 탐방 유선미 작가

66

스마트폰 이미지로 주고 받은 작가들의 대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사진 전시회 Taking Pictures


44

98

Clinic 68

82

92

7080 세대의 평범했던 일상을 그리는 박정진 작가

Halloween treats

Smithsonian American Ingenuity Award

수채화로 되살린 지난 시절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72

Korean Contemporary Art In New York 뉴욕지구 한국대학 동문회 총연합회 (AKUA)

2017 AKUA ART SHOW

Lifestyle 74

영화 심리 이야기

앵그리스트맨 (The Angriest Man In Brooklyn)

76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뉴욕의 길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네타 레인

80

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이달의 요리

86

'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색종이 조각보 구성

88

최고의 건강음식

사찰음식(寺刹飮食)

91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말

Steve Jobs Deathbed Speech

고교 2 년생이 발명한 새로운 췌장암 조기 발견법

스무살 청년 과학자 잭 토머스 안드라카‌ (Jack Thomas Andrak)

94

이혼을 막은 남편의 질문 하나 How do I make you happier?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행복해질까?”

Travel 96

한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

지상 최고의 샹글리라 부탄

98

뉴욕으로의 가을 여행

나에게 뉴욕 맨해튼이란

한국 엄마 홍정연 세 번째이야기

“나도 생선 몸통 먹고 싶단 말이야!” 7


Publisher Jennifer Youngjoo Lee (USA) Dr. Charles Changsoo Lee (KOREA) New York Story

Managing Director Sarah Chung

에스카사 (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 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 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 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가 전해주는 뉴욕 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패션, 라이 프 스타일, 화제인물 focus, 교육, 육 아, 요리, 여행, 건강정보 등을 아우 르는 생생한 이야기를 가득 담았습 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 틀, 애틀랜타, 사우스 캐롤라이나 지 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구, 부 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격 글 로컬 (Global + Local) 잡지입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가 되겠습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 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 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 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 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8

를 만드는 사람들 일동

Magazine Director Yebin Taylor Lee

Editor in Chief Won Young Park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Juyoung Lee, Young Choi 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Legal Columnist / Minji Kim Music & Arts Columnist / Jaewoong Yoo,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Food Columnist / Hwajung Sung Columnist / Mihee Eun, Jungheon Sung Creative Director / Anna Lee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Kibum Kim, Doyoung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Bohyun Im, Joohee Han, Youngjoo Song, Jihye Lee, Byeol Yoon,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Sophia Kim,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YuJin Hong, Minjung Choi, Sungjoo Hong Marketing Director / Joonhee Kim Advertising Director / Michael Choi, Chunsuk Lim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Eun Lee ‌ ‌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 ‌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in each of their field. ‌ ‌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 ‌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 ‌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 ‌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 ‌ will become the hub for cultural/art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 ‌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 ‌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Creato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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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절세계획으로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겠습니다!!” SUNG & ASSOCIATES CPA, LLC

Richard Sung

CPA, MBA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경영학과 졸업 • Baruch College, MBA in Taxation • RSM US, LLP (미국 5대 회계법인) 포함한 미국 회계법인들에서 세무 전문으로 14년 근무

: RSUNG@SUNGCPALLC.COM 201.286.1869 EMAIL ADDRESS : 280 BROAD AVENUE, SUITE 202, PALISADES PARK, NJ 07650

9


COVER STORY

Photography by Kibum Kim

53rd Street library

공립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곳이 아니에요

한인 사서(Librarian) 이초롱 씨가 들려주는 도서관 & 우리 부부이야기 기획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Jenny Lee 정리 10

편집부


맨해튼 5번가와 6번가 사이 53번 스트리트에는 모던 아트의 성지인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 있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모마는 파리의 루브르, 맨해튼의 메트로폴리 탄과 함께 평생 한 번은 방문해보고 싶은 미술관으로 꼽힌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모마 바 로 맞은 편에, 뉴욕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의 분관 중 하나인 ‘53번 스트리트 라이 브러리(53rd Street Library)’가 지난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 도서관에는 ‘Adult Librarian’이란 직함을 가진 친근한 외모의 한인 사서 이초롱 씨가 근무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구 도서관학과)를 나와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이초롱 씨는 뭐든 두드려보는 열정적인 남편을 만나 미국에 정착하고, 작은 시골 도서관을 거쳐 맨해튼 심장부의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에스카사는 뉴욕 도서관을 찾아가 이초롱 씨를 통해 새로운 변신을 마친 53번 스트리트 라이브러리 공립도 서관이 표방하는 ‘미래의 도서관’ 얘기와 함께 두 부부(이초롱-문인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Photography by Kibum Kim

53번 스트리트 라이브러리

the 53rd Street Library

27일 문을 열었다. 1955년 문을 열어 2008년까지 운영되었던 도넬

on June 27, 2016, is a bright, inviting oasis of books and learning

53 스트리트 라이브러리는 뉴욕공공도서관 분관으로 2016년 6월 (Donnell) 도서관이 8년 동안 2300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새로운 모

습으로 탄생했다. 도넬 도서관은 많은 양의 장서를 자랑했고, 특히 뉴 욕도서관 중에서 비영어권 도서가 가장 많은 지점으로 유명했다.

5층 빌딩이었던 도넬 도서관 건물은 2008년 개발업체에 팔려 지금은 50층 건물인 바카라 호텔이 되었다. 처음 목표는 3년 안에 다시 개장하 는 것이었지만 금융 위기 이후 계속 개발이 늦춰지다가 지난해에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저명한 건축회사인 TEN Arquitectos가 디자인을 맡아

첨단의 내, 외관 시설을 자랑한다. 46대의 랩탑을 포함한 68대의 컴퓨 터가 제공되고 커뮤니티 미팅 룸은 120명을 수용할 수 있다.

The 53rd Street branch of The New York Public Library, opened in the center of Midtown Manhattan. The 53rd Street Library

was designed by award-winning architects at TEN Arquitectos.

The branch is just steps away from The Museum of Modern Art,

creating the opportunity for collaborative programs, events, and educational opportunities between the two spaces.The branch’s

collection includes large-print, paperbacks, and popular fiction; nonfiction for adults, teens, and children; and DVDs and CDs.

The 53rd Street Library also provides 68 computers, including 46

laptops. The branch also features state-of- the-art program spaces for up to 120 occupants, plus a Children’s Room and Teen Zone. 주소: 18 West 53rd Street (212) 714-8400

출처: https://www.nypl.org/about/locations/53rd-street 11


Photography by Kibum Kim

“밖에서 언뜻 보니 도서관 같지가 않네요. 들어와 보니 더욱 도서관

느낄 수 있다’라는 것이 큰 장점이에요. 맨해튼은 어딜 가나 너무 사

같지가 않습니다.” 기자가 처음 한 말이다.

람들이 많고 특히 뉴욕현대미술관이 있는 이 부근은 언제나 인파로 넘쳐나죠. 그럴 때 우리 도서관에 들어오시면 밖에서 느끼고 있던

도서관 이용자들 대부분 그렇게 말씀 하세요. 처음엔 여기가 도서관 인 줄 몰랐다고요. 흔히 생각하는 도서관의 분위기와 무척 다르니까 요. 일단 정숙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이용자들의 대부분은 긍정적인 의미의 놀라움을 표현해요. 그래서 한번 와 보면 먼 곳에 사시는 분들도 계속 찾아 오시죠. 이곳은 뉴욕 공공 도서관임을 나타내는 특유의 붉은 색 깃발이 없다.

1945년 이전 지어진 이른바 프리워(pre-war) 빌딩들이 즐비한 뉴욕시에

서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이 고색창연한 벽돌 건물에 위치한 것과 달리,

피곤함과 치열함이 다 사라지게 되실 거에요. 이 도서관의 사서 이초롱씨는 문헌정보학 전공으로 한국에서 대학을, 미국에서 대학원 석사를 받았다. 영어가 완벽한 2세도, 1.5세도 아닌

‘순수한’ 유학생 이씨가 미국의 도서관 시스템중에서도 가장 크고 명망

있는 뉴욕 공공 도서관에 채용된 것은 분명 행운과 노력이 어울린 결과 다. 여기에 남편 문인규 씨의 엄청난 조력(?)이 있었다. 이초롱-문인규 부부의 연애사를 잠시 들어봤다.

전체 외관이 유리로 되어 있는 이곳은 무심코 보면 이 부근에서 흔히 볼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다가, 보스턴 시몬스 대학

정까지 이어진 책장 대신 그림들로 장식된 긴 갤러리를 지나면 목조로

아가 공무원이 되는 소박한 꿈을 꾸었죠. 실제로 유학을 마치고 한

수 있는 고급 리테일 상점이나 모마와 관련된 서점으로 보이기 쉽다. 천 된 계단을 통해 지하층으로 연결된다. 폭이 넓은 이 계단은 지하와 지상

을 연결하는 기능적 목적 외에 이용자들이 앉아서 책을 보거나 쉴 수 있 고, 영화가 상영되는 대형 스크린이 마주하고 있어 극장의 역할까지 하

고 있었다. 더구나 계단에 앉은 이용자들은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심지어

아예 런치까지 먹고 있다니! 잠깐 둘러보았지만, 확실히 일반적으로 생 각하는 도서관과는 다른 공간이다. 건축상도 받은 건물이라고 한다.

(Simmons College)으로 유학을 왔어요. 공부를 마치면 한국으로 돌 국에서 국회도서관과 대학원을 오가며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조금 평범하지 않은, 꿈많고 진취적인 남편을 만나 인생의 방향을 틀어 다시 미국으로 왔습니다. 우연히 남편을 만나게 된 통로는 페 이스북이에요. 페북으로 온 메시지가 시작이었죠. 남편은 당시 다 른 주에서 보스턴으로 박사 과정을 와서 학교 관계망에 한인으로 보 이는 제 이름을 찾아내서 연락했대요. 하지만 전 이미 한국에 있는 데 말이죠! 제 답신은 ‘미안하지만 난 한국에 있다. 그래도 학교 근

이 건물은 TEN Arquitectos이라는 유명한 멕시코 건축 설계 회사의

처 맛집이나 가볼 만한 곳은 알려줄 수 있으니 필요하면 연락하라’

작품입니다. 도서관은 3개의 층으로 이루어지는데, 각 층이 단층 적

고 했지요. 남편은 저보다 7살 연상이라 처음엔 나이차때문에 대화

으로 나눠 있지 않고 1층부터 지하 2층까지 오픈된 형태로 이어져

도 안통할 것 같았지요. (웃음) 그런데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일상

있어서 탁 트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입구 층은 통유리로 되어있

을 들여다보며 저희는 점점 가까워졌어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어서, 그것을 통해 아래층이 내려다보여요 "어, 나도 저기 들어가서

로 말이죠. 페이스북 친구가 된 지 몇 달 만에 남편은 오로지 저를 만

함께 어울리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구조라고 할 수 있어

나러 비행기를 타고 와서 꼬박 일주일을 데이트하고, 그해 8월 우리

요. 다른 공공도서관에 비해 이곳은 특히 ‘쉴 수 있다’, ‘여유로움을

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12


한국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시몬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한 이초롱의 남편 문인규 씨. 연애만큼이나 자신의 영역에서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그도 역

시 유학생 신분으로 시작해서 여러 사회복지 기관에 도전해 뜻을 이룬 사람이다. 초롱 씨가 가진 잠재력을 알아보고, 때로는 서운할 정도로

호되게 아내를 내몰았다. 그런 남편 덕에 아내 초롱씨가 지금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스턴 외곽의 작은 타운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미 국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치자 남편이 저만 두고 교환 학생 자 격으로 한국으로 가버렸어요. ‘6개월 동안 다녀올 테니 도서관 자원 봉사(발런티어)라도 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요. 용기가 없었던 저는, 두 달을 버티다가 결국 타운의 작은 도서관 인터뷰를 하고, 파 트타임 자리를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 더라고요.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을 어필하며 정규직 인터뷰도 통과 하게 됐죠.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남편 이 두 번째로 저를 떠났습니다. 이번엔 뉴욕으로요. 저는 이대로 남 을 것인가, 남편을 따라갈 것인가 갈등하다가 결국, 우스터의 도서 관에서 일하는 틈틈이 뉴욕 뉴저지 퀸즈 어디든 도서관에 전화를 걸 었어요. 전화 인터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곳은 압박 면 접으로 제가 현재 하는 프로그램을 공격적으로 물어본 곳도 있었어 요. 마침내 지금 제가 일하는 53번 스트리트 라이브러리(53rd Street Library)에서 오퍼를 받게 됐고, 저는 정식 사서로서 직업을 얻게 되 었습니다. 주변에 저희 부부를 알고 지내는 지인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초롱이는, 남편이 이야기하는 대로 어느샌가 다 하고 있 어..”라고요. 2015년 뉴욕으로 잠시 여행을 왔을 때, 남편이 42가에 있는 뉴욕 공공 도서관 본관 사자상 앞에 저를 세우더니 한 말을 또 렷이 기억해요. “너의 미래의 직장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자.” 남편 말 대로 그로부터 일 년 뒤 2016년 5월 저는 뉴욕 공공 도서관 '53번 스 트리트 라이브러리'의 정규직 사서가 되었습니다. 초롱 씨가 도서관에서 하는 일, 일과는 어떤 거죠? 출근하면 일반 도서관과 같이 오픈 준비를 합니다. 다른 도서관 이 용자들이 요청한 도서리스트를 보고 책을 찾거나 우리 도서관 이 용자들이 주문한 책들이 다른 도서관에서 배달되면 정리를 하기 도 하죠. 그리고 도서관이 문을 열면 주로 4곳의 인포메이션 서 비스 장소 (Circulation desk) 를 순회하며 대출업무와 레퍼런스 (Reference) 업무를 합니다. 한국말로는 참고 봉사서비스라고 하는 데 이용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아주는 것으로 아주 다양한 범 주를 다룹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일과 외에, 특별 프로그램이 있 는 날에는 그 프로그램 진행을 맡습니다. 저는 어덜트 라이브러리 안(Adult Librarian) 이어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을 하 고 있는데 매주 진행하는 고정 프로그램으로는 컬러링 프로그램 (Coloring Program)이 있어요. 시리즈로 기획하거나 일회성 프로 그램들도 있는데 평균 한 달에 서너 개씩 진행하고 있습니다. 공연, 예술 프로그램도 포함이죠. 그리고 저는 아동 도서 담당자들과 같 이 일을 할 기회가 종종 있는데 제가 한국 사람이어서 담당자가 스 토리텔링 시간에 한국 노래를 불러달라든지 한국 책을 읽어달라든 지 해서 가끔 같이 진행을 합니다. 13


Photography by Kibum Kim

한인 라이브러리안으로서 한인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있

빨라집니다. 특히 디지털화의 속도는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죠. 도

다면 소개해주세요.

서관은 그 시대에 발맞추어야 하고 한발 더 나아가야 지속적인 존 재 이유를 갖게 되겠죠.

제가 처음 일했던 보스턴의 도서관은 한국인 이용자들이 거의 없었 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관련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해도 수요가 없 고 도서관에서도 관심이 없어 아쉬웠죠. 하지만 뉴욕에서는 도서관 이용 한인들도 많고 외국인들도 다른 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많아요. 매니저와 동료들도 다인종을 위한 프로그램 기획과 실행에 적극적 으로 협력해 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뉴욕에 있는 한인 작가분들 그리고 각종 공연 예술 활동을 하는 분들과 협업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입니다. 이미 한국 동화책 만드시는 작 가분과 프로그램을 진행했고요. 10월에도 한국 전통 음악과 악기를 소개하는 강의와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요. 53번 스트리트 라이브러리(53rd Street Library)는 점점 변화할 미래 의 도서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라이브러리안이 직업 인 초롱 씨가 생각하는 미래의 도서관은 어떤 거죠? 도서관이 책을 읽는 공간만이 아닌 커뮤니티 센터로서 그리고 복 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더 많이 하게 될 겁니다. 그동안 도서관 하 면 떠올렸던 이미지 즉 정숙한 분위기와 많은 장서가 아닌 누구나 와서 쉬고, 대화하고, 정보와 오락을 얻는 장소로서 기능하게 되 겠죠. 다인종 사회인 뉴욕은 이미 지역의 도서관이 이민자를 위한 교육과 정보의 제공 장소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그 기능은 계속 확대될 것입니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14

이초롱 씨의 대학 전공인 문헌정보학과의 명칭은 그녀의 교수님들이 공부할 당시에는 도서관학과였다. 책이라는 개념이 변화하는 시대에

책을 다루는 학문을 시작한 셈이다. 20년 전 인터넷으로 책 판매를 한 다는 획기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내세운 아마존은 이제 시장 가치가 세

계 5위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자 제프 베조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맞먹는 세계 1위 부호가 되었다. 그 와중에 미 전역에 수천 개의 매장을 거느렸던 거대 도서 체인점 보더스(Borders) 는 블록버스터 비디오, 타임레코드 등의 기업과 함께 '낡은 산업'이 되

어 시장에서 사라졌다. 뉴욕시 어디에나 볼 수 있던 대형 서점 반즈 앤 노블(Barns and Nobles) 역시 이젠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동

시에 뉴욕 도서관을 찾는 이용객의 수와 뉴욕 도서관에 지원되는 기금

은 역설적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시대지만 사람들은 종이책을 읽는 즐거움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심 속의 휴식처 역할을 하는 공공시설로서 의 도서관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대형 서점들을 몰아냈던 아 마존이 거꾸로 뉴욕을 비롯한 대도시에 오프라인 서점을 계속 열고 있

는 것도 흥미롭다. 유모차를 끌고 들어와 아이들을 맘대로 놀게 하고, 계단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영화를 볼 수 있는 도서관이 5번가 한복

판에 들어선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인 사서의 노력으로 뉴욕의 한인 작가와 예술가들이 새로운 발표의 무대를 얻게 된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 될 것이다.


이 달의 시

미완성 가을 시, 그림 - 선우미애 홀딱 젖은 구름이 죽은 가지 위에서 비에 젖은 깡통 위로 떨어졌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났다 떠나고 가고 떠나고 가고...... 그렇게 혼자가 되고, 그립다 비에 젖은 깡통은 내 몸의 분신처럼 데리고 살기로 했다 목울대 저려오는 그 맞닿은 세상 나 또한 멀고멀지 않으려니 아직 가을은 미완의 상태, 바람이 흔들린다 눈물 젖은 구름이 슬프다지만 비에 젖은 속옷만 하랴 죽음의 별실로 데려간 그 무엇, 부활을 기다린다 르네상스의 빛과 어둠의 공존처럼 죽음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극치로, 그라치아 그것만이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15


사진과 함께 읽는 이달의 좋은 글

가난한 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사람들이다

The poor are not those who have few, but those who want to have more.

- Peter Roserger

돈 많은 어머니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딸을 데리고 교외로 나갔습니다. 모녀는 며칠 동안 농장을 운영하는 가난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어머니는 딸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여행 어땠니?"

"정말 좋았어요. 엄마."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았지?” 어머니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그럼요!”

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뭘 배웠는지 내게 말해보렴.”

“그 집에는 개가 네 마리 있었지만, 우린 한 마리뿐이에요. 우리 집 뒷마당에는 수영장이 있지만, 그 집은 코앞 에 끝도 없이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요. 우리는 정원에 등불이 있지만, 그 집은 밤중에 별들이 한가득 훨씬 훤히 비춰요. 우리 집 앞마당은 울타리로 막혔지만 그 집 마당은 수평선까지 이어져요. 우리 집이 세워진 집터는 매

우 좁지만, 그 집이 세워진 들판은 끝도 없이 넓어요. 우리 집에는 밥 해주시는 분이 있지만, 그분들은 다른 이 들을 위해 작물을 키워요. 배고플 때 우리는 장 보러 마트에 가야 하지만 그분들은 정원에 자라는 음식이 있어

요. 우리 집은 안전을 위해 담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분들은 담벼락 없이 이웃들과 오손도손 잘 지내요. 어머니 가 침묵하자 딸이 덧붙였습니다. 고마워요. 엄마. 이제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됐어요.”

• 글 출처 / www.facebook.com/hefty.kr/videos/534635893405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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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Doyoung Kim 17


PEOPLE FOCUS

Photography by Kibum Kim 18


Alexander Wang

삶도 패션도 ‘나’답게! Alexander Wang 윤정환 부사장 담백하고 정확하다.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알렉산더 왕 (Alexander Wang)’의 부사장 윤정환을 만 난 소감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앳된 얼굴의 동양인 여성이 도도하고 개성 강한 뉴욕의 패션 크루(crew)들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그녀를 만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만하다’ 할 것이다. 자신의 분 야에서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사 람을 만나게 되면 언제나 그 시작이 어디였 는지 궁금해진다.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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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블랙과 화이트로 단순화하면서도 체인을 연상케 하는 굵직한

메탈 액세서리를 과감하게 믹스매치하여 지루하지 않은 세련됨을 구

사할 줄 아는 그녀를 보며 당연히 패션을 전공한 ‘디자이너’일 거라 미 루어 짐작했다. 그런데 시작은 물론 현재까지도 그녀의 8할은 경영전 략가였다. 대학에서 마케팅과 통계학을 전공하면서 최고경영자(CEO:

문서 작성까지 모든 일을 다 해야 했어요. 그 회사의 일이 패션 쪽과 많은 연관이 있다 보니 일하면서 패션 산업 쪽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또 아티스트적인 접근과는 별도로, 비즈니스로서의 패션에는 어 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죠.

Chief Executive Officer)가 되기 위한 이론과 실무의 기본을 익혔다.

그렇게 기본부터 착실히 경험을 쌓은 후 패션 산업에 입성한 그녀는 무

터 중견 기업 운영까지 꼼꼼하게 배워나갔다.

