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raxas_02

Page 1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

summer

2009

vol.2

summer

abraxas

2009

아브락사스

vol.2

vol.2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abraxas

아브락사스


abraxas

아브락사스




Contents Opening scene

7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8

이현미 김미선 /

24

김미선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

50

이상협 고양이/

60

김종소리 글·정지호 그림 화가 나는 이유/

84

원보람 Ending Credits

vol.2 화

107


Contents Opening scene

7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8

이현미 김미선 /

24

김미선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

50

이상협 고양이/

60

김종소리 글·정지호 그림 화가 나는 이유/

84

원보람 Ending Credits

vol.2 화

107


Opening scene

이 책은 2009년 1월 초 김미선과 김종소리의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기획,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첫 취지는 현재 우리나라 문학계의 실정─스스로 출판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힘든 상황─에 반기를 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문학계 Under Ground의 시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문학으로 단정 짓지 말고 판의 형태로 나올 수 있는 모든 예술을 다루자는 의견에 동의, 결국 모든 예술을 다루는 출판물을 만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책은 잡지의 형태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형태의 예술 작품을 싣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문학잡지들의 특성을 따라 계간지의 형태로 출판될 예정입니다─단, 3 · 6 · 9 · 11월 출간이 아닌 4 · 7 · 10 · 12월 출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 분이나 합작을 하실 분, 혹은 단체가 있으시면 Ending Credits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주십시오. 언제든 환영합니다.


Opening scene

이 책은 2009년 1월 초 김미선과 김종소리의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통해 기획,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첫 취지는 현재 우리나라 문학계의 실정─스스로 출판을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힘든 상황─에 반기를 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문학계 Under Ground의 시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문학으로 단정 짓지 말고 판의 형태로 나올 수 있는 모든 예술을 다루자는 의견에 동의, 결국 모든 예술을 다루는 출판물을 만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책은 잡지의 형태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 형태의 예술 작품을 싣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문학잡지들의 특성을 따라 계간지의 형태로 출판될 예정입니다─단, 3 · 6 · 9 · 11월 출간이 아닌 4 · 7 · 10 · 12월 출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으신 분이나 합작을 하실 분, 혹은 단체가 있으시면 Ending Credits에 있는 연락처로 연락을 주십시오. 언제든 환영합니다.


그것은 조용히 기분마저

항상 찾아오고 좋게 한다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그것은 조용히 기분마저

항상 찾아오고 좋게 한다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위험해지고 날 뒤흔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어떤 단어로 표현되기 힘들지만, 내 세상에서는 너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내가 K를 처음 본 것은 사무실에서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K를 보고 난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잠시 넋도 잃었었다. 난 K군에게 내가 너를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했고, K군은 자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사랑은 고사하고 이성적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매일 사무실에서 만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왜 내 마음과 K군의 마음이 같은 내용 으로, 같은 양으로 설정될 수 없는지 토론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줄지 않 았고, K군의 마음은 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집착이 찾아왔다. 나는 페스 트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관계 안에 집착이 찾아오면 꼼짝 없이 사고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 난 사고의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 답게, 망가져갔고 비참해져 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K군은 순전한 동정심 으로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난 그것이 순전한 동정심임을 알면서도 그를 거 절하지 않았다. 집착이 찾아오면 구차함도 모른다. 구차함이 무엇이란 말이 야. 모든 것이 그저 달짝지근한 한 가지 맛으로 변해갔다. 결코 맛있지는 않 지만 뭐 그리 거절할 맛도 아닌, 그런 맛. 집착병은 그 증상이 다양하다.

나는 K군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 다. 그의 자취방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내 자취방을 정리했다. 교통편은 불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1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위험해지고 날 뒤흔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어떤 단어로 표현되기 힘들지만, 내 세상에서는 너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내가 K를 처음 본 것은 사무실에서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K를 보고 난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잠시 넋도 잃었었다. 난 K군에게 내가 너를 사랑할지도 모른다고 했고, K군은 자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사랑은 고사하고 이성적으로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매일 사무실에서 만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왜 내 마음과 K군의 마음이 같은 내용 으로, 같은 양으로 설정될 수 없는지 토론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줄지 않 았고, K군의 마음은 늘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 집착이 찾아왔다. 나는 페스 트에 걸리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것처럼, 관계 안에 집착이 찾아오면 꼼짝 없이 사고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 난 사고의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 답게, 망가져갔고 비참해져 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K군은 순전한 동정심 으로 내 마음을 받아주었다. 난 그것이 순전한 동정심임을 알면서도 그를 거 절하지 않았다. 집착이 찾아오면 구차함도 모른다. 구차함이 무엇이란 말이 야. 모든 것이 그저 달짝지근한 한 가지 맛으로 변해갔다. 결코 맛있지는 않 지만 뭐 그리 거절할 맛도 아닌, 그런 맛. 집착병은 그 증상이 다양하다.

나는 K군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 다. 그의 자취방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내 자취방을 정리했다. 교통편은 불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1


편하지만, 근처에 공원이 있는 동네로 아파트를 얻었다. 13살 때부터 집안

하게 되었다. 그는 텍스트를 많이 접해야 하는 직업이 싫다고 했다. 순수한

사정으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혼자 살아오던 K군은 침대도 같이 쓰지 않

육체노동의 정점에 이르면 가슴 한 켠이 스르르 녹아들면서 마음이 편해진

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처럼 사용한다. 집안에서 그가 머문 흔적은 거의

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섹스 후에 그가 그렇게 조용히 직업관을 역설하는 동

찾아볼 수 가 없고, 어쩌다 내가 집에 늦게 오는 날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안, 나는 그 혼자만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세상은 견고하고,

느끼는 적막과 고요, 그 고독한 기운이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혼자 있는 시

그의 세상은 조용하다. 그의 세상에는 문이 없고 나는 문이 없는 그의 세상

간엔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침대 모서리

언저리에서 문을 찾아 배회한다. 나는 슬펐다. 나의 배회에 엔딩이 없을 것

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끔 새벽에는 혼자 일어나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

이라는 것이? 나는 그의 오른 팔을 잡아 당겨 억지로 팔베개를 만들었다. 그

곤 했는데, 넓은 창 앞에 서서 큰 움직임 없이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

는 고쳐 눕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팔베개 위에 얹어 준다. 그리고

습은 나로부터 그가 얼마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지 실감하게 했다. 그는

는 다른 팔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만져준다. 그의 몸짓에는 자상함이

천성이 혼자인 개체였고 난 그런 개체를 좋아하는 천성을 지녔나 보다. 같

배어난다. 하지만 자상함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생존 방식일 뿐, 애정의

이 살아도 쓸쓸하고 고독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표현이 아니다. 상상해보면 그란 사람은, 그에게 매질을 가하다 힘에 부쳐

사람.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줄 방

쓰러지는 누군가의 난폭함 앞에서도 자상할 것이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

법을 몰랐다.

지 쓰고 그에게 바짝 붙어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웅얼웅얼 혼자서 지나간 가요를 부르며 거실에 앉아 발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서 일어난 나는 회사 가

톱을 깎고 있는데, 아침 산책을 나갔던 K가 사과 몇 알을 사가지고 왔다. 난

기를 포기하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월차를 냈다. 사무실 후배가 어디 아

휴일이면 딱히 입맛이 없어서 사과 한 두 개에 생수만 왕창 마시고 하루 종

프냐고 묻는 말에 생리통이라고 대답하니, 매달 그래서 어떻게 지내냐며 병

일 뒹굴 거리 곤 하는데, K가 봉투에 담아온 사과를 보니 갑자기 울컥한 마

원이라도 가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매달 생리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

음이 들었다. 그는 나의 소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구나. 뽀드득 소리를 내

라 매달 정말 출근하기 싫은 날이 하루씩 있는 거란다. 라고 말하려다 그런

며 사과를 씻는 K의 뒤에 서서 가만히 그를 안았다. 그는 메커니즘으로 움

큰 비밀을 공유하기엔 이 후배는 적합하지 않다, 라는 생각에 관두었다. 수

직이는 유기체처럼 감정 없이 사과를 씻고 있지만 나는 그의 땀 냄새 맡으

화기를 내려놓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오늘은 무얼 해볼까? 왠지 모를 설렘

며, 그의 살짝 올라온 팔뚝의 혈관들과 그의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

이 넘쳐나 기분이 좋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회사 안 갔어?》

며, 감정 따위 뭐? 라고 자위했다. 그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걸.

K다. 아. 나는 K의 이런 문자만 받아도 가슴이 두근두근. 나는 오

함께 살기 시작한 후, 회사를 옮긴 K는 대형 마트 물류 팀에서 일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2

래간만에 얌전한 아가씨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3


편하지만, 근처에 공원이 있는 동네로 아파트를 얻었다. 13살 때부터 집안

하게 되었다. 그는 텍스트를 많이 접해야 하는 직업이 싫다고 했다. 순수한

사정으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혼자 살아오던 K군은 침대도 같이 쓰지 않

육체노동의 정점에 이르면 가슴 한 켠이 스르르 녹아들면서 마음이 편해진

고 화장실도 공동 화장실처럼 사용한다. 집안에서 그가 머문 흔적은 거의

다고 했다. 어느 날 밤, 섹스 후에 그가 그렇게 조용히 직업관을 역설하는 동

찾아볼 수 가 없고, 어쩌다 내가 집에 늦게 오는 날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안, 나는 그 혼자만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세상은 견고하고,

느끼는 적막과 고요, 그 고독한 기운이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혼자 있는 시

그의 세상은 조용하다. 그의 세상에는 문이 없고 나는 문이 없는 그의 세상

간엔 소파와 테이블 사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침대 모서리

언저리에서 문을 찾아 배회한다. 나는 슬펐다. 나의 배회에 엔딩이 없을 것

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가끔 새벽에는 혼자 일어나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

이라는 것이? 나는 그의 오른 팔을 잡아 당겨 억지로 팔베개를 만들었다. 그

곤 했는데, 넓은 창 앞에 서서 큰 움직임 없이 조용히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

는 고쳐 눕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팔베개 위에 얹어 준다. 그리고

습은 나로부터 그가 얼마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지 실감하게 했다. 그는

는 다른 팔로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만져준다. 그의 몸짓에는 자상함이

천성이 혼자인 개체였고 난 그런 개체를 좋아하는 천성을 지녔나 보다. 같

배어난다. 하지만 자상함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생존 방식일 뿐, 애정의

이 살아도 쓸쓸하고 고독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표현이 아니다. 상상해보면 그란 사람은, 그에게 매질을 가하다 힘에 부쳐

사람. 그리고 나는 그런 그에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줄 방

쓰러지는 누군가의 난폭함 앞에서도 자상할 것이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

법을 몰랐다.

지 쓰고 그에게 바짝 붙어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웅얼웅얼 혼자서 지나간 가요를 부르며 거실에 앉아 발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을 한참이나 지나서 일어난 나는 회사 가

톱을 깎고 있는데, 아침 산책을 나갔던 K가 사과 몇 알을 사가지고 왔다. 난

기를 포기하고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월차를 냈다. 사무실 후배가 어디 아

휴일이면 딱히 입맛이 없어서 사과 한 두 개에 생수만 왕창 마시고 하루 종

프냐고 묻는 말에 생리통이라고 대답하니, 매달 그래서 어떻게 지내냐며 병

일 뒹굴 거리 곤 하는데, K가 봉투에 담아온 사과를 보니 갑자기 울컥한 마

원이라도 가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매달 생리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

음이 들었다. 그는 나의 소소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구나. 뽀드득 소리를 내

라 매달 정말 출근하기 싫은 날이 하루씩 있는 거란다. 라고 말하려다 그런

며 사과를 씻는 K의 뒤에 서서 가만히 그를 안았다. 그는 메커니즘으로 움

큰 비밀을 공유하기엔 이 후배는 적합하지 않다, 라는 생각에 관두었다. 수

직이는 유기체처럼 감정 없이 사과를 씻고 있지만 나는 그의 땀 냄새 맡으

화기를 내려놓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오늘은 무얼 해볼까? 왠지 모를 설렘

며, 그의 살짝 올라온 팔뚝의 혈관들과 그의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바라보

이 넘쳐나 기분이 좋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회사 안 갔어?》

며, 감정 따위 뭐? 라고 자위했다. 그는 이렇게 내 옆에 있는걸.

K다. 아. 나는 K의 이런 문자만 받아도 가슴이 두근두근. 나는 오

함께 살기 시작한 후, 회사를 옮긴 K는 대형 마트 물류 팀에서 일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2

래간만에 얌전한 아가씨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3


《네. 안 갔어요. 오늘은 그냥 쉴까 하고요.》

들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서운하지 않았다. 침대를 따로

라고 뜬금없는 존댓말 문자를 보냈다. K는

쓰는 것은 왠지 서로에 대해 신비감을 느끼고자 하는 노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온라인으로 어느 외국 가구 브랜드의 더블 사이즈 침대를 2개 주

《푹 쉬어요.》 라고 문자를 보내왔고 난 왠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좀더

문했고, 어느 날 저녁, 그가 퇴근하기 전에 그걸 모두 조립해 큰 방에 놓아두

긴 말을 해 줄 수는 없나. 하지만 이내 왠지 다시 기분이 달떠서는 콧노래를

었다. 더블 사이즈 침대 2개가 들어선 방은 방 전체가 하나의 침대 같았다.

부르다 결국엔 춤을 곁들인 열창을 몇 곡 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 이런 날은

나와 K는 각각 다른 이불을 덮고 침대의 양 끄트머리에서 잠이 들었다. K

조심해야 해.

도 편하고 나도 편한 방식으로. 그러던 어느 날, 왠지 모를 기분에 잠에서 깬

오후 3시쯤 되자 심심하다. 혼자 있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만날

나는 K의 침대 쪽으로 가서 가만히 K를 안았다. 숨소리조차 없이 자던 K는

사람도 없었다. K와 같이 산 이후로 난 K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못해 다른

내 조심스런 허그에도 바로 잠이 깼다. 그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때

사람 만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오래 간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난 박하 향을 느꼈다. 얇은 유리판을 지구 끝에서 지구 끝으로 옮기는 것 같

어본 들, 모두가 사무실에 있을 시간이다. 나는 혼자 영화라도 보러 갈까 하

았던 섹스. 그가 관계 후에 여자를 안았던 것이 처음이라고 했을 때, 난 왠지

다가 K가 일하는 대형 마트 근처 영화관을 떠올리고는 왠지 모든 것이 착착

정말 중요한 물건을 버스에 두고 내린 사람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진행되는 기분에 신이 났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나는 이제 정말 K의 모든 것을 갖게 된 걸까. 아니면 이제 K에게 아무 것도

가벼운 가방을 들고 밖을 나오니, 오늘따라 날씨조차 가볍다. 버스 정류장

남기지 않고 강탈해 온 걸까. K에게도 당연하게 있을 성적 본능이 가짜일지

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어쩌나 하늘색이 선명한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본인을 참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흥분이 가시지

버스 안에서는 역시나 가벼운 수필집을 읽었고 가벼운 가요를 들었다. 시트

시작하면서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속이 좋지 않았다. 구토가 일어나는 것은

러스 향의 샴푸 냄새. 이름 모를 풀 향이 나는 투왈렛 냄새. 나의 후각은 최고

아닐까? 창문도 열어두지 않은 그 방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온다는 듯이 조

의 기능을 뽐내며 바람에 섞여 오는 냄새들을 소팅(sorting)하고 있었다. 난

용히 눈을 감고 내 손을 잡고 있던 K에 대한 증오심이 일었다. 아래 입술을

왠지 모를 건강해지는 기분이 잠깐 들었다. 어디선가 박하 향이 섞여 불어

꼭 물고 눈물을 삼키며 혹시라도 몸이 떨리지는 않을까 무척이나 신경 쓰

왔다, 난 K가 떠올랐다. 그에게서는 항상 방금 깎은 연필 냄새와 박하 향이

였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증오일까? 사랑하지도 않는 나를 안으면서도,

섞여 난다. 연필도 쓰지 않고 박하사탕도 먹지 않는 그인데도. 나는 우리가

우리 둘 모두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사실이 보란 듯이 묵인되

처음 함께 잤던 날 밤을 기억해 냈다.

고 있는 그 순간에 대한 증오일까? 정말 K에 대한 증오일까? 나의 집착병이 스물 스물 기어 나와 결국 난 눈물을 흘렸다. 끈끈한 땀으로 범벅 된 두 볼과

같이 살기 전, K는 나에게, 자신은 누군가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4

머리카락을 지나 귀 안으로 스며들던 그 미지근한 눈물을 K는 알면서 모른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5


《네. 안 갔어요. 오늘은 그냥 쉴까 하고요.》

들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서운하지 않았다. 침대를 따로

라고 뜬금없는 존댓말 문자를 보냈다. K는

쓰는 것은 왠지 서로에 대해 신비감을 느끼고자 하는 노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온라인으로 어느 외국 가구 브랜드의 더블 사이즈 침대를 2개 주

《푹 쉬어요.》 라고 문자를 보내왔고 난 왠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좀더

문했고, 어느 날 저녁, 그가 퇴근하기 전에 그걸 모두 조립해 큰 방에 놓아두

긴 말을 해 줄 수는 없나. 하지만 이내 왠지 다시 기분이 달떠서는 콧노래를

었다. 더블 사이즈 침대 2개가 들어선 방은 방 전체가 하나의 침대 같았다.

부르다 결국엔 춤을 곁들인 열창을 몇 곡 했다. 왠지 기분이 좋아. 이런 날은

나와 K는 각각 다른 이불을 덮고 침대의 양 끄트머리에서 잠이 들었다. K

조심해야 해.

도 편하고 나도 편한 방식으로. 그러던 어느 날, 왠지 모를 기분에 잠에서 깬

오후 3시쯤 되자 심심하다. 혼자 있고 싶지 않지만 마땅히 만날

나는 K의 침대 쪽으로 가서 가만히 K를 안았다. 숨소리조차 없이 자던 K는

사람도 없었다. K와 같이 산 이후로 난 K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못해 다른

내 조심스런 허그에도 바로 잠이 깼다. 그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때

사람 만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오래 간만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

난 박하 향을 느꼈다. 얇은 유리판을 지구 끝에서 지구 끝으로 옮기는 것 같

어본 들, 모두가 사무실에 있을 시간이다. 나는 혼자 영화라도 보러 갈까 하

았던 섹스. 그가 관계 후에 여자를 안았던 것이 처음이라고 했을 때, 난 왠지

다가 K가 일하는 대형 마트 근처 영화관을 떠올리고는 왠지 모든 것이 착착

정말 중요한 물건을 버스에 두고 내린 사람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무서웠다.

진행되는 기분에 신이 났다.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가벼운 원피스를 입고

나는 이제 정말 K의 모든 것을 갖게 된 걸까. 아니면 이제 K에게 아무 것도

가벼운 가방을 들고 밖을 나오니, 오늘따라 날씨조차 가볍다. 버스 정류장

남기지 않고 강탈해 온 걸까. K에게도 당연하게 있을 성적 본능이 가짜일지

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어쩌나 하늘색이 선명한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본인을 참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흥분이 가시지

버스 안에서는 역시나 가벼운 수필집을 읽었고 가벼운 가요를 들었다. 시트

시작하면서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속이 좋지 않았다. 구토가 일어나는 것은

러스 향의 샴푸 냄새. 이름 모를 풀 향이 나는 투왈렛 냄새. 나의 후각은 최고

아닐까? 창문도 열어두지 않은 그 방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온다는 듯이 조

의 기능을 뽐내며 바람에 섞여 오는 냄새들을 소팅(sorting)하고 있었다. 난

용히 눈을 감고 내 손을 잡고 있던 K에 대한 증오심이 일었다. 아래 입술을

왠지 모를 건강해지는 기분이 잠깐 들었다. 어디선가 박하 향이 섞여 불어

꼭 물고 눈물을 삼키며 혹시라도 몸이 떨리지는 않을까 무척이나 신경 쓰

왔다, 난 K가 떠올랐다. 그에게서는 항상 방금 깎은 연필 냄새와 박하 향이

였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증오일까? 사랑하지도 않는 나를 안으면서도,

섞여 난다. 연필도 쓰지 않고 박하사탕도 먹지 않는 그인데도. 나는 우리가

우리 둘 모두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사실이 보란 듯이 묵인되

처음 함께 잤던 날 밤을 기억해 냈다.

고 있는 그 순간에 대한 증오일까? 정말 K에 대한 증오일까? 나의 집착병이 스물 스물 기어 나와 결국 난 눈물을 흘렸다. 끈끈한 땀으로 범벅 된 두 볼과

같이 살기 전, K는 나에게, 자신은 누군가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4

머리카락을 지나 귀 안으로 스며들던 그 미지근한 눈물을 K는 알면서 모른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5


척 했던 걸까? 난 후다닥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나는 잠시 카트 뒤에 숨어 앉아 치마 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난 처음 아니야.”불필요한 말. K가 좋아하는 딸기잼은 가끔 품절되기도 한다. 프랑스 어디 제

“알아”불필요한 대답. 욕실 거울에서 본 나는, 어느 화가가 말한, 관계 중에 결국 상대

품이라고 하는데 빨간 체크 패턴이 그려진 뚜껑이 제법이나 귀여운 용기에

를 물어뜯어 버렸다는 그 그로테스크한 여자는 아니었을까? 두 눈에서 흐르

담긴 딸기잼이었다. 난 K의 딸기잼을 사고 무엇을 사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

는 눈물이 욕실을 채워서 익사라도 해버리면 좋으련만.

을 장을 봐야 하지? 난 도시락용 김을 한 봉지 샀고, 치즈를 하나 사고 사과 를 몇 알 샀다. 주류 코너에서 달지 않은 화이트 와인 1병을 사고 육류 시식

갑자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의식을 다잡고 마트 앞에서 내렸다.

코너에서 양념 갈비 몇 조각을 먹었다. 방금 튀겨 낸 듯한 깻잎 튀김을 샀고,

오후 4시. K는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나는 마트 앞에 일렬로 늘어진 카트 대

천원 코너에서 필요하지도 않은 과일 꽂이 한 통을 샀다. 2층에 들러서는 얇

열 앞에서 K에게 문자를 보냈다.

은 감의 머플러를 사고, 실내화를 샀다. K의 면도기를 사고 K의 양말을 몇 켤레 샀다. K의 속옷을 사고 K의 셔츠를 샀다. 카라 부분에 알록달록한 스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없으면 나랑 영화 볼래?》 한참이 지나서야 온 K의 답 문자.

트라이프 패턴을 K가 좋아할까?

《그렇게 하자. 6시쯤 퇴근할 수 있을 거야. 어디로 갈까?》

K의 문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그는 정말 모든 걸 포기해 버린 건

《어디야?》

아닐까? 그는 이제 하늘을 봐도 그저 하늘이고, 들을 봐도 그저 들이고 꽃을

《마트 뒤편의 외진 곳.》

봐도 그저 꽃이 돼버린 건 아닐까? 그에겐 이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평면 위

《거기서 모해?》

에 펼쳐진 그림책처럼 돼버린 건 아닐까? 그는 이제 거절도 없고 그저 본인

《담배 피워.》

의 자상함만을 남기고 살기로 한 건 아닐까?

《그리로 갈까?》

《사실 마트 앞이야. 간단히 장을 보고 있을게. 마치면 전화 줘.》

《아니야. 내가 정문 쪽으로 갈게.》

《그랬구나. 응. 빨리 마치도록 해 볼게. 괜찮으면 딸기잼도

《응. 정문 쪽에 있을게.》

사줘. 거의 다 떨어졌더라.》

난 사탕을 우물거리며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멀리 보이는

《응. 이따 봐.》

K의 뒷모습. K는 어느새 소년 같은 PK셔츠로 갈아입고 머리를 만지며 걷고

이대로 K를 만나도 되는 걸까.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있었다. 난 빠른 걸음으로 K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천천히 걸음이 느려

울었다. 짠 눈물에 얼굴은 따끔거리고 원피스 목 언저리 부분이 젖어왔다.

지더니 뒤 돌아보는 K. 그와 눈이 마주친 난, 그저 웃었다. K는 내 손에 든 봉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6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7


척 했던 걸까? 난 후다닥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나는 잠시 카트 뒤에 숨어 앉아 치마 자락으로 얼굴을 닦았다.

“난 처음 아니야.”불필요한 말. K가 좋아하는 딸기잼은 가끔 품절되기도 한다. 프랑스 어디 제

“알아”불필요한 대답. 욕실 거울에서 본 나는, 어느 화가가 말한, 관계 중에 결국 상대

품이라고 하는데 빨간 체크 패턴이 그려진 뚜껑이 제법이나 귀여운 용기에

를 물어뜯어 버렸다는 그 그로테스크한 여자는 아니었을까? 두 눈에서 흐르

담긴 딸기잼이었다. 난 K의 딸기잼을 사고 무엇을 사야 할지 막막했다. 무엇

는 눈물이 욕실을 채워서 익사라도 해버리면 좋으련만.

을 장을 봐야 하지? 난 도시락용 김을 한 봉지 샀고, 치즈를 하나 사고 사과 를 몇 알 샀다. 주류 코너에서 달지 않은 화이트 와인 1병을 사고 육류 시식

갑자기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의식을 다잡고 마트 앞에서 내렸다.

코너에서 양념 갈비 몇 조각을 먹었다. 방금 튀겨 낸 듯한 깻잎 튀김을 샀고,

오후 4시. K는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나는 마트 앞에 일렬로 늘어진 카트 대

천원 코너에서 필요하지도 않은 과일 꽂이 한 통을 샀다. 2층에 들러서는 얇

열 앞에서 K에게 문자를 보냈다.

은 감의 머플러를 사고, 실내화를 샀다. K의 면도기를 사고 K의 양말을 몇 켤레 샀다. K의 속옷을 사고 K의 셔츠를 샀다. 카라 부분에 알록달록한 스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없으면 나랑 영화 볼래?》 한참이 지나서야 온 K의 답 문자.

트라이프 패턴을 K가 좋아할까?

《그렇게 하자. 6시쯤 퇴근할 수 있을 거야. 어디로 갈까?》

K의 문자.

왠지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그는 정말 모든 걸 포기해 버린 건

《어디야?》

아닐까? 그는 이제 하늘을 봐도 그저 하늘이고, 들을 봐도 그저 들이고 꽃을

《마트 뒤편의 외진 곳.》

봐도 그저 꽃이 돼버린 건 아닐까? 그에겐 이제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평면 위

《거기서 모해?》

에 펼쳐진 그림책처럼 돼버린 건 아닐까? 그는 이제 거절도 없고 그저 본인

《담배 피워.》

의 자상함만을 남기고 살기로 한 건 아닐까?

