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A USA SEPTEMBE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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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CASA NEW YORK STORY FOR THE MODERN LIFESTYLE

에스카사

9 $5.99

September

COVER STORY 쌍둥이 주얼리 디자이너 케이트 리 & 클로이 리 PEOPLE FOCUS 주 유엔 대한민국대표부 차석대사 한충희

EDUCATION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미래 화폐 비트코인을 아시나요? 행복한 사업가 MITSOSA 변효삼 대표

ART&CULTURE 뉴욕 취타대 이춘승 단장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 합창축제’ Young Artists Concert








CONTENTS

September 2017 Vol.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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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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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주얼리 디자이너 케이트 리 & 클로이 리

오늘부터 줄반장 해라

달라서 좋은 쌍둥이

이달의 글과 시 19

사진과 함께 읽는 이달의 좋은 글과 시

집으로 가는 길 / 공석진

People Focus 20

세계시민교육으로

더 ‌평화롭고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상을 만들어야‌ 주 유엔 대한민국대표부 차석대사 한충희

8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 (6)

30

작고 내실 있는 뉴욕의 명문 교육 기관

쿠퍼 유니언 대학

34

인물탐구

아시아 현대 무용의 선구자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

38

우울증, 두통, 치매 예방 지침서

THE GRAIN BRAIN

40

디지털 유목민 시리즈 (1)

전자화폐가 몰려온다‌ 미래 화폐 비트코인을 아시나요?

20

우리 이웃이야기 44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행복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행복한 사업가MITSOSA 변효삼 대표

Art & Culture 52

젊은 국악도의 도전이 이루어 낸 10년 만의 성과

‘뉴욕국악축전’ 뉴욕 취타대 이춘승 단장

56

SHOW ME YOUR HEART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 합창축제’

60

긍정의 힘을 믿고 뉴욕에 도전했다

재즈 가수 김후나의 꿈

66

음악으로 전하는 해피 바이러스

Young Artists Concert & NV Factory 유성환 대표


70

96

Lifestyle 68

영화 심리 이야기

아빠는 딸

70

세계 경제 문화의 중심인 뉴욕 시의 중심지

Travel 88

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엄마 홍정연

우르두어, 영어, 한국어를 하는‌ 우리 아이들

96

누구나 이곳에 오면 귀족이 된다

언덕 위의 성 카사 로마(Casa Loma)

98

90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감자& 계란 머핀, 쟁반국수, Barbecue

Clinic

행사 100

'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92

Center of the Center 맨해튼 5번가

74

9월의 어느 날

78

폼보드 연필 문양 판화

82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무서운 사모님들

84

세월아 / 선우미애

치매의 영상진단

‘더는 걸어갈 땅이 없었다’의 저자 김동하

미디어 후원 행사

Young Artists Concert

94

드림랜즈

Orthokeratolens

재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엄마들 모임

Anby Lane

9


Publisher Jennifer Lee(USA) Dr. Charles Changsoo Lee(KOREA) Magazine Director Yebin Taylo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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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Sung

CPA, MBA

•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경영학과 졸업 • Baruch College, MBA in Taxation • RSM US, LLP (미국 5대 회계법인) 포함한 미국 회계법인들에서 세무 전문으로 14년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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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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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의 스토리가 있는 패션 하우스를 만들고 싶어요.

달라서 좋은 쌍둥이,

주얼리 디자이너 케이트 리 & 클로이 리 21세기에 남성,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고 보는 건 시대착오적 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워너비로 여기는 몇 몇 직업들이 있는 것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주얼리 디자이너’라는 직업 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적절하게 매치된 액세서리 하나가 패션의 화룡 점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가꾸고 꾸밀 줄 아는 여성이라면 누구 나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적인 아이템을 반짝이는 돌 몇 개와 둔 탁한 금속 조각들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감각과 재능을 지닌 여성을 보게 된다면 부럽고 동경하는 마음이 드는 건 기본일 것이고, 내가 그렇 게 될 수 없다면 그녀의 친한 친구라도 되어보고 싶을 것 같다. 그렇게 능력 있는 친구 같은 주얼리 디자이너가 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둘 이다. 디자인 명문 학교 파슨스(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패션 디 자인을 전공하고, 유수의 패션 기업들에서 경험을 쌓은 뒤, ‘아베크 뉴욕 (Avec Newyork)’이라는 브랜드로 주얼리 업계에 진출,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케이트 리(Kate Lee)와 클로이 리(Chloe Lee) 쌍둥이 자 매가 그들이다. 에스카사는 볼수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들을 표지와 커버 스토리에 초대했다. 밝고 유쾌하기까지 한 그들은 촬영과 인터뷰 내내 웃음과 에너지로 촬영장을 가득 채워 주었다.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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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c Newyork, 쌍둥이가 ‘함께’ 만드는 ‘뉴욕 스타일’ 주얼리 이미 세간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실력파 주얼리 디자이너였던 케이트, 클로이 자매는 2012년 ‘아베크 뉴욕 (Avec Newyork)’이라는 브랜드를 걸고 본격적으로 액세서리 주얼리 사업을 시작한다. ‘Avec’는 불어로 ‘함 께(with)’를 뜻하고 ‘Newyork’은 뉴욕의 패션을 보고 배우고 경험한 그녀들이 자신들만의 독특한 해석을 통 해 뉴욕 스타일을 재구성해 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치열한 뉴욕의 패션 마켓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같은 꿈 을 이루기 위해 함께 공부하고 노력해 온 그녀들의 결실에 ‘아베크 뉴욕’이라는 이름만큼 딱 맞는 이름이 있 을까 싶다. 이제는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탄탄한 브랜드로 성장한 아베크 뉴욕을 두고 아직도 ‘시작일 뿐’ 이라고 말하는 야심 찬 그녀들의 결코 작지 않은 성공의 진짜 시작은 이랬다. 케이트와 클로이는 2000년대 초 파슨스 재학 당시에, 취미 삼아 직접 만들어 착용하고 다니거나 지인들에게

선물로 준 빈티지 액세서리가 주변의 이목을 끌면서 입소문을 통해 디자이너와 잡지 에디터, 유명 패션 브랜드 매장, 고급 백화점 등에 자신들의 제품을 판매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클로이: 친구에게 중고 시곗줄에 크리스털을 짝지은 팔찌를 선물했는데 그걸 본 지인들이 자기들도 갖고 싶다며 지갑을 연 거예요. 정말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 나갔어요. 그 중엔 랄프 로렌(Ralph Lauren: 미국의 대표 패션 브랜드 중 하나로 한국인들에게는 Polo라는 브랜드로 더 친숙하다.)에 다니던 언니도 있었는데 요. 그 언니가 하고 다니는 저희 팔찌랑 목걸이를 보고 랄프 로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연락을 해 왔 어요. 저희 제품을 랄프 로렌의 세컨드 브랜드 ‘럭비(Rugby)’의 뉴욕 매장에서 특별 아이템으로 팔아보지 않겠느냐길래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이고 2004년부터 2005년까지 1년여 동안 판매를 했어요. 게다가 그분 이 자기 친구인 패션 에디터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 현 Vanity Fair 패션 스타일 디렉터. 2004년 유명 패션 잡지 British Vogue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Vanity Fair에서 파리 에디터로 활동했다.)에게 저희 제 품을 소개하면서 그의 친구 연예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됐어요. 한국인 디자인 학도 두 명이 취미 삼아 만든 액세서리가 ‘바니스 뉴욕(Barneys New York)’과 ‘버그도프 굿맨

(Bergdorf Goodman)’ 같은 뉴욕 유명 백화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유수 패션 브랜드 랄프 로렌 매장의 한 편 을 당당하게 차지함으로써 그녀들은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능력 있는 주얼리 디자이너로 인정을 받은 셈 이다. 단순 행운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들이 함께 투자한 세월과 노력을 생각하면, 그들의 타고난 미술 적 감성과 감각 정도나 행운이라 말할 수 있을까. 14


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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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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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자매의 쌍둥이 꿈 케이트와 클로이는 둘 다 초등학교 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 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데다 미술을 배우고 미술 하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살면서 한 번도 다른 꿈을 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대학에서 케이트는 순수미술을, 클로이는 디자 인을 전공한 후 각자 취업을 했지만, 얼마 후 그녀들은 패션 디자이너 가 되겠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함께 파슨스에 입학하여 패션 디 자인 공부를 시작한다. 클로이: 주얼리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한국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였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때부터 언니나 저나 팔찌 랑 반지 같은 액세서리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하고 싶은 디자인이 머릿속에 그려지면 재료들을 이리저리 엮어 만드는 걸 좋아했으니 까요. 뉴욕에 유학 와서도 독특한 빈티지(vintage) 스타일의 액세서 리를 하고 싶어서 뉴욕 벼룩시장을 뒤져 수십 년 된 액세서리를 찾 아온 다음 그걸 해체하고 재조합해서 새로운 디자인의 빈티지 액세 서리를 만들었죠. 그렇게 직접 만든 액세서리들을 하고 다닌 게 우 연히 주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소문이 나고 주목받게 됐어요.

함한 실제 운영과 관련된 일들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한 케이트는 랄프 로렌에 여성복 컨셉 아티스트로 취직해서 5년

동안 꾸준히 일해 왔지만, 디자인을 전공한 클로이는 캘빈 클라인 컬렉 션(Calvin Klein Collection)에서 가방 디자인, 노티카(Nautica)에서 탑,

니트 디자인, 아메리칸 이글(American Eagle)에서 스카프, 수영복, 주 얼리 디자인, 그리고 랄프 로렌에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까지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케이트의 일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 디자인의 방향을 정하고 큰 그림 을 그리는 역할이었다. 트렌드 예측을 바탕으로 해당 시즌 컨셉의 이 름을 짓고 이미지를 구상하며, 대표 컬러와 패턴을 정해 그 구상을

직접 만들어 보여주며 제안하는 일이었다. 반면, 클로이는 디자인의

최전선에서 일했다. 이미 한국에서 ‘타임(Time)’이라는 고급 여성복 브랜드의 스웨터 디자이너로 하루 12시간씩 ‘빡세게’(다른 순화된 단 어로는 이 느낌의 표현이 불가능하다.)일한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미

국 회사는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녀들이 패션계에 서 일하면서 얻은 것들은 후에 주얼리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큰 재 산이 되었다.

케이트: 매번 어떤 시도를 해 보고자 했을 때 둘이 이견이 없었어요. 2012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주얼리 사업을 해보

케이트: 미국에서 랄프 로렌은 단순 의류 브랜드라기보다 ‘패션 하 우스’라고 봐야 해요. 그래서 컨셉 아티스트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

자 했을 때도 그랬고, 2013년에 세계적인 주얼리 브랜드들이 입점

죠. 컨셉 아티스트는 랄프 로렌의 브랜드를 이해하고 랄프 로렌만의

해 있는 5번가(Fifth Avenue)의 헨리 벤델(Henri Bendel)이 주최하는

전통적이고 독특한 색을 디자이너들이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지켜

주얼리 디자이너 오디션에 나가보자고 했을 때도 둘 다 망설임이 없

나가는 역할을 하거든요. 트렌드를 반영하되 자기만의 색깔과 스타

었어요.

일을 잃지 않는 변화를 만들어 간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아요. 그런데

같은 재능과 같은 열정을 타고나서 오랫동안 같은 꿈을 향해 함께 달려

온 그녀들. 이렇게 이상적인 동업자가 있을까? 이들이 함께하는 일이 잘 안 된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녀들의 강점은 다

너무 재밌어서 오래 일하게 됐고, 많이 배웠어요. 아베크 뉴욕도 그 렇게 만들어가려고 해요. 트렌드와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독특함 을 잃지 않는 스토리가 있는 브랜드요.

른 데 있다.

클로이: 저는 여러 회사에 다니면서 다양한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패션 디자인 전반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달라서 좋은 쌍둥이

것을 배웠던 회사를 꼽으라면 아메리칸 이글일 거예요. 일단 그곳에

사람들은 일란성 쌍둥이를 보면 비슷한 외모 때문에 당연히 둘은 모

서 주얼리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회사를 시작할 때 ‘거기서

든 면에서 비슷할 거라고 쉽게 넘겨짚는다. 하지만 실상 케이트와 클

주얼리 디자인을 한 게 주얼리 사업을 하라는 신의 계시였나’ 하는

로이는 정말 유전적으로 같이 타고난 외모와 미술적 재능 정도 외에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체계적으로 일하는 법을 제대로

는 같은 점이 거의 없다고 한다. (사실 외모조차도 조금만 자세히 보

배웠어요. 아메리칸 이글이 디자인적인 면에서는 제가 추구하는 것

면 많이 다르단다.)

과 너무 달라서 힘들었는데, 판매 촉진을 위한 전략이나 경영 시스

케이트: 전체적인 프레임은 비슷한데요. 성격도 성향도 취향도 완전 히 달라요. 저는 외향적인 성격인데 클로이는 반대로 내향적인 면이 더 강하고요. 저는 제품 프레젠테이션이나 행사 진행처럼 대외적으 로 사람들을 대하는 일에 강한 반면에 클로이는 조용히 혼자 집중력 있게 하는 디자인 작업에 강하죠. 취향에 있어서도 전 모던하고 미 니멀한 도시적 스타일을 좋아하고 클로이는 빈티지 느낌의 자연스 럽고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선호해요. 주변 사람들은 저희를 알면 알 수록 ‘쌍둥이가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 있지?’ 하고 의아해하죠. 그녀들은 그렇게 다른 성격과 성향으로 인해 커리어 면에서도 약간은

다른 길을 걸어왔다. 둘 다 궁극적으로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에 파슨스를 졸업한 후에는 주얼리 제작과 판매는 취미로 남

겨 두고 각자 패션 업계에 취직하였다. 미국 패션 회사의 브랜딩을 포

템이 정말 잘 되어 있었거든요. 그때 배운 게 지금 사업하는 데 얼마 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이렇게 각각의 성격과 개성에 맞게 쌓아 온 커리어를 바탕으로 그 둘은 회사에서도 따로 또 같이 일한다. 케이트가 디자인의 기본 방향을 설정

하는 큰 그림을 그린다면, 클로이는 실질적인 디자인을 맡는다. 그렇게 하는 일이 다르므로 주로는 평행선처럼 헤어져서 각자 맡은 일을 하다

가 한 번씩 만나 토론하고 조율한 뒤 다시 헤어져 일하고 하는 식이다. 적극적이고 리더쉽 강한 케이트가 대외적인 일들을 감당하고, 클로이 는 여성스럽게 차분히 앉아서 회사 내에 돌아가는 일들을 꼼꼼히 챙기

고 마무리한다. 서로 잘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서 좋다는 그녀들이지만, 서로 텔레파시가 통하는 쌍둥이 자매라는 특권이 그 조화로운 다름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언제고 각각의 개성 을 조화롭게 합쳐 두 배의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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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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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따로 광고나 마케팅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그

(Vogue), 엘르(Elle),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등 유수의 잡지들 이 앞다투어 케이트와 클로이의 제품들을 다루어 주었다.

클로이: 큰 인기를 끌었던 디자인 중 하나는 ‘스마일(Smile)’ 컬렉션 인데, 우연히 케이트가 그린 스마일 낙서를 보고 반지로 만들게 됐 어요. 익살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는 살리되 유치하거나 장난감 같아 보이지 않도록 디자인하려고 노력했죠. 대중적이지 않은 디자인이 라 내놓으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다행히도 출시되자마자 반응이 뜨거웠어요. 오픈 링(open ring)이라고 윗부분이 열려있는 반지도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런 디자인들 덕에 아베크 뉴욕이 주얼리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죠. 빈티지한 컨템포러리 케이트와 클로이를 처음 주목받게 한 것은 그들의 빈티지 액세서리 였다. 한국에서는 동대문 시장을 아무리 뒤져도 머릿속에 그려진 재 료를 찾기가 힘들었는데, 뉴욕의 벼룩시장을 접하면서 물 만난 고기 처럼 재료들을 찾아다녔다. 수십 년 된 액세서리를 구해 해체한 뒤 용 접 없이 일일이 손으로 엮고 붙여 재조합한 빈티지 액세서리의 독특 함을 뉴욕의 패션 피플들이 알아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케이트: 100년 전 만들어진 구두나 시계, 보석 등등의 중고 제품들을 재구성해 보았어요. 중고 목걸이의 펜던트만 떼어내 팔찌 장식으로, 구두의 버클을 이용해 목걸이로 만드는 식이었죠. 미국에는 빈티지

아베크 뉴욕의 특성은 ‘빈티지한 컨템포러리’로 정의해 볼 수 있지 않 을까. 빈티지 주얼리를 현대적으로 대량 생산하고자 했던 것은 착오였 으나 현대적인 주얼리에 빈티지한 감성을 더하는 것은 가능했다. 한

다 하는 디자이너들이 몰려드는 벼룩시장에 가서 재료부터 직접 골라,

마음에 상상하고 그려지는 대로 자유롭게 조합하여 ‘작품’을 만들기를 10여 년 동안 해왔던 자매가 디자인한 컨템포러리 주얼리. 그녀들이

아무리 현대적이고 무난한 스타일로 디자인했다고 해도, 소비자들에

게는 제품의 디자인에 어렴풋이 담겨있는 빈티지 주얼리의 느낌이 독 특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박람회도 자주 열려서 둘이 주말마다 이거다 싶은 물건들을 고르러

케이트: 2012년에 시작해서 한동안은 정말 힘들었어요. 1년쯤 지나 서 정말 손을 놓고 싶었을 때 갑자기 여러 매체와 소비자들로부터

다녔죠. 그렇게 십여 년을 보냈어요.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자신감을 가지고 온라인

제품만 모아 파는 시장도 많고, 가치 있는 중고 물건들을 볼 수 있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도 상사나 동료 등으로부터 개인 주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빈티지 액세서리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 업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 고민이 닥쳤다. 빈티지 액세서리의 인기 비결

마켓을 오픈하고, 2014년에는 뉴욕 소호(SoHo)에 쇼룸(showroom) 도 열었어요. 일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프라인 매장도 생각 중이에요.

은 ‘유일무이’하다는 점이다. 희귀한 소재들을 이용해 일일이 수작업으

뉴욕의 겉면은 화려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꿈 하나를 이루겠다고 고

이 판매를 주목적으로 하는 사업에서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쟁하고 있다. 그중 많은 이들은 꿈은커녕,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

로 제작되기 때문에 웬만해선 복제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강점 첫째,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체력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무엇보 다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 같은 것을 여러 개 생산할 수가 없기 때문이 다. 둘째, 실험 삼아 공장에서 생산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건 이도 저도

아니었다. 어색하게 화려하기만 하고 특유의 세련된 거침을 상실한 빈 티지 주얼리는 그야말로 장난감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생산성 있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라인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안 해 본 것이 지 못할 것은 없었다.

향을 떠나오고 고국을 떠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싸우며 경 루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케이트와 클로이가 이룬 것을 결코 작은 성공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겪 었던 힘든 일들을 구구절절이 나열하지 않지만 왜 없었겠는가? 미국 회사에서 외국인으로서 겪었을 직원들의 텃세는 애교 수준에도 못 미칠지 모른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왜 그만두고 나와 그 고생을 하느냐.”는 부모님의 걱정은 이유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매 는 훌륭하게 겪어내고 꿈을 향해 한발 더 나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모던하고 도시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던 케이트의 주도로 메인 디자인

주얼리 사업은 최종 목표로 가는 과정이에요. 저희가 궁극적으로 하고

화점인 헨리 벤델의 주얼리 디자이너 오디션에서 뽑혀 나흘 동안 백화

서리, 신발 등등 모든 패션 아이템들을 아우르는 토탈 브랜드를 만드

5개를 정하고 그것으로 시작했다. 반응은 놀라웠다. 액세서리 전문 백 점 내에 마련된 특별 부스에서 제품들을 전시, 판매하였는데, 이틀 만 에 기성 디자이너들의 제품들을 제치고 판매 1위에 올랐다. 오디션 때 도 그랬지만 소비자들의 평가는 항상 “이런 디자인은 처음 보았다.”였

다.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많은 소비자가 자신의 블로그나 SNS

싶은 건 랄프 로렌 같은 패션 하우스를 만드는 것이거든요. 의류, 액세 는 게 목표예요. 디자인에 우리만의 색깔과 스토리를 담아서 지켜나가 는 거죠. 그래서 ‘우리 옷을 입고 우리 반지를 끼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는 우리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에 제품에 대한 찬사를 사진과 함께 올려 주었고, 연예인들은 직접 구

이 쌍둥이 자매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언젠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예리한 눈도 아베크 뉴욕 주얼리의 독보적인 독특함을 그냥 지나치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매하여 착용해 줌으로써 아베크 뉴욕을 세상에 알려주었다. 기자들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 에스카사와 다시 만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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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글과 시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Live to the point of tears) 영국에 살던 두 아이의 엄마 샬롯 키틀리는 향년 36세, 대장암 4기 진단후 간과 폐에 전이되어 25회 방사선 치 료와 39번의 화학 요법 치료도 견뎌냈지만 끝내 세상 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블로그 글이 많은 이들을 울리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살고 싶은 나날이 이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

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 간을 안 주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 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 소리 지르는 나 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침 도 맞았지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 이 들었어요.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 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 주고 뽀뽀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너

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

는 기쁨을 잊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 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줄까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초등 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

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

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 부 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

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 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고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Photography by Kim Do Young 20


집으로 가는 길 詩 - 공석진

풍랑 일렁이는 잿빛 도시의 바다에 고독한 섬처럼 행인 불쑥 마주치면 그 섬들 에돌아 집으로 가야 하네 빌딩 숲 사이로 헤집고 얼굴 내미는 기죽은 석양 맞으며 남루한 그림자 가슴 시리게 매달고 집으로 가야 하네 숯덩이가 되도록 밖으로 내몰리다 수척해진 가장의 몸 낯선 곳에 둘 수 없어 무거운 발길 재촉해 집으로 가야 하네 단 하루를 살다 장렬하게 세상 떠나는

공석진 시인, 문학인

서울산업대학교 건축공학과 전공

시집5권 발표, 2집<정그리우면> 베스트셀러 대표 시 ‌ ‘흐린 날이 난 좋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이별이 슬픔에게’ 등

하루살이처럼 완전히 탈진하여 이불 속이 더욱 간절한 집으로 가야 하네 가자! 가자! 비록 바람이라도 하늘로 비상할 수 있는 풍선 여러 개 사 들고 집으로 가자!

