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USA JUL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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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 ry fo r t h e m o d e r n l i f e sty l e

에스카사

제 삶의 풍요로움은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단비 TV 대표 아나운서 최지혜 세계의 모든 패션, 디자인 학생들이 선망하는 뉴욕 디자인 스쿨의 대명사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PEOPLE FOCUS

뉴욕 청과물 도매시장 ‘헌츠 포인트’에 가다 30년 째 헌츠포인트로 출근하는

우리 이웃 이혁수 LA 한인 소극장 문화를 이끌고 있는 극단 이즈키엘

열심히 사는 자유를 말하다 NBC Universal 그래픽 아티스트 에디터 노경수

뉴욕에서 보내는 어느 여름 날 하루

이곳에 가면 뉴욕이 보인다

JULY






김종현 전문의, 의학박사 MD, Ph.D

서울 가톨릭의대 졸업 서울 가톨릭의대 정형외과 석사 및 재활의학 박사학위 수료 전 서울 성모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뉴져지 의과대학 - Kessler Rehab Institute전문의 과정 수료 (미동부 랭킹 1위 재활의학전문의 수련기관) 미국 재활의학 교과서 관절염 및 주사치료요법 저자 미국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험 전체 수석 (2013)

김종현 통증 재활의학 M.D.전문의, 의학박사

관절통증 전문병원 진료과목

관절 통증 클리닉 : 관절염(무릎, 어깨, 손목, 엉덩이 관절 등) 진단과 약처방 및 초음파 가이드 주사치료 기타 통증클리닉 : 근육 및 신경통, 인대 및 힘줄 손상의 진단과 치료 (교통사고, 스포츠 손상등) 척추 클리닉 : 목 허리디스크, 좌골 신경통 / 신경 클리닉 : 뇌졸중, 안면 및 말초신경마비, 손발저림 재생치료 클리닉 : 프롤로 테라피(PRP) 를 포함한 주사 재생 치료 / 초음파 (Ultrasound) 진단 / 초음파를 이용한 인대, 힘줄, 신경 주사 / 신경검사 (EMG/N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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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Linwood Plaza 2nd Fl. # 208-10 Fort Lee, NJ 07024 포트 리 한아름 옆 린우드 플라자 빌딩 2층 #208


504명의 미국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험 전체 수석 한국인 최초로 Elkins Award 수상(2013) Dr. Kim was awarded 1st place among 504 candidates for Physical Medicine & Rehab Specialists on American Board of PM & R exam in US, 2013.

모든 환자는 병으로 느끼는 아픔보다 정확히 모르는 불안감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PRP(Plate Rich Plasma) 주사치료는 무엇인가요? PRP(Plate Rich Plasma) 주사치료는 자신의 혈액을 뽑아서 그중에 상처 치료를 담당하는 혈소판만을 골라서 환자의 손상된 부위에 직접 넣어주는 치료법으로 근육 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분들에게 이용되는 주사치료방법입니다. 근육 골격계의 통증은 관절 문제 뿐 아니라, 관절 주변의 인내나 힘줄, 근육의 약화 또는 파열 등의 문제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퇴행성 관절염을 동반할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때 수술하지 않고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여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PRP 주사치료 기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인대와 힘줄은 혈액의 공급이 불충분한 구조이므로 손상을 받으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고 손상이 남아서 만성 통증을 일으키게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찾아 중식제를 주사하게 되면 인대와 힘줄이 중식되어 약해진 부위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통증을 해결하는 치료입니다. 비수술적 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많은 환자분에게 주목을 받는 치료법 중 하나입니다. 간단한 주사요법이기 때문에 시술 시간이 짧은 장점이 있으며 시술 후 입원이 필요 없이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PRP 주사요법의 특징 주사 치료 후 보통 약 4주 후부터 효과가 나타난다. 자신의 혈액을 이용하므로 부작용이 없다. 입원이 필요 없으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손상된 근육 및 인대의 자가 치유 능력을 촉진 시킨다. PRP 주사요법의 대상자 퇴행성 관절염, 연골연화증, 연골 손상, 어깨, 회전근개파열 및 힘줄 손상, 오십견, 팔꿈치 만성 염증, 테니스 엘보 / 골프 엘보, 스포츠 인대 손상 / 발목 인대 손상, 아킬레스건염, 족저근막염


CONTENTS

JULY 2017 Vol. 5

10

42

Cover Story

Education

Art & Culture

10

28

42

단비 TV 대표 아나운서 최지혜

기다림을 연습하기

LA 한인 소극장 문화를 이끌고 있는‌ 극단 이즈키엘

제 삶의 풍요로움은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18

미국 독립기념일‌ JULY 4TH Independence Day

People Focus 20

뉴욕 청과물 도매시장 ‘헌츠 포인트’에 가다

30년 째 헌츠포인트로 출근하는‌ 우리 이웃 이혁수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4)

32

세계의 모든 패션, 디자인 학생들이‌ 선망하는 뉴욕 디자인 스쿨의 대명사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 (Parsons School of Design)

36

에스카사 인물탐구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선생

40

외국어 공부는 사고의 폭과 이해력을 넓혀줍니다

프랑스어 교사 Ms. Zhanna Buzharsky와의 대화

생명의 예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48

테너 유재웅의 재미있고 유익한 음악칼럼

‘성악의 남녀 파트별 분류 및 합창에 관하여’

50

열심히 사는 자유를 말하다

NBC Universal 그래픽 아티스트 에디터 노경수

56

사계절 쉼터 & 여름이 더 좋은 곳

펜실베니아 포코노 임마누엘 수양관

58

전문 음악인이 들려주는 생활 속 음악이야기

조금 특별한 음악회 ‘Chamber on Main’

60

디자인의 미니멀리즘과 플랫폼(Platform)‌ 그리고 디자이너

변화하고 진화하지 않으면 디자인이 아니다 6


66

90

Lifestyle

Clinic

Travel

64

80

86

‘카트’

고혈압을 이기는 식이처방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녀, 이젠 함께 걷다

영화 심리 이야기‌

66

뉴욕에서 보내는 어느 여름 날 하루‌

이곳에 가면 뉴욕이 보인다

70

홍성주 이달의 요리

냉우동 샐러드& 파나코타

72

‘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플라스틱병 비즈 팔찌

76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섹시한 엄마들

78

7월에 읽는 시‌ 호수를 베고 잠들다

임경아의 약식동원(藥食同源)

84

출산 후 요통관리법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90

네팔 전문가가 들려주는 네팔 문화 이야기

이해하기 힘든 그들만의 카스트 제도

94

영어 배우러 멀리 갈 필요 있나요?

대구경북 영어마을로 GO!

행사 96

재미한국학교동북부협의회 주최‌ ‘제13회 나의 꿈 말하기 대회’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어를’ 대상 이조은 양

7


Editor in Chief Jennifer Lee

Executive Director / Yebin Taylor Lee Senior Contributing Editor / Hyobin Lee Managing Editor / Jenny Lee Senior Columnist / Dr. Sung Min Yoon Legal Columnist / Minji Kim Music & Arts Columnist / Jaewoong Yoo, Sunboon Jeong Columnist / Mihee Eun, Stefano Jang, Young Hee Baek Medical Columnist / Ph.D. Kyungah Lim

Contributing Editors Won Young Park, Bohyun Im, Min Her, Joohee Han, Youngjoo Song, Jihye Lee, Byeol Yoon,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Sophia,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YuJin Hong, Minjung Choi, Sungjoo Hong

Copy Editor / Joonhee Kim Creative Director / Anna Lee Graphic Designer / Jin Choi Photographer / Kibum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Publisher / Charles Changsoo Lee Advertising Director / Michael Choi, Chunsuk Lim, Clara Kwon Advertising Manager / Michael Chung Intern / Harry Shim HR & Administrative Manager / Mai Miyaz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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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Sung

CPA, MBA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경영학과 졸업 • Baruch College, MBA in Taxation • RSM US, LLP (미국 5대 회계법인) 포함한 미국 회계법인들에서 세무 전문으로 14년 근무

: RSUNG@SUNGCPALLC.COM 201.286.1869 EMAIL ADDRESS : 280 BROAD AVENUE, SUITE 202, PALISADES PARK, NJ 07650

미주 한인 생활인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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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메이크업 The Lash Place 박미영 Photographer KiKim 김기범 장소협찬 café L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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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풍요로움은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단비 TV 대표 아나운서 최지혜 미주 전역을 커버하는 기독교 복음방송인 단비 TV의 인기 아나운서 최지혜씨 가 7월 표지를 장식해 주었다. 미스코리아 출신다운 늘씬한 키에 편안한 외모를 지닌 그녀는 부드러운 방송 진행으로 입사 10개월 만에 뉴욕 일대에선 이미 유 명인이다. 화면에 나타난 여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 며 취재도 하고, 뉴스를 위한 오프닝 클로징 멘트를 직접 작성하는 등 교민사회 와 미주 한인 사회 현안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 루를 보낸다는 최지혜 씨. 대학생 시절부터 방송인의 꿈을 키우다가 SBS CNBC 리포터부터 시작하여 KBS, 디지털 조선일보 리포터, KEB하나외환은행, RBS TV 아나운서와 전문 MC, 키움증권 채널K 앵커, 시황 캐스터 등 한국에서 활 발한 방송 활동을 하다가 돌연 미국으로 건너와 한인 기독교방송 ‘단비 기독교 TV’에 몸담게 되기까지 그녀의 방송 너머 이야기가 궁금하다. 진행 Jennifer Lee 글 Jenny Lee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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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씨 안녕하세요. ‘단비 TV’를 모르는 분을 위해 간단한 안내와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단비 TV 아나운서 최지혜입니다. 단비 TV는 미 동부 뉴욕, 뉴저지 지역을 넘어서 미주 전역으로

방송되는 기독교 복음 방송국입니다. 우리 방송은 타임워너케이블 채널 1487번으로 하루 24시간 동안 말씀과 찬양, 인터뷰, 설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시청자와 만나고 있지요. 단비의 사전적 의미는 ‘꼭 필요한 때 알맞

게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크리스천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갈급함이 있다고 봐요. 그

점을 단비 방송이 놓치지 않고 시청자에게 전해주자는 큰 뜻을 담고 있어요. 말 그대로 오랜 가뭄 끝에 만난 반

가운 빗방울 같은 방송 사역을 하는 겁니다. 찬양곡 ‘빈들의 마른 풀 같이’에서 “시들은 나의 영혼에 성령의 단 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라는 구절이 있는데 부족하지만 제가 단비 TV에서 조금이나마 ‘성령의 단비를 붓 는 작은 역할’이 되길 원하고 있습니다.

쉼터에 있는 청년을 대상으로 무료 스피치 강의 등 한국에서 여러 방송사를 거치며 다양한 방송일을 하셨 죠? 그 뒤 어떤 계기로 미국으로 와서 기독교방송을 하게 되었는지 지혜 씨의 방송 이력이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3년간 방송 활동을 했었어요. 이곳 단비 기독교 TV에서 활동한 지는 10개월 정도 되어 갑니다. 한국

에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한 게 지하철 METRO TV 리포터였어요. 그 후 SBS CNBC에서 경제 방송을 하게 됐고, 외환은행 사내방송 아나운서와 키움증권 채널 K 그리고 기독교 방송 C채널을 거쳐 지금의 단비 기독교 TV로 오게 되었죠. 한국에서 일할 때, 세속적인 표현으로 얘기하면 ‘돈을 벌 기회’가 많이 보였어요. 특히 경제

방송을 할 때는 주식전문가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조금만 팁을 받으면 금방 부자가 될 것도 같았죠 (웃음) 하

지만, 제가 자라온 환경 탓인지 돈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해 보였어요. 아버지는 공무원이시고 어머 니는 농협원이신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저를 봉사현장으로 종종 데리고 가셨어요. 크게 부족한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었던 가정환경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정성으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걸 보고 옆에서 따

라 했어요. 그러면서 돈보다는 나눔의 기쁨이 크다는 걸 자연스레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이런 저에게 ‘돈과 투

자’를 다루는 경제방송은 물음표를 많이 줬어요. 문득 든 생각이 “내가 가진 달란트가 ‘목소리’와 ‘소통’이라면 투자 정보를 전하는 것 이상으로 더 가치 있는 곳에 쓰고 싶다”라는 욕구가 샘솟았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무작 정 사표를 썼습니다.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두면 부모님 걱정도 크셨겠네요. 사표까지 쓰면서 지혜 씨가 하고 싶은 일이 궁금해 집니다. 물론 부모님은 제가 하루아침에 일을 그만두니 걱정이 많으셨어요. 하지만 저는 걱정보단 꿈으로 가득 찼어요. 그 후 제가 바로 한 일이 꿈 없고 배고픈 청년들이 모이는 쉼터에 가서 무료 스피치 강의, 상담소를 열었어요.

그곳에서 많은 청년들, 고등학생들 그리고 어르신들을 만났죠. 그분들에게 힘이 되는 컨텐츠를 만들려고 노력 하는 동안 제 안에 있던 갈급한 마음도 조금씩 채워지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정도 재충전이 됐을 무렵, 다시 방

송 쪽으로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어요. Job consultant이신 지인분께서 “지혜 씨 혹시 일 할 생각 있어? 뉴욕에

기독교 방송이 있는데, 크리스천이면서 방송 사역자를 찾고 있대. 선교지에 갈 일도 있을 테고… 하나님 사랑

하는 마음으로 아나운서 실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대.” 라고 말씀하셨죠. 그 전화 받자마자 준비해서 일 년 후 이곳에 오게 됐어요.

쉼터 얘기 좀 더 들려주세요. 무료 스피치 강의는 지혜 씨가 만든 컨텐츠인가요? 처음 그곳을 간 이유는 저 자신이 조금 쉬고 싶어서였어요. 그런데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쉴 수 있는 그냥

빈 터였어요. 그곳을 만든 분은 쉼터를 운영할 기획을 고민하느라 어떤 것도 시작을 못 하고 있더군요. 그냥 쉬 러 오는 분들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배고픈 분들에게 밥을 주기만 하더라고요. 저 역시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

는데 맞은편에 앉은 분이 유독 한숨을 크게 쉬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가가 물었죠. “선생님은 뭐가 그렇게 힘 드세요?” 그러자 ‘몇 년간 취업에 연속해서 실패했고, 집에서도 눈치만 받아서’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

고 그 자리에서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고 말해버렸어요. 전 그날부터 쉼터에 오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 고, 자신감을 주는 스피치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됐고요. 2가지 시리즈로 나눠서 매주 강연을 하는데, 매회 사람

들로 가득 차고 다들 수업이 끝나면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가더라고요. 제가 살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 간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다는 게 정말 귀한 거구나 싶더군요. 제겐 그 일이 무척 소중하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12


단비의 사전적 의미는 ‘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입니다. 크리스찬의 입장에서 봤을 때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데, 저희 방송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시청자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13


제 이상형은 특별하게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라는 어떤 조건보다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비전을 가진 사람’이에요. 각자의 꿈을 응원하고 이뤄나가는데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14


2013년 미스코리아 광주·전남 선발대회 인기상을 수상한 최지혜 씨

대화를 나눌수록 20대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속이 꽉 찬 얘기만 하시는군요. 어떻게 보면 출세의 길을 버 리고 미국으로 오셨는데 작은 방송사에 머물며 본인이 준비한 만큼 빛을 내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 움은 없나요? 아쉬움보다는 지금의 현재 제 모습에 만족하고 지금 하는 일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본인이 원하 는 최고 수준까지 갔던 사람이 명예와 돈의 늪에 빠져서 헤매는 걸 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세웠던 목표를 이 뤄본 경험이 있어요. ‘목표에 도달하면 행복할 거야.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될 거야’ 라고 예상한 뒤 그 목표를 이 루어 냈을 때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가장 잘나가던 시절이 오히려 저에게는 가장 우울했던 시간이었어요. 그

시절 제가 교회에 가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뒤로 두고 세상을 즐겼던 시간의 절망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다시 보고 싶어요.”라고 기도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엔 굴러 들어온 복을 왜 차버

리느냐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결국, 내려놓았고 돌고 돌아 제가 쓰임 받을 곳 인 이곳에 마침내 오게 되었어요.

크리스천의 사명을 갖고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맡고 계시는 프로그램이나 회 사 생활 좀 들려주세요. 10개월 차 미국살이 소감도 들려주시고요. 지금 하는 프로그램은 단비 TV 뉴스, 단비 같은 사람들, 믿음의 현장, 비즈니스 산책, 뉴저지 뉴욕 연합 찬양대회 MC 등을 맡고 있어요. 일반 직장인처럼 저도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해요. 출근하자마자 하루 일정을 점검하고,

짧게 묵상을 합니다. 하루를 다져보는 시간이죠. 9시반에는 직장예배를 드리고 그 이후에는 취재를 나가거나 미주 한인, 교민사회 소식들을 체크합니다. 매주 인터뷰가 있어서 인터뷰 준비를 하고, 설교 편집 등을 하며 정

신없이 보내고 있어요. 비즈니스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은 뉴욕 뉴저지의 한인업소들을 탐방하고, 먼 미국 땅에 서 기업을 세운 한인들의 성공 신화를 듣고 전합니다. 짧은 뉴스이지만 뉴스도 진행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시 간을 위해 일주일을 고생하는 단비 기독교 TV는 늘 뜨겁고 생동감 넘칩니다. 제가 일반 방송사에 있을 때는 다

음 스텝을 위한 목표가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그게 없어요. 제 마음을 완전히 쏟아붓고 있는 거죠. 이런 저 자 신이 신기할 정도예요. 전화 한 통으로 결정한 것도 그렇습니다. 친한 친구가 많아서 한국처럼 지낼 수 있는 서

부에 있는 방송사에 갈 뻔 했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욕으로 오게 되었어요. 지금 10개월 차 뉴욕에서의 생 활을 맘껏 즐기고 있습니다.

15


여가시간에 주로 뭘 하고 지내시나요? 특별한 취미나 특기가 있나요? 매일 2~3마일 정도 걸어 다녀요. (웃음) 특기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저는 피아노

와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어요. 피아노는 5살 때부터, 가야금은 9살 때부터 해오고

있어요. 서양악기와 동양악기의 오묘한 조합이죠. 제가 대가족에서 자라서 늘 집

에서 민요를 부르면서 조부모님께 가야금으로 재롱을 떨곤 했었어요. 나중에 제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게 된다면 제 가야금과 피아노를 물려주고 싶어요. 책

도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게 목표에요. 출퇴근 시간이 총 1시간 반 정도 되는

데, 그 시간이 제겐 꿀맛 같은 독서 시간입니다. 최근 읽은 책은 팀 켈러 (Tim

Keller) 목사님의 ‘결혼을 말한다’라는 책이에요. 제가 요즘 결혼에 관심이 많

아서요. 제게 어떤 배우자를 보내주실까…. 하는 맘으로 읽었어요. (기자가 데 이트 상대는 있나는 질문에) 아직 교제하는 이성이 없거든요. 이상하게 아무 도 접근을 안 하네요. (하하)

혹시 이 글을 읽으실 독자분 중에 지혜 씨 배우자가 나타나실 수도 있는 데 본인의 결혼관이나 원하는 이상형을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잘하면 에스카사가 중매쟁이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웃음) 특별하게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는 어떤 조건보다는 가장 먼저 떠오르

는 건 ‘비전을 가진 사람’이에요. 각자의 꿈을 응원하고 이뤄나가는데 함께 걸 어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저도 지금 아나운서를 하고 있다고 해서

꿈이 끝난 건 아니거든요. 지금도 몇십 개의 꿈을 꾼답니다. (웃 음) 어렸을 때부터 봐온 부모님은 항상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해주는 분들이셨어요. 그런 가족을 보면서 ‘나도

엄마처럼’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저도 두 분 부모님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 정을 이루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습니다.

16


를 보니 11시간 동안 촬영을 했더라고요. 종일 돌아다닌 거죠.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7살짜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더니, 지혜 씨 보면서 내 가 오늘 많이 배웠다!” 하셨어요. 제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도 스스로 알게 됐고요. (하하)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지혜 씨는 얘기도 드라마를 보는 듯 실 감 나게 표현을 잘하시는군요. 연기 쪽으로 가도 잘했을 것 같은데 요. (웃음) 연기도 조금 하긴 했습니다. (웃음) 단편 영화도 찍어봤고 짧게나마 모 델활동과 CF 경험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저하고는 잘 안 맞았어요. 몇

번 기획사 제의도 있었지만, 달콤하고 쉬운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말씀을 참 잘하시는데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셨나요? 제 전공은 영문학이에요. 사실 제 진로를 정하고 대학에 진학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죠. 부모님이 “너는 성격 이 밝으니 영문학과를 가서 무역해도 좋겠다.”라고 하셨죠. 한국에서

만 계속 자라다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다른 나라 문화를 접하게 되 고 배우게 되었어요. 그때 문득 ‘취업을 하고 방송을 하게 되면 해외로

도 나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하고 제 미래에 대해서 spectrum을 넓 힐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어요. 제가 방송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 면서 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대해 알아봤죠. 처음 문을 두드렸을 때, 관 계자분들이 제게 “너는 너무 평범하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오 히려 저한테 자극이 되었고, 그렇게 6개월 정도 혼자 공부한 후 다시

학원에 갔더니 “달라졌네? 시작해보자” 하셨어요. 학원 수강생이 매

‘연기 경험을 통해 내가 갈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고, 그때 시기에 더 신앙심도 깊어졌어요. 지금 방송일을 하면서는 반대로 제가 너무 좋

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평소에 만나 기 어려운 분들도 만나게 되고, 직접 인터뷰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거든

요. 울컥 눈물이 날 때도 잦아요. 크리스천 방송이다 보니 사역하시는

분들을 많이 뵈게 되는데 그분들의 미래나 비전을 듣고 나면 제 삶에도 울림이 와요. 인터뷰 중에 그분들이 삶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시는지 듣

고 배워요. 제가 상상도 못 할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도 많아서 숙연해 질 때도 있고요. 지금 하는 일은 신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큰 보람을 느껴요.