대표 격인 두 곳, ‘코치(Coach)’와 ‘마이클 콜스(Michael Kors)’를 거쳐,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비즈니스 현장에 뛰어들어 소규모 매장 영업부

고가의 주얼리 매장에서 일했을 때는 처음 방문하는 고객들과 직 접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 었어요. 낯선 고객에게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끌어내려면 기본적 으로 사람을 관심 있게 관찰하고 배려하는 게 중요한데 그 훈련을 제대로 한 거죠. 그때 배우고 훈련한 덕에 지금도 고객들은 물론이 고 동료들이나 아랫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요. 고3 때 유학 와서 대학 졸업까지 5년, 마케팅이나 세일즈 분야에서 요 구하는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기간이었다. 하지 만 그녀는 영어가 능숙해지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부딪쳐서 이겨내는

쪽을 택했고, 그 결과 단시간에 언어적 약점을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 라, 더불어 고객 관리의 기본을 몸소 터득하게 되었다.

그다음 일한 곳은 섬유를 취급하는 무역회사였는데요. 영어와 한국 어에 능통한 마케터를 원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패키지 여는 것부터

Photography by Kibum Kim 20

서운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미국 매스티지(masstige)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 부티크 ‘알렉산더 왕’에 합류하기까지 그녀에게는 늘 ‘최연 소’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녀가 코치에 입사했던 2001년은 코치가 세계적인 패션 회사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코치 시그니처 컬렉션’(Coach

Signature Collection: 코치의 전통적 로고인 알파벳 ‘C’를 자카드 방식 으로 입힌 제품 라인)이 론칭된 해이다. 회사가 외연을 넓혀나가던 시

기에 매니저로서 여러 부서에서 일하며 코치의 성장에 공헌한 바를 인 정받아 2003년, 29세에 최연소 디렉터가 되었다.

코치에서 패션 비즈니스의 실무를 제대로 배웠어요. 학교에서 이 론적으로 배운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죠. 패션 사업에서 성공하 려면 아티스트적 감성과는 별도로 전략적인 마인드가 필요해요. 모든 상품 판매 사업이 그렇듯이,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알아 야 하고 소비자의 니즈(needs)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죠. 또 디자이너들이 오랜 시간 작업 후 디자인을 임박하게 넘겨주는 경 우가 많다 보니 마지막에 일이 굉장히 많이 몰려요. 그러니 최종 작


업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하죠. 실, 지퍼, 라이닝 같은 자재들을 어디서 어떤 가격으로 주문하고 언제 받을 것인지 등등 모든 것을 사전에 확인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 지 않도록 해야 해요.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패션계의 디자이너들이 들으면 불

행동한 것뿐이라면 그녀는 그저 조직에서 살아남는 데 능한 영리한 회 사원 정도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윤정환의 강점은 자신의 지위를

의식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을 정확 하게 알고 그에 매진한다는 데 있다. 그녀는 늘 다음 기회를 맞을 준비 가 되어 있었다.

편할지 몰라도, 그녀는 패션도 결국은 소비자들에게 판매해야 하는 상

성장을 다음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줄 아는 그녀를 마이클 콜스가 알아

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시간과 노력이 제대로 결

안을 받고 이직한 그곳에서 그녀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경영자 수업

품임을 강조했다. 결코 패션 상품을 제작하는 디자이너들의 창조적 노 실을 보게 하기 위해서는 그다음 과정들이 신속, 정확하고 효율적이어 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더하여, 그녀는 비즈니스에 있어서 사람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디렉터로 일하면서 대인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 어요. 큰 조직에서 일할 때는 나만 똑똑하고 좋은 생각이 있다고 되 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모두가 동의하고 협력해 나갈 수 있 도록 하는 리더쉽, 즉 통솔력이 정말 중요한데요. 그건 각각의 직원 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요. 코치 에서 디렉터로 일하는 동안 그 훈련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고속 승진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칫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

여 안하무인적 말과 태도를 보이는 우를 범하기 쉽다. 그 경우에 그들

의 성공은 그 자리에서 멈추거나 혹은 내리막길로 이어지게 될 수 있 다.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에 대한 조직의 평가는 예리하고 냉정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직의 그러한 생리를 일찍이 파악하고 그것에 맞게

보았다. 가방 쪽 VP(Vice President: 부사장급)로 오라는 파격적인 제

을 받게 된다. 코치에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터득했다면, 마이 클 콜스에서의 경험은 최고 책임자로서 회사의 목표에 도움이 될만한 인재들을 어떻게 대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지를 배워가는 과 정이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단순 지식보다 직원들과의 관계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렇게 3년을 더 보내고, 2016년 알 렉산더 왕으로 스카웃되었다.

개성 넘치는 디자이너 브랜드 부사장으로서의 그녀를 이야기하기 전

에 그녀의 범상치 않은 패션 감각 이야기를 잠시 다시 꺼내 보자. 매 번의 만남에서 그녀가 보여 준 패션은 요즘 트렌드인 ‘미니멀리즘

(minimalism)’과 뜻을 같이하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파격적인

디테일을 잊지 않음으로써 지루하지 않은 절제된 세련미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었다. 더불어 부사장이라는 그녀의 타이틀에 걸맞게 정장한

느낌이 나도록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분명 패션을 공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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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패션을 전

공하고 부가적으로 비즈니스를 배운 사람, 혹은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추가로 패션을 공부한 사람. 그녀는 후자에 속한 다. 코치에서 일하던 시절, 그녀는 패션을 제대로 알지 못하

면 분명 어느 시점에는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직 감하고 뉴욕 미드타운(midtown)에 자리하고 있는 패션 스쿨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 과목들을 이 수하며 패션 관련 지식을 습득했다.

그녀의 패션에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책임감 이다. 그녀는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스타일은 절묘하게 알 렉산더 왕의 코드와 일치되는 면이 있다.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이 구현하는 ‘스트리트 패션(street fashion)’은 모노톤 - 검은 색, 회색, 흰색 – 을 주로 사용하여 단순하고 깔끔하면서도 캐

주얼과 정장의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믹스매치하여 독특함을 살린, 새롭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실용적인 패션으로 평가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좋아하는 기본 스타일은 분명해요. 하지만 패션 트렌 드와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추구하는 패션에 따라 제 스 타일도 조화롭게 바꾸는 편이에요. 저는 동양 사람이고 어 려 보이는 데다 키도 작은 편이에요. 그런데 보이는 것과 반 대로 직책은 높죠. 그래서 상대가 실수하지 않도록 첫인상을 올바르게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경영 간부로 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고 세련되고 단정하게, 그리고 적당히 진지해 보이도록 스타일링하려고 노력하죠. 또 저 자 체가 회사의 브랜드를 알리는 대사(brand ambassador)의 역 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 브랜드를 입어주는 것도 중요 하고요. 패션 회사의 직원으로서, 또 경영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맞고 당연하다 고 생각해요. 그녀가 이제 공히 패션계에서 인정받는 리더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대답이었다. 부사장이라는 자리에 올라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인지 묻자, 그동안 배운 것들을 책임자로서 직접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즐겁다고 했다. 또한, 사람을 배치하 고 쓰는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직원들을 진심으로 케어해 주고 픈 마음이라고도 했다.

회사에 어린 직원들이 많아서 저는 왕이모격이예요. 늘 데드 라인에 쫓기고 정신적 압박이 심한 환경에서 일하는 직원들 을 케어하는 데 있어서 제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게 큰 도움 이 돼요. 아직 인생 경험이 너무 없는 어린 애들인 데다 부모 로부터 일찍 독립해서 사회 생활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많이 필요하죠. 그런 직원들을 진정으로 돕고 멘토가 되어주려고 노력합니다. Photography by Kibum Kim 22


늘 긍정적이고 승승장구해 온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힘든 점들은 있다 고 했다.

코치에서 일할 당시에 자재 구매를 위해 한국에 간 적이 있어요. 같 이 간 직원들이 모두 백인이고 나이도 많았지만 제가 거기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납품업체 사장님이 물어보지도 않고 저를 통역하는 어시스턴트로 아시고 저한테만 명함을 안 주시는 거 예요. 어려보이는 외모 탓도 있었겠지만, 그건 경우가 아니죠. 나중 에 사실을 아신 사장님께 사과를 받긴 했지만 그때 결심했어요. 더 성공해서 미국 주류 사회에 자연스럽게 속하여 사는 모습을 보여주 어야겠다고요. 그녀에게는 세상의 편견과 싸워 이겨내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직장 생활을 하는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아이들에게 엄마로 서 해주고 싶은 것들, 해 주어야 하는 것들을 회사일 때문에 마음껏 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출장을 가게 되면 한 나라만 갔다가 금방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 어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대만, 일본, 중국, 한국, 등등, 가서 유 용한 패션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면 다 돌아보고 오게 되죠. 그 렇다 보니 집을 오래 비우기가 일쑤고 아이들을 직접 학교에서 픽업 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러던 어느 날, 6살 된 딸이 “엄마 는 왜 일을 하게 됐어?”라고 묻더니 “엄마는 잘못된 선택을 했어.”라 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로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 아서 아무 말 못 했어요. 그냥 ‘크면 이해해 주겠지.’ 하고 바랄 뿐이 었죠. 지금은 그 딸이 13살이 되었고 4살짜리 아들도 있어요. 요즘은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회사를 쉬고 온종일 아이들과 시 간을 보내요. 아이들 학교에 가서 자원봉사하거나 아이들 친구들을 집에 불러 놀게 하면서 온전히 엄마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죠. 출장 갈 때는, 10일 출장을 가면 선물 10개를 포장해 놓고 가면서 “하루 에 하나씩 열면 마지막 선물 열 때 엄마가 온다.” 그래요. 그런 노력 덕인지 다행히 이제 딸은 저를 많이 자랑스러워해요. 그녀가 자녀들에게 특히나 많이 미안한 이유 중 하나는, 그녀 자신은

딸 셋 집안의 막내딸인 그녀의 뒤에는 그렇게 바르고 헌신적인 부모님 이 계시고,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도움을 주는 디자이너 언니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늘 감사한다고 했다.

윤정환은 아주 가끔 패션 회사의 가치와 목표가 자신과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외모, 신발, 옷, 가방, 겉으로 보이는 것만 너무 중 요시하는 것 같은 패션계의 얕음과 가벼움에 회의가 느껴질 때가 그렇

다. 모든 대화가 그런 ‘보이는’ 것들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유행을 쫓아가기 바쁜 그곳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라치면, 그녀 회사의 옷

을 입고 기분이 좋아지고 더 자신감이 생겨야 할 고객들을 생각한다.

패션이 삶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 히 의미 있지 않을까. 또 누가 뭐래도 패션계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

이 넘쳐나는 상황이라면, 패션 비즈니스 쪽으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 에게 멘토가 되어주고 제대로 도와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 는 일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믿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제가 꼭 필요한 곳에 가서 제 재능을 주고 쓸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 요. 그래서 전 지금이 좋고요. 하지만 미국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 면서, 회사에서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저를 보는 젊은 친구 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열심히 해서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늘 어깨가 무거운 것도 사실이에요. 그녀에게는 딱히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할까 싶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

에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녀는 거만하지 도 불필요하게 겸손하지도 않다. 모든 면에서 무난하고 조화롭게 균형

이 잡혀 있다. 딱 하나, 그녀가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늘 힘들어하는 것이 가정에서의 그녀의 역할이다. 그녀는 단언컨대 일 이 더 쉽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 맞는데, 회사에서 하는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다 보니 일에 더 초점을 두게 되는 비논리가 속상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완벽한 그녀이기에, 또 그 고충이 충분히 공감되기에 오히려 ‘다들 그렇다. 그 정도는 괜찮다.’ 말해 주며 윤정환, 그녀의 미래를 응원하고 싶다.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보살핌을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일지 모른다.

자라는 동안은 물론,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그녀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아 버지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바른

길을 찾아서 소신대로 열심히 하면 결과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시

며 용기를 북돋워 주셨고, 가정주부인 어머니는 자신이 못 이룬 것을 딸들이 이룰 수 있도록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 다.”, “네 기준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라며 아이인 저의 소신을 인정 해 주셨어요.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살면서, 일하면서 저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 지.’ 하고는 크게 영향받거나 (그 사람과) 충돌하지 않아요. 또, 저희 엄마는 ‘여자니까 어떻다’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세요. 제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요. 요리에 관심 있으 면 몰라도 여자니까, 혹은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러는 거 면 안 그래도 되니까 제 할 일을 하라고 하셨죠. 23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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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7)

FATHER STORY

워키토키와 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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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후 초등학교 앞은 늘 잡상인들로 북적였단다. 빨간색 고무 대야에 옥수수와 떡을 한가득 담아와 파는 나이든 촌부와 호박맛 쫀드

기와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을 파는 젊은 아낙네는 매일 어김없이 같은

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부모님이 제대로 따지기나 했겠어? 할 수 없이 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자리에 앉아 배고픈 아이들에게 손짓하곤 했지. 키다리 아저씨가 팔던

그날 이후로 월부장사 키다리 아저씨는 매달 노란색 월부 카드를 들고

잇거리였단다.

어 놓은 아지트 오두막으로 피신을 가야 했지. 문제는 매달 오천 원의

신밧드의 모험과 프로야구단 종이 딱지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 여느 때와 같이 학교 정문을 나서서 집에 가는데 유난히 아이들로 북적 이던 행상이 눈에 들어왔어. 호기심에 “무엇을 파는 곳인가?” 하고 가 봤더니, “세상에나!” 반짝반짝 빛나는 워키토키 무전기가 있는 거야.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촌 동네 시골 아이들에게 워키토키는

돈을 받으러 오셨어. 책이 집에 배달되는 날 엄청 혼나서 뒷산에 만들 월부금을 받으러 올 때마다 또 혼이 났다는 거야. 그때 오천 원은 아주 큰 가치가 있었단다. 특히 현금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었어. 아이들 여럿을 힘겹게 키우던 부모님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지.

노란색 월부 카드와 통통거리던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잔뜩

그때 텔레비전에서 최불암이라는 배우가 주연하던 ‘수사반장’이라는

아저씨가 오시기 며칠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되고 불안해지더라고. 아저

텔레비전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

드라마를 시청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시리즈 야. 또 ‘전우’라는 반공 드라마도 큰 인기를 얻었지. 범죄와 전쟁드라

화가 나 계셨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단다. 월부장사 씨가 매달 같은 날 오시기 때문에 미리 계산해 두었다가 일부러 집에 늦게 오거나 산속으로 피신을 가곤 했었지.

마를 재미있게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랫동네 아이들과 나무로 가

한 달쯤 지난 후 옅은 녹색 책장에 꽂아 두었던 삼국지 책을 읽기 시작

아저씨를 좋아해서 ‘나도 커서 형사가 되어야지’라고 미래의 꿈을 그

어.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산 책이고 이것 때문에 맨날 혼나는데 읽기라

짜 총을 만들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하곤 했어. 최불암 려보기도 했단다.

했어.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니까 다시 책을 반납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 도 하자”라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노점상 아저씨가 꿈에 그리던 워키토키 무전기

삼국지 책을 읽다 보니 이야기 속에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고. 유비와

수 있다는 거야. 20권짜리 한국역사전집을 사게 되면 10권짜리 삼국지

장감 넘치는 전쟁과 혀를 내두르는 책략, 신의와 배신의 이야기를 접하

를 팔고 있었어. 그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워키토키를 공짜로 가져갈 전집과 워키토키 두 대를 무료로 준다고 하더군. 그것도 당장 돈을 내

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대신 부모님 이름과 집 주소를 카드에 적어주 면 워키토키를 당장 집에 가져갈 수 있고, 역사전집과 삼국지 책은 며 칠 후 집으로 배달해준다고 하시더라고.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와 사마염 같은 수많은 인물을 만나게 되고, 긴 면서 마치 책 내용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다가왔

어. 훌륭한 주군 유비의 인격에 감탄하게 되고, 용맹한 장수들의 무용 담에 눈을 뗄 수가 없었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나 토요 명화만큼 재미가 있더라고.

책을 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책이나 삼국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

나른한 오후, 삼국지를 다 읽고 나서 심심하던 차에 책장에 있던 역사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덜컥 계약을 해버렸지. 나 말고도

자인이 된 책이었어. 지은이도 정확히 누군지 모르겠고 유명 출판사가

지. 대신, 그 멋진 워키토키를 받아서 다음날 전쟁놀이할 때 갖고 놀면 여러 명의 아이가 계약하더라고. 아이들이 너도나도 사니까 좀 대담해 져서 나중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지.

전집 첫 번째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지. 연두색 책표지에 조잡하게 디 발행한 책 같지는 않았어. 하여튼 첫 장을 펴는 순간 단군신화부터 고 조선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적혀 있었단다.

노란색 워키토키 두 대를 들고 집에 가는데 너무 신났단다. “와! 내일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후 두 번째, 세 번째, 그러다 보니 전집 20권을 모

왔지. 집에 가는 내내 두 손에 들고 있던 워키토키에서 한시도 눈을 뗄

그리고 현대에게 이르기까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단다.

동네 근영이 형과 근수에게 자랑해야지”라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 수가 없었어.

집에 돌아와서는 조금 걱정이 되더라고. 부모님이 “그거 어디서 났 어?”라고 물어보시면 곤란하니까 살림살이와 쌀을 넣어두는 광 깊숙 한 곳에 숨겨놓았지. 그리고는 이웃집 아이들과 목장 산에 올라가 전쟁 놀이를 할 때나 학교에 갈 때 몰래 꺼내서 갖고 놀곤 했었어.

사건은 며칠 뒤 터지고 말았어. 워키토키를 준 아저씨가 털털거리는 신 작로를 따라 ‘딸딸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국역사전집 20권과 삼국지 10권을 집으로 배달해준 거야. 당연히 부모님은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겠지. 그런데 그 월부장사 아저씨가 계약서를 들이대고 다짜

고짜 책을 놓고 간 거야. 아마 협박도 했겠지. “이거 안 사게 되면 큰일 26

조리 읽게 된 거야. 한국의 역사를 고대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그 후 집에 다른 책이 별로 없어서 삼국지와 역사전집을 수십 번 읽게

되었어. 하도 읽으니까 나중에는 책이 너덜너덜해지더라고. 그 책을 검 은색 전기 테이프로 붙여서 읽고 또 읽곤 했지. 머릿 속에서 책 내용이 파노라마 드라마처럼 기억이 날 정도가 되었단다.

할부기간 12개월이 다 끝나서 드디어 월부금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었 단다. 얼마나 기쁘던지! 솔방울을 따서 떡방앗간에 팔고 미꾸라지를 아

랫동네 메기 양식장에 납품하면서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좀 보태기도 했었지.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대부분 월 부금은 부모님의 팍팍한 주머니에서 나오긴 했지만, 나도 뿌듯한 마음

이 들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매달 혼나는 일도 없어지게 되니까 십 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느낌이었어. 책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잖아! 그런데 나중에 놀라운 일이 생긴 거야. 중학교에 들어가서 국사라는 과

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단다. 그 덕분에 매달 독서장을 받으며 자존감이 쑥쑥 자라게 되었던 거야. 지식과 교양도 부쩍 늘게 되었단다.

목의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첫 번째 시험에서 백 점을 맞은 거야.

워키토키를 갖고 싶었던 욕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전집과 삼국지

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야. 당연히 역사책 이십 권을 너덜너덜

평생 간직하게 되면 이득이 많단다. 책 읽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물론 수학과 같은 다른 과목은 점수가 낮았지만, 유독 국사에서만 탁월

해어질 때까지 읽은 덕이었어. 평생 어떤 시험에서 만점을 맞아 본 적 이 없었기 때문에 국사시험 점수는 기적이었던 거지.

백 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왔어. 부모님에

책은 오히려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했단다. 한 번 시작된 좋은 습관은

다른 학과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게 된 거야. 학교 수업에도 열심히 참 여하게 되고 성적도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어. 암기력이 좋아져서 중학 교, 고등학교 내내 암기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가 있었지.

게 엄청 자랑했지. 보란 듯이 말이야. 일 년 내내 꾸중을 들을 보람이 생

안 좋은 일이나 실수를 하게 되면 계속 후회를 하고 화를 품는 경우가

곤 했단다.

이게 되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득이 생겨나기도

기더라고. 한동안 낡은 책상 위에 시험지를 붙여놓고 매일 매일 쳐다보 놀라운 변화는 삼국지와 역사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책에도 관심

종종 생긴단다. 그러면 마음속에 앙금이 오래 남지. 대신, 얼른 받아들 한단다.

이 생겼던 거야.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 학급마다 문고가 있었어. 담

세상의 모든 일이나 현상에는 좋고 나쁨이 동시에 존재한단다. 나쁜 것

이라는 조그만 명찰을 읍내에서 사 오셔서 매달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을 수 있단다. 잠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인격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

임이셨던 김기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려고 ‘독서장’ 아이들에게 시상하곤 했지.

책 읽는 습관이 생긴 데다가 독서장을 받을 욕심으로 열심히 학급 문고 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기 시작했어. ‘80 간의 세계 일주’, ‘피노키오’, 신 밧드의 모험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으로 유명한 천일야화’를 밤새

을 잘 인내하며 받아들이고, 좋은 점에 마음을 두게 되면 모든 것이 좋 할 수가 있고 겸손도 덤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된단다.

