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 ry fo r t h e m o d e r n l i f e sty l e
에스카사
COVER STORY
가장 평범한 노년을 꿈꾸는 영원한 보헤미안
‘행복의 나라’ 한대수 PEOPLE FOCUS
천연화장품으로 아시아 최고를 꿈꾸다
‘아이소이’ 이진민 대표
ART&CULTURE 김광석 특집
Young Acoustic Band 최영수 변호사
김광석을 노래하는 가수 송희원
시원한 강과 바다 스카이라인을 즐기는 뉴욕 해상 관광
미디어 후원 행사
세계합창제 World Choral Festival
August
김종현 전문의, 의학박사 MD, Ph.D
서울 가톨릭의대 졸업 서울 가톨릭의대 정형외과 석사 및 재활의학 박사학위 수료 전 서울 성모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뉴져지 의과대학 - Kessler Rehab Institute전문의 과정 수료 (미동부 랭킹 1위 재활의학전문의 수련기관) 미국 재활의학 교과서 관절염 및 주사치료요법 저자 미국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험 전체 수석 (2013)
김종현 통증 재활의학 M.D.전문의, 의학박사
관절통증 전문병원 진료과목
관절 통증 클리닉 : 관절염(무릎, 어깨, 손목, 엉덩이 관절 등) 진단과 약처방 및 초음파 가이드 주사치료 기타 통증클리닉 : 근육 및 신경통, 인대 및 힘줄 손상의 진단과 치료 (교통사고, 스포츠 손상등) 척추 클리닉 : 목 허리디스크, 좌골 신경통 / 신경 클리닉 : 뇌졸중, 안면 및 말초신경마비, 손발저림 재생치료 클리닉 : 프롤로 테라피(PRP) 를 포함한 주사 재생 치료 / 초음파 (Ultrasound) 진단 / 초음파를 이용한 인대, 힘줄, 신경 주사 / 신경검사 (EMG/NCS)
201.346.4347
158 Linwood Plaza 2nd Fl. # 208-10 Fort Lee, NJ 07024 포트 리 한아름 옆 린우드 플라자 빌딩 2층 #208
504명의 미국 재활의학과 전문의 시험 전체 수석 한국인 최초로 Elkins Award 수상(2013) Dr. Kim was awarded 1st place among 504 candidates for Physical Medicine & Rehab Specialists on American Board of PM & R exam in US, 2013.
“
모든 환자는 병으로 느끼는 아픔보다 정확히 모르는 불안감에서 오는 두려움이 더 큽니다
”
PRP(Plate Rich Plasma) 주사치료는 무엇인가요? PRP(Plate Rich Plasma) 주사치료는 자신의 혈액을 뽑아서 그중에 상처 치료를 담당하는 혈소판만을 골라서 환자의 손상된 부위에 직접 넣어주는 치료법으로 근육 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분들에게 이용되는 주사치료방법입니다. 근육 골격계의 통증은 관절 문제 뿐 아니라, 관절 주변의 인내나 힘줄, 근육의 약화 또는 파열 등의 문제로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퇴행성 관절염을 동반할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때 수술하지 않고 손상된 조직을 재생하여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PRP 주사치료 기사용되고 있습니다. 일부 인대와 힘줄은 혈액의 공급이 불충분한 구조이므로 손상을 받으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고 손상이 남아서 만성 통증을 일으키게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찾아 중식제를 주사하게 되면 인대와 힘줄이 중식되어 약해진 부위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통증을 해결하는 치료입니다. 비수술적 요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많은 환자분에게 주목을 받는 치료법 중 하나입니다. 간단한 주사요법이기 때문에 시술 시간이 짧은 장점이 있으며 시술 후 입원이 필요 없이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PRP 주사요법의 특징 주사 치료 후 보통 약 4주 후부터 효과가 나타난다. 자신의 혈액을 이용하므로 부작용이 없다. 입원이 필요 없으며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손상된 근육 및 인대의 자가 치유 능력을 촉진 시킨다. PRP 주사요법의 대상자 퇴행성 관절염, 연골연화증, 연골 손상, 어깨, 회전근개파열 및 힘줄 손상, 오십견, 팔꿈치 만성 염증, 테니스 엘보 / 골프 엘보, 스포츠 인대 손상 / 발목 인대 손상, 아킬레스건염, 족저근막염
CONTENTS
August 2017 Vol. 6
10
46
Cover Story
Education
Art & Culture
10
26
44
'행복의 나라' 한대수
단무지가 제일 맛있다
가장 평범한 노년을 꿈꾸는 영원한 보헤미안
이달의 시 19
그랬으면 좋겠다
선우미애
People Focus 20
천연화장품으로 아시아 최고를 꿈꾸다
‘아이소이’ 이진민 대표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5)
30
유소년 예비 음악인을 키우는 명문 음악 교육 기관
맨해튼 음악학교 The Manhattan School of Music (MSM)
34
인물탐구
짧고 불꽃같은 생을 살았던 한국 인권 운동사의 거목
조영래 변호사
38
미국 600만 독자를 울린 책
The Shack ‘오두막’
42
비 참 좋지
43
이달의 시
독자참여 코너
건강식 별미초계탕 어떠세요? 8
김광석 특집 그곳에 가면 김광석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대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46
김광석 다시 부르기
Young Acoustic Band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
52
내 노래는 나를 위해 부르는 나의 이야기
김광석을 노래하는 가수 송희원
58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성공 공식
영화에서 뮤지컬로 (Film to Broadway)
60
테너 유재웅의 재미있고 유익한 음악칼럼
‘노래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는 좋은 영향들’
62
전문 음악인의 생활속 음악이야기
과거의 나 돌아보기
66
70
Lifestyle 64
Travel 80
96
영감님들에게 자극 받다
유럽 작은 도시를 걷다가 깨달은 소중한 생각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다
영화 심리 이야기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66
82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시원한 강과 바다에서 뉴욕 여름나기
스카이라인을 즐기는 뉴욕 해상 관광
70
한여름 나른한 오후를 즐기다
모듬 꼬치구이
초록지붕, 파란대문, 빨간벽돌집
좋은 집이란?
Clinic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98
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알래스카
74
84
행사 100
종이접시로 만드는 자동차 모빌
다양한 치아미백 클리닉
세계합창제
김민재 미술교실
78
파키스탄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엄마 홍정연
앗살람 왈에꿈
아름다운 미소 하얀 치아 나도 가질 수 있다
86
췌장암에 관한 이야기
미디어 후원 행사
World Choral Festival
88
‘동네 목욕탕 사장님’의 실천하는 힐링
‘솔 사우나’ 대표 이 용
9
Publisher Dr. Charles Changsoo Lee Magazine Director Jennifer Lee
Editor in Chief Won Young Park Executive Director / Yebin Taylor Lee Senior Contributing Editor / Hyobin Lee Managing Editor / Jenny Lee Senior Columnist / Dr. Sung Min Yoon Legal Columnist / Minji Kim Music & Arts Columnist / Jaewoong Yoo, Sunboon Jeong Columnist / Mihee Eun, Stefano Jang, Young Hee Baek Medical Columnist / Ph.D. Kyungah Lim Food Columnist / Hwajung Sung Reporter / Juyoung Lee, Sarah Chung
Contributing Editors Bohyun Im, Min Her, Joohee Han, Youngjoo Song, Jihye Lee, Byeol Yoon, Hyunmee Kang, Sujin Myung, Sunyoung Lee, Jina Seo, Youngmee Shin, Annie Na, Sophia Kim, Minjae Kim, Dongha Kim, Jude Lim, Jooho Choi, YuJin Hong, Minjung Choi, Sungjoo Hong
Copy Editor / Joonhee Kim Creative Director / Anna Lee Graphic Designer / Jin Choi Photographer / Kibum Kim Junior Reporter / Katie Lee, Jae Won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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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절세계획으로 세금 부담을 최소화하겠습니다!!” SUNG & ASSOCIATES CPA, LLC
Richard Sung
CPA, MBA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경영학과 졸업 • Baruch College, MBA in Taxation • RSM US, LLP (미국 5대 회계법인) 포함한 미국 회계법인들에서 세무 전문으로 14년 근무
: RSUNG@SUNGCPALLC.COM 201.286.1869 EMAIL ADDRESS : 280 BROAD AVENUE, SUITE 202, PALISADES PARK, NJ 0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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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가장 평범한 노년을 꿈꾸는 영원한 보헤미안
'행복의 나라'
한대수 알 수 없는 재난으로 거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폐허의 지구. 종말을 맞 은 세상은 극도로 황량하고 온통 재로 뒤덮여 태양마저 가려져 있다. 그 황량한 땅을 아버지와 어린 아들 2명이 묵묵히 걸어간다. 걷다 보면 바 다가 나오고 또 자신들과 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2007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길 (The Road)'의 내용이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는 보호 의식과 사랑은 맹목적이고 지극하다. 식인종이 횡행하 고 문명이 사라진 야만의 땅에서 아들을 보호하는 것을 유일한 생존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소설 전편에 느껴진다. 그건 작가 의 마음이기도 하다. 코맥 맥카시는 65세의 나이에 셋째 부인에게서 아 들을 얻었다. 그는 늦게 얻은 귀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 길'을 쓴 것이다. 이번 호 표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한대수 가족을 만나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기자는 한대수가 코맥 맥카시 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긴 머리와 가죽 재킷, 청바 지가 여전히 어울리는 칠순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청년 같은 한 대수에게 이미 자신이라는 존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0살이 된 딸 이 이제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그의 삶의 의미였다. 기획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정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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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M
편집부
Bohe
m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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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뉴욕에서도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거주하는 퀸스 잭슨하이츠의 2베드룸 아
파트에서 올해 한국 나이로 70이 되는 가수 한대수를 만났다. 아내 옥사나 알페로바 (Oxana Alferova), 딸 양호와 함께 지난해 여름부터 살고 있는 집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기자가 말했다.
“선생님, 옛날 이야기는 안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어려서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70년대 뉴욕에 와서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20년 가까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 가족과 함께 다시 뉴욕에 와 서 살고 있구요. 딱 지난 10개월간의 그 이야기만 듣고 싶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시대다.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지
만, 한대수의 이름만 검색해도 넘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택에 방문한 건 아니었다. 포크록의
전설이나 영원한 히피 등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다시 끄집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 얻은 귀한 딸. 그 딸이 이제는 인생의 모든 목적이고 보람이라고 말하는 늙은 아빠의 평범
한 뉴욕 생활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당연히 첫 질문은 요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 지였다.
“가정주부 역할이지 뭐. 영어로 하면 하우스 허즈번드. 아침에 애 밥 먹이고 학교 데려다 줍니다. 그리 고 오후까지 내 일 좀 하죠. 늘 하는 거. 음악하고 미술. 그러다가 2시 넘으면 다시 애 데리러 학교에 가
요. 집에 와서 뭐 좀 먹이고, 숙제 도와 주고, 놀아 주고 그러면 저녁 먹을 때 되고. 요즘 내 생활이 그래
요. 그렇게 살려고 뉴욕에 온거에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집안 일을 잘하기에 체질에 맞는 생 활이라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옛날 이야기는 안하기로 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시 한대수의 일생에 대해서 간략하게나 마 소개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한대수는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단한 명문 집안 출신이다. 친조부 한영교는 1930년대 흔
치 않은 미국 유학생으로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희전문을 세웠다. 그의 부친 한창석은 서울대 공대 재학 중 핵물리학 분야 최고 명문으로 인정받던 코넬 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불과 20세인 한창석은 이미 18세에 결혼 해 한대수가 1살 나이였다.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한대수가 7 살이 되었을 때 영화에서 나올 듯한 사건이 생겼다. 가족과 나라의 자랑거리였다는 한인 천재 핵물리 학자 한창석이 미국에서 실종된 것이다. (그의 실종 미스테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한편 19살 나이에 싱글맘 신세로 한대수를 혼자 키우던 그의 모친은 결국 실종 사건 이후 재가를 했다. 한대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부산과 뉴욕을 오가는 시기를 보냈다. 55년 부산의 초등학교에 입학했
으나, 미국에 이민 와 뉴욕 할렘에 있는 초등학교을 졸업했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남중학교 에 입학했다가 17세 되던 해 기적 같이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듣고 65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한국말을 잊어 버린 아버지 그리고 백인 새 엄마와 지냈다. 66년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 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자퇴하고 적성을 찾아 뉴욕 사진학교에 입학했다가 생활고 때문에68년 귀국했 다. 50-60년대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드문 롤러코스터 같은 소년, 청년기를 보낸 것이다.
1969년 ‘세시봉’으로 데뷔 한 한대수는 포크 록이라는 장르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했고, 1974년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녹음했다.〈물 좀 주소〉 〈행복의 , 나라로〉등이 들어있는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
악 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2집이 나왔지만 서슬 퍼런 유신 독재 시대에
서 체제 전복이라는 이유로 앨범은 판매 금지되었다. 그는 2집 발표 시절에 첫번째 아내 디자이너 김명 신과 결혼해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이혼을 했다. 20살 차이가 나는 지금의 아내 옥사나와 뉴욕에서 만
나 1992년 재혼, 그리고 한국에서 살던 시기인 59세에 딸 양호를 얻었다. 90년대 후반 일본 록 프로듀 서에 의해 재조명된 한대수는 한국에서도 새롭게 인정을 받으며 가수와 예술가로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 10살이 되는 딸의 교육 문제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 현재 또 한번 뉴욕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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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가족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기사가 1년 전 주요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딸이 미국에서 학교 다니게 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다고 하니까, 언제나 교육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 한 국에서 관심거리가 된 것 같아요. 기러기 가족 문제 등 교육을 이유로 외국에 가는 현상이 이미 오래전 부터 있었고 그 때문에 문제점도 많은 나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어린 학생들과 가족들을 떠나게
하는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취지로 기사화 된 것이겠죠. 개인 한대수 일가의 거취를 일종의 사회 문제로 보는 거죠.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 한국과 뉴욕을 자주 오가지 않았 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내가 만든 노래가 탄압을 받으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 쫒겨나듯 온 적도 있구요.
그래서 이번엔 한국의 척박한 교육환경이 이들 가족을 쫒기듯 미국에 가게 만들었다는 시각의 기사도 나온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아이가 힘들어 하던가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양호가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기 시작했어요. 한국의 입시 경쟁이 이미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현실을 기자님도 잘 아시쟎아요. 아직 10살도 안된 어린애들은
무조건 친구랑 놀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해야 하는데, 초등학생들이 11시까지 공부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아이를 이렇게 삭막한 환경에서 키워서는 안되겠다
는 결심을 어렵게 한 것이죠. 여러번 말하지만 내가 뉴욕에 돌아온 이유는 오직 우리 딸 양호를 자유롭
게 교육 받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나 아내 모두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와이프는 한국 생활의 편안 함이 몸에 밴 상태여서 거칠고 힘든 뉴욕 생활을 다시 한다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고 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린 결론입니다.
뉴욕에 와서 생활해 보니 역시 기대 만큼 양호가 잘 적응하고 좋아하던가요? 한대수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마침 양호가 동네 친구와 함께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왔다. 잠깐 자기 방에 들어가더 니 다시 친구와 나갔다. 1시간 뒤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친구와 놀고 있는 양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오후 6시 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 온 양호의 평일 오후 모습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 이었다.
내가 이 말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일부 기러기 가족들처럼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혹은 남보다 더 앞서
가는 스펙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장 평범한 아이
처럼 키우기 위해서 온 겁니다. 내가 1950년대에 뉴욕 할렘에서 초등학교 다닐 땐 숙제도 없었고 매일 친구들과 맨해튼 길거리에서 놀았던 추억이 뚜렸해요. 그땐 한국도 그랬었겠지만 이젠 어린 아이들에 게 너무 힘들게 변했쟎아요. 뉴욕은 여전히 그런 생활이 가능하다고 기대했죠. 근데 미국도 좀 변한 건
있어요. 생각보다 숙제가 너무 많아졌어요. 딸 애 숙제 봐 주면서 매일 씨름하는 게 큰 일이라 한번은 담임 선생님 찾아가 숙제 적게 내달라고 했습니다 (웃음) 사람은 10대, 20대 때 충분히 인생을 경험하 고, 여행하면서 지리학을 배우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철학을 배우고,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미술을 배
우고, 연애를 하면서 성교육을 배우면서 청년기의 경험과 추억을 쌓아야 하는 겁니다. 그게 전혀 특별 한 것이 아닌거죠. 양호도 그렇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 보다 나은 교육이 아닌 가장 평범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 왔다”는 그의 말이 조금도 거짓 이 아님은 객관적인 현실이 증명한다. 양호는 비싼 사립이나 보딩 스쿨을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한대수 가족이 살고 있 는 잭슨하이츠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 중산층 지역이 절대 아니다. 활기차고 분주하지만 맨해튼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허름해 보이는 지역이다. 오히려 백인을 거리에서 보는 일 이 아주 드문, 스패니시와 아랍계와 인도계와 아시안이 골고루 섞여 사는 전형적인 이민자 동네로 당연히 공립학교 의 인종 구성도 마찬가지다. 한대수는 처음부터 맨해튼은 꿈도 꾸지 않았고 이번에 미국에 오면 '이런 동네'에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었다. 어쩌면 인종 차별 없고 고만고만한 이민자 자녀들이 함께 어울리는 학교를 다니며, 과외도 학원도 없이 수업 듣 고 끝나면 맘껏 놀기만 하며 자라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입장에서 '평범한 아이로 자라기' 외에 어찌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겠는가. 그는 넓고 인구가 많은 미국땅에서 딸이 맘껏 뜻을 펼치고 사는 미래를 희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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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육은 왜 그렇게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괴롭히고 경쟁을 강요 할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로 학부모나 선생님, 교육 관계자들을 비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책임보다는 근본적으로 나라가 너무 작아
요. 그렇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그런데 그렇게 경쟁해서 조
금 뛰어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얼마나 뜻을 펼치고 살고 물질적으로 보 장이 됩니까? 미국에선 가수가 히트곡이 하나 있으면 평생을 먹고 삽니 다. 록스타가 되면 팬이 수억이 되니까요. 인구가 많고 시장이 크니까 가 능한 일이죠. 일본만 해도 록음악 애호가가 한국의 수십 배는 많습니다.
이번에 전인권 씨도 뉴욕에 와서 공연하지만, 전인권, 신중현, 임재범 그런 재능을 가진 록스타들이 만약 한국이 아닌 미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나고 활동했으면 어땠을까요? 남 얘기할 것 없이 저를 보세
요. 50년 동안 음악을 했고 나름 유명한데 월세도 못 내요 (웃
음) 우리 양호가 공부는 얼마나 잘할지 모르지만, 음악, 미 술 쪽에 재능이 있습니다. 제대로 재능을 펼치고 살 수 있
도록 넓은 곳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잘되건 못되건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노릇이지만 부
모가 돼서 길은 열어주겠다는 겁니다.
기대만큼이나 걱정하신 부분도 있었을 텐데 가장 불만스 럽다거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돈이죠. 생활비 문제. 먹고 사는 일이 역시 만만치가 않네요. 물가 비
싼 뉴욕이라 당연히 각오하고 왔지만 막상 도착해 집 구하는 순간부터
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런 아파트가 맨해튼에서도 20년전에 800달러 정도 했습니다. 지금 3천달 러가 넘어요. 퀸즈에서는 300-400 달러 했어요. 지금 얼마나 비쌉니까. 이 건 좀 아니에요. 그래도 저나 아내가 낙관적인 성격이고 돈에 너무 연연하 지 않는 편이라 그때 그때 해결하면서 살고는 있어요.
그리고 전반적인 뉴욕의 문화 환경이 너무 상업화 되었어요. 규격화 되고 일반화 되고 ... 깨끗하고 편해지긴 했는데 제가 젊은 시절을 보낸 그 당시 뉴욕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뭔가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았 지만 대신 자유롭고 낭만적인 뉴욕의 모습은 찾기 어렵죠.