인터뷰를 마치려니 아쉽군요. 마지막 질문으로 만 27년 살면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죠?

달 200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 스타성이나 재능이 있는 사람들만 방송

회사를 그만두고 쉼터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이랑 함께 지낼 때가 기억

코리아를 나갔던 경력이 있거든요. 광주지역 본선도 나가고 인기상도

모님의 품이 늘 그리웠어요. 쉬는 동안 부모님과 오랜 시간 깊은 대화

국을 들어가요. 정말 바늘구멍만큼 좁은 문입니다. 제가 23살에 미스

받게 됐어요. 그게 하나의 이력이 되었는지 SBS CNBC에서 합격이 됐 다고 연락이 왔죠. 대회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일을 시작

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나운서 하면 항상 단정하고 정장 차림의 화려 한 모습을 생각하기 쉬운데, 전 좀 달랐어요. 어느 날은 갈색 야상 점

이 나요. 16살부터 부모님과 떨어져서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부

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혼란스런 시기에 큰 버팀목이 되 어 주셨어요. 아이러니하게 그 시기가 가장 힘들었기도 했거든요. 제

또래 친구들이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저는 번아웃(Burn-out)이

퍼와 운동화 차림에 화장기 없는 모습으로 방송국에 갔더니 경비아저

되어 있었던 거죠.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내가 중간시점에 와서 혼 란스럽다는 후회도 들었어요.‘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게 뭘까? 내

카드도 분명히 찍었는데 말이죠! “아 우리 아나운서시구나… 미안해

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알게 됐죠. 화려한 것과 빛이 나는 건 다

씨가 노숙자인 줄 알고 “저기요” 하면서 잡으신 거에요. (웃음) 출입증 요. 나는 아가씨가 옷을 너무 편하게 입고 와서….”라고 하셨어요. 그

때 저희 회사 분들이 다 웃으셨죠. 저는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것보다 는 평범하고 수수한 게 좋아요.

지혜 씨의 소탈함을 잘 설명하는 일화로군요. (웃음) 방송하면서 재 밌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소개해 주세요.

가 하는 일이 빛이 나지 않고 화려하기만 하네?’ 라는 많은 의문점이 있

르다는 것을요. 지금은 그런 혼란의 시기를 지나서 시청자들을 섬기는 방송을 하며 보람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 좌우명이 ‘Do the Light

Thing’이거든요? 빛이 되는 삶을 살자! 는 말이에요. 이 신조를 지금은 하루하루 실천하며 사는 기분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저는 현장에 나가는 방송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모든 촬영 때마다 재

봉사가 몸에 밴 훌륭한 삶을 살아오신 부모님에게 어려서부터 자연

건 지하철 TV 리포팅을 하는 날이었는데 1호선부터 4호선까지 모든 역

아름다운 삶의 태도와 고운 마음씨를 가진 그녀의 방송은 앞으로 미

밌는 일도 많이 생기고, 일촉즉발의 순간도 만났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을 가서 촬영하는 콘셉이었어요. 1호선부터 4호선까지 역 개수가 100 개가 넘으니까 카메라 감독님께서“지혜 씨가 갈 수 있는 만큼만 하

자” 라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막상 처음 해보는 콘셉이라 제가 재밌어 서 지치질 않았던 거죠. 나중에 카메라 감독님께서“어쩜 지치지도 않 냐” 고,“이거면 충분하다”하며 촬영 중단을 외치셨어요. 나중에 시계

스럽게 나눔의 기쁨을 배운 최지혜 아나운서. 아름다운 외모보다 더 주 한인 생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로 예상된다. 장시간 촬영 과 인터뷰에도 지친 표정 하나 없이 미소 띤 얼굴로 진행에 응해주 어 에스카사 스텝 모두를 놀라게 한 최지혜 아나운서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아울러 표지 촬영에 협조해주신 단비 TV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17


미국 독립기념일

JULY 4TH Independence Day

7월 4일. 연방 공휴일로 지정된 이 날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다. 1776년 7월 4일 미국 독립 선언이 채택된 것을

기념하는 날인 이날은 성조기의 삼색( Red, White, and Blue) 의상을 입고 가족, 친구들과 함께 폭죽 쇼와 피크 닉을 즐긴다. 1884년 7월 4일,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과 프랑스 국민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의 모금 운동으로 미국민에게 증정되었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1884년 임시 완성되어 200

여 개의 조각으로 분해된 뒤 프랑스 해군 수송선을 통해 미국으로 수송됐다. 그 후 2년 뒤인 1886년에 미국 뉴 욕에서 완공되었다. 18



PEOPLE FOCUS 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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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청과물 도매시장 ‘헌츠 포인트’에 가다

30년 째 헌츠포인트로 출근하는

우리 이웃 이혁수 한국 언론과 방송 기자들은 연말이 되면 흔히 시장을 찾는다. 상인들을 만 나고 풍경을 찍어 신년 기사로 만들기 위한 연례행사다. 새해를 여는 활기 찬 삶의 현장 등 낡고 의례적인 타이틀이 기사를 장식한다. 평소엔 평범한 서민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던 정치인도 선거 때가 되면 꼭 시장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서민이 살기 좋은 정치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만 큼 시장은 서민의 애환과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피부로 느끼고 서민의 소리 를 듣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가장 원초적인 삶의 현장인 시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의 생활 속에 존재해왔다. 현대는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컴퓨터 자판과 스마트 폰 클릭 하나로 물건이 집으로 배달되는 소위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활기차고 치열하게 사람끼리 부딪치면서 살아가 는 삶의 현장인 시장이 여전히 존재한다. 클릭 하나로 물건을 고르며 편리 함을 추구하지만, 시장은 우리에게 뭔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누구나 시장 에 나오면 분명히 느끼는 게 있다. 에스카사 취재진은 그 ‘느낌’을 주는 ‘우 리 이웃 이야기’를 담기 위해 뉴욕의 새벽을 여는 ‘헌츠포인트’ 시장을 찾았 다. 한인 이민사에 빼놓을 수 없는 뉴욕 청과물 도매시장인 헌츠포인트 마 켓. 30년째 이곳으로 출근하는 이혁수(뉴저지 해병전우회 회장) 씨의 이야 기는 바로 우리 한인 이민사의 한 단면이다. 공동 취재, 글 Jennifer Lee, Won Young Park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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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도매상인 ‘디아리고 브라더스’ 브라이언 번스 사장과 미팅 중인 이혁수 씨

뉴욕청과물 도매시장 헌츠 포인트

취재진이 찾은 곳은 일반적인 시장이 아닌 브롱스 헌츠포인트에 위치한 뉴욕 최대 청과물 도매시

장이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일을 마칠 시간인 저녁 8시경, 취재진은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이곳 헌츠포인트를 찾았다. 헌츠포인트 마켓은 도매상과 리테일 라이센스를 가진 상인들만이 출입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

을 방문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취재진은 정문에서부터 기다렸다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준 이혁수 씨

(뉴저지 해병 전우회 회장)를 따라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0년째 청과운송업체에 종사하고 있는 그

는 이미 30분 전부터 오늘 구매할 물건을 고르다 나와서인지 다시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바쁘게 발걸음을 옮 긴다. 이곳을 처음 둘러 본 일반인이라면 상상 이상의 엄청난 규모에 먼저 놀라게 된다. 이 층 건물 끝에서 끝

이 소실점으로 보일 정도로 도매상들이 입주한 청과 시장의 건물은 상상외로 넓고 길다. 청과와 수산시장, 육

류 도매상을 합한 헌츠포인트 마켓이 전 세계 55개국과 미국 모든 주에서 생산되는 식재료가 집결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매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취재진은 시장 곳곳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니며 과일을 사고 있는 이혁수 씨의 뒤를 따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정신없이 현장의 모습을 담기 시작한다.

하지만 1시간 정도 지나자 우리는 지치기 시작했다. 따라다닌 거리도 엄청나지만, 청과 상자가 쌓여있는 상점 내 창고들은 말 그대로 냉장고 안이어서 겨울 파카를 입고도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더 따라가기 힘들기 때 문이었다.

“오늘 몇 시까지 일하시죠” 그는 “이제 시작이죠. 내일 새벽 5시까지 일 해야 하니까”라고 당연한 듯 대답한 다. 일주일에 5일을 매일 저녁 8시에 출근하여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냉장고와 같은 이곳에서 이마에 땀이 송

글거릴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며 당일 사야 할 청과물을 구매하는 이혁수 씨. 이처럼 반복된 생활을 지난 30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오고 있다. 밤과 낮이 뒤바뀐 생업은 이혁수 씨 뿐만 아니라 모든 청과 인들의 생활 이기도 하다.

물건을 고르는 모습도 도매상 풍경에 익숙하지 않은 기자의 예상과는 아주 다르다. 일반인의 과일 고르기는

물건을 꼼꼼히 살펴보고 필요하면 냄새와 맛도 보겠지만, 그는 천장 높이 켵켵이 쌓인 팔레트 중에서 하나를 골라 내려보라고 지시한 뒤, 그중 한 상자에서 과일이 담긴 작은 팩을 꺼내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쓱 보고

나서 구매 여부를 그 자리에서 결정한다. 심지어 어느 상자에서 꺼낸 딸기 팩은 자두만큼이나 커다랗고 짙은 빛깔로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지만, 그는 쳐다보자마자 바로 상자에 다시 넣어 버렸다. “보기엔 그럴 듯해도 맛이 없는 딸기에요.” 그와 함께 장을 보는 다른 한인 상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일을 보는 순간 그들은 동시

에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였다. “괜찮지?” “괜찮네.” 간단한 대화만으로 결정 과정은 충분했다. 30년 동안 매 일 같은 일을 해온 전문가의 능력이었다. 22


이혁수씨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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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수 씨는 추위에 떠는 취재진이 잠시 쉬는 사이에 제철을 맞은 딸기와

캘리포니아산 베리를 구입한 뒤 자리를 옮겨 단골 도매상인 ‘디아리고 브 라더스’ 브라이언 번스 사장과 담소를 나눈다. 오랜 비즈니스 파트너답게

둘 사이의 대화 간간이 편안한 웃음이 오가는 모습이 마치 친형제처럼 정 겹게 느껴진다. 직원만 250명이 넘는 큰 회사인 디아리고 브라더스는 헌츠

포인트 내에서 중간 정도 규모의 도매상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세부터 40년 동안 도매상에서 일하고 있다는 브라이언 사장은 “나의 30

년 친구이자 우리 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라고 그를 소개했다. 이어 “한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혁수 씨는 언제나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다. 이혁수 씨를 비롯하여 한인들과 일하는 게 무척 기쁘다”라고 한인 상인

들에게 깊은 친밀감을 표시했다. 도매상을 나온 우리는 건물 2층에 있는 한 인 청과협회 사무실에 들러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혁수 씨가 청과업에 발을 디딘 건 1986년부터다. 이민 온 뒤 곧 일을 시 작한 셈이다. 그가 해병대에 입대한 건 약간의 사연이 있다. 이미 가족 이민 이 결정되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남성은 군필하지 않고는 이민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반 사병보다 군복무기간이 짧은 해병대를 선택했다. 게

다가 도전 정신이 충만했던 그는 힘든 해병대 안에서도 힘들기로 소문난

수색대를 지원했다. 청과 업종, 그중에서도 운송 분야를 선택한 건 많은 돈 을 벌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부분의 경기가 호황이던

80년대 후반이었다. 그의 기대만큼 사업 초기부터 수입은 괜찮아서 “다른 업종에서 비슷한 노동을 하고 주급 300~400달러 가져갈 때 우리는 1,200 달러 이상 벌 수 있었다”라고 한다.

이민 초기 당시의 이민자 대부분의 생활이 그러했듯이 이혁수 씨 가족 역

시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어렵게 돈을 모아 생선도매업을 시작했지 만, 사업 실패를 해서 어린 아들을 한국에 보내야 할 정도로 생활에 어려움 을 겪기도 하는 등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 노아 은행 펠리세이즈 파크 지

점 지점장이었던 이혁수 씨의 아내인 이순이 씨는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하지만 해병대 출신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과 20대 중반이란 한창나이, 노력한 만큼 보답이 돌아오는 직업, 그는 처음 몇 년간 정말 정신없이 신이 나서 일을 했다고 한다. 덕분에 같은 시기 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일종의 아메 리칸 드림을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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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5일을 매일 저녁 8시에 출근하여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당일 사야 할 청과물을 구매하는 이혁수 씨. 이처럼 반복된 생활을 지난 3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오고 있다. 밤과 낮이 뒤바뀐 생업은 이혁수 씨 뿐만 아니라 모든 청과인의 생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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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해병대 임춘석 전임 회장의 아내인 임연숙 씨와 이혁수 현 회장의 아내 이순이 씨

“제 남편은 성실 그 자체에요. 늘 가족 중심적으로 생활하며 가정을 가장 소중히 생각했죠. 결혼 30년 동안 크

게 변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아내 이순이 씨는 30여 년을 주말부부 아닌 주말부부로(남편이 출근

할 땐 아내는 퇴근하므로 엇갈린 생활) 살아오면서도 큰 불만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을 좋아하는 남편 덕에 주말이면 집안에 손님이 끊이지 않아서 집 안 청소며 요리를 자연스럽게 남편이 다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고. ‘아이들이 결혼하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지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그녀.

이런 그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10년 이상 지켜본 이혁수 씨 해병대 선배이자 임춘석 해병대 전임 회장의 아내 인 임연숙 씨는 ‘나 역시 남편이 해병대 회장을 4년 동안 맡았지만, 남편의 일은 아내에게도 똑같은 봉사를 요구 하는 힘든 일이다. 이순이 씨는 마음이 넓어서 남편이 활동하는 해병대 일을 잘 도와줄 거다’ 고 얘기해주었다.

미국 이민 후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와서 아들은 군인으로, 딸은 약사로 둘 다 훌륭하게 키우고 이제는 조금씩 은퇴 후를 생각하고 있다는 이혁수 씨는 멀지 않은 장래에 청과 운송업을 정리하고 육체적으로 조금 덜 고되 고 여유가 있는 연관 업종의 일을 계획하고 있다. 50대 중반이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체력이 떨어짐을 느끼는 것 이다. 그리고 이젠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고 한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제가 이일을 한 것을 후회한 적도,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클 때 옆에 많이 있어 주지 못한 것은 참 아쉽죠. 그래도 주말 틈나는 대로 함께 있으려고 애쓰긴 했습니다만 만족스럽지 못해요. 이젠 더 많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요, 봉사 활동에도 더 노력할 계획입니다”

취재를 마치며 청과업의 어려운 현실과 미래에 관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인 이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였던 청과와 수산, 델리, 네일 등 주요 업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다. 이혁수 씨에게 만약 조카나 친구의 자녀가 일에 뛰어들겠다면 말리겠냐고 물었다.

“시장에 나와 일을 시작하다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는 청년들이 적지 않아요. 예전보다 근성이나 의지가 못하다고 할까요.” 그는 “버티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일인데 안타깝다”라고 했다. 분명히 예전만큼의 호황은 아니지만, 여전히 몸으로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면

시장은 여전히 정직한 곳, 큰 가능성을 가진 곳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헌츠포인트 마켓 종사자 중 한인 비율이 65% 이상이라고 한다. 한인 이민자 삶의 애환이 서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이곳 헌츠포인트는 오늘도 여전히 바쁜 움직임으로 뉴욕의 새벽을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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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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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4)

기다림을 연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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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는 오일장이라는 게 있었단다. 5일마다 한 번씩 읍내에서 열리

는 큰 시장이었지. 그날이 되면 읍내 공터에 촌부들이 우시장을 열고, 각 마을에 사는 시골아낙네들이 밭과 논에서 채취한 각종 농산물을 한

잃어버렸는지 모르시는 것 같았어. 다행히 엄마를 찾았지만, 자칫 잘못 했으면 미아 신세가 될 뻔했던 거야.

아름 들고 와서 노상 좌판을 열었지.

오랜 기다림끝에 점심때가 되면 허기진 끼니를 때워야 하니까 옆집 아

엄마가 오일장에 가는 날이면 나도 종종 따라가곤 했어. 큰 보따리에

쪽에 있던 동원 반점은 아주 작은 규모의 중국집이었는데, 노랑 노랑

고추, 오이, 호박, 가지, 산나물을 바리바리 담아서 아랫마을 주막집 앞 버스정거장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거든. 산과 들에서 놀기를 좋아

했던 내가 장에 따라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단다. 바로, 점심때가 되 면 읍내 동원 반점에서 자장면이나 우동을 먹을 수가 있었던 거야. 내 가 살던 시골에서는 중국집이 없었기 때문에 읍내에 나가야만 먹을 수

낙네에게 펼쳐놓은 물건을 맡아달라고 하고는 중국집에 갔지. 시장 안

한 면발에 구수한 국물의 우동과 후각을 자극하는 자장면이 유명했었

어. 중국집에 도착하기 수십 미터 전부터 맛있는 자장면 냄새가 코를 자극하는데,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온 터라 뱃속은 벌써 꼬르륵꼬르륵 전쟁이 일어났단다.

가 있는 음식이었어.

중국집에 가면 주로 우동이나 자장면을 먹곤 했어. 아침 내내 물건을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놓고 가져온 농산물을 파는 데 여기저기서 온

나셨는지 엄마는 늘 한 그릇만 시키셨어. 유명한 그룹 지오디(GOD)의

아낙네들이 물건을 서로 팔고 있어서 경쟁이 무척 심했어. 시간이 왜 그렇게 느리게 가는지…. 그때는 한 시간이 꼭 열 시간처럼 느껴졌단

다. 책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이 길바닥에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거지. 종종 물건을 사시라고 호객행위를 하곤 했지만, 손님이 늘 오는 게 아 니어서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단다. 아니면 땅바닥에 막대기로 그 림을 그리거나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곤 했지.

하루는 심심해서 엄마에게 말도 없이 시장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러 나

팔았지만, 돈이 별로 없으셨는지, 아니면 집에 두고 온 동생들 생각이 노래, ‘어머님께’에 이런 가사가 있단다.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

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그룹 멤버들의 경험을 노래 로 만든 거래. 그중에 박준형이라는 멤버의 실화 이야기인데 원래는 자

장면이 아니라 잡채였다고 하더라. 잡채라고 하면 이상하니까 자장면

이라고 바꾼 거라고 하더라고. 그분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랐었나 봐.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서 누가 잡채 를 가져오면 드시지 않고 꼭 가져오셨던 거야 있는 아들 준다고.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길을

엄마들은 다 그런가 봐. 자식 생각하면서 배고프고 먹고 싶은데도 자

공포감이 생기면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서 머리가 꽉 막혀버리

런 엄마 덕분에 자장면 한 그릇을 혼자서 거의 다 먹어치웠으니, 참 철

잃었더니 정신이 하얗게 되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 불안하거나 지. 그래서 시장을 몇 바퀴를 돌아도 엄마를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마

음을 진정하고 천천히 찾아보면 금방 엄마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아 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침착함을 보이기란 쉽지 않았어. 한참을 울면

서 엄마를 찾고 있는데, 저 앞에서 엄마가 뭘 사고 있더라고. 아마 나를 30

장면이 싫다고 하고. 자식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마음일 거야. 그 이 없어도 많이 없었지. 지금이야 자장면이 귀하지가 않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먹을 게 없었는지. 그때 먹은 자장면 맛을 늘 기억하고 있단

다. 너무 맛있었거든. 지금은 아무리 자장면을 먹어도 그 맛이 나지가 않아. 뭐든지 풍족하면 그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지. 없을 때, 아주 오


랜만에 먹으니까 맛이 있었겠지. 그래서 결핍도 가끔 필요하단다. 너무

와 나, 그리고 누렁이는 하얀 달빛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걷고 있었어.

니까 그 가치가 점점 떨어지는 거야. 그때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시장에

라고는 달랑 네 채밖에 되지 않는 산골 마을,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플

많으면 귀한 줄 모르고 맛있는 줄 모르거든. 항상 넘쳐나고 늘 맛을 보 와서 자장면을 먹을 수가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먹어보는 자장면이 그 렇게 맛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가져온 물건은 밤 9시가 다 돼서야 다 팔 수가 있었단다. 새벽 6시에 집 을 나서서 아침 첫차를 타고 집에 9시 30분 막차를 타고 돌아오는 거

버스정거장에서 한 삽 십 분쯤 걸으면 멀리 우리 집이 보인단다. 집이 래시 (휴대용전등기)를 켜고 길을 찾아 집에 도착했지. 오랜 기다림 속

에 엄마의 보따리를 열어보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단다. 흔히 먹을 수 없는 시장에서 사 온 과자가 그 안에 들어있었거든. 5일을 기다려서 먹을 수 있는 과자여서 그런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간식거리였단다.