《그리로 갈까?》

《사실 마트 앞이야. 간단히 장을 보고 있을게. 마치면 전화 줘.》

《아니야. 내가 정문 쪽으로 갈게.》

《그랬구나. 응. 빨리 마치도록 해 볼게. 괜찮으면 딸기잼도

《응. 정문 쪽에 있을게.》

사줘. 거의 다 떨어졌더라.》

난 사탕을 우물거리며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저기 멀리 보이는

《응. 이따 봐.》

K의 뒷모습. K는 어느새 소년 같은 PK셔츠로 갈아입고 머리를 만지며 걷고

이대로 K를 만나도 되는 걸까. 나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있었다. 난 빠른 걸음으로 K의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천천히 걸음이 느려

울었다. 짠 눈물에 얼굴은 따끔거리고 원피스 목 언저리 부분이 젖어왔다.

지더니 뒤 돌아보는 K. 그와 눈이 마주친 난, 그저 웃었다. K는 내 손에 든 봉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6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7


투를 건네 들었다. 난 K의 손가락 끝을 잡아 살짝 깨물었다. 그저 웃는 K. 나

병쯤을 마시고 있었다. 아삭아삭. K가 사과를 씹는다. 꼴깍꼴깍. K가 와인

는 그가 말할 수 없이 귀여웠고 오늘 영화는 내가 쏘겠어 하고 후훗―웃었다.

을 마신다. 뉴스에서는 온통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의 영상이

그래, 나 돈 별로 없어 하고 K도 후훗―웃었다.

음소거인 채로 재생되고 있었고 K는 잠시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나는 K에게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라며 «The reader»를 보자고 했다. K는 예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 끝을 만져보았다. 역시 왠지 비현실적이야. K는 나를

상대로 아무 영화나 별 상관없다고 한다. 티켓을 끊고 영화관 로비 의자에

보더니 빙긋-웃는다. 나는 K에게 입을 맞추었다. K는 그 긴 손가락으로 내

앉아 튀긴 깻잎을 먹었다. 맨질 맨질 해진 K의 입술을 닦아주며 나 때문에 가

머리를 만져주었다. 나는 K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앉았다. 그의 반팔 셔

끔 창피하지? 하고 물었다.

츠 소매 끝을 잡아 만지작거리며 나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K가 날 옆으로

“왜?”

쓰러트리며 우리는 포개어 누웠다. 그의 달지 않은 숨결. 필시 달지 않은 와

“가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음식을

인을 마셨기 때문 일거야. 그의 손목에 있던 메탈 손목 시계가 내 허벅지에 닿을 때 잠시 몸이 떨렸다. 그쯤에서 우리가 틀어놓은 OST는 무척이나 빠

먹잖아.”

른 템포의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K의 긴 속눈썹이 내 쇄골 뼈 언저리

“난 그런 거 잘 몰라. 배고프면 다 먹을 수 있어.” 이렇게 소소한 확인 작업을 거쳐야 마음이 놓이는 사고의 번거로

에 느껴졌다. 그가 내 안에서 느껴지는 그 순간, 다른 때와 다르게 순간 극심

움. 나는 하마터면, 나의 소소한 질문들은 참으로 귀찮지? 라고 물을 뻔했다.

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K가 놀라 나를 바라본다. 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곧장 영화의 OST를 검색해 보았다. 잔

느새 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잔한 클래식이면서 동시에 격앙된 클래식이었다. 난 컴퓨터로 OST를 틀어

“괜찮아?”

두고, 거실에서 화이트 와인을 땄다. K는 치즈 위에 사과를 얇게 저며 올려

“응.”

접시에 내왔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

“정말 괜찮아?”

다 대는 K의 옆모습은 좀 전의 영화 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그 소년의 눈매

“응. 그냥 잠시……”

가 K에게 서도 보인다는 사실이 순간 견딜 수 없이 좋았다. 하지만 난 여주 인공처럼 K더러 이제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말 할 수 없겠지. 아니. 돌

말이 끝나기도 전에 K답지 않게 나에게 키스해 온다. 그는 오늘 다른 K인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아갈까 봐 그의 목에, 그의 발목에, 그의 손목에 보이지 않는 끈을 묶어두고 K는 옷을 제대로 벗지 않고 섹스 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내

매일 매일을 그 끈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해하고 있는 거지. 난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K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와인 마시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지더니, 내가 한 잔을 마시는 사이, 그는 이미 반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8

가 마음 급하게 K에게 다가가려 하면 K는 침착한 목소리로 내 눈을 보며 말 하곤 했다.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9


투를 건네 들었다. 난 K의 손가락 끝을 잡아 살짝 깨물었다. 그저 웃는 K. 나

병쯤을 마시고 있었다. 아삭아삭. K가 사과를 씹는다. 꼴깍꼴깍. K가 와인

는 그가 말할 수 없이 귀여웠고 오늘 영화는 내가 쏘겠어 하고 후훗―웃었다.

을 마신다. 뉴스에서는 온통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의 영상이

그래, 나 돈 별로 없어 하고 K도 후훗―웃었다.

음소거인 채로 재생되고 있었고 K는 잠시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나는 K에게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라며 «The reader»를 보자고 했다. K는 예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 끝을 만져보았다. 역시 왠지 비현실적이야. K는 나를

상대로 아무 영화나 별 상관없다고 한다. 티켓을 끊고 영화관 로비 의자에

보더니 빙긋-웃는다. 나는 K에게 입을 맞추었다. K는 그 긴 손가락으로 내

앉아 튀긴 깻잎을 먹었다. 맨질 맨질 해진 K의 입술을 닦아주며 나 때문에 가

머리를 만져주었다. 나는 K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앉았다. 그의 반팔 셔

끔 창피하지? 하고 물었다.

츠 소매 끝을 잡아 만지작거리며 나는 입술을 떼지 않았다. K가 날 옆으로

“왜?”

쓰러트리며 우리는 포개어 누웠다. 그의 달지 않은 숨결. 필시 달지 않은 와

“가끔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음식을

인을 마셨기 때문 일거야. 그의 손목에 있던 메탈 손목 시계가 내 허벅지에 닿을 때 잠시 몸이 떨렸다. 그쯤에서 우리가 틀어놓은 OST는 무척이나 빠

먹잖아.”

른 템포의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K의 긴 속눈썹이 내 쇄골 뼈 언저리

“난 그런 거 잘 몰라. 배고프면 다 먹을 수 있어.” 이렇게 소소한 확인 작업을 거쳐야 마음이 놓이는 사고의 번거로

에 느껴졌다. 그가 내 안에서 느껴지는 그 순간, 다른 때와 다르게 순간 극심

움. 나는 하마터면, 나의 소소한 질문들은 참으로 귀찮지? 라고 물을 뻔했다.

한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K가 놀라 나를 바라본다. 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곧장 영화의 OST를 검색해 보았다. 잔

느새 내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잔한 클래식이면서 동시에 격앙된 클래식이었다. 난 컴퓨터로 OST를 틀어

“괜찮아?”

두고, 거실에서 화이트 와인을 땄다. K는 치즈 위에 사과를 얇게 저며 올려

“응.”

접시에 내왔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

“정말 괜찮아?”

다 대는 K의 옆모습은 좀 전의 영화 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그 소년의 눈매

“응. 그냥 잠시……”

가 K에게 서도 보인다는 사실이 순간 견딜 수 없이 좋았다. 하지만 난 여주 인공처럼 K더러 이제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말 할 수 없겠지. 아니. 돌

말이 끝나기도 전에 K답지 않게 나에게 키스해 온다. 그는 오늘 다른 K인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았다.

아갈까 봐 그의 목에, 그의 발목에, 그의 손목에 보이지 않는 끈을 묶어두고 K는 옷을 제대로 벗지 않고 섹스 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내

매일 매일을 그 끈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해하고 있는 거지. 난 소파에 누워 하염없이 K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와인 마시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지더니, 내가 한 잔을 마시는 사이, 그는 이미 반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8

가 마음 급하게 K에게 다가가려 하면 K는 침착한 목소리로 내 눈을 보며 말 하곤 했다.

그것은 항상 조용히 찾아오고 기분마저 좋게 한다

19


“옷을 입고하는 섹스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그건 마치 하지

다시피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벽 모서리 부분에 앉아 주체할 수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없는 슬픔이 어디까지일까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지금은 슬픔보다 두려움 이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K는 어제와 그저께의 K가 아

K는 항상 천천히 내 옷을 벗겨주었다. 마치 최대한 얇게 사과 껍

니다. 그러면 K는 이제 다른 K이므로 나의 K에 대한 집착은 종료될 수 있는 것

질을 벗겨 보려는 새색시처럼. 그런 그의 손길 앞에 난 부끄러움을 느끼지

인가? 그럼 오히려 좋은 건가? 하지만 그건 억지스러운 정리에 불과했다. 난 K를

못했다. 내 옷을 다 벗기고 난 K는 항상 날 이불 안에 돌돌 말아 넣어둔다. 그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서 어떻게 대

러고는 자신의 셔츠와 바지를 벗어두고 날 이불과 통째로 끌어안아 주곤 했

화를 마쳐야 할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 나는 K와 대화를 나누어야

다. 난 이 파트에서는 항상 키득키득 웃었고, K는 곧 섹스 할 사람이라고는

한다.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눈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알몸이 되지 않고 그와 함

욕조에 잠시 몸을 담갔다가 나온 나는 거실에 K가 없는 것을 보고 순

께 섹스 한 적이 없었고, 알몸이 되어가는 순간의 그 장난 같은 일련의 과정

간 끔찍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K는 나에 대한 분노가 넘쳐 올라왔던 건지도

이 우리 섹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셔츠를 입었

몰라. K는 이제 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건지도 몰라. 그가 과도를 들고 내

고 바지를 끝까지 벗지 않았다. 손목에는 아직 시계를 차고 있었고 박하 향

뒤에 서 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날 찌르려는 것일까? 그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는

이 짙던 그의 육체는 먼지 냄새 나는 옷가지에 묻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것일까? 그러나 뒤 돌아본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서웠고 그는 난폭했다. 마룻바닥에 짓이겨지듯 하던 날 놓아준 건,

K는 안방에도 작은 방에도 없었다. 난 그가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

나의 거센 저항과 울부짖음이 시작된 지 한참 후였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

다고 생각하다, 그의 신발이 모두 있는 것을 보고 테라스 쪽으로 갔다. 그는 창문

시키지 못해 알몸을 부둥켜안고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목 언저리에는

을 모두 활짝 열어두고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줄에 매인 듯 쓰라린 상처가 느껴졌다. 꺾어졌던 팔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거야?”나의 애매한 질문.

입술 가장자리에서는 피 맛이 느껴졌다. K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듯이 소

“화가 나.”그의 단호한 대답

파에 기대어 누웠다. 그는 날 봐주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그저 눈

“괴로웠던 거야?”그가 응―이라고 말하면 어쩌나 하는 질문.

을 감고 거친 숨소리를 내 쉬고 있을 뿐. K는 이제 자상함마저 꺼내 버리려

“화가 났던 거야.”그의 응―이라는 답변보다 더 무서운 대답.

는 걸까? 난 잦아들지 않는 울음을 참으며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나의 자살과도 같은 질문.

온몸이 후들거려 일어날 수 없었다. 발 언저리에는 내가 쏟아낸

“내가.”그의 자살과도 같은 대답.

눈물들이 시커먼 그림자가 되어 고여 있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알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K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난 기어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0

“우리가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닐까?”나의 할복과도 같은 질문. 그 순간 그가 의자 위로 올라섰다. 그의 풀어진 셔츠가 바람에 날리

고양이

21


“옷을 입고하는 섹스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그건 마치 하지

다시피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으며 벽 모서리 부분에 앉아 주체할 수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없는 슬픔이 어디까지일까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지금은 슬픔보다 두려움 이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K는 어제와 그저께의 K가 아

K는 항상 천천히 내 옷을 벗겨주었다. 마치 최대한 얇게 사과 껍

니다. 그러면 K는 이제 다른 K이므로 나의 K에 대한 집착은 종료될 수 있는 것

질을 벗겨 보려는 새색시처럼. 그런 그의 손길 앞에 난 부끄러움을 느끼지

인가? 그럼 오히려 좋은 건가? 하지만 그건 억지스러운 정리에 불과했다. 난 K를

못했다. 내 옷을 다 벗기고 난 K는 항상 날 이불 안에 돌돌 말아 넣어둔다. 그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서 어떻게 대

러고는 자신의 셔츠와 바지를 벗어두고 날 이불과 통째로 끌어안아 주곤 했

화를 마쳐야 할지 도대체가 알 수 없었지만 이 순간, 나는 K와 대화를 나누어야

다. 난 이 파트에서는 항상 키득키득 웃었고, K는 곧 섹스 할 사람이라고는

한다.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눈으로 날 바라보곤 했다. 알몸이 되지 않고 그와 함

욕조에 잠시 몸을 담갔다가 나온 나는 거실에 K가 없는 것을 보고 순

께 섹스 한 적이 없었고, 알몸이 되어가는 순간의 그 장난 같은 일련의 과정

간 끔찍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K는 나에 대한 분노가 넘쳐 올라왔던 건지도

이 우리 섹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오늘은 셔츠를 입었

몰라. K는 이제 정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건지도 몰라. 그가 과도를 들고 내

고 바지를 끝까지 벗지 않았다. 손목에는 아직 시계를 차고 있었고 박하 향

뒤에 서 있는 상상을 했다. 그는 날 찌르려는 것일까? 그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는

이 짙던 그의 육체는 먼지 냄새 나는 옷가지에 묻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것일까? 그러나 뒤 돌아본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서웠고 그는 난폭했다. 마룻바닥에 짓이겨지듯 하던 날 놓아준 건,

K는 안방에도 작은 방에도 없었다. 난 그가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

나의 거센 저항과 울부짖음이 시작된 지 한참 후였다. 난 놀란 가슴을 진정

다고 생각하다, 그의 신발이 모두 있는 것을 보고 테라스 쪽으로 갔다. 그는 창문

시키지 못해 알몸을 부둥켜안고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목 언저리에는

을 모두 활짝 열어두고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줄에 매인 듯 쓰라린 상처가 느껴졌다. 꺾어졌던 팔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거야?”나의 애매한 질문.

입술 가장자리에서는 피 맛이 느껴졌다. K는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듯이 소

“화가 나.”그의 단호한 대답

파에 기대어 누웠다. 그는 날 봐주지 않았고 아무 것도 보지 않았다. 그저 눈

“괴로웠던 거야?”그가 응―이라고 말하면 어쩌나 하는 질문.

을 감고 거친 숨소리를 내 쉬고 있을 뿐. K는 이제 자상함마저 꺼내 버리려

“화가 났던 거야.”그의 응―이라는 답변보다 더 무서운 대답.

는 걸까? 난 잦아들지 않는 울음을 참으며 그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나의 자살과도 같은 질문.

온몸이 후들거려 일어날 수 없었다. 발 언저리에는 내가 쏟아낸

“내가.”그의 자살과도 같은 대답.

눈물들이 시커먼 그림자가 되어 고여 있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알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K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난 기어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0

“우리가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닐까?”나의 할복과도 같은 질문. 그 순간 그가 의자 위로 올라섰다. 그의 풀어진 셔츠가 바람에 날리

고양이

21


고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나는 눈이 시큰해지며 현기증을 느 꼈다. 우리는 11층에 살잖아. “그러지마.”나의 힘없는 명령. “…….”그의 무언의 불복종 “함께 하지 않게끔 하자. 너만의 방도 다시 되돌리고 너만의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해줄게.”나의 피를 토하는 약속.

울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버린 내 얼 굴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맑은 기운이 걷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술 언저리에 결심을 담고 좀더 또렷한 의식을 찾으려는 그를 보았다. 그가 결심대로 행한다면 난, 112에 전화를 해야 하나 119에 전화를 해야 하나. 몸 전체를 감싼 세포들이 모여 그걸 의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2


고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나는 눈이 시큰해지며 현기증을 느 꼈다. 우리는 11층에 살잖아. “그러지마.”나의 힘없는 명령. “…….”그의 무언의 불복종 “함께 하지 않게끔 하자. 너만의 방도 다시 되돌리고 너만의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해줄게.”나의 피를 토하는 약속.

울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버린 내 얼 굴을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에서 맑은 기운이 걷혀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술 언저리에 결심을 담고 좀더 또렷한 의식을 찾으려는 그를 보았다. 그가 결심대로 행한다면 난, 112에 전화를 해야 하나 119에 전화를 해야 하나. 몸 전체를 감싼 세포들이 모여 그걸 의논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2


통곡할

만한 자리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통곡할

만한 자리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천천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오전 11시 23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어딘가에는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지난 십년 간, 늘 다녀왔던 길이 아닌 우리 동네의 다른 길을 따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다. 불과 십 분 전만 해도 나는 늘 있던 자리에 앉아있었다. 멍하니 시계초침의 움직임을 응시하며 수업이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늘 반복되는 시간표와 익숙한 책 을 꺼내놓고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의 나로 말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지금 거리에서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지 금 시간에는 누구나 그렇듯 일상을 보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쯤 아빠 는 뭐하고 있을까. 새벽에 들어 온 아빠는 아마 집에서 지난 주말에 했던 오 락프로그램을 건성으로 보면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식당 에서 곧 있으면 시작될 점심시간에 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영 미이모 또한 주방에서 아침 내내 손질한 반찬을 다시 한 번 검토하며 엄마와 내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너는 눈에 독기 좀 풀어야 돼. 되바라져서 저걸 어따 쓴데.’

팔자 사나운 상이라며 나를 볼 때 마다 타박을 주는 이모였다. 식 당일을 하기 전에는 신 내림도 받고, 그러다가 비구니 생활도 했었다고 한 다. 팔자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이모는 그러고 보면 식당에 와서도 늘 소문의 중심선상에 서 있곤 했었다. 그 소문이래야 봤자, 그렇게 심각한 일 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전날 술 취한 손님이 영미이모에게 집적댈 때 이모 가 그럴싸한 눈웃음을 흘리며 핸드폰 번호를 줬다든가, 일부러 사장님이 있는 시간에는 이모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사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남자를

통곡할 만한 자리

27


천천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쫓아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오전 11시 23분.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어딘가에는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지난 십년 간, 늘 다녀왔던 길이 아닌 우리 동네의 다른 길을 따라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다. 불과 십 분 전만 해도 나는 늘 있던 자리에 앉아있었다. 멍하니 시계초침의 움직임을 응시하며 수업이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늘 반복되는 시간표와 익숙한 책 을 꺼내놓고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익숙한 얼굴의 나로 말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지금 거리에서 사람들을 마주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지 금 시간에는 누구나 그렇듯 일상을 보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금쯤 아빠 는 뭐하고 있을까. 새벽에 들어 온 아빠는 아마 집에서 지난 주말에 했던 오 락프로그램을 건성으로 보면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것이다. 엄마는 식당 에서 곧 있으면 시작될 점심시간에 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분주할 것이다. 영 미이모 또한 주방에서 아침 내내 손질한 반찬을 다시 한 번 검토하며 엄마와 내 얘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너는 눈에 독기 좀 풀어야 돼. 되바라져서 저걸 어따 쓴데.’

팔자 사나운 상이라며 나를 볼 때 마다 타박을 주는 이모였다. 식 당일을 하기 전에는 신 내림도 받고, 그러다가 비구니 생활도 했었다고 한 다. 팔자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는 이모는 그러고 보면 식당에 와서도 늘 소문의 중심선상에 서 있곤 했었다. 그 소문이래야 봤자, 그렇게 심각한 일 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전날 술 취한 손님이 영미이모에게 집적댈 때 이모 가 그럴싸한 눈웃음을 흘리며 핸드폰 번호를 줬다든가, 일부러 사장님이 있는 시간에는 이모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사모님의 입에서 나오는 남자를

통곡할 만한 자리

27


홀리는 이모에 대한 것들이었다. 오빠는 근무를 서고 있을 것이다. 다음 달

을 내린 적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말이다. 조금 더 걸으면 귀정

13일 정도에 정기 휴가를 나온다고 했다. 군대 간 지 일 년이 지나서 지금은

역이다. 그 근처에 공원이 있다고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걸으면서 교

자신에게 닥친 또 다른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을 오빠였다. 친구들은? 전부

복 치마가 허벅지에 닿을 때 마다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다. 단 한 번도 스타

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 아무도 없다. 게다가 아마 지금쯤 학교에서 집으

킹을 안 신고 교복을 입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화장실에서 스타킹을

로 연락을 했을 테고, 엄마의 늘 그렇던 오전 11시도 나처럼 달라졌을 것이

올리다가 손톱에 긁혀서 올이 나갔고 윤정이와 매점에 가서 스타킹을 샀다.

다.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안심을 시켜야 할 텐데, 급하게 나오느라 핸

점심시간에 갈아 신으려고 가방에 넣어 놨다. 가방 속에는 검사 맡을 숙제

드폰을 챙겨 나오지 못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접힌 오천 원짜리와 동전

와 재출할 수행평가 자료들, 자율학습 시간에 하려고 챙겨 온 문제집과 빌

몇 개뿐이다.

어먹을, 엠피도 있다. 엠피나 핸드폰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우울하 진 않았을 텐데, 완전히 미아가 된 기분이다. 열여덟이나 먹고서 말이다. 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갑자기 초조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핸드폰 번호가 생

문제는 이 교시 문학시간이었다.

각이 나지 않는다. 집 전화도 없고 아빠는 핸드폰이 없다. 오빠의 군대번호 는 당연히 모른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동

원래 문학 선생님의 갑작스런 임신으로 인해 기간제로 우리 학

네지만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다. 학원도, 놀이터도, 학교도 이곳과

교에 부임 한 새로운 문학 선생은 소위 또라이로 금세 학교에 소문이 퍼졌

는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후덥지근한 유월 초의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

다. 그녀는 늘 마같은 거끌거끌한 소재의 긴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나이

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갑자기 달려서 아직까지 호흡도 제 자

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어깨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까만 머리를 묶

리로 돌아오지 않았고, 몸에서 열기가 후끈후끈 올라온다. 분명 아까까지

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아서 늘 푸석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

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롭고 조용하

다. 쌍꺼풀 없는 눈매는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지만 뚱뚱했다. 첫 수업에 들

고 그래서 따분하기까지 했던 나의 일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왔을 때 이미 우리 반 아이들 대 부분은 그 선생이 앞서 이 반에서 했던 또

말이다.

라이같은 행동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2반은 신경림의 농무를 할 차례였 다. 매번 수업 시간 전에 쪽지시험을 봤기 때문에 그 날도 아이들은 미리 예 우선 지금 당장은 되돌아가지는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결정?

습 해 온 시 농무에 대한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자유시, 서정시, 운율은 내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본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결정

재율, 사실적, 묘사적, 향토적, 산문적 어조, 임꺽정 설화 인용, 무엇보다도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8

통곡할 만한 자리

29


홀리는 이모에 대한 것들이었다. 오빠는 근무를 서고 있을 것이다. 다음 달

을 내린 적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말이다. 조금 더 걸으면 귀정

13일 정도에 정기 휴가를 나온다고 했다. 군대 간 지 일 년이 지나서 지금은

역이다. 그 근처에 공원이 있다고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걸으면서 교

자신에게 닥친 또 다른 일상에 익숙해지고 있을 오빠였다. 친구들은? 전부

복 치마가 허벅지에 닿을 때 마다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다. 단 한 번도 스타

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니 아무도 없다. 게다가 아마 지금쯤 학교에서 집으

킹을 안 신고 교복을 입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까 화장실에서 스타킹을

로 연락을 했을 테고, 엄마의 늘 그렇던 오전 11시도 나처럼 달라졌을 것이

올리다가 손톱에 긁혀서 올이 나갔고 윤정이와 매점에 가서 스타킹을 샀다.

다. 우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안심을 시켜야 할 텐데, 급하게 나오느라 핸

점심시간에 갈아 신으려고 가방에 넣어 놨다. 가방 속에는 검사 맡을 숙제

드폰을 챙겨 나오지 못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접힌 오천 원짜리와 동전

와 재출할 수행평가 자료들, 자율학습 시간에 하려고 챙겨 온 문제집과 빌

몇 개뿐이다.

어먹을, 엠피도 있다. 엠피나 핸드폰 중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우울하 진 않았을 텐데, 완전히 미아가 된 기분이다. 열여덟이나 먹고서 말이다. 대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갑자기 초조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핸드폰 번호가 생

문제는 이 교시 문학시간이었다.

각이 나지 않는다. 집 전화도 없고 아빠는 핸드폰이 없다. 오빠의 군대번호 는 당연히 모른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동

원래 문학 선생님의 갑작스런 임신으로 인해 기간제로 우리 학

네지만 단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다. 학원도, 놀이터도, 학교도 이곳과

교에 부임 한 새로운 문학 선생은 소위 또라이로 금세 학교에 소문이 퍼졌

는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후덥지근한 유월 초의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

다. 그녀는 늘 마같은 거끌거끌한 소재의 긴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나이

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갑자기 달려서 아직까지 호흡도 제 자

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어깨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까만 머리를 묶

리로 돌아오지 않았고, 몸에서 열기가 후끈후끈 올라온다. 분명 아까까지

을 생각도 하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아서 늘 푸석한 얼굴로 수업에 들어왔

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롭고 조용하

다. 쌍꺼풀 없는 눈매는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지만 뚱뚱했다. 첫 수업에 들

고 그래서 따분하기까지 했던 나의 일상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왔을 때 이미 우리 반 아이들 대 부분은 그 선생이 앞서 이 반에서 했던 또

말이다.

라이같은 행동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2반은 신경림의 농무를 할 차례였 다. 매번 수업 시간 전에 쪽지시험을 봤기 때문에 그 날도 아이들은 미리 예 우선 지금 당장은 되돌아가지는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결정?

습 해 온 시 농무에 대한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자유시, 서정시, 운율은 내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려 본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가 결정

재율, 사실적, 묘사적, 향토적, 산문적 어조, 임꺽정 설화 인용, 무엇보다도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28

통곡할 만한 자리

29


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명이었다. 피폐된 농촌의 현실에 대한 자조

지 않아도 이야기들은 계속 들려왔고 나는 건성으로 흘리려고 애쓰며, 그

와 한탄이 역설적으로 신명으로 전환되면서 표면적으로는 흥겨움이지만

날 반찬으로 나온 고등어가 너무 짜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짠 음식은 질색

이면적으로는 울분을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서의 간접제시가 아니라 원

이다. 젓가락으로 고등어의 살을 헤집고 있는데 윤정이가 내 쪽으로 몸을

통하다고 직접 제시함으로서 현실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요

기울이며 소근 댔다.

점인데, 그 선생은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에게 시험지에다 장거리에서 도수

“네 생각은 어때?”

장 앞까지 오면서 화자와 농촌 사람들이 불렀을 노래를 상상해서 써 내라고

“뭐가?”

했다.

“네가 정미였으면 말이야.” “내가 정미였으면 뭐?” “미친년이야. 정미 알지? 걔 이번에 전교 일 등 한 애 말이야.”