그때 갖고 놀던 워키토키는 금방 고장 나서 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얻은 지식과 좋은 습관은 지금도 늘 간직하고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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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조윤경 교수 28


세상의 모든 오로라 공주의 부모들을 위해서 The Only Way To Do It Is To Do It! 글 Sarah Chung 정리

편집부

조윤경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전공 부교수 및 인문과학대학 부학장으로 초현실주의 프랑스 시를 전

공했으며, 상상력과 창의성 분야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 3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까지 총 30여편의 논문을 KCI 등재학술지에 발표했다. <창의·인성 심화연수

운영사업>, <창의·인성교육 현장포럼 프로그램 개발>, <초·중·고 인문영역 융합형 수업모델 개발 연구> 등 창의·융합분야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를 수행했으며, 2011년 한국 유네스코 창의성포럼 기획 및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200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디지로그 창조학교 ‘창조이론과 교육’ 담

당 멘토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그린비),『초현실주의와 몸의 상 상력』 (문학과 지성사),『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상상력』 (이화여대출판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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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Disney)의 클래식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 (Sleeping Beauty)에 나오는 오로라 (Aurora) 공

주는 마녀로부터 물레 바늘에 찔려 영원한 잠에 빠져 왕자의 진실한 사랑이 담긴 키스가 아니면 깨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저주를 받는다. 이에 놀란 왕과 왕비가 온 나라에 있는 물레란 물레를 다 없앴(다고 생각했)음에 도 불구하고 공주는 결국 물레 바늘에 찔리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하지만 공주는 잠자는 그녀의 모습에 반 해 사랑에 빠진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 행복하게 잘살게 된다. 모든 디즈니의 공주들처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인 오로라 공주도 매우 수동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디즈니의 경쟁사가

디즈니의 많은 이야기들을 비틀어 만든 또 다른 애니메이션인 슈렉 (Shrek) 시리즈에 나오는 적극적인 피오나 (Fiona) 공주가 그토록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교육적인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재미있다. 이 이야기는

바로 극성 부모의 처참한 실패담이기 때문이다. 공주의 부모인 왕과 왕비는 어렵게 얻은 외동인 공주가 위험

에 처한다는 말을 듣고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사생 결단으로 나라의 모든 물레를 불태우고 (분명 이 난리 통에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오던 사람들은 밥줄이 끊겼을 것이다)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심지어 공주를 위험요소

제로 상태인 숲속에 격리까지 시켰지만, 재력과 권력을 업은 부모의 온갖 노력에도 결국은 자식에게 위험이 될 만한 모든 요소들의 완전제거라는 거대 미션은 실패하고 공주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바야흐로 알파고 (AlphaGo)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A.I.: Artificial Intelligence)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에는 무슨 직업이 뜨고 무슨 직업은 사양길일지 모두들 야단법석이다. 또 인공지능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

해서는 창의력이 필수라고 하여 어린아이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까지 ‘반복을 통한 창의력의 단계별 정복 학습’이라는 희한한 말로 포장된 학원이나 학습지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렇게 제공되는 무한 반복 창의력 문제들에 딸린 ‘정답’이 있다는 사실 또한 놀랍지 않은가!

이 재미있고 기이한 시대에 이어령 교수가 2009년 설립한 경기디지로그 창조학교에서 담당 멘토로 활동 중이 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 부교수로 재직 중인 조윤경 교수가 ‘창의행동력’이라는 재미있는 컨셉으로『몸 으로 키우는 캘리포니아 어린이 창의교육 ‘창의행동력’』 이라는 책을 써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런 조 교수와 팀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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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교육, 몸으로 말해요

생활 속에 스며든 창의교육

서 수년째 창의교육을 가르치고 있는 조윤경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딸

정의한다. ‘창의행동력’은 거꾸로 혹은 역으로 생각하는 ‘창의적 사고’

‘창조와 상상의 기술’이라는 인기 교양 강좌를 통해 이화여자대학교에

과 함께 지난 2015년 여름부터 2016년 여름 1년 동안 캘리포니아 산 타바버라에 머무르며 어린이 창의교육을 밀착 취재하였다. 많은 사람

이 창의교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기도 훨씬 전인 10여 년 전부터 조 교수는 상상력과 창의성을 다루는 교양 강좌를 개설해 학생들을 가르

쳤고 현장 교사들을 위한 창의융합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창의성을 흔히 영재교육과 연관시키지만 조 교수는

조윤경 교수는 ‘창의행동력’을 말 그대로 행동을 다르게 하는 힘이라

와는 다르다. 궁금하고 알고 싶으면 바로 찾아가서 보는 것이다. 인공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모든 수학적 경우의 수를 다 동원해서 자기주도 학습 영역을 넓혀나가고 인지능력을 발전시키는 상황에서, 창의성이

라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생각이 아닌 행동이라고 조 교 수는 말한다.

오히려 평범한 아이들의 능력이 공교육이나 사회적인 시스템을 만나

엄마가 아이에게 묻는다. “오늘은 엄마가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줄

인 부모들의 마음을 들쑤셔 놓았던 핀란드의 교육법과 프랑스의 교육

봐.” 부모들의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 걸 강요하면서 마치 아이에게는

어떻게 창의성으로 발현되는지가 알고 싶었다고 한다. 한동안 열성적 법과는 달리 뭔가 특별한 게 있을 줄 알았던 기대를 무참히 깨뜨린 미 국 공립학교의 너무나 평범한 교육법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조 교수는 지난 수년간 연구하고 고민해온 창의교육의 해답을 캘리포니아 공교 육 현장에서 찾았다. 바로 그것은 ‘창의행동력’이었다.

게. 수학 학원 갈래, 피아노 갈래, 태권도 갈래? 자,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선택권을 주는 듯 인심을 베푼다. 이미 아이의 머릿속에 선택은 오직 엄마가 말한 3가지 중의 하나라고 프로그래밍 되어 버린다. 그것은 아

이의 머릿속에 부모가 ‘~해라’ 혹은 ‘~하지 마라’식의 대화를 통해 생각 과 선택의 한계를 명확하게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1년간 캘리포니아 산타바버라에 머물며 이름도 맘에 들어 마지않는

호프 (Hope) 초등학교에 딸을 보내며 조 교수는 부모들이나 선생님들

모두 ‘~해라’ 혹은 ‘~하지 마라’가 아닌 ‘~하고 싶니?’, ‘이 상황에서는 어

떻게 해야 할까’라는 ‘호기심 대화법’을 통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 하고 인내심을 갖고 아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나아가 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상생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대화는 엄청 난 인내심을 갖고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바닷가에 나갔는 데 일교차가 큰 캘리포니아 날씨 때문에 저녁이 되니 갑자기 쌀쌀해졌 다고 하자. 조 교수 본인 자신도 딸에게 한 말이 ‘얼른 차에 가서 옷 가

지고 와서 입어라’였단다. 보통 이럴 경우 그다음은 으레 아이와의 실 랑이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입는다, 못 입는다. 괜찮다, 아니다. 감기 들 면 어쩔래 등등. 그런데 바로 옆에 있던 딸아이와 같은 반인 아이의 엄 마는 아이에게 날씨가 쌀쌀해졌다며 어떻게 하겠냐며 의견을 묻더란

다. 아이는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옷을 입겠다고 하고 얼른 차로 뛰어 가 웃옷을 입고 오더란다. 이런 대화법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

명 강사의 교육 세미나에 가거나 잘나가는 아동교육 지침서를 보면 다

나와 있다. 조 교수가 놀란 것은 이것이 일상생활에 배어 있다는 것이

다. 부모면 부모, 선생님이면 선생님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아이들을 매일매일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훈련 아닌 훈련을 시키니 아이들은 어 려서부터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법을 몸에 익히게 되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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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행동력의 3단계

력’, ‘행동결정력’의 3단계로 쉽게 설명을 해준다. 재미있게도 조 교수

중요하지 않나요?” 그간 창의성 전문가로서 활동하며, ‘창의행동력’을

다. 서핑을 배우거나 즐길 때는 먼저 ‘패들링’, ‘파도잡기’, 그리고 ‘파

“물론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결국은 입시가 제일 알리는 과정에서 조윤경 교수가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다. 조 교수는 그녀 특유의 명랑한 목소리로 ‘창의행동력’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무것 도 하지 말고 창의력에만 집중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

다. 조 교수는 ‘창의행동력’의 핵심은 ‘사고를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 라, ‘행동을 다르게’ 함으로써 생각이 저절로 전환된다는 데 있다고 강

조한다. 오히려 “이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인공지 능시대에 인간의 경쟁력은 창의력에서 나오는데 창의성을 문제집 풀 듯 반복해서 학습시키는 우리나라 창의교육법이 옮은가”라며 반문한

다. 흔히들 창의력을 ‘문제해결력’이라고 생각하며 아이의 영재성을 판 단하는 척도로 본다.

IQ가 높은 사람들만 모였다는 멘사 클럽 회원이나 풀법한 창의력을 테 스트한다는 문제들도 대개 정해진 답이 있다. 학원에서 아이들은 기계

적인 반복 학습으로 이런 ‘정형화된 창의력’을 키우는 문제들을 푼다. 또한, 창의성을 키운다면서 흔히들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라’던지 ‘거꾸로 뒤집어보라’ 같은 조언을 한

다. 조 교수는 발상의 전환은 아무런 계기도 없이 물구나무 한 번 서보

고 뒤집어본다고 일어나지 않는다며, 해결하고 싶은 절실한 문제가 있 을 때 나 스스로 부딪혀 내 손으로 만들어 볼 때 비로소 생각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한다.

조윤경 교수는 ‘창의행동력’을 키우려면 창의성을 지식습득의 도구

로 사용하지 않고,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다. 조 교수는 ‘창의행동력’을 키우는 단계를 ‘행동호기심’, ‘행동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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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를 캘리포니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포츠인 ‘서핑’에 비유한 도타기’의 순서로 하는데, 먼저 ‘패들링’은 가장 기초단계로 서핑 보 드에 엎드려 양손으로 열심히 저어 바다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저 바 다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파도가 밀려올까. 호기심에 마음이 설렌

다. 2단계는 ‘파도 잡기’인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 서퍼들이 밀려오

는 파도를 보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파도를 관찰하고 골라내는 과

정이다.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한 파도 가 마침내 왔을 때 그 파도를 잡아 재빨리 서핑 보드에 서는 것이다.

3단계는 ‘파도 타기’로 이제 자신에게 가장 좋은 파도를 골라내고 서

핑 보드에 균형을 잡고 올라 타 신나게 즐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창의행동력’의 3단계와 매우 비슷하다. 1단계인 ‘패들링’은 ‘행동호

기심’ 단계로 볼 수 있다. ‘행동호기심’은 ‘창의행동력’의 가장 기본이 되는 단계로 한마디로 궁금하면 바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머릿속으 로만 궁금한 것이 아니라 궁금하다면 당장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고,

그 장소에 가보고, 집으로 돌아와 실험해보는 것이다. ‘창의행동력’의

2단계는 ‘행동발견력’인데 ‘파도 잡기’처럼 가서 해보고 발견하는 과 정이다. 수없이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내게 가장 잘 맞고 유리한 파 도가 무엇인지를 관찰하고 잡아내는 과정처럼 수없이 새로운 순간을 경험하고 나름대로 축적된 자신의 경험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주도하 는 것이다. ‘창의행동력’의 3단계는 ‘행동결정력’이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파도를 골라내어 서핑을 즐기는 것처럼 아이가 도전을 통해 자 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끝까지 완성해 짜릿한 경험을 해본다면 아이는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창의적 인 인재로 거듭난다.


배우는 과정이 즐거워야

는 오히려 아이들을 격려하고 손을 잡아 주고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것

교육의 안타까운 현실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때라고 말한다. 자신이 궁금하고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배움

수년간 대학 강단에서 강의하며 이미 조 교수는 억지로 만들어진 창조 학생들은 부모나 선생님이 주는 요점정리용으로 잘 정리되고 가공된

지식을 받아 흡수하는 능력은 정말 탁월합니다. 어릴 적부터 혹시라도

내 자식이 혹은 내 학생이 잘못될까 봐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미리 공부 해서 안전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지식을 전달해주기 때문이지요. 하지

만, 무한 반복 학습을 통하여 습득되는 지식이 통용되고, 실수도 실력 이라며 시험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라면 창의성이

계발될 리가 만무하지요.” 어릴 적부터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해서 배

을 해보도록 격려해주고 기다려 주는 인내심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 실생활과 연결이 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호기심으로

조금 더 나은 무언가를 혹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진정 배우고 익히는 공부(工夫)를 하는 것이 되며 배움의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다. 아이가 도전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창의적인 결과물

을 끝까지 완성해 짜릿한 경험을 해본다면 아이는 스스로 의미 있는 것 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날 것이다.

워본 경험이 거의 없는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

The only way to do it is to do it

에 갇혀 자기의 생각을 피력하거나 행동으로 옮겨 무엇인가를 해보려

전파하는 스탠퍼드 대학의 d. school (The Stanford d. school)에 ‘그

교수는 이런 대학생들의 모습을 시키는 것은 완벽히 잘하나 자기의 틀 는 힘이 부족하다며 B+로 평한다. 이런 현상은 심지어 일선 교사들에 게서도 보인다. 짜여진 교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불안하고 모든 아이들을 한 방향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어 보인다.

모든 ‘배움’을 ‘평가’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당연히 모든 아이들에게 동

일한 정보와 자료, 동일한 재료와 도움을 제공해야 공정한 평가를 통 해 성적을 매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가’의 관점에서 그 렇다는 말이지 조윤경 교수의 말처럼 ‘배움’의 관점으로 방향을 돌리

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시스템상 ‘평가’의 편의를 위해 모든 아이들에 게 같은 재료, 같은 조건, 같은 방법으로 자기만의 창의적인 생각을 표

현하라고 요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마 치 문방구에서 파는 똑같은 종류와 가짓수의 재료가 들어있는 실험 키

트를 주고 엄청난 창의성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교육은 내용의 창의성만큼이나 방법의 창의성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조 교 수는 강조한다. 창의성의 핵심은 흔히 생각하듯 다르게 생각하는 비범

한 천재성이나 고도의 전문성이 아닌 협업할 수 있는 소통능력, 가지 고 있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실천력과 열정이다. 조 교수는 많이 배운 부모, 뛰어난 교사와 잘 짜여진 행정적 제도 등 교육 인프라보다

창의성을 그 어느 곳보다 강조하고 창의방법론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것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하는 것뿐이다 (The only way to do it is to do it)’라는 유명한 사인이 걸려 있다. 부모로서 내 아이를 위해

아이에게 해가 되거나 불리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내서,

그에 따른 모든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모든 실패 요인이 될만한 것을 완벽하게 제거할 방법은 애당초 그 어디에도 없다. 완벽한 커리큘럼을

짜주고 선행학습과 무한 반복 문제풀이로 ‘안전하게 배움의 길로 인도 하여’ 대학을 ‘보내고’, ‘직업을 선택해 주어’ 아이의 인생길을 디자인해

줄 방법은 인공지능 시대에는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오히려 100세 수

명 시대에 아이가 살면서 부딪힐 셀 수 없는 역경과 난관을 이겨내는 ‘창의행동력’을 지닌 ‘창의행동가’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학

부모, 교사, 지역사회의 역할이라는 조윤경 교수의 말에 진심으로 동감 하지 않을 수 없다. 생활 속에 배인 칭찬과 격려와 눈높이 대화로 호기

심 창고의 문을 일찌감치 열고, 몸으로 실천하고 배워 많은 경험을 직 접 몸으로 습득하고, 그래서 배움의 즐거움을 깨달은 아이들이 알파고 (AlphaGo)와 대적할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 옛날 왕과 왕비도 차라리 오로라 공주에게 물레를 쓰는 법과 물레를 마주했을 때 주의할 점을 가르쳐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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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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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보다는 실기 철저한 현장 위주 교수진을 자랑하는

시각 디자인의 명문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 (SVA)

School of Visual Arts 맨해튼 그래머시 파크 인근에 메인 캠퍼스를 두고 있는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 - SVA)’는, FIT, Parsons, Pratt와 함께 뉴욕의 대표적인 아트 앤 디자인 대학 이다. 학교 명칭 그대로 미국의 수많은 예술 대학 중에서도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 정상급 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문 교육 기관이다. 특히 애니매이션, 컴퓨터그래픽, 일러스트레이 션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환경을 갖고 있으며, 전문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로 구성된 교수 진들 이 학교 교육의 핵심을 담당하고 있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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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1947년 실라 로즈(Silas H. Rhodes)와 번 호가스(Burne Hogarth)가 설립한 ‘만화가와 일러

스트레이터의 학교(the Cartoonists and Illustrators School)’이 SVA 의 전신이다. 3명의 교 수진과 대부분 2차대전 참전 베테랑이었던 37명의 학생으로 소박하게 출발한 학교는 1956

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공식 명칭을 바꿨다. 현재 3650여 명의 학부생과 650명의 대학원생 그리고 980여 명의 교직원이 있다. 전공과목은 학사와 석사 과정으로 광고, 애니메이션, 만

화,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상,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인테리어 디자인, 사진, 시각 비평 연구, 인터랙션 디자인 등이다. SVA 는 첼시 8애비뉴와 6애비뉴 사이 예전 클링어뷰

첼시 극장을 구입해서 2008년 SVA 극장으로 개관했다. 2 개의 개별 강당이 있으며 영화 상 영 외에 회의, 강의 및 기타 공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SVA 극장은 또한 에단 호크, 루씨 리

우 등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포함해 학교의 교육 사명과 학생들의 관심사와 관련된 다양 한 프리미어 행사를 하고 있다. Dusty Film & Animation Festival의 개최 공간이기도 하다. 실용적인 커리큘럼

이 학교 컴퓨터 아트 석사 졸업생이고,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드림웍스에서 일했던 전 용덕 동문의 설명을 인용하면, 학생들의 첫해는 대부분 디자인 역사, 디자인에 관한 스토리 텔링, 타이포그래피 등 기본기를 다지는 수업으로 채워지는데 특히 타이포그래피의 비중이 크다. 기존 서체들의 활용을 넘어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탐색해보도록 장려하

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무엇’이라는 목적지와 함께 ‘왜’라는 근본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

두 번째 해에는 디자인 비평, 지적 자산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때 시장조사를 토대로 구축한 자신의 디자인 이론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비즈니스 계획에서부터 브랜드 전략 의 실질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은 명실상부 프로페셔널한 디자이너의 작업 과정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최근에는 그래픽 디자인 교육과정에

서 디지털 영상이 강화되고 있는데, 이는 현재 시장과 업계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 기 때문이다. 시작이 만화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학교였던 만큼 일러스트레이션 학과 출신 학생들의 활약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일러스트레이션 학과에서는 인간의 뇌를 이미지 생성

기로 이해시키며 인류의 기원과 함께한 그림이 스토리텔링의 강력한 도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교육한다. 교수진

뉴욕에서 굴지의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를 배출해온 SVA의 사명은 프로를 양성하는 것이다.

100여 명에 이르는 교수진은 각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실무자들이며 디자인의 기본 요 소들을 현장 경험을 토대로 심도 있게 가르친다. 대표적인 교수로는 타이포그래피의 혁신

가로 불리는 카린 골드버그(Carin Goldberg)와 1961년부터 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밀

턴 글레이저(Milton Glaser) 등을 들 수 있다. 브로드웨이 포스터 디자이너로 유명한 게일 앤더슨(Gail Anderson), 모마(MoMA)의 디자인・건축 부문 수석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 (Paola Antonelli), ‘I ♥ NY’ 로고를 디자인한 밀턴 글레이저, 모건 스탠리 등 금융 서비스 브

랜딩으로 유명한 켄 카본(Ken Carbone), 모토로라와 코카콜라의 아이덴티티를 리디자인 한 브라이언 콜린스(Brian Collins) 등이 있다. 팝아티스트 키스 하링(Keith Harrying), 영화 'X맨'의 감독 브라이언 싱거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 진출한 SVA

한국에서 SVA 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4년 1주일간 상명대예술디자인센터

에서 ‘언더그라운드 이미지: 스쿨오브비주얼아트(SVA) 지하철 포스터, 1947년부터 현재까

지 (Underground Images: School of Visual Arts Subway Posters, 1947 to the Present)’ 전시회를 개최하고 한국 사무소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앤서니 로즈 부 총장은 “이론보다는 실기 중심”이라는 간결한 문구로 SVA식 교육의 경쟁력을 설명했다. 현 장에서 왕성하게 활약하는 인물을 계약직 교수로 채용하는 전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로

즈 부총장은 “예술대학이라면 드로잉, 페인팅 등 커리큘럼은 어디나 비슷하다”며 “그러나 SVA재학생은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최신 지식을 배울 수 있고, 마블과 픽사 등 업계 최전선 에서 활약하는 인물에게 날카롭고 정확한 비평을 들을 수도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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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인물탐구

탄생 100주년을 맞는

세계적인 한국의 음악가 윤이상 문재인 대통령 독일 방문을 계기로 새롭게 조명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방문 일정 중에 작곡가 윤이 상의 묘소를 참배한 기사를 전하며 연합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뽑은 구절이다. 그만 큼 윤이상은 한국 출신 작곡가 중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한 국에서는 금기의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이후 이념 논쟁에 계속 시달려왔 기 때문이다. 재독 동포 오길남에 대한 탈북권유 논란, 북한 정권의 윤이상 추대 건 까지 겹쳐지며 그의 음악은 한국 땅에서 연주되기조차 쉽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의 하나로 논란이 된 블랙리스트에 실제 ‘윤이상평화재단’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국의 밖에서는 동양과 서양 의 음악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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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원조 블랙리스트' 윤이상, 김정숙 여사 묘지 참배로 재조명. 한국에서의 활동

동백림 사건 이후

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과

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

윤이상(1917-1995)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현대 음악 작곡가, 바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고에 진학했

다가 결국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

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이후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

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간 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

들고 자신은 음악 부문을 맡았다. 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거쳐 서울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

게 발표했다. 1956년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의 활동

1956년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 베를린으로 가서 라인하르트 슈바르 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에게 배웠다. 1958년 다름슈타

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여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

윤이상은 서독 귀화 후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 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

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1995년 11월 3일 독 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 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사건 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 하여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여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늘 고향 통영의 바다와 흙이 음악 세

계의 기초가 됐다고 말했지만, 동백림사건 이후 끝내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 7월 윤이상의 묘소를 찾은 김정숙 여사가 참배에 앞서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를 묘비 바로 앞 에 심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생전 일본에서 배

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는데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 를 듣고 많이 울었다”며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고 말했다.

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

윤이상의 음악

를 서양 음악에 접목한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 도나 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 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윤이상의 일생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그는 1963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

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 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 북 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 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저 명한 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1967년 1 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 삼심에서 감형 받았고,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한국에 서 그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었다.