한대수는 전후 경제적인 풍요의 배경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던 비트 제너레이 션이 활약하던 50년대와 히피 문화가 주도하던 60년대를 관통하며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가수다. 60년대 한국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음악을 발표한 배양분 도 결국 그 시절에서 만들어졌다. 그에게는 80년대 이전의 뉴욕이 진정한 뉴욕이다. 범죄와 매춘이 횡행하던 과거의 위험한 타임스퀘어가 이제는 보도를 막 아 행인들이 앉아서 쉴 의자까지 놓여진 현재의 깨끗한 타임스퀘어 보다 그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 여전히 작곡과 미술 활동을 부지런 히 하고 있는 한대수에게, 그러므로 지금의 뉴욕은 예술가로서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뉴욕에도 친한 지인들이 있지만 뉴욕에선 이들과 가끔씩 만나서 회포를 푸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한국과 달리 쉽지가 않다. 게다 가 한국에서는 글도 쓰고 공연도 하면서 수입이 생길 꺼리가 있었 지만 이곳에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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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는 좋은 환경이겠지만 막상 본인은 희생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59살 까지는 오직 내 음악에만 신경 쓰며 살았어요. 어떻게 하면 더 아 름답고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이번 앨범엔 기타리스트 누 구를 고용할까? 내 팬들을 어떻게 만족시킬까? 특히 친절한 여성 팬들
에겐 어떻게 봉사활동을 할까? 이런 주제로 한평생을 보냈죠. 그런데 59세에 갑자기 베토벤 5번 교향곡이 연주되었어요. 딴딴딴 단. 우리 양 호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이렇게 많은 고통과 돈이 필요한지 처음으로 경험하 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처음 세상에 무서운 것이 생
겼습니다. 그리고 돈이 정말 귀중한 것도 알았구요.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그런 두려움과 고통보다 훨씬 크죠. 70이 된 나 이에 편안한 한국을 떠나 다시 뉴욕에 와서 사는 어려움... 물론 있어요.
나름 희생이죠. 하지만 만약 아이를 안 낳았다면, 내 인생은 반쪽이었
을 것이다. 인류 역사가 BC(Before Christ)와 AD(After Death)로 나누
아버지가 한대수라는 것의 의미를 10살 된 딸도 이미 알고 있을까요?
누어진다,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양호를 낳은 뒤 처음 교육에 대해서
함께 참여한 적도 있거든요. 친구에게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걸 보
어진다면, 나의 인생은 BY(Before Yang Ho)와 AY(After Yang Ho)로 나 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전 뉴욕타임스 매거진이 6순의 나이에 임신을 한 여배우의 반나 사진을 표 지로 올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이 혹시 부모의 이기 적인 행동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본인들은 늦둥이를 봐서 행복하겠지만 어 린 나이에 이미 병들고 노쇠한 부모를 지켜보는 것 혹은 부모를 떠나 보내야 하 는 자녀들의 마음의 상처는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일부의 지적을 인용했다. 하지만 한대수를 보면서 '늙은 아빠'를 둔 자녀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 했다. 생각해 보자. 평범한 남자들이 자녀들 두는 20-30대는 인생에서 가장 바쁜 사회 생활을 하는 시기와 겹친다. 육아는 아내에게 맡겨둔 채 매일 바쁜 생활에 쫒기며 살다가 어느새 자녀들은 커버린다. 생활비는 벌어 줄 수 있지만 아빠로서 정말 해줘야 할 노릇은 제대로 못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서구를 중심으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국에서 콘서트를 할 때 무대에 양호가 면 우리 아빠가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가수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
지만 딸이 정말 바라는 것은 유명한 아빠가 아니라 함께 많이 놀아주 는 다정한 아빠에요. 제가 해주고 싶은 아빠로서의 저의 모습도 그것이
구요. 그래서 주말이면 뮤지엄이나 센트럴 파크 등 뉴욕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은 같이 다니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전철비만 쓰 면서 맨해튼 바람 쐬는거죠. 그리고 5월에는 마침 저렴한 패키지 상품
이 있어서 큰 맘 먹고 바하마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바하
마에서 배가 떠날 때 잊지 못할 천국을 맛 본 기분이었어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초록 바다, 양호와 신나게 노래 부르며 같이 탄 제
트스키. 그런게 요즘 저의 행복입니다. 노래 한 곡 더 만드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적어도 딸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이렇게 함께 지내며 늙 어갈 수 있는 평범한 노년이 제가 꿈꾸는 삶이 되었습니다.
로 돈을 더 버는 아내에게 경제적인 책임은 넘기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는 하우
한대수의 조부 고 한영고 목사에게 지난 5월 모교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헤
스 허즈번드들이 늘어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행
리티지 어워드(2017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Heritage Award)를 수여했
동들이다.
다. 한대수도 수상식 자리에 참석했다. 한국전 직전의 최빈국 한국에서 그는 클 래식을 전공한 신학자와 핵물리학자와 피아니스트의 피를 받은 엘리트 가문의 “한대수의 마이뉴욕” 팝캐스트 방송
자녀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피가 예술적인 재능으로 발현되면서 큰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평범한 부모를 둔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되는 큰 불행도 찾아 왔다. 그의 말처럼 아버지가 당시 아무나 할 수 없었던 미국 유학길에 오르지 않 았다면 17년간이나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까지 떠난 상태에서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외로운 청소년기의 방황은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대수에게 가족은 언제나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존재였다. 큰 차이가 있다면 부모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이지만 아내와 딸은 자신이 선택한 가 족이다. 노년의 한대수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일생의 마지막 목표로 하는 사람이었다.
“절대로 아버지 처럼은 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어요. 필요할 때 옆
한대수는 하우스 허즈번드(House Husband-가정주부)역을 자처한다. 하지만 ‘조선일보 - 한대수의 사는 게 제기랄’을 연재하며 팝케스트 ‘한대수의 마이뉴욕’ 방송 진행과 사진작가, 또 그의 본업인 음악가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 중이다.
에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될 겁니다. 아빠가 아닌 가수 한대수로서도 마 찬가지에요.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감각이 떨어지고 뇌가 줄어들 어서 창의성도 줄어듭니다. 이 나이에 대단한 음악을 만든다는 욕심은 없어요. 제 인생의 마지막 걸작이 한양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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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시
시, 그림 선우미애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문학석사 수료 강원한국수필문학회 이사 국제펜클럽강원지부 사무국장 수상 1996년 한맥문학 (월간) 신인상 2008년 새한국문학상 (9회) 2010년 동포문학상 (26회) 2011년 국제펜문학 강원펜문학번역작품상 (8회) 2012년 춘천여성문학상 (7회) 2012년 노천명문학상 대상 (8회) * 중앙일보시조백일장 차상 (새벽을 기다리며) * 금호문화시조백일장 차상 (4월) * 신사임당주부백일장 장원 (대관령) <시집> <자연을 닮은 그대는> <섬 같은 사람> <까닭 없이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산다는 것은> <봉선화 소녀> <길을 읽다> 시집 외 2015년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문학상수상자전집> 시와 에세이출판 2016년 세월호가 남긴 절망과 희망(그날 그리고 그 이후)공저, 한울아카데미출판 21
PEOPLE FOCUS
Dreaming of the best natural cosmetics industry in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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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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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5)
단무지가 제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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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엊그제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갔다가 김밥용 노란 단무지를 사 왔
70년대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시락 반찬은 둥근 소시지
일본의 승려인 “다꾸앙”이 무를 쌀겨와 소금에 절여 만들어 먹기 시작
얀 쌀밥 위에 노란색 노른자가 중간에 딱 자리 잡고 있는 달걀부침이라
지. 단무지는 원래 일본에서 건너온 음식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최초로
해서 이 음식을 “다꾸앙”이라고 불렀다고 해.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한
동안 일본식 발음을 따서 “다꾸앙” 혹은 “닥광”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국어순화를 위해서 “단무지”로 이름이 바뀐 거야. “단무지”는 “단맛이
에 달걀을 살짝 입힌 소시지 부침, 두부조림, 구운 김, 계란말이였어. 하 도 올려놓으면 최고의 도시락이 되었지. 당시에는 달걀과 소시지가 비 싸서 아주 귀한 대접을 받았던 거야.
나는 무”라는 뜻이란다.
가끔 모내기나 추수라도 하게 되면 일꾼들 먹이느라 특별히 음식을 준
원래 단무지는 물렁물렁한 일본식 짠지인데 여기에 여러 가지 화학첨
볶음 등을 도시락 반찬으로 싸 올 수 있었어. 그런 날이 일 년에 며칠
가물과 노란 색소를 넣어서 지금 우리가 먹는 것처럼 딴딴한 노란 단 무지가 만들어지는 거야. 지난번 중국집에 갔을 때도 단무지를 무척 잘
먹었었지. “여기요!, 단무지 더주세요” 라고 여러 번 주문했잖아. 단무
지 없이 자장면이나 짬뽕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거야. 김밥 을 만들 때 단무지가 들어가야 제일 맛있잖아. 단무지는 만들기고 쉽고 가격도 저렴해서 서민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단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단무지를 비닐봉지에서 꺼내 냉장고에 넣어두다
가 문득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셨던 송명순 선생님이 생각이 났단 다. 당시 결혼을 하지 않으신 30대 후반의 미혼 선생님이셨었지. 보통 체격의 단발이셨는데, 늘 웃는 얼굴을 하시며 온화한 미소로 학생들을 대하셨어. 한 번도 매를 들거나 큰소리를 치신 적도 없으셨지.
선생님은 인성교육에 대한 열정이 아주 많으셨어. 늘 학생들에게 서
비하지. 그래서 다음날은 쌀밥에 구운 김, 간장게장, 배추 겉절이, 멸치 안 되기 때문에 대개 나의 양은도시락에는 단무지가 한구석에 초라하
게 자리 잡고 있었지. 김치를 싸서 올 때도 있었는데 종종 양은도시락 통에서 김칫국물이 새어 나와서 교과서와 가방을 빨간색으로 물들이
고 심한 냄새를 풍기곤 했어. 그 후로는 단무지가 김치를 몰아내고 도 시락 반찬의 단골 메뉴가 된 거야.
선생님은 네 명씩 모여서 반찬을 서로 나눠 먹게 하셨는데, 내 반찬이
늘 단무지이다 보니 친구들이 내 반찬은 안 먹더라고. 소시지, 계란말 이, 김을 싸 온 친구들은 자기 반찬만 먹는 거야. 어린 마음에 소심했던
나는 친구들이 싸 온 도시락 반찬을 먹을 수가 없더라고. 좀 불공평하
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친구들이 하찮은 내 단무지 반찬을 먹고 내가 그들이 싸 온 맛있는 반찬을 먹게 되면 손해라는 생각이 든 거야. 그래 서 나도 혼자서 보리밥에 단무지만 먹곤 했었지.
로 배려하고, 단합하고, 친구가 되도록 지도하셨었지. 앉은 자리를 매
점심시간만 되면 마음속에 창피한 생각이 많이 드는 거야. “아 제발
반 50여 명의 학생이 모두 친구가 될 수가 있었던 거야. 선생님의 노
겠다.” 이런 생각을 했지. 점심시간이 기다려지고 즐거워야 하는데
주 바꿔서 서로 다른 친구들과 짝꿍이 되도록 했어. 그러다 보니 한 력으로 같은 반 친구들끼리 서로 싸우는 일도 없었고 늘 사이좋게 지 낼 수가 있었어.
좀 점심시간이 없었으면 좋겠다.” “빨리 점심시간이 지나갔으면 좋 도시락 반찬에 대한 열등감과 수치심 때문에 제일 피하고 싶은 시간 이 된 거야.
점심때는 교실에서 양은도시락을 먹곤 했었지. 양은도시락은 알루미
선생님은 매일 돌아가면서 네 명씩 모여 앉은 책상에 가셔서 함께 식사
형이나 타원형이 많았었지. 그 도시락통 안에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넣
께 점심 먹기를 기다리곤 했지. 시골 학교 선생님이셨지만 도시락에는
늄 재질에 노란색이나 은색을 입혀서 만든 도시락 통이야. 주로 직사각 어서 책가방에 넣고 다녔었어. 알루미늄 통이기 때문에 겨울에 석탄 난
로 위에 얹어놓으면 따끈따끈한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지. 단점은 뚜껑
이 잘 열리고 음식물이 흘러나와서 책과 책가방을 더럽히고 음식 냄새
하셨어. 맛있는 반찬을 많이 싸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선생님과 함 평소 볼 수 없었던 반찬들이 듬뿍 들어있거든. 또 인심도 좋으셔서 반 찬을 많이 싸 오셔서 아이들이 먹도록 하셨어.
를 많이 풍긴다는 것이었어.
어느 날 선생님이 내가 있는 책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게
선생님은 점심시간에도 학생들이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네 명씩 함께
탄이 나오더라고. “고춧가루에 참기름을 살짝 얹어서 단무지 무침이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도록 하셨어. 매주 친구들을 바꿔가며 도시락 반
찬을 나눠 먹으며 친구가 되도록 배려하신 거야. 나무책상을 두 개 붙
여서 의자를 돌려놓고 서로 마주 보면서 도시락을 나눠 먹었지. 먹거리 가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학교에 도시락 먹으러 간다는 말이 나 올 정도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단다.
하지만 나는 점심시간만 되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어. 도시락 반찬 때
문이었지. 우리 집에는 네 살 많은 형과 한 살 아래 여동생을 포함해서
총 세명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어.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던 동
생들이 두 명이 더 있었지. 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농사일로 바쁘신 어머니가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는 일이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었지.
남의 농사짓는 소작농 처지인지라 생활도 넉넉하지 않았었거든. 그래 서 도시락 반찬이 늘 변변치 않았었어. 30
되었어. 그날도 내 도시락을 연 순간 “아! 또 하얀색 단무지구나!” 한
라도 만들지”하고 살짝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어. 친구들은 맛있는 반찬을 싸 왔는데, 나만 단무지를 싸 왔으니 선생님 앞에서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여느 때와 같이 내 단무지하고만 밥을 먹고 있었어.
함께 식사하시던 선생님은 나에게 반찬을 떠주시면서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지” 하시는 거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평소 먹을 수 없는 반 찬들이 많아서 조심스럽게 선생님이 주신 반찬을 먹고 있었지. 대신 선
생님은 내가 싸 온 단무지만 드셨어. “난, 세상에서 단무지가 제일 맛있 다” 하시면서. 그 말씀을 듣고, 난 선생님이 단무지를 정말로 좋아하시
는 줄 알았어. 그리고 갑자기 단무지 반찬에 자부심이 막 생겨나는 거 야. “그래,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는, 아주 귀한 단무지를 내가 싸 왔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지.
그날 이후로도 내 도시락 반찬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어. 똑같이 단무
지금도 어머니는 어렸을 때 많이 먹이지 못했다고 늘 미안해하신단다.
사뭇 달라졌단다. 아이들과 돌아가면서 함께 점심을 먹어도 자신 있게
다녀라” 이런 잔소리를 늘어놓으시지. “엄마!, 요즘 못 먹는 사람이 어
지를 도시락 반찬으로 싸 왔지. 하지만 내가 점심시간을 대하는 마음이 친구들이 싸 온 반찬을 먹을 수가 있게 되었지. 김, 달걀, 소시지도 먹고
말이야. 친구들이 내 단무지를 먹든 말든 상관하지 않게 되었지. 선생 님이 인정한 귀한 단무지이니까.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내게는 큰 용기
가 되었단다. 단무지 반찬 때문이 아니라 단무지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내 마음 때문에 점심시간이 싫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선생님의 작 은 배려를 통해서 도시락 반찬을 대하는 내 생각이 바뀌게 된 거야.
대개 시골 아이들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은 그중에서 더 가난했 었어. 늘 명절이 되기를 기다렸지. 그 날이 되면 새 옷을 하나 얻어 입을
그래서 멀리 계신 어머니는 전화하면 “요즘 잘 먹고 지내냐?” “잘 먹고
디 있어?” “지금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야”라고 맞받아치지
만, 어머니가 음식에 집착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단다. 그때는 몰랐지 만, 가난은 나에게 큰 축복이 되었단다.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
게 되면서 생활력을 키울 수가 있었거든. 가난은 나를 공부하게 했단 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게 성실을 가르쳐 주었지. 살아오면서 음식 투정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습관과 남을 대하는 겸손의 자세는 덤으로 얻을 수가 있었지.
수가 있었고, 평소 먹지 못하는 음식을 마음껏 맛볼 수가 있었거든. 큰
주말에는 단무지를 넣고 김밥을 말아먹기로 했지? 단무지를 듬뿍 넣어
음식들을 못 먹게 되니까 집에 가자는 어머니의 독촉이 전혀 귀에 들어
다는 단무지가 더 좋아졌단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집에 제사를 지내러 가서는 집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어. 집에 오면 그 오지 않았던 거야. 그때마다 억지로 나와 동생들을 끌고 산골짜기에 있 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가 말없이 우셨던 기억이 난단다.
서 만들어야겠다. 얼마나 귀한 단무지인데. 요즘에는 소시지와 달걀보 그러고 보니 “선생님이 정말로 단무지를 좋아하셨나?”라는 생각이 문 득 든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뉴욕차일드센터 임상 및 통합지원 국장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31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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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년 예비 음악인들을 적극 키우는 명문 음악 교육 기관
맨해튼 음대 The Manhattan School of Music (MSM) 뉴욕으로 음악 유학을 오고 싶은 예비 음악인이 꼭 고려하는 학교 중 하나.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맨해튼 음대 The Manhattan School of Music (MSM)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 뉴욕에서 줄리어드, 메네스 와 함께 3대 음대로 꼽히며 전 미국에서도 수준과 명성을 인정받는 음악 교육 기관이다. TBS (The Best School) 사이트에서는 'The Best Music Conservatories in U.S'에서 1위 줄리어드, 2위 커티스 음대에 이어 이 학교를 3위에 올리기도 했다. 명성 있는 한인 음악인들도 많 이 배출한 음악 명문 맨해튼 음대에 대해서 알아보자. 글
편집부 33
소프라노 캐서린 김
테너 이성은
테너 최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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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역사
맨해튼 음대는 뉴욕시의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음악원이다. 클래식과 재즈 연주 및 작곡 분야에 학사, 석사, 박사 과정의 학위를 제공한다. 재학생 중 75% 이상이 뉴욕외 지역에서 지원하고 30% 이상이 외국인 유학생들이다. 맨해튼 음대는 피아니스트 자넷 슈넥이 1910년 맨해튼 이스트할렘에 Neighborhood Music
School이란 이름으로 당시 3,000달러의 학교 기금, 23명의 교수진, 120명의 학생으로 설립되었다. 현재는
50여 개국 유학생을 포함해 95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슈넥 학장과 함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와 피아니스트 해롤드 바우어(Harold Bauer) 등이 초기 이 학교의 기초를 제공한 저명한 예 술가들이다. 1943년 학교의 예술적, 학문적 성장으로 음악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헌장 개정안이 작성되었고,
1947년 석사 학위 그리고 1974년에는 음악 예술 박사 학위 수여를 시작했다. 1969 년 당시 메트로폴리탄 오
페라의 지휘자이자 오페라 코치였던 조지 시크(George Chick)가 학장을 맡은 후 이스트 할렘에서 현재 콜롬비 아 대학 인근인 모닝사이드 하이츠로 위치를 옮겼고 오페라 프로그램을 신설하였다. 프로그램과 활동
맨해튼 음대는 성악, 기악, 연주, 작곡, 재즈 연주, 합주와 오케스트라, 현대 공연, 재즈 작곡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외 프로그램으로 Professional Studies Certificate와 Artist Diploma가 있 다. 이 학교는 특히 2016년부터 시작한 뮤지컬 씨어터 프로그램을 통해 뮤지컬 극장 분야의 학위를 제공하 는 뉴욕 최초의 독립 음악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도 2번째인 뮤지컬 씨어터 프로그램은 루이 페레
즈 (Luis Perez) 디렉터와 예술 자문 위원회(Artistic Advisory Committee)가 이끌고 있는데, 위원회에는 빅토 리아 클락, 조안나 글레슨 등 기라성 같은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위원으로 속해 있다. 2년밖에 안 된 짧은 경력
에도 불구하고 매년 300명 이상이 응모하는 데 이 중 5명만을 선발해 1.6%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만 프로 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맨해튼 음대는 재학생들에게 다양한 라이브 공연 경험을 제공한다. MSM Symphony,
Philharmonia, 그리고 Chamber Sinfonia 3개의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이고 SN Wind Ensemble 역시 연중 활발 한 연주 활동을 벌인다. 재즈 예술 프로그램에는 재즈 필 하모닉, 재즈 오케스트라, 아프로 쿠반 재즈 오케스트 라, 챔버 재즈 앙상블 등 다양한 앙상블이 포함되어 있다. 택투스(Tactus)는 현대 실내악을 위한 앙상블이며 학 교의 현대 공연 프로그램 (CPP)에서 뽑힌 대학원생들로 구성된다. 또한, 학교는 연례 협주곡 경연 대회를 개최 하여 우승자에게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일련의 공연을 포함해 1년에 600여 회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최신식 퍼포밍 아트센터도 맨해튼 음대가 자랑하는 부분이다. 풍성한 유소년 프로그램
맨해튼 음대는 적극적으로 예비 음악가들을 받아들이고 또한 일반 어린이와 청소년 관객을 위한 연주 활
동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 학교는 1999년부터 미국 작곡가 협회 (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ublishers)와 제휴해서 11살과 17살 사이 뉴욕시 공립학교 학생들에게 무료 여름 음악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5살과 18 사이 475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맨해튼 음대의 예비
학교는 학생들의 높은 수준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또한 ‘아트 인 에듀케이션’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연간 2,000 여 명의 학생들에게 음악 교육 활동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4월 이 학교 예비학교 재학생 부모들의 모임인 ‘한 소리 (Hansoree)’가 학생들의 자선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맨해튼 음대에 대한 한인들이 관심과 지원도 커지
고 있다. 또한, 잘 발달한 오페라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Accompany Faculty이자 연주자인 워렌존스 (Warren Jones)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디렉터 출신의 Donna Vaughn 등이 포진하여 연중 2회의 full stage 오페라공연과 크고 작은 성악콘서트가 연 100여 차례 이루어진다. 또한, 현 세계적인 유
명 성악도 들을 배출하여 Susan Graham, Kathleen Kim, Dawn Upshow, Dolora Zajick, Renee Fleming 등 이 졸업하였다.