지. 이제 물건을 다 판 돈으로 시장에서 고등어 두 마리, 닭발 한 자루,

4학년 때가 되어서 드디어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어. 그동안 호롱불에

몇 켤레를 사서 집으로 돌아온단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얼마나 즐거운

며칠 후 다리가 네 개 달리고 미닫이문이 있는 텔레비젼을 사오셨어.

돼지고기 두 근과 돼지비계 몇 덩어리, 뻥튀기 세 봉지, 가족들 줄 양말 지. 보따리 속에 들어있는 뻥튀기와 고등어를 먹을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오곤 했었지.

가끔은 엄마가 혼자 시장에 가시곤 했단다. 그러면 물건을 커다란 자전 거에 싣고는 아랫마을 버스정거장까지 배달했지. 그리고 집에 돌아가

서 한참 놀다가 저녁 대 여섯시가 되면 버스정거장에 엄마 마중을 나간 단다. 물건을 다 팔고 시장에서 사 오신 식료품과 공산품들을 다시 싣 고 가야 하거든.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대체 몇 시에 돌아오실지 모른

다는 거야. 전화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니까 무조건 일찍 나가서 기다려 야 했어.

의지해서 살았는데 마을 전체가 완전 다른 세상이 된 거지. 아버지는 일요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텔레비전을 틀자 뽀빠이 이상용과 백 설희가 진행하는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프로그램이 나오는 거야. 텔레 비전으로 처음 본 프로그램이었지. 산과 들에서만 놀다가 텔레비전이

생기니까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매일 텔레비전만 보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전압변환기를 감춰버려서 평상시에는 잘 볼 수가 없었지. 일주일 내내 기다렸다가 주말에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는데,

매우 토요일 밤에 볼 수 있는 토요명화와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명화극 장을 제일 좋아했어. 토요일 밤이 되면 졸린 눈을 비비고 영화가 상영

되기를 기다리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황야의 무법자’라는 영화 가 텔레비전에 나오면 총잡이들의 멋진 영웅담에 흠뻑 빠지곤 했지.

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에 노랑색 서령버스 한 대가 멀리서 먼지를 일

지금은 세상이 매우 빨라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거야. 어

어. 차가 한 시간에 한 대밖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한 시간을 그냥

오잖아. 인터넷으로 보고 싶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골라서

으키며 들어오면 얼른 나가서 둘러보지. 엄마는 그 버스 안에 안 계셨

기다려야 했단다. 버스정거장 앞에 조그만 냇가가 있었는데, 신발을 벗

고 들어가 송사리나 가재를 잡으며 놀곤 했지. 돌멩이를 주어서 물에 던져 튀기는 놀이도 하고, 다리 난간에 올라가서 아슬아슬하게 저 끝까 지 걷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또 버스 한 대가 멀리서 달려오

는 모습이 보인단다. 그럼 엄마가 왔나 싶어서 얼른 정거장에 나가보 지만, 그 차에도 안 계신 거야.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덧 밤 10시가

금세 넘어간단다. 대개 엄마는 막차를 타고 오셨어. 그래도 엄마의 보 따리에 무엇이 들어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또 물건을 빨리 팔았으면 일 찍 오실 수도 있어서 일찍 나가서 몇 시간씩 기다릴 수 밖에 없었지.

시장에 다녀온 엄마를 만나서 보따리를 자전거 뒤에 싣고 돌아오는 길 은 아주 희망에 차 있었단다. 우리 집 똥개 누렁이를 데리고 간 날, 엄마

디를 가든 편리하게 자가용을 이용하면 되고, 버스, 지하철도 금방금방 볼 수 있고, 케이블을 켜면 수백 개의 채널에서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너무 빠른 것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햄버거집이나 식당에 가서 음식 이 조금 늦게 나오면 바로 불평을 하고, 차가 조금 막히거나, 지하철이

제시간에 안 오면 안절부절못하고 화를 내곤 한단다. 조금 기다리다 보

면 음식이 나올 것이고,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거나 결국 종착지는 똑 같은데도 말이야.

중요한 것은 빨리 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야. 오래 기다렸다 음식을 먹으면 더 맛이 있고, 천천히 걷다 보면 길에 있는 꽃 하나, 나뭇가지 위의 새 소리, 골짜기에 드리운 안개, 그리 고 파란 하늘 위에 놓인 구름도 보이기 시작한단다. 기다림은 불편함이 아니라 기회이자 축복일 수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뉴욕차일드센터 임상 및 통합지원 국장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31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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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모든 패션, 디자인 학생들이 선망하는 뉴욕 디자인 스쿨의 대명사

파슨스 스쿨 오브 디자인(Parsons School of Design) 세계 3대 디자인 학교로 인정받는 명성. 실용적인 학풍. 첨단 교육 시설. 수준 높은 강사진. 화려한 졸 업생 명단. 그리고 맨해튼 중심의 캠퍼스라는 지역적인 매력까지. 전 세계의 모든 패션과 미술 지망 자들이 한번은 학업을 꿈꾸는 학교가 파슨스 디자인 스쿨 (Parsons School of Design)이다. 이런 위치 에 걸맞게 재학생과 졸업생의 비율 중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안 그리고 국제 학생의 비율이 무척이나 높은 학교이기도 하다. 미국의 명문 교육 기관을 안내하는 시리즈로 이 번호는 파슨스를 소개한다. 글

편집부

파슨스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The New School' 의 5 개 단과 대학 중 하나에 속한 사립 대학이다. 패션, 디자인, 광고, 인테리어 디자인,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을 종합적으로 제공한 미국 최초의 학교로 인정받 는다. 파슨스는 13 개의 학부 학사 프로그램과 17 개의 대학원 석사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 는 예술 및 디자인 학교 중 하나로 널리 간주된다. 디자인스쿨 평가에서 미국에서는 1위, 전세계적으로 런던의 로얄 컬리지 오브 아트 (Royal College of Art) 에 이은 2 위를 차지했다고 이 학교 블로그에 설명되어 있다. 파슨스에는 3,800 여명의 학부생과 400 여명의 대학원생이 공부하고 있다. 패션과 디자인 학교답게 재학생의 77 %가 여성이다. 국제 학생의 비율이 30%를 넘는 이 학교는 68 개국에서 온 유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 장 큰 유학생 그룹은 아시아와 유럽이다. 127 명의 풀 타임 교수진과 1,056 명의 파트 타임 교수진이 있으며 그 중 많은 교수들이 뉴욕 및 각국에서 성공적인 작업 예술가 및 디자이너들로 이루어져있다. 역사

파슨스는 1896년 인상파 화가 윌리엄 메릿 체이스 (William Merritt Chase) 의해 Chase School로 설립되었다. 뉴욕 의 Art Students League에서 탈퇴해 소수의 프로그레시브 그룹을 이끌었던 체이스의 성향처럼 학교의 학풍은 자유

롭고, 극적이며 개인적인 예술 표현을 추구했다. 체이스 스쿨은 1898년에 뉴욕 예술 학교(New York School of Art) 로 명칭을 변경했다. 1904년부터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프랭크 파슨스 (Frank Alvah Parsons)는 이후 학교를 오늘 의 파슨스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뉴욕 예술 학교의 학장이 된 프랭크 파슨스는 산업 혁명의 새로운 물결

을 예상하면서, 예술과 디자인은 곧 산업 엔진에 연결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비전은 미국 최초로 패션, 인테리

어, 광고 및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을 융합적으로 설립하면서 이루어졌다. 그의 퇴임 후 1921년 파리의 파리 아뜨 리에 (Paris Ateliers)를 설립 한 윌리엄 M. 오돔 (William M. Odom)이 학장을 승계했다. 오돔 학장은 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전 세계 예술과 산업을 연결하는 이론 개발에 열중한 파슨스에게 경의를 표하며, 1936년 파슨스 디

자인 스쿨 (Parsons School of Design)으로 학교명을 개명했다. 파슨스는 1970년 뉴스쿨 (The New School)의 일 원이 되어 맨해튼 미드타운 이스트의 서튼 플레이스에서 현재 그리니치 빌리지로 캠퍼스를 옮겼다. 뉴스쿨과의 합 병은 새로운 자금과 에너지의 공급으로 파슨스 교육의 질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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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 정

정구호, 이서현

파슨스 출신 명사들

파슨스 학생들의 가장 큰 자부심은 실력과 명성을 갖춘 교수진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선배

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선배들은 구찌와 같은 굴지의 명품 그룹에서 크리에티브 디렉터로, 마크 제이콥스 같 은 자신의 브랜드를 가진 디자이너로 그리고 제이 크루 같은 기성복 메이커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즉 그들

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자신이 졸업하면 그들과 함께 파슨스 출신이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는 점이 큰 매 력이다.

파슨스 출신의 디자이너들은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많다. DKNY 설립자인 Dona Karen, 인테리어 디자

이너 스캇 살바토레Scott Salvator, 마크 제이콥스 Marc Jacobs, 알렉산더 왕 Alexander Wang, 톰 포드 Tom

Ford, 안나 수이 Anna Sui, 제이슨 우 Jason Wu, 나르시스코 로드리게스Narciso Rodriguez, 이작 미즈라히 Isaac Mizrahi, 데렉 람 Derek Lam, 파블로 구룽 Prabal Gurung, 제나 라이온스 등이 있다.

패션 부분 외에도 파슨스는 예술과 사진 등의 영역에서 재스퍼 존스, 폴 랜드, 알렉산더 칼더, 로이 리히텐슈타 인, 노먼 록웰, 듀안 미칼스, 아이 웨이 웨이, 조엘 슈마허 및 재스퍼 콘란 등의 명사들을 배출했다. 한인 졸업생들

미국의 1.5세, 2세 학생들도 상당수지만 한국의 패션, 미술 지망자들에게 파슨스의 명성은 압도적이다. 쉽게 말해 현직 한국 대통령의 아들과 한국 최고의 재벌가 자녀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아직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 은 소규모의 자기 브랜드를 키우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있고 상당수는 대기업의 패션 브랜드에서 활약한다. 이 중 국내외 매체에서 소개되었던 일부 졸업생들을 간단히 소개하면.

디자이너 두리 정은 이명박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국빈만찬에서 입은 미셸 오바마의 드레스를 제작 해 큰 화제가 되었다. 1973년 한국에서 태어난 뒤 4살 때 이민과 세탁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랐고 2001년 뉴 저지에 있는 부모님의 세탁소 지하실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사무실을 처음 내며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그녀는 34


이지선

지오

자신의 재능과 교육보다 항상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의 열정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한다. 미셸 오바 마 이전에 제뉴어리 존스, 아만다 사이프리드, 크리스틴 스튜어트 등 유명 여배우들의 옷을 제작한 적이 있다.

정구호는 기업형 패션 디자이너로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한인 파슨스 졸업생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삼

성 계열의 제일모직이 그의 브랜드 '구호'를 인수한 후 10년 만에 매출이 8배 이상 향상되며 주가를 올렸다. 패

션뿐 아니라 무용과 영화 분야에 걸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제일모직에는 이건희 회장의 딸인 이서 현 상무 외에 다수의 파슨스 출신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버버리 코리아의 바잉 MD 4명이 모두 파슨스 출신 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브자리 디자인 연구소의 한지원 소장은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대모로 불린다. 한인 유학생이

드물던 80년대에 공부한 한 소장은 텍스타일 전공 후 메이시스 등 미국 회사에서 11년을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일한 경력을 갖고 있다. 89년 귀국 후 한국이 침구 산업 발전에 역점을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07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얼굴을 알린 이지선은 파슨스 졸업 심사에서 우수작으로 뽑힌 니트웨어들을 2주간

삭스 피프스 애비뉴 백화점(Saks Fifth Avenue New York)의 메인 쇼윈도에 전시했다. 2011년 이탈리아의 패션

스쿨 마랑고니에서 액세서리 마스터 과정을 마친 친언니 이지연과 함께 자매의 이름을 딴 ‘제이 어퍼스트로피’를 런칭했다. 미니멀리스트 패션을 지향하는 제이 어퍼스트로피는 2017년 봄 컬렉션까지 마치고 계속 순항 중이다.

디자이너 이신우의 딸인 박윤정 씨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박윤정 부티크 CEO가 되었다. 패션 외에도 구미호, 단적비연수, 태왕사신기 등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대작의 의상 디자이너로 활약했다.

보그 닷컴 등을 통해 몇 년 전부터 미 패션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디자이너 지 오 (Ji Oh). 졸업 후 스타일리

스트로 활동하다가 2010년 자기 이름을 딴 레이블을 시작했다. 편안함과 다양함을 추구하는 여성의 세련된 멋, 중성적 매력을 지닌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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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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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진실입니다. 오로지 그것입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선생 지난 32년의 ‘해방후사(解放後史)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일, 진실 되게 그 뜻이 해석되거나 이해되지 않은 일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려져버린 채 거론되는 것이 막혀온 일들…… 이런 것이 오늘 우리의 생존의 ’내 적 근거‘가 되어 있다. 맥락을 추려서 그것을 다시 캐내어 똑똑히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내 일을 사는 지혜이고 용기라고 생각한다.(리영희 (2016년 1월15일) 『우상과 이성』 . 한길사. 26~27쪽.) 글 은미희(소설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낸 리영희 선생

2006년 9월 5일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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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준엄하게 비판하고

통렬하게 사실을 까발린 선생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만큼 선 생은 사회의 여러 곳에 만연된 부조리와 부정을 목도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그것들을 시대의 기록과 고발로 남겼다.

5·16 쿠데타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모두가 침묵할 때 혁명의 부당성을 국내외에 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선생의 절망과 증언

이 있었기에 우리는 거대한 거짓과 위선에 가려있던 진실의 민낯들을

볼 수 있었다. 선생은 격동의 시대를 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그것 도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고 투쟁해 왔다. 따라서 선생에 진실은 우리를 더욱 더 나은 세계로 안내한다. 진실이 힘을 발휘하고

제자리를 찾을 때 우리는 훨씬 풍요롭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 다. 하지만 그 진실은 여간해서는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다는 아니지 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위선과 거짓과 가식으로 포

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통역장교, 언론인, 교수, 사회운동가. 선생 의 살아온 이력만 보더라도 그 내공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선생 은 그렇게 격변기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낱낱이 그 진실을 들여다보고 글로써 세상에 알려왔다.

장하고 나아가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권모술

선생의 이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선생이 지나온 길도 예사롭지 않다. 선

해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썼을 때, 즉,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고,

는 전시동원체제의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수에 능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대중을 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권력을 동원할 때 대중은 암흑의 수렁 속으로 빠지고 만다.

우리에게도 그런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불과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폭압 속에서 자유를 제한당한 채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을 수 있는 조작된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 한데 그 어둠 속에서 은폐된 진실의 장막을 걷고 올곧게 진실을 알리며, 실천하는 지식인으

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협잡과 밀약으로 세상이 혼탁할 때, 자신의 이

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좇아 움직인 사람, 바로 리영희 선 생(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이다.

선생은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선생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을 상기하며 이렇게『우상과

이성』 의 서문에서 소회를 밝혔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 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

이었고,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준 것을 사과한 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보람차다.” 그 괴로움 의 고백은 선생이 힘들게 세상에 알린 진실이었고, 그 진실로 대중들의

몽매를 깬 것에 대한 사과였다.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차라리 진실 을 몰랐다면 우리는 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희망과 비전은 사상누각일 뿐이며 허상이다.

옛말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했는데, 기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펜(pen)이다. 펜은 진실을 전하기도 하고, 거짓의 성을 쌓기도

하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진실이다. 선생은 그 펜으로 서슬푸

른 독재와 군정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지켜냈다. 선생은 1980년에 출 판한『우상과 이성』 의 서문에서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

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

에 그친다”라고 했다. 게다가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

생은 유년시절에 일제강점기 시절을 겪었고, 더불어 청소년기 시절에 난 뒤 혼탁한 사회에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고, 이어 국립해양대학에 입학해, 우연히 여순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국 립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안동 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

유엔군 연락 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군 장교 후보생이 되었다. 이

후 선생은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해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고, 온갖 방해와 협박해도 불구하고 시위에 참여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식인

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어 선생은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 학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다가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

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고,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기자 시절 선생에게 주어진 별칭은 ‘특종기자’였

다. 선생은 두 번의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번은『전환 시대의 논리』 를 출판한 후였고, 두 번째는 한겨레신문에 재직할 때 방

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선생은 모두 아홉 번의 연행

과 함께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총 1,012일 동안의 수감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선생을 회유하거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나와 서대문형무소(구치소)의 만남은 무슨 잘못된 인연인지 언제나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에서였다. 그런 탓인지 무악재 고갯마루에 비껴 서있는 우중충하고 음산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를 회상하면 그 추위부터 생각난다. 하필이면 내가 갈 때마다 왜 그렇게 추웠는지, 세 번 모두 다 그랬다.(네 번째 는 새로 옮긴 구치소였다.)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 에 한 번, 박정희 시대인 1964년과 77년, 전두환 정권 때인 94 년, 해방 후 현대사에서 아마도 극악의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 그 20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들에 의해 묶여 들어갔으니 적은 횟수가 아니다. 생각만 조금 고쳐먹으면 태평성세를 구가하 면서 입신도 웬만큼은 누릴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나도 꽤나 우직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리영희 (2016년 1월15일) 『우상과 이성』 . 한길사. 53쪽.)

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만

첫 수감 생활은『전환시대의 논리』 와 관련된 일련의 저작물들이 원인

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진실을 지키는 일.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일

고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2년의 형을 살았다. 선생이 두 번째로 서

했다”라고 고백하고,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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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었었다. 선생은 그 엄혹했던 그 시절『전환시대의 논리』 를 펴내


대문형무소에 들어갔을 때는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 담당 기자였을 때

였다. 선생은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기

구(AA)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대표를 그해에 열릴 유엔총회에서 함께 초청하고, 유엔 동시 가입 제안을 검토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는

북한에 대한 모든 것은 금기사항이었고, 더욱이 남한과 북한을 동격으

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 신(狂信)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 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리영희 (2005년 3월10일) 『분단을 넘어서』 . 한길사. 274~275쪽.)

로 취급하는 것은 국가정책에 위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 정

실제로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이 가장 번영했을 때를 추적해보고 분석

선생은 두 번째 옥고를 치를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며 글로 남겼다.

이 무너지고 강요 때문에 한쪽이 전체를 지배할 때 세상은 오히려 부조

보를 기사로 내보냈고,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연행되었다.

해보니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룰 때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념의 균형 리와 억압을 낳고 또 다른 폭력을 배태하며 사회발전은 물론 경제발전

그해 겨울 감방 안에서는 동상에 걸린 열 개의 발가락에서 피 또한 역행하는 것이다. 를 짜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6.25전쟁 발발 때부터 최전방 전투지대에서 휴전조인을 맞이할 때까지 3년 반을 살았어도 『뉴욕타임즈』대 정부의 소송사건이 언론의 승리로 끝나고 그 동상에 걸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치작․사상적 이유로 처 충격을 완화하려는듯 닉슨의 중공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오웬 넣어진 자기정부의 시설 안에서 동상에 걸리니 어디에 하소 라티모어 박사는 미국의 30년에 걸친 불행은 매카시즘의 반 연하겠는가. 나라를 잘못 타고 난 죄거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지성주의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진단했다. -중략- 그는 1950 년대 매카시즘의 공포분위기와 사상통제라는 반지성주의가 죄를 한탄할 수밖에.. (리영희 (2016년 1월15일) 『우상과 이성』 . 한길사. 60쪽) 미국국민의 창조력과 자유를 철저하게 위축시킨 탓에 정부화 학계와 여론지도층에는 거의 어용적 성격의 지식인만이 남게 당시 기온은 영하 14도였다. 한데 선생에게 주어진 수복은 홑겹의 여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자체가 ‘적극적 개념’ 름 수복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선생의 정신을 흔들어놓거나 훼절 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否定)의 개념이며 시키지 못했다. 동료들이 협박에 못 이겨 전향할 때도 리영희 선생은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가난은 혹독했다. 하지만 그 가 -중략- 라티모어 박사는 매카시즘이 미국이 세계에 자랑할 난이 선생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난했기에 그의 영혼은 더 맑을 모든 가치와 전통을 철저하게 짓밟았다고 항의한다. 그 자신 수 있었다. 선생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진실이었고, 양심이었고, 정 도 매카시즘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의였다. 정부의 통제 속에 진실이 은폐되고 부정부패가 사회를 지배할 때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위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국민을 시종일관 기만하는 정부체제와 세력에 의해서 이용될 때 그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기만을 폭로하는 것 이상으로 애국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리영희 (2016년 11월10일) 『전환시대의 논리』 . 창비. 26쪽)

그 진실과 양심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어떠한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지도 않았다. 특히 국가의 엄혹

한 반공정책에 우리 모두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릴 때 선생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설파했다. 그 은유에 어 떤 사람들은 통쾌해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격리했다.

‘좌’가 뭐고 ‘우’가 뭔고? ‘좌’는 절대로 나쁘고 ‘우’는 절대로 옳다는 전도된 사고방식은, 그런 위험하고 유치한 이분법의 대표적 신봉작인 레이건이라는 사람조차 이제는 부정하게 되 었는데도 말이다. -중략-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 조차 왼쪽 날갱화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원리가 아닐까? (리영희 (2014년 6월30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한길사. 24쪽)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 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

(리영희 (2016년 11월10일) 『전환시대의 논리』 . 창비. 35쪽.)