김도영 서양화가, 사진작가

School of Visual Arts 졸업 한미 예술인협회 회원

아틀란타, 시카고, 뉴욕 한인신문 사진연재 한인 방송국 사진 강의 다수 그림전 &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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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FOCUS

Photography by Kibum Kim 22


세계시민교육으로 더 ‌ 평화롭고‌ 정의롭고‌ 포용적인

세상을 만들어야

주 유엔 대한민국대표부 차석대사 한충희 십 년도 훨씬 전에 시드니 폴락 감독이 할리우드 배 우 숀 펜, 니콜 키드먼과 함께 만든 영화 중에 The Interpreter라는 영화가 있었다. 유엔을 배경으로 실제로 는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 어떤 나라 출신의 유엔 통 역관에 대한 영화였다. 처음으로 영화 제작 과정의 대부 분이 실제 유엔본부에서 진행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 었고, 실제 유엔 대사들과 직원들에게 영화 속의 해당 배역을 연기해 주도록 요청했다는 사실로 또 한 번 화 제가 되었던 영화였다. 당시 유엔 언론담당 실장의 말에 따르면 고민 끝에 영화 제작을 유엔본부에서 할 수 있 도록 처음으로 허락한 이유가 유엔을 일반 대중에게 널 리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라고 하니 그때나 지금이 나 유엔은 조금은 베일에 싸인 곳인가보다. 시드니 폴락 감독과 두 주연 배우들조차도 영화 촬영 전까지만 해도 유엔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했으니 말이다. 그 유엔본 부가 뉴욕 맨해튼에 이스트 리버를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주변으로는 만국기가 펄럭이며 세계 193개 회원 국의 얼굴을 자랑스레 뽐내는 듯 유엔본부를 에워싸고 있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유엔 대표부 차석대사이신 한 충희 대사님과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기획 Jennifer Lee 진행, 글 Sarah Chung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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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기가 펄럭이는 유엔본부를 보며 매일 출근하는 남자

정말 가슴이 뿌듯하지요. 세계의 중심인 미국, 그 미국 안에서도 중심인 뉴욕 맨해튼에 자리한 유엔본부는 모 든 국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평화와 안보, 경제 발전과 개발, 인권 및 인도적인 지원과 같은 글로벌 이슈들

을 논의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나 자신도 유엔의 일원으로 소속이 되어 그 뜨거운 현장에서 각국의 외교관들과 함께 안건을 놓고 논의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가슴 뿌듯하고 또한 가슴 뛰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동

시에 부담도 많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사로서 대한민국의 입

장을 어떻게 반영하고 관철시키느냐 하는 것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사실 세계가 모든 이슈에 대해 똑 같은 입장이라면 유엔 193개의 회원국이 각각의 대표부를 차리고 이곳에 나와 활동할 이유가 없겠죠. 또한 어 떻게 보면 193개 회원국 중의 한 표이기 때문에 우리의 목소리가 굉장히 미미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우리가

가진 독특한 장점들을 잘 발휘해서 유엔이 추구하는 글로벌 목표를 이루는데 기여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이 익도 반영하려는 윈-윈의 목표와 사명감을 가지고 매일매일 출근한답니다. 불문학도, 대한민국 외교관이 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외교관을 꿈꾸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외국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외국의 새로운 문 화들을 접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그래서인지 불어를 전공하게 되었지요. 그 후 국제

문제에 관심이 있다가 외교관이 되면 좋겠다는 결심을 하고 외무고시를 통과해 외교관이 되었습니다. 지난 30 여 년을 외교관으로서 근무했지만 돌이켜 보아도 정말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3개 대륙, 6

개 공관에서 근무했습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나이지리아, 미국 주미 워싱턴 대사관, 뉴욕 유엔 대표부 그리 고 KEDO 사무국. 이런 다양한 경험들이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고 지금도 이 직업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

다. 특히 10년 전 KEDO 사무국에서 근무할 때 경수로 사업차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던 일은 한 개인으로서도, 또한 외교관으로서도 특별히 가슴에 남는 경험이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 그 이상 그리고 대한민국

많은 사람들이 유엔이라고 하면 U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쓴 평화유지군을 먼저 떠올리지만, 유엔은 다양한 어젠다를 가지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슈인 난민 문제부터 첨단 테크놀로지, 전자상거래, 교육,

인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2000년도에 코피 아난 (Kofi Annan)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주도한 8개의 목표를 토대로 하여 2015년 9월에 150개국 이상의 정상들이 이곳 유엔본부에 모여 앞으로 15년 간 2030년까지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유엔의 지속가능개발목표 (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들을 정하고 함께 협력하기를 약속했던 선언은 미국의 독립선언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선언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을 간단히 5Ps로 설명할 수 있지요. 첫째, 사람이 우선이고 (People), 둘째, 극빈자도 재기할 수 있는 번영

의 추구 (Prosperity), 셋째, 평화의 달성 (Peace), 넷째, 지구의 보호 (Planet)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관은 물론이 요 많은 NGO 단체들과 우리 모두의 협력을 통한 참여 (Partnership)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우리만의 독특한 경제 개발 및 발전의 역사, 그리고 민주주의 제도로의 성공적 전환과 여권 신장과 같은 경험을 토대로 빈곤 퇴치와 교육 분야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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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bal World and Global Citizenship

유엔, 목표가 아닌 가치를 위하여

계시민교육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제 개인으로서도

합니다. 나도 존엄하고 타인도 존엄하다는 매우 당연한 이 기본 명제를

우리나라가 크게 기여하는 유엔의 교육 분야의 목표 중에서도 특히 세 그렇고 대한민국이 몇 년 전부터 유엔에서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는 분 야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자라나는 다음 세대 의 아이들에게 전통적인 관념적 가치 그 이상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부모님들과 선생님들께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이

정말 세계를 변화시키는 리더쉽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에 발을 담가 야 한다는 것이죠.

“왜 나하고 비슷한 아이들이 난민이 되어 전쟁터에서 죽나요?”

“테러리스트들은 왜 생기나요? 테러리스트들은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나요?”

“왜 기후 변화가 우리가 사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되나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주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친절, 정직, 성실, 근면 등과 같은 전통 적 가치만을 가르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가치도 당연히

알아야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 가치 위에서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

유엔이 강조하는 세계시민교육은 ‘인간은 존엄하다.’는 인식에서 출발 바탕으로 세 가지의 관계를 강조하지요. 첫째는 다른 사람과의 상호 존

중의 관계, 둘째는 소외되고 배척된 사람들과의 관계, 이 속에는 불평 등을 개선하고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생각이 들어있죠.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와 지구와의 관계, 즉 하나밖에 없는 지구에서 공멸하 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환경 문제를 다루지요. 세계의 젊은이들에

게 어릴 때부터 이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최소한의 옳고 그름, 선과 악

을 구별할 수 있는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계시민교육 은 유엔 내에서도 한국의 어젠다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일 예로 서

울시 교육청, 경기도 교육청, 충청도 교육청에서는 이런 유엔의 어젠다 를 담아 최근 ‘세계시민’이란 교과서를 편찬했습니다. 아직은 정규과목

은 아니지만, 교육청 재량이나 교장 재량으로 넣을 수 있는 과목으로 지금은 시범적으로 시작하였고 점점 정규과목으로 편성하려 하지요.

국내외적으로 공론화를 계속해서 이런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차

세대 리더들에게 폭력적 테러리즘이나 난민, 인권 유린, 기후 변화 같 은 이슈에 대해 근본적인 접근을 하고 해결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도 록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 때문이죠.

나무, 숲 그리고 꿈

지금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교육을 받고, 더 나아가 고등교육을 받으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게 되니 유엔에도 관심이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우린 믿고 살았죠.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

이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그 믿음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한

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ISIS 같은 테러단체들이 지금까지 약 4만 명 정 도의 사람들을 세계 각국에서 모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학사, 석사, 박사와 같은 고등 교육이 세계 평화를 지켜내지 못하는 이유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님의 10년 재임도 영향이 있었지만 이제 많은 커진 듯합니다. 유엔을 찾는 한국 방문객의 수는 유엔 방문센터 통계에 따르면 거의 최고랍니다. 그러나 유엔 사무국에서 근무하고 정규 직원 으로 들어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한 자리를 놓고 전 세

계의 모든 난다 긴다 하는 수백,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지원하고 경쟁 하기 때문이죠.

정말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성이 무엇인지 인권이 무엇

유엔에서 일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는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

스터디가 학교에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지식, 그리고 언어 능력, 상황 분석력, 그리고 협상력 등 이 모든 것이 다

인지, 즉 소위 유엔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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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가지고 실력을 갖추는 것이 기본입니다. 전문분야에 대한 해박한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꼭 국제 정치 분야에 한정될 필요는 없습니

고자 하는 목적이 지구상에서 소외되고 배척된 사람들을 도와주고, 불

테크놀로지, 전자 상거래, 경영, 법률 등 여러 분야에서 수요가 많지요.

육의 기회를 주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가치 추구에 있다면 이러한

다. 유엔이 수용하는 분야는 놀라울 정도로 매우 다양합니다. 컴퓨터, 그래서 제일 먼저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현재의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그 뿌리가 어디 이며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관심을 두고 이해하고 전체적

으로 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유럽의 난민사태를 촉 발한 시리아 전쟁, 거기에 미국과 러시아는 어떻게 얽혀 있고, 또 더 나 아가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오랜 역사의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다 이해하고 있어야 나무만이 아닌 숲을 볼 수 있겠죠.

또, 다른 예로는 영국이 왜 브렉시트를 선택했는지, 그리고 트럼프 대

평등을 해결하며 어린이들에게 기본적인 삶을 보장해주고 균등한 교

가치 지향적 목표의 추구는 분명 그 사람에게는 동기 부여되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을 끌어올릴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한, 올바르고 정의롭다고 믿는 가치를 낙심하지 말고 추구하면 같은 가 치를 추구하며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유엔에

들어가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든 NGO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NGO를 만 드는 것이든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겠지만, 세계는 꿈과 비전을

가진 한 사람과 그 사람을 따르는 동역자들로 인해 바뀔 수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즉 다자주의에 대한 기피, 이런 이슈들을 종합

두 시간 가까이의 인터뷰 후 에스카사 인터뷰팀을 배웅해 주신 후 다시

전체적으로 나무만이 아닌 숲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왠지 모를 뭉클함을 느꼈다. 그 뒷모습에서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헌신

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유엔에 들어와서 자기 분야에 집중하면서도 유엔에서의 삶은 가치 추구가 우선이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유엔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열심히 하는 목표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돈을 잘 벌고, 나

총총걸음으로 회의장으로 향하시는 한충희 차석 대사님의 뒷모습에서 하는 외교관의 모습을 보아서였을까 아니면 세상을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바꿀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한 개인에 대한 감동 때 문이었을까.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라면 그 과정이 무척 고되고 힘들 수 있습니

낮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밤에는 은은한 푸른 빛의 조명으로 둘러싸

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에도 이를 수 있답니다. 내가 유엔에서 일하

했던 유엔이 새삼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다. 그러나 내가 가진 비전과 꿈,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도

이는 곳. 그저 여러 나라들이 모여 함께 좋은 일을 하는 곳이라는 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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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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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6)

FATHER STORY

오늘부터 줄반장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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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커다란 황금색 오랜지 한 개를 담임 선생님에게 드리겠다며 도 시락 가방에 넣어 간 적이 있었지? 돌아와서는 선생님이 아주 맛있게 드셨다며 기뻐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선생님의 반응에 신이 나서 자꾸 자꾸 갖다 드리고 싶어질 거야. 어떤 행동을 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칭찬 과 관심을 받으면 다음에 또 하고 싶어진단다.

따스한 봄볕에 나른해진 오후 어느 날,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흑판에

적은 수업내용을 칠판지우개로 지우고 계셨어. 임창호 선생님은 키가

180㎝가 넘고 얼굴도 멋지게 생긴 분이었단다. 늘 깔끔한 양복에 넥타 이를 매고 다니셨어. 더구나 온화한 미소와 친절까지 겸비하신 분이어

펄쩍펄쩍 뜀뛰기를 해서 여간해선 손이 닿지 않는 칠판 끝부분까지 지 우는 모습을 보시고는 선생님이 재미있다고 많이 웃으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는 여전히 잘 못 했지만, 칠판 잘 지우는 거로 선생

님의 인정과 귀염을 받던 나는 조금 으쓱해져서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 았단다. 선생님은 성품이 온화하셔서 학생들에게 매를 드시거나 크게 혼내시는 분이 아니었어.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떠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 그날따라 아이들이 너무 소란스럽게 떠들길래, 뒤를 돌아보며 “야!, 조용히 해”라고 큰소리를 질렀지.

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단다.

그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어. “이거 큰일 났구나”

한참 동안 칠판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지우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손에

에 큰소리로 호통을 쳤으니 아이들과 선생님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겠

있던 지우개를 놓쳐서 바닥에 떨어뜨리셨어. 키가 매우 크신 분이어서

지우개를 바닥에서 주울 때마다 허리를 많이 숙여야 했지. 아마 허리가 많이 아프셨을 거야. 또 지우개에는 하얀색 분필 가루가 많이 묻어 있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반장, 부반장, 부장 같은 학급 임원도 아닌 주제 어?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지. 얼굴에 식은땀이 부슬부슬 나고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어서 선생님의 검은색 양복을 더럽히곤 했지.

그때 조용히 미소를 보내시던 선생님은 나를 보며 “오늘부터 네가 줄

키가 작았던 나는 학년마다 줄 제일 앞자리에 앉곤 했어. 그 날따라 선

바라보았지. 선생님은 나를 보시면서 “성민이가 도와줘서 고맙다”고

생님의 칠판지우개가 내 책상 바로 앞에 떨어진 거야.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우개를 주워드렸지. 선생님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 시며 “성민이가 칠판지우개를 주워주니 허리가 안 아픈데” 하시며 칭

찬하시는 거야. 키가 작았기 때문에 지우개를 줍는 것은 아주 잘할 수

있었거든. 그날 초등학교를 4년 동안 다니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난생처

반장을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순간 얼굴을 번쩍 들고 선생님을 격려해 주시는거야. “자기가 뭐라도 되나?”라며 수군대던 반 아이들이 나를 많이 안 좋게 봤을 거야. 그런데 선생님이 ‘줄반장’이라는 권위를

부여해 주시니까 아이들에게 호통을 친 내 실수가 금세 만회가 된 거 야. 친구들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왕따를 당하지도 않고 말이야.

음 칭찬을 들었단다.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에게 큰 자랑을 늘어놓았단다. “엄마! 내가 학

같은 학년 동급생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었기 때문

엄마에게도 내가 줄반장 되었다고 슬쩍 얘기하시더라고. 그럴 법도 한

에 키가 작았고 운동도 잘 못 했어. 학교에 다녀오면 산과 들로 뛰어다

니며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공부는 늘 뒷전이었지. 농사일에 바쁜 부모 님은 아이들 공부를 챙겨줄 여력이 없으셨어. 그래서 숙제를 제대로 해

교에서 줄반장이 되었어!” 엄마도 기분이 좋으셨나 봐. 이웃집 근영이 것이 뭐 생전 상이나 칭찬을 받아봤어야지. 그런 내가 줄반장이 되었으 니 자랑할 만한 일이었지.

간 적도 별로 없었단다. 동아전과나 표준전과 같은 참고서가 있었으면

사실, 줄반장은 학급에서 없는 직책이었단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반

매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지. 미술 시간에 필요한 도화지와 크레용이 없

장은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선생님이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시기

숙제할 의욕이 좀 생겼을 텐데, 연필이나 공책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구 어서 늘 옆자리에 앉은 친구 것을 빌려 쓰곤 했단다.

장과 부반장을 맡았고, 그 밑에 여러 명의 부장을 둘 수가 있었어. 줄반 위해 생각해 낸 ‘신의 한 수’였던 거야.

양조장 부잣집 딸 하연옥과 아랫동네 주막집 아들 김현호는 공부를 잘

다음날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리겠다며 얼룩이 젖소에게서

머리에 예쁜 치마만 입고 다녔어. 더군다나 지역 유지이신 부모님이 학

없는 선물이었지만 마음을 담아 드린 거라서 선생님이 좋아하셨으면

해서 늘 전교 1, 2 등을 다투었지. 하연옥은 얼굴이 백옥같이 하얗고 긴 교 행사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시니까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

단다. 김현호는 차분한 성격에 지도력까지 갖추고 있어서 매년 반장을 도맡아 하고 있었지. 시험을 봤다 하면 매번 전교 1등을 하곤 해서 학 생들 사이에서는 우상 같은 존재였어.

연옥이나 현호 수준은 아니더라도 뭐 잘하는 거라도 좀 있었으면 좋았

을 텐데. 칭찬받을 만한 거리가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신 거야.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지도력을 발휘한 것도 아닌 데 말이야. 고작 바닥에 떨어진 칠판지우개 하나 재빠르게 주워드린 것 밖에 없었거든.

그 후 선생님이 떨어뜨린 칠판지우개를 도맡아 주워드렸어. 그것도 모 자라 나중에는 지우개로 칠판까지도 지워드렸지. 키가 작았기 때문에 30

짠 생우유를 빈 식용유 병에 가득 담아 갖다 드리라고 했어. 좀 보잘것 하는 생각을 갖고 수줍게 드렸지. 수업이 다 끝나서 집에 돌아갈 시간

이 되었을 때, ‘선생님이 그 우유를 어떻게 하실까?”하는 조바심이 있 어서 지켜보고 있었어. 빈 교실에 남아 있던 선생님은 옆 반 총각 선생 님을 불러서 엽차 잔에다가 “이거 귀한 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눠

드시는 거야. 순간, “어, 저 우유 끓여 먹어야 하는데”라는 걱정이 들면 서도, 기분이 아주 좋아지더라고. “보잘것 없는 선물을 귀하게 여기시 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나서 집에 돌아왔단다.

그 전에는 학교 가기 싫어서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하곤 했었어. 어

느 날은 지각할 것 같아서 학교 가는 중간에 혼자 산에 올라가 도시락

을 먹고 놀다가 친구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단다. 그냥 책가방 메고 학교만 왔다 갔다 했었 고 의욕도 없었지. 그런데 줄반장도 되고 선생님의 칭찬과 사랑을 받다


보니 학교생활과 공부에 대한 즐거움이 생겨났어. 자꾸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까 숙제도 하게 되고 성적도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단다.

집에서 키운 강아지나 화초도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 훨씬 건강하게 크 는 법이란다. 누구나 공부를 잘할 수 있는 것도,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

은 아니지. 하지만 누구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단다. 사소한 재능이라도 자꾸자꾸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지. 그것을 알아채고 키워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일 거야. 그래서

삶 속에서 좋은 스승과 멘토를 만나는 것은 좋은 친구와 배우자를 만나 는 것과 함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란다.