“그 말도 안 되는 거 써서 냈을 거냐고.”

“걔가 2반 이었어?”

“몰라.”

“응, 걔 완전 표정 굳어서 아예 하나도 안 써 냈어. 그래서

콩나물국도 짰다. 딱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몰랐다. 그러나 윤정이는 계속해서

문학이랑 한 판 붙었잖아. 중요한 거, 시험에 나올 만한 걸로

“모르기는 뭘 몰라. 넌 정미랑 라이벌이잖아. 걔 아마 수행평가

다시 내달라고, 수업 준비 안하고 온 거 티내지 말라고 막

점수 왕창 깎일걸. 넌 점수 때문에라도 그 미친년이 쓰라면 쓸 거

대들었다니까.” “대박이다. 그래서?”

잖아.”

“뭐가 시험에 나오는 거냐고 그 선생이 다시 물었대.”

다음 달 부터는 급식을 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맨

“미친 거 아니야? 왜 선생이 돼서 시험에 뭐 나올지를 몰라.”

밥 조차 짰다. 소금 알갱이가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내 말이. 수업 끝나고 정미랑 그 친구 울며불며 자기 언어 성적

그 날,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벌써 십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난리쳤대. 아마 내일쯤이면 걔네

분이 넘게 걸었는데도 아직 공원은커녕 귀정역이라는 도로 표지판도 보이

엄마가 학교에 전화 할걸?”

지 않는다. 도로에는 차들이 꽤 지나가지만 아직까지도 지나가는 사람을

“시간 낭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노래가 뭔지 우리가 알 필요가 뭐 있어. 시험에도 안 나오는 걸.”

만나지 못했다. 모두 다 사무실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학교에 있겠지. 하기 야 만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 니는 여자애가 그 들 눈에도 정상처럼 비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그 날 점심시간은 온통 2반 문학수업에 대한 얘기였다. 듣고 싶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0

는 근방에서는 꽤 유명한 사립학교여서 교복을 보면 사람들은 금방 알았다.

통곡할 만한 자리

31


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명이었다. 피폐된 농촌의 현실에 대한 자조

지 않아도 이야기들은 계속 들려왔고 나는 건성으로 흘리려고 애쓰며, 그

와 한탄이 역설적으로 신명으로 전환되면서 표면적으로는 흥겨움이지만

날 반찬으로 나온 고등어가 너무 짜다는 생각에 집중했다. 짠 음식은 질색

이면적으로는 울분을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서의 간접제시가 아니라 원

이다. 젓가락으로 고등어의 살을 헤집고 있는데 윤정이가 내 쪽으로 몸을

통하다고 직접 제시함으로서 현실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요

기울이며 소근 댔다.

점인데, 그 선생은 들어오자마자 아이들에게 시험지에다 장거리에서 도수

“네 생각은 어때?”

장 앞까지 오면서 화자와 농촌 사람들이 불렀을 노래를 상상해서 써 내라고

“뭐가?”

했다.

“네가 정미였으면 말이야.” “내가 정미였으면 뭐?” “미친년이야. 정미 알지? 걔 이번에 전교 일 등 한 애 말이야.”

“그 말도 안 되는 거 써서 냈을 거냐고.”

“걔가 2반 이었어?”

“몰라.”

“응, 걔 완전 표정 굳어서 아예 하나도 안 써 냈어. 그래서

콩나물국도 짰다. 딱히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몰랐다. 그러나 윤정이는 계속해서

문학이랑 한 판 붙었잖아. 중요한 거, 시험에 나올 만한 걸로

“모르기는 뭘 몰라. 넌 정미랑 라이벌이잖아. 걔 아마 수행평가

다시 내달라고, 수업 준비 안하고 온 거 티내지 말라고 막

점수 왕창 깎일걸. 넌 점수 때문에라도 그 미친년이 쓰라면 쓸 거

대들었다니까.” “대박이다. 그래서?”

잖아.”

“뭐가 시험에 나오는 거냐고 그 선생이 다시 물었대.”

다음 달 부터는 급식을 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맨

“미친 거 아니야? 왜 선생이 돼서 시험에 뭐 나올지를 몰라.”

밥 조차 짰다. 소금 알갱이가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내 말이. 수업 끝나고 정미랑 그 친구 울며불며 자기 언어 성적

그 날,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벌써 십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난리쳤대. 아마 내일쯤이면 걔네

분이 넘게 걸었는데도 아직 공원은커녕 귀정역이라는 도로 표지판도 보이

엄마가 학교에 전화 할걸?”

지 않는다. 도로에는 차들이 꽤 지나가지만 아직까지도 지나가는 사람을

“시간 낭비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노래가 뭔지 우리가 알 필요가 뭐 있어. 시험에도 안 나오는 걸.”

만나지 못했다. 모두 다 사무실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학교에 있겠지. 하기 야 만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 니는 여자애가 그 들 눈에도 정상처럼 비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그 날 점심시간은 온통 2반 문학수업에 대한 얘기였다. 듣고 싶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0

는 근방에서는 꽤 유명한 사립학교여서 교복을 보면 사람들은 금방 알았다.

통곡할 만한 자리

31


그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는데도 엄마가 나를 굳이 이 학교에 보낸 이유였

고서 교복의 셔츠 단추를 하나 푸르고 치마를 한 단 접는다. 그리고 한 발,

다. 남색 체크 치마와 빨간 넥타이를 맨 나를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걸음의 보폭이 커지면서 치마 허리 단을 한 번

다고 했다. 언젠가 식당에서 빙초산을 쏟아 온 발에 화상을 입고 돌아 온 날

더 접어야 한다. 처음 세상을 본 꽃잎처럼 나의 하얀 허벅지가 수줍게 빛난

도 엄마는 내 교복 와이셔츠를 직접 빨아서 다려놓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다. 여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멀건하고 연약하다. 근육도 잡히지 않 는다. 햇빛은 북채처럼 둥둥 땅 바닥을 내리치고, 내 발가락 사이에 와 닿는

‘엄마는 너 하나만 잘되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흙은 건강하다. 공기에 태양의 입자들이 눈부시게 떠다니는 그런 곳에서 나 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를 만나러 온 손님이다. 아프리카,

가끔 심장 아래쪽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 올 때가 있다. 내 깊 은 곳으로 천근의 돌덩이가 가라앉아서 아무리 들어내려고 해도 어디쯤에

그 곳이 바로 아프리카다.

있는 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

그런 날 밤마다 나는 아프리카의 꿈을 꿨다.

도 할 수 없고, 나는 무기력하게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어야 한다. 이 윤정이가 내게 문자를 보낸 건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제 막 숨넘어가는 하나의 우주가 내 안에서 마지막 호흡을 하는 것처럼 순 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아무 이유도 없다. 어떤 문제도 없으니 해결 할 것도 없다. 그러

《너 담임한테 오늘 보충 수업 끝나고 병원 간다하고 야자 빼》

나 나도 모르는 내 깊은 곳에서 여러 번의 삶을 태어나고 죽고 했었던 또 다

《나 아픈데 없는데? 왜?》

른 나 자신들이 동시에 소리 지른다. 동시에 아우성치기 때문에 무슨 말인

《급한 일이야. 생리통 심해서 산부인과 간다 해 제발》

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라 나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들은 그 날 나는 생리를 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생리통도 없었다. 게다

적이 없다. 그런 날 밤이면 으레 꿈을 꾸었다.

가 바로 옆 반인데 왜 와서 말하지 않고 굳이 그녀는 문자를 보낸 것일까?

내 책상과 비슷한 색깔이지만, 바람이 불때마다 스르륵 그 방향

남자친구랑 싸웠나? 그녀의 남자친구는 우리 반 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

으로 몸을 눕히는 보리 벌판이 끝도 안보이게 깔려있는 곳이다. 단조로운

였다면 야자를 빼라는 얘기까지 했을까? 제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둘의

인공 나무결 무늬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찬란한 색으로 빛나는 건강한 황색

암호였다.

이 각기 다른 농도로 출렁거리며 나를 간질이는 곳이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천천히 팬티스타킹을 벗는다. 신발은 처음부터 신지 않았다. 스타킹을 벗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2

“생리통이 심해서 앉아 있기가 힘들어요.”

통곡할 만한 자리

33


그게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는데도 엄마가 나를 굳이 이 학교에 보낸 이유였

고서 교복의 셔츠 단추를 하나 푸르고 치마를 한 단 접는다. 그리고 한 발,

다. 남색 체크 치마와 빨간 넥타이를 맨 나를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다. 걸음의 보폭이 커지면서 치마 허리 단을 한 번

다고 했다. 언젠가 식당에서 빙초산을 쏟아 온 발에 화상을 입고 돌아 온 날

더 접어야 한다. 처음 세상을 본 꽃잎처럼 나의 하얀 허벅지가 수줍게 빛난

도 엄마는 내 교복 와이셔츠를 직접 빨아서 다려놓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다. 여기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멀건하고 연약하다. 근육도 잡히지 않 는다. 햇빛은 북채처럼 둥둥 땅 바닥을 내리치고, 내 발가락 사이에 와 닿는

‘엄마는 너 하나만 잘되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흙은 건강하다. 공기에 태양의 입자들이 눈부시게 떠다니는 그런 곳에서 나 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를 만나러 온 손님이다. 아프리카,

가끔 심장 아래쪽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올라 올 때가 있다. 내 깊 은 곳으로 천근의 돌덩이가 가라앉아서 아무리 들어내려고 해도 어디쯤에

그 곳이 바로 아프리카다.

있는 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순간 말이다. 그런 날에는 아무것

그런 날 밤마다 나는 아프리카의 꿈을 꿨다.

도 할 수 없고, 나는 무기력하게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어야 한다. 이 윤정이가 내게 문자를 보낸 건 점심시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제 막 숨넘어가는 하나의 우주가 내 안에서 마지막 호흡을 하는 것처럼 순 간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아무 이유도 없다. 어떤 문제도 없으니 해결 할 것도 없다. 그러

《너 담임한테 오늘 보충 수업 끝나고 병원 간다하고 야자 빼》

나 나도 모르는 내 깊은 곳에서 여러 번의 삶을 태어나고 죽고 했었던 또 다

《나 아픈데 없는데? 왜?》

른 나 자신들이 동시에 소리 지른다. 동시에 아우성치기 때문에 무슨 말인

《급한 일이야. 생리통 심해서 산부인과 간다 해 제발》

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들이라 나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들은 그 날 나는 생리를 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생리통도 없었다. 게다

적이 없다. 그런 날 밤이면 으레 꿈을 꾸었다.

가 바로 옆 반인데 왜 와서 말하지 않고 굳이 그녀는 문자를 보낸 것일까?

내 책상과 비슷한 색깔이지만, 바람이 불때마다 스르륵 그 방향

남자친구랑 싸웠나? 그녀의 남자친구는 우리 반 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

으로 몸을 눕히는 보리 벌판이 끝도 안보이게 깔려있는 곳이다. 단조로운

였다면 야자를 빼라는 얘기까지 했을까? 제발이라는 메시지는 우리 둘의

인공 나무결 무늬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찬란한 색으로 빛나는 건강한 황색

암호였다.

이 각기 다른 농도로 출렁거리며 나를 간질이는 곳이다. 나는 그 앞에 서서 천천히 팬티스타킹을 벗는다. 신발은 처음부터 신지 않았다. 스타킹을 벗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2

“생리통이 심해서 앉아 있기가 힘들어요.”

통곡할 만한 자리

33


담임은 나를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심문하는 경찰 관의 눈빛처럼, 무슨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이.

쉬기가 거북스럽다. 알 수 없는 공기가 내 주변을 꽉 누르고 있었다. 내가 이 해하지 못하는 공기,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공기가 질척거리며 나를 에

“진짜야?”

워싸는 기분이다. 애써 몸 깊은 곳으로 꿀꺽하고 삼켜버렸다. 아마 오늘 밤

“네.”

에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리에 누우면 괜찮아 질 거다. 우선은 넣어두는 것

“오늘이 며칠 짼데?”

이 마음이 편하다.

또 그 기분이다. 이번에는 커다랗고 두꺼운 구렁이가 발목부터

“이틀째에요. 처방전 끊어 올게요. 괜찮아지면 다시 오구요.”

스멀스멀 내 몸 통으로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다. 질척거리는 몸뚱이로 서서 히 숨을 못 쉬게 나를 옥죄면서 말이다. 올 해 마흔 아홉. 저번 달에 담임 생

윤정이는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내가

일 파티를 했을 때, 케이크에 꽂혀 있던 촛불의 숫자였다. 붉게 그을린 얼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안절부절 못하며 교문 쪽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아래로 면도 하지 않아 듬성듬성하게 난 턱수염이 보였다. 햇볕이 가장 강

보였다.

한 시간이라 오후 세시에 햇살이 담임 책상위로 한 바가지 쏟아 부어지고

“담임한테 말 잘했어?”

있었다. 커튼 좀 쳐라. 담임은 지나가던 교무실 청소 당번에게 시키고는 다

“응. 근데 왜 하필 산부인과야.”

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배고파. 우선 뭐 좀 먹자.”

“그것까지 말씀 드려야 해요?”

우선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하교하는 중학생들과

하. 짧게 담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자를 하지 않는 고등학생들로 매장 안은 북적거렸다. 각자가 속한 학교의

“ 그럼 병원 갔다가 다시 와.”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은 순한 초식 동물 무리 같기도 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담임이 다시 말을 했다.

어미가 씹어 주는 것만 먹을 수 있는 온순하다 못해 스스로 퇴화의 길을 걸

“야 임마, 내가 너를 뭘 믿고 보내줘? 니가 공부를 잘하는 건 잘하 는 거고, 너 같은 애들이 더 무서운 거야.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 앉아 있을지

어가고 있는 멸종 위기에 처한 마지막 세대들. 뭐 먹을 거야. 치즈버거.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문 한 후, 우리는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알고? 그럼 나도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거짓말이면 그냥 교실로 가고 아니면 병원 갔다가 다시 와.”

“난 여기 싫더라. 무슨 체스판 같잖아. 온통 빨갛고 하얗고 말야.” “그리고 너무 밝아.”

담임은 말을 하는 줄곧 내 발목으로 시선을 흘끔흘끔 던졌다. 숨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4

“맞아. 이런 데서 데이트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통곡할 만한 자리

35


담임은 나를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봤다. 심문하는 경찰 관의 눈빛처럼, 무슨 냄새라도 맡으려는 듯이.

쉬기가 거북스럽다. 알 수 없는 공기가 내 주변을 꽉 누르고 있었다. 내가 이 해하지 못하는 공기,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공기가 질척거리며 나를 에

“진짜야?”

워싸는 기분이다. 애써 몸 깊은 곳으로 꿀꺽하고 삼켜버렸다. 아마 오늘 밤

“네.”

에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자리에 누우면 괜찮아 질 거다. 우선은 넣어두는 것

“오늘이 며칠 짼데?”

이 마음이 편하다.

또 그 기분이다. 이번에는 커다랗고 두꺼운 구렁이가 발목부터

“이틀째에요. 처방전 끊어 올게요. 괜찮아지면 다시 오구요.”

스멀스멀 내 몸 통으로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다. 질척거리는 몸뚱이로 서서 히 숨을 못 쉬게 나를 옥죄면서 말이다. 올 해 마흔 아홉. 저번 달에 담임 생

윤정이는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내가

일 파티를 했을 때, 케이크에 꽂혀 있던 촛불의 숫자였다. 붉게 그을린 얼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안절부절 못하며 교문 쪽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아래로 면도 하지 않아 듬성듬성하게 난 턱수염이 보였다. 햇볕이 가장 강

보였다.

한 시간이라 오후 세시에 햇살이 담임 책상위로 한 바가지 쏟아 부어지고

“담임한테 말 잘했어?”

있었다. 커튼 좀 쳐라. 담임은 지나가던 교무실 청소 당번에게 시키고는 다

“응. 근데 왜 하필 산부인과야.”

시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배고파. 우선 뭐 좀 먹자.”

“그것까지 말씀 드려야 해요?”

우선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하교하는 중학생들과

하. 짧게 담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자를 하지 않는 고등학생들로 매장 안은 북적거렸다. 각자가 속한 학교의

“ 그럼 병원 갔다가 다시 와.”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그들은 순한 초식 동물 무리 같기도 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담임이 다시 말을 했다.

어미가 씹어 주는 것만 먹을 수 있는 온순하다 못해 스스로 퇴화의 길을 걸

“야 임마, 내가 너를 뭘 믿고 보내줘? 니가 공부를 잘하는 건 잘하 는 거고, 너 같은 애들이 더 무서운 거야.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 앉아 있을지

어가고 있는 멸종 위기에 처한 마지막 세대들. 뭐 먹을 거야. 치즈버거.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문 한 후, 우리는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떻게 알고? 그럼 나도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거짓말이면 그냥 교실로 가고 아니면 병원 갔다가 다시 와.”

“난 여기 싫더라. 무슨 체스판 같잖아. 온통 빨갛고 하얗고 말야.” “그리고 너무 밝아.”

담임은 말을 하는 줄곧 내 발목으로 시선을 흘끔흘끔 던졌다. 숨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4

“맞아. 이런 데서 데이트 한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통곡할 만한 자리

35


“니가 오자며.”

말 못해.”

“가까우니까 들어왔지. 배고파서 말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어떡하려고?”

“……. 영어 표현 아니야?”

“떼야지. 시험기간인데 나 벌써부터 졸리고 입맛도 없고 그래.

“기집애. 누가 공부 잘하는 애 아니랄까봐. 맞아. 저번 시간에

진짜 미친년 같아. 틈만 나면 잔다니까. 배도 나오는 것 같고

배웠잖아.”

기분 더러워.” 윤정이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너무 배가 고프더라도 아마 난 말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말이

콜라를 한 모금 빨고는 내려놓았다. 갑자기 윤정이가 삼십년은 훨씬 더 먹

먹던 건초를 씹어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표현을 만들어도 잔인하게 만드

어 보였다. 아니 일흔이 넘은 노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녀가 싫어하는 조

는 건 그 종들만의 특성이다. 아니 어쩌면 이 생각 또한 내 이기심일지도 모

명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밝았다. 그리고 바닥의 하얀 타일에 반사 돼

른다. 배가 고픈 말이 차라리 나를 잡아먹으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서 그녀가 얼굴 가득 만들어내고 있는 주름을 너무 사실적으로 강조해주고

말이다.

있었다. “한번만 도와줘.” “나 임신했어.”

우리를 스쳐지나가거나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냥 평범 한 고등학생처럼 보였을것이다. 기름에 절여진 감자 쪼가리와 싸구려 케첩,

치즈가 좀 오래된 것 같아 라는 말이 막 입 밖으로 나오던 찰나였

그리고 눅눅한 치즈버거와 달짝지근한 콜라를 먹으며 그렇고 그런 뻔한 수

다. 뭐. 뭐라고. 라는 말 또한 목구멍이 그대로 삼켜 버렸다. 아까 교무실에

다를 떨고 있는 여고생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

서 삼켜버린 게 저 깊은 곳에서 울럭거렸다.

을, 평범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한 그런 여자애들 말이다.

“아까 쉬는 시간에 검사해봤어. 그래서 지금 병원 가보려고. 근데 나 혼자서는 너무 무서워서 너한테 문자 보낸 거야.”

“뭘 어떻게 도와줘?”

“동현이는 뭐래?”

“병원도 다 알아봤어. 넌 그냥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보호자

“아 씨발 몰라. 이번 주 부터 좀 이상하다고 얘기했는데

동의 없이도 수술이 되나봐.”

시험기간이라서 계속 학원 보충이라고 밤에는 연락이 안 돼.

“불법 아니야?”

게다가 너 우리 부모님 알잖아. 나 대학 가야 된다고. 부모님

“응, 근데 아는 애가 알아다 줬어. 그런 애들 있잖아. 나는

아시면 난 끝장이야. 우리 부모님 어떠신지 너 알잖아. 나 진짜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처음이지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수술하고 그런 애들 말이야.

36

통곡할 만한 자리

37


“니가 오자며.”

말 못해.”

“가까우니까 들어왔지. 배고파서 말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어떡하려고?”

“……. 영어 표현 아니야?”

“떼야지. 시험기간인데 나 벌써부터 졸리고 입맛도 없고 그래.

“기집애. 누가 공부 잘하는 애 아니랄까봐. 맞아. 저번 시간에

진짜 미친년 같아. 틈만 나면 잔다니까. 배도 나오는 것 같고

배웠잖아.”

기분 더러워.” 윤정이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너무 배가 고프더라도 아마 난 말을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말이

콜라를 한 모금 빨고는 내려놓았다. 갑자기 윤정이가 삼십년은 훨씬 더 먹

먹던 건초를 씹어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표현을 만들어도 잔인하게 만드

어 보였다. 아니 일흔이 넘은 노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녀가 싫어하는 조

는 건 그 종들만의 특성이다. 아니 어쩌면 이 생각 또한 내 이기심일지도 모

명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밝았다. 그리고 바닥의 하얀 타일에 반사 돼

른다. 배가 고픈 말이 차라리 나를 잡아먹으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서 그녀가 얼굴 가득 만들어내고 있는 주름을 너무 사실적으로 강조해주고

말이다.

있었다. “한번만 도와줘.” “나 임신했어.”

우리를 스쳐지나가거나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냥 평범 한 고등학생처럼 보였을것이다. 기름에 절여진 감자 쪼가리와 싸구려 케첩,

치즈가 좀 오래된 것 같아 라는 말이 막 입 밖으로 나오던 찰나였

그리고 눅눅한 치즈버거와 달짝지근한 콜라를 먹으며 그렇고 그런 뻔한 수

다. 뭐. 뭐라고. 라는 말 또한 목구멍이 그대로 삼켜 버렸다. 아까 교무실에

다를 떨고 있는 여고생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

서 삼켜버린 게 저 깊은 곳에서 울럭거렸다.

을, 평범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한 그런 여자애들 말이다.

“아까 쉬는 시간에 검사해봤어. 그래서 지금 병원 가보려고. 근데 나 혼자서는 너무 무서워서 너한테 문자 보낸 거야.”

“뭘 어떻게 도와줘?”

“동현이는 뭐래?”

“병원도 다 알아봤어. 넌 그냥 같이 가주기만 하면 돼. 보호자

“아 씨발 몰라. 이번 주 부터 좀 이상하다고 얘기했는데

동의 없이도 수술이 되나봐.”

시험기간이라서 계속 학원 보충이라고 밤에는 연락이 안 돼.

“불법 아니야?”

게다가 너 우리 부모님 알잖아. 나 대학 가야 된다고. 부모님

“응, 근데 아는 애가 알아다 줬어. 그런 애들 있잖아. 나는

아시면 난 끝장이야. 우리 부모님 어떠신지 너 알잖아. 나 진짜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처음이지만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수술하고 그런 애들 말이야.

36

통곡할 만한 자리

37


‘너 알지? 우리 아빠 선거 운동 할 때 나 같이 다녔던 것 말이야.

그런 애들이 가는 곳 인가봐.” 라고 말하며 윤정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치매 걸린 노인이 똥을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 삼 선 하는 내내 내가 따라다녔잖아. 이

지려놓고 방 어느 구석인가에 숨겨 놓고는 귀가한 며느리를 보는 듯한 눈빛

지역에서 조금만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내 이름 다 알거란

이었다. 방 전체에 구린내가 진동하는 데 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

말이야. 이 년 전 사진이라고 해도 내 이름이랑 맞춰보면 금방

다. 절대 모르겠지. 그런데 불안해하는 듯한 그런 눈빛 말이다.

알아차릴 거야. 한 번만 부탁할게.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나도

“언제?”

진짜 딱 한 번 실수한 건데 이렇게 된 거라니까. 다른 애들은

“지금.”

수십 번을 해도 임신 한 번 안되고 잘만 하던데 나는 복도

“지금? 그럼 나랑 같이 가자고?”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딱 한 번 했는데 임신이 됐는지 말야.

“응 그것도 그렇고 말야 …….”

내가 너라고 할 게. 니 주민번호도 외우면 되잖아. 이거 의료보험 기록에도 안남는 거고 그냥 형식적인 거야. 너한테 아무 해도 안

아까 넣어두었던 무언가가 또 울컥하고 올라왔다. 내 주위의 공

간다니까. 그리고 만약 걸리더라도 너랑 나는……. 아니

간이 마구 일그러지며 굉장한 압력으로 나를 내리누른다. 지금 여기 이 공

그러니까 내 말은 니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다르시잖니?

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7시 23분 47초를 지나는 순간의 초 단위의 시간조차

너네 아버지 집에서 쉬신지 몇 년 되셨다며 내 말 기분 나쁜 거

도 아까 전부터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서서히

아니지? 한번만 도와줘. 나 일 학기 수시로 사회봉사 특기자

나를 옥죄여왔다. 담임 앞에서 삼켰던 것조차 꾸물거리며 올라올 것 같은

쓸 건데 정말 이 번일 걸리면 내 인생은 끝이야. 넌 공부도

기분이다.

잘하니까 좋은 대학 갈 수 있잖아. 응?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지금도 그 곳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기분

“조금 있으면 친구가 깰 거야. 김현화 라고 방송에서 나오면 들어가면 돼.”

좋은 물결이 넘실거리고 지금과는 다른 향기로운 울렁증으로 가득한 초원

간호원은 이미 이런 교복 입은 환자들은 많이 접해왔던 듯 아무

이 끝도 없이 펼쳐 진 채로 말이다.

표정 없이 나를 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조금 있으면 김현화가 마취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는 그 곳에서 방금 태어난 얼룩

깰 것 이다. 김현화. 지금 이렇게 타인처럼 불러진 이름은 바로 나다. 저 안

말의 새끼를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고 있을 것이다. 아직 단단해지지도 않

에 있는 것 정윤정이고 말이다.

았을 여린뼈들을 씹으면서 수술용 메스같은 날카로운 이빨로 채 눈도 뜨지 못한, 단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는 그 여린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대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8

통곡할 만한 자리

39


‘너 알지? 우리 아빠 선거 운동 할 때 나 같이 다녔던 것 말이야.

그런 애들이 가는 곳 인가봐.” 라고 말하며 윤정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치매 걸린 노인이 똥을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 삼 선 하는 내내 내가 따라다녔잖아. 이

지려놓고 방 어느 구석인가에 숨겨 놓고는 귀가한 며느리를 보는 듯한 눈빛

지역에서 조금만 눈썰미 있는 사람들은 내 이름 다 알거란

이었다. 방 전체에 구린내가 진동하는 데 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

말이야. 이 년 전 사진이라고 해도 내 이름이랑 맞춰보면 금방

다. 절대 모르겠지. 그런데 불안해하는 듯한 그런 눈빛 말이다.

알아차릴 거야. 한 번만 부탁할게.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나도

“언제?”