선생의 폭로와 외침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글을 관통하는 선생의 식견과 세상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이 새로운 비판의 기준을 제시했다. 선생이 펴낸『전환시대의 논리』 와『우상과 이성』등

일련의 책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의 상황과 형편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근거가 되고 있다. 모든 진실이 은폐되고 통제되는 혼탁한 사 회에 양심을 지키고 진실을 좇는 지식인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도 사회 가 아직 살아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 선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 늘과 같은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일생은

진실과의 투쟁이었고, 혼탁한 시대의 등불이었다. 선생이 소망하는 상 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기대해본다.

한달 동안 신문에 반영된 이 사회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루 속히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겠다는 절실한 희 망이다. 영국의 정치에는 그렇게 많고 심오한 이론이 동원되 질 않는다고 한다. 이론으로 안 될 때는 상식에 맞는 것이 영 국 국민의 지혜이고 생활경험이다. 상식이란 무엇인가. 소박 한 민중이 까다로운 이론 조작․설득․세뇌 노력없이 오랜 생활 경험으로 옳거나 그르거나를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다. (리영희 (2016년 1월15) 『우상과 이성』 . 한길사. 97쪽.)

은미희(Mihee Eun) 소설가, 작가, 언론인

1996년 단편《누에는 고치 속에서 무슨 꿈을 꾸는가》로

《전남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99년 단편《다시 나 는 새》 로《문화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삼성문학상 수상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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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외국어 공부는 사고의 폭과 이해력을 넓혀줍니다

프랑스어 교사 Ms. Zhanna Buzharsky와의 대화 세계에는 대략 6,000개 이상의 언어가 등록되어 있고 미국에 서도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베 트남어 등이 쓰인다. 다민족 다문화인 미국에서 공용어인 영 어 이외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미국을 이해하고 화합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프 랑스어를 선택해서 배우고 있다. 2017년 4월 26일 Cresskill high school world language honor society 행사에 초대받 아 참석한 후 내가 존경하는 프랑스어 선생님 Ms. Zhanna Buzharsky와 외국어 공부와 선생님에 대한 유익한 대화를 나 누었다. There are more than 6000 languages in the world. In the States, many other languages such as, French, Spanish, German, Vietnamese, Chinese, and Koreans are spoken. I think that learning a foreign language can be useful for better understanding of the diverse culture of the States, and help unite better. I have been taking French classes since Freshman year. On 26 April 2017, Cresskill High School held world language honor society induction ceremony (for French, Italian and Spanish) for its outstanding junior and senior students. I was honored to have been invited to observe the event, and took this opportunity to ask a few questions to Ms. Zhanna Buzharsky, my honorable French Teacher, on learning foreign languages, and also on her personal motivations. 취재, 글 민재원_

Junior Repoter 정리

편집부

고등학생들이 필수과목으로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큰 이점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자신을 더 잘 이해 하고 사고력을 향상하며 주변 사람들을 이해하는 인내심을 길러주는 것으로 생각해요 능력은 더욱 나은 미래의 기회를 주기도 하죠.

10여 년째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계시는데 다른 언어와 비교하여 프랑 스어의 중요한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프랑스어는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매력적이며 흥미로운 언어예요. 우

리는 영어 중에 프랑스어와 관련된 많은 단어를 찾을 수 있으며, 많은

영어 단어의 어원을 프랑스어로도 찾아볼 수 있어요. 프랑스어는 5개

대륙에서 사용되며 2억 2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이자 많은 국가 의 공식 언어죠. 영어와 함께 세계 여러 나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요

한 언어입니다. 또한, 외교, 미술, 음악, 문화, 패션, 요리법 및 비즈니스 의 언어이기도 해요. 프랑스에 대한 지식은 일자리 기회도 얻을 수 있 고, 여행,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학, 예술 등 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40

While it is not so easy, what do you think are the greatest benefits for learning foreign languages? The benefits for learning a foreign language are numerous including better understanding of the world and of oneself, improving your thinking and multitasking skills, growing patience and tolerance toward others and those around you, ameliorating your English skills, increasing your opportunities to get a better job in the future and to complete in this global world.

From your long teaching experience, what do you think are the particularly interesting aspects of the French language compared to others? French language is fascinating and really interesting both to the learners and teachers alike. We can find so many words that are related in both English and French and trace the etymology of many English words to their original roots found in French as well. French language is spoken on all five continents and an official language of many countries as well as the language spoken by more than 220 million people. Along with English it is the language taught in schools in every country in the world. It's the language of diplomacy (United Nations), art, music, culture, fashion, gastronomy, and business. Knowledge of French can open many doors when it comes to job opportunities, travel, meeting new people, and gaining better understanding of the world politics, economy, societies, literature, art, etc.


선생님은 3개 국어를 능숙하게 하시죠? 그런데 독일어와 아랍어도 공 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대학에 다닐 때부터 언어학을 공부하

기로 했고, 내가 모르는 외국어 프로그램에도 등록했어요. 다른 언어를 배울뿐 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도 배우고 싶었죠.

저뿐 아니라 많은 학생이 외국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데 외국어를 잘하 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외국어는 실제로 연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요. 사용할 기회가 많을수

록 자신감이 생기고 향상됨을 잊지 마세요. 실수하는 것은 학습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언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죠.

선생님이 매년 주관하시는 프랑스 교환 학생 프로그램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것인지 알려 주세요.

이 프로그램은 8년 전부터 미국 Cresskill과 프랑스 Lyon의 Les

Chartreux School 학생들 간의 유대를 형성하고자 시작했어요. 교환 학생 프로그램은 두 나라의 학생들을 연결하고 서로의 문화를 경험하 면서 또한 언어를 향상하고 학생들이 호스트 가정의 일상 생활을 경험 하면서 다른 문화와 자신의 이해를 향상하는 것이 목표예요. 학생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더 관용적으로 되고, 그들의 사는 방법과 문화를 공유

하고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오랫동안 지속하는 우정을 쌓을 기회를 제 공하고 있지요.

선생님께서는 작년도 The Teacher of the Year Award 수상하셨습

니다. 늦었지만, 2015-2016 The Teacher of the Year Award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프랑스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지원하기 위한 나의 모든 노력이 인정된 것 같아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하며 자랑스러웠어요. 나는 훌륭한 공동

체에서 일하게 되어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유익한 프로 그램을 계속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랑스어 관련한 교외 활동에 대해 알고 싶은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프랑스 국립 시험에 참여하는 등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배울 기회는 많 이 있어요. Le Grand Concours 에서 매년 열리는 학생들이 프랑스

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을 겨루는 대회가 있고 뉴저지 전역에서 온 학

생들과 경쟁하여 선정된 시를 암송하고 발표하는 William Paterson University 국제 시 낭송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어요. 크레스킬 고등학

생들은 크레스킬 초등학교의 International day 행사에 참여하여 어 린아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수업을 준비하고 언어와 문화에 대한 관 심을 두는 활동도 하고 있어요. 주니어와 시니어 학생은 Montclair 주 립 대학의 인문학 연구소 (Institute of Humanities)가 주최하는 연례

프랑스의 날에 참석하여, 영화제에서 능력을 겨루고 프랑스와 프랑스 의 세계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프랑스어 워크숍에도 참여해요. 올해 Cresskill 고등학교는 2등상을 받았습니다! French Honor Society 에

가입한다는 것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인정

받는 의미이고 이곳을 통해서 그 학생들은 진정으로 프랑스어 클럽의 지도부로서 여러 문화 클럽과 협조하여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프랑 스어와 문화도 홍보할 수 있어요.

What was your motivation for continuing to learn other languages like German and Arabic when you are already fluent in 3 languages? I am a linguist by nature and was always fascinated by different languages. When I was in college, I decided to pursue my studies of languages and enrolled in courses of languages not related to the ones I already knew. I wanted to challenge myself and better my understanding of second language acquisition as well as get to know other cultures while learning other languages. Many students including myself are eager to obtain fluency in foreign language. Can you share some useful tips for more effective/efficient way of studying foreign languages? I am a strong supporter of practicing on a regular basis and learning languages for communication. The more opportunities one can get to make practical use of the language studied, the more confident and improved one will feel. Making mistakes is part of the learning process so another tip would be to feel ok making mistakes. Use it and you won't lose it!

Can you explain more about the student exchange program that you organize every year? This unique program started over 8 years ago and its mission is to create bonds of friendship between students from Cresskill and les Chartreux School in Lyon. The exchange program connects young adults from two countries and allows them to experience each other's cultures while improving their languages. By immersing the students in the daily lives of their hosting families, the program fulfills its goal of improving students' understanding of and appreciation for other culture and for one's own, as well. It gives an opportunity for families as well as students to become more sensitive and tolerant, to share their lifestyles and cultures and to form long lasting friendships with people from other countries and cultures. Please tell me about you receiving the Teacher of the Year Award in 2015-2016? I was so happy for you. It was a great honor and privilege and I felt extremely proud that all the work and care I have put into building and supporting the French programs and department have been recognized. I am very lucky to work in such great community and am looking forward to continuing with all the programs that promote peace, generosity, curiosity, intellectual improvement and caring for others.

Please explain more about other activities that you encourage students to be involved in such as, “French Honor Society”, and “Grand Concours” There are a number of activities that our students studying French are involved including participation in the French national exam Le Grand Concours -- a yearly competition where the students showcase their knowledge of French language and culture and compete with the rest of the nation to get honors and awards for their hard work. Our students also participate in the annual William Paterson University world language poetry recitation contest competing with students from all over New Jersey in memorizing and presenting a chosen poem. Our upper class honors students participate in international day celebrations in both elementary schools during which they prepare fun lessons for younger kids and engaging them with their passion for language and culture. Juniors and seniors also go to the annual French day organized by the Institute of Humanities at Montclair State University during which they participate in French - speaking workshops on a variety of topics about France and francophone world as well as compete in the French film festival. This year Cresskill got the second prize!!! The French Honor society recognizes the highest academic achievement of students of French and those inducted are truly the leaders of the French club and other activities such as tutoring, organizing and participating in French national week, coordinating other cultural festivities in conjunction with other language clubs and promoting French language and culture in the community. Merci beaucoup, Madame Buzharsky Ms. Zhanna Buzharsky : Merci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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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생명의 예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글 박 원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New School 대학원에서 Media Studies 전공 <뉴욕중앙일보> <라디오 코리아> <뉴욕한국일보> 전 기자. 에세이집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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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과 재능, 실험정신과 열정으로

LA 한인 소극장 문화를 이끌고 있는 극단 이즈키엘 필자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선물을 받기 위해 동네 교회에 성탄절에만 몇 번 가본 경험이 전부다. 그러다가 고등학 교 때 잠원동의 제법 큰 교회에 간 적이 있다. 학교에서 기타를 잘 친다고 소문났던 친구가 속한 성가 밴드가 공연하 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의 K -Pop 댄스음악처럼 그때는 청소년들에게 록음악의 인기가 절정이어서 어느 학교나 록 밴드 하나쯤은 있던 시절이다. 그래도 교회에서 성가를 록이라는 장르로 연주한다는 사실은 꽤 신선했다. 왜냐면 보 수적인 어른들 특히 기독교에서 록음악은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심지어 사탄의 음악이라고까지 불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공연은 정말 좋았다. 찬송가 하나 변변히 모르던 내가 성가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을 정도였다. 대학에서 전공한 신문방송학적 표현을 빌리자면, '메시지'를 전하는 '미디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험한 현장이었다. ' 나이롱 신자' 였던 고등학생을 교회로 이끌었던 것은 록이라는 장르였고 10번, 100번의 설교보다 강렬한 영적 체험을 현장에서 느꼈던 근본은 그 친구의 빼어난 기타 실력과 밴드 멤버들의 멋진 연주였다. 그런 면에서 극단 이즈가엘 기 사를 쓰면서 30년 전 그 공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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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창단 이후 작품성과 화제성을 갖춘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LA의 전문 기독교 공연예술 단체인

LA의 극단 이즈키엘(단장 전수경)을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은 많다. 성도 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공연을 통 해 복음을 전하는 취지, 전문 기성 극단 못지않게 꾸준히 새로운 창작 작품을 선보이는 창의력, 장기 공연을 이 어갈 수 있는 각 분야 전문 연극인들의 기량과 열정, 공연 수익을 모두 기부하며 극단의 목적에 충실해 온 나눔

의 정신 그리고 한인뿐만 아닌 타인종 심지어 타 종교인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진취성 등. 하지만 성극

이라는 형식과 내용을 뛰어넘으려는 부단한 시도와 실험성이야말로 이즈키엘을 단순히 기독교 극단으로 한정 할 수 없는 예술적 평가의 부분이다.

이즈키엘의 도전 정신은 2013년 창단 공연 <만남>에서부터 확인된다. 1.5세 전문 연극인들이 참여한 <만남>

은 ‘기독교 연극의 고정 관념을 깨트린 날카로운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미주 한인 성 극 최장 공연 기록을 세웠다. 연출자는 전통적인 내러티브가 아닌 각 주인공의 대화를 통해 내용을 전개해 가

는 실험극 형식의 이 작품을 통해 “누구나 한 번쯤은 기독교에 관해 궁금하던 질문들이 하나씩 풀려가면서, 관

객들은 전혀 성극 같지 않은 재미있는 연극 한 편을 관람하며 복음의 정체성을 찾아갈 것”으로 기대했고, 이런 의도와 기대가 4개월이라는 장기공연이라는 성과로 결실을 본 것이다.

창단 극 <만남>은 형식의 실험성과 함께 공연장과 관객의 지평을 넓히는 시도 역시 돋보였다. 남가주 농아 관 객들을 위한 수화 동시 통역 극을 공연했고, 치노힐 주립 교도소를 방문해 외국인 크리스천 재소자들을 위한

영어 버전을 공연하기도 했다. 기획을 맡은 김유연 씨는 “교도소를 선교지로 인식하지 않는 교회들이 대부분 이어서 갇힌 자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 교회의 관심, 성도들의 관심이 절실하다”라고 재소자 공연의 취지를 밝 혔다. 이런 취지에 돋보이게 <만남>의 수익금은 재소자를 위한 단체 ‘뉴호프 미션’에 기부되기도 했다.

이즈키엘은 2013년 창단 첫해 ‘만남’의 장기 공연을 이어가는 와중에 또 다른 작품도 준비했다. 그래 12월에는 제2회 정기 공연 성탄 극 <그 맑고 환한 밤중에>를 공연해 역시 수익금 전액을 ‘굿 사마리탄 홈’에 기부했다. < 그 맑고 환한 밤중에>는 기획 단계에 다섯 명의 작가와 연출가가 20분 분량의 크리스마스 코미디 단막극을 보 여주는 옴니버스식 작품을 목표로 했다. 역시 전통적 형식의 정극이 아닌 참여와 소통,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 생하는 에너지의 효과를 기대한 코미디 연극을 추구한 것이다.

인류의 모든 텍스트 가운데 가장 권위 있고 신성한 바이블의 내용을 주제로 삼으면서, 그리고 일반적인 관객들 44


보다 훨씬 보수적인 성향인 기독교인들을 중요한 관객으로 하는 공연을 만들면서 이즈키엘은 왜 전통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아닌 실험성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일까? 심지어 한 작품의 경우엔 공연에서 흡연 장면까지 등장해 일부 관객들에게 불편함까지 주었을 정도로 이즈키엘은 기독교 연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 해 노력하고 있다. 예술적인 의욕이 너무 넘쳐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전수경 단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작품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독실한 신자인 전 단장은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이다. 기독교에 대해 무심한 정도가 아니 라 일부 교회와 교인들의 전도 방식에 반감을 품는 많은 일반인 중의 하나였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팻말로 대표되는 강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분위기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부 분 말고도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가진 율법적이고 오직 교리에만 충실한 닫힌 태도가 저를 기독교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인이 되기 이전에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

으므로 신도 만이 아닌 일반인들을 주요 관객으로 하는 이즈키엘의 연극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깊이 고민했고, 그런 고민에 대한 결과가 신선하고 실험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예술 단체로서 우리의 목적이 신앙이지만 극장에 오는 관객들은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이 아니고 한 편의 무대 예술을 보러 오는 것이죠. 말씀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태의 공연이라도 반드시 관객에게 주어야 할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모든 극회원들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좋은 말씀을 연극으로 전한다’라는, 즉 공연의 목적이 의미가 있고 내용이 신앙적이라는 것 을 내세워 무대 예술이 가져야 할 퀄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연출자와 배우의 각오가 처음부

터 남달랐다. 그래서 이즈키엘은 첫 공연부터 관객에게 입장료를 받았고 일부 관객들은 “성극 보러 오는 데 돈 을 내야 하느냐?”라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전 단장은 “좋은 공연은 배우뿐 아니라 관객도 준비가 되어야 완성이 된다.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투자하겠다는 마음의 관객이 많을 때 공연의 질은 훨씬 향상된다”라

고 믿었다. 실제로 <만남>은 “매 회마다 감동된 관객들이 눈물을 흘려서 연기하는 배우들이 오히려 관객들을 보며 은혜를 받았다”라며 “배우가 관객이 된 연극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라고 전 단장은 말했다. 초대권이 없으 면 공연을 보지 않는 한인 커뮤니티의 척박한 무대 예술 풍토에서 이즈키엘의 공연은 매번 매진 행렬을 이어 갔고 심지어 표를 가지고도 자리가 없어서 돌아가는 관객까지 생기는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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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이후 4년간 이즈키엘의 활동은 기성의 전문 극단 못지않게 열정

20곡 이상의 노래가 나오는 뮤지컬 <청년 예수>는 1910년 일본강점기

독교 예술인을 위한 이즈키엘 정기 워크숍을 개강했고, 4월에는 창작

통치를 하던 시대적 배경에 빗대어 기독교 복음과 예수의 공생애 사역

적이었다. 2번의 정기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듬해 2014년 1월 기 뮤지컬 <마루 마을>을 공연했다. 창립 작품의 <만남>의 각지 초청 공 연을 이어가면서 <마루 마을> 역시 팜스프링스를 비롯한 각지에서 선

보였다. 2015년 제4회 정기공연 옴니버스 성극 <문>을 이즈키엘 소극 장에서 공연하고 수익금 전액을 재소자 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소망의 샘’에 기부했다. 5회 공연으로 옴니버스 연극 <문>을 무대 위에 올렸

고, 그해 10월에는 사극이라는 형식에도 도전해 제5회 정기공연으로

퓨전 사극 <살로메>의 프리뷰 공연을 올렸다. 2016년 초에 선보인 제6 회 정기공연은 미스터리 2인극 <귀향>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이즈 키엘의 장기 공연 화제작인 <청년 예수>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다.

이처럼 전문 예술인들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한 워크숍과 1년 2회의 공

가 주요 배경이다. 한국이 식민 시대를 로마가 이스라엘에 대해 식민 의 의미를 해석한 작품이다. 이미 2세 관객, 외국인 관객을 위해 무대

에서 영어 자막을 제공해왔지만, 전극을 영어로 공연하는 시도는 처음

으로 외국인 관객은 물로 종교가 다른 관객에게도 어필한다는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이즈키엘은 창단부터 ‘생명의 예술’을 지향해왔다. 전 단장이 생각하는 ‘생명의 예술’이란 어떤 예술인지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 넣어진 자들이 전하는 예술이라 는 뜻입니다. 그냥 육체로 숨 쉬는 생명이 아니고 영이 살아난 사람들 이 가지고 있는 생명을 뜻하죠.”

연을 숨 가쁘게 지속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마음이 가

언어와 글자가 없던 시절,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던 아주 오래전 부터

들이 재능기부로 가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전 단장은 자비를

림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신에게 보여줬다. 그들 중 재능이 뛰어난 자들

난한 사람들의 교회’등 종교 단체들이 무대를 제공하고 배우와 스태프 지출해왔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진 비상업성과 여전히 척박한

한인 커뮤니티의 공연 예술 풍토에서 이즈키엘이 계속 성장할 힘은 역 시 “하나님의 은혜”다.

“남자가 군대 얘기하면 끝이 없고 여자들이 아이 낳은 경험 얘기하면 끝이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공연 기획자와 연출자들, 배우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올리면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

라겠죠. 제작비, 늘 어려운 부분이죠. 하지만 돈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겪었던 어려움에서 가장 쉽게 넘어간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전 단장은 작품 하나를 무대에 올리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많은 지 이렇게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우리를 이끌어주실 가장 큰 힘이다”라고 확신한다.