사람의 운명을 바꾸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한단다. 하는 일 이 잘 안 풀리게 되면 ‘운이 지질히도 없다’라는 말을 하지. 그러나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단다. 아무 노력 없이 얻는 운의 결과가 불행이 되는 경우가 있고, 또 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행운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기도 하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나의 초점이 어

디에 맞춰져 있느냐는 것일 거야. 삶에 존재하는 두 가지 본질 중에 내

가 어떤 것을 마음에 담아두느냐에 따라서 행운과 불행이 결정된단다. 모든 선생님이 다 나를 인정해준 것은 아니었을 거야. 또 사람들에게 외롭고 서러운 대우를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단다. 그럴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단다. “선생님들이 어떻게 모든 아이를 똑같이 대할 수가 있을 까?” 또 “어떤 선생님이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꼭 못난 건 아니야.” “임창호 선생님같이 보잘것없는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신

분이 계시잖아.” 그 생각을 마음에 품으니 학교와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 훨씬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단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선생님을 찾아뵙지는 못했단다. 하지만 선 생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관심은 늘 내 마음속에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 아 있지. 지금도 썩 잘하는 게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가는 이유 는 “나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믿음 때문일 거

야. 그 긍정적인 믿음을 품게 되면 힘든 일과 도전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단다. 지금도 “나는 선생님이 임 명한 줄반장이야!”라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연세대학교 졸업 (B.A.) Silberman School of Social Work at Hunter College (M.S.W.) 사회복지학 석사 University of Pennsylvania School of Social Policy & Practice (D.S.W) 임상사회복지학 박사 인지심리치료협회 (Academy of Cognitive Therapy) 공인 전문가 (Diplomat) 공인 임상사회복지사 및 심리치료 자격 (뉴욕 및 뉴저지주) 공인 알코올 및 마약치료사 공인 국제 놀이치료사 겸 슈퍼바이저

현) ‌ Vice President of Integrated & Value-based Care (부사장), The Child Center of NY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뉴욕/뉴저지)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www.mindwellbeing.com 이메일: yoonds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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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작고 내실 있는 뉴욕의 명문 교육 기관

쿠퍼 유니언 대학 (The Cooper Un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nd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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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리그를 다니지 않아도 주립대만 나오면 최소한 외부인들이 어느 지역의 학교를 나 왔는지 알아는 준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학교와 전공 수준에 대해 지식이 있는 관계자들은 명문으로 인정하지만, 일반인과 외부인들은 이름도 위치도 잘 모르는 작은 대학교들이 미 국에 많기 때문이다. 뉴욕시 이스트 빌리지 지역 쿠퍼 스퀘어에 위치한 쿠퍼 유니언은 내실 있고 알찬 대학, 영민한 학생들만 선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대표 적인 작은 대학이다. 무엇보다 교육 철학과 사회 공헌 의식이 충만했던 이가 설립해 양질의 교육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높은 이상을 실현했던 기관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글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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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퍼 유니언은 전교생 천 명 미만(900~950명)을 유지하는 작은 대학으로 공식 학교명은

‘Cooper Un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and Art’다. 학생 수에 비해 많은 교수진으 로 내실 있고 친밀한 수업 분위기를 자랑한다. 1859년 이 대학을 설립한 피터 쿠퍼는 20세기

중반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과학자이며 가장 부유한 기업가 중 한 명이었고 사회

공헌에 관심이 많은 자선사업가였다. 피터 쿠퍼는 1830년대 정부가 재정 지원을 하는 프랑스 의 에콜 대학 시스템에 감명을 받은 후 교육 기관 설립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공식 학

교 교육을 1년밖에 받지 못한 자수성가한 기업가라는 배경이 교육을 통한 사회 공헌에 큰 동

기였다. 피터 쿠퍼의 대학 설립은 이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등 부유한 사업가들이 잇달아 대학을 설립하는 도화선이 됐다.

“교육은 누구에게나 숨 쉬는 공기와 마시는 물처럼 제공돼야 한다”는 설립자의 교육 철학에 맞게 전체 학생에게 학비를 전액 제공하는 대학으로 잘 알려져 왔지만 아쉽게도 재정 위기

이후인 2014년도부터 반액 장학금으로 바뀌었다. 학교 운영진이 기금을 헤지 펀드 등에 투자 해왔는데 2008년 금융 위기 때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거기에 새로운 공대 건물 증축 에 무리한 예산을 쏟아부어 재정난을 심화시켰다. 전액 장학금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경영진이 노력했지만 결국 50% 축소라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교생이 양 질의 교육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학교임에는 변함없다.

파격적인 장학금 혜택에 걸맞게 쿠퍼 유니언 입학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2014년 이전에는

3,000명 수준의 지원자가 몰려 10% 안팎만이 합격했고 건축과 입학률은 5% 내외일 정도 로 치열했다. 장학금 혜택이 절반으로 줄어든 이후에는 예전보다 많은 인원을 뽑아 결과적으

로 입학률은 14.4%를 보인다. 쿠퍼 유니언에는 건축과 미술 그리고 공학 (Architecture, Fine

Arts, Engineering) 3가지 전공만 개설돼 있고 이들 전공은 모두 상위권 수준이며, 특히 매년 30명 안팎을 뽑는 건축대는 미국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주요 대학 건축학과 교수의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수업 규모는 20여 명의 소그룹으로, 교수가 학

생들의 이름, 학업 진행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대관계가 깊다. 재학생 중 약 17%

가 동양계이며, 히스패닉계가 7%, 흑인은 5%이다. 재학생 중 62%가 남학생, 38%가 여학생 이다. 대부분 미국 대학들은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으면 재정 보조를 받기 어렵지만, 쿠퍼 유니언은 신분이 절대적인 고려 대상은 아니다. 재학생 중 약 10%가 외국 유학생이다.

쿠퍼 유니언은 1학년 때부터 “실습교육(Hands-on education)”을 강조하는데 나노 장비까

지 갖추고 있는 실험실은 웬만한 대학원 실험실보다 나은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학부 중심 대

학이지만 건축과 공학 전공은 석사 프로그램도 있다. 졸업 후 취업률이 높고 스탠퍼드나 MIT 등 명문대학원 진학도 용이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학부과정이 쉽지 않고 진급도 까다로 워 많은 양의 학습이 요구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편 건축과 미술 전공 명문인 학교답게 쿠퍼 유니언의 메인 건물인 파운데이션 빌딩은 건 축적인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건축가협회를 창립한 프레드 페터슨이 디자인한 이 탈리안 브라운스톤 양식으로, 세계 최초 엘리베이터 갱을 사용하고 피터 쿠퍼가 발명한 철

제 아이빔을 사용한 첫 건물로, 1961년 미국 역사 기념물로 등재되었다. 파운데이션 빌딩 내 강당인 그레이트 홀은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명연설을 시작으로 그랜트, 클

리블랜드, 태프트, 루스벨트, 윌슨,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미국의 대통령들이 거쳐 가며 자신들의 주요 정책을 발표했던 공간으로 명성이 높다. 랄프 네이더, 살만 루시디 등 저명

인사들이 연설도 이어졌던 그레이트 홀은 2008년 이후로는 외부 강연이 중단되었고, 대신

미래지향적인 첨단의 외관을 가진 41 쿠퍼 스퀘어 공대 빌딩이 2009년 건립 이후 학교를 상징하는 건물로 등장했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993년 노벨 물리학상 을 받은 러셀 헐스(Russell Hulse), 해체주의 건축의 거장인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 1939년부터 1962년까지 미국 연방 대법원장을 역임한 필릭스 프랭크퍼터(Felix Frankfurter), 배트맨을 창안한 만화가 밥 케인(Bob Kane)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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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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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아시아 현대 무용의 선구자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 예술가의 삶을 불꽃에 비유하는 것은 상투적이고 안이한 표현이다. 뚜렷한 발자취 를 남긴 예술가 중에 한순간 뜨겁지 않고 찬란하지 않은 삶을 살다간 이가 어디 있 겠는가? 하지만 한국 현대 무용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자 한국을 넘어 동 시대 아시아 최고의 춤꾼으로 평가받는 최승희의 일생을 표현하기 위해 불꽃 이외 의 단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2006년 발매된 최승희 자서전의 제목이 <불꽃> 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최승희는 뜨거운 논란의 인물이었으며 명암 역시 뚜 렷한 평가를 받았다. 성공을 위해 스승을 버렸고 사치와 허영이 심했다는 인격적 인 비난도 받았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 일본 강점기와 분단의 시대를 살다간 그녀 의 행적은 보는 이의 이념적 시각에 따라 찬사가 아닌 격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본 강점기를 지내온 한국 근대 문학의 거장 중 친일 논란에 휩쓸리지 않은 작가가 드물다. 월북한 예술가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오랫동안 지배받아 온 한국 사회에서 정당한 예술적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이 모두가 격동의 시대를 지나 면서 떠안게 된 당연한 시대의 산물이다. 월북 작가에 대한 정당과 부당한 평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이름조차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조차 금기시 되던 시대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최승희는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 란히 안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에스카사의 인물탐구 이번 호 에서는 한국의 이사도라 덩컨으로 불리는 격정의 춤꾼 최승희를 조명한다. 글

편집부

* 자료 참고 · 나무위키 - 최승희 · 오마이뉴스 - 무용가 최승희의 불꽃같은 삶 · 아시아 자유 방송 RFA - 2011년 11월 30일 방송 · 월간조선 - 김백봉 인터뷰. 2016년 8월 23일 · 프레시안 - 최승희의 생과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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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대의 전성기 그리고 친일 논란

최승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유럽, 남미 등으로 세계순회공연 을 하러 다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저명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

했다. 이러한 인기와 함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걸, 패션 스타로서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다. 또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반도의 무희> 등을 포함 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 시기가 그 녀의 최고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 그녀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 이다. 1940년대 들어서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하고 국방헌 금도 여러 번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펼쳤다. 그래서 광복 이후 에 친일파로 비난을 받았고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 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일부 지인들은 본인의 자발적인 행보가 아닌 강요였고 실제로 최승희가 민족 운동에 지원했다는 주장을 펴기 도 하지만 객관적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친일행각 못지않게 그녀의 인성 역시 후대에 시비를 일으켰다. 최승희

무용가로서의 최승희 성장기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1969년 8월 8

일 사망) 북한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정승 판서 를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은 봉건시대 전형적인 한학자였지만 자

녀 교육엔 개방적이어서 4남매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했다. 최승희는 숙명 여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학창시절, 명문가 집안이 기울어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최승희가 어린 시절 가난의 트라우마

로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매우 인색해졌고 그로 인해 남편과 형제들과 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기술한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가 무 용을 시작했다. 유명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시샘했음인지

숙명여고 동창 중 일부는 그녀가 돈에 팔려 기생으로 일본에 갔다는 헛 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논란과 험담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런 헛소문과는 상관없이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

용단에서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만 들어 독립했다. 당시 이시이 바쿠가 병들어 무용단이 쇠락하던 시기였

고,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무 릅쓰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남편 안 막이 구속되고, 임신과 출산 후유증으로 급 성늑막염 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결

국 다시 스승인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갔다. 그 뒤 몇 년간 일본에서 활 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

을 한 이후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운형, 마해송, 가와바타 야 스나리 등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받으며 전성기를 시작한다. 최승희

는 지방의 춤꾼은 물론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전통춤을 배울 정 도로 열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전통과 현대무용을 융합한 신무용의 창 시자가 되었고, 현재까지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무용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본격적인 현대무용은 최승희로부터 시작되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8

를 독선적인 성격으로 말한 지인들이 적지 않다. 세계순회공연에 제자

를 일본에 혼자 남겨 자신의 딸을 돌보게 하고 이에 불만을 품자 쫓아 낸 일,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한 일, 한 인터뷰에서 ‘팬레터를 받으면 대충 보고 그냥 던져 버린다.’라고 태연히 말한 일, 심지어는 조

선인 관객들이 공연 도중 소리를 낸다고 추던 춤을 중단하고 호통을 치 며 신경질을 낸 일 등.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요즘 헐리우드 스타들과 한 국 유명 연예인 중에도 인기와 재능과는 어긋나는 괴팍하고 독선적인 기행의 주인공들이 얼마든지 있다. 권위주의와 봉건주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1940년대 최고 스타로서의 그녀의 위상을 생각하면 ‘아랫사 람’을 대하는 자세와 공연 문화에 무지한 팬들에 대한 짜증 정도는 이 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 무용가 최승희

러나 최승희의 제자로 북한에 함께 있었고 2003년 탈북한 김영순이 당

주의를 신봉했다. 결국, 안 막은 중국 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

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7년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가 내용상의 문

1945년 해방이 되었다. 중국에 있던 남편 안 막은 청년 시절부터 사회 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

위원회가 발족했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 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최승희는 남편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19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즉 먼저 북에 간 남편 안 막의 간청, 그리고 서울에 있으면 친일파

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 그녀의 월북 동기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

을 만나러 갔다. 최승희의 애제자이자 최승희 못지않은 한국 현대 무용

사의 대가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라는 최승희에게 원하

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 립해 주었다. 북한에서도 최승희는 국제적인 활동을 했다. 무용동맹위

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1950년 6월 초 2백 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 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시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인물로 꼽힌다. 김영순에 따르면, 최승희에 제로 사상투쟁의 대상이 된 후부터다. 최승희는 그 뒤로 무대를 떠났고

2년 뒤 사망했다. 어느 광산에서 데모하다가 총살당했다는 흉문이 들 리기도 했다. 최승희가 숙청당한 시기는 북한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복

고주의와 봉건주의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한 일대 숙청과 단속을 강화했 던 시기와 같다. 중국의 문화 혁명 시기와 같다. 당시 남한에서 올라갔

던 문화예술인들 다수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최승희도 이 숙청 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논란을 넘어 재평가를 해야 할 시기

최승희는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불행한 예술가로 최후를 맞았다.

남에서는 친일과 월북 인사로, 북에서는 자본주의의 악습을 버리지 못

한 청산의 대상으로 숙청당했다. 그의 명성과 재능을 아꼈었던 사람들, 혹은 최승희와 가까웠거나 친했던 사람들이나 제자 등 주변인들은 최

승희의 친일 행보가 사실이더라도 그녀의 춤과 그녀가 한국 무용에 남 긴 업적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남과 북 모두에서 최승희에 대한 복권과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북한에서는 2000년 들어 그녀에 대한 재평가에 나섰고 ‘사도성의 이야 기’를 평양 대극장 무대에 올리며 최승희 무용에 대한 복권을 공식화했 다. 북한 무용계 간부들도 “최승희 선생은 우리의 춤 가락들을 발굴하

고 정리하는 데 온갖 정열과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은 열정가, 일제식민 지 통치에서도 민족무용을 발전시킨 선각자”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최승희는 19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

표하는 두 가지 대표 유형 중 하나인 최승희류를 창시했다.

년대 초부터 10여 년간 일본 · 중국 · 미국 · 러시아 · 프랑스 등을 돌며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1954년 남편 안 막은 문 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

애와 예술>(정수웅 엮음. 눈빛 간) 일 출판되었다. 엮은이가 지난 1990 수집한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 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 올랐다. 당시 부부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1959년 최승희 가족

불세출의 무용가 최승희는 너무 오랫동안 한국에서 금기시되는 인물

다. 안 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것이다. 친일과 월북 같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잣대로만 평가하기엔

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 최승희는 1969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확한 죽음의 원 인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북한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 그

로 잊혔다. 공과 과를 포함해 더 폭넓은 연구와 관심이 이어져도 좋을 예술가로서의 최승희가 한국 현대 무용사에 남긴 영향이 너무 크고, 그 녀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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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이달의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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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뉴욕타임즈,월스트리트저널, USA투데이 베스트 셀러 1위 우울증, 두통, 치매 예방 지침서 THE GRAIN BRAIN 우리가 일반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통곡물마저도 치매나 만성 두통 같은 뇌 질환 을 유발할 수 있다는 놀라운 책(THE GRAIN BRAIN 2014년 초판)이 전 세계 수많은 독자에 게 경각심을 주고 있다. 저자인 미국의 저명한 신경과 의사인 데이비드 펄머터는 뇌 건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우리가 먹는 ‘음식’에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이 책을 통 해 탄수화물이 어떤 과정을 통해 뇌에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히며 우리가 매일 먹는 밥이나 빵과 같은 주식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좋은 지방이 많은 식단이 왜 이상 적인지, 나이와 상관없이 어떻게 하면 새로운 뇌세포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 한다. 또한, 우리가 행해온 그동안의 잘못된 식생활을 짚어주며 콜레스테롤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뇌를 건강하게 하는지 등 정확한 의학 정보를 토대로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리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자. 정리

편집부

‘THE GRAIN BRAIN’은 데이빗 펄머터라는 미국의 의사이며 저술가가 쓴 책 이다. 건강유지와 만성 질병 예방 그리고 다이어트까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베스트 셀러로 이미 전 세계 독자의 공감을 얻고 있다. 저자는 탄수화물과 단

백질을 최소로 섭취하며 고지방 음식과 식이섬유 섭취를 중심으로 글루텐과

설탕은 절대 섭취하지 않아야 하며 그렇게 해서 장내 세균을 보호하는 단순 한 생활방식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식생활과 운동은 식사를 고치고 나름의 전략을 세워 계획에 따라 강 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음식이 좋은지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

는지 수면계획 등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으며 14일 실천 계획도 제시하고 있다. 음식은 정보이며 DNA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음식물 섭취가 매우 중

요하다고 주장한다. 질병의 원인은 염증이므로 이것을 감소시키고 지방섭취 를 통해 케톤을 에너지로 사용하여야 하며 특히 뇌 관련 질병인 치매 등은 장

내 세균과 밀접하므로 탄수화물 섭취를 최소화하고 또한 비만을 통한 당뇨 예방을 위해 식이섬유 섭취를 강조하고 있다.

글루텐도 장내세균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끊고 저탄수화물 식사로 체중감 소 효과도 얻고 특히 과당섭취를 줄여 고혈압 예방, 면역, 신경조직 약화를 방

지할 것을 권하고 있다. GMO는 당연히 섭취하지 말아야 하고 지나친 단백질 섭취는 조기 사망 위험 있다고 경고하고 있으며 달걀 섭취를 권장한다.

식사를 개선하고 보조제섭취 그리고 약물의 중단, 적절한 운동,규칙적 수면, 스트레스 감소를 철저히 계획하고 실제 환경에서 각종 플라스틱 용기 사용금

지, 외식금지, 마이크로웨이브 사용금지, 수시로 단식, 매일 20분 정도의 유산 소 운동, 물 마시기, 저널 쓰기 아침, 오후 2회 생각하는 시간 갖기 등 실생활 글 이제국

캐나다 밴쿠버 거주 / 고려대 경영대 경영학과 졸업 전 밴쿠버 중앙일보 컬럼니스트

에서 실천해야 할 세세한 지시 사항이 많다. 구체적 식단과 계획수립에 대한 자세한 지침이 책에 나와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참고하면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식사 방법론과 실천 전략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며 단지 수많은 건강유지 기법의 하나라고 간주하고 참고로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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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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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목민 시리즈 (1)

전자화폐가 몰려온다 미래 화폐 비트코인을 아시나요? “비트코인 몇 개나 가지고 있니?” 이 말은 요즘 강남에 떠도는 새로운 유행 어라고 한다. 또 ‘비트코인이나 알트코인(이더리움, 리플, 라이트코인, 데쉬 등)에 투자해서 대박이 났다.’는 말이 강남 빌딩숲 사이를 떠돌고 있다. 그만 큼 미래 화폐인 비트코인은 최근 핫한 단어 중 하나이다. 물론 한편에서는 ‘가 상화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허공으로 펑하고 사라질 것이 다.’라고 우려 섞인 주장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통용될 전자화폐를 아예 무 시할 수 는 없다. 올 가을 미국에서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옵션거래가 가능 해진다. CNBC에 따르면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가상 화폐 거 래 플랫폼인 '레저엑스'(LedgerX)를 파생상품 청산 기관으로 승인하는 데 만 장일치로 승인하며 레저엑스는 오는 초가을쯤 '비트코인 옵션'을 먼저 내놓 고 몇 달 후에는 '이더리움 옵션'을 출시한다. 가상화폐를 모르면 빠르게 변하 는 시대를 따라갈 수가 없다. 하지만, 비트코인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 는 일반인은 ‘비트코인? 블록체인이 뭐지?’, ‘왜 여기에 투자하면 대박이라고 하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필자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의 문에 호기심을 품고 인터넷을 뒤져봤지만 컴퓨터를 전공한 필자 역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본 연재는 필자가 습득한 지식인 암호화폐의 대명사인 비트코인(Bitcoin)과 그 근간을 이루는 소스코드인 블록체인(Block Chain)에 대해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에스카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 다.올가을 미국에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옵션거래가 가능해진다. 글 Lee Chang Soo 정리

편집부

글 이창수 Ph.D Lee Chang Soo

서울 대원고등학교 서울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서울대학원 지반전공 석사 서울대학원 지반 박사 수료 서울 벤처대학원 대학교 컴퓨터응용 기술학과 공학박사 43


비트코인이란?