맨해튼 음대 출신 한인 음악인
맨해튼 음대 출신 한인 음악가 숫자는 점점 늘고 있다. 맨해튼 음대 출신으로 뉴욕은 물론이고 국내외에서 활
발한 활동을 하는 음악가 중 성악가 소프라도 케서린 김(Kathleen Kim)은 미국의 신문들이 “경탄할만한 코로
라튜라”라고 극찬을 받을 정도였으며 현재 Metropolitan Opera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장애를 극복한 테너 최승원과 디트로이트 오페라 주역을 맡았던 테너 황진호, Metropolitan Opera 콩쿨에서 우승을 한 테너 이성은도 있다. 바리톤 진솔 역시 Metropolitan Opera 콩쿨 우승자이기도 하며 그는 현재 Houston Opera에서 활동하고 있다. 바리톤 강주원은 마이애미 그래드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으며 San Francisco
Opera에서 활동 중이다. 피아니스트로는 연세대 교수 김영호, 유영욱이 있다. 이외에도 파나마 국제 피아노
콩쿠르와 마리아 칼라스에서 2위 입상한 홍국희 등 뉴욕 MAT을 무대로 활동하는 솔리스트와 전 세계에서 이 름을 떨친 맨해튼 음대 한인 음악가는 이제 그 숫자를 세기 어려울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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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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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짧고 불꽃 같은 생을 살았던 한국 인권 운동사의 거목 조영래 변호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렵게 대학에 진학 후 학생 운동 때문에 투옥을 한 뒤, 감옥에서 사법고시 합격, 변호사가 된 후에도 부와 영예를 좇는 변호사가 아 닌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던 사람이 한국의 새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대 통령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역시 못지않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군사정 권과 맞서 대항하고 노동자의 편에 서서 싸웠던 상고 출신의 노무현 인권 변호 사는 그보다 10여 년 먼저 대통령이 되었다. 에스카사 8월호 인물탐구에서 살 펴볼 고(故) 조영래 변호사. 그가 아직 생전에 있었다면 이들과 비슷한 연배이 고, 흙수저로 태어나 법조인으로서 입신양명의 길을 걷는 대신 어려운 이들의 편에 선 정의로운 변호사였다는 점에서 두 대통령과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렸 던 인물이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만일 정치인의 길을 걸었더라면 어쩌면 이 두 사람보다 더 먼저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될 정도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경기고-서울대 법대-사법고시 통과’라는 개발도상국 시 대 대한민국에서 권력과 명예가 보장되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치면서도 항상 낮은 곳만을 지향하다가 치열하고 불꽃 같은 생을 살다간, 명실공히 한국 인권 운동사의 거목이었다. 편집부
글
조영래 변호사가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지 사반세기가 넘게 시간이
흘렀다. 그를 모르는 세대가 늘어났고 그 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기억 속에서 도 조영래의 이름이 희미해져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삶과 정신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은 다음 책들을 읽어 봐도 좋을 것이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 변호사의 글 모음.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엮음(창작과 비평사, 199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 - 그 인권변론의 발자취(도서출판 까치, 1992) <조영래 평전> - 세상을 바꾼 아름다운 열정-안경환 저(강, 2006) <인권변호사 조영래> - 박상률 저 (사계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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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아깝게 요절한 천재이다. 고 3때 한일정상회담 반 대 시위를 주도했다가 정학을 당했는데도 몇 개월 입시 공부해 서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사법 시험준비 중인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자 공부하다 가 뛰어나와서 학생 장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냈음에도 바로 다음 해인 1971년에 합격했을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졌다. 거기 에 중학교 때부터 불경을 읽던 한문 실력, 사법시험 1차용 영 어문제집을 직접 쓸 정도의 탁월한 영어 실력,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글을 썼던 그는 다방면에 능한 천재였다. 흙수저 출신의 반골(反骨) 소년 천재 그리고 전태일
조영래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대구에서도 가난한 지역으로 소문난 ‘방천가의 빈민가’에서 어 렵게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이 거덜 난 후 7남매를 데리고 대책 없이 상경해 서울의 달동네를 떠돌며 지 독한 가난에 허덕였다. 방에는 늘 형제들로 빼곡했기에 그는 달동네 뒷산으로 올라가 공부해야 했다. 어학에 유달리 뛰어났으며 ‘적벽부’ ‘출사표’ 등 명문에 심취하고 불교 경전을 독학으로 완독했다.
소년 천재로 불러도 좋을 만큼 명석했던 그는 경기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3월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하며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그가 수석 합격 인터뷰에서 “붙었으면 붙은 거지 수석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
냐?”라고 한 것은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유명한 일화다. 조영래 변호사의 인권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기념
비적인 변호 사건으로 기억되는 부천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인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실용적이고 가장 타당한 도덕적 기준 외에 허영심이나 명예욕, 고정관념에서 빚어지는 군더더기들은 단칼에 잘라내는 분”이었다고 그 를 추억했다.
전쟁 후 빈민국가였던 대한민국에서 소위 ‘개천에서 용난’ 많은 서울대 법대 출신 엘리트들과 그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은 이미 그의 고등학생 시절 반골 정신에서 엿볼 수 있다. 조 변호사는 고학으로 쪼들리는 시간 속
에서도 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하여 정학처분을 받았다. 대학 시절 역시 1969년 졸업할 때까지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규탄, 6·7부정선거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 쟁취 등 학생 운동을 주도하며 부정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학생활동을 계속하였고 서울법대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 는 것에 일조하였다.
1970년 ‘노동삼권을 보장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한국 노동 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고, 당시 졸업 후 사법
시험을 준비하던 조영래에게도 평생 남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장기표가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
을 지키는 동안 조영래는 대학가와 종교계, 지식인 사회를 선동하며 누비고 다녔다. 마침내 ‘대학생 친구 한 사 람’을 그토록 아쉬워했던 전태일의 장례식은 서울대 법대에서 거행됐다. 80년대를 관통한 노학연대의 맹아가 이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한편 71년 부정선거를 통해 가까스로 당선된 박정희는 이미 유신을 통한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었다. 전국
대학 서클 해체, 문제 학생 1,800명 연행, 300여 명에 대한 강제 입영 등을 자행했고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있던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18개월간 투옥된다. 그는 출옥 후에도 서슬 퍼런 긴급조치에 민
청학련 주모자로 분류되어 도망자의 신분으로 이후 6년을 보낸다. <전태일 평전>은 바로 그 시기에 쓰였다. 조
영래는 전태일의 수기에 적힌 대로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 미성년 여성 노동자와 만남과 대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의 도보 귀가 등 소년 및 청년 노동자의 궁핍했던 삶을 그대로 체험하며 책을 썼다.
그러나 3년 만에 완성된 이 원고는 출판사를 잡지 못한 채 일본을 떠돌다가 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 과 죽음>이란 제목의 작가 미명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당시 변혁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 영혼들의 양심을 뒤 흔든 책이었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38
자신을 혹사했던 인권 변호사의 짧은 삶
조영래 변호사는 입신양명의 관문인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나서도 고난의 길을 고집했다. 1971년 2월 사법연
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으나 또 다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운 피신 생활에 들어갔다. 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된 조영래는 수배 생활 내 내 그의 곁을 지킨 동지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든다. 그 의 붓은 합법적 공간을 만나 신명을 얻었다. 그의 무기 역시 ‘법’이라는 강력한 전문성을 얻었다. 시민 공익법률
사무소에 둥지를 튼 그는 5공의 인권 경시풍조를 향해 국제인권규약을 상기시키고, 학원안정법 입법 기도를 향해 위헌적 논리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와 서울시를 상대하여 2,000여 가구 수재민의 소송을 맡아 심혈을 기울여 3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 사법 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었다.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으로 인권보고서 집 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독재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으로 인권수호를
주장하는 힘 있는 글도 많이 발표하여 글을 잘 쓰는 변호사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설에 도 관여하였다.
그의 이력에서 1986년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전태일 평전과 함께 가장 인구에 회자되는 업적이다. 여대생 권인숙을 부천경찰서 문귀동 경찰이 성고문했고 이를 폭로한 권인숙에게 “여성의 성 마저 운동의 도구
로 이용한다”며 당시 독재정권과 어용언론들이 매도한 80년대의 대표적 인권 유린 사건이었다. 비록 이 사건은 당시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지만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은 전두환 정권의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 쳤다. 실제로 이 사건은 87년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88년 4월 성고문 경찰 문귀동은 구속됐다.
조영래 변호사는 이외에도 1985년부터 각종 노동사건의 변론에 골몰하였고 보도지침사건 변론, 진폐증 보상
사건 등 노동, 빈민, 공해, 학생관련 사건 등을 맡아 열성적인 변론을 해 왔다. 그야말로 눈부신 활동이었으나 자신도 말했듯이 심신이 힘들고 본업에 무리가 갈 정도로 수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등 격무의 연속이었다. 학생운동가, 반독재투쟁가, 인권변호사, 문필가였지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고 무엇보다 잠시도 입에서 담
배를 떼지 않았던 유명한 골초였다. 결국, 그는 1990년 9월 초순 청천벽력같이 폐암 3기의 진단을 받은 뒤 3개 월을 넘기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12일 43세로 타계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조영래를 기억하자
조 변호사와 절친했고 80년대 재야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장기표 씨는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바란 높은 꿈과 희망,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을 이루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강인한 의지와 집념이 같았다.”고 그를 평가했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성고문 사건 당시 자신도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았지만 조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 오 히려 그의 생계가 걱정됐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1심 변론 요지도 그렇고 고발장과 함께 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글을 거의 조 변호사님이 쓰셨다. 재밌었던 것
은 그분의 구두였다. 낡다 못해 일부는 떨어지기까지 한 구두를 보고서 나는 어이없게도 그분의 생계를 걱정했 다. 수임료도 안 내는 시국 사범들 변론이나 하시면서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실지 짐작이 안 갔다.” 권 교수가 기억하는 조영래 변호사의 모습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창립을 주도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선수 전 회장은 조 변호사를 “무엇보다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평했었다. 집단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년), 여성 차별을 바로잡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1986년),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 봉동 진폐증 사건(1987년) 등은 ‘인권감수성’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시도하기 어려운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 이 기사는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경향신문: 2004년 10월. 실록민주화 운동 (71) 인권변호사 조영래 대한변협신문: 2009년. 김이조 변호사 연합뉴스: 2010년 12월 10일. ‘서울YWCA연합회관’ 강당에서 ‘조영래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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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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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600만 독자를 울린 책 The Shack ‘오두막’ 아마존 종합 베스트 1위 뉴욕타임스 베스트 38주 연속 1위 캐나다 출신 소설가 윌리엄 P. 영은 선교사 부모에 게 태어나 파푸아 뉴기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출판사를 구하지 못해 2007년 자비로 출간한 기독교 소설로 의외의 대 힛트를 친 뒤 영화로도 제 작된 ‘The Shack(오두막)’은 미국 600만 독자가 가 진 내면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책이 되었다. Canadian novelist William P. Young was born to
missionary parents and spent his childhood in Papua New Guinea. The Shack, which was produced as a
film after a hit in a Christian novel was published in 2007. Initially, he could not get a publishing company,
but this eventually became a book that gives the inner scars of 6 million American readers. 정리
편집부
글 이제국
캐나다 밴쿠버 거주 / 고려대 경영대 경영학과 졸업 전 밴쿠버 중앙일보 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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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어느 여름 주인공 맥은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캠핑을 갔다가 큰 딸 케이트가 일으킨 카누 전복 사고로 아들 조쉬가 죽을뻔한 상황을 맞게 되는데 이런 경황이 없던 중에 작은딸인 6살 미시가 살인 연쇄 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맥은 막내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
하고 자신과 카누사고를 일으킨 케이트를 원망한다. 그에게는 어린 시절 가족을 괴롭히던 아 버지를 맥주에 독을 넣은 뒤 집을 가출한 과거를 갖고 있다. 그는 어린 딸을 죽였다는 괴로움과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학대하며 지낸다. 그로부터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맥의 아내가 하나님으로 칭하는 ‘파파’로부터 딸이 살해된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받는 다.
흑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 하나님인 엘루시아와 성령으로 나타난 아시아 여성인 사라유, 그 리고 중동 노동자인 유대인 예수가 3위 일체로 맥 앞에 나타나 기독교 신앙의 중심 사상들인 선
택, 자유의지, 삼위일체, 예수의 인성, 창조, 사랑에 대해 맥과 교대로 이야기하면서 맥을 학대하 던 아버지와 사고를 일으킨 딸 케이트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슬픔과 상처, 고
통의 기억이 있다. 어린 딸을 잃은 슬픔에 잠긴 맥은 파파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딸이 납치되어 살해되었던 오두막, 즉 그의 ‘고통’이 시작된 곳에서 상처에 대한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의 정체성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
는 것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점과 세상일에 하나님은 어떻게 관여하는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으며, 그
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독립성과 권리를 포기하여야 한다. 맥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식을 사랑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딸 미시를 죽게 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살인자 도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며 미시는 하늘나라에서 맥이 생각하듯 불 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감정에는 선악이 없으며 지각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맥은
아버지와도 만나고 화해를 한다. 하나님은 미시의 시체가 동굴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미시는 하늘나라 정원에 묻힌다. 맥은 가족에게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예수는“가야 하므로 가지는 말 고, 가고 싶으므로 가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한다. 맥은 오두막에 돌아와 집으로 운전해 가 던 중 교통사고를 만나 4일 후 깨어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시간은 거꾸로 흘러 사고는 오두 막으로 출발하던 금요일에 발생했으며 일요일에 발생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맥의 부인 낸
은 맥의 말을 모두 믿게 되고, 그는 미시의 시체가 있는 동굴 이야기를 수사관 토미에게 말을 하고 그동안 연쇄 유괴 살인범에게 살해된 모든 어린이 시체를 찾아 범인도 체포하고 모든 일 이 정리되며 가족과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 소설은 호평과 비판이 같이 있는데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의 삶에 작용하는지에 대한 창조 적 묘사를 인정받았으며 인간의 한계를 넘는 존재로 인간의 능력으론 하느님을 평가 할 수 없
는데 그것을 하려고 했고 흑인, 아시아 여성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타낸 것이 이단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공감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며 인간과의 관계를 맺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오두막’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시련을 만날 때 신에게 하는 질문,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 과연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준다. 이 책은 기독교 소설로서 추상적인 기독교 근본 사상을 의인화하여 흥미 있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기독교 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쉽고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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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ary The story opens in a summer day when the main character, Mack, takes three children camping by his big daughter Kate. In the midst of this crisis, the younger daughter Missy gets kidnapped by a serial killer and gets murdered. Mack blames Kate for causing a distraction which led him to fail as a protector of Missy. He actually has a dark past in his childhood with an abusive
father – he now has to live with the guilt and remorse that he has killed his own daughter due
to negligence. One and a half years later, Mack's wife receives a letter from God, who is called Papa, to meet her daughter in The Shack.
God is represented as a black woman, the Holy Spirit is represented as an Asian woman, and Jesus is represented as a middle eastern Jewish laborer. They explore the core ideas of the
Christian faith, freedom, will, creation, and love of the child -- Mack eventually recovers the relationship between him and his daughter Kate, who initially caused the accident. Most of us
have memories of sorrow, broken hearts, and pain. The grief-stricken Mack who lost his little daughter receives a letter from Papa and experiences a healing of the wound from the place
where his 'pain' began. The identity of God is neither a man nor a woman -- a man’s point of
view can be quite different from God’s point of view, and this difference def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a man and God.
Humans can only have faith in God only if they believe that God loves them, In order to do so, they must give up human independence and rights. Makc believed that God had killed
his daughter Missy because he did not love her -- but from God's point of view, the murderer is also a creation. God is forgiving and loving, and Mack realizes that the heaven is not as unhappy as he thinks. There is no good or evil in emotions and it is only a reaction to the
human perception. Mack meets his father and then reconciles. God shows Missy's body in the cave, where Missy is shown to be buried in the ‘Heaven’. Mack makes a choice to go back to his family, and Jesus clearly says, "Forgiveness is not about forgetting. It is about letting go of
another person's throat.." Mack returns to his cabin and drives home. However, he gets into
a car accident and wakes up after four days. But he finds out that the accident happened on Friday, when he started out as a cabin, and not on Sunday. His wife believes all of Mack's words
and tells Tommy about the cave with Missy's body. He finds all the dead bodies murdered by a serial killer, arrests the perpetrators, arranges everything, and restores the relationship with his family.
The Shack ‘오두막’
only to end up in a situation where his Josh almost gets killed in a canoeing accident caused
This novel has been critically acclaimed, and has been acknowledged for its creative portrayal of how God in real human life. Human ability can not assess God. Although there is criticism
that God has shown to be a heretical figure, God is still described as being a sympathetic and beloved being. ‘The Shack’ answers the question that we always ask God in difficult times, such
as, “Why does God give me this pain? Is there really a God?” As a Christian novel, this book is an introductory description of the abstract Christian fundamental thought, which will serve as an easy and good introduction to readers who want to understand Christianity more specif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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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비 참 좋지 詩 - 공석진
비 참 좋지 목만 축이는 여우비 말고 한목에 내리는 목비가 좋지 아이 오줌 누는 건들장마 말고 논두령 터지는 억수장마가 좋지 겨우 들먼지 재우는 먼지잼 말고 흙 향내 사방 그윽한 개부심이 좋지 그런 비가 참 좋지 공석진 시인, 문학인
서울산업대학교 건축공학과 전공
시집5권 발표, 2집<정그리우면> 베스트셀러 대표 시 ‘흐린 날이 난 좋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이별이 슬픔에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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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참여 코너
무더운 장마철
건강식 별미초계탕 어떠세요? 시원하게 먹는 건강 보양식 별미초계탕으로 더운 여름 건강을 챙겨보자. 칼로리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담백한 닭가슴살을 이용하여 만들어 보았다.