윤이상의 음악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

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

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

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 을 개척했다. 그는 유럽 현대음악의 첨단 어법으로 한국적 음향을 표현 하는 데 도전했으며 작품 속에 동양의 정중동의 원리를 녹여내기도 했 다고 평가받는다. 지휘자 최수열은 “여태껏 제대로 연주되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며 “윤이상은 전통 악기나 특수 악기 없

이 기본 오케스트라로 매우 전통적인 소리와 음향을 빚어낸다”고 설명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제희는 “윤이상은 분명 서양 기보법으로 자신 의 음악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가 사용한 하나의 음에는 발생과 전개, 성장, 끝맺음 등 동양적 사고가 담겨 있다”며 “윤이상 음악에는 딱 그만

의 색깔과 사운드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음악계 이곳저곳에서도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 다. 코리안심포니가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죽음에 관한 두

개의 교향시’라는 주제 아래 윤이상의 ‘화염 속의 천사’ 등을 연주했다. ‘화염 속의 천사’는 독재 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분신자살을 한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윤이상이 1995년 발표한 교향시다. 서울시향

은 광복절 기념음악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윤이상의 ‘예악’을 선보였고, 첼리스트 고봉인은 9월 금호아트홀에서 윤이상 특별 무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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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붓끝으로 그리는 본질의 예술

캘리그라피 작가 데이비드 장 데이비드 장(David Chang)은 캘리그라피의 예술을 탐구하는 뉴욕의 예술 가이다. 그는 해석의 이론에 대한 연구인 해석학(the hermeneutics)을 사용해 동양과 서양 캘리그라피의 원리를 연구한다. 또 신성한 텍스트, 공간 및 의 식의 변형 과정에 기초한 패러다임을 창안한다. 데이비드 장(David Chang) 의 예술은 서양 캘리그라피와 동양 철학의 전통을 도시 환경의 직접성에 의 해 형성되는 방법론과 융합한다. 서양 캘리그라피의 도구와 기술 (이탈리아 의 휴머니스트 문서, 독일 표현주의 체 및 잉글리시 라운드핸드 체)을 사용 해 지난 10년 동안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과 필법을 개발했다. 그는 수년 동 안 서양과 동양의 캘리그라피 전문가 존 스티븐슨(John Stevens), 브로디 노 이엔 슈 반데르(Brody Neuenschwander), 데니스 브라운(Denis Brown), Lo Ch'ing Che 작품을 찾아 공부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추구해왔다. 번역 Taylor Lee 정리 Sohn Si-hyun 40


www.davidchang.format.com

데이비드 장(David Chang)은 전통 서체의 의식화된 획에서 각 문구의 본질을 끌어낸다. 그의 작품은 역동적이

고, 체계적이며 원초적이다. 따라서 겉보기에 다소 이상한 ‘울타리’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은 방치된 듯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을 때 더욱 빛난다. 색과 그림자들의 무질서한 집합이 시선을

강탈하는 낡은 판자로 만든 울타리. 당신은 그 너머에서 무엇인가 느낄 것이다. 당신을 갈라진 틈 사이로 유혹하 는 것과 궁지에 몰린 상태로 두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그 울타리의 튼튼한 경계를 만든다. 또한, 그의 작품 과정 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연속적인 전환이다. 즉, 그는 작품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선택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느낌을 들게 하며, 무엇보다도 고백적인 것이 그 특징이다.

David Chang is a New York City-based artist exploring the art of Western calligraphy within a contemporary context. He uses hermeneutics (study of the theory of interpretation) as the tool for his

research on the principles of eastern and western calligraphy. Also, he creates a paradigm based on the transformative process of sacred text, space and consciousness.

David Chang's art merges a tradition of Western calligraphy and Eastern philosophy with a

methodology that is shaped by immediacy of his urban environment. Using tools and techniques from

Western calligraphy (the Italian humanist documents, the German expressionist stroke and the English

roundhand), he has spent the last ten years developing his unique style and stroke. He pursued his art

education by seeking out and studying with both Western and Eastern calligraphy masters, such as John Stevens, Brody Neuenschwander, Denis Brown and Lo Ch'ing 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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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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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목민 시리즈 (2)

가상화폐가 몰려온다 암호화폐 비트코인 이야기 지난 9월호에는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대한 개론을 지면을 통 해 소개하였다. 이번 10월호에는 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코인 의 대명사, 알트코인(Altcoin)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글 Lee Chang Soo 정리

편집부

알트코인(Altcoin)이란 무엇인가?

알트코인은 비트코인 이외의 다른 모든 암호화폐를 편의상 칭하는 말이다. 그 어원은 영어의

얼터너티브 코인(Alternative coin)인데, 이를 줄여서 ‘알트코인(Alternative coin)’이라고 한다. 알트코인으로 대표적인 코인은 이더리움, 리플, 라이트코인, 데쉬 등 거래소에서 거래량 상위

코인을 메이저 알트코인이라 하고, 그 밖에 거래량이 상대적으로 작은 코인을 마이너 알트코 인이라고 한다.

2017년 3월까지만 하더라도 비트코인의 시장 점유율은 85%에 가까웠지만, 이더리움을 비롯

한 알트코인의 상승으로 비트코인의 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여 동년 6월에는 비트코인의 점

유율이 암호화폐 등장 이후 최저치인 38%에 머물고 있으며, 반대로 이더리움은 꾸준한 상승 으로 사상 최대치인 31% 수준에 이르고 있다. 점유율 3위는 리플로, 10% 수준이 되었다.

비트코인 가치가 이미 너무 올랐다는 인식 때문에 아직은 신생기인 알트코인은 대체 투자처로

서 주목받고 있다. 세계에는 700여 개 이상의 암화화폐가 존재하고 지금도 매일 많은 알트코 인이 탄생한다. 대개 볼륨이 작기 때문에, 난데없이 수백%의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지만 어느

날 거래소에서 폐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마이너 알트코인에서 대박을 노리고 싶 다면 너무 볼륨(거래량)이 적은 알트코인은 선택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상장 전 주식에 미리 투자하는 것과 비슷한 절차로 현재 개발 중인 알트코인에 투자하는 ICO(Initial Coin Offering)를 통해 ‘대박’을 노리는 투자자들도 있다. 이들 알트코인을 국내 해 외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는 볼륨으로 구분해서 메이저 코인과 마이너 코인으로 나누어 소개

하고자 한다. 메이저니 마이너니 하는 구분은 단순하게 거래량으로 분류한 것이니 오해가 없

기를 바란다. 즉 그 순위는 언제든지 바뀔 수가 있으며 거래량이 5위까지를 그냥 메이저 코인 으로 그 나머지를 마이너 코인으로 편의상 분류한 것이다.

글 이창수 Ph.D Lee Chang Soo

서울 대원고등학교 서울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서울대학원 지반전공 석사 서울대학원 지반 박사 수료 서울 벤처대학원 대학교 컴퓨터응용 기술학과 공학박사 43


메이저코인

총 1천억 개가 발행되었는데 네트워크 스팸 공격을 막기 위해, 거래마다

1위 이더리움 (Ethereum, ETH)

하는 특징이 있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2.0’ 프로젝트들이 시작되면서 탄생한 암호화폐 중

0.00001XRP가 수수료로 지급되며 이렇게 지급된 수수료는 영원히 소멸

하나이다. 최초 마스터코인(Master Coin) 프로젝트의 참여자이던 ‘비탈

3위 라이트코인 (Litecoin, LTC)

안되었다. 그러나 해당 내용은 마스터코인에 적용되지 않았고, 이후 2013

암호화폐이다. 사실상 비트코인 기반의 파생 화폐이며, 기술적인 면으로는

릭 뷰터린(Vitalik Buterin)’에 의해 마스터코인의 기능 업그레이드로서 제 년에 비탈릭 뷰터린이 이더리움을 독립 프로젝트화 하였다. 2015년 7월 에 출시하였고, 삼성SDS를 포함한 글로벌 대기업들이 이더리움에 기반을

둔 기업용 블록체인 연합체인, 엔터프라이즈 이더리움 얼라이언스(EEA) 에 합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이더리움 화폐단위는 이 더(Ether)이다. 한국에는 2016년 3월 이더리움을 사고파는 거래소가 오

픈하였는데 당시 1달러 수준이었던 1이더가 현재 2017년 9월에는 300달

2011년 10월 7일, 전 구글 직원이었던 찰리리(Charlie Lee) 에 의해 공개된 비트코인과 거의 같은 알고리즘을 사용하지만, 비트코인과는 다른 몇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다만, 비트코인의 단점을 보완하고 좀 더 나은 가상 화 폐를 목표로 두고 있으며, 비트코인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 비 ‌ 트코인보다 블록생성 속도가 4배 더 빠르다. 비트코인 블록은 10분마 다 갱신되지만, 라이트코인 블록은 2.5분(비트코인의 1/4)마다 갱신된다. 따라서 비트코인보다 대략 4배 빠른 거래가 이루어진다.

러 안팎까지 오르는 등 가격변동이 심해 안정성이 문제 되고 있지만 그래

• ‌ 해시함수는 비트코인은 SHA-256 기반이지만, 라이트코인은 Scrypt라는

에 적용된 블록체인 기술과 이보다 더 앞선 기술인 ‘스마트컨트렉(Smart

• ‌ 발행량이 최종적으로 8400만 개로써. 비트코인 발행량인 2100만 개보다

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매력적이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

Contract)’까지 적용돼 현재 가장 주목받는 가상화폐로 떠 올랐다. 스마트 컨트렉은 미리 지정해 놓은 특정 조건이 일치될 때 자동으로 계약이 실행

암호 알고리즘을 사용한다. 정확히 4배 많다.

되는 프로그램으로 주식 거래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4위 대시(DASH)

2위 리플 (Ripple, XRP)

이 즉각적이고 빨라서, 인터넷상의 손에 쥔 돈이라 볼 수 있다. “당신의 시

리플(Ripple)로 잘 알려진 XRP코인은 글로벌 정산 네트워크에서 사용하

는 코인이다.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결제 서비스는 다수의 소비자와 국내

은행, 해외은행 등 여러 기관을 거쳐 이뤄진다. 각 기관의 정산과정을 거 치는데 시간과 비용이 비교적 많이 들어간다. 만일 이런 절차를 줄인다면

Dash는 Digital과 Cash의 D와 ash를 합쳐서 만들었다. 대쉬는 트랜잭션

간은 가치가 있습니다. 즉시 비용이 지급되고 거래가 체결되는데 1초도 안

걸립니다.”라고 대쉬는 이야기한다. 이와 비교해서 비트코인의 트랜잭션 은 처리하는 데 1시간까지 걸릴 수 있다.

효율적일 것이다. 바로 이런 시스템이 리플이며 여기에 쓰이는 코인이 리

5위. NEM

두고 활용하고 있다. 그래서 리플 프로토콜을 차세대 SWIFT(국제은행간

적으로 새로운 코드 베이스로 짜였다. 비트코인과 차별화되는 몇가지의 특

플코인(XRP)이다. 현재는 주로 은행간 이체서비스를 주요 중점 사업으로 통신협정)라는 뜻에서 ‘SWIFT 2.0’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또한, 리플은 각 주체 간 가치의 이동을 중개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리플 분산원장에 서는 리플코인(XRP)이라는 고유의 가상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고 이것

을 매개로 단순 이체나 환전을 넘어서 이종 화폐나 유가물 간의 거래가 가 능하도록 만들었다. 즐, 달러, 엔, 유로, 비트코인, 사이버머니, 기업체 포인

트, 전화카드 남은 시간, 항공사 마일리지 등 모든 형태의 화폐와 유가물 이 교환될 수 있도록 매개한다. 매개 화폐인 XRP는 채굴이 아닌 방식으로 44

NEM은 자바라는 Script 언어로 쓰였다. 비트코인의 오픈소스 코드와는 전

징이 있다. NEM에서는 채굴하기보다는 수확한다고 보면 된다. 그것은 본

질에서 비트코인 채굴과 똑같지만, 비록 훨씬 더 양이 적을지라도 만들어 진 블록으로부터 다양한 이익을 얻는 유일한 코인일 것이다. NEM의 디지 털 원장에는 중요도 증명방식(POI, Proof Of Importance)알고리즘을 도

입하였다. 한 사람의 재산과 수많은 트랜잭션은 트랜잭션에 시간을 매기기 위해 이용된다. NEM은 2017년 초에 나와서 현재 일본에서 인기가 있으며, 크게 성장하고 있다.


마이너코인(거래량 6위 이하의 암호화폐)

PIVX

이더리움 클래식(Ethereum Classic, ETC)

의미한다. PIVX는 비트코인 코어 기반으로 제작되어 있고, Zcash나 모네로

이더리움 클래식이라는 이더리움과 쌍둥이 플랫폼이 엄청난 시가총액을

유지하며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왜 같은 플랫폼의 2가지 버전이 존재할 까? 이더리움 클래식은 이더리움 커뮤니티가 도둑 맞았을 때 기술적으로

해결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서 분기하여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잃어버린

코인을 다시 찾기 위해 이더리움의 코드를 바꾸기를 원했다. 이더리움이 제삼자에 의해서 간섭받지 않아야 하고 블록체인의 불가역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더리움의 클래식 버전으로 분기하였고 오늘날 에도 살아남아서 인기를 얻고 있다. 모네로(Monero, XMR)

모네로는 “블록체인 블록에서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트랜잭션 없이 코인

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즉, 더 큰 익명성을 바라는 이들에게 알맞

PIVX는 사적 즉시증명 트랜잭션(Private Instant Verified Transactions)을 와 마찬가지로 향상된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자랑한다. 올해 3월처럼 거래 량과 가치에서 엄청나게 급등했다. 다시, PIVX가 사생활에 대해 강조하는

것 때문에 범죄에 민감하다. PIVX는 “우리는 당신이 기업의 규칙, 정부의

영향 그리고 비도덕적인 사람들과 행동에 간섭받지 않는 사적으로 화폐를 교환할 권리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한다. 디지바이트(Digibyte, DGB)

스트라티스(Stratis, STRAT) - 제 2의 이더리움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일컬어지는 코인. 왜냐하면, 잠재가능성과 현시점의 위치가 2017년 초의 이더리움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트라티스에 입소문이 나자 마자 대량의 투자가 이뤄졌으며, 앞으로의 성장이 주목된다.

다. 거래 트랜잭션은 모네로의 Leveraging of Ring Signatures로 인해 완

블랙코인(BlackCoin, BLK)

때문에 인터넷의 음성적인 측면과 범죄조직의 이용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른 코인과 달리 철저한 익명성과 돈세탁을 추구하는 코인

전히 추적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모네로의 사생활 보호라는 측면의 강조 보일 수 있다.

지캐시 (Zcash, ZEC)

Zcash는 모네로처럼 이용자들에게 더 큰 사생활 보호를 제공해 준다. 모

말 그대로 암흑가의(BLACK) 거래를 도와준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코인. 다 아크(ARK)

모든 코인을 연결해 장점을 흡수하겠다는 스마트 브리지가 메인 기술.

네로와 다른 점은 트랜잭션을 완전히 사적인 관계로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IOTA

자들과 거래된 양)은 숨겨진다. Zcash는 당사자들이 서로의 신원을 확인

이며 채굴 시스템이 없다.

보호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트랜잭션 그 자체의 세부사항(연관된 이용 하지 않고 돈을 교환할 수 있게 해 주는 영지식증명방식(Zero-knowledge

특이하게도 블록체인이 아니라 Tangle이라는 고유방식을 사용하는 코인

Proof)을 이용해서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비트코인은 투명

버지코인 (Verge, XVG)

이러한 투명성을 없애고 정보보호를 강화하고자 하는 시도가 지캐시이다.

트워크를 활용하여 사용자의 IP주소 등 추적이 불가한 점과 매우 빠른 전

성이라는 특징으로 인해 거래하는 모든 계좌정보와 이체내용이 공개된다. 2013년에 처음 ‘제로코인(Zerocoin)’이라는 프로젝트로 알려졌으며, 영지

식증명(Zero-Knowledge Proof)이라는 기술을 통해 비트코인의 개인정보

모네로, 대시 등과 함께 익명성에 초점을 둔 코인. 다른 코인과 달리 Tor 네 송속도가 특징이다.

보호(Privacy)와 관련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와 관련된

위에 언급한 10가지 알트코인 이외에도 스팀(STEEM), EOS, 그노시스

다.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영지식증명(Zero-Knowledge Proof)은 기본적

(BitShares, BTS), 스텔라(Stellar, STR), 골렘(Golem, GNT) 등 수많은 특화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으며 그 중에서도 지캐시는 주목받아 온 프로젝트이 으로 특정 대상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 정보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기법이다. 이미 30여 년 전에 언급된 연구주 제이며, 여러 가지 방법이 연구됐다. 절대적 증명방법은 아니고 ‘확률적 증

명방법(Probablistic Proof)’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 뢰도를 충분히 높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작업 반복 즉 컴퓨팅 파워가 요구된다. 개발 초기에는 비트코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드온(Add-On)’

으로 기획되었다. 그리고 수차례의 기업투자, 프로그램 코드감사, 브랜딩 을 거쳐 다시 ‘지캐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비트코인의 에드온이 아닌

독자적인 블록체인을 구축하게 된다. 2016년 10월 28일에 베타버전을 공 개하였다. Decred

디크리드의 주요한 목적은 “커뮤니티의 입력값(input), 오픈된 관리방식,

지속할 수 있는 코인과 개발”에 맞춰져 있다. 디크리드는 소수의 사람에 게 많은 코인이 집중되지 못하게 하고 정책 결정이 개발자나 초기 투자 자에 의해서 되기보다는 오히려 커뮤니티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Gnosis, GNO), 리스크(Lisk, LSK), 시아코인(Siacoin, SC), 비트셰어즈 된 코인이 거래소에 등재되어 인기를 얻고 있다.

비트코인과 알트코인은 새로운 세계 경제를 이끌어 나갈지 모른다. 그것은 통제하는 제삼자의 개입 없이 개인 대 개인(P2P)으로 거래하 게 해준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을 구현해 냈고 개발자들은 사토시 의 생각을 개선했다. 리플과 라이트코인은 트랜잭션 속도에 포인트 를 두었고, 거래 트랜잭션을 사적이고 추적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네 로, 지케시는 프라이버시에 초점을 맞춘다. 각각의 알트코인은 이렇 게 장점을 주장하며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감 에 따라 계속 진화해 나갈 것이다. 다음 호에는 에스카사 독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디지털 에셋(Digital Asset)으로 불리는 비트코인과 거래량 상위의 알트코인, 이더리움, 라이트코인, 리플 등에 투자해서 돈을 벌 수가 있을까? 라는 주제로 암호화폐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POW(Proof of Work)와 POS(Proof of Stake) 채굴 알고리즘을 혼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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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뉴욕의 24시를 누비는 택시 드라이버

뉴욕의 24시를 찍는

사진작가 김도영

기획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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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메트로폴리탄의 낮익은 이정표 건물, 그 건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거대한 전광판과 화려한 쇼윈도우. 석양을 배경으로 한 마천루. 눈 오는 날의 센트럴 파크. 배가 정박해 있는 남쪽 항구. 비가 오는날의 흐린 거리 풍경들…. 김도영 작가가 찍은 뉴욕의 모습들이다. 도시는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관찰자의 위치에 따 라 같은 피사체도 미묘하게 변화되고 혹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도영 작가의 작품은 그 순간들을 아주 세밀 하고 빽빽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가 도시의 풍경을 제대로 렌즈에 담기 위해서는 매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부지런함이 필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매 순간의 세밀한 찰나를 잡는 작가가 지녀야 할 열정 외에 그의 직업 자체가 이를 가 능케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을 안다면 그 사진들이 주는 느낌이 새삼 짙어진다. 김도영 작가는 뉴욕 옐로 캡 택시 운전 사다. 그의 작품들이 어딘지 모르게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도, 뉴욕의 구석구석을 24시간 누비는 것을 생업으로 하 는 작가의 카메라가 담아낸 사람과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47


“이거 사진 맞아요? 그림 아니에요?” 김도영 작가의 사진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어김

없이 나오는 반응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우연하게도, 김 작가를 만나기 한 참 전에 그의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한 지인이 자신의 휴대폰을 열더니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사진인데 재밌다”며 타임스퀘어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마치 정밀 하게 풍경을 묘사한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기자는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 까운 작품이네요”라고 말했었다.

김 작가의 사진에서 회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유는 우선 그가 스쿨 오브 비쥬

얼 아트 (SVA) 에서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그가 포토 저널리스트나 순수 사진작 가로 출발한 사람이 아니고 10여 년 전 포토샵의 매력에 빠져 카메라를 들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다. 미술을 전공했던 사람이 늦은 나이에 포토그래퍼로 활동 영역을 바꾼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단순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그 질

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부침이 심했고 굴곡이 많았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도영의 가족은 그가 16살에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다. 조부가 유복했지만 돌아가신

후 가세가 기울었고 부친은 정치에 발을 디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뒤 남미에서 의

류 사업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수학을 유난히 좋아했고 잘해 서 수학 교수를 꿈꾸던 그의 인생은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민을 오지 않고 만약 한국에서 살았다면 아마 지금쯤 수학 선생님이나 교 수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어린 시절 저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술 도 잘했어요. 자랑이 아니고 당시 한국에서 열린 전국단위 미술 대회에 나갈 때마 다 금상을 받곤 했었습니다. 뉴욕에서 미술대학에 진학한 이유기도 하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던 그는 운동을 잘했고 특히 태권도를 오래 했다. 수학과 미술

과 체육. 동시에 잘 하기 힘든 것들을 모두 잘했던 그는 한마디로 머리가 우수하고 예

체능에 재능이 풍부했던 청소년이었다. 재능이 풍부한 사람은 어디에 가도, 오히려 당시 한국보다 더 재능을 꽃피우기 쉬운 뉴욕에서 더 큰 꿈을 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유롭지 못한 생활이었다. 그의 가족은 남미에서 1년을 지낸 뒤 뉴욕 으로 다시 이주했다. 부모님은 5남매의 장남인 김도영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사업을 위해 다시 남미로 돌아갔다가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뉴욕에서 4명의 동생을 돌보는 소년 가장 노릇을 한 것이다. 언뜻 쉽게 이해가 않지 않는 부분이다. 어떻게 어린 자녀들만 그것도 외국에 남겨둘 수가 있었을까.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하면…. 생활력은 부족한데 사회 활동은 열정적으로 하는 분이었어요. 집안보다는 바깥일을 중요시하는 예전 남자들 유형이죠. 과장해서 말하면 회장이란 회장직은 다 해보셨을 겁니다. 예전에 뉴욕 대한 체육회장도 하 셨어요. 아마 제가 말리지 않았으면 한인회장도 하시려고 했을 거예요. 그리고 유 난히 성숙하고 일찍 자랐던 저를 장남으로 많이 믿으셨어요. 충분히 남자 한 명 노 릇을 해낼 거라고 믿고 동생들을 잘 돌볼 거로 생각하셨던 거죠. 심지어 아버지는 저에게 아무런 교육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게 인생에 크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 는 분이셨죠. 그래서 부모님이 남미에서 사업을 하시고 뉴욕에서는 사회활동을 하는 저는 어린 시절부터 돈을 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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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 따라서는 방기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부모님의 결정을 그 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을 김도영은 충실히 수행했다. 17살 때부터 야채 가게에서 일했고 주 7

일 쉬지 않고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주 많던 그는 돈 버는 일에도 재능

이 있었는지 어린 나이에 가게 매니저 역할을 해내며 사장의 신임을 받 았다고 한다.