비트코인의 단위는?

인 전문가시스템(Expert System)을 토목설계 분야에 접목하는 노력을

름으로 불린다. 100분의 1비트코인은 1센티 비트코인이다. 1천분의 1

필자는 1990년도 중반부터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한 분야 해 왔다. 그러나 당시 국내의 상황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고 지식베이

스(Knowledge base) 자료화할 호안 설계자료의 부족으로 전문가시 스템 프로그램은 완성되지 못했다. 다만 미래에 다가올 세상은 거의 모 든 공학 분야가 인공지능을 적용할 것으로 예상하고는 꾸준하게 시간

을 투자하면서 관련 분야를 기웃거렸다. 그러던 차에 올해 초 한국인 터넷진흥원이라는 정부 기관에서 개설한 핀테크 아카데미 1기 강좌에

오랜만에 학생으로 참여하여 아주 따끈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바 로 핀테크(Finance + Technology, Fintech), 비트코인, 블록체인, 금융 API 등의 키워드이다.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암호 화폐가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구조를 기반으로 설계된 것이기 때문에, 비트코인의 블록 체인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응용 화폐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디딤돌

비트코인은 소수점 아래 8자리까지 표기가 되는데 그때마다 다른 이

비트코인은 1밀리 비트코인이다. 1백만분의 1비트코인은 1 마이크로 비트코인이고, 1억분의 1비트코인은 1사토시다. * 1 BTC = 1 bitcoin = 1비트코인

* 0.01 BTC = 1 cBTC = 1 centi bitcoin (bitcent) = 1센티 비트코인 * 0.001 BTC ‌ = 1 mBTC = 1 milli bitcoin (mbit 또는 milli bit)‌ = 1밀리 비트코인

* 0.000001 BTC = ‌ 1 μBTC = 1 micro bitcoin (ubit 또는 micro bit)‌ = 1마이크로 비트코인

* 0.00000001 BTC = 1 satoshi = 1사토시

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블록체인을 응용하여 각종 사업 분야에 도입하

가상화폐란 무엇인가?

서부터 각 정부나 국제기관까지 폭넓은 층에서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

자기만의 가상화폐를 만들었다. 싸이월드는 ‘도토리’를 만들었고, 네이

고자 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세계적인 기업에 이 증가하고 있다. 블록체인 산업에 종사하거나 관련된 프로그램을 개

발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개념을 상식으로나마 알아둔다면 생 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가상화폐는 이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인터넷 서비스마다 버는 ‘네이버 캐시’, 페이스북은 ‘페이스북 크레딧’, 카카오는 ‘초코’이 라는 가상화폐를 만들었다. 그 외에도 자기 서비스 이름 뒤에 ‘캐시’라 는 이름을 붙인 가상화폐를 많이 만들어 사용하였다.

블록체인

비트코인의 특징

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로 공공 거래 장부라고도 한다. 분산 데이터

트코인은 주인이 없다. 특정 개인이나 회사가 운영하는 ‘캐시’가 아니

블록체인( blockchain)은 가상 화폐로 거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해킹 베이스의 한 형태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이터 기록 리스트로서 분

산 노드의 운영자에 의한 임의 조작이 불가능하도록 고안되었다. 기존 의 중앙 서버에 거래기록을 보관하는 것과는 달리, 블록체인은 모든 사

용자에게 거래기록을 보여주며 서로 비교하도록 해서 위조를 막는다. 잘 알려진 블록체인의 응용사례는 암호 화폐의 거래 과정을 기록하는 탈중앙화된 전자장부로서 사토시 나카모토에 의해 비트코인이 최초로

구현하였고, 대부분의 암호 화폐들이 블록체인 기술 형태에 기반을 두

고 있다. 각 블록에는 해당 블록이 발견되기 이전에 사용자들에게 전파 되었던 모든 거래 내역이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P2P 방식으로 모든 사

용자에게 똑같이 전송되므로 거래 내역을 임의로 수정하거나 누락시킬 수 없다. 블록은 발견된 날짜와 이전 블록에 대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 으며 이러한 블록들의 집합을 블록체인(Block Chain)이라 칭한다. 누가, 언제, 왜 비트코인을 만들었는가?

2009년에 ‘사토시 나카모토(예명)’로 알려진 한 개발자그룹에 의해서 만들기 시작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기점으로 2008년 금융위기와 이를 통해 파생된 달러화에 대한 불신 때문에 탈중앙화, p2p(peer to

peer) 네트워크, 해시(hash) 암호화, 작업증명(Prove of Work, PoW) 등의 기술을 다차원적으로 종합하여 완성한 프로그램이 바로 비트코

비트코인이 특별히 주목을 받은 건, 작동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비

다. 작동하는 시스템은 P2P (peer to peer) 방식으로, 여러 이용자의 컴

퓨터에 분산돼 있다. 비트코인을 만들고 거래하고 비트코인을 현금으 로 바꾸는 참여자 모두가 비트코인의 발행주체이다. 그중 누구 한 사람 을 콕 집어서 ‘이 사람이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비트코인을 보관 하는 계좌를 만들 때도 신분증 검사 같은 건 필요 없다. 비트코인에서는

계좌를 ‘전자지갑’이라고 부른다. 지갑마다 고유한 번호가 있는데 숫자 와 영어 알파벳 소문자, 대문자를 조합해 약 30자 정도로 이루어진다.

한 사람이 지갑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는데, 개수에 제한은 없다. 다만 지 갑을 만들 수 있는 별도 프로그램이나 앱을 설치해서 써야 한다.

통상 돈이라고 하면, 중앙에 관리하는 기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국은행이 그 일을 한다. 돈을 얼마나 찍을지 정하고, 유통량을 조절하는 곳이다. 그러나 비트코인에는 이런 기구가 없다. 돈을 찍는 기구도 없

다는 얘기다. 즉, 비트코인은 특정한 발행 또는 관리 주체가 없이 운영

되는 것이다. 참여하는 사용자가 주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하고 이체내 역을 관리한다. 중앙화된 주체에서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p2p 네크워크로 운영되기 때문에 계좌동결, 강제인도, 강제신원공개 및 서비스정지 등이 불가능하다.

인이다. 페이팔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거래되는 가상 화폐는 모두 누

그 대신 누구나 비트코인을 만들 수 있다. 성능 좋은 컴퓨터로 수학 문

제수단이다. 하루아침에 실업자들을 거리로 내몬 금융위기 역시 결국

은 광산에 빗대어 ‘캔다’(mining)라고 불린다. 또 이런 방식으로 비트코

군가에 의해 중앙집중적으로 통제된다는 점에서 제약이 많은 지불결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 등 국제 금융 환경을 거머쥐고 있는 '큰 손' 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사용자들이 직접 관리하는 통화시스템을 구현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는 전 세계에서 국경

에 제약 없이, 은행이 쉬는 날에도, 수수료는 거의 지불하지 않은 가상 화폐를 사토시 나카모토가 만든 것이다. 44

제를 풀면 비트코인을 대가로 얻는다. 이렇게 비트코인을 만드는 과정

인을 만드는 사람을 영어로 ‘채굴자’(miner)라고 부르고 채굴자는 비트 코인 세계에서 곧 조폐공사로 볼 수 있다. 비트코인을 캐기 위해 풀어

야 하는 수학 문제는 꽤 어려운 편이다. 일종의 암호 풀기인데, 비트코

인을 캐는 전용 프로그램과 힘을 모아 비트코인을 캐자는 모임도 등장 했다. 캘 수 있는 비트코인 전체 통화량이 2100만 개로 정해졌다는 점


에서 한국이나 일본, 미국 등 각 나라 화폐와 다르다. 각국의 중앙은행 과 조폐공사는 물가나 환율, 이자율 등 나라 안팎의 상황에 따라 돈을

새로 찍는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채굴자가 되어 수학 문제를 풀고 코인 을 ‘캐야’ 한다. 채굴자가 아닌 사람이 비트코인을 얻는 방법은 다른 사 람이 이미 가진 것을 현금을 주고 사면 된다. 다시 말해 기존의 가상화

폐(virtual money)와는 달리 거래내역을 “분산원장”이라는 블록체인 에 기록하고 암호(cryptography)와 해시를 이용한 작업증명(Work of

Proof)방식을 이용하였다는 점에서 암호 화폐(cryptocurrency)로 불리 고 이러한 암호 화폐의 발행 및 거래 프로그램을 ‘비트코인’이라고 부르

며, 이 프로그램 안에서 통용되는 암호 화폐 또한 ‘비트코인’이라고 칭 하고 있다.

비트코인 장점 (경우에 따라 단점이 될 수 있음)

보안성 - 비트코인이 가진 블록체인의 작동방식 때문에 사실상 이체내 역의 변조가 불가능하다.

낮은 이체수수료 -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수료는 0.0002btc 가량이며

이는 152원에 불과하다. (비트코인 당 762,100원 기준 - 2016년 7월 10 일 코인원 거래소 가격) 수수료는 천원을 보내든 10억 원을 보내든 이 체금액과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전체 이체 건수가 증가하면 더 낮은 이체수수료를 설정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24시간 이체 - 중개기관이 없고 P2P 네트워크로 시 스템이 유지되기 때문에 전세계 어디에서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이 체가 가능하다.

거래의 투명성 - 모든 거래는 블록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며, 이체내

2014 년 9 월 체코 공화국 Bitcoin ATM

역, 발신자, 수신자, 각 지갑의 잔액내역과 이체기록까지 전부 조회가

비트코인의 단점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 수 있음)

불가능하다.

결국 달러 등 다른 법정화폐로 환전하여 사용되는 ‘환전 가치'에 크게

가능하다. 따라서 중간 상인의 경우, 몰래 추가 마진을 부과하는 것은 거래의 익명성 - 비트코인 지갑 생성 및 이용 시, 신원증명 절차가 없으 므로 익명으로 모든 거래가 가능하다.

계좌생성 편의성 - 누구든지 버튼 클릭 한 번으로 계좌생성이 가능하

다. 심지어 매 이체 건마다 새로운 계좌를 생성하여 사용하고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이체수령인 리스크 헷지 - 범죄율이 높은 지방에서 또는 위험한 재료

를 통해 사업을 하는 경우, 비트코인을 통해 결제를 미리 받는다면 떼 일 염려가 없다.

분할성 - 비트코인은 매우 낮은 단위까지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이체도 간편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소액결제 서비스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 을 것이다.

가치 변동성 - 현재 비트코인은 자체로써 생태계를 구성하기보다는,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수시로 10% 이상이 변동되는 비트코인의 달러 표시 가격이 가진 변동성은 큰 리스크가 된다.

인식 부재 - 아직 비트코인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고, 안전

한 화폐로 인식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생태계 확장에 어려움이 있으 며, 각 기업에서 결제 화폐로 사용하기도 쉽지 않다.

비상용화 - 비트코인 프로그램은 아직 보편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불편 한 점이 많으므로 계속해서 현실에 맞게 수정이 되어 가고 있으며, 관 련 서비스들이 개발되고 있다.

관리의 어려움 - 특정한 비트코인 보관서비스나 거래소 등에 비트코인 을 예치해두지 않는다면 자신이 스스로 비트코인을 관리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비트코인의 이체 비밀번호를 잃어버린다면 재설정

할 방법이 없으며, 비트코인이 들어있는 USB나 노트북 등을 분실해도

복구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수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하 기 때문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해킹 -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자체는 해킹이 되지 않지만, 자신이 비트 코인을 예탁한 거래소는 해킹을 당할 수 있다. 이러한 해킹은 수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현재 관련 법규나 구제절차 등이 미 흡하여 제대로 보상을 받기 어렵다.

언젠가는 통용될 미래 화폐인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에 대한 내용은

매우 어렵고 쉽게 설명된 자료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스카사는 전문

가 칼럼을 통해 일반인들도 미래 화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거래를 보여주는 Bitcoin Point of Sale 터미널

‘디지털 유목민 시리즈’로 연재하며 비트코인 이야기는 다음 호에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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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기획 / 우리 이웃 이야기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행복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행복한 사업가 MITSOSA 변효삼 대표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권이 작년 40억여 원에 낙찰되면서 최고가를 경신했다. 올해로 86세가 되는 버핏과의 3시간짜리 식사 한 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액을 지불하기를 주저 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투자 비결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정 작 그의 다음 투자처나 주식을 사고파는 시점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 지 않는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배우는 것은 사업과 투자에 대한 통 찰, 더 나아가 그의 생생한 인생 이야기에서 전해지는 삶의 지혜와 교훈이다. 비단 버핏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인생을 먼저 경험한 사 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때때로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들을 수 없다. 어찌 보면, 버핏은 그의 유명세를 치르느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의 경험을 값을 매겨 팔아야 하는 모욕(?)을 감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스카사와 변효삼 대표와의 만남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누구나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수차례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 한인 사업가이다. 한때 시계 사업으로 뉴욕은 물론 전 세계 시장을 호령 하였으며, 뉴욕 5번가(Fifth Avenue)에 큰 빌딩을 소유할 정도의 부 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무일푼이 되었고 그렇게 여러 차례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동안 말 그대로 7전 8기의 신화를 썼다. 그는 현재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여행용 가방 매장을 세 곳이나 운영하며 아직도 여전히 사업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 주고 싶다는 마음은 워런 버핏이 들려주는 교훈이나 삶의 지혜보다 더 큰 울림이 올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 하나였다. 그는 우리의 기대 를 저버리지 않았다. 40여 년 동안 사업가로 살아온 그의 삶 속에는 극적인 파란만장함 외에도 우리가 곱씹어 보고 마음에 새겨 볼 만한 인생의 질문과 답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의 질문 에 또 다른 질문으로 응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허를 찌르 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인터뷰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며 그의 얘기 를 경청했다.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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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 믿소사(MITSOSA) 대표 - 전 뉴저지한인경제인협회 회장 (제14대 2010~2012) - 현 세계한인무역협회 뉴저지 주 무역촉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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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업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난 의미 있는 변화들에 관해 이야기 하면서,

그 변화들은 진정한 행복의 의미인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이 결론은 다소 진부하고 이상적으 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가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다채롭고 현실적이었다. 사업과의 전쟁을 시작하다 변효삼 대표는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버클리로 (이후 로스앤젤레스 페 퍼다인 대학으로 편입) 유학을 왔다. 하지만, 사업가적 기질을 타고난 탓이었을까. 2년 후 그는 돌연 뉴욕으로

가 ‘돈 버는 일’에 뛰어들게 되고, 그때부터 7전 8기의 파란만장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1970년에 처음으로 접한 사업은 가발업이었다.

당시에 가발 수출 유공자로 철탑 산업훈장을 타면서 미국 내 판매망을 확장하고 있었던 동서양행의 박정 진 사장이 나를 세일즈맨으로 발탁했어요. 그때만 해도 동양인이 미국에서 세일즈를 하는 건 거의 불가능 하다고들 했는데 말이죠. 경험이 일천했고 영어가 유창하지도 않았지만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나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샘플이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무작정 뉴욕 맨해튼의 미용전문업체들을 돌아다녔다. 당시는 상류층 여자들

이나 애용하는 고가품으로 여겨졌던 가발이 한국산 가발의 유입으로 막 대중화되던 시기였기에 그의 가발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렇게 맨해튼을 평정하고 얼마 후, 보스턴의 한 미용실에서 우연히 로버트 그린버

그(Robert Y. Greenberg: 1962년 살롱업을 시작으로 가발, 롤러스케이트, 운동화 사업으로 성공한 미국의 대 표적 사업가. 한국에는 L.A. Gear와 Sketchers라는 운동화 브랜드 창업주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에는 ‘유 로파 헤어(Europa Hair)’라는 미국 최대 가발 업체의 회장이었다.)를 만나 유로파에 스카우트되면서 백화점 세 일즈를 통해 매년 1백만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얻게 되었다. 이후 텍사스 엘파소(El Paso)의 ‘헬렌 오브 트로이 (Helen of Troy)’ 같은 거대 미용용품 업체를 공급처로 얻게 되기도 했다.

마케팅은 그야말로 전쟁이죠. 댈러스, 애틀랜타,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등 미국에 큰 도시는 안 가본 데 가 없어요. 차로도 가고 비행기로도 가고, 정말 쉴 새 없이 다녔어요. 힘들긴 했지만, 그 덕에 미국 사회에 서 세일즈가 무엇인지, 사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웠습니다. 날개 돋친 듯 팔린 시계사업으로 정점에 서다 10년 가까이 미국 전역을 누비며 가발 세일즈를 했던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시계 사업을 시작했다. 뉴욕 42번가 타임스퀘어(Times Square)에 ‘소코(Soko)’라는 간판을 걸고 관광객들을 주 고객으로 손목시계

를 판매하게 된다. 한국산, 홍콩산 시계를 저가에 수입, 판매함으로써 손목시계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계에 패션을 접목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패션 시계 시장을 개척하여 80년대 후반에는 세계 패션

시계 유행을 주도하였다. 화려한 시곗줄로 변화를 주거나 스톤을 부착한 시계, 반지 시계, 시계 펜 등 이전에 없 던 독특한 디자인 덕분에 그의 시계는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미 전역의 백화점에 시계를 공급했음은 물론,

아프리카, 이탈리아, 일본, 중국, 또 시계의 본고장이라 일컬어지는 스위스에까지 시계를 수출하였다. 한때 연

간 매출 2천5백만 달러의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업계 최고였던 시계 회사 타이멕스(Timex)의 매출을 넘어설 정도의 규모였다.

운이 좋기도 했어요. 선택한 아이템과 시장의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뜻하지 않게 귀한 인연들 을 만나게 되기도 했으니까요. 가발 세일즈를 했을 때 우연히 그린버그를 만났던 것처럼, 시계 사업으로 성공하게 된 건, 사업 초기에 금성사(현 LG의 전신)에서 일하던 학교 선배가 대량의 고급 시계를 말도 안 되는 저가에 넘겨 달라 했던 저의 제안을 받아주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또 언젠가는 한 브라질 거물 사업가가 뜬금없이 나타나 시계를 구매해 가고는, 이후에 저에게 브라질 권력층을 위한 유럽의 명품 구매 대행을 맡기기도 했죠.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중간 무역을 통해 얻는 수익도 엄청났어요. 80년대 그는 실로 어마어마한 부를 이루었다. 말 그대로 전성기였고, 그 전성기는 세계 쇼핑의 중심지 뉴욕 5

번가에 자리한 고가의 빌딩을 사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무엇이든 최고와 최상을 누렸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 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에 두려운 이도, 두려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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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t Rains It Pours. 미국 속담에 “When it rains it pours.”(비가 왔다 하면 퍼붓는다.)라는 말이 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닥친다는 뜻이다. 변효삼 대표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하자 그는 정말 한순간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었다. 시계 사업 은 부도가 났고 가정불화로 아내는 떠났다. 우울증이 생기면서 건강도 잃었다.

플레이보이(Playboy) 시계에 손을 댄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플레이보이 브랜드를 시계에 사용하기 위한 계약 조건으로 플레이보이 클럽 측에서 현금 60만 불의 보증금과 6만 불짜리 시계 광고 게재를 요구했어 요. 무리한 계약 조건이었지만 모두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시계가 팔리지 않았습니다. 플레이보이 브랜드 의 이미지 때문에 여성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한 거예요. 결국, 그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몇 년 후에 사업 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는 재고 600만 불어치를 처분해서 얻은 60만 불로 금융기관 등에 빚을 갚은 후 깨끗이 도산했다. 그리고 이 혼 후 4년 정도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발걸음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던 지난날들이 그야말로 일장춘몽 같았다. 이대로 끝인 걸까...... 돈은 ‘필요한’ 것이다 자포자기에 빠져있던 그를 일으킨 것은 사랑, 더 정확히는 부성애(父性愛)였다. 그에게는 쌍둥이 아들 둘 이 있다. 당시 둘 다 공부를 잘해서 첫째는 다트머스 대학(Dartmouth College), 둘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 입학했다. 돈도 차도 없었던 그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지인을 찾아가 돈을 빌 리고 차를 렌트하여 아이들을 각각의 학교로 직접 데려다주었다. 학교가 너무 커서 차가 없으면 불편할 것 같 다는 큰아들에게는 자전거를 사주고, 용돈이 필요하다는 작은아들에게는 “아빠는 예전에 300불 들고 미국 왔 는데 네가 학교에서 무슨 돈이 필요해.”라며 마음에도 없는 핀잔으로 미안함을 감추고 돌아왔다.