재료(6인분 기준)
- 닭가슴살 한 팩 약 500g
- 육수 양파 ½개, 파 한 뿌리, 마늘 5~8알, 통후추 약간
- 야채 오이 반개 파프리카 각 1개, 배 반개(사과), 양파 ½개
- 육수 양념 육수 6컵, 설탕 2스푼, 식초 4스푼, 레몬즙 1스푼, 매실 1, 소금 1/2스푼, 간장 1스푼, 겨자 - 무침 양념 설탕 3스푼, 진간장 한 숟가락, 식초 4스푼, 겨자 한 숟가락, 마늘 1/2스푼 만드는 법 1
물 8컵, 양파 ½개, 파 한 뿌리, 통 후주, 통마늘 5~8알 정도를 넣은 후 25~30분 정도 삶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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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보나 다시
용 팩을 이용하여 육수를 걸러내고 냉장고에 차게 보관한다. 닭가슴살을 이용하면 기름기가 거의 없어 담백함을 즐길 수 있다. (냉동실에 살짝 살얼음이 얼도록 넣어두어도 좋다. 삶아진 닭은 가늘게 찢어놓고, 오이는 돌려 깎 아 채썰고, 당근, 파프리카, 배, 양파도 모두 얇게 채썰어 준비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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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는 매운맛 제거를 위해 찬물에 담가
두고, 오이, 당근은 살짝 소금에 5~10분 정도 절였다가 물기를 짜고 준비하면 좀 더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다. 4
차게 준비해 둔 육수 6컵 기준으로 분량의 양념을 넣고 섞어준다. 기호에 따라 식초, 설탕양을 조절한다. 육수
맛 내기가 힘들다면 시판용 냉면 육수와 함께 섞어 사용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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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예쁘게 돌려 담고 육수를 부어준다.
기호에 맞게 넣어 먹을 수 있게 겨자를 따로 내준다. 기호에 따라 준비해둔 모든 재료를 무침 양념에 미리 버무린 후 그릇에 올리고 육수를 부어 주어도 좋다.
요리, 글 홍성주 미네소타 거주. 미국생활 12년 차. 대학생 두 아들이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들고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카드 만들기가 취 미. 작년에 한국에서 제빵과 앙금플라워 떡케이크을 배우고 와서 요즈음엔 케이크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커져서 카운티 도서실에서 아시아 문화를 알리는 프로그램 중 한국문화코너에 1년에 두 번 정도 이벤트에 참여해 오고 있다. 한복 종이접기, 송편(클레이로) 만들어보기, 사물놀이 공연 등을 했는데 어떤 게 더 한국 문화를 알리면 좋을지 아이디어 구상 중이라는 삶을 아름답게 꾸미고 사는 S.CASA 주부독자이다. 45
ART&CULTURE 에스카사 특집 기획 김광석
그곳에 가면 김광석을 만날 수 있다
대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가수 김광석(1964~1996)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가사이다.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줄여서 김광석길)에 가면 이 노래를 거의 온종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통해 김광석의 노래가 여 러 곡 흘러나오지만, 유독 이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 잔잔한 선율과 포근한 그의 음색이 골목길과 잘 어우러
지기 때문이다. 대구 중구 대봉동은 김광석이 태어나 5살까지 자란 그의 고향이다. 대봉동의 어둡고 으슥한 골 목길에 20명의 지역 미술 작가들이 김광석에 관한 이야기를 벽화로 그렸다. 아주 환하게 웃고 있는 김광석, 오
토바이를 탄 김광석, 포장마차 사장으로 변한 김광석 등 친근하고 익살스러운 그의 모습을 벽에 그렸다. 좁고 기다란 골목길의 한쪽 벽면을 수많은 그림이 가득 메우고 있다. 수성교 방면의 골목 입구에는 김광석이 벤치에
앉아 기타 연주를 하는 동상이 있다. 또 골목 중간쯤에는 실물 크기의 김광석이 기타를 들고 서 있는 동상이 있 다. 손영복 작가의 작품이다. “서 있는 김광석 동상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요. 골목을 찾는 분들이 동
상 옆에 서서 함께 사진도 찍고 추억을 많이 쌓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64㎝ 작은 체구의 김광석 동상을 가리 키며 말했다.
대구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 가면 이제 언제라도 김광석을 다시 만날 수 있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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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대구 김광석길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 서 덩달아 유명세를 타는 사람이 생겨나
고 있다. 가수 채환 씨도 그중에 한 사람이 다. 그는 김광석 닮은 목소리를 가진 인물
로 어느 방송 매체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
다. 방송 출연 전에는 무명가수에 불과했 지만, 지금은 유명 인사가 되었다. 김광석 길이 유명해지면서 지금은 더 바빠졌다.
채 씨는 김광석길에 생긴 소공연장에서
김광석 관련 음악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광석이 형은 지금 가고 없지만, 광석이 형이 뛰어놀던 골목에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채 씨는 어린 시절부터 김광석을 무척 좋 아해서 아버지를 졸라 대봉동으로 이사를 온 적도 있다고 한다. “광석이 형이 이 골
목서 딱지 따먹기, 구슬 따먹기도 하며 놀 았다는 생각으로 이 동네서 사는 것 하나 만으로도 아주 행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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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에스카사 특집 기획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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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Young Acoustic Band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보이스, 한국 포크의 계보를 잇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행보로 대중과 평단 의 찬사를 함께 받았던 ‘노래하는 철학자’ 김광석. 그는 32살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음악으 로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와 생 전의 삶을 볼 수 있는 공간 ‘김광석 스토리 하우스’가, 대 학로 학전소극장에는 ‘김광석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한 국인이 사랑하는 가수 김광석.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 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 뉴욕에서도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하는 이들이 있다.
는 ‘김광석 특집 8월호’
를 기획하다가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공연을 준비 중이라는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반가움에 밴드 연습실인 뉴욕 플러싱 M 스튜디오로 찾아가, 5인조 락밴드를 만들 어 ‘김광석... 노래를 주제’로 공연을 준비 중인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를 만났다.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Jenny Lee 정리
사진
스튜디오 M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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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수 보컬리스트 &기타
임채형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기타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는 에스카사
취재진에게 김광석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한 곡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 랑이 아니었음을’을 첫 곡으로 선사해준다. 밴드 리더 최영수 변호사 에게 김광석은 어떤 가수로 다가왔을까.
“김광석은 제가 지향하는 노래 인생의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생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삶의 목적을 제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노래말, 음성, 선율을 사랑하고 공감하며 인생을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
고 노래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사랑하지요. 그의 수많은 명곡 중 ‘혼자 남은 밤’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에요. 이 노래의 멜로디가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기타
와 하모니카로 연주할 때 잘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구요. 포크 음악을
하는 많은 분이 그러하듯 김광석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가수에요. 평소에 그의 노래를 자주 부르기도 하고 공연할 때도 꼭 몇 곡씩은 불 렀습니다. 당시 기타를 칠 줄 아는 누구에게나 김광석은 그렇게 다가왔 을 겁니다.
그랬다. 당시 기타를 만지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누구나 한 번쯤 김광
석의 음악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전문 가수가 아닌 아마추어가 뉴욕 에서 본격적으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을 기획하고 실제 공연을 한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돌아온 그의 대답이 재 미있다.
“김광석을 저 혼자 부르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가 남긴 노래
를 저처럼 공감하는 분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지요. 그러 최호경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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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로 김광석 노래를 검색하던 중에 그가 생전에 뉴욕에 공연와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어요. 놀랍게도, 제 사무
Peter Manheim 드러머
최형진 재즈피아니스트
실이 뒤로 보이는 카페(뉴욕의 아침)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단번
했어요. 형님이 쓰시다가 내버려둔 야마하 기타가 집에 있었거든요.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어요. 그 뒤로 한국
는 혼자 멋대로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음악으로 처음 김광석
에 알아보았지요. 그가 다녀갔던 공간에 나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에서 매년 열리는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이곳 뉴욕에서도 그의 음악 적 유산(Legacy)을 추억하는 분들과 나누기 위해 ‘김광석 다시 부르기
기타소리에 매료되어 서점에 가서 ‘가요 대백과 사전’을 사갖고 와서 을 만났습니다.”
in NY’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아침’ 카페 사장님도 영아쿠스
혼자서 배운 기타와 하모니카 솜씨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낙우
그리고 뉴욕’이라는 테마로 무대를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우리 밴드의
들었다. 당시 학교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서클활동이 금지되어 있었
틱 밴드의 후원자 겸 열렬한 팬입니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 그의 노래 단독공연 프리미어로 김광석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중학교때 기타로 김광석과 처음 만나다
김광석. 이름 석 자에 그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김광석을 노래
하는 보컬 최영수’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는 한국에서 자라서 뉴욕
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의 인생 언제 어디서부터 음악이, 아니 그의 인생에 김광석이 스며들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평범한 모범생이었
송’(학교의 교목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는 교내 통기타 서클 밴드를 만 지만, 최영수 밴드는 그 다음 해에 발표회도 가질 만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연습하다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저희 담임선생님께서 발표회를 와서 보시고는 잘했다고 인정
해 주시더군요. 발표회 날, 볼거리가 없는 시골이다 보니 150명이 들어
가는 소강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그날 이후로 촌 동 네 우리 마을에서는 제가 나름 유명스타가 된 거죠 (웃음)”
을 것만 같은 그의 외모,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을 물었는데, 돌아온
다시 김광석을 만나다
다. 민중가요와 통기타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있던 그의 어린 시
다. 그 뒤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을 왔으며 결혼해서 생활을 꾸려갔다.
답은 고교 불량(?) 음악 동아리 활동과 발표회 이야기로 쏟아져 나온 절로 돌아가 보자.
“경남 함양이라는 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도시에 비해 무엇 이든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노래나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음악학원은
커녕 동네에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주산학원이 유일했어요. 음악 을 접하거나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전 음악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때 하모니카를 불었고, 중학교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
그는 음악과 더불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법대에 진학했
2008년도에는 뉴욕으로 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음악 을 잊고 지낼 만큼 바쁘게 살아온 최영수 변호사. 그가 다시 기타를 들
었다. “변호사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롱아일랜드로 이사했어 요. 새집에 저만의 작은 골방이 생기게 되었죠. 그 골방에서, 기타와 앰
프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의 하모니카를 하나둘 다시 사면서 음악을 시 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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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직업을 가진 그는 비영리 재단일에도 열심이고 맡고 있는 일도
않는 선에서 즐기는 오롯한 그들만의 자유 시간. 연습실의 현장 분위
쪼개어 해낸다. 그의 샘솟는 열정은 오로지 음악에서 시작해서 음악으
“매주 수요일 연습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플
많아서 무척 바쁘다. 그런 그가 밴드를 만들고 공연 준비까지 시간을 로 끝난다. 당연히 그의 주위엔 음악을 사랑하는 뮤지션이 모였고, 그 렇게 영 아쿠스틱 밴드는 탄생했다.
“음악 자체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집에서 연주도 하고 가끔 지인을 모 아놓고 개인 콘서트도 했었는데 욕심이 생기더군요. 무슨 일이든 그렇
듯이 좋아하면 더 잘하고 싶은 맘이 들잖아요. 그래서 좀더 전문적인 뮤지션과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늘 있었습니다. 60대 중반에 은퇴를 하면 본격적으로 시도해 봐야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
는데 어느날 문득, 더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은 퇴 후에는 지금같은 열정도 용기도 사라져서 밴드결성이 더 어려울 것 같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시작을 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기타리 스트인 최호경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친구 주변 뮤지션들로 밴드 맴버들이 구성되면서 밴드 외형이 갖춰지기 시작했어요.
작은 공간에서 혼자 즐기던 음악이 밴드로 확장했다. 아마추어 리드보 컬 최영수와 뜻을 같이한 전문 음악인들이 ‘영아쿠스틱 밴드’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낸 자체만으로도 최영수는 꽤 멋있는 사람이다.
재즈와 팝을 소화해내는 전문적인 뮤지션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할수
있다는 건 제게 너무나 큰 행운입니다. ‘영 아쿠스틱 밴드’ 멤버를 소개 하면 재즈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최형진, 기타 최호경, 콘트라
기에 젖은 그가 무척 행복할 것 같다.
러싱 스튜디오 M에서 작년 12월부터 연습을 해오고 있는데 결성기 간에 비해 활동은 꽤 됩니다. 지난 3월 경 첫 공연을 낫소카운티 감사
원장실 초청으로 낫소카운티 의회빌딩에서 가졌어요. 팝송 6곡과 한
국 팝 1곡으로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죠. 또, 4월에는 Global Children's Foundation 초청으로 두번째 공연을 했어요. 제가 비영리 단체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주로 비영리단체 자선행사에 공연을 하
고 있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4명 밴드멤버들이 모두 전공자이므 로 연습은 늘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고 전공자들의 연주가 더 빛이 나도
록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보컬인 제가 아마추어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노력 중이고요(하하). 세상에 저보다 노래잘하는 사람이 모래 알보다 많겠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과 우리 밴드는 지구상에 하나뿐이 라는 자신감(?)으로 신나게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보통 제가 곡 을 선곡하고 맞추어 보고 괜찮은 곡을 몇 번 더 연습해서 우리 밴드에 맞는 사운드를 만듭니다.연습이 끝나면 늦은 밤에 맥주집으로 가서 시 원한 치맥도 하며 노래얘기, 밴드얘기, 세상사는 얘기들 함께 나누고 후원자도 몇 분이 계셔 그 분 들과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영 아쿠스틱 밴드’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된다. 곧 열리는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콘서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도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베이스와 베이스기타 임채형, 드러머 Peter Manheim, 노래와 기타 그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 콘서트를 9월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틱 락 밴드 입니다. 락 밴드라고 하면 쿵쾅거리는(?) 그룹 사운드 음악
으로 구성할 예정이며, 밴드 멤버 중 작곡자들이 다수여서 밴드 색깔에
리고 하모니카를 담당하는 저 최영수 이렇게 5명으로 결성된 어쿠스
을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타와 콘트라베이스 등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미국과 한국의 좋은 팝 음악을 얹어 노래하고 연주해서 청중 들과 공감하는 소박한 밴드입니다. 작년 연말에 창단했고, 비영리단체
위주로 크고 작은 공연을 하고 있지요. 제가 특별히 존경하는 한대수
형님(에스카사 8월호 표지모델)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형님의 음악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그 연세(?)에도 저희보다 더 큰 열정을 갖고 활동하시는 점에 자극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열정이 넘치는 ‘영 아쿠스틱 밴드’의 밴드 연습은 늦은 저녁에 시작된
콘서트 구성은 올드팝과 한국팝 그리고 저희만의 창작곡(오리지널곡)
맞는 저희곡을 준비하고 싶거든요. 후에 기회가 되면 레코드 취입도 해
좀 더 발전된 밴드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밴드 멤버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이 될 고정적 공연 기회를 모색 중에 있습니다. 이 친 구들이 실력도 좋고 열정도 많은데, 사실 음악으로 취업을 하는것이 쉽
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롱아일랜드 바닷 가 멋진 카페등에서 고정적으로 공연을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안정적 으로 유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처럼 비영리단체 자선
행사에 노래하고, 버스킹 등도 앞으로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어떤 방 식으로든 수입모델을 만들어서 상시적으로 공연도 하고 멤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밴드가 되었으면 합니다.
독자분들이 저희 ‘영
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향하는 작은 일탈.
아쿠스틱 밴드’에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는 게 삶의 큰 활력소가 된다는 그들. 일에 부담이 되거나 충돌하지
장소협찬
일주일에 1번 혹은 두 주에 한번씩 전 멤버가 만나서 서너 시간 연습을
스튜디오 M 53
ART&CULTURE 에스카사 특집 기획 김광석
내 노래는 나를 위해 부르는 나의 이야기
‘김광석’을 노래하는 가수 송희원 한국의 가요계가 아이돌 붐으로 들썩이고 있는 요즘에도 ‘음악 하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닮고 싶은 가수로 故 김광석을 꼽는다. 무려 20여 년 전 세상 을 떠난 그가 여전히 ‘레전드’로 회자되며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비단 그가 서른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노래가 주는 깊이 있는 울림은 아무리 숙련된 가수라도 재생하기 어려운 까닭이 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서울 종로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한 여가 수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김 광석의 노래들이 익숙하지 않은데도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어 그녀의 공연 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통기타를 메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 를 한 그녀는 송희원이라고 했다. 진행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얼마 전 故 김광석 님의 20주기가 지났다. 지금은 그의 아름답고 깊은 노래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아 있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20년 동안 서른세 살에 머물러있는 김광석. 그가 보는 지금의 세상~ 그냥 눈물이 주르륵 흘렀고 나는 소리 내어 울다가 차를 한쪽에 세웠다. (2017년 1월 17일 자 송희원 Facebook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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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노래가 남긴 심상치 않은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시 카페로 가볼
요. 사실 너무 떨려서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감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뒤로 묶은 머리, 그리고 통기타. 화려하지
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시 불러 봐라”하고 기회
까 했는데, 마침 5.18 민주화운동 기념 음악회 무대에 선 그녀를 볼 수 도 요란하지도 않았지만, 잔잔하게 스미는 맑은 음색과 이야기처럼 들 려오는 가사에 관중들은 기꺼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사하게도 선배들이 제 목소리를 알아봐 주시고 “뒤돌아서 다시 해봐 를 주시더니 뽑아주셨어요. 그렇게 통기타 동아리에 들어가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유명한 가수도 아닌 자신을 무슨 이유로
그녀는 그날이 20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내
가수라는 점이 신선했기 때문이고 나중은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고 정
게 됐다. 그래서 반드시 노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
인터뷰하느냐며 갸우뚱해 했다. 처음은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여성
감이 느껴져서 인간적으로 궁금해진 때문이라고 하니, 금세 만면에 미 소가 한가득히 되었다. 두 이유 다 싫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편안하게
가 왜 태어났지?’ 생각하며 살다가 노래하면서 존재 이유를 처음 느끼 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녀의 음악 활동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어 보았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서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어요. 무엇보다
첫인사, 첫 질문. 그녀는 누구일까?
일찍 아무도 없을 때 동아리 방에 가서 청소하고 혼자 연습했어요. 주
“안녕하세요. 저는 노래하는 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이브 무대에서 오랫동안 노래하다가 싱어송라이터로 2012년도에 자작곡 7곡을 수록 한 음반을 처음 냈고요, 후에 디지털 싱글도 2곡 발표했어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가수는 많다. 그런데 본인 소개를
‘가수 누구입니다, 싱어송라이터 누구입니다’가 아닌 “노래하는 게 행 복한 사람”이라 하니 가수가 되기까지 남다른 사연이 있었나 싶다. 그녀는 어떻게 가수가 되었을까?
“대학에 들어가긴 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뭔
지도 모르겠고 대학 생활 자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 니 1년도 채 안 돼서 휴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때쯤 우
연히 통기타 동아리 오디션 대자보를 보게 됐어요. 기타를 칠 줄 몰라
도 된다고 하길래 친한 친구랑 같이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붙은 거예 56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요. 아침 변에서 선배가 “노래하고 싶니? 기타 쳐 줄게.” 하면 떨리고 싫어서 기 타도 어깨너머로, 아니면 책 보면서 독학으로 배웠죠.”
딸은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 하셨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
버지 밑에 자란 막내딸, 존재감이 크고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
녀가 노래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셨고, 그 허락 을 받기 위해 눈밭에 무릎 꿇고 앉아 울면서 빌기도 했다. 태어나 아버 지에게 반항했던 그 날은 자신도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노래를 할 수 있게 되고 그저 노래하는 게 좋았지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노래밖에 좋은 게 없어서 연애도 안 했고, 가요제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졸업하신 선배님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길 권하긴 하셨는데요. 저는 이
미 기타 치고 노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대회에 나갈 필요를 못 느
꼈어요. 그보다는 교내 축제 공연이나 동아리 자체 공연에서 노래하고
고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노래를 하나 싶은 거죠. 그래서
어요. 그 노래를 내 걸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연습하고 오디션을
리를 찾아보기도 했고, 올 1월쯤엔 ‘환생’이라는 김광석 씨 다큐멘터리
싶었죠. 공연에 서고 싶어서 한두 달 동안 오직 한 곡만 죽자고 연습했
보러 갔더니 선배님들이 “희원이는 마음으로 노래하는구나.”라고 칭 찬해 주셨어요. 그 나이에 그게 쉽지 않다고도 하셨고요. 혼자 스스로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 기특하다고도 해 주셨어요. 정말 기쁘고 행복했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으로 활동했던 김광석 씨 히스토 도 봤어요. 너무 감동을 받아가지고 제가 그의 곡인 ‘서른 즈음에’를 부 른 영상을 그 다큐 링크랑 같이 페북 (Facebook)에 올리기도 했어요.”