이즈키엘은 올해 또 한 번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부터 공연한 <청년 예수>의 영어 풀 버전을 준비하고 있다. 2시간의 분량과

인간은 ‘절대자’를 경배하는 의식을 했다. 그들은 몸과 소리와 춤과 그

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남아 현재의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우리는 그것

을 기꺼이 ‘예술’로 인정한다. 예수님의 출현 이후 비로소 사람들의 예 술적 재능은 지향해야 하는 목적지를 뚜렷이 갖게 되었고 단순히 육체

로 표현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영으로 만들어 낸 예술이 나타나게 되었 다. ‘생명의 예술’에 대한 전 단장의 설명을 이렇게 해석해도 괜찮을 것 같다. 교인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돈을 기꺼이 바친다. 그 시

간과 돈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은 너무나 크다고 교인들은 믿 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교인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재능을 바칠 수 있

다. 생명의 예술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이다. 당사자들에게는 힘들고 지 난한 과정의 연속이지만 그 결과물을 감상하는 이들에겐 그것만큼 부 러운 재능과 열정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재능 또한 누가 주셨을까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 돌

려주는 것일 뿐 남들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질문 에 대한 전수경 단장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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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테너 유재웅의 재미있고 유익한 음악칼럼

‘성악의 남녀 파트별 분류 및 합창에 관하여’ 성악을 목소리로 구분할 경우에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음역과 음색을 통해서 나누어지며, 여성은 소프라노와 알토, 남성은 테너와 베이스와 같이 기본 4성부 합창의 구성의 명칭으로 이루어진다고 지난 호에 말 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전문적인 클래식 성악에 있어서의 세분 화를 통하여 남성과 여성의 파트별 이름과 특징, 그리고 합창의 파트별 종류와 구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남성은 크게 테너와 바리톤 그리고 베이스로 나눌 수 있는데, ‘테 너’는 남성의 가장 높은 음역대를 노래하는 파트이며, 가볍고 경쾌한 ‘레찌에로 테너’, 음색에 따라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리리코 테너’, 보 다 극적이고 조금은 무거운 소리의 ‘드라마틱 테너’ 등으로 구별을 합 니다. 거의 모든 오페라에서 극의 남자 주인공들은 테너가 맡는 경우 가 대부분이며, 정열적인 감정의 화려함과 희극과 비극적인 모든 스 토리와 요소들을 리드하면서, 서정적인 아름다움, 유쾌하고 즐거움, 슬프고 비극적인 사랑, 그 밖의 인생의 모든 감정을 노래합니다. 오페 라 아리아에서 광채같이 빛나고 때로는 절제함 속에서도 마지막 화려 한 절정의 고음을 부를 때에, 듣는이의 심장이 멈추는듯한 감동과 경 험을 통하여 인간의 몸이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신비로 운 감동과 진가를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 남성 음역인 ‘바리 48

톤’은 테너와 베이스의 중간 파트인데, 테너의 화려함과 기악의 첼로 소리와 같은 편안함에서 느껴지는 그윽하고 깊은 음색을 겸비하고 있 어서 남성 중저음의 깊은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일반 인들에게 조금은 낯설게 들릴 수도 있는 ‘베이스 바리톤’은 바리톤과 베이스의 중간에 있는데, 소리의 느낌은 베이스의 그것과 가깝습니다. 이렇게 세분된 소리를 통하여 극적인 역할과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 으며 개인의 음악성을 바탕으로 섬세한 감정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성의 가장 낮은 음역인 ‘베이스’는 주로 왕이나 노인과 같은 위엄있고 엄숙하며 매우 근엄함을 주로 노래합니다. 그런데 음 악의 시대, 스타일, 장르에 따라서 선율적인 가창이 흐르고, 익살스럽 기도 하며, 빈도 높은 매우 낮은 음역만을 특기로 하는 역할과 분류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여성은 크게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로 나누어지며, 가장 고음의 영역을 노래하는 ‘소프라노’에 있어서는 화려하고 기교적이며 매우 높 은 음역을 노래하는 ‘콜로라투라’가 있고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유명한 ‘밤의 여왕 아리아’가 대표적인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노래), ‘리릭 소프라노’는 주로 서정적이고 달콤한 노래를 부르는 역할에 적합 한 소리입니다. ‘라보엠’의 여주인공 ‘미미’와 같이 사랑에 빠지는 역할


이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귀부인과 같은 역할이 어울린다고 할 수 있 으며, ‘스핀토 소프라노’는 오페라 ‘나비부인’이나 ‘토스카’의 비운의 주 인공들같이 깊이 있고 조금은 무거운 호흡이 느껴지는 느낌이고, 가장 극적이며 극 전체를 압도하게 되는 성량이 필요한 소프라노의 소리인 ‘드라마틱 소프라노’는 오페라에는 ‘투란도트’, ‘아이다’와 같은 유명한 오페라들에서 접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 낮은 음역대의 ‘메조소프라노’ 는 소프라노와 알토의 중간 음역에 속해있는데,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 할을 맡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오페라 ‘카르멘’ 에서의 카르 멘은 메조소프라노가 주인공인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마지막으 로 ‘알토’는 남성의 베이스 소리에서처럼 느낄 수 있는 매우 낮고 깊으 며 일상의 여성 음성에서는 듣기가 흔치 않은 저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멋진 소리입니다. 지금까지 자세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성과 여 성의 목소리를 세분화하여서 인간이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을 모든 음역과 소리를 통하여 구분하고 전문화하여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합창 파트의 분류에서는 독창과 다른 명칭과 구성으로 이해가 됩니다. 혼성합창에서는 소프라노(A), 알토(A), 테너(T), 베이스(B)의 기본 4성 부로 나누어지고, 각각의 파트에서 1st, 2nd 와 같이 다시 세분화 되기 도 합니다. 남성합창의 경우에는 테너 I, II 와 베이스 I, II (TTBB)로 구 성이 됩니다. 여성합창은 소프라노와 알토를 각각 두 성부로 나뉘어 SSAA 로 구성합니다. 이밖에 소년소녀 합창단처럼 어린아이들을 포함

하여 남학생들의 변성기를 기준점으로 구분하여서 합창단을 구성하기 도 하고, 이를 통해서 매우 다양한 소리조합과 모습으로 구성할 수 있 습니다. 그리고 또한 합창 음악의 반주에서는 피아노, 오르간과 같은 단독 악기 또는 모든 종류의 악기들과 오케스트라 반주를 포함하여, 어 느 악기로도 ‘반주’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음악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한 번쯤 들어보셨을 음악용어 중에 ‘A cappella’(아카펠라)라는 것이 있는데, ‘반주 없이 목소리로만 노래하는 중창 또는 합창’을 뜻합니다. 독창을 반주 없이 부르는 것은 ‘아카펠라’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합창의 매력으로 글을 마무리하면, 혼성합창은 남녀의 다른 음역, 음 색, 소리의 조합을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균형과 화성을 이룸으로써 인 간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음악 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개 인적으로 혼성합창의 소리에 대해서 ‘선명한 명도와 채도의 차분하면 서도 때로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채색의 그림’이라 표현하고 싶습니 다. 그런데 남성합창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들의 소리 모음이라는 공통 점과는 별개로 매우 다른 느낌의 성격과 특징이 있는데, 마치 유채색에 서 제외되는 흑과 백, 회색만의 조금은 단순할 것 같은 남성들만의 목 소리의 조화임에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음 색과 다른 음역대의 화성을 통해서 다양하고 풍부한 색감을 놀랍게도 무궁무진하게 표현하며, 때로는 격렬하고 때로는 통일감으로 일치되 는 화려함과 섬세함, 서정적이고 깊은 감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 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 유재웅 (성악가. 카메라타 남성합창단 부지휘자 겸 솔로이스트)

작은 여유와 함께 따스한 미소를 머금게 해주는,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과 같은 유익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NEW JERSEY VOICE ACADEMY 뉴저지 성악 아카데미

대상: 찬양대원 (ALL VOICES), 일반인, 7~11학년 학생 (남,여)

찬양대 성가합창곡 파트연습 및 합창발성 지도 CCM, 가스펠 찬양지도 (직접반주) 7-11 학년 카운티, 리저널, 올스테이트 합창 오디션 준비 입시용 포트폴리오 CD 제작 (직접반주) 한국가곡, 세계명곡, 주옥같은 뮤지컬과 디즈니 명곡들 사랑으로 하는 특수 아동을 위한 노래 레슨 선생님과 함께하는 가족 홈콘서트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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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전문연주자 과정 카메라타 남성합창단 부지휘자 겸 Soloist 성가대 지휘자 / 연주 및 레슨 20년 경력 직접 모든 곡 피아노 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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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열심히 사는 자유를 말하다

NBC Universal 그래픽 아티스트 에디터 노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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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는 일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이 모두에게 쉬운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첫 만남을 준비할 때면 언제 나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한가득하다. 얼마나 진솔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 하기에 달려있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노경수 그래픽 아티스트/에디터와 만남은 그런 부담감과 두려움이 쓸데없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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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 펠팍의 한 커피숍에 들어서자 푸근한 인상의 남성 한 분이 입구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잠깐의 눈 맞춤으로 서로를 확인하자 바로 일어서 인사를 건네더니 “뭐 드시겠어 요?” 하며 주문대로 향한다. 무언가 상황이 뒤바뀐 듯해 갸웃거리며 그를 보는데 그의 파란 점퍼에 선명하 게 새겨진 NBCUniversal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NBC TV 방송사의 대표 탐사 보도 프로그램인 “Dateline NBC”팀에서 영상 편집, 그래픽 디자인, 특수효과, 등 다양한 영상 제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23년 차 노 경수 씨다. 방송사 또는 영화사의 영상 제작 아티스트는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많은 젊은이가 갈망하는 꿈의 직업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공중파 3사 (KBS, MBC, SBS) 입사가 ‘언론고시’라 하여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로 여겨진 지 오래고, 케이블, 위성, 종합편성 채널들이 생겨나면서 기회가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 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훈련된 인력을 선호하는 까닭에 웬만한 사전 경험 없이는 입사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전 세계 미디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3대 지상파 방송사 ? ABC, CBS, NBC - 중 하나인 NBC에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당시에는 그저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으로서),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영상의 질을 책임지는 Dateline의 수석 아티스트(lead artist)로 발탁되기까지의 과정이 어 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거대 미디어 기업의 수석 아티스트 가 되기까지의 힘겨웠던 여정뿐만이 아니라, 20살 어린 나이에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까 지 수많은 우연을 필연으로 엮어낸 그의 도전과 노력이었다. 노경수 씨는 그 흥미진진했던 삶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인터뷰를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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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 지상파 방송사에서 일하고 계신데요. 하시는 일 얘기 좀

후에도 여러 상에 노미네이트 됐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 받는 순

표작 소개도요.

나!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도 해요.

해주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제작하신 프로그램 중 대 현재 ‘Dateline NBC’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간들은 늘 감동적이고, 한편으로는 내가 열정을 잃지 않고 잘하고 있구

한국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 있잖아요. 미국판 ‘그것이 알

대단하십니다! NBC 방송국 입사 23년 차 베테랑으로서 지금도 방송

싶다’를 한국판 Dateline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Dateline 스태프가

을 만나게 되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니 저도 영광입니다. 방송 일을

고 싶다’라고 보시면 돼요. 아니다, Dateline이 먼저니까 ‘그것이 알고 300명 정도 되는데 저는 그 팀에서 편집, 컴퓨터 그래픽 (CG), 특수 효

과를 담당하고 있어요. 단순 편집뿐 아니라 CG를 적절하게 삽입하고, 특수 효과를 이용해 보기에 불편한 장면들을 순화시켜서, 프로그램이 정보는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보기에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해요. 프로그램 특성상 살인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 서, 제가 보는 영상 원본은 정말 처참하죠. 그런 걸 매일 보고 작업한 뒤 에 바로 밥 먹으러 가고 하는데도 이렇게 살이 찌니 신기하죠? (웃음)

지금 하는 Dateline NBC가 제가 가장 오래 한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또 제 대표작이기도 해요. Dateline이 올해로 25주년이 되었는데, 제가

23년 차니까 저로서는 NBC에서 일한 내내 Dateline과 함께 한 거죠. CBS에 ‘60 Minutes’가 있다면 NBC에는 Dateline이 있다고 할 만큼 NBC의 대표적인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에요.

한 가지 일을 23년 동안 해오신 점도 대단하신데 NBC 대표프로그램 중 하나인 Dateline 프로에서 23년 동안 팀원으로 일하셨다니 자랑스 럽네요. 이외에도 일하시는 동안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요?

1997년에 ‘NBC Nightly News’의 96년 대통령 선거 방송으로 에미상 (Emmy Award)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카데미상”으

국 간판 프로의 스텝으로 참여하고 계시고 이렇게 큰 상까지 받으신 분 오래 하셨는데, 평소 꿈꾸던 일이셨나요?

제가 처음 미국 온 게 1984년도였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온 가족이 이민 와서, 당장은 대학보다는 가족들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택 했어요. 그때가 뉴욕에 한인타운이 생기기도 전이니 정말 오래전이죠. 할 일을 찾던 중에 결혼식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에 들어가 카메라맨으로 일하게 됐어요. 요즘은 결혼식 촬영이 일반화되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당시엔 촬영비가 3,000불 정도였어요. 담배 한 갑이 1

불 하던 시대였으니 그 촬영비가 얼마나 비쌌는지는 알 만하죠? 흔한

일이 아니었죠. 게다가 처음으로 촬영 장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직 접 촬영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한국 쪽에서, 당

시 민자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이 러시아 순방 후에 뉴욕을 방문한다 고 뉴욕 방문 영상을 촬영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거예요. 그 일은 결

혼식 비디오 제작과는 촬영이나 편집 수준이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죠. 그 일을 하고 나서 이쪽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더라고요. 그래서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86년도에 ‘TKC’(The Korean Channel - 1985년에 설립, 1986년 방송 개시)라는 교포방송에 들어가 방송 일을 시작했어요. 동시에 뉴욕 맨해튼에 새로 생긴 City College 영화 영상학과(film and video)에 1기로 들어가 공부도 했지요.

로 불리는 오스카상(영화), 토니상 (공연), 그래미상(음악)과 함께 미국

그럼 TKC에서 일하시다가 NBC로 옮기신 건가요?

가 제가 한국에서 뮤직비디오와 CF(commercial film: TV 광고) 찍는

고는 NBC에 한 명, CBS 한 명이 전부였는데요. TKC에서 1년 동안 일

미디어 분야 4대 상 중 하나거든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그때 일을 하다가 미국에 돌아와서 NBC에 입사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예요. 이전에 했던 뮤직비디오나 광고 제작의 창조성이나 다이나믹함에 비

하면, 같은 포맷,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TV 프로그램 제작은 상대적으

로 너무 단순하게 느껴져서 일의 재미를 조금 잃어가고 있었을 때 그 큰 상을 받게 된 거죠. 정말 뿌듯했고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느낌이

었어요. 그 후 98년에 또 한 번 Dateline 스튜디오 그래픽 애니메이션 으로 에미상 스튜디오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고, 이후에도 여러 상에

노미네이트 됐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 받는 순간들은 늘 감동적이 고, 한편으로는 내가 열정을 잃지 않고 잘하고 있구나! 스스로 확인하

는 순간이 되기도 해요. 1997년에 ‘NBC Nightly News’의 96년 대통령 선거 방송으로 에미상 (Emmy Award)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

아요.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오스카상(영화), 토니상 (공연), 그래미

상(음악)과 함께 미국 미디어 분야 4대 상 중 하나거든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그때가 제가 한국에서 뮤직비디오와 CF(commercial

film: TV 광고) 찍는 일을 하다가 미국에 돌아와서 NBC에 입사한 지 1 년쯤 지났을 때예요. 이전에 했던 뮤직비디오나 광고 제작의 창조성이 나 다이나믹함에 비하면, 같은 포맷,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TV 프로그

램 제작은 상대적으로 너무 단순하게 느껴져서 일의 재미를 조금 잃어 가고 있었을 때 그 큰 상을 받게 된 거죠. 정말 뿌듯했고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98년에 또 한 번 Dateline 스튜디오 그 래픽 애니메이션으로 에미상 스튜디오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고, 이

(웃음) 그럴리가요. 제가 알기론 그 당시 미국 방송사에 한국 직원이라

하고 ‘대한 방송’(1959년에 설립되고 1961년에 폐국 된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인 대한 방송 - DBC: Daehan Broadcasting Corporation 과는 다르며 1987년 당시 뉴욕 시에 있었던 방송국)이라는 곳에서 다 시 1년, 그러니까 366일을 일했어요. 그 후 일본 NHK의 하청 업체였

던 ‘Telemotion’이라는 일본계 프로덕션에 들어갔어요. 그 회사는 자 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보다 방송 전문 인력을 제공하는 회사였기 때

문에, 그 회사 소속으로 일하는 동안 ABC, CNN, Fox, MTV, NHK HD,

등 다양한 방송사의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VH1’이라는 케이 블 방송사와 일할 때는 ‘RUN-D.M.C.’라는 미국 유명 힙합 그룹의 뮤직

비디오 제작도 했어요. Telemotion에 3년 정도 있으면서 최고의 방송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며 많이 배웠죠. 또 88년도에 NHK가 디지털 HD

(High-Definition: 고화질) 방송을 시작하면서 많은 기존 방송 장비를 Telemotion에 기증했기 때문에 우수한 고가의 장비들도 사용할 수 있

게 되었고요. 거기서 쌓은 실력을 갖추고 1990년에 한국으로 들어갔어 요. ‘비손텍’(Bisontec)이라는 프로덕션에서 저의 미국 방송 경력을 높

이 사 부사장급의 연봉을 주기로 했고, 거기서 미국 기술자와의 통역을

비롯한 광고 특수 효과, 편집, 뮤직비디오 제작 등의 일을 했어요. 그때

변진섭 뮤직비디오, 삼성전자, 자동차 광고를 찍기도 했죠. 그 회사에 서 4년을 일하고 94년에 결혼 후 미국으로 복귀했고, 한 미국 프로덕션 에 들어가서 6개월 일한 후 이듬해 3월에 드디어 NBC 들어가게 됐어 요. 그러고 지금까지 23년을 일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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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여 년 동안 일을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군요. 미국과 한국을 오

도엔가 한국에서 변진섭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요. 히트곡

한 직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그렇게 여러 곳으로 옮겨 일하실만한 특별

는데 2만 개가 돌아왔어요. 한마디로 망했죠. (웃음) 미국에 다시 와서

가며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일을 하셨는데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제 성격이 그래요. 뭔가 익숙 해지면 지루해지고, 그러면 또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지거든요. 초기에 결혼식 촬영 프로덕션부터 TKC, 대한방송, 일본계 Telemotion, 한국

비손텍까지 새로운 일을 배우고 할 수 있는 곳이면 망설이지 않고 갔어 요. 방송 쪽 일은 내용이나 기술 면에서 계속 변하기 때문에 뒤처지지

이 워낙 많아서 그중 11개 노래를 담은 비디오를 3만 개나 찍어 유통했

는, 이전에 방송 일을 7년 넘게 해왔던 제가 경력도 인정 못 받고 두 달

무급에 인턴으로 일하겠다고 해야 했으니 그 결정도 쉽지는 않았겠죠? 때마다 힘들긴 했어도 신기하게 후회를 했던 적은 없었어요. 하던 일이

워낙 재미있기도 했고, 기회는 언제든 또 온다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않고 따라가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아직 은퇴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시지만 향후 하고자 계획하고 계신 일

사실 직장을 옮기고 싶다고 마음대로 쉽게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NBC 말고도 KCB 가톨릭 방송에서 제작국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요. 그렇게 마음먹을 때마다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신 것도 참 대단하 신 것 같습니다.

기회를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이력서

를 참 많이 냈고요. 함께 일한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좋은 기회들이 적절한 시기에 생겨서 잡을 수 있기도 했고 요. 예를 들어, 88년도에 뉴욕에서 방송 기자재 박람회를 한다기에 가

서“Harry”(영국 Quantel사에서 1986년에 출시한 편집기)라는 첨단 편 집기를 처음 봤는데요. 이미 촬영된 영상을 고치고 바꾸는 기능이 너무

신기해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봐 두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한 한국 신문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 Harry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한

다는 비손텍의 채용 광고가 실려 있는 거예요. 그 한국 회사로 바로 편

지를 보냈어요. 그 회사는 89년에 Harry를 산 뒤, 뉴욕 출신 기술자를

고용하여 편집 일을 담당하게 하고 있었는데, 언어 문제로 소통이 쉽지

않아서 그 기술을 배우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데요. 그랬으니 제가 적 임자였던 거죠. 그렇게 한국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땐, 다시 어려움이 닥쳤어요. 당시 미국 프로덕션에서 동양인을 꺼리는 탓에 처

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KCB 가톨릭 방송은 KBTV (Korean Broadcasting Television), KRB

(Korean Radio Broadcasting), YouTube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데요. 고정적으로 일하는 프리랜서 2명이랑 자원봉사로 참여하시는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이 일을 하는 건 아

니고요. 살다 보니 인생에서 순간순간 어떤 절대자(?)의 도움이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포함해서요. 그

래서 뭔가 그 도움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봉사를 시작했죠.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좋아요. 주변에 어떤 사람들은 방송 아카데미 같은 걸 만들어서 후배를 양성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아 직 현역인 상황이라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요. 또 현실적으로 그런 기관

을 운영하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후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우선은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가톨릭 방송일이 그런 셈이고, 가끔 방송 분야에서 상을 주는 행사가 있으면 심사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한국에서 방송하는 사람들이나 방 송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도 기회가 되면 도움을 주려고 해요.