큰아들이랑 짜장면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눈물, 콧물이 다 나오는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던 저인데 말이죠. 차로 350마일을 와야 했는데 눈물이 나서 운전을 할 수가 있 어야죠. 중간에 몇 번을 섰다 갔다 했는지 몰라요. ‘아, 세상에, 내가 돈이 필요할 땐 돈이 없고 돈이 필요 없 을 때 돈이 있었구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도 열심히 돈을 벌었던 그가 두 아들과의 에피소드를 겪기 전까지는 돈의 필요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언뜻 듣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부유하게 자란 데다가 미국에 와서도 성공한 사업가로 살 았기에 돈의 절실함을 느낄 기회가 없었던 거다. 부모로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돈이 없어서 해 줄 수 없을 때만 큼 가장 현실적으로 돈의 절실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도 그랬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다시 돈을 벌어 야겠다.’ 마음먹고 재기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가방 가게에서 건실한 여행용 가방 업체로 성장한 ‘믿 소사(Mitsosa)’가 그 결과물이다. 돈에 지배당하지 말자 변 대표가 질문을 던졌다. “목적과 목표의 차이가 뭔지 알아요?”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인 반면, 목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서 달성해야 한다고 그는 정의했다. 그렇기에, 목표 달성에만 집중하여 목적을 상실하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창 사업이 잘돼서 돈을 벌어들일 때는 그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이 딱히 없었어요. 그냥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그래서 열심히 벌기만 했습니다. 번 돈을 잘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 고 그저 호화롭게 즐기며 살았어요. 그런데 다 잃고 나서야 ‘아, 내가 돈의 노예가 돼서 살았구나.’하고 깨달 았죠. 다시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아들들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어요. 어마어마한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돈의 필요를 깨달았다는 변효삼 씨, 그가 깨달은 ‘필요’는 단순히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차원의 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돈은 있으면 좋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했다. 돈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벌고 쓰면 기쁘다. 즉, 돈은 나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 해 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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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어서다 그가 다시 사업을 시작하고자 했을 때는 돈을 빌려주겠다는 금융기관이 없었다. 돈이 없으니까 오히려 속 편하 게 이것저것 돈이 될 수 있는 일을 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현재 그의 아내인 박선영 씨를 만나게 되

었다. 당시 그녀는 뉴욕에서 조그만 가방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게 운영을 옆에서 도와주면서 그는 다 시금 세일즈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누가 뭐래도 장사하는 건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때마침 제 막냇동생이 한국에 있는 땅을 팔아 마련해 온 10만 불이 있었어요. 그걸 자본으로 아내와 이탈리아에 가서 젤리백(Jelly Bag: 고무 소재의 캐주얼 가방) 몇 개를 45불에 사와서 155불에 팔았는데 내놓자마자 다 팔린 거예요. 그래서 다시 부리나케 가서 그 업자 창고에 있는 가방을 다 사 왔는데 그것도 3일 만에 다 팔렸어요. ‘아, 이게 되는구나.’ 생각하고 그 가방을 계속 들여와서 6개월 정도 열심히 팔고 나니 숨통이 좀 트였습니다. 그렇게 현재의 여행용 가방 전문 회사 믿소사가 탄생하였다. 2000년에 ‘아메리칸 보이저(American Voyager)’ 란 브랜드로 시작한 믿소사는 월 4만5천 불에 달하는 맨해튼의 임대료를 감당해야 하는 오프라인 매장임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가방 매장들의 홍수 속에서 꾸준히 탄탄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런 믿소사의 선전 뒤에는 변효삼 씨의 타고난 사업가적 감각은 물론, 타사 제품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양질의 제품을 공급하고자 불철주 야 고민하고 발로 뛴 그의 노력이 있었다.

예전에는 매장 위치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매장들은 모두 최소 10개 이상의 호텔들이 모 여 있는 곳에 있어요.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이 뉴욕에서 쇼핑한 뒤에 우리 가방을 사서 담아 가게 하기 위한 거죠. 그런데 요즘은 품질을 기반으로 한 브랜드 인지도가 제일 중요해요. 그는 소재 혁명을 통한 품질 개선만이 살 길이라고 보고, 신소재인 카본 파이버(carbon fiber: 탄소 섬유)를 사 용해 여행용 가방을 제작하였다. 카본은 강철의 강도를 지니지만 무게는 절반에 지나지 않고 3,000도의 온도에 도 견고성을 유지하는 불연성 소재로 현재 가방, 스포츠용품, 자동차, 비행기, 첨단 우주 산업 등에 널리 사용되

고 있는 소재이다. 그는 골프채에서 이 소재를 처음 본 후 적용 사례를 찾아다닌 끝에 카본으로 만들어진 바이

올린 케이스의 가벼움과 견고함을 보고 이를 여행용 가방에 적용하게 되었다. 처음 제작된 카본 가방은 가죽 가 방과 달리 장기간 보관 시 변색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3년가량이 소요되면서 상당한 손 해를 감내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지금은 카본 러기지가 믿소사의 대표 상품이 되었다.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행복 ‘믿소사’라는 회사명은 믿음, 소망, 사랑의 앞글자들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그 이름에는 변효삼 대표의 사업 철 학뿐만 아니라 그의 삶이 추구하는 가치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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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젊은 국악도의 도전이 이루어 낸 10년 만의 성과

‘뉴욕국악축전’ 뉴욕 취타대 이춘승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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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2008년 가을 ‘뉴욕 취타대 창단’ 이라는 기사가 한인 언론에 조그맣게 실렸다. 사진에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10여 명의 어린이들이 어 깨동무하고 밝게 웃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단정한 머리에 양복이 어색해 보이는, 마치 신입사원 같은 분위기의 젊은 남자가 서 있다. 그가 당시 33세의 뉴욕 취타대 단장 이춘승이다. 그는 한인 어린 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취타대를 조직하고 이들에게 강연과 무대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전수하겠 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 속의 아이들과 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가 밝힌 단체의 목표도 그저 소박했 다. 그리고 지난 6월 25일. 뉴욕 칼리지 포인트 프라미스 교회 강당에서 열린 6·25기념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나라 사랑 평화음악회. 10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200여 연주자들을 지휘 한 뒤, 쏟아지는 기립박수에 상기된 얼굴이 된 사람, 바로 이춘승 단장이다. 이젠 전혀 소박하지 않은, 장대하고 화려한 무대의 중앙에 올라선 이춘승 씨에게 10년이란 긴 시간의 이야기를 짧게 들어봤다. 글

편집부 사진 뉴욕취타대 제공 55


“Amazing!” “대단하다”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 “백만 불짜리 공 연이다” 2시간 40분의 화려하고 웅장한 국악공연이 끝난 후 프라미스 교회를

어진 5 애비뉴까지 뉴욕 취타대가 설 수 있는 곳이라며 무조건 달려나

갔다. 초기에는 비용 문제로 복장도 갖추지 못해 단원들은 장사익 씨가 써 준 ‘뉴욕 취타대’ 글씨가 새겨진 노란 티셔츠를 입고 연주를 했다.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입에서 나온 찬사들이다. 그동안 뉴욕에서 전통

그리고 10년 뒤, 이춘승 단장이 기획한 뉴욕 국악축전 무대에 한국, 일

음악인들과 유서 깊은 공연장에서 크고 작은 협연들을 해왔다. 이들 선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뉴욕 프라미스교회 연합찬양대, CBSN 뉴욕 기

음악과 무용의 보급과 발전에 힘써온 많은 국악인이 국내외의 정상급 배 국악인들과 단체들의 활동을 고려한다면 뉴욕취타대의 이번 음악

회가 가장 뛰어났다고 혹은 독보적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모

해 보이던 한 젊은 유학생의 도전이 맺은 이 날의 결실은 그동안 그를 지켜보고 후원했던 많은 관객에게 분명히 벅찬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 리고 그 감동은 누구보다 당사자인 이춘승 단장이 느끼고 있었다.

본, 중국의 전통악기와 서양 악기를 아우른 다국적 연주팀 ‘월드 전통 독교방송국 합창단, 남부 뉴저지 통합학교 어린이 합창단, 뉴욕 기독교

선교회 어린이 합창단, 롱아일랜드 한국학교 어린이 합창단 등 200여 명이 참여했다. 관객들의 현장 반응이 너무 뜨거운 것도 감동적이었지

만, 이후 이 단장의 이메일과 카톡으로 쏟아진 어린이 참가자의 부모들 이 보낸 감사의 메시지들은 특히나 고무적이었다.

“10년 만에 뭔가를 하나 이루었구나. 그 생각만 들었어요. 정말 딱

“한국의 소리가 이렇게 매력적인 걸 미처 몰랐다고 하시는 분들, 아

10년만 무조건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달려왔거든요.”

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큰 공연을 마친 뒤 쉴 틈도 없이 바로 토론토 워크숍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이춘승 단장을 만났을 때 처음 한 말이다. 뉴욕 취타대를 처음 조

분들이 많았어요. 어떤 관객은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 셨죠. 지난 10년간의 노력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직했을 때 그 역시 확신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호응해줄지, 재

이 단장의 이력은 예고에 진학해 일찍부터 전통 음악을 시작한 다른 많

것이 불확실했다. 그래서 조그만 학교 행사부터 코리아 퍼레이드가 벌

을 전공하던 공학도였지만 쇠와 장구의 매력에 빠져 부모님 몰래 학교

정적으로 꾸려갈 수는 있을지, 기량을 펼칠 무대는 마련이 될지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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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악인들에 비해서 다소 특이하다. 그는 세종대학교에서 지구과학


를 포기하고 중앙대학 한국음악과에 들어갔다. 동기생들 보다 4살이나

의 성격과 젊은 패기가 있었다. 그는 악기를 한국에서 공수하고 2008

문에 더 악착같이 입시 준비를 해 차석으로 합격했고, 한 학기 빠른 조

도를 시작으로 마침내 국외 최초의 민간 취타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많은 나이였다. 남보다 늦은 음악 입문에 부모님의 반대라는 악조건 때 기 졸업을 수석으로 했다.

그는 졸업 후 중앙대 은사이자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 안산시립국악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김재영 교수와의 인연으로 국내외 많은 공연을

함께 했다. 장사익, 김영임, 김덕수 등 국악계 큰 선배들과 연주하는 기 회도 얻었다. 2006년 그는 뉴욕으로 음악 유학을 왔다. 국악축전 공연

에서 200여 대연 주단을 능숙하게 지휘하는 이 단장의 모습을 보고 놀 랐다면 그를 단순한 사물놀이 연주자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춘

승 단장은 브루클린 컨서버토리 오브 뮤직에서 지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다.

공부를 마친 후 뉴욕에 남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이 단장

은 이곳에 다양한 장르의 국악 활동이 있었지만 유독 ‘취타대’는 찾아

년 여름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캠프장에서 행진에 따른 제식과 음악 지

앞서 말한 대로 무대의 크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연주 를 하면서 현지인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았고 조금씩 취타대의 활동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생긴 자신감으로 수

많은 대학에서의 공연, 자연사 박물관, 링컨센터, FBI 연주회, 뉴욕 메 츠 구장 공연 등으로 무대의 범위를 넓혔고 마침내 대규모 국악축전의 성공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항상 전통을 뿌리에 두고 세련된 음악으로 발전시켜 그 어떤 나라 의 예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계발시키는 것이 저의 의 무이며 책무라 여겨왔습니다. 우리 음악을 알리고 우리 예술의 혼을 전 세계에 불어넣는 일에 앞으로도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서 배운 취타대 퍼레이드를 거리축제

뉴욕 취타대의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이춘승 단장의 각오다.

디어로 가까운 지인들의 아이들과 함께 취타대를 조직했다. 사실 취타

* ‌ 취타대는 조선시대 임금의 어가행렬이나 군사행진시 나발, 태평소, 용고 등을 연

가 끊이지 않는 이곳 맨해튼 퍼레이드에서 재현하면 어떨까라는 아이

대는 대규모 인원과 악기 및 의상 등으로 한국에서도 하기 힘든 국악 장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보여준 ‘일단 하고 싶은 일은 지르고 보는’ 그

주하며 장엄한 행진을 하는 나라의 고적대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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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SHOW ME YOUR HEART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 합창축제’ 가 미디어 후원하는 ‘세계 합창축제(2017 World Choir Festival Concert)’가 10월 1일 오후 7시 카네기 홀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 (Issac Stern Auditorium/Perelman Stage)에서 열 린다. 이 콘서트는 GWB INTERNATIONAL FOUNDATION과 CTS America가 공동주최, 주관하고, JH ART Corporation이 기획을 맡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외 합창단 은 물론 지휘자, 단원 모두 휠체어를 탄, 지난해 구성된 대한민국 휠체어합창단까지, 이번 공 연은 음악적인 향취와 감동을 함께 전할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이번 행사는 해켄 섹 병원 후원으로 진행되는데 수익금을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기금으로 기부되어 그 의미 를 더하고 있다. 다음 달 공연을 앞두고 헤켄섹 병원 원혜경(Heather Won Choi) 이사와 황진 호 대표를 통해 행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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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세계 합창제 WORLD CHORAL FESTIVAL

생각해왔었죠. World Choral Festival의 공연취지는 제 맘에 먼저 와

은 이야기 하나에서 이 연주에 대한 계획을 시작했다. 멕시코 단기선교

하나하나에 참여의미를 부여하고, 스폰서와 공여자들에게 또한 동기

공연 기획자인 황진호 대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가질 수 있는 작 에 다녀온 김창완 이사장님(GWB INTERNATIONAL FOUNDATION)의 얘기를 듣고 ‘물질이 아닌 작은 정성만으로도 이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

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이 온 뒤, 일상을 들여다보며 문득

그 평범함에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보자라 는 마음이 들었다. 나눔과 실천을 위해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진 분을 모

닿았어요. 단순한 행사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공연자들을 와 생각을 전하는 면면을 느낄 수가 있었죠. 그러한 동기부여가 헤켄섹

병원과 제 친구들에게 이 공연을 소개하는 원동력이 된 겁니다.” 공연 수익금으로 소아암 환자를 돕는다는 세계 합창제의 행사 취지가 더욱 빛나 보이는 대목이다.

아 지난 1월 GWB INTERNATIONAL FOUNDATION을 창설했다. 일상

여럿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힘을

가 평범한 일상, 작은 생각들… , 다 같이 마음을 모아 부르는 ‘합창’이

국은 ‘WORLD CHORAL FESTIVAL’의 공동주최 방송국이다. 황진호 대

의 평범함을 통해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다 생각났고, 그 뒤 ‘부르는 사람과 듣는 모든 이가 합하여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합창의 축제를 만들자.’라는 결심을 하고 10월 1일 ‘카네기 아 이작 스턴 홀’에서 열리는 세계합창제를 기획했다.

CTS AMERICA(뉴욕지사 한은경 사장)와 조이 라디오(JOY RADIO)방송 표는 이른 시일 내에 국내 유수 합창단의 동참을 이끌어내고 이처럼 언 론의 협조까지 얻어냈다. 이 모두가 그의 참된 열정이 아니었으면 불가

능한 일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제 생각

을 모아서 만든 작은 행사 계획서를 가지고 GWB 재단 이사님들이 20 여 년간 알고 지내던 한국의 서울우먼 싱어즈 여성합창단을 찾아갔어

SHOW ME YOUR HEART

요. 1983년 국립합창단 지휘자 출신의 오세종 선생님께서 창단한 합창 단인데 제 계획서를 보신 합창단 임원진과 지휘자님께서 흔쾌히 참여 하겠다고 하셨죠. 정말 기뻤습니다.” 이어지는 동참에 힘입어 그는 조 금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계문화 중심의 공연장인 카네기홀

에서의 공연을 결정하고 민간합창단체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섭외 시 작 후 3주 만에 5개 단체(대덕이노폴리스, 수원시 어머니합창단, 서울 우먼싱어즈, 대구 릴리 하모니,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 참가확정을

마쳤다. 그중 특별히 기억하는 단체는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은 창 단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은 순수 민간 합창단으로서 합창단원 100명 이 휠체어를 타는 신체장애우로 구성되어 있어요. 지휘하는 정상일 교

수 역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우입니다.”라고 얘기하며 이 합창단의 동참에 특별한 고마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원 가족으로 구성된 대덕 이노폴리스, 평범한 일상의 어머니들로 구성된 수원어머니 합창단, 대구의 경북여고 출신 학연 동문으로 구성

된 릴리하모니. 이 모든 단체들이 모이게 된 배경, 상황 목적은 다 다르

지만, 단 하나 ‘합창’으로 음악을 하고자 하고, ‘합창’으로 나눔을 실천 하고자 하는 공통적인 분모의 마음으로 참가를 확정 지었다. 그뿐만 아

니라 악기로 합주하며 이 합창의 대화합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엔제이 클래식 오카리나 앙상블(CTS)이 참여를 확정 지음으로 한국에서는 총 6개 팀이 세계 합창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해켄섹병원 마케팅 디렉터Robert Budelman와 원혜경(Heather Won Choi) 이사

WORLD CHORAL FESTIVAL은 주최자이자 기획자인 황진호(GWB

INTERNATIONAL FOUNDATION 대표)씨의 끈질긴 노력과 헤켄섹 병

원의 동참을 이끌어 낸 원혜경(Heather Won Choi) 이사가 아니었으 면 감히 해낼 수 없는 큰 행사이다. 이 공연의 부제인 SHOW ME YOUR HEART는2017년 앨리스 아일랜드상 수상자인 원혜경 헤케섹병원 이

사가 만든 재단의 타이틀이기도 하다. 평소 나눔 문화를 실천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는 원혜경 이사는 “공연 기획자인 황진호 씨를 통해 이번 공연의 취지와 목적을 듣고, 제 마음에 감동이 왔어요. 저 역

시 사회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소 나눔을 통

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밝아질 수 있다면, 제 친구들에게 이제는 ‘당신

의 마음을 조금 나누어 귀하게 쓰일 곳들에 정성을 모아주자’라고 늘

황진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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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상 수상자 Stefanie R. Minatee 가 창단한 Jubilation Choir 의 참여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한 ‘세계 합창제’ 주요 참가팀

‘소아암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세계 합창축제의 취지를 이

해한 뉴욕, 뉴저지 합창단도 마음을 모아주기 시작했다. 뉴욕 효신

장로교회가 참여를 확정하였으며 Hackensack 병원이 “WORLD CHORAL FESTIVAL”의 메인 스폰서로서 함께 협력하고, 이 공연

의 수익금은 Hackensack Children’s Hospital에 기부하기로 결정 되었다. GRAMMY Awards (미국최고권위의 음악가상) 4회 수상의

JUBILATION CHOIR의 참가가 결정되었다. Jubilation Choir의 참가

수원 어머니 합창단

확정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참가는 황진호 대표와 원혜경 이사를 비롯한 행사를 준비하던 스태프들에게 감사를 연발하

게 만든 쾌거였다. Jubilation Choir의 동참 배경에는 세계금융의 중

심회사 중 하나인 BLACK ROCK의 디렉터인 Dr. Obie McKenzie와 그

의 아내 Mrs. Mckenzie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들은 세계 합창축제 가 소아암 환자를 돕는 행사로 이해하고 본인은 물론이고 Jubilation Choir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자처하였다.

대덕 이노폴리스 싱어즈

피아니스트 권다올 (DAOL KWON)의 편지

안녕하세요. 권다올입니다. 저는 좋은 부모님 덕분에 남보다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도 가졌으며 음악가의 꿈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뉴욕 카네기홀에서 ‘WORLD CHORAL FESTIVAL’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건 공연 수익금이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HACKENSACK CHILDREN’S HOSPITAL에 전달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자 제 마음속에서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훌륭한 공연에 부 족하고 미력하지만 제 재능이 이 공연에 나눔으로 쓰일 수 있고 동참하고 싶어서 기획자이신 황진호 대표님을 수소문하여 연락 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공연을 시작으로 저의 재능 나눔이 시작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WORLD CHORA FESTIVAL’ 공연 취지와 목적에 저는 제 인생이 새롭게 시작 할 동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공연을 통해 한없이 부족하지만, 작은사랑의 나눔에 저의 재능이 쓰임 받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서울 우먼 싱어즈

대한민국 휠체어 합창단

CTS NJ 클래식 오카리나 앙상블

권다올 양은 현재 독일 퀼른 국립음악대학의 재학하고, 독일 BERLINER KAMMER ORCHESTRA 와 프랑스 FRENCH CHAMBER ORCHESTRA 등 저명하고 유명한 단체와의 협연으로 활발한 활동중인 차세대 유망주 피아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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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 하모니



ART&CULTURE

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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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을 믿고 뉴욕에 도전했다

재즈 가수 김후나의 꿈 예전에 들었던 문학 수업 시간에 '전형' 이란 용어에 관 해 설명을 들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문학에서 전형 적인 인물이란 어떤 집단·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을 말한 다. 전형적 인물은 구체적 인물의 개별적 성격을 지니면 서 동시에 그가 속한 집단·계층의 보편적인 성격을 함께 띤다. 즉, 소설가가 어떤 시대와 사회를 배경으로 A라는 전형적인 인물의 관한 이야기를 쓰면, 독자는 특정한 A 라는 인물을 통해 결국 그 시대를 사는 같은 계층 사람들 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A 는 소설의 주인 공이 될 만큼 특별할 수도 있고, 동시에 A가 아닌 누가 되 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평범하기도 한 사람인 것이다. 전 형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은 그래서 특별하고 독특한 캐릭터의 매력을 느끼기 힘든 대신 '공감'의 여지가 넓다. 특히나 독자가 그 인물과 같은 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면. 가수 김후나를 인터뷰한 이유를 이런 서두로 꺼내보았 다. 서두라고 했지만 결국 그것이 본론이기도 하다. 그녀 는 한국에서 팝재즈 앨범 ‘Pinocchio’를 발매한 가수이자, 뮤지컬 Rocky Horror Show, Twelfth Night, 담뱃가게 아 가씨, All that jazz, Lunatic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한 뮤 지컬 배우이다. 하지만 늘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꿈을 이 뤄내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하는 ‘전형적인’ 뉴욕 한인 예 술가 중 한 명인 재즈 가수 김 후나. 뉴욕 맨해튼 시내 한 복판에서 그녀를 만나 뉴욕에서 이루고자 하는 그녀의 꿈과 도전을 들어보았다.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정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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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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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가수 성장기: 재능도 있었고 활동도 많이 했어요.

