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교계소식
주제별 성경 구절 모음
신앙칼럼
강단설교
내면을 향한 여정
목회칼럼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10분 성경 한권 읽기 시리즈
야고보서 강해
은혜의 샘터
진리의 샘터
선교사들의 이야기
쉴만한 물가
손동원 박사의 리더십 코멘터리
좁은 길을 걸으며
변화프로젝트
내 주의 은혜 강가로
크리스찬 베이직
삶이 건네는 진리 한 조각
주께로 가까이
감동이 있는 글
신동윤 종합보험
본지는 어떠한 특정 개신교 교단과 연관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본지의 개제되는 모든 설교와 칼럼, 신앙간증 및 수기는 오직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글들로 하나님의 영광과 독자들의 신앙 증진에 초점을 맞춥니다. 단, 보도기사는 본사의 신앙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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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을 주제로 콜로라도 사랑의 교회(홍성우 목사 시무,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록 키마운틴노회(노회장 이동훈 목사, 덴 버삼성장로교회 담임)의 호스트로 은 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번 기도회에는 역대 최대로
특히 기도회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 해 뒤에서 모든 업무를 담당한 록키 마운틴 노회 소속 이형만 목사와 윤 우식 목사는 “록키마운틴 노회가 작 아서 그동안 총회 행사 유치를 못했었 다. 몇 달 전부터 준비 관계로 바쁘고 힘들었지만, 이번 기도회를 통해서 모 두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오늘 개회예 배를 앞두고 있어서 기쁘고 감사하다. 무엇보다 콜로라도 교회들과 노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 고 콜로라도 가을이 아름답다고 소문 이 난 덕분인지 예년보다 많은 회원들 이 참석하셨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현재 록키마운틴 노회에는 6교회와 10명의 회원이 소속되어 있다. 26일
덴버공항(DIA)과
는 호텔 숙소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오후 4시부터 스프링스 사랑의 교회 에 집합하여 체크인을 시작으로 기도 회 일정에 돌입하였다. 개회예배는 6시30분부터 시작되었 다. 사회 이동훈 목사, 찬양 신현수 목사(록키마운틴)외 찬양팀, 기도 안 병권 목사(남가주/총회서기), 성경봉 독 장의한 목사(뉴잉/총회회의록서기), 설교 김성국 목사(뉴욕/부총회장), 인 사 한일철 목사(동남/교육부장)가, 축 도 오세훈 목사(로스앤젤레스/전총회 장)가 순서를 맡았다.
김성국 목사는 예레미야 29:11-14 말씀을 본문으로, 제목 “미래와 기 도”를 선포했다. 김
통해서 일러 주시고, 그 생각대로
취해 가신다. 그러면 우리교단을
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그 실 마리는 ‘미래교회 핵심 역량’ 올해 교육부 기도의 주제인, 그 단어 속에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답은 공항에서 록키산을 보며 오는 길에 얻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목사는 “백합화를 통해서 진 리를 말씀하셨던
주신다.
희망을 주시고 놀라운 계획 을 펼치는 주님, 예수로 인해 희망이
있다. 예수를 다시 붙잡을 때에 우리 교단 부흥뿐 아니라 온 미국의 부흥, 성령의 바람과 말씀의 바람이 부흥이 되고 능력이 될 줄 믿는다. 그런데 주 님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신다. 말씀과 기도에 집 중하며, 몰입하자. 주님을 만나야 한 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할 때 약속 하신 새로운 부흥을 주신다. 주님께 서 돌아오라고 하신다. 돌아오는 것이 희망이다. 잃었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주님 오실 그 날까지 희망을 놓 지 않고 복음 들고 주님을 맞이하자. 기도 모임이 역사를 바꾸게 되길 기 원한다”고 촉구하며 말씀을 마쳤다. 이어 기도회를 주관한 교육부장 한 일철 목사(동남)가 “기도회를 개최하 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10분간의 휴식에 이어 2부 강의 및 기도회가 속개되었다. 먼저 엄영민 목 사(남가주/전총회장)가“영성 있는 목
회”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각자 의 영성이 하나님 앞에 깊어지고 넓 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한다는 엄 목사는 영성의 정의부터 논했다. 엄 목사는 영성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모두가 공감할 영성의 3대 요 소로 하나님의 영, 사람의 영, 그리스 도의 모습을 꼽았다.
이어 개혁교회 인물 중심의 영성의 흐름과 개혁교회 목회자의 영성의 특 징으로 성경적 영성, 말씀의 영성, 인 격의 영성, 삶의 영성, 기도의 영성으 로 나누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영 성이 깊어지기를 갈망하는데, 의외로 영성의 깊은 샘물은 바로 우리 앞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날마 다 닮아서 작은 예수들이 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의 최고의 목표이다. 그렇 게 되기 위해서 바른 신앙과 바른 신 학, 바른 생활, 더불어 뜨거운 회개의 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결론 을 맺었다. 연이어 이동훈 목사의 인도로 다음
성령으로 회개와 거듭남의 역사하심
으로 부흥케 하옵소서' ‘WMS 총회
파송선교사 107가정이 어려운 시국
을 영성 있게 잘 감당하게 하소서' ‘
총회 산하 성도들이 성경쓰기를 통해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게 하소서' ‘
미국과 대한민국이 하나님께 회개하
고 돌아와 다시 왕성하게 쓰임 받게 하소서'의 제목으로 다함께 기도드린
후, 이준우 목사(가주), 이소용 장로 (로스앤젤레스), 이동진 목사(남가주), 유진상 목사(하와이/교육부), 오성관 목사(록키마운틴)가 대표로 기도드렸 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회의 모든 순서 를 마친 후, 단체사진 촬영을 끝으 로 첫날 공식일정을 마무리했다. 늦 은 밤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잠시, 다음날 강도 높은 일정을 소화 하기 위해 아쉬움의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날은 숙소에서 아침 6시 경건 회와 아침식사, 그리고 교회로 이동하 여 오전 9시부터 예배와 세 개의 강 의 및 기도회, 그리고 잠시 짬을 내 어 “신들의 정원”, “네비게이토 선 교센터”, “공군사관학교 채플” 방 문 등
희 록키마운틴 노회가 호스트한 교단 (KAPC) 목사장로기도회는 여러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이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마무리할 수 있 었다. 노회장으로서 이번 행사를 섬 기면서 들었던 두 가지 의미를 생각 해 보았다. 첫째는 우리 노회는 생긴 지 11년이 되었지만, 교단 노회 중에 가장 작은 노회이다. 그런 노회가 두 번째 규모의 교단 행사를 유치하고 성공적으로 치러 낼 수 있어서 노회 적으로 큰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 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노 회 목사님 사모님들의 단결과 하나됨 이었다. 목사님들 7분, 사모님들 5분 이 똘똘 뭉쳐서 100여명의 목사 장 로들을 섬겼다. 총회 총무로부터 총회 를 유치해도 될 정도의 수준있는 행 사였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 모든 것 들이 약할 때 곧 강함을 주시는 하나 님의 은혜였고 노회원들의 열정이 빚 어낸 결과였기에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 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13.