음에 입사할 땐 두 달을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한 뒤에 들어갔어요. 물

일종의 재능 기부를 하고 계신 거네요. 사실 NBC 일만으로도 바쁘실

었죠. 거기서 일하다 NBC에서 Harry를 다룰 줄 아는 젊은 그래픽 아티

니, 너무 일 얘기만 들은 것 같아요. 가족분들 얘기 좀 나눠볼까요? 아

론 막상 일을 시작하니 월급을 주긴 했지만, 처음에 들어갈 땐 모험이 스트를 채용한다길래 바로 지원을 하고 합격했어요. 굳이 제 장점이 있

다면, 그런 기회들이 왔을 때마다 겁내거나 주저하지 않고 무조건 덤비 고 본다는 것 같아요. 오래 생각했다면 이후에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어려움이 떠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냥 기회가 생기면 기뻤고 그 기회를 잡으면 주저 없이 떠났어요. 젊기도 했고, 어떤 것도 못 할 것 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30년 넘게 방송 제작 일만 하셨는데 어려움이 있었거나 지난 일을 돌 아보고 후회됐던 적은 없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죠. 이력서를 낸 양을 생각하면 떨어지기도 많이 했던 거 고, 실제로 크게 실패한 적도 있지요. 87년도 봄쯤인가 MBC에서 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해서 백두산, 한라산에서 올림픽 성공 기원 굿을 하는

데 실황 중계를 할 카메라맨을 구한다고 미국으로 연락이 온 거예요.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라, 한국 직원은 중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한인회의 도움으로 석 달 만에 시민권을 받고 지원을 해서 됐었는데, 촬영 날짜가 임박하도록 연락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임금이 싼 중국 사람을 고용했다더라고요. 한국에서 일할 땐,

한국 방송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라 미국 용어에 익숙한 저로서는 적응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요, 일본 용어에 익숙해지고 다시 미국에 돌 아오니 또 한동안 같은 문제를 겪어야 했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92년 54

것 같은데, 참 대단하세요. 그런데 이렇게 노경수 씨 이야기를 듣다 보 내 분과는 어떻게 만나셔서 결혼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왠지 엄청 난 미인이실 것 같은데요.

이뻐요. (웃음) 89년 말에 일본 NHK에 2주 정도 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거든요. 가는 길에 친구가 뛰어난 미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한국

에 들렀어요. 제가 지금은 살찌고 나이 들어서 이렇지 당시엔 저도 좀

괜찮았거든요. (웃음) 게다가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여배우들, 연예인들 을 많이 봐서 외모에 대한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웬 만해서 누가 눈에 들어올까 싶던 때였어요. 큰 기대 안 하고 춘천의 한 카페에 앉아 기다리는데 정말 어떤 영화배우처럼 생긴 여자분이 제 쪽

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첫눈에 반했죠. 그래서 원래는 일본 교육 끝나

고 미국 가기 전에 한국에 다시 들러 1주일만 있을 계획이었는데 2주 를 있었어요. 그렇게 잠깐 만나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현실적으로 관 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때는 국제전화도 쉽지 않았고, 겨우 편 지만 주고받을 수 있었나 보니 얼마지 않아 그냥 헤어지게 됐죠. 한 6 개월 정도 사귀었나 봐요. 그런데 결국 만나서 결혼할 운명이었는지,

제가 한국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결국, 93년

도에 제가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게 됐고, 94년 2월에 결혼했어요. (“사 진 좀 보여주세요.” 하고 보채니 전화기 속 사진 몇 장을 보여주는데,

정말 보기드문 미인이다). 그렇게 결혼하고 미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딸 셋 낳고 잘살고 있어요.


아니 달라져야 했죠. (웃음)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을 택했다고 봐야겠

죠. 개인적으로는, 이제 23년 차니까 NBC에서 30년을 채우고 싶은 바 람, 욕심이 있어요. 처음 들어왔을 때, 주변 동료들이 3년은 버틸 수 있

을까 했는데 23년 있었잖아요. 30년, 될 거예요. 제가 저처럼 목표를 이 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드리자면, 가능

하면 좋아하고 즐겨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과 또 이왕이면 남들이 많이 안 하는 일을 찾아서 해 보라는 거예요. 물론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려면 겁도 나고 힘도 더 들지 모르지만, 어때요, 해 보면 되지. 전 겁

내고 걱정하느라 시도를 못 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해봤어?”, “그냥 한

번 해 봐.” 해요. 그냥 무대뽀로 밀고 나가 보라고 하죠. 안 될 것 같아 노경수씨의 세 딸들 첫째가 22살, 둘째가 20살, 막내가 16살이다.

그 당시 미국에서 일하시면서 한국에 계신 분을 만나 결혼하시다니 운 명이 맞는 것 같군요. 세 따님 사진을 보니 엄마 아빠 닮아 모두 미인이 네요. 자녀분 중에 노경수 씨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방송 쪽

도, 해보면, 그러다 정말 안 되면, 적어도 안 되는 이유라도 알게 되잖아 요. 그럼 되게 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요. 저도 가만히 앉아서 기

회를 받아먹은 게 아니거든요. 정말 열심히 이력서 뿌리고 지원서 내 고, 지인들, 동료들한테도 많이 부탁하고… 그렇게 그냥 무조건 열심 히 부딪쳐 봤으면 좋겠어요.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나요?

여운이 남는 조언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녹음기를 끄고 자리를 정

아직 잘 모르겠고, 둘째는 공부를 곧잘 해서 지금 뉴욕대에서 정치학

다는 등등… 손사래를 치면서 버는 만큼 나가는 게 미국 생활이란다.

첫째가 22살, 둘째가 20살, 막내가 16살인데 막내는 고등학생이라 을 전공하고 있어요. 졸업 후에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아직 생각 중

인 거 같아요. 첫째 딸이 방송 일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에서 저널리 즘을 전공하기도 했고, 지금은 NBC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지 역 WNBC에서 뉴스 아이템을 찾는 일을 주로 하고 있죠. 저처럼 방

송 편집 쪽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고요. 보면 순발력도 있고 감

각도 있고 리포터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2015년 8월에 ‘KCON’이라 고 한국 유명 아이돌 가수들의 콘서트가 뉴욕에서 열린 적이 있어요. 그때 제작 센터 통역을 맡았는데, 중계차에서 방송 지시가 내려오지

않아서 방송 사고가 날 것 같으니까 자기가 큐시트(cue sheet: 방송 내용, 순서 등의 정보를 담은 대본)를 보고 직접 디렉팅을 한 거예요. 자칫 위험한 일이긴 했어도, 잘했어요. 올 4월에는 ‘이달의 인턴’으로 뽑히기도 했죠.

따님께서 ‘이달의 인턴상’을 받았을때 흐뭇하셨겠어요! 따님의 출중한

능력에 더해 아빠의 도움이 컸을 듯 합니다만… (웃음) 사실 NBC에 딱

리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이제 연봉이 꽤 되시겠 식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만큼 못 해 줘서 속상하다는 얘 기다. 딸들은 아빠한테는 10살까지만이라며 지금은 집에서 ‘따’가 됐

다고도 한다. 이젠 영락없는 귀여운 아빠다. 들었던 노경수씨 과거 얘 기들이 스쳐 지나가고 지금의 푸근한 모습에 잠시 시선이 머무는데, 마 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그저 ‘마음대로 하는 삶’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적어도 노경수 씨에게 ‘자유’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하고 싶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자 유를 얻기 위해 그는 부단히도 노력했고, 그 결과 수많은 우연이 그 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에게 기회로, 경험으로 남아주었다. 쉽지 않았을 30여 년 한 우물 인생, 힘들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힘들 지 않았냐 굳이 다그치기 전까지는 그저 재밌었다는 말뿐이다. 노경 수 씨는 진정 열심히 자유롭게 사는 인생의 즐거움을 아는 것 같다.

자리잡고 계시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NBC 같은 메이저 방송사에서 인

턴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을지 모르잖아요. 방송 쪽은 워낙 능

력 있는 지인들이 서로를 추천해서 인력 수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면도 없잖아 있겠죠. (웃음) 그냥 딸이 자기 일을 좋아하고 재밌어 하니까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모든 부모의 맘이 똑같 잖아요.

이야기에 빠져서 듣다 보니까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지났네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바램이나, 이 인터 뷰 기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무슨 큰 바람이나 꿈이 있는 건 아니에요. 84

년 20살에 이 분야에 들어와 일을 배우면서 NBC 같은 메이저 방송사 PD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요. 그리고 딱 10년만인 94년에 그 목표

를 정말 이루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사실 NBC에 입사 할 당시는 결혼한 후였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재밌는 일 을 따라 자유롭게 다녔던 싱글 시절과는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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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사계절 쉼터 & 여름이 더 좋은 곳

펜실베니아 포코노 임마누엘 수양관

아름다운 것은 윤영미

사랑의 행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나의 이기적인 사랑을 배척하는 일입니다. 용서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나를 소리없이 무너트리는 자아입니다. 햇빛보다 더 환한 것은 내 안에 깔려있는 어두운 생각을 몰아내는 일입니다. 비워내는 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비운만큼 드러내지 않는 겸손입니다. 내 속의 나를 없애는 일입니다. 내 속의 나를 없애는 일입니다. 내 속의 나를 없애는 일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청솔 윤영미

1981년도 미국 도미, '삶터문학' '시대문학'으로 문단 데뷔, 첫 시집으로는 '질경이 풀꽃속에' U.P.L.I 세계시인협회 회원, 재미시인협회 회원/이사

전) 윤영미의 생각하는 오솔길 진행 담당자 < KNN TV> 뉴욕 전) 윤영미의 토요 초대적 진행 담당자 <뉴욕>

전) 라디오코리아 1480 AM ' 시와 인생'프로 진행담당자 윤동주 문학사상 선양회 뉴욕 지부 지회장 역임 56


포코노 임마누엘 수양관. 청솔쉼터. 문학마을 찾아오는 길 110 Honjo Lane.,

Canadensis, PA. 18325

예약 문의 Tel: 631. 459.6220, 516.458.7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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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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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음악인이 들려주는 생활 속 음악이야기

조금 특별한 음악회 ‘Chamber on Main’ 세계의 유명 연주자들도 본인이 하고 싶었던 레퍼토리로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기획된 프로그램이나 관객을 위한 연주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가 보다. 세계 무대에 데뷔한 지 50년이 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 화도 자신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었던 연주는 손가락 부상 후 기적적인 회복을 하고 연주했던 바흐의 샤콘느였 다고 한다. 필자를 비롯한 주변의 음악인들도 좋은 대우를 받는 연주에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각자 추구하는 음악과는 다른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주변의 실력 있는 음악가들이 육아나 가사활동, 부상, 경제적인 이유로 음악 활동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분들이 그들에게 그들을 위 한 음악회를 기획하여 2013년에 시작된 음악회가 ‘Chamber on Main’이다. 글 정선분 정리

편집부

뉴저지 포트리에서 2001년부터 메인 바이올린을 운영해 온 마이클조, 배성욱 사장은 학생 때 만났던 뉴욕 뉴저지의 음악가들 이 부모가 되고 실력 있는 연주자가 개인 사정으로 음악과는 멀어지거나, 활발히 활동해도 연주자 본인을 위한 음악을 할 수

없는 모습들을 보면서 음악인들을 위한 음악회를 만들어 주고 싶어 ‘Chamber on Main’ 음악회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탄생배 경을 설명했다.

초창기 ‘Chamber on Main’은 한달에 한 번씩 뉴저지와 뉴욕의 교회에서 두 번 음악회가 열렸었다. 음악회가 자주 열리면 많

은 음악인에게 기회가 돌아가고 관객의 호응도 기대했었지만 예상과는 다른 결과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지금은 ‘Season 2’로 연주팀의 숫자와 연주 횟수를 줄이고 연주자들과 관객이 더 집중할 수 있는 연주 홀에서 일 년에 두 번 뉴저지 잉글우드 클립 프에 위치한 NV Hall에서 진행하고 있다.

‘Chamber on Main’이 창단되었을때부때 지금까지 공연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는 한 관객은 ‘Season 1’ 음악회는 부페 음식을 먹는 듯 다양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고, ‘Season 2‘에서는 연주자들의 진지한 모습에 이해하기 어려운 레파토리도 오 랜 조리과정을 거친 진한 사골국 한 그릇을 같이 나눠 먹는 거 같이 편안하게 음악에 빠져 들을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독일 유학 후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게 된 한 피아니스트는 출산과 육아로 음악과 멀어졌다가 ‘Chamber on Main’을 통해 연습

도 다시 시작하고 무대에 서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며 벅찬 소감을 밝혔다. 많은 사람에게 축하를 받고 다시 무대에 복귀한 이

연주자의 행복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는 배성욱 사장은 음악회의 주관자로 가장 보람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 고했다.

음악회 준비를 철저히 할 수 있게 음악회에 필요한 모든 매니지먼트를 메인 바이올린이 지원하고 전석 초대로 클래식 음악 애 호가에게도 음악 감상의 기회를 나누는 기업 후원 음악회인 이 음악회는 9월 17일 일요일, 오후 5시, NV Hall 에서 첼리스트 김

수지, 이지현, 강미성이 들려주는 Three Cello의 하모니와 바이올리니스트 정선분, 홍아르미 첼리스트 황지연, 피아니스트 박 유란이 선보이는 피아노 퀠텟을 감상하실 수 있다. 일요일 늦은 가을 오후 가족과 함께 연주 홀에서 감상하는 실내악은 여름에 즐겼던 야외 음악과는 다른 아늑함과 편안함을 선사할 것이다.

글 정선분_바이올리니스트

매네스(Mannes) 음대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NY Classical Youth Orchestra 디렉터 클로스터 Sun Violin Studio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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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디자인의 미니멀리즘과 플랫폼(Platform) 그리고 디자이너

변화하고 진화하지 않으면 디자인이 아니다 현대의 디자인은 눈으로 보이는 실체에서 사람들의 생활 속은 물론 생각과 경험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 가고 있다. 과거의 학교나 책 등에서 교육을 통해 얻은 실력만으로는 디지털 세상을 따라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상품을 단순히 제작하여 만들거나 특별한 미화 작업을 통한 디자인은 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관계와 경험을 유지하면서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편안 해 하는 보편화한 결과를 창출하는 이 두 가지를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디자인 플랫폼이다. 글 Hearyun Chu_ graphic Designer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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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그래픽디자이너 추해련이 플랫폼 방식의 CMS(Designing for Content Management Systems)로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뉴욕, 뉴저지 웹사이트

창의적인 불편함과 복잡한 슈퍼카 보다 편안하고 익숙한 기차역 “플랫폼(Platform)”

요즘 사람들이 여러가지 의미로 플랫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람들이 기차를 타기 위해서 몰려들었다가 제각기 목적지를 토대로

짜인 약속과 일정표대로 프레임 안에 움직이는 곳이 기차역 혹은 전철 승강장이 영어로 플랫폼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지만 비즈니 스나 혹은 인터넷, 디자인 분야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차역을 생각하며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서로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약속한 틀 안에서 많은 사람이 쉽고 편안하게 이용하며 그 결과 신속하고 다양한 결과를 만드는 기반이다. 특히 디자인에 있어 플랫폼은 단순화 작업을 위한 매개체이다. 불편함이나 복잡함을 제거하고 반복되는 것은 하나로 묶는 합리적인 틀을 만들어 그 안에서 서로 약속한 규칙대로 움직이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어 간다.

고객은 신속하지만 아름답고 멋지고 특별하고 편안하며 그러면서 저렴하기까지한 디자인을 원한다!

계속 경쟁이 격화되고 더더욱 세분화, 전문화되는 과정을 계속할 것이며 예술적 활동조차 경쟁력이 없다면 아웃소싱(Outsourcing)의

대상이 된다. 거대한 변화를 앞둔 세상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더 꾸밈이 목적이 될 수 없다. 고객은 신속하지만 아름답고 멋지고 특별

하고 편안하며 그러면서 저렴하기까지 한 디자인을 원한다. 더불어 심플하고, 사람들 혹은 고객과 직접적인 교류까지 가능하게 하는 특정한 기술과 지식 도구까지 함께 다루는 속된 말로 ‘디자이너의 신’을 찾고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통합된 서비스 안에서 움직 이는 플랫폼 안에서의 디자인이다. 수많은 경험과 소통의 결과로 빚어진 성공확률이 가장 높은 틀 안에서 디자인해야 한다. 그래픽 디자인계의 미니멀리즘 최고수 “iOS 7의 플랫(Flat)디자인”

2010년 초반에 단순한 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며 웹디자인 및 모바일 디자인에 플랫디자인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듬

해쯤 유행한 것은 현란한 빛의 반사효과, 풍만한 그라데이션이 준 입체적 질감,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그림자 효과가 주는 고

급스러운 버튼들은 단조로움의 플랫한 버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자아도취에 빠져 모든 기기를 바꾸거나 업그레이드한

후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어느 날 문뜩 드는 생각은 눈부셨던 효과들은 너무 과장되게 보였고 식상하게 되었으며 또한 복잡한 그래 픽 효과로 시스템과의 에러가 나고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디자인의 조건에는 합목적성, 경제성, 심미성, 독창성, 질서상 등의 있는 데 각 요소가 무절제하고 오남용된 디자인이 난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플랫디자인은 각 요소를 절묘하게 얻을 수 있는 플랫폼의 결과 물이었다 특별함은 단순한 것이 아름답고 편리한 순수함이 목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모바일 웹이나 각종 디자인

은 iOS 7과 같이 볼륨효과와 그라데이션 등을 뺀 굉장히 단순화된 버튼이나 레이아웃과 오브젝트를 사용한다. 그 결과 당연히 기기들 은 사람들이 원하는 속도전쟁에 더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모든이가 디자이너가 되는 시대의 디자이너로 살아남는 법

사람들은 누구나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고 꾸미는 보편적 디자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한 오픈 소 스 운동이 더해지면 개인의 디자인 능력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디자이너 개인의 재능보다는 공동체가 발휘하는 지혜가 새로운 활로를 마련해줄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은 잘 짜인 플랫폼 안에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까지 관여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못만 바라보는 망치로 못 치는 사람이 아닌 집을 잘 짓는 입담까지 좋은 목수가 되어야 할 때이다.

글 Hearyun Chu

20년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로 현재 대학원을 다니면서 현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인 전문가이다. 61



NEW YO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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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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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카트’ 영화의 줄거리는?

대한민국의 대표 마트 ‘더 마트’에서 비정규적으로 근무하던 직원들은 어느 날 회사로부터 갑작스럽게 일방적 인 해고 통지를 받게 됩니다. 몇 년 동안 뼈가 부스러지듯이 일해서 곧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었던 선희 (염 정아), 싱글맘인 혜미 (문정희), 청소원 순례(김영애), 착한 아줌마 옥순 (황정민), 그리고 88만 원 세대인 청년 미진 (천우희)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순박하게 일만 하고 살던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 고 회사와 공권력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시작합니다.

출연: 염정아, 문정희, 김영애, 김강우, 황정민, 천우희 감독: 부지영 영화의 주인공은 마트 비정규직 계산원과 청소원들입니다. 그래서 출연자들이 주로 여성들이지요. 영화에 등 장하는 여성은 가장 열등한 사회계급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비정규적인 데다가 남성 중

심적인 사회에서 차별받은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해고가 통보되자 직장 과 노동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조를 만들었지만, 아무도 자기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결과도 알 수 없고, 불안하며 외로운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는 우선 6백 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적 불평등만을 이야

기하지 않습니다. 노조 투쟁을 하면서 단순히 동료에 불과했던 직원들이 마음을 열고 가족처럼 옆에 있는 사람

들에게 다가갑니다. 서로 몰랐던 처지와 상처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를 보듬고, 공감하기 시작합니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동체는 이미 먼 추억이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고, 경쟁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남은 이웃이 아니라 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며칠 전,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린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농촌의 삶이었습니다. 초롱불을 켜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초가지붕이 개량되고, 동네 개천이 현대식으로 바뀌며, 신작로에 아스팔트 도로가 놓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일손을 멈추고 모두 함께 나와서 마을개량 사업에 참여했습니다. 음식과 막걸리를 나눠 먹 고, 서울로 떠난 자식 이야기, 병원에 입원한 이웃집 김씨를 걱정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문

득 그런 어린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파업하면서 음식을 나누고, 줄넘기를 하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놀 아주고 돌봐줍니다. 그리고 서로 함께 손잡아주고 같이 있어줍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던 노조원들이 얻 은 수확이라면 잊혀진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경제가 더 발전하고, 더욱 살기 좋아졌지 만, 이웃과의 공감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인 안정과 인간적인 대우가 우선되어야겠지요.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옆에 누가 있느냐,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결국, 행복은 사람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화는 끝나지 않은 투쟁으로 종결됩니다. 함께 물대포를 맞으면 카트를 밀고 마트로 돌진하는 나약한 여성 노

조원들은 우리의 엄마들이고, 아내들이며, 동생들입니다. 노조원들이 함께 투쟁하고 운명을 같이했듯이, 우리

의 삶도 결국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잘 사는 나라, 사회, 회사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행 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영화는 시사하고 있습니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현) 뉴욕차일드센터 임상 및 통합지원 국장 /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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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뉴욕에서 보내는 어느 여름 날 하루

이곳에 가면 뉴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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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고 무조건 도시를 벗어나란 법은 없다. 뉴욕 맨해튼 내에서도 얼마든지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이 곳곳에 숨어있다. 무더운 여름, 이곳에 가면 피서와 함께 진정한 뉴욕을 만날 수 있다. 편집부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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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BATH’S 사라베스 브런치 식당:

음식맛 이상의 그 무엇을 주는 곳, 센츄럴 파트인근에 있다

‘섹스 앤드 더 시티’ 드라마 덕분에 더 유명해진 브런치 식당이

다. 사라베스는 이제 뉴욕 관광 목록에서 빠지면 안 되는 정도! 센츄럴 파크 인근에 있어서 식사 후에 공원을 산책하기에 더없 이 훌륭한 곳이다. 메뉴 중 가장 인기가 있다는 에그 베네딕트

는 맛보다는 뉴욕 추억 쌓기로 한번은 먹어봐야 나중에 뉴욕을 얘기할 정도가 되었다.