19살이 되던 해 그는 공부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불체자이기 때문에 대학은 어렵지만, 고등학교는 마치고 싶었다. 나이를 17살로 속여 퀸

즈의 한 고등학교에 서류를 냈고 열심히 일을 해줬던 야채 가게 사장님 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친 뒤, 레이건 정 부 때 불체자 사면 혜택을 받아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SVA 를 선

택한 건 앞에서도 말한 미술에 대한 재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사귀 던 여자친구가 미술학도인 이유도 있었다.

신분도 해결되고 대학에도 진학했지만, 자신의 학비는 자신이 해결해 야 했다. 그는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명작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가 백인인 것처럼, 서남 아시안이 다

수인 지금과 다르게 80년대 초반엔 뉴욕 옐로 캡 운전자의 다수가 백 인이었다. 그는 당시 보기 드문 동양인 택시 드라이버였다. 이미 10대

후반 야채 가게 점원 시절부터 보였던 성실함은 택시 운전사 시절에도

나타났다. “24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한 적도 있어요. 남들이 주에 500 달러 벌 때 저는 1000달러를 버는 적도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 물론, 학생이 공부에 열중하고 미술학도가 작품에 몰입해야 정말 성실한 것 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김도영에겐 여전히 그

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동생이 4명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택시일 계속하던 그는 평소 그의 사업 수완을 눈여겨보던 지인에게 세탁사업 을 제안받았다. 이후 사업을 늘려나갔고 동생들이 이주했던 애틀랜타

에 건물도 사는 등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자 3자녀의 아버지, 성실한 가

장으로 살아가던 그는 경제 환경 변화와 사기 등의 불운이 겹쳐 큰 손 실을 보고 다시 택시 운전을 생업으로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침이 심했던 20년 동안의 사연을 그는 자세히 털어놓기 어려워했고

독자들에게 그 사연들을 구구절절이 전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중요한

건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잠깐 했었던 그는 결국 담담 하게 현실을 받아들였고, 소년 가장 시절의 마음으로 다시 최선을 다해

매일 생업에 종사하고, 하루 12시간의 힘든 노동 속에서도 어린 시절 부터 간직해 온 예술혼을 버리지 않았고, 늦은 나이에 전환한 사진작가 로서의 작업에 매진하며 10만 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저한테 남은 건 예술이고 평생 안고 가야 할 길도 예술입니다. 무엇 보다 내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예술가의 모습으로 남길 바랍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김도영 작가는 사진에 포토샵 작업을 아주 세밀하게 공들여서 한다. 포토샵이라는 디지털 효과가 가진 무궁 무진한 가능성에 매료되어 사진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사진의 예술적

표현 영역을 확장하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사진동호회 회원들 에게 저렴한 강습비만 받고 포토샵 교육을 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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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후반 작업으로 완성한 사진 작품에 대한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 도 분명히 있다. 흑백 필름 시절부터 작업해온 정통 사진작가들도 그런

평가를 하지만, 일반인 중에서도 ‘디지털 터치’가 많이 들어간 작품을 마치 성형수술을 많이 한 여성을 진정한 미인으로 보지 않는 것처럼 대 한다. 이에 대해 김 작가의 태도는 확실하다.

“어떤 비판이나 평가건, 예술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예술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의 비판이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하지만 순수함 과 전통이라는 기준에 아주 편협한 사람들의 삐딱한 시선에는 저도 반발하게 되죠. 역사적으로 새로운 조류, 새로운 장르,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표현이 예술에 등장할 때마다 늘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 들이 있었던 것처럼요.” 김 작가는 디지털 후반 작업을 성형이 아닌 ‘화장과 멋내기’로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연인을 만날 때 혹은 비즈니스로 고객을 만날 때, 여성

이 머리와 화장을 하지 않거나 남성이 말쑥한 수트로 갖춰 입지 않는 건 실례다. 민낯과 평상복 차림으로 남을 대하는 건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게으른 것이다.

그는 그래서 자신의 찍은 사진 위에 정성을 다해 세밀하게 후반 작업으 로 아름다움과 느낌을 더한다. 화장과 정장에 대한 각자의 패션 센스와 철학이 있듯이 그도 마찬가지다. 그 사진을 찍었을 때 자신의 감정, 그 것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알고있다.

사진작가가 아닌 뉴욕의 택시 드라이버로서 그가 들려줄 이야기도 사 실은 무궁무진하다. 거대한 뉴욕시에서 얼마나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 고,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된다. 요즘 그는, 자신이

나이를 먹어가서 그런지 연민을 느끼게 되는 손님들도 늘어난다고 한 다. 인터뷰 장소에서 이런 일화를 들려줬다.

“아침에 할머니 한 분을 공항에 모셔다 드렸네요. 며칠 전 할머니가 제 택시를 탔고 그때 오늘 공항행을 부탁했어요. 그 할머니 말씀이 얼마 전 세르비안 항공을 탔는데, 자기가 크로에시안이라고 비행기 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두 나라 사이가 아주 완벽히 안 좋아요. 비 행기에서 끌려 나올 때 사람들이 자기를 테러리스트처럼 쳐다보는 데 기가 막혔다면 막 우시더라고요. 할머니는 그날 심장 수술을 받 고 위독한 상태인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탔어요. 한 달 후 에 되돌아오신다면서 그때도 꼭 픽업해 달라고 합니다. 나이는 모르 지만 아주 많아 보이는 할머니인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화가 많이 났어요.” 김도영 작가가 택시 드라이버의 삶을 살면서 뉴욕 구석구석을 누비며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계속 그의 카메라에

담길 것이고 그만의 독특한 포토샵 작업을 거쳐 각각 개성 있는 사진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의 사진은 결국 그가 전해주는 이야기이 다. 에스카사 독자들은 그가 찍은 사진을 지면을 통해 자주 접하며 작 품속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김도영 작가 작품

https://youtu.be/vQw_awc94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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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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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잔잔한 소망들로 채워가는 나만의 그림

전) 뉴욕현대미술관 행정담당관 조봉옥 ‘꿈은 이루어진다.’ 2002년 한국 월드컵 응원 당시 카드섹션으로 등장한 이후 때로는 자신 의 의지를 다지는 모토로, 또 때로는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덕담으로 쓰이게 된 친숙한 문 구이다. 하지만 이 말이 부담 없이 쓰이는 이유가 목표나 성공보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꿈’ 의 속성 때문이라면?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자유가 못 이루어도 그만인 것이라는 꿈의 허 황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꿈이란 건 그 자체로 공허하지 않을까? 그래서 꿈의 힘을 보여 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았다. ‘뉴욕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 의 작품 보존과(Conservation Department)에서 28년간 행정담당관으로 일하고 은퇴한 뒤, 자신만의 작은 미술관(여러 예술가의 작품들로 가득 찬 그녀의 집)에서 아직 빛을 보지 못 한 보석 같은 예술가들을 돕는 일을 보람으로 삼고 있는 조봉옥을 만났다. 그녀는 말한다. 꿈의 본질은 마음에 품고 추구함을 잊지 않으면 언제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는 현실성에 있다. 더불어, 목표나 성공은 개인적이고 일시적이기 쉽지만, 꿈은 때때로 개 인을 넘어 세상을 영속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매일 7천여 명의 관람객들이 현대 미술의 정수를 보고 느끼기 위해 찾는다는 뉴욕 현대 미 술관, 즉 ‘모마’에는 한국어로 된 안내 책자와 음성 서비스가 갖춰져 있어 영어가 익숙지 않 은 한인들도 어려움 없이 세계적인 걸작들을 한껏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이렇게 한국어 안내 서비스가 모마에서 제공하고 있는 9개국어(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포 르투갈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안내 서비스 중 하나가 된 데에는 ‘조봉옥’이 라는 일등 공신이 있다. 모마에서 일하는 동안 한인 방문객들의 미술 관람을 곁에서 도와 온 그녀의 숨은 노력은 이미 다수의 미디어를 통해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녀의 업적만큼 이나, 혹은 그 이상의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해줄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솔깃한 정보에 에스카사 편집부가 그녀의 집을 찾았다.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53


1939년생인 조봉옥은 올해 나이 79세이다. 하지만 80세를 앞둔 주름

들었던 것은 고국과 가족에 대한 향수였다. 처음 1년 동안은 외로움,

칭은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동안인 외모

까운 감정들로 거의 매일 밤 울다 지쳐 잠들었다. 국제전화조차 쉽지

가득한 ‘여사’님은 계시지 않았다. (하여, 본 기사에서도 ‘여사’라는 호 는 요즘 트렌드라 치더라도, 중년 여성의 노련한 기품과 소녀의 발랄한 감성이 동시에 느껴지게 하는 그녀의 오묘함. 당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볼 수가 없는데도 묘하게 빠져들게 되는 추상화 같달까? 그래서, 추상화 속 패턴 하나하나의 의미를 들여다보듯 그녀의 분위기 속에 담 겨 있는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다.

제1장 숙명적 유학, 홀로서기의 시작 한국에 있던 시절의 그녀는 그야말로 ‘엄친딸’(‘엄마 친구의 딸’의 줄 임말로 모든 면에서 뛰어나 늘 주변인의 부러움을 사는 완벽한 여성

을 뜻하는 요즘 말이다.)이었다고 한다. 예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딸의 전형이었다. 교수였던 어머니를 보며 자

라 본인도 공부하여 교수가 되는 것을 숙명처럼 여겼기에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62년에 망설임 없이 유학길에 올랐다. 대학 시절 학보사를 창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저널리즘을 공부하기로 마

허전함, 그리움, 불안함 등 유학생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안타 않았던 때라 가끔씩 어머니와 통화라도 하게 되면 양쪽 모두 말 그대

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돌아간다는 말은 용케도 꼭꼭 참았다 니 약한 듯 보이지만 목표한 바를 이루겠다는 의지만큼은 그때도 남 달랐다 하겠다.

처음 1년은 거의 매일 울면서 보냈죠. 그런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힘 든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던 것 같 아요. 그때는 시험을 봐서 국비장학생으로 뽑힌 사람만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해외로 돈을 부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 에서 주는 장학금만 가지고 생활을 해야 했는데요. 그게 너무 소액 이라 일을 하지 않고는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 학기 가 지나자마자 바로 레스토랑에 취직했죠.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 얼 마 지나지 않아서 주방의 쉐프들을 재촉할 정도로 일을 잘하는 직원 으로 소문이 났어요.

음먹고 ‘센트럴 워싱턴 스테이트 칼리지(Central Washington State

국비유학생으로 유학을 온 것이나, 향수병을 극복하기도 전에 취직

생활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24년 후 그녀는 모마에 입성했다. 연약한 듯 보이는 외모 속에 숨겨

College: 현 Central Washington University)’에 입학을 했으나 유학 공부가 어렵고 힘든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

하여 스스로 생활비를 해결한 것이나 모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진 의지와 강단이 예사롭지 않다는 방증이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서 기에 성공했다.

미술인 후원단체 알재단 관계자들 및 미술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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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나의 꿈: 미술, 모마,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나

원래 미술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잘 할 수 있다는 확신 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여자가 미술을 공부 하다 실패하면 삶에 타격이 더 클 수 있다는 이유였지요. 그걸 무릅 쓰고 할 만큼 용감하지는 못해서 영문과에 진학했지만,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포기가 안 됐어요. 미술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남편인 이성규 박사(이분 이야기는 다른

장에서 이어진다.)를 만나 아이오와 대학으로 가면서 현실화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왜 이제서야 이 공부

를 시작했을까?’ 싶을 정도로 적성에 맞고 재미있었다. 숙제를 내면 최고 점수를 받았고 교내 디자인 공모에 참여하면 으레 뽑혔다. 시간 은 오래 걸렸지만, 미술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게 된다.

1986년, 아이들이 다 자라 대학에 가고, 마치 그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분이 굉장히 까다롭기로 유명한 작품보존과 책임자였는데 어떤 이 유에선지 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고는 다음 날 바로 같이 일하 자는 연락을 주셨죠. 그렇게 모마의 일원이 된 뒤로 28년간을 작품보존과 한 부서에서 꾸

준히 일했다. 세월이 가면서 눈에 보이게 안 보이게 손상되어 가는 미 술 작품들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일은 굉장히 세밀하고 고된 작업이

기 때문에, 그녀가 직접 그 작업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작품이 훼손 되지 않도록 늘 긴장하고 살펴야 했다. 절대 쉽지 않은 그 일을 했던 시간들을 조봉옥은 미술 전문가들과 함께 명화를 즐겼던 행복한 시 간으로 기억한다.

피카소를 제일 좋아해요. 마티스는 사람이 굉장히 좋고요. 마티스가 그린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이 와요. ‘어떻게 이런 그림 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사람의 심장은 어떻게 생겼을까?’ 작가의 스토리를 알고 작품을 볼 때 그 뭉클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기회가 찾아왔다. 친구가 모마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정보를 주어서 지

그녀의 미술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이해하

락이 온 것이다.

어가 서툴러 세계 거장들의 걸작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하지 못하

원을 하고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한 바로 다음 날 함께 일하자는 연

인터뷰하러 들어가던 순간부터 너무 편안하고 아늑하고…… ‘여기 가 정말 내가 있을 데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당시 저를 면접한

고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발전했다. 특히 한국인이 영 는 점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한국어 서비스 준비를 모마 측에 건의하여 추진하였고, 그 결과 2007년부터 한국어 음성 서비스와 한국 어 관람 안내도가 제공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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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출간된 조봉옥의 저서 ‘피카소와 마티스의 악수’

일하다가도 한국인이다 싶은 사람이 보이면 달려가서 “제가 도와 드릴게요.” 하고는 직접 안내를 해 드렸어요. 그러고 나면 간혹 이 름을 물어보시거나 명함을 달라고 하시는데 그냥 가시라 하고 말 아요. … 한국어로 된 안내 문서, 서비스는 모두 제가 번역을 하거 나 감수를 했고요. 미술관 폐관 안내 한국말 방송은 제 목소리로 녹 음을 했는데요. 지금도 모마에 가시면 저의 젊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웃음) 조봉옥의 한국인 사랑은 그녀 자신이 한국인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

에서 비롯된다. 그녀는‘바니 리(Bonnie Lee)’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조봉옥’이라는 한국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도록 가르치는 그녀를 견디다 못한 미국 친구들이 ‘봉옥’ 과 비슷하면서도 자신들이 부르기 쉬운 ‘보니’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

이었다. (성이 ‘Lee’가 된 것은 결혼 후에 남편인 이성규 씨의 성을 따른 것이다.)

제가 모마에 들어갔을 때는 한국인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보 니 처음에는 같은 부서에 있는 직원들이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죠. 한 번은 한 친구가 회사 냉장고에 넣어 둔 김치를 제 앞에서 흔들면서 무안을 주려고 하길래 정말 대판 싸웠어요. 그게 김치를 소개하는 계기가 돼서 그 뒤로 사무실 직원들이 모두 김치 귀신이 되었습니다. (웃음) 유학 초기, 초등학생 여름캠프 카운슬러로 일할 때는 한국이란 나라를 56

전혀 모르는 아이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고, 모마 에서 일하는 동안 수시로 한인사회 문화 행사에 참여하여 한인들에게

명화 감상법을 설명하는 등 재능 기부 봉사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한

인 예술가들을 돕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2003년, 이화여대 동문이자 지인인 이숙녀 씨가 한인 미술인들을 지원, 홍보하고자 비영리 단체인

알재단(AHL Foundation)을 설립하였을 때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모 마의 미술 전문가들과 알재단을 연결해 줌으로써 재단의 전문성을 뒷 받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까지도 알재단 이사로서 한인 미술인 들을 후원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집에는 알재단의

첫 현대미술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황란 작가의 작품 두 점을 비 롯하여 많은 한인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작품들이

그녀의 집에 자리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가 그 작가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된 스토리들이 담겨 있다.

미술을 하는 게 정말 힘들잖아요.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미술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는 작가들도 많고 요. 재료비가 부족하다 보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작품 을 만들게 되기도 하죠.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 원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예요. 한인 미술가들은 모마에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을지 모

른다. 모마에서나 은퇴한 지금이나 그녀는 미술과 한인들에 대한 한결 같은 사랑으로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한인사회와 한인 작 가들을 돕고 있다.


제3장“ 자기야, 나 제법이지?”

다보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이었어요.” 그녀의 집에는 그 꿈속의 천

은퇴하고 조금은 허전해졌다는 그녀에게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위해 제작해 준 것이다. 작품의 제목이 무엇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글쎄요. 딱히 크게 하고 싶은 일이나

대단한 계획 같은 건 없어요. 그냥……” 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작 고한 남편인 이성규 박사 이야기를 꺼냈다. 로맨틱하기 그지없는 그들

의 연애 시절 이야기는 이미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다. 유학 초기, 울보 였던 그녀를 위로했던 그의 편지와 그가 보낸 베토벤 전집 LP, 아이오

사가 그려져 있는 미술 작품이 걸려 있다. 미술가 안형남이 그녀의

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의 그 당시 마음이 정말 그대로 표현되어 있 어 딱히 제목을 붙일 수도 붙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기자의 질문이 우문이었다. 그 깊은 그리움을 몇 자의 단어로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와 대학으로 옮긴 후 그녀를 불러내던 ‘새소리’를 닮은 그의 휘파람, 그

남편은 생전에 그녀에게 수시로 책을 쓰기를 권했다. 한국일보에 오랫

는 ‘베토벤 콘체르토’ 전곡을 외워 휘파람으로 연주해 주었다고 한다.)

다.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듯 최근 그녀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악수’(일

리고 결혼을 주저하던 그녀를 항복시킨 그의 휘파람 프로포즈까지. (그 미국에 온 뒤로 쭉 든든한 보호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던 남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며 참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먼저 퇴근해서 집에 와 있는데 남편이 그렇게 안 오더라고요… 락커펠라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성규 박사는 2013년 12월 6일에 뉴 저지 포트리(Fort Lee)에 있는 본인의 집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연애 시절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그녀를 열심히 사랑했다.

일하고 제가 남편보다 늦게 집에 오는 날이면, 제가 문을 열고 들어 가자마자 “왔구나!” 하며 보던 책을 놓고 부엌으로 뛰어가서 ‘진토 닉(Gin & Tonic: 칵테일의 한 가지)’을 만들어 테이블 앞에 놓아주 던 것이 참 많이 그리워요. 마시고 편히 쉬라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음악을 좋아했던 남

편을 위해 집에서라도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고 싶은 거, 그게 다라고 답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말속에 묻어났다. 남편이 떠

난 후 한동안 그녀는 모든 것을 놓아버렸었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울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

다. “가슴속에서 조그만 천사가 나와서 내 앞을 뱅뱅 돌다가 나를 쳐

동안 미술 칼럼을 기재해왔던 그녀의 글 실력은 이미 널리 인정된 터였 러스트레이션 안형남)이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그 책의 머리말에는 이 렇게 적혀 있다 - “자기야, 나 제법이지?” 그녀는 “책을 냈다고 하면 제 일 좋아할 사람이 우리 남편인데……” 하며 그리움에 잠겼다.

한국인과 모마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던 조봉옥은 2014년 9월 영예 롭게 은퇴하였다. 모마에서 원하면 아직도 일할 수는 있지만, 이제는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은퇴했다고 한다. 한인 사회의 발전에, 특히 미술 분야에서, 기여해 온 그녀의 업적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이런 그 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후배들이나 한인 작가들에게 해 주

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도 “요새는 그 친구들이 더 잘하고 내 위 인데 뭐.” 한다.