(엡 5:11)
14.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11)
15.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 1:10)
16.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
17.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 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 13:15)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 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되었음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완벽하게 만드신 에덴동산에서조차 죄악이 들어옴으로 얼마 못 가서 원래의 상태를 상실하고 만다. 겨우 창세기 3장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회복은 더욱 선하고 완전하시다는 사실이다.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입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인간을 향한 끝없는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신다.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죄악이 관영하고, 인간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기에 이르신다. 마침내 하나님은 땅에서 인간을 멸하시지만, 이때에도 결코 자비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신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진노 중에도 오래 참으시며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 시키심을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여호와께서�우리를�찢으셨으나�도로�낫게�하실�것이요�우리를�치셨으나
무궁하신 분이시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을만큼 영적인 문제가, 질병이, 인간관계가, 자녀가, 경제가 억누르고 있는가? 죄 가운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가?
그러나 사냥꾼의 올무에 갇힌 새처럼 절망하고 비참해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죄악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지 못할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부르자.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손 내밀자. 주님께서 그 손을 꼭 붙잡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때에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실 것이다. 애통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친히 모든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고 감사하자. 우리의 삶을 회복시키시는 치유의 하나님으로 인해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승전가를 부르는 독자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한다.
이사야 Isaiah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eyes that are blind, to free captives from prison and to release from the dungeon those who sit in darkness.
빛이신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다면, 영적 어두운 감옥에 갇혀 소망없이 고통과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흑암에 “앉은 자”(야솨브)라는 히브리어는 ‘거주하다’, ‘머무르다’는 뜻도 있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가며 그 안에 거주하며 머무르고 있기에 어떤 죄의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사역은, 눈 먼 자들의 눈을 밝히는 것이며, 갇힌 자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영적인 무지로 인하여 눈 먼 자처럼 살아가는 자들과 자기 안에 스스로 갇혀 제대로 된 의식없이
생명력 없이 살아가는 자들을
깨우치는 일이 그들의 사역인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잠언 Proverbs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Lazy hands make a man poor, but diligent hands bring wealth.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와 손이 부지런한 자, 이것이 ‘가난과 부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가난과 부의 이유는 손인데, 이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사는 자와 부지런하여 열심과 성실로 살아가는 사람의 다른 점은 바로 ‘가난’과 ‘부’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잠언 저자인 솔로몬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인 사람이라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를 누렸고, 그가 왕으로서 살아가도록 몸이 부서져라 일한 백성들은 게으른 손이라 가난하게 살아갔을까요? 만약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해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 불리었던 나사렛 예수처럼, 온 몸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며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끊임없이 나눔의 삶을 살아가야 가진 자나 그렇지
말과 기도만으로 하나님의 토
기나 분깃이 되고 주의 가지나 지체
로써 합당한가?
2021년 말까지 가장 행복해 하는 다섯 나라와 가장 불행해 하는 다섯
나라를 찾아 보았다. 가장 행복해 하
는 다섯 나라들의 국민들의 40%에서 65%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그 들은 환경이 연약할지라도 계발하고 합력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면서 성경 말씀과 믿음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 이 그들의 사고방식과 습관화가 되었 던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불행해 하는 다섯 나라 의 일인당 수입보다 30배에서 40배의 수입을 얻고 있다. 반면에, 가장 불행해 하는 다섯 나 라 중의 네 나라는 기독교율이 70% 에서 93%이었다. 그럼에도
좀 더 안전케 할 수가 있다. 마 24:22에서는, 그 날에는 모든 육체가 견딜 수가 없으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로 인하여서 대재앙의 날의 수를 감하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제자들과 스데반과 같이, 거듭 난 자가 되어서는, 하나님의 필요와 원 하심과 기쁨에 따라서 토기로써 생 사하는 것이 생각과 말과 마음만 아 니라 사고방식과 습관과 본능이 되어 야 할 때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 다고 생각하거나 고백하는 사람들은, 순수함과 진실함과 사랑과 희락과 화 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과 온유와 절제를 쌓고 그렇게 사는 것이 평상심과 평상시가 되어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사는 것이 속 편하고 행복하게 될 정도로의 사고방식과 습 관과 본능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인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십자 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어 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본 받고 예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뜻을
하기 위하여서 가진 것들을 사용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서 보람과 행복을 느낄 뿐만 아니라 성공을 지 속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다.