어요. 그렇게 동아리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끔 동아리 선배님 소개로
생전에 김광석은 학전소극장에서 무려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을 하기도 했는데요. 팀을 꾸리기가 힘들어지면서 라이브 무대에 서기
문 근처 ‘소우’(小雨)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6년째 공연 중이다. 자작곡,
CM 송(commercial message song) 녹음을 하기도 하고 소극장 공연 시작했어요.”
김광석의 노래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알려 져 있다. 그녀는 어떻게 그의 노래를 만났을까?
“어느 날 우연히 김광석 씨 LP판을 받아서 듣게 됐는데, ‘그날들’이라
는 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펑펑 운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
르겠는데요. 그냥 ‘어떻게 노래를 이렇게 표현하지?’ 싶고 굉장히 경이
롭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나도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 기도 했고요.”
그녀의 마음을 울린 것은 김광석의 가창력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그가
노래를 대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제 노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입
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 행 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느끼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죠.” (1995년 <샘터> 김광석 인터뷰 中)
“김광석 씨처럼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요.
진솔하게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그런 점이 정말 마음에 와닿거든요. 김 광석 씨 노래가 너무 좋아지니까 사람 김광석에게도 관심이 생기더라
그녀는 자신도 그렇게 노래하고픈 꿈이 있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광화
김광석 노래, 좋아하는 가요를 엮어서 자신만의 공연을 한다. 작년 가 을, 올봄, 여름 공연을 성공적으로 올렸고, 올가을, 겨울을 포함해서 1
년에 작은 공연들을 더 많이 가질 계획이다. 그녀는 소우 말고도 라이 브 공연을 하루에 세 곳이나 더 다닌다. 김광석이 소극장 공연을 선호 한 이유로, 관객이 바로 앞에 있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관 객들 눈빛이 보이니까 자신의 노래를 어떻게 감상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점을 들었다고 한다. 송희원, 그녀가 라이브 카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 같다.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하는 건 당연히 좋죠. 그런데 김광석 씨를 보고
좀 바뀐 게 있어요. 예전에는 오직 관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노래를 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는 거예요. 김 광석 씨 노래 중에는 김광석 씨가 만들지 않은 곡도 많이 있잖아요. 김
광석 씨는 그런 곡들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자기 감성과 목소리로 불 러내면서 완전히 자기 노래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김광석
씨 노래를 들으면 그가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따뜻한 사람이었던 게 느껴져요. 저도 내가 살아가는 이
야기, 진솔한 나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내 색깔로 나 자신에게 불러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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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자신의 노래를 듣고 관객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바라보는 뿌듯
함으로 자신의 행복감 상당 부분을 대신해 왔다면 이제는 좀 더 적극적 으로 노래하는 행복 자체를 누려보겠다는 선언 같았다. 이렇게 노래하
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섭외되어 갔다 해도, 심지어 오디션이라도, 내 생각, 내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했다.
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처음 섭외를 받았을 때는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좀 주저했어요. 촛
“대학을 졸업하고 26살에 존경하던 선배와 결혼을 했는데요. 아들 둘
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민중가요를 해 오시던 분들이 서
낳고 11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한 후에 헤어졌어요. 그러는 동안에 얼마
간씩 노래를 쉬어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죠. 주변에 노 래하는 친구들이나 선배를 보면 가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
이 들 정도였어요. 너무너무 노래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
까 그 스트레스로 몸까지 아프더라고요. 신기했던 건 아파서 응급실을
갔는데 원인이 없다고 했던 거예요. 빈혈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갔더니 빈혈 수치는 정상이라고 하고요. 가수가 숙명인가 보다 하고 노래를 다 시 시작했을 땐 정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2016년 9월부터 페북으로 대표되는 SNS (Social Network Service)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자존심이 강해서 원래 저를 남한테 공개하는 걸 꺼렸었는데요.
불 집회에도 참석해 봤고 시민들 모습에 울컥울컥했던 적도 있어서 공 야 하는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PD님께 음악
회의 취지를 듣고 나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결과적 으로 가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의 호응을 현장에서 느끼고
함께 노래하게 되니까 정말 뿌듯하고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의미 있는 행사 일부가 되었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나 혼자 잘 해서 빛나는 자리가 아니어서 편하고 좋았어요. 김광석 씨도 살아 계셨 으면 당연히 거기서 노래하셨을 거예요.”
그녀는 말한다. 나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가서 노래 하는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서도 되는 무대라는 확신이 들 어야 한다. 밝은 노래도 내가 정말 기뻐서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야 가서 부를 수 있다. 공감을 바탕으로 마음을 담아서 노래해야 헛헛 하지 않다.
언젠가부터 나누고 공감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페
‘노래하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해서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페북에 제 노래 영상 하나를 올리게 됐는데
년 정도 했어요. 길거리 콘서트를 해서 모금한 돈으로 난치병, 희귀병
북을 시작한 건 미국 덴버에 이민 간 친한 언니랑 연락을 주고받기 위
반응이 되게 좋은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무서운 댓글, 무책임한 댓글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죠. 그럴 때마다 아들이 크게 의미 두지 말라고
충고해 주고, 팬분들도 많이 응원해 주신 덕에 이제는 거의 적응이 됐
어요. 지금은 도리어 SNS를 통해서 자존감을 얻게 되기도 해요. 의도 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생기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아해 주시니까요.”
“30대 때 전주에서 음악 하시는 분들과 ‘새 생명 하모니’라는 모임을 4 아이들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거였는데요. 당시에 10명 정도의 아이들
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렇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정말 귀한
경험이었죠. 지금은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어서 못 하고 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1995년 <샘터>와의 인터뷰에서 故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고, 동시에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 할’ 이라고 했다. 송희원은 분명 김광석과 닮았다. 하지만 닮은 것은 그 녀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와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다. 우연히
선물 받은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음반이 그녀가 무미건조한 대학 생
활을 버텨내는 데 힘이 되어 주었듯이, 힘든 누군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공감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
송희원은 노래하는 가수로서 기능적인 욕심은 생길 수밖에 없고, 그건
죽을 때까지 답이 없다고 한다. 끝이 없고 다다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 2017년 5월 17일. 그녀는 광화문 광장 무대에 섰다. 김광석의 노래 중 가장 밝은 노래에 속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 라로’를 마음을 담아 부르면서 그간 답답했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밝
고 희망찬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무대에 서기를 결정한 그녀의 소신은 분명했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생각이 맞는 곳이라는 느낌이
이다. 한계를 느낄 때마다 슬럼프도 오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노래 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막막함과 열정을 같이 느낀다. 더 깊어지고 싶고 익어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알지만,
경험이 더 쌓이고, 그 결과 삶이 묻어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 다고 한다. 시작은 ‘김광석’ 바라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도 분명하게 송희원을 노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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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성공 공식
영화에서 뮤지컬로 (Film to Broadway) 내러티브와 관련된 모든 장르의 창작자들이 언제나 목마르게 찾는 것은 결국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를 찾아 어떻게 풀어서 어떤 방법으로 수용자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특히 영화는 가장 탐욕적으로 이야기(소재)를 갈구하는 매체. 허구와 논픽션, 만화, 연극 등 모든 장르를 통해 이미 대중들에게 검증받은 작품들을 쉴 새 없이 영화화한다. 이중 뮤지컬은 수많은 영화 흥행작을 만들어 낸 대표적인 무대 예술이다. 한편 영화 역시 뮤지컬에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장르기도 하다. 뮤지컬이 영화를 탐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막대한 예산과 오랜 준비 기간이 소요되는 브로드웨이에서 이미 대중들에게 흥행을 통해 검증받은 영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열 개 중에 반 이상은 망하는' 뮤지컬 제작의 안정성을 일정 부분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프리미어 이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지난 5월 막을 내린 '아멜리' 처럼, 영화의 성공이 뮤지컬의 성공을 꼭 약속해주지는 않지만, 흥행 영화가 갖는 매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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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2006)
매직 마이크 (Magic Mike 2012)
프리쳐스 와이프 (The Preacher's Wife1996)
메릴 스트립, 앤 해서웨이 그리고 당시엔 무명 급이었지만 이젠 할리우드의 블루칩 여배우가 된 에밀리 블런트가 출연했던 히트작. 아직 개 봉 시기는 미정이지만 엘튼 존이 음악을 맡아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갖춘 스티븐 소더버 그 감독이 매튜 맥커너히와 채닝 테이텀을 앞 세워 만든 남성 스트리퍼 영화. 영화의 대부분 이 19금 장면인 걸 고려하면 가족 친화적인 브 로드웨이 무대에서 과연 근육질 남성들의 몸 이 어떻게 표현될까?
프로즌 (Frozen. 2013)
민 걸 (Mean Girl 2004)
무랑 루주 (Moulin Rouge 2001)
킹콩(King Kong)
13살에서 30살로 (13 Going on 30.2004)
비틀주스 (Beetle juice Beetlejuice 1988)
10년 이상 장기 흥행 중인 라이언 킹은 물론 알 라딘, 미녀와 야수 등으로 이미 천문학적인 수 입을 브로드웨이에서 올린 디즈니가 프로즌같 은 메가 히트작을 그냥 묵히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일반인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세계 1위 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콘텐츠 왕국인 디즈니 의 장점이다. 2018년 봄 예정.
1933년 첫 개봉 이후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올해도 '스컬 아일랜드'라는 제목으로 리메이 크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 는 (그리고 가장 큰) 고릴라가 드디어 브로드웨 이 무대에 오른다. 2011년 피터 잭슨 판 영화에 서 실제로 브로드웨이 극장 안에 구경거리로 묶여 섰던 킹 콩이 극장을 부수고 나가는 장면 이 있는데, 과연 무대 위의 킹콩이 어떻게 연출 될지 기대가 된다. 2018년 가을 예정.
말썽꾸러기 이전의 풋풋한 디즈니 요정 시절 의 린지 로한을 기억하시는지? 브리티니 스피 어스, 마일리 싸이러스 등이 10대에 누렸던 인 기에 버금갔던 린지 로한과 레이첼 맥아담스, 아만나 사이프러스 등 후에 빅 스타가 되었던 여배우들이 등장했던 유쾌한 여고생들의 학교 내 권력쟁탈전이 무대에 올려진다.
미래의 패션지 편집장을 꿈꾸던 뉴저지의 13 살 소녀가 하루아침에 30살 성인으로 변신해 실제로 패션지 편집장이 된 상황. 제니퍼 가너 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 준 이 영화의 정 통오리지널 작가가 직접 뮤지컬의 각색도 담 당하고 있다. 소녀들이 떼창했던 팻 배네타의 노래, 스릴러 뮤직 비디오 댄스 등 영화 속 유 명한 장면의 무대 버젼이 기대된다.
팝의 여왕 휘트니 휴스턴과 댄젤 워싱턴이 주 연을 했던,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가 주인공인 환타지 영화가 원작. 제목에 어울리게 'I love the lord' 등 가스펠 분위기의 사운드 트랙이 인기를 끌었었다.
당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오히려 “이거 뮤지컬 이 원작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한 안무와 노래, 세트가 돋보였던 히트작 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을 맡 았었다. Red로 토니상을 받은 존 로간이 20세 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각색을 하고 있다.
30년 전의 작품이다. 아마 20~30대 이하 젊은 층들에겐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영 화광 세대들에겐 단연 꼭 봐야 할 영화로 꼽히 던 팀 버튼 초기의 걸작. 유령이 된 부부가 자 기가 살던 집에 새로 이사 온 가족을 몰아내려 고 안간힘을 쓰는 소동극. 청소년 시절 위노나 라이더의 풋풋한 매력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들에겐 그 역을 누가 맡는지가 관심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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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테너 유재웅의 재미있고 유익한 음악칼럼
노래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는 좋은 영향들
성악가, 작곡가, 지휘자가 있습니다. 세 명의 음악가 중에서 누
구의 수명이 가장 길까요? 정답은 지휘자, 성악가, 작곡가 순서 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엄청난 집중력과 에너지를 요구하며 정적인 고요함에서부터 동적인 움직임의 전신운동
과 같은 연주를 하는 지휘자, 아랫배에서 시작되는 복식호흡에 서부터 몸의 가장 윗부분을 통과하는 두성공명까지 뜨거운 공 기를 온몸으로 순환시키며 하나의 악기로서 몸 전체를 사용하 는 성악가들은 비교적 오래 살지만, 사랑과 슬픔, 환희와 기쁨,
고뇌와 번민 등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예술적 감성 과 더불어 섬세한 표현의 창작을 통하여 창조되는 작곡가들은 다른 음악인들에 비해 조금은 일찍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난센스와 유머가 섞여 있으나 언뜻 조금은 이해가 되는(?) 내용
입니다. (실제로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와 같이 정말로 일찍 요절 한 작곡가들도 많지만, 꼭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다 시 이야기를 ‘성악’과 관련해서,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노래’가
우리의 삶에, 그리고 몸과 마음에 어떠한 좋은 영향을 미치며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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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분 좋을 때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활동을 하게 되면 어떤 멜로디 들을 경건하고 기쁜 마음으로 부르게 됩니다. 운전 중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중에 잘 알고 좋아하
는 곡이 나오면 소리내어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때의 행복, 성스러움, 흥겨움 등을 생각해보면 모두 ‘노래’만 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감정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특히 자녀들이나 가족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행복이 넘치는 특별한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슬픔, 이별, 고통, 죽음과 같은
감정들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 한민족의 한(恨)과 같음이 드러나는 우리 고유의 민족 감정에서도 특유 의 소리와 노래를 통한 감정의 표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 또한 노래의 역할이자 기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렇게 인간의 몸은 일평생 멈추지 않고 숨을 쉬어야 생명을 연장하며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공기와 호흡을 사 용하여 일정한 리듬의 반복일 뿐이지만 마치 노래와도 같은 아기의 울음에서부터, 깊게 쌓인 인생의 희로애락
이 담긴 삶의 연륜을 음유하는 노인(老人)의 읊음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그 가사의 내용과 선율 속의 호흡이 끝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정된 공간 속 반복되는 생활의 싸이클 안에서 많은 스트레스와 삶의 의욕이 저하되는 시간의 연속성이 느껴
지거나 이민 생활의 각박하고 복잡한 현대의 삶의 모습이 거울 속의 내 모습과 함께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학창시절에 배우고 불렀던 포크송과 추억의 그 시절에 들
었던 주옥같은 올드팝송들, 또한 음악의 기원인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O Sole mio’ (오! 나의 태양) 같은 나폴 리 민요와 그리운 고국을 생각나게 하는 우리의 아름답고 고운 한국가곡들까지 참 귀하고 좋은 노래들을 많은 매체를 통해서 찾아서 들어보신다면, 여러분들의 삶에 보다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와 함께 편안한 휴식의 시 간을 제공해주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조금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지만, 종교활동이나 취미활동을 통하여
노래를 부르실 기회가 있으실 때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스럽고 의미를 생각하시며 부끄러움 없고 자신 있
게 소리내어 불러보신다면, 흙이 토기장이의 손길을 통하여 훌륭하고 귀한 그릇이 되듯이 여러분들도 스스로 의 생각과 연습(반복)을 통하여 몸과 마음의 귀한 가치들과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을 얻으심으로서 스스로 체험 하며 ‘노래를 통하여’ 많은 좋은 영향들을 경험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 유재웅 (성악가. 카메라타 남성합창단 부지휘자 겸 솔로이스트)
작은 여유와 함께 따스한 미소를 머금게 해주는,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과 같은 유익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NEW JERSEY VOICE ACADEMY 뉴저지 성악 아카데미
대상: 찬양대원 (ALL VOICES), 일반인, 7~11학년 학생 (남,여)
찬양대 성가합창곡 파트연습 및 합창발성 지도 CCM, 가스펠 찬양지도 (직접반주) 7-11 학년 카운티, 리저널, 올스테이트 합창 오디션 준비 입시용 포트폴리오 CD 제작 (직접반주) 한국가곡, 세계명곡, 주옥같은 뮤지컬과 디즈니 명곡들 사랑으로 하는 특수 아동을 위한 노래 레슨 선생님과 함께하는 가족 홈콘서트 이벤트
Jae Woong Yoo TENOR
한양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전문연주자 과정 카메라타 남성합창단 부지휘자 겸 Soloist 성가대 지휘자 / 연주 및 레슨 20년 경력 직접 모든 곡 피아노 반주
전화문의 : 201-218-2040 카카오톡 : okgood365 이메일 : njvoiceacade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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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12finalists
전문 음악인이 들려주는 생활 속 음악이야기
과거의 나 돌아보기 한없이 놀고 싶었던 초등학교 6학년, 뮤직 컴페티션에 참가하기 위해 방안에서 연습만 했던 쉼 없는 준비과정과 본선에서 마신 고배는 어린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연습했 던 나의 노력이 부족해 쓸쓸한 패배자로 끝나버린 이 허무한 게임이 싫었던 나는 다시는 컴페티션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10년이 지난 후, 제2회 서울 국제 음악 콩쿠르 실황을 라디오로 들으 면서 나의 성급했던 결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만약 그때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다 면,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결과에 상관없이 꾸준히 도전했더라면 나도 지금 권위 있 는 국제 컴페티션에 참가해서 저들과 나란히 실력을 겨루고 있지 않았을까? 라며 나와는 다른 연주자 들의 모습에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었다. 그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컴페티션은 아직도 내게 상처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마음속에 남아 있지만, 퀸 엘리자베스 컴페티션을 보면서 젊은 음악인들을 응원 하고 그들의 노력의 결실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음악인으로 성장한 나를 발견한 값진 경험을 했다. 글 정선분 정리 64
편집부
퀸 엘리자베스 컴페티션
들었다. 이런 열정 어린 지도로 2년 전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연주했던
컴페티션은 벨기에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인 유진 이자이(Eugene
선생으로서 최종 결선 무대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보람되고 가슴 벅찬
지난 5월 8일부터 한 달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렸던 퀸 엘리자베스
Ysaye) 생전에 국제 컴페티션을 만들고 싶었던 그의 뜻을 기려 1937년 이자이 컴페티션으로 개최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벨기에 왕비의
이름으로 컴페티션 명칭이 변경되었다. 올해는 첼로 부문이 새로 신설 되어 1회 대회 우승자를 만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한다는것에 많
제자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훌륭하게 키워낸 Jensen 교수는 지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또, SNS에 컴피티션 기간 동안 함께해준 지도교수 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제자의 글 속에서 스승을 향한 존경심이 얼마 나 큰지 느낄 수 있었다.
은 음악인들과 애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보통 2주간 진행되는 여
부모의 헌신
자가 발표된 뒤 공개하는 신작의 준비 때문이다. 일주일간 최종 결선자
을 팔아 마련한 자신의 악기를 소개하는 Brannon Cho의 영상을 보면
느 국제 대회와는 달리 대회 기간이 한 달인 이유는 12명의 최종 결선
들은 Chapelle Musicale Reine Elizabeth에서 외부와 접촉을 하지 못 하는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는 곡을 준 비하고 최종 결선에서 연주한다.
2015년 바이올린 부문 때처럼 이번에도 한국인 우승자가 또 나오지 않
겠냐는 기대감과 7주간 Meadowmount School of Music 동고동락했 던 4명의 연주자가 본선에 진출해 경합을 벌여 다른 때보다 필자는 더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쟁쟁한 실력 참가자들의 대결이니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살벌함과 심사 결과에 의해 참가자에서 관람객 으로 입장이 바뀌는 냉정함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 그 자체였다. 감동의 무대
음악 캠프 동기생들인 Sihao He와 Brannon Cho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의 연주를 최종 결선 무대에서 보여줬다. 혼신을 다하는 연주
에 땀을 비오듯이 쏟고 그 땀방울이 악기와 지판에 묻어 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관객들도 연주가 끝난후 환호했다. 흘린 땀은 단순한 땀이 아니라 2년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본선 제 1라운드에서 끝내야 했던 그들이 정신적인 고통과 심적인 압박감
을 이겨내고 재도전에 성공한 노력의 결실임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함
께 지켜보던 아들도 “엄마 어떻게 심사할수 있어? 둘다 너무 잘해. 누 가 심사위원이야? 이건 심사위원에게 고문이야!” 라며 나와 생각을 같 이했다.