진짜 딱 한 번 실수한 건데 이렇게 된 거라니까. 다른 애들은

“지금.”

수십 번을 해도 임신 한 번 안되고 잘만 하던데 나는 복도

“지금? 그럼 나랑 같이 가자고?”

지지리도 없지 어떻게 딱 한 번 했는데 임신이 됐는지 말야.

“응 그것도 그렇고 말야 …….”

내가 너라고 할 게. 니 주민번호도 외우면 되잖아. 이거 의료보험 기록에도 안남는 거고 그냥 형식적인 거야. 너한테 아무 해도 안

아까 넣어두었던 무언가가 또 울컥하고 올라왔다. 내 주위의 공

간다니까. 그리고 만약 걸리더라도 너랑 나는……. 아니

간이 마구 일그러지며 굉장한 압력으로 나를 내리누른다. 지금 여기 이 공

그러니까 내 말은 니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는 다르시잖니?

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7시 23분 47초를 지나는 순간의 초 단위의 시간조차

너네 아버지 집에서 쉬신지 몇 년 되셨다며 내 말 기분 나쁜 거

도 아까 전부터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서서히

아니지? 한번만 도와줘. 나 일 학기 수시로 사회봉사 특기자

나를 옥죄여왔다. 담임 앞에서 삼켰던 것조차 꾸물거리며 올라올 것 같은

쓸 건데 정말 이 번일 걸리면 내 인생은 끝이야. 넌 공부도

기분이다.

잘하니까 좋은 대학 갈 수 있잖아. 응?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지금도 그 곳은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기분

“조금 있으면 친구가 깰 거야. 김현화 라고 방송에서 나오면 들어가면 돼.”

좋은 물결이 넘실거리고 지금과는 다른 향기로운 울렁증으로 가득한 초원

간호원은 이미 이런 교복 입은 환자들은 많이 접해왔던 듯 아무

이 끝도 없이 펼쳐 진 채로 말이다.

표정 없이 나를 보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조금 있으면 김현화가 마취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치타는 그 곳에서 방금 태어난 얼룩

깰 것 이다. 김현화. 지금 이렇게 타인처럼 불러진 이름은 바로 나다. 저 안

말의 새끼를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고 있을 것이다. 아직 단단해지지도 않

에 있는 것 정윤정이고 말이다.

았을 여린뼈들을 씹으면서 수술용 메스같은 날카로운 이빨로 채 눈도 뜨지 못한, 단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는 그 여린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어대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38

통곡할 만한 자리

39


서 말이다. 그 꿈같은 광경의 일부분에 나는 치타의 사냥 장면을 그려 넣을

우리들은 모두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것도 그 곳의 삶의 일부이니 말이다. 내가 무사히

사랑이 되고 싶다.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때 되면 사냥이 끝난 지 오랜 후 일테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니, 피비린내도 없어져 있을 것이다.

라디오가 되고 싶다.

5월 3주차 문학 수업 제 2차시

◈ 성격 : 패러디, 해체적 ◈ 어조 : 풍자적, 반어적

주제 :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을

◈ 특징 :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표현과 구성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따르고 있음.

통해 패러디의 기법을 살펴보고 현대인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효과 적으로 탐구 할 수 있다.

◈ 구성 1연 :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2연 : 접근이 허락된 존재

그는 다만

3연 : 타인에게 접근의 허락을 받고 싶은 화자의 소망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4연 : 편리한 사랑을 원하는 우리의 소망

◈ 제재 : 라디오(김춘수의 시 <꽃>), 현대 도시 문명 ◈ 주제 : 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패러디(parody)

전파가 되었다.

패러디(parody)는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 parodeia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에서 유래한 말로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누가 와서 나의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문학에서 특정 작가의 약점이나 특정 문학유파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과도한 상투성을 강조해 보이기 위해 그들의 문체나 수법을 흉내내는 일종

그에게로 가서 나도

의 풍자적 비평이나 익살스러운 조롱조의 글.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참고 자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0

통곡할 만한 자리

41


서 말이다. 그 꿈같은 광경의 일부분에 나는 치타의 사냥 장면을 그려 넣을

우리들은 모두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것도 그 곳의 삶의 일부이니 말이다. 내가 무사히

사랑이 되고 싶다.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 때 되면 사냥이 끝난 지 오랜 후 일테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니, 피비린내도 없어져 있을 것이다.

라디오가 되고 싶다.

5월 3주차 문학 수업 제 2차시

◈ 성격 : 패러디, 해체적 ◈ 어조 : 풍자적, 반어적

주제 : 장정일의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을

◈ 특징 :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작품으로 표현과 구성에 있어서 원작의 틀을 따르고 있음.

통해 패러디의 기법을 살펴보고 현대인에 대한 고찰의 과정을 효과 적으로 탐구 할 수 있다.

◈ 구성 1연 :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2연 : 접근이 허락된 존재

그는 다만

3연 : 타인에게 접근의 허락을 받고 싶은 화자의 소망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4연 : 편리한 사랑을 원하는 우리의 소망

◈ 제재 : 라디오(김춘수의 시 <꽃>), 현대 도시 문명 ◈ 주제 : 현대인들의 가볍고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패러디(parody)

전파가 되었다.

패러디(parody)는 다른 노래에 병행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 parodeia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에서 유래한 말로 특정 작품의 소재나 작가의 문체를 흉내 내어 익살스럽게

누가 와서 나의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문학에서 특정 작가의 약점이나 특정 문학유파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과도한 상투성을 강조해 보이기 위해 그들의 문체나 수법을 흉내내는 일종

그에게로 가서 나도

의 풍자적 비평이나 익살스러운 조롱조의 글.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참고 자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0

통곡할 만한 자리

41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한 듯이 입을 다물고 가만 히 앉아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 수업시간 중엔 말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판을 보며 필기를 하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45분으로 정해져 있었

그는 다만

고, 그 시간 동안 마쳐야 하는 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프린트를 다 나눠주고 난 후 문학은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김춘수는 알고 있었다. 무의미의 시. 그러나 오규원과 장정일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느 문제집에서 스쳐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생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소했다. 김춘수의 아류인가.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답답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하복을 입기는 했지만 덥지는 않다. 열어놓은 창으로 약간은 달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짝지근한 교칙이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아직까지 내 머리카락은 어깨를 조금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넘어가는 정도다. 작년까지만 해도 귀에서 오 센티미터를 넘으면 단속에 걸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렸다. 치마 길이 또한 무릎을 덮으면 학생과로 끌려가서 벌점을 받았다.

보통명사가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김춘수의 꽃은 많이 들어봤지? 이 두 작품은 그 꽃을 패러디 한거야.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존재로 불리워 진 진정한

우리들은 모두

자아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어. 몸짓, 그냥 그 단순한 의미

명명하고 싶어했다.

없는 몸짓은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가 되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거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누군가를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욕망, 이름을 가지고 싶은 것은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어. 아주 순수한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욕망 말이야. 그런데 장정일은 그 시를 통해서 현대인들을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2

통곡할 만한 자리

43


오규원의 <꽃의 패러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당연한 듯이 입을 다물고 가만 히 앉아 있었다. 단 한 사람만이 수업시간 중엔 말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판을 보며 필기를 하고,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45분으로 정해져 있었

그는 다만

고, 그 시간 동안 마쳐야 하는 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프린트를 다 나눠주고 난 후 문학은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김춘수는 알고 있었다. 무의미의 시. 그러나 오규원과 장정일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어느 문제집에서 스쳐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생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소했다. 김춘수의 아류인가.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답답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하복을 입기는 했지만 덥지는 않다. 열어놓은 창으로 약간은 달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짝지근한 교칙이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아직까지 내 머리카락은 어깨를 조금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넘어가는 정도다. 작년까지만 해도 귀에서 오 센티미터를 넘으면 단속에 걸

금잔화, 작약, 포인세치아, 개밥풀, 인동, 황국 등등의

렸다. 치마 길이 또한 무릎을 덮으면 학생과로 끌려가서 벌점을 받았다.

보통명사가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김춘수의 꽃은 많이 들어봤지? 이 두 작품은 그 꽃을 패러디 한거야. 꽃은 단순한 꽃이 아니라 존재로 불리워 진 진정한

우리들은 모두

자아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어. 몸짓, 그냥 그 단순한 의미

명명하고 싶어했다.

없는 몸짓은 내가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가 되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거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누군가를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욕망, 이름을 가지고 싶은 것은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어. 아주 순수한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욕망 말이야. 그런데 장정일은 그 시를 통해서 현대인들을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2

통곡할 만한 자리

43


풍자하는 거지. 그런 의미 있는 것조차 원하면 쉽게 켜고 또 쉽게

다가 담임이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쉬는 시간은 십분, 다녀오면 또 수

끄는 존재가 된버린 일회성 같은 그런 사회 말이야. 그래서…….”

업 시작이다. 아직도 집에 가려면 까마득하게 남았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이미 자습서를 통해 다 외운 것들이다. 눈을 감고서도 저 앞에서

내가 쉴 수 있을까? 잠을 자면서도 단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 쉬는 것보

열강을 하고 있는 문학보다도 내가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

다 숨을 쉬어야만 한다. 당장.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

기 문학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났다. 갑자기 의자와 책상이 움직이는 소리에 조용하던 교실의 모든 인 기척이 내게 집중 됐다. 뒷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물론 장정일이 보는 것처럼 현대사회가 인스턴트화 되가는

이곳에서. 뒷문을 열고 빗장이 풀린 마구간의 문을 박차고 나가는 듯이 나

것은 사실이야.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그 상징성을 잃어버리고

는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쉬운 의미가 돼버렸지. 그런데 말야. 내 개인적은 생각은 김춘수건 장정일이건 오규원이건 말야, 가장 중요한 건 살짝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놓친 건 아닌 가하는 거야. 이 세상에는 이름 없는 것 들이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이름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아.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거야.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숨을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쉬고 호흡하고, 똥을 싸고 몸을 뒤트는 것들, 그게 아닌 쓰레기라

알았다.

할지라도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것 또한 소중한 거야. 이름이 9반, 8반, 7반… 수업 시간이라서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건 없건 소중한 것들이야. 지금 여러분 주위에 들이마시면서도 모르는 공기 또한 마찬 가지지. 모든 생명은

없었다. 문학이 나를 소리쳐 부르자 앞 반에서 수업 하던 영어가 무슨 일인

다 꽃이야.”

가 하고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다 이윽고 상황을 파악한 후, 나를 향해 달려 오기 시작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이 얼떨떨하다. 아니 정신이 얼떨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호흡에 호흡이 더해지고 교실안의 마흔 개의 숨소리에 공

“야! 너, 거기 안 서!”

기까지 더해져서 어지럽다. 아찔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소화제처럼 내 깊은 곳을 흔들며 동백꽃이 가득한 뒷동산에서 점순이의 품에 안긴 기분이

6반, 5반, 3반, 2반… 2반에선 미정이가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도 자습서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조금 있

저번 시험 기간에 없어진 문학 프린트물을 미진이가 독서실에서 보고 있었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4

통곡할 만한 자리

45


풍자하는 거지. 그런 의미 있는 것조차 원하면 쉽게 켜고 또 쉽게

다가 담임이 교무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쉬는 시간은 십분, 다녀오면 또 수

끄는 존재가 된버린 일회성 같은 그런 사회 말이야. 그래서…….”

업 시작이다. 아직도 집에 가려면 까마득하게 남았다. 그러나 집에 가서도

이미 자습서를 통해 다 외운 것들이다. 눈을 감고서도 저 앞에서

내가 쉴 수 있을까? 잠을 자면서도 단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다. 쉬는 것보

열강을 하고 있는 문학보다도 내가 더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

다 숨을 쉬어야만 한다. 당장.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

기 문학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났다. 갑자기 의자와 책상이 움직이는 소리에 조용하던 교실의 모든 인 기척이 내게 집중 됐다. 뒷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물론 장정일이 보는 것처럼 현대사회가 인스턴트화 되가는

이곳에서. 뒷문을 열고 빗장이 풀린 마구간의 문을 박차고 나가는 듯이 나

것은 사실이야. 사랑이라는 것은 이미 그 상징성을 잃어버리고

는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쉬운 의미가 돼버렸지. 그런데 말야. 내 개인적은 생각은 김춘수건 장정일이건 오규원이건 말야, 가장 중요한 건 살짝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산기슭을 벗어나자

놓친 건 아닌 가하는 거야. 이 세상에는 이름 없는 것 들이

눈앞이 아찔해지며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이름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아.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거야.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숨을

데가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다니는 존재임을

쉬고 호흡하고, 똥을 싸고 몸을 뒤트는 것들, 그게 아닌 쓰레기라

알았다.

할지라도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것 또한 소중한 거야. 이름이 9반, 8반, 7반… 수업 시간이라서 복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건 없건 소중한 것들이야. 지금 여러분 주위에 들이마시면서도 모르는 공기 또한 마찬 가지지. 모든 생명은

없었다. 문학이 나를 소리쳐 부르자 앞 반에서 수업 하던 영어가 무슨 일인

다 꽃이야.”

가 하고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다 이윽고 상황을 파악한 후, 나를 향해 달려 오기 시작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이 얼떨떨하다. 아니 정신이 얼떨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호흡에 호흡이 더해지고 교실안의 마흔 개의 숨소리에 공

“야! 너, 거기 안 서!”

기까지 더해져서 어지럽다. 아찔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소화제처럼 내 깊은 곳을 흔들며 동백꽃이 가득한 뒷동산에서 점순이의 품에 안긴 기분이

6반, 5반, 3반, 2반… 2반에선 미정이가 수업을 듣고 있을 것이다.

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도 자습서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조금 있

저번 시험 기간에 없어진 문학 프린트물을 미진이가 독서실에서 보고 있었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4

통곡할 만한 자리

45


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시험에 열 문제 이상 나온다고 선생님이 강조했던

기쁨[喜]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치면 울게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꼼꼼히 필기했던 것이었다. 미정아 미안해.

되고, 즐거움[樂]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愛]이 사무치면

사실 그 때 너를 원망하고 저주했어. 너의 재수 없는 얼굴을 내 발로 짓이기

울게 되고, 미움[惡]이 극에 달하여도 울게 되고, 욕심[欲]이

는 상상을 몇 십, 몇 백번을 했었는지 몰라. 대학만 들어가 봐라. 내가 너 보

사무치면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버리는

다 훨씬 좋은 대학에 들어갈 테니까. 하면서 매번 시험 기간이 올 때 마다 나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소이다. 울음이란

는 내 안에서 너를 죽이고 또 죽였어. 그런데 대학에 가면, 그러고 나면 어쩌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게요. 복받쳐 나오는

지? 그러고 나면 내게는 뭐가 남는 거지? 나는 또 그 곳에서 또 다른 너를 만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 다르리요?

나고 그 또 다른 너를 수백 번이고 죽이는 상상을 반복할 텐데 말야. 귀정역은 아직 멀었다. 저 멀리서 역 안내판 같은 게 보이는 것 같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대고

기도 하다. 어쨌거나 공원을 찾으면 좀 앉아야겠다. 목도 좀 축였으면 좋겠

말했다.

다. 이제 곧 여름이 시작 될 것이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아스팔트 사이사이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

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 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팽팽하게 부풀

정 진사가,

어 있다. 굳이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으리라. 그냥 저기 저 곳에 서 있

“이 천지간에 이런 넓은 안계(眼界)를 만나 홀연 울고 싶다니

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 아닌가 삶이라는 것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

그 무슨 말씀이오?”

다. 천천히 내뱉으면서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돌 아가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조금씩 숨이 차 왔다. 아직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런데 신기하게도 달려가는 동안에, 내가 그렇게 답답하다고 느꼈던 이 건물

지금 내게 복받쳐 오는 이 감정은 그 칠정중에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꽤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건물은 오 층이었다. 박지원이 통 곡할 만한 자리를 찾을 때의 기분이 지금 나와 같을까?

아이가 어미 태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는 어둡고 갑갑하고 얽매 이고 비좁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 나오자 팔을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펴고 다리를 뻗어 정신이 시원하게 될 터이니, 어찌 한번 감정이 다하도록

칠정(七情) 중에서 슬픈 감정[哀]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참된 소리를 질러 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겝니다.

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6

통곡할 만한 자리

47


노라는 얘기를 들었다. 시험에 열 문제 이상 나온다고 선생님이 강조했던

기쁨[喜]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치면 울게

것이었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꼼꼼히 필기했던 것이었다. 미정아 미안해.

되고, 즐거움[樂]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愛]이 사무치면

사실 그 때 너를 원망하고 저주했어. 너의 재수 없는 얼굴을 내 발로 짓이기

울게 되고, 미움[惡]이 극에 달하여도 울게 되고, 욕심[欲]이

는 상상을 몇 십, 몇 백번을 했었는지 몰라. 대학만 들어가 봐라. 내가 너 보

사무치면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버리는

다 훨씬 좋은 대학에 들어갈 테니까. 하면서 매번 시험 기간이 올 때 마다 나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소이다. 울음이란

는 내 안에서 너를 죽이고 또 죽였어. 그런데 대학에 가면, 그러고 나면 어쩌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게요. 복받쳐 나오는

지? 그러고 나면 내게는 뭐가 남는 거지? 나는 또 그 곳에서 또 다른 너를 만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뭐 다르리요?

나고 그 또 다른 너를 수백 번이고 죽이는 상상을 반복할 텐데 말야. 귀정역은 아직 멀었다. 저 멀리서 역 안내판 같은 게 보이는 것 같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대고

기도 하다. 어쨌거나 공원을 찾으면 좀 앉아야겠다. 목도 좀 축였으면 좋겠

말했다.

다. 이제 곧 여름이 시작 될 것이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아스팔트 사이사이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

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나무 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처럼 팽팽하게 부풀

정 진사가,

어 있다. 굳이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지는 않으리라. 그냥 저기 저 곳에 서 있

“이 천지간에 이런 넓은 안계(眼界)를 만나 홀연 울고 싶다니

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 아닌가 삶이라는 것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

그 무슨 말씀이오?”

다. 천천히 내뱉으면서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였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돌 아가도 늦지 않을 것 같다.

조금씩 숨이 차 왔다. 아직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 런데 신기하게도 달려가는 동안에, 내가 그렇게 답답하다고 느꼈던 이 건물

지금 내게 복받쳐 오는 이 감정은 그 칠정중에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꽤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이 건물은 오 층이었다. 박지원이 통 곡할 만한 자리를 찾을 때의 기분이 지금 나와 같을까?

아이가 어미 태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는 어둡고 갑갑하고 얽매 이고 비좁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탁 트인 넓은 곳으로 빠져 나오자 팔을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펴고 다리를 뻗어 정신이 시원하게 될 터이니, 어찌 한번 감정이 다하도록

칠정(七情) 중에서 슬픈 감정[哀]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

참된 소리를 질러 보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를 겝니다.

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하리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6

통곡할 만한 자리

47


내 이름으로 등록한 수술대 위에서 사라져간 윤정이의 아이. 그 생각을 하니 배 아래쪽에 찡한 통증이 왔다. 그래 어쩌면 너도 나와 전생에 진한 운명이었을지 모르겠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니 제대로 손, 발 한 번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을 사라져갔을, 그래도 나는 너를 생명이 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자율학습을 빼먹고 하얗고 깔끔하지만 더 러운 냄새가 진동하던 그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교복을 입은 내가 하얀 블 라우스를 입고 아직 가슴도 완전히 자라지 않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자궁에 옮겨 넣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십오 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 짧은, 밥 한 공기 먹을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면서 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호랑이의 출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호랑이뿐만 아 니라 모든 짐승들이 자기 새끼를 낳으면 본능적으로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새끼들을 핥는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작지만 강렬한 울음소리를 듣기 위 해서 말이다. 어둡고 갑갑한 동굴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좁고 답답한 곳 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른 적 없는 엄마가 너를 죽이려고 친구에게 부탁 하는 소리를 들었겠지 너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나와 함께 저 앞의 작은 공원으로 가자. 아마 그 때 박지원도 슬프고도 분하면서 탁 트 이는 기분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불면서 아스팔트 바닥 에 먼지들이 확 일어났다. 시야가 약간 흐려지면서 나는 눈을 반쯤 감았다. 막 해가 지고 난 후, 아직 남아있는 태양의 잔재가 신기루처럼 붉은 보석가 루처럼 흩뿌려졌다.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꽃이다. 곧 그 곳에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꿈에서만 봤던 그 황금 생 명이 요동치는 신의 꽃밭, 그 곳으로 말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8


내 이름으로 등록한 수술대 위에서 사라져간 윤정이의 아이. 그 생각을 하니 배 아래쪽에 찡한 통증이 왔다. 그래 어쩌면 너도 나와 전생에 진한 운명이었을지 모르겠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니 제대로 손, 발 한 번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을 사라져갔을, 그래도 나는 너를 생명이 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자율학습을 빼먹고 하얗고 깔끔하지만 더 러운 냄새가 진동하던 그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교복을 입은 내가 하얀 블 라우스를 입고 아직 가슴도 완전히 자라지 않은 내가, 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자궁에 옮겨 넣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십오 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그 짧은, 밥 한 공기 먹을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면서 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호랑이의 출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호랑이뿐만 아 니라 모든 짐승들이 자기 새끼를 낳으면 본능적으로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새끼들을 핥는다.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작지만 강렬한 울음소리를 듣기 위 해서 말이다. 어둡고 갑갑한 동굴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 좁고 답답한 곳 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른 적 없는 엄마가 너를 죽이려고 친구에게 부탁 하는 소리를 들었겠지 너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울어본 적 없는 나와 함께 저 앞의 작은 공원으로 가자. 아마 그 때 박지원도 슬프고도 분하면서 탁 트 이는 기분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바람이 한 번 크게 불면서 아스팔트 바닥 에 먼지들이 확 일어났다. 시야가 약간 흐려지면서 나는 눈을 반쯤 감았다. 막 해가 지고 난 후, 아직 남아있는 태양의 잔재가 신기루처럼 붉은 보석가 루처럼 흩뿌려졌다. 너도 꽃이고, 나도 꽃이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것 그 자체로 꽃이다. 곧 그 곳에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꿈에서만 봤던 그 황금 생 명이 요동치는 신의 꽃밭, 그 곳으로 말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48


청춘의

화나는 넋두리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청춘의

화나는 넋두리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해충에 대한 화 자정 즈음 어느 군부대, 어느 맛이 간 당직부관의 일지에서 발췌.

이제 슬슬 졸음이 올 때가 되어 가는데, 우리 포대장은 전화를 왜 저렇게 오래 하는지? 그가 말하는 것을 통해 대화 내용을 유추해 보자니, 곧 있을 결혼에 의해 신이 난 상태로써 주변 지인들에게 쉴 새 없이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군인 정신이 안락한 당직사령의 의자에 파묻혀 잠들어야만 나는 쪼그린 채, 비굴한 졸음이라도 청할 수 있을 텐데. 이놈의 모기들은, 내일 준비태세를 뛰어야만 근무취침을 할 수 있는 삐쩍 꼴은 분대장에게 일말의 동정도차 느끼지 못하는 건지, 뭘 그리 뽑아 먹으려고 주변을 배회하는 거냐? 너희들 모두에게 한 방울씩만 피를 나눠준다면 하룻밤 사이 나는 제로 칼로리의 미라가 되어 후번에게 완장을 인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좆같은 개파리 개모기 새끼들…. 다 죽여도 생태계에는 지장이 없(기를 바라는)는. 이것들의 말살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내려준 미션인데, 게을러빠진 인간들은 이기적이게도 제 주위를 맴도는 것들만 살충제나 파리채 따위로 소극적인 방어태세만 취하니까 줄어들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만 가는 것이다. 종말이란 인간의 콧구멍 속까지 파리, 모기가 가득 차버리게 될 근미래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어서 무의미한 분쟁은 멈추고 모든 군대와 과학기술 그리고 GDP를 동원하여 해충박멸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종말이란 건 남편이 출장 간 이웃집 새댁만큼이나 우리의 곁으로 금세 안겨올 것이다. 오늘 밤도 나는 파리채 하나 들고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53


해충에 대한 화 자정 즈음 어느 군부대, 어느 맛이 간 당직부관의 일지에서 발췌.

이제 슬슬 졸음이 올 때가 되어 가는데, 우리 포대장은 전화를 왜 저렇게 오래 하는지? 그가 말하는 것을 통해 대화 내용을 유추해 보자니, 곧 있을 결혼에 의해 신이 난 상태로써 주변 지인들에게 쉴 새 없이 연락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군인 정신이 안락한 당직사령의 의자에 파묻혀 잠들어야만 나는 쪼그린 채, 비굴한 졸음이라도 청할 수 있을 텐데. 이놈의 모기들은, 내일 준비태세를 뛰어야만 근무취침을 할 수 있는 삐쩍 꼴은 분대장에게 일말의 동정도차 느끼지 못하는 건지, 뭘 그리 뽑아 먹으려고 주변을 배회하는 거냐? 너희들 모두에게 한 방울씩만 피를 나눠준다면 하룻밤 사이 나는 제로 칼로리의 미라가 되어 후번에게 완장을 인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좆같은 개파리 개모기 새끼들…. 다 죽여도 생태계에는 지장이 없(기를 바라는)는. 이것들의 말살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내려준 미션인데, 게을러빠진 인간들은 이기적이게도 제 주위를 맴도는 것들만 살충제나 파리채 따위로 소극적인 방어태세만 취하니까 줄어들기는커녕 기하급수적으로 그 수가 늘어만 가는 것이다. 종말이란 인간의 콧구멍 속까지 파리, 모기가 가득 차버리게 될 근미래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어서 무의미한 분쟁은 멈추고 모든 군대와 과학기술 그리고 GDP를 동원하여 해충박멸에 몰두하지 않는다면 종말이란 건 남편이 출장 간 이웃집 새댁만큼이나 우리의 곁으로 금세 안겨올 것이다. 오늘 밤도 나는 파리채 하나 들고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고독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53


여자에 대한 화 크리스마스 이브 날, 첫눈에 반해 사귀기로(?)한 여자에게 바로 이튿날 차이고는. 여자가 자신을 가지고 논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역시 로맨스따위는 개나 줘버려 라며 자학적이고 염세적인 심리상태가 된 남자가 쓴 일기에서 발췌.