구원을 받았다고 믿거나 고백하는 사람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말 씀하신대로 시종 담대하고 평안하게 처신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극한 상황 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도, 예수님을 하 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 할 수가 있어야 한다. 흥망성쇠, 희로 애락 그리고 생사간에, 하나님의 계명 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한다. 신앙을 지키거나 하나님께 순 종하기 위하여서, 핍박이나 순교를 당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께서 인정하시는 구원이 진실한 구원 이지 않는가?
천국시민인가? 천국시민들은 사단 을 이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잠잠히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을 본 받거나 겸손과 경배와 잠잠함과 섬김 이 사고방식과 습관과 본능이 되어 야 한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시험 과 고난과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밤
낮 기도할지라도, 질병 고통 사고 범 죄 혹은 노쇠하여서 죽은 육신일 뿐 이다. 산이나 섬, 지하 혹은 남극으 로 피신을 하여도 또 다른 시험이 생 기고 죽는 육신이다. 예수님께서 오 라 혹은 가라고 명하신 길과 사명이 보람이 있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되 길 기원한다. 바울과 같이,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 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 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수 가 있는 것이 사고방식이요 습관이요 본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말씀 이라면 모든
믿고
견디는
이스라엘�모든�성읍에서�나와서�노래하 며�춤추며�소고와�경쇠를�가지고�왕�사 울을�환영하는데” (사무엘상��:�).
그런데 뜻밖에도 이 환영 행사에 서 여인들이 춤을 추며 부른 노래가 사울 왕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 들었습니다.
“여인들이�뛰놀며�노래하여�이르되 사울이�죽인�자는�천천이요�다윗은�만 만이로다�한지라” (사무엘상��:�).
여인들은 눈치도 없이 노골적으로 사울 왕보다 다윗을 칭송하는 노래 를 부른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 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러한 여인들의 노래에 사울 왕이 보
냐” 그랬습니다.
왕 직을 잃게 될 것이라 는 극도의 자괴감에서는 오는 불안
함입니다.
넷째는 ‘시기(질투)심’입니다.
“주목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여 기 주목했다는 말은 ‘의심에 찬 눈
으로 관찰하다’는 의미인데, NIV 영 어 성경은 ‘jealous eye’, 즉 ‘질 투하는 눈’으로 번역했습니다.
결국 사울 왕의 이 네 가지 복합 적인 심경은 다윗을 향한 극도의 두 려움으로 발전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두려워했다는 말 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왜 두려워했 습니까?
첫째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함 께 하심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와께서�사울을�떠나�다윗과�함 께�계시므로�사울이�그를�두려워한지 라” (사무엘상��:��).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사울 왕이 어떻게 알았을까 요? 사울 왕이 심리적 불안정 상태 에 사로잡히고, 다윗에 대하여 극도 의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는 의미이지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로 지 껄여 대는 행동입니다. 이럴 때마다
다윗이 사울 곁에서 수금을 탔습니
다. 그러면 악신이 물러갔습니다. 그 런데 이번에 임한 악령은 아마도 센 놈인 모양입니다. 사울 왕이 어떤 일 이 벌입니까?
“그가�스스로�이르기를�내가�다윗을 벽에�박으리라�하고�사울이�그�창을�던 졌으나�다윗이�그의�앞에서�두�번�피하 였더라” (사무엘상��:��).
사울 왕은 자기 손에 창이 들여 있 음을 보자마자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하고 그를 향해 창을 던 졌습니다. 질투의 대상인 다윗을 죽 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이 나 말입니다. 이렇게 왕이 자신을 향 해 던지는 창을 다윗은 두 번이나 피 했습니다. 작심하고 다윗을 죽이고자 했지만 위기를 모면하는 다윗을 보 는 순간 사울 왕은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 니다. 자신에게서는 하나님이 떠나고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게 된 사울 왕은 다윗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다윗이
두려움의 대상인
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 은 다윗을 자신에게서 떠나게 하는 방법으로 그를 천부장에 임명했습니 다. 사울 왕이 이렇게 한 이유가 무 엇일까요? 자신을 두렵게 하는 대상 과 마주치지 않음으로 심리적인 위안 을 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다윗을 군대의 일선 지휘 관으로 임명하여 적진의 전장에 있게 하므로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적군의 손에 다윗을 죽게 하고자 하는 음모 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 왕의 계략과 음모는 아무 소용 이 없게 됩니다. 왜요? 두 가지 때문 입니다. 하나는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 기 때문입니다. “다윗이�그의�모든�일을�지혜롭게�행 하니라�여호와께서�그와�함께�계시니 라” (사무엘상��:��).
여기서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은 자기에게 주어진 천부장의 직무 를 너무도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말입 니다. 그리고
셋째는 ‘불안함’입니다.
“그가�더�얻을�것이�나라�말고�무엇이
이�사울에게�힘�있게�내리매�그가�집�안 에서�정신없이�떠들어대므로�다윗이�평
에�사울의�손에�창이�있는지라” (사무엘 상��:��).
그런데 이번에 임한 악령은 이전 에 임했던 것보다도 악화 된 상태로 임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이 집 안에 서 정신없이
지혜로움과 업무
과 왕성한 활동력이 백성들에게
받고 사랑받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열심히 성실하게
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다윗의 행함
을 백성이 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 이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것 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이 백성들로부 터 왕의 자질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 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 서 지혜롭게 행하는 모습을 보고 사 울 왕과 백성들의 반응이
다윗의 잘난 모습, 지혜로운 모습을 보고 그에 대한 시기심을 넘어서 그 를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질투심의 무 서움입니다. 반대로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온�이스라엘과�유다는�다윗을�사랑 하였으니�그가�자기들�앞에�출입하기�때 문이었더라” (사무엘상��:��).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사람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을 극복하는 방 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자기의 아들 요나단처럼 다윗을
사랑했다면 죽이고 싶을 정도의 시기
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사울 왕은 죽을 때까
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윗 한 사람
을 죽이기 위해 그의 뒤꽁무니만 쫓
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인생으로 최
후를 맞이하는 인물이 되고 맙니다.