주소: 40 Central Park S, New York, NY 10021, 339 Greenwich St, New York, NY 10013

New York Public Library 뉴욕 공공 도서관:

장서 규모 부분 세계 3번째 도서관 타임스퀘어 42번가에 있다.

책을 좋아한다면 여름 더위를 피하기에 도서관만큼 최고의 장

소는 없다. 앤드루 카네기가 1901년에 이동도서관 설치기금으

로 520만 달러 기부의 시작으로 미국 최대의 도서관이 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초고, 조지 워 싱턴의 고별사 친필 본, 갈릴레오의 노트, 베토벤의 자필 악보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도서관 총 장 서 수만 해도 5천 3백만 점에 이른다. 서가의 역할을 넘어 시민 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로 유명한데 시민정보센터를 이용해 오 바마가 첫 직장을 찾았다고 한다.

주소: 476 5th Ave, New York, NY 10018

Grand Central Terminal:

세계 최고의 철도역 눈도장 찍기

매시간 수많은 출근 인파로 붐비는 맨해튼의 중심, 맨해튼 기차

역은 단순한 기차역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이곳은 재래시장부터 세계에서 제일 큰 애플 스토어까지 수많은 레스 토랑, 쇼핑몰, 카페들이 몰려있는 역사적인 뉴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뉴욕의 분위기에 휩쓸려 한 바퀴 돌고 난 후 더위와

허기를 느낀다면 시원한 지하 일 층의 다양한 음식점과 치즈 케

잌 전문점을 들러봐도 좋다. 특히 Grand Central Oyster Bar에 서 신선한 시푸드와 마티니로 마무리한다면 금상첨화.

주소: 87 E 42nd St Manhattan, NY 10017 Grand Central Termi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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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ne:

도심의 빌딩숲을 제대로 느껴보기

오래된 기찻길을 재개발하여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뉴 욕 빌딩 숲 사이에서 사계절 내내 많은 볼거리와 매우 아름다운

식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른 아침에나 한밤중에는 뉴욕 시의 고요함과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더운 여름에 당당히 맞 서 또 다른 뉴욕을 즐겨볼 수 있는 곳이다.

주소: 519 West 23rd Street New York, 10011 (212) 206-9922 The Highline

Brooklyn Bridge Park:

더 이상의 멋진 뷰는 없다 아름다운 공원에서 바라보는 맨해튼

뉴욕에서 연인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거나 가족끼리 화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아이들에겐 1920년대 만들어진 제인의 회전목마를 즐기며 추억쌓기를 할 수 있다. 잔

디밭에서 녹지에서 벤치에 앉아 강 건너 맨해튼을 바라보면 최 고의 멋진 뉴욕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뉴욕의 한 여름밤을 폼 나게 보낼 수 있게 된다. 야외 와인바와 다양한 음식을 서빙하

는 레스토랑도 가까이에 있다. 여유가 나면 다리 위를 걸어보는 것도 피서와 함께 좋은 추억이 된다.

주소: 334 Furman St, Brooklyn, NY 11201

Roosevelt Island:

루즈벨트섬 케이블카를 타고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다

‘어? 뉴욕에 이런 곳이 있었나?’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환

상적인 장면을 선사하는 곳! 루스벨트 섬의 케이블카에서 바 라보는 뉴욕 최고 경관을 놓쳐선 안 된다. 지하철 요금으로 맨

해튼을 위에서 바라볼 좋은 기회! 케이블카에서 뉴요커의 아 파트를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고, 이스트 리버 위를 날아 볼 수 있다. 시간적 여유가 난다면 루스벨트 섬의 Franklin D.

Roosevelt Four Freedoms Park에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가까이서 감상하며 시원한 강변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주소: 2nd Ave ; E 60th St NYC T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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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홍성주 요리

여름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시원한 냉우동 샐러드가 최고다. 도톰하고 쫄깃한 우동면은 차게 하면 씹는 맛을 한층 더 살려주어 더운 여름철 빼앗긴 입맛을 되살려준다. 샐러드는 쏘스 레시피만 조금 바꿔도 다양 하게 즐길 수 있다. 곁들인 요리 ‘딸기 파나코타(Panna Cotta)’는 냉우동 샐러드와 잘 어울리는 디저트이다. 글, 요리 홍성주

냉우동 샐러드 재료: ‌ 우동 2팩(시판우동), 색 피망, 작은 사과 ½개, 오이 ¼개, 토마토 ½개, 새우 6개, 야채(스프링믹스 ) 두 주 먹(집에 있는 재료를 기호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소스: ‌ 간장2T , 굴소스1T, 레몬즙1T, 식초2T, 올리고당(설탕)2T, 와사비1T, 마늘1T, 올리브 오일 2T, 매실1/2T 만들기:

1

작은 볼에 소스 재료를 모두 넣고 잘 섞은 후 냉장고에 차게 넣어둔다.

2

함께 넣을 채소와 재료들

을 손질해 준비해 둔다. 피망은 굵게 채를 썰고 오이, 토마토, 사과는 얇게 썰어준다. 새우는 삶아 반으로 자른 다.

3

우동을 삶아 찬물에 헹구고 큰 볼에 우동과 준비해둔 모든 재료를 넣고, 냉장고에 차게 해둔 소스를 넣어

살살 섞어 준다. 여름 음식은 뭐니뭐니해도 시원한 냉우동 샐러드가 최고다. 냉우동 샐러드는 쏘스 레시피만

조금 바꿔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더운 여름에 쫄깃거리는 냉우동샐러드는 도톰하고 쫄깃한 우동면의 맛을 한층 더 살려준다. 70


딸기 파나코타 파나코타(Panna Cotta)는 우유, 생크림, 설탕에 젤라틴을 넣어 만든 달콤하고 시원한 이탈리아식 디저트 로, 이탈리아어로“ 요리한 크림”이라는 뜻이다.

재료: - ‌ 우유 1컵, 생크림 1컵(heavy whipping cream), 설탕 1/3컵, 바닐라 익스트렉 1t, 소금 아주 조금, 젤라 틴 1봉지( 5g), 뜨거운 물 2T

‌ - 딸기1컵, 설탕 4T, 물3/4컵, 레몬즙 1/4t, 젤라틴 1봉지(5g), 뜨거운 물 2T

만들기:

1

우유, 크림, 설탕을 모두 냄비에 넣고 중간 불에서 젓다가 주변에 기포가 생기기 시작하면 바닐라 익

스트렉을 넣고 저은 후 불에서 내려준다. (바글바글 끓이지 않는다.) 풀어준 후 1의 재료에 넣고 잘 저어준다.

3

2

젤라틴 1봉지에 뜨거운 물 2T를 넣고 잘

5분정도 식혀준 후 유리컵이나 서빙할 용기에 나누어 부어준다. 랩

을 씌워 냉장고 에서 2시간 이상 굳혀준다. (사진속 사용한 컵은 ½컵 정도의 크기로 한 컵에 1/4컵과 1T씩 넣 어주었다.) 용기가 크면 시간을 더 두어야 한다.

4

썬 딸기와 설탕, 물, 레몬즙을 넣고 끓여준 후 믹서로 곱게 갈

아준다. 뜨거운 물에 젤라틴을 넣고 풀어준 후 끓인 딸기에 넣고 잘 섞어준다. (10분이상 식혀준다.)

5

냉장고

에 넣어 미리 굳혀둔 것을 꺼내어 그 위에 잘 식힌 딸기퓨레를 살살 부어준다. 잘 식히지 않고 부어 주면 서로 재료가 섞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다시 랩을 씌워 냉장고에서 2시간 정도 굳혀준다. 를 과일이나 허브 잎으로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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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굳은 파나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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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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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준비물 : ‌ 얇은 플라스틱병 (500ml)2개, 퍼머넌트 마커펜,‌

가위, 공예용 비즈 (큰 것), 탄력있는 비즈 줄, 면사 또는 마끈

플라스틱병 비즈 팔찌 여름 방학 동안에 아이들과 함께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느낌의 팔찌를 만들어 보 면 어떨까요? 쉽게 구할 수 있는 플라스틱병과 퍼머넌트 마커펜을 이용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비즈 팔찌를 만들 수 있어요. 아이들은 자기만의 액세서리를 만든다는 것에 더욱 신선한 호기심을 갖게 되고 요리처럼 오븐에 구워지는 진행 과 정을 통해 관찰력도 생긴답니다. 게다가 착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톡특한 결과물에 더욱 뿌듯해 하지요. 재활용품 활용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경험하고 아이들의 꾸미고 싶은 욕구가 긍정적으로 충족이 되는 의미있는 미술활동이랍니다. 엄마 한 줄, 아이 한 줄 커플 팔찌로 착용하면 공감대가 형성되어 사랑이 돈독해질거예요.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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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1_ 플라스틱 병 자르기

플라스틱 병의 몸통 부분을 잘라내요.

* ‌ 플라스틱병은 얇은 것으로 사용해야 잘 말

몸통 부분을 1.5~2cm 폭으로 잘라요.

길이를 반으로 잘라서 16~18조각을 만들어요.

장식한 플라스틱을 돌돌 말아요.

실로 묶어 고정해요.

아져요.

Step 2_ 무늬 입히기

플라스틱의 안쪽에 퍼머넌트 마커펜으로 예 쁘게 색칠해요.

*‌ 수성 마커펜은 플라스틱에 지워지기 때문에 유성 마커펜으로 사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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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스틱 병의 두께가 얇아야 돌돌 말때 힘 이 덜 들어요.

* 최대한 작게 말아주세요.

* ‌ 오븐에 구워야 하므로 나일론(노끈)이 아닌, 열에 강한 면사 또는 마끈을 이용해요.


Step 3_ 팔찌로 꿰기

쿠킹호일을 깐 오븐팬에 올리고 300°F (150° C) 온도의 오븐에서 2~3분간 구워요..

* ‌ 오븐을 예열해서 구워야 결과물이 좋아요.

플라스틱이 약간 따끈하면서 부드러워지면 꺼내어 식힌 후 끝부분을 정리해요.

탄력있는 비즈줄에 공예용 비즈와 함께 예쁘 에 꿰어요.

* ‌ 공예용 비즈는 구워낸 비즈보다 크기가 같 거나 약간 더 큰 사이즈가 좋아요.

글 아동미술칼럼니스트 김민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수의 디

자인 공모전 수상 경력과 쥬얼리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현재 미동북부 뉴저지주에 거주

하고 있으며 www.Goodmandoo.com 네이 버 파워블로거이자 www.Missyusa.com “미

술이랑 엄마랑”의 아동 미술칼럼니스트, 한소

망 한국학교 교감. Fort Lee에서 “미술이랑 가 베랑”을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창의 폭발 엄 마표 판타스틱 미술놀이>가 한국과 중국에 출 판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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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섹시한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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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mmy Mummy: 먹음직한 엄마, Cougar: 연하를 유혹하는 매력적인 중년 여성, Momshell (Mom+Bombshell) : 아주 섹시한 미녀 엄마 섹시한 엄마 혹은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중년 여성들을 나타내는 신조어들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시각에선 엄마라는 존재들에게 모 성이라는 개념을 배제하고 대상화 된 육체만을 투영하는 그리고 중년 여성에게조차 성적인 매력을 강요하는 불쾌하고 천박한 표현 일 것이다. 하지만 비난을 남성들의 시각이나 이를 강요하는 사회의 분위기로만 돌릴 수는 없는 것이 중년 여성들 스스로가 이런 이 미지를 적극적으로 욕망하고 소비하는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영향력 있는 여성 50위 안에 들었던 한국계 언론인 재니스 민〈US위

있어 보이는 학부모들은 2인용, 3인용 자전거에 아이들을 태우고 윌리

념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었듯이 1960~7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는 엄

에서 가끔 마주치는 멋있는 엄마다. 집이 브루클린인 듯 이렇게 세 명

클리(US Weekly)〉편집장은 한 칼럼에서 “열대나라에서 눈이라는 개 마에게 섹슈얼한 이미지를 더하는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며

“이제는 섹시맘들이 넘쳐나 애 낳고도 맘대로 퍼지지 못하는 고단한 세상이 되었다”고 말했다. 제니스 민 편집장의 말은 단순히 트렌드에 대한 분석이 아니고 실제로 자신이 겪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왔다. 그

녀가 네일살롱에 갔을 때 종업원에게 “임신 몇 개월이냐?”는 말을 듣 었던 것. 이 말이 심히 부끄러웠던 이유는 그녀는 4달 전에 출산을 했

기 때문이었다. 애 낳고도 여전히 푹 퍼진 뱃살을 보고 한마디 들었던 것. 그녀는 이미 42세였다.

엄스 브릿지를 힘차게 건너오는 사람들이다. 사진 속의 이 엄마도 학교 을 태우고 다리를 건너는 것을 봤다. 힘들진 않을까, 좀 위험하진 않나 하고 처음 봤을 땐 걱정이었는데, 본인은 아주 자연스럽다. 세 명 모두

자기 자녀인지 그것도 정확히는 모른다. 만약 친구나 동네 주민 아이를

같이 픽업하는 거라면 맡기는 사람도 대단한 배짱이다. 섹시한 엄마다. 지난 1월 뉴욕과 워싱턴 D.C, LA 등 미국 전역의 길거리를 메웠던 '여

성들의 행진'에 어린 자녀들의 손을 잡고 나온 엄마들. 밝은 얼굴과, 당 당한 목소리, 자신감 있는 태도로 아이들과 함께 여성과 인간의 권리를 외쳤던 그 엄마들도 진정으로 섹시한 엄마들이다.

하지만 재니스 민은 푸념조차 맘대로 할 수도 없던 처지다. 그녀가 편

집장이 된 후 독자를 200%나 올린〈US 위클리〉 야말로 한 주가 멀다 고 ‘섹시 맘’을 표지에 올린 대표적인 가십 매거진이기 때문이다. 엄마

가 된 비욘세를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로 선정한 것도 바로 그 잡 지다. 애 낳고 곧장 다시 캣워크를 걷는 하이디 클룸이나 리마를 여왕 처럼 떠받들고, 푹 퍼져버린 제시카 심슨은 비포/애프터 사진으로 조

롱하는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푸념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TV, 잡지

The Lash Place Eyelash & Waxing & Wedding 전문

에 나오는 연예인들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건 싱글 여성들만이 아닌 세 상이 된 것 같다. 그냥 나이 먹으면 좀 퍼지면서 편하게 살아야 자연스 러운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마련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엄마들 패션이 장난 아니라는 뉴욕타임

스 기사 역시 일반 엄마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센트럴파크 근처

에 사는 백인 부유층 엄마들에 대한 기사였지만, 퀸스 이민자 동네의 학교에서도 통하는 말일 듯하다. 몇 년 전 딸애가 집 근처 프리킨더에

다닐 때 한국 엄마 4~5명이 매일 교문에서 만났다. 그중 직장인은 필 자의 와이프 뿐이었고, 나머지는 전업주부들이었다 출근 복장(정장)이 고, 다른 엄마들은 편안한 추리닝(몸빼까지는 아니고) 분위기. 그런데

당시 겨우 5살이던 애들이 “왜 세린이 엄마는 화장하고 예쁜데, 우린 엄마는 추레하냐”라고 투덜거리기 시작해 가정주부 엄마들이 학교 갈 때 조금씩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요즘은 학교가 많이 멀어져 거의 매일 나도 함께 운전해서 애를 데려 다준다. 나보다 훨씬 어린 연령의 엄마들이 힙한 패션으로 아이들 손을

잡고 길을 걸어 온다. 직업이 신경외과 의사라는 딸애 친구의 늘씬한 금발 엄마가 포르쉐에서 내리는 광경도 본다. 하지만 내 눈에 제일 멋

1637 Palisade Ave #2fl, Fort Lee, NJ 07024

TEL 201.46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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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호수를 베고 잠들다 그렇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푸른 호숫가에서 빛깔 고웁게 웃었다 춘천의 호숫가, 평화로운 이곳에서 물오리의 까르르 웃는 소리 듣는다 시, 그림 선우미애

어느 하루, 하염없이 떠다니는 구름 한 점의 풍광이 호수에 풍덩 빠져 있다 내 눈을 스치는 물오리의 자맥질에서 삶의 숨결 헤집고 솔솔 피어오르는 내 어머니의 그리움을 보았다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문학석사 수료 강원한국수필문학회 이사 국제펜클럽강원지부 사무국장 수상 1996년 한맥문학 (월간) 신인상 2008년 새한국문학상 (9회) 2010년 동포문학상 (26회) 2011년 국제펜문학 강원펜문학번역작품상 (8회)

정갈한 호수에 발을 담그고 긴 침묵으로 새어나오는 웃음 사이로 젊은 날의 어머니 모습이 보인다

2012년 춘천여성문학상 (7회) 2012년 노천명문학상 대상 (8회) * 중앙일보시조백일장 차상 (새벽을 기다리며) * 금호문화시조백일장 차상 (4월)

보랏빛 바람으로 흐르는 호숫가의 물결은 엄마의 젖줄이다 가냘프게 웃으시던 엄마가 더욱 그립다

* 신사임당주부백일장 장원 (대관령) <시집> <자연을 닮은 그대는> <섬 같은 사람> <까닭 없이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산다는 것은> <봉선화 소녀> <길을 읽다> 시집 외

그렇게 호수를 베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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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문학상수상자전집> 시와 에세이출판 2016년 세월호가 남긴 절망과 희망(그날 그리고 그 이후)공저, 한울아카데미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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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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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아의 약식동원(藥食同源)

고혈압을 이기는 식이처방

글 Kyungah Lim Ph.D. 의학영양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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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압은 전 세계적으로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는 위험 인자 중 50%를 차지하며, 국내에서도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질환 중의 하나이다. 2015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고혈압과 연관이 있는 심장질환과 뇌혈관질환은 암에 이어 사망원인 2위와 3 위를 차지하고 있다. 고혈압 대부분을 차지하는 본태성 고혈압의 원인은 확실하지 않으며 유전, 식사 습관, 비만, 스트레 스 및 생활 환경 등 복합적인 요인이 고혈압 발생에 영향을 준다. 고혈압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음식과 혈압과 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약물요법 중에서 식사요법과 운동이 기본적인 치료방법으로, 고혈압 환자 에게는 체중 감량과 함께 식습관을 포함한 생활습관의 교정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만, 염분(나트륨) 섭 취 과다, 칼륨이나 칼슘의 섭취 부족, 과다한 알코올 섭취 등 고혈압 발생에 관여하는 영양학적 요인들에 대하여 똑똑히 알아야 고혈압을 이길 수 있다.

혈압이란?

심장은 펌프처럼 혈액을 몸 구석구석까지 보내주고 있으며, 이때 혈액 이 혈관 벽에 가하는 힘이 혈압이다. 즉, 혈압은 혈관 내 압력을 수치로

인으로는 신장질환(만성콩팥병, 신혈관성 고혈압 등), 부신질환 등이 있다.

나타낸 것이다.

고혈압 환자와 생활요법

수축기혈압이란?

치료 또는 생활요법은 혈압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뚜렷하기 때문에 모

고혈압 관리에서 건강한 식사습관, 운동, 금연, 절주 등과 같은 비약물

심장이 수축하여 혈액을 심장 밖 혈관으로 밀어낼 때의 압력을 수축기 (최고)혈압이라 한다.

든 고혈압 환자에게 중요하다.

고혈압 환자의 생활요법에 따른 혈압 감소 효과

이완기혈압이란?

심장이 확장할 때 혈관에서 유지되는 압력을 이완기(최저)혈압이라고 한다.

생활요법 소금섭취 제한

고혈압의 진단기준

고혈압은 수축기혈압이 140 mmHg 이상이거나 이완기혈압이 90

체중감량

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아 적극적인 예방이 필요하다.

식사조절

mmHg 이상일 때로 정의하며, 특히 2기 고혈압전단계는 향후 고혈압 수축기혈압 (mmHg)

혈압분류

정상혈압*

이완기혈압 (mmHg)

< 120 그리고 1기 120 ~ 129 또는 고혈압 전단계 2기 130 ~ 139 또는 1기 140 ~ 159 또는 고혈압 2기 ≥ 160 또는 수축기 단독고혈압 ≥ 140 그리고 * 심혈관질환의 발병위험이 가장 낮은 최적 혈압

< 80 80 ~ 84 85 ~ 89 90 ~ 99 ≥ 100 < 90

자료 : 임상진료지침 정보센터, 고혈압 관리 지침서 2015

고혈압의 종류와 원인

'일차성 고혈압'은 뚜렷한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를 말하며, 고혈압 환자의 95%가 여기에 속한다. 고혈압의 위험인자로는 복부 비 만, 고염분 섭취, 운동 부족, 흡연, 알코올의 과다 섭취가 있으며, 이는 생활습관 교정을 통해 조절이 가능하다. 또한 조절 불가능한 위험인자 로는 다음과 같다. 나이 가족력

일차성 고혈압의 위험인자

나이가 많을수록 혈압은 상승하며, 60세 이상이 되면 남녀 모 두 고혈압의 유병률이 50% 이상 됩니다.

고혈압의 가족력이 있으면 고혈압의 유병률이 높아지며, 35~50%의 유전율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심장혈관질환 · 이 상지질혈증 · 당뇨병의 가족력도 고혈압의 위험인자입니다.