나는 싸움에서 진 개 마냥, 상처를 핥아줄 다른 개를 찾아 헤매고. 나는 하늘을 나는 피터팬과 웬디를 질투하고 있는, 날 수 있을 리가 없는 수염만 무성한 후크 선장이며. 가진 것이라곤 새카맣게 썩어버린 소세지. 이것마저 빼앗기면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 이건 굶주린 악어나 처먹으라고 던져버리자.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이만 먹었나봐? 쓸데없는 것들만 보고 듣고 생각했나봐? 발버둥 쳐도 얻을 수 있는 해답은 한개, 한계. 딱 거기까지. 대안은 이미 역사책에나 존재하는 실패한 혁명이고. 그 잘난 이성과 이상도 다 거짓부렁에 불과한 거지. 나는 그것이 낭만이라고 부인하고 자위하고. 그래 먹을 수도 없는 썩어빠진 소세지 하나. 이거라도 빼앗기면 난 정말 가진 게 없으니까. 나는 싸움에 진 개 마냥, 오늘도 이방인처럼 홍대나 한바퀴 돌고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4


여자에 대한 화 크리스마스 이브 날, 첫눈에 반해 사귀기로(?)한 여자에게 바로 이튿날 차이고는. 여자가 자신을 가지고 논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역시 로맨스따위는 개나 줘버려 라며 자학적이고 염세적인 심리상태가 된 남자가 쓴 일기에서 발췌.

나는 싸움에서 진 개 마냥, 상처를 핥아줄 다른 개를 찾아 헤매고. 나는 하늘을 나는 피터팬과 웬디를 질투하고 있는, 날 수 있을 리가 없는 수염만 무성한 후크 선장이며. 가진 것이라곤 새카맣게 썩어버린 소세지. 이것마저 빼앗기면 나는 가진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 이건 굶주린 악어나 처먹으라고 던져버리자. 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이만 먹었나봐? 쓸데없는 것들만 보고 듣고 생각했나봐? 발버둥 쳐도 얻을 수 있는 해답은 한개, 한계. 딱 거기까지. 대안은 이미 역사책에나 존재하는 실패한 혁명이고. 그 잘난 이성과 이상도 다 거짓부렁에 불과한 거지. 나는 그것이 낭만이라고 부인하고 자위하고. 그래 먹을 수도 없는 썩어빠진 소세지 하나. 이거라도 빼앗기면 난 정말 가진 게 없으니까. 나는 싸움에 진 개 마냥, 오늘도 이방인처럼 홍대나 한바퀴 돌고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4


집에 와서는 회한의 한숨을 내쉰 뒤,

막막한 현실에 대한 화

남이 만든 환각에 도취하고 말아.

교수에게 수 년 안에 서울역에 진출할 것이라는 평을 들은

이놈의 집구석에는 어째서 마약 한 봉다리 없는 걸까?

어느 술이 덜 깬 대학 졸업생의 헛소리에서 발췌.

술을 먹고 푹 잔 다음날이면, 더러운 기분으로 쓰디쓴 입맛을

씨발 누가 제발 말해주라 한번뿐인 인생이라고.

느끼며 힘겹게 일어나고, 몇 년째 접어드는 나의 유흥인 숙취에서의

정말이지 한번뿐이라면 어떻게 살다 뒈져도 좋을 텐데.

흡연과 오렌지 쥬스 섭취 욕구에 의해 가까운 편의점에 가게 된다. 사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대형마트 코아마트에 가서

누군가 말하길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근거는 있다지.

원하는 것들을 구입하는 편이 돈을 절약하는 길인데, 귀찮기도 해서 가까운

그래봤자 내가 지껄이는 것도 니가 재량껏 씨부리는 것도

편의점에 가게 되곤 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슬리퍼에 츄리닝 차림으로

다 똑같지, 다 똑같아!

텅빈 머리를 감추기 위한 비니를 쓰고 간만에 코아마트에 갔다.

내 생활의 이동경로가 주로 집-술집-집-가까운 편의점으로 한정

이제 와서 난 또 왜 염세에 빠지게 되는 걸까?

되어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덜 귀찮은 패턴의 라이프스타일을 습관적으로

뭘 해도 다 똑같은 이놈의 세상이 지긋지긋해진 거지.

고집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놈의 동네가 옛날하고는 달라서 평범한 한국의 주거단지와는 다른 게 집 근처를 슬리퍼신고 세수도 안하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은 항상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지.

나서기에는, 단장을 한 젊고 예쁜 여자가 너무 많이 다닌다는 것이다.

그걸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 것도 같은데 그러긴 싫고.

어쨌든, 코아마트에 들어가서 숙취에 애용해온 1.5리터 오렌지

세상에서 천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야.

쥬스와 담배 한 갑, 그리고 나중을 위한 라면 두개를 사서 봉지에 넣고

창녀를 사서 날개를 달아주는 것.

나오는데 점원 녀석이 나보고는 안녕히 계시란다.

왜냐면 세상에 천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도시인들은 어쩔 수

자, 이 모든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

없이 소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소박하게 대형마트에서

풀기엔 너무 귀찮은 문제야.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그 속을 거닐며 원하는 물건을

그저 싸움에 진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가 풀썩.

고르고, 돈을 지불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다는 것. 그놈의 합리를 위해서.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련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6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57


집에 와서는 회한의 한숨을 내쉰 뒤,

막막한 현실에 대한 화

남이 만든 환각에 도취하고 말아.

교수에게 수 년 안에 서울역에 진출할 것이라는 평을 들은

이놈의 집구석에는 어째서 마약 한 봉다리 없는 걸까?

어느 술이 덜 깬 대학 졸업생의 헛소리에서 발췌.

술을 먹고 푹 잔 다음날이면, 더러운 기분으로 쓰디쓴 입맛을

씨발 누가 제발 말해주라 한번뿐인 인생이라고.

느끼며 힘겹게 일어나고, 몇 년째 접어드는 나의 유흥인 숙취에서의

정말이지 한번뿐이라면 어떻게 살다 뒈져도 좋을 텐데.

흡연과 오렌지 쥬스 섭취 욕구에 의해 가까운 편의점에 가게 된다. 사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대형마트 코아마트에 가서

누군가 말하길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근거는 있다지.

원하는 것들을 구입하는 편이 돈을 절약하는 길인데, 귀찮기도 해서 가까운

그래봤자 내가 지껄이는 것도 니가 재량껏 씨부리는 것도

편의점에 가게 되곤 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슬리퍼에 츄리닝 차림으로

다 똑같지, 다 똑같아!

텅빈 머리를 감추기 위한 비니를 쓰고 간만에 코아마트에 갔다.

내 생활의 이동경로가 주로 집-술집-집-가까운 편의점으로 한정

이제 와서 난 또 왜 염세에 빠지게 되는 걸까?

되어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덜 귀찮은 패턴의 라이프스타일을 습관적으로

뭘 해도 다 똑같은 이놈의 세상이 지긋지긋해진 거지.

고집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이놈의 동네가 옛날하고는 달라서 평범한 한국의 주거단지와는 다른 게 집 근처를 슬리퍼신고 세수도 안하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은 항상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지.

나서기에는, 단장을 한 젊고 예쁜 여자가 너무 많이 다닌다는 것이다.

그걸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알 것도 같은데 그러긴 싫고.

어쨌든, 코아마트에 들어가서 숙취에 애용해온 1.5리터 오렌지

세상에서 천사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야.

쥬스와 담배 한 갑, 그리고 나중을 위한 라면 두개를 사서 봉지에 넣고

창녀를 사서 날개를 달아주는 것.

나오는데 점원 녀석이 나보고는 안녕히 계시란다.

왜냐면 세상에 천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모든 도시인들은 어쩔 수

자, 이 모든 문제의 답은 무엇일까?

없이 소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소박하게 대형마트에서

풀기엔 너무 귀찮은 문제야.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판단을 하고는 그 속을 거닐며 원하는 물건을

그저 싸움에 진 개처럼 어슬렁거리다가 풀썩.

고르고, 돈을 지불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다는 것. 그놈의 합리를 위해서. 딱히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련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6

화나는 청춘의 넋두리

57


그냥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인, 너무나도 합리적인. 이런 게 싫다면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작은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귀찮을 것이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귀찮은 짓이라고, 집을 짓는다는 것부터가. 먹고 살아보겠다고 야채에다가 매일같이 물을 주고, 벌레를 잡다가 결국은 그냥 먹고 말 것이면서 키워보겠다고 애쓰겠지. 만에 하나 키우던 배추에 애정이라도 생기면 웅진이라던가 델몬트같은 이름을 지어주고는 흐뭇하게 성장을 지켜보겠지만 정 배고프면 캐내서 끓인 다음, 먹어버리겠지. 어제부로 나는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졸업을 하였고, 드디어 국가공인의 25살짜리 청년 실업자가 되었다. 익숙하지만 친숙해지지 않는 금전의 압박, 주거지역의 부담스러운 발전, 세상에 내팽개쳤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는 25살이란 나이. 심지어는 어리숙한 가게 점원이라던지, 모두가 합리만을 추구하는 사회구조, 배추농사의 허무함에 대한 방금 전의 내 한심한 고찰까지도 왠지 모르게 울컥하고 화가 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8


그냥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인, 너무나도 합리적인. 이런 게 싫다면 산골짜기에 집을 짓고 작은 밭을 일구며 자급자족하면서 사는 생활을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귀찮을 것이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귀찮은 짓이라고, 집을 짓는다는 것부터가. 먹고 살아보겠다고 야채에다가 매일같이 물을 주고, 벌레를 잡다가 결국은 그냥 먹고 말 것이면서 키워보겠다고 애쓰겠지. 만에 하나 키우던 배추에 애정이라도 생기면 웅진이라던가 델몬트같은 이름을 지어주고는 흐뭇하게 성장을 지켜보겠지만 정 배고프면 캐내서 끓인 다음, 먹어버리겠지. 어제부로 나는 전문 학사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졸업을 하였고, 드디어 국가공인의 25살짜리 청년 실업자가 되었다. 익숙하지만 친숙해지지 않는 금전의 압박, 주거지역의 부담스러운 발전, 세상에 내팽개쳤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는 25살이란 나이. 심지어는 어리숙한 가게 점원이라던지, 모두가 합리만을 추구하는 사회구조, 배추농사의 허무함에 대한 방금 전의 내 한심한 고찰까지도 왠지 모르게 울컥하고 화가 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58


고양이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글

김종소리

그림

정지호 원보람


고양이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글

김종소리

그림

정지호 원보람


늦은 밤, 짙은 어둠 속.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이상 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 한 명이 걷고 있었다. 검은 우산, 비에 약간 젖어 창백해 보이는 하얀 블라우스, 검은 정장치마에 굽이 없는 검은 구두, 어깨까지 오는 단발의 헤어스타일은 누가 봐도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기다란 얼굴에 커다란 눈과 입, 기다란 코에 깃들여 있던 지나치게 밝은 표정과 어깨가 들썩거리는 흥겨운 발걸음은 어딘지 놀 이터에 놀러가는 어린 아이와 너무 닮아 있어, 여자의 차림과는 매우 부자 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니다. 여자는 늘 어두웠다. 그래서 그 지나치게 밝은 표정과 흥겨운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희애, 올해로 서른, 독신이었다.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 다. 아니, 연애는커녕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 상대가 무엇이든 간에. 희애는 부모의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희애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도망쳤 다. 그렇게 혼자 희애를 떠안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희애가 자신의 삶을 망 쳤다며 갓 태어난 아이에게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하지만 싸질러 놓은 자 식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공장에 다니며 희애를 억지로 키웠다. 희 애의 어머니는 부모도,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그 때문에 희애는 간난아이 때부터 집 안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어 서도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집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희애에게 세계는 컴컴한 지하방의 좁디좁은 방이 전부였다. 그렇게 좁은 세계에서 8년을 살 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희애는 세계란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사람이란 생명 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희애의 눈에 그들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너무나 사

고양이

63


늦은 밤, 짙은 어둠 속.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이상 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 한 명이 걷고 있었다. 검은 우산, 비에 약간 젖어 창백해 보이는 하얀 블라우스, 검은 정장치마에 굽이 없는 검은 구두, 어깨까지 오는 단발의 헤어스타일은 누가 봐도 회사원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기다란 얼굴에 커다란 눈과 입, 기다란 코에 깃들여 있던 지나치게 밝은 표정과 어깨가 들썩거리는 흥겨운 발걸음은 어딘지 놀 이터에 놀러가는 어린 아이와 너무 닮아 있어, 여자의 차림과는 매우 부자 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니다. 여자는 늘 어두웠다. 그래서 그 지나치게 밝은 표정과 흥겨운 발걸음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희애, 올해로 서른, 독신이었다. 연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 다. 아니, 연애는커녕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 상대가 무엇이든 간에. 희애는 부모의 원치 않은 임신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희애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도망쳤 다. 그렇게 혼자 희애를 떠안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희애가 자신의 삶을 망 쳤다며 갓 태어난 아이에게 고래고래 욕을 해댔다. 하지만 싸질러 놓은 자 식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공장에 다니며 희애를 억지로 키웠다. 희 애의 어머니는 부모도,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그 때문에 희애는 간난아이 때부터 집 안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가 되어 서도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집 안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희애에게 세계는 컴컴한 지하방의 좁디좁은 방이 전부였다. 그렇게 좁은 세계에서 8년을 살 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희애는 세계란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사람이란 생명 체들을 만나게 되었다. 희애의 눈에 그들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너무나 사

고양이

63


랑스러웠다. 마주치는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같 은 반,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고,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 앉아 울고 있어? 비도 오는데….”

서 희애는 아이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준비했다. 8년간 해

미리는 고개를 들고 희애를 쳐다보았다. 미리의 품에는 미리의

온 것이라곤 집 안에 갇혀 생각하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꿈을 이야기로 만

고양이가 죽은 채로 안겨있었다. 고양이는 머리가 깨진 듯 가죽이 흐느적거

들고, 다시 그 이야기를 이어서 만들고…. 희애는 학교에 가, 아이들 곁에

렸다. 눈알은 그 틀을 벗어나 붉은 색의 핏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주

서 그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희애가 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희

둥이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찢어진 구멍처럼 보였다. 군데군

애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희애의 이야기들을 무척 재밌게 들었다.

데 검붉은 색으로 굳어진 피가 묻어 있었다. 목은 절반이 뜯겨졌는데 그곳에

하지만 막상 이야기가 끝나면 희애의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희애

선 아직도 선명하게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네 다리와 몸통은 모든 관절

주위에 맴돌고 있던 음울함이 그 이유였다. 결국, 희애는 사람들 모두를 사

이 펴진 듯 곧게 뻗은 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윤기 있게 번들거리던 검

랑했지만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희애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선생들

은 털들은 비에 젖어 누렇게 보였고 흐르고 있는 피와 굳어버린 피들로 범벅

까지도.

이 되어 자줏빛이 나기도 했다. 미리의 품은 고양이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 몇 차례나 반복하여 이런 경험들을 겪은 희애는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노력을 그만둔 것이

었다. 그 모습을 본 희애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음산했다. 희애는 희미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그만두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 싶은,

평소, 미리의 고양이에게 정을 주진 않았지만 시체를 보니 눈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은 점

이 났다. 그렇게 우산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흐릿한 신음

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희애의 마음에는 어둠이 더해졌다. 그래서 희애는

소리를 내고 있는 희애에게 미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늘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은 그녀의 몸을 켜켜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누군가 일부러 죽인거야.”

그렇게 희애가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발걸음과 지나치게 밝은 표

“응?”

정으로 집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룸메이트인 강미리는 우산도 없이 문

“누군가 일부러 죽인 거라고. 누군가 일부러 죽인거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희애는 그 모습을 보고, 흥겨운 발걸음과

“무슨 소리야 미리야?”

밝은 표정을 평상시의 우울하도록 느린 발걸음과 어둡디 어두운 표정으로

“저기 망치 보여?”

되돌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채로 울고 있는 미리를 바라보았다. 짙은 어 둠이 깔린 골목에는 시끄럽게 내리는 빗소리와 미리의 울음소리로 기괴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윽고 희애는 미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녀 특유의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4

둘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쇠뭉치에 피딱지가 붙어 있는 망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망치에 핏자국이 선명해. 게다가 우리 양이는…. 우리는 양이는,

고양이

65


랑스러웠다. 마주치는 사람이란 사람은 전부 사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같 은 반, 자신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특히 사랑했고, 친해지고 싶었다. 그래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여기 앉아 울고 있어? 비도 오는데….”

서 희애는 아이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재밌는 이야기를 준비했다. 8년간 해

미리는 고개를 들고 희애를 쳐다보았다. 미리의 품에는 미리의

온 것이라곤 집 안에 갇혀 생각하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꿈을 이야기로 만

고양이가 죽은 채로 안겨있었다. 고양이는 머리가 깨진 듯 가죽이 흐느적거

들고, 다시 그 이야기를 이어서 만들고…. 희애는 학교에 가, 아이들 곁에

렸다. 눈알은 그 틀을 벗어나 붉은 색의 핏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주

서 그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이들은 희애가 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희

둥이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단지 찢어진 구멍처럼 보였다. 군데군

애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희애의 이야기들을 무척 재밌게 들었다.

데 검붉은 색으로 굳어진 피가 묻어 있었다. 목은 절반이 뜯겨졌는데 그곳에

하지만 막상 이야기가 끝나면 희애의 주위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희애

선 아직도 선명하게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네 다리와 몸통은 모든 관절

주위에 맴돌고 있던 음울함이 그 이유였다. 결국, 희애는 사람들 모두를 사

이 펴진 듯 곧게 뻗은 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윤기 있게 번들거리던 검

랑했지만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희애를 사랑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선생들

은 털들은 비에 젖어 누렇게 보였고 흐르고 있는 피와 굳어버린 피들로 범벅

까지도.

이 되어 자줏빛이 나기도 했다. 미리의 품은 고양이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 몇 차례나 반복하여 이런 경험들을 겪은 희애는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준비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노력을 그만둔 것이

었다. 그 모습을 본 희애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음산했다. 희애는 희미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그만두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 싶은,

평소, 미리의 고양이에게 정을 주진 않았지만 시체를 보니 눈물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은 점

이 났다. 그렇게 우산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흐릿한 신음

점 커져갔다. 그럴수록 희애의 마음에는 어둠이 더해졌다. 그래서 희애는

소리를 내고 있는 희애에게 미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늘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은 그녀의 몸을 켜켜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누군가 일부러 죽인거야.”

그렇게 희애가 어울리지 않는 흥겨운 발걸음과 지나치게 밝은 표

“응?”

정으로 집 앞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룸메이트인 강미리는 우산도 없이 문

“누군가 일부러 죽인 거라고. 누군가 일부러 죽인거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희애는 그 모습을 보고, 흥겨운 발걸음과

“무슨 소리야 미리야?”

밝은 표정을 평상시의 우울하도록 느린 발걸음과 어둡디 어두운 표정으로

“저기 망치 보여?”

되돌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채로 울고 있는 미리를 바라보았다. 짙은 어 둠이 깔린 골목에는 시끄럽게 내리는 빗소리와 미리의 울음소리로 기괴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윽고 희애는 미리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녀 특유의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4

둘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쇠뭉치에 피딱지가 붙어 있는 망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망치에 핏자국이 선명해. 게다가 우리 양이는…. 우리는 양이는,

고양이

65


머리통만 부셔졌어. 누군가 분명히 저 망치로 우리 양이 머리를

“그래. 네가 남자를 많이 만났잖아. 근데 헤어지고 그렇게

친 거야.”

심하게 따라다닌 남자는 강우씨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왠지

“왜? 양이가 뭘 했다고?”

강우씨가 의심스러워.”

“나도 몰라!”

희애의 이야기를 들은 미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미리는 죽은 고양이를 꽉 껴안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근데 강우는 그럴 배짱도 없는 사람이야. 소심하고 착한

울기 시작했다. 희애는 일어서 미리의 곁으로 가 미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미리야. 그놈 잡자. 내가 도와줄게.”

사람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질려서 잘 알아.” “그래서 더 의심스러워. 네가 고양이가 강우씨보다 낫다며

미리는 희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희애는 미리의 어깨를 토닥이

비꼬았잖아. 아! 그리고 그 핸드폰 가게 사장도.”

며 훌쩍거렸다. 잠시 후, 희애는 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빼며 말

“핸드폰 가게 사장?”

했다.

“응. 그 외 있잖아. 얼마 전에 너한테 추근거렸던….” “우선 사진을 찍어놔야 할 것 같아.”

“아. 맞아. 그 사람 눈빛이 이상했어.”

희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카메라를 들고 나와 머리가 깨 진 채로 죽어 있는 고양이와 핏자국이 선명한 망치를 연달아 찍었다. 둘은

“그래. 게다가 너한테 엄청 집착했잖아.” “그럼 일단 강우한테 연락해봐야겠다.”

내내 울었다. 사진을 다 찍은 후에도 미리는 바닥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희 애는 그런 미리의 곁에 있어주었다.

미리는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이야기만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안 받는데?”

다음날 아침, 둘은 회사에 각자 휴직계를 냈다. 프린트한 고양이

“그럼 이 전단지부터 복사해서 동네에 붙이자. 그리고 경찰서에

의 사진을 종이에 붙이고 자세한 내용과 연락처를 써넣었다. 그렇게 전단지

신고하자.”

를 다 만들었을 때, 희애가 입을 열었다.

희애가 전단지를 들고 일어서자 미리도 같이 일어나 희애를 안으

“혹시 강우씨 짓이 아닐까?”

며 말했다.

“뭐? 강우?”

“그래. 고마워 희애야. 너 아니었으면 난 아무 것도 못 했을 거야.”

“응. 강우씨. 네가 얼마 전에 헤어지자고 하니까 스토커처럼 널

“그래. 가자.”

따라다녔잖아. 계속 연락하고….”

그렇게 둘은 집을 나섰다. 전 날의 음울하고 기괴스럽기까지 했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진 계속 그러다 요즘 들어 그만두었었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6

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선선하여 쾌청했다.

고양이

67


머리통만 부셔졌어. 누군가 분명히 저 망치로 우리 양이 머리를

“그래. 네가 남자를 많이 만났잖아. 근데 헤어지고 그렇게

친 거야.”

심하게 따라다닌 남자는 강우씨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 왠지

“왜? 양이가 뭘 했다고?”

강우씨가 의심스러워.”

“나도 몰라!”

희애의 이야기를 들은 미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미리는 죽은 고양이를 꽉 껴안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근데 강우는 그럴 배짱도 없는 사람이야. 소심하고 착한

울기 시작했다. 희애는 일어서 미리의 곁으로 가 미리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미리야. 그놈 잡자. 내가 도와줄게.”

사람인데. 그것 때문에 내가 질려서 잘 알아.” “그래서 더 의심스러워. 네가 고양이가 강우씨보다 낫다며

미리는 희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희애는 미리의 어깨를 토닥이

비꼬았잖아. 아! 그리고 그 핸드폰 가게 사장도.”

며 훌쩍거렸다. 잠시 후, 희애는 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빼며 말

“핸드폰 가게 사장?”

했다.

“응. 그 외 있잖아. 얼마 전에 너한테 추근거렸던….” “우선 사진을 찍어놔야 할 것 같아.”

“아. 맞아. 그 사람 눈빛이 이상했어.”

희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카메라를 들고 나와 머리가 깨 진 채로 죽어 있는 고양이와 핏자국이 선명한 망치를 연달아 찍었다. 둘은

“그래. 게다가 너한테 엄청 집착했잖아.” “그럼 일단 강우한테 연락해봐야겠다.”

내내 울었다. 사진을 다 찍은 후에도 미리는 바닥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희 애는 그런 미리의 곁에 있어주었다.

미리는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이야기만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안 받는데?”

다음날 아침, 둘은 회사에 각자 휴직계를 냈다. 프린트한 고양이

“그럼 이 전단지부터 복사해서 동네에 붙이자. 그리고 경찰서에

의 사진을 종이에 붙이고 자세한 내용과 연락처를 써넣었다. 그렇게 전단지

신고하자.”

를 다 만들었을 때, 희애가 입을 열었다.

희애가 전단지를 들고 일어서자 미리도 같이 일어나 희애를 안으

“혹시 강우씨 짓이 아닐까?”

며 말했다.

“뭐? 강우?”

“그래. 고마워 희애야. 너 아니었으면 난 아무 것도 못 했을 거야.”

“응. 강우씨. 네가 얼마 전에 헤어지자고 하니까 스토커처럼 널

“그래. 가자.”

따라다녔잖아. 계속 연락하고….”

그렇게 둘은 집을 나섰다. 전 날의 음울하고 기괴스럽기까지 했

“그러고 보니 얼마 전까진 계속 그러다 요즘 들어 그만두었었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6

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선선하여 쾌청했다.

고양이

67


희애가 미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플라스 틱 공장에서 회계업무를 시작하면서였다. 미리는 희애가 오기 얼마 전부터 그 공장의 회계업무를 하고 있었고, 누가 보아도 예쁜 외모에 싹싹한 성격으 로 공장 사람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보고 무 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의를 얻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 다.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공장에 하루, 이틀 나가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미리가 특유의 싹싹한 성격으로 희애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미리는 희애에 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도 하였다. 처음에 희애는 그런 미리의 행동들이 너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차 츰 그것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마침내 희애는 그녀가 초등학교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의 호의를 사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희 애는 미리에게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미 리는 초등학교 때의 아이들과는 달리 사랑만 받고 등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 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희애는 미리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주었다. 그것은 희애에겐 너무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희애에게 처음이자 마 지막인 친구가 한 명 생기게 되었다. 이후,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게 되었지만 둘의 관계는 멀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끈끈해져 집을 구해 함께 살게 되었다. 희애와 미리, 그 둘이 걸어가는 길은 판이하게 달랐지만(희애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며, 미 리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으며), 잘 맞았다. 서로의 욕구를 채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였다.

둘은 동네 문방구에서 전단지를 100부 복사했다. 그리고 동네 구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8

고양이

69


희애가 미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플라스 틱 공장에서 회계업무를 시작하면서였다. 미리는 희애가 오기 얼마 전부터 그 공장의 회계업무를 하고 있었고, 누가 보아도 예쁜 외모에 싹싹한 성격으 로 공장 사람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보고 무 척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의를 얻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 다.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렇게 공장에 하루, 이틀 나가는 사이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미리가 특유의 싹싹한 성격으로 희애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미리는 희애에 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도 하였다. 처음에 희애는 그런 미리의 행동들이 너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차 츰 그것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마침내 희애는 그녀가 초등학교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의 호의를 사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희 애는 미리에게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사랑을 주었다. 하지만 미 리는 초등학교 때의 아이들과는 달리 사랑만 받고 등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 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희애는 미리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주었다. 그것은 희애에겐 너무 기쁜 일이었다. 그렇게 희애에게 처음이자 마 지막인 친구가 한 명 생기게 되었다. 이후, 서로 다른 회사에 다니게 되었지만 둘의 관계는 멀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끈끈해져 집을 구해 함께 살게 되었다. 희애와 미리, 그 둘이 걸어가는 길은 판이하게 달랐지만(희애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며, 미 리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으며), 잘 맞았다. 서로의 욕구를 채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관계였다.