습니다. 무엇을 시사하는 것입니까? 사울 왕은 무기를 손에 들고서도 다
윗을 죽이고자 하는 계략과 음모를 실패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손에 악 기를 들고서도 사울 왕을 두렵게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습니다.
다. 노래하는 악기가 사람 죽이는
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기는 사랑을 상징하고, 무기는 폭력을 상 징합니다.
“그�이튿날�하나님께서�부리시는�악 령이�사울에게�힘�있게�내리매�그가�집 안에서�정신�없이�떠들어대므로�다윗이 평일과�같이�손으로�수금을�타는데�그 때에�사울의�손에�창이�있는지라” (사무 엘상��:��).
사랑하는 여러분, 질투심과 시기심 이라는 적대감의 폭력을 이기는 것은 ‘무기’가 아닙니다. 요나단과 이스라 엘 백성들이 다윗을 사랑했던 것처럼
다윗을
지 다윗을 향한 이 시기심과 질투심
다윗의 손에는 노래하는, 사람을 치 유하고 살리는 수금이라는 악기가 들 려 있습니다. 사울 왕의 손에는 사람 을 죽이는 창이라는 무기가 들려 있
것과 말하
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사람마다 편
차가 아주 큽니다. 하지만 평균적으
로 10만 단어를 듣는다고 합니다. 일 반적인 책 한권의 단어수는 12만 단 어 내외입니다. 책 한권 분량의 소리
를 매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이 말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코로
나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할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여자는 2
만 단어 정도를 말합니다. 반면에 남
자는 약 7천 단어를 말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3배 정도 말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숨쉬기 를 제외하고 우리가 하루 중 가장 많 이 하는 것이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치 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야고 보서는 구약의 잠언과 같습니다. 믿 음을 가진 사람이 실제 생활을 어떻 게 해야 하는지를
19절을 보세요. “내�사랑하는�형제들아�너희가�알지니 사람마다�듣기는�속히�하고�말하기는�더 디�하며�성내기도�더디�하라”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라고 부릅니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 입니다. 다른 주제로 넘어간다고 예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장 전반부 의 주제는 시험과 유혹이었습니다. 어 려운 시험을 극복하고 유혹에 넘어가 지 않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제 말하는 것과 듣 는 주제로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우 리가 더디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입 니다.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입니다. 성내는 것 역시 말과 연관이 되어 있 습니다. 말의 가장 폭력적인 형태가 성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디하라는 것은 단순히 말하는 속도 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천천 히 할 수도 있고 빨리 할 수도 있습 니다. 사람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그 것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 을 할 때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지 말 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아 예 듣지 않습니다. 내 생각만을 말합 니다.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려고 합니 다. 더디하라는 것은 일단 내가 말하 려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때 상 대방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 이야
기를 다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 다. 말을 빨리 한다는 것은 듣지 않 겠다는 것입니다. 내 판단과 생각만이 옳다는 뜻입니다. 경건과는 아주 거 리가 먼 것입니다.
잠언18:13을 보세요. “사연을�듣기�전에�대답하는�자는�미 련하여�욕을�당하느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말만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 장 미련한 사람입니다. 결국은 욕을 당하고 맙니다. 실수한다는 것입니다. 책임질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잠언29:20절도 보세요. “네가�말이�조급한�사람을�보느냐�그 보다�미련한�자에게�오히려�희망이�있 느니라”
말에 조급한 사람보다 미련한 자가 없습니다. 미련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라도 있습니다. 배우면 되기 때문입 니다. 하지만 말이 조급한 사람은 희 망조차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말 이 조급한 사람에게는 배울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없 는 것입니다. 말이 급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지를 못합니 다. 그래서 성을 내는 것입니다. 모세 는 성장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큰 꿈
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을 구원하는 놀라운 꿈입니다. 그는 애굽 공주의 아들입니다. 당시 애굽 왕위는 반드시 아들 장자에게만 물려 주지 않았습니다. 제국을 통치할 사 람은 강인하고 명철해야 합니다. 무
엇보다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야 합
니다. 그러기에 왕족 중 누구라도 실
만 그의 가슴은 하나님이 주신 꿈으 로 불타올랐습니다. 민족을 구원해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꿈입니다. 세계 최고 제국 애굽의 왕궁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비젼입니다. 모세 가 하루는 민정 시찰을 나갔습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고 싶 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되게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출애굽기2:11을 보세요. “모세가�장 성한�후에�한번은�자기�형제들에게�나가 서�그들이�고되게�노동하는�것을�보더니 어떤�애굽�사람이�한�히브리�사람�곧�자 기�형제를�치는�것을�본지라”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때 렸습니다. 그래도 히브리 사람은 아 무런 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신분 이 거의 종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 을 본 모세의 혈기가 끓어 올랐습니 다.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모래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 지만
다음 날 이 사건은 애굽 전 역에 소문이 나고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
다.” 이 말은 나는 주님께 속하였고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뜻과 내 마음 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싫어하고 용납할 수
시며�자비로우시며�노하기를�더디�하시며 인애가�크시사�뜻을�돌이켜�재앙을�내리 지�아니하시는�하나님이신�줄을�내가�알 았음이니이다” (욘�:�).