조봉옥, 그녀에게 ‘사랑스럽다’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이유는 그

녀 자체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대한 꿈을 얘기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꿈은 작은 소망들을 조금씩 이루어 가며 사는 것

이었고, 그 소망들 속에는 늘 미술과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포함 되어 있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꿈이란 이런 게 아닐까. 작품보전과에

서 티끌만큼 떨어져 나간 것도 소중히 복원하던 그 마음처럼 그녀는 자 신의 삶에서도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거나 놓치지 않고 소중히 여기 며 꼭 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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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MoMA 사진으로 다시 만나다

The Museum of Modern Art

Photography by Doyoung Kim 58


Photography by Doyoung Kim

Photography by Doyoung Kim

Photography by Doyoung Kim

Photography by Do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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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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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에서 상영회를 마친 후 뉴욕의 한 바에서. 왼쪽은 구교환 감독의 영화 동지이며 연인인 이옥섭 감독. 둘은 첫 장편 데뷔작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엉뚱하고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진지한 다재다능 영화인

<꿈의 제인> 상영을 위해 뉴욕 방문한 배우 겸 감독 구교환 멀티 플렉스 상영관에 걸리지 않는 이른바 독립 영화 중에는 ‘아는 관객은 다 알고 모르는 관 객은 통 모르는’ 작품들이 숨어 있다. 영화 자체에 별 관심이 없거나, 극장에 가더라도 상업 오락 영화를 주로 보는 관객들은 전혀 모르지만 ‘그쪽에 관심 있는 팬들’에겐 소문이 자자한 영화들. 지난 7월 뉴욕 아시안 영화제(NYAFF) 에 초대받은 <꿈의 제인>은 작년도 한국 독 립영화 팬들에겐 크게 소문이 났던 작품이다. <꿈의 제인>은 한국 상영관에서 1만 관객을 넘어섰다. 다양성 영화에서 1만이면 일반 상업 영화 100만 관객과 맞먹는다. 감독의 연출도 돋보였지만, 특히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 주인공 제인 역을 맡은 배우 구교환은 독립영화 계를 넘어 한국 영화계의 스타 배우로 떠올랐다. NYAFF 시사를 위해 짧은 일정으로 뉴욕을 찾은 구교환 감독. 그가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해주었다. 앞으로

분명히 더 유명해질 미래의 명감독 겸 명배우의 인사가 뜻깊다. 아직은 작지만, 분명 미래에 더 크고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될 뉴욕의 월간 매거진에 그가 남긴 흔적이 될 것이므로. 글 Won Young Park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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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겸 감독 구교환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영화배우 겸 감독 구교환입니다. 뉴욕은 처음입니 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도시인데 영화 상영을 위해서 오니까 더 보람 있네요. 많은 분이 극장에 와서 관 심 있게 영화를 봐주시고 박수를 보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서울예술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했고요 2006년 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 윤성현 감독의 영화 <아이들>에서 고 등학생 ‘진욱’으로 출연하며 영화배우로 데뷔했습니다. 그 후 <남매의 집>, <겨울잠> 등 독립 영화를 통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2011년에 단편 영화 <거북이들>로 연출을 시작했어요. 어느 날 대변 대신 거북이 를 배설하게 된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기발함과 상상력이 인정을 받아서 13회 정동진 독립영화 제에서 땡그랑 동전 상을 받았습니다. 역시 주연 겸 연출을 겸한 2013년 작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에서는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조금 더 내밀한 주제를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영 화과 동기들과 ‘잽필름’이라는 팀을 구성해 다양한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어요. 이후 ‘연애’라는 소재를 각 각 다른 시각으로 풀어낸 단편 <연애다큐>와 <방과 후 티타임 리턴즈> 를 만들었어요. 구교환의 수상 경력 저의 짧은 영화 경력 중에 처음으로 의미 있는 상을 받은 것은 저의 영화적 동지이자 연인인 이옥섭 감독 과 함께 연출한 2015년 단편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입니다. 이 작품으로 제14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 화제 국내 경쟁 대상을 받았어요. 이옥섭 감독과는 이후 계속 같이 작업을 하고 있고 장편 데뷔작도 함께 준비 중입니다 <아저씨>, <우는 남자>, <미씽>을 프로듀싱했고 현재 <악질 경찰>을 만들고 있는 영화사 ‘다이스 필름’의 김성우 대표가 저와 이옥섭 감독이 만든 단편을 유심히 보신 뒤 함께 하자고 제안을 해서 조만간 구체적인 작업을 할 겁니다. 그전에 국가인권회에서 지원하는 장편을 먼저 촬영할 예정입니다. 구교환의 대표작이 된 ‘꿈의 제인’ 그리고 역시 이번에 상영한 <꿈의 제인>을 빼놓을 수 없죠. 현재까지 저의 인생 연기가 될 제인을 만난 것 이 큰 행운입니다. 트랜스젠더 제인 역으로 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습니다. 하지 만 그런 수상과 상관 없이 처음부터 제인은 정말 탐나는 역할이었어요. 저는 역할을 고를 때 그 인물에 호 기심이 생기느냐, 계속 질문하며 연기할 수 있느냐를 중요하게 보거든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는데 제인의 대사도 좋았지만, 대사가 없을 때의 움직임, 눈빛 등이 매력적이고, 그걸 실현하고 싶었어요. 감독이 인물 을 대하는 사려 깊은 태도도 좋았고요. 기회가 되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제가 만든 영화들은 유튜브 채널 ‘구교환X이옥섭 HD’ (https://www.youtube.com/user/gookyo8) 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더 좋은 작품으로 다시 뉴욕에 와서

바랍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독자분들을 만나게 되길

* 꿈의 제인 줄거리

주인공은 가출팸(가출 청소년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을 전전하는 소녀 소현(이민지)이다. 청소년 쉼터를 거쳐 연인을 만났던 소현은 그 연인마저 자신을 버리자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소현의 모텔방을 찾아온 건,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이다.

제인은 피가 흐르는 소현의 손목에 붕대를 감아주고, 그날 이후 소현은 제인이 만든 가출팸에서 생활한다. 그녀가 보기에 이 가

출팸은 이전에 경험했고 들어보았던 가출팸과는 공기가 다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밤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고, 서로의 과거를 강압적으로 묻지도 않는다. 그렇게 드디어 따뜻한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할 때쯤, 이 가족마 저 와해되고 만다. 소현은 다시 거리로 나가야 한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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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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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 시리즈 (1)

스튜디오 탐방 유선미 작가 예술의 도시 뉴욕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방문할 기회는 많 다. 하지만 아티스트의 스튜디오를 직접 들여다볼 기회는 흔치 않다. 장소와 규모를 떠나 작가의 작업실은 특유의 분위기와 공 기가 분명히 있다. 미완의 작품들 혹은 습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작업실 한구석에 앉아, 차라도 마시면서 작가와 직접 이야 기를 나눈다면, 전시회 오프닝이나 카페에서 만나는 것보다 더 분위기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에스카사는 ‘작가와의 만남 시리즈’ 첫 번째 기사를 위해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유선미 작가의 스튜디오를 찾았다. 작품과 전시에 관한 것 보다 뉴욕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지가 궁금해서 두서 없이 이것저것 물어봤고, 시원시원 대답하는 작가와 편안하게 수 다를 떠는 듯한 기분으로 이어진 인터뷰였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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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 소개를 더

아니고, 그냥 고등학교 때 미술 프로그램이 좋았어요. 담당 선생이 재

저는 회화와 설치 미술을 하는 작가 겸 다른 아티스트들의 전시를 기

백악관이 각 주에서 한 명씩 선정하는 상 아시죠? 애리조나 대표로 그

해주세요.

획하는 큐레이터입니다. 8명의 작가와 함께 TSA NY이라는 비영리 갤

러리를 브루클린에서 운영 중인 갤러리스트이기도 합니다. 퀸즈 박물 관, 뉴욕 한국 문화원,베를린 한국 문화원, 독일 쿤스탈레 슬라우스 발

모랄, 서울 예술의 전당, 와그너 대학을 포함한 다수의 뉴욕, 서울, 베를

린, 달라스, 콜롬보스, 시카고 갤러리들에서 전시했어요. 2012년부터 프레지던트 클린튼 프로젝트(President Clinton Projects)라는 전시 기 획 프로그램을 진행 중입니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시죠?

조각과 설치라고 할 수 있어요. 제 작업이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벽에다가 하는 설치? 아직 대중에는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중입니다. 페인팅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일종의 믹 스드 미디어인데 어떤 미디움, 오브제로 제 작업을 규정하기엔 어려워 요. 조각적인 회화 혹은 회화에 가까운 조각이라고 설명할게요. (독자들 에겐 다소 어려운 설명일 수도 있지만,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작품을 직접 보면서 듣는 기자에겐 작가의 설명이 더욱 쉽게 이해가 되었다.)

능있다고 계속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실제로 상도 많이 받았어요. 매년 상도 받았어요. 원래 공대 입학 허가 받아 놓고 결국 미대로 진로를 바 꿨어요. 선생님의 추천대로 디자인과 애니메이션 전공이 좋은 소수 정

예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원은 미시건의 웨인 대학 을 나왔습니다.

졸업 후 활동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곧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나요?

대학 졸업 후 오랫동안 노마드의 생활을 했습니다. 괜히 멋있게 들리려 고 하는 말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어요.

우선 케냐에 봉사 활동을 갔다 왔고, 유학생 남자 친구가 있던 시절에

한국에 가서 작가 활동을 했어요. 1990년대 후반, 대략 2년 정도요. (어 차피 이야기를 해줬을 텐데 한국에 갔었다는 대목에서 생활은 어떻게

했냐고 냉큼 물어봤다) 홍대 근처에서 작업실 얻어서 지내면서 전시 활동을 하는 중에 영어를 가르쳤어요. 일종의 연예인 대상 전문 강사였

어요. 오연수, 전인화 등 당시 유명 연예인. 그리고 대형 학원인 파고다

어학원에서 소수 정예 1대1 클래스를 맡아서 대기업 중역 등을 상대로 고액 영어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셨죠? 어떻게 미국에 왔으며 미술은 무슨 계기로 시작

그냥 한국에서 작가로 활동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나요?

고1 때 가족들이 애리조나로 이민을 왔어요. 시골은 아니고 조그만 도

가보니 내가 어느새 너무 미국화되었다는 걸 느꼈어요. 이질감과 불편

을 하게 되었죠?

시였는데 학교에 동양인은 거의 없는 그런 곳이었어요. 1.5세라고 할

수 있는 나이죠. 미술을 하게 된 동기는…. 무슨 대단한 꿈이 있었던 건 66

장단점이 뚜렷했어요. 물론 편하고 재밌는 점도 있었죠. 그런데 막상

함이 보였죠. 무엇보다 90년대 후반의 한국은 젊은 작가가 활동하기

에 결코 편한 환경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한국을 떠난 후 곧장 미국에


돌아오지 않고 13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배낭여행을 했어요.

거 공간, 작업 공간에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이 들죠?

물렀다가 M.I.T에 티칭 기회가 생겨서 갔었고, 그리고 약 10년 전에 뉴

이스트 빌리지, 로어 이스트, 윌리엄스버그, 부쉬윅 등 계속 뉴욕 주변

그 후에 오하이오 컬럼버스의 대학에서 강의했고요, 뉴욕에도 잠시 머 욕에 다시 와서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럼 뉴욕은 종착지가 되는 건가요?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 획은 없는거죠?

결국엔 내가 뉴욕에 오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작 가라면 결국 궁극의 목적지가 뉴욕이 아닐까요? 사실 제가 대학을 SVA 에 다닐 기회도 있었어요. 그랬으면 그때부터 이곳에 정착했을 수도 있 겠죠. 뉴욕이라는 도시는 늘 원하지만 두려움이 있던 그런 곳입니다.

말도 못 하게 비싸죠. 그래서 뉴욕 작가들은 예전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으로 이동했죠. 업스테이와 뉴저지 등으로 이동의 폭이 넓어지고 있어

요. 그 비싼 공간에 대한 비용으로 작업 외에 돈벌이를 위해 많은 시간 을 소비해야 하고요. 저도 방송 코디, 아트 투어 등 틈틈이 부업을 해야

했죠. 근데 주류 미술계도 다른 분야처럼 속물적인 성격이 강해요. 마 치 강남에 산다, 센트럴파크 주변에 산다 그런 것이 지위와 성공의 기 준으로 평가받듯이, 첼시에 스튜디오가 있다. 그러면 대접받는 거죠.

작업실이 퀸즈다 그러면 조금 시선이…. 그러니까 주변으로 너무 밀려 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왜 결국은 뉴욕이냐는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네요.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 공동이지만 스튜디오도 갖고 계시고, 갤러리도

그리고 답이 안 나오는 거죠. 물론 여기만 제대로 된 미술을 할 수 있는

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좋습니다. 계속 정진하시고, 나중에

저도 스스로 했던 질문이에요. 왜 뉴욕인가? 아니라면, 그럼 어디인데?

곳이란 뜻은 아니죠. 파리, 런던, 베이징, 서울 어디에서든 작품을 못하

겠어요. 저는 한때 미술 도시로 핫 하다고 소문난 베를린도 갔었어요.

하지만 결국 뉴욕만큼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는

운영 중이고, 자기 전시뿐 아니라 동료 작가들이 큐레이팅도 진행하시 전시회장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이죠. 왜냐면 작품이란 주위와의 교류, 자극이 영감이 되는 건데

유선미 (Sun You)

창작하던 고전적인 천재의 시대가 아니고, 동시대 작가와의 교감, 교류

Association, Künstlerhaus Schloss Balmoral등을 포함 미국과 독일에서 다수의

뉴욕만 한 곳이 없어요. 자기 작업실에서 혼자 낑낑거리며 머릿속에서 그리고 첨단 트렌드와 꾸준히 접촉하는 게 작가로서는 생명 아닐까요?

근데 뉴욕이 갈수록 너무 비싸잖아요. 미술가는 소설가처럼 책상 하나

만 있으면 작품을 써내는 직업도 아니고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한데 주

Marble House Project, ACE Hotel, Atlantic Center for the Arts, Triangle Arts 레지던시로 초대되었다. Pratt Institute, 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 Kyoto

Saga University of Arts 에서 Teaching과 Visiting Artist로 활동하였다. 현재 베를 린 Scotty Enterprise 갤러리, 브루클린 Underdonk 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며 Artist Book Project가 곧 출간된다. 내년에 SARDINE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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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스마트폰 이미지로 주고 받은 작가들의 대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사진 전시회 Taking Picture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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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150년이 넘는 사진의 역사 속에서 지난 10년은 아마도 사진이라는 매

예를 들어 사진작가인 만자리 샤마(Manjari Sharma)는 카메라 플래

의 등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휴대 전화 카메라

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사진이다. 그녀의 파트너였던 사진작가

체의 향유 방식을 변화시킨 가장 극적인 시기로 기록될 것이다. 아이폰 는 사진의 제작과 사용 그리고 그것을 감상하는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 화시켰다. 이전의 카메라가 주로 과거를 보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면 오늘날 사람들은 휴대 전화로 찍은 이미지를 통해 전례없이 시각적 경험을 친밀하게 공유한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아이폰 탄생 10주 년을 기념해 <Taking Pictures- Camera Phone Conversation

Between Artists> 전시회를 12월 17일까지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시로 얼굴을 지운 한 여성의 초상을 올렸는데, 수신자가 전달한 사람 이리나 로조프스키 (Irina Rozovsky)는 “때로는 서로 동의하고, 때로는 서로를 반향하지만 어떤 경우엔 그냥 무시했다”고 다섯달간의 디지털

대화를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여성은 우연히도 이 기간에 임신한 상태여서 많은 사진이 임신과 관계된 주제들이었다. 둘의 대화는 자연 스럽게 신생아의 이미지로 정리된다.

는 아티스트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서로 전화기로

또한, 작가들이 디지털 대화를 나누던 시기는 마침 트럼프 대통령이 당

느냐는 아이디어로 기획되었다. 전통 미술품의 보고로 알려진 메트 뮤

주 콜(Teju Cole)의 사진들엔 이런 정치적인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재밌

찍은 이미지만을 사용하여 시각적 대화에 참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 지엄이 수년 전부터 보다 현대적인 개념의 기획을 늘리고 있는 가운데,

이런 시도 중에서도 단연 실험성이 돋보이는 이번 전시회를 에스카사 편집부가 다녀왔다.

메트 뮤지엄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지난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12명의 아티스트를 선정했다. 그들에게 한 명씩 다른 아티스트와 짝을

맺게 하고 디지털을 이용한 시각적 대화, 즉 휴대폰 사진으로 소통을

선된 직후였다. 저널리스트인 로라 포이트라스(Laura Poitras)와 작가 테 는 것은 한 작가는 지속해서 이미지를 보내는데 이에 대해 상대 작가는

아주 가끔씩 응답을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일상 속에서 소통의 대상 사이 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준다. 윌리엄 웨그먼(William Wegman)

과 토니 우슬러(Tony Oursler) 사이의 농담 같은 사진 교환 역시 흥미롭

고, 신시아 다그나웃(Cynthia Daignault)과 다니엘 헤이드캠프(Daniel Heidkamp)는 특별히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회화를 교환했다.

하게 했다. 정해진 규칙은 간단했다. 선정된 아티스트들은 2016년 11

영상과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이 이미지의

고, 댓글과 내용이 없는 순수한 사진 이미지들만을 교환했다. 그리고

전달할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이미지 메이커들의 궁극

월 부터 2017년 4월까지 5개월 동안 각자의 파트너와 계속 소통을 했 전시회에서 그 사진들이 공개될 때까지 소셜 미디어에서 공유하지 못

하게 했다. 메트는 이 중 6개의 대화를 선별해서 이번 전시에 소개하고 있다.

이런 실험의 효과는 말 그대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힘이다. 말과 글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혹은 말과 글로는 도저히 적인 목표다. 그리고 순수한 이미지는 수용자들의 해석 공간을 확보해 준다. 이미지들을 통해 전해지는 의미는 수용자들의 몫이다. 이미지에 텍스트가 포함되는 순간, 의미는 한정되고 전하는 사람의 의지가 더 일 방적으로 된다.

만약 매년 애플이 개최하고 있는 아이폰 사진 컨테스트처럼 휴대폰으

오랜 기간, 이미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공급자가 주도하는 소통이

한 풍경이나 인물 사진 전시를 기대하고 온 관객이라면 전혀 다른 사진

일은 자본과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다. 일반인들의 사진은 사적인 영역

로 찍었지만, 기존의 사진작가들 작품 못지않게 예술적이고 스펙타클 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말 을 생각나는 데로 내뱉듯이, 사진을 주고받는 당사자만이 그 주고받는

시점에서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는 즉흥적이고 맥락 없는 이미지들의 연속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장난처럼 의미 없는 장면들을 보

내거나, 보는 사람은 물론 그 사진을 받은 당사자도 동의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있을 것이다.

었다. 영상과 스틸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술을 사용하고 내용을 채우는

속에서 과거를 기록하는 역할에 만족했다. 이제는 인스타그램과 스냅

챗 등을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실시간으로 ‘배설’하는 시대다. 익명의 다수를 향해 혹은 지극히 친밀한 친구에게, 이제 사람들은 스마트폰 사

진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거기에 대한 응답을 기다린다. 이런 새 로운 소통 방식에서의 가장 큰 목적이 ‘의미의 전달’인가를 새삼스럽게 질문하게 되는 전시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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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Photography by Doyoung Kim

Photography by Do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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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로 되살린 지난 시절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7080 세대의 평범했던 일상을 그리는 박정진 작가 작가 박정진(Jong Jin Park) 개인전이 맨해튼의 K&P갤러리(547 W 27스트리트, #518)에서 있었다. 개 인전 이름 ‘메모리’답게 1970년대의 평범한 날들(Memory:Ordinary day in the 1970s)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7080세대의 지난 추억을 찾아주는 애잔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전시회를 찾아 주신 많은 분이 누구누구의 엄마나 아빠라는 이름으로, 혹은 누군가의 아내나 남편이라는 호칭 뒤에 숨겨져 살았지만, 7080세대라면 누구나 지난 어린 시절에 한 번쯤 보았던 평범한 일상의 사물을 표현한 작품을 보시면서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작가는 얘기한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서 깊은 공감의 탄성을 지른 편집부가 작품을

기사에 사용해도 되겠냐는 부탁을 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허락을 받아

내는 쾌거를 이루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글

편집부

Photography by Doyoung Kim

뉴욕에 와서 개인전을 하게 된 연유를 묻자, 2013년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엽서로 제작해 재외 동포 몇 분께 나눠드린 적이 있었는데 예상외로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작은 엽서 그림 하나가 누군가

에게 기억과 추억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 달려가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말한다. 이번 뉴욕 개인전에는 70년대의 기억들을 표현한 35점의 그 림을 선보였는데 ‘우편배달부의 다 낡은 가죽가방, 빨간 공중전화기, 아랫목 이불에 식지 말라고 넣어두었던

밥그릇, 겨울날 교실 난로 위에 쌓아놓은 양은 도시락, 화면 조정기가 보이는 텔레비전 위의 못난이 인형, 다 듬잇돌 위의 방망이…’ 등등. 관람객은 작품과 함께 공감과 웃음, 기억을 되살리며 지난 시간 속 추억으로 빨

려 들어간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중년 세대가 작품을 잠시 ‘잊고 있던 70년대에 두고 온 시간’을 만났으면 하 고 바라고 있다. 그가 동년배의 중년에게 주는 일종의 추억 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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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Doyoung Kim

작가노트 박정진 요즘의 중년은 해야 할 공부가 참 많다. 어느 순간부터, 문화 지체를 경험하며, 무엇엔가 익숙해질 만하면, 늘

비슷한 거리만큼의 앞에 극복해야 할 난이도 높은 과제로 남아있는 새로운 문화들…. 중학교에서 대학생 정도

의 자녀를 두고 있는 이들도 20~30년 전에는 한창때의 젊은이였고, 그로부터 거슬러 10년 남짓 세월을 되돌려

보면, 각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줄 뭔가 뭉클하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어린 시절의 감성이 있다. 술래잡기, 구슬치기, 다방구, 묵찌빠, 기마전, 사방치기, 수건돌리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팔씨름, 연날리기, 닭싸움, 딱지치기, 쥐불놀이…. 등 상대도 필요 없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게임에 빠져있는 요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성을 경험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며 성장했다.