둘은 동네 문방구에서 전단지를 100부 복사했다. 그리고 동네 구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68

고양이

69


석구석에 그 전단지들을 붙였다. 이따금 미리는 전단지의 고양이 사진을 바

“음. 그렇군요. 이건 분명히 일부러 누군가 아가씨의 고양이를

라보며 훌쩍거렸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곁에서 토닥여주었다. 그럴 때면 미

죽인 것 같습니다.”

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순경의 말에 미리는 흥분해서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물며 물었다.

“누군진 몰라도 잡아서 꼭 죽여 버릴 거야.”

“그렇죠? 그럼 그 사람을 찾아 주세요.”

동네 구석구석 전단지를 모두 붙인 둘은 동네 어귀에 있는 파출소 에 갔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순경으로 보이는 경찰들이 서너 명 서

“글쎄요. 확실히 일부러 한 것 같긴 한데. 이런 건 저희 업무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거리고 있었고, 소장으로 보이는 경찰이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위로

“업무가 아니라뇨!”

는 파리들만 지루하다는 듯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미리는 그 중 자리에

“글쎄 저희가 하는 업무라는 것이 사람에 해당되지 동물에

앉아 컴퓨터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는 잘 생긴 순경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건 넸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서요.” “그럼 도움을 줄 수 없단 말이에요?”

“저기 아저씨.”

“네. 죄송합니다만 그런 셈입니다.”

“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순경은 그런 미

“네. 제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는데요. 아무래도 누군가 일부러 죽인 것 같아서요.”

리를 보며 당황해했다. 그는 손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는지 자꾸 움직 였다. 그러면서도 미리를 애처로이 쳐다보았다.

미리의 말을 들은 순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 곁에서 희애는 순경과 미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

“네? 고양이 말입니까?”

고만 있었다.

“네. 고양이요.” 미리는 핸드백에서 전단지 한 장과 전 날 찍었던 현장 사진들을 꺼내어 순경 앞에 내밀었다.

미리와 함께 살게 된 희애는 미리가 자신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 란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는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와 두 명의 오빠에게 사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어제 회사를 다녀왔는데요. 집 앞에

랑을 받으며 자랐고, 초·중·고교를 다니며 숱하게 반장을 했으며, 늘 인기

우리 양이가 머리가 깨져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거예요.

가 많았다. 남자친구도 희애와 함께 살기 전 까지만도 수십 명을 사귀었으

그리고 옆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망치가 놓여있었어요.”

며, 그 중 두 명과는 동거까지도 했었다. 미리는 희애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

순경은 미리가 건넨 전단지와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

도 남자친구를 수시로 바꿨다. 미리를 사랑하는 남자는 차고도 넘쳤으며,

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미리 스스로 한 남자의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 하기도 했다. 분명 그것은

70

고양이

71


석구석에 그 전단지들을 붙였다. 이따금 미리는 전단지의 고양이 사진을 바

“음. 그렇군요. 이건 분명히 일부러 누군가 아가씨의 고양이를

라보며 훌쩍거렸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곁에서 토닥여주었다. 그럴 때면 미

죽인 것 같습니다.”

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순경의 말에 미리는 흥분해서 주먹을 쥐고 이를 꽉 깨물며 물었다.

“누군진 몰라도 잡아서 꼭 죽여 버릴 거야.”

“그렇죠? 그럼 그 사람을 찾아 주세요.”

동네 구석구석 전단지를 모두 붙인 둘은 동네 어귀에 있는 파출소 에 갔다.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순경으로 보이는 경찰들이 서너 명 서

“글쎄요. 확실히 일부러 한 것 같긴 한데. 이런 건 저희 업무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거리고 있었고, 소장으로 보이는 경찰이 자리에 앉아 졸고 있었다. 그 위로

“업무가 아니라뇨!”

는 파리들만 지루하다는 듯 천천히 날아다니고 있었다. 미리는 그 중 자리에

“글쎄 저희가 하는 업무라는 것이 사람에 해당되지 동물에

앉아 컴퓨터로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는 잘 생긴 순경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건 넸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서요.” “그럼 도움을 줄 수 없단 말이에요?”

“저기 아저씨.”

“네. 죄송합니다만 그런 셈입니다.”

“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미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순경은 그런 미

“네. 제가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는데요. 아무래도 누군가 일부러 죽인 것 같아서요.”

리를 보며 당황해했다. 그는 손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는지 자꾸 움직 였다. 그러면서도 미리를 애처로이 쳐다보았다.

미리의 말을 들은 순경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 곁에서 희애는 순경과 미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

“네? 고양이 말입니까?”

고만 있었다.

“네. 고양이요.” 미리는 핸드백에서 전단지 한 장과 전 날 찍었던 현장 사진들을 꺼내어 순경 앞에 내밀었다.

미리와 함께 살게 된 희애는 미리가 자신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 란 것을 알게 되었다. 미리는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와 두 명의 오빠에게 사

“여기,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어제 회사를 다녀왔는데요. 집 앞에

랑을 받으며 자랐고, 초·중·고교를 다니며 숱하게 반장을 했으며, 늘 인기

우리 양이가 머리가 깨져서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거예요.

가 많았다. 남자친구도 희애와 함께 살기 전 까지만도 수십 명을 사귀었으

그리고 옆에는 핏자국이 선명한 망치가 놓여있었어요.”

며, 그 중 두 명과는 동거까지도 했었다. 미리는 희애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

순경은 미리가 건넨 전단지와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

도 남자친구를 수시로 바꿨다. 미리를 사랑하는 남자는 차고도 넘쳤으며,

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미리 스스로 한 남자의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 하기도 했다. 분명 그것은

70

고양이

71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미리가 바람둥이인 것을 알면 서도, 그 사랑이 지속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다. 또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는 사람은 절대 없었다. 여자가 보아도 호감이 갈 정도의 예쁜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희애는 파출소에 들어와 순경에게 다가가는 미리를 보는 순간, 그곳에서 자 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순경이 미리를 도와 주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허둥대던 순경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순 있어요.” “네?”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리고 싶다고요. 원하신다면…….” “정말요? 정말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네. 일적으로 도와드릴 순 없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순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좀 도와드릴까요?”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럼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네. 그럼 연락처를 주세요. 제가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찾아봐드릴게요.” 미리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순경에게 넘겨주며 말 했다. 이거 제 명함이에요. 여기 연락처로 연락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만 집에 돌아가 계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희애와 미리는 인사를 하고 파출소를 나왔다.

고양이

73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자들은 미리가 바람둥이인 것을 알면 서도, 그 사랑이 지속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했다. 또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부탁을 한다면 거절하는 사람은 절대 없었다. 여자가 보아도 호감이 갈 정도의 예쁜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희애는 파출소에 들어와 순경에게 다가가는 미리를 보는 순간, 그곳에서 자 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순경이 미리를 도와 주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허둥대던 순경은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순 있어요.” “네?”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리고 싶다고요. 원하신다면…….” “정말요? 정말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네. 일적으로 도와드릴 순 없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순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좀 도와드릴까요?”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그럼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네. 그럼 연락처를 주세요. 제가 일이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자세한 이야기도 듣고 찾아봐드릴게요.” 미리는 핸드백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순경에게 넘겨주며 말 했다. 이거 제 명함이에요. 여기 연락처로 연락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만 집에 돌아가 계세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희애와 미리는 인사를 하고 파출소를 나왔다.

고양이

73


집으로 돌아와 미리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희애는 집 안을

있었나요?”

정리했다. 이따금 침대에 누워있는 미리를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미리는 가

“아. 아니요. 무슨 일 없었어요. 글쎄 잘 모르겠네요. 그냥 미리가

만히 누워 있었다. 하루 종일 고양이를 죽인 사람에 대한 분노로, 그 사람을

좀 아파요.”

찾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로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희애는 미리가 안쓰러웠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시 걸도록 하죠.”

다. 자신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적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

“네…….”

다. 하지만 희애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날 해준 것이 전부였다. 어쩔 수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희애는 목을 타고 올라오는 침을 삼켰

없는 것이었다. 왜 자신은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하물며 남자친구 하

다.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떤 식으

나 없는가. 하는 생각에 잠겨 망연자실한 채 텔레비전을 켰다. 그런 우울한

로든 그 순경이 해결해줄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미리

생각이 들 때면 항상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든 어느 정도

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그 순경이.

잊을 수 있었다.

희애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웃

한참동안 쇼 프로그램들만 돌려가며 보았다. 어지러울 정도의 웃

었다.

음소리들과 즐거운 사람들의 장면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익숙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

몇 시간이 흐른 뒤에야 미리는 일어났다. 희애는 미리의 기척을

이 울렸다. 희애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미리가 깨지 않도록 재빨리

느끼고 텔레비전을 껐다. 미리는 그런 희애를 바라보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

핸드폰을 찾았다. 미리의 핸드폰이었다. 희애는 미리의 핸드폰을 열어 전화

고,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를 받았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애야.”

“여보세요. 나야.”

“응. 몸은 좀 어때?”

목소리는 희애 자신의 목소리만큼이나 어눌했다.

“한 숨 잤더니 좀 나아진 것 같아. 아까 그 순경한테 혹시 전화 안

“네? 누구시죠?”

왔었어?”

“아. 희애씨군요. 저 강웁니다. 이강우.”

“응. 그 순경한테는 안 왔고 강우씨한테는 왔었어. 부재중

수화기를 통해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희애는 긴장했다.

걸려있어서 전화했다면서.”

“아. 강우씨. 네. 어쩐 일이세요? 죄송한데 미리가 자고 있어서요. 뭐 전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제가 일어나면 전해드릴게요.”

미리는 흥분한 듯 몸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애처로웠다. 희

“부재중에 미리가 전화를 했던 기록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뭐! 강우? 걔가 뻔뻔하게 전화를 했다고?”

애는 미리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아 주었다.

74

고양이

75


집으로 돌아와 미리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희애는 집 안을

있었나요?”

정리했다. 이따금 침대에 누워있는 미리를 바라보았다. 그때마다 미리는 가

“아. 아니요. 무슨 일 없었어요. 글쎄 잘 모르겠네요. 그냥 미리가

만히 누워 있었다. 하루 종일 고양이를 죽인 사람에 대한 분노로, 그 사람을

좀 아파요.”

찾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로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희애는 미리가 안쓰러웠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시 걸도록 하죠.”

다. 자신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적다는 생각에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

“네…….”

다. 하지만 희애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날 해준 것이 전부였다. 어쩔 수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희애는 목을 타고 올라오는 침을 삼켰

없는 것이었다. 왜 자신은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가. 하물며 남자친구 하

다. 어쩐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떤 식으

나 없는가. 하는 생각에 잠겨 망연자실한 채 텔레비전을 켰다. 그런 우울한

로든 그 순경이 해결해줄 것이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미리

생각이 들 때면 항상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든 어느 정도

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그 순경이.

잊을 수 있었다.

희애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웃

한참동안 쇼 프로그램들만 돌려가며 보았다. 어지러울 정도의 웃

었다.

음소리들과 즐거운 사람들의 장면은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익숙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화벨

몇 시간이 흐른 뒤에야 미리는 일어났다. 희애는 미리의 기척을

이 울렸다. 희애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미리가 깨지 않도록 재빨리

느끼고 텔레비전을 껐다. 미리는 그런 희애를 바라보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

핸드폰을 찾았다. 미리의 핸드폰이었다. 희애는 미리의 핸드폰을 열어 전화

고, 잠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를 받았다. 그러자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애야.”

“여보세요. 나야.”

“응. 몸은 좀 어때?”

목소리는 희애 자신의 목소리만큼이나 어눌했다.

“한 숨 잤더니 좀 나아진 것 같아. 아까 그 순경한테 혹시 전화 안

“네? 누구시죠?”

왔었어?”

“아. 희애씨군요. 저 강웁니다. 이강우.”

“응. 그 순경한테는 안 왔고 강우씨한테는 왔었어. 부재중

수화기를 통해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 희애는 긴장했다.

걸려있어서 전화했다면서.”

“아. 강우씨. 네. 어쩐 일이세요? 죄송한데 미리가 자고 있어서요. 뭐 전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제가 일어나면 전해드릴게요.”

미리는 흥분한 듯 몸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무척 애처로웠다. 희

“부재중에 미리가 전화를 했던 기록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뭐! 강우? 걔가 뻔뻔하게 전화를 했다고?”

애는 미리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아 주었다.

74

고양이

75


“강우씨가 죽인 게 아닐 수도 있어.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 이따가 그 순경한테 연락이 오면 다 얘기하고 조사해달라고 하자.” 미리는 몸의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온 몸에 힘이 빠진 모 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누웠다. 희애는 그 옆에 같이 누웠다. 그러 자 희애는 몸에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 았다. 그때 다시 한 번 미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희애는 몸을 일으켜 전화기 를 들고 미리에게 건넸다. 미리는 기운이 없는 동작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것은 오전에 만났던 그 순경이었다. “네. 아, 네. 그럼 어디서 뵐까요? 네? 아, 거기요. 네 알겠어요. 그리 갈게요, 저희가.” 짧은 통화를 마친 후 미리는 희애를 바라보았다. “희애야. 오전의 그 순경, 일 끝났다고 만나자는데. 너도 같이 가줄래?” 희애는 미리의 질문에 눈을 감았다. 몸에 열이 더 심하게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미안해 미리야. 너 혼자 다녀와. 나 몸에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좀 쉴게.” “아. 그래? 알겠어.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강우 얘기랑 그 핸드폰 집 사장 얘기랑 다 해봐야겠어. 조사도 부탁하고.” “그래. 그 두 사람이 좀 의심스러워. 잘 얘기해봐.” 미리는 희애의 말에 대답도 않고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기 시작 했다. 희애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76

고양이

77


“강우씨가 죽인 게 아닐 수도 있어.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 마. 이따가 그 순경한테 연락이 오면 다 얘기하고 조사해달라고 하자.” 미리는 몸의 떨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온 몸에 힘이 빠진 모 양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누웠다. 희애는 그 옆에 같이 누웠다. 그러 자 희애는 몸에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 았다. 그때 다시 한 번 미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희애는 몸을 일으켜 전화기 를 들고 미리에게 건넸다. 미리는 기운이 없는 동작으로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것은 오전에 만났던 그 순경이었다. “네. 아, 네. 그럼 어디서 뵐까요? 네? 아, 거기요. 네 알겠어요. 그리 갈게요, 저희가.” 짧은 통화를 마친 후 미리는 희애를 바라보았다. “희애야. 오전의 그 순경, 일 끝났다고 만나자는데. 너도 같이 가줄래?” 희애는 미리의 질문에 눈을 감았다. 몸에 열이 더 심하게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미안해 미리야. 너 혼자 다녀와. 나 몸에 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좀 쉴게.” “아. 그래? 알겠어.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 강우 얘기랑 그 핸드폰 집 사장 얘기랑 다 해봐야겠어. 조사도 부탁하고.” “그래. 그 두 사람이 좀 의심스러워. 잘 얘기해봐.” 미리는 희애의 말에 대답도 않고 벌떡 일어나 샤워를 하기 시작 했다. 희애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76

고양이

77


미리가 강우와 헤어진 건 한 달쯤 전이었다. 미리는 이전의 연애

오지 않았다. 희애는 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미리는 전화를 받지

들과 마찬가지로 강우에게 질렸다. 그래서 그 만남을 끝내려 하였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냥 그대로 다시 잠

만 강우는 이전의 남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을 청했다.

이다. 강우는 단지 자신이 사랑을 주기만 해도 되니 그걸 받아만이라도 달

아침이 되어 출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미리가 집에 들어왔다.

라고 졸랐다. 그런 모습을 희애는 계속 지켜보았다. 마치 그 모습은 자신의

어쩐지 미리의 표정이 좋아보였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모습과도 겹쳐져 보였다. 미리에게 끝없이 사랑을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희애는 그런 동병상련을 강우에게 느꼈다. 그리고 그를 어쩌면

“왔어? 어젯밤엔 왜 안 들어왔어?” “응. 어제 그 순경 있지. 그 순경이랑 이것저것 조사 좀 하느라고.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아마도 최초로 사람을 이성으로써 사랑하게 되었

그 사람 되게 좋은 사람이더라고.”

다. 하지만 희애는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희애는 늘 사랑을 주기만 해왔고,

“그래? 그 두 사람 얘긴 좀 해봤어?”

그마저도 거부만 당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응. 다 했지. 오늘은 일단 그 사람이랑 같이 핸드폰 집 사장한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강우가 미리에게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을 제외

가볼 거야.”

하곤. 그러자 희애는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

희애는 머리를 빗으며 미리의 이야기를 듣다 이상하다고 생각했

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다. 미리의 목소리에 담겨 있던 불안이나 분노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

자신이 미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다

았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나 환호와 같은 감정들이 듬뿍 담겨 있

른 사람들처럼 미리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미리 역

었다. 희애는 희미하게 예감하며 미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시 자신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지

“미리야. 너 혹시 어제 그 순경이랑….”

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기 시작했다. 미리는 단지 자신이 끊임없이

“응. 그 사람이랑 사귀기로 했어.”

주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라고, 어떠한 불편도 요구도 없기에 거절하지 않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애 자신도 강우와 다를 바

희애는 순간 휘청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생각인거야 미리 야. 언제까지 그렇게.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결국 버림받아 다시 세상에 혼자인 상태

“그래. 잘 됐다. 축하해.”

로, 그 고독하고 쓸쓸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응. 고마워 도와줘서. 어제나 그제보다는 좀 괜찮아졌어. 그

시작했다.

사람이 나를 위해주거든.” “그래.” 희애가 잠에서 깬 건 새벽 3시였다. 그때까지도 미리는 집에 들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78

희애는 나지막이 대답하며 집을 나왔다. 밖에는 당장이라도 비를

고양이

79


미리가 강우와 헤어진 건 한 달쯤 전이었다. 미리는 이전의 연애

오지 않았다. 희애는 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미리는 전화를 받지

들과 마찬가지로 강우에게 질렸다. 그래서 그 만남을 끝내려 하였다.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냥 그대로 다시 잠

만 강우는 이전의 남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

을 청했다.

이다. 강우는 단지 자신이 사랑을 주기만 해도 되니 그걸 받아만이라도 달

아침이 되어 출근을 준비하고 있을 때에 미리가 집에 들어왔다.

라고 졸랐다. 그런 모습을 희애는 계속 지켜보았다. 마치 그 모습은 자신의

어쩐지 미리의 표정이 좋아보였다. 희애는 그런 미리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모습과도 겹쳐져 보였다. 미리에게 끝없이 사랑을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희애는 그런 동병상련을 강우에게 느꼈다. 그리고 그를 어쩌면

“왔어? 어젯밤엔 왜 안 들어왔어?” “응. 어제 그 순경 있지. 그 순경이랑 이것저것 조사 좀 하느라고.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아마도 최초로 사람을 이성으로써 사랑하게 되었

그 사람 되게 좋은 사람이더라고.”

다. 하지만 희애는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희애는 늘 사랑을 주기만 해왔고,

“그래? 그 두 사람 얘긴 좀 해봤어?”

그마저도 거부만 당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응. 다 했지. 오늘은 일단 그 사람이랑 같이 핸드폰 집 사장한테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강우가 미리에게 하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을 제외

가볼 거야.”

하곤. 그러자 희애는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

희애는 머리를 빗으며 미리의 이야기를 듣다 이상하다고 생각했

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속이 답답했다.

다. 미리의 목소리에 담겨 있던 불안이나 분노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

자신이 미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다

았다. 오히려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나 환호와 같은 감정들이 듬뿍 담겨 있

른 사람들처럼 미리에게 버림받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리고 미리 역

었다. 희애는 희미하게 예감하며 미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시 자신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지

“미리야. 너 혹시 어제 그 순경이랑….”

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기 시작했다. 미리는 단지 자신이 끊임없이

“응. 그 사람이랑 사귀기로 했어.”

주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라고, 어떠한 불편도 요구도 없기에 거절하지 않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애 자신도 강우와 다를 바

희애는 순간 휘청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럴 생각인거야 미리 야. 언제까지 그렇게.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결국 버림받아 다시 세상에 혼자인 상태

“그래. 잘 됐다. 축하해.”

로, 그 고독하고 쓸쓸하고 절망적인 상태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응. 고마워 도와줘서. 어제나 그제보다는 좀 괜찮아졌어. 그

시작했다.

사람이 나를 위해주거든.” “그래.” 희애가 잠에서 깬 건 새벽 3시였다. 그때까지도 미리는 집에 들어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78

희애는 나지막이 대답하며 집을 나왔다. 밖에는 당장이라도 비를

고양이

79


뿌릴 것 같은 수많은 먹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희애는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러자 그 순간부터 몸에서 열이 났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열은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희애는 미리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 재를 죽일 순 없었다. 그 대신 미리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들을 죽이기로 했 다. 전혀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지만, 미리는 너무나 사랑해주는 존재들. 희애는 미리가 출근하자 신발장 안에 있던 망치를 꺼냈다. 그리 고 집 안에서 자고 있던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밖은 비가 주룩주룩 내 리고 있어서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희애는 망치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 번 내리치 자 고양이는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네 개의 다리를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희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네 번, 연달아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양이의 눈알이 빠지고 그 틈으로 피가 흘렀 다. 고양이의 이빨들이 사방으로 깨져서 날아갔으며 모가지는 절반정도 찢 어져버렸다. 희애는 자신에게 튄 피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잘 인식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그 자리에 죽은 미리의 고양이를 팽 개치고 망치를 집어던졌다. 피로 물든 희애의 몸을 비는 추적추적 적셔주었 다. 집 안으로 들어온 희애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어 느새 몸의 열은 내려 있었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일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희애는 식탁 위에 놓 인 쪽지를 보았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0


뿌릴 것 같은 수많은 먹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희애는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러자 그 순간부터 몸에서 열이 났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열은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희애는 미리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 재를 죽일 순 없었다. 그 대신 미리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들을 죽이기로 했 다. 전혀 자신을 사랑해주지는 않지만, 미리는 너무나 사랑해주는 존재들. 희애는 미리가 출근하자 신발장 안에 있던 망치를 꺼냈다. 그리 고 집 안에서 자고 있던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밖은 비가 주룩주룩 내 리고 있어서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희애는 망치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한 번 내리치 자 고양이는 심하게 발버둥을 쳤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네 개의 다리를 소란스럽게 움직였다. 희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네 번, 연달아 고양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양이의 눈알이 빠지고 그 틈으로 피가 흘렀 다. 고양이의 이빨들이 사방으로 깨져서 날아갔으며 모가지는 절반정도 찢 어져버렸다. 희애는 자신에게 튄 피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잘 인식이 되질 않았다. 그렇게 그 자리에 죽은 미리의 고양이를 팽 개치고 망치를 집어던졌다. 피로 물든 희애의 몸을 비는 추적추적 적셔주었 다. 집 안으로 들어온 희애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어 느새 몸의 열은 내려 있었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일을 마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온 희애는 식탁 위에 놓 인 쪽지를 보았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0


그이랑 같이 범인 찾으러 다녀올게. ― 미리 ―

희애는 뜨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차가 운 물에도 몸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침대에 눕자 달아오르던 열은 점점 심 해졌다. 감기에 걸렸나보다, 고 생각한 희애는 약을 사러 집을 나왔다. 약국 에 가는 도중 희애는 미리와 순경이 핸드폰 집 사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순경과 핸드폰 집 사장은 서로 인상을 찡그리며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리는…. 미리는 순경의 뒤에 바싹 붙어 그 모 습이 즐거운 듯, 얼굴 전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화사해보였다. 희 애는 미리를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약국에 들려 약을 사고 집 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르고 식탁에 앉은 희애는 약 을 먹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장으로 가 망치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 고,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망치를 찾아낸 희애는 현관문을 열며 어딘 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희애 (李希愛) : 바랄 희, 사랑 애 강미리 (姜美利) : 아름다울 미, 이로울 리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2


그이랑 같이 범인 찾으러 다녀올게. ― 미리 ―

희애는 뜨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차가 운 물에도 몸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침대에 눕자 달아오르던 열은 점점 심 해졌다. 감기에 걸렸나보다, 고 생각한 희애는 약을 사러 집을 나왔다. 약국 에 가는 도중 희애는 미리와 순경이 핸드폰 집 사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순경과 핸드폰 집 사장은 서로 인상을 찡그리며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리는…. 미리는 순경의 뒤에 바싹 붙어 그 모 습이 즐거운 듯, 얼굴 전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화사해보였다. 희 애는 미리를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약국에 들려 약을 사고 집 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르고 식탁에 앉은 희애는 약 을 먹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장으로 가 망치를 찾기 시작했다. 이윽 고,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망치를 찾아낸 희애는 현관문을 열며 어딘 가로 전화를 걸었다.

이희애 (李希愛) : 바랄 희, 사랑 애 강미리 (姜美利) : 아름다울 미, 이로울 리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2


화가 나는 이유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화가 나는 이유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우리 집에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곳곳에 장식되어있다. 신발장 위에 도, 텔레비전 옆에도, 엄마의 화장대 위에도, 내 책상 위에도 심지어 화장실 에 있는 장식장에도. 부처님은 하루 종일 신발 냄새를 맡고 있어도, 텔레비 전에서 나오는 시시껄렁하고 쓸모없는 잡담과 패륜아, 강간, 살인 등 웬만 한 영화보다도 수위가 높은 뉴스를 들으면서도 표정을 찌푸리지 않는다. 조 금이라도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주름위로 세심하게 분을 찍어대는 엄마의 화 장대 위에서도 여유롭고 온 힘을 다해 똥을 누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도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시원하게 똥을 누고 물을 내리면서 생 각한다. 어느 누가 그랬더라. 부처는 어디에나 있다, 똥 막대기에도 있다. 이 제 보니 그 말이 맞다. 우리 집 화장실에도 부처가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2년 전부터 불교 학교를 다니고 수 시로 절에 가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불상을 사들고 와 집안 곳곳에 놓아두 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많아지는 불상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날은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 발을 벗고 있었다. 나는 신발장 위를 손으로 짚고 힘을 주어 신발을 벗겨내 었다. 순간, 한 쪽 다리로 선 몸이 휘청거리며 움직였고 내 팔꿈치는 신발장 위에 앉아 있던 불상 중에 4번째 불상을 치고 말았다. 신발장 위에서 가부좌 한 다리를 미처 풀기도 전에 추락해 버린 불상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제일 먼저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여가 시간이 나면 항상 불상들을 정성스럽게 닦아놓기 때문에 불상이 많아도 모두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솔직 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돌아오시자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두 동강 난 불상을 들이밀었다. 엄마는 눈이 똥그래지더니 “네가 그랬니?”