요나가 화가 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 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원했던
대로 상황이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께
그의
그의 뜻을 위하 여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도마
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입
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렇게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이시라 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 가 되시는 것이지 우리의 주님이 되시
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신 것은 우리의 죄와 잘 못, 고통과 어려움에서 우리를 구원하 여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 로 타락된 세상에서 겪는 많은 문제 가운데 구원 받기를 원합니다. 질병일 수도 있고, 정신적 고통일 수도 있습 니다. 물리적으로 겪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는 이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님께서 진정 나의 주님이시라면 우리 는 받아드리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 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진정 나의 주 님이시라면 우리의 마음이 변하여 전 에는 싫어했던 것들도 좋아하고 사랑
하게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 다면 결국 내 마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여러 선지자 중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뜻을 더 귀하게 생각한 선지자가 나옵니다. 바로 요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싫어 서 도망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를 잡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니 느웨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너희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 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하 나님께 화냅니다. “여호와여�내가�고국 에�있을�때에�이러하겠다고�말씀하지�아 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내가�빨리�다시 스로�도망하였사오니�주께서는�은혜로우
서는 당신의 성품대로 행하셔서 니느웨 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생 각에는 니느웨는 재앙을 받아야 마땅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었 으니 요나는 화가 나고 나중에는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이야기까지 하게 됩 니다. 자기가 풍량으로 인하여 죽기 직 전까지 갔다가 물고기를 통해서 구원 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더니( 욘 2장), 멸망 직전에 회개하고 주님의 긍휼을 받은 니느웨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던 자가 바로 요나입니다. 그에 게 하나님은 구세주이시기는 하나, 주 님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과연 우리의 구주 이십니까? 아니면 내가 필요할 때만 나 를 구하시는 분이시고 내 삶의 주인은 아직도 ‘나’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삶이 예수님을 구세주 로만 생각하고
도망가던 선지자입니다. 자비로 우신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화를 내 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인내를 가지고
그를 대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도록 설 득하십니다.
이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 습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살려고 할 때에도 우리를 인내로 대하시고 우 리를 변화시켜 주시기 위하여 역사하 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시려고 우리 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요나를
댁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나사렛 신학대학에서 선교사님 댁 까지 차로 약 40분 거리입니다. 장 선
교사님의 초대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 게 합니다. 에콰도르에서 맛있는 한식 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의 두 따님과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님 부부는 두 따님 의 장래에 대해서 생각이 많습니다. 선교사님 부부는 우리 부부에게 두 따님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기를 바랐 습니다.
큰 따님인 ‘하은’이와 먼저 대화 를 나누었습니다. 많은 얘기를 나누었 지만 요약을 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하은’이는 미국보다 한국이 더 호 감이 간다고 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의 견(약간의 강요)이나 환경(특히 재정)이 비전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환경 에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통하니
겠다고
‘하영’이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영’이는 한국보다 미국이 좋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회사를 경영하거 나 무역을 하거나 마케팅을 하고 싶
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영’이에게 너
도 영어와 스페인어가 능통하니 실현 가능한 목표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인 나사렛 신학대학 기숙사로 돌아올 때도 ‘우버’를 이용했습니다. 갈 때 요금은 9불이었습니다. 올 때 는 ‘우버’ 기사가 우리의 위치를 찾 기 위해 3번 통화를 했는데 통화 요 금 5불이 추가되어 총 13불을 지불 했습니다.
5월 21일(토)은 ‘부부의 날’ 입니 다. 2007년부터 대한민국의 법정 기념 일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이고, ‘21’ 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부부의 날’로 정했다고 합 니다.
우리 부부는 집중강의 시간 중간에 제공하는 과일들을 사기 위해 ‘오펠 리아' 농수산물시장에 갔습니다. 과일 들이 늘어나면서 무거워졌습니다. 장 선교사님이 아는 가게에 맡겨 놓았습 니다. 나중에 자전거 수레에 실어 선 교센터에 내려놓았다가 선교사님의 차 로 나사렛 신학대학 기숙사로 옮겼습 니다.
이도영/이영란 부부께서 늦은 밤에 키토에 도착했습니다. 우선 숙소로 안 내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짐을 풀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숙소가 좋다고 하셨 습니다. 선교지의 숙소는 대부분 화장 실이나 샤워는 공동으로 사용하기 때 문에 각오를 단단히 하셨다고 합니다.
5월 22일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 집 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는 택시를 타 고 ‘키토 사랑의 교회’에 갔습니다. 설교는 제가 했습니다. 본문은 마가복 음 3장 31~35절이고 제목은 ‘상처가 별이 되다!' 입니다.
20선교사들의 이야기 다양한 선교 사역! 10회 에콰도르 선교사 dslim3927@hotmail.com 임동섭 목사 2022년 5월 20일(금) 아침에 장효 빈 선교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점 심 초대였습니다. 오전 11시 40분에 ‘ 우버’ 택시를 타고 이진호/장효빈 선 교사님 1720년에 시작된 ‘San Miguel de Nono’는 훌륭한 스페인 식 농장입 니다. 키토 수도권에서 가장 시골다 운 지역 중 하나입니다. 몇 그루의 전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들은 원산지가 에콰도르가 아니라고 합니다. 돈을 벌 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이 야생의 분위기를 제공합니 다. 들새들의 서식지가 되었습니다. 들 새를 관찰하려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고 합니다. 우리 일행은 그저 운무림을 보면 서 식사와 차 한 잔 마시려고 갑니 다. 이 선교사님 가족 4명과 우리 일 행 4명은 두 대의 차로 ‘노노’에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바리새인에게는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포도 주가 떨어졌다고 말한 어머니에게 ‘여 자여,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상처 를 주었습니다. 딸을 고쳐 달라는 가 나안 여인에게 ‘주인의 떡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라고 상처를 주었습니 다. 가족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상처를 준다면 피 할 수 없는 상처를 오히려 성장의 기 회로 삼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상처 가 진주가 되게 하고 상처가 별이 되 도록 하자는 취지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
길을
이 선교사님은 우리에게
가자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조약돌이 깔린 먼지가 많
일(18km) 거리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운무림(雲霧林, cloud forest)이 아름답습니다. 벌새 보호 구 역입니다. 키토에서 가깝기 때문에 인 기 있는 주말 여행지입니다. 대부분 은 솟구치는 폭포로 하이킹을 가거 나 뒷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 은 모험을 찾는 당일치기 여행자들입 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농장 마 을에 있는 식당에서 전통적인 식사를 즐깁니다.
