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USA JANUAR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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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에스카사

Vol. 11

January

COVER STORY 미국의 심장을 훔치다 춤에 미친 바보들 Just Jerk PEOPLE FOCUS 보살페미니즘을 전하는 살림이스트 유니언 신학대 현경 교수

ART&CULTURE

LIFESTYLE

지적인 성찰, 전통에 대한 향수의 작품들 배소현 작가

맨하탄 외곽 지역에 있는 아름다운 길

J WOO 대표 김재우 디자이너

브루클린 명소 Grimaldi’s Pizza

1월에 놓치면 후회하는 뉴욕 이벤트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Happy New Year's COMFORT DENTAL 가족 일동





CONTENTS

January 2018 Vol. 11

10

20

Cover Story

Education

Art & Culture

10

28

42

춤에 미친 바보들 Just Jerk

아무도 오지 않는 졸업식

미국의 심장을 훔치다

이달의 사진과 글 18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eople Focus 20

사람들은 나를 오해 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 할 의무가 없다

신간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통해 보살페미니즘을 전하는 살림이스트 유니언 신학대 현경 교수

8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10)

31

1월의 인물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32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직장 생생 체험기

우리 이웃이야기 38

인디언 아일랜드 부부, 노시화 & 팀 쉐이 그들만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

6년만의 결혼식으로 꽃을 피우다

스튜디오 탐방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열려 있는 마음과 지적인 성찰,

전통에 대한 향수의 작품들 배소현 작가

48

옷, 작품 혹은 상품 그 중심에 서다

뉴욕에서 배우고 활동하다가 대구에서 옷을 만드는 J WOO 김재우 디자이너

54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D-100일 기념 특별전

뉴욕 아티스트 100명이 만들어낸 100점의 작품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응원한다!

58

디자인, 삶의 진보를 맛보다

Kate Kim 인테리어 디자이너

64

박종진의 작품 속 추억여행

1970년에 두고 온 시간 병정놀이(Soldier Play)


54

78

Life Style

88

66

70

보이차(普洱茶)

<부족Tribe>의 손수범 감독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

아마존 정글에서 2년째 영화 제작 중입니다

69

1월에 놓치면 후회하는

뉴욕 이벤트

영화 심리 이야기

72

우리가 천재 화가를 추모하는 또 다른 방법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74

맨해튼 외곽 지역 아름다운 길 그곳에서 또 다른 매력과 만나다

뉴욕의 길

78

부르클린 최고의 휴식처

PROSPECT PARK

차 중의 왕

90

세계 최정상에 오른 타이탄 200명의 생각, 습관을 모은 화제의 책

Tools of Titans

92

브루클린 명소

Grimaldi’s Pizza

96

Breakfast at Tiffany's ‘티파니(Tiffany)에서 아침을’

Blue Box Café

98

82

크레스킬 고교 학생들 유엔에서 아트 전시회를 갖다

마비정 벽화마을에 가다

행사

도시 속 농촌

84

1월 긴 겨울 우리 아이 간식

핫도그, 까르보나라 떡볶이

Art Exhibit by Cresskill students at UN

100

제 2회 이벤트

PANCAKE MORNING with BOBBY from Making to Decorating 9


Publisher Jennifer Y. Lee (USA) Dr. Charles Changsoo Lee (KOREA)

에스카사 ( )는 S-Story, Casa-집, ‘이야기를 모은 공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Managing Director Sarah Chung Magazine Director Yebin Taylor Lee

Editor in Chief Won Young Park

는 각 분야 최고의 필진이 만드는 뉴욕 스토리 잡지입니다.

Executive Director / Hyobin Lee Executive Editor / Dr. Anderson Sungmin Yoon

는 자신의 삶을 아끼는 20~40대 독자 가 주요 대상이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삶에 향기를 더하는 이야기, 온 가족이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는 Family잡지입니다.

는 빠르게 변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포터 가 전해주는 뉴욕을 중심으로 한 문 화예술, 패션, 라이프 스타일, 화제인 물 focus, 교육, 육아, 요리, 여행, 건 강정보 등을 아우르는 생생한 이야 기를 가득 담았습니다.

는 뉴욕에서 발행하며 뉴욕, 뉴저지는 물론 워싱턴 D.C, 보스톤, L.A., 시애 틀, 애틀랜타, 사우스캐롤라이나, 달 라스 지역과 캐나다 토론토, 서울, 대 구, 부산지역 독자가 함께 읽는 고품 격 글로컬 (Global + Local) 잡지입 니다. 는 영문으로 추가된 주요기사를 통해 젊은 세대와 영어권 독자에게 우리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자랑스러 운 문화전도의 Hub가 되겠습니다.

는 독자 후원과 의 가치를 인 정해 주는 광고만으로 제작하므로 독자 품격에 맞춘 수준 높은 컨텐츠 가 가능합니다.

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협력사의 격려 에 힘입어 더욱 노력하여 최고의 컨 텐츠로 보답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

10

를 만드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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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ing Editor / Jenny J. Lee Senior Writer / Juyoung Lee, Young Choi English Translation / Haejin Oh Senior Columnist / Stefano Jang Legal Columnist / Minji Kim Music & Arts Columnist / Sunboon Jeong, Dr. Yejin Han Medical Columnist / Dr. Francis Oh, Dr. Byungchul Kang, Dr. Kyungah Lim Food Columnist / Hwajung Sung Design by design212 Photographer / Kibum Kim, Doyoung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Senior Contributing Editor / Young Hee Baek Contributing Editors Hyunmin Kwon, Bohyun Im, Joohee Han, Youngjoo Song, Jihye Lee, Byeol Yoon,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Sophia Kim,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YuJin Hong, Minjung Choi, Sungjoo Hong Marketing Director / Joonhee Kim Advertising Director / Michael Choi, Chunsuk Lim HR & Administrative Manager / Katie Eun Lee ‌ ‌ is comprised of Story and Casa (House), thus carrying the meaning of ‘a place where stories are gathered’. ‌ ‌ is a magazine filled with stories inside New York, written by some of our best writers for each field. ‌ ‌ is a family-friendly magazine that welcomes all readers in their 20’s thru 40’s. ‌ ‌ is full of stories that people will relate to, stories that add more scent to our lives, and stories that brings the family together. ‌ ‌ exudes vibrancy in each article, with a focus on culture, art, fashion, lifestyle, education, parenting, cooking, travel, and health information, all centered around New York City. ‌ ‌ is a high-quality global and local magazine published in New York, which targets readers in New York, New Jersey, Washington, DC, Boston, L.A., Seattle, Atlanta, Dallas, South Carolina cities, Toronto, Seoul, Daegu and Busan. ‌ ‌ is the hub for cultural and artistical guidance, by including main stories written in English in order to accommodate our English-speaking, younger readers. ‌ ‌ is solely funded through contributions from our subscribers and exclusive advertisements, thus being able to provide the highest quality for our every issue. ‌ ‌ promises to work hard through the encouragement and support of our readers and subscribers and deliver the best content in our future endeavors. -Creator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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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VER STORY

미국의 심장을 훔치다

춤에 미친 바보들

저스트 저크 (Just Jerk)

성영재, 최준호, 배서원, 맹한준, 황규홍, 닉슨, 이유진, 곽윤영, 김예환, 윤민수, 이경우, 이이정, 박지영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미국 NBC 방송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인 ‘America’s Got Talent’를 뒤흔든 한국의 젊은 댄스팀이 있다. 까탈스러운 독설가이자 점수가 매 우 짜기로 유명한 심사위원장인 사이먼 코웰(Simon Cowell)을 비롯해 나머지 3명의 심사위원인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Heidi Klum), 유명 프로그램 ‘Deal or No Deal’의 진행자이자 에미상(Emmy Awards) 수상 후보자에 이름을 올렸던 하우이 멘델(Howie Mandel), 그리고 스파이스 걸즈(The Spice Girls)의 멤버였던 멜 비(Mel B) - 이들 모 두를 기립 시켰던 저스트 저크(Just Jerk)가 그들이다. 로스앤젤레스 생방송 오디션 경 합 현장에 있던 방청객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TV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생전 처음 보는 환상적인 군무(群舞)의 무대를 선사했던 그들은 오늘도 자정부터 시작된 연습에 구슬땀을 흘린다. 춤이 전부여서 춤이 인생이라는, 춤에 미친 바보들 – 저스트 저크를

취재팀이 직접 한국으로 찾아가 만나 보았다.

기획 Jennifer Lee 글 Sarah Chung 영문 Haejin Oh 정리

12

편집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라는 뜻을 나타 내는 흥(興)이라는 한자 단어는 그 구조부터가 재미있다. 舁(마주들 여)와 同(한가지 동)이 합쳐져 이루어진 흥은

말 그대로 ‘함께 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흥 이라는 것이 혼자일 때 보다 여럿이 함께할 때 배가 되기 때문이라 그런가 보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함께 해서 흥겨운 문화가 있었다. ‘꼭두쇠’라는 우두머리를 필두로

풍물, 대접 돌리기, 땅재주, 줄타기, 꼭두각시놀이 등을 공 연하며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재미있고 흥겹게 풀어냈던

남사당패(중요 무형문화재 3호)의 한마당이 그러했고, 꽹 과리, 장구, 북, 징의 네 가지 악기로 신명 나는 놀이를 가 능케 했던 사물놀이도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예이다. 난

타는 이 사물놀이가 현대적으로 해석되어 대중에게 다가 간 공연 문화이다. 한 번이라도 이런 놀이나 공연을 눈으

로 보고 귀로 들어 본 사람들은 여럿이 함께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흥겨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안다. 함께 해서 더욱 흥겨운 공연 문화의 계보를 이은 저스트 저크. 특정한 노 래에 안무를 직접 만들어 추는 어번 댄스(Urban Dance)

라는 다소 생소한 장르의 춤을 통해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열 세 명의 젊은이들이 바로 2018 년 새해의 문을 여는 첫 커버 스토리의 주인공들이다.

마치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축지법이나 눈 깜짝할 새

벌어지는 공간이동의 순간을 잡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 2017년 6월부터 8월까지 미국 NBC 방송국의 유명 오디션 프로그램인 ‘America’s Got Talent’를 뒤흔 든 한국의 젊은 댄스팀인 저스트 저크(Just Jerk).

까탈스러운 독설가이자 점수가 매우 짜기로 유명한

심사위원장인 사이먼 코웰(Simon Cowell)을 비롯 해 나머지 3명의 심사위원인 수퍼모델 하이디 클룸 (Heidi Klum), 유명 프로그램 ‘Deal or No Deal’의

주는 것 같다. 그리고는 중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처

럼 뛰어올라 공중에 멈춰 있더니 갑자기 열 세 명이 한 몸

이 되어 기합을 지르며 3D 영화에서처럼 눈앞으로 걸어 나온다. 칼같

이 정확하고 오차없는 완벽한 ‘칼군무’의 저스트 저크는 2010년 리더 인 성영재(Young J)와 단짝 친구 최준호(J. Ho)를 주축으로 배서원(S.

One), 맹한준(M. Joon) 등과 함께 창단된 후 현재는 열 세 명으로 구성 된 댄스팀이다.

진행자이자 에미상(Emmy Awards) 수상 후보자에

영어 단어의 Jerk에는 낚시할 때 찌에 신호가 오면 손목의 스냅을 꺾

고 스파이스 걸즈(The Spice Girls)의 멤버였던 멜

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요. 저희의 춤 동작이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스 생방송 오디션 경합 현장에 있던 방청객뿐만 아

단어 속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나 얼간이’란 뜻도 있더라고요.

던 모든 사람들에게 생전 처음 보는 환상적인 군무

부는 잘하지 못하죠. 그래서 오로지 춤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복합적

이름을 올렸던 하우이 멘델(Howie Mandel), 그리

어 고기를 물속에서 낚아채는 것처럼 ‘무엇을 갑자기 확 잡아당긴

비(Mel B) – 이들 모두를 기립 시켰고, 로스앤젤레

그런 빠른 움직임을 팀 이름에 넣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Jerk라는

니라 미국 전역에서 TV로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

저희는 춤에 다 미쳐 있어요. 춤이 인생의 전부이다 보니 솔직히 공

(群舞)의 무대를 선사했다.

인 뜻도 있네요.

“‌ 정말 너무나 대단해요! 저스트 저크는 ‘America’s Got Talent’ 프로그램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무 대를 보여주었어요!”

– 전 스파이스 걸즈 멤버 멜 비 “‌ 이 퍼포먼스에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에 대단한 감동을 받았어요. 어떻게 동작이 마치 기계처럼 정확할 수가 있죠? 정말 환상적이에요!”

– 사이먼 코웰

13


추는 춤), 크럼핑(Krumping: 역시 스트릿 댄스 의 한 종류로 매우 감정의 표현이 매우 역동적인 춤), 락킹(Locking: 익살스러운 캐릭터들이 나와 저스트 저크는 2014년 말레이시

아에서 열렸던 아 시아에서 가장 열 광적인 댄스 경연

대회 중의 하나인 Asia Battleground

Championship과 서울에서 열렸던

동작을 갑작스레 멈추거나 누군가를 가리키거나 펀치 혹은 주먹을 쥐는 동작으로 추는 춤) 그리고 한국무용과 태권도 동작까지도 가미하여 다양한 춤의 장르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펼쳐 보였어 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었고 결과는 정 말 성공적이었지요. 2016년 바디락 댄스 컴피티션에서 우승을 차지한

저스트 저크의 6분여의 퍼포먼스는 과히 압도적이

었고 유튜브에서도 이미 조회수 7백만을 넘기고

Feedback Dance Competition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포함 지난 5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름도 생소한 저스트 저크 댄스팀을 대중에

으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세계에서 권위있는 컴피티션 중의 하

경연 프로그램인 ‘America’s Got Talent’에 참가하면서였다. 마침 샌

년간 전 세계 댄스 컴피티션을 휩쓴 실력파팀이다. 그중에서도 본격적

나인 바디락 댄스 컴피티션(Body Rock Dance Competition)이라는 댄스 경연대회에서 2016년 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 바디락 댄스

컴피티션은 2000년에 미국 샌디에고(San Diego)에서 생긴 춤꾼들의 행사인데, 전 세계에서 경합에 지원한 수십 개의 기라성같은 댄스팀 중 치열한 심사를 통해 오직 본선에 진출한 소수의 팀만이 나와 독창적인 안무의 춤을 통해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댄스계의 슈퍼볼 잔치’이다.

2016년 바디락 댄스 컴피티션엔 9명으로 출전을 했어요. 평균 각 출전팀 댄서들의 수가 30명 정도인걸 고려하면 매우 적은 숫자이 죠. 댄스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 펼쳐지는 경연에서 무엇을 보 여줄까 하는 고민 끝에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 어요. 그래서 힙합(Hip-Hop)이 가장 기본이 되는 춤이었지만 거 기에 비보잉(B-boying: 브레이킹(Breaking), 혹은 브레이크 댄스 (Breakdance) 등으로 불리는 스트릿 댄스(Street Dance)의 한 장르), 팝핀(Poppin: 스트릿 댄스의 일종으로 기본적으로 음악의 베이스나 드럼 같은 소리에 맞추어 목, 다리, 팔 등의 근육에 강하게 힘을 주며 14

게 확실하게 각인시킨 계기는 누가 뭐라해도 미국 NBC 방송국의 유명 디에고에서 저스트 저크의 바디락 댄스 컴피티션 퍼포먼스를 본 NBC

방송국의 ‘America’s Got Talent’ 담당자가 이들에게 프로그램에 나와 더 많은 미국 시청자들에게도 저스트 저크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면 어

떻겠냐고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017년 6월, 7월, 8월 에 있었던 세 번의 환상적인 방송 공연을 통해 저스트 저크는 네 명의 심사위원 모두에게서 역대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엄청난 반향을 불

러일으켰다. ‘America’s Got Talent’에서 보여준 저스트 저크의 세 번 의 퍼포먼스는 유튜브(YouTube)에서도 3백만 번 이상의 조회 수를 기

록하고 있고, 이들의 인기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예선과 본선을 거치면서 심사위원들로부터 최고의 찬사와 기립박수를 받으며 승승장 구했기 때문에 한국인 최초로 ‘America’s Got Talent’에서 우승을 하

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도 해보았던 저스트 저크. 하지만 아쉽게도 예

상치 못했던 방송 경연을 위한 음악 선곡에 따른 저작권 문제가 불거졌 고, 준비한 음악을 쓰지 못하고 급조한 음악을 쓸 수밖에 없는 등 난제

로 인해 아쉽게 본선에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저스트 저크는 분명 전 세 계를 댄스로 호령할 만한 기개를 보여 주었다.


정말로 짜릿한 경험이었어요. 언더그라운드 에서는 그래도 꽤 알려져 있던 저희였지만 공중파의 힘을 제대로 느꼈어요. ‘America’s Got Talent’ 출연 이후로 많은 분이 저희를 알 아봐 주시고, 또 많은 곳에서 저희를 찾아주 시고 있어요. 그 덕분에 평창 동계 올림픽 홍 보대사도 되고, 또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지난해 9월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문 재인 대통령 및 UN 관계자분들 앞에서 공연 하기도 했어요. ‘America’s Got Talent’ 결선 에 올라가지 못해 아쉽냐고요? 그렇지 않다 면 거짓말이겠죠. 가장 아쉬운 것이 음악이었 어요. 저희의 춤은 하나의 스토리 텔링이거 든요.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음 악의 선곡과 사용이 너무나 중요해요. 그런데 미국 방송국이 원하는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 는 곡을 선정하는 기준이 저희에게 사전에 소 통이 잘 안되었어요. 가져간 음악을 쓰지 못 하고 마지막에 급조한 음악으로 빠듯한 생방 송 경연 일정에 맞추어 다시 안무를 짜다 보니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보여주지 못하였다는 것이 가장 아쉬워요. 또 보통 6분 정도 의 공연에 익숙해 있다 보니 2분 남짓에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짧 은 방송 무대에 좀 당황했고요. 그래도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저 희가 조금 더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된 귀한 경험이었어요. 사실 이미 탄탄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지만 겸손하게 자신들의 부족함

을 인정한다. 그러나 저스트 저크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들의 엄청난 무대 장악력과 칼군무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열 세 명의 멤버가 정확하게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무(群舞)이자 멤버들

이 일사불란하게 일렬로 서서 상체를 들어 올려 팔을 뻗고 다리를 구부 리고 점프하며 앞으로 다가오는 안무를 보면 흡사 군무(軍舞) 같기도

하다. 각자 다른 키와 신체조건을 가진 멤버들이 같은 각도를 만들기 위해 조금 더 몸을 펴거나 접는 등 강렬할 춤 속에서도 세심함을 추구 하며 안정적인 밸런스를 유지한다. 조선 시대 절대 군주 임금의 상징인 곤룡포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강한 생명력과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붉

은색과 그 옷을 뚫고 나올 기세의 황금색 용무늬가 절묘하게 조합된 무 대의상을 입고, 여기에 붉은색 눈화장을 하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나와 추는 군무는 마치 신라 시대 화랑을 연상시키며 관중들에게 절대 적으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15


없는 춤꾼이 되어 있었다. 내친김에 춤꾼들을 모아 아

예 팀을 만들었다. 춤을 잘 추고 싶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모였고, 춤을 추면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춤은

어느덧 춤 그 이상의 목표가 되어 버렸고 인생 그 자체 가 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들일까.

무대에 서는 열 세 명의 멤버뿐만 아니라 저스트 저 크의 스텝들 모두 춤으로 맺어진 한 가족이에요. 처 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 예요. 저스트 저크 멤버 중 닉슨은 말레이시아에 서 온 친구이죠. 재미있는건 닉슨은 2014년 Asia Battleground Championship에 출전했던 경쟁팀의 모든 멤버들이 모두 최소 5년 이상, 대부분은 10년 이상 춤으로 살

멤버였어요. 닉슨이 저스트 저크의 춤을 보고 반해 저희를 찾아 왔

아온 춤꾼들이라 낮에는 춤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

고 한 팀의 동료로 함께 하기 위해 한국에 와서 산 지가 벌써 2년이

에는 저스트 저크 멤버로 모여서 안무를 짜고 쇼케이스 공연이나 곧

넘었어요. 저스트 저크라는 이름으로 가족이 되었고 이제는 피붙이

있을 컴피티션을 위한 연습을 하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몇 년째

와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어요. 정으로 뭉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하고 있어요. 보통 연습을 위해 자정에 모이는데 한 번 연습을 시작

서 춤으로 성장해 가는 저스트 저크이기 때문에 우리의 춤에는 희로

하면 짧게는 세 시간, 많게는 대여섯 시간을 하죠. 무대 위에서 보이

애락이 다 담겨있어요. 춤을 통해 온몸으로 희로애락을 보여주다 보

는 춤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사실 춤이 엄청난 기초체력을 필요로

면 그 자체가 무대에서 인생이 되죠.

하는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죠. 저희가 보통 무대에 서면 6분 공연을 하는데요 이건 1분당 300m를 전력 질주하는 체력으로 6분을 버틸만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보시면 맞아요. 혹시 눈 치채셨나요 저스트 저크에 3명의 여성 멤버가 있다는 것을요? 키도 작고 아담한 멤버들이지만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그 파워풀한 에너 지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여성 멤버라는 걸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엄 청나죠. 무대에서 남자 멤버와의 키와 근육량의 차이에 따른 동작의 미묘한 차이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지구력과 근력을 기르는 운동 을 한 노력의 결과에요. 정말 그냥 춤이 좋았고 춤추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노래에 맞춰 몸

을 움직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하다 보니 춤을 더 잘 추 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그다음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춤을 보여주

고 싶어졌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춤만 추었더니 할 줄 아는 게 춤밖에 16

가끔 무언가에 미쳐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무언가에 빠져 미치도 록 몰입하고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무대에서 혼

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를 보며 뭉클할 때가 그렇고, 발톱이 빠 지고 일그러져도 행복하다는 발레리나를 볼 때가 그렇고, 손가락의 지

문이 뭉개져도 몇천 시간의 바느질 끝에 완성된 드레스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디자이너의 경우가 그렇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 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즉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하니 미치도록 덤벼들어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춤이 인생이라는, 춤에

미친 바보들 – 저스트 저크도 그러하다. 그래서 오늘도 연습실의 커다 란 거울 앞에서 자정부터 새벽까지 구슬땀을 흘리며 무대 위 칼군무의 1센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음악에 온몸을 싣고 자신을 표현하

는 저스트 저크가 참으로 부럽다. 그저 춤이 좋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저스트 저크를 기대해 본다.