열정어린 지도
Northwestern 대학교에서 Sihao He와 Brannon Cho를 finalist로 키
컴피티션에 출전하는 아들에게 좋은 악기를 사주기 위해 부모님이 집
서 딸의 악기 구입을 위해 작은 집으로 옮기셨던 부모님 생각에 한 번 더 눈시울을 붉혔다. 악기를 바꿔줄 때마다 실력이 늘었다고 이야기하 시며 가장 중요한 고3 때 형편이 어려워 악기를 바꿔주지 못한 것이 아
직도 마음의 짐이 시라며 말씀하시는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
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가진 것을 다 털어서라도 후원하는 부모님의 무 한한 사랑과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음악 세계에서 부족함 없이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컴페티션의 교훈
1등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사회적 통념에 의한 나의 낡은 사고방식
이 깨진 것은 시상식 때였다. 최종 결선자 12명 모두는 입상 결과에 상 관없이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에게 축하를 받고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 며 시상식을 축제로 이끌어 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끄
러운 이야기이지만, 1, 2 등수를 잊고 ‘그동안 수고 많았어, 축하해’라
는 박수를 쳐본 게 처음이었던 거 같다. Sihao He는 등수에 들지는 않
았지만 4000유로의 상금과 ’Toshio Hosokawa 작곡의 ‘Sublimation’ 을 세계초연을 하는 연주자로 기록되었고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가 실황 CD에 수록되고, Laureates’ Concert 참가하는 기회도 가졌다.
Brannon Cho는 6등과 브뤼셀 시티상을 수상하고 8000유로의 상금
과 프로코피에프 소나타 작품 119가 실황 CD에 수록되고, Laureates’
Concert에서 연주했다. 시대를 함께하는 음악인의 마음, 학생을 지도 하는 스승의 자세,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헌신,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고충까지 깨닫게 해주었던 2017 퀸 엘리자베스 컴피티션에서 얻은 감 동과 교훈은 내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워낸 명 교수 Hans Jensen은 컴피티션 기간 내내 제자들과 함께 했다 고 한다. 여름 음악캠프에 지도했던 학생까지 5명을 본선에 진출시킨 Jensen 교수는 학생들 간의 무한 경쟁을 유도하여 단시간에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학기 중 에도 제자를 위해서라면 식사를 거르는 것은 물론이고 잠도 주무시지
않고 레슨을 하셔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글 정선분_바이올리니스트
매네스(Mannes) 음대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NY Classical Youth Orchestra 디렉터 클로스터 Sun Violin Studio 원장 65
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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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영화의 줄거리는?
미국 보스턴 뒷골목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굿 윌 헌팅’에는 수학 천재역으로 맷 데이먼(Matt Damon)과 그 의 친구역으로 벤 에플렉(Ben Affleck)이 출연했습니다. 세계적인 매사추세츠 공대 MIT에서 일용직 청소
부로 일하는 주인공 윌 Will은 타고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MIT의 수학 교수, 제럴 드 램보(Gerald Lambeau) (그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Field’s medal winner for combinatorial mathematics 상을 받은 저명한 수학자입니다)가 학생들에게 몹시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주고 답을 아는 사
람은 복도에 걸어 놓은 칠판에 적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누구일지는 몰라도 그 사람은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답을 적은 사람은 MIT의 천재들이 아니라 청소부 윌이었지요. 거리 에서 주먹다짐하며 살고 있던 윌은 고아로 자랐습니다. 위탁양육가정 Foster Home을 전전하며 살다 심한 학
대를 받았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램보 교수는 윌은 만나자마자 위대한 수학의 천재, “제 2의 라마누진”이 나 타났다고 흥분합니다. 라무누진은 인도사람으로 윌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위대 한 수학자가 된 사람입니다. 램보 교수는 윌을 수학자로 성공시키고자 합니다. 거리에서의 싸움 때문에 감옥에 가야 할 처지에 놓인 윌을 두 가지 조건을 걸고 꺼내 줍니다. 첫째는 수학을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심리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윌은 천재였지만, 어린 시절 받은 심한 학대로 불안과 트라우마, 반항적인 기질을 갖고 살아오 고 있었습니다. 심리치료를 받게 하기 위한 과정은 순탄치가 않습니다.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램보 교수는 자신 의 대학 기숙사 친구였던 심리학 교수 션 멕과이어(Sean McGuire)를 찾아가 윌을 상담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심리치료 과정?
심리치료사인 션은 길들지 않은 야생마 같은 윌에게 공감 능력을 갖고 접근합니다. 자신의 아내가 암으로 죽게 된 이유를 말해주고,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윌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끊임없이 경청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변 화를 유도해 냅니다. 윌은 그런 션을 통해 자신을 조금씩 열어갑니다. 자신의 두려움, 반항, 폭력성을 인정하게
되지요. 윌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지요.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닫고, 불량배 같은 친구들 이외에는 친구를 사귀려 하지 않습니다. 여자들과는 더욱 진지한 관계 를 맺지 못합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지요. 불안을 느끼지 않기 위해 회피를 선택한 것입니다. 영화가 전달하는 심리적 메시지?
그러던 윌은 하버드 대학 4학년 생인 스카일라 Skylar를 만납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두 사람은 금세 사랑에 빠
졌지요. 스카일라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곧 스탠포드 의대에 진학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윌에게 함께 캘리포니 아에 가자고 청합니다. 하지만 윌은 스카일라에게 이별을 전하고 떠나버립니다. 자신이 함께 갔다가 버림받을
까 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사실, 그는 보스턴 밖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심리치료사 션은 윌의 두려움 을 아주 효과적으로 다룹니다. 션은 윌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찾게 돕습니다. 또 윌이 진심으로 원하 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그런 션은 야심 있는 램보교수와 갈등을 빚고 크게 다투지요. 세상에 하
나둘 있을까 말까 한 천재를 성공시키려는 램보교수와 윌이 원하는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려는 션의 갈등은 우 리 내면의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굳이 윌과 같은 천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질문 속에 살아 갑니다. 직업적 성공과 돈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가정, 사랑, 건강을 추구할 것인지 삶은 끊임없이 선택을 강
요하지요. 영화 속에서 윌은 좋은 회사에 취직합니다. 하지만 윌은 성공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션 교수
에게 “내 여자를 만나러 떠나야 해요 I have to go to see a girl”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스카일라가 있는 캘리 포니아로 떠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추구하길 권면합니다. 여자친구를 선택한 주인공 윌을 통해 시시각각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진실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질문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 자신에게 달려있겠지요.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현) 뉴욕차일드센터 임상 및 통합지원 국장 /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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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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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강과 바다에서 뉴욕 여름나기
스카이라인을 즐기는 뉴욕 해상 관광 뉴욕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애비뉴와 스트 릿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지역마다 랜드마크 빌딩과 공 원, 성당, 공연장, 뮤지엄 등이 있는 뉴욕 시내는 걸어 다녀 야만 숨은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 하지만 전 세 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가장 낭만적으 로 그리고 제대로 감상할 방법은 역시 배를 이용하는 관광 이라고 할 수 있다. 맨해튼 섬을 둘러싼 이스트 리버와 허드 슨 리버, 그리고 대서양과 맞닿은 남단 해로를 운항하는 수 많은 수상 택시와 크루즈 라인이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는 지하철과 도 보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해상 관광의 매력이 단연 돋보인다. 한여름 밤 라이브 재즈 음악 을 들으며 식사를 하는 럭셔리 크루즈를 이용할 여유가 있 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물가 비싼 뉴욕에서 박물관 입장 료 정도로 지인과 가족들이 몇 시간의 크루즈 관광을 즐기 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뉴요커 뿐 아니라 이미 많은 해외 관광객들도 알고 있는 정보지만 무료로 이용할 수 있 는 짧은 코스의 페리 이용도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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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크루즈(Tourist Cruise)
맨해튼 섬을 일주하며 일정 시간 동안 배를 타는 코스. 가장 인기 있는
서비스는 서클라인 Circle Line 이다. 매일 운행되며 투어 시간은 1시간 ~3시간. 모든 서클 라인 보트는 허드슨 강 42 번가에서 출발한다. 비용
은 선택한 유람선과 코스에 따라 다르지만, 뉴욕 패스, 익스플로러 패
스 및 시티 패스에는 서클 라인 크루즈가 무료로 포함되어 있으므로 여 행객 패스 중 하나를 이용하면 실제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서클 라
인은 전문 여행 평가 사이트인 TripAdvisor 에서 별 5개 만점 중 4, 1/2 을 받아 서비스 만족도를 인정받았다. https://www.circleline42.com/ * Best of NYC Cruise
서클 라인 중 코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다. 2시간 30분 동안 자
유의 여신상, 브루클린 브릿지, 할렘, 양키 스타디움 등 맨해튼 섬을 일 주한다. 매일 2~3차례 운행. 성인 $42. 시니어 $40. 어린이 $35. * Landmark Cruise
미드타운 이남을 운행하는 2시간 코스. 자유의 여신상, 엘리스 아일랜 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및 브루클린 브릿지를 순회한다. 매일 2~3 차례 운행. 성인 $36. 시니어 $34. 어린이 $34 * Liberty Cruise
1시간 단기 코스. 자유의 여신상, 엘리스 아일랜드 그리고 원 월드 플 라자를 볼 수 있다. 매일 수시 운행. 성인 $30. 시니어 $28. 어린이 $25.
이 외에도 서클 라인은 Harbor Light Cruise, Happy Hour Cruise, Statue on Night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한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서클
라인의 경쟁사인 스카이라인 크루즈(Skyline Cruise)는 90분간 허드슨
리버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이동하는 CITY SIGHTSEEING NEW YORK 코스를 서클 라인보다 저렴한 성인 $31, 아동 $21 에 제공한다. Pier 78 에서 매일 수시 출발.
디너/재즈 크루즈 전문 회사 혼블로워(HORNBLOWER)도 같은 가 격에 1시간 미드타운/로어맨하탄 코스인International Sightseeing Cruise 를 선보였다.
스피드 보트(SPEED BOATS)
빠른 속도와 급한 회전, 그리고 물보라를 즐긴다. 스피트 보트는 여유 있고 느긋한 뉴욕시 관람이 목적이 아닌 짜릿하고 시원한 속도감을 즐 기는 수상 오락의 성격이다. 여름철에 특히 이용객이 몰린다. 뉴욕시에 는 3개의 스피드 보트 라인이 있다.
서클 라인이 운영하는 비스트(The Beast)는 시속 45마일 (73Km)의 속 도로 자유의 여신상에 100피트까지 근접하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대
부분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이용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Pier 81 에서 운항. 성인 $29. 아동 $23
뉴욕 워터 택시가 운영하는 샤크(The Shark)도 비스트와 거의 비슷한 보트지만 아동 이용료가 4달러 저렴한 것이 매력이다. 가이드의 안내 에 따라 음악과 빠른 속도감을 즐긴다. Pier 78 에서 매시간 출발. 성인 $28. 아동 $19.
신생 라인으로 최근 인기를 더하고 있는 씨 울프(The Sea Wolf)는 배 와 인원수에 따라 이용료가 차이가 있고 25달러부터 시작이다. 70
페리 서비스 HOP-ON-HOP-OFF(FERRY SERVICES)
코스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배 안에 머물러야 하는 관광 크루즈와 달리 페리 서비스는 중간 중간 터미널에 내리고 다시 탈 수 있는, 관광과 교
통의 개념을 합한 이동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일정대로 뉴 욕을 구경하고 다시 탈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장점이다. * NYC – City Sightseeing Cruise
맨하탄 최남단 사우스 스트릿, 브루클린 덤보, 월드 파이낸셜 센터, 미
드타운 터미널에서 승객을 내리고 태운다. 중간에 내리지 않고 계속 이 용하면 90분이 소요된다. 성인 $35. 아동 $25 * New York Water Taxi
시티 크루즈와 같은 90분간의 코스. 하지만 시티 크루즈보다 터미널
수가 2개 많은 6개로 내리고 타는 일정이 좀 더 편리하다. 매 터미널에 서 30~40분 간격 출발. 성인 $35. 아동 $19 * East River Ferry
가장 저렴한 페리 서비스로 엄밀히 말하면 관광이 주목적이 아닌 뉴요
커들의 출퇴근 이동 수단이다. 1회 이용 요금은 4달러. 1일권 12달러 티켓을 사면 언제든 페리를 이용하며 뉴욕을 관광할 수 있다. 전문 관 광 페리가 아니지만 별 4, 1/2의 높은 평점을 받을 정도로 이용객들의 만족도가 높다.
디너(Dinner Cruise)
생일, 결혼기념일, 발렌타인 데이, 마더스 데이 등 가족과 배우자 및 연
인과 함께 로맨틱한 자리를 마련하고 싶을 때 선상 위의 디너는 분명히 매력적인 선택이다. 2시간~3시간 동안 이어지는 선상 여행을 통해 느 긋하게 도시의 야경을 즐기며 라이브 음악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다.
물론 일반 코스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오찬과 브런치 코스를 이용하면 디너 크루즈보다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혼블로워 크루즈(Hornblower Cruises)가 뉴욕시의 가장 대표적인 디
너 크루즈 라인이다. 웨스트 빌리지이 Pier 40 그리고 사우스 스트릿 시포트의 Pier 15 에서 출발한다. 1인당 디너 코스 가격은 $120달러. 재즈 샴페인 브런치 크루즈, 레이디 리버티 브런치 크루즈 등 오찬 코
스는 가격이 더 저렴하고 마더스 데이와 파더스 데이, 크리스마스 등 휴일 특별 크루즈가 있다. 인기 라디오 FM Hot 97 의 DJ 가 탑승하는 크루즈는 친구들과의 파티에 적합하다.
스프릿 크루즈(Spirit Cruises)는 주중 디너 1인당 99달러부터, 주말은 109달러에서 시작한다. 오후 2시까지 운항하는 런치 크루즈는 1인당 59달러.
월드 요트(World Yacht)는 가장 럭셔리한 디너 크루즈다. Pier 81에서 매일 출항하고 4가지 코스 디너 요리, 브런치 그리고 헐리데이 특선 프 로그램이 있다. 6000 스퀘어피트가 넘는 야외 데크에서 특별한 이벤트 와 만남을 가질 수 있다. 가격은 인원수에 따라 예약하면서 결정한다.
모든 디너 크루즈는 상시로 할인 특별 이벤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정보
를 미리 얻으면 부담을 덜 수 있고, 어느 정도의 격식 있는 드레스 코드 를 요구하는 것도 알아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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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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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나른한 일요일 오후 냉장고의 자투리 재료들을 꼬치에 끼워 프라이 팬에 구워보자. 어제 먹다 남은 삼겹살, 아이가 안 먹겠다고 남겨둔 방울토마토, 김치 담을 때 쓰고 남은 마늘 등이 꼬치구이와 통마늘 구이로 만들어지는 순간, 상차림은 마술처럼 화려해진 다. 간단하게 프라이팬 하나로 바베큐 하는 기 분까지 내며 “나른함” 대신 “색다름”이 가득한 휴일 오후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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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듬 꼬치구이 재료: 호박, 색색깔의 피망, 컬리플라워, 브로컬리, 래디쉬, 통마늘, 삼겹살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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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는다.
4
각각의 야채를 꼬치에 끼운다.(제일 위, 아래를 고정이 될 만한 단단한 야채를 꽂아 모양이 흐트러지
지 않게 한다.)
2
통마늘의 위를 자른다.
3
삼겹살은 전체적으로 벌집 모양을 낸 후 5 cm 정도로 잘라 꼬치에
달궈진 팬에 삼겹살을 먼저 굽다가 통마늘, 야채 순으로 넣고 소금, 후추 등을 살짝 뿌려준다.
요리, 글 Hwajung Sung
한양대 작곡과 졸 한양대 작곡과 대학원 졸 뉴욕대 영화음악과 대학원 졸 뉴욕 ICC(International Culinary Center) Food Styling 수료
다수의 콩쿨 입상 경력과 <Leonard Rosenmann 헌정 음악회>의 초청 작곡가이기도 한 그녀는 현재 광고, 무용, 클래식 음악 작곡가이자 영화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며 동시에 그녀만의 창의성으로 푸드 스타일리스트로서 인정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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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준비물 : 종이 접시, 티슈지, 액상풀, 붓, 가위, 마커펜, 출력물 (필요에 따라) 등
종이접시로 만드는 자동차 모빌 일회용 종이접시와 티슈지를 이용해 종이 자동차를 만들어 보세요. 자동차라는 흥미로운 주 제에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아이디어를 발산해 낸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자동차를 얘기해 보고 특징이 있는 자동차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유도해 주세요. 내가 디자인한 스포 츠카, 경찰차, 트럭, 스쿨버스, 소방차 등 자신이 꾸밀 수 있는 많은 자동차를 떠올리며 형태 나 색감등을 관찰하게 해주면 더 좋습니다. 다른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종이접시를 이 용하는 이유는 자체의 볼륨감이 있고, 풀이 마른 후 형태 변형이 적기 때문인데요, 색다른 재 료의 사용이라는 점도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된답니다. 물감으로 색감을 입히지 않고 또 다른 질감의 티슈지와 Texture Paper를 이용해 자동차를 완성한 점도 다양한 느낌의 종이 를 경험하게 해 주려는 이유이지요. 위에 언급한 Texture Paper는 Construction Paper에 계 열색의 물감으로 질감 표현이 되도록 찍거나 뿌리거나 해서 만든 종이인데요, Texture Paper 가 없다면 얼마든지 Construction Paper(색도화지), 잡지, 색종이로 대체 가능하답니다. 완성 후에는 구멍을 뚫어 실로 한 줄 모빌을 만들어 창문이나 방문에 걸어 주세요. 더욱 더 자신이 작업한 활동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과정과 완성의 의미를 알게 된답니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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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1_ 종이접시에 도안하기
종이 접시 안쪽에 자동차 모양을 그려주세요. * 둥근 그릇을 이용하면 좋아요.
아주 간단하게 자동차 도안을 그려주세요.
* 자동차, 경찰차의 예입니다. 마치 비행접시 같지요~
종이 접시에 그린 도안을 잘라주세요.
* 위의 순서대로 스포츠카, 스쿨버스, 경찰차 도안입니다.
Step 2_ 티슈지 입히기
만들고자 하는 특정 자동차의 색감 티슈지를 잘라 준비해요.
* 티슈지의 사이즈는 1”*1”가 좋아요.
* 스쿨버스는 Yellow, 경찰차는 Blue, 스포츠 카는 Red로 하면 좋아요.
액체 풀을 이용해서 티슈지를 붙여주어요.
* 액체풀이 아니어도 좋지만 붓을 이용해 발
라주면 훨씬 깨끗하게 티슈지를 붙일 수 있
도안한 다른 자동차도 같은 방법으로 티슈지 를 붙여주세요.
어요.
Step 3_ 특징적인 부분 완성하기
Texture Paper 또는 Construction Paper(색
도화지), 잡지, 색종이 등의 색감있는 종이를 이용해서 자동차의 창문 등을 완성해요. 78
둥근 뚜껑을 이용해 동그라미를 그린 후 오려 서 자동차 바퀴를 붙여주세요.
구멍을 뚫어 실로 연결해 주세요.
* 보이지 않는 낚싯줄을 이용하면 더욱 좋아요.
글 아동미술칼럼니스트 김민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수의 디자인 공 모전 수상 경력과 쥬얼리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현재 미동북부 뉴저지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www.
Goodmandoo.com 네이버 파워블로거이자 www.