습니다.
아스팔트로
것이란
전망이 우세합니다. 실로 신앙의 위기
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다만 외형적인 측면에 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
의 내적인 측면 곧 영성에 있어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 신앙인들의 영성은 예전만 못합니다. 실제 이단으로 옮겨간 대부분의 사람 들은 기성 교회의 기존 교인들이었다 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 현장을 떠나 인터넷상의 교회를 전전하는 이들도 이전에는 교회의 한 자리를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 을 평가한다면 온전한 영성을 품었었 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진짜 신앙 이 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없고 믿음의 근본이 없는 빈 약한 영성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입니 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떠 났습니다. 신앙의 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홀로서기에
어야 합니다. 혼자서도
영성이
서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영적으로 마주하는 위
기 앞에 주저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모든 게 스 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자립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평평 한 곳에 서 있거나, 누군가 곁에 서서 붙잡아 줄 때나, 기댈 곳이 있었을 때 는 그럭저럭 버티었는데 혼자서는 더 이상 홀로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이 힘을 많 이 잃었습니다. 치열한 영적싸움에서 밀린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야 말 할 것도 없고 신앙으로 버티고 있는 크리스천들도 힘들어하고 있는 현상 을 보면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인은 다양합니다. 이해가 되 는 것도 안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 한 가지라고 딱 잡아 말하기 어 렵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이 자립 의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홀로서기 가능한 자립의 신앙이라면 그 어떤 영적 도전의
늘 신앙에 찾아드는 문제는 비바람 같은 세상 유혹과 시험과 유행이 아 니라 홀로 서 있지 못하는 빈약한 영 성인 것입니다. 홀로서기 안되는 신앙, 자립하지 못하는 신앙의 특징은 무능 하다는 것입니다. 형편과 환경을 초월 하지 못합니다.
오늘 왜 이리도 많은 이들이 신앙
을 떠나 믿음 없는 자리와 불신앙을 좇아가고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시대가 바뀌어서 그
런 것인지 삶이 어려워져서 그런 것
인지 그 원인을 알아야 그 홀로 서 지 못하는 신앙에 버팀목이라도 대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과 삶이 스스로 서 있지 못하는 이유를 제 나름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신앙과 삶에 매뉴얼이 없 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과 삶 을 위해 기준 삼을 매뉴얼이 없을 때 홀로 서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정녕 신앙으로 살고자 한다면 신앙의 매뉴얼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 나님 말씀을 신앙과 삶의 매뉴얼로 삼게 되면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 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와 같이 든든하게 세워져 결실도
가 많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에 있 어 하나님 말씀 아닌 다른 매뉴얼을 따른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유행이 고 분위기이고 환경과 상황이며 자기 형편이고 그때 그때 달라지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잘못된 매뉴얼을 기준 삼은 삶의 결과는 겉으로 드러 난 현상만으로도 심각하지만 내적으 로는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아야 하겠습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자립의 신 앙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 믿음의 사 람들에게 다가오는 유혹과 시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기 때문입니다. 세 상 유행과 풍조는 우리의 신앙을 그 대로 가만 두지 않습니다. 환경과 형 편은 믿음 그대로 서 있지 못하도록 마구 흔들어 댑니다. 이는 어렵게 지 켜온 우리의 신앙이 마주한 강한 영 적 도전이라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들 신앙이 지금 시험대 위에 있습니다. 홀로서기 할 수 있는 신앙인지 테스트 중인 것입 니다. 비록 많은 이들이 홀로서기에 실패하여 이미 주저앉았지만
댈 수는 있을 지 모르나 결코 주저앉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립의 신앙은 막강한 것입니다.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말이 별것 아닌 것처럼 살아갈 때도 있어서, 때론 말을 함부로 하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내 입술로 내뱉는 말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행복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말은 한번 하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에 흘려진 물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내뱉지 않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 말로 내뱉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요?
사실 말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속마음은 아닌데 다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3대 진리 중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이 세상에 거짓말 안 해본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하면서 삽니다. 때로는 하얀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좋은 거짓말이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삶에 능력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면 능력 없는 삶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에는 힘이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 있는 말은 내 속 안에 마음과 내뱉는 말이 함께 일치 될 때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그 말이 바로 현실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있는 데로
대로 화나는 대로, 오해하는 대로, 상처받은 대로 생각을 펼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 가운데 보이는 언어는 부정적인 언어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입술로 내뱉는 말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말들입니다. 이것을 단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늘 말에 능력을 잃어버리고 또 휘둘리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좋은 말을 하고 살면 나아질 수 있을까요? 물론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신경 쓴 만큼만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늘 말과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말 때문에 또 쓰러질 것입니다.
그것이 쉽게 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살면서 늘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나를 모르겠고, 나도 나를 조절할 수 없는데... 그러면 상황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생각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생각의 주인이 되면 가능합니다. 더 이상 내 마음의 말과 내 입술의 말 때문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사랑의 말, 회복의 말, 축복의 말, 용서의 말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기에 이런 주님이 내 말의 주인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사랑과 용서와 축복과 회복의 삶에 힘을 불어넣고 또 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모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최선을 다해 사는데, 할로윈은 애써 모른 척 하며 넌크리스천처럼 사는 것은 아니 지 않을까요?