화가 나는 이유

87


우리 집에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가 곳곳에 장식되어있다. 신발장 위에 도, 텔레비전 옆에도, 엄마의 화장대 위에도, 내 책상 위에도 심지어 화장실 에 있는 장식장에도. 부처님은 하루 종일 신발 냄새를 맡고 있어도, 텔레비 전에서 나오는 시시껄렁하고 쓸모없는 잡담과 패륜아, 강간, 살인 등 웬만 한 영화보다도 수위가 높은 뉴스를 들으면서도 표정을 찌푸리지 않는다. 조 금이라도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주름위로 세심하게 분을 찍어대는 엄마의 화 장대 위에서도 여유롭고 온 힘을 다해 똥을 누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에도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시원하게 똥을 누고 물을 내리면서 생 각한다. 어느 누가 그랬더라. 부처는 어디에나 있다, 똥 막대기에도 있다. 이 제 보니 그 말이 맞다. 우리 집 화장실에도 부처가 있으니 말이다.

엄마는 원래 불교신자였는데 2년 전부터 불교 학교를 다니고 수 시로 절에 가더니 하루가 멀다 하고 불상을 사들고 와 집안 곳곳에 놓아두 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점점 많아지는 불상 때문에 괜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날은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신 발을 벗고 있었다. 나는 신발장 위를 손으로 짚고 힘을 주어 신발을 벗겨내 었다. 순간, 한 쪽 다리로 선 몸이 휘청거리며 움직였고 내 팔꿈치는 신발장 위에 앉아 있던 불상 중에 4번째 불상을 치고 말았다. 신발장 위에서 가부좌 한 다리를 미처 풀기도 전에 추락해 버린 불상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제일 먼저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여가 시간이 나면 항상 불상들을 정성스럽게 닦아놓기 때문에 불상이 많아도 모두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솔직 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돌아오시자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두 동강 난 불상을 들이밀었다. 엄마는 눈이 똥그래지더니 “네가 그랬니?”

화가 나는 이유

87


하고 물었다.

습이 부모님 보시기에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실수로 떨어뜨렸어.”

무엇보다 지금 나는 책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부처님의 시선

나는 힘없이 말했다. 엄마는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목소리가 커졌다. “이게 무슨 불경스러운 짓이야. 조심하지 않고 왜이랬니?”

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컴퓨터 화면 위로 재생되는 영상에 온 정신을 쏟고 있 다. 여자를 멀리하라던 부처님 보시기에 너무나 불경스러운 영상이다. 원한

하며 다그쳤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두 동강

다면 관용을 베풀어 기꺼이 공유해줄 수도 있건만.

난 불상을 조심스레 손에 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그 많고 많은 불 상 중에 겨우 하나 깼을 뿐인데 화를 내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땅을 뚫고

이야기의 중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생각해보

지하 암반수 까지 도달할 것 같은 깊은 한숨 소리에 괜히 기가 죽었다. 두 동

자.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는데 프로그램 내내 사자가 교미를 하는 장면만

강 나버린 미소가 자꾸 생각났다.

나온다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사자 몸뚱이의 길이나 먹이, 습성 따위에 대

사실 그때 나는 엄마의 표정과 한숨에 힘이 빠진 것이지 딱히 불

한 식상한 소개도 없이.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대초원을 질주하며 날카

경스러운 짓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불경이 불교 경

로운 이빨로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생존 본능도 없이. 한 그루 고목처

전을 이야기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경스러운 짓이라면 불교의

럼 자라난 초원 한 가운데의 나무 아래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잠을 자는 모

교리에 맞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동안 꺼내지 않아 먼지가

습도 없이. 그저 프로그램 내내 암컷의 등을 짓누르며 무지한 번식의 욕구를

뽀얗게 쌓인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불경이 경의를 표해야 할 자리에서 무례

밀어 넣고 있다면 결국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들의 경련처럼 보

하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나는 불경스러운 짓에 대해 완전히 이

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중요하다. 사자가 먹잇감도 물어뜯고 잠도

해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잘 모른다는 것 또한 참으로 불경스

자고 달리기도 하다가 교미를 해야 동물의 본능과 생존에 대해 자연스럽게

럽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심코 추가한 야동 파일에서 그 흔해빠진 삼각관계 구도도 없이 반복되어지는 교미를 보면서 정육점 쇠고랑에 걸려 생각해보면 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

있는 냉동 돼지고기들이 엉덩이를 이리 저리 흔드는 모습까지 상상하고 있

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를 다해야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애초에 다리병

다. 얼굴 없는 돼지고기들이 머릿속에서 춤까지 추기 시작할 때 이성과 상관

신으로 태어난 탓에 방안에만 틀어박혀 백수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자고

없이 딱딱하게 서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본능을 인식한다. 그 어느 누구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빚 받으러 와서 드러누운 빚쟁이가 생각난다는 엄마의

의 것보다 큰 나의 본능, 나의 모든 부분 중에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나의 본

말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

능을 손 안에 쥐고 힘을 주려는 찰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여동생인가?

다고도 하는데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자식의 뒷모

나는 재빠르게 바지 속으로 본능을 우겨 넣고 해탈한 부처의 표정으로 평화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8

화가 나는 이유

89


하고 물었다.

습이 부모님 보시기에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실수로 떨어뜨렸어.”

무엇보다 지금 나는 책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부처님의 시선

나는 힘없이 말했다. 엄마는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목소리가 커졌다. “이게 무슨 불경스러운 짓이야. 조심하지 않고 왜이랬니?”

을 애써 모른 척 하며 컴퓨터 화면 위로 재생되는 영상에 온 정신을 쏟고 있 다. 여자를 멀리하라던 부처님 보시기에 너무나 불경스러운 영상이다. 원한

하며 다그쳤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한숨을 크게 내쉬며 두 동강

다면 관용을 베풀어 기꺼이 공유해줄 수도 있건만.

난 불상을 조심스레 손에 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그 많고 많은 불 상 중에 겨우 하나 깼을 뿐인데 화를 내겠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땅을 뚫고

이야기의 중요성을 가장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생각해보

지하 암반수 까지 도달할 것 같은 깊은 한숨 소리에 괜히 기가 죽었다. 두 동

자. 동물의 왕국을 보고 있는데 프로그램 내내 사자가 교미를 하는 장면만

강 나버린 미소가 자꾸 생각났다.

나온다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사자 몸뚱이의 길이나 먹이, 습성 따위에 대

사실 그때 나는 엄마의 표정과 한숨에 힘이 빠진 것이지 딱히 불

한 식상한 소개도 없이.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대초원을 질주하며 날카

경스러운 짓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불경이 불교 경

로운 이빨로 먹잇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생존 본능도 없이. 한 그루 고목처

전을 이야기 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경스러운 짓이라면 불교의

럼 자라난 초원 한 가운데의 나무 아래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잠을 자는 모

교리에 맞는 짓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 동안 꺼내지 않아 먼지가

습도 없이. 그저 프로그램 내내 암컷의 등을 짓누르며 무지한 번식의 욕구를

뽀얗게 쌓인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불경이 경의를 표해야 할 자리에서 무례

밀어 넣고 있다면 결국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고깃덩어리들의 경련처럼 보

하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나는 불경스러운 짓에 대해 완전히 이

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중요하다. 사자가 먹잇감도 물어뜯고 잠도

해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잘 모른다는 것 또한 참으로 불경스

자고 달리기도 하다가 교미를 해야 동물의 본능과 생존에 대해 자연스럽게

럽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무심코 추가한 야동 파일에서 그 흔해빠진 삼각관계 구도도 없이 반복되어지는 교미를 보면서 정육점 쇠고랑에 걸려 생각해보면 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

있는 냉동 돼지고기들이 엉덩이를 이리 저리 흔드는 모습까지 상상하고 있

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효를 다해야 하는데 예상치 못했던 애초에 다리병

다. 얼굴 없는 돼지고기들이 머릿속에서 춤까지 추기 시작할 때 이성과 상관

신으로 태어난 탓에 방안에만 틀어박혀 백수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자고

없이 딱딱하게 서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본능을 인식한다. 그 어느 누구

있는 나를 볼 때마다 빚 받으러 와서 드러누운 빚쟁이가 생각난다는 엄마의

의 것보다 큰 나의 본능, 나의 모든 부분 중에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나의 본

말도 십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

능을 손 안에 쥐고 힘을 주려는 찰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여동생인가?

다고도 하는데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자식의 뒷모

나는 재빠르게 바지 속으로 본능을 우겨 넣고 해탈한 부처의 표정으로 평화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88

화가 나는 이유

89


로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맞이한다.

그래. 난 지금 힘들다. 오빠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동생이 나의 처절한 본능을 목격하고 비웃어주었기에. 다리와 함께 망가지

그러나 여동생은 대꾸도 없이 신발을 벗고 있다. 빨리 동생이 제

지 못한 나의 단단한 성기 때문에. 사고 이후 본능을 억압받아온 성기가 단

방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여동생이 신발

단히 화가 나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여념이 없기 때

을 벗고 들어서며 나를 보고 말한다.

문에. 나는 힘들다. 햇빛이 머리 위로 따뜻하게 비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빨리 오면 안돼?”

홀로 야동을 보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환한 백주 대낮에 보는 야동은 별미처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들어올 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이고 인 사를 하면 적당히 받을 줄도 알아야지 동생이지만 넌 언제나 싸가지가 없구

럼 색다른 맛이다. 요 근래 별미를 밥처럼 먹긴 했지만. 내 책상 위에 부처님 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나. 적당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컴퓨터 화면에 여동생의 시선 이 고정되고 짐짓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나는 시험이 끝나

여동생은 전형적인 범생이였다. 과거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 답을 모두 밀려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큰 절망감을 느낀다. 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 마디를 통해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다. 보통 범

기가 없는 삼류 야동은 여전히 재생중이다. 등에 맺혀있던 식은땀이 척추를

생이는 피를 나눈 오빠에게 한 쪽 다리가 병신이니까 그것도 한 쪽 다리로 해

타고 곤두 박칠 치는 것을 느낀다. 포기하지 말고 생각하자. 답을 밀려 쓰고

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동생이 범생이였던 아이가

나서 내가 어떻게 했더라? 선생님께 달려가서 답을 한 칸씩 땡겨서 채점해

된 것일까. 중학교를 다닐 즈음,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성격도 밝아서 선생

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었던가?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부모님께 죽도

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동생은 친구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몸에 받았다.

록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가?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을 줄 만한

동생은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이의 시기는 부러움을 넘어선 단계라며. 그저

경험을 애써 떠올려보지만 불쌍한 뇌세포들만이 극심한 압박으로 인한 스

부러운 존재는 돈으로도, 외모로도, 그저 우연으로도 될 수 있지만 시기는

트레스에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보며

그렇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를 보면서 따라 잡을 수 없다는 한

여동생은 물에 빠진 무력한 개미를 관찰하듯 비웃으며 말한다.

계를 깨닫고 좌절을 느낄 때, 그리고 그 우월한 존재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다리병신도 야동을 보네.”

초능력자 따위가 아니라 자신과 다를 것 없는 나이마저 비슷한 하나의 인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슬며시 마우스에 민망한 손을 내밀 어 동영상 창을 끈다. 방으로 들어가며 동생은 마지막 한마디를 뱉는다.

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

“그러고 보니 한 쪽 다리가 병신이니까 그것도 한 쪽 다리로 해야 겠네. 힘들겠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임에 불과할 때 시기하게 되는 것이다. 동생에게 타인의 시기는 자신의 우월

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말고사 시험이 있기 하루 전날, 동생은 죽도 록 구타를 당한 채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엄마는 동생 얼굴의 선명한 칼자

90

화가 나는 이유

91


로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맞이한다.

그래. 난 지금 힘들다. 오빠를 지나가는 개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왔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동생이 나의 처절한 본능을 목격하고 비웃어주었기에. 다리와 함께 망가지

그러나 여동생은 대꾸도 없이 신발을 벗고 있다. 빨리 동생이 제

지 못한 나의 단단한 성기 때문에. 사고 이후 본능을 억압받아온 성기가 단

방으로 들어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여동생이 신발

단히 화가 나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데 여념이 없기 때

을 벗고 들어서며 나를 보고 말한다.

문에. 나는 힘들다. 햇빛이 머리 위로 따뜻하게 비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빨리 오면 안돼?”

홀로 야동을 보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환한 백주 대낮에 보는 야동은 별미처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들어올 때 인사를 하는 것이 예의이고 인 사를 하면 적당히 받을 줄도 알아야지 동생이지만 넌 언제나 싸가지가 없구

럼 색다른 맛이다. 요 근래 별미를 밥처럼 먹긴 했지만. 내 책상 위에 부처님 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나. 적당히 웃어 보이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컴퓨터 화면에 여동생의 시선 이 고정되고 짐짓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나는 시험이 끝나

여동생은 전형적인 범생이였다. 과거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고 답을 모두 밀려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보다 더 큰 절망감을 느낀다. 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한 마디를 통해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다. 보통 범

기가 없는 삼류 야동은 여전히 재생중이다. 등에 맺혀있던 식은땀이 척추를

생이는 피를 나눈 오빠에게 한 쪽 다리가 병신이니까 그것도 한 쪽 다리로 해

타고 곤두 박칠 치는 것을 느낀다. 포기하지 말고 생각하자. 답을 밀려 쓰고

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동생이 범생이였던 아이가

나서 내가 어떻게 했더라? 선생님께 달려가서 답을 한 칸씩 땡겨서 채점해

된 것일까. 중학교를 다닐 즈음,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성격도 밝아서 선생

달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었던가?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부모님께 죽도

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동생은 친구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몸에 받았다.

록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가?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을 줄 만한

동생은 그것을 즐겼다. 다른 이의 시기는 부러움을 넘어선 단계라며. 그저

경험을 애써 떠올려보지만 불쌍한 뇌세포들만이 극심한 압박으로 인한 스

부러운 존재는 돈으로도, 외모로도, 그저 우연으로도 될 수 있지만 시기는

트레스에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나를 보며

그렇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를 보면서 따라 잡을 수 없다는 한

여동생은 물에 빠진 무력한 개미를 관찰하듯 비웃으며 말한다.

계를 깨닫고 좌절을 느낄 때, 그리고 그 우월한 존재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다리병신도 야동을 보네.”

초능력자 따위가 아니라 자신과 다를 것 없는 나이마저 비슷한 하나의 인간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슬며시 마우스에 민망한 손을 내밀 어 동영상 창을 끈다. 방으로 들어가며 동생은 마지막 한마디를 뱉는다.

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감정을 단지 감정으로 치부하지 않

“그러고 보니 한 쪽 다리가 병신이니까 그것도 한 쪽 다리로 해야 겠네. 힘들겠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임에 불과할 때 시기하게 되는 것이다. 동생에게 타인의 시기는 자신의 우월

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말고사 시험이 있기 하루 전날, 동생은 죽도 록 구타를 당한 채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엄마는 동생 얼굴의 선명한 칼자

90

화가 나는 이유

91


국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충격과 침묵을 틈

히 놓아 둔 채 휠체어를 타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에는 문제가

타 방으로 들어간 동생은 그 뒤로 삼일 동안 방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시

하나 있다.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험은 0점 처리 되었다. 특수 목적고를 가서 명문대로 향하는 탄탄대로를 걷

나는 고상하게 휠체어에 앉아만 있고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인이 끌

게 하리라는 부모님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삼일 후에 방에서 나온

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팔 근육을 사용하여 바퀴를 굴리

동생은 더 이상 범생이가 아니었다. 동생은 제일 먼저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고 또 굴려야 한다. 지금 나는 그렇게 구르고 굴리면서 병원을 향하고 있다.

받고 진단서를 끊었다. 그리고 가해자들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 했다. 그리

검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대

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들을 무기정학처분을 받도록 노력했다. 마침 학교

해 민감하다. 인도에서 지하철역까지 오는 동안에 여러 개의 시선들과 마주

폭력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치부되었던 때였고, 폭력의 근본부터

쳤지만 오랫동안 나와 눈을 마주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연민과 동정에

없애겠다는 학교의 강력한 의지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한 표현조차 기분 나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에 기분 나쁜 것

힘을 발휘한 것은 이제껏 친분을 쌓아왔던 선생님들 앞에서 흘리는 힘없고

은 그러한 생각 자체이다. 지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계단

나약한 모범생의 눈물이었다.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가 무기정학 처분만큼

을 만난다. 비상벨을 눌러 직원을 부르고 기다린다. 직원은 배운 대로 열심

은 막아달라면서 동생을 찾아와 애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생은 차가운 눈

히 기계를 작동시킨다. 친절한 미소와 날씨에 대한 식상한 이야기도 건넨다.

빛으로 말했다.

아마 봉사를 하는 뿌듯함과 우월함으로 마치 천사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

“이러실 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져 있으리라. 벨을 누르고 준비가 되는 동안에는 언제나 단음의 멜로디가 흘

최악의 상황이란 퇴학을 말한다는 것을 애원하던 그들도 알고 있

러나오는데 그 소리는 영 구식이다. 요즘은 핸드폰도 60화음이 넘어서 mp3

었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동생의 뒤통수에 독한년이라는 욕을 하며 돌아갔

사용하는 마당에 단음의 알림 벨은 수많은 침묵 속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

다. 현관문이 닫히고 동생은 큰소리로 웃었다. 이제는 시기로 인한 험담보

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짐짓 태연한척 하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을

다 독하다는 소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수가 없다.

휘어진 엿가락을 다시 핀다 한들 처음처럼 곧게 펴질까? 동생은 휘어진 이후로 곧게 펴지 않았다. 그리고 휘어진 세계에 익숙하게 적응해 갔다.

띠리리리~ 리리리 기계를 부셔버리고 싶다. 내려오는 동안 세 번이나 반복 될 것이다. “저기요. 이 소리 좀 바꿔주면 안되겠어요?”

나는 부득이하게 외출을 하게 될 일이 생기면 휠체어를 탄다. 걷 는다는 것이 여간 힘들 뿐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적합한 걸음 모양 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단정한 셔츠를 입고 보기에 멀쩡한 다리를 가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2

직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다. “아 예. 소리가 좀 시끄럽죠. 하지만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한다. 웃음만큼이나 어색한 답변이다. 대

화가 나는 이유

93


국과 그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충격과 침묵을 틈

히 놓아 둔 채 휠체어를 타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에는 문제가

타 방으로 들어간 동생은 그 뒤로 삼일 동안 방을 나오지 않았다. 당연히 시

하나 있다. 우리 집이 엄청난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험은 0점 처리 되었다. 특수 목적고를 가서 명문대로 향하는 탄탄대로를 걷

나는 고상하게 휠체어에 앉아만 있고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인이 끌

게 하리라는 부모님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삼일 후에 방에서 나온

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팔 근육을 사용하여 바퀴를 굴리

동생은 더 이상 범생이가 아니었다. 동생은 제일 먼저 병원으로 가서 진찰을

고 또 굴려야 한다. 지금 나는 그렇게 구르고 굴리면서 병원을 향하고 있다.

받고 진단서를 끊었다. 그리고 가해자들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 했다. 그리

검진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에 대

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들을 무기정학처분을 받도록 노력했다. 마침 학교

해 민감하다. 인도에서 지하철역까지 오는 동안에 여러 개의 시선들과 마주

폭력에 대한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치부되었던 때였고, 폭력의 근본부터

쳤지만 오랫동안 나와 눈을 마주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연민과 동정에

없애겠다는 학교의 강력한 의지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한 표현조차 기분 나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에 기분 나쁜 것

힘을 발휘한 것은 이제껏 친분을 쌓아왔던 선생님들 앞에서 흘리는 힘없고

은 그러한 생각 자체이다. 지상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계단

나약한 모범생의 눈물이었다.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가 무기정학 처분만큼

을 만난다. 비상벨을 눌러 직원을 부르고 기다린다. 직원은 배운 대로 열심

은 막아달라면서 동생을 찾아와 애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생은 차가운 눈

히 기계를 작동시킨다. 친절한 미소와 날씨에 대한 식상한 이야기도 건넨다.

빛으로 말했다.

아마 봉사를 하는 뿌듯함과 우월함으로 마치 천사라도 되는 듯한 착각에 빠

“이러실 만큼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져 있으리라. 벨을 누르고 준비가 되는 동안에는 언제나 단음의 멜로디가 흘

최악의 상황이란 퇴학을 말한다는 것을 애원하던 그들도 알고 있

러나오는데 그 소리는 영 구식이다. 요즘은 핸드폰도 60화음이 넘어서 mp3

었다. 매정하게 돌아서는 동생의 뒤통수에 독한년이라는 욕을 하며 돌아갔

사용하는 마당에 단음의 알림 벨은 수많은 침묵 속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진

다. 현관문이 닫히고 동생은 큰소리로 웃었다. 이제는 시기로 인한 험담보

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짐짓 태연한척 하는 나지만 이 순간만큼은 참을

다 독하다는 소리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수가 없다.

휘어진 엿가락을 다시 핀다 한들 처음처럼 곧게 펴질까? 동생은 휘어진 이후로 곧게 펴지 않았다. 그리고 휘어진 세계에 익숙하게 적응해 갔다.

띠리리리~ 리리리 기계를 부셔버리고 싶다. 내려오는 동안 세 번이나 반복 될 것이다. “저기요. 이 소리 좀 바꿔주면 안되겠어요?”

나는 부득이하게 외출을 하게 될 일이 생기면 휠체어를 탄다. 걷 는다는 것이 여간 힘들 뿐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적합한 걸음 모양 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단정한 셔츠를 입고 보기에 멀쩡한 다리를 가만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2

직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다. “아 예. 소리가 좀 시끄럽죠. 하지만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답변한다. 웃음만큼이나 어색한 답변이다. 대

화가 나는 이유

93


화 이후, 서먹한 공기가 흐른다. 나는 계단 오른편에 설치된 기기에 휠체어

“여기가 채림이네 집인가요?”

를 올리고 천천히 내려온다. 이 순간만큼 시간이 더디게 가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엄마에게 혼자 가겠다고 괜한 고집을 부린 것이 후회가 된다. 반복

아버지는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원래도 깊었던 주름이 더욱 짙 어진다.

되는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그 행동에 무뎌져 습관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

데, 이러한 일의 반복은 언제나 처음처럼 낯설고 괴롭다. 지하철 안에는 언 제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인지 알 수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엄마가 이상한 낌새 를 느끼고 쳐다본다.

없지만 단 하나 공통된 것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로부터 위안

“여보, 누구야?”

을 얻는다. 더디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나 또한 가고 있는 것이 분 명하기에.

엄마는 현관으로 가 아버지가 본 상황을 마주한다. 젊은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동생을 뉘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아이구! 이놈의 가시나가 미쳤네. 술을 처먹고 들어오고!”

자주 나가지 않아 경련이 일어날 듯이 아픈 팔을 두드리며 대자로

엄마는 남 보기 부끄럽다는 등 소리를 지르며 오히려 이목을 끌만

누워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엄마는 잘 다녀왔냐고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

큼 요란스럽게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젊은 남자를 보며

고 청소를 하고 있다. 청소라는 것이 과연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의문스

묻는다.

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지금이 그러한 순간이다. 엄마는 불상의 머리

“누구냐?”

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닦고 있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극진한 청소를 보면서

“채림이 남자친구예요.”

부처님이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는 기준으로 해탈을 도와준다면 엄마

젊은 남자는 무섭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기가 눌리는지 기

가 제일 먼저 해탈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요란스럽게 초인

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그 남자의 따귀를 때렸다.

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워 뉴스를 보면서 엄마의 극진한 청소를 방관하던 아

무거운 동생을 업고 오느라 이미 진이 빠져서 그런지 따귀 한 대에 심하게 휘

버지는 현관문으로 다가간다. 동생이 왔으려니 하고 문을 열었던 아버지는

청거렸다. 갑작스러운 봉변을 당하고 난 그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글썽였

불청객이 한명 더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니커즈에 요즘 유행하는 반삭

지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하고 왁스로 떡칠을 한 젊은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아

“저런 꼴로 데리고 들어오려면 아예 들어 오지마.”

버지는 그 남자가 땀을 흘리는 이유가 인사불성 상태로 업혀있는 자신의 딸

아버지는 큰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왠지 그 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이 똥그래진다. 젊은 남자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

자가 불쌍해 졌다. 동생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흥

서 말한다.

부도 아니고 따귀 한 대를 맞고 돌아가다니. 더구나 싸가지 없는 동생의 성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4

화가 나는 이유

95


화 이후, 서먹한 공기가 흐른다. 나는 계단 오른편에 설치된 기기에 휠체어

“여기가 채림이네 집인가요?”

를 올리고 천천히 내려온다. 이 순간만큼 시간이 더디게 가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엄마에게 혼자 가겠다고 괜한 고집을 부린 것이 후회가 된다. 반복

아버지는 점점 표정이 굳어진다. 원래도 깊었던 주름이 더욱 짙 어진다.

되는 일상을 살다보면 어느새 그 행동에 무뎌져 습관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

데, 이러한 일의 반복은 언제나 처음처럼 낯설고 괴롭다. 지하철 안에는 언 제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다들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목적인지 알 수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엄마가 이상한 낌새 를 느끼고 쳐다본다.

없지만 단 하나 공통된 것은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로부터 위안

“여보, 누구야?”

을 얻는다. 더디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나 또한 가고 있는 것이 분 명하기에.

엄마는 현관으로 가 아버지가 본 상황을 마주한다. 젊은 남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동생을 뉘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아이구! 이놈의 가시나가 미쳤네. 술을 처먹고 들어오고!”

자주 나가지 않아 경련이 일어날 듯이 아픈 팔을 두드리며 대자로

엄마는 남 보기 부끄럽다는 등 소리를 지르며 오히려 이목을 끌만

누워있다. 역시 집이 최고다. 엄마는 잘 다녀왔냐고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

큼 요란스럽게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버지는 젊은 남자를 보며

고 청소를 하고 있다. 청소라는 것이 과연 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의문스

묻는다.

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지금이 그러한 순간이다. 엄마는 불상의 머리

“누구냐?”

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닦고 있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극진한 청소를 보면서

“채림이 남자친구예요.”

부처님이 자신의 몸을 깨끗이 닦아주는 기준으로 해탈을 도와준다면 엄마

젊은 남자는 무섭게 쳐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에 기가 눌리는지 기

가 제일 먼저 해탈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요란스럽게 초인

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갑자기 그 남자의 따귀를 때렸다.

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워 뉴스를 보면서 엄마의 극진한 청소를 방관하던 아

무거운 동생을 업고 오느라 이미 진이 빠져서 그런지 따귀 한 대에 심하게 휘

버지는 현관문으로 다가간다. 동생이 왔으려니 하고 문을 열었던 아버지는

청거렸다. 갑작스러운 봉변을 당하고 난 그는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글썽였

불청객이 한명 더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니커즈에 요즘 유행하는 반삭

지만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하고 왁스로 떡칠을 한 젊은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서 있었다. 아

“저런 꼴로 데리고 들어오려면 아예 들어 오지마.”

버지는 그 남자가 땀을 흘리는 이유가 인사불성 상태로 업혀있는 자신의 딸

아버지는 큰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왠지 그 남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이 똥그래진다. 젊은 남자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

자가 불쌍해 졌다. 동생 학교에서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흥

서 말한다.