김후나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서 보컬을 전공했다. 같은 학교에서 연기 전공으로 학위도 받았다. 어린 시절부 터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었다.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하는 무대 체질이었다. 플루트 레슨을 오래 받아 기본기도 탄

탄했다. 즉 김후나는 어린 시절부터 끼가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확실했으며, 대중예술계의 명망 있는 교육 기관에서 착실하게 트레이닝을 받은 준비된 가수였다. 대학 시절과 졸업 후 그녀는 최고 스타의 길을 걷지는 않 았지만 노래와 연기 각 분야에서 비중 있고 의미 있는 활동을 꾸준히 해나갔다.

“가수로 활동하면서 MNET 가요제와 2003년 MBC 가요제에서 수상했어요. 밴드 '푸른 시절'의 메인 보컬 을 했지요. 마스터 카드 등 CM 송도 녹음했어요. 그러다가 2009년 EBS 헬로루키 신인 가수상도 받았습니 다. 2009년에는 펜타포드 페스티벌에서 메인 스테이지 단독 공연도 했습니다. 또 중국 상해 모델 선발 대 회 무대 공연, 주얼홀릭 브랜드 런칭쇼 등 무대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2009년 퓨전재 즈 계열의 솔로 앨범 'Hoona" 를 발표하면서 후나 밴드와 함께 북촌 아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했습니다.” 뉴욕입성: ‘우연히 행복해지다’ 제목처럼 행복한 도전을 찾아 뉴욕에 왔어요.

김후나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록키호러쇼'의 마젠타 역할과 뮤지컬 '십이야' 의 올리비아, 뮤지컬 '우연히 행 복해지다'의 김봉자 역할 등을 맡았으며 올 댓 재즈, 루나틱 등 다수의 뮤지컬에 출연했다. 이렇게 바쁘게 활동 하던 그녀가 어떤 계기로 뉴욕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늘 음악을 가까이 접했어요. 그러면서 언젠가는 꼭 뉴욕이라는 큰 음악의 도시에서 공부하고 뉴욕 무대에도 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제목도 운명을 말하듯이 ‘우연히 행복 해지다’ 라는 뮤지컬 작품을 통해 미국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서부를 시작으로 주요 도시를 거치며 공 연한 이 뮤지컬의 마지막 여정이 뉴욕이었습니다. 뉴욕에 도착한 순간 이곳에서 무언가 새롭게 도전해 보 고 싶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미국공연을 마치고 돌아간 후 이어 많은 공연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늘 반복되는 생활과 사회적 선입견 등 저를 묶어놓는 모든 것들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 었죠. 그래서 곧바로 어리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뉴욕행을 결심했습니다.” 진출기: 이곳에 오면 새로운 길이 보이고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어요.

김후나는 한국을 벗어나 뉴욕에 가고 싶은 욕망이 합쳐진 마음으로 잠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그녀에겐 절실

하게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뉴욕에 가면 성공할 수 있을까? 또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은 그녀의 발목을

잡은 건 가정 형편이었다. 부친의 사업 실패로 풍족했던 집안이 갑자기 기울었다. 그녀는 장녀였기에 망설임이

길었다. 하지만, 2014년, 김후나는 마치 30여 년 전 주머니에 100달러만 넣고 미국에 왔다는 1세대들처럼, 단 돈 500달러를 들고 JFK 공항에 내렸다.

“모두가 그렇듯이 큰 꿈을 안고 뉴욕에 오죠.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치만은 않은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 습니다. 한국에서 들고 온 돈이라고는 고작 500불 남짓이었고, 그 무모한 용기 덕분에 한국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서빙, 웨딩싱어, 홈케어까지 안 해본 파트타임이 없었어요. 물론 주된 직업은 무대에 서고 음악을 가르치는 일이었지만 가장 최고점이었을 때에는 직업이 4개 이상인 적도 있었어요.” 전형적인 뉴욕 고생담: 일하느라 너무 힘들고 노래할 시간이 부족해요.

돈을 벌려고 노력하면 벌 수 있는 곳이 뉴욕이다. 그래서 무작정 오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운 좋게 한인이 운영

하는 보컬 트레이닝 센터에 강사로 금세 취직이 되었다. 문제는 시간당 받는 수당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수업

을 영어로 진행했다. 1시간 수업을 위해 전날 새벽까지 영어로 연습했다. 시간보다 버는 돈이 너무 적었다. 그 래서 김후나는 초기 이민자의 정석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서빙 일을 시작했다. 오후 4시 출근, 새벽 4시 퇴근. 하 루 12시간을 서서 일하다가 탈이 나서 그만뒀다. 몸이 견디질 못했다.

"뉴요커라면 웬만해선 이해하는 부분일 테지만 그만큼 도착한 날을 시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 던 것 같아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의 음악 활동과 미래를 위한 투자였죠. 너무 신이 나 있었던 것 같아요.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모든 것들에…덕분에 평생 이야깃거리, 추억거리가 될만한 정말 많은 경험을 했어요. 이 수많은 경험이 음악이 되어 새로운 가수 김후나로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며 노력하 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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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이지 않은 그녀의 낙천성: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고 믿어요.

김후나의 음악: 어쿠스틱 사운드를 추구하는 나의 음악은 대중과의 진

긍정적인 마인드였다. 미래에 뉴욕에서 녹음할 앨범 구상과 자신의 밴

반복적인 멜로디와 기계 음악이 보편화된 요즘 추세의 음악과는 다르

김후나와의 만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녀의 대책 없는 낙천성과 드와 함께 무대에 설 계획을 말하는 그녀의 눈은 맑고 빛났다.

“이렇게 일을 하면 정말 하고 싶은 음악과 노래는 언제 제대로 할 수

심 교감입니다.

게, 그녀는 그루브있는 어쿠스틱 사운드를 추구하며 무대에서 노래하 는 게 무척 행복하다고 한다.

있을까, 내가 일을 하러 뉴욕에 온 건 아닌 데라는 걱정이 있죠. 너무

“대부분의 가수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도 노래할 때 가장 행복해요.

몸이 힘들 땐 내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맘이 왜 안 들겠어

무대에서 관객과 교감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살아있다고 느껴요. 그

요. 하지만 뉴욕에 온 걸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여기 온 목적을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내 음악이 따뜻한 손길이 되어, 누

절대 잊지 않아요. 찾고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꼭 생기는 곳이라고

군가에게 위안과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중들과 진심을 교

믿어요.”

감하는 가수이고자 언제나 노력할 거예요.”

새로운 기회: 프로듀서 Tom Salta와의 만남은 뉴욕에 살았기 때문에

꿈과 계획: 음악선교사가 되고 싶고, 더 나이 들고 여유가 있을 땐 뉴욕

우연히 라디오방송을 통해 알게 된 ‘라라라’ DJ 서라미, 김신원씨의 소

마음을 다친 사람들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음악 선교사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해요.

개로 비디오게임 '킬러 인스팅트(Killer Instinct)' 속 캐릭터인 '김 우

(Kim Wu)' 타이틀 송을 부를 아시안 여가수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

다. 그리고 실력파 작곡가 Tom Salta를 만났다. 그녀에게 찾아온 새로 운 기회였다.

에 재즈클럽을 오픈하고 싶어요.

가 되고자 하는 김후나. 그 꿈을 이루고 난 다음엔 또 어떤 꿈이 있을까?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고 여유가 생겼을 때 작은 재즈클럽을 뉴욕 에 오픈하고 싶어요. 그곳에 뮤지션들의 땀과 추억, 많은 것들을 담 고 싶어요. 기억하고 싶고요. 올해 말 혹은 내년 초쯤에 앨범을 계획

"코네티컷의 스튜디오에서 Tom Salta를 처음 만났어요. Tom은

하고 있습니다. Soul 느낌이 많이 가미된 pop 앨범이고요, 한국과 미

Whitney Houston, Tommy Page, Cher, Dru Hill 등 최고 뮤지션들

국 동시에 발매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 중이니 많은 기대와 응원을 부

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실력파 작곡가예요. 이런 분과 함께 작

탁드릴게요.”

업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일인데, 더욱 감사하게도 Tom과 제가 녹음한 곡이 ‘2017 GANG AMERICAN AWARD’에 최고의 보컬 상에도 노미네이트되어 시상식을 위해 샌 프란시스코에 다녀오기도 했죠. 늦깎이의 무모한 뉴욕 도전기가 없 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이죠. Tom과 저는 지금도 좋은 친구로서 음악정보 교류와 앞으로의 제 음악 활동에 대해 의논하곤 해요. 너무 나 감사한 일이죠.” 66

사람은 항상 행복하고 긍정적일 수 없다. 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은 비 록 지금 가진 게 없어도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 덕분에 웃을 수

있다. 아직도 뉴욕에 적응 중인 한 사람의 한인 뮤지션 김후나는 결코

쉽지 않은 뉴욕에서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꿈을 꾸고 꿈을 향해 나갈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을 이루고 더 여유로운 음 악으로 대중 앞에 설 날을 기대한다.


Photography by Kibum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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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ULTURE

음악으로 전하는 해피 바이러스

Young Artists Concert & NV Factory 유성환 대표 지난 초여름은 드라마 ‘쌈 마이웨이’ 주인공들의 달달한 러브 스토리에

정을 쏟는 엔지니어 덕분에 우리는 마치 현장에서 듣는 듯한 최고의 음

가 방영되는 날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주인공들의 연기력, 탄탄

의 음악을 녹음하고 편집해서 팬과의 만남을 이어주는 녹음실과의 인

웃고,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오래된 커플의 갈등에 눈물 흘리며 드라마 한 대본, 연출력이 돋보인 수작이지만 무엇보다도 배경음악의 가사와

상황이 딱 맞아떨어져 여주인공의 마음이 내 마음인 양 아파하며 더 슬 퍼했었다. 이렇듯 음악은 흥이 돋구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게도 하며 눈

물이 핑 돌게 하거나 지친 이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 마법의 힘을 지 닌 무언의 언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해피 바이러스이다.

만약 녹음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에게 이러

악을 감상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주가는 공연장 못지않게 자신

연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면에서 2007년 오픈한 NV Factory는

뉴저지 지역 음악인에게 행운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NV Factory는 뉴 욕, 뉴저지뿐만 아니라 타지역 분의 녹음 예약이 밀려 있을 정도로 이

지역 내에서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2013년 지금의 더 넓은 장소 로 이전하고 나서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회를 기획하고 연주 장소를 제 공함으로써 해피 바이러스를 전파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한 감동이 널리 전파되긴 어려웠을 거다. 우선 쉽게 음악을 접할 수 없

이뿐만이 아니라 NV Factory 대표 유성환 씨는 청소년만 참여하는

테니 말이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시공간을 초월하며 음

있다. 이번 9월 24일 5번째를 맞이한다는 Young Artists Concert는

으며 라이브 무대에서 감상한, 일부 제한된 사람만 그 감동을 느꼈을 악을 감상할 수 있고 녹음 기술의 발달로 라이브보다 더 깨끗한 음질로 원하는 음악을 언제라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연주자는 최상의 음악을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한다. 그러나

최고의 음질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녹음 엔지니어의 숨은 노력 역시 무시 할 수가 없다. 한음 한음, 미세한 숨소리까지 잡아내며 녹음실에서 열 68

음악회를 기획하여 예비 음악인에게 무대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고 음악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단순한 연주 기회만 주는 것이 아니

라 음악으로 행복을 전하기도 한다. 즉 티켓 판매 수익금은 소외된 계

층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를 무료로 여는 단체인 ‘EnoB’에 후원하며, 연주에 참여한 학생들은 EnoB 에서 발급하는 certificate를 받게 되 는 연주자와 관객, 우리의 이웃 모두에게 해피 바이러스를 널리 퍼지 게 하는 뜻깊은 행사이다.


획, 마케팅을 위한 홍보 영상, 티켓팅, 언론 홍보 등 연주자들 못지않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예비 음악도를 지원해줄 수 있다는 점 에 더없는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면서 지속적인 후원의 뜻을 전했다.

9월 24일 일요일 7시, 5번째로 열리는 Young Artists Concert는 그

동안의 명성에 걸맞게 수준 높은 연주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던 4명 의 앙상블 그룹이 참여한다. 관악기를 연주하는 고등학생들과 피아

노 타악기로 구성된 Primo Ensemble, 초등학생으로 이뤄진 Piano trio, 두 그룹의 String quartet이 전하는 해피 바이러스는 과연 어떨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이들과 함께 콘서트를 관람하면서 음악

으로 행복을 전달받고 외로운 이웃을 돕는데 함께 하시기를 적극적 으로 권해드리고 싶다.

글 정선분_바이올리니스트

“리코딩 스튜디오 안에선 거짓이 없습니다. 리코딩은 연주자의 연주

매네스(Mannes) 음대 전문 연주자 과정 졸업 NY Classical Youth Orchestra 디렉터 클로스터 Sun Violin Studio 원장

실력, 준비과정, 속마음까지 여과 없이 보여지기 때문에 노련한 연주 자들도 진땀을 빼는 극한작업입니다. 저는 어린 학생들과 작업을 할

때마다 그들의 에너지와 맑은 품성에 힘을 받고 어려움을 견뎌내는

지혜와 끈기에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학생들과 함께 만드는 음악은 더 멋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그들에게 작은 무대를 만들어 주 고 싶었습니다.”

유성환 대표는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쁜 스케줄에도 Young

Artists Concert만은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행사를 위해서는 기

참가자격: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 Ensemble 그룹 Audition: 비디오 연주 영상 문의: ‌ NV Factory 400 Sylvan Ave, Englewood Cliffs, NJ 07632‌ Tel: 201.970.7456

NEW JERSEY VOICE ACADEMY 뉴저지 성악 아카데미

대상: 찬양대원 (ALL VOICES), 일반인, 7~11학년 학생 (남,여)

찬양대 성가합창곡 파트연습 및 합창발성 지도 CCM, 가스펠 찬양지도 (직접반주) 7-11 학년 카운티, 리저널, 올스테이트 합창 오디션 준비 입시용 포트폴리오 CD 제작 (직접반주) 한국가곡, 세계명곡, 주옥같은 뮤지컬과 디즈니 명곡들 사랑으로 하는 특수 아동을 위한 노래 레슨 선생님과 함께하는 가족 홈콘서트 이벤트

Young Artists Concert Audition 안내

Jae Woong Yoo TENOR

한양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대학원 졸업 Mannes 음대 전문연주자 과정 카메라타 남성합창단 부지휘자 겸 Soloist 성가대 지휘자 / 연주 및 레슨 20년 경력 직접 모든 곡 피아노 반주

전화문의 : 201-218-2040 카카오톡 : okgood365 이메일 : njvoiceacade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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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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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심리 이야기

아빠는 딸 영화의 줄거리는? 공부, 공부,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만년 과장 아빠. 세상 다 싫지만, 선배만은 엄청 좋은 여고생 딸. 딸이 꿈꾸던 첫 데이트가 현실이 되던 찰나, 아빠가 절실한 승진의 기회를 잡나 싶던 그때 두 사람의 몸이 바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방영일 : 2017-04-12 / 출연 : 윤제문, 정소민, 이일화, 신구 아빠와 딸의 갈등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는 대사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아빠와 사춘기 딸은 완전 사이가 멀어 져 있습니다. 출근과 등교를 같이 하면서도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지하철역에 도착해서는 서로 다른 라인에서 지하철을 기다립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만년 과장 아빠는 생존경쟁 속에서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실적이 우선시 되는 전투장 같은 사업 체, 그리고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존에 더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빠가 딸을 바라보면서 공부 공부하게 됩니다.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살라고 자기도 모르게 잔소리가 늘어난 것이지요. 반면, 딸은 아빠를 피합니다. 말하기도 싫어하고, 같이 걷지도 않지요. “네가 회사에서 아빠가 어떻게 사는 줄 아니?” 라고 묻는 아빠에게 “그냥 공부만 하라고? 아빠가 한 번 해봐. 그게 가능한지? 아빠가 내 인생 한번 살아 보라고 ” 라며 매섭게 쏘아댑니다. 다른 입장에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다투기만 하지요. 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나? 어느 날 심하게 다투고 함께 차를 타고 가던 두 사람은 교통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잠이 깨지 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두 사람의 몸이 바뀌었습니다. 아빠는 딸이 되고, 딸은 아빠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나와 아빠 친구인,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서로 몸이 바뀐 사실을 확인시키려 합니다. 친구 의사는 그저 비웃 기만 하고, 그냥 내보내지요.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빠의 영혼이 몸에 들어간 딸은 태도와 성격이 완전 히 바뀝니다. 거친 말투, 팔자걸음, 쩍 벌린 앉은 자세, 짧은 교복 치마가 불편하자 바지로 갈아입는가 하면, 고 교 밴드 오디션에 참가해 통기타를 메고 강산에의 ‘삐딱하게’를 걸쭉하게 부릅니다.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간 아빠는 사춘기 딸의 고민을 피부를 느끼며 ‘공부만큼 쉬운 게 없다’며 딸을 닦달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반면, 정글 같은 무한 경쟁, 직장생활을 처음 경험한 딸은 책임감이라는 말의 무게와 그 무게에 짓눌려 살았을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결국 아빠를 생각하며 눈물을 쏟습니다. 어떻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공감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생겨납니다. 영어로 ‘Stand in someone’s shoes”라고 하지요. 다른 사 람의 신발을 신어보게 되면 신발 주인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공감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서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보지 않으면 공감하기가 쉽지 않지요.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 그 사람의 처 지와 입장을 자꾸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주장만을 하게 되면 상대방과 반목이 커질 수밖에 없습 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보입니다. 많은 경우 나 자신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세계적인 윌리엄 유리는 ‘혼자 이기지 마라’ 저서에서 사람과 싸우지 말고 문제 와 싸우라고 조언합니다. 소통할 때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가르치려 하면 안 됩니다. 대신, 존중하고 이해하고 잘 들어줍니다. 그리고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문제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아빠가 된 딸이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방 꼴이 이게 뭐야...” 버스 창에 비친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된 딸은 “아빠 얼굴이 왜 이렇게 늙었어?” 라고 독백합니다. 서로의 처지가 되어보니 서로의 입장과 마 음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는 아빠와 딸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과 회복의 과정을 통해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과 소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현) 뉴욕차일드센터 부사장 / 현) AWCA 가정상담소 소장 / 현) 윤성민 심리건강 클리닉 소장 71


LIFESTYLE

세계 경제 문화의 중심인 뉴욕 시의 중심지

Center of the Center

맨해튼 5번가 Photography by Kim Do Young 72


단위 면적당 임대료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맨해튼 5번가, 피프스 애비뉴(5th Ave) 미드타운은 대표적인 뉴 욕의 관광 지역이다. 센트럴 파크 입구인 옛 플라자 호텔에서 시작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까지 이어지 며 명품 매장과 랜드마크 건물들이 즐비한 이 거리는 언제나 전 세계에서 온 쇼핑객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지난해 연말부터는 트럼프 타워가 또 다른 구경거리로 등장하면서 가뜩이나 인파로 가득한 이 지역의 혼잡 함을 더 하고 있다. 하지만 5번가의 의미를 번잡한 미드타운에만 한정할 수 없다. 뉴욕시의 성장과 발전 역 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세계 경제, 문화, 패션의 중심가 ‘맨해튼 5번가, 5th Ave’에 대해서 알아본다. 글

편집부

Photography by Kim Do Young

맨해튼 5번가(5th Ave)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브로드웨이는 뮤지컬 극장들이 몰려 있는 타임스퀘어 인근의 몇 블록 지역이지만 실제

로는 어퍼웨스트에서 소호까지 연결되는 긴 대로인 것처럼, 5번가 역시 맨해튼의 남북을 중심으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다. 할렘 143 가에서 그리니치 빌리지의 워싱턴 스퀘어파크까지 그 길이는 150블록에 이른다. 최고 급 브랜드 매장과 럭셔리 호텔, 고층 아파트, 성당, 뮤지엄, 히스토릭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선 뉴욕의 상징적인 거리이며 지리적으로도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뉴욕 사교계의 명사인 캐롤린 애스토어가 1862년 34가에 저택을 지은 후부터 19세기 고급 주택가로서 피프스 애비뉴(5th Ave)의 명성은 확고해졌고, 고층 상업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1893년 월도프 아스토

리아 호텔(Waldorf Astoria Hotel) 이후부터다. 마차가 다니는 좁은 길이었던 5 애비뉴는 차량과 건물이 늘면 서 20세기 들어 조금씩 확장 공사가 시작되었고 1차 대전 이후 미드타운의 급격한 개발과 확장으로 미국의 발

전과 성장을 상징하는 지역이 되었다. 1900년대 초반 월 스트릿의 경제가 부흥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대두되어 떠오르고 있던 시절에 록펠러, 반더빌트를 비롯한 대부호들이 이 거리에 자신의 빌딩과 저택을 마련했다.