HARDER, FASTER, STRONGER, POWER, SWAGGER

Fueled by Love of Dancing

Just Jerk This past summer, a group of young dancers from South Korea rocked the stages at NBC’s flagship show America’s Got Talent. Going by the name of Just Jerk, the dance crew received an overwhelming waves of standing ovation from every one of the show’s notoriously fastidious judges: Simon Cowell, Heidi Klum, Howie Mandel and the ex-Spice, Mel B. The dance group’s meticulously choreographed performance was enough to drop the jaws of not only the live audience inside the LA studio set, but also over 10 million viewers watching the show on television from across America. The days of the much buzzed-about audition is over, but the members of Just Jerk are nevertheless continuing to hone their already outof-this-world skills during their usual midnight practices.

flew to Korea

to meet the self-proclaimed “jerks who are just crazy for dance.” 17


opens its January issue with a cover story on Just Jerk,

the 13-member dance crew known for powerful dance moves that radiate with explosive energy on-stage. They are known as pioneers of the “urban dance” genre in Korea, which revolves

around precisely choreographed performances based on the dancer’s interpretation of the music (s)he dances to. Picture this. You think you are watching a slow motion

of some dancers caught in teleportation. Until perfectly

uniform assemblage of all the

dancers they soar through the air, seemingly defying gravity, and then with a shout, suddenly turn to the audience

and proceed towards them in a brisk manner. The 13

individuals move in perfect

everything to us, and frankly, we are not that [conventionally] intelligent. So in a way, our name states that we are a bunch of fools whose only obsession was, and is, dancing.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Just Jerk has been sweeping the

world’s major dance competitions for the past five years. Their gift, showcased at the 2014 Asia

“Wow, wow, wow! You guys have taken this competition to a whole different level! You are amazing!” – Mel B “I’m so impressed with the amount of work you put into this. It is so precise. It is like a machine. Brilliant!” – Simon Cowell

sync as if they were one. The

Battleground Championship - in Malaysia to the Feedback Dance Competition in Seoul, allowed them to take home several coveted titles. One of the first early breakthroughs for Just Jerk, however, was in 2016, when they won the first place at the Body Rock Dance Competition , oftenly dubbed the “Superbowl of the dance community.”

level of precision in every movement is so high that this type of

At Body Rock, the average number of dance participants was

“Knife group dance(칼군무)” is one of the many terms used to

The event was held in none other than the U.S., the home of dance,

synchronized choreography is compared to a “knife” in Korean. describe Just Jerk, a dance crew founded by Young J and J. Ho in 2010, later joined by S. One, M. Joon and nine others.

around 30 within each team, but we only had nine members then. so we put in a lot of thought before finally deciding to incorporate an aspect of Korean culture into our routines. The dance was largely based on hip-hop, but we mixed in a wide range of styles,

The word “jerk” has several meanings, one of them being “to give a

like b-boying, popping, krumping, locking, and even moves from

sudden thrust.” Because our dance moves are very fast, we thought

traditional Korean dance and Tae-Kwon-Do. We were able to

it would be appropriate to create the nuance of such instantaneous

deliver a cross-genre performance and thankfully, people loved it.

motions reflected in our name. “Jerk” can also refer to “a foolish,

We were very successful.

stupid person.” We are all crazy about dancing - it [dancing] is

The crew’s stunning winning performance at their 2016 competition, which ran for about six minutes, has garnered more than 7 million views on YouTube to this day. Yet

perhaps their greatest breakthrough was the crew’s appearance on America’s Got Talent

in summer of 2017, when coupled with unprecedented moves that ratched up the

standard for dancing everywhere, made them

an emerging sensation within the dance community. Their epic performances were broadcast three times throughout the season,

and each one of them made the show’s four celebrity judges stand to their feet, amid a

thunder of applause. Despite high hopes, the team did not make it to the finals, but this

initial roadblock never fazed them of making their next move -- they surely proved that

they’ve got what it takes to reign supreme in the world of dance. 18


a carefully coordinated

military parade. Style-wise, the members were dressed

in red garment inspired by the Dragon Robe, or the

royal gown worn by kings of Chosun Dynasty in Korea

- just by adding dragon

patterns in gold stitches, red

color eye make-up and black headwrap, they are ready to

deliver that overpowering gig sure to blow your mind.

They say that it all began

with a simple love for dance.

Because they liked to dance

and to watch other dancers show off their cool moves, they just kept on dancing. Their undying passion for

dance was at the foundation of the challenges they took, to meet

with a greater audience. The members of Just Jerk have just one

mutual goal in common: they want to be better dancers and

make people happy -- given their purpose, the question arises regarding what they think of each other.

We think of ourselves as a family. Not just us dancers, but the entire staff members of Just Jerk Crew of course. We have always been thinking this way and will definitely hold on to this attitude. One of our members, Nickson Lai, is from Malaysia. Ironically enough, he After appearing in America’s Got Talent , we were appointed as

was competing against us in the Asia Battleground Championship

ambassador for the 2018 Winter Olympics in PyeongChang. We

back in 2014. He just fell in love with what we were doing and

actually performed in front of President Moon Jae-in and UN

came to us. Two years have already passed since he moved to

officials at New York’s Metropolitan Museum in September 2017.

Korea to dance with us. We are one big family under the name of

Looking back at America’s Got Talent , we’d have to say our biggest

Just Jerk, and we feel so close to each other. Because of this, we

regret was the music. Every dance we do has a story, and in order

strongly believe we are able to bring out all the emotions of joy,

to deliver it effectively, choosing and using the right music is critical.

anger, sorrow, and happiness and empathize the emotions with one

However, we were told in America that we could not use the piece

another.

of music we had worked on due to copyright issues. This was a huge setback because now we had to make up new routines to a new tune and had a very tight schedule. One more thing, we are used to 6-min acts, so cramming what we had in mind into a 2-min gig was painful. Still, we learned a lot from the experience and the time we spent preparing for the audition has helped us grow and mature more as a team. Contrary to their modest attitude, their attention-arresting, overwhelming presence on stage and their signature choreography filled with machine-like synchronizations are truly

one of a kind. The seamlessly-moving thirteen dancers resemble

Follow your heart and live your passion - as straightforward as this sounds, most people struggle to even come close to achieving

this. Getting to explore deep within the inner self and discovering one’s real passion, is a difficult journey that deserves utmost respect, let alone being able to live that passion. Jerk Crew has just done this - their passion evokes altruistic motivation to live up to their name, which accurately reflects this old saying, “you will never reach the goal if you never get crazy over it.”

will continue to look forward to hearing about more great and

exciting updates from the crew, whose perpetual passion will take them to the next level in their already brilliant dancing car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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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사진과 글

Photography by George Jung 20


2018 Happy new year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만드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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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ocus

신간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통해

보살페미니즘을 전하는 살림이스트 유니언 신학대 현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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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스타일과 화장, 옷차림은 물론 자신의 생활 공간 모든 구석을 세심하게 꾸미 는 멋쟁이, 나이든 이의 원숙함과 여전히 창창한 육신이 뿜어내는 젊은 기운이 동 시에 전해진다.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려 애쓰지 않지만 놓칠 수 없는 생의 중심 은 단단히 움켜잡고 있는 강단이 보인다. 현경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신간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을 읽고 나서 받은 기자의 느낌이다. 한 마디로 현경은 ‘저렇게 나이를 먹어가면 좋겠다’라는 부러움을 자연스레 불러일으 키는 사람이다. 그녀는 온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집이 있지만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변화에 순응하지만, 정신의 노쇠를 허락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획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정리

편집부

에코 농장 실습 에서 유니언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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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온 신학대 동료 교수들과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불교도. 세계인이 모인 성령 컨퍼런스에서 굿

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전통 무속 의식인

경은 크고 작은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남에게 관심을 얻기 위해 한 일

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제 강연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강

판을 벌인 파격적인 신학자. 모성과 살림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로 현

도 아니었고 그 논쟁을 의도적으로 만든 적은 없다. 하지만 현경은 논 쟁을 피해 본 적도 없다. 그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현경에겐 그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이고,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고, 여 성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무엇보다 지

초혼제를 선보이며 아시아 여성의 영성 문제를 제기하여 세계신학계 연’으로 거론되면서 현경은 극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보수적인

한국의 교계에서 살해위협까지 받았고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애인이

자 동지였던 남편과도 헤어지게 되는 개인적인 아픔까지 겪는다. 현경

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

위와 젠더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궁극적

성 위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여성 신학,

으로 누려야 할 자유였다. 그런 현경의

제3세계 신학을 주장해왔다. 1989년부

태도는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지만, 그 수

터 7년간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하버

이상으로 많은 지지자와 열성 팬들이 생

드대학교 ‘종교와 여성’ 분야 초빙 교수

겼다. 특히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성차별

로 가르쳤고, 1996년 세계 진보 신학의

이 만연한 한국 여성들에게 남성의 시각,

명문 유니언 신학교의 아시안 여성 최초

더 큰 의미로 ‘남의 눈’이라는 굴레에서

종신교수로 부임했다.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는 현경은 자유롭 고 당당한 여성의 롤모델이 되었다.

현경은 이후 진보적인 학풍의 유니언 신

현경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와

속했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1999년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뉴욕의 유니언 신 학교에서 ‘아시아 여성 해방신학’으로 박 24

학교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킨 행보를 계 졸업식에서 제자들과

히말라야의 수도원에서 머리를 깎고 수 행을 하고, 이슬람교를 공부하기 위해


2006년부터 1년간 이슬람 17개국을 순례하며 무슬림 여성 200여 명

페미니스트들이 심하게 싫어할 단어들이다. 당연히 현경이 말하는 모

고 평화통일 운동단체 ‘조각보’의 공동대표다. 신학을 퍼포먼스와 제의

고 나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광의의 개념들이다. 이번 책에서는 더

을 만나는 등 종교 간 화해를 위해 애썼다.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이 로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이며 에코 페미니스트, 해방신학자, 환경

운동가, 평화운동가다. 2015년 5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각국 여성 수상 자 30명과 함께한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Women Cross DMZ) 행사

는 현경이 추구해 온 다양한 운동들이 한자리에서 표출된 대표적인 이 벤트였다.

현경은 스테디셀러인 <미래에서 온 편지>를 비롯해 <결국은 아름다움

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등 다수의 저서를

발표해왔다. 새로 나온 책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에서 도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여성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주

제에 대한 현경 특유의 솔직함과 에너지가 넘쳐난다. 마치 그동안의 거 침 없는 행보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듯 “꿈에 책의 신이 나타나 잔

인할 정도로 솔직히 쓰여야 한다”고 했다는 후기가 붙을 만큼 아끼지 않고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다. 거기에 60살이라는 의미 있는 나이를 지나는 저자에게서 “30

대, 40대와 다른 좀 더 진화한 인

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성

찰과 각오도 엿보인다. 현경을 롤모델로 여기고 멘토로 존경하

는 젊은 여성들이 아닌 그와 비 슷한 혹은 윗세대 여성들이 특

히 책을 읽으며 크게 고무될 수 있는 부분이다.

60이라는 나이에 대해 현경은

“기존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완

성은 그 모성만이 아니고, 살림은 그 살림만이 아니다. 그의 설명을 듣

욱 과감한 표현도 등장한다. “이슬람 여성들은 맞서 싸우려 드는 서양 의 페미니즘보다는 한국의 기생 문화에서 배울 게 더 많다고 얘기해.”

장담하지만,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글의 앞뒤 문맥을 자르고 딱 이 구

절만 따로 발췌해서 ‘현경 교수가 한 말이다’라고 SNS에 올리면 그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동의하고 매춘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냐’라는 식

의 집중포화를 맞을 수도 있다. SNS의 험악한 단면을 알고 있는 독자

들은 공감할 것이다. 현경이 종교적인 이유로 험한 공격을 받았었지만, 일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도그마는 종교의 도그마에 버금가기 때 문이다. 그런 기자의 걱정에 당사자는 오히려 아주 태연하다.

“젊은 페미니스트들 대부분 나에게 동의해요. 그런 공격 별로 받지 않 아요. 그리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원래 젊을 때는 당연히 그런 거죠. 과격하게 공격도 하고 싸우고 그

“젊은 페미니스트들 대부분 나에게 동의해요. 그런 공격 별로 받지 않아요. 그리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원래 젊을 때는 당연히 그런 거죠. 과격하게 공격도 하고 싸우고 그래야죠.” 그런데도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 할 의무가 없다는 것

그런데도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면….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 가 있고, 나는 해명 할 의무가 없

다는 것이 현경의 태도다. 그에게, 지금 정말 의식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이제는 남이 뭐라 하건 별문제가

안 돼. 내 안의 진아. 신의 목소리. 신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그 거울이 제일 중요하지.”

신간의 제목에서 보이듯이 <서

울…>은 현경이 김수진 작가와

전히 다 삭제하고 내가 원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시 다운로

래야죠.”

세계 곳곳을 함께 여행하며 대화

드하여 새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단순한 업

한 기록의 모음이다. 두 사람의 생물학적 탄생지인 서울, 현재 현경의

로 60년이 진짜 인생을 사는 멋진 신세계”라는 기대감이기도 한다. 동

로 돌아오는 여정은 각각 운명과 선택 그리고 회귀라는 챕터로 정리된

데이트가 아니고 “어쩌면 내게는 지난 60년이 연습과 준비였고 앞으 아시아의 우주론에 의하면 환갑의 나이는 인생의 의무가 끝난 시기이

며 남은 삶은 덤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환갑잔치를 벌이는

삶의 터전인 뉴욕, 모든 인류의 출발점인 동아프리카를 거쳐 다시 서울 다.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을 ‘늙은이’로 여기는 60대는 없다. ‘60대는 새

이 책이 이전의 저서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현경의 목소리가 자신

경은 그 수준을 넘어 자신이 ‘0살’이 되었다고 여기며 새로운 인생을

이다. 그리고 1년을 목표로 했던 출판이 4년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긴

로운 40대’라고 주문을 외우며 노년이 아닌 장년의 삶을 살아간다. 현 맞을 준비에 거의 들떠 있다.

한편, 늘 당당해 보이는 현경의 모습에 관해, 인터뷰했던 기자로서 꼭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평소 글이나 말에서 자칫 오해살 수도

있는 표현도 그가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나는 눈

치 안 보고 신경 안 쓴다’ 식의 오만과 무신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충실함”을 늘 강조해 온 태

도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에겐 “오해를 한다면 해석하기 나름이다. 잘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나랑 대화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바탕에 있다. 예를 들어 현경이 강조하는 ‘모성’과 ‘살림’이란 단어는 강요된 모성과 여성 혼자만 떠안는 가사에 환멸을 느끼는 젊은

이 아닌 다른 사람, 30대 여성 작가인 김수진 씨를 통해 전해지는 형식 산고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긴 진통을 겪

은 것은 현경이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 출판사의 기획대로 현경이 어린 세대의 작가에게 멘토로서 대화하는 형식이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과정이다. 현경은 그러나 그 형식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아

직 깨달은 자도 아니고 내 삶의 많은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 고 매일 조금씩 더 배우고 더 깨우쳐 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었다. 이

미 유명한 학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말이 저절로 권위를 얻게 되고 작가 는 순순히 그 말을 옮기는 일은 피하고 싶어서 더 많은 이해와 숙성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현경이 천성적으로 ‘꼰대’가 될 수 없는 사람임

을 보여준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30년 가까이 어린 세대 작가와 다른 코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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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온 신학대학원 제자들과 세계 종교학회 여성들을 위한 텐트에서

산타페 여성 영성 리트리트

현경과 작업한 작가가 그 세대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를 통해 보인 지금의 20~30대는 젊은이다운 치열함이 부족했다. 주변과

쉽게 화해하며 순응하는 듯했다. “다 그렇죠”, “뭐 그럴 수도 있죠”라는 식으로 60대인 현경보다 오히려 더 세상에 초연하고 달관한 듯한 태도

를 보였다. 현경은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환경 때문에 독하게 공부해 장

학금을 받았다. 대학 시절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정도로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기존의 종교인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도 위축되지 않

았다.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대항했던 1세대 페미니스트다. 미국에서 교수가 된 후에도 인종과 성별에 대한 차별에 맞서면서 지금 의 위치를 만들었다. 그처럼 투사로서의 기질이 다분한 현경에게 작가

“서로 접점을 찾은 후에 우리는 사회 변혁, 연애, 섹스, 신성, 우주에 대

편해했다. 만남의 초반에 대화는 진전 없이 맴돌았다. 함께 책을 만들

친구가 되고 사랑해야 하나 보다. 인생은 끊임없는 변화이고 그래서 살

의 그런 모습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지적했고 작가는 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갈등과 오해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서 거칠 것이 없는 현경은 그런 면에서 기질적으 로 꼰대다. 요즘 기성세대는 어린 세대에게 말조심이 습관화되어 있다.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전전긍긍한다. 주차장 알바생에게 무식 한 모녀가 갑질을 하면 순순히 무릎을 꿇는 것이 요즘 세대들이다. 그

해 막히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만나고 이해하고 아볼 만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현경은 또 한 번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되새 긴 셈이다. 그렇게 젊은 작가와 함께 3개 대륙을 여행하고, 갈등과 화

해의 과정을 거치며 4년간이나 대화한 기록물인 <서울…>에서 현경이 결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걸 지적하는 여교수에게 젊은 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들이 앞장서서 ‘꼰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모습은 어떤 걸까? 다시 정리해 보는 시간

하는 척하고 다독이고, 그도 아니면 그냥 무시한 것이 쿨한 기성세대라

그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앎에 근거한 페미니즘, 욕하고 손가락질하기

대’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세태다. 자신보다 어린 세대에겐 무조건 이해 는 인식이다. 현경은 그런 기성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겪었던 갈등인

셈이다. 하지만 현경과 작가 모두 인정했듯이, 유익한 시행착오였고 꼭 치뤄야 했던 수업료였다. 4년간의 여행 끝에 한 명은 무뎌지고 한 명은 날카로워지면서 서로 닮아갔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26

이었어요. 살아가는 모든 만물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 근거한 페미니즘, 보다는 다독여주며 같이 잘살아 보자는 페미니즘… 나는 이러한 페미 니즘을 살림이스트 보살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만약 신이 허 락한다면 앞으로 60년의 삶은 살림이스트 보살 페미니즘이라는 프로 그램을 다운로드해서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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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교수와 함께하는 북클럽 27


현경 교수와의 인터뷰를 위해 유니언 신학교를 찾은 건 지난해 늦가을

성>, 힐러리 멘틀의 <월프 홀>, 제프리 쵸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이

일에 열리는 북클럽 모임이 진행 중이었다. 현경을 비롯한 10여 명의

의 시도 포함되어 있다.

의 정취가 깊어지던 어느 화요일이었다. 그날은 마침 매달 4번째 화요 여성 참석자들은 노자의 도덕경을 주제로 자신들이 읽은 텍스트에 대

외에도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오마르 카이암과 하피즈의 시와 서정주

한 해석을 교환하며 하며 2시간여 동안 진지하고 활기찬 대화를 이어

만만치가 않은 커리큘럼이다. 가볍게 읽고 와서 가볍게 대화를 나누기

이 나타났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겪는 개인적인 일들을 도교의 관점에

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난해한 문장으로 유명한 책들도 끼어 있다. 제

갔다. 대화에 임하는 회원들의 태도에서도 교양인의 모임다운 세련됨

서 새롭게 풀이해 보는 회원들의 의견이 제시될 때마다 다른 회원들은 동의와 긍정으로 화답하며 경청했다. 말을 하는 것보다 잘 들어주는 것 이 가장 바람직한 대화와 토론이라는 것을 회원들이 다년간의 북클럽

모임을 통해 체득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남성들만으로 이런 모임

을 할 때 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배려의 분위기가 2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빅토리아 목 회장은 “고

인이 되신 최월희 문학 교수님을 모시고 가톨릭 여신자들이 모여 시작

엔 대부분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해석은 물론 텍스트를 독해하 대로 읽지 않고 자리에 참석해 대충 아는 지식으로 끼어들만한 교재들

이 아니다. 하지만 숙제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이런 ‘부담감’이 북클럽 모임을 장기간 이어 갈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회원들은 공통으로

“클럽이 주는 의무감이 바쁜 생활 속에서 책을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 게 하고, 그렇게 해서 완독을 거치면 큰 보람과 기쁨을 얻는다”고 동의 한다.

한 북클럽이 이제 10년째를 맞았다”고 소개했다.

목 회장은 “북클럽을 만나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삶의 즐

그동안 북클럽이 소화한 책들의 목록을 보면 다양한 주제와 쟝르에 걸

를 다시 읽으며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헷세의 철학에 빠지게 되었고,

쳐 영미권은 물론 한국과 기타 지역 유수 작가들의 책들로 이루어졌다.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

덕>, 윌리암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버지니

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 체홉의 <단편집>, 헨리 제임스의 <워싱톤 스퀘어>,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노자의 <도덕경>, 토마 스 하디의 <테스>, 소크라테스의 <플라톤의 대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황석영의 <손님>,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거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중학교 때 읽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흑인의 노예사가 배경인 토니 모리슨의 <비러브드> 와 엘리스 워커의 <칼라퍼플>을 읽으며 그들의 처절한 고통이 와 닿았다는 것이다. 한

강의 <채식주의자>에서는 남성 우월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여성을 비

롯한 소수자들의 힘없는 저항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목 회장은 “책

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상과 생각 또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 며 좀 더 풍성한 삶이 되기”를 기대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길 위의 인생>, 아룬다이 로이의 <작은 것들의

원혜경 뉴저지훈민학당 교장은 그동안 가장 좋았던 교재로 도덕경을

의 <그리움의 차도>, 한 강의 <채식주의자>, 시몬드 보봐리의 <제2의

학이 다르게 다가오고 새로웠기 때문이다. 원 원장은 “나이가 들면서

신>, 토니 모리슨의 <비러브드>, 엘리스 워커의 <칼라 퍼플>, 이 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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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15년 전에 읽었지만,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니 책의 감성과 철


점점 고집스러워지고 강퍅해 질 수 있는데 아마도 자신에 대한 불

안감과 자신감의 결여에 의한 것

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내면과 외면이 한결같이 나이 듦을 즐기 면서 익어가고 싶은 마음에 도덕

경이 다가왔다.”고 평했다. 이전 에는 선호하는 책만 읽고 혼자만 의 생각에 빠지고 했는데 북클럽 을 통해서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그에게는 쉼이 되는 동시 에 도전이어서 흥미롭다.

박영숙 씨가 선택한 가장 유익했던 독서는 무게감이 더한다. 엥겔스

의 <영국에 있어서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1845)>를 꼽았다. 엥겔스를 읽으면서 공산주의의

원리나 태생의 정당화 등을 처음으로 제대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읽게 된 가장 유익한 책이 되었다.

“좋은 책은 언제라도 나약해질 수 있는 내 판단력에 등불이 된다는 믿 음이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권씩은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았다. 북클럽에 참여한 것이 독서를 독려시켜주는 자극제가 되

었다. 또한,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범주의 책을 접할 수 있게 되 었다.” 박영숙 씨가 밝힌 ‘북클럽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유다.

이날은 마침 북클럽 모임만이 아니고 할로윈과 현경 교수의 신간 기념 파티를 겸하는 자리였다. 신학교 내 교실에서 모임을 마친 회원들은 학

교 건물 내 옥상에 있는 현경의 자택으로 자리를 옮겨 흥겨운(더 정확 히 표현하면) 광적인 뒤풀이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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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0)

아무도 오지 않은 졸업식 그림 박종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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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 학교 안 운동장에는 솜사 탕과 먹을거리를 파는 장사꾼들과 커다란 사진기를 들 고 나와 졸업 대목을 잡으려는 사진사 아저씨들이 손 님을 붙잡기 위해서 분주하게 돌아다니셨단다.

드디어 졸업식이 시작되었어. 국기에 대한 경례와 지 루한 연설 순서가 끝나고, 성적 우수 졸업생들과 개근

한 학생들에게 상장과 상품이 전달되는 순서가 진행되

었단다. 5학년 후배 재학생들이 나와서 “빛나는 졸업

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노래를 불러주었어. 그리고 졸업생들이 그동안 연습

한 노래를 답가로 해주었지.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노래를 부르면 서 너도 나도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라고. 정든 학생들

을 떠나보내는 선생님들도 서운해서 울고, 졸업생들도 마음이 복받쳐서 울고, 갑자기 졸업식장이 울음바다가 되었지.

어느덧 감동적인 졸업식이 모두 끝났단다. 이제 뒤에 서 기다리던 가족들의 축하와 선물을 받는 시간이 되 었지. 건물 왼편에 십여 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모두 졸

며칠 전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문득 과거의 추억이 떠올랐단다.

업식에 참석한 향직이네 식구들이 눈에 들어왔고, 아랫마을 주막집 현

진을 찍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래전에는 사진을 찍는 것이 그리 흔한

큼지막한 꽃다발을 손에 들고는 사진을 찍고 있었단다. 그 순간 나는

요즘에는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기로 하루에도 수십 장의 인증 사

일은 아니었어. 가끔 동네에 사진사 아저씨가 찾아와서 사진을 찍어주

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돈이 들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어. 학교에서 봄과 가을에 떠나는 소풍이나 졸업식과 같이 특별 한 날에 사진사를 동원해서 단체사진을 찍기도 했었지. 사진이 귀하다

보니 집집이 사진 액자를 대청마루에 걸어 놓고 매일 들여다보기도 하

고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에게 서울로 돈 벌러 나간 아들 사진이라고 자랑을 하곤 했지.