부도 아니고 따귀 한 대를 맞고 돌아가다니. 더구나 싸가지 없는 동생의 성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4

화가 나는 이유

95


화를 감당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나는 그 남자의 휘청거리는 다리를 떠올 리며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아파트의 입구가 보이는 창문으 로 다가가 힘없이 돌아가는 그 남자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 각을 하고 있는 순간, 거실에서는 아까 보다 더 선명한 따귀 소리가 들렸다. 한창 수능을 준비해야할 고등학생이 술을 먹고 온 것이 화의 원인일까, 아니 면 너무 변해버린 동생의 모습에 대한 부모님의 회의감 때문일까, 아버지는 무서운 표정으로 동생의 따귀를 때렸다. 동생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얼굴 왜이래? 그리고 아프긴 왜 이리 아픈 거야?” 어제 밤 그렇게 처맞았으니까 그 꼴이 당연하지 라고 말해주고 싶 지만 침을 꾹 삼킨다. “어제 네가 술 먹고 들어와서 아버지한테 맞았어.” 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집으로 왔단 말이야? 난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없겠지. 정신도 나갔는데 기억이라고 뇌에 붙어 있겠니? 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다시 꾹 참는다.

연신 두꺼운 손바닥을 휘두르고 있다.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쩔 줄 몰

“네 남자친구라는 애가 업고 왔던데.”

라 했고 나는 문을 반쯤 열어두고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미소를 띤 불

“뭐라고?”

상도 지켜보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이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꽤나 많은 생각들

아버지는 때리는 것을 그만 두었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거친 숨

이 지나쳐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동생은 방으로 뛰어가더니 휴대

을 몰아쉬었다. 동생은 얼마나 취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

폰을 확인했다. 이미 몇 개의 메시지가 와있었는지 전화를 하지 않고도 상황

게 맞고도 깨어나지 않는걸 보니 말이다. 엄마는 전쟁의 폭격으로부터 방공

파악을 한 듯 소리를 질렀다.

호로 대피를 시키듯이 동생을 욕실로 밀어 넣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아빠 미친거 아냐?” 동생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님은 등산을 가고 집에는 동생과 나 뿐이었다. 분이 풀리는지 않는지 내 방에 들어와 화풀이를 한다.

평화로운 휴일이다. 사실 나는 집에서 놀고 먹는 신세기에 휴일

“오빠는 뭐했어? 아빠 좀 말리지. 쪽팔려 죽겠어! 이놈의 집구석.”

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휴일이 더 마음은 편하다. 사람들은 백수가 매일 놀

아버지는 어제 이웃 보기가 쪽팔려 동생을 때리고 동생은 남자

고 먹으니까 휴일이건 평일이건 구분이 안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친구 보기가 쪽팔려 아버지를 욕한다. 참으로 징그럽게 연결된 혈연관계다.

에는 조금 더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휴일이 되면 나도 다른 사

내가 건성으로 듣고 있자 동생은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실로 가더니 불

람들처럼 휴식을 즐겨도 되는 듯 느껴져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상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불상이 데구르르 구르

오늘은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동생이 방문을 열고

는 소리가 들렸다. 짐짓 놀라 쳐다보니 불상의 몸과 목이 분리되어 다른 쪽

들어왔다.

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6

화가 나는 이유

97


화를 감당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까. 나는 그 남자의 휘청거리는 다리를 떠올 리며 처음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아파트의 입구가 보이는 창문으 로 다가가 힘없이 돌아가는 그 남자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 각을 하고 있는 순간, 거실에서는 아까 보다 더 선명한 따귀 소리가 들렸다. 한창 수능을 준비해야할 고등학생이 술을 먹고 온 것이 화의 원인일까, 아니 면 너무 변해버린 동생의 모습에 대한 부모님의 회의감 때문일까, 아버지는 무서운 표정으로 동생의 따귀를 때렸다. 동생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동생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얼굴 왜이래? 그리고 아프긴 왜 이리 아픈 거야?” 어제 밤 그렇게 처맞았으니까 그 꼴이 당연하지 라고 말해주고 싶 지만 침을 꾹 삼킨다. “어제 네가 술 먹고 들어와서 아버지한테 맞았어.” 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집으로 왔단 말이야? 난 기억이 없는데?” 기억이 없겠지. 정신도 나갔는데 기억이라고 뇌에 붙어 있겠니? 라고 말하고 싶지만 또 다시 꾹 참는다.

연신 두꺼운 손바닥을 휘두르고 있다.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어쩔 줄 몰

“네 남자친구라는 애가 업고 왔던데.”

라 했고 나는 문을 반쯤 열어두고 몰래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미소를 띤 불

“뭐라고?”

상도 지켜보고 있었다. 동생의 얼굴이 새빨갛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꽤나 많은 생각들

아버지는 때리는 것을 그만 두었지만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거친 숨

이 지나쳐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동생은 방으로 뛰어가더니 휴대

을 몰아쉬었다. 동생은 얼마나 취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

폰을 확인했다. 이미 몇 개의 메시지가 와있었는지 전화를 하지 않고도 상황

게 맞고도 깨어나지 않는걸 보니 말이다. 엄마는 전쟁의 폭격으로부터 방공

파악을 한 듯 소리를 질렀다.

호로 대피를 시키듯이 동생을 욕실로 밀어 넣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 았다.

“아빠 미친거 아냐?” 동생은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부모님은 등산을 가고 집에는 동생과 나 뿐이었다. 분이 풀리는지 않는지 내 방에 들어와 화풀이를 한다.

평화로운 휴일이다. 사실 나는 집에서 놀고 먹는 신세기에 휴일

“오빠는 뭐했어? 아빠 좀 말리지. 쪽팔려 죽겠어! 이놈의 집구석.”

이 따로 없지만 그래도 휴일이 더 마음은 편하다. 사람들은 백수가 매일 놀

아버지는 어제 이웃 보기가 쪽팔려 동생을 때리고 동생은 남자

고 먹으니까 휴일이건 평일이건 구분이 안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평일

친구 보기가 쪽팔려 아버지를 욕한다. 참으로 징그럽게 연결된 혈연관계다.

에는 조금 더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휴일이 되면 나도 다른 사

내가 건성으로 듣고 있자 동생은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거실로 가더니 불

람들처럼 휴식을 즐겨도 되는 듯 느껴져 조금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상을 들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불상이 데구르르 구르

오늘은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동생이 방문을 열고

는 소리가 들렸다. 짐짓 놀라 쳐다보니 불상의 몸과 목이 분리되어 다른 쪽

들어왔다.

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6

화가 나는 이유

97


“이딴 게 다 뭐야!”

졌다. 엄마가 불상을 닦는 모습은 걸레로 장식품을 문질러 대는 모습으로 밖

불행하게도 지금 이 순간 동생의 눈에 든 불상은 힘없이 굴러가

에 보이지 않았다.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장식구들이 엄마를 비웃는 것처럼

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어 개를 집어 들어 던졌다.

보였다. 나는 못난 아들이라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이리저리 파편들이 굴러다녔다. 그리고는 더 이상 던졌다간 감당하기 힘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들만 응시하고 있다. 데

거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방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분

굴데굴 구르던 파편들처럼 산산이 부셔지는 밤이다.

명 엄마가 보면 왠 불경스러운 짓이냐며 난리를 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 이다. 집에만 붙어있는 백수에게는 집에 몰아치는 폭풍우가 영 불편한 것이

“아들, 오늘 초파일인데 같이 절에 가자.”

기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반찬이 급격히 부실해져도 한마디 말도 꺼내기가

엄마는 부드러운 햇살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을 자는 나를 깨운

힘들며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한다. 나는 오랜 고심 끝에 증거

다. 엄마가 뭘 하던 관심도 없던 아빠까지 절에 가겠다고 준비를 마치고 나

를 인멸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실로 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조각들을 검

를 채근했다.

은 비닐봉지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박스 테이프로 잡기 힘든 조각들을 꾹꾹

“절에 가서 동생 시험 준비 잘하라고 빌어주고 오자. 오랜만에

눌렀다. 엉성한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파편을 모으고 있는데 외출

바깥공기도 좀 쐬고 말이야.”

하려고 방에서 나오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던 동생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나서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는 사안이

은 한 마디를 하고 나가버렸다.

라는 것을 알았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대충 옷을 입고 절에 가는 차를

“병신”

탔다. 동생 또한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에 타고 있었다. 잠시 머리도 식힐겸

나는 전생에 원수가 있다면 동생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같이 가자는 아버지의 말이 명령 아닌 명령이라는 것을 아는 동생이 어쩔 수

그리고는 청소기로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끝냈다. 매일 지극정성으로 청소

없이 따라나선 것이다. 나는 불교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절에 가는

를 하는 엄마가 불상이 네 개나 없어진 것을 모를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유를 알고 있다. 며칠 전 엄마가 얻어온 불교 경전을 우연히 읽게 된 이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으로 듬성듬성한 불상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도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금연을 시작했다. 지금이 금연한지 한 달 정도 되

잊지 않았다.

었는데 육체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

일주일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 다. 나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어수룩하게 사과하던 나에게 화를 내던 엄마

렇게 이야기 했다. “이 몸은 잠시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땅에 돌아 갈 때는

의 믿음과 경건함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이상한 낌새를 채지 못하

깨끗하게 돌려줘야 해. 이제부터 니코틴을 쫙 빼고 정화시켜서

다니. 비운의 운명으로 사라져버린 몇 개의 불상을 생각하니 문득 나는 슬퍼

자연에게 돌아가야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8

화가 나는 이유

99


“이딴 게 다 뭐야!”

졌다. 엄마가 불상을 닦는 모습은 걸레로 장식품을 문질러 대는 모습으로 밖

불행하게도 지금 이 순간 동생의 눈에 든 불상은 힘없이 굴러가

에 보이지 않았다.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장식구들이 엄마를 비웃는 것처럼

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두어 개를 집어 들어 던졌다.

보였다. 나는 못난 아들이라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이리저리 파편들이 굴러다녔다. 그리고는 더 이상 던졌다간 감당하기 힘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야기들만 응시하고 있다. 데

거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방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분

굴데굴 구르던 파편들처럼 산산이 부셔지는 밤이다.

명 엄마가 보면 왠 불경스러운 짓이냐며 난리를 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 이다. 집에만 붙어있는 백수에게는 집에 몰아치는 폭풍우가 영 불편한 것이

“아들, 오늘 초파일인데 같이 절에 가자.”

기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반찬이 급격히 부실해져도 한마디 말도 꺼내기가

엄마는 부드러운 햇살을 만끽하며 늘어지게 잠을 자는 나를 깨운

힘들며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한다. 나는 오랜 고심 끝에 증거

다. 엄마가 뭘 하던 관심도 없던 아빠까지 절에 가겠다고 준비를 마치고 나

를 인멸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실로 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조각들을 검

를 채근했다.

은 비닐봉지에 주워 담았다. 그리고 박스 테이프로 잡기 힘든 조각들을 꾹꾹

“절에 가서 동생 시험 준비 잘하라고 빌어주고 오자. 오랜만에

눌렀다. 엉성한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파편을 모으고 있는데 외출

바깥공기도 좀 쐬고 말이야.”

하려고 방에서 나오는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던 동생

나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나서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는 사안이

은 한 마디를 하고 나가버렸다.

라는 것을 알았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대충 옷을 입고 절에 가는 차를

“병신”

탔다. 동생 또한 오만상을 찌푸리며 차에 타고 있었다. 잠시 머리도 식힐겸

나는 전생에 원수가 있다면 동생일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같이 가자는 아버지의 말이 명령 아닌 명령이라는 것을 아는 동생이 어쩔 수

그리고는 청소기로 마무리까지 깨끗하게 끝냈다. 매일 지극정성으로 청소

없이 따라나선 것이다. 나는 불교에 아무런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절에 가는

를 하는 엄마가 불상이 네 개나 없어진 것을 모를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유를 알고 있다. 며칠 전 엄마가 얻어온 불교 경전을 우연히 읽게 된 이후

나는 최선을 다했다. 마지막으로 듬성듬성한 불상의 간격을 조정하는 것도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는지 금연을 시작했다. 지금이 금연한지 한 달 정도 되

잊지 않았다.

었는데 육체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이

일주일이 지났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 다. 나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어수룩하게 사과하던 나에게 화를 내던 엄마

렇게 이야기 했다. “이 몸은 잠시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땅에 돌아 갈 때는

의 믿음과 경건함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런 이상한 낌새를 채지 못하

깨끗하게 돌려줘야 해. 이제부터 니코틴을 쫙 빼고 정화시켜서

다니. 비운의 운명으로 사라져버린 몇 개의 불상을 생각하니 문득 나는 슬퍼

자연에게 돌아가야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98

화가 나는 이유

99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자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 오셨네요.”

“몸이 건강해지면 정신도 맑아진단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엄마는 아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신이 해탈에 이르게 되면 육체가 가벼워져 공중으로 몸이

“이 분이 원래 술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알콜 중독이었데. 그런데

부양할 수 있데.”

글쎄 우연히 절에 다니게 되면서 술을 끊기로 마음을 먹고

이주일이 지났다.

완전히 끊었다는 거 아냐.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건강하셔. 담배도

“53살이면 살만큼 산거야. 죽었다고 생각하고 수양을 열심히

끊은 지 2년이 다되어 가신데. 당신도 지금 금연하잖아.

해서 새로 태어나야겠다.”

이분한테 많이 물어봐.”

한 달이 지난 어제 밤 아버지는 절에 가서 초심을 다지고 와야겠

집에서 매일 한달의 금연을 대단하게 이야기 하던 아버지는 2년

다고 하며 말했다.

이라는 기간 앞에 겸손해지셨다.

“담배 피는 사람 옆에 가서 연기만 맡아도 고소하더라.”

“아이고, 이거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이제 막 금연을

절에 도착해서 내리고 보니 날씨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었

시작했는데 참으로 힘이 드네요.”

다. 은빛 고기떼들이 반짝이며 헤엄치고 있을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눈이 시

그리고는 이어 불교 경전과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

리도록 빛나는 햇살. 그리고 차디찬 계곡물에 역동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송

다.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 깨달은 점과 앞으로 해나가야 할 행동들에 대해

사리의 헤엄처럼 펄떡이는 여름의 푸르름. 자연은 아름다웠다. 일어나는 것

끊임없이 이야기 했다. 나는 이 대화가 길어지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힘겨웠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멍

그래서 발을 절뚝이며 절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절에는 목탁소리와 불경

하게 감탄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얼굴이 탄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혼자 그늘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집에서 울려 퍼지는 경전소리

로 찾아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두 손을 모아 절을 향해 합장을 했다. 엄마가

보다 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불경소리는 경건하게 들려왔다. 절 옆에는 아

다니는 절이라 스님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우

파트 7층 높이 정도로 보이는 거대한 불상이 서 있었다. 우리 집에 옹기종기

연히 마주친 신도에게 엄마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모여 있는 불상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절 뒤편으로 가니 벽면에는 여러 개의

“어머, 오늘 초파일이라 오셨나봐요? 잘 지내셨어요?”

탱화가 그려져 있었다. 오직 동그라미만이 그려져 있는 마지막 칸에 눈길이

신도는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피

갔다.

부에서 윤기가 흘렀다. 숱이 많이 않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올렸고 알이 8. 소도 사람도 없다.

두껍고 커다란 은색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미소는 부드러웠다. “네. 운동하고 나서 날씨도 좋고 해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궁금해진 나는 반대로 거슬러가 1번 그림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100

화가 나는 이유

101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자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 오셨네요.”

“몸이 건강해지면 정신도 맑아진단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엄마는 아빠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신이 해탈에 이르게 되면 육체가 가벼워져 공중으로 몸이

“이 분이 원래 술이 없으면 잠을 못자는 알콜 중독이었데. 그런데

부양할 수 있데.”

글쎄 우연히 절에 다니게 되면서 술을 끊기로 마음을 먹고

이주일이 지났다.

완전히 끊었다는 거 아냐. 그래서 지금 이렇게 건강하셔. 담배도

“53살이면 살만큼 산거야. 죽었다고 생각하고 수양을 열심히

끊은 지 2년이 다되어 가신데. 당신도 지금 금연하잖아.

해서 새로 태어나야겠다.”

이분한테 많이 물어봐.”

한 달이 지난 어제 밤 아버지는 절에 가서 초심을 다지고 와야겠

집에서 매일 한달의 금연을 대단하게 이야기 하던 아버지는 2년

다고 하며 말했다.

이라는 기간 앞에 겸손해지셨다.

“담배 피는 사람 옆에 가서 연기만 맡아도 고소하더라.”

“아이고, 이거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이제 막 금연을

절에 도착해서 내리고 보니 날씨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었

시작했는데 참으로 힘이 드네요.”

다. 은빛 고기떼들이 반짝이며 헤엄치고 있을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눈이 시

그리고는 이어 불교 경전과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

리도록 빛나는 햇살. 그리고 차디찬 계곡물에 역동적으로 꼬리를 흔드는 송

다. 물 만난 고기처럼 서로 깨달은 점과 앞으로 해나가야 할 행동들에 대해

사리의 헤엄처럼 펄떡이는 여름의 푸르름. 자연은 아름다웠다. 일어나는 것

끊임없이 이야기 했다. 나는 이 대화가 길어지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힘겨웠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멍

그래서 발을 절뚝이며 절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절에는 목탁소리와 불경

하게 감탄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얼굴이 탄다고 투정을 부리면서 혼자 그늘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집에서 울려 퍼지는 경전소리

로 찾아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두 손을 모아 절을 향해 합장을 했다. 엄마가

보다 산 속에서 울려 퍼지는 불경소리는 경건하게 들려왔다. 절 옆에는 아

다니는 절이라 스님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우

파트 7층 높이 정도로 보이는 거대한 불상이 서 있었다. 우리 집에 옹기종기

연히 마주친 신도에게 엄마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모여 있는 불상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절 뒤편으로 가니 벽면에는 여러 개의

“어머, 오늘 초파일이라 오셨나봐요? 잘 지내셨어요?”

탱화가 그려져 있었다. 오직 동그라미만이 그려져 있는 마지막 칸에 눈길이

신도는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피

갔다.

부에서 윤기가 흘렀다. 숱이 많이 않은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올렸고 알이 8. 소도 사람도 없다.

두껍고 커다란 은색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미소는 부드러웠다. “네. 운동하고 나서 날씨도 좋고 해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궁금해진 나는 반대로 거슬러가 1번 그림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100

화가 나는 이유

101


1. 소를 찾아 나서다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겨우 대답을 하고 계

2.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속 울기만 했다.

3. 소를 보다

“진짜 병신이네.”

4. 소를 붙잡았다

화가 났다.

5. 소를 먹인다

“그래. 나 병신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자꾸 떠올리게 하지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말란 말이야. 병신, 병신! 그래 안다고. 나 병신인거. 그니까

7.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닥쳐!”

8. 사람도 없고 소도 없다

동생은 쥐에게 물린 고양이처럼 충격 받은 표정으로 처절하게 울 부짓는 내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뒤통수에 무언가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 야기 인지 왜 소가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졌는지, 어디서부터 소를 찾아 나섰

사실 고백하자면 동생이 더 이상 범생이로 살지 않게 된 그날. 나

는지, 소가 갑자기 왜 흰색이 되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도

는 그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나가야 하

없고 소도 없는 공의 동그라미 앞에 내가 있다. 다리 병신이 있다. 아무 일도

는 길이었다. 나는 걸어가면서 조용한 거리의 구석에서 들려오는 욕짓거리

하지 않는 백수가 있다. 못난 아들이 있다. 애써 모른 척 해왔던 감정들이 북

를 듣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점점 크게 들려오는 지점

받쳐 올라왔다. 아무것도 비우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것들이 더

에서 숨을 잔뜩 죽이고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걷는다고

이상 버티지 못하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사

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며 나의 존재감을 지우려고

실 왜 눈물이 나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눈물을 훔치며 길을

노력했다. 길로 드리워진 몇 명의 그림자를 지나는 길이었다. 나는 궁금함

돌아 절의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부처님의 머리가 보였다. 다리의 힘이

을 견디지 못하고 그 쪽을 곁눈질 하였다. 다수의 아이들이 한 명을 폭행하

풀렸다. 정면이 보이지 않는데도 온화한 미소가 온 몸을 덮는 것처럼 느껴

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은 동생이었다. 숨이 막혔다. 몸 속에서 위험과 혼란

졌다. 나는 애써 참아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저앉

을 알리는 신경계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어떻게 해

아 이유도 모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루하다는 듯이 이곳저

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

곳 둘러보던 동생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했다. 나는 다리병신이었다. 구타 당하고 있는 동생을 발견한 오빠가 아니라

“뭐야, 왜 우는 거야?”

지나가는 다리병신이었다. 나는 그 골목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왔다.

“몰라.”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02

화가 나는 이유

103


1. 소를 찾아 나서다

뚜렷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겨우 대답을 하고 계

2.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속 울기만 했다.

3. 소를 보다

“진짜 병신이네.”

4. 소를 붙잡았다

화가 났다.

5. 소를 먹인다

“그래. 나 병신이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자꾸 떠올리게 하지

6.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말란 말이야. 병신, 병신! 그래 안다고. 나 병신인거. 그니까

7.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닥쳐!”

8. 사람도 없고 소도 없다

동생은 쥐에게 물린 고양이처럼 충격 받은 표정으로 처절하게 울 부짓는 내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뒤통수에 무언가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 야기 인지 왜 소가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졌는지, 어디서부터 소를 찾아 나섰

사실 고백하자면 동생이 더 이상 범생이로 살지 않게 된 그날. 나

는지, 소가 갑자기 왜 흰색이 되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도

는 그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나가야 하

없고 소도 없는 공의 동그라미 앞에 내가 있다. 다리 병신이 있다. 아무 일도

는 길이었다. 나는 걸어가면서 조용한 거리의 구석에서 들려오는 욕짓거리

하지 않는 백수가 있다. 못난 아들이 있다. 애써 모른 척 해왔던 감정들이 북

를 듣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점점 크게 들려오는 지점

받쳐 올라왔다. 아무것도 비우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것들이 더

에서 숨을 잔뜩 죽이고 조심스레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걷는다고

이상 버티지 못하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사

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최대한 천천히 움직이며 나의 존재감을 지우려고

실 왜 눈물이 나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누가 볼까 싶어 눈물을 훔치며 길을

노력했다. 길로 드리워진 몇 명의 그림자를 지나는 길이었다. 나는 궁금함

돌아 절의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부처님의 머리가 보였다. 다리의 힘이

을 견디지 못하고 그 쪽을 곁눈질 하였다. 다수의 아이들이 한 명을 폭행하

풀렸다. 정면이 보이지 않는데도 온화한 미소가 온 몸을 덮는 것처럼 느껴

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은 동생이었다. 숨이 막혔다. 몸 속에서 위험과 혼란

졌다. 나는 애써 참아왔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저앉

을 알리는 신경계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어떻게 해

아 이유도 모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루하다는 듯이 이곳저

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시작

곳 둘러보던 동생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했다. 나는 다리병신이었다. 구타 당하고 있는 동생을 발견한 오빠가 아니라

“뭐야, 왜 우는 거야?”

지나가는 다리병신이었다. 나는 그 골목을 지나쳐 집으로 돌아왔다.

“몰라.”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02

화가 나는 이유

103


절에서 돌아온 날 저녁, 엄마와 아빠는 두 번 다시 절에 가자고 하 지 않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새로 나온 야동을 다운 받았다. 절에서 거대한 부처님을 보고 와서 그런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불상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불상을 잠시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를 부여잡고 땀을 뻘뻘 흘리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의 성기는 몇 배나 더 커졌고 야동에 나왔던 섹시한 간 호사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수돗물을 세게 틀어놓 은 것처럼 정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태평양을 가로 지르며 푸른 바다를 헤 엄치는 정자들은 육지에 다다르자 점점 다리가 자라나고 팔이 자라나서 걷 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듬직하고 튼튼한 다리를 가진 놈 이 하나 있었는데, 그 놈은 바로 나였다. 나는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 그 골목길로. 얼굴에 바람이 스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땀이 흐르고 숨이 차올랐지만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곳에 도착하니 동생이 있었 다. 동생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하얀 이빨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 는 동생의 얼굴은 부처님의 미소처럼 부드러웠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04


절에서 돌아온 날 저녁, 엄마와 아빠는 두 번 다시 절에 가자고 하 지 않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궜다. 그리고 새로 나온 야동을 다운 받았다. 절에서 거대한 부처님을 보고 와서 그런지 책상 위에 있는 작은 불상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불상을 잠시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성기를 부여잡고 땀을 뻘뻘 흘리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의 성기는 몇 배나 더 커졌고 야동에 나왔던 섹시한 간 호사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리고 수돗물을 세게 틀어놓 은 것처럼 정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태평양을 가로 지르며 푸른 바다를 헤 엄치는 정자들은 육지에 다다르자 점점 다리가 자라나고 팔이 자라나서 걷 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키가 크고 듬직하고 튼튼한 다리를 가진 놈 이 하나 있었는데, 그 놈은 바로 나였다. 나는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날 그 골목길로. 얼굴에 바람이 스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땀이 흐르고 숨이 차올랐지만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곳에 도착하니 동생이 있었 다. 동생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하얀 이빨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 는 동생의 얼굴은 부처님의 미소처럼 부드러웠다.

아브락사스 abraxas vol.2

104


Ending Credits

기획

김미선 김종소리

작품

이현미

kanophic@hotmail.com

김미선

gimmi13@naver.com

이상협

arkdang@naver.com

김종소리

jongsoriz@naver.com

정지호

jjihojjiho@naver.com

원보람

dnjsqh0720@naver.com

디자인

장지혜

jihe.jang@gmail.com

발행

김미선 김종소리

발행일

2009/07/06

문의

김종소리

jongsoriz@naver.com

이곳에 실린 글과 그림의 저작권의 위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따라하시거나 가져다 쓰시면 안 됩니다. copyright©2009 abraxas all rights reserved


Ending Credits

기획

김미선 김종소리

작품

이현미

kanophic@hotmail.com

김미선

gimmi13@naver.com

이상협

arkdang@naver.com

김종소리

jongsoriz@naver.com

정지호

jjihojjiho@naver.com

원보람

dnjsqh0720@naver.com

디자인

장지혜

jihe.jang@gmail.com

발행

김미선 김종소리

발행일

2009/07/06

문의

김종소리

jongsoriz@naver.com

이곳에 실린 글과 그림의 저작권의 위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무단으로 따라하시거나 가져다 쓰시면 안 됩니다. copyright©2009 abraxas all rights reserved


아브락사스

아브락사스

summer

2009

vol.2

summer

abraxas

2009

아브락사스

vol.2

vol.2

이현미 김미선 장지혜 이상협

김종소리 정지호 원보람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