Missyusa.com “미술이랑 엄마랑”의 아동 미술칼럼니 스트, 한소망 한국학교 교감. Fort Lee에서 “미술이랑 가 베랑”을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창의 폭발 엄마표 판타 스틱 미술놀이>가 한국과 중국에 출판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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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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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인의 아내로 3
3
미국에 사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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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엄마 홍정연
앗살람 왈에꿈 내가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갈 나라는 자의건 타의건 어찌하든 선 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에 와서 살지라도 이민 이유와 상관없이 이민 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 합니다. 한민족의 뿌리를 잊지 못하고 타국 에서 살아갑니다. 모국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우리의 2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신 과 혼을 전해줄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이웃 이야기’ 연재 두 번 째는
제 3의 세계인 파키스탄에서 온 남자와 결혼한 후 미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사는 보통 의 한국 엄마 홍정연 씨가 어떻게 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조화시키며 한국말, 우루두, 영어 세 가지를 완벽하게 다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글입 니다. 홍정연 씨는 아직도 한국의 뿌리를 후대에 잘 전달하려는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녀 는 자신의 노력이 후대의 정체성 확립에 조금이나마 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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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책이 너덜거릴 만큼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몇 개월 후에 치른 시험에 서 100여 명의 지원자 중 2명만이 합격하였고 난 간호학은 통과하였으
나 영어 과목은 그렇지 못하여 재도전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명석하게 태어나지 못함을 한탄해보기도 하고 남아 중심의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특기인 오뚝이 정신으로 다시 일어섰
다. 그때부터인지 어려운일이 생기면 더 오기가 생겨서 안 되고 넘어져 도 계속 도전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건 그로부터 6개월 후다. 나에겐 달랑 1000달러
가 있었고 그나마 그린카드 수속비를 내고 나니, 남은 돈 300불로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행히 그 당시엔 외국인 간호사에 대한 처우 카라치 공항에 도착하니 시댁 식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화려한 색감
의 카미즈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엘리트 티가 물씬 나는 시동생이 인
사말을 건넨다. “앗살람 왈에꿈” 이 곳에 오기 전 여러 번 연습했건만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낯선 분위기 탓이기도 했지만, 시누이가
들고 있던 꽃다발에 시선을 빼앗겨서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꽃다발
은 편편한 삼각형 종이에 한송이씩 붙여져서 플라스틱으로 감싸진 화
가 좋아서 비행기 티켓과 3개월 렌트비를 병원에서 지급해 주었으니
주급만 모으면 지출도 별로 없어서 일단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구사할 수 있는 실력으로 병원에서 근무해야 했 으니 실수라도 할까 봐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길에 난 그 푸른 뉴욕의 5월의 하늘을 보면서 기도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환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천진하게 말없이 웃으시던 시어머니는 오래
나의 첫 근무지는 200 침상을 보유한 지역 병원으로, 대부분이 고령 환
곤을 감추며 ‘생큐 생큐’를 연발했다. 반듯한 인상을 주고 싶어 흰 셔츠
었다. “Could you speak slowly? One more time please?”도 두어 번
기다리셨는지 지친 모습이었고, 24시간을 비행기 타고 온 나 역시 피 에 베이지 정장을 입었건만 파키스탄의 5월의 더위는 (거의 섭씨 100 도를 넘나드는) 그런 나의 의도를 비웃는 듯했다.
23여 년이 지났지만, 온몸에 훅하며 들어오던 그때의 더운 카라치의
밤공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난 파키스탄 남자와 인연을 맺었고 전래동화의 이야기처럼 아이 셋을 낳고 살고 있다. 요즘은 고국에서도
파키스탄 남편과 한국 여성 커플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대부 분의 국제 커플은 그들의 나라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자인 비교적 수월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전화 받는 일은 진짜 고역이 쓰면 알아듣는 척해야 해서 환자의 약을 제대로 오더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벨만 울리면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피하곤 하였지만,
창피함 보다는 환자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던 나는 수간호사에게 여러
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후로도 1년 정도 전화 울렁증은 계속 나를 괴롭힌 것 같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나와 남편은 제 3국인 미국, 그것도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만났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으로 자연스 레 학생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85 학번인 나는 대학시절,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민주화 활동과 반독재 운동의 하나로 학생회 홍보팀에서
활동한 게 다였지만, 졸업 후 운동권 학생이라는 낙인은 취직에 부정적 으로 작용하였다. 서울에 이름만 대면 아는 대부분의 병원에 지원했고
필기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었다. 그러나 매번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소위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두 살 위인 오빠는 운동권 수장으로 경찰에 쫓기고 있던 터라 집에선 나의 취직보다 오빠의 안위가 우선일 수 밖에 없었다. 도망 다 니다 지친 오빠가 집에 들러 엄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다
잡힐 뻔한 경우도 있었으나 우리 오 형제의 기지로 무사히 고비를 넘긴 기억도 있다.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 집은 어두운 긴 터 널을 한 조각의 빛도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빠져나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답답한 심정으로 몇 달을 보내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
정으로 여러 신문을 광고까지 포함해서 세세히 읽곤 하였는데 하루는 해외개발공사에서 미국 간호사 취업을 도와준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쓴웃음이 났지만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등록을 했다. 학원을 오가는 지
아가칸 파키스탄 대학원 간호학 석사
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미제타도를 외치던 내가 미국을 간다는 것에 하철과 버스 안에서 남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를 중얼거렸고
가톨릭의대 간호학과 학사
뉴욕 리만 칼리지 Family Nurse Practitioner certificate 81
LIFESTYLE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영감님들에게 자극 받다 글 박원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New School 대학원에서 Media Studies 전공 <뉴욕중앙일보> <라디오 코리아> <뉴욕한국일보> 전 기자. 에세이집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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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패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Bill
이다. 꼭 직장인들의 사오정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0~60대가 되어야
임스 주말 패션 면에 실리는 그의 길거리 패션 사진과 짧은 글들이 좋아서
감독과 70대 촬영기사가 머리를 맡대고 씬 구성을 하는 모습이 흔하지만,
Cunningham)은 내가 인생의 롤 모델로 여기는 사람의 하나였다. 뉴욕타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3년 전 <빌 커닝행의 뉴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후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빌 커닝행은 사망
직전까지 지난 수십 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전거로 뉴욕을 누비며, 구식 필름 카메라로 거리의 행인과 유명인들의 패션을 촬영했다. 비가 오 나 눈이 오나 촬영을 거르지 않았다. 비가 오면 우비와 장화 패션, 눈이 오면
스노우 패션을 찍느라 더 분주했다. 구식 카메라와 자전거 그리고 초록색 점퍼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일반인들의 빈축을 사는 화려함 위주의 패 션 세계에서 빌 커닝햄은 너무나 소탈한 사람이기도 했다. 패션계의 여제인 애나 윈터 보그지 편집장이 “우리는 모두 빌을 위해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 다”고 말할 정도로 알아주는 작가였지만, 그의 실제 삶은 수도승에 비견될
정도로 검소했다. 직업상 수많은 파티와 패션 이벤트에 초대받았지만, 파티
장에서 제공하는 와인과 그 비싼 진수성찬에 포크 하나 안대는 걸로 유명하
다. 늘 사진만 찍고 파티장을 떠났다. 뉴욕타임스 회장은 그의 80회 생일날
직접 사무실에서 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빌 커닝햄을 존중했다. 빌 커닝햄 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띵’하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있었다. 나이를 따지
지 않는 미국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던 내가 그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채 너 무나 한국적인 ‘조로(早老)현상’을 겪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직 50살도 아닌 데 너무 많은 걸 접어놓고 혹은 미리 내려놓고 살고 있지 않 았나 하는 자책이었다. 몇 편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험으로 이 력서에 독립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써놓지만 나는 카메라(비디오)를 상당히
늦게 잡은 편이다. 직접 내 손으로 처음 촬영이란 것을 해본 것이 31살 때였
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실습은 커녕 카메라를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방송제작론’도 오로지 책으로만 배웠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완숙하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조차 40대가 고비다. 헐리우드에선 70대 한국의 CF, 영화, 방송 등 프로덕션 분야에서 노인 측에 드는 전문가를 찾기 힘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만났던 방송국 PD 동기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
‘관리직’이 되어 있었다. 아직 몸도 마음도 청년들인 40대 후반이지만 “20 년 현장 일했으면 책상에 앉아서 일해야 할 때”라는 조직문화가 느껴졌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촬영장으로 보내달라고 회사와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
제 50대 초반인 언론계 선배들 역시 대부분 직함이 부장이나 위원이고 ‘데
스크’를 하고 있다. 그 나이와 경력이라면 언론의 꽃인 탐사 보도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노련한 기자들인데… 뛰어다니며 쫓아다니며 취재하기엔 이미 늙었단 뜻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빌 커닝햄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었지만, 뉴욕이
라는 특수한 장소와 예술가라는 특정한 직업상, 게다가 이미 명성과 지위 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 아니겠냐고. 혹은 일 할 기회가 없어
서 그렇지 기회만 되면 누구나 그러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곳에
서 로컬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 현장에서 정말 많은 50~60대 노장들을 만
났다. 그런데 모두 미국인 주류 언론 기자 아니면 중국인, 폴란드인, 쿠바 인 등 각 커뮤니티 미디어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퇴할 때까지 현장에 서 사진 찍고 취재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현장에서 가장 젊은 사람들은 늘 20~30대인 한인 기자들이었다. 이곳에서도 40대가 중반이 넘으면 벌써 현
장을 떠나 데스크로 간다. ‘조로’는 지형을 떠나 분명히 한국적인 마인드다.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웨딩 촬영으로 활 발하게 일하던 후배를 만났는데 이미 카메라는 손을 놓고 어린 사람을 시 킨단다. 이유는,
“인제 그만 해야죠, 그런 일은.”
커리큘럼에 방송국 견학 한번 없었다.) 물론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위
한국 뉴스 채널에 보낼 촬영일을 열심히 하는 후배도 같은 말을 한다.
대학 상황은 그랬다. 직장 생활을 광고회사 PD로 시작하고 제작 업무를 맡
언제까지? 카메라 들고 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 바로 조나스 메카스 감독
방송이란 명칭이 붙는 학과의 학생 대부분에게 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의 았지만, 당연히 카메라는 촬영기사의 몫이었다. 조감독 시절 ‘도대체 카메
라는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해 슬쩍 만져 보려고 하면, 촬영 감독님도 아
닌 조수가 먼저 인상을 쓰면서 나를 마치 보물단지에 손대는 도둑놈이나 발 견한 듯이 소리지르며 질색을 했다.
“조심해요. 뷰파인더 함부로 들여보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조감독 한 두 명 아니야.”
'입봉'을 하고 나서야 가끔 뷰파인더를 통해 프레임을 확인했지만, 대부분 은 모니터만 지켜볼 뿐이었다.
뉴욕에 영화 유학을 와서 처음 만져 본 카메라가 90년대 후반 당시에도 골 동품 취급을 받던 16밀리 볼렉스였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이미 디
지털 시대였다. 소니 6밀리 디지털 캠과 매킨토시를 사고 나니 세상이 내 것 같았다. ‘내가 직접 하는 촬영과 편집’이라는 이전까지는 몰랐던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7년간, 나는 직업이 VJ가 아닌 사람치고는 정말 카
메라를 항상 지니고 살았다. 특히 지하철 음악가들의 다큐멘터리를 몇 년 간에 걸쳐 만들었을 때는 특정한 촬영일과 장소가 따로 없었다. 조금이라 도 그림이 될 만한 상황을 놓칠 수가 없어서 언제나 카메라 가방을 휴대하
고 다녔다. 그러던 내가 마지막으로 작업을 위해 촬영을 한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 이후로는 그저 캠코더로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유일한 촬영이었다. 혹시 누가 영화 만드는 건 포기했냐고 물어보면 세상의 모든 감독 지망생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진전도 없는
시나리오를 계속 끄적거리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운 좋게 늦은 나이에 감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카메라를 들고 하 루종일, 정신없이 거리와 지하철역을 헤매고 다니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이미 단정 지었다. 한국이 유난히 조로현상이 심한 사회라는 건 인정할 것
“이제 저도 40 중반인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겠어요….” 처럼.
최근 내 뒤통수를 또 한 번 호되게 때린 영감님이 조나스 메카스 감독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60~7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를 관통
하며 앤디 워홀, 존 레논, 오노 요코 등과도 작업했던 뉴욕 독립 영화의 대부
다. 여전히 뉴욕의 인디 시네마 보급의 보루 역할을 하는 ‘앤솔로지 필름 어 카이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90살이 넘은 그는 여전히 1년에 3~4편의 단
편들을 찍고 있다. 필자는 이 영감님을 직접 본 적 있다. 1999년 학교 수업 시간에 특별 강사로 왔었다. 감독이 만든 이중노출을 주로 사용해 찍은 시 각적으로 현란한 단편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조나스 메카스는 그때가 이미 77세였고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 접한 실험영화에 감탄하고, 처음 만져 본 필름 카메라에 재미를 들이 던 그 시절, 비싼 외화를 쓰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진짜 배워야 할 것에는
막상 바로 눈앞에서 대하면서도 무감각했던 것 같다. 내일모레 팔순 노인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현장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 자극받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50살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미리 꺾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 있을 것이다. 뭔가를 계속 추구하는 것 이 끈기와 집념으로 보이기보다는 미련과 집착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잇값,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남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만 좋으면
계속해야 하는 일들을 실제로 남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신이 스스로 먼
저 “이제는 늦었다”고 규정하는 일이 더 많지는 않은가? 꼭 예술가나 작가 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멋지게 늙어가고 있는 영감님들을 보면 그런 생각
이 든다. 성공한 삶은 아닐지 몰라도 결코 실패한 인생일 수는 없다. 죽을 때 까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면. (영감님이라는 단어에 성적 인 구별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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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초록지붕, 파란대문, 빨간벽돌집
좋은 집이란? 이번 달에 Netflix에서 “Anne of Green Gables” 시리즈를 방영한다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이다. 각각의 동네는 그 고유한 색깔이 있
애니메이션으로 더 알려진 이 작품은 캐나다 여성 작가 루시 모드 몽고
호되는 지역과 더 비싼 지역이 있다. 그리고 집을 살 때, 머릿속으로 팔
소식을 듣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간 머리 앤”
메리의 소설이다. 어렸을 적의 이 e가 붙은 Anne을 너무 좋아해서 몽 고메리 여사의 후속작품인 앤의 아들들이 1차 대전에 참여하고 앤이
세상을 뜰 때까지의 시리즈를 겉장이 낡아질 때까지 끼고 살았었다. 한
참 어학연수가 붐이던 대학 시절에는 몽고메리 여사의 고향이자, 책의 배경이 된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가기 위해 어학연수를 핑계 로 캐나다로 향했었던 요샛말로 필자는 몽고메리 여사의 덕후였다.
초록색 지붕의 앤처럼 우리도 감나무골 최 진사, 파란 대문집 영희, 김 약국집 딸들처럼 우체국에서 정해진 주소로만 집을 칭하는 경우보다
어서 리모델링이 쉽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동네 안에서도 더 선 때의 구상을 같이하는 것이 좋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비싼 동네의
작은집이 싼 동네의 큰 집보다 더 가치가 있다. 학군과 함께, 내 직장과 의 거리, 주위환경, 타운의 전통, 개발 가능성 등, 내가 살고자 하는 타 운의 개성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학교와 공원 등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것이 좋고, 막힌 골목인 Cul-De-Sac이 차량의 유입이 많지 않고,
안전해서 좋고, T자 길 앞은 통상 피하는 것이 좋다. 학군과 관계해서 도 인터넷으로 나오는 성적 랭킹만을 신뢰하지 말고, 직접 여러 경로로 알아보는 것이 내 아이를 위해서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는 집을 칭하는 말이 있었다. 전근이 많은 아버지를 둔 탓에 이사가 잦
그리고 또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Condition인데, 새집이 아닌 이상,
간 벽돌집이다. 그 집에는 젊디젊던 내 엄마가 딸기잼을 만드시느라 큰
려진 곰팡이 냄새가 없는지를 잘 봐야 한다. 방음, 방열도 확인해 봐야
았지만, 머릿속에 항상 남아 있는 우리 집은 황령산 자락에 있었던 빨 냄비에 종일 삶던 딸기 냄새가 온 동네에 진동하던 그런 기억이 있는 집이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머리 밖 세상보다 머릿속 세상에서 놀기 좋아하 는 사람이 리얼터 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놀란 사
꼼꼼한 Inspection을 통해서 집의 골조가 튼튼한지, 페인트 냄새로 가 하는데, 방열에 관해서는 전기회사에 전화해서 주소만 대면 일 년의 평
균 전기세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내부구조가 쓸모가 있고, 부엌, 화
장실, 바닥, 조경이 잘 된 집은 시세보다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주인이 신경을 썼다는 것이므로 가치가 있다.
람은 나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손님들이 좋아하는 집을 찾아서 계약하
‘좋은 집 이란?’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다. 내 상황과 형편에 맞는 집이
나 신중해지고 가슴이 뛴다.
태가 되는 집이 진짜 좋은 내 집이다.
게 해드렸을 때는 이 일이 누군가의 꿈에 동참하는 일인 것이어서 너무 좋은 집은 어떤 집인가? 많은 전문가가 말하기를 Location!, Location!, Location!'이라고 가장 먼저 손을 꼽는다. 위치는 학군과 연관 지어서 84
가장 좋은 집이고, 모게지가 내 목을 죄는 짐이 아니며 저축의 다른 형 글 그레이스 조
sojotoprealty@gmail.com
CLINIC
아름다운 미소 하얀 치아 나도 가질 수 있다
다양한 치아미백 클리닉 시원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하얀 미소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로 밝고 환한 미소
를 지으면 대인관계에 많은 도움을 주므로 누구나 새하얀 치아를 갖고 싶어 한다. 본인에게는 자신감을, 보는 이에겐 기분 좋은 새하얀 미소를 만들어 주는 하얀 치아. 그러나 아이들의 유치가 하얀색인 것과는 달리, 성인 치아의 자연 색은 하얀색이 아니라 약간 누런 빛이 돈다. 이는 치아의 안쪽 면에 있는 상아질의 색 자체가 약간 노란 빛을 띠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얀 치아를 가졌다고 해도 개인의 식습관에 따라 커피, 차, 담배, 와 인 등 치아 변색을 초래하는 음식을 많이 섭취할 경우, 변색 현상은 더 심해지거나 가속화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게 치아미백시술이다. 치아미백클리닉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변색한 치아를 삭제하거나 손상하지 않고 치아의 색을 희고 밝게 만드는 치과 치료 시술이다. 스케일링으로 해결되지 않는 변색 부위에 안전성이 입증된 여러 치아 미백제와 특수광선 등을 이용하여 여러 치아의 색을 원래의 색으로 회복시키거나 더 밝게 하는 방 법인데 이러한 전문 치과 시술 이외에도 다양한 치아 미백 방법을 알아보고 장단점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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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백 치약 : 치약 속의 작은 입자들이 표면의 얼룩을 제거해 준다. 하지만 치아 안까지 깊숙이 박혀 있는 내부
얼룩은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백의 한계가 있다. 미백 치약은 미백 치료를 받은 후 미백의 효과를 유지해 주는 역할 정도로 생각하면 좋다.
미백 린스 : 과산화수소 성분이 들어있는데 한번 가글을 할 때 30초에서 1분 정도 치아 표면에 미백 작용을 한 다. 하지만 하루 당 작용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실제로 미백 효과는 미미하다는 게 대부분의 연구결과다.
미백젤 & 스트립 : 대부분의 경우, 과산화수소 성분이 젤이나 스트립 타입 미백제에 들어 있다. 하루 3분에서 2 시간 정도 치아 표면에 적용하여 약 2주 동안 지속 사용할 경우 4개월 정도의 미백 효과를 유지할 수 있다. 장 점은 가까운 약국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고 치료 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 단점으로는 각자 치아에 맞추어 제작 된 트레이가 아니기 때문에 미백제가 트레이 바깥으로 흘러 잇몸에 통증을 주거나 미백제가 닿지 않는 치아 표면은 얼룩져 보일 수 있다.
치과 미백 치료 : 대체로 안전하지만 치아가 약한 환자의 경우, 구강 상태를 치과 의사와 상담을 한 후 어떤 강 도의 미백 치료가 적절한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또한, 치아 클리닝 후 미백 치료를 받으면 표면에 쌓여
있는 치태가 제거되어 고른 미백이 가능하다. 치과 심미 치료는 대략 1시간 정도면 가능해 ‘오늘’ 바로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미백 방법 중, 자신의 구강 상태에 따라 어떤 치아 미백이 적합 한지 검진을 통해 먼저 확인해야 함을 기억하자. 가능한 치아 미백 후의 부작용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좋다. 치과 치아 미백 시술 후 오래 유지하는 방법
정기적으로 스케일링과 치과 검진을 받는다. 미백 치료 후 일주일 정도 커피, 콜라 등 착색이 쉬운 음식물을 피하 고 흡연자는 금연을 한다. 미백 후 가벼운 touch-up 미백을 한 번 더 해주면 훨씬 더 하얀 치아를 유지하게 된다.