어린 자녀 혹은 손주가 있다면 영 화 ‘코코’를 보셨을 것입니다. 이 영 화의 배경은 멕시코의 명절, ‘망자의 날’입니다. 10월 31일부터 3일 동안, 특히 마지막 날인 11월 2일은 공식 휴 일일 정도로 중요한 날입니다. 아즈텍 제국 때부터 시작된 이 명절은 멕시 코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 모든 성인의 날’과 합쳐졌습니다. 이 기간에는 추석처럼, 고인의 사진 앞 에 음식을 놓고 제사합니다. 이때 십 자가를 중심으로 죽은 조상을 의미하 는 해골 인형과 주황색의 멕시코 국화 꽃잎으로 집을 장식하고 해골 분장을 하고 길거리에 나오는데, 이런 풍습이 영화 ‘코코’의 모티브가 되었던 것이 지요. 중요한 것은 할로윈에 천주교가 한몫을 감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용사였습니다(6:4). 여기서 하
나님이 개입하시는데, 이들이 120살까
지만 살게 하십니다(6:3). 네피림이 좋
은 존재였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살
날을 제한하셨을까요? 좀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네피림에 대한 이야기 직후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로 심판하 십니다(6:5). 네피림은 히브리어로 ‘넘
어뜨리는 자’를 뜻합니다. 즉, 자신이 가진 괴력으로 원하는 것은 모두 가 졌던 것이지요. 이후 ‘하나님의 아들 들’은 욥기에 또 등장합니다. “하루는�하나님의�아들들이�와서�여호 와�앞에�섰고�사탄도�그들�가운데에�온지 라” (욥기 �:�) 네피림은 홍수로 다 죽지만, 하나님 의 아들들은 아니었죠. 이들은 하나 님 앞에 사탄과 함께 섭니다. 영어 성 경은 이들을 ‘엔젤’ 즉, 타락한 천 사라 칭합니다. 이후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은 하나님께 도발합니다. 욥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힘들 면 하나님을 배신할 것이라 말이죠. 이러한 귀신의 활약이 집대성된 때 는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였습니다. 예 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하시죠. 그리고 사역을 시작하면서는 본격적 으로 축사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는 어떤가요? ‘ 목사님, 지금은 그런 일 없어요.’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변증학 자 C.S 루이스는
으면서도 상반된다. 그중 하나는 우리 가 악령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그들의 존재
를 믿으면서 그들에게 불건전하게 관
심을 두는 것이다. 악령들은 이 두 가
지 잘못된 믿음을 모두 기뻐하며, 유 물론자나 마술사를 이와 같은 기쁨으 로 맞이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만나교회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기도실에서 긴급한 호출이 와서 가보 니 김병삼 목사님이 한 자매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있더군요. 무슨 일인지 물어보니, 저 자매가 귀신 들려 서 엄마가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래 서 함께 기도하자고 호출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둥글게 서서 열심히 기도 했습니다. 목사님이 “사단아, 예수 그 리스도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외 치는데 자매가 여자, 할아버지 또 괴 물 목소리로 달리 대답하는데, 등골 이 오싹하더라고요. 그렇게 거진 2시 간 동안 자매에게서 귀신들을 쫓았던 적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구 약과 신약 시대만이 아닌 지금도 귀신 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 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과 엘리야가 낙심 하며 불안해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병 들과 귀신 들림을 조심스럽게 구별해 야 합니다. 변증학자
믿음 과 타협했던 앞서간 교회의 비겁함과 나태함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할로윈은 아이들에게 우리 집은 하나님을 섬김을 알려주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를 들 어 호박 조각(carving)을 하되, 호박 을 파내며 ‘우리 안의 죄도 불쾌하고 끈끈하며 냄새 난단다’라고 알려주세 요. 또 잭 오 랜턴(Jack-o’-lantern) 을 만들되, 어두운 방에서 초를 키며 ‘죄로 가득한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 려고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알려주세 요. 마지막으로 코스튬은 귀신 복장 을 피해서 입혀주세요. 그리고 네피 림 이야기를 들려주며, ‘네피림은 실 패한 용사지만 하나님은 네가 이 시 대의 진짜 영웅이 되길 원한다’고 응 원해 주세요. 저는 할로윈의 원래 의미가 나쁘다 고 크리스천들이 집과 교회에 갇혀 스스로 외톨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 다. 오히려 이를 기회 삼아 자녀에게
아람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사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동생이었던 야곱이 형이었던 에서로 부터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 니다. 에서는 야곱이 속임수를 쓴 것
인 줄 알아채고 그를 죽이고자 했고, 그것을 알아챈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
의 아내 문제로 이삭을 설득하여 야 곱을 라반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 에서가 진짜로 야곱을 죽일 수도 있는 문제를 사전에 차단 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이 라반의 집 으로 간 것은 도피였고, 장자의 축복 을 얻어내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에 대한 일종의
해 도망친 것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도망친 자리에서 실제로 아내를 맞이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
는 통로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이삭, 이삭과 리 브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야곱, 야곱
과 레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유다…
이 유다 지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께서 이 땅에 오십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그것 때문에 형 에서 에게서 도망을 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뿐인데, 하나님은 그런 야곱 이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그 일을 통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열 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일을 가지고 어떤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실패할 수 있 고, 때로는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 하여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불리한 조 건들을 가지고도 가장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속임수를
싶은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의구심을 가지고 라반의 집에
가서도 20년 동안 고생하며 노동력
을 착취 당하기도 합니다. 도무지 축 복 받은 것 같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야곱으로 하여금 레아를 만나 게 하시고, 마침내는 우리 인생과 모 든 피조세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께서 오시는 통로가 되게 하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심을 기억 해야 합니다.