수는 축하 나온 부모님과 함께 양손에 공부 잘 해서 받은 국회의원상과 졸업식에 선물을 들고 와서 사진을 찍어주기로 약속한 사촌 형을 찾고

있었지. 바쁜 부모님들이 못 오시고 대신 사촌 형이 오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오기로 한 형을 찾을 수가 없었어. 큰소리 떵 떵 치면서 “내가 가서 사진을 찍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 놓고는 결국 졸업식에 나타나지 않았던 거야. 부모님도 사촌 형이 가서 사진을

찍어준다니 그 말을 믿었던 거지. 어차피 사진기도 없으니 사촌 형이 가서 사진도 찍어줄 수 있으니까 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었을 거야.

몇 안 되는 어린 시절 사진을 정리해보니, 읍내 사진관에서 엄마와 여

동생, 그리고 이모와 찍은 빛바랜 흑백 사진, 집 담벼락에서 고구마를

먹다가 뺏긴 후 오른손을 쭉 내밀어 다시 먹던 고구마를 달라고 하다가 찍힌 사진, 고장 난 세발자전거를 끌고 나와 동네 어귀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학교 소풍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전부였단다. 그러

면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초등학교 졸업식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생 각난 거야.

면 소재지 마을에서 달랑 하나밖에 없던 초등학교 졸업식은 온 동네 잔 칫날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단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6년 동안 다닌 학 교 졸업식이다 보니 부모님을 비롯하여 근처 마을에 사는 할아버지 할 머니와 친척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였어. 축하하러 온 사람들의 양손

에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졸업하는 학생을 위해 준비한 큼지막한 꽃다 발과 빨간색 포장지에 싸인 앨범 선물이 들려 있었지.

번쩍번쩍한 금배지를 검은색 양복에 달고 나타나신 지역 국회의원님, 교육청에서 나오신 장학사님, 학교 교장과 교감 선생님이 귀빈석 연단

에 자리를 잡으셨어. 지난 6년 동안 학생들을 지도하신 선생님들이 감

회가 교차한 얼굴로 앉아 계셨고, 졸업식장 안과 밖으로 축하 손님들이 31


꽃다발과 앨범을 양손에 들고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던 졸업생

차려진 저녁상이 마련되어 있었어. 미안하셨는지 어머니가 읍내에 나

지 않았어.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 우수상을 받지도 못했

던 거야. 오랜만에 먹어보는 비계가 하나도 없는 순살 돼지고기가 입에

들을 뒤로하고 슬며시 학교를 빠져나왔단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

고, 학교에 간다고 하고는 산에 놀러 다닌 적이 종종 있어서, 남들이 다

받는 6년 개근상, 정근상, 심지어 1년 개근상도 받지 못했지. 아무도 찾 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꽃다발과 앨범은 받지도 못했고 말이야.

크게 실망한 얼굴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학교 정문을 지나 언덕을

가셔서 돼지고기 서너 근과 고등어 몇 마리를 사다가 저녁을 준비하셨 착착 감겼지. 고등어에 묵은지를 넣어 조린 걸 내가 제일 좋아했었거 든. 그걸 알고는 고등어 요리도 아주 맛있게 내 오셨단다. 가마솥에서 지은 검은콩 밥에 맛있는 반찬으로 포식을 하고 나니 졸업식에서 느낀 서운함이 금세 가시면서 기분이 많이 풀렸단다.

내려가고 있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

다음 날 부모님이 큰 집에 가서 사촌 형에게 따졌단다. “아니 졸업식에

이였지만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더 컸어. 또 나이도 같다 보니 한 번도

빡 잊어버렸슈” “아무도 안갔대유”라고 말하는 거야. “그려, 아무도 안

어. “저기, 이거 받아.” 건넛집에 사는 명희였어. 한 학년 아래인 여자아 오빠라고 부른 적이 없었어. 평소 수줍음이 많은 여학생이어서 내게 말

을 걸어온 적도 없었지. 명희는 분홍색 종이로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전해 주었어. 열어보니 안에는 공책이 몇 권 들어있었단다. 명희 엄마

간다고 그러더니 왜 안 갔댜?” 사촌 형이 태연하게 “졸업식 날짜를 깜

가서 엄청 서운했댜” 졸업식 날짜를 깜빡했다는 사촌 형에게 뭐라고 한들 더 무슨 소용이 있겠어.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가 졸업한다고 준비한 건지 아니면 자기 용돈을 모아서 산 건지 모르겠

집에 돌아오면서 부모님에게 다짐을 받았지. “다음에 중학교 졸업식에

핑 도는 거야.

안허다” “괜찮유, 뭐 그럴 수도 있쥬” 연실 미안하다는 어머니 눈에도

지만, 그 선물을 받는 순간 너무 고마운 나머지 갑자기 눈가에 눈물이 공책 선물을 손에 들고 비척비척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단다. 오는 내내

얼굴에는 서운한 눈물이 고여 있었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그냥 저절

로 눈물이 나더라고. 그렇게 울면서 한참을 걸어 평소 걸리던 시간을 훌쩍 넘긴 채 집에 도착했단다.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애꿎은 돌멩

이를 발로 연신 차서 운동화에 흙먼지가 많이 묻은 꼬락서니를 하고는

는 꼭 오는 거유” “그려, 졸업식에 꼭 가야지” “너 혼자 졸업식 가서 미 살짝 눈물이 고인 것을 볼 수 있었단다. “뭐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든다

니. 자식들은 줄줄이 여섯 명이고, 맨날 일만 죽으라고 해도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고 말여.” “그래도 괜찮유” “어제 맛있는 저녁 먹었잖유” 라고 어머니를 위로해 드렸지. 사는 게 팍팍했던 부모님도 살아간다는 게 무척 힘겨우셨을 거야.

대문을 늘어섰어.

집에 돌아오는 길, 하늘에는 커다란 달님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단다. 그

마침 집에 계시던 어머니가 물어보시는 거야. “아니 얼굴이 왜 그 모양

들었어.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말이야. 빨리 커서 공장에 취직해 돈을

이여?”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많이 놀라시더라고. “아니, 네

사촌 형이 안 나타났어?” “걔가 꼭 간다고 그렸는데?” “내일 가서 물어 봐야겄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위로하시는 거야. “그러면 뭐 혀,

림자를 앞에 두고 걷고 있는데 달빛에 비친 내 키가 갑자기 커진 느낌이 벌어야지 하고 다짐을 하면서 집에 돌아왔단다.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 업할 때 공장에 취직하지 않고 친구들 따라서 대학에 갔지만 말이야.

졸업식이 다시 열리지도 않는데”라고 쏘아 붙이고는 두꺼운 솜 이불에

지금도 이 일이 생각나는 걸 보면 그때 무척 서운했었나 봐. 가난은 죄

세 눈이 스르르 감겼단다.

한단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잠시 가난하게 살았다고 해서 평생 돈 없이

들어가 잠을 청했단다. 온종일 장작불에 따뜻해진 아랫목에 누우니 금

한참이 지난 후 몸을 흔들면서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단다. “얼른 일어 나, 저녁 먹어” 눈을 떠보니 빨간색 나무 식탁에 갖가지 맛난 반찬으로

가 아니지만, 살다 보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서러운 일을 겪게 되기도 힘들게 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오히려 그때의 경험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부족한 인격과 성품을 성 숙시키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단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32


EDUCATION

1월의 인물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I Have a Dream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는 미국에서 흑인으 로 태어났지만, 나름대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보스턴 대학교 신학 박사이자 목사,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인권 운동가로 대학 시절 받은 인종차별로 목사가 된 이후 흑인

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시 민권을 얻기 위한 운동을 펼쳐왔으며 그 결과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비폭력 운동을 펼쳐왔으나 1968년 4월 4일 백인 과격단체인 제임스 얼 레이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한 수많은 연설 가운데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 때 링 컨 기념관 앞에서 한 연설이 가장 감동적이다. '나에게는 꿈 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미국 3

대 연설 중 하나이자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명연설로 유 명하다.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 정부는 1월 셋째 주 월요일 을 마틴 루터 킹의 날로 지정, 국경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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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VMN 콘텐츠배급재무전략팀 전) 부사장 정승희

유학생에서 VP가 되기까지

미국 직장 생생 체험기 내가 잘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보장은 없다. 직장 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한다고 해서 꼭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잘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얼 마나 좋을까.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기운이 넘쳐날 것만 같을 텐데. 어쩌 면 판타지 같기도 한 이런 행복한 커리어를 꿈꾸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발을 담근 지 가 벌써 18년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미국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많은 변 화를 겪었고 때로는 기뻤고 때로는 힘들었다. 20년 전 유학생으로 와서 MBA 프로그램 을 마치고 취업비자를 받아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취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좌충우돌하며 버텨낸 것은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였을 것이다. 지난날의 나의 경험이 지금 막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길 바라며 매달 작은 에피소드 하나씩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 Seunghee Chung 영문 Taylor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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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01. 점심 언제 먹어요?

2001년 1월! 드디어 그렇게 기

다렸던 워너 브라더스 영화사에 서의 인턴십이 시작되었다! 인

턴십만 목이 빠져라 바라보면서 고된 MBA 과정을 견뎌냈다 해

도 과언이 아니니 두근거리는

이 가슴을 어찌할까. 대충 머리 를 굴려봐도 5월 졸업이니 1월

부터 인턴으로 일하면 앞으로 5

개월은 일할 수 있고, 학생 비자 가 만료되고도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 미국 유학생 이 학업을 마친 후 현장 실습이

라는 명목하에 최대 1년까지 관

련 분야의 기업이나 기관에서 일하며 미국 내에 체류하는 것

을 허용하는 제도)로 적어도 1 년은 일할 수 있으니 한국에 돌

아가서도 경력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어깨가 절로 들썩여졌다.

MBA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가

무작위로 맺어준 멘토가 마침 워너 브라더스 영화사의 해외배급부서

을 먹으러 다 같이 나갈 때 다시 부서 사람들을 만나면 밝게 인사도 하

급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고 시작했다.

데 점심시간이 몇 시부터인지 물어보지를 않았네. 뭐 기다리고 있으면

사장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얻은 인턴십 자리였지만 사실 배 아무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하고 단정히 옷을 입고 첫 출

근을 하였다. 상기된 얼굴로 캘리포니아 버뱅크(Burbank)에 있는 본 사에 도착하여 안내 데스크에 짧은 영어로 LMU (Loyola Marymount University) MBA 프로그램에서 온 학생 인턴이라고 나를 소개하니 조 금 있다가 자신이 인턴 담당자라며 디렉터 한 명이 나왔다. 언제 미국 에 왔는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졸업은 언제인지 기본적인 질문을

한 뒤에 인턴십 학점 이수를 위해 일주일에 채워야 하는 시간이 있을 테니 부담 갖지 말고 수업 일정에 맞추어 편한 시간에 왔다가 편한 시 간에 가라고 했다. 매우 친절하게 건네는 말 속에 왠지 모르게 드는 이

상한 거리감은 뭘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인턴으로 있는 몇 달 동안 내가 쓸 자리라며 보여주는 큐브를 보니 조금 전 들었던 이상한 느낌 의 정체를 알겠다. 거의 인적이 없는 미로같이 생긴 사무실 구석에 있

는 책상인데 먼지는 쌓일 대로 쌓여있고 그동안 창고 대용으로 썼는지 정리되지 못한 낡은 서류뭉치들이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이 쌓여 있었다.

순간의 당황함을 뒤로하고 몸 하나 겨우 비집고 들어가 책상 앞에 앉으 니 확실하게 드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아, 내가 여기서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구나. 뜨내기손님 정도로 언제 들고 나는지도 중요하지 않

은 그런 위치구나.’ 그 편견을 어찌 깰 수 있을까 막막했지만 일단 나중

고 확실하게 한 번 더 좋은 인상을 심어 주리라 생각했다. ‘아 참, 그런 부르러 오겠지...’하며 컴퓨터도 켜보고 책상의 먼지도 닦고 하며 기다

리고 있는데 시계는 11시 반을 넘어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미국 사

람들은 원래 점심을 늦게 먹나...?’하는 생각과 함께 몰려오는 허기짐을 달래려 하는데 순간 ‘아, 그렇지. 오늘 첫날이라 부서원들이 다들 내가 여기 있는 걸 잊었나 보다!’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래서 부서 사람

들의 사무실이 있는 복도 쪽으로 가서 복사기도 한 번 만져보고, 비품

을 찾는 척도 해보고 볼펜도 떨어뜨려 줍는 척도 해보았지만 다들 슬쩍 한 번씩 쳐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일 뿐 아무도 같이 점심 먹으러 가자 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화 배급 업무는 주말 극장 상영 후 월요일이 제

일 바쁘다더니 아직 다들 오전 일을 못 마쳤나 보네...’하고 생각하며 다

시 먼지 쌓인 구석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예의 바르게 부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웬걸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도록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배고픔에 요동치는 배를 부여잡고

다시 부서 사람들이 있는 사무실 근처로 가보니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

고 있었다. 다들 자기 책상에서 일하며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간 단히 샐러드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샌드위치를 사다가 먹는 사람도 있 었다. 할 수 없이 오전에 잠시 낯을 익힌 비서 중 제일 친절해 보이는 한 명에게 쭈뼛쭈뼛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에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나 고민을 시작했다.

“저... 점심은 어떻게 먹나요?”

어쨌든 오늘은 인턴 첫날이라 그리 오래 있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담

으니 거기 가서 사 오던지 아니면 이 근처에 조그만 가게들이 여럿 있

당 디렉터는 내가 앉을 책상을 보여주고는 첫날이라 뭘 하겠냐 싶었는 지 총총걸음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빼꼼히 내다보니 업무에 바쁜지

전화 통화에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을 보니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 이라 한 시간 남짓 정도 그때까지만 시간을 때우면 될 것 같았다. 점심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랏(Studio Lot)에 가면 회사 카페테리아가 있

어요. 그중에 아무 데나 가서 투고(To-Go: 한국의 Take-Out을 미국 현 지에서 부르는 말) 해오면 돼요. 아마 지금 이 시간에 제일 빨리 먹을

수 있는 건 타코(Taco: 멕시코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토르티야에 고기,

해물, 채소 등 여러 가지 요리를 싸서 먹는 음식)일거에요. 바로 길 건 35


너에 타코벨(Taco Bell: 타코를 취급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패스트푸드 점)이 있거든요.”

언제 같이 먹냐는 질문이었는데 어디서 점심을 사 오느냐는 질문으로

알아 들었나 보다. 당황한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대수롭지 않

게 설명을 해주고는 다시 자기 일에 몰두하는 비서를 한참을 홀로 멍하 니 서서 쳐다본 뒤에야 나는 타코벨로 향했다. ‘미국에서 맞는 첫 직장 에서의 첫 점심이 값싼 타코벨일 줄이야. 그것도 혼자서 먹는 점심이라

니...’ 두근거리며 시작했던 인턴 근무 첫날은 그렇게 타코벨에서 제일 싼 메뉴를 홀로 시켜 먹으며 저물어 갔다.

아직도 버뱅크 회사 앞에는 그때 혼자 점심을 먹었던 타코벨이 있다. 참 신기한 회사고 신기한 부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워너 브라더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워너 브라더스, NBC Universal 그리고 Viacom까지 이

이 한꺼번에 자리를 비울 경우 급한 용무가 발생할 때 담당자가 없어 문제가 생기기도 할뿐더러 매일 그렇게 한 시간씩 혹은 그 이상의 시

간 동안 자리를 비워가며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는 것이 효율적이 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이것도 최근 들어 밀레니

엄 세대(Millennials: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난 세 대)가 직장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직장인이 대부분 혼자서 점심을 먹는다. 물론 모든 부서 원이 모여 함께 하는 점심이나 해피아워(Happy Hour: 바(Bar)나 레스

토랑에서 미국 직장인들이 이른 저녁에 모여 간단히 술을 마시며 친 목을 도모하는 시간)도 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하던 동료가 이직할 때

나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자축할 때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매일 점심 은 나 홀로 먹는 데스크탑 다이닝이 보통이다.

전체 부서원 혹은 친한 동료들과 매일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서 나가 함 께 먹는 한국 직장인들

곳 미국에서 세 곳의 굵 직한 엔터테인먼트 회사

에서 18년을 일하는 동 안 거의 매일 사무실에

서 참으로 많은 날을 일 하며 홀로 점심을 먹었

다. 언젠가 어떤 한국 기 사에 미국 사람들이 회 사에서 점심을 혼자 먹 는 것이 최근 일부 IT 기

업 위주로 시작되었고

비싼 점심값에 대한 부

담과 경기 침체 이후 기 업의 비용 감소 노력에 따른 것이라고 하며 점 심시간을 아껴 ‘저녁이

있는 삶’을 갖기 위한 것 이라고 분석한 것을 보 았다. 자기의 주관적이

고 개인적인 경험을 일

의 점심 문화와 정해진

“전체 부서원 혹은 친한 동료들과 매일 같은 시간에 사무실에서 나가 함께 먹는 한국 직장인들의 점심 문화와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개인 스케줄에 맞춰 가능한 시간에 나 홀로 먹는 미국 직장인들의 점심 문화. 굳이 좋고 나쁘고를 재고 따져보거나 어떤 심각한 사회문화적 이론의 잣대를 들이대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그냥 서로 다른 것뿐이다. 그저 다름의 차이를 인정해 주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 조직,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첫걸음임을 이때는 깨닫지 못했었다.”

반화하는 것은 편향된

시각으로 흐를 수 있기

시간이 아니라 개인 스 케줄에 맞춰 가능한 시

간에 나 홀로 먹는 미국 직장인들의 점심 문화.

다 같이 같은 시간에 점 심을 먹고 점심시간이

되면 온 사무실이 텅텅

비는 한국 직장의 점심 문화와 점심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이 사무실에

서 자리를 지키며 업무

를 보고 심지어 워킹 런

치(Working Lunch)라고 하여 아예 점심을 시켜 먹으며 모여서 몇 시간

씩 회의를 하는 것도 다 반사인 미국 직장의 점 심 문화. 전자는 전체주

의에 기반을 두지만 사

람 냄새 나는 끈끈한 정 이 있는 문화이고, 후자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책상에 앉아서 먹는 데스크

는 개인주의적이지만 내 시간을 내가 필요할 때 쓰겠다는 실용주의적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내 경험상으로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고 따져보거나 어떤 심각한 사회문화적 이론의 잣대를 들이대 볼 필요

탑 다이닝(Desktop Dining)이 IT 기업을 중심으로, 그것도 최근 시작

있다. 내게는 이것이 서구의 개인주의와 실용주의가 합쳐져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주어진 업무를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는 선에서 자기 페이스에 맞게 조절해서 일하는 미국 직장인들은 따로

정해진 점심시간이 없다. 그야말로 점심을 먹을 때가 점심시간인 셈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굳이 좋고 나쁘고를 재 는 없는 것 같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그냥 서로 다른 것뿐이다. 그저 다

름의 차이를 인정해 주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한 조직, 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첫걸음임을 이때는 깨닫지 못했었다.

이다. 물론 점심시간을 아끼면 저녁 시간을 벌 수 있기는 하지만 시간

진정 세상은 넓고 넓은 곳이었다. 대한민국이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지 남아 일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특히 사기업에서는 더하다. (한

에 와서도 의식주의 차이로 인한 문화적 충격이 없었던 나는 대신 미국

제로 일하는 직장인이 아니고서는 쌓여있는 업무 때문에 저녁 늦게까 국만 야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도 점심은 거의 늘 책상

에서 일하며 먹는다. 회사 카페테리아나 근처 식당에 함께 가서 점심 을 사오는 경우는 있지만, 부서원들끼리 매일 시간을 내서 함께 점심 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딱히 정해진 점심시간이 없기에 모든 부서원 36

근대화가 한창일 때 태어난 덕분에 꽤 서구화된 문화 속에서 자라 미국 직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점심 문화를 접하고 처음으로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외롭게 홀로 타코벨에서 첫날 점심을 먹

던 그 날엔 앞으로 어떤 더 많은 문화적 충격이 직장에서 나를 기다리 고 있는지 정말 미처 몰랐었다.


My Journey in Corporate America by Seunghee Chung, Former VP at Viacom Media Networks:

Climbing The Corporate Ladder of Success What you are good at doesn’t necessarily mean that is something you’d like to die for. Possessing an exceptional skill at something does not always translate to having a real passion in itself: workplace is no exception. In another words, doesn’t everyone share a mutual desire to find a job that they’re good at, which actually happens to perfectly parallel their actual interests? Exactly 18 years into this fantasy-like career in the entertainment industry, I’ve realized that no matter how demanding or tiring the work may be, doing something I love somehow creates more energy to be constantly fueled by. However, I must admit that I’ve also had my own fair share of hardships throughout my career, but those were eventually lulled by frequent joyful moments that netted out the negatives. But thanks in part to having a job that I truly enjoyed, I was able to endure this 20-year-old journey, where I started out as an international MBA student who stepped into a foreign country with limited English that wasn’t even my native language. I hope that my humble narrative of the past days will encourage and inspire the minds of young working professionals who are currently in the nascent stage of building their careers within the mainstream society today, and I am happy to openly share my episodic memories on a monthly basis for them.

01. So, When’s Lunch?

It was January 2001! The exact day that I’ve counted down to

was finally here, to start my first day of internship at Warner Bros. Pictures. It is not an exaggeration to say that I have even endured

the intensive MBA courses by looking forward to the internship only. The students such as myself who were graduating from

the MBA program in the spring semester (May), could work for

an internship starting in January, which allowed me to work for

another 5 months. By my own reckoning, I realized that even if my student visa expires upon graduation, there is an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 Temporary employment directly related to an F-1 student’s major area of study) that extends working period

to at least one year with a company -- needless to say, I was getting very excited at these opportunities aligning perfectly after one another. In retrospect, I was very lucky to get an internship

because my MBA program randomly assigned me with a mentor

who happened to be the president of the International Theatrical Distribution department at Warner Bros. Pictures -- but to be

frank, I was not fully aware of the role of distribution department at the time of my start.

37


Repressing all my nervous thoughts for now, I decided to put my

was working, touched the copy machine, pretended to search

to toe for my first day in the corporate world. Upon arriving at

attention -- but rest of the workers only returned simple smiles

best effort in every given opportunity and dressed up nicely head the headquarters in Burbank, California, I walked up to the front desk and introduced myself as the student intern from the LMU’s

(Loyola Marymount University) MBA program, using my then-

limited English. Not long after, I was greeted by a woman who proceeded to introduce herself as the Director for the department.

After quickly running through the most basic questions ranging from when I came to the U.S., where I came from, and when I

graduate, she let me know that I can also work flexible hours

during the week to accommodate my class schedule. Her words

were spoken in a very polite tone -- too much of a polite tone that somehow drew a strange distance from me. After going through a quick tour around the office with continuous mazes of adjacent

cubicles after one another, I was finally shown to my intern cubicle; my confusion from earlier was immediately solved by the sight of all the collected

for props, and intentionally dropped my pen to seek for their with no invitation to a meal. I came back to my dusty cubicle,

thinking to myself, ‘I guess since movie distribution work is

usually the busiest on Mondays after the screening on weekends, so maybe everyone has not finished their work yet...’ The clock

was approaching almost 2PM, and I was expecting any moment

to be called to lunch by my team. Being caught up with the overwhelming hunger, I finally went back to the area where my

team worked in, but then I slowly started to witness a common

behavior: everyone was having lunch at their desks. They were eating simple meals like salad, or even store-bought sandwiches. Confused and lost, I decided to muster enough courage to ask

one of the friendliest faces among EA’s (Executive Assistants) that I’ve remembered from the morning.

“So... How should I eat lunch?” I asked, as I’d known she would have more details.

“Well, there’s a cafeteria in

dust among the old over-

the Warner Bros. Studio Lot,

stacked piles of papers high

or other small places around

enough to reach the ceiling.

the area and get the food to-

I crouched behind my own

go,” said the once-friendly

embarrassment and then

faced EA. “Maybe the fastest

thought to myself, ‘Right,

option would be tacos, and

I'm not that important

there’s a Taco Bell across the

here.’ Evidently, there was

street.” She then went back

a shade of prejudice that I

to her busy tasks after hastily

did not know how to break,

listing the options without a

but I knew that I should

backward glance.

instead channel all my focus

She definitely misinterpreted

into worrying about what I

my question where I actually

should do right now: after all, it was only my first day.