베이비 붐 세대로 여러 명의 형제 틈에서 조금은 부족한 듯하게 자라난 그들이기에 자녀들에게는 성장하면서

느꼈던 모자란 부분까지 더해, 최선을 다하려 한다. 노력한 만큼 이상의 결과로 무한한 성취감을 경험하게 하 는 자녀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 기대치와의 괴리감은 작은 좌절을 경험하게도 하지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어린 시절, 새로 틀어온 솜을 넣어 이불을 만드시던 날, 바늘귀에 실 을 꿰어드리며, 풀 먹여 새로 만드는 이불 한가운데 누워있을 때면, 새로 시쳐지는 이불의 두께만큼이나 세상

무서울 것 없던 푸근한 기억이 있다. 그 이불 위에 어릴 적 기억의 그리운 소리가 담긴 소품들을 더해 따뜻함을 전하고자 한다. 집집마다 켜켜이 쌓인 서로 다른 두께의 이불과 화려한 색채, 중간에 끼어있는 베개들과 늦게 귀가하는 가족들을 위해 묻어두었던 밥그릇 등 나름의 조형성과 배색을 통해 현대인의 해체되어가는 가족이 라는 삶의 방식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빠르게 변해가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 문화 지체를 경험하며, 사회적 역할의 주어진 몫을 힘겹지만, 묵묵히 감 당해가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과 한류를 만들어낸 70, 80세대들의 정서와 감성의 회복을 돕는 작은 위안의 선물을 주고 싶다. 나의 작품 감상을 통해 각자의 마음에 내재한 치유의 감성을 불러내어 현대인의 바쁜 생활 과 세대 차로 소원해진 가족 간의 소통을 돕고, 부모나 배우자라는 이름 뒤에 숨겨두었던 꿈 많던 어린 시절의 ' 나'를 찾아 일상으로 향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주고자 한다. 박정진 작가

경희대 졸업 후, 20년 넘게 학생들에게 미술을 전문으로 가르치고 현재 용산의 오산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전공하고 미술치료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며 서울시 교육청 학교복원진흥원 이 진행하는 시 지원 학생 심리치료 프로그램의 전문 상담사도 겸임하고 있다.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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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Korean Contemporary Art In New York

2017 AKUA ART SHOW

뉴욕지구 한국대학 동문회 총연합회 (AKUA)

맨해튼 뉴욕한인회관에서 열린 ‘2017 아쿠아 아트쇼 뉴욕’ 오프닝 리셉션 개막 테이프 커팅

이광기 집행위원장

지난 8월, 맨해튼 뉴욕한인회관 6층 한인 이민사 박물관(MOKA)에서는 미국- 한국 국제 교류전의 하나인, 뉴

욕지구 한국대학 동문회 총연합회 (AKUA) 가 주최한 전시회가 있었다. 이광기(밀레니엄 뱅크 부행장) 집행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번 전시회가 첫 번째 개최이지만 부산대 김창언, 서울여대 김은하, 서울대 정상 곤, 성신여대 노승옥, 중앙대 강태웅, 숙명여대 이영수, 홍익대 김인옥 교수 등 뉴욕지구 한국대학동문 총연

합회(AKUA) 소속 한국 미대 교수 작가 40여 명의 회화와 믹스미디어, 조각, 사진 등 한국 현대미술이 집약된 다양한 작품들이 출품됐다’고 밝혔다. 뉴욕지구 한국대학동문총연합 류재길 회장은 “각 대학의 모교 작가들

을 초청한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회의 큰 성과’라며 ‘세계 최대 도시이자 상업미술 도시 뉴욕에 이분들의 작 품을 소개함으로써 더 나아가 한미 간 국제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고 말했 다. ‘아쿠아 아트쇼 뉴욕’은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미국 국제 미술 시장과 현지인에게 소개하고 더 나아가 국제무대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작품 판매 수익금 전액이 미국 내 한인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쓰인 의미 있는 전시회였다. 글 74

편집부


맨해튼 뉴욕한인회관에서 열린 ‘2017 아쿠아 아트쇼 뉴욕’ 오프닝 리셉션 축하공연 Yoonmi Choi Trio : 최윤미 (피아노), 조은정(베이스), Julieta Eugenio (알토 색소폰)

NEW JERSEY VOICE ACADEMY 뉴저지 성악 아카데미

대상: 찬양대원 (ALL VOICES), 일반인, 7~11학년 학생 (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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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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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앵그리스트맨

(The Angriest Man In Brooklyn) 영화의 줄거리는? 주인공 헨리 올트먼 (로빈 윌리엄스 분)은 분노의 화신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요. 그의 화로 인해 서 주변 사람들과도 관계가 멀어지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어느 날 그가 병원에 갔다가 담당 전문의의 대타로 들어온 풋내기 인턴 의사 샤론 길(밀리 쿠니스 분)에게서 뇌동맥류(Brain Aneurysm)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단, 90분밖에 못산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동안 자신이 잘못 대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마지막 화해를 시도합니다. (주연: 로빈 윌리엄스, 밀라 쿠니스) 헨리는 왜 화가 났을까? 영화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헨리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즐겁 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 헨리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피 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온통 불평을 늘어놓고, 폭언을 퍼붓는 사람이 되었습니 다. 부인을 멀리하게 되고, 둘째 아들 토마스와도 2년 동안 연락을 끊으며 외로움 삶을 살게 되지요. 남은 90분의 삶 동안 헨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헨리는 아내와 아들 토마스와 화해하길 원합니다. 자신에게 남은 90분 동안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임을 깨닫 게 되지요. 아내에게 꽂을 사 들고 찾아가 아주 로맨틱(?)한 화해를 시도하지만, 오히려 한바탕 싸우고 집을 뛰 쳐나옵니다. 아들 토마스에게도 찾아가지만, 연락이 잘 안 됩니다. 유펜을 졸업하고 뉴욕대 로스쿨까지 나온 아들 토마스는 전문댄서가 되면서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아왔었습니다. 의사 수잔의 도움으로 어렵게 아들 을 찾아가서 헨리가 한 것은 함께 춤을 추는 것이었지요. 헨리는 그 후 기적같이 8일을 더 산 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일주일은 헨리와 가족에게 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내와 병원 침대에 누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과는 어렸을 때 놀았던 카드게임을 합니다. 영화가 주는 심리적 의미는? 영화를 보던 날, 오래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습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입니다. 브랜다이스 대학 교수였던 뮤리 슈워츠 교수가 루게릭병으로 점점 죽어가고 있을 때, 미치 앨봄이라는 제자가 찾아가 화요일마 다 마지막 수업을 하지요. 그걸 책으로 내서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 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책에서 모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 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그 절반 은 자는 것과 같지.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야.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네. “ “마치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어.” 영화 속에서 헨리는 의사 수잔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안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수 잔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지요. 헨리가 의사 수잔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 모두를 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단 90분의 생이 남아 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영화는 그 질문을 우리에게 툭 던 져줍니다. 그리고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금 이 순간 늦기 전에 찾아보도록 안내합니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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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뉴욕의 길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네타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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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글 박원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New School 대학원에서 Media Studies 전공 <뉴욕중앙일보> <라디오 코리아> <뉴욕한국일보> 전 기자. 에세이집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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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광장의 문화가 아닌 길의 문화다. 스트리트과 애비뉴의 문화다. 모든 일은 길에서 벌어진다. 한정된 단

위 면적안에 이렇게 길이 많은 도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은 걸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대표적 인 도시다. 그런데 이런 길의 도시 뉴욕에 막상 골목길이라고 부를 만한 길은 없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한국의 한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그 원고의 주제

가 ‘골목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어떤 골목길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생각해 봤는데…. 막상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분들은 물론 유학이나 여학 연수 등으로 뉴욕에서 살다 간 분들은 아마 그 렇게 반박할 것이다.

“무슨 말이야, 뉴욕에 골목길이 없다니. 내가 가 본 곳만 해도….” 그다음에 갑자기 말이 좀 막히지 않으시나요? 물론 영어로 골목을 지칭하는 Alley 나 Lane이라고 붙어 있는 길

은 있다. Road, Drive, Place 등 좁은 길에 붙어 있는 명칭도 많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정서상에 골목이라고 부를만한 골목이 뉴욕시에 있나요? 우리의 골목 시장을 연상시키는 벼룩시장 골목도 다닌 적 있으시겠지만, 그 역시 ‘스트리트’에 잠시 허락을 구하고 한정된 시간만 손님으로 찾아오는 골목일 뿐이다.

그럼 우리가 골목이라고 부르는 공통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시공학적인 개념이 아니고 다분히 심리

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일 것이다. 우선 당연히 좁아야 한다. 평평하지 않고 경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로등

이 있어야 한다. 예전이라면 연탄재 정도, 요즘도 쓰레기 더미 정도는 있어야 한다. 즉, 부유함보다는 가난함이 나 최소한 소박한 동네의 분위기여야 한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지나 자기 집으로 향하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지저분하더라도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어야 한다. 외롭더라도 위험하지는 않아야 한다. 외국 영화의 골

목이 미스테리 영화의 배경이라면 우리의 골목은 로맨틱 영화의 배경으로 더 어울린다. 그리고, 차가 다닐 수 없어야 진짜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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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골목길을 나는 아직 뉴욕에서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는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면, 유럽이나 중동 지역의 오래된 골목과 비교해도 미국은 골목이라는 문화 자체가 거의 없다. 몇 안 되는 미국인 친구이자 뉴욕 토박이 유태인인 데이빗 이라는 녀석에게도 물어봤다. 질문의 내용조차 잘 파악 하지 못하는 거로 봐서 내 짐작이 크게 틀리진 않은 것 같다.

구글에서 뉴욕의 골목길을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해봤다. 헬렌 레빗이란 사진작가의 이미지들이 가장 먼저 나온다. 20세기 초반 할렘과 브루클린 빈민가 거리에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물놀이를 하는 흑백 사진들이

다. 귀하고 정겨운 사진들이지만, 차가 귀하던 시절 널찍한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일 뿐 골목길의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헬렌 레빗의 사진 속 거리가 내게 진정한 골목이 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이 거리가 아닌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골목은 그곳에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실체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골목의 탄생이 주체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건물들의 부산물이라 는 것에 있다. 무슨 말이냐면, 골목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겨나는 것이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마주 보는 집들의 벽이나 문이 서로 붙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람이 다닐 만한 통로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게 골목이다. 폭도 일정하지 않았고 곡선으로 이어졌다. 뉴욕의 길들은

아무리 좁아도 탄생 과정이 다르다. 계획적이었다. 그래서 뉴욕의 모든 길은 다 이름이 있다. 단지 숫자로만 표 시되더라도 어쨌든 이름과 명칭이 없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국의 골목길에는 이름이 없

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도 없이 태어난 부산물로서의 길. 그 외로움과 천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개발 도상국 시대 한국에서 자란 세대들에겐 골목길이 아니다.

그래도 뉴욕에서 가장 골목다운 골목을 소개하라면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미네타 레인 (Minetta Lane) 을 꼽겠다. 좁고 구부정하며 주위 건물들이 세련된 낡음을 가진 운치 있는 길이다. 봄과 가을이 되면 특히 꽃과 단풍의 모습을 충분히 연출해준다. 뉴욕대 인근이어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와 레스토랑도 즐비하다. 무엇보다 Wha, Comedy Cellar 등 유서 깊은 공연장들이 인근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가 거리를 누비던 예전 그리니 치 빌리지의 향취를 간직한 골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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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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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인의 아내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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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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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엄마 홍정연 (세 번째이야기)

나도 생선 몸통 먹고 싶단 말이야! 82


내야 하니 배가 고프고 졸려도 기름진 맛 난 음식 먹기만을 고대하며 기다리기 일쑤였다. 제사를 중시하고 자손이 귀하다 보니 할머니는 장

손인 오빠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생선이나 고기반찬이 나올 때면 몰래

숨겼다 오빠만 주시곤 했다. 나는 “왜 오빠만 주는데? 나도 생선 몸통 먹고 싶단 말이야!” 하고 대들다가 부지깽이로 된통 맞은 적이 한두 번 이 아니었다. 고분고분 한 성격이 아닌 데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던 나는

불합리하다는 판단이 들면 오빠에게도 대들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

했던 할머니와 엄마는 그런 날 매로 다스렸고 자존심이 강한 나는 악발 이가 되어갔다. 게다가 동네 아이들이 동생들을 괴롭히면 집까지 쫓아

가 남자애든 여자애든 혼꾸멍을 내주곤 해서 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했

다. 초등학교 1학년 계집아이는 동네 아이들 흔들리는 이빨도 야무지 게 잘 빼줬다. 치과의사는 오빠가 됐는데 소질은 내가 있지 않았을까? 스물여덟이 되던 해에 나는 결혼을 했다. 친할머니는 나이 스물여덟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되셨다. 어렸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는

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열녀상이 내려졌고 고

향 어귀엔 홍살문이 세워졌다. 성리학 중심의 교육을 받은 난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군상들의 삶을 접하면서 그 열 녀상이 할머니가 칠순에 돌아가시기까지 끊기 어려운 족쇄임을 알게

되었다. 친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한량으로 지내다 해방 직후에 나름

의 뜻을 펼치고자 경찰이 되셨다. 한국전쟁 중엔 군인 가족이라 몰살을

당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평소에 이웃들과 돈독히 지냈던 덕분

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지리산에 잔류한 빨치산 소탕 임무를 수행하던 중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지금도 정복

을 입은 젊은 할아버지의 바랜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시던 할머니가 떠 오른다. 황망하게 할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아버지는 홀로 서울 친척 집에 오게 되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여 말썽을 피우고 있던 차에 법대를 다니던 사촌 형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아버지도 공부에 매진 하게 되었다. 혼자되신 할머니가 친척 일을 봐주면서 뒷바라지를 하였

젖이 말라 모유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오빠에게 치여 그랬는지 어렸을 때 나는 얼굴이 누렇고 몸매는 깡말랐다. 어느 날 이모 할머니가 내 몰

골을 보시곤 애가 죽을 것 같다고 해서 그 길로 나를 본인 시골집에 데

리고 가셨다. 당시 고등학생인 고모는 날 탐탁해서 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내가 가끔 고모의 교련 모자를 슬쩍 해서 동네 아이들한테 자랑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의 개구쟁이 짓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 루는 이모할아버지가 곰방대로 빠금 빠금 연기를 내뿜는 게 신기하여

따라 해보고 싶었다. 근데 낮잠을 주무실 때도 그 곰방대는 항상 할아 버지 손에 쥐어있어 감히 손도 못 대고 있었다. 호시 탐탐 기회를 엿보

던 나는 차선책을 마련했다. 지푸라기 맨 위쪽이 빨대같이 길게 생겨 얼추 불을 붙이면 곰방대 역할을 할 거 같았다. 짚을 쌓아둔 헛간에서

불을 붙이고 빨아 보니 눈앞이 찡하니 코가 메케해서 그만 피던 지푸라 기를 떨어뜨려 불이 났다. 다행히 이모할머니가 마당에 계시다 바로 발 견해서 큰불은 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모 할머니는

이 얘기를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볼 때마다 하셨는데 얼마나 가슴을 쓸 어 냈으면 그러셨을까 싶어 지금도 죄송할 따름이다.

으니 그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기에 철도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나의 이런 호기심은 미국에 와서 제대로 발휘하였는데 영어도 변변하

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만큼 경쟁률도 높았다.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

“Would you tell me how to go to the Macy?”를 주야장천 잘할 때까

철도 고등학교는 학비를 국가에서 지급하여 가난하지만 똑똑한 학생

는 세무 공무원이 되었고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누구보다 빠른 승진을 하며 공직생활 20년을 보내시고, 회계세무사 자격을 취득한 후엔 자수 성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것이 꿈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다섯 자식 모두를 4년제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홍 씨 문중의 기금으로 장학

제도를 마련하여 근로학생들을 도왔고 우리 오 형제 모두 대학진학을

하였으니 그 꿈을 어느 정도는 이루어 내셨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리 다섯 형제가 그 어떤 재산보다 값지다고 여전히 말씀하신다.

우리 집은 제사를 6대까지 지낸다. 일년으로 치면 추석, 대보름, 설을 제하고도 한 달에 한번 꼴로 제사음식을 차린다. 엄마가 시집 올 때는

게 못 하면서 낯선 사람에게 “Hello” 하고 말 걸기 일쑤였다. 알면서도 지 맨해튼 길거리에서 물어보고 다녔다 눈떠서 잘 때까지 라디오나 텔 레비전을 틀어놓고 뉴스와 soap opera를 보고는 연습을 한답시고 커 피숖이나 쇼핑몰에 가서 말하는 연습을 했다. 병원에서는 시간이 날 때 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면서 전날 공부한 문장들을 말하곤

했다. 그렇게 3개월쯤에 한두 개 들리던 단어가 숙어로 들리기 시작했

고 6개월 지나니 통 문장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 다. 1년이 지난 후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미국에 온 지 2년쯤에 동생이 방문하였는데 영어로 잠꼬대를 한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예전의 말라깽이 꼬맹이가 뉴욕의 한복판에 당당 히 서게 된 것이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매일 부뚜막에 정한수를 떠 놓았고 삼월 삼짓날엔 목욕제계 후 할머니 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4대 독자인 아버지를 부처님의 은공으로 낳 았다고 믿으신 할머니는 구복신앙을 추종하였고, 아버지는 선대가 대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다. 외며느리인 어머니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따랐기에 어

아가칸 파키스탄 대학원 간호학 석사

대로 단명을 하여 후손이 어렵다 여기셨는지 제사에 대하여 철저하셨 려서부터 우리 오 형제는 제사음식 만드는데 총동원되었다. 제사를 지

가톨릭의대 간호학과 학사

뉴욕 리만 칼리지 Family Nurse Practitioner certificate 83


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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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준비물 : ‌ 양면 색종이(검정색 필수), 풀, 가위, 자

색종이 조각보 구성 색종이 세 장으로 작은 조각보를 접어 화면을 구성하는 평면작업을 소개해드립니다. 재 료 준비의 부담도 적고, 색종이를 이용해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완성할 수 있으므 로 연령이 낮은 어린아이들도 구성과 디자인의 원리를 느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작업입 니다. 두 종류의 양면 색종이를 선택할 때에는 서로 보색 관계이거나 차가운 색과 따뜻 한 색, 또는 명도 차이가 있는 색상을 선택하세요. 그런 다음 바탕으로 검정 색종이를 사 용하게 되면 명도 대비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어 구성의 기본 원리를 배울 좋은 기회 가 됩니다. 종이접기를 통해서 소근육 활동이 이루어지고 조각의 반복과 색상, 명도 대 비를 통해서 쉽고 친근하게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조각보 구성을 진행해보세요. 정리 88

편집부


'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Step 1_ 양면 색종이 조각 자르기

양면 색종이를 4등분으로 접어 16조각을 만 들어 주세요.

색종이 한 장 당 16조각으로 잘라요.

* 15 * 15cm 색종이를 사용하였어요.

2장의 양면 색종이를 이용해 16장씩 총 32장 을 준비해요.

Step 2_ 조각보 접기

1

1. 조각보를 준비해요.

2

3

4

5

6

3. ‌ 앞장을 중심에 맞춰 역삼각형이 되도록 내

5. 2 ‌ 장의 색종이를 이용해 16장씩 총 32장을

4. ‌ 뒷장도 중심에 맞춰 역삼각형이 되도록 내

6. ‌ 검은색 종이에 십자가 접기, X 접기를 해서

검은 색종이 위에 조각보를 마주 보게 하여 반

검은 색종이에 32개 조각보를 꽉 차게 붙여줍

액자에 넣으면 근사한 조각보 구성이 됩니다.

* 미리 접어놓은 기준선에 잘 맞추어 주세요.

* ‌ 붙이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패턴이 만들

2. 조각보를 반으로 삼각 접기 해요.

려 접어요. 려 접어요.

같은 방법으로 접어서 준비해요.

조각보를 붙일 기준선을 만들어요.

Step 3_ 조각보 붙이기

복패턴으로 붙여주세요.

니다.

어지므로 풀칠하기 전에 여러 가지 방법으 로 만들어보세요.

글 아동미술칼럼니스트 김민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 현재 미동북부 뉴저지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한소망 한국학교 교감. Fort Lee에서 “미술이랑 가베랑”을 운 영 중이다.

89


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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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건강음식 사찰음식( 사찰음식(

)

)은 이제 종교를 떠나,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최

고의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찰음식은 육식과 인공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는다. 채소조차 파나 마늘처럼 향이 지나친 재료(오신채( ))는 수행자에겐 사심을 부른다 하여 넣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 게 만드는 사찰요리는 이제 건강을 위한 자연 음식으로 자리 잡아 사찰 음식 조리법을 배우려는 주부들이 점차로 늘고 있다. 음식 만드는 과정 조차 수행의 한 방법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사찰음식을 먹는다는 건, 단 순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생각하게 한 다. 지난 7월 말, 뉴욕 올드웨스트베리에 있는 마하선원(주지 서천 스님. 337 Jericho Tpke, Old Westbury)에서는 사찰음식 조리법 강의와 시연회 가 있었다. 건강을 위한 자연 음식 28가지를 직접 만들고 조리법을 강의 하신 도림 스님(경기도 소재 덕암사 주지)은 불교방송 사찰요리 강의 진 행자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요리 지정자로 불교문화원에서 사찰 전 통요리를 강의하고 있다. 채식 위주의 사찰음식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 시는데 도림 스님과 함께 온 일행 중 팽주(차를 타서 나누어 주는 사람을 뜻함) 이해수 씨의 연꽃차 시연회도 함께 진행되었다. 글

편집부 사진 Do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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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간은 고로쇠 물로 담근 간장으로 맞췄다. 한국에서 생화로 가져와, 생연꽃으로 만든 연꽃차

인공 조미료나 멸치 하나 없이 무우와 배, 고로쇠 간장만으로 만든 정갈한 음식 사찰음식은 육류를 배제하고 대신 두부, 표고버섯으로 영양분을 보충한다. 사찰음식은 조리과정부터 이타심을 버리게 한다.

사찰음식을 대하면 모든 생명에의 경외감, 삶에 대한 겸허한 태도를 품게 된다. 불교에서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하여

차를 마시는 것과 선을 닦는 것을 하나로 보며 그 자체를 수행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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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말 번역 Taylor Lee

나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 인

I reached the pinnacle of success in the business world.