글 Francis Oh, DDS, MS, MA, Ph.M 현 콜롬비아 치과대학원 보철과 교수 / 뉴저지 Comfort Dental Clinic 원장 Comfort Dental Clinic /
njcomfortdental@gmail.com
(201) 585-8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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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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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미국에 와서 배운 게 있다면, 미국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게 되면 ‘나눔’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제가 실천할 수 있는 나눔은 힐링과 관련된 일을 계속해 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음악 상담 치료 그룹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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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 SAUNA
‘동네 목욕탕 사장님’의 실천하는 힐링
‘솔 사우나’ 대표 이 용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삶들이라 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 은 면면들과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유명인의 성공 스토리가 우리를 꿈꾸게 하고 앞으로 달려가게 한다면, 주변 이웃의 평범한 듯 “비범한” 삶의 이야 기는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춰서서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뉴저지 Palisades Park 시 (흔히 “팰팍”이라고 불린다)에 위치한 “솔 사우나” 의 사장 이용 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도 그가 추구하고 실천하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이었다. 빈손으로 미국에 들어와 어엿한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도 분명 ‘성공 스토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자신을 “그냥 동네 목욕탕 사장”일 뿐이 라며 낮추고 낮춘다. 겸손함이 몸에 밴 탓도 있겠으 나, 그보다는 자신의 이야기가 일부의 성공 사례 정 도로 퇴색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 는 우리가 모두 치열한 삶 속에서 자칫 잊어버리기 쉬운 소중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했다. 진행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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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몸과 정신을 같이 힐링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정신적 힐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과 상담학을 공부했고요. 일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몸을 힐링하는 스파 서비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일에 지치거나 몸이 이유 없이 찌뿌듯한 날이면 잠깐 들러 씻고 쉬다오
정에 들어가 현대음악 작곡을 공부했는데요. 운 좋게도 당시 현대음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 진열된 동양 산수화 도자기들이다. 보통은 항아
년에 아시아 젊은 작곡가 8인을 뽑는 콩쿨에서 입상을 한 덕에 예술
는 사우나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특이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리나 그릇 모양의 자기들을 떠올리겠으나, 이 경우는 그림이 그려진 고가의 판 형태의 백자들이다. 규모나 형식이 한국적임과는 다소 거리 가 있어 자연스레 그 공간의 주인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한다. 다른
하나는 고객들과 직원들이 수시로 사장님 칭찬을 한다는 것이다. 고객
들이야 서비스가 마음에 들어 그럴 수 있다 쳐도 직원이 뒤에서 상사를 칭찬하는 모습은 다소 낯설다. 그래서 그 궁금증을 자아내는 주인공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이용이라고 합니다. 전 중국 길림성 훈춘이라는 곳에서 태어난 한국 계 중국인, 그러니까 중국 교포라고 보시면 돼요.”
악 분야의 권위자였던 이복남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요. 2004 의 전당에서 연주회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 제 연주를 들은 뉴저지 Rutgers 대학의 Gerald Chenoweth 교수로부터 박사 과정으로 오라 는 제안을 받게 된 거죠. 정말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 주저 없이 미 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꿈같은 기회를 얻어 Rutgers대학에서 공부한 것도 잠시, 그에게 예상
치 못한 어려움이 닥쳤다. 그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아버지가 심장마비 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가까이서 아버지를 봉양하지 못한 자식으로
서의 죄책감이 몰려왔다. 동시에 이젠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겠 다는 책임감도 들었다.
중국 교포라는 소개로 그 이국적인 작품들은 설명되었다. 대신 어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어요. 처음
금해졌다.
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결국은 등록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뉴욕 맨
이유로 중국 교포가 이곳 미국 뉴저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
“독립투사 가정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평생 교육자셨어요. 그래서 전 어린 시절 내내 아버지로부터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 죠.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도 아버지 못지않으셨어요. 그런
부모님의 격려와 지지 덕분에, 한국에 중국 유학생이 거의 없던 그 시 절에 제가 한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어요. 한국으로의 유학은, 제 인 생에 있어서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어요. 명지대학교 음악학과 석사 과 92
엔 어떻게든 Rutgers대에서 공부를 계속해 보려고 노력을 했는데 상 해튼의 Blanton-Peale 대학원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실망
과 좌절은 항상 또 하나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는 법인 것 같아요. Blanton-Peale에서 상담학을 공부하면서 자아를 돌아보게 되었고 미 래를 지향하게 되었어요.”
유학생들에게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부고는 청천벽력 그 이상이다. 더 욱이 그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자신의 전공까지 포기해야 했던
그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그런데 그는 속상하고 힘들었다는 말 대신,
그 시련 덕분에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현실에 제대로 접목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Blanton-Peale을 졸업한 후에도 그곳에서 동료 그룹(peer group) 리 더로서 활동했는데요. 음악과 상담을 결합한 음악 치료를 개발해서 주 변 사람들을 돕기도 했죠. 이후에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스파
(spa) 사업에 관심을 가졌어요. 중국 문화하면 스파를 떠올릴 수밖에
없거든요. 오래된 전통과 문화인지라 모든 사람이 그에 익숙하고 친숙
해져 있어요. 저도 그 익숙함과 친숙함 때문에 스파 사업을 하게 되었 는지 모르죠. 또 제가 음악과 상담을 전공한 것이 이 사업을 하는데 영 향을 미친 것도 없지 않고요.”
현대음악, 상담, 그리고 스파 비지니스 사이의 연결 고리가 딱히 떠오 르지 않아 갸웃거리고 있는데 ‘힐링’(healing)이라는 비교적 익숙한 단
어가 들려왔다. 그는 음악, 상담, 스파 서비스는 모두 효과적인 힐링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사회적으로도
“사업하는 피는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 같아요. 공부만 하셨던 아버
반면에 마사지처럼 몸을 힐링하는 문화는 굉장히 발달되어 있어요. 몸
어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교육열도 대단하셨고요. 어려서부터 제 특기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긴 사람들을 위한 치료나 복지가 거의 전무해요. 을 건강하게 하면 정신은 자연히 따라서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있는 거 죠.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일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진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몸과 정신을 같이 힐링하는 게 필요 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학교에서는 정신적 힐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음악과 상담학을 공부했고요. 일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몸을 힐링하 는 스파 서비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힐링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사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혈혈단신 유학 와서 자리 잡기까지 저도 아 주 힘들었고요. 주변에 고생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이 봐왔죠. 사업이라
는 게 결국은 돈 벌자고 하는 거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힘들고 지친 사 람들한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와는 반대로 회계사이신 어머니는 정말 활동적이고 사업을 잘하셨
를 개발하시려고 기타, 서예 등등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게 하셨고요. 제가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을 공부하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었어요.
12살 때부터 장춘이라는 먼 도시로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는데요. 어머
니는 제 레슨을 위해 저와 함께 12시간을 기차를 타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거죠.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본인이 곁에 있으면 제가 연습을 소홀히 할까 봐 염려되셔서였을까요 선생님 옆에서 제대로 배
워야 한다시며 저를 아예 그 선생님 댁에 살게 하셨어요. 그런 어머니
가 저한테 늘 하셨던 말씀이 “사람이 잘 되려면 벌(도시)로 나가야 한
다”는 거였어요. 그 영향으로 제가 이렇게 미국까지 와서 사업하면서 사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제가 보살펴 드려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항상 마음이 무거워요. 올해는 어머니 생
각이 별스레 더 많이 나서 어버이날에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어머니 께 감사 편지를 썼어요.”
그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일하지 않는다. 늘 직원들과 함께 움직이고,
‘잔소리’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타국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고마워
훈련을 받은 그가 깨달은 상담의 본질은 진실한 소통이라고 한다.
잔소리가 그립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잔소리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틈날 때마다 사우나를 드나드는 손님들과 수다를 떤다. 전문적인 상담
“상담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단순해요. 상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
하는 막내아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렇게 싫었던 엄마 깨달았기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고 그 사람의 내적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거예요. 물론 그러려면
“어린 시절 그렇게 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면서도 정작 제가 아
고요. 오랫동안 손님들과 얘기를 하다 보니 이제는 첫인상만으로도 그
아요. 그냥 내 자식만은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그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하 손님이 뭘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직원들하고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미국에 와서 고생해 봐서 지금 이 친구들 심정을 알거든요. 잘해 줘야죠.”
어느 날인가는 70세가 훌쩍 넘은 듯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사우나에 오셔서 “어디 갈 데도 없는데 그냥 좀 들어가면 안 돼요?” 하셨다. 이에 그는 망설임 없이 할머니를 안쪽으로 안내해 드렸다. 순간 중국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였다.
빠가 되고는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몰랐던 것 같 래서 솔 사우나 오픈하고 거의 1년 동안을 집에 안 들어갔어요. 아침 7 시에 문 열어서 새벽 2시에 문 닫고, 사우나에 있는 기계들을 다 점검
하고 나면 새벽 5시가 되요. 그 시간에 들어가면 아내랑 아이들을 깨울
것 같아서 그냥 사무실에서 잠깐 눈 붙이고 출근하고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 큰 애가 학교 선생님이 아빠 직업을 묻는데 아빠가 없다고 했 다는 거예요. 그 일로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제가 그 성공이라는 두 글자에 매료되어서 일만 하며 달렸던 것 같아요. 정말 한심한 일 중독이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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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결혼한 그에게는 일곱 살, 세 살 된 두 딸이 있다. 그는 매주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는 웰빙도 힐링도 그저 남의
아무리 바빠도 이 이틀만큼은 식구들과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하고
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는 힐링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그들
월, 화요일을 아내와 딸들과 보내는 가족의 날(family day)로 정했다.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오로지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한다. 성 공한 사업가와 행복한 가장 둘 다 이룬 그에게 더 바라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미국에 와서 배운 게 있다면, 미국 사람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게 되면
‘나눔’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제가 실천할 수 있는 나눔은 힐링과 관련 된 일을 계속해 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얘기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이용 씨는 그들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공감 의 심신의 치유를 도우려고 노력해 왔다. 그가 말하는 힐링은 휴식, 소 통, 가족으로 정의되는 듯하다. 그는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휴식 공
간을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하고, 그를 찾는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 며, 사랑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감으로써 가족의 소중함을 몸
소 보여 준다. 더불어 그는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 힐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족 같은 관계 형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음악 상담 치료 그룹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한국 유학 시절 그 고단함과 힘든 생활 속에 제 곁에는 항상 교수님들
로 봉사하면서 신자들의 영적 힐링을 돕기도 해요. 힐링 사업도 확장하
지지가 않아요. 제가 너무 힘들어 방황했던 시기에 정말 인생의 멘토로
들을 돕고 있고요. 뉴저지 영광 교회(정광희 목사님 시무)에서 지휘자
고 있는 중이에요. 이민 사회, 교포 사회의 힘든 것들을 이겨내지 못하 고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사람들에게 잠시라
과 학우들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박종대 교수님은 지금까지도 잊혀 서 위로가 되어 주시고 가이드가 되어 주신 분이죠.”
도 위안을 줄 수 있는 한국식 휴식처(가칭 “Korean Village”)를 만들어
그는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다음 세대를 위해 살라”고 얘기한다고
지를 마련해서 7월부터 공사에 들어갔고요. 2년 후에 완공될 예정이에
게 금전적으로 좀 더 여유로운 삶을 물려줄 수 있도록 열심히 살라는
보려고 해요. 펜실베니아에 있는 Equinunk와 Damascus 에 좋은 부 요.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한국은 저한테도 제2의 고향으로 느 껴지거든요.”
행복한 삶의 척도로서 심신의 건강을 강조하는 웰빙(well-being) 붐이
일던 무렵, 웰빙을 위해서는 고단한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해야 한다는 힐링의 중요성도 동시에 부각되었다. 하지만 치열한 사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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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이 말이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팠던 우리 부모 세대에게는 자식에 뜻으로 해석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다음 세대가 좋은 사람들과 조화
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라고 했
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각자가 자신을 치유하 고 타인을 배려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러한 부모의 삶을 보고 배우며 자연스레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터득하 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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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유럽 작은 도시를 걷다가 깨달은 소중한 생각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내가 정말 못생겼나?’ 하 고 거울을 자주 본다거나 왠지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가 꺼려졌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생각했다. 나와 너는 엄청난 우연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고귀한 존재이다. 하지만 동시 에 명동거리만 나가보아도 발에 챌 정도로 많은 평범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고민했다. 나란 사람은 특별한 것일까 평범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다 그 렇지 뭐….'를 입에 달고 살며 사람들에게 이리 채고 저리 채여도 집에만 가면 '우리 아들'하고 나를 안아주는 부모님이 계시니 말이다. ‘여러분은 소중하고 특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알 바몬을 뒤적거리는 나를 보고 있자면 그다지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정리
편집부
반년간 유럽에 있으며 유럽풍의 건축물들을 눈이 닳도록 보았다. 동유
보이는 이들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며 위로받지만) 결국엔 전
릴 법도 한데 언제 어디서 봐도 매번 두 눈을 만족하게 한다. 나에겐 이
것이다.
럽의 아기자기한 건물들부터 서유럽의 웅장한 건물들까지. 이제는 질 렇게나 아름다운 건물인데도 누군가는 다들 똑같아 이제는 질린다고
혀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하는 '타인'이었던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또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건물을 만지며 이것
결국 ’판단'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먼지에서 보
있지만, 반대로 비슷한 모습들 속에 그 차이와 가치를 알아주는 이를
나라는 사람이 소중할 수도,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나에 대
좀 보라고 내 팔을 잡아당겼던 일이 떠오른다.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도 기다리는 평범한 건물들도 있었다.
유럽의 시골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투박하고 조악하기 그지없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그런 집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 같아 보
면 우주에 가까운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불완전한 행위이다.
한 타인의 판단은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경
험 속에서 살아온 네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에게 함부로 내리는 평가이니 말이다.
이지만 사실 제각기 다른 그런 집들. 그런 집들이 있는 길을 걷고 있노
‘나’라는 건물을 짓고 나니 아쉽게도 에펠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 찾아오진 않지만 그래도 네가 와주었잖아. 네가 와서 사진을 찍
로는 그 '소박함'이 주는 무료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특별하지 못하다
라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많은
고 아름다움을 느껴주었잖아. 그걸로 족해.’ 하고 속삭이는 듯 하다. 그 곳의 공기를 맡고 있자면 그런 기분이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타인과 나 사이 흐릿했던 경계가 뚜렷해진다. 세상과
타인 그리고 나라는 존재들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우리'라고 부르는 '너'는 비슷비슷 하게 살아가지만 (그래서 유사성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끼거나, 특별해
좌우에 있는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소박한 녀석이었다. 때 는 사실 때문에 우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보니 누군가는
이 보잘 없는 벽돌들 안에서 추위를 피해 손을 녹였고 잠을 청했다. 나
름대로 나도 쓸모 있는 녀석이었던 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
에 의해 어떤 건축물로 비칠지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과 함께 있느냐였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불완전한 평가들
사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얘기에 더 귀를 기울 였을 텐데. 그렇다면 좀 더 사는 게 재밌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김동하
문학과 여행, 살사댄스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는 유럽 보도 횡단 4,000km 중이다.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 를 좌우명 삼아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현실로 만들어 가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꿈이 곧 현 실이 되고 현실을 꿈으로 만들 수 있는 청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으로 세상을 향해 그는 오늘도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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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사진으로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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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우린 겨울로 간다
Alaska
신이 내린 천혜의 자연
알래스카 여름에 겨울을 느끼게 해주는 곳.
찌는 듯한 막바지 무더위에 가장 생각나는 그곳!
천혜의 자연과 알래스카만이 가진 문화를 맘껏 느낄 수 있고 쿠르즈 여행객이 가장 가고 싶어 하고 여행객에게 인기 있는 바로 그곳 알래스카로 떠나자.
치일캇 강 근처에는 카메라만 들이대면 바로 작품이 나온다.
그곳에는 연어를 먹기 위해 겨울마다 대머리독수리가 모여들고 흑곰과 불곰이 연어를 낚고 열매를 딴다. 그뿐이랴.
바다표범과 범고래, 흰고래까지
온갖 고래의 종류를 눈에 실컷 담아올 수 있는 알래스카! 해발 4천 300m의 산봉우리, 3천 개의 강. 숫자를 셀 수 없는 호수는 또 어쩌랴.
빙하 지역은 여름을 잊게 하는 마약과도 같다. 빙하가 떨어지는 크레바스를 감상하고
눈을 돌려 바다에서 고래 떼와 물개를 만날 수 있다. 떠날 수 없다면 사진으로나마 알래스카를 만나자. 정리
편집부
사진 New York Film Media / George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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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후원하는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합창제 OCT. 1 , 2017(SUN) 7PM 가 후원하는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합창제 (2017 World Choir Festival Concert)’가 10월 1일 오후 7시 카네기 홀 아이작 스턴 오디 토리엄 (Issac Stern Auditorium/Perelman Stage)에서 열린다. 이 콘서트는 GWB INTERNATIONAL FOUNDATION과 CTS America가 공동주최, 주관하 고, JH ART Corporation이 기획을 맡고 있다. 주최 측은 이번 콘서트 무대에 미국 내 5~6개 팀과 한국 6~7팀, 모두 10~12개 팀 참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릴리 하모니 합창단(Lilly Harmony), 서울 우먼 싱어즈(Seoul Woman Singers), 수원시 어머니 합창단(Suwon City Women's Choir), 대덕연구단지 과학자들로 구성된 대덕 이너폴리스 합 창단(Deadeok Inopolis Singers)과 지휘자부터 단원까지 모두 휠체어를 타 고 있는 대한민국 휠체어합창단 (Korean Wheelchair Choir), 그리고 CTS 엔 제이 클래식 오카리나 앙상블 (CTS NJ ClassicOcarina Ensemble)의 참여가 확정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Newark Art School Choir와 그래미 상(Grammy Award) 4회 수상에 빛나는 Jubilation Choir 등이 참가를 확정하였다. 주최 측은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세계인의 합창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러한 찬양의 축제가 모든 세계인의 마음에 감동으로 하나되어, 문화가 지닌 다양 성과 수월성을 통한 복음전파와 메시지를 전하는 공연을 만든다는 기획 의도 로 이 콘서트를 준비한다고 밝혔다. 공연을 주최하고 있는 GWB International Foundation의 황진호 대표는 “미 국은 세계 선교뿐 아니라 세계 금융과 정치,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으로 뉴욕에서 찬양의 축제와 더불어 인류를 향한 메시지와 세계의 복지를 위한 주도적인 움직임이 필요할 때”라고 강조했다. 황 대표는 또한 “이제는 단순한 공연만이 아닌 사회 캠페인과 복음적 움직임이 복합적인 상승효과를 가져와 야 하는 시대” 라며 “네트워크 사역의 구조가 탄탄해져야 하는 시대적 공감을 이번 공연을 통해 풀어보려 한다”고 말했다. 공연 기획을 맡은 JH 아트 코퍼 레이션은 2011년 미래지향적 월드와이드 문화/예술 컨설팅 회사를 지향하며 설립되었는데 카네기 홀과 링컨 센터, 유엔, 케네디 센터, 버겐 PAC 등 유수의 공간에서 다양한 음악회를 기획, 주관해 오는 등 그동안 굵직한 공연을 진행 했다. GWB 국제재단(GWB International Foundation)은 뉴욕에 거점을 둔 문화/교육 증진을 통한 사회 복지적, 교류증진 비영리단체로 활동하고 있으 며 특히 어려운 처지의 한인을 돕기 위해 다각적인 활동을 모색하며 본 행사 를 주최/주관하고 있다.
카네기 홀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 (Issac Stern Auditorium)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은 카네기 홀 내 3개의 공연장 중에서 메인 공연장으 로 꼽힌다. 바이올린의 대부이자 카네기 홀 극장장으로 40년 이상 활동했던 ‘카네기 홀의 영적 지도자’ 아이작 스턴의 이름을 붙였다. 아이작 스턴은 극장 장 시절 고층 오피스빌딩으로 바뀔 뻔한 이 유서 깊은 공간을 구해낸 인물로 도 칭송받고 있다. 600석 규모의 젠켄 홀 (Zanken Hall), 작은 실내악과 독창 무대가 주로 열리는 270석의 웨일 리사이트 홀 (Weill Recital Hall)에 비해 2,800명 이상을 수용하 는 대형 공연장으로 전 세계 모든 연주자의 꿈의 무대인 카네기 홀에 선다는
것은 결국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에서의 공연을 말한다.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