As far as it goes for an ordinary “first day” as an intern, it did not

make sense for me to stay that late. Assuming that I wouldn’t have much on my plate for my first day, the Director had already been gone for awhile -- only to be found on a conference call

every time I coyly took a peek at her desk. I decided to pass time until it was time for lunch, as I knew that eventually my team

would call me to go eat lunch altogether. Besides, I was planning to use this “team” lunch as the perfect opportunity to officially introduce myself to the team and make a solid first impression.

It was still 11:30AM, when I was watching the time moving at a glacial pace and waiting for the clock to go past 12:30PM --

implied asking when we are

all eating together as a team, not asking where the lunch options are. Standing there embarrassed and dumbfounded for awhile,

I eventually headed to Taco Bell. I had somehow thought that my lunch at a Fortune 500 company would include a bit more luxurious, and to be honest, a more welcoming lunch.

‘Who would’ve thought my very first lunch at my very first job

in US would be a cheap fast food... moreover, eating by myself,’

I thought to myself as I’ve quickly finished my lonely meal -my first day of work that initially started with a heart-pounding

excitement ultimately led to a rather hollow yet unforgettable closure.

being unaware of my surroundings, I thought that this delay

To this day, there is still that Taco Bell in front of the Burbank

late. My growing hunger was soon joined by paranoia, while I

Warner Brothers as a strange company with a strange team, but

could only be explained by assuming that Americans eat lunch thought to myself, ‘Since today’s my first day, maybe my team

had forgotten and left me behind!’ Hoping to be reminded of my presence, I walked back and forth to the hallways where my team 38

office where I had my first lunch alone. I had then singled out

it turns out that this company was not the only exception. While

working for major entertainment companies in the US such as Warner Bros., NBC Universal and Viacom for 18 years, I myself


had lunch at my office almost everyday also. I remember once

department everyday and leave the office empty at the same

lunch alone at their desks originated from IT companies recently,

individual schedules and even have “Working Lunches”, where

reading a Korean article on how the practice of Americans eating

due to the burdening of rising lunch prices and in efforts to reduce the company’s costs after the recession -- this article drew an analysis that these workers make a choice to skip their lunch in order to allocate that free time to working more, thus allowing them to leave work earlier.

time, American workers eat lunch according to their own workers gather together a task force in a conference room

and bring in food. This difference in Korean lunch practice can be explained by its collectivism culture, where westerns have

adopted a more individualistic approach. However, I don’t feel

that I would need some kind of social theories to understand the difference and it does

not seem even necessary

However, I can confidently say that the “Desktop Dining”, which is defined

as sitting at the desk

and eating, does not

seem to be rooted solely

from the IT industry, at

“While Korean workers eat lunch together as the whole department everyday and leave the office empty at the same time, American workers eat lunch according to their own individual schedules. These

least not based on my

are mere differences in two cultures, and at this time,

seems to me that this is

I was not a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se two.

experience. Rather, it

the phenomenon resulted from the combination of individualism and

pragmatism. Americans

who work at a self-paced job only with a given

Learning to understand and accept it with a more open mind was the first step to becoming a part of an organization, a member of society: this was only the beginning to the series of revelations that corporate

deadline, actually do not have an official, fixed

world has presented to me.”

schedule for their meals --

to look back on which is

better or worse -- these are mere differences in two cultures, and at this time, I was not able to distinguish between these two.

Learning to understand

and accept it with a more open mind was the first step to becoming a part

of an organization, a member of society: this

was only the beginning to

the series of revelations that corporate world has presented to me.

I was born in the height

it is lunch time whenever they decide they want to eat. Forgoing

of modernization movement in South Korea -- I grew up in a

many of the workers might still need to stay late until evening due

that I was immune to almost any culture shocks related to food

lunch can save more time to finish the work in time; however, to demanding work, especially in the private sector. Even when

they do eat lunch, it is often done at their desks. They may go to

the company’s cafeteria or a nearby restaurant occasionally, but it is very rare to eat out together as a team almost everyday. It is also not efficient for everyone in the team to leave

fairly westernized environment, allowing me to naively assume and shelter, even in America. The loneliness I’ve felt while eating

Taco Bell lunch alone was only the starting point that opened a network of hidden surprises soon to be unraveled followed by an untold journey left to be traveled.

altogether, as there is no one else to backfill for

the team’s vacancy when an emergency firedrill occurs -- nonetheless, there seems to be a slow

pace of paradigm shift as millennials begin to

enter the workplace, but many of them still have lunch alone.

Of course, there are occasional team lunches

or Happy Hours to celebrate certain events or projects, that invite all members of the

entire department. Other than these singled out anomalies, the rest of everyday lunches

are presumed to be normal. Contrary to the

well-known Korean corporate culture, where the workers eat lunch together as the whole

39


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인디언 아일랜드 부부, 노시화 & 팀 쉐이

그들만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 6년만의 결혼식으로 꽃을 피우다 지난 11월 5일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보호구역인 메인주 인디언 아일랜드 (Penobscot)에서 조금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뉴욕에서 무용수로 활 동했고 현재는 메인주 뱅고시에서 탱고와 태극권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45세 의 한인 노시화씨이고 신랑은 인디언 인권보호자이자 돌 조각 아티스트인 62 세의 팀 쉐이(Tim Shay)씨이다. 이들에겐 인디언 이름인 ‘천둥 노래’, 한국 이름 ‘환희’인 6세 아들 찰리가 있다. 부부의 적지 않은 나이 차이도 놀랍지만, 더 흥 미로운 사실은 남편 팀이 이미 2번 결혼했던 경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자녀, 손주까지 있다는거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국인 여성이 어떤 인연으로 이런 ‘범 상치 않은’ 경력의 인디언 남성과 사랑에 빠져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일 까? 한국의 종편 TV 조선의 프로그램 <사랑은 아무나 하나> 제작진은 결혼식 1주일 전부터 이들 부부의 결혼 준비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도 그들의 감동적인 결혼식을 방송팀과 함께 현장에서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글

40

편집부


만났다. 시화씨는 “당시 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고 게다가 그 사람은 아내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헤어졌다.

노시화의 이야기- 팀은 마음이 넓은 사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4년 후인 2009년. 역시 뉴욕주 업스테이트

에서 열린 티피 세러모니에서였다. 그 기간 큰 변화가 있었다면 팀이 티피(Tipi) 세러모니가 맺어 준 인연- 인디언 텐트에서의 첫 만남

노시화씨 가족이 LA로 이민 온 것은 1987년이다. 3남매의 막내였던 시 화씨는 당시15살. 전형적인 1.5세인 셈이다. 불과 몇천 달러 정도의 돈

을 갖고 미국에 온 가족은 햄버거 가게를 시작했다. 밤낮으로 일에만 몰두하며 10년 정도 사업을 하면서 제법 돈이 모였다. 힘든 미국 생활 에 지쳤던 부모는 고향인 마산에서 숙박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역이민

을 했다. 하지만 이미 UC 어바인을 졸업하고 무용수의 길을 걷고 있던

시화씨는 한국이 아닌 뉴욕으로 왔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퀸즈 서니사

이혼하고 싱글이 된 상태였고, 변화가 없던 것은 시화씨의 여전히 외로 운 뉴욕 생활이었다. 세러모니를 마치고 팀이 시화씨에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다. 시화씨는 많이 놀랐다.

“팀이 거주하는 메인은 세러모니 장소에서 8시간 운전해야 하는 거 리였어요. 저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고요. 집과 반대 방향으로 4시 간을 더 운전해야 하는 수고를 해주겠다는 것이니 나에게 호감이 있 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이드였다. 시화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을 따라 학원을 옮겨 다니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팀은 이후 8시간 이상의 운전을

가 되는 무대는 어디라도 섰다. 그러다가 큰 무대를 앞둔 시점에서 연

수련하고 있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타이치는 두 사람을 엮어 준 주요한

며 무용을 배우고, 밤에는 서빙 등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기회 습 중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회복이 된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몸이 돌 아올 수 없는 상태였다. 전업 댄서의 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시화씨는

생활을 위해 차선을 생각했다. 무용으로 단련된 몸으로 할 수 있는 방 법을 찾다가 타이치(태극권)를 배우고 강습을 시작했다.

무용수의 꿈은 좌절되고, 가족과 친구가 없는 뉴욕에서 강습으로 힘겹

게 살아가며 시화씨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지쳐갔다. “TV에서 한국 드

라마를 볼 때 친구들끼리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내가 직접 겪어보

지도 못한 모습인데도 갑자기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시화씨는 말했다. 그러던 2005년, 시화씨가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참

하며 시화씨를 만나러 뉴욕에 왔다. 공교롭게도 팀 역시 타이치를 매일 고리였다. 무엇보다 시화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팀의 넉넉한 성품이 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웠을 때 인내심을 갖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준 사 람이에요. 내가 보고 싶으면 외국에 가는 시간인 8시간, 10시간을 마 다치 않고 보러 와주었고요. 가진 건 많지 않지만 늘 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고, 당장 어려움에 굽히지 않고 멀리 보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게 잘될 거라며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거죠.”

석한 것이 ‘티피 세러모니’였다. ‘티피 세러모니’는 인디언들의 전통 텐

누구나 자신이 힘든 시기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줄 수

를 하고 차와 담배를 나누는 영적인 의식이다. 태극권을 연마하며 기와

기에 나타났던 사람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삶의 방식 (Way of Life)은

트 가옥인 티피(Tipi) 안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밤새도록 기도와 대화 영적인 에너지의 중요성을 체험하던 시화씨는 티피 세러모니가 준 경

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남편인 팀 쉐이를 처음

있다. 뉴욕에 혼자 살면서 힘들었던 그녀에게 팀은 단순히 ‘적절한’ 시

그녀와 같았다. 이런 그를 보며 시화씨는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41


팀의 이야기 - 시화는 내면이 강한 여자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보호 지역 내 많은 인디언처럼 너무 무미건조하고 순탄해서 삶의 의미를 쉽게 찾지

못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자신이 원하 는 것을 찾고 주류로 나아가 큰 꿈을 펼칠 기회는 적었다. 그들의 조상 은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넓고 크게 생활했었다. 그 조상들이 대륙에 이주한 백인들로부터

그는 2005년의 한 세러모니에서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을 만나 첫눈에

는 삶이 인디언의 운명이었다. 팀은 “어린 시절의 나는 알코올에 의존

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연락처도 없고 다시 만날 기약도

가혹한 탄압을 받은 후 이제는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선택만이 주어지 했고 폭력적이었고 많은 사고를 쳤던 문제아”라고 고백했다. 그는 같 은 마을 인디언 여성과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명의 딸도 낳았다. 하지

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와 아내 모두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다. 결국, 아내는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반했다. 작은 체구에서 강한 기운과 밝은 빛이 나오는 것 같은 그 여인

없었다.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한 뒤 얼마 뒤에 다른 세러모니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왜 시화씨에게 반했냐 는 질문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시화는 정말 아름답고 내면이 강한 여 자였으니까요. 저는 그걸 느꼈어요”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다시 한 명의 자녀를 얻고 나서는 조금 안정을 찾

어린 아들의 부탁- 엄마 아빠 결혼하세요

중년이 된 그는 돌을 조각하는 일에 전념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40

는 것도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태어날

았다. 그는 뉴멕시코에 있는 인디언 아트 스쿨에서 조각을 배웠었다.

대 중반에 티피 세러모니를 접하게 되었다. “인디언이라면 누구나 이 런 종류의 의식을 어려서부터 익히며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

렇지 않습니다. 저는 40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티피 세러모니를 본 적 도 없어요. 뉴멕시코에서 여성이 지도하는 의식에 참석한 뒤 비로소 나

의 근본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모든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도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나무와 물과 땅과 불, 모든 자연이 결국 하 나이고 모든 삶의 근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42

두 사람이 만나고 1년 뒤 시화씨는 임신을 했다. 뉴욕에서 함께 생활하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마을에 제대로 된 거처를 얻기 전, 두 사람은

창고와 마찬가지인 팀의 작업실에서 몇 달을 지냈다. 몸을 눕힐 침대 는 있었지만 조각 중인 돌들이 널려 있고 화장실마저 없는 공간이었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는 임산부 시화씨는 급한 대로 양동이를 사용했

고, 팀은 아침마다 양동이를 갈았다. 그는 “곧 집이 생길 것이니 걱정하

지 말라”고 했고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2주 전에 집을 얻었다. 아들 찰리가 태어났다. 엄마는 아들에게 ‘환희’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고


아빠는 인디언 말로 ‘천둥소

바 없는 인자한 웃음이 저절로

는 한국의 부모에게 알려야 할

판에서 야생화를 따서 부케를

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제

때가 왔다. 시화씨는 보수적인

경상도 부모 밑에서 막내딸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나왔다. 시화씨의 친구들은 들 만들고, 제빵사인 팀의 동생은 웨딩 케이크를 구웠다.

엄마 박덕조 여사는 뉴욕에서

4일 오후 어둠이 깔리자 시화

다. 시화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은 티피 안으로 들어갔다. 주

혼자 사는 딸이 늘 걱정이었 훨씬 많고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인디언 남성의 아이를 가졌 다는 말을 차마 부모에게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부모님이 LA에 있는 큰 오빠 집에 왔을 때, 시화씨는 팀과

어린 찰리를 부모님에게 소개 했다.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딸을 빼닮은 찰리 때

문이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아이까지 있는데 어찌하겠노.

씨 가족과 20여 명의 인디언들 문과 기도 소리가 들리고 북 소리가 흘러나왔고 의식은 12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 참석

자 중 몇 명이 새벽에 나와 물 과 야생 베리와 무스 수육을 챙겨 다시 티피 안으로 들어갔

다. 한 줌씩, 한 모금씩 돌려가 며 먹고 마신다고 한다. 일요

일 오전 결혼식 하객들의 차량 이 센터 안으로 줄을 잇고 들 어올 때까지 세러모니는 계속 되었다. 결혼식 예정시간이 오 후 12시를 한 시간 앞두고서야 사람들은 티피에서 나왔다. 화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셋이서 잘 살아라”고 만 했다. 물론 그

장이 잘 받으라고 신부는 결혼 전날 푹 자야 하는데, 시화씨는 꼬박 밤

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시화의 기대만큼 인디언 마을

향했다. 하지만 의식의 기운을 듬뿍 받은 시화씨의 얼굴은 밝고 활기찼

때 시화씨 부모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화씨의 아버지 에서 찰리는 밝고 건강하게 컸다. 말 그대로 자연을 벗 삼으며 도시의 아이들은 겪어 보지 못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시화씨 부부의 집

에서 찰리를 처음 봤을 때 아이는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반소매 차림 과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 달 전 6살이 된 찰리가 갑자 기 말했다. “엄마 아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인디언들은 아이가 생 기면 결혼식 없이 그냥 평생 사는 경우가 많다. 팀도 정식 결혼식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린 찰리가 결혼이란 개념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시화씨가 몇 번을 물 어봐도 아들의 대답은 늘 “그냥”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의 바람대로 동 거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을 새운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가 준비해 온 한복을 입고 곧장 식장으로 다. 결혼식은 전통 한국식과 전통 인디언식 그리고 현대식이 어울린 종

합 의식이었다. 주례가 축사한 뒤 두 사람은 맞절했고 서로 반지를 교 환한 뒤 부부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서약하는 시화씨의 목

소리가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인디언 주민들이 축가를 했고 이 어 신부 측에선 박덕조씨가 나와서 아리랑을 불렀다. 주례는 인디언들

이 성스럽게 여기는 나뭇잎을 태운 뒤 그 향을 동서남북으로 흩뿌리는 것으로 식을 마무리 지었다. 인디언 전통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 운데 피로연이 벌어졌다. 시화씨는 무대에 나와 흥겹게 춤을 추며 사람 들과 포옹을 했다. 눈물을 보였던 신부는 간데없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 한 표정의 새 신부만이 식장에서 춤을 추었다.

1박 2일의 결혼식 - 한번은 신에게, 한번은 주 정부에게

결혼식 다음 날 - 우리 가족 정말 잘 살 거예요

5일 해 질 녘에 끝났다.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토요일 진행된 티피

을 보여주며 산책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 다음 날 아침을 보냈다. 카누

노시화와 팀 쉐이의 결혼식은 토요일인 11월 4일 해 질 녘에 시작해서 세러모니는 ‘신에게 드리는 결혼 신고’이며 일요일 결혼식은 ‘합법적으

로 부부가 되었음을 주 정부에 신고’한 것이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결 혼식이 열린 장소는 마을회관 격인 ‘니베준(Nibezun) 센터’ 내 마당과

마굿간이었다 (원래 야외 결혼식을 계획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실내 로 옮겼다). 팀과 인디언 동료들은 결혼식에 앞서 센터 마당에 5m 기 둥 12개를 박고 천을 둘러 티피를 설치했다.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불 을 지피기 위한 장작은 팀이 이미 며칠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했다. 박 덕조씨도 도착해 딸과 함께 잔치 음식을 준비했다. 인디언들이 즐기는

무스(큰 사슴) 고기와 야생 칠면조 고기가 들어간 잡채와 만둣국과 양 배추 김치를 만들었다. 딸의 결혼식 음식을 만드는 친정엄마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했지만, 손자를 볼 때마다 여느 할머니와 다를

부부는 니부젠 센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촬영팀에게 마을 이곳저곳

를 타고 강을 건너가 인디언 아일랜드 안쪽에 있는 자신들의 땅을 보여 주었고, 팀의 조각품이 전시된 페노스콥 리버 공원을 산책했다. 시화씨

는 티피 세러모니에서 “나무와 물, 땅, 불 모든 신에게 우리 가족의 건

강과 행복을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팀은 니부젠 센터 장으로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인디언 젊은이들이 없게 하도록 여생을

인디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부부의 가

장 큰 헌신의 대상은 아들 찰리이다. 나이 많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 온 아버지로서 팀은 이제 아들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큰 수입 이 없는 그가 벌써 아들 통장에 1만5천 달러의 돈을 저축해놓았다. 한

푼이라도 생기면 모두 아들을 위해 모으는 것이다. 1주일간의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부부는 강변 오솔길을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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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그림 그리는 것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중단한 적이 없는 것뿐이에요.”

Nina Subin

스튜디오 탐방 시리즈 네 번째 이야기

열려 있는 마음과 지적인 성찰, 전통에 대한 향수의 작품들 배소현 작가 글 Won Young Park 정리 44

편집부


배소현 작가가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보스턴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다. 레즈비언 커플이 그녀의 그림을 1,500달러에 샀다. 얼마 후 한인 부부 가 자녀 2명과 함께 초상화를 의뢰했다. 작가는 4명을 그려주고 1,000달러를 받았다. 그렇게 모은 2,500달러로 그는 책 몇 권과 그림 도구만 가지고 뉴욕 으로 왔다. 29세가 되던 1997년이었다. 작가는 그 돈의 절반으로 첼시 26가 에 있는 건물 7층에 스튜디오를 얻었고 나머지 돈으로 Upper East에 아주 작 은 방 한 칸을 구했다. 기자가 찾은 스튜디오가 바로 그곳이다. 작가는 그곳에 서 작업을 한 지난 20년 동안 많은 그림을 그렸고, 수많은 전시회를 했으며,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 현재 대표적인 재외 한인 미술인으로 여전히 왕 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기자가 만난 어떤 예술가보다 지적인 사람이었고 무척이나 흥미로운 퍼스낼리티를 가진 존재였다. 이번 호 스튜디 오 탐방에서는 첼시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소현 작가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SoHyun Bae, Untitled (Nature of Water 1), 2015, rice-paper and pure pigment on canvas, 72 x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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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 서교동에서 살았던 작

가는 8살 나이에 캘리포니아에 왔고 그 후에 오하이오에서 줄곧 살았다. 가족 이

민이었다. 아버지 배종우 씨는 KBS 편성 과 PD로 근무하다가 동아방송 개국과 함 께 뉴스실로 옮겨 편성부장까지 지낸 한

국 방송계 1세대였다. 배종우 씨가 방송 을 그만두고 아직 어린 자녀들과 미국에

온 것은 박정희 독재 시대 언론 탄압의 결 과다. 당시 유신 정권은 정권에 비판적이

었던 동아일보를 옥죄기 위해 광고주들 을 위협해 신문에 광고를 끊어버렸고 동 아일보는 이에 항거해서 광고가 없는 백 SoHyun Bae, Jasper Lake II, 2014, rice-paper and pure pigmetn on canvas, 72 x 108 inches

SoHyun Bae, Egg Woman II, 2003, rice-paper and pure pigment on canvas, 81 x 60 inches Asian Art Museum of SF-installation

지 신문을 발행했다. 나이 든 세대는 기억

하는 동아일보 광고사태다. 당시 동아방 송도 광고가 중단되었고 많은 해직 기자

들이 생겼다. 배종우 씨는 천직이던 기자

직과 직장을 그만두었고 유신독재의 나 라 한국을 떠나 미국에 왔다. 작가는 후배 들에게 존경받던 언론인으로서의 아버지 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딸이 원하는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자유를 주었던 자상 한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RISD 시절을 작가는 무척 즐겁게 회상했 다. 젊었고, 독립했고, 재능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늘 원하던 미술 대학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으며 오직 그림에 몰두했다. 4 학년 시절은 특히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 억을 주었다. 학교에서 '유러피언 어너스

“그림 그리는 것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중단한 적이

프로그램'으로 20명의 학생을 선발해 경

없는 것뿐이에요”

비를 전액 제공하며 이태리 로마에서 지

낼 기회를 제공했다. 작가는 로마와 이태

어떻게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냐는, 작가들을 만나서 흔히 던지게 되는

리 전역은 물론 유로 열차로 유럽 각국을

질문에 대한 배소현 작가의 대답이었다. 그리고서 오히려 질문했다.

여행했다. “우리가 한 일은 그저 스케치북 을 들고 나가 그 유명한 예술 명소를 찾아

“아이가 있어요? 지금 몇 살이에요? 아이가 어렸을 때 그림을 늘 그리

다니며 그림을 그렸을 뿐”인 꿈같은 졸업반 1년이었다.

지 궁금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졸업 후엔 곧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건축과 디자인 등 졸업

작가의 말은 정확히 맞았다. 기자의 아이는 어릴 때 늘 뭔가를 그렸지

직 회화에만 관심이 있었다. 회화를 전공한 대학졸업생 화가에게 당장

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림을 안 그리기 시작했죠? 왜 그런

만 조금 나이가 들면서 그리기를 멈췄다. 그리고 궁금하다 생각해 본적

조차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 렸을 때부터 그려온 그림을 지금도 그리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그런

후 취업이 보장되는 실용적인 전공이 유명하던 대학이지만 그녀는 오

먹고 살길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빙일을 하며 일단 ‘생존 모드' 에 들어갔다.

차이였다. 물론 오직 그림만을 그렸던 것은 아니고 여느 아이들처럼 피

“부모님은 막내딸이 대학 졸업하고 웨이트리스 한다고 크게 걱정했지

히 그림이 가장 좋았고 대학을 결정할 시기가 되어서도 아트 스쿨외에

아요. 제가 서빙 일에 소질이 있는지 팁도 꽤 많이 받아서 생활은 유지

아노와 바이올린, 배구와 농구 등 음악 활동과 운동을 했다. 다만 여전 다른 학교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녀는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 인(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RISD)에 전액 장학금으로 진학했 다. 학교 자체의 명성도 높았지만,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살아온 그 녀는 조금 먼 곳으로 가서 공부하고 혼자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46

만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어요. 예술 지망생들은 누구나 겪는 과정이잖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가 보스턴의 한 아트 갤러리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보스턴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거죠. 갤러리에서 풀타임으로 일하 면서 저녁과 주말엔 그림을 그렸어요.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대학원 준비를 했고 제가 원했던 보스턴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SoHyun Bae, A Woman of Josun Dynasty Colossal Head I, 1998, charcoal and pure pigment on canvas, 81 x 81 inches

보스턴 대학엔 ‘지난 50년간 추상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작가는 우선 첫 번째 궁금증에 대해선 “크리스천이라면 유대교에 대한

있었다. 부연하면 작가가 보스턴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미술을 더 심도

는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한국 기

평가되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미술가 존 워커(John Walker) 교수가 있게 공부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작가가 “그 세대에서 가장 훌륭한 화 가”라고 생각하는 존 워커의 지도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기

대대로 워커 교수는 놀라울 정도로 자상하고 훌륭한 스승이 되어 주었 다. 그런데 대학원 진학 후 그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전환점이 생긴다.