1917년 미국 신흥 부자들을 타겟으로한 명품 시계 브랜드 ‘C’가 자체 매장을 오픈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명

품 브랜드들이 차례로 이곳에 매장을 열면서 현재 명품 거리로 자리매김 되었다. 1920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에디스 와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라는 바로 20세기 초반 이 시기에 5번가 상류층의 모습

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008년 포브스 매거진은 ‘미드타운 피프스 애비뉴(5th Ave)’를 세계에서 가장 땅

값이 비싼 지역으로 선정했고, 어메리칸 플래닝 어쏘시에이션 (APA) 은 이곳을 미국에서 반드시 찾아봐야 할 거리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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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by Kim Do Young

명품 브랜드 매장과 백화점

뮤지엄 마일

오네(Montenapoleone), 홍콩의 커우스웨이 베이(Causeway Bay), 프

집되어 있어 ‘뮤지엄 마일(Museum Mile)’이란 명칭이 붙었다. 워싱턴

세계적으로 유명한 쇼핑 장소를 들자면, 이태리 밀라노의 몬테나폴레 랑스의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Elysees) 와 함께 ‘티파니

에서 아침을’ 무대였던 티파니 보석 상점을 비롯해 무수한 영화 속 장

면에 등장하던 ‘맨해튼 5번가’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뉴욕 49 가에서 60가 사이에 최고급 백화점인 브룩스 브러더스와 삭스를 비롯해 도로 양편으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다. 루이비통ㆍ베르사체ㆍ크 리스티앙 디오르ㆍ불가리ㆍ에르메스 등 우리가 흔히 아는 명품 브랜

드의 총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꾸며진 매장 쇼윈도는 그달 잡지광고에 등장하는 신상품을 3D로 보는듯한 느낌까지 선사한다.​

이 지역 임대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서 2016년 기준 평당 피트당

무려 3, 500달러에 이른다. 10평짜리 가게 하나면 월 10만 달러의 임대 료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임대료는 매장에 햇볕이 잘 드는가가 중요

한 요소다. 쇼핑객들은 햇살이 잘 드는 거리로 걷는 경향이 있고 자연

광은 상점에 전시된 물건들을 더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교통도 중요 하다. 지하철 출구가 있는 쪽 거리의 유동 인구가 많으므로 이쪽에 있

는 상점들의 임대료가 높다. 또한, 주변에 어떤 상점들이 있는가도 중 요한 요소다.

햇살이 잘 드는 동쪽의 경우 3,500달러였던 임대료는 조금 덜 드는 서 쪽의 경우 3,000달러로 내려간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임대료는 급격 히 낮아져서 49가와 42가 사이는 1,000달러이고, 42번가와 34번가 사

이는 425달러로 더 떨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싼 임대료임이 분명하다. 74

82가와 105가에 이르는 어퍼이스트 지역 5 애비뉴에 미술관들이 밀 D.C 에 7개의 스미소니언 뮤지엄들이 도보거리에 밀집되어 있듯이 어 퍼이스트에서도 다리품을 팔면 과거와 현대, 동양과 서양의 미술 작품 들을 하루 내에 두루 섭렵할 수 있다. 큰 차이가 있다면 스미소니언 뮤

지엄은 7개 건물을 모두 보는데 입장료가 전혀 들지 않지만, 뮤지엄 마 일 내 건물들을 순회한다면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무료도

있다. 1979년 6월 26일 시작된 뮤지엄 마일 페스티벌은 6월 둘째 주 화

요일 열리는데 오후 6~9시 사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10개 박물관 모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110가: Museum for African Art 105가: El Museo del Barrio

103가: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92가: The Jewish Museum

91가: ‌ 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part of the Smithsonian Institution)

89가: National Academy Museum and School of Fine Arts 88가: Solomon R. Guggenheim Museum 86가: Neue Galerie New York

82가: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리고 뮤지엄 마일에는 속하지 않지만, 70가 코너에도 작은 미술관인 Henry Clay Frick House가 있다.


Photography by Kim Do Young

백만장자의 거리

19세기 후반부터 뉴욕 부호들은 59번가와 96번가 사이를 따라 센트

럴 파크를 마주하는 저택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 William

B. Astor House, William A. Clark House, Felix M. Warburg House, Morton F. Plant Houses와 같은 저택들이 줄줄이 5번가(5th Ave)에 들

어서면서 ‘백만장자의 거리(Millionaire's Row)’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1916년 5번가(5th Ave) 건축사에 이정표가 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제이스 버든 2세의 개인 주택이던 72가 코너의 건물이 다세대가 거주

하는 아파트로 개조된 것이다. 이 건물의 변경 이후 5번가(5th Ave)개 인 주택들이 차츰 아파트 건물로 바뀌었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로 뉴욕시는 1922년 5번가 건물의 층수를 제한했다. 오늘날에도 5 애비

뉴 59가 북쪽 백만장자의 거리에서 1920년대에 지어진 고풍스럽고 우 아한 라임스톤 건물들의 외관을 감상할 수 있다.

랜드마크

5번가에는 뉴요커와 미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건물들이 많다. 미국과 뉴욕의 옛 건축 모습, 발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천문학적인 가치의 관광 자원인 이 건물들은 엄격하게 관

리, 보호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지정하고 보조하는 대표적인 내서녈

랜드마트 빌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34가), 플랫 아이언 빌딩 (23

가), 뉴욕 공공 도서관 본점 (42가), 록펠러 센터 (47가), 세인트 패트릭 성당 (46가) 등이다. 뉴욕시 차원에서 지정한 랜드마크 건물들은; 뉴욕

공공 도서관 (40가), 트럼프 타워 (56가), 엘리자베스 아덴 빌딩 (54가), 조지 반더빌트레지던스 (54가), 스위스센터 빌딩 (49가), 고람 빌딩 (36

가), 로드 앤 테일러 (42가), 삭스 백화점 (51가), 세인트 레지스 호텔 (55 가) 등이 있다. 한편 건물은 아니지만 5 애비뉴 미드타운 중심의 브라

이언트 파크는 센트럴 파크와 함께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겨 찾는 도심 속의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퍼레이드

뉴욕은 광장이 아닌 길의 문화다. 스트릿과 애비뉴의 문화다. 모든 일 은 길 위에서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5번가는 뉴욕시에서 벌어지는 퍼 레이드가 가장 많이 열리는 전통적인 행진의 장소이기 하다. 국경일 기

념 퍼레이드는 물론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뉴욕시 위상에 걸맞은 다양 한 인종별 퍼레이드 그리고 게이 퍼레이드와 할로윈 퍼레이드 등이 다

채롭게 5번가 위에서 벌어진다. 가장 역사가 깊은 행사는 4월의 세인 트 페트릭 퍼레이드, 가장 눈요깃거리가 많고 TV로 생중계되는 메이시 스 백화점의 추수감사절 퍼레이드가 대표적이다. 14가 그리니치 빌리

지를 중심으로 6월에 열리는 LGBT 퍼레이드, 라티노들의 축제 푸에르 토리칸 데이 퍼레이드도 빼놓을 수 없다.

One of New York's other landmarks, Flatiron Building Photography by George 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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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랑 엄마랑' 김민재 미술교실

폼보드 연필 문양 판화 가정에서 조각도 없이 연필을 이용해 손쉽게 판화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폼보드 연필 판화>를 소개합니다. 연필로 눌러 그림을 그려 음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을뿐더러 어린아이들도 쉽 게 진행할 수 있어 스케치부터 찍어내는 판화의 완성 과정 내내 성 취감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업입니다. 음영이 드러나 문양의 윤곽 이 또렷해지고 판화의 특징인 명도 대비를 느낄 수 있음으로 가장 어두운색인 검은색으로 찍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같은 원판 을 이용해 여러 장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판화의 큰 장점도 알려 주시면서 이러한 판화 기법을 이용해 미술의 산업화와 대중화를 가 져온 현대 미술작가 앤디 워홀을 소개해 주시면 더욱 좋겠지요. 정리

편집부

준비물 : ‌ 도화지, 폼보드 (or 스티로폼 트레이),‌ 연필, 붓, 여러 가지 물감, 롤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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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1_ 바탕지 만들기

건조가 빠른 아크릴 물감으로 준비해 주세요.

도화지 중심부분을 기점으로 색칠합니다.

* 동 ‌ 심원 또는 사각형이나 기타 다른 형태로 작업을 해도 좋아요.

밝은 색감을 칠할 수 있게 유도해 줍니다. * ‌ 명도대비를 느낄 수 있어요.

* 빨리 말라야 하므로 얇게 칠해요.

Step 2_ 폼보드에 눌러 그리기

도화지의 절반 사이즈로 자른 폼보드지의 한 쪽 면의 종이를 벗겨내 주세요.

* ‌ 폼보드지에 종이를 벗겨내 주어야 연필그림 을 그리기가 쉬워요.

* ‌ 폼보드 대신 스티로폼트레이를 재활용해도 좋아요.

연필로 눌러 그림을 그려주세요.

* ‌ 화면이 비어 보이지 않게 촘촘히 그림을 눌 러 그려요.

* ‌ 폼보드 두께의 1/3 이상이 패이도록 그림을

문양을 가득 그리지 않으면 예쁘고 화려한 바 탕이 가려져 판화를 찍어 냈을때 시커멓게 나 온다는 사실에 유의하세요.

깊게 그려야 좋아요.

Step 3_ 특징적인 부분 완성하기

롤러를 이용해 검정색 물감을 칠해 줍니다. * ‌ 롤러가 없다면 붓으로 칠해도 좋아요.

도화지에 꽉 차게 찍어줍니다.

* 물감이 마르지 않게 재빨리 찍어요.

밝고 어두운 명도 대비를 느껴봅니다.

글 아동미술칼럼니스트 김민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다수의 디자인 공모전 수상 경력과 쥬얼리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현재 미동북부 뉴저지주에 거주하

고 있으며 www.Goodmandoo.com 네이버 파워블로거이자 www.Missyusa.com “미술이랑 엄마랑”의 아동 미술칼럼니스트, 한소망 한국학교 교감. Fort Lee에서 “미술이랑 가베랑”을 운영 중이다. 저서로는 <창의 폭발 엄마표 판타스틱 미술놀이>가 한국과 중국에 출판 번역되어 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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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무서운 사모님들 글 박원영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New School 대학원에서 Media Studies 전공 <뉴욕중앙일보> <라디오 코리아> <뉴욕한국일보> 전 기자. 에세이집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저자

Photography by Kibum Kim 84


“아니 또 4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사모님 2명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사모님 B는 한숨을 쉬면서도

나를 쫓아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나이가 더 많은 사모님 A는 건물 계단에

겠단다. 내가 순두부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사는 사람 생색도 안 나게 순두 부는 무슨. 고기랑 냉면으로 합시다.” 한다.

주저앉아 버린다.

두 분은 자식들 집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나는 돈을 벌었다는 흐뭇함에 분

“아이고, 나는 못가. 너 혼자 보고 와라”

술 한 병 시키자는 말은 못 하고 있는데 사모님 B가 너무 반갑게도 “우리 술

후덥한 여름날 오후였다. 두 분에게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월세 2,000달러 스튜디오를 보여주러 도착한 참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5층 워크업

위기 좋게 등심을 먹는 건 좋은데…. 소주가 무척 당기는 것이다. 내가 먼저 한잔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해주신다.

건물이다. 뉴욕시엔 이런 5, 6 층 건물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 온 두 사모님

권커니 잣거니 낮술을 하다 보니 깍듯이 ‘어머님’, ‘박 선생님’하던 형식적인

아들은 뉴욕의 같은 디자인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 전 아들의 방을 구해주

때 반드시 나오는 질문이 있다. “미국엔 언제 오셨냐. 그리고 왜 오셨느냐.”

에겐 기가 막힌 노릇이다. 50대 중반인 사모님 A와 40대 후반 사모님 B의 고 살림살이까지 마련해 주려고 직접 오셨다. 유학생 자녀에게 비싼 등록금 과 렌트비를 지원해줄 만큼의 재력은 있는 분들이다. 그래서 여성의 나이와

지위에 대한 어떤 폄하의 의미도 없이 그냥 편하게 ‘사모님’이라 호칭한다.

뉴욕의 물가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각오는 하셨겠지만, 막상 둘러본 뉴욕의

분위기는 어느덧 사라지고 농과 웃음마저 오간다. 미국에 살다 보면 이럴 상대방의 반응은 예상하면서도, 굳이 거짓말이나 숨길 것까지는 없어서 뉴 욕의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고 했다.

방들은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비쌌고 형편없었다.

“어머, 멋있으시다.” 사모님 B가 짧은 탄성을 내더니 술잔을 내민다.

“그래도 한국 돈으로 200만 원이 넘는데 어떻게 이런….”

솔직히 말하면 손님들 만나서 내 경력을 슬쩍 써먹기도 했고 그 반응을 즐

부분이 한국에서 보면 재건축을 벌써 해야 했을 낡은 빌딩이었다. 건물에

것이 뭐가 멋있는 일일까? 갈수록 마음이 씁쓸해져 그 이야기는 가능하면

방을 볼 때마다 어안이 없는 표정들이었다. 월세 200만 원 넘는 아파트 대 들어가면 복도는 바퀴벌레가 나올 것 같이 어둡고 침침했다. 방이 따로 없

는 원룸들이었고, 고시원보다 조금 넓었고, 걸어 올라가는 건물 4, 5층이었

고, 방에 세탁기는커녕 건물 안에 세탁실도 없었고, 마룻바닥은 삐걱 소리 를 냈다.

계단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는 저 사모님들의 고충을 이해는 한다. 더운 여

긴 적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영화를 공부한 안 꺼내려고 하고 있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서류를 작성하고 브로커 수수료 를 결정했다. 1년 렌트비의 7.5%라는 단가가 정해져 있지만 내심 후하게 깎아주려고 생각했고, 그래서 후한 금액을 말했다.

름날 뉴욕에서 지하철을 타는 건 정말 고역이다. 전철역에 대부분 에어컨이

….

맞춰 바쁘게 옮겨 다니려면 맨해튼에서 택시를 탈 수가 없다. 러시아워에

갑자기 아줌마 근성들 나온다. 조금 전의 화기애애한 분위는 순식간에 사라

없기 때문이다. 택시비가 아까워서 못 탄 게 아니었다. 빠듯한 약속 시각에

는 걸어서 30분인 거리가 택시로 30분이 걸리기도 한다. 한국에선 이런 폭

염에 거리에 나서지도 않을, ‘10보 이상은 무조건 택시를 탈’ 돈 많은 사모

졌다.

님이 찜통 전철역에서 기다리고, 만원 지하철에 껴 흑인과 백인의 겨드랑이

막무가내로 수수료 액수를 후려치는데 사모님 B는 불쌍한 척하고 사모님 A

이 빠져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다. 나는 원래 여자랑 싸우면 못 이기는데 특히 이런 무서운 아줌마들에겐

냄새를 맡아가며 기진맥진 나를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또 4층이란 말에 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는 이곳에 사는 분들이 “뉴욕에 사는 매

는 무섭다. 후하다고 제시한 준 금액의 두 배를 깎으신다. 꼼짝 못 하고 당했 당할 도리가 없다.

순간이 아주 행복하고 즐거워 못 견딜 지경”이라는 듯 번듯한 풍경 사진을

거의 이런 상황이다. 어떤 사람이 장에 가서 물건을 샀다. 상점 주인이 2만

하고, 번잡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다.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는

다? 아이 왜 그래 사람이.” 그리고 가버린다. 합의고 뭐고 필요 없다. 상점

자주 올린다. 하지만 내가 늘 주장하듯이 뉴욕은 비싸고, 불편하고, 불친절 사람들이 결국 진짜 뉴요커다. 한국에서 잠깐 들른 사모님들에게 그 불편함 을 즐기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다.

“지쳐 쓰러져 있는 그대들은 그래도 맨해튼 아파트에 자식들을 넣어줄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스스로 대견해 하세요. 지금 퀸스와 브루클린에서 룸메 이트를 열심히 찾고 있는 유학생들이 부지기수입니다.”라고 속으로 위로해 줬다.

어쨌든 두 사모님과 다음날도 아침부터 발품을 팔았다. 다행히 두 분 모두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하나씩 발견했다. 계약하기로 결정하고 서류 준비를

위해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어중간한 오후 시간인데 사모님 A가 점심을 사

원을 부른다. 승강이가 벌어진다. 손님이 딱 1만 원 한 장 놓고 “됐죠? 된 거 주인은 멍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당한다.

사모님 A가 “기분 나빠 하지 마, 내가 비싼 점심도 사줬잖아. 밥값이 200불 이나 나왔어.”라며 내 어깨를 다독거린다.

“그래서 내가 순두부 먹자고 했잖아요. 고기 안 먹고 200불 더 받을걸” 사모님들이 내 말에 기분 좋은 듯 하하하 웃는다. 누가 전문가인지 가려진 순간이다. 난 한참 아마추어다, 아직.

* 저자가 브로커로서 2015년 여름 겪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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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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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엄마들 모임

Anby Lane 가정에서 살림하는 주부 중에는 전문가 이상의 손재주와 재능을 가진 분이 많다. 재능을 살려 Handmade 제품을 만들어 상품화시 키기도 하고 제품에 따라서는 대기업 상품 이상의 인기를 얻기도 한다. 아마존 등 온라인 쇼핑이 대세인 요즘엔 취미로 만든 상품 으로 부업을 넘어선 주 수입원이 되는 세상이다. 앤비라인(Anby Lane)은 전업주부로서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이 모여 숨겨진 재능 을 꺼내어 Handmade 제품으로 만들고 이를 필요로 하는 분과 연 결하여 수익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생겨난 모임이다. Anby Lane 을 이끄는 대표 Shana Kim 씨는 네 아이의 엄마이자 주부이다. 손 재주가 뛰어난 그녀는 디자이너이자 웨딩 플레너 일을 하면서 자 신과 같은 재능을 가진 주부를 모아 이 모임을 만들었다. Shana Kim (전 이영희 한국의상 디자이너, NGL Group 대표, Shana & Co Wedding Stylist Company 대표, Vonore15 대표)씨를 만나 앤 비라인(Anby Lane)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글

편집부 사진 Anby Lane 제공

앤비레인의 뜻 함께 하나가 되어서 서로 지지하고 움직이고 엄마들을 먼저 생각하면 서로 지지대가 되어주고 그리고 함께할 때 뭐든지 가능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Anby Lane A is for activities, for you have many 활동하고 N ‌ is for number one, make sure to take care of yourself above all others 엄마가 우선이 되며 B is for buoy, you encourage those you see. 서로를 지지하며 Y ‌ is for yes, always open to new possibilities 모든 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드는것 Lane 함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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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주부가 해야 할 일은 사실 무척 많다. 전업주부면 아이도 키우면서 일도 해야 하고 육아와 교육도 주부의 몫이 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면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하고 싶은 일은 많지만, 혼자 하기에는 지치는 일을 다 같이 모여 해보자는 생각으로 이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혼자서 불가능한 일이지만 다 같이 하

면 가능할 수도 있고 새로운 길도 생기듯이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Anby

Lane을 통해 삶의 활력이 생기고 아이를 키우는데 좋은 에너지로 바뀌면 아이들이 더욱 건강하고 밝게 자라 더 나은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다. 엔비레인의 참여는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던 부분이 새로운 시작과 함 께 사회와 연결이 되고 삶의 희망을 찾아주는 길이다.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앤비레인(Anby Lane)의 주 사업은 웨딩이나 첫돌, 칠순, 팔순 등 특별한 파티를 위한 플랜을 해준다. 뉴욕, 뉴

저지의 기억에 남을 파티 장소 섭외나 음식, 꽃, 사진, 헤어 메이크업, 사회자, 답례품 등 파티를 준비하는 고객

을 대신하여 특별한 파티가 진행되도록 모든 플랜을 제공한다. 꽃, 돌상, 백일 상 아이들 파티 소품과 의상은 대 여나 맞춤으로 제공하고 하며 웨딩, 돌. 팔순 등의 파티계획뿐만 아니라 결혼을 준비하는 신부를 위한 브라이 덜샤워, 태어날 아기를 위한 베이비샤워, 아이들 생일파티 등 소규모 파티에 관한 파티준비도 섬세하게 준비해

준다. 특별히 첫돌을 준비하는 엄마들을 위해서 돌파티 플랜 뿐만 아니라 셀프로 돌상 데코용품과 아이들 의상 을 렌탈할 수 있는 서비스와 핸드메이드 답례품과 카드 등을 직접 맞춤으로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

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핸드메이드를 좋아하는 분을 위해 프랑스 자수, 재봉, 뜨개, 퀼트, 유리공예 클래스와 예

비엄마를 위한 태교 배냇저고리, 태교 아기 이니셜 자수, 태교 아기 소품 뜨개질, 어린아이를 위한 아동복 만들 기, 엄마를 위한 생활한복 만들기, 꽃꽃이 , 앙금 플라워떡케이크, 디저트 쿠키 만들기 등 다양한 클래스가 준비 되어 있다.