'이차성 고혈압'은 어떤 특별한 원인이 되는 병으로 인해 생기며, 그 원 82

운동 절주

혈압감소 효과 수축기/확장기혈압 (mmHg) -5.1/-2.7

권고 사항 하루 소금 6g 이하

-1.1/-0.9 (매 1kg 감소 시)

체질량지수(BMI)* 25kg/㎡ 미만 및 허리둘레 남성 90cm 미만, 여성 85cm 미만 유지

-4.9/-3.7

하루 30~50분, 일주일 5일 이상

-11.4/-5.5 -3.9/-2.4

채식 위주의 건강한 식습관

하루 소주 2잔 이하 (남자 20~30g, 여자 10~20g의 알코올)

* 체질량지수(BMI)란 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누어 구하는 비만도 수치입니다.

체중 감량하기

고혈압은 체중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체중을 줄이면 혈압이 낮아진

다. 특히 복부비만은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당뇨병 및 관상동맥 질환 에 의한 사망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혈압 환자가 표준체중을

10% 이상 초과하는 경우 5 kg 정도의 체중을 감량하여도 뚜렷한 혈압 감소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채소와 과일을 많이 섭취하기 채식주의 자들은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보다 혈압이 낮으며, 채식 위주로 식사 를 유지하면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낮아진다.

권장되는 식사 지침은 무엇인가요?

1

식사를 거르지 않고 천천히 먹습니다.

3

빵, 과자, 청량음료 등 불필요한 간식을 하지 않아야 하며, 섬유소가 많은 음식을 많이 섭취합니다.

2

4 5

당분이 많은 음식과 술은 피합니다.

과일과 채소 및 생선을 많이 섭취하고, 콜레스테롤과 포화지방산을 적게 섭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통상적인 양(하루 1~2잔)의 커피는 혈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고혈압을 이기는 식이처방 1. 싱겁게 먹기

고혈압을 이기는 건강식단 (1,900 kcal 예시)

소금을 과다 섭취하는 사람이 소금 섭취를 절반으로 줄이면 수축기혈

압이 평균 4-6 mmHg 감소하고 심혈관질환이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 가 있으므로 소금 섭취를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1 2 3 4 5 6

소금을 적게 섭취하려면?

국물은 짜지 않게 만들고, 국물 자체를 적게 먹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추가로 소금이나 간장을 넣지 않습니다. 가공식품과 라면, 햄, 소시지 등은 가급적 피합니다. 김치, 젓갈, 장아찌와 같은 짠 음시은 덜 짜게 하여 먹거나 적게 먹습니다. 패스트푸드 등 외식을 줄입니다. 자연 재료로 직접 조리된 음식을 먹는 것이 소금 섭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콜레스테롤 섭취는 줄이자

고혈압으로 인해서 동맥경화증의 위험률이 높아지며 죽상경화증, 고

지혈증 등의 합병증을 조심해야 한다. 합병증의 유발을 촉진시키는 콜

레스테롤과 포화지방산을 줄이는 것이 좋다. 콜레스테롤은 간, 곱창 등

아침

콩밥 (1공기), 콩나물국, 연두부찜 (1/2개), 가지나물, 꽈리고추볶음, 오이생채 간식

내장류와 오징어류, 달걀노른자, 런천미트 등에 많고, 포화지방산은 동

바나나 (중1/2개,50g), 저지방우유 (1컵)

물성 기름(소, 돼지기름 등)과 팜유(라면기름, 분말 커피크림 등), 코코

넛유 등에 많이 들어 있다. 가급적이면 팜유, 코코넛유를 제외한 식물 성 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3. 섬유소가 풍부한 식품을 충분히 섭취하자

식물성 섬유소 섭취 증가가 수축기 혈압을 감소시키며 섬유소 섭취가

적은 사람이 많이 섭취 하는 사람에 비해 고혈압 발생 위험도가 높은

점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유소 섭취가 혈액 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도 있고 체중조절에도 도움이 되므로 가급적 섬유소가 많은 식품

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섬유소는 신선한 채소, 과일, 잡곡, 콩류, 해조

보리밥 (1공기), 북어국 (1대접), 닭가슴살볶음 (1토막), 양송이볶음, 무초절이, 그린샐러드

류에 많이 함유하고 있다.

4. DASH(Dietary Approach to Stop Hypertension) Diet - 고혈압 식사요법

DASH 다이어트란 칼륨, 칼슘, 마그네슘 섭취 증량 및 콜레스테롤 및

포화지방산, 염분 섭취를 줄이고 정상적인 체중 유지를 위한 열량 조절

간식

을 권장하는 식이요법으로 혈압 강하 효과가 있다.

- 포화지방산 및 콜레스테롤, 지방 등의 총량을 줄인다.

방울토마토 (20개)

- 과일, 채소, 저지방 유제품 섭취를 늘린다. - 소금은 1일 6g 이하로 줄인다.

- 간식 및 설탕 함유 식품 섭취를 줄입니다. 저녁

잡곡밥 (1공기), 모듬쌈, 레몬갈치구이 (1토막), 불고기 (1접시), 호박볶음, 나박김치 간식

호상요구르트 (1개)

자료 : 대한영양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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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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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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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함께 걷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녀,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작은 성당이다. Logrono라는 스페인 중북부에

위치한 한 마을이었다. 밤늦게 성당에 도착한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순 례자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있었다. 그때 2층 계단으로 한국인 무리가 내

내게서 남성적인 매력을 느끼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내게 단지 착한 누나였다.

려왔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넙죽 인사를 했지만 추레한 내 몰골을 상

사랑은 아주 조금씩 하지만 무섭도록 빠르게 진행된다. 사랑을 암에 비

등장에 당황해하며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 무리 중 두 번째에 있던

은 마치 암세포가 몸속을 잠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나도 모

상하며 다소 싱겁게 다시 눈을 돌렸다.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한국인의 사람이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그녀다. 운명의 사람을 만날 때는 환

한 빛이 그 사람 곁에서 뿜어져 나오고 시간은 마치 정지된 것처럼 그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정지된 시간 속

에서 조금씩 내 곁으로 오는 그녀를 보는 난 눈에서는 하트가 뿅 나올 줄 알았건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나는 한국 사람들과 갑작스러운 조우

에 당황했으며 그녀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숙소로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빨리 침대에 누워 쉬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 외 별다른 생각 이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와 나, 그러니까 우리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 길’을 걷고 있

었다. 약 한 달가량을 걸어 스페인의 끝에 도달하는 이 길에 많은 한국

인이 있었고 우리 역시도 그 한국인 중 한 명이었다. 우린 인사를 나눴

다. 그녀는 친근하고 털털한 옆집 누나 같았다. 당시 안경이 부러져 고 생하던 내게 테이프를 건네는 친절을 베풀고 자신이 사 온 군것질거리

유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 르는 사이 조금씩 그녀를 사랑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처음 같이 길을 걸었던 날이 생각난다. 일행들에게서 뒤처진 우리는(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나와 함께하려고 일부러 하루를 더 쉬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새벽 공기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Burgos 성당을 바라보며 배 낭을 멨다. 제대로 얘기 한번 해보지 않은 그녀와 단둘이 길을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며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갔다. 하지만 우린 금세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시작했다. 낯선 외국의 시골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만큼 로맨틱한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은 너

뿐이었고 너 역시도 그랬을 것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하늘은 분홍 빛으로 변했다. 나는 “해가 떴네요.”라고 말했고 너는 “그러네. 하늘 봐, 이쁘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발걸음을 멈췄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

라를 꺼냈다. 같은 하늘을 다른 카메라에 담았다. 그곳은 우리만의 작 은 우주였다.

를 나눠주는 것을 보았을 때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

반나절을 걸으며 살아왔던 얘기를 했다. 순례자 길의 마법이 있다면 그

녀도 마찬가지겠지만, 순례길을 걷고 있던 나는 마음의 짐을 지니고 있

데 단 5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름이 뭐예요? 사는 곳은 어디

만 이성적인 감정을 느낀다거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일은 없었다. 그 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라든지 현재의 걱정과 고뇌를 안고 있

었기 때문에 본능에 의한 추동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아직 대학 도 졸업하지 않은 내가 거친 사회생활을 거친 3살이나 많은 그녀에게 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엔 턱없이 어렸다. (그녀 역시 3살이나 어린 88

것은 내 옆에 걷는 사람을 마치 십여 년 넘게 알고 지낸 것처럼 느끼는 시죠? 취미가 어떻게 되시나요?’ 따위의 재미없고 상투적인 질문들은

건너뛸 수 있다. ‘저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 앞으로 이 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후회했던 것들은 이런 것이에요.’ 와 같은 좀 더 재밌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이 길의 매력이다. 나는 그녀


와 나란히 걷기도 때로는 앞서 걷기도 했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을 정

지 나이가 적고 큼의 차이라기보다 아우를 수 있는 감정의 종류가 달랐

나고 나면 복잡한 수학 문제가 풀리고 난 뒤 맛볼 수 있는 그런 상쾌함

감정을 이미 그녀는 느꼈고 그것에 대한 스스로 답을 내렸다. 묘한 거

도로 재잘거리며 수다를 떤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와의 작은 대화가 끝 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평소에 말수가 적었음에도 이 것저것 그녀에 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으

며 졸업 후 ‘광고 아트 디렉터’라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광고 촬영 에 필요한 소품을 제작하고 배치하는 일을 3년간 하며 사회 초년생의

삶을 톡톡히 맛보았다. 하루 2시간도 채 잠을 자지 못하며 1년 365일 먼지 가득한 세트장에서 살았다. 이토록 힘들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지금만 참으면 언젠가 행복 해질 거라면서 말이다. 집은 단지 샤워를 하는 곳으로 바뀐 지 오래였 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그 ‘행복’이라는 것은 점점 더 멀어져 가

다.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던 이유는 내가 느껴보지 못한 리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이해하기보다

그녀 자체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들었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 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불현듯 찾아온 이런 생각이 낯설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무척 반가웠다.

멀리서 꽃이 보였다. 그 꽃은 아름다웠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서 서 보고 싶은 그런 꽃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어 간직한다거나 화분에

담아 지닐 수는 없었다. 그 꽃은 그때가 아니면, 그 순간이 아니면 아름 다울 수 없는 꽃이었기 때문이다.

는 것 같았다.

밤이 찾아왔고 창문 너머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글을 썼고

얘기가 끝났을 때쯤 우린 숙소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순례자들이 모든

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오늘 하루에 대해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무

침대를 차지했고 남은 거라곤 2층 침대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는 1층 침대에 짐을 풀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누워 우리가 나눴

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아직 직업이란 것을 가져보지 않았던 나는 그녀가 했던 말을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열정을 가지고 ‘내 일’이 란 것도 해본 적 없기에 맞장구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단

그녀 역시 노트를 펼쳐 글을 적었다. 고개를 조금 내밀어 ‘뭘 하고 있냐’ 척 궁금했다. 그녀의 하루에 내가 있는지 말이다. 그녀가 적고 있는 일

기에 내가 등장하는지, 등장한다면 어떤 얘기를 썼을지. 문득 나에 대 해 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갈 때쯤 우리는

불을 껐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 봐”라는 말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날은 우리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던 첫 번째 밤이었다.

김동하

문학과 여행, 살사댄스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는 유럽 보도 횡단 4,000km 중이다.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 를 좌우명 삼아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현실로 만들어 가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꿈이 곧 현 실이 되고 현실을 꿈으로 만들 수 있는 청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으로 세상을 향해 그는 오늘도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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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배우러 멀리 갈 필요 있나요?

대구경북 영어마을로 GO! 세계화의 무한 경쟁시대인 요즘, 외국어 구사 능력은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그 중에서도 영어 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이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또 영어 는 입시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영어에 대한 학생들과 학부모의 관심은 높을 수밖에 없다. 방학이면 어학연수를 가거나 영어캠프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 해 노력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칠곡군 지천면 아름다운 산속에 위치한 ‘대구경북 영어마을’은 영 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하는 이들의 요구와 맞물려 인기를 모으고 있 다. 영어 마을에 발을 딛는 순간 유럽의 조용한 마을을 옮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기에 공 항에서 비행기 탑승을 위한 수속을 밟는 과정에서부터 비행기 탑승, 외국 도시 체험 등 각종 다양 한 상황 속에서 원어민 교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레 영어 습득 기회를 가지게 된다. 몸소 체 험하는 영어야 말로 어떤 교육보다 효과가 높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당일 체험 코스인 유아견학 프로그램에서부터 4박 5일 정규프로그램, 주문식 프로그램, 주말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형편에 맞춰 선택한 후 예약 방문하면 된다. 영어에 목마른 이들이라면 살아 있는 영 어 습득의 장 ‘대구경북 영어마을’을 방문해 보자. 기획·취재 94

편집부


“공항ㆍ호텔 등 외국 현지 상황 체험하며 영어 배워요”

16만 8천여 교육생 배출…93.6% “실력 향상에 도움” 답해

‘대구경북 영어마을’은 대구시와 경상북도, 영진전문대가 운영하는 영

대구경북영어마을이 이처럼 경쟁력을 갖추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체험 기회와 수준 높은 어학교육을 제공할 목적으로 지난 2007년 10

스콘신주립대와 협약을 체결한 덕에 이 대학에서 파견된 영미권의

어체험 교육시설로 지역의 학생과 주민들에게 다채로운 영어권문화

월 30일 개원했다. 우수한 교육 콘텐츠와 미국 현지에서 파견된 원어 민 강사의 수준 높은 교육으로 어린아이부터 학생, 직장인까지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중에서 대구 지역 초

등학교 고학년들이라면 한 번씩 다녀 갈 정도로 지역 영어 공부의 장으 로 통하고 있다. 영어 마을에 들어서면 “와~이국적이다”라는 생각부터 들 정도로 외국의 어느 잘 단장된 마을에 온 듯하다. 외관만 구경하더 라고 좋은 구경 했구나 싶다. 영어마을 내부로 들어가면 더 놀라운 광 경이 펼쳐진다. 공항, 호텔, 은행, 병ㆍ의원, 경찰서, 우체국, 방송국 등 각 장소와 상황에 따라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해 놓은 17개의 체험학습

시설이 사실적으로 꾸며져 있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서 통용되는 여권과 항공권을 갖고 수속을 밟아야 한다. 혹시라도 비행

기를 타지 못할까봐 손에 여권을 꼭 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 다. 도장을 콱. 입국 심사가 끝났다. 건물 외부에는 미국 맥도널더글라 스사에서 수입한 항공기 DC-9기를 개조, 비행기 탑승 중 발생하는 다

양한 상황에 맞춰 영어교육을 진행한다. 활주로를 달려 금방이라도 어

디 먼 나라로 데려다 줄 것처럼 비행기에서의 체험은 실감 난다. 실제 비행기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조종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이곳에서

만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이후 호텔에서는 체크인을 어떻게 하는

지, 몸이 아파서 찾는 병원에서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현실적인 상황별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보니 영어에 대한 재미가 새록새록 솟는

다. 어린 시절 이런 체험장이 있었더라면 영어 울렁증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잠시 든다. 또 요리, 음악, 미술, 과학, 체 육 등을 실습할 수 있는 11개의 공간도 마련 돼 있는 것은 물론 멀티미

디어실과 어학실습실, 도서관 등 33개의 학습시설과 DVD룸, PC룸, 미 니콘서트장 등 23개의 편의시설도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는 먹고 노래 부르고 뛰어 노는 하나하나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도구이자 기회다.

이밖에도 한꺼번에 286명을 수용하는 기숙사와 강의실, 도서관 등의

시설이 구비돼 있고, 외국인에 대한 친근감과 영어에 대한 괴리감을 해

소하도록 하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 전통 민속놀이, 조리체험 등의 프 로그램이 마련돼 다양한 환경 속에서 영어 학습이 가능하다.

‘Animal World(동물의 세계)’를 찾은 아이들. 비록 인형이지만 다양한 동물들을 만지며 영어를 배우는 시간.

것은 영어마을 운영사업자인 영진전문대가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위

우수한 원어민 교수 50여 명이 상주하고 있고, 교육 콘텐츠 역시 글로 벌한 수준으로 질을 높였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간혹 문제가 되

는 원어민 교사의 자질 논란문제는 이곳과는 먼 얘기다. 개원 9년 차

에 접어든 ‘대구경북 영어마을’은 현재까지 초등학생 4박 5일 프로그

램에 참여한 9만3천여 명을 비롯해 총 16만8천여 명의 교육생을 배 출했다. 초등학생 뿐 아니라 경북도 초등교원 교사연수(TEE, TESOL)

프로그램 700여 명, 공무원 연수 프로그램 1,100여 명, 당일 체험 프 로그램 3만2천여 명, 달성군 중학생 4박5일 프로그램 6천여 명도 이 곳에서 체험교육을 받았다. 일본 대학생 400여 명도 4박5일 프로그

램으로 이곳을 찾았고, 타 지자체 학생 920명도 이곳에서 영어체험 교육을 받았다. 유아들은 오전에 시작해 오후 4시경에 끝나는 당일 코스도 있다. 초등학생 4박 5일 프로그램의 경우 초등학교 4~6학년

을 대상으로 하는데, 월요일 입소해 금요일 퇴소를 한다. 매일 오전 9 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요리ㆍ음악ㆍ미술ㆍ과학 등을 직접 실습 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심화학습시설 11곳과 우체국ㆍ은행ㆍ공

항ㆍ병원ㆍ마트 등 외국 현지 상황을 체험하는 체험학습시설 17곳에

서 진행된다. 입소 전 레벨 테스트 및 평가 결과에 따라 학년별ㆍ수준

별로 교육을 하는데, 전 과정 100% 원어민 교사에 의한 수업이 운영 된다. 부모들의 걱정은 합숙 기간 동안 잠자리와 먹는 것에도 신경이 쓰이기 마련인데, 쾌적한 기숙사 시설은 물론 유기농 과일 및 채소 등

친환경 먹거리를 제공한단다. 상담교사, 간호사, 생활지도 교사 및 빌

리지 가이드를 통한 학생 건강 및 안전지도에도 신경 쓰고 있다고 말 한다. 이 모든 시설과 환경이 좋다고 해도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실 력이 늘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준에 맞춘 자연스런

공부가 돼서인지 이곳을 찾은 수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93.6%가 영어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고 답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곳을 찾은 엄모 양은 “오기 전에는 엄마한테 떠밀려 왔 는데, 막상 4박 5일 일정이 끝나니 아쉬울 정도로 이곳에서의 생활은

재미있었고, 영어를 즐겁게 배울 수 있었다.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오고 싶다”고 말했다.

“Me, Me(저요, 저요).” 영어 울렁증은 저 멀리~ 이제 영어 무섭지 않아요. 4박 5일 프로그램에 참가한 후 자신감이 생긴 아이들.

대구 경북 영어마을은요

칠곡군 지천면 송정중리 1길 195에 위치해 있다. 시설은 지하 1~2층, 지상 1~5층 높이에 연면적 2만5,844㎡의 본관동, 상황체험동, 창의 동, 기숙사동 등 건물 4채로 구성돼 있다. 특히, 직접 실습하며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심화학습시설 11개와 외국 현지 상황 체험학습시설 17 개, 멀티미디어실ㆍ도서관ㆍ화상영어센터 등 학습지원시설, 노래방ㆍ미니콘서트장ㆍ세탁실 등 편의시설 34개 등을 갖추고 있다. 문의 054-970-1500, 홈페이지 www.dgev.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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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재미한국학교동북부협의회 홈페이지

재미한국학교동북부협의회 주최‘제13회 나의 꿈 말하기 대회’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어를’ 대상 이조은 양 지난 4월 29일 재미 한국 학교 동북부협의회(회장 박종권) 주최 ‘나의 꿈 말하기 대회’가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파크의 뉴저지프라미스 교회에서 열렸다. 올해로 제13회를 맞이하는 이 대회는 재미 한국학교에 소속된 각 지역 한국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학교별 대표로 참여하는데 올해는 15명이 참가해 자신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소중한 꿈을 모국어 인 한국어로 표현했다. 한인 2세들이 꿈을 밝히고 정체성을 일깨우는 행사인 ‘나의 꿈 말하기 대회’의 올해 수상자로는

‘프린스턴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수’ 되겠다는 이조은(갈보리무궁화한국학교)양이 대상을 받았으며 금상은 허태 성(성김대건한국학교), 은상 손모아(세빛한국학교), 동상 노지오(성바오로정하상한국학교). 강범준(성김대건한국학교)

등이 각각 수상했다. 대회는 한인 청소년들이 미래의 자신의 꿈과 모국의 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표현할 좋은 기회의 장 으로 매년 각 미주지역과 재외 한국학교에서도 열리고 있다.

심사위원: 재외동포재단 뉴욕 주재관 김채영 영사, 제미경-AWCA 사무총장, 이제니퍼-에스카사 편집장

수상자 명단

기념촬영 박종권 회장, 고은자 재미한국학교(NAKS) 이사장, 김채영 재외동포재단 영사(뒷줄 왼쪽부터)가 대상을 수상한 갈보리무궁화한국학교 이조은 양(앞줄 오른쪽 두번째) 가족 (*사진출처 AM1660 K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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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이조은 (갈보리무궁화 한국학교)

금상

허태성 (성김대건 한국학교)

은상

손모아 (세빛한국학교)

동상

노지오 (성바오로 정하상한국학교) 강범준 (성김대건 한국학교)

장려상 김예진 (샛별한국학교) 손유미 (성바오로정하상 한국학교) 최하나 (세종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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