대학원의 필수 교양 과정으로 문학 과목을 수강하던 중 그가 평생의 멘 토로 여기는 작가 엘리 위젤 (Elie Wiesel)을 만난 것이다. 아유슈비츠

생존자인 위젤 교수는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나이츠 ( Nights)를 비롯해 홀로코스트와 유태인의 아이덴티티를 다룬 수십

관심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기독교와 유대교

독교인들에게 위젤 교수의 나이츠를 꼭 읽어 볼 것을 권했다. 솔직히 기자는 종교에 대해서 문외한이다. 한국 뿐 아니라 뉴욕에서도 타 종교 에 대해 지극히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을 주로 보아왔던 터라서 작가의 신앙심이 상당히 열린 사고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공부가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일에 ‘꽂히면’ 하고야 마는 성격의 발현뿐, 미술에 대한 그의 열정이 식은 것 이 아님도 확인할 수 있었다.

권의 책을 발표했고 열정적인 인권 운동으로 8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

작가는 붓을 놓은 적이 없다. 다만 “운이 좋아서 하버드에서 받아줬고

욕구를 느꼈고 그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기

받아들였다. 영어로 대답을 한 작가는 인터뷰 도중 럭키 (Lucky)라는

다. 작가는 그를 통해 접한 유대 신비주의를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은 로 결심한다.

이 부분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동시에 일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크리 스천인 그가 왜 유대 신비주의에 그토록 매료되어 대학원 공부까지 따 로 했을까? 화가인 그가 당시엔 미술에 대한 전념을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인가? 하바드가 종교 철학 분야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서 진학했다는 것도 어찌 보면 기막힌 말이다. 하버드가 가고 싶다고 맘대로 갈 수 있

는 학교인가? 계속 대학원 과정을 이어 갈 수 있는 재정 형편은 충분히 되었던 것인가?

전액 장학금을 주었다”라는 말 만큼은 사실이 아닌 겸손의 표현으로 표현을 자주 썼다. ‘럭키 해서’ 유수의 대학과 대학원 모두 전액 장학금

을 받았고, 대학 시절 불과 20명만 선정되는 유럽 연수 기회도 받았으 며,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필요한 시기마다 각종 그랜트를 받았다는 것

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재능과 학업 성적 그리고 작 품의 수준을 인정받은 결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오랜 기

간의 학업과 창작 과정을 마친 작가는 1997년 뉴욕에 왔다. 작가로서 제대로 링에 오른 셈이다. 그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파트 타임으로 일해서 돈을 벌며 첼시 스튜디오에서 작업에만 몰두했다. 옷과 장신구 에 전혀 관심이 없고, 쇼핑하지 않고, 심지어 머리도 직접 자를 정도로 작가는 일반 여성들의 관심사에 무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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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첫 전시회를 한다. 쥴리아 슈나벨 등 수

회를 가졌을 때 관객들은 어릴 때 떠나온 한국에 대한 무의식적인 향수

러리스트 마리오 디아코노(Mario Diacono)의 보스턴 갤러리에 초

발했다고 한다.

많은 유명 화가들의 초기 작품들을 소개했던 이태리 출신의 거물 갤 대를 받은 것이다. 마리오 디아코노는 이후에도 작가의 그림을 계속

가 짙게 배어 있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피는 못 속여”라는 감탄을 연

후원하며 2011년 뉴욕의 ‘강 콜렉션’에서 열린 ‘서브리미널 아이콘

물론 작가의 작품들이 한국의 전통 정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

Context)’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기도 했다.

고 종교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작가의 그림들에는 이런

스(Subliminal Icons: SoHyun Bae and Traditional Korean Art In

2년 후엔 첼시의 스코토(Skoto) 갤러리에서 두 번째 전시회를 한다. 최 고 수준의 현대 흑인 아티스트들 작품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스코토 갤러리 전시가 작가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가 언제나 아프리칸, 즉 미국의 흑인 작가들이 아닌 아프리카 작가들

다. 이미 설명했지만, 그는 세계적인 추상화의 거장에게 교육을 받았

요소들이 골고루 드러난다. ‘Jasper Lake’, ‘So Wang Mo’s Garden’, ‘Nature of Water’ 등의 작품에선 도교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 모든

것을 열려 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화가로서 뿐만이 아닌 한 인 간으로서의 그의 태도다.

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인 작가 들이 인종과 젠더, 장르에 대해 자신을 제약하는 경향이 강했던 반면 흑인 작가들은 훨씬 자유롭

고 경계가 없는 그림들을 그리기 때문”이라고 설 명했다.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까지 작가의 대표

작은 ‘조선 여인들을 위한 송시 ( An Ode to the

Women of Josun Dynasty )’ 시리즈다. 기형적 으로 큰 여인의 머리가 화폭을 가득 채우는 이 시 리즈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흥미롭게도 그가 어

린 시절부터 판소리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흥부 전을 특히 좋아했던 작가는 조선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민속화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놀 랍게도 그 시대 일반 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묘

사한 그림이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작가는 그래

서 여염집 여성과 기생과 귀부인들의 이미지를

모두 담은 자신만의 조선 여인상들을 창조했다. ‘한’이라는 정서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애잔하지

만 강렬한 이미지의 ‘큰 머리 여인’들이었다. 그 여인 중엔 심청도 있었고 위안부 여성들도 있었

다. 위안부 여성을 그린 것은 꼭 정치적인 의미

를 전하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는 “작가 중에서 는 직접 정치적인 메시지를 자기 작품에 담는 경

우도 있지만, 그것이 예술의 목적과 의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예술이라는 이유로 정

치를 굳이 외면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의견을

SoHyun Bae, So Wang Mo's Garden, 2009, pure pigment on canvas, 81 x 81 inches

밝혔다.

전통을 소재로 한 작가의 작품은 보자기에 한지를 덧씌워 작업한 ‘보자

왜 그림을 그리고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작가는 종교적인 함의를 담

자신의 어머니가 가장 그리워한 것이 따듯한 한국의 전통 온돌방이었

받은 것과 같아서 축복이자 저주다. 그냥 숨 쉬는 것이 자연스러운 행

기 온돌’ 시리즈로 이어진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 온 후

기 때문이다. 불로 데운 구들방 바닥을 한지로 도배한 이미지를 차용했 으며 보자기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은 “폴 클리, 몬드리안 등의 작품에 서 보이는 기하학적인 문양을 평범한 조선의 여인이 수놓은 보자기 속

에 볼 수 있지 않으냐”는 아이디어였다. 샌프란시스코 뮤지엄에 영구 전시된 ‘계란 여인’ 역시 작가가 한국에 있던 어린 시절, 집마다 찾아다

니며 계란을 팔던 낡은 한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그 린 작품이다. 2007년 뉴욕 12인의 작가로 선정되어 예술의 전당 전시 48

은 ‘Calling(부름)’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자신에게 작가의 삶은 부름을 위여서 평생 그림 그리는 것 외엔 다른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교육과 훈련으로 작가가 될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고 결국 작가로 태 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이 붓을 놓는 순간 비록 육체는 살아 있을

지 모르지만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비장한 선언을 배소현 작가 는 담담하게 웃으며 한 셈이다.


SoHyun Bae, Milk Maid 2009, rice-paper and pure pigment on canvas, 100 x 70 cm

첼시의 스튜디오에서 배소현 작가가 이전 작품들을 골라 보여주고 있다

* 배소현 작가

8세에 이민 와서 오하이오주에서 자랐다. 1990년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에서 학사(B.F.A)를, 1994년 보스턴 대학에 서 석사 (M.F.A) 과정을 했다. 1997년 하버 드 대학에서 종교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 았다. 2007년 John Simon Guggenheim Memorial Foundation Fellowship을 비 롯해 New York Foundation for the Arts Fellowship, Pollock-Krasner Foundation, Inc. Grant, Fellowship at The Corporation of Yaddo,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Fellowship 등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은 The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The Peabody Archaeological Museum at Harvard University, The Museum of Modern Art in Finland에 영구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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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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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작품 혹은 상품 그 중심에 서다

뉴욕에서 배우고 활동하다가 대구에서 옷을 만드는

J WOO 김재우 디자이너 글 손시현 영문 Taylor Lee 정리

편집부

인스턴트 음식은 맛있고 편리하다. 패션 역 시 빠른 생산과정과 소비과정이 반복되는 인스턴트식 패션이 시장을 장악했다. 이지 앤 페스트의 시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음 식의 건강 성분표를 따지며, 장인의 손길이 담긴 명품에 열광한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 하는 패션계일지라도 분명 자신만의 패션 철학을 고수하는 디자이너들이 있기에 우 리는 페스트 폭풍에 휩쓸려가지 않고 하이 패션을 맛볼 수 있다. 여기, 심플한 듯 보이 지만 신체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구조적 디 자인으로 전혀 단조롭지 않은 매력적인 옷 이 있다. 자신의 이름을 건 여성복 브랜드 J WOO의 김재우 디자이너. 대구 출신 디자 이너임에도 세계 속 치열한 패션계에서 우 뚝 설 수 있었던 그만의 스토리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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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시다가 대구에서 제이 우 디자인드 바이 재

우킴(J WOO Designed By Jaewoo Kim : J WOO)를 론칭하게 되기까 지의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대구 밀라노 프로젝트가 한창이던 시절 패션을 시작했죠. 그 후, FIT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패턴 메이커와 디자이너로 활동했어요. 좋은 직업이었지만 제 이름을 건 브랜드에 대한 열망에 과감하게 고 향으로 돌아왔죠. 그렇게 2011년 귀국해서 여성복 브랜드 J WOO 를 론칭하게 됐습니다.” 패턴 메이커로서의 경력이 디자이너 활동에 어떤 도움이 되셨나요?

“디자이너가 패턴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죠. 디 자인을 구상한 후 옷이 실물로 제작되기까지는 꼭 필요한 과정이 바 로 평면 패턴 제작 과정입니다. 건축으로 치면 설계도 같은 것이죠. 아무리 멋진 건물을 그려도 설계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완성 된 건물이 쉽게 무너지거나 처음의 의도와는 결과가 다르겠죠?” “그래서 저는 제 디자인의 패턴 작업을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아요. 제 디자인은 제가 가장 잘 현실화 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J WOO의 옷들은 겉으로는 간결하고 심플해 보이지만, 파고들면 그 리 간단한 옷은 아니에요. 디테일을 살린 구조적인 디자인이 많습니 다. 신체에 대한 이해 없이 트렌드만 넣어 인스턴트식으로 찍어 내 는 디자인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언제나 기본에 충실히 하고 자 합니다.” J WOO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떤 브랜드로 설명이 될까요?

“30대를 메인 타겟으로 하는 J WOO는 모던미의 감성을 자극하는 디자이너 캐릭터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마니아층을 집중적으로 공 략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단과 봉제 과정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고 급화된 퀄리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생산 단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비싼 옷을 쉽게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많이는 없어요. 특히나 한국 패션 시장은 더 그래서 아무래도 타겟 의 범위가 좁은 편이에요. 또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국내에서 활동 52

을 시작하기에는 유통 구조상의 문제가 많아요. 그래서 지금은 주로 해외 활동을 하고 있어요. 현재 J WOO의 가장 큰 마켓은 중국 시장 입니다. 그 외에도 미국, 그리스, 이탈리아, 일본, 이집트, 레바논 등 에 편집매장이 입점해있습니다.” 나만의 패션 철학을 소개해 주시죠.

“저는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입기에 앞서 옷도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옷장에 보관되는 옷이 아닌, 거실에 전시되 는 옷을 만들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만큼 아트적인 요소에 많이 치중했어요. 제 초창기 디자인을 본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입고 다 녀?”’ 라고 할 정도였죠. 그렇지만 이제는 디자인적으로 분산된 포인트를 하나로 집중시킨다 거나 아예 포인트를 숨겨놔요. 그렇게 디자인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욕심을 조금씩 버리니 판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고요. 막상 제 옷이 더 많이 입혀질수록 좋았어요. (웃음) 그러면서 자연스레 ‘옷 은 상품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 패션 철학까지 바뀌게 됐어요.” JWOO의 세컨드브랜드 JWOOC 소개 좀 해주시죠.

“J WOO C는 제이우 커머셜(J WOO COMMERCIAL)의 약자에 요. J WOO의 높은 가격대를 커버하기 위해 만든 커머셜 라인이죠. J WOO가 30대를 메인 타겟으로 두고 젊은 40대까지 타겟팅 했다 면, J WOO C는 30대를 포함한 20대까지도 선호할 수 있는 라인이 에요.” “요즘 30대들은 점점 더 스트릿 웨어를 선호하는데, 정작 그들이 입 기에 적당한 스트릿 웨어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으로 20대 가 즐겨 입는 스트릿 웨어를 입곤 하는데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약간 민망할 때도 있죠. 그래서 한층 차분하면서도 멋이 숨어있는 ‘소심 한 30대를 위한 스트릿 웨어’ 라는 컨셉으로 ‘As I real 30(서른 즈음 에)’ 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어요. 처음부터 J WOO C는 상업성에 목 적을 두고 계획한 라인이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대와 함께 가볍고 재 미있는 컨셉으로 접근했습니다.”


J WOO C, 국내에서도 만날 수 있나요?

“J WOO C 라인은 국내 마켓에도 입점할 수 있도록 마진을 대폭 줄 여서 판매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J WOO C 라인을 섞어서 해외 페어를 나갔는데, 반응이 꽤 괜찮아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요. 해외 반응이 안 좋았으면 국내에 풀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는 데, 아직 해외에서 J WOO C의 가격대가 안정해졌기 때문에 해외 소매가와 국내랑 비교했을 때 가격대가 차이가 나버리면 해외 바이 어들의 입장이 곤란해지니까요. 여러 가지 실질적인 문제들 때문에 국내 시장에서는 소개할지는 아직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J WOO C 해외 반응이 궁금합니다.

“J WOO의 커머셜 라인을 만들 때, 처음에는 제작 과정에서 단가를 절감할 수 있는 동대문에서 봉제하려고 했어요. 동대문에서는 봉제 값 팔천 원에서 만원이면 블라우스 한 장 을 만들거든요. 그런데 제가 하는 라인은 3 만 원을 줘야 할 만큼 퀄리티 차이가 엄청 나죠. 원래는 만원짜리로 가려고 했는데, 제가 스스로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 서 마진이 줄더라도 고퀄리티로 방향을 틀 었어요. 그랬더니 J WOO C 라인이 가격 대비 퀄리티가 좋아서 그런지 바이어들의 반응이 참 좋았어요. 기존의 바이어들이 J WOO를 바잉하러 왔다가 J WOO C도 사 가는 거예요. 가격이 워낙 좋으니까요. 또 새로운 바이어들은 J WOO C를 사러 왔다 가 어? 여기 굉장히 질 좋은 옷이 있네? 하 면서 J WOO도 사가게 되는 거죠. 여러 가 지로 세컨드 라인을 만들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업계의 가장 큰 단점이에요. 한국에도 해외 바이어들을 불러서 하 는 전시회가 있긴 있어요. 해외 같은 경우에는 그 나라의 바이어들 이 물건을 사잖아요.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자국의 바이어들이 없 죠. 결국은 백화점식 유통구조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급은 있 는데 수요를 시킬 판매처가 마땅히 없으니 저 같은 디자이너들이 가장 힘든 부분은 재정적인 부분일 거예요. 이게 생각보다 돈이 많 이 들어가거든요. 다행히 어떻게든 회사를 굴려 살아남은 디자이 너들도 있지만, 저와 같은 시기에 시작한 디자이너들은 이제 거의 업계에서 모습을 감춰버렸죠. 근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신진 디자 이너들은 해마다 엄청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처음 시작했던 친구 들이 계속 줄어든다는 게 제일 아쉬워요. 꾸준하게 활동하는 디자 이너가 많이 없다는 점은 전적으로 유지가 잘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 유통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디자이너들이 꾸준히 디 자인하는 게 참 힘들 것 같아요.”

최근 집중하고 있는 일과 활동을 소개해 주 세요.

“최근 쇼룸 르돔(LEDOME)으로 2018 S/S 도쿄 Ambiance 전시회에 참가했어요. 한국 의류 산업 협회 소속의 르돔은 K-Fashion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쇼룸으로, 이번 전시회는 한국의 쇼룸 르돔과 일본의 쇼룸 엠비언스의 콜라보 행사였죠. 사 실 J WOO는 이때까지 일본 바이어가 한 명도 없었어요. 파리에서 도 미국에서도 일본 바이어들을 많이 봤지만, 제 부스 자체에 들어 오지를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제 옷이 수주가 들어왔어요. 일본인들이 면을 좋아해서 그런지 J WOO C의 면 블 라우스 라인을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사실 첫 올더다 보니까 많은 양은 안 되지만 일단은 일본 판매처가 생겼다는데 큰 의미가 있었 죠. ‘드디어 일본을 뚫었다’라는 느낌이었달까요? (웃음)”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로서 한국 패션업계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은?

어려움을 헤치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제가 이번에 파리로 7번째 해외전시를 나갔어요. 그런데 6번째까 지는 에펠탑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이번에 드디어 에펠 탑을 봤어요. 그러니까 이제서야 여유가 좀 생긴 것 같다고 할까요? 올해부터는 꾸준히 유럽과 중국 쪽으로만 활동할 계획입니다. 이렇 게 해외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놓고, 곧 국내에서도 매장을 오 픈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동료라고 생각되는 디자이너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같이 디자인을 고민할 수 있고, 술 한잔하면서 트렌드 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동종업계 관련 친구들이죠. 그 친 구들이 있어 제가 앞으로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오래오래 같이 영차영차 했으면 좋겠어요.”

“개인 디자이너들을 위한 국내의 마켓이 없다는 게 우리나라 패션 53


Fom NYC to Daegu,

Designer Jae Woo Kim Don’t let the monotonous simplicity of an exterior appearance fool you -there is so much complexity left to be explored on the level of structural designs, thus requiring a high understanding of its overall body. Jae Woo Kim, coming from humble beginnings in the city of Daegu, now leads and designs for his own women’s clothing brand called J WOO. S. CASA unfolds the story of how his self-reliance has allowed him to endure this fiercely competitive world of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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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Woo Kim was a student studying at FIT in the US, and eventually launched his own brand called J WOO in Daegu.

“I started fashion when the Daegu Milan project was in the midst of full swing. After I graduated from FIT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 NYC), I then got a job as a pattern maker / designer in the US. It was a rather cushy and decent job, but after a while, I knew that I eventually wanted to create a brand of my own name one day -- I made a bold move and returned to Korea in 2011, and then launched the women's wear brand J WOO.” Experience in pattern making helped his growth as a designer.

“It’s actually considered to be quite a strong advantage for a designer to understand patterns well. The process of making flat patterns is necessary to comprehend to produce the overall design and actual operation of making clothes. As sharp and demanding as this skill is, I never leave my pattern work for my design to anyone else -- the process takes quite a high level of expertise to master. J WOO's clothes may look simple on the outside, but these actually are embedded with structural designs along with intricate details. I cannot create an instant design only filled with the most popular trends, without even understanding the full body of it -- it’s important to never deviate from the basics.” What type of brand is J WOO?

“J WOO mainly is marketed towards women in their 30’s, and we concentrate on centering around the contemporary style that stimulates the sensibility of modernism. In addition, we aim to improve the quality of all aspects, ranging from the sewing process to even fabrics. At this moment, we are doing businesses in the markets overseas, with the largest market in China -- we also have stores in America, Greece, Italy, Egypt, and Lebanon.” Jae Woo Kim’s Fashion Philosophy

“When I first started design work, I thought of clothes as part of my artwork -- I concentrated more on the artistic elements to make others think that these clothes are not only meant to be stored inside the closet, but also artistically attractive enough to be displayed as an artwork in the living room. But after eventually wanting to take a more humble and honest approach nowadays, I decided that I’d rather focus on bringing the distributed design points into one focal area, or even hiding the points and their attached extragavance.”

J WOO’s Second Brand: J WOO C

“Our second brand, J WOO C stands for J WOO COMMERCIAL. It is a commercial line created to provide a more alternative way to wear the J WOO brand, to cover the high prices. If J WOO targets those in their 30’s, J WOO C might be more preferrable to those in their 20’s and also 30’s.” J WOO C in Overseas Market

“Even if the margins are reduced, we still produce the highest quality. We think the buyers have noticed that J WOO C has a relatively low cost without compromising quality. The existing buyers who originally came to buy J WOO end up buying J WOO C -- and vice versa, where those new buyers who come to buy J WOO C end up buying J WOO as they could not resist the original brand. These two brands have basically become complements of each other, and it’s been extremely beneficial so far to have created this second line.” Jae Woo Kim’s Most Recent Projects

“Currently, we’ve recently attended the 2018 S / S Tokyo Ambiance Exhibition as a showroom at LE DOME. This was a showroom event by the Korea Apparel Industry Association, where they aimed to spread more awareness around K-Fashion -- this year, they’ve collaborated Korean showroom LE DOME along with the ambience of Japan showroom.“ Weakness Within Korean Fashion Industry

“The lack of a domestic market for smaller, independent designers is probably the biggest drawback in our Korea’s fashion industry. There certainly is a supply, but unfortunately not enough salespersons to market and find a channel to produce -- this presents an unevitable financial challenge to the designers like me, and it saddens me to think that my friends, whom I’ve started out my career with, have slowly started to leave this industry for this reason.” Future Plans

“Starting this year, we plan to continue to work towards sustaining the market in Europe and China. After laying a foundational base overseas, we hope to have a chance and open a store in Korea very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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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D-100일 기념 특별전 <PASSION. CONNECTED. 100×100> 1월 31일까지 뉴욕한국문화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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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아티스트 100명이 만들어낸 100점의 작품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응원한다! 뉴욕한국문화원(원장 오승제)이 평창동계올림픽 개막 D-100일을 기념해서 시작한 특별전 <Passion. Connected. 100×100>이 1월 31일까지 진행된다. 조 희성 씨가 큐레이팅한 이번 전시는 제23회 평창동계올림픽(2월 9일~2월 25 일) D-100일에 맞춰 시작되었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 중인 아티스트 100 명이 참여, 가장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방법으로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과 평 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전시로 역대 뉴욕한국문화원에서 기획된 전시 중에 는 지난해 11월 14일 열린 오프닝 행사를

가장 큰 규모의 전시였다.

둘러봤다. 오프닝 행사에는 도종환 문화체육부 장관과 이번 전시에 참여한 6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석했으며, 참석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평창올림픽 성공을 바랐던 성대한 행사였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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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참여한 작가들이 자신과 다른 작가들의 헬멧을 감상하고 있다- 김창종

뉴욕한국문화원은 이번 전시를 위하여 총 100명의 아

티스트에게 동계스포츠용 흰색 헬멧을 각각 공통 지급 하고, 여기에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및 패럴림픽의 키

워드(조화, 어울림, 화합, 사람, 열정, 우정, 가능성, 공정,

평화, 전진, 하나, 춤, 집중, 힘, 비상, 균형, 공간, 환희, 드 라마, 축제, 스피드, 도전, 스포츠)에 영감 받은 팝아트 작품 총 100점을 모집하였다.