우리는 크나큰 축복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 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것,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 시시때때로 경험하는 것은, ‘이것 이 과연 축복 받은 자의 삶이란 말인 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현실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선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전혀 선하지 않다 고 생각하는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은 당신의 선을 이루고 계십니다. 이 것이 야곱의 삶에 고스란히 그려지 고 있습니다. 야곱은 몰랐겠지만, 하 나님은
우리의 삶도 그럴 것입니다.
들 때도 있겠지만,
야곱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기로 하면 좋겠습 니다. 교활했던 야곱, 속임수를 썼던 야곱, 축복을 받고도 축복 받은 삶 같지 않은 삶을 살았던 야곱… 우리 는 야곱보다는 나을까요? 아마 별 차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야곱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셨다면, 나에게도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이 다… 라는 믿음의 용기를 야곱의 이 야기에서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사랑하는�자, 곧 그의�뜻대로�부르심을�입은�자들에게는 모든�것이�합력하여�선을�이루느니라(롬 �:��)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지지�아니할�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을 가로채지 않을 것이다는 믿음의 담대한 고백을 드렸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한 후에 이 제는 아브람에게 아무런 염려 없이 평안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에 깊은 염려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지 않습 니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승리를 경험하고도 또다시 우리의 마음에 염려와 고민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두려움과 염 려를 떨치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들 에게 끊임없이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가운데 있는 아 브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중에 아브람에게 임했 습니다.
“너는�두려워하지�말라�나는�네�방패
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돌보시는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상 급”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의 필 요를 채우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두려움을 쫓아내시는 분, 평안을 안 겨주시는 분,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으로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찾아오시는 분이십 니다. 나의 염려와 걱정과 고민과 두 려움과 불안을 아시고 끊임없이 찾 아오십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 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찾아오십 니다. 날마다 찾아오신는 하나님으 로 인해 믿음의 큰 용기와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이 갖고 있는 두려움과 염려 가 무엇일까요? 그에게 상속자가 없 었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힘 은 없어져 가는데 자녀가 없었습니 다. 자기 대에서 모든 것이 끝날 위 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지체할 수 없고 상속자를 세워야겠 다는 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상속자를 세우기 위한 아브람의 모 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하고 반문했습니다. “…나는�자식이�없사오니�나의�상속
자는�이�다메섹�사람�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또�이르되�주께서�내게�씨를 주지�아니하셨으니�내�집에서�길린자가 내�상속자가�될�것이니이다” (창��:�-�)
하나님은 분명 아브람에게 큰 민족 을 이루고, 내 이름을 창대케 하며, 복의 근원이 되겠다며 약속하셨습니
다. 자녀와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약속이 지체가 되고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는다는 것이 가능하 지 않게 되자 자녀가 없는 책임을 하 나님께 돌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으니 내 종이 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고 반 문하는 아브람을 보면 앞서 신실하 고 믿음의 사람의 말과 행동이 보이 지 않습니다. 앞서 “한가락의 실오 라기라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한 단 호한 믿음을 보인 아브람의 신실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의심 하고 반문하며 약하고 인간적인 아 브람의 모습만 보일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문하는 아브람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은 혜를 받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 럼 하나님을
하는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의 모습과도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님은 아브람을 책망하거나 화를 내 거나 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믿 음이 약한 아브람을 이해하시고 아 브람이 믿을 수 있도록 그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밤하늘 의 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별들을 세어보아라! 셀수있느냐….? 네 자손 이 이와같으리라… 믿음이 없는 아 브람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그의 믿음을 도우셨습니다. 이러한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믿음이 없고, 반문하고 의심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나의 믿음 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 음을 도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을 믿게 된 것도
님이 우리의 믿음을 도우셨기
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두려움은
나의
나도 모르게
혹은 무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를 때가 있다.
언제나 마음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죄가 떠나지 않음은 성령이 아닌 마귀에게 유혹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위하여 주님은 기도하라 하신다. 성경을 읽고 믿음으로 무장하라 하신다.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쟁터에서 싸울 준비를 하라고 하신다.
내가 넘어지는 이유는 무방비의 상태로 있을 때다.
원수 마귀가 나를 향하여 오지만 방어하거나 대적하여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 자체가 은혜다.
때로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이게 하심은
죄를 깨닫고 죄를 멀리 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나는 죄짓기에 더 담대하고 과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더러운 죄를 가지고는 그 거룩하심 앞에 설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하였을지라도 마치 선악과를 먹고 나무숲에 숨어서 두려워하던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세상 사람들은 돈 벌어 잘 사는 것이 목적일지 모른다. 돈이면 최고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들은 쉽게 돈에 연연하지 말라고 설교한다. 기복신앙을 맹비난하면서 이단 버금가는 취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이 나쁜 것이 아니라 사용을 잘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문제가 된다. 세상 향락에 취하고 죄를 짓는 곳에 돈을 사용한다면 돈이 저주가 될 수가 있다.
돈을 목적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 선한 일에 사용하고 주의 뜻에 맞게 사용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부자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일만 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돈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정직히 말해서 돈 싫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돈은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야 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처럼 충성된 종으로 이 모든 것을 대하며 살아야 한다.
구약에 족장들이나 신앙에 거장들은 갑부들이 많았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잘 사용하면 복이요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것이 돈이다. 돈과 하나님을 동등된 위치에 놓고 살라고 하심은 우리의 중심이 어느 곳에 치우쳐 있느냐 저울에 달아서 신앙의 무게를 보시려 함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간증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기복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내는 일이다. 돈이 악한 것이 아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벌어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돌아보며 복음을 위하여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수 있어야 진정한 성도일 것이다.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이 기복신앙이다. 돈을 대할 때에 욕심을 빼면 하나님이 보인다. 우리가 희망을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