다. 결국 부란 내가 익숙해진 삶의 한 가지 사실이었을 뿐이었다. 지금

I have little joy. In the end, wealth is only a fact of life that I am accustomed

생은 성공의 상징이다. 하지만, 일을 빼놓고 나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 이 순간에, 병상에 드러누워 내 삶 전체를 돌이켜보건대, 깨달은 건 내

가 그토록 자부했던 그 많은 명성과 재산은 막 닥쳐올 죽음 앞에는 희 미해지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는 거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초록색 광선을 바라보며 윙윙거리는 기계 소리를 들을 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의 신이 쉬는 숨소리를 느낄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우리 인생의 삶을 유지할 만큼 적당한 재물을

In others’ eyes, my life is an epitome of success. However, aside from work, to. At this moment, lying on the sick bed and recalling my whole life, I realize that all the recognition and wealth that I took so much pride in, have paled and become meaningless in the face of impending death. In the darkness,

I look at the green lights from the life supporting machines and hear the humming mechanical sounds, I can feel the breath of god of death drawing closer…

쌓은 후엔 부와 무관한 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더 중요한 그

Now I know, when we have accumulated sufficient wealth to last our lifetime,

을 시절에 가졌던 꿈을… 쉬지 않고 재물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나 같

Should be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무엇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런저런 인간관계, 아니면 예술, 또는 젊었 이 비꼬인 인간으로 전향시킬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각자의 가슴안에

있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감각(senses)을 주셨다, 재물이 가져다주는 그 환상이 아니라. 내 평생 성취한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we should pursue other matters that are unrelated to wealth…

Perhaps relationships, perhaps art, perhaps a dream from younger days ...

Nonstop pursuing of wealth will only turn a person into a twisted being, just like me.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에 빠졌던 그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이

God gave us the senses to let us feel the love in everyone’s heart, not the

것이다. 사랑은 1,000 마일을 갈 수 있다. 삶에는 한계가 없다. 가고 싶

bring with me. What I can bring is only the memories precipitated by love.

야말로 너를 동반해줄 참된 보물이고 그것은 네게 살아갈 힘과 빛을 줄 은 곳을 가라. 높이 올라가고 싶은 곳으로 올라가라. 모든 것이 너의 마 음과 너의 손안에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침대가 뭐냐고? ? ‘병상이다’… 너는 너를 위해

운전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 있고, 돈을 벌어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

illusions brought about by wealth. The wealth I have won in my life I cannot That’s the true riches which will follow you, accompany you, giving you

strength and light to go on. Love can travel a thousand miles. Life has no limit. Go where you want to go. Reach the height you want to reach. It is all in your heart and in your hands.

만 너 대신 아파줄 사람을 구할 수는 없다.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 찾을

What is the most expensive bed in the world? "Sick bed" … You can employ

‘삶’이다. 수술실에 들어가면, 읽어 내야 하는 유일한 책이 한 권이다는

someone to bear the sickness for you. Material things lost can be found. But

수 있다. 하지만 잃은 후에 절대로 되찾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 것을 알게 될 테니 ? ‘건강한 삶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지금 삶의 어느

순간에 있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장막의 커튼이 내려오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너의 가족들을 위한 사랑을 귀하게 여기라. 너의 동반 자를 사랑하라, 너의 친구들을 사랑하라, 너 자신에게 잘 해라. 타인들 을 소중히 여겨라.

someone to drive the car for you, make money for you but you cannot have there is one thing that can never be found when it is lost – "Life". When a

person goes into the operating room, he will realize that there is one book that he has yet to finish reading – "Book of Healthy Life". Whichever stage in life we are at right now, with time, we will face the day when the curtain comes down. Treasure Love for your family, love for your spouse, love for your friends... Treat yourself well. Cherish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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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고교 2년생이 발명한 새로운 췌장암 조기 발견법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인 그래 니티 상 (Smithsonian American Ingenuity Award) 수상

스무살 청년 과학자 잭 토머스 안드라카 (Jack Thomas Andrak) 모든 암이 다 비슷하지만 한번 걸리면 진단 후 평균 생존 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못 산다는 췌장암은 사망률이 96%이다. 췌장암은 85%의 환자가 말기가 되어야 발견되고 재발 확률 또한 높다고 한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도 췌장암 재발로 사망했다. 초기증상이 거의 없는 췌장암 은 치료방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췌장암에서 살아날 방법이라고는 오로지 치료가 아 닌 빠른 발견이다. 초기 발견이 가장 어렵다는 췌장암, 그러나 췌장암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새 로운 방법을 개발한 암 연구가가 있다. 잭 안드라카 (Jack Andraka).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췌 장암 연구를 시작하여 7개월 뒤 정확도 90% 검사보다 168배 빠르고 비용은 26만 분의 1 정도의 검사 센서를 발명했다. 그는 이 성과로 스미소니언 아메리칸 인그래 니티(Smithsonian American Ingenuity Award) 수상과 2012 인텔 국제 과학 및 기술 박람회 (ISEF)에서 1위를 차지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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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미국 매릴랜드에 살던 15살 소년 잭 안드리카는 어느 날 그가 가 족처럼 생각했던 아저씨 테드가 췌장암으로 사망하자 크게 슬퍼

했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안타까워하며 ‘좀 더 빨리 발견했더라

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을 했다. 잭은 의사의 말에 의문을 품

었다. ‘현대의학은 발전했는데 왜 조기 발견하지 못할까? ‘그는 인터넷으로 췌장암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정보를 찾던 그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을 알게 된다. 현재 사용하는 췌장

암 진단법은 60년 전부터 사용하던 기술에다가 정확도는 30% 였던 것이다. 게다가 검사 기간은 14시간에 비용은 800불이나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나?’ 잭은 고민했다. 그는 그날 부터 암 검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시 찾기 시작해서 암에 걸리 면 특정한 단백질이 혈액에서 증가한다는 사실과 췌장암에 걸릴

경우 증가하는 단백질만 찾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러나 우리 몸 햘액안에는 수많은 단백질이 있고 단백질 하나의 작은 변화를 찾아야 한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큰 문제

는 췌장암에 걸렸을 때 혈액에서 발견되는 단백질 종류만 무려 800종이었다. 그 많은 종류의 단백질 변화를 무슨 수로 …

하지만 15세 소년은 3개월 여름방학 동안 더 나은 진단법을 찾

기 위해 수많은 논문을 찾아 읽고 단백질을 분석했다. 드디어 그 는 무려 4000번의 도전 끝에 췌장암 난소암, 폐암에 걸리면 증

가하는 단백질 메소텔린을 찾아낸다. 하지만 수많은 혈액 속 많

은 단백질 중에서 메소텔린만 인식할 도구가 필요했다. 3개월의

긴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이 시작되어도 그는 연구를 몰입했다. 어느날 과학 논문에서 탄소나노튜브를 보게 되었다. 아주 길고 가느다란 탄소나노튜브에다 특정 단백질에만 반응하는 항체를

엮으면 한 단백질에만 반응하는 센서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 이 왔다. 그는 좁스홉킨스 대학 200명에 메일을 보냈다. 199명

에게 보낸 메일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의학자, 마이트

라 박사에게 ‘어쩌면 가능할 거 같다’는 답을 받는다. 잭은 마이 트라 박사를 만나기 전에 500 이상의 논문을 읽고 연구소로 찾

아간다. 드디어 실험 공간을 얻고 실험실에서 쪽잠을 자면서 드 디어 7개월 뒤 실험에 성공한다. 마침내 췌장암을 진단하는 센

서를 만든 것이다. 이 검사 센서는 기본 검사기보다 검사시간은 5분에 불과하며 비용은 3센트밖에 안 든다. 기존 검사보다 168

배 빠르고 2만 6000배나 저렴하지만 400배 더 민감하다. 거기에

백 퍼센트에 가까운 정확도를 자랑한다. 췌장암뿐만 아니라 난 소암, 폐암도 찾아낼 수 있다. 심장병이나 말라리아, 에이즈에도 응용할 수 있다. 잭은 16세가 되던 2012년 세계 최대 청소년 과 학 경진대회 인텔 ISEF 최종 우승을 한 뒤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

악관 초대를 받는다. 그는 현재 스탠퍼드에 진학해서 암세포를 죽이는 나노봇, 진단 센서 프린터 등을 연구하면서 전 세계로 강 연 중이다. 그의 나이 이제 20세. 그의 목표는 가능한 많은 사람 생명을 살리는 거라고 한다. 그는 3999 실패를 경험했으며 199

명에게 거절을 당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꼬박 7개월을 연구에

매달린 뒤 췌장암 조기 발견이 가능한 리트머스 센서를 발명해 냈다.

사진, 기사 참고 https://storiesbywilliams.com/2013/09/05/jackandraka-and-i-have-a-c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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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이혼을 막은 남편의 질문 하나 How do I make you happier?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행복해질까? 결혼 20년 차 5명의 자녀를 둔 남편 리차드는 어느 날 급작스러운 이혼 위기에 내몰리게 된다. 그러나 한 문장이 모든 것을 바꾸게 되는데…. 글

편집부

ONE

아내와 저의 결혼 생활은 행복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방어적이었고 서로에게 담을 쌓았죠. 하루 는 통화 중에 대판 싸우고 그녀가 전화를 끓어버렸습니 다. 저는 한계에 다다랐죠.

FIVE

다음날, 아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좋은 하루를 보낼

까?” 아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습니다.

“가서 차고를 청소해.” 저는 깊게 숨을 들 이켰습니다. ‘오늘도 고된 하루가 될텐데 나한테 이런 걸 시키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꾹참고 답했습니다. “알았어.” 저는 일어나서 차고를 청소했습니다. TWO

‘나는 왜 이토록 나와 다른 사람과 결혼했던 걸까? 아내

는 왜 달라질 수 없을까?’ 절망이 극에 달한 순간 깨달 음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됐죠. 다음 날 아침 옆에 누운 아내를 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THREE

“당신이 좋은 하루를 보내도록 내가 해줄

“도와주겠다는거야? 가서 부엌이나 청소

로 절 봤어요. “뭐?” “내가 어떻게 하면 당

겠지만 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죠. “알았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아내는 화난 표정으 신 하루가 더 나아지겠냐고?” 그녀가 나를 쏘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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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하던가.” 아내는 제가 화를 낼거라 생각했 어.” 저는 일어나 부엌을 청소했습니다.


SIX

그날부터 매일 아침 아내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

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좀 더 나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아내가 원하는건 뭐든지 했습니다.

SEVEN

아내가 행복해 한다는 사실에 제 마음이 행복해지더군 요. 그리고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싸움이 그쳤죠. 아내

가 묻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뭐 필요한거 없어? 내 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 우리 사이에 쌓인 벽이 무

너졌습니다. 싸우는 횟수가 줄고 전처럼 격하게 다투 는 일도 없습니다. 싸울거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더는 서로 상처주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와 깊은 관계에 있는 인생의 반쪽에게 꼭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더 행복해질까? 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기사 참고 / https://www.facebook.com/hefty.kr/videos/52301522790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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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한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

지상 최고의 샹글리라 부탄

히말라야 동쪽 기슭에 위치한 부탄은 최근에서야 외부에 알려진 나

의 사진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국왕이 너무 젊었다. 거기다

소개한 나라이다. 이 때문에 ‘은둔의 왕국’이나 ‘지상 최후의 샹그릴

긴 외모 때문에 태국 여성들에게 부탄 국왕의 인기가 연예인 못지않게

라로 ‘국민 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세계에

라’라는 별칭이 붙은 곳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유여행이나 배낭 여행이 허락되지 않고 부탄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만 가능한 데 다, 하루에 최소 200-250달러씩 체류비를 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좀처럼 가보겠다.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국왕에 대한 국민의 애정과 존경이 대단한 나라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커졌다. 결국, 올해 2월 네팔에 가는 기회를 틈타 부 탄을 방문하기로 했다. 드디어 부탄으로 가는 날. 카트만두 트리부반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한 시간쯤 지나 부탄의 유일한 국제공항인

파로 공항에 도착했다. 파로 공항은 5500m의 높은 봉우리들로 둘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게 잘생긴 얼굴을 가진 게 아닌가? 실제로 잘 생 높았다고 한다. 물론 국왕이 결혼한 후에는 그 인기가 조금은 수그러 들었지만 말이다. 이전 4대 국왕은 국가의 발전지표를 경제적 개념의

‘GDP’가 아니라 ‘GNH (국민총행복)’을 척도로 삼아야 한다면서 ‘국민 총행복’의 개념을 전 세계에 소개를 한 장본인이다. 또한, 그는 2006년 에는 나라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며 절대군주제였던 부탄왕국의 정치

제도를 입헌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오히려 국민이 망

연자실하며 입헌군주제 도입을 반대했는데, 국왕이 전국을 돌며 국민 을 일일이 만나 투표를 하도록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러싸인 계곡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공항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때문에 부탄의 국왕은 ‘국민의 왕’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마침 내가

한다. 그러나 위험한 공항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국왕의 생일부터 3일간은 공식휴일인데, 생일 당일에는 행사가 있지

이곳에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기 조종사는 전 세계에 10명뿐이라고 탄 비행기는 부드럽게 착륙했다.

파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공항건물이었다. 내

가 지금까지 방문한 공항 중 가장 아름다운 공항이 아닐까 싶은 정도로 예뻤는데, 부탄 전통 양식의 건물에 전통 문양과 색으로 아름답게 장식 이 되어 있었다. 공항 건물에서도 부탄이 얼마만큼 그들의 전통과 문화 를 지키고자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돌려보니 부탄 5대 국왕 부

부의 커다란 걸개 사진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걸개 사진 속의 국 왕 부부의 미소가 무척이나 따뜻했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며 국왕 부부 98

부탄을 방문한 날은 5대 국왕의 37번째 생일 다음 날이었다. 부탄은

만, 그 후 이틀간은 특별한 행사는 없이 공휴일이라고 한다. 도착한 날

도 행사가 있는 줄 알고 부탄 국왕을 직접 만나볼 기회를 기대하고 있

었던 터라, 아무 행사도 없다는 얘기에 살짝 실망했다. 도착한 날 저녁, 부탄에서는 어떤 방송을 하는지 궁금해 호텔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뒤 적거렸다. 상당히 많은 채널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인도 방송이었다.

한참 채널을 돌린 후에 부탄의 유일한 텔레비전 방송인 BBS (Bhutan Broadcasting System)의 채널을 찾았다. 이 BBS에서 전국 각지에서

보낸 부탄 국왕 생일 축하 메시지를 하나씩 소개하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다들 하나같이 사랑하는 국왕이 만수무강하길 바란다는


얘기였다. BBS가 국영방송이라 왕가를 칭송하는 방송만을 내가 보낸 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데, 역시 그렇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홈스테이를 하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틀었을 때도 여전히 국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서신을 낭독하고 있었다. 조금 후에는 지난 10

년간 국왕이 이룬 치적을 칭송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는데, 나

는 이 방송을 다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부탄 친구가 ‘부탄에서 국왕만큼 우리 국민을 위하는 사람 은 없다’며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과장이

겠거니 생각하며 “진짜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느냐?”고 물었는데, 정말로 말 그대로 ‘구석구석’을 다 방문한다고 했다. 가가호호를 방

문하고 얘기를 나누며 그들과 함께 먹고 잔다는 것이다. 공항에서부 터 거의 모든 건물이나 집마다 걸려있는 국왕의 사진을 보며, 우리나 라가 과거에 관공서마다 대통령 사진을 걸어놓고 대통령 각하라 부 르며 충성을 다짐했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 런 정도의 국왕이라면 사랑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실 제로 국왕의 사진을 거는 것은 의무사항이 아닌데도 국민이 스스로

존경의 마음에서 사진을 걸어 놓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 럼 진정으로 국민의 삶을 돌아보고 행복을 높이기 위해 관심을 기울

이는 국왕이 있기에 실제 순위와는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간 부탄을 돌아다니며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나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자 애쓰는 부탄인들의 모습이다. 하루에 200~250달러

의 체류비가 부탄을 방문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부

분이겠지만, 이 또한 겨우 인구 75만의 국가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려는 방편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학

생들의 교복부터 모든 일상 업무를 위한 정복으로 전통 복인 ‘고 (남성

옷)’와 ‘키라 (여성 옷)’을 입게 하는 것도 그렇다. 이 때문에 부탄에서

는 업무를 하는 일 과중에는 캐쥬얼 복장을 하는 이를 만나기가 어렵 다. 또한, 부탄의 공공건물 역시 부탄의 전통 건축 방식을 따르도록 하 였으며 외부 장식은 모두 전통 문양들이다. 이런 점들이 부탄을 더욱더 매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부탄도 더 히말라야 은둔의 왕국이 아니다. TV와 인터넷이 보급되고 여러 나라의 문화들이 물밀듯 들어오면서 아메리칸 드림이나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늘

어나고 있다. 며칠 되지 않은 기간에도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젊은이들

을 만날 수 있었고, 이들을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만났 다. 부탄이 아름답고 멋진 이유는 거대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그들

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여전히 부탄이 세계화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지키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행복과 경제적 성장을 이루어가 는 나라이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일까? 글 김설미

새로운 것들을 찾고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대한민국의 평 범한 40대이다. 30대 중반, 대한민국의 무한 경쟁 사회가 싫어 잠시 여행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네팔에서 NGO 활동을 하며 주변국을 여행하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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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Photography by Doyoung Kim

Manhattan 뉴욕으로의 가을 여행

나에게 뉴욕 맨해튼이란…. 누구나 한 번쯤 와보고 싶고, 살아보고 싶어 하는 세계 최대 도시

맨해튼에 사는 나! 이제 나도 위풍당당 뉴요커? Photography by Doyoung Kim

100

글 Jenny Lee 정리

편집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2007년 가을이다. 소개팅으로 만난 미국 유학생이 난 너무 좋았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눈에 서로 반한 우리는 오가는 이메일로 사랑을 확인하고 그야말로 속전속

결, 6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리고 뉴욕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나 고 자랐으며 초중고 대학을 거쳐, 교직 생활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결혼 이전

에 뉴욕은 고사하고 미국에 와 본 적도 없다. 이런 내가 얼떨결에 뉴욕대 졸업 반이었던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온 것이다. 결혼해서 뉴욕 한복판 맨해튼에서 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내가 말이다.

Photography by Doyoung Kim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나의 성격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직장까지 미련 없이 다 버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 하나만 따라 한국을 떠날 수 있었다. 도착 후 처 음 몇 달은 무척 잘 지내는 듯했다. 취미 삼아 몇 년간 배워왔던 요리 교실의 레

서피를 뒤적이며 남편과 소꿉장난도 했고, 화려한 뉴욕의 거리를 쏘다니며 당 시 한참 유행했던 ‘싸이월드’에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쏠쏠한 재미도 느껴봤다.

영화속 같은 센츄럴 파트의 아름다운 장면, 락펠러 센터의 여유, 잡지에서나 보 던 5번가 쇼윈도에 비친 명품을 실컷 눈요기하거나 갖고 싶은 멋스러운 상품이 유혹하던 소호, 분위기 좋은 리틀 이태리 카페, 어디나 들어가면 예쁜 상품들이 쌓여있는 작은 가게들, 볼거리 넘치는 크고 작은 갤러리, 차이나타운, 타임스퀘

어의 화려한 밤거리도 맘껏 즐기며 난 약간 들뜬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Photography by Doyoung Kim

신나던 뉴요커 놀이도 ‘실증’ 이란 단어 앞에 무너졌다.

몇 달이 지나자, 무엇이든 긍정 마인드를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 안 올

것만 같았던 ‘향수병’이란게 슬슬 고개를 들고 날 흔들기 시작했다. 뒤도 안 돌 아보고 떠났던 지난 한국 생활에 대한 그리움은 종일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살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울리던 전화기. 그런데 뉴욕에서는 너무나 조

용하고 잠잠한 전화기가 그렇게 이상하고 섭섭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나에게 는 아무 관심도 없구나’라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면서, 괜스레 공부하느라 바쁜 남편에게 투정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졸업을 앞둔 남편 또한 예민해져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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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황금 같은 신혼생활을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다투면서 보냈다.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그 좋다는 도시도 다 소용이 없었다.

결혼 후 조금은 여유가 생기는 지금이지만, 쌀쌀한 가을바람이 부는 이맘때가

되면 문득문득 낙엽이 지는 센트럴파크를 홀로 걸으며 안 해도 되는 쓸데없는 생각들로 나 자신을 괴롭혔던 기억이 난다. 졸업 후에는 텍사스 시골 군부대로

발령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1년 동안 도시에서 좋은 추억을 쌓으라며 부모님께 서 우리를 배려해서 어렵게 얻어주신 미드타운 고층 아파트. 창가에 서면 저 멀 리 자유의 여신상도 보였었다. 밤이 되면 야경이 참 아름다웠던 그 창가에서 난

바보처럼 눈물이나 훔치고 있었으니, 이제야 돌아보면 참 배부른 소리였고 성 숙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2007년 가을의 맨해튼은 내게 야속함과 서운함이 뒤섞인 도시로 남아있다. 그 해 이후 뉴욕 맨해튼은 늘 나에게 아쉬움이 남는 단어가 되었다. 더 많이 행복

Photography by Doyoung Kim

Photography by Doyoung Kim

했어야 했고, 더 즐겼어야 했고 더 감사했어야 할 도시였는데 말이다. 현재의 나 는 두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텍사스와 서울을 거쳐 십 년 뒤 내가

다시 정착한 곳은 마음만 먹으면 30분 안에 맨해튼에 닿을 수 있는 이곳 뉴저지 라는 사실이 날 행복하게 한다. 지난 2007년 가을이 남긴 아쉬움을 풀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육아와 가사를 하는 틈틈이 맨해튼에 나갈 궁 리를 하는 오늘도 난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거야,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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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배부처

Fort Lee: 정관장, Rash Place, Main Violin, 엄마손만두, KBS헤어, 우리은행 Palisades Park: Koko Loko Coffee, 솔사우나, 김밥클럽 Leonia: Coffee Park, 우리은행 Closter: TOUS LES JOURS, Sun violin, 예당, 우리은행 Norwood: Camerata New Jersey, 정미용실 Paramus: Kook Hwa Bakery Cafe, 서울 BBQ Teaneck: AWCA Ridgefield: 우리은행, H-Mart River Vale: 혜윰 공방 Edison: H-Mart

뉴욕 배부처

Manhattan: 소림꽃집, 우리은행 Flushing NORTHERN: 뉴욕카페 뉴욕의 아침, M 스튜디오, 우리은행, 굽지(Gupji) Bayside: SEJONG MUSIC STUDIO Long Island: H-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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