100명의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100개의 작품은 아티스트 각자의 개성과 창의성이 돋보이는 완성도 높은 개별 작

품이기도 하지만 작가 모두에게 공통으로 지급된 동계스 포츠용 헬멧과 올림픽 키워드 컨셉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하모니는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뉴욕한국문화원 오승제 원장은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 가들은 미술, 디자인, 패션, 건축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를 비롯하여 예술대학에 재학 중인 학

생에 이르기까지 평창동계올림픽과 한국, 세계 평화라 는 키워드에 관심을 가진 다양한 총 100명의 아티스트 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특별전인 만큼 아티스트 한 사람

한 사람의 열정이 모여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낼 것” 이라며“100명의 아티스트가 올림픽이라는 하나의 주

제로 뭉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라고 전시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아울러 오 원장은“내년 2월 9일, 올

림픽 개막 직전까지 약 3개월간 개최되는 이번 전시가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견인차 구실을 할 수 있길 희망한다”고 특별전에 개최 소감을 밝혔다. 58

안드라니크 아로우티우니언(Andranik Aroutiounian), 김미정, 연지 모모 김, 이기섭, 하퍼 윤(Harper Yoon), 가브리엘 시게모토 (Gabriel Shiguemoto)(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방향 순)


조성모, 이가경, 아이리스 문, 김정향, 현수정 (왼쪽부터) - 사진제공 아이리스 문

이번 전시에는 100개의 헬멧 작품 이외에도 뉴욕 패션계에서 활동 중

인 패션디자이너 그룹 D2(Designers 2nd Generation) 소속 디자이너 6명이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및 패럴림픽의 키워드를 주제로 총 10 벌의 의상을 선보인다. 팀으로 전시에 참여한 윤주영&김민희는 전통

혼례복을 모티브로 여성 의류를, 그리고 뉴욕의 대형의류 제조회사

인 Amerex Group에서 패션 프로덕션 매니저 근무하고 있는 조윤희 는 한복을 모티브로 저고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크롭트 재켓 등

초현대적이며 모던한 느낌의 룩을 이번 전시에 소개한다. Christian Siriano의 패션디자이너로 근무한 김수현은 한복과 한글을 모티브로 올림픽 키워드인 열정, 도전, 그리고 전진 등과 같은 단어를 재해석한 모던 룩을, 뉴욕의 32Degrees브랜드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근무한 황

지원은 평창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이 가지고 있는 색인 검정과 흰색을 사용하여 한국적인 미를 살린 액티브웨어(active wear)를 선 보이며 랄프로랜과 토리버치 등 미국 유명 브랜드에서 실습 경험이

많은 이은솔은 올림픽의 키워드 중 하나인‘축제’라는 단어를 주제로 남성복과 여성복 각 1벌씩을 선보인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서는 역대 동계올림픽 개최지의 역사와 문화적 배

경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동계올림픽 포스터를 비롯하여 2018평창동 계올림픽의 미션, 슬로건, 마스코트 등 동계올림픽에 관한 모든 정보

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전시장 내 가상현

실(VR), 게임, 그리고 인스타 그램 포토존 등 평창동계올림픽 체험존 이 마련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사전에 올림픽을 즐길 수 있도록 프로 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자세한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 www.passion.

koreanculture.org를 확인하면 된다. 전시 관람 및 개막행사 관람은 무

료. 뉴욕한국문화원 갤러리 코리아는 월요일-금요일, 오전 9시-5시까 지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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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디자인, 삶의 진보를 맛보다 Kate Kim 인테리어 디자이너 예술이 예술로써의 한계를 허물고 실용을 가미해 생활 깊숙히 침투해 들어오면 서 디자인이라는 삶의 한 코드를 만들어냈다. 흑백텔레비젼이 칼라TV로 재탄생 된 것을 문명의 진보라고 한다면 디자인의 발견은 예술의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일상 속에서 예술을 경험할 수 있 도록 진보를 주도하는 사람, 인테리어 디자이너 Kate Kim씨를 만났다. 글 Young Choi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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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GW bridge에서 허드슨 강을 끼고 북쪽으로 5분 남짓 올라가면 Englewood Cliff라는 타운이 있다. 비교적 고

급 주택들이 즐비하고 주거환경도 뛰어나 한인들이 선호하는 곳으로 알려진 이 동네에 인테리어 디자이너 Kate Kim씨가 살고있다. 아름다운 정원과 수영장을 갖춘 그녀의 집은 6개의 침실이 있는 바이레벨(Bi-Level) 형식으로, 모던하고 심플하면서도 심미적 에센스가 집안 곳곳에 녹아있어 마치 인테리어 쇼룸을 연상케했다. 디자인이란 삶이다.

인터뷰 자리에 앉자마자 서두도 없이 디자인이 무엇이냐 묻는 기자의 질문에 Kate씨는 개념적 정의가 아니라

실용적인 차원의 담백한 답을 제시했다. 아마도 오랜 경험을 통해 얻어진 그녀의 사유이자 신념일 것이다. “디자인이란 삶이죠. 다소 모호한 말 같은데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만일 다이닝 룸에 맞는 식탁을 구입한다

고 가정을 하면 먼저 가족의 수를 생각하고 가족 구성원의 성격을 고려해서 식탁의 배치를 결정합니다. 가령 노 인이 함께 거주하는 가정이라면 식탁의 높이나 의자의 소재 등을 좀 더 따져야 하고, 동선이 용이하도록 특별히 신경을 기울여야겠죠. 또 어린 아이가 있으면 하이체어를 추가해야하고 가급적 식탁의 재질도 친환경적인 소재 로 만들어진 것을 구입하는 것이 좋겠죠. 이렇듯 디자인이란 우리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디 자인은 곧 삶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디자이너의 유년기, 유니크(Unique)했던 아이

그녀는 딸만 셋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무용을 전공한 자매들과는 달리 그녀가 디자이너가 된 이유는 무척 흥미 롭다.

“어릴적 부터 남의 집에 가면 그곳의 공간구성이나 여기저기 놓여있던 물체, 색깔 등을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와 종이 위에 그대로 묘사해보곤 했었어요. 그리고 난생 처음 가본 길을 다시 되짚어 돌아오는 일이 제게는 무척 쉽 고 재미난 놀이였고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시각적 인지기능이 좀 발달했던 걸까요? 어쨌거나 저의 그런 점을 알 아보신 어머니께서 무용이 아닌 미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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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만났지만 자신의 일을 실내디자인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고 한 다. 공간을 나누고 틀을 바꾸는 공간디자이너

로, 또 내부에 가구를 배치하고 소품을 매만지 고 디테일을 고민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게

다가 처음 가본 낯선 길을 다시 그대로 되돌아 오는 것은 컴퓨터의 기본원리와 비슷하다는 설 명까지 덧붙여준 그녀가 현재 웹디이너로도 활 발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란 어느

특정 분야로 세분하기도 하지만 디자인 전반에

관한 모든 이론과 경험을 아우르는 총체적 작 업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눈으로 본

세상을 종이 위에 다시 재현해내는 일에 재주 가 많았던 한 아이가 마침내 디자이너가 되었 다는 것은 그닥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국 패션계의 대부 도신우회장의 모델센터 출신

인터뷰를 위해 Kate 씨를 만났을 때 훤칠한 키 와 아름다운 미모가 어쩐지 남달라 보였다. 디

자이너가 되기 전 그녀는 패션계와 광고 CF등 을 장식하며 무대와 매체를 넘나들던 탑모델이 었다. 한국 모델계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던 모

델라인과 모델센터 중 그녀는 도신우회장이 이 끌던 모델센터에서 활동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이미 모델로 활동하 고 있던 친구를 따라 패션쇼에 갔었는데 그날 마침 모델 한 명이 급한 사정으로 쇼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쇼를 기획하셨던 디자이 너께서 저를 보시더니 급히 무대의 동선을 일러 주고 워킹을 가르쳐준 다음 저를 무대에 세우셨 어요. 다행히 제가 그 일을 무리없이 해냈고 그 때부터 모델 훈련을 받게되었어요. 앙드레 김 쇼를 비롯해서 여러 패션쇼에 참여했고, 일본 도쿄컬렉션에 참가하는 한국대표 Top 5모 델로 뽑히기도 했었습니다.”

모델로써 남부럽지 않은 자리를 고수하고 화려한 20대를 보내던 그녀는 돌연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7년 남짓했던 모델생활을 정리하고 인생의 터닝포인트 앞에 마주서게 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자로써 자신을 충분 히 stand out 했고, 대학 때 전공했던 그래픽 디자인을 더 공부해보 고 싶어서 아쉽지만 모델활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Kate씨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강행

했다. 짧지않은 시간을 탑모델로 활동했던 터라 경제적인 어려 움은 크게 없었다. 맨하탄으로 건너온 그녀는 뉴욕텍(New York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진학해서 컴퓨터 그래픽과 편집디자 인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써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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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더 큰 걸음을 떼다

“미국 유학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 ‘구그램 디자인(9 g Design)’이라는 디자인펌(Firm)을 설립하고 여러 분야의 다양한 작업 을 진행했어요, 당시 이효리가 속해있던 핑클의 앨범을 비롯해 대중 음악 가수들의 재킷을 디자인 했고, TV 프로그램 그래픽 디자인 제작 과 문화공보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공무에도 참여하고, 또 일반 기업 과 회사의 의뢰를 받고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인테 리어 디자인으로 까지 확대하게 된 계기는 기업체 포트폴리오 작업

을 하기위해 여러 회사 다양한 사무실들을 방문하면서였다고 한다.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점점 커지자 그 분야에 대한 학업의 필요

를 느끼고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학에 진학해 인테리어 디 자인 학사를 취득했다. 새로운 삶에 대

한 호기심과 도전이 디자이너로써의 자

신의 지경을 넓히고 공고히 하는데 큰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일에 떠밀 려 분주히 살아가던 그녀는 유학시절 상

품디자인으로 인연을 맺었던 L사로 부 터 러브콜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기술지원팀(Technical Support Team) 의 웹비즈니스(Web Business) 를 담당

하면서 웹디자이너와 인테리어 디자이 너의 삶을 병행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조합, 범상치 않은 가문

Kate 씨의 어머니는 한국인 건축가가 설

계한 최초의 서양건축물로 알려진 화신

백화점 제 1호 모델로 활동하셨던 분이 다. 산수 80세를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

고 여전히 곱고 아름다우시다. 무용가

인 언니 김경란씨는 오랜기간 KBS 안무

가로 활동하셨고, 이후 남성그룹 SS501 을 비롯해 여성 가수 손담비를 훈련하고 스타로 배출하는데 조력하기도 했다. 또

언니의 남편이자 Kate 씨의 형부는 80

년대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남성그룹 소 방차의 멤버 김태형씨다. 서로 다른 분

야지만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 유명예술인들이다. 디자이너의 삶 속에 녹아있는 오브제 아트(Objet Art)

“디자인 작업을 ‘계획, 설계, 혹은 밑그림’정도로 심플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요, 디자이너인 제 머리 속에는 매순간 그런 작업들이 반복되고 있어요. 내가 사는 공간과 일하는 작업실, 사무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제 머리와 생각 속에서 설계되고, 재구성되고 디자인 되거든요. 생필품 하나를 구입할 때도 기능을 고 려하고 디자인을 따지고 그 물건이 놓여질 장소와의 조화를 고려하게 되고 또 그런 이유로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여러 매장을 다니며 꼼꼼히 살피게 되죠. 남 들이 봤을 때 불필요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때론 발품이 곧 노하우로 연결되기도 하거든요. 디자인이란 어쩌면 예술보다는 오히려 노동에 가깝다고 해야할까요? 어쨌든 매순간이 디자인과 결부된다는 것, 그것이 디자이너의 삶 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63


하루는 주택가에 버려진 책상 하나를 주워다가 다듬고 페인트를 칠해

“인테리어 일을 시작하고 초기에는 80%이상이 개인 주택의 인테리어,

말할 수 없이 우울해져서 그 책상을 다시 검정색으로 칠했더니 뭔가 자

몇년 전부터 상용빌딩과 음식점, 또 애견샵(Commercial Interior) , 그리

서 적당한 자리에 배치했더니 그럴듯 했단다. 그러다 얼마 뒤 기분이 신의 감정에 공감해주는 듯한 위로를 얻게되 었다고 한다. 이렇듯 디자이너란 쓰임을 다

한 물건 하나를 통해서도 자신을 표현하고

메세지를 전달하며 보는 이들과의 소통을 이 끌어 내는 아티스트다.

Kate Kim 디자인의 키워드 ‘모던과 심플 (Modern & Simple)’

현재 뉴저지 에지워러에 위치한 건축회사 Serim201의 인테리어 디자인팀 실장이자 프 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Kate 씨는 현재 한

중국업체가 의뢰한 빌라 건축의 인테리어 디 자인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

즉 개실인테리어(Private Interior)를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들이었는데, 고 사무실(Office Interior) 등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고 또 좋은 평가를 받고있어요. 디 자인을 의뢰받으면 클라인트의 요구에 맞춰 디자인하고 거기다 제 디자인 모토인 모던함 과 심플함을 더합니다. 디자인이란 단순히 상 품을 사고파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고객과의 소통이 무척 중요한데요, 의뢰인의 요구를 구 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자주 미 팅을 갖죠. 그리고 미팅 중에 가볍게 나누는 사소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요. 그 대화 속에 클라이언트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 일 그리고 생각과 요구가 담겨있거든요.”

의 디자인 키워드는 ‘모던과 심플’이다. 일

누구나 자신의 취향대로 디자인을 요구할 수

Ando)의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좋아하

이디어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도

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Tadao 는 그녀는 모던하고 단순하면서도 기능성을

살린 디자인 위에 심미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64

있지만 전문가로써 디자이너가 제안하는 아 필요하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일선에서 느끼는 아쉬움이 있다면, 흔히들 디자인을 한다고 할 때 이전 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는 혁신적인 변화를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것이 일시적으로는 신선함을 안겨줄 수 있지만 머지않아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전문가와 잘 상의하셔서 익숙함 가 운데서 자연스러운 변화를 통해 최적화된 효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 하다고 생각해요.” 동물친화력을 자랑하는 디자이너의 견공사랑 “작업이 없는 날은 편안한 차림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요. 샤핑몰에서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웃을 수 있는 결실을 추구하는 것

디자이너란 소비자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사람들이다.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일상에서 예술을 경험하도록 돕는 그녀의 바램 은 이랬다.

디자인의 트랜드를 살피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아트데코(Art Déco)를

“무형의 한 상태가 미적 의미를 지닌 하나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디자

공부하기도 해요.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 보는 것과 현장에서 직접 느끼

인입니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에서 출발해 모든 것이 디자이너의 손을

는 것은 큰 차이가 있거든요. 그리고 또 저의 애완견 나또와 함께 보내

거쳐 마무리되죠. 이전에는 없던 것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창의적

는 시간이 제게는 가장 큰 휴식시간 입니다. 나또가 오기 전에도 강아지

사고의 훈련도 필요하고 늘 트랜드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다양

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요, 언니가 키우던 강아지였는데 저희집에만 오

한 분야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아 클라이언트와 제가 함께 웃을 수 있는

면 돌아가지 않으려고 해서 제가 그냥 키웠어요.”

결실을 도출해내는 것이 디자이너로써의 제 바램입니다.”

4살짜리 반려견 비숑브리제 나또와 함께 살고있는 Kate 씨의 강아지

좋아보이는 것은 다 그만한 비밀이 있다. 혹자는 좋아보이는 것의 핵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입양절차를 검토 중이다. 뿐만

만 디자인이란 시각의 최적화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작업이고, 디자이

사랑은 좀 특별하다. 얼마전 Pet finder를 통해 앞을 못보는 강아지가 아니라, 시간이 허락되는대로 유기견 구제팀(Animal Rescue)이나 동 물보호소(Animal Shelter)에서 자원봉사를 하고싶단다. 반려견이 주 는 정서적 가치를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한다.

심이 겉모양에 있지 않고 내면의 숨은 가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 너란 바로 내재된 비밀을 외현화하는 사람들이다. 달콤한 데이트 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행복하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Kate Kim 씨, 그녀가 있기에 디자인은 오늘도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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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1970년에 두고온 시간들-병정놀이수채-20F.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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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Z

박종진의 작품 속 추억여행

1970년에 두고 온 시간

병정놀이(Soldier Play) 글, 그림 박종진 정리

몇 해 전 양재천을 지나다가 잠시 차를 멈추었던 적이 있다. 잠시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여름방학에 아버지께서 풀을 엮어서 만들어 주신 여치 집을 들고 양재천에서 곤충채집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 지난 추

억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은 이내 공허함과 허전함으로 바뀌어 난 가던 길을 멈추고 양재천 언저리를 맴돌았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되어버린 서울 강남 8학군인 양재역과 강남역

중간쯤 되는 곳에서 살았던 나는 도시와 시골을 동시에 경험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폭넓은 경험이 생명인 작가로서는 부모님 덕분에 운 좋 은 성장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왕복 12차선으로 뻗어있는 강남대로를 가득 메운 마천루를 바라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

만, 당시에는 정겨움이 물씬 묻어나는 곳이었다. 영화 ‘내 마음의 풍금’ 속 장면에서 느끼든 정겨움과 공감처럼….

한파가 물러나 조금 따사로운 햇볕이 비치던 한가로운 어느 겨울날, 처

마에 매달린 가장 긴 고드름을 조심스럽게 따서 옆으로 뉘어 눈에 대고 보면 고드름 사이로 울퉁불퉁한 무지개 세상이 새로 열린다.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도 하고 아톰이 그려있는 새로 산 털신이 젖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얼음을 지치며 썰매놀이를 하였다. 온종일 밖에서 놀다가 집에

편집부

돌아오면 젖은 신발을 말리려고 부뚜막에 엎어놓았던 어린 시절 아련 한 기억들….

풀 먹인 이불을 시치고 계시는 어머니를 등지고 앉아 책상 밑에 넣어두 었던 나무로 된 보물 상자 속의 장난감으로 방안의 가구와 소품을 이용 해 나름의 연출을 하며 놀던 장난감이 그림 ‘병정놀이’에 등장하는 소 품들이다. 어머니가 시치고 계신 이불 귀퉁이를 구겨서 벙커도 만들고,

먼저 시쳐져 쌓아둔 이불을 고지대로 삼아 아버지께서 직접 만들어 주 신 나무로 된 트럭에 구슬 포탄을 가득 싣고 이동하는 꼬마 병정들, 주 판으로 된 사다리로 망을 보고 병정 인형에게는 밧줄만큼 굵은 털실을 이용해 낙오된 병사를 구출하는 등 많은 상상력을 키웠던 어린 시절의 아늑한 추억들이다.

박종진 경희대학교 미술대학 / 홍익대학원 졸업 개인전(NewYork K&P Gallery)외 7회 해외전 및 그룹전 100여회 현재) 한국미술협회/한국수채화협회 이사 서울시교육청 학교보건진흥원 전문상담요원 67


ART&CULTURE

“아마존 정글에서 2년째 영화 제작 중입니다.”

<부족Tribe>의 손수범 감독 글

편집부

LA 에서 프로듀서로 활동중인 누나 손소명씨와 함께

2008년 한국 영화계와 뉴욕 한인 사회에 화제를 일으켰던 독립 장편 영화, 제목은 <페티쉬> 였고 연출과 촬영은 손수범이라는 뉴욕대 영화과 졸업생이었다. 그는 여러모로 화제를 일으 켰다. 무명 감독이 뉴욕에서 찍는 저예산 영화였음에도 당대 최고 스타인 송혜교가 주연을 맡았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그가 소재로 삼은 영화 내용도 그러했다. 멀티플렉스 극장에 걸리지 않아 많은 관객이 보진 못했지만, 뉴욕으로 시집온 무속인의 딸을 주인공으로 동서 양의 문화가 기묘하게 어울리는 색다른 스릴러인 <페티쉬>의 독특한 분위기는 영화를 단지 오락이 아닌 예술로 인정하는 소수의 관객에게 손수범이란 이름을 크게 각인시켰다. 유럽의 선댄스영화제 격인 독일의 올덴버그 국제영화제, 샌프란시스코 아시안영화제 등에서 받은 호평과 뉴욕현대미술관 초청 상연 역시 이 영화의 비평적 성과였다. 벌써 10년 전이다. 그의 영화를 본 관객은 아마도 다음 작품을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마침 올해 개봉 예정으로 두 번 째 장편 영화 촬영이 끝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 에스카사가 그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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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 (Tribe) 의 스틸 컷

다큐멘터리 소재로 더 적당해 보이기도 하고, 제작 여건상 다큐가 더 편하지 않나요.

맥코믹 교수가 처음부터 다큐를 생각했다면 저에게

의뢰하지도 않았겠죠. 저는 픽션과 CF만 찍던 감독이 니까요. 그리고 이미 환경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많잖 아요. 극영화로 만드는 것이 의미있고 더 효과가 크다 고 판단을 했겠죠.

다큐가 더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는 이런 소재 와 주제의 영화가 극영화로서의 재미를 갖기 어렵지 않나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냈죠?

그걸 살리는 게 작가와 감독의 몫이겠죠. 즉 저의 책

임입니다. 의미를 살리면서 드라마를 잘 뽑아내야죠. 중심 플롯은 이런 겁니다. 댐 건설로 삶의 터전을 잃

게 된 아라라족의 13세 소녀 카마자라 가족이 정부에 항의하러 가던 도중 소녀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

어서 사창가에 팔립니다. 한편 주인공 로버트는 브라질의 부패한 관리 두 번째 작품이 아마존에서 촬영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부족(Tribe)’이란 제목의 영화인데 원시 부족과 환경에 관한 이야기입 니다. 벨로 몬테라는 댐이 아마존강 서쪽에 완성되었습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댐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댐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특히 아마존 열대우림에 살던 부족들이 벨로 몬테댐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편법 과 불법이 모두 동원되어 결국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환경과 원시 부

족을 보호하는 업무를 해야 할 브라질 정부 담당자들은 건설업자의 뇌 물을 받고 이런 현실을 외면합니다. 이런 실제 상황을 실제 원주민을 출연시켜서 픽션으로 풀어 본 작품입니다.

뉴욕에 사는 감독의 머리에서 쉽게 떠오를만한 영화 소재는 아닐텐데요.

조지 워싱턴 대학의 사브리나 맥 코믹(Sabrina McCormick) 교수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어요. 환경 문제 전문가인데 몇 년 전 한 영화의 시

사회장에서 만난 인연입니다. 이분이 UN에서 펀드를 받게 되었는데 그 기금을 제작비로 단편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거죠. 그러다가 기왕 만들 거면 좀 더 많은 관객층 확보를 위해 장편으로 키

우자, 그렇게 된 거죠. 맥 코믹 교수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공동 연출 하고, 물론 촬영은 제가 합니다.

인데, 뇌물을 받고 아마존 부족의 어려움을 눈감는 인물이죠. 그렇게 받은 뇌물로 매춘까지 합니다. 로버트가 사창가에서 만난 상대가 바로 카마자라에요. 너무나 어린 원주민 소녀를 마주한 그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소녀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고통을 실감하게 되죠. 부패한 인물인 백인 주인 공이 왜 아마존 원주민을 위해 함께 싸우게 되었나 하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극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드라마적인 장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마존 야외 로케가 대부분일 텐데 어려운 점도 많겠어요

우선 덥습니다. 정말 더워요. 여름철엔 핀란드 사우나에 들어가 있는 기분, 겨울철엔 한증막에서 촬영하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2주 이상 계 속 촬영하기가 어려워요. 2년의 기간 동안 틈틈히 작업을 해왔습니다. 원주민과의 소통 문제도 어려움이 있었고요. 실제 원주민을 배우로 출

연시켜야 하는데 오디션 과정에서도 힘들었고, 막상 캐스팅한 배우가 너무 열의 없이 촬영에 임해서 중간에 교체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습니

다. 원래 시나리오상으로는 임신한 여성을 캐스팅 해야하는데 대상자 가 없어서 그냥 소녀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촬영 시작 1년 후 그 소녀 배우가 정말 임신을 했어요. 그래서 다시 원래 시나리오대로 찍는 해 프닝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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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티쉬

영화 배경이 된 아마존 부족의 실제 모습

계획대로 올해 공개가 된다면 데뷔작 페티쉬 이후 10년만인데 두 번째 장편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나 봅니다.

<페티쉬> 이후 극영화 아이디어가 몇 개 있긴 했어요. NYU 학생 때 만

들었던 <물속의 물고기는 목말라 하지 않는다>라는 단편이 있는데 거 기 나왔던 캐릭터의 10년 후 모습을 담은 영화를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까지 완성해 제작사를 찾기도 했

어요. 미국 요리사가 한국의 절에 가서 요리를 배우는 <템플 푸드>라 는 아이템도 구상한 적이 있고요. 성사가 되진 못했어요. 전업 감독이 라면 한 작품 마치면 최소한 2~3년 이내 차기작을 만드는 걸 누구나 목

표로 하죠. 저는 조금 상황이 다른 점이 우선 학교에서 강의합니다. 교 수 생활을 시작한 것이 오히려 페티쉬가 개봉하기 이전인 2005년부터

니까요. 가르치는 일이 보람이 커요. 그리고 저는 촬영 감독이기도 합 니다. 장편 극영화 연출만 안 했을 뿐이지 촬영 감독으로서 매년 한 작

품 정도는 작업을 지속해서 해왔습니다. 그동안 영상 작업을 쉬어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계획입니다.