어떤 제품을 판매하나?

앤비레인 핸드메이드 제품은 솜씨 좋은 엄마가 함께 참여해서 만든 뜨개질, 자수, 헤에 악세사리, 쥬얼리, 그림,

케이크, 쿠키, 비누 등 다양하다. 모든 상품이 회원들이 직접 핸드메이드로 한땀 한땀 정성 들여서 만든 상품이 다. 프리미엄 맞춤 주문 방식으로 주문도 가능하다. 재능과 솜씨가 있고 핸드메이드를 사랑하는 분이라면 언제 라도 엔비레인에 참여가 가능하다. 참여 방법은?

집에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작은 제품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언제든 참여하실 수 있다. 또

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핸드메이드 맞춤 주문식 상품을 원하시는 분은 웹사이트 혹은 전화로 더 자세한 정보 를 얻으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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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레인 회원 / 김유겸

엔비레인 회원 / Jina

엔비레인 회원 / 구연주

엔비레인 회원 / Garce Shin

엔비레인 회원 / 조재영

엔비레인 회원 / Su

엔비레인 회원 / May Choi

엔비레인 회원 / 허다솔

엔비레인 회원 / 윤경혜

비누

노랑색 뜨개 발판과 아이 옷

떡의 화려한 변신

퀼트 가방/소품

자수 침봉

쌀베이킹 & 플라워케익

그림 액자

수채화 그림

양초 방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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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인의 아내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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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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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엄마 홍정연 (두 번째이야기)

우르두어, 영어, 한국어를 하는 우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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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때 중점을 둔 부분이 ‘정체성(identity)’이었다 엄마와 파키스탄 아 버지 그리고 미국 국적인 아이들이 다국적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성장 해 나갈지 가장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부부가 흔들림 없이 우리의 ‘identity’를 지키다 보니 아이들도 그대로 보고 배 운 것 같아 다행이다. 나를 닮으라고 한국 문화를 따라 해야 한다고 강 요하지도 않았고 미국의 자유 문화를 금지하지도 않았다. 우리 아이들 은 런닝맨과 개그콘서트를 즐겨보고 금요일마다 모스크에 가서 이슬

람 예배를 본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선택이 무엇인지 서로를 존중하며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었다.

한때 김정은이 남한을 쳐들어오지 못하는 건 ‘중2’가 무서워서라는 우 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심하게 사춘기를

겪는 것과 달리, 파키스탄 아이들은 사춘기가 없다. 우르두어로 ‘사춘 기’라는 단어가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인 듯 보인다. 결혼을 일찍 시키는 관습에 따라 아이들은 금방 성숙하고 철이 든다. 특히 여자아이들은 고

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게 되고 모든 집안 대소사를 다 접하다 보 니 사춘기를 겪을 여유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불행 하다는 것은 아 우리 가정은 소위 말하는 다문화 가정이다. 남편은 파키스탄 출신이고

나는 한국인이며 아이들은 이곳 뉴욕에서 태어났다. 카라치에서 유년

기를 보낸 우리 아이들은 한국어를 접하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왜냐면 집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르두어를 사용하셨고 학교에선 영어로

만 공부하니 한국어를 듣거나 사용하는 건 오로지 엄마인 나와 대화하 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당연히 우르두어나 영어보다 한국어 실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각 나라의 언어는 단순한 대화 통로를 넘어 그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전달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 들이 자랄수록 한국어를 통해 엄마의 나라를 알고 자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한글 기초 책들과 한글 배우기 비디오테이프로 꾸준히 가르쳤고 아이들도 잘 따라와 주어 말

하기와 읽기 그리고 간단한 글쓰기 정도의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종의 사명감으로 한국말을 가르친 것 같다. 다만 한국 역

사를 제대로 못 가르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스스로 공 부해주길 바랄 뿐이다.

물론 카라치에도 한글 학교는 있다. 그러나 당시엔 주재원이나 선교사 그리고 개인사업을 하는 분들의『한국인』아이들만 입학이 허가되었

다.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치다 보니 좀 더 수준 높고 체계적으로 한글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그 즈음 나는 ‘코트라’에서 통

역과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 무역 진흥공사의 주최로

영사님을 비롯해 무역 대표단과 저녁 만찬을 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다 싶어서 ‘일본 대사관에선 일본인 자녀뿐 아니라 편 부모가 일본인인 가

정의 아이들까지 무료로 교육한다’는 사례를 소개하고 한글 학교의 안 타까운 실정을 설명하며 청원을 했다. 다행히 허가가 인증되어 한글학 교의 학칙이 개정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입학하게 되었다. 야호!

과거 이민 1세대의 어르신들은 한국어 교육을 아예 포기한 경우도 있 었다고 한다. 이민자의 어려운 삶을 경험하면서, 자식들만큼은 한국인

이 아닌 완벽한 미국인처럼 살기를 원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글 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이 틀림없다. 온전한 한국인이건 반쪽 한국인

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젊은 세대의 한인들은 한글학교는 물론이고 학

니다. 오히려 더 행복하게 자식을 낳고 잘 사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이 중매로 만나지만 연애결혼이 보편화한 나라에 비해 이혼율도 저조하

다. 방금 전 큰딸 아이와 통화하면서 “사춘기가 뭔지 알아?” 했더니 “영

어로 Puberty or teenage 아닌가?” 한다. 보통 여기는 사춘기가 되면 이슬람의 5대 율법 중의 하나인 ‘라마단’ 금식을 시작할 수 있다. 하루 중 해가 있는 시간만 금식을 한다. 쉬워보일 수도 있는데 더운 날씨에 물 한 모금 안 마신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온전한 한국인이건 반쪽 한국인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때문에 한 달 간의 금식 이후엔 친

척과 친구들을 초대해 크게 파티를 하고 축하해 준다. 이를 통해 아이 들은 극기와 인내를 체험하게 되고 그 동안 흔히 접할 수 있는 것들, 물,

음식에 대한 고마움,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 대한 공감 등을 느끼며 성숙의 길에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물론 우리 아이들도 이 과정을 거 쳐왔고 잘 치뤄 준 것이 대견하고 고맙다. 또한, 이곳엔 ‘왕따’라는 단어 도 없다. 간혹 여자아이들끼리 예쁜 옷을 입으면 부러워하고 시기도 하 지만 그렇다고 몰아세우고 괴롭히는 일은 없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왕

따 당한 아이들의 사건 뉴스를 볼 때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참 답 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나라 부모의 교육열도 남다르지만, 파키스탄도 그에 못지않다 . 모 든 정성을 아이들에게 쏟고 최대한의 지지를 해준다. 특히 아들은 집안

을 이끌고 노부모를 모시기 때문에 쏟는 정성은 특별하다. 예전 인도 와 분리되기 이전에는 힌두의 영향을 받아 딸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었

다고 한다. 심지어 딸이 태어나면 바로 죽이거나 태웠고 남편이 죽으면 살아있는 아내를 산 채로 묻기도 했다고 한다. 종교분쟁으로 인해 인도

와 독립되고 나서 이슬람 영향을 받은 파키스탄은 ‘딸은 신의 선물’이 라는 이슬람 이념에 근거해 딸에 대한 애정이 아주 깊다. 그런 문화 안

에서 자란 우리 딸이 다행히 공부를 잘해 내년이면 의사가 된다. 아들 도 작년에 의대에 입학하게 되어서 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쑥 스럽지만 한국과 파키스탄 문화의 접목이 결실을 이룬 것이라 조심스 럽게 말해본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원을 두드리며 국제화 시대의 이중언어-바이링구얼(bi-lingual)은 물론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은 영어 발음이 안 좋아지니 한국어를 일부러 안 가르친다고 한다. 하

아가칸 파키스탄 대학원 간호학 석사

삼중언어-트리플링구얼(triple-lingual)아이들로 키워낸다. 또 어떤 분 지만 한국말 하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 나는 아이들을 기

가톨릭의대 간호학과 학사

뉴욕 리만 칼리지 Family Nurse Practitioner certificate 91


LIFESTYLE

세월아 詩 - 선우미애 세월아 천천히 가자 쉬었다 가자 날 저물게 걸어온 길 돌아보니 사라져 되돌아 갈 수 없으니 세상 짐 내리고 남은 건 가느다란 뼈 한 조각 이것도 짐이라고 고해이구나

시, 그림 선우미애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 문학석사 수료 강원한국수필문학회 이사 국제펜클럽강원지부 사무국장 수상 1996년 한맥문학 (월간) 신인상 2008년 새한국문학상 (9회) 2010년 동포문학상 (26회) 2011년 국제펜문학 강원펜문학번역작품상 (8회)

세월아 앞서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꾸나

2012년 노천명문학상 대상 (8회) * 중앙일보시조백일장 차상 (새벽을 기다리며)

투명한 햇살 속

* 금호문화시조백일장 차상 (4월)

헐벗은 구름도

* 신사임당주부백일장 장원 (대관령)

살을 파고드는 바람도 기다릴 수 없다 하니 인생사 허망쿠나 허망하구나 92

2012년 춘천여성문학상 (7회)

<시집> <자연을 닮은 그대는> <섬 같은 사람> <까닭 없이 그대가 그리운 날에는> <산다는 것은> <봉선화 소녀> <길을 읽다> 시집 외 2015년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문학상수상자전집> 시와 에세이출판 2016년 세월호가 남긴 절망과 희망(그날 그리고 그 이후)공저, 한울아카데미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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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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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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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누구나 이곳에 오면 귀족이 된다

언덕 위의 성 카사 로마(Casa Loma)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도깨비> 방영 이후에 이 드라마의 주요 촬 영 장소였던 캐나다 퀘벡 시가 한국인들에게 관광 명소로 갑작스럽게 떠올랐 다고 한다. 특히 유럽 작은 도시 골목길의 아기자기함을 담고 있는 퀘벡시 전 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호텔 샤또 프롱트낙은 마치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고풍스러운 성의 자태를 뽐내며 최고의 사진 촬영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캐나다 동부 관 광의 영원한 베스트 장소는 역시 나이아가라 폭포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찾는 사람들은 불과 2시간 거리 인 토론트 방문을 빼놓지 않으며, 토론토를 찾았을 때 반드시 들러보는 명소가 바로 이 번 호에 소개할 ‘원조 언덕 위의 성’ 인 카사 로마(Casa Loma)’다. 현실에 선 이룰 수 없지만, 누구라도 잠시라 도 귀족이 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 는 아름다운 성이 토론토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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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히스토리

카사 로마는 1914년 토론토에 지어진 고딕 스타일의 건물이다. 스페인어로 언덕 위의 집이란 뜻이다. 금융 부호였던 헨리 밀 펠리아트의 저택으로 지어졌지만, 후에 뮤지엄

으로 전환되었다. 카사 로마의 건축은 현재 토론토에 여러 개의 사적(Landmark)으로 지정된 건물을 지은 건축가 E.J 레녹스가 담당했다. 300여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당시 금액 350만 달러가 투입된 공사는 1차 대전 발발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3년 만에 완공 되었다.

98개의 방을 가진 64,700 스퀘어피트(6,000 평방미터)의 카사 로마는 완공 당시 토론 토뿐 아니라 캐나다에서 가장 큰 개인 저택이었다. 건물 안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

고 오븐의 크기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구울 만큼 거대했다. 웅장한 파이프오르간과 소 유주의 집무실로 향하는 두 개의 비밀 통로가 있고, 지하엔 3개의 볼링 레인이 설치되 었다.

인테리어와 레이아웃

1층 메인 플로어에는 대연회장 격인 그레이트 홀과 도서관, 다이닝 룸, 컨서버토리, 피코크 앨리, 헨리경의 서재, 스모킹 룸, 당구장, 오크 룸이 있다. 특히 오크 룸(Oak

Room) 은 화려한 내관을 자랑하는 이 건물 안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공간이다. 이태리 목공 장인들이 3년에 걸쳐 방의 내부를 깎고 다듬어 장식했고 24개의 전구가 달린 루이 16세 풍의 메인 라이트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2층은 침실이다. 헨리경의 마스터 베드룸/스위트, 안주인이었던 레이디 펠라트의 스위

트와 게스트 룸들이 있다. 3층엔 소형 박물관인 The Queens's Own Rifles of Canada Regimental Museum 이 주 공간이며 예전 집사와 하녀들의 침실이 있다.

외관은 마굿간(Stable)과 정원, 차고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2014년부터 차고에는 1900년대 초기에 제작된 빈티지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방문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카사 로마의 화려하고 고풍스런 내·외관은 주요한 영화의 촬영 장소로 인기가 높

았다. X-Men, Strange Brew, Chicago, The Tuxedo, Scott Pilgrim vs. the World,

Warehouse 13, Twitches Too, ,The Pacifier, The Rocky Horror Picture Show 등의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해리포터 시리즈 중 'Deathly Hallows'에서는 마법 학교 호그와트로 이용되었다. 관람 가이드

입장료는 캐나다 달러로 성인 $27, 시니어 $22, 13세 이하는 $17. 토론토의 주요 관광 명소를 두루 이용할 수 있는 시티 패스를 구입하면 40%의 비용을 절약한다. 카사 로마

와 함께 CN Tower, Royal Ontario Museum, Ripley’s Aquarium of Canada, Toronto Zoo, Ontario Science Centre 를 볼 수 있는 시티 패스는 성인 $76, 아동 $51 이므로 훨씬 경제적이다. 주차는 고정으로 10달러를 받는다.

라이브러리 카페에서 커피와 음료 2-3달러, 베이커리류 3-4달러, 스프를 8-9달러에 판 매한다. 카사 로마의 외관과 시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야외 식당 테라스 그릴에서의

식사는 의외로 비싸지 않다. 샐러드가 10달러 내외, 샌드위치는 15달러 내외, 파스타를 20달러 이내로 즐길 수 있고 맥주도 8달러 이내로 종류가 많다.

입장 시간과 식당 이용 시간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미리 http://casaloma.ca 에서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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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더는 걸어갈 땅이 없었다’의 저자 김동하 유럽 여행은 한국 대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고 한다. ‘에스 카사’에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 유럽 여행 이야기’를 연재 중인 김동하 씨는 220일간 4,017km 유 럽 대륙을 두 발로 걸으며 횡단했다. 그는 유럽 도보 여행에 앞서 약 1년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한 경험이 있다. 호주에서 돌아온 뒤, 더 늦기 전에 유럽을 도보로 횡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제주 올레길과 서울에서 목포에 이르는 구간을 걸으며 여행을 준비했다고 한다. 여행 자금의 반 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으로 충당했다. 여행 경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하루에 텐트와 침 낭을 포함해 26kg의 짐을 메고 20km 이상을 걸어서 유럽 땅을 횡단한 의지의 대한민국 청년 김 동하. 그는 2016년 5월 24일부터 인천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 고 모스크바를 거쳐 벨라루스, 폴란드, 체코,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을 걷고 또 걸어서 목표했 던 4,000km를 넘긴, 포르투갈의 호까곶에서 여정을 끝났다. 그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중에 ‘에 스카사’ 연재와 함께 SNS에 올려둔 솔직한 여행 뒷이야기는 같은 또래의 청춘들에게 대리만족과 함께 많은 공감을 받았다. 이제 그의 글은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가 걸으며 느꼈던 생각을 모은 책, ‘더는 걸어갈 땅이 없었다’를 소개한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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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순례길과 닮아있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드넓은 하늘, 여유로운 사람들. 순례길을 걸은 지 도 보름이 지났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배낭도 이제는 한 몸이 된 듯 익 숙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걷다가 적당히 그늘진 나무 밑에 앉아 아침에

샀던 바게트와 하몽을 입에 넣는다. 귀를 스쳐 가는 바람 소리를 듣고

그 소리 따라 고개를 까딱거려본다. 아, 좋다. 비록 아직도 일행들보다

걸음이 느려 해가 질 때쯤 숙소에 도착하곤 하지만 하루를 오롯이 마치 고 배낭을 내려놓았을 때 기쁨은 누구 못지않다.

6개월 전, 회사를 퇴직하고 여행을 떠났다. 물론 주위의 반대도 심했다. 조금만 버티면 이 바닥에서 자리 잡을 수 있던 3년 차였기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바보짓’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바보처럼 살지 않아서 그간 내가 얻은 건 무엇인가? 집에서 잠을 자본 것이 언젠지 기

3개월간 유럽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변해 있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목마름을 느꼈다.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

가 다시 수족관에 갇혔을 때 기분이랄까? 한국에 오자마자 미친 듯이 일을 했는데 이번엔 미래의 행복이 아닌 지금 당장 행복을 위해서였다.

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일에 치이고 살았다. 3년 동안 내 달력은 온통

밤마다 멀리 떨어진 땅의 별을 그리워했다. 낯선 곳에서 마시는 낯선

웠다. 열정에 가득 차 시키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고 나서서 했다. 이렇

딪치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도착한 도시

‘일하는 날’과 ‘일하는 걸 준비하는 날’ 밖에 없었다. 처음엔 물론 즐거 게 힘들수록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빨리 배워서 곧 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일을 하면서 행복할 거라 고. 그 날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문득 어느 날 깨달았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 깨달음은 한 통의 전 화에서 시작되었다.

공기가 그리웠다. 한없이 경계를 품고 다가가 이내 친해져 맥주잔을 부 한복판에서 길을 헤매며 사람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 있던 내가 그리웠 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 세계를 모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었다. 지도를 펼쳐 유럽을 보았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 리고 세계가 있다. 어느 날, 불현듯 나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내가 열차에서 본 세상은 전부 땅이었다. 열차 안에서 간절히 바라던

바깥세상, 두 다리로 그렇게 밟고 싶어 했던 땅이 끝없이 있었다. 일 주일이 지났을 때 나는 그 땅을 밟았다. 그토록 만지고 싶었고 숨 쉬

고 싶었고 느끼고 싶었던 대지 위에 섰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온 몸 구석구석으로 공기가 퍼졌다. 크게 기지개를 켰다. 철로 위엔 낡

지만 단단한 열차 한 대가 있었다. 그 열차는 7일간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고 끝없이 서쪽으로 갈 수 있는 존재였다. 열차는 멈췄고 나 는 걸을 준비를 했다. 내 작은 세계는 무너졌고 그렇게 좀 더 큰 세계 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김동하

문학과 여행, 살사댄스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청년 김동하는 유럽 보도 횡단 4,000km 중이다. ‘청년은 다시 오지 않고 하루는 두 번 새벽이 없다.’ 를 좌우명 삼아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둘씩 현실로 만들어 가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꿈이 곧 현 실이 되고 현실을 꿈으로 만들 수 있는 청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으로 세상을 향해 그는 오늘도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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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배부처

Fort Lee: Rash Place, Main Violin, 손만두집, KBS헤어, 우리은행 Palisades Park: café LUNE , Koko Loko Coffee, 솔사우나, 김밥클럽 Leonia: Coffee Park, 우리은행 Closter: TOUS LES JOURS, Sun violin, 예당, 우리은행 Norwood: Camerata New Jersey, 정미용실 Paramus: Kook Hwa Bakery Cafe, 서울 BBQ Teaneck: AWCA Ridgefield: 우리은행, H-Mart River Vale: 혜윰 공방 Edison: H-Mart

뉴욕 배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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