데뷔작인 <페티쉬>를 아직 보지 못했거나 모르고 있는 독자도 많을 겁 니다. 기회가 되면 찾아볼 수 있도록 감독이 직접 소개를 해주시죠. 어 떤 영화인가요?

무속인의 딸(송혜교)이 미국에서 자란 기독교 집안의 2세와 결혼해서 뉴욕에 살게 됩니다. 그 집안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에 관한 영

화. 이민 1세대는 기독교 커뮤니티가 중심적인데 한국 전통적인 정서 는 샤머니즘적인 게 있지 않나, 그런 데에서 오는 서로 다름을 보고 싶 었죠.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아이덴티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그걸 리얼리티로 풀고 싶지는 않았어요. 은유를 통해서 풀고 싶었 죠. 허구의 영화적인 장치를 통해서 말입니다. 70

문소리 주연 장편영화 <사과>

* 손수범 감독

1969년생. 영화 연출부였던 누나 손소명(현재 LA에서 프로듀서 활동 중) 영 향으로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앙대 사진과 졸업 후 삼성 메피스트 장학생으로 AFI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촬영 전공. 뉴욕대 영화과 대 학원 연출 전공. 졸업 작품 <물속의 물고기는 목말라 하지 않는다 (Island to Island)>로 시카고 국제 영화제, 스튜던트 아카데미 어워드 수상. 2005년 강 이관 감독, 문소리 주연 장편영화 <사과> 촬영 감독. 2008년 <페티쉬>로 장 편 영화 감독 데뷔. 롱아일랜드대학(LIU) 영화과 교수로 재직. 두 번째 장편, 공동 연출작 <부족(Tribe)> 제작 중


장난감 기관차들을 따라가다 보면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뉴욕의 150 개 명소를 다 구경할 수 있다. 일시: 2018년 1월 15일까지 장소: NEW ‌ YORK BOTANICAL GARDEN, BRONX, NEW YORK ITEMS: IS FASHION MODERN?

Levi’s 501 청바지처럼 20세기와

21세기 사회 문화 및 라이프 스타 일에 영향을 미친 111점의 옷과 액

세서리를 전시한다. 패션 아이템을

통해 패션과 기능성, 문화, 자아 정 체성, 정치와 미학까지 들여다 보는

시각이 매우 신선하다. 패션 전공자 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전시회. 일시: 2018년 1월 28일까지

장소: ‌ MUSEUM OF MODERN ART (MOMA) WINTER JAZZFEST 2018

재즈를 사랑한다면 뉴욕의 겨울 재

1월에 놓치면 후회하는

뉴욕 이벤트 정리

즈 페스티벌은 놓칠 수 없는 이벤

트이다. 매해 1월 열리는 WIINTER JAZZFEST의 유명한 그리니치 빌

리지 이틀 밤 마라톤 재즈 연주는

음악팬들에게 어깨를 들썩일 만큼 의 흥분을 선사한다. 일시: 2018년 1월 한 달

장소: 공연 일정별로 다름

편집부

VOLEZ, VOGUEZ, VOYAGEZ - LOUIS VUITTON NEW YORK EXHIBITION

1854년 회사의 창립 시절부터 현재까지 루이 비통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 루이 비통 가방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로운 경험이 될 듯하다. 일시: 2018년 1월 7일까지

장소: 뉴욕 증권거래소 빌딩 86 TRINITY PLACE, NEW YORK HOLIDAY TRAIN SHOW

아이들과 연말 연휴에 무엇인가 기억에 남을 곳을 찾아가 보지 못했다

면 아직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매년 찾아오는 유명한 트레인 쇼가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서 1월 중순까지 열린다. 식물원의 이국적인 나무들을 헤치고 숨바꼭질하듯이 모습을 나타냈다 감추기를 반복하며 달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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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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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 영화의 줄거리는?

수용소행 기차에 타겠다고 독일인 장교에게 간청합니다. 그 장

‘도라’를 운명처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부잣집 딸인 ‘도

성을 만나게 됩니다.

시골에서 갓 로마로 상경한 촌뜨기 ‘귀도’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라’는 이미 시 행정관 (Town Clerk)인 약혼자가 있습니다. 호텔

면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용감한 여

웨이터로 일하는 ‘귀도’는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도라’의 마음을

‘귀도’와 그의 가족이 갇혀있던 수용소는 폭력과 학살이 만연한

며 분신과도 같은 아들 ‘조수아’를 얻습니다. ‘조수아’가 다섯 살

간의 수감생활을 회상하면서 “유대인들이 붙잡혀 수용소에 들어

얻는 데 성공하지요. 그 후 ‘귀도’는 ‘도라’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 생일을 맞이한 어느 날, 갑작스레 들이닥친 독일 군인들은 유대

인인 ‘귀도’와 ‘조수아’를 체포해 수용소행 기차에 싣습니다. 갑작

스레 사라진 남편과 아들을 찾아 나선 “도라’는 군인들에게 끌려 갔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역까지 따라갑니다. ‘도라’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가족과 함께 수용소행 기차에 오릅

곳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실제 3년 가면 몇 겹의 높은 철조망과 독일군 경비병을 보며 공포를 느끼 고, 굶주림과 끝없는 구타로 고통을 겪는다.”라고 적었습니다. 수

용소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두려움과 고통을 느끼는 곳이었습니다.

니다. 힘든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귀도’는 유머와 재치로 아들

그런데도 인생이 왜 아름다울까요? 진정한 인생의 아름다움은

요. 불안한 하루하루가 지나 어느덧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들은

서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을 위로하고 절망적인 아내의 마음을 달래며 희망을 보여주지 ‘귀도’는 마지막으로 ‘조수아’를 숨겨둔 채 아내를 찾아 나섭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인생

주인공 ‘귀도”는 마치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킬 정도로 유머가 넘

사랑과 헌신에서 나옵니다. 평생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 있겠지요. 또 목숨을 아끼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헌신해 주는

사람이 내게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 삶은 행복했었다고 자 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치는 인물입니다. ‘귀도’의 코미디 코드는 영화 곳곳에 담겨 있지

영화는 공포스러운 유대인 집단 살상 캠프가 배경으로 등장합니

처에 흠뻑 빠지게 됩니다. 또한, 영화는 고통과 슬픔마저도 웃음

일 뿐입니다. 영화는 삶의 고통과 불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

요. 영화를 보는 내내 ‘귀도’의 재치 있는 입담과 유머 있는 제스 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귀도’의 말과 행동은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그의 삶은 “아름다운 인생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게 해 줍 니다. ‘귀도’는 무자비한 수용소에서 무서워하는 아들을 달래기

위해 수용소 생활을 단체게임이라 속이고, 1,000점을 따는 우승

자에게는 진짜 탱크를 준다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 쳐있지만, 여전히 웃음과 재치를 보여주며 아들을 안심시키고 희망을 보여줍니다. 수용소에서 집사로 일하게 된 ‘귀도’가 독일

다. 하지만 그곳은 역설적인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공간 습니다. 대신 아름다운 인생의 정의를 역설적으로 제시하지요.

영화의 끝자락에 우리는 삶의 어려움은 지나갈 수 있다는 희망 을 발견합니다. 사랑과 희생을 통해 살아남은 어린 아들 ‘조수아’ 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고 했습 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진정한 인생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인 장교 파티가 끝나갈 무렵 전축 확성기를 창밖으로 돌려놓고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한 사람은 바로 ‘도라’입니다. 은은한 달빛을 타고 들려오는 감미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이탈리아 오페라 음악을 들려줍니다. 그것을 듣고 알아채는 단 로운 오페라 선율을 통해 ‘귀도’와 ‘도라’는 서로의 사랑을 전달 하지요. 유대인이 아닌 ‘도라’는 남편과 아들이 타고 있는 죽음의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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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우리가 천재 화가를 추모하는 또 다른 방법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정리

편집부

미술에 문외한일지라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굳이 어떠한 수식어를 찾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이나 <해바라기(Sunflowers)>뿐만 아니라 정신병으로 고통 받다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결국은 권총 자살로 37세에 생을 마감한 그의 비극적인

삶도 너무나 영화같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을 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이 그의 비극적인 죽음 127년 후에 영화를 통해 다시금 탄생했다. 그것도 세계 최초로 유화로만 제작된 애니메이션 영화로 말이다.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는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 중에서도 가장 극적

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죽음 전후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고흐

가 권총으로 자살한 후 1년 뒤 그의 지인이었던 우체부 룰랭의 아들인 아르망이 고

흐의 편지를 가지고 고흐의 동생인 테오를 찾아 오베르라는 작은 마을로 오면서 시 작한다. 오베르는 고흐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이다. 우체부 룰랭의 아들인 아르망은 고흐가 죽기 전에 살았던 마을 오베르에 머물면서 고흐라

는 한 천재 예술가의 죽음에 의문을 품게 되고, 영화 속의 이야기는 ‘정말 고흐가 자 살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고흐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

면서 미스터리 추리물처럼 흐른다. 영화 속 어떤 사람은 고흐가 정말 그렇게 죽고싶 74

아르망 룰랭의 초상(Portrait of Armand Roulin)


어할 리가 없었다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흐는 정말 충분히 그러고 도 남을 미치광이 정신병자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환상적인 것은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에 나오는 각 장소와 배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등장인물이 실제 고흐가 그린 유화 작품 속의 인 물들이라는 것이다. 생전에 2,000 여점의 작품을 남긴 고흐는 주변 인

물의 모습을 많이 그렸었다.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노란 재킷을 입 은 아르망은 고흐의 작품인 <아르망 룰랭의 초상(Portrait of Armand Roulin)>의 그림 속에서 툭 튀어나와 영화 속 스크린을 활보하고 다니

고, 그의 아버지인 우체부 룰랭은 <우체부 룰랭의 초상(The Postman

Joseph Roulin>의 모델이었으며 고흐의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와 탕 기 영감도 고흐의 작품인 <닥터 폴 가셰(Doctor Paul Gachet)>와 <페 르 탕기의 초상(Portrait of Pére Tanguy)> 속에 그려져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부활이라도 한듯 고스란히 살아 숨쉬며 영 화에 등장한다.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박물관에 걸려 있는 고

흐의 작품이 2차원의 평면을 뚫고 나와 3차원의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면서 4차원의 시간 속에서

우리와 만나는듯 하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고흐가 살았던 1890년 그 어디

즈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동시에 고흐 특유의 거칠고 짙은 붓놀림 속의 강렬한 유화 그림 이 움직이고 그 속의 인물들이 나와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대단히 몽환적이고 환

상적인 화면을 선사한다. 고흐가 생전에 남긴 작품 들을 가지고 만든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인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는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이다. 총 10년의 제작기간 후 탄생한 이 영

화 속의 장면들은 모두 고흐의 실제 130여점의 작

품을 토대로 하였고 94분의 러닝타임 속에서 살아

해바라기(Sunflowers)

움직이는 장면을 위해 컴퓨터 CG는 철저히 배제 한 채 100명 이상의 화가들이 직접 손으로 2년동

안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 작품을 토대로 장면의 움직임별로 65,000개

로 나누어 1,000개 이상의 캔버스에 그려냈다. 영화 자체의 스토리 구 성은 고흐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리물에 가깝고 조금은 평면적이고 단조롭지만 생전에 지독히도 외롭고 고독한 생을 보낸 한

천재 화가에 대한 후세의 지극한 헌정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는 듯 보 인다. 영화는 그렇게 고흐를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현대 기술이 만나 비극적일 정도로 짧은 생애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천재 화가를 추모하는 서사시가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죽은 뒤 1세기도 훨씬 넘었지만 여전히 고흐는 그의 작품 속 별이 빛나는 밤에 살고 있다. 살아생전 고흐의 숨결과 붓의 터

치가 느껴지는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어버린 이 영화 속에서 우리 는 그렇게 “고통은 영원하다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라는 말

을 남기고 죽어간 고흐를 만난다. 고흐의 작품 없는 고흐의 이야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현재 상영되고 있는 영화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는 www.lovingvincent.com에서 볼 수 있다.

닥터 폴 가셰(Doctor Paul Gachet)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반드시 봐야하는 세계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 도로타 코비엘라와 휴 웰치멘 감독의 엄청난 노력으로 태어난 이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또 다른 서사시로 엮는다. – A. O. Scott from The New York Times

역사상 최초로 유화로만 제작된 애니메이션! 이 영화를 만들기 위

한 수년간의 노력이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 Jeffrey M. Anderson from Common Sense Media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그대로 모사하여 영화를 만들 기 위해 65,000개의 장면을 일일이 유화로 그렸다니 미쳤다고밖

에 할 수 없다! – Peter Debruge from Variety

빼어난 기술적 기량과 환상적인 영상의 승리! 그 믿을 수 없는 대

담함에 박수를 보낸다. – Ian Freer from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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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맨해튼 외곽 지역 아름다운 길

그곳에서 또 다른 매력과 만나다

뉴욕의 길

뉴요커가 되는 혹은 뉴요커 따라잡기의 첫걸음은 필시 뉴욕 의 길을 정복하는 것일 거다. 바둑판 형태의 도시인 맨해튼에 는 동서로 나있는 스트릿과 남북으로 나있는 애비뉴가 있다. 이 맨해튼을 대표하는 풍경 중 하나인 빨간색 이층 관광버스 는 맨해튼 시내를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편하게 즐길 수 있어서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애비뉴만 주로 다 니므로 좁은 길로 다녀야 제대로 느끼는 뉴욕 거리만의 참맛 을 느끼기에는 아쉽다. 그래서 걸어야 제대로 구석구석 숨어 있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뉴욕에서 이층 버스를 이용하면 의 도하지 않았어도 수박 겉핥기식 관광이 되기 쉽다. 또 이들 이 층 버스는 주로 맨해튼 내에서만 운행한다. 물론 뉴욕을 생각 하면 맨해튼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거야 어쩔 수 없다 하여도 맨해튼을 조금만 벗어나도 색다른 뉴욕의 멋과 낭만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길이 꽤 많다. 그중 두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 76

편집부 사진 Do 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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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클린 하이츠 크렌베리 스트릿(Cranberry Street)

럼 19세기 뉴욕 귀족들의 이름을 따서 불렸었는데 거리명이 너무 속

(Brooklyn Heights)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역사 거리로 지정된 곳이다.

도 특히 크랜배리 스트릿이 유명한데 셰어(Cher)와 니콜라스 케이지

뉴요커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네 중의 하나인 브룩클린 하이츠 가로수로 빽빽하게 뒤덮인 이곳 브룩클린 하이츠의 거리에는 19세기

주택과 교회들이 즐비하다. 브룩클린 하이츠에서 북쪽 맨해튼 방향 덤

보(DUMBO) 거리로 올라가다 보면 과수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진짜 과수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크랜베리, 오렌지, 파인애플 – 과일나무 이

름으로 된 거리가 늘어서 있다. 이 길들은 원래 ‘크리스토퍼 스트릿’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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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스럽다는 이유로 이후 친근하게 과일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중에서 (Nicolas Cage)가 열연한 1987년 영화 문스트럭(Moonstruck) 덕분이

다. 영화 속에서 셰어가 분한 로리타가 살았던 곳이 크랜베리 스트릿 19번지로 여전히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이다. 형형색색의 브라

운스톤 건물이 가득한 가로수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맨해튼 남쪽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길로 이어진다.


그린포인트 켄트 스트릿(Kent Street)

브룩클린의 그린포인트(Greenpoint) 북쪽, 맨해튼 애비뉴와 프랭클린 애비뉴 사이엔 깜짝 놀랄 만큼 매력적인 거리가 있다. 뉴욕의 유명한 법 률가 켄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켄트 스트릿. 만일 이곳에서 운이 좋아 나무와 강물 사이에 비친 석양을 마주한다면 어느 순간 브룩클린 한복

판이 아닌 조그만 교외 동네에 와있는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

다. 맨해튼에서 20분 이내면 찾아갈 수 있는 켄트 스트릿은 북부 브룩 클린에서 가장 훌륭한 수준의 레스토랑과 바가 길 양쪽에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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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PROSPECT PARK 부르클린 최고의 휴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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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센트럴 파크로 불리는 프로스펙트 파크(Prospect Park)는 브루클린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브라운스톤의 고풍 스러운 건물이 공원을 더 클래식하고 품위 있게 만들어 준다. 이 런 이유로 현재에서 다소 시간 차이가 나는 시대를 다룬 영화, 레 오나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울프 오브 월 스트릿 Wolf of Wall Street>, <윈터스 테일 Winter's Tale> 배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또한, 결혼식 사진 촬영지로 인기 있는 장소로 주목받는 이곳은 파크에 들어서는 순간,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관광객 이 붐비는 맨해튼 센츄럴 파크에 비해 브루클린 거주민이나 뉴요 커의 진정한 사랑을 받는 프로스펙트 파크! 사진으로 만나보자. 글

편집부 사진 Do 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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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에이커의 프로 스펙트 파크 (Prospect Park)는 뉴욕시 공원 중 하나로 브루클린에

서 두 번째로 큰 공원이다. 맨해튼 센트럴 파크 (Manhattan's Central Park)를 완공 한

Frederick Law Olmsted와 Calvert Vaux가 디자인한 이곳은 90 에이커의 잔디밭과 피 크닉 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공원 내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리치 필드 빌라는 공원이 조 성되기 전, 소유주인 에드윈 클락 리치 필드 (Edwin Clark Litchfield)의 집이다.

Prospect Park 내에는 야생 동물 보존 협회 (Wildlife Conservation Society)에서 관리 하는 동물원과 브루클린에 남아있는 유일한 습지대, 보트 하우스, 60에이커의 브루클

린의 유일한 호수가 있다. 또한, 7개의 야구장, 테니스 센터, 농구 코트, 야구장, 축구장, 아이스링크 등의 레크리에이션 시설과 스포츠 시설이 갖춰져 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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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 농촌

마비정 벽화마을에 가다 글 권윤수 사진 서가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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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2리. 시내버스 달성 2번이 마지막으로 서는

림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다. 화가의 노고에

인데 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담을 새로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그래서 그 거친 느낌이 색다른

곳. 대구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농사짓는 사람이 많은 평범한 시골 우선 마비정이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인터넷에 떠도는 유래를 살펴보

면, 어떤 장군이 마을 앞산에 올라가 건너편 산의 바위 쪽으로 활을 쏘

면서 말에게 ‘화살보다 늦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 은 힘껏 달렸지만, 활보다 일찍 도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장군은 말을 죽였고,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말을 불쌍히 여겨서 ‘마비정(馬飛亭)’ 을 세우고 추모했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도 있다. 먼 옛날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말을 타고 한

양으로 가다가 이 마을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우물이 하나 있어서 말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화가의 캔버스는 흙으로 된 담이다. 흙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버지가 우물가에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등목을 시켜주는 모습, 뻥튀기를 튀기는 아저씨와 그 소리에 놀라 자지러지거

나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알루미늄 사각 도시락을 난로 위에 잔뜩 얹어 놓은 교실 안 풍경.

7080세대들이 어린 시절 겪었을 법한, 보았을 법한 풍경들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활을 쏘는 장군과 말의 모습도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처마에 메주가 걸려있는 모습과 농부가 소달구지를 끄는 모습은 그림이 아니라 실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 우물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했다는 설이다. 그 우물이 바로 마비정

또 마을에는 신기한 연리목이 있다. 뿌리를 내린 지 100년이 되었다는

나 한양을 갈 때 이 마을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말들뿐 아니라 사람들

고 있다. 이밖에 100년이 넘었다는 살구나무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

(馬飛亭)이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청도와 가창의 사람들은 화원장이 도 마비정 우물물을 마셨을지 모른다. 실제로 마을의 가장 안쪽으로 들 어가면 우물 하나가 있다.

느티나무와 돌배나무가 서로 줄기가 이어진 채 한 나무가 되어서 자라

래되었다는 옻나무가 자라고 있다. 골목길에 있는 나무에는 정성스럽 게 이름표가 달려 있다.

평범한 시골 마을이 인기 마을로 재탄생하기까지는 자치단체의 역할

마을 어귀에는 국수나 부침개. 막걸리 같은 것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몇

비정 벽화마을 조성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국비 공모사업을 신청했다.

등을 판다. 시니어 클럽에서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세운 곳이라고

이 주효했다. 달성군은 조용한 시골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마 부수고 새로 지어 올리는 ‘개발’이 아니라 ‘보존’이라는 역발상을 담아 사업을 제안했다.

마을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으로 많이들 이용하는 벽화 그리기가 도

군데 있다. 작은 매점도 하나 보인다. 시원한 음료와 아이스크림, 과자 하는데, 이 동네 할머니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근무를 하신다. ‘어

르신들의 계산이 조금 늦어질 수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어르신들의 정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정겹다.

입됐다. 그러나 이 마을에 그려진 벽화는 남다르다. 여러 명의 화가가

도심과 가까워서 시골인 듯 시골 아닌 시골 같은 마비정 벽화마을. 농

사람이 마을의 모든 벽화를 그렸다. 지난 2012년 이재도 화가가 3개월

기고 간다.

구역을 나눠서 그림을 완성한 보통의 벽화마을, 벽화골목과는 달리 한

이 넘는 시간을 들여 혼자 마을에 이야기를 입혔다. 그래서 벽화 속 그

촌의 정겨운 일상이 남아 있는 이곳엔 해마다 수십만 명이 발자취를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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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중의 왕, 보이차(普洱茶) 글 손시현 / 자료 제공 다소 아세아 문화원(茶笑園) 대표 김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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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중국 황실 혹은 귀족들만이 즐겨 마시던 차인 보이차(普洱茶)는 까다 로운 발효 과정 때문에 매우 귀히 여김을 받았다. 손이 많이 가는 제작 과정만큼 이나 보이차는 훌륭한 효능을 겸비하고 있는 데 오래 묵을수록 맛과 향은 물론 이고 약효도 뛰어나다고 한다. 고서 본초강목습유(本草綱目拾遺)에도 보이차는 몸의 해로운 기름기를 제거한다고 나와 있다. 보이차는 할아버지가 찻잎을 따, 50년 후 그 손자에게 전해줄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맛과 풍미가 깊어진다고 한다. 손자가 할아버지가 따주신 찻잎으로 만든 보이차를 마실 즈음에는 그 세월 에 담긴 이야기까지 함께 마시는 것이다.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은 보이차가 서양 차의 한 종류인 커피와 다를 게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몰라서 못 마실 이들은 많아도 알고도 마다할 사람은 없을 차 – 차 중의 왕, 보이차를 소개하고자 한다. 운남의 보이차

가를 한 후, 차로 우려냈을 때 후각과 미각을 더해 탕색, 향기, 맛으로

나로 꼽힌다. 보이차의 ‘보이(普洱)'는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하니족

지닌 고유의 향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실내의 온도와 비슷해졌을

보이차는 중국의 운남성에서 나는 차로 중국의 전통 명차(名茶) 중 하 의 말로 ‘보'는 산채를, ‘이’는 물굽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런지 ‘보이' 라는 말은 자연스레 산채를 굽이굽이 도는 물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을 떠오르게 한다. 보이차는 해발고도가 높고 일

조량이 많으며 생태환경이 잘 보존된 곳에서만 재배되는데 이 보이차

내질을 평가한다. 차로 우려낸 물이 45℃ 정도로 약간 식었을 때 차가 때 차의 향기가 얼마나 지속하는지로 좋은 보이차를 더 자세히 감별할 수 있다. 차에 대해 전문 지식이 없어도 쉽게는 찻물이 혼탁하지 않고 맑을수록 좋은 보이차라고 할 수 있겠다.

의 차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중국의 운남이다. 운남

숙성차, 보이차의 보관법

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유의 발효 냄새가 나는 운남의 보이차는 세계

되어 있다는 뜻이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같은 원료와 같은 기술을 사

은 또한 천 년 이상 수백 년의 수령을 가진 고차수가 많이 분포하고 있 의 차 중에서도 극히 진귀한 차의 하나로 꼽힌다. 생차와 숙차로 나뉘는 보이차

보이차의 제작은 크게 생차(生茶)와 숙차(熟茶) 두 가지로 구분하여 나뉜다. 맨 처음 차나무 잎을 이용하여 만든 모차(母茶)는 자연 진화

과정을 거친 생차와 인공적으로 발효 과정을 추가하여 보다 짧은 시간

내에 풍미를 지니게 하는 숙차로 탄생한다. 두 종류의 보이차는 그 성 분과 효과가 조금씩 다르다. 보이생차에는 폴리페놀, 카페인, 데아닌

세 가지 성분이 가장 많이 들어 있어서 항산화, 항 방사능, 항암, 신경안

시간이 흐를수록 보이차가 잘 숙성되어가는 것은 적합한 환경에 보관 용하여 생산된 동일한 차라도 어디에 어떻게 보관했는지에 따라 차의 품질이 현격히 달라진다. 적합한 환경에 보관해둔 차라면 시간에 따른 변화를 가진 맛있는 차가 되지만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보관해두면 맛

과 향을 잃게 된다. 보이차의 진화(陳化: 차가 익어가는 과정)가 적절하 게 진행되려면 기본적으로 온도와 습도가 알맞아야 한다. 보이차의 적

절한 보관 온도는 15℃~50℃라고 하며 실온에 보관해도 좋다. 습도는

55~80%로 습도가 너무 낮으면 보이차의 진화가 진행되지 않고, 반대 로 너무 습하면 곰팡이가 발생하기 쉽다.

정 및 기억력 증진, 항바이러스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보이숙차의 경우

보이차 언제, 어떻게 마시는 것이 좋을까?

고 혈압 조절, 혈중 지질농도 조절, 혈당 조절, 위장보호, 미용 등에 탁

한 번 우려낼 때 넣는 보이차의 분량은 엄지손가락 한마디 정도이며,

갈산, 테아플라빈, 테아루비긴, 펙틴, 차다당 등의 성분이 포함되어 있 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보이차가 남다른 이유, 갈산

유독 발효차인 보이차에 많이 포함되어있는 성분인 갈산은 체중 감량

효과가 있고, 지방 흡수를 억제하는 놀라운 효능을 지니며 체내에 흡

보이차는 녹차와는 달리 100도로 끓는 물을 사용할 때 가장 맛이 좋다.

첫 번째로 우린 찻물은 버리는 것이 좋다. 오래 발효시킨 것이기 때문 에 불순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척 과정을 거친 찻잎에 물을 반

복해서 부어 우려 마시면 된다. 보이차는 차 색깔이 연해질 때까지 여 러 번 마실 수 있다.

수된 지방이 쌓이지 않고 그대로 배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한다. 녹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차 문화가 여유 있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전

해 극소량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산화되어 고유

그 이상의 것들을 가져다줄 것이다.

차, 우롱차, 홍차, 홍차에도 물론 갈산 성분이 들어있지만 보이차에 비 의 색과 향, 맛을 잃는 차들과 달리 보이차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

유물로 인식돼 있지만, 커피 대신 마시는 보이차 한잔의 여유는 건강

풍미는 더 깊어지고 가치는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녹차는 비발효차이

며, 우롱차는 50% 발효차, 홍차는 80%가 발효된 차다. 100% 발효차 는 오직 보이차뿐이다.

좋은 보이차를 고르는 법

좋은 보이차를 고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색, 향, 미를 보면 알 수

있다. 우선 시각과 촉각으로 우리기 전 찻잎의 형태와 색으로 외형 평

- 다소 아세아 문화원(茶笑園) 대표 김정제 “차는 그 누구와 함께해도 좋지만, 혼자여도 좋다. 음 악과 함께 해도 좋고, 글 혹은 그림과 함께해도 차가 좋은 친구가 되어줄 테니 말이다. 차는 언제나 나를 좋은 곳으로 인도해준다.” 91


LIFESTYLE 이달의 추천도서

2017년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세계 최정상에 오른 타이탄 200명의 생각, 습관을 모은 화제의 책 Tools of Titan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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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18세 때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 노트 수집가 팀 페리스(Timothy Ferriss). 그는 천재적 인 노트 수집광이다. 그는 노트를 모은 첫 목표가 자신의 ‘성공한 경험과 비결을 기록하여 두고두 고 꺼내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자신의 기록뿐만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노트’ 가 궁금했 다. 팀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팟캐스트 방송 ‘팀 페리스 쇼’를 시작하고 청취자와 함께 뽑은, ‘세상 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들’을 찾아 인터뷰했다. 방송을 통해 각 분야에서 최정상에 오른 200명을 만 나고 그들의 습관과 독창적인 생각, 성공비결을 들었다. 그의 애플 팟캐스트 방송은 3년 연속 청취 율 1위, 비즈니스 분야 최초 1억 다운로드 기록을 세울 만큼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인터뷰에서 얻 은 내용을 3년에 걸쳐 직접 자신의 삶에 적용해봤다. 그리고 그들의 생생한 성공비결과 자신이 직 접 실천하고 기록한 수 천장의 노트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그가 만난 최정상의 인물을 거인이란 뜻으로 ‘타이탄’이라 불렀기에 책 제목도 ‘Tools of Titans’이다. 이 책은 출간하자마자 <아 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2017년 화제작이 되었다.

저자는 자신이 만든 팟캐스트 방송 청취 자가 뽑은 인물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타이탄 200명을 만났다. 그가 만난 인물은 알랭 드 보통,

세스 고딘, 말콤 글래드웰, 파울로 코엘

료, 피터 틸, 에드 캣멀 등 세계적인 석학

과 작가, 최고의 혁신기업을 세운 창업가 와 CEO,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협상가, 슈퍼리치, 아티스트, 전문직 종사자 등

각자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다. 그의 저서 ‘Tools of Titans’은 성공한 사

람들의 특징, 습관, 사고방식, 생활패턴, 운동습관, 심지어 그들이 공통으로 자주 사용하는 앱, 인터넷 사이트, 음악까지

세세하게 소개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

과 벌였던 열띤 토론, 그들이 더 큰 결과

Tools of Titans

를 얻기 위해 매일 실천하고 있는 것들에

다는 등 세계 최고들이 매일 실천하고 누 구나 쉽게 바꿀 수 있는 일상의 작은 습 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61가지 전략들을 읽다 보면 성공

한 타이탄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 는 듯 보이지만 기본적인 일부터 당장 실 천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들은 아주

특별한 거인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분

야에서 최정상에 오르기 위해 매일 자신

이 정한 규칙과 습관으로 목적을 정해 성 실히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저자 자신

도 실천하기에 부담스럽거나 특수한 상 황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당장 생

활에서 적용되는 작은 일부터 실천했으 며 성공한 결과를 책에 소개했다. 결국,

성공한 삶을 살고 싶다는 선택은 내 삶

의 습관이나 행동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대한 저자 자신이 시도해보고 성공했던 벤치마킹 경험과 그들의 독창

에 달려있다. 저자는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알

지 책 안에 고스란히 담았다.

은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적 아이디어와 전략, 평범한 습관,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 창출 비법까

고 가능한 쉬운 일이지만, 생활 속에서 적용 여부에 따라 독자의 인생

페이팔의 창업자 피터 틸의 메시지를 소개하면서, 가령 어느 프로젝트

Timothy Ferriss (팀 페리스)

있지 않나?’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고 저자는 적고 있다. 10년짜리

The 4-Hour Chef, Tools of Titans등 네 권의 저서 베스트셀러 작가,

가 10년이 걸리는 계획이지만, ‘왜 10년이 걸리지? 6개월에도 해낼 수 계획을 6개월 만에 해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하는 이유는 더 적극적이고 더 대담한 도전 과 더 생산적인 인물로 바뀌는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2장에서는 담대한 목표를 돕는 디테일한 실천을 하는 그들의 습관을

프린스턴대학교 졸업, The 4-Hour Workweek, The 4-Hour Body, 페이스북, 우버, 트윗터, 알리바바 등 세계적 기업의 투자자이자 컨설 턴트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으며 ‘패스트 컴퍼니’, ‘포브스’, ‘포춘’ 이 선

정한 ‘우리 시대 최고의 젊은 혁신가들’ 중 한 명이다. 현재 프린스턴 대 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을 강의하고 있다.

소개한다. 예를 들어 매일 가벼운 명상하기, 잠자리를 깔끔하게 정리

승리하는 아침을 만드는 5가지 실천

을 위해 쓸 때 가장 효과적이라며 아침에 일어나 내가 감사하게 여기는

- 명상하라.

정돈하기, 일기는 피곤한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라 활기찬 하루의 시작

것들, 오늘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과 오늘의 다짐을 적는 아침일기를 쓰기, 또 45세 이상의 남자들은 소식한다거나 잠자리용 매트로 칠리패

드를 사용하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할 때 반복적으로 듣는 앨범이 있

- 잠자리를 정리하라.

- 한 동작을 10분~15분 반복하라. - 차를 마셔라.

- 아침 일기를 써라. 93


LIFESTYLE

브루클린 명소

Grimaldi’s Pizza 자주 접하고 먹는 일상의 음식 속에서 자국의 음식이 아니면서 현 지화와 토착화의 단계를 넘어서 이미 보편화가 되어버린 음식 중 의 대표적인 것이 피자가 아닐까 싶다. 나폴리 지역에서 유래했다 는 이탈리아 요리인 피자는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에 주둔한 미군 들이 맛본 후 미국에 전해지거나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의 이 민자들과 함께 미국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세계 적인 음식으로 발돋움하였다. 아이들의 간식이나 손쉬운 파티 음 식으로, 혹은 직장인들의 점심으로 인기 있는 피자는 이제는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먹을 수 있고 어느 동네를 가도 유명한 피자집 한두 곳은 꼭 있을 만큼 우리의 음식문화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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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사진 Do You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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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피자 소스와 토핑에

쓰이는 토마토도 이탈리아에서 수입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잘 어우러 져 석탄불로 지피는 오븐에 구워지면 비로 소 그리말디 피자집 특유의 피자가 완성되 어 미식가의 코끝을 자극한다.

음식 외교관으로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 는 브룩클린의 그리말디 피자집의 위상은

상상 이상이라 그에 따른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그리말디 피자집이 본점이 있는 브룩

클린 덤보(DUMBO) 거리에 2호점을 내려고 했을 때 뉴욕시에서는 허가를 내줄 수 없다

고 하였다. 그 이유는 뉴욕주의 엄격한 환경 법에 따라 석탄을 이용한 오븐을 쓰는 레스

토랑은 불허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25톤 이나 되는 석탄불로 지피는 벽돌 오븐은 무 뉴욕에 널린 수많은 피자집 중에서 ‘동네 피자집’ 차원을 넘어서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꼭 가봐야 하는 피자집이 뉴

욕 브루클린 덤보(DUMBO) 거리에 있는데 이름하여 그리말디 피자 (Grimaldi’s Pizza). 보통 이렇게 유명세를 탄 집은 막상 가보면 실망하 는 경우가 많지만, 그리말디 피자에 관한 한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좋다. 피자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가게 문밖까지 길게 꼬리를 문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피자를 먹기 위해 몇 시간씩 테이블을 기다리는 사 람들이 절로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 방송 채널인 Food Network에서 미국의 베스트 5 피자집 으로 꼽히기도 한 그리말디 피자는 석탄불로 때는 벽돌 오븐에서 구워

지는데 가스나 장작불로 굽는 피자와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을 낸다. 인 테리어에는 조금은 무심한 듯 빨간색과 하얀색의 체크무늬로 덮인 테 이블로 가득한 피자집에 들어서면 우선 석탄불에 구워지는 피자 크러 스트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맞아준다. 아주 얇은 피자 크러스트로 유명한 그리말디 피자의 성공비결은 신선한 재료와 직접 만드는 모짜

렐라 치즈, 피자 소스 그리고 이 집만의 특별한 피자 반죽 레시피라고

용지물이 될 처지에 놓였는데 얼마 있다가

뉴욕시에서 예외적으로 그리말디 피자집에만 허가를 내주었다. 그 이 유가 그리말디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기 위해 브룩크린으로 모여드는

관광객의 수와 그에 따른 관광 수입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엄청 났기때 문이라고 한다.

예약은 상상할 수도 없고, 한 판씩 파는 피자 이외에 조각 피자는 아

예 메뉴판에도 없으며, 계산은 오직 캐시로만 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 수하고서라도 그리말디의 피자를 맛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 해 애리조나, 네바다, 텍사스, 그리고 플로리다에도 체인점을 열었지

만 그래도 그리말디 피자집의 피자는 뭐니 뭐니 해도 브루클린의 덤

보(DUMBO) 거리에서 먹는 것이 제맛이다. 그리말디 피자에서 피자 를 먹고 난 후 길 건너에 있는 또 다른 명소인 브루클린 아이스크림

(Brooklyn Ice Cream) 가게에서 입가심하면 더욱 금상첨화. 덤보의 볼 거리와 함께 맛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Grimaldi’s Pizza

1 Front Street, Brooklyn, NY 11201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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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kfast at Tiffany's

‘티파니에서 아침을’ 글

편집부

Blue Box Café 98


보석 상점 티파니(Tiffany)가 작년 11월 10일 맨해튼 5번가

티파니 건물 내에 ‘Blue Box

Cafe’를 오픈 했다. ‘티파니’는 단순한 보석 상점을 넘어 영화

를 사랑하는 올드팬들에게 진 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장소 이다. ‘Blue Box Cafe’의 오픈

으로 이제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티파니(Tiffany)에서 아

침을’ 제목처럼 이곳에서 ‘아 침’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뉴요커를 표현하는 모습 몇 가

지를 꼽으라고 하면 ‘검은 선 글라스를 끼고 손에 담배를 물 며 한 손엔 애완견을 끌고 가 는 여성’이 빠지지 않는다. 영

화 ‘티파니에서 아침’에 나오 는 홀리의 모습이다. 검은 선 글라스에 화려한 장신구로 치 장하고 택시에서 내려 번화한

맨해튼 5번가 티파니 보석 상

점 앞 거리를 활보하는 홀리. 이 모습은 올드영화팬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는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티파니(Tiffany)에서 아침을’

장면이 아닐까? 홀리는 뉴욕 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지만 부

유한 남자를 만나 화려한 신분 상승을 꿈꾼다. 영화 속 장면은 1940년

대가 주 무대이지만, 오늘의 티파니 역시 여전히 신분 상승을 원하는 뉴요커들로 차고 넘친다.

‘Blue Box Cafe’는 맨해튼 5번가 유서 깊은 티파니 건물 내에 있으며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가 내려다보이는 전망까지 갖췄다. 카페 전

체 공간을 티파니 브랜드의 시그니쳐 컬러인 에그 쉘 블루톤으로 치 장하여 세련된 실내 분위기를 연출했다.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어쩌

면 영화 속 홀리가 꿈꾸던 신분이 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Blue

Box Cafe’의 등장은 당분간 올드 영화 팬들의 지난 추억을 자극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티파니의 오랜 역사와 명성에 걸맞은 우아함을 갖춘 이곳은 ‘뉴욕식 특

선 요리’로 아침과 저녁 메뉴를 제공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시그니 처 메뉴는 트루먼 카포티의 소설 이름을 딴 아침 메뉴다. 차나 커피, 누

텔라를 곁들인 부드러운 크루아상, 허니 버터 그리고 제철 과일과 베리

류가 포함된다. 훈제 연어와 베이글, 트러플 에그, 버터 우유 와플 또는

비건 아보카도 토스트 중 한 가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가격은 29불 ~40불 정도. 57번가 플랫브레드(Fifty-Seventh Street Flatbread) 또는 5번가 샐러드(Fifth Avenue Salad)를 선택하는 점심 메뉴도 있다. 이미

많은 일자가 예약석으로 꽉 차서 아마도 당분간은 사진으로나마 만족 해야 할지 모르겠다.

The Blue Box Café

4th floor, 727 5th Ave

New York, NY 10022,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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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크레스킬 고교 학생들 유엔에서 아트 전시회를 갖다

Art Exhibit by Cresskill students at UN 지난 해 11월 13일부터 이 주 동안 크레스킬 고등학생들의 아트 전시회가 유엔 뉴욕 본 부에서 열렸다. 크레스킬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외부 전시 공간을 찾던 중, 유엔 직원인 학부형의 도움과 협조로 특별히 유엔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다. 유 엔 전시장은 사상과 이념, 인종을 초월한 곳이자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글 Jae Won Min

Junior Reporter 정리

편집부

이번 전시회는 참여를 원하는 학생들이 국제적인 관심 사안을 선택한

작품을 제출한 학생 전원은 유엔 방문과 함께 전시회를 후원한 고위급

데 이 중 20점이 선정되어 전시하게 되었다. 선정 기준은 예술적인 면

국제적인 사안에 대한 이해를 넓힐 기회를 가졌으며 보람된 시간을 보

뒤, 각자 작업한 미술 작품과 짧은 글 등 총 35점의 작품을 제출하였는 외에도 국제적인 사안에 대한 이해 정도가 반영되었다고 한다. 선정된

작품 내용은 양성평등, 기아, 환경 그리고 난민과 같은 중요한 국제 이

유엔 직원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 본 전시회를 통해 참여 학생 모두 냈다.

슈를 다루었으며 학생 개개인의 미술적 성과도 상당하였다.

크레스킬 고등학교 Mr. Massaro 교장 선생님은 격려사를 통해 ‘전시회

무엇보다도, 참여한 모든 학생은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 생각을 많은

의 수고에 감사하다’고 전하며 이번 아트 전시회에 그치지 않고 학교의

사람과 특별한 방법으로 공유하고 또한 자신의 미술 작품을 유엔과 같 은 큰 규모에서 전시할 수 있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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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에 대해 축하하며 참여한 모든 학생과 선생님들 큰 행사 중 하나인 ‘카지노 나잇’에서 유엔 모금 행사 계획도 의논할 예

정이며, 또한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유엔과 관련한 활동을 강화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On the 13th of November, 2017, there was opening of Art exhibition by Cresskill High School students at the prestigious United Nations Headquarters Building in NYC. The exhibition ran through 25 November 2017.

The Cresskill High School art teachers have

been on the lookout for special locations at

which student works can be displayed. When students see their work outside of the school

building, it gives their efforts greater validation, and is a wonderful motivator. The possibility that their work could be displayed at

the prestigious UN Headquarters in New York City, of course, gave the students reasons to be especially excited. The United Nations is marvelous place and popular tourist attraction as well. It was

made possible by one of the parents who works in the United

Nations, who actually brought forward the idea, and thereafter provided critical support in obtaining the permission from the United Nations and helped with the logistics of the display.

So, in late May of 2017, the faculty of the art department at Cresskill High School (led by Ms. Julie Keating, and Ms. Catherine Gelchinsky) sent out a “call for entries” asking students to create

works of art for consideration. It was explained that the goal was to challenge students to consider global issues, to choose an

issue that matters most to them, and to discover ways that they

could convey the importance of the issue to others using visual

The faculty explained that it chose those artworks that clearly

20 were chosen to be displayed in the United Nations.

gender equality, poverty, racial discrimination, environment etc.

means. Approximately 35 entries were made, out of which only

demonstrated pertinent understanding of world issues such as and also demonstrated artistic talents and effort. Overall, the quality was impressive.

The students whose art works have been selected for the exhibition had an opportunity to visit the UN, and see their art works in display on 20 November 2017. They were greeted by

high ranked UN official, and had an opportunity to explain some

of the art works. The students surely appreciated the visit to UN,

and more so the opportunity to have their works displayed at UN. They were very proud.

Mr. John Massaro, the Principal of the Cresskill High School,

congratulated all participating students, and the faculty of art departments on their efforts and success in the whole events. Mr. Massaro further suggested that the school may utilize the art works for a fund raising event for the United Nations during its

famous “Casino Night”. He also expressed his desire to explore another activities related to the United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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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CAKE MORNING 제 2회 이벤트

with BOBBY from Making to Decorating

글 Jenny Lee 사진 Do Young Kim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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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행사 시작 전

행사 장소에 모인 에스카사 스탭들. 참가자들 의 명단을 확인하고, 준비된 명찰을 점검한다.

행사 참가자들에게 줄 에스카사 11월호 책도

잊지 않고 챙겨둔다. 행사시간이 가까워지자 Brownstone Pancake House에서 제공해주는 따뜻하고 진한 커피 향을 즐길 여유조차 없다. 행 사에 차질이 없도록 진행 상황을 꼼꼼히 점검하 는 스텝의 손길은 점점 빨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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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시작

11월 14일 10시, 에스카사가 주최하고 브라운스톤 팬케이크 하우스가 협찬한 ‘PANCAKE

MORNING with BOBBY from Making to Decorating’ 행사가 시작되었다. 에스카사 홈페 이지와 페이스북 등 온라인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보되어 신청 접수된 총 40명의 참가자

들이 Brownstone Pancake House에 모였다. 스텝의 안내로 조별로 구분된 지정석에 착 석한 참가자들은 테이블에 준비된 에스카사 책자를 펼쳐본다. 오늘 행사의 호스트인 ‘바

비’대표가 표지로 나온 11월호! 표지 사진만으로도 행사에 대해 기대감이 커지는 느낌이 다. 드디어 청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바비가 등장한다. 여느 옆집 아저씨 같은 푸근

한 이미지이다. 그는 준비된 볼에 ‘Brownstone Pancake House만의’ 특별한 반죽을 만들 어 보인다.

앉아 있던 참가자들은 반죽하는 모습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쿠킹테이블로 모여든다. 반죽 에 궁금한 것이 많은 참가자가 질문을 시작한다. 때로는 짓궂은 질문을 던져도, 인상 좋은 바비아저씨는 친절하게 응대한다. 반죽 시범이 끝나고 오픈키친 시간이 되었다. 미리 짜인

조별로 팬케이크 하우스의 부엌에 들어갈수 있는 기회가 왔다. 아쉽게도, 안전상의 이유로

직접 팬케이크를 만들어볼 수는 없었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직접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바비와 마주하며 팬케이크 제조과정을 참관할 수 있었다.

바비가 만들어 준 팬케이크 접시를 받아든 모든 참가자 는 토핑이 준비된 테이블로 삼삼오오 모여든다. 눈앞에 서 잘라주는 과일류, 고소한 견과류 그리고 달콤한 각 종 시럽과 과일잼까지…. 입맛에 맞게 취향에 맞게 토

핑을 얹어서 테이블로 향하는 참가자들의 입가에 웃음

이 번진다. 맛있는 팬케이크도 먹고,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참가자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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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마무리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되어버린, 간단한 퀴즈를 맞히

는 분들께 선물을 증정하는 시간! 바비가 준비한 구디백

안에는 Brownstone Pancake House의 시럽과 커피 파 우더 그리고 매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 등 알찬 선물

이 준비되어 있다. 팬케이크를 가장 독특하고 멋지게 만든

참가자를 찾는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어올리며 전 화기로 찍어둔 사진을 바비에게 보여준다. 한 테이블 두

테이블 정성껏 사진을 둘러보며 다가오는 바비의 모습에

서 성공한 사업가의 진솔한 면모를 보게 된다. 행사의 주

최인 에스카사 또한 6개월 정기구독권을 추첨을 통해 증 정하며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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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배부처

배부처

Fort Lee: 정관장, Rash Place, Main Violin, 엄마손만두, KBS헤어

Palisades Park: Koko Loko Coffee, 솔사우나, 김밥클럽, Peppre Media Leonia: Coffee Park Closter: TOUS LES JOURS, Sun violin, 예당

Norwood: Camerata New Jersey, 정미용실 Paramus: Kook Hwa Bakery Cafe, 서울 BBQ Englewood Cliffs: NV Factory Teaneck: AWCA Ridgefield: H-Mart, 아리랑김치 River Vale: 혜윰 공방 Edison: H-Mart

뉴욕 배부처

Manhattan: 고려서적, 뉴욕한국문화원, 소림꽃집 Flushing NORTHERN: ‌ 금강산, 대동연회장, 뉴욕의 아침, M 스튜디오, 굽지(Gupji), 뉴욕가정상담소 Bayside: SEJONG MUSIC STUDIO Long Island: H-M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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